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소오강호 1-1

3학년2반 | 2022.03.11 06:51:10 댓글: 0 조회: 91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627

소오강호 제 1 권 -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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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멸문(滅門)
싱그러운 꽃내음이 봄의 훈풍(薰風)에 실려오는 남국(南國)의 봄날이었다.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서문대가(西門大街)의 청석판로(靑石板路)를 쭉 따라가면 서문에 다다른다. 웅장한 저택앞에, 이장(二丈)높이의 깃대가 좌우 양쪽의 돌계단위에 서있고, 깃대에는 푸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오른쪽 깃발에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바짝 세운 용맹스런 숫사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니 마치 사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위세가 있었다. 사자의 머리위에는 날개를 퍼득이며 막 날아오를 듯한 한 마리 박쥐가 검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왼쪽 깃발에는 [복위표국(福威標局)] 이라는 네글자가 검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저택 대문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문위의 크고 작은 차종이 반짝거리며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문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에는 [福威標局] 네 글자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그아래 작은 글씨로 [총호(總號)]라 적혀 있었다. 대문앞에 긴 의자가 양편으로 놓여져 있고, 8명의 건장한 무사(武士)들이 나뉘어 앉아 있었는데 꼿꼿이 앉아 있는 그들의 자세는 한결같이 용맹스러워 보였다.
그때 갑자기, 후원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리자 8명의 무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대문으로 뛰어들어갔다. 표국 서쪽 문에서 5기의 말이 뛰어나와 대문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선 말은 전신이 눈처럼 하얗고 말장식이 모두 은(銀)으로 되어 있는데 안장에는 18세 가량의 비단옷을 화려하게 입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어깨에는 잘 길들여진 사냥매가 앉아 있고 허리에는 보검을 차고 등에는 장궁을 메고 말을 몰아 나왔다. 그뒤에 4기의 말이 따랐는데, 모두 청색 짧은 옷을 입은 대한들이 타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표국 입구에 이르자, 8명의 무사중 세명이 아뢰었다.
"소표두(小標頭), 또 사냥을 나가십니까?"
소년이 하하 웃으면서 말채찍으로 허공을 후려치자, 백마가 고개를 쳐들고 청석판로(靑石板路)로 뛰어나갔다. 무사 한 명이 소리쳤다.
"사표두(史標頭), 오늘 멧돼지 한 마리 잡아와서 배에 기름칠 좀 합시다." 소년을 뒤따르는 40세쯤 되어 보이는 무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 마리 잡아서는 꼬리 한 쪽도 자네에게 돌아갈게 없다네! 국물이나 실컷 마시도록 하게"
사람들이 웃고 있는 사이에 5기의 말은 이미 멀리로 내달렸다.
성문을 벗어나자 소표두 임평지(小標頭 林平之)는 말을 더욱 빨리 몰아 순식간에 일행들과 거리를 벌리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산언덕에 이르자, 말을 세우고 사냥매를 날려 보내 숲속에서 한 쌍의 토끼를 발견했다. 그는 등에서 장궁(長弓)을 하나 빼들고 안장옆의 전대(箭袋)에서 화살을 집어 활에 걸고 시위를 당겼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 한마리가 튀어올랐다 떨어졌다. 다시 한발을 쏘려하니 나머지 한 마리의 토끼는 수풀속으로 도망쳐 보이지 않았다. 정표두가 말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小標頭, 명중(命中)입니다."
그때 쟁자수(쟁子手), 백이(白二)가 왼쪽 숲속에서 소리쳤다.
"소표두, 빨리 오십시오. 여기 꿩이 있어요."
임평지는 말을 뒤로 돌려 숲속에서 꿩 한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한 발을 쏘았으나 명중하지 않고 꿩은 그의 머리위로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는 급히 꿩을 쫓아 말채찍으로 허공을 치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오색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렸다. 다섯 사람은 함께 호쾌하게 웃었다. 사표두(史標頭)가 말했다.
"소표두, 이번의 채찍질은 꿩이 아니라 수리라도 잡겠습니다." 다섯 사람은 숲속에서 새와 짐승을 쫓았는데 사표두, 정표두와 쟁자수, 백이, 진칠(陳七)은 소표두를 흥겹게 하기 위해 그들 앞에 사냥감이 나타나 좋은 기회가 와도 잡지않고 양보했다. 두어 시진 동안 사냥을 해서 임평지는 토끼 두 마리, 꿩 두 마리만을 잡았을 뿐, 멧돼지같은 큰 짐승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성에 차지 않아 "우리 앞쪽 산으로 가서 다시 짐승을 찾아봐요."
라고 했다.
사표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다시 다른 산으로 들어가면, 소표두의 성미로 보아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텐데. 우리들이 돌아가면 아마 부인의 원망을 듣게 되기 쉽지.) 생각을 굴리면서 그는 말했다.
"날이 곧 어두워질 것입니다. 산속에는 길이 험해서 말의 발목을 다칠지도 모르니, 내일일찍 다시 일어나서 다시 와 멧돼지를 잡지요?" 그는 무슨말을 해도 소표두의 성미를 누그러뜨릴 수 없으나 소년이 백마를 매우 아끼므로 절대로 그말을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명마는 임평지의 외할머니가 낙양(洛陽)에서 천금을 주고 사서, 이년전 그가 17세 되던 생일날 선물로 준 것이었다. 과연 그는 말발굽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말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애석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소설룡(小雪龍)은 매우 총명해서 날카로운 돌을 밟지 않지만 그대들의 말이 문제가될 것 같아. 좋아! 우리 돌아가자. 진칠의 엉덩이에 불이 나지 않도록 말이야."
다섯 사람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임평지는 원래 왔던 길이 아니라, 북쪽으로 말을 몰아 한바탕 신나게 달린후 흥이 다하자,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앞쪽 길옆에 주점이 보였다. 정표두가 제안했다.
"소표두 우리 술 한잔 하는 게 어떻습니까? 신선한 토끼고기와 꿩고기를 구워 놓으면 안주로 기가 막힐 텐데요."
임평지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나와 사냥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술 마시러 왔구먼, 오늘술을 사지 않는다면 자네가 내일은 따라오지도 않을테니 하는 수 없지. 한잔 하세." 그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는 안장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려 천천히 주점으로 걸어갔다.
예전같으면 주인 채노인(蔡老人)이 이미 나와 말고삐를 받으며 "소표두, 오늘은 몇 마리나 잡으셨나요. 활을 소표두만큼이나 잘쏘는 사람은 아마 당금 천하에 없을 겁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주점앞에 왔는데도 술집안이 고요하고, 주로(酒爐)옆에 청의 소녀가 머리를 곱게 빗어 노리개를 꽂고 있는옆모습만이 보이는데, 술을 거르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정표두가 소리쳤다.
"채노인, 나와서 말고삐를 매지 않고 뭘하는 게요?"
백이, 진칠은 의자를 당겨 옷소매로 먼지를 털고 임평지에게 앉도록 권했다. 사표두, 정표두가 임평지의 오른쪽에 앉았고,두명의 쟁자수가 따로 한자리를 차지했다.
안쪽에서 기침소리가 나더니 백발노인이 나와서 말했다.
"손님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무슨 술을 드시겠습니까?" 말소리에 북방 사투리가 섞여 나왔다. 정표두가 말했다.
"술말고 차를 마시면 어떨까? 먼저 죽엽청(竹葉靑)을 세 근 가지고 와봐요. 채노인은 어디 갔소? 뭐라구, 술집주인이 바뀌었다구요?"
그 노인이 대답했다.
"예, 예, 완아(宛兒), 죽엽청 세 근 가지고 오너라. 실은 저의 성씨는 설(薛)씨로 이 지방이 고향인데 어려서부터 객지에 나가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자식과 며느리가 모두 일찍 죽고, 찢어지는 가슴을 달랠 길없어 이렇게 손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 떠난 지 40년동안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없어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침 이 술집을 하던 채노인이 장사를 그만두고 저에게 은자 30냥에 술집을 팔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고향말씨를 들으니 말할 수 없이 반가우나 저는 이미 고향말씨를 잊어버려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 청의 소녀는 머리를 숙이고 나무 소반을 받쳐들고 와서 임평지 등의 사람들 앞에 술잔, 젓가락과 세개의 호로병을 놓고 머리를 숙이고 돌아갔다. 시종 손님들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임평지는 이 소녀가 몸매는 날씬하지만 살결이 검어 깨끗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점이 많아 용모가 볼품이 없어보이자 술집에서 장사하는 것이 서툴러도 신경쓰지 않았다.
사표두는 꿩과 토끼 한마리씩을 설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먼저 깨끗이 껍질을 벗긴 다음, 두개의 그릇에 나누어 볶아주시오." "예, 예! 우선 우육(牛肉)과, 잠두(蠶豆), 화생(花生)을 드시고 계십시요." 완아는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써 우육,잠두 등을 탁자위에 내어 놓았다.
정표두가 말했다.
"이 임공자는 福威標局의 소표두일세. 의협을 떨쳐 소년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계시지. 만약 요리가 소표두의 입맛에 맞는다면 노인이 투자한 30냥은 한달안에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네"
설노인이 대답했다.
"예, 예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연신 인사를 하며 꿩과 토끼를 가지고 나갔다.
정표두는 임평지, 사표두와 자기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술맛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또 잔을 부어 마시려 할 때,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두 마리의 말이 북쪽에서 관도(官道)위로 달려왔다.
두 필의 말은 매우 빨리 달려 순식간에 주점앞에 다다라서 "여기 술집이 있구나. 들어가서 한 잔 하지."
라는 소리가밖에서 들려왔다. 사표두가 말소리를 듣고 천서인(川西人)임을 알아차리고 머리를 돌려보니 청색 장포(長袍)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주점앞의 큰 용나무(榕木)밑에 말을 매고 술집안으로 들어와 임평지 일행에게 눈길을 흘끔 던지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일신에 청포를 걸쳐 사문을 표시하는 듯 했으나, 두 다리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사표두는 천인(川人)은 대개가 이러한 복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흰띠는 제갈량이 죽은 해에 천인(川人)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머리에 둘렀던 것이 천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머리에 띠를 두르는 관습으로 전해졌다. 임평지는 그들의 복장이 매우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저 두 사람이 文人인지 武人인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기이한 차림새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을 다오. 술을 주오. 복건성에는 산이 많아 말도 지쳐버렸구나." 완아는 머리를 숙이고 두 사람의 탁자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술을 드시겠습니까."
작았지만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젊은 무사는 움찔하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내밀어 완아의 턱끝을 받쳐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깝구만, 아까워 !"
완아는 깜짝 놀라서 급히 뒤로 도망쳤다. 또 한 명의 武士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여(余)형제,이 아가씨 몸매는 쓸만한데 얼굴은 점이 많아 마치 석류껍질같구료." 여(余)씨 성을 가진 사람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임평지는 비위가 상해 오른손으로 탁자를 쾅 두드리며 크게 소리쳤다.
