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중신통 왕중양3

3학년2반 | 2022.02.23 07:41:02 댓글: 0 조회: 59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0558
제13장 여협과 무심 공자
검을 뽑아든 맏이의 눈엔 살기가 등등했다. 좀처럼 등에 메고 있는 검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하던 그가 검을 높이 쳐들자 모두들 긴장했다. 귀도 허재의 공격을 그저 피하기만 하던 맏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쉽게 검에 손을 대지 않는 그를 두고 반신반의했었다.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기에 그럴 것이라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의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허재의 도법(刀法)도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맏이가 검을 그어대자 허재의 도법에도 빈틈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초수가 실력대로 발휘되지 않아 속도로 일정하지를 못했다. 허재가 자신의 약점을 무마시키려는 듯 맏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야압!"
허재의 칼이 맏이의 귀 옆을 스쳤다. 서로 엇갈려 몇 걸음 떨어졌던 이들은 다시 자세를 추스리고는 맞붙었다.
"검을 받아랏!"
맏이의 검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허재를 몰아붙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맏이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재도 위로 솟구치며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쨍! 검과 칼이 공중에서 불꽃을 튀기며 작열했다.
한편 허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도객 중 맏이인 무도(無刀) 맹랑(孟浪)이 곧게 상체를 펴고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터억 땅을 구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 같은 맏이끼리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그대가 허재와 싸운다면 체면이 서질 않지!"
이말에 십팔검객 맏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맹랑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10여 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맹랑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술에 만취가 된 그는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며 비오는 거리를 헤매였다. 사람들이 이런 맹랑을 두고 한마디씩 던졌다.
"저 사람 미쳐버린 거 아냐? 미친 게 틀림없어!"
그도 그럴 것이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거리를 비칠대며 걷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맹랑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엔 막연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아무래도 무슨 큰 일을 치를 사람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다시는 칼을 잡지 않았는데 칼은 쓰지 않아도 손에 칼을 든 것과 마찬가지로 싸움에 임했다. 또한 사람들을 그때부터 그를 무도 맹랑이라 불렀다.
역시 맹랑의 손엔 칼이 들려 있지를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십팔검객 맏이가 넌지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무도 맹랑, 그댄 항상 마음속에 칼을 품고 다니는가?"
맹랑이 두어 번 고개를 저어댔다.
"흠, 내 마음속에 칼이 있다고? 천만에, 단지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따름이지. 난 칼을 원하지 않아."
"어디 그럼 시험을 해볼까?"
맏이가 아래로 떨어뜨렸던 검을 바로 잡으며 그를 겨냥했다. 맏이의 걸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초식 중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무리가 없는 것을 선택하려 했다. '횡도탈애(橫刀奪愛)'라는 초식이었다. 그는 이 맹랑의 도법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칼도 들지 않은 맹랑에게서 도법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맹랑이 맏이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맏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그로서는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얏!"
곧 두 사람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높이 치솟은 두 사람이 엇갈리며 강한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금속성의 물체가 서로 맞부딪칠 때 나는 소리와 빛이었다. 그렇다면 맹랑 역시도 칼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의 동작이 하도 빠르고 맹렬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맏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금속성의 물체에 막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서는 그도 칼을 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훌륭한 도법이군!"
맏이가 검을 왼쪽 어깨 위로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랑 역시도 맏이의 실력을 인정했다.
"훌륭한 검술이야."
그런데 갑자기 맹랑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과 귀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피를 본 십도객(十刀客)들이 발악을 하며 맏이에게로 달려들려고 했다.
"가만있어!"
맹랑이 이들을 제지했다. 맹랑의 매서운 눈빛은 맏이를 응시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를 않았다. 십도객들이 맹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십팔검객 맏이가 서 있었는데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의 낯빛은 맹랑보다 더욱 창백했는데 십도객들은 그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맏이의 가슴엔 빗금을 그어댄 형상의 칼자국이 나 있었고 어깻죽지는 살점이 달아나버려 솟구친 피로 옷이 뻘겋게 변해버렸다.
이번엔 십팔검객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이들은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명 십팔거사(十八居士) 노절천(怒折天)이라 불리는 울부짖음이었다. 강남에서 널리 알려진 외침소리로 웬만한 종소리보다 더한 울림으로 퍼졌다. 반벽산장을 뒤덮을 정도의 이 외침에 모두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지었다.
십팔검객이 이처럼 힘을 내보이자 십도객들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이들 역시 동시에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더욱 우렁차 구중천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겉으로 봐서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유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던 딸 유일민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짐승들의 포효소리와도 같은 이들의 괴성에 딸이 두려움을 느낄까 봐 근심이 된 모양이었다. 한편 옥총은 얼굴색이 약간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가슴이 요동치는 기운에 몸이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도 목청을 높여 어떠한 소리라도 제압할 수 있는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쉽게 그런 충동에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챵바가 무심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아는가? 늑대의 울음소리라도 흉내내려는 건가?"
무심이 씨익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고함소리에 가장 경멸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귀낭자였다. 또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협은 오히려 관심이 없다는 투로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십팔검객들이 쥐고 있는 검은 모두 열여덟 개였다. 이 검들은 긴 것과 짧은 것 그리고 더러는 부러진 단검(斷劍)까지 다양했다. 또한 녹이 슨 수검(銹劍)과 연검(軟劍)이 눈에 띄는가 하면 중검(重劍)도 보였다. 이들은 각기 다양한 검을 움켜쥔 채 부동자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반면에 십도객들은 열 자루의 칼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칼을 한데 모아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도 세워놓을 태세였다.
십도객 중 하나가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로 이렇게 주위를 일깨웠다.
"십지도진(十地刀陳)이다!"
이 십지도진이란 대협 소소(簫嘯)가 만든 진법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이유는 그의 수하에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도객이 열이 채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소도 써보지 못했다는 이 십지도진이 십도객에게서 불리워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십팔검객들이 사못 긴장하는 듯했다.
"십지도진을 조심해라!"
맏이가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들에게 급히 일렀다. 그리곤 자신이 몸을 솟구쳐 십지도진을 이루고 있는 칼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야아 !"
그러나 맏이는 십지도진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십지도진 안으로 채 들어가지도 못한 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뒤집히듯 날아와 버렸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이미 맏이의 몰골은 아까보다 더 형편없어졌다. 옷은 주린 맹수가 달려들었는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렸고 상처가 몇 군데 더 깊이 나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어서 검성직천(劍星織天)을 펼쳐라!"
]그러자 나머지 십팔검객들이 맏이를 따라 십지도진을 향해 와 하며 달려갔다. 이 검성직천이란 말 그대로 검빛이 별빛으로 되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천라지망(天羅地罔)을 만드는 초수였다. 대개의 검객들은 각기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검술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무리로 조화되기가 어려운 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검성직천은 이 조화되기 어려운 각기의 검술들을 한데 모을 수 있게 하는 위력을 지닌 초수였던 것이다.
십지도진을 작파하기 위해 달려든 검성직천. 이십여 자루나 되는 검과 칼이 서로 엉키어 피를 튀는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결을 쭉 지켜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갔다. 아직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고 있는 탓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자 속까지 울렁거렸다.
'이 사람들은 왜 목숨까지 내걸고는 싸우려 하는 것일까? 강호란 이토록 서로를 죽이는 곳이란 말인가?'
그녀는 겉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 유기에게 매달렸다. 가뜩이나 딸의 반응을 우려하고 있던 유기로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이 애는 누굴 믿고 살아갈 것인가?'
그는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는데 무심이 챵바를 툭 치며 물었다.
"그대 생각에는 저 사람들의 법수가 어떤 것 같은가?"
챵바가 요란스럽고 어지럽기만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도 복잡해서 구경이나 제대로 하겠나?"
챵바의 시큰둥한 태도를 무심은 이해했다. 그 역시도 챵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검술이든 검법이든 복잡하면 할수록 정신과 힘만 소모될 뿐이라 믿었다. 상대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단칼에 베어버리는 초수야말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이 아니겠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싸움은 그러나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여기저기서 칼과 검이 마찰할 때마다 챙챙!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또 피가 사방으로 튀고 목이 달아나는 참극까지 벌어져 그야말로 일대의 살육전이 이어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유일민은 더 이상 눈뜨고 볼 수가 없었는지 유기의 옷깃을 잡아 당겨 얼굴을 감추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왕중양의 가슴엔 다른 의미의 떨림이 자리했다. 이들처럼 고함을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런 불길이 아닌 살육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유기가 해불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불개 네가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나를 모욕했는데 그 대가는 알고 있겠지?"
그러자 해불개가 입을 실룩거리더니 받아쳤다.
"이거 안되겠는데. 그런대로 낯 붉히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정말 귀찮게 구네. 죽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거냐?"
"뭣이, 네가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네가 아무리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다!"
유기의 도전에 해불개가 바람소리를 내듯 피식 하고 웃었다.
"후후, 흥! 건방진 소리. 넌 당장 죽고 말 것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이 말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다고!"
사람들은 해불개가 왜 후회할 사이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지 의아해 했다. 왠지 숨겨진 속뜻이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해불개에 맞서려던 유기가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우욱!"
유기가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칼날이었다. 어느샌가 옆에 있던 옥총이 그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던 것이다.
"아버지!"
유일민이 유기를 안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양손이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진 유기는 두 눈을 흡뜨며 옥총을 노려보았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옥총이 꺼져 가는 유기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놀렸다.
"반화대회 후에 내가 왜 그렇게 너를 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고. 해불개 형님은 내 뺨을 몇 대 갈겼을 뿐이지. 하지만 난 해불개 형님에게는 원한이 없어. 아니 나를 죽인다고 해도 절대 원한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기는 숨이 막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왕중양에게로 사그라드는 눈길을 주었다. 왕중양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싶어 다가갔다.
"유 장주님!"
유기가 다시 어렵게 입술을 떼려고 했다.
"한 가지…… 난 죽어도 마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그가 급히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본 왕중양이 얼른 등을 받쳐주었다.
"염려마시고 어서 말씀하시오."
"내 딸을 좀……."
유일민은 유기를 부여잡은 채 그저 울기만 했다. 왕중양이 그녀를 한 번 돌아보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유기가 십팔검객 맏이에게 띄엄띄엄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들 피하시오. 당신들은 십도객의 적수가…… 못 되오."
그리곤 그만이었다. 유기는 목을 아래로 꺾은 채 더는 말을 잇지를 못했다.
유기가 죽자 해불개의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반벽산장의 인간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이 해불개의 노복들임을 명심하여라. 어느 한 놈이라도 내 말을 거역한다면 몰살시키고 말겠다!"
그러나 반벽산장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해불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불개를 강물에 처넣을 듯이 덮쳐 들었다.
"이것들이!"
해불개가 그중 한 노인의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눈을 부라렸다.
"이 늙은 두상이 우기를 따라 지옥에 가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가 노인의 목을 단번에 꺾어 비틀었다. 노인이 맥없이 해불개의 다리를 타고 주르르 미끌어졌다.
"이놈 해불개야! 네 죄가 벌써 하늘에 이르렀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불쑥 끼여들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해불개의 안중에는 왕중양이 제대로 된 적수로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건성으로 왕중양을 확인한 해불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중양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여협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감히 해불개에게 대든 왕중양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눈치였다.
왕중양이 해불개를 치려고 일어서려는데 유일민이 붙잡았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왕중양의 팔에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며 간청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제발!"
어린 유일민을 바라보는 왕중양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감았던 눈을 뜨고는 해불개에게로 천천히 다가간 그가 위엄 있게 말했다.
"네 이놈, 남은 파리목숨으로 알아도 제 목숨은 소중하다고 생각할 테지!"
"네가 바로 그 유운장 놈들에게 혼찌검이 난 놈이더냐? 한 번 목숨을 구했으면 고맙게 알고 있을 것이지 왜 또 나서는 것이냐? 오냐, 어디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독이 잔뜩 오른 해불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젊은이, 그와 맞서지 마오! 해불개는 악독한 사람이오."
누군가 왕중양을 말렸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또한 얼굴을 가린 여협 역시 왕중양의 행동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왕중양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과연 해불개를 물리칠 수 있을지…….
해불개는 왕중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입은 중상으로 왕중양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회복이 되었더라도 완벽한 자기 실력은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의 실력이라고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넌 지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죽더라도 아쉬워할 사람은 없다!"
말을 마친 해불개가 서서히 손을 들어 앞으로 절도 있게 내밀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룡수(熬龍手)'였다. 이 오룡수는 손을 용의 발톱처럼 구부린 채로 움켜쥐기도 하고 때론 할퀴기도 하는 초수였다. 해불개가 왕중양을 잡아채려고 힘껏 손을 휘어 쳤다.
왕중양이 얼른 몸을 뒤틀며 해불개의 손아귀를 피했다. 이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여협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무심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엔 어림도 없다!"
옆걸음질을 치면서 기회를 엿보던 해불개가 몸을 휙 날리면서 왕중양의 손을 잡아챘다.
"으악!"
그런데 왕중양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던 해불개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왕중양의 팔은 불덩이와도 같았다. 그는 손바닥으로부터 심장까지 들쑤시고 들어오는 화기에 당황했다.
"우습군!"
하며 해불개를 내려보던 왕중양이 선천신공(先天神功)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는 선천신공이라 불리우는 내공심법이었다. 신공심법(神功心法)은 천하지성(天下至聖)의 심법으로 그것은 전후좌우가 온통 물이고 얼음이 없는 곳에서 공을 닦아야 하는데 태호에서 왕중양은 정말 우연하게 바로 그런 곳에 떨어졌었다. 호수 가운데 있는 거북의 등 위로 떨어진 왕중양은 그곳에서 이 선천신공을 비로소 터득했던 것이다.
해불개가 깜짝 놀라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왕중양의 공격이 날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도 해불개는 일격을 맞고 다시 허물어졌을 것이다. 얼른 양손으로 왕중양의 공격을 막아낸 해불개가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탁! 탁! 탁!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내밀며 밀었다 물러섰다는 주고받았다. 해불개는 그러면서 틈만 나면 왕중양의 손을 잡아채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는 왕중양의 몸 어디든지 잡히기만 하면 단번에 찢어버릴 태세였다.
"제법이군!"
해불개가 왕중양의 눈을 응시하여 중얼거렸다. 그리곤 잽싸게 몸을 날려 왕중양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해불개의 손길이 다가오자 왕중양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크!"
해불개가 팔을 부여잡으며 옆으로 비틀거렸다. 갑자기 어깻죽지까지 쩡 하고 울리는 통증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해불개는 조금씩 왕중양에 대해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늘었군. 그런데 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려는 게지?"
왕중양은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내비쳤다. 이제서야 여협은 안심을 하는 기색이었다. 이제는 여유롭게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해불개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무슨 꿍꿍이 수작을 하려는 것인가. 왕중양이 약간 경계를 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해불개의 손아귀로 칼 한자루가 슝 하고 날아들었다. 수하 중 누군가가 재빨리 칼을 해불개에게 던져 준 것이다.
"어디 이 칼도 막을 수 있나 볼까?"
그가 곧 흙바람을 일으키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땅에서는 뿌우연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얏!"
해불개가 질풍처럼 돌진해 오자 왕중양은 가볍게 훌쩍 몸을 띄웠다. 해불개의 머리 위로 치솟은 왕중양이 아래로 내리기 전 얼른 그의 등짝을 발로 찼다. 왕중양의 발차기에 해불개가 저만큼 허겁지겁 밀려가다가 섰다. 왕중양은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후였다. 해불개가 급히 몸을 돌렸는데 잔뜩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자, 받아랏!"
해불개가 죽기살기로 다시 왕중양을 향해 칼을 뻗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몸을 날린 왕중양은 해불개의 머리 위에서 마음껏 무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뒷발로 해불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해불개가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칼끝으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일어선 해불개의 눈가엔 불꽃이 튀었다. 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이를 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만약 해불개 자신이 전의를 상실한 채 칼을 떨어뜨린다면 강남 흑도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아아!"
칼을 앞으로 모아 쥔 해불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왕중양은 아예 멀찌감치 몸을 날려 해불개와 제법 떨어진 곳에 내렸다. 마구 칼을 휘두르던 해불개가 사라진 왕중양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이쯤하면 무릎을 꿇고는 용서를 빌 것이라 생각한 왕중양이 다시 몸을 새처럼 띄워 해불개에게로 날아들었다. 해불개가 쓰는 도법은 같은 무리들이 부리는 초수와는 달리 사악하고 무자비한 살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왕중양은 한편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해불개 바로 앞으로 소리 없이 내린 왕중양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직 해불개의 공격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때를 기다려 해불개가 칼로 왕중양을 내리쳤다. 그는 왕중양이 이미 손가락 하나를 곧추 펴 높이 쳐드는 것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쨍! 하는 쇠붙이 소리가 나며 해불개의 칼이 허공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정말 멋진 솜씨군!"
구레나룻을 기른 챵바가 외쳤다.
그 옆에서 함께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는 무심 역시도 감탄을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불개, 어서 칼을 내려놓으시지?"
챵바가 왕중양 대신 해불개의 가슴을 들쑤셔 댔다. 그러나 해불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곧 하얗게 질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곤혹스런 낯빛으로 아직까지 높이 쳐든 상태로 있는 자신의 칼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물러선다면 강남 흑도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이다. 기필코 너의 목을 치고 말리라!"
해불개가 결사적으로 칼을 휘둘러댔다. 왕중양이 기묘한 보법(步法)으로 공격을 피하자 또 챵바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저건 또 무슨 보법이지?"
그말에 무심도 왕중양의 걸음에 눈길을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종의 성진보법(星陳步法)같기도 한데 모르겠어. 말만 들었지 아직 보지를 못했거든."
무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왕중양의 걸음걸이를 살피기에 바빴다. 사실 왕중양 자신도 지금의 이 보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니 어떤 특정한 보법이라는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연스럽게 발을 옮겨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선천신공의 절기가 몸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새로운 보법이었다. 한순간도 왕중양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있던 무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인형(仁兄)은 무공이 실로 대단하시군요. 정말 탄복하였소이다."
무심이 나서자 해불개는 기회라도 만난듯 한쪽으로 얼른 물러섰다.
"그런데 그 무공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다시 무심이 물어오자 왕중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천신공이라 하지요."
이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천신공을 연마하려면 물 안에서만이 가능하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언제인가 소소라는 대협이 우연한 기회에 수정궁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는 사실도. 선천신공은 매우 신기한 무공으로 무궁무진한 힘을 갖게 하는데 소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익힌 사람이 없었다.
해불개의 안색도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이거 덕분에 견식을 넓히게 되어 고맙군요."
무심이 탁탁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챵바가 무심에게 물었다.
"그럼 저 선천신공인가 하는 것도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드는가?"
"물론이지. 사대 천하기공에는 그밖에도 유운장의 합마공 대리 단씨의 일양지, 동해 도화도의 탄지신공 등이 있다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이 선천신공을 천하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넣기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 연유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좀체 익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무심이 설명을 해주자 챵바가 화를 버럭 내며 따져 물었다.
"거짓말! 선천신공이 익히기 힘든 무공이라면 어째서 저 사람은 능숙하게 하는 거요?"
어이가 없어진 무심이 입을 헤 하고 벌리자 챵바의 주먹이 대뜸 날아들었다.
"어쿠!"
옆으로 몇 걸음 밀려가던 무심이 몸을 세우며 챵바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리고 그 주먹 좀 잘 다스리라고!"
그런데 난데없이 해불개가 무심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공자께서도 이 일에 간섭할 의양이라면 좀 공평하게 처신을 하시오."
해불개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윽박지르며 나설 것이 분명했으나 때가 때인 만큼 그도 조심을 하는 눈치였다.
무심이 해불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몽골의 대군이 이미 변경을 들이치고 있는데 당신들 송나라 임금은 임안에서 향락에만 젖어 있으니 이를 두고 망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런데 그런 송나라를 위해 목숨들을 바치려고 하니 이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하며 무심에게 따지듯 나선 사람은 십팔검객 중 성미가 고약하게 생겨먹은 한 사내였다.
"다른 뜻은 없소. 준마는 영웅에게 바치고 미인은 지기에게 준다는 말도 있기에…… 당신들만 좋다면 내가 추천하여 당신들에게 몽골국의 큰 벼슬을 내리게 해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슬쩍 해불개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해불개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해불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한 무심이 다시 덧붙였다.
"해불개 총타주님께서 몽골 대군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시겠다고만 하면 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도록 내 도와줄 수도 있소. 사실 나 혼자서라도 문제는 없지만 말이요."
무심이 내민 손가락 끝에는 왕중양을 비롯해 반벽산장의 사람들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해불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나왔다.
"뭐라고! 나더러 몽골놈들의 개노릇이나 하라고? 이놈아, 이 해불개를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냐? 나 해불개는 지금까지 떳떳한 대장부였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람 같지 않은 놈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래도 대장부야. 내가 남의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며 문전걸식은 할지언정 몽골 놈들에게 빌붙는 짓은 못한다!"
"어허, 이거 감히 누구를 욕하는 거야?"
"바로 네 놈을 두고 하는 욕이다!"
무심의 으름장에도 해불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해불개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오히려 흐뭇하게 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되겠다. 먼저 저 놈의 모가지부터 비틀어야겠다!"
느닷없이 긴 팔을 쑥 내민 무심이 해불개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원공삼격(猿公三擊)이다!"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바로 얼굴을 가린 여협의 외침이었다. 왕중양은 원공삼격에 대해 알 수는 없었으나 워낙 여인의 외침이 다급하여 대단한 무공일 거라 추측했다.
무심은 여협이 말한 그 무공을 앞세우고는 해불개를 덮쳐 들었다.
"받아랏!"
무심의 공격은 무서웠다. 돌풍이 인듯 그의 손놀림에 흙먼지가 풀풀 일었다. 해불개는 그의 공격을 두어 번 피하더니 곧 옷 앞자락을 찢기고 말았다. 가슴팍이 서늘해진 해불개가 뒷걸음질 쳤다.
"타인은 유심(有心)이지만 이 공자는 무심(無心)이다!"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 지껄인 무심은 틈을 주지 않고 해불개에게로 달려갔다.
"윽!"
그의 장에 해불개는 그만 어깨를 들이쳤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아픔과 함께 해불개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부서진 어깨를 부여잡고는 해불개가 부르짖었다.
"죽어도 난 몽골놈들의 개노릇은 안 하련다!"
무심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고 하는데 왕중양과 여협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심 앞에 먼저 당도해 그를 막아 선 것은 챵바였다.
"너까지 나를 막을 셈이냐? 넌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잊었어?"
챵바를 노려보는 무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건 나도 알지. 사부님께서 공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방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소. 우리에게 투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어. 그건 대장부로서 할 짓이 못되오."
"집어치워. 투항하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해!"
슬쩍 왕중양과 여협을 확인한 무심이 챵바를 슬쩍 떠보았다.
"이봐, 저 왕중양이란 사람이 바로 대장부가 아니라고. 저 여인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가 한 번 겨루어보는 게 어때?"
"대장부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인까지는 너무 하잖아?"
챵바가 떫떠름한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무심은 챵바를 부추겨 이들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럼 저 사내와 먼저 붙어보지?"
챵바 역시 왕중양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던 차라 은연중 한 번 겨뤄보고 싶었다.
왕중양에게로 다가간 챵바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왕중양이 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대단한 기로군!"
왕중양이 비꼬는 투로 빈정대자 챵바가 열을 올렸다.
"내 주먹을 피하다니?"
초원에 있을 때 큰 황소를 때려눕힌 적도 있는 챵바였다. 그런데 왕중양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자신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챵바가 다시 주먹을 끌어쥐고는 왕중양에게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왕중양은 두 다리가 땅에 붙박힌 듯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들의 싸움에서 시선을 뗀 무심이 여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누구일까. 손에 든 장검을 봐서는 무술 역시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가려진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는 다른 일은 몰라도 여인의 관해서는 무심코 지나쳐본 적이 없었다. 미인을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야마는 성미이기도 했다. 무심으로서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과 싸운다면 기회를 봐서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품었다. 그런데 여인은 좀체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무심이 왕중양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여협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심이 인사드립니다."
