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7-4

3학년2반 | 2022.03.07 07:28:32 댓글: 0 조회: 60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360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4 장 어둠 속의 열기(熱氣)


일단 한 가지 큰 일이 마무리된 셈이다. 사손은 삼십 년이란 긴
방황 끝에 귀처(歸處)를 찾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증오와 불타는 복수심이 사라졌다. 그는 증오
와 복수심이 얼마나 무서운 자아학대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
증오를 포용할 수 있는 게 관용의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통감
한 것이다.

어쨌든 이제 그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장무기는 그의 앞날에 편안함과 광명이 함께 하길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장무기의 마음 속에는 사실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
다. 그의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손이거늘, 사
손이 총총히 떠나는 바람에 미처 그 의문을 물을 새가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어렴풋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이 필경 주지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한때 주지약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
다. 주지약도 자기에게 은혜를 여러 번 베푼 게 사실이다. 장무
기는 그녀와의 옛정을 생각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을 덮어
두기로 했다.

일단 의문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 아무래도 주지약의 명예에 손
상이 갈 것 같은 불안감이 잠재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무기는 의문을 밝히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밝혀서는 안될 것
같은 상반된 모순에 빠져 버렸다.

소림사의 식사는 매우 담백했다. 육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
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무기는 사홍석을 비롯한 개방 장로들
과 서쪽 객청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개방의 앞날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장무기는 힘닿는데까지 개방을 돕고 싶었다. 그것은 황삼 여인
의 부탁이기도 했다.

그들이 한창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명교의 제자 한 사
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교주님, 무당파의 장사협께서 뵙자고 합니다. 아마 긴히 상의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무기는 웬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태사부님께서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그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내두르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장송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무기
는 먼저 장송계의 표정을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
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장무기는 장송계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태사부님께선 편안하시죠?"

장송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르신네께선 편안하시다. 무당산에서 한 가지 중대한 사실
을 접하게 되어 이렇게 밤을 세워가며 달려온 것이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원병(元兵) 이만 명이 소림사를 향해 진발해 오고 있다. 그들
은 이번 영웅대회를 기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려는 게 분명하다."

장무기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속히 소림 장문인께 알려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후원으로 가서 공문에게 알렸다. 공문은 잠시 심
각하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만 명이라면 엄청난 병역이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 중
원 무림의 원기를 꺽으려는 것 같소. 모든 무림인의 안위에 관계
되니 만큼 군웅들과 상의하여 대책을 결정짓는 게 좋을 것 같
소."

장무기와 장송계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소림사의
경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고, 얼마 안 되어 군웅들이 대웅보전에
운집했다.

군호들은 공문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자 모두 놀라는 한편 제
각기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대웅보전 안은 곧 술렁거렸다. 그들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두 가
지로 나뉘어졌다.

혈기가 왕성한 군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천하 영웅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맞이
하여 미리 선제공격을 취해 한바탕 통쾌하게 해치웁시다."

비교적 생각이 온건한 사람들은 의견이 달랐다.

"원병이 이동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번에 우리를 겨냥
해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오. 그러니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
들 필요가 있겠소?"

그러자 장송계가 나섰다.

"나는 몽고어를 알아듣는데, 그들 군관이 소림사를 겨냥해 진군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몽고가 중원을 점령한 지 백 년이 넘은 때라 한인 중에 몽고어
를 알아듣는 자가 적지 않았다. 장송계는 본디 영특하여 각 지방
의 방언에 능통할 뿐 아니라 몽고어도 유창했다.

공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 보아하니 우리가 이곳에서 회합을 갖는 것을 안 조
정이 필시 조정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 판단해 많은 병력을 동원
해서 탄압하려는 것 같소. 우린 무림인으로서 무공을 지니고 있
어 오랑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정면대결을 벌일 수도 있
을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옳소>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공문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 강호의 호걸들은 줄곧 일 대 일의 싸움
을 해 왔으며, 그 숫자가 많은 경우라도 몇 십명에 불과했소. 이
번처럼 수천, 수만 명이 떼지어 대교전(大交戰)을 벌이는 것은
전혀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소. 모
름지기 이러한 대교전은 무공보다 병법(兵法)에 능통해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텐데, 빈승으로선 심히 우려가 되는 바이
오. 그러니 차라리 그들을 피해 여러분들이 본사를 떠나심이 어
떨지....."

군호들은 서로 마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장무기가 나섰다.

"우리가 이대로 떠나가면 오랑캐들이 두려워 도망친 결과가 될
것이니, 오히려 그들의 기세만 높여 줄 것입니다. 게다가 소림사
의 승려분들만 그들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하게 될지도 모르잖습
니까?"

공문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병이 이곳에 당도해 강호 영걸들이 모두 떠난 것을 보면 도
에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군호들은 공문의 호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번 영웅대회를
개최한 것이 바로 소림이므로, 공문은 소림으로 인해 군호들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군호들은 모두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이대로 떠나려 하
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대규모의 군사들을 출동시켰는데 헛탕
을 치고 돌아갈 리도 만무했다. 필시 소림만이라도 살겁의 대상
으로 삼을 것이다. 소림 승려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생포될 것이
고, 소림 고찰마저 잿더미로 변할 게 분명한 것이다.

몽고 병사들은 워낙 잔악하여 살인방화를 예사로 여기고 있었
다.

양소가 앙연히 나섰다.

"오랑캐들은 여지껏 숱한 잔악 행위를 저질러 왔으니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대항해 싸울 책임이 있
소. 본인의 생각으로는 소림의 천 년 고찰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오랑캐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생사결단을 내는 게 좋을 것 같
소."

군호들은 분분히 그의 의견에 찬동했다.

"옳소!"

군호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있는 사이에 사문 밖에서 급박한 말
발굽소리가 들려오더니 두 필의 준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어 지객승의 안내하에 두 사람이 대전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나타난 두 사람의 복
장으로 보아 명교의 교도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장무기 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
서 그 중 한 사람이 아뢰었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오랑캐 병사 오천 명이 선발대로 소림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소림 승려들이 반역을 계획하고 있
다면서 이번 기회에 소림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중....."

공문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중놈이라고 말하려는 모양인데, 개의치 않을 것이니 어서 말해
보게."

사나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중은 물론이거니와 무기를 휴대한 무림인
이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인다고 했습니다. 벌써 여러 명의
화상이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명교 교도의 보고를 들은 군호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랑캐놈들과 생사결단을 냅시다. 그 동안 짓밟혀온 원한
을 이번 기회에 갚읍시다!"

몽고가 중원 땅을 거머쥐고 송나라가 패망한 지 백 년이 되었지
만 무림에서 활약하는 군호들은 계속 몽고 관병들과 적대시해 왔
다. 지금 몽고 병졸들이 대거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자 한결같이
피가 끓어올라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장무기는 그 걷잡을 수 없는 혈기를 막을 수 없어 낭랑한 음성
으로 외쳤다.

"여러분들, 오늘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번 소림사 영웅대회가 천추에 빛
나도록 모두 힘을 합쳐 싸웁시다!"

대전 곳곳에서 곧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군호들의 기세
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 공문방장께서 명령만 내려 주시면
우리 명교의 모든 형제들도 그 명령에 따를 겁니다."

공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장교주,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오. 본사의 승려들은 다소간
의 무공을 배웠지만 큰 규모의 전투에 임하는 병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근래에 와서 명교가 천하 방방곡곡에
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을 모르는 자가 없소. 오직 명교만이
오랑캐를 맞이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장
교주께서 명령을 내려 주시오. 우리 모두 장교주의 명에 따라 오
랑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장무기가 사양을 하려는데 이미 곳곳에서 찬성하는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장무기는 비록 나이가 젊지만 혼자서 소림 삼승과 겨룬 것을 모
두 보았으므로 그의 무학이 천하 제일이라는데 대해 의심할 자가
없었다. 게다가 명교 산하에 있는 한산동, 서수휘, 주원장 등이
도처에서 원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도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
다.

앞서 오행기가 광장에서 보인 솜씨만 하더라도 군호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각 문파의 고수들이 모여 있지만 군호들은 명교 교주
를 제외하고 이번 싸움을 이끌 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
다. 하지만 당사자인 장무기는 군호들의 뜻을 선뜻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용병술은 별도의 학문으로서 본인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
다. 그러니 다른 적절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사양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오더니 소림 승려 두 명이 대전 안으로 달려 들어와 보
고했다.

"방장께 아뢰옵니다. 몽고병이 산 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예금, 홍수 양기(兩旗)가 선발대로 그들을 맞이하시오. 그리고
주전 선생과 철관 도장께서 각기 일기(一旗)를 돕도록 하십시
오."

주전과 철관도인은 곧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라 장무기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설불득 대사께선 나의 성화령을 갖고 가까이 있는 본교의 형제
들을 소집해 속히 소림으로 모이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설불득은 명을 받들고 떠나갔다.

대전 안에 모여 있던 군호들은 원병의 고함소리가 갈수록 고조
되자 제각기 무기를 뽑아 쥐고는 벌떼처럼 몰려나갔다.

그러자 양소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확실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중지란이 일어
나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산중턱에
이르러 전세를 살펴보았다.

몽고병의 선봉대는 예금기와 맞닥뜨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
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몽고병은 무리를 지어 일사불란하
게 움직였다. 역시 징기스칸의 후예들답게 막강한 군사들이었다.

이때였다. 홀연 우측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
다. 장무기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많은 여승과 남녀
가 몽고병에 쫓겨 산 위로 도망쳐오고 있었다. 바로 앞서 떠났던
아미파 일행이었다. 아마 도중에서 몽고 관병들의 공격을 받아
다시 쫓겨온 모양이었다.

아미파 제자들 중에 십여 명의 사나이가 들것에 부상자들을 실
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몽고병들이 그들 주위를 빙 둘러싸
고 공격을 퍼부었다.

주지약은 정현, 정소를 이끌고 거듭 공격을 전개했으나 수십 명
의 몽고병졸만 죽였을 뿐 동문을 포위망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무기는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
었다.

'아뿔싸! 저 들것에 송사형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곧 소리 높여 외쳤다.

"홍수, 열화 양기는 엄호를 해라! 좌우이사(左右二使)와 위형
(韋兄)은 나와 함께 사람을 구하려 갑시다!"

그는 앞장서 몸을 날렸다.

두 명의 몽고병이 즉시 긴 창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
다.

장무기는 날렵한 동작으로 긴 창을 좌우 양손에 나꿔잡고 살짝
떨치자 두 명의 몽고병은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산 아래로 날아갔
다.

"으악!"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허공에 길게 울려퍼졌다.

장무기는 창 끝을 돌려 한 마리의 신룡(神龍)처럼 원병 틈을 뚫
고 들어갔다. 양소, 범요, 위일소, 팽화상 등도 그의 뒤를 따랐
다. 그들이 스쳐가는 곳에 원병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아미파 제자들에게 접근해갔다.

범요가 주먹을 격출해 원병의 포위망을 뚫고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나꿔채더니 즉시 몸을 돌려 후퇴했다. 그 순간 장무기
는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살펴보았으나 몸집이 뚱뚱한 것이
송청서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한편 주지약은 온몸에 피가 묻은 채 좌충우돌 계속 몽고병에게
닥치는 대로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지약! 송사형은 어디에 있소?"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채찍을 떨치며 계속 공
격을 전개할 뿐이었다. 그녀가 위치해 있는 좁은 산길에 많은 원
병이 몰려 있어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었다.

장무기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미파의 제자 두 명이
제각기 한 손으로 들것을 들고 원병에게 포위된 채 사투를 벌이
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보아하니 송사형은 저 들것에 있는 모양이군."

