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10

3학년2반 | 2022.03.10 06:33:37 댓글: 0 조회: 59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327

의문의 복강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은연중에 앞쪽 소로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은연중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아! 그녀가 다시 돌아왔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기가 공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성은
떠날 때 말을 타지 않았다. 더군다나 달려오는 소리는 한 두 필의
소리가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는 다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적
해 오는 군사들은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으며, 아홉필
의 말이 서쪽으로부터 달려왔다. 호비는 시선을 모아 그쪽을 바라
보았다. 말에 타고 있는 한 사람은 매우 준수한 용모에 사십여 세
정도의 나이인데 바로 복강안이 아닌가?
호비는 복강안을 보자 미친듯이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천하 병마대권(兵馬大權)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만
청(滿淸)이 한족(漢族) 백성을 억압하는데 있어 당금 황제 건륭
다음의 괴수는 바로 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소저에
대해 정리를 저버리고 그녀로 하여금 남편을 잃고, 집안까지 망하
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병부상서(兵部尙書)라는 존귀한 신분으
로 이 황량한 교외까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수행하고 있는
위사들도 틀림없이 일류 고수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도와줄 사람
이 둘째 누이 밖에 없다 하더라도 내 그의 위풍을 땅에 곤두박질
치도록 만들겠다. 설사 죽일 수는 없어도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다.)
그는 즉시 길 한복판으로 나아가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노기 띤
눈으로 복강안을 노려보았다. 말을 타고온 아홉 사람은 누군가 갑
자기 앞길을 막고 나서자 일제히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복강안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이 믿는 구석이 있는듯 태연히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좀 비키시게!]
호비는 손가락질을 하며 부르짖었다.
[정말 뻔뻔하군! 당신은 아직도 마춘화를 기억하시오?]
복강안은 우울한 안색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마춘화라구?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
호비는 더욱 분노하며 냉소를 했다.
[허허허! 당신은 두 아들까지 두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녀의 남편까지 죽이고도 기억을 하지 못한단 말이오!
당신네 모자 두 사람이 결탁하여 독을 써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
데 모른단 말이오!]
호비의 음성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그러나 복강안은 천천히 고
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봤군!]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외팔이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이 녀석은 실성한 녀석인가 봅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느냐? 우리가 마춘화인지 우추화(牛秋花)인지를 어떻게 안
단 말이냐?]
호비는 다짜고짜 몸을 날려 왼쪽 주먹으로 복강안의 안면을 후
려쳤다. 이 주먹은 허초였으며, 호비는 복강안이 팔을 뻗쳐 막기
전에 오른 손가락을 호랑이 발톱 모양으로 만들어 복강안의 가슴
팍을 움켜쥐려 들었다. 호비는 자신의 일격이 적중되지 못한다면
호위무사들이 손을 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놀림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고, 번개가 춤추듯 지극히 빠르고 정확하여 실
로 평생 닦아온 무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복강안의 호위
무사들이 아무리 뛰어난 일대 고수라 할지라도 결코 번개보다 빠
른 호조금나(虎爪擒拿)의 수법을 해소시킬 수 없으리라!
순간 복강안은 어! 하고 탄성을 뱉어내더니 그의 주먹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른손의 중지와 식지를 벼락같이 뻗쳐내며 가위모양으
로 만들어 호비의 손목에 있는 회종혈(會宗穴)과 양지혈(陽池穴)
의 기민함과 지법의 기이함은 호비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 호비는 홈칫하여 즉시 초식을 바꾸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상대의 손가락을 끼워 잡았다. 손목
만 비튼다면 상대의 손가락은 부러치고 말 형편이었다.
그러나 복강안의 무공은 매우 뛰어났다. 그는 손가락을 뺄 생각
을 하지 않고 도리어 나머지 세 손가락을 마주 뻗어내며 손목을
홱 뒤집더니 팔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장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릇 주먹을 뻗치거나 장력을 쏟아내려면 반드시 팔을 뒤로 움
츠렸다가 빼어내야 했다. 그러나 복강안은 장력을 뻗쳐내면서 전
혀 팔을 움직이지 않았으며, 더우기 초식 또한 기이하여 환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고 내력 또한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호비는 깜짝 놀랐으나 몸은 이미 허공에 떠 있는 상태라 힘을
빌릴 곳이 없었다. 그는 즉시 왼손을 내리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복강안의 두 손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순간 가슴의 기혈이
뒤집히는 듯 하였다. 순간 호비는 이 장 남짓 뒤로 몸을 날리며
허공에서 기식을 조절하고는 날렵하게 땅 위로 내려섰다. 비록 급
습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여전히 신(神)이 완전하고, 기(氣)가 흐
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사뿐히 내려선 것이었다.
주위에 있던 팔 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훌륭하군!]
복강안은 미미하게 흔들하더니 곧이어 좌정을 하고 앉았다.
그는 놀람과 의아함에 찬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곧
이어 우울한 듯한 무표정한 원래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
호비가 몸을 날려 손을 쓰고, 나는 듯 뒤로 물러선 것은 눈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두 사람은 허초(虛
招), 금나(擒拿), 점혈(點穴), 뉴지(杻指), 토장(吐掌), 변력(弁
力), 약퇴(躍退), 조식(調息) 등 칠팔 식의 가장 정묘하고도 오묘
한 무학의 변화를 교환한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호비
는 사생결단을 내려고 전력을 다해 덮친 것이고, 상대방은 그저
자연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방어를 한 것이라 호비가 한 수 아래임
이 분명히 입증되었다.
호비는 복강안이 그토록 정묘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
도 못했기 때문에 놀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탄복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분노는 억누를 수가 없었
다.
이때 그 외팔이 도인(道人)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하게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빨리 사
과의 절을 올리지 않고 무엇하고 있느냐?]
호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
리 봐도 그 사람은 복강안이었다. 다만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쓰
고 있었으며, 낡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웅들을 통솔
하고 호령을 내리는 존귀한 기상은 감출 수가 없었다.
설사 이 사람이 복강안과 닮았다 하더라도 대원수의 기풍이나
풍채까지 이토록 똑같을 수 있겠는가?
호비는 어리둥절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옷차림을 한 것을 보면 어떤 음모가 숨
어 있을 것이니 그 속임수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되겠구나.)
호비는 내심 작정을 하고는 부르짖었다.
[복강안! 당신의 무공이 너무나 출중하여 나는 비교가 안되는구
려. 그러나 당신이 저지른 천리에 어긋난 일을 나는 잘 알고 있
소. 설사 내가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내 당신을 놓아주
지 않을 것이니 명심해 두시오!]
복강안은 담담히 말했다.
[소형제, 자네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군. 하지만 나는 자네가 찾
고 있는 복강안이 아닐세. 그런데 자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
가 ?]
호비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래도 당신은 시치미를 때고 나를 희롱하려는 것이오? 설마하
니 당신이 내 이름을 모른단 말이오?]
그러자 복강안 뒤에 서 있던 사십여 세 정도 되는 키가 훤칠한
대한이 낭랑히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의 기개는 매우 뛰어나네. 정말 청년 영웅이라 할
수 있으며 탄복해 마지 않는 바일세.]
호비는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위풍이 당당한 것이 무공이 지극히 고강한 고수인 것 같
았다. 호비는 그의 위엄에 탄복하는 마음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낭
랑히 입을 열었다.
[귀하는 뛰어난 인재인 것 같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만주 벼슬아
치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오?]
그 대한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북경성은 천자의 발밑이나 마찬가지인데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하다니 자네는 목이 잘릴까 두렵지 않은가?]
호비는 앙연(昻然)히 말했다.
[오늘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죽일테면 죽이시오! 대장부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면 그만이지 무엇이 두렵겠소?]
사실 호비는 매사에 조심을 하고 신중히 배려를 하는 사람이었
지 결코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젊은 혈기가 끓어오르는 나이였다. 그는 마춘화
가 복강안에게 해를 입어 그토록 참담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보고 협의심이 끓어올라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당당하게 나선 것
이었다.
더우기 오매불망 잊지 못하던 소저가 갑자기 비구니로 변하여
나타난 사실이 그로 하여금 세상인심은 험악하고, 인생을 이토록
슬프고도 고달프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 감정에
빠져 그는 경천동지할 소란을 피워야 마음이 풀릴것 같았다. 기껏
해야 한 목숨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노기띤 눈으로 마상의 아홉 사람을 노
려보았다.
순간 외팔이 도인이 말에서 몸을 날려 뛰어내리더니 손이나 팔
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홀연 눈앞에 푸른 광채가 돌더니 그의 수중
에는 어느덧 장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이렇게 검을 뽑는 수법
은 실로 한평생 보기 힘든 것이었다.
호비는 암암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복강안의 휘하에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망라되어 있을
까? 어제 장문인 대회에서 만약 이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소란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혹시나 그 외팔이 도인이 검을 뻗쳐 올까봐 미리 몸을 기
울여 피하면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외팔이 도인이 웃으며 입
을 열었다.
[검을 받아라!]
푸른 광채가 번득이는 순간 눈깜짝할 사이에 잇따라 여덟 번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이 검세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호비는 검세의 방향도 간파하
지 못하고 부득이 그 기세에 따라 칼을 휘둘러 막았다. 그 외팔이
도인의 검법이 빠르기는 했으나 호비가 지니고 있는 가전의 절기
인 호가도법(胡家刀法)의 위세에 모조리 막혀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검과 칼이 여덟 번이나 부딪히며 창창창!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호비는 손발이 약간 어지러운 것을 느꼈지만 아
홉 번째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시키며 칼을 비스듬히 베어갔다. 그
외팔이 도인은 장검을 뻗쳐 막아냈다. 순간 두 검과 칼은 서로 마
주쳤는데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마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훌륭한 검법이고, 절묘한 도법이군!]
복강안이 말했다.
[도장(道長), 갑시다! 쓸데없는 사단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 같구려.]
외팔이 도인은 그 우두머리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듯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는 호비의 도법이 정묘하고도 기이한 것을 보고 더 겨
루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몸
을 날려 말 위로 오르더니 입을 열었다.
[이 녀석 도법이 제법이군!]
호비는 내심 탄복하고 있던터라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도사 양반, 당신의 검법도 훌륭했소!]
그리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애석하군, 애석해!]
외팔이 도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뭐가 애석하다는 것이냐? 나의 검법 가운데 어떤 빈틈이라도
있단 말이냐?]
호비는 냉랭히 말했다.
[당신의 검법에는 빈틈이 없으나, 위인됨에는 커다란 빈틈이 있
구려. 당당한 무림의 고수가 일개 만주 벼슬아치의 종놈이되다
니!]
외팔이 도인은 앙천대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욕 한번 잘 했다. 잘했어! 소형제, 자네는 나와 검을
겨룰 용기가 있는가?]
호비는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못할 것이 뭐 있소? 기껏해야 당신에게 죽기 밖에 더 하겠소?]
외팔이 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 밤 삼경, 나는 도연정(陶然亭)에서 자네를 기다리
겠네. 두렵다면 오지 않아도 되네.]
호비는 늠름하게 말했다.
[사내 대장부는 오로지 정인군자(正人君子)를 두려워 할 뿐, 어
찌 남의 집 종놈을 두려워 하겠소!]
마상의 사람들은 일제히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칭찬을 했
다.
[말 한번 시원하게 하는군!]
그리고는 말을 몰아 달려갔다. 하지만 몇몇은 여전히 고개를 돌
리고 바라보았다. 호비와 외팔이 도인이 싸우고 있는 동안 정영소
는 약왕묘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복강안을 발견
하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그들이 멀리 사
라지자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복강안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죠? 헌데 오라
버니는 정말 도연정으로 갈 거예요?]
호비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마하니 그가 정말 복강안이 아니란 말인가? 결코 그럴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위사들과 시종들에게 주구(走狗)니 종놈이
니 했는데도 그들은 어째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내가 말 한 번
잘했다고 칭찬을 하는 것일까?]
그러자 정영소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늘 밤 약속 장소에 가시겠어요, 안 가시겠어요?]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물론 가야지! 둘째 누이, 누이는 이곳에서 마소저를 돌보도록
하오.]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소저는 이제 돌볼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내일 아침까지 지탱할 수 없을 거예요. 오라버니가 강적과
맞서기로 약속을 했는데 내가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호비는 말했다.
[둘째 누이가 복강안이 애써 노력하여 개최한 장문인 대회를 망
쳐 놓았는데 그들은 이제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네. 누이가 만약
같이 간다면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영소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다.
[오라버니가 홀로 적을 만나러 가는데 어찌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요? 내가 옆에서 돌봐준다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
겠어요?]
호비는 그녀가 이미 결심을 한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았다. 그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의지는 자신보다 훨씬 굳건하
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자는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다고 판단을 했다.
정영소가 나직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원...... 원소저는 떠났나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돌
려 약왕묘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호비가 상방으로 들어서자 마춘화가 가느다란 음성으로 부르짖
고 있었다.
[아가야, 아가야! 복공자, 복공자! 나는 곧 죽어요, 나는 당신
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어요.]
호비는 또 한차례 마음이 쓰라렸다.
(정이라는 것은 이토록 도리를 따져 말할 수 없는 것일까? 복강
안은 그녀를 그렇게 대했는데도 죽어가는 마당에도 그를 잊지 못
하다니......)
어스름 빛이 찾아오자 호비와 정영소는 수 마장 떨어진 농가를
찾아가 약간의 쌀과 채소를 사서 밥을 지어 먹었다. 그리고는 다
시 신농씨의 약왕묘로 돌아가 마춘화를 곁에서 지켜 보았다. 이윽
고 초경이 되자 그들은 약왕묘를 나섰다.
호비와 정영소는 복강안 수하 무사와 약속을 하고 무공을 겨루
는 만치 상대방은 틀림없이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
니 일찍 가서 그들이 어떠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도연정은 황량한 들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은 도연(陶
然)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비구니 암자로서 쓰여있는 이름은 자
비암(慈悲庵)이었고, 암자에 모시고 있는 신상은 관음대사(觀音大
士)였다.
호비와 정영소는 그곳에 도착했다. 사방은 모두 갈대밭이었으며
서풍이 불어오자 갈대 꽃이 춤을 추듯 휘날리는 것이 마치 구름이
몰려오는 듯 했으며, 썰렁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끼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기러기 한 마리가 어스름 하
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정영소는 그 기러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저것은 짝을 잃은 외로운 기러기로군요. 친구들을 찾지 못해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홀홀망망히 길을 재촉하는군요.]
홀연 갈대밭에서 누군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온누리는 갈대꽃이 어지러이 춤추는데,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사람보다 가볍구나! 두 분은 정말 신의가 있는 사람이구
려. 일찌감치 약속을 지키고자 찾아왔으니 말이오.]
호비와 정영소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방의 음모와 간계를 미리 파악하려고 왔는데 그들
은 벌써 와서 도처에 사람을 매복시켜놓고 경계를 하고 있다니.
전혀 뜻밖이구나! 저 사람은 싯구를 물흐르듯 읊어대는 것을 보면
범상한 인물은 아닌 것 같구나!)
이윽고 호비가 낭랑히 입을 열었다.
[부름을 받고 약속을 지키러 온 이상, 어찌 서둘러 미리 오지
않겠소?]
이때 갈대밭 속에서 온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선비차림의 수재상
공(秀才相公)이 일어서더니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하지만 두 분은 잠시 기다려야 하겠소이
다. 우리 윗분들과 형제분들은 정히 제사를 지내고 있소이다.]
호비는 아무 생각없이 그러겠다고 했지만 내심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복강안이 야반 삼경에 이 황량한 곳에서 어떤 사람의 제사를
올리는 것일까?)
홀연 어떤 사람이 길게 읊었다.
[수심은 깊고, 액겁은 끝이 없구나(浩浩愁, 茫茫劫). 짧은 노래
가 끝나니, 명월이 일그러지네(短歌終, 明月缺). 성안은 푸르름과
핏빛으로 울창하구나(鬱鬱佳城, 中有碧穴). 푸르름이 다하니 핏빛
도 사라지고, 임올 달래는 마음 그지 없구나(碧亦有時盡, 血亦有
時滅, 一縷香魂無斷絶). 그런가, 아닌가? 벌나비로 변했다네(是耶
非耶? 化爲蝴蝶).]
읊는 것이 끝나자 그 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고, 덩달아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장탄식을 불어냈으며 나직이 흐느끼기도 했다. 그
속에는 몇 명의 여인의 곡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호비는 그 한 수의 사(詞)를 듣고 그 속에는 사람을 기리는 정
이 듬뿍 담겨 있어, 한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모시는구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푸르름과 핏빚' 운운하는 것
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호젓한 밤에
처절하고도 애절한 그 소리는 호비의 심경을 흔들어 놓아 자기도
모르게 목이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소리가 멈추고 십 여 명의 사람들이 등성이로 올라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비 옆에 있던 수재상공이 부르짖었다.
[도장, 당신과 약속한 친구가 왔구려.]
외팔이 도인은 말했다.
[정말 장하군. 장해! 소형제, 우리 삼백 합만 겨루어 보세.]
그러면서 그는 몸을 날려 등성이에서 내려왔다.
호비는 마주나갔다. 외팔이 도인은 호비와 수 장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별안간 몸을 솟구치며 검을 뽑았고, 몸을 날리는 기세를
빌어 질풍같이 찔러갔다. 이 기세의 강맹함과 신속함은 더 없는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호비는 그가 그토록 강맹하게 나오자 젊은 혈기가 발동하여 자
신도 몸을 솟구치며 허공에서 칼을 뽑아 맞받아갔다. 창창창창!
하는 네 번의 음향이 울려퍼지며 순식간에 칼과 검이 마주쳤으며,
두 사람은 일제히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도 그 외팔이 도인
은 일검을 공격했고, 호비는 칼을 들어 반격했다.
두 사람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시 창창창! 창창창! 하는 소리
가 여섯 번 울려퍼졌다. 동시에 등성이에서는 갈채 소리가 크게
일었다.
외팔이 도인의 검법은 매섭고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보통 사람
이 한번 검을 내뻗는 시간에 너댓 번을 찔렀다.
호비는 각오를 다지며 생각했다.
(당신이 빨리 움직인다면 나라고 질소냐?)
순간 호비는 호가도법의 쾌속무비한 도법을 전개하여 보통 사람
들보다 너댓 번은 더 휘둘러댔다. 서로 비교한다면 외팔이 도인의
검초는 반푼 정도 호비보다 빨랐고, 호비의 도세는 외팔이 도인보
다 반푼 정도 더 강맹했다.
두 사람은 재빠름으로 맞서며 겨루고 있는지라 공수의 변화나
완급은 모두 쓸모없는 듯 했으며 오로지 매섭게 초식을 교환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그저 쩡쩡! 창창!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우박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어떻게 보면 여러
필의 말들이 달려오는 것 같기도 했으며, 혹은 소가죽으로 만든
북을 여러 개 동시에 치는 것 같았다. 연이어 들려오면서도 하나
하나의 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것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었
다.
외팔이 도인은 싸우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통쾌하군! 통쾌해!]
검초는 갈수록 빨라지고 매서워졌다. 호비는 암암리에 내심 자
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외의 강적올 만나 자신이 한 평생
갈고 닦은 것을 모조리 펼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와 손을
쓰는데 있어 도법이 척척 들어 맞아 이렇게 자유자재로 호가도법
을 구사한 적이 없었다.
그는 혼자 연습읕 해왔기 때문에 이토록 빨리 자신의 도법을 구
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호가도법이 정묘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상대를 만나 몇 초만 펼치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던터라 그
도법의 정묘함을 자신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외팔이
도인이 다그치듯 핍박을 하자 자연스럽게 자기도법의 주도 면밀함
과 정교함을 깨우치며 받아낸 것이었다.
외팔이 도인의 신속한 대응을 볼 때 그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싸움을 치러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겨루자마자 상대의 도
법의 빈틈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호비의 한 수 한 수는 모두
공수를 겸비하고 있어 수비를 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수비의 형
태를 갖추었고, 세찬 공격을 하지 않는데도 매서움이 실리는 것이
었다. 또한 매 일초에는 후수가 갈무리 되어 있어 빈틈을 찾을 수
가 없었다.
외팔이 도인의 공격은 실제로 휠씬 심후한 편이었다. 만약 호비
가 재빠름으로 상대와 맞서지 않고, 상대의 초식을 하나 하나 해
소시키며 변화에서 승부를 걸려고 했다면 벌써 패하고 말았을 것
이다. 하지만 초식의 빠름이 형언할 수 없는 정도라 생각할 여유
가 없이 평소 익힌대로 쾌도를 펼치며 상대를 한 것이었다.
이 쾌도는 과거 비천호리(飛天狐狸)가 창안한 것으로서 호비의
부친인 호일도에 이르러 더 많은 변화와 묘수가 가해진 것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오백 여 초를 겨루었으니,
그 빠름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것이다.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외팔이 도인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으며, 호비 역시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은 모두 상대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가 있었다.
격렬한 싸움이 한창 무르익자 호비와 외팔이 도인은 내심 똑같
이 상대에게 탄복을 하며 아끼는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검으로
찌르고, 칼로 내리치는 초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던지라 누
구라도 먼저 손을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
칼과 검이 난무하며 쩡쩡!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갑자
기 한 사람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곧이어 멀리서 무기
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더불어 호통을 내지르는 소리가 섞여 들
려왔다.
외팔이 도인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싸움의 테두리 밖에서 두
둥실 몸을 날려 비껴서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형제, 잠깐만. 자네의 도법은 매우 고명하구만. 하
지만 공교롭게도 적이 들이닥친 것 같네.]
호비는 일순 어리등절했다. 그러고 보니 동북쪽과 동남쪽에서
인영이 어른거리며 예닐곱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희끄무
레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런
가 하면 등 뒤에서 호통소리가 일며 서북쪽과 서남쪽에서 사람들
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대략 스무 명 정도는 됨직했다.
외팔이 도인이 부르짖었다.
[열 넷째, 자네는 돌아오게! 이 둘째 형이 상대를 하지!]
그러고 보니 호비와 응대하던 그 서생이 손에 노란색의 곤봉모
양의 무기를 들고 서북쪽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외팔이 도인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대답했다.
[좋소이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무기를 허공에 휘둘렀다. 순간 윙윙! 하는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며 일진광풍이 일며 갈대꽃이 휘날렸다. 그
리고는 몸을 돌려 등성이로 올라 뭇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뚝 서는 것이었다.
복강안이 등성이에 서 있었고, 그 곁에는 십 여 명이 함께 서
있었다. 그 중에 서너 명은 여자인 것을 호비는 달빛 아래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호비는 크게 기뻐하며 생각했다.
(사면 팔방에서 모두들 복강안을 적으로 삼고 있는데 어느 가문
의 영웅호걸들인지 모르겠구나. 저 사람들의 경신법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내가 그들과 합심협력하여
저 간악한 복강안이라는 도적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복강안이라는 도적의 무공이 뜻밖으로 고강하고 그 휘하의 사
람들도 하나같이 강자들이다. 저들이 저렇게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혹시 달리 어떤 음모를 안배한 것이 아닐까?)
정히 생각에 사로잡혀 망설이고 있을 때 사방에서는 여전히 사
람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호비는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더욱 의
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달려오는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반수는 선홍색 승포를 걸친 서장의 승려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
은 궁중에서 일을 보고 있는 위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호비는 몸을 날려 정영소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직이 입을 열었
다.
[둘째 누이, 우리는 과연 고약한 적의 함정에 빠진 모양이군.
안밖으로 적이 협공을 해오니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우리는 서쪽으로 뚫고 나가세!]
정영소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청나라 궁중의 위사 가운데 검은
수염을 기른 대한이 손에 장검을 들고 뭇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무진도인이오? 오래전부터 당신의 칠십이로의 추혼탈명검(追魂
奪命劍)이 천하무쌍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구려.]
그러자 그 외팔이 도인은 냉랭히 응수했다.
[당신은 무진이라는 이름을 알면서도 도전을 하다니 정말 대담
하군! 당신은 누구요?]
호비는 그 검은 수염을 기른 위사의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무진도장이라구!]
