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7

3학년2반 | 2022.03.10 06:29:07 댓글: 0 조회: 65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324
김용 대하역사장편소설
비호외전 (4)
지은이 김용

잇따른 횡재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은 말을 끌고 천천히 숲 속에서 걸어나왔다. 정영소는
넌즈시 물었다.
[오라버니, 우리는 어디로 가지요?]
호비는 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먼저 객점으로 찾아가 둘째 누이가 편안히 쉰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지요.
나의 누이가 피곤해서 병이라도 나면 큰 일이니까 말이오.]
정영소는 그가 나의 누이라고 하는 말에 무한히 기뻤는지 고개를 돌리고 활짝
함박웃음을 지으며 애교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 어느 고을에 당도하여 객점을 찾아들었다. 정영소가 한잠 곤히 자
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그녀는 물건을 사겠다면서 객점을 나섰으며 얼마 후에 그녀는 커다란 봉지를
두 개 들고 들어오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내가 무엇을 샀는지 알아맞춰 보세요!]
호비는 커다란 봉지에 '노구복의장(老九福衣莊)'이라는 점포의 상호가 인쇄되
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또 수염을 붙이고 변장을 해야하는 것이오?]
정영소는 빙긋이 웃고는 종이 봉지를 펼치고 하나하나 꺼내보였다. 한 봉지에
한 벌씩 새 옷이 들어있었는데 한 벌은 남자의 옷으로 담청색이었으며, 다른 한
벌은 여자의 옷으로 엷은 황색이었으며 모두 우아하고 운치가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후 호비는 정영소가 권하여 입어보니, 소맷자락이 두 치 정도
는 길었고 겨드랑이품도 너무 넓었다. 정영소는 요모조모 눈대중을 하더니 가위
와 실을 꺼내어 등불 아래에서 호비의 몸에 맞도록 고쳐 주었다.
호비는 정영소를 다정히 바라보며 넌즈시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우리 북경으로 올라가 보는 것이 어떻소이까?]
정영소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오라버니가 경사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옷들을 산 거예요.]런 옷을 입고 그대로 간다면 시골뜨기 처녀가
왔다고 남들이 놀리지 않겠어요?]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의 생각은 정말 치밀하군. 우리는 천자(天子) 발밑에서 굽신거리며
백성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다루는 인물들을 한번 상대해 보고, 또한 복대수의 장
문인대회에는 도대체 어떤 영웅호걸들이 나타날 것인지 구경이나 합시다.]
이 말은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 어조에는 범접할 수 없는 호기
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정영소는 바느질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복대수가 이번에 천하 장문인 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어떤 꿍꿍이
속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거야 인재들을 망라해 천하의 영웅들을 모두 자기 휘하로 불러들이자
는 것이겠지. 그러나 진정한 영웅호걸이라면 가지 않을 것이외다.]
정영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오라버니와 같은 청년 영웅이라면 가지 않겠죠?]
호비는 그 말을 받았다.
[내가 무슨 놈의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소? 내가 말하는 사람은 묘인봉과
같은 일류 고수를 가리키는 것이오.]
그리고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 아버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다면 이 장문인 대회에 참석하여 발
칵 뒤집어 놓을텐데...... 그렇게 되면 정말 통쾌한 일이 아니겠소?]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가서 복대수의 일을 한 번 훼방놓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내가
보기에 반드시 한 사람이 더 갈 것 같군요.......]
호비는 물었다.
[그게 누구요?]
정영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알고 있으면서 뭘 그러세요. 괜히 능청떨지 말고 오라버니 입으로 시원스
럽게 말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호비는 이미 그녀가 자기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뜨끔해
서 넌즈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반드시 가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원소저 그 사람은 친구인지 적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적이 나에게 옥봉황을 선물해 준다면 나는 천하 곳곳에 적을 만들려고
노력하겠어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때 갑자기 창밖에서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아요. 당신에게 옥봉황을 하나 선물하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물건이 창호지를 뚫고
정영소에게 날아들었다.
호비는 탁자 위에서 정영소가 옷을 마름질하던 대나무 자를 들어 그 물체를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촛불이 일렁이며 그만 꺼지고 말았다. 곧이어
창밖의 여인은 다시 말했다.
[등불을 켜고 두 사람이 오손도손 정겨운 이야기를 나눈다니, 상상만해도 정
말로 아름다운 정경이로군요!]
호비는 그 말소리가 어렴풋이 원자의의 음성임을 알아차렸다. 순간 그는 가슴
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원소저이시오?]
그러나 발걸음 소리가 가볍게 들려오더니 이내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다시 불을 켰다. 정영소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우리 나가서 살펴봅시다.]
정영소는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오라버니나 나가 보세요.]
호비는 음! 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탁자 위의 물건을 들어보고는 그것이 자그
마한 돌멩이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소저는 일을 행하는 것이 신출귀몰하구나. 언제부터 우리 뒤를 밟고 있었
는지 모르지만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는 정영소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창밖으
로 나가 살펴보았다. 사방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고 사람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호비가 다시 방안으로 되돌아오며 무슨 말을 걸려고 했을 때 정영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고 하니 오라버니는 그만 방으로 돌아가 주무시도록 하세요.]
호비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다.
[나는 아직 피곤하지 않구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나는 피곤하군요. 내일 일찍 길을 떠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되 겠구려.]
하는 수 없이 호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호비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원자의를 떠올렸고, 한편으로는 정영소를 떠올렸다. 그의 뇌리 속에는 이상하게
도 마춘화와 서쟁, 그리고 상보진 세 사람의 관계가 떠올랐다. 한 여인과 두 남
자...... 그러나 자신은 한 남자와.......
그러다가 사경 무렵이 되서야 겨우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호비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정영소가 문을 두
드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새 옷을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빨리 일어나세요. 밖에 좋은 물건이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호비는 몸을 일으켜 앉아 새 도포를 몸에 대보니 꼭 맞았다. 그는 내심 생각
했다.
(어젯밤 내가 돌아올 때는 소맷자락 하나 제대로 고치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잠도 자지않고 밤새도록 바느질을 한 모양이구나.)
이윽고 그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가 정영소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둘째 누이, 정말 고맙구려.]
정영소는 그 말에 응수를 했다.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요? 다른 사람은 오라버니에게 훌륭한 말까지 선물한
걸요.]
호비는 약간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훌륭한 말이라고?]
그리고는 재빨리 마당으로 나가보니 전신이 눈처럼 희게 빛나는 한 필의 백마
가 말뚝에 매여 있었다. 바로 옛날 상가보로 조반산이 타고 온 말이었으며, 후
에는 원자의가 타고 다니던 그 백마였다.
정영소는 설명하듯 말했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는데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젯밤에 도둑이 들은 것
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어떤 물건을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 보니 없어진 물건은 없고 오히려 한 필의 말
이 매어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것은 그 말 안장에 꽂혀 있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조그마한 비단 보따리를 내밀었는데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호상공과 정소저, 함께 풀어 보시오.>
그 필체는 매우 우아해 보였다.
호비는 비단 보따리를 열어젖히다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그 보따리 안에는
하나의 옥봉황이 들어있었다. 그 옥봉황은 지난 번 자기에게 선물한 것과 똑같
은 모양이라 일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니 내가 옥봉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가 훔쳐간 것일
까?)
그는 즉시 품안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옥봉황은 멀쩡하게 자기 품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옥봉황을 꺼내 보았다. 두 옥봉황은 똑같이 생겼는데 다만 한
마리는 머리를 왼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다른 것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비단 보따리 안에는 하나의 조그마한 종이 조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말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고, 옥봉황은 협녀(俠女)에게 선물하나이다.>
호비는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여 생각했다.
(저 백마는 나의 것이 아닌데 어째서 말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일
까?)
이윽고 그는 그 쪽지와 옥봉황을 정영소에게 내밀며 말했다.
[원소저가 둘째 누이에게도 옥봉황을 하나 선물했구려.]
정영소는 쪽지 위의 글을 보더니 말했다.
[내가 무슨 협녀인가요? 내게 주는 것이 아니예요.]
호비는 그 말을 반박하듯 말했다.
[보따리 위에는 분명히 정소저라고 씌여 있지 않았소? 그녀는 또 어젯밤에 당
신에게 '좋아요, 당신에게 옥봉황을 하나 선물하지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면 받아두기로 하지요. 그분 원소저가 이토록 후한 선물을 주셨는데도
나는 보답할 길이 없네요.]
두 사람은 줄곧 북쪽으로 나아갔다. 도중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
자의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호비와 정영소의 마음 속에는 원자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방안에서 서로 이야기를 할 때면 창밖에서 원자
의가 엿듣는 것 같았고, 산길을 달릴 때에도 산등성이 어디에선가 원자의가 숨
어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사코 그녀의 이름을 들먹이려 하지 않았지만 피하면 피할수록 자
꾸만 그녀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경사에 도달하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빨리 그녀를 만나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때로는 오히려 늦으면 늦을수
록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북경에 이르는 길은 본래 멀었으며, 게다가 두 사람은 상념에 가득차 느릿느
릿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길은 더욱 험하고 고달프게 느껴졌다. 북쪽으로 올
라갈수록 잔서리와 찬바람이 몰아쳐 정영소의 몰골은 더욱 초췌해졌다.
그러나 끝내 북경에 도달하게 되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도문(都門)으로 들어섰다.
성문을 돌어설 때 호비는 정영소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어렴풋이 눈가에 눈물
이 맺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있어 그
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움찔하며 생각했다.
(이번에 내가 북경으로 온 것이 잘 한 짓일까?)
때는 건륭(乾隆)시대 중엽이라 온 천하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경사
에는 천하의 온갖 재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세상의 진귀함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호비와 정영소는 정양문(正陽門)으로 들어서서 성 남쪽에 있는 어느 객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점심으로 국수와 약간의 과자로 요기를 하고 거리로
함께 나와 각처를 어슬렁거리며 구경을 하였다.
거리에는 행인들이 많았고 보는 것마다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번화한 모
습이었다. 두 사람은 길을 묻지도 않고 되는대로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한 시진 정도 구경을 하고 나서 호비는 얼음과자를 몇 개 사서 정영소와 손에
나누어 들고 걸어가면서 먹었다. 어디선가 징소리가 쾅쾅! 울려퍼지며 큰 소리
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다가가 보니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무예를
펼쳐보이고 있었다.
호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둘째 누이, 우리도 구경 좀 하다 갑시다.]
이윽고 두 사람은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거칠고 건장
한 대한이 마침 손에 칼을 한자루 들고 포권을 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이 형제는 사문도법(四門刀法)을 한 수 펼쳐보이겠으니 여러 나으리들께서는
아무쪼록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한 수에는 도결(刀訣)이 있는데 다음과
같지요.]
이윽고 그는 낭랑한 소리로 그 도결을 읊었다.
[어모최봉쾌승강(禦侮최鋒쾌勝强),
천개심입적입상(淺開深入敵入傷).
담욕대혜심욕세( 欲大兮心欲細),
근수서혜비수장(筋 舒兮臂 長).
피고아왜감상용(彼高我矮堪常用),
적우저시아즉양(敵偶低時我卽揚).
적봉미견휴선진(敵鋒未見休先進),
허자위찰인유광(虛刺僞札引誘廣).
인피부래수매파(引彼不來 賣破),
안명수쾌시위량(眼明手快始爲良).
천심노눈개갑타(淺深老嫩皆 打),
진퇴비등즉타장(進退飛騰卽 藏).
공부구련방운숙(功夫久練方云熟),
숙능생교대명양(熟能生巧大名揚).]
호비는 이 구결이 대적을 할 때의 기본 자세나 공수의 방도를 자세히 설명하
고 있는 것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도결은 정말 그럴듯 하구나. 이 사람의 무공 역시 고강할 것 같군.)
그런데 그 사내는 자세를 취해 문호(門戶)를 펼쳐보이더니 큰칼을 쳐들고 전
(展), 말(抹), 구(鉤), 타( ), 벽(劈), 타(打), 갑( ), 찰(札) 등의 수법을 펼
치기 시작했으며, '대붕전시(大鵬展翅)', '금계독립(金鷄獨立)'으로 시작해서 '
독벽화산(獨劈華山)', '분화불류(分花拂柳)'에 이르기까지 일초 일식 차근차근
조리있게 펼쳤다.
하지만 발걸음이 부실하고 도세(도세) 역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어 무공은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우습다고 여기며 생각했다.
(일찌기 경사에는 쓸데없이 허풍을 떨며 밥만 축내는 사람들이 득실거린다고
하더니 이 사내도 말만 번지르했지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만.)
이윽고 정영소와 함께 그 자리를 뜨려는 순간 갑자기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
람이 껄껄 웃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하하하! 이것 보시오. 당신이 펼치는 것은 무슨 개방구 같은도법 이지?]
도법을 시범보이던 자는 그 말에 대노해서 칼을 비껴들고 돌아보더니 그의 행
색을 보고는 공손한 태도가 되어 입을 열었다.
[나의 이 정통 사문도법이 설마하니 잘못되었다는 것이오? 어디 가르침을 한
번 받아봅시다.]
그러자 사람들을 비집고 한 대한이 걸어나오며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한 수 가르쳐주지.]
그 사람은 무관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도 우렁차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도법을 펼치던 사내의 손에서 칼을
받아들고 주위를 한번 힐끗 둘러보다가 갑자기 호비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하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호형, 당신도 경사에 오셨구려? 하하하! 호형이야말로 칼을 쓰는데 고수이니
아무쪼록 호형이 한 번 솜씨를 보여주어 이 녀석으로 하여금 도법이란 어떤 것
인지 가르쳐 주도록 하시구려.]
호비와 정영소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나오는 그를 보고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
아보았다. 그는 바로 석옥에 사로잡혀 있던 응조안행문의 왕철악이었다. 그 당
시 그는 마춘화를 데리고 오려고 도적으로 가장을 했지만 원래는 직책이 있는
무관이었다.
호비는 그가 우직한 사람으로 결코 교활한 도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라 빙긋이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소제가 무엇을 알겠소이까? 왕형이 어서 한 수 펼쳐보이도록 하시구려.]
왕철악은 자기의 무공이 호비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
비 앞에서 자기 재간을 펼친다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칼을 땅바닥에 던지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자자. 호형, 그리고 이분 소저는 성이...... 성이...... 성이
정씨지? 맞았어! 정소저, 우리 함께 가서 시원하게 석잔의 술을 마시며 축하
를 합시다. 두 분이 경사까지 오시다니 불초로서는 한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구
려.]
그는 호비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그 도법을 설명
하던 자는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무예를 팔아먹고 사는 자가 어찌 벼슬
아치에게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겸연쩍게 칼을 집어들더니 세 사람이 멀
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왕철악은 걸음을 옮기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호형, 우리야말로 정말 싸우지 않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
렇게 되었구려. 노형의 무예는 불초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소이다. 내일 내가
호형을 대신해서 복대수님께 말씀을 여쭈겠소이다. 그 어르신께서는 호형과 같
은 인재를 본다면 틀림없이 기뻐하며 등용을 하실 것이외다. 그때는 이 형제 역
시 호형의 은혜를 입어야 할 것이외다.......]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그는 갑자기 음성을 낯추고 말했다.
[그분 마소저 말이외다. 우리는 그들 모자 세 사람을 모시고 경사로 돌아왔는
데, 그들은 지금 복대수의 부중에서 살며 그야말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부귀영
화를 누리고 있는 셈이라오. 복대수는 없는 것이 없이 다 있지만 단 한 가지 아
들이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마소저는 어쩌면 복대수의 정실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오. 하하, 하하! 노형이 오늘날의 일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면 우리와는
그렇게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더욱 소리를 높혔는데 큰 길에서 방약무인할 정도로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호비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여간 언잖은 것이 아니었다. 마춘화
가 혼례를 올리기 전에 복강안과 이미 서로 정을 통하여 그 두 아이를 낳고, 지
금은 그의 남편이 죽었으니 다시 복강안과 함께 사는 것도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서쟁이 숲 속에서 참혹하게 죽은 형상을 떠올리자 침울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덧 세 사람은 커다란 주루 앞에 이르렀다. 주루
위에는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취영루(聚英樓)'라는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주점의 주인은 왕철악을 발견하자 웃으면서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와서는 말을
걸었다.
[왕대인,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우선 상석에 오르시어 한잔 하시지요?]
왕철악은 고개를 시원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오늘은 내가 두 분 친구들에게 한턱 내는 것이니 술과 음식은 특별히
해주어야 한다네.]
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요.]
주인은 그들 세 사람을 귀빈석으로 안내를 하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일일이
따라주는 것이 왕철악은 틀림없이 이 주루의 단골 손님인 것 같았다.
호비는 주루의 손님들이 열 명 중 예닐곱은 무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무관
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대다수가 가슴이 떡 벌어진 무림의 인사들
같아 이 주루는 보기에 무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사의 요리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주인이 직접 날라다 주는 술과 안주는
맛이 기막히도록 좋아 입에 달라 붙었으며 느끼하지도 않았다.
호비는 연신 좋은 음식이라는 칭찬의 말을 했고, 왕철악은 체면을 세우기 위
하여 한 상의 상등주석을 다시 시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열댓 잔의 술을 대작했는데 갑자기 옆방에 한 떼의 사람들이 들이
닥치더니 잠시 후에는 떠들썩하며 도박판을 벌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
방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9점의 천공(天 )이다! 전부 다 내가 먹었다!]
호비는 그의 음성이 귀에 익은 것을 느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철악은 웃
으며 말했다.
[잘 아는 친구죠!]
그리고는 큰 소리로 불렀다.
[진형, 누가 왔는지 알아맞춰 보시오!]
호비는 즉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바로 팔극권의 장문인인 진내지
였다. 옆 방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어떤 개돼지 같은 친구를 데리고 왔는지 알게 뭔가? 이리로 나와서
함께 몇 수 놓아보지 그래?]
왕철악은 웃으며 응수했다.
[진형이 나를 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친한 친구에게 죄를 짓게 된다면 아
마 나중에 낭패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호비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호형, 우리 가 봅시다.]
두 사람은 옆방으로 가서 문의 휘장을 들추자 마침 진내지가 패를 보며 외치
고 있었다.
[3점에 매화 한 쌍이니 천(天)은 먹고 상문(上門)에는 졌구나!]
그는 고개를 쳐들다가 호비를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기뻐하며 말했
다.
[아! 형제였군. 뜻밖이군, 뜻밖이야!]
그리고는 패를 밀어젖히고 몸을 일으키더니 손으로 자기 이마를 몇번 치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을 죄를 지었군. 죽을 죄를 지었어! 내가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여댔으니.
호형이 왕림하실 줄 그 누가 알았겠소? 자자! 이리와서 형제가 패를 한번 돌려
보시구려.]
호비가 눈길을 쓸어보니 방안애는 십여 명의 무관들이 탁자를 에워싸듯 하고
서 패구(牌九) 놀음을 하고 있었다. 마침 진내지가 선을 잡고 있었다. 그 자들
가운데 태반은 비마표국의 표화물을 강탈하려는 도적으로 가장하여 자기와 손을
쓴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뇌진당을 쓰던 저가와 섬전추를 쓰던 상관이라는
성씨의 무관, 그리고 장검을 쓰던 섭가 등이 모두 있었다.
뭇 사람들은 호비의 갑작스런 출현에 왁자지껄하던 방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져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 되었다.
호비는 포권을 하고 사방을 빙글 돌며 읍을 한 이후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타고 갈 말을 선물해주신 데 대해 정말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
다.]
뭇 사람들은 몇 마디 겸손의 말을 했다. 그 섭가라는 자가 입을 열었다.
[호형, 당신이 패를 돌리시구려. 그런데 호형은 은자를 가지고 왔소? 소제가
오늘 운이 좀 좋은 모양이니 먼저 이걸로 쓰시구려.]
그러면서 세 봉지의 은자를 호비의 앞으로 내밀었다.
호비는 친구와 사귀기를 매우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벼슬아치에 대해서는 별
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자기를 지극히 존중해주며
또한 자신도 원래 도박을 좋아하는지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진형이 선이 되시는게 좋겠구려. 소제는 한번 걸어보고 운이 어떤지 볼
랍니다. 섭형, 거두어 두셨다가 나중에 내가 잃거든 섭형의 은자를 빌리도록 하
지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정영소에게 물었다.
[둘째 누이, 당신도 한번 해보지 않겠소?]
정영소는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도박을 할 줄 몰라요. 나중에 오라버니가 은자를 얼싸안고 집으로 돌아
가는 것을 도와드리지요.]
진내지는 패를 돌리는 자리에 앉아서 패를 섞고 주사위를 던지게 되었다. 호
비와 왕철악은 은자를 걸었다. 무관들은 호비가 나타나자 처음에는 상당히 겸연
쩍어 하는 편이었으나, 몇번 패를 돌리고 놀음을 하면서 호비가 웃으며 연신 재
미있는 이야기를 할 뿐 지난 번 일을 들먹이지 않는지라 모두 호비를 개의치 않
고 도박에만 신경을 썼다.
호비는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였으며 들락날락하는 것이 별로 크지 않아 속으
로 생각했다.
(오늘은 팔월 초아흐레니 엿새만 지나면 바로 중추절이다.
그날 천하장문인 대회가 복대수의 주최 하에 열리며 커다란 연회가 함께 열린
다고 들었다. 봉천남이라는 간악한 도적은 오호문의 장문인이니 그가 오지 않는
다 하더라도 그 대회에서 어느 정도는 그 흉악한 놈에 대한 소식을 얻어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사람들은 복대수의 휘하에서 세도가 있는 부하들이니 이
들과 잘 사귀어 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장문인의 신분은 아니지만 그들
이 들여보내 준다면 대회에서 장문인들과 함께 술 한잔은 얻어먹을 수 있겠구
나.)
그리하여 그는 잃는 것을 개의치 않고 아무렇게나 걸었는데 운이 좋아서 얼마
되지 않아서 삼사백 냥의 은자를 따게 되었다.
약 한 시진 남짓하게 도박을 하자 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사람들이 거는 판돈
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소리가 나면서 휘장이 젖혀지더니 세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왕철악은 그들을 보자 즉시 몸을 일으키고는 공손히 말했다.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오셨군요.]
탁자 주위에 모여서 도박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다투어 인사치레를 했고, 어
떤 사람들은 '주 나으리, 증 나으리'하고 불렀으며, 혹자는 '주대인, 증대인'하
고 부르는 등 그 얼굴 표정이 모두 공손하고 근엄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그들이 인사치레 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응조안행문의 주철초와 증철구가 당도했구나. 이 두 사람의 위풍은 대단하구
나.)
이윽고 그들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주철초는 왜소하면서도 다부진 데가 있었
는데 키는 다섯 척 정도였고, 오십여 세의 나이에 머리는 허옇게 세어 있었다.
증철구 역시 오십에 가까운 나이로 키가 훤칠했으며, 손에는 담뱃대를 들고 있
었다. 그는 마고자에 금줄을 늘어뜨리고 있어 퍽이나 기인귀족(旗人貴族)의 풍
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비는 세 번째 서 있는 사람을 보자 흠칫하며 어리둥절해 졌다.
그는 바로 과거 상가보에서 만난 적이 있는 천룡문(天龍門)의 은중상(殷仲翔)
이었다. 그는 귀밑부리가 희여져 반백이 되어 있는 것이 그새 많이 늙어 있었
다.
은중상은 호비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으나 그가 별볼일 었게 생긴 시골뜨기
인 것을 보고 전혀 개의치 않는듯 했다. 사실 과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호비
는 겨우 열 서너 살의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기골이 장대해졌고 얼굴 모습도 변
했는데 어찌 그가 알아볼 수 있겠는가?
진내지는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주형, 증형. 내 두 분께 한 친구를 소개하리다. 이 친구는 호형인데 재간이
뛰어나면서도 위인됨이 지극히 의리가 깊지요. 오늘 막 북경으로 올라온 모양이
니 세 분은 한번 잘 사귀어 보시구려.]
주철초는 호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며, 증철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익히 이름을 들었소이다.]
두 사람은 무공이 탁월하여 경사에서도 명성을 누린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자
연히 이런 시골 젊은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였다
왕철악은 정 영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소저는 우리 사형들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인사도 나누지 않지?)
그는 정영소가 그날 나오는대로 거짓말을 한 것을 모르고 있는 처지였다.
정영소는 왕철악의 눈길을 받게 되자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짐작하고는 미
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한쪽 눈을 깜박였다. 왕철악은 이 가운데 무슨 연
고가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는 더 이상 캐묻지를 않았다.
진내지는 다시 두 번 패를 돌리고 난 후에 선을 주철초에게 양보했다. 이때
증철구와 은중상 등이 가세하여 돈을 걸게 되자 판은 점점 커져갔다.
호비는 운수대통한듯 반 시진도 채 못되어 이미 천 냥이나 되는 은자를 따게
되었다.
주철초는 끝발이 안서는 듯 가지고 온 은자와 전표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가 다시 선을 잡고 주사위를 던지자 쥔 넉장의 패는 놀랍게도 이삼관(二三關)
이라 모조리 물어내야 했다. 그는 돈을 치루고 나더니 패를 밀며 말했다.
[나는 안되겠네. 둘째, 자네가 한 번 돌려보게.]
중철구가 선을 잡고 패를 돌렸으나 그는 그저 본전치기를 하는 정도였지만 호
비가 다시 은자 칠팔 백 냥을 더 따게 되어 그의 앞에는 은자가 수북히 쌓였다.
증철구는 웃으며 말했다.
[시골에서 온 노제, 도신보살(賭神菩薩)이 노제를 위해 환영식을 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노제가 한번 선이 되어보시오.]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패를 섞고는 주사위를 던지며 패를 들고 흔들어 펼치자 먼저번 것은 8
점이고, 두번째 것은 한 쌍의 판등(板橙)이라 두 집의 것을 먹을 수가 있었다.
