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5~36

나단비 | 2024.02.16 12:07:59 댓글: 0 조회: 13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595
35
퀸스 학교에서 보낸 겨울





앤의 향수병은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점차 치유가 되었다. 에이번리의 학생들은 날씨가 허락하기만 하면 매주 금요일 밤마다 새로 가설된 기차를 타고 카모디까지 와서, 다이애나를 비롯한 마중 나온 다른 젊은이들을 만나 모두 함께 에이번리까지 즐겁게 걸어갔다. 앤에게는 차가운 가을 공기 속에서 언덕 저 멀리 반짝이는 에이번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즐겁게 떠들며 걷는 이 시간이 일주일 중 가장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거의 언제나 루비 길리스와 나란히 걸으며 루비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루비는 매우 아름다운 아가씨로, 이제 자기는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치마도 어머니가 허락하는 한 길게 입고 머리도 도시 스타일로 틀어 올리고 있다가 집에 올 때는 내리곤 했다. 커다란밝은색푸른 눈에 피부도 밝고 몸은 보기 좋을 정도로 통통했다. 잘 웃고 유쾌하고 성격도 좋았으며 즐거운 일을 꾸밈없이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루비를 길버트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제인이 앤에게 속삭였다. 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할수는 없었다. 앤 역시 길버트 같은 친구와 농담이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책이나 공부나 야망에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무척이나 바랐다. 앤은 길버트도 야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루비 길리스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앤이 길버트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하고 어리석은 감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번도 남자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앤에게 남자는 단지 좋은 동료에 불과했다. 따라서 만약 앤과 길버트가 친구가 되었더라도 길버트가 친구를 얼마나 많이 사귀든 누구와 함께 걷든 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앤은 친구를 사귀는 데 소질이 있었고, 여자 친구는 무척 많았다. 하지만 남자 친구를 사귀면 교우관계가 한층 원숙해지고 세상을 판단하고 비교하는 시각을 한층 넓힐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앤이 자기감정을 그렇게 분명하게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앤은 만일 기차에서 집까지 너른 들판과 고사리가 우거진 오솔길을 길버트와 함께 걷는다면 둘이서 그들 앞에 열려 있는 새로운 세계와, 그 안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소망과 야망에 즐겁고 재미있는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매사에 자기만의 뚜렷한 생각이 있고, 삶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려는 굳은 의지가 있는 똑똑한 청년이었다. 루비 길리스는 길버트 블라이드의 말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제인 앤드루스에게 털어놓았다. 앤 셜리가 생각에 잠겨 말을 할 때처럼 길버트도 그렇게 말하고, 책을 두고 골머리를 썩이는 것은 조금도 재미없으며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다. 또 프랭크 스토클리가 훨씬 남자답고 활기차지만 길버트의 반만큼도 잘생기지 않아 누구를 더 좋아해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퀸스 학교에서는 앤이 자기처럼 생각이 깊고 상상력도 풍부하며 꿈을 가진 학생들을 조금씩 주변에 끌어들이며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앤은 ‘장미처럼 빨간’ 스텔라 메이너드와 ‘꿈꾸는 소녀’ 프리실라 그랜트와 곧 친해졌다. 프리실라는 하얀 얼굴에 기품이 있었지만 재미있는 장난을 생각해내는 장난꾸러기였고, 스텔라는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앤 못지않게 영묘하고 무지개 같은 꿈과 공상에 곧잘 빠져드는 아이였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난 다음에는 모든 에이번리 학생들이 금요일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포기하고 공부에 파고들었다. 그때쯤 퀸스 학교 학생들의 성적이 대충 정해졌고, 각자가 어떤 등급에 속하는지도 정해졌다. 또 몇 가지 사실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인정받았다. 그런 예를 들어보면 메달 경쟁자는 길버트 블라이드, 앤 셜리, 그리고 루이스 윌슨, 이 세 명으로 좁혀졌다. 에이버리 장학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가능한 한 여섯 명의 후보 중에 한 명이 받게 될 것은 분명하다고들 믿었다. 또 수학 성적으로 결정되는 동메달은 뚱뚱하고 울퉁불퉁한 이마에 작고 우습게 생겼으며 기운 코트를 입고 다니는 육지 출신의남자아이가 타게 될 거라고들 했다.