무진도장이라 불리운 그 외팔이 도인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 조 셋째 아우님이 자네가 영웅호걸답다고 칭찬
을 하더니 정말 틀림없군!]
호비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복강안은...... 우리 조 셋째
형님은 어디에 계시죠?]
그 검은 수염의 대한은 무진의 말에 대답을 했다.
[불초는 덕포(德布)라고 하오.]
무진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바로 덕포였군. 나는 회강에서 최근 황제 늙은이가 그
무슨 놈의 이빨이 뾰족하고 발톱이 예리한 충실한 개를 한 마리
찾았는데, 그 이름이 그 무슨 놈의 덕포라던가 떡포라던가 하던데
그가 만주 제일의 용사라고 일컬어지며 그 무슨 놈의 어전시위의
두령이라는 말을 들었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그는 잇따라 새 번이나 '그 무슨 놈의'라는 말을 붙이자 덕포는
그만 울화가 치밀었는지 호통을 내질렀다.
[맞았소! 당신이 나의 대명을 들었으면서도 감히 천자의 발밑까
지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정말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군......]
그 말의 여운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며 무
진도장의 장검은 어느덧 그의 가슴팍을 노리고 찔러왔다. 덕포는
검을 비켜 들고 막았다. 창! 하는 소리가 나며 두 검이 서로 부딪
히고서는 웅웅!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의 검에 실린 경력(勁力)이 똑같이 매우 웅후한 모양이었다.
무진도장은 칭찬의 말을 했다.
[그런대로 괜찮군!]
그리고는 검초를 끊임없이 내뻗으며 공격을 했다.
덕포의 검초는 무진도장의 신속함에 비하면 휠씬 뒤떨어지는 편
이었으나 문호를 엄밀하게 지키며 가끔 일검을 내뻗곤 했는데 역
시 매서웠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는 호칭은 결코 요행으로 얻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호비는 원성에게서 홍화회의 둘째 두령인 무진도장의 검술의 정
묘함은 당금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라고 했는데 뜻
밖에도 자기가 무진도장을 상대로 수백 초를 겨루고도 패하지 않
았다는 사실에 불현듯 뿌듯해지며 기쁜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
는 요행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다행히 무진도장인 줄 몰랐기 때문에 버틸 수가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위명(威名)에 지레 겁을 먹고 일백 초도 견
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복강안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그가 홍화회의 영웅이고 조 셋째 형의 친구라면, 저 복강안은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호비는 정신을 가다듬고 무진도장과 덕포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
고 있었는데 청나라 시위가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무기를 버려라!]
호비는 엉겹결에 물었다.
[뭐하자는 게냐?]
그 시위가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감히 체포하려는데 항거하겠다는 것이냐?]
호비는 냉랭히 반문했다.
[그러면 어쩔테냐?]
그 시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이 젊은 도적놈이 간덩이가 부었군! ]
그리고는 검을 높이 쳐 들고 내리쳐왔다. 호비는 몸을 날려 피
하며 칼을 휘둘러 일초를 반격했다. 순간 다른 한 명의 시위가 철
추(鐵鎚)를 비스듬히 날려 호비는 칼로 후려쳤다. 그 사람의 팔힘
은 무척 센편이고 무기 또한 기이하도록 무거운 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비는 무진도장과 사력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손과 팔에
맥이 풀린터라 칼을 놓치고 말았다. 대뜸 호비의 칼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 사람은 철추를 휘둘러 호비의 등을 노리고 쓸어쳐 왔
다. 호비는 무기를 놓쳤으나 조금도 당황하거나 흩어진 자세를 보
이지 않고 몸을 솟구치며 그 철추를 피하고 기세를 빌어
팔꿉으로 그 자의 허리를 밀어쳤다. 그 자는 큰 소리로 부르짖
었다.
[어이쿠! 어쭈 요녀석 봐라!]
그는 순간 하마터면 철추를 놓칠뻔 했다. 곧이어 두 명의 위사
가 달려들며 협공을 했다. 한 사람은 채찍을 들고 있었고, 한 사
람은 단창(短槍)을 들고 있었다.
정영소는 그 모습을 보고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제가 도와드릴께요!]
그리고는 유엽도를 뽑아들더니 앞으로 달려나와 도우려 했다.
호비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이 오라버니가 공수입백인의 수법을 보여주
지!]
정영소는 그가 네 명의 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매우 위험
해 보였다. 그러나 호비가 여유있게 말을 하자 한편으로 물러서서
칼을 비껴들고 경계를 했다.
호비는 어릴 적부터 익혀서 몸에 익숙해진 사상보법(四象步法)
을 전개하여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네 명의 시위들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사상보법은 동쪽의 창룡(蒼龍), 서쪽의 백호(白虎),
북쪽의 현무(玄武), 남쪽의 주작(朱雀) 등 사상(四象)에 따라 변
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사상에는 다시 제각기 칠숙(七宿)이 있어
다시 이십팔숙의 형태로 변화를 하는 것이었다.
적의 네 가지 무기는 가벼운 것도 있었고, 무거운 것도 있었는
데 왼쪽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어느덧 오른쪽에서 찔러오곤 했다.
그러나 그의 보법이 기묘해서 종종 간일발의 차로 적의 무기를
피하곤 했는데, 어떤 때는 몇 치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
기도 했다.
정영소는 처음에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는 그의 절묘함이 극에 달해 그녀는 마음이 차분해
졌다.
호비를 상대하고 있던 네 명의 시위는 모두 만주 사람으로 청나
라 궁중에 들어가기 전에는 관동사걸(關東四傑)이라 불리어졌으며
모두 일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호비가 교묘한 사상보법을 펼치
며, 간간이 그 기세를 몰아 반격을 하며 공수입백인의 수법을 펼
쳤지만 상대의 무기를 빼앗기는 커녕 도리어 위험한 지경에 빠지
곤 했다.
순간 호비는 그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조금전 무진도장과 격렬
한 싸움을 벌임으로써 소모된 힘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아직 원기
가 회복되지 못해 긴요한 찰라에 진기를 끌어올리는데 차질이 생
겨 정묘한 수법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도리
를 깨우치자 즉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적의 공격을 피하며
천천히 운기조식을 했다.
한편 덕포와 싸우고 있던 무진도장은 수 십 초를 공격했으나 모
두 가로막히자 초조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십년 동안 중원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늘 처음으로 손을
쓰는데 정말 내가 늙어서 쓸모가 없어진 것일까?)
기실 덕포의 무공은 뛰어난 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무진은 일거
에 제압을 하지 못하자 초조해졌지만 사실 덕포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번쩍 번쩍하
며 칼날이 번득이자 그 신출귀몰함이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
아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자기가 천하를 종횡하면서도 한번도 이와 같은 강적
을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암암리에 자기가 패한다
면 황마괘(黃馬掛)를 하사받은 것이나 어전시위반령(御前侍衛班
領)이니, 만주제일용사니, 통령대내십팔고수(統領大內十八高手)니
하는 기다란 직함과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목숨을 걸고 대항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진도장은 호비가 혼자서 맨손으로 네 명의 위사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자기는 손에 검을 쥐고서도 한 사람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불같은 성격에 호승심이 강한 그로서는 굴욕감을 느낄 정
도였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심해진 편이
라 즉시 더 빠른 일검을 내뻗어 착실하게 공격을 펼쳤으며 한걸음
한걸음씩 승기를 잡고 있었다.
덕포는 적의 공세가 갈수록 매서워지며 검날을 휘두를 때마다
광막이 이는 것이 자기의 요해를 찔러오는 듯 하자 자신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하들을 불러 도와달라고 부탁
하고 싶은 생각이 목까지 차올라왔으나 만약 '모두 덤벼라!'하는
말이 입에서 홀러나온다면 한평생 쌓은 영명은 물거품이 되리라는
것을 떠올리고 억지로 참으며 근근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한편
으로 자신은 젊고, 상대는 나이가 많으니 지금은 열세에 놓여있지
만 시간을 끌다보면 상대의 기력이 쇠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
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진도장은 고함을 치면서 매서운 공세를 펼쳐내고 있었
고, 정력은 더욱더 왕성해지는 것 같았다. 뭇 시위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검의 광채가 희뿌옇게 뻗쳐
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두 사람이 어떤 초식을 펼치는지 분간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구릉에서 지켜보던 무진도장의 무리 역시 조용히 두 사람이 싸
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점차 무진도장이 우세를 차지하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도장의 영기발랄한 풍모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신위
(神威)도 과거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으니 정말 기쁘고도 축하
할 일이다!)
별안간 무진도장이 대갈을 일성했다.
[받아라!]
창! 하는 소리와 더불어 검날이 덕포의 가슴을 찔렀으나 순간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일며 그의 장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원래
덕포는 옷속에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고 있었던터라 일검이
적중되기는 했으나 아무런 손상을 입지도 않았고, 도리어 무진도
장의 장검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순간 무진도장은 어리둥절했으며, 이때를 놓칠세라 덕포는 매서
운 일검을 뻗어 무진도장의 어깨를 찔렀다.
구릉에 서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바람처럼 두 사람이
달려와 구원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무진도장이 호통을 내질렀다.
[우두척차(牛頭擲叉)!]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부러진 검을 나는 듯이 뻗쳐내 덕포의
목을 찔렀다. 덕포는 괴이한 소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무진도장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네가 이긴 것이냐, 아니면 내가 이긴 것이냐?]
덕포는 부러진 검에 적중이 되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
은 것은 아니었지만, 목에 칼을 맞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떨
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이겼소.]
무진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검초를 수없이 받아냈고, 내 어깨에 상처를 입히
다니.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좋아!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생각해서 나는 당신의 목숨은 용서해주기로 하지.]
두 명의 위사가 재빨리 달려와 덕포를 부축하여 한켠으로 물러
섰다.
무진도장은 어깨의 상처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렇
지도 않는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천천히 구릉 위로 올라갔다. 그
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싸매도록 하고는 여전히 손가락질을 하
면서 호비의 도법을 평하고 있었다.
이때 호비는 운기조식을 어느 정도 끝내자 정력이 이미 회복된
상태였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맹렬한 기세로 삽시간에 주먹
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다. 순간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어이쿠!]
[으윽! 헉!]
네 마디의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칼과 철추, 채
찍, 그리고 단창 등 네 가지 무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호비는 발로 걷어차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주먹으로 한 사람올
때려 정신을 잃도록 만들었으며, 장력을 내쏟아 나머지 한 명의
위사로 하여금 선혈을 토해내며 연신 곤두박질치도록 만들었다.
순간 구룽 위에서 뭇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는데 그 중에서도 무
진도장의 목소리가 가장 우렁찼다.
[호비, 정말 절묘하군!]
구룽 위에서 갈채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다섯 명의 시위들
이 호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지니지 않은 맨손
이었다. 그 중 맨 왼쪽에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맨손으로 당신을 상대하겠소.]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두 발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잡히며
동시에 등뒤에서 한 사람이 덮쳐들어 무쇠와 같은 팔로 그의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다른 사람이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얼싸안았으며, 다른
두 사람은 호비의 두 손을 잡아당겼다.
이번에 덕포는 거느리고 있던 대내십팔고수(大內十八高手)를 모
조리 데리고 나선 것이었다. 대내십팔고수라 함은 네 명의 만주인
과 다섯 명의 몽고인, 아홉 명의 서장 승려였다.
건륭 황제는 홍화회와 한 차례 접촉을 한 후 다시는 한족 출신
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시위에 한족 출신
을 한 사람도 등용하지 않고 모두 만주나 몽고, 서장의 용사 등을
뽑은 것이었다. 이들 십팔고수는 더군다나 대내 시위중에서도 엄
선된 사람들이었다.
호비를 붙잡은 사람들은 다섯 명의 몽고 출신 시위로서 씨름과
되잡이질에 능했으며 더우기 호비가 순간 경계를 하지 못해 그들
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호비는 몸이 들리는 순간 흠칫했으나 도리어 기뻐하고 있었다.
(이 금나수법은 바로 우리 가문의 가전절기가 아닌가?)
그들이 두 손을 끌어당기자 즉시 몸을 뒤로 벌렁 젖히며 그 기
세를 빌어 두 사람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쿵! 쿵! 하는 소
리가 일며 손을 잡고 있던 두 위사들이 서로 사정없이 박치기를
하고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호비는 두 손을
뽑아내는 순간 목을 감고 있던 자의 손을 거머쥐고 비틀자 우지
끈! 하는 소리가 일며 그 사람의 팔목이 부러졌으며, 동시에 우지
끈 뚝뚝! 하는 소리가 두 번 일며 허리를 껴안고 있던 시위의 팔
이 부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 다섯 명의 몽고인들은 씨름에는 일가견이 있어 한만몽회장
(漢滿蒙回蔣) 등의 각 부족의 무사들 가운데 적수가 없는 형편이
었다.
그러나 씨름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누르는 것이지 호
비처럼 뼈를 부러뜨리는 금나수법은 허용되지 않았다. 두 명의 시
위들은 뼈가 부러지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으나 이
미 전의를 상실한터라 일제히 노해 부르짖었다.
[위반이다. 규칙위반이야!]
호비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싸움에도 어떤 규칙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섯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규칙위반이겠구만.]
두 시위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다리를 잡고 있던
자는 여전히 죽어라 하고 힘을 쓰며 호비를 쓰러뜨리려고 애를 쓰
고 있었다.
호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 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넌즈시 물
었다.
[당신은 손을 놓겠소? 못놓겠소?]
그 자는 이를 악물고 부르짖었다.
[못놓겠다! 못놔!]
그러자 호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그
의 등에 있는 대추혈(大椎穴)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순간 그 자는
전신에 맥이 빠지고 힘없이 두 손을 풀었다.
순간 호비는 그의 몸을 쳐들어 이합! 하고 기합을 내지르며 그
자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이윽고 첨벙 첨벙! 하는 소리가 일며 사
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그 자가 내던져진 곳은 진흙으로 된 갈
대밭이었다.
그 자는 허공에서 내동댕이쳐지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골이 빠
개지는 것 같았으나 노기를 참지 못하고 비척비척하며 진흙탕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버럭버럭 악을 쓰고 있었다.
호비가 네 명의 만주 시위를 처리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
나, 이 몽고 시위들을 요리하는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또한
깨끗하기 이를데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네 명의 만주 시위들을 물리친 호비
를 다섯 명의 몽고 시위돌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로잡는가 했는데,
순간 쿵쿵!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아이쿠! 우
엌! 하는 소리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첨벙 첨벙!
하는 소리가 일어나며, 순식간에 네 명의 몽고 시위는 맥없이 바
닥에 나뒹굴었고, 더우기 한 명은 멀찌감치 수 장을 가로질러 날
아가 갈대 숲을 헤치며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자 어떤 자는 망연자
실했고, 어떤 자는 의기소침해 했다.
그러나 구릉 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갈채 대신 와!
하니 박장대소를 하였다.
영웅호걸들과 만나다!
와! 하는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붉은 구름이 일듯 아홉 명의 서
장 승려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호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들의 무기는 모두 각기 달랐다. 어떤 사람은 계도를 쓰고 있
었고, 어떤 자는 석장(錫杖)을 들고 있었으며, 어떤 자들은 호비
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괴이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것이 중후한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다만 그들의 포위한 형
세와 발걸음을 볼 때 실로 강적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
면 동쪽에 한 명, 서쪽에 한 명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 팔괘(八
卦)의 방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마치 진세(陣勢)를 펼쳐 놓은
것 같았다.
호비는 손에 들린 무기가 없었으므로 내심 당황하며 재빨리 생
각을 했다.
(둘째 누이에게 칼을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적의 계도를 빼
앗아야 하는가?)
홀연 구릉 위에서 누군가 호통을 내질렀다.
[소형제! 칼을 받게.]
순간 세찬 파공성이 일며 구릉 위에서 한 자루의 칼이 날아왔
다. 바람을 가르며 이는 윙윙! 하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그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호비는 그 기세에 내심 감탄했다.
(조 셋째 형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예에 정통한 인재들이로구
나. 나보고 이렇게 던지라면 던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칼의 기세를 보자 서장의 승려들은 쳐서 떨어뜨릴 엄두를 내
지 못하고 다투어 몸을 피했다. 순간 호비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기회를 빌지 않고 어찌 이 진세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겠는
가? 바로 이때다!)
그의 판단은 칼이 날아오는 속도만큼이나 기민했다. 허연 광채
를 번득이며 등이 두텁고 날이 엷은 칼이 위맹한 파공성을 일으키
며 호비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호비는 그 칼을 받을 생각
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살짝 칼자루를 퉁겨냈다.
그러자 그 칼은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다가 곧장 방향을 틀며 하
늘로 쏜살같이 치솟는 것이었다.
아홉 명의 승려는 일순 자신도 모르게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허
공으로 솟구치는 칼을 바라보았다.
호비가 노린 것은 이 찰라의 순간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
려 계도를 들고 있는 승려 곁으로 짓쳐들며 계도를 빼앗아 들고
즉시 호가도법의 쾌속무비한 도법을 전개했다. 맹렬히 찍고 베어
가는 그 신속함과 정확함은 질풍노도와 같았다.
그는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홉 명의 서장 승려는
모두 팔이 아니면 다리가 잘라져 요행으로 참변을 모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승려들은 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었으나, 일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적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삽시간에 모두 중상을
입고 비명을 토해냈다.
이 싸움에서 호비는 순간적으로 교묘한 술책을 펼쳐 아슬아슬하
게 이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위험 천만의 순간이라 할 지라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칼을 휘두른 것은 어쩌면 그 누군가를 떠
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거 이렇게 칼로 적의 시선을 빼앗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 역시 불심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되
었기에......
계도를 휘둘러 적을 제압하자 퉁겨 올랐던 칼은 비로소 머리위
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즉시 계도를 던지고 그 칼을 받았다.
칼이 손에 들어오자 보통 칼보다 두 배는 더 묵직한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칼의 주인의 완력은 엄청난 모양이었다.
달빛 아래 비추어 보니 칼자루에는 다음과 같은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분뢰수(奔雷手)!>
호비는 크게 기뻐하며 부르짖었다.
[문(文) 넷째 나으리! 제게 칼을 빌려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
립니다!]
별안간 등뒤에서 쉰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검을 받아라!]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호비의 등 뒤에서 바람이 일었다.
호비는 순간 흠칫하며 놀랐다.
(사람의 검법이 이렇게 매서울 수가 있다니!)
그는 황급히 칼을 돌려 막았다. 그러나 상대의 일초는 이미 거
두어진 이후였고, 곧이어 다시 일검을 찔러왔다. 호비는 다시 칼
을 뒤로 돌리며 막으려 했으나 다시 허공을 긋고 말았다.
몸을 돌려 적을 맞으려 했으나 배후에 있는 적의 검초는 신속하
고 민첩하기 이를데 없어 도저히 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호비
는 경악을 하며 급히 앞으로 반 장 남짓 몸을 날려 왼발을 내딛으
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은 그림자처럼 따라붙
으며 검초를 다시 뻗쳐내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등 뒤에서 다섯 번의 검초를 펼쳐냈고, 호비는 막는
답시고 다섯 번 허공을 후려친 셈이었다. 그러나 시종 그 자의 얼
굴을 볼 수가 없었다.
호비에게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검이 빠르기로 유
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진도장과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였고, 곧이
어 네 명의 만주 용사, 다섯 명의 몽고인과 아홉 명의 서장 승려
를 연이어 상대한 것인데, 지금 또한 적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곤경에 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패배를 예고한 것이었다.
호비는 다급하고 당황한 나머지 요행을 바라며 위험한 초식을
구사하려 했다.
순간 다시 등 뒤에서 적의 검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호비는 맞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훌쩍 앞으로 몸을 날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몸을 뒤집어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칼을 옆
으로 비켜내며 적의 검초를 밀어젖혔다.
순간 그 자는 칭찬의 말을 던졌다.
[훌륭하군!]
그리고는 동시에 왼손을 들어 호비의 가슴을 후려치려 했다.
호비 역시 왼손을 내뻗었다. 두 손이 맞딱뜨리자 호비는 그 자
의 장력이 부드러우면서도 웅후하며, 부드러움 속에 살기가 갈무
리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호비는 홀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알고보니 당신이었구려!]
그 사람 역시 똑같이 부르짖었다.
[알고보니 당신이었구려!]
두 사람은 장력을 맞닥뜨리자 비로소 상대방이 복강안의 대회에
서 암암리에 혈도가 짚힌 젊은 서생 심연(心硯)을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 알아차리고 즉시 뒤로 물러섰다. 호비가 정
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그 사람은 허연 수염을 휘날리고 있었고,
의젓한 용모에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 무청자가 아닌가?
호비는 그만 어리둥절했으며 일시에 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무진도장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비청형(菲靑兄), 당신은 나의 이 소형제의 무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청자는 대답했다.
[무진도장과 오백 여 초를 겨룰 사람이 천하에 몇 명이나 되겠
소 ? 이 늙은이의 견문이 좁아 우리 무림에 이렇게 젊은 영웅호걸
이 출현한 것을 모르고 있었구려.]
그는 말을 하면서 장검을 검집에 꽃고 앞으로 걸어나와 다정한
얼굴로 호비의 손을 잡았다.
호비는 그의 모습에서 영기발랄한 기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지난번 장문인 대회에서 본 것처럼 금방이라도 저 세상으로 갈
것 같은 노인의 풍모와는 전혀 달라 내심 무척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진도장은 구릉 위에서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형제, 이 우비자(牛菲子)는 출가 이전에는 면리침(綿裏針) 육
비청(陸菲靑)이라고 했다네. 자네는 이 분을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게나.]
호비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면리침 육비청이라면 천하에 위명을 떨친지 이미 수십 년이 되
었는데, 오늘 공교롭게도 그와 손을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
었구나.)
그와 같은 생각이 들자 호비는 급히 몸을 구부리고 큰절을 올리
며 입을 열었다.
[후배 호비가 도장님께 인사드립니다.]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치를 따져 말하더라도 자네가 후배지! 소형제, 그는 나와 의
리로 맺어진 나의 형님이시라네.]
호비는 순간 홈칫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장포마괘를 걸친 약간 뚱뚱한 체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호비가 꿈에도 그리던 천수여래 조반
산이 아닌가?
호비는 이 의형님을 하루라도 잊은 날이 없었던지라 와락 달려
들어 조반산을 껴안으며 불렀다.
[셋째 형! 정말 이 소제는 형을 무척 그리워 했답니다!]
조반산은 호비의 몸을 돌리고 달빛에 비치는 호비의 얼굴 모습
을 잠시 바라보더니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형제, 자네는 이제 성인이 다 되었군! 이 형은 오늘 자네가 잇
따라 고수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실로 기쁘기 짝이 없었네.]
호비 역시 기쁘기 그지 없었다.
이미 궁중의 시위들은 모조리 뺑소니쳐서 그림자도 볼 수 없었
다.
호비는 즉시 정영소를 데리고 와 무진도장과 조반산 등에게 소
개를 했다. 조반산이 입을 열었다.
[형제, 정씨 누이, 내가 자네들에게 우리 총타주를 소개시켜 주
지.]
호비는 깜짝 놀라 물었다.
[진 총타주...... 그...... 그 어르신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
까?]
무진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자네에게 크게 꾸중과 욕을 듣지 않았는가? 무슨 천
리에 어긋난 짓을 했으며 무슨 의리없고 박정한 남자라고 그야말
로 혼이 나갈 정도로 욕을 퍼부었지 않았는가 말일세. 하하하! 우
리 총타주께서는 한평생 아마 그처럼 혹독한 욕은 얻어먹은 적은
없을 것이네.]
호비는 어리등절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 복강안이......]
육비청은 미소를 했다.
[진 총타주의 모습과 복강안의 모습은 정말 닮았더군. 소형제,
자네는 그와 일면식도 없으니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설사 매일 만
나는 사람이라도 오해를 하겠더구만.]
무진도장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과거 항주성 밖에서 총타주는 복강안으로 가장하여 그 뭐라드
라...... 위진하삭(威震河朔) 왕유양(王維揚)을 사로잡기도 했었
지......]