무심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인을 고르는 것은 준마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색깔과 용모 그리고 재간과 목소리 심지어는 걸음걸이는 물론 잠든 모습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 가지나 되는 기분에 적합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엔 웬만한 여인은 들어차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여협에게서는 부드럽고도 진정한 여인의 품성이 느껴졌다. 비록 면사포에 얼굴이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대는 저 왕중양과는 구면인가요?"
무심이 묻자 여인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의 마음속에는 괜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단순히 구면이라고만 했는데도 마치 그들이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왕중양을 적수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 질투심은 더욱 사납게 일었다.
"왜 얼굴을 가리고 계시지요? 강호에 다니시기에 불편함이 많이 따를텐데……. 또한 그대의 용모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소?"
무심의 말투는 제법 차분했으며 여인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방에 가두어 놓고 사흘 낮밤을 설득한 적도 있는 그였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마음을 닫아두고 있던 그녀 역시 나중에는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반년도 못 되어 무심은 그녀를 차 버렸다.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는 무심이였기에 여협이 꼭 제 손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하리라 자신을 했다. 그런데 어떤 달콤한 말로도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여
인의 동태를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왕중양은 사람은 좋은데 한 가지 아깝게도……."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여협이 물어왔다.
"아깝다니요? 무슨 말이죠?"
무심의 입꼬리로 회심의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슬슬 자기의 계략에 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그가 여협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대도 상술(相術)에 대해 알고 있겠지요? 관상을 보는 것 말입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만 내 보기엔 저 공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할 운명이지요."
"그래요?"
여협의 반응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분명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게 확실했다. 계속 헛손질을 하며 왕중양 앞에서 허둥대고 있는 챵바를 무심코 돌아보던 그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왕중양은 나중에 자신의 신세 또한 비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인과의 정 또한 품을 수 없게 되는 건 물론 폐인으로 남을 뿐이지요."
"당신의 말이 맞다면……."
여협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무심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대도 제게 관상을 좀 보시지 않으시겠소? 그대가 얼굴을 잠시 내보인다면 앞날에 대해 훤히 꿰뚫어 드리리다."
그녀가 무심의 말에 잠시 손을 들어 면사포를 들추려다 불현 멈추었다.
"아니오. 내 관상은 필요없소."
무심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격으로 괜한 심술까지 생겨나 열이 받쳤다. 무심이 속마음을 숨기고 다시 여협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들어라! 어서 몽골에 투항하여 충설을 맹세하여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산장 전체가 살육잔치를 이룰 것이며 강은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바로 귀낭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십팔검객들 속에서 누군가 비웃었다.
"그런 엄포가 통할 것 같은가? 구원군이 온다면 몰라도 너희들로서는 어림도 없다."
이번엔 십도객 무리에서 이렇게 받아쳤다.
"구원군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십도객들이 다시 칼을 들고 반벽산장 사람들을 노리고 있지를 않은가.
"어서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반벽산장의 이름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아라!"
십도객들이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덤빌 테면 어서 나서라!"
반벽산장 사람들 중 한 노인이 이렇게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지르며 나서자 십도객들이 내심 놀랬다. 노인의 몸으로 거침없이 나서는 것을 보자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귀도 허재가 앞으로 나서며 노인을 향해 칼날을 그어댔다.
"윽!"
비록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노인이었지만 힘이 있을 리 만무였다. 노인은 허재의 칼날에 목이 잘린 채 널브러졌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더욱 치를 떨었다.
"이 잡놈들아!"
반벽산장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십도객들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맨주먹으로는 십도객의 칼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십도객들은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마구 칼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반벽산장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 넘어갔다. 여기저기서 나는 아우성과 사지가 찢겨나가는 비명이 한데 어우러져 일대의 피바다를 이루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서넛이 떼를 지어 십도객 한 사람과 맞붙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듯 허공을 그어대는 칼날 앞에서는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십팔검객이 나서게 되었다.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검과 칼이 내뿜는 ㅂ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십도객 중 한 사내가 반벽산장의 사람의 몸뚱이를 두 동강 내자 심팔검객이 달려들었다.
"이 개백정 같은 놈아!"
십도객에게로 검들이 날아갔다. 십팔검객은 그의 숨통을 향해 일제히 검을 찔러댔다. 그러자 놈이 재주넘기를 하며 옆으로 피해 달아났다.
"차라리 그 검으로 반벽산장 놈들의 밑구멍이나 쑤시거라!"
놈이 이죽거리며 놀려댔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로 떠밀려온 반벽산장 사람의 목을 쳐 날려버렸다.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도 합세를 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에 따라 죽어 가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 발에 밟히는 것은 잘려 나간 사람들의 목과 사지였고 보이는 것은 하늘로 치솟는 핏덩어리였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왕중양! 어서 여기를 보거라!"
그 목소리는 무심의 말이었는데 왕중양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는 어느 틈엔가 유기의 딸인 유일민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곧 죽일 듯한 기세였다.
"싸움을 그만두고 어서 우리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의 목은 날아갈 것이다!"
유일민은 눈을 감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어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미처 손을 쓸 여유가 없었던 왕중양은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유일민을 끌어안고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무심 뒤로 휙 하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심이 자기 뒤쪽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유일민의 목을 졸랐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이 계집의 목숨은 끝이다!"
그러면서 뒤를 짧게 돌아보던 무심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곳에는 여협이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여협은 유일민의 생사가 달린 일이라 조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대가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준다면 이 계집을 놓아줄 수도 있소."
무심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껄였다.
"무엇으로 당신의 말을 믿소?"
여협의 말에 무심이 탁한 웃음을 토했다.
"하하핫! 날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다는 거요?"
살육전도 이미 멈춘 상태였다. 싸움을 중단한 이들이 모두 무심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이봐, 자넨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무심이 왕중양을 향해 불쑥 물었다. 왕중양이 여협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가 알고 있는 알고 있는 여인이라고는 오로지 임조영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옆에 있었던 자지(紫枝)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여협이 자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난 모르오."
왕중양이 고개를 내젓자 무심이 콧바람을 불었다.
"흥, 모른다고? 하지만 이 여인은 너를 알고 있다. 이 여인의 눈을 보고 난 알았지."
모심공자가 휙 고개를 돌려 여협을 협박했다.
"이 계집을 살리겠다면 어서 얼굴을 내보이시오!"
"필요없소. 난 그 애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오. 만약 그 애가 죽는다면 다만 그 원수를 향해 일침은 가할 수 있소."
여협의 태도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했다. 무심이 뱀눈을 만들었다.
"내가 그대의 손에 죽는다고? 허허."
그는 손아귀에 있는 유일민을 당장 죽일까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무신, 넌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왕중양이 꾸짖으며 한 발 내딛었다. 무심이 고개를 젖혀 웃는 시늉을 하더니 곧 순금으로 만들어진 부채를 펼쳐 들었다. 중간에는 누공(鏤空)으로 새겨진 불조도겁도가 있는 부채였다. 그 황금 부채를 유일민의 눈앞으로 들이민 그가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자, 이 부채를 보렴. 여기 그려져 있는 이 화상이 바로 부처님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 누구지? 부처님이지?"
유일민이 바들바들 떨며 겨우 대답했다.
"그…… 그래요."
무심이 히죽 웃더니 부채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 지금 무얼 하고 있더냐?"
자세히 부채에 새겨진 그림을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몰라요."
유일민이 고개를 돌리며 뿌리치려 하자 무심이 가로막았다.
"어서 똑똑히 보란 말이다. 부처님도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가 유일민의 백옥같은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내와 한 번도 살을 섞지 않은 여인에게서는 늘 특별한 향기가 나거든……."
마치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무심은 유일민의 몸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는 벌름거렸다. 유일민은 그때마다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제14장 유일민의 사랑
왕중양은 무심이 하는 짓거리를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린 유일민이 몸부림을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자 왕중양의 심기가 몹시 뒤틀렸다. 의협심이 강한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슴 한편으로 옥총의 칼을 맞고 죽어가며 유기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차마 다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생생하게 눈앞을 스쳐 자나갔다.
"네 이 놈!"
왕중양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무심에게로 덮쳐 들었다.
"움직이지 마!"
무심이 손을 뻗으며 제지했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서기만 하면 이 계집은 끝장이다!"
왕중양이 주춤하자 챵바가 대신 나서며 툭 한마디 내던졌다.
"이 계집은 천하의 일색이로다. 자고로 미인은 죽이지 않는 법."
챵바를 노려보는 무심의 눈초리가 다시 파르스름하게 변했다. 여협이 왕중양에게 조심하라는 뜻으로 눈짓을 보내왔다. 왕중양이 거친 숨을 내쉬며 울분을 가라앉혔다.
"강호에서는 그래도 알아준다는 무심 공자가 이게 무슨 짓이오? 어린 계집을 데리고 그런 비열함을 일삼다니?"
그러나 왕중양의 충고를 곱게 받아들일 무심이 아니었다. 히죽히죽 이빨을 내보이며 다시 유일민의 목덜미에 코를 갖다 대었다.
"헤헤, 난 이 계집의 향기에 반했소이다. 물씬 풍겨 오는 여인의 냄새에 취하고 싶단 말이오."
"이봐요 무심 공자, 내 얼굴을 보여드린다면 그 아이를 풀어주겠소?"
하며 여협이 나서자 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원래 복면을 한 이들이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수치요 큰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요?"
무심이 반색을 하며 유일민의 몸에서 얼굴을 떼었다.
"그런데 얼굴이 추상이면 어쩌지? 그렇게 되면 난 괴로워 미칠지도 모르는데……. 멧돼지를 잡으려다 집돼지마저 놓치게 되면 여간 낭패가 아니지."
그는 계속 히죽거리며 유일민과 여협을 번갈아 감상했다.
"당신에게만 얼굴을 보여줄 테 니 약속을 지키시오."
단호하게 나오는 여협이었기에 무심도 더는 빈정대지 않았다.
이윽고 여협이 무심의 정면으로 나왔다. 검을 쥐는 여인의 손치고는 곱고 가냘펐다. 여협은 면사포의 한쪽을 슬쩍 들어 눈을 보여 주었다.
"눈매가 이쁘긴 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봐야지."
무심이 투덜대자 여협이 면사포 전체를 들었다.
"아니!"
무심은 숨을 턱 멈추고는 입을 벌렸다. 뒤쪽에서 무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챵바가 애타게 물어왔다.
"어때, 절색인가?"
그러나 무심은 어떠한 대답도 못한 채 넋을 잃고 여협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껏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보지 못했었다. 절색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여인이다, 등등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심은 갑자기 두 다리가 심하게 떨려 중심을 잃을 뻔했다.
"자, 제 얼굴을 보니 어떻소?"
여협이 내뱉은 말 속엔 조소가 은근히 담겨 있었지만 무심은 그것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이미 혼백을 빼앗겨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홀린 듯 여협에게 시선을 맡기고 있던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대를 갖을 수만 있다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겠소!"
"이젠 어서 저 아이를 놓아주시오."
여협이 정색을 하더니 면사포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럼, 그럼. 놓아주어야지."
유일민이 비로소 무심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유일민이 왕중양에게로 달려와 안겼다.
그러자 다시 얼굴을 가린 여협이 어디론가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잠깐!"
그녀를 잡은 것은 무심이었다.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그동안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지만 모두 한때의 장난에 불과했소. 하지만 오늘부터 난 진정한 사내가 될 것이오."
여협이 면사포 속에서 웃었다.
"오호호, 단지 그대에게 얼굴을 보여준 것으로 우리의 인연은 끝난 것이오."
하며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그가 황급히 여협에게로 발을 옮겨 놓으며 안달을 했다.
"난 진심으로 그대가 좋소. 죽어도 그대를 보낼 수는 없소."
"자꾸 귀찮게 하시면 가만두지 않을 테요!"
그녀가 슬쩍 검을 잡으며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러나 무심의 치근거림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더욱 발끈 달아오른 그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안 되겠군!"
갑자기 검을 뽑아든 그녀가 무심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일이었는지 그녀의 검을 재빨리 피하며 무심이 인상을 썼다.
"소용없소. 난 그대가 가는 곳이라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겠소!"
"정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여협의 검이 다시 무심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녀의 검술이 무심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듯 했다. 무심은 부채를 펼쳐든 채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오호, 놀라운 일이로다. 어찌 저 여협의 검술은 임조영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일까? 검끝에서 튀는 초식 하나하나가 치밀하고도 섬세한 것이 아무래도 임조영과 동문수학을 한 여인이 아닐까?'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왕중양이 다시 여협의 동작에 눈길을 주었다. 수세에 몰린 무심이 몇 걸음 치닫더니 난데없이 해불개를 불렀다.
"불개 형,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나를 따르면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드리리다."
그러나 해불개는 쌀쌀한 태도로 무심의 말을 귀넘어 들었다.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깨달은 무심이 이번엔 귀낭자와 챵바에게 짧게 소리질렀다.
"가자!"
그리곤 먼저 훌쩍 몸을 날리며 멀리 달아났다.
"제기럴,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야? 하지만 사부님의 분부가 있으니 할 수 없군."
이렇게 혼자말로 웅얼웅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쏜살같이 치달았다. 귀낭자도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어디 후에 두고 보자!"
그녀 역시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난 유일민은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마저 잃어버린 어린 유일민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왕중양만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왕중양에게 기대고 있던 유일민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젠 어디로 가야하죠?"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엔 끝없을 슬픔이 묻어났다.
"글쎄다. 일단 나와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을 찾아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왕중양과 유일민은 이만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은 반벽산장 사람들과 이들을 도우러 온 그밖의 사람들과 작별을 나누었다. 유기가 없는 반벽산장은 이젠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반벽산장을 떠나 강변에 이른 두 사람은 배를 빌려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저기에 배가 있어요."
유일민이 가르킨 쪽을 따라가 보니 과연 물살에 흔들리고 있는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그래, 저 배를 타고 가자. 그런데 정강(靜江)까지 그대로 내려갈 수 있으면 좋겠구나."
사공은 늙은이였다. 눈꼬리가 조금 아래로 쳐지고 온통 주름으로 얼굴을 덮었으나 눈은 어둡지 않은 것 같았다. 거동 또한 굼뜨지 않게 보이는 그 사공은 뱃삯으로 은자 석 냥만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푼이라도 깎으려 들면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공이 원하는 대로 배삯을 주고 오른 두 사람은 곧 선창에 기댄 채 곯아떨어졌다. 너무 피곤한 탓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왕중양이 어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잠에서 깨어난 것은 조금 뒤였다. 선창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에 푹 빠졌거든."
그러면서 누군가 소리를 죽이며 킥킥 웃었다.
"이쁜 계집도 하나 있어."
"이거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군."
두 사람이 선창 안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올가미 하나면 그만이겠는데. 조심하라구. 깨어나면 씨끄러우니까."
왕중양은 이들이 자기 앞에까지 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숨소리와 발소리들로 충분히 짐작해 냈다.
갑자기 한 사내가 큰칼을 높이 쳐들더니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또한 다른 사내는 왕중양의 발목을 노렸다. 칼날이 왕중양을 향해 내리꽂힐 때였다. 재빨리 유일민을 끌어안은 왕중양은 물 위를 스쳐나는 새처럼 가볍게 선창 밖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급한 김에 너무 힘을 가했는지 배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강물에 곤두박질치려는 찰나에 왕중양이 발을 뻗어 난간에 걸었다. 다행히 강에 처박히는 꼴은 면하게 되었지만 그는 유일민을 안은 채 거꾸로 매
달리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유일민은 눈앞의 상황에 놀라 왕중양을 세게 끌어앉았다. 또한 아직 배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배는 강변에 묶인 그대로였다.
왕중양을 단칼에 죽이지 못한 사내들이 선창에서 급히 뛰어나오며 두리번거렸다. 이들은 곧 배 난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하하하, 우리들만 색을 밝히는 줄 알았는데 저 공자님은 더 하는군. 죽어도 계집은 품에서 놓지 않겠다는 꼴 좀 보라구."
"어서 사내놈을 죽이고 계집과 놀아보자고."
사내들이 서로 수작을 주고받으며 한동안 낄낄대더니 난간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왕중양은 머리를 들어 이들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사공은 보이지 않고 단지 사공차림을 하고 있는 낯선 사내들이었다. 이들 중 하나가 칼로 왕중양의 발을 찍으려고 했다. 왕중양은 낭패스러웠다. 품에 안고 있는 유일민 때문에 달리 몸을 쓸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다가오면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왕중양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비웃기만 했다. 칼을 높이 쳐든 사내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아래로 내리찍었다.
"잘 가거라!"
그런데 갑자기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공중으로 튕겨졌다. 왕중양이 급히 장을 날렸던 것이다. 그 사내는 칼만 잃어버린 셈이었다. 사내가 옆에 있던 사내에게 칼을 받아 쥐고는 왕중양을 공격하려 했다. 왕중양이 다시 장을 뻗어 일격을 날렸다.
"우욱!"
가슴에 강한 장을 얻어맞은 사내가 높이 솟구치더니 떨어지면서 난간에 머리를 박고 강물로 빠졌다. 사내가 강 속에 빠지면서 튄 물이 왕중양의 얼굴에까지 묻었다. 이 틈을 이용해 왕중양이 한 손으로 배를 탁 하고 쳤다. 그 반동으로 왕중양과 유일민은 다시 배 위로 간단히 올라왔다. 유일민을 내려놓은 왕중양이 남아 있는 사내를 향해 떠억 버티고 섰다. 사내는 이미 겁을 집어먹고는 벌벌 떨고 있었다.
"제발 사, 살려주시오. 난 상관이 없어요. 누가 시킨 거란 말이요!"
사내가 기어오더니 왕중양 앞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시킨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구인가?"
왕중양이 다그치자 사내는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되오. 말을 하면 저는 죽습니다요."
"그렇다면 내 손에 죽는 것은 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더냐?"
한발을 들어 쿵 하고 바닥을 구르자 배 전체가 기우뚱거렸다.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왕중양을 슬쩍 올려다보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를 봐요. 그 사람이 바로 저기 있어요."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있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사내가 가리킨 쪽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후다닥 몸을 일으킨 사내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유일민이 왕중양 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무서워요."
유일민의 몸은 몹시 차가웠다. 찬바람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노출시킨 탓도 있었지만 연이어 당하게 되는 위기에 더욱 떨고 있는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왕중양이 유일민을 끌어안으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아라. 곧 정강에 도착할 테니. 다른 사공을 구해보든지 아니면 내가 노를 저어서라도 갈 것이다. 일단 오늘은 이 배에서 지내도록 하자. 그리고 그곳에 가면 둘째와 셋째 동생이 있어. 넌 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거야."
유일민이 울먹이며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난 싫어. 난 그 사람들과 같이 있지 않을 테에요."
유일민은 왕중양이 달아다니기라도 할 것처럼 부등켜 안으며 계속 두려움에 떨었다. 왕중양은 지금 유일민이 자기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말에 따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왕중양이 유일민을 달래려고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에 대해 말해 주기 시작했다.
"둘째 동생은 강남에서 유명한 모용 공자인데 풍류남아요 인품도 그만하면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리고 셋째는 무공이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얼마전 아름다운 여인을 얻기도 했지. 그 여인은……."
말끝을 흐려버리는 왕중양의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어느새 눈물을 거둔 유일민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왕중양을 올려다보았다.
"응, 셋째가 얻은 그 여인도 아주 미인인데다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
"그렇게 예뻐요? 하지만 전 완벽한 미인은 보지 못했어요."
유일민의 눈동자 속엔 빛이 반짝였다. 왕중양은 그녀의 눈 속에 들어찬 은은한 달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여인 역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너 역시 아름다운 여인이란다.'
하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왕중양은 애써 안으로 삼켰다. 유일민의 목덜미로 난 보드라운 솜털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차츰 그 은빛이 흔들리기 사작하는 게 아닌가. 왕중양은 다시금 유일민이 울먹이고 있음을 깨닫고는 물었다.
"왜 또 울지?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러나?"
유일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었다.
"울지 말거라. 앞으론 나를 믿고 의지하렴. 네 아버지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난 너를 보살펴 줄 마음이니 너무 외로워 말고."
"제가 자꾸 눈물을 보이니까 싫으시죠?"
애써 미소를 만들려는 유일민이 애처럽게 보였다. 왕중양은 입을 다물고는 달빛을 조각조각 흩어 놓고 있는 어두운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제가 우는 것이 싫으시면서도 제 마음이 상할까 봐 말씀을 안 하시는 거죠."
왕중양이 그윽한 눈빛을 유일민에게 주었다. 그는 눈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눈가를 어루만지던 유일민이 성숙한 여인들이 보여 주는 그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숙부님이라고 부르자니 좀 뭣하고, 그렇다고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저 지금처럼 당신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녀가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알았어요. 지금처럼 당신이라고 부를 게요."
유일민이 입 속으로 당신이라는 호칭을 두어 번 소리내더니 왕중양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유일민을 품에 안은 채 선창에 기대 앉은 왕중양은 깊은 사색에 빠져 들었다.
'내가 처한 입장을 동생들에게 전하면 뭐라고 할까? 나를 책망할지도 모른다. 괜한 일을 떠맡아 고생을 한다고. 그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둘째 모용준과 셋째인 임조영은 아직도 함께 붙어 다니고 있을까. 또한 그 어여쁜 자지 처녀는 셋째와 행복한 정을 나누고 있는지…….'
자는 줄 알았던 유일민이 고개를 들더니 왕중양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나요?"
"아니, 별 생각……."
얼버무리려고 하자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살짝 눈을 흘겼다.
"아니예요.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얼굴에 그렇게 새겨져 있어요."
왕중양이 보이지 않게 미소를 내비쳤다. 그는 모용준과 임조영 두 사람과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다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당신은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헤어진 형제들을 그리워하고 있었지."
하는 수 없이 왕중양은 그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임조영이 자기를 여러 번 구해준 것과 모용준의 소탈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유일민도 그들을 어서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들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또 다른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배에는 반벽산장에서 나온 십팔검객들과 한 여인이 타고 있었다. 그 여인은 뱃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여인의 눈동자엔 왕중양과 유일민이 아로새겨졌다. 지금 그 두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궁금해했다. 왕중양의 모습을 더욱 절실하게 그리고 있는 여인의 눈빛은 금세 흐려졌다. 이 여인은 반벽산장에 있던 여협으로 다름아닌 임조영이었다.
"바람이 차니 선창 안으로 드시지요."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말을 건넸다. 십팔검객의 맏이였다. 맏이를 따라 선창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중 임조영은 다소곳이 앉아 있던 한 계집을 발견했다. 청풍검(淸風劍) 오일척(吳一척)이라는 18세 전후로 보이는 계집이었는데 여인을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어서 제 옆으로 와 앉으세요. 그리고 정 불편하시다면 사내들은 모두 밖에 나가 있으라 하면 돼요. 우리끼리만 선창 안에 있기로 해요. 그래야 그 면사포에 덮여진 얼굴도 제가 볼 수가 있을 테니까요."
계집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임조영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선창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오일척이 쪼르르 뒤따라 나왔다.
뱃전에 자리잡고 앉은 임조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십팔검객들은 술단지를 앞에 놓고 한창 술판에 빠져 있었다. 더러는 고향을 그리는지 밤하늘에 뜬 달을 우러르며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다행히 오늘 십도객을 물리쳤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우리가 졌더라면 큰 망신을 당할 뻔했지."
맏이가 술잔을 높이 들며 떠들자 모두들 그말이 맞다며 한마디씩 던졌다.
"자, 우리 또 술잔을 들어 이 승전을 경축하세!"
여러 개의 술잔이 달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우리도 한잔 해야죠?"
옆에 앉은 오일척이 임조영에게 술잔을 건네며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난 술을 할 줄 몰라."
"술은 이성을 파괴시킨다고들 하지만 걱정말아요. 우리 십팔검객들은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으니까요."
몇 번을 더 사양하던 임조영이 끝내는 그녀가 내민 술잔을 받았다. 그런데 한잔의 술이 들어가자 임조영의 가슴은 금방 우울함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술잔을 비우고 무심코 달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앞으로 모용세가의 동굴에서 있었던 일이 스쳤던 것이다. 그녀는 깊고도 뼈아픈 상념 속으로 잠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곳에서 병부 목우와 귀살 주정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녀의 상념은 모용준에게까지 옮겨갔다. 어쩌면 모용준 그도 악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는 예감에 임조영은 더욱 침울해졌다. 만약 그가 악인이라면 왕중양에게도 해가 미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를 믿고 있는 왕중양이기에 언제나 방심을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서 왕중양에게 경계를 하라는 말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으로는 왕중양은 필시 정강으로 돌아갈 텐데 이미 늦지나 아닌지, 이미 당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자신의 예감이 적중한다면 왕중양은 모용준의 마수에 걸려들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임조영이 갑자기 오일척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그대에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도와주겠나?"
