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2

3학년2반 | 2022.02.22 07:36:12 댓글: 0 조회: 425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320


제6장 함정에 빠진 단지흥
이노파가 대리국을 찬탈하려고 이렇듯 치밀하게 간계를 꾸며 왔다니……. 단지흥은 치받치는 분노에 사정없이 온몸을 떨어댔다.
'이 거친 산간벽지엔 미개한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줄 알았는데 이렇듯 간교한 계략이 꾸며지고 있었다니……. 내 도저히 묵과할수 없다!'
단지흥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노파가 또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까. 난 여기서, 저 사람과 혼사를 치르고 함께 궁궐로 갈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대리 황제 단지흥이 되고 난 어엿한 황후가 되는 거예요. 어때요? 볼 만하겠지요?"
단지흥은 치가 떨렸다. 이런 요망한 것이 어디 있으며 이런 악독한 음모가 어디 있는가? 단지홍은 하도 기가 막혀 차라리 실성한 사람마냥 흐흐흐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해 보란 말야!"
그런데 그 가짜 단지홍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퀭하니 단지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핏 보기엔 단지흥의 일거일동을 주시해 두었다가 궁궐에 가서 그 흉내를 내려는 심산 같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란 하늘이 내리는 법, 흉내를 내서 될 일인가? 어떻게 며칠은 버틴다고 해도 금세 들통이 날 터인즉 그때 가선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단지흥은 방안이 들썩거릴 정도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노파는 문득 생각이 난 듯 한들한들 단지흥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군. 그러니 진짜 황제께서 이리 시큰둥하시지. 황제께서 왜 이리 태연자약한지 이제 알았어요. 생김새만으로는 사람들 눈을 못 속인다 이 말이지요? 생김새가 아무리 똑같아도 일양지공을 쓸 줄 모르면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요, 그렇다면 궁궐에 가도 조만간 꼭 들통이 난다, 그래서 우리 말에 코웃음만 치는 거군요."
"그러니 그런 수작일랑 싹 집어치우란 말이오. 대리 단씨 자손들은 모두 궁 안에서 일양지공을 익힌단 말이오. 일양지공이 뭔지도 모르는 이런 허깨비 같은 인간은 가 봤자 황제 자리는커녕 그 자리가 무덤이 될 거라는 걸 명심하시오!"
가짜 단지흥은 그 말에 대번에 남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단지흥은 기세등등하게 노파에게 빈정거렸다.
"거기다 뭐 황후가 된다구? 그런 까마귀 핑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어느 정신 빠진 황제가 낯가죽이 쪼글쪼글한 노파를 황후로 삼겠소?"
그러나 노파는 그 말에 성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호호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나 같은 건 싫다? 그렇담 이젠 나도 마음을 고쳐 먹겠어요, 눈앞에 진짜 황제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짜를 만들어 보낼 게 뭐겠어요? 이봐라, 진짜 황제를 가져야겠으니 넌 썩 물러가거라."
노파는 가짜 단지흥에게 외쳤다.
가짜 단지흥은 희색이 만면하여 건들건들 걸어 나갔다. 노파는 말을 이었다.
"단황 나으리는 이미 독약을 먹었으니 황중에 가도 내 말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그러니 내가 황후가 되는 데 아무 지장도 없을 것인즉, 황제 생각은 어때요?"
노파는 단지흥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아찔한 향기가 풍겨 왔다. 사내들을 홀려 놓고도 남을 기막힌 향기였다.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향기는……."
노파는 후후후 웃음을 날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황제도 궁녀들에게서 늘 이런 냄새를 맡았겠지요?"
단지홍은 정신을 차리려고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황제란 모름지기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는 줄로 아는데, 기실 황제의 말못할 고충은 아무도 모르오."
노파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었다. 그 소리에 뒤미처 처녀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중에는 처음에 보았던 국부만 살짝 가린 나체의 여자들과 뱀 굴로 그들을 끌어들인 조그마한 계집애도 있었다. 손톱이 너무 길어 매 발톱같이 끝구부러진 여자도 눈에 띄었다.
노파는 자못 위엄 있게 말했다.
"난 방금 새로운 생각을 하나 해 냈다. 난 지금 황제와 혼례를 치르련다. 그런 연후에 우리 모두 대리국으로 가서 부귀영화를 누려 보자. 한평생 이 침침한 산굴에 있는 것보다야 몇 십 배는 좋을 것이야."
그러자 여자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그런데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나는 이 황제에게 시집갈 생각이지만, 황제께선 날 싫다고 저 야단이구나. 하나 우격다짐을 해서 라도 일을 성사시켜야겠으니 너희들이 좀 도와다오."
노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톱이 매 발톱같이 구부러진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단지흥에게 바투 다가왔다.
"폐하, 우리 할머니를 황후로 맞아들이면 복이 저절로 굴러 드는 건데 뭐가 싫다는 거예요?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재미없을걸요."
그리고는 매 발톱 같은 손톱 끝을 단지흥의 살에다 꾹 찔러 넣었다. 그러자 대번에 피가 쭉 흘러 나오고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홍은 튀어 나가려는 비명을 급히 삼키고는 낯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할머님, 이 사람이 정 싫다고 하면 아예 죽여 버려요. 그리고 할머님이 직접 대리국 황제 자리를 빼앗아서 차지하면 그만 아녜요?"
"저 사내만큼 잘난 사내도 찾아보기 어려워. 암, 그렇고말고. 그래 내 죽이기 아까워 그러는 것이니 황제도 너무 고집 피우지 마시오. 마냥 그러다간 우리 애들이 사정 안 둘걸요."
"황제께서 할머니한테 장가들겠다고 응낙만 하신다면야 우리가 얼마나 살뜰하게 보살펴 올리겠어요?"
이 여인들은 짐짓 들으라는 듯이 자기들끼리 쑥덕공론들을 해대더니 이내 단지흥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꾹꾹 혈도를 눌러 놓았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금방 먹은 독약 기운이 발작하는지 온몸이 쑤시고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단지흥은 어쩔 수 없이 노파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내 귀비가 되는 게 소원이라면 귀비로 봉해 주겠소! 그러나 이런 몸으로야 어떻게 혼사를 치른단 말이오? 이러다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겠는걸."
그러자 여자들은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며 호들갑스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 할머니만 좋아한다면 그깟 고통쯤이야 삽시에 가셔지고 만사형통이라니까……. 그러니 우리 할머님이 시키는대로만 하세요."
그리고는 사지를 잡고 단지흥을 번쩍 들어올려 굴 안에 있는 작은 온천으로 들고 갔다.
그들은 단지흥의 옷을 훌렁훌렁 벗기고는 물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는데도 단지홍은 혈도를 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그녀들도 옷들을 홀랑홀랑 벗어 던지고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텀벙텀벙 물에 뛰어들어 단지흥의 몸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껏 살아오면서 이런 치욕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엽사(艶事)는 처음이다. 여인들 여럿과 함께 홀랑 벗고 물에 들어서 목욕을 하다니 이 얼마나 남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폐인(廢人) 신세가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여자들이 맘대로
문지르도록 내버려두고 있다니 낭패로다, 낭패야!'
수치심과 자괴감이 뒤범벅이 되어 단지홍은 목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당신들도 너무 가혹하지 않소. 날더러 저런 노파를 맞이하라고 이 야단이니, 그래 내가 좋을 리 있겠소?"
그래도 여자들은 계속 같은 말만 했다.
"정말 모르는 말씀이네요. 우리 할머님만 얻으면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 온다는데도 자꾸 왜 이러세요. 송나라 천자(天子)도 이런 황후는 얻으려 해도 못 얻는다구요."
단지홍은 기가 막혀 아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정신나간 여자들에게 하소연하는 내가 바보지. 이 여자들과 그 악마 같은 노파가 다 한통속인데! 자기네 노파를 위해 나를 강박하며 히히덕거리고 있는 판에 더 말해 봐야 입만 닳는다, 에 잇.'
여자들은 팔을 문지른다 다리를 문지른다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이윽고 단지흥을 온천에서 나오게 해 이번에는 목욕통 안에 넣고 또 한 차례 몸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앉혀 놓고 머리를 빗어 주었다. 그러자 단지홍은 대리국 황제라기보다는 꼭 남방 산골의 영준한 청년같이 보였다.
여자들은 단지흥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발그래져 수군거렸다.
"우리 할머님은 사람 고르는 재간이 남다르거든……."
"정말 이 황제는 옥으로 만든 사람같이 멀끔한걸. 그러니 할머님이 한사코 이 황제와 혼사를 치르려 하지……."
그들은 단지흥을 앉혀 놓고는 한동안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중독되어 도마 위에 오른 고기 꼴이 되었다 하나 이렇게 능욕을 당하고도 가만있다면 그건 사내도 아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러나 사대 시위마저 죽은 지금, 내 가 죽어 버리면 누가 천룡사 중들을 구한단 말인가.'
단지홍은 생각할수록 비애만 가슴 가득 차 올랐다.
여자들은 한참이 지나자 단지흥을 옹위하여 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밝은 달이 걸려 있었다. 이처럼 밝은 달은 처음 보는 성싶었다.
동굴 어귀에선 독수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졸고 있고, 불면의 야신(夜神) 같은 코끼리 몇 마리가 달빛 아래 거연히 서 있었다.
밤은 세인들이 모르는 무수한 비밀을 품고 교교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인들은 단지흥을 한켠에 앉혀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아무리 들어도 알 수가 없었다. 뿐더러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둘 눈물을 짓자 더군다나 의아하기만 했다.
"무슨 노래지?"
단지홍은 개중 제일 다소곳해 보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손등으로 턱을 괴고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단지흥의 말소리에 언뜻 고개를 들고 나직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옛날이야기를 엮은 노래예요. 옛날 한 총각이 한 처녀를 사랑했지요. 그런데 그 처녀가 그만 뱀에게 물려 갔어요. 총각은 매일매일 찾아가 뱀과 싸웠답니다. 그래서 끝내 뱀을 쳐죽였
지만 그 자신은 기진맥진하여 거의 죽게 됐지요. 그래도 총각은 안간힘을 쓰며 굴 안으로 들어가 처녀를 찾았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굴 안엔 처녀는 없고 백골만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어요. 어느 백골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총각은 백골 하나하나를 보며 일일이 물었다지 않아요? 네가 내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이냐? 네가 내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이냐?…… 그랬더니 어느 한 백골이 눈물을 뚝뚝 떨구더랍니다. 그제야 총각은 그
백골이 애인의 백골인 줄 알고 그걸 가슴에 왁 껴안더니 그예 숨을 거두고 말았대요."
단지홍은 그제야 이 여자들이 왜 비애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아름다운사연이 담긴 노래였다.
그는 잠자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일순, 이 여자들이 왜 등불을 켜지 않는지 단지홍은 그것이 또 궁금해졌다. 그는 좀전의 그 여자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아이 참, 그거야 우리가 켜기 싫으니까 안 켜는 거지요, 뭐. 하늘의 달만이 우리들의 혼사처럼 깨끗하고 신성한데 왜 등불을 켜요? 등불은 아무리 밝아도 깨끗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집가 는 처녀들은 깨끗한 달빛이 흐르는 야밤에 결혼을 하기를 바란답니다."
단지흥은 그 말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낯가죽이 쪼글쪼글 한 노파가 그 주제에 처녀가 시집가는 흉내는 다 내 보겠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노룻이었다.
여자들은 이번엔 코끼리를 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매우 유순한지, 처녀들의 춤에 맞춰 네 다리를 움직가렸다. 그걸 보고는 나무 위에 앉아 졸던 독수리들도 깨어나 날아 내려왔다. 그것들은 여자들 어깨에 내려앉아서 날갯죽지를 으쓱으쓱하더니 끼윽끼윽 소리를 내질렀다. 여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코끼리를 몰고 야음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 순간 어디에서인지 또 다른 여인들이 한 무리 단지흥에게로 다가왔다. 그 여자들은 그를 에워싸더니 언뜻 자장가 같은, 혹은 축복의 노래 같은 잔잔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나
씩 하나씩 다가와 그의 귀에다 입술을 대고 제각각 뭐라고 소곤거렸다.
한 여자는 단지흥 곁으로 바싹 다가오더니 그윽한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다가 방긋 웃으며 속살거렸다.
"오늘 밤 신혼의 쾌락을 축하드려요."
그녀의 눈길은 가을의 호수처럼 그윽했다. 단지흥은 마치 그녀의 눈길에 빨려 들 듯이 가슴이 몹시 설ㄹ다.
"노파의 용모가 그대 절반만 돼도 내 기분이 이렇지는 않을 텐데……."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갔다. 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말해 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동정 어린 눈길로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이내 멀어져 갔다.
이윽고 다른 여자들도 차례차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여자 둘만 남아서 엄청나게 큰 버섯 모양 장막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장막 안은 적이 교교했다. 밖에서 조그만 틈새를 뚫고 어슴푸레하니 달빛이 흘러 들고 있었다. 단지흥은 차라리 이 달빛마저 없으면 싶었다. 온통 어두워야 그 쪼글쪼글한 노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 얼굴을 맞대고 혼사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노파와 혼사를…… 실로 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일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단지흥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참! 혈도를 눌렸으니 죽으려도 죽을 수가 없게 됐구나, 이 노파는 충피보다 더 지독한 괴물이다. 충피는 단지 일양지 비본만 요구했을 뿐인데……. 오늘에 이르러 이 단지흥이 이런 곤경을 만나다니…….'
단지흥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넋 놓고 앉아 있기만 했다. 잠시 후 여자 둘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장막 한복판에다 털 담요를 깔고 거기에 그를 눕혔다. 그리고는 그의 아혈(兒穴)을 꾹 눌렀다.
"용연향(龍涎香)을 피울까?"
"너는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니? 할머님이 분부했잖아, 청향(淸香)을 피우라고. 이분은 용연향 향내를 좋아하지 않는대."
"우리 할머님같이 살뜰한 분을 어디서 얻어? 황제는 복이 터졌어."
단지홍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레 노기가 치받쳐 뭐라고 소리를치려 했으나 이젠 아혈마저 눌린지라 그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찍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장막의 휘장들을 모두 내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희미하게 흘러 들던 달빛도 이젠 가려져 온 장막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단지흥은 자못 긴장해서 새까만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쳐댔다. 그도 귀비들을 여럿 맞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귀비들은 모두 늘 시중들던 궁녀들 중에서 고른 여인들이라 단지흥과는 그전부터 익숙한 사이였다. 게다가 그는 신분이 신분인지라 황비를 맞아들여 첫날밤을 보냈을 때를 빼고는 긴장감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여인들과 즐기는 건 둘 사이의 사랑이 충만해서라기보다는 황제로서의 일방적인 요
구요, 여인들 측에선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도저도 아니요, 남에게 혈도가 눌려 꼼짝을 못하면서 구역질 나는 노파에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할 판이니 한시도 경계심을 늦출 수도 없고 그러자니 자연 전에 없이 긴장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수치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노파는 대체 젊은 남자를 어떻게 다를 것인가…….
한 순간,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뒤미처 가벼운 숨소리도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무당 할미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 노파야, 네 년이 나와 동방합환(洞房合歡)을 하자고 할진대 나를 그냥 이대로 놔두지는 못하겠지. 설마 벙어리로 놔두기야 하려구. 아혈만 풀리면 일단 단단히 따져 보자. 이런 강박이 어디 있는지, 여자가 남자를 강박하여 억지로 합판을 하는 법이 세상 천지 어디에 또 있는지.'
단지홍은 단단히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마침내 노파가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노파는 조심조심 손으로 더듬으며 다가오더니 손에 털 담요가 만져지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로군요."
노파는 단지흥을 지척에 두고 마주앉았다. 단지홍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노파는 한껏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난 이번이 처음이에요. 비록 이 숙녀동의 동주여서 할머니란 말은 듣지만 사내와 자리를 같이 하기는 이번이 정말 처음이라구요. 날 부드럽게 다뤄 줘요. 부탁이에요. 당신은 황제니까 여인들을 많이 다뤄 봤을 거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아실 테니 제발 살갑게 다뤄 주세요. 난 무서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악귀같이 굴더니 이제 와서는 이처럼 부드럽게 사정하듯 하자 단지흥은 오히려 덜컥 의심이 났다. 이 노파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런 요사를 떠는 것일까? 그 나이 먹도록 세상 무슨 일을 못 겪어 보았기에 남자와 같이 있기가 무섭다느니 어쩌느니 괴망을 떨까?
'옳거니, 네 년이 나하고 잠자릴 하려 하니 요런 요사를 떠는구나. 내 마음이 동해야 합환이 될 테니 그러는 게지? 내가 그냥 버티면 제가 무슨 수로 나와 살을 섞어. 두고 보자!'
어쨌든 깜깜해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 쪼글쪼글한 얼굴을 환히 들여다보고는 단둘이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만도 소름이 돋칠 지경 이리라.
단지흥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노파는 저 혼자 겨워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내가 만인임을 모르지 않지만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남자들은 착한 여인을 좋아하죠? 그럼 저를 가지세요. 저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충피를 죽이겠다면 제가 나서서 죽며 버리겠어요. 충피를 죽이는 것쯤은 여반장이니까요……."
'여반장이라구? 나를 죽이는 것도 여반장이겠지.'
노파는 한숨을 짓더니 또 말을 이었다.
"난 어려서부터 이 굴에서 자랐어요. 난 천하에서 이 굴이 제일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한번은 할머님과 함께 성안에 들어갔다가 어느 날 황궁을 보고서야 세상에 이곳보다 더한 별
천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황궁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워요? 나도 저런 황궁에서 한번 살아 봤으면 하고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그 꿈이 오늘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나도 이젠 당신을 따라 황궁에 가 살게 되었으니……."
단지흥은 노파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몸까지 떨고 있는 듯하였다. 그 순간, 단지홍은 문득 깨달았다. 노파 말마따나 이 노파는 필시 처녀임에 틀림없다. 하기는 숙녀동 동주이니 의당 처녀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한 번도 남자와 살을 섞어 봤을 리 없고 그래서 긴장해서 저토록 떠는 모양이었다…….
노파는 노파 같지 않게 보드라운 손으로 단지흥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아혈을 눌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해 줄 텐데……."
노파는 단지흥에게서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아혈을 풀어주려 했으나, 간신히 마음을 돌렸다. 그랬다가 단지흥이 성이 가라앉지 않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날엔 신혼 첫날밤부터 대판으로
싸웠다는 소릴 들을 게 아니겠는가? 그 수치를 어떻게 당해 낸단 말인가. 노파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지흥은 아직도 노기가 가시지 않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여자고 네가 남자라면 능욕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지만 명색이 사내 몸으로 어찌 네 년을 무서워하겠느냐. 그냥 이렇게 꿈적않고 있기만 하면 네 년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한번 당해 봐라! 이런 일은 여자 혼자만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것이야.'
단지흥은 배짱이 든든해졌다.
"여보, 낭군님, 날 사랑해 줘요. 파초 잎처럼 넓은 품으로 날 꼭안아 줘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번개가 차나 우레가 우나 변함없이 사랑해 주어요, 네?"
노파는 정답게 속삭이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잠시 있더니 단지흥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젖무덤 위에 올려 놓았다.
"여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만져 보아요."
단지흥은 노파가 하는 대로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낮에 목욕하고 나올 때 보았던 그 탱탱한 젖무덤을 그는 노파가 이끄는 대로 더듬게 되었다. 꼭 처녀의 것마냥 작고 딴딴한 젖꼭지에 손이 닿자 단지흥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정말 몸만은 견줄 데 없이 매혹적이었다. 낮에 얼굴을 보지 않고, 오늘 밤 이 깜깜한 방에서 몸만 만졌다면 이 여인이 노파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파의 젖무덤을 더듬으면서 그는 퍼뜩퍼뜩 노파의 얼
굴이 떠올라 그때마다 울컥울컥 치미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중독이 된데다가 혈도까지 눌려 일양지공도 못 쓰고 말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안간힘을 쓰면 그는 여인을 애무하는 정도는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늙은 노파와는 정녕 그러기가 싫었다.
노파는 다시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꼭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나 대신 다른 동주를 뽑고 나면 난 당신을 따라 당장 여기를 떠날 수 있어요. 아까 방안에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건 당신 들으라고 일부러 허세를 부린 거고 나 혼자서만 당신을 따라…… 당신, 날 데리고 갈 거지요? 그렇지요, 네?"
그러더니 노파는 부끄러움을 타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아아, 우리 이 산 굴의 일을 당신도 알겠지만…… 난 정말 남자들과 이런 일은…… 하지만 이 일을 모르지는……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어때요?"
그러더니 노파는 단지흥의 목을 텁석 끌어안았다.
"내가 당신을 안아 줄게요."
노파는 보드라운 살결을 찰싹 갖다붙이고 목을 꼭 끌어안은 채 한동안 무엇에 취한 듯 가만히 있었다.
"낭군님, 나하고…… 나하고 이러니 좋지요? 나하고 더……."
단지흥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노파의 얼굴을 더듬어 볼 요량으로 주춤 손을 들어올렸다. 애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쭈글쭈글 늙은 노파의 낯에 손이 닿으면 자기도 모르게 기겁을 해서는 저절로 아혈이 풀려 악 비명을 내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소리에 부끄러워서라도 이렇게 매달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버렸다. 아무리 악귀라도 노파가 지금 한창 흥분되어 열이 올라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였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마음이 약해 졌다.
"낭군님!"
노파는 지겹도록 낭군님을 부르며 속삭여댔다.
"난 낭군님이 있기에 날이 새면 더는 이 숙녀동의 동주로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그냥 동주로 있는 게 좋아요, 아니면 당신 각시가 되는 게 좋아요?"
'흥, 별 꼴같잖은 걸 다 묻는구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라니. 너 같은 건 이 숙녀동의 무당 할미로 있는 것도 과분하다. 과분해!'
단지흥은 생각할수록 노파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 생각밖에 안 했다.
"날 꼭 데리고 가야 해요. 누가 목욕하는 걸 보라고 했어요? 내 몸을 본 이상, 당신이 나를 거두어야 해요. 여인이 목욕하는 걸 엿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내도 있지만 난 그런 건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다 보아 놓고선……."
이건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별별 구실을 다 끌어다 대며 자기를 옭아매려고 하니 단지흥은 속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시간이 갈수록 더 더욱 흥분되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떨리는가 하면 몸이 나른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사내와 단둘이 있는 것이 이다지도 좋은데 왜 이때껏 모르고 있었을까? 그녀는 감미로운 술에 흠뻑 취한 듯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문득 자기 혼자만 온 정을 쏟아 붓고 있지 상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순 마음이 상해 그녀는 단지흥의 어깨를 꽉 틀어 잡았으나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날이 새면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우리 아이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죽어요. 알아요?"
단지흥은 물론 알 도리가 없었다.
'이 숙녀동엔 괴이한 일도 많구나. 합환을 증명하라니,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날이 밝으면 여자들이 모여들어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소린가? 그런데 만약 오늘 밤 동침이 못 된 줄 알면 노파 를 처벌한다고? 그거야 정말 잘된 일이군. 오늘 밤만 잘 버터 내면 이 요망한 것이 여자들 손에 죽든지 자기 손으로 자결을 한다? 그럼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원수를 갚는 게 아닌가?'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기뻐서 킁킁 코방귀를 뀌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양 노파는 성깔을 부렸다.
"낭군님, 낭군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난 그걸 고려할 형편이 못돼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어요. 난 오늘 밤 당신과 꼭 일을 치러야겠어요."
그러더니 노파는 한 팔로 단지흥을 안아 반쯤 일으키고는 약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 약을 잡수세요. 잡숴야 해요. 잡숫고 나선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노파는 사정없이 약병을 들이밀면서도 웬일인지 한숨을 폭 내쉬 었다. 그 소린 적이 서글프게 들렸다.
단지흥은 먹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이 요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그를 꽉 그러안고 억지로 약을 먹였다. 단지흥은 토해 내려고 꺽꺽거리다가 숨을 들이켜는 바람에 그만 약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내 말을 들어요, 내 말을 들어. 낭군님, 낭군님이 일국의 황제인 줄 내 모르는 바 아닌데 내가 낭군님을 능욕하려고 이럴까.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요? 궁으로 다시 돌아갈 테야요, 안 갈 테야요? 돌아가서 천룡사 중도 구해 내야죠. 그 방법은 내가 알아요. 충피 그 놈도 내 앞에선 설설 긴다니까요! 내일이라도 가겠으면 당장 갑시다, 네?"
노파는 갖은 말로 단지흥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지흥도 귀가 솔깃해졌다. 정말 노파의 말대로 안전하게 대리국으로 돌아가 천룡사 중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기 싫어도 눈 딱 감고 노파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 다시금 이곳 숙녀동에서 비명횡사한 네 시위가 떠올랐다. 죽은 네 시위는 대리국의 고굉지신(設肱之隆)들이다. 그들이 죽은 것은 대리국의 네 기둥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거늘 이 원수를 아니 갚고는 설사 천룡사 중
들을 살려낸다 한들 그 한은 풀 길이 없는 것이다.
노파는 계속 속살거렸다.
"날 데리고 가요, 네? 난 당신을 도와 꼭 대리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니깐요."
그 말에 단지흥은 번쩍 정신이 났다.
'그러면 그렇지, 네 년이 대리를 집어삼킬 야심으로 이 수작이로구나, 이 수작이! 그래 황후가 되어 대리국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겠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때였다. 갑자기 뱃속이 뜨끔뜨끔하더니 뜨거운 열기가 확확 솟구치며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삽시에 온몸이 화끈화끈 달아 올랐다. 신음 소리조차 비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 마구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노파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낭군님, 낭군님! 남녀의 연분과 인간의 명은 하늘이 정해 준다는데, 그러게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요? 공연히 이렇게 사서 고생할 게 뭐예요?"