주철초는 돈을 잃었으나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증철구는 더욱더 소탈해
보이고 태연자약했으며 짓궂은 장난의 말을 몇마디 하기도 하는 등 여유를 보였
다.
그러나 은중상은 성이 난 듯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는 나중에 져서
수중에 몇푼이 남지 않게 되자 다급해진 나머지 이백 냥이나 되는 은자를 한 번
에 모조리 다 하문(下問)에 걸었는데, 패를 벗기고 보니 3점과 9점이 나와 먹혀
버리게 되었다.
은중상은 그만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서는 손을 뻗쳐 탁자를 내리치자 온
탁자 위의 골패와 은자, 주사위 등이 모조리 튀어올랐다가 떨어졌다.
은중상은 냅다 탁자를 걷어차며 욕을 했다.
[이 시골뜨기가 주사위에 야바위 짓을 부린 게 틀림없어. 어떻게 이토록 공교
롭게도 3점이 나오면 3점이 되어서 먹고 9점이 나오면 9점이 되어서 먹는단 말
인가? 아무리 패의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다구.]
진내지가 옆에서 황급히 말했다.
[은형,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오. 호대형은 절대로 그럴 친구가 아니오.]
뭇 사람들은 은중상과 호비를 번갈아 쳐다보며 호비의 솜씨를 보고 한결같이
속으로 생각했다.
(은중상은 호비가 도박판에서 사기친다고 험담을 했으니 호비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은중상이 틀림없이 재수 옴붙는
꼴이 될걸.)
그런데 호비는 단지 빙그레 웃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도박을 할 때는 행여나 질 때도 있는 것이고 이길 때도 있는 것이니, 어디
한번 은형이 선을 잡아 보시구려.]
은중상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패검(佩劍)을 풀었다. 뭇 사람들은 그가 싸움
을 시작하려는 줄로 알 고 있었다.
사실 무관들이 도박을 하다가 싸우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은
중상은 패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나의 이 검은 적어도 칠팔 백 냥의 은자가 나가니 당신에게 오백 냥어치만
걸겠소.]
그 패검의 검집은 금과 옥을 박아 놓아 무척 화려한 편이라 그 검집만 하더라
도 상당한 값을 부를 수 있는 형편이었다.
호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팔백 냥으로 걸도록 하는 것이 공평하겠구려.]
은중상은 골패와 주사위를 들더니 말했다.
[나는 오직 당신을 일대 일로 상대하겠소. 다른 사람이 두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으니 우리들끼리 한 번의 패로써 승패를 결정합시다!]
호비는 앞에 놓여 있는 은자더미 중에서 팔백 냥을 계산해 앞으로 밀어내면서
말했다.
[당신이 주사위을 던지도록 하시오!]
은중상은 두 손을 모아 두 알의 주사위를 손바닥 안에 넣고서 몇 번 흔들더니
훅! 하니 주먹에다 입김을 불어넣고는 주사위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한 알은 5
점이고, 한 알은 4점으로 모두 다 9점이었다.
이윽고 그는 첫번째의 네 장의 패를 쥐어들고 한번 쪼여보더니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시골 양반아, 이번에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겠지!]
그리고는 왼손을 훽! 뒤집으니 9점이요, 오른손을 펑! 하니 뒤집으니 놀랍게
도 한 쌍의 천패(天牌)였다. 하지만 호비는 패를 뒤집어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패의 안쪽을 더듬어 전후의 짝을 맞추어 탁자 위에 배열했다.
은중상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시골뜨기 녀석, 패를 뒤집어봐!]
그는 자기가 틀림없이 이겼다고 생각하고는 팔을 뻗쳐 팔백냥의 은자를 자기
앞으로 가져오려고 했다. 왕철악이 준엄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성급하게 굴지 마시고 패를 본 후에 다시 이야기 하시오!]
호비는 세 손가락을 내밀어 자기 앞에 있는 패 두 장를 가볍게 두드렸고, 다
시 뒤에 있는 두 장의 패를 한번 치더니 손바닥으로 넉 장의 덮어두었던 패를
쓸어 어지럽게 놓여있는 다른패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웃었다.
[당신이 이겼소!]
은중상은 크게 의기양양해서 자화자찬의 말을 하면서 탁자를 바라보는 순간 '
어!' 하는 놀란 소리를 내지르며 그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뭇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주홍 칠을 한 탁자 위에는 또렷하게 넉 장의 패의 모양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앞서의 두 장은 한 쌍의 장삼(張三)이고, 뒤의 두 장은 한 장이 3점인데 다른
한 장은 6점이라 모두 합치면 놀랍게도 한 쌍의 지존보(至尊寶)였다. 넉 장 패
의 무늬와 선이 분명하게 탁자 위에 새겨져 있었으며 점자(點子) 한 알 한 알이
불쑥 불거져 있는 것이 틀림없이 호비가 세 손가락으로 한번 가볍게 치자 내력
(內力)이 뻗쳐나며 탁자 위에 선명하게 그 모양이 새겨진 것이었다.
이곳에 모여서 도박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무공이 능한 사람들인지
라 이와 같은 내력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대단하군, 대단해!]
은중상은 온 얼굴이 시뻘개져서 은자와 검을 일제히 호비 앞으로 밀어붙이며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호비는 패검을 들고 말했다.
[은형, 나는 검을 쓸줄 모르는데 이 검을 가져서 어디에 쓰겠소? 아무쪼록 물
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이 아니겠소?]
그리고 두 손으로 검을 내밀었다.
은중상은 검을 받지 않고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귀하의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호비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왕철악이 서둘러 말했다.
[이 친구는 호비라고 합니다.]
은중상은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호비, 호비?]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듯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산동 상가보에서.......]
호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았소이다. 불초는 그때 은 나으리와 한번 만난 인연이 있는데 은 나으리께
서는 깜빡 잊으신 모양이군요.]
은중상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패검을 받아서 탁자 위에 내던지며 말했
다.
[무리가 아니군, 무리가 아니야!]
그리고는 휘장을 들추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일시에 방 안의 모든 무관들은 분분히 의논을 했으며 호비의 내력이 뛰어난
것을 칭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은중상이 너무 초라한 꼴을 보이며 전
혀 품위가 없다고도 했다.
주철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호비의 앞에 수북히 쌓인 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호형제, 그게 모두 얼마나 됩니까?]
호비는 너즈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천 오백 냥은 되겠지요.]
주철초는 골패를 섞더니 탁자 위에 놓고 천천히 이리 밀고 저리 밀어 움직이
게 하더니 천천히 네 몫으로 갈라 놓았다. 그리고 난 이후 품속에서 하나의 커
다란 봉투를 꺼내더니 자기 앞에다 놓고 말했다.
[자, 내가 당신과 한번 패를 맞추어 보기로 하겠소. 만약에 내가 이긴다면 당
신의 사오천 냥이나 되는 은자와 패검을 모조리 따는 것이고, 만약에 당신의 패
가 좋다면 이걸 가져가도록 하시오.]
뭇 사람들은 그 봉투에 아무 글자도 씌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안에 무엇
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다 호비가 어렵게 많은 은자를 땄
는데 어찌 단 한판의 패로써 졌다고 인정하여 물러날 수 있겠으며, 더군다나 봉
투 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만약에 한 장의 백지만 들어있다면 그
거야말로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비는 선뜻 수북히 쌓인 은자를 모조리 앞으로 밀어부치고는 그 봉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묻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주철초와 증철구가 서로 마주보는 눈길에는 가상하다는 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 젊은이의 소탈하고 호방한 기세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주철초는 주사위를 들고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이번의 결과는 7점 이 나왔다.
그리고 호비로 하여금 첫번째 패를 가지도록 하고 자기는 세번째 패를 가졌으
며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번 보더니 골패를 뒤집고 팍팍!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
에 잇따라 두 번을 내리쳤다.
뭇 사람이 어리둥절해졌으나 곧이어 '와!'하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원래 넉
장의 패가 둘로 나누어지며 앞뒷쪽의 패가 단정하게 탁자 표면에 나뉘어 박혔는
데 패와 탁자의 면의 높이가 똑같아 마치 목수가 탁자 위에 구멍을 파서 골패를
박아놓는다하더라도 이토록 평평하고 매끄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 패의 숫자
는 평범한 것으로서 앞쪽이 5이고 뒷쪽이 6이었다.
호비는 몸을 일으키고는 웃었다.
[주 큰나으리, 미안하게 되었구려. 내가 당신 것을 이기게 됐소이다!]
그리고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넉장의 패가 동시에
허공에서 부러졌다. 그 넉 장의 패 역시 놀랍게도 앞과 뒤 두 몫으로 나누어져
서 평평하고도 단정하게 탁자위에 박히면서 패와 탁자의 면이 똑같아지는 것이
었다.
주철초는 손의 힘을 이용하여 직접 내려쳤으며 그가 펼친 수법은 그의 본문의
장기인 응고력이었다. 이는 그가 수십 년간 고된 수련을 쌓은 외문(外門)의 경
공(硬功)이라 원래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호비가 허공
에다 패를 던져 역시 탁자 위에 박히도록 한 이 한 수의 재간은 더욱더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주철초는 잇따라 두 번을 내려쳤지만, 호비는
그저 한 번만 던졌을 뿐이었다.
뭇 사람들은 이 그만 놀라 어리둥절해져서는 갈채를 보내는 것마저도 잊고 있
었다.
주철초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로 봉투를 호비에게 내밀며 말했다.
[당신은 오늘 정말 운수대통이군.]
뭇 사람들은 그제서야 호비의 한 수의 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호비의 패
는 팔팔관(八八關)으로서 앞의 한 몫이 8점이고 뒤의 한 몫 역시 8점이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삼아 한번 한 것인데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소이까!]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봉투를 다시 되밀었다. 주철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말했다.
[호형제, 당신이 만약에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주가가 도박판에서 돈에 정
신이 팔려 품위가 없다는 것을 헐뜯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오. 이 한 수의 패로
만약 내가 이겼다면 내가 어찌 당신에게 예의를 차리겠소? 이것은 선무문(宣武
門) 안에 하나의 저택을 구입한 문서인데 별로 크지 는 않지만 그래도 천 평 정
도는 된다오.]
그러면서 봉투 안에서 싯누런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것은 한 장의 집문서
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깜짝 놀랐다. 이 한 판의 도박판은 그야말로
거창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선무문 안의 커다란 저택이라면 적어도 육칠천
냥의 은자가 나가는 것이었다.
주철초는 집문서를 호비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오늘 도신보살이 당신을 뒤따르기로 결정한 모양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소.
이제 도박판은 끝내도록 하지. 그리고 이 저택을 당신이 굳이 사양을 한다면 바
로 이 주가를 당신이 업수이 여기는 것이 될거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형제가 받지 않는다면 불손한 태도가 되겠군요. 그러면 집을 깨
끗이 정돈한 이후에 집들이 겸 여러 형님들을 모시고 한 판 크게 벌리도록 하겠
소이다.]
뭇 사람들은 와! 하니 박장대소를 하며 응대를 했다. 주철초는 두 손을 잡아
보이고는 곧장 증철구와 나갔다. 왕철악은 대사형이 삽시간에 한 채의 커다란
저택을 잃어버렸는데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나가 버리자 도리어 그가 가슴
을 졸이면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음모의 장본인
호비는 진내지와 왕철악 등에게 작별을 고하고 정영소와 함께 객점으로 돌아
왔다. 정영소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큰 부자가 되도록 운명이 정해진 모양이니 사양할래야 사양할 수
가 없게 되었네요. 의당진에서 훌륭한 밭과 땅을 갖게 되었는데 또 뜻밖에 경사
에 들어온 첫날 다시 한채의 커다란 저택을 얻었군요.]
호비는 천천히 말했다.
[그 주가는 꽤나 호방하더구려. 그가 비쩍 마르고 왜소하며 얼굴 생김새도 별
로 놀라운 데가 없는데 그 한 수의 응조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더군. 무관 중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오.]
정영소는 말했다.
[오라버니, 또 다시 한 채의 집을 땄는데 어디다 써먹지요? 직접 들어가 살겠
어요, 아니면 팔아치우겠어요?]
호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어쩌면 내일 다시 한 번 커다란 노름판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찌
팔 수가 있겠소? 도신보살이 한두 번이지 언제까지나 따라 줄 수는 없지 않겠
소?]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일어나 막 아침밥을 먹고 났을 때 점소이가 중년 사내
를 한 명 데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호 나으리, 이 나으리께서 찾는뎁쇼.]
호비는 이 사람이 하나의 묵경(墨鏡)을 쓰고 있으며 장포마괘의 옷차림이 산
뜻하고 손톱을 길게 기른 것이 품위가 있어 보였으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었다.
그 사람은 오른쪽 다리를 반쯤 구부리며 문안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호 대야님, 주대인께서 분부하시기를 호 대야님께서 여가가 있으면 한번 선
무문 안으로 들어가 그 집을 구경하는 것이 어떠냐고 여쭈라고 하시더군요. 소
인의 성은 전(全)가이며 바로 그 집의 관리인이랍니다.]
호비는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끼고 정영소에게 말했다.
[둘째 누이, 우리 한 번 구경가도록 합시다.]
그 전씨 성을 가진 관리인은 공손히 그들 두 사람을 선무문 안쪽으로 안내했
다.
호비와 정영소는 그 저택에 당도했다. 대문에는 붉은 칠이 되어 있었고, 누런
구리의 문장이 달려 있었으며 곳곳을 둘러보아도 빈틈없이 단아한 모습으로 모
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것같았다.
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전청(前廳), 후청(後廳), 편청(偏廳)에서부터 상방
(廂房), 화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빠진 것 없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었다.
전가라는 관리인이 말했다.
[호 대야님께서 만약 이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짐을 옮기도록 하시지요. 중대
인께서는 술자리를 마련하시어 오늘 밤 이곳에 와서 호 대야님께 이사하게 된
것을 축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대인과 왕대인 등도 모두 와서 집
들이 술을 얻어마시겠다고 하더군요.]
호비는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꽤 생각이 치밀하시구려. 그러면 모조리 모시도록 하시오.]
전가 성의 관리인은 말했다.
[소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소이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물러갔다.
정영소는 그가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이 저택은 아마도 이만 냥 은자도 더 나갈 것 같은데 이번 일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네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둘째 누이가 볼 때 어떤 점이 이상한 것 같소?]
정영소는 미소를 지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좌우지간에 누군가 오라버니를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 암암
리에 잇따라 커다란 선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호비는 그녀가 원자의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
를 가로저었다. 정영소는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우스개 소리를 한번 해 본 거예요. 오라버니께서는 마음이 넓고 호방하
시니 이와 같은 논밭이나 집들을 어찌 마음에 두겠어요? 이 선물을 한 사람은
결코 오라버니의 지기는 아니예요. 차라리 옥봉황을 하나 선물하는 것보다도 못
하지요. 이 선물은 그 사람이 만약 오라버니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당신을 끌어들이려는 음모일 거예요. 음, 그런데 그 누가 이토록 커다란 재부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호비는 갑자기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복대수가 아닐까?]
정영소는 다소곳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의 휘하에 많은 인물들을 망라하고 있
지만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오라버니와 견줄만한 사람이 있겠어요? 더군다나 마소
저가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면 역시 오라버니에게 한 번쯤 두터운 선물을 하
지 않겠어요? 그들은 오라버니의 성품이 강직한 것을 알고 가볍게 대가집의 재
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사람을 보내 도박판에서 슬쩍 진 것처
럼 해서 선물을 한 것이 틀림없을 거예요.]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음, 그들은 소식이 정말 빠르기도 하군. 우리가 경사로 들어온 첫 날로 즉시
나로 하여금 커다란 돈을 따도록 해주니 말이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우리가 이번에 변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중팔구 모든 일을 미리 안배해
놓고 우리들이 도래하기만 고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사실 왕철악
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런지는 몰라도 취영루에서 도박판을 벌이자 그 소식은
급히 전해지게 되었고 주철초가 집문서를 가지고 온 것이겠죠.]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째 누이의 짐작이 일리가 있는 것 같구려. 어젯밤 주철초는 오로지 나에게
지겠다는 뜻만을 가지고 있었소. 그때 내가 졌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놀음판을
벌이도록 했을 것이며 어찌되었든 간에 이겨서 내가 그 집을 가지도록 방법을
강구했을 거외다.]
정영소는 물었다.
[그렇다면 오라버니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참이죠?]
호비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밤 나는 다시 그들과 한바탕 도박판을 벌려서 그 저택을 잃을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하겠소. 제대로 될런지 두고 보구려.]
정영소는 웃었다.
[양쪽에서 모두 일부러 도박에 지려고 하니, 이번 판은 정말 재미있게 되겠군
요.]
이날 오후 신시 무렵이 되자 증철구는 사람을 시켜 한 탁자의 지극히 풍성한
어시연와석(魚翅燕窩席)을 보내왔다. 또한 그 전가라는 관리인은 하인들을 데리
고 대청의 등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히고, 잔치 분위기를 돋구도록 꾸미고 단장을
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왕철악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전후좌우를
한번 빙 돌아보더니 연신 이 저택이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칭찬의 말을 했
으며, 또한 호비가 어젯밤 도박판에서 정말 운수태통한 것을 비롯하여 노름판에
서 보여준 솜씨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했다.
호비는 왕철악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왕철악은 고지식해서 이 가운데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같다. 나중에 이 집
을 그에게 준다면 그의 두 사형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두고봐야겠구나. 그렇게
되면 정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한바탕 벌어지게 되겠군.)
얼마 후 주철초와 증철구 두 사형제가 도달하였고 저씨 성을 가진 무관, 상관
성을 가진 무관, 섭가 성을 가진 세 사람이 당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진내
지가 웃으면서 들어 오더니 입을 열었다.
[호형제, 내가 형제를 위해 두 분의 친구를 데리고 왔소. 어디 누구인지 짐작
해 보시오.]
그리고 보니 그의 등 뒤로 세 사람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는데 맨 뒤에 서 있
는 사람은 바로 어제 보았던 은중상이었다. 어젯밤의 그 일을 당하고서도 그가
방문을 하는 것을 보고 호비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의 두 사람은 용모가 비슷했는데 모두 다 혈기가 왕성해 보이는 노인들
이었는데 보기에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라 호비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호비
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지극히 굳건한 것을 보고 즉시 깨닫는 바가 있어 서둘러
절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왕 큰 나으리와 왕 둘째 나으리, 두 분 선배님들께서 왕림하셨군요. 정말 뜻
밖입니다. 상가보에서 헤어진 후 두 분의 기력은 더욱더 건강하시고 왕성해지셨
군요.]
원래 그 두 사람은 팔괘문의 왕검영과 왕검걸 형제였다.
열두 명의 사람들은 즐겁고 시원시원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다 강호에서 활약하고 있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였다.
은중상은 과거 상가보에서 뭇 사람들이 어떻게 무쇠로 만들어진 대청에 갇히
게 되었고, 불길에 타서 죽을 위기를 당할 판국에 어떻게 호비가 기지와 용기로
써 몸을 돌보지 않고 구해준 덕택에 살아나게 되었다는 등의 일을 털어놓았다.
진내지와 주철초 등은 그 이야기를 듣고 더욱 더 칭찬의 말을 해 마지 않았
다. 정영소는 호수와 같은 눈을 들고는 묵묵히 다정스런 눈빛으로 호비를 바라
보았다. 그 눈빛은 그와 같은 영웅호걸다운 행동을 왜 아직까지도 자기에게 말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눈치 같았다.
술자리가 끝나자 등근 보름달이 환히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날은
바로 팔월 초열흘이라 비록 이미 입추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날씨가 무더
운 편이라 사람들은 이 절기를 계화증(桂花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가 성의 관리인은 화원의 정자에 과일 등을 차려놓고 여러사람들이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더위를 식히도록 했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선 차를 한잔 마신 다음 다시 한판 크게 벌려봅시다.]
뭇 사람들은 우렁찬 음성으로 응대를 했으며, 모두들 화원의 시원한 정자 안
으로 들어와 앉았다.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낭하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
렸으며 누군가 관리인과 심한 언쟁을 벌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관리인이 어이쿠!
하는 외마디를 내질렀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분명 그 누구에
게 걷어차여 나가떨어진 모양이었다.
곧이어 한 명의 철탑과 같은 대한(大漢)이 나는 듯 정자 안으로 뛰어들더니
다짜고짜 손을 뻗쳐 탁자를 한번 내려치자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찻잔과
과일 쟁반 등이 마구 땅바닥에 엎어졌다.
그 대한은 주철초를 손가락 질하며 거칠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주형,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오. 이 저택은 내가 당신에게 일만 이천 냥의 은
자를 받고 팔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반은 팔고 반은 선물한 것이었소. 주형의
체면을 보아 이 형제가 잠자코 있었던 것이지만 뜻밖에도 눈깜짝할 사이에 당신
은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으니 나로서는 손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
소. 여러분들 한 번 말씀을 해보시구려. 이 덕(德)가가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겠소?]
주철초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돈이 부족하다면 좋게 말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곳은 친한 친구의
집인데 어디라고 와서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대한은 원래 검은 얼굴이 더욱 검붉게 부풀어 올라 다시 탁자를 후려치려고
했다.
주철초는 왼손을 구부려서 당기듯 그의 두 손목을 움켜잡았다. 주철초의 체구
는 왜소한 편이라 몸을 일으키자 겨우 그 대한의 어깨죽지 밖에 미치지 않았지
만 그 대한은 두 손을 잡히자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집게에 찝힌듯 꼼짝을 하지
못했다.
주철초는 그를 끌고 정자 밖으로 걸어나가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그에게 몇 마
디의 말을 했다.
그 대한은 그래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주철초는 성이 난
듯 두 팔에 힘을 주고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그 대한은 그대로 서 있지를 못하
고 뒤로 몇 걸음 밀려서 한 그루 매화나무에 부딪히고는 우지끈! 뚝! 하는 소리
와 함께 커다란 나무가 뽑히며 나무와 함께 뒤엉켜 쓰러졌다.
주철초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얼뜨기 같은 덕가 놈아! 바깥에 나가서 기다리도록 해라. 정히 죽음이 두
렵지 않다면 다시 한번 들어와서 씨부려 봐라!]
그 대한은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연신 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나갔다.
증철구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얼뜨기는 종종 나타나 흥을 깨뜨리는데 대사형이 진작 한번 패줄걸 그랬
구려.]
주철초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씨가 그런대로 온순한 편이라서 내가 그와같이 다루지를 않
았다네. 그건 그렇고 호형, 불초가 못난 꼴을 보여주어 웃었겠소.]
호비는 깍듯이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저택을 그가 싸게 팔았다면 이 형제가 얼마간
의 은자를 더 보태주도록 하지요.]
주철초는 재빨리 말했다.
[호형,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이번 일은 이 형제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호형은 신경을 쓰지 마시구려. 그러나 그 경망스러운 작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호형의 비위를 거슬린 것 같구려. 그는 호형의 영웅호걸다운 풍모를 모르고 그
와 같은 짓을 했으나 지금쯤은 실로 후회막급할 것이외다. 이 형제는 그를 불러
호형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술을 권하도록 하고 사과를 올리도록 할 것이니 이
형제와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봐서 호형이 이번 만큼은 따지지 않은
것이 어떻겠소?]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과라니, 들먹이지도 마십시오. 주형의 친구라면 그를 함께 불러서 술을 같
이 들도록 하지요.]
주철초는 몸을 일으켜서 말했다.
[호형은 젊은 영웅호걸로서 우리들은 모두 진심으로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귀
고자 하는 바이외다. 그 얼뜨기 놈의 잘못을 우리들 모두가 다 잘알고 있소이
다. 호형은 대인의 커다란 아량으로서 아무쪼록 마음에 두지 않기를 바라오.]
호비는 겸손히 말했다.
[그까짓 조그만 일을 왜 자꾸 입에 담으십니까? 주형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
니다.]
주철초는 허리를 구부려 보이고 말했다.
[이 형제가 먼저 사과를 드리는 바이외다.]
증철구와 진내지는 동시에 몸을 일으켜서 읍을 하며 말했다.
[우리 모두 사의를 표하는 바이오.]
호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환례를 했다. 주철초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가 가서 그 얼간이를 불러와 호형에게 사과를 하도록 하리다.]
그리고 나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호비는 정영소와 서로 한번 쳐다보며 똑같이 생각했다.
(그 얼뜨기라는 사람은 비록 행동이 거칠기는 했지만 주철초가 이와 같이 사
과를 하다니 너무나 정중하지 않은가? 그 거무티티한 대한은 어떤 내력을 지니
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화원으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주
철구는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 이 얼뜨기 친구야! 빨리 호형에게 석 잔의 술로 경의를 표하도록 하게
나. 자네는 그야말로 싸우지 않으면 사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꼴사납게 되
기는 했지만 호형은 이미 자네를 용서하겠다고 응낙을 했네. 그는 사내 대장부
로서 한마디하면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는 호걸이니 오늘은 자네와 같은 얼뜨
기가 평생 처음으로 덕을 보는 날일세.]
호비는 주철초의 뒤를 따라오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안색이 일변하여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표연히 정자에서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 사람의
퇴로를 막고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하여 날카롭게 말했다.
[주씨 양반, 당신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오? 내가 만약 이 사람을 친히
죽이지 못한다면 이 호비는 그야말로 헛되이 하늘을 이고 땅에 두 발을 딛고 있
는 졸장부라고 칭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오.]
화원으로 들어온 그 사람은 바로 광동성 불산진에서 종아사 일가족을 몰살한
장본인인 오호문의 장문인 봉천남이었다.
호비는 이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원래 주철초의 안배로
함정을 만들어 먼저 한 명의 얼뜨기를 시켜 소란을 피우도록 한 이후 호비가 용
서를 하겠다는 말을 하도록 유도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비는 종아사 가족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상황을 떠올리자 뜨거운 피가 울컥 솟아오르며 두 눈에서는
그야말로 불이라도 뻗쳐나올 것 같았다.
