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7

3학년2반 | 2022.02.23 07:35:36 댓글: 0 조회: 425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555



제31장 비바람에 꺾인 꽃가지
광명송과 등아는 호젓한 산기슭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해 조촐하게 살림을 차렸다. 이 부부는 참으로 의가 좋았다. 그토록 표독스럽던 향녀 등아도,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던 대협 곽명송도 하루아침에 순박한 시골 남정네와 여인네로 변한 듯싶었다. 둘의 산림은 날마다 깨알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여염집의 오붓한 살림에도 비바람이 찾아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이날도 두 내외간은 마주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더니 바로 밖에서 멈춰 서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집이지요, 이 집!……."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어대더니 다시 요란스레 말발굽 소리를 남겨 놓고 떠나가 버렸다.
곽명송과 등아는 들창으로 다가가 언뜻 내다보았다. 풀썩풀썩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한 무리 사람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둘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곽명송은 등아의 손을 꼭 잡아쥐며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 둘의 아늑한 생활도 끝장이 나는가 봐."
등아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저 때문에 서방님이 욕을 보네요. 정말 죄송스러워요!"
"또 그 말이군. 실은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는 게요. 앞으론 절대 그런 말은 꺼내지 마오!"
"아니에요! 저 같은 향녀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에요."
등아는 일순 설움이 북받쳐서 방을 나가 부엌으로 뛰쳐 들어갔다. 총명하고 아량 깊은 등아는 진작부터 자기 때문에 곽명송이 이처럼 쫓겨 다니고 숨어 다니면서 갖은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등아는 한참 동안이나 부엌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적셨다. 자기의 심경을 어떻게 무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곽명송은 부엌문을 부여잡고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 순간 등아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얼른 방으로 몸을 피했다. 등아는 선뜻 밖으로 나오더니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을 냉큼 잡았다. 그리고는 분주하게 손을 놀려 이내 닭을 푹 고아서는 한상 차려 곽명송 앞으로 가져 왔다.
"씨암탉을 두고 갈 수도, 그렇다고 안고 갈 수도 없어서 잡았어요. 저는 생각 없으니까 어서 든든히 잡수세요."
그리고는 등아는 뒤로 물러앉았다. 그러자 곽명송이 손목을 잡아 끌어 앉히며 사람 좋게 웃었다.
"아따 사람도! 이 골짜기에서 닭 한 마리면 진수성찬인데 어찌 나만 포식을 하겠소. 자, 괜히 체면 차리지 말고 이 좋은 안주에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등아는 못 이기는 척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따라 주고는 마주보면서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도 한 추렴 들자구요!"
두 내외는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는데 어느새 웬 험상궂게 생긴 사내 다섯과 계집 셋이 방문을 확 열어제치고는 두 편으로 갈라 서서 징글맞게 웃고 있었다.
곽명송을 노려보고 있는 네 사내는 정파 패거리요, 등아를 쏘아보고 있는 네 사람은 사파 패거리였다. 두 패거리 사이에는 서로 경계하는 눈빛이 오갔다.
곽명송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양반들이 어찌하여 두 손 맞잡고 이 누추한 집엘 다 찾아오셨소? 좌우간 이렇게 왕림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곽명송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자 정파 패거리의 두목인 쾌도(快刀) 악기(岳琦)는 바싹 약이 올라 느물느물 미소를 지으며 대뜸 쏘아붙였다.
"고마울 거야 없지! 화산파의 명예를 훼손시킨 당신을 단죄하러 왔으니까!"
사파패거리에 끼여 있는 충피도 질세라 소리쳤다.
"화산파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대환희 보살님을 노엽게 한 죗값만은 이 세 아가씨에게 똑똑히 치러 줘야 하겠어. 황약사를 등에 업고 너무 우쭐대지 말란 말야!"
두 패거리는 너나없이 살기등등했다. 곽명송과 등아는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등아는 눈웃음을 치며 충피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대환희 보살님의 노여움을 샀다니요? 도통 까닭을 모르겠는데요."
"이봐, 눈 가리고 아웅할 셈인가? 그때 동정호 일 벌써 잊었단 말이더냐? 황약사를 등에 업고 대환희 보살님의 막중한 수하들을 죽인 게 너희 둘이 아니고 누구 다른 사람이라더냐? 우린 너희 두 연놈을 잡아다가 사내 놈은 보살님 시중을 들게 하고 계집년은 보살님의 미혼탕을 먹여 뚱뚱한 여장군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면 목숨만은 살릴 수 있으리라."
충피는 키들키들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버들처럼 호리호리한 등아가 절구통 같은 뚱뚱보 계집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돌연 쾌도 악기가 말을 가로챘다.
"곽명송은 화산파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 죄를 달게 받으라!"
그 말에 등아가 한마디 오금을 박았다.
"말끝마다 화산파, 화산파 하는데 대관절 당신은 화산파에서 뭘 하는 사람인가요?"
그러자 악기는 입이 헤벌어지며 말 한마디 못했다. 그의 아내 육사고(陸四姑)는 화산파에서도 방자하고 지독한 여인으로 소문이 높을 뿐더러 기실 악기 자신은 화산파와는 담을 쌓고 사는 터라 정정당당히 내놓고 할 말이 궁색했던 것이다.
등아는 곽명송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미안해요. 원체 당신은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강호의 협객이었건만 저같이 명성을 더럽힌 향녀 계집과 만나는 바람에 이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됐군요……."
"등아, 왜 또 부질없는 말을 하는 거요? 나는 협객의 명예보다, 아니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대가 귀중하오!"
곽명송은 짐짓 성을 내며 앉은걸음으로 다가가 한 팔로 등아의 동그란 어깨를 껴안았다.
"제길, 퍽도 약을 올리는군. 얘들아, 저 놈을 당장 끌어내라!"
쾌도 악기가 손짓을 하자 대번에 정파 세 사내가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곽명송을 잡아 일으켰다.
난쟁이 충피도 황황히 뚱뚱보 여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저 년도 잡아들여랏!"
세 여인은 각기 칼이며 밥주걱이며 쇠스랑을 들고 우악스럽게 등아에게 달려들었다. 등아는 얼른 피했다.
"쾌도, 자네도 사내대장부가 아닌가? 왜 꼭두각시처럼 여편네 말만 듣고 그 장단에 춤을 추는 건가?"
곽명송은 쾌도 패거리들을 밀치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쾌도는 태연자약하니 느물느물 대꾸했다.
"남정네가 주변머리가 없으니까 여편네 말을 듣는 거지. 아무리 사납다 해도 내 여편넨데 남보다야 낫지 않나? 아무려면 제 남편을 속여먹겠어?"
곽명송은 할말이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매섭게 으르렁거리며 여편네와 티격태격하던 놈이 갑자기 자기를 깎아내리고 여편네를 추어올리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 아닌가.
정파 패거리 세 사내는 곽명송이 완강히 뻗대자 각기 채찍이며 환도며 몽둥이를 정신없이 휘둘러댔다. 채찍이 등허리를 후려치고 환도가 배를 찌르고 몽둥이가 정수리를 내리치는 것을 곽명송은 용케 피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방님, 조심하세요!"
등아는 손에 땀을 쥐고 동동거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충피가 눈을 핼끔거리며 비웃어댔다.
"이 오지랖 넓은 것아, 네 년 발등의 불이나 먼저 꺼라!"
충피가 감때사납게 눈을 번득이자 세 뚱뚱보 계집은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등아는 바삐 물러서며 훌쩍 몸을 날려 밖으로 나왔다. 충피는 신바람이 나서 소리를 쳤다.
"등아, 뛰면 어디로 뛰겠느냐? 순순히 칼을 받지 못할까? 조만간 너희들 두 연놈은 지옥으로 가게 돼 있어!"
그 말에 뚱뚱보 여인들은 한층 기가 살았다. 그녀들은 등아를 깔아뭉개려고 들소처럼 달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등아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하고 있으니 등아만 잡아죽인다면 대환희 보살에게 큰 상을 받을 터였다.
등아는 경공으로 슬슬 몸을 피하다가도 틈만 있으면 이 여인들의 가슴과 얼굴에 번개같이 장을 날렸다. 대환희 보살이 기른 계집들이라 심성이 지독하고 손아귀가 드셌지만 그래도 곽명송을 둘러싼 사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등아는 몸을 피하면서 가끔 곽명송 쪽을 힐끔거렸다.
굵직한 채찍은 윙윙거리며 허공에 원을 그리다가는 철썩 소리를 내며 곽명송의 등허리며 머리를 향해 곧추 떨어졌다. 향미사(向眉蛇)가 곽명송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형상이었다. 곽명송이 채찍을 피해 바삐 몸을 피하고 나면 다시 시퍼런 환도가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그러기를 수십 합, 일순 곽명송은 틈을 보여 환도에 어깨를 찔리고 말았다. 대번에 시뻘건 피가 확 뿜어 나왔다. 곽명송은 급히 자세를 가다듬으며 한 손으로 어깨를 잡고는 이를 악물었다. 꺼꾸러지는
한이 있어도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비명을 지르면 자칫 뚱뚱보 계집들과 맞서고 있는 등아가 흐트러질지도 모른다.
곽명송은 더는 피할 길이 없자 쓱 검을 빼 들었다. 쾌도가 가로세로 날쌔게 검을 휘두르며 다가들었다. 한 쌍의 서슬 푸른 검은 허공에서 멋지게 어우러지며 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검을 맞대고 빙빙 도는데 난데 없이 채찍이 날아와 곽명송의 오른손 손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웬만한 사내가 맞았더라면 아마도 단박에 뼈가 으스러졌을 터이나 곽명송은 그래도 검을 꼭 쥐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검을 바로 쳐들 수는 없었다. 다시 채찍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곽명송은 슬쩍 갈지자로 몸을 피하며 왼손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사내의 면상에 번개같이 한 장을 날렸다. 사내는 흠칫 놀라 얼른 물러섰다. 그러느라 곽명송은 자연 틈이 생기고 말았다. 한 순간 눈앞에 우지끈 몽둥이가 날아들며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더니 앞이 캄잠해졌다.
"못된 놈들!……."
곽명송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이제는 무작정 좌충우돌 장을 내질러댔다. 일순 가슴팍이 선뜩했다. 쾌도 악기가 틈을 노리다가 그의 가슴에다 깊숙이 검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곽명송은 한 길이나 뛰어올랐다가 가슴에 박힌 검을 부여잡고 쿵 떨어져 내렸다.
등아는 너무나 놀라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 한복판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등아는 뚱뚱보 여인들을 보고 급히 사정했다.
"당신들이 이겼어요. 잠깐만요……."
등아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으쓱해서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코방귀를 뀌었다.
등아는 한달음에 곽명송에게로 달려갔으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하여 그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간 칼날은 등허리까지 삐죽이 나와 있었다. 등아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곽명송의 몸 위로 쓰러졌다. 곽명송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등아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등아, 왜 이럴까? 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구려……. 화산파 손에 잡혀 죽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곽명송은 손을 들어 등아의 얼굴을 더듬다가는 고개를 외로 꺾으며 왈칵왈칵 피를 토해냈다.
등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쾌도 악기를 쏘아보았다.
"쾌도, 쾌도! 네 놈 같은 불한당도 정파의 영웅이냐? 네 놈은 한평생 여편네의 치마폭에 감싸여 놀아난 비겁한 놈……. 듣자니 네 놈 여편네는 선우순의 외조카라더니, 이번 일은 선우순과 네 여편네의 사주를 받고 한 짓이야! 그렇지?"
쾌도는 웬일인지 한풀 죽어서 곽명송의 가슴에 꽂힌 자기의 칼자루만 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정 두지 않고 찌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험하게 찌를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그는 애써 등아의 눈길을 피했다. 그러나 등아는 바락바락 악을쓰며 외쳐댔다.
"강호의 영웅호걸! 칼을 아주 잘 부리는 것 같은데 이 가슴에도 한번 찔러 봐라, 어서! 왜 찌르지 못해, 왜? 또 여편네의 호령이 있어야만 찌르겠나? 퉤, 더러운 놈!"
등아는 설움이 복받쳐 연해 피울음을 토해냈다. 쾌도는 본시 성미가 칼날 같은 사내였지만 등아의 악다구니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일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곽명송에게 공손히 읍을 하고는 잽싸게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자!"
네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아는 피멍이 든 곽명송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좀처럼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곽명송은 거센 숨을 몰아 쉬며 등아를 올려다 보았다.
"등아, 검을 뽑아 주오, 이 검을……."
그러나 등아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검을 뽑아 버리면 그 즉시 사랑하는 이는 숨을 거두게 될 터였다. 등아는 더욱 슬피 울부짖었다.
"등아, 울지 마오. 울면 내 마음이 더 아파……."
곽명송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칼자루를 잡고는 쑤욱 칼을 뽑았다. 등아가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조용히 등아의 품에 쓰러졌다. 등아는 곽명송의 너부죽한 얼굴에 미친 듯이 뺨을 비비며 울고 또 울었다.
간악한 충피마저도 콧날이 시큰해져 고개를 외로 돌렸다. 피를 보는 싸움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돌처럼 굳어진 그였지만 웬일인지 가슴이 뭉클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처음이었다. 정녕 사랑이란 이토록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뚱뚱보 여인도 측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아, 그 양반은 이미 죽었으니 저리 비켜 놓으라구."
등아는 곽명송의 상반신을 안은 채 조용히 흐느끼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충피가 짐짓 헛기침을 해 가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리 좀 비키라구. 우리가 힘을 도와 묻어 줄 테니."
그 말에 등아는 흠칫하더니 더욱 으스러지게 곽명송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아직도 몸이 이처럼 따뜻한데 어찌 그 싸늘한 땅속에 묻을 수 있단 말인가?
뚱뚱보 여인들은 물끄러미 등아를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세상에 저처럼 제 서방을 사랑하는 계집도 있을까. 뚱뚱보 여인 하나가 콧마루가 시큰해서 힝 코를 풀고 나서는 울먹울먹 한마디 꺼내놓았다.
"등아, 이젠 그만 울고 대환희 보살님한테로 가자구. 자네가 향녀 무리들을 데려오고 대환희 보살님의 말만 듣는다면 보살님도 필히 한자리 내주실 테니!"
옆에 있던 두 뚱뚱보 계집도 한마디씩 토를 달았다.
"보살님이 말씀하셨어, 여자들이란 사내들을 어를 줄도 알고 닦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데 우리 뚱뚱보 여자들은 사내들의 멱살을 틀어 잡고 뺨을 후려칠 수는 있지만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줄은 모르거든. 그러니 이제 자네 향녀들까지 오게 된다면 손발이 척척 맞지 않겠는가 말이야!"
"아무렴! 자네네 향녀들까지 손을 맞추어 준다면 보살님께서 천하를 얻기는 여반장이지!"
등아는 고개를 들고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머나먼 남쪽 하늘 밑에 대리국이 있다. 그녀는 그 대리국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는 눈물 자국이 얼룩진 동그란 얼굴에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곽명송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단칼에 염통을 찌르지 못하는 검객은 검객이 아니지……."
등아는 뚱뚱보 여인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보살께 말해 줘. 향녀 무리는 진작에 흩어졌다고. 이제는 덮어놓고 남자들을 저주하는 향녀들은 없어. 그리고 사내는 진정 사내다워야 하고 등아는 그런 사내를 따라 달갑게 죽는다고……."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하더니 등아는 불쑥 단도를 빼어 들고 왼편 가슴을 푹 찔렀다. 그리고는 곽명송에게로 천천히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저히 말릴 틈이라곤 없었다. 충피와 세여인은 넋을 놓은 채 멀거니 서 있었다.
"또 사람을 죽였군, 사람을 죽였어! 대관절 어찌 된 일인고?"
문득 누군가 웅글진 목소리로 외쳐댔다. 충피와 뚱뚱보 여인들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백통이었다. 그는 뚱뚱보 여인들을 힐끔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또 화근거리군, 화근거리야!"
그리고는 불에 덴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슬금슬금 다가와 세 계집을 차례로 뜯어보았다.
"좋았어. 비곗덩이처럼 추하게 생겨 먹었으니 성은 허물어지지 않겠어."
뚱뚱보 여인들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주백통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는 또 히죽거리며 주워섬겼다.
"잘 죽었어, 잘 죽었고말고! 향녀들이란 본시 미로를 믿고 사내를 홀리는 요물들이야. 해죽해죽 웃으면 그걸 보는 사람은 애간장이 다 녹아난단 말야. 애간장이 녹으면 큰일이지, 큰일이야!"
주백통이 치신머리없이 굴자 뚱뚱보 여인들과 충피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주백통의 무공이 뛰어남을 잘 알고 있는지라 감히 뭐라고 대꾸조차 못하고 씨근덕거릴 뿐이었다. 물 덤벙 술 덤벙 하는 노완동 주백통은 세상 무서운 것이 거의 없었지만 독사만 나타나면 혼비백산 날뛰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 충피는 독사를 가져 오지 않았다. 충피는 속으로 장탄식을 하면서 살살 주백통 눈치를 보며 굽실 허리를 꺾었다.
"너희들 짓이지? 너희들이 여기서 사람을 죽였지?"
주백통은 일순 눈알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충피는 대뜸 손을 저으며 살살거렸다.
"아니 무슨 말씀이우? 사실은 두 젊은 내외간이 순사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 보고 있었을 뿐이오."
"순사라니? 뭐가 순사란 말야?"
주백통은 바짝 호기심이 동해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충피가 어물쩍 되물었다.
"어떻게 말할까? 가령 당신을 좋아하는 계집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계집이 당신을 위해 죽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주백통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가 왜 죽는단 말이야? 내가? 사형님은 앞으로 전진교 일을 나더러 맡아 보라고 하셨어. 그 밖에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내가 왜 실없이 죽는단 말이야. 내가 죽는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지, 당치도 않은 일이고말고."
충피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면상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게 한마디만 대답해 보우. 당신을 좋아하는 여자가 죽었다면 당신은 그녀를 따라 죽겠느냐 말이오?"
"그녀가 나를 위해 죽는다고? 그럴 리 없겠는데……. 아니, 왜 나를 위해 죽느냔 말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
"여보시오, 이 사내는 화산파 사람인데……."
"나도 알아! 이름이 무엇이더라…… 옳지, 화산파의 곽명송이라는 협객이야. 한데 죽기는 왜 죽었나?"
"글쎄 죽은 건 사실인데 문제는 곽명송의 색시도 따라 죽었다는 것이오. 새서방이 죽으니 새색시도 단검을 뽑아 제 가슴을 찔러 함께 순사하더란 말입니다. 이 새색시는 남자들을 아비 죽인 원수 이상으로 미워하는 향녀 무리의 두목이오. 이런 여자도 제 서방을 위해 죽는데 당신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죽을 수 없단 말이오?"
"그렇고말고! 나만은 죽을 수 없어, 나만은……."
주백통은 얼핏 영고의 아리따운 얼굴이 떠올랐다. 뒤이어 대리국 황궁에서 그녀와 즐겁게 지내던 그때가 새록새록 눈앞을 스쳐갔다. 그는 새삼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영고는 분명 자기 여인이 아니라 단황의 여인이다. 영고는 잡을 수 없는 아지랑이처럼 그저 눈앞에 가물거릴 뿐이었다.
"안 돼, 나는 죽을 까닭이 없어. 그 여자가 좋은 남정네 품에 안겨 있는데 내가 왜 속절없이 죽는단 말이야. 그런 죽음은 허무맹랑한 죽음이고 어디 묻힐 자격도 없어……."
충피는 얄궂게 웃으며 바싹 약을 올렸다.
"그래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라면 함께 죽어 줘야 하우. 당신이 그렇게 순사한다면 내 잘 묻어 주고 제사까지 지내 드리지. 당신이 원한다면 시체가 썩지 않게 무덤 안에 독약도 넣고 뱀도 두어 마리 순장해 드리지. 뱀도 말이오."
"뭐야? 뱀? 뱀은 싫어! 난 죽어도 뱀은 질색이야!"
주백통은 대번에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가재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천방지축 도망을 쳤다.
화산 기슭 한적한 언덕 위에 이고암이라는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이 암자에는 오로지 여승만 살고 있는데 개중에는 열서너 살밖에 안 되는 새파란 애기 중이 있는가 하면 여든에 가까운 늙은 여승도 있다. 그런데 이곳 여승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성이 착하고 부드러운 반면, 나이가 많을수록 괴벽스럽고 심술 사납기 그지없었다.
이 암자에서 제일 늙은 여승이 바로 한연 사태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 자그마한 뜨락을 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일손이 굼뜬지 향불을 붙일 때까지도 다 쓸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린 여승들은 이 늙은 여승의 일손을 재촉한다거나 도와주는 일이라고는 없이 늘 때가 되면 이 노파를 스쳐 지나가 향불을 붙이곤 했다. 노파는 뜨락을 다 쓴 다음에는 꼭 대문 어귀의 섬돌에 올라서서 먼 산자락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이때면 문을 지키던
세 늙은이가 쪼르르 마중을 나와 아침 인사를 올렸다.
그날도 한연 사태가 섬돌 위에 나서니 세 늙은이가 앞다투어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밤새 안녕하셨수?"
노래소가 먼저 선수를 치니 노불락과 노시락도 뒤질세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수?"
"안녕하셨수?"
이럴 때 한연 사태는 웃는 얼굴을 보이는 법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다. 이날도 그저 무뚝뚝하니 합장을 하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암자로 들어갔다. 그녀가 암자로 들어가 문을 꽁꽁 닫자마자 세 늙은이는 뜨락에 내려와 갈라서더니 주먹질, 발길질을 해 가며 성난 장닭처럼 싸우기 시작했다. 후닥닥 튀어 올라 주먹을 나누고 내려섰다가는 다시 다리를 휘저으며 장을 내질렀다. 이 세 늙은이들의 솜씨가 어찌나 날쌘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려 서른 합이나 맞붙었다가 갈
라졌다.
노래소가 씩씩거리며 대뜸 노불락을 보고 시비를 걸었다.
"네 녀석은 정말 욕심꾸러기야! 아까 왜 한연 사태님을 우리보다 한 번 더 도둑질해 봤냐?"
하나 노불락도 숙이고 들지 않았다.
"이거야 정말 적반하장이로군. 우리 셋이 약속한 대로 '안녕하셨수?' 하고 다섯 글자만 말하면 될 걸 왜 '밤새 안녕하셨수' 하고 일곱 글자나 말했느냐 말이야. 흉측스럽게 '밤새'는 왜 덧붙여?"
그러자 노시락이 능글맞게 껄껄 웃으며 넙죽 되받아쳤다.
"쳇, 둘 다 검둥개 돼지 흉보는 격이로군. 한 놈은 훔쳐보고, 한 놈은 잘난 체 인사말 한마디 더 했으니 둘 다 욕심꾸러기요, 피장파장이지 뭐가 다른 게 있어?"
"뭐야?"
셋은 또다시 어우러져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팍팍 장이 오가고 허공에서 발길이 원을 그리는 품이 세 마리 용이 얼기설기 얽혀서 노니는 듯싶었다. 일순 세 늙은이는 문득 싸움을 멈추더니 머리를 맞대고 허리를 굽혀 땅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일어섰다. 보검이었다. 얼핏 보아도 화산파 보검에 틀림없었다. 화산파 검은 칼날이 좁고 끝이 뾰족한데 영락없이 그 모양이었다. 누구 것일까.
노래소가 노불락에게 대뜸 검을 앗아다가 찬찬히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자 노시락이 또 곁에서 앗아다가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노불락은 두 노 친구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야? 누구 검이야?"
"곽명송 것 같아……."
두 노인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들은 이제 화산파 일이라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심히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정직한 젊은이 곽명송의 일만은 무심히 스쳐 지날 수 없었다. 언젠가 선우순의 명을 받잡고 그를 처치하려 했으나 한연 사태의 만류로 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 호젓한 백사장에서 이상야릇한 밤을 함께 지내고 난 후에는 되레 늘 곽명송과 등아의 행복을 남몰래 빌곤 하지 않았던가. 뿐더러 장차 곽명송이 강호 무림을 호령하는 영웅이
되어 주기를 내심 바라 마지않았었다. 한데 그 젊은이의 검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니,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였다. 검을 잃었다 함은 목숨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법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화산파의 곽명송을 죽이고 그의 생명 같은 검을 이 한적한 암자 앞에 던져 놓았을까? 대관절 누구에게 으름장을 놓고 위세를 보이려는 것일까? 삼로의 머리 속에는 불현듯 선우순의 표독스런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놈은 화산파 장문인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을 꼭 틀어쥐고 있으니 필시 그 기세를 믿고 또 곽명송을 모해하라고 호령했을 것이다. 얼마 전 자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즉 이번에는 선우순이 직접 나서서 곽명송을 죽
이고 검을 여기에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
삼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비록 선우순의 명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들은 결단성 있고 괄괄한 등아와 어리숭하면서도 씩씩한 곽명송을 매우 아끼고 좋아했었다.
"더러운 자식! 내가 가서 그 선우순 놈을 죽여 버릴 테야!"
노래소가 불끈 주먹을 쥐고 외쳤다. 그러자 노불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렸다.
"안 돼! 화산파의 계율에 장문인을 죽이고 모반하는 자는 팔다리를 자르고 돼지처럼 뒷간에 처넣는 법이야! 다리도 없고 팔도 없는 괴물이 된단 말이야. 그런 괴상망측한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겠나?"
그러자 노래소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돼지가 된 다음에는 죽을 수도 없단 말이야."
노시락이 노래소를 힐끔 쳐다보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래소는 바락 화를 냈다.
"돼지가 되든 소가 되든 난 그 불쌍한 것들을 대신해서 복수하고야 말 테야. 두 노형은 여기서 문이나 지키고 있어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홱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다른 두 늙은이가 바삐 팔소매를 잡았다. 노래소는 잔뜩 독이 올라 두 늙은이를 번갈아 쏘아보며 외쳐댔다.
"놔, 놔! 노형네 둘은 이 문이나 지키라니깐! 나 혼자 복수하러 갈 테니! 흥, 화산파 삼로는 개떡 같은 삼로! 남의 문이나 지켜 주는 강아지 같은 삼로지!"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직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무슨 말을 했지요?"
삼로는 흠칫 놀라 홱 뒤를 돌아다봤다. 그들 셋이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짝사랑을 바쳐 온 그 준엄한 노파가 서 있었다.
노래소는 더는 떠들어대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지껄이는 걸 다 들었겠군요?"
노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래소를 흘겨보면서 쏘아붙였다.
"문은 안 지키고 그냥 가겠단 말이죠?"
노래소는 대번에 낯빛이 벌개졌다. 그는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불뚝 심통을 부렸다.
"나 원 기가 막혀서! 화산파는 곽명송이란 그 젊은이를 내놓고는 말짱 다 한 가마에 잡아 넣을 놈들뿐인데 그 망할 놈의 선우순이 곽명송을 잡아죽였단 말이오. 이를 어찌 참을 수 있겠소!"
노불락은 근심스레 노래소를 보면서 나직이 물었다.
"그래, 정말 가겠소?"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노시락도 거들었다. 노래소는 연방 힘있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러자 늙은이 둘은 노래소의 손을 법석법석 잡았다.
"좋아, 우리도 가지."
순간 세 늙은이는 한 덩어리가 되어 저마다 두 눈에 맑디맑은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들은 더는 노파를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으흠!"
노파가 헛기침을 했다. 삼로는 노파에게 공손히 합장을 했다.
"한연 사태님, 문 하나 지켜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하외다."
삼로는 그 한마디만 남겨 놓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뒤에서 다시 붙잡아 세울까 봐 바삐 서두르는 눈치가 역력했다.
노파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 말 한마디 듣고 가면 못쓰나요?"
그러자 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춤 멈춰 섰다.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사모하던 여인의 말 한마디를 듣지 않고 훌쩍 떠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정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뚝처럼 굳어진 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감히 돌아다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은근하면서도 매서운 그녀의 눈초리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정녕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다시금 또랑또랑한 노파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잘들 생각해 봤나요? 그쪽에 가서 누가 나설 셈이에요? 셋이 함께 나설 셈인가요?"
"내가 나서겠소!"
노래소가 대뜸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노시락이 펄쩍 뛰며 퉁을 주었다.
"아 참, 이 친구는 무슨 일에나 욕심을 부린단 말이야!"
노불락도 기세등등하니 대들었다.
"자네들은 언제 보나 큰 고기는 제 그물에 넣으려고 설친단 말야. 그러니 난 늘 기분만 잡치는 거라구. 이번만은 결단코 내가 나서야 쓰겠네!"
그러자 한연 사태가 정색을 했다.
"화산파의 무공은 시원치 않지만 그들의 계율은 실로 무섭지요. 장문인을 죽이는 자는 어김없이 팔다리가 잘려 뒷간에 처박히고 말 것이에요. 그래도 안 무서워요? 그래, 누가 나설 건가요?"
"내가 나서겠소!"
셋은 똑같이 대답했다.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삼로는 한연 사태가 더 할 말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우쭐우쭐 발걸음을 뗐다. 그때 다시금 노파가 발목을 잡았다.
"잠깐만!"
셋은 못박힌 듯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한연 사태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세 분은 잘 들어 두세요. 누구든지 만약 돼지가 돼서 돌아온다면 이 한연 사태는 늙어 죽을 때까지 그분을 모시겠어요."
삼로는 일순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거야말로 속세의 사람들은 맺을 수 없는 기이한 연분일 것인즉, 한연 사태야말로 절세의 여걸이요 참사랑을 간직한 진짜 여인이 아니겠는가? 그들 셋은 이렇듯 한연 사태와 도저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연분으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삼로는 차마 뒤를 돌아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뿐더러 울고 있을 한연 사태의 얼굴을 마주보기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화산에는'한검당(閒劍堂)'이라고 하는 넓고 아늑한 대청이 있었다. 지금은 화산파 두목이 집무청으로 쓰고 있지만 기실 이 대청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옛날에 화산파에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그막에 오묘한 도리를 깨쳤다. 즉, 가장 뛰어난 검술은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을 조용히 놓아두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검당'이라는 대청을 짓고 그후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장구히 검을 놓아두었다 한다. 그랬더니 천하가 태평해지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화산파 사람들은 검을 놓는 대신 검을 부여잡고 싸우기만 하니 남도 죽이고 자기들도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야 어쨌든 선우순과 그의 깐깐한 마누라는 요즘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저 혼자만 의롭고 정직한 체하던 곽명송도 감쪽같이 죽여 없앴겠다, 귀찮게 잔소리만 늘어놓던 삼로도 알아서 이고암에 가 있겠다. 이젠 정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선우순은 허파에 바람든 사람처럼 온종일 입을 벙싯거렸다. 보다 보다 못해 하루는 그 마누라가 얼마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봐요,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세요. 그 귀신 같은 세 늙은이가 또 기신기신 찾아올지 모르니까!"
