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4

3학년2반 | 2022.02.22 07:38:31 댓글: 0 조회: 42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322

제16장 허황된 꿈
단지흥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심정으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시간이 속세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그는 참으로 여러 날이나 흘러간 듯싶었다. 속세의 나날들과 이곳에서 지나 보낸 일들을 떠올리며 시름에 겨워 넋 놓고 앉아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나서 그는 언뜻 고개를 들었다. 홍사가 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홍사 앞에 웬 처음 보는 여인 하나가 앞서고 있었고, 개중에 사내도 하나 언뜻 눈에 띄었다. 그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내는 천만 뜻밖에도 자기의 시위인 선비가 아닌가.
"폐하! 이곳에 계셨습니까?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선비는 여인들을 제치고 한달음에 달려와 울먹거리며 단지흥의 손을 잡았다.
"자넨 여기 어인 일인가? 자네까지 이제는 이 지옥에……. 난 별고 없었네. 이곳에서 잘 지냈어. 저 여인들도 날 잘 대해 주고……. 하지만 지금은 다소 적적하이. 난 저 여인들이 몹시 불쌍해. 어쨌든 이렇게 지내고 있다네."
선비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여인들이 이미 두 사람을 에워싸고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불쌍하고 안 하고 간에 황제께선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황제께선 우리들을 비천하다고 깔보시는 모양인데, 만일 배은망덕 하셨다간 이곳에서 끝장을 보게 될 줄 알아 두세요."
홍사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걸어온 여인이 냉랭히 소리치더니 양 미간을 찌푸리고는 곁에 있던 찻잔을 비틀어 버렸다. 그녀는 잔뜩 악이 받쳐 있었다.
"이분은 등아 향녀님이시옵니다."
홍사가 나서서 여인을 소개했다. 그러자 여인은 홍사를 밀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 사내들 중에 좋은 사람이 어디 하나나 있어요? 황제건, 강호의 대협이건 모두 한통속이요, 욕심 사나운 개들이에요!"
그녀가 사뭇 사납게 나오는데도 단지흥은 그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가 사내들을 그처럼 미워하는 데는 필시 그 어떤 고충이 있을 줄 아오. 그러니 굳이 설득하려 들진 않겠소. 하지만 천하에 사내들이 그토록 많은데 사내란 사내들을 하나같이 다 나쁜 놈으로 몰아서야 되겠소?"
그러자 등아는 부아가 치밀어 자기 옷자락을 짝짝 찢으며 고함을 쳤다.
"그럼 말해 봐요, 사내들이 나쁘지 않다면 왜 여인들이 모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요?"
"등아, 나의 황궁엔 궁녀들이 많다오. 물론 그 여인들이 매일매일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소. 그네들이 사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 사실이고 내가 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하나 국사가 지엄한 법이거늘 내 어찌 그녀들의 원을 다 풀어 줄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등아는 잡자기 미친 사람마냥 웃어젖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는 단지흥은 연민의 정이 불끈 치솟았다.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등아, 여인은 꽃인 거요. 그처럼 예쁜 얼굴로 그리 무섭게 굴건 뭐요?"
그러자 등아는 느닷없이 단지흥의 뺨을 찰싹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요. 그렇게 많은 미인들을 차지하고 독수공방을 시켜 고통을 주고 있으면서도, 그런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나요?"
단지흥의 얼굴에 대번에 손자리가 났다. 선비는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벙벙해 있다가 등아가 단지흥에게 손찌검을 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단지흥이 얼른 저지하였다. 단지흥은 얼얼해진 볼을 만지며 잠시 망연자실하게 등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편으론 성이 났으나 마음을 가다듬고는 오히려 허허롭게 웃었다.
등아는 황제의 뺨을 올려붙이고 나서 속으로 우쭐했으나 의외로 그가 성을 내기는커녕 웃음을 짓자 일순 당혹스러워졌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탄복해 마지않으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단지흥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한마디했다.
"미인이 섬섬옥수로 나를 어루만졌으니 정을 느꼈도다. 죄과로다."
그러자 등아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단지흥은 그녀가 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홍사가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등아를 희롱했어요. 그 죄, 죽어 마땅해요."
여인들은 장탄식을 하면서 마치 죽은 사람 대하듯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단지흥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이곳이 지옥이거늘 또 죽이겠다니…….
얼마 안 있어 등아가 과연 사람을 보내 왔다. 그 여인은 읍을 하더니 냉랭히 말했다.
"등아 향녀님께서 폐하를 청하십니다."
단지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인데 등아가 나를 청해다가 마저 죽여 버리려고 그러는 거요?"
"단황 나으리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등아가 보낸 여인이 물었다.
"이미 죽은 목숨, 무엇이 두렵겠는가? 황제 노릇 하기란 고달프기 짝이 없다네. 날마다 숱한 일을 처리하느라고 골머리를 앓노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적이 더러 있었지."
선비는 등아가 단지흥을 청한다고 할 때부터 적당한 기회를 노려 손을 쓰려 하고 있었다. 하나 지금 단지흥의 말을 들으니 그는 불현듯 황제를 향한 측은지심이 일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때 홍사가 나서서 냉랭히 말했다.
"이제 사실대로 다 말씀드려야겠군요. 기실 이곳은 지옥이 아니에요. 폐하께서 처음 이곳에 오실 때 본 그 망향대도 다 사실이 아니지요. 폐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뿌린 미향에 중독되어서. 그후론 정신을 차리셨겠지만 그땐 이미 지옥이라고 알고 난 뒤라 폐하께선 이곳이 지옥이라 생각하고 계셨겠죠. 이곳은 우리 향녀들의 은거지예요."
"아, 기실은 그랬었구나, 그랬었어……."
단지흥은 허탈하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곳이 정녕 지옥이 아니라 하는데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그 무슨 생환의 기쁨 같은 것이 찾아 들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이제는 정말 죽게 되셨군요! 등아 향녀님을 능멸한 죄, 살아 남을 생각일랑 아예 접으세욧!"
그제야 단지흥은 머리가 환해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시 바삐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어찌 됐든 그 등아라는 여인과 한 번은 맞대면해야 하리라. 그는 선비에게 결연한 눈빛을 보
내며 선뜻 여인을 따라 나섰다.
단지흥이 그렇게 나오자 선비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그를 병풍 뒤로 데려갔다. 한 순간 연기가 피어 오르며 그는 언뜻 정신을 잃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무슨 석실에 와 있는 듯했고, 그는 좁다란 통로를 걷고 있었다. 천장에는 수많은 등불이 걸려 있고 등불 주위에는 사람 해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정신이 드셨군요. 저 해골은 모두 사내들 것이죠. 모두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멍청이들 것이오. 그자들은 여인을 유린하는 일이 아주 멋진 일인 줄 알고 덤비다가 비명에 죽었어요. 향녀는 결코 사내가 자기를 업신여기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
여인은 짐짓 위엄을 갖추며 말했다. 단지흥은 여인이 일부러 자기 들으라고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런가?"
여인은 단지흥이 그 숱한 해골을 보고 깜짝 놀랄 줄 알았다가 그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자 내심 혀를 내두르며 더는 지껄이지 않았다.
여인은 단지흥을 데리고 어느 석실로 들어섰다. 석실 여기저기에 수많은 병과 단지들이 널려 있었다. 한가운데에 침대가 있고 등아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운기를 하고 있었다.
"날 부른 게 해골을 만들자고 한 노릇이오?"
단지흥은 큰소리로 외쳤다.
"나를 해골로 만들 바에야 반드시 잘 만들어 주오. 약간 분홍빛을 띠었으면 좋겠고 눈언저리도 좀 붉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소. 어떻게, 될 수 있겠소?"
그러자 등아는 번쩍 눈을 뜨더니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당신은 아직도 입은 잘 놀리는군요. 이제 조금만 지나면 더는 입도 놀리지 못하게 될걸……."
등아는 말끝을 흐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적이 부드러웠다.
'저 여인은 필시 고독하여 날 동무로 삼자는 게다. 그러니 진심으로 잘 대해 주어야지.'
단지흥은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사뭇 마음이 놓였다. 그리하여 자기를 데리고 온 여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긴 네가 할 일이 없노라. 그래, 남들 좋아 지내는 걸 꼭 볼 셈인가?"
그러나 그 여인은 단지흥을 쏘아볼 뿐 조금도 물러갈 생각을 안했다.
등아가 소리쳤다.
"저자의 옷을 몽땅 벗겨라!"
그러자 그 여인은 즉시로 그에게 달려들어, 이 일에 아주 익숙한지 낯색 한 번 붉히지 않고 그의 옷을 홀딱 벗겼다.
단지흥은 분위기도 사뭇 냉랭한데 그렇게 옷을 벗고 있으려니 다소 민망했다.
"개똥 같은 사내들이 저마다 위세를 떨려 들거든. 당신은 사내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나요?"
등아가 물었다. 단지흥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홀딱 벗기는 거예요. 사내들을 홀딱 벗겨 맨바닥에 세워 놓는 거죠. 그렇게 해 놓으면 사내들이란 하나같이 가소롭기 짝이 없지요. 게다가 몹시 부끄럼을 타면서 몸둘 바를 모른다구요. 홀딱 벗긴 사내들은 여인처럼 용감하지도 못……."
등아가 연이어 뭐라 말하려는데 의외로 단지흥이 씩 웃으며 털버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댄 잘못 생각했소. 날 좀 보시오. 난 이렇게 홀딱 벗고 바닥에 앉아 있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소."
"쳇, 당신은 황궁에서 늘 홀딱 벗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여인들 앞에서? 그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죠?"
등아는 코방귀를 뀌었다.
"그렇지 않았소. 궁전에선 난 그닥 재미를 보지 못했지. 여하튼 지금 난 맘속으로 책 한 권을 암송하고 있소."
등아는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책인데요?"
"그래, 무슨 책 같소? 《금강경》이오."
단지흥은 불심이 깊은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심보다는 향녀를 조롱하고 싶은 생각이 앞서 있었다. 등아는 대번에 싸늘히 낯색을 굳혔다.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이제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곧 해골로 만들어 놓을 게 뻔하다. 등아가 사내들을 저처럼 가혹하게 해골로 만들어 놓은 걸 보면 그녀는 그녀 말마따나 사내들에게 크나큰 원한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지흥은 마음이 몹시 착잡해졌다. 일단 이들을 제압하려고 들면야 식은죽 먹기지만 그는 그녀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주고 싶어서 잠시 관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 사람을 채찍으로 후려갈겨라!"
등아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은 무척 기뻐하며 얼른 천조편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소리는 마음껏 질러도 돼요. 그런 소린 참으로 듣기 좋으니까. 일부러 이를 악물고 참지 마세요. 당신이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않을수록 전 더 얻어맞고 싶어 그러는 걸로 여기고 더욱 호되게 굴겠어요."
여인의 낯빛엔 그 어떤 흉포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단지흥은 그저 천연덕스럽게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조편을 본 순간, 그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채찍은 끝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 가닥들은 모두 뱀의 힘줄로서 매우 가늘고 엄청나게 질겨 보였다. 하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은 아주 훌륭하군."
"무엇이 훌륭하다는 거예요?"
"그 채찍 말이오! 난 황제이면서도 그런 채찍은 없다오."
등아는 단지흥이 끝끝내 빈정거리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때려! 난 혓바닥 놀리기 좋아하는 놈을 가장 미워해!"
철썩철썩,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은 몸에 감기듯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순간 살갗이 찢기는 아픔이 온몸으로 확 퍼져 나갔다.
"아이쿠!"
단지흥은 소리를 내지르며 털버덕 옆으로 쓰러졌다.
보아하니 여인은 채찍질에 이골이 난 듯싶었다. 여인은 단지흥이 몸을 비트는 대로 쫓아다니며 연거푸 몇 십 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단지흥의 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채찍은 그의 가슴 속에 들어앉은 불집을 마구 쑤셔 놓는 듯싶었다.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렀다.
한 순간 채찍 소리도 사라지고 여인의 발자국 소리도 없어졌다. 채찍질이 멎었다. 단지흥은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등아가 천천히 다가와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쳐들었다.
"황제 폐하, 시원하시겠소? 여인을 가지고 놀 때처럼 기분이 좋으시죠?"
그녀는 마치 가학의 쾌감을 맛보는 듯했다. 단지흥은 눈을 감았다. 한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그는 점점 노기가 끓어올라 눈을 번쩍 뜨고 등아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여인의 눈에서는 복수의 기쁨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저 여인들은 사내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게 뭐 대순가? 난 황제가 아닌가? 하늘이 나를 황제로 이 지상에 내려 줄 때 남한테 매를 맞으라는 뜻은 결코 없었을 게다. 일평생 누가 감히 나를 때리겠는가? 나를 때려 저 여인들이 가슴에 맺힌 울분이 풀린다면 맞아 주자, 맞아 줘! 이 향녀 덕에 매를 맞는 게 어떤 것인가도 알게 된 셈이니…….'
단지흥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등아, 때리고 싶거든 때리시오. 난 염두에도 두지 말고 때려요!"
그러자 등아는 질겁을 하며 발딱 일어섰다.
"과연 대단하군요. 바보 계집들이 당신을 좋아할 만도 해요."
향녀는 짓씹듯이 한마디 내뱉더니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틀어쥐고는 그를 질질 끌고 통로로 나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이쪽저쪽으로 끌고 다녔다. 그녀의 손 힘은 엄청나게 셌다. 등아에게는 단지흥이 한 구의 해골로만 보이는 듯싶었다.
"자, 저걸 보시오, 황제! 저 놈은 중인데 힘이 좋았지. 난 이처럼 힘이 좋은 사내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어요. 이 사내는 이레 동안이나 밤낮을 쉬지 않고 우리 애들을 가지고 놀았어요. 이젠 만족하냐고 물으니 이 사낸 너털웃음을 웃으며 '난 이 짓엔 종래로 만족을 몰라' 하더란 말이에요. 그래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겠소? 먼저 가위로 그 놈의 그것을 썩둑 잘라 냈지요. 그러니 놈은 실로 사자같이 울부짖는데, 으하하하……."
등아는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단지흥을 한쪽에다 팽개쳐 놓고는 도통 그칠 줄 모르고 숨을 헐떡여 가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저기, 저것도 좀 보시오! 저 물건은 여윈 사내였는데 도사였지요. 이자는 처음에는 여인들을 건드리지도 않더군요. 그저 품에 안기게 놔둘 따름이었지요. 내가 '유하혜(柳下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하고 말하자…… 참, 폐하는 황제이시니 유하혜를 모를 리 없겠죠? 색을 멀리한 것으로 이름난 노나라 때 귀족말이에요……. 어쨌든 놈은 냉랭한 기색으로 '유하혜는 참말로 여인을 갖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난 아냐……' 하는 게 아니겠어요? 결국 놈은
자기가 진짜 사내라는 걸 내게 보여 주더군요. 저 놈은 여위었어도 힘만은 대단했어요."
단지흥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난 저 놈을 꼭 껴안고 사흘 동안이나 주물러댔지요. 드디어는 못 참고 나동그라지고 말더군요."
등아는 그때의 그 감미로운 순간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이 왜 이런 악몽에 빠져 있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탄식을 하며 한마디 꺼내 놓았다.
"기실 그대들은 정말 이럴 필요가 없소. 세상 사내들이란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여인을 저버리지 않아!"
그러자 등아는 쏜살같이 단지흥 앞으로 달려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은 매일 황궁에서 여인들을 당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을 테죠? 여인들은 한마디도 거절할 수 없었을 테고요? 여인들이 맘속으로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겠죠? 당신은 여인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마치 고고한 군자마냥 꾸며 대고 슬그머니 피해 나왔을 거예요. 여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그러니 여인들이 얼마나 서럽겠나요?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살면서 여인들이 왜 당신들의 노리개가 돼야 한
단 말이에요? 듣자 하니 운남에는 대환희 보살이란 여자가 있다던데 그 여자가 사내를 가지고 노는 데 아주 재간이 있다면서요? 그 여자가 참말로 잘하는 게지요. 세상 사내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마음대로 주무른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안 그래요?"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에게는 참된 사랑이 있소. 남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그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그따위 말은 하지도 말아요. 구역질 나요. 세상 사내들에게 사랑이란 한 순간의 불장난에 불과해요."
단지흥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참으로 난처했다. 도저히 이 향녀 등아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연민의 정이 치밀어 처연히 등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등아가 단지흥의 손을 잡아 자기의 젖가슴 쪽에 갖다 대고 문지르더니 갈라진 소리로 외쳤다.
"날 가지고 노세요. 날 가지고 놀란 말이에요! 당신은 알고나 있나요? 사내들이란 종당에는 바로 이 젖가슴을 만지고 난 후부터는 이곳 여인을 가지고 놀려는 심사마저 없어졌다는 걸……. 얼굴에 피어 오르던 음탕한 기운이 대번에 가시고 온통 놀라움과 두려움밖에 남지 않아요, 겁쟁이들같으니라구……."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단지흥의 손을 힘껏 틀어쥐며 또다시 소리쳤다.
"가지고 노세요. 가지고 놀란 말이에요. 두려운가요? 그래요? 두려운 거지요?"
단지흥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여인이 이끄는 대로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 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 살짝 어루만졌다. 이제부터는 입이 아니라 손이 모든 것을 말해 주리라. 저 밑에 감추어져 있는 가슴속 진실까지도 이제는 손이 말해 줄 것이었다.
등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다 미워해선 안 되오. 세상엔 나보다 훌륭한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오."
단지흥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등아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당신이야…… 좋지요. 좋고 말고요……. 하지만 사내들이란 모두 심보가 고약해요……."
이 여인은 사납게 단지흥을 끌고 다니던 좀전의 그 여인이 아니었다. 등아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했다.
단지흥은 가볍게 등아를 부축하여 석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침대는 아주 컸다, 수많은 사연이 깃들인 바로 그 넓이만큼 되듯이…….
농부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꼭 무슨 꿈을 꾸고 있는 듯싶었다. 머리 속이 어질어질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농부는 의식을 잃어 모르고 있었으나 방금 뚱뚱보 여인 셋이 그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 여인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그녀들은 욕망을 다 채우고는 농부를 높이 달아매 놓고 밥을 먹으러 가 버렸다. 그녀들은 이렇게 매달아 놓으면 사내의 욕정은 더욱 커진다고 믿고 있었다.
농부는 견딜 수 없이 구역질이 나서 거꾸로 매달린 채 계속 음식물을 토해냈다. 여인들은 농부에게 미약을 자그마치 한 사발이나 먹였다. 만일 그나마 여인들한테 한바탕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미약 독이 온몸에 퍼져 벌써 딴 세상으로 갔을 터였다. 한바탕 토하고 나자 독 기운이 퍽 약해진 듯싶었다. 그는 자기의 처지가 한심하기 그지없어 이빨을 바드득 갈며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부었다. 대리에 돌아가게 되면 대환희 보살 무리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 더는 운남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리라. 그러나 능히 살아서 대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없었다.
세 여인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여인들은 밧줄을 풀어 농부를 내려놓고는 뺨을 살살 어르며 말했다.
"아이, 우리 귀염둥이, 우리 보살님을 잘 따르기만 하면 복이 덩굴째 굴러 들어요. 이제 곧 보살님이 오실 텐데 그전에 뭘 좀 잡수셔야지?"
여인들은 한 장막으로 농부를 끌고 갔다. 그 장막 안에는 바닥에 커다란 가죽을 펴 놓았는데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들은 제각기 가죽 위에 벌렁벌렁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보배둥이, 어서 와요, 어서 와. 와서 누워요. 방금 힘을 많이 썼으니 무얼 좀 자시고 몸을 추슬러야지요!"
개중 한 여인이 누운 채 한 팔을 뻗어 농부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평소 같으면 농부가 능히 당해 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나 지금 농부는 중독되어 있는지라 속수무책으로 여인이 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농부를 한가운데다 자빠뜨려 놓고는 개중 한 여인이 농부의 발을 끌어다가 불룩하니 솟아오른 배 위에다 올려 놓고는 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기가 몽글몽글하니 발을 올려 놓으면 좋을 거예요."
그러자 다른 한 여인도 뒤질세라 머리를 품에 껴안으며 속닥거렸다.
"난 당신의 귀한 머리를 받들어 줄 테야요."
다른 한 여인은 농부의 손을 쥐었다.
"난 당신의 손만 잡겠어요."
농부는 여인들이 왜 이처럼 법석을 떨어대는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갑갑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얼굴에 덕지덕지 분을 바른 사내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쟁반에다 음식을 날라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여인은 벌떡 일어나 앉아 눈빛을 반짝였다. 순식간에 짐승 가죽 위엔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천하에서 먹는 것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마도 대환희 보살밖에 없을 것이다. 짐승 가죽 위에는 남방 요리며 북방 요리며 할 것 없이 갖가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는데 농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도 많았다.
