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3

3학년2반 | 2022.02.22 07:37:25 댓글: 0 조회: 53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321


제11장 주 영웅의 일전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어느덧 세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화산논검도 두어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무예 높은 중원 고수 몇이 벌써 화산 아래에 당도해 거처를 정하고 눈이 빠지게 당일의 일전을 고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접하자 대환희 보살은 다시금 온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애초에는 화산 무예 시합에 참여해 천하 제일의 영예도 따내고 《구음진경(九陰眞經)》도 차지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나 언젠가 천만 뜻밖으로 황약사를 만나 그의 무예에 겁을 집어먹고는 사기가 한풀 꺾여 중원 나들이를 포기했었다.
그녀는 황약사를 대하고 나서야 자기보다 무공이 월등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화산에 가서 무턱대고 무예를 겨루다가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 동안 나름대로 무예를 연마해 왔다. 아무래도 그렇게 쉽사리 《구음진경》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화산에 고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보살은 일단 화산 아래 가서 기회나 엿보자고 내처 화산으로 달려갔다. 아직 무예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연히 운이 닿으면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 가닥 요행수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화산 아래 한길에는 병장기를 지닌 검객들과 준마를 탄 호객(豪客)들이 분주히 오갔으며 주루와 객점에는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온통 왁자거렸다. 사람마다 한결같이 화산의 무예 시합을 입에 올리며 침을 튀기고 있었다. 20여 년 전 강호를 쥐고 흔들던 북방 대도(大盜) 제일사(齋-思)가 죽은 이후로 이렇듯 흥성거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히 20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화산 아래에 있는 제법 큰 취선루(聚仙樓)에도 사람들이 왁자하니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강호의 적지 않은 명인 중 화산의 무예 겨룸에서 우승을 따낼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몇 안 된다
고들 입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첫째를 꼽는다면 당연 도화도 도주 황약사라고도 했다. 황약사의 무공은 세상에 없는 독특한 무예라는 것이다.
바다를 건너왔다는 검객 하나는, 자기가 우연히도 도화도에 올랐다가 황약사를 보았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때의 그 공포가 서려 있었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냉소를 쳤다.
"쳇, 듣자니 무릇 바다에서 황약사를 만난 사람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던데 선배님께서 이렇듯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면 그 무예가 대단하겠구려."
그 말엔 다분히 야유가 섞여 있었다. 그러자 말을 꺼낸 그 검객은 발끈하더니 전후 사정을 상세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 솔직히 무슨 일이 있어 일부러 도화도에 간 건 아닙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 떠내려가다 천만 다행으로 한 섬에 다다랐는데 거기가 바로 도화도였지요. 섬엔 온통 도화가 만발해서 경치가 세상 없이 좋습디다. 나는 그만 경치에 홀려 배를 기슭에 대고 섬에 올랐지요. 그런데……."
검객은 예까지 말하다가는 더는 말을 못 이었다. 도화도에서 목격한 그 무시무시한 일을 말하려니 벌써부터 그때의 그 공포감이 덮쳐 와 사정없이 온몸이 떨리고 혀가 굳어지는 것이었다. 부쩍 호기심이 동해 귀를 모으고 듣던 사람들은 안달이 났다.
개중에서 구레나룻이 시꺼먼 장한 하나가 볼멘소리를 했다.
"뭘 사내대장부가 얘기를 꺼내다 마나. 세상 말을 들으면 도화도가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라고들 하지만 난 어쩐지 믿기지가 않소. 황약사란 사람이 아무려나 무턱대고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하겠 소?"
그러나 도화도에 가 보았다는 그 검객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중에 혹 도화도 사람이 끼여 있지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 도화도 도주가 여기 있을까 봐 그러나? 그것 참, 꽤나 겁 많은 사람이군! 도화도 사람은 여기 씨도 없으니 염려 비끄러매고 어서 하던 얘기나 계속하라구, 젠장."
곁에서 누군가 타박을 놓았다. 그래도 도화도에 가 보았다는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않고 일어나 서성이며 엉뚱한 말을 했다.
"그렇게도 도화도 얘기를 듣겠다면 내 먼저 요구가 하나 있소. 여기 있는 사람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어디 한마디씩 들 해 보시오."
사람들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한마디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을 옮기지 않는다는 다짐을 하라는 건가, 아니면 누가 물어도 결코 자기가 발설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라는 건가?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말들이 많았다.
그러자 수염이 청수한 중년 사내 하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 그 사람 참! 염려 마시고 어서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오. 우리도 풍문으로는 대충 다 들은 터이니. 도화도란 곳은 도시 불측지연(不測之淵) 같은 곳이고, 그 도주는 사람을 죽이고도 눈 깜짝하지 않는 살인마왕이라고들 하지만 도무지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오. 그러니 거기가 정말 도화도엘 갔다 왔다면 속시원히 한번 얘기 좀 해 보시란 말이오, 진짠지 거짓인지……. 우리도 견식 좀 넓혀 보게, 엉?"
그러자 뒤쪽에 있던 사내가 사람들을 헤집고 나서며 비아냥거렸다.
"어이, 이 사람, 아무래도 도화도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흰소리를 치는 거 아냐?"
그러자 도화도에 가 봤다는 그 검객은 얼굴이 벌게져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더니 끝내는 결심을 내린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 다 관두고 한마디씩 해 보란 말이오. 난 여기에 도화도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분명히 확인해야겠으니!"
검객의 기세가 사뭇 강고한지라 그제야 사람들은 이 검객이 확실히 도화도에 다녀왔다고 믿게 되었다. 하나 말만 들어 보고야 그 사람이 도화도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해 낸단 말인가? 그래도 어찌 됐든 말이라도 들어 봐야 마음을 놓겠다는 투였다. 만의 하나라도 여기에 도화도 사람이 끼여 있다면 이 검객 아니라 누구라도 그 일을 토설하지 못할 것이다.
수염이 청수한 청수 검객이 선코를 떼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한마디하지요. 난 화산에 무예를 겨루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무예 시합을 구경하러 왔소이다."
그러자 그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봉(大棒)을 손에 쥔 구레나룻 장한이 웅근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그럼 나도 한마디하겠소. 난 화산에 검술을 비기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이 봉술(棒術)을 비기러 왔소이다."
화산논검이면 검술을 비기는 자린데 엉뚱하게 몽등이 내두르는 초수를 비기러 오다니…… 사람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중에서도 중년의 청수 검객 왼쪽에 앉아 있던 처녀의 웃음 소리가 제일 높았다. 청수 검객이 처녀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었다.
"경망스럽다!"
그러자 처녀는 숨을 들이켜며 입을 싸쥐었다. 주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숙연해졌다.
바다에서 온 검객은 내내 표정을 굳힌 채 사람들의 말을 일일이 다 들어 보고 나서야 큰 숨을 내쉬며 말을 치어 가기 시작했다.
"여러분,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그 도화도 도주의 무공은 세상에 둘도 없이 출중하다오. 나도 명색이 몇 십 년 강호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이 쌍칼로 이름깨나 얻은 사람이오. 그런데 그날 도화도에서 식은땀을 한 번 빼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사람들과 맞서기가 싫어집디다."
뭇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섬에 올라간 나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 갔지요. 길 옆은 온통 복숭아꽃 천지니 얼마나 아름답겠소. 복숭아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다 나는 마침내 그곳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힘이 하나도 없이 축 늘어져서는 나뭇가지를 치기도 하고 흙을 북돋아 주기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여보시오'하고 손을 저어 부르니 그제야 고개들을 돌려 바라봅디다. 그래 내가 '당신들은 도화도 사람들이오?' 하고 물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대답을
않고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묵묵히 일만 하더란 말이오. 마치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말이오. 그래 내 여러 번 다그쳐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제야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눈을 뚝 부릅뜨고 쳐다봅디다. 난 냅다 그 놈의 멱살을 거머쥐고 '이 놈 아,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말 같지 않다 이거냐?' 하고 윽박 질렀지요. 그랬더니 글쎄 그 사람은 말 대신 입을 벌려 보이지 않겠소. 그 입 안을 보고 난 그만……."
검객은 몸서리를 치며 더 말을 못 이었다.
"그래, 어떻다는 거요? 말을 해야지!"
성미 급한 장한이 또 다그쳤다.
"말도 마시오. 글쎄 그 입 안엔 혀가 없더란 말이외다. 그저 몽톡하니 혀 뿌리만 남았으니 말을 해도 맹꽁이처럼 옹알옹알 할밖에요. 그런데 더 놀란 건 하나만이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혀가 없더란 말이외다. 저마다 입을 벌려 보이는데, 아유 나는 너무 끔찍해서 다리가 다 후들후들 떨리더라니까요."
사람들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화도 도주가 왜 섬사람들의 혀를 모두 그 모양으로 만들어 버렸을까? 도화도에 어떤 대단한 비밀이 있어 누설될까 봐 그랬을까? 어쩌면 무림을 진동시키고도 남을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들 중 몇은 공연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검객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이 나를 보는 기색이 영 이상해요. 아예 나를 무슨 송장 대하듯 하더란 말이오. 나는 섬을 더 올라가도 되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상대방은 도리질을 치면서 입을 벌려 잘 린 혀를 다시 내보입디다. 뻔하지요. 올라가지 마라, 올라갔다간 영락없이 우리 꼴이 된다, 이런 뜻 아니겠소. 그래도 난 올라갔소. 기왕 온 바에야 끝을 봐야겠다 하고 말이오. 한참을 올라가니 조그마한 정자가 하나 나옵디다. 가까이 가 보니 정자에는 주련이 한 쌍 있었는
데 정자 기둥을 깊숙하게 파서 새긴 게 퍽이나 힘이 있습디다. 만약 저것을 누군가가 무공으로 새겼다면 실력이 대단 하겠구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소.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는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자색 두루마기를 걸쳤는데 한눈에도 무예가 대단하다는 걸 알겠더군요. 나는 얼른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지요. 그는 돌덩이를 들고 정자에 앉더니 손에 슬쩍 힘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단박에 돌덩이가 팍 하고 으스러져 가루가
되더란 말입니다. 대단한 힘이지요. 그런데 얼핏 보니 돌알 하나가 꼭 나한테로 날아오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 어이쿠, 들킨 모양이다 하고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사내가 외치더군요. '그래 내 솜씨가 어떠냐?' 나는 꼭 나에게 묻는 줄 알고 막 입을 떼려는데 너무나 기겁을 하여 아무 소리도 안 나오더군요. 그랬는데 글쎄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요. '사부님의 탄지신공(彈指神功)은 세상에 둘도 없는 줄 압니다. 이 탄지신공을 대적할
사람은 세상에 아직 없는 줄 압니다.' 미처 못 보았으나 그 여잔 아마 그 남자 뒤를 따라온 모양입디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열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계집이더군요. 이쁘고 총명하게 생겼습디다. 나는 그 둘이 정자를 떠나 돌아갈 때까지 거기에 숨어 숨을 죽였지요. 이윽고 두 사람이 돌아가자 나는 그 돌 조각으로 도대체 뭘 했는지 궁금해서 살금살금 다가가 봤지요. 그런데 이 보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돌조각이 모두 열 장이나 떨어진 큰 바위에 날아가
박혀 있더란 말이오. 그것도 아무렇게나 박힌 것이 아니라 '진경득주, 비아이수(眞經得主, 非我而誰)' 이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더란 말입니다. 나는 그만 기겁을 하여 발에 땀이 나도록 내뺐지요!"
사람들은 눈이 휘등그래졌다. 열 장이나 떨어진 바위에다 돌 조각을 퉁겨 박는다는 것도 기상천외한 일이지만, 거기다 글자까지 새겨 넣는다는 것은 상상 못할 일이었다. '진경득주, 비아이수', 즉 내가 진경을 못 가지면 누가 가질 것인가, 이 뜻 아닌가! 물론 말하지 않아도 그가 바로 도화도주 황약사라는 걸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경악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약사의 무공이 부러워 속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뿐이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고 내심 모두들 자탄을 했다. 개중에는 이제 《구음진경》에 대한 흥이 식어 시들해지기도 하고, 또 개중에는 《구음진경》을 탐내는 것조차 두려워하기도 했다. 공연히 《구음진경》을 탐내다가 황약사한테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구음진경》이고 《십음진경》이고 목숨이 최고지…….
"듣고 보니 중양 진인의 적수는 이 황약사밖에 없을 것 같군. 황약사가 결단코 《구음진경》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중양 진인도 버터 내기 어려울 것 같아, 암, 어렵고말고!"
누군가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자 청수 검객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적이 시뜻한 기색으로 말했다.
"글쎄 도화도주의 무공은 듣기만 하고 보지는 못했지만 중양 진인의 무공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내 보건대는 오늘날 천하 무림에는 중양 진인의 무공을 당해 낼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장승(藏僧)이 냉소를 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니 티베트 승복을 입고 있는 라마 중이었다.
"듣건대는 중원 무림들이 왕중양의 무공에 모두 탄복을 한다고 합디다만 내 보기엔 별로 그래 보이지 않소. 천하 기물(奇物)은 오로지 덕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소? 달리 말 하면 천하 기물은 오로지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왕중양이 진정 천하 없는 무공을 지녔다면 왜 그 무학기서(武學奇書)를 남에게 내놓는단 말이오? 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소."
라마 중의 말에 사람들은 발끈해서 벌떡 일어섰다. 한둘이 아니 었다. 그중 제일 격분하는 사람이 바로 청수 검객이었다.
"이 놈이 지금 어디 와서 허튼소리야! 중양 진인이 어떤 분이라고 감히 그따위로 입을 놀려!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라마 중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 역시 맞받아 벌떡 일어서며 소리 쳤다.
"말 같지 않은 소리! 중원에 그런 왕중양이 있는데 왜 당신들은 금나라 사람들에게 꼼짝도 못하오. 중원엔 사람이 없소? 금나라 사람 몇 배, 몇 십 배가 되는데 왜 그러고 있냐 말이오! 열이 달
려들어 하나만 죽여도 금나라 사람은 씨도 남겨 놓지 않고 꺼꾸러뜨릴 수 있을 거요. 그런데도 중원 사람들은 금나라 사람 그림자만봐도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달아나니, 정말 우습지 않소?"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원 사람들인지라 모두들 노기가 충천하여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이 중 놈아! 미친 소리 그만 하고 중원 사람이 어떤가를 알려면 나하고 직접 겨루어 보자!"
그러나 라마 중은 태연히 코웃음만 쳤다.
"이거 왜들 이러시오? 당신들이 금나라 사람한테 꼼짝을 못한다고 했지 어디 나한테 꼼짝못한다고 했소? 당신들이 날 이기면 어쩔 거요? 나 같은 걸 이기는 게 뭐 그리 대단하오?"
딴은 그렇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성미가 거친 구레나룻 장한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너 따위가 우리 중원 사람들을 업신여기다니! 내 네 놈을 가만 놔둘 수 없다. 네 놈이 나를 이기면 그때 가서 네 놈 마음대로 비웃어라."
장한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악 소리를 지르면서 다짜고짜 몽둥이를 높이 쳐들었다.
"후회 마라, 이 놈! 한 번만 더 중양 진인을 욕했다가는 박살이 날 줄 알아라."
그러나 라마 중은 몽둥이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러든 말든 구레나룻 장한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 모아 있는 힘껏 라마 중을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가 무섭게 났다.
사람들은 라마 중이 입질 한 번 잘못한 대가로 황천객이 되었다고 혀를 찼다. 그러게 하필이면 왕중양의 위망이 중천에 뜬 햇발같은 이 마당에 중원에 와서 왕중양을 비난할 게 뭐란 말인가. 왕중양이 중원의 무림을 거느리고 금군(金軍)에 저항할 땐 금군도 왕중양의 이름 석 자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하지 않는가.
중원을 위해 왕중양이 한 일을 모르고 함부로 비웃다가 저 봉변을 당했으니 자업자득이요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 눈이 휘둥그래진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분명 머리뼈가 빠개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라마 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서 있었다. 뿐더러 몽둥이는 그새 용수철에 퉁겨 나가듯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고 귀신인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라마 중을 바라보았다.
"중원 사람들은 이치고 뭐고 없이 몽둥이가 먼저구먼. 그저 달려 들기만 하면 장땡이야."
라마 중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태연히 말했다.
구레나룻 장한은 혼이 절반이나 나가 대답도 못하고 얼뜨기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지요. 중원 무림의 인시에 나도 답례를 해야겠소. 이젠 내 차례요. 자, 한번 막아 보시오."
라마 중의 한마디에 구레나룻 장한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도 이제 자기가 라마 중의 적수가 못 됨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굴복을 하자니 앞으로 강호에 나설 면목이 서겠는가. 구레나룻은 내심으로는 겁이 덜컥 나면서도 호기롭게 허풍을 떨어댔다.
"그럼 어디 손을 써 봐. 나라고 못 막을 줄 알아?"
그러자 라마 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그 순간 손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겨 왔다.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무슨 초수인지 도시 알 수가 없었다. 이제껏 그런 초
수는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청수 검객만이 낯색이 확 변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앗, 저것은……."
그러나 얼이 빠져서 진땀을 빠작빠작 흘리고 있는 구레나룻에게 그 소리가 들릴 리 만무였다. 그는 그저 라마 중이 장풍을 내치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고 가만히 서서 라마 중의 장풍을 막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라마 중은 허공에서 손을 딱 멈추더니 퍼뜩 모로 세웠다. 그러자 그의 손은 마치 칼날처럼 날이 서고, 벌겋게 달아 오르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두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구레나룻을 향해 번개같이 손을 내리쳤다.
"조심햇!"
청수 검객은 라마가 손을 내치는 찰나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속에서 번개같이 몸을 솟구쳐 내리치는 라마 중의 손바닥을 자기 손으로 턱 막았다!
중년 사나이는 라마 중이 손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바로 티베트의 화염도장식(火焰刀掌式)인 줄을 금세 알아보았다. 화염도는 원래 장승 구마습(塢摩什)의 독점 무공이었는데 일찍이 대리 천룡사 일양지공을 이긴 적도 있었다. 후에 구마습은 무공을 폐하고 티베트의 이름 높은 고승이 되어 허다한 불경 역서(譯書)를 썼다. 구마습의 화염도장 무공은 실전되어 없어졌다고 회자되었는데 어떻게 이 라마 중이 이 초수를 펼쳐 내는 것인지 청수 검객은 기이하기만 했다
청수 검객은 일단 화염도장을 맞받아 내치기는 했지만 그 기세에 밀려 서너 장이나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대단해, 대단한 무공이야……."
청수 검객은 낯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적이 긴장하여 찍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그 소리로 보아하니 청수 검객은 내상을 입었음에 틀림없었다. 다만 한 사람만이 냉큼 내달아 청수 검객을 끌어안으며 부르 짖었다.
"이 봐, 곽 대협, 괜찮으신가?"
사람들 중엔 이 화산파의 수제자 곽명송(雲明松)과 교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곽명송의 무공을 따를 자가 없는데, 그마저 이렇게 단번에 여지없이 당하고 말자 사람들은 모두 겁먹은 눈길로 라마 중과 곽명송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라마 중은 한껏 기가 올라 거만하게 소리쳤다.
"당신들 중원엔 여태껏 세상에 내놓을 만한 무림대가가 어디 있기나 있었소? 그러고도 뭐 천하 무림의 수령이 되겠다고? 그래도 왕중양은 스스로 《구음진경》을 내놓겠다고 하는 걸 보면 자기 주제를 알고 있거든. 그만하면 총명하다고 할 수 있지."
사람들은 라마 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자 속으로는 불끈불끈하면서도 그 위력에 눌려 누구도 말을 못했다. 이윽고 곽 대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장(西藏)의 라마가 감히 대협 중양 진인을 능멸하다니. 당신이 지금은 그따위로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지만, 감히 화산 봉우리에 올라 우리 중양 진인과 자웅을 겨루어 볼 음기는 있는가?"
라마 중은 가스롭다는 듯 깔깔 웃었다.
"내가 중원 고수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당신들의 그 왕중양과 겨뤄 승산이 없다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예까지 찾아왔겠소? 난 결코 중원 땅에 유람 온 것이 아니오!"
그 말에 사람들은 다시금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이젠 누구도 범접할 생각을 못했다. 감히 중양 진인과 직접 맞서려고 온 사람을 자기들이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곽명송도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게 누구 없느냐?"
주루 안이 대번에 숙연해지자 라마 중은 득의양양하여 잔뜩 위엄을 부리며 사환을 불렀다. 주루의 사환들은 무서워서 여차직하면 달아나려고 저마다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다가 낯색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힌 채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들은 그 앞에 가까이 다가서자 당장이라도 라마 중의 그 칼 같은 손바닥이 정수리를 내리칠까 봐 더욱 몸을 움츠렸다.
"어서 술과 안주를 가져 와!"
라마 중은 눈을 부라렸다. 사환들은 즉시 읍을 하고는 그대로 허리를 굽힌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이내 술과 안주를 한 상 그득 차려 왔다. 라마 중은 한껏 흥이 올라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껄쩔 웃었다.
"서장에서 듣기로는 중원 무림에 인물이 아주 많다더니 모두 헛소문이었군, 헛소문! 중원에 와 만나는 족족 모두 무용지물들뿐이니, 이거야 원 재미가 없어서……."
라마 중은 콧대를 건뜻 들고 방약무인하게 떠들어댔다.
곽 대협은 사람들을 보고 소리를 죽여 말했다.
"글쎄 우리로선 저자를 어쩔 수가 없구먼. 저 사람 말대로 우리 중원에 고수들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대리 황제 단지흥이나 전진교 교주 왕중양,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 그리고 백타산군 구양봉, 이 네 사람의 무공은 가히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외에도 고수들이 허다하나 이 자리에 없는 게 한이로구먼."
사람들은 곽 대협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두들 자기 고장에서는 제법 주름을 잡으며 우쭐거렸지만 우물 안 개구리 격으로 천하에 그 많은 고수들이 있는 줄은 미처 모르고들 있었다. 오늘 곽 대협의 말을 듣고서야 그 네 사람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중원엔 그 몇 명만 고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등신이다. 이 말이구먼. 쳇,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으니……."
속삭이듯 작게 말했는데도 라마 중은 금세 알아듣고 그 말을 맞받아 쳤다.