"뭐라고, 눈도 없는 두마리 미친개가 복주땅을 더럽히고 있구나." 여씨 성을 가진 젊은 무사가 비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보게, 저사람이 욕을 심하게 하고 있구먼. 자네는 저 토끼같은 어린 사람이 누구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
임평지의 용모는 그의 어머니를 닮아 미목(眉目)이 수려(秀麗)하고 품격을 갖추고 있어서 평소 그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토끼같은 어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그는 탁자위의 술병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향해 냅다 던졌다. 여씨 무사가 가볍게 피하니 술병은 주점 밖의 풀밭위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술은 땅위로 쏟아졌다.
사표두, 정표두가 몸을 일으켜 그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여씨 무사가 비웃으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저 어린 놈이 함부로 설치니, 한 번 매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정표두가 소리쳤다.
"이분은 복위표국의 임소공자이시다. 너는 간이 얼마만하기에 누구에게 감히 덤비려 하느냐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오른손의 무시무시한 일격이 그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여씨 무사는 왼손을 위로 가볍게 뒤집어 쳐오는 손목의 맥문을 잡아당기니 정표두는 서있지 못하고 몸이 탁자를 향해 쾅하고 넘어졌다. 그 무사가 다시 왼손을 털듯이 정표두의 목덜미를 내리치니 "읔"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정표두는 탁자위로 콰당 넘어졌고 사람과 함께 탁자도 뒤집어졌다.
정표두는 복위표국에서도 고수라 할 수는 없었지만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표두는 정표두가 그 사내의 가벼운 일초(一招)에 쓰러지자 상대의 무예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 차리고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 그대도 무림인일진데 어찌 福威標局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인가?"

여씨 무사는 냉소했다.
"福威標局 ? 나는 이때까지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게 뭐하는 것이냐?먹는 것이냐? 마시는 것이냐?"
임평지가 몸을 날렵하게 위로 솟구치면서 소리쳤다.
"이 죽일 놈의 자식 !"
왼손이 눈부시게 뻗어나갔고,오른손이 연이어 왼손 밑으로 뻗어쳤다. 곧바로 가문고유의 [번천장(번天掌)]중의 [운리건곤(雲裏乾坤)] 일초를 시전한 것이었다. 여씨무사는 여전히 비양거렸다.
"어린 놈이 제법 몇 수를 알고 있구나."
그는 왼손을 휘둘러 공격해오는 주먹을 막으며 오른손으로 비스듬이 임평지의 어깨를 잡아갔다.
임평지는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빼면서 갑작스러운 각도로 왼손을 격출시켰다. 여씨 무사가 옆으로 피하자, 갑자기 임평지의 좌권(左卷)이 펴지면서 순간적으로 권이 장(掌)으로 변하며 [무리간화(霧裏看花)] 일초를 펼치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통에 격중했다. 여씨 무사는 한 번 몸을 휘청하고 크게 노하여 발로 임평지를 공격했다. 임평지도 우측으로 피하면서, 역시 발로 수비와 공격을 겸했다.
이때 사표두도 이미 가(賈)씨 무사와 한창 싸우고 있었고, 白二는 정표두를 부축하고 있었다. 정표두는 큰소리로 욕을 하며, 여씨 무사를 공격해 갔다. 임평지가 그를 막으면서 말했다.
"사표두를 도와주시오. 이자는 내가 맡겠소."
정표두는 소표두의 호승심(好勝心)이 매우 강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손을 거두고 방향을 바꾸어 가씨 무사의 머리를 향해 공격해 갔다.
두 사람의 쟁자수는 문밖으로 도망쳐 한 명은 말안장에서 임평지의 보검을 빼어들고, 한 명은 사냥용 창을 들고, 여씨무사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욕을 했다.
표국의 쟁자수는 무예는 평범하지만 표호(標號)를 항상 소리쳐 왔기 때문에 목소리가 매우 크다. 두 사람은 모두 복주사투리로 욕했기 때문에 두 명의 서천인은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지만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평지는 부친이 직접 가르쳐준 [번천장]의 일초(一招), 일식(一式)을 차례대로 펼쳐 갔다. 그는 평소에 표국의 표사(標師)들과 무예를 겨루어 늘 이기곤 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전수받은 무예가 뛰어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 표사들 중 누구도 이 소년 주인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고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입은 경험은 다소 있지만 이번처럼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은 매우 적었다. 비록 복주성 안팎에서 몇몇 악한들과 싸운 적이 있지만 그 시정잡배들의 무예로 어찌 임씨 집안의 절예에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 삼초양식(三招兩式)을 쓰기도 전에 눈이 퍼렇게 멍이 들고 코가 깨져서 그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솜씨를 뽐내어 10여초(招)를 격돌했는데 이미 임평지의 오만함은 점차 꺾여가고 상대방의 솜씨는 더욱 교묘해져서 이 소년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자세를 풀고, 비웃으며 말했다.
"소형제 자넨 보면 볼수록 예쁜 여자같기만 하이. 아가씨가 남장을 한 것 같단 말씀이야! 얼굴이 볼그스럼한 게 제법 향기로운 숨결까지 내뿜으니 다치도록 때릴 수가 있나. 우리 심하게 다투지는 말도록 하세."
임평지는 더욱 화가 치솟았다. 사 정표두를 바라보니 그들은 가(賈)씨 무사와 싸우고 있는데, 여전히 수세에 빠져있었다. 정표두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옷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임평지가 갑자기 장(掌)을 뻗어 싱글거리고 있는 상대를 치니 퍽소리와 함께 여씨 무사에게 주먹이 격중했다. 이번의 한 수는 매우 힘을 쓴 공격이어서 그는 대노하여 소리쳤다.
"은혜를 모르는 놈. 생기길 여자같이 생겨서 사정을 봐주었더니 천지를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구나."
권법이 일변하며,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듯 임평지의 아래 위에서 공격이 몰아닥쳤다. 두 사람은 주점 밖으로 나와서 싸우고 있었다.
임평지는 상대방의 주먹이 뻗어오는 것을 보자 부친이 가르쳐준 어(御)자결을 기억해 내어 왼손을 뻗어 적의 권풍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은 거세고 교묘했으니 공격을막지 못하고 가슴에 일권을 맞았다. 임평지의 몸이 휘청거렸고 목은 이미 그의 왼손에 잡혔다. 그는 팔에 힘을 가해 임평지를 아래로 꾸부리게 하고는 연이어 오른팔로 [철문감(鐵門鑑)]을 펼쳐 목덜미위를 누르며 광포하게 웃었다.
"이놈아! 나에게 세 번 절하며 세 번 '좋은 아저씨 좋은 아저씨, 잘못 했어요!'라고 하면 놓아주겠다."
사 정표두가 깜짝 놀라서, 상대방을 젖히고 나아가 구하려 했으나, 가씨 무사가 막아서는 바람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쟁자수 白二는 사냥용 창을 들고 여씨 무사의 등을 향해 찌르며 큰소리를 쳤다.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네 놈은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된단 말이냐..." 여씨 무사가 왼쪽 발을 떨쳐 돌려차니 찔러오던 창이 수장 밖으로 멀리 날아갔고, 이어서 오른쪽 발을 날리니 백이는 땅위를 몇 바퀴 굴러 나가떨어져 한참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진칠이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죽일 잡종 놈아 !"
욕을 한마디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고 몇 마디하고는 몇 걸음 물러서곤 했다. 여씨 무사가 계속 놀렸다.
"아가씨, 절을 할 거요. 안할 거요?"
팔에 힘을 가하니 임평지의 머리는 점점 숙여져, 이마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임평지는 주먹으로 그의 배를 치려 했으나 계속 간발의 차로 칠 수 없었다. 목은 아파서 부러질 지경이었고, 눈에는 별이 번쩍이고, 귀에는 윙윙하는 소리만 들렸왔다. 그는 두손을 마구 휘두르다가, 자신의 종아리 근처에서 딱딱한 물건을 집어들고, 엉겁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앞으로 뻗어 여씨 무사의 배를 찔렀다.
여씨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배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칼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석양이 배에 꽂힌 칼자루에 반사되어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고 손을 뻗어 비수를 뽑으려 했으나 기운이 달렸다.
임평지도 놀라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가씨 무사와 정 사표두도 싸움을 멈추고, 경악에 찬 눈으로 여씨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고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뽑으려 애를 쓰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만 보여,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씨 무사가 힘겹게 말했다.
"가형(賈兄), 가형, 아버지에게 전해서 복수를, 복수를......" 그는 오른손을 젖혀 비수를 뽑아 던졌다. 가씨 무사가 부르짖었다.
"여형제(余兄弟), 여형제."
그가 급히 곁으로 뛰어갔지만 여씨 무사는 땅위에 넘어지더니 몸을 몇 차례 부르르 떨다가는 곧 멈추어버렸다.
사표두가 낮은 소리로 으르릉거렸다.
"저놈도 죽여야 한다."
그는 급히 말옆으로 가서 칼을 빼들었다. 그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여 이미 피를 본 이상 가씨 무사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씨 무사는 임평지를 잠시 노려보고는 비수를 주워들고 뛰어가 말위로 훌쩍 올라타고 말재갈이 풀리지 않자 비수로 끊어버리고 말을 몰아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진칠은 시체 곁으로 가서 발로 툭툭차서 뒤집으니 입에서 선혈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보고는 표독스럽게 씹어뱉었다.
"우리 소표두께 죄를 짓고 살아남을 것 같으냐 ! 죽어 마땅한 놈, 잘 죽었다." 임평지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표두, 어떻게 해야하지 ? 나, 나는 죽일 생각은 없었어." (복위표국이 3대째 장사를 해오면서 강호에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죽인 사람이 모두 흑도의 인물들이었고, 또 깊은 산중에서 죽여버리고 그대로 매장하였기 때문에 관가에 그일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죽인 사람은 도적이 아니고 게다가 표국의 소표두가 사람을 죽였으니 일이 골치 아프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사표두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체를 빨리 술집으로 옮기자. 여기서 큰길이 가까우니 사람들 눈에 띌지 몰라." 마침 해가 넘어가고 있는 때여서 도로에 다른 행인은 없었다. 백이와 진칠이 시신을 술집안으로 옮겼다. 사표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표두 은자가 좀 있습니까 ?"
임평지가 급히 대답했다.
"있어, 있어, 얼마나 있어야 할까 ?"
그는 품안에서 은자 20여냥을 꺼내어 놓았다.
사표두는 돈을 받아들고, 술집으로 들어가 탁자위에 돈을 놓고는 설노인을 향해 말했다.
"설노인, 저 사람이 당신 손녀를 희롱하는 것을 우리 공자께서 보시고 당신 손녀를 도와 주려다 우연히 사람을 죽여버렸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직접 눈으로 본 사실이오. 이일은 당신과도 관계가 있으니, 말이 새어나가면 당신도 이로울 게 없소.
여기 돈을 드릴 테니 우리 함께 시신을 묻읍시다. 그리고 뒷일은 다시 천천히 생각하도록 합시다."
설노인이 황망히 대답했다.
"예, 예, 알았습니다."
정표두가 겁을 주면서 덧붙였다.