단지흥은 혈도만 눌리지 않았더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양지공으로 이 정욕의 불길을 능히 내리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기는커녕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조수같이 정욕이 밀려들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순간, 단지흥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더욱이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손이 거뜬해지며 자유자재로 움직여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노파의 몸을 정신없이 매만졌다. 옥같이 하얗고 미끈한 몸뚱어리,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 소리…… 단지흥은 점점 노파에게 빨려 들어갔다.
'이 여인은 처녀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다. 이런 숙녀가 나를 원하는데 내가 왜 마다하겠는가…….'
온몸에 불을 지펴 놓은 듯 정욕에 불타 올라 단지흥은 연신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으스러지듯 노파를 껴안았다.
"그래요, 낭군님. 내 몸은 낭군님 것이에요. 가지세요. 어서 가지세요!"
노파도 눈물이 글썽해져 더욱 힘껏 단지흥을 끌어안았다. 일순 여인의 새된 신음 소리가 물결쳤다. 이윽고 단지흥과 노파는 한 몸이 되었다. 노파는 아리따운 목소리로 애간장을 녹이는 신음 소리를 연신 토해냈다.
날이 밝았다.
단지흥은 환한 빛을 느끼며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장막 안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몹시도 머리가 무겁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러다 차츰차츰 어젯밤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파는 갖은 소리로 애원을 했고 자기는 목석같이 버티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야, 약을 먹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절통하고 분해 죽을 일이었다. 또다시 그런 모욕을 당한다면
정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리라.
드디어 해가 반짝 솟아오르고 햇빛이 장막 안으로 비껴 들었다.
햇빛은 여전했건만 단지흥의 심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불경에 이르기를, 크게 슬픈 자 그 슬픔을 모르노라 하였더니 내가 정녕 그 지경이 되었구나. 어젯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 또 그처럼 강박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내 오늘은 결단코 가만있지 않으리라.'
단지흥은 기실 아직도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결코 그 일을 치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파가 자기를 껴안고 미친 듯이 달라붙은 것만으로도 미치도록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는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자기도 모르게 팔을 힘껏 내둘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팔이 시원스레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언뜻 환호성을 질렀다.
"야, 이거 봐!"
다리도 뜻대로 움직이고 몸에도 기운이 솟구쳤다. 말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싹 독 기운이 가시고 혈도도 풀린 것이었다. 단지흥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이빨을 사리물며 이제야 진정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을 다졌다. 일국의 황제로서 참을 수 없는 능욕을 당하고서도 순순히 물러선다면 이는 자기만의 수치가 아니라 나아가 대리 전체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때 장막 밖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왔다. 신랑, 신부의 첫 아침을 축복하는 나팔 소리였다.
단지흥은 선뜻 장막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어느새 숙녀동 여인들이 아침 햇발 아래 다 나와 서 있었다. 그녀들은 가까운 일가 친척을 대하듯 반가운 눈길로 단지흥을 맞이했다.
그녀들의 얼굴을 대하자 단지흥은 욕지기가 날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싫었다. 불을 싸질러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 싶을 만큼 그는 자신을 욕보이고 사대 시위를 처치한 이곳, 이 산 굴, 이 여자들이 싫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다 거두시오. 당신들은 나와 내 시위들에게 그토록 못할 짓을 저지르고도 웃음이 나온단 말이오? 가증스럽게……."
그 말에 모여 선 여인들은 호호 웃더니 양 옆으로 짝 갈라섰다.
그 순간, 단지흥은 놀라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농부, 어부, 나무꾼, 선비…… 그렇게도 익숙한 네 얼굴이 빙긋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단지흥은 눈을 비비고 나서 또 한 번 바라보았다. 정녕 꿈은 아니었다. 그는 그래도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일순 확 달려나가 그들을 와락 부등켜안았다.
손톱이 긴 여인이 한켠에 서서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러자 단지흥은 네 시위를 붙잡았던 손을 놓고는 홱 돌아서며 호통을 쳤다. 사대 시위는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 그따위 소린 입에 담지도 마라!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느냐! 난 그 노파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그 소리에 숙녀동 여인들은 놀라서 웃음을 싹 거두었다. 손톱이 긴 여자가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 혼례가 아이들 장난인 줄 아세요? 어젯밤 우리 동주님과 그래 도…… 동침을 하면서 그…… 그 일을……."
그녀는 그 다음 말은 더 잇지를 못했다. 처녀 몸으로 그 말을 더 하기가 웬지 부끄러워서였다.
"안 했소. 그런 일은 난 안 했소!"
단지흥은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했어요? 그렇담 어쩔 수 없군! 얘들아, 어서 가서 신부를 불러오너라!"
계집애 몇이 득달같이 고파를 끌고 왔다. 노파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한발 한발 다가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몹시 부끄럽다는 기색이었다. 단지흥은 보면 볼수록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얘, 영고(瑛姑)야, 이젠 네 몸이 분명 처녀 몸이 아니랬지?"
손톱이 긴 여자는 위엄 서린 목소리로 노파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끄러워 머리를 더욱 숙이며 모기 소리같이 다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내 말하잖았니, 난 이젠 숙녀동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자 여자들이 와 환성을 올렸다.
"얘, 영고야! 너도 알겠지, 숙녀동의 율(律)이 어떻다는 걸? 이제 검사해 봐서 네 말이 정말이라면 너희 부부는 가서 다시는 숙녀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하나, 만약 네 말이 거짓이면 율대로 넌 여기서 자결을 해야 해……."
손톱이 긴 여인이 다그치자 노파는 머리를 숙인 채 가만히 끄덕였다.
"그럼 좋다. 얘들아, 너희 몇 사람이 영고를 데리고 들어가 검사를 해 봐라.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일이 돼가는 형세를 보고 단지홍은 적이 불안해졌다. 어째서인지 노파에게 얼핏 연민의 정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처럼 떠받들더니 오늘은 저처럼 종 다루듯하다니. 게다가 진짜 처녀인가 가짜 처녀인가를 검사한다니, 뭐 이런 해괴망측한 율이 다 있어. 어쩌자고 숙녀 동에선 이따위 율을
다 만들어 냈을까. 그런데 정말 어젯밤 내가 저 노파와 일을 치렀는지 정녕 알수가 없군.'
단지흥은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취한이 어제 일을 회상해 보듯 불안한 심정으로 간밤의 일을 되살려 보았으나 아리송하기만 할 뿐,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일을 치른 것 같기도 하고 치르려다가 만 것 같기도 하고…….
여인들 몇이 노파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야 조그마한 계집애가 쪼르르 달려왔다. 여인들은 자못 잠잠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계집애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해죽 웃었다. 그러자 여자들은 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이윽고 노파가 천천히 다가왔다.
손톱이 긴 여자는 노파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제부터 영고는 이 숙녀동의 할머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
노파는 이제까지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안다니까. 이건 내 자의야."
"그렇다면 좋아. 어서 황제를 따라 여기를 떠나라.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숙녀 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처신하도록."
노파는 손톱 긴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지흥을 돌아보았다.
"낭군님, 이젠 떠나야지요?"
단지흥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지라 단호히 거절할 생각으로 노파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갈구하는 듯한 노파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찡해 그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어쩌겠소."
사대 시위는 그 동안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해 일순 어리등절해졌다. 그러나 곧 단지흥의 대답을 제 나름대로 해석했다.
'저건 순 완병지책(緩兵之策)이야. 숙녀 동에서는 저 노파를 해치우기가 거추장스러우니까 데리고 나가서 해 치우겠다는 거지. 아무렴 황제께서 저 노파를 황비로 데리고 가겠나.'
노파는 한걸음 물러서서 숙녀동을 향하여 무릎을 꿇더니 주문을 외우듯 뭐라 중얼거렸다. 단지흥과 사대 시위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엄숙하고 경건한 기색으로 보아 숙녀동과 작별을 고하는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노파는 몸을 일으켜 손톱 긴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작별 인사를 해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손톱 긴 여자가 노학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파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숙녀동의 할머님이다."
그리고는 노파는 자그마한 가위를 꺼내 그 여자의 긴 손톱을 싹둑싹둑 깎아 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인 듯했다. 손톱 긴 여자는 손톱을 다 깎자 이 숙녀동의 새로운 동주가 되었다.
노파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모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는 돌아섰다. 코끼리와 독수리들은 그 무슨 기미를 알아차린 듯 못내 섭섭해하며 노파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코끼리들을 쓰다듬어 주고 휘파람을 불어 독수리에게도 작별을 고하고는 앞장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지흥 일행도 이 지옥 같은 숙녀등을 뒤로 한 채 길을 떠났다.
차츰차츰 산 굴이 멀어지고 노파는 멀찌감치 앞서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폐하! 정말 저 노파를 궁으로 데리고 갈 작정입니까?"
선비는 대리국 승상인지라 누구보다도 근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저 노파를 황비로 데리고 간다면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골동품처럼 함 안에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새 황비가 왔다는 소문이 나면 얼굴을 내보이게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무슨 말들을 하겠는가.
"죽여 버려요, 자결을 시키든지! 폐하께서 명하기 불편하시면, 제가 말하리다."
성미 급한 농부는 한마디 불쑥 내뱉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 달려 내려가 어느새 노파를 따라잡았다. 그는 얼른 노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노파는 의아한 눈길로 농부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잠깐! 내 할말이 있다!"
단지흥이 급히 외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노파에게 다가 왔다. 그러나 정작 노파 앞에 서자 단지흥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못했다. 심경이 복잡했다. 죽이자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을 살려 준 은인인데 이렇게 죽인다면 그것은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파를 데려가 황비로 봉할 수 도 없는 터, 그는 선뜻 단안을 내릴 수 없었다.
노파는 예의 그 까만 눈으로 단지흥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다섯 사람은 하나같이 선뜻 말을 꺼내 놓지 못하고 멀뚱멀뚱 노파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선비가 불쑥 나섰다.
"노파께선 아무튼 지난밤 대리국의 황비가 되었다고 하니 대리국 승상의 말을 들으시오. 황제를 대신하여 사사(雌凉)를 내리거늘, 순종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그 시신은 황비의 예로 후장 (厚葬)을 해 드리리다."
그 말에 노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단지흥에게서 눈길을 떼고 다른 세 시위를 돌아보며 힘없이 물었다.
"모두들 동감이겠군요?"
세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노파는 매서운 눈길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냉소를 치며 물었다.
"나 덕분에 환생했다는 걸 잊으셨군요?"
사대 시위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흥 역시 한숨을 지을 뿐 말을 못했다. 노파는 새까만 눈동자에 원망을 담고 단지흥을 노려보더니 꺼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낭군님도 내가 자결할 것을 소망하고 있단 말이지요? 참말 그래요?"
단지홍은 언뜻 애원과 원망이 뒤섞인 노파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보지. 어젯밤 어쨌든 내가 바보 짓을 했어. 아무리 약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낭군님, 나를 데리고 가야 천룡사 중들을 구한다는데 도 내가 자결하기를 바라시나요?"
"천룡사 일은 내 나름으로 해결책이 있으니 염려 마시오."
단지흥은 대뜸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녕 날 버리겠단 말씀이세요?"
노파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보다가 그만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버리는 게 아니오. 난 애초부터 원치 않은 일이었소. 어젯밤의 그 일은 당신의 강박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내 자의는 추호도 없었소."
"낭군님, 그렇게도 내가 보기 싫단 말입니까? 낭군님 마음에 드는 데가 조금도 없다, 이 말씀이세요? 왜 그토록 날 미워하세요?"
노파는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이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든 간에 우리는 다. 이해해 줄 수가 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 같은 노파를 어떻게 우리 젊은 황제 폐하의 황후로 맞아들인 단 말이오? 이건 천만 불가한 일이라는 걸 왜 모르시오?"
어부가 답답하다는 투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런 까닭이군요. 그런 이유라면…… 낭군님, 말해 보세요. 정말 그래서 내가 싫단 말이에요?"
노파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여 애처롭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여하튼 이만 해 둡시다. 내 영고라는 이름은 잊지 않으리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 갈 데로 가시오."
그러자 노파는 그 말엔 대답도 않고 이번엔 선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대리국의 승상이랬죠?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이라 했으니 승상의 말씀이야 더 엄중하겠지요? 내가 노파이기에 황비로 봉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가령 내가 젊은 처녀라면 어쩔 셈이지요?"
선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젊기만 하다면 우리가 이럴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황제 폐하가 다소 부족해하실지라도 우리가 받들어 황비로 모시겠소만,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 우리도 할 수 없지 않소."
이미 한번 늙어 버린 몸, 제가 어쩌랴 싶어 선비는 조금의 미련이라도 끊어 놓으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좋아요."
노파는 한숨을 짓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일행은 하나같이 머리들을 숙였다. 노파가 슬피 울면서 기운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기가 어쩐지 면구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노파가 어서 멀리 사라졌으면 했다.
그런데 문득 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자, 보세요. 이러면 되겠어요? 이러면 나도 대리국 황비가 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일행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다섯 사람은 너무나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들 눈앞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절세 가인이 애련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열 예닐곱 살 꽃다운 소녀, 그녀는 대리국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누구 앞에서도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경국지색이었다!
"전 이제까지 우리 숙녀동의 규례에 따라 할머니 형상을 한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예요. 자, 이러면 됐나요?"
단지흥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입이 헤벌어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제7장 방탕한 황비
단지흥 일행은 영고를 데리고 곧바로 천룡사로 향했다.
천룡사 중들이 중독된 지 이미 여러 날이 흘러 내일이면 벌써 닷새째였다. 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영영 때를 놓치고 말 것이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말을 여섯 마리 구해 밤을 도와 천룡사로 내달렸다. 앞장서 천룡사에 이른 단지흥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영고에게 말했다.
"영고, 어서 들어가 고승들을 구하시오."
그 사이 선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가 주지 일속 대사에게 그들이 왔다는 걸 알렸다. 일속 대사는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던 터라 반색을 하며 얼른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영고의 뛰어난 미모를 마주 대한 순간, 일속은 그 경황에도 흠칫 놀랐다. 황제가 이 여자를 얻은 것이 행여 대리국에 화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 조금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사께 인사드립니다."
영고가 먼저 말을 건겠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일속은 환례를 하고 일행을 선방으로 안내했다.
영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놓으면서 일속에게 서둘러 중독된 고승들을 불러오라고 재촉했다.
잠시 후 얼굴뿐 아니라 수염까지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노승 하나가 빈사 상태가 되어 들려 들어왔다.
"부축해 앉히세요."
노승을 부축해 앉히자 영고는 작은 손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노승의 몸 이곳 저곳을 모두 열여섯 곳이나 째고 거기다가 작은 병의 약을 발랐다. 일단 그렇게 한 다음 약초를 가져 오라고 해서는 불을 붙여 노승의 곁에 놓았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곱같이 작은 벌레들이 짜개진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작은지 머리와 몸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벌레들은 나오다 말고 방향을 찾느라 그러는지 한동안 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여러 사람들은 영고가 미리 당부한 대로 숨을 죽이고 소리 없이 벌레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승도 선기(禪機)가 깊은 노승이라 아픔을 참고 견디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온 벌레들은, 곁에서 타는 약초의 짙은 향기에 취하여 꼬물거리더니 하나씩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두 열여섯 마리였는데 영고가 잽싸게 불붙은 약초를 그 위에 가져다 얹자 벌레들은 피직괴직 타 죽어 버렸다.
"이젠 됐어요."
영고는 노승의 상처에 다시 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금할 게 있는데……."
영고는 웬지 말머리만 떼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금해야 할 거라니, 그게 대체 무엇이오?"
단지흥이 얼른 물었다. 영고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을 보니 그는 애련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대사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일인걸요."
그러면서 영고는 단지흥을 보고 방긋 웃었다. 그녀의 눈길엔 뭔가 부끄러운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단지홍은 이내 눈치를 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금하라는 건 바로 남녀간의 그 일을 금하라는 것이었다. 영고도 귀밑이 발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일속은 이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유심히 지켜 보았다. 일순 가슴속에 다시금 불안이 밀려들었다.
'이번 남방 만동에 다녀오시면서 황제께서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시고 몹시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런데 저 여인은 용모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요염하다. 앞으로 저 여인 때문에 뜻밖의 일이 일어나 대리국에 해를 끼치게 될까 크게 저어되는구나.'
하나 지금은 천룡사 중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그는 우선 이 생각은 접어 두었다.
영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삐 손을 놀렸다. 그러면서도 매우 신중했다. 열 몇이나 되는 중들을 치료해 주고 나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폐하, 다행히 때를 놓치지 않았으니 그렇지, 이 몇 대사님들의 목숨이 그만……."
영고는 숨을 할딱이며 웃는 얼굴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예쁘디예쁜 영고가 천룡사 대사들의 생명까지 구하자 단지흥은 마냥 싱글벙글 입이 벌어져서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오. 천룡사 대사들의 몸에서 독을 빼내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내 이젠 만 가지 근심이 싹 가셔 버렸소. 정말 고맙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세요. 폐하의 일이자 소첩의 일인데요. 꼭 남의 일을 해 드린 듯이 말씀하시네요."
영고는 짐짓 뾰로통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오, 아니오! 내 그런 뜻이 아니오! 영고가 너무나 많이 수고를 해서 내 그리 하는 말이니 달리 생각 마시오, 응 영고!"
단지홍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영고를 달랬다. 그러자 영고는 살짝 눈을 치뜨며 애교스럽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일속은 웬지 민망하여 불쑥 끼여들었다.
"폐하, 황비께서 잠시 쉬시게 우리는 나가십시다."
그러자 단지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과 일속 등은 조용히 선방을 나와 대응보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이곳에서 천룡사 중들이 충피에게 중독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영고가 온 정성을 다해 천룡사 중들을 구해 내니 단지흥은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영고가 아니었다면 도시 어떻게 될 뻔했던가. 만일 그때 숙녀 동에서 자기가 극구 영고를 내쳤다면 오늘의 이 일은 기대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처럼 아름다운 황비를 언감생심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단지홍은 사뭇 흡족하여
자기도 모르게 연해 입이 벙싯거렸다.
그러는 양을 일속은 내내 근심스러이 지켜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황비는 예사 여인이 아니었다. 혹 저 여인으로 인해 대리국에 먹구름이 드리우지나 않을까. 그는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일말 의 불길함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로 인해 그 역시 얼마나 마음을 앓았던가. 황제도 자기처럼 저 여인에게 빠져 버리면 국사를 뒷전으로만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속은 안 되겠다 싶어 선뜻 말을 꺼냈다.
"저, 황제 폐하, 저 황비님은……."
"정말 뛰어난 여인 아니오? 저 여인은 진정 보배요, 보배! 두고 보십시오, 우리 대리국이 저 여인으로 인해 한층 흥성하게 될 것이오."
단지흥은 일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만만하게 한마디했다. 그러자 일속은 그만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황제가 저토록 저 황비에게 흡족해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속은 차후에 기회를 보자고 마음을 다지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자, 어서 스님들을 치료해야지요."
단지흥은 관후한 미소를 지으며 일속을 바라보았다. 일속은 말없이 읍을 하고는 앞장서서 선방으로 향했다.
영고가 천룡사 중들을 다 해독시키고 나자 단지흥은 사대 시위와 영고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고를 각별히 총애했으며 형고와 정사를 치르면서부터는 다른 귀비들과 달리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영고 이전의 여인들은 대개 부르면 와서 그저 단지흥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는 형편이니 둘이서 하는 정사라도 기실은 한쪽밖에 재미를 못 봤다. 그러나 영고는 달랐다. 서로 농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며 한데 어울려 열을 올리다 보면 원래 남녀간의 정사란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새록새록 재미가 났다.
영고는 그녀의 침궁에서 단지흥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가면 몇 달 만에 만난 것마냥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였다.
그런 나날이 몇 날 며칠이고 흘러 어느덧 두어 달 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궁녀들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리며 일심으로 단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반가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자 그녀는 반색을 하며 뛰어나았다.
"어머나, 이제야 오세요? 보고 싶어서 혼이 났어요."
그녀는 서둘러 황제를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폐하, 부탁이 있사와요! 내일 위사들에게 명해서 날 좀 마음대로 궁 밖으로 나가게 해 줘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네?"
"영고, 여긴 숙녀동이 아니라 대리 황궁이오. 나도 마땅치 않을때가 다소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종(祖宗)의 법이 지엄하거늘 난 들 어쩌겠소, 그대로 지켜야지. 영고도 이제 황비이니 황중의 법 을 지켜야 한다니까. 더욱이 그대가 거리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그대를 황비인 줄 알아보면 한켠으로 기한다 길을 내준다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니 그런 번거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런 대
로 황궁에 정을 붙여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궁귈이 숙녀 동보다 좋으니 내가 온 거지 이렇게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바에야 숙녀동에 그냥 있지 예까지 무엇 하러 왔겠어요?"
영고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곁에 있던 궁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싸쥔 채 키득키득 웃었다. 대리 황궁에 영고처럼 황제의 말에 대꾸질하는 여인은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예의를 모르는 영고를 비웃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듣고도 꾸짖지 못하는 황제마저도 비옷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영고, 이러면 못쓰오. 황비의 체모를 지켜야지."
"체모요? 그럼 어떻게 말하란 말이에요? 숙녀 동에서 나한테 장가들 때는 예의고 뭐고 한마디 못하더니, 궁귈에 오니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이건 무슨 예법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난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라, 이 말이에요?"
단지흥은 이대로 나갔다가는 궁녀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라 손을 내저어 궁녀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잔뜩 언성을 낮추어 영고를 달랬다.
"천하의 일은 어디나 다 법도가 있게 마련이오. 숙녀 동에도 숙녀동 법도가 있더구먼. 그대도 그 법을 지켰지 않소? 아무리 숙녀동의 할머님이고 뭐고 해도 그 법도를 지키지 않았나 말이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난 숙녀 동에서 그 많은 예법을 모르고도 잘만 살았어요. 게다가 숙녀 동에는 이따위 거추장스러운 예법은 없었다구요. 이때껏 잘 참다가 하필이면 황제하고 연분이 돼 서…… 어쨌든 난 예법 따위엔 골치가 아프단 말이에요. 당신을 만나면 먼저 무릎부터 꿇어야 하고. 글쎄 무릎 꿇는 게 뭐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는데 왜 여자만 무릎을 꿇어야 하고 남자는 무릎을 안 꿇는가 말이에요. 당신은 황제이고
난 황비인데 황비가 무릎을 꿇으면 황제도 같이 무릎을 꿇어야지 왜 가만있어요?"
영고는 막무가내로 생트집을 잡았다. 단지흥은 기가 막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단지흥은 노기를 띠지 않고 사뭇 부드럽게 영고를 달랬다.
"황비 자리에 앉아 있는 그 고충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황상 자리도 마찬가지요. 평민 백성들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만 황제는 원래 그럴 수가 없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도 좀 자숙하면서 궁성 생활에 적응해 봐요. 아, 내가 있잖소, 내가!"
"아이고, 그런 말은 다 그만두세요. 시끄러워요. 한 가지만 대답하세요. 나를 계속 황비로 곁에 두고 싶으시면 바깥 구경 좀 하게 날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갑갑해서 죽겠어요. 한 번만요, 네?"
단지흥은 방법이 없었다. 이 야생마 같은 영고를 단 몇 달 만에 길들여 조신하게 후궁에만 틀어박혀 있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좀 내놓아 바깥 구경을 시키면서 차차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정 그렇다면 궁 밖을 좀 나가 보오만 궁녀들과 위사들은 데리고 나가야 하오."
그 말에 영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다만 시종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몹시 성가셨지만 싫다고 하면 황제가 자기를 아예 내 보내지도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그것만은 양보하기로 하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아이, 좋아라. 뭐 딱히 위사들이 안 따라가도 좋지만 어쨌든 내보내 주시기만 하세요!"
"안 되오, 위사들이 꼭 따라가야 하오! 아시겠소?"
단지흥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영고는 뜨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단지흥은 영고와 마주앉아 있기가 웬지 떨떠름하여 영고의 처소를 나와 버렸다.
단지흥은 심기가 몹시 울적하였다. 영고가 그저 일심으로 자기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못내 서운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가다 보니 그는 어느덧 취옥궁(翠玉宮)에 다다라 있었다. 이 침궁은 단지흥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처음으로 맞아들인 파이인(擺夷人) 황후의 처소였다. 단지흥이 들어서자 파이인 황후는 흠칫 놀 라더니 반가움에 겨워 땅에 부복을 한 채 머리채가 땅에 끌리도록 큰절을 하였다. 금방 목욕을 하고 나온 듯 함치르르한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미모는 요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폐하께서는 새 황비를 맞으신 후부터는 소청은 아예 잊으셨나이까?"
파이인 황후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황제가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해 아름다운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이 여인은 단지흥보다 두세 살 위였다. 그래서인지 매우 숙성해 보였다. 단지흥이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궁중 숙방(淑房)엔 황비가 없었다. 대신들이 하나같이 이는 천의 (天意)에 어긋나는 일이
라고들 간언에 간언을 하여 단지흥은 궁녀들 중에서 가장 아리따운 이 파이인을 택해 황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첫날밤, 파이인은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속삭였었다.
"폐하,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렇게 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단지홍은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도 남자였다. 그것도 여인들과 통정 한 번 못해 본 동정남이었다. 단지흥은 얼굴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은 부처간이니 그대는 나의 황후요. 앞으로 나를 진심으로 많이 도와주어야겠소."
그 말에 파이인은 방그레 웃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그 미끈한 허리를 폈다. 그날 밤부터는 그녀가 남녀간의 그 일을 그에게 가르쳐 주는 황제의 선생인 것이었다.