그때였다. 주루 안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살이 퉁퉁하게 오르고 크지 않은 키에 도포를 입었는데 생김새가 사뭇 무던해 보였다. 그는 방금 들어오면서 라마 중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맞소. 당신 말마따나 우리 중원엔 고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정말 몇 안 되오. 그런데 당신은 그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오? 복색을 보아하니 서장 끝에서 온 라마 중이신데?"
라마 중은 자기와 수작할 사람이 없어 무료하던 차라 반가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엇 하는 분이온데 내 말에 동감을 하시오?"
"맞으니 동감이지요. 당신 하는 말이 딱 맞단 말이외다. 우리 사형께서도 천하에 고수가 몇 없다고 늘 한탄을 하셨지요. 당신도 내 보기엔 고수는 아니고 겨우 명수(名手)에나 들는지 모르겠소만."
농담인지, 조롱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색으로 봐선 무던한 게 농이나 조롱은 모를 사람 같았다. 라마 중운 다소 기분이 상해 내뱉듯 또 되물었다.
"글쎄, 무엇 하는 사람이냐니까? 말을 들으면 사형이 분명 대단한 무림 고수 같은데 그래, 사형이 대관절 뉘시오?"
그러자 그 사람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로 대답을 못하고 꺽꺽거렸다.
"우리 사형 말이오? 우리 사형이 누군가 이 말이오?"
어쩐 영문인지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듯싶었다.
라마 중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강호 사람들은 만나면 제일 먼저 자기 문파(門派)부터 통성명하는 것이 상례였다. 자기가 소속된 문파가 아무리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문파도 없는 떠돌이보다는 백 번 낫기에 누구나 문파부터 들이대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것일까?
"칼을 차고 있는 걸 보면 무림 사람이 분명한데 왜 자기 문파를 못 대는 거요?"
라마 중은 성마르게 다그쳤다.
"못 대긴 누가 못 대? 우리 사형은…… 에잇, 나, 원!"
그 사람은 아예 화까지 내며 발뒤축을 구르더니 끝끝내 제 사형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수상쩍었다.
'이건 어디서 문파도 모르는 떠돌이 같은 게 굴러 온 거 아냐? 남들이 알면 주루에 올라올 자격도 없다고 내쫓을까 봐 차마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잖아! 사형이 있다면서 왜 이름을 못 대냔 말이야!'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봐, 무슨 문파인들 꺼릴 게 뭔가? 아무리 작은 문파라도 우린 모두 한식구, 한형제가 아닌가. 뭘 그렇게 우물주물하나?"
곽 대협이 사뭇 온순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퉁퉁한 사람은 털어놓고 말은 못하면서도 도리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왜 작은 문파란 말인오? 우리 문파처럼 큰 문파가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요! 우리 사형은 천하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영웅이오, 영웅! 우리 사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솟구쳤는지 급히 입을 다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 하자, 그만 해. 아무리 말해 봤자 내막 모르는 사람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 사형님 말씀도 있잖아…… 그러니까, 음…… 에라, 또 잊었군. 에잇 이 정신머리 좀 봐라……."
서장 사람까지 끼여들어 중원 무림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판에 이제는 어디서 저런 얼뜨기마저 굴러 와 연신 헛나발만 불어대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이 등신 같은 사내를 더욱 떨떠름하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라마 중만은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서 내심 주도면밀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중원 무림엔 문파간의 쟁투가 심한 모양이다. 그러니 이자가 선뜻 문파를 못 밝히고 있지. 어쨌든 이자도 한번 혼찌검을 내줘야겠다. 그래야 중원 무림의 예기를 완전히 꺾어 놓고 서장 밀종(密宗)의 위풍도 과시하지.'
라마 중은 생각을 굳히자 자못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중원 무림의 진짜 영웅이 오신 걸 몰라뵈었습니다. 이거 참으로 죄송합니다."
라마 중이 이처럼 깍듯이 예를 갖추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사내는 시답잖게 라마 중을 건너다보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의 사형께서 나더러 남과 싸우지 말라고 했은즉, 난 그대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라마 중은 이 사람이 비록 말은 바보같이 하고 있어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는 터였다. 그는 자못 점잖게 물었다.
"당신의 사형께선 훌릉한 무공을 보기만 하면 배우라는 말씀은 하지 않던가요?"
그 사내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투로 무표정하니 듣고 있더니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천하의 문파들이 바다처럼 많고 그 문파마다 뛰어난 초수들이 있다고 사형께서는 늘 말씀하셨어. 만일 천하에 있는 여러 문파들의 무공을 다 배우기만 한다면 기필코 무학귀재가 될 수 있을 텐데. 사형께선 나를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서 만큼은 천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 천하에 드물게 보는 천재라고 말이야."
마치 혼자 말하듯 반말투였다. 그러자 라마 중이 대뜸 물었다.
"호오, 그러시오? 한데, 당신은 사형이 누군지는 밝히길 꺼리고, 그렇다면 당신이 누군지는 말해 줄 수 있소?"
"나? 난 주백통이오. 사람들은 그저 나를 완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오! 그래 완동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놀기 좋아한다는 말이라오, 히히히……."
그는 큰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
한옆에 있던 곽명송은 그 이름 석 자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저 퉁퉁한 사내가 바로 그 전진파의 주백통 이란 말인가…….
라마 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워낙 주 영웅이셨구먼요."
주백통은 자기를 영웅이라고 추켜 올리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영웅이라구? 허, 참! 허, 참! 똑똑히 들어 두시오. 이건 내 입으로 떠든 게 아니라 당신이 한 말이오. 당신이 내켜서 한 말이란 말이오. 나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고 사형께 말씀 드려야지."
주백통은 라마 중이 진심으로 자기를 영웅이라고 하는 줄로만 여기고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그래, 난 영웅이지! 암, 영웅이고말고. 참말 영웅이란 말이야. 글쎄, 영웅인데 그 솜씨를 안 보여 줄 수 있나! 이보시오, 나 와 한번 겨뤄 봅시다! 저 사람들한테 구경 좀 시켜 주잔 말이오."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백통을 시답지 않게 보야 오던 차에 그가 주제넘게 라마 중과 무예까지 겨루어 보겠다고 나서자 코방귀를 뀌면서도 모두 낯색이 질려 버렸다. 그러나 라마 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과 겨뤄요? 내가 왜 당신과 겨룬단 말이오? 난 서둘러 화산에 가야 하오. 쓸데없이 당신 같은 사람과 겨를 게 아니라 가서 당신들 중원의 고수들과 겨루어 볼 테요."
주백통은 그가 화산으로 가겠다고 하자 키드득 웃음이 나왔다.
"이보시오, 내 보기엔 그대는 화산에 안 가는 게 좋아. 화산에 가도 시합엔 낄 수 없단 말이오. 그저 남 하는 걸 구경이나 한다면 몰라도. 옆에서 보기란 해도 대번에 시합에 나갈 생각이 없어질걸요? 그럴 걸 화산엔 뭣 하러 가오?"
라마 중은 주백통이 자신을 여지없이 깔아뭉개 자 대로하여 고함을 내질렀다.
"네 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주둥일 놀려!"
주백통은 주춤하더니 기가 조금 죽은 듯 중얼거렸다.
"난 다른 건 모르지만 그대가 화염도를 다루는 재간이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소. 그건 워낙 서역의 번승 구마습의 문예잖소? 구마습이 일찍이 대리로 들어왔다가 대리의 보정제(保定帝)와 맞붙었었지. 그때 구마습은 그대보다 훨씬 고수였소. 그 사람이 화염도를 쓰는 재간이 구 할쯤 된다면 거기는 기껏해야 오 할쯤밖에 안 된단 말이오! 그러니 그렇게 큰소리 마시오."
라마 중은 내심 흠칫 놀라 주백통을 빤히 쏘아보았다.
'놀랍군. 저자가 내가 화염도를 쓰는 재간이 사오 할밖에 안 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라마 중은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주백통의 기색을 유심히 살폈다. 주백통은 연신 눈자위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고수 같지는 않아. 뛰어난 고수라면 야 눈길이 저처럼 희번덕거릴 수 있는가. 필시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 저 사람은 맘속에…….'
라마 중은 짐짓 웃으면서 응수했다.
"안목이 높으십니다. 소승은 탄복했습니다그려! 영웅께서는 소승과 한번 겨루어 볼 생각이 없으시오?"
"아까는 싫다더니 이젠 또 왜 그러시오? 난 안 하겠소. 마음이 변했어!"
라마 중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된다더냐.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고 나서 발뺌을 하려구? 그렇게는 안 되지.'
"안 하겠다구? 어디 그게 맘대로 될까?"
라마 중은 한마디 내지르고는 즉시 달려들었다. 그는 손바닥을 칼같이 세워 주백통에게 똑바로 들이댔다. 그러자 주백통은 아주 겁이 난 사람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야단났네. 아까는 그만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식언을 한 것인데…… 저렇게 달려드니 이 일을 어찌하나! 사형님, 난 저 놈과 싸우지 않으려는데 기어이 달려드니 어떡합니까?"
주백통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라마 중의 화염도를 교묘히 피해 내며 연거푸 물러났다. 한켠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고 두 사람이 돌아치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마 중이 내리치는 장도가 머리에 떨어지자 주백통은 몸을 외로 틀었다. 그의 장도가 또다시 가슴으로 날아들자 주백통은 얼른 머리를 돌리며 소리쳤다.
"사형은 나더러 남과 싸우지 말라고 했어. 난 싸우려 하지 않는데 저 놈이 기어이 날 때리려 드니 이런 변이 어디 있나. 기막혀 죽겠네, 기막혀 죽겠어."
라마 중은 처음에는 주백통이 무서워 피하는 줄 알았지만 십여 합을 공격해도 모조리 피해 내자 결코 허투루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겉보기엔 그렇지 않더니 내가 속았구나. 이제 이 놈이 나를 죽이려 들겠군.'
라마 중은 초식을 더할수록 점점 더 당황하여 장을 날리는 초수와 초식도 점점 못해졌다. 주백통은 한 번도 공격을 들이대지 않고 계속 피하기만 하면서 입만은 쉬지 않고 놀려댔다.
"난 그래도 오 할쯤은 되는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까 그것도 못 되는군! 에 참, 기막힌 일이야!"
그제야 사람들은 비로소 주백통이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주백통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계속 피하기만 했는데 언뜻 보기엔 보법도 갈핑질팡 헤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가 라마 중을 당해 내지 못해 저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소리를 질러 응원했다. 라마 중은 싸울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당신 사형은 누구시오? 말을 하시오!"
"말하지 않겠다는데도 왜 자꾸 말하라면서 못살게 구는 거요? 내가 그쪽을 이기면 말해 줄 필요가 뭐요? 진다고 해도 내 말 안 할 테요!"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 네 놈은 티베트 사람인데 우리 중원 무림 일을 왜 네 놈 한테 말해 주겠느냐?"
주백통은 구경꾼들이 모두 자기편을 들어 주는 것을 보고서 한껏 기가 살았다.
"좀 보시오, 모두 내 말이 옳다고 하지 않소?"
"주백통, 당신이 만일 날 이기게 되면 난 두말없이 티베트로 돌아가겠소. 화산 무예 시합에는 가지 않겠단 말이오. 난 말하면 말 한 대로 하는 사람이오."
라마 중이 한마디하자 주백통은 우뚝 멈추어 섰다.
"됐다, 됐어. 어디 그 말, 다시 한 번 해 보시오!"
라마 중은 주백통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으나 이미 꺼낸 말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없는지라 다시 한 번 곱씹듯 말했다.
"좋아요, 내가 진다면 화산 무예 시합에는 안 가리다!"
주백통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좋아했다.
"됐다. 됐어. 나의 사형께선 화산 무예 시합에서 그 노독물과도 싸워야 하고, 그 황 괴물과도 싸워야 하고 또 거렁뱅이와도 싸워야 하니 지쳐 죽을 지경일 거야. 그런 판에 무슨 중입네 도사입네 하는 자들과도 싸워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 그러니 내가 대신 몇 합 싸워 사형의 부담을 덜어 드려야지."
주백통은 흥이 나서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아 사내가 누군지, 왜 이러는 것인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됐다, 됐어. 그대는 가짜 중은 아니겠죠? 중이라면 말에 신용이 있어야 해요! 거기서 먼저 지면 곧 돌아가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요?"
라마 중은 진작부터 이 주백통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라 정색을 했다.
"내 말을 믿으시오. 내가 지면 결단코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가지 않으리다."
라마 중은 내심 중원 사람들한테 그다지 알려져 있지도 않은 주백통한테까지 진다면 화산에는 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티베트로 돌아가 수련을 쌓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단단히 마 음을 사려 먹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재간이 있으면 어디 덤벼 보란 말이오."
라마 중은 화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주백통은 호들갑을 떨면서 헤헤거렸다.
"좋소! 싸우고 싶으면 얼마든지 싸웁시다. 나의 사형이 함부로 겨루지 말라고 신신당부만 하지 않았어도 난 벌써 손을 썼을 게요! 아까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말이오! 내 보건대 거기는 심성이 비뚤어진 것 같으니 한번 뿔이 빠지게 싸워 봅시다!"
-제 11권에 계속 -




제12장 《구양진경》에 홀린 주백통
화산 아래에 있는 취선루는 온통 시끌벅적 들끓고 있었다. 라마중과 주백통은 벌써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 동안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주백통은 말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겠는지 싸우면서도 연신 떠들어댔다.
"이 중 놈아, 이제 그만 손을 드는 게 어떠냐? 네 놈은 죽었다 깨나도 날 못 이겨. 네 놈은 화산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 용서해 주지……."
라마 중은 그 말에 칼을 더욱 사납게 휘두르며 날뛰었다. 그러나 주백통이 어찌나 날렵한지 아무리 악을 쓰고 대들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못했다. 주백통은 신이 나서 춤을 추듯 했다.
"그까짓 재간으로 언감생심 화산에 오르려 했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주백통은 주먹으로 라마 중의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라마 중은 약이 바싹 올라 악악 소리를 지르며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라마 중은 어떻게 하든지 이 주백통이란 작자와 끝장을 보려 하였으나 주백통의 주먹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아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본디 장화도(掌化刀)는 한 번 내칠 때마다 엄청난 내력이 소모되는 것으로 결코 허투루 써서는 아니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백통을 제압할 욕심에 너무 분별 없이 오랫동안이나 화염장도를 펼쳐내는 바람에 급기야는 진이 빠지고 말았다. 그는 도저히 주백통을 이겨 낼 수 없음을 알자 그의 주먹을 피하며 점점 문 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뒷걸음질을 쳤다. 마침내 문까지 다 다다르자 그는 돌연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바람처럼 뛰쳐나가 버렸다.
주백통은 펄쩍펄쩍 뛰었다.
"안 된다, 안 돼. 이 놈, 게 섰거라! 아직 실컷 싸우지도 못했는데 비겁하게 도망을 가느냐?"
라마 중은 그러든 말든 아랑곳 않고 나는 듯이 층계를 달려 내려가 그 길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주백통은 발을 동동 구르며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화산파 곽명송이 한눈에 띄었다. 그는 대뜸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구, 이거 정말 싱거운 일이로군. 방금 흥이 날 참이었는데 도망을 쳤으니, 이거 원 손이 영 근질근질해서……. 암만 해도 거기, 당신과 한번 싸워야겠소! 어떻소?"
곽명송은 주백통이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는지라 정색을 했다.
"여보시오, 주 영웅. 당신은 대체 어느 파의 사람이십니까? 보아하니 무예가 매우 출중한데, 그러지 말고 이 사람들한테 우러러 볼 만한 강호의 영웅들에 대한 얘기나 좀 해 주십시오."
주백통은 다시금 문파를 따져 묻자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그 문파 소린 제발 좀 그만둘 수 없소?"
그러자 청수 검객 곽명송은 웃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 보기엔 선생의 무예가 마치 종남산 전진교파의 것과 같은데 옳게 보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주백통은 다리를 철썩철썩 치면서 도리질을 했다.
"허허, 그 사람 정말 짓궂은 사람이구먼. 이건 내가 알려 준 게 아니오. 당신이 당신 입으로 내 무예가 전진교 무예라고 말한 것이오. 내 입으론 전진교 사람이란 말은 벙긋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이 주백통이란 사람이 순박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전진교라고 하자 웬지 친근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곽명송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 딱 부러지게 말을 해요! 내 보기에는 형씨의 일장일식(一掌一式)이 중양 진인의 선천신공(先天神功)과 신통하게도 똑같군요. 형씨는 필시 중양 진인의 수제자인 듯한데 사실이지요?"
주백통은 난처해하며 선뜻 대답을 못했다. 사람들이 재촉을 하자 주백통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난 그분의 제자가 아니오. 난 그분의 제자가 아니란 말이오."
곽명송은 몹시 의아해졌다.
'전진교에도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다. 남이 말하기 싫어하는 바에야 더 캐물을 거야 없지…….'
곽명송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백통을 바라보기만 할 뿐 더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아하니 더 이상 묻지 않을 눈치이자 주백통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됐어, 됐다니까. 당신들이 더 겨루어 보려 하지 않으니 여기 있어도 재미가 없군. 난 가겠소."
그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주루에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주백통은 주루에서 나와 앞만 보며 내처 걸어갔다. 거리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는 가면서도 내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형은 내가 남들과 싸우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싸우기만 하면 영락없이 내가 질 거라고 말씀하셨어. 한데 오늘은 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내 무예가 크게 나아진 것 같아."
주백통은 자못 득의양양해 입이 함지박만해졌다.
때마침 저쪽 켠에서 웬 거렁뱅이 하나가 소리를 치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러분, 무학밀서 사세요. 천하를 주고도 얻기 힘든 무학밀서예요!"
'무학밀서라고? 무슨 책일까? 왜 숨겨 두지 않고 팔아 버리는 걸까? 너무 가난해서 귀한 책을 팔아 버리려는 모양이지?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
"이봐, 무학밀서라니 그게 무슨 책인가? 은자 얼마면 그걸 볼 수 있겠나?"
거렁뱅이는 주백통을 보더니 입을 삐쭉거렸다.
"당신은 아마 이 책을 사지 못할걸요. 이 책은 《구양진경(九陽眞經)》라고 하는데 우리 가문에서 맨 처음 발견했지요. 원래 우리 가문의 가보인데 가세가 빈한하다 보니 할 수 없이 내놓게 된거요. 은자 삼십 냥이면 보여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예 드리겠습니다."
주백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진짜일지로 몰라. 강호엔 허다한 파벌이 있는데 개중에 저런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구양진경》이라니 사형이 얻은 책과 같은 종류의 기서인가 보다. 사형은 《구음진경》을 얻고 나서 매일 그것이 천하의 기서라고 찬탄하곤 했는데 내가 이 《구양진경》을 얻어 가면 무척 기뻐할 게야. 그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날 칭찬해 주시겠지.'
주백통은 그냥 지나치려는 거렁뱅이를 확 잡아당겼다.
"자네가 갖고 있는 게 참말 《구양진경》인가?"
거지는 주백통이 사뭇 관심을 보이자 아예 털썩 주저앉았다.
"참말이고말고요. 천하에 《구음진경》이란 기서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하셨나요? 이 화산 아래에서는 요 며칠 동안 북새통이 벌어지고 있는데 천하의 고수들이란 고수들은 거의 다 모여들었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서 뭘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은 유람을 온 게 아니랍니다. 말하자면 무예를 겨뤄 《구음진경》을 얻고자 온 거지요. 그 책에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무예 초수들이 적혀 있다는군요. 중양 진인께서 그 책을 얻으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요?"
거지는 입담 좋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주백통은 큰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 중양 진인께서 바로 내 사형인데."
거지는 손뼉을 탁 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 잘됐지요. 《구음진경》이 있는데 《구양진경》이 없을까. 아, 마누라는 있는데 영감이 없어서야 되나요?"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마누라가 있으면 영감이 있고 영감이 있으면 마누라도 있게 마련이지. 옳아, 옳아……. 아니야, 아니야."
주백통은 한창 신나서 말하다가 문득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아니란 말이지요?"
"그럼 난 왜 마누라가 없냔 말이야? 사형도 마누라가 없거든. 그러니 자네 말은 틀렸어. 자네한테는 그 무슨 《구양진경》이란 게 있을 수 없어. 자넨 날 속이는 거야!"
그래도 거지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주백통을 바라보았다.
"당신 사형한테 마누라가 없는 건 연세가 너무 많기 때문인 거죠. 당신한테 마누라가 없는 건…… 저, 그렇지요, 당신은 아직 젊으신데 왜 마누라를 얻지 못했소?"
"마누라는 얻어서 뭘 해? 마누라가 무예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마누라는 뒀다가 어디다 써먹는 거냐구? 마누라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되물었다.
"당신은 바보인가요, 바보인 척하는 건가요? 마누라를 얻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래요? 나 같은 소인배도 다 아는 사실인데 중양 진인의 사제라면서 왜 그걸 모르나요?"
그러자 주백통은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여편네를 얻은 사내들은 하나같이 피로해하고 힘들어 하더구먼. 그러니 여편네는 얻어 뭘 하겠나?"
거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흘끔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 툭툭 먼지를 털었다.
"책을 사지 않을 거요? 생각이 없으면 난 가겠소."
"아니, 아니, 기다려. 나도 함께 갈 테니."
"가기는 어딜 가요? 무엇 하러?"
거지는 마땅찮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사! 산다니까!"
"그럼, 은자가 있나 먼저 좀 보여 봐요. 당신한테 은자가 있어야 데리고 가도 갈 거 아니오."
그러자 주백통은 한참이나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은자를 한움큼이나 꺼내 거지에게 보여 주었다. 세 보니 삼십 냥 남짓했다.
"됐구나, 됐어. 이젠 그 《구양진경》은 내 것이다."
주백통은 어린애같이 펄쩍펄쩍 뛰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그 《구양진경》을 드릴 테니 먼저 은자를 주세요."
주백통은 의심하지도 않고 은자를 톡톡 털어 그 거지에게 다 내주었다. 그러자 거지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사형에게 칭찬을 들을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 건들건들거리며 줄레줄레 거지를 따라갔다.
거지는 주백통을 데리고 거리를 벗어나 내처 걸어갔다. 사위를 살펴보니 갈수록 황량한지라 주백통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책은 어디 있나?"
"뭐가 그리 급해요? 그냥 따라오면 될 건데."
