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1

3학년2반 | 2022.02.25 07:02:40 댓글: 0 조회: 79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021

화산논검(華山論劍) 제19권 7부 신조협 양과후전 I
제목: 화산논검 제19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번역을 마치고
작가 소개
제1장 떨어지는 꽃잎
제2장 협객행(俠客行)
제3장 거와회의(巨蛙會議)
제4장 사주상박(蛇蛛相拍)
제5장 취중에 한 결혼
제6장 홧김에 선택한 남편
제7장 흩어진 사랑
제8장 숲속의 혈투

제1장 떨어지는 꽃잎
바람 자고 꽃잎 지는
이 밤에 머리 빗는 그녀
만사가 여의치 않아
눈물 먼저 앞서네
강물 위에 봄빛은 무르익어
뱃놀이 좋다지만
아무리 큰 배라도
이 많은 수심 다 싣지는 못하리
미풍(微風)이 스칠 때마다 물 위엔 잔 물결이 일고 방원(方圓) 몇 리에 핀 연꽃들이 살랑거
린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이라 이제 연꽃도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사람을 취하게
할 듯한 그윽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때 연꽃밭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서 애련한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배 위에 있는 네 명의 여인네는 연꽃을 따며 계속 노래를 불
렀다. 그 노래는 바로 남송(南宋)의 유명한 여류 시인 이안거사(易安居士) 이청조(李淸照)가
지은 무릉춘(武陵春)이었다. 연꽃 따는 일과 그 노래는 별반 관계가 없지만, 그 애련한 정서
만은 배 위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는성 싶었다.
'무릉춘'은 쉰 살의 이청조가 금화(金華)에 은거할 때 지은 사(詞)의 제목이다. 첫째 수는
꽃잎이 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늙어감을 서글퍼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는 강물 위의 봄빛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무거워 봄놀이가 내키지 않음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물론 마지막 두
행은 과장법을 쓴 것이리라. 후대의 '서상기(西廂記)'에도 '인간 제상의 번뇌가 가슴 속에
가득하거늘 크고 작은 저 수레들로 어찌 모두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시구가 있다. 이 시구
는 바로 이청조의 무릉춘을 본뜬 것이리라.
일찍이 이청조는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다. 불행한 일생이 시 구절
마다 애상을 깃들게 했고 그러기에 그녀의 시는 애절한 정서로 뭇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인들이 그녀의 시를 애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때는 남송의 이종(理宗) 황제가 보위에 앉아 있던 시기였다. 그때의 강남 일대는 비교적 평
화스러웠다. 이곳은 바로 가흥(嘉興)의 남호(南湖)! 호숫가엔 푸른 수양버들이 그 가지를 물
위에 치렁치렁 드리우고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중 한 버드나무 아래 회색의 승복을 입
은 한 비구니가 홀로 서서 호수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구니의 나이는 마
흔살 가량 돼 보였으나 평소 얼굴에 꽤 신경을 쓴 탓인지 그 피부는 마치 서른살 이내의 처
녀 같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따운 얼굴에 비해 그녀의 눈빛은 싸늘함과 날카
로움을 담고 있었다.
비구니는 호수 위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가볍게 한숨 짓고선 시를 읊조리듯 이렇게 말했
다.
"이번 길 한번 가면 즐거움도 허사여라. 그 즐거움이 아무리 많다 한들 내 그 누구와 나눌
손가."
그리고선 봇짐을 메는데 그 속에선 병장기들의 부딪치는 쇳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비구니 뒤편으로 이삼 장 떨어진 곳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한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고
리눈에 짙은 눈썹부터 위풍당당하게 보이는 그 사내는 왼손에 낭아봉(狼牙棒)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낭아봉의 무게는 적어도 사오십 근은 돼 보였다. 그 무거운 병장기를 나뭇가지처
럼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다니 그것만 보아도 이 사내의 힘이 신력(神力)에 가까움을 충
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사내에겐 그저 그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천신(天神)
과 같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비구니가 돌아보며 가볍게 손짓하자 그 사내는 곧
그녀를 따라나섰다. 비구니와 그녀의 노복인 듯한 그 사내는 눈 깜짝할 순간에 어디론가 사
라져버렸다.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네 여인들 중 둘은 이팔 청춘의 소녀들로 보였는데, 그들은 깔깔대
며 웃고 재잘거리면서 연꽃을 따고 있었다. 한편 다른 두 여인은 모두 서른을 넘긴 중년에
가까운 나이인 듯했다. 그 중 한 여인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추녀였고 다른 한 여인은 경국
지색의 미인이었다. 그 노래는 바로 이 미인이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를 끝마친 미인은
가볍게 탄식섞인 소리를 냈다.