"허, 괜한 근심! 이 어른이 좋은 꾀를 생각해 두었으니 그런 근심일랑 딱 붙잡아 매라구! 한번 들어 보겠소? 일단 그 한연 사태라는 노파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온단 말야. 그 노파만 볼모로 잡고 있으면 감때 사나운 삼로도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게지 별수 있겠어? 제기랄, 여차하면 그 노파를 죽여 버리면 될 것이니까!"
그때였다. 문득 와르르 기왓장 뒤엎는 소리가 나더니 꼬장꼬장한 삼로가 허공에서 불쑥 떨어져 내렸다. 삼로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길로 매섭게 쏘아보더니 개중 노래소가 성큼 나서며 을러댔다.
"선우순, 네 놈이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빼앗은 죄, 오늘 우린 그 죄를 따지러 왔다."
뒤이어 노불락과 노시락도 연달아 한마디씩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녀석이 화산파의 대들보 협객 곽명송을 죽였으니 그 죄 역시 가볍지 않으리라!"
"네 녀석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느냐! 그 죄는 일일이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사형과 명송을 모해한 죄는 기어코 보응을 받으리라!"
선우순은 등골이 서늘했지만 짐짓 목청을 높여 으름장을 놓았다.
"호오, 그렇소? 그대들은 화산파의 원로 대신이나 다름없으니 화산파 계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는 보검을 쓱 꺼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한검당의 보검을 보시오. 이 보검의 권위를 거역하는 자는 팔다리 없는 돼지 신세가 될 거야!"
선우순은 여편네와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만 던져 놓으면 고분고분 수그러 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장문님의 명령이니 물러들 가세요!"
선우순 곁에 있던 노파가 대뜸 소리쳤다.
"뭐, 장문? 장문은 무슨 개코 같은 장문이야!"
장문 앞이라면 이 삼로도 설설 기었건만 오늘따라 안하무인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화산삼현(華山三現) 초수로 껑충 공중제비를 돌아 선우순 앞에 바싹 내려섰다. 다음 순간 삼로의 시퍼런 검이 무섭게 춤을 추었다. 선우순의 길다란 몸뚱이는 단박에 가로세로 대여섯 토막으로 잘려 버렸다.
"아이고, 삼로인지 뭔지 하는 두상들이 장문님을 죽였고나! 이 두상들아,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 줄 모르느냐? 네 놈들은 흉물스러운 돼지가 되고 말리라!"
선우순의 괄괄한 여편네는 화들짝 놀라 금세 눈물 콧물 쏟아 내며 울부짖었다. 순간, 노래소의 날카로운 칼끝이 노파의 입 안을 슬쩍 후비고 지나갔다. 그러자 혀가 뭉텅 떨어져 나가고 비릿한 것이 입 안에 그득 찼다. 그녀는 그래도 삿대질을 해 가며 바락바락 삼로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혀가 잘렸는지라 그저 윽윽거릴 뿐 무슨 허튼소리를 내뱉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돼지는 저 년이 먼저 되는 판이군."
노불락은 낯을 찡그리며 검을 치켜 들어 단칼에 그녀의 두두룩한 모가지를 쳤다.
그때 화산파 무리들이 소란스런 기척을 듣고 모두들 대청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이 그저 놀란 기색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삼로의 조카뻘 되는 후배들인지라 감히 화산파의 세 원로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독 사납기로 이름난 육사고가 냉랭하게 웃으며 선뜻 나섰다.
"세 좌상 어른께서 사람을 죽이시니 감히 막아 나서지는 못하겠으나 화산파의 계율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화산파 원로들이시니 여러 후배들 앞에서 귀감이 돼야 하지 않겠나요?"
삼로는 어쩐지 한풀 죽어 면구스럽게 육사고를 훔쳐보았다. 비록 화산파의 장문 자리에는 선우순이 앉아 있긴 했지만 화산파의 대소사는 필시 육사고가 참여해야 결판을 내곤 했다. 아무튼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삼로는 그저 멋쩍게 서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나섰다. 쾌도 악기였다. 쾌도는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가 문파를 연 지 백여 년 되도록 강호에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화산파 내부가 화목하고 상하지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소. 한데 오늘에 와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만 하니 강호의 어진 이들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옵니다."
화산파 무리들은 너나없이 죄지은 놈들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숙연하게 정적이 감돌았다. 한 순간 노래소가 정적을 깨고 키들키들 웃어젖혔다.
"네가 쾌도란 녀석이지? 세상에 입 가진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어도 네 놈만은 입을 닥쳐야 해! 죄는 선우순이 냈겠지만 하수인은 분명 네 놈이야. 아직 곽명송을 죽인 죄를 묻지도 않았거늘 왜 주둥이부터 놀리는 게냐? 화산파 계율은 하룻강아지인 네 놈보다 수염이 시허연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네 녀석은 잔말 말고 구경이나 하거라!"
노래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늙은이에게 냉큼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삼로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단박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팔다리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세 몸뚱이만 쿵, 쿵, 쿵 땅에 떨어졌다. 좌중은 짧은 숨을 들이켜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청 마당에선 마치 돼지 세 마리가 꾸물거리는 듯했다.
쾌도 악기는 적이 송구스러워 푹 고개를 숙였다.
화산파 젊은 제자들은 쭈뼛쭈뼛 눈길을 들었다. 일순 피투성이가 된 삼로의 얼굴이 달려들 듯 두 눈으로 뛰어들어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화산파 제자라면 응당 삼로 같은 사내대장부가 돼야 하리라!
삼로의 팔다리가 끊어져 나간 부위에서는 선지피가 흘러 나와 실개천을 이루었다.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놓아두면 피를 다 흘리고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좌중은 우르르 다가갔다.
"가만 놔두지 못할까? 다가가는 놈은 가차없이 죽이리라!"
육사고가 표독스럽게 고함을 지르며 쓱 검을 빼 들었다. 그녀는 매섭게 좌중을 노려 보다가는 삼로를 흘겨보며 내뱉었다.
"이젠 옴짝달싹 못하고 죽게 됐군. 내 그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하리라! 너희 삼로는 피를 몽땅 쏟아 내고 거미처럼 말라 죽게될 게야. 그래야 장문님 내외간을 죽인 피 값을 물어낼 수 있어!"
화산파 제자들은 두 눈 뻔히 뜨고 삼로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못내 한스러워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더러는 발을 구르며 목놓아 울부짖기도 했다.
노래소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아니 올까?……."
"너무 보채지 말게! 그 여인은 꼭 오고야 말아!……"
"암, 오고말고!……."
노불락과 노시락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삼로는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둘러선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세 노인은 이따금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깨어나곤 했다. 쾌도 악기는 사람들 속에 끼여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다가 차마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육사고에게 사정사정했다.
"사고, 저 죽어 가는 선배님들을 저대로 내버려두는 건 너무 지독해……."
그러자 육사고가 눈꼬리를 치뜨며 쏘아붙였다.
"당신은 손님이지 결코 화산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해요!"
쾌도는 기가 막혀 낯선 사람 보듯 아내 육사고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늙은 여승 하나가 허공에서 휘익 떨어져 내려 곧장 삼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여승은 대뜸 꿇어앉아 삼로를 하나하나 부축해 앉히고는 약을 한 알씩 꺼내 먹였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대나무 잎 같은 약초를 꺼내 피가 뿜어 나오고 있는 곳에 붙여 주며 또 한 번 끌끌 혀를 찼다.
"이, 이게 무슨 꼴인가? 이런 봉변을 당할 줄 내 미리 알았지만 그래도 도리를 다 하려는데 야……."
육사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쾌도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저 주제넘은 여승을 어서 몰아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악기는 두 손 딱 붙이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육사고는 잡아먹을 듯이 그를 흘겨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왜 주제넘게 화산파의 내분에 끼여드는 거요?"
그러나 여승은 먼 산을 쳐다보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묻는 거요? 화산파 장문이라도 되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은 물론이요 그의 여편네마저 삼로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했으니 이젠 표면적으로 육사고가 장문 아닌 장문 아닌가? 여승은 코를 벌름거리며 빈정댔다.
"검을 고이 모신다고 한검당이라고 했건마는 검이 춤추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니 견딜 수가 없구려!"
그녀는 한마디 던지고는 장삼 자락에 삼로를 싸안고 쓱 대청을 나섰다.
"섰거라!"
육사고가 훌쩍 날아와 여승 앞을 가로막았다.




제32장 의기 남아
육사고는 쌀쌀히 웃으며 호통을 쳤다.
"우리 화산파를 허투루 보고 하는 수작이군! 그래 도둑괭이처럼 뛰어들었다가 인사 한마디 없이 갈 셈인가?"
늙은 여승은 장삼 자락을 부여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삼로를 안고 있는지라 육사고가 달려든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쾌도 악기는 여승이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여승에 대한 연민이 더할수록 인정머리없는 육사고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쾌도 악기는 더는 참지 못하고 껑충 몸을 솟구쳐 두 여인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사고!"
육사고는 눈알을 부라리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악기, 중뿔나게 당신이 뭣 땜에 간섭하고 나서는 거예요? 어서 썩 비키지 못해요!"
악기는 귓불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집 안에서는 늘 아내에게 훈계를 받고 꾸지람 듣기를 밥 먹듯 할지언정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이토록 남편의 체면을 깎아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악기는 울컥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러자 육사고는 악기를 밀치고 여승을 쏘아보며 바락바락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우리 화산파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 악귀 같은 늙은이들을 안고 가는 거요?"
여승은 쓸쓸히 웃음을 지었다.
"이왕 폐인이 된 불쌍한 늙은이들 아닌가? 불쌍한 늙은이들을 박대하면 죄업만 쌓을 뿐이야!"
"닥쳐요! 이 영감태기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기나 해요? 우리 화산파 장문님을 난도질해서 죽였단 말이에요. 지은 죄를 보아서는 강물에 처넣어 고기밥이 되게 하고 싶지만 본디 화산파 원로였던 만큼 땅에 묻어는 주겠어요. 한데 당신이 무슨 심사로 끼여들어 가져 가나 말이에요? 까마귀 먹이로 가져 가는 건가요?"
그 말에 늙은 여승은 난데없이 주르르 눈물을 떨궜다.
'이 불쌍한 늙은이들을 까마귀 먹이로 내던진다고? 이 독한 계집아, 이 세 사내를 두고 몇 십 년 간 애타게 그려 온 이 내 마음을 네가 아느냐? 내 가슴은 썩고 곪아서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늙은 여승은 쓰라린 추억을 훌쩍 털어 버리고 은근한 눈길로 쾌도를 쳐다보았다.
"쾌도 이 사람아, 계집을 얻으려면 제대로 된 계집을 얻어야지! 남정의 말을 잘 듣고 남정을 잘 섬기는 어질고 착한 계집이 진짜 계집인 게야. 제 남정을 동네 집 아이 다루듯 하는 이런 개차반 같은 계집하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게!"
그러자 육사고는 대번에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망할 놈의 할망구가 우리 내외간을 이간 놀 셈인가?"
늙은 여승은 그저 픽 웃더니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갔다.
육사고는 매서운 눈길로 화산파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나서기를 저어하는 눈치였다. 육사고는 악에 받쳐 버럭 고함을 쳤다.
"무릇 저 늙다리 여승을 막아 나서지 않는 자는 화산파 법에 따라 처단하겠다!"
그래도 모두들 요지부동으로 한 사람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폐인이 된 세 불쌍한 늙은이를 안고 비틀비틀 간신히 걸어가는 여승을 어찌 막아 나선단 말인가……."
"등신 같은 놈들!"
육사고는 짓씹듯 내뱉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여승의 가냘픈 어깨에 검을 힘껏 내리쳤다. 삽시에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내려놓지 못할까!"
육사고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러나 여승은 시답지 않다는 듯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대가 날 죽여도 이 세 늙은이들만은 내려놓을 수 없노라.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내려놓을 수 없단 말이다. 알겠나?"
여승은 단호하게 한마디 던지더니 또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육사고는 악 소리를 지르며 껑충 몸을 솟구쳐 여승을 막아 서며 시퍼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젱겅 소리가 일며 육사고의 검이 번쩍 위로 쳐들렸다. 육사고는 신경질적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검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쾌도 악기였다. 육사고의 얼굴은 단박에 독 오른 고춧빛이 되었다.
"아니, 당신마저 날 거역할 셈이에요? 저리 비켜요, 비켜!"
악기의 얼굴도 푸르뎅뎅한 것이 만만찮아 보였다.
"난 이제껏 네 년한테 괄시와 수모를 받을 대로 받았어. 네 년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야, 악귀!"
"뭐? 악귀? 이 양반 이거 정신나간 거 아냐?"
"오늘부터 난 네 년과는 남남이다, 남남! 칼로 베듯 갈라서겠단 말이다!"
몇 년 간이나 가슴에 응어리 졌던 그 말을 토해 버리고 나니 악기는 그야말로 비길 데 없이 가슴이 후련했다.
육사고는 성난 암두꺼비처럼 젖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아니…… 뭐…… 뭐…… 날 따르지 않고 뛰쳐나가겠다고?"
"그렇다! 너는 그 동안 얼마나 나를 들볶고 종처럼 부려먹었냐? 나도 이젠 사내답게 살아 봐야겠다. 이 악기란 남정네는 네년 손에서 노는 꼭두각시가 아니란 말이다! 강호를 주름잡고 다니는 영웅 쾌도란 말이다!"
"흥! 쾌도는 무슨 썩어빠진 쾌도? 길러 준 정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같으니라구!"
악기는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여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연 사태님, 어서 가시지요!"
악기와 한연 사태는 나란히 한검당을 나섰다.
다급해진 육사고는 대청에 떨어진 한검당의 보검을 주워 들고 화산파 무리들을 둘러보며 성마르게 외쳐댔다.
"화산파 제자들은 들으시오. 지금 얼간이 같은 놈들이 감히 우리 화산파를 짓밟고 있소. 실로 화산파의 운명은 경각을 다투고 있다 할 것이오. 이젠 저 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길밖엔 없어요. 이제부터 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저 놈들과 한통속이 되어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처벌하겠어요? 자, 모두들 합심해서 저 사악한 무리를 쳐 눕힙시다!"
화산파 제자들은 쾌도가 선뜻 나서서 삼로와 한연 사태를 구해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듯 육사고가 발악을 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괜히 팔짱 끼고 구경만 하다가 역모 죄를 뒤집어쓰는 날엔 애매한 죽음을 당하지 않겠는가? 모두들 서로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육사고는 매섭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서너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한사람, 두 사람 뒤를 따랐다. 화산파 제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육사고 뒤를 따라 한검당을 나섰다.
쾌도 악기와 한연 사태가 채 얼마 가지도 않았을 때 육사고와 화산파 한 무리가 와 소리를 지르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쾌도 악기는 그들을 바라본 순간 검을 비껴 들고 죽기 살기로 한연 사태가 삼로를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엄호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악기, 오늘 내 검술을 보여 주겠어요. 내 검 아래 황천객이 된다 해도 날 원망 말아요!"
육사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검을 곧추 들어올렸다. 평소에 두 내외간은 가끔 서로 검술을 연마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악기는 매번 슬그머니 져 주곤 했다. 그럴수록 오만한 육사고는 신바람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렸고 차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말 자기의 검술이 남편보다 뛰어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육사고와 악기는 두 장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육사고가 고함을 쳐댔다.
"저 늙은 중 년을 놓치지 마라!"
그 소리에 뒤미처 난데없이 뒤쪽에서 쟁쟁하게 염불 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육사고가 얼핏 돌아보니 이고암 여승들이 일고여덟이나 빙 둘러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승들은 모두 새파랗게 젊었는데 개중 제일 어려 보이는 여승은 겨우 열서너 살 될까말까 해 보였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염불만 외워대고 있었다.
한연 사태는 젊은 여승들을 보고 흠칫 놀라 재우쳐 물었다.
"암주, 여기까지 올 건 뭔가? 화산파와 원한지간이 되면 꽤나 시끄러울 텐데!"
제일 어려 보이는 여승이 이고암 암주였다. 그녀는 한연 사태에게 정중히 합장을 하고 아뢰었다.
"저 여인이 저희 암자의 문지기 늙은이들을 죽이고자 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육사고는 이 한 무리의 여승들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화산 기슭 구석에서 향불이나 피우고 부처님을 마주해 종일 합장배례나 하는 처지니 그 재간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니 필시 한연 사태와 삼로를 빼돌리려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일 터였다. 육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늙어빠진 연놈들을 빼돌리는 자는 중이고 속인이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그래도 젊디젊은 여승들은 태연자약하니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로 난처한 형세였다. 죽은듯이 합장을 하고 서 있는 애젊은 여승들을 상대로 덮어놓고 찌르고 베어 죽이기는 뭣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화산파 제자 하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우리 사숙님께서는 분명히 삼로를 내려놓으라 하셨다. 냉큼 시행하렷다!"
한연 사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젊은 여승들도 합장을 한 채 의연히 뒤를 따랐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형상이었다.
육사고는 볼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저 능청스런 년들이……. 오늘 삼로를 잡아 칼로 쳐 죽이지 못한다면 이 육사고 어찌 다시 강호에 낯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저 악기란 녀석까지 나를 능멸하다니! 감히 남들 앞에서 내게 대답질을 하고…… 무례한지고! 좌우간 먼저 저 청승맞은 한연 사태 년부터 모가지를 비틀어 놓고 나서 세 늙다리를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겠다.'
육사고는 앙칼지게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도망칠 생각일랑 싹 집어치ㅇ!"
그 순간 악기가 악 소리를 지르며 육사고를 가로막았다. 육사고와 악기는 독 오른 장닭처럼 서로 무섭게 노려보며 빙빙 원을 그리다가 한 순간 번개같이 맞붙어 검을 휘둘러댔다. 챙강, 챙강! 애처롭게 칼날이 울고 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은 갈라져서 또다시 원을 그러며 빙빙 돌았다. 쾌도가 대뜸 소리쳤다.
"저 사람들을 놓아줘야 할걸!"
"악기, 계속 나를 막아 선다면 네 놈까지 죽여 버릴 테다!"
"그따위 재주로 날 죽여? 소 웃다 코뚜레 터질 소리 말아랏!"
"이 엉큼한 녀석! 네 놈은 말끝마다 화산파 여중호걸이요, 화산파의 기둥 같은 여검객이요 하고 나를 치켜 올리더니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내 일찍이 네 년을 추어 준 건 다 네 년이 심지 바르고 선량한 여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근자에 들어 점점 두 눈 까뒤집고 날뛰니 눈꼴 시어서 봐 줄 수가 없단 말이다!"
"뭐야? 이 후레자식 같은 놈!"
육사고는 훌쩍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돌며 화산삼현을 펼치며 연거푸 세 번이나 쾌도 악기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악기는 세 번 다 너끈히 피해 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날렸다. 육사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내심 자기가 이 검법만 펼쳐 보이면 그 당장 악기는 옴짝달싹 못하고 굴복할 것이라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에 검술을 익힐 때도 화산삼현만 펼치면 악기는 손을 바짝 들었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 보니 악기는 여태껏 화산파 검술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고 얼렁뚱땅 속여 온 것이었다. 육사고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싸늘히 쾌도를 노려보았다.
젊은 여승들은 화산파 무리들 앞에서 깍듯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린 암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화산 기슭에 붙어 사는 생령들이 아니옵니까? 똑같은 물줄기에서 나오는 샘물을 먹고 밤마다 똑같은 수림에서 들려 오는 바람소리로 귀를 돋우며 이웃해서 살아가고 있사온즉, 오랜 이웃간의 정을 봐서라도 길을 틔워 주셨으면 하옵니다."
화산파 제자 하나가 유심히 이 여승을 건너다보았다. 미목이 수려하고 말이 청산유수인지라 모름지기 춘심이 동하는 것이었다. 이고암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니 으슥한 야밤에 몰래 숨어 들어가 저 애티 나는 여승과 정을 통하면 여복이나 좋겠는가. 젊은 사내는 실없이 히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어여쁘신 암주 아가씨, 화산파 삼로만 돌려주면 가마에 태워 보내 드리겠소. 그렇게만 한다면 고작 늙어빠진 세 문지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혹독하게 고생할 턱이 있겠소?"
"남을 착하게 대해야 남도 자기를 착하게 대하는 거지요."
어린 암주는 침착하니 또박또박 말하더니 정중히 합장을 하고는 이내 발길을 옮겼다. 여승들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게 섰거라!"
젊은 사내는 한번 본때를 보일 심산으로 쓰윽 검을 빼 들었다. 여승들은 흠칫 멈춰 섰다. 사내는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멋지게 검을 휘두르다가 어린 암주의 코앞에다 바싹 검끝을 세웠다. 암주의 콧날과 불과 한 촌 거리였다. 사내는 느물느물 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화산파 제자들 중에서도 내 무공이 단연 으뜸이지. 오늘 나의 뛰어난 검술을 보면 이 여승은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놀랄 게야!'
사내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요란스럽게 검을 부리며 다가와 봉황새가 대가리를 갸웃하는 형상으로 검끝을 암주의 눈앞에 들이댔다. 봉점두(鳳點頭)초수였다. 하나 천만 뜻밖으로 어린 암주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앞에서 나불거리는 검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태연하고 냉랭한 자태였다.
만약 이자가 무공깨나 익혔다면 암주가 무서운 정력(定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채고 얼른 물러섰을 터였다. 그러나 본디 미련한 이 사내는 재간을 부린답시고 더욱 바싹 검끝을 들이댔다. 그때였다. 불현듯 암주의 손이 번쩍 하더니 툭 소리가 나며 대번에 검이 두 동강이 나 땅에 떨어져 버렸다.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말고 어서 길을 비키시오!"
어린 암주는 정색을 하고 조용히 꾸짖었다. 화산파 제자들은 너나없이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젖내나는 어린 여승에게 이처럼 무서운 내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암주는 싸늘히 그들을 쏘아보더니 선뜻 몸을 돌려 초연히 한연 사태 뒤를 따랐다. 본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졸장부들만 육사고 뒤를 따른 터라 화산파 제자들은 더는 길을 가로막을 엄두도 못 내고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악기는 이제 육사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쪽 여승들 쪽으로 눈길을 던지더니 이내 화산 봉우리를 쳐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아버님, 소자는 죄를 짓고 떠나갑니다!"
그리고는 맨 뒤에서 여승들을 따라 발길을 떼놓았다. 육사고는 얼핏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더니 싸늘히 소리쳤다.
"악기, 한사코 떠날 생각인가요? 그럼 다시는 화산파에 못 돌아오는데도?"
"그렇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육사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급급히 덧붙였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없겠어요?"
"사고, 더는 막아 서지 마오. 내 이렇게 떠나게 되니 한 가지만 알려 주고 싶소. 당신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당신 아버님과 내 아버님은 서로 의형제간이오. 기실 두 분이 의형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연분을 맺게 된 것이오. 하지만 연분은 이로써 끊긴 것이고 나도 그간 당신을 떠받들며 아버님이 진 빚을 얼마간이나마 갚은 셈이오. 그러니 더는 막아 서지 말아 주오!"
육사고는 적이 놀란 눈으로 악기를 쳐다보았다. 악기의 마음을 알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늘 오리무중에 빠져 들곤 했었다. 실로 악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녀 자신은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악기는 화산파 무리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화산파 형제들, 나는 이만 떠나려오. 부디 안녕히들 계시오."
육사고는 선뜻 악기에게 다가섰다. 어떻게든 만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녀의 눈에는 애절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악기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악기는 칼집에 조심스럽게 검을 꽂아 넣으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이여, 검! 이 사내가 산을 내려간 다음에는 좀처럼 칼집에서 나올 줄 모르거라!"
악기는 산등성이를 타고 휘적휘적 산을 내려갔다.
악기는 화산 기슭의 무연한 수림 속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나물을 캐거나 산토끼 따위 산짐승을 잡았으며 저녁에는 화톳불을 피워 놓고 그것들을 구워 먹었다. 그러다가 화톳불이 사그라들면 그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악기는 다시는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로 거듭거듭 작심했다.
이리저리 달포쯤 흘러간 어느 날, 웬 낯 모를 사내가 이 수림으로 찾아들었다. 헌칠한 키에 도포를 걸쳐 입은 씩씩하게 생긴 사내였다. 사내는 저물도록 초가집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악기는 다 저녁에야 산토끼 한 마리를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낮 모를 사내는 말 한마디 없이 악기를 건너다보더니 대뜸 토방에 걸터앉았다. 악기는 내심 흠칫 놀라며 사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복색이며 점잖은 행동거지며 성품이 강직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악기는 넌지시 운을 뗐다.
"노형은 이 누추한 곳에 웬일로 오셨는지요?"
"살인하러 온 사람일세."
낮 모를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하나 그 어투란 도시 말꼬리를 이을 여지를 안 주는지라 악기는 더욱 놀라며 더 말을 나눌 멋이 없어 잠자코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됫박같이 큰 주먹, 바위 뿌리처럼 억세게 솟아오른 목, 어디를 보나 힘이 장사요 무공이 뛰어난 무림의 영웅임에 틀림없었다.
사내는 뚫어지게 악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선 화산파의 위망이 높은지? 아는 대로 말해 주시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왜요?"
사내는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어찌 됐든 화산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화산파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 물어 보는 편이 좋겠소."
사내는 바위처럼 앉아 그윽하면서도 강인한 눈길로 먼 산을 바라다보았다. 악기는 열적게 마주 앉으며 생각을 굴렸다.
'이 사내는 실로 범상치 않군. 필시 속세를 숨어 다니는 제왕이 아니면 강호의 호걸인데…… 대관절 누굴까?'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화산파 사람들은 내일 만나 봐야겠군."
사내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악기를 보고 말을 이었다.
"요즘 화산파 사람들은 정신들이 나간 모양이야. 장문네 내외간을 죽이고 삼로도 폐인이 되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버렸으니. 아무래도 한번 가 봐야겠어."
그제야 악기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첫눈에 제왕의 풍모다 했더니 과연 천하 무림의 대영웅 대협 왕중양이로구나!'
사내는 정색을 하며 악기를 바라보았다.
"내일 화산파들과 만나면 금번 사건의 전후 종말을 알 수 있겠지. 한데 곽명송을 죽인 사내가 바로 자네 아닌가?"
악기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조만간 누군가 이렇게 따지고 들 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곽명송을 죽이기 전에도 여러 번이나 육사고의 사촉을 받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 무림의 대영웅 왕중양이 자기 죄를 물을 줄은 실로 천만 뜻밖이었다.
사내는 다시 느릿하니 말을 이었다.
"악기, 세상만사는 인연이 있고 업보가 있는 법일세. 자네는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으니 마음이 편할 리 있겠나?"
악기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만천하에 이름을 떨친 왕중양에게 걸렸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과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요,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악기는 쑥스럽게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치만 매번 다 죽일 만한 연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곽명송만은 죽이지 말았어야 했지만……."
"난 화산파 내부 일엔 손대고 싶지 않소. 하지만 삼로의 부탁을 받았으니 곽명송을 죽인 까닭만은 똑똑히 밝혀야겠소. 좌우간 곽명송을 죽인 건 자네가 틀림없겠지?"
"틀림없소이다."
사내의 너부죽한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그는 악기가 강호의 쾌도로 이름을 날렸고 됨됨이도 정직하다고 익히 들어 왔었다. 한데 장가를 든 후부터는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나쁜 짓만 한다는 것이었다. 육사고란 계집이 대관절 얼마나 요망스러운 계집이기에 선량하고 정직한 사내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사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쾌도 악기도 분명 덮어놓고 계집의 장단에 춤출 지경으로 어리석은 사내는 아닌 듯하고, 여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악기, 하고픈 말이라도 있으면 툭 털어놓으시게."
"날도 저물었고 또 예까지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저를 죽이시려거든 요기나 하고 죽여 주시오."
악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저녁이나 들고 보세."
악기는 더는 사내와 말수작을 않고 가죽을 벗겨 내고는 토끼를 화톳불에 노랗게 구워 냈다. 그리고는 조롱박에다 술을 내놓으면서 벙긋 웃었다.
"자, 한잔 하십시다. 퍽 오래 전부터 천하 영웅을 논할진대는 대협 왕중양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는 말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내 첫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이제껏 명성만 자자하게 들어 오다가 이참에 한자리에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게 되었으니 이 한평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은 것 같소이다."
악기가 허허 웃자 왕중양도 맞받아 껄껄 웃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술을 마시고 담소하는 악기가 내심 대견스럽기 그지 없었다. 둘은 권커니자커니 술잔을 나누고 토끼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강호에 떠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주고받았다. 두 사내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간처럼 서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어느새 중천에 걸렸다.
왕중양은 악기를 건너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서글서글하고 후덕한 사내가 여북하면 사람을 죽였을까……. 왕중양은 데면데면하니 악기를 건너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악 형, 이젠 아까 하던 얘기나 좀 해 봅시다. 가슴에 응어리 진 얘기가 있을 법한데 어디 속시원히 말 좀 해 보시오."
"곽명송을 죽인 건 정말 잘못된 노릇이지요. 중양 진인께서 곽명송을 위해 복수코자 하신다면 소인은 할말이 없소이다."
악기는 달빛 쏟아지는 밤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며 숙연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왕중양은 측은한 생각이 새록새록 깃들였으나 삼로의 부탁을 저버릴 수도 없는 터, 침울한 기색으로 조용히 악기를 꾸짖었다.
"악기, 그렇게 악한 짓을 할 건 뭔가?"
악기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왕중양을 똑바로 쳐다보며 선뜻 말했다.
