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6

3학년2반 | 2022.02.21 06:57:21 댓글: 1 조회: 48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119

제24장 변해 버린 인심
도도하게 굽이치며 흘러오던 드넓은 양자강은 건강 일대 평원 지역에 이르면 한결 뉘엿뉘엿 흘러간다. 부산히 노를 저으며 급히 떠내려가는 배도 몇 안 되고 대부분 그저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서서히 떠내려갈 뿐이었다. 강기슭 가까이에 대 놓은 배도 여러 척 되었다. 개중 하나에 얼굴이 넓적하니 준수하게 생긴 공자 하나가 사뭇 위엄을 풍기며 이물 쪽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각각 농부 차림, 나무꾼 차림, 서생 차림을 한 세 사람이 아무 말없이 그저
묵묵히 공자 뒤에 앉아서, 이물에 앉아 있는 공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물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강호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대리(大理) 황제 남제(南帝) 단지흥(段留興)이었다. 남제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도한 양자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중대한 일로 골똘히 사색에 잠겨 있음에 틀림없었다. 파도는 밀려올 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연신 쏴쏴 휘몰아치며 하얗게 뱃전에서 부서졌다.
남제는 지금 일양지공(一陽指功)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일양지공은 그즈음 큰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의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화산의 무예 시합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그도 무예 시합에 참여해 왕중양이나 황약사, 개방의 소씨 거렁뱅이, 홍칠 등등과 당당히 겨뤄야 했다. 그 외에도 천하에 무림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여들 터였다. 그때 중양궁에서, 화산 무예 시합에서 최후로 이기는 사람이 《구음진경》을 가지기로
약정한 일은 다만 왕중양과 단지흥, 그리고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 도화도 황약사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 제법 한다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터이고 일단 그 소식을 접하고 나면 구미가 당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화산의 무예 시합은 그야 말로 천하 무예 고수들이 다 한데 모여 갖가지 무예를 겨루는 시합장이 될 것인바, 승부를 단언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남제는 세속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 오직 어떻게 하면 일양지공을 더욱 고강하게 연마할 수 있을 것인가만을 연구할 뿐, 무예의 승부와 강약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는 강물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일양지공의 내력도 의당 저렇게 끊임없이 밀려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내공이 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번 손가락을 뻗어 혈도를 찍기만 하면 단번에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절기를 이미 지니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찍고 나면 당분간 내력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공이 끊기지 않고 계속 밀려오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되면 일양지공은 더 더욱 강고해질 터인데……."
남제는 이미 하루 낮 하루 밤을 끼니도 때우지 않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뱃전에 앉아 골똘히 강물만 바라보면서 이 난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즈음이었다. 남제가 타고 있는 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 희끗한 물체가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하며 출렁출렁 떠 내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농부 차림 사내가 제일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치려 하는데 선비 차림이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옷깃을 가만해 잡아당겼다. 농부 차림 사내는 선비 차림을 힐끔 바라보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같소."
그러자 그때껏 잠자코 있던 남제가 그 소리를 듣고는 문득 제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깜짝 놀라 분부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어서 저 사람을 건져라!"
선비 차림 사내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피리를 농부 차림에게 넘겨주고는 물에 텀벙 뛰어들었다. 남방 사람들은 거개가 수영에 능했다. 그 역시 남방 사람으로 능숙하게 손사래를 치며 앞으로 쭈욱 나아가더니 어느덧 한 손으로 그 떠내려오는 물체를 잡고 소리 높이 외쳤다.
"맞습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순식간에 그 사람을 끌고 배 쪽으로 헤엄쳐 왔다. 배 위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끌어올리고는 선비 차림이 배에 오르는 걸 도와주었다.
남제는 물에서 건져낸 사람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 사람은 개방의 신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가! 코에다 바싹 손을 대 봤지만 숨결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히 손목의 맥을 짚어 봤지만 허사였다. 남제는 머리만 가로 흔들 뿐 말이 없었다. 남제의 어(漁), 경(耕), 초(樵), 독(讀) 사대 호위 중 남제 곁에 있던 농부, 나무꾼, 선비 세 사람은 망연히 남제만 바라보았다.
"폐하, 어떻게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남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거늘 구하고 못 구하고가 어찌 인력으로 되겠는고…… 어서 배를 기슭에다 바짝 갖다 대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 사람은 부산스레 노를 저었다. 원래 기슭 가까이에 있었기에 노를 몇 번 젓지 않아 배는 곧 기슭에 가 닿았다. 남제는 수하 셋에게 소씨 거렁뱅이를 업고 배에서 내리라고 명했다. 세 사람은 재게 몸을 놀려 소씨 거렁뱅이를 기슭에 내려놓고, 그의 배를 힘껏 눌러 뱃속에 든 물을 빼냈다. 소씨 거렁뱅이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채 입으로 한 양동이는 됨직한 물을 쏟아 놓았다. 그러자 얼굴은 아직도 종잇장처럼 창백했지만 맥이 조금씩 뛰
는 듯싶고, 숨결도 가냘프게 들려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남제는 얼굴에 희색이 돌며 흥분한 기색으로 외쳤다.
"어서, 어서 부축해 앉히고 옷을 말리게. 불을 지펴, 빨리! 난 진력을 좀 넣어 주겠네."
세 사람은 남제의 분부대로 소씨 거렁뱅이를 부축해 앉히고 저마다 서둘러 불을 지피고, 겉옷을 벗겨 말렸다. 옷을 벗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소씨 거렁뱅이의 등에 난 상처는 여간 깊은 게 아니었다. 마치 등허리 살점을 억지로 잡아뜯은 것마냥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가 지독히도 참혹한 형색이었다.
"폐하, 이 상처……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되어……."
선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제는 길게 장탄식을 하며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우리도 작은 집에서 철장방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나? 이 독약은 구천인 수하들이 쓰는 것인데 일단 사람 몸에 묻기만 하면 살이 썩고 뼈가 녹는 아주 독한 것이라네. 비록 해독은 할 수 있다하나 회복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일단 이 독에 중독된 사람들은 대부분 참혹한 말로를 맞이했네."
수하 셋은 그 말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하나같이 앞으로 철장방 놈들과 맞닥뜨리면 각별히 조심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소씨 거렁뱅이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러나 맥박은 여전히 극히 미약했고, 동공도 크게 확대되어 그저 허공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따끔 들릴락말락 헛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이 소씨 거렁뱅이는 다른 데도 상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데…….'
남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수하들에게 소씨 거렁뱅이의 옷을 홀딱 벗기고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라고 명했다. 하나 등말고는 아무데에도 무슨 상한 흔적이라곤 없었다.
"자네들이 잘 잡고 있게. 어디 내가 한번 살펴보겠네."
남제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훑어보다가 드디어 목 양켠에 각각 자그마한 붉은 점이 하나씩 찍혀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탄식했다.
"아, 악독한 놈…… 악독한 놈……. 자네들은 구양봉이란 악당놈을 본 적이 있나? 사람들이 하나같이 구양봉이 들고 다니는 사장은 악독하기 그지 없다고 하더니만, 이 소씨 거렁뱅이는 그 놈에게 당한 게 틀림없구먼. 사장엔 아주 독한 독사가 두 마리 있다는 데 그 독사한테 물리기만 하면 살아 남는 사람이 없다네. 이 상처를 보게. 이건 필시 그 독사들에게 물린 이빨 자국이야. 한데 양켠의 이빨 자국이 각기 다른 걸로 봐서 두 마리가 똑같은 독사는 아니란 말일세."
남제의 말에 세 사람은 유심히 그 상처를 살펴보았다. 과연 오른쪽 목에 난 이빨 자국은 깊고 좁았으며, 왼쪽 것은 얕고 컸다. 셋은 모두 등골이 오싹해지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폐하! 그렇다면 이 사람을 살려낼 수 있사옵니까?"
농부가 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남제는 침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내 보기엔 어찌 어찌 살릴 수는 있다 해도 영 반병신밖에 못 되겠군. 이거 정말 큰일일세."
그 말에 세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한숨만 지었다. 남제도 가볍게 탄식하더니 기도를 드렸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이 사람이 성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남제는 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기더니 수하 셋에게 얼른 나무를 엮어 들것을 만들게 했다. 들것이 다 만들어지자 네 사람은 소씨 거렁뱅이를 그 위에 눕히고 길을 떠났다.
홍칠은 범장천과 노명성이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그들이 그 계집에게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 계집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자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계집이 범장천의 가족을 해치겠다고 협박하여 그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했으며, 노명성에게는 비록 근심할 가족은 없으나 그가 지난날 나쁜 짓을 일삼은 적이 있어 계집이 그것을 꼬투리 잡으려 하자 노명성은 그만 단박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
해 벌벌 떨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말대로 그들은 마음이 내켜 계집의 앞잡이질을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뭐라고 딱 단안을 내릴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홍칠은 일단 두 사람을 만나 직접 타진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사람을 풀어 그들 두 사람을 찾아냈다. 마침내 임안 자운재(紫雲齋)에서 두 사람과 만나기로 약정이 됐다.
홍칠은 임안에 이르러 곧장 임안 4대 명소 중 하나인 화방(書舫) 자운재를 찾아갔다. 자운재는 임안의 명소답게 풍광이 뛰어났다. 그는 누각 위로 올라가 정좌하고 앉았다. 짐짓 경치를 감상하는 듯 했지만 그는 한곳만을 골똘히 응시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고요히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에서 두 사람이 느려터진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범장천
, 노명성이었다. 홍칠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앞만 똑바로 노려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모습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 여보 주인장!"
마침내 누각 아래에 당도했는지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주인부터 불렀다.
주인은 급히 달려 나오다가 두 사내가 비단옷을 걸친 것을 보고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어서, 어서, 누각 위로 오르십시오!"
범장천은 누각 아래쪽을 둘러보다가 홍칠이 보이지 않자 위에 있으리라고 짐작하고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누각 위에도 앉을 자리가 있겠지?"
"있지요, 있다뿐이겠습니까."
주인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구부린 채 두 사람을 누각 위로 안내했다. 홍칠은 그들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꿈쩍도 안 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내심 참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개방을 배반하고 소씨 거렁뱅이와 소검 오평을 해친 일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에 저마다 참혹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홍칠을 대하니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홍칠은 덤덤하니 손을 흔들었다.
"두 장로는 거기 앉소!"
범장천과 노명성은 송구스러운 듯 의자 한 귀퉁이에 엉덩짝을 들이밀고는 가만히 홍칠의 말을 기다렸다. 홍칠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운산 방주님께서는 생전에 일찍이 오늘과 같은 때를 예측하시고 이미 나를 개방의 새 방주로 정해 두셨소. 더불어 차제에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그리고 또 타주 몇 사람의 공동 추천이 있어 나는 개방의 새 방주가 되었소."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의 말에 뜨끔했다. 두 사람은 기실 이때껏 개방 방주 자리를 노려 왔으며, 그런 허욕에 불타 오늘날 이렇듯 사악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홍칠이 이미 개방의 새 방주가 되었다고 하자 그들 둘은 자기들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토록 악행을 저지르고 죄업만 쌓았는데 어느 누가 자기들을 개방 방주로 추대해 주겠는가. 그렇다고 그 여인 쪽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
때 배 위에서 홍칠을 죽이지 못한 것으로 책을 잡아 은근히 따돌리는 눈치일 뿐만 아니라, 과시하듯 과이야를 죽여 겁을 주지 않던가. 이리저리 두 사람은 후회막급한 심경이었다.
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앉은 자리에서 홍칠에게 굽실 절을 올렸다. 주루(酒樓) 안이라 절만 했을 뿐 개방의 신임 방주에게 예를 갖추는 격식대로 침을 뱉는 것은 생략했다. 홍칠은 이제 그만 하라는 뜻으로 손을 내젓고는 물었다.
"두 장로는 미기를 못 보았소?"
범장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개방 방주…… 아니……."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짜 미립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홍칠이 이미 방주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상 그 앞에서 그 여인을 방주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어떤 다른 칭호도 쓸 수가 없어 매우 난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 여인의 말에 의하면, 구양봉이 그 여인의 분부를 받들어 미운산 방주님을 살해하였는데, 그는 비단 미운산 방주님뿐만 아니라 미운산의 가족들과 소 방주님까지도 모두 살해한 모양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범장천, 노명성은 일제히 머리를 푹 숙였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 몇이 그 여인의 수하로 들어가 충복 노릇을 하지 않았던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계략이 뛰어나다 해도 그 여인 독단적으로는 그런 악행을 자행할 수 없지 않은가. 홍칠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에 대해선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그 계집은 지금 뭘 하고 있소?"
홍칠의 목소리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다소 주저하면서도 사실 그대로 여인의 계획을 홍칠에게 다 알려 주었다.
'몹쓸 계집년! 네 년이 날 죽여? 까마귀 꿩 잡아먹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홍칠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내내 조심스러이 홍칠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홍칠이 별다르게 분노하는 기미가 없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범장천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방주님, 저와 노 장로가 저지른 죄,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 두 사람은 새로이 각오를 다졌습니다. 앞으로는 개방 형제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홍칠은 굳이 이 마음 저 마음 품어 보려 하지 않았다. 저들이 저토록 공손하게 나오는데야 쓸데없이 의구심을 품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누 아래쪽에서 소란스레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를 누 위로 안내하라니깐!"
뒤미처 주인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안 됩니다. 그런 옷차림으로는 누 위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이 아래에 계십시오. 대접은 결코 소홀치 않겠습니다."
주인이 극구 말리는데도 그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아니, 못 비켜? 그럼 내 주먹 맛을 한번 보겠다는 거야, 엉?"
그 사람은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힐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바로 개방 금의파 장로인 출수표 노경이 아닌가. 둘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홍칠에게 말했다.
"방주님, 잠시 몸을 피하십시오! 저자는, 저자는 출수표 노경입니다. 우리가 저자를 멀리 데리고 갈 테니 어서 자리를 피하세요, 어서요!"
그러나 홍칠은 입가에 가볍게 냉소를 흘릴 뿐 꿈쩍도 안 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이 노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새 방주의 담략이 보통이 아니라고 내심 탄복하였다. 그들 둘은 평소 노경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닌데다가, 노경은 자원하여 그 여자의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노경이 누각 위로 올라오면 필시 난리가 나고야 말리라고 두 사람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안절부절못했다.
마침내 주인을 밀치고 노경은 누각 위로 뚜벅뚜벅 올라왔다. 홍칠과 개방 금의파 장로인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냉소를 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출수표 노경은 세 사람 앞으로 유유히 다가서서 도포 앞자락을 확 열어제쳤다. 허리에 넓은 띠 같은 것을 둘렀는데, 필시 암기를 많이 넣어 둔 암기 띠임에 분명했다. 그는 암기 대가로서 몸통 앞 뒤 어디에나 암기 자루를 주렁주렁 달고 다녀서 보기만 해도 흉맹스럽기 짝이 없었다.
노경은 차디찬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범 장로, 노 장로!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옳든 그르든 간에 한 번 결정했으면 결정한 대로 행해야지, 이 무슨 망발이오? 미 방주를 버리고 새 방주를 따르기로 했으면 일심으로 새 방주를 보좌함이 지당하거늘 장로님네 둘은 왜 이 모양으로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오? 미 방주를 배반하더니 이번엔 또 그 여인을 배반해? 이게 어디 소인배들의 작태지 대협이 할 짓이오?"
개방 10대 장로로서 평소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높던 범장천과 노명성은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건만 노경의 이 말에는 얼굴만 하얗게 질릴 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두 사람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고 홍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출수표, 말은 호탕하게 잘하는구려. 그러나 그대도 조심하시오! 그 여인이 갖은 계책으로 개방 방주 자리를 빼앗아 우리 개방을 없애려고 작당을 부리는데, 그댄 그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면서요? 그것도 사내대장부의 소행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댄 그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오?"
"입 닥치시오! 그런 알량한 소리로 내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고 수작을 부려 봐야 꿈쩍도 않을 테니 꿈도 꾸지 마시오!"
출수표 노경은 큰소리를 쳤다.
출수표 노경은 평소 과묵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도 철저하게 그 계집의 꽁무니를 따르리라고는 홍칠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는 놀랍기도 하고 성도 나서 탁상을 쾅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범장천이 기괴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강물도 굽이쳐 돌다가 똑바로 흐르고, 사람도 잘못을 고치면 새 사람이 된다. 나와 노 장로는 지난날 과오가 한두 가지가 아니나 과거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고자 결의를 다졌다. 우리는 이제 홍 방주를 받들어 모시고 개방을 예전처럼 진흥시키는 데 매진하려 한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네 잘못을 인정치 않고 그토록 좁은 소견으로 남을 헐뜯으려 드니, 정히 그렇다면 내 너에게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출수표 노경은 코웃음만 쳤다.
"당신들 둘의 재간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만의 하나, 당신들 손에 죽는다 해도 그뿐, 난 조금도 겁내지 않소."
홍칠은 원래 노경에게 그 계집을 떠나 개방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려 했었다. 한데 노경은 의외로 완강했다.
'소검 오평과 그 계집은 서로 치정으로 얽혀 있고, 또 미운산 방주도 그 계집의 요염한 미색에 미혹되어 그 결과 오늘날 개방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나도 알고 있는 바이나, 출수표 노경 이 작자도 그 여인과 무슨 치정 관계에 있단 말인가?'
홍칠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범장천은 천천히 걸어 나가 출수표 노경과 두 장 거리를 두고 섰다. 중간에는 탁자 세 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내 삼십육식 탈혼장(三十六式奪魂掌)을 받으라! 단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고분고분 홍 방주님의 말을 따르면 목숨은 살려 줄 터인즉!"
그러자 출수표는 옷자락을 확 가르며 크게 웃었다.
"이미 지난번 과청천 제갈옥생 손에 한 번 죽다 살아난 목숨! 다시 태어난 몸이나 진배없으니, 내 오늘은 기꺼이 너에게 죽어 주마!"
출수표는 범장천을 노려보며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홍칠이 고함을 내질렀다.
"잠깐!"
범장천은 홍칠의 말에 급히 손을 거두었다. 홍칠은 범장천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방금 그가 섰던 자리에 대신 가 섰다.
"노 장로, 먼저 나와 겨루어 봅시다! 암기는 모두 얼마나 지니고 있소?"
홍칠이 노경을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육십네 개요!"
"많지도 적지도 않구먼."
출수표는 홍칠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공, 이번의 이 난이 없었다면 나 출수표 노경도 당신이 방주가 되는 것을 찬성하였을 거요. 당신의 무공이 나보다 훨씬 출중하기에 나를 죽이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임을 나도 아오. 그러나 나를 죽이기 전에 그대는 반드시 내 육십네 개 표창 맛을 보고 염라부 문전에 한번 갔다 와야 할 거요."
출수표 노경은 자기의 육십네 개 표창을 철석같이 믿고는, 비록 홍칠의 무예가 자기보다 한 수 위라 해도 한가닥 요행수를 바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홍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 장로, 난 그저 여기 가만 서 있기만 할 테니 마음대로 해 보시오. 그 육십네 개 표창 중에서 하나라도 나를 맞힌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 추궁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대를 돌려보내겠소. 그러나 만일 하나도 못 맞힌다면 안됐지만 그 목숨은 여기 두고 가시오!"
"좋소!"
출수표 노경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결연히 말했다.
출수표 노경과 홍칠은 석 장 사이를 두고 섰다. 홍칠은 밝은 데 서고 노경은 어두운 데 서 있었다. 자운재 창문으로 비쳐 드는 햇빛에 홍칠 쪽은 환히 밝은데다가 어디 한구석 몸을 피할 곳도 없어 홍칠은 그야말로 천상 표적 감이었다. 출수표의 표창 육십네 개가 일시에 날아든다면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고서는 절대 그 표창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출수표 노경은 한바탕 웃음을 토해내더니 외쳤다.
"홍칠공! 자, 내 표창을 받으시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쉭쉭쉭 정신없이 표창이 날았다. 표창은 두세 개씩 혹은 일고여덟 개씩 짝을 지어, 혹은 두 개가 서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가 다시 반사되어 날아가기도 하면서 연신 홍칠을 향해 날아갔다. 하도 빨리 날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표창 육십네 개가 순식간에 모두 홍칠에게 날아들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의 무예가 노경보다 훨씬 뛰어나기에 아무리 표창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일단 그가 손을 뻗치기만 하면 이 표창들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 자신들도 막아낼 수 있는 판에 홍칠이야 더 말할 게 무언가. 그러나 육십네 개 표창이 쌩쌩 날아드는데 도 홍칠은 발 한 번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눈 한 번 깜빡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엉겁결에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눈을 번쩍 뜨고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는 입이 헤벌어졌다. 표창은 단지 앞, 뒤, 옆, 탁자 위,
땅 위 등 홍칠을 에워싸고 사방으로 날려 꽂히며 홍칠을 옴쭉달싹 하지 못하게 했을 뿐, 홍칠의 몸에 꽂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을 바라보며 감탄하여 부르짖었다.
"대단하오! 대단한 담력이오!"
홍칠은 여전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노 장로, 내 보기엔 노 장로는 그 계집의 무리가 아닌가 싶소."
그러자 출수표는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웃어젖혔다. 그는 내심 홍칠의 담력에 탄복하며 연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담력과 의리를 가장 중히 여긴다. 그는 홍칠에게 과인한 담력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그야말로 방주의 소임을 떠메고 나갈 수 있는 적임자라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홍칠은 웃음기를 머금고 노경을 바라보았다.
"노 장로, 날 찾아온 걸 보니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한데, 대체 무슨 일이오?"
노경은 범장천과 노명성을 돌아보며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분명 그 둘이 꺼려져서 말을 못하는 눈치였다.
"범 장로와 노 장로가 있어도 괜찮으니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시오!"
그러자 출수표는 웃음을 거두고 정중하게 말했다.
"홍칠공, 나를 따라오시오."
홍칠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노경을 따라 나섰다. 노명성과 범장천도 홍칠이 혹 무슨 꾐에 빠져 들지 않을까 염려되어 함께 따라가려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홍칠은 빙그레 웃으며 만류했다.
"겉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출수표 노경은 결코 그 계집의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두 분께서는 너무 염려 마시오. 그리고 두 분은 어서 그 계집에게로 돌아가 그 계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하시오! 지금 두 분이 할 일은 바로 그것이오!"
홍칠이 그렇게 나오자 범장천과 노명성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굽실 읍을 했다. 홍칠은 노경을 따라 자운재를 떠났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을 데리고 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구불구불 돌아 어느 자그마한 집 앞에 이르더니 발길을 멈췄다. 홍칠은 의아해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노경의 뒤를 따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더니 훌쩍 담장을 뛰어넘었다. 홍칠도 뒤따라 담장을 넘었다.
"이제 오세요?"
발자국 소리를 들었음인지 안에서 웬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뭇 반가운 기색이었다.
홍칠은 그 소리에 노경 뒤로 성큼 다가섰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뛰어나왔다.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바로 미기였다. 미기는 홍칠을 보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미기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어리벙벙해져 아무 말도 못했다.