루비 길리스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소녀로 뽑혔다. 2학년 반에서는 스텔라 메이너드가 최고 미인으로 꼽혔다. 소수이긴 했지만 비판적인 아이들은 앤 셜리를 좋아했다. 에델 마르는 가장 맵시 있게 머리 손질을 잘하는 학생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제인 앤드루스는 평범하면서도 꾸준하고 성실한 제인이라 불리면서 가정 과목에서 1등을 차지했고, 조시 파이까지 퀸스 학교에서 가장 매서운 독설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스테이시 선생님의 제자들은 더 큰 학문의 장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앤은 열심히, 또 꾸준히 공부했다. 길버트와의 경쟁은 에이번리 학교 때만큼 치열했지만, 퀸스 학교에서는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쓰라린 고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앤은 길버트를 꺾어놓으려고 승리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호적수에게 멋지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긍심을 가지려고 승리하고 싶었다. 승리는 쟁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승리하지 못한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와중에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누렸다. 앤은 한가한 시간의 대부분을‘너도밤나무 저택’에서 보냈고, 일요일이면 거의 언제나 점심을 그곳에서 먹고조제핀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다.조제핀할머니는 나이를 먹어갔지만 까만 눈동자는 침침해지지 않았고 독설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앤에게는 결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 앤은 그 비판적인 노인에게 가장 소중한 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앤은 갈수록 좋아진다니까. 다른여자아이들에게는 금세 싫증이 나는데.여자아이들은 화가 날 정도로 언제나 똑같아. 앤은 무지개처럼 여러 색을 지녔고, 모든 색이 한결같이 예뻐. 앤이 어렸을 때만큼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 나는 좋아. 그래야 억지로 사랑하려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구도눈치챌틈도 없이 봄이 찾아왔다. 에이번리에서는 산사나무들이 눈꽃이 채 녹지 않은 황량한 벌판에서 분홍빛 싹을 드러냈고, 숲과 계곡에서는 ‘초록의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샬럿타운에서 퀸스의 학생들은 공부에 시달리며 시험만을 생각했고, 시험만이 유일한 화젯거리였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이번 학기도 거의 끝났어. 지난가을만 해도 아득히 먼 미래처럼 보였는데. 겨우내 학교에만 다니고 공부만 했으니. 이제 거의 끝났어. 다음 주가 시험이잖아. 얘들아, 나한테는 말이야, 가끔 시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하지만 저 밤나무에서 점점 커지는 싹이나, 길 끝에 아른거리는 푸른 안개를 보면 시험이 절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앤의 하숙집을 찾아온 제인과 루비와 조시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코앞에 닥친 시험이 여전히 무척 중요했다. 밤나무 봉우리나, 5월의 안개보다 훨씬 중요했다. 적어도 시험을 통과할 것이 확실한 앤에게는 시험을 하찮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지만, 자신들의 미래가 시험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시험을 철학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지난 2주 동안 3킬로그램이나 빠졌어. 걱정하지 말자고 생각해보지만 소용이 없어. 그래서 차라리 걱정하기로 했어. 걱정하는 게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하잖아. 걱정할 때는 뭔가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드니까. 겨우내 학교에 다니면서 돈도 많이 썼는데 교사 자격증을 따지 못하면 죽을 맛일 거야.”
제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걱정하지 않아. 올해 합격하지 못하면 내년에 또 다닐 거야. 우리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낼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까. 앤, 프랭크 스토클리가 프레메인 교수에게 들었는데, 길버트 블라이드가 메달을 받을 것이 확실하고, 에이버리 장학금은 에밀리 클레이가 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
조시 파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들었으니 내가 내일은 기분이 엄청 나쁘겠는걸, 조시.”
앤이 웃었다.
“하지만‘초록 지붕 집’아래 분지에 제비꽃이 가득 피어 있는 한,‘연인의 오솔길’에 작은 풀고사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한, 지금은 장학금이 누구의 것이 되건 조금도 상관없다는 기분이야. 난 최선을 다했고, ‘노력의 기쁨’ 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어. 열심히 노력하고 이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을 때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이지. 얘들아, 시험 이야기는 그만하자! 저 아치 모양의 지붕들 너머로 옅은 녹색 하늘을 보면서, 에이번리 뒤쪽에 짙은 자줏빛 너도밤나무 숲이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해봐.”