느닷없는 임조영의 말에 오일척이 당황하며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려 댔다. 남의 도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임조영이 이렇게 나오자 그녀는 내심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염려 마시고 어서 말씀해 보세요. 제가 힘껏 도와드리지요."
임조영이 자신의 걱정거리를 오일척에게 대충 털어놓았다.
"그랬었군요? 하지만 꼭 정강으로 가시겠다면 우리들도 함께 가서 도와드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말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불현 자신의 예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용준은 예외이고 목우와 주정만이 악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에 상황이 그렇다면 괜히 십팔검객들을 몰고 가 작은 일을 오히려 크게 만들 필요는 없을 거라 판단되었다.
오일척이 실팔검객의 맏이에게 임조영의 사정을 전하자 그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변에 나가 말 한 필을 구해 올 테니 그것을 이용하시오. 배보다는 육로를 따라 가는 것이 더 수월하니까."
강변을 향해 노를 저어가던 임조영과 십팔검객 일행이 다른 배 하나를 발견했다. 강변에 정박한 채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배를 가리키며 누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맏형님, 저기 좀 봐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같은데요."
"글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이 없는 듯하다만. 일단 접근해 보자."
맏이의 말에 노를 보다 천천히 저으며 그 배 가까이로 접근해 갔다.
한편 그 배 선창 안에는 왕중양이 잠든 유일민을 안고 있었다. 그는 행여 유일민이 깰까 봐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야릇한 냄새가 나고 있었는데 왕중양은 얼른 알아낼 수가 없었다. 물비린내 같기도 하고 자기의 땀냄새 같기도 했다. 바로 자신의 가슴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유일민에게서 나는 풋풋한 여인의 체취였다. 성숙된 여인의 체취가 아닌 어린 소녀의 싱싱한 향기였다. 왕중양은 그 냄새를 더 가까이 맡고 싶어 고개를 숙였다. 유일민의 이마에 코를 댄 왕중양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활짝 핀 꽃에서 나는 달고 은은한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그는 곁에 웬 그림자
가 다가서고 있는 것도 모른 체 유일민의 향기에 차츰 취해갔다.
왕중양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임조영이었다. 임조영의 눈빛이 매우 반짝였다. 그토록 염려하던 왕중양을 만나자 반가움과 기쁨에 그녀는 말문을 잃었다. 그녀는 한동안 못박인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미처 그녀가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앞에 모습을 먼저 보인 것은 심팔검객의 맏이였다.
"오, 그대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셨소?"
왕중양은 그러나 유일민이 행여 깨어날까 봐 말소리를 죽이며 맏이를 바라보았다.
"수상한 배 한 척이 있길래 와본 것이었소."
임조영이 비로소 왕중양 앞으로 나왔다.
"여협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임조영은 아직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왕중양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유일민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젠 모두들 돌아가시오. 난 이곳에 남아 왕 공자와 함께 강남에 가겠소."
임조영이 맏이와 오일척에게 그런 의사를 밝히자 놀란 것은 왕중양이었다.
"아니 그대는 어떻게 내가 강남에 간다는 걸 알고 있소?"
"짐작이지요. 그리고 난 정강까지 가는데 길이 같다면 동행을 해도 괜찮겠지요?"
오히려 임조영이 정강이란 말까지 비치자 왕중양으로서는 별 수 없었다. 정말 우연이라 여겼던 것이다.
"정강? 그곳에는 무슨 일로 가는 길이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지요."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한편 여협과 동행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유일민과 단 둘이서만 길을 간다는 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츰 어린 소녀가 아닌 여인으로 비쳐지는 유일민의 모습에서 왕중양은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좋도록 합시다."
여러모로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왕중양이 기꺼이 임조영의 말을 받아들였다.
"난 싫어요!"
그런데 자는 줄로만 알았던 유일민이 고개를 들더니 앙칼진 소리를 냈다. 유일민의 시선은 임조영에게로 곧장 날아들었다.
"언제 깼지?"
왕중양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계속 임조영만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나와 함께 가면 되지, 왜 저 사람까지 데리고 가려는 거죠?"
심기가 불편해진 임조영은 오기가 났는지 오일척을 향해 어서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자, 모두들 이제 돌아가시오."
오일척이 윗입술을 살며시 깨무면서 대답했다.
"그럼 우린 가요."
십팔검객 맏이와 오일척이 임조영에게 인사를 하곤 돌아갔다. 이들이 배에서 완전히 떠나자 왕중양은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서였다. 왜 여협이 강남에는 가는 것인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는 여협이 바로 임조영이라는 것도, 또 그녀가 그곳 모용세가에서 큰 위기를 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왕중양을 걱정하여 동행하겠다고 나선 그녀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임조영을 얼굴을 가린
여협으로만 알고 있는 왕중양으로서는 여간 의심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왕 공자님은 정강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임조영이 슬쩍 말을 건네왔다. 그러자 왕중양은 내심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맺은 의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셋째인 임조영이 한 쳐녀와 혼례를 치를지도 모른다고요?"
임조영이 놀라는 기색을 하며 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미 혼례준비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무작정 찾아간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군요."
"그 일 때문만은 아니오. 사실 우리 형제들 중 내 무공이 가장 뒤떨어지기 때문에 동생들은 걱정을 무척 하고 있을 게 틀림없소. 나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또 그들의 안부도 알고 싶기에……."
"말인즉, 동생들이 보고싶어 간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셋째 뿐만 아니라 둘째도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는 무척 기뻐할 것이오."
"……."
왕중양은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한동안 벅찬 감격에 빠져들었다. 그의 이같은 거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임조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왕 공자의 추측대로 셋째가 정말 자지라는 처녀와 혼례를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근거라도……."
"물론이지요. 둘째가 하는 말이……."
그러다가 왕중양이 말을 끊었다. 둘째 모용준의 근황이 궁금해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쉬시지요?"
"둘째는 영웅호걸인데 그 밑에 있는 몹쓸 사람들이 동생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말았죠. 내 둘째를 만나면 꼭 그 두 사람의 행실을 귀띔해 버릇을 고쳐 놓게 해야겠소."
그녀도 왕중양이 말하려고 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감을 잡았다. 자신을 죽이려던 목우와 주정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오히려 둘째 동생이란 사람의 행실이 나쁘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자 왕중양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임조영을 노려보았다.
"모르는 말씀. 우리 둘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모를 것이요. 둘째는 모용세가의 유일한 계승자요. 그런 사람이 그릇된 품성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소!"
왕중양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지금도 모용준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품고 있는 처지였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를 찾아 가려는 길이 아니던가.
"천길 물속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요. 더군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름해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임조영이 계속 모용준에 대해 헐뜯는 말을 늘어놓자 왕중양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해 갔다.
"아니, 당신은 우리 형제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리 모함을 하는 것이오?"
임조영이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불쑥 유일민이 사이에 끼여들었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지요. 말로는 남을 도와주는 것같지만 실은 딴 속셈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사람이 많다구요."
임조영을 대고 비꼬는 말투였다. 임조영이 잠시 할말을 잊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유일민이 한술 더 떠서 임조영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따라다니려고 하죠? 진짜 이유가 뭐예요?"
유일민이 쌀쌀맞게 따져 묻자 임조영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곤 결코 편안하지 않은 심기를 억누르는 기색으로 설명했다.
"난 그대들의 뒤를 따르자는 게 아니오. 나는 지금껏 남이 간 길을 따라가 본 적이 없소."
유일민이 괜한 소리 말라는 뜻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임조영은 어린 유일민과 말싸움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았다. 세 사람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기에 그녀는 가급적 유일민과 상대하지 않으려고 다시 왕중양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셋째 동생은 어떤 사람이지요?"
그때서야 왕중양의 태도도 한층 누그러져 임조영의 질문에 반색을 했다.
"기꺼이 말해드리리다."
그는 그윽한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셋째인 임조영을 만나게 된 동기와 자지 처녀와의 일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셋째인 임조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임조영은 속으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임조영과 왕중양이 적의를 거둔 채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본 유일민이 또 사이에 끼여들었다.
"반벽산장에서 저를 구해주시려고 했던 일 정말 고마워요."
유일민이 뒤늦은 예를 올리며 왕중양에게서 임조영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신은 미인일 것 같아요. 그때 무심 공자가 넋을 잃었는데 저에게도 보여줄 수 없나요?"
임조영이 몹시 당황하며 황망히 고개를 흔들었다. 유일민이 더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인지 갑자기 울먹이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이미 부모님을 잃은 가엾은 아이랍니다. 그런데 저를 구해주려 했던 사람의 얼굴을 모른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저의 청이니 꼭 들어주세요."
남의 속도 모르고 왕중양이 유일민을 거들며 나섰다.
"이 아이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러니 어렵지 않다면 청을 들어주시구려. 내가 마음에 걸린다면 돌아앉아 있으리다."
하며 왕중양이 몸을 돌렸다. 하는 수 없었다. 임조영이 유일민에게 보이도록 슬며시 면사포를 쳐들었다. 유일민 역시 무심과 마찬가지로 크게 탄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미인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는 입술과 가을바람에 다듬어진 솔잎 같은 눈썹 그리고 새벽 호수를 닮은 눈동자…… 모두가 자기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유일민은 고개를 숙인 채 심한 열패감에 시달렸다. 자
신의 미모에 오히려 여협이 감탄을 할 것이라 계산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미인이예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유일민이 왕중양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며 우물거렸다. 그말에 왕중양은 고개를 돌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임조영은 얼굴을 가리고 난 뒤였다. 다시 면사포를 내리는 것을 보던 유일민이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토록 아름다운 외모를 숨기려 하나요?"
"글쎄……."
임조영은 유일민의 호기심을 일축했다. 유일민은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뾰로통해졌다. 유일민이 과시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왕중양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보기에 민망하구나. 이곳엔 세 사람의 남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보다못한 임조영이 유일민을 꾸짖었다. 유일민은 입을 더 불쑥 내밀고는 왕중양의 반응을 살폈다.
"오해 마시오. 이 애는 지금 나를 의지하고 있을 뿐이요. 또한 이 애의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부탁도 받았고……."
왕중양이 난처한 몸짓을 보이며 변명하려 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그 애 역시 어엿한 여인의 몸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사람이 죽으면서 장래까지 책임지라고 하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왕중양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이 의협심에 불타는 사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하죠. 하지만 지나친 행동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왕중양은 그 말에 대해 곰곰 되씹어 보았다. 과연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저 여협이 무슨 이유로 상관을 한다는 말인가?'
왕중양은 그런 여협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협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일민이 자꾸 자신에게 지나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자제시켜야 한다는 것은 깨달았다. 왕중양이 슬쩍 유일민을 떼어놓으려 했다.
왕중양의 의도를 벌써 눈치챈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나는 당신이 사내 중의 사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속이 좁은 형편없는 사람이었군요!"
유일민의 태도에 모두들 경악했다. 어찌 어린 계집의 입에서 이같은 말들이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세상을 오래 살아보고 또 숱한 사내들을 겪어본 성숙한 여인 정도가 되어야 속으로 품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유일민은 끊임없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말들을 퍼부어 댔다.
"우리 아버님께서는 왕 공자님이 기인(寄人)이라 여기셨어요. 그래서 돌아가시면서 저를 왕 공자님에게 부탁을 하신 거예요. 공자님은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행동하시는 것이겠지만 만약 내키지 않으시다면 저 역시도 더는 남아 있지 않겠어요. 아니 난 스스로 죽어버리는 길을 택하겠어요!"
이미 유일민의 순진한 소녀의 티는 말끔히 벗어 던진 뒤였다. 무엇이 이토록 유일민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왕중양으로서도 난감할 뿐이었다. 임조영도 선뜻 대답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 유일민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공자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오. 내가 싫으신가요? 그렇다면 전 당장 공자님 앞에서 사라지겠어요."
"누가 너를 싫다고 했더냐?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렴."
"관두겠어요. 당신들은 모두 나를 부모도 없는 고아라고 업신여기고 있는 게 분명해요."
유일민이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임조영이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 그리고 난 너와 왕 공자님 사이에서 어떤 의미로도 나서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라."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왕중양 쪽이었다. 유일민의 어리광 때문에 괜히 서로의 사이만 곤란해진 것같아 임조영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데 낄낄대는 요란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힛힛힛, 한 사내를 두고 두 여인이 차마 못할 마음고생을 하고 있군 그려? 그렇바에야 둘 다 내게로 오는 것은 어떤가?"
모두 등줄기로 확 돋는 긴장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두 다리를 떠억 벌린 채 서서 징그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여협 임조영을 따라다니겠다고 한 무심이었다.
"난 아가씨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오. 오호, 여기 또 하나의 여인이 있는데 어쩌면 난 두 가지의 복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군!"
유일민이 얼른 왕중양의 팔에 매달리며 작게 움츠렸다. 임조영이 무심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렇다면 네 놈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말이더냐?"
무심이 넉살좋게 히죽거리며 임조영의 말을 묵살하려 했다.
"아가씨가 얼굴을 감춘다면 나같은 사람은 쉬지 않고 생겨날 것이외다. 왜 '홍안화수(紅顔禍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미인은 화근이 된다는 뜻인데 그대가 강호에 얼굴을 내보인다면 온갖 사내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얼마나 큰 화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헤헤, 하지만 내게 온다면 그같은 성화는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타탁탁탁! 요란하게 발소리를 내며 달려간 임조영이 검을 뽑아 한차례 찔렀다. 그러나 무심은 용케 피하며 계속 떠벌렸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을 아시오? 임금이 나라까지 망치게 한 뛰어난 미모를 일컫는 말인데 난 믿지를 않았소.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말의 참뜻을 알 것 같으니 그대야말로 내 학식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하하!"
그는 연신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으며 임조영의 검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임조영이 애를 먹는 것을 본 왕중양이 막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임조영이 만류했다.
"공자님은 나서지 마세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요절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러자 다시 무심이 기분 나쁜 웃음이 터뜨렸다.
"헤헤헤! 나를 어쩌겠다고? 그러기 전에 그대는 내 품에 안겨 별구경 달구경에 정신을 못 차릴텐데?"
"닥쳐라!"
임조영이 후다닥 무심에게로 덮쳐들며 검을 두어 번 그어 댔다.
"이크!"
그러나 흥분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검끝은 그닥 예리하지가 못했다. 매번 무심이 여유를 갖고 피할 수 있는 공격으로 끝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대는 지금 엉뚱한 곳에 힘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요. 그러지 말고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나와 대몽골 군영에 다서 즐거움을 나누는데 투자하는 게 어떠시요?"
그러면서 자신에게로 임조영의 검끝이 득달같이 날아오자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그의 걸음은 어지럽고 일정한 보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좁은 배 안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녔다. 왕중양의 눈에도 임조영의 검이 제 실력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야비하게 여인을 상대로 상스러운 말을 떠벌리는 무심 때문에 그녀는 지금 대단히 흥분해 있어 격한 동작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임조영과 무심의 어린아이 놀이와도 같은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데 소리 없이 낯선 배 한 척이 다가왔다. 곧 그 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은 누구인데 싸움을 하느냐!"
자세히 보니 몽골 대군들이었다. 이를 호가인한 무심이 더욱 기세를 높이며 임조영에게 협박을 했다.
"어때, 이제는 내 말을 듣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을 거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순순히 나를 따르시오!"
이윽고 몽골 대군이 타고 있는 배가 쿵 하고 닿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민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오들오들 떨어댔다.
"들으시오! 난 몽골 좌군장전(左軍帳前) 지휘부사(指揮副使) 적로온(赤老溫) 휘하의 사람이오!"
무심이 그 배를 향해 소리치는 게 보였다. 몽골군들은 자기 편 사람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 대꾸해 왔다.
"알겠소. 곧 그리로 갈테니 기다리시오!"
"그럴 것 없이 아예 물러섰다가 이 배를 부셔 버리시오!"
이렇게 목청을 돋운 무심이 매섭게 왕중양을 향해 눈을 치켜 떴다. 사태를 얼른 간파해낸 왕중양이 고함을 내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발재간이 남다른 무심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불과 몇 합을 겨뤄보지 않고서 불리함을 깨달은 그가 몸을 돌리며 다시 허연 이빨을 내보였다.
"아가씨, 부탁이니 어디를 가더라도 날 잊지 마시오! 내 꼭 다시 찾아가리다!"
그리곤 텀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누가 강으로 뛰어든 것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몽골 대군 쪽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쳐 댔다.
"활을 쏴라! 어서 활을 쏴!"
곧 몽골군의 배 위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무심에게로 쏟아졌다. 물 밖으로 머리를 막 내밀려던 무심이 이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다시 물 속으로 몸을 처넣었다. 겨우 이들의 배 쪽으로 헤엄쳐 간 무심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는 위에 대고 고함을 쳤다.
"이봐, 나라구! 적로온 휘하의 사람이라니까!"
무심을 알아본 몽골군들이 화살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화살 끝이 왕중양 일행에게로 돌려졌다. 곧 무수한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우리도 어서 강물로 뛰어들어요!"
임조영이 다급하게 외치자 왕중양이 유일민을 끌어안았다.
"난 걱정말고 어서 그대나 먼저 뛰어드시오. 난 이 애를 보살펴야겠소!"
핑! 핑!…….
수십 개도 넘을 듯한 화살이 임조영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화살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러나 화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들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몽골군은 임조영 뿐만 아니라 왕중양에게도 마구 화살을 쏘아댔다. 왕중양도 유일민을 한 팔로 안은 채 몸을 날리며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역부족임은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날아든 화살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중 하나가 유일민의 어깨에 박혔다.
"악!"
유일민이 풀썩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어깨에선 어느새 시뻘건 선혈이 쏟아졌다.
"한놈도 놓치지 말고 목을 따라!"
느닷없이 어디선가 이런 외침이 들려 왔다. 왕중양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언제 나타났는지 주위에는 여러 척의 배가 횃불을 밝혀 든 채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배들은 왕중양 일행이 탄 배와 같은 작은 규모였는데 사람들이 병장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배들이 차츰 몽골 대군이 탄 배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곧 몽골 대군 배를 향해 횃불들이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몽골군의 배는 순식간에 화염에 덮이면서 강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몽골군들이 하나둘씩 강으로 뛰어드는 소리와 함께 더욱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어 작은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몽골 대군 배로 줄지어 올랐다. 남아 있는 몽골군들도 곧 전멸을 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왕중양은 어디서 이처럼 용감무쌍한 사람들이 나타났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옆에서 유일민의 상처를 돌보던 임조영도 이들의 싸움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제15장 정체를 밝힌 임조영
강으로 뛰어든 몽골군 중 몇이 왕중양이 타고 있는 배로 기어올랐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을 힘을 다해 오른 곳이 엉뚱하게도 왕중양이 있는 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잠시 허둥댔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판사판이라는 듯 왕중양에게로 덤벼들었다.
"아악!"
눈깜짝할 사이에 몽골군 둘이 나가떨어졌다. 뒤에 남아 있던 서너 명이 주춤하며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몽골군이 온다! 어서 피하자!"
아마도 작은 배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 중 하나가 내는 소리인 것 같았다. 정말 강변 쪽에서 몽골군 기병들이 아우성을 치며 새카맣게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서 이곳을 떠라! 지체했다가는 큰 일을 당한다!"
다시 처음 소리를 질렀던 사내가 다그쳤다. 언뜻 보기에 젊은 사람 같았는데 그의 말에는 제법 위풍이 담겨져 있었고 권위도 적당히 들어차 있어 보였다.
불길에 휩싸인 채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몽골군의 배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곧 자기들 배로 올라간 후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공자님도 어서 이곳을 피하시오!"
젊은 사람이 왕중양을 향해서도 한마디 던졌다. 왕중양은 아직 남아 있은 몽골군과 대처하고 있던 참이었다. 젊은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들 중 하나가 양팔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쓰러졌던 놈 중 하나가 떨어뜨린 칼을 번개같이 집어든 왕중양이 보기 좋게 놈의 목을 날렸다.
유일민의 표정이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심하게 일그러졌다. 임조영은 그녀 옆에서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낸 뒤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는 등 바쁘게 손을 놀렸다.
"어서욧!"
젊은 사람이 다시 다그치듯 왕중양에게 뛰어내릴 것을 종용했다. 왕중양은 얼른 임조영의 시선을 찾았다. 그녀 역시 왕중양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교감이 교차되었는지 왕중양이 몸을 돌려 젊은 사람이 있는 배로 몸을 날렸다. 왕중양의 경공으로 배는 조금도 기우뚱거리지 않았다.
"남쪽 기슭으로 배를 몰아라!"
젊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많은 배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앞으로 물살을 헤쳐 나갔다. 구름떼로 몰려든 기병들은 차츰 멀어져 가는 배를 지켜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한참 후 숨을 돌린 젊은이가 자신의 이름은 구처기(丘處機)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는 문포(文浦)이며 이 강 연안의 호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또한 금나라를 반대하며, 그 금나라를 등에 업고 호기를 부리려는 몽골군들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지만 몽골군보다 금나라 군대가 더 큰 적이요. 우리 송나라 금수강산을 짓밟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이놈들 때문에 나라는 더욱 쇠약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왕중양이 말하자 구처기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중양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었다. 무공이나 인품이 모두 뛰어난 사람일 거라 믿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왕중양을 스승으로 삼고 싶었다.
기슭에 무사히 오른 왕중양은 가장 먼저 배가 있는 쪽을 향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협과 유일민의 생사가 염려되어 가슴 한쪽이 휑하니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몰려왔다. 왜 그들을 두고 혼자 이곳까지 왔는지 불현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보여 주었던 눈빛에 대해 왕중양은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았다. 왕중양은 그녀의 눈빛에서 읽어낸 뜻이 어쩌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자신이 유일민을 돌볼 테니 걱정 말고 먼저 몸을 피하라
는……. 정말 그런 의도였을까? 왕중양은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던 게 아닌가 싶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다.
도저히 혼자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왕중양은 곧 구처기 일행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두 여인을 찾기 위해 다시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배 위에 남겨졌던 임조영과 유일민은 큰 곤혹을 치르게 되었다. 몽골군 기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사태가 긴박해지자 임조영이 나즈막하게 유일민에게 속삭였다.
"안 되겠어. 어서 이곳을 피하고 보자."
그러나 유일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공자님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상처를 싸맨 천을 한 번 보더니 아찔한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리곤 살며시 눈을 떠 그만큼 찢겨져 있는 임조영의 옷자락에 눈길을 주었다.
"그 분은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임조영이 재촉을 하며 유일민을 부축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조영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길게 뽑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왕중양이었다. 그는 막 임조영이 있는 배로 오르려는 몽골군 서넛을 때려눕혔다. 그러나 몽골군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불붙은 배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왕중양이 사라진 것을 보고는 다시 나타난 모양이었다.
왕중양이 드디어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두 놈의 목이 공중으로 솟았다. 놈들이 공격이 주춤했다. 섣불리 왕중양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한 가지 묘안을 짜내었다. 둘씩 짝을 이루어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섯 명씩 나누어진 이들이 조금씩 왕중양을 향해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그중 왕중양의 왼쪽에 있던 둘이 칼을 꼰아쥐며 달려들었다.
"얏!"
왕중양의 검이 허공에서 울음을 토했다. 때를 같이하여 오른쪽과 등뒤에 있던 두 무리가 한꺼번에 덮쳤다. 다시 검이 허공을 날카롭게 그어 댔다. 이번엔 나머지 무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날아간 놈들의 목이 강속으로 쳐박히기도 전에 이들의 목 역시 날아갔다.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놈들의 목이 강으로 떨어졌다. 자세를 풀지 않고 검을 틀어쥐고 있는 왕중양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그의 검날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
다.
"배 위에 있는 자는 듣거라! 당장 이리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가까이 다가온 몽골군의 기병 중 누군가 소리쳤다.