"미기야!"
홍칠이 소리쳤다.
그러자 미기는 한달음에 달려와 홍칠의 품에 매달렸다. 아이의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홍칠은 한동안 가만히 미기를 품에 안고 말없이 서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자기를 원망하던 미립의 그 눈길도 눈앞을 스쳐 갔다. 이제 미기를 찾았으니 미운산 방주의 영령에 한 가닥 위로는 되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미립까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미립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홍칠은 감개와 비애가 엇갈려 말할 수 없이 착잡했
다.
"우리 누나는요? 우리 누난 무사한가요?"
미기는 눈물을 훔치며 다그치듯 물었다. 홍칠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나는 무사히 잘 있다. 염려 말아라."
그 얼마 동안 미기도 꽤 철이 들고 성숙해 있었다. 그는 홍칠의 말투에서 그가 그 어떤 말을 숨기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노 장로, 개방을 대표하여 노 장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홍칠은 출수표 노경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나는 이미 개방 형제들이 홍칠공을 새 방주로 내세운 것을 알고 있었소. 정말 기쁜 일이오! 나도 일심으로 개방을 진흥시키고자 전심전력 다할 것이오!"
그 말을 듣고 홍칠은 감격하여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개방의 앞날에 먹구름만 드리운 줄 알았는데 이렇듯 범장천, 노명성 그리고 노경까지 다시 개방에 돌아오기를 숙원하니 어찌 개방이 비운하다고만 할 순 있겠는가. 이 세 장로에 집법장로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까지 합치면 살아 있는 개방 장로는 대부분 다시 개방으로 돌아온 셈이 된다.
홍칠은 가슴이 부풀어올라 개방의 금의파, 오의파 장로 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일점지 나장태를 직접 찾아가 설복해 보리라고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나장태만 돌아온다면 개방은 이제 옛 면모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홍칠은 결연히 말했다.
"노 장로, 지금 당장 나와 갈 데가 있소!"
출수표 노경은 읍을 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방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나 장로를 찾아가려 하오. 가서 다시 개방으로 돌아오라고 설복해 볼 작정이오!"
출수표 노경은 얼굴을 굳힌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장로들 중에서도 일점지 나장태와 부귀산인 범장천 그리고 청한자자 노명성, 이 셋을 가장 하찮게 보고 있었다. 이들 셋은 모두 방주 자리를 탐내는 야심가들이다. 노경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방주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범 장로나 노 장로, 그리고 이 나장로는 개방과 한마음 한뜻으로 일하기가 매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들 셋은 비록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했으나 야심이 많고 심보가 바르지 않으니 방주님께서는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홍칠은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무슨 뜻이신지 잘 알겠소. 하나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오."
홍칠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이 나온 김에 그 길로 곧장 일점지 나장태를 찾아볼 작정이었다. 홍칠의 결의가 남다른 것을 알고는 출수표 노경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이럽시다. 일단 가서 그 사람을 만나봅시다. 하나 여차직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손을 쓰겠으니 밖주님은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그 말에 홍칠은 크게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엄중하려구?"
"내 말대로 하시지 않겠다면 난 가지 않겠습니다."
홍칠은 출수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개방 방주로서 자기가 개방 대사를 어깨에 지고 나가야 하는데 만의 하나라도 자기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이는 개방 전체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출수표 노경은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홍칠은 그에게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 알겠소. 그러지요. 노 장로님 말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미기를 남겨 두고 개방 오의파 장로인 나장태를 찾아 떠났다. 나장태는 시정배 출신으로 시장 바닥에서 구걸을 일삼는 거렁뱅이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는데 개방에 들어와 운이 터서 강호에 자자하게 명성을 날렸다. 그는 개방에 든 다음에도 예전대로 시정에서 살면서 개방엔 아주 드물게만 드나들었다. 그런 고로 그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글쎄 나장태가 거기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나를 따라 거기부터 가 봅시다."
출수표 노경은 한마디하더니 청하니 길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임안 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여러 개 돌아 한곳에 이르렀다. 양켠에 높직높직하게 담벽이 솟아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집 집마다 문들을 모두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다. 출수표는 그 골목길을 따라 또 한참을 걸어서야 한 자그마한 낡은 문 앞에 이르렀다.
"자, 여깁니다. 한번 들어가 봅시다."
홍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경이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누구요?"
"누더기 옷을 입고 이 빠진 사발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헌 지팡이로 헌 문을 두드리고 있소."
출수표 노경이 대답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반쯤 문을 열고 하품을 하며 내다보았다. 홍칠과 노경은 그 틈으로 잽싸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사람은 급히 문을 닫았다. 들어가 보니 뜨락은 매우 넓었다. 그 넓은 뜨락 여기저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뜨락 한켠 우물 옆에는 아이들 한 무더기가 오밀조밀 몰려 서서 한 사나이가 개 잡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달아맨 개 한 마리를 주둥이에서부터 쭉 가죽을 벗겨 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개는 아직 숨이 넘어
간 게 아니라서 몸서리쳐지도록 비명을 질러댔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흠모 어린 눈길로 넋을 놓고 그 사나이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뜨락 한켠에 있는 탁자에서는 사나이 예닐곱이 주사위를 놀고 있었다. 낭하에서는 사나이들 몇이 큰 솥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고 있었고, 더러는 공중제비를 돌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제 나름의 재간을 뽐내고 있었다. 무술깨나 하는 놈들 같았
다.
아무리 봐도 개방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한 사람 홍칠과 노경을 개의하려 들지 않았다. 홍칠은 금방 문을 열어 준 키 큰 사나이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 어귀에는 언뜻 봐도 무예가 만만치 않을 성싶은 장한이 서넛 서 있고 그 맞은편 의자에 일점지 나장태가 앉아 있었다. 홍칠은 나장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나장태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지금 한창 몸이 달아 그대를 찾고 있는 판인데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다니……. 내가 그대를 붙잡아 그녀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걸 두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한다던가!"
홍칠은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장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개방에도 되다 만 놈들이 적지 않거든. 나는 종래로 우리 거러지 개방에 그 무슨 금의파니 뭐니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래, 비단을 몸에 걸치고 네활개를 치며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거러지 개방 사람입네 하면 부끄러운 노릇 아니겠소?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웃으며 손가락질할 일이오! 난 범장천이나 노명성 따위를 가장 미워하오. 사람이 뜻을 품었으면 먼저 인심부터 사야 하거늘……. 그댄 옛날 맹상군(孟嘗君)의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
홍칠은 정중히 대답했다.
"모르오!"
그러자 일점지 나장태는 장황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춘추 전국 시기에,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제(齋)나라의 맹상군,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룽군(信陵君), 네 공자가 있었는데 당시 이들은 천하에 이름난 사군자(四君君子)로서 모두 제 집에 아주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춘신군이 거느린 식객들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집 계집종들까지도 큰 구슬이 달린 신을 신고 다닐 만큼 의복도 퍽이나 버젓했다. 그런가 하면 맹상군은 재
산과 능력은 이 춘신군보다 더하였으나 그의 식객들은 결코 출신군의 식객만 못하였다. 맹상군에게는 풍훤(馮 )이라는 식객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맹상군이 풍훤더러 위나라로 가 빚을 받아 오라 하였다. 풍훤은 위나라로 가서 빚을 갚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다 놓고 빚 문서를 몽땅 태워 버리면서 말했다.
"맹상군께서는 자네들이 불쌍해서 빚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빚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네들에겐 빚이 하나도 없다."
그러자 위 땅의 사람들은 감지덕지 좋아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맹상군은 풍훤이 돌아오자 빛을 얼마나 받아 왔는가 재우쳐 물었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풍훤은 오히려 자기가 그 빚돈으로 의(義)를 사왔다고 대답했다. 맹상군은 심히 불쾌했지만 일이 이왕지사 그렇게 된 바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후 과연 맹상군이 화를 만나 위 땅으로 피란 가게 되었을 때 위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 백성들이 백 리 밖에까지 나와 맹상군을 임금처럼 모셔 갔다는 것
이다.
맹상군의 일화를 홍칠에게 들려주며 일점지 나장태는, 세상 큰 일을 하려는 자들은 모두 그에 맞는 수단을 쓰는바, 청한자자 노명성이나 부귀산인 범장천 같은 사람들이 자기 집 재물을 나눠 주고 개방에 들어올 적엔 필시 그보다 더 큰 이익을 노렸음에 틀림없다고 의미 심장하게 덧붙였다.
홍칠은 그 말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들어넘겼다. 범장천과 노명성에 대한 나장태의 경계심을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에 대해 뭐라 변해할 생각도, 딱히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하면서 나장태에게 말했다.
"이때까지 우리 개방에선 금의가 옳으냐 오의가 옳으냐 옥신각신이 많았소. 하나 기실 금의건 오의건 그건 큰 문제가 아니오. 문제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광명정대해야 우리 개방사람답다는 것이오."
일점지 나장태는 홍칠의 말이 듣기 거북한지 그저 담담히 웃어보일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나 장로, 개방 일은 지금까지 미운산 방주님이 주재하셨지만 미운산 방주님이 타계하셨다고 하여 우리 10대 장로가 자기 잘못을 서로 남한테 덮어씌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나 장로도 미운산 방주님을 살해하는 데 단단히 한몫 했으니 미운산 방주의 명령이 결코 용서치 않을 게요. 미 방주께서는 지하에서나마 우리가 다시 개방을 진흥시킬 것을 학수고대하고 계실 터인즉, 나 장로 생각은 어떠하신지? 우리 개방을 도울 수 있으시겠는지? 부귀산인과 청한자자,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노 장로는 이미 우리 개방으로 돌아섰소."
홍칠이 일사천리로 쏟아 놓자 나장태는 크게 웃어젖혔다.
"홍칠공, 나를 속이려고 그따위 잔꾀를 부리다니. 그대가 이미 범장천과 노명성을 만났고 또 저 출수표 노경도 만난 걸로 봐서는 개방 금의파와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뭣 때문에 나 같은 걸 찾아온 게요?"
그 말에 홍칠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일점지 나장태는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다른 말 말고 어서 여기서 나가시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난 상관 안 할 테니 그대도 날 간섭치 마시오!"
홍칠은 원래 나장태를 설복하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고작 몇 마디 말에 이렇듯 나장태가 성화를 부리니 딱히 할말을 잃고 말았다. 나장태의 대갈일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들짝 문이 열리며 장한 몇이 들어섰다. 개중 하나는 피투성이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아까 뜰에서 본 그 개 잡던 사내였다. 그는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더니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허공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가는 낚아채듯 잽싸게 받아 잡기를 되풀이하면서 출수표 노경을 똑바
로 노려보았다. 그 칼로 출수표 노경과 한차례 자웅을 겨루어 보자는 눈치였다. 출수표 노경은 눈들이 사나워 당장이라도 손을 쓰려고 허리춤께에서 손을 움찔거렸다. 홍칠이 얼른 가로 막았다. 그리고는 나장태에게 말했다.
"나 장로, 나 장로는 나와 노 장로가 여기 온 것을 그 여인에게 고해 바칠 생각인지 어떤지 모르겠소."
나장태는 껄껄껄 웃어제쳤다.
"날 그렇게 얕잡아 보다니! 그대와 출수표가 여기 온 일을 그 여인에게 고해 바칠 내가 아니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시오. 난 결코 그댈 돕지는 않소! 그러나 만약 그대가 장담한 대로 개방을 다시 진흥시키지 못한다면 그땐 내 가만있지 않으리다! 개방 72개 분타 타주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그댈 방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 테니까."
나장태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홍칠은 그 말을 듣고 나장태가 비록 속이 좁고 성미가 괴팍하기는 하나, 그래도 나름대로는 꿋꿋한 사내대장부로 그 여인과 콧김을 같이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좋소. 난 그 말을 믿고 조용히 이곳을 떠나겠소."
홍칠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허리를 굽혀 읍을 하고는 출수표 노경을 데리고 천천히 방을 나왔다. 뜨락에는 이젠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에 시정배들만 모여 앉아 있는데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길로 홍칠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일점지 나장태에게서 한마디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나 장로는 비록 성미가 괴팍하다고는 하나 여느 시정배들과는 부류가 다르다. 이런 사람이 우리 개방에 합세한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겠는데…….'
홍칠은 아쉬운 생각을 뒤로 남긴 채 그 집을 나왔다. 두 사람은 양켠 담벽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여러 번 꺾어 돌아 임안 대로로 나왔다. 두 사람은 거기에서 서로 작별을 고하고 헤어졌다.
홍칠이 숙소로 돌아오니, 집법장로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칠이 사부님인 소씨 거렁뱅이의 행적을 알았느냐고 묻자 두 집법장로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얻어들은 소리지만,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 방주님 등 네 사람이 개방 대회에 참가하여 그 여인의 정체를 폭로하고자 용골묘로 가던 도중 고수 하나가 막아 나서서 혈투가 벌어졌는데 그 사람이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 강물에 처넣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놈은 미운산 방주님을 칼로 찔러 가슴에 관통상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운산 방주님은……."
홍칠은 손을 내저었다. 그 역시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다만 사부님의 생사만이 확실치 않았는데 사개 정원의 말로 미루어 사부님은 이미 타계했음에 분명했다. 그는 비통하기 그지없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소미타 추우가 말했다.
"호기를 노려 그 계집년과 한판승부를 겨뤄야 합니다! 그 계집에게서 개방 방주의 녹옥죽봉을 빼앗고, 계집의 목을 따 미운산 방주님의 영령에 제를 올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결단코 그래야 합니다.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오. 우린 얼마간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야 하오."
사개와 추우는 홍칠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계집 곁에 대내오주와 개방의 사람들만 있다면 아무 어려움도 없겠지만,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천하 일등 고수 구양봉이 입에 혀처럼 계집의 뜻을 받들고 있지 않은가! 그 둘을 미리 처단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그 계집을 처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임안 경내에 동사조항(東斜條巷)이라 이름이 붙은 골목이 하나 있다. 이 골목을 끼고 작은 개천이 하나 흘러가고, 그 위로 돌다리가 하나 가로지르고 있다. 그 돌다리 바로 옆에 여염집이 하나 있었는데 식구가 다섯이었다. 주인 사나이는 마흔 남짓으로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 아내는 늘 마당에 서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자식 셋을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지켜 보곤 했다. 사내아이가 둘, 계집아이가 하나인데 사내아이는 각각 열대여섯 살, 열한두 살쯤 돼 보이고 계
집애는 일고여덟 살쯤인 듯했다. 셋 모두 귀여운 얼굴이다. 언제나 웃음이 가시지 않는 화목한 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러자 이 집 주인은 급히 아이들을 불러 집 안으로 들여 보내고, 여인도 집 안으로 피하게 했다. 그리고는 대문으로 다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어서 문을 여시오. 범 장로가 계시지 않아 노 장로께서 손수 이 물건을 갖다 드리라고 하셨소."
주인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 밖에 웬 거지가 하나 서 있었다. 그는 적이 한가롭게 좌우를 둘러보다가 대문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왼손에 큰 보따리를 하나 들었는데 모서리가 울퉁불퉁한 것이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은 생면부지의 사람인지라 선뜻 문을 열지 않고 동태만 살폈다. 그러자 문 밖의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어서 문을 열어요! 범 장로도 계시지 않지, 범 장로와 이 집이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노 장로가 이것을 이 집에 갖다 주라고 해서 왔단 말이오! 어서 문을 열어욧!"
주인은 다시 내다보았다. 밖에는 확실히 그 거지 하나밖에 없었다. 무슨 나쁜 짓을 하려 해도 저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겠거니 마음을 놓고 주인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보따리만 받고 얼른 되돌려보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거지는 문이 열리자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노 장로가 이 보따리를……."
거지는 말을 채 마치지도 않고 돌연 보따리를 주인에게 내던졌다. 주인도 무예를 아는 사람이라 급히 피하긴 했으나 얼마나 쏜살같이 날아왔는지 그만 주인의 귓전을 휙 스치고 말았다. 그의 귀에선 금세 피가 흘러내렸다. 주인은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심상찮은 눈빛으로 그 거지를 쏘아보았다. 거지는 냉큼 한걸음 다가서며 주인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주인은 삼십육식 탈혼장을 펼치며 가볍게 피했다. 그 법수는 신통히도 개방 장로 부귀산인 범장천을 꼭 닮
았다.
거지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여유작작 웃음을 흘리며 집주일의
대혈을 똑바로 찔러 왔다. 집주인은 또 살짝 피해 냈다. 두 사람은 서로 법수를 펼쳐 내며 몇 합을 싸웠다. 승부는 쉽사리 판가름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거지는 혼자 힘으로는 안 되겠는지 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개방 복색을 한 사람들이 한 무리 뜰 안으로 들어왔다. 놈들은 대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주인을 에워쌌다.
"네 놈이 범옥(範玉)이렷다?"
한 놈이 쌀쌀맞게 물었다. 주인은 자못 위엄을 갖추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모양새도 범장천과 흡사했다
"이 집 제일 큰 주인 범장천은 우리 개방을 배반했다. 그러니 너의 일가는 살아 남을 생각은 아예 마라!"
제일 먼저 문을 두드렸던 사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집 안에서 사내아이 둘이 뛰쳐나와 아버지 범옥 앞을 막아서며 괴한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어린 계집애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문 앞에 나타났다. 어린 계집애는 자기네 집에 뛰어든 사람들이 괴한인 줄도 모르는지 새까만 눈망울을 또랑또랑 굴리며 이 사람 저 사람 살펴보았다.
"개방 오의파 장로인 일점지 나장태는 새 방주 홍칠공의 명을 받잡고 너희들 온 가족을 멸하려 한다."
사내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몇 놈이 일시에 달려들어 먼저 여인 품에서 계집애를 빼앗으려 했다. 계집애는 기겁을 하며 앙앙 울어댔다.
"아이는 다치지 마라. 죽이려면 날 죽여라, 이 놈들아!"
범옥이 소리쳤다.
"흥, 네 차례도 있으니 걱정 마라. 오늘은 네 집 식솔들이 모두 빠짐없이 저승길로 행차할 터이니 먼저고 나중이고 따질 것 없다!
이 집에 우물이 있겠지?"
사내 하나가 소리쳤다.
범옥은 이 사내의 심사를 미리 알아채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철부지 계집애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어서, 어서 대 줘요. 이 사람들이 날 잡아가려 해요. 아빠, 어서…… 저기…… 저기…… 우물이 저기……."
계집아이는 우물 있는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우물은 뜨락 한 귀퉁이에 있었다. 사내는 어린 계집애를 우물 곁으로 끌고 갔다.
"네 할아버지가 가산을 싹 나눠 주고 이 자그마한 울안에서 너희들을 고생시켰다. 부귀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며 살던 부자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단 말이다. 흐흐흐……. 그러나 심 보를 곱게 써야지, 그 놈은 양심이 글러 먹었거든. 그 계집을 따라 개방을 배반하고 미 방주님을 죽였단 말이다. 그런 악행의 대가로 오늘 너희 일가는 비명에 죽어야 한다. 알겠느냐!"
사내는 험상궂게 내뱉더니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집아이를 우물 안에다 집어 던져 버렸다. 어린애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뒤미처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리고는 우물 쪽은 이내 잠잠해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범옥의 가솔들은 미처 손도 쓰지 못하고 멀거니 보고만 있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제야 알아차린 듯 정신나간 사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인은 자기를 붙잡고 있는 사내들의 손을 물어뜯고 우물로 달려가 부르짖었다.
"아이고, 영아야! 아이고……."
그리고는 여인은 우물 안으로 뛰어들 기세로 몸을 솟구쳤다. 사내 둘이 냉큼 내달아 여인을 붙잡았다.
"이 놈들, 이 손 놔라, 이 손 놔! 내 발로 뛰어들겠다, 이 극악무도한 놈들……."
여인을 잡고 있던 사내는 개중에 우두머리인 듯싶은 장한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그 장한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은 손을 턱 놓았다. 그러자 범옥의 처는 우물로 뛰어들려고 다시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범옥이 퉁겨 나가듯 뛰어가 여인을 부둥켜 안았다.
"이러지 마오. 제발 이러지 마오!"
여인은 몸부림치며 호곡을 하였다.
그 사이 다른 사내가 범옥의 작은아들을 움켜잡았다.
"네 할애비 범장천은 망나니 중의 망나니다. 우리 개방을 배반한 죄, 백 번 죽어 마땅하다!"
범옥의 작은아들은 사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우리 할아버진 망나니가 아냐! 망나닌 바로 네 놈들이야!"
어린 녀석이 뜻밖에 대담하게 대들자 사내는 대로하여 있는 힘껏 어린애 귀때기를 후려갈겼다. 어린애의 두 뺨은 삽시에 풍선같이 부풀어올랐다. 그래도 아이는 굽히지 않고 두 눈을 부릅 뜨고 고래 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망나닌 네 놈들이야! 네 놈들이 망나니……."
사내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두르며 그 장한을 돌아보았다.
"형님, 이 녀석도 우물에 처넣을까요?"
"그럴 것 없이 어서 숨통을 끊어 놔!"
장한은 얼음같이 차갑게 내밴었다.
"좋수다, 좋아! 어떻게든 못 죽여……."
그는 짓씹듯이 지껄이더니 어린아이 몸에 장풍을 세게 한 번 날렸다. 아이는 왈칵왈칵 연거푸 두어 번 피를 토해냈다. 그러고도 아이는 계속 중얼거렸다.
"망나니, 망나니……."
그러나 이윽고 그 소리마저 점점 가늘어지더니 아이는 그예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혈육을 잃게 된 범옥은 가슴이 찢기는 듯하여 곡 짐승이 울부짖는 것마냥 비명을 지르며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양쪽에서 그의 어깻죽지를 거머쥐고 있던 놈들은 번개같이 그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범옥이, 이 놈! 네 애비의 죄악을 안다면 너도 죽어 마땅하다는 걸 알아야 하거늘, 끝까지 발악을 해! 이 놈, 순순히 목숨을 내놓아라!"
놈들은 범옥을 번쩍 쳐들어 있는 힘껏 우물 속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범옥은 우물 바닥으로 곤두박이쳐졌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았다. 우물은 물이 깊지 않았다. 그러나 어두운 속에서도 손을 더듬거려 보니 우물 벽은 대단히 미끄러웠다. 그는 그 벽을 타고 오르려고 벽에 발을 딱 붙이고 한 발 옮기다가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그때 딸애의 시체가 손에 잡혔다. 범옥은 화들짝 놀라 딸애의 시체를 부여안고 어루만지면서 목이 멨다.
"영아야, 영아야……."
그러나 딸애는 머리칼이 물에 흠뻑 젖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숨결 하나 없었다.
"영아야, 나한테 업혀라. 이 우물을 나가자……."
범옥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사내들이 남편을 우물에 처넣자 범옥의 처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다시 우물로 뛰어들려고 몸부림을 쳤다.
"놔라, 이걸 놔라, 이 놈들아!"
그러자 사내들은 여인의 팔죽지를 세게 비틀었다.