거지는 발걸음을 다그치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걸어서야 한 낡은 절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는 불상들은 너무도 헐망하여 이젠 그 형상조차 알아보기 힘들었고 머리에는 군데군데 삼 검불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거지는 그
절이 아주 익숙한 듯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나 주백통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지라 선뜻 들어가지를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잠시 후 그 거지가 절 문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 말했다.
"왜 안 들어오고 게서 계시오? 들어오세요! 아, 어서 들어오라니까!"
"낡은 절간엔 왜 들어가자고 그래?"
"두려워서 그러시오? 두려우면 관두시구려. 당신은 《구양진경》을 가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려."
"난 이미 돈을 다 치렀으니 어서 그 책을 갖고 나오게."
주백통은 한 발짝도 떼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제가 어찌 그 책을 갖고 대처로 떠돌겠소? 그러다 이 목숨 다 날려 버리라구요? 난 그 책을 이 절에다 숨겨 두었소. 그러니 그 책을 가질 양이면 어서 들어오란 밖에. 함께 책을 파내야 하니까."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대뜸 되물었다.
"그래, 자넨 그 책을 땅 속에 파묻었단 말이지?"
"당신은 보기보단 총명하군요. 들어와 보시면 알게 돼요."
주백통은 하는 수 없이 거지를 따라 절 안으로 들어갔다. 절간은 바깥에서 볼 때도 헐망하기 그지없더니 정작 안으로 들어가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낡아 버려서 눈앞이 다 산란하였다. 뿐더러 냄새까지 코를 찔러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이구, 이거 정말 못 참겠다. 그래, 그 책을 어디에다 묻었지? 어서 파내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네."
그러자 거지는 정색을 했다.
"당신이 직접 파내세요."
주백통은 영 마뜩치 않으면서도 이 거지와 실랑이를 하느라고 시간을 끌기 싫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과연 무슨 표지가 한 개 보였다.
'그렇구나. 저 거지가 거짓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형 말씀이 《구음진경》을 얻을 때도 그 주변이 아주 괴이하더라고 하셨지. 이곳은 딱히 이렇다 하게 괴상하지는 않지만 사문(邪門)의 맛이 좀 나는군.'
주백통은 거지를 돌아다보며 손가락으로 표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래요, 거기요! 파기만 하면 됩니다."
주객전도라더니 거지는 이제 꼿꼿이 서서 자못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주백통은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갈 욕심으로 대거리를 할 염도 내지 않고 허리를 굽히고는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팠을까. 한참을 팠는데도 무슨 《구양진경》 따위는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그는 점점 성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단박에 머리를 들고 돌아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십여 명 되는 사람들이 뒤쪽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모양도 아주 괴상한 것이 사내들은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분을 가득 처바른데다 저마다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고, 반면 여인들은 어찌나 크고 뚱뚱한지 마치 작은 산봉우리처럼 울뚝불뚝 솟아 있었다. 주백통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라 입이 딱 벌어져서 소리쳤다.
"누구냐? 여긴 뭣 하러 왔느냐?"
주백통은 한편으론 저쪽의 기색을 살피면서도 방금 파던 구덩이를 얼른 몸으로 가렸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뭘 파는 거지요?"
살집이 터져 나갈 듯이 뚱뚱한 여인이 주백통을 보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주백통은 얼버무렸다. 그러자 여인은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커다란 볼우물이 푹 패었다.
"기서를 파내려는 거지요? 《구양진경》을? 안 그래요?"
주백통은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고함을 쳤다.
"아무리 파 보아도 왜 없나 했더니 그쪽에서 벌써 파 간 거 아냐? 맞아, 너희 년놈들이 파 갔지? 어서 내놔. 그 책은 내가 은자 삼십 냥을 주고 산 거야. 비겁하게 훔쳐가다니, 어서 내놔!"
여인은 온몸을 흐들거리며 더욱 요란스레 웃어댔다.
"당신은 전진교 사람이지요?"
"내가 전진교 사람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주백통은 심통이 나서 내쏘았다.
"당신은 전진교 사람이고 주백통이지요?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 아니에요?"
"그러는 네 년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내 사형을 들먹여?"
주백통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짐짓 더욱 성을 내며 외쳐댔다.
"난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어요. 난 당신의 사형께서 기서를 두 권 얻은 것도 알고 있지요. 그 기서는 《구음진경》인데 그분은 그 책을 자기가 갖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천하의 무림 사람들을 모두 화산으로 불러다가 무예 시합을 벌여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그걸 내주기로 했다면서요? 그렇지요?"
뚱뚱보 여인은 가슴을 쓱 내밀고는 딱부러지게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죠? 아신다면 아마 당신은 아주 놀랄 거예요. 난 대환희 보살이에요! 벌써 알고 계실 텐데?"
주백통은 대번에 안색이 핼쑥해졌으나 사뭇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아아, 거기가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었구먼그래. 그래 운남 사람이 중원엔 뭣 하러 왔나?"
대환희 보살은 주백통이 자기에 대해 알은척을 하자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목에 힘을 주었다.
"당신 사형께서 나더러 천리나 되는 이 중원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난 그저 온 게 아니라구요. 그 《구음진경》은 꼭 내 것이 될 거예요."
"《구음진경》차지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걸. 당신은 화산에 몰려든 천하의 영웅들을 다 이겨야만 그 《구음진경》을 가져 갈 수 있어!"
주백통은 겁이나 잔뜩 집어먹으라고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대환희 보살은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백통, 중원 무림과 천하의 군웅들 중에서 누가 제일 무예가 출중하다고들 하던가요?"
보살은 한담이나 즐기려는 사람마냥 여유작작하게 물었다. 주백통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러는가 의아해하면서도 말을 꺼냈다.
"잘 모르긴 해도 사형 말씀에 의하면 동해 도화도주가 일괴(一怪)이고,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도 일패(一霜)라고 하더구먼. 나머지는 그리 대단치 않다더군. 가만있자, 그리고 또 두 사람이 더 있는데……."
"그 둘 중에 내가 있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살은 눈을 크게 뜨며 낚아채듯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주백통은 멀뚱거리며 반문했다.
"우리 사형 말씀이 운남의 한 문파 중에 대환희 보살이라는 문파도 있다더군. 그 여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독약을 사용할 줄 아는데 그 독이 아주 지독하다고 하시더니, 그게 당신을 두고 한 말인가?"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사형은 비록 무예가 천하 으뜸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약을 피할 순 없을 거예요."
대환희 보살은 가슴을 쭉 펴며 사뭇 거들먹거렸다. 주백통은 여기서 이렇게 한담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됐어. 난 당신들과 떠들고 있을 사이가 없어. 그만 가야겠어."
그리고는 그는 대뜸 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백통이 채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아 뚱뚱보 여인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왜 이러는 거야?"
주백통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그저 왕중양한테 이 한마디를 전하려고 그럴 뿐이에요. 사제가 내 손안에 잡혀 있으니 《구양진경》을 내놓으라고!"
그러자 주백통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허튼소리! 네 년이 내 《구양진경》을 가져 가고도 또 《구음진경》까지 탐내? 《구음진경》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낡은 절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당신은 듣던 대로 참말로 완동이로군요. 당신은 그래 이 낡은 절 안에 《구양진경》인지 하는 게 정말 있다고 믿었단 말이오?"
"무슨 소리냐? 그럼 《구양진경》이 없단 말이냐? 영감이 있으면 마누라가 있게 마련이고 사내가 있으면 계집도 있게 마련이거늘 《구음진경》이 있는데 《구양진경》이 왜 없어? 그게 뭐가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자 뚱뚱보 여인 하나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바보 같으니. 《구양진경》이 있다고 한 건 다 속임수였다! 네 놈을 속여 이 절간으로 끌고 오려고 속임수를 쓴 거라구!"
"뭐라구? 이 비겁한 년들! 너희 년들이 작당을 해서 날 꼬여내?"
주백통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년들아, 너희 년들은 상대하기도 싫으니 냉큼 물러서라. 내 일평생 속임수라곤 써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어서 비켜! 썩 물러서지 않았다가는 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투실투실한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고야 말겠어, 괘씸한 년들!"
주백통은 길길이 날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더 불을 지르겠다는 심보인지 보재기 터지듯한 웃음을 토해냈다.
"주백통, 네 놈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내 더이상 《구음진경》은 상관 안 하고 그대로 물러가지! 하나 그게 그리 쉽지 않을걸!"
"흥, 그래? 그런데 어쩌나? 우리 사형은 《구음진경》을 천하에 덕 있는 사람에게 준댔지, 가장 뚱뚱한 사람에게 준다고는 안 하시던데."
대환희 보살은 그래도 여전히 깔깔거렸다.
"호오, 그렇다? 한데 네 녀석은 살집이 많은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그녀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다.
"우린 좋아요! 여인은 뚱뚱해야 좋아요! 여인은 역시 보살님이 최고지요."
주백통은 그 소리를 듣고는 사내들을 쏘아보면서 허리를 꺾어 가며 죽겠다고 웃어댔다.
"왜 웃는 거냐?"
보살은 무섭게 주백통을 쏘아보았다. 주백통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 가며 되물었다.
"아이고, 기가 막혀……. 아이고, 나 죽겠다……. 그래, 어디서 이렇게 많은 괴물들을 주워 모았나?"
그러자 한 사내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주백통, 감히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놀려? 너희 전진교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너희 교주 왕중양은 줄곧 명예욕에 들떠 강호의 패주가 되려 하는데, 그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난 화산에 네 놈의 시체를 널어 놓아 왕중양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검을 쓱 뽑아 들었다. 꼴은 그래도 검을 뽑아드는 품새에선 사뭇 명가의 기백이 풍겨 나왔다. 대환희 보살이 무어라 소리치자 그자는 즉시 온순한 고양이처럼 조르르 대환희 보살 앞으로 달려갔다. 보살은 살이 투둑투둑 찐 손으로 그자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면서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괴묘아(乖猫兒)야, 네가 저 놈을 이겨야 한다. 이기면 상을 톡톡히 줄 테니."
사내는 마치 큰 금덩이라도 얻은 것마냥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연신 헤헤거렸다. 그러더니 주백통 쪽으로 돌아서서 호기롭게 소리를 내지르며 똑바로 검을 찔러 왔다.
"네 놈, 목숨을 내놓아라!"
주백통은 실로 가소로울 뿐이었다. 모양이나 차리고 나섰을 따름이지 일단 자기가 손을 쓰기만 하면 한 주먹거리도 안 돼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그자의 검은 날쌔기 그지 없었다. 어찌나 빨리 휘두르는지 주백통은 방어만 하면서 몇 차례 피하다가 옷깃까지 찢겨 나갔다.
"큰일났구나, 큰일났어. 살인이야! 이 놈이 사람 죽인다!"
주백통은 엄살을 떨어댔다. 대환희 보살은 신이 나서 응원을 했다.
"옳지, 괘묘아야. 저 놈의 몸에 구멍 몇 개만 뚫어 놓고 죽이지는 말아라. 저 놈을 죽이면 왕중양이 우리한테 《구음진경》을 내어 주겠느냐?"
사내는 대환희 보살의 명을 듣더니 이제는 사뭇 조심스럽게 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검법은 날쌔고도 정확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주백통은 한 번도 공격을 들이대지는 않고 검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네 놈이 자꾸 핍박하면 나도 선천신공을 쓸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어서 손을 거두어라!"
"좋아, 네 놈이 참말로 선천신공을 안다면 한번 써 보려무나. 저 애가 모자라면 그땐 내가 나서지."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대번에 나섰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선천신공을 보고 싶어 조급증이 났다.
주백통은 일단 싸움을 멈추면 중상을 입을 것 같아 큰소리로 말했다.
"사형!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핍박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아야 하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냅다 주먹을 휘둘어댔다. 다음 순간 주먹은 빗발같이 번쩍거리는 검도 사이를 뚫고 상대방의 콧등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며 사내의 코가 단박에 뭉개지고 피가 솟구쳤다. 사내는 악 소리를 지르며 검을 떨어뜨리고는 코를 싸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주백통은 여유만만하게 한마디했다.
"자넨 공동파구먼. 자네 검법은 속도가 빠르기는 해도 서른두 가지 초수 중 한 가지가 틈이 있어. 그래서 지고 만걸세."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대환희 보살이 히히덕거리면서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내 일러 줄 게 있으니."
그러자 사내는 오금을 못 펴고 쭈뼛쭈뼛 대환희 보살 앞으로 다가갔다. 보살은 사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적이 정겹게 말했다.
"나의 보배야, 너의 검술은 형편이 없구나. 넌 정말 하나도 쓰잘데가 없어."
"전…… 전……."
사내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는 꺽꺽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대환희 보살은 더욱 살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놀라지 마라, 놀라지마! 내 말에 겁이 났느냐? 그러지 말고 어서 가까이 와, 가까이 오라니까……."
그녀는 식지를 까딱거려 사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겁을 내진 마라. 내가 너의 목을 살짝, 아주 살짝 쓰다듬어 줄 테니까."
그리고는 그녀는 사내의 목을 살살 어루만졌다. 잠시 후 사내는 별안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공중으로 퐁퐁 몇 번이나 뛰어올랐다. 사내는 두 눈을 홉뜨고 보살을 노려보았다. 삽시에 그의 눈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사내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씩 토해냈다.
"네, 네 년은 정말 지독하군, 지독해! 네 년은 나 보고…… 나를…… 네 년은……."
"그럼, 한때는 널 잘 대해 주었더랬지. 하지만 그까짓 왕중양의 사제마저 대적해 내지 못하니 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야. 네가 죽은 뒤 내가 대신 복수해 주지! 그럼 됐지?"
대환희 보살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사내는 더는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대환희 보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코와 입과 눈에서는 연신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마침내 그는 풀썩 꼬꾸라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단 말인가? 왜 저 사람을 죽이는 거냐?"
주백통은 큰소리로 외쳐댔다.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주백통을 보고 싱긋 웃었다.
"자넨 달리 대해 주지. 자네가 날 따르기만 하면 늘 살갑게 대해 주겠어."
주백통은 코대답도 않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에잇, 더러운 것들! 난 가겠어!"
주백통은 워낙 여인들과 주고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더구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 널브러지는 걸 보고는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흥, 그렇게 마음대로 갈 수 있을까?"
대환희 보살이 손을 까딱거리자 난쟁이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느물느물한 것이 눈은 짝 찢어지고 보기에도 역겨운 몰골이었다. 난쟁이는 주백통을 노려보며 앵앵댔다.
"서랏? 가지 말라는 보살님 말씀도 듣지 못했느냐?"
주백통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날리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몸을 홱 솟구쳐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 넘었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경공은 가히 상승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어찌 된 영문인지 난쟁이는 여전히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천하에 기이한 기충이다! 넌 날 알고 있느냐?"
난쟁이는 한껏 조롱거리는 투였다.
"알게 뭐야."
주백통은 같잖다는 듯 코대답을 하고는 마냥 내달렸다. 그러나 채 십여 보도 못 가서 갑자기 머리 쪽이 무거워지고 발 쪽이 가벼워지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손뼉을 쳤다.
"잘했어, 잘해. 놈을 이리로 끌고 오너라."
누군가가 다가와 주백통을 덥석 거머쥐려다가 흠칫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주백통은 그 경황에도 의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거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거지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얼굴이 아주 노쇠해 보였다.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그는 주백통에게서 눈길을 돌려 사내들을 바라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자네들은 어디 사람들인가? 어째서 낯짝을 귀신같이들 하고 다녀?"
"이 거지 같은 놈아, 상관 말고 저리 꺼져!"
한 사내가 기분이 상해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 거지는 더욱 흥을 내며 거들먹거렸다.
"좋아, 난 지금 화산에 가서 재미난 구경을 하려던 참인데, 이렇게 쉬었다 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싸우고 싶거든 어디 덤벼 봐."
'보아하니 저 사람도 화산 무예 시합에 가는 모양이구나. 복색으로 봐선 개방 사람임에 틀림없어. 듣자니 개방에는 두 사람이 무예가 뛰어나다고들 하던데. 한 사람은 전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임 방주 홍칠공이라고 했지 아마. 한데 이 사람은 나이가 많지 않으니 개방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슨 큰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대환희 보살은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는 친절하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오는 거요?"
그러자 거지도 악의 없이 대답했다.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기에 구경이나 할까 해서 오는 길이오. 한데 가다 보니 여기서 북새통을 벌이고 있기에 궁금해서 좀 들여다봤소."
대환희 보살은 기색으로 보나 품새로 보나 개방의 그 두 방주는 아닌 듯싶어 단호히 명령했다.
"저 놈을 죽여 버려."
그러자 일곱 사내가 병장기를 들고 척 나섰다.
한 사람은 두 손에 창을 들고 있었는데 왼손에 든 창은 길고 오른손에 든 창은 짧았다. 그는 쌍창을 일제히 내밀며 가슴과 머리를 겨누어 똑바로 찔러 왔다. 또 한 사내는 사슬망치로 목을 겨누고 치달려 왔다. 그 사슬에 목이 감기기만 하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은 쌍장으로 목을 겨누며 일곱 가지 초식을 연거푸 이어 대며 흉악하게 달려들었다. 그 밖에 세 놈은 단도를 들고 일제히 두 어깨를 노려 질풍같이 내달았다. 마지막으로 난쟁이 똥자
루만한 녀석만은 손을 쓸 생각도 않고 멀찌감치 서서 비위 상하게 웃고만 있었다. 놈이 바로 충피였다.
전후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주백통은 몸을 일으키더니 발을 동동 굴러 가며 큰소리로 한탄을 했다.
"글렀구나, 글렀어. 괜히 참견할 게 뭔가? 그러니 목숨을 잃게 됐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놈들의 병장기가 저절로 절컥절컥 움직이며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돌연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모두들 한 발자국씩 비틀비틀 물러섰다. 여섯 사내들은 일순 얼떨떨해져서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거지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손짓 한 번 안 하는데도 일순 병장기들이 여섯 놈들 손에서 스르르 빠져 나가더니 마구 얼크러지며 공중으로 휙휙 날아다녔다. 창은 다
른 놈의 어깨와 땅바닥에 박히고 사슬망치는 들고 있던 놈의 목에 감겼다. 놈은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맥없이 두 팔을 너풀거렸다. 누가 풀어 주지 않으면 질식할 판이었다. 쌍창을 휘두르던 놈은 팔이 부러진 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도 모르고 멍청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거지는 정색을 하며 장풍을 내치려던 사내에게 외쳤다.
"네 놈은 장법을 쓰기에 다른 놈들보다 운수가 좋은 셈이다. 대신 네 놈이 날 기습하려 했으니 내 네 놈 손을 좀 손봐 줬을 뿐이다."
대환희 보살은 깜짝 놀라 생각을 더듬었다.
'저 놈이 손을 쓰는 게 왜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 놈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저자는 바로 홍칠공이다. 방주라고 해서 꼭 나이가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쌀쌀한 어조로 짤막하게 외쳤다.
"그대가 홍칠공인가?"
거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13장 치주를 찾다가 닥친 조우
단지흥과 네 시위들도 대리를 떠나 화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궁을 나선 김에 혹시나 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붙잡고 2년여 전에 사라진 치주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녀는 돌연 궁에서 사라진 뒤로는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만약 일속이 있었다면 당연히 함께 동행했겠지만 그 역시 행방이 묘연하여 단지흥은 네 시위만을 데리고 떠나왔던 터였다. 치주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찾아보겠노라고 천룡사를 떠난 일속은 그 참에 왕중양을 찾아가
《구음진경》을 한번 구경하겠노라고 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어쨌든 그는 자기를 위해하려는 누군가가 치주를 납치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단지흥은 치주가 일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녀를 못 잊고 가슴을 앓고 있었다. 화산에는 강호의 각 문파들이 다 모여들 터, 화산에 가면 치주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그들은 밤을 도와 발길을 다그쳤다.
마침내 화산 아래에 당도해 보니 그곳은 이미 산지사방에서 한다하는 무림 인사들이 다 모여들어 자못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단지흥은 형세를 살피고는 네 시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치주가 실종된 건 필시 강호 누군가의 짓일 터, 우리에게 아주 불리할지도 모르네. 각별히 조심들 하게."
그들은 화산 아래에 있는 작은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목도진(木桃鎭)이라고 하는데 가옥이 약 2백 여 호쯤 되는 곳으로 이즈음 전에 없이 술렁대고 있었다. 단지흥은 이곳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 생각이었다.
이곳에는 객점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일행은 객점으로 들어가 술과 요리를 시키고는 주위를 살폈다. 별다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상이 차려지고 막 먹으려 하는데 객점 안으로 한 사 람이 성큼 들어섰다. 장작개비처럼 빼빼 마른 꺽다리였다. 그는 문어귀에서부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아, 싸다 싸! 구슬 사시오, 구슬! 자, 싸구려, 싸!"
그 사람은 유독 단지흥 일행을 주시하면서 그쪽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하나 네 시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평소 단지흥이 엄하게 단속한 바 있어 시위들은 귈 밖에서는 대개 남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더욱이 중원 땅에서는 중원의 관습에 익숙치 않은 터라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시끄러운 시비에 휘말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더군다나 객점에 와서 구슬을 사라고 소란을 피우는 게 수상쩍어 아예 못 본 척 거
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목이 터져라 싸구려를 외쳐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이처럼 훌륭한 구슬도 사려는 이가 없으니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치인(痴人)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치인이야 치인, 사람만 알고 구슬은 모르니 치인인가 치주(痴珠)인가?"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무심코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구슬 주자와 어리석을 치자를 합쳐 치주라고 하니 바로 그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얼른 시위들의 기색을 살폈다. 그들도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단지흥이 앞장서서 잰걸음으로 객점을 나왔다. 시위들도 뒤따라 문을 나섰다. 거리에 나서니 그림자 하나가 얼핏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발밑에서 바람소리가 나도록 황급히 뒤쫓아 갔다. 그러나 시위들은 다소 떨어져서 걸음을 늦잡으며 짐짓 여유롭게 뒤따랐다.
한참이나 뒤쫓아서야 단지흥은 먼 곳에서 늘쩡늘쩡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단지흥은 그가 거리를 벗어나는 것이 좀 의아했으나 행적이 괴이할수록 더욱 치주의 소식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아 급히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가 거의 따라잡을 만했을 때 갑자기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여유작작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 뒤를 쫓는 겁니까?"