왕중양은 급히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임조영에게 그랬듯이 눈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렸다. 다행히 임조영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곧 배를 저어 유일민과 그곳을 떠나갔다.
임조영과 유일만은 잠시 후 왕중양과 기병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벗어나게 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이곳 남쪽 기슭에 배를 대고는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몸을 숨기고 잠시 쉴 만한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임조영이 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지쳐 있는 유일민을 편히 눕혔다. 그리고 마른 삭정이와 잡풀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이들의 옷은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임조영이 먼저 옷을 벗어 불 가까이 대고는 말렸다. 그러자 유일민도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벗었다. 이들은 얇은 속옷만을 걸친 채 춥고 지친 몸을 녹이기 위해 불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런데 문득 푸른 연기를 띄우며 타오르는 불꽃을 주시하던 임조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녀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등뒤로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필시 사람의 발소리가 틀림없었다.
"누구얏!"
그녀가 몸을 옆으로 날리며 검을 잡았다.
"헤헤헤, 당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찾아왔지."
임조영의 입꼬리가 위로 사납게 올라갔다. 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질기고도 대책 없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임조영은 그를 보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무심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어댔다.
"히힛, 두 사람 꼴이 말이 아니군. 꼭 비맞은 수탉 같잖아. 아니 암탉이라고 해야 맞나? 하하하!"
헤죽헤죽 뭐가 좋은지 혼자 즐거워하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그는 두 여인의 굴곡진 몸매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익은 과일을 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듯 그는 탐욕스런 시선을 두 사람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임조영이 급히 옷으로 몸을 가리며 화를 냈다.
"당장 꺼지지 못하겠어!"
그러나 그는 임조영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여인들은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들 하지. 그런데 그대들은 그런 모습과 다를 게 없어. 온몸이 젖어 매끌매끌 윤기가 감도는 것 같아. 그런데 이 깊은 수림 속에서 그것을 보아줄 사내들이 없으니 이거 비단옷 입고 밤길에 나선 것 같겠구먼. 헤헤, 그럴 줄 알고 내가 이렇게 와 준 것이오."
약이 머리 끝까지 올랐으나 임조영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와 싸움을 벌이다가 혹시 몽골군이나 금군이 소리를 듣고 나타난다면 더욱 낭패스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애써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임조영이 의외로 열적은 태도를 보이자 무심은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는 날뛰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에는 불이 있고 또 얼음이 있소. 이것들이 잘 화합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여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그런데 사내가 여인의 몸에 있는 서른여섯 군데의 지점을 만져 주고 눌러 주고 해야지만 가능하다 하더군. 바로 내가 그대들을 완벽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왔다는 뜻이지. 헤헤헤!"
더는 참지 못하고 임조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심이 손사래를 치며 이죽거렸다.
"어허, 왜 이러시나. 난 평소 세가지를 싫어하는데 그 한 가지는 여인에게 손을 대는 것이오. 여인에게 손을 대면 그 일을 할 때나 가능한 것이지 아무 때나 대서는 안되지요. 둘째는 남이 내 말을 막고 나서는 것이지. 나머지 하나는 여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내요. 여인은 물과 같아서 한 번 쓰고 나면 흐려지곤 하지요. 그러나 한 번 흐려졌다고 버릴 수는 없는 법. 난 그래서 여인을 고인 물처럼 한 번 쓰고는 버리는 사내들을 경멸하는 것이지."
무심의 입에서는 음탕한 말들이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그는 또 입을 열어 두 사람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다.
"그대 둘은 모두 뛰어난 미인이오. 저 어린 아가씨는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같은 수녀(秀女)이고 당신은 절색이요. 이 무심 공자가 두 여인을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난 삼 년 동안 다른 여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소이다. 또한 그대들은 모두 사내들을 살살 녹일 수 있는 육감적인 몸을 갖고 있어 난 더없는 기대에 빠져 있소."
들을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임조영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자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내심 애가 탔다. 그러나 더 이상 주위를 의식하며 이 자가 내뱉는 음란한 말들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각오해라!"
임조영이 검을 단단히 쥐고는 몸을 날렸다. 단번에 상대를 절명시키는 초수 '파화향천(把火向天)'이었다. 그러나 무심이 그냥 당할 자가 아니었다. 재주넘기를 하며 한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정색을 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황금으로 된 부채였다.
"어허, 이거 참! 그대에게 어울리는 사내가 되겠다는데도 이 앙탈이니 어찌 쓰겠나? 나중에 침대 위에서라면 몰라도 벌써부터 강짜 타령이면 정말 곤란하다구."
그의 입은 여전히 술술 비온 뒤 물레방아 돌듯 쉬지 않고 돌아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임조영이 검을 힘껏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채로 탁탁 소리를 내가며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임조영이 검을 앞으로 내밀 때마다 두 번씩이나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의 검은 단 한 번의 힘으로 내리쳐도 늘 두 번의 단계를 거쳐 상대에게 이르렀던 것이다. 도중에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해 아주 짧은 순간 멈칫하는 검술이었다. 그런데도 무심은 우연인지 아닌
지 척척 막아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무림에 나가면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도 틀리나 보군. 사내도 아닌 여인과 몇 합도 겨뤄 보지 않고서 벌써 어깨가 뻐근한걸. 정말 그대의 힘은 알아주어야겠어. 난 오직 그대와 침대에 오르기만을 기다릴 테니 힘 좀 아껴 두라구!"
임조영은 대꾸하지 않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자를 오늘 죽이지 못하면 임조영이란 이름도 쓰지 않으리라.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탁탁탁! 허공에서 검과 부채가 맞부딪치며 금속성의 굉음을 토했다. 한차례 엇갈렸다가 서로 멀찌감치 물러선 두 사람의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입놀림은 쉬지 않았다.
"내 보기엔 그대는 왕중양인가 하는 작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인데 마음대로 될까?"
차라리 귀를 틀어막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가 입을 열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소름이 확 돋고 속이 메슥거렸다. 유일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가 계속 씨부렁거렸다.
"그런데 저 어린 아가씨도 왕중양을 흠모하는 것 같던데? 정 그대가 왕중양을 독차지하고 싶다면 내가 저 어린 계집을 죽여 드리리다. 어떻소?"
그가 말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 행동에 옮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새 유일민에게로 병아리 채는 매처럼 덮쳐 드는 그를 보며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임조영의 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긁어 몸을 던져 간발의 차로 그자보다 먼저 유일민 앞에 이르렀다.
무심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다시 간죽거렸다.
"사람이 살면서 한평생 아무 일에나 무심히 지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법이거늘 그대는 애써 어려움을 택하는군. 그러나 오늘은 저 어린 아가씨를 구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누구의 손에 단단히 걸리게 될 것이오."
임조영은 이제 그의 말이라면 오뉴월 담장 밑에서 거품을 무는 미친개의 앓는 소리로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귀에 거슬리오? 하지만 그대는 나를 따라가야 할 것이오. 왕중양은 저 계집에게 던져주고 나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립시다."
눈앞이 아찔하고 귀가 먹먹한 게 아무래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말소리가 온몸의 혈도와 심지어는 땀구멍까지 막아대는 통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단박에 검 끝으로 그의 염통에 바람구멍을 내놓고 싶었으나 다른 날과는 달리 초수도 제대로 통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지만 마음대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곳에서 하루 아니 일순간이라도 더 마주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었다.
멀리서 들려온 웬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임조영은 정녕 혼이 나간 여인처럼 머리를 풀고 강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 오고는 있었지만 내공이 센 사람의 것인지 그 소리가 드세게 전해졌다. 웅웅 하며 수림을 뒤흔드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무림의 고수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차츰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얼핏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옷부터 입으시오."
무심도 은근히 그 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여인들에게 턱짓을 했다. 처음으로 정상적인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때서야 두 여인들은 옷을 챙겨 입으며 주위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 사람이 이들 앞으로 모습을 보였다. 맨 앞에 앞장선 사람은 멀리서 보았을 땐 어린아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그는 다름아닌 모용세가의 공자 모용준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못쓸 인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의형제 중 하나인 모용준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조영은 이 뜻밖의 만남보다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더욱 침통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 역시도 왕중양처럼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헤헤, 난 또 큰 적수라도 오는가 했더니만 기껏 난쟁이를 두고 괜히 긴장했잖아!"
무심이 여전히 빈정거렸다.
두 사람은 일기충천 지청과 절금수 허불잉이었다. 모용준의 눈길은 금세 불처럼 뜨거워졌다. 처음 이곳에 다다라서 임조영과 유일민에게 시선을 던질 때만 해도 별다른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 무심과 얼굴을 맞대고 또 그같은 실없는 소리를 듣게 되자 심기가 영 뒤틀렸다.
"당신은 누구요?"
모용준이 약간 노기를 띤 채 물었다. 무심이 고개를 곧추 치켜들고는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부터 말해 보시오?"
모용준의 예사스럽지 않은 눈초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는 투로 모용준이 자신을 밝혔다.
"난 강남 모용세가의 공자 모용준이라 하오."
"강남의 세가? 강남의 세가라면 모두 흐리멍텅한 족속들인데 모용세가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그의 걸쭉하고도 천박하기 그지없는 입담이 터졌다.
"그래도 예전의 모용세가는 그나마 사람들의 형태는 온전하게 갖추고 세상으로 나왔는데……, 이젠 아예 난쟁이를 만들어내는 모양이로군! 하하하핫!"
말을 마친 무심이 박장대소를 하며 모용준을 모욕하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모용준은 무심의 거친 태도를 묵살하고는 임조영과 유일민 쪽을 향했다.
"두 분께서 몹시 놀라셨겠군요?"
임조영은 모용준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두 사내를 확인했다. 이 두 사람은 낯익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왜 같이 오지 않은 걸까? 주정과 목우를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임조영은 모용준 역시 코앞에 있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가 임조영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무심에게 따끔한 일침을 쏘았다.
"보아하니 네 놈은 금나라 졸개가 확실한 것 같은데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또한 이 여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죄값도 톡톡히 받게 될 것이다!"
"뭐? 날 죽이겠다고?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라구!"
무심이 자기 가슴을 푹푹 손바닥으로 쳐 가며 모용준의 약을 올렸다. 두어 걸음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연신 가슴을 쳐댈 때였다. 후두둑, 마치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비상을 하듯 공중으로 뛰어오른 모용준이 높이 달려 있던 나뭇가지를 차며 무심에게로 꽂혔다.
"야아 !"
모용준이 날쌘 동작으로 내리꽂히자 무심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모용준이 땅에 내리자 발로 찼던 나뭇가지가 우지직 부러지면서 그 옆으로 떨어졌다. 위에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꽤 굵은 가지였다. 무심이 흠칫 놀라며 얼른 접어 두었던 황금부채를 꺼내 펼쳤다.
"난쟁이치고는 제법이군!"
이번엔 무심이 모용준을 흉내내듯 똑같은 동작을 부리며 치솟았다가 내려왔다. 때를 기다려 모용준이 무심과 엇갈리며 공중으로 올랐다. 이들은 서로 몸을 날리며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도 하고 때론 탁!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손과 부채를 맞부딪치기도 했다. 아래로 내린 무심이 부채를 접더니 모용준에게로 어슬렁대며 접근해 왔다. 접은 부채를 한쪽 손바닥에 탁탁 치며 그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디를 쳐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작아서."
그가 부채를 들어 모용준의 어깨를 내리치려 했다. 이상한 점은 미리 예고를 하고 있었는데 어딘가 계략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예감이 적중했다. 그는 모용준의 오른쪽 어깨를 치는 척하다가 얼은 방향을 바꿔 앞가슴에 있는 대혈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부채 끝은 강한 물체에 막힌 듯 튀겨져 나왔다. 모용준이 어느새 손바닥으로 부채를 막아낸 것이다.
"욱!"
그러면서 무심의 심장을 향해 펼친 손바닥을 안쪽으로 오무려 주먹을 내질렀다. 투투투. 썩은 잡초와 삭정이들을 밟으며 무심이 뒤로 미끄러졌다. 그것이 오히려 모용준에게는 호기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싶은 모용준이 장을 뻗었다. 무서운 돌풍이 무심의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막 부채를 펼치려던 무심이 장에 밀려 아름드리 나무에 등을 박았다.
"으……."
그의 입에서 뻘건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공자님, 제가 저 놈의 나머지 살점과 피를 모두 거두겠습니다!"
그때 일기충천 지청이 나섰다.
"치사한 놈들!"
나무에 기댄 채 무심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중간쯤 오른 그는 다른 나무로 훌쩍 뛰더니 원숭이처럼 이 가지 저가지 옮겨 다녔다. 그러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임조영과 유일민에게로 다가온 모용준이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두 분께서 대단히 놀라셨겠습니다. 저희는 큰형님과 셋째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로 가는 길이온지 제가 사람을 붙여 그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임조영은 바로 이렇게 예의바르고 사내다운 기백이 흘러넘치는 것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이었음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강으로 가던 길이지요."
임조영의 대꾸에 모용준이 반색했다.
"그거 참 잘 되었군요. 제 집도 그곳에 있는데 누구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까?"
"강남 정강에 가서 무림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모용세가를 찾아볼까 하던 참이었소."
빙그레 미소짓는 임조영을 유심히 보던 모용준이 다시 허리까지 굽히며 반기는 자세를 보였다.
"대환영입니다. 내가 그곳 공자 모용준올시다. 우리 모용세가를 방문하려던 길이라니 이런 기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서둘러 지청과 허불잉을 불러 이들에게 인사를 올리게 했다. 모용준은 강호의 예법을 충실히 이행하려 했다. 임조영에 대해 함부로 이름과 정체를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얼굴을 가린 사람에게는 결례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용세가로 돌아온 모용준은 비녀들에게 분부했다.
"여기 두 분을 후원 자지 아씨에게로 모셔 가거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일러 후원 출입을 조심하라고 다짐해 두거라!"
유일민은 일단 비녀들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일단 갔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모용준은 비녀들에게 그녀의 상처를 돌보라고 당부했다.
한편 비녀들의 안내로 후원으로 간 임조영은 곧 자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윽고 둘만이 남게 되자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나를 못 알아 모겠나?"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벅이던 자지가 곧 그녀를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아니, 당신은……? 정말 제 눈이 틀림없다면?"
"그래."
"어디에 계셨었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자지는 기쁜 마음에 임조영의 목을 끌어안고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두 사람은 내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지는 모용준과 약왕문 무리들에게 당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임조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언니, 아니 조심을 해야하니까 그저 공자님이라고 부르겠어요. 모용준 공자님은 공자님이 여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의형제를 맺었지만 이젠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거예요. 그는 공자님에게 죄를 지었다며 늘 괴로워했어요. 그때마다 전 사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공자님이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임조영은 주정과 목우에게 당한 일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모용준도 경계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주정과 목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임조영이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한 가지 공자님이 그들과 심하게 다툰 일은 있었어요. 그들이 공자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 공자님이 눈물까지 보이면서 심하게 꾸짖었어요. 언뜻 듣기로는 좋은 사람을 만나 더없이 행복하던 중인데 두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떠나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말없이 무릎을 꿇고는 공자님에게 용서를 빌더군요. 그러나 공자님은 두번 다시 꼴도 보기 싫다 하셨고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어디론가 떠나갔어요."
그렇다면, 자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용준도 그때의 일을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괜한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임조영은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임조영이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자지가 그녀의 동정을 살폈다. 자지는 속으로 자신이 모용준과 가까워지는 것을 혹시 임조영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해서 슬쩍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혹시 제가 이곳에서 모용 공자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보기 싫으신가요?"
"글쎄, 그런 건 아니지만……, 나로서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한 가지, 난 그동안 공자님의 남장에 대해 한 번도 달리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모용 공자님은 마음 고생이 심해요. 공자님에게 늘 미안한 생각을 품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이제는……."
자지는 어서 빨리 임조영의 정체를 모용준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 모용준이 여인으로 돌아온 임조영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해도 어서 그의 무거운 심정을 덜어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임조영이 가벼운 한숨을 날렸다. 자지는 임조영이 승낙만 하면 당장 모용준에게로 달려갈 태세였다. 그녀는 이미 모용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처지였다. 낡은 절간에서 있었던 일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차츰 모용준에게 일생을 걸리라 내심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좋다. 하지만 나도 함께 가겠어. 그의 반응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자지가 활짝 핀 얼굴로 임조영의 팔을 잡았다. 이들은 곧 모용준의 서각으로 향했다.
이곳은 천일각(天一閣), 성서방(聖書房), 소림사의 장경각(藏經閣) 등 큰 서각을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 있는 서각이었다. 예로부터 '책은 모용 서각의 것이 가장 좋고, 사람은 유운장의 사람들이 가장 나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모용세가와 유운장은 양극으로 하나는 명망이 높고 다른 하나는 악명으로 지금껏 지내온 것도 사실이었다.
모용준의 서각에는 벽마다 빼꼭히 책들이 쌓여져 있어 안으로 들어서면 모두들 감탄을 연발했다. 모두 선본(善本)이나 진서(珍書)들 뿐이었다.
마침 서각 한쪽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모용준은 그 품이 어린애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어떤 책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기척을 내자 그때서야 책을 덮고 일어섰다.
"두 분도 책에 관심이 있나 보죠?"
"그게 아니라 이 분이 공자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대신 대답하고 나선 것은 자지였다.
"그래요? 비록 얼마 사귀지 않은 사이지만 부담 갖지 마시고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임조영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겨 냈다.
"오, 당신은 내가 본 미인 중 가장 으뜸이군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용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아…… 아니! 이럴수가……. 그대는 나와 의형제를 맺었던 내 동생?"
비로소 모용준도 그동안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가는 이내 꺼뜨려버리곤 했던 일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렇다면 셋째였던 임조영은 사내가 아닌 여인? 그것도 천하에서 둘도 없는 절색의 미인이 아닌가!
"둘째 형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임조영은 예전의 의형제로써 모용준을 대하려고 했다. 임조영의 눈에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 더욱 아름다운 미인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모용준은 할말을 잃은 채 돌아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의 셋째 동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용준이 홀짝 큰 책상 위로 뛰어오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와, 그토록 기다리던 셋째 동생이 왔다! 우리 셋째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그는 미친 듯이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양팔을 휘저었다. 모용준이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며 임조영의 손을 부여잡았다.
"난 동생에게 사죄를 해야하는 몸이야. 난 동생에게 잘못을 저질렀어."
모용준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약왕문이 모두 죽어 자빠진다 해도 용서할 수 없어. 난 꼭 원수를 갚고 말겠어. 그리고 큰형님을 찾기 전에는 절대 눈을 감을 수가 없다고!"
임조영의 눈에도 서서히 물기가 배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의형제들의 깊은 우애에 탐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용준의 행동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지의 가슴에도 큰 감동의 소용돌이가 쳤다. 그녀는 평소 난쟁이로 손가락질을 받아 왔던 모용준의 고독감에 대해 헤아렸다. 그 때문인지 그는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자지는 그에게 달려가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공자님,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속뜻이 있을 것 같아 차마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어요."
자지가 모용준을 향해 울먹였다. 모용준이 다가와 자지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자지, 너무 상심하지 마오. 그리고 난 앞으로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오. 우린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는 거요."
자지가 감격해서 더욱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우려 했던 모용준의 마음도 이젠 자신의 바람대로 되었기에 자지는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난 지금까지 둘째 형님의 소행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주정과 목우를 시켜 저를 해치게 한 사람이 형님이라 믿었었죠. 하지만 이젠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형님에게로 손을 썼던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셋째 동생이 그 굴 안에 들어간 사실조차 몰랐었지. 후에야 그들에게 큰형님과 동생을 해쳤다는 자백을 들었던 거네."
침통한 기색에 잠긴 모용준이 한숨을 토했다.
"난 큰형님과 셋째 동생을 만난 것을 천행으로 알고 있다네. 그러나 내가 형제들을 돌보지 못해 미안할 뿐이야. 처음부터 주정과 목우의 낌새를 알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형님 탓은 아니예요."
"아니오. 난 그들과 형제로 지냈다는 이유 때문에 차마 죽이기까지는 못하였으니 이 또한 죄를 지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말만 했을 뿐……."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그런 놈들을 가까이 했기에 큰형님이 해를 당했고 또 셋째마저 죽을 뻔했었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큰형님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모용준이 눈가를 어루만지며 근심 어린 투로 물었다.
임조영은 얼른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혼자 남겨진 왕중양이 떠올라 그녀의 눈빛은 금방 흐려졌다.
"저와 함께 온 처녀애 있죠? 유일민이라고 하는데 큰형님을 매우 따르는 아이랍니다."
"그래? 강호에 나간 점잖은 형님이 벌써 여인을 꿰찼다는 건가?"
모용준이 약간 웃음기 있는 투로 떠벌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임조영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보고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는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거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군."
임조영의 반응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모용준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눈치였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임조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겸연쩍게 얼버무렸다. 그러나 모용준은 임조영이 왕중양에게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읽어버린 뒤였다.
밤이 깊었지만 자지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용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피곤함도 소용이 닿지를 못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용준의 서각으로 갔다. 그런데 모용준은 그곳에 없었다. 무공을 연마하는 방에도 가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지는 더욱 애가 타 안절부절못하였다. 모용준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후로는 한시라도 그를 떠올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져 어서 모용준의 품에 안
겨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자지를 흔들어 놓았다.
자지는 모용준의 침실로 가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자지는 옷을 벗어 한곳에 가지런히 놓아둔 다음 구리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벗은 몸에 그녀는 스스로 감탄했다.
"공자님, 나 같은 여인을 사랑하는 당신은 정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를 향해 이처럼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내밀어 보기도 했다. 다시 가슴으로부터 옮겨 온 열기가 목덜미를 거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몸이 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다니. 조금 음탕스런 일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았다.
모용준이 덮고 자는 이불 속으로 몸을 감춘 그녀는 낮게 한숨을 쉬며 애타는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갑자기 침대가 흔들리면서 우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곤 아득한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침대가 하염없이 추락하는 게 아닌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바닥에 닿았지만 큰 충격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자지가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어딘가로 이어진 복도처럼 생긴 굴 같았다. 사방 벽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모용세가의 재물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처럼 벽에까지 장식할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 지하통로는 어디로 연결된 것일까?'
자지는 자신의 차림을 확인하고는 황망히 주위를 살폈다. 혹시 사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조금 전 덮고 있던 이불이 생각나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그런데 침대가 다시 올라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지하 통로를 따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녀는 곧 눈앞에 나타난 면류관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제왕들이 머리에 쓰는 면류관이 틀림없었다. 구슬이 모두 마흔아홉 개가 달려 있는데 야명주를 비롯해 화주와 옥주 등 진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면류관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머리에 쓰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하 통로는 가면 갈수록 더더욱 휘황찬란한 것들로 장식돼 있어 눈이 부셨다. 이렇듯 호화로운 궁전은 생전 처음 대하는 자지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값비싼 옷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는 또 한 번 놀랬다. 자지는 그 앞으로 달려가 아무 옷이나 주워 몸을 가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옷은 자지의 몸에 딱 맞았다. 누군가 미리 몸 치수를 재 보지 않고서는 이처럼 들어맞기가 힘들 것 같았다. 옷을 입은 자지는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천천히 발을 옮겨 놓았다.
얼마나 더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을까. 그녀는 웅웅 하며 벽을 울리는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야릇하게 변해 갔다. 그것은 남녀가 서로 정욕을 불사르며 내는 숨가쁜 소리들이었다.
드디어 자지는 큰 침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자지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릴 듯 멈춰 섰다. 침대 위에 올려진 의자에 알몸으로 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고 황금비단으로 깔려진 침대 위에도 역시 나체의 여인 몇이 요상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녀들은 의자 위에 있는 사내의 몸에 엎드려 샅샅이 입술과 혀로 핥고 빨고 하는 중이었다. 이자 위에 있는 사내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묻혀 심하게 몸을 비틀어 댔다.
자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모용준의 해괴한 자태를 지켜 보고 있기만 했다.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자, 이젠 됐다. 그만 일어들나거라."
모용준의 음성이 들려 왔는데 전혀 낯선 소리였다. 자신 앞에서 사랑하겠노라 다짐을 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음색이 아닐 수 없었다. 색에 푹 빠진 방탕아의 목소리라고 해야 옳았다. 여인들이 축 늘어진 동작으로 한둘씩 몸을 일으켰다.