그는 즉시 창 끝으로 땅을 찍으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순간,

"으악!"

"악!"

들것을 들고 있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거의 동시에 화살을 맞아
비명과 함께 쓰러져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내렸다.

장무기는 허공에서 창을 던졌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땅
에 꽂히면서 들것이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이어 장무
기는 사뿐히 들것 옆에 내려섰다. 들것에 있는 자는 온몸이 흰
붕대에 똘똘 감겨져 있고 얼굴만 노출돼 있었다. 바로 송청서였
다.

장무기는 얼른 그를 안아올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무척 무
거웠다. 흰 붕대가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몸과 다른 물체를 함께
감아 놓은 것 같았다.

주위에서 원병들이 계속 공격을 해왔다. 장무기는 자세한 생각
을 굴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송청서의 뼈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좌우로 몸을 번
뜩여 원병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뚫고 나갔다.

이때 공동파의 당문량과 종유쌍협이 달려와 그를 호위했다. 그
들이 검을 떨치자 원병들이 분분히 쓰러졌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안고 무사히 산 위로 올라왔다.

이 무렵 수백 명의 원병이 떼를 지어 밀려오자 팽영옥이 소리쳤
다.

"열화기, 공격해라!"

열화기에 속한 교도들은 일제히 원통(圓筒)을 꺼내 기름을 뿜어
냈다. 잇따라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가자 거센 불길이 치솟아올
랐다.

"으앗!"

"악!"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앞장서 진격해 오던
이십여 명의 원병은 불길에 휩싸여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옷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땅에서 뒹굴며 아비규환을 했다.

자연히 원병 진영에 큰 혼란이 일었다.

한데, 비참한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홍수기가 뒤따라
독수(毒水)를 뿜어냈다. 다시 수백 명의 원병이 독수 세례를 받
아 연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원병 주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몸부림치다가 죽어
가는 원병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생지옥을 연출했다.

원병을 이끌고 있는 만부장(萬夫長)은 황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
다. 거기에 따라 후퇴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길게 울려퍼지며 원
병들은 앞을 다투어 후퇴했다. 뒤쪽에 있던 원병들은 방패를 앞
세워 앞쪽으로 달려와 방패막을 구축해 동료들의 후퇴를 도왔다.

열화기 쪽에선 계속 화살을 쏘아댔으나 더 이상의 전과를 거두
지 못했다.

원병은 비록 커다란 손실을 입었지만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하
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팽영옥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
다.

"패배를 당해 후퇴하면서 혼란이 빚어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오
랑캐의 병졸이 천하의 정병(精兵)이라는 걸 알 수 있겠군."

산 아래로 물러난 원병은 부채꼴로 흩어졌다. 그들의 상황으로
보아 당분간은 공격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적시에 명령을 하달했다.

"예금, 홍수, 열화 삼기는 산중턱 중요 길목을 지켜라! 거목,
후토 양기는 신속하게 나무와 흙을 옮겨 방위벽을 구축하라!"

오행기는 그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군호들은 앞서 원병들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게 사실
이었다. 단지 혈기만 믿고 그들을 상대하려 했었다. 물론 승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교전을 해보니 비로소 원병의 위력이 상상외로 강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울러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무림에서 일 대 일로 무공을 겨루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는 사실을 알았다.

수천 명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자 그 기세는 성난 파도
와 같았다. 주지약 같이 무공이 뛰어난 고수도 물밀듯이 밀려오
는 군사들 틈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면팔방에서 칼과 창이 난무하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들지 알 수 없어 평상시에 사용하던 무공 초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약 명교의 오행기가 진법을 펼쳐 원병의 질서정연한 진법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군호 쪽이 처절한 패배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군호들 중에서 소림의 승려만이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했을 뿐
나머지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펼쳐 오히려 자중지란을 빚는 경우
도 있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주로 나한진법(羅漢陣法)
으로 원병들을 상대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승려가 희생되었
다. 원병이 물러간 뒤에 군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보다 경
각심을 높였다.

송(宋) 말년에 조정 장수들 중에도 무림 출신의 고수들이 많았
는데, 결국 몽고인에게 강산을 빼앗겼으니 병법과 무공이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군호들은 비로소 실감했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맥을 짚어보
니 다행하게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보
이지 않았다.

"송부인은 어디에 있소?"

장무기가 물었으나 정확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원병과 맞서 싸우느라 주지약이 어디로 갔는지 눈여겨 보지 않았
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제 명교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풀렸다. 그
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장문인이 갑자기 사라진데 대하여 어
리둥절했다.

장무기는 혼란 중에 송청서가 다시 부상을 입었을까 봐 염려가
되어 일단 붕대를 풀어 살펴보기로 했다. 붕대는 세 겹으로 되어
있었다. 세 번째 붕대가 풀어지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부러진 검과 칼이 떨어졌다. 역시 장무기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다른 물체가 몸과 함께 붕대에 싸여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부러
진 검과 칼일 줄이야 실로 뜻밖이었다.

한데, 그 검과 칼을 확인한 장무기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앗! 도룡도, 의천검!"

그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군호들도 분분히 달려와
주위를 에워쌌다. 틀림없는 도룡도와 의천검이었다. 단지 그 두
가지 신병이기가 모두 반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실 앞에 군호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장무기는 부러진 도룡도를 집었다. 역시 육중한 무게만은 변함
이 없었다.

그는 부러진 도룡도를 손에 쥔 채 만감이 교차됐다. 도룡도. 부
모님의 목숨을 빼앗아간 칼이다. 이 칼로 인해 근 이십 년간 강
호에서 풍파가 끊이지 않았다. 군호들이 소림에 모이게 된 것도
사실은 이 한 자루의 보도 때문이었다.

파란만장한 보도가 드디어 군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두 토막으로 부러진 것일까? 이로 인해 보도의 위
력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무기가 부러진 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니 중간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무엇을 숨겨 놓았던 것이 분명했다. 의천검을 살펴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검 속에 무엇을 숨겨 놓았다면 아마 누가
그것을 갖고 갔을 것이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양소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주낭자의 무공이 갑자기 고강해진 것은 바로 이 도검 속에 숨
겨져 있던 비급을 얻은 게 분명할 것이오."

장무기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아울러 장무기는 확연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알고보니, 무인도에서 그날 밤 도검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조
민의 소행이 아니라 주지약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수
법으로 조민을 쫓아 버리고 은리(=주아)를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지약은 도검 속에 숨겨 있는 비급을 손에 넣기 위해 두 가지
의 신병이기를 부러뜨린 게 분명했다. 비급을 얻은 주지약은 암
암리에 무공연마를 해왔을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릴수록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렸다.

'맞아. 당시 무인도에서 그녀의 체내에 있는 독을 제거해 주기
위해 구양신공을 펼쳤을 때.....'

그렇다. 당시 주지약의 체내에서 괴이한 힘이 뻗쳐 장무기의 구
양신공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져 장무기는
그녀의 내력(內力)이 날로 증진돼 가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주지약은 속성을 꾀하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목적한
대로 짧은 기일 내에 음독한 무공을 연성했지만 그것이 상승 무
학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지약이 무당의 육이협과 은육협을 격패한 것은, 그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것은 장무기가 총교 풍
운 삼사에게 패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지약의 진정한 무공은 육이협 등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 차
후 다시 겨루게 된다면 주지약이 무당 제협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장무기가 혼자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예금기의 장기사 오경초
가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교주님, 속하는 장인(匠人) 출신으로 주검술을 배운 적이 있습
니다. 이 부러진 검과 보도를 이어보고 싶으니 윤허해 주십시
오."

양소가 얼른 나섰다.

"오기사의 주검술은 천하무쌍이니 한번 시도해 보라고 하십시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자루의 신병이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좋을 대로 해 보시오."

오경초는 열화기 장기사 신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검술은 화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만치 신형께서 도와주셔야
겠어. 오랑캐들은 당분간 재진격을 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우리
가 언제쯤 일을 착수하면 좋을것 같나?"

신연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불을 지피는 일은 소제의 특기이니 만치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착수할 수 있소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부하들을 지휘해 놓은 화로를 쌓게 했다.
화로의 불구멍은 직경 한 자에 불과했다. 오경초는 도룡도의 자
루 쪽 반 토막을 집어 끊어진 부분을 불구멍을 겨냥해 고정시켰
다.

열화기는 늘 연료가 준비돼 있기 때문에 불을 지피는데 어려움
이 없었다. 순식간에 화로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오경초는 오른팔이 끊어져 왼팔 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이미 십여 가지의 병기가 준비돼 있었다. 그는 처음서부터 계속
뚫어지게 노화(爐火)를 응시했다. 노화의 색깔이 변할 때마다 준
비해 놓은 무기를 집어 화력(火力)을 시험해 보았다.

노화가 차츰 푸른 빛에서 흰 빛으로 변해 갔다. 거기에 다라 오
경초의 표정도 차츰 긴장되었다.

오경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드디어 집게로 나머지 반 토
막의 도룡도를 집어 화구(火口)에 고정시킨 자루 쪽의 반 토막에
갖다 붙였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토막난 도룡도가 서로 연결된
채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오경초는 웃통을 벗고 있어 불꽃이 몸에 튀었다. 상당한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경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도룡도를 달구는데만 온 정신이 집중돼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장
엄하기까지 했다.

한쪽에 떨어져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무기는 내심 새로
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예전엔 주검술(鑄劍術)을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 나
름대로 대단한 기술과 학문을 요하는군. 화력의 강열을 조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만약 평범한 장인이라면 단지 저 엄청난 열을 견
뎌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갑자기,

"앗!"

"저런.....!"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군호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
다. 장무기도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알고보니 풀무질을 하던 열화기의 두 교도가 열을 견뎌내지 못
해 그만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진 것이다. 그 즉시 신연과 열화
기의 장기부사가 앞으로 뛰쳐나가 까무라친 두 사람을 끌어내고
직접 풀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의 내공은 모두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 일단
풀무질을 하자 노화가 치솟았다. 화염이 일 장 가량 솟구쳐 오르
자 장관을 이루었다.

모든 사람의 기대와 긴장속에서 향 한 자루가 타는 시간이 경과
되었을까, 오경초의 입에서 별안간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앗!"

비명과 함께 그는 뒤로 몸을 솟구쳤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
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좌절의 빛이 역력했다.

중인은 흠칫 놀라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순강으로 된 집게는 이미 불에 달구어져 쭈글쭈글했다. 그러나
반 토막의 도룡도는 원래 상태에서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아무
리 강한 불길에도 달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증명된 셈이
다.

오경초는 장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속하가 무능하여 도저히 보도를 복원시킬 수가 없군요. 이 도
룡보도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신연과 열화기의 장기부사도 풀무질을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났
다. 두 사람은 모두 물 속에 첨벙 빠졌다.

도룡도를 원상 복귀시키는 일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해지는 듯했
다.그런데 줄곧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조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상공, 이 세상에 도룡도를 달굴 만한 집게가 없을 테니, 그
성화령으로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도룡보도가 성화령을 손
상시킬 수 없었잖아요?"

장무기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군!"

여섯 매의 성화령 중에 하나를 설불득에게 주어 교도들을 소집
케 했으니 아직 다섯 매가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품 속에서 성화령을 꺼내 오경초에게 내주었다.

"도검을 복원시키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성화령은 본교의 신물
(信物)이니 만치 파손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오경초는 힘주어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몸을 숙여 공손하게 성화령을 받았다.