"폐하, 오늘 밤 여기엔 다른 시녀들이 없으니 소첩이 폐하의 옷을 벗겨 드리겠나이다."
파이인은 단지흥 앞으로 더욱 바싹 다가들며 정답게 속삭였다.
단지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가슴은 널뛰듯 하였다. 언젠가 무예 비본에서 남녀간의 일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일 뿐이었다. 이렇게 막상 신방에 들어 파이인과 마주앉아 있자니 그는 실로 당황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대 뜻대로 하시오. 오늘 밤 난 그저 그대 하라는 대로만 하겠소."
파이인은 단지흥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냈다. 그리고는 또 살갑게 속삭였다.
"폐하, 남자와 여자가 동심동체(同心同體) 하나로 어우러지면 일천(一天)이라 하옵니다. 폐하는 여느 사내가 아니라 황상이시라 세상 모든 여인을 다 안으실 수 있사옵니다. 폐하의 마음에만 든다 면 이 대리의 여인은 어느 여인이든 가질 수가 있지요."
"나는 오늘 그대만 마음에 든다니까."
단지흥은 빙그레 웃었다.
성격이 활달한 파이인은 황제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자기 몸으로 가져 가며 속살거렸다.
"폐하,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폐하를 시중들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이 소첩을 겪어 보시지 않고서야 어찌 다른 여인들을 견주어 보겠사옵니까?"
"다른 여인들과 견줄 필요는 없도다!"
단지흥은 여색에 흠뻑 취하여 눈동자마저 몽롱해졌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천하 여인들은 각기 제나름의 색깔이 있는 법이옵니다. 오늘은 제가 제일인 것 같겠지만 내일은 또 다른 여인이 더 좋아 보이실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파이인은 벌써부터 자기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의 여인들은 비록 오늘은 총애를 받는다 해도 언제 실총(失寵)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두려워 다짐하듯 같은 말만되풀 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있나. 내 비록 다른 희첩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그대가 첫정이니 너무 상념하지 마시오."
단지흥은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파이인은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비애부터 느꼈다.
'황제의 저 말을 믿지 마. 저 말을 믿으면 바보야. 내가 어찌 황제를 한평생 내 사람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서글픈 마음을 털어 버리려고 나긋나긋한 몸을 한껏 단지흥 품에 내맡기면서 애교를 부렸다.
"폐하, 저를…… 저를 꼭 껴안아 줘요. 더 힘껏……."
단지흥은 파이인을 바싹 끌어안았다. 여인의 몸이 이처럼 부드러울 줄, 그는 미처 몰랐었다. 그는 여인이 시키는 대로 여인의 몸을 애무하다가 점점 더 망아(忘我)의 경지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한 순간 그는 퍼뜩 책에서 본 '만악음위수(萬惡淫爲首)'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만악(萬惡) 중에서 음탕함이 수악(首惡)이라는 그 말을 그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체험하는 성싶었다…….
잊지 못할 밤이었다.
파이인과 단지흥은 서로 그토록 애절했건만 오늘에 이르러 파이인은 마냥 비애에 젖어 구슬프게 단지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새로 온 황비가 무척 총명하고 요염하며, 매우 담대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익히 듣고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는 지니지 못한 많은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황제로부터 자기는 누리지 못한 은총을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는 그 여인밖에 안보일 것이었다. 파이인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언젠가 냉궁(
冷宮)으로 쫓겨 들어 가지는 않을까…….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단지흥에게 매달렸다.
"소첩만을 총애하겠다고 하셨으면서……. 전 매일 목욕갱의(沐浴更衣)하고 폐하를 기다렸사옵니다. 야경 치는 소리만 들리면 소첩은 퍼뜩퍼뜩 폐하께서 오시는가 소스라쳐 깨어나고, 꿈결에도 폐하를 잊지 못했사와요. 소첩을 품에 안고 소침에게 남녀간의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그런데도 폐하는 오시지 않고……. 새 황비를 데리고 오신 이후로는 한 번도 오시질 않으셨으니……. 폐하, 그 여인이 그렇게 좋사옵니까? 소첩보다 무엇이
그렇게 좋사옵니까?"
파이인의 두 눈에선 눈물 방울이 주르르주르르 굴러 떨어졌다.
단지흥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인지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얼굴에 주름살이 엿보였지만, 한창엔 진정 견줄 바 없이 빼어난 미색이었다.
그 순간, 단지흥의 눈앞에 얼핏 영고가 스치는 듯하더니 점점 더 또렷이 영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파이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파이인 황비보다야 영고가 훨씬 낫군……. 이 여자가 비록 나의 황후요 첫 여자로. 남녀간의 그 일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하나 아무래도 영고 쪽으로 마음이 끌리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영고 쪽이…….'
그런 생각이 들자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파이인은 마냥 울고 았다가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야. 그 동안 황제가 여기에 발걸음을 아니한 것은 내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이렇게 오신 것을 보면 그 영고라는 계집과 무슨 불쾌한 일이 있은 게 분명해. 그 울적한 심기를 풀려고 여기에 오신 게야. 그런데 내가 한심하게 울기만 하고 있으니 심기가 더욱 울적해지실 것이고 그러면 나를 더욱 멀리하실 게 아닌가. 그래, 이 무정한 황제 앞에서 울기만 해서는 안 돼. 무슨 수를 써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은 총애를 되찾아야해.'
여인의 직감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단지흥은 파이인의 생각대로 화가 한층 더 끓어오르던 참이었다.
'영고의 앙탈이 듣기 싫어 마음이나 좀 달래 보려고 온다는 것이 예까지 온 것인데 잘못 왔군그래, 잘못 왔어! 여기서도 징징 울며 화를 돋우니……. 이럴 줄 알았으면 서재에 가서 책이나 보는 건데! 그래, 가서 책이나 보자.'
단지흥은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홱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파이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생긋웃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기실 소첩은 폐하가 오시니 너무 반가워 그만 폐하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듯 눈물만 보였으니……. 폐하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닌가 심히 저어 되옵니다. 폐하, 어여삐 살펴 주옵소서……."
그리고는 파이인은 단지흥 품에 찰싹 안겼다.
"폐하, 이런 재미는 언제나 제가 가르쳐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소첩은 폐하와 제일 처음으로…… 안 그렇사옵니까?"
파이인은 아직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단지흥을 올려다보며 방긋 웃더니 그의 귓바퀴를 살짝 물고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더듬기 시작했다. 이러기만 하면 황제는 욕정이 일어나 신음 소리를 내며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파이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가슴팍을 온 정성을 다해 더듬었다…….
영고는 드디어 황궁 밖으로 나왔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그녀 뒤에는 궁녀들도 따르고 위사도 몇 따라왔다. 그녀가 만일 뜻하지 않은 일에 봉착하게 되면 이들이 나서서 막아 주리라,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황비의 행차를 알리며 사람들을 물리지 않겠는가. 그러면 사람들은 한껏 부러운 눈길로 자기를 우러러보고…….
영고는 자못 흡족한 마음으로 잔뜩 위엄을 부리며 거만하게 걷고 있었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며 그녀는 대리의 궁성을 한 바퀴 쭉 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도 위사들은 마냥 못 본척하며 사람들에게 황비의 행차를 알리는 법 한 번 없었다. 그들은 기실 되레 영고가 황비라는 사실이 웃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새 황비가 왔어도 공식적으로 대리 사람들 앞에 선 적이 없으니, 대리 사람들은 그녀가 황비인지 대가 댁 규수인지 모르고 있는 터였던 것이다. 영고는 위사들의 태도가 자못 못마땅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트집잡아 길거리에서 위신을 깎
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위사들을 약이나 올려 주자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루(酒據) 위로 선뜻 올라갔다.
숙녀동에 있을 때 밖이라곤 나돌아다녀 보지 않다가 딱 한 번 성안에 들어왔을 때 거리에 술 먹는 주루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황비인 자기가 남정네들이나 찾을 법한 주루로 들어서면 궁녀들이건 위사들이건 적이 당황해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궁녀들과 위사들은 몹시 당혹스런 기색으로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히 말릴 수는 없었다.
영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가져 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웬 여자가 올라와 술을 가져 오라고 호통을 치자 술상에 앉았던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가히 심장이 벌렁거릴 만한 천하 절색이 아닌가.
그녀는 거만하게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앉아 있다가 술을 날라 오자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술 맛이 이래?"
그녀는 고개를 내젓다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한 사내와 눈길이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 스무 살 가량 돼 보이는 애송이였다.
'쳇, 그 주제에 나를 탐내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남자들은 여자가 욕심나면 여자 몸에서 한시도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더니 꼭 그 짝이로군. 도적 놈같이 시꺼멓게 생긴 녀석이……. 심사도 그렇지 않은데 심심풀이나 해야겠다!'
영고는 그 사내를 쳐다보다가 살짝 웃어 주었다. 그러자 사내는 눈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거 오늘 운수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닌데. 내가 중원 땅에서 불원천리 예까지 와 일양지 비본도 못 얻어내 영 기분이 판인데, 뜻밖에 예쁜 계집과 한바탕 놀아나게 됐군! 하, 이거 참!'
사내는 가슴이 뿌듯하여 연신 입이 벙싯거렸다. 그는 영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농을 걸었다.
"살결이 아주 고운데, 백설같이 하얗고."
그러자 영고는 또 한 번 방긋 웃어 보이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받았다.
"그쪽도 그리 검은 편은 아닌데……."
사내는 영고의 대답에 이빨을 쩍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잖아, 저 계집은 나를 홀리고 있어. 대단한 계집이야. 혹 몸을 파는 계집일지도 모르지. 그런 계집들은 맛이 독특하거든. 여하튼 저런 예쁜 계집을 그냥 스쳐 지나갈 내가 아니다.'
사내는 허허 웃으며 수작을 걸었다.
"내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다 이 말인데……. 내 보기엔 그대도 미색이 뛰어나군. 그러니 우리 함께 술잔이나 기울여 보지 않겠소? 미남 미녀 동배주란 말도 있으니."
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따라온 궁녀들과 위사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등골에 식은땀이 확 내뱄다.
'아이고 황비님, 황비 신분으로 이런 곳에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생면부지 외간 사내와 저렇듯 함부로……. 큰일났다, 큰일!'
영고는 사내를 흘끗 쳐다보면서 속으로 한껏 빈정거렸다.
'네 놈이 내가 숙녀동의 무당 할미였던 줄을 알면 꼬리가 빳빳해져서 진작에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을 게다. 내 오늘 네 놈을 선선히 놔 주지 않을 터인즉, 그 동안 궁 안에서 갑갑증이 나 죽을
뻔했는데 마침 잘됐다, 한바탕 가지고 놀아 봐야지.'
영고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이 사내 역시 평범한 속인은 아니었다. 무림에서 한다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영고 뒤에 기골이 장대한 장정 여럿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신분을 짐작해 벌써 꽁무니를 뺐을 터였다.
대리의 천룡사를 한번 들었다 놓고 황제도 한번 만나 혼쭐을 내 주겠다고 벼르며 이 먼 길을 달려온 겁 모르는 사내였다.
"나는 추가라는 사람이오. 아씨는 성이 뭐요?"
영고는 자기를 아씨라고 부르자 적이 기분이 좋았다.
'아씨? 그 말 참 좋은데. 지금껏 아씨란 소리 한 번 못 듣고 이렇게 컸어. 아주 어려서부터 숙녀동 동주가 되어 말끝마다 할머님, 할머님, 그저 여기에 올 때까지 할머님 소리만 듣다가 여기 와 서는 또 그저 황비, 황비…… 아유, 지겨워. 한데 이 사람은 나를 아씨라고 부르는구나. 아씨…… 참 다정한 말이야.'
"방금 날 뭐라고 불렀죠?"
영고는 사내에게 되물었다. 사내는 의아해서 대뜸 되물었다.
"아씨라고 불렀소만, 뭐 잘못되었소? 그대는 아씨 중에도 굉장히 예쁜 아씨, 첫눈에 쏙 안기는 예쁜 아씨 라니까."
사내는 넉살좋게 영고를 치켜 올렸다.
"내 이름은 영고예요. 하지만 지금껏 아씨라는 소린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아씨! 호호호……. 아씨!"
영고는 진정으로 기뻤다.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떵고는 한껏 신이 나서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사내는 다시금 홀딱 반했다.
'햐! 저 웃음은 기가 막히는구나. 여인의 한 번 웃음을 얻기 위해 천금을 버리고, 나라를 망쳤다는 얘기도 있더니…….'
사내는 당장 이 요염한 계집을 텀석 품에 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영고를 따라온 위사들은 이제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주인 마님, 이젠 돌아가시지요."
한 위사가 다가서며 말했다.
"아니, 자네가 주인인가, 내가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라면 내명을 기다려야지 왜 나서는 게야? 돌아가고 싶으면 돌 아가자고 할테니 잠자코 기다리게."
그러더니 영고는 한쪽 다리를 옆 걸상에 척 올려 놓았다. 그러자 치마가 걷혀 올라가며 그 희디횐 다리가 다 드러났다. 뾰얗고 미끈한 영고의 다리를 보자 사내는 두 눈이 뒤집혀 군침을 꿀꺽 삼켰다. 영고는 사내의 하는 양을 보고 내심 코웃음을 쳤다.
'보는 건 네 놈 자유다. 실컷 봐라. 하나 눈요기나 하지 네 놈이 별수 있다더냐. 이 예쁜 다리는 황제에게만 보이는 건데 네 녀석이 오늘 의외로 득을 보는구나. 자 보려면 실컷 보아라. 보는 것쯤이야 뭐라 안 할 테니.'
사내는 영고의 속마음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영고의 다리만 훑었다. 사내의 눈에서 탐욕스런 눈빛이 번쩍였다. 저처럼 분같이 희고 쏙 빠진 다리는 그때껏 본 적이 없었다. 남방의 만동 에서 자란 여인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은 모르는 특이한 식물을 먹기에 살결이 유난히 희다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사내는 한참 만에야 백옥 같은 다리에서 눈길을 떼고 아직도 얼얼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아씨. 우리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어때요?"
"그럽시다. 거기선 거기서 산 술을 마시고 난 내가 산 술을 마시는데 누가 뭐래요?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좋소. 아씨가 나를 그렇게 환대해 주니 정말 고맙소. 그럼 내 먼저 한잔 쭉 들이켜리다."
사내는 음심이 동해 손까지 덜덜 떨면서 술잔을 들었다.
위사들은 그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려 눈을 부릅떴다. 생각대로라면 당장에 놈을 쳐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그깟 위사쯤아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따라온 놈들로 봐선 허투루 몸을 파는 계집 같지는 않고, 어느 고관대작의 딸이거나 권문세도가의 소실쯤 될 것 같은데, 아 뭐, 황제의 누이일지도 모르지. 그러면 뭐 대순가? 대리 단씨들이 몽 땅 달려들어도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사내는 자못 호기롭게 술을 쭉 들이켰다.
사내 여남은 명이 이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이 두 남녀가 수작을 거는 모습을 처음부터 줄곧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다. 한눈에도 이 여인이 여염집 아낙이 아님을 그들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복색으로 보나, 얌전치 못한 행실로 보나 결코 평범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판세를 쭉 지켜 보다가 웬지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들 차례차례로 주루를 빠져 나갔다. 마침내 다른 주객들은 다 사라지고 영고와 그 사내 그리고
궁중 위사들과 궁녀들만 남았다.
사내는 연신 영고에게 술을 권했다. 영고 역시 한 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들어가는 족족 술을 들이켰다. 영고는 퍽이나 취기가 올라 있었다. 일순, 사내는 눈빛을 반짝 빛내며 은근 슬쩍 물었다.
"아씨는 집에 날마다 웃는 낯으로 대해야 할 남정네가 따로 있는 모양이오, 뒤에 저렇게 사내들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그 말에 위사들은 더욱 발끈했으나 취중진담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속에 맺혔던 생각 하나가 불끈 치솟아 눈꼬리를 치뜨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사내에게 되물었다.
"거기도 사내이니, 어디 말 좀 해 봐요. 여자들은 꼭 사내한테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영고가 난데없이 엉뚱한 질문을 들이대자 사내는 영문을 몰라 한동안 어정정해 있었다.
'여하튼 이 계집이 속에 뭔가 단단히 꼬인 게 있는 모양이다. 어디 슬슬 장단을 맞춰 가며 한번 들어나 보자. 제 사내에게 억울한게 있어 하는 말이라면 내겐 오히려 잘된 셈이지.'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아씨가 싫어하는 사내한테야 무릎을 꿇을 필요가 뭐 있겠소?"
"그럼…… 그럼 좋아하는 남자한테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고가 계속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해대자 사내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이 계집이 고관대작의 딸이긴 딸인가 보다. 그러니 제 본가의 지체를 믿고 제 사내를 깔보는 게지. 그런데 저 계집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정네란 대체 누군가? 제 남편인가 아니면…….'
사내가 멀뚱멀뚱하니 말이 없자 영고가 새초롬히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어서 말해 봐요. 왜 말을 못해요? 내가 말하는 남자가 황제일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거예요?"
영고는 취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 나갔다. 그러나 사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벌컥 자존심이 상해 큰소리 쳤다.
"황제? 흥, 대리 황제 단지흥이라도 난 무섭지 않소. 아씨, 사내들이 아무리 잘나도 미인들 치마폭에서는 별수없는 거라오, 황제라도 다 똑같다구."
지금은 비록 황비 신분으로 황제의 말 한마디에 설설 기며 궁 안에 갇혀 있지만 숙녀 등에서는 일호백웅하는 동주 아니었던가. 영고는 사내의 말에 쌍수를 들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황제면 뭐 단가요? 제가 황제면 황제지……."
영고는 술잔을 쳐들며 깔깔 웃었다.
그러나 한켠에 꼼짝없이 서서, 영고와 사내가 수작하는 양을 쏘아보던 위사들은 노기가 끓어올랐다. 궁녀들도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저런 개망나니 같은 놈이?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제깟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황제를 들먹여?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이 났군, 환장이!'
그들은 주먹을 불끈 부르쥐었다. 하지만 감히 사내를 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단지흥은 시위들이 바깥에 나가서 사단을 만드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한 위사가 영고에게 다가갔다.
"마님, 주인님 말씀이 있잖습니까? 바깥에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마님께서 오늘 과음하신 것 같으니 이젠 그만 돌아가십시다."
"돌아가자구? 어디로? 내 집…… 내 집이 어딘데?"
영고는 불콰하니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위사를 바라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위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님 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겠습니까?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술이 너무 과하십니다. 가십시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고는 손을 내두르며 막무가내로 중얼거렸다.
"집…… 내 집…… 내 집이……."
"저리 못 비켜? 너희 마님과 내가 지금 한창 흥에 겨워 술이 한창이라는 거 안 보여?"
위사는 화가 나서 몸이 다 부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녀석을 육장을 내 놓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 왜 호통이오? 내가 우리 마님하고 말하는데 거기서 무슨 상관이라고 이 야단이오?"
"이 놈이 어디다 대꾸질이야!"
사내는 짓씹듯 내뱉으면서 다짜고짜 장풍을 날렸다. 고막을 찢듯. 쌩하고 바람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에 영고는 정신이 번쩍 들며 적이 놀랐다.
'저자의 무예가 보통이 아닌데!'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장풍을 날렸는지라 영고 뒤에 있던 위사는 미처 방비를 못하고 그만 그 장풍에 맞고 말았다. 그는 휙 뒤로 몇 자나 날려 가더니 탕 하고 벽에 부딪혔다. 철퇴를 맞은 듯 벽에는 순식간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것을 보고 나머지 위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야앗 기합을 지르며 일제히 공격을 들이댔다. 하나는 짧은 비수를 사내의 옆구리를 겨누어 내던졌고, 한 위사는 큰 칼을 휘두르며 머리를 내리찍었으며, 또 한 위사는 그 사내 뒤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사내에게는 위기 일발의 순간이었다. 옆구리로 날아드는 비수를 피하면 내리찍는 큰 칼을 피할 수 없고, 내리찍는 큰 칼을 피하면 뒤에서 질러 오는 주먹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몸을 약간 기울이면서 손바닥을 척 내밀어 장풍을 내쳤다. 그러자 날아오던 비수가 곧바로 그 장풍에 맞아 퉁겨 나가며 비수를 내던지던 시위는 직통으로 장풍에 맞았다. 다음 순간 그의 가슴에서 북 치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는 욱 하며 피를 왈칵 토해냈다. 피는 맞은편 바람벽으로 튀어 가 벽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큰 칼을 내리찍던 위사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바람에 큰 칼은 사내
를 찍지도 못하고 빗나가 땅에 쿡 박혔다.
그 순간 사내는 급히 방향을 돌려 뒤에서 주먹을 내지르는 위사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먹을 쓰는 위사는, 셋 중에서 손은 제일 느렸지만 주먹 힘이 비길 데 없이 세서 평소 병장기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사내가 내미는 손바닥을 미처 내칠 겨를도 없이 무쇠 같은 손바닥이 문득 가슴에 와 닿은 것을 느끼며 일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얼핏 느끼기엔 아무 힘도 없이 그저 슬쩍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숨이 턱 막히고 오장육부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그는 가슴을 그러쥐며 온몸을 비비꼬았다.
"사…… 사람…… 죽인다……."
그 위사는 말도 채 못 맺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나 영고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허, 저 녀석 좀 보게. 대리에서도 보기 드문 무예를 지니고 있네. 황제나, 천룡사 고승들 아니고는 누구도 감히 대적을 못하겠어.'
"대단한데요. 그게 무슨 장법인가요?"
영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뭐 딱히 무슨 장법도 아니고, 이 정도야 보통이지요."
사내는 그 장법에 대해 말하기를 피하며 씩 웃었다.
위사들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자 영고는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한쪽으로 물러서 있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찍소리도 못하고 한켠으로 물러섰다. 놈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 주려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차마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황제가 이 황비마마 덕분에 구구십팔동에서 봉변을 당하고도 살아났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황비가 이 추씨라는 무례한 놈을 요절내기를 학수고대했다.
"장사님은 어디서 왔어요? 여긴 무얼 하러 왔구요?"
영고가 물었다. 그 추씨 성을 가진 사내는 영고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의 색욕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저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난 중원 사람으로 단지 대리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오. 대리는 경치도 좋고 어디나 동백꽃 향기가 그윽해서 남자도 그 향기에 취해 녹고 여자들도 사뭇 달떠 오른다기에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고 온 것이오."
사내는 콧대를 건뜻 들고 앙천대소를 했다. 영고 뒤에 물러서 있는 위사들은 약이 바짝 올랐다.
'우리 대리가 아무리 소국일지언정 이렇게 면전에서 모욕하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황비마마를 앞에 두고 능욕이 저토록 방자하다니…….'
사내는 오만불손하게 영고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고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감상하듯 했다. 숙녀 동에서 자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여인은 당돌하기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다.
"그래 그런 한가한 구경이나 하자고 이 대리에 왔단 말이에요?"
영고는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만은 아리오. 나는 온 김에 대리 단씨네 사람들을 만나 그 일양지공이 정말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한가도 알아볼 참이오. 일양지공이 내 이 철장(鐵掌)보다 강한지 한번 겨뤄 볼 셈이오."
사내는 웬일인지 선선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듣고 나자 영고는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뭐라구? 저따위 시들시들한 녀석이 세상에 으뜸가는 단씨 가문의 일양지공을 여지없이 깔보고 시비를 다 걸어? 괘씸한 놈같으니라구. 좋다, 나도 이 참에 어디 네 그 철장인지 뭔지 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센지 구경이나 좀 해야겠다.'
영고는 마음속으로 독기를 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한껏 교태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어디 나하고 한번 겨루어 보겠어요?"
그러자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눈길로 영고를 쳐다보았다.
"겨루자니? 내가 거기와 그래, 뭘 겨룬단 말이오?"
"대리 단씨네와 무예를 겨뤄 보러 여기에 왔다면서요? 나도 대리 단씨네 사람이니 나하고 먼저 겨뤄 보잔 말이에요."
영고의 말에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에이, 농담 마시오. 내가 뭐 단씨네 사람이면 아무하고나 겨루려는 줄 아시오? 난 그 누구도 필요없고 단 한 사람, 단지흥하고 겨루러 온 것이오. 내 이 철장이 더 센가, 단지흥의 일양지공이 더 센가 보자고 말이오."
그러면서 사내는 그릇 하나를 한 손으로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릇은 팍 하고 깨지더니 한줌 가루가 되어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실로 대단한 장력(掌力)이군! 저 철장을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대리에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황제도 못 당해 낼지 모른다…….'
영고는 이런 생각이 들자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먼저 손을 써서 이 녀석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심 이 사내를 어떻게
죽일까 방책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하고 누가 더 독에 잘 견디나 한 번 내기해 봐요."
영고가 은근 슬쩍 운을 뗐다.
여자가 이따위 내기를 걸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이 사내는 한동안 물끄러미 영고를 바라보았다. 일개 계집이 재간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처음 볼 때는 음심이 통해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그는 이제 영고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불현듯 한 여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구양봉의 여인, 모용쟁…… 인상 깊은 여인이었다. 그때것 그 여인처럼 그렇게 자기를 끌어당긴 여인은 없었다. 영고도 아름답긴 하지만 단지 그 미모 때문에 탐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정 그렇다면 좋소, 아무것으로나 겨뤄 봅시다. 내 대리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탄복하고 말게 만들어 놓겠소이다."