"벌써 20년이 흘러가다니……. 휴∼ 그이는 아직 살아 계실는지……."
그 말에 옆에 있던 추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씨,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당시 경성(京城)에서도 그 이름이 자자한 풍류소왕
(風流小王)이 아닌가요? 그런 방탕한 사람을 어찌 아씨는 아직도……."
그리고선 그 추녀는 한숨을 크게 쉬는게 아닌가.
그 미인의 이름은 미랑(美娘), 바로 대금국(大金國) 왕공의 딸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그녀는
이렇게 몸종 추동(秋桐)만을 데리고 가흥 땅에 와서 이름을 바꾸고선 숨어 살고 있었던 것
이다. 그녀의 곁에 있는 그 추녀가 바로 추동이었다.
추동은 비록 얼굴은 박색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쭉 미랑과 함께 지내면서 미랑의 수족 노릇을
해왔고, 또 무예도 익혀서 미랑에게 치근덕거리는 음탕한 사내들을 여러번 혼찌검 낸 적도
있었다.
배 위에 있는 다른 두 소녀들은 미랑이 이곳에 숨어 들어 와서 구한 몸종 청아(靑兒)와 홍
아(紅兒)였다.
미랑과 추동이 이곳 남호에 있는 육가장(陸家莊)에 왔을 때 그들은 사고무친의 외로운 처지
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장원주인 육입정(陸立鼎) 부부가 도와줘서 그 덕분에 집을 짓고 이곳
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0여년 전에 육입정 일가는 마녀 적련선자(赤練仙
子) 이막추(李莫秋)의 마수에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그때 추동은 육입정을 도와 마녀 이막추
를 막으려고 달려 갔으나 도착할 무렵 이미 육입정 일가는 한 줌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연꽃이 배에 가득차자 청아가 물었다.
"이만하면 됐지요?"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기슭에 닿아 여인들이 막 내리려는데 추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저기 좀 보세요."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린 미랑은 하마터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강 기슭 위 버드나무 아래에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는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나 있었지만 아주 영준하고 늠름하게 생긴 사내였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산전 수전을 다 겪은 노인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 사내의 오른쪽 소
매가 가느다란 바람에도 나풀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외팔이가 틀림없었다. 또 괴이하게도
그 사내는 허리에 목검(木劍)을 차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사람 어깨만큼 될 듯한 커다란 새
한마리가 있었다. 그 새는 부리가 칼처럼 날카롭고 눈매가 창칼같이 매섭게 보였는데 날갯
죽지엔 깃털이 거의 다 빠져 왠지 메마른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날개로 과연 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차리자 왼손으로 얼굴을 쓱하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냉혹하게 변했다.
미랑은 크게 놀랐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추동은 미랑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씨, 놀라지 마세요. 분명히 저 사람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쓴 것이 틀림없어요."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난…… 난 저 사람의 얼굴이 어쩐지 꼭 꼭 어쩜 그렇게도
닮을 수 있을까."
춘동은 미랑의 말이 당치않게 들렸다.
"세상에 모습이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게다가 나이부터 맞지 않잖아요? 우리네
효비(曉非)보다 몇 살 더 많은 나이인 듯한데요."
추동의 말에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미랑은 감히 기슭을 올라 그 사나이의 곁
을 지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외팔이 사내의 이름은 바로 양과(楊過)였다.