"우리 복위표국이 장사를 하면서 녹림의 도적 몇 명 죽이는 것 쯤은 흔히 있는 일인데, 내가 보기에 저 두 놈은 강양(江洋)의 도적의 괴수인데 복주에 일을 벌리러 온 것 같다. 우리 소표두께서 훌륭한 무공으로 저 놈을 가볍게 처리하여 복주를 편안하게 했으니 이는 표창을 받을 일이지만 우리 공자께서는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허명(虛名)을 원치 않으셔서 이렇게 처리하는 것일세. 노인장, 만일 비밀을 발설할 시에는 당신도 저자들과 같은 패라고 여길 것이오. 그러니 알아서 하시오." 설노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알았습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사표두는 백이, 진칠을 데리고 시신을 술집뒤의 채소밭에 묻고 또 술집 문앞의 혈혼을 깨끗이 없앴다. 정표두가 설노인에게 다시 으름짱을 놓았다.
"열흘동안 비밀이 새나가지 않으면관값으로 은자 50냥을 보내 주겠소. 만약 당신이 입을 놀리고 다닌다면, 그때는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오. 우리 손에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는데 당신과 손녀를 죽인들 채소밭에 시체가 두 구 늘어나는 것 밖에 별일이 아니오."
설노인이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모든일을 처리 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임평지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표국으로 돌아왔다.
대청(大廳)으로 들아서자. 부친이 태사의(太師椅)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임평지는 좋지않은 낯빛으로 "아버지"하고 불렀다.
임진남(林震南)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
"사냥을 갔었다고 ? 멧돼지라도 한 마리 잡았느냐 ?"
임평지가 말했다.
"아니요, 잡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은 담뱃대를 들더니, 갑자기 아들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
"환초(還招)!"
임평지는 부친이 불시에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그는 [벽사검법(僻邪劍法)]의 제 20초 [유성비타(流星飛墮)]에 대응하여 제 46초 [화개견불(花開見佛)]을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이미 술집에서의 살인을 알고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담뱃대로 자신을 꾸짖는 것으로 알고 감히 피하지 못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임진남은 담뱃대로 아들의 어깨를 내리치다가 어깨 3촌(寸)앞에서 멈추고는 물었다.
"왜 그러느냐. 강호에서 만약 적을 만난다면, 임기응변이 이처럼 늦어서야 너의 어깨가 제대로 성하겠느냐 ?"
말가운데 꾸짖음의 뜻이 들어 있었으나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임평지는 왼쪽 어깨를 낮추면서 몸을 돌려 아버지의 몸뒤로 돌아가 차탁자 옆의 계모추(鷄毛추)를 잡아 아버지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바로 [화개견불]을 펼친 것이다.
임진남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막아내며 손을 뒤집어 담뱃대를 휘두르며, [강상롱적(江上弄笛)] 일초를 뽑아 공격함에 임평지는 정신을 차려 [자기동래(紫氣東來)]의 수법으로 막았다. 부자는 서로 50여초를 겨루었다. 그때 임진남이 담뱃대를 재빨리 뻗으면서 아들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찔렀다. 임평지의 방어 초식이 미치지 못하고 가슴을 찔려 계모추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임진남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한 달 동안 많이 늘었구나. 오늘은 이 애비의 공격을 네번씩이나 막아냈으니."
의자에 앉으면서 담뱃대에 담배를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평아, 잘 듣거라. 오늘 우리 표국에 기쁜 소식이 당도했다." 임평지는 부싯돌을 집어서 아버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아버님, 장사가 잘되어 이익을 많이 남겼습니까 ?"
임진남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익만 생각하다간 일을 망치는 법이야."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고는 말을 이었다.
"방금 호남(湖南)에서 장표두가 서찰을 보내왔는데, 천서(川西) 청성파(靑城派)의 송풍관(松風觀) 여(余)관주가 이미 우리가 보낸 예물을 받았다고 전해 왔다." 임평지는 천서와 여관주라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미 우리가 보낸 예물을 받았다구요 ?"
임진남이 설명했다.
"표국의 일을 이제까지 너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너도 알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아버지가 맡고 있는 짐을 조금씩 맡기려 한다. 이후에는 표국의 일을 한가지라도 무심하게 넘겨보지 않도록 해라. 얘야 ! 우리 집안은 3대째 표국을 해오고 있다. 너의 증조부님의 명성과 우리 집안의 재주를 바탕으로 지금은 강남(江南)굴지의 대표국이 되었다. 강호에서 [복위표국]이라는 이름이 명성과 신용을 얻게끔 되었다. 강호의 일이라는 것은 이름과 실력이 2할이고, 나머지가 8할을 점하기 때문에 흑백도의 인물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야 한다. 생각해 보아라. 복위표국의 표차는 10개성을 다니는데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싸움이 난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다치겠느냐 ? 매번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을 10명 죽이면 우리도 8명은 다치는 법, 표사가 다친다면 그 가족은 우리 표국에서 돌봐주어야 하니 표국으로서도 재산의 손실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표국을 이끌어가려면 첫째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서 얼굴을 넓혀야 한다. 이 [교정(交情)] 두 글자를 너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임평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잘 알았습니다."
그전 같았으면 표국의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흥분해서 이것 저것 물으며 아버지와 쉬지않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서]와 [여관주]라는 몇 마디만 머리속에 맴돌았다.
임진남은 다시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아버지의 무예는 너의 증조부에 미치지 못한다. 또 너의 할아버지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표국을 경영하는 일은 내가 그분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복건에서 광동(廣東), 북으로 절강(浙江), 강소(江蘇) 네 성의 기업은 너의 증조부께서 이룩한 것이었다. 산동(山東),하북(河北), 양호(兩湖), 강서(江西)와 광서(廣西)의 여섯 성은 내가 이룩한 것이다. 그 비결을 말하자면 [다교붕우 소결원가(多交朋友少結寃家)]의 여덟 글자이다. 복위라는 이름에서 복(福)이 위에 위(威)가 아래에 있는 것은 복기(福氣)가 위풍(威風)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기(福氣)라는 것은 [다교붕우 소결원가(多交朋友少結寃家)]의 여덟 글자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위복(威福)]으로 고치면 위엄조차 복이 될지도 모르지 하하하 !" 임평지도 아버지를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도 근심이 깃들어 있었다.
임진남은 아들이 불안함을 감추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흥이 나서 다시 말을 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의하면 롱(瓏)을 얻으면 촉(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애비는 이미 악(鄂)을 얻었으니 촉(蜀)을 차지 하려고 한다. 우리 표국은 복건에서 서쪽으로 뻗어갔고, 강서, 호남에서 호북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었다. 왜 서천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말인가 ? 서천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진 곳이어서 부자들이 매우 많다. 우리가 서천에 진출할 수 있다면, 북으로 섬서(陝西)에 남으로 운귀(雲貴)에 이를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3배의 이익을 남길 수가 있다. 사천성은 지세가 와호장룡(臥虎藏龍)의 형세여서 기인이사들이 많다. 복위표국의 표차가 사천으로 가려면 청성파(靑城派)의 송풍관(松風觀)과 아미파(峨嵋派)의 금정사(金頂士)에서 통행을 허가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3년전부터 매년 봄, 가을로 예물을 준비하여 양파에 보내왔었다. 그러나 양파의 장문인들은 예물을 받지 않았다. 아미파의 금광상인(金光上人)은 우리 표국의 표두를 만나 사양의 뜻을 표하고 간단한 식사를 대접한 후, 예물을 뜯어보지도 않고 표두와 함께 돌려보냈다. 송풍관의 여관주는 더 심하게 대했었다. 예물을 가지고 간 표두에게 관주가 폐관중이니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 예물을 받지 않았다. 우리 표국의 표두는 여관주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송풍관 대문조차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보낸 표두에게 어떠한 수모나 굴욕을 당하더라도 참을 것을 분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냥 조용히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매우 자랑스러운 듯 몸을 일으켜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여관주가 예물을 받고 네 명의 제자를 답례차 보냈다고 한다." 임평지가 물었다.
"네 명이요 ? 두 명이 아니고요 ?"
임진남이 대답했다.
"그래. 네 명의 제자, 여관주가 네명의 제자를 보낸 것은 복위표국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 이미 강서, 호남, 호북의 분국에 청성파 네 명의 제자를 잘 대접하도록 전했다."
임평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 사천인들은 자신을 노자(老子)라 칭하고, 다른 사람은 귀아자(龜兒子)라 부르지 않나요 ?"
임진남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천의 천민들이 그런 말을 사용한다. 어디든지 입이 험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는 항상 욕설이 끊이지 않는 법이지. 우리 표국의 쟁자수들이 하는 말을 너도 들어보지 않았느냐 ? 왜 그것을 물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한 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청성파 제자가 오면 그들과 가깝게 지내거라. 명가 제자의 풍모를 배우고, 또 그들을 사귀어두면 차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니라."
임평지는 아버지의 말에 귀울이지 않고 줄곧 사람 죽인 일을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어머니에게 먼저 말하리라 마음먹고 다시 아버지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임진남 일가는 후원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처남의 생일이 유월초였다. 그래서 임진남은 생일예물에 관해 부인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낙양의 금도왕가(金刀王家)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몇사람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임진남이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너희들은 규칙도 모르느냐 ? 우리 가족이 담소하는 자리에 이렇게 분주하게 뛰어들다니."
세명의 쟁자수가 뛰어들어왔는데, 그중의 한 명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쳤다.
"총, 총표두..."
임진남이 답답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을 피우느냐 ?"
쟁자수 진칠이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백...백이가 죽었습니다."
임진남이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누가 죽었다고 ? 너희 놈들 또 서로 싸운 것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하렸다." 진칠이 하얗게 질려서 계속 더듬거렸다.
"아닙니다. 싸우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소인이 측간(厠間)에 갔었는데 측간옆 채소밭에서 백이를 보았습니다. 상처는 없는데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무슨일로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급환(急患)이 아닌가 합니다." 임진남이 숨을 한 번 몰아 쉬고 마음이 좀 가라앉자,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가보겠다."
임평지가 뒤따라갔다.
채소밭에 가보니 7,8명의 표사와 쟁자수가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총표두가 오는 것을 보고 길을 비켰다. 임진남이 백이의 시체를 보니 이미 옷이 벗겨져 있었는데 아무런 핏자국도 없었다. 옆에 서있는 축표두에게 물었다.
"아무런 흔적이 없느냐 ?"
축표두가 대답했다.
"제가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독살(毒殺)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떡이며 명했다.
"장방동(贓房董)선생에게 알려서 백이의 장례를 치루도록 해라. 그리고 백이의 가족에게 위로금으로 은자 100냥을 보내도록 해라. "
쟁자수 한 명이 병으로 죽은 것에 불과한데도 임진남의 마음에 불안감이 스쳐갔다대청으로 몸을 돌리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백이가 오늘 너와 사냥갔었지 ?"
임평지가 대답했다.
"갔었습니다. 돌아올 때까지는 멀쩡했었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흉복은 왕왕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사천의 상권을 얻기 위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건만, 실마리가 풀리지 않던 일이 오늘에야 풀려 여관주가 갑자기 맘을 바꿔 예물을 받아들이고 또 천리 먼곳까지 제자를 보냈으니 말이다." 임평지가 억지 호기를 부리며 말했다.
