의천도룡기 3-3

3학년2반 | 2022.03.03 07:16:32 댓글: 0 조회: 44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485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3 장 주장령의 음모(陰謀)


장무기와 양불회는 만 리나 되는 먼 길을 지나 서쪽으로 올 때
까지는 서로 그림자처럼 의지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갑자기 헤어
지게 되자 몹시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효부가 부탁한
그녀의 여식을 실수없이 양소에게 보냈다는 생각을 하자 그런대
로 마음의 위안이 됐다. 잠깐 서 있는 동안 혹시 하태충, 반숙한
등 곤륜파 사람들과 다시 마주치게 될까 봐 즉시 산 속으로 걸어
갔다.

이렇게 십여 일을 걸어가자 팔에 입은 상처는 점차 완쾌되었다.
그러나 곤륜산에서 아무리 왔다갔다 헤매어도 산을 벗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이날은 계속 반나절이나 걸어 몹시 피곤하여 돌더
미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
란하게 들려왔다. 무려 십여 마리가 되는 것 같았다. 개 짖는 소
리가 재차 가까이 들리면서 마치 사나운 야수를 쫓는 것 같았다.

개 짖는 소리에 따라 한 마리의 작은 원숭이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꽁무니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원숭이는 수
장 밖으로 달려가더니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듯 뒹굴
었다. 꽁무니에 박힌 화살 때문에 높은 나무 위로 기어오르지 못
했다. 게다가 너무 지쳐버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장무기가 얼른 다가가 살펴보니, 원숭이의 눈에서 애절과 공포
의 빛이 서려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묘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곤륜파 사람들에게 쫓겨 다닐 때 아직 저 원숭이와 같았
을 거야.'

그는 즉시 원숭이를 안아 조심스레 화살을 뽑아 주고 품에서 환
약을 꺼내 잘근잘근 씹어 상처 부위에 발라 주었다.

바로 이때 개 짖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장무기는 얼른 옷
깃을 풀어서 원숭이를 품속에 숨겼다. 삽시간에 크고 사나온 사
냥개가 달려와 그를 꼼짝 못하게 포위했다. 사냥개들은 원숭이
냄새를 맡자 송곳니를 드러내 으르렁 거렸으나 금방 덮쳐오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이 사나운 개떼가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당
장 덮쳐올 자세이자 속으로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몰론 품안에
있는 원숭이를 던져 버리면 개떼가 원숭이에게만 덮쳐갈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받은 교훈은, 매사
에 협의를 우선으로 하고 비록 야수 한 마리일망정 서운하게 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개떼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급히 달려갔다. 순간 개떼들도 짖어대며 뒤쫓아왔
다.

사냥개가 뛰는 속도는 굉장했다. 장무기가 십여 장 밖으로 달려
갔는데 바로 뒤따라왔다. 순간 다리에 통증이 오면서 장무기는
한 마리 맹견에게 물렸다. 맹견은 죽어라 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사냥개의 머리통에 일장을 후려
쳤다. 이 일 장은 전력을 다해서 격출한 것이라 사냥개는 비명과
함께 몇 번 뒹굴더니 기절해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사냥개들은
피냄새를 맡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장무기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가며 사력을 다해 대항했다. 그
러나 그의 팔에 입은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제대로 팔을 움
직일 수 없었다. 얼마 후, 움직일 수 있는 왼손마저 사나운 개에
게 물려 무방비 상태가 되자 사방에서 개떼들이 덮쳐와 마구 물
어도 속수무책이었다. 머리, 얼굴, 어깨 등 온몸이 개떼의 날카
로운 이빨에 물려 경황이 없는 찰나, 어렴풋이 가냘프면서도 앙
칼진 여인의 호통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의식하며 앞
이 캄캄해지더니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흘렀을까. 몽롱한 의식 속에서 마치 수십 마리의
늑대, 여우 등 사나운 야수들이 몸을 마구 물어 뜯는듯한 환상에
짓눌려 그는 입을 벌려 크게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전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열이 내려서 죽지는 않을 거다."

장무기가 얼른 눈을 떠보니, 희미한 등불 아래 먼저 확인한 것
은 자기가 작은 방 안에 누워 있는 것과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앞
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아저씨..... 제가 어떻게.....!"

겨우 이 몇 마디를 내뱉는 사이에 갑자기 온몸이 불에 덴 것처
럼 아픔이 몰아쳐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제서야 자기가 사
나운 개떼들에게 포위당해 마구 물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남
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 녀석아, 넌 명이 길어서 죽지 않을 거다. 왜 그러느냐? 배
가 고프냐?"

그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깨어나 보니 그 중년 남자는 이미 방 안에 없었
다. 장무기는 생각했다.

'난 아무리 해도 오래 살 수 없는 몸, 구태여 이렇게 시련을 겪
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머리를 숙여 살펴보니 가슴, 목덜미, 손, 발, 허벅지 등 상처
부위에는 약을 마르고 헝겁으로 감아놓은 걸 볼 수 있었다. 그러
나 약초의 냄새를 맡아보니 자기에게 약을 발라 준 사람은 상처
치료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약물에는 형인,
마전자, 방풍, 남성 같은 약재가 들어 있는데, 이런 약재는 광견
병에 걸렸을 때 쓰는 약제들이라서 자기의 상처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픔만 더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딱한 형편인지라 하는 수 없이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잠시 후에 그 중
년 남자가 다시 그를 보러 왔다.

"아저씨,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남자는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는 홍매산장이다. 우리의 소저께서 너를 구해 준 것이다.
배고프지 않느냐?"

말을 미친 그는 뜨거운 죽 한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장무기는
몇 모금 마셨으나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더 이상 먹
지 못했다. 계속 여드레나 침상에 누워 있다가 그제서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밑이 둥둥 떠 있는 것
처럼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이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매일 그에게 밥을 갖다 주고
약을 바꿔 주었지만 몹시 귀찮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무
기는 몹시 고맙게 생각했다. 이날도 그가 방풍과 남성 같은 약재
를 갖고 와서 절구에 찧고 있는 걸 보자 장무기는 참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아저씨, 그 약재들은 상처에 맞는 약제가 아닙니다. 죄송하지
만 몇 가지를 바꿔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눈을 흘기면서 그를 한참 노려보더니 그제서야 말했
다.

"주인 나리께서 직접 처방하신 건데 틀릴 수가 있겠느냐? 이 약
이 만약 너의 상처에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과 같이 너를 사
릴 수가 있었겠느냐? 정말이지 어린 것이 엉뚱한 소리도 잘 하는
구나. 우리 마님께서 들으시면 설사 나무라지는 않더라도 얼마나
서운하시게 생각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약을 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장무기는 하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나이는 훈계하듯 한 마디 했다.

"내가 보기에 네 몸에 입은 상처가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응
당 마님과 소저에게 가서 절을 올리고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진
심으로 감사를 해야 될 것 같다."

"그건 당연합니다. 아저씨 길을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사나이는 그를 데리고 작은 방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거쳐 다시
대청 두 곳을 지나서야 아담한 누각 앞에 도달했다. 이 때는 초
겨울로 접어들어 곤륜 일대는 벌써부터 날씨가 몹시 추웠다. 하
지만 누각 안에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어디서 군불을 지피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누각 안은 무척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고, 침
대, 의자 위에는 모두 비단으로 된 부드러운 보료와 방석이 놓여
있었다. 장무기는 평생 이처럼 부유하고 화려하며 안락한 거실을
본 적이 없었다. 자기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 이 호화스런 누각
안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창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
다.

누각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몹시 공손한 표
정으로 몸을 굽혀 아뢰었다.

"그 개에게 물린 녀석이 많이 좋아져서, 마님과 소저께 고맙다
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말이 끝나자 다시 몸을 꼿꼿하게 하고 서서 숨도 크게 쉬지 않
았다.

한참 후 병풍 뒤에서 십 오,육 세 정도 되는 소녀가 나오면서
장무기를 곁눈짓으로 한 번 훑어 보더니 말했다.

"교복(嬌福), 당신도 참 어쩌자고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죠? 그
의 몸에 있는 빈대와 이 같은 게 뛰어나오면 어떻게 하려는 거
죠?"

그러자 교복은 크게 당황하여 굽신거렸다.

장무기는 그렇지 않아도 거북스러워하고 있는 터에 소녀의 말을
듣자 창피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는 몸에 걸친 누더기 외
에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확실히 빈대와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
았다. 그러니 소녀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소녀의 얼굴은 거위알처럼 갸름하게 생겼고, 명주실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몸에 입은 옷은
무슨 비단인지는 몰라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손목에는 금팔찌를
끼고 있었다. 이런 호화스런 차림을 한 소녀를 장무기는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내가 개떼에게 공격당할 때 어렴풋이 여자의 호통소리를 들었
다. 저 교복 아저씨도 자기네 소저가 날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
니, 난 당연히 소녀에게 절을 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된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말했다.

"소저께서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
지 않을 것입니다."

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까르르 웃으며 호들갑을 떨듯 말
했다.

"교복, 당신이 저 미련한 녀석을 놀리셨군요? 그렇죠?"

교복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소봉(小鳳)낭자, 이 미련한 녀석이 낭자에게 절을 몇 번 한 것
이 뭐가 대수롭습니까? 이 미련한 녀석은 세상 물정이 어두워서
낭자를 보자 소저인 줄 알았던 것이오. 그것은 우리집에 있는 아
가씨의 몸종도 사실은 남의 집의 금지옥엽보다 더 존귀하게 보이
기 때문이 아니겠소?"

장무기는 깜짝 놀라 얼른 일어섰다.

'아차, 그녀는 몸종이었구나. 그녀를 소저인줄 착각했으니....'

순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 몹시 난감해 했다.

소봉은 킥킥 웃음을 참아가며 장무기의 아래위를 새삼스레 살펴
보았다. 그의 얼굴과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피와 먼지는 고사
하고, 뗏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누더기 하며 영락없는 거렁뱅이었
다. 게다가 상처 부위에는 헝겁으로 칭칭 감아져 있으니 장무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몰골이 사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봉은 소매를 들
어 올려 코를 막고 말했다.

"나리와 부인께서는 마침 볼 일이 있어 아니 계시니 절을 할 필
요가 없다. 그러니 소저나 뵈러 가라."

말을 하면서 장무기를 멀찌감치 돌아가더니 앞에서 길을 인도했
다. 행여나 그의 몸에 있는 빈대와 이들이 자기의 몸에 옳아올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았다. 한참을 가니 또 다른 호화스러운 대청
이 보였다. 대청 문루 위에는 영교영(靈교營)이란 세 글자가 새
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소봉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
시 나와 손짓하며 교복과 장무기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대청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깜짝 놀랐다. 삼 십여
마리나 되는 사나운 개떼가 세 줄로 나눠져 바닥에 쭈그리고 앉
아 있었고, 순백의 여우 털가죽을 입은 낭자가 호랑이 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도도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
에 쥔 가죽채찍을 한 차례 떨치며 앙칼지게 호통쳤다.

"전장군(前將軍), 목덜미!"

그러자 맹견 한 마리가 즉시 몸을 날려서 벽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장면이었다.

장무기는 이처럼 잔인한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
명을 질렀다. 그 개는 입에 고기덩어리를 하나 물고 땅에 쭈그린
채 맛있게 씹어 먹고 있었다. 장무기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자
세히 보니 벽 쪽에 선 사람은 가죽으로 만든 가짜 사람이었고,
몸 군데군데 급소에는 고기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낭자는 다시 소리쳤다.

"차기장군(車騎將軍), 하복부!"

그러자 또 한 마리의 맹견이 쏜살같이 달려가 그 가짜 사람의
하복부를 물었다. 이 맹견들은 전부 고도의 훈련을 받아 그녀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공격을 하며 무는 부위가 한치의 착오도 없
었다.

장무기는 순간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날 산중에서 자기
를 마구 물어 댄 것은 바로 이 사나운 개들이었고, 나중에 어렴
풋이 들려온 그 여인의 호통소리도 바로 이 낭자였다. 그는 이
소저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그
반대로 자기가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은 것이 전부 그녀의 소행
임을 알았다.그러자 화가 치밀어 내심 생각했다.

'당장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사나운 개가 그녀 곁에 버티고 있
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진작 야산에서
죽어 버렸지, 절대 그녀의 집에 와서 상처를 치료 받지는 않았을
걸.'

장무기는 즉시 상처를 동여맨 붕대를 풀어 발기발기 찢어 바닥
에 팽개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교복이 소리쳤다.

"이봐! 왜 그러느냐? 이 분이 바로 고귀하신 우리의 아가씨다.
냉큼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지 못하겠느냐?"

장무기는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뭣 때문에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합니까? 나를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든 것도 바로 그녀가 키운 개의 소행이
아닙니까?"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줄곧 장무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소녀가 비로소 장무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씩씩대며
흥분해 있는 것을 보자 재미있다는 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꼴에 오기는 있는 모양이군. 이리 가까이 와 봐라!"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마치 자기가 키우고 있는 개를 부
르듯 명령투였다. 장무기의 강한 자존심을 짓뭉개는 언동이었다.
한데,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장무기는 그만 입이 딱 벌
어지며 넋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마
구 뛰었다. 백옥 같은 살결과 햇볕처럼 빛나는 눈동자, 오똑한
콧날은 상아를 정성스레 다듬어 놓은 것 같고, 불타는 듯한 앵두
빛 입술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월궁의 선녀가 하범(下凡)한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장무기의 가슴에 걷잡을 수 없는 격랑이 일었다. 갑자기 등줄기
에 식은땀이 배어나고 정신이 어찔어찔했다. 그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크게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한 순간이나마 실태
(失態)를 보인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
듯 청아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는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군."