주철초는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호형, 내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지. 의당진의 전답과 가옥은 모두 다 이 못난
이가 선물을 한 것이라네. 그리고 이 저택과 가구들 역시 모두 다 이 얼뜨기가
산 것이라오. 그는 당신에게 사과하려고 하는 마음은 지극히 성실하고도 완곡하
기 이를데 없다오. 사내 대장부라면 물론 뻗칠 줄도 알아야 하겠지만 구부릴 줄
도 알아야하는 것이 아니겠소? 과거의 조그만 감정을 꽁하니 마음에 둘 필요가
어디 있겠소? 봉노대(鳳老大), 빨리 호형에게 사과를 하도록 하시오.]
호비는 봉천남이 두 손으로 포권을 하고 절을 하려고 하는 뜻을 비추자 두 팔
을 벌리고 말했다.
[잠깐!]
그리고 정영소에게 말했다.
[둘째 누이, 이리 오시오!]
정영소는 재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호
비는 낭랑히 소리쳤다.
[여러분! 실례를 했소. 이 호가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따지는 것은 오직 의
기투합할 수 있는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하느냐 하는 것이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도박을 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못되며, 설사 시정(市井)의 소인잡배들이라 하
더라도 서로 모여서 술을 마시며 도박판을 벌리지 않소? 사내대장부가 의리를
앞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은으로 이 호아무개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다니 그
야말로 이 호아무개의 인품을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것으로 보았구려.]
증철구는 너스레를 떨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하! 호형은 오해를 하셨구려. 봉노대가 조그만 예물을 드리는 것은 그저
약간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지 어찌 노형을 가볍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
소?]
호비는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봉가는 광동성에서 거들먹거리고 살면서도 이웃집의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손에 넣기 위해 늙고 젊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일가족을 모조리 비명횡사하도
록 만들었소. 이 호비는 종씨 집안과 친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고 지내는 사이
도 아니지만 이왕 그 일에 손을 댄 이상 이 봉가라는 악당과는 맹세코 같은 하
늘에서는 밥을 빌어먹지 않겠소. 만약에 여러 친구분들에게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 또한 부득이한 일이니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양해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오.
주형, 이 집문서는 거두어 주시오!]
그리고 품속에서 집문서가 든 봉투를 끄집어내서 가볍게 한번 흔들자 그 봉투
는 곧장 주철초에게 날아갔다. 주철초는 부득이 받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그렇
다고 다시 되돌려주자니 자기의 재간으로서는 그렇게 알맞게 그 봉투를 그의 얼
굴 앞으로 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호비는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경사의 중지(重地)이고 천자가 발을 딛고 있는 지방이며, 또한 저 봉
가가 얼마나 많은 절친한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호비는 오늘밤 목
숨을 떼어 붙이더라도 그를 한번 건드려 볼 참이오. 이 호가와 절친한 친구라면
막지를 마시고, 저 봉가와 절친한 친구라면 모두들 함께 덤비시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북경의 성안
에는 고수들이 구름떼처럼 많고, 봉천남이 감히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보면 자연
히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봉가의 뒤에서 암암
리에 도와주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지 왕씨 형제와 주철초 및 주씨 두
사형제만 하더라도 상대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극도
로 분개하여 이미 생사를 도외시하고 있었다.
주철초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호형이 그렇게 체면을 세우기가 어렵다면 내가 조정자 노릇을 할 수
가 없구려. 봉노대, 당신은 그만 가보시오. 우리는 이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합시다.]
호비는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봉천남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그가 이 자리
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호비는 대뜸 두 손을 교차시키며 곧장 봉
천남에게 달려들었다.
주철초는 눈살을 찌푸리며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너무나 지나치지 않소!]
그리고 왼팔을 옆으로 뻗쳐 막으려 들었고, 오른손은 획 뒤집어 음장(陰掌)을
이루어 암암리에 도예구우미(倒曳九牛尾)라는 일초의 금나수를 갈무리하고서 호
비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들었다.
호비가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도우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던 터
였지만 이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들이 나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예의를 깎듯이 지켰으니 나는 결코 먼저
손을 쓰지 않겠다.)
호비는 주철초가 손을 뻗쳐 감아드는 것을 보고는 피하지 않
고 그가 자신의 완골(腕骨)을 거머쥐고 자기의 맥문을 움켜잡도록 했다.
주철초는 크게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내지와 봉노대 등은 이 녀석의 재간을 너무나 하늘처럼
부풀려 과장을 했었구나. 진작 이 정도라는 것을 알았으면 구태여 그토록 좋
은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었는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말리는 투로 이야기했다.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는 급히 기운을 돋구어 호비를 끌어당기려고 했는데 별안간 호비의 완
골이 무쇠처럼 딱딱해지면서 자신을 끌어들이는 힘이 강맹하게 밀려들어 맞부딪
쳐왔다. 주철초는 그만 제대로 서지를 못하고 손을 놓치며 휘청하니 앞으로 세
걸음을 고꾸라지듯 달려나갔다.
이와 같은 금나수로 당기고 치는 것은 응조안행문에서 가장 자랑하는 무공이
었지만 호비는 이 무공을 통하여 일문의 장문대사형을 대패시킨 셈이었다.
두 사람이 일초를 교환한 것은 순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봉천남은 어느덧
잽싸게 몸을 돌려 바깥쪽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호비는 일학충천의 신법을 펼
쳐 달려들며 질풍같이 일장을 쪼개내자 봉천남은 손을 뒤로 돌리며 막았다.
증철구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기분좋게 술 한잔 마시고 도박을 할 판인데 서로 얼굴을 붉혀서야 쓰겠소?]
그러면서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독수리의 발톱, 즉 응조(鷹爪)처럼 구부리
고서 호비의 등뒤을 움켜쥐려고 들었다. 그는 마치 호의를 가지고 싸움을 말리
는 척 하고 있었지만 기실은 살수를 펼치고 있었다.
그래도 호비는 여전히 봉천남에 대한 공격을 멈추려 하지 않았고, 등 뒤에서
증철구가 기습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모르는 듯하자 섭가라는 자는 호비에게 입
은 은덕을 생각하고는 참을 수가 없는듯 부르짖었다.
년형, 조심하시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증철구의 다섯 손가락이 어느덧 호비의 등에 닿게 되었
다. 그러나 손가락이 닿는 곳은 마치 한조각 질기고 두터운 소가죽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호비는 등을 한 번 움찔하면서 그의 다섯 손가락을 곧바로
퉁겨내는 것이 아닌가?
주철초와 증철구 두 사람이 호비를 제지하지 못하자 은중상은 싸움을 말리는
시늉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러 호비의 안면을 후려치려
고 들었다.
호비는 고개를 숙이고 왼손으로 그의 등심에 기를 모아 '이얍!' 하고 기합을
지르자 은중상의 몸뚱아리는 곧장 날아가 봉천남의 등으로 부딪쳐 갔다.
물론 호비는 봉천남과 부딪치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일이 그
렇게 되어 봉천남이 몸을 날려 피한다면 은중상의 머리통은 돌로 만들어진 가산
(假山)에 부딪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처지라 봉천남은 반드시 손을 뻗쳐 구원
을 해야 될 형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봉천남은 이곳에서 도망칠 기회를
놓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과연 봉천남은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간사하기 이를데 없는 자였다. 은중
상이 애써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다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은중상의 생사
를 돌보지 않고 도리어 날아오는 탄력을 빌어 도망치려고 왼발을 그의 어깨에
갖다 대며 뒤로 빙글 돌며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
께 은중상은 가산에 부딪치면서 머리에 선혈이 낭자한 채 즉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일대의 고수인데 어찌 봉천남의 이 한수가 가
증스러울 정도로 비열하고 치사한 것을 모르겠는가?
왕씨 형제는 내심 손을 쓰고자 했으나 호비의 뛰어난 무공을 꺼려하며 혹시
또다시 잘못 건드렸다가 큰코 다치기가 십상인지라 순간적으로 망설이고 있었
다. 그러던 차인데 봉천남이 오로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가기에 급급
한 나머지 도리어 친구를 해치자 왕씨 형제 두 사람은 멸시의 빛을 띠우며 서로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는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간악한 도적이 담장 밖으로 도망친다면 한바탕 더 수고를 해야 할 것이
다. 더군다나 담장 밖에는 그의 조력자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호비는 봉천남이 담장 위에 내려서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즉시 몸을
솟구쳐 막으려고 했다.
봉천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 담장 위에 올라섰는데 갑자기 눈앞에 홀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청명한 달빛 아래 그 모습은 확연했으며 그는 바로 철천지원수인 호비의 신형
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비수를 거머쥔 채 아래에서 위로 치켜 휘두르며 호비의
아랫배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호비는 급히 왼발을 들어 발끝으로 그의 손목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 비수는
곧장 날아오르더니 담장 밖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봉천남의 손 씀씀이 역시 매섭기 이를데 없었다. 담장 위의 한 자 남
짓한 곳에서 서로 근접전을 벌이자 초식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비수로 찌르는
데 실패하자 봉천남은 잇따라 왼쪽 주먹을 격출했다.
호비는 더이상 반격을 하지 않고 가슴을 내밀어 내경(內勁)을 돋구어 그의 주
먹을 맞받았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봉천남은 도리어 자기의 주먹에 반탄력이
실려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질겁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담장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호비는 즉시 뒤따라 내려와 발로 목덜미를 밟으려고 했다. 봉천남은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별안간 몸을 뒹굴며 두 팔을 땅에 짚으며 솟구쳐 올라 호비의 발
을 피하며 담장 위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호비는 이번에 그가 다시 담장 위에
내려 서려는 것을 보고 양팔을 날개짓하며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두둥
실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봉천남보다 몇자 정도 더 솟아오르게 되
었고 아래로 몸을 떨구면서 봉천남의 어깨죽지에 걸터앉아 두 다리로 그의 목을
끼우고 힘을 주었다. 봉천남은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끼고 이제는 죽었구나 하
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이 간악한 도적아! 오늘 너는 온갖 못된 짓의 죄값을 받게 되었구나!]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 그의 정수리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신출귀몰하는 소녀
별안간 등 뒤에서 파공성이 일며 한 사람이 간드러진 음성으로 호통을 내질렀
다.
[손에 사정을 두어요!]
호통소리와 동시에 칼날은 어느덧 호비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
가? 날아오는 칼의 기세가 너무나 빨라 호비는 미처 막지를 못하고 급히 몸을
돌리며 뒤에서 찔러오는 칼을 피한 후 뒤에서 공격을 하는 자의 팔목을 움켜쥐
려고 했다. 그 사람의 솜씨는 민첩하기 이를데 없어 한번 찔러 적중하지 못하자
즉시 초식을 변화시켜 날카로운 비수로 신속하게 휙휙! 하고 두 번 칼질을 하여
호비의 양쪽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호비는 부득이 몸을 솟구쳐 봉천남의 어깨를 밀쳐내며 앞쪽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림자처럼 따라오며 연신 공격을 해댔다.
호비는 노해 부르짖었다.
[원소저, 어째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손에 비수를 들고 있는 그 사람은 자색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푸른
두건을 쓴 바로 원자의였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성이 난듯 하기도 하고 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호 오라버니의 공수입백인이라는 무공을 가르침 받고자 해요!]
호비는 재빨리 말했다.
[새털같은 날들이 앞으로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오!]
그리고는 몸을 솟구쳐 다시 봉천남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원자의는 민
첩하게 몸을 짓쳐들어오면서 비수로 곧장 그의 목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이 일초의 공격에 호비는 부득이 손을 써서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별수없이 팔굽을 내려뜨리고 뒤로 후려치는 동시에 손을 비스듬히 하여 그녀의
어깨로 쪼개갔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맞서 십여 초를 교환
하기에 이르렀지만 칼빛이 난무하고 손 그림자가 난무하는 가운데 매 일초일식
이 보는 사람의 눈을 휘둥그레 지도록 만들었다.
주철초와 증철구, 그리고 왕씨 형제 등은 원자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녀
가 갑자기 나타나 경각에 달린 봉천남의 목숨을 구해냈으며 더군다나 내뻗는 초
식이 모두 호비와 맞수를 이루는 것을 보고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두 사람의 손
씀씀이가 너무 빨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입을 벌린 채 다물
지를 못했다.
호비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어느덧 담장위로 올라서더니 다
시 담장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비수를 어지럽게 휘두르며 공격을 해왔으며 모든 초식이 호비의 요
해를 벗어나지 않았고, 손씀씀이가 매서워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판의 승부인
것 같았다. 호비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공격을 막
아내고 있었다. 순간 봉천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호씨 집안의 소형제, 이 늙은 형님은 이만 실례하오. 우리 다음에 다
시 만납시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는데 어두운 밤중에 멀리서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는 마치 부엉이가 우는 소리 같았다.
호비는 대노해서 급히 걸음을 옮겨 뛰쫓아가려고 했지만 원자의가 감아들듯
손을 쓰는 바람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는 더욱 울화가 치밀어 호통을 내질
렀다.
[원소저! 불초는 당신과 아무 원한도 없고 악의도 없는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하얀 광채가 번쩍이며 비수가 어느덧 그의 몸에 닿
으려 했다.
고수가 초식을 교환함에 있어서 생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결정되는 판이라 절
대로 조급하게 서두를 수가 없었다. 호비의 무공은 겨우 원자의보다 반수 정도
뛰어난 정도였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자신은 맨손이고 상대는 비수를 들고 있
어 막상막하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호비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서 또다시 원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노여움
에 정신이 헛갈리게 되어 왼쪽 어깨를 비수에 찔리고 말았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옷자락을 찢으며 어깨를 뚫게 되었다. 만약 원
자의가 그 가세를 빌어 손을 내려치기만 한다면 호비는 어깨에 중상을 입을 판
국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손목을 비스듬히 뒤집으며 도리어 비수를 위
로 쳐들었다.
호비는 어깨가 섬뜩한 것을 느꼈을 뿐 조금도 상처를 입은 기색을 느낄 수 없
게 되자 속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너는 또 왜 손을 쓰는데 사정을 두는 것이지?)
원자의는 깔깔거리며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비수를 거꾸로 들더니 그에게
던지며 허리에서 연편을 뽑아들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우리들은 진짜 칼에 진짜 창으로 겨루어 보도록 해요.]
호비가 비수를 받아들려는 순간 갑자기 담장 위에서 정영소가 부르짖었다.
[자! 이 칼을 쓰세요!]
그리고는 칼을 던져주었다. 원래 정영소는 그가 맨손인 것을 보자 혹시나 불
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까봐 미리 방안으로 달려가 그의 무기를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원자의는 부르짖었다.
[정말 알뜰한 누이동생이군요!]
그리고는 연편을 휘둘러 담장 위로 걸려고 하자 정영소는 몸을 날려 담장에서
뛰어 내렸다. 순간 원자의는 연편을 담장 위에 걸어 힘을 빌려 마치 한 마리의
커다란 새처럼 날아올랐다.
달빛 아래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이 마치 선녀가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
녀는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휙! 하니 채찍을 휘둘러 정영소의 등심을 노리고
공격하면서 부르짖었다.
[정씨 집 누이, 나의 삼초를 받아봐요!]
정영소는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고개를 숙여 채찍을 한 번
피하기는 했지만 원자의가 펼치는 초식의 변화는 기이하도록 빨라 좌우상하로
자유자재로 선회하면서 순식간에 그녀를 채찍의 그림자 가운데 가두는 것이었
다.
호비는 정영소가 결코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 봉천남을 추살하려 한다면 원자의가 정영소에게 살수를 쓸지 모른
다는 두려움이 앞서 즉시 채찍의 그림자 안으로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며 부르짖
었다.
[당신이 겨루고자 한다면 즉시 겨루도록 하지!]
원자의는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애틋한 오라비네요!]
그녀는 연편을 휘둘러 호비의 칼을 감으려 들었다.
두 사람은 각기 손에 맞는 무기를 든 셈이었고, 이제 정세는 조금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호비가 펼친 것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호가도법(胡家刀法)
으로 강맹한 가운데 부드러움이 있고 부드러움 가운데 강맹함이 있으며, 신속하
고 민첩할때는 마치 뇌성벽력이 몰아치는듯 하고, 침착하고 온건할 때는 마치
태산이 우뚝 버티고 선듯 하였다.
원자의의 편법(鞭法) 역시 종횡으로 민활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명가의 풍모
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삼십여 초를 겨루었다. 채찍은 마치 영사(靈蛇)가 세차게
날아오르는 기세로 휘둘러지고 있었고, 칼은 마치 맹호가 덮쳐들듯 이리 찍고
저리 찍곤 했다.
진내지와 주철초, 왕씨 형제 등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며
생각을 했다.
(저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저토록 깊은 무공의 조예를 쌓다니!)
사실 두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겨루고 있었지만 단지 자기 실력의 육칠 성의
무공만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호비는 원자의가 매번 위험한 고비에 일부러 살
수를 펼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자신도 칼을 휘두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손에
사정을 두고 양보를 했다. 그는 싸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나를 대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도일까?)
조금전 주철초와 증철구, 그리고 은중상 세 사람이 호비를 상대로 손을 썼으
나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무관들은 자신들도 일대 일로 싸워
서는 호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 원자의가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보자 좋은 기회라고 판단을 했는지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는 싸움을 구경하는 척하며 주위에 슬금슬금 접근하
여 일시에 호비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릇 무학의 고수라면 손을 쓸 때도 모든 신체기관을 예민하게 움직이며 눈으
로는 사방을 살펴보고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었다. 주철초 등이 그러한 태도를
취하자 호비는 내심 초조하게 생각했다.
(저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나는 그럭저럭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
겠지만 둘째 누이는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힐끗 보니 정영소는 한쪽 구석에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바
라보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고 있어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원소저를 물리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그는 휘익! 하니 잇따라 세 번의 칼을 휘둘렀다. 이는
모두 호가도법에서 가장 무서운 살초(殺招)였다.
원자의는 한 번은 피하고 두 번은 막더니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도법이네요!]
그리고는 갑자기 기다란 채찍을 돌려 자신의 허리로 찔러오는 칼을 막지 않고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라는 일초를 펼쳐 증철구, 주철초, 진내지 세 사람의 안
면을 각기 찍으려 들었다.
이 일초는 너무나 느닷없는 의외의 공격이라 세 사람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
다. 그러나 증철구는 물러서는 것이 한걸음 늦어 채찍이 이마를 스치며 대뜸 한
가닥 선혈이 얼굴에 그어졌다.
바로 이때 호비의 칼은 호가도법의 절초를 펼치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녀의
허리와 한 자 정도 간격 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녀가 자기를 도와 채찍을 휘
둘러 적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즉시 팔에 내력을 쏟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
와 같이 다급한 순간에 무기를 마치 허공에 못박듯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적을
찌르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원자의는 고개를 넌즈시 쳐들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며 호비에게 물었
다.
[당신은 왜 나를 찌르지 않나요?]
순간 증철구가 호비와 원자의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부르짖었다.
[정말 애틋한 오라버니와 누이로군!]
그 말투는 큰칼을 들고 칼춤을 추며 망나니들이 희롱을 하는 듯한 말투와 비
슷했다.
원자의는 아리따운 얼굴을 굳히더니 채찍을거두어 허리에 감고는 호비에게 말
했다.
[호 오라버니, 이 몇 분의 영웅호걸들을 저에게 소개를 해주세요.]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이 분은 팔극권의 장문인인 진내지 진 나으리이시고, 이분은 응조안행
문의 장문인인 주철초 주 나으리이시며.......]
그는 이어 왕검영, 왕검걸 형제와 증철구, 왕철악 등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왕걸걸은 은중상을 부축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
자 끊임없이 봉천남을 욕하면서 그와 같이 몰염치하고 비열한 자에 대해서 우리
형제들은 참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라는 등 욕을 해대고 있었다.
호비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나서 맨마지막으로 원자의를 소개했다.
[이분은 원소저이지요.]
그리고는 내심 생각하는 바가 있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원소저는 소림 위타문과 광서 팔선검, 호남 역가만의 구룡파 이 세 개 문
파의 총장문인이지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일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비가 거짓말을 할 리
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자의는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는 좀더 명백하게 말씀을 하시지 못했군요. 한단부( 鄲府)의 곤
륜도(崑崙刀), 창덕부(彰德府)의 천강검(天 劍), 보정부(保定府)의 나타권(
拳) 이 세 문파에서도 불초를 장문인으로 모시고 있다오.]
호비는 탄성을 발했다.
[아! 원래 소저는 또 세 문파의 장문직을 영광스럽게 이어받고 있었구려. 축
하하오. 축하해!]
원자의는 웃었다.
[고마와요. 원래 나는 경사로 오면서 열 개 문파의 총장문이 되려고 했어요.
그러나 호북 무당산의 무청자(無靑子) 도장은 내가 이길 수가 없고, 하남 소림
사의 대지선사(大智禪師) 역시 감히 나로서는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
런데 마침 이곳에 세 분의 장문인이 계시군요. 이봐요, 저 노사! 당신네 새북
(塞北) 뇌전문(雷電門)의 장문노사(掌門老師)인 마노부자(麻老夫子)는 북경에
도달했나요?]
뇌진당을 쓰는 저가라는 성을 가진 무사는 이름이 외자로서 굉(轟)이었는데
그녀가 자기의 사부에 관해 묻는 말을 듣고는 대답을 했다.
[가시께서는 언제나 내지(內地)로 들어오는 일이 없으며 무슨 볼일이 있으면
제자들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한다오.]
원자의는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대사형이니 반 장문인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이렇게
하지요. 나는 오늘 밤 세 개 반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겠어요. 열 가문의 총장문
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아홉문파 반의 장문인 노릇을 한다면 그럭저럭 구색을 갖
추는 것은 아니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 주철초 등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진내지는 포권을 하고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림 위타문의 장문인 만학성 만형은 불초와 수십년 간 교분을 가진
터인데 어떻게 하여 소저에게 장문인 자리를 전수했는지 모르겠구려.]
원자의는 말했다.
[만 나으리는 돌아가셨어요. 그의 사제 유학진이 나를 이길수 없고 세 명의
제자들은 모두 밥통들이었지요. 우리들은 주먹과 발, 그리고 칼 및 창을 써서
고하를 겨루었는데 장문인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진노사, 나는
먼저 당신의 팔극권을 가르침 받고, 다시 주노사와 왕노사, 저노사 등 세 분들
과 초식을 겨루어 보도록 하겠어요. 내가 아홉 문파 반의 장문인이 되어 천하장
문인 대회에 참가한다면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몇 마디의 말은 주철초와 진내지, 왕검영, 저굉 등 고수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가 이와 같이 도전을 하자 주철초와 왕검영 등은 모두
천하에서 명성이 드높은 고수들이라 설사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
도 위축되어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주철초는 입을 열었다.
[우리 응조안행문은 선사께서 세상을 떠난신 이후 제자들이 하나 같이 그릇이
되지 못해 선사의 무공 가운데 일성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오. 소저가 가르침
을 베풀어주시겠다면 귀파에서는 위아래 모든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길 것이외
다. 다만 사형제들이 모두 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단지 선사가 전해준 무공만
약간 연마했을 뿐 다른 문파의 무공은 연마하지 못했다오.]
원자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만약에 내가 응조안행문의 무공을 모른다면 어찌 귀파의
장문인이 되겠어요? 주노사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을 하셔도 될 거예요.]
주철초와 증철구 등은 모두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서로 쳐다보
며 생각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고강한 고수들을 상대보았지만 감히 응조안행문을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 너는 누구의 세력을 믿고 이 북경성 안으로 들어와서 소란을 피
우겠다는 것이냐!)
그들은 봉천남에게 후한 선물을 받고 봉천남을 위해 분규를 해결하고자 나섰
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흥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신들과는 아
무 상관이 없는 처지라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형편이었다. 헌데 이 아가씨가
장문인 자리를 빼앗겠다고 나서니 이토록 자기들을 업수이 여기고 머리 위로 기
어오르려고 하는데 어찌 상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진내지는 오늘 밤 반드시 손을 쓰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
으나 방금전 원자의의 무공이 호비와 백중지세를 이루는 것을 보았고, 자기가
또한 호비에게 패한 적이 있으므로 슬쩍 요령을 부려 그녀가 먼저 주철초와 왕
검영 등 여러 사람과 상대하도록 한 연후에 기운이 빠졌을 때 자기가 나서서 득
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입을 열었다.
[주노사나 왕노사의 무공이 이 형제보다 훨씬 깊은 편이니 형제는 뒤에 숨었
다가 나중에 나서도록 하지.]
원자의는 그의 심사를 꿰뚫어 보는듯 냉소를 흘리며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의 무공은 그들보다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먼저 약한 사람을 골라 싸워 힘을 남겨 강한 사람을 상대해
야겠어요. 바깥의 풀밭 위에는 미끄러우니 우리들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 겨루기
로 해요. 자, 올라가지요!]
그러더니 몸을 흔들하며 정자 안으로 들어가 두 발을 나란히 세우고 어깨를
약간 내려뜨려 몸을 구부정하게 만들며 손가락을 모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후 아랫배 앞에 모아 받쳐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는 바로 팔극권의 기수식
(起手式)인 회중포월(懷中抱月)이었다.
진내지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본파의 무공은 그다지 널리 유행되거나 전수되지 않았는데 이 회중포월이라
는 일초는 왼쪽 어깨를 낮추고 오른쪽 어깨를 높이고, 왼손은 비스듬히 놓이는
반면에 오른손은 똑바로 놓는 것이 정확하게 초식을 구사하는구나. 이 소저는
틀림없이 본파의 심전(心傳)을 받은 모양인데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그리고는 호비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다시 생각했다.