"중양 진인, 물론 노형의 무공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한번 겨루어 보고 죽기가 소원입니다!"
"좋아, 한번 겨루어 봄세."
왕중양은 악기의 됨됨이가 적이 대견스러워,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 강호 무림에서는 대협 왕중양과 더불어 무공을 겨루다 죽는 것을 더없는 영예로 알고 있는 터였다. 왕중양은 조용히 일어나 악기와 마주섰다. 그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악기 쪽에서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수림에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악기, 악기이!……."
악기는 흠칫 놀라더니 귀찮은 듯 이맛살을 찡그렸다.
"중양 진인, 마음을 가다듬어 노형과 싸우고 싶으니 잠시 틈을 주시오."
"좋아! 누군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니, 내 기다리지."
왕중양은 선선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숲 속에서 껑충 뛰어나왔다. 서른 살 될까말까 한데 다소 거친 데가 엿보여도 꽤나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쪽에 장승처럼 서있는 왕중양은 보지 못했는지 냉큼 악기 쪽으로 다가가며 반가운 기색으로 종알거렸다.
"내 진작부터 알았지요, 멀리 가지 않을 줄 말예요……."
"내가 멀리 가든 가까이 있든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오?"
그러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기, 당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당신은 늘 저한테 양보만 했지요. 더욱이 결혼한 후부터는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어요. 그 통에 결국 제가 이 꼴 이 지경이 되었지만."
어두운 그늘 밑에서 왕중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은 제가 저지르고 죄는 남정한테 들씌우다니, 실로 요망스러운 계집 아닌가.
악기는 말 한마디 없이 어둠 속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육사고는 악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좋은 말로 몇 마디만 구슬리면 원체 어리숭한 사내라 꼭 나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악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도 잘못한 게 많았어요. 당신은 쾌도 악기로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 제가 집에서 늘 들볶아대고 바가지만 긁었으니까요. 더욱이 남들 보는 데서까지 당신한테……."
그래도 악기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육사고는 더욱 살갑게 눈웃음을 치며 빌고 들었다.
"악기, 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 슬하에서 응석받이로 자랐어요. 당신한테 시집간 후에도 당신이 아끼고 쓰다듬어만 주었으니 이런 철없는 계집이 된 것 아니겠어요? 이제 당신마저 절 버리면 어느 사내가 저를 주워 가겠나요?"
육사고는 일순 짐짓 통곡을 해댔다. 악기는 그래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읊조렸다.
"악기, 화산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어요. 장문인 내외간이 피살당한 후로는 저 혼자서 화산파의 중임을 메고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이럴 때 저를 돕지 않고 언제 돕겠어요? 사내대장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절 좀 도와주세요, 네?"
"난 당신을 도와줄 힘이 없소."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한테는 얼마든지 힘이 있어요. 지난번 한검당에서 맞섰을 때 보니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당신은 이제껏 절 속이기만 했어요. 이봐요 악기, 제발 우리 화산파를 헐뜯고 미워하는 놈들을 몽땅 죽여 주세요. 그러면 저는 화산 대회를 열고 천하의 호걸들을 청해 큰 잔치를 벌이겠어요. 그때 가면 누가 감히 이 육사고를 업신여길 수 있으며 어느 무리들이 감히 우리 화산파를 넘볼 수 있겠어요?"
육사고는 말할수록 신바람이 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들며 침을 튀겼다. 악기는 어쩐지 속이 울컥울컥 치받쳐 올랐다. 이토록 철면피 같은 계집과 여태껏 살아 온 자신이 한스러웠다.
'내가 왜 이 욕심스럽고 괴팍한 계집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살아왔던가? 만약 내가 일찌감치 이 계집과 갈라섰더라면 지금쯤은 천하 영웅들이 부러워하는 진짜 쾌도가 되었을 텐데……. 이 욕심 사나운 계집은 지금도 나를 장기쪽처럼 다루려고 하지 않는가?'
악기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담당히 말했다.
"일전에 내 그대에게 얼추 말한 적이 있지만 당신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의형제를 맺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소. 오늘 좀더 자세히 말해 볼까. 우리 아버님은 임종시에 그대를 아내로 데려다가 평생 목숨을 걸고 아끼고 보호해 주라고 유언을 남기셨지. 왜 그랬는지 아오? 그대의 아버님이 우리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기 때문이오."
그 말에 육사고는 두 눈에 함빡 웃음을 머금고 바짝 다가들었다.
"그래요? 저는 정말 몰랐네요. 아무튼 저는 그 동안 당신을 너무 괴롭힌 것 같아요. 이제부턴 착하고 어진 아내가 되어 당신을 극진히 섬길 테니 다시 한 번 의좋은 부부로 살아 봐요, 우리!"
"아니오. 당신의 남편으로는 이만 됐소."
뜻밖의 소리였다. 육사고는 그만 온갖 기대가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대번에 악에 받쳐 소리를 쳤다.
"악기, 방금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당신네 아버님 목숨을 구해 줬고 그 대가로 당신은 한평생 나를 아끼고 보호해 주기로 언약했다고!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다시 한 번 더!"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자 악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그런 언약이 있었고 또 나는 그 언약대로 했던 거요."
"당신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언약을 지켜야 해요.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화산파로 돌아가 저를 도와주세요!"
육사고는 대뜸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악기는 거세게 뿌리치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담, 오늘 안으로 내 목숨을 그대에게 바치면 되는 것 아니겠소?
"뭐요? 오늘 안으로 뭘 어째요? 흥, 나를 놀라게 할 거라면 그따위 수작은 그만둬욧!"
그러자 악기는 어둠 속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중양 진인, 죄송스럽지만 좀 이리로 나와 화산파의 새 장문 아씨에게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그 말에 육사고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왕중양은 어둠속에서 몸을 드러내며 육사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늘 안으로 꺼져 버려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악기가 급급히 소리를 쳤다.
"잠깐만요!…… 말씀하셨다시피 의당 곽명송을 죽인 자가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곽명송은 내가 죽였으니 나를 혼내 주시오!"
"악기, 자낸 참 답답한 사람이구먼. 이런 악귀 같은 마누라를 감싸 주는 이유가 대체 뭔가?"
"중양 진인, 악귀든 마귀든 아직까지는 내 아내니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되오. 죽이려면 어서 나를 죽이시오!"
악기는 발끈 성을 냈다. 왕중양은 허탈하니 미소를 지었다.
"이 벽창호 같은 사람아!"
왕중양은 악기에게로 성큼 다가서며 전신에 내력을 운행시켰다. 왕중양의 온몸이 불더미처럼 달아오르고 무서운 기류가 악기의 몸에 닿기 시작했다. 악기는 점점 숨이 가빠지고 바람에 펄럭이는 돛폭처럼 온몸이 앞뒤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지가 나른해서 그는 검을 잡을 힘도 없었다. 쾌도는 마치 천애절벽과 마주선 사람처럼 숨이 막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모습을 보고는 육사고가 혼비백산하여 물어뜯을 듯이 왕중양을 쏘아보며 악을 써댔다.
"당신이 그 왕중양이란 사람인가요? 당신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 화산파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나는 본디 싱거운 사람이오. 천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고 발벗고 나서는 싱거운 사람이란 말이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왜 속도 모르고 닷곱에도 참례, 서 홉에도 참견이냔 말예요? 까놓고 말해 자기 뒤도 구린 양반이……."
그 말에 왕중양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 계집이 지금 임조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 추잡하고 망측한 계집이 언감생심 임조영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왕중양의 얼굴에는 대번에 살기가 내비쳤다.
악기는 얼핏 눈치를 채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왕중양 앞을 막아 섰다.
"중양 진인, 곽명송을 죽인 죄인이나 논죄하십시오!"
그러나 왕중양은 시끄럽다는 듯 잔뜩 양미간을 찌푸리고는 악기를 옆으로 확 밀어 버렸다. 그리고는 육사고에게 더욱 바투 다가섰다. 그의 한 장이면 육사고는 박살이 날 판이었다. 하지만 육사고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점점 독이 올라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왕중양, 당신도 사내대장부라면 계집을 후려 잡든지 아니면 잡히든지 해야 할 게 아니에요? 한데 당신과 임조영 사이는 오래도록 서로 버성기기만 하다가 끝내 죽어 가는 걸 그대로 내버려뒀으니 정말 꼴불견이군요. 흥, 남의 허물은 잘 알지만 당신 역시 계집 하나 꺾지 못한 양반 아닌가요! 그래도 천하 호걸이랍시고 남의 제사에는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야단을 치는군요! 입이 써요, 입이!"
왕중양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육사고의 말도 그른 데가 없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그녀의 도도한 성품에는 결코 수그러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로 육사고의 말마따나 그는 계집 하나 다를 줄 모르는 매력 없는 사내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한 번 절절한 사랑을 고백해 보지도 못하고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렸으니, 안 그래도 그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던 터였다. 하나 아무
리 육사고의 말이 일리가 있다 해도 그 말은 그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그는 사납게 육사고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악기가 또 왕중양에게 대들었다.
"왕중양, 왜 섬약한 계집을 못살게 구는 거요. 당신도 강호의 협객이라면 이 쾌도하고 한판 겨룹시다."
왕중양은 감때 사납게 악기를 흘겨보았다.
"이 놈, 잔말 말고 있어. 네 놈은 칼이나 휘둘렀을 뿐, 진짜 흉수는 이 계집이란 말야!"
왕중양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먹을 번쩍 쳐들었다. 그 주먹이 떨어지면 육사고의 머리는 당장 묵사발이 될 터였다. 육사고는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악기, 악기, 날 구해 줘요!"
악기는 힘껏 육사고를 밀쳐 버리고 제가 그 자리에 가 섰다.
"왕중양, 내가 대신 죽으리다!"
일순 쾌도의 검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삽시에 그의 머리가 뎅겅 땅에 나동그라졌다.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땅에 굴러 떨어진 그의 머리에서 눈만은 애절하게 왕중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육사고 만은 살려 주십사고 간절히 애원하는 듯싶었다.
왕중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수백, 수천 번이나 사경을 넘나든 왕중양이건만 눈알이 뒤집힐 지경으로 놀랐다. 악귀 같은 여편네를 위해 죽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내인가.
아니, 아니다! 과연 쾌도야말로 가장 신의를 지키는 사내인지도 모른다……. 왕중양은 서글픈 마음으로 쾌도의 처참한 시신을 내려다보며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어서 이 자리를 뜨게나.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아라!"
육사고는 얼빠진 사람마냥 넋을 잃고 악기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데려가려 왔다가 이런 참변을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중양은 왕중양대로 그녀를 아랑곳 않고 견딜 수 없이 쓰라린 가슴을 움켜잡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과 임조영 사이를 견주어 보고 있었다. 자신은 악기처럼 이렇게 죽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망정 만일 죽으라고 한다면 자연 뒷걸음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끝내 방관한 격이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우직한 사나이 악기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밉더라도 결국은 자기 아내인 육사고를
위해서 서슴지 않고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왕중양은 악기의 시신 앞에 풀썩 꿇어앉았다.
"악기, 자네는 진짜 사나일세! 난 자네의 부탁대로 자네 아내를 놓아주겠어. 자네의 죽음으로 화산 삼로와 곽명송의 일도 다 끝난 셈이니……."
육사고는 흑흑 흐느껴 울더니 별안간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뭐가 끝났단 말이냐, 뭐가?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어서 내 남편을 살려내! 살려내!"
왕중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 순간, 선뜻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내처 걸어갔다.
"왕중양! 왜 도망을 치는 게냐? 내 남편을 살려내라니깐!"
왕중양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서서 잡아먹을 듯 육사고를 쏘아보았다. 육사고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악을 써댔다.
"당신만 오지 않았던들 내 남편이 죽을 리 있느냐? 당신은 피값을 치러야 해. 자, 칼을 받아랏!"
육사고는 고함을 지르며 냅다 내달아 왕중양의 가슴팍을 향해 똑바로 검을 찔러 왔다. 왕중양은 피할 생각도 않고 피식 웃으며 번개같이 손을 뻗쳐 들어오는 검을 가볍게 받아 쥐었다. 육사고는 흠칫 놀라 안간힘을 쓰며 검을 빼려 했으나 마치 얼어붙은 듯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검술로 보아 삼로 정도라면 나와 얼마간 어울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십 합을 넘기기 어려워! 네 년 검술로는 묶어 놓은 양이나 간신히 잡을 정도다! 그따위 재간으로 화산파의 장문이 되려 하다니, 낯뜨거운 일이로군!"
"이거야 정말 고자가 물건 자랑하는 격이로군! 하, 그따위 자랑은 임조영이란 년 혼백에나 가서 하란 말야!"
육사고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이 계집이 입에서 구렁이가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주둥아릴 놀려? 실로 네 년 같은 악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쾌도 악기만 불쌍할 따름이다. 반병신 같은 사내야!"
육사고가 다시 임조영을 들먹이자 왕중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되는 대로 내뱉었다. 그러나 이내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이면 신의와 의리를 지켜 비장하게 죽어 간 쾌도 악기를 입에 올리다니……. 그러느라 왕중양이 잠시 틈을 보이자 육사고는 힘껏 검을 뽑아 냈다. 그리고는 단박에 다시금 검을 휘둘러댔다.
왕중양은 육사고쯤은 여반장으로 꺼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손을 쓰지 않고 슬쩍슬쩍 피하기만 했다. 육사고는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고 다시 무섭게 검을 내질렀다. 왕중양은 예의주시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일순 장지와 식지로 슬쩍 칼등을 낚아 쥐었다. 검은 또다시 허공에서 요지부동이 되었다.
"아이고 분통해라! 이젠 더 청승을 떨지 말고 아예 날 죽여라, 죽여!"
"너 같은 것을 죽여 봐야 내 손만 더러워질 뿐."
"내 하늘 같은 남편을 죽였으니 나까지 죽여야 속이 시원하지 않겠느냐? 이 악귀 같은 놈아, 어서 나까지 죽이란 말이다!"
육사고는 미친 듯이 왕중양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밀며 길길이 뛰었다. 왕중양은 가볍게 몸을 피해 버렸다. 육사고는 계속 쫓아오며 죽여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왕중양은 번번이 피하다가 육사고가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려 살짝 피했다. 그러자 육사고는 그만 나무에 머리를 박고 그 힘에 밀려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래도 육사고는 수그러 들지 않고 팔딱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이 악귀 같은 놈아, 내 지금은 네 놈에게 죽지만 내세에는 네놈이 내 칼을 맞고 죽으리라!"
육사고는 왕중양을 힐끔 쳐다보더니 자기 목에다 대뜸 검을 가져다 댔다.
"왕중양, 네 놈에게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빨리 네 갈길이나 가거라!"
그녀는 짐짓 목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왕중양은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러지 말고 나도 좀 구경을 하자꾸나. 네깟 계집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모든 사람들이 맘놓고 살 수 있는 거다!"
"흥, 왕중양! 그러고도 천하 호걸이랄 수 있느냐? 일개 아녀자를 몰아세워 자결하게 했으니……."
왕중양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회심의 미소를 띤 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육사고는 미칠 지경이었다. 애시당초 그녀는 자결 같은 걸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왕중양을 혼쭐이나 내 주자는 것뿐이었다. 한데 왕중양은 도리어 흐물흐물 웃고만 있지 않은가? 그녀는 몹시도 조바심이 났다.
"네 놈은 스스로 정파의 호걸이라고 자처한다면서? 난 정파 사람들에게 이 일을 다 백일하에 드러내겠다. 왕중양이라는 놈은 결코 부처님같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야!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 번 깜짝 않는 악한이라고."
"맘대로 해, 하지만 네 년이 자결하는 시늉만 했다는 말일랑은 절대로 꺼내지 말아라! 그럼 톡톡히 망신만 당할 테니!"
육사고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매섭게 왕중양을 쏘아보더니 팔소매를 털며 벌떡 일어나 그 길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숲 속 샛길로 사라졌다.
왕중양은 절로 쓴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악기를 묻어 줄 구덩이를 파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악 형, 자네가 목숨까지 바친 여자건만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누먼. 자네의 죽음은 이렇게도 값없단 말인가? 그래도 단 한사람, 나만은 자네의 충정과 신의를 오래도록 기억할 걸세."
왕중양은 세상의 야박한 인심에 새삼스러이 진하게 회의가 몰려왔다. 그는 슬그머니 내력을 운행시켜 손끝을 놀려 땅을 파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제33장 애증
새로 삼경이 지났으나 단지흥은 뒤척이며 좀체 잠들지 못했다. 자꾸만 눈앞에 숙비와 두 태감이 놀아나던 장면이 어른거려 그는 연신 장탄식만 토해냈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가 황궁의 법도가 이다지도 문란해졌단 말인가! 그는 온통 뒤숭숭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 순간, 밖이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발이 들쳐지며 영고가 태감들을 물리치고 성큼 들어섰다. 단지흥은 적이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하며 한팔로 아기를 안고 있는 품이 자못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냉큼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이 아이를……."
단지흥은 얼른 일어나 급히 굽어 보았다. 과연 아기의 두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숨소리도 몹시 가쁜 듯했다. 실로, 예사로운 일이 아닌지라 그는 얼른 아기를 받아 안아 강보를 헤쳤다. 자세히 보니 아기의 뒷잔등 늑골이 이미 다섯 대나 부러져 있었다.
영고는 미친 듯이 연해 울부짖었다.
"폐하, 천첩이 지은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하오나 제발 이 아기의 가련한 목숨만은 구해 주소서! 한시가 급하옵니다, 폐하!"
"아기가 왜 이렇게 됐소?"
단지흥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라 재우쳐 물었다. 그러나 영고는 그 말엔 대답도 없이 그저 울며 애원할 뿐이었다. 단지흥은 거듭 물었다.
"말을 해야 알 게 아닌가? 누가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영고는 끝내 대답을 않고 어깨를 들까불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단지흥은 도무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필시 냉궁에 무슨 변고가 생겼음에 틀림없었다.
"폐하께서 천첩더러 죽으라고 해도 저는 아무런 원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애, 이 애만은……."
단지흥은 부아가 났다.
"누가 그대더러 죽으라던가? 대관절 아기는 왜 이 지경이 된 거요? 말을 해요, 말을!"
그제야 영고는 비칠비칠 머리를 들어 단지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한 가닥 기대의 빛이 어려있었다.
"그러시다면 정녕 폐하께서 시킨 일이 아니로군요!"
단지흥의 목소리는 갑자기 격하게 떨려 나왔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대관절 어떤 놈이 그랬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독한 짓을 했단 말이야?"
영고는 유심히 단지흥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필시 단지흥이 시킨 짓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즉시는 미처 생각을 못했으나 그자가 단지흥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품이 내심 매우 미심쩍었던 것이다. 단지흥이 시켰다는 것을 은폐하려고 일부러 더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보아하니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영고는 대번에 자신을 휘감아 돌던 안개가 풀리는 듯했다.
"알았어요, 폐하의 성지가 아니라면 이 애는 살 가망이 있어요."
영고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단지흥은 황급히 몸을 굽혀 영고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살내음에 단지흥은 부지중 몸을 흠칫 떨었다. 다른 사내의 계집을 범하려 할 때 꼭 그러하리라. 그녀의 살내음은 단지흥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호되게 자신을 질책하며 영고를 침대에 기대 놓고 아기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무슨 수를 써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
로지 무서운 진동 때문에 혈맥들이 끊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놈이 그랬을까. 필시 만만치 않은 놈임에 틀림없어. 한데 왜 이처럼 사정을 두었을까? 이 애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대단히 사정을 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단지흥은 아이를 내려놓고 부랴부랴 냉궁으로 달려가서는 이 잡듯이 샅샅이 살펴봤으나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다만 창문과 지붕 위의 기왓장들에만 보일락말락 발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단지흥은 다시 급급히 침궁으로 돌아왔다. 영고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폐하, 황후께서 하사하신 단설기에 독약이 들어 있었사옵니다."
영고는 고개를 들어 빤히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지흥은 흠칫 놀랐다. 독이라니……. 단지흥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어 장탄식을 토해냈다.
"독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고? 그렇담 그대의 궁에 널브러져 있는 궁녀들도 모두 독에 중독된 것이란 말이오? 난 방금 그대의 궁에 다녀왔소. 얼핏 보아도 중독된 것이 분명한데……."
영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그토록 온화하던 황후가 이런 악독한 짓을 하리라고는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만일 단지흥이 종일토록 수심에 잠겨 있고 또 자기를 그토록 미워하지 않았다면야 황후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고는 일순 단지흥을 향한 증오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지흥은 영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단설기는 내가 보낸 거요. 황후와는 아무 상관도 없소!"
영고는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곧 비 오듯 눈물을 쏟아 냈다.
"폐하! 왜, 왜 독약을 뿌렸어요? 왜요?……."
그녀는 정신나간 사람마냥 울부짖었다.
"난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소! 이 일은 그 찬합을 가져 간 두 태감에게 물으면 즉시 알 수 있을 것인즉!"
단지흥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하고는 지체 않고 그 두 태감을 불러들였다. 두 태감은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덜컥 겁을 집어먹고는 다 죽은 사람처럼 혼이 빠져 넙죽넙죽 걸어 들어왔다. 태감들이 들어오자 단지흥은 벽력같이 호통을 내질렀다.
"네 놈들은 내막을 알 것인즉, 이실직고하렷다!"
그러자 개중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소, 소인들은 모,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다만 찬합을 들고 가던 도중 갑자기 쥐가 나 찬합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것밖에는 없사옵니다."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깊은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는 두 태감에게 그만 물러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들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꽁무니 빼듯 황황히 물러 나갔다. 영고는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아무리 봐도 단지흥이 자기 모자를 죽이려고 계책을 꾸민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 자객은 재주가 대단한 놈이야. 특히 경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우리 대리국에는 나를 내놓고 이만한 공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영고는 단지흥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갑자기 낯빛이 질려 부르짖었다.
"그럼 그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 사람이 왜 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겠어요?"
근자에 들어 많은 경난을 치러 낸 단지흥은 그 자객이 필시 주백통이 사주한 놈일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너 같은 아녀자의 소견으로는 그자가 도저히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겠지. 네가 어찌 그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자가 속해 있는 전진교는 중원에서는 소문 높은 명문대교야. 그러니 주백통이 전진교의 얼굴에 먹칠하는 걸 보고만 있을 리야 없지. 후일 강호 무림에 이 아기의 이름을 꺼내 놓는다면 전진교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영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절대로 그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단지흥은 그저 영고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평소의 그 아리따운 자태는 간데없고 살기마저 섬뜩하게 풍겨 나왔다.
단지흥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묵묵히 강호 무림 중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손꼽아 보았다. 그러나 여러모로 따져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진교 사람들이라면 왕중양을 제외하곤 마옥이나 구처기(丘處機) 같은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설사 이들이라 해도 왜 자기가 하사한 음식을 이용하여 독을 쓰고, 더욱이 필시 이 아기를 죽여 버리려 했음이 분명한데 왜 완전히 죽이지 않고 실오리만큼이라도 목숨을 붙여 둔 것일까? 만일 이들이 아니라면 서역의 구양
봉……. 하나 영고의 말에 의하면 그 자객은 몸집이 작은 그 추 선생이라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골이 장대한 구양봉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 그 추 선생이란 대관절 누구인가?
그때였다. 영고가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폐하, 이…… 이걸 보세요……."
영고는 아이를 부여안고 애절하게 단지흥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깜빡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고 있었다. 그는 영고에게서 얼른 아이를 받아 안았다. 영고는 처연히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예 다시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영고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아이를 안아 올리다가 일순 번개가 번쩍 정수리를 내리치는 듯하여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처 보지 못했으나 아이를 감싼 비단 강보에는 그때 주백통이 떨구고 간 그 비단 손수건에 그려진 것과 똑
같은 원앙새 한 쌍과 시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 두 남녀의 사랑의 정표……. 영고는 그 멍청한 사내를 못내 그리면서 아이를 이 비단 수건으로 싸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흥은 일순 손길을 멈춘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이 정표는 영고와 주백통 그리고 이 아기를 한데 묶어 주고 있는 끈이요, 언제나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비록 천애지각에 떨어져 있다 한들 함께 있음과 진배없었다.
일순 단지흥은 숙녀동에서 보낸 그 달 밝은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녀는 얼마나 일심으로 자기를 사랑했던가. 황궁에 들어온 후에도 그녀는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손길을 그렸었는데……. 그러던 영고가 주백퉁과 눈이 맞아 아이까지 낳았다. 그뿐 아니었다. 일단 자기가 황궁을 비우면 귀비들마저 태감 놈들과 눈이 맞아 돌아치고……. 그는 일순 두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이제껏 아무 가치도 없는 일생을 헛살아 왔다는 자책감이 걷잡을 수 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이 일단 그렇게 돌아가자그는 자기의 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 주백통의 씨를 살려내야 하는지 선뜻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영고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가물거리더니 차차 단지흥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아기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그저 강보만 내려다보며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녀는 독기가 피어올라 이를 악물고는 지체 없이 품안에서 단도를 쓱 뽑았다. 그리고는 선뜻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폐하, 폐하는 끝내 천첩의 원을 저버리려 하시는군요. 그렇담 좋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더는 살아갈 면목이 없는 목숨, 천첩의 이 목숨으로 아기의 목숨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천첩은 내세에 소나 말이 돼서라도 폐하의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영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 단도로 자기의 가슴을 쿡 찔렀다.
단지흥은 깜짝 놀라 금나법(擴拿法)으로 영고의 손에서 장도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칼끝은 이미 영고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대번에 그녀의 앞가슴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단지흥은 영고가 또 죽으려 덤빌까 봐 그녀의 손발에 있는 혈도를 잽싸게 눌렀다. 그리고는 앞가슴의 상처를 동여매 주고 편히 눕혔다. 그러는 동안 내내 영고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애절하게 단지흥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애원의 빛이 흘러 넘
쳤다. 아기의 가냘픈 숨소리는 연해 들려 왔다.
그러나 단지흥은 아기의 숨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지나간 일들에 대한 상념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영고는 진정 다른 궁녀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와 더불어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던가. 그녀로 인해 진정으로 여인을 알았고 진정으로 자기가 사내임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영고는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던가. 그는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만일 그녀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어떻게 주백통과 그런 짓
을……. 이제 와서는 치주까지도 애초에는 대환희 보살의 사주를 받아 자기에게 접근했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한 여인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단지흥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헛살아온 이 일생을 보상받지 못하리라……. 한 순간, 그는 벌떡 솟구치더니 자기 앞에 놓인 상아 걸상을 있는 대로 걷어찼다. 상아 걸상은 대번에 산산조각이 났
다. 단지흥은 씩씩거리며 몸을 홱 돌려 영고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영고는 맥이 빠진 채 처연히 아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녀의 머리가 차츰차츰 잿빛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점점 새하얗게 퇴색해 가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너무나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더듬더듬 소리를 내질렀다.
"그 머리. 그 머리……. 영고, 그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그러나 영고는 그가 뭐라 하든 아기만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참으로 절절하고 사랑과 연민이 충만해 있었다. 단지흥은 입을 다문 채 멍청하니 그녀를 지켜 보았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기의 모든 사랑을 쏟을 때는 다 저런 것일까? 이 여인은 진정으로 그 주가와 아기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가 아니고…….'
단지흥은 힘없이 거울을 집어 들어 영고에게 건네 주었다.
"보오! 당신 머리를 좀 보오!
이제 영고의 머리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 새하ㅇ다. 이 짧은 동안 마치 몇 십 년 세월이 흐르기나 한 것마냥 그녀는 공포와 근심, 회한, 실망, 상심에 부대끼다가 머리마저 세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데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녀는 거울로 자기의 시선을 가로막는 단지흥이 귀찮기만 했다.
"이 거울을 냉큼 치워요!"
그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으나 적이 날카로웠다. 단지흥은 너무나 착잡하여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 나가는 듯싶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주백통, 치주, 숙비의 얼굴이 어지럽게 오락가락했다. 그는 아물아물 정신을 잃으며 희끗희끗한 영고의 귀밑머리를 힘없이 건너다볼 뿐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일순 영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를 구해 줄 마음이 없다면 어서 내 혈도나 풀어 주어요. 난 아이를 안아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단지흥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영고는 손발이 움직여지자마자 성큼 아기에게 다가들어 으스러지도록 힘껏 아기를 껴안았다. 아기는 온통 얼굴을 찡그리고 까무러치듯 온몸을 뒤쳤으나 더 이상 울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양 볼이 새파랗게 질린 채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벙긋거리며 영고를 쳐다 보았다. 마치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아기를 내려다보면서 영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야, 이 엄마는 네 목숨을 살릴 재주가 없구나. 자거라, 아가야. 달콤한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라!"
영고는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콤한 노랫가락이 힘없이 방안을 떠돌았다. 단지흥은 게슴츠레하니 초점 잃은 눈빛으로 두 모자를 지켜 볼 따름이었다.
일순 아기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어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더욱 격하게 온몸을 뒤챘다. 아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영고는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내 귀염둥이, 어서 자야지. 잠이 들면 아프지 않단다. 어서 자거라, 내 귀염둥이야……."
영고는 한참이나 아기에게 중얼중얼 속삭여댔다. 그러더니 한 순간, 단도를 쓱 쳐들더니 아기의 가슴팍을 힘껏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껏 멍하니 앉아 있던 단지흥은 바위 덩어리로 호되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마냥 정신이 반짝 들며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짓이오? 내 이제 아기를 구, 구하려고……."
그는 혼비백산하여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껏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언제든지 한번은 내가 이 단도로 당신의 가슴팍을 찌를 날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는 영고는 자기 팔목에 차고 있는 옥팔찌를 들어 보였다.
"이건 내가 입궁할 때 당신이 나한테 준 것이에요. 기억하시죠? 두고 봐요, 내가 이 옥팔찌를 돌려드리는 날이 곧 이 단도가 당신 가슴팍에 꽂히는 날일 테니……."
영고는 싸늘하게 뇌까리고는 아기를 안고 훌쩍 창문을 뛰어넘었다. 단지흥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짐에 따라 미친년 울부짖는 듯한 그녀의 웃음 소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단지흥의 눈앞엔 점점 하얗게 세어 가던 영고의 머리칼이 또렷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넋을 잃고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한 순간, 문득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폐하, 왜 홀로 말없이 앉아 계시옵니까?"