그해 절정곡(絶情谷)의 절벽에는 소룡녀(小龍女)가 남겨놓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16년 후 여기서 만나요. 부부 간의 깊은 정을 잊지 말고 약속을 어기지 마세요. 소룡녀가
부군 양과님께 부탁하는 글이니 부디 잊지 마시고 꼭 만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때 소룡녀는 곽부(郭芙)의 독침에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중하게 되었다. 그녀는 절벽에 글
을 남기고선 홀연히 자취를 감춰 소식이 두절되었다. 황용(黃蓉)은 양과가 절망에 빠져 자살
이라도 할까봐 소룡녀는 매 16년 만에 중원 땅을 찾아온다는 남해신니(南海神尼)를 만났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양과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소룡녀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말을 믿
기로 했다. 그때 양과는 고묘파(古墓派)의 옥녀심경(玉女心經)을 동문 사매인 육무쌍(陸無
雙)에게 전수해주고서는 정영(程英) 그리고 육무쌍과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그렇게 함으로
써 그는 자신을 따라 다니는 두 여인의 연정을 끊어 버린 후 어느 날 밤 훌쩍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후 검마(劍魔) 독고구패(獨孤求敗)가 한때 은거해 있던 곳에 아른 양과는 신조(神
雕) 독수리와 함께 검법을 수련했다. 신조 독수리는 그를 동해로 데리고 가서 거친 파도 속
에서 검법을 연마하게 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양과의 지팡이와 목검은 당년의 독고구
패를 능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검술을 천하 그 누구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독고구패는 자비심에 검을 궁곡(窮
谷)에 묻어 버렸을 것이라고 양과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닷가에서 검술을 익히던 양과는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뱃사람들에게 남해도의 남해신니를
보지 못했느냐고 그저 물어보았다. 그 몇 년간 물어 본 뱃사람만 해도 천 명은 더 되련만
남해신니를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소룡녀의 소식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양과는 16년이 되기 전에는 소룡녀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바람이 몰아쳤다. 양과는 급기야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누더
기를 걸치고 허리에 목검을 찬 후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서쪽으로 떠났다. 가흥에 다달아
서호의 경치를 다시 보자 '산천은 의구하되 사람만은 달라졌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육가장에서 문전걸식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폐허가 된 육입정의 집터를 바라보니 이곳
에서 곽정(郭靖)과 화용을 처음 만난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오른팔을 끊어버린 곽부까지 생
각나자 감회가 새로웠다.
의매(義妹) 정영과 육무쌍의 어린 시절 모습도 떠올랐다. 철부지였던 그들은 커서 제각기 다
른 길로 나아갔다. 육무쌍은 적련선자 이막추를 따라갔고, 정영은 동사(東邪) 황약사(黃藥
師)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육무쌍과 정영은 양과에게 연
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때 이미 양과는 소룡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들의 연정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이 두 여동생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모두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까?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가슴 아파하는 양과는 지금 천하의 연인들이 영원히 잘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추동은 미랑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기슭에 서 있는 그 사람을 수상쩍게 여기면서 말했다.
"아씨, 그러면 저 멀리 가서 기슭으로 오르시는 것이 어떨까요?"
미랑은 그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 무섭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에게 오래도
록 가슴 속에 간직해둔 뭔가를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하렴."
그런데 갑자기 방울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더니 말 한 필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말에
탄 사람이 외쳤다.
"어머니, 저예요. 제가 돌아왔어요."
양과가 멀리서 보기에도 그 사내의 기마술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정 정도
의 무공을 갖추고 있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오는 말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것도 그랬고 말이 뛰어오를 때마다 경공을 써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솜씨도
그랬다. 도화도에 있을 때 양과는 언젠가 강남칠협(江南七俠)의 우두머리인 비천편복(飛天
) 가진악(柯鎭惡)에게서 마왕신(馬王神) 한보구(韓寶駒)의 기마술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마왕신의 기마술에 비하면 이 사내의 솜씨는 발끝에도 못미치리라.
말을 타고 달려온 사내는 미랑의 아들 양효비(楊曉非)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괴한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본 미랑은
괜히 그 괴한의 노여움을 살까봐 지레 겁이 나서 외쳤다.
"얘야, 그 괴한 가까이 가지 말아라!"
그 말에 양효비는 오히려 씨익하고 웃었다.
"괴한이라구요? 그렇다면 제가 한번 가 보죠. 도대체 뭐가 어쩌길래 괴한이지? 어라, 흉측하
게 큰 새도 한 마리 있네. 히히히, 이거 재미있는데."