장무기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보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
의 눈방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망울에 이끌려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빨려갔다.

소년은 여전히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이봐, 나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졸지에 개떼한테 물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당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장무기는 솔직하게 대
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향기로운 체취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백합보다 더진한 그 향기에 장무기는 자신
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속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녀는 그를 주시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성이 주(朱)라고 하며 이름은 구진(九眞)인데, 그대의 이름
은 무엇이지?"

장무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장무기라 합니다."

"장무기라고.....? 이름은 제법 고상하군. 이름만 들으면 어느
명문의 자제분 같군. 자, 이리 앉아라."

이렇게 말하며 자기 앞쪽에 놓여 있는 의자를 발끝으로 가리켰
다. 장무기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가슴이 설래어 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노예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 심정 같아선 주구진
이 자기에게 불구덩이에 뛰어들어가라 해도 전혀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그녀가 자기에게 바로 옆에 앉으라고 하자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즉시 공손하게 앉았다. 소봉과
교복은 아가씨가 이 더럽고 냄새나는 녀석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옆에 앉히자 너무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주구진은 다시 교성으로 개떼를 향해 호통쳤다.

"절충장군(折衝將軍), 명치!"

그러자 큰 개 한 마리가 몸을 날려 그 가짜 사람에게 덮쳐 갔
다. 그러나 그 가짜 사람의 명치에 걸어두었던 고기덩어리는 이
미 다른 개가 물어갔다. 그러자 그 개는 즉시 겨드랑이 밑에 있
는 고기덩어리를 떼어내 먹기 시작했다. 주구진은 화를 내며 소
리쳤다.

"이런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네놈은 말을 듣지 않을 거냐?"

그녀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더니 채찍으로 맹견을 후려쳤다. 그
녀의 채찍에는 작은 가시가 많이 돋아 있어 채찍이 가해진 곳은
이내 시뻘건 핏자국이 나타났다. 그래도 그 맹견은 입에 물고있
는 고기덩어리를 놓지 않고 오히려 으르릉 대며 대들었다.

주구진의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말을 듣지 않겠다 이거지!?"

말을 내뱉기 무섭게 맹견을 향해 닥치는 대로 채찍질을 가하자
그 맹견은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삽시간에 온몸이 핏투성이
가 됐다. 그녀가 채찍질을 가하는 수법은 정확하고 신속해 그 맹
견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든 시종일관 채찍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 맹견은 고기덩어리를 토해 내고 바닥에 축 늘어져 움직
이지 않고 단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으르릉 댔다. 그러나 주구
진은 여전히 쉬지 않고 마구 후려쳤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는
짜릿한 흥분마저 감돌았다. 그 개가 숨이 깔닥거리게 되자 그녀
는 비로소 채찍을 거두었다.

"교복, 끌고 가서 약을 발라 줘라!"

"네, 소저."

하고 대답하고 나서 교복은 그 만신창이가 된 맹견을 안고 밖으
로 나가 개를 키우는 사육사에게 넘겨줬다.

개들은 이같은 광경을 보자 모두 무서운 것을 아는지 납작 엎드
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구진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평구장군(平寇將軍), 좌퇴! 위원장군(威遠將軍), 오른팔! 정동
장군(征東將軍), 눈!"

그러자 맹견들은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한 마리씩 덮쳐갔는데,
전혀 한 치의 착오없이 주구진이 원하는 부위를 물었다. 그녀가
키우는 이 수십 마리나 되는 맹견들은 모두 장군의 봉호가 붙어
져 있으며 그녀가 총지휘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 자신은 대
원수(大元帥)가 되는 셈이다.

주구진은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저 짐승들이 불쌍하게 보이겠지만, 채찍질을 심하게 하
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

장무기는 비록 개떼에게 고통을 많이 당했지만 그 개가 맞아 비
참한 꼴을 보니 몹시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주구진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걸 보자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분명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내가 묻
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하지 않느냐? 어떻게 해서 서역(西域)
까지 오게 됐으며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장무기는 이런 꼴로 사부와 부모의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혼자 중원에 몸담고 있
다가 어려워, 발길 가는대로 유랑생활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
게 된 것이오."

주구진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화살을 맞힌 그 원숭이를 무엇 때문에 몰래 품속에 숨기
려 했느냐? 너무 굶주려 원숭이 고기라도 먹으려 했느냐? 배를
채우기 위해 하마터면 나의 개한테 찢겨 죽을 뻔 한 줄은 모르는
구나."

장무기는 얼굴을 붉히고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숭이 고기를 먹으려 한 게 아닙니다."

주구진은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사실을 부인하려 들지 마라!"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무슨 무공을 배웠느냐? 일 장으로 나의 <좌장군>의 머리
통을 부셔 죽여 버렸으니 장력이 대단하더구나."

장무기는 자기가 그녀의 애견을 때려죽였다는 말을 듣자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경황이 없어 출수가 너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에게 건성으로 이삼 년간 권법을 배웠을 뿐 아무
무공도 할 줄 모릅니다."

주구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봉에게 말했다.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라!"

그러자 소봉은 입을 삐쭉거려 웃으며 대답하고 나서 그를 데리
고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왠지 섭섭해 문앞에 이르자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는데, 주구진도 마침 자기
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장무기는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
킨 사람처럼 크게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모르다가 공교롭게도 문지
방에 걸려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인데다
이처럼 졸지에 넘어지게 되자 모든 상처 부위에서 한꺼번에 아픔
이 무너져왔다. 그래도 감히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얼른 몸을 일
으켜 세웠다. 그러자 소봉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보게 되면 누구나 넋을 잃고 멍청해진다. 그런
데 넌 아직 어린 것이 벌써부터..... 호홋.....!"

장무기는 몹시 난처해져 얼른 걸음을 떼어놓아 앞장서 갔다. 잠
시 후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나?"

장무기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보니 금실로 수놓은 문발
이 걸려 있었고,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제서야
자기가 엉겁결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장무기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봉이 짓궂게 말했다.

"어서 나에게 "소봉 누나"라고 한 번 부르고 "제발 부탁합니다"
라고 해야지만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겠다!"

당장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자면 무기로선 어쩔 도리가 없
었다.

"소봉 누나....."

그러자 소봉은 오른손 식지로 자기의 턱을 받치고 의젓하게 말
했다.

"오냐. 뭣 때문에 나를 부르느냐?"

"제발 부탁합니다. 절 데리고 나가 주십시오."

소봉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래야지."

하며 그를 데리고 뜨락 밖으로 다시 나가며 교복에게 말했다.

"소저의 분부가 계시니, 그에게 목욕을 시켜 주고 깨끗한 옷으
로 갈아 입혀요."

"네, 네."

교복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봉은 비록 하인이지만 다른
하인들보다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대여섯 명의 남자 하인들이
한꺼번에 다가와서 소봉을 떠받들어 모셨다. 그러나 소봉은 본
체 만 체하고 엉뚱하게도 갑자기 장무기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
다. 그녀의 별난 행동에 장무기는 어리둥절 했다.

"왜..... 이러십니까?"

소봉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네가 나에게 절을 했으니 지금 그 답례를 하는 거다."

하고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교복은 장무기가 소봉을 아가씨로 착각하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
고 절을 한 일을 살을 붙여 과장되게 늘어놓자, 하인들은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장무기는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직 주구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화사한 웃음, 고고한자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마등처
럼 뇌리에 맴돌았다.

목욕을 서둘러 끝내고 나니 교복이 그가 갈아입을 옷을 갖고 들
어왔다. 뜻밖에도 그건 하인들의 옷이었다. 어이가 없는 장무기
는 눈살을 찌푸렸다.

"난 이 집의 하인도 아닌데, 어찌 나더러 이런 의상을 입으라
하는 거요?"

하며 자기가 원래 입던 헌 옷을 다시 입고 보니 여기저기 구멍
이 나 있어 속살이 다 보였다.

'잠시 후 아가씨가 다시 날 불러 내가 여전히 이 더럽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필시 기분이 언짢을 거야. 설령 내가 그
녀의 하인이 된다 해도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막상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거침없이 하인의 옷으로 갈아 입었
다.

그러나 그날은 주구진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 후 계속해서
십여 일 동안 소봉마저도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으니 아가씨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장무기는 얼빠진 사람처럼 오직 아가씨의 음성
과 웃는 모습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후원으로
달려가 멀리서나마 그녀를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교복은 여
러 번 당부하길, 주인이 부르지 않으면 절대 중문(中門)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맹견에게 다시
물릴 것이라 경고했다. 장무기는 비록 아가씨 생각이 간절했으나
개떼에게 물려 고생했던 생각을 하니 감히 후원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달쯤 지나자 그의 팔은 예전처럼 완쾌되고 개떼에게 물
린 상처도 모두 아물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 평생 지울 수 없
는 이빨 자국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의 몸에
응결돼 있는 한독이 여전히 며칠마다 한 번씩 발작했다. 매번 발
작할 때마다 고통이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날도 한독이 다시 발작되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솜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서도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이때 교복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장무기의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보아와서 별로 이
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 후 오한이 좀 가라앉게 되면 랍팔죽(臘八粥)을 좀 먹어
라. 이건 부인께서 너에게 설에 입으라고 주신 새 옷이다."

하고 말을 하며 보따리 하나를 상에 올려놓았다.

장무기는 밤새도록 오한에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한독의
침습이 천천히 감소되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봇짐을 풀어 보니,
새로 재봉한 가죽옷 한벌이 가지런히 접어진 채 들어 있었다.
그는 몹시 기뻤다. 그러나 그 가죽옷도 역시 하인의 옷처럼 만들
어진 것을 확인하자 시무룩해졌다. 이제 주가(朱家)의 하인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성격이 온화하고 체념이 빨라 별
로 후회하지는 않았다.

'벌써 여기에서 한 달도 넘게 머무르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저
물고 설날이 돌아왔구나, 호 선생님은 내가 일 년 밖에 살 수 없
다고 했으니, 이번 설이 지나면 다시는 설날을 맞이하지 못할 것
이다.'

부유한 집일수록 세모가 다가오면 한층 더 즐거운 분위기에 휩
싸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인들은 분주하게 벽과 대문에 칠을
새로 단장하고 돼지도 잡고 닭도 잡으면서 모두들 즐거워했다.
장무기는 교복을 도와 잡일을 거들며 오직 초하루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새해 첫날 필시 어르신네와 부인, 아가씨에
게 세배를 드리게 될 것이니, 자연스럽게 소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매불망해 온 아가씨를 한 번만 더 뵐 수 있다
면 자기는 조용히 멀리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손수 죽을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기대했던 설날이 되
었다. 장무기는 교복을 따라 대청으로 가서 주인에게 세배를 드
렸다. 대청 한가운데는 한 상의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으며 칠,
팔십 명이나 되는 하인들은 모두 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
부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모두 수고했소."

그러자 옆에 있던 청지기 두 명이 세배돈을 나누어 주었다. 장
무기도 은자 두 냥을 받았다. 그는 아가씨가 보이지 앉자 몹시
실망했다. 그는 은자를 쥐고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염
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올해는 꽤 일찍 오셨군요."

바로 장무기가 학수고대했던 주구진의 소리였다. 곧이어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외삼촌, 외숙모에게 세배 드리려면 감히 늦게 올 수 있느냐?"

다시 한 여인이 까르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이 이렇게 일찍 달려온 건 두 분 존장께 세배를 드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사촌 여동생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 때문인
지 모르겠군요."

곧이어 대청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자 하인들은 급히
옆으로 비켜섰으나 장무기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교복이 황급히 그를잡아끌자 그제서야 옆으로
물러섰다.

대청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자는 젊은 청년이었
다. 주구진은 왼쪽에서 걸어 들어왔는데, 진한 붉은색 초피(돼지
가죽)옷을 입고 있어 더욱 화사하게 보였다. 그 청년이 다른 한
쪽도 낭자였다. 주구진이 대청에 들어설 때부터 장무기의 눈빛은
한순간도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두 젊
은 남녀의 얼굴이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빨간 옷을 입었는지
노란 옷을 입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주인 부부에
게 어떻게 세배드리고 주객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그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않고 오로지 주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인 부부는 세 젊은이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인이 자상
하게 웃으며 딸애에게 말했다.

"진아, 무가(武家) 매자(妹子)를 잘 돌봐 주어라. 너희 세 사람
은 정월 초하루부터 입씨름을 해서는 안 된다."

세 젊은 남녀는 담소를 나누면서 후원을 향해 갔다. 그러자 장
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멀리 떨어져 뒤를 따라갔다. 이날만은 하
인이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간
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무기는이제서야 그 남자의 용모가 준
수하며 키도 훤칠하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비록 혹독한
겨울 날씨였지만 황색 비단도포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내공이
심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낭자는 검은 호피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몸매가 몹시 날씬했으며, 말씨와 일거일동 또
한 세련돼 보였다. 용모의 아름다움을 따진다면 주구진과 별차이
는 없었지만 장무기의 눈으로 볼 때는 아가씨보다는 훨씬 못했
다. 세 사람은 모두 십 칠, 팔세 정도의 나이였다.