다섯 매의 성화령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금(金)도 아니며 강철도 아니었다. 그러나 견고무비했다.

오경초는 성화령을 유심히 살피고 고개를 저울질해 보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무기는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자신이 없으면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소."

오경초는 생각을 골똘히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비로소 깊은 생각에 깨어나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가 물음에 신속히 답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성화령은 백금, 현철(玄鐵)에다 금강사(金剛砂) 등을 혼합해 만
든 것으로서 절대 불에 녹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애당초 이 성화령을 어떻게 만들었
는지 불가사의합니다.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민이 곁눈질로 장무기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나중에 교주님께서 파사국으로 한 중요한 인물을 만나러 갈 거
예요. 그 때 당신도 함께 따라가 성화령을 만든 장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수수께끼가 풀릴 거예요."

장무기는 멋적게 말했다.

"내가 무엇하러 파사국에 가야 한단 말이오?"

조민은 짓궂게 웃었다.

"그야 교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게 아니겠어요?"

조민은 다시 오경초에게 말했다.

"성화령을 보면 꽃무늬와 줄이 새겨져 있는데, 도룡도와 의천검
으로서도 손상을 입지 않는 성화령에다 어떻게 꽃무늬와 글을 새
겼는지 모르겠군요."

오경초가 곧 대답했다.

"꽃무늬와 글을 새겨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화령에
다 백랍(白臘)을 칠한 후 그 백랍 위에 꽃무늬와 글을 새겨 다시
강렬한 산액(酸液)으로 몇 달간 천천히 부식시켜 나중에 백랍을
긁어내면 꽃무늬와 글이 고스란히 새겨지게 됩니다. 소인이 알
수 없는 것은 용주(鎔鑄)하는 방법입니다."

신연은 한쪽에서 기다리다 못해 은근히 짜증이 났는지 큰소리로
물었다.

"이봐, 대관절 할 건가, 안 할 건가?"

오경초는 결심을 내린 듯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리고
는 장무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교주님, 안심하십시오. 신형제의 열화가 제아무리 거세다 해도
성화령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겁니다."

신연은 그의 말에 약간 망설여졌다.

"내가 최선을 다해 불길을 키워 만약 본교의 신물을 손상시킨다
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해 낼지 걱정이 되는구먼."

오경초는 빙긋이 웃었다.

"염려 붙들어 매고 이번 기회에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게. 내
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네."

이리하여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일이 다시 착수되었다.

오경초는 우성 두 매의 성화령으로 반 토막의 도룡도를 앞뒤로
끼어 다시 새 집게로 그 성화령을 집어 화로에 넣어 달구기 시작
했다. 용광로가 녹아내리듯 뜨거운 불길이 화구 위로 치솟아 올
랐다. 엄청난 열량이었다.

중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경초와 신연, 열화기 장기부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어느덧 반 시진이 흘렀다. 이제 오경초 등 세 사람은 힘이 완전
히 고갈되어 곧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버
티는 게 무리였다.

이때 철관도인이 주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
속한 듯 앞으로 달려나가 신연과 열화기 장기부사를 대신해 풀무
를 가동했다.

이들 두 사람의 무공은 신연보다 한 수 위이므로 일단 풀무를
가동하자 화로 속에서 한 줄기의 백색 화염이 곧장 허공 높이 치
솟아 올랐다. 그 열기로 인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마저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경초의 표정은 극도로 긴장되어 갔다.

홀연, 오경초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고형제, 어서 출수하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금기의 장기부사가 예리한 칼을
쥐고 화로 옆으로 뛰쳐나갔다.

중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와 오경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 한 줄기의 싸늘한 도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예금기의 장
기부사가 다짜고짜 칼 끝으로 오경초의 가슴을 찔렀다.

"앗!"

군호들의 입에서 자연히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대경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금기 장기부사의 행동은 실로 뜻밖이었다. 군호들이 놀라는
가운데 오경초의 가슴에서 선혈이 뿜어졌다. 그 선혈이 도룡도에
뚝뚝 떨어졌다. 핏방울이 열에 닿자 뿌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파
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경초의 입에서 다시 짤막한 외침이 터졌다.

"됐다!"

그는 비칠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손에 집중됐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거무스름한 대도(大刀)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두 토
막의 도신(刀身)이 붙은 도룡보도였다.

중인은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보니, 검과 칼을 주조하는 대장인들은 왕왕 자신의 피를 주
물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옛날 간장(干將), 막사(莫邪) 부부도 자신들의 몸을 화로 속에
던져 천고의 신검(神劍)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오직 신검을 만
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미련없
이 버리는 것이 바로 고대(古代)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이었다.

지금 오경초의 행동도 그 장인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장무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경초를 부축해 일으
켜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상처가 깊지 않았다.

장무기는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로 가슴을 감싸주었다.

"오장기사,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겠소?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데 이로 인해 오장기사가 너무나 고
생이 많았소."

오경초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이 정도의 상처는 별것 아닙니다. 공연히 교주님께 염려를 끼
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도룡도를 살펴보았다. 장무기도 그제서야 시
선을 도룡도로 돌렸다.

도신의 연결 부분은 거의 완벽했다. 단지 어렴풋이 한 줄기의
혈흔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오경초는 매우 만족했
다.

장무기는 다시 두 매의 성화령을 살펴보았다. 과연 아무런 손상
도 없었다.

장무기는 오경초로부터 도룡도를 받아 원병으로부터 빼앗은 대
도(大刀)를 향해 내리찍었다.

뚝!

대도가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났다. 도룡보도의 위력은 역시 예전
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군호들 사이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와! 보도다! 보도야!"

오경초는 두 동강이가 난 의천검을 집었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하게 변했다. 예금기의 전임 장기사와 예금기 산하의 형제
수십 명이 이 의천검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니
오경초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의천검을 손에 받쳐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장무기에
게 말했다.

"교주님, 나의 장대가(莊大哥)와 여러 형제들이 이 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속하는 이 검에 대한 원한이 뼈속 깊이 맺혀
있습니다. 이 검만큼은 잇고 싶지 않으니 교주님께서 달리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것은 오장기사의 의리이며 또한 인지상정이거늘 내 어찌 나
무랄 수 있겠소?"

그는 부러진 의천검을 받아 아미파의 제자 정현 앞으로 걸어갔
다.

"이 검은 귀파의 소유였으니 사태가 보관하셨다가 주..... 송부
인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소."

정현은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받았다.

장무기는 다시 도룡도를 손에 쥐고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
니 소림 장문인 공문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이 보도는 나의 의부님께서 소유하셨던 것인데, 지금
의부님께선 일문에 귀의해 소림제자에 속하니 이 보도를 의당히
소림에서 맡아야 할 겁니다."

공문은 당치도 않다는 듯 연신 손을 내둘렀다.

"그 보도는 이미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마지막으로 장교주께
서 어렵게 수중에 넣지 않았소이까? 그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이며 더구나 귀교의 오장기사가 그 부러진 보도를 잇는데 성공하
지 않았소. 그보다도 장교주가 그 보도를 지녀야 할 가장 큰 이
유가 있소. 당금 무림에서 모두 장교주를 지존(至尊)으로 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재덕(才德)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역시 장교주
가 그 보도를 관장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오."

군호들도 공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오! 모든 무림인의 뜻이니 장교주께서 더 이상 사양
할 필요가 없소!"

장무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만일 이 보도로 천하 호걸들을 호령해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
낸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군호들은 입을 모아 우렁차게 외쳤
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

그 아래 원래 두 귀절이 더 있었다.

----- 의천불출 수여쟁봉! -----

그러나 의천검은 절단되어 다시 이일 수 없으니 구태여 더 이상
의천검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의천검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명교 예금기 산하의 사람들은 의천검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었
다. 이제 도룡도가 옛 모습을 되찾고, 의천검이 여전히 두 동강
이가 된 채 무용지물로 사장되자 그들은 모두 후련해 했다.

반나절 동안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군호들은 모두 시장기를
느꼈다.

명교 오행기와 소림의 일부 승려들은 제각기 나누어 중요한 길
목을 지키는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승려들의 안내로 소림사로
들어가 요기를 채웠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기울자 차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
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 산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원병들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산기슭 부근에 흩어져 있고, 연
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저녁 식사를 할 분
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위일소에게 웃으며 말했다.

"위형, 날이 어두워진 뒤에 혹시 적이 야습을 해올지도 모르니
수고스럽지만 그들의 동태를 살펴봐 주시오."

위일소는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그러자 양소가 넌지시 장무기에게 말했다.

"교주, 내가 보기에 놈들은 앞서 혼쭐이 났기 때문에 섣불리 재
공격을 해오지 않을 것이오.만약 다시 공격을 해온다면 정면 공
격보다 산기슭 뒤로 돌아가 기습을 시도할 가능성이 짙을 것이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럼 양좌사와 범우사가 이곳을 지켜 주시
오. 나는 산 저편으로 가서 살펴보겠소."

그가 떠나려 하자 조민이 얼른 뒤를 따라갔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장무기는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어 그녀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사손이 갇혔던 산봉우리 쪽으로 와서 뒷산을 살폈으나 별다른 이
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세 그루의 부러진 소나무와 시꺼먼 지뢰(地牢) 입구를
바라보며 오늘 낮에 있었던 치열한 싸움을 생각하니 아직도 등줄
기가 오싹해지며 한의(寒意)를 느꼈다. 실로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문득 장무기의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의부님이 나더라 지뢰 석벽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깜박 잊을
뻔했군.'

그는 곧 조민에게 말했다.

"난 지뢰 아래로 내려가 살펴볼 것이 있으니 잠시만 위에서 기
다려 주시오."

그는 조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땅
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장무기는 부싯돌로 불을 밝혔다. 어
느새 물이 빠졌는지 바닥만 약간 질퍽할 뿐 벽 아랫쪽은 빙둘러
대리석을 깔아놓아 건조했다.

장무기의 시선이 먼저 사면 벽에 쏠렸다. 그곳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장무기는 대리석 위로 올라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뾰족
한 돌로 새긴 듯 간단한 필획이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동쪽 첫
번째 그림에는 세 명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한 여인이 땅에
누워 있는데, 다른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여인은 오른손을 내밀어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
의 품 속을 더듬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 옆에 두 글자가 적혀 있
었다.

----- 취약(取藥). -----

남쪽 벽 두 번째 그림은 큼지막한 해선(海船) 한 척이었다. 한
여인이 다른 한 여인을 배 위로 던지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 옆에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추방(追放). -----

여기까지 살펴본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예측했던
상황이 명확하게 그림으로 나타나 있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이마에서 어느덧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속으
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과연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지약은 조민이 나의 사촌누이를
보살펴주고 있는 틈을 타서 그녀의 품 속에서 십향연근산을 훔쳐
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그림에서 밝힌 취약(取藥)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약은 십향연근산을 몰래 음식에 풀어 모두 정신을 잃은 사이
에 조민을 안아 파사국의 해선 위에다 던져 배를 몰아 떠나게끔
했을 것이다.....'

그렇다. 사손의 그림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주지약은 조민을 일
단 무인도에서 몰아내 버린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약은 왜 조민 낭자를 추방한 것일까? 차라리 그녀를 죽일 수
도 있었을 텐데.....'

장무기는 의문에 봉착됐지만 곧 그 의문이 해답을 찾아냈다.