영고를 따라온 위사들은 자못 긴장이 되었다. 그들은 이 추씨 성을 가진 사내가 무예를 겨뤄 보겠다고 그 먼 중원에서 이렇게 온 것을 보면 무예도 매우 고강할 뿐 아니라 다른 재간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황비가 저 녀석하고 겨뤄서 저 녀석이지면 원수를 갚는 것이 되겠으나 만의 하나 황비가 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네 사람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추 선생은 대리에 온 손님인데 그러다가 잘못되면 좋지 않으니 잘 생각해 보세요. 잘못하여 타관에서 객사하면 무주고혼이 될지도 모르니……."
영고는 그릇을 가져다가 거기에 물을 가득 부으며 생글생글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목을 젖히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런 염려일랑 마시오! 내 평생 가장 두렵지 않은게 무엇인지 알기나 아시오? 바로 독이오, 독! 이번 대리에 올때까지만 해도 남과 독을 겨를 기회가 닿을 줄은 예상도 못했는데 당신 같은 아씨가 다 나하고 독을 겨뤄 보겠다니, 이거 재수가 좋은걸. 핫하하하……."
영고는 사내가 이렇듯 기고만장하게 나오자 다소 어정정해져서 금세 대꾸를 못했다. 이 사람이 정말 말 그대로 독을 사용하는데 뛰어난 재간을 가진 대가라면 오히려 자기가 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한번 내뱉은 터, 도로 걷어들일 수도 없어 영고는 단단히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누가 센지는 겨뤄 봐야 알 게 아니에요?"
영고는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물이 찰랑찰랑 담긴 사발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죽음이 두 사람 복판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나 진배 없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죽을 수도 있고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추씨 성 가진 사내는 코웃음을 쳤고 영고는 살짝 낯을 붉혔다.
"추 선생님, 이렇게 해요.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다툴 필요 없이 아주 간단한 내기지요. 우리 둘이 모두 이 물에다 손을 담그는 거예요. 그런 연후에 향 한 대를 다 태을 동안 누가 버터 내는지 보는 거지요. 그때까지 참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말예요. 어때요?"
"나하고 독에 견디는 재간을 겨루느니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내놓는 게 유리할 거요. 내 이 손은 어떤 독에도 꿈쩍도 안 하는 손이니……."
사내는 호탕하게 웃어 젖히더니 한 눈을 찔끔 감아 보이면서 손을 척 그 물에다 담갔다.
사발의 물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그런 물이었으나 기실 아주 지독한 독수였다. 사내의 손이 들어가자마자 물은 단박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피지직 연기가 피어 올랐다. 사내는 가슴이 뜨끔하여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참 대단한데!"
이어 사발의 물은 금세 핏빛으로 변하고, 다시 흰색으로, 또 회색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의 얼굴색도 창백해졌다. 팔뚝 근육마저 눈에 띄게 불뚝거렸다. 그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거 정말 생각 밖인데!"
사내는 연신 소리를 지르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팔근육은 더욱 비어져 나왔다. 그릇의 물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끓어오르고 연달아 연기가 피어 올라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추 선생님, 견디지 못하겠으면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해독제를 드릴 테니……. 그렇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게 돼요.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구요!"
영고는 여유작작하게 이죽거렸다.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흥, 거기선 상관 마시오!"
그릇의 물은 계속 증발하여 점점 줄어들었다.
"추 선생님, 그릇에 물이 다 마르면 더 이상 내기를 못하니 그때 가선 난 안 하고도 이긴 것으로 치겠어요."
사내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그저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한 순간 그는 그룻에서 손을 뺐다. 어느새 향 한 대가 다 탈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긴장해서 내가 시간 가는 것도 몰랐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사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은 내가 잘못했어. 저 녀석 손은 보통 손이 아니야. 오산을 했지, 오산을 했어…….'
영고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천천히 손을 담갔다. 그러나 좀전과는 달리 물은 그냥 그대로일 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지도 않았고, 김도 피어 오르 지 않았다.
추씨 성을 가진 사내는 이 여자가 손에 필시 무슨 해독약을 발랐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발의 물이 저렇듯 그대로 일 수 있겠는가? 사내는 연신 코방귀만 뀌었다.
어쨌든 이번은 피차 일반으로 비긴 셈이었다.
"추 선생님, 이번에 대리에 와서 기어코 대리 사람들과 자웅을 가려 보겠다 이거예요?"
영고는 뻔한 일을 또 물었다.
"물론이오. 난 꼭 대리 황제 단지흥을 만나 봐야겠소. 그 사람의 일양지공이 도대체 어떻기에 무림 사람들이 천하 4대 기공(奇功) 중에 하나라고 떠받드는지 내 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사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천하 4대 기공이라니요? 난 금시초문인데…… 그래, 그 4대 기공엔 어떤 무공들이 있어요?"
그러자 사내는 몹시 언짢아져서 투덜거렸다. 그 4대 기공이라는 것을 입에 담기도 싫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4대 기공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일일이 꺾어서 내 이 철장공이 천하 제일이란 걸 세상에 보여 주려고 이 대리에 왔단 말이오."
영고는 사내의 말이 같잖아서 입을 삐죽거렸다. 이윽고 영고가 물에서 손을 뺐다. 사내는 언뜻 영고의 손을 건너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 볼 때처럼 그렇게 매끈하고 횐, 남자들의 눈 길을 홀리는 예쁜 손이었다.
"추 선생님, 이번엔 서로 어슷비슷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이러고야 말 수 없잖아요? 한 번 더 겨뤄 어떻게든 끝을 봐야지요."
영고가 대뜸 말하자 사내는 또 무슨 꿍꿍인가 싶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영고가 말을 이었다.
"나는 남방에서 왔어요. 내 있던 고장엔 볼 만한 것들이 아주 많은데 한번 가 보지 않겠어요? 가 보시면 다시는 이전 내기는 안하려 들걸요. 세상 아무리 독에 능한 사람이라도 우리 할머님한테 는 못 이긴다구요."
사내는 도통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고는 사내가 얼떨떨해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주 작은 꽃함 하나를 탁상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추 선생님,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제라도 그만두자고 하세요."
"후회? 내가 후회할 게 뭐야?"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영고는 그 작은 꽃함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열었다. 사내는 몹시 의아해하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았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저렇게 애기 다루듯 하는 걸까?'
영고는 꽃함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은방울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와서 지금껏 너를 가둬 두었다고 성내지 마라. 오늘 시원하게 바깥 구경을 시켜 주면 되잖니?"
깜찍하게 생긴 그 꽃함은 금실로 엮어 만든 것인데 안에는 또 은박을 입혀 놓았고, 가장자리에는 옥편(玉片)으로 장식을 하여 대단히 귀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 함 안에는 아주 작고 가는 독사 한
마리가 죽은 듯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영고는 마치 귀염둥이 갓난애기를 어르듯 속삭였다.
"성내지 말래도 이런다. 글쎄 여기 와서 한 번도 너를 내놓지 않은 건 내 탓이 아니야. 이젠 내가 황궁 사람이 됐으니 너를 갖고 놀면 안 된다고 단속이 여간이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지 뭐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니까."
뱀은 마치 영고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나 하는 것처럼 서서히 대가리를 치켜 들더니 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뱀은 함 뚜껑 위에 기어 오르더니 갑자기 흥분된 것마냥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 들고 새빨간 두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며 짧은 바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흥, 활궁 사람이라면서 그따위 뱀이나 갖고 놀다니……."
사내는 내심 겁이 덜컥 나면서도 입으로는 영고를 비웃었다. 아무리 뻔뻔스런 영고라도 그 말에는 얼굴이 붉어져 급히 반박했다.
"궁 안에선 결단코 뱀을 가지고 놀지 않았어요. 하늘에 두고 맹세해요! 궁에서는 뱀을 갖고 놀게 하는 줄이나 알아요?"
"글쎄 송나라 황궁이라면 모를까 이까짓 대리 황궁 같은 데서야 뱀이면 어떻고 송충이면 또 어떻겠소?"
사내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영고는 그저 한숨을 한 번 짓더니 그 말엔 대답을 피하고 딴소릴 했다.
"내기 한 번 더 해서 승부를 꼭 가르자는 데 동의하셨죠?"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요."
"그럼 좋아요, 한 번 더 겨뤄 봐요. 이 독사에게 물리고도 누가 더 견뎌 내는가, 그것이 바로 내기예요. 마지막까지 견뎌 내지 못 하고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면 그 사람이 지는 거예요. 어때요?"
"좋소! 그러면 내가 먼저 시작할까?"
사내는 호기를 부렸다.
"아니오. 아까는 추 선생님이 먼저 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해야죠."
영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선뜻 옷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옥같이 하얀 팔을 탁상 위에 척 올려 놓았다.
"이렇게 놓고 그저 저 뱀이 아무데나 물게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러나 피하면 안 돼요. 누구라도 움직여서 피하기만 한다면 그건 진 거예요. 알겠어요?"
사내는 코를 팽 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글쎄 그건 근심 마시오. 아무렴 내가 거기만 못하겠소. 내가 뱀 앞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구(裏)씨 성…… 아니 내 추씨 성을 갈겠소."
위사들과 궁녀들은 영고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고가 팔을 탁상 위에 올려 놓자 그 조그마한 독사는 쉭쉭 소리를 내며 천천히 기어왔다. 온몸이 풀잎처럼 파란 조그마한 독사는 영고의 팔까지 와서는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사방을 돌아볼 뿐 더는 앞으로 기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 귀염둥이야, 네가 날 물지 않으면 내기가 안 돼요. 먼저 나를 물고 가서 저 추 선생을 물어야 한다, 알겠니?"
그러자 뱀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나 한 듯 느릿느릿 영고의 손 위로 기어올라가 손등을 깨물었다.
"이젠 됐다, 이 귀염등이야."
한 순간, 영고는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팔뚝이 약간 떨렸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되었다. 영고의 팔뚝에선 금세 검은 줄 하나가 생기더니 이내 쭉 뻗어 나가 눈 깔짝할 사이에 어깨에까지 검은 줄이 짝 그어졌다.
"추 선생님, 이젠 거기 차례예요."
사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영고가 하는 그대로 팔뚝을 걷어 붙이고 탁상 위에 올려 놓았다.
'계집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내 이 팔이 어떤 팔인데. 무쇠 팔이야, 무쇠 팔! 백 가지 독을 다 써도 꿈쩍도 안 한다. 그런데 뭐, 이까짓 조그만 독사를 무서워할 줄 알고…….'
그는 뱀이 와 물기를 배짱 좋게 기다렸다. 조그마한 독사는 사내의 팔뚝이 탁상 위에 놓여지자 쉭쉭거리며 사내의 손 위로 기어올랐다. 뱀은 순식간에 사내의 손을 물려고 하였다. 그때였다. 영고가 손을 획 내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 팔뚝이란 여자들보다 몇 배나 탄탄하니까 추 선생은 손 말고 어깨를 깨물어라."
그러자 뱀은 알아들은 듯 재빠르게 사내의 어깨 위로 기어올라 덥석 깨물었다. 그리고는 대가리를 들고 영고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만 해, 이 귀염둥아. 더 깨물면 추 선생이 노여워할 게야."
그러자 뱀은 대가리를 끄덕거리더니 탁상 위로 내려와 가만히 있었다.
차츰차츰 뱀 독이 퍼져 가자 영고와 사내는 얼굴색이 변해 갔다.
영고의 낮색은 술에 취한 듯 빨갛게 물들었다.
'뱀에 물려 독이 퍼지면 얼굴색이 검어지거나 누레지게 마련인데 저 여자는 왜 빨개지기만 할까? 필시 해독약을 미리 먹었음에 틀림 없어.'
사내는 내심 놀라서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영고도 사내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괴이하다. 얼굴색을 보면 시꺼멓게 죽어 가는 게 분명한데도 저렇듯 태연자약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뱀 독이 퍼지지 않을리 없는데. 저 사내가 철장공을 한다더니 손과 팔을 독액 속에다 몇 천 번이나 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뱀 독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지.'
영고는 불안해서 사내를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이윽고 사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내력으로 뱀 독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추 선생, 그만 하고 이젠 항복을 해요. 항복만 하면 목숨은 건 질 수 있으니까……."
그러자사내는 눈을 번쩍 뜨며 껄껄 웃어젖혔다.
"그런 꿈은 꾸지도 마시오. 사내가 죽으면 죽었지 항복이라니, 그런 수치가 세상 천지 어디 또 있겠소? 내가 누군지 아오? 내 이 철장은 천하 무적이오, 천하 무적! 아직 천하 무림의 4대 고수 라고 하는 자들과 겨뤄 보지 못했다뿐이지, 난 그들 모두를 거꾸러 뜨릴 자신이 있소."
그리고는 사내는 득의양양하게 쏘아보았다.
추씨라는 사내가 독사에게 물렸어도 저렇게 제법 껄껄 웃으며 떠들어대는 것을 보자 영고는 다시금 심히 불안해졌다.
'이 추씨는 괴상한 인간이야. 무공도 강호의 다른 문파들과 다르고 뱀 독도 타지 않으니 특별한 초수가 아니고는 이자를 꺾을 수가 없겠다.'
영고는 먼저 독사를 얼렀다.
"요 귀염둥이야, 저분은 비록 중원에서 오신 분이지만 뱀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어쩌겠니? 넌 좀 가만있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더니 또 추씨를 보며 말했다.
"추 선생님, 그럼 이번도 비겼다고 해요. 이런 뱀 독에 견디는 내기는 그만두고 이번엔 이런 걸 겨뤄요. 자, 보세요……."
그녀는 품 안에서 또 깜찍한 함 하나를 꺼내 놓는데 금방 그 뱀 함보다도 더 작았다. 사내는 이게 또 무슨 기괴한 수작인가 하고 함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 혼이에요. 이번만 이기면 난 더는 아무 말 않고 항복하겠어요."
"항복? 항복하면 어떻고 항복하지 않으면 어떻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구?"
영고가 계속 수작을 부리자 사내는 성이 나서 내뱉었다. 영고는 방긋 웃었다.
"내가 항복하면 직접 나서서 추 선생과 폐하, 그리고 추 선생과 천룡사 고승들이 무예를 겨루도록 주선해 줄 텐데요? 그런데도 상관이 없나요?"
"그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내 발로 대리 황궁을 찾아가 단지흥과 싸워 보면 되는 건데 주선은 무슨 주선? 그런 주선 따위는 난 필요 없소!"
그러자 영고는 또 방긋 웃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이에요. 물론 중원 강호에서 왔으니 우리 대리국의 일을 잘 모르실 수도 있겠죠. 대리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예의지국(禮儀之國)이어서 황제께서는 어지간해서는 남과 무예를 겨루지 않지요. 뿐만 아니라 천룡사 고승들도 남과 무예 다투기를 모두 꺼려 한답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무예를 겨뤄 보자고 불원천리 예까지 찾아왔다 한들 모두 헛수고가 되지 않겠어요?"
"내가 내 발로 천룡사에 찾아가 직접 도전을 해도 그들이 응하지 않는단 말이오?"
"글쎄, 안 된다니까 저러시네! 천룡사가 생긴 후부터, 천룡사에 호국신공인 일양지공 비본이 있다는 걸 알고 그걸 노려 찾아온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셀 수도 없어요. 만약 천룡사에서 그 런 사람들을 다 일일이 상대하자면 아마 하루 걸러 한번씩은 싸웠을 거예요. 그러면 천룡사가 지금까지 남아 났겠어요? 천룡사 중들은 그저 입이 닳도록 권도하여 원심(怨心)을 풀어 주고 그 보서를 뺏어 가려는 마음을 돌려 세워서 그냥 돌아가도록 했죠. 이렇게 해서 천룡사를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이에요. 그러니 거기서 아무리 천룡사 고승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겠다고 해도 고승들이 응해 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지."
"그렇다면 거기선 무슨 방법이 있소? 무슨 방법으로 그들로 하여금 무공을 겨루도록 하겠다는 거요?"
"난 이 대리국의 황비거든요. 알아요?"
사내는 그저 이 여인이 활궁 사람이고 허풍이 좀 있는 편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단호하게 자기를 황비라고 밝히자 깜짝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영고는 아랑곳 않고 계속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영고가 그 말까지 꺼내 놓자 위사들은 사뭇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이 사람은 대리에 무공을 겨루러 온 것이지 절대 일양지 비본을 탐내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뿐더러 황비의 말인데 의심할 리가 있겠어요? 그러면 안심하고 무공을 겨룰 수 있으니, 그렇게만 되면야 거기의 철장공이 더 센지 대리의 호국신공인 일양지공이 더 센지 직접 알아볼 수가 있잖아요?"
영고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사내는 선선히 응했다.
"그렇다면 좋소. 이번엔 또 무슨 내기요? 무엇을 어떻게 겨뤄 보겠소?"
"내 말했잖아요, 이 작은 함에 내 혼이 들어 있다구. 어쨌든 이 번 내기에만 이기면 난 항복을 하고 거기를 돕겠어요."
"그걸 가지고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좋소! 그럼 어서 그 함을 열어 보시오."
영고는 해쭉 웃으며 함을 열었다. 사내가 목을 늘여 들여다보니, 함 안에는 조그만 갑충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북방의 귀뚜라미 비슷했는데 머리는 크고 꼬리는 뭉툭해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아니, 이런 조그만 벌레가 어떻게 거기의 혼이란 말이오?"
사내는 의아해서 물었다.
"우리 남방의 만동에는 예전부터 행고의식(行蠱儀式)이라는 것이 있는데 처녀가 커서 생리가 시작되면 자신의 월경 피를 받아 두었다가 칠월 칠석 날에 작은 벌레한테 먹이지요. 벌레는 반드시 용맹하면서도 음(陰)에 속하는 것이어야 하구요. 이 벌레는 일단 처녀의 월경 피를 맛보면 그 이후로는 풀을 먹지 않고 계속 처녀의 피만 먹으며 자라는데, 이렇게 3년이 지나면 더 이상 피는 먹지 않아요. 그 대신 처녀는 독충들의 독즙을 이 벌레에게 먹인답니다.
이렇게 하여 자란 벌레는 그 독이 대단해서 세상 아무것도 당해 낼수가 없게 되지요. 추 선생, 내 이 벌레는 6년 전부터 독즙을 먹이기 시작한 벌레인데 여태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독도 아주 셀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제아무리 추 선생이라도 견뎌 내기 힘들걸요. 남자들이 이 벌레에겐 물리면 다른 것은 관두고 생식 기능이 마비되어 후사가 없게 될 수도 있지요. 물론 생명도 위험하구요. 자, 어때요? 겨뤄 보겠어요?"
사내는 그 보잘것없이 작은 벌레를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참, 별일도 다 있군! 아무리 독한 벌레라고 해도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다. 이제 와서 물러선다면 얼마나 비웃음을 사겠는가. 뿐더러 강호에서의 나의 명성도 묵사발이 된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죽더라도 저 여자와 결판을 내자, 운남 처녀들이 기르는 독충이 무섭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그런지 내 눈으로 직접 한번 봐야겠다!'
"내가 마지막까지 해 본다고 했잖소? 더는 다른 말을 말고 어떻게 할 건지 그거나 말하시오."
사내는 역정을 냈다. 영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좋아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이 벌레를 손바닥에 잠깐만 올려 놓고 있으면 돼요. 그래도 무사하면 이기는 거죠."
사내는 그 말에 크게 앙천대소를 했다.
'이 계집이 정말 미쳤군.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따위 수작인가? 내 별호가 철장 수상표(手上默)다. 이 별호는 내가 생사를 무릅쓰고 철장방 방주 자리를 빼앗을 때 얻은 것이다. 내 철장공과 경공 (輕功)은 천하 무적으로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 다 몰려들어도 두렵지 않거늘 겨우 대리의 하잘것없는 계집이 날 위협해? 내 오늘 본때를 보여 주리라."
"좋소! 어서 올려 놓으시오!"
그래도 영고는 마냥 생글거리며 거듭 경고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번 더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벌레한테 물려 죽으면 타관에서 객사하게 되는 판인데……."
"아이고 잔소리 그만 하고 어서 그 벌레나 이리 내요!"
사내는 성가셔 죽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적이 긴장되어 있었다. 긴장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역정을 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온몸의 기운을 손에 집중시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왔다. 벌레가 아니라 돌사자라도 그 주먹 한 방이면 단번에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손을 펴서 앞으로 쓱 내밀었다. 손바닥은 숯 검댕처럼 시커맸다.
"그 벌레를 그냥 내 이 손바닥에 놓는다고 만 했었소!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사단이 날 줄 아시오!"
"염려 마세요. 잠깐이면 돼요. 더는 필요 없어요."
영고는 풀잎으로 벌레를 툭 쳤다.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 벌레가 닿자 풀잎은 사정없이 부르르 떨렸다. 사내는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튀어 일어날 수도 없는 터, 그는 힘주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영고가 벌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벌레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잠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정작 별 느낌이 없는지라 사내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손바닥이 짜릿하더니 그 기운이 손바닥에서부터 염통까지 한 번에 쭉 뻗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대번에 염통이 발기발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그만 악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바닥에서 사지를 내뻗으며 한동안 데굴데굴 구르다가 크게 한 번 몸을 부르르 떨고는 걸상 다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앞을 쏘아보았다. 여인의 자태가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자세히 보니 백타산 산장에 간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앞에 모용쟁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용쟁, 미안하오. 그때 구해 주지 못해서……. 나를 보게 한 그때는…… 내가 비열해서가 아니라…… 구양봉이 너무해서 그렇게 된 거요. 그래서 당신이 난산으로 죽은 거요……. 내 탓이 아니
오. 내 탓이 아니라는데……."
혼자 웅얼거리던 사내는 또다시 픽 쓰러져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사숙님들과 사조(師祖)님들을 내가 죽인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내가 방주가 되는 걸 한사코 반대하니 전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는 또 영고를 쳐다보며 계속 헛소리를 했다.
"모용쟁! 모용쟁이 맞지? 맞아, 안 맞아? 모용쟁이 맞다면 날 따라가자구. 난 이젠 철장공을 장파했으니 구양봉 같은 건 무섭지도 않아. 구양봉이 오기만 해 봐. 내가 단번에 쳐죽일 테니."
그는 눈까지 뻘게져서 마구 헛소리를 내지르더니 냉큼 뛰어 일어나 아우성을 치면서 잡히는 대로 탁자와 걸상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언뜻 문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이젠 끝났군.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영고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궁녀들과 위사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서로 조심스레 눈길을 주고받으며 굽실굽실 뒤를 따라갔다.



제8장 흘연히 사라진 치주
영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궁으로 돌아왔다. 황제를 해치려던 중원의 무림 고수 하나를 자기 손으로 내쫓았으니 황제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녀는 사뭇 득의양양했다. 단지흥은 그 소식을전해 듣고 득달같이 그녀의 침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단지흥을 보자마자 기세등등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수다를 떨어댔다.
"내가 오늘 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 만났는데 뭘 했는지 아세요? 글쎄, 내가요……."
"일국의 황비가 도대체 그게 무슨 추태요! 주루에 올라가 술을 안 먹나. 뭐 또 내기를 해? 그래 그대가 강호를 쏘다니는 호걸인가? 독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소란을 피우게. 정말 그 무슨 추태 야!"
단지흥은 대로하여 영고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영고는 너무나 뜻밖이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나, 그 사람이 나쁜 심보를 갖고 폐하를 찾아왔기에 내가 쫓아 보낸 거예요. 폐하를 돕느라고 그런 걸 가지고 왜 화는 내요, 화는?"
단지흥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는지라 그런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또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그대더러 도와 달랬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다 하니 그런 참섭일랑 말라구! 어느 안전이라고 황제 일에 참섭을 하려 들어, 참성이!"
그러자 영고도 영고대로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눈물부터 왈칵 쏟아 냈다.
"좋아요, 좋아. 당신은 황제니까 마음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고 난 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 그거죠? 좋아요. 내 다시는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어요! 나가지 않겠다구요! 그래 나는 이 침궁 안에서 고삐 매인 망아지처럼 갇혀 있는데, 폐하는 며칠에 한 번이나 나를 찾아올 건가요? 숙녀동에 있을 땐 날마다 곁에서 동무 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내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다 했다구요!"
영고는 울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이 여자는 아직까지도 숙녀동에 있을 때의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는 게야. 계속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말썽을 부리면 앞으로 무슨 풍파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노룻이다. 아무래도 선생을 하나 모셔다가 예의 범절을 가르쳐야겠다.'
단지흥은 단단히 벼르며 엄포를 놓았다.
"어쨌든 이젠 더는 밖으로 나가지 마오. 그렇게 막된 여자로 굴어서야 황실의 권위가 서겠소? 황비의 치신을 지킬 줄 알아야지, 남의 웃음거리나 돼서는 안 된단 말이오."
그 추씨라는 무침 고수를 쫓아 보내 버렸으니 궁에 돌아오면 단지흥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칭찬이 대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훈계만 당하니 영고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이젠 자기 황궁 안이니 다시는 내 도움이 필요 없다 그거죠? 그래요, 당신은 황제예요. 황제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시란 말이에요."
영고는 황제 앞인데도 무례하게도 발딱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단지흥은 그 꼴을 보고는 한층 더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잘하라고 타일러도 백방이 무효일 것 같았다. 그는 분을 내리누르지 못한 채 영고를 내버려두고 그곳을 나와 버렸다.
그는 못내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며 자기 처소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후원에 이르렀을 때였다. 얼핏 궁녀 하나가 자그마한 제단 앞에 향불을 피워 놓고 하늘을 우러러 무엇인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묘령의 궁녀는 검은 머리칼에 몸에 꼭 달라붙는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아주 고왔다.
단지흥은 화가 난 중에도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서서 그 궁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 보았다.
"그이께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기를…… 소녀 간청 드리옵나이다. 그이께서는 돌보아야 할 일, 골치 아픈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으십니다. 창천께서 이렇듯 그 많은 대사를 그이께 위임하셨으니 언제나 그이의 몸에 탈이 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대리의 일은 모두 그이에게 달렸고 그이가 있기에 대리의 오늘이 있사옵니다. 저희 아버님 말씀같이, 그이는 이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 천상의 신이옵니다. 그이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비옵니다……."