“졸업식에는 어떤 옷을 입을 거야, 제인?”
루비가 현실적인 얘기를 꺼냈다.
제인과 조시가 즉시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의 주제는 금세 패션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앤은 혼자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보드라운 뺨을 두 손에 포갠 채 공상에 빠진 눈길로 도시의 지붕과 첨탑 너머로 노을에 찬란히 물든 둥근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황금 같은 청춘의 희망을 담아 미래를 그려보았다. 앤의 앞길은 장밋빛으로 빛나고,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이며, 그 장밋빛 약속은 해를 더해갈수록 더욱 빛날 것만 같았다.




36
영광과 꿈





최종 시험 결과가 퀸스 학교 게시판에 나붙기로 예정된 날, 앤은 제인과 함께 학교로 걸어갔다. 제인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행복한 표정이었다. 시험은 이미 끝났고 적어도 합격은 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인은 더 이상의 일을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별로 큰 야망을 품고 있지 않아서 불안에 떨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비록 야망이라는 것이 충분히 간직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고, 수없이 자기를 들볶고 불안과 실망을 겪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쉽게 욕심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창백한 표정의 앤은 말이 없었다. 앞으로 10분만 있으면 누가 메달을 받고, 누가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된다. 앤에게는 그 10분 뒤의 시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넌 둘 중 하나는 받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교수들이 정당치 않은 거라고 생각하는 제인이 말했다.
“난 에이버리는 기대하지 않아. 모두들 에밀리 클레이가 받게 될 거라고 해. 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게시판 앞까지 걸어갈수 없을것 같아. 그럴 용기가 없어. 제인, 난 곧바로 휴게실로 갈 테니 네가 보고 와서 좀 알려줘. 우리 둘의 우정에 걸고 부탁하는 거니까 곧바로 알려줘. 만약 실패했더라도 위로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말해줘. 나를 동정하려고도 하지 마. 약속하는 거지, 제인?”
앤이 말했다.
제인이 엄숙하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이 퀸스 학교 입구 계단에 닿자마자남자아이들이 복도에 가득 모여 길버트 블라이드를 헹가래 치면서 어깨를 감싸고 목청껏 “메달 수상자 블라이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 앤은 패배감과 실망감으로 통증이 다 느껴졌다. 내가 떨어지고 길버트가 메달을 쥐었구나! 이제 어쩌나! 매슈 아저씨가 실망하실 텐데. 사실 매슈는 앤이 메달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누군가가 외쳤다.
“오, 미스 셜리, 에이버리 수상자!”
“오, 앤, 앤. 난 네가 자랑스러울 정도야! 너무 잘되지 않았니?”
제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둘은 휴게실로 쏜살같이 달려갔고 주변에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여자아이들이 모두 앤을 둘러싸고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모두들 앤의 어깨를 치고 손을 잡아 힘차게 흔들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앤을 밀고 잡아당기고 안고 하는 중에 앤이 제인에게 간신히 속삭였다.

“오, 매슈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당장 집에 편지를 써야겠어.”
졸업식은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였다. 퀸스 학교의 널찍한 강당에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연설을 하고, 에세이를 읽고, 노래를 부르고 학위증과 상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매슈와 마릴라도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들의 눈과 귀는 단상 위의 한 학생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훤칠한 키에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발그스레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가장 훌륭한 에세이를 낭독하자, 주변에서 에이버리 장학금 수상자로 선정된 학생이라고 소곤거렸다.
“우리가 저 애를 키워서 너도 기쁘지, 마릴라?”
앤이 낭독을 끝내자 매슈가 나지막이 말했다. 매슈가 강당에 들어온 후로 처음 한 말이었다.
“잘했다고 생각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짓궂게 옛날 얘기를 또 하세요, 매슈 오라버니?”
마릴라가한소리를했다.