단지흥은 그렇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대번에 치주 얘기부터 꺼낼 수도 없어 그는 말을 돌렸다.
"방금 술집에서 구슬을 팔겠다고 했소?"
그 사람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구슬을 팔려고는 합니다만 당신 같은 사람한텐 안 팔겠습니다. 사라고 할 땐 안 사더니……. 그런데 참말로 구슬을 살 생각이 있긴 있는 거요?"
"글쎄, 당신이 파는 구슬이 어떤 구슬인지 몰라서……. 동주(東珠)요, 야명주요, 식주(飾珠)요? 아니면 벽독주(酸毒珠)?"
"그런 건 아니오."
구슬 장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래도 단지흥은 여전히 인자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견식이 짧기에 더 좋은 구슬이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오. 하지만 나한테 은전은 넉넉히 있으니 우선 구슬이나 한번 구경합시다."
"이렇게 따라와서까지 사겠다면야 못 팔 것도 없지요. 하나 번거롭게 보이고 어쩌고 하진 않겠소."
단지흥은 잠시 망설였다. 이 사람이 치주의 행방을 참말로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만일 치주의 행방을 모른다면 공연히 구슬만 사게 되는 꼴 아닌가. 그러나 단지흥은 의심이 들수록 더욱 공손히 물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보여 주오!"
그 사람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구개를 저었다.
"글쎄, 안 된다면 안 돼요! 당신도 이미 본 적이 있는 물건인데 괜스레 다시 보겠다고 우기는군. 사려면 그냥 사지 시끄럽게 굴지 마시오."
단지흥은 한층 의아심이 들었다. 그때 얼핏 네 시위가 당도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멀찌감치 흩어져서 단지흥의 손끝 하나라도 다칠새라 뚫어지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좋소, 당신의 구슬을 사겠소!"
"살려면 사슈, 은자나 내놓고."
"그래 구슬 값이 얼마요?"
"에누리없이 팔만 냥이오."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자약하니 말을 받았다. 단지흥은 내심 더욱 의아해지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마냥 여유롭게 물었다.
"당신의 구슬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소만 물건을 보이지도 않고 팔만 냥이나 부르다니……. 너무한 것 아니오?"
"나나 되니까 팔만 냥이지 딴사람한텐 배를 주고도 못 살 거요. 그래, 사시겠소, 안 사시겠소?"
양 옆구리에 떡하니 손을 짚고 쌀쌀한 얼굴로 비껴 서 있는 품이 아무래도 무림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의 팔은 사뭇 단단해 보였다.
'보아하니 호수(好手)인 것 같군!'
단지흥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 호수들은 대체로 침착하고 태연자약하다. 천룡사에도 고선 장로라는 고승이 하나 있는데 그는 십여 년 동안이나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서 한 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는 일에서나 사물의 도리를 깨치는 일에서나 대리에서는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수행을 쌓아 끝내 성과(聖果)을 이루었다.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단지흥은 웬지 저도 모르게 고선 장로를 떠올렸다. 고선이 수행을 쌓듯이 이 사람이 무학을 터득했다면 필시 높은
경지에 올랐으리라. 단지흥은 선뜻 응답했다.
"좋소, 내가 사겠소. 그런데 창졸히 떠나오다 보니 그렇게 많은 은자를 갖고 오진 못했소이다. 여기에 물건 두어 개가 있으니 당신이 팔만 냥이 될지 한번 보시오."
그는 흥정을 하는 체하며 몸을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그 사람은 단지흥이 하는 양을 쌀쌀하게 지켜 보았다. 단지흥은 먼저 머리에 쓴 모자에서 옥성(玉星)을 끌러 내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은 진짜 옥이었는데 수만 냥은 족히 넘는 것이었다. 그는 또 허리띠에서 구슬 한 알을 뜯어냈다. 이 구슬은 창산 이해의 정안주(定顔珠)로서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는 또 생각을 굴리다가 품속에서 부채를 꺼냈다. 이 부채도 값을 헤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
다.
"이만하면 안 되겠소?"
단지흥이 묻자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쓱 건더다보더니 별다른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겨우 될 것 같긴 한데……. 좋소, 날 따라오슈."
그 사람은 더 이상 뭘 물을 틈을 안 주려는 듯 홱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단지흥은 묵묵히 따라갔다. 네 시위도 멀찌가니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구슬 장수는 오랫동안 걸어서야 한곳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단지흥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날 놓치지 말고 단단히 따라오시오."
그리고는 몇 발자국 걸어가 나무 뒤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단지흥도 그 사람 뒤를 따라 나무 뒤쪽으로 잽싸게 걸어갔다. 그랬더니 일순 난데없이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흥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하여 거세게 도리질을 치면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것만이 몇 점 가물거릴 뿐이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꼭 지옥에라도 온 것 같군. 무슨 괴상한 것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슬 장수는 이제 더는 한마디도 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단지흥은 놓칠세라 얼른 내달아 그 뒤에 바싹 붙어 서서 걸어갔다.
꿈에서도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이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도시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은 단지흥에게 바싹 달라붙어 주위를 맴돌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 사람 아니면 귀신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한 순간 구슬 장수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웬 높직한 단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 위엔 늙은 노파가 하나 앉아 있었다. 길다란 머리를 당조 때 유행하던 식으로 양쪽 귀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사람 같지 않았다. 얼굴은 길쭉하니 말상이었다. 낯빛이 끔찍하리만치 창백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마치 원귀가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자넨 누군가?"
노파는 사뭇 위엄이 있어 보였다. 단지흥은 겸손히 답했다.
"소인은 대리 사람입니다."
"무슨 사람? 이거야, 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대리 사람이건 중원 사람이건 여하튼 조만간 다 이곳에 오게 돼 있어. 어디 사람이든 마찬가지야. 한데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나?"
아무래도 중원 말씨는 아니었다. 단지흥은 정중하게 되물었다.
"노파는 누구십니까?"
그러자 노파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말했다.
"자넨 저승과 지옥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나? 이곳이 바로 저승으로 가는 입구일세. 사람들은 이곳을 망향대(望鄕臺)라고들 하지. 한번 올라와 보려나?"
노파의 말을 듣고 단지흥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내가 죽었단 말인가? 언제? 어찌하여 내가 이 지옥의 망향대에까지 오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난 그 사람을 따라 치주를 찾으러 온 것이다.'
"한 선생이 소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저에게 치주를 팔겠다고 했지요. 저는 죽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흥은 당혹스러워서 황급히 몇 마디 주워섬겼다. 그러자 노파는 눈을 부릅떴다.
"난 백여 살을 살았는데 무슨 일이든 안 겪었겠나? 내가 뭣 하러 자넬 속여? 자, 어서 이리로 올라와 봐! 올라오기만 하면 내 말을 믿게 될 테니. 여기서는 대리도 볼 수 있다구."
노파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망향대로 끌어올렸다. 망향대 위에 올라서니 아래로 구름송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아주 먼 곳까지 내려다보였다. 운무 사이로 멀리 죽루화동(竹樓晝棟)이 보였는데 그 어름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닌게아니라 대리였다. 단지흥은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짧고 짧아 천추가 한 순간이라더니 참말로 그 말이 맞구나. 한데 언제 어떻게 죽은 게야? 도시 믿기지 않는군……. 듣기로는 몽약(夢藥)이라고 꿈속을 헤매게 만드는 약이 있다더니 내가 혹시 그 약에 중독된 건 아닐까…….'
그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찌푸리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곽들은 보일락말락 희뿌연하고 사람의 그림자도 그저 조그맣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더 똑똑히 볼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파는 비시시 웃었다.
"자세히 보겠다구? 자세히 봐서 뭘 하나? 자넨 이젠 죽은 몸이라 망향의 일념이 가득할지라도 어렴풋이밖에 볼 수 없는 거라네."
단지흥은 평소 불경을 좋아했는데 그중 《금강경(金剛經)》을 제일 즐겨 읽었다. 사람들은 《금강경》을 읽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들 했는데 어찌하여 자기는 부처님을 만나 보지 못하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하는 건 불심이 깊지 못해서일까…….
'부처님을 믿어야만 한다, 믿어야만 한다! 부처님의 힘은 끝간 데없이 미치거니 어찌 감히 볼 수 있다고 내가 이리 흔들린단 말인가?'
단지흥의 얼굴엔 짙게 그늘이 비꼈다. 노파는 대번에 그의 심사를 알아챘다.
"여보게, 자넨 어째서 이곳까지 끌려왔는가?"
그 순간, 멀리에서 초롱불이 가물가물 비쳐 왔다. 그리고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세 보니 열여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하나둘 얼굴도 또렷이 보였다.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을 보고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같이 천하 절색이 아닌가. 그녀들은 저마다 궁등(宮 )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마침내 단지흥 앞에 가까이 와 서더니 개중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제 폐하, 어서 용차(龍車)에 오르세요!"
'무슨 용차를 타란 말인고? 용차가 어디에 있다고……. 그렇지, 이전에 경전을 배울 때 누군가 불가의 인도를 받아 용차를 타고 천정(天庭)에 올랐다고 하더니 나도 이제 그렇게 되는 모양이로구나.'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의연히 허공으로 발을 올렸다. 그러자 과연 눈앞에 용차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용차에는 말을 네 필 맸는데 두 마리씩 짝을 지어 굴레를 씌워 놓았다. 마부는 묘령의 여인으로 단지흥이 차에 오르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단지흥은 마치 인간세상에 돌아온 듯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금은주옥이 가득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마치 걷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시위는 어찌 되었을꼬. 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찾고 있을 테지…….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그들을 대리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원하리라.'
한 순간 덜컥하더니 마차는 나는 듯이 내달렸다.
그렇게 한 나절이나 달려서야 마차는 어떤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맨 처음 말을 건넨 여인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도하였으니 폐하께선 어서 내리시옵소서."
단지흥은 마차에서 내려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저만치에 옥선원(獄仙園)이란 명패가 보였다. 옥선원 안에는 기이한 화초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는데 모두 대리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장미와 등나무를 접목시킨 것인지 등나무에 장미꽃이 만발해 있기도 했다. 만화방초가 우거져 춘색이 짙었다.
'이곳은 대리에 비겨도 손색이 없구나. 이곳의 꽃들이 조금 희귀하긴 하지만. 하나 차 꽃이 일제히 만발하는 대리의 그 진세(陣勢)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
여인들은 그를 옥선원 안 화청(花廳)으로 안내해 들였다. 그곳에는 옥석으로 된 화분 몇 개가 있었는데 거기에 비단을 씌워 놓았다. 저승의 제왕도 사치를 즐기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흥은 보는 것마다 속세와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화청에는 이십여 개의 궁등이 걸려 있었다. 궁등의 색깔은 모두 검었다. 무슨 기름으로 칠했는지 자못 기이했다. 단지흥이 궁등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보고 좀전의 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 궁등은 사람의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거랍니다. 나쁜 짓을 한 자들의 기름이어서 불을 켜면 검은 연기가 많이 나지요."
단지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되물었다.
"왜 좋은 사람의 기름은 쓰지 않소?"
그러자 여인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황제께선 재미있으시네요. 좋은 사람은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유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왜 그런 사람들의 기름으로 등불을 켜겠어요?"
단지흥도 풍류를 즐기는 황제였다. 평소 그는 귀비들과 후원을 거닐며 한담을 나누길 좋아했었다. 그는 그 나날들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양세(陽世)가 아닌 이곳 음세(陰世)에서 남의 미움을 사면서 고생할 생각을 하니 갈수록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인은 다소곳이 그의 곁에 서 있다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일렀다.
"황제 폐하, 기억해 두세요. 누가 와서 폐하를 찾을 거예요.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응하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시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되고 폐하의 황족들한테까지 화가 미칠 수 있어요."
단지흥은 저승에까지 온 몸인데 이제 와서 얼마나 더 큰 재앙을 만나랴 싶었으나 황족에게까지 화가 미칠 수 있다는 말에는 근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여인들은 물러가고 그만 홀로 가슴을 졸이며 초조하게 서있었다.
이윽고 잘랑잘랑 장신구 부딪는 소리가 언뜻 들리더니 누군가 가까이 오는 듯 그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곧 향내가 풍겨왔다.
'그래, 이젠 드디어 지옥의 제왕이 오는 모양이로구나. 한데 지옥의 제왕은 필시 사내일 텐데 무슨 향내가 이리도 그윽하단 말인가?'
단지흥은 웬지 몽롱해지면서 생각을 더듬었다. 이윽고 사람의 자취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발걸음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녀는 단지흥에게 예를 갖추며 정중히 말했다.
"황제 폐하, 오시느라고 신고가 많으셨습니다."
단지흥은 그 눈부신 자태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언뜻 눈길을 들었다. 그 여인을 바라본 순간, 그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여인은 바로 치주, 치주가 아닌가. 사내의 간장을 녹이던 그 교태 어린 웃음까지, 그녀는 틀림없는 치주였다. 단지흥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심하게 가슴이 고동쳐서 도무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은 치주 같으면서도 치주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치주는 좀
살이 올랐으나 여인은 여위었고, 치주는 무던한데 여인은 사뭇 영민해 보였다. 치주가 웃을 때는 볼우물이 약간 팰 정도지만 이 여인은 아주 쾌활하게 웃는 것이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옷도 치주가 입던 옷과는 썩 다른 것이었다.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시겠습니다. 어서 쉬셔야 할텐데 제가 바삐 지내다 보니 그만 접대가 늦어졌습니다.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단지흥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과히 신경 쓰지 마시오! 한데 이곳은 어디오?"
그러자 그 여인은 또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문을 열었다.
"지옥에는 칠중천(七重天)이 있는데 폐하께선 지금 그 첫번째 중천에 계시옵니다. 다른 말로 이곳을 망우천이라고도 하는데 지옥에서 가장 향락을 누릴 수 있는 곳이지요. 이곳에 이르러 갖은 향락을 다 누리고 나서 때가되면 누군가가 와 데리고 갈 겁니다. 그때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이는 서방(西方)으로, 도교와 인연이 있는 이는 선경(仙境)으로 가게 될 것이에요. 오로지 이곳에서만 속세에서 받아 오던 번거로움에서 해탈되어 훌륭한 보응을 받게 되지요."
아무리 견식이 넓다 한들 단지흥은 지옥은 처음 오는지라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그는 묘령의 이 여인에게 그저 머리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여인은 섬섬옥수로 단지흥을 가볍게 건드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단랑(段郎)님, 저는 당신이 평소에 선덕(善德)을 많이 베풀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던들 당신은 이런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실 거예요. 이곳의 모든 것을 마음껏 향유하세요."
그녀는 단지흥의 손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와 닿자 그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고 기분이 미묘해졌다.
"단랑님, 눈을 감으세요. 저를 따라 낙원 선경으로 가십시다."
단지흥은 불가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지라 눈을 떠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 여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많은 층계를 올라갔다. 속으로 세 보니 팔백 계단도 넘을 듯싶었다. 선경이란 이처럼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인가.
"당도했어요, 폐하. 눈을 뜨세요."
단지흥은 눈을 번쩍 떴다. 너무나 오래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한순간 가물가물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더니 차츰차츰 하나 둘씩 그곳의 정경이 눈에 잡혀 왔다. 그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그만 입이 헤벌어지고 말았다. 눈길 미치는 곳마다 여인, 여인…… 여인 천지였던 것이다. 그녀들은 일제히 두 사람 주위로 몰려왔다. 언뜻 보기에도 대리 황궁의 궁녀들보다 많은 듯싶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미색이 뛰어나고 저마다 교태를 부리고 추파를 던지며 단지흥과 정을
나누고 싶어했다.
"이곳은 천경(天境)인데 무릇 이곳에 와서는 모든 향락을 다 누릴 수 있지요. 인간세상에서는 만사에 규범을 따라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제한도 없으니 걱정 마시고 마음껏 누리세요. 이곳이 진정 선경이지요. 자, 보세요. 이곳이 바로 왕이 성교하는 꿈을 꾸는 곳이랍니다."
함께 온 여인은 단지흥을 바라보며 병풍을 가리켰다.
단지흥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큰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에는 숱한 미녀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미녀들은 하나같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다만 한 여인만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수태를 한 듯 좀 뚱뚱한 편이었다. 단지흥은 그 여인에 대해 물어 보려다가 갑자기 얘기 하나가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꿈에 선녀와 성교했다는 얘기였다.
옛날에 한 선비가 친구와 함께 들놀이를 나갔다가 우연히 어느 헐망한 절에 당도해 그곳에서 병풍을 보게 되었다. 병풍 안에는 머리칼을 풀어헤친 미녀가 그려져 있었다. 선비는 병풍 속의 그 여인을 보자마자 그 미녀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났다.
'내가 만일 저 여인과 단 며칠이라도 아기자기하게 보낼 수 있다면 한평생 원이 없으련만.'
그가 이처럼 달콤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한 순간 그 그림 안에 있는 미녀가 웃으면서 손을 저어 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발을 내밀어 병풍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나 병풍 안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선비는 그제야 자기가 선경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경관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천천히 침대에 올랐다.
두 사람은 그후로도 오랫동안이나 향락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러자 미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에구머니나, 사람들이 와요! 어쩌죠?"
"사람들이 오는 게 뭐 어떻소?"
선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답답하시네요. 사람들이 오면 들통이 나잖아요. 이곳은 선경이어서 들통이 났다가는 큰 화를 입는다구요."
"그럼 어떻게 하지? 어디 숨지?"
선비는 흠칫 놀라며 당황하여 정신없이 허둥거렸다.
미인은 잠자코 생각을 굴리다가 이내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미인은 급히 선비를 침대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미처 한 무리나 되는 미인들이 병풍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미색이 빼어난 선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미인을 대령해 놓고 다짜고짜 캐물었다.
"넌 날마다 이곳에 숨어 뭘 한 게야?"
"뭐 별로요! 한 것도 없어요!"
이 미녀는 능청스럽게 딱 잡아뗐다. 그러자 선녀들이 달려들어 목이며 겨드랑이며 발바닥이며 정신없이 간질여댔다. 그래도 여인은 실토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재수 없게도 나이 어린 선녀 하나가 우연히 허리를 굽히다가 침대 밑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선비를 발견했다.
"아이, 이봐요, 여기에 좋은 물건이 있군요."
선녀들은 와 하니 달려들어 선비를 침대 밑에서 끌어냈다. 끌어내고 보니 사내인지라 그들은 저마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 뒤로 물러서면서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선비는 와들와들 떨면서 단단히 마음을 사려 먹고 백배사죄하며 선녀들에게 호소했다.
"선인을 범했으니 실로 큰 죄를 지었나이다. 이번 한 번만 어여삐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천만 뜻밖으로 선녀들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들에게서 그 무슨 대로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녀들은 선비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참말 영준한 사내를 숨겨 두었구나."
선녀들은 오히려 이 미녀를 부러워하면서 선비와 미녀를 번갈아 보았다. 선녀들은 저마다 선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개중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가장 아름다웠는데 그녀가 선비의 여인에게 말했다.
"넌 이미 시집간 몸이다. 그런데 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서야 되겠니?"
미녀는 고개를 푹 숙일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선녀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모두들 이 여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를 틀어 올려 준다고 성화를 부려댔다. 그녀들은 머리를 빗어 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내는 검을 차고
여인은 머리 단장을 해야 하거니
넌 박씨 감추는 걸 잊지 말고
삼단 같은 머리칼도 틀어 올려야 하리.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사라져 갈 무렵 갑자기 무섭게 우레가 울어댔다. 붉은 옷을 입은 선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이봐요, 선비님! 어서 떠나세요, 어서요! 안 떠나면 큰 화가 미쳐요!"
선비는 크게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숨을 데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문득 붉은 옷을 입은 선녀가 궤짝을 발견하고는 그 모서리 뒤에 숨겨 주었다. 뒤미처 천신(天神)이 하늘에서 곧장 내려왔다. 흉악하게 생긴 천신은 손에 괴상한 칼을 들고 선녀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선녀들은 기겁을 하며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흉악한 천신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선비는 겁이 덜컥 났다. 들키는 날에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병풍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서생, 아직도 안 나오시오? 서생 빨리 나오시오!"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 우연히 지나치다가 병풍을 보니 웬 선비 하나가 궤 뒤에 숨어 사방을 살펴보며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불쌍한 중생을 구제해 주자고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선비는 누가 자기를 부르기에 소리난 쪽을 바라보니 먼 곳에서 중이 애가 달아서 손짓을 해 가며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궤 뒤에서 얼른 뛰쳐나왔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일순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마의 식은땀을 쭉 훑어 내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웬 헐망한 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눈앞엔 병풍이 하나 떡하니 서 있는데 그 안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들이 가득 그려져 있고 개중에서 한 여인만이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부인이 되어 있었다.
단지흥은 세속에서 꿈이라 회자되던 일을 이곳 지옥에서 두 눈으로 뻔히 보게 되자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넋 나간 사람마냥 골똘히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언뜻 머리를 풀어헤치고 엷은 천을 걸친 여인들이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들은 그야말로 한 송이 꽃 같았다. 예닐곱 되는 듯싶었다. 여인들은 그에게 바싹 다가오더니 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냈다. 그리고는 반짝 안아다가 커다란 온천에 들여놓았다. 뜨끈뜨끈한 온천
물에 몸을 담고 누워 있노라니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지흥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미녀들도 가슴만 가린 채 옷을 홀딱 벗고 호호 웃으며 온천물에 뛰어들었다. 그녀들은 단지흥의 혈도를 가볍게 안마해 주었다.
'지옥이 이처럼 좋은 곳일진대 사람들은 지옥을 왜 두려워한단 말인가?'
단지흥은 여인들의 손길이 닿자 차츰차츰 욕정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페하, 폐하께서 제 머리를 틀어 올려 주시지 않겠나이까?"
한 여인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은 언뜻 욕정에 불붙은 듯했다. 그녀의 그 불타듯 한 입술은 단지흥의 가슴에도 거세게 불을 지펴 놓았다.
'지옥도 다를 바가 없구나. 인간들이 원래 이러할진대 난 왜 속세에 있을 때 늘 욕정을 절제했던가? 지옥에서도 이렇듯 사무치도록 욕정을 갈구하게 될 줄 내 어찌 알았으랴?'
처녀는 단지흥의 심사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사뭇 부드럽게 속살거렸다.
"황제 폐하, 저희들은 인간세상의 여인들과 비길 바가 못 되옵니다."