그러면서 그 사내는 말을 달려 양과의 뒤쪽으로 바싹 다가갔다.
양과는 그들 모자가 자기를 괴한이라고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옛날의 성질
같았으면 벌써 화를 내며 다가가 욕을 퍼부었든가 주먹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몇년
동안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낼 고생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신조 독수리의 도움으로 수
년 간 수련해온 그였기에 이전의 난폭했던 성질이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게다가 대협 곽정
과 일등대사(一登大師)의 넓은 도량도 배워 인간사 수많은 일에 매우 담담한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10여년 후 사랑하는 아내와 다시 만날 일을 제외하고선 그의 관심을 끄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곁에 있는 신조 독수리는 그렇지 않았다. 짐승인 신조 독수리는 양과의 무심한 태도
와는 달리, 뒤쪽에서 나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날개를 확 펼치며 마주섰다. 지난
날 검마 독고구패를 따라다니며 심오한 무공을 배워 고수의 경지에 이른 신조 독수리! 그
무공은 보통의 무예 고수들이 따라갈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양과마저도 신조 독수리의 도
움으로 신공(神功)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조 독수리는 천성적인 신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리고 그 날개엔 고수들의 내공에 못지 않은 힘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니 그 힘을 어찌
말 따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신조 독수리가 칠팔보의 거리에서 날개를 한번 퍼덕거리자 거
센 광풍이 일었다. 놀란 양효비의 말은 뒤로 몇 걸음을 비틀거리며 물러나면서 울부짖었다.
말에 탄 양효비도 그 광풍에 얼굴이 따끔따끔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크'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양효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이
렇게 신기한 짐승이 있다니? 그는 말에서 성큼 뛰어내려 신조 독수리 가까이로 가서 웃었
다.
"대단한 새로군. 어디 네게 무슨 재간이 더 있는지 보자구."
신조 독수리는 양효비를 매섭게 쏘아보며 낮은 소리로 몇 번 울었다. 그것은 마치 양효비에
게 발하는 경고 같았다. 그러나 양효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조 독수리의 날개를 잡으
려고 했다. 그러자 신조 독수리는 새된 소리를 내며 한쪽 날개로 양효비의 손을 내리쳤다.
양효비는 쇠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손이 저려서 자기도 모르게 급히 몇 발짝을 뒤로 물러섰
다.
"얘야, 어서 피해 어서!"
배 위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미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짐승과 싸우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요, 집으로 가."
추동도 소리쳤다.
추동은 양효비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무공을 가르쳐 왔다. 그러니 벌써 십오 년이 되는 셈
이다. 추동은 양효비의 스승이 틀림없지만 출신이 양씨가의 노복인지라 양효비에게 제자의
절을 결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효비는 추동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들었다.
미랑의 독자로 자라면서 미랑과 추동의 사랑만을 받아온 양효비이기에 그 성미가 짓궂고 제
멋대로인지라 지금 어머니와 스승이 고함치는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공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의 고초를 겪을대로 겪은 미랑은 '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咸器)'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의 성미를 바로잡기 위해 매질이라도
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애틋한 생각이 들어 차마 손을 대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어
나이가 지긋한 유생을 모셔다가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 유생도 며칠 못가 손 들고 떠나 버렸
다. 미랑은 계속 선생을 물색해 보았지만 모두 가르치기도 전에 떠나가 버렸다.
추동은 무공이 출중한 스승을 모셔다가 양효비를 다스림이 어떻겠냐고 건의하기도 했지만
여인들만 있는 집에 남정네가 들어오면 불편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만일 호색한이 들어오게
된다면 더 큰 일이 아닌가? 그래서 양효비를 밖으로 내보내 스승을 찾아가 공부하게 해볼까
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또 미랑은 어린 아들을 먼 곳으로 내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차마 떠
나보내지를 못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에 양효비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이 되었던
것이다. 미랑과 추동은 여전히 짓궂고 장난만을 일삼는 이 아이를 가르칠 마땅한 방법을 찾
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양효비는 가흥성 안에 들어가 놀다 오는 길이었다. 아직 그 흥이 덜 가셨는데 사람 키
만한 독수리를 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는 다시 몸을 가누고선 신조 독수리에게 덤볐
다.