단지흥은 그녀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렇듯 축망을 받으니 그 사람은 복도 많구나. 이 여인이 흠모하고 있는 사람은 필시 기인(奇人)인 모양이다.'
단지흥은 더욱 숨을 죽이며 그 궁녀의 기도를 유심히 들었다.
"나는 그이를 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어서……. 그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이만 보면 가슴이 설레어 말은 한마디도 안나오니, 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창천이 이 내 마음을 아신다면 그이에게 영원토록 즐거움을 주옵소서, 복을 주옵소서. 그러면 소녀 죽어도 원이 없사옵니다."
궁녀는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녀 앞에 놓인 향로에서는 향연(香烟)이 하늘하늘 피어 올랐다. 궁녀는 무릎을 꿇고 사뭇 정중하게 아홉 번이나 큰절을 하였다.
단지흥은 그 모습을 보자 감개가 무량해졌다.
'내가 전에 본 시서에는 그대와 나의 사랑 영원히 변치 않으리 하는 시들이 퍽이나 많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래 보지를 못했구나. 만인지상 황제가 되었지만 그런 절절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지금껏 해 보지 못했다. 황제의 자리란 다 그런 것인가……. 기도드리는 말로 보아서는 상대는 이 궁녀가 저토록 연모하고 있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단지흥은 듣다 못하여 흠흠 헛기침을 하며 대뜸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만 네가 기도드리고 있는 그 남자는 대체 누군고?"
그러자 궁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등뒤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 야밤에 기도를 드리면 아무도 모르려니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한테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궁녀는 낯이 새하얗게 질려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었다. 사정없이 온몸이 떨리며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단지흥은 그녀가 몸을 오그리고 떨고 있는 것이 불쌍하여 손수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궁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 하게 말했다.
"폐하…… 널리 용서하시옵소서, 누구에게도 이 마음 아뢸 길 없사와 하늘에……."
그러더니 궁녀는 눈물을 뚝뚝 떨궜다. 단지흥은 이 여인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게 여겨졌다.
'응당 남자의 보호를 받고 응석이나 부릴 연약한 계집이거늘, 오히려 남자를 이렇듯 살뜰히 염려하고 있다니. 그 남자가 알면 얼마나 가슴이 뭉클할꼬.'
"그래 네가 그렇게 축망하고 있는 사내는 대리 어디에 있느냐? 내 너를 밖으로 내보내 줄 터인즉, 어서 찾아가 둘이 금실 좋게 살도록 하라."
황제의 말에 궁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야밤에도 보일 정도로 그녀의 눈은 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지었다.
"소녀가 사모하는 그분은 대리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시지만, 정작 그분께선 이 미천한 것을 잘 알지도 못하옵니다."
단지흥은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가 넓고 콧날이 오똑한 것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몸매에 봉곳 솟은 젖가슴, 실팍한 엉덩이…… 달빛을 받아 그녀의 모습은 적이 교태 로웠다.
"참으로 예쁜지고……. 그래, 그렇게 한숨만 짓지 말고 그 사내가 누구인지 어서 말만 하여라. 궁 밖으로 나가 결혼하는 것을 내 허락할 것인즉."
궁 밖으로 나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어째서인지 궁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살포시 얼굴을 들고 단지흥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그런 말씀은 마시오소서. 소녀는 오직 마음 속으로 그분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나이다. 제발 그분이 누구인지는 묻지 말아 주소서, 그 사람이 소녀를 모르는데 소녀가 어찌 이름을 밝히오리까?"
궁녀가 굳이 그 사내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자 단지흥은 다소 갑갑증이 일었다.
"이거 답답하군. 그 사람이 누군가만 말하면 내 그 사람에게 명을 내려 너와 결혼을 하게 한다는데도."
"폐하의 명에 못 이겨 마지못해 치르는 혼례라면 무슨 기쁨이 있겠사옵니까. 마지못해 나를 맞이하는 그런 혼례는 소녀도 싫사옵니다."
궁녀는 한마디하고는 다소곳이 황제 앞을 물러나와 향로를 걷어 들고 발걸음을 뗐다.
"폐하, 밤이 깊었사오니 폐하께서도 돌아가셔서 침소에 드소서."
궁녀가 돌아가자 단지흥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나도 저 같은 사랑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 진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황제 자리라도 내놓을 수 있으련만.'
오늘 밤은 이대로 잠을 이룰 것 같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하늘을 우러르던 궁녀의 고운 자태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단지흥은 천천히 궁녀의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이슥한데도 예기치 않게 황제가 행차하자 궁녀들은 화들짝 놀라 급급히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단지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만들 하고 오늘 밤은 다른 곳으로 가 취침을 하거라. 저기 저애만 남고! 난 저 애와 따로 할 얘기가 있느니라."
기도를 드리던 그 궁녀는 흠칫 놀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궁녀들은 황제가 특별히 그 궁녀에게 은총을 내리시려고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고 내심 그녀를 부러워하며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궁녀들이 침소 밖으로 모두 나가기를 기다려 말했다.
"네 마음속에 그리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이젠 알려고 하지 않으마, 그저 너만 원한다면 궁을 나가 그 사람과 만나도록 해 주겠다."
그러나 궁녀는 분같이 하얀 목선이 다 드러나 보이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등불에 비친 그녀는 더욱 사랑스러웠다.
옆으로 비껴 보이는 그 얼굴은 부끄러움에 노을 빛으로 물들었고, 매끈한 두 손은 안절부절못하며 양 무릎 사이에 올려 놓기도 하고 몸 뒤로 가져 가기도 했다. 그러는 양을 보고 단지흥은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 좋다. 이젠 내 더 이상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지. 대신 내일 사람을 시켜 너를 궁 밖으로 내보낼 터인즉, 그 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라. 예단감으로 명주 2백 필을 하사하겠노라."
그러자 궁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의 마음에 있는 그 사람은 그런 비단필은 소용없는 사람이옵니다."
"허허…… 그럼 뭣이 필요한가? 말만 하면 내 다 준비해 주겠노라."
단지흥은 인자하게 껄껄 웃었다. 궁녀가 그리는 그 사내가 황궁안의 관원이라면 자기의 칙명을 거역하진 못하리라. 예단감을 갖추어 주자는 건 다만 이 궁녀를 더 기쁘게 해 주자는 데 불과하였다.
궁녀는 단지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분한테…… 그분한테 소실로 들어간대도……."
그리고는 말을 못 맺고 애타는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그렇게도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이 아이를 안고 싶구나. 그러나 이미 사모하고 있는 남자가 따로 있는데 그럴 수는 없도다. 그 남자가 나라면…….'
"내 약속하지 않았더냐, 말만 하면 그 사내에게 시집보내 준다고."
"폐하, 그 말씀 참말이시지요?"
궁녀는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단지흥은 껄껄 웃었다.
"얘야, 황제가 그런 일에 실언을 하겠느냐. 네가 사모하는 남자가 싫다고 해도 난 그 남자를 돌려 세울 수가 있는 사람이다. 이 대리국에 내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염려 말고 그 사내가 도대체 누군지나 어서 말해 보아."
"우리 아버님께선 그분에게 큰 희망을 걸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죠. 그분은 결코 날 좋아할 수가 없다면서 말예요."
궁녀는 여전히 수심에 잠겨 말했다.
'이렇게 예쁜 계집을 어디서 얻을 수 있다고……. 그 사내는 왜 그것을 모를까? 대관절 얼마나 잘났기에 그러는 걸까. 그 사내가 원치 않는다 해도 내 필히 이 궁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단지흥은 애를 태우며 더욱 궁녀를 재촉했다.
"다른 말은 그만두고 그 사내가 누군가만 말하거라. 그러면 내 꼭 네 소원을 이루어 줄 터인즉, 그 사내가 꼭 너를 맞아들이게 해 주겠다."
그 말에 궁녀의 눈빛은 샛별같이 빛났다.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의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자라면서 경서도 읽었고 금기서화(琴棋書畵)도 조금은 할 줄 아옵니다. 소녀가 어릴 적부터 품은 평생 소원이라면 마음에 드는 낭군에 게 시집을 가는 것이었사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궁녀는 무릎을 꿇더니 고두사배를 하였다.
"그래, 그 사나이가 누구지?"
"폐하, 소녀는 속세의 한 티끌에 불과하지만 폐하께선 하늘의 별이시며 일국의 제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소녀는 어렸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폐하를 보고 나서는 꿈속에서도 폐하를 잊지 못하고 자랐사옵니다. 폐하의 거룩한 모습에 반하여 침식을 잊고……. 폐하 같은 분은 세상에 없다고……. 소녀 언제나 폐하만 그려 왔사옵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단지흥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궁녀가 불철주야 사모하며 날마다 창천에 기도까지 드리고 있는 사내가 바로 다름 아닌 단지흥, 자신이라는 것을 알자 그는 어정정하여 궁녀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궁녀는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드디어 모두 내놓고는 마음이 몹시 후련해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또 말을 이었다.
"소녀는 이 황궁으로 들어온 이후로 비록 폐하 가까이서 시중을 들 수는 없었으나 먼발치에서나마 매일 뵈올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사옵니다. 소녀는 오로지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폐하의 쾌락과 건강을 축망하는 것으로 폐하에게 제 마음을 바치기로 하였사와요. 이 주제넘은 계집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흐느끼며 눈물을 쏟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그 순간 행복에 겨워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렇듯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염려해 주고 축원해 주는 여인이 있었는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는 이 궁녀의 마음 씀씀이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궁녀들은 기실 모두 단지흥의 여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에게 침대머리에서 시중을 들려고 애를 쓰며 총애를 받으려고 교태를 부린다. 그러나 그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진정 이 궁녀처럼 날마다 자기를 위하여 하늘에 기도까지 드리며 자나
깨나 걱정하고 사모하는 궁녀가 있을까?
"네 이름이 뭐지?"
단지흥의 목소리는 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치주(癲珠)이옵니다."
그는 그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쓸어 만졌다. 그러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날 사모하게 되었는지 좀더 소상히 말해 보거라."
"소녀가 열세 살 나던 해였사옵니다. 그때는 폐하가 아직 등위하시기 전, 태자로 계실 때였사옵니다. 그때 거리에 나갔다가 소녀는 우연히 폐하를 우러러보게 되었사옵니다. 그때 첫눈에 가슴이 설레며 '바로 이분이다, 내가 꿈속에서 본 바로 그분이다'……그렇게 부르짖었사와요. 그 다음부터 소녀는 그만 폐하에게 완전히 미쳐 버렸사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저 폐하 생각
만 하였사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소녀를 크게 꾸짖으면서 이름을 치주라고 바꿔 버렸답니다. 그래도 밤낮 폐하 생각에 침식을 잊고 지내자 아버님께서는 하는 수 없어 소녀를 궁으로 들여보냈사옵니다."
젊은 황제 단지흥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이 세상에 이토록 자기를 미친 듯이 사모하는 여인이 있었다니……. 그는 탄복을 금치 못하며 치주를 와락 껴안았다.
"치주, 내 이제 진짜로 너를 시집보내겠노라."
궁녀는 그 말에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더니 단지흥의 품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절더러 다 말하라 하시고선 저를 내쫓으려 하시다니……."
"누가 내쫓겠다고 했느냐? 네가 못 잊어 하는 사내에게 너를 시집보내겠다는 거지."
"아…… 황제 폐하……."
치주는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며 살포시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휘장이 드리운 방안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흥은 치주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네가 싫다면 몰라도 너만 원한다면 오늘 밤으로 나는 너를 귀비로 맞아들이고 싶다. 어떠냐?"
황제는 치주의 엉덩이를 바싹 당겨 안았다.
"아이 참 부끄럽사옵니다……."
치주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기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의 품에 더욱 찰싹 달라붙으면서 도 사뭇 부끄러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하나 불…… 불을 꺼야죠……."
"왜? 내 보기가 두려운가? 그러면 치주, 눈을 감아 봐. 눈만 감으면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폐하, 그런 건 아니옵니다. 소녀가 폐하를 두려워하다니요. 소녀는 날마다 꿈에서도 폐하를 보곤 했는데……. 하지만 똑똑히 본적은 한 번도……. 폐하만 보면 가슴이 뛰고 눈앞이 뿌얘져서……. 하나 오늘만은 다르옵니다. 소녀, 오늘은 폐하의 용안을 똑똑히 보겠사옵니다. 어쩌면 오늘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그래도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설사 훗날 폐하께서 소녀를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해도 오늘 밤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겠사옵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려면 내가 너를 아랑곳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이렇게도 나를 위하는 너를……."
단지흥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 위에 눕혔다. 나긋나긋한 몸은 뼈가 없는 듯 솜처럼 가뿐했다. 그녀는 지친 듯 나른하게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혈기왕성한 젊은 단지홍은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감개에 젖어 말했다.
"오늘 이 일은 네가 끌어들인 것도 아니요, 내가 심심풀이로 찾아온 것도 아니다. 이건 연분이다."
치주는 한 순간 단지흥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몸을 비비꼬았다.
"아아, 폐하…… 꿈만 같사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단지흥은 이처럼 나긋나긋하고, 이처럼 남자를 미치게 하는 여인은 진정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여러 미인들과 운우의 밤을 보냈지만 치주 같은 여인은 없었던 듯싶었다. 그는 치주를 안고 밤 가 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저녁, 느닷없이 영고가 단지흥을 찾아왔다. 그는 그때 마침 서재에 있었다. 영고는 단지흥 앞에 앉자마자 그를 흘깃 흘겨 보며 대뜸 물었다.
"요사인 밤마다 어디서 지내시는 거예요? 내가 궁녀들을 풀어 얼마나 찾아 다녔는 줄 알기나 아세요?"
"찾아 다니긴 어딜 찾아 다닌단 말이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소.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조신하게 침궁에 있으면서 궁내의 범절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했잖소? 그리고 내궁 중사대부더러 황중의 예의 범절을 가르치라고 분부해 놓았는데, 그래 얼마나 배웠소?"
단지흥은 그녀에게 아직도 성이 나 있는 참인데, 그녀의 얼굴을 대하자 새삼스레 그때 일이 떠올라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 많은 황궁 범절을 어떻게 다 배운단 말예요. 너무 많아 들어도 하나도 기억도 안 나요."
"이봐요, 여긴 대리국 황궁이오. 그대가 있던 숙녀동이 아니란 말이오.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 해선 안 돼요. 내궁 관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오, 알겠소?"
"내궁 관원들 말이오? 내가 왜 내궁 관원들 말을 들어야 해요? 황제인 당신 말만 들으면 되지, 내가 왜 그 구린내 나는 남자들 말을 들어야 해요? 나 원 참, 알다가도 모를 말씀만 하신다니까."
영고는 눈빛마저 번득이며 막말을 해댔다. 정말 불 같은 성미였다. 그러나 그 성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또 무슨 사단을 불러올지 누가 알겠는가. 단지흥은 한동안 할말을 잃 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영고는 단지흥에게 슬쩍 몸을 기대며 한껏 애교를 부렸다.
"그런데 폐하, 어젯밤은 어디로 납시셨죠?"
"가긴 어딜 가오? 혼자서 불경을 독경했지."
단지흥은 영고 앞에서 치주 얘길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치주에 대해서 얼마나 험악하게 말할 것인가.
영고는 깔깔 웃으며 제멋대로 빈정거렸다.
"독경을 했다구요? 무슨 독경을 하필이면 여자들 침대에 올라앉아 하세요? 내가 뭘 모르는 줄 아시나 본데, 잘못 생각하셨어요! 당신과 그 계집애가 밤마다 뭘 하는지 궁 안에 소문이 확 퍼졌단 말예요. 내가 뭐 귀가 먹고 눈이 먼 줄 아세요? 당신은 황제예요, 황제! 황제가 궁내에서 제멋대로 놀면 혼우한 군주가 된다는 걸 모르세요?"
영고는 앞뒤 재지도 않고 나가는 대로 마구 지껄여댔다. 단지흥은 노기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치주를 좋아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치주처럼 나를 사랑하는 여인은 없었다. 그런 치주를 내가 내 마음대로 사랑할 수도 없단 말인가?'
"그대가 혼우한 군주가 뭔지 알기나 알고 입을 놀리는 겐가? 내가 귀비를 몇 명이나 더 맞아들여 도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 노라!"
단지흥은 눈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왜요? 왜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난 매일 혼자만 있게 되는데 왜 상관을 안 해요? 난 그럼 그 넓은 방에서 허구한 날 독수공방만 하란 말이에요?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 날마다 밤마다 나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녜요? 안 그래요?"
영고가 철부지 어린애같이 굴자 단지흥은 그녀가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했다. 이 여인은 그저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단지흥은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낮춰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영고, 난 황제야. 중차대한 국사가 태산 같은데 어떻게 날마다 영고만 데리고 있겠어?"
"흥, 날마다 국사가 태산 같다구요? 날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내 모르는 줄 알아요? 날마다 그 계집애가 향불을 피우고 기도드리는 걸 보고 날마다 그 계집을 껴안고 침대에서 뒹굴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요? 그게 그렇게 보긴 좋다면 나도 날마다 향을 피우고 폐하를 위해 기도를 올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다구요!"
영고는 막무가내로 단지흥을 걸고 넘어졌다. 그쯤 되자 단지흥은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시끄러운 황궁을 벗어나 중원으로 훌쩍 날아가 버리고만 싶었다. 당장 내일에라도 화산논검이 치러졌으면 싶었다. 그러면 이 귀따가운 소리들을 듣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는 휘휘 손사래를 쳐 영고를 물리고 까물거리는 등불 앞에 오래도록 혼자 앉아 있었다. 그의 이마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게 내천자가 그려졌다.
이즈음 운남의 대양산(大凉山) 산줄기를 타고 나는 듯이 황궁으로 달려온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 그림자는 황성 성벽 아래까지 와서는 숨을 몰아 쉬며 성벽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쳇, 황성 성벽치고는 그리 높은 축도 아니구먼."
그리고는 두 손으로 성벽 돌들을 그러쥐고는 성벽 위로 잽싸게 기어 올라갔다. 성벽을 넘어선 그림자는 눈 깜짝할 새에 황궁까지 당도하여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어둠 속에 묻혀 아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좀 있으니 황궁 안쪽에서도 두건을 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석벽을 타넘고 이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도 그 그림자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어둠 속에 스며든 듯 서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고는 먼저 암호를 보냈다.
"환희불환희, 환희몰료골(歡喜不歡喜, 歡喜沒了骨)."
그러자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이 대번에 응답했다.
"환희불환희, 불조야난속(歡喜不歡喜, 佛祖也難贖)."
목소리로 보아하니 여자들이 분명했다.
둘은 서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마주서게 되자 궁내에서 넘어온 여인이 먼저 인사를 했다.
"보살님께 여쭈세요. 저는 이미 귀비가 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구요. 황제는 언제나 남이 모르는 밀실에서만 일양지공을 연마하는데 시위 몇을 빼놓고는 그 누구도 얼씬도 못하게 해요. 저도 물론이구요."
"아니, 그럼 너도 거길 못 들어간단 말이냐?"
먼데서 온 여인은 다소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러자 궁 안에서 나온 여인은 몹시 난처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요. 나 같은 건 어, 어림도 없어요."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여인이 다소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럼 그 동안 뭘 했느냐? 소임도 제대로 완수 못하고! 보살님도 화산에 가서 천하 무림 고수들과 무예를 겨루어 보실 참인데 네가 일양지공을 알아내지 못하면 보살님께서 무엇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긴단 말이냐? 너 혹시 젊고 영민한 황제한테 아예 반해 버린 거 아냐?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넌 목숨을 보전치 못할걸? 그러니 잘 알아서 처신하라구, 알겠지?"
"알아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궁에서 나온 여인은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조심해! 헛 생각 했다간 큰코다칠 테니. 대환희(大歡喜) 보살님께서는 천하 어떤 남자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겠지 ? 대리국 단지흥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대양 산에 오면 대 환희구진(大歡喜丸陣)에 사단이 날 거란 말이야, 알았어?"
먼저 온 여인은 사뭇 위엄 서린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궁에서 나온 여인은 대환희구진이란 다섯 자를 듣더니 얼핏 몸을 떨었다.
"예, 잘 알고 있어요. 보살님의 대환희구진이 천하무적이라는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남자로 생겼다면 누구도 그 대환희구진을 어쩌지 못하고 그 진에 녹아 난다는 걸 저도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러자 먼저 온 여인은 음탕하게 웃어젖혔다.
"어떤 사내라도 일단 우리 대환희구진에 빠졌다 하면 성한 몸으로는 결코 나오지 못해. 전번에도 봤지? 소림사 화상이 하나 죽어 나는 걸 말이야! 수컷이란 것은 천하에서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살아 나오지 못해! 너, 허튼수작 말고 이 말 명심해!"
"알았어요."
궁에서 나온 여인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알았으면 됐다. 내 말은 우리 스스로를 너무 낮게 보지 말잔 말이다. 보살님께서 너에게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을 알아 오라고 보낸 것은 우리 불진(佛陣)의 역량을 더욱 강하게 하여 빛을 내고자함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보살님의 이 심중을 헤아리고 받들어야 하느니라."
궁에서 나온 여인은 그저 허리만 굽실거렸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두 여인은 헤어졌다. 먼데서 온 여인은 나는 듯이 성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둔한 몸집인데도 동작은 의외로 재빨랐다.
궁 안에서 나온 여인은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황궁 벽을 사방으로 살펴 보면서 오르기 알맞춤한 곳을 찾았다. 마침 나지막한 곳을 발견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바로 곁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흡사 쥐새끼가 찍찍거리는 듯한 괴상한 웃음 소리였다.
"누구ㄴ?"
여인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나지막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ㄴ?"
그 사람은 농을 치듯 여인의 목소리를 흥내내며 똑같이 따라했다.
"네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여인은 다급해서 한껏 목청을 낮춰 급급히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그자는 황궁 성벽 위에 앉아서 조그마한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얌전하게 입다물고 있는 게 좋아. 황제는 네가 이런 야밤에 궁을 나와 웬 여인과 수작을 하고 헤어졌다는 걸 아직은 모를 게야. 그저 자기에게 입의 혀처럼 구는 너를 어떻게 둘째 황후로 봉할까만 궁리하고 있을 테지. 하나 만일 내가 단지흥한테 한마디만 벙긋하면 그땐 어떻게 될까? 네가 야밤에 궁을 나와 웬 여인이 아니라 어떤 젊은 사내와 수작을 하다가 들어갔다고 한마디만 귀띔해 주면 단지흥은 단박에 일양지공으로 너를 죽이지 않겠냐, 히히히……."
"넌 누구냐? 누군데 내 손에 죽지 못해 안달이냐?"
여인은 가만있지 않았다.
"히히……내가 누구냐고? 나로 말하면, 운남에서 이름난 기충 충피다. 난 너희 단지흥 따위도 하나도 무섭지 않다. 대리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제 꼭 하나밖에 없지. 그것도 여자야. 하 지만 너는 아니거든……."
여인은 충피라는 소리를 듣고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갑자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기선 거기 일이 있고, 난 내 소임이 있는데 왜 이러는 거예요. 우리 둘은 서로 상관없는 사이니 내 일에 참견 말아요."
"네가 누군지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남방 대환희 보살네 사람들중에 연약한 여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익히 알고 있지. 그런데 뭘 그렇게 내숭을 떨며 가련한 척하는 거야? 그런 내숭은 단지흥한테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텐 도통 안 통한다니까."
충피는 계속 히히덕거렸다. 여인은 이윽고 성벽 위로 다 올라가 살며시 충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충피는 성벽 위에 달랑 올라 앉은 채 히히 웃으며 여인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여인은 충피에게 가까이 접근하자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제비처럼 훌쩍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져 내리며 충피를 덮쳤다. 충피는 몹시 왜소하지만 날쌔기 그지없어 여인이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성벽 위에서 냉큼 날아 내리며 기분 나쁘게 히히거렸다.
"이봐, 내가 단지흥처럼 어리석은 줄 아느냐?"
그리고는 여인을 향해 똑바로 솟구쳐 올랐다. 둘은 허공에서 한바탕 일전을 벌였다. 여인의 병장기는 입에서 내뿜는 구슬이었다.
여인은 충피의 이마를 겨냥해 단단한 쇠구슬을 똑바로 내뿌렸다.
다행히 충피가 알고 미리 방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구슬에 명맥(命脈), 쇄심(鎖心), 현기(玄機) 삼대 요혈(要穴)을 맞고 진작에 꺼꾸러졌을 터였다. 그러나 충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충피는 파르르하게 대로해 소리를 질렀다.
"내 손에 죽지 못해 환장이 났구나. 오냐, 내 오늘 너를 황천에 보내 주마……. 아니, 그게 아니지! 그래선 안 되지. 난 단지흥과 달라! 예쁜 계집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구. 속는 줄 뻔히 알면 서도 난 계집들을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마구 뒹굴거든. 난 기실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목숨은 얼마든지 살려 둔다구. 단 나는 그저 잡아다가 들여앉혀 놓고 날마다 독약을 먹이는 수법을 쓸 뿐이지. 그러면 제가 나한테 순순히 따라야지 별수 있다더냐?"
충피는 숨이 넘어가도록 낄낄 웃어댔다. 야밤 삼경의 부엉이 울음 소리처럼 소름이 끼쳤다.
여인은 그 말엔 코대답도 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제 재간으로는 도저히 충피를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인은 기가 죽어 말했다.
"이제 그만 비켜요. 우린 서로 좋게 헤어져 제 할 일이나 합시다."