그들의 뒤에 앉아 있던조제핀배리가 앞으로 몸을 숙여 양산 끝으로 마릴라의 등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앤이 무척 자랑스럽겠어요? 난 그런데…….”
그날 저녁 앤은 매슈와 마릴라와 함께 에이번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4월 이후 죽 집을 떠나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단 하루도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사과꽃이 활짝 피고, 온 세상이 싱그럽고 새롭게 보였다. 다이애나가 앤을 만나려고‘초록 지붕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릴라가 창틀에 장미꽃을 놓아둔 하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앤이 돌아보고는 행복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다이애나, 다시 돌아오니 너무 기뻐.저 뾰족한 전나무들이 분홍빛 하늘로 솟아오른 것을 봐서 너무 좋아. 하얀 꽃이 핀 저 과수원과 우리의 정겨운 ‘눈꽃 여왕’ 님도. 박하 향내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니? 그리고 이 월계화, 이 모든 게 하나로 합해진 노래이고 희망이며 기도야. 무엇보다 너를 다시 만나서 좋아, 다이애나!”
“난 네가 나보다 스텔라 메이너드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조시 파이가 내게 그렇게 말했거든. 조시 말로는 네가 그 애한테 폭 빠져 있다고 그랬단 말이야.”
다이애나가 책망하듯 말했다.
앤이 웃으며 다이애나를 향해 시든 ‘6월의 백합’ 꽃다발을 던졌다.
“스텔라 메이너드가 한 사람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이긴 하지. 그 한 사람이 바로 너, 다이애나야. 난 너를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지금은 여기 앉아 너를 쳐다보고만 있어도 너무 즐거운 것 같아. 내가 지쳤나 봐. 공부하고 야망을 갖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정도야. 내일은 과수원 풀밭에 누워 적어도 두 시간은 보낼 생각이야. 아무 생각도 않고.”
“넌 정말로 잘해냈어, 앤. 그런데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았으니 곧바로 선생님이 되지는 않겠지?”
“응, 9월에 레드먼드 대학에 진학할 거야. 너무 멋질 것 같지 않니? 먼저 황금 같은 방학 3개월을 멋지게 즐긴 후에, 그때쯤에나 새로운 야망을 품을 거야. 제인과 루비는 선생님이 될 거래. 무디 스퍼전과 조시 파이까지 우리 모두가 합격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굉장하지 않니?”
다이애나가 말했다.
“뉴브리지 학교 이사회가 제인에게 이미 초청장을 보내왔대. 길버트 블라이드도 가르칠 거래. 내년에 대학에 가야 하는데 길버트의 아버지가 대학에 보내줄 형편이 못 돼서 길버트가 직접 돈을 벌 생각인가 봐. 에이머스 선생님이 우리 학교를 떠나시기로 결정하면 길버트가 그 자리를 채울 것 같아.”
길버트도 레드먼드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앤은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서로 자극을 주는 경쟁자가 없어지면 맥이 빠져버리는 일이지 않은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갑자기 앤은 매슈의 얼굴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작년보다 머리도 더 희어졌다.
“마릴라 아주머니, 매슈 아저씨 괜찮으신 거예요?”
매슈가 나가자 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니, 건강하지 않아. 올봄에 심장 발작을 심하게 일으켰는데 그 후로 몸을 좀처럼 돌보지 않는구나. 매슈 아저씨 때문에 정말 걱정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조금 회복된 것 같기는 하다. 일꾼도 착한 사람으로 구했으니까 좀 쉬면서 건강을 회복했으면 좋겠는데. 이제 네가 집에 있으니까 아저씨가 좋아지실 거다. 네가 언제나 아저씨 기운을 북돋워주잖니.”
마릴라가 말했다.
앤이 탁자 너머로 몸을 기울여 마릴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주머니도 제가 생각하는 만큼 좋아 보이시지는 않아요. 피곤해 보이신다고요. 일을 너무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이젠 제가 집에 있으니까 쉬도록 하세요. 오늘 하루만 옛날 정든 곳을 찾아보면서 옛날에 꾸었던 꿈을 되살려보려고요. 그 후로는 제가 일을 다 할 테니까 아주머니는 게으름을 피우셔도 돼요.”