애초부터 신조 독수리는 날개로 막기만 할 뿐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만하
면 상대방이 알아서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양효비
는 그 잘난 자신의 무공을 믿고 마냥 덤벼들었던 것이다. 신조 독수리도 화가 났는지 이번
에는 오성(五成)의 공력으로 양효비를 내려쳤다. 양효비는 그만 한 장이나 날아가 땅으로 곤
두박질치며 나뒹굴었다.
양효비의 눈 앞에 별들이 어른거렸다. 그제서야 신조 독수리가 보통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양효비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신조 독수리가 아니라 양과에게
다가갔다.
그는 신조 독수리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 새를 제게 팔지 않겠어요? 돈은 달라는대로 드릴게요. 우리 집에 은자가 많다니까요."
미랑과 추동이 다급하게 부르고 있는데도 그는 신조 독수리만 보면서, 저 새를 사서 친구들
에게 자랑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양과는 이 무지한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으나 신조 독수리를 사겠다고 수
작을 부리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신물(神物)인 이 독수리는 내게 사부와 같은 존재인데, 뭐 팔라
고?' 양과는 양효비를 노려보았다.
비단적삼에 옥대를 두르고 옥으로 된 패물까지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부유한 집안임이
분명했다. 청년은 단순호치(丹脣晧齒 : 붉은 입술과 흰치아)의 영준한 모습이었지만 눈꼬리
엔 어딘지 모르게 경망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열여덟이나 아홉이 될까 말까한 녀석이 세도와 재산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다니, 경망스러
운 녀석!'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문전걸식하며 자란 양과는 세도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거만한 부
잣집 자식들이 제일 미웠다. 양효비네 모자가 자기한테 한 불쾌한 언사를 떠올린 양과는 이
녀석의 못된 버릇을 좀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양효비는 나름대로 양과가 독수리 값을 높이 불러 단단히 한목 잡으려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양과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게 아닌가.
"여보세요. 당신은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거요?"
그러면서 양과에게 눈길을 던지던 양효비는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양과의
얼굴이 어느새 죽은 시체의 얼굴처럼 싸늘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
기 어머니와 추동이 양과를 괴한이라고 부르던 말이 생각났다. 양과의 얼굴은 정말 괴이하
게 보였다.
양과의 모습에 놀란 양효비는 몇 걸음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조금 전처럼 시건방지게 굴지는 못하고 실실거리며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
었다.
"헤헤…… 헤헤, 여보세요. 내 말대로 할테요? 저 짐승을 내게 팔란 말이오."
양과는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얼마에 살텐가?"
'이 괴한이 이제서야 한목 단단히 잡으려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는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글쎄, 그거야 흥정에 달려 있지. 얼마면 되겠소?"
'저 못난 새를 지가 받으면 얼마나 받겠어? 은자 천 냥이면 감지덕지하겠지.' 양효비는 이
렇게 생각했다.
양과는 더욱 화가나서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웠다. 몇 년 동안의 수련을 통해 성미가 무척
온순해진 양과였지만 천성을 그 몇 년에 완전히 고칠 수는 없었다. 오늘 이런 일을 당하니
또 옛날 그 성미가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못된 성질이 어쩌면 이렇게도 어렸을 때의 나와 비슷한 것일까? 그런데 이 녀석
은 너무 건방져.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군.' 하면서 마음 속으로 벼르고 있었다.
양과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운 것을 본 양효비는 싱긋 웃었다.
"은자 열 냥을 달라구요? 그거야 어렵잖은 일이죠."
그리고는 품 속에서 스무냥짜리 은괴 하나를 꺼내어 양과에게 훽 던졌다.
"거스름 돈은 가지시오."
방금 독수리에게 당한 양효비는 보복을 할 셈으로 은괴를 던질 때 마치 암기(暗器)를 던질
때처럼 암암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양과가 그것을 그렇게 손쉽게 받아낼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건 몇 냥 짜리지?"
양과가 물었다.
"스무 냥 짜리요. 당신이 요구한 값보다 배나 많은 셈이지."