이들이 물러나 한쪽에 나란히 서자 이번엔 다른 한 여인이 모용준을 독차지하고 옆에 기대었다. 모용준은 위엄 있게 행동하려 했으나 그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 역시 알몸이었기에 그런 상태로 여인들에게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것이 여간 괴상망측한 게 아니었다.
"자, 모두들 저기를 보아라! 짐이 선택한 황비낭낭이 납시셨다!"
뜻밖의 일이었다. 갑자기 몸을 세우고 모용준이 가리킨 곳은 자지가 숨을 죽이고 있는 이쪽이었다. 그렇다면 모용준은 이미 그녀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벌거벗은 여인들의 시선이 동시에 자지에게로 달려갔다.
"저 여인이 바로 내가 선택한 서궁낭낭(西宮娘娘)이렷다!"
모용준이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모용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황급히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께서 황비낭낭을 맞는 이 경사를 축복하나이다! 황상 만세, 만만세!"
여인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하자 모용준이 근엄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원래 황비낭낭의 몸은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이런 자리에 벗은 몸으로 나타날 수 없기에 내가 저렇게 옷을 하사하였노라!"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자지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괴스런 일들이 부디 꿈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코 꿈이 아닌 생시였고 또한 모용준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는 현실이었다.
"황상이라니요? 그리고 이게 다 무슨 해괴스런 짓입니까요?"
자지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앞으로 나서며 냉소했다.
"뭣이! 안되겠다. 저것의 주둥이를 호되게 쳐라!"
모용준이 명령하자 여인들이 우루루 자지에게로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비틀었다. 그리곤 사정없이 자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년이 감히 황제께 언성을 높였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그 죄값을 받아야할 줄 아옵니다!"
한 여인이 선창을 하자 나머지들도 한결같이 소리 높여 자지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벽에 막혀 그 소리가 웅웅거리며 거대한 괴물의 울부짖음처럼 들려 왔다.
"하지만 아직 모르고 한 일이니 내 이번만은 용서를 할 것이다!"
모용준은 황제의 위신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로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거벗은 난쟁이의 몸으로 역시 알몸인 여인들 앞에서 호령하는 이 모습이 과연 얼마나 위엄이 있겠는가.
"황제라면 대체 어느 나라 황제를 말하는 건가요?"
자지는 냉정하게 처신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를 모용 공자로서만 바라볼 뿐이란 사실을 이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했다.
"대연국(大燕國)의 황제이로라!"
연나라라고 하면, 그것도 모용씨의 연나라를 지칭하는 말일 텐데 그렇다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나라에 불과했다. 자지는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공자님은 지금 꿈을 꾸고 계시는 건가요? 아니면 옛이야기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허, 짐은 대연국의 황제이고 내 너를 서궁낭랑으로 봉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용준의 흐리멍텅하게 풀려진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자지의 심기는 흙탕물로 얼룩져 갔다. 모용준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한 자지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치였고 또 배신감이었다. 그녀는 모용준의 어리석음과 해괴한 짓거리에 조소를 보내듯 한마디 더 내뱉었다.
"그런데 어찌 낭랑에 봉하시려면 동궁낭랑이 되어야지 서궁입니까요? 그럼 동궁에는 이미 낭랑이 책정돼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렇게 뇌까린 자지가 옆에 늘어서 있는 여인들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여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누구 하나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왜 말이 없지? 너냐? 아니면 너로구나?"
자지가 실성을 한 여인처럼 뛰어다니며 여인들 면상을 손가락으로 찔러대며 열을 올렸다.
"동궁을 알려주세요. 그래야 제 뜻을 밝힐 테니까요."
자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태도로 일관하자 모용준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정 네가 알고 싶다면 말하지. 짐은 동궁에 임조영을 삼으려 한다!"
"오호호호!"
자지가 다시 미친듯 웃어댔다. 너무 어이가 없고 한편 모용준의 가슴에 담긴 또 하나의 마음을 엿본 탓에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가슴은 예리한 검날에 찢기듯 갈기갈기 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지는 한동안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서 있었다.



제16장 자지와 모용준의 신방
'누구지?'
임조영은 지붕 위에서 누군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신경을 그쪽으로 모았다. 모용준이라면 강남에서 손꼽히는 인물이고 그 집안 또한 함부로 넘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이처럼 야밤에 집 안으로 뛰어들어 그것도 지붕 위를 넘나든단 말인가? 임조영은 불길한 예감에 잔뜩 긴장을 했다. 필시 보통의 담력을 가진 자가 아닐 게 분명하리라.
검을 소리 없이 뽑아든 임조영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훌쩍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언뜻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하나가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가 나는 듯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 뒤를 여럿이서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 섰거라!"
임조영도 그림자를 향해 외치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앞선 자의 걸음이 워낙 빨라 역부족이었다. 그림자를 앞서 쫓던 자들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이들은 지청과 허불잉이었다.
"누구였습니까?"
임조영이 묻자 이들이 고개 숙이며 설명했다. 이들은 모용준과 의형제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그녀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예, 괴한이 침입했는데 우리 형제들이 나오니 곧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뒤에 큰 봇짐 같은 것을 지고 있었습죠. 무엇을 훔쳐 달아났는지는 당장 확인 해봐야 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지붕 위에서 내려오자 늦었지만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경계를 하느라 분주했다.
"공자님은 서각에 계십니다."
그중 한 사내가 알려 주자 임조영이 일단 이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잠깐!"
하고 임조영을 불러 세운 것은 지청이었다.
"사실 요즘 공자님의 심기가 좋지 않으십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을 아시면 또 화를 내시어 우리들이 곤혹을 치르게 됩니다요. 그러니 우리끼리 가서 말씀드리면 좀……."
함께 가달라는 뜻이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임조영은 이들을 따라 서각으로 향했다.
모용준이 임조영을 보자 자리를 권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큰일이 났소이다. 어느 놈인지 자지를 납치해간 모양이오."
'그렇다면 그 그림자가 등에 짊어지고 갔다는 것이?'
임조영은 그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조금 전 지청이 말한 것과 연결시켜 생각했다. 지청이 도둑을 쫓은 사실을 모두 털어놓자 모용준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임조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때 우리가 회모루에서 기생들이 사라진 일이 있었던 걸 기억하시죠? 거기에는 자지 처녀도 끼여 있었지요. 결국 유운장 놈들에게 납치된 자지는 반화대회까지 끌려 나와 그 수모를 당하지를 않았었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도 그 유운장 놈들의 짓이……."
임조영의 말에 모용준이 버럭 화를 냈다.
"아무튼 유운장이건 어느 놈이건 우리 강남 모용세가를 업신여기려는 놈들은 가차없이 쳐죽이고 말 것이다. 지청은 내 말을 전달하게. 모두들 자지를 찾는 일에 추호도 게으름이 없도록 말일세. 알겠는가?"
모용준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자지를 애태워하자 모두들 숙연해졌다.
지청과 허불잉이 물러가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용준은 돌로 깎아만든 조각상 같았다.
그때 밖에서부터 비녀 하나가 총총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게 생겼는데 연와탕(燕窩湯)을 들고 와 모용준에게 바쳤다.
"공자님, 무엇 좀 드셔야지요. 이렇게 하루 종일 속을 비워 두시면 어쩌십니까요? 앞으로도 할일이 많으신 분이 이렇듯 자신을 학대하신다면 더 큰일을 부르시게 됩니다."
모용준이 연와탕을 받아 놓기만 한 채 임조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난번 수재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은 10만 냥을 하남(河南)에서 약탈당한 것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셋째, 그러나저러나 수재금을 어디서 충당한단 말인가?"
일의 다급함으로 따지자면 자지의 납치가 우선이 되겠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임조영도 일단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부터 거론해 볼 생각이었다.
"다른 곳에서 급한 대로 빌리는 수밖에는 없겠는데요."
"그렇지?"
모용준은 비로소 결심을 굳혔다는 의도로 자금영전(紫金令箭)을 사람들에게 내주며 분부했다.
"하남으로 당장 가서 수재를 당한 사람들을 도울 자금이니 한 10만 냥만 꾸어 달라고 하거라. 방법은 너희들이 한두 번 하는 일이 아니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서 다녀와 그 결과를 알리거라!"
하인 둘이 물러 나와 빠른 말을 타고는 하남으로 달려갔다.
이때서야 모용준은 한시름 덜었는지 눈빛이 조금 전보다는 평온해졌다. 임조영은 그가 사라진 자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먼저 그 문제를 꺼내지는 못했다. 모용준 자신이 나름대로 마련해 둔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다.
한편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유일민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그녀는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비녀들이 유일민의 상처를 봐준 뒤 한 번 만나 보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라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먼저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난 지금 유일민이란 처녀애를 찾아가 볼 생각인데 어떤가? 그녀에게 이곳 일을 좀 맡길 요량도 있는데 함께 가 주지 않겠는가?"
임조영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유일민에게 적당한 일감을 준다는 말에 더없이 반가웠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시름도 한결 덜어질 것 같았다.
"누구세요?"
모용준이 문을 두드리자 곧 안에서 유일민이 나왔다. 그녀는 모용준을 반기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그를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라 임조영은 여겼다. 그녀는 혼자 사반(沙盤) 위에 나뭇가지를 놓고 무언가를 하던 참이었다.
"그것이 뭐요?"
모용준이 묻자 그녀가 살짝 귓볼을 붉히며 설명했다.
"왕중양 공자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점을 쳐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왕중양 공자님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면서 모두들 다른 생각들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차츰 격해지던 유일민은 모용준과 임조영을 책망하는 투로 말을 끝냈다.
"아직 모르고 있소."
모용준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세가도 좋지만 전 왕중양 공자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저는 그분을 찾아갈 생각이예요. 그분과 같이 강호를 떠돌면서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어린 처녀였지만 뜨거운 정을 품고 있는 유일민에 대해 모용준은 감격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여인이 있을까?
"정말 그분이 왜 혼자 떨어지셨는지 모르세요?"
유일민이 다시 모용준을 졸라댔다. 그는 난처한 입장에 빠져 허우적댔다.
"큰형님과 여기 이 셋째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어 서로 헤어진 모양이요."
그가 견디다 못해 한마디 흘리자 유일민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서로 다투기라도 했나요? 알겠어요. 서로 의형제라고는 하지만 왕중양 공자님이 저기 임조영이란 여인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던 모양이죠?"
모용준이 대꾸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재잘거렸다.
"아니면 반대로 당신이 공자님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던 것은 아닌가요?"
임조영을 응시하고 있는 유일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공자님이 저를 안고 있는 것을 보자 그렇게 안색이 파스름하게 변해 버렸던 거였군요?"
"큰형님이 아가씨를 안고 있었다니 금시초문인데?"
모용준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굴리며 중간에 끼여들었다. 유일민은 망설일 것 없다는 투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그에게 털어놓았다.
유일민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모용준이 뒷짐을 진 채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같은 자리를 배회하던 그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나와 큰형님 그리고 여기에 있는 셋째 임조영과 의형제를 맺자고 한 것은 나였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호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지. 또한 처음부터 셋째가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사실이었소. 그래서 그랬는지 셋째는 순순히 내 뜻을 따르겠다고 하지는 않았지. 어쩌면 셋째의 가슴속에는 큰형님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또한 큰형님의 마음속엔 아가씨가 들어차기 시작했는지도 몰라."
그말에 유일민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자신이 바라고 있는 염원에 대해 모용준이 대신 확인해 주자 그녀는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모용준은 자신의 추측만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이미 기정 사실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하죠?"
유일민이 한껏 부푼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물어 오자 모용준은 더욱 난감해졌다.
"글쎄, 그거야 두 사람간의 연분이 얼마나 절실하고 깊은가에 달려 있지. 하지만 내 보기엔 큰형님은 점잖고 또 아가씨는 아직 때묻지 않은 처녀이니 더 이상 좋은 인연은 없으리라 보는데……."
말끝을 슬쩍 흐린 모용준은 임조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임조영을 한쪽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유일만을 부추겼다. 임조영은 되도록 감정을 숨기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난 공자님을 찾아 떠나겠어요. 난 그분과 함께 있어야만 해요."
거의 목놓아 울부짖을 듯한 소리로 유일민이 격하게 손짓을 해댔다.
"아가씨의 소원이 정 그렇다는데 누가 말리겠소? 행여 큰형님을 만나거든 내게 기별이나 해 주시오. 나 역시 그분의 일이 근심되어 밤잠도 설치고 있는 몸이니까."
모용준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임조영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유일민이 당장이라도 떠나겠다고 나서자 모용준이 너그럽게 양팔을 벌려 다독이며 만류했다.
"그것만은 안 되오. 아가씨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루 더 쉬었다가 내일 길을 떠난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유일민의 고집은 대단했다. 모용준은 그럼 정한 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혼자 강호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모용준이 애써 사람 몇을 불러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용준 앞으로 불려온 가신들에게 모용준이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자네들에게 극히 중요한 소임을 맡기려고 한다. 이 아가씨를 모시고 나의 큰형님을 찾는 일에 몸을 아끼지 말거라. 이 아가씨를 나를 대하듯 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렷다!"
가신들이 허리를 굽혀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이들은 곧 노자를 받아들고는 서둘러 유일민과 함께 밤길을 떠났다.
자기 방에 돌아온 모용준이 난데없이 훌쩍이며 작은 몸을 더욱 작게 움츠렸다.
뒤에 서 있던 임조영은 훌쩍이며 우는 모용준의 모습이 애처러워 그를 위로했다. 이제서야 납치된 자지 처녀의 일이 걱정이 되어 그러는가 싶어서였다.
"아무래도 나와 자지는 인연이 아닌가 싶네. 약왕문에서 그같은 실수를 범하고는 괴로워하다가 다시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얻게 되었는데 혼례를 앞두고 이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어린아이같은 체구의 그였지만 엄연한 사내가 아니던가. 그것도 모용세가의 공자인 그가 눈물을 보이자 임조영의 마음은 한층 무거워졌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꼭 자지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장강에 빠진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노릇일 텐데……."
이렇게 한쪽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다른 한쪽은 위로의 말을 하다보니 밤이 훨씬 깊어졌다.
"그대와 나 그리고 큰형님은 수족 같은 사이일세. 그런데 큰형님에 대해서는 행방조차 알 수 없으니 속이 타는군. 지금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의 말에 문득 임조영은 가슴으로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왕중양.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몽골 대군 기병들과의 싸움에서 혹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사실 그동안 그의 안부에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었던가? 임종영은 자기 생각에 빠지자 더 이상 모용준의 탄식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가슴을 들쑤셔 놓고 있는 일 ㄸ문에 그녀는 우울해졌다. 왕중양을 찾겠다고 떠난 유일민 때문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왕중양과 어떤 모종의 약속이 오고 갔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처녀의 몸으로 왕중양을 찾겠다고 무작
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유일민을 품속에 안은 채 앉아 있던 왕중양의 모습도 임조영의 심사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만약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약조가 오고 갔다면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으리라.
임조영은 어느새 여기까지 상념을 끌고 온 것에 흡 하고 놀랐다.
"그대는 이곳을 떠날 마음은 없을 테지?"
아직 스스로 파놓은 상념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그녀를 상념의 늪에서 빼내기라도 하듯 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해 눈으로 되물었다.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냐고 물었네."
"예, 저도 어서 드넓은 강호로 나가 마음껏 활개를 치고 싶은 마음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용준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미끄러지더니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뭣이라고? 이젠 큰형님도 싫고 또 나 역시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모용준은 거의 절규하다시피 했다. 그런 모용준이 갑자기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예요. 전 다만 답답하니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떠난다 해도 또 만날 기약을 늘 두는 것이기에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는 마세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일민이 큰형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무 상심 말게. 강호에서 누가 옥녀검(玉女劍) 임조영의 진가를 외면하겠어? 그정도의 미모라면 사내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모용준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임조영은 여인의 육감으로 그 시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세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임조영이 자기 처소로 돌아간 후 모용준은 혼자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미처 끝내지를 못한 것처럼 공연히 애만 태우는 답답함이 이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침대에 달려있는 걸쇠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자 소리 없이 침대가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에 이른 그는 지하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걸으면서 그는 석벽에 새겨져 있는 초상들을 유심히 살폈다. 세월의 더께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은 연나라의 황제이거나 후에 평민으로 있었던 선조들이었다. 초상들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다시 연나라 역대 황제들이 공성약지(攻城略地)한 무훈들이 새겨져 있었다.
지하통로가 끝나는 곳까지 들어간 모용준은 그곳에서 얇은 깁천만을 걸친 궁녀 두 명과 만나게 되었다. 그녀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을 듯 조아리고는 입을 모았다.
"폐하, 옷을 갈아입으셔야지요?"
그녀들이 곧 모용준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는 새옷으로 갈아입혔다. 솟옷부터 정성껏 갈아입히는 그녀들의 부드러운 손끝이 모용준의 살갗 위로 스쳤다. 물결을 간지럽히는 미풍처럼, 용의까지 입고 난 모용준은 다시 황제로 탈바꿈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위풍당당하게 대청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황제폐하께서 만조(晩朝)를 납신다!"
누군가 이렇게 아뢰자 한동안 사르락사르락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궁녀들이 한곳에 모여 몸단장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였다.
이윽고 북소리가 둥둥둥 세 번 울리자 궁녀들이 열을 지어 안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모용준에게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 삼궤구고(三 九叩)를 올렸다. 이는 한 번에 세 번씩 절을 하는 것을 뜻한다. 궁녀들도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공구경(三公九卿)이 모두 한곳에 있는 듯했다.
삼궤구고가 끝나자 직전관(直殿官)이 목을 길게 뽑았다.
"일이 있으면 나와 아뢰고 일이 없으면 돌아들 가시오!"
그러자 태위(太尉)차림의 한 궁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 강남의 그 구재금 은자를 다시 찾아왔나이다. 이 은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폐하께서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모용준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치뤄야하는 구재금이다 어쩌구다 하는 통에 짐도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 이번엔 나도 모르겠다. 어디 짐의 백성들이 굶어 죽겠어? 송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겠지."
모용준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궁녀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강남 무림대회는 언제 열리는지 알아보았느냐?"
모용준이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묻자 다시 한 궁녀가 앞으로 나왔다.
"듣기로는 스무날 뒤에 영주(永州)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대책이 있으신지요?"
"우리 모용세가는 이렇게 강호에 숨어 지내면서 기회를 노린 지 오래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궁중에 있는 인마를 모두 동원해서라도 이 기회를 노려야겠다. 그리하여 천하 영웅들을 우리에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송나라 강산도 어렵지 않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궁녀들이 지당한 말이라며 다시 한 번 머리 조아렸다. 더욱 의기가 충천해진 모용준이 말을 이어 갔다.
"인마의 준비도 철저히 하겠거니와 진주 보석과 은자 금괴도 충분히 가져 가야겠다. 그래서 인심을 얻어 강호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이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여라!"
"예 잇!"
궁녀들의 안색은 더없이 밝아졌다. 지하 궁전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들이라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니 날개라도 단 기분들이었다.
"낭랑은 지금 어떠한가?"
갑자기 소리르 죽인 모용준이 나즈막이 물었다. 그러자 구경(九卿) 중에 태상경(太常卿) 차림을 하고 있던 궁녀가 나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께 이뢰옵니다. 서궁낭랑께서는 여전히 식음을 전페하고 있는 줄 아옵니다. 다행히 난옥(暖玉)이 하나 있어 낭랑께서 주무실 때 몰래 품에 넣어 두곤 하여 혈기를 보존하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하나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낭랑의 생명이 위태로울 줄……."
한동안 말이 없던 모용준이 몸을 세웠다.
"어디 짐이 한 번 가보겠노라!"
자지가 누워있는 침대는 매우 큰 용상이었다. 한 번에 대여섯 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이 용상 위에는 금수황단(錦銹黃緞)의 비단이불이 깔려있으며 베개 역시도 소상원앙침(瀟湘鴛鴦枕)으로 불리우는 귀한 것이었다. 그 속에 초췌해진 몰골로 자지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모용준을 바라보는 자지의 눈에는 노여움과 설움이 뒤섞여 있었다.
"병세가 좀 어떻소?"
모용준이 태연한 기색으로 물어 오자 자지가 코웃음을 쳤다. 모용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뭐라도 들어야지, 계속 고집을 피우면 몸만 상해요. 자, 이거라도 좀 드시오 황비."
궁녀에게서 연와죽을 받아든 모용준이 직접 자지에게 떠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자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난 황비가 나이예요."
"황비가 아니라니? 여기에 대연의 황제가 있는데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이요?"
"공자님, 제가 보기에 공자님은 몹쓸 병에 걸리신 게 틀림없어요. 연아라가 없어진 지 몇백년도 더 넘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시나요? 당신은 모용세가의 공자님일 뿐이예요."
"여기가 어딘지 아직 모르겠소? 자, 그렇다면 이것을 한 번 보시오."
하며 모용준이 탁자 위에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던 벽옥(璧玉)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런 벽옥은 황궁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또 이거……."
그러면서 내보인 것은 서궁낭랑 신표인 옥새(玉璽)였다.
"기건 황비의 옥새요. 서궁낭랑 옥새란 말이오. 보오, 수궁고적(守宮固積)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지 않소? 이것을 지녀야만 황비가 되는 것이오. 이것을 지니면 황궁에서 일호백응(一呼百應)은 문제가 없기도 하오. 비록 동궁낭랑으로 임조영을 책봉한다 해도 경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낭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나 자지의 귀에는 모용준의 말이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무덤과도 같은 이런 지하궁전을 만들어 놓고 황제로 군림하려는 그가 한심스러워 보였다. 어느 누가 그를 황제로 인정한단 말인가. 곧 허물어질 사상누각에 불과한 짓이 분명한데…….
"공자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뭔가?"
갑자기 달라진 태도를 보이자 모용준이 반색하며 자지의 손을 잡았다.
"저 궁녀들을 모두 돌려보내세요. 저들도 귀한 집 여인들일 텐데 어서 자기들의 인생을 찾게 보내 주세요."
"모르는 말씀. 내가 저 여인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되겠소? 이 궁의 비밀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는 말이요."
모용준이 궁녀를 향해 서릿발 어린 눈빛을 띠자 모두들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공자님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공자님의 뜻을 따르지 않겠어요."
자지는 계속 모용준의 어리석음을 돌려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도 모용준의 아집은 더해만 갔다.
"오호, 그대는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섭섭한 모양인데 당장이라도 치릅시다."
모용준이 정말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신방을 치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모용준이 자지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당부했다.
"난 잠깐 나갔다 오겠소. 내가 돌아오거들랑 우리 화촉을 밝히도록 합시다."
자지는 하도 어이가 없어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용준이 나가자 알몸의 궁녀 여섯이 큰 목욕통을 들고는 자지 앞으로 왔다.
"황비낭랑, 목욕을 새롭게 하시고 신방에 드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녀들이 자지를 안아들고는 목욕통 속에 앉혔다.
"황비낭랑의 몸매는 황제께서 아주 좋아하시게 생겼네요."
한 궁녀가 이렇게 지껄이자 모두들 킥킥 웃어댔다. 이제껏 이들이 주는 음식은 모두 마다해 온 자지라 손을 들어 뿌리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궁녀들의 손길이 온몸을 어루만지고 밀어 주고 하면서 이상하게도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게 아닌가. 아마도 자지의 몸에 있는 혈도들을 눌러 기를 살려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목욕이 끝나자 여섯 명의 궁녀들은 자지를 다시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속옷부터 시작하여 모두 열여섯 가지나 되는 의복을 차례대로 입혀 주었다. 마치 잠자리의 날개를 단 것처럼 그 옷들은 매우 가벼웠고 몸에 잘 맞았다.
"어머, 참 이쁘다."
저희들끼리 소근대던 궁녀들은 곧 대형 구리거울을 대령했다. 궁녀들이 거울을 들어 전신이 보일 수 있도록 자지를 비추었다. 거울 속에는 봉황을 쌍으로 새긴 황후의 의복에 싸인 한 여인이 보였다. 자지 자신도 그 모습에 놀랬다.