"흐흐흐, 너같이 예쁜 계집을 그렇게 헛되게 죽일 수야 없지."
그리고는 여인을 집 안으로 마구 끌어당겼다.
범옥의 큰아들은 놈들에게 붙잡혀 그 모습을 낱낱이 보면서 바드득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잡고 있던 사내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살고 싶으면 꿇어 엎어져 할아버지, 아버지 빌어라. 그러면 네 놈쯤은 살려 줄 수도 있다……."
아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사납게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집 안에선 여인의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 왔다. 아이는 눈을 질끈 감고 눈물만 흘렸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두 사내가 허리춤을 부여 잡고 히히덕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아이를 쳐다보며 지껄였다.
"이 놈도 죽여 후환을 아예 없앱시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장한은 냉소를 흘리더니 단번에 아이의 기해단전대혈(氣海丹田大穴)을 콱 찔렀다. 그리고 다시 담중혈(膽中衆)도 쿡 찍었다. 아 이는 악 비명을 토해내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사내들은 아이가 넘어가는 꼴을 보더니 서로 흡족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손을 탁탁 털고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중 하나만 남아서 대문을 안으로 잠그고는 몸을 솟구쳐 담 위로 훌쩍 뛰어올라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리는 골목 밖의 돌다리 위에 서서 집 안을 돌아다보았다. 다섯 식구가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아가던 범씨의 집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멀쩡했다. 사내들은 얼굴에 냉소를 머금고 돌다리를 지나 동사조항을 벗어나 점점
멀리로 사라져 갔다.
노명성 노 장로는 고요한 밤 자시 전에 경도 임안의 뚝배기점에서 밤참으로 술 한잔을 걸치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날 밤도 그는 뚝배기점에서 밤참을 먹었다. 자그마한 집이었지만 여러 가지 맛난 뚝배기 요리로 임안의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히고 있었다.
노명성은 뚝배기점 한구석에 앉아 뜨끈뜨끈한 뚝배기 한 사발을 청해 놓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즈음 그는 마음이 가벼웠다. 전에는 미운산 방주를 배반하고 여인을 따른 일로 언제나 개방 형제들을 보기가 송구스러웠으나 마음을 고쳐 먹고 홍칠을 따라 개방을 다시 진흥시키겠다고 결심을 굳히자 마음은 한결 거뜬했다.
'내일부터 수를 써서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나 대악당 구양봉을 멀리 보내 버려야겠다. 일단 그 여인의 좌우 두 날개를 꺾어 버리면 개방에도 서광이 비친다. 그런데 일을 계획하기는 쉬우나 실행에 옮겨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구양봉이나 구천인 같은 강호 악한들은 자기 성미대로 행할 뿐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그저 말로만 권해서 개방을 떠나게 할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아, 어떻게 한다? 강호에서 구양봉과 구천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대협 왕중양? 남제 단지흥? 도화도 도주 황약사? 홍칠? 물론 홍칠은 아니다! 홍칠의 말은 들으려 하기는커녕 얼굴만 상면해도 눈에 불을 켜고 당장 생사 판가름을 하려 들 텐데……. 그러니 나머지 강호 고수 셋 중에 누구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과연 누구일까? 아니, 그러지말고 구양봉에게 이 강호 무예 고수 넷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아 바싹 약을 올려 놓아야겠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직접 그들을 찾아가 무예를 겨루게 하자! 《구음진경
》을 가지고 서로 다투도록! 맞다, 그거다! 기회만 있으면 구양봉을 자꾸만 부추겨 그를 떠나 보내자. 그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그렇담 구천인은? 구천인은 어떻게 한다지? 악하기는 구양봉이 제일이고 꾀도 많지만 그래도 서역 오랑캐의 피가 섞여 있어 그에게는 일단 말을 뱉으면 그 말대로 옮기는 강의한 구석도 있다. 그러나 구천인은 음특하고 내흉하여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구천인을 떠나가게 어르는 것은 구양봉보다 더 어려운 노릇이다.
노명성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이 뚝배기점에 사람 다섯이 들어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철장방 무리 넷이 웬일로 그 시간에 이 뚝배기 점으로 찾아온 것이다! 구천인말고는 모두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알아보고는 곧장 청한자자 노명성을 향해 다가왔다. 노명성은 문득 고개를 들다가 그제야 비로소 그들을 보았다.
'아니, 구천인에게 언제부터 이같이 깊은 밤중에 이 뚝배기점을 드나드는 버릇이 생겼지?'
노명성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25장 거듭되는 복수
노명성은 구천인을 보자 급히 일어나 읍을 하고는 웃는 낯빛으로 말했다.
"구 방주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이 누추한 뚝배기점에를 다 오셨습니까?"
"노 장로가 즐기는 음식을 나라고 싫어 하겠나!"
그는 의외로 쌀쌀맞게 한마디 뱉고는 맞은편 탁자에 가 앉았다. 수하 넷은 구천인 뒤에 병풍처럼 둘러서서 노명성을 노려보았다.
"듣자 하니 노 장로는 식솔이 없다면서?"
구천인은 웃는 낮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 얼굴엔 적이 냉기가 감돌았다. 의외의 질문에 노명성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 여인이 자기에 관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쳐 웬지 석연찮은 감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인은 자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청평채(淸平寨), 운가교(雲家橋), 녹보(鹿堡)……."
여인은 그때 예사스럽게 이 몇 마디 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에 노명성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몸둘 바를 몰랐었다.
개방에 들기 전에 그는 강호의 녹림대호(緣林大豪)로 가만히 앉아서 장물을 나누어 가지는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강호의 여느 사람은 그 내막을 감감 모르고 그저 사람들을 위해 선뜻 자산을 털어 다리도 수리해 주고 길도 닦아 주는 자선가로만 여기고 있었다.
노명성은 장년에 이르도록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양갓집 미녀나 명문 규수와 다리를 놓아주며 어떻게든 맺어 주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명성은 늘 '물동이는 우물에 부딪혀 깨지기 쉽고, 장군은 전장터에서 죽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녹림대호로서 주변에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만일 어느 날 자기에게 복수의 손길이 뻗친다면 그 혼자만
이 아니라 온 식솔의 운명이 처참해지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명성은 바로 그 때문에 가정을 이루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끝까지 녹림대호로 살아간다면 필시 끝이 사나울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해 늘 좌불안석, 마음이 불안하던 차에 마침 범장천과 뜻이 닿아 둘 다 재산을 나눠 주고 개방에 가담한 터였다. 그런데 워낙 강호에 이름이 자자하여 개방에 들자마자 금세 5대(五袋) 제자가 되었고, 또 몇 년 못 가서 개방 10대 장로로 추대되니 명
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러나 지난날 저질렀던 피비린내 나는 그 일들이 끈질기게 마음속에 달라붙어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벌떡 일어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녹림 총표파자(總瓢把子)로 있던 노명성은 수하 십일장검(十一長劍)에게 명해 청평채 채주인 등문수(鄧文水)의 식솔 열 일곱을 몽땅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 시체는 이레 동안이나 그대로 매달려 있었는데 그 위로 까마귀가 새까맣게 날아들고, 송장 썩는 악취가 인근 십여 리까지 코를 찔렀다. 이렇게 되자 청평채는 자연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운가교는 부유한 곳이었다. 절강 일대 큰 도박꾼들은 모두 운가교에 모여 도박을 놀았다. 운가교는 삼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 쪽으로만 강이 하나 흐르고 있어 그 강의 다리를 건너야 운가교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해, 노명성은 역시 십일장검을 데리고 부호집 재산가로 분장하여 운가교로 들어가 도박을 노는 척하다가 중도에 괜스레 트집을 잡아 술상을 뒤엎고 주사위 알을 던지면서 장원 주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주사위 알은 장원 주인과 그 수하 두 사람
눈에 정면으로 날아가 박혔다. 세 사람은 단박에 눈이 멀어 버렸다. 십일장검들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운가교 남녀노소 백여 명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렇게 되어 노명성은 운가교에서 굉장히 많은 재물과 돈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편 녹보의 보주(堡主)는 원래 대도(大刀) 육청평(陸淸平)이었다. 그의 자식 둘은 기무학문(棄武學問) 시와 부(賦)를 짓기 좋아했다. 녹보에 값비싼 골동품과 금은보화가 가득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명성은 십일장검들을 데리고 또 녹보를 기습했다. 육청평의 두 아들이, 육씨네 집 후대나 잇게끔 어린애들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노명성은 악독하게 젖비린내 나는 애기들마저 몽땅 죽여 없앴다.
그러나 강호 사람들 중에 그가 개방에 가담하기 전에 자행한 이 악행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은 오히려 재물을 탐내지 않는 선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노명성은 문득 그때 여인이 내뱉은 그 세 마디가 머리 속을 스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구천인은 착 가라앉은 소리로 주점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뚝배기 요리를 가져 오게! 요리란 요리는 한 가지씩 있는 대로 다 가져 와. 나는 원래 여기 있는 이 노 장로처럼 아끼는 습성이라곤 생판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의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 뚝배기점의 요리란 모두 이름난 뚝배기국이었다. 남과 북의 유명한 요릿감으로 뚝배기를 끓이는데 오래 끓여야 제 맛이 난다. 비록 자운재나 호숫가의 주선루(酒仙樓), 낙사거(樂士居)나 홍글루(鴻雁樓) 등 경도 임안에서 이름난 명소에는 못 비기지만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사환이 구천인 앞에 각기 크기가 다른 뚝배기 사발 세 개를 가져왔다. 제일 작은 것은 술잔만했는데, 물고기 눈알 몇 개와 지느러미 몇 개가 동동 떠다녔다. 구천인은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그저 맛만 두어 번 보고는 한켠으로 밀어 놓았다. 그 다음 큰 것은 사람의 주먹보다 좀 작을까 한 것이었는데 남방의 부채(腐菜), 부간(腐肝) 그리고 콩알 같은 것을 한데 넣어 끓인 것으로 남모르는 조미료를 넣어 아주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구천인은 그것도 그저 몇 입 뜨는
시늉만 하고 한켠으로 밀어 버렸다. 세 번째 뚝배기는 주먹보다 좀 컸는데 두부를 끓인 것이었다. 뚝배기 안에서는 아직도 두부가 펄펄 끓고 있었다. 구천인은 대수롭지 않게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어 쓱 입으로 가져 갔다. 입이며 식도가 다 익어 버릴 만큼 뜨거운데도 구천인은 낯색 한 번 변하지 않고 펄펄 끓는 두부를 연신 입에 집어 넣고 우물거렸다. 그것만 봐도 구천인의 무공이 매우 고강함을 알 수 있었다. 노명성은 내심 흠칫 놀랐다.
사환은 이번엔 좀전의 것보다 각기 조금씩 더 큰 뚝배기를 세 개 또 가져 왔다. 이번에도 좀전처럼 뚝배기 크기에 따라 제가끔 맛이 달랐다.
구천인은 노명성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 야밤에 노 장로가 여기 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소이다. 하나 뚝배기국을 한 가지만 먹어서야 어디 재미가 있겠소? 자, 이 뚝배기국이나 한번 맛보시오?"
그러더니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개중 제일 큰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휙 날려보냈다. 노명성은 오늘 저녁 구천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확연히 알아차리고는 급히 젓가락 두 개를 들어 그 뚝배기 사발을 막아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어찌나 센지 뚝배기 사발에 부딪히자마자 젓가락은 뚝 하고 두 동강이 나고 노명성은 그대로 국물을 옴팡 뒤집어썼다. 급히 얼굴을 돌리긴 했으나 그의 오른쪽 뺨은 그대로 뚝배기 국물로 범벅이 되어 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구천인 뒤에서 있던 철장방 무리들은 킥킥킥 키들거렸다.
노명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탁자를 뒤엎으려고 양 모서리를 딱 잡았다가 간신히 참았다.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구 방주님의 배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간이 없어서 방주님의 맛좋은 요리를 먹을 수가 없었군요. 허허……."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구천인 뒤에 서 있던 넷이 급히 내달아 문을 막아서며 노명성을 에워쌌다. 일이 예사롭지 못함을 느끼면서도 노명성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구천인에게 말했다.
"구 방주님도 개방을 도모하고자 하고, 개방 장로인 나도 방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무슨 일로 제게 노여움을 사셨는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노 장로가 날 노엽게 해서야 안 되지. 그랬다면 벌써 죽은 목숨인걸. 지금은 그게 아니야. 그대는 내가 아니라 한 여인을 노엽게 했어!"
그 말에 노명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기와 범장천이 홍칠을 만나 같이 개방을 다시 진흥시킬 일을 논의한 것은 셋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한 사람 더 알고 있다면 출수표 노경……. 그러나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다. 한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벌써 그 여인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일까? 뿐만 아니라 철장방 방주 구천인까지도 알고 있다니……. 노명성은 반신반의하며 짐짓 능청을 떨었다.
"구 방주님께서 무슨 악몽이라도 꾸신 게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를 의심……."
"노 장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내게 시켰네. 후에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없애라고!"
구천인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천히 뚝배기 두 개를 들어올려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놀림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러나 뚝배기 두 개엔 장풍의 힘이 실려 노명성을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거기에 일단 얻어맞았다 하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게 아니리라 직감하고 노명성은 급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쭉 뻗쳤다. 그리고는 악 소리를 내질렀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닿아 뚝배기는 공중에서 딱 멎었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 언감생신 내 장풍을 막으려 들다니!"
구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천인의 만중에는 단황 나으리, 황약사, 서독 구양봉을 내놓고는 누구도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그깟 개방 장로 노명성 따위가 자기와 맞서려 하자 분기탱천하여 이빨을 악물었다.
한편 노명성은 등골에 식은땀이 쫙 내배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구천인이란 놈은 천하 악인 중의 악인이다. 철장방이 지독하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고 있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 놈 손에 목숨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노명성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손바닥에다 온 힘을 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뚝배기 두 사발은 차츰차츰 노명성 쪽으로 움직여와 급기야는 그의 가슴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노 장로, 그렇게도 뚝배기국을 좋아한다면서! 내 오늘은 실컷 먹게 해 주겠다는데도!"
구천인은 크게 웃어제치며 마지막 힘을 가해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쓱 내쳤다. 다음 순간, 노명성은 뚝배기 두 사발을 가슴에 안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는 뜨거운 뚝배기에 두 손이 데고, 얼굴에선 식은땀이 송송 내돋았다.
그때 철장방 수하 넷은 이미 노명성 뒤쪽으로 옮겨 와 빙 둘러서 있었다. 이제 노명성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으로 좌우를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철장방 무리들이 뛰어들었을 때부터 뚝배기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하나 둘씩 슬금슬금 빠져 나가 지금은 이 뚝배기점에 오직 구천인과 철장방 무리 그리고 노명성만 남아 있었다.
"구천인, 사람을 이토록 못살게 굴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소!"
노명성은 노호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두 손바닥을 힘껏 밀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도 구천인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뚝배기 두 사발을 구천인에게 들씌워 그를 비 맞은 수탉꼴로 만들어 놓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노명성이 쌍장에 힘을 주자,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연이어 퍽퍽 소리가 나며 뚝배기 두 사발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구천인이 노명성보다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오히려 노명성이 온몸에 뚝배기 국물을 뒤집
어쓰고 비 맞은 수탉 꼴이 되고 말았다. 노명성은 얼굴이고 가슴이고 두 다리고 할 것 없이 몽땅 뜨거운 국물에 데어 온 데가 쓰리고 아렸다. 다행히 가을날 깊은 밤이어서 옷을 껴 입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심하게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노명성은 악에 받쳐 악다구니를 썼다.
"네 놈이 나를 이렇듯 업수이 여긴단 말이냐. 좋다! 내 목숨을 내걸고 너와 싸우리라!"
그리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날쌔게 구천인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구천인만은 못해도 노명성의 무예는 개방에서도 으뜸으로 일점지 나장태, 부귀산인 범장천과 견줄 만했다. 그는 온몸에 힘을 모아 구천인의 앞가슴을 냅다 갈겼다. 한데 구천인은 산더미처럼 꼼짝도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노명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다시금 구천인의 앞가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 구천인이 움찔하는 듯싶더니 잽싸게 그의 주먹을 덥석 쥐었다. 노명성은 그
에게 주먹이 꼭 쥐인 채 빼내려고 온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구천인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의 주먹은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구천인은 서서히 서서히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명성은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져 가고 우지직우지직 소리가 나면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다섯 손가락은 뼈마디가 다 으스러져 몇 십 개로 조각이 나고 그의 얼굴에선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에 나한테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애석하게도 네 녀석은 아니닷!"
구천인은 노명성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노명성은 소리를 지르려 해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노 장로, 네가 그 여인을 배반한 죄 실로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네 놈을 죽이는 것이지만 나는 진작부터 네 놈을 죽이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네 놈은 우리 철장방의 원수다!"
노명성은 그 말에 언뜻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그가 개방 장로가 된 이후에 그는 수하들을 데리고 철장방과 한 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노명성은 철장방 열 몇 명을 단번에 쓰러눕혔다. 그 싸움에서 노명성은 큰 승리를 거뒀고 그로 인해 개방에서 위신도 높아졌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인데도 구천인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니……."
"이번 이 한 장(掌)은 그때 죽은 우리 철장밖 형제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거다."
구천인은 팍 하고 장풍을 한 번 날렸다. 삽시간에 노명성의 왼쪽 귀가 뚝 떨어져 나가고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명성의 눈에서 번쩍 살기가 튀었다. 그는 맞받아 또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구천인은 이미 으스러질 대로 으스러진 노명성의 주먹을 한 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조각난 뼈들이 비수처럼 살을 파고 들었다. 노명성은 악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팔에서도 기운이 빠져 나가고 내치던 주먹은 털렁 무릎께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되니 또 왼손을 휘둘러? 내 왼손마저도 가루를 내놓겠다. 그때 가서 네 놈이 어쩌는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구천인은 노명성의 왼손까지 텁석 틀어쥐고는 얼굴이 파르르 떨리도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노명성은 왼손마저도 으스러져 버렸다. 부서진 뼈 조각들이 삐죽삐죽 살가죽을 뚫고 비어져 나왔다.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노명성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명성은 머리에 무엇인가가 철썩철썩 들씌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철장방 무리들이 탁자 위에 남아 있던 뚝배기 국물을 모조리 쓸어 모아 그의 머
리 위에 퍼붓고 있었다. 그는 그 국물을 옴팡 뒤집어써서 얼굴이 온통 찐득찐득하고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구천인 이 놈! 사지를 찢어 죽일 수는 있어도 이렇듯 모멸감을 주는 법은 천하에 없다. 죽이려거든 깨끗이 죽일 것이지 이런 능욕을…… 처, 천하에 모, 몹쓸 노옴……."
"하하하, 아직 입은 살아 있군 그래. 두 손은 다 요절나고, 귀까지 하나 덜렁 떨어져 버렸는데 이제 누가 너를 청한자자라고 하겠느냐? 영락없이 문전걸식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 꼴이다, 으하하하……."
"네 놈의 만행은 꼭 보응을 받고야 말리라."
노명성은 칠을 질질 흘리며 쥐어짜듯 내뱉었다. 구천인은 순간 웃음을 딱 멈줬다.
"그으래? 그렇담, 좋다?"
그리고는 대뜸 노명성을 향해 한 주먹 힘껏 내리쳤다. 노명성은 턱이 탁자에 짓찧이며 이빨이 하나 툭 분질러져 나갔다. 구천인은 사이를 두지 않고 그의 등허리 대혈을 번개같이 내지르고는 그의 뒷다리를 움켜잡고 종아리와 발뒤축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어 힘줄을 뚝뚝 끊어 버렸다. 노명성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소름 끼치게 비명을 내질렀다. 귀신의 호곡이 꼭 그러하리라.
구천인은 뚝배기점이 떠나가라 웃어제쳤다.
"어쨌든 목숨은 살려 주겠다. 이만하면 대단히 사정을 둔 것이니 가서 너네 그 새 방주를 모시고 어디 한번 우리 철장방을 집어삼켜 봐라!"
구천인은 노명성을 한 번 걷어차고는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뚝배기점을 걸어 나갔다.
범장천은 그의 숙소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삼십육식 탈혼장은 일종의 음유(陰柔)한 내력으로 그 장력이 신기하고 법수가 변화무쌍했다. 그리하여 범장천은 매일 무예 수련을 할 때마다 반드시 음초지맥(陰焦之脈)과 소음(少陰) 양처의 경맥을 연마하여 음유가 하나로 통하도록 내력을 형성시키곤 했다. 그가 금방 수련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방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대청으로 좀 오시랍니다."
범장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돌아가 방주님께 아뢰게. 내 바로 간다고."
범장천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혹 흠잡힐 만한 점이 없는지 두루 두루 생각해 보았다. 그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암청자(暗靑子)를 매고는 옷을 갖춰 입은 뒤 선뜻 문을 나서 앞뜰에 있는 대청으로 걸어갔다.
가짜 미립은 대청 복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범장천을 보자 얼굴에 꽃 같은 웃음을 방글거리며 그를 맞아들였다.
"뭐 긴한 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니에요. 긴긴 밤에 혼자 심심해서 범 장로와 그저 한담이나 하려고 부른 겁니다."
'이런 화냥년같으니라구. 밤낮 사내들을 껴안고 음탕하게 뒹굴다가 맥이 빠지면 수하 남자들을 불러 한담이나 하겠다고? 이런 계집이 대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범장천은 속으로 계집을 욕하면서도 사뭇 정중히 응수했다.
"방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저 역시 마다하겠습니까?"
여인은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범 장로께서도 미 방주의 딸 미립을 보셨겠지요?"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예, 보긴 보았습니다만……."
기실 미립을 본 사람은 범장천만이 아니었다. 미립이 그때 용골묘에 뛰어들어 자기가 진짜 미운산의 딸 미립이라고 하면서 그 당장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펼쳐 보였을 때 개방 상하가 다 두 눈 멀정히 뜨고 번연히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오늘 이 계집은 생뚱맞게 이 말을 꺼내는 걸까? 범장천은 사뭇 긴장했다.
가짜 미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난 내가 진짜 미립이라 하고, 그 여잔 자기가 진짜 미립이라고 하지만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범 장로같이 총명한 분들은 모두 그 여자가 가짜이고, 내가 진짜 미립이란 걸 믿고 있겠죠?"
여인은 또 호호호 요염하게 웃어댔다. 범장천은 이 계집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이 계집은 마음속 깊이 홍칠을 연모하고 있다. 그러기에 진짜 미립을 더 더욱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립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자기 미모가 진짜 미립을 능가한다고 여기길 바라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장천은 공손히 말했다.
"방주님은 능력도 미모도 모두 그 계집에 비해 훨씬 월등합지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허허허……."
그러자 가짜 미립은 또 한 번 살짝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짐짓 비통한 기색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범 장로님,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아아, 할 수 없이 말해야겠군요……."
"방주님께선……."
범장천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감히 더는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어제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 범 장로의 집에서 범 장로의 가솔 다섯이 그만……."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장천은 벌떡 일어섰다.
