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39~40 (5권 끝)

나단비 | 2024.04.08 17:40:51 댓글: 0 조회: 4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487
39
짐 선장이 모래톱을 건너가다






9월 하순 어느 날, 드디어 오언 포드의 책이 도착했다. 짐 선장은 책이 오기를 고대하며 9월 내내 거의 매일 글렌의 우체국에 들렀다. 이날은 우체국에 가지 않았는데, 레슬리가 앤과 자기와 짐 선장 모두의 책을 가져왔다.
“오늘 저녁에 짐 선장님께 이 책을 드리러 가요.”
마치 어린 학생처럼 신이 나서 앤이 말했다.
그 밝고 즐거운 날 저녁 붉은 항구 길을 따라 곶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태양이 서쪽 언덕 너머 골짜기로 떨어지자 주변을 가득 채웠던 저녁놀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곶의 하얀 탑에 불이 켜지며 주변을 훤히 밝혔다.
“짐 선장님은 1초라도 늦는 법이 없어요.”
레슬리가 말했다.
책을 건네줄 때 짐 선장의 표정을 앤과 레슬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책은 값지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노년의 창백한 짐 선장의 얼굴에 갑자기 소년 같은 활기와 홍조가 퍼졌고 눈빛은 젊은이처럼 열정으로 빛났다. 책을 펼치는 짐 선장의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책 제목은 간단하게 《짐 선장의 인생록》이었고, 속표지엔 오언 포드와 제임스 보이드가 나란히 공저자로 되어 있었다.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짐 선장이 등대 문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오언 포드가 포 윈즈에서 책을 쓸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짐 선장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진을 책에 실을 줄은 몰랐다.
“생각 좀 해봐요. 이 늙은 선원의 모습이 이렇게 출판되어 나온 책에 버젓이 나와 있다니, 정말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에요. 너무 좋아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오늘 밤엔 아마 한숨도 자지 못할 거예요. 내일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 이 책을 다 읽어야겠어요.”
짐 선장이 말했다.
“그럼 우린 이만 갈게요. 그래야 방해 안 받고 책을 읽으실 것 아니에요.”
앤이 말했다.
책을 건네받으며 짐 선장은 뭔가 경건함이 감도는 환희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책을 탁 덮어 한쪽으로 치웠다.
“아니, 아니에요. 이 늙은이와 차 한 잔도 안 하고 가면 안 되지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지, 항해사? 《인생록》은 잠시 뒀다 읽어도 돼요. 저 책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친구들과 보내는 몇 시간 더 못 기다리겠어요?”
짐 선장은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빵과 버터를 내왔다. 몹시 흥분해 있었지만 상을 차리는 행동거지에서 예전처럼 민첩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짐 선장의 움직임은 더뎌 보였고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쉬기도 해야 했다. 하지만 앤이나 레슬리는 선뜻 일어나 도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짐 선장의 기분을 언짢게 할까 두려웠다.
“마침 때를 잘 맞춰 왔어요.”
짐 선장은 찬장에서 케이크를 꺼내며 말했다.
“오늘 조 에미가 케이크와 파이를 보내왔거든요. 저 설탕이랑 호두를 입힌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보고는 ‘솜씨 좋은 요리사에게 축복을!’ 하고 외쳤어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자 앉으세요, 어서요!
‘그리운 그 시절을 위하여 우정의 잔을 함께 들어보자고요!’”17)
앤과 레슬리는 즐거워하며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짐 선장이 끓인 차와 조의 엄마가 만든 케이크는 무척 맛이 좋았다. 짐 선장은 집주인으로서 왕처럼 품위 있게 손님을 대접하느라 한쪽 구석에 놓인 자기의 초록빛과 황금빛 용기와 모험이 가득 담긴 《인생록》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앤과 레슬리가 등대를 나오고 그들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짐 선장이 곧장 책으로 달려가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둘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짐 선장의 삶에 온갖 매혹적인 색깔을 입힌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워하는 노인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렸다.
“선장님이 결말 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내가 오언에게 제안한 결말이요.”