단지흥은 소리나는 쪽으로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두 태감과 눈이 맞아 놀아난 바로 그 숙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단지흥의 마음을 돌려 세워 보려고 이렇듯 찾아온 것이었다. 단지흥의 마음을 풀어 주지 못하면 큰 화가 미칠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러가거라! 난 오늘 마음이 몹시 언짢다."
단지흥은 그녀를 외면하며 나직이 내뱉었다. 그러나 숙비는 되레 선뜻 다가들어 야들야들하니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그녀의 손을 탁 떨쳐 내며 퉁명스레 소리를 질렀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홀로 있는 게 소원이노라."
그러자 숙비는 주춤하더니 눈웃음을 치면서 애교를 부렸다.
"폐하, 잠시 고정하소서……. 이렇듯 폐하께서 홀로 계시려고만 하신다면 저희들은 할 일이 없게 되지 않사옵니까? 귀비가 그토록 많은데도 폐하가 이렇게 홀로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그건 저희들 본분이 아닌 줄 아옵니다!"
기실 숙비의 이 말은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황제로부터 소박이라도 당한 양 오래도록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다보니 본의 아니게 태감들과 눈이 맞게까지 되었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흥은 만사가 다 귀찮아졌는지라 그녀의 말은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숙비는 그가 더는 내치지 않으려 하는 줄 알고 마냥 눈웃음을 치며 살살거렸다.
"폐하께서는 나라일로 속을 많이 태우시고 계시는데 저희들이 제때 제때에 속을 풀어 드리지 못하면 용체가 어찌 되겠사와요? 그러니 그만 고집을 꺾으시고 천첩과 함께 이 밤 푹 쉬시와요."
단지흥은 물끄러미 숙비를 건너다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영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영고의 집념에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영고는 일단 한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여자다. 제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못해 삼단 같던 검은 머리가 백발로 변했으니 비단 수건에 수놓아 있던 시구처럼 '늙기도 전에 머리가 먼저 센'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지 않은가.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자기를 사랑해 줄 여인을 손꼽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참담하고 허탈했다.
단지흥이 뭐라 꾸짖지도 않고 멀거니 자기를 바라보자 숙비는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폐하는 필시 날 염두에 두고 계심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면 저리도 넋을 놓고 계시냔 말이야. 저것만 보아도 나에 대한 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숙비는 마음을 턱 놓고는 나긋나긋 단지흥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폐하, 머리 복잡하게 더 생각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그 놈들이야 어디 사내 구실이나 하는 놈들입니까……. 그건 아무런 실속도 없는 헛짓이옵니다. 폐하께서도 그 놈들이 진짜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단지흥은 숙비 말은 아랑곳 없이 깊은 사념에 빠져 들었다.
'본시 세상만사는 죄다 진짜로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담 왜 영고만은 그처럼 고집스럽게 모든 걸 진짜로 대하는 걸까? 그녀는 진짜로 제 아들 애를 죽이고 진짜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지 않았는가…….'
여전히 단지흥이 대답이 없자 숙비는 또 생각을 굴렸다.
'가련하구나. 일국의 황제가 이처럼 바보 같을 줄이야. 황제가 이런 인간인 줄 미처 알았더라면 내가 왜 그따위 태감 놈들과 놀아났겠는가. 그런 일을 친히 보고도 꾸짖지도 않고 저토록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다니……. 앞으로는 매일마다 이 단황을 내 침궁으로 끌어들여야겠어!'
숙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단지흥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이미 깊은 사념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터라 꿈속을 떠도는 사람이나 진배없었다. 그리하여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되 바로 이 시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귀비는 그를 침대로 끌고 가 가만히 눕혔다. 그리고는 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벗겨 냈다.
"궁중에는 사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태감들이야 사내라고 할 수도 없는……. 폐하께서도 태감들이 사내가 아니란 건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 놈들은 천첩과 마찬가지로 폐하의 시종에 불과해요. 시종들의 본분이야 의당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잖아요, 호호호……."
숙비는 워낙 음탕한 계집으로 한때는 단지흥의 총애를 받기도 했었다. 그녀는 자기가 갖은 애교를 다 부려 단지흥의 마음을 일단 녹여 놓기만 하면 그가 더는 자기를 꺼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한 순간, 단지흥의 침궁 문이 스르르 열리며 누군가 잽싸게 안으로 스며 들어가 번개같이 병풍 뒤에 몸을 숨겼다. 그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비가 들어오면서 이미 태감과 시위들을 물린 터였다.
바야흐로 숙비는 단지흥의 몸을 일심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제정신을 끊은 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일순 괴상한 웃음 소리가 방안을 휘저었다.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ㄴ?"
그러자 병풍 뒤에서 세 여인이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세 여인은 모두 볼썽사납게 추하고 뚱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들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왔다.
"방금 보자니깐 사내 다루는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난 그걸 보고 눈이 다 아찔아찔하고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오줌을 다 쌀 뻔했단 말이야."
한 여인이 대뜸 내뱉었다. 그러자 다른 한 여자가 말을 받았다.
"넌 이만한 재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 찾아오지 않았지? 그런 재간만 있다면야 보살님의 일을 훌륭히 거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뚱뚱보 여인 셋은 일제히 박장대소를 했다. 숙비는 강호 사람이 아닌지라 대환희 보살이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감히 황궁 안에 이처럼 숨어 들어온 것만 해도 대죄이거니와 단지흥의 무예는 대리에서도 첫손꼽히는지라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된통 호통을 질러댔다.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그냥 버티고 있다가는 다들 죽는 줄로만 알아라!"
그러자 한 여인이 냉큼 나섰다.
"네 년은 대체 뭐 하는 년인데 우리에게 오라가라 호통을 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년을 잡아다가 우리와 똑같이 뚱뚱보 계집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주둥이 닥쳐! 나 같은 뚱뚱한 몸집을 가지고 이 바람둥이 황제를 어떻게 홀리나 어디 두고 볼까."
숙비는 기겁을 하며 사람을 부르려고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뚱뚱보 여인은 잽싸게 한 손을 날려 그녀의 아혈을 찔렀다.
"이제 됐다. 아무리 악다구니질을 치고 싶어도 마음뿐일걸. 우린 이 단황과 얘기를 좀 나누어야겠으니 넌 저리 가 있어!"
뚱뚱보 여인은 숙비를 확 밀치고 단지흥에게 성큼 다가섰다.
"폐하, 폐하도 벌거벗으니 한갓 필부에 불과하군요, 호호호……. 폐하께서 일양지를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 가르쳐 드리기만 하면 보살님께서는 십분 목숨을 살려 줄 것이고 저도 단황님을 모시고 기쁘게 해 드리겠사옵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거절했다가는 폐하의 목숨은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인 줄로 아뢰옵니다."
뚱뚱보 여인이 한껏 비아냥거리는데도 단지흥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해진 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영고는 어찌하여 나한테는 그토록 냉담하고 그 주백통이라는 놈에게는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영고도 죄다 잊지는 않았을 텐데, 내 저를 그토록 사랑한 것을…….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고 주백통과 정이 맞아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애시당초 날 사랑하지는 않은 게야!'
단지흥은 남이야 어쩌건 말건 자기와 영고 사이에 맺어졌던 지난날의 정을 돌이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고는 그 석굴 안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들켰기에 마지못해 자기한테 시집을 오게 했다고만 낙착이 되자 그는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하나 뚱뚱보 여인들은 천만 뜻밖으로 단지흥이 자기네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멍하게 누워 있기만 하니 자못 어리둥절해졌다. 자세히 보니 눈빛마저 흐릿해져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단황은 중독된 것 같아. 너희들 보기에는 어때?"
한 여인이 묻자 다른 두 여인들도 단지흥을 아래위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눈에 정기가 없는 걸로 봐서는 중독된 것 같아. 하지만 괴상하구나. 자기 황궁 안에서 이 단황이 어찌 중독될 수 있겠어?"
"저 년이 그런 거 아냐? 저 년은 필시 이 바람둥이 임금과 무슨 알력이 있었을 게야. 맞아, 분명 저 년이 독을 안겼을 거야."
한 여인이 숙비를 가리키며 내뱉었다.
"하, 이거 정말 어부지리로구먼!"
한 여인이 쾌재를 부르자 뚱뚱보 여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크게 웃어젖혔다. 한참이나 웃어대더니 개중 하나가 키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단황 놈을 끌어다가 보살님께 갖다 바치자! 보살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니?"
그러자 두 여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이미 아혈을 찔린 뒤라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여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폐하, 미안하게 됐사옵니다. 잠시 억울함을 당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폐하의 아혈과 혈도 몇 군데를 찔러서 대환희 보살님께로 모셔 가겠습니다."
그래도 단지흥은 그녀를 마주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뚱뚱보 여인은 재주가 뛰어났다. 그녀는 번개같이 손을 날려 단지흥의 혈도를 꾹꾹 찔러 놓고는 두 여인을 돌아보았다.
"옷을 입혀 줄까?"
그러자 다른 한 뚱뚱보 여인이 말을 받았다.
"넌 옷을 입은 황제들을 본 적이 더 많으냐, 아니면 알몸으로 나선 황제들을 본 적이 더 많으냐?"
"그야 물론 옷을 입은 황제밖에 못 봤지."
세 여인은 히히덕거리며 서로 눈을 맞추고는 이불로 단지흥을 둘둘 싸서는 꽁꽁 동여맸다.
"사람들은 임금의 몸뚱어리는 천만 금도 넘는다고 하지 않던? 한데 왜 이다지도 가벼울까?"
"저 불여우 같은 년들한테 정혈(精血)을 몽땅 빨린 게지 뭐!"
셋은 단지흥을 친친 동여매고 나서 매섭게 숙비를 쏘아보았다.
"미리 알려 준다마는, 만일 내 년이 궁중 안 누구에게라도 우리가 누구라는 걸 알려 주기만 하면 사흘 안으로 목숨이 달아난다는 걸 명심해, 알겠느냐? 만일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 날에는 이 단지흥과 네 년의 시체를 바꿔 갈 테니!"
숙비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그 여인들이 단지흥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스런 기색이 어른거렸다.
세 여인이 커다란 뭉치를 들고 황궁 담을 뛰어넘자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뚱뚱보 여인 하나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뭘 잡아 오는 게야?"
한 여인이 의기양양하게 내쏘았다.
"대리의 단황 단지흥!"
그러자 마차를 모는 여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허튼소리 작작 해! 단황이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너희들한테 잡혀. 보살님께서 친히 납시셔도 그자를 이길까말깐데 너희들 재간으로 남제를 잡아? 바빠 죽겠는데 왜 농을 치고 난리야, 제길!"
그러자 다른 여인이 나서며 입을 비쭉거렸다.
"믿지 못하겠으면 네 눈으로 한번 직접 봐라."
밖에서 지키고 있던 여인은 급급히 등불을 밝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이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단지흥이 아닌가. 그녀는 잠시 어리벙벙해 있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참말로 단황을 통째로 생포했네그려."
마차를 모는 뚱뚱보 여인은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단지흥의 팔뚝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한데 어떻게 이 대단한 자를 사로 잡았어?"
마차를 모는 여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재우쳐 물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이미 제 귀비 년한테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더라구. 우린 거저 주운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자 마차를 모는 여인은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알고 보니 귀비 년들도 다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돕고 있었구먼. 호호호……."
이윽고 마차는 질풍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모두 준마들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우거진 수림에 다다랐다. 여인들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단치흥을 들어 내렸다.
이 수림에는 장막이 가득 쳐 있고 장막마다에는 모두 등불이 켜 있었다. 그 등불 밑에서 여인들이 둘러앉아 한창 게걸스레 먹어대고 있었다. 여인들은 입가가 번들번들해서는 우악스럽게 씹어대다가 네 여인이 이불 뭉치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는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저걸 봐, 또 무슨 좋은 물건을 보살님께 바치는가 보다!"
그러나 네 뚱뚱보 여인들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대환희 보살에게 똑바로 걸어가 그녀의 발치에 이불 뭉치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입이 함지박만해지며 대뜸 말했다.
"보살님, 훌륭한 물건을 가져 왔사옵니다."
대환희 보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들더러 대리에 가서 단황이 무얼 하고 있는가 잘 살펴보고 오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지체되었느냐?"
그러자 한 뚱보 여인이 선뜻 나섰다.
"보살님, 우린 단황을 청해 왔사옵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침을 탁 뱉었다.
"허튼소리 그만 해. 단황이 너희들을 따라왔다니, 감히 날 놀리려는 수작이냐?"
"아이고 보살님, 그런 천 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시고 이걸 일단 보기나 하세요. 이게 단황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에요?"
뚱뚱보 여인은 말을 하면서 헐레헐레 이불을 헤쳐 놓았다. 과연 알몸동이 단지흥이 꼼짝없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대환희 보살은 냉큼 내달아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단황을 모셔 왔느냐? 폐하, 그래, 어찌하여 예까지 오셨소? 내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대환희 보살은 입이 헤벌어지며 이죽거렸다. 한 뚱뚱보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보살님, 단황은 제 귀비 년한테 중독되었어요. 그런 걸 우리가 데려왔지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너스레를 떨어댔다.
"으하하…… 그랬었다구? 폐하, 그래 어찌 계집을 경솔히 믿을 수 있겠어요? 세상 믿지 못할 물건이 바로 계집들인 거예요. 단황께선 여태껏 그것도 모르셨소 그래?"
단지흥은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은 여전히 멍청했다. 대환희 보살은 그가 참말로 중독되었다 여기며 큰소리로 분부했다.
"여봐라, 어서 이분을 수습해 드리고 자실 것을 가져 오너라!"
보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뚱뚱보 여인들이 한 무리 우르르 보살 앞으로 몰려왔다. 개중 한 여인이 단지흥을 일으켜 보살 앞으로 데려다 앉히며 말했다.
"폐하, 사실 우리들은 오래 전부터 사돈간이 아니옵니까? 단황의 황비였던 치주가 바로 우리네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냉큼 그녀를 밀치며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중독되었을 때 마침 우리 수하들이 나타난 건 바로 폐하가 저와 인연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 아니겠어요? 먼저 내 제자들을 시켜 폐하께서 마음껏 향락을 누릴 수 있게 해드리지요. 아마 황궁에서는 생각도 못한 색다른 맛을 느끼시게 될 거예요."
보살은 얼른 종전의 그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잽싸게 다가와 단지흥을 텁석 품에 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마치 아기다루듯 단지흥을 자기의 허벅다리 위에 앉힌 다음 삶은 고깃덩이를 쭉쭉 찢어서는 연신 그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단지흥은 입을 벙긋벙긋 벌리며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기실 혈도가 눌려 꼼짝도 못할 지경일 뿐더러 그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죄다 흐리멍텅한 환영에 불과했다. 자기가 어디로 끌려 왔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분간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앞에 나타난 사람이 계집인가 사내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영고만, 지난날 영고와 다퉜던 일만, 그녀의 아기를 마땅히 구해야 했던가 하는 것만, 그리
고 끝내는 자기가 아기를 죽여 버린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멍청하니 앉아 있는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 솔직히 말하겠소만 당신의 그 일양지 비결을 나한테 알려만 준다면 난 그저 당신의 한쪽 발과 한쪽 손의 힘줄만 끊어 놓지요. 하지만 경고하건대 알려 주지 않으면 난 폐하를 죽여 버릴 뿐만 아니라 대리 황실의 모든 사람들을 깡그리 잡아죽이겠소."
누구를 죽인다는 말을 듣자 단지흥은 일순 머리가 깨는 듯싶었다. 자기가 바로 천진난만한 어린애를 죽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뿐, 저 여인이 누구를 죽이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인지 하는 따위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처럼 겁을 주어도 단지흥이 여전히 멍청하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대환희 보살은 버럭 화를 냈다.
"내 말이 귓구멍으로 안 들어간다, 그런 뜻이오? 어떻게 할 참인가 말이에요?"
대환희 보살이 닦달을 하자 단지흥은 멀거니 쳐다보다가 부지중에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화를 간신히 참으며 그녀는 속으로 궁리했다.
'남제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 제 황궁에서 제 귀비에게 중독되어 널브러진 주제가 아니더냐. 죽은 돼지 같은 걸 내 제자들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입만은 아직 살아 있구나. 내가 네 놈을 죽이자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대환희 보살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일양지 비결을 알려 주겠어요, 안 알려 주겠어요?"
단지흥은 또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사람을 너무 윽박지르지 마라!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한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젖혔다.
"일국의 황제라면 사람 한두 명쯤 죽이는 거야 다반사지. 나도 하루에 몇 사람씩은 죽이오."
"너무 핍박하지 마라. 까불면 너도 죽여 버릴 테니."
단지흥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쳇, 당신이 알몸으로 덮쳐 들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내가 얼마나 좋아할 줄 알기나 해요?"
그러자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내들과 계집들은 모두 부산스레 손뼉을 치면서 웃어댔다. 뭇 사내와 계집들의 웃음 소리에 단지흥의 머리가 한결 더 맑아졌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찌하여 예까지 오게 됐을까? 분명 저 뚱뚱한 계집들 작간임에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대환희 보살이? 저들이 무슨 수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이곳은 대관절 어디인가?'
기실 단지흥은 내력이 대단한 사람이라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다 보니 모든 내력이 거기에만 집중되어 다른 일에는 무념, 무상, 무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의식을 잃어버린 사람마냥 넋이 나가 있는 터였다. 그러나 답답한 방안을 나와 수림의 신선한 공기를 접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되니 한데 쏠렸던 내력이 점점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환희 보살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둘러 주위를 잠잠해지게 해 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처지를 안다면 순순히 내 말을 따라요. 그냥 뻗대다가는 손발이 죄다 병신이 된다니까요. 물론 당신 힘줄을 끊어 놓는 게 내 소원은 아니오! 난 그저 일양지 비책을 알고 싶을 뿐……."
그녀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단지흥은 분연히 일어섰다. 그 순간 그의 온몸에 기가 확 뚫린 것이었다. 그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대환희 보살 앞에 우뚝 섰다. 한 사내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단지흥, 이 노옴! 수치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 알몸으로 여자들 앞에 나서다니, 네따위가 황제는 무슨 황제야! 옷을 벗고 나서니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더러운 사내 놈인걸."
그러자 사내들은 다시금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웃어댔다.
"대환희 보살!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계속 나를 못살게 굴면 난 네 년을 당장 잡아죽일 테다!"
단지흥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넙죽 주워섬겼다.
"호호호, 당신은 볼수록 마음이 동하는군! 계집들이 당신과 한 번만이라도 살을 섞기를 그토록 영원하는 까닭을 이제야 알 만해! 그런데 당신 손발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는 그 무슨 재미를 볼 수 있겠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 재미를 봐? 그래 내 당신 손발의 힘줄을 끊어 놓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래선 안 되겠군! 그 재간에 대해선 참말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야!"
그러자 한 사내가 선뜻 나서며 한마디 던졌다.
"보살님께서 저 놈에게 미약을 좀 안기기만 하면 저 놈은 보살님만 생각하게 되고 또 보살님과 재미를 보려고 미친 듯이 따라다닐 겁니다. 그러면 좀 좋습니까?"
단지흥은 대환희 보살 무리들을 쏘아보며 내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범상한 사람들이라면 혈도를 눌리면 적어도 몇 시진 동안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법이나 그는 일양지라는 세상에 보기 드문 초수를 몸에 지니고 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별로 어렵지 알게 혈도를 풀 수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가 중독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단지흥이 이미 혈도를 풀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지라 여전히 웃으면서 거들먹거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미약만 자시면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나와 재미를 보려고 덤벼들 테니! 이 미약을 잡숴 보시겠소?"
단지흥은 냉랭하니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았다.
"난 사람을 죽이는 게 소원이 아니다.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어. 더 죽이고 싶지는 않다!"
대환희 보살은 코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그렇게 극구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지만 난 당신을 죽이고 싶으니 어쩝니까? 하지만 먼저 데리고 놀아야겠어요. 데리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그때 천천히 죽여 주지……. 자, 어서 미약을 먹어욧!"
대환희 보살이 손짓을 하자 두 뚱뚱보 여인이 단지흥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여인이 다가들자 대뜸 고함을 질러댔다.
"네 년들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계속 거들먹거리다간 후회해도 이미 늦을 테니."
그러나 두 뚱뚱보 계집은 단지흥을 시들방귀로도 여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섰다.
"폐하는 참말 복이 있네요. 보살님께서 친히 보살펴 주시니 얼마나 복 많은 남정네예요."
한 계집이 선뜻 다가들어 그의 입을 쩍 벌려 놓고는 약 한 알을 집어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단지흥은 그 약을 번개같이 낚아채서는 휙 던져 버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단지흥의 발치로 훌쩍 날아왔다.
"요 귀염둥이, 제발 성깔 부리지 마! 성깔 부리면 몸이 상한다구! 그러면 어떻게 나와 재미를 볼 수 있겠나?"
대환희 보살은 마냥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단지흥은 여전히 그 한마디만 곱씹었다.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난 다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약을 올리지 말아라……."
"내가 왜 그렇게 하게 하겠어요? 기쁘게 해 드리려 해도 다 못 하겠는데……. 당신이 살인을 하도록 약을 올려서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구……."
대환희 보살은 히죽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그리고는 수하들에게 잽싸게 손짓을 했다. 그것을 신호로 뚱뚱보 여인 넷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단지흥에게 덮쳐 들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맞설 태세를 취하지 않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또다시 그 말을 곱씹었다.
"오늘 이미 한사람을 죽였으니 더 죽이고 싶지는 않다……."
네 계집의 병장기가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을 들이대지 않고 경공을 써서 슬쩍슬쩍 피하다가 네 계집의 포위망을 완전히 뚫고 나갔다. 병장기가 어지러이 난무하는 속에서 일순 단지흥이 눈에 띄지 않자 보살은 흠칫 놀라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보살은 그만 입이 헤벌어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저만치에 외따로 떨어져 서서 멍청하니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 걸려 있는 보름달은 쟁반같이 동그랬다.




제34장 황제의 비가
대환희 보살은 의아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언제 혈도가 풀렸지? 하나 이미 중독되어 있는 이상 내가 오늘 남제를 내 수중에 넣지 않고 언제 또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있으랴?'
그녀는 지체 않고 불같이 호령했다.
"저 놈을 잡아랏!"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숱한 사내들이 일제히 단지흥에게 달려들면서 외쳐댔다.
"단지흥 이 놈, 네가 아무리 황제 노릇을 한다 해도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따르는 것보다는 못할 거다!"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난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또 사람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이제 더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한 사내의 고함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단지흥 이 놈! 어디 일양지를 펼쳐 보아라. 우리들도 견식이나 좀 넓히게……."
그 소리에 단지흥은 몸을 홱 돌리며 슬쩍 피했다. 창 한 자루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뱀마냥 그의 몸뚱이를 바싹 스쳐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몸뚱이에 구멍이 뻥 뚫릴 뻔했다. 사내는 창을 꼬나 쥐고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단지흥 이 놈! 빨리 손을 써라! 계속 그렇게 손을 쓰지 않다가는 당장에 송장이 될 테니!"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화산에 가지 않고 그냥 영고와 함께 있었다면 영고의 아들은 내 아들이었을 게야. 그 애가 내 아들이었더라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었을 리 만무하지. 난 더는 살인을 할 수 없어!'
사내들은 단지흥이 중독된 줄로만 알고 용기백배하여 창과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들었다. 사내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치켜 들자 단지흥은 숱한 창과 칼 밑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그 모습을 보고는 기뻐서 연신 입에 먹을 것을 집어 넣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장하다, 장해! 내 귀염둥이들이 참말로 장하구나! 누구든지 저 놈 몸뚱이에 상처를 입히기만 하면 난 그 녀석을 내 허벅다리 위에 앉힐 테다!"
대환희 보살의 허벅다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 사내들에게는 비할 바 없는 영광이었다. 그 말에 사내들은 저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 단지흥에게 병장기들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번에도 경공을 써서 창과 칼 밑을 뚫고 나왔다.
알몸인 단황과 여러 사내들의 대결은 그야말로 괴이한 싸움이었다. 사내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려고 전심전력으로 공격을 들이댔으나 단지흥은 끝끝내 손을 쓰지 않고 그저 사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단지흥이 자기들을 깔본다고 여기고는 더욱 악에 받쳐 덮쳐 들었다. 대환희 보살의 수하가 된 지 이미 오래 된 터, 세상사람들이 죄다 자신들을 깔본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그런 기색만 내비쳤다 하면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이
었다.
"단지흥, 이 놈아! 네 놈이 손을 안 쓴다고 해서 네 놈을 살려 줄 것 같으냐?"
그 말과 동시에 서릿발 같은 빛이 번쩍하더니 긴 검이 단지흥의 정수리를 겨냥해 똑바로 내리찍혔다. 단지흥이 용케 머리를 비키니 이번에는 더욱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겨누고 검이 들어왔다. 단지흥이 또 몸을 피하자 그자는 이제 초수를 바꿔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이번에는 단지흥의 잔등을 겨냥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저 스치고 지났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사내는 그만 힘이 빠져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한 사내가 구리 철퇴를 휘
두르면서 덮쳐 왔다. 철퇴는 단지흥의 왼쪽 가슴을 겨누고 똑바로 날아왔지만 그는 역시 묘하게 몸을 피했다.
그때 단지흥은 얼핏 영고를 떠올렸다. 영고가 조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필시 자기를 사랑했었다. 사랑하긴 했으되 한 사내로서가 아니라 황제라는 자리에만 눈이 어두워 영고가 자기를 따랐다면 그는 그녀의 몸만 차지했을 뿐 마음은 차지하지 못한 셈이 아닌가.
그렇게 딴생각을 하다 보니 단지흥은 자연 틈이 생기고 말았다. 일순,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퇴가 단지흥의 잔등에 똑바로 내리꽂혔다. 그의 잔등에선 순식간엔 피가 솟구쳤다. 철퇴잡이는 기쁨에 넘쳐 환성을 올렸다.
"보살님, 찔렀습니다. 내가 단황을 찔렀습니다!"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장하다, 장해! 내 이제 너를 매일마다 내 허벅다리 위에 앉혀 놓으마!"
그 말에 철퇴잡이는 더욱 으쓱해져서 달려들었다.
"단지흥 이 놈! 내 철퇴에 죽는 줄 알아랏!"
비록 피를 보긴 했으나 단지흥의 상처는 그다지 중한 편은 아니었다. 무릇 단지흥 같은 무림의 명수에게 중상을 입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철퇴가 몸에 닿는 순간 단지흥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나마 그 무서운 일격을 피해 냈던 것이다. 철퇴잡이가 사기충천하여 고함을 치자 단지흥은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이자들은 나를 죽이려고 사생결단을 하는구나! 한데 왜 내가 이자들 손에 죽어야 하나? 나와 영고 사이에는 수 없이 많은 매듭이 있지만, 이자들하고야 아무런 원수지간도 아닌데 왜 이렇듯 악다구니로 대드는 걸까? 대환희 보살은 대리의 악물이다! 이 계집을 제거하지 않고서야 내 한도 풀 수 없으리라!'
일순 단지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터져 나왔다. 고함소리는 수림을 뒤흔들어 놓고 밤 하늘을 향해 길게 꼬리를 끌며 울려 나갔다. 마치 한 마리 용이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에 덮쳐 들던 사내들은 모두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쏴하니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천천히 사내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선뜻 손을 뻗쳐 창잡이에게서 긴 창대를 잡아채서는 삽시에 두 동강을 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검잡이한테로 다가들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검잡이의 손에서는 검이 퉁겨 나가 젱그렁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단지흥은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끝으로 퉁겨서 제 손에 잡자마자 검잡이의 몸뚱이를 비스듬히 내리쳤다. 검잡이는 삽시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허리가 잘려 땅바닥에 털썩 나뒹굴
었다.
철퇴잡이는 눈앞의 광경에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홱 몸을 돌렸다. 그러나 등뒤에는 대환희 보살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뺑소니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도망을 치려구, 요 귀염둥이야?"
철퇴잡이는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변명은 듣기 싫다!"
대환희 보살은 쌀쌀맞게 내뱉고는 쓱 손을 뻗쳤다. 철퇴잡이는 보살의 손이 닿기만 하면 뼈와 살이 썩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얼른 몸을 피했다.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그가 피하려는 쪽으로 냉큼 몸을 솟구쳐 머리로 그의 배때기를 들이받았다. 대환희 보살의 머리는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것인 듯, 다음 순간 철퇴잡이는 그 즉시 몇 길 밖으로 나가떨어져 땅바닥에 엎어지자마자 덜컥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단지흥은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진작에 사태는 일변해 있었다. 이제 사내들은 다 물러가고 뚱뚱보 여인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엔 잠시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살은 의기양양하니 이죽거렸다.
"폐하, 왜 옷을 벗고 계십니까?"
그러더니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그래, 난 워낙 알몸으로 나선 황제를 더 좋아하지. 알몸이니 황제인지 뭔지 분별할 수도 없는 터, 뭐 무서울 게 있겠소?"
보살은 잠시 단지흥을 쏘아보더니 뒤를 향해 소리를 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사내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와 굽실 허리를 꺾었다.
"보살님,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어서 초롱에 불을 밝혀라, 황제의 몸뚱어리를 샅샅이 살펴보아야겠으니. 황제의 몸뚱어리가 범상한 인간들의 몸뚱어리와 뭐가 다른지 내 한번 봐야겠다! 무엇이든 다른 점이 있기에 우리 치주라는 년이 그토록 반했겠지!"
단지흥은 치주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치주가 이 자리에 있다면 나와 대환희 보살 중에 누가 이기기를 바랄까? 그 애는 보살의 등살에 못 이겨 아마 나한테 호감을 나타낼 엄두도 못 낼 거야. 계집들이란 다 그런 거야. 계집으로 생긴 것은 할 수 없지……."