세 여인은 좀전에 이미 한바탕 먹었으면서도 서로 질세라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젓가락 같은 건 쓰지도 않고 아예 손으로 마구 쑤셔 넣었는데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무슨 철물이라도 씹는 듯이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났다.
그때껏 농부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어지간히 배가 찼는지 한 여인이 갑자기 농부의 머리를 바싹 끌어당겨서는 그의 입에다 시꺼먼 음식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이건 녹양(鹿陽)인데 잘 먹어 둬요. 이걸 잡숴야 대환희 보살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으니까."
곁에 있던 여인도 끼여들었다.
"당신이 대리 사람이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도 우리 보살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겠지요? 지금 당신은 필시 대환희 보살님의 속심을 알고 싶을 거예요. 그러자면 잘 잡숫고 기운을 추슬러야 할 게 아니에요? 보살님께서 당신을 좋아하게만 되면 당신은 복에 파묻히게 되거든요. 보살님께서는 평소 세 사내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며칠 전에 그중 한 사내가 죽었어요. 그래서 보살님께서는 지금 매우 상심해 계신데 당신이 만일 보살님의 환심만 사게 된다면 그야말
로 복덩어리가 되는 거라구요. 그럼 매일매일을 얼마나 즐겁게 보낼 수 있겠어요."
그러자 세 여인은 앞을 다투어 농부에게 음식을 먹였다. 어떻게나 마구 퍼 넣는지 농부는 미처 씹어 삼킬 틈도 없었다.
"날 즉일 셈이냐?"
농부는 손을 가로 저으며 입 안의 음식물을 캭 뱉어 내고는 소리를 질렀다.
"토하면 안 돼요. 만일 보살님 앞에서 음식을 토하면 살아 남지 못해요!"
한 여인이 질겁을 하며 농부가 뱉은 것을 일일이 주워 먹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세 여인은 서로 마주보고 깔깔 웃었다.
"참말 우리는 입이 셋이라 그렇지 셋이서 한꺼번에 음식을 떠 먹였으니 저분 혼자 어찌 다 받아 자실 수 있었겠니?"
한 여인이 눈을 찡긋했다. 곁에 있는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하나 보살님이었다면 우리 셋이 바삐 떠 드려도 미처 따라가지 못할 텐데. 세상에서 보살님보다 더 빨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듣자니 홍칠이라는 사람도 먹을 것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더라."
여인은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어댔다.
홍칠공이 개방 방주요 풍운아로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고 있었다. 무림 고수의 이름을 듣고 나니 농부는 더한층 자기 처지가 한심해졌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황제 폐하는 어찌 되었을까……. 그는 숨이 막히도록 배가 불러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속으로는 연신 장탄식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쉬셨지요? 푹 쉬셨는가 말이에요?"
한 여인이 다그치듯 물었다. 옆의 여인도 거들었다.
"당신은 대리의 벼슬아치지요? 지위가 그러하시니 우리가 시중을 들어 드릴게요. 대리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 서로 잘 지내요."
농부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순간 이 뚱뚱보 여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뚱뚱한 여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대환희 보살이었다. 여인은 큰 곰 같은 몸집으로 소리 없이 농부 앞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 어떤가? 쓸 만한가?"
보살이 묻자 여인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히히덕거렸다.
"보살님, 이분은 팔 힘이 대단해요."
한 여인이 대답하자 대환희 보살은 사뭇 흡족한 듯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자 그녀의 살집은 징그럽게 흔들거렸다.
"좋아, 좋아!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이 녀석 팔 힘이 센가, 내 팔 힘이 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살은 농부한테 팔을 쓱 내밀었다. 하나 그것은 사람 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깃덩어리 같았다. 농부는 이 여인들이 어찌하든 대뜸 자기 말만 했다.
"대환희 보살, 당신은 우리 황제를 보지 못했소? 우리 황제를 보았다면 제발 행방 좀 말해 주시오. 보답은 후하게 해 드리리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실눈을 뜨며 농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한데 어떻게 보답하겠다는 것이냐? 날 안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무슨 보답인지 똑똑히 말해야 알아먹지."
"난 지금 황제 폐하를 찾고 있는 중이오. 만일 그분을 보셨다면 어서 알려 주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드리리다."
"난 중양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일간 무예 시합이 열리면 자연 단지흥을 찾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니 나만 따라 가면 그를 만나게 돼!"
보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내뱉더니 농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세 여인들을 툭툭 차면서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거라, 일어나. 내 이 녀석한테 보답을 받아야겠다!"
왕중양은 화산에 당도했다. 그가 마침내 화산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묵고 있는 객점 앞에는 각 문파 인사들이 몰려와 만나기를 청했다. 왕중양은 워낙 후덕하고 남한테 함부로 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찾아온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느라고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왕중양은 휴식할 짬이 생겼다. 마침 긴장을 풀고 몸을 눕히려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불쑥 들어섰다. 한눈에도 흉악해 보이는 인상에 호복(胡服)을 입고 있었다. 살펴보니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대뜸 불량스레 말머리를 꺼냈다.
"모두들 왕중양이 미치광이라고 하기에 그게 사실인가 알아보러 왔소이다."
왕중양은 하루 온종일 공손한 말만 들었던지라 적이 의아해하면서도 너그럽게 대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칠 거야 무어 있겠소만, 난 당신 수중에 있는 《구음진경》을 좀 보려고 하외다."
그는 껄껄 웃었다. 왕중양도 마주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그래 당신은 아직도 저의 말을 믿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믿도록 말씀해 주면 나도 믿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않소?"
내내 곱지 않은 말투였다.
"믿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 먼 길을 오시었소? 당신 차림을 보아하니 서역 사람 같은데. 서역에서 불원천리 예까지 오신 걸 보면 아마도 절 믿기 때문이겠지요?"
"천하에 둘도 없는 무학기서를 남한테 내주려 한다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바보 아니겠소? 그러니 믿지 못하는 거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
왕중양은 장탄식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할는지는 모르겠소만 실제로 미쳤다고 해도 나는 오히려 그 멋을 알고 있소이다. 다행히 미쳤기 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방해하는 중에도 그 재미를 알 수 있는 게 아니겠소이까?"
그 사람은 왕중양을 유심히 쏘아보았다.
"좋소, 좋아. 사람들이 왕중양은 불가전승이라고들 말하지만 당신을 직접 대하니 역시 인정이 많은 사람이로군. 그렇다면 당신을 이기기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소."
그리고는 그 사람은 대뜸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왕중양은 일순 그 사람에 대하여 흥미가 생겼다. 그 사람은 흔히 보는 강호 무객들과는 달랐다. 눈길이 사나워 보이는데다 체구가 우람했는데 한눈에도 강호의 악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강호에서 소문이 자자한 악인 구양봉이로군요?"
왕중양이 말하자 그는 대뜸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과연 대단하구먼. 중양 진인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신다니까."
"중양절이 눈앞에 임박했소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당신은 《구음진경》을 쟁탈하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당신은 간악한 사람이라 만약 《구음진경》을 갖게 된다면 천하가 편안한 날이 없을 겁니다."
왕중양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구양봉이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왕중양, 당신이 그 밀서를 그토록 아끼는데 차라리 내가 그 《구음진경》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랬다면 당신에게 큰 번뇌도 주지 않았을 게 아니오?"
"구양봉, 모두들 당신은 형을 죽이고 형수를 통간한 자라고 하더군요. 떠도는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말해 줄 수 있겠소?"
"난 성미가 뻐들뻐들하여 떠도는 말을 관계치 않소. 사람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든, 남한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있소?"
이때 구양봉의 머리 속에는 갑자기 한 사람의 자태가 떠올랐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자태가……. 그는 그 여인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인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터, 설사 그 여인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라면 여인에게 얽매여서는 안된다. 사나이가 여인만 생각하고 여인의 치마폭에서 허우적댄다면 결국 그 여인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구양봉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마음속에 그 여인을 새겨 두고 있으면 되는 게지 남이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걸 두려워해서 뭣하랴?"
그러더니 구양봉은 험상궂게 얼굴을 굳히며 뚫어지게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떠도는 말에는 이 중양 진인의 무예가 천하 으뜸이라고 하더라만 직접 대하고 보니 대단할 것 같지 않구나. 내가 손을 써서 아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야지.'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독기를 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거렸다. 왕중양은 구양봉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적이 의아했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토록 긴장하는 걸까?'
그때 불현듯 구양봉은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쌍장을 내밀었다.
"중양 진인, 조심하게!"
그 소리와 동시에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울 듯한 대력이 왕중양에게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노독물 구독사옹 신독행의 합마공이었다.
왕중양이 만일 사전에 방비하지 않았더라면 기필코 그는 크게 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구양봉의 손가락이 움직거릴 때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마음을 도사렸다. 그는 구양봉의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꿈틀 놀랐다.
'참말로 천하에 드문 재간이다. 과연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사람이 나를 기습하는 데 무예 초수를 쓰지 않고 내력을 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워낙 구양봉은 내력을 다 기울여 단번에 왕중양에게 내상을 입히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을 쓸 때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간 의구심이 일었었다. 행여나 자신의 공력이 왕중양보다 못할까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힘을 다 내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왕중양에게 막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왕중양은 구양봉이 장을 내치는 것과 동시에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선천공으로 장을 내밀었다. 역시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울 듯한 대력이 파도처럼 구양봉 쪽으로 밀려갔다. 두 사람의 장풍이 맞부딪치며 꽝 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 다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왕중양은 얼른 몸을 날려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져 내렸는데 원래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구양봉은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더 밀려났다. 구양봉은 물러나
면서 얼핏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두들 자네를 대독물이라 하더군. 난 그걸 믿지 않았었는데 오늘에서야 믿게 됐군."
왕중양이 의연하게 한마디했다. 그에게는 실로 대가이 기백과 풍모가 역력히 배어 있었다. 기습을 당하고도 저토록 태연자약하지 않은가? 구양봉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난 북방 유운장에서 나온 뒤 아직까지 진짜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오늘 중양 진인을 보니 실로 어려운 적수로구나.'
구양봉은 겁이 났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난 천생 악인이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왕중양은 기억 속의 유운장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 유운장에서는 사람마다 악을 영광으로 알고 있으며, 어느 날 거기에 일심으로 천하 악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구양봉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구앙봉, 《구음진경》은 꿈도 꾸지 말게. 자네가 그걸 얻으려 해도 내가 내주지 않을 거야. 모름지기 천하의 기서란 덕이 있는 자가 갖고 있어야만 해. 자네가 무슨 낯으로 그런 기서를 얻겠다고 허튼 궁리를 하는 겐가?"
그러자 구양봉은 앙천대소를 하고는 냉랭히 쏘아보았다.
"무슨 낯이냐구? 난 천하에 드문 귀재다. 난 중원의 모든 무림 고수들을 다 이길 수 있어. 그러니 《구음진경》은 의당 내 거야!"
왕중양은 하찮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었다.
구양봉은 그를 노려 보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이자와 싸워서 좋을 게 없어. 방금 보니 내력이 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이런 자와 싸워 봤자 재미없는 일이야. 일단 양보하고 슬쩍 물러가자. 화산 꼭대기에서 다시 겨루는 거야. 일단 내력의 정도를 알았으니 단단히 방비를 해야지!'
"중양 진인, 내가 지금 온 건 그대가 남을 속이기나 하는 쥐새끼같은 놈이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일단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난 이만 물러가겠어!"
구양봉은 훌쩍 내달아 문 밖으로 뻗어 나가더니 순식간에 몸을 솟구쳐 단번에 백 보쯤 물러갔다. 그는 귀가 쩌렁쩌렁하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왕중양, 그 《구음진경》을 잘 읽어 두라구. 한 달쯤 후에 내 가지러 올 테니!"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구양봉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거처를 나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문득 먼 곳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ㄴ?"
구양봉은 내심 경계심을 가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고 웃음 소리만 요란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끄물거리더니 구양봉을 향해 내처 걸어왔다. 구양봉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간을 찌푸리며 잠자코 쳐다보았다. 그 그림자는 의외로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뚱뚱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구양봉 앞에 와 서더니 대뜸 히히덕거리며 물었다.
"듣자니 당신은 북방 유운장 사람이라면서요?"
구양봉은 자기가 북방 유운장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지 이미 오래였던지라 그 물음에 코대답도 안 했다. 그는 그 뚱뚱한 여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추물도 그런 추물은 없었다.
"이봐, 그쪽은 운남 사람인가 아니면 양광(兩廣) 사람인가?"
이 여인이 운남 사람이라면 필시 대환희 보살 수하일 것이고 양광 사람이라면 양광 방건묘( 묘) 사람일 터였다.
"참말로 구양봉 어르신답군요. 당신은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는군요. 저는 대환희 보살님 수하예요. 보살님께서 당신을 청하십니다. 미인을 하나 내드리겠다고요.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구양봉은 영 시답지 않은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모양새가 아주 가소로웠다. 엄청나게 큰 적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적삼은 너무도 커서 마치 커다란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얼굴에 분과 연지를 가득 처발랐으며 걸음걸이도 마치 그 옛날 미녀 서시(西施) 흉내를 내기 좋아했다는 추녀 동시(東施)를 연상시켰다.
'미인들이라면 나의 백타산장에도 얼마든지 있다. 내가 어떤 미인인들 만나 보지 못했겠는가? 저희들한테만 미인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 실로 꼴같잖군.'
구양봉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여인이 못난 주제에 교태를 부리는 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내가 화산에 온 건 그 기서를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왕중양의 무예가 대단하니 그를 이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만일 대환희 보살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잘된 게지.'
"좋아, 내 한번 가 보지. 대환희 보살이 나한테 어떤 미인을 주나 어디 선이나 보자."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읍을 하고는 앞장서 길을 잡았다. 구양봉은 그 여인을 따라 한 수림에 당도했다. 수림은 화산의 음지쪽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몽고포 같은 장막들이 줄지어 쳐져 있었다.
'대환희 보살이 이렇듯 수하들을 이끌고 와 있는 것을 보면 그녀도 《구음진경》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겐가? 하나 제까짓 것이 그따위 재간으로 《구음진경》을 차지해 보려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구양봉은 실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그를 대환희 보살에게로 데려갔다. 보살은 장막 안에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장막 안을 쓱 살펴보았다. 듣기에는 화장을 한 사내 녀석들이 이 여인을 시중들고 있다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분이나 연지를 바른 사내 녀석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뚱뚱한 여인들만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은 아주 조용하구먼. 안 그러오?"
구양봉이 대뜸 말을 건넸다. 대환희 보살은 대번에 구양봉의 의중을 짐작해 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그런 사내도 여인도 아닌 자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내 미리 모두 물렸지요. 그래야 당신이 비웃지 않을 것 아니겠소?"
"사람을 보내 날 찾은 이유가 그쪽 시중을 들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녀가 웃을 때는 어김없이 온몸의 살집이 다 흔들거렸다.
"백타산군,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게요? 내가 무슨 담력으로 감히 당신더러 시중을 들라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무슨 일로 날 불렀나? 어서 말해!"
"밤이 긴데 어서 자리에 앉기부터 하세요. 우리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차차 미인들을 구경합시다. 그러면서 대사도 상론하구."
"보살이 말하는 미인들이란 모두 저런 뚱뚱보 아닌가?"
구양봉은 사위를 둘러보면서 대환희 보살의 제자들을 가리켰다. 그는 이런 여인들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이곳엔 온통 피둥피둥한 고깃덩어리들만 있을 뿐 미인이라고는 보고 죽자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넘겨짚으시기도 잘하시네요! 나한테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 앤 대단한 미인이지요. 심지어 대리의 황제 폐하마저도 그 애에게 빠져 넋을 잃었다오!"
대환희 보살은 자못 거들먹거리더니 손뼉을 탁탁 두 번 쳤다. 그러자 그녀 뒤쪽에서 한 여인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그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절반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도 미색이 빼어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어찌나 작고 깜찍하게 생겼는지 마치 상아를 조각하여 만든 인형 같았다. 구양봉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여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용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키며 몸매가 모두 균형이 잡혀 있었다. 얼핏 보면 채 자라지 않은 어린 애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의 성숙미가 물씬 풍겼다. 아니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사를 아주 많이 겪은 여인 같았다. 구양봉은 정신나간 사람마냥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구양봉이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한 순간 깔깔 웃어댔다.
"구양봉 장주님, 이 여인이 어떻습니까? 참으로 특별난 여인 아니에요? 어떤 여인은 여위고 어떤 여인은 뚱뚱하고 어떤 여인은 얼굴만 보기 좋고 어떤 여인은 몸매만 쭉 빠졌지만 이 앨 한번 보세요. 당신은 종래로 이 같은 미인은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언뜻 보면 어린애 같지만 잘 익은 복숭아처럼 씹으면 단물이 나온단 말이오, 으하하하……."
구양봉은 세상이란 실로 기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이 여인은 원래부터 이렇게 작지 않았을 게다. 누가 무슨 약을 먹여 이렇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어.'
과연 구양봉의 눈썰미는 속일 수 없었다. 이 여인은 기실 치주였다. 뚱뚱보 여인들이 강제로 독약을 먹여 예기치 않게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치주는 구양봉을 흘끔 보고 나서 더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날 더는 사내들과 한곳에 두지 말았으면…… 아아, 정말 그랬으면. 왜 갈수록 망종들과 만나게 되는 걸까? 첫 사람만 마음씨 좋은 단황 나으리였을 뿐 그 다음에는 중에게……. 오늘 이 사람은 더욱 흉악해 보이는구나. 저 눈, 저 눈은 꼭 독수리나 호랑이 눈같고 정말로 거칠게 생겼어. 참말로 저런 거친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아.'
"대환회 보살, 지금 나더러 저 여인을 그저 보기만 하라는 겐가?"
구양봉은 온몸이 근질근질해져서 역정 내듯 큰소리로 다그쳤다.
"물론 일단은 보기만 해야지요. 우리가 서로 약정을 하기 전에는!"
보살은 마냥 느물거렸다.
"일단 내가 좀 만져 봐야겠다. 난 요런 여인은 보다 보다 처음이거든!"
"그저 만져 볼 생각이라면 맘대로 하시구려."
대환희 보살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구양봉은 냅다 달려들어 덥석 치주의 허리를 껴안았다. 나긋나긋하니 감겨 오는 맛이 정말 황홀했다.
"훌륭하군. 과연 훌륭해. 내 백타산장에도 숱한 미인들이 있으나 이 여인만한 보옥은 없다……."
그는 치주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대환희 보살, 우선 내게 장막부터 하나 내주게. 그 무슨 의논같은 건 내일 하고."



제17장 음녀들의 궤계
구양봉은 품에 치주를 안고 있으니 벌써부터 황홀경에 빠져 들어 갔다.
'내가 백타산장에서 장주 노릇을 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어디 한 번이나 이런 재미를 본 적이 있었던가? 중원에 오니 이거 일거양득이로구먼. 천하의 보배를 빼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미인도 얻게 되니, 흐흐흐…….'
그는 자신의 백타산장을 생각해 보았다. 백타산장에는 천지인(天地人) 삼층집이 있고 저마다 미색이 빼어난 여인들이 그 집 가득 살고 있다. 하지만 구양봉은 백타산장을 떠나온 지 오래인데다 중원에 온 후로는 여인과 즐기는 것도 피했었다. 더욱이 그 여인이 죽은 이후로는……. 그러나 일단 치주를 품에 안자 그간 잊고 지냈던 남녀간의 그 일이 미쳐 버릴 듯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아 그는 마치 야수가 포획물을 삼켜 버리듯이 치주에게 달라붙었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뚱뚱보 여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지체 않고 구양봉과 치주를 한 장막으로 데려갔다.
구양봉은 치주와 단둘이서만 장막 안으로 들었다. 그는 치주를 덥석 안아다가 짐승 가죽 위에 내려놓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치주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몇 살인고?"
그러더니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을 마구 주무르면서 황홀경에 빠져 소리를 질러댔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훌륭해."
그는 눈빛마저 희멀게져서는 조바심이 나서 헛손질을 해 가며 그녀의 옷을 벗겼다. 드디어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나체가 다 드러났다. 그는 음미하듯 자세히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다가는 봉곳 솟아 오른 젖무덤을 주무르면서 연신 소라를 내질렀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얻기 힘든 보배야."
구양봉은 침을 질질 흘리며 치주한테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성마르게 그 일을 치르려고 허둥대다가 언뜻 치주의 볼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구양봉은 한참 몸이 달아 있는데 여인의 눈물을 대하자 버럭 성이 나서 소리쳤다.
"사내와 처음 자 보나?"
그 소리에 치주는 그만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지며 눈물을 함씬 쏟아 냈다.