"뭐라구요?"
지략이 뛰어나고 담대한 범장천이건만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의 집이라는 말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오자 숨이 탁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아아 범 장로님, 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식솔들은 모두 죽고 오, 오직 어린애 하나만 도망쳐 나왔는데……."
범장천은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사정없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막혀 꺽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그…… 그게……아니, 그게…… 저, 정말……."
가짜 미립은 매우 비통한 기색으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을 시켜 급히 달려가게 하였지만 그 땐 이미 때가 늦어 오직 그 집 손자만이……."
범장천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범장천은 동사고항 집에 있는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이 피 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각별히 몸조심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그 악몽이 바로 현실이 될 줄이야……."
"내 소, 손자가 아직 살았다구요? 지, 지금 어디 있소?"
범장천은 맥없이 물었다. 그러자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이 어린애 하나를 부축해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범장천을 보자 쏜살같이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도 죽고 엄마도 죽었어요……. 동생들도 모두……."
범장천은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재산을 나눠 주고, 집을 버린 채 개방에 가담한 것은 오로지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였다. 오늘에 이르러 이렇듯 가솔들이 모두 비명에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다행히 창천이 보우하사 손자 하나는 살아 남아 범씨 후대는 잇게 되었다만……."
범장천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자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 엄마는 어떻게 죽었느냐? 어느 놈들이 죽였지?"
어린 손자는 흐느끼면서 그때 일을 두서 없이 늘어놓았다. 뒤죽박죽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범장천은 대강의 경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말을 듣건대, 그 복색은 개방 사람들임이 분명하고, 홍칠의 수하들의 악행임에 틀림없으나 그건 결코 아니다. 홍칠은 나와 대사를 의논하고 서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런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 홍칠의 수하 사람들이라면, 건강 분타 타주 나대통과 절강 분타 타주 노유각일텐데 이 둘은 모두 그런 유의 강간과 살인을 절대로 범하지 않을 올곧은 사람들이다. 그들 입으로 직접 자기네가 일점지 나장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지만 실상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개방 중에서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오직 이 가짜 미립…… 이 년의 수하 놈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개방을 가장한 딴 놈들의 소행……."
지모가 뛰어난 범장천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면서도, 십중팔구는 이 악독한 여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쥔 근거가 없으니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터, 그는 솟구치는 비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었다.
"범 장로님, 홍칠은 정말 극악무도한 인간입니다. 하나 홍칠에게 보복하는 건 잠시 훗날로 미루고 범 장로님께선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후사를 처리하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범장천은 의언히 대답하고 손자를 데리고 대청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인은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어떠냐?"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이 계집의 손에 손자를 맡겨 놓고 가다니, 그럴 순 없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내 범장천이 백치가 아닌 이상 네 년의 지독한 심보와 악독한 수단을 모를 리 없다. 하나 앞날을 기약하려면 하는 수 없지.'
범장천은 웃는 낯으로 손자에게 말했다.
"그래,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저분이 개방 방주님이시다. 너를 극진히 아껴 주실 게다."
손자를 두고 나오자니 범장천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여인에게 그런 속내를 들킬까 봐 손자의 손을 놓고 황급히 대청을 걸어 나왔다.
범장천은 숨이 턱에 닿도록 한달음에 내달아 황망히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 당도했다. 관 네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뜨락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뜨락을 휘둘러보고 나서 범장천은 관을 지키고 있는 개방 사람 몇에게 소리쳤다.
"내 친히 할 일이 있으니 너희들은 대문 밖에 나가 파수를 서도록 하라. 어느 놈이건 내 명도 없이 들어왔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는 마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식솔을 해친 원수이기나 한 것마냥 두 눈을 부릅 뜨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 벌벌 떨며 쫓겨가듯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범장천은 대문 빗장을 지르고 뜨락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지난 날 즐거운 웃음 소리가 흘러 넘치던 뜨락, 화기애애하던 집……."
심정이 울적해질 때마다 그는 이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이 집으로 와서 마음속의 우수를 털어 버리곤 했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세 손자를 거느리고 여섯 식구가 마음 편하게 담소를 나누던, 이곳은 범장천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듯 피바다가 되어 버리고, 식솔 모두 비명 횡사를 하다니…… 더욱이 요행히 살아 남은 손자 하나마저 그 계집의 손아귀에 앗겨 버려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범장천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기분이었다.
그는 관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관 뚜껑을 짚고 슬픔에 잠겨 말했다.
"얘들아, 모두 내 탓이다. 나 때문에……."
그리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어 열었다. 그 안에 아들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소년 상부(少年喪父), 중년상처(中年喪妻),노년 상자(老年喪子), 이 세 가지를 가장 큰 불행으로 여긴다. 그리고 누구나 노년에 이르면 아들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범장천은 아들 범옥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가 그는 눈시울을 닦고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사람들이 아들의
얼굴을 대강 닦아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얼굴 여기저기에 흙 모래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시체를 우물에서 건져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사람을 이렇게 우물 안에 처넣어 죽이다니…….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두 번째 관을 열어 보다가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 온순하고 착한 며느리, 며느리는 지금 옷 한 가지 걸치지 못한 채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저 시체를 거둔 사람이 급히 가져다 덮어 놓은 듯 천 조각 하나만 덜렁하니 국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범장천은 악이 치받쳐 자기도 모르게 발뒤축을 쿵쿵 굴렀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 죽였으리라.
범장천은 성마르게 관 뚜껑을 와락 당겨 닫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세 번째 관을 열어 보았다. 열두 살 어린 손자가 마치 잠든 것마냥 조용한 낯빛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자의 입가엔 시뻘건 선지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 이 일의 내막을 밝히지 않고서는 내 어찌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으리!'
범장천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손자의 시체를 안아 관에 기대앉혔다. 아이는 힘없이 손가락을 내려뜨린 채였고, 눈동자에선 검푸른 빛이 돌았다. 그는 의아해졌다.
'내가 개방을 배반하고 미운산 방주을 살해하는 데 공모했다고 하여 개방이 우리 가솔을 몰살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걸 보아하니 다른 어떤 놈의 소행임에 분명하다. 과연 누굴까?'
그는 자기와 원수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그러나 딱히 누구라고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이 글썽 차오르며 손자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나도 차마 네 여린 몸에 칼을 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고 손자 애를 반듯이 땅에 눕혔다. 그는 손자의 웃옷을 쭉 찢고는 장화 안에 꽂고 다니는 칼을 휙 뽑아 손자의 가슴을 쿡 찔렀다.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와락 밀려왔다. 범장천은 하늘을 우러러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꾹 감았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손으로 어린 손자의 가슴을 짝 짜갰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애의 심맥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철장방이다! 철장방!"
범장천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며 불꽃이 파팍 튀었다. 그는 남이 들으면 큰일나겠다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골몰했다. 내막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천인의 수하 놈들이 겁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반드시 그 여인이 배후에서 모종의 지시를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집은 벌써 자기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밀고를 한 놈은?…… 그는 또다시 의문에 빠져들었다. 범장천
은 천천히 도포를 벗어 손자의 시체를 싸서는 관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는 관 앞에 꿇어앉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르 주르르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되풀이 되풀이 곱씹었다. 그는 너무나 절통하고 기력이 쇠잔하여 네 번째 관은 열 힘조차 없었다.
대문 밖으로 쫓겨나 있던 개방 사람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범장천이 나오지 않자 그가 너무나 비통하여 자살해 버린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났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문을 두드렸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 문을 여시오.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다급해진 개방 사람들은 그대로 문을 부숴 버리고 화들짝 뛰어들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우르르 몰려 들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들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범장천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도포는 걸치지도 않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퍼질러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불현듯 벌떡 일어서더니 정신없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그의 눈에선 소름끼칠 정도
로 광기가 번뜩였다. 한순간 범장천은 우뚝 멈춰 서서 발뒤축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아…… 나도 가자.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나도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그는 미쳤음에 틀림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넋나간 사람마냥 멀거니 서 있다가 와락 달려들어 그를 잡아 끌었다.
"이 놈들, 이 무슨 무엄한 짓인고! 날 내버려둬! 내버려둬!"
범장천은 몸부림을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개방 사람들은 넙죽 꿇어 엎드려 통사정을 했다.
"범 장로님, 고정하십시오! 제발 정신차리십시오. 그래도 아직 손자님이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손자님이 커 가는 걸 보시면서……."
범장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말에 귀기울이더니 외쳤다.
"손자? 손자? 그래 내 손자! 내 손자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나 말이다?"
그는 개방 사람을 덥석 붙잡고 어서 자기 손자를 내놓으라고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개방 사람들은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며 소리쳤다.
"아이고, 개방 총부에 있어요. 안심하세요! 방주님이 데리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범장천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더니 고개를 돌려 관 네 개를 바라보며 마치 나들이 가는 사람마냥 태연히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잘들 있거라."
그는 이제 눈물도 말라붙고 슬픔도 다해 버린 듯했다. 개방 사람들은 이 미친 범장천이 혹 거리에서 개방 망신을 시키면 어쩌나 염려되어 황상을 옹위하듯 좌우 앞뒤를 에워쌌다. 범장천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문을 나서고 돌다리를 건너 동사조항을 떠나갔다. 거리로 들어서자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 손자, 내 손잔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어디에?"
늦은 시각이라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은 서로 수군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범장천 쪽을 힐끔거렸다. 개중에 한 노파가 어린애를 안고 서서 혀를 끌끌 차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범장천은 노파와 눈길이 마주치자 팔죽지를 잡고 있는 개방 사람들을 휙 뿌리치며 갈지자걸음으로 노파에게 헐레헐레 뛰어갔다.
"오오, 여기 있구나! 내 손자, 내 손자 여기 있었구나!"
산발을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자기 쪽으로 달려들자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꼭 끌어안고 횅하니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범장천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리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서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허허허허…… 손자 놈이 달아났다. 내 손자 놈이 달아났어……. 내겐 이젠 손자가 없다, 손자가 없어!"
그러더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범장천이 개방 사람들에게 끌려 개방 총부로 돌아왔을 때 가짜 미립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그 좌우로는 여인을 따르는 자들이 둘러서 있었다. 범장천은 대청에 누가 누가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듯 모둠발로 통통 뛰며 제 소리만 쥐어짰다.
"아이고 죽었다, 내 손자가 죽었다. 내 손자 모두 죽었다!"
가짜 미립은 범장천을 유심히 쏘아보았다. 영민하기 그지없던 그가 삽시에 저토록 미치광이가 돼 버리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도무지 성한 놈의 짓거리는 아니었다.
"범 장로께서는 너무나 비통하여 정신이 돌아 버린 모양이다. 저 지경이 되면 미쳐 버릴 수밖에 없겠지……."
가짜 미립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는 두 수하에게 범장천을 데려다가 쉬게 하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범장천을 부축하려고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범장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그 두 사람에게 장풍을 날렸다. 삼십육식 탈혼장 중 암연소혼이라는 법수였다. 다행히 앞가슴을 맞지 않아 경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단박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범장찬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정신 이상이 된 상태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천
인은 가짜 미립 곁에 앉아 내내 냉담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그의 두 대혈과 혼수혈(昏睡穴)을 연거푸 찍었다.
"이 놈, 이 놈……."
범장천은 구천인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다가 쿵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젠 범 장로를 모셔다가 쉬게 하라."
여인이 침통하게 명했다. 수하 몇은 범장천을 총부 뒤채로 들고가 침대 위에 눕혔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웃으며 구천인에게 물었다.
"구 방주님 생각엔 범 장로가 정말로 미쳤다고 보세요?"
구천인은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리며 뇌까리듯 말했다.
"난 종래로 철장방 방주로 있으면서 수하 사람들을 믿어 본 적이 없소……."
여인은 방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게 누구 없느냐?"
여인이 소리치자 시녀 몇이 달려왔다.
"범 장로님께서는 일시 상심하셔서 정신이 돌아 광기가 생긴 것 같다. 혹 범 장로 손자를 데려다 보이면 정신이 맑아질지 모르니 너희들은 어서 가서 손자를 데려다 보여 봐라."
시녀들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급히 물러갔다.
여인은 구천인을 돌아보며 깔깔 웃었다. 구천인도 따라서 쩔쩔 웃어젖혔다. 자못 득의 양양한 웃음이었다.
가짜 미립의 명을 받들어 시녀들은 범장천의 숙소로 그의 손자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범장천의 큰 손자였다. 열대여섯 소년이라 웬만큼 철이 든 아이였다. 할아버지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허둥지둥 따라왔다. 시녀 하나가 문 밖에서 소리했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네 공자 분이 오셨습니다."
방안에선 응대가 없었다. 시녀들은 잠시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는 그대로 범 장로의 손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 장로는 침대 위에 앉아서 이불을 이리저리 들추면서 자락 자락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방안에는 천 조각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녀들은 어리벙벙해서 서로 마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범 장로님, 범 공자께서 장로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실성한 모습을 보자 목이 메어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범장천은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뭐,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내가 무슨 네 할아버지냐?"
손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고 동생들도 모두 죽은 터에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실성을 하시다니, 아이는 가슴을 뜯으며 소리쳤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예요, 저예요오……."
그러나 범장천은 손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희멀건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기들이, 범장천이 정말로 실성한 것인지 그 진위를 염탐하러 왔다는 것도 잊은 채, 시녀들도 그 광경을 보고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범장천은 계집아이들이 훌쩍거리자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서는 개중 하나에게 와락 덮쳐 들며 으르댔다.
"울긴 왜 울어? 울긴 왜 우냔 말이야?"
시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울먹였다.
"범 장로님, 난…… 난 울지 않았어요……."
"하하하…… 울지 않았다고? 울지 않았다고? 거짓말 마라! 방금 전에 울었잖아? 울었지, 울었지, 엉?"
그는 뒤룩뒤룩 눈망울을 굴리며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기괴하게 웃음을 흩뿌리며 입고 있는 옷을 훨훨 벗어부쳤다. 그리고는 짧은 속곳바람으로 침대 위로 훌쩍훌쩍 뛰어오르며 주절주절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난 개방 방주가 되련다, 개방 방주! 흥, 노명성 놈? 나장태 놈? 그따위 거렁뱅이 놈들이 방주 자리를 넘봐? 어림도 없는 소리! 개방 방주는 내가 된다, 내가 돼! 으하하하하……."
시녀들은 어리벙벙하니 보고 있다가 서로 귀엣말을 속닥이고는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녀들은 그 길로 곧장 대청으로 뛰어갔다.
가짜 미립은 거만한 얼굴로 시녀들이 달려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자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며 의미 심장하게 물었다.
"그래, 어떻더냐? 미친 게 분명하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범 장로님은 확실히 미쳤습니다. 자기 손자도 못 알아보고…… 그리고 또……."
시녀는 범장천이 짧은 속곳바람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허튼소리를 주절거리던 모습이 생각나 말을 잇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가짜 미립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싸쥐었다.
"네 말이 사실이렷다? 만의 하나 잘못 본 거라면 네 목숨은 없다는 걸 알렷다!"
가짜 미립의 말에 그 시녀는 흠칫 놀라 읍을 하며 다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가 보기엔 범 장로는 확실히 미친 것 같사오나 방주님께서 미심쩍으시다면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시옵소서……."
그 말에 가짜 미립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미쳤으면 미친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녀는 표독스럽게 웃어젖혔다. 범장천과 노명성이 이미 자기를 배반한 이상 두 놈은 이미 무용지물이요, 뿐더러 큰 장애물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노명성은 병신이 되었고 범장천 또한 실성했으니 자잘한 근심 걱정은 얼추 사라진 셈이었다. 그녀는 시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부했다.
"네가 수하의 시녀들을 배치해 돌아가며 매일매일 범 장로 시중을 들게 하라. 아무데도 나가지 말게 해야 한다. 달아나서 길거리에서 미친 짓을 하면 우리 개방의 대 망신이다!"
며칠 전부터 경도 임안에 귀가 하나 날아가고 형색이 볼품없이 남루한 거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그 몰골에 보는 사람마다 혀를 끌끌 찼다. 거렁뱅이 개방 사람들도 누군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 거지, 이 거지는 바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청한자자 노명성이었다. 그는 문전걸식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부잣집 대문 앞에서 엎드려 새우등으로 추운 밤을 지새고는 동녘이 희부여니 밝아올 무렵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또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워낙 거렁뱅이였던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어도 주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혹은 몇 전 집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는 그 돈으로 저잣거리에 가 호떡 몇 개를 사서 배를 불렸다.
그날도 그는 한 골목을 찾아 들어 잠자리를 찾았다. 마침 적당한 데를 골라 누우려 하니 거기엔 이미 거렁뱅이 둘이 누워 있었다.
"자리 좀 내주게나."
노명성이 청하니 두 거렁뱅이는 두말없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틈을 비워 주었다. 세 거렁뱅이는 추위를 이겨 보려고 서로 몸을 바싹 달라붙였다. 깜박 잠이 들려 하는데 두 거렁뱅이 중 하나가 노명성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노 장로님, 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노명성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알고 있네."
"노 장로님, 난 노유각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었네."
노명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이번에는 노유각 옆에 있는 사내가 말했다.
"나는…… 나대통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어."
노명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대통과 노유각은 노명성 곁으로 더욱 다가붙으며 물었다.
"노 장로님을 해친 놈이 대체 누굽니까? 노 장로와 범 장로가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게 이미 발각된 게 아닙니까?"
노명성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말했다.
"그런 것 같진 않네. 발각되었으면 놈들이 잡아다가 신문을 할 터인데 그러진 않고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겠나. 듣건대는 놈들이 일점지 나장태 수하 사람들로 가장하여 범 장로네 손자만 하나 남기고 네 식솔을 모조리 도륙했다고 하더군."
그 말에 노유각과 나대통은 절통하여 가슴을 쳤다. 노유각은 가까스로 격분을 억누르고 진중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노 장로님, 이 골목을 빠져 나가면 끝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십시오. 우리 개방의 은거지로 데려다 줄 겁니다. 가셔서 몸을 보전하십시오."
그러자 노명성은 갑자기 번쩍 두 눈을 뜨고 노유각과 나대통을 노려보았다.
"날 해친 놈을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가긴 어딜 가!"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권해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하고 나대통과 노유각은 그 얘긴 접고 다시 물었다.
"놈들이 어떻게 노 장로님을 해쳤는지 소상하게 알려 주십시오!"
노명성은 목소리를 낮춰 냉랭한 어조로, 구천인에게 당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침울한 어조로 덧붙였다.
"보아하니, 놈들은 아마 나와 범 장로의 계획까진 모르되 우리가 홍칠을 만난 일은 알고 있는 모양이네. 그러지 않고서야 그 계집이 이렇게 마수를 뻗칠 수야 있는가. 그 계집년은 홍칠을 만나고도 잡아 오지 못한 것 하나만으로도 이런 짓을 능히 저지르고도 남을 년이네. 구천인 독단적으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터, 필시 그 계집이 개입되어 있어!"
"잘 알겠습니다. 우리 둘이 가서 방주님께 이 일을 알리겠으니 노 장로께선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노유각이 가만히 말했다.
그때 골목 초입으로 거렁뱅이 둘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복색은 거렁뱅이나 의연히 머리를 쳐들고 흔들흔들 활개를 치며 걸어오는 품이 단순한 거렁뱅이 같지는 않았다.
"자네들 둘은 어서 여기를 떠나게."
노명성이 말했다. 노유각과 나대통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노명성은 절룩거리며 그자들을 맞받아 걸어갔다.
"형제들, 돈 몇 전…… 사정 좀 봐 주게……."
그 두 사람은 노유각과 나대통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속이 탔다. 개중 하나가 목을 빼들고 계속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주시하면서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귀찮다는 듯 뇌까렸다.
"에잇, 성가셔. 옜소!"
노명성은 손가락 마디가 다 으스러져 버려 미처 그것을 받아 쥐지 못했다. 동전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렀다. 그는 급히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줍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으로 가련한 몰골이었다. 두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노유각 등이 사라진 쪽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명성은 동전을 주워 들고 도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며 운기(運氣)를 시작했다. 그는 이젠 주먹과 발을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차 한 번은 꼭 써 먹으리라 다짐하고 동전을 암기(暗器) 삼아 새로운 무예를 연마하는 중이었다. 그는 늘 손에 동전을 가지고 놀았다. 이번에도 그는 그 조막손으로 동전닢을 던져 올렸다 받곤 하면서 연마에 열중했다. 그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경도 임안 거리 어느 골목 작은 뜨락, 일전에 홍칠이 찾아갔던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오의파 장로 나장태는 지금, 눈시울을 내리깔고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예의 그 개잡이꾼이 들어왔다
"맏형님, 아홉째가 벌써 돌아왔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일점지는 아무 말 없이 손사래를 쳤다. 사설은 생략하고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들 셋이 앉자 나장태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소식인가?"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소씨 거렁뱅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뿐이라 강을 따라 내려가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소씨 거렁뱅이를 봤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이미 죽은 게 분명한 성싶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기쁜 기색도 아니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일곱째한테 눈길을 돌렸다.
"맏형님, 전 범장천에게 가 보았는데 두 계집애가 곁에서 수청을 들며 여러 가지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심드렁할 뿐, 그 고운 계집들을 한 번 끌어안지도 않으니 실성을 해도 단단히 실성한 모양입니다."
그는 일점지 나장태의 기색을 흘낏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맏형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이 범 장로는 언제나 여자를 끼고 놀기 좋아하는 풍류객인데 지금은 이쁜 처녀 애들이 벌거벗고 달려들어도 그저 멍청하니 앉아 있기만 하니 글쎄 아무리 봐도 실성했다니깐요."
일점지 나장태는 무표정하니 듣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래 범 장로는 손자는 만나 보았겠지?"
"만나는 보았지만 제 손자인 줄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일곱째 말에 나장태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 나장태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자 아홉째가 한마디했다.
"노명성 역시 매일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문전걸식만 하는데, 그 얼굴엔 비분강개하는 기색도 없고 아무 표정이 없습니다. 그저 동전 몇 닢을 얻어 가지고는 어느 집 대문통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 말에 나장태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씩 얻어 가지던가?"
아홉째는 말문이 막혀 즉시로 대답을 못했다. 그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이나 구걸해 가지는지 그것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홉째는 은근히 화가 났다. 나장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사람을 풀어 노명성을 후려패고 온몸을 다 뒤져 지니고 있는 것을 몽땅 이리로 가져 와! 상처는 입히지 말고!"
아홉째는 나장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맏형님이 금의파와 오랫동안 등지고 살아오더니 노명성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사정없이 몰아세우기만 하겠다는 건가?'
아홉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장태의 분부인지라 거역할 수도 없어서 무뚝뚝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가 보지요."
"안 돼! 지금 당장 갔다 와! 자네들이 누군지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저 개방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교묘히 꾸미고! 자, 어서 지금 당장!"
나장태는 자못 결연했다. 아홉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하는 수 없이 꾸뻑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명성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맞은편 쪽에서 조무래기 거렁뱅이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고 개중 하나가 소리쳤다.