'맞아..... 만약 섬에서 조민 낭자의 시신이 발견된다면 그녀에
게 모든 죄를 전가시키진 못했겠지.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어.
누이동생을 해친 것도 역시 지약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시
주지약이 주아(=은리) 시신 앞에서 눈물까지 뿌린 생각을 하면
그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명의 남자가 그려져 있는 그림인데, 한 명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고 한 명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장무기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보니 의부님께선 지약이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짓을 행하
는 것을 예민한 청각으로 모두 감지하고 있었군. 그런데 왜 아무
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장무기의 두 번째 의문도 곧 풀렸다.

'그렇다. 의부님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십향연근산에 중독된
후였을 것이다. 이미 공력이 상실되어 만약 내색을 한다면 지약
의 손에 죽게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의부님은 한 술 더 떠 그
당시 조민 낭자의 소행이라고 단언하며 일부러 매우 분개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침착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
고 있는 의부님은 행여나 무의식중에 기밀을 누설할까 봐 나에게
까지 숨겼던 것이다.'

그림에는 군데군데 선혈이 묻어 있었다. 낮에 사손과 성곤이 혈
투를 벌이면서 뿌린 피였다. 그 선혈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더욱
처절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사손이 단정히
앉아 있고 주지약이 그의 등 뒤에서 기습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
었다. 그리고 바깥 쪽에서 개방 제자들로 여겨지는 한 무리의 사
람들이 뛰쳐들어오는 것도 그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조민이 대도(大都)에서 벌어진 유황성(遊皇城)놀
이에서 사람들을 시켜 분장한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장무기가 그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손에 쥐고 있던
불씨가 다 타버려 별안간 꺼져 버렸다.

장무기는 즉시 땅굴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조낭자, 이리 내려와 보시오. 부싯돌이 필요하오!"

조민은 곧 불을 밝혀 들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그림을 훑어보자 이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장무기는 불빛을 빌려 마지막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몇 명의 사나이가 사손을 들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한 소녀가 나
무 뒤에 숨어 훔쳐보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제 장무기는 모든 그림을 살펴보고 그 내용도 확연하게 알았
다.

그림의 필법은 모두 훌륭했으나 사손 한 사람의 모습을 제외하
고 나머지 사람들의 용모는 뚜렷하지가 않아, 내심 짚이는 바가
없었다면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손이 실명했을 때 장무기는 아직 세
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손은 장무기와 주지약, 조민, 주아의
음성만 들었을 뿐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당
연히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마지막 그림 중에 나무 뒤에서 훔쳐보는 소녀를 가리
키며 조민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낭자요? 아니면 주지약이요?"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요. 성곤이 개방으로 가서 사대협을 납치해 소림으로 보낸
뒤 스스로 길목에다 명교의 암호를 남겨 당신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한 거예요. 난 사대협을 빼앗아 오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
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장무기는 새삼 조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그녀를
의심해 온 것도 죄스러웠다.

장무기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초
췌해진 모습이었다. 몇 달 동안 자기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은
흔적이 얼굴에 역력했다.

장무기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격정이 끓어올라 왈칵 그녀를
품안에 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내 잘못이 너무 많은 것 같소."

그가 갑자기 조민을 껴안는 바람에 불씨가 꺼지고 말았다. 주위
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장무기는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
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낭자가 총명하고 지혜롭지 못했다면, 이 어리석은 장무기
가 경솔하게 낭자의 목숨을 앗아가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소."

조민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 당신은 내가 흉수
라고 단정했는데 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수를 전개하지 않았
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낭자에 대한 나의 감정은 진실한 것이었소. 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늘 그 감정에 지배되어 온
게 사실이오. 만약 낭자가 나의 누이동생을 죽였다면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거요. 그 동안 그 일로 인해 고민을 많이 해
왔소. 이제 진상이 밝혀지니 마음이 홀가분하구료."

조민이 이렇게 가까이서 장무기의 마음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장무기는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고 조민은 그의 뜨거운
마음이 직접 가슴에 와닿았다.

조민은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웬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행복에 겨워 눈물이 쏟아질 것
만 같았다. 장무기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거짓없는 감정을
듣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조민은 장무기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 왔다. 부
귀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혈육의 정마저도 뒷전으로 미루었
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승유언
(無言勝有言)이란 말이 있듯이 이런 분위기에선 차라리 무언이
더 많은 의미를 대신해 주었다.

어느덧 달이 위치를 바꾸어감에 따라 땅굴의 좁은 입구 위로 그
교교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희미한 달빛이 두 사람 머리 위로
뿌려지자 비로소 조민은 고개를 쳐들었다.

주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조민이 접한 장무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그 강렬한 눈빛 속으로 자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조민은 웬지 불안하고 당황해졌다.

그녀는 당황함을 숨기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 함께 지하로 떨어졌는데
그 상황이 오늘과 비슷하죠?"

장무기의 입가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녹류산장
지뢰(地牢)에서, 미륵묘의 북 속에서 있었던 일이 픽픽 그의 뇌
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그녀의 앙증스러운 맨발을 잊을 수 없었다. 본연의 욕
망이 다시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조민의 맨발을 다시 한 번 손에 쥐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이젠 망설일 것이 없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욕망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조민의
왼발을 움켜잡고 신을 벗겼다.

조민은 도리질을 했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녀는 장무기에게
자신의 발을 맡겼다.

장무기는 곧 그녀를 맨발로 만들었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그의 가슴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웅립(擁立)한
엄지발가락에서부터 발등을 타고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 오목하
게 패인 발바닥, 달걀같이 매끄러운 발뒤꿈치,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조민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연약한 여자라고 해서 멋대로 다루려는 거죠?"

장무기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대가 연약한 여자란 말이오? 모름지기 열 명의 남자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이오."

조민은 입을 삐쭉거렸다.

"장대교주님의 칭찬에 소녀는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녀가 장난투로 말하자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
이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도 이와 유사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적의를 갖고 한 말이지만 지금은
무한한 유정(有情)이 깃들어 있어 금석지감을 느끼게 했다.

장무기는 이제 쑥스러운 감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농이 섞
인 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발바닥을 간지럽혀도 겁나지 않소?"

조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겁나지 않아요."

장무기는 즉시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조민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의 손
에서 발을 빼려 했다.

"호호호..... 간지러워요."

장무기는 그녀가 간지러워 발버둥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계
속 간지럽혔다.

"겁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겠소."

조민은 선 채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호호..... 이제..... 그만 하세요. 호호..... 도저히 못 견디
겠어요."

그녀는 발버둥치다가 그만 대리석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
람에 장무기도 그녀의 발을 쥔 채로 쓰러졌다.

이제 조민의 발이 바로 장무기의 코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히지 않았지만 여전히 발목을 쥐
고 있었다. 조민도 뒤로 쓰러져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주위가 갑
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되는 것 같았다. 웬지
모르게 이 갑작스러운 침묵이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의 회오리로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정적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민은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쪽 발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순간, 장무기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며 그녀의 맨발에 얼굴을 묻었다. 조민은 그의 부
드러운 입술이 발등에 닿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민은 장무기를 안 후로부터 야성(野性)을 지닌 몽고의 여인이
아닌 한인(漢人)의 규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
왔다. 물론 그녀는 한인의 규방 처녀가 오직 자기가 흠모하는 남
자에게만 발을 맡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밀폐된 침
실에서 부부만이 행할 수 있는 유희이며 즐거움이기도 했다.

원래 옛부터 여인의 발에 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은밀한 방사
(房事)가 많았다.

청(聽)이라 하여 여인의 발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간
(看)이라 하는 여인의 발을 바라보는 행위, 흡(吸)은 여인의 발
냄새를 깊이 들여마시는 것을 뜻한다.

그밖에도 발가락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무는 교(咬), 발 전
체를 혀로 골고루 핥는 첨(甛), 앙증스러운 발을 통째로 입 안에
넣었다가 뱉으며 그 행위를 반복하는 탄(呑).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유희가 많았다. 예를 들어 발가락 사이에
대추 혹은 기름에 볶은 수박씨를 끼워 놓고 그것을 혀로 밀어내
어 먹는 식(食), 발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온(穩), 발을 양 어깨
에 얹는 견(肩).

아무튼 여인의 발은 남정네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강
렬한 신체 부위로 인식되어 왔다.

유난히 예쁘장한 조민의 발을 접한 장무기의 이성이 차츰 무너
져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은 발등에서 잠시 머물다가 자리바꿈을 해 갔다. 거기
에 따라 조민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장무기의
혀가 발가락 사이를 누비자 그녀는 온몸이 오무라드는 것 같았
다.

장무기의 입술은 결코 한 군데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가 가
르쳐 준 적도 없는데 그는 본능에 따라 입술을 움직여 갔다. 그
본능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라 그의 몸을 불사르고 조민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조민의 신음은 차츰 고조되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묘한 기분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
는 야릇한 기분임엔 분명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는데 따라 옷자락이 흐트러지면서 백옥같은
각선이 드러났다. 살결이 너무 고왔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본능
이란 마군(魔君)에 이끌려 장무기는 그녀의 동그스름한 발뒤꿈치
를 거쳐 한 치씩 위쪽으로 탐닉해 갔다.

그를 주체해 오던 이성(理性)이 벌써 무너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본능적 감정뿐이었다.

땅굴 위에서 뿌려지던 희미한 달빛이 갑자기 구름에 가려지자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에 잠겼다. 어둠은 장무기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에서 계속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그 열기가
땅굴 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 제 7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5 장 늙은 마두(魔頭)의 음욕(淫慾)


한편, 군호들 사이에서 훌쩍 떠나가 버린 주지약은 어떻게 되었
을까?

그녀는 혼란을 틈타 뒷산 쪽으로 달려갔다. 장무기에 의해 도룡
도와 의천검의 의문이 밝혀지게 될 것이 뻔한 사실이므로 그녀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비록 임종을 앞둔 스승님의 엄한 유명(遺命)이고, 자신이 스승
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실천에 옮긴 것이지만 장무기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장무기를 진심
으로 사랑했었기에 그녀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멸절사태의 유명에 따라 의천검과 도룡도에 숨겨진 비
급을 찾아내 새로운 음공(陰功)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
문에 그 나름대로 장무기에 대한 죄의식을 잊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마당에 또 그 망각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무
너져버려 그녀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도 해보았지만 그 때마다 스
승님의 유명이란 지상과제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이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고 적대시해야만 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인 멸절사태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게 있어 멸절사태는 스승인 동시에 어버이며 은인이었다. 임종을
앞둔 멸절사태의 그 처절하리 만치 강렬한 당부를 생각할 때마다
주지약은 등골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아울러
멸절사태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당부가 귓전에 되살아났다.

----- 절대 장무기와 혼례를 해선 안된다. 너의 미색으로 그를
유혹해 의천검과 도룡도를 동시에 손에 넣어 본문의 무학을 천추
에 빛내야 한다. -----

그것은 주지약에게 있어 더 없는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님 앞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녀의 진심과는
거리가 먼 약속이지만 한번 한 맹세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승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다. 그 결과가 어떠한 것
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되
리라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주아를 죽게 한 일이었다. 그일로
인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언제쯤 자신의 죄상이 밝
혀지게 될 것인지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
다.

이제 막상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더불어 홀가분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허탈
이었다.