"내가 부른 값이 얼마인지 알았느냐?"
"열 냥 아니었소? 그 잘난 짐승, 고작해야 은자 석 냥 값어치도 안 될 거요. 그만하면 장사
잘하는 셈이지."
그러자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른 값은 열 냥이 아니야."
"그럼, 백 냥?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이 사람 누구에게 사기를 치려고? 너 사람 잘못 본거다.'
양효비는 속으로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양과가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닌가.
"내가 부른 값은 10만 냥이야, 10만 냥!"
그 말에 양효비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앙천대소했다.
"여보시오, 괴한! 10만 냥이면 육가장도 몽땅 살 수 있겠소. 그만 합시다. 난 당신과 이런 사
소한 일로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으니 독수리를 남겨두고 돈이나 챙겨 가도록 하시오. 그렇
지 않으면 성미 사나운 우리 형제들에게 된통 당할 것이오. 일 터지기 전에 어서 가시오."
그러나 양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부른 값은 10만 냥이니, 한푼도 빠져선 안된다. 그것도 현금으로 말이다. 어음 나부랭
이는 싫어."
그 말에 양효비는 배알이 꼴렸다. 이 인간이 주먹 맛을 한번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
가. 그는 방금 전 가흥성의 도박장에서 딴 쉰 냥 짜리 은괴 두 개를 꺼내서 각각 양손에 쥐
었다. 그리고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독한 생각을 품었다. 이른바 소리장도(笑裏藏刀)의 계
책이었다.
"십만 냥이라면 십만 냥 주지. 자 그럼 은자를 받으시오."
그러면서 양효비는 두 손에 쥐고 있던 은괴를 힘껏 양과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양과는 양효비가 힘껏 던진 은괴를 보고선 아까 던진 은괴는 맞아봐야 기껏 멍이나 들겠지
만, 이번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 못된 짓을 하
다니.' 그러면서 양과는 오른쪽 소매를 휙하고 저어 은괴 둘을 소매 안으로 받아넣어버렸다.
양과의 옷소매가 한번 펄럭이는가 싶었는데 자기가 던진 은괴가 보이지 않자 양효비는 잠시
어안이벙벙해졌다. 그는 은괴가 양과를 지나쳐 수풀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면서 추동과 어머니가 자신의 실수를 보았다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앞에 있는 괴한이 자기를 우습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릴 적부터 승부욕이 강했던 양효비인지라 참을 리 만무했다. 그는 냉큼 양과 쪽으
로 뛰어들며 왼손을 내밀자 마자 오른쪽 주먹으로 양과의 가슴을 내질렀다. 흑호도심의 초
식이었다. 이것은 추동에게 배운 것으로 고급초식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시정
잡배들과의 싸움에서는 한몫을 단단히 하는 주먹질이었다.
건방진 양효비였지만 머리는 총명해서 이 흑호도심의 초식이 상대방이 간파하기 어려운 것
임을 알고는 평소 열심히 익혀 두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제법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있었다.
왼손은 속임수였다. 하지만 얼핏 보면 진짜 같아서 싸움질에 이골이 난 양과마저도 그 속임
수에 넘어갈 뻔했다.
물론 절세 무공을 지닌 양과가 양효비 따위를 안중에 둘 리가 없었다. 그는 양효비가 왼주
먹을 쓰자 북파권법의 충천포(沖天暑) 초식을 쓰는 것으로 알고 막으려 했는데 급기야 양효
비의 오른쪽 주먹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정요금(程 金)의 삼판부(三板斧)라
고나 할까. 보통 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양효비에게 속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양효비의 주먹이 양과의 가슴팍을 내 질렀으니 양효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엎어졌겠지' 하는 양효비의 생각과는 달리 양과는 얻어맞고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
니라 양효비의 주먹은 마치 솜뭉치를 내지른 것처럼 맥없이 쑥 들어갔다. 이상한 느낌이 든
양효비는 급히 주먹을 걷어들이려 했지만 그 주먹은 마치 쇠고리에 걸린 것 마냥 단단히 붙
잡혀 있었다. '큰일났다!' 다급해진 양효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이고, 이 자식이 사악한 술수를 쓰는구나."