"아버지, 청성파가 비록 무림의 명문대파이지만 복위표국과 아버님의 명성도 강호에서 그에 못지않습니다. 우리가 예물을 바치고 그들이 우리에게 사람을 바치는 것은 주종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까 ?"
임진남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알겠느냐. 사천성의 아미 청성 양파는 이미 200년의 전통을 쌓았고 그 문하의 영웅들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비록 소림(少林), 무당(武當)에는 미치지 못하나, 숭산(嵩山),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의 오악검(五嶽劍)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너의 증조부이신 원도공(遠圖孔)께서 72로(路)의 벽사검법을 창안하시어 강호에 이름을 떨치셔서 무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너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원도공만 못했고, 나에 이르러서는 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 임씨 가문은 1인에게만 무예를 전수했기에 한 명의 사형제도 없다. 너와 나 둘이서 어떻게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 임평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주장했다.
"우리의 열개 성에 깔려 있는 표국으로부터 영웅 호한을 모두 모은다면 소림,무당,아미,청성과 오악검파와도 겨룰 만할 텐데요."
임진남이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곤 다시 얘기했다.
"얘야, 그런 어린아이같은 말은 이 애비하고나 이야기할 것이지, 밖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거라. 만약 그말을 누가 듣고 강호에 전해진다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면 무엇을 하겠느냐 ? 표국을 경영하기 위해 한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영웅입네, 호걸입네 추켜주면 우리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느냐 ?"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정표두가 또 죽었다."
임진남 부자는 동시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임평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은 그들의 복......'이라 말하다가 '수'라는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때 임진남은 이미 문쪽으로 나가 아들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고 쟁자수 진칠이 급히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총...총표두.큰일 났습니다. 정표두...정표두가 또 사천악귀에게 목숨을...목숨을 잃었습니다."
임진남의 안색이 변하며 급히 물었다.
"뭐! 사천악귀라고 ? 그게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
진칠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천악귀가, 사천악귀가 이처럼 악날하게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는 총표두의 노한 얼굴을 대하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임평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진칠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다. 임진남이 무겁게 말했다.
"정표두가 죽었단 말이지. 시체는 어디에있느냐 ? 왜 죽었느냐 ?" 이때 몇 명의 표사와 쟁자수가 분주히 대청안으로 들어왔다.
그중의 한 표사가 대답했다.
"정형은 마굿간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백이와 마찬가지로 몸에 아무런 혈혼도 없고 칠공(七孔)에서 피도 흐르지 않고 얼굴에 청자(靑紫)색의 부종(浮腫)도 없습니다. 아마...아마, 낮에 소표두를 따라 사냥을 갔다가 악귀가 붙어온 모양입니다." 임진남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나는 이때까지 귀신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가보겠다." 그는 대청을 나와 마굿간으로 걸어갔다. 정표두는 땅에 누워 있었고,두 손에는 말안장이 잡혀있었는데, 아마 말안장을 내리다가 갑자기 쓰러진 것 같았고 다른 사람과 싸운 흔적도 없었다.
이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임진남은 사람들에게 등불을 비추게하고는 손수 정표두의 옷을 헤쳐 앞뒤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전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고 반점조차도 없었다. 임진남은 평소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이만 급사했다면 몰라도 정표두도 똑같이 죽어버렸으니, 분명히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 만약 흑사병같은 전염병이라면 몸에 반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 그는 이 일이 낮에 그의 아들과 사냥갔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몸을 돌려 임평지에게 물었다.
"오늘 너를 따라 사냥갔던 사람 중 정표두와 백이외에 사표두와 진칠이 남았지 ?" 임평지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진남이 명했다.
"너희 둘은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쟁자수에게 사표두를 동상(東廂)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명했다.
세사람이 동상에 이르자, 임진남이 아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
임평지는 아버지에게 사냥에서 돌아오다 들린 술집에서 두명의사천인과 다투다가 엉겁결에 그를 비수로 찔러 죽이고 술집뒤의 채소밭에 묻게 되었고, 술집 주인에게돈을 주어 비밀을 지키도록 당부한 것 등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아들의 말을 다듣고 한참동안 침묵에 잠겨있다가 물었다.
"그 두 명이 자신들이 어떤 문파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 임평지가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남이 다시 물었다.
"그들의 행동과 말씨에 어떤 특이한 점은 없었느냐 ?" "뭐 별로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성이 여(余)씨 라는 것 밖에는......"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임진남이 다잡아 물었다.
"네가 죽인 사람의 성이 여씨라고 ?"
"예! 제가 듣기에는 다른 한 사람이 여형제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余)인지.
유(兪)인지 다른 지방 사투리여서 정확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흔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여관주가 보낸 사람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리야. 몸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임평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그 두 사람이 청성파의 사람인가요 ?"
"네가 [번천장]을 펼쳤을 때 상대가 어떻게 막더냐 ?" "그는 막아내지 못하고 가슴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임진남이 웃으면서 말했다.
"잘했다. 아주 잘했다."
방안의 분위기는 숙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임진남이 이렇게 웃으며 칭찬하자 임평지도 활짝 얼굴을 펴고 따라 웃으니 마음이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임진남이 또 물었다.
"네가 이 초식을 펼쳤을 때, 그가 어떻게 반격하더냐 ?" 그는 한편으로 말하면서, 한편으로 손짓을 해보였다.
"그때 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허초와 실초를 실어서 그의 가슴을 때린 것 같습니다."
임진남은 안색이 더욱 부드러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 초식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무예조차 막아내지 못했다면 그 유명한 청성파 여관주의 자제일 리가 없다. 잘했다." 이것은 자식의 무예를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사천에는 여(余)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아들에게 당할 정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면 청성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불안했던 마음에 위안을 얻게 되어 칭찬의 소리를 연발했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의 중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면서 또 물었다.
"그가 어떻게 너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냐 ?"
임평지는 어떻게 잡혔는가를 손짓으로 설명했다. 진칠이 겁없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백이가 소표두를 구하려고 창으로 찌르자 발로 창을 차버리고 연이어 사람을 찼습니다."
임진남이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발로 백이를 차서 쓰러뜨리고 또 창을 차서 날려버렸다구 ? 어떻게 차더냐 ?" "아마 이렇게 찬 것 같습니다."
진칠은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등뒤로 하고 오른발로 돌려차고 한 번 뛰어오른 다음 왼발로 돌려차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두 번 차는 모습이 마치 말이 뒷발로 사람을 차는 모습과 흡사해서 임평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보세요..."
임진남의 얼굴에는 놀라운 빛이 가득했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망연하게 서있었다.
잠시후 임진남이 무겁게 말했다.
"이렇게 발을 들어 두 번 차는 것은 청성파의 절기 [무영환퇴(無影幻腿)] 와 비슷하구나. 얘야 ! 도대체 발을 어떻게 움직이더냐 ?"
"그때 저는 목이 잡혀 있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사표두에게 물어보아야겠구나."
임진남은방문을 나서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무도 없느냐. 왜 사표두가 아직 오지 않느냐?"
두명의 쟁자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사표두가 아무곳에도 없다고 대답했다.
임진남은 대청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발재간은 아무래도 청성의 [무영환퇴] 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여관주의 자식이 아니면, 청성파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 도대체 그사람은 누구일까 ?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는 최표두와 계표두를 불렀다. 최표사와 계표사는 표국 일도 잘 처리할 뿐더러 오랜 세월동안 같이 일하면서 임진남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들 두사람은정표두가 횡사하고 사표두가 보이지 않자 이미 대청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임진남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 바로 대청안으로 들어왔다. 임진남이 명했다.
"내가 직접 가보아야겠다. 최 계표두, 진칠 그리고 너도 따라오너라." 즉시 다섯사람은 말을 몰아 성밖 북쪽으로 달려갔다. 임평지가 선두에서 말을 몰아 안내했다. 얼마가지 않아 다섯 필의 말은 주점에 도착했다. 주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임평지가 문을 두드리며불렀다.
"설노인, 설노인, 문 좀 열어요."

한참동안 문을 두드렸는데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최표두가 임진남을 바라보며 쌍수로 문을 칠 자세를 취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합 소리와 함께 문고리를 힘껏 내리쳤다. 쇳소리를 내면서 문고리가 끊어지자 문이 삐거덕거리며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최표두가 임평지의 옆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술청안에는 촛불만이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 탁자 위와 벽에 붙어있는 등에 불을 붙였다. 몇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방안의 이불과 가구들은 제자리에 있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노인이 도망친 것 같구나. 자신이 살인 사건과 연루될까 두려워 도망쳤구나." 채소밭으로 걸어와서 담에 세워져 있는 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칠, 시체를 파라."
진칠은 악귀를 믿기 때문에 두세 번 삽질을 하다 손발을 떨면서 주저앉아 버렸다.
계표두가 노해 소리쳤다.
"똥을 싸느냐? 너같은 놈이 어찌 우리 표국에 붙어 있었느냐?" 진칠에게 등불을 넘기고 자신이 삽을 받아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파지 않아, 시체의 옷이 드러났고, 조금 더 파니, 삽끝에 시체가 걸려나왔다. 진칠은 고개를 돌리고 시체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등불을 떨어뜨렸다. 채소밭 주위가 갑자기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임평지가 떨리는 소리로 중얼중얼했다.
"분명히 여기에 사천인을 묻었었는데. 그런데...그런데..." 임진남이 소리쳤다.
"빨리 등불을 켜라."
그는 계속 침착했으나 이때에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최표두가 급히 등불을 켜자, 임진남이 허리를 굽혀 시체를 한참동안 살펴보고 말했다.
"시체에 아무런 상처도 없다. 똑같은 수법으로 죽였다." 진칠이 용기를 내어 시체를 보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표두, 사표두다 !"
땅속에서 파낸 것은 사표두의 시체였고, 원래 묻었던 사천인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설노인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임진남이 등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부뚜막의 솥에서부터 탁자 밑까지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최 계표두와 임평지가 흩어져서 여기저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임평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 빨리 와 보세요."
임진남이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가니, 아들이 소녀의 방에서 녹색 수건을 들고 서있었다. 임평지가 수건을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 가난한 집의 소녀가 어떻게 이런 것을 갖고 있을 수 있을까요 ?" 임진남이 수건을 받아드니 담담한 향기가 코에 전해졌다. 그수건은 부드러우며 묵직한 게 고급명주가 분명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건의 가장자리를 녹색으로 둘렀고 한쪽 귀퉁이에 황색으로 산호(珊瑚)가지를 수놓았는데 수(繡)가 매우 정교했다.
임진남이 물었다.
"이 수건을 어디서 찾았느냐 ?"
"침대밑 구석에서 찾았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물건을 챙길 때 빠뜨린 모양입니다."
임진남이 등불을 들고 몸을 구부려 침대밑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다 말했다.
"네가 그 소녀의 얼굴이 추하고 의복의 천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옷매무새는 무척 정결하지 않았느냐 ?"
"그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옷이 더러웠다면 술을 따를 때 느꼈을 겁니다."
임진남이 최표두에게 물었다.
"최표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 생각에는 사표두, 정표두와 백이의 죽음은 이 노인과 소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계표두가 말을 이었다.