세 사람은 재미있는 얘기를 하며 후원으로 곧장 갔다.그 낭자
가 말했다.

"진 언니, 지금쯤 일양지(一陽指)의 무공이 한층 더 심오한 단
계로 연성했을 거예요. 그러니 한 수 보여 주시겠어요?"

"아이구, 날 놀리고 있는 거냐? 설사 내가 십 년을 더 연마한다
해도, 그대 무가(武家)의 난화불혈수(蘭花拂血手)의 일부(一扶)
도 따르지 못할 텐데."

그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둘 다 너무 겸손하군. 이름도 거룩한 <설령쌍매(雪嶺雙妹)>가
서로 추켜세우며 겸손해 하니 어울리지가 않아."

주구진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난 혼자 집에서 죽어라 하고 연마해도 절대로두 분 사형, 사
매가 서로 도와주며 연마하는 것에 따라갈 수 없잖아요?"

그 낭자는 주구진의 말 속에 은연히 시기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걸 느껴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 자신도
시인한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주구진이 화를 낼까 봐 얼른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지. 진매는 외숙부님과 외숙모님, 훌륭한 두 사
부님이 계시니 우리보다 유리할 텐데."

주구진이 이내 토라졌다.

"우리, 우리! 계속 우리라는 걸 강조하는군요! 사매니까 당연히
사촌동생보다 친하시겠죠. 난 청매에게 농담으로 얘기한 건데 오
빠는 자꾸만 그녀의 편만 들고 있군요."

하고 말을 하며 고개를 획 돌리면서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자 청년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촌동생과 친하면 사매하고도 친하기 마련이지. 손바닥이 살
이면 손등도 살이잖소? 그러니 나로서는 절대 편견을 두지 않소.
날 구장(狗場)으로 안내해 수문대장군들을 보여 줄 수 없겠소?
여러 장군들이 그동안 더욱 사나워졌을 텐데."

그러자 주구진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데리고
영교영으로 갔다.

장무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세 사람이 얘기하고 웃는 모습
만 보았을 뿐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하고, 즉시 뒤따라 구
장으로 들어갔다.

주구진은 본시 주자유(朱子柳)의 후인이다. 그 무(武)가 소녀는
이름이 무청영(武靑瓔)이고, 무삼통(武三通)의 후인이며 무수문
(武修文) 계파에 속한다. 무삼통과 주자유는 모두 일등대사(一등
大師)의 제자이며 같은 무공을 지녔었다. 그러나 백여 년 동안
몇 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동안 두 집안의 무공이 점차 변화가
온 것이다. 무돈유(武敦儒), 무수문 형제는 대협 곽정(大俠郭靖)
을 사부로 모셨고, 비록 <일양지>를 배웠으나 무공은 구지신개홍
칠공(九指神改洪七公)의 강맹함에 접해 있었다. 그 청년 위벽(衛
壁)은 주구진의 사촌오빠이며 용모가 준수하고 성격 또한 온순하
여 주구진과 무청영은 가슴을 설레이며 은근히 그를 사모하고 있
었다.

주,무 두낭자는 연령이 비슷하고 모두 미모를 갖춘데다가 가전
무학 또한 막상막하라서, 이삼 년 전에 이미 곤륜 일대 무림 사
람들로부터 <설령쌍매>라 일컬어져 왔다.

주구진은 개를 사육하는 하인에게 명하여 맹견을 모두 풀어 주
라 했다. 개들은 모두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한 마리도 복종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위벽은 쉴새없이 칭찬을 하자 주구진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무청영은 입을 삐죽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사형, 사형은 장래 <장군>이 될 건가요? <졸병>이 될 건가요?"

위벽은 영문을 몰라 멍해졌다. 그러자 무청영이 설명하였다.

"사형이 진 언니의 말을 그토록 잘 들으니, 진 언니는 틀림없이
사형에게 <대장군> 혹은 <선봉장군> 같은 봉호를 하사할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채찍은 조심하야 해요."

위벽은 얼굴을 붉히며 미간에 화난 기생이 띄어졌다.

"그게 무슨 허튼소리야? 사매는 나를 개로 취급하는 건가?"

무청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 장군들이 미인을 가까이 모시고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
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런데 뭐가 못마땅하죠?"

주구진이 눈을 흘겼다.

"오빠가 만약 개라면, 그의 사매는 뭔지 모르겠군."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참지 못해 픽 하며 웃어 버렸다. 순간
자신이 경솔했다는 걸 알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물러섰다.

무청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주구진에게 직접
화를 낼 수 없어 엉뚱한 사람에게 화살을 돌렸다.

"주 언니네 집안의 하인은 법도가 대단하군요. 우리가 이야기하
는 걸 하인녀석이 몰래 엿듣고 킬킬거리며 웃으니 말이예요. 사
형, 난 먼저 집에 가겠어요."

주구진은 무기가 자기의 좌장군을 일격에 때려 죽인 일을 생각
해 내고 웃으며 말했다.

"무사매,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물론 저 하인을 무시할 순 없
지만 너희 무가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삼 초식 이내에
저 천박한 녀석을 쓰러뜨릴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사매를 언니로 모시겠어."

"흥, 저런 녀석하고 겨루란 말이예요? 주 언니, 정말 그렇게 나
를 무시할 건가요? 차라리 개를 상대하는 게 낫겠어요!"

장무기는 참다못해 소리쳤다.

"무 아가씨, 나도 부모가 있어 태어난 사람인데 개와 비교하다
뇨?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나 보살이라도
된단 말이오?"

무청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위벽에게 말했다.

"사형, 내가 저런 하인녀석한테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도와주실
생각도 않는 거예요?"

위벽은 그녀의 애교어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이
설령쌍매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무
사매의 아버지로부터 무공을 배우려면 사매의 환심을 사놓지 않
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즉시 웃으며 주구진에게 말했다.

"동생, 이 하인의 무공이 상당하다는데 내가 한 번 시험해 봐도
괜찮겠나?"

주구진은 그가 사매를 도와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녀는 즉시 생각했다.

'이 장가라는 녀석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오
빠를 시켜 그의 내력을 알아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요. 그에게 무가의 절학을 가르쳐 준다는데 나쁠 게 없죠.
그에 대해선 나도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모르고 있어요."

주구진이 무기에게 말했다.

"오빠한테 너의 사부가 누구고 어느 문파인지 말해라."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이처럼 나를 경시하는데 내 어찌 부모의 문파를 말해
태사부와 부모들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무당파
의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잖은가.'

무기가 말했다.

"나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강호를 유랑했소. 무공이라는 걸 배
운 적도 없습니다. 그저 어릴 적에 아버지로부터 조금 배운 것이
전부요."

주구진이 물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리고 어떤 문파의 제자지?"

"그건 말할 수 없소."

위벽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의 안목이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지."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가며 말했다.

"꼬마야, 내 삼 초식을 받아 보아라!"

그는 말과 동시에 무청영을 항해 슬쩍 눈짓을 했다. 이 꼬마를
실컷 두들겨서 속시원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랑에 빠진 이
두 여자는 위벽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것
과 웃는 것에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위벽이 무청영에게 하
는 눈짓의 뜻을 주구진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은근히 오기
가 생겨 무기를 손짓해 불렀다. 무기가 가까이 오자 그녀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오빠의 무공은 아주 강하다.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그의
공격을 세 번 받아 내기만 해. 그러면 내 체면을 세울 수 있어."

그녀는 무기의 어깨를 툭 쳤다.

무기는 자신이 위벽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결하지 않고 물러선다면 그들을 기분좋게 해줄 것이다.
그는 주구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황홀해서 멍청해질 지경이었는
데, 그녀가 향긋한 체취를 풍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가씨가 부탁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목숨을 걸고
해내야 한다. 몇 대 정도야 죽지 않겠지.'

그는 위벽의 앞으로 나아가 멍청히 섰다.

위벽이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나의 초식을 받아 봐라!"

그 즉시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는 따귀를 얻어 맞았다. 그
의 공격은 극히 빨라 무기가 대항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
았다. 퉁퉁 부어오른 그의 볼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났다.
위벽은 무기가 주가의 비전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사
정없이 공격을 했다. 무기가 주가의 무공을 배웠다면 위벽은 외
삼촌과 외숙모의 체면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력을 크게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기
의 이빨은 모두 부러졌을 것이다.

주구진이 소리쳤다.

"어서 반격을 해!"

무기는 아가씨의 외침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힘차
게 일권을 쳐냈다. 위벽은 옆으로 슬쩍 피하며 놀려 댔다.

"꼬마가 제법이군!"

그는 무기의 등 뒤로 잽싸게 돌아갔다. 무기도 급히 몸을 돌렸
으나 위벽의 출수가 번개같이 빨랐다. 그는 무기의 목덜미를 잡
아 팔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무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기는 사손으로 부터 수년 동안 무공을 배웠으나, 그 때는 나
이가 어렸고 주로 구결을 배웠으므로 실전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명문제자인 위벽과 겨룬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
이었다. 무기는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지탱하려 했으나 도무
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와 코를 땅바닥에 부딪치
며 곤두박질쳤다. 얼굴에서 이내 피가 흘러내렸다.

무청영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진 언니, 우리 무가의 무공이 어때요?"

주구진은 창피하고 분했다. 무가의 무공을 무시했다가는 위벽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고 치켜올려 주자니 무청영의 콧대만
높여주는 결과가 될 것 같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는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 주구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
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아가씨의 체면을 세워야지.'

무기가 속으로 마음을 다지는데 위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생, 이 꼬마는 무공을 하나도 모르잖아? 그런데 무슨 놈의
문파가 있겠어?"

이 순간 무기는 매섭게 돌진하며 발을 날려 냅다 위벽의 아랫배
를 걷어찼다.

"어림없다!"

위벽은 몸을 슬쩍 뒤로 젖히며 무기의 오른발을 왼손으로 끌어
잡고 옆으로 팽개쳤다. 그 즉시 무기는 벽 쪽으로 날아가 등이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 다행히 머리가 부딪쳐 두개골이 부서지
는 화는 가까스로 면했다. 그러나 부딪치는 순간에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기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 일
어났다. 그는 몸이 부서지는 듯이 아팠으나 그 와중에도 주구진
의 안색을 살폈다.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하인은 하나도 쓸모가 없군. 우리 화원에 가서 놀아요."

실망한 듯이 내뱉은 주구진의 말을 듣는 순간, 무기는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이 몸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질풍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위벽을 향해 일장을 펼쳤다. 위벽은 껄껄 웃으
며 무기의 일장을 맞받아 쳤다. 그러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위
벽의 몸이 비칠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무기의 이 일장은 왕년에 뗏목에서 부친 장취산으로부터 전수받
은 무당장권 가운데 칠성수(七星手)란 초식이었다. 무당장권(武
當掌拳)은 무당파의 입문 무공으로 권법의 초식으로 말하면 오묘
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무당파의 무공은 다른 문파의 무
공과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고 약한 힘으로 센 힘을 이기는 수법이었다. 자기의 센 힘으
로 적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경력(勁力)을 되돌려 쳐
서 상대를 이기는 방법이었다. 상대가 한 근의 힘으로 쳐오면 되
돌아가는 것도 한 근이고 백 근으로 쳐오면 되돌아 치는 반탄지
력도 백 근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옛날 각원대사가 읊은 구양진경 가운데 이유극강
(以柔克剛)의 원리를 장삼봉이 무당권법에 도입한 것이었다. 따
라서 송원교, 유연주 등의 고수는 상대의 강력한 힘에 자신의 강
력한 힘을 얹어 공격할 수 있으므로 대단한 효과를 얻게 되었다.
무기는 무당의 무공을 거의 배우지 않다시피 했지만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이 상승무공을 펼쳐냈던 것이다.

위벽은 심한 충격에 손과 팔이 마비되고 가슴의 기혈이 끓어올
랐다. 그는 즉시 몸을 옆으로 비키며 주먹을 휘둘러 무기의 등을
쳤다. 무기는 손을 뒤로 돌리며 일조편(一條鞭)의 초식으로 응수
했다. 위벽은 그의 장세가 기이한 것을 보자 급히 옆으로 비켜섰
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이미 무기의 세 손가락에 쓸려 대단한
통증을 느꼈다. 주구진과 무청영이 지켜보는 앞에서 위벽은 산
수 당한 꼴이 되었다.

위벽으로선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 앞에서 이처럼 창피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무기가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미천하므로 싸
워서 이긴다 해도 자랑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장난 삼아 무
기를 데리고 놀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무청영을 기분좋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약간의 공력만을 사용했다. 그
런데 두 차례나 창피를 당하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녀석이 죽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그는 소리치며 무기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뻗어냈다. 이 초식을
장강삼첩랑(長江三疊浪)으로 세 갈래의 장력을 연달아 뿜어내는
무공이었다. 먼저 한 차례 힘이 나간 뒤 이어 두 번째 경력이 밀
려나가고 마지막으로 강력한 힘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나가는 초
식이었다. 무학의 고수가 아니면 죽거나 중상을 입게 마련인 무
서운 무공이었다.