사문(師門), 스승님의 은혜, 자신을 속박해 온 그 모든 것이 일
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자신에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희생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적이 없는 산길을 홀로 힘없이 걸으며 주지약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당장 장무기에게 다시 달려가 모든 것을 털
어놓고 용서를 빌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것
은 또한 이미 작고한 스승님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도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걸음을 내딛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막막한 사막에 자기만이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어려
서 부모를 잃고 자라온 그녀지만 이렇게 짙은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젠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도 구
멍이 난 듯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왜소한 그
림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탈상태에서 걷고 있던 주지약은
갑자기 사람을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이미
자기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평상시라면 주지약의 예민한 감
각으로 이런 황산에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왜소한 사람의 그림자는
추악하게 생긴 꼽추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턱 밑이 헐어 진물이 흐르며
한 쪽 눈마저 흰자위뿐인 애꾸였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추악한 노인이 불쑥 나타나자 주지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꼽추 노인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지약은 웬지 불안을 느
끼며 걸음을 멈춘 채 몸을 돌려 꼽추 노인을 지켜보았다. 그녀
앞에 다가온 꼽추 노인은 뜻밖에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
자갈을 입에 문 듯한 까칠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주낭자가 아니십니까?"

주지약은 멍해졌다.

"그렇습니다만, 노인장은 뉘시기에 저를....."

꼽추 노인은 왼눈으로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후 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주낭자를 찾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구료. 노부는
명교 장교주의 수하로서 주낭자에게 전할 서찰이 있어 황급히 뒤
를 쫓아온 것이오."

주지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상대방이 정말 명교의 제자
인지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었다. 하기야 명교의 교도가
워낙 많으므로 세심을 기울인다 해도 상대방의 진위를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표정이 굳어지는 주지약에게 꼽추 노인은 징그럽게 웃으며 품
속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건네 주었다.

주지약은 약간 망설이다가 그 서찰을 받았다. 서찰 겉장에 틀림
없이 용등호약하는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장교주가 이 서찰을 나에게 전해 주라고 했단 말인가요?"

꼽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에 제삼자가 없는데도 다소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장교주께서 낭자와 은밀히 나눌 얘기가 있는 모양이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 금방 낭자의 뒤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
에 이 늙은이더러 미리 서찰을 전해 주라고 분부한 것이오."

주지약은 전신에 한 차례 진동이 일었다. 자기는 분명 아무도
모르게 떠났는데 장무기가 어떻게 자기가 떠난 방향을 알고 사람
을 시켜 서찰을 보낸 것일까? 그리고 서찰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주지약이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꼽추 노인은 다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럼 본인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만 떠나야겠소."

이 말을 남기고 꼽추 노인은 즉시 신법을 전개해 오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비록 등이 굽은 꼽추지만 그의 신법을 신속무비했다.

주지약은 명교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
하며 잠시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뜯어보았다. 서찰에는 겉봉과
똑같은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금만신시 소실산후 천룡암견 (金晩辛時 少室山後 天龍庵
見) -----

오늘밤 신시 소실산 뒤편 천룡암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아래쪽에 천룡암으로 가는 약도와 장무기의 이름이 명시돼 있었
다. 천룡사라면 바로 지금 그녀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얼마 떨어
지지 않았다.

주지약은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가 자기를 만나려
하는 것은 불문가지,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문책하려는 게 분
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장무기는 마주치기가 두려운 존재가 아
닌가?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설
령 장무기가 자기에게 살수를 전개한다 해도 어차피 부딪쳐야 할
사람이다.

장무기가 직접 뒤쫓아오지 않고 수하를 시켜 만날 장소를 약속
한 것을 보면 단둘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심산임을 알 수 있었
다.

주지약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어떠한 결과가 벌어지더라도 장무기와 만나 은원을 해결 하리라
고.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 동안 얼
마나 많은 각오를 해왔던가. 하지만 막상 그 각오가 현실로 나타
나자 서글픔이 앞섰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은 힘이 없
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 어둠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물론 그녀는 지금쯤 장무기가 오경초의 주검술을 지켜보고 있으
며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면, 그녀에게 가짜 서찰을 전해 준 꼽추노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녀를 천룡암으로 유인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핏빛 놀이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인 가운데 주지약은 천룡암 앞
에 당도했다.

그녀는 아직도 장무기의 서찰이 가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
었다. 물론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짐작하
지 못했다. 이왕 부딪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차라리 한시 바
삐 장무기를 만나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장무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시에 만나
자고 했으니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룡암 앞 돌계단을 올랐다. 천룡암은 작은
암자로서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 되었음이 분명했다. 대문은 아
미 무너졌고 담벽도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암자 안은 더욱 황량했다. 무성한 잡초가 무릎을 넘고 어디선가
들쥐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음씨년스럽기만 했다.

뜨락 안으로 들어서며 보니, 돌로 세운 병풍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무녀져내려 단지 아랫 부분에 새겨진 불(佛)자만이 어렴풋
이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돌병풍의 뒤쪽이 바로
암자의 대전(大殿)이었다.

대전 안에서 뜻밖에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비록 등잔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 황폐된 암자의 분위기가 워낙 침침
하여 일찍 등불을 밝힌 것 같았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
었다. 주지약은 당연히 장무기가 먼저 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 벌써 당도해 날 기다리고 있었군.'

주지약은 마음을 굳게 다지며 성큼성큼 대전 안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잡초가 무성한 곳을 지나가자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사사삭!

다른 여자라면 질겁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소리였다. 독사가
풀밭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귀신이 해골을 파먹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라서, 웬만큼 담이 큰 남자라 해도 머
리카락이 쭈뼛해질 것이다.

'날 이곳까지 오게 하고서 어찌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일까?'

주지약은 다소 의혹을 느꼈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푸다닥!

잡초가 무성한 대전 앞쪽에서 난데없이 몇 줄기의 시꺼먼 물체
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이번에 주지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몇 마리의 박쥐였다.

'어두운 동굴에 사는 박쥐가 어떻게 이곳에.....'

주지약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몸을 솟구쳐 사뿐히 대전 앞
에 내려섰다. 그 순간 또다시 푸드득 거리며 몇 마리의 박쥐가
잡초 틈에서 날아올랐다.

주지약은 대전 앞에 서서 소리쳤다.

"장교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곳에 왔는데 왜 모습을 드러내
지 않죠?"

그녀의 외침소리는 조용한 주위를 가르며 멀리 퍼져나갔으나 대
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주춤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
겨 놓았다. 대전 복판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 콩알 만한 등잔불
이 밝혀져 있었다. 그 뒤쪽으로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곳곳에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주지약은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낡은 탁
자 위에 종이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기 대문이다.

쪽지 위에는 분명 무엇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가 어둑어둑하여 무슨 글
인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대관절 무슨 속셈으로 이런.....'

그녀가 생각해 온 장무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이 계속 일
어나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쪽
지에 적힌 글이 등잔불에 비쳐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받
은 서찰과 똑같은 필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또 한 번 주지약
을 멍하게 만들 만큼 엉뚱한 것이었다.

----- 후원(後園)에서 기다리겠소. -----

주지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처음부터 나의 기를 꺾으려는 모양이군. 구태여 이럴 필요는
없을 텐데.....'

그녀는 등잔을 손에 들고 후원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후원으로 가려면 좁고 긴 복도를 지나야만 했다. 복도에도
거미줄과 먼지가 뒤덮혀 있었다. 그런데 먼지가 쌓인 복도에 한
줄기의 발자국이 길게 연결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장무기가 남
긴 발자국이라 생각했다.

등잔을 앞세우고 그녀는 복도를 지나 뒷편 뜨락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모든 건물이 낡을 대로 낡아 폭삭 주
저앉을 것만 같았다. 눈에 뜨이는 것은 오직 폐허뿐이었다.

후전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주지약은 대전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눈에 띄지 않자 소리쳐 장무기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쳐나오려던 말을 삼켜 버렸다. 비록 죄를 짓
고 있는 입장이지만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가 대전 안에 있다면 응당히 밖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는
가!

주지약은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주지약
은 어쩔 수 없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장교주! 대관절 무슨 꿍꿍이속인가요?"

하지만 후전 안은 조용할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오기가 생겼다. 동시에 이상한 느낌도 들어 조심스럽
게 후전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후전 안쪽 기둥에 제각기 등잔불이 걸려 있어 주위를 환하게 밝
혀 주었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복판에 탁자
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술병과 잔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술병 아래에 또 하나의 쪽지가 눌려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
다.

주지약은 발끈했다. 설령 장무기에게 문책을 받아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수모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앞으로 달려가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곳
에 똑같은 필체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 안주를 구해 올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오 -----

주지약은 울지도 웃을 수도 없었다. 장무기가 이런 장난에 가까
운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후전 안도 마찬가지로 곳곳에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지만 탁자 주위만은 예외였다.

주지약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제하기 위해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병의 마개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코 끝에 풍겨왔다. 주지약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
은 심정에선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자신의 불안감을 삭히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때 그녀의 뇌리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날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불길한 생각을 이내 떨쳐 버렸다. 이미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는데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장
무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루었
다. 술의 빛깔은 벽록(碧綠)색으로 향기가 진했다. 한 잔 마셔
보니 입 안 가득히 향기가 감도는 것이 마실 만했다.

주지약이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어두어졌다.

뜨락을 할퀴는 바람이 제법 차가왔다. 갑자기 바람결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약은 얼른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
다. 과연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지약은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방은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장무기가 아니
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흡사 바람에 실리듯 눈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다
가온 사람은 장무기가 아닌 현명이로 중의 한 사람인 녹장객이었
다. 실로 뜻밖이었다.

주지약은 대경실색했다. 그녀가 쪽지를 건네받을 때부터 느꼈던
많은 의문이 일시에 풀렸다.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걸려든 사실
을 깨달은 것이다.

녹장객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을 띄
었다.

"주낭자, 그 장무기라는 음적이 아니라 이 늙은이가 나타나니
무척 실망하는 눈치군."

주지약은 의자에서 일어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녹장객의 강렬한 눈빛에서 직감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날 이곳으로 유인해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녀가 싸늘하게 다그치자 녹장객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네가 절세의 무공비급을 수중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서 순순히 그 비급을 내놓아라."

주지약은 어림도 없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녹장객은 히죽 웃었다.

"네가 신공을 어설프게 배웠다고 해서 우리 형제를 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흐흐...."

그는 징그럽게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거기에 따라
주지약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오늘의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귓전에 녹장객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원래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너
를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해 왔는지 아느냐?"

주지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녹장객이 스스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일단 소유하고 싶어서였다. 계
집은 옥과 같은 것이라 티끌만한 하자가 생겨도 그 값어치를 상
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느냐?"

주지약은 다소 당황해졌다. 녹장객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
었다. 게다가 학필옹마저 부근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렇다고 비급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주지약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녹장객의 다음 말이
었다.

"겁낼 것 없다. 너는 이미 합환주(合歡酒)를 마셨을 것이다. 그
술 속에 미약(迷藥)을 풀어놓은 사실을 넌 아마 모르고 있을 것
이다. 일단 그 약효가 온몸으로 퍼지면 제아무리 정절을 목숨처
럼 생각하는 계집도 세상에서 둘도 없는 탕녀(蕩女)로 변하게 된
다. 하하핫....."

그는 양양하게 광소를 터뜨리며 눈에서는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
렸다.

주지약은 황급히 진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별로 막히는 데가 없
었다. 그러나 음호혈(陰戶穴)로부터 미미하게나마 한 갈래의 뜨
거운 기류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하게도 그
녀가 새로 연마한 무공이 음유(陰)柔한 기운을 위주로 한 것이므
로 그 뜨거운 기류를 스스로 억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 발작하게 될지 그녀로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냉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오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술에다 미약을 풀어넣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군요. 그 약효가
언제쯤 발작할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녹장객은 본디 남달리 여색을 탐했다. 그는 주지약으로부터 신
공 비급을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학필옹의 양해를 얻어 내친
김에 자신의 욕심까지 채우려 했던 것이다.

앞서 꼽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가 바로 학필옹이 위장한
것이다.