그러나 충피는 도리질을 했다.
"안 돼, 안 되지. 난 널 꼭 잡아 둬야겠다. 그래야 너희 보살님이 와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게 아니냐? 그러니까 너를 인질로 잡아두겠다, 그 말이지."
난쟁이 충피는 그녀 앞뒤로 콩콩 뛰었다 내렸다 하면서 히히덕거렸다.
"난 여자를 앞도 보고 뒤도 보고 남보다 자세히 훑어보는 습관이 있거든. 보면 볼수록 참 괜찮은데. 정말 끝내 주는 몸매야! 그러니 대환희 보살이 너를 내세워 미인계를 쓰려 한 거겠지. 단지흥도 홀딱 반할 만해. 아무튼 이번엔 내가 너를 데려다가 재미를 좀 봐야겠다. 히히히……."
그러면서 충피는 냉큼 뛰어 덮쳐 들었다. 여인은 삽시에 피했으나 연신 숨 가쁘게 들이대는 충피의 공격에 채 몇 합도 못 겨뤄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어? 그럼 정말 화를 낼 테다. 정말 화를 낼 테야!"
충피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여인을 덥석 잡아당겼다. 여인은 그만 중심을 잃고 픽 꼬꾸라져 버렸다.
"히히히…… 나도 이젠 참아야지. 자, 날 따라가자. 날 따라가면 단지흥보다야 훨씬 잘해 줄 테니……. 단지흥한텐 희첩이 얼마나 많으냐? 너쯤이야 싫증나면 금세 실총을 당하기 십상이라구.
하지만 날 따라가 봐, 난 다른 계집은 모두 뒷전으로 하고 너만 총애할 테니! 화도 내지 않고……."
여인은 어느새 충피한테 혈도를 눌려 팔다리를 꿈쩍도 못하고 다급하게 소리만 질러댔다.
"날 놓아주어요, 놓아주어요! 난 궁에 들어 가야만 해요."
"요 귀염둥이야, 단지흥만 너를 갖고 재미 보란 법 있니? 나도 재미 좀 보자꾸나. 순순히 내 말을 들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정말 성을 내겠어! 내가 성을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인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이제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흥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적이 걱정이 되었다. 단지흥이 지금 취화궁(翠華富)을 찾아왔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취화궁에 와서 그녀가 없는 걸 알게 된다면 온 궁의 사람들을 다 동원해 샅샅이 뒤질지도 모르는 터였다.
충피는 그 뱀 껍질같이 징그러운 손으로 그녀의 두건을 홱 낚아챘다.
"이따위는 뭣 하러 쓰고 다녀? 난 벌써 네 정체를 다 알고 있어."
그리고는 또 징그럽게 웃음을 흩뿌리며 그 뱀 껍질 같은 손으로 치주의 몸을 정신없이 쓸어 만졌다.
"자, 내 좀 만져 보자. 가만있어야지, 옳지. 안 그러면 내가 성을 낼 테야. 옳지, 옳지."
충피는 그 징그러운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다가 이내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더듬으며 연신 기성을 질러댔다.
"멋들어져! 정말 멋들어져!"
치주는 충피를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지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충피의 몰골이 눈물 나도록 싫어서인지…….




제9장 뚱뚱보 여인들
치주가 야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궁인의 보고를 듣고 단지흥은 당장에 대리 황궁 내외의 관원들을 모두 풀어 치주를 찾게 했다. 하나 사흘 낮 사흘 밤을 찾아 헤매도 치주의 행방은 끝내 알 길이 없었다.
단지흥은 매우 의아스러웠다.
'치주는 대체 어디 가 있는 겐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제 발로 나갔으면 궁내에 본 사람이 있을 터인데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없어졌으니 실로 괴이한 일이로다. 그러나 이 일로 지나치 게 법석을 피울 수도 없는 터, 일국의 황비가 어느 날 잠자기 실종 되었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는가?'
단지흥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하였다. 근자에 들어 누구보다도 총애하던 치주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단지흥은 심기가 말이 아니었다. 허전한 마음 달랠 길이 없었다.
'혹시 영고의 작간이 아닐까? 영고는 평소 치주를 시새워하고 생트집을 잡기 일쑤였는데, 그 계집이 쥐도 새도 모르게 치주를 끌고 가 해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꼭 영고의 짓 같기만 했다. 일단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자 단지흥은 지체 않고 황급히 첩안궁(疊安宮)으로 향했다.
영고는 정원 돌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런 시각에 황제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영고는 반색을 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요사이 매일 중사대부한테서 황궁의 예의 범절인 궁금(宮禁)을 배우느라 영고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영고는 중사대부를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화상은 여편네가 없나? 아이고, 있다면 그 여편낸 나 영고보다 훨씬 더 적적 하겠다. 이런 목석 같은 화상하고 사는 그 여인도 팔자 한번 우라지게 타고났군. 그 여인에 비하면 내 팔 잔 백 배 더 나은 셈이다!'
그러니 그 앞에 앉아 있다 해도 귀로 중사대부의 말이 들어갈리가 천부당만부당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입다물고 조신하게 앉아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져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번번이 화를 내며 중사대부를 쫓아 보내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렇게 중사대부를 내몰고 돌의자에 앉아 있는데 황제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아이고 이제야 오시네. 어서 오셔요. 이건 그 영감태기한테 매일매일 귀가 따갑도록 말만 듣고 앉아 있으려니 머리가 다 빠개지는 것 같았는데……. 자, 어서 앉으세요. 어서요!"
영고는 마냥 입이 벙싯 벌어지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 동안 영고는 가뭄에 단비 기다리듯 황제를 기다려 왔다. 숙녀동에서 치른 그 초야의 정을 부여안고 잊지 못할 그날 밤의 일을 돌이켜보며 영고는 몸을 불태워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단지흥은 적이 쌀쌀맞았다. 그는 영고를 쏘아보며 차디 차게 물었다.
"요사인 또 무슨 일들을 하였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단지흥의 물음에 영고는 대번에 낯색이 변하며 날카롭게 되받았다.
"무슨 일들을 하다리요? 하긴 무슨 일을 해요? 매일 궁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갑갑하여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지만 나가지 못하게 하니 낸들 별수 있어요? 낮에는 창문으로 밖에서 오가는 궁 녀들이나 내다보고 밤에는 하늘에서 가물거리는 별이나…… 세어 보고……."
일단 말이 나오자 영고는 그만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금세 눈물이 맺혔다.
치주 일만 아니라면 단지흥도 영고가 불쌍하여 온순하게 타이르기도 하고 달콤하게 한마디 농도 건네련만 지금은 그런 심기가 아니었다. 단지흥은 위로 한마디 없이 냉랭하게 내뱉었다.
"내 한 가지 물을 일이 있어 왔소."
"무슨 일인데요? 무슨 답답한 일이 있기에 여기까지 절 찾아온 거예요?"
영고는 황제가 무슨 큰일이 생겼는데 혼자서 해결 못해 자기를 찾아왔다고 넘겨짚었다. 치주가 제 아무리 날고 기는 계집이라도 황제는 중대사에 관한 한 여전히 자기만 믿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뜻밖의 일을 물어 왔다.
"치주를 못 봤소? 치주가 없어졌단 말이오."
그 소리에 영고는 낯색이 확 달라졌다.
'흥, 그 잘난 계집애 일을 왜 예 와서 물어? 예가 어딘데. 치주가 없어져서 속이 탄다 그거지? 황제가 그 치주 년을 제일 총애한다더니 그 말이 한치도 틀리지 않는군. 뭐? 치주 그 년이 황제를 제일 끔찍이 위하기 때문이라고? 아니, 그럼 그 년만 그렇다는 거야? 나 영고도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숙녀 동에서 내가 그렇게 했기에 우리 둘이 인연이 맺어진 게 아니만 말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그 속보이는 년에게 홀려서…….'
영고는 심술이 나서 내쏘았다.
"그 년 일, 난 몰라요. 못 봤어요."
단지흥은 치주 얘기가 나오자 영고의 낯색이 금세 변하는 것을 보고 더욱 의심이 들었다.
'기색을 보니 영고가 한 짓임에 틀림없어. 궁성의 예의 범절도 모르지, 게다가 누구보다도 나서서 치주를 질투하고 시새워했거든. 그래서 어디다 치주를 감추어 놓고 분풀이를 하는 게야.'
"이보오, 그대가 치주를 숨겼다면 어서 내놓아요. 황비가 없어졌다고 온 궁 안이 다 술렁거리는 판이니 이게 큰일이 아니고 뭐란 말이오?"
단지흥은 영고의 짓이라고 단정하고는 어르듯 말했다. 그러나 영고는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아니, 이 큰 황궁에 계집애 하나 없어진 걸 가지고 뭘 그리 야단이에요? 그 작은 숙녀 동에서도 사람이 늘 없어지곤 했지만 난 하나도 대수롭지 않데요. 가다 가다 산자락이나 산골짜기에서 더 러 시체를 찾아내기도 하는데, 구역질 나는 사내들에게 겁탈당해 죽었거나 독수리, 코끼리한테 죽은 것 천지던데 일일이 그런 걸 다 문제삼자면 큰일도 참 많겠소!"
단지흥은 영고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만 지껄여대자 기가 딱 질려버렸다. 이런 한심한 여인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단지흥은 화가 나서 횡하니 나와 버렸다.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했다.
치주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충피는 치주를 데리고 중원으로 향했다.
"너는 이때껏 뚱뚱보 보살네에서 살아서 중원엔 한 번도 못 가봤을 테지? 중원에서 무림 호걸들의 집회가 열리는데 오늘 날 따라 거기나 가자. 가면 눈이 좀 뜨일 게다."
황궁을 떠나온 지 벌써 여러 날째였다. 치주는 이제나저제나 틈을 보아 도망가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충피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하세월이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충피가 뭐라든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충피는 막무 가내로 치주를 교자에 태웠다. 충피가 한마디 호령을 내지르자 교자는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자꾼은 전변의 장한들이었다. 그들은 걸음이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10여 리를 나아갔다. 교자 뒤에는 운남 기충 충피의 시청들이 따르고 있었다. 중원에 가면 볼 만한 구경거리가 많으리
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모두들 신명이 나서는 연신 웃고 떠들며 재잘거렸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충피는 수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 오늘은 저기서 밤을 보내자."
교자는 건들건들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일단 행장을 풀고 한숨 돌리자 교자꾼들은 오목조목 예쁜 충피의 시침들을 흘깃흘깃 건너다보며 군침들을 흘렸다. 하지만 어느 한 놈 감히 그녀들을 다치지는 못했다. 어쨌든 너나없이 노독에 지쳐 있었다. 나무 아래 꼬꾸라져 벌써부터 코를 골아대는 자들도 더러 있고 대개는 화톳불 곁에 모여 앉아 애꿎은 술만 퍼마셔댔다.
충피의 시첩들은 때가 되었다고 모두들 머리를 빗는다, 세수를 한다, 화장을 한다 야단을 떨었고 충피의 하인들은 굉장히 큰 침대를 펼쳐 놓고 사방에 휘장을 치고는 향불을 피웠다. 그리고 나자 충피의 시청들은 모두들 침대 앞으로 다가가 충피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그래 오늘 밤은 기분이 어떠냐? 즐거우냐?"
충피는 첫머리에 꿇어앉은 시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말에 그녀는 흠칫했으나 자세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동주께서 오늘 밤 제 시중을 받으신다면 시첩 어찌 즐겁지 않으리이까?"
"우리는 그래 몇 번이나 했던가?"
"소첩은 행복하게도 열 번을 겪었습니다."
시첩의 목소리는 적이 떨리고 있었다.
"열 번이나? 그래, 열 번이나 했는데도 싫지 않다? 그러나 난 아냐, 싫증이 났어! 넌 물러서 있거라!"
그녀는 충피의 이 명이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알 수가 없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또 한 시첩이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다가갔다. 열 몇 살 어린 나이에 그림같이 예쁜 소녀였다. 그녀는 충피 앞에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주께서 이 시청의 시중을 윤허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충피는 별안간 징그럽게 웃음을 날렸다.
"넌 언젠가는 나를 깨물었고 또 한번은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렇게도 밉더냐?"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동주님께 정성을 다 바치겠어요."
그녀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우린 몇 번이나 했던가?"
"세 번…… 세 번밖에 못했습니다."
시첩은 시종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충피는 한숨을 지었다.
"할 수 없다. 갈 길이 총급하니 더 노닥거릴 시간도 없고 너라도 데리고 자야겠다. 자, 올라오너라."
그러자 다른 시첩들은 모두 마치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어나 절을 하고는 물러 나왔다. 그녀들은 나무아래로 몰려가 옹기종기 붙어 누웠다.
한동안 주위는 쥐죽은듯 정적에 잠겨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쉬임 없이 흘러갔다.
일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우더니 점차 커져 가고 그 소리에 섞여 충피에게 깔린 그 애어린 시침의 교태로운 비명 소리도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다. 시각을 더할수록 어린 소녀의 아우성치듯 한 비명 소리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그러자 술 마시던 장한들도 귀가 쭈뼛해지고 누웠던 시첩들도 하나 둘씩 일어나 앉았다. 조용한 야밤, 그것도 수림 속이라 여인의 낭자한 비명 소리는 지독히도 짜릿하고 열광적으로 들렸다. 남자들은 그 소리에 몽롱해져서 피가
뛰고 사타구니 사이가 불끈불끈해졌으며, 시침들도 가슴이 설레어 귀를 솔깃 세우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샅으로 가져갔다.
한 순간, 갑자기 교자꾼 하나가 벌떡 일어나 마치 발정한 황소처럼 충피의 시첩 하나에게 덮쳐 들었다. 바로 조금 전 충피에게 퇴짜를 맞은 그 시첩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더럭 겁이 나서 장한을 밀어내며 다리를 동당거렸다. 그러나 장한이 어찌나 우악스럽게 구는지 그 힘에 밀려 포르르 떨더니 맥이 빠진 듯 두 팔을 축 늘어 뜨렸다. 교자꾼들과 시첩들은 어안이 벙벙해 그들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불현듯 휘장 안에서 자지러지던 비명 소리가 뚝 멎더니 잔뜩 위엄이 서린 충피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너희 둘은 게서 뭣 하는 게냐?"
그러나 그 장한은 여인을 끌어안고 그녀를 애무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지라 그 소리가 귀에 들어갈 리 없었다.
"힘 빼지 말고 오늘 밤은 참아! 그래야 내일 또 기운 내서 교자를 메지……."
충피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 사내는 씩씩거리며 여자의 옷을 벗겨 내리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한 순간, 쌩 바람소리가 일며 휘장 안으로부터 화탄 (火彈) 하나가 퉁겨 나왔다. 그러자 장한은 단박에 악 비명을 내지르며 코를 땅에 박고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다들 듣거라. 내 색시는 어디까지나 내 색시야. 내가 아무리 싫증난 여자라도 너희 같은 놈들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없어, 알아?"
충피는 거만하게 내뱉더니 징그러운 웃음을 흩뿌렸다. 교자꾼들의 그 끓어오르던 욕정도 찬물을 끼얹은 듯 사그라들고 불끈불끈하던 것도 대번에 파김치가 되었다. 피를 물고 꼬꾸라진 송장을 보니 그저 간담이 서늘해져 딴생각은 싹 가시는 것이었다.
"내가 밀쳐 둔 여자라고 해서 마음대로 갖고 놀아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상으로 내줄 때까진 손대면 안 돼. 이 계집은 내가 너희들에게 상으로 주는 계집이다. 자, 너희들끼리 마음껏 갖
고 놀아라."
충피는 방금 그 장한에게 붙들렸던 여자를 가리켰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여인은 혼비백산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동주님, 아이고 동주님, 비나이다.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저를……. 저는 그만 그 사내에게 덜미가 잡혀서……. 저 사내들한테 가면 저는, 저는……."
"듣기 싫다. 저 사람들은 내 교자를 메는 심복들이야. 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줘야 내일 또 힘을 내 교자를 메지 않겠느냐! 계속 앙탈을 부리면 당장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충피는 신경질적으로 버럭 외쳤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짐승 같은 사내들이 미친 듯이 번갈아 달려들면 숨이 막혀서라도 죽을 것이었다.
장한들이 손가락을 톡톡 꺾어가며 그녀에게 다가들 즈음, 난데없이 수림 속으로 기괴한 웃음 소리가 흐흐흐 울려 퍼졌다.
"어느 놈이냐?"
교자꾼들이 대번에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충피도 휘장을 젖히고 펄쩍 뛰쳐나왔다.
웃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한두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도란거리는 말소리, 풀밭을 스치는 소리도 연이어 계속 들려 왔다. 소리로 보아하니 여인들 같았다. 필시 한 무리는 되는 듯싶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수림 속으로 숱한 연화등(蓮花燈) 불빛이 꿈결처럼 예서 제서 반짝거렸다. 이제 은방울 굴리는 듯 맑고 달콤한 웃음 소리가 수림을 가득 메웠다.
"어디서 오는 미인들이시오? 나 같은 악인도 미인들의 웃음 소리는 싫다 하지 않으니, 그것 참 잘됐구려. 어서들 오시오, 그 예쁜 얼굴들 좀 봅시다."
충피는 눈이 희번득해져서 한껏 점잔을 빼며 외쳤다.
"아마 내 얼굴을 보면 모르긴 해도 놀라 뒤로 훌렁 나자빠질 텐데……."
저켠에서 어느 미인인지 들입다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어떤 계집이야? 대리 황제 단지흥도 내 앞에서는 꼼짝못하는데 하물며 일개 계집이 내 앞에서 호기를 부려?'
"난 운남 기충 충피요. 중원 무림의 고수가 오셨다면 어서 모습을 나타내시오."
충피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 많던 등불이 단번에 꺼지고 웃음 소리도 사르르 그쳤다. 깜깜한 야음 저쪽에서 어느 여인이 말했다.
"내 그대의 침대를 좀 빌려 쓸까 하는데 빌려 주시겠소?"
"내 침대를 빌리자고? 이거 살맛나는 소린데. 오늘 밤 한 침대에서 살을 섞어 보자?"
충피는 반색을 했다. 여인은 여전히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충피 그대는 그따위 짓을 그리도 좋아하지만 난 그보다 다른 걸 더 좋아하지!"
"그게 뭐요?"
"그래 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오?"
충피는 퍼뜩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건 난 모르겠소. 여하튼 나오기나 하시오. 나오기만 하면 침대야 거저 빌려 준다니까."
수림 저쪽은 잠시 조용해졌다. 저쪽에선 대답이 없고 바람 부는 소리만 살랑거렸다. 그러다 얼마 안 가서, 등불이 다시 켜지고 여자들이 수림 사이를 누비며 충피를 향해 행군하듯 다가왔다.
그런데 아뿔싸, 그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여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더욱이 생김새는 하나같이 괴상망측하여 꿈에 볼까 걱정되리만큼 꼴불견이 었다. 키들은 너나없이 짜리몽땅한데 그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비대해서 마치 커다란 항아리들이 한데 어울려 따닥따닥 붙어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가로 넓이가 세로 길이보다 한 자도 더 될 듯싶은 그녀들은 모두 배가 만삭치 여인들만큼 솟아나와 허리도 굽히지 못했고 배에
가려 발끝을 내려다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뚱뚱하다 뚱뚱하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뚱보들은 난생 처음이었다. 뚱뚱보여인들은 등불을 들고 충피의 침대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섰다.
그 한가운데로 장한 열둘이 큰 의자를 어깨에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의자 위에는 개중에서 제일 비대한 여인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 의자는 앉는 자리가 일반 태사의(太師椅) 서너 배만큼이나 넓었는데 여인은 그 안이 비좁은 듯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그 침대를 왜 빌리려 하는가 하면 이 의자가 너무 비좁아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편히 앉아 보자고 그러는 거야."
그 의자에 앉은 여인의 몸이 얼마나 육중한지 허우대가 멀쩡한 장한들인데도 모두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이 하인들이 너무 지쳐서 숨을 좀 돌리게 해야겠네, 이 사람들은 좋은 일꾼들일 뿐만 아니라 사내 구실도 제법 잘하지. 일 잘하는 일꾼은 얻기 쉽지만 사내 구실 제대로 하는 남자들은 얻기 어려운데, 내 이 하인들은 일도 잘하고 사내 구실도 잘하니 여간 귀엽지 않아."
여인은 충피를 보자마자 대뜸 반말투로 나가더니 하인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이제는 여기 내려놓아라."
하인들은 간신히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짓누르던 태산이라도 내려놓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확 펴더니 조심스레 한켠으로 비켜섰다.
"당신 침대에 올라가도 괜찮겠지?"
여인은 충피를 쏘아보며 거들먹거렸다.
충피는 이 육실하게 비대한 여인 체구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여인한테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멋쩍게 헤헤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교자꾼들에게 자못 거들먹거리며 외쳤다.
"얘들아, 어서 휘장을 거둬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자꾼들이 득달같이 달려가 휘장을 홱 걷어 올렸다.
그러자뚱뚱보 여인은 냉큼 뛰어 침대 위에 사뿐 올라앉았다. 몸은 엄청나게 비대하지만 동작은 어찌나 날렵하고 가벼운지 그 육중한 몸이 침대에 내려앉는데도 삐그덕 소리 한 번 없었다. 충피는 놀라 혀를 찼다.
여인은 자리를 잡자 똑바로 충피를 노려보았다. 여인 앞에 서자 충피는 그 여인에 비해 딱정벌레처럼 작아 보였다.
"난 몸이 너무 육중해 야단이다. 낭중(郎中, 의사)의 말은 내가 땀을 너무 많이 흘리면 죽는대. 그런데 난 사내들과 그 짓을 하면 땀이 비 오듯 하거든. 난 그게 겁이 나서 당신처럼 재미를 자주 못 봐."
"그럼 그 좋아한다는 건 대체 뭐요?"
충피의 말에 여인은 낄낄거렸다.
"사실 이 일도 그 짓 못지않게 아주 재미있지. 한번 해 보지 않겠나? 싫지 않다면 내 오늘 밤 당신과 어울려 신나게 즐겨 봄세. 어찌 보면 이 일은 살을 섞는 것보다 몇 갑절이나 재미 있다니까.
어때? 한번 해 볼 테야?"
태산처럼 비대한 여인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그녀의 입에선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해 보지요, 뭐. 그렇게 재미난다는데 못해 볼 게 뭐요?"
"그러면 어서 올라와야지, 이 침대 위로 어서 올라오라니까."
충피는 냉큼 침대로 뛰어올랐다. 충피도 재간을 보인답시고 가볍게 살짝 내려 앉았지만 그 육중한 여인의 날렵한 재간에 비하면 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 여인과 살을 섞는 것보다 더 재미난다는 일이 도대체 뭐요? 어디 한번 봅시다."
충피는 여인과 마주 앉으며 다그쳤다.
"중원 가장 큰 성인의 말씀도 못 들었나. 일생 너나 할것없이 매일 하는 일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계집 사내가 어우러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먹는 것이로다. 알아?"
뭐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있던 충피는 빈둔한 여인의 말에 시시하다는 듯 깔깔거렸다.
"난 또 뭐라구……. 먹는 거야 매일 하는 짓인데 그게 뭐 그리 재미나오? 하여튼 난 먹기도 잘하오. 식성 하난 끝내 주지."
그러자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싱거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먼저 나 먹는 걸 따라 한번 먹어 보고 그런 소리를 해. 얘들아, 어서 상을 차려라!"
여인의 대갈일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자를 메고 온 사내들은 땅에다 부뚜막을 열 몇 개나 만들어 놓더니 삽시간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가마에서는 벌써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엄청나게 큰 쟁반에 무엇인지 시꺼먼 것이 한 쟁반 그득 담겨 침대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이어 힘줄 같은 것이 큰 쟁반으로 한 쟁반 올라왔다. 충피는 뒤에 날라온 것은 동산(嶠山)에서
늘 즐겨 먹던 사슴 힘줄이 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만 앞서 들어온 것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음식들이 계속 날라져 왔다. 충피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수두룩했다. 어찌나 많이 올라왔는지 그 큰 침대가 넘쳐 날 지경이었다.
"자 그럼 먹자구."
비둔한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침대 주변에 앉아 있던 뚱뚱보 여인들이 일제히 손을 쭉 뻗쳐 닥치는 대로 한 주먹 쥐어다가 굶주린 승냥이마냥 아귀아귀 먹어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큰 침대에 그득했던 음식은 절반이나 없어져 버렸다.
왜소하기 그지없는 충피는 몇 입 못 먹어 벌써 배가 똥똥하게 튀어나와 더 먹으려야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놀란 눈길로 여인들이 게걸스레 먹어대는 것을 그저 구경하기만 할 뿐이었다. 먹을 것이 산더미 같았는데 눈 갈짝할 사이에 들개바람에 쉽쓸려 가듯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부지런한 남자 노복들이 또 설레발을 치며 한 상 챙겨 오고 여자들은 또 게걸스럽게 먹어 없앴다. 이렇게 서너 시간을 먹어대니 급기야 침대 위엔 국물과 뼈다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여인들은 배가 북상투같이 밀려나와 허리띠를 풀고 땅바닥에 나자빠져서는 손 하나 꿈쩍 못하고 살이 다 드러난 배를 미친 듯이 헐떡거렸다. 눈도 바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충피는 잘 먹었나?"
뚱뚱보 여인이 물었다.
"잘 먹었소만……."
충피는 여인들의 기세에 눌려 목소리가 다 기어들고 있었다.
"미식(美食)은 불여미기(不如美器)라는 말도 있거늘, 맛있는 음식도 멋있는 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나는 법! 다행히 자네가 이 큰 침상을 빌려 준 덕으로 우린 땅바닥에서 먹지 않고 편안히 맛
좋게 먹게 되었네. 고맙네. 그런데……."