"두명의 사천인과 그들이 한패인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그들이 시체를 옮겼을 턱이 없지 않습니까 ?"
임평지가 부정했다.
"그 여(余)씨라는 놈이 그 소녀를 희롱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와 다투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패일 리가 없습니다."
최표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표두께서는 강호의 인심이 얼마나 험한지 모르십니다. 강호에서는 함정을 파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계표두가 물었다.
"총표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 술집 주인과 소녀는 분명히 우리를 노리고 여기에 왔다. 그러나 그들과 사천인이 한패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임평지가 초조하게 물었다.
"아버지 송풍관 여관주가 네 명을 보냈다고 했는데,그들이 그 네 명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임진남은 무엇이 생각난 듯이 한참동안 말을 않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복위표국은 청성파에 대해 예의를 다했고 어디에서도 그들과 다툰 일이 없는데 그들이 우리를 괴롭힐 리 없지 않느냐 ?"
네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묵묵히 서있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임진남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표두의 시신을 먼저 방으로 옮긴 후 이야기하자. 표국에 돌아간 후 이 일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라. 이 일이 관부에 알려지면 일이 커질 것이다. 비록 임씨 가문이 겸손하고, 주위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를 그냥 묵과할 수는 없다."
계표두가 큰소리로 말했다.
"총표두, 우리도 병사를 모아서 전력으로 싸운다면 복위표국의 위명에 부끄럽지 않게 대항할수 있을 겁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은 성안 표국으로 말을 몰았다. 멀리서 보니 대문밖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임진남은 마음이 급해서 말을 재촉했다. 모여 있던 몇 사람이 소리쳤다.
"총표두께서 돌아오셨다 !"
임진남이 말에서 내리니, 그의 처 왕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보세요 ! 누군가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어요."
두 개의 깃대와 비단 깃발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표국 문앞에 있던 큰 깃발이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부러뜨려 땅위에 버려놓았던 것이다. 깃대가 부러진 면이 매우 매끈한 것으로 보아, 보도로 단칼에 베어버린 것 같았다.
왕부인은 다른 사람의 허리에서 칼을 빼어들고 "얏 !"하고 앙칼진 기합소리와 함께 비단 깃발을 깃대를 따라 끊어들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임진남이 명령했다.
"최표두, 저 두 토막난 깃대를 토막 토막 잘라버려라. 흥, 福威標局을 짓밟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최표두가 대답했다.
"예 ! 알았습니다."
계표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놈인지 씨를 말려 버리겠다. 총표두께서 안계신 틈을 타서이런 무례한 짓을 하다니."
임진남이 손짓으로 아들을 불러 함께 표국안으로 들어갔다.
부자(父子)가 동상(東廂)의 방으로 들어오니, 왕부인이 두 개의 깃발을 탁자위에 반듯하게 펴놓고 있었다. 하나의 깃발은 황색사자의 눈이 파져 구멍이 나있었고, 또 하나는 [福威標局] 네 글자중 [威]자가 없어져 있었다. 임진남은 수양을 오래 쌓은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니, 이화팔선탁(梨花八仙卓)의 다리가 와장창 부러졌다.
임평지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따.
"아버지, 모두......이 모든 것이 제가 못난 탓입니다. 소자가 못났기 때문에 이런일이 벌어졌습니다."
임진남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임씨 집안 사람이 그런 놈을 죽였기로서니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 그런 놈이 내손에 걸렸다면 요절을 냈을 것이다."
왕부인이 물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말씀인가요 ?"
임진남이 대답했다.
"평지야 ! 어머니께 말씀드려라."
임평지가 오늘 어쩌다 사천인을 죽이게 되었으며, 사표두가 술집에 죽어 있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설명했다. 백이와 정표두가 급사한 것은이미 왕부인도 알고 있었다. 사표두가 또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왕부인은 탁자를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
"여보, 우리 북위표국이 어찌 이처럼 수모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 사람들을 모아 사천성 청성파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겠습니다. 친정 아버지와 형제들도 모두 불러야겠습니다."
왕부인은 어려서부터 성미가 불과 같아서 처녀때도 종종 칼을 휘둘러 사람을 상하게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 금도무적(金刀無敵) 왕원패(王元覇)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어서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아들이 이처럼 장성했어도 불같은 성미는 여전했다. 임진남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원흉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청성파인지도 확실하지 않소. 내 생각에는 그들이 깃대만을 부러뜨렸을 리 없고, 두 표사를 죽인 것도 같은 흉수일 것이오. 그러니 이일은......"
왕부인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임진남이 아들을 바라보자, 왕부인은 남편의 속마음을 읽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도 폈다.
"이 일은 저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대장부로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소자...두렵지 않습니다."
임평지는 입으로는 두렵지 않다고 했으나 목소리는 떨렸고 속마음은 겁에 질려 있었다.
왕부인이 아들을 달랬다.
"흥, 누가 너에게 손끝이라도 댈려면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걸. 북위표국이 세워진지 3대째인데 너는 그 명성이 그저 얻어진 것인줄 아느냐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임진남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요."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풀어서 성 내외와 표국안을 조사할 터이니, 당신은 평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시오.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예, 잘 알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적들이 아들곁에 한 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적들은 기회를 노리다 임평지가 표국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죽이려 할 것이다.

임진남은 대청으로 나와 표사들을 불러모아 각각 조를 나누어 호위와 순찰을 엄중히 하도록 명했다. 여러 표사들도 복위표국의 기(旗)가 부러지고, 표사들이 죽는 상황에 접하자 이것을 그들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여겨, 이미 무장을 완벽히 하고 있다가 총표두의 명이 떨어지자 즉시 각자 맡은 위치로 갔다.
임진남은 표국의 식솔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뭉치는 것을 보고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내당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말했다.
"평지야 ! 어머니가 요며칠 몸이 불편했는데 오늘 이런 일이 생겼으니, 네가 며칠동안 우리 방밖의 침상에서 자면서 어머니를 보호하도록 해라." 왕부인이 웃으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남편의 뜻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임진남의 속뜻은 부부가 함께 아들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이 귀하게 키운 아들은 자존심이 강하여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라고 말하면 도리어 밖으로 나가 위험을 자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요사이 손발이 쑤신다고 하는구나. 나는 전표국을 관장해야 하니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가 없구나. 만약 적이 내당으로 들어온다면 누가 어머니를 지키겠느냐."
"제가 어머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요."
그날 저녁 임평지는 부모님 곁에서 잠을 잤다. 임진남 부부는 방문을 열어놓고 무기를 베개옆에 두고 누워 있었다. 옷과 신발도 벗지않은 채 얇은 이불만을 덮고 누워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날 저녁은 아무일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하인이 창밖에서 작은 소리로 임평지를 불렀다.
"소표두, 소표두 !"
임평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다 새벽녘에 잠이 들어 아직 잠이 깨지 않았다. 임진남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
밖에서 하인이 대답했다.
"소표두......소표두의 말이 죽었습니다."
그 백마는 임평지가 매우 아끼던 말이었다. 임평지는 몽롱한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황급히 뛰어나갔다. 임진남도 아침부터 기이한 일이 벌여지자 아들과 함께 급히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마굿간 바닥에 백마가 드러누워 있었는데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역시 아무런 상처없이 죽은 것이다.
임진남이 물었다.
"밤에 말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느냐 ? 아니면 다른 소리라도 ?" 그 마부가 대답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달랬다.
"얘야 ! 상심하지 말아라 이 애비가 더 좋은 말을 사주마." 임평지는 죽은 말을 쓰다듬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쟁자수 진칠이 뛰어와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쳤다.
"총...총표두님, 큰일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 표두들이 모두 악귀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임진남과 임평지가 동시에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라구 ?"
진칠은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몇 마디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죽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임평지가 노해서 물었다.
"누가, 무엇이 모두 죽었단 말이냐 ?"
손으로 진칠의 가슴을 잡고 흔들면서 다그쳤다.
"소...소표두......죽었습니다."
임진남에게 '소표두가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처럼 재수없는 소리를 들으니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나빴으나 그것을 꾸짖으면 기분이 더 착찹해질 것 같았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표두는 ? 장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면서."
"이놈의 악귀가 이처럼 신출귀몰하니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임진남이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두 명의 표사와 세 명의 쟁자수가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우두머리인 듯한 표사가 말했다.
"총표두, 순찰나갔던 사람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임진남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사람이 죽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에 순찰나간 표사와 쟁자수가 모두 23명이나 되는데 모두 죽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급히 되물었다.
"죽은 사람이 누구누구냐 ? 연락을 못받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니냐?"
그 표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얼이 빠진 듯이 말했다.
"이미 17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임진남과 임평지가 깜짝 놀라 똑같이 소리쳤다.
"17구의 시체라구."
그 표사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워섬겼다.
"그렇습니다. 부(富)표두, 전(錢)표두, 오(吳)표두의 시체와 함께 모두 17구의 시체가 대청에 있습니다."
임진남은 더이상 말을 하지않고 빠른 걸음으로 대청으로 갔다.
대청에는 탁자와 의자가 치워져 있고 17구의 시체가 엇갈리게 놓여 있었다.
임진남은 일생동안 무수한 풍파를 겪었지만 이번같은 경우는 일찌기 없었다.
두 손이 쉴새없이 떨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외쳤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목이 쉬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대청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표두는 사람됨이 매우 충실했었는데 악귀에게 목숨을 잃을 줄이야." 이웃 사람 다섯 명이 시체 한구를 떠메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명이 임진남에게 말했다.
"소인이 오늘 아침 가게문을 열다가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가보았더니 고표두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체를 가지고 왔습니다." 임진남이 예의를 갖추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수고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쟁자수에게 명했다.
"저분들에게 수고비를 좀 드리도록 하여라."
이웃 사람들은 대청에 시체가 가득한 것을 보고 질겁해서 곧 가버렸다. 잠시 후 또 어떤 사람이 3명의 표사의 시체를 보내왔다. 임진남이 시체를 헤아려 보니 어제 저녁 순찰 나간 사람이 23명인데 이미 22명이 시체가 되었다. 아직 한 명이 남았지만 이제는 모두 죽었다는 귀신이 곡을 할 일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동상(東廂)으로 돌아와 뜨거운 차를 마셨으나 마음은 더욱 산란해지고 혼란스러웠다. 대문을 나서니 이미 두 개의 깃대가 부러져 기분이 더욱 언짢았다. 지금까지 종적을 알 수 없는 흉수가 28명을 감쪽 같이죽였는데 아직도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는 고개를 돌려 {福威標局}이라 적힌 현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복위표국이 강호에 명성을 얻은 지 수십 년인데 오늘 나의 대에서 무너질 줄 누가 알았으랴 ?)
갑자기 거리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필의 말이 천천히 걸어왔는데 등에는 사람이 가로로 얹혀 늘어져 있었다.
임진남이 나아가 보니 저표사(楮標師)의 시신이었다.
임진남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저표사의 시체를 안고 대청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현제, 너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조금만 빨리 살아와서 원수의 정체를 나에게 알려주지 못한 것이다." 저표두는 표국내에 가족도 피붙이도 없는 홀몸이었다. 임진남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그와의 정이 각별했기에 슬픔을 참지못하고 오열하며 걸어들어왔다.