(그날 내가 그와 손을 쓸 때 물론 그는 이러한 기수식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본문의 권법을 논할 때에도 이 일초를 들먹이지 않았으니 그가 이 여자에
게 전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속으로 의아하게 여겼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탁자와 걸상들을 걸치적거리지 않도록 치우리다.]
원자의는 그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진노사의 그 말은 틀렸소이다. 본문의 권법은 [번수( 手), 설완( 腕), 촌간
(寸懇), 두전( 展)]은 팔극(八極)이고, [누(樓), 타(打), 등(騰), 봉(封), 척(
), 등( ), 소(掃), 괘(卦)] 등이 팔식(八式)이며, [섬(閃), 장(長), 약(躍), 타
( ), 요(拗), 절(切), 폐(閉), 발(撥)]이 팔법(八法)으로 변화를 하며 49로의
팔극권이 따지는 것은 잔재주로 이리저리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만약
탁자와 의자들이 걸치적거린다고 말을 하니 한심하군요. 진짜로 적과 목숨을 걸
고 싸울 때 설마하니 그대는 적에게 의자와 탁자를 먼저 치우라고 할 건가요?]
그녀의 이와 같은 말은 본문의 장문인이 아랫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투였고,
팔극권의 여러가지 방법과 비결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진내지는 얼굴이 붉어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정자 안으로 뛰
어들어 추산식(推山式)이라는 일초를 펼치며 왼손을 밀어냈다.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일초는 좋지 않아요.]
그리고는 그것을 막지 않고 왼쪽으로 한 걸음 내딛자 진내지의 몸 앞에는 탁
자가 가로막혀 그 일장은 뻗쳐도 그녀의 몸에 닿지 않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초식의 변화가 신속하여 추보번면추(推步 미面錘), 요자번신( 子
身), 벽괘장(劈卦掌) 등 잇따라 세 가지 절초를 펼쳐냈다.
원자의는 오른발을 살짝 들고 왼팔을 오른팔 위로 얹어 교차시키고 둥글게 휘
두르는가 하면 휙! 하니 양권(陽拳)을 이루었다가 번개처럼 재빨리 음권(陰拳)
으로 때려가는 데 바로 팔극권 가운데 제 44식인 쌍타기문(雙打奇門)이었다.
이는 원래 진내지가 자랑하고 있는 일초였지만 원자의가 너무나도 신속하게
펼쳤기 때문에 진내지는 미처 방비할 사이없이 급히 몸을 비스듬히 피하려다 그
만 쿵! 하니 탁자에 부딪혀 그릇들이 엉망이 되며 낭패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원자의는 웃으면서 외쳤다.
[조심하세요!]
그리고는 좌우로 몸을 감아돌리며 좌충우돌하듯 공격을 하자 팔극권의 예리한
공세가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진내지는 애써 막아내려고 했지만 연신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녀의 초식은
본문의 권법이 틀림없지만 갑자기 빨라졌다가 갑자기 느려지고, 좌우로 몸을 비
스듬히 기울여 공격을 하는 것이 본문의 무공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원자의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막기만 할뿐 어째서 공격을 하지 않나요? 당신이 배운 팔극권
은 그저 얻어맞기만 할줄 아는 권법이 아니란 말이예요!]
진내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을 해댔다.
[나이 어린 계집애가 건방지군!]
그리고는 청룡출수(靑龍出水)라는 초식을 펼쳐 왼손을 갈고리 처럼 하고, 역
으로 오른손을 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뻗쳐왔다. 원자의는 쇄수찬권(鎖手瓚拳)
이라는 일초를 펼쳐 별안간 오른쪽 팔굽을 흔들며 손을 뒤집어 그의 손목을 잡
고 등뒤로 꺽어 올렸다.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네 손가락을 앞으로 하고
엄지 손가락을 뒤로 하여 그의 견정혈을 잡고 몸을 앞으로 밀며 탁자 위로 내려
눌렀다. 그녀는 정확하게 찻잔에 그의 입을 대고 누르며 소리쳤다.
[차를 마셔요!]
그녀가 이 한 수의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는 본래 평범한 것이라 어느 문파
의 사람이라도 모두 펼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다만 그녀가 펼쳐내는 것이 기이
하도록 신속하여 진내지는 그녀에 손가락에 손목이 닿는 순간 전신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진내지는 놀람과 분노에 얽혀 다시 욕을 했다.
[나이 어린 계집년이!]
원자의는 두 손으로 암암리에 힘을 주자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진내
지의 오른쪽 어깨의 관절이 즉시 탈골되었다. 원자의는 그의 손목을 놓고 탁자
위에 걸터앉아 미미하게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장문인의 자리를 양보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진내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를 지경이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재빨리 정자에서 내려갔다.
왕검영이 앞으로 나와 그의 팔을 받쳐들고 머리와 목을 잡고 한번 밀고 당겨
그의 어깨를 접골해 주더니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원소저의 그 팔극권 무공은 정말 신묘하구려. 나는 당신의 팔괘장을 한번 가
르침 받아보겠소이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원자의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고 차분한 것을 보고 그가 강적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본래 유신팔괘장(遊身八卦掌)을 연마한 사람은 틀림없이 보
법이 표홀하여 걸을 때는 마치 발을 땅에 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도 그
는 발걸음을 지극히 무겁게 내려놓아 땅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이는 '자
중지경(自重至輕) 지경반중(至輕反重)'의 상태로서 기초가 견실하기 이를데 없
었다.
원자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수십년 동안 쌓은 공력은 결코 자신과는 견
줄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것임 헤아릴 수가 있었다.
호비는 재빨리 정자 안으로 들어가 찻잔을 들고 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넌즈시
말했다.
[이 사람은 무서우니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되오.]
원자의는 살포시 눈을 아래로 내리며 가느다란 소리로 물었다.
[내가 몇 번이나 당신의 대사를 그르쳐 놓았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탓하지
않으세요?]
이 한 마디의 질문에 호비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녀가 이미 세 번이나 봉천남을 구출해낸 것
을 용서하는 꼴이 될 터이고, 탓한다고 하자니 그녀의 다정하
면서도 짓궂게 웃고 있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하
니 어찌 또 그녀를 탓할 수 있겠는가?
원자의는 호비가 정자 안으로 들어와 자기에게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자 커다
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혹시나 이 팔괘문의 고수를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
나 하고 두려움이 일었는데 호비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씩 들며 용기백배하여
나직이 말했다.
니 어찌 또 그녀를 탓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안심하세요.]
그리고 발끝으로 사뿐히 차며 둥근 탁자 위로 올라서며 입을 열었다.
[왕노사, 당신의 팔괘문의 무공은 발걸음을 팔괘방위 즉, 건(乾), 곤(坤), 손
(巽), 감(坎), 진(震), 태(兌), 이(離), 간(艮)에 따라 밟는 것이니 우리는 다
른 사람들이 잘볼 수 있도록 이 걸상 위에서 초식을 겨루어 보도록 하지요.]
왕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이윽고 그는 걸상 위로 올라가 두 손을 서로 둥글게 해서 양손을 앞뒤로 세웠
다. 호비는 다시 원자의에게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정자에서 물러났다.
원자의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평소 팔괘문중의 왕씨 형제 영(英)과 걸(傑)이 똑같이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데 왕노사가 패하게 되면 다시 영제(令弟)와 한차례 겨루어
야 하나요?]
왕검영은 성격이 무겁고 중후한 사람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울화
가 불끈 치밀었다. 그녀는 자기가 손을 쓰기도 전에 자기가 패하는 것을 기정
사실처럼 단정하면서 동생과 다시 겨루어야 하느냐고 물어 본 것이었다.
본래 그는 언변이 뛰어난 형편이 못되는지라 울화가 치밀자 더욱 말을 더듬거
렸다.
[저...... 저.......]
이때 왕검걸이 노해 입을 열었다.
[나이 어린 계집애가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너는 우리
형님의 일백 초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 형제 두 사람은 다시는 팔괘장을 펼
치지 않겠다.]
사실 왕씨 형제들은 무림에서의 덕망이 높은 편이었고 흔히 보는 무사들은 그
들의 십 초도 받아내지 못했다. 왕검걸이 대뜸 일백 초라는 말을 꺼내기는 했지
만 그것은 조금도 그녀를 얕보아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원자의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영형(英兄)을 격퇴한다면 나를 팔괘문의 장문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나
요? 없나요? 당신도 여전히 나서서 싸울텐가요?]
왕검걸은 반박을 했다.
[당신은 무슨 허풍을 떠는 것이오! 우리 형님을 이기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원자의는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확실히 물어보고 싸우려던 참이예요.]
왕검걸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왕검영이 물었다.
[존사는 누구시오?]
원자의는 되물었다.
[당신이 나의 사문 내력을 물어서 어쩌자는 것이지요?]
그녀는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생각해 보더니 상대방의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음! 왕노사는 정말 성이 나서 살수를 펼치려고 먼저 나의 사부님이 누구인
를 묻는 것이로군요. 우리 사부님의 명성이 너무나 쟁쟁하기 때문에 말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싸우지도 못한 채 놀라 자빠질게 뻔해요. 나는 사부를 끼고 돌지
않을테니 당신은 안심하고 팔괘문의 절초를 펼치도록 하세요. 무릇 모르고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했으니 당신이 나를 때려죽인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부님은
탓하지 않을 거예요.]
이 몇 마디의 말은 바로 왕검영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갈파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왕검영은 원자의가 먼저 호비와 싸우고 곧이어 진내지를 제압했는데 비
단 손을 쓰는 것이 속되지 않은 것을 미루어 볼 때 내력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
다. 그리하여 만약 자기가 손을 너무 무겁게 써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
녀의 사부가 와서 따지게 될 터인데 그때 십중팔구 상대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
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그런 말을 꺼내자 즉시 입을 열
었다.
[그럼 여기에 계신 분들이 모두 중인이 될 것이오.]
그리고 나서 갑자기 휙! 하니 일장을 맞은 편에서 격출해냈다. 그는 장력을
다 뻗쳐내기 전에 손을 따라 몸도 함께 움직여 곤(坤)을 밟으며 이(離)로 나아
가며 어느덧 발로는 팔괘 방위를 밟고 있었다. 그의 몸집은 비대해 보였지만 팔
괘문의 경신법을 펼치자 마치 나르는 제비가 물결 위를 노니는 듯 했다.
원자의는 비스듬히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힘을 해소시키고 간(艮)에서 진(震)
으로 추격을 했다. 물론 뻗치는 초식 역시 팔괘장이었으며 보법 역시 팔괘의 방
위였다. 왕검영은 잇달아 몇장을 쪼개냈으나 모두 그녀에 의해 해소되고 말았
다.
두 사람은 둥근 탁자를 한복판에 두고 돌면서 열두 개의 걸상를 밟으며 질풍
같이 돌아가는 것이 마치 어린애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지만 가면 갈수록
속도가 빨라져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릴 정도였다.
왕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생각하는 것이 영리하고 교묘한지라 나를 걸상위에서 움직이게
하여 탁자를 격하고 장법을 교환하도록 유도하고 있구나. 그녀의 장법은 비단
나와 견줄 수는 없으나 중간에 탁자가 놓여 있으니 나의 심후하고 맹렬한 장법
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는 다시 궁리를 했다.
(이 계집애의 무공은 무척 잡다하여 놀랍게도 우리 문중의 팔괘장도 정확하게
펼치니 내가 흔히 사용하는 장법으로 그녀와 늘어붙어 싸움을 질질 끌 필요가
있을까?)
이윽고 그는 맹렬히 바람을 내며 발걸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손을 되감아 비틀
며 공격을 하는 것이 놀랍게도 과거 그의 부친인 위진하삭(威震河朔) 왕유양(王
維揚)의 가전 절기인 팔진팔괘장(八陣八卦掌)을 펼쳐냈다.
이 일로(一路)의 장법은 두 아들에게만 전수한 것이고, 다른 성을 가진 제자
인 상검명 등에게도 일채 전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팔괘장 가운데 팔진도를 삽
입한 수법이었다. 즉, 천진(天陣)이 건(乾) 안에 위치하게 되면 천문(天門)이
되고, 지진(地陣)이 곤(坤) 안에 위치하면 지문(地門)이고, 풍진(風陣)이 손
(巽) 안에 있으면 풍문(風門), 운진(雲陣)이 진(震) 안에 있으면 운문(雲門)이
었다.
또한 비룡(飛龍)이 감(坎)에 위치하게 되면 비룡문(飛龍門)이며, 무익(武翼)
이 태(兌)에 위치하면 무익문(武翼門)이고, 조상(鳥翔)이 이(離) 안에 위치하면
조상문(鳥翔門)이며, 완반(碗盤)이 간(艮) 안에 위치하면 완반문( 盤門)이 되는
것이었다.
천지풍운(天]地風雲)이 네 개의 정문(正門)이고, 용호조완(龍虎鳥 )이 네 개
의 기문(奇門)이며, 건곤간손(乾坤艮巽)이 합문(闔門))이고 감리진태(坎離震兌)
가 개문(開門)이었다. 이와 같이 사정사기(四正四奇)와 사개사합(四開四闔)을
무학에 이용하게 되자 삽시간에 변화는 기묘하게 변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환각
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비록 조그마한 정자 안이었지만 보기에는 진을 치고 싸우는듯 했다.
이 팔진팔괘장에 대해서 원자의는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본 바도 없는 형
편이었다. 이는 왕유양의 비전지학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부가 무학의 박학함에
있어 당금 세상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었으나 역시 아는 바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자의는 몇 초를 받아내자 눈이 어지러워지고 마음이 산란하여 암암
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호비는 밖에서 그녀가 실수를 하면 즉시 뛰어들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형
세가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자의가 팔괘문의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겠
다고 큰소리를 친 이상 자기로서는 싸움판에 뛰어들어 원자의를 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검영은 싸우면 싸울수록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자의는 열세에 몰려 점
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날렵하게 탁자 위로 올라서더니
입을 열었다.
[걸상 위에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우리들은 탁자위에서 겨루어 보도
록 해요. 왕노사, 하지만 찻잔이나 접시를 깨서는 안되요.]
그러자 왕검영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덩달아 탁자 위로 올랐다. 이렇게 되
자 두 사람의 간격은 더욱 가까와졌으며 원자의는 더더욱 요령을 피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후려쳐오는 권법과 장법을 맞받아내야 했지만 발밑으
로는 덕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원래 탁자 위에는 열 두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고 네 개의 과일 접시가 어지럽
게 늘어져 있는 상태라 매화춘(梅花椿)이나 청죽진(靑竹陣) 등의 수법을 펼칠
때와 같이 반드시 발을 디디는 규칙이 있는 것과는 달랐다. 더구나 왕검영의 팔
괘장은 평지에서 위력이 가장 강하지만 일단 매화춘 위에 오르면 변화에 제약을
받게 되는 셈이라 위력이 감소하거나 약화되는 것이었다.
왕검영은 탁자 위로 오르며 내심 조심하지 않는다면 자칫 실수라도 하여 그릇
을 깨서 이 짓궂은 계집애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우려를 하며 될 수 있는 한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장력을 뻗쳐냈다. 그는 자신의 장기인 각보(脚步)와 장법
의 오묘함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심후한 내공만으로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있다
고 믿었다.
그가 손을 쓰자 장풍 소리가 휙휙! 일며 정자 옆에 피어 있던 꽃송이들이 그
의 장력에 날아올라 꽃잎이 난무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원자의는 탁자 위를 오를 때 이미 타산을 해 본 바가 있었다. 상대방이 일장
일장을 차분하면서도 질풍같이 뻗쳐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쉬지 않고 움직이며
앞으로 뛰거나 뒤로 몸을 날리는 등 상대방의 장력을 맞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상대방의 웅후한 장력에 휘말린다면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순간 왕검영은 오른손으로는 허초로 휘두르더니 왼손을 비스듬히 끌어당기면
서 오른손으로 다시 쪼개내려고 했다. 그녀는 암암리에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
는 것이 있는지 발끝을 가볍게 들며 찻잔을 하나 왕검영의 안면을 향해 날려보
냈다.
왕검영은 급히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원자의는 그가 피하려는 방위를 이미 내
다보고 있는듯 두 발을 연신 번갈아 끌어 올리면서 일곱여덟 개의 찻잔을 잇따
라 날려보냈다.
왕검영은 세 개의 찻잔을 피하기는 했으나 네 번째, 다섯 번째 찻잔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어깨를 얻어맞게 되었고 나머지 찻잔은 손을 뻗쳐 후려쳤기 때문에
잔 속에 남아있던 찻물과 차잎들이 그의 얼굴과 머리에 뿌려졌고 곧이어 아홉번
째와 열번째 찻그릇은 그의 가슴에 적중되었다.
왕검영과 왕검걸은 일제히 노호를 터뜨렸고 옆에서 구경하던 왕철악과 저굉,
은중상 등은 참을 수 없는 놀람에 찬 소리를 지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두 개
의 찻잔은 왕검영의 두 눈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분노하여 맹렬
히 일장을 후려 쳤다.
원자의가 찻잔을 차서 적을 교란시킨 것은 원래 그의 이와 같은 일장을 유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 같은 호기를 놓치겠는가?
그녀는 즉시 몸을 날리며 손을 내뻗어 그의 오른손 완맥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의 곡지혈을 거머쥐고 비틀어 밀어내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왕검영은 아이
쿠!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팔이 아래로 축 쳐지고 말았다.
이 한 수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분근착골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기묘한 초식이
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손씀씀이가 번개와 같이 빨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끝내 한평생에 오점을 남기는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
왕검걸은 두 손을 휘두르며 몸을 날리며 원자의의 등뒤를 덮쳐들려고 하자 호
비가 일장을 격출하여 그를 세 걸음 뒤로 물러나서게 하고는 말했다.
[왕형, 잠깐만! 일대 일로 싸울 것은 이미 양쪽에서 약정이 되어 있지 않소.]
왕검영은 안색이 창백한 채로 얼어붙은 듯 탁자 위에 뻗뻗히 서 있었다.
원자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를 가볍게 놓아준다면 나중에 그의 동생이 시비를 걸어올 것이고 나
는 그들 두 형째들을 상대한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그가 항거할 힘을 잃도록 만들려고
그의 왼쪽 팔마저도 탈골을 시킨 이후 손가락으로 그의 태양혈을 짚고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이 팔괘문의 장문인 자리를 양보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왕검영은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는듯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왕검걸은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우리 형님을 놓아주시오! 당신이 장문인이 되고 싶다면 장문인이 되시
오!]
원자의는 확답을 받으려는듯 물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가 있어요?]
왕검걸은 황망히 그 말을 받았다.
[책임질 수 있소. 책임질 수 있소!]
원자의는 그때서야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서 내려섰다.
왕검걸은 형을 업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재빠른 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십대(十大) 총장문인
주철초는 말했다.
[소저가 잇따라 두 문파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는 것을 보니 정말로 총명하고
영리하지만 어떤 묘계를 이 주가의 몸에 펼치게 될런지 모르겠구려.]
이 말은 분명히 원자의가 간계를 써서 승리를 얻은 것이니 진짜 실력이라고
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원자의는 지지않고 응수했다.
[당신네들의 응조안행문을 상대하는 데 간계를 쓸 필요가 있겠어요? 당신네
사형제 세 사람이 한꺼번에 나와 겨루어 보겠어요, 아니면 주노사 혼자서 나와
겨루어 보겠어요?]
주철초는 담담히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원소저의 그와 같은 말은 문틈으로 사람을 보는 격으로 이 북경성 안에 무사
들을 모조리 발뒤꿈치의 때만큼 여기지도 않는구려. 이 주모는 열 세 살적부터
무예를 겨루어 왔으며 언제나 일대 일의 싸움을 해왔소.]
원자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음, 그러면 열 세 살 이전에는 영웅호걸이 못되어 전문적으로 이대 일의 싸
움을 벌였겠군요.]
주철초는 냉소를 흘렸다.
[허! 나는 열 세 살 적부터 겨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오.]
원자의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영웅호걸은 태어날 때부터 영웅호걸이고, 어떤 사람들은 무예가 고강하더라
도 시종 푼수에 불과하지요. 주노사, 나는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예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녀는 왕검영, 왕검걸 형제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삼푼
정도 탄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철초의 오만하고도 자부심이 지극히
강한 태도를 보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주철초가 언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와 같은 수모를 당했겠는가? 그는 속으로
미친 듯 노기가 끌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싸늘히 냉소를 하고 있었는데 왕철악은
참지를 못하고 부르짖었다.
[이 계집애야! 우리 대사형과 말을 할 때 좀 더 예의를 차리도록 해라!]
원자의는 그가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아랑곳하
지 않고 주철초에게 말했다.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아요.]
주철초는 아연해져서 말했다.
[무엇 말이오?]
원자의는 냉랭히 대답했다.
[뭐긴 뭐에요? 동응철안패(銅鷹鐵雁牌) 말이예요.]
동응철안패라는 다섯 자로 된 이름을 듣자 아무리 수양이 깊은 주철초라 하더
라도 더 이상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하! 당신은 우리 문중의 일을 정말로 적지 않이 알고 있구려.]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비단 주머니를 풀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고 호통을 내질
렀다.
[동응철안패는 바로 여기에 있소. 당신이 오늘 이 주가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이 이 패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외다.]
원자의는 말했다.
[꺼내보세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어요.]
주철초는 두 손을 미미하게 떨면서 비단 주머니를 풀더니 한조각의 네 치 길
이에 두 치 폭의 금빛의 패를 꺼냈다. 금패 위에는 발톱을 날카롭게 뻗고 있는
구리빛의 독수리 한 마리와 비스듬히 날고 있는 강철로 된 기러기가 상감되어
양각되어 있었다. 이는 바로 응조안행문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장문의 신패(信
牌)로서 무릇 본문의 제자라면 이 패를 장문인 보듯 하는 것이었다.
원래 응조안행문은 명나라 말기 천계(天啓)와 숭정(崇禎) 시기에 무림에서 명
성을 떨친 커다란 문파였으며 앞선 몇 대의 장문인들은 무공이 탁월했고, 문파
의 규율도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그러나 주철초와 증철구의 손에 이르게 되었
을 때 여러 제자들이 만주 청나라의 권세있는 귀족들에게 등용됨으로서 경사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기풍에 물들게 되어 무공의 조예가 선대의 조상들에 비
해 훨씬 못미치게 되었다. 나중에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러 응조안행문 중에는
몇 명의 대단한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이 문파가 비로소 중흥을 한 것이었다.
이때 원자의는 천천히 말했다.
[보기에 진짜 같지만 단정은 할 수가 없네요.]
원래 그녀는 조금 전 왕검영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 요행히 역전승을 거두었으
나 내력은 이미 많이 소모를 한 상태였다. 지금 주철초에게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는 것은 첫째, 상대를 격노시키자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시간을 벌어 기운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주철초는 견문이 넓은 사람이라 그녀의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두 손을 한번 들었다가 누르면서 갑자기 정자의 지붕 위
로 올라서더니 입을 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높아진다고 나는 바로 이 정자 위에서 절묘한 초식을 몇 수
가르침 받고자 하오.]
사실 그의 문파는 응조안행(鷹爪雁行)을 이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자연히 응
조금나(鷹爪擒拿)에 정통했으며, 또한 안행경공(雁行輕功)에 정통했다. 그가 정
자 지붕 위로 오르는 것은 혹시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자연히 경신법을 펼
쳐 피하기가 쉽다는 생각이었고, 또한 상대방과 생사를 걸고 싸우자는 각오이기
도 하였으며, 동시에 그녀가 요령을 피워 이상야릇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자
는 뜻도 있었다. 그리고 더우기 호비로 하여금 그녀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도와
주지 못하도록 막자는 뜻이었다.
주철초의 생각은 원자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하더라도 한낱 여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강적은 역시 호비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금나수법과 경신법의 두 가지 재간이 바로 원자의가 지니고 있는
절기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만약에 역가만에서 그녀가 역길
과 높다란 돛대 위애서 채찍으로 겨루면서 펼쳤던 그 오묘한 경신법을 보았더라
면 이처럼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호비는 그가 몸을 날려 지붕으로 뛰어오르는 신법이 경쾌하면서도 민첩하기는
하지만 결코 원자의와는 비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이 느긋해져서 고개
를 돌리고 웃을 여유마저 생겼다.
원자의는 일부러 자기의 특기를 자랑하지 않으려는 듯 얌전히 지붕 위로 뛰어
오르더니 입을 열었다.
[받아요!]
그리고는 양손 열 손가락을 독수리 발톱처럼 해서 덮쳐들듯 공격을 했다.
권술에 있어서 조법(爪法)은 대체로 용조(龍爪)와 호조(虎爪), 그리고 응조
(鷹爪) 이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었다. 용조는 네 손가락을 한데 모으고 엄지
손가락을 뻗쳐 손목의 완절(腕節)이 손바닥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하고, 호조는
각자 손가락을 벌리되 둘째와 세째 손가락이 손바닥 쪽으로 구부러지게 되는 것
이며, 응조는 네 손가락을 모으되 엄지 손가락만을 벌리고 둘째와 세째 손가락
이 손바닥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세가지 조법은 각기 장점이 있었지만 용조공이 가장 심오하고 연마하기 어
려웠다.
주철초는 그녀가 펼치는 것이 과연 본문의 수법인지라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만약 이상야릇한 무공을 펼친다면 꺼림직한 것이 있겠지만 진짜로 네가
응조안행공을 펼친다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즉시 능숙한 솜씨로 두 손을 갈고리처럼 해서 응조의 수법으로 공격을
해왔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구경을 하였다. 두 사람이 가볍게 몸을 이
리저리 날리면서 접근하여 금나수법을 써서 서로 공수를 주고 받으며 상대의 초
식을 해소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일단 몇 초를 겨루고는 즉시 물러
섰다. 이날 밤 네 차례의 결투 가운데 이번 격투가 가장 볼만 했지만 또한 기세
가 매우 흉흉하였고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달빛 아래 정자의 처마와 모서리에
서 두 사람은 한쌍의 붕새처럼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치고받고 있었다.
