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재인, 클레어

나단비 | 2024.03.01 07:39:17 댓글: 0 조회: 97 추천: 0
분류단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0864
마리, 재인, 클레어 

정세랑


마리가 어린 시절 깎은 렌즈 미러는 모두 몇 개일까? 똑같은 유리 한 쌍 사이에 연마제를 넣고 열 번 간 다음, 15도쯤 돌려서 다시 갈았다. 아빠의 망원경을 위해서였다. 지구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천문학자 아빠를 두고 태어나면 유년을 그렇게 보내게 된다. 마리는 늘 렌즈 가는 작업을 보석 세공처럼 여겼는데, 한국 사람들이 거대한 망원경을 설치해주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망원경의 데이터는 아빠가 분석하고, 바로 한국으로 전송되어 한국에서도 분석한다. 자연스레 연구원들도 자주 교환되어, 마리가 소백산에 왔다.

초가을에 도착했지만 추위가 대단했다. 해발고도 1,400미터는 물론 웬만해선 따뜻할 수 없는 높이지만, 마리도 고원 출신인데 역시 한국은 북쪽 나라였다. 마리는 천문대에 도착하자마자 도로 타운에 나가 집히는 대로 두꺼운 옷을 샀다. 천문대 사람들이 타운이 아니라 ‘읍내’라고 말을 고쳐주었다. 대학 때 배운 한국어는 형편없어서 영어가 나았다.

읍내에서 산 옷은 아무래도 마리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마리는 관측을 마치고 들어올 때마다 로비의 거울을 보고 깜짝깜짝 놀랐다. 혼자 재난물에 출연하는 사람처럼 불쌍해 보였다. 외국인이 유난히 그렇게 보이는 것은 사실 돈이 없어서이기보다는 어디서 무슨 옷을 사야 하는지 적응을 못 해서일 때가 많다. 본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지, 자꾸 동료들이 회식비를 빼주거나 덜 받았다. 마리는 옷을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랑 같은 관측조는 아니지만 천문대엔 스타일이 근사한 여자 연구원이 있었다. 이재인 씨였다. 마리는 프랑스 여자를 만나본 적 없지만 이재인 씨가 프랑스 여자처럼 옷을 입는다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친해지기 쉬운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 예쁜 옷 입어요. 사요. 같이.”

그러자 재인 씨가 몇 초쯤 놀란 후 온 얼굴로 웃었다. 짐작보다 쉽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재인 씨는 그날 바로 숙소에서 보던 잡지를 갖다 주고 원하는 분위기를 미리 골라두라고 했다. 도시에 쇼핑을 가자고 말이다.

“마침 마리 씨랑 이름이 같은 잡지네요.”

겨우 젊은이다운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하자, 천문대 사람들이 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태양이 두 개인 행성을 발견하는 등 연구 업적으로 유명한 소백산 천문대 연구팀이지만, 막상 와보니 맛있는 저녁과 끊임없는 농담에 굉장히 집착하는 사람들이었다. 밤을 새우려면 꼭 필요한 두 요소이기도 하고, 마리를 불편하지 않고 불쌍하지 않은 동료로 여겨준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난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옆자리 동료는 읍내에 가서 김말이를 잔뜩 사오더니 ‘마리, 마리, 김마리’ 하면서 줬다. 박사님도 ‘마리, 마리, 로즈마리’ 하면서 차를 건넸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마리도 그건 유치하다고 느꼈고 몇 번 되풀이되자 “재미 안 해요!” 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 씨까지 묶어 놀리기 시작했다.

“마리랑 재인이니까 메리 제인이네.”

“엠제이네, 엠제이.”

“둘이 놀려고 맨날 관측 못 하게 기우제라도 하는 거 아냐?”

이상하게 그 가을엔 비도 자주 오고 구름도 많이 끼고 악천후가 이어졌다. 마리는 흐린 날이면 천문대 근처를 산책했는데 웬만한 등산가가 아니면 가까이 올라오지 않았다. 11월에는 이른 눈이 오기 시작했으므로, 조그만 산짐승들만 눈꽃이 핀 천문대 주변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좋지 않은 상태로 비틀거리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여기 높아. 배고파?”

배고파서 이렇게 높이 온 거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마리의 한국어는 짧았다. 재인 씨와는 잠깐 잠깐밖에 못 만났고 향수병도 도져 마리는 조금 외로웠다. 숙소에 동물을 들이면 안 되지만 수건에 싸안고 와선 목욕도 시키고 음식도 주었다. 고양이는 산을 헤매던 것 치고는 잘 적응했다. 마리는 고양이에게 클레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고향의 친한 친구 이름이었다.

클레어가 워낙 식욕이 왕성했으므로, 마리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읍내에 내려가 사료를 포대 단위로 사와야 했다. 장날에 내려갔더니 강아지 옷을 파는 좌판도 열려 있었다.

“고양이 옷 주세요.”

“개 입히는 건데…… 고양이도 입히려면 입혀요. 얼만 해?”

“이만해.”

마리가 귀여운 꿀벌 옷을 가리켰다.