왕부인은 대청 입구에서 가문의 금도(金刀)를 오른손에 잡고 고개를 젖히며 대들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람 백정놈아 ! 숨어서 사람을 해치지 말고 네가 남자라면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
임진남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 보았다.
"부인 무슨 낌새라도 있었소 ? 누구에게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오 ?" 그는 저표두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왕부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어요. 흉수놈은 아마 우리 가문의 벽사검법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꼬리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아요." 그녀는 금도를 잡고 허공에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나의 금도가 두려우냐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방 모서리 위에서 음침한 냉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작은 물체가 날아와 쨍하고 그녀의 금도를 때렸다. 왕부인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저려와 더이상 도를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을 떠난 금도가 그대로 천정쪽을 향해 날아갔다.
이때 임진남이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뽑으며 그쪽 방위로 뛰어오르며 {소탕군마(掃蕩群摩)} 초식을 빠르게 펼쳐갔다. 암기가 날아온 곳으로 한줄기 검화(劍花) 가 눈부시게 뿌려졌다. 그는 지금까지 흉수의 흔적조차 보지못해 매우 답답하고 심기가 사나웠으므로 이 일초에 필생의 공력을 다해 찔렀기에 검화가 뻗어나가는 사방 몇 자의 범위에서 검을 피할 여지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사나운 공격은 허공만을 갈랐고 어디에도 적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동상의 지붕까지 뛰어올라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흉수의 종적조차 볼 수 없었다.
왕부인과 임평지도 무기를 집어들고 위로 치솟아 올라왔다. 왕부인이 앙칼지게 외쳤다.
"어떤 놈인지 꼬리를 감추지 말고 나오너라. 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그리고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망을 갔나요 ?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
임진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연히 떠들석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시오." 세 사람은 지붕위에서 뛰어내렸다. 임진남이 낮은 소리로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금도를 때린 암기가 무엇이었소 ?"
왕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무슨 암기가 그렇게 강하고 세찬지 손아귀가 찢어질 뻔했어요." 세 사람은 주변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계화수(桂花樹)옆에 떨어져 있는 매우 작은 벽돌조각을 찾아냈다. 상대가 이렇게 작은 벽돌 조각을 던져 그 정도의 위력을 냈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왕부인은 겉으로는 승복하지 않았지만 그 벽돌 조각을 보는 순간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한참동안 망연자실해서 서있다가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아들도 방으로 따라 들어오자 문을 닫아 걸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이토록 신출귀몰하고 그 무공이 이렇게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우리의 적수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 장차 이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임진남이 마음을 다지듯이 무겁게 말을 했다.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야지. 무림인이라면 이러한 어려움을 맞았을 때 서로 도우는 것이 의기이고 예의이니까. 그들은 곧장 달려와 우리와 힘을 합쳐줄 거요." "우리와 우의가 두터운 사람들은 적지 않지만 그이들의 무예가 우리 부부보다 나은 사람이 별로 없지 않아요 ? 그이들이 달려온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친구들을 불러 의논하다 보면 묘책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오."
"누구누구를 청하시려구요 ?"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부터 불러야지, 우선 항주(抗州), 남창(南昌), 광주(廣州) 세 곳의 표국 무사들을 부르고, 민, 절(浙), 오(奧), 감 네 성의 무림동도들을 청해야겠소."
왕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처럼 급하게 도움을 청하다가 소문이 나면, 복위표국의 위신이 땅에 처박힐 텐데요."
임진남이 갑자기 물었다.
"부인 올해 몇 살이오 ?"
왕부인이 의아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나이는 왜 물으세요 ? 호랑이띠잖아요. 제 나이도 모르세요 ?"임진남이 설명했다.
"초청장을 보낼 때 당신의 40세 생일초대라고 하면 어떻겠소 ? 생일 초대라 한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친구들이 도착한 후 비밀리에 이야기한다면, 표국의 명예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왕부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다치고 제 생일선물은 뭘 주실 거에요 ?" "우리 내년에는 아기를 하나 낳읍시다."
왕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이 양반이 무슨 망녕이 드셨나봐. 지금 이 혼란중에 무슨 심정으로 그런 농담을 하셔요."
임진남은 호방하게 웃으며 서재로 들어가서 친구들에게 보낼 초청장을 쓰기 시작했다. 두려워하는 부인을 위로하려고 농담을 했지만 혼자 있게 되자 그의 마음도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먼곳의 물로 근처의 불을 끄려는 격이로구나. 오늘 저녁 표국에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친구들이 당도했을 때 세상에 복위표국이라는 현판조각이 남아 있을런 지 모르겠구나.)
그가 서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하인 두명이 공포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었다.
"초....총표두, 큰일 났습니다."
임진남이 방문을 열고 물었다.
"또 무슨일이냐 ?"
"관을 주문하러 갔던 임복(林福)이 길 모퉁이에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임진남은 시체를 거두어 오라고 명하고는 혼자 생각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그것도 길거리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다니 보통 담이 큰 녀석이 아니구나.)
하인들이 대답만 하고 길거리로 가려 하지 않고 머뭇거리기에 임진남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 ?"
"총표두님께서 좀 가보셔야겠습니다......"
임진남이 기이하게 여겨 하인들을 꾸짖으며 대문으로 나갔다.
대문앞에 세 명의 표사와 다섯 명의 쟁자수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진남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까닭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대문밖 청석판(靑石板)위에 검붉은 피로 여섯 자의 글자가 또렷하게 마치 저주받은 악령의 붉은 혓줄기같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出門十步者死...}
---열 발자국 이상 문밖으로 나오면 죽는다...---

문에서 약 10보 떨어진 곳에 무시무시한 혈선(血線)이 주욱 그어져 있었다.
임진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느냐 ? 누가 제일 먼저 보았느냐 ?" 한 표사가 대답했다.
"조금 전 임복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모두 거기로 달려가고 문앞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구차스럽게 사느니 죽기를 원하니 과연 죽는지 안죽는지 보아라." 그는 큰걸음으로 대문밖으로 나갔다. 표사 두명이 동시에 외쳤다.
"총표두 !"
임진남은 손을 저으면서 걸어나가 그 혈선 있는 곳을 지났다가 되돌아와 발로 혈선을 문질러 지워버리고 대문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세 분 형제들 관을 좀 사오시오. 그리고 서성(西城)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반(班)화상에게 며칠간 와서 영혼을 달래줄 것을 부탁하고 오시오." 세 명의 표사는 총표두가 혈선 너머까지 갔다 왔는데도 무사한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무기를 고쳐 잡고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섰다. 임진남은 그들이 혈선을 지나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것까지 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집사에게 명했다.
"황선생, 초청장을 보내시오. 집사람의 생일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고 알리시오." 황선생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생일이 언제입니까 ?"
돌연 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임진남이 고개를 돌려보니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뛰어들어 방바닥에 쓰러졌다. 임진남이 숨을 죽이며 다가서 보니, 관을 사러갔던 세 명의 표사중 한 사람인 적(狄)표두가 쓰러져 있었다. 임진남이 그를 일으켜 안고 급히 물었다.
"적형제, 무슨 일이오 ? 어떻게 된 거요 ?"
적표두가 힘겹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저만 간신히 도망쳐 왔습니다." 임진남이 다그쳤다.
"도대체 어떤 놈에게 당했소 ? 흉수가 누구요 ?"
"누군지 알 수가......알 수가 없었습니다."
적표두는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표국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 왕부인과 임평지가 내당에서 나오니 온통 {出門十步者死} 라는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임진남이 나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명 표사의 시신을 가지고 오겠다."
황선생이 임진남을 만류했다.
"총...총표두 가시면 안됩니다. 누가 가서 시체를 가져올 사람 없느냐. 은자 30냥을 내리겠다."
그가 세 번을 소리쳤으나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왕부인이 갑자기 외쳤다.
"아니, 평지야 ! 평지야 !"
아들을 부르는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울려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소리쳤다.
"소표두, 소표두 !"
그때 문밖에서 임평지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있어요. 황선생. 은자 30냥을 주시오."
사람들이 기뻐하며 대문으로 몰려가 보니, 임평지가 양 어깨에 시체를 메고 길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두 명 표사의 시체였다. 임진남과 왕부인이 손에 검과 도를 움켜잡고 혈선 너머까지 나아가 아들을 호위해서 돌아왔다.
여러 표사와 쟁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소표두, 우리 표국의 소년영웅, 과연 용감하십니다." 임진남과 왕부인의 기분도 뿌듯했다.
그러나 왕부인이 애타는 목소리로 아들을 원망했다.
"얘야. 왜 이리 속을 썩이느냐 ? 두 명 표사가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었지 않느냐 !" 임평지는 웃으면서, 그러나 심정은 괴로운 듯 말했다.
"소자가 잠시 혈기를 참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몸을아낀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갑자기 후당(後堂)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사부(華師傅)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임진남이 급하게 몸을 돌려 되물었다.
"무엇이 ?"

표국의 관사(管事) 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보고했다.
"총표두, 화사부가 후문으로 채소를 사러 가다가 10보밖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후문에도...후문에도 그 혈자(血字)가 쓰여 있습니다." 화사부는 표국의 요리사였는데 요리 솜씨가 복주에서 제일이어서 복위표국의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임진남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화사부는 일개 요리사에 불과한데, 강호에서 표국을 칠 때 거부(車夫), 교부(轎夫)등은 죽이지 않는 것이 상례이거늘, 이렇게 적이 악랄하니 우리 표국을 완전히 멸문 시킬 작정이구나.)
그는 여러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해라. 적은 우리의 헛점을 노리고 있다. 방금 우리가 10보밖까지 갔다와도 아무일이 없지 않았느냐 ?"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문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임진남과 왕부인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임진남은 표사들에게 표국 주위를 경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가 순찰을 돌면서 보니 10여 명의 표사가 대청에 모여 있었고, 아무도 밖에 나가 경비하지 않고 있었다. 표사들은 총표두를 보고 쑥스러운 듯이 몸을 일으켰지만, 아무도 대문밖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았다. 임진남 자신도 적이 너무 신비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이미 여러명이 죽었는데도 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달래주기 위해 여러 표사들과 함께 대청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마음이 산란하여 아무말도 않고 술만 마셔댔다. 오래지 않아 이미 몇 사람이 술에 골아떨어졌다.
다음날 오후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몇 명의 표사가 표국을 나가 도망가 버렸다. 임진남이 조사해보니 다섯 명의 표사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쳤던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큰 환란(患亂)이 닥쳤는데, 내가 무능하여 대책을 세우지 못하니 모두들 도망가는 구나."
남아있는 표사들 중에는 도망간 표사들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말도 않고 탄식만 연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 무렵에 다섯 필의 말이 다섯 구의 시체를 싣고 돌아왔다.
이 다섯 사람은 위험한 곳을 피해 도망가려다 도리어 먼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임평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장검을 빼어들고 혈선 삼보(三步)앞까지 나아가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대장부는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법이다. 여씨 성의 사천인은 내가 죽인 것이니 나에게 복수해라. 그대들은 무고한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는데, 그것은 영웅호걸이 할 일이 아니다. 어서 나오너라."