"날 붙잡아 봐야 소용없어요. 난 돈이 없다니깐요."
그 뒤쪽으로 쫓아오던 거렁뱅이 하나가 맞받아 소리쳤다.
"이 놈, 게 못 서느냐? 빨리 가진 거 다 내놔! 가진 거 내놓으란 말야! 동전 한 닢 없다는 게 말이 돼?"
조무래기들은 점점 더 노명성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일은 거지들 사이에선 다반사였다. 그러나 자칫 휘말려들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었다. 노명성은 얼른 길 옆으로 피하려 했다. 그런 데 피한다는 것이 그만 조무래기들을 바로 뒤따라온 거렁뱅이 사나이에게 부딪혀 그는 쿵 넘어지고 말았다. 거렁뱅이 사나이는 대뜸 노명성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따위가 다 있어, 이거? 왜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게야?"
두 눈을 부릅 뜨고 으르대더니 사내는 갑자기 소리쳤다.
"앗, 여기 돈이 있다! 어서 와서 빼앗아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무래기 거렁뱅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노명성을 깔고 앉아 주먹질을 해댔다.
"이 놈 몸을 뒤져라. 발칵 뒤져 봐. 행색은 별 볼일 없지만 돈깨나 있는 품세다!"
조무래기들은 노명성의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몽땅 꺼냈다. 서른여섯 개나 되었다. 그것에 족하지 않고 조무래기들은 땅에 떨어진 것들도 모조리 주워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더 샅샅이 뒤져 봐. 어디 또 돈이 있을지 모르니까. 있는 대로 몽땅 꺼내, 하나도 남기지 말고."
한 놈이 또 소리쳤다.
노명성은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심히 수상쩍기도 하였다.
'옛날 내가 장로로 있을 때, 이 거렁뱅이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장로님, 장로님 하며 허리를 굽실거리고 내가 지나가고 나서야 발을 떼던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니 별 딱정이 새끼같은 거지 애들마저 날 이렇게 능멸하다니……."
노명성은 손을 쓰려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치고 만다. 그는 그저 고개를 가슴에 틀어박고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척했다.
"자, 술값도 톡톡히 벌었으니 가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
사내들은 희색이 만면하여 히히덕거리며 조무래기들을 끌고 어디론지 급히 사라졌다.
노명성이 품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은 반 시진도 못 되어 일점지 나장태의 손에 들어갔다. 나장태는 거렁뱅이들이 가져 온 물건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살펴보다가 동전 서른여섯 개를 골라냈다. 일점지 나장태는 이 동전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서 물었다.
"이것말고 또 없던가?"
아홉째는 크게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이젠 더 없습니다요."
일점지 나장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동전 서른여섯 개를 하나하나 줄지어 늘어놓고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노명성은 지금 기한(飢寒)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는 한심한 거렁뱅이에 불과했다. 잘살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자가 나타나는 법이지만 가난하면 저잣거리에서도 알은척하는 사람 하나 없다는 말도 있지만, 노명성은 달랐다. 개방 장로로 수하에 거느렸던 사람도 많고, 재산을 흩어 주고 개방에 가담하면서 구해 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노명성이 이지경이 되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가져 오고 은이 있는 사람은 은을 가져 오
고 또 집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건만 그는 그것을 단호히 사절하고, 오로지 매일매일 구차하게 구걸하여 얻은 몇 푼으로 근근이 목구멍에 풀칠을 해 가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그 연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점지 나장태는 각상 위에 놓인 동전 서른여섯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 몇 닢을 써먹지?"
"어떤 사람 말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그저 호떡 두 개만 사는데 그것도 국물도 없이 맨떡으로만 먹는답니다."
아홉째가 대답했다.
"이것 좀 보게, 이 동전 서른여섯 개! 하나하나가 모두 반들반들하지 않은가? 노명성은 이 동전 서른여섯 개를 그냥 주머니에 넣고만 다니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 걸까? 이걸 지니고 다녀 무엇을 하겠다고?"
일점지 나장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26장 미립의 죽음
일점지 나장태는 천천히 개방 총부로 들어섰다. 그는 적이 근엄한 기색으로 걸어갔다. 그럴 때 그는 곁눈 한 번 파는 법이 없었다. 사뭇 위엄이 풍겼다. 근자에 들어 개방 사람들은 한층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유독 이 일점지 나장태 한 사람만이 미립 방주를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즈음 행동거지에 한결 신경을 쓰며 근엄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저 고
개만 약간 끄덕거려 보일 뿐 인사하는 말에 대꾸도 않고 곧장 개방 총부의 대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짜 미립은 대청에서 그를 맞아들였다.
"나 장로, 개방이 새로이 섰기에 나 장로께서 수고해 주셔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여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나장태는 쌀쌀맞게 내뱉었다.
"미 방주님, 미 방주님이 새로이 방주님이 되신 후 개방 장로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여 10대 장로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소. 이젠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그러자 여인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제가 10대 장로들에게 소홀했던 게 아니라 기실은 그분들 중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나를 믿고 따르지 않은 거였어요. 그러니 내가 어찌 그분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나 장로는 달라요. 저는 나 장로만은 믿고 있어요. 그래서 나 장로한테 큰일을 맡길까 해요."
"방주님의 명이라면 내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
"아, 고마워요, 나 장로님! 창천이 개방을 보우한다면 앞으로 개방 방주는 필시 나 장로께서 맡아 주셔야 될 거예요."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그 말에 나장태의 눈길이 반짝 빛났다. 나장태는 개방 오의파 2대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개방 방주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심을 품어 왔다. 그 점에서 금의파의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가 노명성과 쌍벽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미 방주님께선 그런 좋은 방주 자릴 왜 양보하려 하오?"
말은 비록 점잖게 했지만 나장태는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나 장로님은 이까짓 방주 자리를 제가 탐내는 줄 아세요?"
여인은 의기양양하게 웃어댔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나 장로님께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전 강호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묘대야 등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황궁에 몸을 둔 사람이에요."
그녀는 옥벽 반쪽을 꺼내 보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 이것을 징표로 황궁을 드나들지요. 황궁에 있는 사람들도 이 내막은 잘 모른답니다. 황제께서는 저한테 이 옥벽 반쪽을 하사하시면서 저더러 강호 군웅(群雄)들의 수령이 되라고 당부하셨지요. 황제에게 소속된 사람들은 이 옥벽을 보기만 하면 제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지요. 황제는 그 사람들에게 이 옥벽을 보면 그 옥벽을 가진 사람을 황제 대신으로 여기라고 당부하셨답니다."
나 장로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적지 않이 안심이 되는 듯 긴 숨을 몰아 쉬었다. 그 여인은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고는 급히 말했다.
"개방이 장차 철장방에 가 붙게 되겠는지 혹은 독립적으로 발전해 나가겠는지 하는 건 전적으로 나 장로님께 달려 있어요."
나 장로는 그 말에 무척 흥취를 느꼈다.
"방주님, 분부를 내리십시오."
"좋아요. 개방 금의파 장로 청한자자 노명성은 철장방 구천인한테 상해 가지고 가두에서 문전걸식하고 있어요. 난 이자를 죽여야겠어요. 그러니 그대는 그자부터 먼저 죽이세요. 그런 연후에 저는 당신을 부방주로 임명하겠어요."
일점지 나장태는 기쁜 나머지 크게 읍을 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길로 부하를 시키지요."
"아니에요! 손수 손을 쓰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장태는 머리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그에게 직접 청한자자 노명성을 죽이라 함은 그녀를 배반한 개방 장로를 나장태가 친히 처치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표명하라는 것임에 진배없었다. 그때껏 나장태가 나서서 개방 장로를 처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독한 여인이다. 나장태는 여인의 심사를 대번에 알아차리고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개방 방주가 되려면 먼저 개방 장로 하나쯤은 죽여야 한다는, 그리하여 자기를 따르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표명하라는 것 아닌가.
일점지 나장태는 망설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좋소. 내가 직접 죽이지요. 안 그래도 난 개방에서 그 노명성과 범장천을 가장 미워했었소."
"범장천은 굳이 당신 손을 빌리지 않겠어요. 그 놈은 내가 처치하지요. 그 두 놈을 그대로 두고서야 개방 위신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노명성을 처치하라는 가장 큰 이유요."
"나도 평소 그렇게 생각했었소. 명색이 개방 장로였는데 동냥 거지에 불과한 행색으로 거리를 쏘다니니 남부끄러워서, 원……."
그러자 여인은 냉소를 쳤다.
"동냥 거지 행색이라고요?"
그녀는 갑자기 깔깔 웃더니 나장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느덧 웃음기는 싹 가셔 버렸다.
"그대가 개방에서 쫓겨나 동냥 거지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음식을 사 먹으라고 그대한테 돈을 준다면 어쩌시겠소? 그 사람이 그대한테 장원을 선사한다면 어쩌시겠소? 그대는 아마 거절하진 않을 거요. 그러나 노명성은 달라요. 사람이란 뜻이 크면 의지도 굳세지는 법입니다. 청한자자 노명성은 명성이 작은 사람이 아니에요. 깔봐선 안 돼요!"
나장태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당신을 방주로 추대한 까닭을 알 만하외다. 그대가 나를 무엇 때문에 방주로 삼으려 하는지도 알 만하외다."
나장태는 이렇게 한마디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말을 더 들으려 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노명성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호떡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호떡집 주인 늙은이는 노명성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각별히 동정심을 보이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개방 사람들과 남다른 친
분이 있어 이 초라한 몰골의 나이 지긋한 거렁뱅이가 노명성이란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노 장로로구먼. 어서 자시게!"
노명성은 자리에 앉아 품을 뒤적여 동전 두 닢을 꺼냈다. 그때 품에서 절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으로 보아 그에겐 아직 동전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늙은이는 생각했다.
"노 장로, 오늘은 호떡 한 개만 자시려우?"
"한 개면 됩니다."
노명성은 뚝뚝하게 대꾸했다.
"여보시오, 노 장로, 한 개 더 자셔 보구려. 한 개 더 자시고 훗날 갚아도 되니……."
노명성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하나면 됩니다."
늙은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동전을 꺼낼 때 절렁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필시 돈이 많음에 틀림없어. 이렇듯 거지 꼴을 해 가지고서도 품속에 돈이 있고 또 마구 써버리지도 않으니 이건 필시 거지들의 습성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좀 이상하군!'
노명성은 한입 한입 아껴 가며 호떡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에서 사람 하나가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호떡집을 향해 내처 걸어와 노명성 앞에 딱 멈춰 섰다.
노명성은 머리를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오물거리고만 있었다. 매일매일 하루 세 번씩 이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지만 한 번도 질리는 법 없이 먹을 때마다 맛이 새로웠다. 노명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같이 거지 행색이었는데 두 눈엔 살기가 등등하고 사뭇 험상궂었다. 노명성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오른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안 되겠수. 하나 더 주시우."
그때 불현듯 옆에 선 사내가 손을 내밀어 그의 두 손목을 확 거머잡았다. 노명성은 제꺽 그 사람을 쏘아봤다. 사내는 눈을 부릅 뜨고 노명성을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재수 없군.'
노명성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는 다름아닌 평소부터 노명성과 사이가 가장 떨떠름하던 일점지 나장태였다.
"나 장로, 호떡 하나 자시지 않겠소?"
"노 장로, 내 그대한테 할말이 있소!"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팡이를 노명성의 옆구리에 끼워 주고 내처 자기가 왔던 쪽으로 손을 잡아 끌었다. 노명성은 몹시 언짢았지만 하는 수 없이 나장태에게 끌려갔다. 나장태는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서 어떤 집 문 앞에 다다랐다. 나장태는 얼른 좌우를 살펴보고는 아무도 없자 발길질로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문 안쪽으로 노명성을 냅다 밀어 넘어뜨렸다.
"노 장로, 자네는 매일 호떡 세 쪽으로 배가 고프지도 않나?"
노명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픈들 별 수 있겠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장태가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노 장로, 자네는 생각이 깊은 사람 아닌가? 나는 평소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자네와 범장천 두 사람이 가장 식견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한데 지금은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렸구먼. 품속에 동전을 서른여섯 닢이나 갖고 있으면서도 그 동전이 반들반들 닳아 빠지도록 먹고 싶은 음식도 맘대로 사 먹지 않다니……. 그렇게 배를 곯려서야 어찌하겠나……. 또……."
나장태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데 노명성이 외쳤다.
"허튼소릴랑 그만 하게."
나장태는 냉소를 한 번 치더니, 목청을 돋웠다.
"노명성, 자네 심사를 다 알고 있다. 나뿐 아니라 미 방주께서도 진작에 다 알고 계셔!"
노명성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그는 동냥을 하고, 남의 집 문전에서 노숙을 하는 등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그 동전 서른여섯 닢으로 그 계집에게 복수하는 꿈을 키워 왔었다. 언젠간 그런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 비록 동전 한 닢만 그 계집을 명중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날이 오면 그는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점지 나장태뿐만 아니라 그 계집까지도 이미 자기의 심사를 꿰뚫어보고 있다니……."
"그…… 그래…… 그녀도 다 알고 있단 말이지?"
그는 몹시 당황하여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제야 사태를 똑바로 보는군. 그 여인은 네 녀석 머리 꼭대기에 있어. 여인은 나에게 네 놈을 죽이라고 분부하셨다."
그 말에 노명성은 기가 죽었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장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날 죽이려거든 어서 죽여라. 두말 말고……."
노명성은 자못 비장했다. 과연 개방 금의파, 그 위풍 당당하던 청한자자 모습 그대로였다. 일점지 나장태는 코웃음을 쳤다.
"훌륭하군. 과연 청한자자다워!"
두 사람은 마주섰다. 노명성은 자기가 지금 일점지 나장태와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허망하게 그의 손에 죽는다는 건 영 달갑지 않았다. 그가 오매불망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여인이지 결코 이 일점지 나장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실로 뜻하지 않게 일점지 나장태와 생사 판가름을 해야 하다니,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체념한 사람마냥 오른손을 천천히 품속에 집어 넣어 동전 서른여섯 닢을 꺼냈다.
"노 장로, 난 실로 그대에게 탄복하는 바이다. 날마다 배를 곯리면서 그 동전을 써 버리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다니……."
"이제야 알 만하군. 며칠 전에 거지 몇 놈이 거리에서 나의 동전 서른여섯 개를 빼앗아 갔는데 그게 바로 네 놈 짓이로군."
일점지 나장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다. 내가 그랬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동전 한줌을 꺼내 노명성에게 던졌다. 노명성은 급히 몸을 피했다. 그 동전은 파파팍 벽에 가 박히며 죽을 사(死)자를 새겨 놓았다. 그것을 보고 노명성은 조막손으로 서른여섯 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장태, 자넨 나 같은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아 이 동전 서른여섯 닢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구먼. 동전은 한꺼번에 써 버려서는 안 되네. 매일 두 개씩만 써야 한단 말일세. 배가 몹시 고프면 동전 한 닢으로 호떡 한 개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그래도 배가 고파 밤잠을 못 이루겠거들랑 그때 가서야 또 한 닢으로 호떡 한 개를 사 먹는단 말일세. 이 서른여섯 개의 동전은 바로 내 목숨일세. 자네처럼 서른여섯 개 동전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면 이튿날엔 무얼 먹고 살아
가겠나?"
노명성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동전 두 닢을 움켜쥐고 휙 내던졌다. 동전 두 닢이 쌩 바람소리를 내며 일점지 나장태를 향해 날아갔다
나장태는 강호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대적고권(大赤尻拳)이었다. 만일 그가 심기가 조급하지만 않으면 노명성과 싸워 간신히 비길 수 있거나, 재주 좋게 운이 조금 따른다면 약간 우세한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노명성은 이미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동전 두 닢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나장태를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장태는 살짝 몸을 비켜 두 손으로 벽을 짚고는 발을 탕 구르더니 훌쩍 날아 노명성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노명성은 한 번의 공격이 무로 돌아가자 장탄식을 했다.
"가난한 거진 무슨 큰일은 해내지 못한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나장태야, 너는 대단한 사람이니 동전 두 닢만으로는 거꾸러뜨릴 수 없겠다."
노명성이 왼손을 쳐들자 또 동전 여섯 닢이 나장태를 향해 날아갔다. 구천인이 노명성의 오른손을 으스러뜨려 그는 왼손만 쓰고 있는 것인데 아무래도 기세가 약했다. 뿐더러 그가 손을 놀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 손으로 나장태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장태는 몸을 날려 노명성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노 장로, 헛수고일랑 작작 하고 조용히 죽는 게 어떤가?"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손으로 노명성의 손을 텁석 틀어쥐었다. 쥐어 보니 노명성의 손은 손이라기보다 벌레 먹은 나무 등걸 같았다. 이런 손으론 동전을 뿌리기는커녕 짚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나장태가 노명성의 손을 잡아 흔들자 그의 손에선 동전이 모조리 떨어져 내렸다.
"그 여인은 자네가 살아 있는 걸 원하지 않아. 그래 내게 자넬 죽이라고 명한 것이니 자넨 날 원망치 말게."
나장태는 이렇게 말하면서 노명성의 정수리를 내리치려 했다. 만일 나장태가 그대로 내리쳤다면 노명성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노명성이 노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는 바람에 그는 주춤 손을 멈췄다. 노명성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노 장로, 자넨 뭐든 후회가 없는가?"
"내가 무엇을 후회한단 말인가?"
"자네와 범장천이 그때 날 죽여 버렸더라면 자네는 오늘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노명성은 뜻밖에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장태, 대단한 척 말게! 자넨 뭔가? 자넨 그 계집년의 주구일 따름이야. 그 년이 자네한테 날 죽이라고 하면 자넨 감히 거절할 수 없단 말일세. 자네 인생이 불쌍하이. 자네가 그 모양으로 개방 방주가 된들 뭘 하겠는가? 남의 주구에 불과할 뿐. 나와 범장천은 방주가 되려고는 했지만 남의 주구 노릇은 하려고 하지 않았어!"
노명성은 말을 마치고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아무리 암기를 쓰는 법수를 연마한다고 해도 그 손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폐인이 된 이상 인간 세상에 살아 남으면 수모나 받을 따름 아니겠는가. 그는 지그시 나장태를 바라보았다.
"나 장로, 날 죽이겠으면 어서 죽이게. 개방의 10대 장로 중에서 제일 먼저 운중연, 옥면검객, 과천청이 죽었고 그 다음으로 소검 오평이 죽었네. 지금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그리고 출수표 노경은 모두 홍칠공을 따르고 있지. 이젠 자네와 범장천, 나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았어. 범장천은 실성해 버려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되었고 다만 자네와 나 두 사람만 남았는데 자네만 그 계집을 따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매일 밤마다 자넨 개방의 10대 장로 생각만 하노라면
마음이 편치가 못할걸세. 내 보기엔 자네도 그 계집년을 떠나 버리는 게 좋아!"
"주둥아리 닥쳐!"
나장태는 고함을 쳤다. 그는 노명성이 그따위로 자기를 질책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청한자자 노명성은 쌀쌀한 기색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게 될 사람인데 말 좀 하게 내버려두게!"
그는 나장태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장태, 그 계집이 황궁에 돌아간 뒤 꼭 자넬 개방 방주로 삼는다고 믿기도 어려워. 자네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거야. 자넨 교활한 사냥개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 주구란 종당에는 끓는 가마 속에 들어가게 될 뿐이야. 나와 범장천을 보게. 그 계집은 조만간 자네도 그냥 놔두진 않을걸세."
노명성의 목소리는 비분으로 하여 심하게 떨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장태, 그 계집이 자네더러 날 죽이라고는 했지만 자넨 속으로 그걸 원치 않는다는 걸 난 알고 있네. 큰 거리에서 손을 쓰지 않은 것도 다 그 때문 아닌가?"
노명성은 조용히 말을 맺더니 동전을 집어 천천히 문가로 걸어가 앉았다. 그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 줄에 일곱 닢씩 네 줄을 만드니 스물여덟 개가 딱 맞아떨어졌다. 노명성은 그 것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저승에 가서 돈이 없으면 악귀가 길을 막는 것만 두려울 뿐. 이승에선 어디 가나 두려우니 이승이 저승보다 살기가 어렵다오……."
노명성은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나장태, 자넨 자네 앞길을 그르치지 말게."
그는 외마디 비명처럼 한마디 꺼내 놓더니 장화목다리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힘껏 찔렀다. 노명성의 가슴에서 삽시에 피가 용솟음쳐 흘러 나왔다.
"나 장로, 개방에 자네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자네도 아마 재미가 없을걸……."
노명성은 있는 힘을 다 쥐어짜 한마디 한마디 간신히 더듬거렸다. 그는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얼빠진 사람처럼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스물여덟 닢 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모았다. 그는 그 동전을 품에 넣고 돌아 나가려다가 언뜻 맞은 편 벽에 노명성이 던진 동전 여덟 닢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나장태는 그쪽으로 다가가 그 여덟 닢 동전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냈다. 그는 동
전 여덟 닢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모두 서른여섯 닢이라……. 이만하면 괜찮은걸."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점지 나장태가 골목을 나와서 보니 멀리에 자기네 오의파 수하 거렁뱅이 둘이 보였다. 그는 그 두 거렁뱅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 둘은 일점지 나장태임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저기 저 집 뜨락에 시체가 있으니 너희들이 널빤지를 얻어다가 염습이나 해 주어라."
나장태는 한마디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대통이 헐레벌떡 홍칠을 찾아왔다.
"방주님, 누가 방주님을 찾습니다."
"누가?"
홍칠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글쎄 사람을 시켜 전갈을 했는데, 음식을 여덟 그릇 보내 왔습니다. 방주님이 보시면 아신다고 합니다."
홍칠은 그 말을 듣자 대뜸 짚이는 바가 있어 미소를 띄웠다.
"아마도 묘씨네 세 사람이 날 만나려 하는 모양이군."
홍칠은 혼자말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날 어디로 오라 하였소?"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저 방주님더러 이 음식 그릇을 들고 저자거리 밀가루 음식 난전을 찾아오라고만 했습니다……. 제 보기엔 심히 수상쩍으니 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나대통이 만류하자 홍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개방의 원한이란 바로 그 계집에 대한 원한이오. 지금 그 계집은 구양봉과 구천인을 철석같이 믿고 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묘씨 등 세 사람은 모두 그 계집의 졸개들이오. 그들 다섯 요리사들 중 근자에 둘째가 죽었는데 그 계집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싶소. 필히 그들을 한번 만나 봐야겠소."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방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대통이 여전히 걱정스런 낯빛으로 말하자 홍칠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소. 나 혼자 간다고 해서 그자들이 날 어쩌진 못하오!"
나대통은 홍칠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요. 방주님 생각대로 하십시오. 한데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게 정말 이상스럽습니다. 그 사람 말이 자기는 개방 사람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믿지 않지만 저와 방주님만은 믿는다고 하더이다. 그러니 방주님께서는 가시더라도 자취 없이 가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홍칠은 여러 사람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노 장로와 범 장로가 해를 입은 것도 필시 누가 그 여인한테 밀고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 놈이 어느 놈인지 모르고 있는 판이라 결코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나 혼자 가니 소문이 나진 않을 거요."