이윽고 기악이 울렸다. 손에 생황(笙篁) 퉁소 젓대 등 악기들을 든 궁녀 여섯이 들어오더니 경쾌한 곡조를 연주했다.
"황비낭랑, 성지를 받으시오!"
궁녀 하나가 이렇게 선창하자 모두 자지를 꿇어앉게 한 후 황제의 성지를 받게 준비했다.
"납길(納吉)이오!"
다시 그 궁녀가 선창을 하자 자지를 부축하고 있던 다른 궁녀들이 대신 응수했다.
"납채(納采) 하시오!"
곧 한 궁녀가 자지 앞으로 다가와 기러기 한 마리를 내려놓았다.
"이름을 말하시오!"
다른 궁녀가 재차 물었다.
"황비낭랑의 이름이 자지이시죠?"
그러나 자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같은 의식은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이른바 육례(六禮)가 끝난 셈이었다. 악대와 다른 궁녀들은 탁자에 붉은 길첩(吉帖)을 놓고 또한 바닥에는 기러기 한 마리를 놓고는 모두 물러갔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한 무리의 궁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들은 자지의 이마에 난 솜털을 다듬고 머리를 얹어 주며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자지는 이들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이젠 황비낭랑께서 대청으로 나가시어 폐하와 완혼을 하여 주십시오."
누군가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궁녀 몇이 자지를 옹위하여 동방(洞房)을 나와 대청으로 갔다. 이곳은 모용준이 평소 이 궁녀들과 소위 국사를 의논한다는 장소였다.
용의에 앉아 있던 모용준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원래 모두 강호의 악인들이었는데 오늘 우리의 혼례의 중매인으로 삼기 위해 청해온 이들이오."
자지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마저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꼴들이었다. 모용준이 밖에서 강제로 잡아다 세워둔 사람이 분명했다.
"옥필쌍준(玉筆쌍준) 나세재(羅世才)와 나세기(羅世奇)!"
한 궁녀가 호명을 하자 두 사내가 허리를 곧추 펴지도 못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자네들 둘이 폐하의 혼사에 중매를 서야 하네."
궁녀가 이들에게 이르자 그저 "예 예." 하는 대답만 흘릴 뿐이었다. 다시 궁녀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꾸부정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기련산(기連山) 음마(陰魔) 영운(靈運)은 어디 있느냐?"
노기를 가득 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궁녀가 그에게 다시 지시했다.
"영운은 듣거라. 오늘은 폐하의 대혼(大婚)날이기에 너를 특별히 용서할 것이다. 만약 또 방종을 떨며 황제를 노여움을 샀다가는 목숨이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운은 고개를 곧추세운 채 모용준을 노려보았다.
"난쟁이 같은놈!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름한다더니 네 놈이 용의에 다 앉아 있느냐? 황제가 되겠다는 게 네 팔자에 있더란 말이냐?"
그런데 그는 이미 온몸에 있는 혈도들을 모두 빼앗겨 버렸는지 말만 험상궂게 할 뿐 손가락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 무례함을 보다못한 궁녀가 다시 영운에게 손을 쓰려고 하자 모용준이 말렸다.
"죽이지는 말게. 오늘은 내 혼삿날이니 피를 보고 싶지가 않다."
궁녀가 모용준의 뜻을 헤아리고는 영운의 등뒤에 있는 혈도를 탁 찔렀다. 그러자 영운의 혓바닥이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궁녀가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더니 가차없이 그의 혀를 싹뚝 잘랐다.
"폐하, 이젠 헛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좋다. 다른 놈들도 허튼수작을 하거든 모두 혀를 잘라 버려라!"
모용준이 매우 흡족하게 웃어젖혔다. 자지는 큰 충격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혼례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다. 증혼을 선다, 주혼을 선다, 활성을 올린다, 기악을 울린다 등등 궁녀들이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그리고 나서 주혼인이 높이 목청을 뽑았다.
"신부를 동방에 모시어라!"
그러자 황제의 용포(龍袍)를 뒤집어쓴 모용준이 자기보다 큰 자지를 겨우 안고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자지의 동방화촉의 밤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자지는 모용준을 보며 왠지 우울함에 잠겼다. 오늘이 첫날밤은 아니지만 이전까지 그를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비록 난쟁이였지만 착하고 인품이 좋아 자지는 그를 존경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모용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지 않았던들 이처럼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
이다.
'강남 모용세가의 공자님과 마주한 자리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텐데…….'
자지는 이런저런 생각에 눈물만 흘렸다. 자지를 침대에 눕힌 모용준이 궁녀들에게 그만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저희들은 끝가지 폐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한 궁녀가 당돌하게 입을 놀리자 모용준이 귀찮다는 시늉을 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만 가렷다!"
궁녀들이 모두 물러가자 모용준이 자지를 향해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실 나도 이런 혼례는 처음이요."
그러면서 그는 자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지금 몹시 떨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행여나 자지가 자신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기색도 역력했다.
"공자님, 왜 당신은 황제 자리를 원하시나요?"
자지가 입을 열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되는 것은 우리 모용세가가 시켜서 하는 것이오. 난 사실 모용세가를 저버릴 수가 없소."
자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난 그 반화대회에서 그대에게 반해 버렸지. 그대는 나와 신방을 차린 것을 후회하는가?"
"난 당신에게 제 일생을 바치는 것을 원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연나라 황제와 혼례를 올릴 마음은 추호도 없답니다."
"그럼 모용 공자와 혼례를 치른 것으로 여기면 되지 않나?"
이렇게 말을 마친 모용준이 자지를 덮쳤다. 자지를 끌어안고 모용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난 그대를 여인으로 만들어 주겠어. 몸이 불덩이 같은 나의 여인으로……."
모용준이 정신없이 자지의 몸을 어루만지며 헉헉 댔다. 자지는 눈을 감은 채로 전혀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모용준이 자지를 반듯이 눕히며 뜨겁게 숨을 토했다.
"그때의 일은 잊어버려."
낡은 절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도 그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모용준이 자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열여섯 가지의 의복을 모두 벗긴 모용준은 더욱 급히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옷도 벗었다.
"공자님, 그저 공자님이라 생각하게 해 주세요."
자지가 촉촉히 젖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래, 그대의 말을 따르겠어."
모용준은 지금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손끝은 얼음물에 담갔다 꺼낸 사람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에서도 전혀 다른 광채가 쏟아졌다. 겨우 속옷 하나만을 걸친 자지가 알몸이 된 모용준을 향해 다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것도 공자님이 직접 벗겨주세요."
모용준이 허리를 굽혀 자지의 속옷을 벗기며 떨리는 음성으로 다짐했다.
"난 그대와 평생을 같이 하겠어. 공자라는 자리도 모두 벗어 던지고 평민으로 살겠어. 밭 갈고 나무를 하며 그렇게 그대와 행복하게 살테야."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지는 흐뭇했다.
"그래요."
비로소 격정을 이기지 못한 자지가 그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았다. 모용준이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 등을 쓰다듬었다. 차츰 그의 몸이 자지를 향해 깊은 골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지가 한차례 꿈틀댔다.
"모용 공자님, 공자님, 당신은 공자님이죠? 당신은 공자님이예요……."
자지는 모용준을 더욱 세게 안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모용준은 거대한 과육 덩어리 위에 얹어진 것처럼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을 비틀어 댔다.




제17장 무림대회
수많은 풍문을 뿌리던 무림대회가 드디어 영주에서 그 막을 올렸다. 천하에서 이름이 난 영웅호걸들을 무림대회라른 명목으로 영주로 모이게 한 것은 금나라 군대를 물리칠 방책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금에게 반벽강산을 빼앗긴 지금 강남의 나머지 땅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이런 위기감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에 천하 호걸들을 불러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주는 뱀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유종원(柳宗元)이 그의 유명한 글에서 밝혔다시피 영주 땅에는 속살이 검고 겉이 흰 특이한 뱀이 많이 났다. 그 뱀은 사람이 한번 물리면 즉사할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다.
무림대회를 영주에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임안과 멀리 떨어진 입지적인 조건으로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것이다. 또한 뱀이 많은 곳이기에 뱀을 잡아 죽이지 못하면 곧 물려 죽고 만다는 이치를 은연중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껏 한적했던 영주는 며칠째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천하의 창기(娼妓)들도 이 영주에 구름떼로 몰려들었다. 녹림호걸들이란 일이 없어 한가해지면 술독에 빠지거나 여색을 즐기는 게 보통이었다. 녹림호걸들 뒤에는 영락없이 여인들이 따라다니는 법이요 여인이 없으면 녹림호걸들도 없다는 식이었다.
경성 회모루의 명기들을 미롯해 소흥(紹興)이나 평강(平江)의 명기들까지 제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벌기 위해 꾸역꾸역 몰려온 것이다. 영주는 며칠 사이에 모인 기녀들로 꽃밭을 이룬 듯 현란했다. 무림대회는 아직 사흘이 남아 있었지만 벌써부터 술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아 규모 있는 대회가 될 듯싶었다. 또한 이번 대회는 개방에서 소집을 하였기에 영주에는 난데없는 거지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이곳 영주의 중심가인 사가(蛇街) 곁에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새로 늘어서서 또 하나의 거리를 만들었는데 바로 이번 무림대회의 영향으로 생겨난 화가(花街)였다.
오후로 접어들자 화가는 더욱 분주해졌다. 화장을 마친 기녀들이 거리로 나와 손님을 부르는 소리, 간장을 녹일 듯한 웃음 소리, 노랫소리와 술 취한 사내들이 지껄이는 온갖 욕설……, 칼끝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온몸이 쑤셔 한시라도 견디지 못하는 호걸들이 모였기에 더욱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여인에게 사랑이니 순정이니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내들이기도 했다.
화가 저쪽 끝에서 공자차림의 사내가 걸오고 있었다. 다름아닌 왕중양이었다. 그가 검을 등에 지고 이 기녀 골목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먼 여행길 뒤라 의복은 지저분하고 지쳐 보였지만 키도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라 기녀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분을 진하게 처바른 몇몇 기녀들이 그의 앞으로 뛰어나가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나으리, 저와 함께 살방아를 찧어 가며 술을 마셔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기녀가 노골적으로 왕중양을 유혹하자 다른 한 기녀가 잘록한 허리를 흔들며 콧소리를 냈다.
"난 첫눈에 벌써 나으리가 견식이 넓고 즐거움을 아는 풍류남아라는 것을 알아보았답니다. 나으리, 그리고 회모루에 있는 어여쁜 소녀아이들이 이곳에 와 있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회모루라는 말에 왕중양의 귀가 번쩍 뜨였다. 경성의 회모루라면 임조영을 만났던 장소가 아니던가? 왕중양은 기녀가 일깨워 준 기억으로 새삼 그와 둘째 모용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들로 무림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을 안다면 분명 올 것이라 생각되었다. 기녀들은 잠시 머뭇대며 서 있는 왕중양은 기녀들은 마음이 있어 그러는 줄 알고 한 판자로 된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겉보기와 달리 안은 제법 꾸며 놓은 흔적이 엿보였다. 침대 주위는 다양한 꽃들로 장식해 놓고 탁자 위에도 향기로운 곡주가 놓여져 있어 보기만 해도 흥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얘들아, 귀빈이 찾아오셨다!"
왕중양을 팔을 잡아끈 그 기녀의 소리에 향내가 물씬 풍기는 기녀 몇이 몰려나왔다. 그중에서도 애띠고 정말 막 피어난 꽃과 같은 기녀 하나가 애교스럽게 왕중양을 향해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누가 마음에 드시나요? 어서 골라 보세요."
왕중양은 약간 야릇한 생각이 들어 이들을 둘러보았다. 기녀들이라면 먼저 재물에 대한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왕중양이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왕중양 앞에서 진정한 여인으로 뽑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갖은 교태를 마다하지 않았다.
"회모루에서 잃어버렸다던 그 여인들은 모두 찾았소?"
이처럼 엉뚱한 왕중양의 물음에 기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왕중양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기녀가 살짝 보조개를 피우며 입을 열었다.
"찾기는요? 듣자하니 강호에서도 악명이 높은 유운장에서 모두 데려갔다고 하던데 어떻게 찾아요? 다시 와서 해꼬지를 하지 않는 게 다행인데."
기녀가 조금 침통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려고 하는데 웬 사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해꼬지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구? 그건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하하!"
이윽고 한 사내가 문발을 사납게 들치고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첫눈에 그가 난쟁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반화대회 때 만난 공자시구먼. 그런데 여긴 또 무엇을 하러 왔지?"
이 난쟁이는 왕중양에게 처음부터 무례하게 굴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난 친구를 찾으러 왔소이다. 그러는 당신은 이곳엔 웬일이오?"
무뚝뚝한 왕중양의 대꾸에 사내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콧등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 이 사자우를 보고도 큰소린가!"
왕중양은 씁쓰름한 표정을 내보였다.
"알겠소. 그러고보니 악명 높으신 분을 만난 것 같은데 반갑소. 모두들 당신 같은 악한을 없애지 않으면 천하에는 사람이 살 길조차 없을 거라 말하던데 그런 소문은 들어 보았소?"
사자우가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물론이지. 그럼 넓은 곳으로 가 그동안 그대의 재간이 얼마나 늘었나 한번 볼까?"
이들이 밖으로 나오자 구경꾼들이 어디서 알고 몰려들었는지 거리를 온통 메우다시피 했다. 무림대회에 참가하러 온 고수들 중 누군가가 싸움을 벌인다는 소식은 거리를 또 다른 열기로 들뜨게 했다.
"왕중양, 그래,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거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지 그러나?"
구양봉이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떠벌렸다. 일단 왕중양의 심기를 건드려볼 요량이었다.
"사자우! 네 이놈, 네 죄가 하늘에 닿았는데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단 말이오?"
왕중양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좋다. 네 놈이 나를 천하의 제일 가는 악인으로 대접해 주겠다는데 고맙구나!"
구경을 하러 모인 사람들 중에는 사자우를 알아보고는 벌써부터 피냄새를 맡은 듯이 치를 떠는 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사자우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은 이미 강호에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들의 눈에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는 이유는 왕중양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왕중양에 대해 조금도 알지를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곧 벌어질 혈전을 앞두고 가슴을 조이었다. 필시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자우와 맞서겠다고 나섰
겠는가, 하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먼저 검을 뽑아든 것은 왕중양이었다.
"자, 간다!"
왕중양이 검을 모아 쥐고는 사자우를 향해 타타타탁 하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반출룡사(盤出龍蛇)' 초수였다. 사람들은 왕중양의 보법에 혀를 내두르며 잔뜩 긴장을 했다. 왕중양의 검이 사자우를 향해 약간 사선으로 그어졌다.
"쨍!"
그러나 사자우가 급히 검을 내뻗어 왕중양의 검을 맞추었다. 왕중양은 검을 잡고 있는 손으로 엄청난 울림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내심 놀랬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왕중양이 옆걸음질 치며 사자우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왕중양이 타타타탁 하는 소리를 내며 덮쳐 들었다. 이번에도 사자우가 검으로 막아냈다. 두 사람이 맞붙었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는 강풍이 휘몰아치듯 거리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간혹 흙먼지
가 눈에 들어갔는지 손으로 비벼대면서도 연신 두 사람의 신기한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왕중양은 자신의 무공을 더욱 더 견고하게 다졌었다. 또한 선천신공을 검술에까지 도입시켜 그의 검끝에서는 무서운 기가 뻗어 나왔다.
사자우는 왕중양의 이같은 검술에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반화대회 때의 왕중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니고 있지 못한 기이한 초수와 보법에 속으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역시 한판 붙어 볼 만한 실력이군! 자, 이번엔 내 차례다!"
사자우도 자신의 기이한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국자와 방망이 그리고 갈고리가 달려 있는 요상한 것이었다. 그것을 휘둘러대는 사자우의 양쪽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는 그것을 어깨와 가슴 그리고 팔을 이용해 아주 가볍게 돌리는 듯한 동작을 펼쳤다.
"이야아앗!"
왕중양이 사자우의 병장기를 머리 위로 스쳐 보내며 무서운 고함을 토했다. 사자우의 공격이 머리를 비껴 가는 것과 동시에 그는 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겨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자우는 쉽사리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 빙빙 돌던 국자에 검이 부딪치면서 튕겨 나왔다.
두 사람은 벌써 백여 합이 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기울어지지 않는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너만 소리를 낼 줄 아느냐?"
사자우가 돌리던 독사장을 우뚝 멈추며 웅 웅 하는 저음의 소리를 땅을 향해 내뱉었다. 그 소리는 무수한 원귀들이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오며 울부짖는 소리 같아서 사람들의 머리칼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성력(聲力) 또한 대단하여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력(內力)을 한 번 겨루어 볼까?"
사자우가 제의하자 왕중양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들을 거두었다. 왕중양이 가슴 위로 올린 양손을 교차하며 묘한 동작을 취하다가 곧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터억!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한 힘이었다.
겨우 몸을 피한 사자우가 자기만의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하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의 눈에 그의 동작이 괴사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사자우의 손에서 내력이 휘몰아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내력 역시 그 동작처럼 비웃을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얍!"
왕중양이 손을 내밀 때마다 사자우는 아래서 위로 뛰어오르면서 방어를 하고 또 공격을 이어 나갔다. 왕중양은 사자우의 실력을 얕잡아본 탓에 약간 밀리는 추세였다. 그러나 일단 선천신공만 쓰려 했다. 극렇게 되면 그 역도(力道)가 증가되어 엄청난 힘을 내뿜을 것이다.
"야아앗!"
왕중양이 힘을 써 머리로 온몸의 피를 다 끌어 모았다.
"어이쿠!"
그러자 사자우가 뒤로 나자빠지더니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그런데 정도 이상으로 몸을 굴리던 사자우는 벌떡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아났다. 일단 왕중양의 승리로 일단락된 셈이었다.
새로운 고수를 칭송하듯 구경꾼들이 왕중양에게로 몰려들어 허리를 숙이는가 하면 슬쩍 그의 손을 만져보는 이도 있었다. 왕중양은 계속 따라붙는 그들을 억지로 떼어놓고는 몸을 돌렸다.
왕중양이 거리를 벗어나 꽤 멀리 걸어왔을 때였다. 한 무리의 그림자가 길을 막고 선 채 비켜주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이들이 누구인지 몰라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귀에 익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헤헤헤,. 무공이 정말 대단하시던데?"
무심의 목소리였다. 그의 옆에는 챵바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이 왕중양에게로 가까이 접근해오며 징그렇게 낄낄거렸다. 왕중양은 말없이 이들의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왜 이들이 무림대회까지 그 모습을 나타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대회를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온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무심이 헤헤 하는 기분 나쁜 웃음을 앞에 달며 입을 벌렸다.
"왕 공자, 여기선 함부로 날뛰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대회가 무엇을 하는 대회인지 알고나 날뛰는 거요?"
"그래, 이번 무림대회는 무엇을 하려는 대회요?"
왕중양이 굳굳한 자세로 받아치자 무심이 또 낄낄거렸다.
"이번 대회는 개방놈들이 소집을 한 건데 뭐 금나라를 치겠다는 논의를 벌인다나.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울 줄 모른다더니. 금나라는 우리에겐 어버이나 다름없는데 왜 우리가 금나라를 친단 말인가? 금나라가 없으면 우린 죽사발도 못 얻어먹는데……."
왕중양의 입꼬리가 매섭게 찢어졌다.
"이 무식하고도 비열한 놈아! 닥치지 못하겠느냐?"
"왕 공자, 웃기는 소리 말라구. 너 역시 금나라 덕분으로 밥술을 뜨는 주제에 그따위 소리야. 네가 사는 곳과 밥 처먹는 곳은 누구 관할이더냐? 금나라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헛소리를 늘어놓을 셈이냐?"
"정말 개만도 못한 놈이로군! 중원 사람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다스리며 살아왔어. 그래도 잘 살아왔다. 그런데 금나라 오랑캐들이 침범을 한 다음부터 강산이 두 쪽으로 양분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넌 그같은 도적 놈들에 불과한 무리의 앞잡이 노릇이 좋단 말이더냐?"
쿵! 하며 왕중양이 발을 구르자 무심이 깜짝 놀랬다. 그 여파가 자기의 두 다리로 전해져 후들후들 떨리는 게 아닌가.
"잔소리 말아랏!"
이렇게 지껄인 무심이 황금부채를 휘릭 앞으로 내젓자 누군가 수레 한 대를 밀고 나왔다. 풍막으로 가려진 수레 안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무심이 잔꾀를 쓰려는 것으로 여기고는 선수를 쳤다.
"허튼수작 그만하고 어서 목이나 내놓거라!"
"헤헤, 나는 무심한 사람이지만 왕 공자께서는 정이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오. 자, 한 번 보시오, 이 안에 누가 있는지를."
풍막이 젖혀지자 곧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왕중양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수레 위에는 유일민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왕중양을 본 유일민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분명 임조영과 함께 그곳을 피한 것으로 알고 있는 유일민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무심의 손아귀에 들어간 채로. 왕중양은 울고 있는 유일민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모르긴 해도 무심이 손을 썼을 거라 왕중양은 추측했다. 그러니 더욱 치가 떨렸다.
"왕 공자, 듣자하니 그대가 이 아이를 구해줬다고 하던데 한 번으로 끝나면 재미가 없지 않소? 흐흐흐, 이 아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난 질투가 다 날 지경이요."
무심이 유일민에게로 다가가 부채 끝으로 그녀의 턱을 올렸다.
"무심, 그 아이에게 손을 댔다가는 요절을 내고 말 것이다!"
왕중양이 덤벼들 자세를 취하자 무심이 비웃었다.
"헤헤, 난 이 아이에게 손만 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갖다 댈 생각이다."
유일민의 턱을 어루만지던 무심이 슬쩍 그녀의 아혈을 열어놓았다.
"왕 공자님!"
겨우 말문이 트인 유일민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왕중양이 무심에게로 달려들어 목을 조를 순간이었다.
"잠깐! 무심의 말로는 내가 당신보다 못하다고 하던데 어디 한 번 확인시켜 주겠는가?"
챵바였다. 그가 씩씩대더니 얼른 기를 모아 왕중양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한 손으로 챵바의 주먹을 쳐 옆으로 빗나게 만든 왕중양이 훌쩍 몸을 날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챵바가 위를 올려다보는 찰나 눈앞으로 검은 물체가 쏟아졌다.
"욱!"
챵바의 면상으로 왕중양의 발바닥이 내리꽂혔다. 땅으로 박힐 듯 주저앉은 챵바가 벌떡 일어서며 자세를 다졌다. 그는 기를 모으더니 왕중양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챵바는 몽골에서 알아주는 장사였다. 왕중양은 그리고도 몇 번을 더 치명타라고 여길 만한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그는 끄덕하지 않았다.
"왕 공자, 내가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는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난 원래 이런 겁많고 경험 없는 여인은 질색이거든. 그래서 네 놈에게 던져 줄 마음인데 어떤가?"
무심이 떠벌리는 말에 왕중양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유일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이 사람 말을 듣지 마세요!"
유일민의 말 속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왕중양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유일민을 되찾고 나서 뒷일에 대해 처신할 생각이었다.
"좋다. 네 놈 말을 따르겠다."
"헌데 한 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조건이라니?"
"간단해. 이번 무림대회 때 우리에게 접근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 알겠나?"
무심의 야심을 알아버린 왕중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들은 무림대회에 참가하여 중원 무림의 패권을 거머쥐려고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왕중양을 비롯해 고수들이 이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설 거라 판단하고 먼저 손을 쓰려는 속셈이었다. 왕중양은 일단 내친 일이라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좋소. 그렇게 하리다."
그런데 무심은 간괴한 수를 쓰려 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지금 넘겨주지는 않겠소이다. 나중에 그대가 딴 마음을 먹으면 어찌하겠소? 행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무심이 갑자기 화살 하나를 쥐고는 작신 반으로 부러뜨렸다.
"이렇게 될 것이다!"
무심이 신호를 보내자 다시 수레가 사라졌다.
무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영주 벌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히 대단한 대회임을 입증해 주고도 남았다. 수 천을 헤아리는 무림 사람들이 앉아서 개회를 기다렸다. 흙으로 쌓아올린 단상 위로 한 젊은이가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전 개방의 홍칠이라는 사람올시다. 우리 무림 사람들이 이렇게 오늘 모이게 된 것도 인연인가 합니다.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나라에 대한 방책을 의논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무림의 인사들은 대부분 중원 사람들이 아닙니까? 금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강산을 마음대로 짓밞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지당한 말이오!"