그러면서 양효비는 왼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그러나 그 주먹도 양과의 허벅지에 박혀 빼낼
수 없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술수냐? 어서 놓으란 말이다."
양효비는 또 오른발을 날렸다. 그러나 마치 돌기둥을 찬 것처럼 자기 발만 아팠다. 얼마나
아픈지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만 내뱉을 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과는 왼손으로 뒷짐을 진 채 양효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조 독수리는 양효
비의 우스꽝스런 꼴을 보고 비웃기나 하는 것처럼 꾹꾹하는 소리를 냈다.
"이 놈의 짐승마저 나를 비웃다니?"
그리고는 양과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어디서 굴러온 홀에미 자식이냐? 빨리 놔. 내가 추동을 시켜 네 놈의 정강이를 분질러 놓
아야 정신을 차릴래?"
그 말에 양과는 두 눈을 부라렸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마저 여읜 양과는 남
들이 자기를 홀에미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게다가 자기가 사부처럼 모시
는 신조 독수리에게마저 욕을 해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양과는 배와 허벅
지를 밖으로 불쑥 내밀면서 내공을 뿜어냈다. 그 바람에 양효비는 석자나 튕겨나가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 속에 떨어져 버렸다.
그것을 본 미랑은 황급히 청아와 홍아를 시켜 배를 젓게 해 아들에게로 다가가 그를 배 위
로 건져올리게 했다. 배 위에 오른 그는 찔끔거리면서 추동에게 괴한을 혼내달라고 야단이
었다. 아들의 손등이 찐빵처럼 부은 것을 본 미랑은 가슴이 아팠다.
대협 곽정의 가르침을 받고 며칠 동안 연구해 본 양과는 전진교의 현문내공(玄門內功)이 천
하의 정통내공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친 파도 속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틈틈이 현문내
공도 열심이 익혔던 것이다. 원래 고묘파 내공의 바탕이 있었기에 그는 현문내공도 단시일
내에 습득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는 절정의 내공을 갖게 되어 방금 같은 술수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효비가 그 욕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그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욕을 들은 양과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난 양과는 공력을 좀더 실어 양
효비의 두 손을 퉁퉁 붓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과에게 당한 양효비는 양과가 틀림없이 무슨 사악한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 추동을 천하 제일 고수로 알고 있는 양효비는 추동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추동과 양효비는 사제지간이라는 정식 명분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자기의 제자가 얻어터졌으니 추동의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게다가 양효비
는 추동과 미랑이 함께 키운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양효비를 아들삼아 믿고 추동이 아
직 시집을 안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추동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추동은
번쩍 뛰어올라 한 장 거리가 넘는 물 위를 날아 기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양과는 그녀의 몸놀림이 극히 가볍다고 할 수는 없으나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경공술은 어딘지 모르게 전진교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게 있다면 전진교의 경공술은 온건하고 실속이 있는 반면 추동의 경공
은 무언가가 빠져 있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추동의 무예는 태을교(太乙敎)의 한 무명 도장(道長)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도장은
추동이 어렸을 때 그 추한 외모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석
달 동안 태을교의 입문 무공과 기타 장법(掌法)을 가르쳐주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추동
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남보다 뛰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열심히 무공
을 연마했다. 그러나 자질이 부족해서 대성하지는 못했다.
북송의 도교는 본래 태을파밖에 없었다. 산서(山西) 용호산(龍虎山)의 장천사(張天師)가 그
수장이었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중원을 침범하자 송나라 황실은 강남으로 옮겨갔고, 강북의
도교는 전진교, 대도교, 태을교 이렇게 세 파로 갈렸다. 그 중 제일 세력이 강한 파가 전진
교였다. 전진교의 도사들은 의협심을 발휘해 여러차례 의로운 거사를 했다.
그 당시 강북은 금나라에 유린되고, 그 다음엔 또 몽고의 기마병에게 침략당했다. 그야말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는데, 송나라 조정의 북벌이 가망없게 되자 서민 백성들은 모두
전진교에 기대를 걸고 구세주로 여겼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중원은 외적에게 유린되고, 남송은 유약하여 맥을 못추니 천하의 호걸지사들은 어찌할 바
를 모르는데…… 중양종사(重陽宗師)와 장춘진인(長春眞人)이 만물의 사표가 되어 무위(無
爲)의 교의로써 유위(有爲)의 지사들을 모으고 맹주(盟主)를 기다린다."