녹장객은 주지약에게 억지로 미약을 복용시킬 수 없음을 알고,
일부러 이런 과정을 거쳐 주지약으로 하여금 홧김에 스스로 술을
마시게끔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늙은 생각이 맵다는 말
이 있듯이 실로 음흉한 마두였다.

녹장객은 지금 주지약의 반응이 갑자기 부드러워지자 속으로 침
을 꿀꺽 삼켰다. 슬슬 약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
했다.

주지약은 그의 성급한 마음을 부채질하듯 이번에는 눈웃음을 쳤
다.

"당신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군요. 당신이 노리는 것이
다 여기에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그녀는 마치 상대방을 맞아들이는 듯한 자세로 양팔을 벌렸다.

녹장객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주춤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역시 그는 세심했다. 이제
주지약은 독안에 갇힌 쥐나 다를 바 없으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
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방은 미약을 복용했으므로 그 미약의 약
호가 나타나면 자연히 자기의 품 안에 안길 것이다. 그에게 신경
이 쓰이는 것은 오히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는 학필옹이었다. 그
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문밖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 팔을 벌리고 있던 주지약이 갑자기 용수철에서 튕겨진
듯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핑! 녹장객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요란한 굉음
이 들리며 주지약의 몸이 천장 지붕을 뚫고 나갔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적중되었다. 그녀가 서 있던 후전은 건물이 낡을 대로 낡
아 몸을 솟구치며 쌍장을 펼쳐내자 지붕이 뻥 뚤리며 기왓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녹장객으로선 실로 뜻밖의 변화였다. 그는 자신이 문 입구 쪽을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에 주지약이 절대 달아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빗나간 것이다.

녹장객은 손아귀에 들어온 떡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는 즉시
뒤따라 그 뚫려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사제, 계집을 잡아라!"

지붕을 뚫고 나온 주지약은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녹장객의 싸늘한 고함소리가 들려왔
다. 힐끗 고개를 돌려본 주지약은 녹장객 외에 또 한줄기의 그림
자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필옹임이
분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약은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가 달리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장무기와 조민이 함께 있는 그
지뢰(地牢)쪽이었다.

한편, 한창 열기에 싸여 있던 장무기와 조민.

장무기는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이성이
무너지려는 순간, 홀연 서북쪽에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
자 흠칫하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조민도 찬물 세례를 받은 듯 활활 타오르던 열화가 순식간에 식
어 버리며 벌떡 몸을 일으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녀
의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그녀는 장무기를 쳐다보기가 부끄
러웠다.

이때 고함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왔다.

잠시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장무기가 덥석 조민의 손
을 잡았다.

"어서 밖으로 나가 살펴봅시다."

그는 조민의 손을 잡은 채 땅굴 위로 솟구쳤다. 고함소리가 들
려오는 방향을 살펴보니 세 줄기의 그림자가 질주해 오고 있었
다. 그들의 신법은 모두 전광석화같이 빨라 일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무기가 언뜻 보기에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쫓는 각축전이었
다.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갑자기 손을 떨치자 한 줄기의 싸늘한
광채가 앞쪽에서 도망치는 자의 등을 향해 뻗쳐나갔다. 앞서 달
리는 자는 즉시 옆으로 피하며 장검을 떨쳤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빛줄기를 그리며 뻗쳐오던 물
체가 검에 의해 허공으로 높이 튕겨져 올랐다. 그가 멈칫하는 사
이에 추격해 오던 또 한 사람이 바싹 따라붙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구름에 가려졌던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어
장무기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현명이로와
주지약이 아닌가!

녹장객은 가까이 따라붙자마자 재빨리 녹장을 사납게 휘둘렀다.
주지약은 황급히 우측으로 미끄러지며 허공에 검광을 뿌려 녹장
을 막았다. 달빛을 빌어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치
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얼른 조민과 함께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앞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주지약의 장검에 의해 높이 튕겨져
오른 물체는 학필옹의 무기인 학취필이었다. 학필옹은 뒤쫓아와
허공에서 떨어지는 학취필을 나꿔잡더니 주지약의 왼쪽으로 내려
서서 녹장객과 더불어 좌우협공을 전개했다.

주지약은 이를 갈며 싸늘하게 외쳤다.

"계속 내 뒤를 쫓아와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녹장객이 공격을 펼치며 소리쳤다.

"오늘 장무기가 도룡도와 의천검을 수중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급은 이미 사라졌다. 그 비급만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내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수중에 넣었을 때 저 마두들이 숨어서
지켜보았군.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니.....'

주지약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무공 비급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공을 터득한 후에
이미 태워버렸다."

녹장객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냉소를 날렸다.

"네가 신공을 터득했다고?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도룡도와
의천검은 자고로 무림지존이라 일컬어져 왔는데 그 속에 숨겨진
비급이 예사 무공이겠느냐?....."

녹장객은 학필옹과 서로 위치를 바꾸며 계속 떠들어댔다.

"너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짧은 시일 내에 그
절세 신공을 완전히 터득하진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터득했다
면 구태여 도망칠 필요없이 벌써 노부 형제를 죽였을 게 아니겠
느냐?"

주지약은 아슬아슬하게 학필옹의 공격을 피하며 악을 쓰듯 외쳤
다.

"네가 뭐라고 해도 이미 불태워 없앴다. 설령 나를 죽인다 해도
그 비급을 수중에 넣지는 못할 것이다."

학필옹과 녹장객은 더 이상 입씨름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독수리가 먹이를 나꿔채듯 덮쳐내렸다.

주지약도 몸을 급속도로 회전시키며 검을 떨치자 그녀의 주위
다섯 자 안이 온통 싸늘한 검광으로 뒤덮였다. 비록 수세에 몰려
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검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신공을 연
마한 후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보았지만 검을 전개하는 것은 처
음 보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은빛 뱀이 난무(亂舞)하듯 검초(劍招)가 펼쳐지는 가
운데 그녀는 이대 고수(二大高手)를 맞이해 그런데로 버텨나갔
다. 예전의 주지약이라면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지약의 검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따금씩 연출되는 절
묘한 변화였다. 허(虛)와 실(實)이 서로 어우러져 변화를 창출할
때마다 녹장객과 학필옹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 반대로 주지
약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숨을 돌릴 계기를 만들곤 했다.

순식간에 쌍방은 삼십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이제 주지약이 펼쳐낸 검막은 둘레 여섯 자까지 뻗쳤다. 갈수록
검초가 더욱 위력적으로 변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장무기는 그곳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

주지약이 이러한 타법(打法)으로 쾌속하게 내력(內力)을 운용하
는 것은, 달아나기 위한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장무기
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주지약이 계속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내력이 과도
하게 허비되어 스스로 지치게 될 뿐 아니라 무리한 공격을 전개
하는 도중에 눈꼽만치의 실수를 보이면 즉시 돌이킬 수 없는 위
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지약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
다. 이 순간 만큼은 그녀에 대한 원한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장무기는 손에 땀을 쥐며
무의식중에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만약의 경우 주지약을 도우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야압!"

주지약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토해지며 녹장객을 향해 질풍
이 몰아치듯 연거푸 삼검(三劍)을 펼쳐냈다.

녹장객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비록 놀랐으나 당황하
지 않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뒤틀며 피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학필옹의 쌍필이 수중에서 벗어나 주지약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암기로 삼아 던져내는 것은 강호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는 일종의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 것
이므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반면, 기습을 전개
하는 쪽도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기습이 실
패로 돌아가면 무기를 잃게 되므로 오히려 자신이 위경에 처하게
된다. 그야말로 마지막 주사위를 던져 최후의 승부수를 거는 것
과 다를 바 없었다.

학필옹의 쌍필을 던져내는 순간 장무기는 흠칫했으나 주지약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지약의 등을 겨냥해 날아가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
서 뜻하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줄이야!

창!

맑은 금속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쌍필이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치
며 방향을 꺾어 주지약의 뒷통수와 허리 뒤쪽을 향해 폭사돼 갔
다.

뒷통수와 허리 뒤쪽 요후혈(腰後穴)은 모두 급소로서 일단 적중
되면 금강신선(金剛神仙)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이다.

한편, 주지약은 등 뒤에서 쌍필이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
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피했으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서 맞닥뜨리며 방향을 전환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아차하는 찰나 주지약은 뒤통수로 날아오는 학취필을 피했으
나 요후혈을 겨냥해 화살처럼 뻗쳐오는 또 하나의 학취필은 도저
히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위기일발!

주지약의 뇌리에 죽음의 암영(暗影)이 드리워지는 것과 동일한
시각에 한 줄기의 그림자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날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 학취필을 나꿔챘다. 동시에, 학필옹이 잇따라 떨쳐낸 일
장을 맞받아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느닷없이 뛰쳐들어 주지약을 사선(死線)에
서 구해낸 장본인은 장무기였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지약
은 미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사신(死神)의 손짓만 의식할 뿐 뇌리가 백지처럼 텅 비었다.

그 틈을 타서 녹장객이 적시에 일장을 전개해 그녀의 아랫배를
적중시켰다. 녹장객이 전개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현명패천장이
었다.

"윽!"

주지약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터지며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위기를 틈탄 녹장객의 교활한 출수가
결국 싸움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쓰러진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쥐
고 있던 학취필을 팽개치며 얼른 주지약을 안아올려 비스듬히 일
장 남짓 솟구쳤다. 그리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호통쳤다.

"이 비겁한 마두들! 무림 선배랍시고 거드름을 피울 때는 언제
고, 이제 와서 비겁하게 둘이서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러고도
낯짝을 들고 무림 동도를 대할 수 있겠느냐?"

녹장객은 가소롭다는 듯 광소를 날렸다.

"으핫핫핫핫.....! 어느 놈이 감히 이 어른신네들의 일을 방해
하는가 했더니, 이제보니 장대교주시군, 마침 잘 만났다. 우리의
군주마마를 꾀어 어디다 숨겨 놨느냐?"

장무기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나무 뒤 어두운 곳에서 조민
이 스스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우선 장무기로부터 주지약을 받아
안더니 현명이로를 향해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녹선생, 아직도 나를 못 잊어 오매불망 찾아 헤매고 있나요?
이런 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주책을 부린다면 나의
아버님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녹장객은 주지약을 탐하려던 것이 발각된 듯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 수치심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요망한 계집, 여지껏 네가 군주라고 해서 흥이야 항이야 해
도 들어 줬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우리 형제는 네 아비와
벌써 인연을 끊었다. 그러니 여양왕도 앞으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다!"

여양왕부에 예속돼 있을 때는 그런대로 마성(魔性)을 억제하던
녹장객이 이젠 스스럼 없이 그 마성을 드러냈다.

장무기는 녹장객이 주지약에게 독수를 전개하고 더우기 예전의
상전이었던 조민에게 서슴없이 무례한 언동을 발하자 분노가 치
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어렸을 때 그들 두 사람에게 현명
패천장을 당해 많은 세월 동안 고생해 온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
렸다.

장무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
졌다.

"민매(敏妹), 잠시 뒤로 물러나시오. 오늘 저 두 늙은 마두를
단단히 혼내주겠소."

현명이로는 장무기가 빈손인 것을 보자 즉시 무기를 거두고 만
반의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장무기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받아랏!"

대갈일성과 함께 공작전미(孔雀展尾)라는 초식을 쌍장으로 밀어
냈다. 이 초식은 태극권법으로서 장세가 뻗쳐나가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장무기는 이 초식에다 암암리에 구양신공을 주입시켰다.