무기는 상대의 초식이 사나운 것을 보자 덜컥 겁이 났으나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친에게서 배운 정란(井欄) 초식으로
맞받아쳤다. 이 일초는 극히 심오한 무공이었으므로 사실 무기가
그것을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으
므로 반사적으로 펼쳐냈다. 그런데 위벽의 강력한 일권이 무기의
몸에 닿는 순간 넓은 바다에 빠진 듯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위벽이 깜짝 놀라는 순간 그가 쳐낸 두 번째의 장력이 무서운
기세로 반탄되어 되돌아와 그의 오른팔을 쳤다. 뿌드득 하는 소
리와 함께 그의 팔뼈가 부러졌다. 다행히 위벽은 세 번째 경력을
발출하지 않았다. 이 경력까지 발출했다면 무기도 잘 모르는 정
란 초식으로 인해 두 사람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주구진과 무청영은 놀라 일제히 소리치며 위벽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위벽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잠시 실수한 탓이야."

주구진과 무청영은 그가 상처를 입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
팠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팔을 휘두르며 장무기에게 덮
쳐갔다. 무기는 일초로 위벽의 팔을 부러뜨렸지만 그 자신도 넘
어져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한데 채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에
서 두 낭자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무기는 결국 피할 엄두도 내
지 못한 채 가슴과 어깨에 쌍장을 맞았다. 그 즉시 선혈을 토해
냈다. 그의 마음은 분함과 슬픔으로 범벅돼 상처로부터 우러나오
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체면을 지켜주려 했는데, 겨우
이겨 놓으니까 나를 치다니!'

위벽이 외쳤다.

"내게 맡겨라!"

두 낭자는 손을 멈추었다. 위벽은 시퍼런 얼굴로 무기를 향해
왼손바닥을 밀어쳤다. 무기는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주구진이 소리쳤다.

"오빠, 상처를 입은 몸으로 이런 꼬마와 다툴 필요가 있나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이제 그만해요!"

거만한 성품의 그녀가 남한테 잘못했다고 머리를 숙인다는건 대
단한 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위벽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아
무리 다급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수그러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러나 위벽으로서는 그녀의 말이 더욱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
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진매, 저 꼬마는 무공이 아주 고강해. 진매가 잘못 판단한 것
은 아니야. 다만 내가 승복할 수 없을 뿐이야."

그는 주구진을 옆으로 밀어내며 다시 무기에게 일권을 쳤다. 무
기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무청영이 무기의 등
을 향해 쌍장을 펼쳐 냈다. 그 순간 위벽의 주먹이 무기의 콧등
을 쳤다. 금새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무청영은 주구진보다 심
기가 훨씬 깊었다. 그녀는 은근히 사형을 도와 체면을 세워 주어
마음 속으로 감복케 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눈치챈 주구진은 내심 못마땅했다.

'네가 사형을 도우는데 나라고 오빠를 돕지 못하겠어!'

그녀는 즉시 출수하여 위벽과 함께 무기를 협공했다. 장무기는
삽시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다시 몇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며 부친이 가르
쳐 준 삼십 이 세(勢)의 무당장권을 펼쳐냈다. 그러나 공력이 부
족한 탓에 주먹과 다리를 아무리 휘둘러도 위력이 없었다. 다만
상승무공인 덕분에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버텨 나갔다.

주구진이 호통을 쳤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감히상전한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거
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순간 위벽이 왼손으로 무기의 왼쪽 어깨를 거칠게 쳤다. 위벽은
부러진 팔의 통증이 극렬한데다 이 꼬마와 더 이상 실랑이를 하
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 일장에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무기의 몸
은 무청영의 장력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사나운 경풍
이 얼굴을 쳐왔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두 팔을 들어올려 막았다.

이때 갑자기 위엄있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그리고 그림자가 번뜩 하더니 누군가가 옆에서 날아들어와 위벽
의 장력을 밀어냈다. 위벽은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몸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려 하자 남포를 입을 사나이는 재빨리
가서 위벽의 어깨를 부축했다.

주구진은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

무청영도 기겁을 했다.

위벽은 숨을 헐떡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외삼촌!"

그 사람은 바로 주구진의 아버지 주장령이었다. 위벽의 팔뼈가
부러진 것을 본 개 시중꾼이 주인에게 알려 그가 황급히 달려와
보니 셋이 합세하여 무기를 협공하고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지
켜보면서 소년이 무당파의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
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벽이 살수를 쓰자 무기를 구하려 뛰어든
것이었다.

주장령은 주구진과 위벽, 무청영을 쏘아보며 얼굴에 노기를 띠
더니 냅다 딸의 뺨을 후려쳤다.

"주가의 자손이 이런 짓을 하다니! 내가 이 따위 딸을 낳았단
말인가! 저승에 가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구나!"

주구진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총애만 받고 자랐으므로 지금까지
엄한 꾸중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 앞에서 부친
에게 뺨을 얻어맞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장령이 호통을 쳤다.

"그치지 못해! 어디서 우는 거냐!"

대들보의 먼지가 분분히 날려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으므로
주구진은 덜컥 겁이 나서 즉시 울음을 그쳤다.

주장령이 말했다.

"우리 주가는 대를 이어 오면서 의를 목숨처럼 중시했다. 너의
고조부는 일등대사를 보좌해 대리국에서 재상을 지내셨고 나중에
양양성을 지키며 명성을 천하에 날리셨다.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
냐! 그런데 자손이 불초하여 내 대(代)에 와서 이런 아이를 갖게
되다니..... 그래, 세 사람이 한 소년을 협공해 생명을 빼앗아
어찌할 셈이냐?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가 딸을 질책하기는 했으나 위벽과 무청영의 귀에도 그 꾸중
이 칼날처럼 찔러왔다.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무기
는 통증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
물고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주장령이 하는 말을 또렷
이 들었으므로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했다.

'사리가 분명한 것을 보니, 이 분은 정말로 의협심이 있는 사람
이구나.'

주장령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노기충천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위벽 등 세 사람은 땅만 내려다 보며 감
히 그를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무기가 보니 주구진은 아버지에
게 얻어맞은 뺨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
은 정말 가련할 정도였다.

무기가 말했다.

"어르신네, 이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 놀랐다. 목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위벽에게 목덜
미를 세게 얻어 맞았기 때문이었다.

주장령이 말했다.

"내가 보니 이 소년은 제대로 무예를 배우지 못한 게 틀림없다.
의지 하나로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모습이 훌륭했다. 너희들 셋
이 이처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공격한 것은 평소에 스승의 말
을 한 귀절도 마음에 새기지 않은 탓이다!'

그의 이 날카로운 질책에 오히려 무기가 황송하고 민망할 정도
였다.

주장령은 무기가 어떻게 하여 여기에 왔으며 어째서 하인의 옷
차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해 위벽의 상처를 보살펴 주었다. 주구진은 부친의 엄한 물음에
감히 속이지 못하고 무기가 원숭이를 품에 숨긴 것에서부터 개에
물린 일, 그리고 자신이 그를 구해 준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
다.

주장령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이 소년은 원숭이를 구하려는 마음을 지녔는데 너는 그를 하인
으로 만들었구나. 차후에 이 이야기가 강호에 전해지면 이 겅천
일필(驚天一筆) 주장령이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모두 비웃겠구나.
네가 개를 키우는 것은 단순히 즐기라고 허락해 준 것인데 어찌
사람을 물게 내버려 두었느냐? 내 오늘 너를 없애지 않으면 앞으
로 무슨 면목으로 무림에서 행세를 하겠느냐?"

주구진은 부친이 크게 노하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
다.

"아버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주장령이 여전히 화를 내자 위벽과 무청영도 함께 무릎
을 꿇고 애걸했다. 무기가 입을 뗐다.

"어르신네....."

주장령이 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소형제, 어찌 나를 보고 어르신네라 부르는가! 내 자네보다 나
이를 조금 더 먹은 것밖에 없으니 구태여 대우를 하겠다면 선배
라고 불러주면 족하네."

"예, 그러면 주 선배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번 일은 아가씨 때
문이 아닙니다. 아가씨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자네는 어린 사람이 그토록 도량이 크구먼. 오늘은 새해 첫날
이고 또 무소저는 손님이니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번 일
은 우리 무림인으로서는 정말 수치스런 일이기에 화를 낸 것일
세. 소형제가 이렇게 부탁을 하니 모두들 일어나게."

위벽 등 세 사람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일어났다.

주장령은 개를 기르는 사육사에게 말했다.

"그 나쁜 개들을 모두 풀어놓아라."

개 사육사가 응답하고 개를 풀어놓았다. 주구진은 부친이 왜 그
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님....."

주장령이 차갑게 대답했다.

"너는 이 나쁜 개들을 길러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느냐! 이
제 저 개들에게 나를 물라고 해보아라!"

주구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주장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개들 사이로 뛰어들어 쌍장을 휘둘렀
다. 일순간에 네 마리의 개가 두개골이 터져 죽어 넘어졌다. 아
무도 감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주장령을 쳐다볼 뿐이었다.
삽시간에 삼십여 마리의 개가 모두 격살되어 있었다. 위벽, 무청
영, 무기 등은 놀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장령은 장무기를 안아 자기의 방으로 데려가서 직접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조금 후에 부인과 주구진이 달려와 탕약을 달여
준다. 어쩐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무기는 개에게 물려 피를 많
이 흘린 뒤로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는데 이번에 또 상처를 크
게 입었으므로, 며칠 동안 혼미한 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그
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처방한 약을 먹으며 차츰 회복해 갔다. 주
장령은 그가 훌륭하게 약처방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치료받는 이십여 일 동안 주구진은 자주 장무기의 침실
로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재미있는 수수께끼도 하며 옛날 얘기
도 해주었다. 마치 큰 누나가 동생의 병을 간호해 주는 것처럼
세심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장무기는 상처가 완쾌되어 침
상에서 일어났는데도 주구진은 여전히 매일 반나절은 그와 같이
지냈다. 그녀가 부친에게 무공을 배울 때도 장무기에게 숨기려
하지 않고 항상 그더러 옆에서 참관하라 했다. 게다가 주장령은
두 번씩이나 그를 제자로 삼아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그
러나 장무기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는 그 일을 들먹이지 않았
다. 그래도 그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주가의 무공은 서법
(書法)과 관계가 있었다. 주구진은 매일 글쎄 쓰는걸 연습했고,
장무기에게도 자기의 말동무가 되어 함께 글공부를 하자고 했다.
장무기는 빙화도를 떠나 중원땅에 온 후부터 계속 유랑생활을 해
왔다. 그로선 이처럼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은 꿈에도 생각해 보
지 못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 월 중순이 되었다. 이날 장무기와 주구진은
작은 서재에서 임첩상대(臨帖相對)를 하고 있었는데, 몸종 소봉
이 들어와 아뢰었다.

"아가씨, 요숙부님께서 중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주구진은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붓을 던지며 소리쳤다.

"난 반 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오셨군."

그녀는 장무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기 동생, 같이 가보지. 요이숙부께서 내가 부탁한 선물을 다
사 오셨는지 모르겠어."

둘은 손을 잡고 대청으로 갔다. 무기가 물었다.

"요이숙부가 누굽니까?"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분이셔. 천리추풍(天里追風) 요
청천(姚淸泉)이란 분이지. 지난 해 아버지의 부탁으로 중원에 예
물을 갖고 가셨거든. 나는 항주의 유명한 연지와 분가루, 그리고
비단과 붓, 먹, 서예책도 사오라고 했는데 다 사오셨는지 모르겠
어."

그녀는 주가장(朱家莊)이 서역 곤륜산에 있으므로좋은 물건들
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서 중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물건을 부탁한다고 했다.

둘이 함께 대청앞에 이르자 오열하며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
짝 놀라 대청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장령이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중년 남자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하얀 상복을 입
고 허리에 새끼끈을 매고 있었다. 주구진이 가까이 다가갔다.

"요숙부님!"

주장령이 방성대곡하며 말했다.

"진아야! 우리들의 은인인 장어른께서..... 그만 돌아가셨다는
구나!"

주구진이 놀라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장공은 십 사 년 전에 실종됐었잖아요?
그분이 언제 돌아오셨었나요?"

요청천이 오열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외진 곳에 살아 소식을 듣지 못한 거야. 장공
은 사 년 전에 부인과 함께 자결하셨다는 구나..... 무당산에 가
기 전 협서성에서 그 소식을 듣고 무당산에 가서 송대협과 유이
협을 만나 사정을 들었단다. 그분들을 뵐 면목이 있구나!"

장무기는 들을수록 내심 크게 놀랐다. 그들이 말하는 장공은 자
기의 부친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주장령과 요청천이 애절하
게 우는 걸 보자 주구진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장무기는 참다
못해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고 싶었으나 나름대로 망설였다.

'난 지금까지 신분을 감초고 있었는데, 설사 지금 솔직히 얘기
해 준다 해도 주백부와 진누나는 믿어주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내
가 은인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들에게 뭔가 바라는 듯한
오해를 줄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날 우습게 볼 것이고....'

잠시 후 내당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부인은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으로 들어와서 울먹이며 요청천에게 물었다.
요청천은 비통한 나머지 의형수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즉시
장취산이 자결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비록 장무기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대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내
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보지 못했다.