호비는 매우 황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형, 빨리 저를 진 총타주 앞으로 데리고 가셔서 사과를
드리도록 해 주십시요.]
조반산은 웃었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되지 않는 법일세. 총타주는 자네와 일장
을 교환한 후 자네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대단하셨다네. 또
한 자네의 심기가 굳건하다는 등 칭찬이 자자하셨네.]
두 사람이 구릉 위로 오르기 전에 진가락은 군웅들을 데리고 구
릉 위에서 그들을 맞으려는 듯 내려오고 있었다. 호비는 털썩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소인이 눈이 멀어 총타주의 위엄을 거스르게 되었으니 실로 벌
을 받아도 마땅하오이다......]
진가락은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손을 뻗쳐 호비를 부축해
일으키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사내대장부라면 오직 정인군자(正人君子)를 두려워 할뿐, 어찌
주구들과 종놈들을 두려워 하겠는가라는 말이 있네. 북경에 도착
하자마자 내 그 두 마디 말을 들으니 속이 시원했네. 소형제, 자
네의 그 몇 마디 말에 우리는 만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보람을 느끼네.]
조반산은 일일이 군웅들에게 소개를 했다. 호비는 이 사람들을
흠모한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문태래(文泰來)가 칼을 던져 도와
준 것과 낙빙이 천리마를 선물해 준데 대해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
을 하고, 이윽고 문태래에게 공손히 칼을 되돌려 주고 자신의 칼
을 땅바닥에서 주워 허리에 꽃았다. 그러나 그 칼은 이미 철추에
맞아 날이 문드러져 쓸모가 없게 된 상태였다.
잠시 후 심연이 다가와 복강안 부중에서 혈도를 풀어 준 일에
대해 호비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무진도장은 매우 흥겨운듯 연신
손짓 발짓을 하며 조금전 호비와 덕포 두 사람과 무공을 겨루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처럼 신명나는 싸움은 평생 동안 몇 번 없
었다고 했다.
육비청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도장, 무공에 대해서는 우리 이 소형제가 실로 대단하구려. 그
러나 또 한 분의 젊은 영웅호걸이 이 소형제보다 열 배는 더 무서
운데 도장은 아마 그 영웅호걸을 이기지 못할 것이오.]
무진도장은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소?]
육비청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충고하는데 도장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니
그를 찾지 않는 것이 좋을 거외다.]
무진도장은 펄쩍 뛸 듯하며 말했다.
[쳇!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는데 만나자마
자 이렇게 된소리를 하는 것이오? 나는 그와 같이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구려.]
육비청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복강안 부중에서 개최한 천하장문인 대회에 각문 각파의 고수
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그들 나름대로 절기를 지니고 있는 자
들이라는 것은 시인할 수 있겠소?]
무진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오?]
육비청은 설명하듯 말했다.
[심연 노제가 대회에서 소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실수를 하여 사
로잡히게 되었소. 그리고 조 셋째아우만 하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자부하는 재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옥룡배 밖에 차지하지
못했소. 서천 쌍협 상씨 형제가 왕림했으나, 겨우 두 사람을 구출
했을 뿐이외다. 그러나 그 젊은 영웅호걸은 눈깜짝 할 사이에 일
곱 명의 고수의 손에서 옥룡배를 모조리 빼앗아 박살을 내버렸소
이다. 그는 단지 몇 모금의 입김을 불어 냈을 뿐인데 복강안의 그
대회를 풍지박산이 되도록 만들었단 말이외다. 그런데도 도장이
그 젊은 영웅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이오?]
정영소는 그가 자기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
굴을 붉히며 살그머니 호비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모두들 육비청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고 아무도
그녀를 주의하지 않았다.
젊고 아리따운 부인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우리들은 단지 그 장문인대회가 방해를 받아 무산되었
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이 아리따운 부인은 바로 금적수재(金笛秀才) 여어동(余魚同)의
아내인 이원지(李沅芷)였다.
육비청은 이윽고 그 젊은 영웅이 어떻게 교묘한 계책으로 일곱
개의 옥룡배를 박살냈으며 어떻게 독연기를 내뿜어 모든 사람들의
배를 아프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복강안을 사람들이 의심했으며,
나중에 어떻게 혼란이 일어났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군웅들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무진도
장은 여전히 승복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육형,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그 젊은 영웅이 누구인
지 알려 주려는 것이오? 도대체 누구길래 그러시오?]
육비청은 웃었다.
[멀리 있다면 하늘 끝에 있을 수 있고, 가까이 있다면 눈 앞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듯이 바로 이 정소저가 그 사람이외다.]
그리고는 호비의 손을 끌어당겨 등 뒤에 숨어 있던 정영소의 모
습이 군웅들의 눈에 뜨이도록 만들었다.
군웅들은 일제히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
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비쩍 마르고 얌전하게 생긴 나이 어린 처
녀가 복강안이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하고 획책했던 천하장문인대
회를 순식간에 풍지박산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육비청과 같이 무림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 터무
니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지 않을래
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무당파에서는 십 년 전 동문 간의 참극으로 사형인 마옥
(馬鈺)과 사제인 장소중(張召重)이 차례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자
문파에서는 명성이 실추되는 것을 걱정하고 육비청을 모셔다가 장
문직을 이어받도록 했다. 장문직을 계승한 육비청은 착실히 문호
를 정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에서 의심을 하고 시기를 할까봐 아예 육비
청은 출가를 했으며, 도호(道號)를 무청자라고 하였다. 그는 이후
십 년 간이나 깊은 산 속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이번에 복강안이 장문인 대회를 열자, 무당파는 자고로 소림파
와 쌍벽을 이루는 무림의 대 문파이고, 무당의 명수인 화수판관
(火手判官) 장소중이 과거 조정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생각하여
무당파의 장문인이 산에서 내려오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
정에서는 육비청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다.
육비청은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웅심이 여전했으며, 복강안이
이번 일을 도모한 것은 틀림없이 강호의 무림 동도들에게 불손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거절하고
가지 않는다면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불러일으킬 형편이라 홀로
대회에 참석하여 진상을 알아보고 기회를 보아 일을 처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심연이 탕패에게 붙잡히는 것을 보고 몰래
손을 써서 구원을 한 것이었다.
진가락, 곽청동(藿靑桐) 등 홍화회의 군웅들이 회강에서 대거
북경으로 달려온 것은 바로 이 날이 향향공주(香香公主)가 세상을
떠난지 십 년째 되는 제사날인지라 무덤에 찾아가 제사를 올리려
는 목적 때문이었다.
한편 복강안은 장문인대회가 여러 사람들의 훼방으로 풍지박산
이 나고 더우기 은연 중에 무림 각문파와 원한을 맺게 되자 매우
분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덕포로 하여금 대내 십팔고수를
거느리고 성밖 각처를 순찰하여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죽이
거나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화정 부근에서 미처 조반산이나 문태래 등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들은 대패를 당하고 뺑소니를 친 것이었다.
진가락 등은 청나라 조정 벼슬아치들의 근성을 잘 알고 있었다.
덕포 등이 그토록 참패를 당하고 낭패한 나머지 도망을 쳤지만,
홍화회의 인물들이 황친대관(皇親大官)을 건드리거나 놀라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덕포는 돌아가서 애써 이 사실을 감출 것이고, 결
코 그들은 복수하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비록 북경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마음놓고 머물 수
가 있었다.
군웅들과 육비청은 오래전부터 사귀던 친구인지라 오랫만에 상
봉을 하자 각자 할 말도 많았으며, 게다가 호비와 정영소를 새로
알게 되어 더욱 기분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순간 멀리서 두 번 손뼉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에 다시
세 번 손뼉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생 행세를 하던 금적수재 여어
동이 손뼉을 세 번 쳐서 응대를 했고, 잠시후 다시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무진도장이 입을 열었다.
[다섯째 아우와 여섯째 아우가 왔군.]
이때 소리가 나는 곳으로부터 두 명이 나는 듯이 달려왔다.
키가 훤칠하고 마른 체구를 가진 것이 복강안 부중에서 본 적이
있는 서천 쌍협 상백지, 상혁지 형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뒤로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각기 어린애
가 안겨 있었다. 그들은 예불대와 예불소 쌍동이 형제였으며, 두
아이들은 마춘화의 쌍동이 아들이었다.
예불대와 예불소는 그 한쌍의 어린애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 목
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하제자로 키우기 위해 빼앗아야겠다
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씨 형제 역시 쌍동이인지라 예씨
형제의 말을 듣자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그들은 장문인 대회
가 아수라장이 된 기회를 이용해 복강안 부중의 내원(內院)으로
잠입하였다. 이때는 복강안과 뭇 위사들이 배가 아파 독에 중독이
된 줄 알고 서둘러 해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 상씨형제는 힘들이
지 않고 예닐곱 명의 무사를 쓰러뜨리고 아이들을 빼앗아 온 것이
었다.
호비는 그 아이들올 대하자 마춘화의 명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떠올리고 희비가 교차하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진가락에게 말했다.
[총타주, 지극히 황당한 생각이지만 이 후배가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진가락은 천천히 말했다.
[호형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게나. 자네와 나는 오늘 처
음 만나기는 했으나 이미 마음으로는 사귄지가 오래된 사이가 아
닌가? 내 힘이 닿는 한 소형제의 말을 들어주겠네.]
호비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말로 꺼내기가 매우 거북스러워 겸
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후배의 이와 같은 생각은 실로 희한야릇한 것이라 이야기하면
모두 웃을까 두렵군요.]
진가락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황당무
계하게 보이겠는가? 그리고 어느 한 가지라도 이상야릇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호비는 용기를 낸듯 말했다.
[총타주께서 탓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그리고는 두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햇다.
[이 두 어린애는 복강안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애들의 어머
님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답니다.]
이윽고 그는 과거 상가보에서 일어난 일과 마춘화를 치료하게
된 사연을 쭉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웅들은 모두 피
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으며 하나같이 분노했다.
성격이 괄괄한 무진도장은 즉시 북경성 안으로 쳐들어가 의리없
고 인정머리 없는 복강안을 일검에 찔러 죽이겠다며 분개했다. 그
러자 홍화회의 일곱째 두령인 무제갈(武諸葛) 서천평(徐天宏)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북경성 안에 그와 같은 커다란 변고가 일어났소이다.
우리가 북경성으로 온 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외다. 설령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복강안을 찔러 죽이기는 커녕 어쩌
면 우리들이 무사히 빠져나오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진가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복강안 저택의 대문 앞뒤로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지 셈 수도 없을 지경인데 단지 성 안으로 잠입하는 일만 하
더라도 쉬운 노릇이 아니외다. 내가 이번에 형제들과 이곳에 함께
온 뜻은 친히 제사를 모시고자 하는데 있었으니 일시에 분을 참지
못하여 뭇 형제들 중에 어떤 손상을 입도록 할 수는 없소이다. 호
형제, 자네가 나에게 부탁할 일은 무엇인가?]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저는 총타주께서 만리 먼 길을 마다않고 회강에서 북경까지 오
신 것이 단지 무덤 속에 있는 저소저의 제사를 지내고 기리겠다는
마음 때문이라 생각하며, 진타주께서 정이 많고 의리를 중시하는
점은 보기드문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불초는 과거 그
마소저로부터 은혜를 입은 몸이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어 내심 안
타깝게 여기고 있던 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 마당에도 눈을
편히 감지 못한 것은 첫째로, 그녀가 아끼는 두 아들을 그리워하
는 것이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상씨 쌍협 두 분 선배님께서 이미 구
출을 하셨군요.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녀가 복강안이라는 간악
한 자를 여전히 그리워하며 만나보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외
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
지만 한편으로는 가련하기도 합니다. 다만 정에 얽혀......]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호비는 서글픈 감정이 들면서 어떻게 표
현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진가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는 나에게 천리를 저버리고 매정하기 이를데 없는
복강안을 대신하여 다정하고도 의리가 깊은 마소저를 한 번 위로
해 달라는 말이 아닌가?]
호비는 나직이 대답을 했다.
[네, 그렇습니다!]
군웅돌은 호비의 그와 같은 생각이 정말 희한한 착상이라고 생
각했으나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진가락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침울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입을 열었다.
[무덤 속의 저 소저가 죽을 때 만약 나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
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끌내 소원을 이루
지 못하고......]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내 즉시 그 마소저를 만나러 가도록 하지.]
호비는 진정으로 감격을 했다. 진가락이 풍운을 질타하는 인물
이고 천하 영웅호걸들이 모두 다 승복하고 추대하는 인물인데 반
해 자신은 무명의 후배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그와 같이 황당무계한 일을 부탁하고 보니 너무나 자기가
경솔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진가락
은 선뜻 승낙하는 것이 아닌가? 호비의 마음은 이 진총타주가 이
후 끓는 물 속이나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하더라도 기꺼이
따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웅들은 말에 올라타서 호비의 인도 하에 나아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일행은 약왕묘 밖에 이르렀다.
호비는 두 어린애의 손을 잡고 진가락과 함께 약왕묘 안으로 들
어갔다. 조그마하고 음산한 방 안에 콩알만한 등불이 켜져 있었는
데 기름이 다되어 등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상태였으며,
마춘화는 낡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등불과 같은 모습이었
다.
두 어린애는 침대로 달려들며 부르짖었다.
[엄마! 엄마!]
마춘화는 눈을 뜨더니 사랑하는 아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갑
자기 정신이 드는 듯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두 어린애를 품안에 꼭 껴안고 중얼거렸다.
[아가야, 아가야, 이 엄마가 너희들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
단다.]
세 모자는 서로 얼싸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
춘화는 눈길을 돌리고 호비를 보더니 두 어린애에게 타이르듯 말
했다.
[이후 너희들은 호 아저씨를 따르도록 하고 아저씨 말을 잘 듣
도록 해라...... 너희들은...... 저 호 아저씨를 의......]
호비는 그녀의 심중올 헤아리고 말했다.
[좋소이다. 내가 이 두 어린애를 의아들로 삼도록 하지요. 마소
저, 안심을 하시구려.]
마춘화를 미소를 띠우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가들아, 빨리...... 빨리 큰절을 해라. 그래야 내가......
안심을 할 것이 아니냐......]
호비는 두 어린애가 무릎을 꿇고 네 번의 절 하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어 두 어린애를 얼싸안고 나직이 말했다.
[마소저, 또 어떠한 분부가 있으신지요?]
마춘화는 띠엄 띠엄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 부탁을...... 제발 나를...... 나의 남편인
서...... 사형의 무덤 곁에...... 묻어주어요...... 그는 매우 불
쌍해요...... 어릴적부터 나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
를...... 그를 싫어했었죠.]
호비는 갑자기 그날 석옥에서 적에 대항하던 광경과 상보진이
석옥 밖 숲 속에서 서생을 죽이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
음 속으로 쓰라림을 느끼면서 다시 약속을 했다.
[내 반드시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가 죽기 직전에 남편을 떠올리는 것을 보
자 호비는 쓰라린 마음 속에서도 미미하나마 기쁨을 느꼈다.
사실 그는 복강안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춘화가 남편을
기억하고, 그 양심없는 연인을 들먹이지 않는 것을 보고 더없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춘화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탄식을 하듯 중얼거리
는 것이었다.
[복공자, 내가 얼마나 당신과 만나기를 원하는지 아시나요.]
진가락은 방안으로 들어간 이후 문가 으숙한 곳에 서 있었기 때
문에 마춘화는 그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비는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흔들며 두 어린
애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 그 대신 진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
로 다가섰다.
호비가 문을 나서 마당 중간쯤 걸어가고 있을 때, 아! 하는 마
춘화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는 행복과 희열, 그리고 하염
없는 사랑과 연모의 정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끝내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사
람을 만난 것이었으니......
호비는 망연히 약왕묘의 대문을 나섰다. 홀연 피리소리가 그윽
하게 울려퍼졌다. 금적수재(金笛秀才) 여어동(余魚同)이 나무밑에
서 피리를 불고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홈칫해졌다. 과거 산동 상
가보에서 어렴풋이 그와 같이 감미롭고 정에 겨워 몸부림치는 듯
한 가락을 들어본 것 같았다.
그와 같이 정에 겨우면서도 부드러운 가락을 당시 복강안은 퉁
소로 불어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마춘화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고, 끝내는 이와 같은 사연을 낳게 된 것이었다.
금적수재의 피리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사랑과 연모 가운데 내포된 씁쓸함과 상심, 그
리고 불행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약왕묘 밖의 모든 사람들은 멍하니 넋을 잃고 침묵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겪어온 달콤하고도 처량하기도 했던
아련한 과거를 각자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호비는 백마를 타고 있는 자색 장삼의 소저를 떠올렸다.
그 백마에 타고 있는 자의 소녀를 떠올리자 호비는 땅바닥에 퍼
져 앉아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호탕하
기 이를데 없는 무진도장마저도 아스라히 먼 기억 속에 파묻혀 있
었다. 그 역시 과거 아름답고도 매정했던 어느 벼슬아치 집의 소
저에 빠져 그녀의 말에 속아 스스로 자신의 한팔을 잘라낸 일이
있었으니......
피리소리는 그윽하면서 느릿하게, 그리고 처량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진가락은 약왕묘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며 호비에게 고
개를 끄덕였다. 마춘화가 이미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두 아이들과 연인을 모두 만나
본 것이었다.
호비는 그녀가 진가락에게 복강안으로 오해하고 복강안의 매정
함을 꾸짖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한평생을 다하도록 넘쳐흐르던 그
리움을 하소연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가락 이외에 이세상 그
누구도 모르리라!
호비는 상씨 쌍협과 예씨 형제에게 마춘화의 두 아이들을 회강
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마춘화의 상을 치르고 나
서 즉시 회강으로 돌아가 뭇 영웅호걸들과 만나겠다고 약속을 했
다.
진가락은 호비와 정영소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한 뒤 말을 타
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호비는 시종 그들로부터 원성에 관한 이야
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조반산이나 낙빙마저도 그녀
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혹시 원성이 그들을 만나 영원히 자기에게 그녀의 이름을 들먹
이지 말라고 부탁을 한 것일까?)
그녀 역시 호비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히 멀어져 가는 한 여인이
되고 마는 것인가?
독수의 흉계(凶計)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바쁘게 움직였던 터라 호비와 정영소는
약왕묘에서 수십 장쯤 떨어진 개울로 가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정영소는 등 뒤에 있는 봇짐 속에서 소병(燒甁)을 꺼내더니 개울
가로 가서 맑은 물을 퍼다가 호비에게 권하며 함께 먹었다.
호비는 격렬한 싸움을 벌였으며, 게다가 기쁘고 슬픈 일을 겪은
지라 이때는 호되게 전신의 맥이 빠지고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개
울가에 누워 반 시진이 넘도록 휴식을 취했다. 그제서야 기력이
약간 회복되어 , 사람은 다시 약왕묘로 되돌아 왔다.
두 사람이 승방(僧房)으로 걸어가 가볍게 방문을 열고 보니 마
춘화는 침대 위에 죽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이 무척 평온한 표정이었다.
호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남편 옆에 묻어달라고 했네.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을 잡으려고 도처에 사람들이 깔려 있는 형편이니 어디 가
서 관을 구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녀를 화장하여 재를 가지고
가서 안장하는 수밖에 없겠네.]
정영소는 다소곳이 그 말을 받았다.
[네 그래요.]
호비는 몸을 구부려 마춘화의 시신을 안아 일으키려고 했다.
정영소가 갑자기 팔을 잡아끌며 부르짖었다.
[잠깐만!]
호비는 그녀의 음성이 매우 긴박한 것을 보고 즉시 손을 움츠리
며 물었다.
[아니, 왜 그러는가?]
호비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문 뒤에서 나직이 나는 숨소리
를 들을 수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판자 문 뒤에 두 사람
이 숨어 있었는데 그들은 놀랍게도 정영소의 대사형인 모용경악과
세째 사누이인 설작이었다.
정영소는 손을 재빠르게 놀려 한 무더기의 적갈분을 날려 마춘
화가 누워있는 침대 밑으로 뿌렸다.
호비는 마음 속으로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침대 밑에는 틀림없이 지극히 흉악한 적이 숨어있는 모양이었
다.)
이때 설작이 방문을 밀어젖히고 달려나왔다. 호비는 신속하게
오른손으로 정영소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날려 방문을 뛰쳐나가
며 발로 문짝을 걷어찼다.
순간 문짝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왈칵 젖혀지며 모용경
악과 설작은 문과 벽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모용경악은 그런대로 견딜 수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설작의 높
다란 곱추 등은 벽에 눌려 매우 아픈 듯 참지를 못하고 큰 소리를
내질렀다.
호비와 정영소가 막 문 입구에 도달하여 멈추어 서자 침대 아래
에서는 적색의 안개와 같은 것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적갈분은 다른 사람의 장력에 의해 되날려 나온 것이었다. 이윽고
홀연 인영이 번쩍하더니 한 사람이 몸을 퉁기듯 달려나왔다. 순간
챙그랑 창창!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면서 그 자는 손에
호탱(虎撑)을 휘둘러 호비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호비는 힐끗 보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는
스스로 독수약왕이라고 자처했던 석만진이었다.
정영소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그의 몸과 무기에 손을 대지 말아요!]
호비는 그녀의 사형과 사누이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람들의 온몸이 독으로 뒤덮혀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독을 묻
힌다면 후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세 걸음 뒤로 미끄러
지듯이 물러서며 칼을 뽑아들고 간과회감(諫果回甘)이라는 일초를
펼쳐 반격을 했다. 이 일초의 도법은 지극히 빨라 석만진은 다급
하여 피하지를 못하고 호탱을 들어 그 칼을 맞받았다.
순간 챙그랑 창창!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석만진의 호탱에 달려있던 쇠구슬
이 그 충격에 챙그랑 창창! 하고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
다.
이때 모용경악과 설작도 어느덧 승방에서 달려나와 석만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석만진은 호비의 일초를 맞받아치자 상대방의 도
법이 정묘하고 팔힘이 엄청나서 자신의 팔이 은근히 저려오며 시
큰거리는 것을 느끼고 더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호비는 내심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독을 쓰는데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무공 역시 뛰어
나구나. 나의 간과회감이라는 일초는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고 부
지불식간에 펼친 것인데 그가 받아내다니 대단하구나.)
이때 모용경악이 입을 열었다.
[서사매, 사숙을 보고도 어째서 인사를 드리지 않는가?]
정영소는 냉랭히 대답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사숙이지요?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요!]
석막진이 냉랭히 말했다.
[독수신효(毒手神梟)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너의 사
부는 설마하니 나에 대해서 한 번도 들먹이지 않았단 말이냐?]
정영소는 시큰둥하게 응수했다.
[독수신효라고요? 그 이름은 한 번 들어본 것 같군요. 우리 사
부님은 과거에는 확실히 사제가 한 사람 있었지만, 그 사제가 함
부로 독약을 남용해서 사람을 해치고 못된 짓을 골라했기 때문에
이미 사조(師祖)에 의해 문파에서 축출당했다고 하더군요. 석선
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인가요?]
석만진은 넌즈시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문파는 독약을 사용하는 것을 따지는 문파이니라. 따라서
독(毒)자가 붙은 이상 좋은사람처럼 행세를 할 필요가 어디 있느
냐? 이 석가는 말 그대로 소인이 될지언정 너의 사부와 같이 가장
된 위군자(僞君子)는 되고 싶지 않다.]
[우리 사부님이 언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는 거예요?]
정영소는 노해 부르짖었다.
석만진은 태연히 말했다.
[너희 사부가 죽인 사람이 한 두 사람인 줄 아느냐? 그 자신은
그가 독살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극악무도하여 죽어 마땅하다고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 더우기
죽은 당사자의 가족이나 자식들은 더욱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다.]
호비는 내심 흠칫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맞아요. 우리 사부님은 한평생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깊이 후회를 하시고 부처님께 귀의했어요. 그 어른신께서는
항상 우리 사형제 네 사람에게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하셨어요. 이 후배는 여태까지
한 사람의 목숨도 해친 적이 없어요.]
석만진은 냉소를 했다.