마릴라는 자기의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일 때문이 아니야. 내 두통 때문이지. 요즘 두통이 더 잦아졌다. 눈 뒤가 특히 아프구나. 스펜서 의사 선생님은 나한테 안경을 바꿔보라고 성화였지만, 안경을 바꿔도 별로 나아지지 않더구나. 6월 말에 유명한 안과 의사가 우리 섬에 온다니까 그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하더라. 나도 꼭 그럴 참이다. 이젠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바느질을 할 때도 편하지가 않다. 앤, 퀸스 학교에서 정말 잘해냈다고 칭찬해주고 싶구나. 일 년 만에 1급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에이버리 장학금까지 받았으니까. 린드 부인은 교만이 파멸의 씨앗이라면서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고등교육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아 참,레이철을 말하니까 생각나는데 최근 들어 에비 은행에 대한 소문 뭐 들은 게 있니, 앤?”
“네, 저도 그 은행이 흔들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왜요?”
“레이철도 그렇게 말하더구나. 지난주에 우리 집에서 와서는 에비 은행에 좋지 않은 말이 있다고. 그 말을 듣고 매슈 아저씨가 무척 걱정하는 눈치더라. 우리가 그 은행에 모든 돈을 저축해두었거든. 난 처음부터 세이빙스 은행에 저축하자고 했지만 매슈 아저씨는 에비 은행장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면서 항상 그 은행에 돈을 저축했지. 그 사람이 우두머리로 있는 은행이면 누구라도 믿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분은 명목상으로만 은행장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분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조카가 실질적인 은행장 노릇을 하고 있대요.”
“레이철한테 그런 말을 듣고 아저씨한테 우리 돈을 당장 꺼내자고 했더니 생각해보겠다고 하긴 했는데. 그런데 어제는 러셀 씨가 아저씨에게 그 은행이 괜찮다고 말했다는구나.”
앤은 그날 여유롭게 바깥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언제까지나 그날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화창한 날씨여서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고, 사방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앤은 과수원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후‘드리아드의 샘’과‘버드나무 연못’과‘제비꽃 골짜기’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또 목사관을 방문해 앨런 부인과 기분 좋은 얘기도 나누었다. 끝으로 해가 질 무렵에는 매슈와 함께 소들을 데리러 ‘연인의 오솔길’을 지나 방목장으로 갔다. 황혼의 노을이 숲에 스며들었고, 따뜻하고 황홀한 노을빛이 서쪽 골짜기들까지 흘러내렸다. 매슈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었다. 그래서 허리를 똑바로 펴서 유난히 커 보이는 앤은 활달한 걸음을 매슈의 걸음에 맞추어야 했다.
“매슈 아저씨, 오늘 일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왜 일을 줄이시지 않는 거예요?”
앤이 나무라듯 말했다.
“글쎄다, 나는 그게 잘 안 되는구나.”
매슈가 대문을 열어 소들을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늙어서 그런지 계속 잊어버리는구나, 앤. 난 아주 열심히 일을 해왔지. 죽는 순간까지도 열심히 일을 하게 될 거야.”
“제가남자아이였다면 지금쯤 아저씨한테 큰 도움이 되어드렸을 텐데요. 그랬으면 여러 면에서 아저씨가 좀 더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었을 거예요.”
앤이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
그러자 매슈가 앤의 손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사내아이 열두 명을 준다 해도 너하고는 안 바꿀 거다, 알겠니? 난남자아이열두 명보다 네가 더 좋다고. 에이버리 장학금을 탄 건남자아이가 아니고여자아이였잖니.여자아이였어. 우리 아이, 난 우리 아이가 너무 자랑스러워.”
매슈는 앤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 장면을 앤은 그날 밤 자기 방 안에 앉아서도 오랫동안 떠올려 보았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어보기도 했다. 창밖에서는 ‘눈꽃 여왕’이 달빛에 싸여 은은한 흰 빛을 띠었고, 비탈길 과수원 너머의 늪에서는 개구리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앤은 이날 밤 은빛으로 빛나던 아름다움과 평화롭던 고요를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앤에게 슬픔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밤이었고 일단 슬픔이라는 냉정하고 신성한 손길이 앤에게 닿자 앤의 삶은 두 번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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