"전 워낙 이렇게 작은 여인이 아니었어요. 전 본래 보살님 수하 여인이었는데 용모가 괜찮다 하여 보살님이 나를 운남 대리의 황궁에 궁녀로 들여 보냈지요. 황제를 유혹하라고……. 다행히 단황 나으리는 저에게 반해 저를 총애하게 되었지요. 얼마간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으나 일이 잘못되어 그만 납치를 당하고 이후 또다시 보살님 신변으로 끌려 왔어요. 그후부터 저는…… 저는……."
치주는 한번 입을 떼자 그간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왔다. 그녀는 자기와 일속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이야기하려 했으나 부끄러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말았다.
이 여인은 일속에게 몸을 더럽힌 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허탈해지고 자기 운명이 비관되어 마음을 앓았으며 그럴수록 더 더욱 일심으로 단지흥을 그리게 되었다.
'황제 폐하는 내가 대환희 보살님 수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계셔. 그분은 아마도 내가 도망하여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줄로 아실 거야, 내가 이처럼 억지로 끌려 와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그분께서 어찌 알 수 있으리? 그분은 나를 음란한 여인으로 여기실지도 몰라. 내가 그분을 떠나 딴 사내의 품으로 도망쳤다고. 아, 그분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려 드릴 수만 있
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단지흥을 생각하다 보니 치주는 식음마저 전폐하게 되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가 병에 걸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언뜻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치주는 줄곧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비웃으면서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치주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얘, 너는 황비이니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겠지? 귀하신 몸이 어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겠니?"
"황비님, 제가 부채를 부쳐 드릴깝쇼!"
여인들은 모두 치주를 조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치주는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일심으로 단지흥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비웃고 놀려대고 쥐고 흔들어도 치주가 꿈쩍도 하지 않자 뚱뚱보 여인들은 종당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년은 이제 황비가 아니야! 이젠 자기가 황비라는 허튼 생각은 버리란 말야. 네 황제 폐한지 뭔지는 조만간 대환희 보살님 손에 죽고 말 거야!"
치주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분을 죽여선 안 돼요! 그분을 죽여선 안 된단 말이에요!"
뚱뚱보 여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시샘이 나서 치주가 얄밉기 그지없던 참인데 그녀가 단지흥을 감싸고 나서자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치주를 밀어 넘어뜨려 놓고는 깔고 앉아 마구 짓눌러댔다. 치주는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것들 봐요, 제발 좀 비켜요! 깔려 죽어요. 깔려 죽는단 말예요!"
"그래, 황제 밑에 깔린 건 견딜 수 있고 우리한테 깔리면 안 된단 말이냐? 왜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이 난리야, 난리가? 입다물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치주가 소리를 지를수록 여인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댔다. 치주는 말을 해 봤자 통할 사람들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닫고는 다만 가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여인들은 이 기회에 그때껏 참았던 분풀이를 하느라고 한결같이 미친년처럼 날뛰었다. 결국 치주는 견디다 못해 그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뚱뚱보 여인들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아직도 치주를 보배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차에 자기들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보살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여인들은 겁먹은 얼굴로 서로 마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한 여인이 나섰다.
"내 보기엔 저 애를 아예 죽여 버려야 해. 그래야 절대 우릴 일러바치지 못하지."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대번에 얼굴이 환해지며 쌍수를 들고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 수밖에 없어? 보살님한테 들키기만 하면 우린 살아남지 못해."
"아니, 아니야. 내 보기엔 이 애한테 미약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애가 우리보다 더 뚱뚱해져 버리면 보살님도 귀히 여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만 되면 황제도 더는 이 애를 거들떠보지 않을 거 아니니? 그 뚱뚱한 꼴을 보기만 해도 왈칵 구역질을 할거란 말야. 그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아니니? 저것이 매우 상심하게 될 테니 이 얼마나 묘안이냔 말야?"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게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다른 한 여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셋이 첫 며칠 동안 미약을 먹였었어. 그런데……."
다른 여인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지라 깜짝 놀랐다.
"미약을 먹였다구? 그럴 리가. 미약을 먹였는데 왜 몸매가 더 날씬해졌지?"
세 여인은 서로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그들 세 여인은 치주가 너무나 얄미워 견디다 못해 미약을 먹였던 것인데 몸이 뚱뚱해지기는 커녕 되레 더욱 날씬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세 여인 중 하나가 기가 죽어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지 우리도 모르겠어. 너무나 이상해. 보통 먹이는 대로 똑같이 했는데……. 그러니 내 보기엔 독약을 먹여 죽여 버리는 게 제일 묘수야. 만일 보살님께서 캐물으시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이 년이 자나깨나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 아뢰면 보살님도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야."
여인들은 잠시 잠잠히 말이 없더니 미약이 효과가 없다면 그게 더 낫겠다고 결론을 냈다. 한 여인이 부스럭거리며 독약을 꺼냈다. 여인들은 누구나 비상시를 대비해 이런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해친 여인도 있었다. 바로 그 독약을 써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한 여인이 치주를 안고 다른 한 여인이 독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치주는 가물가물 정신이 돌아오다가 누군가 목에다 무엇을 쏟아 붓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면서 그대로 받아 먹었다. 이 독약은 일단 먹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조그맣게 졸아 붙다가 급기야는 뼈만 남고 그마저도 아예 흔적조차 없어지는 열성(熱性) 독약이었다.
한 순간 치주가 힘없이 눈꺼풀을 치켜 올리고 뚱뚱보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울먹였다.
"사저(師姐)님들, 절 양해해 줘요. 전 결코 당신들과 맞서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전 그저 한 분만 생각하다 보니……."
"보살님께선 우리더러 제자가 되면 다시는 딴 사내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하셨다. 넌 우리 문파의 금기를 어겼으니 죽어 마땅해!"
한 여인이 소리쳤다.
치주는 희멀건한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눈에선 한결같이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구나. 이 여인들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거다.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이 여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거다. 이 여인들은 종래로 한 사내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사내한테 마음을 둔 여인의 애타는 심정을 결코 헤아릴 수 없겠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인들에게 한 사내를 향한 이 절절한 사랑을 토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여인들은 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치주는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차라리 날 죽여 주세요! 다만 단황 나으리를 만나게 되거든 한마디만 전해 줘요. 이 치주가 황궁을 떠난 건 본의가 아니었다고."
"좋아, 그 정도야 뭐 우리가 그 사람한테 알려 주지."
한 여인이 시답잖다는 듯 건성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치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를 쓰고 말했다.
"안 돼요.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해야 해요. 이 약속을 어기면 벼락을 맞아 죽겠다고!"
그러자 한 여인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쳐댔다.
"야 이것아, 네 년이 대체 뭐란 말이냐? 네 년이 뭐 진짜 황비라도 된다더냐? 진짜 황비들처럼 선반(仙班)에 서고 하늘에서 성위(星位)를 가질 수 있느냐 말이다? 네 년은 천민이야, 천민! 개똥 같은 천민 주제에 뭐가 그리 대단해서 잘난 체야, 잘난 체는?"
곁에 있던 여인도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네 년은 좀 날씬하다고 해서 뭐 아주 아름다운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도 이전에는 이처럼 뚱뚱하지 않았어! 아주 날씬했다구! 보살님께서 뚱뚱해지라고 하시니까 미약을 먹고 이렇게 뚱뚱해진 거란 말이다. 네 년만 날씬하니까 기가 살아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는데,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콧대 세우고 있나 한번 두고 보자! 네 년도 우리처럼 뚱뚱보를 만들어 놓으랴, 엉? 대답을 해 봐, 대답을!"
그 여인은 이미 독약을 먹였으면서도 강박을 하느라고 치주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치주는 가늘기는 하나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싫어요."
그러자 그 여인은 경멸 어린 눈길로 치주를 쏘아보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건방진 계집! 네 년이 원하든 원치 않든 네 년은 죽어 줘야겠다. 죽더라도 우릴 원망하지는 마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뚱뚱보 여인들은 요란하게 웃어댔다.
"치주야, 네 년은 이미 독약을 먹었느니라. 그건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서 만드신 독특한 독약이지! 이제 곧 네 년은 몸이 졸아 붙어 죽게 돼 있어!"
치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살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구쳤다. 반드시 살아 남아서 황제를 만나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녀는 급히 품속을 더듬어 해독약을 찾았다. 그러나 해독약이 있을 리 만무였다. 약을 넣어 둔 자그마한 주머니는 이미 여인들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치주는 목멘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저님들은 참말로 절 죽일 참이군요……."
그러나 뚱뚱보 여인들은 비웃기만 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입을 삐쭉거릴 뿐이었다.
'그만두자, 다 그만둬! 난 단황을 모시면서부터 남녀간의 일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한 생, 후회할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날 죽이겠다면 죽으면 그뿐, 산다 한들 다시 폐하를 만나 볼 면목도 없는 것을…….'
치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여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좋아요. 여러 사저님들께 감사를 드려요. 나를 이렇게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막상 치주가 이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할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들 손에 달갑게 죽겠다는데야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여인들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만 살필 따름이었다.
치주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소곳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여인들더러 나가라고 소리치고 혼자서 조용히 죽고 싶었지만 어차피 죽을 몸, 이 여인들과 이러니저러니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치주는 오한인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신음을 토해냈다. 견디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여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이나 지켜 보았다. 일순 한 여인이 차마 더는 볼 수 없던지 다가앉으며 물었다.
"치주야, 내가 좀 도와줄까?"
그 여인은 돌연 치주에 대한 연민이 일어 검으로 찌르거나 장을 내쳐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치주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비록 육체는 고통스러웠으나 마음으로는 그럴 수 없이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죽을 생각을 하니 세상의 모든 은원도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이렇게 죽으면 단황 나으리께서는 내가 도망간 것으로 아실 게야. 어떤 사내와 함께……. 하나 기왕 죽을 바에야 황제께서 날 어떻게 생각하실지 맘에 두어 뭣하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법, 순순히 하늘의 뜻을 좇으면 그뿐, 그분 생각은 이제 하지 말자.'
이윽고 치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온몸이 졸아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려고 이를 앙 다물며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지켜 보고 있자니 은근히 겁이 났다. 늘 이 약을 지니고 다녔지만 종래로 이 약에 중독되어 사람이 죽어 가는 모양은 본 적이 없는 터라 이렇듯 두 눈 뻔히 뜨고 지켜 보고 있자니 그녀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이 약이 이다지도 독하단 말인가?'
그때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대환희 보살이었다. 보살은 치주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누가 저 애한테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빨리 대지 못하느냐?"
대환희 보살은 눈앞의 광경에 노기충천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가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여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보살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꺽꺽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그녀들은 대환희 보살의 심보가 지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독약을 먹인 사람이 발각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치주가 죽기만 하면 스스로 자결했다고 발뺌을 할 수도 있지만 죽지 않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한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보살님, 저…… 저 앤 자, 자살하려고……."
대환희 보살은 이 여인들을 냉랭히 쏘아보며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허튼소리! 나의 이 독약은 천하에 기이한 약이다! 스스로 먹었다면 저 모양일 수 없어. 누가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말해!"
여인들은 머리를 더욱 깊이 처박으며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참말로 누구도 한 짓이 아니란 말이지?"
대환희 보살이 그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더욱 떨어댔다. 오늘 일이 사뭇 상서롭지 못하다는 징조였다. 먼저 나섰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보살님 제, 제가 먹였어요…… 요, 용서해 주세요!"
"그래 네가 했느냐? 잘했구나. 네가 저 애를 죽이려 들었다면 이제 조만간 나도 죽이지 않겠느냐?"
보살의 목소리는 사뭇 온화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당황해서 더욱 허둥댔다.
"아니에요. 보살님, 아니에요. 제 어찌 보살님을…….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보, 보살님께서 그렇게 뚱……."
여인은 사색이 돼서는 횡설수설 주워섬기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을 훅 들이켰다.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벌써 그 말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보살은 대번에 낯색이 바뀌며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래, 내가 뚱뚱보란 말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언제…… 보살님께선 뚱뚱하시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거렸다.
"발칙한 것! 내가 엄연히 네 년들보다 뚱뚱한데도 뚱뚱하지 않다구? 그래 넌 두 눈 뻔히 뜨고 날 놀릴 셈이냐?"
뚱뚱보 여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아무리 변명해야 쏟아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죽이든지 살리든지 보살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넌 날 보고 뚱뚱하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게야. 날 보려무나, 조각달처럼 여위지 않았느냐?"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더욱 기겁을 했다. 얼굴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렸다. 여인은 다급히 애원했다.
"보살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나도 널 용서해 주고 싶구나. 하나 이미 늦은 일! 넌 그래 치주가 나한테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모른단 말이더냐?"
"보살님, 저 애를 대관절 어디다 쓰시려고 그러시옵니까? 제가 대신하겠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대환희 보살은 별안간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그럼 한번 그 몸뚱이로 단지흥 앞에 나서 보아라! 네 년이 치주라고 하면서. 한데 그때 가서 단지흥이 네가 치주라는 걸 믿지 않는다면 넌 어떻게 할 셈이냐, 응? 어떻게 그를 믿게 하지?"
여인은 대답을 못하고 그저 넙죽 엎드릴 뿐이었다.
"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라."
보살은 단호히 내뱉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여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꺽꺽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보살님, 아이고 보살님……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하, 한 번만 사, 살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정수리를 향해 팍 하고 장을 날렸다. 빠지직하니 두개골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장막 안을 뒤흔들었다. 여인들은 몸서리를 치며 더욱 고개를 처박았다. 여인은 두 눈을 홉뜨고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퉤, 네 년은 살찐 돼지야! 돼지! 돼지!"
대환희 보살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발을 쾅 굴렀다.
"돼지라구? 지독한 년! 끝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그리고는 보살은 다른 여인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여인들은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얼른 심호흡을 하고는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우린 뚱뚱한 여인을 좋아해요? 여인들은 뚱뚱한 게 좋아요. 보살님이 뚱뚱한 게 우린 보기 좋아요!"
대환희 보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년들도 다 죽어 마땅하다. 하나 치주만 살려내면 목숨은 구해 주지!"
하지만 그 여인들에게 그런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치주는 이미 너무나도 심하게 중독되었는지라 신선이 내려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여인들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여인들에게도 장을 내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보, 보살님, 제발……."
모두들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 열두어 살 먹은 어린애같이 졸아 든 치주가 힘없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보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냉큼 내달았다.
"치주야, 네가 소생했구나! 네가 소생했어!"
대환희 보살은 탄성을 내지르며 치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원래 뚱뚱보 여인들이 당황해서 독약을 조금만 쓴 덕분에 치주는 천만 요행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났지만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사뭇 기이해 보였다. 대환희 보살은 치주를 바라보다가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 하나를 붙잡았다.
'보아하니 정녕 나쁘지 않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어. 이 계집애가 희한한 물건이 되었으니 써먹을 데가 많겠다! 이 깜찍한 계집애를 좋아하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흐흐흐흐, 이 애는 이제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여인이다.'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치주를 안아 올렸다.
"꼬마야, 날 따라가자."
치주는 예까지 말하고는 눈물을 담뿍 쏟아 냈다. 그녀는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더니 이내 목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백타산장의 장주님은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같이 조그만 계집을 어디다 쓰시겠어요. 전 정말 하잘것없는 계집에 불과하옵니다……. 제발 저를 단황 나으리와 만나게만 해 주십시오. 진정코 부탁드리옵니다. 전 그분한테 꼭 말씀드려야 해요, 전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넌 아직도 단지흥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구양봉은 치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하소연을 했다.
"장주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이런 꼴을 해 가지고 어찌 단황 나으리를 모실 꿈이라도 꾸겠나요? 다만 단황 나으리께서 제 마음만 알아주신다면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난 백타산장의 장주이니 부귀를 누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백타산장의 천지인 삼층집에는 미인들이 수두룩하고 내 명이라면 누구든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내가 없을 때 그 여인들도 이 꼬마 여인이 단지흥을 생각하듯 나를 생각할까? 아마 그런 여인은 하나도 없을 게다…….'
"얘야, 세상엔 사내들이 얼마든지 있다. 단지흥이 널 그렇게 잘 대해 주었다 하나 나도 그 사람 못지않게 널 살갑게 대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날 달리 대하지 말아라."
치주는 구양봉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장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와요."
그러나 구양봉은 연해 음심이 꿈틀거렸다. 모용쟁과 그 낡은 절에서 영별한 뒤로 그는 더는 여인에게 진정으로 정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치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이전에 아내, 아니 형수 한 분이 계셨는데……."
치주는 당황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구양봉이 형수를 아내로 삼기까지 허다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가 음심이 동해 저리도 횡설수설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구양봉이 그 사연을 단 몇 마디로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었어. 네 마음이 움직인다면 날 따라와. 난 너를 잘 대해 줄 거야."
치주는 구양봉 같은 사람은 일대 무학종사(武學宗師)로서 일 처리가 보통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구양봉은 남녀간에 쉽게 할 수 없는 이런 말을 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불쑥 꺼냈다. 그러나 그만큼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치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터였다.
'보아하니 이 사내도 음란한 사람인 것 같구나. 저 사람은 나를 차지하고 노리개로 삼고 싶어한다. 만일 내가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대로할 거야.'
하지만 치주는 이젠 죽고 사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는 구양봉의 위풍에 눌리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저는 이미 단황 나으리한테 속한 몸이옵니다. 장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러나 구양봉은 그런 말에 머리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껄껄 웃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네가 단지흥의 사람이라구? 좋아, 난 단지흥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게야. 너는 나와 함께 화산에 가자. 단지흥이 내 손에 죽는 걸 너한테 직접 보여 주리라!"
치주는 그 말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흥의 일양지공이 천하 무림에서 유일무이한 초수라고 알고 있었다. 한데 구양봉이 무슨 수로 단지흥을 죽이겠다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구양봉은 치주의 속심을 눈치채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믿지 않는군. 너네 단지흥이 그렇게 대단하냐? 좋다. 내가 너한테 내 재간을 보여 주리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좌정하고 앉아 꼼짝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의 배가 불룩하니 솟아오르며 단전에서 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다 드러나 보였다. 치주는 그가 그저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구양봉이 갑자기 나직이 말했다.
"좀 보라구!"
구양봉은 즉시 두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장막 천장이 불룩하니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이 장막은 원래 질긴 돛 천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구양봉의 장풍에 밀려 종이짝같이 얇아지며 마치 바람에 불린 돛 같은 형상이 되었다. 구양봉은 손만 쓸 뿐 몸을 까딱하지도 않고 오로지 기만 가지고 장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장력은 실로 대단했다.
치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말…… 참말로 단황 나으리를…… 죽이실 건가요?"
구양봉은 그녀가 대경실색하는 것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난 애시당초 너와 단지흥 간에 이런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제 오늘 알게 됐으니 잘됐다. 네가 날 따라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 난 화산에 가서 대리에서 온 그 단씨란 자를 죽여 천하에 더는 무공을 갖춘 황제가 없도록 할 셈이니까!"
구양봉은 치주가 질겁을 할수록 한층 더 큰소리를 쳤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그가 그리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치주는 강호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지라 그 말을 어김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며 매달렸다.
"장주님, 단황 나으리를 해치지 마세요. 당신은 왜 하필 그를 해치려 하시나요, 네? 왜 하필이면 그를……."
"하면 넌 나를 따라갈 테냐?"
구양봉은 징그럽게 웃으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지주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돼서는 정신없이 울먹였다.
"따르지요, 따르겠어요! 제가 장주님 말만 들으면 되죠? 그럼 황제 폐하를 해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제야 구양봉은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내 백타산장에는 여인들이 허다하고 그 여인들은 저마다 많은 재간을 갖고 있어. 하지만 너처럼 아름답고 깜찍한 여인은 참말로 천하에도 없을 거다. 네가 내 시중을 잘 들기만 하면 난 너를 천(天)자 방의 첫번째 부인으로 삼겠다."
워낙 백타산장에 있는 천지인 삼층집에는 숱한 미인들이 있었는데 인(人)자 방에는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세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지(地)자 방에 있는 여인들보다는 덜 요염했다. 가장 훌륭한 미녀는 천자 방에 있는 미인들이었는데 그 여인들은 모두가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구양봉은 치주를 그 천자 방에, 그것도 첫째 부인으로 두겠다는 것이었다.
치주는 마음속으로 피울음을 토해냈다.
'황제 폐하, 전 또 능욕당하는 걸 피할 수 없게 됐어요. 전 워낙 한마음으로 폐하만을 섬기려고 했지만 저의 운명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군요. 이제 와서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터……. 전 폐하께서 남의 해를 받지 않게만 된다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아요.'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이따금씩 밤새 울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사내와 계집이 한데 엉겨 수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 구양봉이 옷을 벗으면서 치주에게 말했다.