그는 더욱 큰소리를 지르며 앞가슴을 풀어헤쳐 가슴을 탕탕치며 미친 듯이 외쳤다.
"장부는 한번 목숨을 걸었으면 두 말을 하지않는다.나를 죽여라.이 못된 놈아!" 그가 두 눈을 붉히고 가슴을 치며 소리치는 모습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리서 보고 아무도 표국 근처로 오지 않았다.
임진남 부부는 자식의 외침소리를 듣고 급히 문밖으로 달려나가 임평지의 손을 잡아끌며 대문안으로 돌아왔다. 임평지는 울먹거리다가 침실로 들어와서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렸다. 임진남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너는 과연 우리 林氏 가문의 아들답구나. 그러나 적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쩌겠느냐.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 푹 자거라."
임평지는 한참동안 울다가 잠이 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임진남과 왕부인의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몇 명의 표사들이 후원에 땅을 파서 혈선을 넘어간다면 살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쑤근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표국에 남아 가슴을 조이며 죽을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찍 생명을 걸고 탈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왕부인이 처연하게 탄식했다.
"땅굴을 파는 거야 그들 자유지만. 두려운 것은....." 임진남 부자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말을 타고 도망가다 죽은 다섯 사람처럼 그들도 미리 생명을 잃을까봐 두렵다는 뜻이었다. 임진남이 착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땅굴을 파서 살 수만 있다면, 모두 다 가더라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을 텐데...." 그날 저녁 세 사람은 일찍 잠을 청했다. 표국내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건질 방도만을 궁리할 뿐, 표국을 지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경으로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임평지는 누가 조심스레 어깨를 치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 베개 밑의 장검을 잡으려 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지야, 아버지께서 나가신 지 오래되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가 찾아 나섰다."
임평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데요 ?"
"나도 모르겠구나."
두 사람이 방을 나오니 대청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표사들이 모여앉아 노름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가슴을 조리며 몇날 밤을 지새우자 이제는 지치고 지친 상태가 되어서 생사문제도 개의치 않고 노름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자(母子)는 여러 곳을 살폈으나 임진남을 찾지 못하자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표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던 임평지가 왼쪽에서 칼날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를 듣고 가보니 병기고(兵機庫) 창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창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아버님, 거기 계셨군요."
임진남은 허리를 꾸부린 채, 벽을 향해 서있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임평지는 하얗게 질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떨려 얼굴은 창백해지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왕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고, 가로놓인 긴의자에 사람의 시체가 발가벗은 채 누워 있었다. 그 시체는 가슴과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곽(郭)표두였다. 그는 네 명의 표사와 함께 도망치다 죽음을 당했었다. 임평지도 병기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임진남은 시체의 가슴속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
"아무런 외상도 없이 심장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버리다니, 과연...과연..." 왕부인이 말을 이었다.
"과연 청성파의 {최심장(催心掌)}이로군요 !"
임진남은 고개만 끄덕일 뿐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임평지는 그제서야 부친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임진남은 사인(死因)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을 부검했던 것이다.
임진남은 시체를 기름종이에 싸서 벽모서리에 치워두고 손을 깨끗이 씻고 부인과 아들과 함께 침실로 돌아와 말했다.
"상대는 분명히 청성파의 고수다. 부인, 장차 이일을 어쩌면 좋겠소?" 임평지가 성질을 부리며 벌컥 소리질렀다.
"이일은 저로 인해 생긴으니 제가 그놈과 싸우겠습니다. 제가 상대가 되지못해 죽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임진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의 일장에 심장이 여덟조각 났는데도 겉으로 봐서 몸에는 하나의 상처도없었다. 이와 같은 솜씨라면 청성파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틀림이없다. 그가 너를 죽이려고 마음 먹었다면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 세 사람을 쉽게 죽이려 하지도 않을 것 같다." 임평지가 물었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가요 ?"
"그놈들은 우리를 지금 놀리고 있다. 놈들은 우리가 공포에 질려 스스로 자결을 할 때까지 서서히 조여올 것 같다."
임평지가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따.
"그놈들이 아버지의 벽사검법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암중(暗中)에서 사람을 해치겠습니까 ?" 임진남이 한숨을 쉬며 아들을 타일렀다.
"평지야, 나의 벽사검법은 조무라기 흑도의 인물들을 능히 상대할 수는 있다.그러나 최심장을 때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심장을 조각낼 정도의 고수라면 아예 상대가 되지를 못한다. 나...나는 이제까지 패배를 자인해본 적이 없으나 곽표두의 심장을 보니 이 일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어서 인정하지않을 수가 없다." 임평지는 처음으로 대하는 부친의 허약한 모습을 보고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왕부인이 제안했다.
"적이 이처럼 강하니 우리 잠시 피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후일을 기약하도록 해요."
임진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그러하오."
"오늘밤을 기하여 우리 낙양으로 피합시다. 적의 내력을 알고 있으니 당신은 정진하여 10년 안에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소. 장인 어른은 강호에 친구가 많으시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어서 행장을 차려 몸을 피하도록 합시다."
임평지가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버리면 표국에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가 ?" 임진남이 대답했다.
"적들은 그들과 애초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우리가가버리면 그들은 무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평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듯 하다. 적이 표국의 여러 사람을 죽였지만, 실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으니, 내가 여기서 도망가 버리면 표사들과 쟁자수들은아무런 화도 입지 않을 거야.)
그는 곧 자기방으로 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반을 온통 흔들어 놓았고, 많은 귀한 것들을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는 아끼던 물건들을 두 개의 큰 상자속에 넣어 들고 부모님이 기다리는 방으로 갔다.
왕부인은 큰 상자를 들고오는 아들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우리는 도망가는 거지 이사가는 게 아니란다.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가져 가려고 하느냐 ?"
임진남이 탄식하면서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무학세가(武學世家)임에도 자식을 너무 곱게만 키웠어.저런 철부지 도련님이 오늘처럼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혼자 헤쳐나갈 수 있을 까 ?" 갑자기 애처로운 생각이 솟아나 아들을 타일렀다.
"외가집에는 없는 게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져갈 필요가 없어. 약간의 금과 보석만 가지고 가자. 강서, 호남, 호북에는 모두 우리 표국의 분국이 있으니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짐이 간편할 수록 움직이기가 수월한 법이다." 왕부인이 말했다.
"말을 타고 대문을 뚫고 나갈까요. 아니면 뒷문으로 몰래 빠져 나갈까요 ?" 임진남은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다 비로서 눈을 떴다.
"평아, 가서 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라. 짐을 꾸려 날이 밝거든 모두 떠나라고. 그리고 집사에게 여비를 나누어 주도록 시켜라.모두 뒷날을 기약하자고 해라." 임평지는 "예!"하고 대답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수가 없었다. 왕부인이 물었다.
"모두 떠나버리면 이 표국은 누가 관리하지요 ?"
"표국을 지킬 필요는 없소. 역신이 나와 떼죽음을 하는 흉가에 누가 들어와 죽으려하겠소. 우리 세 사람이 떠나버리면 어차피 남아있을 사람이 있겠소 ?" 임평지가 나가서 부친의 말을 전하니 일시에 표국이 소란했다.
임진남은 아들이 나가자 말을 시작했다.
"부인, 평지와 나는 쟁자수의 옷으로 갈아입고 부인은 하녀처럼 차린 다음, 날이 밝는 대로, 백여 명의 사람 속에 끼여서 빠져나간다면 적이 아무리 무공이 높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거요."
"정말 그렇겠군요."
왕부인은 곧 남루한 쟁자수의 옷 두벌을 가지고 와서 아들이 돌아오자 부자(父子)의 옷을 갈아입게 하고 자신도 푸른색 치마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남색 수건을 두르니 피부가 하얀 것 외에는 영락없는 하녀가 되었다. 임평지는 냄새나는 옷이 입기 싫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새벽녘이 되자 임진남은 대문을 열게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나의 운수가 좋지 않아 표국내에 역귀(疫鬼)가 설치니 모두 피난가도록 하여라.
만약 우리 표국에 계속 있기를 원허는 사람은 항주부, 남창부에 가서 절강분국, 강서분국의 유표두, 역표두를 찾도록 해라. 그럼 모두 떠나거라." 일백여 사람이 말에 올라 대문을 향해 일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함성을 지르며 10여 필의 말이 혈선을 넘어 달려갔다. 사람들은 이제 혈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표국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려는 생각뿐이었다. 말발굽소리도 요란하게 모두들 북문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옆사람이 북쪽으로 가니 그저 몰려갈 뿐이었다.

임진남은 길모퉁이에서 손을 들어 자식과 부인을 멈추게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북쪽으로 갔으니 우리는 남쪽으로 가자."
"낙양으로 가야하는데, 어찌 남쪽으로 갑니까 ?"
"적들은 우리가 반드시 북쪽으로 가리라 예상하고 북문밖에서 지키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남쪽으로 가서 빙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향하면 그들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임평지가 결연하게 말했다.
"저는 북쪽으로 가겠습니다. 그 흉수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또 그들을 죽이고 제가살기 위해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왕부인이 아들을 달랬다.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무예로 어찌 그들의 상대가 되겠느냐 ?"
임평지가 울컥 화를 내면서 말했다.
"기껏해야 곽표두꼴밖에 더 되겠습니까. 심장이 갈라지면 갈라지는 거지요." 임진남이 안색이 파랗게 되어 탄식하며 아들을 눌렀다.
"우리 임씨 3대가 너와같이 용감했다면 복위표국이 오늘 이런 비참한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
임평지는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부모를 따라 남쪽으로 갔다.
성을 지나, 서남쪽으로 구부러져 민강(閔江)을 지나서 남서(南嶼)에 당도했다.
쉬지않고 반나절을 달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길옆의 작은 음식점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임진남은 주인에게 식사를 주문하면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서둘렀다. 그러나 주인이 간 지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임진남이 재촉했다.
"주인장, 음식을 빨리 주시오."
두 번을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왕부인도 "주인장, 주인장..."하고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왕부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도를 빼들고 후당(後堂)으로 뛰어갔다. 음식점 주인은 땅에 쓰러져 있었고, 문턱위에 한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술집 주인의 아내였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입술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때, 임진남 부자도 장검을 빼어들고, 음식점 주위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 음식점은 외진 곳에 있어서, 근처에 소나무숲이 있을 뿐 민가는 없었다. 세 사람이 집앞에서 사방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임진남이 검신(劍身)을 눕히고, 소나무숲을 향해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청성파의 친구, 나 임모(林某)가 여기 있으니, 어서 모습을 나타내시오." 몇 번을 외쳤으나 메아리만 울려 되돌아올 뿐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가까이에 적이 숨어있는 것은 분명한데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임평지도 큰소리로 외쳤다.
"임평지가 여기 있으니 나와 죽여보아라. 이꼬리를 감추는 비겁자야. 겁이 나서 못 나오는 거냐 ! 무엇때문에 애꿔은 사람들만 죽이는 거냐 ? 나를 죽여라." 갑자기 송림으로부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평지는 적의 흔적이 보이자 자세히 보지도 않고 장검으로 직도황룡(直島黃龍)을 펼쳐 몸통을 베어 갔다. 적은 몸을 옆으로 비끼면서 가볍게 피했다. 임평지는 힘을 왼손으로 일장을 날리고 이어서 검을 돌려 찔렀다.