[거짓으로 인정이 있고 의리가 깊은 척하여 무슨 덕을 보겠다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 너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우리 문파의 걸출한
인재라고 생각되는구나. 장문인 대회에서 그 몇수는 정말 훌륭했
으며 너의 사숙인 나마저도 하마터면 너의 술수에 말려들뻔 했었
지.]
정영소는 그 말을 듣고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스스로 사숙이라고 칭하고 우리 사부님의 독수약왕이라
는 이름을 도용하고 있군요. 만약 진짜 독수약왕이 세상에 살아계
시다면 손으로 옥룡배를 잡으려 했을 때 어째서 옥룡배에 적갈분
이 뿌려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겠어요? 내가 대청에서 그 삼
오오마연을 뿜어낼 때 우리 사부 어르신이라면 어찌 알아차리지
못하겠어요.]
캐묻는 듯한 이 말은 들은 석만진은 대뜸 얼굴이 붉어지며 변명
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젊었을 적에 무진대사와 함께 무예를 익힌 바가 있었
다. 다만 독을 사용하는데 절제하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들을 많이
해쳤기 때문에 사부에게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수십 년 동
안 그는 무진화상과 여러 차례 겨룬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독을 쓰는데 있어 대가인지라 사용하는 약물의 맹렬함이나 독물의
기이함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몇 차례에 결쳐 솜씨를 모두 펼쳐 겨루었지만 번번이 석만진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 만약 무진대사가 시종 동문의 정리를 생각해
서 손에 사정을 두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빼앗기
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독을 가지고 겨룰 때, 석
만진은 단장초(斷腸草)의 연기에 그만 두 눈이 멀고 말았다. 그리
하여 그는 면전(綿甸)의 야인산(野人山) 속으로 도망쳐서 은주사
(銀蛛絲)로 차츰차츰 단장초의 독성을 제거한 끝에 가까스로 두
눈의 광명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다시 햇살을 볼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시력은 크게
손상을 입은 형편이었다.
옥룡배에 적갈분이 묻어 있고, 담뱃대에서 뿜어내는 연기 색깔
이 약간 다른 점이 있었으나 그는 그런 미세한 점을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정영소가 재배한 독초의 왕이라고 불
리우는 칠심해당(七心海棠)의 잎사귀의 가루를 적갈분에 섞어 넣
었고, 삼오오마연에 칠심해당의 꽃술을 섞은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독약의 냄새와 색깔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독성은
더욱 무섭게 되었다.
석만진은 야인산에서 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겨우 두 눈을
치료하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으나 무진대사는 이미 저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무진대사가 죽기만 한
다면 자기가 천하를 주름잡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형의 나이 어린 막내 제자에게 그토록 무서운 재간을 지니고 있
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밤 사람들은 정영소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망구
로 변장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더군다나 안중에도 없었
다. 따라서 당금 세상에서 독을 사용하는데 있어 능수능란한 고수
인 석만진 역시 자그마한 할망구가 옆에서 몇 모금의 연기를 내뿜
어 자기를 곤두박질 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다그치듯 하는 정영소의 두 마디에 그만 벙어리가 된 것처
럼 말을 하지 못했다.
뒤에 있던 모용경악이 넌즈시 입을 열었다.
[사매, 너는 사숙에게 죄를 짓고도 사죄를 하지 않다니 정말 건
방지고 당돌하구나. 사숙 어르신께서 일단 노하면 그 즉시 너는
뼈를 묻힐 곳이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나와 설 사매는 이미 어
르신의 문하로 들어갔다. 네가 순순히 약왕신편(藥王神篇)을 바친
다면 어르신께서는 어쩌면 기뻐하시며 제자로 거두어 들일 지도
모르는데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정영소는 사형과 사누이가 사문을 배반하고 더구나 본파에서 파
문을 당한 자의 문하로 들어갔다는 사실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
누를 길이 없었다. 이는 무림에서 가장 무거운 기사멸조(欺師滅
祖)라는 대죄를 범한 것이라 어느 가문이나 문파에서건 똑같이 용
서하지 않고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이미 석선배 문하로 돌어가게 되었구려. 그렇다면 소
매는 더이상 당신들을 사형이나 사누이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강
사형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역시 석선배의 문하로 들어갔는가
요?]
모용경악은 차갑게 말했다.
[강사제는 시류의 흐름을 모르고,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사부님께 죽음을 당했단다.]
정영소는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철산은 위인됨이
강직한 편이었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약간 거칠고 자기 멋대로
이긴 했지만 그녀의 사형, 사누이 가운데 가장 정파다운 인물이었
다. 그러한 그가 뜻밖에도 석만진 손에 죽었다니 슬픔을 금할 길
이 없었다.
정영소는 또 다른 의문을 느끼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설 세째 언니, 당신의 아들 소철은 어떻게 되었나요? 물론 잘
있겠죠?]
설작은 냉랭히 말했다.
[그 애 역시 죽었다.]
정영소는 궁금증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모르겠군요.]
설작은 냉랭히 말했다.
[내 아들인데 네가 왜 쓸데없이 나서는 게냐?]
정영소는 다소곳이 말했다.
[소매가 그 때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했어요. 그런
데 아직 축하의 말을 하지 못했네요. 모용 오라버니와 설세째 언
니는 언제 혼례를 올렸지요? 우리는 그래도 동문이고 같이 기예
를 익혔는데 잔치 국수 한 그릇 얻어먹지 못했다니 섭섭하기 그지
없네요.]
모용경악, 강찰산, 설작 세 사람이 한평생 얼키고 설킨 은원관
계는 처참하고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처음에 설작은 모용경악
을 짝사랑 했으나 모용경악은 다른 사람을 처로 맞아들였다. 설작
은 이에 노해서 모용경악의 처를 독살했다. 모용경악은 처를 위해
복수를 한답시고 설작의 용모를 추악하게 만들고 그녀를 꼽추와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강철산은 본래 이 사매를 좋아하였고, 그녀가 추악한 여인으로
변했는데도 개의치 않고 처로 맞아들였다.
헌데 모용경악은 그들이 혼례를 올리고 자식을 낳게 된 이후에
야 사매의 여러가지 좋은 점을 새삼 느끼고 끊임없이 그녀를 추근
덕거렸으며 끝내는 강철산과 안면을 바꾸고 원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강철산과 설작 부부는 부득이 무쇠로 된 집을 만들어
대사형의 침해를 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강철산은 석만진
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모용경악과 설작은 부부로 맺어진 것이었
다.
정영소는 이 중간의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깨닫자 속으로 생각했
다.
(둘째 사형이 석만진의 손에 죽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선사를
배반하고 석만진의 문하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겠지만 대
사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안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런데도 세째 사누이가 대사형에게 개가를 했다니 어쩌면 그녀 역
시 친남편을 모살한 죄를 범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윽고 정영소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소철이 중독된 그 날, 소매가 방법을 강구해서 구하려고 심혈
을 기울인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도 역시 그는 도화장 아래 목숨
을 잃고 말았으니...... 그 또한 그렇게 될 운명인가보죠?]
모용경악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물었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그는 실언을 했음을 알고 중도에서 황급히 말을 멈추며 설작을
바라보았다.
정영소는 냉랭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소매는 그저 짐작해 본 거예요.]
원래 모용경악은 운남성과 귀주성 접경지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도화장의 장독을 이용하여 일종의 독탄(毒彈)을 만들 수 있는 독
문의 재간이 있었다.
강철산과 설작 부부는 긴 세월을 두고 싸워왔기 때문에 나중에
그 독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정영소는 넌즈시 말을 해서 떠본 것인데 모용경악은 그 일이 사
실인데다가 느닷없이 질문을 하자 엉겁결에 대답을 한 것이었다.
정영소는 내심 더욱 커다란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
시 입을 열었다.
[세째 사이는 정말 악독하군요. 둘째 사형이 그토록 당신을 아
껴주었는데도 당신은 대사형과 공모해서 아들과 남편을 해쳐 죽이
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사실 강소철이 모용경악의 도화장 독탄에 중독되었다 하더라도
설작에게는 도화장을 해소시키고 강철산을 구할 수 있는 해약이
있었지만 일부러 나서서 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강철산
부자의 죽음은 비록 그녀가 손을 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공모를 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영소는 모용경악이 불쑥 대답한 말에 따라 그와 같은 인륜참
변(人倫慘變)의 내막을 헤아린 것이었다.
설작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소사매, 우리 사부깨서는 너를 돌봐주려는 뜻을 가지게 된 것
은 너의 운이 좋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너는 사과의 절을 올리지
않고 뭘 꾸물대고 있는게냐?]
정영소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그를 사부로 모시지 않는다면 둘째 사형과 같은 모
습이 되겠군요. 그렇죠?]
모용경악이 그 말에 대답을 했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지. 자네가 굴러들어오는 복을 걷어
차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강요를 하겠느냐? 다만 약왕신편(藥王神
篇)은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부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라 자
네가 장문인 대회에서 어르신에게 무례를 범한 점에 대해서는 아
마 따지지 않으실 것이다.]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약왕신편은 우리 사부님이 친히 쓰신
것이라 우리 세 사남매가 석선배 문하로 바꾸어 투신한다면 당연
히 선사가 전수한 무공을 모조리 버리고 다시 배워야 할 거예요.
석선배와 선사께서는 문호가 다른지라 설사 석선배가 선사를 이길
수 없더라도 제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두 분은 달리 명사(明師)를 모시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같이 복
을 누릴 수 있느니, 나의 운이 좋으니 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그 약왕신편은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으니 나는 태워버리겠어요.]
그리고는 보따리 안에서 누런 기름 종이로 된 책을 한 권 꺼내
화접자에 불을 켜서 책장에 갖다댔다.
석만진은 처음 그녀가 약왕신편올 태운다는 말을 하자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 약왕신편은 무진이라는 도적같은 땡초가 한평생 심혈을 기
울여 집필한 것인데 네가 어찌 아까와하지 않고 태울 수 있겠느
냐?)
그리하여 그녀가 책에 불을 붙이고 있어도 여전히 비슷한 생각
을 하였다.
(너의 사형 사누이가 약왕신편을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데
너와 같은 교활한 계집애가 어찌 가짜로 책을 한 권 만들어 놓지
않았겠느냐? 내 앞에서 시치미를 떼고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격이이니라!)
내심 그런 생각에 그는 그녀가 불로 책을 태우려 하는 것을 보
고도 냉소를 띠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런데 열기에 책장이 말려드는 것을 보니 지질이 오래되고 필
사본의 필적이 틀림없이 무진대사의 필적인지라 깜짝 놀라며 생각
을 달리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저 계집애는 책을 모조리 달달 외운 모양
이로구나. 그러니 저 가증스러운 계집이 미련없이 태우는 것이 아
니겠는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재빨리 호통을 내질렀다.
[손을 멈춰라!]
그리고는 휙! 하니 일장을 뻗었으며 화접자의 불은 대뜸 꺼지고
말았다.
정영소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건 저로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만약 석선배님의 의
술이 선사보다 못하지 않다면 이따위 책을 가져다가 어디에 쓰겠
어요? 그리고 만약 선사를 이길 수 없다면 어찌 후배를 제자로 거
두어들일 수 있겠어요?]
모용경악은 넌즈시 입을 열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독을 쓰고 약을 사용하는데 있어 선사보다
도 월등히 뛰어나시다네. 그러나 커다란 바다는 가느다란 실개천
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도 옥을 다듬을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약왕신편이 선사의 필생의 역작이니 우
리 사부가 대충 훑어본다면 그 가운데의 오류와 부족한 점을 지적
하여 후세에 더욱 훌륭한 약서(藥書)를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
느냐 ?]
그는 언변이 유창해 그럴싸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의 학문은 갈수록 일취월장 하시는군요. 홍! 그래서 두
사람은 문 뒤에 숨고, 한 사람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호오라버
니와 나를 암산하려고 하셨군요. 좋아요, 석선배. 이 후배는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데 만약 의혹을 밝혀주신다면 이 후배
는 약왕신편을 공손히 받치겠으며, 선배님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이 후배를 제자로 거두어들일 것을 간청드리도록 하겠어요.]
석만진은 그녀가 틀림없이 이상야릇한 문제를 들고 나와 자기를
난처하게 만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왕신편이 그
녀의 수중에 있어 그녀가 한번 손을 썼다하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이 상태에서 안면을 바꾸면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이윽고 그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에게 무슨 일을 묻고자 하는 것인가?]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귀주에 사는 묘인(苗人)에게는 일종의 벽잠독고(碧蠶毒蠱)라는
것이 있지요......]
석만진은 벽잠독고라는 네 글자를 듣자 안색이 일변하며 정영소
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만약에 벽잠독고의 알을 갈아서 만든 가루를 옷이나 그릇에 묻
혀 놓는다면 다른 사람은 잘 모르고 실수하여 건드리게 되면 고독
에 중독이 되겠지요. 이것은 묘인의 삼대 고독 가운데 하나가 아
닌가요?]
석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네. 나이어린 처녀가 아는 것이 꽤 많구만.]
그는 야인산에서 중원으로 들어섰으나 무진대사가 이미 죽었다
는 사실을 알고 그렇다면 무진대사의 문하 제자들이라도 모조리
죽여서라도 원을 풀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용경악은 지극히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석만진에게 제압을 당하자 에걸복걸하며 사부가 약왕신편
이라는 유작을 남겼는데 지금은 소사매의 손에 들어가 있으며 기
꺼이 석만진을 사부로 모시고 그를 인도하여 약왕신편을 빼앗아
드리겠다는 제안을 한 것었다.
석만진은 무진대사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무진대사를 외경(畏敬)스럽게 느끼던 차인데 그에게
유작이 있다는 말을 듣자, 그 가운데 독을 사용하는 재간이나 학
문이 실려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고귀한 수법이 적혀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용경악을 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후에 그의 간계를 받아들여 강철산 부자를 죽이고 설작마저 제
자로 맞아들였다.
석만진은 모용경악과 강철산, 설작 세 사람을 상대로 손을 써
보았는데 그들의 무공이 평범하고 사부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영소가 십 칠팔 세의 어린 아가씨라는 소리를
듣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저 찾아내기만 한다면 쉽게 책
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장문인대회에서 정영소의 술수에 말려들기는 했으나 여전
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과거 단장초에 상처를 입고 시
력이 형편없어져 적갈분과 삼오오마의 연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이었다. 하지만 호비가 대회에서 보여준 무공은 그로 하여금 상당
히 꺼리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암암리에 그들 뒤를 따르며 호비와 정영소가 도연
정으로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 떠나자 그들 스승과 제자 세
사람은 즉시 약왕묘의 후원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약왕
신편을 손에 쥐는데 있었다.
이후에 홍화회의 군웅들이 들이닥쳤는데 그들은 사람이 많고 세
력이 강대한 것을 보자 줄곧 후원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비와 정영소가 홍화회의 군
웅들을 전송하고 개울가로 나가 요기를 하고 휴식을 하는 틈을 타
서 겨우 마춘화가 누워있는 방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호비와 정영소가 들어오자 일거에 그들을 제압할 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총명하고 영기발랄한 정영소는 그
위기일발의 순간을 때늦지 않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석만진은 정영소로부터 벽잠독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
야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이 계집애가 이토록 뛰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의
사형 사누이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는걸!)
즉시 그는 온 정신을 모아 경계를 했으며 털끝만치도 얕볼 엄두
를 내지 못했다.
정영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벽잠독고의 알을 갈아 만든 분말은 어떤 물건이나 그릇에 뿌린
다면 무색무취하여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
더군요. 다만 독가루가 피와 살에 묻지 않는다면 독성이 맹렬하지
못해 해소시킬 방법이 있고, 반드시 피와 살에 묻혀 퍼져야만 목
숨을 빼앗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 일이란 양측면이 있는 법
이라 독가루가 사람 몸에 닿는다면 은은하게 파르스름한 빛이 드
러난다고 하더군요. 석선배가 마소저의 시체에 독을 뿌릴 때 만약
그녀의 옷자락에만 뿌려 놓았다면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었겠지만
진선진미(盡善盡美)하도록 한답시고 그녀의 얼굴과 손에까지 뿌린
것이 실수를 하신거죠.]
호비는 거기까지 듣자 비로소 그 떠돌이 의원 같은 자의 심보가
음악하기 이를데 없어 마춘화의 시신 위에 독을 뿌려놓은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는 자기와 정영소가 그녀의 시체를 옮기려 했다면
중독되는 것을 면할 길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대뜸 욕지꺼리
가 튀어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놈 같으니! 너는 남을 해치려다 오히려 너를 해
치게 될 것이다!]
석만진은 호탱을 혼들어 쨍그랑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나이 어린 계집애가 정말 눈썰미가 매서워 나의 벽잠독고를 알
아보았구나. 한(漢)나라 사람들 중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
람이 없는데 너야말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제이인자(第二人者)가
되겠구나. 정말 너는 견문이 넓고 재간도 뛰어나구나. 그러니 너
의 사형과 사누이가 어찌 너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겠느
냐?]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선배께서는 과찬의 말씀을 하고 있군요. 하지만 이 후배가 알
수 없는 것은 선사의 유작인 약왕신편에서도 벽잠독고를 사람의
몸에 뿌려 파르스름한 빛이 우러나지 않게 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석선배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셨지요?]
석만진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말했다.
[정말 보자 보자하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이고 있구나.
묘인들 중에서 고독을 창안한 조사(祖師)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방법을 모르고 있다. 너의 사부는 묘강으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데 무엇을 안다는 것이냐?]
정영소는 넌즈시 말했다.
[선배 그렇게 말을 하니 이 후배로서는 믿어야 하겠지만 선사의
유작 가운데는 틀림없이 그와 같은 방법이 적혀 있어요. 하지만
선배가 옳은지 선사께서 옳은지 잘 모르겠네요?]
석만진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방법인지 한번 네 이야기를 들어 보자꾸나.]
정영소는 여유있는 태도를 보였다.
[이 후배가 말한다 하더라도 믿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옳고 그
름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길밖에 없을 거예요.]
석만진은 물었다.
[어떻게 시합을 한단 말이냐?]
[선배가 벽잠도고를 꺼내서 사람의 손 위에 놓아보세요. 이 후
배는 선사가 적어놓은 방법에 따라 약을 배합하여 파르스름한 빛
이 드러나는지 알아보겠어요.]
석만진은 한평생 독약과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이
있다고 하자 반신반의 하면서도 진위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
이 간절했다. 그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의 손에 놓아 시험을 하자는 것이냐?]
정영소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다.
[그거야 물론 선배가 정하셔야죠.]
석만진은 내심 생각했다.
(내가 만약 저 계집애의 손에 놓자고 하면 저 기집애는 틀림없
이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 기세등등한 젊은이의 손에 놓
는 것은 더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생각을 해보더니 모용경악을 향해 말했다.
[손을 내밀게!]
모용경악은 펄쩍 뛸듯이 놀라며 외쳤다.
[이건...... 이건...... 사부님, 저 계집애의 속임수에 넘어가
지 않도록 하십시요!]
석만진은 엄한 표정을 하며 거듭 재촉했다.
[손을 어서 내밀어라!]
모용경악은 사부의 안색이 준엄한 것을 보고 감히 항거할 엄두
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벽잠독고가 얼마나 무서운가? 조금이라도
몸에 닿는다면 설사 사부가 해약을 주고 치료를 해주어도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한바탕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괴로움
을 당할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왼손을 한 자 정도 내밀었다가
급히 움추려 들였다.
석만진은 냉소를 했다.
[좋다. 네가 사부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노릇이지!]
모용경악은 사부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창
백해졌다. 원래 그는 석만진을 사부로 모시기로 하면서 엄한 맹세
를 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만약 사부의 명을 어긴다면 기꺼이 벌
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매일 같이 독물이나 독약을 만지고
있었기 때문에 벌을 내리겠다는 말은 쉽게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참혹하고도 잔인한 고통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도록 만드는 것
이었다.
그가 정히 손을 뻗쳐내려고 했을 때 설작이 재빨리 입을 열었
다.
[사부님, 제가 시험해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는 태연히 왼손을 내밀었다.
석만진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설 필요 없다! 사내대장부가 저렇게 용기가 없어 꽁무니를
빼는 꼴좀 보려무나.]
모용경악은 항의하듯 말했다.
[제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요. 나는 다만 소사매에게
간계가 많으니 틀림없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심려되어 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거죠.]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은 정말 무섭기 이를데 없군요. 과거 선사를 따를 때,
선사는 매사를 대사형 때문에 성을 내곤 하셨는데 이제 새로운 사
부를 모시고서도 제자가 사부보다 더 아는 체를 하는군요.]
석만진은 그녀의 말은 물론 자신들을 이간질시키려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냉랭한 시선으로 모용경악을 비스듬히 훌겨보았다.
모용경악은 그와 같은 눈초리를 대하자 온몸의 솜털이 돋는 것 같
아 슬금슬금 왼손을 내밀었다.
석만진은 품속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
다. 그 안에는 파란 빛을 띠우고 있는 누에 같은 것이 세마리 꿈
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황금 숟가락으로 상자 안에서 녹색 가루를
조금 뜨더니 모용경악의 손바닥 위에 부었다.
모용경악의 왼팔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온 얼굴은 공포와
분노, 놀람과 증오의 빛으로 가득차 얼굴 근육을 끊임없이 움직이
고 있었으며, 눈동자에서는 야수와 같은 광채를 내뿜는 것이 금방
이라도 사람에게 달려들어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둘째 누이의 저러한 처사는 좌우지간 그들 사제지간에 깊은 골
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저 모용경악이 이후에 기회만 있다면 오
늘의 이 원한을 갚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파르스름한 가루가 손바닥에 놓여지자 삽시간에 스며들
어 아무런 종적도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에는 은연중 푸른기운이
배어나왔는데 그것은 마치 나뭇잎이나 풀을 뜯은 손 같았다.
석만진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처녀애야, 어디 어떤 방법이 있어 손바닥에 푸른 빛이 돋아나
지 않게 하는지 너의 솜씨를 보도록 하자.]
정영소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호비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그 날 동정호반에 있는 백마사에서 나와 세 가지 약
속한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네.]
그리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 날 누이는 나보고 말을 하지말고, 손을 쓰지 말 것이며 그
녀 곁에서 세 걸음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세 가
지를 하나도 지키지 않았었지.)
정영소는 당부하듯 말했다.
[기억하고 있다니 잘 됐네요.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 약속을 절
대로 잊지 않도록 하세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영소는 다시 석만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선배, 당신의 몸에는 틀림없이 학정홍(鶴頂紅)과 공작담(孔
雀 )이 있겠지요. 이 두 가지 약물은 벽잠독고와 상극하면서도 상
보(相輔)하지요. 만약 믿을 수 없다면 선사의 유작을 한 번 보도
록 하세요.]
그리고는 기름종이로 만든 책자를 펼쳐 석만진의 눈 앞으로 디
밀었다.
석만진이 보니 과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 있었다.
<학정홍과 공작담 이 두 가지는 벽잠란(碧蠶卵)과 섞어 사용할
수 있는데 무색무취하게 되지만 다만 효과를 보는 것이 늦어진
다.>
그가 아랫 부분을 읽어내려가려 하자 정영소는 책을 덮어버렸
다.
석만진은 내심 생각했다.
(무진이라는 도적과 같은 땡초는 과연 박식하구나. 이번에 확실
히 진위를 가려보아야 하겠구나. 만약 틀림이 없다면 저 약왕신편
역시 가짜가 아닐 것이다.)
그는 한평생 독약 연구에만 몰두한 사람이었다. 근 이십 년동안
그는 먹고 자는 것을 잊다시피 하면서 사형보다 뛰어나기를 바랬
으며, 그것은 마치 광적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이때 그는 다진 기름종이로 된 필사본을 천하의 어떤 진귀한 재
물보다도 귀하게 여기며 오로지 저것을 내 손에 넣었으면 하는 생
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천성은 매우 잔인하고 매정한 사람이라 묘용경악을 이용하
자는 것이었지, 사제의 정리는 털끌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용경악의 손바닥에 벽잠독고를 시험에 본다면 훗날 기회를 노리
고 틀림없이 자기에게 보복을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즉시 세 가지 독물이 한꺼번에 섞여진다면 나중
에 어떻게 해소하던 간에 우선은 시험을 해보겠다는 욕심에서 오
른손 식지의 손톱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일진의 은홍빛 엷은 안
개가 분사되어 나오며 모용경악의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곧이어
다시 중지의 손톱을 퉁겨 일진의 검푸른 안개가 모용경악의 손바
닥에 뿌려졌다.