"넌 성숙한 여인이다. 그러니 내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치주는 천천히 일어나 구양봉의 목에 살며시 매달렸다. 치주의 몸뚱이는 너무나 깜찍하여 쥐면 꺼질 것만 같았다. 무수한 여인들을 숱하게 겪은 구양봉이지만 치주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은 진정 처음이었다.
"좋아, 좋다니까."
구양봉은 치주를 안고 적이 흡족하여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멀찌가니 떨어져 있는 등잔불을 대번에 훅 불어 껐다. 그는 어둠 속에서 치주를 힘껏 껴안았다.
한 순간 여인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는 듯한 처참한 소리였다. 뚱뚱보 여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척였다.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 죽어 가는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처절하게 울려 퍼지자 너나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벌떡 일어났다. 처음에는 고소하게 여겼으나 계속 듣고 있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대환희 보살만이 아직도 단잠에 빠져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대환희 보살의 장막으로 찾아 들어 보살을 깨웠다.
"보살님, 보살님!"
연해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없자 여인은 보살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보살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치…… 치주, 치주가 죽어 가고 있어요. 그 애가 목숨이 꺼져 간단 말이에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시뜻해서 듣고 있더니 단박에 성을 버럭 냈다.
"저 애가 한창 좋아서 그러는 걸 모르느냐? 저 앤 좋아서 저러는 것이니 작작 상관하란 말이야!"
그 순간에도 여인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여인은 그렇게 온밤을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화산의 나무 숲이 고요히 설렌다. 비명 소리는 점점 미약해지다가 드디어는 뚝 그치고 말았다.
등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전 이 세상의 사내란 사내들은 몽땅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내들이란 모두 여인을 지배하려고 하거든요. 그들은 여인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치려고만 하는데, 그나마도 한두 여인으로 족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얻어 들이려 한단 말이에요. 그런 사내들은 정말 사정을 두지 않고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랑이오? 진심이오? 사내들은 그런 건 몰라요. 그런 걸 아는 사내란 하나도 없어요. 연약한 여인의 심사는 조금만치도 생각지 않아요. 그런 사내들은 이 세상에서 하
나도 남기지 않고 내 손으로 깡그리 죽일 작정이에요. 난 나의 향녀들더러 이런 사내들을 데려다 하나하나 시중들게 해서는 사내들이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해 취생몽사하게 만들겠어요. 이전에도 숱한 사내들이 향녀들의 품에서 저 세상으로 갔지요. 어떤 사내들은 원한을 품고, 어떤 사내들은 여인의 품에 안겨 비웃으면서 죽어 갔어요. 그자들을 보면서 전 정말 다짐했어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내들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단지흥은 처연히 등아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이 여인…….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 세상 사내들의 기를 다 빼놓고 그들을 색에 굶주린 바보로 만들어 죽여 버린 후 십팔층 지옥에 처넣겠어요. 당신들이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지만 난 그것을 여지없이 망쳐 놓을 거예요.
천하에서 오로지 이 향녀 등아만이 우쭐거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구요!"
단지흥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웃었다.
"등아, 그대가 화산에 가면 그 고수들을 다 이길 자신이 있소?"
"제가 그들과 왜 싸워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걸요."
단지흥은 내심 장탄식을 했다. 칼과 창 같은 병장기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천하 영웅이라도 자고로 여인의 수작에는 견뎌 내지 못하지 않는가.
"등아, 내 그대한테 할말이 있노라."
등아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주저하지 말고!"
등아는 적이 매정하게 내쏘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등아, 세상에는 종래로 사내가 있으면 여인이 있어야 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거요. 그래야 세상에 인간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오. 그대가 일심으로 사내를 없애 버리려 하는 건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러자 등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듣기 싫어요. 전 사내들을 미워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사내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요."
"사랑이 있어야 미움도 있는 법, 미워하는 것도 다 사랑하기 때문인 거요. 그렇지 않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우리 향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한평생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나 진배없어요. 나나 우리 향녀들이란 원래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내의 품에 안긴 여인이 사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느 사내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단지흥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등아, 사내들의 해골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는 건 그대가 그만큼 그들을 미워한다는 걸 말해 주지만 반면 그걸 매달아 놓게 되면 그대는 그들을 정녕 잊을 수 없게 되는 거요. 그대가 그들을 잊지 못하게 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미워하게도 되지만 사랑하게도 되어 끝내 정을 끊지 못하게 되는 게지. 이런 심정은 그대도 똑똑히 말할 수 없는……."
그러자 등아는 그의 말허리를 똑 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요. 그만 하시란 말이에요!"
단지흥은 씁쓰레한 남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등아는 낯색이 자못 험상스러웠다. 기실 그녀 역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단지흥의 그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을 뿐 아니라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녀는 들릴락말락 뭐라고 속살거리더니 끝내 말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단지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여인이 지독하기 이를 데 없으나 가슴 한구석에는 여리디여린 여인의 순정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아는 일순 몸을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마냥 불쑥 물었다.
"단황 나으리, 절 도와주실 수 있죠?"
"무엇을?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게요?"
"전 그 《구음진경》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요."
단지흥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그댄 결코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될 거요. 왕중양이 천하 무림에 내놓고 공표를 한 바에야 그 경서를 얻으려면 실로 뛰어난 재간이 필요한 거요. 무슨 교묘한 꾀를 쓰거나, 무예를 겨뤄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난데…… 내 보기엔 그대가 그걸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그러자 등아는 눈에 불꽃이 튀며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래 당신은 절 도와 주시겠나요, 안 도와주시겠나요? 그 말씀만 하세요. 난 원래 당신을 화산 무예 시합에 가지 않게 하는 조건으로 선비를 데려왔으나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꼭 당신을 화산으로 데리고 가 그 《구음진경》을 앗아 내도록 하겠다는 말이에요!"
여인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단지흥은 같은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어렵소. 어려운 일이오."
"왕중양은 그 책을 얻은 뒤 밤이나 낮이나 한탄만 하고 있다더군요. 그 경서가 나쁜 놈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한테 무궁한 우환을 남기게 될 거라고 말이에요. 보아하니 그 책은 기필코 무학밀서이므로 나한테는 큰 이득이 될 거예요. 난 그 책을 얻어 천하의 사내들이 모두 나한테 숙이고 들게 만들겠어요."
등아는 《구음진경》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의 부질없는 한갓 일장춘몽에 더욱 깊게 연민만 느낄 따름이었다.
홍사와 두 여인이 선비를 둘러싸고 애교를 떨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여인들이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지라 선비는 그 여인들을 마주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책만 들여다보며 곁눈 한 번 파는 법이 없었다. 선비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좌전(左傳)》이었다.
"그 책이 무슨 책이에요? 선비께서 책을 읽으실 바에야 《구음진경》을 읽으셔야죠. 그래야 선비님 무예가 천하에 다시 없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홍사는 한껏 아양을 떨며 선비에게 다가들었다. 선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당신들은 천하에 《구음진경》만 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오!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가면, 아니 십 년만 흘러가도 아마 사람들은 이 《좌전》은 읽어도 《구음진경》같은 건 읽지 않을 것이오."
홍사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렸다. 그러자 선비는 사람 좋게 웃었다.
"내 말을 잘 들어 보오. 천하 사람들은 다 《구음진경》을 서로 빼앗으려 하면서 모두들 그걸 보물로 여기고 있소. 하나 그걸 얻은 자는 극구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걸 잃은 자는 몹시 가슴 아파하며 그 경서 얘기는 입 밖에 꺼내려 하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 책은 자연 인간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돼 버린단 말이오. 하지만 이 《좌전》이 잊혀져 유전되지 않았다는 얘긴 못 들었소."
"당신은 승상이시라더니 말재간이 대단하군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니 우리 같은 소인에 비하겠나요? 당신 말씀이 맞아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우린 모두 믿어요. 그러니 만일 당신께서 《구음진경》을 얻게 되면 우리한테 주세요. 그럼 우리가 상아에다 새겨 넣은 《좌전》을 드리겠어요. 어때요?"
세 여인은 자신들의 제안이 퍽 그럴싸하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그러나 선비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않고 불쑥 물었다. 겉으로는 자못 태연자약했지만 속으로는 한시 바삐 황제를 구해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애가 닳았다.
"당신네의 등아와 우리 황제 폐하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내가 찾아뵐 수 없겠소?"
그러자 홍사는 선비를 붙잡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선비님, 당신은 참말 책벌레가 아니면 바보로군요.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데 왜 끼여들려 하시나요? 더욱이 당신은 즐기지 않고 이곳에서 멍청하니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인생은 짧고 고달픈 거예요. 당신은 정녕 그걸 모르세요?"
"알고 있소.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조금 전에 한 여인이 폐하에게 벌을 주겠다고 데려갔으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지. 폐하는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실 분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어서 빨리 폐하를 모시고 이곳을 나가야겠소!"
선비는 지금의 이 형세가 몹시도 답답하여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가고 안 가고는 우리 손에 달린 일이에요.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원래 등아 향녀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화산으로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조건으로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폐하가 우리 향녀들을 위해 《구음진경》을 빼앗아 주겠다는 걸 약정해야만 당신들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진정으로 인생이 짧고 고달프며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신다면 그 일은 폐하께 맡기고 이곳
에서 우리와 재미를 보아요. 그런 다음 폐하와 그 무슨 화산의 무예 시합인가 하는 델 가시란 말예요. 그때 가도 늦지 않으니……."
선비는 이 여인들이 무슨 수작을 꾸며 댈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황제를 찾아내긴 했으되 그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지금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실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선비는 몹시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는 다만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 향녀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선비는 웃기만 할 뿐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참말 바보로구나. 이 사람이 참말로 우리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이러는 걸까? 만일 참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지가 굳센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어디, 우리를 당해 내나 두고 보자.'
그녀들 셋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선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선비는 눈 하나 까딱 않고 큰소리로 《좌전》만 읽어 내려갔다.
선비는 점점 더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의 향긋한 체취만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은 책에 가 있지만 책장에는 글자가 아니라 여인들의 요염한 모습이 어리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제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칫 여인들을 겁탈하게 될까 저어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은 그래 여인이란 쟁기를 쓰지 않고고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홍사가 사뭇 정겹게 속살거렸다. 선비는 머리를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대꾸했다.
"알고 있소. 옛날 서시라는 여인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정예 군사 팔만보다 강했소. 그 여인은 일거에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또 귀비 양옥환은 나라를 망치고 임금을 사경에 몰아넣었지……."
"선비님께선 굳이 말씀을 안 하시려고 자꾸만 피하셔서 그렇지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그런 학식으로 온종일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여인이 얽혀 들어 빚어진 그런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춰 내긴 몹시 겁이 나니까……."
그는 향녀들의 유혹을 받아 죄과를 범하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선비님, 당신은 일국의 승상이시니 여색에 빠지면 나라를 망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반대로 여인이 나라를 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선비님도 그건 알고 계시죠? 만일 당신이 단황 나으리를 도와 우리들이 《구음진경》을 얻으려 하는 것에 일조해 주시기만 한다면 우린 꼭 당신들 군신에게 훌륭히 보답할 거예요."
그러자 선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대들이 우리 황제 폐하에게 미향을 뿌려 이곳까지 데리고 와 아직까지도 폐하가 저처럼 혼미해져 있도록 해 놓고는 아까부터 도시 그게 무슨 말이오? 이건 모두 그대들이 우리 대리국의 황제와 신하를 깔보았기 때문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더러 《구음진경》을 빼앗는 일을 도와 달라니 실로 어불성설이구먼. 그건 망상이오, 망상!"
"흥, 아무리 그래도 별수없을걸요? 단황 나으리와 선비님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언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달이 점차 차고 있어요. 중양절 날 밤에 당신들은 서로 참살해야 해요. 그때 누가 그 《구음진경》을 얻게 되고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겠나요? 과연 누가?"
"난 모르오. 하지만 우린 아니오. 우린 그것을 얻을 생각이 없소."
그러자 홍사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참말 그걸 보게 되더라도 얻으려 하지 않으리란 말씀인가요?"
선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소. 우린 그걸 바라지 않소."
"됐어요, 아주 훌륭해요. 한데 우린 참말로 당신들 군신들의 도움을 바래요. 당신들처럼 이 《구음진경》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를 도와 그 《구음진경》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홍사는 정색을 했다. 선비는 그 말에는 더 이상 대꾸를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야 어찌 됐든 어서 폐하를 만나게 해 주오. 어쨌든 우린 화산으로 가야겠으니."
"그렇게 서두를 게 뭐예요? 어차피 우리도 갈 테니 함께 가면 더욱 좋지 않나요?"
선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그는 정말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들이 화산에 가선 뭣하오? 그대들은 참말로 그깟 재간으로 화산에 가 싸우려 하는 게요?"
"비웃는 거군요. 우리 향녀를 비웃으면 안 돼요. 잘못 생각하셨어요. 그럼 선비님 신변이 위태롭게 된다구요."
선비는 뭐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홍사가 그의 등에 있는 비구(脾樞) 대혈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자 두 여인도 일제히 손을 써서 순식간에 선비의 대혈 열세 곳을 찔러 놓았다.
"선비님, 당신은 스스로 재간이 대단하다고 믿고 계시는군요."
선비는 태연자약하나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대들한테 알릴 일을 잊었구먼그래. 화산 무예 시합 때 그대들과 마주앉으려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게요."
그것은 화산의 무예 시합 때 향녀들한테는 근본적으로 남을 제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선비님, 당신은 승상 노릇은 할 수 있지만 여인들한테는 안 되겠군요. 두고 보기나 하세요."
홍사는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제18장 왕중양의 여인
구양봉은 온밤 내내 치주를 상대로 그 짓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절정에 달해 신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하룻밤 보내고 나니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가 이렇듯 중원 무림을 찾아온 것은 비단 《구음진경》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심중에는 이 참에 이 백타산군 서독의 악명을 천하 무림에 톡톡히 드높여 놓아야겠다는 의도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야만 설사 《구음진경》을 손에 못 넣는다 하더라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
기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치주가 그 첫번째였던 것이다. 그는 중원 무림 호객들이 치주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핍박을 당하며 손이야 발이야 빌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나서 연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요란하게 떠들었다.
"좋아, 훌륭해! 꼬마 미인, 넌 날 무척 즐겁게 해 주었어. 난 네가 한평생 만족하고 살게 해 주겠다."
치주는 치가 떨렸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장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몸이야 어찌 되든 그럼으로써 단지흥을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구양봉은 날이 밝아서야 치주를 놓아주었다.
"참 좋았어. 좋았단 말이야……."
대환희 보살은 장막 밖에서 기색을 살피다가 구양봉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잠시 뜸을 들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치주 쪽을 힐끔거렸다. 치주는 되는 대로 옷을 걸치고 있었는 데 아랫도리가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 장주님께선 이 한 밤 기분 좋게 보내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지 않아도 구양봉은 묘한 여운이 남아 입을 벙싯거리다가 보살을 바라보며 요란히 웃어댔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보살은 참말로 내 맘을 잘 알아준단 말이야, 흐흐흐……."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입맛 좋게 비위를 맞추었다.
"구양 장주님, 어제 저 애와 잘 보내셨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잘됐어요. 이제 장주님께서 내 말을 들으실 차례군요. 내가 저 애를 상납했으니 이번엔 장주님이 내 요구를 들어주셔야지요. 그래 어떻소, 내 보기엔 이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무림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여들었으니, 당신이 그 기서를 빼앗긴 쉽진 않을 텐데……."
대환희 보살은 구양봉이 기분이 좋은 김에 얼른 매듭을 짓자는 심산에서 대뜸 말을 꺼냈다. 구양봉은 그 말이 거슬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래 보살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렇게 합시다. 장주님께선 시름을 놓으세요. 당신은 위로 왕중양 한 사람만 대적하면 돼요. 제가 밑에서 화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막아내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왕중양하고만 싸우면 될 거 아니에요? 장주님께서 왕중양 한 사람만 이긴다면야 그 《구음진경》은 장주님 호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아니냔 말예요?"
대환희 보살의 말에 구양봉은 한껏 구미가 당겼다.
"훌륭하군, 대환희 보살. 당신은 참 수완이 좋군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이 성사되면 내 당신한테 단단히 보답하지."
"기실 저도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싶지만 재간이 못 미치니 장주님께서 꼭 그걸 얻기를 원해요. 다만 그 경서에 있는 무공 초수를 저한테 두서너 가지는 반드시 전수해 주어야 해요. 그 조건으로 난 장주님을 도와드리겠어요."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이처럼 겸손의 말을 하자 우쭐해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내 그대 요구대로 해 주지."
"한데……."
대환희 보살은 일순 웬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말을 맺지 못했다.
"한데 어쨌단 말이냐? 어서 말을 해라, 말을!"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과연 구양 장주님이 단지흥의 일양지공, 홍칠공의 강룡십팔장, 왕중양의 선천신공을 다 이겨 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 고수들을 다 이겨 내기란……."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한껏 추어올렸다가 다시금 그를 얕잡아 보며 종작없이 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이 뚱뚱보가 그까짓 계집 하나 안겨 놓고 자기를 갖고 놀자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대로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봐 뚱뚱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큰소릴 치는 모양인데 내 사장 맛을 보기 전에 냉큼 말하지 못할까! 무슨 좋은 계책이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계속 아리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보살의 머리 속에 기가 막힌 계책 하나가 번개같이 스쳐 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탁 치며 환성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기실 당신이 그 경서를 얻자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이리 좀 가까이 와 봐요!"
대환희 보살은 겉보기엔 미련해도 속에 꾀가 가득 들어찬 여인이었다. 구양봉이 다가가자 보살은 그의 귀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뭐라고 속닥거렸다. 이윽고 구양봉은 삽시에 얼굴이 환해졌다.
'나 이 백타산군은 한다면 하는 성미다. 천하의 기서를 왕중양 손에 두고서야 내 어찌 참을쏘냐. 난 기어이 그 책을 수중에 넣고 말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좋소. 당신 계책대로 하지."
왕중양은 화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활사인묘 앞에서 그 여제자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듯했다. 그 처녀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서 임조영도 뒤미처 화산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 왕중양은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무엇보다 짙어 가는 그녀의 병색이 여간 근심되지 않았었다. 하나 《구음진경》에 힘입어 독을 해독하자고 그토록 권고해도 듣지를 않고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꼭 온다고 했으니 병세가 다소 나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조영은 승부심이 대단한 여인이다. 왕중앙과는 이미 십여 년이나 승부를 다투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화산 무예 시합을 놓쳐 버릴 리는 없다. 그녀가 오기만 하면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 져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니, 사정을 두지 않고 싸워도 임조영은 능히 그를 이겨 낼지도 모른다. 임조영은 그때 큰 바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겨 넣지 않았던가. 왕중양은 진심으로 탄복하여 그녀에게 활사인묘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임조영은 실로 천하에 드문 기녀(奇女)였다. 그녀가 자기에게 질 리 만무였다. 자기가 임조영에게 져서 《구음진경》을 내어준 뒤 훗날 그 활사인묘를 찾아가 함께 배우자고 하면 그녀는 응낙해 줄 것인가……. 뱀 독도 말끔히 해독하고……. 그는 씁쓰레
하니 미소를 지었다.
한 순간, 산 저쪽에서 홀연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실로 어마어마한 내력이었다.
'저 사람이 임조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임조영이 아니라면 절대로 방심할 수 없지!'
그는 며칠 전 서독 구양봉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 후 한층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그는 구양봉 같은 악인한테 지게 된다면 차라리 이 일전에서 《구음진경》과 함께 자신의 육신을 깨끗이 없애 버리리라고 마음을 굳혔었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였다. 그는 그의 아내 아형을 데리고 화산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마침내 화산 아래에 이르러 아내에게 말했다.
"아형, 당신은 무공을 닦지 못했으니 먼저 이 옥석 두 개로 귀를 틀어막아. 왕중양도 이미 화산 아래 객점에 와 묵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당도했다는 걸 그에게 소리쳐 알려야겠어."
아형은 황약사가 시키는 대로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황약사가 머리를 뒤로 제치고 소리를 지르자 화산에 빽빽히 들어찬 수목들이 일제히 으스스 울어댔다.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아형마저도 낯색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겁이 나는 것이었다.
'저이의 공력이 이다지도 고강한데 누가 감히 이겨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저이는 반드시 《구음진경》을 얻고야 말 거야.'
왕중양은 산 저쪽에서 울려 오는 외침 소리를 듣고 중천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아마도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일 게다. 저 소린 좀 무례한 듯하나 음충스럽지는 않아. 저 사람이 《구음진경》을 차지하게 된다면 최소한 무림에 해는 입히지 않을 게야."
그때 산 뒤쪽에서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린 적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길게 여운을 남겼다. 아마도 숨 가쁘게 밤길을 다그치는 듯싶었다. 왕중양은 곰곰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의 공력은 나보다 못하지 않겠군. 일전 나를 기습하던 구양봉일지도 모르지.'