홍칠은 그 여덟 개의 작은 음식 그릇을 소매 속에 감춘 뒤 거리로 나갔다. 그는 나대통이 가르쳐 준 대로 저잣거리로 가 밀가루 음식 난전만을 살폈다. 그는 한 난전에 이르러 멈춰 섰다.
난전 주인이 소리쳤다.
"볶은 국수요. 한 사람한테 한 그릇씩만 파니 차례가 안 돌아가는 분들은 내일 다시 오시오!"
주인은 국자로 국수를 볶아 내면서 연신 소리쳤다. 이 요리사의 음식 솜씨는 대단하여 맛이 일품이었으나 하루에 조금씩밖에 팔지 않았다. 홍칠이 다가가서 은자 두 냥을 꺼내 그 앞으로 쓱 내미니 그 사람은 힐끔 보고는 외쳤다.
"그릇!"
홍칠은 내심 흠칫 놀랐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 곁에 그릇이 가득 쌓여 있는데도 그릇을 내놓으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는 소매 속에서 그릇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요리사는 홍칠의 돈을 챙기고는 국수를 퍼서 그가 내민 사발에 담아 주었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왼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쪽으로 가시오."
홍칠은 그가 담아 주는 국수를 먹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좀더 앞으로 걸어가니 어깻죽지에 멜대를 멘 사람이 대쪽을 짝짝 맞부딪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탁주요, 탁주!"
찹쌀 막걸리를 파는 장수였다. 홍칠은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찹쌀 막걸리요?"
"그럼, 그럼요. 그렇다마다요."
그 사람은 냉큼 대답하고 나서 멜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나무 통 뚜껑을 열었다. 기가 막힌 냄새가 확 풍겨 왔다.
"그릇을!"
이 사람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홍칠은 또 흠칫 놀랐다.
홍칠이 소매 속에서 그릇을 꺼내자 그 사람은 그 그릇에다 막걸리를 가득 퍼주었다.
"술을 다 마신 다음에는 그릇은 나한테 주시오!"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대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홍칠은 대번에 알아차리고 단숨에 술을 들이켠 다음 왼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식으로 몇 군데를 거치고 나니 이제 홍칠의 수중에는 그릇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말린 고기를 주렁주렁 걸어 놓은 가게에 이르렀다. 홍칠이 집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은 칼을 들고 말린 고기를 실오리같이 썰고 있었다.
"먹을 것 있소?"
홍칠이 한마디하자 주인은 웃으면서 또 같은 말을 했다.
"그릇을!"
홍칠은 얼른 그릇을 꺼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릇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홍칠공이 왔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묘대야, 허삼야, 우사야였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주인은 얼른 빗장을 지르고 문가에 서서 망을 보았다. 묘대야 등은 홍칠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권했다.
"홍 방주님, 어서 앉으시오!"
홍칠도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묘대야가 입을 열었다.
"홍 방주께서도 우리 다섯 사람이 황궁에서 아주 편히 지냈다는 걸 알 겁니다. 비록 어선방에서 일했지만 대신들 못지않게 존경을 받았지요. 그런데 황제의 성미가 변덕스럽다 보니 며칠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조그마한 실수를 트집잡아 우릴 황궁에서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강호에서 옥벽 반쪽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든 황제의 명으로 알고 그의 명령을 받들라고 하였죠. 이리하여 우리 다섯 사람은 합심하여 그 여인의 명을 받들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우릴 어떻게 대했는지 아십니까? 다섯째가 죽었는데도 우릴 놓아주지 않아요. 그러기는커녕 싸움에서 후퇴했다고 혹독하게 꾸짖고 당신의 사부님인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트집을 잡았지요. 소인은 구양봉한테 목이 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결국 철장방 방주 구천인한테 맞아서 우리 둘째는 죽어 버리고……."
묘대야 등은 둘째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대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런데 날 찾은 목적은?"
홍칠은 단호하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건대는 개방 사람들 중에 필시 그 년의 심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자에 그 년이 연거푸 개방 사람들에게 손을 써서 개방 10대 장로들은 거의 다 죽고 말았지요. 나는 그 년과 갈라지기는 했지만 분이 가시지 않아서…… 그 년이 죽어 넘어가야 이 속이 풀릴 겁니다. 한데 도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당신을 청해온 겁니다, 그 계책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
홍칠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묘대야의 말은 딱딱 사리가 맞았다. 묘대야 등을 잘 구슬리면 범장천, 노명성을 해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그 여인 신변에 가까이 있어야 거사를 꾸미기 쉽겠지만 이 사람들이 딱히 개방과 깊은 인연도 없는 터에 그런 모험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홍칠은 은근히 말했다.
"당신들 새 사람은 원수를 갚으려 하지는 마시오! 내 보기엔 당신들은 피하는 게 좋을 듯하오."
그러자 묘대야는 홍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홍칠공, 만일 당신이 우리 말을 안 듣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더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홍칠은 그들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순 묘대야가 칼과 국자를 틀어쥐자 셋째와 넷째가 번개같이 홍칠을 에워쌌다.
"당신이 우리 말을 안 들으면 우린 당신과 함께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소!"
홍칠은 그들의 뜻이 의외로 강고한 것을 보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들은 그 계집과 상극이 되었구나.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겠다!'
"그렇다면 당신들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겠소? 그런 각오는 돼 있소? 이 일은 힘들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소."
홍칠은 다짐하듯 말했다.
"우린 죽더라도 그 년에게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묘대야는 이빨을 악물었다.
"좋소! 당신들 세 사람 뜻이 그러하다면 내 계획을 말하겠소. 당신들은 돌아가 우리 개방의 범 장로와 노 장로를 그 년에게 고해바친 자가 누군지 알아보시오. 그것만 알아내면 그 놈을 당장에 죽여 버릴 테니!"
홍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묘대야는 국자와 칼을 내던지고 홍칠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홍칠공! 당신 말씀대로 우리 세 사람은 다시 돌아겠습니다!"
묘대야는 다시는 그 여인과 마주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하지만 홍칠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을 뿐 아니라 밀고자를 제거해 우환거리를 없앤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러고 나면 자기들은 홍칠과 힘을 합해 그 여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홍칠은 결코 그 여인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홍칠을 돕는 것은 곧 자기들의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했다.
묘대야는 굽실 읍하면서 말했다.
"내 맹세하오이다. 홍칠공,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우리 세 사람은 그 계집년한테로 가겠으니 일단 소식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개방 사람들은 신임하기 어려운데 누구를 통해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소?"
홍칠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금후의 일은 모두 나대통을 통해 전하시오!"
묘대야는 말없이 읍을 했다. 홍칠은 뜻하지 않게 기회를 잡게 되니 한결 홀가분해져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개방 일이 끝나 세 분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홍칠은 가만히 궁궐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그 원앙오진회를 맛볼테요."
홍칠은 소탈하게 한마디하고는 읍을 하고 자리를 떴다. 주인은 문가에 서 있다가 홍칠이 나가자 구운 고기를 꿰어 놓은 꼬챙이를 하나 건네 주었다. 홍칠은 그 뜻을 얼른 알아차렸다. 그래야 이 가게에 고기를 사러 들어왔다 나가는 사람 모양이 될 것 아닌가. 주인은 술도 한 병 주었다. 홍칠은 얼른 받아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시고는 몸에다가도 술을 좀 뿌렸다. 그리고는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 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홍칠은 마음속으로 늘 범장천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때건 범장천이 홀로 개방 총부에서 나오면 꼭 한 번 만나 볼 심산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노유각이 급급히 달려와 그날 아침에 범장천이 개방 총부를 나왔다고 기별했다. 홍칠은 매우 기뻐하며 노유각과 함께 황망히 범장천을 찾아 떠났다.
경도 임안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자 저만치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이 보였다. 홍칠은 빽빽히 모여 선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과연 거기엔 범장천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신발짝을 두드려 장단을 맞춰 가며 거렁뱅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임안 거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노래였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어울린 이 노래를 읊조리며 거렁뱅이들은 밥을 빌어먹었다.
노래를 다 부르더니 범장천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임안 성은 정말 아름다워라. 동쪽은 비탈지고 골목이 가로 세로 뻗었네. 동사조항 돌다리 지나서 작은 뜨락 보이는 곳에 내 집이 있네. 다섯 식구가 사는데……."
그 광경을 보고 홍칠은 가슴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여직껏 자기 집 작은 뜨락을 못 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범장천의 미친 짓거리를 보고 죽겠다고 웃어댔다. 홍칠은 이곳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어쩔 수 없자 노유각을 한쪽으로 불러 거렁뱅이 한 무리를 모아 오라고 분부했다.
잠시 후 거렁뱅이 한 무리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로 밀쳐 가며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몰려 섰던 사람들은 코를 싸쥐고 저마다 꽁무니를 뺐다. 거렁뱅이들은 한 주점으로 범 장로를 끌고 들어갔다. 홍칠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는 범장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울먹이듯 외쳤다.
"범 장로, 나요! 홍칠이오!"
범장천은 희멀거니 홍칠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고 겁먹은 눈망울로 노유각과 둘러선 거렁뱅이들을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홍칠이? 홍칠이가 누구요?…… 아니, 너 범옥이 아니냐?"
그는 와락 홍칠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홍칠은 살짝 피했다.
"범 장로, 범 장로! 정신을 차리시오! 그 심정은 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우나 정신을 차려야지요. 이러시면 어떻게 원수를 갚겠소? 놈들은 필시 그 계집 신변에 있소. 일점지 나장태가 사람을 보내 한 짓이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소!"
범장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멀뚱하니 홍칠을 바라보다가 또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범옥아, 애비다! 애비를 몰라보느냐, 엉! 애비야, 애비!"
범장천은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또다시 홍칠을 끌어당기려 했다. 무예가 출중해서 그 정신에도 그는 손을 뻗치기만 하면 삼십육식 탈혼장을 쓰는 것이었다. 홍칠은 또 살짝 피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범장천은 실심하다 못해 정말 미쳐 버렸구나. 아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개방은 또 한 사람 잃게 되었으니 범장천은 탁자 위에 있는 것을 모조리 쓸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범옥아, 범옥아! 이 애비를 몰라보다니……. 가자, 임안 성 동쪽 비탈로 가자. 거기서 작은 돌다리를 지나 우리 그 작은 뜨락으로 가자꾸나!"
그리고는 홍칠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홍칠은 울적한 심정 달랠 길 없었다.
'그 계집년을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구양봉과 구천인을 그 년에게서 떼놓아야 손을 쓸 수 있다. 지금 개방에는 철장방 구천인과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과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 무슨 수를 쓴다지……."
홍칠은 범장천을 만나면 개방에 숨어 있는 밀고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암담하기만 했다.
개방 대사로 머리 속이 어지러운 중에도 홍칠은 미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작에 개방 사람들을 풀어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했었다. 어느 날, 나대통은 반가운 소식을 물고 홍칠을 찾아왔다.
"미립 아가씨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임안 부근 작은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합니다."
홍칠은 내심 매우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는 자기와 미립 사이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개방 일은 어차피 시일이 필요하므로 그는 그녀의 행방을 안 김에 먼저 미립부터 데려다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홍칠과 나대통은 임안 성을 빠져 나와 고심암(枯心庵)이라고 하는 작은 절로 향했다. 고심암은 딱히 별다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절이었다. 사람 키 절반에 못 미치는 높이로 담장이 둘러서 있고 담장 주위엔 빽빽히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담 안쪽으로 사합원(四合院)이 한 채 서 있고 그 옆으로 암당(庵堂)이 하나 있었는데 다 스러져 가듯 낡아서 보기에도 쓸쓸했다. 그 안에 켜 놓은 향불도 가물가물한 것이 적이 황량해 보였다. 홍칠은 그곳을 둘러보고 우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미립, 그대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게요? 이렇듯 쓸쓸한 곳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홍칠은 우울증을 날려 버리려고 일부러 힘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문을 두드려서야 삐꺽 문이 열리며 한 어린 여승이 내다봤다.
"두 시주님께서는 이 고심암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난 미립이란 여승을 찾아왔소."
홍칠이 말을 받았다.
"이곳엔 미립이란 여승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어린 여승은 짤막하니 한마디하고는 이내 문을 닫으려 했다. 나대통이 급히 막아 나섰다.
"그런 여승이 없다면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얼마 전에 이 암자에 한 낭자가 출가해 왔지요 이름이 무언지는 알 수 없소만."
그러자 어린 여승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홍칠은 어린것이 무례하게 군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여인의 요염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얼른 돌아보았다. 거기엔 뜻밖에도 가짜 미립이 서 있었다. 좌우로 몇 사람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홍칠공, 듣자 하니 당신도 새 방주가 되셨다면서요? 개방 장로 셋을 수하로 끌어들이고? 당신도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홍칠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인 뒤로 구천인이 서 있고 구천인 뒤로는 묘대야, 허삼야, 우사야가 서 있었다.
가짜 미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죠? 석실에서 보냈던 그 즐거운 나날들을?"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웃음기를 싹 거두고 홍칠을 빤히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길에선 노한 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녀는 천하의 사내들이 다 자기의 놀잇감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자기한테 넘어가지 않은 사내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이 홍칠만은 아무리 검질기게 달라붙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 더욱 홍칠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를 자기 곁에 끌어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원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옛정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여인은 고심암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녀는 또다시 깔깔 웃으며 이죽거렸다.
"홍 방주, 내가 그대에게 승가에서 쓰는 그 여인의 이름을 알려드릴까요? 그 여인은 고심암에 들어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매일매일 좌선에 빠져 있지요. 그래서 이름을 선심(禪心)이라 지었답니다. 그러나 홍칠공,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당신의 그 미립은 진짜가 아니에요. 여기 서 있는 제가 진짜 미립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미립을 좋아하신다면 마땅히 저를 좋아하셔야죠."
말을 마치고는 여인은 다시금 요염하게 웃어젖혔다. 그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굴자 홍칠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저 년 가까이 있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저 년에 대한 개방의 원한이 바다처럼 깊거늘 꼭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참아야 한다!'
홍칠은 그저 그 여인을 노려보고만 있다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자, 그만 갑시다, 나 타주!"
그러자 가짜 미립이 소리쳤다.
"구 방주님, 홍 방주께서 가시더라도 우린 여기 있습시다. 자, 그럼 이 고심암 문을 열어 볼까요?"
그 소리에 홍칠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다.
구천인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천천히 문께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어 장풍을 날렸다. 그러자 두꺼운 문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다. 그는 왼쪽 손을 마저 내밀어 구멍 한 개를 또 뚫었다. 그런 연후에 손을 구멍 안으로 집어 넣어 그대로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와지끈 소리와 함께 암자의 대문은 덜렁 떨어져 나갔다. 가짜 미립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멋지군요. 참 멋진 장법이에요! 이봐요, 홍칠공! 연인들의 상봉이란 자고로 참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장면인데, 당신은 그래 만나 보지 않을 참인가요? 그럴 거면 왜 몇 십 리를 걸어 이 고심 암까지 찾아온 거예요? 자, 어서 들어가 보세요! 그녀가 말을 안 한다 해도 얼굴만 봐도 그게 어디라구……."
여인은 한껏 빈정거렸다. 홍친은 여인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미립을 만나는 것이 겁나기도 했다. 그녀의 싸늘한 눈길, 굳어 버린 표정, 그리고 자기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리란 것에 생각이 미치자 홍칠은 몹시 답답했다. 더욱이 미립이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한 채 머리 숙여 염불만 외우고 있을 그 구슬픈 광경을 떠올리자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짜 미립은 여전히 요염한 웃음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저 계집이 자기를 물러가게 할 수작으로 이 말 저 말 산란하게 해놓고 그런 후에 미립을 해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인 미치자 홍칠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당신이 문을 열었으니 난 뒤따라 들어갈 생각이오."
가짜 미립은 크게 웃어젖히더니 성큼성큼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뜨락 안에, 헐벗은 몇 그루 나무는 자못 쓸쓸함을 자아냈다.
그들은 사합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 복판엔 관음보살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대정향로(大鼎香爐)가 놓여 있었다. 향로엔 재만 두터이 깔려 있을 뿐 향내가 풍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향객의 발길이 끊어져 향을 피우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좌우에 각기 방석을 놓아두었는데 왼쪽에는 오육십 돼 보이는 여승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일심으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푸른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아름다운 머리칼을 채 감추지도 못한 채 꿇어앉
아 있었는데 그녀 역시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염불만 외우고 있었다. 미립이었다.
"미립, 넌 경을 외우더라도 결코 좋은 곳을 찾아오진 못했구나. 이런 황폐한 곳에선 네가 아무리 열심으로 염불을 외워도 부처님은 귀담아듣지도 않아!"
가짜 미립이 소리쳤다.
미립은 그 자리에 엎드린 채 까딱도 하지 않았다.
"미립, 넌 날 모르겠느냐? 그래도 네 연인이야 알아보겠지!"
미립은 불현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홍칠이 찾아왔음을 알아차리고는 더 열심히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노사부님, 이런 연세에 지금도 염불을 외우시는군요. 좀 쉬면서 하세요."
가짜 미립은 늙은 여승한테 다가가 한켠으로 힘껏 밀쳤다. 여승은 분노한 기색으로 고개를 반짝 쳐들었으나 가짜 미립의 눈빛이 사뭇 살기 등등하자 급히 읍을 할 뿐 채 말문도 열지 못했다.
홍칠은 미립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 여인이 아직도 진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았다면 꼭 나를 미워할 것이다. 나를 미워해도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저 여인이 진심으로 부처님한테 귀의했다면 우리 둘 사이는 이제 끝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미립, 나요. 내가 찾아왔소. 미……."
홍칠은 미기를 찾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가짜 미립이 곁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뜻밖에도 홍칠의 목소리를 듣고는 미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홍칠은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립, 그대는 어찌 속세를 떠나 불가에 귀의했단 말이오? 좀전에 그대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몸을 흠칫 떨었는데……. 그대는 옛정을 잊지 않은 게 분명하오. 옛정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불전의 사람이 되려 하는 게요?"
홍칠은 탄식하며 말했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미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립, 네가 정작 이렇게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니 홍칠공이 비로소 너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걸 넌 모를 거다. 저인 네가 이곳으로 들어온 후부턴 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내 보기엔 너는 이 사람과 다시 좋아할 만도 할 것 같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가짜 미립의 말에 미립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홍칠은 격분하여 성마르게 외쳤다.
"나와 이 여인은 개방의 은원지간이오. 이 여인은 나와 수화상극(水火相剋), 조만간 내 친히 미 방주를 대신해 이 여인에게 복수를 하리다. 미립, 당신은 날 따라갑시다! 가서 내가 개방을 재건하는 일을 도와주오."
미립은 다시 고개를 들고 홍칠에게 예를 올렸다.
"홍 방주님, 미립은 이미 죽었사옵니다. 고심암엔 다만 선심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 말에 홍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립이 이처럼 냉정하게 자기를 남 대하듯 하다니…….
'미립이 이 암자에서 나가기를 원치 않으니 아무리 설복해도 소용없을 게다. 이번에는 그냥 돌아가고 훗날 다시 와야겠다.'
홍칠은 생각을 가다듬고 담담히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소. 오늘은 이만 돌아가리다. 하나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훗날을 기약해 두겠소. 그럼……."
홍칠은 등지고 앉은 미립에게 예를 올리고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가짜 미립이 홍칠과 미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모두들 사랑의 굳은 맹세는 참말 진심아라고들 하더니만 그건 모두 입에 발린 소리였군. 미립, 홍칠공은 정말 인정사정이 없구나. 지성껏 설복도 안 해 보고 저렇듯 떠나가 버리다니!"
홍칠은 가짜 미립이 뭐라든 아랑곳 않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에 미립이나 자기나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채 몇 발자국도 못 가서 미립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홍칠은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구천인은 한 손으로 미립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잡아먹을 듯이 홍칠을 쏘아보며 외쳤다.
"홍칠이 이 놈, 네 놈은 하루하루 질질 끄는 성미지만, 이 구천인은 그렇지 않다. 난 바쁜 몸, 너무 오래 임안에 머물 순 없단 말이다. 이까짓 일을 가지고 질질 끌면 사내답지 못하다는 걸 왜 모르는가? 어떤가, 이 여인을 죽여 버리길 원하는가?"
홍칠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구천인, 당장 그 여인을 놓지 못햇!"
구천인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맞받아 고함을 질렀다.
"홍칠아, 개방은 조만간에 나의 철장방 수하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네 놈이 그깟 방주가 되었대도 소용없어. 차라리 나와 여기서 생사를 가르는 것이 어떠냐? 그럼 일은 단번에 해결될 텐데?"
"구천인 네 이 놈, 일개 대방의 방주로서 무슨 너절한 짓이냐? 네 놈이 미립을 놓아주지 않으면 내 친히 네 놈을 죽이리라."
가짜 미립은 일이 묘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얼른 끼여 들었다.
"하하하, 구 방주님, 그 년을 놓아주지 마세요! 저 홍 방주란 위인은 한 입 갖고 두말하는 위인이라 그 년을 놓아주면 당신과 싸우지 않고 그냥 가 버릴 거예요."
"옳은 말이오!"
구천인은 구차하게 여러 말 않고 손을 내밀어 미립의 정수리에다 철장을 올려 놓았다.
"자, 봐라! 나와 싸우겠느냐, 싸우지 않겠느냐?"
"좋다! 구천인, 먼저 손을 써라!"
홍칠은 자세를 잡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구천인은 내심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원래 이 가짜 미립이 황궁 사람으로 강호에 오래 머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이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자기는 엄연히 개방과 철방장을 총괄하는 대방주가 되는 것이다. 그전에 홍칠만 죽여 놓으면 만사는 다 그가 생각한 대로 착착 진행될 터였다.
"좋다! 우리 둘이 승부를 가리자!"
구천인은 악쓰듯 내뱉고는 얼른 미립의 대혈을 찍어 한켠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홍칠과 일 장 사이를 두고 마주 섰다. 그 사이 가짜 미립은 미립을 보며 빈정거렸다.
"미립, 너도 홍칠공을 좋아하고 나도 홍칠공을 좋아하니 우리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어떨까?"
미립은 가짜 미립을 보자 불끈 화가 치밀어 이미 불문에 몸담은 처지란 것도 잊어버리고 침을 퉤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누가 네 년하고 속마음을 나누겠느냐, 독사 같은 년!"
그러나 가짜 미립은 여전히 방글거렸다.
"그래, 맞아! 넌 홍칠공을 좋아하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고 있고, 난 드러내 놓고 홍칠공을 좋아해. 그래, 난 그에게 바싹 다가섰지, 넌 숨기고 난 바싹 다가섰는데 우리 둘 중 누가 홍칠공을 빼앗는지 어디 두고 보자꾸나."
미립은 기가 막혀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며 다시금 외쳤다.
"홍칠공, 당신은 나, 이 진짜 미립을 좋아하죠? 안 그래요?"