여인은 눈동자를 초롱거리며 물 안에서 단지흥을 꼭 끌어안았다. 여인의 몸은 황홀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단지흥은 아찔하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평소 색을 멀리해 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단지흥은 황제의 체모를 염두에 두고 다소 절제하며 지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에 와서는 속세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인간의 욕망이 뭐가 잘못된 것이랴? 지금까지 욕망을 절제했다면 오늘은 그것을 보상받아 기꺼이 즐겨야 하리라.
네 시위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채 단지흥이 그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까물까물 어두워지더니 땅속에서 연기가 물씬 솟아올랐다.
"큰일났다!"
선비가 소리를 지르며 총망히 뛰어갔다. 나머지 세 사람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화급히 내달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큰 나무 뒤쪽으로 난 발자국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폐하, 폐하!"
네 사람은 경황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안타까이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목이 쉬도록 불러도 단지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흩어져 찾아보자고 입을 모았다.
단지흥은 더없이 즐거웠다. 그는 선대 제왕들 중 유왕(幽王)이 날이면 날마다 황음무치한 생활에 빠져 쾌락만을 좇고 국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책에서 읽고 늘 일상의 교훈으로 삼았었다. 색에 미친 황제가 조국강산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에 통분해 그는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제왕이 아니라 한가로운 망인(亡人)일 따름이다. 조국강산이 그와 무슨 상관이요, 그것을 애써 지킨들 무엇 하겠는가?
그는 향락에 빠져 세상만사 오만 근심 걱정을 다 잊고 있었다. 발밑에도 여인이요, 무릎에도 품속에도 머리맡에도 여인, 여인들이 그를 휩싸고 돌았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살을 섞지는 않는지 그녀들은 한 번도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꿈꾸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왕이 이렇듯 나날을 허비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무릎 위에 앉은 미녀가 눈을 깜박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요? 제왕 노릇 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데 하필 당신이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뭐겠어요?"
단지흥 역시 듣고 보니 일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위에도 맞았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말도 반말투로 나가고 있었다.
"너희들이 이렇듯 잘 대해 주니 상을 톡톡히 주고 싶으나 보다시피 지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만 가지고서도 될까?"
그러자 한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정색을 했다.
"지옥에서는 무보수로 하는 일이란 없지요. 당신에겐 숱한 재산이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기필코 천벌을 받을 거예요."
"그렇담 무얼로 보답해야 하나?"
단지흥은 일순 흥이 깨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어디에선지 돌연 한 여인이 나타나 그들 앞에 우뚝 섰다.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본 그 치주를 닮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추상같이 싸늘한 얼굴로 단지흥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줄곧 용모도 청수하고 적이 맘에 드는 낭군님을 얻게 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당신은 천하에 쓸모없는 남정네에 불과하군요.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에게 무슨 재간이든 가진 걸 낱낱이 말씀해 보세요. 우리가 듣고 무엇으로 보답을 받을지 결정하지요."
"그래요 홍사(紅紗), 그렇게 해요!"
이 치주를 닮은 여인의 이름이 홍사인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너무도 당혹스러워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에게 무슨 재간이 있단 말인가. 한 번도 이런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라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워져서 시무룩해서는 힘없이 말했다.
"나는 황제야."
이제 와서 그가 내세울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홍사라 불린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제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일단 내하교(奈何橋)를 건너오기만 하면 아무리 관직이 높고 지위가 높다 해도 그따위 것들은 다 피안에 던져 버려야 하고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이다. 황제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쓸모가 없었다.
단지흥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재간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홍사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무예 같은 건 알지 못하나요?"
그 말에 단지흥은 반박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너무도 반가워 대뜸 응답했다.
"난 일양지공을 알고 있어."
여인들은 놀라는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보아하니 이 여인들도 일양지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홍사가 교태롭게 웃으며 다른 여인들에게 말했다.
"저이는 물론 일양지를 알고 있을 거예요. 저인 대리 황제인데 저분이 일양지를 모를 리 있겠어요?"
"맞아요. 당신의 일양지가 어떤 무예인지 모르겠지만 실로 재미있겠죠? 우리도 그걸 배우고 싶어요. 배워 주시겠지요?"
한 여인이 방싯 웃으며 홍사를 바라보고는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그는 이 여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얘야, 그게 아니다! 나의 일양지는 여인들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황제께서도 익히셨는데 우리 여인들이라고 못 배울 게 뭐예요? 우리같이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 동작을 흉내내기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만일 이곳에 나쁜 놈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 그 동작만 보여 줘도 겁을 먹을 게 아니겠어요?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단지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를 이 여인들은 그저 장난으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가르쳐 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일양지는 참말로 사내들만 할 수 있는 거야. 여인들은 음(陰)에 속하는데 어찌 일양지공을 배워 낼 수 있겠나? 내가 배워 줘도 공연한 짓일 테니 다른 걸 배우는 게 차라리 나아."
그 말을 듣자 여인들은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당신한테 일양지보다 더 좋은 게 있나요?"
"너희들은 황제를 너무 깔보는구나. 대리 황제는 비록 큰 나라의 임금은 아니지만 고상한 것들을 적잖이 알고 있다. 악기를 가져 와, 곡을 연주해 줄 테니."
그러자 여인들은 다시금 낯빛이 환해졌다. 그녀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더니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린 처녀를 단지흥 앞으로 밀어냈다.
"악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악기에서만큼은 아마도 폐하가 우리보다 못할 거예요. 황제께선 내기를 하실 생각이 있나요?"
'허 참, 갈수록 방자한지고. 이 조그만 계집애가 무슨 그리 대단한 재간이 있겠는가? 저 계집애가 나보다 악기를 더 잘 다룬다고? 어디 한번 솜씨나 좀 보자!'
단지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 애가 나보다 악기를 더 훌륭하게 다룬다니 그렇담 저 애와 내가 각기 한 곡씩 타 보기로 하지. 너희들은 잘 듣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 만일 이 처녀가 악기 다루는 재간이 나보다 나으면 내가 너희들한테 일양지를 펼쳐 보이지. 만일 나의 재간이 낫다면 너희들 모두 이 단지흥에게 작은 선물을 내놓아야 해!"
여인들은 기뻐하며 일제히 손뼉을 쳤다.
"선물을 드리고말고요. 만일 우리가 지게 되면 우린 폐하를 얼마든지 만족시켜 드리겠어요. 하지만 우리 이 애는 지지 않을걸요."
여인들은 초미금(焦尾琴)을 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 옆에 향로 하나도 갖다 놓고 향을 피워 놓았다. 향 연기가 가물가물 공중으로 피어 올랐다. 지옥의 하늘은 티없이 깨끗했다.
어린 처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아주 태연자약했다. 노련한 악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초미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먼저 폐하께서 연주하세요."
단지흥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지옥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었다. 이 내기에서 처녀들한테 진다고 해도 일양지를 한번 보여 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일양지는 사내들의 기공으로서 기(氣)와 신(神)을 응축시켜야만 양강(陽剛)이 이루어질 수 있는바, 여인들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몸에 익힐 수 없다. 만일 여인들이 익힐 수 있다면 그걸 음양지(陰陽指)라 하지 왜 일양지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가 이런 사실을 터놓고 말하지 않으니 이 여인들이 어찌 그런 도
리를 알 수 있으랴.
'지옥의 여인들이 인간세상의 아름다운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내가 정성을 다해 연주해도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 아닌가.'
그는 팔소매를 거두며 고요히 침잠해 들어갔다.
대리 황제들은 대대로 학식과 무예, 덕망이 높았다. 단지흥 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거의 나무랄 데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일양지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젊은 나이에 벌써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다. 그는 또 불학(佛學)의 대가로서 몇몇 선황들처럼 일찍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경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아울러 악기에 대한 조예도 깊어 대리에서는 함께 논할 이가 드물었다.
그는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겸가(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여인들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어떤 여인은 꽃을 바라보고, 어떤 여인은 그윽한 눈길로 단지흥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마다 음악에 심취해 들어갔다. 단지흥도 신들린 사람마냥 지그시 눈을 감고 초미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단지흥이 연주를 끝내자 한동안 정적이 고요히 깃들였다. 잠시 후 누군가 짤막하게 탄성을 내지르자 이내 모두들 탄성을 지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인들의 얼굴엔 감동의 빛이 어른거렸다. 한결같이 꿈속을 헤매 도는 사람마냥 도취된 눈빛으로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낯색을 보니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 듯싶었다.
홍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가 연주하는 인간세상의 음악에 아마도 우리 이 애가 겁을 먹지나 않았는지? 얘야, 어떻게 황제와 시합을 하겠느냐?"
그러나 이 처녀는 겁내는 기색이란 조금도 없었다. 처녀는 말없이 웃음을 지으면서 단지흥이 물러선 후에야 천천히 악기를 무릎에 얹고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지흥은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내심 이제 겨우 악기를 배우는 초학자에 불과한 이 계집아이가 어찌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낼 수 있으랴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악기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언뜻 들어도 야무진 소리였다. 개울물이 돌돌 흐르듯 했다. 그 소리는 여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흥도 점점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눈을 감고 곡조에 나긋나긋 몸을 흔들어 가며 초미금을 타고 있는 처녀를 단지흥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에 한 여인의 영상이 비꼈다. 치주의 모습이…….
'아, 치주는 어디로 갔을까? 나와 치주 사이엔 진정 연분이 없단 말인가?'
그는 점점 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 순간, 여인들의 탄성이 터져 올랐다. 그 처녀의 연주는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단지흥은 언뜻 치주의 생각을 떨쳐 냈다.
'이거 야단났구나. 내가 저 아이의 연주에 무심하게 대한 걸 알면 이 여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지옥의 선인들을 불경스럽게 대했다간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음악을 감상했다. 이 처녀에겐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녀만의 독특한 주법이 있었다.
'보아하니 이 지옥의 여인들한테는 누구한테나 감동적인 면들이 있구나. 이처럼 부드럽고 훌륭한 여인들을 인간세상에 보내지 않고 왜 가두어 둔단 말인가? 이곳이 아무리 좋다기로 필경 지옥이 아닌가? 적막한 것은 그만두고 오가는 손님만 해도 대개 무심하고 재미없는 사람들뿐이니 이 여인들이 어찌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겠는가?'
음악 소리는 사뭇 색다른 음조였다. 이 처녀는 자신의 심사를 악기에 실어 이별의 한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나보다 악기에 능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어린 계집애가 어떻게 이런 조예를 갖추었을까? 천하의 기재다. 어찌 인정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을 수 있으리. 저 아이의 수심 어린 마음을 풀어 주어야지.'
이윽고 연주를 끝내고 처녀가 다소곳이 몸을 일으켰다. 단지흥은 손뼉을 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훌륭하군. 과연 인간세상의 음악과는 색다른 것이야. 이곳 음악은 정말 훌륭해, 훌륭해!"
단지흥이 탄성을 내지르자 악기를 연주한 처녀는 얼굴을 곱게 물들였다. 다른 여인들도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역시 폐하는 음악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폐하가 인간세상의 것보다 낫다고 하셨으니 우리 애가 이긴 셈이죠?"
홍사가 한마디했다. 순간 단지흥은 아연실색했으나, 지금 그는 지고 이기는 데는 더는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홍사는 외치듯 말했다.
"폐하, 당신은 일국의 황제이시니 약속을 지키시겠죠? 폐하는 방금 이 애가 연주한 곡이 인간세상의 것보다 낫다고 하셨으니 내기에 지셨어요. 지셨으니 우리에게 그 일양지신공을 가르쳐 주셔야 해요."
여인들은 깔깔 웃으며 단지흥을 둘러쌌다.




제14장 가슴이 없는 여인들
단지흥은 여인들의 성화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 여인들이 이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을 줄 진정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이 여인들을 달래느라 땀깨나 흘리고 있었다.
"일양지공은 사내의 양기(陽氣)를 요구하는데 너희들은 모두 연약한 여인들이야. 그러니 다른 걸 배우는 게 더 낫다니까 자꾸만 이렇게 성화를 대는구먼."
아무리 그래도 여인들은 막무가내였다. 홍사가 사뭇 쌀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황제께선 일양지공을 빼놓고 뭘 가르쳐 줄 수 있죠? 그것말고 뭐가 또 있나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여인들에게 대리 단씨 가문의 다른 무공이라도 한 수 배워 주어야겠다. 그러면 더는 일양지공 얘기는 안 꺼내겠지.'
"그럼 내가 아주 재미있는 걸 보여 주지."
그는 한쪽에 늘어서 있는 초 열 자루를 가져다 탁상 위에 한 줄로 세웠다.
"이건 일양지공보다 훨씬 재미있어. 이걸 배워 두면 심심풀이로 아주 제격이지. 정말 재미가 있단 말야."
그는 초 열 자루를 향해 장을 내뻗쳤다. 그러자 열 자루에 하나씩 하나씩 불이 반짝 붙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가할 때 이 놀음을 하면 사람들을 퍽이나 즐겁게 해 줄 수가 있거든."
단지흥은 다감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이 쌀쌀한 눈길이었다.
"왜, 재미가 없어?"
단지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말없이 스무 자루의 초를 가져다 단지흥이 한 그대로 세워 놓았다. 그녀가 세워 놓은 초는 단지흥의 것보다 길이가 배나 되었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가볍게 장을 뻗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자루의 초에 모두 불이 붙었다.
여인들은 아무 말도 않고 단지흥을 응시했다. 그녀들의 눈길에서는 실망스런 기색이 내비쳤다.
"내가 지금껏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지만 대리 단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 오는 일양지공은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배워 주는 게 아니다."
단지흥은 몹시 난처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배워 주겠다고 대답한걸요. 기실 인간이 지옥에 이르면 늘 이런저런 욕심 때문에 시달림을 받게 마련인 거예요. 당신한테 사욕이 있는 걸 전 나무라지 않아요."
홍사는 의외로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기왕 이곳이 인간세상이 아니고 지옥인 바에야 일양지를 한번 보여 준들 어떻단 말인가? 이 여인들이 그걸 본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바에야……. 그렇담 그저 한번 보여나 줘 봐…….'
단지흥은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은 속세의 인간들과는 다르지요. 이곳의 여인들은 당신의 일양지공을 능히 익힐 수 있을 거예요."
홍사는 단지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급급히 덧붙였다. 단지흥은 지옥과 속세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는지라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내 한 번 보여 주지."
일양지공은 도학과 불가 간의 기(氣)를 연마하는 공력에 기초를 두고 양강의 기를 얻는 고도의 무학이다. 하나 단씨 가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일양지공을 몸에 지니지는 못했다. 일양지공은 이러저러한 사심이 생겨 버리면 도저히 익힐 수 없는 것이다. 일심으로 기를 길러 최고의 경지까지 공력을 연마해 내지 못하면 일양지공은 도저히 숙련할 수 없다.
일양지공은 원래 단씨 가문의 오랜 선조가 새로이 창안해 낸 것이었다. 그는 무슨 연고인지 출가하여 모든 외적인 것들과 연을 끊고 오로지 일심으로 기를 연마했다. 그렇게 5년 동안이나 기를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벽을 마주하고 좌정하고 있는데 돌연 그 동안 기른 기가 샘물처럼 용솟음쳐 나오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한 갈래의 기가 손에 있는 양명대장경(陽明大腸經)의 오리(五里), 곡지(曲池), 삼리(三星)로부터 무명지의 상양혈(商陽穴)에 이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기에 못 이겨 손가락을 내치자 한 줄기의 기가 손에서 뻗어 나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맞은켠 석벽을 대번에 무너뜨렸다.
그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기이한 무공을 창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신비하여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그 초수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낙심하여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인간이 무공을 배우게 된 이래 인간은 무공의 목적이 다만 신체 단련에 있다는 것을 점차 잊어버리고 늘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는 데 써 왔음을 문득 떠올렸던 것이다. 자기가 만일 이런 기세(奇世)의 무공을 후대에 전수해
준다면 이로 인하여 살인을 하기가 더욱 쉽게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단씨 가문은 종래로 인의로써 사람을 대했으며 무공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삼가 왔었다. 하지만 이후에 후대들 가운데서 불초의 자손이 나와 조종의 전통을 배반하고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한번 손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바다를 밀어낼 듯 기가 용솟음쳐 나와 석벽을 무너뜨리고 돌덩이가 가루가 되는 판이니 이런 위력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후과가 빚어질 것인가?
그는 자기의 이 무공을 멸해 버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는 그대로 좌정한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이 무공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작심했던 것이다. 그는 고요히 죽을 시각이 닥쳐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그때 언뜻 매 한 마리가 창천을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는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그 비둘기는 산 아래의 단씨 가문에서 그에게 날려보낸 전서비둘기였다. 그 전서비둘기는 화가 닥친 것을 알고 내리꽂히듯 급급히 땅으로 활강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그의 머리 위까지 수직으로 곧장 날아 내려왔다. 매는 곧바로 그 비둘기 뒤를 쫓았다. 그는 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팍하는 소리가 일며 순식간에 매의 털이 모조리 빠져 공중으로 풀풀 날렸다. 매는 그 길
로 황망히 도망쳐 버렸다. 그 순간 그는 마음속이 환히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의 지력(指力)을 선행에 쓰기만 하면 좋은 점이 무궁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단지흥은 여인들에게 부득불 일양지공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는 이곳이 양세간(陽世間)이 아니고 음세간(陰世間)이므로 선행을 베풀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단씨 가문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에게 허투루 일양지공을 시전해 보여서는 안 된다는 조상의 훈시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어서서 한참 동안 정신과 숨결을 가다듬으며 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일양지 초수를 하나하나 차례차례 보여 주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쥐 죽은듯이 고요했다.
단지흥은 일단 일양지를 펼쳐 내기 시작하자 흥이 한껏 올라 수많은 절묘한 지법(指法)을 보여 주었다. 여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새로운 초수가 펼쳐질 때마다 열렬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네 시위는 산지사방을 헤매면서 종일토록 단지흥을 찾아 다녔다. 아무리 해도 다 허사였다. 그들은 기진맥진하여 한 수림에 당도했다. 수림 안엔 인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어떻게 하면 황제를 찾을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더했다. 분명히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기가 뭉클 솟아오르더니 황제의 종적이 묘연해지니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닌가.
"우린 워낙 폐하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말았어야 했네. 혹시 어느 놈이 무슨 미향(迷香) 같은 걸 써서 폐하를 쓰러뜨린 게 아닐까? 몽약이 섞여 있는 걸로 말이야."
선비가 힘없이 말을 꺼냈다.
기실 그들은 연기가 피어 올랐을 때 일각 정도 정신을 잃었었다. 그 연기는 선비 말마따나 미향이 피워 올린 연기로 미향 중에서도 아주 기이하여 바로 곁에서 맡은 사람에겐 그 연기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마냥 무의식중에 모든 걸 하게 되고,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에겐 독의 효력이 조금 떨어져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하니 네 시위들이 그 사실을 알 리 만무였다.
그러나 농부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거네. 폐하가 어떤 분이신가? 미향으로는 우리 같은 사람도 쓰러뜨리지 못할 텐데 하물며 그따위로 폐하를 대적하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네!"
나무꾼과 어부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 일은 정말 괴상하이. 두 눈 뻔히 뜨고 있는데도 순식간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참말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리들 가운데 누가 대리에 가서 나라일을 배치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아. 그런 다음 천천히 폐하를 찾아보세. 황제의 무공으로 보아 그리 간단히 넘어가실 분이 아니니 그래도 늦진 않을 거네."
그러나 선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보기엔 그리 간단한 일 같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를 찾는 게 급선무네. 역시 이곳에서 잘 찾아보아야 해. 그리고 소림 무공의 각 문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종당에는 무슨 단서라도 잡히겠지. 우리가 이곳에서 찾지 못하면 화산으로 곧추 가야 하네. 화산에는 필시 가실 것이니 거기 가면 혹 폐하를 만날지도 모르지."
세 사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이 일양지공을 모두 시전해 보이자 여인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지르며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홍사가 나서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황제께선 참말 수고하셨어요. 이런 멋진 무공을 어찌 쉽사리 구경할 수 있겠나요? 만일 황제 폐하께서 이 음세간에 오시지 않았던들 우린 결코 이런 절기를 구경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른 여인들도 너나할것없이 한마디씩 찬사를 던졌다. 단지흥은 자기가 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쉬고 계세요. 가서 새 의복을 가지고 오겠어요."
홍사는 웃으며서 한마디하더니 다른 여인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홍사의 손짓을 신호로 여인들은 일제히 단지흥을 에웠쌌다. 그 바람에 단지흥은 홍사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홍사는 곧장 병풍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주 큰 옥석 위에 올라섰다. 이윽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여인과 옥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낙하하여 아주 큰 석실 안에 내려섰다.
석실 안 한복판에 있는 대들보 위에, 천장 바로 밑으로 아주 큰 유등(油燈)이 한 개 걸려 있었다. 그리고 유등의 언저리에는 무수한 해골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 석실은 아주 높아 몇 장은 족히 될 듯싶었다.
석실 안에는 길다란 돌의자가 놓여 있고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위엄 서린 자태로 그 돌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홍사는 그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읍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
돌의자에 앉은 여인은 자못 쌀쌀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홍사는 공손히 대답했다.
"별다른 말씀은 없고 일양지공을 시전해 보였사옵니다."
여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화산의 무예 시합이 곧 시작될 게야. 그때가 되면 난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어. 그 사람의 일양지공에 어떤 묘한 점이 있는가 잘 익혀 두어라."
홍사는 머리를 숙인 채 일각이나 흘러도 대답이 없었다. 돌의자에 앉은 여인이 다시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넌 왜 대답이 없느냐?"
"등아(燈蛾) 향녀(香女)님, 세상에 제가 배울 수 없는 무공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전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사옵니다."
홍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등아라는 여인은 대로하여 소리쳤다.
"넌 천하의 무공을 손쉽게 배워 내는 기재(奇才)가 아니냐? 어떤 절세의 무공이라도 그 비결을 속속들이 알아내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고? 그래 일양지공이 어디가 그리도 신묘하더냐?"
"허다한 무공 초수들은 그 동작만 배우면 되지요. 하지만 이 일양지공은 그 비결이 기에 있어요. 그의 기는 입으로 일일이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호방한 그 기세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지요. 그러기에 그 사람도 일양지공이 사내의 무공이라 여인들은 써먹을 수 없다고 누누이 말했사옵니다."