뒤미처 산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엔 낭랑히 불경을 외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자못 평온했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구절 힘껏 외우는 그 목소리는 아주 박력이 있었다.
왕중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다소 근심이 되었다.
'이 사람의 공력은 아마도 나보다 나은 것 같구나. 저 사람이 외우는 불경은 아주 평온하고 살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황약사나 구양봉의 외침과는 달리 공력을 아주 깊이 닦은 게 분명하구나.'
왕중양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대리 황제 단지흥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왕중양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두들 화산의 무예 시합을 고대하고 있다. 몇 년 간이나 벼르고 별렀던 그 기다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올 것인가. 임조영도 필시 찾아올 테지만 일찌감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지난날 임조영을 오랫동안이나 기다리게 했었다. 이제는 그가 임조영을 기다릴 차례였다. 언제까지든 임조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리라. 그는 조용히 침잠하면서 마음의 온갖 사심을 털어
내려고 정신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엇 때문에 밤에 무예 시합을 벌이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구음진경》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구음진경》은 기경(奇經)이라 꼭 밤에 얻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중양 진인이 하필 한밤중에 화산으로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왕중양의 의중은 딴 데 있었다. 그는 이번 쟁탈전에서 그 여인과 마지막으로 승부를 가르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승부를 가려 지난날 뜻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를 얽어맸던 그 비정한 운명의 끈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산의 어둠 속에 지난날의 원망을 깨끗이 묻어두리라고 그는 거듭거듭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종남산 뒤쪽으로 자그마한 돌비탈이 있고 그 돌비탈 위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그 수풀은 매우 울창하여 가을이 되었는데도 아주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거기에 임조영의 활사인묘가 있다.
그 석굴 어귀로 언뜻 사람 그림자가 희끗하더니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구양봉과 대환희 보살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지금 보살의 계책으로 왕중양의 여인 임조영을 사로 잡아 왕중양을 협박해 번거롭게 화산 무예 시합 따위는 치르지도 않고 그녀의 목숨과 《구음진경》을 맞바꾸자고 할 심산으로 내처 이 종남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뚱뚱보 여인 하나가 소리를 쳤다.
"석실 안 사람은 들으시오!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이 좀 뵙기를 청하오!"
그러나 석굴 안은 잠잠하니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구양봉은 이내 대꾸가 없자 발싸심이 나서 더 큰소리로 외쳐댔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손님 대하는 법이 이다지도 무례하냐? 문을 부수고 들어갈 테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구양봉의 옷소매를 잡아 끌며 짐짓 질책을 했다.
"구양 장주님, 좀 고분고분하세요. 임조영이란 여인은 예사 여인이 아니에요. 듣건대는 이 여인은 왕중양을 이겨 이 석굴을 차지했대요. 이 석굴 이름이 활사인묘인 것을 봐도 그녀가 속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아요. 당신이 그 여인 손에 잘못 되면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는 꼴이 아닌가요?"
그 말에 구양봉은 시뜻해서 냉소를 쳤다.
"보살은 이 구양봉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먼. 나도 임조영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 내가 계집 하나 제압하지 못한단 말인가?"
구양봉은 임조영을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사내만을 대단하게 여기고 여인은 늘 하잘것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임조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결국 계집이 아니란 말인가. 그저 왕중양의 여인이란 것 때문에 여기까지 이렇게 친히 온 것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직접 찾아 나선다는 건 그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석굴 안에서 찍소리도 없자 이제는 대환희 보살이 나서서 큰소리로 열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길게 고함을 치세요. 아무려면 이렇게 끈질긴데 안 나오겠어요? 어서요!"
"그런데 아까는 뭐가 어쩌고 어째? 고분고분하라구?"
구양봉이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내쏘자 대환희 보살은 무색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구양봉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림의 나무들이 정정 울리고 메아리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임조영은 석실 안에서 천년 동안 얼어붙은 석상(石狀) 위에 올라앉아 기를 모으고 있었다. 밖에서는 연해 떠들썩하니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목소리를 들으니 심보가 고약한 놈이로군. 혹시 왕중양에게 무슨 일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제자를 불렀다.
"굴 밖에 누가 왔느냐?"
"사부님, 복색을 보아하니 서역 오랑캐 같은데 아주 흉악해 보이는 녀석이 하나 와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또 여인들도 여럿 되는데 모두 다 어찌나 뚱뚱한지 보기조차 역겨웠어요."
"뚱뚱하다구? 그렇담 그 여인들은 운남 대환희 보살네 무리들이군. 그런데 그 사내는 누구지?"
임조영은 석실 밖으로는 추호도 나가지 않겠다 맹세했으나 혹 왕중양 신변에 위험이 닥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냥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임조영이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조갈이 날 지경이었다. 한 순간 돌 문이 쩌그덩거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조영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저어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구양봉의 코앞까지 바투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요? 대관절 누군데 여기 와서 고함을 지르며 이 난리를 부리는 게요?"
언젠가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더욱 천하 절색이라 구양봉은 일순 얼빠진 사람마냥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쌀쌀맞게 다그치자 언뜻 정신을 차리고 대뜸 주워섬겼다.
"그대가 임조영인가?"
마음은 사뭇 설ㄹ으나 구양봉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짐짓 거만한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여인을 쏘아보았다. 임조영은 아무 대꾸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구양봉은 잠시 바라보다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좋아. 난 왕중양과 화산에서 한판 붙어 볼 생각인데, 듣자니 당신이 왕중양을 이긴 적이 있다기에 당신과 먼저 한번 재미를 보려고 이렇게 온 것이다. 자, 어서 한판 붙어 보자구!"
임조영은 자못 멸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흥, 보아하니 왕중양한테도 질 것 같은데 감히 내게 이기겠다구?"
"듣던 대로 방자한 계집이로군!"
구양봉은 짓씹듯이 내뱉었다.
"그래,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데 감히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왕중양이 내 손에 패했다는 사실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모양이군? 왕중양도 내 적수가 못 되는데 네 녀석은 죽으러 예까지 온 게야?"
"아직 내 명성도 듣지 못했다니 우물 안 개구리로군. 난 서독 구양봉이다! 왕중양은 네 년한테 진짜로 진 게 아니라 일부러 져준 게야, 일부러! 허장성세는 집어치우라구!"
임조영은 가느다랗게 눈살을 찌푸리며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왕중양이 일부러 나한테 져 줬다구?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그가 참말 나보다 못할까? 그렇다면 그이는 왜 남한테는 다 이기면서 나한테는 늘 져주는 것일까? 내가 지난번에 비석에 글을 새길 때…… 이건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왕중양, 당신은 나한테 일부러 양보할 필요가 없노라. 이 임조영이 참말로 당신을 이길 수 없는 줄 아는가?'
구양봉은 유심히 임조영의 기색을 살폈다. 방금 나오는 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허튼소리를 지껄였을 따름인데 임조영이 이처럼 반응을 보이다니…….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럴 때 손을 쓰면 이 여인을 사로잡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되면 왕중양이 나한테 굽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
그때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입을 열었다.
"임조영, 듣자니 당신이 천하 제일인자라고 하여 구양 장주님이 당신과 무예를 비겨 보려고 온 거예요."
임조영은 대환희 보살을 싸늘히 쳐다보더니 홱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구양봉을 겨누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신난다! 한바탕 해 보자. 내가 너한테 진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홱 들이댔다. 그의 독사장은 워낙 그의 형인 구양적이 쓰던 병장기로서 거기에 그의 무공이 실리자 아주 지독한 것이 되었다.
"어디 독사장 맛을 보아랏!"
임조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구양봉의 손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른 순간, 구양봉은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여인이 대뜸 공격을 들이대는 걸 보면 무학이 뛰어나긴 뛰어나구나. 뿐더러 검세에 한치도 빈틈이 없다. 실로 무학대가다운 기백이다!'
구양봉은 임조영의 검을 피하면서 바짝 정신을 집중해 사장을 휘둘렀다. 채 십여 합도 싸우지 못해 구양봉은 벌써 조급해졌다. 임조영의 검술에는 실로 공격과 방어가 엄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두 사람은 수십 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구양봉은 임조영을 인질로 잡겠다는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자 조급하면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마구 고함을 지르며 독사장을 휘둘러댔다.
"쥐새끼 같은 녀석이 함부로 종남산에 발을 들여놔? 죽고 싶은 게로군. 목숨 하나는 여기 두고 가도 내 개의하지 않으마."
임조영이 한껏 이죽거리자 구양봉도 질세라 임조영의 화를 돋웠다.
"뭐라구, 이 여우 같은 것이? 네 년은 왕중양의 노리개지? 놈과 물론 통정했을 테고! 내가 네 년을 붙잡아 왕중양의 《구음진경》과 맞바꿔야겠으니 어서 순순히 사장을 받으라!"
임조영은 그간 석실에서 오래도록 지내며 왕중양에 대한 화가 점차 가라앉자 뱀 독에 중독되어 있는 중에도 마음을 침잠하고 새로운 검법 한 가지를 익혔다. 이 검법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이를 옥녀심경(玉女心經)이라고 이름했다. 그녀는 이젠 웬만해서는 그 어떤 감정의 충동을 받지 않았으나 구양봉이 무례하게 욕설까지 퍼붓자 불같이 화가 나 전력을 다해 중독된 몸을 추스르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좋아, 어디 내 검 맛이나 보아라!"
그녀는 초수를 바꾸어 옥녀심경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한켠에 서 있던 그녀의 제자도 사부가 이 초수를 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임조영이 옥녀심경 초수를 펼쳐 내자마자 구양봉은 연신 피하기만
하면서 쩔쩔맸다. 제자는 저도 모르게 퐁퐁 뛰며 소리쳤다.
"멋지다! 사부님, 저 놈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줘요!"
임조영은 기세를 올려 구양봉에게 더욱 바싹 공격을 들이댔다. 그러나 그 순간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등짝을 때렸다. 얼른 머리를 돌려 보니 대환희 보살이 그녀의 제자를 틀어쥐고 징그럽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제자를 놓아주지 못할까!"
임조영은 분기탱천하여 구양봉에게 한층 가열차게 검을 휘두르면서 호통을 쳤다. 그 제자는 임조영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처녀가 갓난쟁이 아기였을 때 들판에서 주워 와 이만큼 크도록 함께 동고동락해 왔다. 그러니 이 두 여인들 사이의 사제의 정이란 더없이 깊은 것이었다. 그런 터에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그녀는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득의양양하여 껄껄 웃어댔다.
"잘했어, 대환희 보살! 난 이 년을 쉽사리 이길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이 년의 제자를 붙잡고 있으면 일이 한층 쉬워지지. 임조영, 어서 검을 내려놓아. 내가 네 년의 혈도를 눌러 왕중양한테 끌고 가야겠다."
임조영은 제자와 대환희 보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살의 얼굴은 징그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살은 분명 자기 제자한테 독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일순 제자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임조영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임조영의 제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년, 나를 놓아라! 사부님, 이 년 말을 듣지 말고 그 더러운 놈을 어서 죽여 버리세요. 절 위해 복수를 해 주세요, 사부님!"
임조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단칼에 구양봉을 쓰러눕히고 싶었지만 마음이 조급하여 손끝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을 급히 휘두를수록 옥녀심경 초수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고 그 위력은 점점 못해 갔다. 그러자 역으로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독사장을 더욱 힘있게 휘둘러댔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 어슷비슷하게 검과 사장을 주고받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힘들어 하시는구나. 사부님께서 검을 쓰시는 초수가 좀전보다 퍽 못하다. 이러다간 사부님께서 지게 될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지게 된다면 난 하등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계집이다. 사부님께선 한평생 남한테 져본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천하에 이름을 날린 대협 왕중 양마저 사부님의 손에 패하지 않았던가. 사부님께서 수치를 당하시게 할 수는 없다…….'
처녀는 머리 속으로 슬한 사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언뜻 자기가 죽게 되면 사부님은 반드시 노기충천해 자기를 위해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이 제자는 사부님께 더는 효성을 드리지 못하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중하시옵소서!"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급히 혀를 깨물어 자살하려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등허리가 마비되는 듯해 몸을 움찔 떨었다. 혀의 감각도 점점 없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서 적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살아가자면 고통을 당하게 마련인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쉽사리 생명을 버리려 하는가?"
임조영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왕중양이 대환희 보살 뒤에 서 있었다. 왕중양은 화산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그녀의 병환이 걱정되어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권해 보고자 재우쳐 종남산으로 달려온 터였다.
"대환희 보살, 공연히 힘 빼지 말게!"
대환희 보살은 왕중양을 보더니 질겁을 하여 창백하게 질려서는 살살거렸다.
"백타산군이 화산 무예 시합을 하기 전에 임 여협과 놀아 보느라고 저래요."
왕중양은 태연한 기색으로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구양봉, 자네가 임 시주님과 싸우는 건 난 참섭하지 않겠어. 하지만 대환희 보살이 남의 제자를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건 나쁜 짓이야."
왕중양은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대환희 보살의 귀엔 마치 작탄이 터지는 것처럼 들렸다. 보살은 극구 발뺌을 했다.
"중양 진인, 그렇게 날 나무라지 마세요. 임 시주님의 제자가 나를 능멸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만……. 이제 놓아주면 되잖아요."
대환희 보살은 연신 왕중양에게 굽실거리며 임조영의 제자를 탁 놓았다.
"자 가라, 가!"
왕중양은 임조영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 일에 끼여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구양봉이 아니라 천하 무림 호걸들이 다 온다고 하여도 그녀는 왕중양이 자기 일에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왕중양은 한켠에 물러나 앉아 눈을 감고 양신(養神)을 했다.
임조영은 자못 못마땅한 기색으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전진교 사람이 예서 뭘 하려고 가지 않고 그러고 있어요?"
임조영의 어조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없자 왕중양은 괜히 성을 돋우게 될까 저어되어 얼른 말했다.
"임 시주, 난 당신과 구양 장주가 싸우는 걸 구경하려고 그러오. 구양 장주의 독사장 초수가 천하에 다시 없고 그대의 검술도 세상에 다시 없으니 좀 보자고 그러는 것일 뿐이오."
그러자 임조영은 대뜸 쓴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왕중양, 사공이 뱃머리 돌려 대듯 말을 잘도 둘러대시는군요. 내 일에 털끝만큼도 참견 말아요. 당신은 천하를 정정 울리는 대협이니 당신은 당신 할 대로 대협 노릇이나 하고 난 나대로 활사인 노릇이나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일에 상관 마세요!"
왕중양은 어색하니 웃으며 입맛만 다셨다.
구양봉은 경난을 많이 겪어 본지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대번에 그것이 사랑 싸움인 것을 알아챘다.
'보아하니 저 미련퉁이 대환희 보살이 보기는 바로 보았군. 이 왕중양은 임조영을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만약 참말로 이 임조영을 사로잡기만 한다면 왕중양은 고분고분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왕중양이 이곳에 와 있는 한 구양봉이 임조영을 사로잡는다는 건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입맛이 몹시도 씁쓰레했다.
"구양봉 네 이 놈, 네 놈은 이 활사인묘로 죽으러 왔느냐?"
임조영은 왕중양이 들으라는 듯이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구양봉은 바싹 약이 올랐다.
'네 년이 왕중양의 계집이든 어떻든 내 오늘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겠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꼭 그 격이 아니냐! 감히 이 구양봉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고 한갓 계집이 날뛰다니…….'
구양봉은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면서 독사장을 치켜 들고 임조영을 향해 똑바로 찔러 갔다. 임조영은 번개같이 피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이번에는 있는 재간을 다 부리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워낙 그 자체로 검법이기도 하고 내공심법이기도 한 옥녀심경을 뱀 독에 중독된 중에도 일심으로 연마한 것은 왕중양한테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왕중양이 다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대송 강산을 되찾을 생각에만 불타고 자기를 성심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결코 자기도 왕중양한테 뒤져서는 안 된다고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다. 그리하여 무예에 있어서만
큼은 기어이 왕중양보다 우세를 점하리라고 벼르며 활사인묘로 들어간 뒤에도 병세를 아랑곳 않고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 옥녀심경을 창안해 낸 것이었다.
그러한지라 임조영은 결코 왕중양한테 옥녀심경 초수를 허투루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왕중양과 싸우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 온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어찌 왕중양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창안한 검법을 경솔히 써먹을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일심으로 왕중양에게 대적하려 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녀는 그 초수를 필히 왕중양한테 전수해 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극적인 순간에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내심 필히 자신의
옥녀심경이 왕중양의 《구음진경》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고로 지금은 진정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자 구양봉은 실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여인은 왜 아까의 그 괴상한 검법을 써먹지 않는 것일까……. 그는 워낙 임조영의 검법에 눌려 힘이 부쳤는데 그녀가 옥녀심경 초수를 쓰지 않자 더럭 의심이 났다. 그렇게 되니 정신을 한곳에 집중할 수가 없어 자연 그의 독사장 초수에도 예사롭지 못하게 틈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에 왕중양과 이 임조영 사이에 아주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간파해 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조영이 대번에 그 검법을 걷어들일 리 없는 것이다. 대환희 보살은 음흉한 눈빛으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천하를 뜨르르하게 울리는 대협이라 해도 저 사내 역시 치인(痴人)에 불과하다고 보살은 속으로 마음껏 비웃어댔다.
임조영의 검법은 갈수록 속도가 느려졌으며 아주 힘겹게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워낙 임조영은 왕중양과 공력이 어슷비슷하여 이들 둘이 싸운다면 승부를 가르기 어려운 정도이다. 그리고 이 구양봉과 제대로 싸운다면 더 빨리 끝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왕중양이 신경이 쓰여서 그녀 역시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싸우지 못했으므로 검법은 평온하기 그지없고 허점도 많았다.
왕중양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일순 임조영이 빈틈을 보인 사이 구양봉의 독사장이 그녀에게로 똑바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구양봉 독사장의 그
유명한 천외비장(天外飛杖) 초수였다.
왕중양은 급급히 몸을 날려 임조영과 구양봉 사이로 끼여들며 외쳤다.
"구양봉, 그만 하면 한 재미 톡톡히 봤으니 이젠 됐네! 그만 내려가게!"
구양봉은 이빨을 바드득 갈면서 손을 걷어들였다. 뭐라 해도 왕중양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와 싸우다가는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고 화산에는 아예 발도 못 들여놓은 채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게 될 게 뻔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능글맞게 깔깔 웃으며 임조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워낙 활사인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말 정이 깊구먼그래. 묘 안팎에 온통 사랑이 철철 넘친단 말이에요. 중양 진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으하하하……."
임조영은 매섭게 보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선 살기가 튀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찔끔하여 뚱뚱보 여인들에게 어서 빨리 산에서 내려가자고 서둘러댔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꽁무니 빠지게 달려 내려갔다. 구양봉도 씁쓰레하니 입맛을 다시며 냉소를 머금은 채 그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산 아래로 내려 갔다.
왕중양은 그윽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조영이, 당신……. "
그가 운을 떼자마자 임조영이 그의 말허리를 똑 끊으며 찬바람이 일도록 쌀쌀맞게 내뱉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존귀하신 교주님이시고 전진교는 천하 무림의 사표(師表)이옵니다. 당신은 그래, 너무나 존귀해서 저를 그렇게 부르시나요? 아까처럼 그냥 임 시주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흠칫하며 임조영의 눈길을 좇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임조영이 지금 자기를 조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좀전에는 외간 사람들 앞이라 존중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임 시주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둘만 남게 되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자기가 이렇게 한 것이 무에 잘못된 것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얄미워서 그 거동을 낱낱이 걸고 넘어졌다.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어정쩡해져서 선뜻 말을 못 이었다.
'임조영은 아직도 나를 미워한단 말인가…….'
그는 못내 서운했다. 그는 미움도 사랑에서 연유한다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숙맥 같은 사내였다.
그는 다시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함께 화산에 오르려고……."
"제가 화산에 가선 뭣하겠어요? 전 그 《구음진경》이라는 걸 얻을 생각이 없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림 영웅이 될 생각도 없어요. 전 활사인일 따름이에요. 하필 인간세상의 허영을 쟁탈할 필요는 제겐 하나도 없어요."
임조영은 사뭇 담담하게 말했다.
"조영이, 내 말 좀 들어 보오. 내가 처음에 이 석굴을 팠을 때 난 내 스스로 활사인묘라는 이름을 지었더랬소. 그때 난 이 석굴을 당신한테 빼앗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소. 그리고 또……."
임조영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당신을 이겼거든요.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나요? 물론 이제 와서 그걸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당신은 지금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이니까요.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당신은 일찍이 저한테 진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해요. 안 그런가요?"
"아오, 난 그대한테 졌었소."