홍칠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구천인과의 일점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예로 친다면 둘 다 엇비슷하지만, 오늘은 미립이 놈들 손에 있으니 자칫하면 열세를 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미립은 성가실 정도로 다시 외쳤다.
"홍칠공, 당신이 내 말을 듣겠다면 내가 이 미립을 놓아주겠어요. 하나 그러지 않겠다면 내 필히 이 년을 요절내고 말 거예요!"
가짜 미립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검 끝으로 미립을 겨눴다.
"홍칠공, 당신은 구 방주님과 싸우지 마세요. 그저 내가 셋을 셀 동안 그에게 순순히 잡히는 거예요, 알겠죠? 미립의 생사가 위태롭다는 걸 명심하세요!"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팔을 내려뜨린 채 손을 쓰려 하지 않았다. 기실 그 역시 가짜 미립의 수작은 의외였다. 그는 다만 지켜보면서 홍칠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점쳐 보았다.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노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 들었다. 그때 그 석실에서 홍칠은 자기를 품에 안고……. 두 사람은 얼마나 정다운 나날을 보냈던가. 기실 미립은 그 때부터 마음속으로 홍칠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그 석실에서 능히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없어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후에 가짜 미립 농간에 맥없이 둘이 놀아나는 일이 없었더라면 미립은 결코 이렇게 출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립은 다시 홍칠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그는 구천인한테 패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만일 홍칠이 패한다면 개방의 삼십만 사람들과 미기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홍칠공, 한 가지만 묻겠어요. 그때 당신은 그 여덟 그릇의 음식이 더 소중했나요, 아니면 제가 더 소중했나요?"
홍칠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목이 메어 대답했다.
"무, 물론 당신이오. 내게는 무엇보다도 당신이……."
"잘 알겠어요. 당신의 진심을 알게 돼 기뻐요. 홍칠공, 이후 당신은 평생 동안 다시는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둬서는 안 돼요. 그리고 요리에만 정신을 팔지도 말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잽싸게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의 가슴을 푹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무도 말릴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털썩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짜 미립은 자기의 꾀는 역시 신통하다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검으로 미립을 겨누면 홍칠은 자기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렇듯 뜻밖에도 손 하나 까딱 않고 미립을 처치하게 되다니……."
미립은 힘없이 고개를 들고 가짜 미립을 올려다보았다.
"네 년이…… 저이를…… 아, 아무리 좋아해도…… 다 부질없는 일……."
그때 가짜 미립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계집을 한 번 더 찔러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홍칠이 잽싸게 미립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미립, 미립…… 아아, 미립, 왜 이런 짓을……."
홍칠은 진정으로 미립을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었다. 미립과 함께 석실에 갇혀 있던 나날 동안 그는 처음으로 거렁뱅이한테도 마땅히 집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비록 섬세한 사람이었으나 따뜻한 말로 여인의 환심을 살 줄은 몰랐다.
'미립, 이 홍칠이 그래 당신 말대로 고작 여덟 그릇의 요리에 정신이 팔려 당신과 부부간의 정분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한심한 작자이겠소? 결코 그렇지 않소! 난 이 여인을 멸시하오! 증오하오! 음식을 그렇게 먹었기로,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아, 미립, 미립……."
홍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 한마디도 못했다. 미립은 가느스름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힘없는 눈길을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소리쳤다.
"미, 미립, 나, 난 다시는……."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 한생에 더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미기를…… 잘…… 돌봐 줘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운 채 나직이 한마디하더니 털썩 고개를 떨궜다. 홍칠은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쩍도 안 했다. 한순간, 그는 반짝 머리를 치켜 들고는 똑바로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갑자기 무서운 비명을 질러댔다. 나대통도 적개심에 불타 올랐다. 두 사람은 횅 하니 몸을 솟구치며 결사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가짜 미립이 홍칠을 힐끔 곁눈질하면서 구천인에게 한마디 했다.
"구 방주님, 비분에 잠긴 군대는 꼭 패하는 법이에요. 홍칠공이 지금은 창자가 찢기는 듯 괴로울 테니 우리 오늘은 인정머리없이 굴지 말고 이만 하도록 해요. 훗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구천인은 손이 근질근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홍칠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홍칠, 이 미 방주의 명도 있고 하니 분하다만 내 오늘은 참겠다. 네 놈이 싸우고 싶거든 일찌감치 날 찾아오너라. 난 이젠 갑갑해 죽을 지경이다. 만일 네 놈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너희 개방놈들을 모조리 손봐 줄 테다."
그의 목소리는 고심 암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윽고 가짜 미립이 앞장서 나가자 구천인, 묘씨네 삼형제도 뒤따라 고심암을 떠났다.
홍칠은 미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를 구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미립의 짧은 인생은 얼마나 슬프고 고독했던가. 행복했던 나날은 불과 며칠뿐…… 그 석실 안에서 함께 보냈던 그 며칠뿐이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신혼의 기쁨을 나누며 앞날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은 살아날 희망을 버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때 그들은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했었다. 홍칠은 그때 그
석실에서 보냈던 그 나날들이 떠올라 한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홍칠은 미립의 시체를 안고 고심암 밖으로 나왔다. 나대통과 여승들이 힘을 도와 미립을 매장해 주었다.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고심암은 정적에 잠겨 있다. 한없이 우울하고, 고독이 밀려드는 쓸쓸하고 적막한 오후였다. 홍칠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무덤에 돌 두 개를 세웠다.
'미립, 안심하오. 미기는 내가 돌볼 테니. 미씨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내 결단코 최선을 다하리다. 그 애가 어른이 되었을 때 미운산 방주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내대장부로 자라게 할 거요. 그대는 그때 구천에서나마 웃음을 머금을 수 있으리다……'
홍칠은 말없이 맹세를 다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심암의 여승들은 경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의 평온한 목소리가 홍칠의 마음을 적지 않이 가라앉혔다. 홍칠은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로지 개방을 위해 매진하기로 각오를 새로이 하였다.




제27장 보이는 적과 숨은 적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은 침착하고 믿음직한 사나이였다. 그는 올곧고 매사에 신중해 개방에서 일찍 미운산 방주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요행히 미운산 방주의 아들 미기를 만나 임안 성 작은 골목에 집 한칸을 얻어 미기를 그곳에 안전하게 숨겼다. 그리고는 미기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말하지 말며, 개방의 전임 방주 미운산의 아들이라고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미기는 아직 어렸지만 그 동안 숱한 변고를 겪으며 험악한 강호를 익히 경험
한 터라 노경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하여 몇 사람말고는 그가 미기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다. 미기가 뜨락에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미기야! 미기야!"
미기는 달리 생각지 않았다. 자기가 이곳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출수표 노경과 그의 심복뿐이고, 아니면 홍칠이나 나대통뿐이었기에 그저 그들 중 하나겠거니 하고 기뻐 환성을 지르며 문을 열었다.
빗장을 끄르자마자 문을 확 열어젖히며 흑의를 걸친 사나이 넷이 들이닥쳤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뜨락에 들어서자 뒷발질로 문을 쾅 닫고는 감때사납게 미기를 쏘아보았다.
"네 놈이 미운산의 새끼냐?"
미기는 흠칫 놀라면서도 맞받아 목청을 높였다.
"네 놈은 누구네 새끼냐?"
사나이는 미기가 사뭇 당당하자 잠시 당황하다가 다시 기세를 돋워 외쳤다.
"미운산도 죽고 네 누나도 죽었다. 혼자만 살아 남아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네 놈도 아버지와 네 누나 뒤를 따르게 해 주지!"
사내는 한마디 내뱉으면서 성큼 내달아 미기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영특하고 민첩한 미기는 얼른 몸을 피했다. 사내는 성이 나서 낯색이 시뻘개졌다. 그자는 철장방에서도 이름난 위인으로 무예도 비범한데 어린애 하나 붙잡지 못하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미꾸라지 같은 녀석!"
사내는 고함을 내지르며 홱 돌아섰다. 그자는 쌍장을 뒤로 주춤 끌어들였다가 미기를 향해 철장개산(鐵掌開山) 법수를 힘껏 펼쳐 냈다. 아무리 영특해도 아직은 어린 나이라 미기는 그만 그 힘에 밀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털버덕 나동그라졌다. 넘어지면서 땅바닥에 얼굴을 짓찧어 미기의 입가에선 선연히 피가 흘러내렸다. 미기는 팔뚝으로 쓱 입을 문지르며 소리쳤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무슨 일로 나를 해치려는 거예요?"
미기는 이 사람들이 개방 사람들이 아니란 걸 진작에 짐작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그 말에 코대답도 않고 자기 뒤에 서 있는 세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우리 넷이 돌아가며 한 장씩 날릴 테니 누구 장이 더 센지 한번 맛을 보아라!"
그러자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개중 하나가 선뜻 나섰다.
"단 한 장으로도 저 녀석을 죽여 버릴 수 있지."
그 사내는 눈알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미기에게 다가와 덥석 팔을 붙잡았다.
"네 누나도 죽고 너 혼자 살아 남아 아무 재미도 없겠지? 안 그러냐?"
그리고는 힉 하고 미기의 동가슴을 장으로 내질렀다. 미기는 꿀꺽 선지피를 토해냈다. 사내의 근 장에 중한 내상을 입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앨 죽여서는 안 되네."
이어 한 사내가 또 이죽거리며 미기가 마치 무예 연마 상대라도 되는 듯 미기를 붙잡고 한바퀴 빙 돌며 아이의 몸뚱어리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미기의 등에 한 장을 먹였다. 사나이는 손에 사정을 두었으나 그 장을 얻어맞자 미기는 마치 천식증에 걸린 늙은이마냥 연거푸 쿨럭거리며 입에 피 거품을 물었다. 정말 인정사정없는 놈들이었다. 미기는 이미 그 두 장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는데도 나머지 두 놈은 차례로 미기에게 한 장씩 먹였다. 그러자 미기는 땅
바닥에 납작 쓰러져 뭍에 나온 물고기마냥 심하게 온몸을 퍼덕거렸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시각에 출수표 노경은 나대통, 노유각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사람은 어지간히 취해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었다.
"개방에서 난 미운산 방주님을 가장 존경했었네. 그분은 매사에 아주 공정했으며, 사람들의 자그마한 허물에는 늘 관대하게 대해 주셨지. 내가 그분 수하에서 일하면서 실책을 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방주님께서는 늘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난 감격을 금할 수 없다네."
출수표 노경은 격분을 눌러 가며 담담히 말했다. 나대통, 노유각도 저마다 미운산의 됨됨이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기실 미운산은 출수표 노경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진중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미운산은 방주 자리를 소씨 거렁뱅이한테 넘겨 주었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 대사는 뒷전이고 떠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리하여 개방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운산이 여인의 손탁에 휘말려들어 개방은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새로이 방주가 된 홍칠 역시 그 여인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 나왔다고는 볼 수 없었으며 녹옥죽봉도 여전히 그
여인 수중에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 세 사람은 홍칠이 미운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나없이 얼굴이 불콰하니 혀가 꼬부라지자 출수표 노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들 마시고 이젠 돌아감세."
그러나 나대통과 노유각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허, 이 사람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세나. 거기 가선 밤새껏 마셔도 일없네."
출수표 노경이 권하자 두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여 안주와 술 몇단지를 사 들고는 노경의 집으로 향했다. 노경은 술단지 두 개를 들고 앞장서 걸으며, 나직이 한마디 던졌다.
"미 방주의 아들 녀석은 참말 귀엽단 말야. 영특하고……."
나대통, 노유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비틀비틀 뒤따라갔다. 이윽고 그들 세 사람은 노경의 집 앞에 당도했다. 노경이 문을 두드리려는데 저절로 스르르 열렸다.
"어, 이상하군!"
평소 미기는 그가 집에 없으면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허투로 문을 열어 주는 법이 없었다. 세 사람은 몽롱한 중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일은 터져도 크게 터진 것 같았다. 뜨락엔 난데없이 흑의 사내 넷이 빙 둘러서 있었다. 복색으로 보아 철장방 녀석들이 분명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출수표 노경은 대갈일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네 사내에게 덮쳐들었다. 나대통, 노유각도 동시에 사내들을 덮쳤다. 그러자 사내들은 일시에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어 내빼기 시작했다.
"이 놈들, 꽁무니를 빼!……."
노경은 눈에 불을 켜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는 듯이 담을 뛰어넘어 놈들을 뒤쫓았다. 나대통, 노유각도 연달아 담을 뛰어넘었다. 그들 세 사람은 철장방 네 놈을 바싹 추격해 갔다. 그러나 하나같이 공력이 매우 대단하여 순식간에 골목을 구불구불 에돌아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출수표 노경은 계속 뒤쫓으려다 미기가 걱정되어 외쳤다.
"놓쳤다! 어쩔 수 없다. 얼른 돌아가 미기를 살펴보자!"
다시 노경이 앞장서고 두 사람이 뒤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미기는 뜨락에 널브러져 있었다. 미기의 입에다 바싹 귀를 갖다 대니 가느다랗게 숨결이 느껴졌다. 노경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미기를 껴안았다.
"미기야, 미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미기야!"
노경의 눈물이 미기의 몸에 뚝뚝 떨어졌다. 노유각과 나대통도 비통을 금할 수 얼었다. 방주 미운산도 비명에 가고, 그의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제 미기마저 이렇듯 죽어 가고 있지 않은가!
"구천인, 철장방, 이 개 같은 놈들! 내 절대로 용서치 않으리, 절대로 용서치 않으리!……."
출수표 노경은 이를 갈며 외쳤다. 마치 한 마리 짐승이 포효하는 것 같았다. 나대통, 노유각도 비통에 잠겨 무릎을 꿇고 처연히 미기를 내려다보았다. 일순 미기의 입이 꿈틀하더니 아이는 서서히 눈꺼풀을 치떴다. 그리고는 입가에 엷게 웃음을 지었다.
"아, 아저씨……."
나대통이 황급히 노경을 불렀다. 노경이 얼른 얼굴을 갖다 대자 미기는 그를 바라보면서 힘없이 말했다.
"아, 아저씨…… 그…… 그 놈들이…… 누나가 죽었다고……."
"아니다. 아니야. 놈들의 말을 믿지 마라. 다 허튼소리야!"
미기는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는 듯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홍칠 아저씨, 누나를……누나를……."
그러나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미기는 털썩 고개를 떨궜다. 미기는 그예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노경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미기를 이곳으로 데려올 때만 해도 능히 그 아이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놈들의 마수가 여기까지 뻗쳐 오다니……. 미운산 방주의 이 마지막 혈육 하나까지 끝내 지켜 내지 못하다니……. 미기의 주검을 앞에 놓고 노경은 수치감과 분노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노유각과 나대통도 울분을 참지 못해 꺽꺽 울음을 토해냈다.
묘씨네 형제들은 이제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다. 매사를 가짜 미립의 명을 받들어 그녀가 하라는 대로 착착 시행하니 그들에게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더욱이 일심으로 그녀 말만 들었더니 무슨 일을 하든 수월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세 사람은 다 같이 방안에 있었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 장승 같은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행색을 보니 개방 사람이었다. 그는 방안을 휘둘러보고 나서 무뚝뚝하게 물었다.
"묘 나으리시우?"
묘대야는 그대로 몸도 일으키지 않고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또 셋째 허삼야를 바라보았다.
"셋째 나으리시우?"
셋째도 머리를 끄덕였다. 사내는 이번에는 우사야를 보고 물었다.
"넷째 나으리시우?"
넷째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다시 묘대야에게 눈길을 돌렸다.
"묘 나으리의 병장기가 이곳에 있습니까? 소인이 한번 보고자 합니다."
묘대야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허투로 나갔다가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신변에 있던 병장기 두 개를 선뜻 꺼냈다. 하나는 둔중하게 생긴 식칼이고 다른 하나는 자루가 긴 국자였다.
그 사람은 탁자 위에 놓인 묘대야의 병장기를 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셋째 허삼야를 유심히 뜯어보고는 그가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름을 놓는 것이었다. 허삼야는 사내의 속심을 눈치채고는 손을 날려 탁자 귀퉁이를 뎅겅 끊어 버렸다.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아주 만족스런 기색을 지었다. 그는 또 넷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넷째는 주먹으로 탁자 복판을 쾅 내리칠 태세를 취하다가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주먹이 채 탁
자에 닿기도 전에 탁자 복판엔 구멍이 뻥 뚫렸다. 그것을 보고 사내는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문께로 가서 밖의 동정을 살핀 연후에 한껏 소리를 낮춰 말했다.
"소인은 개방 사람입니다."
형색이야 개방이 확실한데 어느 개방 사람이란 말인가? 홍칠의 개방, 가짜 미립의 개방……. 묘씨 세 형제는 의아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네 분께서는 이곳 방주한테 돌아오셨는데 그녀가 당신들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당신들한테 빨리 도망가라고 얘기해 주기 위함입니다. 떠나야만 화를 면할 수 있으니 조금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일각이 급합니다. 조금만 멈칫해도 이곳에서 뼈도 못 추스를 겁니다!"
사내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세 사람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긴 했으되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말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나 그렇다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작정 따를 수도 없었다. 묘대야는 의아한 생각에 휩싸여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개방 사람들은 우리 다섯 요리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란 걸 잘 알 거요. 지금은 비록 셋뿐이지만."
셋째도 덩달아 물었다.
"누가 우리를 해치려 하다니요? 왜요? 그자가 누구요?"
사내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야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백타산군 구양봉이지요."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딴은 그렇기도 했다. 그 둘이 아니고서는 자기들을 쉽사리 죽일 만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묘대야는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좋소. 미리 알려 주어 우리 셋은 감사를 드리오."
사내는 이들이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자 안달이 났다.
"과연 당신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우리 집 주인이 당신들더러 몸을 피하라고 하는데도 당신들은 믿지 않는구려."
넷째는 내내 잠자코 있다가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주인이라니, 그게 누구요?"
그 사람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더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세 사람은 적이 의아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선심이든 흑심이든 어쨌든 미리 알려 몸조심을 시키는데 정체도 모르는 마당에 함부로 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쪽에서 잡지도 않는데 사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당신들 세 분이 둘째가 죽은 일로 미 방주한테 원한을 품고 계시다는 걸 미 방주 그녀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서독 구양봉과 철장방 구천인을 시켜 당신들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제보기엔 아무래도 세 분께서는 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여전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망연히 사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묘대야가 입을 열었다.
"형제께서 알려 주어 감사하오. 한데 우린 결코 미 방주를 배반한 일이 없소. 그러니 그녀가 우리를 죽이려 드는 무슨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러한데 우리가 뭐가 두려워 도망치겠소?"
그러자 사내는 엉거주춤하니 서서 탄식을 했다.
"우리 집 맏형님 말씀은 참말로 거짓이 없소. 당신들은 모두 바보들이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발길을 뗐다. 그러나 그가 채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요란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여, 개방 사람! 어디로 가려는가?"
네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 목소리…… 그는 바로 철장방 구천인이었다. 묘대야 등은 그제야 이 사람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늦고 말았다. 뒤미처 꽝 소리가 나며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구천인은 음험한 기색으로 세 사람을 쏘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묘대야, 허삼야, 우사야 다 모여 있구나. 잘됐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그 사내를 바라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자넨 누군가? 개방에선 자넬 본 적이 없는데? 누구 수하지?"
그 사람은 창백하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미 방주님 수, 수하이옵니다. 그저 전갈이 있어 와, 왔을 뿐입니다요."
그 말에 구천인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흩뿌렸다. 그는 이미 문 밖에서 이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내를 붙잡아 이 세 요리사들에게 전갈을 보낸 위인이 누구인가를 캐낼 작정으로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그는 끝끝내 알아내고야 말리라고 마음먹고는 사내의 대혈을 향해 힘껏 찔러 갔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기도 전에 사내는 뜻밖에도 잽싸게 칼을 꺼내 자기 목을 베어 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사내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구천인도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편으론 부아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론 탄복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훌륭한 사내로군!"
구천인은 뱉어 내듯 한마디 던지고는 고개를 홱 돌려 세 사람을 쏘아보았다.
"더 긴 말은 않겠다. 너희들 세 놈은 홍칠을 찾아가 밀모하고는, 다시 미 방주 곁으로 돌아와 능히 목숨을 보전할 줄 알았더냐? 유감스럽게도 너희 놈들의 일은 이미 발각되었으니 성사되기는 글러버린 줄 알아라!"
묘대야는 화급히 셋째와 넷째를 돌아보았다. 이들 세 사람은 둘째의 원수를 갚는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된 마당에야 복수고 뭐고 이 자리를 무사히 벗어나는 것만도 천만다행일 터였다. 묘대야가 소리쳤다.
"구천인, 오늘 우리 세 사람은 이곳이 우리 무덤인 줄 알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네 놈과 일점을 겨루겠다."
묘대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황급히 왼손에는 식칼을, 오른손에는 국자를 집어 들고 냅다 구천인에게 달려들어 빗발처럼 칼을 휘둘러댔다. 바람소리가 쌩쌩 허공을 가르며 국자도 사방으로 날았다. 하지만 구천인은 코웃음만 쳤다.
"그까짓 재주로 감히 나한테 덤비려 하다니!"
그는 일순 웃음을 거두고 휙 철장을 날렸다. 그 순간 묘대야의 칼과 국자는 허공에서 딱 멎어 버렸다. 셋째와 넷째는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황급히 손을 썼다. 그러나 구천인은 눈하나 깜짝 않고 여유만만하게 방장을 휘둘렀다.
네 사람은 한데 엉켜서 밖으로 나왔다. 구천인은 법수를 바꿔 가며 철장을 날렸으나, 이 세 사람 역시 목숨을 내놓고 덤비고 있는 터라 한참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천인이 묘대야를 향해 있는 힘껏 철장을 찔러 가는데 뒤쪽에서 기괴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구천인, 자넨 그까짓 재간으로 화산 무예 시합에 참가하려 했었나? 그깟 조무래기 몇 놈도 처치하지 못하고서야 위신이 말이 아닐세그려!"
언제 왔는지 백타산군 구양봉이 팔짱을 긴 채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구천인은 속으로 무척 조급했으나 태연한 척 말했다.
"구양 선생,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시오!"
구천인은 한층 번개같이 장을 날렸다. 그는 공격을 분산시키지 않고 주로 묘대야를 겨냥했다. 먼저 앞가슴을 공격하다가 순식간에 왼쪽 어깨를 들이치고 다시 오른쪽 어깨를 들이쳤다. 그리고는 이마를 가격해 나갔다. 묘대야는 쩔쩔매며 칼과 국자로 간신히 그의 장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구천인이 이마를 가격해 오자 그만 몸을 피할 새가 없어 머리만 살짝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급히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그는 국자는 위로 쳐들고 칼은 아래로
드리웠다. 그 바람에 가슴 쪽에 틈이 생기고 말았다. 구천인은 그때를 노려 방장을 곧게 앞으로 뻗었다. 일단 격중되기만 하면 묘대야는 죽게 될 판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그것을 보고 급히 달려들었다. 허삼야가 급작스럽게 외쳤다.