레슬리가 말했다.
레슬리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앤이 눈을 떴을 때 길버트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옷까지 다 차려입고 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자 때문에 나가는 거야?”
앤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앤. 아무래도 곶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해가 뜨고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등대에 여전히 불이 켜져 있어. 짐 선장님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등대 불을 켜고 끄고 하셨잖아. 그분에겐 그게 자존심이 걸린 일인데.”
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는 파란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등대 불빛이 약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인생록》을 읽다가 잠이 드셨나 보지. 아니면 책에 너무 쏙 빠져서 불 끄는 걸 잊어버리신 건 아닐까?”
앤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길버트가 머리를 도리질 쳤다.
“아니, 그건 짐 선장님답지 않아. 내가 가서 알아봐야겠어.”
“잠깐만 기다려, 나도 같이 가. 그래, 나도 같이 가. 젬은 일어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수잔도 불러야겠어. 만약에 짐 선장님이 아픈 거면 여자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앤이 소리쳤다.
정말 아름답고 감미로운 아침이었다. 세상은 온갖 소리들과 색조로 가득 찼고, 반짝이는 항구 근처 바닷물은 소녀의 보조개처럼 잔물결을 일으켰으며, 모래사장 위로는 하얀 갈매기가 날아올랐다. 모래톱 너머 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고 해안가의 긴 들판은 아침 해의 맑고 순수한 빛을 머금은 이슬로 신선했다. 바람은 휘파람을 불며 춤추듯 불어와 아름다운 고요를 한층 더 아름다운 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얀 탑에 걸린 불길한 저 별만 없었다면 그 이른 아침의 나들이는 앤과 길버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둘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등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길버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대 안의 오래된 방은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전날 저녁에 작은 파티를 벌이고 남은 음식이 그대로 놓였고 방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등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일등 항해사는 햇볕이 잘 드는 소파 곁 방 한가운데 잠들어 있었다.
짐 선장은 소파에서 《인생록》을 손에 쥔 채 누워 있었다. 가슴팍에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 책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짐 선장의 눈은 감겨 있었고 얼굴은 너무도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찾아다녔던 것을 마침내 찾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무시고 계셔?”
앤이 떨면서 속삭였다.
길버트가 소파로 가 잠시 짐 선장 쪽으로 몸을 숙였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편안히 주무시고 계셔. 짐 선장님은 모래톱을 건너가셨어.” 길버트가 조용히 말했다.
짐 선장이 정확하게 언제 숨을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앤은 짐 선장이 소망하던 대로 아침이 올 때 바다로 떠났다고 믿었다. 저기 바다 저편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타고 짐 선장의 영혼은 떠나갔다. 진주빛과 은빛바다에 떠오르는 태양과 폭풍과 고요를 넘어 잃어버린 마거릿이 기다리고 있는 안식처로 긴 여행을 떠났다.

17.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가 민요 선율에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 <그리운 옛날(Auld Lang Syne)>의 한 구절이다.




40
꿈의 집이여, 안녕






짐 선장은 항구 저편에 있는 작은 묘지에 누웠다. 하얀 작은 숙녀가 잠든 곳에서 아주 가까운 자리였다. 짐 선장의 친척들은 아주 비싸지만 보기는 흉한 기념비를 세웠다. 짐 선장이 보았더라면 쿡 찔러보며 익살스러운 웃음을 터트릴 기념비였다. 사실 진짜 기념비는 짐 선장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길이 남을 책 속에 세워졌다.
레슬리는 짐 선장의 책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한탄했다.
“서평을 보셨으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예요. 거의 모든 서평이 우호적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인 《짐 선장의 인생록》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보셨더라면 기뻐하셨을 거예요. 아, 살아계셨다면 다 보실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앤!”
앤도 슬프긴 했지만 더 현명하게 생각했다.
“짐 선장님이 사랑하신 건 책 자체지 선장님의 평가가 아니에요, 레슬리. 선장님은 책을 다 읽으셨잖아요. 그리고 소망하시던 대로 고통 없이 아침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그날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책이 성공을 거둬 오언이나 레슬리에게 잘됐으니 정말 기쁜 일이에요.”