그러자 등아는 더욱 노기충천해서 소리쳤다.
"단황이 한 말을 넌 그래 그대로 믿는단 말이냐?"
등아가 불같이 성을 내자 홍사는 머리를 더욱 숙이며 탄식하듯 말했다.
"제가 그 말을 믿겠사옵니까마는……. 하지만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옵니다."
"이 향녀 등아는 속세에서 버림받은 여인이다. 그래서 이 불음불양(不陰不陽)한 곳에 칩거하게 된 게야. 난 사내들이라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넌 그 젊은 황제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거지, 안 그러냐?"
등아가 다그쳤다. 홍사는 머리를 숙인 채 또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 황제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사옵니다. 그 분은 정의로운 사람이며 주색을 즐기는 여느 강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았사옵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향녀 등아에게는 꼼짝못해. 아무리 인품이 좋다 해도 여색에 끌리지 않을 수는 없지."
"그런 점은 없지 않았사오나 한 번도 우리 향녀들에게 그 짓을 요구하는 법이 없고……. 보아하니 그분은 대리에 있을 때 주색에 빠진 황제는 아닌 듯했사옵니다."
아닌게아니라 홍사는 단지흥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등아는 홍사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보고는 꾸짖듯이 엄하게 말했다.
"홍사야. 넌 종래로 세속의 사내들한테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지 않더냐? 그 사람이 황제라고 해서 그에게 빠졌단 말이지?"
홍사는 흠칫 놀라며 극구 발뺌을 했다.
"아니에요. 만일 향녀께서 친히 그분을 만나 보신다면 아마도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말씀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자 등아는 요란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유등을 바라보면서 뇌까렸다.
"그래, 이 등아도 그 사내를 만나 보면 그렇게 된다구? 등아가 그런 사내를 만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찌 향녀 등아가 생겼을꼬!"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그녀의 외침 소리는 마치 우레가 우는 듯 석실 안에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등아는 갑자기 몸을 솟구쳐 높이 걸려 있는 유등을 덮쳤다. 유등은 한창 기세 좋게 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심지를 틀어쥐었다. 순간 석실 안엔 암흑이 내려앉고 그녀의 웃음 소리만이 어둠 속으로 처절하게 울려 나갔다. 그녀는 앞가슴을 헤쳤다. 옥같이 맑은 살결이, 그러나 봉곳 솟은 젖가슴은 간데없고 밋밋한 가슴이 등불같이 환히 드러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고통과 절망이 비낀 신음 소리로 변해 갔다.
홍사는 돌의자 앞에 꿇어 엎드린 채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말 그대로 향기로운 여인, 향녀였다. 계집만 탐하는 세상의 뭇사내들을 증오하여 그녀들은 스스로 향녀라 이름하고 이곳에 석굴을 파고는 칩거하면서 사내들에 대한 복수의 불길을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산 무예 시합에 즈음하여 이 기회를 잡아 무림을 휘어잡고 대대적으로 복수전을 펴고자 미향으로 단지흥을 미혹해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향녀들은 사뭇 살뜰하게 단지흥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한껏 흥에 겨워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너희들은 어째서 날 이렇게 잘 대해 주지?"
한 여인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당신뿐 아니라 훌륭한 사내라면 우린 모두 잘 대해 주지요. 천하엔 훌륭한 사내가 너무나도 귀해요."
"일리 있는 말이다. 천하엔 진정 사내대장부라 할 만한 사내들이 많지 않지."
단지흥은 그녀들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들의 살결은 아주 매끌매끌했다. 단지흥은 문득 이 여인들이 왜 젖가슴을 만지는 것을 꺼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이제껏 이상하게도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은 추호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여인을 애무하면서 젖가슴을 만지지 못하고서야 무슨 재미란 말인가? 단지흥은 일순 그것이 너무도 기이해서 곁에 있는 여인의 젖가슴께로 슬쩍 손을 가져 갔다. 그러자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팔로 앞가슴을 감쌌다.
"왜, 왜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게냐?"
단지흥은 더 더욱 조급증이 나서 그 여인의 팔을 뿌리치며 앞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여인은 한사코 몸부림을 쳤다. 곁에 있던 여인들도 한결같이 막아 나섰다.
"황제 폐하, 이러지 마세요……."
그러자 단지흥은 속삭이듯 한 목소리로 여인을 얼렀다.
"미인은 옥과 같은 거야.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젖가슴인데 왜……."
"폐하께서는 잊으셨나 봐요. 이곳은 지옥이에요. 사내들과 여인들의 지옥이란 말이에요. 이곳은 속세와는 달라요. 우리의 몸도 속세 사람들의 것과는 달라요. 폐하께선 만져 보려 하지만 소녀는 폐하가 놀라게 될까 두려워요."
그래도 단지흥은 막무가내였다.
"좀 만져 보게 해 줘. 내 나무라지 않을 테니까……."
옛날 불경 이야기에 범가죽으로 만든 옷을 가진 여인에 대한 설화가 있다. 그 여인은 그 옷을 입으면 수시로 도망을 갈 수도 있고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들이 범가죽 옷을 입은 여인이라 해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빨리 옷을 벗으라고 독촉했지만 여인은 마냥 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폐하, 폐하께서 참말 보려 하신다면 어려울 거야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폐하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래도 굳이 보셔야겠나요? 그냥 재미있게 노시면 될 걸 하필 젖가슴을 보아선 뭣 하시나요?"
그래도 단지흥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여인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젖무덤께로 선뜻 손을 가져 갔다. 지옥의 여인들이 속세의 여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옛말에도 있듯이 여체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젖가슴이다. 그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는 두 개의 구름과 깊숙이 팬 골짜기, 그 아름답고 유연한 곳에서 사내들은 종달새 노래 같은 휴식을 맛보곤 했다. 당조 때 현종이 총애하던 귀비 양옥환(楊玉環)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젖가슴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왔는데 몸에 두른 명주 옷 위로 옥 같은 젖무덤과 새빨간 젖꼭지가 그대로 내비쳐 당 현종은 즉석에서 시 두 구절을 읊었다고 하지 않는가.
단지흥은 떨리는 손길로 여인의 젖가슴을 더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악 소리를 지르며 손을 덥석 떼어 냈다. 젖가슴이 하나도 없이 마냥 밋밋했던 것이다.
여인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지었다. 단지흥은 두 눈을 휘등그래 뜨고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워낙 지옥의 여인들은 모두 이러하구나. 보아하니 저 여인은 기필코 생전에 풍진 세상에서 방탕하게 굴다가 벌을 받은 모양이다.'
"미안하이, 미안해. 난 너를 슬프게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난 다만 호기심 때문에 그랬던 게야. 네가 그처럼 아리따운데 약간 허물이 있은들 그게 뭐 그리 대순가?"
하지만 여인은 마냥 눈물을 흘렸다.
"저와 자매들은 당신에게 시중을 잘 들어 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어요. 당신은 지옥에 있는 여인들의 비밀을 알고 말았으니 우릴 깔보시겠죠? 그렇고서야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나요? 우린 가겠어요."
단지흥은 할말을 잃고 그저 여인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홍사가 여인들을 스쳐 지나 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홍사, 우린 이곳을 떠납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제일 뒤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쫓아가던 여인이 홍사에게 한마디 남겨 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홍사는 천천히 단지흥에게 다가왔다. 단지흥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소연하듯 애절하게 말했다.
"난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었소. 이 여인들은 왜 떠나가는 거요?"
홍사는 두 눈에 애련한 빛을 담고 가볍게 탄식했다.
"자고로 미인박명이라 했어요. 지옥에 있는 여인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여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중히 여기지요, 그런데 오늘 폐하께선 그 여인들의 비밀을 알아내셨으니 그녀들의 상처를 건드린 셈이에요. 여인들은 폐하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예요."
단지흥은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쓸데없이 여인들의 젖가슴을 보자고 고집을 피웠던고. 이 여인들이 나를 얼마나 살뜰히 대해 주었는가? 이 여인들과 함께 있으니 그리도 좋던 것을…….'
"홍사, 다시 그 여인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나? 내 이제 다시는 섣불리 굴지 않겠어, 맹세코 내 이제 다시는……."
"지나간 일은 돌이키지 못해요. 속세나 지옥이나 그건 마찬가지예요."
홍사는 적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세상의 정사란 종래로 사랑보다 원한이 많았다. 세상에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랑 때문에 액운을 당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단지흥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이곳 지옥에서 그가 직접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곳에 온 이후,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화산 무예 시합이 임박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옥문을 들어선 이상 그는 속세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여인들과 나날을 보내며 시름을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때는 무림의 고수들과 결사적으로 겨루어 《구음진경》을 차지할 꿈을 꾸었으나 이젠 주검이 되었으니 속세의 그런 다툼도 아무 소용이 없는 터, 그런 차에 여인들마저 떠나가 버리자 그에겐 아무런 꿈도 희망도 낙도 없어졌다. 이곳
지옥에 갇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그 나날들을 어찌 무미건조하게 지낸단 말인가.
"홍사, 그대도 알고 있겠지? 난 한평생 남녀간의 정사에 그리 집착해 온 사람은 아니야. 난 그대들과 함께 있으며 벗으로 지내기를 원했을 뿐……. 그대가 그 처녀들한테 전하게, 날 용서해 달라고 말이야."
홍사는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녀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시위들은 각자 흩어져서 단지흥을 찾아 헤매다가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행방이 묘연하자 마침내 저마다 화산으로 가기로 작정하고는 비슷한 시점에 각각 화산에 당도했다.
화산에 당도하니 제가끔 할말들이 많은지 《구음진경》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자 무림 고수들은 물론 흔히 얼굴을 내밀지 않던 무객들도 거의 다 화산에 몰려왔다고 가는 곳마다 이야기로 성시를 이루었다. 화산 기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 도화도주 황약사, 개방 방주 홍칠 등이 벌써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다고도 하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중양은 누군가 사람을 기다리며 아직도 종남산에 칩거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왕중양
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문을 닫아걸고 무예를 익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왕중양이 《구음진경》의 일을 발설한 것도 알고 보면 이 《구음진경》을 남한테 내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고 독점하기 위해서라고들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그만큼 천하의 모든 영웅들을 제압하고 《구음진경》을 자기 손에 틀어쥘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왕중양이 기다려 마지않는 그 한 사람이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여인 역시 종남산에 칩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왕중양은 왜 그처럼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도 찾아가 만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까. 그 내막에 대해서도 구구하게 말들이 많았지만 딱 부러지게 이렇다 하게 단언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시위는 모두 화산 기슭에서 단지흥의 소식을 탐문하느라 사처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다 허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네 사람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애가 닳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도 선비는 밖에 나가 단지흥의 소식을 탐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발이 아프게 돌아다니다 화산 기슭의 한 절 앞에 이르렀다. 어마어마하게 큰 이 절은 그 옛날 노대(魯代)의 한 제왕이 화산 기슭에 봉한 대성선사(大成先師) 공자(孔子)의 사당으로서 지금은 다 스러져 가는 낡디낡은 절로 그 옛날의 영화를 잃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선비는 소리를 죽여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 무리나 되는 아름다운 묘령의 처녀들이 모두 머리를 숙인 채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모두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비가 전으로 들어가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밤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절간으로 내리꽂혔다. 그러자 앉아 있던 처녀들은 일제히 일어나 방금 나타난 사람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 사람은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 의외로 그 사람은 여인으로 천하 절색
이었다. 선비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려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여인은 미색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쌀쌀하게 한마디 던졌다.
"모두들 왔느냐?"
한 여인이 허리를 굽실하며 대답했다.
"등아 향녀님, 모두 왔사옵니다."
"그럼 좋아, 내 말을 듣거라. 화산 밑에서는 지금 온통 북새통이 일고 있다. 서역에서 왔다는 그 구독사옹 문하의 독인(毒人) 구양봉은 지금 어떠한가?"
자주색 옷을 입은 처녀가 아뢰었다.
"향녀님께 아뢰나이다. 그 구양봉은 부하들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그 사람은 독사를 몰아왔는데 서역의 살기를 그대로 화산으로 몰아온 셈이옵니다. 강호의 인물들과 한곳에 있지도 않고 따로 화산 아래 뜨락이 곁달린 집에 묵고 있사오며, 그의 사노(蛇奴)들은 날마다 뱀을 먹이고 있는데 그 뱀들은 아주 지독한 것들로 사노의 호령에 따라 움직인답니다."
"구양봉은 나와서 훈련을 하지 않더냐?"
"아뇨. 그가 나온 걸 두 번 보기는 했지만 그저 산보만 하더이다. 언뜻 보기엔 눈치가 없어 보이고 겉모습만 봐서는 무예가 특출해 보이지도 않더이다. 하지만 사람들 말을 듣건대 그 사람은 얼마 전에 형수가 죽어서 그렇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이번 화산 무예 시합에도 참가하지 않으려다가 하는 수 없이 참가했다 하더이다."
"형수가 죽은 게 그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여인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에 의하면 구양봉은 형을 죽이고 형수와 통간했다고 하더이다. 그 둘의 관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옵니다. 형수가 죽자 그 사람은 한동안 마음을 못 잡고 다른 일은 돌볼 생각도 안 했다 하더이다. 화산에 와서도 매양 그 모양이랍니다."
여인은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 사람이 풀이 죽어 있다면 시합 때 어찌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겠느냐? 그럼 넌 그 사람을 왜 네 사내로 만들지 못했지?"
처녀는 갑자기 쏙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었다.
"찾아가긴 찾아갔었사옵니다……. 하지만 그……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절 쏘아볼 뿐으로……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이다……."
내전 뒤에 숨어서 엿듣던 선비는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은 필시 강호에 숨어 있는 한 문파의 수제자 아니면 우두머리임이 분명했다. 여인이 이처럼 세밀하게 따지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이 나타남으로써 이번에 화산에 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리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고? 그래 그 사람이 단지흥보다 더하단 말이냐?"
'뭐라구?'
선비는 일순 귀가 번쩍 뜨이며 더욱 쫑긋 귀를 기울였다.
여인이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처녀는 감히 대꾸를 못하고 조용히 서서 그녀의 명만 기다렸다.
"세상에 어디 좋은 놈이 있단 말이냐? 그 구양봉이란 놈은 형을 죽이고 형수를 통간했다니 아주 간악한 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놈이 형수한테는 그다지 악독하게 대한 것 같지는 않군. 마침 그 형수를 잃었다니까 이런 때 대신할 여자를 찾아 주는 게 어떠냐?"
처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자 여인은 무서운 목소리로 화를 냈다.
"됐다! 더 말하지 말아라! 만일 이번에도 구양봉이란 놈을 홀리지 못한다면 그땐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 알았느냐?"
처녀는 여인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읍을 하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또 한 처녀가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향녀님 앞에 아뢰나이다. 저는 홍칠공에게 갔다가 망신만 당했나이다. 그자는 저를 보더니 대뜸 그저 알고 있다고 말했사옵니다. 하지만 그자가 무얼 안다는 건지, 개방에서 참말로 우리 일을 알고 있다는 건지는 통 모르겠더이다. 그래 따져 물었더니 더는 한 마디도 대답이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전 그저 그를 주시하면서 그의 강룡십팔장이 어떤 것인가 알아보려 했지만 그자는 하루 종일 술만 퍼마실 뿐 조금도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사옵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더니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온종일 술만 퍼마시고 무예 연마를 하지 않더라구?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알건대 이번 일은 단지 홍칠의 운명에만 관계되는 게 아니라 개방의 흥망마저 걸려 있다고 했다. 만일 그자가 지게 되면 천하에서 제일 큰 개방의 위신이 납작해진단 말이다. 그런데 이런 판에 그자가 날마다 술만 마시다니, 이상하지 않느냐?"
"제 말에는 한치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실 때면, 어디를 가든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던 타구봉까지 땅바닥에 내려놓았사옵니다. 그리고는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타구봉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뭇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자가 타구봉을 바라볼 때 어찌 하더냐?"
"그 사람은 타구봉을 때로는 옆으로 눕혀 놓기도 하고, 때로는 곧게 세워 놓기도 하고, 술단지 곁에 놓아두기도 했사옵니다. 혹은 눈앞에 곧추 세워 두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이상하게도 온종일 타구봉만 들여다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자는 타구봉법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자는 그 타구봉 쓰는 초수만 가지고는 왕중양의 선천신공을 이겨 낼 수 없을 거야. 그자가 그러는 건 필시 타구봉 쓰는 새 초수를 생각하느라고 그러는 걸게다."
여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신중히 말했다.
선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은 보아하니 계책이 대단한 여인 같았다. 이전에 본 어떤 사람들보다 퍽이나 주도면밀해 보였다. 만일 이 여인이 단지흥을 주목하고 있었다면 필연코 그의 거취도 탐지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선비는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만일 이 여인이 단지흥을 탐지했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여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다른 한 처녀에게 또 물었다.
"그녀가 석굴에서 나왔느냐?"
"그 여인은 아직 석굴에서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보아하니 그 여인은 천하에서 으뜸을 다투는 이번 시합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았사옵니다."
세 번째 여인도 그간 보고 들은 일을 아뢰기 시작했다.
"그 여인이 흥취를 느끼는지 안 느끼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석굴 안의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이고 조금도 변화가 없었사옵니다. 다만 매일 한 가지 일에서만 변화가 생기곤 했는데……. 그 여인의 비녀(婢女)가 더는 날마다 생화를 꺾어 가지 않더이다."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그 처녀를 쳐다보았다.
"어리석구나,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 비녀가 매일 생화를 꺾으러 나오지 않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
그러자 처녀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이제야 알겠사옵니다. 제가 너무 미련했나이다. 향녀님께서 깨우쳐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여인은 조금도 으쓱거리는 기색을 비치지 않고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가 보아라. 가서 활사인묘(活死人墓)를 다시 잘 살펴보거라."
선비는 여인이 말하는 활사인묘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들어서는 어떤 석굴에 거처하는 여인을 저 여인이 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만일 선비가 중원 사람이었더라면 그것이 대협 왕중양과 그 활사인묘에 거처하는 여인, 즉 천하에서 으뜸가는 기녀(奇女) 임조영 (林朝英)의 일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중원 무림에서는 이 두 남녀의 일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여인은 다시 다른 한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처녀는 키가 아주 컸지만 얼굴은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향녀님, 벌써 화산에 당도해 있다고 소문은 무성하지만 제 보기엔 그 동사 황약사가 꼭 이곳에 온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옵니다. 그 사람은 아내까지 얻었는데 그들 두 사람은 매우 금실이 좋다는군요. 더욱이 도화도에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뭍으로 나오지 않았고 섬에 있던 큰 배도 없어졌다 하옵니다. 저는 그 도화도에 들어가 황약사의 제자를 보았는데 그 사람은 아주 흉맹스러웠사옵니다. 난 그자와 겨뤄 보았는데 몇 합 겨루고는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어 바다로
해서 도망을 쳤사옵니다."
"황약사가 오가고 출몰하는 건 아주 궤계가 많고 신비롭단 말야. 내 보기엔 이잔 기필코 화산에 왔을 것이다. 아직 종적을 못 찾았다뿐이지 화산 주위 어느 객점에 묵고 있을 게야."
다른 한 처녀가 나서서 도리질을 했다.
"아니옵니다. 아무데도 없사옵니다.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욕심만 부리며 덤비는 무림 사람들밖에 보지 못했나이다. 그자들은 그 경서를 손쉽게 손에 넣을 줄 알고 있더이다. 그래서 대낮에도 객점에서 언쟁을 하다가는 맞붙어 싸우기까지 해요. 이런 사람들 사이에 고수란 한 사람도 없더이다."
"황약사는 그리 쉽게 사람들 앞에 나설 위인이 아니다. 절대 경거망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너희들이 잘못 봤다. 한데 고수가 한 사람도 없다니, 하면 각 문파의 사람들이 다 오지 않았단 말이냐?"
여인이 소리치자 또 한 처녀가 대답했다.
"거의 다 왔는데 다만 항산파(恒山派)의 사람들만 객점에 보이지 않더이다. 더러는 화산 산곡간 시냇가에 풍막을 쳐 놓고 거처하기도 하지만 각 명문대파(明門大派)의 사람들은 화산 아래 거리에 있는 객점들에 묵고 있지요. 보름달만 떴다 하면 화산으로 올라가려고 잔뜩 벼르고 있더이다."
"각 문파도 허투루 봐서는 안 되지……. 왕중양은, 그는 몸을 움직일 뜻이 있더냐?"
"아직도 기다리고만 있더이다."
조금 전의 그 처녀가 다시 대답했다.
'그가 종남산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선비는 자못 의아했다. 바로 그때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왕중양의 거처는 주시할 필요가 없다. 천하의 검객이 다 오게 되면 왕중양도 오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넌 다만 화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때 가서 그 사람의 행적을 주시하거라."
그 처녀는 정중히 읍을 했다.
여인은 잠시 사색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한동안 정적만이 고요했다. 일순 여인이 손짓을 하자 명령을 받은 처녀들은 모두 읍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처녀들이 다 나가자 그녀는 혼자 남아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선비는 이제나저제나 단지흥 얘기가 나올까 학수고대하며 귀를 기울였으나 끝내 그 여인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자 못내 서운해하며 급히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여인의 대갈일성이 등짝을 때리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사람 그림자가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선비는 급급히 뒤로 물러서며 붓으로 여인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괴이한 일이었다. 여인은 조금도 피할 생각을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대담하게 내맡기며 선비의 머리 위로 두건을 휘둘렀다. 그 두건은 길기도 하거니와 공중에서 윙윙 소리를 내는 것이 아주 무시무시했다. 선비는 다시 그녀의 가슴을 겨냥해 붓을 내뻗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인이 피할 생각을 않고 똑같
이 죽을 기세로 덤벼들자 일순 당황해 감히 찌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여인은 여전히 두건을 휘둘러대면서 한마디했다.
"선비께서 오셨군요. 말을 타면 군사를 거느릴 수 있고 말에서 내리면 풍월을 읊조릴 수 있는 시위가 대리에 있다더니 바로 선비님이셨군요.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는 게 아닌데요."
"과찬이시군 폐하께서 어디 계시는가만 빨리 말하시오!"
선비는 급히 물러서며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세요? 내가 누군지 안다면 묻지도 않겠지요?"