"주먹 나간다!"
넷째 우사야도 전력을 다해 구천인의 등허리를 갈겼다. 구천인은 두 사람이 공격하는 것에는 코웃음만 치고 기어이 묘대야를 물고늘어졌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묘대야는 뒤로 십여 걸음 밀려갔다. 그는 숨을 몰아 쉬고서 중얼거렸다.
"장법이 대단하군."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 자리에 털버덕 주저앉고 말았다. 입가엔 선혈이 내비쳤다. 묘대야는 중상을 입었다.
셋째와 넷째는 구천인을 쏘아보면서 각기 지니고 있는 법수를 다 동원해 결사적으로 대항해 나갔다. 그러나 구천인은 가볍게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양 선생, 그래 당신 보기엔 내 장법이 어떻소? 화산에 갈 만 하겠소?"
"글쎄, 그만하면 갈 수도 있겠군. 만일 상대가 소씨 거렁뱅이였다면 아직 몇 십 합은 더 겨뤄야 하겠지만 말야. 보아하니 홍칠이 녀석과 겨뤄도 비길 수는 있겠군. 그러나 나와는……."
구양봉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천인은 이빨을 부드득 갈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가 적수로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는 엄연히 구양봉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구 방주, 이젠 그만 쉬시게나. 내가 저 두 놈을 상대할 테니!"
구천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냉큼 옆으로 물러섰다. 구양봉은 천천히 허삼야와 우사야 쪽으로 다가섰다.
"너희 두 놈들은 요리를 잘 만든다고 평판이 자자하더구먼. 이참에 내가 너희 두 놈을 붙잡아 가야겠다. 너희 놈들은 재수에 옴붙었다 하겠지만 어쩔 수 있나. 나의 백타산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거든. 여자를 원한다면 절세미인도 수두룩하지! 어때? 마음이 동하지?"
이때 두 사람은 전의를 상실하였으나 구양봉의 말이 도무지 귓속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생각했다.
'네 놈 말을 듣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말지. 뭐, 서역에 가서 요리를 만들어? 명색이 활궁 요리사인데 이토록 능멸하다니.'
셋째 허삼야가 소리쳤다.
"구양봉,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마라. 황궁 요리사는 한평생 두 사람 시중만 든다!"
"그래? 그래, 그 두 사람이 누구냐? 한 사람은 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자 셋째는 의기 양양하게 대답했다.
"홍칠공이다!"
"이 노옴? 네가 아직 내 솜씨를 모르는 게야……."
구양봉은 분기탱천해서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때 그는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났다 선비 노릇을 할 때 그는 홍칠을 뒤따라 황궁에 들어가 원앙오진회를 먹은 적이 있었다. 음식을 훔쳐먹는 일에서는 당연 홍칠이 자기의 사부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 한동안 말문이 막혀 남색까지 괴이하게 변했다. 구양봉의 이런 심사를 알 수 없는 둘째와 셋째는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가 보다 생각하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구양봉을 쏘아보면서 불의의 습격을 경계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갑자기 노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네 놈들이 홍칠이 놈의 시중을 들겠다니 나의 부아를 돋우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냐?"
셋째와 넷째는 구양봉이 손을 쓸 생각은 않고 그저 소리만 질러대자 의아하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구양봉이 또 소리쳤다.
"구천인, 이 묘가란 놈은 죽이든 살리든 자네 맘대로 하게나. 이 셋째와 넷째는 나한테 맡기고! 난 이 두 놈들을 필히 백타산으로 끌고 가 내 시중이나 들게 해야겠다!"
구양봉은 기실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황약사는 악한들을 끌어다가 자기 심복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강호에서 내로라 하고 뻐기던 악한들이 다 황약사한테 잡혀가서는 꼼짝도 못하고 고분고분 하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 평소에도 그는 솔깃했었다. 그는 득의 양양하여 생각했다.
'황약사, 네 놈 동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이 서독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네 놈은 무예가 뛰어난 놈들을 주워 모았지만 이런 훌륭한 요리사는 얻어 들이지 못했겠지? 흐흐흐, 이 점에선 내가 네 놈보다 한수 위다!'
평소 그가 첫손가락으로 꼽는 사람은 남제와 동사였다. 그는 사악한 면에서는 자기가 동사보다 위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셋째와 넷째를 보고 소리쳤다.
"너희네 다섯 요리사들이 황궁에서 지낼 땐 기껏해야 처자까지 복을 누리게 하고 풍의족식(豊衣足食)할 수 있었을 따름이지만 나의 백타산에 가면 황제 곁에 있을 때와는 비길 수 없이 호의호식할 수 있다. 내 말만 고분고분 듣는다면야 뭐든 못 들어주겠느냐?"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 악한들이 두려운 것은 다름아니라 그자들이 변덕이 심해 그 비위를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황제의 시중을 들 때도 전전긍긍하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여야 했던가? 그런데 이 구양봉 같은 악한의 시중을 들기란 정말 참기 어려운 수모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구양봉, 우리 두 형제는 절대 네 놈 시중은 안 들겠으니 아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라!"
셋째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 말만 했다.
"허허허, 알 만하다, 알 만해. 황약사가 간악한 자들을 도화도로 끌고 갈 때만 해도 그 놈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방법이 없었던 거다. 너희들이 이 서독을 따라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수록 난 더 기분이 좋단 말이다. 그래 이 서독에게 네 놈들을 굴복시킬 방법이 없는 줄 알았느냐?"
그 말에 두 사람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때 구천인이 구양봉을 바라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구양 선생,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 당신이 그 놈들을 끌고 갔다가는 도리어 그 놈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는 거요."
구양봉은 구천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구천인, 자네 날 얕볼 셈인가?"
"내가 어찌 당신을 얕볼 수 있겠소. 당신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한이 아니오. 하지만 독은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오? 이 놈들이 당신을 죽일 일념으로 음식에 독을 넣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소?"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듯도 했다. 하지만 기왕에 황궁 요리사들을 하인으로 삼겠다고 작정한 이상 구양봉은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동사와 승부를 가르고 싶은 마음에 달떠올라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구천인이 자기를 빈정거린다고 생각하자 구양봉은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구천인, 그래 자넨 내가 저 두 놈이 음식에 독약을 넣을지 몰라 두려워할 거란 말이지?"
"당신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한이면서 저 놈들이 요리를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기막힌지 모르시오? 저 놈들은 맛과 색깔이 전혀 달라지지 않게 하면서 교묘하게 독약을 넣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 그거요. 잘못하다간 천하에 으뜸가는 악한이란 칭호가 나한테 돌아온다니까."
구천인의 말은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맞아, 저 놈들을 끌고 갔다가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군. 이거 곤란하게 됐는걸. 이제 와서 저 놈들을 죽여 버리면 구천인이란 놈의 비웃음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격이 아닌가.'
그는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쌀쌀맞게 말했다.
"구천인, 자네는 뭣 때문에 그렇게 엄포를 놓는 건가? 무슨 목적으로? 좋다. 그럼 내기를 하자! 이 두 놈을 백타산으로 끌고간 후 저 놈들이 독약을 먹여 나를 죽이는가, 아니면 저 놈들이 내 손에 죽는가 어디 두고 보잔 말이다."
구천인은 그 말에 냉소를 머금을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 웃음은 뭔가?"
"저 놈들이 죽는 걸 두려워한다면 구양 선생의 수단이 쓸모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만일 저 놈들이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당신 수단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된단 말이오."
자세히 들어보니 구천인의 말은 실로 사리에 맞았다. 만일 이 셋째와 넷째가 참말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얼마든지 황제 시중을 들 듯 자기를 받들게 조종할 수도 있다. 재물과 고운 계집을 넘치도록 안겨 주면 그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심으로 자기를 죽일 생각만 한다면 그야말로 상서롭지 못하다. 그는 예전에 유운장(留雲莊)에 당도한 후 노독물 신독행한테서 독약을 사용하는 재간을 배웠기 때문에 기실 독약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타산에는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요, 만일 구양극이 이 두 놈한테 중독된다면 그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구천인은 구양봉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내가 네 놈을 설복하는 게 네 놈을 위해 그러는 것인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 요리사 놈들이 네 놈을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난 그렇게 되기를 쌍수를 들고 바라는 바이다. 나는 다만 묘씨네 일을 벌여 놓기만 하고 뿌리를 뽑지 못한 격이 될까 봐 그러는 거다. 후에 이 두 놈이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다면 만의 하나 우리 철장방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구천인은 철장방 방주가 된 후 강남에서 자기의 세력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자기의 명성이 점차 커지자 그는 더더욱 야심에 불타 올라 자기의 철장방을 천하에서 가장 큰 무리로 만들 일념으로 꿈을 키워 왔다. 마침 조정에서 개방을 없애 버리려고 하자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개방을 없애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며 개방을 돕는 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묘대야 앞으로 다가갔다. 묘대야는 벌써 기가 죽어 있었다. 그는 중상을 입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묘가야, 난 네 놈은 꼴도 보기 싫다! 지난번엔 그냥 살려 뒀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너희 세 놈은 모두 한곳에 모이거라!"
구천인은 큰소리로 외치더니 묘대야의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고작 요리사 주제에 위풍을 부리다니……. 이까짓 식칼과 국자가 그래 병장기가 될 수 있다더냐?"
구천인은 가소롭다는 든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한순간 냉랭하게 표정을 굳히며 국자를 들고 묘대야한테 달려들었다.
"묘가야, 내가 네 그 알량한 스물네 가지 국자 쓰는 법수를 펼쳐보일 테니 어디 내 솜씨를 보아라."
그는 식칼과 국자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휙휙 바람소리가 나면서 식칼이 묘대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국자가 번쩍거렸다. 묘대야는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이제나저제나 죽기만 기다렸다.
한순간 바람소리가 멎고 주위는 정적에 잠겨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기미가 없자 묘대야는 의아해하며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고 있던 옷은 오간데없이 사라지고 몸엔 실오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칼도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천인이 법수를 자랑하느라고 한바탕 식칼과 국자를 휘두르는 통에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대머리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묘대야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구천인, 네 놈이 날 죽이려면 죽일 거지 왜 이다지도 능멸을 하느냐?"
"묘가야, 난 그저 국자 스물네 가지 법수를 써 본 것일 뿐이다. 네 놈 보기엔 내 국자 쓰는 재간이 어떠냐? 네 놈보다 나으냐?"
묘대야는 말없이 구천인을 쏘아볼 따름이었다. 그는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구양봉 곁에 서 있는 셋째와 넷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 두 사람은 죽지 부러진 장닭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의 그 위풍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묘대야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리고는 호통을 쳤다.
"구천인, 이 개 같은 놈! 네 놈은 우리 다섯 형제를 해치고 둘째를 죽였다.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 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래, 원귀가 되게 해 주지. 내 네 놈한테 진짜 국자와 식칼 맛을 보여 줄 테다!"
구천인은 식칼과 국자를 들고 기세 등등하게 묘대야를 찔러 나갔다. 묘대야의 몸뚱이 위에서 식칼과 국자가 어지러이 춤추더니 등허리에서 삽시에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묘대야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분노가 치받쳐 부르르 몸을 떨면서 악을 썼다.
"구천인, 이 개 같은 놈!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고……."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오를수록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이제는 온몸과 얼굴이 피에 얼룩져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구천인은 손을 멈추고 빈정거렸다.
"묘가야, 네 놈은 이제 곧 저승길인데, 그래도 나한테 굽어 들지 않을 테냐?"
묘대야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구천인, 네, 네 놈이 거꾸러지는 꼴을 못 보고 죽는 게 하, 한이 될 뿐이다……."
그는 기진하여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쏘아보기만 했다.
"좋다! 네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내가 소원을 풀어 주지."
구천인은 식칼과 국자를 높이 치켜 들어 식칼로 국자를 힘껏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가 나며 국자 끝이 자루에서 떨어져 나갔다. 구천인은 소리를 지르면서 길다란 국자 자루로 힘껏 묘대야를 찔렀다. 그러자 묘대야는 뒤로 휙 날아가 벽에 붙박히고 국자 자루는 그의 앞가슴에서 용수철처럼 덜렁거렸다
"묘가야, 이젠 네 놈 차례다! 어디 마음놓고 죽여 보아라!"
묘대야는 아직도 숨이 남아 있었다.
"구천인, 빨리 날 죽여라……."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구천인은 손에 들었던 식칼을 힘껏 뿌렸다. 푹 소리가 나며 식칼이 묘대야의 앞가슴에 깊이 박혔다.
셋째와 넷째는 이를 악물고 그 참상을 바라보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구천인한테 달려들었다. 구천인은 얼른 손을 뻗쳤다. 그때 구양봉이 껄껄 웃으며 가로막았다.
"구천인, 이 두 놈은 내 거야. 죽여도 내가 죽인다!"
구천인은 급히 한켠으로 물러났다. 구양봉은 잠시 여유도 주지 않고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그의 장풍을 막았으나 허사였다. 다섯 형제가 함께 덤벼도 안 될 판인데 하물며 이 두 사람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구양봉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독사 장으로 그들 둘을 마구 밀어붙여 정신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서 항복해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어떠냐, 날 따라 백타산으로 가겠느냐?"
구양봉은 연신 장풍을 날리면서 거듭 소리쳤다.
셋째와 넷째는 그의 말은 아예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구양봉은 왼쪽 장을 끌어 당겼다가 팍 하고 셋째의 어깨를 갈겼다. 그러자 셋째는 휘청하더니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넷째야, 난 먼저 간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혀를 깨물어 자결하고 말았다. 넷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셋째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더럭 겁이 났다. 다섯 형제가 순식간에 구름 흩어지듯 흩어져 버리고 자기만 오롯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사정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욱이 앞에 맞서고 있는 자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대악한 구양봉! 더 싸워 봐야 목숨만 잃을 뿐이다. 넷째는 두려운 나머지 더듬더듬 소리쳤다.
"구양 선생, 당신께 충성을 다하렵니다. 다섯 요리사 중 제 재간은 보잘것없다 할 수는 있으나, 그래도 가장 못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어떻게……."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넷째야, 아까는 싫다고 하더니? 지금은 왜 마음이 변했는고? 한데 이제는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테냐?"
넷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결을 하려 해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 법, 넷째에겐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저 비는 수밖에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그는 구천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구 방주님, 구양 선생께 사정 이야기 좀 해 주칩시오! 제발 목숨만 좀 구해 주십시오!"
구천인은 냉소를 치며 구양봉과 넷째를 번갈아 보았다.
"구양 선생, 원한다면 저 놈을 그곳으로 데려가구려. 저 놈이 서역 오랑캐 놈들보다야 음식을 잘 만들지 않겠소?"
구양봉은 오랑캐란 말이 심히 거슬렸다. 구천인이 자기를 비꼬고 있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참기로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천인, 자네가 권하지 않았던들 난 저 놈을 용서해 주었을 거다. 하지만 이 구양봉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절대 남의 말을 듣는 법이 없다!"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않고 코방귀만 뀌었다.
'그러니까 멋대로 하라구.'
구양봉은 넷째에게 바싹 다가가 징그럽게 웃어댔다.
"네 놈은 마땅히 나한테 빌어야지 어찌 구천인한테 굽실거리는 게냐?"
그러자 넷째는 화들짝 놀라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구양 선생,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넷째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오만하게 웃으며 거들먹거렸다.
"네 놈이 아무리 빌어도 이젠 늦었다!"
그는 약간 사정을 두고 우사가 넷째라고 해서 발로 그의 앞가슴을 연거푸 네 번 걷어찼다. 넷째는 저만치로 패대기 쳐졌다. 구양봉이 다가가 살펴보니 넷째는 이미 지각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은 죽었군. 이런 걸 상대로 손을 써야 하다니, 제기랄!"
그는 시답잖다는 표정으로 사장을 들어 넷째의 머리를 내리쳤다. 넷째는 사지를 뻗어 버리고 말았다.
임안 성 작은 골목으로 두 사람이 총망히 걸어가고 있었다. 일점지 나장태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작은 집에 가 멎었다. 그 집 뜨락에선 평소와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거나 노름을 놀고 조무래기들이 한데 몰려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급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큰형님……."
그가 말머리를 떼자 나장태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홉째, 이 의잔 오늘 내가 은자 서른 냥을 주고 사 왔네."
아홉째는 의아해하며 유심히 의자를 뜯어보았다. 모양도 괴상하고 낡아서 볼품이 없었다. 용이 부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팔걸이 한쪽이 떨어져 나간데다 남아 있는 하나마저 온전치 못했다. 이런 고물을 왜 그렇게 비싼 값에 사 왔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장태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건 개방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의 걸상이었네. 그 사람은 홍안루에 가면 늘 이 걸상에 앉아 있곤 했다네."
그제야 두 사람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듯도 하였다. 나장태는 줄곧 개방 방주 자리를 탐내 왔다. 지금 개방에는 방주가 둘이나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장태 자신이 방주가 된다는 건 실로 하세월이 아니겠는가.
나장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홉째, 또 무슨 일인가?"
아홉째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울먹거렸다.
"셋째형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나장태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 후닥닥 뛰어 일어났다.
"뭐라구? 누구 손에?"
아홉째는 머리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했다.
"구, 구천인한테 발각되어 그만 스스로 목숨을……."
"난 셋째에게 묘가한테 알리고는 즉시 자리를 뜨라고 했었는데, 그렇담 묘가는 어찌 되었는가? 묘씨네도 몽땅 죽었다고 하던가?"
나장태는 혼비백산했다. 아홉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장태는 탄식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난 그 사람들을 구해 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 셋째의 시체는 염습은 했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 요리사들도 묻어 주게. 비석은 세우지 말고. 셋째와 한곳에 묻지도 말고."
나장태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망히 밖으로 나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걸상에 앉아 앞뒤로 흔들거리다가, 혼자말을 하며 쓸쓸히 웃었다.
"소씨 거렁뱅이, 불편해서 이 걸상에 어떻게 앉아 있었나……."
그는 몹시 답답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바깥 바람을 쐬자 기분이 다소 나아지는 것 같았다. 때마침 저 만치에서 구양봉과 구천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점지 나장태는 벌써부터 얼굴에 웃음을 발라 가며 말했다.
"구양 선생, 구 방주님, 두 분은 웬일로 한가하십니까?"
"오늘은 그렇네. 보다시피 산보나 하고 있지."
구양봉이 시답잖다는 듯 대꾸했다.
구천인은 오만하여 워낙 개방 사람들을 깔봤지만 웬일인지 나장태에게만은 달랐다.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짜 미립이 황중으로 돌아가면 기필코 이 일점지 나장태가 개방 방주가 될 터이다. 개방의 삼십만 무리들을 철장방에 복종하게 하려면 미리부터 이 나장태한테 점잖게 보여 놓아야 한다. 자칫 그의 기분을 잡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구천인은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 돌아다니는 걸 보니 나 장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려?"
"헤헤헤, 저야 뭐……. 오늘 두 분께서 기분이 좋으신 듯하니 제가 두 분께 술을 좀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구양봉은 곱지 않은 눈길로 나장태를 흘겨보았다. 그는 누군가 자기한테 술 마시기를 청하면 그것은 필시 자기한테 무엇을 바라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쌀쌀한 눈길로 나장태를 쏘아보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인은 활짝 웃으며 반색을 했다.
"나 장로는 개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장로인데 어찌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구양봉한테도 읍을 하였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다 자기를 존중하는 기색을 보이자 득의 양양해져서 앞장서 걸으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네, 네, 홍안루로 모십죠."
나장태는 허리를 낮추 꺾고는 앞장서 길을 잡았다.
그들은 홍안루에 당도해 누각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나장태가 넙죽넙죽 말을 주워섬겼다.
"구양 선생, 구 방주님, 이 홍안루는 경도 임 안에서도 이름난 곳으로 자운재, 취선루, 낙사거 세 곳과 어깨를 견줄 만한 곳이지요. 일찍이 이곳에서 소씨 거렁뱅이가 요리사로 있었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적이 흥분된 기색이었다.
구양봉은 그저 나장태를 바라볼 뿐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인은 한눈에 나장태의 속셈을 환히 꿰뚫어 보았다.
"그러기에 나 장로는 예전에 소씨 거렁뱅이가 앉던 낡은 걸상을 은자 서른 냥이나 주고 사지 않았소?"
구천인은 능청을 떨었다. 나장태는 그 말에 가슴이 찔끔하였다.
'구천인이 철장방 방주 노릇을 하며 그녀 곁에서 일을 도모하더니 임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르는 게 없구나.'
나장태는 남한테 속셈을 들여다보인 게 창피한지 낯색이 새빨개졌다.
"구 방주님이 바로 알아맞히셨습니다. 만일 미 방주께서 아신다면……."
그러다가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구천인은 껄껄 웃었다.
"이건 내가 미 방주한테서 들은 얘기요. 그렇지 않다면야 나 장로가 날이면 날마다 방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도 나 장로를 의심하지 않을 턱이 없잖겠소!"
나장태는 그 말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는 그 여인이 비록 무예는 대단치 않으나 심사가 지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 여인은 자기 나장태가 오히려 야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름을 놓고 있는 것이다.
"헤헤헤, 저는 그 여인이 나이가 어려 중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나이도 어리고 섬약한 여자 몸이라 일을 그렇게 멋들어지게 해낼 줄은 참말 몰랐지요. 개방 대사를 처리하는데도 아주 과단성이 있어 누가 미 방주님을 해코지하려고 해도 참말 쉽지가 않지요."
나장태는 사뭇 감탄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구천인과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천인이 쌀쌀한 기색으로 맞받았다.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면야 그 여인 혼자 어찌 홍칠의 내막을 그처럼 잘 알 수 있겠소?"
"그렇지요, 그렇지요! 미 방주께서 이런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다 구양 선생과 구 방주님 공덕 때문이지요."
구양봉이 코방귀를 팬면서 한마디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출수표 노경이 암암리에 그 여자 편을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인 거야. 그자는 겉으로는 홍칠한테 가 있지만 기실은 그 여자의 심복일세. 그자 역시 조정 사람이거든."
일점지 나장태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누군가 했더니 바로 그자였구나!'
나장태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양봉, 구천인에게 다시 한 번 읍을 하며 술을 따랐다.
"첫말이 아닙니다. 이 나장태는 수십 년 개방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어 봤지만 구양 선생처럼 유능한 인물은 보지 못했고, 구 방주님같이 기백 있는 인물도 못 보았습니다. 오늘 두 분을 모시고 술을 마시게 되니 이 나장태, 일생의 영광입니다."
구양봉, 구천인은 나장태가 한껏 추켜 올리자 기분이 좋아져 들어가는 대로 술을 퍼마셨다. 비록 교활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나 누군가 추켜 주기만 하면 그들은 마치 어린애마냥 기뻐하곤 했다. 나장태도 개방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인지라 그가 자기들을 추켜 세우니 두 사람은 한량없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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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21.♡.93
내사랑이다 (♡.50.♡.153) - 2022/02/21 20:57:45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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