별안간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 몸쪽으로 파고 들었다. 순간 우드득! 하는 소
리가 들리며 원자의는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주철초는 기다란 비
명소리을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손발을 쓰는 것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구경을 하던 사람들 가운
데 호비와 증철구를 제외한 사람들은 주철초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원래 주철초가 격투 중에 사안남비(四雁南飛)라는 절초를 펼치며 잇따
라 연환퇴(連環腿)로 상대방의 손을 발로 걷어찼는데, 두번째 발길질을 할때 그
만 원자의의 '분근착골수'에 걸려 선기를 빼앗기게 되어 왼발의 관절이 탈골된
것이었다.
그 일초는 두 발을 연이어 뻗쳐내야 했으며 중도에서 그 초식의 기세를 거두
어 들일 수가 없는 수법이었다. 왼쪽 다리가 비록 탈골하였지만 그 기세를 거두
어 들일 수가 없는 형편이라 오른쪽 다리를 잇달아 걷어찰 수 밖에 없었다. 원
자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무릎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가 사정없이 걷어
찼기 때문에 그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에 입은 상처보다 더욱 심하게 되어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어깨와 등이 먼저 땅에 닿으면서 떨어지고, 또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정자가 별로 높은 편이 아니라 설사 주철초가 실
수를 하여 뛰어내렸다 하더라도 결코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는 아닐텐데 설마
하니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사형!]
왕철악은 평소 대사형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터라 큰소리로 부르며 앞
으로 달려갔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울음이 섞여있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주철초를 일으켜 똑바로 서도록 부축했지만 주철초의 두 다리는 이미 탈골이 되
어 있는 상태라 제대로 설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왕철악이 그것도 모르고 그를 부축하여 일으킨 다음에 두 손을 놓자 주철초는
신음소리를 내며 또다시 맥없이 쓰러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증철구는 중얼중얼 욕을 했다.
[멍청한 놈.......]
그리고는 서둘러서 앞으로 나아가 주철초를 부축했다. 그의 무공은 응조안행
문에서 절정의 고수라 할 수 있었지만 다만 추나(推拿)와 접골술(接骨術) 모르
기 때문에 주철초를 안고서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주철초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호통을 내질렀다.
[응안패를 가지고 오게!]
증철구는 깨닫는 바가 있어 서둘러 정자 안으로 들어가 탁자 위에서 금패를
집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바람소리가 휙! 하니 일더니 장력이 어
느덧 머리쪽으로 뻗쳐왔다. 중철구는 오른손으로 사형을 안고 있었던 까닭에 이
렇게 되자 미처 금패를 집지 못하고 부득이 손을 들어 그 일장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손을 들어 막았지만 손이 허전한 것이 허공을 내지른 것 같아 움찔하는
순간 눈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흔들하면서 지붕 위에서 몸을 거꾸로 내려서는가
했는데 어느덧 금패를 쥐고 호통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싸움에 졌는데도 억지를 쓸 참이예요.]
그 사람은 바로 원자의였다.
증철구는 놀람과 두려움에 어리둥절하여 주철초를 안은 채 정자 아래로 내려
서서 몸을 뻣뻣이 굳히고 서 있었다. 그는 원자의와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해
야 할런지 아니면 일단 사람을 청해 대사형의 뼈를 접골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
리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는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주형의 두 다리는 탈골이 되었는데 만약 즉시 바로잡아 치료를 하지 않는다
면 근골을 상하게 될 것이외다.]
호비는 주철초의 사형제 두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손을 뻗쳐 그의 왼쪽 다리
를 잡고 한번 밀고 한번 당기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접골이 되었다. 그는 다
시 오른쪽 다리를 접골시켜주고 그의 옆구리에 있는 혈도를 몇 번 주물러 주었
다. 주철초는 순간 통증이 많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비는 원자의에게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동응철안패는 뭐 그렇게 재미있는 노리개도 아니니 주형에게 돌려주시는
것이 좋겠구려.]
원자의는 별로 재미없는 노리개라는 호비의 말에 방긋 웃으면서 그 금패를 그
의 손에 놓았다.
호비는 두 손으로 금패를 공손히 받쳐들고 주철초 앞으로 내밀었다. 주철초는
그 금패를 집어들며 말했다.
[두 분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 주가가 한가닥 숨이 붙어있는 한 끝내는 보응할
때가 있을 것이외다.]
그러면서 그는 호비와 원자의를 각기 한번씩 쳐다보더니 증철구의 부축을 받
으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러나 원자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원한과 독기
로 가득차 있었고, 호비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감사하는 빛이 서려있었다.
원자의는 전혀 개의치 않는듯 조그만 입술을 삐쭉하더니 청수한 눈썹을 약간
치켜오르며 뇌진당을 쓰는 저굉에게 입을 열었다.
[저 나으리, 당신은 일개 문파의 반 장문인데 한번 겨루어보아야 하지 않겠어
요?]
아무리 저굉이 우둔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연후에는 자신의 주
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보잘 것 없는 몇 수의
무공으로서는 결코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즉시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폐파의 뇌전문은 가사께서 집장(執掌)을 하고 계신데 불초가 어찌 장문인으
로 자처할 수가 있겠소? 소저가 정히 가르침을 베풀고 싶다면 새북으로 왕림하
시구려. 가사께서는 틀림없이 기쁘게 맞이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오만하지도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책임을 모두 사부에게로
미루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냉소를 흘리더니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또 어느 분이 가르침을 베풀겠어요?]
은중상 등은 일제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호나으리,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는 서둘러 바깥으로 나섰으나 그들은 각자 가슴 가득 풀리지 않는 의문
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공이 그토록 고강한 소녀의 내력이 어떤 것인
가 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그들을 친히 대문 입구까지 배웅을 하고 화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갑
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어 하늘을 쳐다보니 검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청명한 달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원자의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감돌고 있고, 인간 세상에는 아침 저녁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뒤바뀐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가 보군요. 호 오라
버니가 이 풍진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의협의 일을 펼쳤는데, 경사에 올라오셔
서도 수단이 좋고 발이 넓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
했던 일이군요.]
호비는 그녀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하자 울화가 치밀어 퉁명스럽게 말했
다.
[원소저, 이 저택은 그 봉가라는 간적의 재산이오. 내가 만약 일각이라도 이
집안에 더 머무른다면 내 몸을 더럽힐 것 같으니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정영소에게 말했다.
[둘째 누이, 우리 갑시다!]
원자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야밤 삼경에 어디로 가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하늘이 변해서 금방이라도
큰 비가 퍼부을 것 같은데 그것도 느끼지 못하나요?]
그녀가 막 이 한마디를 하자 하늘에서는 콩알 같은 빗방울이 뿌려지기 시작했
다.
호비는 노기띤 어조로 말했다.
[설사 길거리의 풍우지림(風雨之林) 속에서 밤을 지새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이 간악한 적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외다.]
그리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깥쪽으로 걸어나갔다. 정영소는 묵묵히 그를
따라 걸어나갔다.
원자의는 호비의 등 뒤에서 통한에 찬 어조로 말했다.
[봉천남이라는 간악한 사람은 원래 죽어도 마땅할 사람이예요. 나도 그 자를
칼로 베어 살과 뼈를 갈라냈으면 속이 시원할 심정이예요.]
호비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으나 여전히 노한 어조로 물
었다.
[그건 또 누구를 비꼬으려고 하는 말이오?]
원자의는 천천히 말했다.
[내 가슴 속에 맺힌 봉천남에 대한 원한은 당신보다 백 배나 더할 거예
요.......]
그리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은 단지 그를 몇 개월 동안 미워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한평생 동
안 그를 증오하며 살아왔어요!]
최후의 이 몇 마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약간 목이 메어 있었다.
호비는 그녀가 그토록 슬픈 내색을 하는 것이 조금도 거짓이 아닌 것 같아 의
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몇 번이고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당신은 세 번 네 번
이나 그를 구해주었소?]
원자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세 번이예요! 그러나 결코 네 번은 있을 수 없어요!]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고 물었다.
[맞았소. 세 번이었소. 그게 어떻다는 말이오?]
두 사람이 말을 하는 가운데 세찬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세 사람
의 옷은 흠뻑젖고 말았다.
원자의는 약간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설마하니 당신은 내가 이 비를 맞고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 누이의 연약한 몸이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이예요?]
호비는 힘주어 말했다.
[좋소! 둘째 누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합시다.]
이윽고 세 사람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서동은 촛불을 켜고 차와 간단한 다
과를 날라다 주고 물러났다.
서재는 무척 정교하면서도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동쪽 벽에는 책이 잔똑
꽂힌 두 줄의 서가가 있었고, 서쪽에는 기다란 창이 있었는데 천사장( 紗 ) 사
이로 파란 대나무가 곧게 하늘 뻗쳐올라 우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다
가 방안에는 계수나무 꽃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으니 참으로 선비가 기거
할 만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남쪽의 벽에는 한폭의 동기창(董基昌)이 그린 사
녀도(仕女圖)가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 쓰여진 대련(對聯)은 축지산(祝枝山)의
행서(行書)로서 백낙천(白樂天)의 싯구가 두 줄 적혀있었다.
<붉은 촛불이 하늘거리니 복숭아 꽃잎이 일고,
자색 장삼이 어른거리니 뽕나무 가지가 일더라!
(紅臘燭移桃葉起, 紫羅杉動 枝來)>
호비는 마음 속으로 원자의가 말한 이야기를 되새겨 보느라고 그 서화를 주의
하여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책을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설사 본다 하
더라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정영소는 그 싯구를 두 번이나 속으로 읊어보고, 탁자 위의 붉은 초를 바라보
더니 다시 원자의가 걸치고 있는 자색 비단 장삼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댓구의 두 마디 말은 마치 지금 이 광경을 두고 쓰여진 것 같구나. 그런
데 내가 이 중간에 끼었으니 이게 무슨 꼴이람!)
세 사람은 묵묵히 말이 없이 각자 심사에 잠겨 있었다. 창 밖에서는 빗방울이
대나무 잎과 연꽃 잎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무심하게 들려왔고, 촛물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영소는 촛대 옆에 있는 조그마한 은침을 들고 촛불의 심지를 바로 세웠다.
서재 안은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호비는 어릴 적부터 강호에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와 같이 두 아리따운 여인
을 벗하고 조용히 서재에 앉아보기는 한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원자의는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
며 자그마한 입술을 움직였다.
자의 소녀의 내력
원자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십구 년전,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어요. 광동의 불산진에 있
는 한 젊은 부인이 갓태어난 계집아이를 안고서 빗길을 무릅쓰고 달리고 있었는
데 그녀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
의 핍박을 받아 갈 길이 없어진 처지에 놓였던 거예요. 그녀의 혈육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했고, 그녀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받았지요. 만약 품속에 있
는 어린 딸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고 말았
을 거예요.
[이 젊은 부인의 성은 원(袁)씨였고, 이름은 은고(銀姑)였어요. 이 이름은 매
우 시골티가 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녀는 본래 시골처녀였으니까요. 그녀는
살결이 약간 검은 편이었고 매우 고운 얼굴에 짙은 눈썹과 맑고 아리따운 눈망
울을 가지고 있어 불산진의 청년들은 그녀에게 '흑모란(黑牡丹)'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지요. 그녀의 집안은 본래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라 매
일 이른 아침 그녀는 시골에서 불산의 어시장으로 가져오곤 했지요. 그런데 어
느 날 불산진의 봉대재주(鳳大財主) 봉천남이 연회를 벌여 손님을 청했는데 은
고가 물고기를 한 광주리 떠메고 봉씨 저택에 갖다주게 되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감돌고, 인간세상의 길흉화복은 조석
(朝夕)으로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와 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꽃다운 처녀는 그
렇게 해서 봉천남의 눈에 띠게 되었지요.
[봉가는 처첩을 집안 가득 거느리고 있었으나 여전히 만족할줄을 모르고 강제
로 그녀의 순결을 짓밟고 말았지요. 은고는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기 값
도 받지 못한 채 집으로 도망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요. 그와
같은 저주의 인연으로 그녀는 그만 잉태를 하게 되었고 그녀의 부친이 사정을
물어보고는 봉씨 저택으로 가서 따졌답니다. 그런데 봉나으리께서는 도리어 성
질을 내며 사람을 시켜 그를 매질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그에
게 딸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한 주제에 도리어 사기를 치려한다고 욕을 했대
요. 은고의 아버지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그만 울화병으로 병
석에 누워 몇 개월 후에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은고의 백부님이나 숙부님
은 그녀에게 자기 애비를 죽인 년이라고 상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게다가 그
녀에게 관을 향해 절을 하지 못하게하며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돼지 광
주리에 담아서 물에 빠져죽도록 만들겠다고 말을 했답니다.
[은고는 야밤을 틈타 몰래 불산진으로 도망쳐나와 몇 개월 고생 고생 끝에 한
계집아이를 낳았지요. 모녀 두 사람은 생계를 이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불산진
에서 밥을 빌어먹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겼지요. 어떤 사람들은 은자
나 쌀을 보태주는 등 도움을 주면서 봉나으리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며 봉나으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였지요. 하
지만 그의 세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먹일 수는 없어지요.
[불산진의 한 어물전에 있는 사환이 평소 은고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은고를 처로 맞아들이고 싶으며 기꺼이 그녀가 낳은
딸을 자기의 친딸처럼 여기겠다고 말을 했답니다. 은고는 물론 기뻐하며 그의
뜻을 받아들여 두 사람은 혼례를 올리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누군가 봉나으리에
게 아부를 한답시고 그 사실을 알렸더래요.
봉나으리는 크게 노해서 말했답니다. '물고기를 팔아 먹고 사는 천한 놈이 감
히 어느 안전이라고 내가 가지고 놀던 여자를 감히 넘본단 말인가?' 그리고는
즉시 십여 명의 제자들을 어물전 사환의 집으로 보내 잔치 술을 마시고 있던 손
님들을 모조리 쫓아보내고 집안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이 아궁이의 솥까지 깨
뜨려 버리는 등 온통 수라장을 만들어 놓았을 뿐만아니라 그 어물전의 사환을
불산진에서 내쫓고 다시는 불산진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만들었지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호비가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촛불이 마구 일렁이며 춤을 추었고 호비는 참을 수 없는 듯 호통을 내질
렀다.
[그 간악한 도적이 어찌 그토록 나쁜 짓만 일삼는단 말이오!]
원자의는 그를 바로보지도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을 창밖으로 향한 채 자
기가 하는 말에 정신을 빼앗긴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은고는 갓입은 새색시 옷을 벗어던지고 딸을 안고 즉시 불산진 밖으로 뒤쫓
아 나갔더래요. 그날 밤 하늘에서는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두 모녀
는 전신이 흠뻑 젖고 말았지요. 그녀는 빗속에서 이리 쓰러지고 저리 나뒹굴면
서도 십여리 길을 달려나갔지요. 그런데 갑자기 대로 위에 한 사람이 엎어져 있
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더래요. 그녀는 그저 술에 취한 사내인가 보다 하고 그를
부축해 일으켜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
는데 바로 자기와 혼례를 올린 어물전의 사환이었답니다. 원래 봉나으리께서는
불산진 밖에서 사람을 보내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써서 그를 죽인 것이지요.
[은고는 여간 슬퍼하지 않았으며 진정 더 살 생각이 없어졌대요. 그리하여 그
녀는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남편을 묻고 그 즉시 냇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려
고 했으나 품안의 딸애가 그토록 가련하게 울고 불고 하더래요. 그리하여 딸애
와 함께 냇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친자식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고, 또한 태어
난지 얼마 안된 갓난아이라 혼자 내버려 둔다면 억수같은 빗속에서 죽고말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더래요. 그리하여 그녀는 앞뒤로 요모조모 생각한 끝에 이를
악물고 어찌 되었던 간에 그 딸을 키우기로 결심을 했더래요.......]
정영소는 거기까지 듣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자의의 말
이 끊어지자 나직이 물었다.
[원언니,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원자의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고 미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를 언니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해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영소는 창백한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벌써 알고 있었군요.]
그리고는 맑은 차를 한 잔 따르고 손톱 사이에서 담황색의 분말을 약간 찻물
에 넣었다. 원자의는 담담히 말했다.
[누이의 심성은 퍽이나 곱군요. 이미 손톱 안에 해약을 준비해 놓고 귀신도
모르게 나에게 먹여주려고 했었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를 들고 단숨에 다 마셨다.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설
명을 했다.
[그대가 중독된 것은 치명적인 독약이 아니라 큰 병을 오랫동안 앓고 나면 몇
달 동안 기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해야 호 오라버니가 다시 봉천
남을 죽이려 손을 쓸 때 그대가 나서서 막는 일이 없어질 것이 아니겠어요?]
원자의는 담담히 웃었다.
[나는 이미 그대의 독수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만 그대가 어떻게
독을 썼는지 시종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 집 안으로 들어온 이후 나
는 한 모금의 차도 마신 적이 없으며 반 조각의 과일도 먹은 적이 없어요.]
호비는 암암리에 놀라며 생각했다.
(원래 원소저가 지극히 주의하고 조심을 했는데도 끝내는 둘째 누이의 술수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정영소는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그대와 호 오라버니가 담장 밖에서 싸우고 내가 칼을 오라버니에게 던져줄
때 나는 그 칼날에 엷은 독가루를 묻혀놓았는데 그대의 연편이 그 칼을 후려쳤
기 때문에 묻었을 것이고 그대의 손에도 묻은 거예요. 나중에 칼과 연편을 모두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야 할 거예요.]
원자의와 호비는 서로 쳐다보며 똑같이 생각했다.
(그와 같이 독을 쓴다면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겠구나!)
정영소는 몸을 일으키더니 절을 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원언니, 이 누이가 언니에게 사과를 드리지요. 나는 이 속에 그렇게 많은 우
여곡절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어요.]
원자의도 몸을 일으켜 답례를 하며 말했다.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어요. 더군다나 손을 쓴 것이 치명적인 독이 아니고 손
에 사정을 둔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더니 자리에 앉았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봉천남은 그대...... 그대의.......]
자의는 담담히 말했다.
[맞았어요. 은고는 바로 저의 어머니이고 봉천남은 나의 생부(生夫)예요. 그
는 나와 어머니 두 사람을 그토록 참담하게 해쳤지만 저의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사람에게 부모가 없는 한 어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
겠는가?' 또한 제가 사부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중원으로 들어올 때 저에게 거
듭 분부를 하셨지요. 너의 부친은 살아 생전 못된 짓만 골라했으니 반드시 비명
횡사할 것이다. 너는 그의 목숨을 세번 살려주어 부녀의 정을 다하도록 해라.
그런 이후에 너는 너이고, 그는 그이니, 서로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호 오라
버니, 불산진 북제묘에서 내가 한번 그를 구했고, 그날 상비신사에서 그를 한번
구했으며, 오늘 밤 다시 구해주었어요. 다음에 만약 내 손에 걸린다면 내가 먼
저 그를 죽여 기구한 운명에 얽혀 돌아가신 어머님의 원한을 갚아드리겠어요.]
그녀가 말하는 표정과 태도는 결연했으며 통한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영소는 넌즈시 물었다.
[자당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나요?]
원자의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 어머님은 불산진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줄곧 밥을 빌어먹으며 북쪽으로
향했지요. 그분은 그저 불산진에서 멀리 떨어지면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생각
하며 영원히 다시 봉나으리를 보지도 않고 그의 이름을 듣지도 않기를 바라셨지
요. 그리하여 몇 개월 동안 떠돌아 흘러가다가 나중에 강서성(江西省)남창부(南
昌府)에 도달하여 탕(湯)씨 성의 소유인 저택으로 가서 하녀 노릇을 하게 되었
지요.......]
호비는 아! 하고 탄성을 발하며 말했다.
[강서 남창부 탕씨 집안이라면 그 감림혜칠성(甘霖惠七省) 탕대협과 어떤 관
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려.]
원자의는 '감림혜칠성 탕대협'이라는 말을 듣자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더니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바로 탕...... 탕대협의 저택에서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
가 돌아가신 뒤 사흘 후에 우리 사부님이 저를 데리고 회강으로 갔으며 십팔 년
이란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가까스로 중원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호비는 넌즈시 물었다.
[존사의 아래 위의 함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구려. 원소저가 각문 각파의
무공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이고 그야말로 통달하지 못한 무공이 없을
정도이니 존사께서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보기드문 기인이 아닌가 여겨지는구
려. 그 묘대협은 타편천하무적수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당신의 사부와 같은 재
간이 있으리라고는 보여지지는 않소.]
원자의는 그 말을 받아 설명하듯 말했다.
[가사의 이름은 그 어르신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말씀을 해
드릴 수가 없으니 양해를 해주세요. 그리고 내 자신의 이름도 진짜가 아닌데 얼
마 후면 호 오라버니와 정누이는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또한 그 묘대협은 우
리가 회강에서 그의 명성을 들은 바가 있어요. 당시 홍화회의 무진도장(無塵道
長)은 그 이름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중원으로 와서, 그와
겨루어 보겠다고 했지만 조반산 조삼숙께서.......]
그녀는 '조삼숙(趙三叔)'이라고 말을 하고는 호비에게 빙긋이 웃어보였는데
그 속에는 '당신이 또 한번 덕을 보고 있는 셈이라'는 의미의 미소였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계속해서 설명하듯 말했다.
[조반산은 그가 그러한 별호를 쓰는 이유을 알고 계셨던 모양이예요. 그분은
묘대협이 오만방자한 사람이라서 그러한 별호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이
고충이 있다고 하더군요. 소문에 들으니 그는 부친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요동
에 있는 한 분의 고수가 그를 찾아와 주도록 자극을 하려고 일부러 그러한 칭호
를 붙인 것이라 하더군요. 나중에 강호에서 전해지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부친
의 원한은 이미 갚게 되었고, 그리고는 여러 차례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은 감
히 그와 같은 별호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하더군
요. '뭐가 타편천하무적수라는 말입니까? 그 별호는 개방구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소이다. 대협 호일도의 무공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고강한 편이지요.']
호비는 속으로 흠칫해서는 물었다.
[묘인봉이 정말 그와 같은 말을 했소?]
원자의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친히 듣지는 못했지요. 그것은 조...... 조반산이 말한 것이지요. 무진
도장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웅지가 일어 그 호일도와 한번 겨루어 보겠다고 다시
나서는 것이었어요. 이러저리 수소문을 해봐도 그 호대협이 어디에 계신지도 알
아낼 수 없자 그만두고 말았지요. 헌데 그해 조반산이 중원으로 돌아와 그대를
만나게 되었고 회강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대가 여간 영웅호걸답지 않다고 매우
칭찬을 했더래요. 다만 나는 그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소매(小妹)가 동쪽으로 오게 되었을 때
문(文)네째 숙모가 백마를 타고 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어
요. '만약 그 호씨 성의 청년 호걸을 만난다면 나의 이 말을 그에게 선물하도록
해라.' .......]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 문 네째 숙모는 또 누구지요? 그녀는 나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서
나에게 그토록 커다란 선물을 주는 것이지요?]
원자의는 천천히 설명하듯 말했다.
[문 네째 숙모는 과거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날린 분이었지요. 그녀는 바로
분뢰수(奔雷手) 문태래(文泰來) 문사숙(文四叔)의 부인으로 성은 낙(駱)이고 이
름은 빙( )인데, 사람들은 그녀를 원앙도(鴛鴦刀)라고 하였지요. 그녀는 조반산
이 그대가 상가보에서 무쇠로 된 대청을 대파시킨 이야기를 전해들었으며 그대
가 그 백마를 매우 좋아하더라는 말을 듣자 즉시 다음과 같이 조반산을 원망하
는 말을 했었대요. '셋째 오라버니,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어째서 선물을 하
지 않았어요? 설마하니 조 셋째 나으리는 젊은 영웅호걸을 사귈 자격이 있지만
이 문 네째 낭자는 사귈 수 없다는 말인가요?]
호비는 그 말을 듣고 그제서야 원자의가 전날 객점에서 쪽지를 남겨 '말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말을 한 내력을 알아차리고 내심 문 네째 숙모인 낙빙에
대해서 무척 고맙게 느끼며 생각했다.
(그러한 보마는 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구하기가 힘들다. 그 문 네째 낭자는
나와 만리를 격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보물 같은 말을 선물하다니 이와 같은 두
터운 정과 높은 의리에 대해서 이 호비는 정녕 보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호비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 셋째형도 안녕하시겠지요? 이번 일이 끝나면 나는 회강으로 한번 찾아가
조 셋째형도 찾아뵙고, 아울러 여러 선배 영웅호걸들에게 인사를 드릴 작정이라
오.]
원자의는 담담히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어요.]
호비는 그 소리를 듣자 기뻐하며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영소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내가 호 오라버니를 위해 술을 가지러 가지요.]
그리고는 방을 나서서 시종에게 분부를 하여 일고여덟 병의 술을 가져오도록
했다. 호비는 가져온 술을 잇따라 두 병이나 마셨고, 얼마 후에는 뭇 영웅호걸
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을 설레이며 연신 물었다.
[조 셋째형 일행은 언제 이곳에 도착하오?]
원자의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흘만 지나면 바로 중추절이예요. 그날은 천하장문인 대회가 열리는 날이기
도 하지요. 이 대회는 복강안이 개최하는 것인데 그는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
書)에 내무부(內務府)를 총괄하는 대신이라 천하병마대권(天下兵馬大權)을 장악
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들도 일제히 그의 관장 하에 있는 형편
이예요. 그런데 어째서 강호의 호걸들과 사귀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호비 역시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 역시도 그 일을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그는 천하를 주유하고
있는 영웅호걸들을 망라해서 조정을 위해 힘을 쓰도록 할 뜻인 것 같소. 다시
말해 황제가 과거 시험이라는 제도를 두어 장원입네, 진사입네 하는 사람들을
뽑는 방법으로 글공부하는 사람들을 망라하는 것과 같이 보면 될 것이외다.]