정영소는 그가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지도 않고 손톱을 가볍게
튕겨 마음대로 필요한 독약을 쏟아내는 손발의 움직임이 신속하고
민첩한 것이 선사나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놀라며 감탄했다.
그녀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전신을 살펴보던 중 내심
떠오르는 바가 있었고 어느덧 그 가운데의 현묘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석만진은 허리띠에 한 칸 한 칸 조그만 칸을 만들어 놓았
는데 모두 칠팔 십 칸은 되었다. 그 칸 속에 약가루를 숨기고 있
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익숙하도록 연마했기 때문에 손만 뻗치기
만 하면 원하는 약물을 손톱에 떠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귀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는 생각과 더불
어 그와 같이 손을 한번 내뻗는 사이에 독가루를 퉁겨낸다면 방어
하는 상대방이 어찌 방비하고 피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
다.
학정홍과 공작담 두 가지 약물을 모용경악의 손바닥에 퉁겨 낸
것은 그야말로 번개 불에 콩을 구워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용경
악이 손을 움추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모용경악은 이미 고독에 중독된 데다가 두 가지 극독을 첨
가하려 하자, 설사 석만진과 안면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항거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석만진이 자기에게 그토록 악
독하게 구는 것을 보자 차라리 소사매에게 굴복을 하고 사남매 세
사람이 합심협력하는 것이 차후에 석만진에게 끝없는 고통을 당하
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헌데 석만진이 독을 쓰는 수법은 번개처럼 빨라 모용경악이 미
처 행동을 하기도 전에 두 가지 극독은 그의 살갗으로 스며 들었
다.
그 순간 붉고 푸른 안개가 자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는데 홀연 손바닥에 감돌고 있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원상태로 되는 것이 아닌가?
석만진은 기쁨에 넘쳐 탄성을 질렀다.
[훌륭하군!]
그리고는 몸을 날려 정영소의 손에 들린 약왕신편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러나 정영소는 물러서거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방긋 읏고 있었다.
석만진은 책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순간 흠칫하며 생각했다.
(이 계집에는 도적같은 땡초의 관문 제자이니 책에 어떤 술수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재빨리. 손을 움츠리며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했다.
(이 돌대가리야, 멍청한 돌대갈아! 네가 만약 저 계집애를 업신
여겼다가는 몇 개의 목숨이 붙어있다 하더라도 저 계집년의 손에
모조리 요절이 나고 말 것이다.)
이때 모용경악은 손바닥이 찌릿찌릿 하다가는 다시 근질근질 한
것을 느꼈다 이와 같이 찌릿찌릿하다가 근질근질한 것이 곧장 심
장까지 전해졌으며, 마치 수천 수만 마리의 불개미들이 심장을 파
먹어 들어가는 것 같아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소사매, 빨리 해약을 꺼내 주게.]
정영소는 의아한 듯 부르짖었다.
[어마! 대사형, 어째서 선사의 당부를 잊었지요? 본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고독을 풀어놓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
홉 가지 해약이 없는 독약은 결코 사용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모용경악은 그 말을 듣자 등골에서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며 전
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학정홍, 공...... 공...... 작담은 구대금약(九大禁藥)에 속하
는데 자네...... 자네는 어째서 나의 몸에 사용했는가? 그것은 선
사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정영소는 냉랭히 말했다.
[대사형께서는 아직도 선사를 기억하시고 선사의 가르침을 어겨
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소매로서는
뜻밖이네요. 그 벽잠독고는 내가 당신의 몸에 놓은 것인가요? 그
리고 학정홍과 공작담도 내가 당신에게 쓴 것인가요? 선사께서는
항상 우리들에게 생사의 고비에 놓인다 하더라도 결코 해약이 없
는 독약은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어요. 이것이야말로 본
문의 가장 큰 계율이예요. 석선배와 대사형, 세째 사누이는 모두
본문에서 이탈했으니 그 본문의 계율을 자연히 준수할 필요가 없
겠지만 소매로서는 감히 그 계율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모용경악은 오른손을 내밀어 자신의 인손 맥문을 움켜잡고 독기
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으며, 온 얼굴에 식은 땀이
줄줄 훌러내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설작은 오른손을 홱 뒤집더니 모용경악의 왼손에 열 십(十)자로
그어 독성이 피와 함께 흘러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방
법으로서는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독성을 조금이라
도 약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그런 방법을 쓴 것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정영소에게 말했다.
[소사매, 사부님의 유작에서는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고 계신
가? 그 어르신께서 그와 같이 세 가지 독물을 함께 쓰는 방법을
기술해 놓으셨다면 틀림없이 해소시키고 구원할 방법이 있을 것이
네.]
정영소는 냉랭히 되물었다.
[설 세째 사누이가 말하는 사부님은 어느 분을 가르키는 거지
요? 소사매의 사부님인 무진대사를 가르키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
네들 현명한 두 부부의 사부인 석선배예요?]
설작은 그녀가 매정하게 다그치는 말을 듣자 극도의 분노가 치
밀어 욕찌걸이가 금방이라도 목에서 튀어나올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지라 지금은 사정을 해야
할 판이기 때문에 입으로는 부득이 굴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우리 못난 부부는 죽어 마땅하네. 아무쪼록 사매는 과거 동문
지간의 정을 생각하고, 선사이신 무진대사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
번 만큼은 용서를 하고 그 고귀한 손을 뻗쳐 이 이의 목숨을 구해
주기 바라네.]
정영소는 약왕신편을 뒤적거리더니 어느 글귀를 가리키며 말했
다.
[사누이, 보세요. 이 일은 나를 원망할 수 없어요.]
설작은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
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벽잠독고와 학정홍, 그리고 공작담을 함께 섞어 사용하게 되면
극독이 심장으로 스며들어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삼가하고 또 삼
가하도록 해라.>
설작은 대노해서 석만진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사부, 이 책에는 분명히 세 가지 독약을 섞어 쓴다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사부는 어째서 경악의 몸에다가 시험을 한
거예요?]
그녀는 사부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표정은 매섭기 이를데 없었
다.
약왕신편에 실린 그 두 글귀는 기실 석만진이 본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설사 그가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꺼려할 인물
이 아니었다. 그는 설작이 날카롭게 따지자 어찌 자기 자신이 모
르고 있었다고 승인을 하여 창피를 당하겠는가?
그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어디, 그 책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 안에 어떤 이상한 문제가
있는지 보아야겠군.]
설작은 극도로 분노했으며 다시 망설였다가는 남편의 생명을 보
장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하고 단도를 들어 묘용경악의 팔을 어
깨로부터 잘라버렸다.
사실 세 가지 독약은 무척 독하기 이를데 없었다. 독성이 손바
닥으로 스며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으므
로 손만 잘라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세 가지 독약을 섞
어 썼기 때문에 발작이 비교적 느렸고, 동시에 그의 손에는 상처
가 없었기 때문에 독약이 혈맥을 따라 홀러든 것이 아니라서 잠시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두었
다면 독이 퍼져 죽고 말았으리라!
설작은 무진대사의 제자인지라 그녀 나름대로의 지혈법과 상처
를 치료하는 재간이 있었다. 삽시간에 그녀는 묘용경악의 상처를
싸댔는데 그 수법이 지극히 깨끗하고 날렵했다.
정영소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사형, 세째 사누이, 내가 일부러 당신을 해칠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당신 두 분은 사문을 배반하고 사부의 원수를 다시 사
부로 모셨으니 이미 주살받을 죄를 지은 거예요. 게다가 둘째 사
형 부자를 해쳤으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모두 분노할 일을 저지
른 거예요. 지금 본문의 전인으로서는 오직 소매 한 사람 밖에 없
어요. 두 분이 사문을 배반한데 대해 소매가 징벌을 하지 않는다
면 일세에 쌓은 영명이 도리어 원수와 제자들의 손에 더렵혀지는
꼴이 되지 않겠어요? 둘째 사형부자가 참혹하게 비명횡사를 당했
는데도 만약 소매가 나서서 따지지 않는다면 그들 두 부자는 영원
히 원한에 사무쳐 구천을 맴돌게 될 거예요.]
그녀의 몸매는 수척하고 나이는 어렸지만 그러한 말을 도도히
내뱉는 모습은 절로 늠름한 위엄이 우러났다.
호비는 그 소리를 듣고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비열하고 악독하니 진작 죽였어야 했다.)
이때 정영소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사형의 팔을 잘라내기는 했으나 독기가 이미 심장으로 파고
들었으니 한 달 이내에 독이 퍼져 더이상 치료할 수 없을 거예요.
두 분은 이미 본문을 배반했다가 남의 독수를 입은 것이니 본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선사의 얼굴을 봐서 이곳에 있는
세 알의 생생조화단(生生造化丹)을 이 소매가 사부님을 대신해서
주겠어요. 이 생생조화단은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
로서 한 알이면 사형께서는 삼 년 동안 목숨을 연장할 수 있을 거
예요. 사형은 이를 복용한 이후에 선사의 은덕을 기억하시기 바래
요. 그리고 먼저 사부가 대사형을 더 잘위해 주었는지 아니면 지
금의 사부가 더 잘 대해 주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
요.]
그리고는 품안에서 세 알의 붉은 알약을 꺼내 내밀었다.
설작이 손을 내밀고 그것을 받으려는 순간 석만진이 냉소를 했
다.
[팔이 이미 잘렸는데 독기가 심장으로 퍼지는 것을 두려할 필요
가 뭐있는가? 그 세 알의 사사삭명단(死死索命丹:생생조화단을 비
꼬아 하는 말)이 뱃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거야 말로 독기가 심장을
파고들게 될걸.]
정영소는 냉소를 하며 그 말을 받았다.
[두 분이 새 사부의 말씀을 믿는다면 이 약은 필요가 없겠군
요.]
그리고는 품안으로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모용경악은 다급해
져 외쳤다.
[아닐세! 소사매, 아무쪼록 나에게 주게.]
설작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사매, 정말 고맙네. 우리는 개과천선해서 좋은 사람이 되겠
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정영소 앞으로 나서서 세 알의 알약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몸을 휘청하더니 노갈을 터뜨
렸다.
[석만진, 너는 정말 악독......]
그녀는 그 한 마디 말을 미처 끌내지 못하고 그만 앞으로 고꾸
라졌다. 정영소와 호비는 깜짝 놀라며 석만진이 움직이지도 않고
어떻게 독수를 뻗쳤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영소는 허리를 구부리고 설작의 몸을 뒤집어 그녀가 어떤 해
를 입었으며 구원을 할 수 있는지 보려고 했다. 그녀의 몸을 막
뒤집는 순간 갑자기 오른쪽 손목이 바짝 조여지면서 어느덧 설작
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정영소는 일이 잘못되었
다는 것을 알고 왼손을 들어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했으나
오른손 맥문을 움켜잡히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설작은 오른손
에 단도를 쥐고 정영소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호통을 내질렀다.
[약왕신편을 내려 놓아라!]
죽음을 선택한 순정
정영소는 어진 생각을 품었다가 제압당하게 된 형편이라 부득이
약왕신편을 땅에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나서서 구원을 하려고 했으나 설작의 단도가 정영소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단도를 조금이라
도 앞으로 내뻗기만 한다면 정영소는 목숨을 잃게 될 판이라 초조
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설작은 정영소의 손목을 바짝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자가 사부님을 위해 약왕신편을 빼앗았으니, 사부님
께서는 벽잠독고와 학정홍, 그리고 공작담, 세 가지 약물을 이 못
된 계집애의 손바닥에 부어 저 계집이 자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
는지 살펴보도록 하세요.]
석만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제자군, 훌륭한 제자야! 실로 고명한 방법이로다!]
이윽고 그는 금상자를 꺼내 금숟가락으로 벽잠독고의 알을 떠
서, 손톱 사이에 숨겨놓은 학정홍과 공작담 가루를 정영소의 손바
닥에 함께 쏟아놓았다.
모용경악은 중상을 입은터라 비칠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번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
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호비의 앞을 가로막아 석만진을 저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정영소에게 해약이 있다면 반드시 꺼내 치
료를 할 것이고, 설령 해약이 없다 하더라도 자승자박의 고통을
당하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비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용경
악이 앞을 가로막자 즉시 왼주먹을 내뻗어 그의 안면을 후려치려
들었다. 순간 모용경악은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한지라 호비는 손에 사정을 두지않고
왼주먹이 그의 안면에 미처 도달하기 전에 다시 오른 주먹을 질풍
같이 내뻗어 삽시간에 모용경악의 가슴을 격타했다.
이 일장은 아무 기척이 일지 않았지만 내력이 실린 것이라 모용
경악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곧장 설작에게 부딪혀 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설작은 피하지 못하고 모용경악과 함
깨 나뒹굴었지만 손에 쥐고 있던 정영소는 여전히 놓지 않았다.
호비는 사정없이 몸을 솟구치며 설작의 불쑥 튀어나온 곱추등을
매섭게 발로 힘껏 내리찍었다. 설작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으며
정영소의 손목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몇차례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와 같이 삽시간에 일어난 일어났
다.
설작이 정영소를 놓치자 석만진이 갈고리처럼 손을 하고 대뜸
달려들었다.
호비는 그의 손에 있는 독약이 정영소의 몸에 닿게 될까봐 오른
손을 급히 휘둘러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석만진은 피하지
않고 도리어 손목을 뒤집으며 금나수법을 펼쳐 호비의 손목을 잡
으려 들었다.
정영소는 급히 부르짖었다.
[빨리 물러서세요.]
호비가 만약 금나수법 가운데 구곡절골법(九曲折骨法)을 펼친다
면 석만진의 다섯 손가락을 모조리 비틀어 부러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석만진의 손에 극독이 숨겨져 있으니 어찌 건드릴 수 있겠
는가?
호비는 급히 몸을 뒤로 날리며 피했다. 석만진은 호비가 피하자
황급히 금숟가락을 내던지는 동시에 손가락을 연신 퉁겨냈다. 독
가루는 즉시 안개나 연기처럼 일며 호비의 손등으로 뿜어졌다.
호비는 세 사람이 간교하고도 음흉하고, 또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하니 모조리 죽어 마땅하다는 마음에 극독에 중
독된다는 사실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이 기회에 깡그리
죽여버리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호비는 즉시 하얀 광채를 번득이며,
칼을 휘둘러 공격 일변도의 초식을 뻗어냈다.
석만진은 호탱으로 미처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피했으나
왼손이 섬뜩한 것을 느끼는 순간 세 개의 손가락이 잘리워 허공에
뿌려졌다.
그는 놀람과 두려움에 뒷걸음질치며, 오른손을 연신 퉁겨 일진
의 연무(烟霧)를 쏟아냈다.
정영소는 놀라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물러서세요!]
호비는 그 소리를 듣자 정영소의 앞을 보호할 뿐 더 이상 추격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간악한 자들이 도망치
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정영소는 다정스레 호비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심장을 칼로 도
려내듯 마음이 아팠다. 그녀 자신은 커다란 액겁에서 벗어났지만
호비는 자기를 구하려다 손등에 세 가지 극독에 중독이 된 것이었
다.
약왕신편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가?
<......극독이 심장으로 스며드니, 약으로서는 치료할 수가 없
다.>
그렇다면 호비의 손목을 잘라내고 생생조화단을 먹여 구 년간의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야하는 것일까? 세 가지 극독이 몸안에 스며
든다면 생생조화단으로 구 년이라는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그 이후 다시 복용을 한다 하더라도 내성이 생겨 효과가 없게 되
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호비는 이 세상의 유일한 지기였다. 또한 그녀는
호비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모든 것을 자신보다 더욱 아끼고
있었다. 이토록 아끼고 있는 사람이 구 년밖에 살 수 없단 말인
가?
정영소는 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굳히
고 하얀 알약을 품안에서 꺼내 호비의 입속에 넣어주며 떨리는 음
성으로 말했다.
[빨리 삼키세요.]
그 말에 따라 약을 삼키자 호비는 심신이 안정되어 약간의 여유
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조금 전에 있었던 아슬아슬한 장
면이 떠올랐다. 정말 생각만해도 치가 떨리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
게 불쑥 입을 열고 물었다.
[정말 위험했군, 위험했어!]
그러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약왕신편은 땅바닥에 그대로 남아 청
명한 가을 바람에 책장이 뒤적이며 펄럭이고 있었다.
호비는 그 모습을 보자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세 악적을 죽이지 못해 정말 애석하군. 하지만 그들 역시
그 책을 빼앗지 못했으니 천만다행이 아니겠소? 만약 둘째누이가
그 독약에 중독되었다면 어떻게 할 참이었소?]
정영소는 창자가 끓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대성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울 수가 없었다.
호비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
다.
[둘째 누이, 피곤해 보이는구려. 가서 쉬도록 하시오.]
정영소는 그의 부드럽고도 알뜰한 말을 듣자 더욱 서글픈 마음
이 복받쳐 올라 목이 메어 울먹였다.
[나는...... 나는......]
호비는 갑자기 오른손 손등이 약간 찌릿하고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고 손등을 긁으려고 하자 정영소가 그의 손목을 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호비는 그녀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디찬 것을 느끼고 의아한 생
각에 물었다.
[아니, 왜 그러는가?]
순간 호비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쿵! 하니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정신은 말짱했으나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
이 근질근질 하다가 찌릿찌릿한 것을 느끼고 호비는 놀라 물었다.
[나 역시 그 삼대극독에 중독된 것인가?]
정영소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마치 매듭이 풀어진 진주알
처럼 그녀의 빰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은 호비의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정영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비는 그 모습을 보자 온몸에 피가 멈추는 것 같아 생각했다.
(둘째 누이가 이토록 괴로와하는 것을 보면 내 몸에 중독된 독
은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하구나.)
순간 과거의 수 많은 일들이 그의 뇌리에 밀물처럼 밀려왔다.
상가보에서 조반산과 결의 형제를 맺은 일, 불산진 북제묘에서
의 참극, 소상(瀟湘)에서 원자의를 사귀며 다투던 즐거웠던 추억,
동정호반에서 정영소를 만나게 된 일, 그리고 장문인대회는 말할
것도 었고, 홍화회의 군웅을 만나고, 그리고 석만진......
이 모든 것은 이미 흘러간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과거의 일
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고 뼈마디와 손가락에 한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넌즈시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이란 모두 운명이니 너무 괴로
와하지 말게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오래비는 누이를 돌보지 못
하고 혼자 남겨두게 되었네. 그 금면불 묘인봉은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그는 마음이 넓고 호탕한 다시 없는 호걸이라 할 수
있네. 내가...... 내가 죽으면 둘째 누이는 그분에게 가서 의지하
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거기까지 말을 하자 혀가 부풀어 올라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
었다.
정영소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 가지 극독에 중독이 되었다
고 하지만 나는 구원할 방법이 있어요. 오라버니깨서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이 마비된 것은 독의 침습을 저지하는 하얀 알약을 먹었
기 때문이예요.]
호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알았다는 표
시를 했다.
이윽고 정영소는 품안에서 금침을 뽑아 그의 손등에 있는 혈관
에 찌르고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호비는 깜짝 놀라며 내심 생각했다.
(독혈을 입으로 빨아낸다면 둘째 누이마저도 극독에 중독되는
것이 아닌가? )
그러나 사지의 한기가 점점 윗쪽으로 올라오며 전신이 마비되어
발버둥칠래야 칠 수도 없었다.
정영소는 독혈을 한 모금 빨아내더니. 땅바닥에 뱉었다. 만약
흔히 보는 독약이라면 묘인봉의 눈을 치료한 것처럼 속이 빈 금침
을 꽃고 독물을 뽑아낼 수 있었으나 벽잠독고, 학정홍, 공작담 이
세 가지 극독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줄곧 마흔 번 이상 피를 빨아냈다. 그녀는 빨아낸 혈색
이 새빨간 것을 보고 그제서야 한숨을 길게 내쉬며 부드러운 어조
로 말했다.
[오라버니, 당신과 나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예요. 오라버니는
마음 속으로 원소저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출가
한 비구니였고...... 나는...... 나는 마음 속으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호비를 바라보
며 약주머니에서 알약과 연고를 꺼냈다. 연고는 손등에 발라주고,
노란 알약은 호비의 입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세 가지 극독을 치료할 약은 비록 없다고
했지만, 방법은 있어요. 그분은 세상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
지 환자를 돌보는 의원이 없기 때문에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한 것이지요. 오라버니, 그 어르신은 내가...... 내가 오라버니에
게 이러한 태도를 취하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고 싶었지만 그 소리는 자기 뇌리에만
맴돌고 있었다.
(나는 둘째 누이가 그러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제발 그러면 안
되네!)
그러나 절규하는 듯한 그의 눈빛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사표시
도 할 수 없었다.
정영소는 보따리를 풀어 원성이 준 옥봉황을 꺼내 처연한 눈빛
으로 한동안 바라보더니 손수건에 곱게 싸서 호비의 품안에 넣어
주었다.
이옥고 그녀는 양초를 한자루 꺼내 신상 앞의 촛대에 꽂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보따리 안에서 가느다란 초를 한자루 꺼내
중간을 부러뜨려 버리고, 그 초를 후원으로 가지고 나가더니 화접
자로 불을 당겨 한참 동안 피웠다.
그러더니 그 촛불을 끄고 다시 가지고 들어와 촛대 옆에 놓고,
다른 양초를 하나 꺼내서는 촛대위에 꽃았다.
호비는 그녀가 세심하게 조처하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의도인지
는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나는 본래 한 가지 일에 대해 오라버니가 상심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하니 부득
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장문인 대회에서 악독한 나의 사숙
(師淑)과 전귀농이 만날 때 오라버니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
했나요? 내가 보기에 그들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전귀농이 묘대협의 눈을 해친 그 단장초는 틀림없이 석
만진에게 건네받은 걸 거예요. 또한 오라버니 아버님과 어머님을
중독되게 만든 독약 역시 석만진이 배합하여 만들어낸 걸 거예
요.]
호비는 내심 흠칫한 생각이 들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 원래 그랬었구나!)
그러나 정영소는 호비가 절규하는 말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리버니의 어머니,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나는 태어
나기도 전이고, 우리 사형 사누이 역시 어린 편이라 사문에 들어
오기는 했으나 재주를 익히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 당시 세상에서
독을 쓰는데 고명한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었는데 바로 선사와
석만진 두 사람이지요. 묘대협은 독약을 우리 사부가 배합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기 때문에 과거 우리 사부님과 안면을 붉히고 손
을 쓰게 되었지요. 그러나 사부님께서 한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예요. 나는 물론 사숙을 의심하지만 증거가 없어 내심 천천히
알아내려고 했지요. 만약 그가 틀림없다면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그 원한을 갚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
렀으니 어찌되었던 간에...... 그를 죽여야겠어요......]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체내에 독성이 퍼진 듯 휘청하며 호비 곁
에 쓰러졌다.
호비는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가에 한 줄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호비는 수천 수만 개의 침이 동시에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슬픔을 느끼며 입을 벌리고 크게 부르짖었다.
(둘째 누이! 둘째 누이!)
그러나 그 소리는 깊은 밤에 잠꼬대를 하듯 입밖으로 나오는 소
리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지만 발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호비는 정영소의 시신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오전에서 오후가 되고, 오후가 지나 다시 황혼이 찾아들었다.
사실 그 벽잠독고와 학정홍, 그리고 공작담 삼대극독의 독성은
가히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정영소가 그를 대신해서 독혈
(毒血)을 빨았다 하더라도 독약은 이미 그의 몸안으로 스며들어
전신의 근육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하루 밤 하루 날을 꼬박 기다리
지 않는다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몇 시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도 그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정영소가 자기 곁에 누워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고
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두 시진이 홀러갔다. 멀리 숲속에서 버꾹 버꾹! 하고 버꾸
기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별안간 몇 사람이 약왕묘 밖에 이르는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작, 네가 들어가서 보아라!]