등대 불은 여전히 밤의 파수꾼 역할을 계속했다. 정부가 수많은 지원자 중에 적당한 사람을 골라 짐 선장의 자리를 물려주든지, 아니면 연줄이 좋은 사람이 이 일을 맡게 되든지 간에 다음 등대지기가 오기 전까지 임시로 일할 사람이 올 것이다. 일등 항해사는 작은 집으로 옮겨와 앤과 길버트 그리고 레슬리의 사랑을 받았고 수잔도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봐주어 편안히 지냈다.
“짐 선장님을 봐서 저 녀석은 참아줄 수 있어요, 사모님. 나도 그분을 좋아했으니까요. 그리고 먹이도 줄 거예요. 쥐덫에 걸리는 쥐도 다 저 녀석 차지가 되겠지요. 거기까지예요. 그 이상은 나한테 바라면 안 돼요, 사모님. 고양이는 고양이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그리고 사모님, 고양이가 사랑스러운 아기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해야 해요. 만약에 저 녀석이 아기의 숨을 핥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고요.”
“그러면 고양이 참사18)가 아닐 수 없죠.”
길버트가 말했다.
“아이구, 지금은 웃음이 나올지 모르지만요, 선생님, 이건 전혀 웃을 일이 아니라구요.”
“고양이는 아기 숨을 핥지 않아요. 그건 그저 미신이에요, 수잔.”
길버트가 말했다.
“아, 뭐 미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선생님.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내 동생 남편의 조카의 부인 집 고양이가 그 집 아기의 숨을 핥았는데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는 그 가엾은 어린것이 이미 죽어버린 다음이었대요. 미신이든 아니든 저 노란 짐승이 우리 아기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이 부지깽이로 저놈을 때려줄 거예요, 사모님.”
마셜 엘리엇과 그 부인은 초록 집에서 편안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었다. 레슬리는 오언과 크리스마스에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그에 맞춰 바느질하느라 바빴다. 앤은 이제 레슬리가 가고 나면 어찌 지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변화는 있게 마련이야. 그저 좋은 변화가 생기기만을 바랄 뿐이지.”
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글렌에 있는 모건 저택을 판대.”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듯 길버트가 말했다.
“그래?” 
앤도 별 관심 없이 대꾸했다.
“응. 모건 씨가 돌아가셨으니 모건 부인은 밴쿠버에 있는 자식들한테로 간대. 집도 싸게 팔 건가 봐. 글렌처럼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큰 집을 처분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 정말 아름다운 집이니까 살 사람이 곧 나타나겠지 뭐.”
앤은 갓난아기에서 유아복으로 갈아입게 될 젬의 옷에 헴스티치를 할까 아니면 페더스티치를 할까 망설이며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우리가 사면 어떨까, 앤?”
길버트가 조용히 물었다.
앤은 바느질감을 놓고 길버트를 가만히 쳐다봤다.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길버트?”
“난 진심이야.”
“그러면 이 다정한 우리의 ‘꿈의 집’을 떠난단 말이야? 아, 길버트, 그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 말 좀 잘 들어봐,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나도 알아. 나도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언젠가는 이사를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아, 하지만 이렇게 일찍은 아니야, 길버트. 아직은 아니라고.”
“아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우리가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살 거라고. 그리고 그 집 말고 글렌에 우리가 정말 사고 싶은 집은 없고, 또 집을 지을 만한 좋은 장소도 없잖아. 이 작은 집은…… 그래, 우리에게 이 집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곳은 없지.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여긴 의사 노릇을 하기엔 너무 외져. 우린 이 집에서 아주 잘 지냈지만 불편하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잖아. 그리고 이젠 너무 좁아. 몇 년 있으면 젬도 자기 방이 필요할 거고 그러면 집이 너무 좁을 거야.”
“아, 그래, 나도 알아, 안다구. 조건이 안 좋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이 집을 너무 사랑해. 그리고 정말 아름답잖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앤이 말했다.