주장령이 갑자기 일장을 후려쳐 앞에 놓여 있는 팔선탁을 부셔
버리며 말했다.

"둘째 아우, 나에게 자세히 말해 주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무당산에 가서 은공 부부를 살해했단 말인가?"

"제가 소식을 들은 즉시 당연히 큰형님께 곧바로 보고를 해드렸
어야 하는 건데, 원수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 좀 지체된 것입
니다. 우선 무당산에 가서 은공을 죽게 한 자들이 소림파의 삼대
신승 이하 많은 무림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렇게 서둘러 돌
아온 것입니다."

하며 소림, 공동, 곤륜, 아미 각파와 해사, 거경, 신권, 무산
등 방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얘기해 주었다. 주장
령은 처연하게 말했다.

"둘째 아우, 그 사람들은 모두 현 무림에서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고수들이다. 우리는 그들 중에 한 사람도 당해 낼 수는 없지만,
장오야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설사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다 해도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해 기필코 복수를 해
야 하네."

요청천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장어른이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신
덕분으로 그 동안 십 여 년을 살았으니, 장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마땅한 일이지요. 제가 가장 섭섭하게 생각한 일은 장
어른의 아드님을 뵙지 못한 일입니다. 그분을 뵈었으면 형님의
뜻도 전하고 이곳으로 모셔 와 평생 동안 모시면 좋을 텐데."

주부인은 장공자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요청천은 그가 중상을
입고 어딘가로 치료하려 떠났으며 올해 십여 세쯤 되었을 것이라
고 말했다. 앞으로 장삼봉 어른의 절세무공을 전수 받는다면 장
래에 무당파의 장문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주장령 부부는 무릎
을 꿇고 은인이 자손을 두었음을 하늘에 감사했다.

요청천이 말했다.

"형님이 장어른께 드리라고 주신 천 년 인삼, 천산의 설련 등
선물은 모두 무당산에 남겨 두었습니다. 나중에 장공자에게 드리
라고 송대협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아주 잘했네, 잘했어."

그는 딸을 보고 말했다.

"우리 집안이 장어른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을 장형제에게 이
야기해 드려라."

주구진은 무기의 손을 잡고 부친의 서재로 데리고 가서 벽에 걸
려 있는 한 폭의 큰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에는 <장공취산은
덕도(張公翠山恩德圖)>라는 제호가 적혀 있었다.

장무기는 주장령의 서재에서 부친의 이름을 대하자 눈앞이 흐려
지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림엔 영준한 소년 무사가 왼손에 은
구를, 오른손에 철필을 들고 광야에서 다섯 명의 적과 싸우는 모
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소년 무사가 자기의 아버지인 모양인데
눈썹 주위만이 아버지를 닮았을 분 오히려 자기의 얼굴과 비슷했
다. 땅에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바로 주장령과 요청천이었
다. 이들 말고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떨어진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왼쪽 귀퉁이에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주부인이 그
려져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린 여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여
자 아이의 입가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주구진인 모양이었
다. 그림은 누렇게 변해 있어 그린 지가 십 년이 넘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주구진은 그림을 가리키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당시 주구진
은 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주장령은 무서운 원수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끝내 원수들이 추격해
온 것이었다. 사제 두 명은 적에게 살해되고그와 요청천도 부상
을 입고 쓰러진 상태에서 적이 독수를 가하려는 찰나, 마침 장취
산이 이 길을 지나가다가 상황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의협심
을 앞세워 적을 격퇴하고 주장령 일가족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다. 그것은 장취산이 빙화도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주구진은 설명하고 나서 암담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중원과 외진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장은공께서 실종되
신 후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작년에서야 알게 된
것이야. 아버님께서는 중원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맹
세를 스스로 하셨기에 하는 수 없이 요숙부님께 부탁해 귀중한
예물을 갖고 무당산으로 가게 한 것이지.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사동 한 명이 들어와 영당(靈堂)으로 가
서 장은공에 배를 올리라고 했다. 주구진은 급해 자기의 방으로
돌아가 깨끗한 소복으로 갈아입고 장무기와 후당으로 갔다. 후당
에는 이미 위패 두 개가 마련되었고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왼쪽
위패에는 <은공장대협위취산영위(恩公張大俠偉翠山英位)>라고 적
혀 있었다. 다른 위패에는 <장부인은씨지영위(張夫人殷氏之英
位)>라고 적혀 있었다. 주장령 부부와 요청천은 무릎을 굻고 몹
시 서글피 울고 있었다. 장무기도 주구진을 따라 함께 무릎을 꿇
고 절을 했다.

"소형제, 잘했네, 잘했어. 자네는 이분 장대협을 알지도 못하고
친척지간도 아니지만, 그분에게 절을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
네."

장무기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바로 장은공의 아들이라고 밝히
는 것이 더욱 난처해졌다.

갑자기 요청천의 소리가 들렸다.

"형님, 그 사야란 분은....."

그러자 주장령이 얼른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그에게 눈짓을 하자
요청천은 금방 알아차린 듯 말했다.

"그 사의(謝儀)를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주장령이 간단하게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장무기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분명히 사야(謝爺)라고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말을 바꾸
었을까? 사야.....? 사야라면 혹시 나의 의부를 말하는 게 아닐
까?'

이날 밤, 그는 돌아가신 부모와 극북한도(極北寒島)에서 고생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의부 생각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 뒤척
이기만 할 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면서 여자 특유의 향기로
운 체취가 사르르 풍겨오더니, 주구진이 세수물을 들고 방 안으
로 들어왔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진 누나, 어찌..... 어찌 누나가 직접 나의.....?"

"하인과 몸종들이 모두 떠나갔어. 내가 동생의 시중을 좀 들기
로서니 뭐가 그리도 놀랍다는 거지?"

장무기는 더욱 의아하여 물었다.

"무엇..... 무엇 때문에 모두 가버렸습니까?"

"나의 아버님께서 어젯밤에 그들을 모두 보낸 것이야. 모두에게
은자를 주면서 각자의 고향으로 가라고 했어. 여기에 있으면 위
험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버지께서 너에게 하실 말씀이 계신가 봐."

장무기는 대충 세수를 끝냈다. 주구진은 그의 머리를 빗겨 주고
나서 무기를 데리고 주장령의 서재로 갔다. 원래 이 큰 저택에서
는 칠, 팔십 명의 하인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한 명도 보이지 않
아 몹시 썰렁하게 느껴졌다.

주장령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 말을 꺼냈다.

"장형제, 난 자네의 의협심과 영웅기개에 반해 이 집에 오래 머
물도록 하려 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겨 할 수 없이 자네와 이
별을 해야 하네. 소형제는 절대 오해하지 마시게."

라고 말하며 쟁반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쟁반에는 열 두개의
황금과 백은 그리고 호신용 단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이건 우리 부부와 딸의 작은 뜻일세. 소형제는 이를 받아 두시
게. 우리가 살아난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오열하며 작아졌다.

무기는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

"주 아저씨,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인
배는 아닙니다. 댁에 위난이 있는데 어찌 저만 피해 떠나겠습니
까? 아저씨와 누님을 돕지는 못하다 해도 죽음을 같이 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주장령이 몇 번이나 떠나라고 권했으나 무기는 듣지 않았다.

주장령이 한탄하며 말했다.

"아, 소년영웅은 위험을 모른다더니..... 그럼 자네에게 진상을
말해 주겠네. 다만 먼저 맹세를 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는다고 말일세."

무기는 무릎을 꿇고 낭랑하게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주 아저씨가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누
설한다면 제 몸은 난도질 당하게 될 것이며 날벼락을 맞을 것입
니다."

주장령은 그를 부축해 일으킨 뒤 창 밖을 내다보더니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다시 서재로 돌아와 무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말하는 것은 가슴에만 새겨 두게.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있잖은가?"

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령이 다시 속삭였다.

"어제 요아우가 장은공이 돌아가신 소식을 갖고 돌아왔을 때 한
사람을 데리고 왔네. 그 사람의 이름은 사손인데 별호가 금모사
왕이라네....."

순간,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주장령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 사대협은 장은공과 의형제지간이고 지금 천하 각 문파의
호걸들과 깊은 원한 관계가 있네. 장은공 부부가 자결하게 된 원
인도 의형의 거처를 발설하지 않기 위함이었네. 사대협께서 뭣
때문에 중토에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장은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많은 사람들을 죽였네. 결국 그 자신도 중과부적으로
중상을 입고 말았지 요아우란 사람은 몹시 기지가 있어 그를 구
해 여기까지 피신시켜 왔지만 그의 원수들이 잠시 후면 들어닥칠
것이네. 상대방은 인원수가 많고 세력이 막강하여 우린 절대 막
아낼 수가 없다네. 나는 장은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려
도 무방하지만, 자네는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구태여 여기
서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소형제, 내 말을 이것뿐이니
어서 빨리 떠나가게. 적이오게 되면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
이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지 몹시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기뻐했다.
그는 의부가 여기에 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의부를
만나고 싶은 심정이 다급해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하고 말을 내뱉기 무섭게 주장령은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말을 해서는 안 되네. 적들은 신통광대(神通光大)하여 한 마디
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사대협의 목숨이 그만큼 더 위험해질 것일
세. 아까 한 맹세를 벌써 잊었는가?"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모든 걸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전 더욱 떠날수가 없
습니다."

주장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앞으로 우리는 공생공사하기로 하고 다른 건 더 이상 얘
기하지 않기로 하세. 이제 때가 됐으니 서둘러야겠네."

그는 즉시 주구진과 장무기와 함께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
문을 나서자 주부인과 주구진, 요청천이 이미 문 밖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그들은 보따리를 몇 개씩 꿰어차고 멀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무기는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큰아버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장령이 황급히 부싯돌을 꺼내 불을 씔여 곳곳
에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집 전체에 불이 붙었다. 미리 수백 칸
되는 방마다 기름을 부어 불이 잘 붙게 해놓았던 것이다.

무기는 활활 타들어가는 집과 나무들을 보며 마음 깊이 감격했
다.

'주 아저씨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구나. 이건 모두 아버지와 큰아버지을 위해서가 아니가? 이
렇게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이날 밤 주장령 부부, 주구진 무기 네사람은 가까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잤다. 요청천과 주장령의 다섯 제자는 병기를 들고 동
굴 밖에서 경계를 섰다. 저낵을 사흘 동안이나 타 들어갔다. 다
행히 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주장령은 처자와 제자, 오청천, 부기를 데
리고 동굴을 떠났다. 그들은 어두운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
엔 식량과 물 등 필요한 물품들이 고루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왠지 무척 더웠다.

주구진은 무기가 끊임없이 땀을 닦아내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
었다.

"동생, 여기가 왜 이렇게 더운지 알아맞춰 봐. 우리가 어디에
있을까?"

무기는 무언가 타는 냄새를 맡으며 언뜻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
었다.

"아니, 우리는 바로 원래의 장원 밑에 와 있군요?"

주구진은 웃으며 말했다.

"동생은 정말 총명하군."

장무기는 주장령의 치밀한 계획에 더욱 감탄했다. 적이 대거 공
격해 올 때 주장령의 집이 잿더미로 변한 걸 보게 되면 자연히
먼곳으로 추격해 갈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사손이 화장(火場)밑
에 숨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는 반대편 한
곳에철문이 굳게 닫혀져 있는 걸 보자 의부가 그 안에 숨어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부를 만나 그동안 지내온 일들을 얘기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주장령이 그에게 절대 철문 안으로 가지
말라고 당부한 걸 보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그런 경거망동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큰일을 그르치게
돼 자기가 죽게 되는 건 관계가 없지만, 의부와 주가 일가족의
생명마저 지장을 준다면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 석실에서 반나절을 지내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차츰 감소됐
다. 작자 침낭을 펴서 취침하려는 찰나 갑자기 급히 달려오는 말
굽소리가 한 차례 " "리서 들려오더니, 바로 머리 위에서 멎었
다. 그러자 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말했다.

"주장령, 그 늙은 도적놈은 필시 사손을 보호한 채 도망갔을 것
이다. 빨리 뒤쫓자!"

장무기 일행은 비록 지하에 있었지만 위에서 나는 소리를 똑똑
히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지하로부터 철관(鐵管)이 지면으로 통
해 있어 위에서 나는 소리가 철관을 통해 밑으로 쉽게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점점 멀어져 갔
다.

이날 밤머리 위를 지나간 추적자들은 선후로 모두 다섯패나 되
었다. 군륜파도 있고, 공동파, 거경방, 그리고 나머지 두 패는
대화만 듣고서는 어떤 문파의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인원수가
작은 패는 칠, 팔 명 됐고, 많은 건 십여 명이 되었다.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며 준마의 울음소리 하며 한결같이 욕지거리를 해
대며 떠들어대는 기세로 보아 몹시 살기등등해 졌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의 의부께서 두 눈이 실명되지 않고 중상을 입지 않았
더라면, 너희들 같은 것쯤이야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나타난 인마들이 멀어져 가는 걸 기다렸다가 요청
천은 나무마개롤 철판 구멍을 다시 막았다. 이는 지하 밀실에 있
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혹시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염려스러워서
였다. 그래도 요청천은 여전히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사대협의 상처가 어떤지 좀 가봐야겠소."