바로 석만진의 음성이었다.
호비는 속으로 부르 짖었다.
(그만두자, 그만 둬! 나는 이제 꼼짝도 할 수 없으니 이렇게 조
용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구나. 둘째 누이야! 둘
째 누이야!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에게 온몸이 마비되
는 약을 복용시켜 주었지만 약 기운이 너무 맹렬하여 언제나 그
약효가 가실런지 모르겠구나. 이제 적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판
이니 누이를 따라 황천으로 가게 되었구려.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커다란 통한을 품고 눈을 감아야 하다니
정말 원통하기 짝이 없구나!)
이윽고 그의 뇌리에는 정영소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지난번 석
옥에서 마춘화가 누워있을 때 정영소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나중에 도망치지 못하게 된다면 오라버니는 나를 구
하겠어요, 아니면 마소저를 구하겠어요?...... 나는 마소저를 구
하고 둘째누이와는 함께 죽도록 하지......)
이제는 몸을 마비시킨 약기운이 많이 사그러진 상태였다. 그의
근육이 아직도 죽은 시체처럼 뻣뻣한 것은 전적으로 삼대극독 때
문이었다.
이때 설작이 가볍게 몸을 날려 살그머니 들어와서는 몸을 숨기
고 안을 두리번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화접자를 감히 켜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녀는 다시 약왕묘 문 밖
으로 나가서 석만진에게 안쪽의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
석만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의 손등에다가 내가 삼대극독을 뿌렸으니 이미 저승사
자가 되어 황천길로 가지 않았다면 어쨌든 한쪽 팔을 잘라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 계집애 혼자 남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혹시 두 년놈들은 이미 멀리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
지.]
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듯
호탱을 손에 들고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나도록 흔들면서 가슴을
보호한 채 천천히 약왕묘 안으로 들어섰다.
상방에 이르러서 어둠 속에 두 사람이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돌맹이를 하나 집어 던졌
다. 그러나 돌맹이에 얻어맞고도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은 지라
그는 즉시 화접자에 불을 붙이고 살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바로 호비와 정영소였다. 두 사람의
전신이 뻣뻣한 것이 이미 죽은지 오래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석만진은 아직도 못미더운 듯 정영소의 코 앞에다가 손을 가져
가 보았다. 이미 그녀는 콧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다시 손을 뻗쳐 호비의 코앞에 손을 갖다대었다. 순간 호
비는 두 눈을 꼭 감고서 숨을 멈추었다.
석만진 역시 진정으로 조심성이 많은 위인이었다. 그는 호비의
얼굴이 아직도 미지근하며 완전히 죽지 않은 것을 보고는 즉시 한
대의 금침을 꺼내 정영소와 호비의 손바닥에 각기 한 번씩 찔렀
다.
그들이 만약에 거짓으로 죽은 척 하고 있다면 금침으로 찌를 때
저도 모르게 신경을 건드려 손바닥이 반드시 떨리게 되므로 즉시
그 진위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정영소는 이미 죽었으니 반응이 있을리 없고, 호비의 근육도 아
직 마비된 상태인지라 금침이 그의 손바닥에서 가장 예민한 곳을
찔렀으나 역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용경악은 통한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 계집애는 자기 연인의 손등에 스며든 독약을 빨아내려고 하
다가 그만 연인을 살려내지도 못하고 제 목숨마저 바친 모양이
군.]
석만진은 급히 약왕신편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화접자가
이미 다 타들어가 그는 촛대 위에 초에다 불을 당기려고 했다. 화
접자의 불꽃이 막 초의 심지에 닿으려는 순간 석만진은 갑자기 손
을 멈추며 생각했다.
(이 초는 새 것 이니 어쩌면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
구나.)
그러고 보니 촛대 아래에 타다 남은 반토막의 초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초는 피웠던 것이니 틀림없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는 촛대 위에 있던 새 초를 걷어내고, 반토막 짜리 초를 촛대
에 바꾸어 꽃고 화접자로 불을 당겼다.
촛불이 빛을 발하자 세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 던져져 있는 약왕
신편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기쁨에 넘친 탄성을 내질렀다. 석만진은 즉시 앞
섶자락을 찢어 손에 감고 약왕신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촛불
옆으로 가져 가 뒤적거려보았다. 과연 빽빽하게 한 줄 한줄 깨알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각종 의술과 약성(藥性)에 대한 설명
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살펴본 결과 글의 내용은 독을 사용하는 것보다 병
을 치료하고 상처를 낫게하는 의술이 구성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
었다.
책 속에 독약을 논하고 있는 곳에는 다만 그 요지만이 쓰여져
있었다. 독을 어떻게 해소시키고, 배합하고 펼치는 수법과 독초를
심고 독충을 배양하는 등의 방법에 관해서는 지극히 간략하게 기
록되어 있었다.
사실 무진대사는 강호에서 독수약왕이라는 명호(名號)를 얻게
된 데 대해 깊히 후회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남긴 유작을 약왕
신편이라 이름을 지은 것인데 바로 이 한 권의 책이 세상 사람을
구제하는데 쓰이는 의학서로 남기려는 의도에서 집필을 묘한 독공
(毒功)의 비술(秘術)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의학서에 불과했다. 설사 그 가운데 실려있는 의술이 기묘하
고 심오하다 할 지라도 석만진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라 실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설작에게 말했다.
[너는 저 죽은 계집애의 몸을 뒤져 보고 또 다른 책자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이 책은 의학서에 지나지 않으니 별 쓸모가 없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게 그 약왕신편을 신단 위로 내던졌다. 설작
은 정영소의 옷과 보따리를 뒤적여 보았으나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말했다.
[없어요.]
모용경악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은형자체(隱形字體)를 잘쓰는데 혹시.....]
그 한마디 말을 뱉고 보니 대뜸 크게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런 빌어먹을 멍청한 놈 같으니! 내가 왜 이야기를 했지? 저
자가 저 책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내던지면 내가 나중에 자세히
더 좋을 뻔 하지 않았는가?)
석만진은 대뜸 모용경악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리고는 그는 다시 약왕신편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홀연 모용경악과 설작은 무릎에 맥이 빠지며 축 늘어졌
다. 그들의 표정은 웃는듯, 우는듯 지극히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순간 석만진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왜들 그래? 칠심해당...... 칠심해당이란 말이냐? 설마하니 죽
은 계집애가 칠심해당을 키우는데 성공했단 말이냐?...... 이 초
가......]
그는 뇌리에는 젊은 시절 무진과 함께 재간을 익힐 때의 광경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과거 어느날 밤 무진과 석만진의 사부가 천하에서 독문의 왕이
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강의를 했다. 사부님은 학정홍, 공
작담, 묵주즙(墨蛛汁), 부육고(腐肉膏), 채홍균(彩虹菌), 벽잠란
(碧蠶卵), 복사연(馥蛇涎), 번목별(番木鼈), 백서아(白薯芽) 등
등은 모두 다 가장 무서운 독물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에 가장 무
서운 것은 칠심해당이라고 말하였다.
칠심해당의 독물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하고 세심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방
비할 수가 없어 부지불식간에 중독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독되어 죽는 사람의 얼굴에는 시종 미소를 띠우고 있는 것이 마
치 매우 평안하고 즐거운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부는 해외에서 칠심해당의 씨를 얻을 수가 있었
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싹이 돋아나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무진과 석만진 자신은 각기 사부에게 아흡 알의 칠심해당의 씨를
얻었다.
그런데 사부는 미소를 띠우며 말하지 않았던가?
<칠심해당의 꽃을 피우기가 어려운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느
냐?>
모용경악과 설작의 증상은 바로 칠심해당의 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다.
석만진은 그와 같이 느끼는 순간 즉시 호흡을 멈추고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독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살펴보려고 했을 때 갑
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촛불이 꺼진 것
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으나 곧이어 두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칠심해당이야! 칠심해당!)
그는 다행히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입안에 백독을 해소시킬 수
있는 단약(丹藥)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칠심해당의 독성
이 오장육부로 칩입하지는 못했지만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두 눈
이 독성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
다.
그러나 호비는 미리 정영소로부터 칠심해당의 독성에 대항할 수
있는 해약을 받아 먹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장이 없이 모든 광경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모용경악과 설작은 천천히 맥없이 쓰러졌으며, 석만진은 허공으
로 두 손을 마구 휘젖고 할퀴듯 허우적거리며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칠심해당! 칠심해당이야!]
그러면서 약왕묘를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조용한 밤의 적막을 꿰뚫고 들려오는 그의 처절하고도 날카로운
음성이 한참 동안 울려퍼지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는 아스라히
들판 저쪽으로 멀어져 갔으며 마치 발광을 하는 야수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칠심해당! 칠심해당이야.]
호비의 곁에는 세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한 명은 그와 의리로 맺어진 누이 동생인 정영소였고, 두 명은
그의 의누이 동생의 적이며 동시에 사부를 배반한 사형과 사누이
였다.
황량한 절간에는 다만 침침한 촛불만이 외롭게 남아 바람에 일
렁이며 사위를 밝히곤 했다.
호비는 극심한 오한을 느끼며 내심 공허하고 처량한 마음에 사
로잡혀 있었다.
조금 남아있던 초마저 다 타들어가 생명이 다한 미련을 버릴수
없는듯 붉은 불꽃을 일렁이더니 가벼운 음향과 함께 꺼졌다.
황량한 절간은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둘째 누이는 저 촛불처럼 다 타고 말아 다시는 영롱한 빛을 발
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구나...... 그녀는 석만진이 다시 오
리라는 것을 알고, 소심한 그가 의심을 품고 새 초에 불을 당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미리 칠심해당의 꽃가루가 섞인 초를 반
쯤 잘라내고 피우다 만 양초처럼 만들어 놓았었구나. 석만진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죽은 제갈 공명 앞에 사마달의
꼴이 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 죽은 몸이었으나 죽어서도 두 명의 원수를 죽인
것이었다. 비록 그녀는 독수약왕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람의 목숨
을 해친 적이 없었다. 한평생 그녀는 자기가 죽으면서 비로소 두
명의 개만도 못한 사형과 사누이를 죽이고 사부의 문호를 정리한
것이구나.
(그녀는 나에게 자기의 신세를 말한 적이 없다. 나는 그녀의 부
모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연유로 무진
대사를 따르게 되었으며, 일신에 지닌 놀랍고도 가공할만한 재간
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고 있다. 그녀에게 내 자신의 일을 이야
기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이제는 물어
볼 수 없게 되었구나......)
호비는 온몸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아 참기 어려운 지경이었으
나, 정영소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애절한 심정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둘째 누이는 언제나 여러모로 나를 생각해주며, 모든 점에 있
어 나를 위해 배려하곤 했다. 어떤 점이 좋았길래 그녀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내 목숨을 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그럴 필요었이 그저 나의 팔을 잘라내고 생생조화단으로
치료했다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함께 구 년이라는
세월을 즐겁게 보낼 수가 있는데 나에게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일
까? 설사 그녀가 나와 함께 죽는다 하더라도 그때 가서 함께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한 서글픈 심사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
올랐다.
(나는 즐겁게 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앞 둔 그 세월 동안 살면서 과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까? 둘째 누이는 내가 줄곧 원소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으며, 더우기 그녀가 비구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모하는 감
정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다. 그렇다면 그녀가 죽게 된 동기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
니었을까?)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많은
일들을 회상했다.
호비는 정 영소의 말 한 마디, 한 번의 미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가운데 담긴 부드러운 애정
과 애틋한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님을 그리는 그녀의 깊은 은정
그녀의 정을 저버리지 말아라.
그녀를 만나면 애정으로 대하라.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으로 생각해야 하나니 .
과거 대장장이 왕가가 부르며 떠났던 연가(戀歌)가 그의 귓전에
맴도는 것 같았다.
(아...... 아...... 그녀 살아 생전 나는 그녀에게 잘 대해주기
는 커녕 매일같이 수십 번을 그리워했던 여인은 다른 아가씨였으
니......)
그러나 아무리 애통해 한다 하더라도 산 자와 죽은 자의 별리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날은 점점 밝아왔다.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그의 몸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지만 호비는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더욱 온몸으
로 뻗쳐나고 있었다.
이내 그는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과 팔을 움직일
수 있었고, 잠시 후에는 그는 땅에 두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
으키며 애절한 눈빛으로 정영소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남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둘째 누이는
이토록 다정하게 대해주었는데 나는 박정하게 그녀를 대하지 않았
던가? 차라리 그녀와 함께 죽어버리자!)
그러나 그의 눈에 모용경악과 설작의 시체가 눈에 들어오자 다
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하고 둘째 누이를 죽인
석만진 역시 이 세상에 살아 있다. 더우기 그런 자를 비호하는 간
적과 소인배들이 이 세상에 득실거리고 있으며, 백성들을 못 살게
구는 탐관오리들이 더 커다란 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목숨을 가볍
게 여기고 모든 일을 나 몰라라 하고 죽는 것이 어찌 대장부의 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원래 정영소는 죽기 전에 이미 이 일을 내다본 것이었다.
그녀는 칠심 해당을 썼지만 반토막만한 가는 초로 바꾸었고, 독
약의 분량도 비교적 경미한 것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호비가 즉시 자신을 따라 자진할 것을 우려하여 석만진
을 즉사 시키지 않고 호비가 그를 찾아내 원한을 갚으며, 나아가
세상을 위하여 더욱 커다란 의협의 일을 행하고, 강호를 종횡하는
영웅호걸이 되어 당당한 위명을 후세까지 떨쳐주기를 바랬던 것이
다.
또한 석만진의 눈이 먼 이상 그가 결코 호비를 해칠 수 없으리
라는 계산도 미리 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호비에게 그의 부모를 죽인 독약도 석만진이
배합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사실이든 짐작에 불과하든 그로 하여금 부모의 원수를
상기시켜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녀를 따라 죽지 못하도록 한것이었
다.
그녀는 모든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내다보지 못한 사실은 호비가 역시 이번
에도 그녀와의 세 가지 약속을 어기며 적과 손을 써서 싸운 것이
었다. 끝내 이로 인해 몸에 극독이 되었으며 자신이 죽이게 된 동
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가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리라!
그녀는 호비가 자신이 사랑하는 만치 절박한 사랑을 자신에게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와 같은 해결책을 강구하여 연인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겠
는가......
매우 처량하고도 슬픈 일이었지만 이로써 만사를 해결지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독수약왕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또한
천하 제일 독물인 칠심해당의 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아니겠는가?
소녀의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헤아리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
다. 정영소와 같이 천부의 지헤를 타고난 소녀는 더욱더 영원히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짐
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별안간 호비는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그저께 밤 도연정에서 진 총타주가 그 무덤 속의 소저
를 제사지내며 그토록 슬피 울던 심정을 알겠구나......)
원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의 반을 잃어버린 것처럼 슬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는 정영소와 마춘화의 시체를 황량한 약왕묘의 후원으로 옮기
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의 시체에는 모두 다 독이 묻어 있으니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한다. 나는 아직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죽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는 나뭇단에 불을 당겨 두 사람을 나누어 화장했다.
그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자기의 심신도 불꽃을 따라 연기가 되고, 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게 구덩이를 파서 모용경악과 설작 부부를
묻어 주었다.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정영소와 마춘화의 시체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절간에서 두 개의 조그만한 옹기 그릇을 찾아내 두
사람의 뼈를 그릇 안에 집어넣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둘째누이의 뼈가루를 우리 어머님, 아버님이 계신 곁에다
묻어 줄 것이다. 그녀는 비록 나의 친누이 동생은 아니었지만 그
녀가 그토록 애절하게 나를 대했으니 친혈육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소저의 뼛가루는 호북의 광수(廣水)로
가져가 서쟁의 무덤 옆에다 묻어주어야겠다.)
모든 일을 끝내고 상방으로 되돌아와 보니 정영소의 옷 보따리
는 여전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 그는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보따리 안에
는 몇 가지의 역용(易容)과 변장에 필요한 도구는 물론 아교풀과
가짜 수염 등 모든 것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홀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만약에 본래의 모습으로 나돌아 다닌다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복강안이 파견한 앞잡이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물론 두렵지
는 않지만 길을 가는 동안 계속 싸워야 할텐데 언제 끝장을 낼 수
가 있겠는가?)
이윽고 그는 얼굴에다가 역용의 약물을 바르고 세 가닥의 긴 수
염을 붙이고는 두 개의 유골을 담은 옹기그릇을 보따리 안에 넣고
망연히 약왕묘를 나섰다.
간악한 자의 최후
호비는 남쪽으로 석만진을 추적해 가고 있었다.
이날 정오 경에 이르러 진관둔(陣官屯)의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지 얼마되지 않아 신발 소리가 저
벅저벅 울려퍼지며 네 명의 무관이 걸어들어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편이었는데 바로 응조안
행문의 증철구였다.
호비는 내심 약간 놀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는 자기가
이미 옷차림을 바꾸고 변장을 해서 그가 알아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증철구라는 인물은 눈치가 빨라 어쩌면 자신을 알아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점의 점소이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시종 무관들의 시중을 들기
에 바빴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저 사람이 경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나의 일과 무관하지
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들어
봐야겠구나.)
그러나 증철구 등 네 사람은 시종 어느 고을의 아낙이 제일이라
는 둥 경사에서 내려오며 겪은 일들에 대해 희희낙낙하며 진탕한
농담을 주고 받을 뿐 자기들의 임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그들의 수작을 듣고 있자니 호비는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데 순간 반점 밖에서 청석판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
면서 맹인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이 반점으로 들어서자 호비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며칠 동안 그는 줄곧 석만진을 추적하면서 뒤를 쫓
아왔다. 그가 앞서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고 게다가 그 자의 눈이
멀어서 걸음이 재빠르지 못할 것이니 조만간 만나게 되리라고 생
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조그만 고을의 반점에서 원수를 외나무다리
에서 만나듯이 공교롭게 마주친 것이었다.
그의 옷차림은 남루했고 얼굴은 초췌했지만 여전히 왼손에는 떠
돌이 의원이 사용하는 호탱을 들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탁자
가로 다가서더니 다시 걸상을 더듬어 천천히 자리에 앉으면서 입
을 열었다.
[점소이, 먼저 술 한 병 주게나.]
점소이는 그가 거렁뱅이 모양을 하고 있는지라 퉁명스럽게 말했
다.
[술을 마시려면 은자가 있어야지!]
석만진은 품속에서 한덩이의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점소이는 헤벌쩍 입을 벌리며 대뜸 고분고분 했다.
[좋아요. 내가 가서 술을 갖다드리지요.]
석만진이 반점으로 들어서자 네 무관은 눈빛이 달라졌다. 증철
구는 동료에게 손짓하여 석만진을 포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장문인대회에서 뭇 사람들의 배를 아프게 만들었을 때 군호들은
술과 찻물 속에 독을 풀었다고 의심을 했는지라 복강안등은 독수
약왕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복강안은 많은 무관과 위사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내며 중
요한 임무를 세 가지 맡긴 것이었다. 첫번째는 홍화회의 군호비,
정영소, 마춘화, 일행을 추적하여 체포하고 복강안의 두 아들을
찾아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문인대회를 풍지박산 낸 석만진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셋째는 자신의 세세한 내막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탕패와 비구
니 원성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런 마당에 두 눈이 먼 석만진을 만나자 증철구는 속으로 기뻐
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그가 다른 속셈이 있어 눈이 먼 것
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
었다.
[점소이, 어째서 당신네 가게의 탁자와 의자가 이렇게 적지? 자
리를 찾을래도 없지 않는가?]
입을 열었다.
이때 한 무관이 그 말을 받았다.
[장형, 오늘 무슨 장사를 하려고 이 진관둔으로 오셨소? 밥먹고
살기는 괜찮소?]
[잘 되기는 뭐가 잘 되겠소. 겨우 밥이나 빌어먹는 것에 만족해
야지 뭐.]
증철구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이러쿵 저러쿵 몇 마디 수작을 했다. 이윽
고 증철구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자리가 없으니 우리 이 의원 옆에 잠시 합석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석만진의 탁자 곁에 비스듬히 주저 앉았다.
기실 반점에는 빈 자리가 무척 많았으나 석만진은 결코 의심을 하
지 않는 듯 했으며, 두 사람의 수작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증
철구는 그제서야 그가 진짜 눈이 먼 것을 알고서 대담하게 다른
두 명의 무관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조형, 왕형, 이리와서 한 잔 하시구려. 소제가 한턱 내리다.]
두 명의 무관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 실례가 많구려.]
그러면서 그들 역시 증철구가 있는 탁자로 다가와 석만진의 곁
에 앉았다.
석만진은 눈이 멀기는 했으나 귀는 여전히 밝았다. 그는 증철구
등 네 사람의 말투가 이 지방의 사투리가 아니라 북경 관가에서
쓰는 말이며, 그들은 장사꾼인냥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몇 마디 주
고 받지 않아 마각을 드러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대충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짐작을 하곤 몸을 일으키며 그
입을 열었다.
[점소이, 나는 오늘 속이 좋지 않아 음식 생각이 별로 없구만.
우리 나중에 다시 보세.]
그러자 증철구는 그의 어깨를 누르고 옷으며 입을 열었다.
[의원님, 서두를 것 없소이다. 우리 몇 잔만 마시고 나가도록
합시자.]
석만진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미미하게 냉
소를 하더니 다시 걸상에 주저 앉았다.
잠시후 술과 음식이 날라져 왔다. 증철구는 술을 한 잔 따르고
입을 열었다.
[의원님, 내가 경의의 표시로서 술 한 잔을 드리지요.]
석만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좋소. 좋지!]
그리고는 잔을 들고 술을 다 비우더니 말했다.
[나 역시 여러분들께 한 잔의 술로 경의를 표하겠소이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술 주전자를 들고 왼손으로 네 사람의 술
잔을 더듬으며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을 가
볍게 튕겨서 각자의 술잔 속에 독약을 뿌렸다.
이 수법은 지극히 민첩한지라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석만진이 자칭 독수약왕이라고 일컫는 만큼 석만진이 독
을 쓰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악한 증철구가 어찌 감히 그가
따라준 술을 먹으려고 하겠는가?
그는 신속하고도 교묘하게 자기의 앞에 놓인 술잔과 석만진의
술잔을 살짝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어린애라도 분명히 볼 수가 있었지만 석만진은 볼 수가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탄식했다.
(두 눈이 멀었는데도 여전히 독을 써서 사람을 해치려고 하다니
그야말로 죄를 짓고는 살 수가 없다는 말이 맞구먼. 저러한 사람
을 상대로 내가 나서서 살수를 펼칠 필요가 있겠는가?)
호비는 몸을 일으키고 걸어나와 음식값을 치렀다. 증철구는 웃
으며 입을 열었다.
[자! 자, 모두 한 잔 합시다.]
네 명의 무관들은 간교한 미소를 머금고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일제히 외쳤다.
[자! 건배!]
그러자 석만진도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우며, 자기가 탄 독약
이 들어있는 술잔을 집어들었다.
호비는 네 무관이 부지불식간에 독이 퍼져 죽을 것을 석만진이
상상하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고 음흉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석만진의
가증스러운 모습에도 호비는 약간 연민의 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반점에서 걸어나왔다.
며칠 후, 호비는 창주(滄州) 어느 시골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았다. 어렸을 적 평사숙(平四淑)은 해마다 그를 데리고 와서
묘를 하곤 했다. 호비는 삼 년 전에 홀로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
다.이곳에 오면 부모님 무덤 앞에서 며칠 동안 멍하니 앉아서 보
내곤 했다.
여러가지 일들을 생각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면......
그분들이 내가 이토록 장성한 것을 보신다면...... 아버님이 내가
이렇게 칼 쓰는 것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
묘지에 이르자 이미 날은 어두워 있었다. 그런데 멀찌감치 흰색
장삼을 걸친 한 여인이 꼼작도 하지 않고 무덤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비는 자기 부모 이외에 다른 무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저 소저는 우리 부모와 아는 사이일까?)