"그대가 누구든 난 관계치 않소. 그대는 화산에 모여든 무림의 호걸들에게 몹시 신경을 쓰고 있더군. 당연히 황제 폐하의 행방도 알고 있을 것인즉, 어서 말하시오!"
선비는 여인의 코앞에 붓 끝을 바짝 들이댔다. 여인은 몹시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이렇게 무뢰한들이거든. 여인들한테 늘 호통이나 치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네 놈이 내 남편이라도 된다더냐? 무슨 권리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냐?"
'폐하께서 어디 계시는지 이 여인은 틀림없이 알고 있다. 하나 이 여인에게서 그걸 알아내기란 그리 수월치 않을 것 같구나.'
그는 이렇게 강세로 나갔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천하의 사내들이 다 나쁜 건 아니오. 이를테면 우리 폐하 같은 분 말이오. 당신이 만일 그분을 만나 보게 된다면 사내들을 더는 미워하지 않게 될 겁니다."
"당신의 그 단황을 저도 이미 만나 보았어요. 하나 그 사람도 별 다를 게 없었어요.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전 대부분 만나 보았어요. 왕중양은 아주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한 여인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날마다 그 무슨 천하 대사만 운운하고 있지요. 사랑도 모르는 이가 어찌 천하 대사를 알 수 있겠나요? 구양봉이 그래도 여인에게는 이 사람보다 낫다 할 수 있으나 그 역시 때로는 이상 야릇한 짓을 해서 골치 덩어리고. 홍칠이란 사람도 그래요.
매일 누더기만 걸치고 다니니 영웅은 무슨 영웅이란 말인가요? 미립이란 여인이 그 사람 때문에 속을 앓다가 스스로 자결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동사란 사람이 묘한 인간이기는 했는데 이젠 미인을 얻어 날마다 그 여인하고만 아기자기하게 보낸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천하 미인들의 재미는 모른다구요. 당신의 그 황제요? 내가 보기에 그는 대리에 있을 때 그다지 여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후궁에 사는 여인들은 날마다 독수공방 울적한 나날을 보냈을 거
예요.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연약한 여인의 심리를 모르는 자들뿐이니 모두 죽여 버려야 해요!"
선비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혼자 생각했다.
'인정에 눈이 어두우면 고집스럽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이 호의로 권하는 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고집만 부리게 된다더니, 이 향녀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지 않은가.'
"그대의 말을 들어 보니 우리 황제 폐하는 당신한테 있는 것 같소이다."
"그래요. 하나 당신이 뭐라든 난 당신의 황제를 절대 내보내지 않겠어요. 그의 목숨은 이미 내 손안에 있어요. 그분은 지금 여색에 빠져 있는데 당신은 그걸 짐작조차 할 수 있나요? 그분은 화산의 무예 시합엔 가지 못할 거예요."
선비에겐 단지흥이 화산의 무예 시합에 가고 안 가고는 하나도 대단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다만 그의 안위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당신이 우리 황제 폐하를 화산에 보내지 않는다면 대리국의 만 백성들은 당신의 공덕에 감개 무량해할 겁니다."
"아니, 왜요? 왜 그렇다는 거죠?"
"황제 폐하는 고수라서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니 아주 기뻐하셨소. 우린 폐하의 신하들이라 그분의 뜻을 좇지 않을 수 없었소. 하지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강호의 으뜸가는 고수가 되려 해서야 나라일이 어떻게 되겠소?"
그녀는 그 말에 일순 어리벙벙해졌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이윽고 선비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대리의 승상이 말재간이 있어 혀끝으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더니만 그 말이 참말이었군요."
그러자 선비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라일에 대해서 당신은 잘 모르시는 모양이로군. 임금 노릇을 하려면 행실을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되오. 그분은 임금이요, 자기 멋대로 사는 분은 못 되오."
그녀는 선비의 말에 적이 감동되어 혼자 말하듯 읊조렸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참말로 임금 노릇을 하려면 오로지 그 노릇에만 충실해야지 여색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녀는 막 깊은 사념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싶었다.




제15장 석굴 앞에서 기다리는 마음
'이 여인에게 괜스레 이 말 저 말 길게 하다가는 폐하의 행방을 말해 주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어서 매듭을 짓자.'
"아까 듣자니 당신은 그 《구음진경》에 아주 흥미가 있는 모양이더군요. 기실 황제께서 이번에 중원으로 오신 건 결코 그 경서 때문이 아니오. 그분은 그저 중원 무림의 면모를 눈여겨보려던 것뿐이었소. 만일 당신이 폐하를 놓아준다면 이번 싸움에 끼여들지 마시라고 내 성심성의로 설복하겠소. 우린 다만 화산의 무예 시합이나 구경하고 떠나가겠소."
여인은 그 말을 듣자 참말로 구미가 동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선비를 지켜 보다가 슬쩍 딴 곳을 보며 물었다.
"당신의 말은 듣기는 좋으나 내 무엇으로 그 말을 믿지요?"
"나는 대리국의 승상이오. 승상이란 자리는 종래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자리라는 걸 당신도 알 겁니다. 거짓말을 하고서야 어찌 승상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그래 갖고서야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할 텐데!"
선비는 사뭇 단호히 말했다.
"좋아요. 일단 당신의 말을 믿지요. 만일 당신이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나대로 방법이 있으니까!"
여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옥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요? 당신의 황제는 지금 지옥에서 유람을 하고 있답니다, 아리따운 여인들과."
여인의 말에 선비는 마치도 혼백이 다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뭐라구요? 지옥이오?"
"뭐 그리 놀랄 것도 없어요. 우린 향녀예요, 사내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려고 원한을 불태우는 향녀! 사내가 그런 향녀 무리에 걸려들었으니 지옥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겠어요?"
그제야 선비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랬구나, 그랬어! 우린 그때 다 미향에 중독된 것이로구나.'
선비는 조급히 서두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다면 날 어서 지옥으로 데리고 가 주시오. 가서 폐하를 만나게 해 주시오!"
농부는 한나절이나 헤맸지만 그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 화산 아래 한 자그마한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창문 곁에 앉아 술 한 주전자를 청해 놓고 시름에 겨워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였다.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나마 시름을 털어 내려고 그저 창 밖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언뜻 오솔길로 말 세 필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말에는 세 여인이 타고 있었다.
'저 세 여인은 지독히도 뚱뚱하군. 마치 말 위에 자그마한 산더미가 올라앉아 있는 것 같다.'
농부는 적이 호기심이 일었다. 세 여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객점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더니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왔다. 몸집이 엄청나게 비대한 데 비해 동작은 날쌔기 그지없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여인이 두 여인에게 소리쳤다.
"빨리 오란 말이야. 배고파 죽겠어. 배고파 죽겠다구!"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데도 주인은 기겁을 하고 달려왔다. 지금 화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보통 사람들이 아님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 여인이 지독히도 못생긴데다 그 기상이 사뭇 흉맹스러워 한눈에도 성미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네가 주인인가? 어서 요리를 내왓!"
여인은 주인 사내를 힐끔 거들떠보더니 단박에 외쳤다. 그러자 주인은 여인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굽실 허리를 꺾고는 주방에다 대고 요리 몇 접시를 볶으라고 분부했다.
삽시간에 요리 몇 접시가 여인들 상에 차려졌다. 우두머리인 듯 한 여인은 요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식탁을 탕 하고 내리쳤다.
"좋은 술과 요리가 있으면 다 가져 오란 말이야. 우릴 이따위로 대접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래, 우리한테 은자가 없을까 봐 걱정이냐?"
"처녀들……술 몇 근에 요리 얼마를 가져 오렵니까?"
주인은 두 다리를 와들와들 떨어댔다.
"무슨 잔소리가 이렇게도 많아? 술은 단지째로 날라 들이면 되는 거고, 요리는 아예 큰 쟁반에다 담아 날라 들이란 말이야. 이 집에 있는 좋은 술과 요리는 몽땅 다 내와!"
주인은 찍소리도 못하고 부리나케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엄청난 술과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 여인은 그제야 군소리 없이 큰소리로 강호 무림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술과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품새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웬만한 장정들도 저리 가라였다.
"보아하니 그 물건짝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그 년은 자기가 잘 먹지 않아 비실비실 마른 줄 아는 모양이더군. 그 년의 꼬락서니를 보니 구역질이 나더란 말야."
한 여인이 말하자 다른 한 여인도 신이 나서 손바닥을 쳤다.
"그 년이 아무리 살찌는 걸 싫어해도 제깟 년이 별 수 있어? 내가 그 년이 먹는 음식에 미독(迷毒)을 넣었거든. 이제 그 년도 우리같이 뚱뚱보가 될 테니까 두고 봐."
세 여인은 탁자를 쳐 가면서 죽어라고 깔깔 웃어댔다.
'보아하니 이 여인들은 운남의 대환희 보살 수하들이 분명하구나. 이 여인들은 뚱뚱한 걸 아주 자랑으로 아는 모양이군. 대환희 보살은 심보가 고약해서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예쁜 여인만 보면 죽이거나 억지로 약을 먹여서는 무리에 끌어넣는다지. 또 무예를 아는 사내를 붙잡아서는 소굴로 끌고 가 노리개로 만든다고도 했어. 이 여인들이 너무나도 음탕하다고 폐하는 늘 이 패거리를 큰 우환거리로 여기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여인들이 뭣 땜에 이 화산 기슭에까지
기어 들었을까? 필시 그 《구음진경》을 노리고 있는 게로군.'
농부는 여인들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한 여인이 또 목청을 높였다.
"보살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번 일을 해내려면 건장한 사내 하나를 물색해야 한다는 거야. 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보살님께 큰 벌을 받을걸?"
그러자 다른 여인도 거들었다.
"보살님께서 어떤 사내를 즐기시는지 모두 잘 알지 않아?"
그 여인은 다른 두 여인에게 눈을 꿈적여 보였다. 그러자 세 여인은 또다시 징그럽게 웃어댔다.
이 객점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진작부터 강호 사람 여럿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켠에 있는 탁자에 세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헌 천으로 동동 싸맨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고 곁에 앉은 사람은 갈고리 한 쌍을 갖고 있었다. 그 갈고리는 도금을 했는지 눈부시게 번쩍거렸다. 또 다른 한 사람은 한 자하고도 세 치는 족히 됨직한 잣대를 갖고 있었는데 굵기도 유난히 굵고 기관(機關) 같은 장치가 붙어 있었다. 이 세 사나이는 뚱뚱보 여인들이 들어올 때
부터 줄곧 그녀들을 사납게 보고 있었다. 여인들이 마구 떠들고 웃어대자 그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쌍갈고리를 쓰는 사내가 탁자를 탕 치면서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화산 기슭에 별 더러운 물건들이 다 기어드는군."
그러자 세 여인은 뚝 웃음을 그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게 지금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한 여인이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내뱉자 또 한 여인이 장단을 맞춰
대답했다.
"너보고 하는 소리지."
그러자 다른 한 여인도 거들었다.
"맞아, 널 욕하고 있는걸. 저 놈은 우리가 누구라는 걸 모르고 있나 봐. 그러니 저렇게 함부로 굴지. 얘, 우리가 누구라는 걸 네가 알려 줘라."
그러자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여인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일어섰다. 그 여인은 배불뚝이처럼 솟아오른 배를 팡팡 두들겨 가며 세 사내 쪽으로 돌아섰다.
"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이냐 하면 말이다, 운남 땅에서 흘러 온 물건들이다. 그래, 운남 대환희 보살님 수하들이지. 알겠느냐? 알았으면 일찌감치 물러들 가라구. 괜히 후회하지 말고!"
그러자 세 사나이는 단박에 노발대발하며 의자를 뒤로 홱 걷어 차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운남의 그 무슨 대환희 보살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 갈고리로 약간만 긁어도 기름이 한 자루는 쏟아지겠군.'
쌍갈고리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대뜸 뚱뚱보 여인의 솟아오른 배를 겨눴다. 그러자 잣대를 든 사내가 가볍게 웃으며 말렸다.
"사마(司馬) 형, 동생이 본때를 보여야지요. 형님이 나서서야 쓰겠어요?"
사나이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잣대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잣대는 기이하게도 그대로 쭉 뻗어 나가 여인의 배도 아니요 머리도 아닌 젖가슴을 쳐들었다.
"이크, 그 젖통 크기도 하구나. 항아리만한 걸 무겁게 달고 다니느니 성가시지 않게 떼어 버려. 그럼 얼마나 가볍고 간편하겠나!"
사내는 잣대로 여인의 젖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 여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 죽일 놈아, 감히 에미 같은 사람에게 버릇없이 굴어?"
여인은 순식간에 몸을 홱 돌리더니 커다란 칼을 들고 사내를 향해 똑바로 찔러 왔다. 그 칼은 여느 칼과는 달리 농부의 호미처럼 투박했다.
"어쭈, 이것이 감히 칼을 들어?"
잣대를 쓰는 사내는 있는 힘껏 잣대로 여인을 내리쳤다. 다음 순간, 잣대와 칼이 맞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의외로 잣대가 밑으로 쓱 처졌다. 사내는 잣대로 여인을 단번에 쳐 눕히려던 것이었는데 천만 뜻밖으로 자기가 밀리자 내심 덜컥 놀랐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이거 힘깨나 쓰는군! 조심해야겠는데!"
뚱뚱보 여인은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갑자기 손을 거두고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세 사나이를 싸늘히 쏘아보았다. 그러자 갈고리를 든 사내가 이죽거렸다.
"좀 똑똑히 굴란 말이야! 그 꼴에도 계집은 계집이니 얌전히 사내를 떠받들라구!"
그 말에 세 여인은 죽겠다고 히히덕거렸다.
"그래 대환희 보살님 수하들이 겨우 네 놈들한테 질 것 같으냐?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릴 하고 있네……."
"너희 세 녀석이 모두 내 손에 꺼꾸러지고 말 테니, 두고 봐라!"
이번엔 다른 여인이 나서며 호기를 부렸다.
농부는 그 여인이 그저 거드름을 피워 보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천만 뜻밖으로 여인의 말이 떨어지고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세 사나이의 낯색이 점점 흙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눈마저 휘둥그래져서는 멀거니 세 여인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필시 부지불식중에 세 여인의 법술에 걸려든 게 분명했다. 이윽고 잣대를 가진 자가 제일 먼저 풀썩 꼬꾸라지고 뒤미처 두 사람도 연이어 꼬꾸라졌다.
한 여인이 천천히 갈고리를 쓰는 사내에게 다가가 거칠게 사내를 잡아 일으켰다.
"난 이 세상에서 갈고리를 쓰는 놈을 제일 미워한다. 한데 네 놈은 하필 재수 없게시리 쌍갈고릴 쓴단 말이야!"
그러자 사내는 낯색이 창백하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왜 이처럼 몸이 났는지 알려 줄까? 그건 내가 늘 사내들의 뇌를 꺼내 먹기 때문이다. 내가 네 놈의 뇌를 먹으려 하는데, 어떠냐?"
종래로 사람의 뇌를 꺼내 먹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사내는 혼비백산하여 숨넘어가듯 한 소리로 통사정을 했다.
"제……발…… 제발 내 뇌를…… 먹지 말아 주……."
여인은 팽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검을 쓰는 사내가 눈을 치뜨며 대들었다.
"지독한 년, 지독한 년! 내 지옥에 가서도 네 년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리라!"
"좋아, 네 놈은 지옥에 가서 날 기다리거라. 망향대에서 하루도 떠나지 말고 내가 가는 걸 기다려! 이봐, 너! 어서 가서 도끼를 가져 와!"
여인은 주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를 빽 내질렀다. 주인은 오금도 못 펴고 덜덜 떨면서 애원했다.
"제, 제발 사람을 자, 잡아먹지 마십시……오. 이 객점에 고, 고긴 어, 얼마든지 있으니……. 고기를 자시겠다면 다, 당장 요리를 만들어 드리리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갈고리 사내를 돌아봤다.
"에잇 귀찮아! 이 놈아 내가 네 놈 갈고리로 네 놈 뇌를 끄집어 내려는데 좀 써도 되겠느냐?"
"날 잡아먹지 마, 잡아먹지 말란 말이야! 내 네 년을 용서치 않을 테다!"
쌍갈고리 사내는 소리소리 내질렀다.
"허튼소리 작작 해! 어서 지옥으로 보내 주겠다니까! 지껄일 말이 있으면 거기 가서 마저 해!"
그리고는 다시 주인에게 윽박질렀다.
"빨리 가져 오란 말이야. 네 놈 객점이 박살난 다음에야 가져 오겠느냐?"
주인은 이번엔 찍소리도 못하고 기다시피 주방 쪽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자그마한 도끼 하나를 가져 왔다. 여인은 뺏듯이 도끼를 낚아채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차, 잊어버릴 뻔했군. 네 놈은 술을 잘 마시는 놈이냐?"
쌍갈고리 사내는 왜 이런 걸 묻는지 몰라 이랬다저랬다 종작없이 외쳐댔다.
"난 술을 안 마셔, 아니 술을 마셔……."
"그래, 술을 좀 마셔야지. 술을 안 마시는 놈들 것은 맛이 없거든. 하지만 주정뱅이 건 냄새가 너무 지독해. 그저 술을 적당히 마시는 너 같은 놈의 뇌가 맛있단 말야."
그러자 쌍갈고리 사내는 정신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냐. 난 술고래야, 술고래! 저……저 사람 것이…… 저 사람은 술을 많이 안 마셔……."
그러면서 쌍갈고리 사내는 잣대를 쓰는 사내를 가리켰다. 그러자 잣대를 쓰는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놈? 저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저 놈이 술을 알맞게 마시고 또 미주(美酒)만 골라 마신다구! 저 놈 뇌는 기가 막힐거야."
농부는 그쯤 되어도 이 뚱뚱보 여인들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겠지 설마 사람 뇌를 꺼내 먹을까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인은 아무 말도 않고 냉소를 날리더니 불현듯 도끼를 쳐들어 잣대를 쓰는 사내의 머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가 두 쪽으로 짝 쪼개졌다. 여인은 씽긋 웃음을 흘리며 도끼날로 사내의 뇌를 짝짝 펴더니 텁석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두 여인을 돌아봤다.
"음, 맛이 기가 막히는군! 얘, 너네들도 와서 어서 먹어 봐."
그러자 두 여인도 득달같이 달려와 기갈 들린 사람마냥 마구 퍼 먹었다.
이 객점에는 그들말고도 손님이 몇 사람 더 있었는데, 여인들이 사람 뇌를 먹는 것을 보고는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내빼려고 아우성을 치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객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러는 비칠거리고 넘어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농부는 통탄해 마지않으며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왜 진작 쌍갈고리를 쓰는 사내를 구해 내지 못했던가! 맞아 죽어 뇌를 파먹힐 망정 이 여인들과 결단을 냈어야 했다. 그는 진정 후회막급이었다. 농부가 분기탱천하여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한 여인이 먼저 소리쳤다.
"이 놈의 뇌는 참말 기가 막힌다! 보아하니 이 놈은 술고래는 아닌가 봐."
"전번에 먹은 것은 어찌나 비리던지 내 보살님께 물어 보았지. 보살님 말씀이 여인을 다룰 줄 모르는 사내의 것이 맛이 그렇대. 한데 이 녀석은 아마 여인을 다루는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지?"
"이 놈이 여인 다루는 재간이 있었다면 왜 우리를 대적해 내지 못했겠어? 이 녀석은 우리같이 무서운 여인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던 모양이지?"
뚱뚱보 여인 셋은 악귀같이 입을 놀려댔다.
농부는 그 세 여인을 바라보면서 장탄식을 했다.
'중원 사람들이 남방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하면서 피하는 게 다 우연은 아니었군! 이 꼴을 보고 누군들 겁이 나지 않겠는가? 이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고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 산 사람의 뇌와 장을 파먹는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떠들어 대지. 이러니 운남 사람들이 중원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때 한 여인이 잔뜩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이 좀 불쌍하긴 해, 아까는 달리 도리가 없어 이 놈을 죽이고 뇌를 파먹었지만 운남에서라면 머리만 내리치고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놈이 견디다 못해 알아서 머리로 담벽을 들이받아 자살을 했을 텐데. 아무래도 방법이 좋지 않았어."
여인은 느직느직 말하더니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두 사내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겁이 나서 더욱 머리를 파묻으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소리쳤다.
"차라리 깨끗이 죽여라. 그렇게도 악독하게 능멸하지 말고 제발 깨끗이 죽여!"
그러자 다른 한 사나이도 용기를 냈다.
"죽이려면 그냥 죽일 게지 이토록 고통을 줄 게 무어냐. 내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 년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 사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여인이 펄쩍 뛰어오르며 방금 말한 사내의 뺨을 연거푸 휘갈겼다.
"난 네 놈을 죽이지 않겠다! 운수 좋은 줄이나 알고 입 닥치고 잠자코 있어. 다시 한 번 더 찍소리를 했다가는 네 놈을 산 채로 잡아먹을 테니. 아까 저 놈보다 더 끔찍하게 말이야!"
그쯤 되자 농부는 더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인들에게 단단히 뜨거운 맛을 보여 다시는 악한 짓을 못하게 만들어 놓을 작정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세 여인의 손에 들려 있는 향 주머니를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것은 필시 사람을 중독시키는 향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한 여인이 농부에게 힐끔 눈길을 던지더니 대뜸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넨 농부가 아닌가? 그 호민 왜 쥐고 있나? 호미로 뭘 하려구? 우릴 찍어 죽이려구?"
그러자 다른 한 여인도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이 사내가 위풍이 있어 보이는군. 보아하니 보살님께서 매우 좋아하실 것 같아. 이 사내를 보살님한테 데려가면 아주 기뻐하시며 톡톡히 상을 내려 주실 것 같은데."
"그래, 네 말이 맞아. 우선 저 놈을 붙잡아 놓고 보자."
여인들은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일제히 농부한테 덮쳐 들었다.
농부는 세 여인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셋이서 동시에 달려드니 우세를 점하기가 어려웠다. 농부는 조급한 나머지 모든 초수를 다 동원해 세 여인을 한걸음 한걸음씩 밀어붙였다.
"재간이 대단하군. 그만하면 뽑낼 대로 뽑냈으니 호미를 던지란 말야. 우리와 함께 가면 보살님께서 네 놈을 한평생 호강시켜 줄게야!"