임진남과 왕부인도 도검을 빼어 겨누고 있었으나, 아들이 여러 초를 강하게 펼쳐가며 강적을 만났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날카롭게 공격하자, 뒤로 물러나 적을 살폈다. 이제야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청삼(靑衫)을 입었고, 허리에 장검을 찬 긴 얼굴이었는데, 나이는 23,4세쯤 되어 보였다. 침착한 얼굴에서는 불굴의 투혼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울분을 참아왔던 임평지는 벽사검법을 펼치며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동귀어진의 검법이었다. 적은 행운유수처럼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임평지의 20여 초 결사적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비로소 그 사람은 냉소하며 말했다.
"벽사검법이 고작 그런 정도냐."
그가 가볍게 일지를 튕기자 쨍소리와 함께 임평지의 칼이 날아갔다. 임평지는 팔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일격을 맞대고 나서 아들을 보호했다. 임진남이 말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어떻게 되시오. 귀하는 청성파의 제자요 ?"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
"이름뿐인 복위표국을 믿고 감히 나의 이름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 그렇소, 나는 청성파의 제자요."
임진남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송풍관 여관주에게 예의를 다해 왔소. 올해는 여관주가 친선의 뜻으로 제자 네 명을 보낸다고 들었소. 우리가 무슨 결례를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소."
그 청년이 울분을 폭발시키듯이 앙천대소했다.
"그렇소, 사부께서 네 명의 제자를 복주에 보냈소이다. 내가 그중의 한 사람이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오 ?"
그 청년은 한동안 말없이 세 사람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뗐다.
"나의 성은 간(干)이요. 간인호(干人豪)라 하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사수, 여관주의 4대제자중의 한 명이니 최심장이 그토록 고명했구료.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솜씨였소이다. 젊은 나이에 놀라운 일이오. 간영웅(干英雄)이 멀리서 오셨는데 마중을 나가지 못했구료. 결례가 많았소." 간인호가 코웃음을 쳤다.
"뭐, 영접을 못했다구 ? 이처럼 무예가 높은 공자로부터 우리는 대단한 영접을 받았소이다. 사부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말이오."
임진남은 그 소리를 듣자 머리가 아찔했다. 죽은 사람이 청성파의 일반제자였다면 그래도 화해해 볼 가능성이 있었으나, 여관주의 아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사우는 것외에 다른 길은 이미 없었다. 그느 장검을 치켜들고 대소하며 물었다.
"간소협, 농담을 하는 거요 ?"
간인호는 임진남의 뜻밖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농담이라고요."
"여관주는 일대의 종사이고, 가정교육이 엄하다고 들어왔소. 노부의 자식이 실수하여 해친 사람은 술집에서 소녀를 희롱하다 죽었고, 그 무예 또한 철없는 자식에게 당할 정도로 평범했으니, 어찌 여관주의 자식일 수 있겠소. 이치가 그렇지 않소."
간인호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소나무숲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잘도 둘러댄다마는 주먹으로는 사수(四秀)를 못당할 것이오. 그 술집에서 임소표두는 표두 10여 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공격했소." 그는 말하면서 숲에서 걸어나왔는데 머리는 작았고 손에는 부체를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검이나 도로 싸웠으면 복위표국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았어도 우리가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요. 비겁하게 여형제의 술에 독을 풀고 독묻힌 암기로 해쳤소. 우리가 호의를 베풀어 이렇게 방문했는데 암살당할 줄이야 생각도 못했소." 임진남이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방인지(方人智)라 하오."
임평지가 장검을 들고 노기를 참으며 부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 너와 원수진 일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방인지가 교묘하게 말을 되받았다.
"비겁한 어린 놈, 여형제는 너에게 원수진 일도 없는데 왜 표사와 쟁자수들을 술집에 매복시켜 그를 암살했느냐 ? 술집에서 소녀를 희롱하는 너를 보다못해 형제가 타이르려고 했는데 너는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표사, 쟁자수들과 함께 여형제를 협살하지 않았느냐 ?"
임평지는 울분을 삭일 길이 없어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청성파는 명문정파를 자처하면서 모두 이런 무뢰배들만 모였는가 ?" 돌연 휙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임평지 앞으로 빠르게 닥쳐왔다. 임평지는 좌장(左掌)을 급히 뻗었으나 한 발 늦어 얼굴에 정통으로 일격을 맞았다. 눈앞에는 별똥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방인지가 민첩하게 일격을 때리고 제자리로 돌아가 자기의 뺨을 만지며 소리쳤다.
"비린내 나는 어린 놈이 말을 함부로 하니 혼이 나야 한다. 알겠느냐. 하하핫 !" 왕부인이 아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도를 뻗으며 { 야화소천(野火燒天)} 을 펼쳐 공
격했다. 초식이 부드러웠으나 힘이 실려 있어다. 방인지가 몸을 틀어 피하자 도가 오른쪽 어깨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그는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훌륭한 도법이었소."
다시는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허리에서 검을 빼어 왕부인의 다음 공격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남이 장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청성파가 복위표국을 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오. 그러나 무림의 시비에는 공론(公論)이 있는 법이오. 간소협께 한 수 청하는 바이오." 간인호가 장검을 빼어들고 낭랑하게 말했다.
"임총표두께 가르침을 청하오."
임진남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청성파의 송풍검법(松風劍法)은소나무의 강함과 바람의 빠름을 겸하고 있다고 들어왔다. 오직 내가 선기(先機)를 잡아 몰아붙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주저하지 않고 그는 장검을 횡으로 뉘어 비스듬히 베어가니 바로 벽사검법 중의 { 군사피역(群邪避易)}의 일초였다. 간인호는 쌩하는 바람소리를 듣고 그의 검법이 실로 위맹하자 몸을 돌려 피했다. 임진남은 계속해서 {종규결목(鍾規抉目)}을 펼쳐 상대의 두 눈을 찔러 갔다. 간인호가 뒤로 뛰어오르며 피했다. 임진남이 계속해서 제 3초를 펼치자 간인호는 검을 들어 정면으로 막았다. 쨍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 모두 손이 저려왔다.
임진남이 생각했다.
(청성파의 4대제자가 이 정도 실력에 불과하다니, 저자의 무예로 보아 그처럼 높은 수법의 최심장을 펼칠 수는 없다. 그럼 또 다른 흉수가 따로 있단 말인가 ?)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가슴이 내려 앉는 듯했다. 간인호가 장검을 돌려 찔려오니 검끝이 7개 방위에서 엄밀하게 밀려왔다. 임진남도 재빠르게 대응하여 검막의 중심을 찔러갔다. 두 사람이 일진일퇴하며 20여 초를 겨루었다.
그 옆에서는 왕부인과 방인지가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왕부인이 상대의 신속한 검초에 밀리고 있었다.
임평지는 어머니가 수세에 밀리자 급히 뛰어가 방인지의 목을 무기교하게 베어갔다. 방인지가 몸을 젖히며 슬쩍 피해버리자 임평지의 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돌연, 임평지의 발이 겹질려 땅에 나둥그러졌다. 육중한 발이 그를 밟고 있었고 날카로운 비수가 등에 겨누어져 있었다. 임평지의 눈에는 땅바닥만 보였고 어머니의 외침이 들렸다.
"죽이지 마라 ! 아들을 살려다오."
임평지 모자가 방인지를 협공할 때, 한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 임평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비수를 빼서 등을 겨누었던 것이다. 왕부인도 아들의 목숨이 적의 손에 잡혀 있으니 마음이 산란해져 도법이 흐트러지고 방인지의 공격을 받아 쓰러졌다.
방인지는 왕부인의 28혈도(二十八穴道)를 빠르게 짚어버렸다. 임평지를 넘어뜨린 자는 복주성밖 주점에 있었던 가(賈)씨 무사였다.
임진남은 부인과 자식이 적에게 제압당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간인호가 장소(長笑)를 터뜨리며 절초를 펼쳐 도리어 기선을 잡아버렸다. 임진남은 상대의 검법을 보고 당황하여 손발이 떨렸다.
(저 자가 어찌 벽사검법을 익숙하게 알고 있을까 ?)
간인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벽사검법이 어떻소 ?"
임진남이 떠듬떠듬 물었다.
"너...너는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느냐 ?"
방인지가 웃으면서 놀렸다.
"임가의 벽사검법이 이런 정도요 ?"
그는 장검을 휘둘러 군사피역, 종규결목, 비연천류를 연거푸 펼쳐 보였다. 1인 전수의 가전절학이 임진남의 눈앞에서 일초반식의 어긋남이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임진남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정신이 없고 망연자실, 전신에 힘이 빠졌다.
간인호가 외쳤다.
"받아랏 !"
임진남은 오른쪽 무릎에 검을 맞고 휘청하며 쓰러졌다. 그는 즉시 일어나려 했으나 간인호의 검이 이미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가인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사제, 훌륭한 유성간월(流星桿月)이었소."
임진남을 쓰러뜨린 유성간월은 벽사검법 중의 일초였다.
임진남이 검을 버리고 탄식했다.
"너희들이,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느냐 ? 그것도 그다지도 완벽하게......" 그는 방인지의 칼등에 혈도를 짚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만 그들의 말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흥, 천하에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소. 저 임씨부부와 어린 자식을 사부님께 데려갑시다.
가인달이 임평지의 배를 움켜 잡아 일으켜서 몇 대를 후려쳤다.
"이놈아, 오늘부터 사천의 청성산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에 18대씩을 때려야겠다.
그러면 그 예쁘장한 얼굴이 볼 만하게 될 거야."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됐어 그만해. 죽어버리면 사부님을 어찌 뵐려고, 이놈은 색시같이 약해서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돼."
가인달은 무예가 평범하고 인품이 간사해서 사부가 평소에 그를 싫어했고 동문 사형제들도 그를 멸시했다. 가인달은 방인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때리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방 간 두 사람은 임진남 일가를 음식점으로 끌고 들어가 땅바닥에 팽개쳤다. 방인지가 말했다.
"여기서 식사나 하고 가지. 가사제, 밥 좀 해오시구료." "알았습니다."
가인달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간인호가 말했다.
"방사형, 저 세 사람이 도망치지 않을까요. 저 애비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는데, 좋은 수가 없을까요?"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없어. 밥먹고 난 후, 세 사람의 수근(手筋)을 끊어버리고 포승으로 비파골(琵琶骨)을 묶어버리면 꼼짝할 수 없지."
임평지가 욕설을 내뱉었다.
"할아버님께서 너희 들을 죽이러 오실 것이다. 사람을 간살하는 더러운 잡졸들." 방인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 어린놈, 입에 똥을 처넣기 전에 입닥치거라."
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임평지는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간사제, 사부님이 우리에게 72로(七十二路) 벽사검법을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이처럼 완벽하게 전개하는 것을 보고 임표두가 혼이 빠진 모양이오. 임표두, 우리 청성파가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임진남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성파가 어떻게 우리 임씨 가문의 벽사검법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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