주장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요청천은 손을 내밀어 철
문의 옆에 있는 장치를 움직이자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유
등을 하나 들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장무기느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서 요청천
의 등 뒤에서 철문 안을 살펴보았다. 몸집이 우람한 남자가 안쪽
을 항해서 누워 있었다. 장무기는 의부의 뒷모습을 보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 요청천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대협님, 좀 괜찮으십니까? 물을 드릴까요?"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갑자기 경풍이 불면서 요청천의 수중에 있
는 등불이 바람에 꺼져 버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요청천이
사손의 일장에 철문을 뚫고 밖으로 뛰어나가 땅에 무겁게 떨어졌
다.

그러자 사손의 오침이 들려왔다.

"소림, 곤륜, 공동 세 파의 무리들아! 오너라, 나 금모사왕 사
손이 너희들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주장령은 중얼거렸다.

"큰일났군. 사대협이 정신 나갔군."

그는 급히 문쪽으로 걸어가 말했다.

"사대협, 우린 당신의 친구이지 적이 아닙니다."

사손은 냉소를 지음 차갑게 말했다.

"흥, 그런 말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큰걸음으로 철문을 나가 주장령의 가슴을 항해 다짜고짜
장풍을 뻗쳤다. 이 일장의 위력은 정말 날카로왔다. 실내의 유등
(油燈)마저도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장령은 감히 막지를
못하고 몸을 피했다. 사손은 다시 왼손을뻗어 그의 얼굴을 향해
일권을 내리쳤다. 주장령은 어쩔 줄 몰라 팔로 막았으나 몹시 심
하게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장무기도 이 돌연한 변화에 그
만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또다시 사손의 공격이 뻗쳐왔다. 그
의 주먹과 장력은 비수와 같이 날카로왔다. 주장령은 대항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사손의 이장이 주장령을 맞추지 못
하고 벽에 부딪치자 돌가루가 휘날렸다. 만약 그의 몸에 맞았다
면 치명상이 될 것은 뻔했다.

사손의 장발을 어깨까지 치렁치렁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숨을 거칠게 물아쉬며 장세가 더
맹렬해져 갔다. 주부인과 주구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숨어 있었
다. 주장령은 다시 그의 장력이 뻗쳐오자 할수 없이 옆에 있는
탁자로 막았다. 그 즉시 퍽! 퍽!하고 사손의 주먹이 탁자를 가루
로 만들었다.

장무기는 어쩔 줄 몰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서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사손은 자기의 의부 금모사왕 사손이 아니었다. 자
기의 의부 금모사왕은 눈이 멀었는데, 눈앞의 이 사람은 두 눈을
시뻘것게 뜨고 있지 않은가! 이 순간 그가 또다시 일장을 뻗자
주장령은 벽에기대고 있어서 더 이상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막지를 않고 외쳤다.

"사대협,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라서 반격을 하지 못하겠소!"

그 거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주장령은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외쳤다.

"사대협, 이젠 나를 믿겠소?"

대한(大漢)이 외쳤다.

"개 같은 놈! 내 일권을 다시 받아라!"

그러면서 또 일권을 뻗었다.

주장령은 울컥울컥 선혈을 토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은공(恩功)의 형입니다. 난 절대로 반격하지 않겠
소."

대한은 광소를 터뜨리며 팔을 쳐들었다.

"그럼 더욱 좋지. 너를 때려 죽일 것이다."

하면서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그의 가슴에 맞추었다. 주장령은
윽!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쓰러졌다.

그 대한은 여전히 사정을 두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이때 장무
기가 얼른 앞으로 나서 두 팔을 벌려 막았다. 대한의 경력은 정
말 대단했다. 장무기도 그의 장력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외쳤다.

"당신은 사손이 아니야! 당신은.....!"

대한은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조그만 녀석이 뭘 아느냐?"

그러면서 장무기를 향해 거세게 걷어찼다. 장무기도 재빨리 피
하며 외쳤다.

"당신은 금모사왕으로 거장하고 우릴 속였군. 당신은 가짜야!"

주장령은 땅에 쓰러져 있었으나 장무기의 말을 듣자 억지로 기
어 일어서며 대한을 가리켰다.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너는.....!"

그러면서 갑자기 대한의 얼굴에 선혈을 내뿜었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손을 뻗듯이 그의 어른쪽 가슴의 신봉혈(神封
穴)을 찍었다. 주장령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대한의 적수가 되진
못했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비
기인 일양지 수법으로 그의 대혈을 찌른 것이다. 주장령은 다시
그의 허리와 늑골을 향해 지풍을 뻗은 후 자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주구진과 장무기는 재빨리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잠시 후, 주장령은 정신이 드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무기에게
물었다.

"그 자는.....?"

장무기는 고개를 숙였다.

"주 아저씨, 이젠 더 이상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은공은 바로 가부(家父)이시고 금모사왕은 나의 의부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의부를 잘못 알고 있겠어요."

주장령은 고개를 저으며 도무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의 의부께선 오래전에 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은 저렇게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증거입니다. 저의 의부
께선 해외에서 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이 자도 그걸 모르고 저의 의부인 척한 겁니다."

주구진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무기 동생, 네가 진짜 우리 대은공의 아들이라니 정말 기쁘구
나."

주장령은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할 수 없이 어
떻게 해서 곤륜에 오게 된 것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러자 요청천이 참지 못하고 나서서 무당산에서 있었던 일과 장취
산 부부가 자살한 일 등을 물었다. 장무기는 서슴치않고 대답했
다. 그제서야 이들은 장무기의 말을 믿었으나 주장령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이 애의 말이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르다면 우리는 사대협
에게 죄를 짓게 되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요청천은 비수를 꺼내 대한의 눈을 노리며 말했다.

"어이 친구! 금모사왕은 눈을 실명했다는데, 네가 그 사람으로
흉내내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야겠지. 이 소형제가 아니었더라면
너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두 형님의 목숨을 그냥 허무하게 잃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비수끝으로 대한의 눈을 찔렀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왜 금모사왕인 척했지?"

대한은 음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단칼에 죽여라! 개비수 호표(開碑手胡豹)
가 너희들에게 입을 열 줄 아느냐?"

주장령이 엇! 하고 소리치더니 말했다.

"개비수 호표라고? 너는 공동파가 아니냐?"

호표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천하의 무림인이라면 주장령이 장취산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속담에 먼저 선수를 치는 자가 강자란 말도
모르느냐?"

요청천이 외쳤다.

"악독한 놈!"

그는 비수로 그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주장령이 잽싸게 왼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二弟), 잠깐! 만약 이 사람이 진짜 사대협이라면 우리들
은 만 번 죽어도 속죄할 길이 없을 걸세."

"아닙니다. 장형제가 이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형님께서
도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어려움이 있
을지 모릅니다."

주장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장은공이 털끝 하나라도 건
드려선 안 된다."

장무기가 앞으로 나섰다.

"주 아저씨! 이 사람은 절대로 저의 의부가 아닙니다. 저의 의
부께선 별호가 금모사왕인 것처럼 머리카락이 노랗습니다. 그런
데 이 사람은 검지 않습니까?"

주장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무기의 손을 잡았
다.

"소형제! 나를 따라오게."

주장령은 통로를 통해 석실 밖으로 나와 언덕 뒤에 있는 절벽까
지 갔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바위 위에 앉았다.

주장령이 입을 열었다.

"소형제! 만약 저 사람이 사대협이 아니라면 우린 물론 저자를
죽여야 하네. 하지만 그 전에 내 마음속의 의문을 완전히 풀어야
될 것 같군."

장무기는 수긍했다.

"무슨 실수를 저지를까 봐 그러시는군요. 물론 그러셔야죠. 그
러나 저 사람은 절대로 저의 의부가 아니니 안심하십시요."

주장령이 탄식하듯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속임을 당했는지 아느
냐? 내가 오늘 반격하지 않은 것은 한 번 실수하며 다시는 돌이
킬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지. 내 자신이 죽더라도 너와
사대협은 절대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너한테 사
대협이 지금 어디 계신지 물어보고 싶은데....."

장무기는 감동하며 말했다.

"주 아저씨, 당신께선 저의 부친과 의부 때문에 백만가산을 다
버리시고 또 몸에 이런 중상까지 입으셨는데, 그래도 제가 아저
씨를 못 믿겠습니까? 저의 의부에 대해서 묻지 않으셔도 저는 알
려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장무기는 부모님과 사손이 어떻게 빙화도까지 표류해
가서 십 년이란 세월을 지냈으며, 다시 돌아오게 됐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주장령은 세세속속 자세히 캐물었다. 장무기가 빙화도에서 무공
을 어떻게 배웠고 양불회는 어떻게서쪽으로 왔으며, 곤륜삼성이
조난을 당한 사정 등을 일일이 물어보고 나서, 장무기의 대답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그를 믿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은공! 개대해 주십시오. 주장령은 힘을 다해 무기 형제를 훌륭
하게 키우겠습니다. 다만 내 무공이 미천해 사악한 무리들을 다
벌할 수 있을지..... 그러나 기필코 원수를 갚겠습니다. 은공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을 했다. 장무기는 슬프면
서도 감격했다. 그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주장령은 희열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난 모든 의혹이 풀렸다. 소림, 아미, 곤륜, 공동 어느 파
나 세력이 강하지만, 이 늙은이는 목숨을 걸고 영존의 원수를 갚
기로 결심했네. 그러나 눈앞의 일이 더 시급하니 복수는 나중 일
일세. 이 넓은 천지에 어딜 가서 대난을 피하지? 이런 외진 곳에
있는 내 거처까지 놈들이 찾아 냈으니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사대협께선 몇 년을 혼자 빙화도에서 지내셨으니 얼마나 외로
우실까. 사대협께 은공은수(恩公恩嫂)에게 그렇게 의리를 지키셨
다니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장무기는 의부께서 외롭게 지내신다는 주장령의 말에 우울해 졌
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주 아저씨! 우리 같이 빙화도로 가요. 섬에서 살 땐 정말 즐거
웠었는데, 중토(中土)에 와서부터는 그저 피비린내 나는 살인뿐
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무섭습니다."

주장령은 장무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무룩했다. 자기는 이미 오래 못
사는 처지라 빙화도까지 갈 시간이 없을테니, 주장령 일행만 위
험을 겪게 될 것이다. 오랜 항해에서 거센파도라도 만나면 물귀
신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때 주장령은 그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소형제, 자넨 남이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해
라. 빙화도에 가고 싶으냐?"

그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장무기는 사실 험악한 강호 인심에 질려 죽기 전에 의부를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의부의 품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주장령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장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장무기를 데리고 석실로 돌아
왔다. 그리고는 요청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은 첩자가 틀림없어!"

요청천은 그제서야 비장한 각오를 하면서 비수를 들고 밀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개비수호표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고. 요
청천이 밀실에서 나왔다. 그의 비수엔 선혈이 묻어 있었다. 그는
피를 신발바닥으로 닦았다.

주장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놈이 우리침실까지 잠입했으니 우리의 종적도 탄로날 모양이
야. 이젠 여기서 지체할 수가 없네."

일행은 주장령을 선두로 석동에서 나와 약 이십 리 길을 걸었
다. 산을 넘고 계곡을 끼고 돌아가자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밑에
작은 오두막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왔다. 주
장령은 서슴치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도 따라 들어갔
다. 집 안에는 낫이며, 괭이 같은 농기구가 있었고 취사 도구와
양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주장령이 근처에 피난할 곳
을 많이 안배해 둔 것 같았다. 주장령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침
대에 눕히자 일어나지를 못했다. 주부인은 광목으로 된 장삼, 짚
신, 머리띠 등을 꺼내 그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갈아입게 했다.

잠시 후, 그들은 부잣집의 부인과 아씨에서 농촌 부녀자로 변했
다. 말씨나 행동은 다소 어색했으나 그래도 가까이 접근하지 않
으면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며칠이 지나갔다. 주장령은 다행히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운남상
약(雲南傷藥)이 있어 그걸 복용하고 나선 상처가 빨리 치유되어
갔다.

장무기가 한가로이 그들을 지켜보니, 요청천은 매일 소식을 정
탐하러 나가고 주부인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행낭을 챙기고 있었
다. 멀리 떠날 채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주장령이 일단 원수
를 피해 빙화도로 가려는 계획이리라. 장무기는 내심 무척 기뻤
다.

이날 장무기는 침대에 누워, 만약 자기가 다행히 죽지 않고 빙
화도에 도착하여 평생 이 선녀와 같이 아름다운 주구진과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또 주 아저씨, 그리고 요이숙이
의부와 만나 서로 좋은 친구가 된다면, 몽고놈들의 잔악한 압박
도 받지 않고 무림의 원수들이 기습해 올 걱정도 없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장무기는 자기가 몸에 한독을 입어 얼마 살
지 못하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달콤한 생각을 하며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살며시 나무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곧 그림
자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장무기는 순간 은은한 향기를 맡
고 있었다. 바로 그 향기는 주구진이 평상시 자주 옷에 뿌리는
소경화향(素경花香)이었다. 장무기는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가 되
며 얼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구진은 조용히 침대 가까이 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기 동생, 잠들었어?"