"그말에 대찬성이오!"
홍칠의 말에 여기저기서 뜻을 모으려는 함성 소리가 터졌다.
약간 흥분을 듯한 홍칠이 사람들을 넓게 둘러보았다. 그는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 보통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우리 개방은 여러분들과 마음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쳐부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잃었던 대송(大宋) 강산을 수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의 피끓는 절규가 영주 벌판을 메아리쳤다.
"금나라 오랑캐를 내몰자!"
"잃어버린 강산을 다시 찾자!"
"아예 놈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홍칠과 사람들의 힘있는 외침을 보고 있는 왕중양의 가슴도 서서히 불이 붙어 갔다.
'나 왕중양만 뜨거운 피를 갖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오늘 보니 저 홍칠의 가슴은 더욱 뜨거운 피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무공만이 뛰어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우국지심도 대단해. 홍칠이 말대로 무림 인사들이 모두 항금(抗金)의 깃발 아래 하나로 묶어진다면 금나라쯤은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기를 다지는데 갑자기 껄껄껄 대는 냉소가 터졌다. 그 소리는 보통의 웃음과는 달리 몹시 귀에 거슬렸고 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누구얏! 어느 놈이 비웃고 나서겠다는 거야?"
누군가 소리치자 웃음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곤 한 사내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더니 빠른 속도로 수천이나 되는 큰 무리의 주변을 서너 바퀴 쯤 돌고 나서 홍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무공은 실로 기이한 것이라 사람들의 눈은 찢어질듯 커졌다. 빠른 속도로 무리의 주변을 돌던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면서 홍칠 앞으로 어느 틈엔가 당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같은 경공을 처음 보기 때문에 그가 모르긴 해도 대단한 고수일 거라 추측들을 하는 눈치였
다. 그가 홍칠이 서있는 곳으로 훌쩍 몸을 날려 올랐다. 체구가 우람한 것이 홍칠보다 머리 하나는 모자란 난쟁이, 다름아닌 사자우였다.
"너희들이 모두 중원 사람들이 맞는가? 중원이고 나발이고 자기 일들이나 할 것이지 대송이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웬 말들이 이리도 많으냐!"
사자우는 무림대회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사자우 이놈아! 그럼 넌 어버이의 일에도 고개를 돌리겠다는 말이더냐?"
누군가 이렇게 받아치자 우와와 하는 폭소가 뒤를 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사자우가 가슴을 부풀렸다.
"어느 놈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사자우가 목줄기로 툭툭 힘줄을 새기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시 그가 으르릉거렸다.
"어느 놈이든 또 아가리를 놀려댔다가는 확 찢어 버릴 것이다!"
창끝 같은 눈초리로 사자우가 욱박지르자 코앞에 있던 몇몇은 기가 죽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 번 찢어보시지."
누군가 이렇게 반발을 했지만 자신이 없는지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로 겨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구. 아 제 먹고 살길 찾으면 그만이지, 송나라가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왜 이다지도 말들이 많아? 어느 나라가 세워지든 백성은 백성이라고. 백성들은 그저 배부르게 먹여주면 그만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금나라가 더 좋은 세상일지도 모르지."
사자우가 제 멋에 빠져서 혼자 뇌까리고 있는데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졌다.
"이 더러운 놈아! 냉큼 내려오지 못하겠어?"
이렇게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른 것은 산서(山西) 연풍표국(連風표局)의 국주인 연천성(連天城)이었다. 연씨네 쌍필(雙筆)의 계승자이기도 한 그는 붓자루 두개로 백여 명을 물리친다는 유명한 고수에 속했다.
사자우의 안면 근육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연천성과 한동안 눈싸움을 벌이던 사자우가 몸을 훌쩍 날리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머리를 마치 돌다리인 양 밟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작은 체구인데다가 날렵하기 그지없어 그의 동작은 수면을 스치는 새 같았다. 머리를 밟힌 사람들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연천성이 막 사자우의 돌진을 막아 서려고 할 때였다.
"우욱!"
어느새 날렸는지 연천성은 사자우의 장을 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 부, 분하다……."
치명타였다. 연천성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사자우의 일격에 그만 숨통이 끊어졌다. 그의 제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절명을 한 뒤였다. 그의 아들인 연성(連城)이 연설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역시도 연천성 못지않게 붓을 잘 쓰는 고수였다.
"이 난쟁아! 우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쓰러진 연천성 곁에 있던 두 명의 제자들이 쌍필을 꺼내 들며 합세했다. 사자우가 코웃음을 쳤다.
"흠, 이 미련한 놈들아, 내가 그만큼 살아갈 이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냐?"
왕중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천하의 악인이 되려고 자청한 사자우를 응시했다.
'그의 무예 역시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연씨네 세 사람의 목숨도 바람 앞에 등불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사자우의 악랄함에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날 테니까…….'
왕중양이 막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허, 왕 공자께서는 어디를 가시려나?"
무심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유유작작한 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는 유일민의 모습도 보였기에 왕중양은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연단 위에서는 사자우와 연씨네 세 사람이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단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 연씨네를 향해 기필코 물리치라는 말을 던지며 응원을 했다.
"간다!"
연성이 두 개의 붓을 나누어 쥔 채로 사자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자우의 눈과 사타구니를 겨냥해 붓을 찔렀다. 연천성의 제자들도 각각 붓을 세우고는 사자우의 측면을 노렸다. 이같은 싸움은 사실 무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사자우가 보인 태도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은 오히려 열이 아니라 백이라도 나서 그를 굴복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자우의 무공은 생김새와는 딴판이었다.
연성과 제자들의 붓끝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장벽에 부딪쳤다. 연성이 있는 힘을 다해 붓 끝에 기를 모았지만 더는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사자우가 양손을 내저으며 이들의 붓을 옆으로 쳐냈다.
그런데 느닷없이 홍칠의 손이 불쑥 사자우에게로 날아들었다.
"넌 또 뭐냐?"
홍칠의 손에서 엄청난 기를 감지한 사자우가 내심 놀라 옆으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홍칠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 판단한 사자우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연씨네 세 사람은 홍칠의 출현으로 일단 목숨은 구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하게도 자신들을 겁내는 줄로만 안 모양이었다.
"사자우, 도망치는 꼴이 우습구나?"
기고만장해진 이들이 사자우에게로 덮쳐 들려고 하자 재빨리 홍칠이 가로막았다.
"복수는 일단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저 사자우란 작자는 아주 도망치지는 않을 위인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잠시 앞뒤를 재보던 연성이 황급히 연단 아래를 향해 사람들에게 따져 물었다.
"이게 무슨 무림대회요? 내 아버님이 악인의 손에 죽어 갔는데도 당신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소. 당신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없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홍칠의 덕분으로 목숨을 구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연성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사태를 얼른 수습하려는 의도로 홍칠이 사자우를 향해 큰소리로 경고했다.
"사자우, 사람을 죽이고도 살아 남을 생각은 못할 것이다. 넌 오늘 이곳에 모인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네 죄를 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사자우의 콧에서 무서운 바람이 뿜어졌다. 어찌나 콧바람이 센지 발밑의 땅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흥,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진 백성이라 자부하는 것 같은데 흰소리 말아라! 저기에 있는 연씨네만 해도 양민들의 땅을 빼앗고 약탈을 놀이삼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제는 우리 가문에 대해 도전을 하겠다는 거냐?"
연성이 이를 부득 갈며 사자우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흐흐, 넌 사람들의 피를 뽑아 주둥이만 살찌운 모양이구나. 여기 모인 사람들도 잘 들어라. 자신이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어디 있으면 나에게 덤벼봐라!"
그러나 사자우를 향해 선뜻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연단 위로 날아들며 소리쳤다.
"하하핫! 그렇다면 내가 과연 무슨 죄를 지었는지 한 번 말해 보시지?"
그는 유생 차림에 자색 옷을 걸친 선비였다. 사람들은 이 선비가 자신들의 틈을 비집고 연단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괴상한 보법이었는데 사자우가 부린 것과는 또 다른 아주 날쌘 동작이었다. 사자우는 그러나 이 사람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의 눈매가 심하게 떨렸다.
"황약사(黃藥師)……!"
그러자 연단 아래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츰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황약사, 내가 너 따위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정당한 이유를 댈 줄 알아야 하는 법!"
"훈계를 하려거든 네 놈의 제자들 앞에서나 씨부려라."
"어허, 네 놈이 제법이로구나!"
이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곧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걸음을 막 내딛은 황약사가 얼른 장을 날렸다. 낙영빈분(落英빈紛)이란 초수였다. 이 황약사의 무공은 모두 동해 도화도에서 스스로가 개발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한 가지 풍류적인 것을 좋아해 그의 초수들은 내력은 강하면서도 겉으로는 매끄러운 멋도 지녔다. 어찌보면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소맷자락을 나풀대며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것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그렇게
부드러운 초수 속에는 예리한 기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사자우는 잘 알고 있었다.
사자우의 동작도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날렵해졌다. 연거푸 장을 날리며 돌진해 들어오는 황약사를 피해 공중으로 솟구친 사자우가 비웃음을 흩뿌리며 사뿐히 내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기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여가며 이들의 초수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이놈, 네 놈은 지금껏 사람을 해치지 않았단 말이더냐? 대력(大力) 허패(許覇)도 네가 붙잡아갔지 않았느냐? 말도 못 하게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잡아간 것이 네 놈이 아니면 누구였느냐?"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자우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일시에 굳어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력 허패를 기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였을 뿐 아무도 그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정호 기슭에서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남경성 밖에서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자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약사가 잡아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막상 황약사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렇다. 네 말대로 그는 지금 도화도에 있지. 난 앞으로 어떤 놈이든 허패와 같이 악한 짓을 일삼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끌고 갈 생각이다. 한 가지 네 놈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그 허패는 지금 도화도에서 매일 꽃밭이나 가꾸며 편하게 지내고 있다. 하하핫!"
황약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입으로는 항상 정의로운 소리를 떠들지만 속에는 온통 망나니 근성이 들어 있는 놈들은 내 말을 잘 듣거라! 너희들도 어느 날 갑자기 강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도화도에 끌려가 나무를 심고 섬을 지키며 한평생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감히 황약사를 향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끝까지 황약사와 대적하고 나선 것은 사자우였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너 또한 사람을 해쳤거늘 감히 누구를 향해 꾸짖는단 말이냐?"
"글쎄, 우하하핫!"
웃음이 채 멎기도 전에 사자우의 손이 날아왔다. 타탁!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이들은 싸움닭이 상대를 향해 날갯짓을 하듯 서로의 몸을 날렵하게 던졌다.
"황약사, 나하고 경공(輕功)을 겨뤄보지 않겠나?"
순식간에 몇십 합을 대결하고 나서 갑자기 사자우가 실실 웃어가며 황약사에게 제의를 해왔다. 그 표정에는 감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네 놈이 산꼭대기로 오른다 해도 난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사자우가 먼저 해라도 만질듯 높이 몸을 높이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황약사도 소맷자락을 나비의 날개처럼 퍼득이며 그의 뒤를 쫓아 올랐다. 이들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들이 차츰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자 홍칠이 시선을 거두며 사람들을 향해 섰다. 그리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게 한 후 입을 떼었다.
"자, 이젠 우리의 대사를 위해 다시 의견들을 나눕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크게 나누어 두 종류의 탄식이었는데 하나는 사자우와 황약사의 싸움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무공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을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때문에 그같은 우쭐거림이 일시에 허물어졌다는 허탈함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홍칠이 다시 무림대회의 열기를 북돋우려고 하는데도 모두들 열적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칠이 연단에 서서 계속 사람들의 술렁임을 바로 잡고 회의를 진행하려 하자 누군가 시비를 걸어 왔다.
"너 홍칠은 개방의 방주 노릇도 못하면서 천하 무림의 맹주로 나서겠다는 거냐?"
둘러보니 차림새를 보아서는 황약사 못지않은 풍류남아로 비쳤는데 어딘가 위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심 공자……, 무심 공자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외쳐댔다. 무심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거만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사이를 헤쳐 나갔다. 곧 연단 위로 올라와 홍칠 앞에 선 그가 건성으로 읍하며 말을 건넸다.
"홍방주님, 나도 이 위에 올라서 보니 누구 못지않은 대장부처럼 여겨지는데 그래. 나를 꺾을 자신이 있소?"
무심이 거들먹거리며 홍칠과 아래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개방은 맹주가 되려는 마음으로 이 무림대회를 연 것은 아니오. 무림대회를 통해 우리를 이끌 수 있을 만한 분을 세워 놓고 금나라를 치자는 것이오."
"건방진 소리. 너 홍칠은 전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보다 공을 더 세워 그 자리에 오른 치사한 놈이 아니더냐?"
소씨거렁뱅이로 말하자면 홍칠의 사부인데 어찌 그를 넘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행여 어떤 근거가 있으니 저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품었다. 아무리 침착한 홍칠이라도 무심의 이같은 망발에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네 놈의 눈알에는 내가 사부님을 해치는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느냐?"
"글쎄, 그런 일은 나보다는 네 놈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명백하다. 네가 이번 무림대회를 소집한 목적이 무림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자 함이 아니더냐?"
유들유들 기름칠을 한 듯한 무심의 말재간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와 언쟁을 하는 것은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홍칠이 자세를 낮추며 기를 모으려고 하자 무심이 사람들을 향해 지껄여 댔다.
"저 보시오. 내가 저놈의 비밀을 까발기려 하자 날 죽이려는 게 틀림없지 않소? 그러나 저놈이 날 죽이면 자기의 죄를 만천하에 대고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 난 두렵지 않소!"
사실 무심의 술수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게 홍칠의 속마음이었다. 괜한 일을 벌여 사람들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대사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다. 그럼 네 놈이 밝히겠다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홍칠이 자신의 계산대로 쉽게 꼬리를 내리자 무심의 배포는 두둑해졌다.
"네 놈이 저지를 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넌 계속 시치미를 뗄 셈이냐?"
그런데 무심은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고 이렇듯 모호한 말로 질질 끌어가려 했다. 그러나 아직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심은 그런 궁중심리를 십분 이용하려는 심보였는지 다시 입을 놀려댔다.
"나 역시 죄를 짓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는 네 놈이 더 독하고 살떨리는 짓거리를 많이 저질렀을 게다."
그는 계속 양팔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8장 무림의 맹주
무심이 얼마나 열심히 혀를 놀려댔는지 차츰 사람들의 의심은 짙어만 갔다. 처음 몇몇 정도만이 홍칠을 의심하는 눈치였는데 이젠 거의가 그런 쪽으로 몰리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홍칠이가 이 무림대회를 소집한 이유에는 남모를 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무심의 이같은 생각은 집요하게 혀끝으로 옮겨졌다.
"난 네가 꿈을 꾸면 그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다. 네가 한 짓에 대해서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훤히 알고 있지만 네 놈의 꿍꿍이속도 이미 알고 있다. 네 놈은 지금 겉으로는 우국지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어림도 없다. 천하의 영웅들을 속이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네이놈! 네 놈이 몽골족의 앞장이라는 사실은 어린 동자들도 아는 사실이다. 요사스런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힐 생각 말고 어서 꺼져 버려라! 이 무림대회를 망쳐 종국에는 금나라 오랑캐 놈들을 돕자는 짓이 아니겠느냐?"
홍칠도 무심의 음모를 파헤쳐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려 했다.
"금나라를 위해 무심 공자가 나서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 일이란 말이냐?"
말뚝에 매어 둔 소처럼 우둔하게 생겨먹은 챵바가 느닷없이 나섰다. 무심을 옹호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도움은커녕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제공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우와 하는 웃음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챵바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자기 말에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챵바를 향해 홍칠이 꾸짖었다.
"네 이 놈! 세상엔 좋은 일은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금나라에 빌붙는단 말이냐? 그러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뭐라고?"
그러나 챵바는 우직스럽게 계속 홍칠에게 맞서 대들었다.
"흥, 무심 공자가 그랬어. 약자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강자의 노복이 되는 게 낫다고. 네 놈은 그런 진리도 모르느냐?"
다시 귀를 찢을 듯한 폭소가 터지자 챵바가 우쭐해져서 씨익 웃어 보였다. 왕중양은 챵바의 어리석음에 슬쩍 미소지었다.
이 순간 사람들의 박장대소 사이로 웬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아장아장대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더니 곧장 단 위로 뛰어올랐다. 난쟁이였다. 그러나 사장는 아니었다. 그는 모용세가의 공자이자 왕중양과 의형제를 맺은 둘째 모용준이었다. 키가 하도 작아 단 위에 올라섰지만 그게 그거였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모용준이 모습을 보이자 모두들 숙연해졌다. 아마도 강남 모용세가의 명성에 기가 꺾인 것 같았다. 모용준은 비록 난쟁이였지만 위엄 가득한
자세는 잃지 않았다.
"나 강남의 모용준은 개방의 홍칠공이 사내대장부란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이다. 오늘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틀리지 않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소. 우리는 이제껏 대송의 자(子民)으로 대대를 이어오며 임금이 하사하는 녹(祿)을 먹고 또 그 임금을 섬겨왔소. 그러니 홍칠공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게 아니겠는지요? 금나라의 앞잡이가 되는 것은 곧 배신행위와 다를 바 없소!"
그러자 호걸들이 서서히 입을 모아 모용준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무심이 모용준이라고 그냥 뇌둘 리 없었다.
"네 놈은 또 누구인데 나서는 거냐? 난쟁이 주제에 주둥이로 짹짹거리는 꼴이 꼭 참새 같구나. 헤헤헤!"
여지없이 한방 먹은 모용준이 인상을 구겼다. 더군다나 평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난쟁이란 말에 심기가 여간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네 놈의 버르장머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구나!"
모용준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위엄을 보이자 무심이 더욱 호기를 부려댔다.
"네 놈이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난쟁이로구나!"
모용준은 임조영이 서 있는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임조영이 있는 자리라 더욱 무심을 내쳐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또한 모용세가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무심을 꼭 주저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앗!"
곧 모용준이 작은 키가 무색할 정도로 높이 치솟으며 무심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그의 주먹은 산맥이라도 허물어뜨릴 만한 기를 발산했다. 용케 그의 주먹을 피하긴 했지만 자기 눈앞으로 강하게 스쳐가는 돌풍을 본 무심은 속으로 몹시 떨었다. 그 주먹에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오장육부가 온전하지 못할 듯싶었다. 무심이 황금부채를 꺼내들며 다시 몰아쳐 오는 모용준의 주먹을 막아냈다.
"꼭 뱁새가 황새 걸음을 따라오는 것 같구나!"
무심이 속으로는 겁을 내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모용준의 속을 긁어대는 말을 쏟아놓았다. 잠시 열에 바쳐 주춤하는 사이 무심의 무채가 모용준의 앞가슴을 향해 들어왔다. 모용준의 가슴에 있는 대혈을 노린 것이었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모용준이 무심의 공격을 피하며 재빨리 그의 사혈(死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심의 부채가 모용준의 손목에 탁 걸렸다. 이들은 계속 번갈아 공격을 주고받으며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이어 나갔다.
"너희 연나라는 망한 지 이미 오래인데 왜 이리 서두르는가? 이렇게 네 놈이 서두른다고 사라진 연나라가 다시 세워지기라도 하느냐?"
서로 주먹을 교차하면서도 무심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이제 사람들은 무심의 말에 솔깃해졌던 심리에 변화를 일으켰다. 어디선가 무심을 죽이라는 선창이 들려오자 곳곳에서 뒤를 따르는 외침이 터졌다. 불현 위기를 직감했는지 무심은 얼른 또 다른 꿍꿍이속을 드러냈다.
"이 난쟁이놈아. 그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아라. 저게 누군인지를!"
무심이 손가락을 펴 자기 귀 뒤를 가리켰다. 곧 모용준의 눈꼬리가 묘하게 변해갔다. 왕중양이 막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나서려던 참이었다.
"둘째, 날세."
모용준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형님! 정말 형님이 맞소? 형님, 정말 반갑습니다. 저기…… 셋째도 와 있답니다. 헌데 형님은……."
"왕중양,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무심이 야비한 눈빛을 번뜩이며 위협조로 말했다. 그의 생각에 더 이상 말이 길어지면 일이 복잡하게 될 거라 계산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유일민을 미끼로 삼아 놓은 판국이라 자신만만했다.
왕중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일민을 확인했다. 챵바가 그녀를 움켜쥐고는 이쪽을 향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무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은 날아가리라.
"형님, 저 무심이란 놈은 악한 중의 악한이요. 제가 당장 박살을 낼 테니 잠시 물러서 계시지요."
왕중양은 선뜻 모용준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임조영은 왜 왕중양의 태도가 불분명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다시 유일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임조영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당신은 누구요?"
챵바는 세상에 자신을 몰라보고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투로 젊은 사내에게 계속 투덜댔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난 몽골에서 으뜸가는 장사 챵바다!"
그러자 젊은 사내가 흐흐흐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난 중원에서 으뜸가는 장사 주백통이라 하오. 모두들 날 실없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아무튼 날 모르겠소?"
챵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 가슴을 턱턱 주먹으로 쳤다.
"모른다. 네 놈이 중원에서 으뜸가는 장사? 우하하하!"
"허, 이거 헛소리가 아닌데. 그래 네 눈에는 내가 그리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주백통 노완동이 또 흐흐 웃어대자 챵바가 더욱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실없이 웃기만 하는 장사도 있단 말인가. 챵바의 생각에는 그저 허우대만 멀쩡한 실성한 놈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웃기는군. 너 역시 으뜸가는 장사라면서 무슨 꼬라지가 그래?"
이렇게 노완동과 챵바가 한창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무심의 고함이 끼여들었다.
"챵바, 지금 거기서 뭣하는 거야?"
불에 데인 사람처럼 흠칫 정신을 차린 챵바가 노완동 면상에 대고 떠벌렸다.
"어쿠, 무심이 날 부르네. 난 너하고 말씨름한 겨를이 없어."
챵바가 잠시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던 유일민의 몸을 꽉 틀어쥐었다. 잠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왕중양에게 무심이 전음입밀법(傳音入密法)이란 초수를 이용해 그의 귀에만 들리게 뇌까렸다..
"왕중양, 네가 저 모용준을 꺼꾸러뜨리지 않으면 재미없다. 허나 반대로 저 난쟁이의 짧은 다리를 시작으로 작신작신 사지를 찢어 놓는다면 약속은 지킨다. 어쩌겠는가?"
왕중양의 시선은 또 다시 유일민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안타까운 몸짓을 해대며 왕중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형편이라 표정만 간절하게 그리고 있었다. 무심이 그녀의 아혈(啞穴)을 또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무심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언동은 모용준에게로 옮아 갔다.
"그댄 아직도 왕중양을 큰형님으로 믿고 있겠지? 중원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대협으로 삼고 있을 테지? 허나 아무리 유명한 대협 왕중양도 지금은 우리 금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고 있지."
"뭐라고!"
모용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곧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왕중양도 인내에 한계를 느꼈는지 드디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허튼소리! 네가 금나라 개 노릇을 한다고 중원 무림이 모두 개 노릇에 동참할 것 같으냐?"
왕중양의 노여움에도 괘념치 않은 듯 무심은 말을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왕중양, 말이란 무릇 앞뒤를 잘 재어 보고 해야 하는 법인데……."
왕중양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았다. 유일민의 존재를 일깨우려는 수작이었다. 보지 않아도 유일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두 볼 위로 흐르는 눈물과 애처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어린 소녀의 눈망울……. 왕중양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그는 좀더 시간을 갖고 무심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예상하지 않았던 빈틈이 노출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무심은 왕중양이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듯싶자 비겁하고 야비한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챵바에게 남모를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자 챵바가 유일민의 등에 칼을 꽂아 버렸 다.
"악!"
그녀의 비명 소리가 넓은 영주 벌판 위로 울려 퍼졌다.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눈과 마주친 왕중양은 차마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천하의 못된 놈 같으니라고! 네 놈이 그러고도 몽골에서 알아준다는 장사더냐? 어린아이의 등짝에 비수를 꽂는 네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노완동이 격분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챵바 앞까지 걸어와서는 슬쩍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챵바는 이자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얼굴을 노완동에게로 숙 내밀었다. 그 순간 그가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이쿠!"