그는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가 보니 그
여인은 지극히 아름다운 중년의 부인이었다. 갸름한 얼굴은 수려
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다만 안색이 너무나 창백했고 전혀 핏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녀는 호비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
를 쳐들고 호비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호비는 이미 북경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추적해오
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길이라 변장을 하지
않고 자기의 본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을 오는 동안 흙먼지에 얼굴과 옷이 온통 희부옇게 되
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여인은 안면이 없는 젊은이인 것을 보자 개의치 않는 듯 고
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호비는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그녀는 과거 전귀농을 따라 도망을 쳤던 묘인봉의 처였다.
과거 상가보에서 묘인봉의 딸이 '엄마!' 하고 애절하게 부르면
서 두 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안아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 모습을 호비는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옆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호비는 참을 수 없어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묘부인, 혼자 이곳에서 뭘 하는 것이오?]
그녀는 갑자기 묘부인이라는 칭호를 듣자 몸을 흠칫하더니 천천
히 몸을 돌리고 창백한 얼굴에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나를......]
몇 마디의 말만 했을 뿐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부모님들이 지하에 영면하시
게 되어 한평생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지만 당신
의 딸아이에 비하면 휠씬 행복한 것 같소이다. 그날 상가보에서
딸애가 울면서 안아 달라고 할 때 당신은 매몰차게...... 그렇지
요. 나는 당신의 딸보다는 훨씬 행복한 편이지요.]
묘부인 남란(南蘭)은 몸을 휘청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호비는 무덤을 가르켰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란 소리를 한번 부르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지요. 다만 이분들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답도 못하고, 나를
안아줄 수 없는 거지요.]
남란은 물었다.
[당신은 호대협 호일도....... 호일도의 영랑(令郞)인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이다. 나의 성은 호이고, 이름은 비라고 하오이다. 나는
금면불 묘대협을 만나보았으며, 또한 그의 딸아이도 본적이 있지
요.]
남란은 나직이 물었다.
[그들...... 그들은 잘있나요?]
호비는 무쇠를 자르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잘 있지 못하오!]
남란은 호비 곁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호상공 제발 부탁이니 나에게 말씀
좀 해주세요.]
호비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묘대협은 간악한 자의 해침을 받아 눈이 멀게 되었고, 묘소저
는 외롭게도 돌봐줄 어머니가 없지요.]
남란은 놀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그는 무공이 천하제일인데 어떻게......]
호비는 대노하며 매섭게 외쳤다.
[내 앞에서 거짓으로 그들을 위하는 척 할 필요는 없소. 전귀농
이 그와 같은 독계를 펼쳤는데 설마하니 당신의 간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곳이 만약 우리 부모님의 무덤 앞이
아니라면 나는 한 칼로 당신을 죽이고 말았을 것이외다. 당신은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남란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호상공, 묘대협의 상처
는 지금은 다 나았겠지요?]
호비는 그녀의 안색이 지극히 절실하고 간곡한 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짓으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 여자가 갈대처럼 지조가 없고 교활하면서도 매정하다
는 사실을 떠올리자 어떤 연극이라도 할 수 있는 여자라고 판단했
다. 그는 그녀와 더이상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싸늘히 코웃음
치고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남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가...... 그가 남에게 해침을 받아 눈이 멀었다니, 더군다나
나의 가련한 란아는......]
갑자기 그녀는 몸을 휘청하더니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호비는
그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 코앞에다 손을 대어보니
정말 기절한듯 맥박이 미약했으며 갈수록 느려져 가고 있었다. 만
약에 재빨리 손을 써서 구원하지 않으면 즉시 죽고 말것 같았다.
그로서는 매정하고 의리없기 이를데 없는 여자가 이렇게 되리라
고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는 즉시 그녀의 인중(人中)을
주물러주고, 그녀의 옆구리를 안마해 주었다.
한참 후에 남란은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호상공, 나는 죽어 마땅한 여자예요. 다만 나에게 사실대로 알
려주기를 바랄 뿐이예요. 그이와 우리 란아는 어떻게 되었어요?]
호비는 냉정하게 물었다.
[설마니 아직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남란은 다소곳이 말했다.
[말을 해도 당신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 몇 년 동안 나
는 밤낮으로 그들 두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이미 생명
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
문에 그들을 한번만이라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예요. 하지
만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다시 찾아갈 수가 있겠어요.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묘 오라버니가 과거 나와 혼례를 올린지 얼마되지
않아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영존과 영당(令堂)의 제사를 모
셨기 때문이지요. 묘 오라버니는 자기의 한평생 호대협 부부 두
사람에게만 탄복했다고 말하였지요. 그때 그는 이 무덤 앞에서 나
에게 많은 말을 하였지요.]
호비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진지한 것이 결코 거짓됨이 없다
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지만 여린 성격이라 그 모습을
보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소. 묘대협 부녀의 근황을 이야기해 드리리다.]
이윽고 그는 묘인봉의 두 눈이 어떻게 중독되었고, 어떻게 해서
강적들을 대패시켰는가 하는 것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옆에서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
지 않았다.
남란은 귀찮을 정도로 묘인봉과 묘약란(苗若蘭) 부녀의 거처와
음식은 물론, 묘약란의 얼굴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좋
아하는지 등등에 관해서 자세하고도 꼼꼼하게 묻는 것이었다. 그
러나 호비는 묘씨집으로 달려갔다가 총총히 떠나왔기 때문에 그
나이 어린 소저의 처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줄곧 이야기했으나 남란은
여전히 부족한 듯 자꾸만 물어왔다.
호비는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보니 실로 대답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지만, 남란은 그에게 그녀의 딸이 어떤 모양의 옷을 입는지,
비단인지 아니면 무명베인지, 그녀의 부친이 산 것인지 아니면 다
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맞춘 것인지, 또 보기가 좋았는지 흉했는지
등등 쉴새없이 호비에게 질문올 던져왔다.
호비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당신이 그토
록 관심이 깊었다면 과거에 어째서......]
그러면서 그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객점을 찾아야 하오. 본래 오늘 나는 의누이의 시신을 화
장한 재를 묻으려고 했으나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니 부득이 내일
다시 와야겠구려.]
남란은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좋아요. 나도 내일 다시 오겠어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나는 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이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묘부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묘인봉의 손에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죠?]
남란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는 나에게 그 일을 말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정히 여기까지 얘기 했을 때 근처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
다.
[아란, 아란...... 아란! 어디에 있소?]
호비와 남란은 그 소리를 듣자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전귀농이 부르는 소리였다.
남란은 다급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날 찾아왔어요. 내일 아침 일찍 이곳으로 와 주세요. 당
신에게 영존과 영당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리겠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내일 아침 일찍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는 전귀농과 얼굴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 무덤 뒤로 몸을 숨기
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작고한 진상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정말 전귀농이라는 이 간적과 관계가 있다면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짐작컨데 묘부인은 틀림없이 그를 위해
감추거나 속이려고 들겠지만 내가 꼼꼼하게 알아보고 유도해 낸다
면 틀림없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귀농이 이곳
창주까지 온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구나.)
남란은 재빠른 걸음으로 무덤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전귀
농이 부르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었다.
전귀농은 끊임없이 부르고 있었다.
[아란, 아란. 어디 있소?]
남란은 그제서야 대답을 했다.
[나 여기 있어요.]
전귀농은 아! 하더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남란은
원망하는 듯 말했다.
[바람씌러 나오는 것도 이렇게 쫓아다녀야 하는 거예요? 사소한
일까지 참견을 하니 말이예요.]
어렴풋이 전귀농이 웃음 지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시오. 당신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 아
니겠소. 이곳은 황량한 곳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츰 멀어져 갔다. 호비는 더이
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호비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니 차라리 이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하룻밤을 지새우도록 하자.)
그는 보따리에서 말린 음식을 꺼내 먹고, 무릎을 얼싸안고 쪼그
린 채 무덤 옆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약간 썰렁한 기운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덤 위의 노랗게
빛바랜 나뭇잎들이 바람을 따라 마구 춤추듯 했으며, 한 잎 한 잎
그의 얼굴과 몸으로 달려들기도 했다.
동녁 하늘에 둥근 달이 훤히 떠오르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자
리에 드러누웠다.
잠결에 홀연 말발굽소리가 멀리서 들려와 호비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했다.
(이 야반 삼경에 누가 이 황량한 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일까?)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말이 신속하게 달
리는 것 같았으나, 그 소리가 약 이삼 마장 정도 다가오자 말발굽
소리가 차츰 완만해지더니 말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은 고삐를 잡고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듯 했다.
호비는 그 말이 자기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즉시 무덤 뒤쪽의 풀숲에 몸을 숨기고 누구인가를 살폈다.
달빛 아래 날씬한 몸매를 한 사람의 그림자가 말을 끌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무덤에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이
르자 호비는 그 사람이 치의(緇衣)에 둥근 모자를 쓴 원성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호비는 너무나 놀라 심장이 멏는 것 같았고, 입안의 침이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그는 소리를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입밖으
로 내뱉을 수 없었다. 삽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어 닥
쳤다.
(그녀가 이곳에 무엇하러 왔을까?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인지, 아
니면 나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인지 모르겠구나.)
이때 원성은 나직이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보고 있었다.
(요동대협 호일도 부부지묘(遼東大俠 胡一刀 夫婦之墓).)
그리고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로 여기로군.]
이어 그녀는 무덤 앞을 살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덤 앞에 제문을 태운 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는 이
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지 않은 모양이구나.]
갑자기 그녀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으며, 그 기침은 좀처럼 멈추
지를 않았다.
호비는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듣자 내심 놀라며 생각했다.
(그녀의 병이 가볍지 않은 모양이군.)
그녀는 한참 동안 기침을 하더니 겨우 기침을 멈추고나서 나직
이 말했다.
(만약에 내가 사부님 앞에서 맹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 그
대와 더불어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의로운 일을 행한다면 얼마
나 좋겠어요...... 아! 호 오라버니, 당신 마음이야 오죽했겠어
요. 하지만 제 마음도 당신보다 열 배나 더 찢어질듯이 아프답니
다......]
호비는 그녀와 여러 차례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녀는 정
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태도를 보일 뿐 자신
의 진실을 털어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이 황량
한 들판에 들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와 같은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을 토로하지 않았으리라.
원성은 몇 마디의 말을 하더니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묘비에 기댄 채 다시 크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비는 더 참을 수 없어 숲속에서 몸을 날려나가며 부드러운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다 감기가 걸렸소? 몸 조심해야지.]
원성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교차하여 앞
뒤로 세우며 가슴을 보호했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이 호비라는 것
을 발견하고는 그만 온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참 이후에야 원성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대는...... 경박한 사람같으니,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숨어서 개꼬리 감추듯 하고 남의 말을 엿듣고 있는 거예
요!]
호비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꺼리낌없이 큰소리
로 말했다.
[원소저, 나는 그대의 진심을 이미 알고 있소.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부질없이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와 함께 존사
(尊師) 앞으로 나아가 말씀을 드리고 환속하도록 합시다. 비구니
가 될 것 없소. 그리고 그대와 내가 이 세상 다하도록 영원히 함
께 살게 된다면 좋지 않겠소!]
원성은 묘비를 어루만지듯 붙잡고서 기침을 하느라고 허리를 구
부린 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호비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두 걸음 다가가서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더 번민할 것 없소이다.]
그런데 그녀가 기침을 하면서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내자 호비는
그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 내상을 입었소?]
원성은 간신히 대답했다.
[탕패라는 그 간적에게 상처를 입었어요.]
호비는 노해 말했다.
[그 자는 어디에 있소? 내 그 자를 찾아가리다.]
원성은 다소곳이 말했다.
[나는 이미 그를 죽였어요.]
호비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가 친히 불구대천의 원한을 갚은데 대해 축하하오.]
그리곤 다시 걱정스러운듯 말했다.
[어떻게 내상을 입었소? 빨리 앉아서 좀 쉬도록 하시구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부축해서는 천천히 앉히고는 재차 입을 열
었다.
[상처를 입었다면 마땅히 쉬면서 몸조리를 해야지 어찌 밤길을
멀다하지 않고 말을 몰고 달려왔더란 말이오.]
원성은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바라보며 속으로 혼자서 중얼거
렸다.
(내가 어찌 편히 몸조리를 할 수 있겠어요. 만약에 그대가 아니
라면 내가 어째서 말을 타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밤을 도와 달려
왔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물었다.
[정 누이는 어디 있나요? 어째서 그녀가 보이지 않죠?]
호비는 대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그녀는......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소.]
원성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다가...... 어떻게요?]
호비는 그녀의 측은한 모습을 보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단 그대는 앉으시오. 내가 천천히 이야기해 드리리다.]
이윽고 그는 자기가 어떻게 석만진의 독에 중독되었으며, 정영
소가 어떻게 몸을 던져 자기를 구하게 되었는가 하는 상황을 일일
이 이야기했다.
원성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정영소의 의협심과 인정 많은 성품을 되돌이켜 보며 두 사람
모두 서글픈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며 한기가 몸안으로 스며들었다. 원성은 가
볍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비는 장포를 벗어서는 그녀의 몸에
결쳐주며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한숨 자구려.]
원성은 나직이 말했다.
[아니예요. 나는 그대에게 한 마디의 말을 하고는 그대로......
그대로 떠나겠어요.]
호비는 놀라 물었다.
[그대는 어디로 간다는 것이오?]
원성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읊었다.
[생리사별도 용납하거늘, 어찌 오랫 동안 슬퍼할 수 있으랴(借
如生死別, 安得長苦悲)?]
호비는 그 두 마디의 말을 듣고 멍하니 그 말을 나직한 음성으
로 다시 읊었다.
[생리사별도 용납하거늘, 어찌 오랫 동안 슬퍼할 수 있으랴!]
원성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돼요. 어서 멀리 떠
나도록 하세요. 내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전해들은 소식이 있기
에 알려드리러 이곳까지 달려온 거예요.]
호비는 물었다.
[무슨 소식이오?]
원성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날 그대와 헤어진 이후 나는 탕패를 뒤쫓아 갔어요. 그러나
그 도적이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그만 놓치고 말았지요. 그의 고
향은 호북인데 복강안의 비위를 거슬린 이상 전가족에도 누가 미
칠 것이니 틀림없이 방법을 강구해서 집안의 가족들에게 급히 도
망쳐 목숨을 구하도록 연락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옳게 짐작을 했군요.]
원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외호가 '감림혜칠성'이라 강호에서 교분이 지극히 넓은
편이죠.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간악한 도배라면 절친한 친구를 사귀
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제 큰 화가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 스스로 집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나는 서남쪽으로 질풍과 같이 추적해서 사흘 후에
청풍점(淸風店)에서 그를 따라 잡았지요. 수수밭에서 한바탕 격전
을 벌인 끝에 나는 계책을 써서 그 도적을 격살할 수 있었지만 나
역시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게 되었지요.]
호비는 한숨을 내쉬며 할 말이 없었다. 원성은 다시 입을 열었
다.
[나는 객점에서 미리 운기조식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 복강안
휘하의 부하들이 두 패거리나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는 응조안행문의 주철초도 끼어 있는 것을 보았지요. 그리하여 주
철초에게 아는 척을 하고 그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호비는 놀라며 말했다.
[그는 몸에 내상을 입었는데 그가 감정을 품고 해칠 것을 두려
워하지 않았단 말이오?]
원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커다란 공을 세우도록 도왔어요. 설사 그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을 거예요. 나는 탕패가
묻혀있는 곳을 그에게 알려주었어요. 그러니 그는 탕패의 수급을
잘라 북경으로 가지고 간다면 또 다시 커다란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짐작대로 나에게 고마워했어요. 그리고 나는 넌
즈시 이 말을 했지요. '주 나으리, 만약 나마저 잡아간다면 나으
리는 다시 공을 세우는 것이겠지만 호 오라버니가 결코 가만 놔두
지 않을 것이며, 과거의 모든 일을 다 털어놓을 거예요. 그랬더니
주철초는 꽤나 솔직하게 말을 하더군요. '호형의 위인됨은 이 형
제를 탄복토록 만들었소이다. 결코 나는 호형제의 비위를 건드리
고 싶지 않으니 아무쪼록 당신은 호형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시오.
전귀농이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창주에 있는 그의 부모님 묘소에
서 매복을 하고서 호형을 잡으려 한다고 말이오.]
호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이곳에 매복을 하고 있단 말이오!]
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주철초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초조하여 한 시라도 빨리 이곳에 달려오려고 했어요. 정말 하늘이
돌보셔서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군요......]
호비는 그녀의 초췌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는 나를 구하기 위해 아마 며칠 밤을 자지 못한 것 같구
려.)
원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귀농은 어떻게 그대의 부모님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것
을 알았을까요? 또한 무슨 근거로 그대가 이곳에 제사를 지내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오라버니, 아무리 훌륭한 호걸이라
도 많은 적을 상대할 수는 없는 거예요. 지금 당장은 한 걸음 뒤
로 물러섰다가 다시 기회를 엿보도록 하세요.]
호비는 넌즈시 말했다.
[나는 오늘 묘부인을 만났소이다. 내일 그녀와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요.]
원성은 물었다.
[묘부인이 누구예요?]
호비는 대강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원성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히 말했다.
[그 여인은 남편과 딸마저도 저버렸는데 어찌 신의를 지키리라
고 믿을 수 있겠어요? 빨리 떠나도록 하세요.]
호비는 묘부인의 태도나 표정이 거짓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더우기 그녀는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된 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묘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원성은 다그치듯 말했다.
[전귀농은 이미 부근에 매복을 하고 있으니 묘부인이 어찌 그에
게 알려주지 않겠어요? 호 오라버니, 그대는 어째서 나의 말을 듣
지 않는 거예요. 나는 밤을 마다 않고 그대에게 화를 피하라는 말
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그대는 나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군요.]
호비는 내심 흠칫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나의 잘못이외다.]
[나는 그대가 잘못을 시인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예요.]
호비는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좋소, 말에 오르도록 하시오!]
원성이 말에 오르려고 할 때 홀연 사면에서 피리소리가 울려 퍼
지며 적이 사면에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적은 어느덧
묘소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무상(恨無常)
호비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여인은 결국 나를 팔아넘겼군. 우리는 서쪽으로 뚫고 나갑
시다.]
호비는 피리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격
을 해 온 적은 적지않은 수였다. 만약에 원성이 상처를 입지 않았
다면 두 사람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원성은 입을 열고 말했다.
[그대는 곧장 서쪽을 뚫고 나가도록 하세요. 나를 생각할 것 없
어요.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책이 있어요.]
호비는 가습 속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강한 어
조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죽으나 사나 함께 있도록 합시다. 그러니 그대
는 빨리 나를 따르도록 하시구려.]
원성은 그가 거칠게 호통을 치자 오히려 흐뭇한 것이 되려 기분
이 좋았다. 사실 그녀는 중상을 입어 연편을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는 몸이었다. 그녀는 말고삐를 흔들어 말을 몰고 호비의 뒤를
따랐다.
호비가 손에 칼을 뽑아들고 수 장 쯤 달려나가게 되었을 때 다
섯 명의 어렴풋한 그림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을 막아서는 것
이 아닌가?
호비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내가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
칼에 살수를 펼쳐야 하며 절대로 반 푼어치의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시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적은 사람의 수로서
많은 사람의 적을 대항하게 되었지만, 먼저 손을 쓰지 않고 뒤에
손을 쓰되 여러 사람을 제압한다는 요결을 지키고자 작정하며, 왼
쪽 어깨를 앞으로 당기듯 하면서 왼손을 비스듬히 뻗쳐내고 오른
손의 칼은 끝이 다리 옆으로 드리워지도록 했다.
복강안 부중에 있는 두 무사 가운데, 한 사람은 철편(鐵鞭)을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비도를 호비를 겨눈 채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더니 각기 좌우 양쪽에서 호비의 머리를 노리고 공
격해 왔다.
호비는 그들 두 사람이 손을 쓰는 것을 보자 그들의 무공이 대
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단 싸움이 시작된다면 삽시간에 승리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싸우는 와중에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들을 포위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는 것
은 더욱더 어렵게 되는 형편이었다.
이윽고 그는 비스듬히 솟구치며 휙 하니 칼을 들어 다섯 사람
가운데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내려찍었다. 그 무사는 손에
장검을 들고 막으려고 했다. 호비는 몸이 허공에 떠있던 상태에서
내경(內勁)을 돋구고 두 다리를 뻗쳐내며 번개처럼 날쌔게 네번째
무사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발길질에 채인 그 무사는 곧장 날아가
며 미친듯이 선혈을 내뿜었다.
검을 쓰는 무사는 순간 무기에 거대한 힘이 실리며 그 힘이 손
끝에 밀어닥치는가 하더니 다시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순간 늑골이 일제히 부러지는 충격을 받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그가 일순간에 두 동료를 해치우는 것을 보고 모두
다 경악했다.
귀두도(鬼頭刀)를 든 무사가 호통을 내질렀다.
[호 나으리, 정말 뛰어난 무공이구려. 불초 사도뢰(司徒雷)가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그러자 그 철편을 들고 있는 무사도 입을 열었다.
[불초 사불당(謝不撞)도 고명한 절초를 가르침 받겠소이다.]
호비는 부르짖듯 말했다.
[좋소이다!]
그리고는 칼을 빙글 돌려 자기 몸 주위에다가 허연 광채를 수놓
으며 휙휙! 칼빛을 번득이면서 세번의 허초를 펼쳐내고 곧장 상대
방에게 육박해갔다. 사도뢰와 사불당은 급히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세번째의 무사가 부르짖었다.
[불초는 동방(東方)......]
겨우 그 무사는 자기의 성씨를 밝혔을 뿐이었는데 호비의 칼등
은 어느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으며, 그
자는 뇌골이 박살나며 즉시 절명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이름이
동방 무엇인지 밝힐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사도뢰와 사불당은 엄히 문호를 지키며 두 걸음을 물러서기는
했으나 호비가 뚫고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네 명의 무사들이 사도뢰와 사불
당의 등뒤로 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섰다. 호비는 순식간
에 잇따라 세 명의 적을 처치했지만 사도뢰와 사불당은 견문과 경
험이 넓은 듯 앞으로 나와서 직접 호비의 공격을 맞받지 않고 두
걸음이나 물러서며 호비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호비는 내심 큰일났구나 생각하며 야전팔방장도식(夜戰八方藏刀
式)이라는 초식을 펼쳐 공격하면서 왼발을 축으로 삼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그와 같이 한 번 돌자 어느덧 적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서쪽에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처치한 세 사람을 계
산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스물네 명이나 되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낭랑히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
고 우렁찼다. 그리고 곧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형제, 반갑네. 반가워! 매번 자네를 볼 때마다 자네의 무공
이 한층 더 증진된 것을 보니 진정 영웅은 젊은이 가운데서 나오
는가 보네. 정말 훌륭하네. 훌륭해!]
바로 전귀농의 음성이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호비는 아랑
곳하지 않고 서쪽의 여섯 명의 적을 응시했다. 그러자 네 명의 무
사들이 각기 입을 열었다.
[불초는 장녕(張寧)이라고 하오!]
[불초는 정문패(丁文沛)로서 가르침을 받을까 하오!]
[불초 정문심(丁文沈)은 호 나으리께 인사를 드리오!]
[허허허, 노부는 진경부(陳敬夫)이오!]
호비는 그들의 소개가 끌나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왼손의 손가락을 뻗치며 북쪽에 있는 두번
째 무사의 흉구점을 찢어갔다. 그 사람은 손에 한 쌍의 판관필을
들고 있었는데, 바로 타혈(打穴)의 고수였다. 그는 상대방이 손가
락을 뻗쳐 혈도를 짚으려 들자 판관필을 벼락같이 뻗쳐내며 오른
쪽 어깨에 있는 결분혈(缺盆穴)을 짚으려 들었다.
이 일초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한 것으로서 실로 지극히 무서운
살수였으며, 호비가 먼저 손을 뻗쳐내기는 했으나, 그 자의 판관
필의 길이가 두 자 두 치나 되어 혹비의 손가락이 그 자의 혈도에
닿기 전에 호비의 결분혈이 먼저 상대방에 의해 짚힐것 같았다.