“어유, 중형견 사이즈네. 아가씨 고양이 뚱뚱한가 봐?”

“뚱뚱이 아니에요.”

중형견이라는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뚱뚱하다는 말은 알아듣고 마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숙소에 돌아와 클레어를 붙잡고 얼러가며 꿀벌 옷을 입혔다. 클레어는 매우 귀찮아했지만 귀엽게 어울렸다. 재인 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설마 어디 이르진 않겠지. 마리는 신이 나서 재인 씨를 불렀다. ‘귀여운 거 봐요. 쉬는 시간 마리 방에 와요.’ 문자를 보냈다.

“이것 봐, 클레어 예뻐요?”

“으악!”

컵라면 두 개를 쟁반에 받쳐 온 재인 씨에게 클레어를 안아 보이자, 재인 씨가 쟁반째 라면을 엎었다. 거의 던졌다고 보아야 할 수준이었다. 그렇게까지 규정 위반인가?

“마리 씨, 그거 삵이야!”

샤크? 쇼크? 마리는 클레어가 다른 사람의 잃어버린 고양이인가 싶었다. 산에 사는 고양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었나. 원래 이름은 좀 이상하네.

“살쾡이라고! 내려놔, 내려놓고 일단 나와!”

방문을 밀어 잠그고 재인 씨가 뭐라고 뭐라고 강하게 계속 말했으나, 마리는 그쯤 되니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몰랐어요. 미안해요?”

일단 사과하고 보자 싶었다. 재인 씨는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으로 자꾸 뭘 검색했다. 그러더니 쭈그리고 앉아서 갑자기 막 웃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무는 힘이 강해서 주의해야 한다는 맹수한테 대체 뭘 입힌 거야. 안 되겠다. 이건 방송국에 전화해야겠어.”

좀 있으니 온 천문대 사람이 마리 방 앞에 모였다. 문을 살짝 열고는 클레어를 구경했다. 클레어도 이 상황이 싫은지 방 안에서 크르렁거렸다. 마리는 점점 기분 상해갔고, 다음 날 방송국 사람들이 왔다. 야생동물구조관리센터 사람들도 함께였다. 일곱 사람이 처음의 재인 씨처럼 막 웃기 시작했다.

“누가 이랬어요?”

“우리 교환 연구원이. 외국에서 와서 몰랐대요.”

“오해하는 게 없는 일은 아닌데 꿀벌 옷은 진짜.”

“게다가 난 저렇게 뚱뚱한 살쾡이는 처음 봤어.”

클레어는 ‘구조’되어 산 아래쪽 계곡에 방사될 예정이라 했다. 이미 체력도 완전히 회복한 상태고 야생성을 잃으면 안 되니 작별 인사를 하라고 했다. 마리는 클레어랑 헤어지는 것도 서럽고 자신의 실수에 웃는 사람들한테도 섭섭해서 클레어를 안고 막 울고 말았다. 클레어를 꼭 안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어는 그저 안겨 있을 뿐이었다. 마리의 펑펑 우는 모습이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었다.

차트 레코더의 바늘이 얼어 움직이지 않는 겨울이 될 때까지, 마리는 마음이 상해 있었다. 어쨌든 고양잇과의 동물이었다. 한국에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헷갈리나 보더만 그럴 수도 있지. 소장님은 심지어 마리의 아빠한테 전화해 “따님이 벌써 우리 천문대의 전설이 되셨습니다”라고까지 했다. 마리는 부루퉁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나중에 한국 연구원들이 오면 밤에 도마뱀이고 뭐고 잔뜩 넣어버려야지. 아빠에게선 “딸아, 별을 발견해서 이름을 빛내야지 사르그 같은 걸 키우다니 실망이다”로 요약되는 길고 긴 메일이 왔다. 사르그라니, 아빠도 삵이 뭔지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책상에 오니 재인 씨가 남겨놓은 쿠키와 쪽지가 있었다. 재인 씨 팀은 이제 자러 갔을 시간이었다. 쪽지 안에는 잡지에서 뜯은 레스토랑 추천 페이지가 있었다. 재인 씨가 한 가게에 형광펜을 쳐둔 걸 보았다. ‘우리 다음에 서울 가면 여기 안 갈래요?’ 주소를 보니 이태원이었다.

외국인이면 다 이태원 가고 싶어 하는 줄 아나!

하지만 사실 마리는 엄청 가보고 싶었다. 쪽지도 잡지도 탁상 달력 밑에 슬쩍 접어두었다.

늦봄에 마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소백산에서는 아니었지만 돌아가 소행성을 하나 발견했다. 반점 같은 크레이터가 많은 소행성이었기 때문에, 마리는 ‘살쾡이 클레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기원을 아는 사람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마리와 마리의 친구들만 알고 부른다.



작가의 말

마리 끌레르 20주년 기념 소설
《마리 끌레르》, 2013년 3월

이름을 빌려준 재인은 《재인, 재욱, 재훈》에도 한 번 더 빌려주었다.
소백산 천문대의 단기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천문대 근처의 풍광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저 귀여운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아라의 소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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