장무기는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잠이 든 척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부드럽고 향기로운 손이 그의 얼굴 위에 살
포시 날아와 앉았다. 장무기는 놀랍고 기쁘고 부끄럽고 겁이 나
는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면서 오직 그녀가 빨리 이 방에서 나가
주기만 바랐다. 그의 마음 속은 주구진을 존경할 뿐 장래에 그녀
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야
밤에 왔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진 누나가 무슨 급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게 아닐까?'

바로 이때, 갑자기 흉구에 있는 담중혈(膽中穴)이 마비되면서
연이어 견정(肩貞), 신장(神臟), 곡지(曲池), 환조(環조) 등 혈
도가 차례로 찍히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주구진이 왜 심야에 찾아와 자기의 혈
도를 찍은 것일까? 장무기는 후회가 되었다.

'진 누나는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경각심이 있는지 시험하는 것
이 틀림없다. 내일 그녀가 혈도를 풀어 주면서 나를 비웃을 것이
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서 일어
나 그녀를 놀라게 해줬을 텐데.....'

이때 주구진은 살며시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려서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재빨리 생각했다.

'빨리 혈도를 풀어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놀라게 해야겠다.'

그는 즉시 사손에게 배운 혈도 푸는 법을 썼다. 주가의 가전인
<일양지>무공은 과연 대단했다. 그는 반 시간이 넘어서야 찍힌
혈도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주구진의 공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혈해법(穴解法)이 제아무리 교묘해
도 혈도를 풀지 못할 것이다. 재빨리 옷을 입고 창 밖으로 날아
가 보니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어디에도 주구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맥이 탁 풀렸다.

'진 누나는 아제 나를 쓸모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기야 구태여
그녀를 이기려 할 필요는 없겠지. 평상시 내가 그녀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내가 그녀를 따라간다 해도 그녀는화를 냈
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 문득 초봄의 밤바람에
실려 풍겨오는 들꽃 향기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는 금
방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 작은 시냇물을 따라 걸어갔다. 산비
탈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히끗히끗 보였고 눈 녹은 물이 시냇물
을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
자기 좌측 숲 속에서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주구
진의 웃음소리였다.

장무기는 흠칫 멈춰섰다.

"진 누나가 나를 본 것일까?"

이때 그녀가 낮은 소리로 호통을 쳤다.

"사촌오빠! 허튼 짓하며 따귀를 때릴 거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바로 위벽이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덜컥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려 버릴 뻔했
다. 반나절이나 꾼 아름다운 꿈들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진 누나는 나의 혈도를 찍은 것은 바로 심야에 사촌오빠와 만
나는 걸 내가 알까 봐 한 짓이구나!'

하고 생각하자 갑자기 손이 저려오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집도 절도 없는 가난뱅이고 학문이나 무공이나 인품, 용
모, 어느 한가지도 위상공을 따를 수 없다. 더구나 그녀와 그는
사촌지간이나 두 사람은 너무도 잘 맞는 한 쌍이야.'

장무기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때 경
미한 발자국소리가 났다. 장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앞을 내다
보았다. 그러나 주구진과 위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정하게 소
근거리며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왔다. 다음 순간
주구진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어떻게.....!"

나타난 사람은 바로 주장령이었다.

주장령은 딸이 야밤에 외조카와 밀회하는 걸 보자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주장령의 꾸중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주구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사실 사촌오빠와 오랫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어
렵게 만났기에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이예요."

"너는 그래도 할 말이 있는 게로구나. 만약 무기가 알게되
면....."

주구진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살짝 그의 혈도를 다섯 곳이나 찍어 버려서 지금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이따가 가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면 아
무 일도 없을 거예요.'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주 백부께서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줄 눈치채셨구나. 나의
아버님에게 은헤를 입은 것 때문에 내가 상심하고 실망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백부님, 비록 진 누나를 좋아하고는 있지만 절
대로 다른 마음은 먹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날 따뜻하
게 대해 주시는군요.'

이때 주장령의 말소리가 들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조
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모든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주구진은 웃으며 말했다.

"소녀 명심하겠습니다."

"외숙부님, 진매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부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주장령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도 가서 너의 사부님을 만나야겠다. 이번에 우리
가 북해의 빙화도에 가는 일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한치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말을 하면서 세 사람은 일제히 서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장무기는 몹시 이상하다고 느꼈다. 위벽의 사부는 무열이고 무
청영이 아버지인데, 주장령의 말투를 보면 주가 부녀와 위벽 모
두 빙화도에 갈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전에 나에게 말해 주
지 않았을까?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많아지면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의부에게 화를 끼칠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갑자기 주장령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모든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무슨 빈틈이 있단 말인가?

<빈틈>이란 두 글자가 그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러자 갑자기 모
든 것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바로 <장취산은덕도>란 그림에는 다
른 사람들은 용모가 비슷한데, 그의 부친만은 턱이 뾰죽한 얼굴
이 넓적하게 그려졌었다. 다만 부친의 미간은 비슷했다. 그래 그
것은 자신의 미간이 아버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간만
아버지를 닮았을 뿐 다른 곳은 닮지 않은 것이다.

주장령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십여 년 전에 그가 친필로 그
렸다고 했다. 설사 그의 그림 솜씨가 좋지 못하다 해도 어찌 대
은공의 얼굴을 전혀 닮지 않게 그릴 수가 있겠는가! 그림에 있는
장취산은 장무기가 성장한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또 한가지 있었다. 아버님이 사용했던 철필은 붓과 같이 뾰족했
다. 그날 대륙에 돌아왔을 때 벙기포에서 판관필 한 자루를 사시
면서, 무게와길이는 쓸 만한데 단지 철수 같은 것이 한 짝이어
서 보기에 흉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이 생활이 안정되면
다시 주조(鑄造)해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림에 있는 아버님
은 보통 판관필을 갖고 계셨고, 쇠를 주조하는 사람 손에는 철필
을 한 자루 쥐고 있었다. 주장령 자신은 판관필을 사용하는 전문
가인데, 어찌 아버님께서 사용했던 판관필마저도 틀리게 그릴 수
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
해 왔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의문과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답은 너무나 가공스러운 것이라 깊이 생각하기조차 두려웠
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 지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주 백부님이 날
그렇게 잘 대해 주시는데 오히려 의심을 하다니, 천벌을 받을 짓
이지..... 어서 가서 잠을 청해야겠다. 내가 한밤중에 나온 것을
알면 그 땐 정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겁이 덜컥 났다. 예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그 자신도 왜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절로 주장령 부녀
가 갔던 방향으로 걸음이 옮겨갔다. 숲 속에 희미한 달빛이 새어
나왔다. 외딴 집이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죄진
사람처럼 살금살금 그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
리나지 않게 집 뒤로 돌아간 그는 창문틈으로 집 안을 엿보았다.
그곳에는 주장령 부녀와 위벽이 창 쪽을 마주 본 채 앉아 있었
고,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둘인데 얼굴을 확인할 수 없
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 중 한 소녀가 설령쌍매 중의 하나인
무청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우람한 남자
였다. 주장령은 어떻게 객상으로 위장해 산동 일대에서 출해할
것인가에 대해 소상히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옆에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장무기는 공연히 자책감을 느꼈다.

'하늘이 무너질까 봐 밤잠을 설친다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군.
저 무청영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열일 것이다. 주
백부는 그와 친분이 두터우니 함께 빙화도에 가지고 청한 건 인
지상정이거늘 내가 공연히 의심을 하다니.....'

이때 무청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 우리가 망망대해에서 그 작은 섬을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올 길마저 잃으면 어떻게 하죠?"

장무기의 생각이 맞았다.

이번에는 무열이 입을 열었다.

"두려운 생각을 갖고 있다면 넌 가지 않아도 된다. 세상 이치가
모두 마찬가지이듯이 고난을 겪지 않고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무청영은 응석을 부리듯 쏘아붙였다.

"저는 그저 여쭤본 것뿐인데 당장 훈계를 할 게 뭐예요?"

무열은 껄껄 웃었다.

"이번 일은 주사위놀음과 다를 바 없다. 운이 좋으면 우린 빙화
도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다.사손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해
도, 외톨이인데다가 눈먼 봉사이니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이다....."

여기까지 들은 장무기는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오싹 몸을 움츠렸다.

무열의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그 도룡도만 우리 손에 들어오면 호령천하를 하게 될 게 아니
겠느냐? 다시 말해 나하고 너의 주 백부님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림지존으로 군림하게 된단 말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는 설령 바다에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해야지."

위벽이 그의 말을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금모사왕은 무공이 탁월하여 왕반산도에서 사
자후로 수십명의 강호 고수들을 일제히 죽였다고 합니다. 제자의
의견으로선 일단 빙화도를 찾아 내면 그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음
식물에다 독을 풀어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가 앞 못
보는 장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양아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자기
를 해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

무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진아야....."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순간, 장무기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며 자지러지게 놀랐다. 이 자는 바로
의부로 위장했던 개비수 호표였다. 주장령에게 중상을 입히고 요
청천에 의해 단칼에 죽음을 당한 것 등등은 모두 속임수였다. 모
든 것이 연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열이 주구진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도 우린 철저하게 해야 한다. 사손을 없애고 도룡보도를
수중에 넣을 때까지 마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구진이 말했다.

"아버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그 녀석을 시중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빙화도에 가
서 사손을 죽일 때까지는 참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무슨 죄를 졌
나 봐. 아무튼 도룡도를 얻은 뒤엔 내가 직접 그 녀석을 죽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듣자 눈앞이 캄캄해지며 기절할 것만 같
았다. 주장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교묘한 계략으로 그를 속여 금모사왕의 소재를 알아내
는 건 사실 옳은 일이 아니다. 그 녀석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사손을 죽이고 도룡도를 얻은 뒤엔 그의 눈을 멀게 하여 빙화도
에 남겨두는 게 좋겠다."

무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주 형님의 어진 마음은 과연 협의도의 풍도를 잃지 않고 있군
요."

주장령이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네, 아우, 우리가 먼저 바다에 나가
면 자네들 배는 멀리서 우리를 따르되 너무 가까이 오면 안 되
네. 꼬마의 의심을 사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러나 너무 멀리 있
다가는 연락이 두절될 염려도 있지. 사공들을 잘 물색하게."

"알았습니다. 형님은 역시 주도면밀하십니다."

장무기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내가 스스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저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음..... 내가 위벽과 두 여자에게 저항할 때 무당파 무공을 전개
했는데 그 때 견식이 넓은 주장령이 나의 내력을 알아냈구나. 그
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결을 하면서까지 의부의 소재를 말하지
않은 걸 알고 억지로 내 입을 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게 틀림
없어. 그래서 가짜 그림을 그리고 저택을 불사르며 나를 감동케
한 수, 내가 스스로 빙화도에 가고 싶다고 말하게끔 유도한 거
야. 저자의 간계는 정말 너무 악랄하구나.'

이때 주장령과 무열은 출해할 준비와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더 이상 들을 것 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는 주장령
과 무열의 무공이 강해 자칫 실수하여 낙엽이라도 밟게 되면 들
킬 게 뻔하므로 조심하는 것이다. 삼십여 걸음을 조심스럽게 걷
자 십여 장쯤 벗어났다. 무기는 그제야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는 길로 가지 않고 숲 속으로 달려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숨
을 헐떡이며 계속 뛰었다. 밤새 달렸는지 하늘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는 눈 덮인 숲 속에 있었다. 그는
주장령 등이 쫓아오지 않나 산 밑을 내려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때는 이미 봄철이었으나 산중턱에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도망하느라 산 위로 오르기만 했지 자
기의 발자국이 눈 위에 남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멀리서 이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절하고 무서운 울음
소리였다. 무기는 벼랑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앞산 언
덕에 여러 마리의 잿빛 이리가 머리를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
다. 굶주려 있는 모양이었으나 산과 산 사이에 엄청나게 깊은 협
곡이 가로질러 있어서 이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래 산언덕에 다섯 개의 검은 점
이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주장령 일행임이 분명했
다.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렇게 빨리 달려온다면 한 시진
도 갈리지 않아 추격해 올게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았다.

'이리들의 밥이 될망정 저들의 수중에 잡혀서는 안 된다.'

사모했던 주구진이 아름다운 얼굴 속에 사갈 같은 마음을 지닌
걸 생각하니, 한때나마 그녀를 연모했던 자기가 한없이 부끄럽기
도 하고 상심이 되어 무턱대고 밀림 속으로 달려갔다. 밀림에는
길풀들이 허리까지 나 있어서 눈이 쌓였다 해도 발자국을 찾기
가 쉽지 않았다. 그는 지친데다가 체내의 음독이 발작해 두 다리
를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풀이 무성한 곳에 기어들어가 날
카로운 돌맹이 하나를 왼손에 쥐었다. 주장령이 자기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면 스스로 돌로 태양혈을 치고 죽을 심산이었다.

그는 이 두 달 동안 주가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마음이
서글펐다.

'공동파, 화산파, 곤륜파 사람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별 신
경을 쓰지 않았는데, 진 낭자마저 인면수심일 줄은 정말 몰랐다.
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게 해주신 말을 왜 잊고 있었단 말
인가?'

모친이 죽을 때 그에게 들려 준 몇 마디가 새삼스레 또렷이 그
의 귓전을 때렸다.

----- 얘야, 이 다음에 여인을 조심해라. 여자는 예쁘면 예쁠수
록 잘 속인단다. -----

그는 눈물이 괴어 눈 앞이 흐릿해졌다.