원자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과거 당태종(唐太宗)이 과거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이 시험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는 거예요. '천하의 영웅호걸
들이 나의 손안에 걸려들었구나.' 복강안이 이번 대회를 여는 것은 부귀공명으
로서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유혹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따로이 뼈에 사무
치는 아픔이 있는데 외부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요. 복강안은 한때 조반산
과 문사숙, 무진도장 둥에게 잡혀간 적이 있는 데 이 일을 아세요?]
호비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머리를 젖히고 술 한사발을 단숨에 마시고 말했
다.
[통쾌하군. 통쾌해! 나는 그를 본 적이 없구려. 무진도장과문 네째 나으리가
그토록 영웅호걸답다니 정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는구려.]
원자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옛 사람들은 한서(漢書)를 안주로 삼는다고 하더니, 그대는 영웅호걸들이 백
성들을 통쾌하게 만든 무용담을 안주로 삼는군요. 만약 문사숙 등 어르신들이
취한 행동과 작풍을 말한다면 그대가 설사 천 잔의 술을 마시고 취하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통쾌함에 술을 마시다 보면 사흘간을 취해서 누워있게 될거예
요.]
호비는 술을 한사발 가득 넘치도록 따르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시구려.]
원자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을 말하자면 한이 없을 것 같군요. 대충 말하면 문사숙 그분들은 복강
안이 당금 건륭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사로잡아 황제에
게 협박하여 복건의 소림사를 다시 짓도록 만들었고, 또한 홍화회의 각처에 흩
어져 있는 호걸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이후에 그를 풀어주었던 거
예요.]
호비는 무릎을 치고는 말했다.
[복강안은 그래서 그 일을 가장 큰 치욕으로 느끼고 천하 무림 각문각파의 장
문인들을 소집하여 문 네째 나으리 등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겠군요.]
원자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금년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되면 복강안은 문사숙 등이 북경으
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먼저 각성의 무림 고수들을 소집하려는 거예요. 그는 십
년 전에 그 일을 당하고 나서는 휘하에 군사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무림의 호
걸들을 대적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죠.]
호비는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그대가 아홉 가문 반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은 것은 원래 그에게 먼저 으름장
을 놓자는 것이었군요.]
원자의는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우리 사부님과 문사숙 등과는 무척 교분이 깊어요. 그러나 소매가 중원으로
들어온 이유는 내 자신의 사사로운 일 때문이예요. 나는 먼저 광동 불산진으로
가서 봉나으리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려고 했던 것인데, 또한 기회가 좋아서
비단 그의 목숨을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천하 장문인대회의 소식을 얻어듣게 되
었지요. 나는 봉천남을 뒤쫓아야 했기 때문에 회강으로 달려가서 전갈을 할 수
가 없었지요. 그리하여 호 오라버니가 비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까지 줄곧 소란을 피우며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복강안으로
하여금 그 무슨 장문인대횐가 하는 것이 반드시 어떤 일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
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호비는 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조 셋째형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너무나 칭찬했기 때문에 이 아가씨
가 승복할 수가 없어서 길을 오는 동안 기회만 있으면 나를 저울질한 것이로구
나.)
그는 원자의를 매서운 눈길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또 조반산 형님께 그 호가라는 젊은이는 별로 특출난 재간이 없는 평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겠지요.]
원자의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호호! 우리가 광동에서 이곳 북경까지 오는 동안 나 역시 그대에 비해서
우세를 차지한 것도 없지 않아요? 호 오라버니, 조반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대는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원자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어요. '조삼숙, 그대의 나이 어린 의형제는 명불허
전으로 과연 영웅호걸이더군요.']
호비는 줄곧 자기와 맞서서 괴롭히던 소저가 자기 앞에서 칭찬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대뜸 온 얼굴이 시뻘개진 채 어색한 몸짓을 했으나
내심 야릇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가분이 좋았다.
광동에서 북경까지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수천 리나 되는 길을 오는 동안 그
의 뇌리에서 원자의가 떠난 날이 없었으며 다만 매번 이 아리땁고 매력적이면서
도 짖궂고 괴팍한 아가씨를 떠올릴 때마다 칠 푼쯤 좋아하는 감정과 두 푼 정도
의 곤혹감, 그리고 한 푼 정도의 울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해보니 모든 감정이 깡그리
사라졌다. 알고보니 그 가운데는 이토록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어찌 호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원자의의 본심을 듣고나니 그는 삼푼쯤 주기가 오른 상태
에서 삼푼쯤 흐뭇한 마음이 더해져 정겨운 감정이 몽롱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금
할 수 없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이미 가늘어져 있었고, 촛불도 다 타들어가 조금밖에 남아있
지 않았다. 호비는 다시 한 사발의 술을 마시고 말했다.
[원소저, 그대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지 모르겠구려.]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대의 도움을 청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호비가 약간 실망의 빛을 띠우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처리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호 오라버니와 정 누이에게 다
시 도움을 청하도록 하지요. 호 오라버니, 나흘이 지나면 장문인 대회가 열리는
데 우리 세 사람이 그 대회에 뛰어들어 한바탕 아수라장을 벌여 '세 영웅, 북경
성을 뒤집어 놓다!'라는 제목의 한판 굿을 벌이는 것이 어때요?]
호비는 호기가 발동하여 부르짖었다.
[정말 절묘하군. 절묘해! 만약 내가 그 장문인 대회를 발칵 뒤집어 놓지 않는
다면 조 셋째형이나 문 네째 나으리와 숙모가 나와 같은 녀석을 사귀어 어디에
다 쓰겠소?]
정영소는 줄곧 옆에서 듣고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고 끼어들었다.
['두 영웅, 북경을 발칵 뒤집어 놓다!'라는 제목으로도 충분한데 어째서 보잘
것 없는 저까지 끼워넣어 격을 떨어뜨리려고 하세요.]
원자의는 그녀의 연약한 어깨를 얼싸안고 말했다.
[정 누이,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대의 재간은 나보다 열배는 더 뛰어나
요. 나는 그저 그대에게 빌붙어 호감을 사려고 할뿐 그대의 비위를 거스를 엄두
를 감히 낼 수가 없어요.]
정영소는 품안에서 옥봉황을 꺼내면서 입을 열었다.
[원언니, 그대와 우리 오라버니 사이의 오해도 명백하게 풀었으니 이 옥봉황
은 역시 그대가 가져야 할 거예요. 그렇지않다면 두 마리 봉황을 모두 우리 오
라버니에게 주세요.]
원자의는 어리둥절하여 중얼거리듯 그 말을 되씹어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두 마리 봉황을 모두 우리 오라버니에게 주세요.]
정영소가 그 말을 할 때는 별다른 뜻은 없었으며, 원자의는 인품이나 무공이
모두 으뜸가는 인재이고, 길을 오는 동안 호비의 말투를 미루어 볼 때 이미 자
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매우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몇 차례 봉천남
을 구해준데 대해서 약간 꺼림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모든
감정을 틸어놓았고 더구나 따지고 보니 쌍방간에는 더욱 커다란 관계가 있으니
그들 사이에 장애가 될 것이 전혀 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하지만 정영소는 원자의가 다시 자신의 말을 되풀이해서 말하자 자기의 말이
마치 '두 여인이 한 지아비를 섬기겠다'라는 뜻으로 연상되는 것 같기도 하여
뺨을 붉히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니예요!]
원자의는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요. 그렇다면 어떤 뜻이지요?]
정영소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입술을 샐쭉거리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
릴 것 같은 얼굴을 지었다.
원자의는 정영소의 곤경을 구해주려는듯 다시 말을 이었다.
[정씨 집 누이, 그대는 칼에다 치명적인 독약을 묻히지 않았나요?]
정영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분연히 말했다.
[나는 비록 독수약왕의 제자이지만 한 사람도 죽여본 적이없어요. 설마 내가
함부로 그대를 해칠 수 있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더군다나 그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이고, 밥을 먹고 잠자리를 들 때 이외에는 하루종일
그대를 잊지 못하고 줄곧 그대만을 생각하고 있는 형편이예요....... 그런데 내
가...... 내가 어떻게 그대를 해칠 수 있겠어요.......]
여기까지 말을 하더니 끝내 눈망울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원자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호비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 역시 겸
연쩍고 수줍어하는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영소의 말은 그의 마음을 대신 털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그
의 의표를 찌르는 말이었기에 그만 낭패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그의 눈에는 부드
러운 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원자의는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정영소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안심해요. 절대로 두 마리의 봉황을 그에게 모두 다 주는 일은 일어
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는 부드러운 섬섬옥수를 들어 휙! 촛불을 끄고는 창문으로 달려나가 지
붕으로 올랐다.
정영소와 호비는 모두 깜짝 놀라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펴보았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그치면서 구름이 걷히고 청명한 은빛 광채가 온 대지를 흩뿌리고
있었으나 어느덧 원자의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속으로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을 똑같이 되씹어보고 있었다.
(그대는 안심해요. 절대로 두 마리의 봉황을 그에게 모두 다 주는 일은 일어
나지 않을 거예요.......)
뜻밖의 만남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붕 위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비는 내심 기뻐하며 원자의가 다시 돌아온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불렀다.
[그대...... 그대는 돌아왔구려!]
하지만 지붕 위에서는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 나으리, 실례하지만 잠시 귀를 좀 빌릴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음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자는 서쟁을 쫓아온 도적의 무리 속에서 검을
자기 목숨처럼 아끼던 섭가라는 성을 가진 무관이었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나의 누이동생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 섭형은 들어오셔서 술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합시다.]
그 섭가라는 무사의 이름은 외자로서 월(鉞)이라고 했는데 그날 호비가 그의
보검을 망가뜨리지 않은데 대해서 고마와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원자의가 진
내지, 왕검영, 주철초 등과 싸울 때 호비가 암암리에 원자의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도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호비의 말을 듣더니 지붕 위에
서 뛰어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호형, 당신의 옛 친구 분이 소제를 이곳으로 보냈소이다. 수고스럽지만 호형
이 한번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말을 전하라고 하는구려.]
호비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친구라니, 그게 누구란 말이오?]
섭월은 말했다.
[소제는 누설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으니 아무쪼록 용서해주시구려. 호형이 만
나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외다.]
호비는 정영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누이,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오. 나는 반드시 날이 밝기 전에 돌아
오리다.]
정영소는 몸을 돌려 그의 칼을 집어주며 말했다.
[무기를 가져가셔야겠죠?]
호비는 섭월이 목숨처럼 아끼고 있는 보검을 차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
다.
[옛 친구가 만나자고 부르는 것이니 가져갈 필요는 없을 것이오.]
즉시 두 사람은 대문으로 걸어나갔다. 모든 것이 미리 안배가 되어 있는듯 문
밖에는 이미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서 있었다. 수레의 차체에는 금칠이 되
어 있었고 망사로 휘장을 두른 것이 무척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게 보였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봉천남 그 녀석이 또 어떤 간계를 부리는 것일까? 이번에 다시 나
에게 걸려 들기만 한다면 설사 맨손이라하더라도 일장으로 격살을 하고 말리
라!)
두 사람은 수레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윽고 마부가 채찍을 들어 허공을 후
려치자 두 필의 준마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북경성의 노상에 깔아놓은
청석판(靑石板) 위를 달리자 인적이 끊긴 거리에서 매우 요란한 소리가 밤하늘
을 가르고 있었다.
경사에서 밤중에는 본래 수레를 몰거나 말을 몰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순
라를 도는 군졸들은 마차 앞의 붉은 빛의 글자가 없는 둥롱을 보자 모두 한편으
로 물러서서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약 반 시진 정도를 달려가자 마차는 새하얀 칠을 한 커다란 담장 앞에 멈추었
다. 섭월은 수레에서 먼저 뛰어내리더니 호비를 인도하여 조그만한 쪽문으로 들
어섰다. 이윽고 그는 아란석(鵝卵石)을 깔아놓은 꽃밭 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
섰다. 이 화원의 규모는 매우 엄청나서 벗나무가 무성했고, 정자나 회랑, 가산
이나 연못 등 일일이 걸어가면서 구경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정자와
누각 사이에는 줄줄이 사등(紗燈)을 켜놓고 있었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봉천남 이 녀석의 신통력은 대단하구나. 이 화원은 일 이백만 냥의 은자를
주고도 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가 불산진에서 끌어모은 돈이 정말 적
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그는 생각을 돌렸다.
(아무래도 봉가 놈이라고는 볼 수가 없겠구나. 그가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
라도 광동의 일개 토호(土豪)나 악패(惡覇)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섭월과 같이
공명(功名)을 세운 무관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섭월은 그를 인도하며 돌로 쌓은 한 채의 가산을 지
나 나무다리를 지나 호수 가운데에 지어놓은 수각(水閣)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수각 안에는 두 개의 붉은 촛불이 밝혀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찻잔과 다과그릇
이 놓여있었다.
섭월은 깍듯이 말했다.
[친구 분은 곧 당도하실 것이외다. 소제는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그리고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갔다.
호비는 호수 위에 서 있는 수각의 꾸밈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교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우아하면서도 깨끗해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기상을 엿
볼 수 있었다. 성문 밖의 그 저택도 화려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 조그마한 수
각(水閣)과 비교하니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서쪽 벽에는 한 폭의 서예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정해서체(正楷書體)로 장자
(莊子)의 '설검(設劍)'중의 한편이 쓰여져 있었고, 아래에 서명이 된 것은 놀랍
게도 당대 황제 건륭의 아들인 성친왕(成親王)이었다.
이 한편의 문장은 후세 사람이 만든 모조품으로 결코 장자가 적은 것이 아니
었으나 호비는 그러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무료하
기에 처음부터 그 문장을 읽어보았는데 다행히 그 문장이 천박하고 뜻이 명백해
서 이해할 수가 있었다.
............ <과거 조(趙)나라의 문왕(文王)은 검을 좋아했는데 손님 대접을
받는 검사(劍士)들이 삼십 여 명이나 되었고, 밤낮 그의 앞에서 무예를 겨루니
사상자가 일 년에 백여 명이나 되는데도 좋아하며 싫어하지 않더라........>
............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복대수가 천하장문인 대회를 소집한 것은 혹시 조나라 문왕을 흉내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는 다시 그 족자를 읽어 내려갔다.
............ <......신(臣)의 검에 대한 조예는 열 걸음에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천리 길을 나아가는데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소이다. 왕은 크게 기
뻐하며 말했다. 천하 무적이로다. -장자는 말했다. -무릇 검이라 함은 허(虛)함
을 보여주어 이(利)로서 열리게 되고, 나중에 뻗쳐낸다 하더라도 먼저 도달할
수 있어야 하니.......> ............
호비는 다시 속으로 생각했다.
(장자가 스스로 열 걸음에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천리길에 한 사람도 남
기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면 물론 천하 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보기에 이 장
자는 허풍을 치는 것 같다. 그리고 허로서 보여주고 이로서 열며, 뒤에 뻗쳐서
먼저 도달하게 한다는 말은 무학의 정의(精義)로서 비단 검술 뿐만 아니라 도법
이나 권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홀연 등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은연중에 향기로운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한 명의 아리따운 젊은 부인이
담록색의 엷은 비단 장삼을 입고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는데 바로 마춘화였다.
호비는. 황연히 께닫는 바가 있었다.
(원래 이곳은 복강안의 저택이었구나. 어찌 내가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
까?)
마춘화는 걸어나와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더니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형제, 우리가 다시 경사에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자, 앉으세요.
앉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친히 차를 따르고 다과 접시를 그의 앞에 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호형제가 북경에 도달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많이 생각했어요. 급히 뵙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그토록 나를 지켜주려는 은덕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예요.]
호비는 그녀의 머리에 은실로 만들어진 하안 꽃을 꽂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아마도 그것은 죽은 서쟁을 생각하며 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옷차림
이 화려하고 얼굴에 기쁜 빛이 양미간에 가득 차 있어 남편은 잃은 서러운 과부
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었다.
호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실 모두 이 소제가 쓸데없는 일에 관여를 한 셈이지요. 진작부터 복대수께
서 사람을 보내 서 아주머니를 맞이하려는 것을 알았더라면 마음을 졸이며 걱정
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그랬습니다.]
마춘화는 그가 자기를 서 아주머니라고 부르자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호형제의 깊은 의리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해요. 유
모! 유모, 공자를 데리고 나와요.]
동쪽의 문 뒤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하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
왔다. 두 어린아이는 마춘화를 보더니 불렀다.
[엄마!]
그리고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기대고 섰다. 두 아이는 똑같은 모습이었으
며 옥과 같이 희고 귀여운데다가 비단 옷을 입혀 놓고 구슬입네 옥입네 노리개
를 달아 장식을 해놓으니 더욱더 고귀하게 보였다.
마춘화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아직도 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겠지? 호 아저씨는 길을 오는 동안
줄곧 우리들을 도와주었단다. 빨리 절을 하거라.]
두 아이는 앞으로 나와 절을 하며 불렀다.
[호 아저씨!]
호비는 두 손으로 그들을 안아 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너희들은 나를 그래도 아저씨라고 한마디 불렀지만 얼마 되지 않아 너
희들은 위풍이 당당한 황친국척(皇親國戚)이 될 것이니 어찌 이 초야에 묻힌 사
람을 알아보겠는가?)
마춘화는 호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형제,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응낙을 해주시겠어요?]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아주머니, 그날 상가보에서 소제가 상보진에게 매질을 당할때 아주머니가 애
써 소제를 구해주려고 한 것에 대해서 마음깊이 새겨두고 있으며 한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일전에 석옥에서 소제가 아주머니를 도와 뭇 도적들에게 항거한
것은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한 것이고, 부질없는 행동을 하며 생색을 낸 것에
지나지 않아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우스운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소제는 아주머니가 옛날에 베푼 은덕에 대해 보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만약에 아주머니가 부르는 줄 알았더라면 소제은 원래 오지 않았을 겁니다. 우
리들은 귀천의 차이가 분명하니 우리들은 다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겁니
다.]
이 말은 당당하고도 거침없이 흘러나왔으며 그녀에 대해 상당히 불만스럽게
여기는 투가 역력했다.
마춘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호형제, 나는 좋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권세에 빌붙어 사는 사람은 아
니예요. 소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전생에 쌓은 업보에 의한
인연일 수밖에 없으며.......]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소리가 작아졌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호비는 그녀가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하자 자기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어떤 생
각을 불현듯 떠올리며 그녀에 대한 불만스러운 마음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호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나보고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사실 복대수께서는 하
지 못할 일이 없을텐데 어째서 아주머니는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지요?]
마춘화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두 아이들을 위해서 호형제에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아무쪼록 호형제
가 그들을 제자로 거두어 들여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무예를 가르쳐주도록 하세
요.]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두분 공자께서는 부귀와 영화를 한몸에 누릴 수 있는 존귀한 신분인데
뭣하러 무예를 배운단 말입니까?]
마춘화는 말했다.
[몸을 건강하게 하는 일도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수각 밖에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
다.
[춘누이, 아직도 잠들지 않았소?]
마춘화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문쪽에 있는 병풍을 손가락질 했다. 호비는 즉
시 병풍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발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마춘화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당신은 아직까지도 주무시지 않고 있지요? 가서 부인을 모시지 않고
여기는 왜 왔어요?]
그 사람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고 웃었다.
[황상께서 부르시어 군무(軍務)를 상의하다가 이제서야 물러나게 되었소. 당
신은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을 나무라는 것이오?]
호비는 그 소리를 듣자 바로 복강안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이곳에 숨어 있
는 것에 매우 겸연쩍게 생각했다. 그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사사로운 정담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안들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형세는 마춘
화가 사사로이 그와 몰래 밀회를 즐기는 것 같기 때문에 만약 복강안에게 발각
된다면 마춘화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두 다 좋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더
더욱 마음이 껄끄러워졌다. 호비는 사방의 형세를 찬찬히 살피며 그곳에서 빠져
나갈 궁리를 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마춘화는 입을 열었다.
[강 오라버니, 내가 한 사람을 당신에게 소개해드리지요. 이 사람은 당신도
본 적이 있지만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음성을 높여 불렀다.
[호형제! 나와서 복대수에게 인사를 드려요!]
호비는 부득이 병풍 뒤에서 걸어나와 복강안에게 읍을 했다. 복강안은 병풍
뒤에서 건강한 사내가 불쑥 튀어나오자 그만 깜짝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건.......]
마춘화는 웃으며 말했다.
[이 형제의 성은 호씨이며 이름은 외자로서 비라고 해요. 나이는 아직 젊지만
무공은 탁월해서 당신 휘하의 무사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이 호형제를 따를 사람
이 없다구요. 이번에 당신이 사람을 보내 나를 경사로 데리고 오려고 했을 때
이 호형제가 저를 적지않이 도왔기 때문에 내가 그를 청해온 거예요. 당신은 어
떻게 그에게 사의를 표할 건가요?]
복강안은 안색이 변했으나 그 말을 듣고서야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듯 말했
다.
[음, 그렇다면 사의를 표해야지. 사의를 표하구 말구!]
그리고는 왼손을 들어 호비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는 우선 돌아가게. 며칠 후에 내 자네를 부르도록 하지.]
그 어조에는 약간 불쾌한 빛이 서려 있었다. 마춘화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
면 함부로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더우기 무릎을 구부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지 않는 무례함을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마춘화는 천천히 불렀다.
[호형제.......]
호비는 울화가 잔뜩 치밀어 문밖으로 걸어나가며 생각을 했다.
(이게 무슨 지랄이냐? 야반 삼경에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하려고 여기에 왔다
니.......)
섭월은 수각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입을 삐쭉 내밀어 수각을 가리키며 나
직이 말했다.
[복대수께서 방금 들어가셨는데 만나보았소?]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마소저가 나에게 소개를 시켜주며 복대수께 나에게 무슨 보답을 하라고 하더
구려.]
섭월은 기뻐하며 말했다.
[마소저의 한 마디만 떨어지면 복대수가 어찌 달리 보지 않겠소? 차후로 소제
는 호형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정말 다시 없이 잘된 일이지요.]
그는 호비의 무공과 위인됨에 대해 탄복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이 몇 마디의 말
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즉시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나갔다.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가에 이
르러 대문 근처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며
몇 사람이 재빨리 쫓아오며 불렀다.
[호 나으리, 잠깐만 기다리십시요!]
걸음을 멈추고 보니 한 무관이 비단상자를 받쳐들고 걸어왔으며 그 뒤에는 세
무관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입을 열었다.
[마소저가 몇 가지 예물을 드리라고 했으니 아무쪼록 거두어 주십시요.]
호비는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나빴던 참이라 퉁명스레 말했다.
[공을 세운 바가 없으면 녹을 받지 않는다고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소이다.]
그 사람은 넌즈시 말했다.
[마소저는 성의로서 드리고자 하는 것이니 호 나으리께서는 겸손해 하실 필요
가 없소이다.]
호비는 천천히 말했다.
[아무쪼록 마소저에게 전해주시구려. 그녀의 깊은 호의에 대해서는 이 호가가
마음 속 깊이 새겨두겠다구요.]
그리고 나서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 무관은 달려들오더니 매우 초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 나으리, 당신이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마소저는 틀림없이 소인을 꾸지람
할 것이외다. 섭형, 당신이...... 당신이 좀 호나으리를 설득해주시구려. 나는
실로 명을 받들고 심부름을 온 사람이라.......]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발걸음이 민첩하고 신법이 온건한 것을 볼 때 역시 뛰어난 고수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부귀공명에 눈이 어두어 다른 사람 밑에서 아양이나 떠는 종
놈이 되었단 말이냐?)
섭월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묵직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귀중한 예물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관은 미소를 띠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호나으리께서 열어보시고 그저 한 가지라도 거두어 주신다면 소인
은 백골난망이외다.]
섭월은 옆에서 거들었다.
[이 형제의 말도 사실 맞는 말이외다. 만약 마소저가 이로 인해 꾸지람을 한
다면 이 형제의 전도를 그르치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 호형, 아무렇게나 한
가지 받아서 그로 하여금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구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얼굴을 봐서 한 가지 가지고 가서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도 괜찮
겠지!)
이윽고 그는 손을 뻗쳐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비단으로 네모
난 물건을 싸고 있었는데 네 모퉁이를 붙잡아 매서 두 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었
다.
호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그 무관은 대답했다.
[소인은 모릅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예물은 모두 한덩어리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는 손을 뻗쳐 그 비단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하나의 매듭을 푸는 순간 갑자기 상자 뚜껑이 튕겨오르며 퍽! 하는 소리와 함
께 맹렬히 젖혀지며 그의 두 손을 꽉 찝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격렬하고 뼈
를 에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으며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이 느껴졌다.
원래 이 상자는 강철로 주조된 것으로 내부에는 교묘하고도 지극히 강력한 장
치가 숨겨져 있었는데 상자 겉은 비단으로 싸아 놓았기 때문에 외견 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상자의 뚜껑이 닫혀지자 가면 갈수록 바짝 조여와 호비는 진기를 끌어올려 항
거했다. 만약 그의 내력이 조금이라도 뒤떨어졌다면 두 손목은 이미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며 설령 끊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끌어올린 진기를 털끝만치도 이
완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 명의 무관은 그가 암산에 걸리자 즉시 비수를 뽑아들고 전후좌우에서 그의
가슴과 등을 겨누는 것이었다.
섭월은 놀라 재빨리 입을 열었다.
[뭣...... 뭣하는 것이오?]
앞장을 섰던 무관이 말했다.
[복대수께서 이 악당 호비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소이다.]
섭월은 어처구니가 없는듯 입을 열었다.
[호 나으리는 마소저가 모셔온 손님인데 어찌 이렇게 대접을 할 수 있단 말이
오?]
그 무관은 냉소를 했다.