대환희 보살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은 좀 희한한 방법으로 겨루기를 해야겠다. 옛날에는 싸움을 할 때 초롱에 불을 밝히고 싸웠다는데 오늘 우리가 그걸 따른다 해도 남들이 비웃지야 않겠지. 이미 단황 나으리께서 대낮처럼 밝은 보름날 밤에 벌거벗고 나섰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도 우리 폐하를 본떠서 알몸으로 나서려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대환희 보살의 말에 누구라고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사내는 냅다 다가가서 보살의 옷을 몽땅 다 벗겨 주었다. 그러자 보살은 단지흥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이제부터 난 폐하와 겨루겠으나 조금도 텃세를 하진 않겠어요. 아주 공평하게 겨루려고 해요. 그래야만 져도 불만이 없을 게 아닌가요?"
대환희 보살은 알몸으로 단지흥 앞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나 살이 쪘는지 모가지는 거의 어깨 넓이와 비슷했고, 배에는 군살이 여러 겹으로 접쳐 있었으며, 그 아래로 뻗은 두 다리는 너무나 피둥피둥해서 다리인지 고깃덩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우리 둘이 어우러져 싸우다가 씨름판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당신은 내 배 밑에 깔려 숨도 바로 쉬지 못할걸! 호호호……."
대환희 보살은 죽겠다고 킬킬거렸다. 그러자 유들유들한 군살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단지흥은 코대답도 않고 이를 악물었다.
'이런 능욕은 실로 듣도 보도 못했다. 내 오늘 사람을 하나 죽였지만 이제 너마저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치주를 죽인 년, 네 년이 아니었다면 치주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이냐?'
단지흥은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대환희 보살, 넌 오늘 끝장이다. 공손히 죽음을 기다려라!"
"이봐요, 단황 나으리, 아무리 실랑이를 해도 당신이나 나나 하등 다를 게 없어요. 당신한테 귀비 년들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우쭐대지 말란 말예요. 나한테도 남첩이 수십은 되니까. 당신이나 나나 다 권세 있는 사람 아닌가요. 서로 합심해야 할 처지인데 왜 자꾸 생트집을 잘아요? 함께 화목하게 지내면서 향락을 누리는 게 옳은 게지 싸우기는 왜 싸운단 말이에요? 내 말이 틀린가요?"
단지흥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삽시에 두 사람은 한데 어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사정을 두지 않고 손을 쓰자 내심 덜컥 겁이 났다. 단지흥은 이미 화산 무예 시합에서 천하의 5대 고수 중 하나로 지목되었은즉, 그와 맞서 본대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뿐더러 중독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도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녀 역시 운남에서는 소문이 뜨르르한지라 결단코 단지흥한테 녹녹하
게 보이지 않으려고 전심전력하고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손을 쓰겠으니 조심하세요!"
대환희 보살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지금은 보살의 수하가 된 충피가 독충을 잘 부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충피가 오늘은 무슨 독충들을 부릴까 저어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니나다를까 충피가 또르르 굴러 나오더니 능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폐하, 그때 만일 그 숙녀동의 노파가 아니었더라면 단황 나으리는 벌써 저승 원귀가 돼 있을 게 아닙니까?"
충피가 한마디 내뱉자마자 스륵스륵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두 눈을 찌푸렸다. 수천 수백 마리나 되는 독사들이 땅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벌벌 기어오고 있었다. 단지흥은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또 독사 떼를 풀어 놓았군! 이를 어찌한다……."
독사들은 이미 혀를 쌀름거리면서 그에게 바투 기어들었다. 충피는 연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장단 맞추듯 독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그에게 덮쳐 왔다. 단지흥은 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서 앞으로 곧추 내질렀다. 그 찰나 쾅하고 굉음이 터지더니 독사 몇 마리가 삽시에 몇 동강이 났다. 비릿한 냄새가 쏴 번졌다. 그 냄새를 맡자 독사들은 기갈이 난 것마냥 더욱 사납게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래도 단지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연신 손가락을 지르고 퉁겼다.
동강이 난 독사들이 순식간에 무더기로 쌓였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리 단씨의 일양지였다. 대환희 보살은 보면 볼수록 뛰어난 무예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외쳐댔다.
"훌륭하다! 훌륭해!"
보살의 수하들도 모두 숨을 죽인 채 단지흥 홀로 독사 무리 속에 우뚝 서서 태연자약하게 손가락을 휘둘러대는 것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환희 보살은 일순 일양지가 너무나도 탐나 성마르게 소리를 질러댔다.
"단황 나으리, 나으리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좋은 점이 수 없이 많아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 잘 생각해 보세요."
단지흥은 내심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충피한테 독사가 얼마나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충피가 끊임없이 독사들을 불러내게 되면 아무리 재주가 용하다고 한들 그 역시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단지흥은 이때다 싶어 잠시 숨을 돌릴 심산으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소리쳤다.
"대환희 보살, 잠깐만 손을 멈춰 달라. 내 할말이 있으니."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웠다. 단지흥은 다시금 다급하게 외쳐댔다.
"대환희 보살, 우리 둘 다 옷을 입은 후에 다시 겨루어 보는 게 어떤가?"
"이봐요, 폐하. 잔꾀 부리지 말아요. 오늘의 겨룸에서 끝내는 내가 폐하의 그 알몸 때문에 이기게 되는 거예요."
대환희 보살은 느물느물 대답을 늦잡았다. 단지흥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저나나나 다 알몸인데 왜 나만은 알몸이기에 지게 된다는 거야?'
"충피, 쉬지 말고 어서 독사를 몰아대라! 어서 저 놈을 물어 죽이라고 해!"
그리고는 다시 단지흥에게 내뱉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난 강호에서 굴러먹는 사람이니 알몸이라도 누가 뭐라 할까마는 당신은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요? 지고무방한 황제가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건 말도 안 되지요. 난 당신을 생포하기만 하면 그 모양 그대로 대리국으로 끌고 가서 톡톡히 망신을 주겠어요!"
단지흥은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보살은 다시 충피를 재촉했다. 충피는 더욱 열심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수많은 독사들은 연달아연달아 단지흥에게 기어왔다. 단지흥은 또 손가락을 내쳐 독사들을 삼대처럼 쓸어 능했으나 끊임없이 달려 드는 독사 무리를 보고는 점차 기가 질렸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웬 사람들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필시 이곳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지흥은 이내 길게 외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대리국의 사대 시위의 한 사람인 농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대 시위들이 자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이렇게 찾아 나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대 시위 역시 모두 독사들에게는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대 시위들이 구하러 온다 해도 무슨 뾰족한 수는 없었다.
휘파람 소리가 한 번 휘익 울리더니 연달아 그에 화답하는 휘파람 소리가 또 울려 왔다. 마치 회오리 같은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대 시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의 광경에 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히 외쳤다.
"폐하, 어인 일이시옵니까?"
"자세한 얘긴 두었다 하고, 어서 옷이나 가져 오너라!"
선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농부와 나무꾼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농부와 나무꾼은 자기 옷들을 한 가지씩 벗어 얼른 선비에게 넘겨주었다. 옷을 받아 쥔 선비는 대환희 보살을 건너다보면서 삿대질을 했다.
"대환희 보살, 네 년이 감히 황제를 모해하려 덤비다니. 아무리 악독한 수를 써도 다 헛수고다. 오늘 우리 대리국 신하들은 네 년을 사로잡고야 말 테다!"
대환희 보살은 펄펄 뛰며 소리쳤다.
"얘들아, 냉큼 저 놈들을 잡아죽여라!"
그녀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뚱뚱보 계집들과 사내들이 일제히 사대 시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어우러져 금세 일대 사투가 벌어졌다. 독사들은 충피의 괴상한 소리에 맞춰 시시각각으로 단지흥에게 몰려들었다.
사대 시위는 보살의 수하들과 맞서 싸우는 한편 틈만 나면 독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선비의 부채가 날리는 곳마다 독사들의 몸뚱이는 뭉텅뭉텅 끊어져 나뒹굴었다. 농부가 휘익휘익 바람을 일으키며 호미를 휘두를 때마다 역시 수많은 독사들이 널브러졌다. 나무꾼은 날렵하게 도끼를 휘두르면서 독사를 절단냈다. 어부의 낚싯줄도 만만치 않았다. 단번에 감아서 내칠 때마다 영락없이 독사의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나곤 했다.
사대 시위가 사생결단으로 초수를 펼쳐 내자 보살의 수하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고함만 지를 뿐 감히 더는 다가들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선비는 짤막히 외치면서 단지흥을 향해 옷을 휙 던졌다. 그러자 그 옷은 어부의 낚싯줄에 날아가 감기고 어부가 다시 휘익 낚싯줄을 던지자 이내 단지흥의 손에 들어갔다.
이를 지켜 보던 보살은 매우 다급해졌다.
"옷을 입지 마! 당신이 옷을 입으면 난 어떻게 해요?"
그녀는 부르짖으면서 단지흥 앞으로 곧추 달려왔다. 그녀가 몸을 솟구치는 모양은 마치 한 마리 곰이 재주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단지흥은 손가락에 옷을 걸어 허공에다 휙 뿌렸다. 그러자 묘하게도 그 옷은 그의 몸에 툭 떨어져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보살을 향해 똑바로 손가락을 뻗었다. 일양지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라 보살은 더는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고함만 쳤다. 두루마기까지 다 차려 입고 나서 단지흥은 훌쩍
몸을 솟구쳐 보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훌륭한 솜씨이옵니다!"
그때 갑자기 수림 속에서 한사람이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일제히 고개들 돌렸다. 큰 키에 생김새도 적이 흉악스러운 라마 중이 하나 서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단지흥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의 솜씨가 참말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이 운남 땅에 십여 년 동안이나 다른 풍파가 없었겠지요."
단지흥은 이 라마 중의 거동만 보고도 대단한 무예를 익힌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도 일찍이 화산에 갔사온즉 화산에서는 미처 여러분들을 뵙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천대평석까지 올라가기는 했으나 그때 일은 정말……. 그때 이후로 저는 중원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작심했으나 아무래도 지금 저의 무예로는 다소 부족한 듯하여 고수 여러분께 가르침을 받고자 다시 이렇게 발을 들여놓게 된 겁니다. 그때 그 전진교의 주백통이라는 친구와는 일전을 겨뤘으나 그만 졌답니다. 그래 생각을 키우다가 오늘 이렇게 운남부터 들른 것입니다."
서역의 번승이 틀림없었지만 중원 말을 유창하게 했고 중원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섣불리 대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법사께서는 내가 지금 이 대환희 보살과 한참 무예를 겨루고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라마 중은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이 운남 땅에서 소승과 무예를 겨룰 수 있는 상대는 오직 단황 나으리 한 분뿐인 줄 아옵니다. 이따위 대환희 보살이야 어디 축에 들기나 하겠습니까. 한데 단황 나으리께서 이런 천치와 상대를 하시다니요."
라마 중이 대놓고 자기를 모욕하니 대환희 보살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어디서 굴러 온 중 놈이 이렇게 방자하냐? 네 녀석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는데, 내 오늘 네 놈한테 대환희 보살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톡톡히 가르쳐 줘야겠다!"
보살은 대뜸 손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충피야, 난 야금야금거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너는 책임지고 이 놈을 단번에 잡아 치워라!"
충피는 보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금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방금 전의 소리와는 역력히 달랐다. 마치 목구멍에서 가까스로 짜내는 듯 매우 가늘어서 귀를 바싹 기울여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라마 중이 보자니 너무나도 우스운 짓거리를 하는지라 그는 기도 안 막혔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따위 허튼수작은 당장 집어치워라!"
그러나 충피는 아랑곳 않고 연해 소리를 냈다. 이윽고 나직하니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것들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점점 가까워올수록 붕붕거리는 소리도 고막을 찢을 듯 요란스러워졌다. 일순 선비가 고함을 내질렀다.
"독벌이옵니다!"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독벌 떼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까지 날아와 있었다. 그들은 부랴부랴 병장기들을 내던지고는 저마다 독벌들을 쫓느라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독벌은 독사와 달라서 도끼로 찍어도 소용이 없고, 낚싯줄로 후려쳐도 소용없고, 부채나 호미 같은 것으로도 때려잡을 수 없었다. 몸 주위에서 맴돌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으니 실로 속수무책이었다. 죽어라고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쫓으면 잠깐 피했다가는 맥이 진한 틈을 타서 또 달려
들어 따끔따끔 쏘아대는 것이었다.
단지흥과 라마 중은 쩔쩔매면서 독벌 때들을 쫓느라 넓은 팔소매를 마구 휘둘러댔다. 그러나 한 떼가 물러서면 다른 한 떼가 날아들며 잠시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대 시위의 처지는 더욱 비참했다. 그래도 선비는 부채를 휘둘러 독벌들을 얼마쯤은 막을 수 있었으나 다른 셋은 모두 적수공권이니 그저 아우성을 치면서 두 손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이 독벌들은 힘들여 훈련시킨 독종들이어서 내치면 내칠수록 더욱 독을 품고 달려들었다. 이들 세 사람은 젖 먹
던 힘까지 다 내 두 팔을 휘둘러 댔으나 독벌 떼를 조금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어느 한 순간, 불현듯 수림 속에서 뭔가 우람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더니 수림이 사납게 울어댔다. 독벌 떼는 여전히 그들의 신변에서 맴돌았으나 아무래도 힘이 다했는지 기세가 점점 못해 갔다. 그 천둥 같은 소리는 끊길 줄 모르고 연거푸 들려 왔다. 단지흥 일행과 대환희 보살 무리들은 너나없이 놀라서 일제히 수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수림 속에서 마치 공중에 붕붕 떠 있는 듯한 형상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처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들은 허공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코끼리 잔등에 타고 있었다. 이쪽 사람들은 모두들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뿐더러 그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코끼리를 부리며 곧추 다가오더니 한 장 사이를 두고 멈춰 섰다.
코끼리 잔등에는 민대머리 독수리도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충피는 그 독수리를 보고는 독벌들을 얼른 거두어 들였다. 여인들은 거만하게 아래를 굽어보더니 개중 한 여인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사람이 대리국의 황제라는 사람이고, 저기 저 사람이 대환희 보살이라는 여자야."
이어 한 계집애가 깜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이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갈라서 싸움을 했는데 참말로 죽기 살기였어요. 저 대환희 보살은 독사를 풀어 놓기도 하고 독벌을 풀어 놓기도 하면서 싸움판을 벌였는데 참말 재미있었어요."
달빛에 비친 그 계집애는 열서너 살 될까말까 했는데 자그마한 가죽 치마로 아랫도리만 달랑 가리고 있었다. 계집애는 사람들을 보면서 해죽거렸다. 이 계집애를 보고 단지흥은 갑자기 두 눈이 환해지는 듯했다. 숙녀동의 바로 그 계집애였던 것이다.
계집애는 단지흥에게 대뜸 말했다.
"폐하, 왜 우리 할머니를 그렇게 소박했나요?……."
단지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세히 보니 한복판에 선 코끼리 잔등 위에 올라앉은 여인은 바로 영고 뒤를 이어 무당 할미가 된 그 긴 손톱의 처녀였다. 그녀는 이윽토록 단지흥을 내려다보더니 일순 입을 열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아마 자기가 한 말을 죄다 까먹지는 않았지요? 그때 단황 나으리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고를 잘 대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단지흥은 묵묵부답으로 말이 없었다. 그는 이 처녀한테 어떻게 그 사연을 말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고 더구나 누구에게든 영고의 일에 관한 한 다시는 입 밖에 옮기고 싶지 않았다.
계집애도 냉랭히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단황은 참말로 양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때 내가 단황을 왜 구해 주었는지 아세요? 우리 할머니를 잘 대해 주라고 그런 것이에요."
계집애는 두 눈에 금세 눈물이 핑 돌며 울먹거렸다.
"어서 말해 봐요.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대했는가 말이에요. 만일 똑바로 대답을 못하면 우리는 폐하를 죽여 버리겠어요. 코끼리가 밟아 놓고 독수리가 쪼아 놓게 하겠어요! 뼈도 추리지 못하게 만들겠다구요!"
단지흥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대 시위들을 들러보았다. 그들은 아직 지난밤의 내막을 모르는지라 물끄러미 단지흥을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이들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멀거니 서 있기만 하자 처녀의 두 눈에선 점점 살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섭게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추상같이 따져 물었다.
"네 놈은 참말 심술 사나운 놈이야. 내가 네 놈한테 분명히 말했었지, 무릇 숙녀동을 떠난 사람은 우리 숙녀동과는 무관하다고! 아마 네 놈은 그 생각만 하고 우리 할머니를 박대했겠구나. 어떻게 굴었으면 하룻밤 새에 그 모양으로 변했겠느냐? 어서 말을 해!"
그래도 단지흥은 대답이 없었다. 영고와 주백통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입 밖에 옮긴단 말인가. 더구나 대환희 보살 무리들 앞에서 영고의 일에 대해서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흥은 씁쓸히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나와 영고 사이의 일은 우리 둘 사이의 은원(恩怨)이니 너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계집애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글쎄 우리 할머니도 그렇게는 말했어요. 하지만 왜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겠어요? 나는 할머니와 이 일에 대해 많은 말을 했어요. 아무튼 우리 숙녀동 여인들은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이 자리에서 사연을 똑똑히 말하지 않으면 운리 손에서 빠져 나가기 어려운 줄 알아요!"
숙녀동의 새 할머니가 된 그 손톱 긴 처녀는 자못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폐하, 필시 무슨 고충이 있는 것 같은즉, 어서 나한테 말을 해요. 내가 듣고서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 줄 테니. 하지만 그냥 덮어 감추려 고만 든다면, 당신이 아무리 대리국 황제라 하더라도 당신은 우리 숙녀동 여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숙녀동의 여인들은 모두 영고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지흥과 영고는 무엇 때문에 싸우고 헤어졌는지, 영고는 왜 대리국을 떠나 다시 숙녀동으로 찾아든 것인지……. 숙녀동의 여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몹시 궁금할 터였다.
숙녀동 동주 처녀는 다시 한 번 오금을 박았다.
"단황님, 당신은 당신과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우리 숙녀동 여인들한테 똑똑히 알려 줘야 해요, 필히요!"
단지흥은 처녀를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참 답답한 노릇이로구먼.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대들 숙녀동 여인들에게 이 일을 똑똑히 알려 줄 순 없노라. 이런 일일수록 그냥 파묻어 두는 게 상책이야!"
그러나 처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요. 폐하께서 영고를 냉궁에 처넣었을 때는 꼭 무슨 잘못한 짓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는데, 이에 대해서 똑똑히 알려 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단지흥은 이제 더는 가타부타 말을 안 했다. 그러자 처녀는 엄한 목소리로 횃불을 밝히라고 영을 내렸다. 그녀의 수하 처녀들은 너도나도 코끼리 잔등 위에서 뛰어내려 횃불을 밝히느라고 부산을 피웠다. 삽시에 널따란 공지는 대낮처럼 환해졌다.
"폐하, 그래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세요?"
처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단지흥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순간 그 민대머리 독수리가 날개를 퍼득이면서 훌쩍 날아와 처녀의 팔에 앉았다. 민대머리 독수리는 백 근도 더 나갔지만 처녀는 마치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내려앉은 듯 조금도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을 보고 단지흥은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때 계집애가 또 한 추렴 들었다.
"폐하, 우리 할머니께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만 알려 주면 용서를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처녀들은 중구난방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한 순간 단지흥은 담담히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난 그대들한테 더 이상 할말이 없노라!"
동주 처녀는 호수같이 맑은 눈으로 단지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남녀간의 그 일을 겪어 보지 못해 폐하와 우리 할머니 사이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만한 사리는 알고 있어요. 우리 할머니가 하룻밤 새에 머리까지 다 세 버릴 때에는 마음속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 말이에요.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여자가 하룻밤 새에 오륙십 먹은 노파처럼 됐으니 얼마나 속이 탔으면 그렇게 됐을까요? 폐하, 어서 우리 숙녀동 여인들에게 속시원히 털어놓으세요……."
"난……."난 말할 수 없어!"
단지흥은 확고부동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으며 또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역시 얼마나 속을 끓였었던가. 그 일들을, 한두 번 아니게 다퉜던 그 일들을, 주백통의 그 일을, 자기가 어찌하여 영고의 아들 애를 구해 주지 않았는가를 어찌 몇 마디로 다 말한단 말인가. 말을 하려야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설사 입을 벌린다고 해도 어찌 똑똑히 말할 수 있으랴.
동주 처녀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 됐어요. 말하기 싫어하는데 강박은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사전에 알려는 줘야겠어요. 오늘 이 밤 내로 폐하께서는 내 이 독수리한테 찢기고 코끼리한테 밟혀 죽는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단지흥의 사대 시위들도 여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흥이 기어코 말을 하지 않고 버티는 데는 또 단지흥으로서도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고충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비는 나라의 정도를 보아서라도 숙녀동 여인들한테 영고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있는 대로 말하라고 단지흥에게 설득할 심산이었다. 얼핏 보아도 이 숙녀동 동주와 계집애는 기실 단지흥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폐하……."
선비가 허두를 떼자마자 단지흥이 눈알을 부라리며 매섭게 소리쳤다.
"입다물지 못할까!"
선비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 시위에 대해서는 종래로 늘 너그러이 대하던 단지흥이 아니던가! 이처럼 매몰차게 눈알을 부라리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오늘은 왜 저러실까? 얼굴에 저런 노기가 서린 것은 종래로 보지 못했다. 그 황비의 일에 대해 왜 저토록 말하기 싫어하실까?'
선비는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 사이 단지흥이 숙녀동 동주를 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6년 전 숙녀동에서 입은 은혜는 참말로 백골난망이오. 하지만 나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당분간 그대들한테 알려 줄 수 없소. 사실 난 지금까지도 내가 영고한테 미안한 짓을 했는지 아니면 영고가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는지 분간을 못하고 있소. 아무튼 나는 오늘 밤 영고의 아들 애를 죽게……."
단지흥이 거기까지 말하자 처녀는 대번에 소리를 내지렀다.
"그럼 단황님께서 우리 할머니를 소박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로군요."
단지흥은 처녀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 하늘에는 유난히 많은 별들이 총총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하나도 똑똑히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떨구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허 참, 제가 한 일을 제가 모르다니……. 내가 어찌하다간 영고의 아들 애를 죽였는지 참말로 모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집애가 꽥 소리를 질렀다.
"단지흥 이 놈! 네가 우리 할머니를 구박했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난 독수리더러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게 할 테다!"
계집애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휘파람을 휘익 불어 젖혔다. 삽시에 하늘을 가득 메우고 큰 새들이 날아들었다. 독수리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곧추 아래로 날아 떨어지며 단지흥을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단지흥은 급급히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일순 일진광풍이 일며 지풍이 일직선으로 쭉 뻗쳐 가더니 앞으로 곧장 내리꽂히는 독수리 한 마리를 그대로 갈겼다. 그 독수리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찍히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지르면서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 광경을 보자 계집애는 분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단지흥 이 놈! 아마도 네 놈은 그런 재주를 믿고 우리 할머니를 구박했겠구나."
계집애는 말을 마치고는 또다시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치는 듯, 바다에서 태풍이 이는 듯 코끼리들이 대가리를 쳐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요란한 소리에 귀청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숱한 코끼리들이 지축을 울리면서 터벅터벅 단지흥을 향해 내처 다가왔다. 이 코끼리 떼는 모두 평소에 그 처녀가 잘 길들여 놓았는지라 정연하게 대열을 지어서 단지흥에게 육박해 들어왔다. 사대 시위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급급히 둥그렇게
진을 치면서 고함을 쳐댔다.
"폐하, 위험하옵니다!"
일단 이 코끼리 떼 속으로 휘말려들기만 하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다 해도 도통 빠져 나올 수 없을 터였다. 하물며 이 코끼리들은 가죽이 바윗돌마냥 딱딱하고 두터운지라 아무리 창과 칼을 휘둘러도 소용이 없었다. 설사 상처를 입혔다 해도 죽지는 않으니 상처를 입은 후에라도 마구 짓밟아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흥도 위험을 느끼고 있었지만 조금도 비킬 생각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다시금 영고의 아들 애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죽어 가는 애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으니 내가 그 애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이후의 화산 무예 시합을 염두에 두고 내력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무고한 어린애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나도 죽어 마땅해.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단지흥은 죽음 앞에서도 자못 초연해졌다. 그는 그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선 채 달려드는 코끼리 떼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코끼리들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단지흥 앞으로 곧추 다가와서는 일제히 대가리를 쳐들고 한바탕 땅이 꺼지게 울부짖었다. 코끼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단지흥은 마치 한 마리 자그마한 벌레 같았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라마 중은 코끼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려고 좌충우돌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덤비다 보니 그만 돌멩이에 발뿌리가 채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코끼리들이 각일각 라마의 몸뚱어리를 짓밟으려는 찰나 단지흥은 잽싸게 몸을 날려 라마 중을 구해 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라마 중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네 년들은 대관절 어떤 년들이야? 왜 이다지도 나를 핍박하는 거냐?"
그러나 동주 처녀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잠시 휘파람 불기를 중단하고는 대뜸 단지흥에게 쏘아붙였다.
"단지흥아, 이제 더 할말이 없느냐?"
단지흥은 정색을 하며 엄하게 꾸짖었다.
"설사 나와 너희들 사이에 원한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도 없지 않느냐? 이 이방의 스님은 중원 사람도, 대리 사람도 아닌 한낱 무림의 과객이다. 그러니 이 스님만은 빠져 나가게 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처녀는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 페하께서는 지금 남의 사정을 봐주자는 겁니까? 폐하께서 아무리 재주가 빼어나다고 해도 이 코끼리 진은 뚫고 나가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라도 어떻게 우리 할머님을 구박했는지 솔직히 말하기만 하면 놓아줄 수도 있어요."
그러자 단지흥은 낯색을 굳히며 한일자로 입을 딱 다물었다.
"폐하, 아무리 대단한 무림 영웅이라고 해도 결코 내 코끼리 진은 뚫지 못해요. 이제부터는 다른 말은 말고 어서 폐하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이나 말씀하세요. 우리 숙녀동 자매들이 듣고서 시비를 가릴 테니까. 만일 단황님이 옳다면 순순히 놔주겠어요."
단지흥은 가벼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대는 동주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이만한 이치야 알겠지.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집안의 망신스러운 일은 남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대와 영고는 비록 숙녀동에서는 자매처럼 지내 왔을지 모르나 영고는 엄연히 나한테 시집을 왔으니 영고와 나는 한집식구이다. 그러니 집안일에 상관치 마라!"
그러나 처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 집안 망신살 뻗친 일을 남들한테 알려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기실 저와 단황님은 한집안 사람이 아닌가요? 단황께서는 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나요?"
단지흥은 무슨 뜻인지 몰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녀는 단지흥을 말끄러미 건너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우리 숙녀동 여자한테 장가들었으니 의당 우리 숙녀동의 모든 자매들과 친척이 되는 거예요. 우리한테 영고의 일을 감추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도 말아요."
처녀는 단지흥이 왜 저리도 고집을 부리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냥 고집을 부리다가는 이 코끼리 진 속에서 송장이 될 터인데……. 그녀는 결코 단지흥 같은 영웅호걸이 코끼리 발에 밟혀 죽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라마 중만이 코끼리 진 속에서 벗어나려고 소란을 피워댔다.
"이 요사스런 계집아! 넌 기마코 내가 코끼리 진과 싸우는 걸 구경하려는 심산이구나."
라마 중은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의 말씀이 지당해요. 당신은 서역의 중이니 먼 곳에서 온 손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떠들지 말아요. 당신은 그 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할 테니……."
라마 중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둔탁한 채찍 소리가 울렸다.
그중에서 채찍 한 가닥이 날아오더니 중의 허리를 휙 감아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코끼리 진 밖으로 끌어냈다. 채찍의 반동으로 땅바닥에 나가떨어진 라마 중은 한 바퀴 구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코끼리 진을 바라보았다. 거무칙칙한 코끼리들이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단지흥을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사대 시위들은 소리 높이 단지흥을 부르면서 코끼리 진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이때다 싶어 큰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나와 사대 시위의 앞을 떡 가로막고 병장기들을 휘둘러댔다. 사대 시위는 한시가 바빴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들은 코끼리 진 밖에서 대환희 보살 수하의 계집과 사내들을 막아내느라 허둥거렸다.
단지흥은 홀로 코끼리 진 안에 서 있었다. 그는 이처럼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영고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는 영고가 숙녀동의 자매들한테 그 일들에 대해 말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고의 성미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절대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영고는 언젠가 꼭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가 아니면 그녀는 영영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는 불현듯 영고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자기도 모르게 문득 하늘을 우러르더니
장탄식을 했다.
"영고! 이봐요, 영고! 그대가 만일 여기에 있다면……. 나는 그대가 마음대로 나를 찍고 베고 해도 가만히 있겠소. 그리하여 그대 마음에 가득 찬 울화를 풀어 버릴 수만 있다면……. 저런 계집애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난 영고의 손에……."
하지만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영고가 어찌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는 일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코끼리 떼가 자기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양지를 펼쳐 코끼리의 눈을 멀게 하고는 그 틈에 포위를 뚫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악을 쓰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숙녀동 여인들은 숨을 죽인 채 증오에 찬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일순 코끼리 한 마리가 길다란 코를 휘둘러 단지흥을 감으려 했다. 계집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야단났어요!"
계집애는 코끼리가 코를 내미는 순간 단지흥이 그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코끼리 코를 밟고 몸을 솟구쳐 코끼리 잔등에 뛰어오를까 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자기들이 단지흥의 출중한 무예를 막아내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삽시에 단지흥을 휙 감더니 허공으로 쑤욱 올렸다가 있는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쳤다. 땅바닥에 내리꽂힌 단지흥은 사지를 쩍 벌 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코끼리는 곧 육중한 발을 들어서는 단통에 단지흥을 짓밟으려 했다.
사대 시위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흥의 안위가 위험에 처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었다. 어느새에 선비의 부채는 피가 낭자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눈에 보이는 족족 부채로 내리쳐댔다. 한 뚱뚱보 여인은 직통으로 머리를 맞아 그 즉시 묵사발이 됐다. 그 여인의 머리에서 솟구친 피는 선비의 온몸에 점점이 튀어 박혔다. 선비는 벌겋게 눈이 충혈되어서는 천둥같
이 고함을 지르면서 몸을 돌려 또다시 부채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부채가 곧바로 한 뚱뚱보 여인의 젖통에 맞았다. 그계집은 퐁퐁 뛰면서 비명을 올렸다. 선비는 부채로 마구 내리치면서 고함을 쳤다.