충피는 여인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말꼬리를 길게 늘여 빼는 것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부지중 몸을 흠칠했다. 아니나다를까, 여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만하면 자낸 오늘 운수가 좋은 셈이네. 우리가 오늘 뜻대로 배불리 먹었으니 그렇지, 만의 하나 내 비위가 조금만 상했어도 자넨 이렇게 앉아 있질 못해. 당장 숨통이 끊어졌을 거요?"
"아니, 내가 죄 지은 일이 무엇이관대 숨통이 끊어진다는 거요?"
충피는 부아가 났다.
"이봐, 충피! 자낸 여자들을 부려먹는 재간이 있지만 내겐 사내들을 개처럼 부려먹는 재간이 있거든. 어디 한번 보겠나?"
육실하게 비둔한 여인은 난데없이 한 소리 내뱉더니 휘파람을 획 불었다. 그러자 나무 곁에서 이쪽 눈치만 살피고 있던 사내들이 우르르 침대 앞으로 몰려왔다.
충피는 그 남정네들을 보고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좀전까지만 해도 멀정하던 이 사내들이 언제 그랬는지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지분들을 발라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몰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충피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사내들은 귀찮다는 듯 충피의 어깨를 툭툭 쳐서 한켠으로 밀쳐 내고 모두 제 주인 섬기는 강아지마냥 여인 발부리로가 번듯이 드러누웠다. 그 지독하게 몸이 우람한 여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한 놈 한 놈 머리를 쓸어 주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왜 이렇게 여위었냐고 한숨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는 먹다 남은 뼈다귀를 던져 주는데 사내들은 정말 개같이 그것을 받아 입에 물고 뿌드득뿌드득 깨무는 것이었다.
"자넨 여자들을 잡아다가 시첩을 삼아 몇 번 해 보곤 내버리지만 나는 이 남자들을 노복으로 만들어 개같이 부리고 있지. 부리고 싶으면 부려먹고 부리기 싫으면 이렇게 한 발로 차 내버리면 그만인게야."
그러더니 그녀는 바로 자기 발부리 앞에서 열심히 고기 뼈다귀를 핥고 있는 사내 하나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찢어지듯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더니 삽시에 사지가 뻣뻣해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나머지 사내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땅에 엎어져 벌벌 떨었다. 여인은 그 퉁퉁한 손바닥을 툭 마주치며 흐들거렸다.
"이봐, 그래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위풍이 센 것 같은가?"
충피는 입술만 달싹일 뿐 대답을 못했다. 계집들을 학대할 때는 못 느꼈으나 뚱보 여인이 사내들을 개처럼 학대하는 걸 보니 사뭇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똑바로 충피를 쏘아보았다.
"충피, 한데 우리 사람은 왜 잡아 왔나?"
여인의 목소린 매섭기 그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누굴 잡아 오다니…… 내가 감히 어찌 그런 일을 하겠소?"
충피는 깜짝 놀라는 척했다. 비둔한 여인은 곁에 있는 다른 한뚱보 여인에게 소리쳤다.
"그럼 네가 거짓말을 했더냐, 충피가 우리 사람을 잡아왔다고?"
그 여인도 비대하기는 매일반이었으나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에 비하면 곰 앞에 다람쥐 격으로 보잘것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보살님, 저기 저쪽에 묶여 있는 아이가 바로 우리 애입니다."
침대 위에 앉은 여인은 뚱보 여인이 가리키는 대로 저쪽을 건너다 보고는 다시 충피를 돌아보았다.
"내가 자네의 이 큰 침대를 빌려 앉아 있는 것에 대한 답례로 혼내지는 않겠지만 어서 내 계집애를 놓아주게."
여인은 적이 부드럽게 말했다.
충피는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자기 쪽 사람들 힘만으로는 이 뚱뚱보 여인, 대환희 보살 측 사람들에겐 실로 중과부적이었다.
"헤헤헤, 보살핌네 사람인 줄 몰라서 그랬지, 알고서야 어찌 잡아 왔겠어요. 난 저 계집애가 하도 예쁘게 생겼기에 재미나 좀 보자고…… 진심이오, 다른 뜻은 없었소."
"그렇다고 해 두지. 자, 가서 그 애를 풀어 주거라."
뚱뚱보 여인은 빙긋빙긋 웃음을 흘리며 제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뚱뚱한 여인 하나가 오라를 풀어 주자 치주는 대환희 보살한테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두사배를 했다.
"됐다, 이젠 그만 하거라. 그런데 황제가 널 좋아하긴 좋아하더냐?"
치주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들릴락말락 낮은 소리로 말했다.
"황제께서…… 좋아하긴 좋아합니다만……."
"그럼 됐다. 황제가 널 좋아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손쓸회가 있다."
대환희 보살은 연신 흐흐흐 웃어댔다. 웃을 때마다 축 늘어진 군살이 욱실거렸다. 그러더니 일순, 보살은 갑자기 몸을 솟구쳐 허공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러자 목을 쑤욱 늘여 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충피네 사내들 머리 몇 개가 후두두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아니, 왜 갑자기 사람은 죽여?"
충피는 노기가 솟구쳐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대번에 날아올라 대환희 보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 번을 겨루어도 대환희 보살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를 다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게 무슨 짓이오? 왜우리 사람들을 죽이는 거요?"
충피는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수림이 떠나갈듯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이와, 충피. 내가 그만 깜빡 생각을 못했더랬지. 그래, 내 비밀을 아는 녀석들을 가만 놔둘 수 있겠나? 너도 내 비밀을 알았으니 죽어야 해!"
대환희 보살은 또 훌훌 날아다니며 다시금 몇 사람을 죽였다. 대환희 보살네 패거리들은 하나같이 몸을 흔들어 가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당장 손을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내 더는 가만있지 않으리라!"
충피는 분기탱천하여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내쏘았다.
대환희 보살은 정하니 충피 앞으로 날아와 뚝 떨어져 내리더니 눈을 부라렸다.
"내가 너희 모두를 몰살시킨다 한들 네 놈이 감히 어쩌겠느냐?"
그러자 충피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 히쭉 웃었다.
"어쩌긴 어째, 내가 이다음에 화산에를 안 가면 되지. 그럼 거기한테도 불리할걸?"
그 말에 대환희 보살은 같잖다는 듯 빈정거렸다.
"천하 이름 높은 고수들만 모인다는 화산에 너 같은 건 가서 뭘하려구?"
"쳇, 그 고순가 뭔가에 대리 황제 단지흥도 들어 있겠지요?"
"그야 물론이지. 충피 네 놈은 그것도 모르냐? 화산에 모일 고수 중에 단지흥도 있으니 내가 네 놈들을 죽여 버리는 거 아니냐.
내가 민인계로 단지흥을 홀려 일양지공을 알아내려 했다는 비밀이 누설되면 내 꼴이 말이 아니거든. 듣자니 일양지공을 장악하면 산사람은 죽지 않고 죽은 사람은 살리기도 한다는데 이 얼마나 귀신 같이 신비로운 무공이냐? 그런데 미인계를 써도 아직 못 알아냈을 뿐더러 네 놈이 중간에 끼여들어 훼방을 놓지 않았느냐!"
충피는 깔깔 웃어댔다.
"아니, 웃기는 왜 웃는 게야?"
대환희 보살은 벌컥 화를 냈다.
"뭘 그렇게 일양지공을 무서워하오? 난 대리에서 천룡사 중들과는 물론 단지흥과도 한 번 겨뤄 봤는데 그 일 양지공이 아무리 어쩌니어쩌니 해도 내 좀 독한테는 별수없더라고. 천룽사 중들이 다 중독되자 그 황제란 작자, 살려 달라고 구구십팔동까지 날 찾아왔습디다. 뒤에 해독은 됐지만 그것도 남이 해 준 거지 일양지공으로 한건 아니 란 말이오."
충피는 제법 우쭐해서 콧대를 잔뜩 치켜 세웠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갑자기 흐흐흐 웃어댔다.
"그래, 그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넌 가서 단지흥을 이기고 난 가서 왕중양을 이기고……. 그래 그때가 되면 나하고 같이 화산엘 가겠느냐?"
"우리 사람을 더 죽이지 않겠다고 해야 같이 가겠소. 그렇지 않으면 난 못 가."
"좋다, 안 죽이지. 하긴 나도 너무 포식을 해서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야. 아이고, 숨차라."
그녀는 묘령의 처녀처럼 까르르 웃어댔다.
그 소리에 뒤미처 돌연 수림 쪽에서 독경 소리가 울려 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금강경을 외우는 소리였다.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독경 소리만 갈수록 낭랑해졌다.
"누구ㄴ? 어서 못 나왓?"
충피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림 속에서 언뜻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중 하나가 쓱 나타났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염불을 외우면서 똑바로 걸어왔다. 오로지 불도를 깨달아 정과(正果)를 이룩하는 데만 전념하는 듯 단아한 자태였다. 그는 옆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침대 쪽으로 곧장 다가가 다소곳이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은 일속이오."
대환희 보살은 이 중년의 중을 보자 대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내 수하 사내들도 뭐 빠지지야 않지만 이 화상은 정말 미끈하군. 단단하고. 이런 사내야말로 진짜 사내지. 아무래도 내 손아귀에 넣고 써 먹어야겠다.'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적이 간사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겐가?"
"일속일념(一俗一念), 일속일지(一俗一地)일 뿐입니다."
일속은 정중히 대답하며 다시 합장을 했다. 대환희 보살은 깔깔거리며 고개를 건들거렸다.
"아이고, 나한테 그런 도깨비 같은 소린 집어치워. 아무리 말해봤자 난 도통 못 알아들으니. 네 속념이 뭔지 맞혀 보라면 또 모를까……."
"나무아미타불, 보살님께서 저를 깨우쳐 그 속념을 점화(點化)해 주십시오!"
일속은 다시 합장을 했다. 대환희 보살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유심히 중을 훑어보았다. 하얀 살갗에 눈이 크고 선해 보이는 얼굴, 후리후리한 키…… 말 그대로 옥골선풍의 미남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내 가르쳐 주지. 그야 어려울 게 있나."
대환희 보살은 형편없이 큰 엉덩이를 내두르며 일속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실 부처님이 남녀간의 그 일을 가르쳐 줬단 말야. 그렇지 않고야 이 세상 남자 여자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나. 진작에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부처님이 계시기에 남자는 그걸로 여자를 진저리나게 하는 것이고 여자는 일심으로 남자를 기다리게 된 거라구. 일속은 한 가지 속념을 이름인데, 너의 속념은 바로 그것이로다."
그러자 일속은 질겁을 하며 고개를 반짝 쳐들고 대환희 보살을 바라보았다.
"나무아미타불. 보살님은 어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소승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 그건 아닙니다."
대환희 보살은 일속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단향목 같은 내음이 콧구멍으로 흘러 들자 대환희 보살은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설렌다.
"좋아, 좋아. 내가 틀렸다고 하지. 그러면 일속 화상의 그 일속은 대체 무엇인고?"
일속은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러는 양을 지켜 보면서 충피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일속이 매우 덕망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속이 아무려면 코끼리 같은 대환희 보살에게 홀리겠는가? 대환희 보살이 어떻게 나올지 자못 흥미진진했다. 그는 일속을 알아봤을 때부터 벌써 침대 뒤에 몸을 숨기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한껏 음심이 동해 요염하게 눈을 빛내며 일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속의 의젓한 의표와 준수한 용모에 홀딱 반해 한시 바삐 이 화상을 품에 끌어안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녀는 그때껏 일속이 천룡사 주지이며 그 무공과 수련이 어느 정도인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자낸 여기 왜 왔나? 숨어서 우리 하는 짓을 봤으니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그래 자낸 뭐가 제일 재미있지?"
일속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대환희 보살은 짓궂게 물었다.
"그럼 왜 여기 왔지? 저 애들 좀 봐라. 저 애들 중에 탐나는 애가 있으면 서슴없이 말하라고. 내 모든 일이 뜻대로 되게 해 줄 테니. 저 애들은 모두 내 제자들인데……."
그러자 천만 뜻밖으로 일속은 문득 머리를 들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보살님께서 이렇듯 누누이 점화하시는데야 보살님 말씀을 들어야지요. 저도 한번 인간 속세의 욕해(欲海)를 건너 볼까요?"
그리고는 그는 대뜸 뚱뚱보 여인들 앞으로 걸어갔다. 뚱뚱보 여인들은 이미 보살이 이 미남 화상에게 반해 그를 붙잡아 두려고 저러는 것임을 눈치채고는 저마다 좋아서 입들이 헤벌어졌다. 그녀들은 앞을 다투어 일속 화상에게 잘 보이려고 항아리 같은 허리를 비비꼬면서 교태를 부렸다. 그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일속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들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가 마침내 치주를 발견했다.
'아, 가히 절색이다!'
일속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웬일인지 그 여인, 백면라살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속으로 도리질을 치며 이를 사리물었 다.
치주는 심히 불안한 심정으로 일속을 퍼뜩 쳐다보았다.
'큰일났다! 내가 싫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대환희 보살한테 죽음을 당할 것이요, 가만있으면 이 중한테 당하고 말 것인즉, 그러면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고 황제를 만나겠는가?'
치주는 너무나 난감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안고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럼 좋다. 그 애를 내주지. 하나 그 애를 가진 다음에는 내 욕망도 채워 줘야 하네, 알겠지?"
대환희 보살이 소리쳤다. 일속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10장 색계를 파한 일속 대사
"소승은 그저 시주님과 고해일도(苦海一渡)를 한번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일속은 잔뜩 겁에 질린 치주의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치주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말이 없었다. 세상 천지에 이처럼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자가 또 있을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단지흥을 유혹하긴 했지만 그후로는 그저 황제의 총애나 받으며 즐겁게 살게 되기를 그녀는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데없이 충피가 나타나 일이 모두 꼬여 버렸다. 충피에게 납치당해 예까지 끌려 와 앞날을 예측할 길 없는 가운데 그저 운명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형편인데 불행 중 다행으로 대환희 보살 손에 구원을 받아 무사히 대리
로 가는가 했더니 이번엔 어디서 이름자도 모르는 중과 몸을 섞어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그녀는 자기의 신세가 한탄스럽기만 했다.
"시주님, 소승이 혹 색계(色戒)를 파할까 봐 그러십니까?"
일속의 목소리는 온화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치주는 그가 원망스러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한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님은 일가(一家)를 이를 수 없는 출가인(出家人)이옵니다. 저는 가정을 꾸려 오순도순 살고 싶은 속인에 불과하구요.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천벌을 받을 거예요."
일속은 그녀의 말재간이 썩 야무지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그녀를 다시 보면서도 적이 야멸차게 말을 받았다.
"시주님은 미모가 빼어나니 보살님 명이라면 소승 아니라도 누구에게든 몸을 바쳐야 할 형편이 아닙니까?"
치주는 선뜻 대답을 않고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하긴 그래. 보살이 개하고라도 살라면 사는 수밖에. 타고난 팔잔데 누구를 탓하겠어. 하지만 황제께선 내 이 답답한 마음을 알아 주실지……. 난 오직 그것만이……. 아니야, 이젠 잊어버리자. 황제께서도 나 같은 건 싹 잊어 주시기를…….'
치주는 자포자기하여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일속에 게로 다가섰다. 일속은 낚아채듯 그녀의 손을 잡고 얼른 수림 저쪽을 살폈다. 적당한 퇴로를 미리 보아 두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등짝을 때렸다.
"일속, 천하를 다 속여도 이 충피는 못 속인다! 네가 대리 천룡사 주지라는 걸 내 익히 알고 있거늘, 그래 천룡사 주지가 계집을 탐해? 너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 단지흥에게 도로 가져다 바치려
고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게지?"
일속은 날카롭게 눈빛을 번득이며 소리난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과연 충피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서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여유작작하니 돼가는 형세를 지켜 보고 있다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대뜸 소리쳤다.
"뭐? 단지흥에게 갖다 바쳐? 그따위 얕은 꾀로 날 속이려 들다니, 어디 어떻게 갖다 바치는지 내 한번 보리라."
그러더니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솟구쳐 허공으로 날아올라 똑바로 일속을 덮쳐 왔다. 일속은 급히 몸을 피하며 일지소총검법(-指少沖劍法)을 써서 번개같이 손가락을 뻗었다. 세찬 강풍이 마치 채찍질하듯 보살의 따귀를 때렸다. 보살은 숨이 턱턱 막혔다. 결코 가벼이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속이 무예가 이렇듯 고강하니 대환희 보살은 오히려 마음이 흡족했다.
"요 기특한 것,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그 나이에 그만하면 됐으니 이젠 손을 거두고 나하고 아기자기하게 재미나 보자."
보살은 한마디 외치고는 몸을 훌쩍 솟구쳐 일속 앞에 떨어져 내렸다.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다른 여인들도 일제히 몰려들어 길을 막았다.
그러나 일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주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여인들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살찐 사람일수록 무공은 신통찮은 법이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여인들을 밀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실 이 여인들은 무공도 뒤지지 않을 뿐더러 산자락같이 비대해서 제아무리 일속이라도 도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순 일속의 얼굴엔 당황스런 기색이 어른거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군살을 요란스레 흔들어대며 미친 듯이 웃어제쳤다.
"요 귀염둥이 화상아, 나 대환희 보살만 따르면 무엇을 하든 매일매일 즐겁게 살 수 있다는데 왜 그리도 용을 쓰는 게냐! 쓸쓸한 절간에서 청등고불(淸燈古拂)을 지키느라 고생할 필요가 무에야?
야심한 삼경이면 속은 타지, 일어나 봤자 맨 남정네들뿐이지…….
그러니 더 처량할밖에. 겨울엔 추워 걱정, 여름엔 더워 걱정, 안 그러냐? 그러나 내 곁에만 있어 봐라! 추우면 내 따뜻하게 덮어 주고 더우면 미녀들을 시켜 부채질을 해 줄 테니 이것이 무룽도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일속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 저었다.
"요 귀염둥이, 이래봬도 난 웬만한 사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하나 그렇게 준수하니 내 꼭 너를 붙들어 둬야겠다. 저 놈들을 좀 봐라. 그래도 고른다고 고른 것들인데 하나도 쓸 만한 게 없으
니. 자 보라구……."
그녀는 일속에게 눈을 찔끔 감아 보이고는 획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지금껏 개처럼 엎드려 있던 사내들이 느직느직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일속이 보니 분 바르고 연지 찍은 꼴이 남자도 아니고 계집도 아니었다. 대환희 보살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 낚아채듯 그 중 한 사내의 뒷덜미를 낚아채 자기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사내의 어깨를 꾹꾹 눌러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꼴 좀 봐, 이 꼴…… 요렇게 뼈만 남아서야."
그러더니 불현듯 사내를 허공에다 획 집어 던졌다. 사내는 다 썩어빠진 장작개비같이 가벼이 서너 장이나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서너 번이나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뿐 땅에 내려섰다. 보통 재간이 아니었다. 일속은 사내가 영락없이 죽겠거니 했는데 저렇듯 멀정하자 속으로 혀를 내 둘렀다.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냥 일속만을 바라보며 깔깔거렸다.
"저 놈은 꼭 잔나비 같지? 안 그래?"
그러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모름지기 사내란 말이야, 계집이 좋아할 때는 성난 맹수같이 달려들고 싫어할 때는 고양이같이 얌전하게 굴어야 하는 게야, 알겠어? 한데 어떤 걸 보고 고양이 같다고 하는지 아느냐?"
물론 일속은 몰랐지만 알아도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치주의 손을 꼭 잡은 채 일심으로 빠져 나갈 기회만 살폈다.
대환희 보살은 일속을 힐끔거리며 또 한 사내를 움켜쥐었다.
덩치가 꽤 큰 사내였다. 그러나 줄곧 여인의 손에서 놀아난 때문인지 기백은 없어 보였다. 대환희 보살은 사내를 우악스레 끌어안고 온몸을 마구 주물러댔다. 그러자 사내는 비위를 맞추느라고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마지못해 몸을 비비꼬며 헤헤거렸다.
"응, 괜찮아. 여기도 쓸 만하구, 여기도 제법 단단해. 사내는 그래도 살이 적은 축이 좋지, 너무 찌면 둔해 못써. 하지만 가슴팍은 좀 달라. 가슴팍은 좀 불룩해야 끌어 안아도 맛이 나거든. 안 그러냐?"
비계 덩어리를 뭉쳐 놓은 것 같은데도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놀림이 빨라서 떡 주무르듯 사내를 주무르며 연신 중얼거렸다. 사내는 보살의 손을 피하느라 몸을 옹송그리면서도 억지웃음 을 띄웠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일속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똑바로 일속을 건너다보다가 한 순간 두 팔에 힘을 주며 사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자 사내는 숨이 턱 막히며 낯빛이 새까매지더니 그러고도 한참 만에야 간신히 신음을 토해내
는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앙천대소를 했다. 그리고는 이번엔 사내의 아랫배 살을 한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견딜 수 없이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이마에 식은땀 이 송송 맺혀서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애걸했다.
"보살님, 자…… 자비를 베푸소서. 보살님, 자비를……."
"뭐? 자비를 베풀라고? 넌 왜 나한테 자비를 안 베푸니? 왜 열심으로 무예를 연마하지 않느냔 말이야. 넌 공동파(皓嵋派) 칠성자(七星子), 이전엔 무공깨나 날렸는데 어찌하다가 이렇게 배에 군살만 잔뜩 붙어서 굼벵이 같냔 말이다! 배가 이렇게 나와서야 칠성나열(七星羅列) 초수를 어떻게 쓰려고?"
대환희 보살은 사내의 아랫배 살을 연신 잡아뜯으며 비아냥거렸다. 마침내 사내의 뱃가죽에선 군데군데 벌경게 피가 낭자하고 아예 살집이 뜯겨 나가기도 했다. 저대로 조금만 지나면 죽고 말 터였다.
일순 사내는 에잇 소리를 지르며 대환희 보살을 확 밀치고 그녀의 품에서 퉁겨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허, 이 놈 봐라! 그 주제에 재간을 부려?"
대환희 보살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껄껄 웃음을 흘리며 양팔을 짝 벌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저 만치까지 달려갔던 사내는 큰 나무에 퍽 하고 이마를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퉁겨지며 다시 보살 앞으로 날아와 납작 엎어지고 말았다.
"이 놈, 칠성자야! 나를 버리고는 어디도 갈 수 없다고 내가 일렀을 텐데?"
대환희 보살은 이빨을 바드득 갈더니 칠성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코앞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칠성자는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도 노기가 치받쳐 벌겋게 눈을 까뒤집고 악다구니를 썼다.
"암돼지 같은 년! 이 년아,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리도 날 못살게 구는 게냐?"
그리고는 칠성자는 온몸의 힘을 두 손에 모아 보살의 배를 힘껏 내지르고 이어 혼신을 다해 장풍을 내쳤다. 그러나 뱃가죽이 얼마나 두꺼운지 보살은 꿈쩍도 안 했다.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마냥
둥둥둥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얘 칠성자야, 네가 평소에 이렇게 어리광을 부렸으면 내가 얼마나 너를 귀여워했겠니. 하지만 이젠 늦었다."
그녀는 칠성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싱긋 웃었다. 하나 얼핏 보기엔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녀는 슬그머니 내력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칠성자는 이제 입도 벙긋 못하고 내력을 막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칠성자의 눈에선 검은 피가 배어 나오고, 배는 점점 더 부풀어올랐다. 그는 보살의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헛손질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태산처럼 부풀어오르더니 한 순간 수림을 뒤흔들 듯 뺑소리가 나며 눈 깜짝할 새에 칠성자의 배는 툭 터져 버렸다. 사내는 창자며 내장이며 다 비어져 나와 비참한 몰골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침을 퉤 뱉으며 사내를 한옆으로 홱 걷어찼다.
"저런 것도 다 남자라구……."
일속의 일양지 위력을 익히 아는지라 침대 쪽에서 성큼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던 충피는 그 광경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보살은 입을 한 번 씰룩거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 일속을 향해 말을 던졌다.
"내가 사내를 밝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 사내나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칠성자 같은 녀석은 재미없어!"
칠성자가 이토록 참혹하게 죽는 걸 보고서도 보살네 수하들은 누구 하나 동요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보아하니, 한다 하는 강호 무객들을 잡아다 신물이 나도록 갖고 놀고는 진물이 다 빠지면 죽여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모양이었다. 일속은 치를 떨며 경멸 어린 눈길로 보살을 쏘아보았다. 여간만 지독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하, 내 솜씨가 어떤가? 일속 화상, 당신이 날 따르겠다면 내 그 계집을 자네한테 주겠네. 어떤가?"
일속은 노기가 치받쳐 부르르 몸을 떨 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불문에 몸담은 사람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불현듯 획 몸을 솟구쳐 일속에게 덮쳐 들었다. 일속은 급급히 몸을 날려 살짝 옆으로 피했다.
"괜찮은 솜씨군. 제법 괜찮아."
대환희 보살은 흐들거리며 웃더니 잽싸게 팍팍 장풍을 내치며 일속의 언저리를 획 돌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산더미가 일속을 휩싸고 도는 듯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발을 구르면서 환호성을 올렸다.
일속도 화급히 공격을 들이댔다. 두 사람은 번개같이 잽싸게 돌아치면서 정신없이 초식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십여 합을 싸우니 일속은 기력이 점점 못해짐을 느꼈다.
"보살님! 계속 이렇게 덤비면 소승도 더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오."
"그 말마따나 내가 보살님인데, 보살님에게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법이 어디 있나? 보살은 자네를 고행에서 구원하고 자네의 육체를 입성(入聖)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모른다면 나하고 하 룻밤만 지내 봐! 그러면 다 알게 될 테니!"