[섭형, 당신은 복대수에게 여쭈어 보도록 하시오. 우리같이 심부름만 하는 사
람이 어찌 알겠소?]
섭월은 어리둥절했다가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형, 안심하시오.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 오해가 있을 것이외다. 나는 즉시
달려가 마소저에게 알리겠소이다. 그러면 그녀는 틀림없이 방법을 강구해서 당
신을 구해드릴 것이외다.]
그러자 그 무관은 호통을 내질렀다.
[게 서시오! 복대수께서는 이 사실을 마소저가 알게 하면 안된다는 밀명을 내
리셨소이다! 당신에게 몇 개의 머리통이 달려있소?]
섭월은 온 얼굴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상자는 내가 친히 호형에게 준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나는 간사한 소인배
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복대수께서 밀명을 내렸다고 하니 어찌 그 명령에
항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무관은 호비에게 비수를 드리대며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갑시다!]
그 강철 상자는 서양의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만든 것으로서 용수철의 작용
이 지극히 패도(覇道)적이었으며 상자 아래 위의 가장 자리의 비단이 찢어지며
예리한 날이 드러났다. 원래 상자 뚜껑의 양쪽에는 놀랍게도 두 자루의 예리한
칼날이 설치되어 있었다.
섭월은 호비의 손목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며 근골에 상처를 입게 될 것
같은지라 속으로 생각했다.
(호형이 설사 하늘같이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이런 비열한 수단으로 대해
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는 줄곧 호비를 우러러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참상을 보고 또한 그 화근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갑자기 강철 상자를 잡고서
손가락을 그 틈사이로 끼어넣고는 힘주어 열어젖혔다. 순간 상자 뚜껑이 열리며
호비의 두 손은 자유로와졌으나 그의 손이 대신 끼이게 되었다.
그러자 앞장을 섰던 무관이 몸을 솟구치며 비수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섭월
의 무공은 본래 그보다 한 수 위였으나 두 손이 상자 안에 끼어있어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 하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가슴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 호비는 두둥실 몸을 솟구치며 비수를 세 번 휘둘렀
다. 두 번은 허공을 찔렀으나 나머지 한번은 끝내 그 무관의 오른쪽 다리에 한
가닥의 선혈을 그었다.
호비는 지체없이 두 발을 일제히 날렸다. 이때는 목숨이 백척간두에 있는지라
사정을 두지 않고 공격을 했다. 오른쪽 발끝을 앞으로 뻗쳐내며 왼발 뒷굽치를
뒤로 내뻗어내자 두 무관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선혈을 뿌렸다.
섭월을 찔러죽인 무관은 호비가 땅에 내려서기 전에 형가헌도(荊軻獻圖)라는
일초를 펼쳐 곧장 호비의 아랫배를 찔러왔는데 세찬 바람이 일며 무척 날카로운
기세였다.
호비는 왼발을 뒤쪽에서 뒤집듯 끌어올리며 쿵! 하니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
다. 그 무관은 풍덩! 하고 연못 속을 떨어졌는데 열 몇 대의 늑골이 모조리 부
러져 아마도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나머지 한 명의 무관은 형세가 어려
운 것을 보자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치려했다.
호비는 대뜸을 몸을 날려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들어올리며 일장을 들어 그
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순간 달빛 아래 그의 애걸하는 듯한 눈빛을 대하
자 마음이 약해져서는 생각했다.
(이 자와 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 다만 그는 복강안의 명을 받든 몸인데 목
숨까지 해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호비는 그를 가산 뒷쪽으로 끌고가 나직이 호통을 치며 물었다.
[복강안이 나를 처치하라고 했는가?]
그 무관은 말을 더듬거렸다.
[사실은...... 사실은...... 불초도 모르는 일입니다.]
호비는 다시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복대수...... 복대수께서는 마소저의 정자에서 나오셔서는 우리에게 분부를
하고 다시...... 다시 들어갔습니다.]
호비는 손을 뻗쳐 그의 아혈(啞穴)을 짚고는 말했다.
[목숨은 용서하겠다. 내일 그 누가 묻는다면 너는 저 섭가 역시 내가 죽인 것
이라고 말을 해라. 만약에 네가 소문을 내서 그의 가족에 화를 입게 한다면 나
는 너의 삼대를 몰살해 버릴것이다!]
그 무관은 아혈이 짚혀 있었기 때문에 말은 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만 끄덕였
다.
호비는 섭월의 시체를 안아 가산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 그의 시신 앞에서 네
번 절을 한 이후 다시 나머지 두 구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 풀숲으로 밀어넣고
옷자락을 찢어 두 손의 상처를 싸댔다. 비수에 찔린 다리의 상처는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자 노기가 끌어올라 비수
를 움켜쥐고 마춘화가 머무르고 있는 수각(水閣) 쪽으로 나아갔다.
호비는 복강안의 부중에 위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커다란 나무나 가산, 풀더미에 몸을 숨기고 앞에 사람이 없
음을 확인한 이후에 비로소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곤 했다.
그리하여 수각의 다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두 개의 등롱을 앞세우고 여러 명
의 호위무사들이 복강안을 경호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화원에는
산천의 형세를 모방한 가산(假山)같은 것이 지극히 많아 몸을 숨길 곳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호비는 하나의 석순(石筍) 뒤에 몸을 숨겼다.
복강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는 그 호가라는 악당을 심문하여 마소저와 무슨 연고로 알게 되었으며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야밤에 나의 부중으로 온 것은 무엇 때문인지 확실히 문
초를 하게. 하지만 이 일은 절대로 소문을 내서는 안되네. 심문을 하여 모든 것
을 알아내면 속히 와서 보고를 하게. 그리고 그 악당은 오늘 밤 당장 죽이도록
하고 이 일은 앞으로 다시는 들먹이지 않도록 하게.]
그의 등뒤를 따르고 있던 사람이 연신 대답을 했다.
[소인이 잘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복강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마소저가 묻는다면 내가 그에게 삼천 냥의 은자를 주어 집으로 보냈다
고 말을 하게.]
그 자는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대답했다.
[네! 네!]
호비는 들으면 들을수록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복강안은 그저 마소저와 나와 사사로운 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 뿐인데도 이와 같은 독수를 써서 끝내 섭월의 목숨을 해치게 만들었구나!)
만약 이때 호비가 달려나간다면 즉시 복강안을 비수 아래죽일 수가 있었으나
그는 경슬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경사에 온 것이 처음이라 여러
가지 일을 모르고 있는 반면에, 복강안은 천하병마대권을 손에 쥐고 있고 그 명
성이나 위세가 혁혁하니 냉철하게 따져볼 때 역시 경솔하게 손을 써서 죽여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석순 뒤에 몸을 숨기고서 복강안 일
행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
호비를 심문하라고 명을 받은 사람은 나직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바지춤을
풀어헤치면서 호비가 숨어있는 석순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순간 호비는 팔
을 뻗쳐 그의 옆구리를 짚었다. 그 자는 적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호비는 다시 그의 양 무릎에 있는 혈도를 짚은 이후 재빨리 복강안 일행을 따
라갔다. 멀리서 복강안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깊은 야반 삼경에 노마나님이 나를 무슨 일로 부르셨을까....... 그 어르
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뒤따르고 있던 한 명의 시종이 말했다.
[공주께서 오늘 궁안으로 들어가셨다가 부중으로 돌아온 이후 줄곧 노마나님
과 함께 있었답니다.]
복강안은 '음!' 했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호비는 그를 따라 정원을 가로지르고 낭하를 돌고 돌아 그가 푸른 송죽으로
둘러쌓인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뭇시종들은 멀리 집과 떨어진 곳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호비는 집 뒤로 돌아가 나무 덩쿨 사이를 기어 그 집에 가까이 접근했다. 눈
을 들어 바라보니 북쪽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창아래로 살그머니 다
가가서 바라보니 창문은 녹색의 가느다란 망사를 창호지 대신 발라놓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 아무 소리도 않고 살그머니 소나무 가지를 꺽
어 얼굴 앞을 가리고 창문의 망사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 한복판에는 삼십여 세 된 귀티나는 부인이 두 명 앉아 있었고, 아랫쪽에는
육십여 세씀 되는 노부인이 앉아 있었으며 그 노부인의 옆에는 두 부인이 앉아
있었다. 다섯 명의 여자들은 모두 온몸에 능라비단을 감고 있었고, 몸을 치장하
고 있는 보석들도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복강안은 무릎을 꿇고 중간에 있는 귀부인에게 문안을 여쭙더니 다시 노부인
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불렀다.
[어머님!]
노부인의 옆에 서 있던 두 부인은 그가 돌어서자 몸을 일으키고 서 있었다.
원래 복강안의 부친은 부항(ㄹ傅恒)이라는 사람으로 당금 건륭황제의 황후인
효현황후(孝賢皇后)의 친동생이었다. 부항의 처는 만주에서 유명한 미인으로 입
궁하여 건륭과 대화를 하면서 건륭의 마음에 들어 두 사람은 암암리에 사사로운
정을 통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바로 복강안이었다.
부항은 누나와 처, 아들의 삼중관계로 인해서 건륭의 총애를 받아 장수는 물
론 재상까지 올라 이십 삼년 간이나 재상 노릇을 하였으며 지금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부항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인 복령안(福靈安)은 다라액부
(多羅額駙)에 봉해졌으며, 한때 조혜(兆惠)를 따라 회강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
워 정백기만주부도동(正白旗滿州副都 )까지 올랐으나 이미 죽었다. 차남인 복륭
안(福隆安)은 화석액부(和碩額駙)에 봉해졌으며,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공부상
서(工部尙書)를 지냈으며 지금은 공작(公爵)에 봉해져 있었다.
세째는 바로 복강안이었다. 그의 두 형님들은 모두다 부마(駙馬)가 되었지만,
건륭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그가 오히려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지 않았
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기실 그는 건륭의 친
골육이기 때문에 사실 황제의 사위가 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그는 병부상서직을 맏고 있었으며 내무부를 총괄하는 대신이고 더우기
태자태보(太子太保) 직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부항의 넷째 아들인 복장안(福長安)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직을 맏았으며 나
중에는 후작(候爵)에 봉해졌다.
이 당시 복씨 집안은 그야말로 부귀공명이 극에 달해 있었으며 조정을 통털어
도 따라올 집안이 없었다.
방 한복판에 앉아있는 부티가 나는 부인은 공주 신분을 가진 복강안의 두 형
수님이었다.
둘째 공주인 화가공주(和嘉公主)는 건륭의 네째 딸로서 말주변도 좋고 재기
발랄하여 어릴 적부터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건륭은 이틀이 멀다하고 그녀를
궁안으로 불러들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답답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그
녀와 복강안은 실제로는 남매이지만 명목 상으로는 군신(君臣)관계이기 때문에
복강안은 그녀를 보더라도 반드시 문안을 올리고 절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부인 가운데 한 사람은 복강안의 부인인 해란(海蘭)씨이고,
한 명은 복장안의 처였다.
복강안은 서쪽 모퉁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두 분 공주와 어머니께서는 이토록 밤이 깊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계십니까?]
노부인은 입을 열었다.
[두 분 공주님은 너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애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구나.]
복강안은 해란씨를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한나라 사람이라 제대로 예의범절을 배우지 못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공주님과 어머님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았지요.]
화가공주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노삼(康老三)께서 점을 찍은 여자라면 어찌 뒤떨어지겠어요? 우리들도 그
여자를 만나자는 것은 아니니 그대는 빨리 사람을 시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세요. 황제 나으리께서도 며칠 후 나보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인
사를 시키라고 했어요.]
복강안은 내심 의기양양하며 금지옥엽 같은 두 아이들을 황상께서 만나보신다
면 틀림없이 크게 기뻐하며 귀여워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그는 하녀에게
명하게 유모에게 두 어린 공자를 데리고와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라고 전했
다.
화가공주는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궁안에 들어갔더니 어마마마께서는 강노삼이 밖에 두 아들이 있는
데도 딪 년 동안 시침미를 떼고 찾아보지 않는 등 사람들을 깜빡 속였으니 황상
께서 껍질을 벗길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복강안은 웃으며 말했다.
[두 아이에 대한 일은 나도 지난 달에서야 겨우 알게 된 일이라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자 유모가 쌍동이 두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복강안은
두 아이에게 공주와 노마나님과 부인 및 숙모에게 절을 하도록 했다. 두 어린애
들은 고분고분 매우 말을 잘 들었으며 잠이 와서 게슴츠레 한 눈을 하고 그의
말에 따라 절을 했다.
뭇 사람들은 이 한쌍의 어린애의 모습이 똑같이 생겨 반점의 차이도 없었으며
동그란 얼굴에 이목이 청수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화가공주는 손뻑을 치며 웃었다.
[강노삼, 이 한쌍의 아이들은 그대와 한틀에서 찍어낸 것 같아 그대가 억지를
쓸 수 없겠는걸!]
해란씨는 이 일에 대해서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이 한쌍의 어린애
들이 너무나 귀여워 참을 수 없는듯 품속에 안고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노부인과 공주들은 각기 상견례를 할 때 관례적으로 내리는 선물을 하사하였
으며 두 유모들은 연신 절을 하며 사의를 표했다.
두 분의 공주와 해란씨는 한동안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물러갔다. 노부인
과 복강안은 쌍둥이 두 아이를 데리고 공주를 배웅한 이후 다시 방으로 들어왔
다.
노부인은 등뒤에 서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가서 마소저에게 이야기를 전하거라. 이 마나님께서 이 아이들이 너무
나 귀여워서 오늘밤은 데리고 잘 것이니, 마소저는 아이들을 기다리지 말고 자
도록 말이다.]
그 시녀는 대답을 했다. 이윽고 노부인은 탁자 곁의 서랍에서 보석을 잔뜩 박
은 금 주전자를 꺼내 올려놓더니 말했다.
[이 주전자에 담긴 인삼탕을 가져가서 마소저에게 내리도록 하고 이 노마나님
께서 이 애들을 잘 돌볼 것이니 마음을 놓고 자도록 하라고 이르거라.]
복강안은 손에 찻잔을 들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크게 변하며 두 손을
떠는 바람에 찻물이 그의 장포에 마구 떨어졌다. 그는 찻잔을 들고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시녀는 금주전자를 상자 안에 넣고는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고 물러났다.
야심한 밤이라 두 어린애는 노부인의 품에서 두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잠투
정을 했다.
[엄마, 엄마! 엄마한테 갈래요.]
노부인은 달래듯 말했다.
[착하지 애들아. 투정부리지 말고 이 할머니를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 이 할
머니가 너희들에게 사탕과 떡을 줄께.]
두 어린애는 울부짖었다.
[사탕도 떡도 싫어요. 할머니 싫어요! 엄마한테 갈래요.]
노부인은 안색을 굳히더니 손짓을 하여 유모로 하여금 어린애들을 데리고 나
가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눈짓을 하자 뭇 시녀들도 물러났으며 집안에는 복강
안 모자만 남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 노부인은 시종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복강안은 천장을 바라
보며 한숨만 내쉴 뿐 감히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 복강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째서 그녀를 용납하지 못하십니까?]
노부인은 말했다.
[그걸 물어볼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 여자는 한나라 사람이라 심사를 헤아리
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표국 출신으로 칼을 쓰고 발길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냐?
우리 부중에 두 분의 공주가 기거하고 계신데 어찌 그러한 사람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 게다가 십년전 황상께서 친히 커다란 위험을 겪은 것도 한 이족(異
族)의 미녀 때문이라는 것을 너는 설마하니 벌써 잊었더란 말이냐? 그와 같이
독사 같은 여자가 우리 옆에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들은 불안해서 잠을 편히
잘 수 없을 것이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되느니라!]
복강안은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말씀도 옳습니다. 저도 처음에 그녀를 이 부중으로 맞아들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그녀를 한번 살펴보고 은자나 몇 푼 쥐어주려고 했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가 두 아들을 낳고 살고 있지 뭡니까? 이 아이들은 저의
친골육이니 상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지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도 이제 마흔이 다 되가는데 아이들이 없으니 물론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할 것이며 이후에 그들은 작위를 물려받
아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니 그 애들의 어머니도 안심을 할 수 있을 것이
다.]
복강안은 잠시동안 생각해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 자식의 뜻은 그 여자를 먼 변방으로 보내 다시 만나지 않으면 될 것인데
굳이 어머니께서.......]
노부인은 안색을 굳히더니 그 말을 가로챘다.
[너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그 가운데의 이해득실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냐? 그녀의 친아들이 우리의 부중에 있는한 그녀가 어찌 사단을 일으키지 않는
다는 보장이 있느냐? 더우기 이러한 강호의 여자들은 마음만 모질게 먹으면 어
떠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단 말이다!]
복강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후하게 장사지내 주기만 하면 너의 도리는 다한 것
이라 할 수 있느니라.......]
복강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네!]
그리고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권사십팔(華拳四十八)
호비는 창밖에서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처음에는 그들 모자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후히 장사를 지내주라는 말을
듣자 그만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본래 이 두 사람은 악독하기 이를데 없어 아이들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마
소저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구나! 이 일은 매우 다급하니 지체해서는
안되겠구나. 두 사람이 독살을 하기 전에 야음을 틈타 마소저를 구해내야 하겠
구나.)
그는 살그머니 걸어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 수각으로 향했다. 다행히 밤은 조
용하고 화원에는 오고가는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방금 전 죽인 위사들은 아직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비는 초조함에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
다.
(마소저는 복강안에게 첫눈에 반하였고, 두 사람은 오랫만에 만나 회포를 풀
게 되어 한참 열정에 들떠있을 것인데 어찌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도망을 치려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녀가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직 작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수각 앞에 이르렀다. 문 밖에는 이
미 한 명의 위사가 서 있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흥! 그들은 벌써 매복을 하여 그녀가 도망칠 것을 대비히고 있구나!)
그는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고 수각의 뒤로 돌아가 연못을 가로질렀다. 그러
고 보니 수각의 등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
는 순간 그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마춘화는 머리카락을 산산이 흐트린 채 바닥에 쓰려져서 배를 움켜쥐고 신음
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으며 그녀를 시중들던 하녀
들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호비는 이러한 광경을 보자 대뜸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이쿠! 이거 야단났구나! 끝내 한걸음 늦고 말았군!)
그는 급히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살펴보니 그녀는 가뿐 숨을 몰
아쉬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죽죽 했고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를
내쏟을 것 같이 충혈되어 있었다.
마춘화는 호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는...... 나는...... 배가 아파요...... 호형제...... 당신은.......]
당신이라고는 불렀으나 기운이 없는듯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호비는 그녀
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조금전에 무엇을 먹었지요?]
마춘화는 탁자 위에 있는 울긋불긋한 보석을 잔뜩 박아넣은 금주전자를 바라
보았으나 말은 하지 못했다.
호비는 이 금주전자를 즉시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복강안의 어머
니가 시녀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그 노파는 악독하기 이를데 없구나. 그녀는 마소저를 해치고 두 아이들은 남
겨두려고 먼저 아이들을 불러간 이후에 인삼탕을 보내왔구나. 그렇지 않았을 때
마소저는 인삼탕이 몸에 좋은 보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아이
들에게 먼저 먹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복강안이 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복강안은 인삼탕을 보내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해서 찻물을 쏟은 것은
그가 그 인삼탕에 독약을 탄 것임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저지를 하려
고 하지도 않았고 확실히 알고 난 연후에도 구하려고 하지 않는구나. 그러니 그
가 친히 독을 타지 않았더라도 그가 친히 독을 보낸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
는가?)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매섭고 악독하기 이를데 없는 심보로구나.]
마춘화는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당신, 당신...... 빨리 가서...... 복대수에게 알려 빨리 의원을 불러오도
록.......]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복대수에게 말해서 의원을 청해 온다면 당신에게 더 많은 독약을 먹이게 될
걸. 지금으로서는 둘째 누이로 하여금 방법을 강구해서 구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이윽고 그는 의자에 있는 보를 걷어 인삼탕을 넣은 금주전자를 싸서 품안에
갈무리했다. 이윽고 수장 밖에 아무런 동정이 없는 것을 보고 마춘화를 안고 살
그머니 창문으로 뛰어나갔다. 마춘화는 놀라서 불렀다.
[호.......]
호비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고 나직이 말했다.
[아무소리 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의원에게 데리고 가겠으니 안심하시오.]
마춘화는 다시 말했다,
[우리 애들은.......]
호비는 그녀에게 자세히 전후 사정을 말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연못을 가로질
러 뛰어넘었다. 정히 길을 찾아 달려나가려고 했을 때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
가 나면서 두 사람이 달려오며 호통을 내질렀다.
[게 누구냐!]
호비가 그대로 앞으로 질풍같이 달려나가자 두 사람은 진기를 돋구어 급히 쫓
아왔다.
호비는 가볍게 몸을 날리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그가
걸음을 멈추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일시에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
고 호비의 앞을 지나쳐갔다. 순간 호비는 허공으로 몸을 도약시키며 두 발을 일
제히 양쪽으로 뻗으며 동시에 두 사람의 신당혈(神堂穴)을 걷어찼다. 두 사람은
신음소리 한번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 두 사람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수각을 지키고 있는 위사들
같았다.
호비는 이렇게 되자 이미 종적이 탄로난 셈이라 몸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
각하고 문을 향해 곧장 달려나갔다. 순간 부중은 시끌벅적한 소란이 일면서 위
사들이 이리저리 뛰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객이다. 자객이야!]
그는 부중으로 들어오면서 연도의 길을 주의깊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즉시 아
란석이 깔린 꽃밭을 지나 자그마한 쪽문으로 달려가서 회칠을 한 담장을 뛰어넘
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마차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마춘화를
수레 안에 밀어넣고 호통을 질렀다.
[돌아갑시다!]
그 마부는 이미 저택 안이 떠들석한 소리를 듣고 호비의 얼굴이나 태도가 다
른 것을 보고 머뭇거리며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다. 호비는 일장을 내뻗어 그를
마부석에서 밀쳐내자 호통소리와 함께 부중의 사오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쫓아
왔다. 호비는 고삐를 당기며 소리를 질러 마차를 몰아 달려갔다.
무사들은 십여 장이나 쫓아왔으나 따라갈 수가 없자 다투어 부르짖었다.
[말을 준비하라! 말을 준비해!]
호비는 말을 몰아 질풍과 같이 나아갔다. 한 마장쯤 달려갔을 때 뒤에서 말발
굽 소리가 일며 이십여 필의 말들이 줄줄이 쫓아오는 기척을 들을 수가 있었다.
추적해 오는 사람들은 좋은 말을 타고 있는 듯 갈수록 그 간격은 좁혀지고 있었
다.
호비는 초조해져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곳은 천자의 발밑이나 다름없는 경사이니 여느 곳과는 다르다. 다시 소란
을 피운다면 순라를 도는 병마(兵馬)가 출동하여 포위를 하고 체포하려고 할 것
이니 설사 나는 빠져나간다하더라도 마소저를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어둠 속에서 뒤쫓아 오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수레 안에
있던 마춘화는 처음에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기척이 없어 호
비는 걱정이 되어 넌즈시 물었다.
[마소저, 좀 어떠시오?]
잇달아 몇 번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횃불이 환히
비추는 가운데 추적해 오는 위사들이 더욱 가까와 지고 있었다. 갑자기 휙! 하
는 소리가 나더니 한 대의 비황석(飛蝗石)이 그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호비는
왼손으로 그 비황석을 낚아채서는 되던졌다. 순간 한 사람이 아이쿠! 하는 소리
를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이는 오히려 호비를 깨우쳐 주게 되었다. 최선의 방법은 암기를
던져 추격해 오는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몸에 지닌 암기는
없는 상태였고, 더우기 뒤쫓아 오던 무사들도 대번에 요령이 생겼는지 더이상
암기를 던지지 않았다.
호비는 매우 초조해져 생각했다.
(성문 밖까지 도달하자면 아직도 멀었는데 야밤에 이 사람들이 소리소리를 지
르며 쫓아온다면 관병을 놀라게 하여 불러모으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급하면 지혜가 생긴다는 말이 있듯이 갑자기 품안에 넣었던 금주전
자가 생각이 났다. 그는 의자의 덮개에 대고 힘주어 잇달아 금주전자를 몇 번
비틀자 주전자에 붙어있던 보석들이 여나무 개나 떨어졌다. 그는 횃불을 들고
위사들이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어 보석을 손
에 들고 한알 한알 내던졌다. 호비가 온 힘을 다하여 눈이나 얼굴을 향해 던졌
으므로 비록 자그마한 보석일지라도 뭇 위사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호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레 안에 있는 마춘화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가
보니 다행히 그녀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나직이 신음소리
를 내고 있었으나 이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이제는 호비가 머물고 있는 처소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채찍을 가해 마
차를 한 갈래길까지 몰고 왔다. 그는 처소와는 반대 편으로 마차를 몰아 모퉁이
를 돌자마자 마춘화를 안고 채찍을 휘둘러 말을 채촉한 후 마부석에서 근처에
있는 집의 지붕 위로 몸을 날려 낮게 엎드렸다. 마차는 여전히 곧장 달려가고
있었고 뭇 위사들도 그 마차를 뒤쫓았다.
호비는 사람들이 마차를 쫓아 멀리 간 이후에야 비로소 지붕을 타고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막 담장을 넘는데 정영소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돌아오셨군요. 아니! 누가 뒤를 쫓고 있나요?]
호비는 급히 말했다.
[마용소저가 독에 중독이 되었으니 빨리 봐주시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소저를 안고 서둘러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정영소는 촛불에 불을 켜고 마춘화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하여 전혀 핏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영소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마춘화의
손가락을 비틀었으나 그녀의 손가락이 탄력을 잃은 채 누른 그대로 있었다.
정영소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어떤 독에 중독이 되었나요?]
호비는 품안에서 금주전자를 꺼내며 말했다.