"왕중양, 당신은 천하의 제일인자이긴 하지만 내게만은 패했어요. 그러니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당신은 관계치 말아요. 일단 패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사사건건 내 일을 참섭하려 드는 건가요?"
"조영이, 답답하구려. 난 당신의 일을 간섭하려는 게 아니오. 난 다만 당신이 이 책을 보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일 따름이오. 이 책은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천하의 무학이란 바다와 같이 넓다는 걸 알게 되었소. 우리가 배운 건 참말 한줌 재에 불과하단 말이오. 더군다나 당신의 병세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대의 안색을 보니 결코 소홀할 수가 없겠구려. 그러니 빨리 그 독을
해독해야 하지 않겠소?"
임조영은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애잔한 눈길로 왕중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왕중양, 당신은 진정으로 제가 배운 것이 한줌 재에 불과하다고 여기시나요? 당신은 끝내 저한테 탄복하지 않는군요. 그러면서 제가 뱀 독에 중독된 걸 걱정해선 무엇 하겠어요……. 뿐더러 당신은 내가 그때 당신을 꾀로 이긴 걸 알게 되면 더군다나 날 우습게 여기겠지요. 당신은 이 책에 기재된 무예가 내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고 하고 싶으시겠지만 당신의 그 책이 뭐 그리 대단한가요? 제가 새로 창안해 낸 옥녀심경이야말로 고금에 없는 것이에요. 더욱이 그 책
에 이 뱀 독을 해독할 만한 그 무슨 비결이 있을 리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한 난 이렇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뿐이이에요.'
임조영은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듯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고금에 드문 무학기재로 두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평소에도 늘 무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두 사람 다 자기 주견을 고집하는 바람에 매번 말다툼이 생겼다.
뿐더러 임조영은 왕중양이 이 활사인묘에 들어가 있지 못하게 하려고 자청해 이 석굴로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왕중양은 그 마음을 진정 알아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의 《구음진경》만 으뜸이라고 내세우면서 다만 겉치레로 자기의 병세가 어떻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임조영은 왕중양에 대한 미움도 깊었다.
왕중양이 이런 여인의 심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줄곧 임조영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십여 년 동안 본의 아니게 그녀가 마음 고생을 한 걸 무시해 버린 것이 되어 그에 대해 속죄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임조영을 잘 대해 주면 줄수록 그녀는 성만 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절하게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임조영은 그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해 버렸다.
'당신은 절 활사인묘에 들어가게 했지요. 그래서 전 천하 무림이 다 아는 활사인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야 비로소 나한테 인정상 빚을 졌다는 것을 느낀 것 같군요. 당신 같은 매정한 사람의 청을 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임조영은 웬일인지 마음이 더욱 외로 꼬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먹서먹하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색하니 말문을 열었다.
"이 책을 좀 읽어 보오. 참말 신기하다니까."
"당신은 그것 때문에 화산으로 천하 무림 고수들을 다 불러모아 땀을 흠뻑 흘려야 할 테니 당신이나 많이 보세요. 저에게는 아무 소용 없어요. 전 그것 없이도 제 무공을 닦아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제 병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더는 괘념치 마세요."
왕중양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원래 임조영 앞에만 서면 구변이 신통치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그녀의 부아를 돋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사내가 구변이 좋아 가끔씩 달콤한 말도 해 줄 줄 안다면 여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 것이고 웬만한 분노도 얼음 녹이듯 녹일 수 있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사랑에 이처럼 오래도록 금이 가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왕중양은 종래로 임조영만 보면 말문이 콱 막혀 버
리곤 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더욱 성이 났다. 그가 평소에 무림 호걸들과 한자리에 모일 때면 얼마나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지만 자기 앞에 오기만 하면 무뚝뚝하니 입을 다문 채 얼빠진 사람처럼 있기가 일쑤였다. 그리하여 임조영은 더 더욱 왕중양을 미워하게 되고 그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간에 왕중양을 위해 기꺼이 고초를 겪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에는 왕중양을 위해 죽기를 소원해 왔다.
"조영이, 난 이 책을 가져다 당신한테 보이려고 언제부터 작정하고 있었소. 이 책엔 나도 이해하지 못할 곳이 적지 않소. 당신이 만일 나와 함께 《구음진경》을 배우기만 한다면 한 근심 덜겠는걸 당신은 한사코……."
임조영은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했다.
'당신은 또 날 속이려 드는군요. 무슨 무예를 익힌다고 그래요? 두 사람이 함께 그걸 익히자고요? 왕중양, 당신은 이젠 이 땅의 신선으로 치부되는 사람인데 나하고 무슨 무예를 익히자고…….'
"중양 진인, 당신이 그 《구음진경》을 잘 보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 혼자 그것을 간직하고 절대로 경솔하게 남에게 내보이지 마세요."
임조영이 끝내 이렇듯 뻣뻣하게 나오자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이런 때에 왕중양이 임조영 당신은 내 사랑이고 나 때문에 활사인묘에까지 들어가 있는데 내가 이 경서를 당신한테 내준들 어떻단 말인가 하고 뜨거운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임조영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쌓인 원한도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중양은 이런 생각을 심중에 품고만 있을 뿐 입 밖에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왕중양은 그토록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남녀간의 일이란 본디 아차하는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는 터, 그가 이처럼 미욱하게 구니 임조영이 매번 쌀쌀맞게 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 저 사람은 맘속에 뚱딴지 같은 궁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활사인묘에 거처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매번 이 일만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모양이군.'
"당신이 자꾸 날 찾아오는 건 마음속에 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그러는 거 아닌가요? 나하고 다시 승부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난 당신과 그 무슨 승부를 내거나 하지는 않아."
왕중양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가슴속에 서린 감정을 뭐라고 이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의 내기를 두고두고 원통하게 생각해 왔다. 자기가 그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만 하지 않았던들 임조영이 어찌 이 차디차고 음습한 활사인묘로 들어갈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 일만 해도 정녕 후회막급인데 어찌 또 임조영과 승부를 가르려고 한단 말인가.
"중양 진인께서 딱히 그럴 마음이 아니시라면 전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임조영은 쌀쌀하게 돌아섰다. 두어 걸음 떼어놓다가 그녀는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경서라면 함부로 나돌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세요."
그녀의 낯빛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려 내처 활사인묘로 들어가 버렸다.
왕중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임조영이 석굴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제19장 화산의 달밤
이윽고 중양절 달이 둥실 떠올랐다. 청청히 밝은 밤이었다. 다만 바람에 풀잎 스치는 무심한 소리가 섞여 들어 으스스한 기운을 자아낼 뿐이었다.
화산 양쪽 기슭을 메우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봉우리로 오르고 있었다. 사람마다 각양각색이요, 생각도 천차만별이었다. 악심을 품고 갖은 수단을 다하여 왕중양의 손에서 그 천하의 기서를 빼앗으려는 사람, 별 생각 없이 구경이나 실컷 해두자는 사람……. 하지만 천하에 드문 고수들의 싸움을 지켜 보려는 일념만은 너나할것 없이 똑같았다.
화산 양지쪽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산기슭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조용하던 밤 하늘에서 불현듯 우레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거 좋지 않군. 인기척이 있어!"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화산파의 곽명송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 근심스런 눈길을 주고받았다. 순간 암벽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이내 쿵쿵 소리가 진동하며 큰 바위 하나가 사람들을 향해 곧추 굴러 내려왔다.
"피해욧! 누가 저 뒤에 매복하고 있소!"
곽명송은 급히 외치고는 몸을 날려 절벽 쪽에 바투 붙어 섰다. 절벽에 붙어 선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맹수와 흡사했다. 몇몇 사람들은 비록 곽명송의 고함소리는 들었지만 영문을 몰라 멍청히 있다가 굴러 오는 바위을 안고 그대로 나뒹굴었다. 악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순식간에 족히 십여 명은 될 듯싶은 사람들이 바위에 깔려 죽었다. 요행 살아난 사람들도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 서서 떠들썩하니 갑론을박을 했지만 그 바
위가 어디에서 굴러 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길은 좁으니 빨리 지나가야 해요. 어물거리다간 위험하단 말이오!"
곽명송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제압하며 고함을 내지르곤 앞장서서 성큼성큼 내달아 갔다. 모두들 서로 먼저 가려고 밀치락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이윽고 저 높이에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좀전에 바위가 굴러 내린 것말고는 요행히 그때껏 그 누군가가 그들을 암해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산봉우리에도 사람의 자취는 아직 없는 듯했다. 보름달은 아닐망정 교태로운 달빛이 내리비추고 맑은 바람이 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순 무리 중에 누군가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사제, 사부님께선 날더러 자네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셨지. 그런데 결국 그 《구음진경》을 빼앗으려고 길만 다그쳐 다니다가 이 꼴이 됐구먼. 경서는 구경도 못하고 싸움 한 번 못해 본 채 형제만 죽고 말다니."
그 사람은 일단 말을 꺼내 놓자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끝내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아까 그 바위에 자기 문파 사람이 하나 깔려 죽은 모양이었다. 곡성이 화산 위로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사형, 너무 그렇게 비감해하지 마시오. 우리라도 어서 가서 무예 시합을 구경해야 하지 않겠소? 사형이 만일 갈 생각이 없으시다면 이곳에다 그냥 우리 시체를 묻도록 합시다!"
아마 그 사람의 사제인지 누군가가 입을 떼자 그는 쓱 눈물을 훔치며 급히 나섰다.
"아니, 안 돼. 어서 산에 올라감세. 사부님께선 우리들에게 꼭 그 《구음진경》을 갖고 오라고 당부하셨어. 난 꼭 그걸 빼앗고야 말 테야!"
그 사람은 울음을 뚝 그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곽명송은 이윽고 화산 남쪽 기슭에 당도했다. 그 뒤로 강호 호걸들이 한 무리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잔뜩 긴장한 채 내처 걸어왔는지라 온몸이 뻣뻣이 굳어질 지경이었다. 곽명송은 잠시 멈춰 서서 산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인들의 낭랑한 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는 이내 꽃같이 어여쁜 여인들이 바위 뒤쪽에서 몰려 나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호걸들은 얼떨떨하니 서로를 마주보며 주춤주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인들 가운데서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여러분은 밤이 이렇게 늦었는데 뭣 하러 화산을 오르는 거예요?"
호걸들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모두 여인인지라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강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들었기로서니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미인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중에 꼭 원숭이같이 생긴 사람이 제일 먼저 나서서 말을 건넸다.
"처녀를, 오늘 밤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그쪽도 그걸 보러 가는 길이우?"
"우리가 어찌하든 그건 상관할 바 아니에요. 전 다만 여러분한테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시라고 권하려는 것뿐이에요. 만일 뱀한테 물리기라도 하면 앞으론 아무 구경도 못할 게 아니에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기색은 적이 냉랭했다.
'난 화산에서 여러 해를 지내 왔지만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말은 종래로 들어 본 적이 없다. 한데 저 여인들은……. 실로 우리 화산파의 명예를 더럽히는구나.'
곽명송은 여인들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생각을 굴렸다. 곽명송은 그 여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뜸 쌀쌀하게 내뱉었다.
"곽 대협, 당신은 강호의 명인이니만큼 이런 어중이떠중이들과 한데 섞여서는 안 되지요. 만일 당신이 물러서신다면 살 길은 내드리겠어요."
그 말은 아주 사정을 보아 주는 듯하여 모두들 곽명송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곽명송은 그 말이 몹시 거슬렸다. 그는 평소 성품이 아주 온화하여 누구와도 큰소리로 대거리하는 법이 거의 없었으나 이처럼 감히 화산파를 건드리고 깔보는 여인들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계집들이냐? 감히 화산에 와서 무례하게 굴다니, 화산파의 검술을 배워 보겠다는 겐가?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여인은 냉랭히 낯색을 굳히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 녀석이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세 여인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곽명송을 향해 똑바로 찔러 왔다. 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는 품이 무예가 만만치 않음에 분명했다. 곽명송은 급급히 피하며 홱 검을 빼들었다. 세 자루의 검이 일제히 곽명송을 겨누고 춤을 추면서 그의 검과 맞부딪쳐 밤 하늘에 불꽃을 날렸다. 곽명송은 화산 검술을 정통으로 전수받은 화산파이 으뜸가는 제자로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세 여인의 검을 번개같이 받아 쳤다. 네 사람은 한데 어우러져 차 한잔 마
실 시간 동안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곽명송은 원래 일단 자신이 초수를 써서 눌러 놓으면 세 여인이 순순히 물러서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세 여인이 만만치 않게 세 자루의 검으로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자 속이 뜨끔했다. 아무리 화산파의 정통 검술을 펼쳐 낸다 해도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데야 별 재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여인들이 똑같은 초수로 연이어 공격을 들이대자 적이 의아하여 한켠으로 썩 물러났다. 아무래도 이 여인들에겐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했다.
"당신들은 왜들 이러는 건가?"
곽명송은 고함을 내질렀다.
"우린 다만 당신들더러 산에서 내려가라는 것뿐이에요. 산놀이를 하시겠거든 내일 다시 오세요."
"무슨 농담을 하는 게냐? 우린 바로 오늘 밤에 일이 있어서 화산에 온 것이다. 허튼수작 말고 냉큼 길을 비켜라!"
"당신이 화산파 대협 곽명송이라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어요. 정히 그러시다면 다른 분들은 올라가세요. 하지만 곽 대협께서는 오늘 밤 절대로 화산에 올라가셔서는 안 돼요."
곽명송은 안색이 확 달라졌다.
"내가 화산에 올라가면 왜 안 된다는 거냐? 무슨 연고로 다른 사람은 화산에 올라가도 일없고 나 이 화산파의 제자만 못 올라간다는 말이냐?"
세 여인은 의미 심장한 눈길로 서로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곽 대협,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나요?"
여인의 그 한마디에 곽명송은 삽시에 안색이 변했다.
"다, 당신들은……."
"곽 대협께선 강호에 명성이 뜨르르한 분이시라 모두들 우러러보지요. 하지만 우리 가문의 처녀들만 보면 몸둘 바를 몰라 하시거든요."
뭇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게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필시 말못할 고충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세 여인을 바라보며 고분고분 말했다.
"여인들께선 무슨 분부가 있어서 그러시오? 속시원히 말해 보시오."
그러자 뭇사람들은 그만 아연실색해졌다.
"무슨 어려운 건 아니에요. 단지 곽 대협께선 이 화산 꼭대기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한 여인이 정색을 했다. 곽명송은 하얗게 질리더니 이윽고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좋소, 이 곽모는 물러가리다."
곽명송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곽명송이 왜 저리도 황황히 떠나가는지 도무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뭇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내두르면서도 한시 바삐 화산 꼭대기로 올라가 무예 시합을 볼 생각이 앞서 곽명송의 일을 자세히 따져 보려 하지 않았다.
"여인네들, 난 필히 화산에 올라가 무예 시합을 구경해야겠소. 우린 가게 해 주겠지?"
누군가가 운을 떼자 또 한 사람이 거들었다.
"난 당신네와 초면강산 처지인데 내가 가는 걸 막을 리야 없겠지."
"우린 이곳에서 사람들이 산정에 오르는 걸 막고 있어요. 당신이 화산에 올라가지 않는다면야 막을 필요도 없겠지요."
한 여인이 쌀쌀하게 말했다. 적이 냉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화를 발끈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네들이 그런다고 화산에 안 올라갈 내가 아니야! 이렇게 쉽게 돌아갈 거면 애초부터 나서지도 않았어!"
그러나 여인들은 이번엔 대꾸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문 채 매섭게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인들의 눈빛에선 살기가 번쩍였다. 그러자 사람들 가운데 연장자인 듯한 사람이 손짓을 하면서 사람들을 물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처녀들, 처녀들은 왜 우리가 산에 올라가는 걸 막는 겐가? 뭘 알아야 내려가든 올라가든 할 거 아닌가?"
그러자 그 여인은 옥같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노옹, 화산 꼭대기는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노옹께서는 올라가시지 않는 게 좋아요."
"내 나이 많은 것이야 처녀들이 걱정할 바 아니네! 그래 우리가 산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처녀네 가문이 그 기서를 빼앗을 수 있을 성싶은가?"
"빼앗고 못 빼앗는 것은 내 손에 달린 거예요. 노옹께서 올라가고 못 가는 것도 내 손에 달린 거지요."
도시 말이 통하지 않는지라 연장자 노인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람들 중에 귀영자(鬼影子) 오신(吳信)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눈알을 부라리며 세 여인들을 험악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저따위 섬약한 계집들이 어찌 호랑이 같은 강호 무객들을 막아낸단 말인가……. 그는 코방귀만 뀌어대다가 곽모라는 얼뜨기가 여지없이 꽁무니를 빼고 나자 여인들이 더한층 기세를 올리는 것을 보고는 벨이 꼴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오신은 대뜸 노인을 밀치며 노한 기색으로 외쳤다.
"네 년들이 날 어떻게 막나 두고 보리라!"
그리고는 바람을 일으키며 화산 꼭대기를 향하여 곧추 달려갔다. 그의 경공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세 여인은 여유만만하게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지 마라. 그러다가 후회할라!"
귀영자 오신은 시답잖은 듯 맞받았다.
"내가 왜 후회하냐? 내가 산꼭대기에 올라간들 너희들이 어쩔 셈이냐?"
오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족히 백여 보는 뛰어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돌처럼 굳어졌다. 그는 간신히 머리를 돌려 세 처녀를 노려보았다.
"네……네……네 년들이……."
하지만 그는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쓰러져 그 즉시 뻗어 버리고 말았다. 세 여인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검으로 시체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귀영자는 어디 가고 썩은 고깃덩어리밖에 없는 게야?"
사람들은 모두 놀라 입이 떡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연장자 노인이 낯색이 확 달라지면서 간신히 한마디 토해 냈다.
"너네들은 하……향녀……."
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에 식은땀이 확 솟구쳤다. 일찍이 향녀들이 지독하기 이를 데 없고 특히 사내들을 미워해 어느 사내든 맞닥뜨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못살게 굴다가 죽여 버린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돌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거개가 향녀들을 처음 보는지라 아무리 강고한 호객들이라 하더라도 한결같이 사족을 못 펴고 와들와들 떨어댔다.
세 여인은 희색이 만면하여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자는 자기 재주만 믿고 날뛰다가 죽어 버렸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저 사람처럼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래요."
모두들 잠자코 말이 없었다. 화산 꼭대기에 이르기도 전부터 이처럼 시끄러운 일이 생기게 될 줄은 그 누구도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어, 안 돼. 사부님께선 나더러 기필코 그 《구음진경》을 가져 오라고 하셨는데 예서 말 수는 없지! 산에 올라가지 않고서야 그걸 어떻게 손에 넣는단 말이여? 이봐 사제, 가세나!"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한발 한발 떼놓았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잠시 주춤거리더니 장탄식을 하며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세 여인에게서 서너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처녀들, 인사드리오!"
세 여인은 표정을 굳힌 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나섰던 사람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회양파(淮陽派)사람 허도(許度)라고 하오. 우리 사부님께선 우리 삼형제더러 반드시 《구음진경》을 가져 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셨소. 한데 한 형제는 저 밑에서 바위에 깔려 죽어 버렸고……. 어쨌든 난 사부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소."
그 사람은 바로 회양파 대응조문(大鷹爪門)의 계승자였다. 워낙 회양파는 일찍이 다른 6대 문파들과 나란히 천하의 7대 문파를 이루었다. 그런데 회양파의 대력응조(大力鷹爪)는 꽤 날쌘 초수이기는 하나 충분한 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으로서, 갈수록 정치하고 변화무쌍해지기는 했지만 내력은 갈수록 못해져서 드디어는 그 대응조문의 공력은 강호에서 명성을 잃게 되었다.
형세가 이런지라 사람들은 그의 무예가 그리 대단치 않으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기백이 강고한 사나이였다. 그는 여인들에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기어이 산꼭대기로 올라가고야 말 심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진땀만 빼고 있었다.
세 여인은 삽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들은 검 끝으로 오신을 가리키며 내뱉었다.
"저자의 무예가 당신보다 어때요?"
허도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저 사람은 나보다 퍽 강하오."
"당신은 그처럼 뻔히 알면서도 왜 죽으려 드는 거요?"
"난 분명히 말했소.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 형제더러 《구음진경》을 꼭 가져 오라고 하시면서 우리 회양파의 공력을 빛내라고 하셨다고 말이오. 이건 우리에겐 아주 요긴한 일이오."
"목숨을 살리는 게 요긴한 일이지 목숨을 잃고서야 어찌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 있겠어요?"
"모르겠소. 어쨌든 사부님께서 그 《구음진경》빼앗아 오라고 하셨으니 그대로 하는 수밖에. 이제 산으로 올라가야겠으니 길을 비켜 주시오!"
"사부님께서 당신이 이번에 가기만 하면 목숨을 잃는다고 말해 주었더라도 당신은 그냥 갈 셈인가요?"