어느새 노완동의 주먹이 그의 인중에 정확히 꽂혔던 것이다. 무당산(武當山) 정종권법(正宗拳法)이었다. 사람들은 혹시 이 노완동이 쓰는 권법으로 보아 무당산의 제자가 아닌가 했다. 큰 몸집에 어울리게 어기적거리며 일어선 챵바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네 놈은 원래 무당산파였구나?"
그러자 노완동이 입술 사이로 실실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흐흐, 무당산파? 그럼 이건 무슨 파인지 봐라?"
노완동의 주먹이 다시 챵바의 입 언저리에 박혔다.
"웁!"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이번엔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대단한 충격에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입 주변을 더듬던 챵바가 이마에 주름을 그으며 확인하듯 말했다.
"화산파?"
"그래? 그럼 이것은? 봐! 봐! 봐!"
노완동이 똑같은 소리를 세 번이나 내지르며 그에 맞게 연거푸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세 번 모두 다른 권법이었다. 차례대로 공동산(控동山) 칠상권(七傷拳) 중의 하나인 호낙평양(虎落平陽)과 회양문(淮陽門) 권법의 하나인 백문출입(백門出入) 그리고 산서 연씨네 필법(筆法)이 변한 쌍룡희주(雙龍嬉주)라는 권법이었다. 챵바는 계속 노완동이 뻗는 주먹에 코잔등과 두터운 입술을 내맡기고는 신통하게도 모두 알아맞추었다.
"그럼 넌…… 공동산파? 아니 회양문 권법을 쓰니까……, 어, 연씨네 권법도 있네? 아니, 그럼 도대체 어느 문파의 놈이냐?"
얼이 빠진 챵바가 횡설수설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 그럼, 알려줄테니 똑똑히 보라구."
회심의 미소를 잠깐 내비친 노완동이 힘을 다해 일격을 날렸다. 이번엔 챵바의 가슴팍을 겨냥한 결정타였다. 쿵 하는 바위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챵바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 토해졌다. 실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챵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사부가 무심의 말만을 믿고 따르라는 분부를 하자 지금껏 목숨을 걸고 지켜 왔던 것이다. 유일민에게 비수를 꽂은 것도 따지고 보면 무심의 눈짓을 읽고 그대로 행한 것뿐이었다. 그는 어떤 의미로 본다면 몸만 있을 뿐 머
리는 무심의 것을 쓰고 있는 기이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유일민의 등짝에 비수를 꽂아 넣을 때도 그는 죽지 않게 신중히 손을 쓰라는 무심이 사전에 당부한 말을 되새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단칼에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끝내 사리판단을 할 수 없는 머리를 가졌기에 무심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련하기로 이미 사람들에게 확인된 그였지만 가슴에 내리꽂힌 노완동의 주먹에 그냥 쓰러질 약골은 아니었다.
"이 놈아!"
성난 황소가 뿔을 앞세우고 달려들 듯 노완동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쇠방망이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그의 주먹은 보기만 해도 묵직하고 힘이 넘쳐났. 곧 노완동과 엉겨붙은 챵바는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쳐댔다.
이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등에 칼침을 맞고 쓰러졌던 유일민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조심조심 중심을 잡으며 몇 걸음 옮겼다.
"꼼짝 마라!"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났는지 공교롭게도 불쑥 귀낭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유일민의 막혔던 아혈을 열어 놓았다. 그리곤 왕중양을 불렀다.
"왕 공자, 여기를 보시오. 이 아이가 할말이 있다고 하오."
왕중양이 고개를 돌리자 유일민이 왈칵 참았던 눈물을 다시금 쏟았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왕 공자님, 어떡하면 좋아요. 왕 공자님이 금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으면 나를 죽인다고 해요. 그러나……."
유일민은 아픔을 참아 가며 한마디 한마디 어렵게 이어 갔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지금 자기 등뒤에는 귀낭자의 손이 버티고 있는 형편이었다. 조금만 어긋나게 입을 놀리면 끝장이라고 협박을 받은 유일민은 그러나 자신이 사랑했던 왕중양이 비열한 짓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왕 공자님, 저는 당신과 함께 한평생을 보내려고 했지요. 하지만…… 흑,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윽!"
순간 유일민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는 입으로 피를 내뿜었다. 그녀는 이들의 말을 듣지 말고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귀낭자가 이미 알아차렸는지 장을 날려 유일민의 등을 부셔 버렸다.
"이 더러운 놈들아! 어린아이에게 그게 어디 할짓이더냐?"
싸움을 멈춘 노완동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온 사방에 대고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괜히 그 앞에 있던 챵바가 얼떨결에 대꾸를 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그저 무심 공자가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담은 사람들의 눈길이 하나 둘 무심을 향해 날아갔다. 무심도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고는 자기 가슴을 텅텅 치며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그래, 모두 내가 한 일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그러면서 귀낭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유일민을 아예 죽여 버리라는 신호였다. 무심의 의도를 읽은 귀낭자가 유일민의 등에 손을 얹으며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왕 공자님, 이 아이의 최후를 보시겠어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왕중양이 화가 나서 고함을 내질렀지만 귀낭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 공자님, 이 아이나 저나 여인이긴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이 애가 갖고 있는 건 나 역시 빠짐없이 지니고 있다구요. 내가 이 아이를 대신하면 안될까요?"
싱글싱글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이죽거리던 귀낭자가 갑자기 유일민의 등을 향해 장을 날렸다. 유일민이 욱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들 잘 보았겠지? 금나라와 맞서는 자는 모두 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무심은 저 혼자 마구 지껄이더니 곧 몸을 솟구쳤다. 그는 메뚜기가 뛰어오르듯 통통 튀며 제법 멀리 날아갔다. 무심이 달아난 것을 깨달은 챵바가 또 사부의 말이 떠올라 다급히 무심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와 같이 가야지!"
챵바가 우왁스런 몸짓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무심의 뒤를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미 사람들은 무심의 행동에 격분해 있던 터라 남아 있는 챵바를 짓밟으려 했다.
"이것들이!"
챵바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미련하긴 하지만 그의 힘은 대단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하자 호걸들 몇몇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다. 겨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챵바는 무심의 뒤를 쫓아 재빨리 달아났다. 거의 동시에 쓰러진 유일민의 몸을 타넘은 귀낭자가 무리를 벗어났다.
모두들 귀낭자가 도망치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지만 귀낭자는 곧 멈칫 설 수밖에 없었다. 귀낭자 앞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자가 터억 막아선 것이다. 모용준이었다.
"듣자하니 귀낭자는 손만 쓰면 독이라는데 어디 구경 한 번 해볼까?"
모용준의 빈정거림에 귀낭자는 오히려 실눈을 떠 가며 간사스런 웃음을 내보였다.
"호호호, 제가 알고 있기로는 강남에서 여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분이라 하더군요. 침대 위에서의 기교도 대단하시다던데 저는 어떤지요?"
"그대가 있기에 무심이 더 포악스럽게 날뛴다는 것을 모르는가?"
귀낭자가 미처 대꾸를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모용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모용준으로서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그녀가 독을 쓰기 전에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불행히도 모용준의 첫번째 공격은 빗나갔다. 귀낭자와의 거리가 좀 있었기에 몸을 피할 틈을 준 셈이었다.
"어머, 정말 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실 건가요?"
귀낭자는 계속 아양을 떨어대며 모용준에게 연막을 치려 했다. 모용준은 대답해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먹을 연거푸 귀낭자의 면상을 향해 퍼부었다. 귀낭자는 요리조리 몸을 날리며 주먹을 피하기만 했다.
이때서야 한쪽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다. 그들은 적당하게 공간을 만들어준 형태로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이들은 모용준의 동작보다는 귀낭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눈길을 모았는데 이유는 그녀의 독 때문이었다. 언제 그녀가 독을 쏠지 모르는 일이었다. ㅁ약에 모용준이 그녀의 독을 피하고 엉뚱하게 구경을 하던 사람들에게 날아든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귀낭자가 모용준의 주먹 피해 살짝 주저앉았다 일어서며 입을 놀려댔다.
"씨끄럽다!"
"들으셔야 해요. 왜냐하면 흥미롭게도 공자님 집안에 대한 일이기 때문이죠."
귀낭자가 잠시 가느다란 눈으로 묘용준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디를 갔었는데 글쎄 그곳에 그럴듯한 궁전이 하나 있지 뭐예요."
모용준의 안색이 창백하게 돌변했다. 이런 모용준의 태도를 확인한 그녀가 더욱 여유 있는 어투로 계속 나불거리려 했다.
"또 혀를 놀렸다가는 아예 잘라 버리겠다!"
하며 모용준이 귀낭자를 덮쳤다.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모용준의 양팔 사이로 빠져나가며 비아냥거렸다.
"난쟁이의 장점은 몸이 빠르다는 거지. 호호호, 아무튼 조만간 다시 만날 일이 있을 테니까 오늘은 이만. 호호홋!"
간드러진 웃음을 남긴 귀낭자 역시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왕중양에게 안겨 있는 유일민은 이미 소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맥은 겨우 뛰는 듯 위태롭게 들려 왔고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가신 뒤였다. 유일민의 눈을 들여다본 왕중양은 곧 유일민이 죽을 거란 예감에 안타까웠다. 그녀의 입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내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지?"
왕중양이 그녀의 입에 귀를 바싹 대고 물었으나 그뿐이었다. 왕중양을 향하고 있는 유일민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잠시 둘러보더니 이내 왕중양에게로 고정시켰다. 겨우겨우 안간힘을 쓰며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왕중양이 얼른 귀를 더욱 바싹 갖다 댔다. 그녀가 입술 사이로 어렵게 몇 마디의 말을 흘렸다.
"난…… 난 죽어도 당신의…… 당신의 사람……."
유일민은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던 왕중양은 차라리 고통 없이 어서 눈을 감게 해달라고 간절히 속으로 빌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유일민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끝맺지를 못했다. 그녀의 입 주변은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왕중양에게 임조영에 대한 비밀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 속을 맴돌 뿐 입 밖에 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옆에 서 있던 임조영의 가슴 역시 유일민의 고통을 옮겨 받은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임조영은 한편으로는 왕중양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소식을 기다리던 왕중양이었는데 막상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입장 또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유일민이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반벽강산…… 반벽강산…… 인생은 고되고 짧…… 아……."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는 유일민의 그 작고 동그스름한 입술은 열리지를 않았다.
왕중양의 가슴으로 참았던 슬픔이 가득 북받쳤다. 슬픔이 극에 도달해서 그런지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싸늘해져 식어 가는 유일민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늘 애틋한 마음을 전하려고 애쓰던 유일민이었다. 어린 소녀였지만 그 마음은 아름다웠었다. 그러나 차마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방해하는 무리들도 사라졌고 유일민의 시체도 수습한 사람들은 다시 대사를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단 위로 오른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그는 더 한층 비분강개해진 태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가 되자고 역설했다.
"금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중원을 침범하여 창생들을 도탄에 밀어넣고 있는데 대송의 자민으로서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소이까?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칩시다!"
"왕 공자의 말이 옳소!"
"백번 천번 지당한 말이요!"
왕중양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곧 와와 하는 함성으로 무림대회의 꽃을 피우려고 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일제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금나라 기병들이 뿌우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역적 놈들을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고 있던 한 사내가 이렇게 외치자 곧 넓은 대열로 벌어졌다. 그러더니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어서 저 놈들을 막아냅시다!"
홍칠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개방 사람들은 저마다 타구봉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개방 사람들이 움직이자 금나라 기병 쪽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활을 쏘아랏!"
핑 핑 핑…… 빗발치듯 화살이 개방 사람들을 향해 쏟아졌다.
"욱!"
"악!"
화살에 벌써 개방 사람 몇몇이 고꾸라졌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저 금나라 오랑캐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 중원 사람들은 끝장이다. 우리는 싸우다 죽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개방의 장로인 노옥기(魯玉基)가 사람들을 향해 다짐했다. 이 노옥기가 선두에 서서 돌진해나가자 개방 사람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타구봉을 휘둘러댔다. 와아 하는 함성이 영주 벌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시 장대비 같은 수많은 화살들이 쏟아졌다. 개방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섭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만 선봉에 서서 타구봉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던 노옥기가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뒤에서 그를 따르던 개방 사람들이 얼른 쓰러진 노옥기를 뒤쪽으로 옮겨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군가 다가와 화살을 뽑으려 하는데 홍칠이 막았다.
"화살을 뽑는 즉시 장로는 죽게 돼!"
노 장로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홍칠을 찾았다.
"방주님, 저 개만도 못한 금나라 놈들에게 절대로 굴복해선 안 되오."
"염려마시오. 우린 하나가 남고 그 하나가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싸울 것이오."
홍칠이 새롭게 의지를 다지자 개방 사람들이 하나로 입을 모았다.
"우리들도 최후의 하나가 될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습니다!"
노 장로가 손을 허공으로 내저으며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골, 내 아들에게…… 내 아들에게 금나라 놈들과 싸우다 죽었으니 꼭 원수를……."
노 장로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노 장로가 말한 아들이란 개방의 사대 제자인 노유각(魯有脚)을 말한 것이다.
홍칠은 벌개진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끈 쥐어진 그의 주먹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기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개방 사람들은 계속 화살에 하나 둘 넘어갔다. 금나라 기병들은 조금 거리를 둔 상태로 화살만 퍼부어 대고 있었기에 개방 쪽이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왕중양 앞으로 온 모용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큰형님!"
왕중양도 모용준의 목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를 절감했다. 굳게 다문 입을 약간 움찔거리던 왕중양이 화살에 쓰러져 가는 개방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래, 저 금나라 오랑캐들을 어떻게 쳐없앨 수 있겠는가?"
모용준이 격분한 가슴을 주체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장수로 보이는 놈을 먼저 쳐야 나머지들이 물러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앞서 누군가 금나라 기병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게 아닌가. "야앗!"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느새 공중으로 튀어오른 한 물체가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나를 막는 놈들부터 목을 따줄 것이다!"
드높은 공중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대단한 내공이었다. 그 물체가 바닥으로 막 내려앉을 때였다.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치솟은 그는 가까이 있던 금군 중 한 놈의 머리를 단칼에 날렸다. 놈의 머리는 바위처럼 데굴데굴 굴러 저 멀리 달아났다. 그가 비로소 땅에 사뿐히 내려앉자 왕중양의 눈빛이 빛났다. 얼굴을 가린 여협이었다. 반벽산장에서 만난 무공이 뛰어난 복면의 여인, 그러나 왕중양은 그 이상은 알지를 못했다. 왕중양은 여협의 무공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라움에 넋을 놓고 있던 금나라 장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활을 더 쏴라! 어서!"
이번엔 복면을 한 여협, 즉 임조영에게로 화살이 쏟아졌다. 임조영이 얼른 몸을 피하긴 했지만 차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창을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임조영은 곧 지쳤다. 그녀는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검으로 자신을 겨우 가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또 한차례 하늘을 덮을 듯한 화살들이 임조영에게로 발사되었다. 그녀는 검을 회전시키며 화살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중 화살이
한 개가 득달같이 날아와 다리에 푹 박혔다. 그녀가 한쪽으로 막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간다!"
왕중양이 뛰어들었다. 그가 쓰는 경공은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른 절기였다. 이미 그는 선천신공에 익숙해진 몸이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공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그는 임조영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는 즉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하지만 왕중양이 향하고 있는 곳은 금군의 장수 막아발(莫兒勃)이 있는 쪽이었다.
막아발은 중원 무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극도로 거만한 작자였다.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왕중양을 보자 깜짝 놀랐다. 다급해진 그가 부하들에게 화살로 방어하라는 말을 외치려는데 번쩍하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치듯 엄청난 기운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으로 내리꽂히는 게 아닌가. 그 괴력이 떨어진 곳을 보니 한 길은 족히 파여 있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요행히 비껴 갔기에 망정이지 머리에 맞았더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사지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뒤늦게 그는 왕중양이 내뿜은 장력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기 앞으로 날아오던 왕중양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어서 활을 가져와랏!"
곧 곁에 있던 친병(親兵)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활을 대령했다. 이 활은 대여섯의 장성들이 힘을 모아 당겨도 끄덕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대단한 활이었다. 활을 건네 받은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왕중양을 찾았다. 왕중양은 엉뚱하게도 벌써 반대쪽에 내려 유유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왕중양 곁에는 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비스듬히 엎드려 있는 임조영도 보였다.
"네이놈! 어디 이 살에 저승 구경이나 하거라!"
활에 걸린 화살 역시 보통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겨냥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로 서둘러 그 화살을 날렸다. 이 막아발의 활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있는 실력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도 날아가는 매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금군의 신궁수(神弓手)였다.
모두들 화살이 날아가는 쪽을 주시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막 왕중양의 가슴에 꽂힐 찰나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왕중양은 화살촉이 가슴에 박히려는 순간 가볍게 한 손으로 툭 내쳤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방향을 튼 그 화살이 왕중양의 무공에 감탄해 입을 벌리고 서 있던 한 금나라 군사의 입 속에 박힌 것이다. 놈은 졸지에 당한 일이라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자신의 화살이 헛물만 켜자 대노한 막아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너를 맞히지 못하면 네 놈의 아들이다!"
다시 화살을 뽑아든 그가 시위에 천천히 올려 놓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살기에 젖어 이글이글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니!"
그 불길이 일순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버티고 서있던 왕중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화살에 맞아 고통을 참고 있는 임조영만 있을 뿐 왕중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막아발이 막 고개를 들려는데 다시 청천벽력같은 굉장한 소리가 귀청을 뚫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의 왼쪽 어깨를 스쳐 땅에 꽂히긴 했지만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막아발은 그 충격으로 저도 모르게 방향 없이 시위를 놓았다. 피웅 하며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았다. 하지만 구름에 닿을 듯 치솟은 왕중양이 내려오면서 검으로 그 화살을 반으로 보기좋게 반으로 갈랐다. 촉이 달려 있는 쪽은 땅에 떨어져 깊숙히 박혔고, 다른 한 쪽은 어디론가 까마득히 날아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윽고 땅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왕중양이 검으로 닥치는 대로 금군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금군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떨어져 굴렀다. 왕중양의 검은 보이지 않았고, 휙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때마다 영락없이 금군의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금군들은 곧 전의를 잃고는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말을 타고 있던 기병들과 그 뒤를 따르던 군사들 할 것 없이 우왕좌왕하며 제 살길을 찾기에 바빴다.
때를 기다려 홍칠이 소리쳤다.
"추격이다! 저놈들의 목을 남김없이 쳐라!"
금군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던 무림 호걸들은 신명이 나 앞으로 돌진해갔다. 이들은 각기 손에 들고 있던 병장기를 휘둘러 금군의 목을 잘랐다. 대열에서 물러나 있던 막아발이 눈을 부라리며 왕중양을 향해 비황대우(飛惶大羽)를 한 발 쏘았다. 왕중양은 무려 여섯 명의 금군을 상대로 도륙에 정신이 팔려 있어 미처 그 화살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살은 왕중양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얏!"
비황대우 화살은 왕중양의 몸에 닿기 직전에 툭 힘없이 떨어졌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고 번개같이 달려온 임조영이 막아낸 것이다.
"고맙소!"
왕중양의 말에 사실 임조영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그런 것이었지만 생면부지의 남에게 감사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막아발은 매번 쏜 화살이 허탕을 치자 고삐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말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를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이한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던 막아발의 눈이 휘둥그러졌다. 체구가 우람한 한 사내가 말꼬리를 잡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 막아발은 약이 올라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내빼긴 어딜 내빼려고 그래?"
노완동이었다. 더욱 애가 탄 막아발이 힘껏 말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히히힝! 말이 별안간 앞발을 들더니 발버둥을 쳤다. 말은 뒷발이 땅에 박혀 있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막아발의 눈이 더욱 튀어나올듯 커지고 만 것은 이때였다. 자세히 보니 말 뒷다리에 예리한 비수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은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버둥거렸던 것이다. 노완동이 잡고 있는 말꼬리는 말에게 더욱 고통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이 치사한 놈아! 그래 내 말에 칼을 꼽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막아발이 악에 바쳐 낭아봉(狼牙棒)을 노완동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높이 쳐들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노완동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낭아봉이 노완동의 정수리에 내리꽂히기 직전이었다. 임조영에게 한 번 도움을 받은 왕중양이 똑같이 몸을 던져 이번엔 노완동을 구했다. ㅉ 굉음을 내며 막아발의 낭아봉이 왕중양의 검에 걸렸다. 자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놀란 노완동이 엉겹결에 잡고 있던 말꼬리를 놓쳤다. 그러자
말이 사납게 날뛰며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 히히잉! 히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말이 방향 없이 날뛰자 타고 있던 막아발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어, 어!"
막아발은 한동안 미친 듯 날 뛰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허공으로 한차례 솟구치더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품속에 있던 비수를 꺼내든 노완동이 그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휘젓던 막아발의 명치에 그대로 박혔다.
"으……."
막아발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러자 기세가 꺾인 금군은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전사자만을 남기고 멀리 물러가는 금군을 바라보던 홍칠이 입을 열었다.
"왕 공자님, 왕 공자님의 무공은 천하의 으뜸입니다. 우리 중원이 금나라를 막아내는 일에 공자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왕중양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손을 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 마십시오. 나는 덕도 없고 능력 또한 부족하여 그런 대사를 이끌 수가 없소이다. 제 생각으로는 개방에서 영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곁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웅성웅성 저마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으로 한마디씩 걸고 넘어졌다. 이들은 아직 무심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홍칠에 대한 의문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가뜩이나 세력이 비대해진 개방이 주도를 한다면 천하 제일의 무리가 될 것 같아 미심쩍은 태도를 비쳤다.
그중 한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정중히 권고했다.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자님을 보면서 저희 결심했소이다. 두말 마시고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전멸하는데 앞장을 서 주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왕중양이 맹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칠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전음입밀공을 써 왕중양에게 전했다.
"왕 공자님이 사양하신다면 이번 대회는 무산돼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한 죄를 짓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중양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가 망설여졌다. 왕중양도 홍칠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허나 과연 내가 중원 무림의 맹주가 될 자격이 있겠소이까?"
"우리 36만의 개방이 왕 공자님의 뒤를 받치고 있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소? 그리고 공자님의 무공을 크게 떨치지 않고 그대로 썩힐 생각입니까?"
왕중양이 한동안 두 눈을 지긋이 감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의를 생각한다면 기꺼이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쳐부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왕중양이 이윽고 눈을 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왕중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좋소!"
비로소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옆에 있던 홍칠도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중양이 우리 천하 무림의 맹주이다! 왕중양을 옹호하자!"
한 사내가 외치자 모두들 한뜻으로 왕중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왕중양은 이들과 삼혈지맹(三血之盟)을 맺고 다 함께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해 맹세를 했다.
"왕중양을 비롯한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중원의 금수강산이 금나라의 마수에 하루하루 썩어 들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일 영주 들판에서 이 맹세를 하나이다. 우리는 종남산 사람 왕중양을 맹주로 삼고 일심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 물리치며 우리 대송 강산을 지키고 수복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늘은 가차없이 천벌을 내려 엄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환성을 내질렀다.
차츰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왕중양이 단 위로 뛰어올라 손을 들었다.
"우리 금수강산이 금나라에 유린당하고 있는 이때, 나 왕중양은 이제부터 여러분과 더불어 한 뜻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없애겠소이다. 만약 오랑캐들을 치지 못하면 나 왕중양은 스스로 활사인 묘에 들어가 영원히 빛을 보지 않겠소이다!"
이같은 왕중양의 결의에 찬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격정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왕중양의 결심에 긴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미 금나라가 대송의 심장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독을 내리고 있는 처지인데 과연 이 무리를 이끌고 대의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은……!"
왕중양의 안색이 묘하게 변해 갔다. 우연히 임조영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에 맞고 또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날리는 가운데 임조영을 감추고 있던 면사포가 벗겨 버렸던 것이다. 임조영 역시 경황이 없어서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 여협이…… 나의 셋째 동생이란 말인가!'
왕중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굳은 상태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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