"나를 막는 자는 죽는다!"
뚱뚱보 여인들은 기겁을 하여 엉겁결에 양쪽으로 쭉 갈라섰다. 선비는 그 사이를 뚫고 곧장 코끼리 진 가까이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코끼리들이 어찌나 비좁게 몰려 서 있는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선비는 틈을 보다가 훌쩍 몸을 솟구쳐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섰다. 하나 그의 두 발이 채 코끼리 잔등에 닿기도 전에 그의 발을 향해 칼이 휙 날아왔다. 선비는 잽싸게 칼을 피하며 다시 코끼리 진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때 농부 역시 코끼리 진 가까이 달려와 있었다.
"어떻게 하지?"
농부가 겁먹은 눈길로 다급히 물었다. 선비는 그에게 얼른 눈짓을 보내고는 급급히 소리쳤다.
"쌍뢰후(雙雷吼)!"
농부와 선비는 몸을 위로 솟구쳤다. 둘은 삽시에 공중으로 높이 솟았다. 이때 선비가 농부의 정수리를 콱 밟으면서 또다시 몸을 솟구쳐 코끼리 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선비가 코끼리 진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단지흥이 코끼리 발에 깔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으며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폐하, 무릇 국사가 지엄하고 개인의 일은 경하옵니다. 나라 대사는 원전으로 돌리시고 이게 어인 처사이시옵니까?"
선비는 홱 몸을 날려 자기 몸으로 단지흥을 덮쳤다.
'코끼리가 밟아도 내가 먼저 죽겠지!'
선비는 단지흥의 몸을 덮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코끼리의 발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돌기둥같이 육중한 코끼리 다리가 시시각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이제는 정녕 죽었구나 생각하였다…….




제35장 생사의 갈림길
선비는 단지흥을 자신의 몸으로 덮고 이를 악물었다. 일순 뱃속에서 그 어떤 강한 기운이 차 올랐다.
'나는 밟혀 죽어도 황제는 살려야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다짐하며 큰소리로 연신 단지흥을 불렀다.
"폐하! 폐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정적이 고요히 깃들였다. 벌써 죽은 것일까.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치떠 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지 않은가.
바로 코앞까지 덮쳐 들었던 코끼리 발바닥은 보이지 않고 거물 같은 코끼리들이 모두 두 사람 주위로 바싹 몰려들어 제가를 길다란 코를 킁킁거리며 그들의 몸에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선비는 적이 의아하여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얼떨떨하니 코끼리들을 올려다보았다.
동주 처녀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코끼리 두 마리가 길다란 코를 들이대더니 선비와 단지흥을 휘감아 천천히 코끼리 잔등 위로 올려 놓았다. 동주 처녀는 선비를 보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대리국 승상이 맞지요?"
선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처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승상이란 벼슬은 황제 아래에 있는 벼슬인가요?"
선비는 갈수록 의아했으나 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처녀는 선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나는 당신이 왜 이 단황을 대신해 죽으려 했는지 그게 알고 싶어요. 단황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이런 사람을 대신해 죽는다는 것은 실로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죽음이란 말이에요."
선비는 길게 장탄식을 했다.
"세세대대 대리국 황제 중에서 단황이 제일 덕행이 있는 황제입니다. 하기에 저는 대신 목숨을 잃는다 해도 되레 영광이오!"
처녀는 한참이나 선비를 훑어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당신 말씀을 들어 보니 단황은 신하들에게는 아주 어진 것 같은데 왜 유독 우리 할머니에게는 그토록 모질게 굴었을까요? 우리 할머니의 재간이나 용모는 당신도 아시겠지만, 세상 어디에 가서 그런 분을 찾을 수 있겠어요?"
선비는 잠시 주춤하더니 대답했다.
"저도 황비님 일에 대해서는 얼마간 알고 있습니다만, 그, 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답니다……."
"입다물지 못할까! 누가 자네더러 그런 말을 하라던가?"
단지흥은 내내 두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겨 있더니 선비가 조심스럽게 허두를 떼자마자 발끈 화를 냈다. 선비는 더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단지흥이 영고의 일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라도 누설되는 것을 한사코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동주 처녀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선비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처녀의 눈길에 선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상님께서 말하지 않으시면 승상님은 물론이요, 승상님이 그토록 받들어 마지않는 저 폐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선비는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니 저도 어쩌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그건 당신 뜻에 달린 겁니다."
그리고는 선비는 묵묵히 처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 있었으나 서로 거리가 가까워 선비는 처녀의 몸에서 풍겨 오는 향기마저 맡을 수 있었다. 처녀는 선비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참말로 괴이한 일이야. 승상도 말을 하려 하지 않으니……."
코끼리 잔등 위에서 내려다보니 코끼리 진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그야말로 일목요연하니 한눈에 다 들어왔다. 농부와 나무꾼은 한창 대환희 보살의 무리들과 어렵사리 대항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 어부는 낚싯줄을 휙휙 돌리면서 몇몇 사내들과 싸우고 있었다. 선비가 보니 밖에서의 싸움은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자기가 돕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는 차녀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가 단지흥에게 무슨 말을 꺼내는가만 기다렸다.
이윽고 처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단황 나으리께서 훌륭한 황제인 것을 익히 알고 존경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 방금 전에도 살려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제가 우리 할머니를 위해 복수하려던 마음을 버렸다는 건 아니에요. 폐하께서 그 일의 내막을 알려 주시기만 하면 저는 꼭 폐하를 돕겠어요."
그러나 단지흥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영고의 아들 애를 죽였어. 변명할 나위 없이 난 살인자야. 그때 난 심사가 너무나도 비뚤어졌었어. 그렇게 애원해도 못 본 척 했으니……. 영고를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하고서 이제 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단지흥이 역시 대답이 없자 처녀는 한껏 목소리를 죽여 다시 물었다.
"제가 폐하께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대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단 같은 머리를 내려 드리우고 코끼리 잔등 위에 살포시 앉은 얌전하게만 보이는 처녀가 저렇듯 사납게 사람 목숨을 빼앗겠다고 하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들이 영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박속같이 새하얀 이가 곱게 드러났다.
"폐하, 폐하께서는 왜 말끝마다 영고의 아들, 영고의 아들 하십니까? 영고의 아들이라면 바로 폐하의 아들이 아니온지?"
그러자 단지흥은 더 더욱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끼리 진 밖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처녀의 질문을 듣고 일시 싸움을 멈췄다. 그들은 과연 이쪽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자못 궁금해 전심전력으로 싸우면서도 귀는 내내 이 쪽으로만 열려 있던 터였다. 모두들 단지흥이 뭐라고 대답할지 자못 궁금했다. 대환희 보살마저도 영고란 여자가 대관절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단지흥을 이토록 얼빠진 바보로 만들어 놓았는가 몹시 알고 싶었다.
단지흥은 대답이 궁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하나 그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만일 영고의 아들애가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자기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영고의 아들 애를 자기 아들이라고 승인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단지흥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폐하, 만일 영고의 아들이 바로 폐하의 아들이라면 단황 나으리는 영고를 미워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고의 아들이 자기의 아들인데도 단황 나으리는 영고를 그토록 구박했으니 참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고 뭡니까? 더욱이 그 애를 단황 나으리가 죽이셨다면서요……."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단지 흥에게로 쏠렸다. 다들 그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망설이기만 하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또다시 숙녀동에서 영고와 함께 보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도 오늘처럼 달이 휘영청 높이 솟았었다. 그는 그날 밤 영고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팠다. 자기와 영고 사이에는 실로 정이 없었던가? 자기는 참말로 영고한테 미안해하고 있는가? 아니 미안해해야만 하는가? 영고는 진정 자기한테 미안해해야 할 짓을 저질렀는가?
단지흥은 자기가 대답을 못하면 영고의 이름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자기의 체모도 깎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용단을 내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고의 아들이면 바로 내 아들인 게야."
그러자 사람들은 삽시에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 있는 처녀들은 단지흥의 입에서 필시 다른 말이 튀어 나오려니 하면서 숨을 죽였으나 뻔한 대답이 나오자 더한층 영고를 동정하고 단지흥을 증오하게 되었다. 자기가 데리고 사는 황비의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마저 승인하기 싫어서 짜 내다시피 간신히 대답하니 정말 황제랍시고 더러운 심보를 부리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계집애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요. 내 오늘 소원을 풀어 드리겠어요. 우리 할머니를 위해 폐하를 죽여 버리겠단 말이에요!"
이 계집애는 원래 영고가 숙녀동에 있을 때 데려다 기른 의지가지없는 불쌍한 아이였다. 영고는 이 계집애를 진심으로 가여이 여기면서 잘 보살펴 주었었다. 계집애는 영고의 은혜를 언제나 가슴깊이 간직하면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폐하, 만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죽음으로 영고한테 속죄하는 길밖에 없는 줄 아세요."
처녀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자기가 영고의 아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숙녀동의 처녀들이 자기를 죽인다 해도 결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
단지흥이 인자한 척 웃고만 있자 계집애는 더 이상 못 참고 와락 달려들어 단지흥의 볼따귀를 연거푸 세 번이나 후려쳤다. 단지흥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자 계집애는 되레 자기 쪽에서 놀라 손을 멈췄다. 단지흥이 말은 그렇게 성인군자연하며 해도 일단 대들기만 하면 힘껏 막으면서 본색을 드러내리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가 가만히 맞고만 있는 게 아닌가. 계집애는 멍청하니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황제인데 어찌하여……."
계집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흥이 왜 가만히 앉아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는 생각을 굴리다가 뺨 정도니까 그러겠거니 하며 다시 용기를 내 채찍을 휘둘렀다. 첫번의 채찍질에 단지흥은 코끼리 잔등 위에서 나가떨어졌다. 두 번째 채찍질에 선비 역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단지흥은 코끼리 진 안에, 선비는 코끼리 진 밖으로 각각 떨어졌다.
계집애는 이만큼 성깔을 부리고도 여전히 앙앙불락이었다.
단지흥은 조그만 계집애한테 수모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얘야, 때리고 싶으면 실컷 때리려무나.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 내 그냥 맞고만 있을 테니."
농부, 나무꾼, 어부는 발끈하여 일제히 소리쳤다.
"감히 폐하를 때려? 네 년을 잡아죽이고야 말 테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어부지리를 얻는다 싶어 얼른 고함을 내질렀다.
"네 놈 셋은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잠자코 여기서 구경이나 해!"
그녀가 휙 손짓을 하자 뚱뚱보 여인 몇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셋의 앞을 떡 가로막았다.
"썩 물러나지 못할까!"
농부가 호통을 치자 어부는 그 서슬에 낚싯줄을 빙빙 휘두르면서 뚱뚱보 여인들을 향해 덮쳐 들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대환희 보살이 바라보고 있는지라 감히 도망칠 염을 못 내고 죽기살기로 대항했다. 세 사내는 이 뚱뚱보 여인들을 단번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 여인들은 시위들이 짓쳐 나오면 슬쩍 물러섰다가 틈만 있으면 다시 달려드는 것이었다. 세 시위는 이 여인들에게 애를 먹으며 선뜻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단황 나으리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라마 중은 그때껏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다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대뜸 대환희 보살의 사내들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라마 중이 합세하자 형세는 급격히 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환희 보살의 수하들이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다급해져서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싸움판에 끼여들었다.
동주 처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계집애에게 말했다.
"얘야, 넌 너무 참견해서는 못 쓴다. 코끼리 진 속에 갇혀서 밟혀 죽으면 그것으로 보응하는 셈이니까."
그 말에 계집애는 몸을 비켜 몇 발자국 뒷걸음질치더니 몸을 훌쩍 날려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갔다.
단지흥은 다시 코끼리들한테 포위되어 하늘을 우러렀다. 그는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 세상에 무슨 욕망이 있겠는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려는 이 시각에도 그의 마음속은 빈집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황궁에는 누구 한 사람 미련을 둘 만한 사람이 없고 이 천하에도 누구 하나 뼈에 사무치게 그리는 사람이 없다. 천하의 황제라도 이따위 인생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인생의 고통을 맛볼 대로 다 맛보았는데 코끼리 발에 짓밟혀
죽는다 한들 그 무슨 여한도 없을 것 같았다.
코끼리들은 천천히 조여 들었다. 이제 단지흥은 복판에 납작 끼여 몸을 돌릴 틈도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하늘은 손바닥만하니 빠꼼히 드러날 뿐이었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한치의 땅도 보이지 않았다. 사위에서는 코끼리들의 거센 숨소리만 들려 왔다. 이제 남은 것이란 죽음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동주 처녀의 가슴은 까닭 모르게 심하게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현듯 단지흥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사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대리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노래 한 가락이 떠올랐다.
어화 절싸 좋구나
황제 계시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근심이 없구나
태평성세 호시절에
인심도 좋아서
농부들 밭에서
흥타령을 부르네.
단황 치하에서 대리국 백성들은 확실히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만일 단황이 죽고 그의 동생이 뒤를 잇는다면 단황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처녀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뭇처녀들 앞에서 어찌 단지흥을 쉽게 용서해 줄 수 있으랴.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내흔들고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단지흥 이 놈! 저승에 갈 차비나 하거라!"
바로 그때였다. 코끼리 진 밖에서 불현듯 염불 외우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 왔다. 그러더니 기이하게도 코끼리가 점점 바깥으로 물러났다. 처녀들이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대도 코끼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 순간, 코끼리 사이를 비집고 중들이 한 무리 안으로 들어와 단지흥 주위를 빙 둘러쌌다. 누런 가사를 걸친 중들은 연해 염불을 외우면서 사위를 향해 정중히 합장을 했다. 그리고는 개중 하나가 선뜻 입을 열었다.
"숙녀동의 시주님께서는 종래로 속세의 일들에 대해 참견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무슨 연고로 우리 대리국 황제를 괴롭히십니까?"
동주 처녀가 얼핏 세어 보니 중들은 모두 여덟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응대했다.
"대리국 국운은 천룡사와 많이 이어져 있다는 걸 저도 익히 알고 있어요. 그러니 대리국 황제를 다치면 천룡사 여러 스님들을 노엽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단황 나으리와 우리 숙녀동 사이의 은원은 당신네 천룡사와는 실로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동주 처녀는 짐짓 준엄하게 말했다. 나이가 제일 많고 얼굴에 불긋불긋 화색이 도는 노승이 나지막하게 개탄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고선 장로였다.
"숙녀들의 정갈한 마음 역시 불심처럼 득실하구먼. 하지만 동주 처녀께서 우리 황제 폐하를 이 코끼리 진에서 풀어 놓지 않는다면 우리 천룡사는 동주 처녀와 원한을 맺게 될 겁니다."
동주 처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대꾸했다.
"보아하니 천룡사 사람들은 아직 범심(凡心)을 채 지우지 못했군요. 그러니 고승이랄 수 없음이요, 또 매일 염불이나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고선 장로는 낮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대답했다.
"불심은 재기(在機), 재심(在心)이고 무심고심(無心固心)은 본래 부처님 뜻이라 했소."
그러나 동주 처녀는 호락호락 꺾이지 않았다.
"이 코끼리 진 속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원래 하나뿐이었는데 지금 대사님께서 여러 승려들을 끌고 와서 억울한 사람 목숨을 여덟이나 더 내던지려 하니 그게 부처님 뜻을 어기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지요?"
고선 장로 역시 수그러 들지 않았다.
"당신이 황제 폐하를 해치는 것은 바로 대리국을 해치는 것이요, 대리국을 해친다면 수천수백만 중생들이 유리걸식하게 될 것인즉, 그 죄는 경하지 않은 것이오."
동주 처녀는 고선 장로의 말에 매우 일리가 있다고 여겼으나 겉으로는 그냥 고집을 부렸다.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예요. 그러니 그 처사도 깨끗하고 바르며, 밝고 도량이 넓어야 할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단황 나으리의 영고에 대한 처사는 참으로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래 이런 처사가 불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고선 장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처녀는 아직 견식이 모자라는구려. 보아하니 당신은 비록 동주 노릇은 하고 있으나 결국은 한갓 처녀에 불과하군. 처녀는 아직은 이 세상의 사내와 여자들 간의 일에 대해 다는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오. 이 노승도 비록 금년에 백하고도 십 년을 더 살았지만 아직 남녀 사이의 정에 대해서는 죄다 알 수가 없다오. 자기도 다 알지 못하는 남녀 사이의 일을 가지고 처녀는 왜 이다지도 고집을 부리는가 말이오?"
동주 처녀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노승의 말에 감복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단지흥에 대해 억하심정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아무튼 그녀는 점점 기세를 잃어 갔다.
"노승의 말씀이 설사 죄다 옳다고 해도 우리 영고에 대한 단황의 증오심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지 않아요?"
고선 장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처녀는 이 노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구먼. 그러면 우리 천룡사의 여러 스님들에게 손을 써 보오. 처녀가 나까지 포함해 우리 천룡사의 이 여덟 스님을 죽이기만 하면 단황 나으리의 일에 대해 우리 천룡사에서는 더 상관치 않겠네."
처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덟 중 놈들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이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는 거야! 천룡사의 무예가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저 말이 그럴 뿐이지. 좋아 내 눈으로 친히 한번 봐야겠어.'
처녀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 보니 이젠 마음이 점점 모진 쪽으로만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룡사 중들과 승부를 가려 보고 싶은 마음이 발끈 동해 단호히 내뱉었다.
"천룡사 스님들께서 싸울 뜻이 있으시다면 우리 숙녀동의 여인들은 달갑게 응하겠어요. 하지만 지는 날에는 우리들에게 공정하게 대해야만 됩니다!"
"허, 공정하게 대한다뿐이겠소. 한 사람의 마음도 자네들한테 돌려주겠네."
고선 장로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처녀는 갑자기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육중한 코끼리들이 한층 더 뒤로 서서히 물러서는 것이었다. 코끼리 떼가 한쪽으로 물러서자 선비는 얼른 단지흥 곁으로 달려왔다.
고선 장로는 단지흥을 바라보면서 정중하면서도 엄하게 말했다.
"남녀지정이란 흔히 그 속에 빠질 수도 있사옵니다. 하지만 빠졌다가도 느끼고 깨달아야만 하옵니다. 폐하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계시옵니까? 나라와 백성들을 다 망친 후에야 깨달으려 하시옵니까?"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정이란 것은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옵니다. 지금 나는 대사님이 승상과 함께 돌아가시어 함께 단지방을 보필하여 등극하도록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또 그래야만 남한테 진 빚을 갚을 수 있으며 그것이 제 도리인 줄 아옵니다."
선비는 단지흥이 이미 세상만사를 귀찮게 여기고 있고 유독 영고와의 그 일만을 못 잊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단지방님께 황위를 물려준다 하더라도 이 일은 심사숙고 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이런 경황중에 한마디로 해결할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처사 하시어 나라 안에 난리가 없으리라 생각하시옵니까?"
선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었다. 단지흥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니 사직이니 하는 것은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복수를 다짐하던 영고의 얼굴만이 자꾸 어른거릴 뿐이었다.
"난 나라일은 더는 상관하지 않겠소이다. 스님들은 자꾸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 단지방이나 잘 보필하십시오. 잘만 보필하면 단지방도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황제가 나라일을 상관하지 않겠다는데 그것도 과히 나쁜 일은 아니옵니다. 우리 천룡사에는 이전에 대리 황제 몇 분이 머리를 깎고 귀의하신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들이 쳐 놓은 코끼리 진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황제께선 정신을 단단히 차리시고 이 코끼리 진을 타계할 궁리를 하셔야 합니다. 대리 단씨의 가학인 일양지를 남들이 초개처럼 보지 말도록 말입니다!"
그때 동주 처녀가 크게 소리쳤다.
"천룡사 승려들께 미리 알려 드립니다. 이제 곧 우리 숙녀동의 상취광풍(象鷲狂風)이 터질 거예요, 조심들 하세요!"
고선 장로가 손짓을 하자 나머지 일곱 중들은 고선 장로와 함께 재빨리 여덟 방위로 갈라져 자세를 취했다. 이들이 지키는 방위는 팔괘의 방위와 완전히 합치되는데 고선 장로는 태위(兌位)에 서 있었다. 이윽고 여덟 스님은 《금강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독경 소리는 밤 하늘로 높게 올려 퍼졌다. 그 소리에 지상엔 적이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숙녀동에서는 종래로 천룡사 무예를 구경해 본 적이 없는 데, 오늘 이처럼 안계를 넓히게 해 주시니 고선 장로님께 대단히 감사드려요."
동주 처녀가 불쑥 내뱉었다. 고선 장로는 원래 입에 발린 말에는 아랑곳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코끼리들이 갑자기 대가리들을 쳐들더니 무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 땅이 진동하는 듯했다. 모든 사람들의 낯빛은 삽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한 순간, 울부짖음이 멎고 코끼리들은 여덟 사람들을 향해 터벅 터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비가 소리를 질렀다.
"코끼리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그 어떤 초수도 다 소용이 없으니까!"
하지만 고선 장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코끼리들이 다가들든 말든 목청을 길게 빼며 경문만 외우고 있었다. 그 독경 소리는 마치 바다에서 용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다른 일곱 스님들도 일제히 따라서 경문을 외우고 있었다. 여덟 스님이 합세하여 독경하는 소리는 마치 끊임없이 기복을 이루며 밀려드는 밤 바다의 파도처럼 비장했다. 그 소리에 코끼리들은 자못 불안한 기색으로 멈칫멈칫하더니 한 마리씩 차례로 제자리에서만 빙빙 맴돌 뿐 더는 앞으로 다
가들려 하지 않았다.
동주 처녀는 당황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코끼리 잔등 위에 올라탔던 처녀들은 속속 독수리들을 풀어 놓았다. 독수리는 날 짐승인지라 땅 위에서 사는 맹수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들은 공중에 높이 날아올랐다가는 슬슬 저공으로 선회해 내려오면서 고선 장로를 비롯, 단지흥 쪽 열 사람을 낚아챌 기회만 노렸다.
"승상, 얼른 내 등뒤로 숨게!"
단지흥은 급급히 외쳤다. 선비는 자기 재간으로는 도저히 이 코끼리와 민대머리 독수리들의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어 얼른 단지흥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짐승은 짐승일 뿐,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더냐?"
고선 장로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윽고 독수리 한 마리가 고선 장로를 겨냥하고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고선 장로는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독수리의 그 억센 발톱을 툭 퉁겨 냈다. 독수리는 비명 같은 울음을 한 번 토해 놓더니 놀란 듯 공중으로 홱 날아올랐다. 다른 독수리도 단지흥에게 덮쳐 들었으나 손가락을 한 번 퉁기니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다.
선비는 단지흥의 등뒤에 서서 여덟 스님들의 초수를 눈여겨보았다. 지금 이들은 대리 일양지의 최고 초수인 육맥신검을 쓰고 있었다. 이 육맥신검은 원래는 보정제와 서역의 중인 구마습이 무예를 겨룰 때 그 위풍을 나타냈던바, 단지흥에 이르러 더욱 세련되어진 초수였다. 단지흥과 여덟 스님이 매섭게 지풍을 날리니 독수리들은 조금도 범접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연거푸 내지르는 지풍은 마치 공중에 그물을 쳐 놓은 듯하여 독수리들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그들의 살점
하나 할퀴지 못했다.
"처녀, 이제는 그만둘 때가 안 됐나? 이만하면 중생들도 다행히 무사한 셈이고 우리도 덕을 쌓은 셈이야."
고선 장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자 동주 처녀가 깔깔 웃어댔다.
"호호호, 대리 단씨의 이 일양지는 참말 볼 만하군요. 육맥신검 역시 세상에 둘도 없는 신법이구요. 좀더 구경을 하십시다."
동주 처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와 코끼리 잔등에 앉은 처녀들은 일제히 코끼리를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삽시에 복판에 있는 넓다란 공지는 점점 좁혀지고, 코끼리들은 시시각각으로 단지 흥과 스님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자 하늘에는 민대머리 독수리들이 새까맣게 날아와 빙빙 선회했다. 천룡사 스님들과 단지흥은 복판에 완전히 포위됐다.
'폐하, 폐하는 내게 꼭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다들 일심양용(一心兩用)이라고들 말하지만 난 안 믿어요. 단황께서 내 독수리 떼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코끼리 떼의 공격은 막아내기 힘들걸요. 설사 내 코끼리 떼를 막아냈다 하더라도 우리 숙녀동의 숙녀들이 아직 손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동주 처녀는 적이 의기양양했다.
단지흥은 사뭇 정중히 말을 받았다.
"이 천룡시 스님들을 너무 핍박하지 말게! 기어코 트집을 잡아 싸움을 벌이면 서로간에 다 끝이 안 좋을 테니!"
"그럼 우리 영고를 왜 그토록 구박했어요? 그랬는데도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단지흥은 그 말에 그저 장탄식을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선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님께서는 손을 쓰시더라도 사정을 봐 가면서 써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 여인들은 모두 영고의 자매들입니다."
고선 장로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코끼리 떼가 다가오는 것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불현듯 고선 장로가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휙 뛰어오르더니 허공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발을 굴러 한 코끼리의 잔등 위로 사뿐 날아 내렸다. 잔등 위에 있던 세 처녀는 당황하여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가 일며 채찍 세 개가 연거푸 장로의 몸에 떨어졌다. 세 처녀들은 설사 이 호된 채찍질에 상하지는 않는다 해도 코끼리 잔등 위에서는 쉽사리 버틸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장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코끼리 머리 위에 우뚝 올
라서 있었다. 그 코끼리는 자기 머리 위에 사람이 올라섰는지라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또 아래로 처박기도 하면서 땅바닥으로 떨궈 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코끼리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고선 장로는 끄떡도 안 했다.
드디어 코끼리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무섭게 울부짖으면서 두 앞발을 쳐들고 몸뚱이를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새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잔등 위에 앉아 있던 세 처녀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코끼리 가죽을 움켜잡고 발악을 했다. 이제 몇 번만 앞발을 쳐들고 일어서는 날이면 고선 장로가 나가떨어지기 전에 세 처녀들이 내동댕이쳐질 판이었다.
고선 장로는 세 처녀들을 보면서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낭자들! 부처님께서는 자비하십니다. 그러니 세 처녀들은 어서 내려가는 게 좋을 듯하오."
그리고는 옆의 코끼리 머리 위로 훌쩍 건너뛰었다. 그러자 그 코끼리 잔등 위에 타고 있던 처녀들은 모두 기겁을 해서 마구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고선 장로는 코끼리 머리 위에서 단번에 잔등 위에 달아맨 앉은뱅이 의자까지 날아가더니 손으로 힘껏 의자를 당기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려가게!"
세 처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러자 코끼리 진 안에는 단지흥, 선비, 일곱 스님과 더불어 이 세 처녀들도 함께 갇힌 격이 되었다.
동주 처녀는 세 처녀들의 꼴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졌다고 승복을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싸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고는 단지흥이 선뜻 나섰다.
"세 아가씨는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단지흥은 즉시 한 처녀를 두 손으로 잡아서는 공중에다 휘익 뿌렸다. 묘하게도 그 처녀는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곧바로 코끼리 잔등 위로 떨어졌다. 다시 한 처녀를 잡아서 뿌리니 그녀 역시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세 번 손을 쓰니 세 처녀는 모두 자기가 탔던 코끼리 잔등 위로 다시 올라타게 되었다.
이때 고선 장로는 이미 진 안으로 도로 내려와 서 있었다.
"이봐요 동주 처녀, 이만하면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천룡사의 여덟 스님들과 함께 있는 이상, 이제 다시 독수리 떼를 풀어 놓아도 소용이 없을 게야."
단지흥은 고선 장로를 힐끔 보더니 천천히 운을 뗐다. 그러자 동주 처녀는 공중에서 빙빙 날아 도는 독수리들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단지흥의 말마따나 독수리들은 평소와는 달리 마구 덮쳐 들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 먹고 소리를 질렀다.
"허튼소리 말아요! 단황이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천룡사까지 도와 나서기는 했지만, 우린 숙녀동의 영고를 구박한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어요!"
그 순간, 단지흥은 부지중 영고가 남기고 간 말이 불쑥 떠올랐다. 영고는 옥팔찌를 그에게 도로 돌려주는 날이 그녀가 칼로 그의 가슴팍을 찌르는 날이 될 거라고 했었다. 단지흥은 잠시 생각에 잠져 있더니 이윽고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나와 영고 사이의 일들은 내가 요량해서 처리할 것이다. 그대들과는 정녕 상관이 없노라……."
그러자 계집애가 대번에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우리 할머니를 망쳐 놓았어요. 우리 할머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당해 내요?"
"사람들 사이의 잘잘못은 하늘이 굽어보는 법이다. 만일 나와 영고 사이에 참말로 원한 맺은 일이 있다면 조만간 우리 둘이 결판을 지을 것이다. 네가 왜 나서서 이다지도 조급해 하느냐?"
단지흥은 단호하게 내뱉더니 동주 처녀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난 일찍이 숙녀동과 등을 지고 살 생각이 없었노라. 오늘 일에도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저 독수리들은 물러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차후에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 주겠으니……."
"지금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내일이라고 말하겠어요?"
동주 처녀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뜸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단지흥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입을 뗐다.
"그래 난 그 일을 발설할 수는 없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난 결코 알려 주지 않을 테야!"
동주 처녀는 날카롭게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일순 고선 장로 쪽으로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장로님, 나는 잠시 여기서 이 처녀들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여러 스님들과 승상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가셔서 대환희 보살네 무리들에게 혼찌검을 좀 내 주십시오. 그들은 대리에서 악독한 짓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단호했다. 고선 장로와 선비는 말없이 단지흥을 쳐다보기만 했다. 단지흥 홀로 여기에 남으면 그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황제의 분부를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난 차후에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 둘이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더욱이 오늘 일은 나와 숙녀동 사이의 일인즉, 저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러니 저 사람들은 순순히 밖으로 나가게 허락해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후 나 혼자서 결판을 짓겠다! 어떤가?
의외로 단지흥이 그렇게 나오자 동주 처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거니! 여덟 중 놈이 곁에 있으니 당신이 무사했지, 이제 그들이 나가만 보아라, 당신은 죽는 길밖엔 없어!'