그래도 이 억센 허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곳으로 오르다가 죽더라도 난 사부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소! 사제는 죽고 싶지 않아도 죽어야 하는 거요. 산에 올라 그 경서를 빼앗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소."
"당신은 산에 올라가기만 하면 《구음진경》을 빼앗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오만,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당신은 내 말을 안 들으니 산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나의 검에 찔려 죽어야 해요."
그 여인은 더는 말을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잽싸게 검으로 사나이의 앞가슴을 찔렀다.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나 사내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 나왔다. 달빛 아래에선 핏빛도 시꺼멓게 보였다. 섬뜩했다. 여인은 내심 흠칫 놀라며 사내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이 돌아서서 가기만 하면 아직 목숨은 살릴 수 있어요."
하지만 허도는 우직하게 하던 말만 곱씹었다.
"사부님께선 우리 형제더러 꼭 《구음진경》을 가져 오라고 하시었소. 죽고 사는 건 요긴한 일이 아니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앞으로 발자국을 떼놓았다. 여인은 연거푸 몇 걸음이나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죽이지 않을 거라고 오산하지 말아요. 그렇게 나오면 난 사정을 두지 않겠어요!"
"난 화산에 올라가 《구음진경》을 빼앗아야만 하오!"
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되뇌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세 여인은 참으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나서 외쳤다.
"좋아요! 당신이 자초한 죽음이니 절대 우릴 원망하지 마세요!"
세 여인은 일제히 검을 치켜 들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긴 염불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사람은 바로 주백통에게 혼쭐이 났던 라마 중이었다. 그는 워낙 서역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조했으나 이역만리 중원 땅까지 왔다가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화산에 오르던 중이었다.
"처녀들, 살려 줄 만한 사람은 살려 줘야지, 처녀들한텐 이만한 공덕도 없단 말인가?"
세 여인들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대력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검마저 푸르르 떨리며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여인들은 두 눈 뻔히 뜬 채 태연한 기색으로 서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 시주님의 심사는 오로지 사문(師門)을 위해 《구음진경》을 얻으려는 것뿐이잖소? 사내인 나도 보고 자못 감동되는데 당신들 세 처녀들은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오?"
세 여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서로 마주보더니만 한껏 이죽거렸다.
"마음이 움직여요? 당신은 우리가 향녀라는 걸 모르세요? 향녀더러 감동을 받으라고 하다니, 그런 농담은 집어치우세요!"
세 여인은 하나같이 코웃음을 쳤다. 개중 한 여인이 목청을 높였다.
"모두들 들으세요. 우리 향녀들이 있는 한 오늘 밤 화산에서 잡인들은 소란을 못 피우니 당신들 남정네들은 엄두도 내지 말아요!"
그러자 라마 중은 앙천대소를 하고는 허도를 보고 물었다.
"시주님, 당신은 화산에 가길 원하고 계시는지요?"
그러자 허도는 장탄식을 했다.
"대사님께 말씀드리지요. 제가 화산에 온 건 남들의 뛰어난 무공을 보기만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당히 그 기서를 빼앗으려고 온 겁니다. 내 이 회양문의 무예로 그 기서를 빼앗는다는 건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나 사부님의 명이 지엄한지라 예서 말 수는 없습니다. 하나 이 여인들이 이렇게 막아 나서니 예서 죽는다 해도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다가 죽으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라마 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 경서를 얻자면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당신이 내 말만 들으면 그 책을 꼭 얻게 해 주겠소."
"대사의 말씀이 참말입니까?"
허도는 반색을 했다.
"출가한 몸으로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내 말을 믿으시오. 다만 당신은 누가 물으면 이 라마 중은 경서를 빼앗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을 도우려 할 따름이라고만 말하시오. 어떻소? 그러시겠소?"
라마 중은 주백통과 한 언약 때문에 아무래도 찜찜했다. 그래서 이 우직한 사내를 내세워 명분이나 세워 보자는 심산이었다. 허도는 허도대로 방도가 없던 판이라 가뭄에 단비 만난 듯 이 라마 중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속으로 적이 감격하면서 얼른 외쳤다.
"그럼요, 그럼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요. 대사님, 대사님이 날 데리고 가겠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세 향녀는 라마 중을 바라보다가 서로 이마를 맞대고 한바탕 귀엣말을 나누었다. 그러더니 그녀들 중 하나가 웃음 띤 얼굴로 라마 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스님, 당신은 화산에 올라가 《구음진경》을 빼앗으려고 그러시나요?"
"아니, 아니오. 화산에서 무예 시합이 있단 말을 듣고 그저 구경이나 하려고 그러오. 백년을 두고도 볼 수 없는 희한한 구경거리가 아니오?"
라마 중은 정색을 했다.
그러자 의외로 향녀들도 낯색이 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워낙 이 여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 막자고 하는 게 아니었구나. 저 여인들의 비위에 맞게 잘 구슬리면 산정으로 올라갈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향녀들의 비위를 맞춰 보려고 저마다 허리를 굽실거리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한 사람이 쭈뼛쭈뼛 나서며 사정을 했다.
"향녀들, 우리가 산 위에 올라갈 수 있게 해 주구려. 우린 하나같이 다 재간이라고 해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니 그 《구음진경》을 쟁탈할 궁리도 안 하우. 백년 이래에 보기 힘든 희한한 구경거리라 한번 보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거라오."
그러자 향녀들은 웬일로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이었다.
"좋아요. 저 라마 중을 봐서 당신들을 모두 산으로 올려 보내겠어요. 구경이나 잘하세요!"
세 여인은 더는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사뿐사뿐 산 위로 올라갔다. 그녀들은 기실 모름지기 중은 여체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바뀐 것이었다.
화산 북쪽 기슭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꼭대기로 오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아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화산 꼭대기에 거의 다 와서야 그들은 멈춰 섰다. 두 사람이 길다란 의자를 들어다가 내려놓았다. 한 사람이 그 의자에 앉아 호령을 했다.
"됐어. 자 줄들을 서! 줄을 좀 잘 서란 말이야!"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오늘 밤 일은 아주 중요하다. 평소 너네들이 다소 과실을 저질러도 내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으나 만일 오늘 조그만한 실수라도 있었다가는 모두 죽을 줄 알아라! 산 위로 올라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몽땅 도로 쫓아 보내라. 만일 안 듣고 시비를 거는 놈이 있거든 사정을 두지 말고 죽여 버려라! 알겠느냐?"
뚱뚱보 여인들은 저마다 꼿꼿이 서서 대환희 보살의 훈시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듣고 있었다. 보살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바위 뒤에 숨어서 길목을 지켰다.
한 순간, 누구인가 천천히 올라오는 기척이 들려 왔다. 그 사람은 내내 구시렁구시렁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합을 하려면 낮에 할 거지, 이 야밤에 할 게 뭐람? 맑은 날 낮에 하면 얼마나 좋아? 그리고 또 평지에서 하면 누가 뭐라나? 이따위 산꼭대기에서 할 건 또 뭐람? 아유, 성가시다, 성가셔!"
뚱뚱보 여인은 한층 경각심을 가지며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노완동 주백통이 아닌가. 그는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면서 곧추 다가오고 있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그때 낡은 절에서 그의 무예를 익히 보지 않았던가. 대환희 보살은 누구를 막론하고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무슨 재간으로 주백통을 막아낸단 말인가. 여인들은 전전긍긍하다가 떼밀리듯이 바위 뒤에서 튀어나갔다.
주백통은 그들 두 여인을 보자 눈동자가 휘둥그래지더니 실없이 허허 웃었다.
"실로 괴이한 일이로군. 화산엔 원래 뚱뚱보가 많은 건가? 그래 당신들은 모두 화산 사람들인가?"
"주백통,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ㅇ! 우린 대환희 보살님의 수하들이다. 네 놈은 오늘 밤 이 산 위에 오르려고는 꿈도 꾸지 마라!"
주백통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당신들이 날 산 위에 못 올라가게 하겠다구?"
두 여인은 팔을 떡하니 허리에 얹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주백통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 돼, 난 꼭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해. 그래 당신들은 내가 중양 진인의 사제라는 것도 모르고 있나? 난 애시당초 남한테 무공 배우는 걸 아주 좋아해. 듣자니 중양 진인의 무예가 천하에서 으뜸이라고 하는지라 종남산으로 찾아가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려 했는데 그분이 날 제자로는 받지 않고 사제로 삼을 줄 뉘 알았겠나? 뿐만 아니야. 앞으로 전진교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날더러 그걸 타개하라고 하셨다구. 그분 재간이 그처럼 대단한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까 하
는 생각이 들더군. 천하에 나의 사형을 이길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당신들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거렁뱅이 홍칠공과 싸워야 해. 그 거지는 무공이 대단해서 난 그 사람을 이기지 못해. 그 밖에도 황 약사라는 동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재간이 대단해. 그 사람은 늘 상냥한 여인 한 사람만 데리고 다니는데 무예는 대단하거든. 또 대리 황제도 이 세상에서 희귀한 일양지란 무공을 연마해 냈단 말야. 난 화산에 가서 그 멋진 시합을 구경해야겠어. 그러
니 어서 길을 비키라구!"
"글쎄, 네 녀석은 못 가!"
뚱뚱보 여인은 시답잖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백통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왜 내가 가선 안 된다는 거야?"
"우리 보살님이 엄명을 내렸거든. 어쨌든 네 녀석은 절대 못 올라가!"
"당신들의 그 무슨 보살이 당신한테나 명령을 내리는 게지 나한테는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거야. 난 전진교 사람인데 왜 개떡 같은 대환희 보살이 날 가로막는 게냐?"
주백통은 대뜸 주먹을 들이댔다. 그러자 두 여인은 급히 피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삽시에 뚱뚱보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좋아, 너희 모두 덤벼 봐라. 안 그래도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주백통은 신바람이 나서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어찌나 빠른지 뚱뚱보 여인들은 당황하여 가까이 다가들지도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대환희 보살이 운남에서 대문파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니만 무예는 아주 형편이 없군 그래. 그래 이까짓 재간으로 나의 사형과 겨루어 보겠다구?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나와 싸워도 안 되겠는데 우리 사형과는 몇 합도 못해 보고 패하고 말아."
주백통은 연신 주먹을 날리면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재간이 있으면 어서 빨리 덤벼들어.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구! 질질 끌다가는 화산 무예 시합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단 말이야. 행차 뜬 뒤에 나팔 분다고 다 끝난 다음에 당도하면 누구 검술이 훌륭한지 보지도 못하게 된단 말이야. 빨리 덤벼!"
그는 발싸심이 나서 주먹질도 더욱 빨리 해댔고 입도 더욱 바삐 놀려댔다.
"대환희 보살, 어서 나오너라. 네 년의 제자들은 네 년처럼 뚱뚱하기는 하지만 모두 바보들이라 도저히 내 상대가 안 되는구나!"
대환희 보살은 바위 뒤에 몸을 가린 채 나갈 생각도 안 했다. 혹 이 길목으로 대단한 고수가 지나갈지도 모르므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백통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도저히 주백통의 적수도 못 됐던 것이다.
주백통은 연신 주먹을 휘둘러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빨리, 빨리, 난 가야겠어. 난 가야겠단 말이야!"
주백통은 대환희 보살의 수하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면서 십여장이나 나아갔다.
"저 놈은 왕중양의 사제다! 절대로 놓아 보내서는 안 된다!"
뚱뚱보 여인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어 손을 써도 주백통을 놓칠 듯한 형세이자 대환희 보살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육중한 몸을 달빛 아래 드러냈다. 주백통은 우뚝 멈춰 서서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거기 숨어 있었구먼? 그러니까 당신은 내 무예에 탄복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디 덤벼 봐!"
"얘들아, 저 놈을 붙잡아. 독약을 쓰란 말이다!"
주백통은 코웃음을 쳤다.
"독약을 쓰면 두려워할 줄 아느냐? 어디 맘대로 써 봐!"
큰소리는 쳤지만 그는 멀찌감치 서 있을 뿐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뚱뚱보 여인들이 이미 앞다투어 독사를 풀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주백통은 이 세상에서 독사를 제일 두려워하는지라 그만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안 놀겠다. 안 놀겠어. 네 년들하고는 안 놀아! 어서 화산 무예 시합이나 보러 가야겠다!"
주백통은 소리소리 지르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여인들 사이를 냅다 뚫고 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떨떠름하니 입맛을 다시며 그가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벌써 중천에 걸려 그 교교한 빛으로 티 하나 없는 밤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월색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왕중양은 화산 산정 천대평석(天臺平石) 위에 앉아 고요히 밤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그는 임조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예 그 음습한 활사인묘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통탄을 금치 못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핏 눈물이 가랑가랑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구음진경》, 그녀도 세상을 떠나고 난 마당에 이 경서가 그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당대 천하 무림의 영웅으로 그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 구구 중양절을 맞아 화산에 올라와 침잠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가벼이 인기척이 들려 왔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무림 4대 고수들이 이미 천대평석 위에 올라 자못 숙연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20장 화산논검, 그후
동이 이미 훤히 텄다. 그러나 화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화산으로 올라간 사람들도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됐다. 듣건대는 황약사와 서독 구양봉이 올라갔다고 한다. 그외에도 대리 황제 단지흥, 개방의 신임 방주 홍칠공, 노완동 주백통, 향녀 등아, 운남의 대환희 보살 등이 입에 오르내렸다.
강호의 호객들은 대부분 화산 기슭까지 와서 발목이 잡혀 어떤 사람은 남쪽 기슭, 어떤 사람은 북쪽 기슭에서 도중에 발을 돌렸다. 모두 향녀와 대환희 보살의 수하 여인들에게 가로막혀 대전의 성황을 목전에서 놓쳤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산기슭에서 밤을 보내고 누가 《구음진경》차지했는지 뒷소식이 궁금해 안달을 하며 눈이 빠지게 누구든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얼빠진 표정으로 비칠비칠 내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라마 중이었다. 그는 세 향녀와 뭇 강호 호객들과 산을 올랐는데 경공이 출중해 누구보다 먼저 정상에 올랐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공도 시원치 않은데다 도중에 실랑이를 벌인 덕에 가는 길에 그만 아침 해를 맞이하고 말았다.
라마 중이 눈에 띄자 사람들은 얼른 내달아 그를 둘러쌌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멀거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는 반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누구인가 그를 막아서며 성마르게 물었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 누가 이겼습니까? 말씀 좀 해 보시우!"
그러자 그는 불현듯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마냥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자못 침울한 기색이었다. 그는 지난밤의 그 광경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그 광경이 언뜻 스치기만 해도 소름이 확 돋는 것이었다.
요행히 화산에 오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감히 대전에 끼여들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천대평석 위엔 올라서지도 못한 채 겨우 그 아래 조그만 바위 위에 발이나 붙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그곳에 서 있으려면 자기를 향해 똑바로 뻗어 오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밀려오는 대력의 고통을 견뎌 내야만 했다.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에는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숨을 헉헉거려야 했다. 그리고…….
라마 중은 일순 소스라치게 놀라며 단호히 말했다.
"나 이 지마탄(智摩呑)은 중원 무림 인사들 앞에서 맹세하오. 내 평생 다시는 중원 땅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겠소."
사람들은 이 라마 중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예를 겨루다 패해 급히 산을 내려오는 것일까.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그를 흔들어 가며 채근을 해댔다.
"스님, 우린 산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니 그 흥미진진한 시합을 볼 수나 있었겠소? 당신은 그래 알려만 주는데 뭐가 그리 어려워 남의 애간장을 끓이오, 끓이길! 어서 말을 해 봐요, 말을!"
그러나 라마는 창백하게 질린 채 다만 머리만 절레절레 저으며 산 아래로 휑하니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리를 못 뜨고 발을 동동 굴렀다. 또다시 몇 사람이 내려왔다. 그 뒤로 또 몇 사람 내려왔다. 그러나 하나같이 파리하게 질린 채 라마 중과 똑같이 말을 얼버무리다가 쏜살같이 내뺐다. 누구 하나 말을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위 위에 퍼더버리고 앉아 갖고 온 건량들을 먹고 개울 물로 목을 축이며 점심때까지 기다렸다.
연장자 노인이 씁쓸하니 말했다.
"향녀, 당신들이 우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한 건 여러모로 참 유감스럽구먼. 우리도 싸움을 구경하지 못하고 당신들도 못했으니 세상에 이런 유감이 어디 있겠나? 직접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향녀들도 대전을 못 본 건 유감 천만이었지만 자못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등아가 화산 꼭대기에서 이미 사내들을 정복했을 것이며 기필코 《구음진경》을 쟁취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 단지흥이 왕중양을 이기기만 해도 향녀들은 《구음진경》을 차지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비록 단지흥 자신이 친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향녀들을 그토록 동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경서를 쟁취하기만 하면 자기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것이다.
이윽고 산꼭대기에서 두 사람이 더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등아 향녀와 기막히게 뚱뚱한 대환희 보살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알고는 있으나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여인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오자 향녀들은 얼른 뛰어가 등아를 둘러싸며 물었다.
"누가 이겼나요? 등아 향녀님이? 아니면 단황 나으리가?"
"아니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혹시……."
또 한 향녀가 성급히 말을 하다가 말끝을 사렸다.
두 사람의 꼴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대환희 보살은 신발도 없이 맨발이었으며 부대 자루같이 품이 넓은 두루마기도 실이 다 튿어져 꼭 누구에게 옷자락을 쥐어뜯긴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향녀라고 보살보다 나을 게 없었다. 머리에 꽂았던 금비녀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방금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 그 지경이니 서로 부축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 뻔했다.
연장자가 시비조로 대뜸 물었다.
"향녀, 보살, 당신들 두 사람도 중양 진인과 싸웠소?"
등아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대환희 보살은 냉소만 칠 뿐 입도 벙긋 안 했다.
"모두들 그만두고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 다 끝난 일이다."
등아가 불쑥 외쳤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을 손에 넣은 것 같지 않아 향녀들은 기갈을 하며 달라붙었다.
"다 끝나다니요? 그럼 다신 그 《구음진경》을 상관치 않는단 말씀인가요?"
그러자 향녀와 대환희 보살은 서로를 마주보며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 다 이내 낯색을 굳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얼핏 공포가 서려 있었다.
향녀들은 등아가 이처럼 무서운 기색을 띠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천만 뜻밖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등아는 사뭇 피곤한 기색으로 힘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가자!"
그 말이 떨어지자 향녀들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따라 가 버렸다. 순식간에 향녀들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비틀비틀 북쪽 기슭으로 길을 잡았다.
뚱뚱보 여인들은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보살이 눈에 들어오자 냅다 달려들었다.
"어찌 되었나요? 보살님, 구양봉이 이겼지요? 그분이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지요?"
"그게 어디 그렇게 쉽다더냐?"
대환희 보살은 장탄식을 했다. 그리고는 맥빠진 소리로 힘없이 외쳤다.
"가자!"
보살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뚱뚱보 여인들도 감히 말을 못 걸고 장막을 걷으며 행장을 꾸렸다. 대환희 보살의 무리들도 모두 그렇게 산 아래로 사라졌다.
저녁이 되도록까지 무슨 홍칠공이니 단지흥이니 황약사니 하는 무림 고수들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 갈 때쯤 해서야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뭔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기슭으로 내려왔다. 대리 황제 단지흥과 개방의 신임 방주 홍칠공이 있었다. 기색으로 보면 아직도 정신은 말짱한 듯하나 발걸음은 좀 지쳐 보였다.
"홍칠공, 난 당신이 이처럼 호걸인 줄은 미처 몰랐소. 진작에 알지 못한 게 한스럽구먼. 하지만 이젠 친구로 지내고 싶구려."
단지흥은 자못 미더운 눈길로 홍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홍칠도 반색을 했다.
"폐하께서 계시는 곳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소이다. 더욱이 우리 소씨 사부님을 구해 준 은공도 못 갚았구요. 언제 한 번 꼭 대리를 찾아갈 터인즉, 그때 가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 거하게 차려 주셔야 하오!"
홍칠이 짐짓 농을 치자 단지흥은 껄껄 웃었다.
"역시 듣던 대로 당신은 자시는 걸 좋아하는가 보구려. 여부가 있겠소. 그런 걱정일랑 말고 필히 한 번 찾아오시오! 내 대리의 천룡사도 구경시켜 드릴 테니!"
"허허, 좋아요, 좋아! 꼭 폐하를 뵈러 가겠소이다!"
두 사람은 일전을 치르고 나서 오히려 서로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으며 서로의 무예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산 아래까지 거의 다 내려와서야 서로 작별을 했다.
"폐하, 우리 십 년 후에 다시 겨뤄 봅시다. 십 년 후에 폐하와 내가 다시 왕중양과 싸워 봅시다. 그때까지 일심으로 일양지 내력을 쌓아 이 거지를 탄복해 마지않게 해 주십시오!"