'이 말을 할 때 어머니는 비수가 가슴에 꽂혀 그렇게 아픈 중에
도 고통을 참으며 내게 신신당부하신 것이다. 이 피어린 어머니
의 말씀을 어찌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지 않았단 말인가! 혈도를
푸는 법을 몰랐다면 주장령의 음모를 지금까지도 모른 채 결국
그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빠져 그들을 데리고 빙화도에 가서 의부
의 생명을 해쳤을 거야.'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정하자 금방 머리가 맑아졌다. 주장
령 부녀의 음모는 처음부터 너무나 완벽했다. 주장령은 자기가
장취산의 아들이라는 걸 알자 개들을 죽이고 딸을 때리면서까지
자기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그 넓은 저택을 불사르는 게 아깝긴
했지만 무림지존인 도룡보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주
장령이 일을 처리하는 신속함과 과단성을 실로 놀랍고 무서웠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섬에 있을 때, 의부께서는 칼을 안은 채 매일 멍하니 앉아 있
곤 했다. 그런데도 십 년이 지나도록 그 도룡도의 비밀을 알아내
지 못했다. 의부는 비록 총명하긴 하지만 주장령의 간교한 기지
와 계략을 따르지 못한다. 의부께서는 도룡도의 비밀을 생각해
내지 못했지만, 그 보도가 주장령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쯤이면
거의 생각해 낼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온갖 상념에 빠져들고 있는데 발걸음소
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주장령과 무열 두 사람이 먼저 수풀 사
이로 들어온 것이다.

무열이 말했다.

"그 꼬마가 이 숲에 숨어 있을 겁니다. 더는 도망....."

주장령이 그의 말을 막으며 이야기했다.

"진아가 아마 그에게 뭔가 잘못을 한 모양이야. 걱정이 되는구
먼. 어린 나이에 이 눈 덮인 산에서 자칫 변이라도 당하면 은인
께 면목이 없네."

그의 말은 무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뭇 가지로 덤불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무기
는 몸을 웅크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수풀은 굉장히 넓
어 일일이 다 헤치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위벽과
주구진, 무청영도 도착했다. 다섯 사람은 수풍을 거의 반나절이
나 뒤졌으나 장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펑퍼짐한
바윗돌 위에 앉아 쉬었다. 그들이 있는 곳과 무기가 숨어 있는
곳은 겨우 삼 장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풀이 무성했으므
로 그의 몸이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장령이 잠시 생각하다가 돌연 큰 소리로 물었다.

"진아야, 넌 도대체 무기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가 말 한
마디 없이 한밤중에 떠나가게 만들었느냐?"

주구진이 놀라 쳐다보자 주장령은 얼른 그녀를 향해 눈짓을해
보였다. 장무기는 풀숲에 숨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구진은 금방 눈치를 채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장난삼아 그의 혈도를 찍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진짜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이어 소리쳐 불렀다.

"무기! 무기! 어디에 있지? 내가 잘못했어!"

목소리에 교태가 어려 유혹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아무
리 불러도 무기가 나타나지 않자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

"아이구..... 아버님! 제발 저를 때리지 마세요. 전 나쁜 뜻으
로 무기 동생에게 장난을 친 건 아니예요."

주장령은 손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치며 입으로 호통
을 쳤다. 주구진은 연신 비명소리를 지르며 정말로 부친에게 맞
는 것처럼 흉내냈다. 무열, 위벽, 무청영은 옆에서 지켜보며 배
시시 웃고 있었다.

무기는 두 부녀가 하는 연극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의 비명소
리를 듣고 뛰쳐나갔을 거야.'

주씨 부녀는 무기가 필시 이 숲 속에 숨어 있으리라 믿고 하나
는 호통을 치고 하나는 애걸을 하며 가증스럽게 능청을 부렸다.
장무기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으나 그 소리는 여전히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거냐? 그렇게 한다고 내가 속을 것 같으냐?"

그들 일행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여기에 있었군!"

장무기가 소리쳐 말했다.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그는 수풀을 뚫고 미친듯이 달렸다. 주장령과 무열이 몸을 날려
그를 추격했다. 장무기는 죽기로 작정했으므로 주저하지 않고 만
길 협곡을 향해 달려갔다. 주장령의 경공은 그보다 훨씬 빨랐으
므로 그가 협곡에 닿기도 전에 거의 쫓아왔다. 그는 손을 뻗어
장무기의 등을 나꿔잡았다. 장무기가 멈칫하는 순간 주장령은 오
른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무기의 한쪽 발은 이미 허공을
내딛고 있었다. 나머지 한쪽발마저 앞으로 내딛는 순간 그의 몸
이 돌덩어리처럼 앞으로 기울어졌다.

주장령은 그가 정말로 계곡으로 뛰어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기를 잡고 있던 그도 덩달아 앞으로 같이 기울었다. 그는 질겁
을 했다. 만약 그가 즉시 손을 놓고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면 위
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놓으면 무림지
존인 도룡보도는 영원히 그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두 달 동안
고심해서 세운 계획과 초토가 된 대저택이 그가 손을 놓음으로
해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떨어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가파른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아래는
만장이나 되는 심연이었다. 무열과 주구진 등이 놀라 외치는 소
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도 곧 들리지 않았다. 둘
은 계곡에 꽉 들어찬 구름과 안개를 뚫고 곧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여지껏 갈아 오면서 숱한 풍랑을 겪은 주장령은 위기에 처해도
여간해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칼날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벼랑가에 나뭇 가지가 군데군데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뭇 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러나 몇 자 차이로 잡을 수가 없었다. 몸이 계속 떨어져 내리며
가까스로 마지막 가지 하나를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떨어지
는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뭇 가지가 버티지 못하고 뿌지직
부러지고 말았다. 그 덕분에 떨어지는 속도가 원만해졌고, 주장
령은 이 틈을 타 두발을 앞으로 차서 절벽에 바싹 기대며 오룡
교주(烏龍絞柱) 초식으로 그 소나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는
무기를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장무기가 죽으려고 뛰어내릴까 봐
팔을 놓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자 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흥!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난 당신을 데리고 의부를 찾으러 가
진 않을 것이오. 그러니 그런 끔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주장령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사람의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각을 하니
주장령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읏으며 말했다.

"장형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겠
네.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게."

무기가 대꾸했다.

"난 이미 당신의 속셈을 알아냈으니 이젠 소용이 없어요! 강제
로 나를 빙화도로 데려간다 해도 내가 동서남북 아무 방향이나
엉터리로 가리키면 모두 바다에서 죽고 말 거요!"

주장령은 그 말을 듣고 보니 사실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은 그와 싸울 때가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리
고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계곡이니 아래로 내려
가는 길도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절벽을 따라 천천히 기어오르
는 것이었다.

주장령이 무기를 향해 말했다.

"이봐, 쓸데없이 의심을 하지 마라. 난 너를 괴롭혀서 사대협을
찾을 생각은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수 만개의 화살
에 맞아 묻힐 곳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가 이처럼 굳게 맹세하는 것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무기
가 자결하려고 계곡으로 뛰어든 것을 보고 아무리 그를 괴롭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감
동시켜 스스로 가자고 하기 전에는 안 될 일이었다. 무기는 그가
맹세하는 걸 보자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주장령이 말했다.

"우리 여기서 천천히 기어 올라가자. 절대 뛰어내리면 안 된다.
알았냐?"

"당신이 괴롭히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필요가 있겠소?"

주장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를 꺼내 나무껍질을 잘라 그 껍
질을 가는 줄로 엮어 만들어 자기와 무기의 허리를 연결해서 동
여맸다.

두 사람은 눈 덮인 절벽을 비스듬히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과 발로 바위 틈을 짚으며 계속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절벽은
상당히 가파른데다 얼음이 얼어 있어 미끄러웠다. 장무기는 두
번이나 미끄러졌으나 주장령이 잡아 주어 아래로 떨어지는 걸 면
했다.

반나절을 기어 올라가자, 손과 발꿈치, 무릎 등이 날카로운 얼
음 모서리에 찢겨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험한 절벽을 한 걸음
한 걸음 온 힘을 다해 기어갔다. 병풍처럼 생긴 큰 산맥을 돌아
가자 주장령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나
높고 깊은 절벽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엔 구름바다가 망망하
게 펼쳐져 있었고 더는 갈 길이 없었다. 그들은 절벽에 삐쭉 튀
어나온 평평한 곳에 겨우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둥그스름한 평지
는 공중에 떠 있는 듯 걸려 있어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도, 아
래로 내려 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죽는 길밖에 없는 셈이었다.
하얀 눈뿐 나무는 물론 짐승 한 마리도 없었다.

장무기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젠 당신도 끝장났어요. 이렇게 되었으니 도룡보도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주장령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뭉쳐 삼키고는 한동안 우기조식을
하며생각했다.

'지금은 피곤하기는 해도 아직 힘이 남아 있지만, 만약 하루를
더 굶었다간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어렵겠다.'

그는 일어나며 무기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더 갈 길이 없으니 우리 되돌아가서 출로를 찾아 보
자."

무기가 대답했다.

"나는 여기가 좋은데, 무엇 때문에 돌아가겠소?"

주장령이 노해서 소리쳤다.

"여기는 먹을 것이 전혀 없는데 멍청히 앉아서 뭘 하겠단 말이
냐?"

무기는 피식 웃었다.

"사람으로 구차하게 살 생각 마시고, 차라리 신선의 길을 수련
하시는 게 어떻겠소?"

주장령은 크게 화가 났으나 함부로 대했다간 또 몸을 날려 죽으
려 할까 봐 참았다.

"그럼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내가 출로를 찾은 뒤에 너를
데리러 오겠다."

"나의 생사존망에 어찌 그리 괘념하시오? 당신은 아직도 나를
데리고 빙화도에 갈 꿈을 꾸고 계시는 모양인데, 제발 그런 생각
은 하지 마세요."

주장령은 대답하지 않고 온 길로 되돌아갔다. 그는 아까의 큰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왼쪽으로 갈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
다. 이 산벽은 지세가 험했으나 혼자서는 꽤 빨리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는 기고 걸으면서 반 시진을 더듬었으나 절벽에서 벗
어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장령은 벼랑에 기대어 한탄하다
가 돌아왔다.

장무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색을 살폈다. 길을 못 찾았다
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몸의 음독은 제거할 수가 없다. 이제 곧 수명이 다할 것이
다. 어디서 죽은들 나야 마찬가지지. 그런데 저 사람은 있는 복
을 누리지 않고 무림지존이 된다는 망상 때문에 이 얼음 천지 속
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니 불쌍하구나.....'

주장령의 계략을 알았을 때는 몹시 증오했으나, 절벽에서 떨어
진 뒤 계속 말로 비고고 나니 사기가 꺾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
는 그를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따뜻하게 위
로했다.

"당신은 살 만큼 살았고 모든 영화와 쾌락한 생활을 누리셨으
니, 지금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장령이 무기를 구해 준 것은 그를 끝까지 속여 감동시켜서 빙
화도로 함께 가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 길이 없
고 이런 지경을 당한 것도 모두 장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원
망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는 분노와 함께 눈을 부릅뜨고 무기
를 노려보았다. 무기는 그 동안 자상하고 온후했던 사나이가 갑
자기 야수처럼 변하는 걸 보자 뒷걸음질을 했다.

"도망갈 길이 있을 것 같으냐?"

그는 팔을 뻗어 무기를 잡으려 했다. 그에게 온갖 고통을 준 뒤
서서히 죽일 작정이었다. 드디어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장무기는 미끄러지며 뒤로 스러졌다. 순간 왼쪽 산벽에 컴컴한
동굴이 보였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
갔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바지 가랑이가 찢겨 나갔다. 주장령
이 잡아당긴 것이다. 무기는 계속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돌연 쿵하며 머리가 돌과 부딪쳤다.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 했다.

그는 주장령이 자기를 해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허겁
지겁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캄캄한 동굴로 들어가면 위
험에 빠질지 상대의 손아귀에 잡히게 될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
다. 주장령이 계속 뒤쫓아왔다. 다행히 그 구멍은 갈수록 좁아져
십여 장을 기어 들어가자 덩치가 큰 주장령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장무기가 몇 장을 더 기어가 방향을 꺾자 밝은 빛이 보
였다. 그는 너무나 기뻐 빨리 기어갔다.

뒤에서 주장령이 외쳤다.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이리 나와라!"

주장령은 내력을 운용하여 동굴 석벽에다 일장을 쳤다. 그러나
석벽이 견고하기 이를데 없어 그의 손바닥만 은은히 저려올 뿐이
었다.

그는 단도를 꺼내 구멍을 파내려고 했다. 몇 번 파자 쨍그렁 하
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부러졌다. 주장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
구쳐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한 자 정도 나아갔다. 그러나 그 이
상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단단한 석벽이 그의 몸뚱이를 꽉 조인
것이다. 그는 질식할 것 같아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앞으
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가없었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젖먹던 힘까
지 짜내 두 팔로 돌을 밀었다. 비로소 몸이 겨우 한 자 정도 뒤
로 물러났다. 가슴에 극렬한 통증을 느끼는 사이에 늑골 하나가
부러졌다.


----- 제 3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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