[인삼탕에 독을 썼는데 이것이 인삼탕을 담았던 주전자이외다.]
정영소는 그것을 받아들고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말했다.
[정말 무섭군요. 학정흥(鶴頂紅)이예요.]
호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넌즈시 물었다.
[구할 수가 있겠소?]
정영소는 대답하지 않고 마춘화의 심장 박동을 살피더니 동문서답을 했다.
[만약에 부귀공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토록 진귀한 금주전자가
없을 거예요.]
호비는 비분강개한 어조로 말했다.
[맞았소. 독을 쓴 사람은 재상의 부인이며, 병부상서의 모친이외다.]
정영소는 탄성을 발했다.
[아! 우리와 같이 독을 쓰는 사람 가운데 그토록 부귀를 누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군요.]
호비는 그녀가 아무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춘화의 중독이 깊기는
하지만 아직은 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약간 마음이 놓였다. 정영소는 마춘화의
눈을 뒤집어 보더니 갑자기 아! 하고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호비는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시오!]
정영소는 대답했다.
[인삼탕!안에는 학정홍 이외에도 번목별(番木鼈)도 탔군요.]
호비는 감히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지 못하고 슬쩍 돌려 물었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가 있소?]
정영소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가지 독약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는 몸을 돌려 실내로 들어가더니 약상자에서 하얀 두알의 알약을 꺼내
마춘화에게 먹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반드시 조용한 밀실(密室)로 가서 금침으로 열 세 곳 혈도를 찌르고 해약을
혈도를 통해 체내에 주입시켜야 하는데 즉시 침을 놓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구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열 두시진 안으로 그녀의 몸을 움직여서는 안돼요.]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복강안의 위사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이니 이곳에서는
침을 놓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우리는 변두리로 들어가 은밀한 곳을 찾아야겠
소이다.]
정영소는 재촉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빨리 출발하도록 해요. 두 알의 알약으로는 겨우 한 시진 정
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이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재상부인은 심보가 악랄하기는 하지만 독을 쓰는
재간은 매우 형편없군요. 이 두 가지 독약을 섞어 사용했고, 게다가 인삼탕에
넣었기 때문에 독성의 발작이 느려진 거예요. 만약 한 가지만 썼더라면 마소저
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
호비는 총총히 물건을 챙기며 말했다.
[당금 세상에서 그 누가가 우리 약왕 소저의 신기에 가까운 재간을 능가할 수
있겠소?]
정영소는 방그레 웃으며 그 말에 대꾸를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
가 가까와지더니 저택 바깥에 이르러 멈추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칼을 거머쥐고 말했다.
[별수 없이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하겠군!]
그러나 그는 내심 여간 초조한 것이 아니었다.
(적은 틀림없이 싸울수록 많아질 것이고, 다급하면 나는 우선 둘째 누이를 돌
볼 수 밖에 없으니 마소저는 구할 수가 없겠구나.)
정영소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경사에서는 무력을 썼다가는 화를 자초하게 될 거예요. 오라버니, 탁자와 의
자를 높이 쌓아 주세요.]
호비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금의 정세가 급박한지라 자세히 물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탁자와 의자를 쌓아올렸다.
정영소는 다시 창밖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마소저를 데리고 저 나무 위로 올라가도록 하세요.]
호비는 칼을 검집에 꽃고 마춘화를 안고서 그 나무 밑으로 다가가 몸을 솟구
쳐 올라 마춘화를 나뭇잎이 무성한 으숙한 곳에 숨겼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여러 명의 위사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전가라는 관리인이 나가 연유를 묻는 것 같았고, 뭇
위사들은 날카롭게 호통을 내지르고 있었다.
정영소는 촛불을 끄고는 품안에서 초를 한 자루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촛대
위에 꽂고 방안의 창문이나 문에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닫아걸었다. 이윽고 그
녀는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고 나무 위로 올라와서 호비
곁에 앉았다.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모두 열 일곱 명이나 되는군!]
정영소는 말했다.
[약 기운이 충분할 거예요.]
곧이어 뭇 위사들이 사방을 수색하는 기척이 들렸으며 그 가운데는 은중상의
음성도 섞여 있었다. 뭇 위사들은 호비가 뛰어나오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더우
기 원자의가 여전히 이 저택 안에 남아 있는가 싶어 함부로 날뛰지 못하고 서너
사람이 한조를 이루어 조심스레 수색을 했다.
정영소는 돌멩이를 호비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돌멩이를 던져 쌓아놓은 탁자와 의자를 쓰러뜨리도록 하세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묘한 계책이군.]
이윽고 그는 돌을 던져 가운데 있는 탁자를 맞추었다. 그러
자 탁자와 의자로 쌓아올려진 누대는 와장창! 하는 소리가 일며 무너져 내렸
다.
뭇 위사들은 소리쳤다.
[이곳이다. 이곳에 있다!]
여러 위사들은 자기네 편이 많은 것을 믿고 우르르 대청 안으로 밀고 들어갔
다. 그러고 보니 대청 안에는 탁자와 의자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 이곳에서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
아볼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은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일제히 쓰러지고 말았
다.
호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칠심해당은 또 다시 공을 세우는군!]
정영소는 살그머니 발소리를 죽여 대청 안으로 들어가더니 촛불을 끄고 초를
품안에 넣고는 호비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빨리 가도록 해요.]
호비는 마춘화를 등에 엎고 담장을 넘었다. 그런데 골목길을 돌아가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거리의 한 편에 등롱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는 가운데 한 떼의
관병들이 순라를 돌며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갔으나 반 마장도 가지 않아 다시 한
떼의 관병들이 순라를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복대수 부중에 자객이 침입했다는 소식이 온 성안에 다 퍼진 모양이구나. 지
금은 도처에서 순라을 엄밀하고 돌테니 한적한 교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정말 쉽
지 않을 것 같구나.)
이때 등뒤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떠들썩하게 일며 다시 한 떼의 관병이 들이닥
치는 기척이 들렸다.
앞뒤로 적이 나타나 물어설 틈이 없게 되자 호비는 정영소에게 손짓을 하고는
옆에 있는 커다란 저택의 담장을 넘었으며 정영소도 그를 따라 담을 넘어 들어
왔다.
담장을 뛰어넘고 보니 발밑이 매우 부드러웠다. 알고보니 풀밭이었고 눈앞에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으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있는 것이 아닌
가?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이곳에도 관병이 있을 줄을 생각지 못했구나!)
그런데 담장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어수선한 것이 두 패의 관병들이 한데 어
울리게 된 모양이었다. 지금의 형세를 볼 때 도저히 다시 담장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왼쪽에 한 채의 가산이 있고, 그 앞에는 꽃넝쿨이 우거져
있는지라 호비는 마춘화를 업고 그쪽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순간 가산 뒤에서 한 사람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하얀 광채를 번뜩이며 비
수로 호비의 가슴팍을 노리고 찔러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가산 뒤에 적이 매복하고 있다가 맹렬히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
지 못한 바였다. 창졸지간에 부득이 등에 업은 마춘화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왼손을 뻗쳐 적의 팔꿈치를 가격하며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급히 뻗쳐냈다.
상대방의 손놀림은 매우 민첩한듯 팔굽을 돌리면서 비스듬히 피하는 동시에
비수를 옆으로 찔러왔고 왼손으로는 금나수법을 펼쳐 도리어 호비의 맞받아치며
호비의 공격을 해소시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자는 얼굴을 노란 베로 가리
고 있었으며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 것이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된 일이다.)
관병들이 담장 밖에 있는 기척을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호통을
치며 공격을 해온다면 그야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소리없이 몸을 밀착하고 육박전을 펼치며 살수를 사정없이 내뻗었
다. 호비는 그의 무공이 일종의 장권(長拳)으로서 초식이 매서우면서도 맹렬하
여 무공에 대한 조예가 진내지나 주철 철초 등 일류고수의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 더욱 유리한 형세였다.
아홉 차례의 초식을 해소시키고 나서야 호비는 그의 가슴 안으로 짓쳐들어가
가슴에 있는 구미혈(鳩尾穴)을 짚었다. 그러나 그 자는 혈도가 짚혔는데도 아랑
곳하지 않고 오른발을 들어 걷어차는 바람에 호비는 다시 손가락을 뻗쳐 그의
다리에 있는 중도혈(中都穴)을 짚었다. 그제서야 그 자는 비로소 땅바닥에 쓰러
져 꼼짝을 하지 못했다.
정영소는 호비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등불 환히 켜진 쪽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아마도 창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호비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넓은 마당에 높다란 무대를 만들어 놓았으며 무
대 아래에는 줄줄이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등불이 휘황찬란했으며 창극 배우들
은 아직 무대 위로 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시기는 바로 건륭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때이라 북경성 안에 있는 벼슬아
치들 집안에서 어떤 경사스러운 일이나 잔치를 열게 될 때는 종종 며칠 동안 창
극을 공연했으며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을 예사로운 일이었다.
호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 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노란 베조각을 벗
겨 보니 어렴풋이 거친 얼굴에 나이는 사십여 세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이 사내는 아마도 남의 집 잔치를 틈타 닭이나 개를 슬쩍하려고 온 친구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것 같구려.]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아무래도 좀도적은 아닌 것 같아요.]
호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사에서는 좀도적이라도 이토록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구려.]
그러나 그는 내심 꺼림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의 솜씨를 보아하니 쥐새끼 같이 개나 훔치는 좀도적은 아니다. 일을
조용히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원한을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재수없게도 우연히 나와 마주치게 되었구
나.)
정영소는 호비의 어깨를 건드리며 나직이 제안을 했다.
[우리는 차라리 이 대가집 안에서 나무를 쌓아두는 헛간이나 누각을 찾아 열
두 시진만 숨어있도록 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구려. 밖에는 저렇게 엄밀하게 지키고
있는 데 어찌 나갈 수가 있겠소.]
바로 이때 무대의 휘장이 걷히며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 사람은 흔히 보는
거칠은 삼베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무
대로 나서더니 포권을 하며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사백부님과 시숙부님들, 그리고 여러 사형제 자매님들 안녕들 하셨소!]
호비는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고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창극을 하는 배우 같
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이라 곧 날이 밝을 것이니 눈깜짝 할 사이에 다
시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흘 후에는 바로 천하장문인 대회를
여는 날이 되오이다. 그러나 우리 서악(西嶽)의 화권문(華拳門)은 지금까지도
장문인을 내세우지 못했소이다. 이 일은 실로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으니 각
지파(支派)의 선배님들께서 고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무대 아래의 사람들 틈에서 검은 색 마괘(馬 )를 입은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화권사십팔(華拳四十八)에 예성행천애(藝成行天涯)라고 했듯이 우리 서악의
화권문은 삼백여 년 동안 내려오면서 줄곧 예자(藝字), 성자(成字), 행자(行
字), 천자(天字), 애자(涯字), 이 다섯 지파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줄곧 총장문
인을 세우지 못했소. 비록 다섯 지파가 모두 다 명성을 누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형제들은 각기 문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나는 예자파라는둥 나는 성자파라
는둥의 말을 하고 있을 뿐 사람들은 절대로 나는 화권문의 사람이오 라고 말을
하지 않소이다. 그러나 다른 문파의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예자파나 성자파라고
여기지 않고 우리들을 모두 서악 화권문의 문하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우리 문파의 사람 수는 많으며, 조사의 손에서부터 전
해내려온 재간 또한 대단한 것이지만 어째서 소림, 무당, 팔괘문파와 같은 문파
들의 쟁쟁한 명성에 훨씬 뒤떨어지겠소이까? 역시 우리들이 다섯 지파로 나누어
진 것에 연유한 것으로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로서는 더 할
말이 없는 것이외다.]
그 노인의 말투는 전적으로 섬서성 북쪽지방의 사투리였는데 여기까지 말을
한 후 길게 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복대수께서 이번에 천하장문인대회를 열지 않았더라면 우리 서악 화
권문은 어느 천년에 가서야 장문인을 내세울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소.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의 성대한 거사로 인해 장문인을 억지로라도 추대하게 되었소. 이
늙은이가 한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추대한 장문인은 비단대회에 나가
우리 서악 화권문의 영광을 쟁취해야 할뿐 아니라 본문의 문파를 다시 정돈시켜
야 한다는 것이외다. 그런 이후 다섯 지파가 원래 종파로 되돌아와 모두들 합심
협력하여 화권문의 위풍을 떨치고 호기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외다.]
무대 아래에 있던 뭇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고 많은 사람들을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보니 서악의 화권문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구나.)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은밀한 곳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모든 통로에는 한
결같이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화원에는 이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일단 나가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이 사람들에게 발견이 될 것 같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빨리 장문인을 추대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겠구려. 서악의 화
권(華拳)이라도 좋고, 동악(東嶽)의 태권(泰拳)이라도 좋으니 일단은 빨리 뽑고
해산하기를 바래야 할 것이외다.]
그런데 이때 무대 위에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채(蔡)사백부의 말씀은 모두 금쪽같이 훌륭한 말씀이외다. 이 후배는 예자파
의 우두머리로서 감히 본파의 사형제를 대신해서 한 마디 하겠소이다. 나중에
장문인을 뽑는다면 우리 예자파에서는 전심전력으로 장문인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겠소. 또한 어떤 불평불만도 늘어놓지 않고 한마디의 이의도 달지 않을 것이
오.]
무대 아래에서 누군가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조오쏘!]
그 소리가 길게 끌어지는 것이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멋진 노래가락을 한가
닥 불러 무대 아래의 구경꾼들이 칭찬하는 것같았지만 그 말투에는 비아냥거리
는 투가 역력했다.
무대 위의 그 사람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 각파에서는 어떠시오?]
그러자 무대 아래에서 한 사람씩 일어나며 말을 했다.
[우리 성자파에서는 우리 장문인의 말씀을 어기지 않겠소!]
[그 어르신이 어떤 말을 하던 간에 우리 행자파에서는 받드시 받들어 모시겠
소.]
[천자파에서는 호령을 받들어 순종할 것이며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오.]
[예자파는 나이어린 동생 격이라 형님네들이 앞장서서 해나간다면 이 동생은
결코 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외다.]
무대 위에 있던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소! 각 지파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외다. 이제 각 지파의 지장(支長), 각파의 선배님과 사백부, 사숙부님
들이 모였으나 천자파의 희(姬)사백부만이 오지 않았소. 그러나 그 어르신께서
는 서찰을 보내시어 그의 영랑(令郞)인 희사형을 모임에 참석시키겠다고 말씀을
하셨소. 그러나 이제까지 기다려도 희사형은 아직도 도달하지 않고 있구려. 이
사형은 평소부터 일을 행함에 있어 신출귀몰한 면이 있는데 어쩌면 지금 당도하
여 몸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외다.......]
거기까지 말을 하자 무대 아래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비는 몸을 구부리고 그 사내의 귀에 대고 나직이 물었다.
[당신의 성이 희씨지! 그렇지 않소?]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의혹의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녕 이 일남일녀가 어쩐 내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눈
치였다.
무대 위의 그 사람은 재차 말을 이어갔다.
[희사형 한 사람이 도달하지 않았으나 우리들은 이미 꼬박 한나절을 기다렸고
지금 역시 밤이 반은 흘러갔으니 어찌 되었던 간에 기다릴만큼 기다렸다고 생각
하는 바이외다. 이후에 희사백부님은 우리를 탓하지 못할 것이외다. 이제 여러
문파의 선배분께서 본문의 장문인을 어떻게 추대할 것인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
도록 하시지요.]
뭇 사람들이 하루 밤을 지새며 기다린 것은 바로 장문인을 추대하는 좋은 구
경거리를 보고자 했던 것이기에 모두들 신이나서 두서없이 다투어 소리를 질렀
다.
[무공으로 겨루도록 합시다!]
[그 누구도 서로 승복할 수 없으니 권각법이나 무기에 의지않고 무엇으로 겨
루겠소?]
[사정을 두지않고 싸운다면 모든 사람들이 승복을 할 것이니 자연히 장문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채씨 성을 가진 노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나직이 기침을 하고 낭랑히 입을 열
었다.
[본래 장문인은 덕에 의한 것이지 힘에 의한 것이 아니외다. 후생의 젊은이들
의 재간이 아무리 고명하다 하더라도 덕망이 높으신 선배님을 앞지를 수는 없는
것이외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고 사람들을 한번 쓸어본 이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 상황만은 다르게 되었소. 천하 장문인 대회에는 각처의 영웅호
걸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이니 각자가 자기의 신통력을 나타내게 될 것이외다.
우리 서악의 화권문이 만약 쭈그렁 영감탱이를 내보낸다면 다른 사람들은 갈채
를 보내며 '좋아! 화권문의 쭈그렁 영감쟁이가 덕망이 높아 늙어서도 아직 죽지
않은 분이셨군'하고 칭찬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다시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정영소 역시 참을 수
없는듯 방긋 웃으며 생각했다.
[저 쭈그렁 영감쟁이가 꽤나 우스게 소리를 잘 하는구나.)
채가라는 노인은 다시 낭랑히 말했다.
[화권사십팔은 예행성천애로 나뉘어졌소. 하지만 수백 년 동안 화권의 이 사
십팔로의 권각법과 무기를 다루는 수법은 한 사람도 모든 초식에 정통하다고 할
수 없었소. 오늘의 일은 어느 분이건 간에 재간이 가장 고강하다면 그분이 본문
을 집장(執掌)하게 될 것이외다.]
뭇 사람들이 막 갈채를 보내는 순간 후문에서 갑자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으며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희사형이 도착한 모양이구려!]
한 사람이 나가서 문을 열자 등롱과 횃불이 환히 비추는 가운데 관병들이 한
떼 모여들었다.
호비는 오른손으로는 칼자루를 쥐고 있었으며 왼손으로는 정영소의 손을 잡았
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위기를 맞고 있었으나 도리어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서로 바라보자 정영소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
녀는 갑자기 원자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심 생각했다.
(나와 오라버니가 함께 이곳에서 죽는다면 원소저는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구
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호비는 원자의를 떠올렸다.
(나와 둘째 누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원소저는 어떻게 할런 모르겠구나.)
이때 관병들을 이끌고 온 한 무관이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몇 마디 물어보았
다. 그는 서악 화권문이 이곳에서 장문인을 추대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었는지
표정과 태도가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등롱을 쳐들고 사람들의 얼굴을 두
루 비추어 보더니 다시 화원의 전후 좌우를 둘러보았다.
호비와 정영소는 가산 안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었는데 그 등롱이 점점 가
까이 다가오자 속으로 생각했다.
(저 무관의 운수가 어떤지 모르겠구나. 만약에 그가 등롱을 들고 가산으로 올
라와 비춘다면 별수없이 그의 머리에 한 칼을 먹이는 수밖에 없겠구나.)
홀연 무대 위의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무공이 제일 고강한 분이 본문을 집장하게 된다는 말을 모두 들었을 것이오.
여러 사백부와 사숙부, 사형제 자매들은 아무쪼록 일일이 무대 위로 올라와 절
예를 펼쳐 보여주시기 바라는 바이외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뭇 사람들은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엷은 붉은 빛 장삼을 걸친 젊은 부인이 무대위로 오르면서 말했다.
[행자파의 제자인 고운(高雲)이예요. 여러 선배님들에게 가르침을 한번 받겠
어요.]
뭇 사람들은 그녀가 보여준종 경신법이 우아하고도 아름다운데다가 옷마저 날
아갈 것처럼 세련되고 얼굴도 고운지라 모두들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 무관
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멍해져서는 다른 곳을 수색할 생각을 하지 않고 빙긋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그녀에게 눈길을 떼지 못했다.
무대 아래 쪽에서 한 젊은이가 뛰어오르더니 입을 열었다.
[예자파의 제자인 장복룡(張復龍)이외다. 고 사저께서 아무쪼록 가르침을 베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고운은 입을 열었다.
[장사형, 겸손해 할 것 없어요.]
그리고는 오른쪽 다리를 반쯤 구부리고 왼쪽 다리를 앞으로 뻗더니, 오른손을
옆으로 짝 벌리고 왼손은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이는 화권 중에서 첫번째 초식
인 출세과호서악전(出勢跨虎西嶽傳)이라는 것이었다. 장복룡은 무릎을 들어 동
그랗게 원을 그리듯 하고 손을 벌리며 상양등지각독현(商羊登枝脚獨縣)라는 일
초로 대응하였다.
두 사람은 각기 본문의 권초를 펼치며 싸우기 시작했다. 이십 여 합을 싸우자
고운은 회두망월봉전시(回頭望月鳳展翅)라는 초식을 펼쳐 달려들면서 손을 벌려
일장으로 장복룡을 후려쳐 무대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 무관은 그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찬사를 연발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러자 무대 아래에서 다시 한 사내가 뛰어오르더니 몇 마디 인사말을 하고는
고운과 손을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고운이 실족을 하여 그 사내에게 밀려 곤두
박질쳤다. 그 무관은 흥이 깨진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애석하군. 애석해!]
그리고는 더 이상 구경할 흥미를 잃은 듯 다른 곳을 수색하지 않고 문을 나섰
다.
정영소는 관병들이 문을 나서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무
대 위에서는 한 사람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등 싸움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까지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가 장문인을 추대할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호비를 돌아보니 그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무대 위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
보고 있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이 긴각법을 펼쳐 매우 격렬하게 싸우고는 있지만 그렇게 고명한
편은 못되는데 큰오라버니는 어째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일까?)
이윽고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반 시진이 훨씬 지났어요.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만 되겠어요. 다
시 더 침을 놓고 약을 쓰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치게 될 거예요.]
호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응!'하고 대답하더니 여전히 무대 위를 주시
하고 있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패하고 물러섰고 다른 사람이 승자와 겨루었다. 동문끼리
무예를 겨루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틀림없이 두 사람은 지파가 서로 다른
제자인 모양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승부가 자신의 지파의 영욕
에 관계가 있는지라 모두다 전력을 다해 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문중의 고수
들은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눈 앞의 이 사람들 역시 진정으로 장문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화권문의 다섯 지파가 암암리에 내분이 있어 왔으므로
이 기회를 빌어 과거에 있었던 감정을 풀어보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주먹과 발길
질이 오가는 것이 퍽이나 날카로웠으며 열기를 더해 갔다.
정영소는 호비가 마치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큰오라버니는 천성적으로 무공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이 무공을 겨루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잊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등을 밀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의 정세가 긴박하니 우리들이 빠져나간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저 사람들은 모두 무림의 호걸이고 강호의 의리를 내세워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면 꼭 관부에 보고를 한다고는 볼 수는 없어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복대수의 일인데 어찌 그들이 말을 하지 않겠소? 그거
야말로 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소?]
정영소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마소저에게 치료를 해주는
거예요. 다만 훤한 대낮에 이곳에서 머뭇거리다가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발각되
고 말 거예요.]
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의 말투에는 매우 초조한 빛이 서려있었다. 평소 차분
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이와 같이 재촉하는 것을 보면 지금 상황이 매우 절박하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비는 '음!'하더니 여전히 눈길을 돌리지 않
고 무대 위에서 무공을 겨루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영소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중에 마소저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호비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좋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험을 한번 해볼수 밖에 없겠군.]
정영소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뭐 말인가요?]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서악 화권문의 장문인 한번 자리를 차지해야겠소. 하늘이 보살피시어
성공한다면 그들은 나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이오.]
정영소는 크게 기뻐하며 연신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큰오라버니, 어찌 그대의 적수가 되겠어요. 틀림없이 성공할 거예요. 성공하
고 말구요!]
호비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만 곤란한 것은 반드시 내가 그들의 권법을 펼쳐야 하는데 일시삼각(一時
三刻)에 어찌 그토록 많은 초식을 기억할 수 있겠소?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만 나중에 고수들이 오르면 이 몇 수의 권법은 쓸모가 없어
지고 마각을 드러내고 말 거외다. 그들이 만약 내가 본문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
을 안다면 설사 내가 승리를 한다 하더라도 나를 장문인으로 추대하지는 않을
것이오.]
거기까지 말을 하자 호비는 자신도 모르게 원자의를 떠올렸다. 그녀는 각문각
파의 무공에 대해서 그야말로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만약 이곳에
있어 그녀가 나선다면 그 가능성은 훨씬 더 클 것 같았다. 기실 어떠한 경우가
닥치더라도 호비는 마음 속으로 원자의를 떠올렸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를 떠올
리며 화권문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선 것이었다.
이때 어이쿠!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한 사람이 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
고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욕을 했다.
[제기랄! 손을 그토록 무겁게 쓰다니!]
그러자 다른 사람이 곧장 반박을 했다.
[손을 쓰는 도중에 무겁고 가벼운 것을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재간이 있다면 올라가서 체면을 세워보지 그래!]
그 사람은 거칠게 말했다.
[좋아! 우리 둘이 한번 겨루어보지!]
말을 한 사람은 그 자의 심기를 흐트리려는 듯 그저 비아냥거리는 말만 하고
있었다.
[나는 자네와 같은 십팔대 장문인의 후보와는 적수가 되지못해 감히 당신과
같은 어르신과는 손을 쓸 수 없겠는걸!]
호비는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시진이 되었는데도 내가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누이는 이곳
에서 마소저에게 손을 쓰도록 하오. 어찌되었든 우리는 가는데까지 한번 가 봅
시다.]
그리고는 그는 희가 성을 가진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노란 베조각을 벗
겨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정영소는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아홉 가문 반의 총장문인이 되었는데 설마하니 그대는 한 문파
의 장문인도 될 수 없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녀는 그 한마디를 해놓고 매우 후회를 했다.
(내가 어째서 잊지 못하고 자꾸만 원소저를 떠올리며 큰오라버니로 하여금 상
념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일까?)
호비는 가슴을 펴고 당당히 가산에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
영소는 다시 생각을 했다.
(내가 설사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저 분이 일시반각이라도 그녀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무대 위로 오르는 호비를 보며 정영소는 달콤한 감정과
씁쓰레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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