동주 처녀는 방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과연 대범한 분이시군요. 단황 나으리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코끼리들은 천천히 움직거렸다. 이내 코끼리 무리 사이로 한 갈래 길이 생겼다. 천룡사 중들은 지리를 뜰 생각을 않고 근심 어린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단지흥은 고선 장로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근심일랑 하지 마십시오. 대사님께서 나가시기만 하면 나 홀로라도 빠져 나가는 수가 따로 있습니다."
고선 장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안에 있던 사람이 밖을 내다볼 때 기실 나가나 들어오나 다 같은 거지요, 허허허……."
그리고는 고선 장로는 더는 두말도 않고 몸을 훌쩍 날려 코끼리 진 밖으로 떨쳐 나갔다. 그는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대환희 보살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께선 나더러 너희 사악한 무리들을 극락세계로 제도하라 하셨다. 알아들었느냐?"
동주 처녀와 숙녀동 처녀들은 이 고선 장로의 재간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녀들은 일단 고선 장로가 손을 쓰기만 하면 자기네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흥의 말을 듣고 의리를 지켜 코끼리 떼를 날아 넘으면서도 손가락 하나 내흔들지 않았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고선 장로의 인품에 감복해 마지않았다.
코끼리 진 안에 남아 있던 선비와 일곱 중들도 일제히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코끼리 사이로 난 비좁은 길로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 나갔다. 밖에서 뚱뚱보 여인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농부, 어부, 나무꾼 그리고 라마 중은 이들이 진 밖으로 나오자 다급히 소리를 질러댔다.
"폐하는 어디 가시고 이렇게들만 나오십니까?"
평소에는 언제나 늑장을 부리던 어부마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승상, 폐하는 어디 계시오?"
선비는 워낙 궁리가 깊은 사람인지라 이쪽의 전열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짐짓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영을 내리셨다! 이 극악무도한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깡그리 잡아죽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급급히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농부와 나무꾼, 어부도 단지흥의 신변이 안전함을 확인하자 마음이 한결 놓여 더욱 기세 사납게 공격을 들이댔다.
대환희 보살은 그만 기겁을 하여 충피를 마구 불러댔다.
"충피! 어디 갔느냐? 빨리 독벌과 독사들을 풀어 놓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충피는 다시금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쥐죽은듯 엎드려 있던 독사들은 대번에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는 어부, 농부, 나무꾼, 선비를 향해 덮쳐 들었다.
여덟 중들은 얼른 내달아 손가락을 휘둘러댔다. 독사들이 새까맣게 몰려 와도 누구 하나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독사들은 두 동강이 나 널브러졌다.
"고선 장로님, 이 독사들을 모조리 죽여 주십시오. 살려 두었다가는 이후에도 숱한 생령을 해칠 겁니다."
선비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뱀들을 모조리 죽여라!"
여덟 중들은 일제히 손가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삽시에 공중으로 독사들이 마구 날아오르고 핏방울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선 장로와 일곱 스님이 쓰는 지법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눈여겨보니 이들의 지법은 단지흥의 지법과는 퍽 달랐다. 여덟 스님의 손가락이 어지러이 오락가락하자 마치 공중과 땅에 날카로운 검으로 만든 그물이 둘러쳐지기라도 하는 듯 독사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 장 남짓 밖에서 벌써 몸뚱이가 몇 토막
으로 동강나곤 하는 것이었다.
"충피, 저 중 놈들과 결판을 내거라!"
대환희 보살은 조급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충피도 흠칫 놀라며 독사들을 몽땅 풀어 놓았다. 하지만 독사들은 기어가는 족족 여덟 스님의 칼날 같은 지풍에 맞아 무더기로 죽어 갔다. 잠깐 사이에 독사들은 거의 다 죽거나 상했다.
대환희 보살은 악에 받쳐 또 소리를 질러댔다.
"충피, 독벌! 빨리 독벌을!"
"알았습니다!"
충피는 얼른 또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금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갈수록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가득 메우고 독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고선 장로는 그 모습을 보고 황황히 소리를 질렀다.
"독벌이야, 조심하게나!"
고선 장로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선비, 어부, 나무꾼, 농부 앞에 막아 서서 다시금 지풍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법은 여전히 위력이 대단했으나 방금 전 독사 떼를 소탕할 때보다는 훨씬 못했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 내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흐르자 일곱 중들은 몹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고선 장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았다.
'어찌 이다지 흉악할 수 있는가.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려 했더니 그랬다가는 후한이 무궁하겠구나.'
고선 장로는 즉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대환희 보살, 공손히 승복하지 않으면 당장 너를 죽여 버릴 테다!"
대환희 보살은 점점 우세로 나아가고 있는지라 득의양양하게 응수했다.
"이 늙다리 중 놈아, 네가 만일 환희선을 좋아한다면 내 곱게 승복하마. 그런데 환희선을 하더라도 나와 같이 하면 어떠냐? 듣자니 넌 그런 짓거리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하더라만!"
고선 장로는 대로하여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곧추 대환희 보살한테 덮쳐 들려 했다. 그 순간 선비가 얼른 옷깃을 잡았다.
"고선 장로님, 아직은 내버려둡시다. 지금 제일 괘씸한 것은 저기 숨어 있는 저 난쟁이올시다."
고선 장로는 선비가 가리키는 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무 뒤에서 괴상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네 놈은 이미 우리 천룡사와 원수진 일이 있는 터, 내 오늘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충피는 고선 장로의 비범한 초수와 재간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도망치려고 엉겁결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계속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냅다 뛰었다. 그러자 독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웅웅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고선 장로는 훌쩍 몸을 솟구쳐 그의 눈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삽시에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짓누르면서 호통을 쳤다.
"밥 먹듯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뉘우침도 없느냐?"
"후……후회……."
그러나 고선 장로가 힘을 한 번 주자 그는 채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두개골이 우그러 들며 두 눈에서 삽시에 피가 솟구쳤다. 충피는 그대로 땅바닥에 뻗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충피는 평소 피를 먹여서 독벌들을 길들여 왔는지라 독벌들은 충피의 몸뚱이에서 피 냄새를 맡자 대번에 그의 몸뚱어리에 달라붙어 윙윙거리며 피를 빨아먹었다. 충피의 몸뚱이에는 분봉하는 벌 떼처럼 삽시에 독벌들이 몰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충피가 이미 죽은 송장이 된 줄도 모르고 마냥 충피를 불러댔다.
"충피! 빨리 독벌을 풀어 놓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어서 독벌을 풀어 저 놈을 죽이거라!"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충피는 대답이 없었다. 뿐더러 독벌도 보이지 않았다.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 얼른 사위를 훑어보았다. 오로지 충피만 보이지 않을 뿐 늙은 중이나 단지흥의 네 시위나 라마 중, 천룡사의 일곱 중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래도 버티고 서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질겁을 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얘들아! 저…… 저 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여라!"
사내들과 뚱뚱보 여인들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기는 했으되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고 그저 몇 합 싸우다가는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이 사내들은 모두 미약을 먹고 이성을 잃은 놈들이니 각별히 조심들 해야 합니다!"
선비는 나직이 귀띔을 했다. 그러자 천룡사 중 서넛이 달려나가 순식간에 사내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왔다. 사내들은 무릎을 꿇려서도 계속 발악을 해댔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봐라! 난 공동파의 검객이다! 육각유성수가 뭔지 알기나 아는가?"
선비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사내들을 똑바로 노려보더니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따위 악종들을 죽여 버리지 않으면 후일 우환거리만 남기게 됩니다. 가차없이 죽여 버리시오!"
하지만 중들은 차마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죽지 않을 만큼 사정을 두어 팔다리만 끊어 놓았다. 놈들은 팔다리가 끊겨 땅바닥에 나뒹굴면서도 마냥 악담을 늘어놓았다. 고선 장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중 놈들, 감히 내 수하 사람들한테 손을 대다니! 이 어르신이 오늘 네 놈들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대환희 보살은 두 눈을 까뒤집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 분에 못 이겨 윗통을 활활 벗어젖히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어댔다.
"단지흥 이 놈! 냉큼 나서지 못할까! 내 오늘 네 놈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네 놈의 대리국에는 모두 죽일 연놈들밖에 없어!
사내 놈들은 죄다 쓸개 빠진 놈팽이들뿐이고 계집들은 죄다 낯가죽이 쇠가죽보다 두꺼운 화냥년들뿐이야! 이 노옴, 내 네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눈을 감으리이……."
코끼리 진 안에는 달랑 단지흥 혼자 서 있었다. 동주 처녀는 그윽이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넌지시 물었다.
"폐하의 용기에 참으로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저의 코끼리 떼를 당해 낼 수 있을까요?"
"난 살고 죽는 건 이미 초월했다. 그런 건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야. 영고의 아들은 내가 죽였다. 난 영고한테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죽어 마땅한 죄지! 하여 네가 나를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노라!"
단지흥은 비장하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푹 주저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할머니, 무슨 술수라도 피우는 게 아닐까요?"
계집애는 대뜸 소리치면서 코끼리 잔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내처 단지흥 앞으로 바투 다가가 갑자기 단지흥의 대혈을 쿡 찌르고는 연거푸 몇 군데 혈도를 거의 다 찔러 놓았다. 선중혈( 中穴)이 찔릴 때 단지흥은 일순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내비치고 낯빛마저 삽시에 변했지만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할머니, 이제는 용 빼는 수가 없을 거예요. 어서 내려오세요."
다른 계집들도 여남은 코끼리 잔등 위에서 뛰어내려 단지흥에게 바싹 다가갔다.
"달갑게 죽으려 한다는데 그 소원 기꺼이 성취시켜 주마. 지옥에 가서 고생이나 실컷 해 보아라!"
동주 처녀는 행여 다시 망설이게 될까 봐 급급히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때였다. 계집애가 갑자기 외쳐 불렀다.
"할머니!"
동주 처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언뜻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머리가 돈 것 같은데…… 참말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요? 사람을 억울하게 죽여도 마음이 편치 못할텐데……."
"그게 그러니까……. 나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냐! 말끝마다 영고의 아들이라고 하니 정말 이상스럽지 않느냐? 필히 영고의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란 뜻이 아니고 뭐냐? 난 지금도 바로 그 말 때문에 어쨌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동주 처녀는 사뭇 시무룩했다. 계집애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순 손뼉을 탁 쳤다.
"묘한 수가 있어요. 죽이지 말고 먼저 우리 숙녀동으로 끌고 가요! 그런 연후에 영고더러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면 되잖아요! 어때요?"
동주 처녀는 대번에 반색을 했다. 실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조그만 것이 영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좋다. 그럼 네가 끌고 가도록 해라."
계집애는 단지흥을 움켜잡은 채 몸을 날려 코끼리 잔등 위로 단 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다들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대리국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귀담아들으라! 너희들의 황제는 우리가 끌고 간다. 너희들이 황제의 목숨을 중히 여긴다면 섣불리 우리 숙녀동 사람들을 노엽게 하지 말거라!"
독수리들은 무리를 지어 빙빙 하늘을 맴돌고 코끼리 떼는 수림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제36장 부처에 귀의한 남제
밤이 깊을수록 숙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시름시름 앉아 있다가 대뜸 궁녀를 보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어머나 숙비님도 참……. 승상님께서 황제 폐하의 침궁에서 숙비님을 발견하고 혈도를 풀어 준 연후에 숙비님께서는 승상께 폐하의 행방을 알아 오라고 분부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황비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이르고도 깜빡 잊었구나."
숙비는 또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궁녀를 보고 대뜸 말했다.
"네가 가서 그 진짜배기와 가짜배기를 어서 불러 오너라. 내 긴히 할말이 있으니."
그러나 궁녀는 숙비를 힐끔 바라볼 뿐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숙비는 버럭 화를 냈다.
"들었느냐, 먹었느냐? 빨리 가지 못할까!"
"숙비님께 아룁니다. 그 두 사람은 궁내 연못에 빠져 죽었사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지 반 시진이나 지나서야 송장을 발견했사옵니다. 일각쯤 전에 황후마마께서는 사람을 시켜 송장을 건져 올리라고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그 말에 숙비의 얼굴빛은 삽시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다.
'이런 끔찍한 일이……. 폐하께서는 필시 나한테 무슨 벌을 줄 것인가 궁리하고 계실 것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는 난 죽고 말겠지. 두 태감도 그 일을 누설할까 봐 폐하께서 자결하라고 시킨 것일 게야! 결코 나를 용서해 줄 리 없어. 조만간 나를 죽이고 말 거야……."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댔다.
새로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했을 때 불현듯 풍경 소리가 왈강달강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밖에 있는 궁녀에게 소리쳐 물었다.
"폐하께선 아직도 안 돌아오셨느냐?"
"숙비님께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사옵니다."
그녀는 한편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도무지 진정이 안 돼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궁녀를 불러들였다.
"이리 들어오너라. 나하고 좀 놀아 보자꾸나."
궁녀는 놀아 보자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 차제에 두 태감이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일단 방에 들어서기는 했으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숙…… 숙비님,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제발……‥
숙비는 벌컥 화가 나서 매섭게 궁녀를 쏘아보면서 따져 물었다.
"평소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해 주었느냐?"
궁녀는 나오는 말투가 벌써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는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애걸하기 시작했다.
"숙비님, 평소 이 미천한 것한테 베푸신 은혜는 실로 백골난망이옵니다. 하오나……."
숙비는 궁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손을 쓱 뻗쳐 궁녀의 귀를 있는 힘껏 잡아 비틀었다.
"어서 말해 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비틀어 대니 궁녀는 숨이 꺽꺽 막힐 지경이었다. 너무 아파서 입을 딱딱 벌리는 궁녀를 내려다보면서 숙비는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호, 내 은혜에 백골난망이라니 됐다. 그런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수 있겠지? 그렇지? 어떠냐, 난 너하고 함께 죽으려 하는데 네 생각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궁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일순 귀가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님, 소인은 평소 숙비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사……."
궁녀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숙비는 쥐어뜯을 듯이 세게 한 번 귀를 비틀고는 그녀를 홱 밀쳐 버렸다. 궁녀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그 꼴도 못 보겠는지 숙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궁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쌀쌀맞게 웃었다. 꼭 실성한 사람 같았다.
"너는 어서 가서 다른 계집애들을 몽땅 불러 오너라!"
그리고는 그녀는 세차게 궁녀를 뒤로 밀어붙였다. 궁녀는 윽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얼마 후 궁녀들이 잠이 덜 깬 눈두덕을 연신 비비대면서 영문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와 숙비 앞에 대령했다. 숙비는 얼떨떨해 있는 궁녀들을 휙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얼마 후에는 죽고 말 것이다.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숙비의 낯빛이 적이 심상치 않은지라 궁녀들은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려나 하고 잔뜩 가슴을 졸였다. 한참이나 아무도 대꾸가 없더니 이윽고 평소 아첨을 떨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궁녀 하나가 대뜸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폐하께서 숙비님을 그토록 총애하고 계시온데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무 변고도 없을 것이니 숙비님께선 시름을 놓으십시오."
"그럴까? 그렇게 됐으면 오죽이나 좋겠느냐. 그렇담 이런 재수 없는 얘긴 그만두고…… 나한테 좋은 술이 있으니 오늘은 모두 시름을 잊어버리고 술이나 진탕 마셔 보자. 중원 땅에서 폐하한테 보내 온 술이노라. 어서 그 술을 가져 오너라!"
숙비의 궁녀가 냉큼 일어나 쪼르르 달려나갔다. 나머지 궁녀들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저마다 속궁리를 하면서 숙비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를 살펴봐도 대관절 무슨 심사로 술판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전이 하는 노릇을 언감생심 물어 볼 수도 없는지라 모두들 속앓이만 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졌다. 궁녀들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으나 감히 술잔을 들어올릴 염도 못 내고 숙비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봐라, 어서 술들 마시잖고 뭐 하고 있는 게냐?"
숙비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너도 나도 천천히 술을 입에 갖다 댔다. 워낙 좋은 술이라 일단 혀끝에 닿자 향긋한 내음이 쏴하게 돌며 입에 착 감겨 왔다. 그러니 일단 한잔 마시고 나자 두 잔째부터는 술술 잘도 넘어갔다. 이내 얼큰하게 취기가 돌며 궁녀들은 그 무슨 불안감과 공포심도 없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 궁녀가 숙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숙비님, 소인은 폐하께서 꼭 숙비님을 잘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하옵니다. 황비 영고는 원래 폐하의 총애를 받았지만 종당에는 떠나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귀비 치주 역시 폐하께서 그토록 아끼셨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지요. 총애가 유별한 황비님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궁중에 계시는 분은 오로지 숙비님 한 분뿐이옵니다. 그러니 폐하의 은총은 자연 숙비님께서 독차지하게 될 게 아니옵니까?"
궁녀들은 다들 옳은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숙비는 그 궁녀를 쏘아보며 속으로 냉소를 쳤다. 자기 앞에서 발린 말들만 골라 하느라고 신경을 쓰고 있는 궁녀들이 가소롭기 그지 없었다.
술판은 이제 막 한창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쯤 되자 궁녀들은 모두 얼굴빛이 복사꽃처럼 발그스름해졌다. 궁녀들은 가슴이 갑자기 세차게 뛰고 숨결도 가빠지면서 서로를 흘끔흘끔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답답해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궁녀들은 저마다 저고리 앞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잡아들기 시작했다.
숙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뜻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내가 폐하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다. 난 더는 참아 낼 수가 없어. 너희들이 평소 서로 어떤 짓들을 해 왔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남의 눈을 피해 사내들을 홀려서는 온갖 재미들을 다 보았지? 하지만 나만 재수 없게 폐하한테 들켰단 말이다. 오늘 너희들은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해. 그래야 난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어."
뺨이 홧홧 달아오르고 앞가슴이 툭툭 뛰어 정신없이 얼굴과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궁녀들은 그제야 숙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희들한테 솔직히 알려 준다마는, 난 너희들이 방금 마신 술에다 미약을 타 넣었다. 사내 생각을 하게 하는 춘약(春藥) 말이다.
너희들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정욕을 풀지 못하면 결코 좋지 못할 게야!"
궁녀들은 너나없이 오늘 큰 봉변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숙비의 표독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개중 담이 좀 큰 궁녀가 숙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대뜸 말했다.
"폐하께서 계시지도 않으신데, 저희들은 숙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태감들을 불러 올까요?"
"그으래? 눈치 하난 빠르군. 그래 태감들은 다 어딜 간 게냐?"
숙비가 사뭇 쌀쌀하게 내쏘자 한 궁녀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다……다들 후원에……."
"내가 또 보잘까 봐 알아서 후원에 나가 있으라 한 게야, 응? 내가 그따위 반편 같은 사내놈들을 또 보잘까 봐?"
숙비가 버럭 역정을 내자 모두들 감히 말을 못하고 굽실 머리를 조아렸다.
"내 말을 거역했다간 다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거라. 하나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주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녀들은 일제히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분부를 기다렸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저녁나절에 이 숙비와 두 태감 놈이 어설픈 재미를 보다가 폐하한테 발각당해 혼쭐이 났었다. 그래 두 태감놈은 그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가. 오늘 우리들이 이 숙비의 말을 거역해도 죽음이요, 고분고분 듣는다 해도 역시 저 숙비가 우리들 일을 다 불어 버려 한 동아리로 끌고 죽음으로 들어가려 할 테니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다. 그럴 거면 이왕에 재미나 보고 죽자.'
한 궁녀는 마침내 작심을 하고는 선뜻 입을 열었다.
"달갑게 분부를 따르겠사온즉, 어서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러자 숙비는 냉소를 치면서 손짓을 했다. 어서 태감을 불러들이라는 뜻이었다. 궁녀 몇이 냉큼 뛰어나가 눈에 띄는 대로 태감들을 꼬드겨서는 얼른 데리고 돌아왔다.
태감들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적이 어색하기만 했다.
궁녀와 태감들은 서로 마주선 채 힐끔힐끔 곁눈질이나 할 뿐 누구 하나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평소에는 서로 하나씩 짝을 맞추어 재미를 보느라고 야단들이었으되 오늘은 숙비가 보는 데서 그 짓들을 하자니 자못 불안스러웠던 것이다.
'보아하니 저 숙비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폐하한테 보복을 하자는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니 이 일이 폐하한테만 발각되지 않으면 만사대길이나 만의 하나 발각되는 날에는 다들 끝장이다.'
다들 멀뚱멀뚱 서서 눈만 꿈뻑거리는데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숙비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멋들어지게 한번 놀아 보십시다."
그 말에 모두들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도 너나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일순 태감 하나가 쓱 앞으로 나서며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내 벌거숭이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앞을 다투어 궁녀들과 태감들이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 숙비의 침궁 침실 안에서는 몇 쌍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발그레 상기 돼서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마주앉았다. 숙비는 상좌에 높직하니 올라앉아 이들을 굽어보았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추상같이 명을 내렸다.
"태감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모두 사내라고 할 수 없는 종자들이니 별로 구경할 만한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네 놈들은 각자 계집 하나씩을 맡아 성심성의를 다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멋진 구경거리를 만들어 내란 말이다. 저 계집들의 아래고 위고 죄다 물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게 하란 말이야."
그리고는 숙비는 흥을 잔뜩 돋워 놓으려고 태감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무리 영이 지엄하다 해도 제정신으로야 할 수 없는 짓 아닌가. 한 순배, 두 순배, 술이 돌자 태감들은 차차 술 기운이 돌아 게슴츠레하니 궁녀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한 사내가 계집에게 후딱 달려들자 저마다 와락와락 계집들한테 달려들었다. 벌거숭이 남녀들은 이내 한데 어우러져 서로 애무를 하고 입을 맞추고 샅을 만지작거리며 바야흐로 사뭇 음란한 정경을 자아냈다.
숙비는 눈 한 번 깜빡 않고 이 남녀들의 정사를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혼자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폐하, 당신의 이 황궁을 좀 보소서. 이 천첩만 사내와 놀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옵니다. 심지어 태감들마저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지 않사옵니까."
숙비는 쓴웃음을 짓더니 불현듯 어깨를 들까불며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춘정이 동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쏟아 부으며 한데 얽히고설키며 돌아쳤던 태감과 궁녀들은 얼굴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일순 서로를 마주보았다. 급기야 코에서 단내가 확확 나고 큰 바위 덩이에 짓눌린 듯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듯 갑갑하여 시원히 소리라도 질러보려 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손도, 팔도, 다리도, 온몸이 뻣뻣하니 굳어지며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미약 독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진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부둥켜안고, 혹은 드러누운 채 숙비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숙비는 의미심장하니 이 남녀들을 쏘아보다가 싸늘히 웃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이 그런 게 아니옵니다, 폐하! 어디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시옵소서! 폐하는 후회하고야 말 겁니다. 한평생 이 광경을 뇌리에 담아 두게 될 겁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감과 궁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놀리며 더한층 음탕해 보이도록 궁녀들과 태감들의 자세를 이리저리 돌려놓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들어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내배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지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쭉 휘둘러보더니 일순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꼭 미친년처럼 주절거렸다.
"폐하께서는 나를 죽이려 해. 그러니 너희들은 모두 내가 저승길로 갈 때 나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탓하진 말아라. 이 모든 것은 폐하가 부덕한 소치이니라."
태감과 궁녀들은 몸뚱이는 비록 뻣뻣이 굳었을지언정 정신만은 또렷하였다. 그들은 숙비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정을 봐서 용서해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숙비는 궁녀와 태감들을 둘러보다가 일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더러 용서하라구? 그럼 나는 누가 용서해 준단 말이냐?"
숙비는 일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가련한 줄은 내 익히 알고 있노라. 어쨌든 난 한때 폐하에게 은총을 받았다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너희들은 죄다 가짜배기들하고만 어설프게 놀아난 게 아니더냐. 그러다가 오늘날 이 꼬락서니들이 됐으니 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인가. 실로 너희들은 오명을 뒤집어쓰기에는 너무 너무 억울한 것이야."
숙비는 짐짓 침울하니 늘어놓더니 또 한바탕 미친 듯 웃어댔다.
세상일을 모르는 듯 밤은 무정하게 깊어만 갔다. 새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황궁 안으로 은은히 울려 퍼졌다. 숙비는 문득 넋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폐하, 천첩은 폐하한테 이 장면을 보이겠어요. 때로는 폐하의 궁중에서 사는 사람들도 모두 아주 음충한 짓을 하고 싶어한답니다. 폐하는 정녕 이걸 막아낼 수 있나요?"
밤이 깊도록 숙비는 울고 또 울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자책을 하며 연신 주워섬겼다.
"너는 폐하께 아들을 낳아 줄 수도 있었어. 그러면 더는 숙비가 아니라 황후마마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더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지 누가 알아! 그래, 그럴 수도 있었어."
그녀는 짐짓 눈물을 훔치며 태감과 궁녀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또 중얼거렸다.
"오늘 밤 일은 참말 잘됐어. 내일 날이 밝으면 폐하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는 보기 싫어도 너희들을 보러라도 이곳에 오실 게 아니냐? 하지만 너희들의 이 꼬락서니들을 보시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진노하실 게야!"
숙비는 갑자기 술주전자를 집어 들더니 입에다 콸콸 들이부으면서 비칠비칠 태감과 궁녀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이 한 쌍은 영 틀렸어. 맘에 안 들어. 죽은 송장도 아닌데 이따위 자세로는 재미를 본다 할 수 없지 않아?……이 한 쌍은 참 멋지구나! 폐하께서도 보시면 아마 칭찬할 거야. 웃는 맵시 역시 일품이다. 그리고 이 한 쌍은……."
그녀는 주절주절거리더니 천천히 상좌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그렇게 알몸이 된 채로 궁녀와 태감들을 게슴츠레 바라보며 다시 술주전자를 들었다. 바로 태감과 궁녀들이 마신 그 술이었다. 그녀는 주둥이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다리를 쩍 벌려 자기의 옥문에다가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옥문에서 술이 철철 흐르자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코끼리 떼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제일 앞서가는 코끼리 잔등 위에 단지흥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대리의 사대 시위들은 대번에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두지 못할까! 어서! 폐하를 내놓아랏!"
동주 처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지흥에게 외쳤다.
"저 사람들을 물러나라고 하세요. 다시 싸움이 붙으면 피차에 재미 없어요."
그러자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선비를 바라보았다.
"여보게 승상, 자네들한테 한 말은 모두 내 진심이노라. 그러니 자네들 넷은 급히 황궁으로 돌아가 내 아우 단지방을 잘 보필하게. 단지방은 필히 성군이 될 것인즉!"
선비가 다급히 외치려는데 라마 중이 한 발 앞으로 내달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단황님, 사나이의 의리를 지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시는군요. 이전에는 단황 나으리의 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알고 보니 실로 탄복하옵니다. 살아서 숙녀동에서 돌아오신다면 꼭 한 번 무예를 겨루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라마 중은 홱 몸을 돌려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라마 중이 가 버리자 앓던 이 하나가 빠져 버린 듯 속이 시원했다. 보살은 기분이 좋아서 우쭐대며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선비 놈아, 네 놈은 네 상전이 붙잡혀 가는데도 그냥 이 어르신과 까불어댈 거냐? 넌 네 상전도 구해 주지 않으려느냐?"
"대환희 보살, 안 그래도 오늘 황제 폐하의 엄한 영도 있으니 네 년을 필히 죽이려던 참이다. 네 년은 그렇게도 죽고 싶으냐?"
선비는 대갈일성을 내지르고는 다른 세 시위와 함께 일제히 손을 썼다. 천룡사 스님들도 그와 동시에 나섰으므로 보살네 허다한 뚱뚱보 여인들을 삽시에 제압해 버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노기충천하여 달려들었다.
"이 놈들! 난 네 놈들과 끝까지 해 볼 테다! 네 놈이 우리 애들을 죽였으니 내가 너희 대리국의 모든 씨를 말리지 않으면 대환희 보살이 아니야!"
"하동(河東)에 울부짖는 사자가 있다더니 하서(河西)에도 울부짖는 사자가 하나 있었군?"
선비는 한껏 비아냥거리며 보살을 노려보았다.
"먼저 네 놈 승상 놈부터 없애야겠다! 자, 재주가 있으면 피해 보아랏!"
대환희 보살은 선비 앞으로 바싹 덮쳐 들었다.
'흐흐흐…… 나한테 미인(媚人)이란 독약이 있다는 걸 모를 테지……. 너희들은 아직 그 맛을 몰라. 이 독약을 처음으로 안겨야 할 놈은 아무래도 이 선비 놈이야.'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독약 가루가 담긴 봉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찰나, 고선 장로가 소리쳤다.
"나무아미타불! 대환희 보살은 허울좋게 보살이란 이름만 썼을 뿐 보살의 마음은 갖추지 못했군. 그 독약 가루를 뿌려 사람을 죽일 작정이냐?"
대환희 보살은 피식 웃으며 코방귀를 뀌었다.
"그으래? 그렇게도 남이 고통받는 게 가슴이 아프냐? 그럼 어디 네 놈부터 먼저 쓴맛을 한번 보아 봐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독약 봉지는 고선 장로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조심하십시오!"
선비는 고함을 지르며 중간에서 독약 봉지를 가로채려고 홱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천룡사 고승이 그를 제어했다.
고선 장로는 꼼짝도 않고 그 독약 봉지가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을 똑바로 노려 보면서 장탄식을 했다.
"대환희 보살, 어찌 이리 무고한 중생을 해치려고 못된 궁리만 하는 게냐?"
고선 장로는 일순 손을 앞으로 뻗쳐 손가락을 가볍게 한번 톡 퉁겼다. 그러자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면서 독약 봉지는 도로 대환희 보살이 서 있는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원래 독약 봉지가 터져 고선 장로가 독약 가루를 옴팡 뒤집어쓰지는 못할 지라도 티끌만치는 그의 몸에 묻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만 돼도 고선 장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중들도 부득이 장로를 살려 보려고 달려들 테니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으로 고선 장로가 그저 손가락을 한번 통기니 독약 봉지는 엉뚱하게도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보살은 기겁을 하며 부랴부랴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껑충 뛰어 몇 길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 독약 봉지는 마치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묘하게도 그녀를 쫓아 정통으로 날아왔다. 그녀는 다급히 내공을 모아 두 손바닥을 확 펴서 내밀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되레 독약 봉지에 맞아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뿐
더러 바로 그 순간, 독약 봉지가 툭 터지며 삽시에 온몸에 독약 가루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눈으로 코로 독약 가루는 풀풀 날아들었다.