태극권법, 이 권법은 후세에 이르러 권법의 태두라 일컬어지며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분리돼 널리 펴져나갔지만, 당시 장삼
봉이 창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림에서도 이 장법을 직접 목격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녹장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음유무력(陰柔無力)한 장세
(掌勢)를 본 적이 없어 일단 당황했다. 어떤 변화가 숨겨져 있는
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무기를 매우 경원
시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정면으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
스듬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장무기는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몸을 돌리며 학필옹
을 겨냥해 왼손을 뻗어냈다.

백사토신(白蛇吐信).

이와 동시에 장무기의 오른손이 왼손 손등에 붙여지며 미미한
떨림을 연출했다. 그의 왼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경기(勁氣)가
분명히 뻗쳐나갔다.

학필옹은 거기에 맞서 왼손 식지로 장무기의 장심(掌心)을 허초
로 찍으며 오른손으로 호선(弧線)을 그려 장무기의 아랫배를 노
렸다.

장무기는 현명이로와 두 차례나 격출한 바가 있으므로 그들이
자기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에 자신은 도액 등 소림 삼승과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여 무공이
더 한층 증진되어 현명이로를 여유있게 격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을 만만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경솔한 마음을 갖지 않고 태극권법을 위주로 하여 잇따라 원을
그려내며 그 원형의 경기(勁氣) 사이로 구양신공을 간간이 구사
했다.

싸움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현명이로는 자신들의 열세를 풍부한 대적 경험으로 보충했다.
역시 고목의 뿌리는 깊었다.

현명이로는 일초 인식을 신중하게 대처해 나갔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에게서 뻗쳐오는 양강지기(陽剛之氣)가 거세지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뜨거운 양기가 자신들이 구사하는 현명신
장의 음한지기를 차츰 좀먹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휙! 휙!

무서운 경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릴 뿐 쌍방
은 침묵 속에서 격전을 치루어갔다.

어느새 쌍방은 백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순간, 장무기의 몸이 광풍에 쏠리는 한 닢 낙엽인양 허공으로
붕 떠올라 아랫쪽을 향해 쌍장을 교차시키며 떨쳐냈다. 새로운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허공에 떠 있는 장무기는 우연히 한쪽에 시선이 쏠리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현명이로가 좌우로 갈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사뿐히
당에 내려서면서 방금 시선이 쏠렸던 곳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
에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몸을 떨고 있었는데, 달빛을 빌어
조민과 주지약이라는 것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눈꼬리를 치켜올리자 조민과 주지약
의 모습이 보다 확연하게 시야에 잡혔다. 조민은 주지약을 안고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곧 주지약을 놓칠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이내 그 까닭을 깨달았다.

'맙소사, 지약은 녹장 늙은이의 현명패천장을 맞아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녀 자신도 음한한 무공을 연마한데다가
다시 천하에서 가장 음한하다는 현명패천장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된 셈이다. 그 한기(寒氣)가 민매에게까지 전달된 게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자 장무기는 공격을 최
고 경지로 끌어올려 앙연히 녹장에게 밀어냈다.

녹장객은 그의 권법이 급변한 것을 보자 능구렁이답게 정면 대
결을 피하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몸을 번뜩였다. 동시에 장무기가
왜 갑자기 공격을 서두르게 되었는지 눈치챘다.

그는 옆으로 미끄러지는 즉시 소리쳤다.

"사제, 유투(遊鬪)를 펼치게. 주지약 계집의 한독이 발작한 모
양이니 녀석에게 돌봐줄 틈을 줘선 안 되네!"

"알았소!"

그는 일단 뒤로 물러서 학취필을 뽑아쥐더니 장무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돌다가 통천철지(通天撤地)의 초식을 전개해
학취필로 장무기의 위아래를 찔러왔다.

그는 녹장객과 더불어 이제부터는 정면 공격보다 측면 기습을
시작했다.

장무기는 그들의 전술 변화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냉
소를 날렸다.

"어떠한 형식으로도 너희들을 상대해 주마!"

장무기가 외침과 함께 광풍노도 같은 일장을 떨쳐내자 학필옹은
휘몰아쳐 오는 무지막지한 경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녹장객은 자신의 무기인 녹장을 손에 쥐기 무섭게 장무기
의 옆구리를 후리며 뻗어왔다.

장무기는 속전속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연거푸 권법을 변
화시켜 소림신승 공성(空性)으로부터 배운 용조금나수(龍爪檎拿
手) 삼십 팔식을 펼쳐냈다.

무금식, 고슬식, 포풍식, 포잔식..... 계속 맹렬한 공격이 이어
졌다.

녹장객이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이 용조공의 위력은 대단하군. 잠시 후 이 용조공으로 구덩이
를 파면 안성마춤이겠다!"

"사형, 구덩이를 파서 무엇한단 말이오?"

녹장객은 교활하게 웃었다.

"주지약 계집이 죽으면 묻어 줘야잖겠느냐?!"

알고보니, 그는 일부러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려 놓기 위해 얼토
당토않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한데,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러 놓기도 전에 그 자신이 입을 놀
리다가 그만 주의력이 분산돼 장무기가 걷어찬 발에 왼쪽 장단지
가 적중되었다. 녹장객은 질겁을 하며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백전노장답게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녹장을 물샐틈 없이 펼쳐냈
다.

장무기는 힐끗 고개를 돌려 다시 조민과 주지약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좀전보다 더욱 심하게 떨고 있었다.

장무기는 염려가 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 높
여 외쳤다.

"어떻소?"

즉시 조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몸이 자꾸만 차가와져 견딜 수가 없어요!"

장무기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조민의 떨리는 음성을 들어보니
그녀도 음한지기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름지기 조민은 주지약을 도와 체내의 음한지기를 몰아내기 위
해 공력을 주입시키다가 오히려 상대방의 음한지기가 체내로 유
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공력이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다가 주지약의 내력(內力)이 워낙 괴이하여 빚은 불행한 결과
라고 생각했다.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좌우 쌍장을 떨쳐 맹공을 퍼
부으며 한시바삐 싸움을 매듭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현명이로는 그의 속셈을 읽고 있는 터라 멀찌감치 떨어
져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뜩이며, 단지 시간을 끄는데 주력할 뿐
정면 대결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그는 다시 조민을 향해 소리쳤다.

"민매, 어서 주낭자를 땅에 내려 놓으시오!"

조민은 당황해 하는 음성으로 외쳤다.

"손..... 손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조민의 울먹이는 듯한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그녀의 등심에 붙인 손이 떨어지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 녹장객이 다시 엉뚱한 말을 건네왔다.

"장교주, 저 주낭자는 천성이 악랄해 일부러 자신의 음한지독을
군주에게 전해 주고 있으니 군주가 먼저 죽음을 당하게 될 게 뻔
하다. 그러니 군주를 살리고 싶으면 한 가지 조건을 교환하는 게
어떠냐?"

장무기는 조급한 마음에 다그치듯 물었다.

"교환 조건이 무엇이냐?"

녹장객은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걸로서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나는 주낭자가 갖고
있는 비급을 얻고, 장교주는 군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장무기는 이내 냉소를 날렸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
다. 현명이로의 무공은 지금 상태에서도 적수를 찾아 보기가 어
려운데, 만약 주지약으로부터 무공 비급을 얻어 더욱 음독한 무
공을 연마한다면 그야말로 온 무림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광분할
게 아니겠는가!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다시 조민 쪽을 바라보았다. 조
민의 아리따운 얼굴이 이미 파르스름하게 변색된 채 고통으로 일
그러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녹장객의 제의에 가
부를 대답할 겨를도 없어 조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즉시 왼
손으로 조민의 오른손을 잡아 체내의 구양진기를 주입시켜 주었
다.

녹장객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대뜸 소리쳤다.

"맹공을 퍼붓자!"

그 외침을 신호로 하여 현명이로는 녹장과 한쌍의 학취필을 광
풍폭우처럼 전개했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조민의 체내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 몸
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쪽 손만으로 현명이로의
맹렬한 공격을 상대해야 한다. 더군다나 진력을 조민에게 빼앗기
고 있어서 위험천만의 상황이었다.

과연 그 위기는 즉각 현실로 나타났다.

찍!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장무기의 왼쪽 바지 가랑이가
학취필에 의해 찢겨지며 선혈로 물들었다.

조민은 본디 주지약의 체내에서 역류해 온 음한지기로 인해 전
신의 혈액이 응결되는 것 같았는데, 구양진기가 다시 체내로 유
입되자 차츰 그 혈기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장무기가 다른 한 손
으로 현명이로를 상대하자 조민의 체내로 유입되던 구양진기가
약해졌다. 그로 인해 조민은 다시 오한에 시달렸다.

녹장객은 연거푸 녹장을 떨쳐내 장무기의 눈을 노렸다.

장무기는 한 손으로 장력을 뻗어내 맞이하자 학필옹이 때를 맞
추어 절묘한 자세로 뒹굴며 왼손에 쥐고 있는 학취필로 장무기의
옆구리를 찍어왔다. 장무기는 피할 여유가 없어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학취필의 방향을 바꿔 놓으려 했다. 그러나 조민에게 태
반의 공력을 빼앗기고 있는 입장에서 학필옹의 전력이 담긴 학취
필을 따돌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순간,

창!

뜻밖에도 금속성이 들리며 학취필이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학필옹의 학취필이 마침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도룡도에 적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평상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액 등 소림삼승과
맞붙을 때 성화령을 사용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도룡도를
허리에 차고 있으면서도 전혀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지금, 학필옹의 학필이 공교롭게도 도룡도에 적중되자 장무기는
비로소 도룡도에 생각이 미쳤다.

"얍!"

그는 용이 울부짖듯 일성 기합을 발하며 왼발을 쓸어내 학필옹
을 뒤로 석 자 가량 물러나게 만들고는 재빨리 도룡도를 뽑았다.
마침 녹장객의 녹장이 뻗쳐왔으므로 장무기는 도룡도를 맞닥뜨려
갔다.

뚝!

그 즉시 가벼운 소리가 들리며 녹장의 녹두(鹿頭) 부분이 싹뚝
잘려져 나갔다.

녹장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앗!"

그가 놀란 외침을 발하는 순간 학필의 쌍필이 파공음을 일으키
며 휘몰아쳐 왔다.

장무기의 도룡도가 재차 허공에 수놓아지자 한 쌍의 학취필마저
모두 싹뚝싹뚝 네 동강이로 잘라졌다. 도룡도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현명이로는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비로소 자신의 진력을 차분히 조민의 체내에 주입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민은 금방 한독이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지약이 당했던 현명한독이 즉시 말끔하게 씻든 듯 제거
되었다.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물론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 계속 조민의 체내
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주지약은 비록 한독이 제거됐지만 간접적으로 조민의 손바닥을
통해 구양진기가 계속 체내로 뻗쳐들어왔다. 그녀가 새로 연마한
것은 구음내력(九陰內力)이었는데, 일단 현명한독이 사라지자 막
힘없이 뻗쳐들어오는 구양진기로 인해 애써 쌓아올린 구음내력이
파괴되어 갔다.

주지약은 그러한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알고보니, 그녀는 벌써 정신을 되찾았다. 그 즉시 조민이 자신
의 체내에 공력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
녀는 조민이 주입시켜 주는 내력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엉뚱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조민의 도움을 받아 체내의 한독을 제거하지 못할바에는
거꾸로 자신의 한독을 조민의 체내로 되돌려 주면 자신의 살 길
이 열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이지만, 배은망덕한 행위임
은 부인할 여지가 없었다. 조민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단지 주
지약이 당한 음독이 너무나 심해 자기마저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으니, 영특한 사람일수록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는 말이 맞
는 모양이었다.