그러자 둘러선 여인들이 손뼉을 쳐대며 환성을 내질렀다.
"우리 보살님의 점화를 얻으면 꼭 정과를 이루지!"
"일속 화상, 우리 이 애와 재미를 보겠다고? 그게 진심이렷다! 그야 내가 얼마든지 시켜 줄 수 있지. 단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한다. 어때?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 이 애를 두말 않고 내주지."
대환희 보살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단 일속의 색계를 파해 버릴 작정이었다. 일단 일속이 파계하게 되면 보살은 더는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일속을 끌어안고 원앙침에 뒹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생각만 해로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일속은 이, 삼십 합을 싸우고도 승부를 못 가르자 더 이상 보살을 만만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초수로는 이 대환희 보살을 거꾸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되자 하는 수 없이 한 손가락을 곧게
뻗어 일양지공을 내쳤다. 그러나 보살은 이번에도 재빨리 피했다.
일속은 내심 흠칫 놀랐다.
보살은 비웃음을 흘리며 음충스럽게 내쏘았다.
"보아하니 이 앤 싫다, 그거로군? 그럼 나하고 사는 건 어때? 노복이 아니라 내 서방으로! 어때, 그건 싫지 않겠지?"
일속은 간신히 구역질을 참으며 더욱 힘껏 일양지를 내쳤다. 보살도 내심 일양지공의 위력에 혀를 내두르며 급급히 막아낼 따름이었다. 그러느라 그녀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이 화상은 이제껏 갖고 놀던 놈들에 비하면 인물도 뛰어나고 무예도 굉장하다. 이런 놈을 놓쳤다간 일평생 한이 되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놈을 우선 잡아 둬야겠다. 일단 붙잡아 놓기만 하
면 고분고분 길들이는 거야 어차피 시간문제지.'
대환희 보살은 마음속으로 단단히 벼르며 방어에서 공격으로 옮겨 한 수 한 수 새로운 초수를 펼쳐 내면서 일속의 전신에 맹공격을 가했다.
일속은 이 보살을 제압해야 달아나도 달아날 수 있겠는데 뜻대로 안 되니 걷잡을 수 없이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한번 마음이 흐트러지자 자연 내력도 흩어져서 제대로 일양지를 내칠 수 없었다. 그는 연신 헛손질만 해댔다. 일속이 당황해 하는 꼴을 보자 대환희 보살은 입심 좋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글쎄, 그렇게 안간힘 쓸 필요 없이 내 말을 들으라니까! 사내는 여윈 축이 좋고 계집은 실한 편이 나아. 남녀간에 일을 치르는데는 그게 딱 제격이라구. 계집은 퉁퉁해야 색이 강하고 힘도 좋거
든. 젖가슴이 몽실몽실하고 살도 부들부들해야 사내하고 쩍 붙으면 그 기묘함이 무궁하여 필설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게 되는 법이라구. 흐흐흐…… 사내는 또 반대로 여윈 치들이 그런 일엔 기운을 쓴다 이거야. 여윌수록 그런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내가 왜 칠성자를 죽였는지 아는가? 나를 배반하기도 했지만 그 녀석은 살이 너무 쪘단 말이야. 살찐 놈들은 먹기만 하고 제구실을 못해서 쓸모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알맞게 여위었거든. 서방으로 삼기엔 금
상첨화지. 내 당신을 누구보다도 제일 위해 주지. 그리고 당신이 날 위해 주기만 하면 난 우리 저 예쁜 것들을 내주어서 맘껏 데리고 놀게 해 주겠어."
보살이 음탕하게 사설을 늘어놓자 뚱뚱보 여인들은 음탕한 웃음을 질질 흘리며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일속을 쳐다보았다.
'불경에서 말하는 지옥에 가도 이런 천한 계집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속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일양지를 내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환희 보살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어찌나 번개같이 빠른지 보살은 금세 피하는 듯싶더니 어느새 한 손을 번쩍 치켜 들어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러자 쌩 바람소리가 일며 일속을 향해 칼 세 자루가 날아갔다. 일속은 얼떨결에 한 손에 하나씩 두 개를 맞받아 쥐었다. 그러나 이마를 겨냥해 날아오는 하나는 도저히 어찌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몸을 약간 솟구치며 입으로 칼을 받아 물
었다.
대환희 보살은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실로 뛰어난 재간이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당신과 늘 이 장난만 쳐도 심심치 않겠어."
그러자 일속은 칼을 퉤 뱉어 손에 받고는 악이 나서 소리쳤다.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고 던질 테면 던져 봐라!"
"아니, 또 싸워 보자구? 당신은 이미 졌어! 졌으면 항복을 해야지 또 싸우자구?"
"내가 지다니? 내가 뭘 어떻게 졌단 말이오?"
"이거야 정말 밤새 곡을 하고서도 누구 초상을 치렀는지 모른다더니, 꼭 그 짝이로구먼, 금세 내 칼을 그 입으로 물지 않았나? 그 칼엔 독이 묻어 있다, 독! 이제 조금만 있므면 독이 온몸에 퍼 질 건데도 항복을 안 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속은 온몸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충피도 성큼 내달아 앞으로 뛰어나와 손뼉을 치며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일속이 독에 중독되었다니, 그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슴푸레하더니 날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다. 나무며 풀, 수림의 자태가 똑똑히 눈에 잡혔다. 뚱뚱보 여인들과 사내들은 이제 얼마간 지쳐서 눈을 멀거니 뜨고 대환희 보살 이 이제 또 무슨 재미나는 일을 시작하려고 저러나 가슴을 졸였다.
"얘, 치주야, 이리 좀 오너라. 이리 와서 이 화상과 그것 좀 멋들어지게 한번 해 봐. 피곤한 차에 우리도 눈요기나 좀 실컷 하게."
대환희 보살은 사뭇 요염을 떨며 치주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러웠다.
치주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마지못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어 나와 보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애원의 눈길로 보살을 바라보았다.
"보살님, 저는 황궁에 들어가서 이제야 겨우 황제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일양지공의 비결도 탐지해 낼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오늘…… 오늘 이런 일을 하면 장차 보살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 년 사설도 많다! 누가 네게 그런 것까지 따져 보라더냐. 어서 내 말대로 냉큼 시행하지 못할까!"
치주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일어나 한 발 한 발 일속에 게로 다가갔다. 일속은 중독이 되어 못박힌 듯 꼼짝못하고 서 있었다. 치주는 처연히 일속을 바라보았다. 정녕 그를 파계시키기는 싫었으나 보살의 명을 거역한다면 자기나 이 일속은 목숨을 건질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다.
"보살은 소식(素食)을 하고 중은 육식을 하니 인간의 일이란 알 수가 없네."
대환희 보살은 시라도 읖조리듯 한껏 멋을 부려 얄궂은 소리를 토해 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화상! 속세의 재미를 한번 맛보는 것도 가히 나쁘진 않을 것인즉, 부처님도 날고기의 비린 맛을 맛봤다지 않은가?"
치주는 원망 어린 눈길로 흘낏 대환희 보살을 쳐다보았다. 그 말은 기실 어서 일속 화상을 홀리라는 분부와 다름없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군 채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는 이윽고 일속에게 바투 다가서서 허리를 비비꼬며 일속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모두 겉으로는 태연해도 내심 이런 정사가 어른거려 속을 않는다면서요? 스님도 한창 나이인데 왜 여자들이 싫겠어요? 안 그래요?"
치주는 일단 마음을 먹자 오로지 이 일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사뭇 나긋나긋 말하며 일속의 옷을 다 벗겨 냈다.
그리고는 사락사락 자기 옷도 벗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스르르 흘러내리고 나자 백설같이 하얗고 매끈한 나체가 매혹적으로 드러났다.
"화상도 일생에 몇 번은 여자 맛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색(色)은 공(空)이고 공도 색이라는데 색을 두려워할 게 뭐예요?"
일속은 백옥 같은 치주의 살결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종래로 색은 공이거늘, 그따위로 말을 돌리면서까지 날 유혹해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더군다나 그대는 일국의 황제의 황비로서 어찌 하여……."
일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살이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뭐, 색은 공이라고? 허튼소리 집어치워라! 계집 사내가 다 벗고 아랫도리를 맞추는데 색이 없겠느냐, 소리가 없겠느냐? 난 너희들에게서 그런 살방아 찧는 몸짓, 그런 숨넘어가는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흐흐흐……."
그리고는 보살은 징그럽게 웃어젖혔다. 하지만 치주는 일속이 황제를 입에 올리자 참괴감이 솟구쳐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일속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불문에 몸담은 사람으로 이렇듯 중독이 되어 꼼짝도 못하고 부처님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제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닐 터였다. 그는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조차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자포자기한 채로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 순간, 다시금 난데없이 백면라살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치주는 잠시 멈칫하다가 모든 것이 자기의 기구한 팔자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될 대로 되라는 심경으로 일속에 게로 더욱 바싹 다가가 몸을 찰싹 갖다 붙였다.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속은 치주의 매끌매끌한 몸이 살에 닿자 흠칫 놀라며 소리 높여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잘한다, 우리 치주 잘한다. 더 바싹 붙어라, 더 바싹 붙어야지."
보살은 곰 발바닥 같은 손바닥을 탁탁 마주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대는 지아비가 있는 몸으로 어찌 이리 방종하게 구오?"
일속은 엄하게 치주를 꾸짖었다. 그러나 치주는 애써 그 말을 귓전으로 흘려 버렸다. 그녀 역시 이미 단지흥에게 돌아가기는 틀린 몸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런 말은 마세요. 이제 와서 남들 모두 즐겨 하는 일을 스님이라고 마다할 게 뭐예요? 그걸 참느라 이렇게 스스로 고생하실게 무엇이냔 말예요. 다른 생각은 마시고, 자, 어서요! 모든 게 다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인생은 한갓 일장춘몽일라구요, 일장춘몽……."
치주는 속삭이며 자꾸만 몸을 비벼 왔다.
일속은 정말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아니 정말 꿈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한 순간 귓전에 어렴풋이 부처님 말씀이 울려 왔다.
'일속아, 지금껏 네가 털어 버리지 못하는 그 일속은 세속의 상쟁이나 시비에 대한 속념이 아니라, 바로 색에 대한 미련이니라. 그래서 오늘 이런 일을 당하는 게다.'
일속은 번쩍 눈을 떴다. 자신을 바싹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치주는 마치 꿈속의 요녀처럼 느껴졌다. 옥같이 하얀 그녀의 살결도 오히려 무섭도록 창백하게 보였고, 그 몸에 끌려 자기는 지금 헤어 나올 수 없는 피 못을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여인…… 이 여인은 바로 백면라살…….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언제 여기에 온 것일까.
"아아, 그대는 백면라살……. 아아, 백면라살……."
일속은 정신없이 헛소리를 해대며 와락 백면라살을, 아니 치주를 끌어안았다. 한 순간 그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마침내 그는 치주와 한 몸이 된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며 눈빛을 반짝이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급기야 일속은 파계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마다할 핑계가 없어진 것이다. 설사 마다한다 해도 염려 없다. 말을 듣게 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윽고 치주의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를 홀리는 소리였다. 뚱뚱보 여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헤벌린 채 거칠게 숨결을 토해냈다.
"잘한다, 치주! 좋다, 멋들어 진다! 화상, 기운이 대단한데! 역시 방사 한 번 못해 본 숫총각이야, 숫총각!"
대환희 보살은 탄성을 높이 올렸다. 너무나 격동된 탓인지 그 목소리는 차라리 황소의 영각 소리를 방불케 했다.
치주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예기치 못했었다. 바로 그 순간 단지흥의 얼굴이 떠오를 줄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폐하, 폐하 저를…… 저를 잊지 마세요. 저를…….'
대환희 보살은 자신도 늘 음사를 즐겼을 뿐 아니라, 수하의 여인들과 벽남 사내들을 맞붙여 놓고 구경하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오늘 일속과 치주를 억지로 붙여 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보살은 음심이 부쩍 동해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 일속, 이제 그만하면 나하고도 한번 재미를 봐야지."
일속은 일순 멍하니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시 알 길이 없었다. 좀전의 그 여인, 백면라살은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는 정신없이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아무데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일속 화상,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대환희 보살은 손까지 내저으며 성화를 부렸다
일속은 가까스로 눈꺼풀을 치켜 올리며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웬 뚱뚱보 여인이 가물가물 멀리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 백면라살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계
속 이렇듯 혼미해 있다가는 일생의 수행(修行)이 수포로 돌아가고 몸과 마음이 다 타락하여 부처님에 대한 정성마저 없어지고 말 것 인즉,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겨우겨우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억누르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녕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거대한 힘이 끌어당기는 듯 그는 자기도 모르게 대환희 보살 쪽으로 차츰차츰 발길이 끌려가는 것이었다.
보살은 일속이 아직 서너 발짝 떨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쭉 내뻗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일속은 솜덩이 같은 그녀의 살무더기 안에 콱 파묻혀 버렸다.
"요 귀염둥이 화상아, 이제부터 넌 내 것이다. 하자면 하고 놀자면 놀고 웃으라면 웃고……. 흐흐흐…… 내 말만 들으면 복이 터져요, 복이."
그러더니 뚱뚱보 여인들을 힐끔거리며 연신 주워섬겼다.
"자 봐, 내 이 제자들도 천자만흥(千紫萬紅) 얼마나 예쁜가? 이 아이들도 당신 마음대로 갖고 놀라구."
일속은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마냥 스르르 머리를 돌려 그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일속이 아니었다. 마음이 물같이 깨끗한 일속은 어디로 가고 그는 점점 전혀 딴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여인들을 쳐다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비대해서……."
"자, 이것 봐. 아직 철부지구먼. 계집은 동등해야 좋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 줬건만! 사내가 계집을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살 때문이라구. 사내들이 좋아하는 건 계집의 살이야, 살!"
기실 일속은 지금 대환희 보살의 그 어떤 법술에 홀려 있었다.
그는 지금 여인이라면 아무리 추녀라도 다 선녀처럼 보였다. 아니, 그가 그토록 애절하게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여인, 백면라살로 보이는 것이었다. 언뜻 일속의 눈에는 대환희 보살이 백면라
샅로 보였다. 그는 애타게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당신은 내 여자, 내 여자……."
대환희 보살은 두 팔로 일속을 안고 어린애같이 둥둥 어르면서 쪽쪽 입을 맞춰댔다. 어찌나 세게 맞추는지 잔뜩 불어난 돼지 오줌통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뚱뚱보 여인들마저 흠칫흠칫 놀라며 저러다가 일속이 잘못되면 어쩌나 은근히 근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환희 보살은 그저 제 욕정에 취해 일속을 품에 넣고 못살게 굴었다.
마력(魔力)에 걸려든 일속이 이렇듯 고분고분해지자 뚱뚱보 여인들은 저마다 속이 달아오르고 샅이 가려워졌다. 어서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기를, 그녀들은 숨을 꼴깍꼴깍 삼켜 가며 손에 땀을 쥐었다. 충피도 쾌재를 부르며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살과 일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먼데서부터 홀연 퉁소 소리가 울려 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때로는 격하게 유유히 울려 오는 그 퉁소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울려 퍼지는 천국의 음향 같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종긋 귀를 세웠다.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사색을 던져 주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뭇 설레게도 하는 그 퉁소 소리에 저마다 제 나름의 비애에 물들어 갔다…….
그중 화산파(華山派)의 검객으로 있다가 대환희 보살에게 홀려 노복이 된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퉁소 소리를 들으며 마냥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천하 무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기백, 그 위세는 다 어디 가고 오늘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이냐. 계집의 치마폭에 휩싸여 부서진 기왓장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 다시 세상 사람을 대할 면목도 없구나. 이렇게 살아 무엇하리…… 아 구차스럽다.'
사내는 오만 가지 착잡한 생각에 젖어 들어 몽롱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광채가 번쩍 빛을 발했다. 에라, 이렇게 개같이 살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사내
는 불꽃이 번쩍 튀도록 잽싸게 검을 뽑아 들더니 삽시에 제 목을 홱 베어 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에서 벌컥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털버덕 고꾸라지더니 더는 꿈쩍도 안 했다.
그가 자결해 버리자 다른 사내들도 온통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본디 모두 명성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공리를 생명보다도 중히 여기던 강호의 무사들인지라 퉁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괴한 마음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사내들은 한결같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있었다.
'옳다, 죽자!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옳았던 것을…….'
퉁소 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어 들려 왔다.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비장해졌다 몸이 건장하게 생긴 한 사내가 부르짖었다.
"나도 죽겠다!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난 내 사촌 누이를 죽인 놈이오. 내 이종사촌 누이를 죽였단 말이오. 그 여잔 인물도 좋고 검술도 나보다 월등했소. 하나 내가 청혼을 하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내의 체면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니, 나는 그만 악에 받쳐 그 여잘 죽여 버렸소. 죽이고서도 못 참아 시체를 간음했소. 난 이런……."
퉁소 소리는 한층 낭랑하게 울려 왔다. 사내는 죄책과 비애, 울분과 절망이 밀려들어 머리를 쥐어뜯더니 미친 듯이 수림 속으로 뛰쳐가 버렸다. 다른 사내들도 주먹들을 불끈불끈 쥐었다.
단 한 사람, 이 퉁소 소리를 듣고 마음이 샘물같이 맑아지고 더 할 나위 없이 평온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일속이었다. 대환희 보살의 마법에 걸려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일속은 얼굴
이 안온해지면서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대환희 보살을 밀치고 조용히 빠져 나와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을망정 그는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도 퉁소 소리에 눌려 넋을 잃고 수림 쪽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퉁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쩌면 이제 지척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대환희 보살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네 년은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함부로 놈자를 붙여? 괘씸한 년 같으니!"
상대방은 가소로운 듯 받아 쳤다.
"대관절 누구관대 함부로 나를 얕잡아보고 찧고 까부는 게냐?"
대환희 보살은 한껏 주눅이 들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되레 가일층 쌀쌀맞게 되쏘았다.
상대방은 대답은 않고 느닷없이 기괴한 웃음 소리를 토해냈다.
웃음 소리는 동서남북 온 수립을 빙 둘러 가며 울리는 것 같았다.
분명 그 순간 수림 주변을 한바퀴 빙 날아 돈 것임에 틀림없었다.
대환희 보살은 대번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남들은 채 한걸음도 못 내디딜 순간에 벌써 수림 주변을 한바퀴나 빙 돌다니……. 그 경공만으로도 무예가 얼마나 고강한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는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오. 거기는 누구요?"
보살은 잔뜩 수그러져 존대를 했다.
"대환희 보살? 아니,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란 말인가? 운남에서 이 중원 땅까지 어이 왔나?"
아마도 상대방은 이곳 중원에서 대환희 보살과 마주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상대방이 자기 명성을 알고 있음직하자 어깨가 으쓱해지고 담이 커졌다.
'흥, 네 놈도 이 대환희 보살의 명성을 들은 게로군. 그렇담 결코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못하겠지.'
"그런 쓸데없는 건 묻지 말고 어서 신분이나 밝혀."
그러자 기고만장한 호통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쨍 귀청을 때렸다.
"고얀 년! 난 몸뚱이가 불어 터진 계집과는 단 한마디도 말 품을 팔기 싫으니 숨통 끊어 놓기 전에 냉큼 꺼져!"
남하고 싸우는 일이라면 쌍수를 들고 나서는 대환희 보살은 걷잡을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땅땅 호령이야! 나 대환희 보살도 운남에선 위세가 뜨르르한 사람이다. 네 놈이 염라대왕이라도 무섭지 않다, 쾌씸한 놈!'
대환희 보살은 온몸의 군살이 팽팽히 당기도록 열을 올렸다.
"숨통을 끊어 놔? 오냐, 어디 어떻게 숨통을 끊어 놓을지 어디 두고 보자! 네 녀석이 감히 무슨 재간……."
보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쌩하니 바람소리가 일며 돌멩이 하나가 번개같이 날아왔다. 대환희 보살은 급급히 손을 들어 돌멩이를 받아 쥐었다.
대환희 보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손바닥이 짜개지는 듯하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확 퍼져 팔까지 찌릿찌릿했다. 그 작은 돌멩이에는 굉장한 역도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내 네 년 수하 사내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단번에 몰살시켜주랴!"
상대방은 엄하게 소리쳤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속이 뜨끔하면서도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잡아다 부리고 있는 이 사내들은 그래도 전에는 모두 한다 하는 고수들 이었다. 자기가 하나를 죽이려 해도 한 식경은 땀을 빼야 하는 터, 무슨 재간으로 이 모두를 단번에 몰살시킨다는 겐가. 보살은 연신 코방귀만 뀌었다.
그때였다. 다시금 바람소리가 일더니 돌멩이가 쌩 날아왔다. 돌연 보살의 사내 하나가 째지듯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으로 획 퉁겨 올랐다가 내리꽃히듯 떨어져 내리며 그대로 뻗어 버렸다. 보살이 가장 총애하는 벽남이었다.
"아이고 이 귀염둥이야, 내 사랑 보배야, 이게 웬일이냐? 어디 보자. 어디를 다쳤느냐. 내 원수를 갚아 주마……."
대환희 보살은 사내에게 덮쳐 들어 사내를 마구 뒤흔들며 눈물을 쏟아 냈다. 사내는 인후에 구멍이 뺑 뚫린 채 뻔히 눈을 뜨고 진작에 숨이 넘어가 있었다.
"아이고 내 사랑 보배를 죽이다니……. 내 네 놈을 기어이 죽이고야 말리라. 매 밥을 만들어 놓을 테다! 아이고, 이 아까운 것! 아이고 어쩌나."
대환희 보살은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군살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이 놈아, 어서 나오너라, 비겁하게 숨어서 손을 쓰지 말고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대환희 보살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면서 육중한 몸으로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발광을 했다.
"네 이 놈! 어서 썩 기어 나오지 못하느냐?"
그러자 수림 저쪽에서 사뭇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려 왔다.
"그런다고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내가 일단 나가기만 하면 너희 년놈들은 하나도 살아 남지 못햇! 빈말이면 내 황약사란 이름을 갈겠다!"
그 말에 누군가 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모두들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다. 황약사한테 잡혀 비명 횡사를 할까 봐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도화도 어름을 지날 적엔 숨도 크게 못 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황약사는 오가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혀를 베어 벙어리를 만들어서는 부려먹는다고도 했다. 수림 속에 숨어 있는 저 사내가 바로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던 그 황약사라니…….
사람들은 모두들 얼이 빠져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황황히 숨을 곳을 찾았다. 바로 그때, 그때껏 빠져 나갈 틈을 노리고 있던 일속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가 수림 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그대로 정신없이 내달아 갔다.
그즈음, 수림 저쪽에서 여인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들려 왔다.
"또 성이 나셨군요. 저와 언약했잖아요, 다시는 성을 내지 않고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또 식언(食言)이세요?"
그러자 좀전까지의 그 쩌렁쩌렁한 기세는 산그라지고 적이 누그러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래, 그래, 내 아형 말대로 함세. 하긴 저런 것들은 성을 낼 상대도 못 되는데……."
"그래요. 부끄럼도 모르는 저런 여인들하고 시비를 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에요. 우린 우리 갈 길이나 가요."
"그래, 가자구. 그대 말마따나 우리도 똑같이 손가락질을 받을라. 어서 이 너저분한 데를 빠져 나가세."
그러더니 일시에 수림 저쪽은 잠잠해지고 바람에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건너왔다.
대환희 보살은 분기탱천하여 발뒤축을 구르면서도 정작 한마디도 꺼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입 밖에 냈다가는 황약사가 듣고 되돌아올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그 한마디에 송장을 몇이나 더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한동안 두꺼비처럼 눈만 슴벅거리며 서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수림 저쪽에서 황약사와 한 여인의 인기척이 끊기고 난 뒤에도 한동안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문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쥐새끼같이 빠져 나갔는지 일속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분해서 가슴을 펑펑 쳐댔다. 여직껏 이번 행로만큼 재미난 적은 없었는데 그 악독한 황약사 때문에 흥이 깨지고 일속까지 놓쳤으니 그녀는 입 안이 몹시도 깔깔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내들에게 큰 침대를 메게 하고 서둘러 그곳을 떴다.
충피도 제 시첩들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그는 대환희 보살의 재간이 여간 아니고, 자기와는 배가 잘 맞는지라 그의 수하가 되기로 진작에 작심했었다.
치주도 마치 앞날을 포기한 사람마냥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뚱뚱보 여인들 틈에 끼여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대환희 보살은 중원으로 한번 나가 보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운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추천 (0) 선물 (0명)
IP: ♡.99.♡.216
23,51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03
0
72
나단비
2024-04-02
0
60
나단비
2024-04-02
0
68
나단비
2024-04-02
0
62
나단비
2024-04-02
0
45
나단비
2024-04-02
0
70
나단비
2024-04-01
0
70
나단비
2024-04-01
0
72
나단비
2024-04-01
0
101
나단비
2024-04-01
0
64
나단비
2024-04-01
0
57
나단비
2024-03-31
2
68
나단비
2024-03-31
2
112
나단비
2024-03-31
2
84
나단비
2024-03-31
2
97
나단비
2024-03-31
2
65
나단비
2024-03-30
2
64
나단비
2024-03-30
2
64
나단비
2024-03-30
2
84
나단비
2024-03-30
2
63
나단비
2024-03-30
2
148
나단비
2024-03-29
2
165
나단비
2024-03-29
1
66
나단비
2024-03-29
1
62
나단비
2024-03-28
1
68
나단비
2024-03-28
1
52
나단비
2024-03-28
1
50
나단비
2024-03-27
1
54
나단비
2024-03-27
1
66
나단비
2024-03-27
1
7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