독약 가루가 눈에 들어가자 대환희 보살은 불에 덴 듯 눈이 따끔 따끔하여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면서 부랴부랴 품속을 더듬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황하여 순식간에 서너 봉지나 꺼냈으나 해독약 봉지는 그중에 없었다. 다급할수록 그녀는 손이 점점 굳어지고 비명소리만 각일각 높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눈 장작할 새에 대환희 보살의 뚱뚱한 몸집은 빼빼 마른 장작개비처럼 변하더니 키도 점점 작아지고 급기야는 어른 허리춤에나 닿을까말까 하게 작은 난쟁이가 돼 버리지 않는가.
사람 몸뚱이가 작아지느라고 뼈다귀들이 아드득아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수림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한결같이 치를 떨면서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이 끔찍한 광경에 아연실색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고선 장로 역시 이 독약 가루가 이처럼 무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던 터라 할말을 잃고 말았다.
단지흥은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서 땅바닥에서 발발 기어 다니는 난쟁이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다가 힘없이 고선 장로에게 말했다.
"고선 장로님, 저 여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고 있자니 치주가 눈앞에 어른거려 그는 고개를 툭 떨군 채 외면해 버렸다. 세상만사가 죄다 암담하게만 생각되었다.
동주 처녀는 단지흥의 기색을 살피고는 언뜻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불쌍해지기라도 하셨나요?"
단지흥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대환희 보살은 운남에서 그 악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저런 악인이 어찌 불쌍하겠는가. 난 단지 대환희 보살 손에 저 지경이 됐던 내 귀비 하나를 떠올리고 있노라."
단지흥은 몹시 비장해 보였다. 동주 처녀는 일순 호기심이 일어 눈을 반짝이며 그 후일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르르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 더듬어 보니 치주야말로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도 그 어느 황비들보다 치주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치주야말로 자기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어야 할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치주였지. 그 여자는 죽었어. 너무나 작아져서 밤에 침대 위에서 가슴 설레는 그런 쾌락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못내 애달파하다가 그만 자살하고 말았어……."
단지흥의 목소리는 적이 침통했다. 동주 처녀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보아하니 이 사내는 정이 많은 사내야. 그런 사내가 아니라면 그 여인 치주가 왜 자살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다정다감한 사내가 영고하고는 왜 정분이 끊어졌을까? 이들 둘 사이에는 필시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처연히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참을 수 없이 혹독한 고통에 온몸이 옥죄인 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손끝, 발끝으로 고통이 밀려 나가면서 웬지 몸이 가뿐해 짐을 느꼈다. 보살은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치떴다.
그 순간, 보살은 그만 눈앞의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거대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갑자기 키가 다섯 자는 더 자란 듯해 보였으며 까마득히 먼 곳에 괴물 같은 코끼리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실 그때껏 혼비백산하여 의식을 잃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차츰차츰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독약 봉지가 손바닥에 맞아 터지면서 그녀는 바로 자기가 뿌린 미약에 자기가 중독된 것이었다.
그녀는 일순 전율을 느끼며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사느니 자살하는 것이 백번 천번 나을 터였다. 그녀는 정신없이 뱅뱅 돌아치다가 언뜻 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와락 달려들어 칼자루를 손에 쥐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제는 칼 한 자루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바락바락 안간힘을 쓰면서 두 손으로 칼을 들어올렸지만 번번이 무릎 위까지도 올리지 못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놈들아! 날 죽여 다오! 어서 날 죽여 다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독약 가루가 흩어져 있는 곳을 찾아서 벌벌 기어갔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널린 독약 가루를 한줌이나 와락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난 죽어야 해! 죽어야 해!……."
대환희 보살은 독약 가루를 주먹째 입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더니 즉시로 땅바닥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삽시에 그녀의 몸뚱어리는 점점 더 점점 더 작아지더니 급기야는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쪼그러 들었다가 이윽고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로 변하고 종당에는 사람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때 운남 땅에서 내로라하던 대환희 보살은 순식간에 뼈다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마냥 한결같이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니……. 그 광경을 굽어보고 있던 단지흥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세상만사 진토와 같다 했거니 이런 꼴들을 더는 보구 싶지 않다!"
단지흥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동주 처녀가 휘파람을 불자 코끼리는 다시금 천천히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선비는 크게 낙담하여 황황히 코끼리 떼 앞을 막아 나서면서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승상님, 당신도 들으셨겠지만 황제 폐하 스스로 숙녀동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에요."
동주 처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보게 승상, 길을 비키게! 더는 다른 말 말고 제발 내 말대로 하게나!"
선비는 단지흥이 이렇게 떠나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여 부복을 하고는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 소신의 소견으로도 단지방 어른께서 즉위하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의당 절차가 필요한 것이옵니다. 지금 황궁에는 폐하께서 채 처리하시지 않은 국사가 가득하옵니다. 이런 나라 대사들을 제때 제때 처리하시지 않으면 기필코 중도이폐하게 되옵니다. 소신이 보건대 폐하께서 숙녀동 사람들한테 무슨 약속하신 일이 있으시더라도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 국사들을 처리하신 뒤에 가세도 늦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때 가서는 우리 시위들이
직접 폐하를 모시고 숙녀동으로 가겠나이다."
선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많은 국사들을 아직 매듭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주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보오, 동주. 만일 이 단지흥의 사람됨을 믿는다면 먼저 대리로 돌려보내 주게나. 열흘이나 이십 일 말미만 주면 되이. 그때 가서 내 꼭 숙녀동으로 찾아가겠어. 만일 정 믿기지 않는다면 나한테 독약을 줘. 먹은 후 열흘이나 이십 일 후에 죽는 그런 독약을!"
동주 처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안 돼요! 우리가 어찌 당신을 믿겠어요? 우리 할머님께선 폐하 하나만 믿고 이 숙녀동을 떠나가셨는데 폐하는 우리 할머님에게 어찌하셨지요? 구박하다 구박하다 못해 우리 할머니 아기까지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할진대 어찌 폐하를 믿을 수 있겠나요?"
동주 처녀는 적아 단호했다. 숙녀동의 다른 처녀들도 모두 똑바로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하나하나의 눈빛에는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비는 동주 처녀를 쏘아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뭐지요? 왜 웃는 거예요?"
동주 처녀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네 숙녀동 사람들이 너무나 우스워서 그러오. 나는 당신들이 왜 폐하에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는지 정말 모르겠소. 폐하께서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그렇게 일심으로 떠들고 있지만…… 좋아요, 그 말대로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칩시다. 그렇담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황비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몇 년간이나 계속 황궁에서 계셨겠소? 진작에 도망치시지 않고? 당신들도 황비님의 성미를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래 황비님 성미로 그렇게까지 견디셨
겠나 말이오! 칼부림이 나도 벌써 났지!"
그러자 동주 처녀는 고개를 반짝 쳐들고 쏘아붙였다.
"당신네 황제는 천하 5대 고수 중 한 분이에요. 그런데 하물며 우리 할머니께서 어찌 단황의 적수가 될 수 있어요. 일국의 승상이라는 사람이 너무 억지를 부리는군요."
"황비님께서 폐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건 한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셈이오. 정박을 하려 들었다면 황제께선 진작에 손을 썼고 그럼 황비님은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지 않았겠소?"
선비는 조목조목 근거를 들이댔다. 그러자 숙녀동의 처녀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들은 다들 속으로 곰곰이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 말에 일리가 있어……. 한데 참말 믿어도 될까? 하지만 저 선비는 대리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이라고들 하니 그 언변에 따를 자가 없을 게야. 그러니 번지르르하게 말을 발라 놓으면 감쪽 같이 속아넘어간단 말이야. 저 정도 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둘러 붙일 수도 있겠어……. 아, 정말 저 사람 말을 믿어야 할까?'
동주 처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선비는 그녀가 필시 동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또 설복을 했다.
"아무리 명관(明官)이라도 집안 시비는 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 보기엔 기실 집안 시비란 뭐 그리 가르기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소. 남자들이란 으레 밖의 일을 주관하므로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게 되고 그래서 자연 시비를 가리기 어렵게 되는 거라오. 황비님과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고 두 분이 불화하신 것은 아마 당신들이 본 게 과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오. 그렇지 않으면 황비님께서 왜 황궁에서 도망치셨겠소? 그러나 두 분
께서 왜 화목하지 못하셨는가, 이는 대관절 누구의 과실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선 아마도 여러분들께서는 그 내막을 잘 모르시는 것 같소이다. 그 내막을 잘 모르면서 당신들이 어떻게 황제의 잘잘못을 가리겠다고 나설 수 있소? 그리고 폐하를 숙녀동에 모시고 간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물며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이시니 대리국에서도 당신네들이 이렇게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게요. 그러니 당신네들이 폐하를 숙녀동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아니고 뭐겠소?"
동주 처녀는 선비의 일장설화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닫아 붙인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폐하, 저도 폐하가 한 나라의 황제이신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명고의 일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숙녀동 사람들한테 똑똑히 알려 주어야만 폐하를 믿을 수 있겠어요. 이십 일 후 저는 숙녀동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꺼내 놓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휙 손짓을 했다. 그러자 처녀들은 즉시로 피리를 불어 독수리들을 부르고 큰소리로 코끼리들을 몰면서 떠날 차비들을 했다. 코끼리 떼는 천천히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우지끈우지끈 나뭇가지들이 밟혀서 부러지는 소리, 어린 나무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레 진동했다.
단지흥은 그 소리가 끊길 때까지 잠자코 서 있다가 이윽고 숙녀동 여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천룡사 여덟 고승, 사대 시위들과 더불어 대리로 돌아왔다.
황궁에 닿자마자 그는 사대 시위에게 천룡사 고승들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분부하고는 곧장 지난 2년여간 영고가 묵었던 냉궁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헐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냉궁은 오늘따라 더 적막하고 황량해 보였다. 사위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단 이틀 사이에 벌써 이 지경이 되었구나. 하긴 사람의 인생이란 따져 보면 필시 이 모양으로 짧으면서도 허무한 것 아닌가? 설사 영고와 밤낮으로 마주앉아 금실 좋게 지냈다고 해도 그런 행복한 나날 역시 인생에서는 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울적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그저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가만히 영고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황궁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그는 조용히 묵상에 잠겨 들었다.
'역대 단씨 조상들이 삼천번뇌사(三千煩惱絲)를 깎고 천룡사에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고 불학의 묘경에 심취하게 된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원래 제왕 노릇을 한다는 것도 따져 보면 눈앞에 흘러가는 뜬구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순간,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궁녀 하나가 들어왔다.
"폐하, 황후마마 침궁에 있는 궁녀이옵니다. 승상께서 이리로 납시셨다 하시기에……. 황후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단지흥은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파이인 황후는 종래로 무슨 일로 자기를 부른 적이 없었다. 황후는 아주 얌전한 여자로 종래로 자분자분했고 그 무슨 사단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렇게 친히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급급히 황후의 침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기색을 보니 당혹스러워하는 기미가 역력히 내비쳤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궁녀와 태감들에게 일렀다.
"폐하께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거라."
태감과 궁녀들이 다 물러가고 나자 황후는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얼핏 눈물이 고인 듯했다.
"폐하, 궁내에 큰 변고가 생겼사옵니다. 천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을 모르겠사옵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친히 가 보시고 처리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근심스러이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의 침궁에 가 보시면 다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단지흥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숙비의 침궁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침궁 밖에서 파수를 보던 위사들은 황제를 보자 굽실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대로 있으라 이르고 선뜻 침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한 무리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알몸으로, 그것도 한껏 음란한 자태로 쌍쌍이 부둥켜안은 채 돌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표정이며 눈빛을 보아하니 다들 죽을 임박까지도 음희에 빠져 있었음이 분명했다. 상좌에는 다름 아닌 숙비가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짐짓 비웃는 듯한, 적이 음란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궁내에서 이렇듯 음희판을, 그것도 숨어서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공공연히 벌였단 말인가. 일국의 법도가 땅에 떨어져도 유만부득이요, 하늘이 울고 땅이 통탄하고 천인공로할 짓거리가 아닌가. 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자기 대에 이르러 대리 황궁이 이렇듯 문란의 극에 치닫다니, 모두 자기의 부덕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끔찍한 광경을 둘러보았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지 머리 속에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탁상 위에는 어지러이 술잔이 널려 있었다. 이들은 필시 독주를 마시고 죽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는 숙비가 시킨 짓일 터였다. 그는 음란하게 웃고 있는 숙비의 두 눈을 멍청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자기에게 분명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죽음으로써 자기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를 뼈에 사무치게 증오했
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녀와 이 궁녀, 태감들은 몰래몰래 숨어서 음희를 즐겼으며 이는 모두 황제가 부덕한 소치라는 것을…….
그는 도망치듯 비칠비칠 그곳을 빠져 나와 미친 듯이 서재로 달려갔다. 영고며, 치주며, 방금 전에 본 그 참혹한 광경이며 오만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서재에 달려들어서는 허물어지듯 털버덕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알지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이래 줄곧 만사가 형통하고 나라일은 뜻대로 술술 풀려 나갔다. 하늘의 뜻인지 그 무슨 기상 이변도 없어 재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막중한 황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언제나 마음은 편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기운이 점점 사라지더니 마음 편치 못한 일들만 겹겹이 들이닥쳤다. 맨 먼저 치주가 자결하고, 이어서 영고가 황궁을 떠나 버렸으며 오늘은 이런 일마저……. 그는 자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모두 자기 탓이 아니겠는가. 일순 수십, 수백의 원망 서린 눈동자들이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그는 흡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무엇에라도 놀란 사람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한 순간,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황제를 떠나서 한 인간, 한 사내로서도 그의 그 짧은 생은 결코 원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로서 그 어떤 여인도 온전히 다 차지하지 못했고 어떤 여인도 진정 어린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하진 않은 것만 같았다. 회한과 자책의 눈물이 조용히 그의 뺨을 적셨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 한 구절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비단 짜는 틀에서 실북이 오락가락
짜 놓은 비단폭엔 원앙새 한 쌍 날으네
불쌍하구나, 늙기도 전에 머리가 세었으니
궁전의 앞뜰엔 봄 풀이 파릇파릇
꽃샘의 찬바람 이는 깊은 궁궐 속에서
그대와 마주앉아 녹의홍상 차려 입네.
단지흥은 참을 길 없이 마음이 쓰리고 아파 격하게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으로 스며들었다. 단지흥은 정신마저 혼미해 지는 듯 몽롱한 눈길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뜻밖으로 라마중이 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라마 중은 대뜸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생각다 못해 되돌아왔습니다. 이곳 남방 대리까지 왔다가 폐하에게 진짜로 한 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떠난다면 설사 서역으로 돌아간다 해도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폐하와 꼭 무예를 한번 겨뤄 보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스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나는 지금 그 누구와도 무예를 겨룰 경황도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폐하, 무림 고수들은 자고로 생사에 괘념치 않는 법입니다. 비록 폐하께 큰 변고가 있으시더라도 이렇게 풀이 다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일장춘몽으로만 생각하십시오. 나는 너무나도 꿈을 많이 꾼 사람이었소."
단지흥은 여전히 아무 동요도 없이 사뭇 초연한 기색이었다.
"저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옛날 고승이었던 구마습이 쓴 책을 말입니다. 그 고승은 자기가 무예를 연마하던 끝에 창안한 화염도에 대해 상세히 써 놓았지요. 저는 일심으로 이 화염도를 익혀 이렇게 중원에 찾아온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중원 종남산 전진교의 주백통이라는 사람을 내놓고는 적수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 당신들 5대 고수 말고는……."
단지흥은 실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보아하니 이 라마 중은 중원의 5대 고수들과 무예의 높고 낮음을 겨루기 전에는 서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스님, 나는 스님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대리국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절망하고 비관합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고, 다투고,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소. 이 회염도는 무림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것으로 나에 이르러 간신히 맥을 잇게 된 것이오. 하여 중원과 대리의 5대 고수들과 한번 무예를 겨루어 보기만 하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코끼리 진 안에서 비록 폐하께 은공을 입기는 했으나 난 꼭 폐하와 겨뤄야만 하겠소!"
"이보시오, 스님! 중원 무림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사람은 아마도 전진교 교주 왕중양일 겁니다. 그 사람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더러 무덕도 높은 분으로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무예를 겨루기를 원한다면 왜 왕중양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바로 눈앞에 당신 같은 고수가 있는데 하필 왕중양은 뭣 하러 찾습니까?"
단지흥은 멀거니 라마 중을 바라보더니 더는 말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라마 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리분별에 밝은 덕망 높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헛 보았군. 계속 이 핑계 저 핑계 들이대며 발뺌을 하는 걸 보니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마중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곧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삽시에 손을 모로 세워 있는 힘껏 단지흥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것이 바로 백여 년 동안이나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던 화염도란 장법이었다. 단지흥은 대번에 동가슴을 얻어맞아 울컥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래도 그는 그냥 제자리에 앉은 채 라마중을 그윽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라마중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지금 3할밖에 쓰지 않았다. 내게 이만한 재간밖에 없는 줄 알고 여유를 부리는 모양이나 오산이다. 오산! 내가 당신을 죽이자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하지만 내가 너무나 쉽게 죽여 버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계략을 부려 이겼는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입은 있으되 할말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
라마 중은 이빨을 사리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단황 나으리,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람 대접을 한다면 어서 내 요구에 응하시오. 그렇지 않고 이토록 끝까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난 당장에 당신을 죽여 버리겠소!"
"당신은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전에는 나 역시 당신처럼 하늘 넓고 땅 넓은 줄 모르는 인간이었소. 그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남과 힘을 겨루고 사람 잡기나 겨루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참으로 우스운 일이요, 너무나도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리란 말입니다."
단지흥은 얼마만한 고행을 통해 이토록 철저한 깨달음에 달할 수 있었던가. 그러니 라마 중이 그것을 이해할 리 만무였다. 그는 그저 자기를 야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더욱 발끈 화를 냈다.
"좋다! 그럼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린가 아닌가!"
라마 중은 또 한 장을 내갈겼다. 이 한 장은 더욱 위력이 컸다. 단지흥은 앉은걸음으로 수장이나 뒤로 밀려나고 다시금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런데 정작 선지피를 토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거뜬해지는 것이었다. 단지흥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살점을 베어서 독수리에게 먹이셨다. 부처님께서 왜 자기 살점을 독수리한테 베어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독수리는 부처님과 달리 일생의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아하니 이 라마 중도 사리를 모르는 자이니 나 역시 부처님께서 독수리 대하듯 이 중을 대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단지흥은 침잠한 채 조용히 묵상하고는 길게 탄식했다.
"스님께서는 서역에서 오셨다니 구마습이라는 고승이 후에는 천하 《역경》을 집대성하셨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라마 중은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스님께서 보건대 구마습이란 고승이 후에 불경을 번역하신 게 옳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이전에 살인에 열중한 게 옳았다고 여기십니까?"
라마 중은 단지흥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때에 왜 이따위 말만 늘어놓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구마습 스님은 무예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 대리에서도 보정제와 한번 겨루어 이긴 바 있습니다. 나 역시 내 무예로 천룡사 모든 고수들을 무릎 꿇릴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줄곧 품어 왔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당신의 그런 질문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소이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듣고 있더니 불현듯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웃기는 왜 웃소?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당신은 불법을 모르는 중이로군요. 그러니 내가 왜 웃는지 의당 알 수 없을 테지……. 옛날의 구마습 같은 고승도 종당에는 불경을 해석하는 대사가 되지 않으셨소? 천룡사 스님들도 매일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계시오.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나서는 누구나 선행을 베풀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지요. 구마습 스님께서 천하 중생들에게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서역에서 오셨으면서도 그분의 선행은 본받지 않고 그 무슨 화염도
만 믿고 남들과 완력이나 겨루고자 하니 왜 웃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라마 중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단지흥의 입가에 흘러내린 선지피를 보면서 딴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벌써 내상이라도 입은 게야? 왜 싸울 생각을 안 하느냔 말이야? 지금 이 사람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때를 놓치게 된다?'
라마 중은 마음을 도사려 먹고는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단황, 당신이 입으로 연꽃을 토해낸다 해도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즉시 두 손을 앞으로 쓱 뻗었다. 이 한 장이면 단지흥은 끝장이 나고야 말리라. 일순 천지를 진동하듯 요란한 소리가 두 사람을 뒤흔들더니 단지흥은 그만 그 힘에 비칠 자빠질 듯하다가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 호통을 쳤다.
"그따위 재간으로 나를 어쩔 테냐?"
간신히 몸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단지흥은 또다시 선지피를 토해냈다. 라마 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다구나. 드디어 중상을 입은 게로군! 이자가 내력을 잃은 틈을 타서 일격에 죽여 버려야겠다! 그러면 내 손으로 천하 5대 고수 중 한 사람을 제거하게 되는 셈이다!'
라마 중은 급급히 손을 모로 세우고는 단지흥을 향하여 똑바로 내질렀다. 이번엔 단지흥은 살짝 몸을 피했다.
그때였다. 돌연 독경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더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마 중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백발 노승 고선 장로가 버티고 서 있었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을 쏘아보면서 대뜸 호통을 쳤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으로서 이런 악행을 저지를 때에는 이미 악귀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진배없느니라. 일찍이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그 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라마 중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입을 못 뗐다. 고선 대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듣자니 네 놈의 사부는 구마습 스님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이런 불초한 제자가 나타났을꼬?"
고선 대사가 서릿발같이 부르짖자 라마 중은 할말이 궁했는지라 고선 장로를 쏘아보면서 그저 소리만 질러댔다.
"흐흐흐, 고선 장로! 마침 잘 왔다. 네 놈과도 겨뤄 보려던 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네 놈과 겨루지 않았느냐? 네 놈은 이미 졌어!"
라마 중은 코방귀를 뀌면서 냉소를 날렸다.
"내 이미 너희 그 잘난 황제에게 중상을 입혔거늘 그게 무슨 소리냐?"
고선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장탄식을 했다.
"불행한 일이로고! 구마습 대사께 이따위 개망나니 후예가 있다니……. 구마습 대사께서 살아 네 놈이 이따위 행실을 하고 다니는 걸 보셨다면 그 참괴감이 하늘을 찔렀겠다. 이 노옴! 네 놈은 벌써 세상만사 사리 이치에서 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지고, 가련한지고!"
라마 중은 말귀를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뻐들뻐들하니 방약무인하게 외쳐댔다.
"고선 장로, 그따위 허튼소리는 그만두시오. 만일 장로가 나를 이긴다면 그따위 소리도 순순히 다 받아들이지. 하나 장로가 진다면 천룡사 무예는 죄다 거짓말이 되는 것 아니겠소?"
"가련토다, 가련토다……. 기어코 한번 겨뤄 보겠다? 할 수 없군! 정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보게. 자네가 화염도 초수로 내 앞가슴을 세 장 갈겨 보게. 만일 내가 내상을 입으면 자네가 대리국을 이긴 것으로 치고 대리국 단씨를 이긴 것으로 치지! 어때?"
라마 중은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저 늙다리 중이 드디어 나한테 속았구나. 내가 화염도를 한 절반쯤 익혔다고 하니 참말로 믿고 있잖아! 사실 나는 이미 6, 7할쯤은 익혔어. 평소에 허풍치기 싫어하는 성미라 그렇게 말했을 뿐인걸. 이 늙다리야, 넌 오늘 영락없이 내 손에 죽었다. 그리고 너희 대리 단씨도 내 이 서역 무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해!'
"그럼 시작해 볼까요?"
라마 중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자리에 선 채 급히 운기하여 기를 단전(丹田)에 몰아넣고는 라마 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마 중은 고선 장로와 두 장 거리를 두고 서서 기를 안정시키고는 침짓 별 대수롭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고선 장로는 이전에 구마습도 바로 이런 초수로 일양지의 육맥신검을 제압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장로는 인자한 표정으로 라마 중을 노려보았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이 지금 비록 태연하게 처신하고는 있지만 그의 화염장이 내리떨어지는 날에는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 생각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일순 라마 중은 손을 치켜 올리더니 번개같이 장화도로 고선 장로의 앞가슴을 내리갈겼다. 고선 장로는 라마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이 일격이 대단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라마 중의 손은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단지흥도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고선 장로는 뒤로 두 걸음 비칠 물러서서 라마 중을 쏘아보더니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화염도는 이미 6할 이상의 위력을 가졌네. 그런데 왜 감추었지?"
고선 장로는 대뜸 꾸짖었다.
"당신들 중원 사람들은 늘 남한테 말할 전 언제나 여지를 남기라고 하지 않소? 참말 그른 데가 하나도 없는 말 아니오?"
라마 중은 한껏 이죽거리더니 호기롭게 웃어댔다. 단지흥은 고선 장로가 필시 내력이 많이 상했으리라 생각하고는 냉큼 그의 앞을 막아 나섰다.
"장로님, 내가 이 중 놈의 버릇을 좀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황황히 손을 내저어 단지흥을 물리고는 라마 중을 쏘아보았다.
"이보게, 인간이란 모름지기 일단 말했으면 말한 대로 해야 하는 법, 그 말을 지켜야 도리를 다하는 것이네. 자넨 분명 자네의 장화도가 세 번 내리친 후에도 내가 죽지 않으면 대리에서 떠나겠다고 말했으렷다!"
라마 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렇소이다! 세 번이면 세 번이지요!"
라마 중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또 한 장을 휙 내갈겼다. 이번엔 고선 장로는 몸을 슬쩍 피했지만 촌분이 늦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장화도에 가슴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고선 장로는 한걸음 뒤로 주춤 물러섰을 뿐 첫번보다는 한층 더 굳센 기색이었다. 그러자 당황하는 것은 되레 라마 중이었다. 그는 마치 귀신 대하기라도 하듯이 멍청하니 고선 대사를 바라볼 뿐, 더는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불길해! 내 이 장화도는 서역 땅에서는 서독 구양봉 외에는 누구도 당해 내지 못했어! 구양봉이라도 감히 내 장화도 한 장을 받아 내겠다고 장담을 못하는데, 이 늙다리는 내 장화도에 두 번이나 맞고도 끄떡하지 않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마 중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고 마음은 적이 불안하여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선 장로가 다시 우렁우렁하게 소리를 쳤다.
"이보게, 아직 한 번 남지 않았나? 다음 한 번에 나를 꺼꾸러뜨리지 못하면 자낸 두말 말고 대리를 떠나야 하네!"
그 목소리를 듣고 라마 중은 고선 장로에게 아직도 중기(中氣)가 가득하고 내장이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라마 중은 이제 무서워서 더는 손을 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승은 대사님 무예에 승복합니다. 지금 당장 서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평생 다시는 이 대리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
라마 중은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급급히 일어나 그 길로 몸을 솟구쳐 밖으로 뛰쳐나가 이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라마 중이 도망치고 나자 고선 대사는 일순 무너져 내리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입가에서 언뜻 선지피가 비치더니 이윽고 꿀렁꿀렁 피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저 단아한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볼 뿐, 고선 장로는 깊이 침잠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진중하게 숨을 몰아 쉬고 나서야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하기 시작했다.
"다, 단황, 이전에 단씨네 자손 중에는 우리 처, 천룡사에서 부처님께 귀의한 분들이 사, 상당히 많았습니다. 빈도의 뜻을 아, 알 만합니까?"
단지흥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제, 제왕 노릇을 한 사람들은 모, 모두 욕망이 크,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욕망이 크고야, 야심이 많아야 제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 빈도가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이미 모든 욕망을 버리신 것 같……. 여자에 대해서도, 돈에 대해서도, 술에 대해서도……. 이렇게 되면 폐, 폐하께선 더 이상 제왕 노릇을 할 수 어, 없을 터……."
그제야 단지흥은 고선 장로의 말 속에 숨은 뜻을 깨달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선 대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선 장로는 여전히 피를 흘리면서도 들릴락말락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자고로 저, 정이란 일단 끝나면 바,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요, 인생은 살고 나면 하, 한바탕 꿈인 법이니라. 하루하루 속세의 버, 번거로움에 시달리기보다는 조용히 고독한 등잔불 심지를 도, 돋우는 편이 나으리……."
고선 장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한 손을 뻗쳐 단지흥의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돌연 머리가 뜨거워지더니 삽시에 단지흥의 검은 머리칼이 분분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면서 흐느끼듯 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이 제자를 받아 주십시오. 스님의 말씀대로 법호를 일등(一燈)이라 하여 주십시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앉아 있는 고선 대사의 얼굴은 산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다가서니 이미 원적(圓寂)한 뒤였다. 단지흥은 다시 꿇어 엎드려 머리를 연신 땅바닥에 조아렸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고 일어나 대전 쪽을 바라보면서 입 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부터는 더는 단황이 아니옵니다. 소승은 일등, 하나의 자그마한 등잔불이옵니다!"
―제 4부 끝―



추천 (0) 선물 (0명)
IP: ♡.99.♡.216
23,51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02
0
60
나단비
2024-04-02
0
68
나단비
2024-04-02
0
59
나단비
2024-04-02
0
44
나단비
2024-04-02
0
67
나단비
2024-04-01
0
69
나단비
2024-04-01
0
71
나단비
2024-04-01
0
100
나단비
2024-04-01
0
64
나단비
2024-04-01
0
56
나단비
2024-03-31
2
67
나단비
2024-03-31
2
112
나단비
2024-03-31
2
84
나단비
2024-03-31
2
96
나단비
2024-03-31
2
59
나단비
2024-03-30
2
64
나단비
2024-03-30
2
62
나단비
2024-03-30
2
84
나단비
2024-03-30
2
62
나단비
2024-03-30
2
146
나단비
2024-03-29
2
164
나단비
2024-03-29
1
63
나단비
2024-03-29
1
60
나단비
2024-03-28
1
65
나단비
2024-03-28
1
51
나단비
2024-03-28
1
50
나단비
2024-03-27
1
49
나단비
2024-03-27
1
64
나단비
2024-03-27
1
73
나단비
2024-03-27
1
6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