"여부가 있나! 보살님께서 네 놈을 첩(妾)으로 삼으려 하실걸. 그분 첩이 되면 얼마나 멋진 줄 알아? 늘어지게 호강하지, 아따 팔자 한번 기막히게 핀다니까! 일단 가기만 하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구."
여인들은 돌아가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농부는 그야말로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그는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죽어라고 호미만 휘둘러댔다. 그가 호미를 휘두를 때마다 세찬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세 여인은 그가 이처럼 결사적으로 호미를 휘둘러대자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쳐 꼬꾸라지겠어요. 사내가 맥을 너무 빼면 닭 새끼보다도 못하게 된다 했어요. 맥빠진 닭 새끼 꼴이 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게 힘을 빼지 말아요. 그 힘을 아껴 두었다가 보살님 침대에서 써야죠. 그처럼 재미있는 일을 팽개치고 여기서 힘을 뺄 게 뭐예요?"
여인들은 일부러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 소리에 농부는 더욱 성이 나서 악 소리를 지르며 닥치는 대로 호미를 휘두르고 내리찍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자 농부는 맥이 빠져 호미를 휘두르는 바람 소리도 점점 약해졌다.
'이거 내가 너무 마구 힘을 쓰는 건가?'
세 여인은 웃으면서 그저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세 여인은 농부가 맥이 빠지는 틈을 타 독약을 쓸 심산이었다. 여인들은 연해 농부의 부아를 돋우면서 손톱을 살짝 퉁겼다. 여인들의 손톱 안쪽에 독가루가 묻어 있었다. 일단 독가루가 농부의 콧구멍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손톱을 퉁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농부가 비틀하더니 호미를 툭 떨어뜨렸다. 농부는 그제야 자기가 이 여인들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독약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그는 대번에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환상에 빠져 들었다.
종남산 원산에는 한 뙈기 평지가 있다. 이곳에서 옆으로 비껴 보면 석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석굴 입구는 제법 커서 눈에 잘 띄었다. 한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 석굴 문과 문 앞의 평지는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석굴 입구엔 커다란 문짝 두 개가 달려 있는데 이 문짝은 꼭 닫힌 채 열릴 줄을 몰랐다.
왕중양은 벌써 오랫동안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만일 석굴 안에 있는 사람이 이대로 계속 나오지 않고 있으면 그도 천년 만년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 석굴은 예전에 대협 왕중양이 천하 무림 호걸들을 거느리고 금나라의 침략에 항거할 때 그가 손수 판 것으로 그는 거기에서 수진양성(修眞養性)을 했었다. 그는 금나라에 항격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더는 세상사에 관계치 않고 이 석굴에서 수행을 할 작정이었다. 그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금나라 군대와 참으로 피어린 싸움을 했다. 그런데 그가 계속 금나라 군대와 맞서는데도 남송의 조정은 화친을 맺을 생각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침내는 종남
산으로 돌아와 스스로 전진교 교주가 되었고 전진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자 급기야 이 석굴에 들어가 오랫동안이나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임조영은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석굴로 찾아와 이긴 사람이 이 석굴을 차지하기로 내기를 걸어 그와 일전을 겨루었다. 이긴 사람은 임조영이었다. 그리하여 왕중양의 이 석굴은 임조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왕중양은 사흘이나 이 석굴 문 어귀에 서서 임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려 함께 화산으로 갈 작정이었다.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얻었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감사를 드렸었다.
"청천이시여, 이 왕중양은 하늘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인연으로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이전부터 임조영은 왕중양에게 깊은 정을 품고 있었지만 왕중양은 악무목(岳武穆)처럼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지 않고서는 가정을 돌볼 수 없다며 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애절한 사랑은 알은 척도 하지 않고 금나라와 싸우는 데만 전념했다. 세월이 흘러 금나라 군대와의 항전에서 실패한 후 다시 돌아와 임조영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녀도 그에 대한 배신감에 사무쳐 그를 사뭇 냉랭하게만 대했다. 그는
임조영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을 괴로워하며 종남산에서 전진교를 세우고 시기를 기다렸다. 하나 그가 《구음진경》을 얻었을 때 첫 사람으로 마음에 둔 것은 바로 임조영이었다.
'만일 이 책을 가지고 임조영과 함께 배운다면 더욱 빠르게 무예를 정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경서에 힘입어 임조영의 독을 해독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조영의 성미로 봐서 그녀는 결코 나와 함께 《구음진경》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게다. 그러나 무예 시합에서 우승을 한 자가 이 《구음진경》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아무리 임조영이라도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때 가서 내가 다시 지게 되면 그녀는 화를 풀 것이고, 그러면
다시 화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림 고수들과 약속한 일이긴 하지만 왕중양은 내심 이런 생각으로 중앙절 날 밤에 천하의 무림 호걸들과 무예 시합을 벌여 우승한 사람에게 《구음진경》을 내주겠다고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의 예측과 달리 임조영은 그의 권고를 비웃기만 할 뿐 참가할 의도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중양은 화산 무예 시합이 임박해 오자 임조영을 다시 한 번 찾아가 종용해 보기로 결심하고 석굴 앞에 이렇게 오래도록 서 있는 것이었다.
석굴을 바라보며 왕중양은 감개가 무량했다. 그는 친히 이 석굴을 뚫었고 여기에 거처했을 뿐 아니라 종당에는 이곳이 자기의 분묘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이 석굴을 활사인묘라고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배신감이 깊을수록 임조영은 그에 대한 사랑도 사무쳐 자기가 이렇게 활사인묘를 차지하고 있으면 왕중양을 세상에 나가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슴속에서 언제나 자신이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극구 이곳을 차지한 터였다.
왕중양은 석굴에 당도한 후 줄곧 여러 번이나 소리쳐 불렀으나 석굴 문은 굳게 닫긴 채 번번이 기척 한 번 없었다. 임조영이 그가 찾아온 것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한편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선 채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 보면서 그녀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녀를 얻을 기회를 많이 놓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통탄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
으리라. 그렇게 서 있자니 왕중양은 일순 가슴에 피멍이 맺히는 슬픔을 느꼈다.
'하늘이여, 왕중양이 이 굴 앞에서 백년을 서 있는 한이 있더라도 임조영을 내주소서. 꽃 같은 여인이 적막한 석굴 속에서 어찌 그 고독을 참아 낼 수 있으리까? 더욱이나 병세까지 점점 짙어지는데……. 만일 그녀가 저 안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면 이 왕중양이 대신 죄를 받으리다. 아, 이 굴을 팔 때 임조영을 이 굴속으로 밀어 넣게 될 줄 내 어이 알았으랴.'
왕중양은 자기가 화산에 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나 임조영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화산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임조영이 없다면 화산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임조영과 함께 그 경서에 실린 무예를 수련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경서로 인해 임조영의 독을 해독할 수 없다면 그 경서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는 언뜻 참회의 눈물이 비꼈다.
넷째 날이 또다시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소 문이 스르르 열리고 안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이전부터 임조영의 시중을 들고 있는 처녀였다. 왕중양은 내심 오늘도 헛고생을 한 셈이라고 울적한 심정에 빠져 있었는데 뜻밖에도 사람이 나오는지라 적이 기뻤다. 그는 마주 걸어가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곳 주인에게 좀 전해 주게! 내가 꼭 한 번 만나잔다고! 진심으로 부탁드리네!"
처녀는 왕중양을 보더니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내때문에 자기의 사부가 중독된 몸으로 매일 석굴 속에 틀어박혀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왕중양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왕 진인께서는 근심 마세요. 저의 사부님은 석굴 속에서 잘 지내고 계세요. 그분은 이미 이곳에 익숙해지셨는걸요. 사부님은 나오고 싶어하시지 않아요. 사부님께선 저에게 대신 감사를 드려 달라고 했어요. 자기 한생에 진인 나으리의 두터운 관심을 많이 받았노라고 전하랍니다."
왕중양은 처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한마디 대답도 못했다. 이 처녀의 말에는 다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막상 처녀를 대하자 임조영의 심사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해 그는 탄식을 자아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이 어두운 석굴 속에서 지내게 하다니……. 그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할말이 없어 멍청하니 처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다시 한 가지 간곡히 부탁드리네만, 임 시주한테 이 왕중양이 화산으로 꼭 청한다고 전해 주게! 천하 고수들이 다 모였은즉, 어서 빨리 독을 해독하고 그들과 무예를 겨뤄 달라고 말이야."
"중양 진인께서는 잘못 생각하고 계셔요. 저의 사부님은 남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 없으세요. 당신은 천하 으뜸이란 명성을 대단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지만 저의 사부님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으세요. 이전에는 그분이 한 사람한테 뜻을 두고 계셨지만 그분은 좋은 사람이 아니래요. 사부님께서 하필 다시 그 사람한테 뜻을 둘 필요가 어디 있나요?"
왕중양은 그 처녀의 심사를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기는 이 처녀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기도 했다. 당초에 왕중양은 온몸에 피가 끓어 임조영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오로지 금나라 군대를 항격하는 일에만 골몰했고 2, 3년 시간이면 금나라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중년이 되도록까지 금나라 군대는 도무지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덧없이 늙어 버린 것이었다.
그 처녀가 조소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자기를 죽이려고 든대도 왕중양은 할말이 없었다.
"소저, 성가시겠지만 내가 만나잔다고 딱 한 번만 전해 주게! 제발 부탁이네!"
왕중양은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처녀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이 종남산 뒷산은 저희 사부님 가문의 땅이니 전진교 사람들이 더는 한걸음도 침범하지 말길 바래요. 그걸 위반한다면 나으리 스스로 체면을 깎아 내는 결과가 되리라는 걸 기억해 두세요."
처녀가 그 말을 꺼내자 왕중양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임조영과, 만일 내기에서 그가 이기게 되면 그녀는 그의 요구라면 어떤 것이든 다 들을 것이지만 그녀가 이기게 되면 뒷산은 그녀의 소유로 하기로 약정했었다. 전진교 왕중양의 제자들은 더는 뒷산에 들어가지 못하며 그것을 위반한 자는 목숨을 내놓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왕중양은 그 언약을 어긴 셈이 되었다.
"소저, 내가 임 시주의 규정을 어겼은즉 마땅히 약속을 지켜야 하리라. 다만 오늘만은 나한테 요긴한 일이 있으니 내가 좀 만나잔다고 전해 주게."
"중양 진인께서는 천하 무림 사람들 중 가장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신데 무슨 요긴한 일이 있어 예까지 오셨나요? 저는 진인께서 무림 대사나 돌보러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그러다가 대사를 그르치십시다."
왕중양이 재삼 간청해도 그 처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터, 만일 자기가 억지로 들어간다면 기필코 그녀의 화만 더욱 불같이 돋워 놓을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시 한층 더 시끄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좋은 말로 처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어도 처녀는 꿈쩍도 안 했다.
"듣건대, 중양 진인께서는 화산에서 큰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하던데……. 중양 진인께선 화산 무예 시합에 참가하며 천하에 으뜸가는 영웅이 되셔야지 이곳에 와서 뭐 하시는 겁니까? 긴말할 것없이 사부님이 진인을 만나려 하지 않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왕중양은 처녀의 말을 듣고 그제야 알았다. 임조영이 이미 화산 무예 시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나 다만 이 여인은 왕중양 자신이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내놓고 자랑하기 위해 무예 시합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정말 오해였다. 그것이 진정 오해인 바에야 진심을 알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항변하기는커녕 혼자말로 중얼거는 것이었다.
"이리 청하는데도 나오지 않으니 내가 거긴 가서 뭘 하겠는가? 그런 천하의 으뜸이란 명예는 쟁탈해서 뭘 하는가? 난 이미 천하의 으뜸가는 바보인데 뭐 하러 천하 으뜸이란 이름을 쟁탈한단 말인가? 다 부질없는 일……."
하나 처녀는 왕중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가 더욱 기고만장해하는 줄로만 알고 코방귀를 뀌며 한껏 비꼬았다.
"중양 진인, 종래로 대협들이란 모두 고독한 사람들인가 봐요. 천하 으뜸이란 칭호를 따내는 것은 이 백여 년 무림사에서는 무엇보다 큰일이고 축하할 만한 일 아녜요?"
왕중양은 얼빠진 사람마냥 멀거니 처녀를 바라보았다.
'자고로 투기적인 말은 절대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 여인에게 투기적인 말을 한 적이 없거늘, 임조영은 일부러 나를 깔보려고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일까?'
"소저, 지나간 일은 모두 내 탓이요, 나 때문에 임 시주가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네. 난 지금 그걸 사죄하고자 임 시주가 석굴에서 나오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그녀가 나오기만 하면 기필코 천하 으뜸의 칭호를 얻게 될 것이네. 하나 그것은 명성에 뜻을 두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림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이네!"
왕중양은 오랫동안 심중에 묻어 두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적이 진중했다. 처녀는 왕중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왕중양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중양 진인께서 이곳에서 나흘 동안이나 기다린 수고를 생각해서 제가 사부님께 한번 여쭙겠어요. 사부님께서 중양 진인을 가엽게 여기신다면 친히 화산 무예 시합에 참가하려 하시겠지요.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왕중양은 처녀가 임조영에게 자기의 본심을 전해 준다고 하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좋소. 꼭 부탁하오!"
처녀는 이내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석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 한 석실에 이르렀다. 이 석실에는 두 구의 석관(石棺)이 놓여 있었다. 임조영은 그중 한 석관 위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었다.
처녀는 한옆에 서서 임조영이 먼저 물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분이 뭐라더냐?"
이윽고 임조영이 입을 뗐다.
"그분 말씀이 사부님께서 화산에 가시기만 하면 반드시 천하 으뜸의 칭호를 따낼 수 있을 것이라 하시면서 그건 사부님한테도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 되리라 하셨어요. 그리고 덧붙여서 그것은 무림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임조영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탄식을 했다.
"이봐요. 왕중양. 당신은 왜 그리도 어리석고 박정한가요? 당신은 제가 달갑게 이 석굴 속에 있으려는 심사를 참말 모른단 말인가요? 전 당신이 이 석굴 속에 거처하는 걸 진정 원치 않아요. 당신은 종남산에 계셔야 하고, 그건……."
임조영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제자 앞이라 속심을 다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처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말했다.
"그분은 또 사부님께 사죄드린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그것은 그분께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조영이 말허리를 가로챘다.
"그분이 뭐라더냐? 그분은 강호에서 달갑게 물러나 나와 함께 이곳에 은거하겠다고 하시더냐?"
처녀는 일순 임조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참 전진교가 흥성하고 있는 이때 그가 어찌 은거하려 하겠는가.
"사부님, 중양 진인은 사부님과 함께 화산에 가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께 천하 으뜸이란 칭호를 쟁취하게 한 다음 사죄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저가 보기에도 사부님과 중양 진인 사이에 있었던 오해는 다 풀리게 될 것 같습니다."
임조영은 탄식했다. 그녀는 원래 그 무슨 천하 으뜸이란 칭호 같은 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왕중양도 그러기를 바랐다. 천하 으뜸이 다 무엇인가? 그런 것은 부질없는 것이요, 허튼 것이다. 백년 세월도 순식간에 지나가거늘 사람의 한 생이란 눈앞의 연기와도 같은 것, 하나 왕중양은 아직까지도 명성을 그토록 아끼고 있으니……. 임조영은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사부님께선 안 가시겠나요?"
처녀는 다시금 말을 꺼냈지만 감히 권고할 생각은 못했다. 기실 임조영은 석굴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맘속으로 다진 맹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조영은 앞으로 다시는 왕중양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로 작심했었다. 그런 결심이 없었다면 이 여인은 이 굴속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처녀는 자기가 뭐라고 해도 사부가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임조영은 언뜻 석벽에 걸려 있는 구리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 반들거리는 구리 거울은 임조영이 이곳으로 갖고 들어온 것으로 평소 몹시 아끼는 것이었다. 임조영은 거울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제자야, 횐 머리칼이 얼마나 늘었느냐? 네 사부는 이제 더 이상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미인이 아니구나. 더구나 이토록 뱀 독에 중독되어……. 그러니 이제 와서 밖에 나가 세상의 비웃음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
처녀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녀는 내심 자기 사부가 왕중양과 함께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는 사부의 공력이라면 왕중양은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왕중양을 이기기만 하면 천하의 다른 영웅호걸은 문제도 아닐 것이었다. 하물며 그 일을 기화로 사부의 병세를 호전시킬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만일 사부가 굴 밖으로 나가는 걸 동의하게 되면 왕중양과 화해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얼마나 좋으랴.
"사부님, 제가 보건대 중양 진인은 진심인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도 역시 자기의 심사를 다 이야기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건 단지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을 따름인 줄 압니다. 사부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알고 계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처녀는 다소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고 완곡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임조영은 펄펄 뛰었다.
"뭐라고? 그 사람이 심사를 드러내기 싫어한다고? 그 사람이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데 내가 왜 내 마음을 드러내겠느냐? 그 사람은 사내대장부고 천하의 무림을 호령할 만한 사람인데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데 내가 여인으로서…… 그래야 한단 말이냐? 그 사람이 심사를 드러내지 않으면 속에 생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사람이 속에 생각이 없는데 이 임조영이 무슨 생각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이 애초에 이 활사인묘에 거처하려고 한 건 밖의 일이
시끄럽다고 여겨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밖에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신 이 활사인묘에 들어온 것이야. 내가 왜 그 사람을 대신하여 이 묘 안에 거처하려고 했는지 아느냐? 그건 천하 무림의 일에 이 임조영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왕중양 혼자만의 일은 아닌 거야."
그러나 처녀는 사부의 기색을 살피며 이왕에 내디딘 걸음이라 생각하고 꾸중을 들을 각오로 다시 권고했다.
"사부님…… 그분은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한번 만나 보셔야……."
임조영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성을 냈다.
"난 그 사람이 미워. 아직도 성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서 뭘 해? 난 천하의 으뜸을 쟁취할 생각도 없고 으뜸가는 여협이 되고 싶지도 않아. 그 사람이 《구음진경》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내 보기엔 그건 대단한 게 아니야. 난 새로운 검술을 창안해 냈는데 그것으로 그 《구음진경》을 얼마든지 대적해 낼 수 있어!"
처녀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처녀는 애가 타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임조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가 이 굴로 들어올 때 내가 한 맹세를 넌 아직도 기억하느냐?"
"네."
처녀는 머리를 숙이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한평생 이 굴 밖으론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중양 진인이 왔다고 해서 그 맹세를 저버릴 순 없다. 넌 어서 나가 그에게 돌아가라고 일러라. 어서 화산으로 가라고 해!"
처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정중히 읍을 하고는 물러나왔다.
왕중양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임조영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와 함께 화산으로 가려 할지 속이 달았다. 아니, 나올지 안 나올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쨌든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일단 마주 대하게만 돼도 무슨 방도가 생길 것 같았다.
왕중양은 말주변이 좋았다. 강호 무림에서 국가 대사를 상론할 때에는 실로 열변이 도도했다. 그러나 일단 임조영을 만나기만 하면 할말을 찾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혀끝이 마비된 듯이 뻣뻣해져서 청산유수 같은 그 말솜씨는 번번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그는 거듭거듭 마음을 다졌다.
드디어 들어갔던 처녀가 다시 나왔다. 왕중양은 반색을 했다.
"그래, 사부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처녀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꾸가 없었다. 왕중양은 일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싶었다.
"임조영이 가지 않고서야 어찌 화산의 무예 시합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가지 말아야겠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양 진인께서는 꼭 가셔야 합니다. 진인께서 가시지 않으면 화산의 무예 시합은 누가 장악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중양은 그 말을 못 들은 듯 거듭 되뇌었다.
"임조영이 가지 않는다면 다 쓸데없는 일이다……."
처녀는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저분이 저러시는 모양을 보면 저분은 사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라. 저분은 사부님을 무척 생각하고 계심에 틀림없어. 그런데도 두 분은 일단 만나기만 하면 서로 한치도 양보를 하지 않는단 말이야. 만일 내가 저분을 속여넘기지 않는다면 저분은 화산에 가지 않으려 할 거다.'
처녀는 생각을 굴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중양 진인께서는 화산으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저의 사부님도 딱히 안 가시겠단 말씀은 않더군요."
왕중양은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임조영이 참말로 그러던가? 안 간다고는 단언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렇담, 좋아! 그녀가 화산으로 오겠다고 했다면 병세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형편인 듯싶으니 내 믿지. 믿고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지. 임 시주한테 알려 줘, 꼭 와야 한다고! 건강한 몸으로 꼭!"
왕중양은 기뻐서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는 처녀에게 몇 번이고 치하를 하며 그제야 석굴을 떠나갔다.
처녀는 왕중양이 떠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펄쩍펄쩍 뛰어오르다간 이내 구름에 뜬 듯 잽싸게 걸음을 떼놓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처녀는 적지 않이 감격했다. 두 사람은 한평생 이처럼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만나기만 하면 서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늘 말다툼을 벌였었다. 왕중양은 일심 전력으로 금나라에 항거하고 강호의 대업을 소중히 여겼다. 임조영은 그를 강호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지만 그는 극구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처녀는 그간 사부의 병세가 점점 깊어 가는 걸 보면서 왕중양의 청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사부의 애증을 두려움으로 지켜 보았었다.
처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으며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가 천천히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들어가 보니 임조영은 왕중양의 초상 앞에 바싹 다가선 채 그의 초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머리를 숙이더니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지금 왕중양을 위해 축원을 드리고 있는 게야.'
잠시 후, 임조영이 머리를 돌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분은 돌아가셨느냐?"
"그분은 가셨어요. 화산에서 사부님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
임조영은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분은 내가 화산으로 갈지, 안 갈지 어떻게 안다더냐? 내가 어떻게 화산으로 간단 말이냐? 화산 무예 시합에는 천하의 영웅들이 다 모이게 되는데 너의 사부는 이제 그 무슨 영웅도 아니다. 활사인에 불과한 사람이 어찌 무예 시합에 참가할 수 있겠느냐?"
그녀는 잠시 말을 끊더니 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화산은커녕 아무데도 나가지 않을 거다! 넌 명심해 두어야 해. 이 석굴에서 나는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아. 너도 네 맹세를 기억해야 하느리라. 그걸 위반하면 엄벌을 내릴 것이야. 내가 일러준 바대로 저 두 개의 석관이 나와 너의 잠자리인 게야. 우린 거기에서 죽기를 기다려야 해, 그 석관 속에 누워서……. 나는 그렇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생각이야."
처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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