“레슬리가 떠나고 나면 당신도 너무 쓸쓸할 거야. 짐 선장님도 돌아가셨잖아. 모건 저택은 아름다워. 당신도 그곳을 좋아할 거야. 언제나 그 집을 동경했잖아, 앤.”
“아, 그래.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길버트. 어지러울 지경이야. 10분 전만 해도 난 이 다정한 집을 떠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어. 봄이 되면 할 일을 계획하고, 정원에 뭘 심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가 이 집을 떠나면 누가 이 집을 사겠어? 너무 외진 집이라 여기저기 떠도는 가난하고 게으른 사람들이나 세 들어 살게 될 거고, 그럼 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거야. 아, 그건 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을 파괴하는 모독 행위라구.”
“알아. 하지만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집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모건 저택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꼭 맞는 집이야. 더군다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 능력으로는 그렇게 좋은 집을 살 수 없어. 고목들이 서 있는 그 넓은 잔디밭을 생각해봐. 잔디밭 뒤로는 멋진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도 있잖아. 거의 만 오천 평이야.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정말 그만이잖아! 그리고 아주 좋은 과수원도 있어. 당신은 언제나 높은 벽돌담이 정원을 둘러싸고 대문이 있는 집을 동경했잖아. 이야기책에 나오는 집 같다면서. 그리고 여기만큼이나 모건 저택에서도 항구와 모래 언덕 풍경이 잘 보여.”
“하지만 거기선 등대가 안 보이잖아.”
“다락방 창문에서는 보여. 그게 또 좋은 점이라고요, 앤 아가씨. 당신은 커다란 다락방을 좋아하잖아.”
“하지만 뜰에 개울도 없을 거 아냐.”

“그래, 그건 없지. 하지만 글렌 연못으로 이어지는 단풍나무 숲에 흐르는 시내가 하나 있어. 그리 멀지 않아. 당신만의 빛나는 호수를 다시 갖게 될 수도 있어.”
“음, 지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길버트. 생각할 시간을 좀 줘.”
“그래, 좋아. 서두를 건 하나도 없어. 하지만 일단 사기로 결정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이사하는 게 나을 거야.”
길버트는 밖으로 나갔고 앤은 떨리는 손에 쥐고 있던 젬의 옷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날은 더 이상 바느질을 할 수 없었다. 눈물에 젖은 채 앤은 자신이 여왕으로 행복하게 지배했던 그 작은 집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길버트는 모건 저택을 원했다. 그 집은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았으며 적당히 오래되어 위엄이 있고 조용히 쉬기도 좋았으며, 또 편리한 현대식 시설도 갖췄다.
앤은 항상 그 집을 동경했다. 하지만 동경하는 건 사랑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앤은 이 ‘꿈의 집’을 지극히 사랑했다. 앤은 ‘꿈의 집’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앤이 살기 전에 그 집에 살던 여주인이 아끼던 정원을 앤도 사랑했으며 모퉁이를 가로질러 활기차게 흐르는 작은 개울, 끼익끼익 소리를 내는 전나무 사이로 난 대문, 오래된 사암석 계단, 위풍당당한 미루나무, 거실 벽난로 선반에 놓인 고풍스러운 조그마한 두 개의 유리 찬장, 하얀색 부엌 찬장 문, 2층에 있는 우습게 생긴 지붕창 두 개, 계단에 있는 조그마한 돌출부 등 모든 것을 사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앤의 일부가 아닌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단 말인가?