'허허 과찬의 말씀이오. 오히려 제가 홍 형께 드릴 말씀이외다. 부디 십 년 후엔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다.
단지흥은 홍칠과 헤어지자 좀전의 쾌활한 기색은 간데없고 적이 착잡해졌다. 끝끝내 이긴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왕중양이 이미 《구음진경》에 기재된 무공을 익혔기에 그의 무예가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고들 했다. 왕중양이 선뜻 황약사의 청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천하 군웅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흥은 달랐다. 그는 왕중양이 딴 일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챘다. 왕중양은 일심으로 그 누군가를 애절히 그리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급기야 구양봉, 단지흥 그리고 홍칠공과 황약사를 전승했으나 앙앙불락했으며 몹시 침울해했다. 단지흥은 다시금 지난밤의 대전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때 문득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사이엔가 세 여인이 코앞까지 바투 다가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향녀들이었다.
"단황 나으리께선 썩 기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왕중양을 이기지 못했나요?"
향녀들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다.
"등아는 어디에 있나? 좀 만나게 해 주게."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저희들은 모시러 왔사옵니다."
세 향녀는 단지흥을 산속의 어느 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선비도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향녀들은 단지흥을 방으로 안내했다.
등아는 그 방에 홀로 앉아 탄미금을 타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이 온 것을 알고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단지흥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그 역시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은은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취해 깊은 명상으로 빠져 들었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멎자 단지흥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오! 등아가 만일 사내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실로 향녀일 것을……."
"폐하, 이제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황제 폐하께서도 풍류스럽지 않다면 어찌 황제의 풍모가 풍기겠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등아는 그윽하게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단지흥은 실로 애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등아는 실로 총명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구변이 대한한 기재임에 틀림없는데 그토록 자기 자신을 학대하니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었다.
"황제께서는 패하셨지요?"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저는 끝까지 있지도 못하고 중도에 산을 내려왔어요……. 왕중양은 실로 대단한 무학대가예요. 하나 폐하는 조금도 불평스런 기색이 없으시군요. 폐하의 수양은 지극히 높사옵니다."
등아는 차제에 이르러 단지흥을 자못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그의 위인됨에 탄복하여 《구음진경》을 꼭 자기 손에 쥐여 주겠다는 언약을 하지 않았어도 선선히 그와 선비를 놓아준 것이었다. 한편 그가 자기 향녀들을 몹시 애틋하게 여기고 있는 고로 만일 그가 《구음진경》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들에게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구음진경》에 대한 집념은 이미 접고 있었다.
단지흥은 가벼이 탄식했다.
"과찬의 말이오! 기실 우리 네 사람이 모두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소!"
"왕중양은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이미 익혔지요? 그걸 써 먹지는 않던가요?"
등아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물었다. 단지흥은 선뜻 대답을 않고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닐 거요. 그는 분명 아직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는 않아! 그 사람은 우리들과 다시 언약을 했소. 이제 십 년이 지난 후에 또다시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하겠다고 말이오. 그때 누구든 최후의 승자에게 그 기서를 기어이 내놓겠다고 했소. 중양 진인은 작은 인물이 아니오."
등아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 무림을 잘 몰라요. 당신은 황제라서 무슨 일에든지 신용을 지켜야 하지만 왕중양은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일 왕중양이 정말로 당신 생각대로라면 그는 아주 바보일걸요.'
등아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내흔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들은 그 《구음진경》을 보기는 하셨나요? 그 책이 참말로 있긴 있던가요?"
"보기만 했겠나. 중양 진인이 한 대목 읽기까지 했는걸……."
순간 왕중양이 그 대목을 읽던 정경이 떠올라 단지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 사람 모두 경악하여 몸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에 전율이 돋는 것이었다.
"그 책은 그대나 내가 능히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니오. 천하의 보물이란 종래로 덕 있는 자가 가지게 되어 있소. 그래야만 화가 미치지 않는 거요. 내가 보건대 그 경서는 오로지 중양 진인만이 가질 수 있소. 누구든 그걸 갖게 되면 조만간 목숨을 잃게 돼!"
단지흥은 길게 탄식을 했다.
"폐하는 결국 경서를 손에 넣지 못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나의 일양지는 중양 진인의 선천신공을 이기지 못했소. 하나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오. 만일 내가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구음진경》을 가지지 않았을 게요."
등아는 그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왜요? 무엇 때문에 그걸 가지려 하지 않지요?"
"난 황제요. 신경 써야 할 국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오. 그러니 그 《구음진경》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지가 없는 거요. 만일 내가 그걸 얻게 된다면 천하 무림 사람들이 모두 이번엔 나한테 와서 시끄럽게 굴 테니 내 어찌 그걸 감당하겠소?"
"황제께서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나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하나 나는 《구음진경》은 더 이상 갖지 않기로 했어요. 《구음진경》이 아니라도 우리 향녀들은 너끈히 사내들에게 대항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내들에게 복수를 하고 말 거예요."
단지흥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해도 이 여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으니……. 이 여인은 왜 한갓 헛된 복수심으로 이처럼 불행을 자초한단 말인가. 단지흥은 그저 애처로운 눈길로 등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등아는 단지흥의 심사를 눈치채고는 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떨궜다.
"폐하, 이젠 그만 돌아가세요. 비록 폐하가 제게 《구음진경》을 쥐여 주지 못했다 해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하나 제가 살려 보낸 사내는 폐하가 처음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세요. 또 한 사람, 그때 그 사내……. 어쨌든 그것만 아시고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단지흥은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인지 익히 알고는 더는 무슨 얘기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리라. 그것만으로도 다소 진심이 통했다고 할 수는 있었다. 다만 도중에 그녀가 얼버무린 그 말, 자기말고 또 한 사람 살려 보냈다는 그 말에 다소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는 묻지 않았다. 향녀들의 일이 자기 손을 떠난 이상 더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애처롭게 등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등아는 문 밖까지 단지흥을 따라 나왔다.
"황제 폐하, 인연이 있다면 훗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단지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가슴에 묻어 둔 채 그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세 시위들을 찾아서 어서 빨리 대리로 돌아갈 일념으로 선비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한시진 가량 걸어갔을 때 그는 떠들썩하니 마주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가운데 몇몇 사내들이 서로 팔을 맞잡아 의자 모양을 만들어서는 한 뚱뚱보 여인을 태우고 뻘뻘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뚱뚱보 여인은 단지흥을 보더니 대뜸 쏘아붙였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산에서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구음진경》의 비밀을 어서 내게 알려 줘요."
여인은 음충맞게 능청을 떨었다.
"대환희 보살, 당신도 화산에 갔었으니 까 《구음진경》의 그 무슨 비밀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걸고 넘어지는 게냐?"
단지흥은 단호하게 외쳤다. 선비도 보살을 노려보며 여차직하면 덤벼들려고 자세를 잡았다.
"단황 나으리는 인품이 좋으시다더니 듣기와는 다르군. 왜 날 놀리는 게요? 그래요! 맞아요! 난 그 천대평석 위에서 내려온 뒤로는 다시는 올라갈 생각이 없더군요. 만일 다시 올라갔더라면 아마 지금쯤 대환희 보살은 없어지고 썩은 고깃덩어리만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 천대평석 아래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겠나요? 그래, 왕중양이 이겼지요?"
"알고 있구먼. 중양 진인이 이겼소."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그것 보라니까, 역시 애는 제 집에서 길러야 한다더니, 모두들 법석을 떨어댔지만 누구도 《구음진경》을 뺏지 못하고 결국 원래 임자가 가지게 됐군요. 당신들은 괜히 소란만 피우고!"
단지흥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단황 나으리, 그래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해 얼마나 불쾌하시겠소?"
그러자 단지흥은 시답잖다는 듯이 불쑥 내뱉었다.
"내가 그 《구음진경》을 가져선 뭣하겠나?"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목청을 높였다.
"전 그걸 갖고 싶어요."
"《구음진경》은 한 부밖에 없는데 누구나 다 그걸 갖고 싶어하는구먼. 그러니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남들이 그걸 갖고 싶어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에요. 난 다만 내게 그것이 몹시 필요하다는 것만 염두에 둘 뿐! 난 원래 구양 장주님이 그 《구음진경》을 얻게 되었으면 했어요. 그분이 그 경서를 얻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점이 있으니까요. 난 또 당신이 그 경서를 얻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당신이 《구음진경》을 얻게 돼도 나한테는 좋은 점이 있으니까."
단지흥은 그 말에 뭔가 상서롭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걸 직감하고 다그쳤다.
"뭐 하는 수작이냐? 어서 바른 대로 못 댈까?"
"성미도 급하시긴. 보셔요. 제가 당신한테 무얼 가져 왔나!"
대환희 보살은 획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뚱뚱보 여인들이 한 사람을 앞으로 쓱 떠밀었다. 그는 바로 네 시위 중의 한 사람, 농부였다. 농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단지흥을 쳐다 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
단지흥은 분기탱천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선비도 연신 입을 씰룩거렸다.
"알 만해. 네 년 악명이 운남을 넘어 중원까지 자자하더니 내 오늘에야 실체를 보는군. 어서 이 사람을 놓아줘!"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당신은 가서 냉큼 《구음진경》을 빼앗아 와요. 구양 장주님과 함께 가서 그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란 말이에요. 왕중양이 아무리 무공이 대단하다 한들 둘이 합심하는데야 당해 내겠어요?"
"우린 넷이서도 왕중양을 제압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둘이서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단지흥은 냉소를 쳤다.
"그런 건 난 관계 안 해요. 무엇을 어찌하든 당신들 두 사람이 가서 왕중양과 싸워야만 전 이 사람을 놓아주겠어요."
단지흥은 이내 대꾸를 않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보아하니 저 뚱뚱보 여인은 사리도 뭣도 모르는구나. 그저 그 기경을 손에 넣을 일념으로 억지 소리를 해대니. 할 수 없지. 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의 손이 심상치 않게 꼬물거리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소리쳤다.
"단황 나으리, 꼼짝 말아요. 당신이 움직이기만 하면 이 농부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어요!"
단지흥은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농부가 저쪽 손에 있으니 허투루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비를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주먹만 부르쥐고 있을 뿐 대책이 없는 눈치였다.
그때 별안간 한 사람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미꾸라지처럼 대환희 보살 무리에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농부의 손을 거머쥐고는 끌어당겼다.
"가잔 말이야. 빨리 가지 않고 뭘 해?"
"저 놈을 붙잡앗!"
대환희 보살은 급급히 소리를 질러댔다.
"날 붙잡겠다구?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그래 어디 붙잡아 봐, 붙잡아 보란 말이야!"
그 사람은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농부를 끌고 뚱뚱보 여인들 속을 벌이 제 집 드나들 듯 제 마음대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보살의 수하들은 누구 하나 그 사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대단하오, 주 영웅! 그대가 그 사람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 버리시오!"
단지흥은 호기롭게 외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비도 덩달아 쾌재를 불렀다.
"훌륭하오, 훌륭해!"
그러자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농부를 데리고는 훌쩍 내달았다. 그 뒤로는 흙먼지만 뽀얗게 일었다.
단지흥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대환희 보살에게 말했다.
"당신은 《구음진경》을 얻겠다고 야단이지만 왕중양의 사제 하나 못 이기는 주제에 왕중양을 찾아가선 뭣하나? 그랬다간 흠씬 얻어맞기 십상이지."
그리고는 간다는 말도 없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감히 뒤쫓아갈 엄두도 못 냈다.
그때 등뒤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살은 도끼눈을 뜨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양봉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보살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왕중양한테 졌다면서요?"
"그랬지.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네. 난 다시 그자와 겨루겠어. 내가 그자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 주겠단 말이야."
구양봉은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한풀 기가 꺾여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에 한편 반가우면서도 웬지 밸이 꼴려서 쏘아 붙였다.
"왕중양은 지금 종남산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 사람의 전진교엔 인재가 즐비하고 제자들도 재간이 대단하대요. 그러니 당신 혼자 찾아가 봤자 헛수고만 할 거 아녜요?"
"헛수고를 하면 어떤가? 그래도 찾아가야지. 그래 그 작자 말마따나 지금부터 십 년이나 기다리란 말인가. 난 못해! 도저히 그럴 수 없어! 난 조만간 꼭 그 놈을 찾아갈 거야."
십 년은 아주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예를 닦는 사람에겐 십 년이란 순간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십 년 후엔 왕중양을 이길 수 있나요?"
그러자 구양봉은 이번엔 낯색이 대번에 우울해지더니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오늘 그자를 이기지 못한 건 그자한테 《구음진경》이 있기 때문이야. 십 년 후에도 그자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하나 난 결단코 포기 못해!"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음흉한 눈빛을 빛내며 딱 잘라 말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십 년 후에도 그 《구음진경》을 빼앗는 건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해요. 십 년 후라면 왕중양은 그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다 익힐 텐데 그럼 당신은 도저히 그 사람의 적수가 못 돼요."
구양봉은 그 말에 슬슬 화가 났다. 왕중양한테 졌다고 자기를 업신여기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봐 뚱뚱보! 내가 손안에 《구음진경》을 넣지 못했다고 해서 날 깔보는 모양인데 계속 그렇게 나갔다가는 내 독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줄 알아랏!"
구양봉은 대뜸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구양 장주님, 잠시 노여움을 푸시고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장주님은 정말 총명한 사람이에요. 만일 장주님이 《구음진경》을 얻기만 하면 천하 무림에서 제일인자가 될 건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러나 사실을 말해서 지금도 그렇고, 설사 십 년 동안 무예를 연마한다고 해도 구양 장주님이 왕중양의 손에서 《구음진경》을 앗아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 말을 한번 들어 보세요. 들어 보신 후에 화를 내도 내시란 말이에요."
대환희 보살은 장광설을 늘어놓더니 힐끔 구양봉의 눈치를 살폈다. 구양봉은 다소 누그러져서 시뜻한 기색으로 보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보기엔 장주님은 먼저 나와 함께 단지흥을 뒤쫓아가잔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그의 일양지를 배우고 그 다음에 다시 홍칠공을 찾아가자구요. 장주님이 이 두 사람을 이긴 다음 다시 왕중양과 싸운다면 그땐 필시 《구음진경》을 차지하게 될 거예요."
그러자 구양봉은 그제야 얼굴이 환히 펴지는 것이었다. 보살의 말은 참말로 일리가 있었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즈음 왕중양은 황약사와 함께 화산을 내려왔다. 황약사는 오는 동안 내내 아형의 손을 꼭 그러쥐고 한 번도 놓는 법이 없었다.
왕중양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몹시도 울적하였다.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했건만 서로 애틋한 정 한 번 못 나눠 보고 그녀는 그만 세상을 떠나 버리고……. 그녀 생전에 자기와 그녀는 저렇듯 다정하게 지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는 마음과 달리 그녀를 한 번도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으며, 둘 사이가 내내 그렇듯 서먹서먹했던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고 자책이 되어 가슴 한구석이 아프도록 저며 왔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토록 애원하는데도 그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의 얼굴엔 사뭇 어두운 그늘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황약사 앞이라 조금도 내색을 않고 부러 쾌활한 기색으로 짐짓 아형을 놀려댔다.
"아형, 무슨 일을 하든지 황 형의 손을 꼭 쥐고 있구먼요. 손을 놓았다가 깜빡 누구한테 잡혀 갈까 봐 그러시오?"
그러자 아형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활짝 웃었다.
"잡혀 가 봤자 그 사람만 부담이 느는 거죠. 죽 한 그릇이라도 더 축나게 되지 않겠어요?"
아형은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다. 왕중양은 내심 더한층 부러움을 느꼈다.
"아형, 너무 머리를 쓰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소. 당신과 황약사 두 사람이 천하에서 제일 총명하다고 소문이 나면 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니."
황약사는 왕중양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조금도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는지라 빙그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황약사는 갈림길이 나오자 왕중양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왕 형, 십 년 후에 다시 만납시다."
왕중양도 답례를 하였다. 황약사는 자존심이 대단하여 누구도 대단치 않게 보는 성미였다. 하지만 이번에 화산에 와서 왕중양의 기공(奇功)을 보고는 그만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의 무공을 보고서야 아직 《구음진경》은 그의 손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정중히 읍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황약사는 얼마쯤 걸어 가다가 아형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형, 난 이전에 나 자신을 이인(異人)으로 자부하면서 나보다 강한 자는 천하에 드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소. 그래서 난 내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여겼었지. 하지만 왕중양을 보고 나니 이 세상엔 나보다 더 기이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아형은 딱 손뼉을 쳤다.
"황약사, 전 당신이 누구를 두고 탄복하는 소리를 종래로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오늘에야 비로소 당신을 탄복시킬 만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군요. 참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황약사는 감개무량한 듯 아형의 손을 꼭 틀어쥐었다.
"아형, 당신은 날 원망 말아요. 내가 언제나 진짜로 탄복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방긋 웃었다.
꽤 멀리 걸어왔을 때 별안간 등뒤에서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사람이 멀리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황약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의외로 그는 왕중양이었다.
그는 황약사와 아형 앞으로 곧장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황 형, 난 당신한테 가르침을 받을 일이 하나 있소!"
황약사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거렸다.
"중양 진인,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나 좌우간 말씀해 보오."
"난 이전에 어떤 사람한테 진 적이 있소. 그런데 지금까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있소. 그 의문을 좀 풀어 달란 말이오. 당신이 날 도와줄 테지? 난 실로 그때 어떻게 되어 지게 됐는지도 몰랐었소."
왕중양은 참말로 번뇌를 느끼고 있는 기색이었다.
"당신의 공력으로 알아내지 못한 걸 내가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참 이상하더란 말이오. 황 형은 견식이 넓으니까 내 의문을 꼭 풀어 줄 수 있으리라 믿소. 아직도 그 자리가 남아 있으니, 자 어서 갑시다."
그러더니 왕중양은 다짜고짜 잡아 끄는 것이었다. 그는 임조영이 이승을 하직한 뒤에는 더 더욱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약사의 도움을 받아 그때 그 일을 알아내고자 이렇듯 되돌아온 터였다.
황약사와 아형은 할 수 없이 왕중양을 따라 종남산으로 갔다. 왕중양은 산비탈에 이르러 돌비석 앞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그 돌비석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조영과 왕중양이 다툴 때 임조영이 새겨 놓은 것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그 획이 아주 멋지고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건 사람 손가락으로 새긴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이 왕중양은 천하에서 백여 년 내에는 볼 수 없던 뛰어난 무학기재인데 그렇담 왕중양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 글씨는 임조영이 새긴 것이오. 글쎄 그 여인이 이 비석에다 손가락으로 이렇게 글자를 새겨 넣으니 내가 지지 않을 수 있었겠소?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니까."
왕중양은 그때 일을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때 임조영한테 지는 바람에 그 활사인묘를 내주어 임조영이 그 석굴에 들게 했고 그 뒤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지척에 두고 있었건만 천애지각이 가로놓인 듯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바로 그 석굴이 그녀의 무덤이 돼 버린 것이었다.
황약사는 놀라서 선뜻 대답을 못했다. 아형도 그것이 적이 괴이하게 여겨졌다. 진흙에 글자를 쓰듯이 사람 손으로 이처럼 굳은 청석에다 글자를 새기다니, 이 정도 공력이면 가히 천신(天神)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아형은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보고 또 보았다. 황약사도 손가락으로 획을 따라 더듬어 보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해도 확실히 손가락으로 새긴 것이었다. 황약사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연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한 순간 아형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임조영 그녀한테 무슨 방법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천신도 아닌데 어찌 이렇듯 손가락으로 돌에다 글을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황약사는 갑자기 찌푸려졌던 이맛살이 펴지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중양 진인, 당신은 참말 이 일의 영문을 알고 싶소?"
왕중양은 성마르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내겐 아주 중요한 일이니 난 꼭 알고 싶소."
"좋소. 다음번에 내가 다시 중원에 오면 그때 가서 이런 방법으로 똑같이 비석에 글을 새겨 보겠소!"
왕중양은 황약사의 의중을 찬찬히 음미해 보았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임조영이 참말로 나보다 공력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무슨 계책을 쓴 것이로구나. 황약사는 공력이 필경 나보다 못한데도 손으로 글씨를 새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보아하니 여기엔 무슨 계책이 있는 거다.'
"중양 진인, 그때를 기약하고 이제 난 여기서 당신과 작별해야겠소."
황약사는 왕중양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아형을 데리고 표연히 걸어갔다.
왕중양은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임조영에게는 무슨 말이든 물어 볼 수도 없고, 그 스스로 그때껏 하고 싶던 말들도 모두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만 한다. 새삼스레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는 도무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이번의 이 화산 싸움을 통해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왕중양은
통탄에 젖어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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