헌데 뜻밖에도 호비는 왼손을 밀쳐내며 재빨리 판관필을 낚아챘
다. 그러면서 팔관필을 앞으로 내밀자 그 사람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지러졌다. 판관필의 끝이 그의 목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
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초는 황초(黃樵)이오!]
[불초는 오공권(俉公權)이외다!]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어느덧 등심까지 뻗쳐오고 있었
다.
호비는 앞으로 덮치듯 몸을 날렸다. 그러자 두 자루의 칼이 허
공을 치게 되었다. 호비는 그 기세로 칼을 돌려 아래에서 윗쪽으
로 황초의 손목을 베어갔다. 이 수법은 호가도법 가운데 가장 정
묘한 무예가 강한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익히는 도법이었다. 그런
데 뜻밖에도 황초는 십팔로(十八路)의 대금나수에 정통했으며, 임
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칼이 자기의 손목을 베어 오자
경황 중에도 곧장 무기를 내던지고 손뻗쳐 곧장 호비의 칼등을 움
켜잡으려고 들었다.
그는 두 가닥의 쥐꼬리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머리는 작은 편
이었으며, 눈은 가늘게 찢어져 있고, 얼굴이 넓다란 것이 볼상 사
나운 몰골이었지만, 이와 같은 초식의 변화는 호비보다도 신속한
편이었다. 그는 다섯 개의 닭발톱 같은 손가락이 한번 내뻗는가
했는데 어느덧 호비의 칼등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호비는 자기의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칼을 휘둘러 앞으로 쪼개
내려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초의 팔힘 역시 적지 않았기에
호비는 제대로 초식을 펼쳐내지 못했다.
적의 역습을 받고 멈칫하는 순간 호비의 등뒤에서 다시 세사람
이 동시에 공격해 왔다. 등뒤의 세 사람이 공격해 올 때까지는 아
직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나 반드시 짧은 시간 내에 황초를 처리
해야했다.
그는 지금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고 상대가 강적이기 때문에 만
약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한 푼의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와 같이 가늠해 본 즉시 그는 신속히 칼에서 손을 떼면서 동
시에 두 손을 앞으로 뻗쳐내 퍽! 하니 황초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황초는 일순 뒤뚱했으나 결코 쓰러지지 않았으나 칼을 잡고 있던
손은 끝내 풀어지게 되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다시 쥐게 되자 몸을 돌리는 즉시 세 가지의
무기를 막아냈다. 그 세 명의 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오공권이
었고, 한 사람은 노인인 진경부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체구가
우람하고 호비보다도 머리가 하나 반 정도는 더 큰 사람인데 손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숙동곤(熟銅棍)으로 사십 여 근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호비가 그 자의 숙동곤을 칼로 막게 되자 가슴팍이 띵
할 정도로 충격이 전해졌으며, 몸을 날리려고 했을 때 좌우 양쪽
에서 두 사람이 공격해왔다.
원성은 말을 타고 뒤쪽에 있었다. 뭇 무사들이 모두 다 호비를
포위 공격하느라고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중상
을 입은 몸이었지만 호비가 다섯 사람을 헤치며 펼치는 일초 일식
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호비의 안위에 쏠
려 있었고, 그가 한번 몸을 날리는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 몸을
날려 피하는 것 같았고, 한 초의 칼부림과 일장의 격출일지라도
그녀가 스스로 손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성은 그가 다섯 사람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즉시 말을 몰아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그녀
는 말채찍을 휘둘러 편법 가운데 양관절류(陽關折柳)
라는 일초를 펼쳐 어느덧 그 우람한 체구를 가진 대한의 머리와
몸을 감았다. 그 대한은 정히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있었다.
[불초는 고일력(高一力)으로 가르침을......]
갑자기 목이 바짝 죄여지자 그만 말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힘이 좋았지만 별안간 호흡이 막히게 되었고, 말이 끌어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여세로
옆에 있는 장녕마저도 쓰러지고 말았다.
호비는 두 명의 적이 줄어들자 재빨리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둘
러 어느덧 정문패, 정문심 형제를 찍어 땅바닥을 내꽂았다.
그런데 갑지기 등뒤에서 세찬 파공성이 일며 누군가 바짝 다가
드는지라, 미처 발을 돌릴 사이도 없이 손을 뒤로 돌리며 도와 호
괴망번신(倒臥虎怪 飜身)이라는 수법으로 칼을 선회시키듯 쪼개냈
다.
순간 창! 하는 가벼운 음향이 울려퍼지면서 손에 든 칼이 가벼
워졌다. 그의 칼은 어느덧 적의 예리한 무기에 잘려지게 되었고,
적의 무기는 그 기세를 빌어 들어닥치고 있었다.
호비는 깜짝 놀라 왼발로 가볍게 땅을 차고 앞쪽으로 곧장 일
장 남짓 솟구쳤다. 그러나 왼쪽 어깨에 한차례 격렬한 통증이 오
는 것을 느끼며, 암습을 가한 사람은 바로 전귀농이라는 것을 알
았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귀농의 무공은 별로 대단치 않지만, 그의 보도는 예리하기 이
를데 없어 실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오른발을 땅에
내려놓으며, 왼손으로 후려치는 동시에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한 무사 손에 들린 칼을 낚아채며 즉시 그 칼로 휘둘렀다. 이 한
수의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은 깨끗하고도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
으며, 잇따라 칼을 선회시키는 공격 역시 날카롭고 매서웠다.
사실 예리한 무기를 든 적이 잇따라 들어닥치고 있었기 때문에
찰라의 순간이라도 늦는다면 자기의 몸뚱아리는 전귀농의 손에 들
린 보도에 난도질 당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호비는 감히 칼로서 적의 보도와 맞딱뜨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경신법을 펼쳐 그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칠팔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십여 명의 적이 일제히 그를 에워싸게 되었고,
다른 세 사람은 원성을 공격했다.
원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자 호비는 마음이 산란해져 멈칫하는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칼은 보도에 의해 다시 잘려지고
말았다. 그 보도의 예리함은 무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경지에 이
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귀농은 호비를 능지처참하겠다는 마음으로 서늘한 광채를 번
득이며 조금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일초일식을 매섭게 펼쳐냈
다.
그는 평소 검을 사용했으며, 칼(刀)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도가 예리하기 이를데 없었기 때문에 아무렇게 휘둘러도 호비는
결코 언감생심 그 예리함에 맞서지 못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보도를 휘두르며 곧장 짓쳐 들어왔다.
호비는 다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상대하기는 했으나 칼과 창이
이곳저곳에서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도저히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를 한 무사의 화창(花槍)
에 찔려 기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호가야, 이제 투항해라!]
[당신같은 호걸이 어찌 이곳에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가?]
[우리들은 사람이 많아 중과부적이니, 패배를 시인하더라도 체
면을 잃는 것은 아니다!]
전귀농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매섭게 보도를 휘두르며 공격
을 해왔다. 호비는 어깨와 뒷등의 상처가 매우 깊어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한 여인이 큰 소
리로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그 젊은이의 목숨을 해치지 마세요!]
호비는 이를 악물며 일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그것이 묘부인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당신 보고 알량한 인정을 베풀어 달라고 했소?]
순간 그는 다시 허리춤을 발길질에 걷어차였다. 호비는 극도로
분노하여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뻗쳐 그 사람의 발목을 움켜잡고
들어올리며 빙글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뭇 무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이는듯 일시에 짓쳐 들어오지는 못했다.
호비의 손에 들린 사람은 바로 장녕이었다. 그는 무기를 손에서
놓치며 호비가 내지르는 바람에 어지러워져 제대로 발버둥 한번
치지 못했다.
호비는 원성이 마상에서 이리저리 피하기에 급급하며, 그녀가
타고 있는 말도 몇 차례 칼질을 당하여 끊임없이 울부짖는 것을
보고 즉시 장녕을 든 채로 원성 앞으로 내달으며 부르짖었다.
[나를 따라 오시오!]
순간 원성은 몸을 솟구치며 뛰어내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호
일도의 무덤 옆에 이르게 되었다.
무덤 옆의 잣나무는 상당히 자랐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무를 의
지하고 싸움을 벌이자 적의 공격은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게 되
었다.
호비는 장녕을 쳐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들은 이 사람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작정이오?]
전귀농은 부르짖었다.
[반적(反賊) 호비를 죽이면 복대수께서 크게 상을 내릴 것이
다.]
그 말뜻은 장녕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전귀농은 뭇 사람들이 주저하며 망설이자 자신이 먼저 칼을 휘
두르며 달려들었다.
호비는 장녕을 인질로 잡는다 하더라도 적을 물러서도록 위협하
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심 전귀농이 보도를 손에
들고 있고 무공이 고강한 편이라 그를 잡는 것은 수월치 않는 노
릇이니, 역시 묘부인을 인질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나 묘부인은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어 아무리 내닫는다 하
더라도 포위망을 뚫고 그곳까지 달려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호비는 전귀농이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다가들자 즉시 장녕의
몸을 더듬어 그의 몸에 지닌 무기를 사용하여 잠시간이나마 저항
하려 했다. 과연 그의 몸에는 묵직한 표낭이 달려 있었다.
호비는 왼손으로 그의 혈도를 짚고 오른손으로 그의 표낭을 낚
아채며, 표낭 안에서 묵직한 강표를 한 자루 꺼내 즉시 전귀농의
아랫배를 겨냥하고 휙! 하니 강표를 던졌다.
강표가 세찬 파공성을 일으키며 전귀농의 아랫배 격중되려는 순
간, 그는 급히 칼을 휘둘러 막았다. 강표는 즉시 두 토막으로 잘
라지며 앞의 뾰족한 부분이 세찬 기세로 전귀농의 오른쪽 허벅지
에 박히며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동시에 악! 하는 외마디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명의 무사가 목에 강표을 얻어맞고
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전귀농은 욕을 했다.
[이 좀도적아. 네가 오늘 어디로 도망치는지 두고 봐야겠구나.]
그는 감히 짓쳐들지 못하고 뭇 무사들에게 호령하여 두 사람을
에워싸도록 했다.
복강안 부중에서 이곳으로 온 무사들은 전귀농을 포함해서 모두
스물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 중 호비의 칼에 베이거나, 강표에
적중되고, 발길질에 채여 쓰러진 사람이 모두 아홉 명이나 되었
다. 하지만 호비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상대방은 열여덟 명이나 되었으며,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완전히 승기를 잡은 편이라 몇몇은 호비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에게 투항하라고 외쳤다.
호비는 원성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동쪽으로 뚫고 나가 사람들을 유인할테니 그대는 빨리 서
쪽으로 달려가구려. 백마는 소나무 아래에 매여 있소.]
원성은 담담히 말했다.
[백마는 그대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예요.]
호비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 니꺼 내꺼 따질 여지가 어디 있소? 나는 그대를 돌볼수는
없지만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은 할 수 있소.]
원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를 돌봐줄 필요는 없으니 그대나 이대로 떠나도록 하세요.]
호비의 계획대로 한다면, 한 사람은 질풍같이 말을 달려 이 자
리를 빠져 나가고, 한 사람이 용감하게 칼을 휘둘러 적들을 추풍
낙옆처럼 쓰러뜨리며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결코 가망없는 일 만
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원성도 호비도 서로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
람은 이 생사의 고비길에서 서로 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두 사람은 내심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며 함께 죽
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호비는 원성의 손을 잡고 말했다.
[좋소. 원소저, 우리 함께 죽도록 합시다. 나는...... 나는 무
척 기쁘오!]
원성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나는 출가외인이예요. 나를 원소저라고 부르지 말
아요. 나는 성이 원도 아니예요.]
호비는 침울해졌다. 생사의 고비길에 처해 있는데도 원성이 호
의를 가지고 대해 주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만 내세우는 모습을 보
자 일말의 슬픔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무사 한 명이 하얀 광채를 번득이며 단도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육박해 왔다. 호비는 돌맹이 를 하나 집어 들고 하얀 광
채의 테두리 안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그 무사는 칼을 들어 돌맹
이를 튕겨냈다. 호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표를 내던져 그
무사의 가슴에 적중시켰다. 그 무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고꾸라져 절명하고 말았다.
전귀농이 부르짖었다.
[저 젊은 도적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니 일제히 덤벼들도록 하
자! 설마 그가 정말 머리가 세 개 달리고, 팔이 여섯 달린 괴물이
겠는가?]
호비는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바탕의
결전을 벌여야 하며, 설사 서너 명은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저
하늘의 달과 별, 푸르른 들판과 아름다운 들꽃들, 이 모든 것과
영원히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밀려왔다.
전귀농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십육 명의 무사들에게 사방으
로 공격하여 저 도적놈을 난도질하라고 독려했다. 이에 무사들은
일제히 응대했다.
전귀농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여 부르짖었다.
[저 녀석은 무기가 없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를 난도질하
여 육젖을 담그도록 하세!]
묘부인이 갑자기 다가서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 잠깐만요. 나는 저 젊은이에게 할 말이 있어요.]
전귀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란, 이쪽으로 오지 마오. 저 젊은 도적이 미쳐 날뛰면 당신
을 해칠 지도 모르오.]
묘부인은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그는 곧 죽게 될 건데 뭘 그러세요. 내가 그에게 한 마디 한다
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전귀농은 더이상 말리지 못하고 달래듯이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한번 이야기해 보구려.]
묘부인은 넌즈시 입을 열고 물었다.
[당신은 누이의 유골도 묻지 못하고 죽을 작정인가요?]
호비는 당당히 말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요? 나는 여인에게 욕을 하고 싶지 않
으니 당신은 좀 더 멀찌기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묘부인은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부모에 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응낙했어요. 당신
은 곧 죽게 될 몸인데, 그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으세요?]
전귀농이 호통을 내질렀다.
[아란, 당신은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거요? 당신이 알
턱이 없지 않소?]
묘부인은 전귀농을 아랑곳하지 않고 호비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세 마디만 하겠어요. 모두 당신 아버지와 관계
가 있는 이야기예요. 당신은 듣겠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의문의 응어리를 남긴 채 눈을 감지는 못할 것 같
으니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묘부인는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만 조용히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나를 인질로
잡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신은 응낙할 수 있겠어요?]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의문을 풀어준다면 나
는 매우 고맙게 생각할 것인데 어찌 당신을 해치겠소. 천하에는
사내대장부가 많다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전귀농처럼 비열한
소인배인줄 아시오?]
전귀농의 안색이 울그락 푸르락 했지만 노기를 참고 있었다.
그는 남란이 호비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한 처지인데다가 곧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이것까지 막
을 수는 없다고 여기며 내심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의 명성에는 누를 끼치는 말을
할 것이니,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묘부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호비 앞으로 다가서서 호비의 귀
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은 유골 항아리를 묘비 뒤 석 자쯤 되는 성 곳에 묻도록
하세요. 그곳을 파면 보도(寶刀)가 한 자루 있을 거예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즉시 물러서서 낭랑히 말했다.
[이 일은 오직 묘인봉과 관계가 있을 뿐이예요. 당신은 이일을
안 이상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이니 빨리 유골을 묻어주고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하세요. 더우기 당신은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셈
이니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거예요.]
호비는 내심 많은 의혹을 느꼈으며, 그녀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기에 그녀가 일부러 자기를 희롱하고 있지는 않다
는 생각이 들어 내심 작정했다.
(일단 둘째 누이의 뼈를 묻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이윽고 그는 묘비 뒤쪽의 석 자쯤 되는 곳을 가늠하고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전귀농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아란은 그의 부친이 묘인봉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했었구나.)
그 생각에 그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그녀
를 바라보았다. 그는 남란이 호비에게 유골을 묻어주라고 하는 소
리를 듣고, 어쨌든 호비는 조만간에 죽게 될 것이니 서두를 필요
는 없다고 생각하며 무사들에게 손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십육 명이나 되는 무사들은 무기를 들고 호비와 일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둘러서서 감시를 했다.
원성은 호비가 정영소의 유골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것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저이도 나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합장의 예를 올리며
나직이 불경을 낭송했다.
호비는 왼쪽 어깨 상처의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도 정성스레 땅을 파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원성이 단정
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었다. 호비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가
장엄하고 엄숙한 것을 보자 마음이 편해지며 내심 생각했다.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귀의하였는데 어찌 내가 환속
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녀가 응낙하지 않았기 망정
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편치 못할 것
이다.)
별안간 손끌에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한 촉감을 느꼈다. 묘부인
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천하제일의 보도가 있을 거예요!)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양쪽을 더듬어 보니 과연 칼집에 칼
이 꽃혀 있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쥐고 가볍게 뽑았다. 칼날이 한
치 남짓 뽑혔으나 푸른 예기가 번득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
다.
(묘부인의 이 일을 오직 금면불 묘대협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칼은 묘대협이 묻어놓은 것이 아닐까? 설마 묘대협이
우리 아버님을 기리기 위해 이 칼을 묻어놓은 것일까?)
그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다만 그는 묘인봉이 묘부인과 혼례를
올리게 된 사연이 바로 이 냉월보도(冷月寶刀) 때문이고, 또한 이
보도 때문에 금슬 좋은 부부의 연이 깨어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두 사람 이외에 이 일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쥐고 고개를 돌려 묘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
가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
지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전귀농이 큰 소리로 불렀다.
[아란! 객점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젊은 도적을 죽인 후에
우리 함께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묘부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점차
멀어져 갔다.
전귀농은 호비를 바라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젊은 도적아, 빨리 묻어라! 우리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
다!]
호비는 냉랭히 응수했다.
[좋다.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리고는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순간 푸른 광채가 눈 앞에 번
득했으며 서늘한 한기가 뻗쳐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시퍼렇고 기
다란 칼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칼빛은 추수와 같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파도처럼 춤추며 일렁이고 있었다.
전귀농의 뭇 무사들은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뭇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칼을 휘둘러 공격해 나
갔다. 쨍그랑! 창! 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세 명의
무사들의 무기가 잘리웠고, 두 무사의 팔이 잘라져 나뒹굴었다.
호비는 전귀농이 칼을 비껴들고 베어오자 막았다. 순간 보도와
보도가 맞부딪히며 석고(石鼓)를 두드리듯 쩡! 하는 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퍼졌다. 두 사람은 두둥실 몸을 솟구치며 세
걸음을 물러섰다.
달빛 아래 바라보니 서로의 손에 들린 칼은 똑같이 조금도 손상
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보도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
난 칼이었다. 호비는 자기 손에 들린 칼이 전귀농의 보도와 견줄
수 있는 것을 보자 대뜸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힌 듯 쾌속무비한
공격을 펼쳐냈다. 그는 호가도법을 펼쳐 삽시간에 다시 세 명의
무사를 해치웠다.
전귀농의 보도는 호비의 보도와 막상막하였으나, 도법은 훨씬
뒤떨어진 편이었다. 더우기 전귀농의 무기인 장검을 들고 싸우더
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판인데 어찌 단도를 들고 호비의 호가도법
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삼사 초를 겨루자 전귀농의 팔과 다리는
잇따라 칼에 얻어맞게 되었다. 만약에 옆에 있던 무사들이 도와주
지 않았더라면 호비의 칼 아래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
상처를 입지 않은 무사들은 어느덧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어떤 무기일지라도 호비의 손에 들린 보도와 맞부딪
치면 즉시 토막이 나서 맨손으로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호비는 더이상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아 부르짖었다.
[보기에 여러분들은 모두다 뛰어 난 분들인 것 같은데 어이해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전귀농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
랑치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은 동료들을 일으켜
낭패한 몰골로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뭇 무사들은 몇 년이 지난 이후 그 보도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애써 생각하고 여러모로 의논을 해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호비의 행동이 신출귀몰하여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예측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비호(飛狐)라는 외호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강호를
휘몰아치는 그의 호걸다운 풍모는 후대의 청년 호걸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잡게 되었다.
호비는 칼을 퉁기며 맑고 우렁찬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감개무
량했다.
호비는 칼을 칼집에 꽃고 다시 구덩이 안에 넣어 그 보도가 영
원히 지하에서 부친과 함께 하도록 했다. 이윽고 정영소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정성스레 넣고 흙을 잘 덮어주었다.
합장을 하며 읊조리는 원성의 불경 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졌다.
[모든 사랑은 열매를 맺으나,
무상하여 오래가지 못하나니.
세상에 나면 번뇌가 끊이지 않고,
이승의 연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니라.
사랑으로 인해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근심도 번뇌도 사라지느니.]
단아한 독경소리가 울려퍼지며 조용히 그녀는 서쪽으로 말을 몰
아 나아갔다.
호비는 낙빙이 준 백마를 끌고 뒤쫓아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이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오. 그대는 몸도 성치 않으니,
역시...... 역시......]
원성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몰아 떠나갔다.
호비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비의 가슴 속에는 그녀가 읊조리던 불경 소리가 끊임없이 맴
돌고 있었다.
백마도 원성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더니 불현듯 구슬피 울부짖
었다.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떠나가는 원성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
전히 사라지자 호비와 백마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完 結>
저자후기
비호외전(飛狐外傳)은 본래 1960년 - 1961년 무협과 역사라는
소설 잡지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연재 소설이었으므로 분량의 제
한을 받아 제대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마음이 들어 다시 수정을
가해 집필을 한 것이다.
이 소설의 문학적 스타일은 중국 고전 소설의 전통과는 비교적
차이가 있는 셈이고, 단지 두 가지 정도만 고친 것이다. 첫째로
대화 가운데 현재적인 어미가 있는 표현이나 관념을 삭제했으며,
인물이 생각하는 말 역시 그러하다. 둘째로, 너무나 새로운 문예
적인 말투와 외국어 문법과 유사한 구절을 고쳐서 썼다.
이 책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의로운 일을 행
하는 협사(俠士)를 그리고자 했다.
무협 소설 가운데 진정으로 협사를 다룬 작품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대다수는 주로 무공을 연성하고 펄치는 것이지 의협의 길
을 걷는 사람을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맹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귀하다고 해서 음탕해서는 안되며, 가난하고 천함에 구애받
지 않고, 강한자 앞에서 굴복하지 않아야만이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무협의 인물은 부귀와 빈천을 마음에 두지 않고, 더우기 강한
자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내 대장부의 표준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이 모두 꿋꿋하게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
다.
이 책에서 나는 호비에게 약간의 요구를 보태고자 하였다.
즉, 그로 하여금 미색에 현혹되지 않고, 사랑과 미움에 사로잡
히지 않으며, 체면에 구에받지 않고 당당히 행동하도록 한다는 것
이다.
영웅은 미인관(美人關)을 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호비는
원자의 같이 아리따운 소저에게 마음을 기울인 바 있고, 그녀 역
시 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봉천남을
용서하라고 부탁을 해도 그녀에게 응낙하지 않는 것은 기실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웅호걸은 부드럽고 애절한 부탁에는 잘 넘어가지만, 강
압적인 요구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것이다. 봉천남이 금은보화
와 화려한 저택을 선물했으나, 호비는 시종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데도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엄히 따지는 것은 체면과 의리인데 주철초 등이
그와 같이 호비의 체면을 세워주고 사정하다시피 봉천남에 대한
감정을 떨쳐버리도록 부탁을 하지만 호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다.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영웅호걸에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대목인 것이다.
호비가 봉천남을 응징한 것은 단지 종아사 집안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는 그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교분도 없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강호의 체면을 져버리고 간악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 대장부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대장부의 모습을 힘차게 그려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깊이 있
게 묘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묘사한 많은 남
성인물(男性人物) 가운데 호비, 교봉(喬峯), 양과(楊過), 곽정(郭
靖), 영호충(令狐沖)등 몇 명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격의 소
유자이다.
무협소설에서 좋지 못한 인물들은 정파의 인물에 살해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되고 있으며, 나 역시 그들의 죽음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상노태(商老太)라는 인물을 묘사한 것은 악한
사람이 피살되었음에도 그의 친지들은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고 판단하며, 여전히 그를 숭배하고 사랑하며 늙어 죽을때까지 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우기 악적을 응징한 사람에 대해 그 친
족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
타내려고 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고 꿋꿋한 사내 대장부가 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金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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