주지약은 사실 무인도에서 의천검 속에 숨겨진 구음진경을 수중
에 넣었지만, 행여나 사손 혹은 장무기에게 발각될까 봐 외떨어
진 동굴에서 밤에만 몰래 연마하는 바람에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못했다. 자연히 구음진경의 진수를 완벽하게 익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한독을 조민에게 되돌려 주려
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 그 단계를 넘어서 거꾸로 뻗쳐오는
구양진기에 의해 자신의 구음진기가 자꾸만 소멸돼가자 내심 대
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등심에 붙여진 조민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입
장이었다. 체내에 구양진기가 뻗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의
도적으로 조민의 체내에 음한지기를 주입시켰기 때문에, 조민이
안간힘을 서도 그녀의 등심에서 손을 뗄 수 없었지만 이젠 입장
이 바뀌어 조민의 손이 구양진기의 강한 점력(點力)에 의해 등에
밀착돼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기 위해 소리칠 수 없었
다. 일단 입을 열면 진기가 흩어져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민은 차츰 체내의 한기가 사라지며 혈액이 원만하게 유
통되자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젠 됐어요. 내 걱정 말고 어서 전력을 다해 현명이로를 상대
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회복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는 곧 구양신공을 거두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강한 점력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되자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음독은 말끔히 씻어졌지만 구음내력이 많이
손실되었다.

그녀는 장무기가 도룡도를 떨치며 현명이로를 상대하는데 여념
이 없는 것을 보자 또 다시 뇌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
부려 다짜고짜 조민의 정소리를 향해 내리꽂았다. 뜻밖에도 불의
의 살수(殺手)를 펼친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미움이 자아낸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다. 차라
리 발악이었다. 장무기가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구석엔
그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간절하게 응어리져, 그 고통이 조민에 대
한 마음으로 변해 비뚤어진 행동으로 분출된 것이다. 조민을 극
진히 생각해 주는 장무기의 노골적인 행동에서 심한 심적인 자극
을 받은 영향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조민은 또 한 차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피할 새도 없었다.

"앗!"

그녀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내질렀다. 정수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목숨을 잃게 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뼈마디가 어긋나듯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며 주지약의
입에서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갔다.

장무기는 조민의 비명에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이오?"

조민은 자신의 정수리를 만져보더니 혼비백산하여 제대로 대답
을 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에 의해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인 줄 알고 역시 대경실색했다. 그는 도룡도를 떨쳐 현명
이로를 막으며 조민에게 접근하여 왼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만
져보았다. 손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두개골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
고 조민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위로해 주었다.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니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장무기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지약이 의도적으
로 조민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어째
서 찰과상만 입은 것일까?

물론 장무기가 곰곰히 생각하면 의문이 금방 풀릴 수도 있었지
만 지금은 현명이로를 상대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조민이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긴 것은 체내에 주입된 구양
진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은 내력이 크게 손상
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라,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한 구양진기의 반탄지력에 의해 손
목뼈가 삐걱하며 손마디에 심한 통증을 느껴 신음을 내뱉었던 것
이다.

장무기가 약산 주춤하는 사이에 현명이로가 다시 공격해 왔다.

주지약이 떠나 버리고 조민의 한독이 퇴치된 지금의 상황하에서
장무기는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느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구태
여 도룡도의 위력을 빌려 현명이로를 꺾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진정한 무공으로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장무기는 즉시 도룡도를 조민에게 건네주고 체내의 진기를 일주
천(一周天)시켜 전신에 골고루 퍼지게 하더니 왼손으로 학필옹이
떨쳐온 일장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놓았다. 드디어 건곤이위신공
을 전개한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치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제칠단계인 최고
경지로 전개하는 한편 구양신공마저 잔뜩 주입시켰다. 이것은 장
무기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인 동시에 내력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타법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 표리(表裏)가 있듯이
이 위력적인 공격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력(內
力)의 안배가 어긋나게 되면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조민과 주지약의 한독
을 퇴치해 줄 때는 비록 상황이 위급했지만 감히 이러한 타법을
구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건곤이위신공에 말려든 학필옹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녹장객의 어깨에 일장을 후려쳤다.

녹장객은 깜짝 놀라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제, 무슨 짓인가?"

학필옹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생각이 우둔한 편이었다. 왕왕 한
가지 일을 갖고 한참 생각해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창졸
간에 묘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 자신도 어리둥절하며 녹장객이 묻
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 장무기가 수작을 부
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단 자기가 열심히 장무기를 공격하면
사형도 오해가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전력을 다해 장무기를 향해 발을 걷어차냈다.

장무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을 떨쳐내자, 이번에도 학필옹의
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녹장객의 아랫배를 향해 걷어
차 갔다. 녹장객은 황급히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자네 미쳤나?"

한쪽에 있는 조민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즉시 소리쳤다.

"잘 하는구요. 학선생, 맞아요! 어서 저 대역무도하고 음탕한
사형을 사로 잡으세요. 그럼 나의 아버님께서 약속한 대로 후한
상을 내릴 거예요."

장무기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조민의 외침에 따라 녹장객과 학
필옹이 당혹해 하는 것이 재미있고도 통쾌했다. 그래서 원래는
건곤이위신공으로 학필옹이 녹장객에게 공격을 전개하게끔 하고
다시 녹장객의 공격이 학필옹에게 쏟아지게끔 할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을 달리했다.

계속 학필옹에게만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녹장객을 당혹하게
만들고, 녹장객에게는 태극권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조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학필옹에게 외쳤다.

"학선생, 아무 염려 마시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 음
탕한 늙은이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오. 여양왕은 이미 학선생
을 대장군에 봉하였소!"

조민이 다시 소리쳤다.

"학선생, 당신에게 봉관(封冠)한다는 공식문서를 갖고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음..... 대원호국양위대장군(大元護國揚威大將軍)에 봉해졌군
요. 어서 힘을 내세요!"

장무기는 오른손을 펼쳐내 녹장객을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건곤
이위신공의 영향을 받은 학필옹의 좌장(左掌)이 마침 녹장객에게
뻗쳐오자 장무기와 더불어 좌우 협공하는 형태가 되었다.

녹장객은 학필옹과 수십 년간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친형제 이
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그래서 학필옹이 자기를 배신하리라곤 전
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학필옹이 거듭하여 자신의 급소
를 겨냥하여 공격해 오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부귀영화가 탐나 정말로 날 배신하려는 게 아닌가?"

그가 의심스럽게 묻자 학필옹은 다급해졌다.

"나는..... 단지....."

그가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조민이 다시소리쳤다.

"맞아요! 학선생은 단지 장래를 생각한 것뿐이에요. 언제까지나
강호에서 풍파를 겪으며 살 수 없으니 호국양위대장군이 되어 말
년을 부귀영화 속에서 보내려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심이잖아요. 사형이 아무리 좋다 해도 자신의 행복과 바
꿀 수야 있겠어요?"

장무기는 적시에 건곤이위신공을 펼쳐 녹장객에게 허초를 전개
하며 학필옹의 장풍을 유인했다.

펑!

학필옹의 장풍은 장무기의 허초를 피하려는 녹장객의 어깨에 적
중되었다. 녹장객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즉시 학필옹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학필옹은 그 즉시 얼굴이 부어오르며 이
빨이 여러 개 부러졌다. 그는 나이가 많아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을 귀하게 여겨 왔는데 이렇게 되자 역시 발끈하여 소리쳤다.

"사형, 이럴 수가..... 있소?"

녹장객은 눈에 쌍심지를 키며 맞섰다.

"네가 먼저 출수를 하지 않았느냐?"

그는 비록 견식이 넓지만 이런 해괴한 위력을 지닌 건곤이위신
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차력타력(借力他力)의 수법인데, 그것도 불가능했
다. 장무기의 공력으로 학필옹을 꺾을 수야 있겠지만 차력타력의
수법을 전개해 학필옹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장객은 장무기가 암암리에 엉뚱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학필옹은 자신의 결백을 표명하는데 다급하여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교활한 놈!"

물론 그는 장무기를 겨냥해 한 욕이었다. 그러나 조민이 그 화
살일 엉뚱한 데로 돌려 버렸다.

"맞아요! 그는 이제부터 당신의 사형이 아니라 교활한 놈이에
요!"

녹장객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
지껏 자기에게 고분고분하던 학필옹이 스스로의 부귀영화를 위해
자기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살수까지 전개하니 오장육부가 뒤틀
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눈이 충혈되어 계속 학필옹에게 공격을 전개했다. 학필옹
은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가 없어 몸을 피하며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원병(元兵)들이 야습을 가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학선생, 그럼 이음탕한 늙은이를 맡기겠소!"

그는 발 끝으로 살짝 지면을 찍으며 뒤로 물러나 조민의 손을
잡고 소림사 방향으로 향했다.

현명이로는 서로 초식을 주고 받으며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졌
다.

이때 어둠을 뚫고 조민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학선생, 그 <교활한 놈>을 사로잡는다면 도룡도의 비급을 한
달간 빌려줄 테니 힘내서 싸우세요. 이런 기회는 많지 않을 거예
요!"

녹장객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들 두 사람은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을 배워 실력이 막상막하였
다. 일단 둘이 맞붙어 악투를 벌이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소림사로 돌아온 장무기는 조민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나서 웃
으며 말했다.

"민매, 민매가 적시에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보이지 않았다면
녹장객이 속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품 속에서 얄팍한 종이를 꺼내 흔들어 보
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요?"

장무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내둘렀다.

"모르겠소. 민매가 알아 맞추라는 것은 도저히 알아맞추지 못하
겠소."

조민은 얄팍한 종이 두 장을 장무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장무기가 불빛을 빌려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매미 날개처럼 얇은 비단이었다. 그곳에 깨알처럼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첫 번째 바단 첫머리에는 무목유서(武穆遺書)라는 네 글자가 적
혀 있고, 그 내용은 주로 병법으로서 포진술(布陣術)과 용병술
(用兵術)이었다.

두 번째 비단 첫머리엔 구음진경(九陰眞經)이란 글이 적혀 있
고, 내용은 모두가 신기하고 괴이한 무공의 구결(口訣)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구음백골조와 철심장(鐵心掌)도 수록돼 있었다.

장무기는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주낭자에게서 취해 온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가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슬쩍 훔쳐온 거예요. 나
는 이따위 음독한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그
녀가 이 무공을 배워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겠죠."

장무기는 구음진경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문구가 어렵고 뜻이
깊어 퍼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구음진경이 절대 음독한 무학이 아니라는 것
을.

장무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수록돼 있는 무공은 지극히 심오하여 기초서부터 차근
차근 연마하면 일, 이십 년 후에 틀림없이 대성할 수 있을 것이
오. 반면에 만약 속성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음독한 무공으로 전략할 것이오."

그는 말 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황삼을 입은 낭자의 무공은 분명 주낭자와 뿌리가 같은 것
같소. 그런데 주낭자와는 정반대로 모든 초식이 광명정대하지 않
소? 아마 그것이 바로 구음진경의 진면목일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대관절 어떠한 내력(來歷)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 무슨
<신조협려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다>하고 읊조렸던 기억
이 나는데....."

장무기도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중에 태사부님을 뵙게 되면 여쭤봐야겠소. 그 어르신네께선
어쩌면 아시는 게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가 원병 쪽에서 별다른 행동을 취
할 기미가 없냐는 보고를 받고 제각기 잠자리로 들어갔다.

이날 밤, 조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무기와 땅굴 속
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만에 잠이 들은 그녀는 오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날
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 제 7 권 5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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