그리고 사랑과 기쁨으로 신성해진 이 작은 ‘꿈의 집’은 앤의 행복과 슬픔으로 다시 한 번 더 신성해지지 않았던가? 이 집에서 앤은 신혼을 보냈고, 조이스는 짧은 하루를 살다 갔으며, 아기 젬이 태어나 앤이 행복한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누렸고 아기 웃음소리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음악소리에 행복했다. 그뿐이랴, 사랑하는 친구들과 벽난로 가에 둘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기쁨, 슬픔, 탄생과 죽음이 이 작은 ‘꿈의 집’을 영원히 신성하게 했다. 그런데 이제 앤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 길버트의 생각에 반대하긴 했지만 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집은 이제 너무 비좁고 길버트가 의사로서 일을 하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길버트는 의사로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집이 외진 곳에 있어 적잖이 곤란을 겪었다. 앤은 이 정다운 집에서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으며 그런 사실을 씩씩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삶에서 뭔가가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아. 아, 이 집에 좋은 사람들이 왔으면, 아니면 차라리 그냥 빈집으로 남아 있는 게 좋겠어. 이 꿈의 땅의 지세나 이 집의 역사, 영혼과 정체성 같은 걸 전혀 모르는 유랑민에게 짓밟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오면 바로 황폐해지고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까. 오래된 집은 조심스럽게 가꾸지 않으면 금세 낡아버리잖아. 그 사람들이 내 정원을 다 파헤쳐버릴지도 몰라. 미루나무도 너덜너덜해지게 내버려둘 테고 울타리 담장은 이가 반쯤 빠진 것처럼 되겠지. 지붕도 샐 테고, 회반죽을 붙인 벽도 떨어져 나가고 말이야. 게다가 그 사람들은 깨진 유리창을 베개나 누더기로 막을지 몰라. 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릴 거야.”
앤은 흐느껴 울었다.
그 작은 ‘꿈의 집’이 훼손되는 상상을 너무 생생하게 하다 보니 이미 그 집이 그렇게 돼버린 것 같아 앤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앤은 계단에 앉아 길고도 아주 서럽게 울었다. 수잔이 그런 앤을 보고 걱정이 되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랑 싸운 건 아니지요, 그렇지요, 사모님? 하지만 싸웠어도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결혼한 사람들은 다 그런다고 들었어요. 선생님도 미안해할 거예요. 그리고 좀 있으면 화해할 거라구요.”
“아니, 아니에요, 수잔. 우린 싸운 게 아니에요. 길버트가 모건 저택을 살 거라고 해서, 그러면 우린 글렌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그래요.”
수잔은 앤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잔은 글렌에서 살게 될 거라는 소식에 너무 기뻐했다. 수잔은 앤의 작은 집이 너무 외딴 곳에 있다며 못마땅해했다.
“어머나, 사모님. 세상에, 너무 멋져요. 모건 저택은 정말 좋고 크거든요.”
“난 큰 집이 싫어요.”
앤이 흐느껴 울었다.
“아이를 여섯쯤 낳고 나면 큰 집이 싫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걸요. 그리고 이 집은 지금 있는 식구만으로도 너무 좁아요. 무어 부인이 이곳으로 온 후로는 손님방도 없지요, 식료품 저장실도 그래요. 난 이렇게 불편한 곳은 처음이라고요, 어디로 몸을 돌려도 코를 박게 생겼잖아요. 게다가 여긴 너무 외져요. 풍경이야 좋지만, 그거 아니고는 뭐 좋은 게 있나요.”
수잔이 말했다.
“수잔의 세계에서는 외진 곳일지도 모르지만, 내 세계에선 아니에요.”

앤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사모님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 물론 난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블라이드 선생님이 모건 저택을 사기로 한 건 정말로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사모님도 좋아하게 될걸요. 그 집은 집 안에서도 물이 나온대요. 식료품 저장실이랑 옷장도 멋지고,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손꼽히는 멋진 지하실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 여기 지하실은 정말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고요. 사모님도 알지 않아요?”
“아, 수잔, 가요. 가서 수잔 일이나 보세요. 지하실, 식료품 저장실, 옷장이 가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요. 우는 사람과 있으면, 함께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앤이 절망에 가득 차서 말했다.
“글쎄요, 난 우는 재주는 없어요. 같이 울어주느니 차라리 일이나 하든지, 아니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써보겠네요. 자, 이제 그만 울어요. 그렇게 우니까 예쁜 눈이 망가지잖아요. 이 집은 아주 예쁘고 사모님에게 즐거운 추억이 깃든 집이죠. 하지만 이젠 더 좋은 집으로 옮길 때가 됐어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수잔과 같은 생각이었다. 레슬리만 앤을 이해하고 공감해줬다. 레슬리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울었다. 하지만 둘은 울음을 그치고 이사할 준비를 시작했다.
“어쨌든 가야 하니까 가능하면 빨리 이사해서 일을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풀이 죽은 앤이 씁쓸하게 말했다.
“글렌에 있는 모건 저택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만큼 오래 살고 나면 사랑하게 될 거예요. 이 집처럼 친구들도 찾아올 테니까요. 집이야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복되게 하는 거죠. 처음에는 그저 집일뿐이지만 세월이 그곳을 진정한 집으로 만들어줄 거예요.”
레슬리가 말했다.
그다음 주 앤과 레슬리는 완성한 옷을 젬에게 입혀보면서 또 한 차례 울음을 터트렸다. 앤은 밤이 되어 아기에게 긴 잠옷을 입히면서도 다시 그런 비극적인 느낌을 받았다.
“다음번엔 멜빵 달린 놀이복, 그리고 바지를 입혀야겠지. 아마 금세 자라 어른이 되어버릴 거야.”
앤이 한숨을 쉬었다.
“흠, 언제까지나 젬이 아기로 있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순진무구한 이 아기를 축복해주세요. 짧은 바지를 입혀놓으니 발이 보이는 게 너무 예쁘네요. 그리고 다림질을 안 해도 되니 너무 좋잖아요, 사모님.”
수잔이 말했다.
“앤, 지금 막 오언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요. 정말 좋은 소식이에요. 오언이 이 집을 사서 여름휴가용 별장으로 사용하겠대요. 앤, 너무 기쁘지 않아요?”
레슬리가 환한 얼굴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 레슬리, 그저 기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너무 기뻐서 현실 같지가 않아요. 이제 이 다정한 집이 반달족 같은 사람들에게 훼손되거나 낡아서 허물어지는 일도 없을 테니 우울해하지도 말아야겠어요. 정말 너무 잘됐어요!”
10월의 어느 날 아침, 앤은 꿈의 작은 집 지붕 아래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날은 너무 바빠서 감상에 젖어있을 틈도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집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고 앤과 길버트만 집 안에서 그들의 ‘꿈의 집’에 작별을 고했다. 레슬리와 수잔 그리고 작은 젬은 마지막으로 가구를 보낼 때 먼저 같이 글렌으로 갔다. 커튼도 없는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말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허전해, 그렇지? 오늘 밤 글렌에서 이 집 생각을 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앤이 말했다.
“우린 여기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그렇지 않아, 앤 아가씨?”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목소리로 길버트가 말했다.
앤은 목이 메어 대답할 수 없었다. 앤이 집 안, 방마다 돌아다니며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길버트가 전나무 대문에서 앤을 기다렸다. 이제 앤은 떠나려 한다. 하지만 이 오래된 집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 멋진 창문을 통해 바다를 내다보면서.
가을바람이 신음하듯 집 주변으로 불어올 것이고, 잿빛 빗줄기가 그 집을 때릴 것이며, 바다에서 하얀 안개가 올라와 감싸 안아줄 것이다. 달빛은 존 선생과 그의 신부가 걸었던 길을 밝힐 것이고, 오래된 항구가 있는 해안에는 마법같이 신비로운 이야기가 계속해서 전해질 것이며, 바람은 은빛 모래 언덕 위로 유혹하듯 휘파람을 불 것이고, 파도는 변함없이 바다 후미 사암석에 철썩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떠나고 없을 거야.”
앤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앤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 잠갔다. 길버트가 미소를 지은 채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대별이 북쪽 하늘에서 반짝였다. 이제는 금잔화만 피어 있는 그 작은 정원은 벌써 그림자 속에 가려졌다.
앤은 무릎을 꿇고 자신이 신부가 되어 넘어온 오래된 계단에 입맞춤을 했다.
“안녕, 내 사랑하는 ‘꿈의 집’이여!”

18. 참사(catastrophe)라는 영어 단어에 고양이(cat-astrophe)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 하게 된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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