그러나 태을교의 도사들은 그와는 달리 심산벽지에 남모르게 은거하면서 자기 일신만을 지
켰다. 그래서 세인들은 그들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추동의 무공은 태을교의 무공이다. 전진교와 태을교는 원래 한 집안으로 후에 갈린 것이니
그 두 파 사이의 무공에도 유사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과는 추동의 무공을
보고 전진교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었다.
당초 추동은 미랑의 집을 지키는 무사들과 겨루기를 해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2, 3류의 무객
에 불과했기에 추동은 보통 반은 이기고 반은 지곤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추동은 아직 일류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양과의 무공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 이런 귀신
같은 무공이 있다니?' 추동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추동은 강호인의 예에 따라 읍하며 말했다.
"호걸께서는 왜 우리 도련님의 손을 그렇게 상하게 하셨습니까?"
추동의 무공이 기본을 갖추고 있음을 파악한 양과는 그녀를 얕잡아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 녀석이 너무 버릇없이 천방지축 날뛰기에 손 좀 봐준거요. 날 나무랄 생각이오?"
그때 양효비가 소리쳤다.
"네가 사악한 술수를 썼잖아? 추동, 어서 저 자를 혼내달라니까, 어쨌든 난 제자가 아닌가
말이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강호에서는 사제지간의 명분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데
양효비가 이렇게 자기 스승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법대로 하자면 큰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과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양과 역시 그와 비
슷한 처지였다. 소룡녀는 양과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양과의 아내가 되었던 것이
다. 그래서 양과는 사제지간의 명분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결국
은 커다란 풍파를 겪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제지간의 결혼은 세속의 예의를 무시하는 동사
황약사가 들어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추동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우리 효비가 어리고 무지해서 무례하게 군 것은 잘못이에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 애도 자기 어머니가 계시지 않겠어요. 저 애의 버릇은 그 어머니가 고쳐줄텐데
외인이 손을 대서야 되나요?"
"손을 대다니? 내가 손 대는 것을 봤소?"
양과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추동은 그 말에 잠시 대답을 못했다. 이 괴한이 효비를 다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초식
이 얼마나 빠른지 양과가 손쓰는 것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저런 녀석은 버릇을 고쳐놓지 못하면 앞으로 마을의 골칫덩어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
시오."
그렇게 말하고 양과는 돌아서 가버리려고 했다.
추동은 이 괴한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급히 소리쳤다.
"어딜 가요? 못 가요!"
그러자 양과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못 가다니? 그래 나 같은 사내를 붙잡아서 뭐 하려고 그러시오? 그게 무슨 뜻이오?"
아버지 양강(楊康)을 닮아서 천성이 좀 방탕한 면이 있는 양과였다. 소룡녀를 아내로 맞아들
이고 나서부터는 그 버릇을 고치려고 했지만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
다. 지금도 그 말을 하고 나서 후회했다.
추동은 지금까지 그런 놀림을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분기탱천했다. 그녀는 일갈(一喝) 하면서
오른손으로 양과의 어깨를 향해 일장을 내뿜었다.
그러나 양과가 누군가? 양과는 훌쩍 몇 장 거리를 날아 앙천대소하며 버드나무 숲속으로 사
라져버렸다. 신조 독수리도 쏜살같이 양과를 따라 어디론가 없어졌다.
추동은 신속하게 추격했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그녀는 돌아왔
다.
그때 미랑은 양효비와 두 시녀 청아와 홍아를 데리고 기슭에 올라와 있었다. 양효비가 추동
에게 물었다.
"괴한을 붙잡았나요?"
추동은 몹시 화가난 탓인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대답을 못했다. 미랑은 상황을 짐작하고는
아들을 꾸짖었다.
"모두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추동도 수모를 당한 게야. 얘야,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라."
어머니의 꾸지람에 양효비는 아무말도 못했다.
대문에 막 들어선 홍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마님, 마님! 저것…… 저것 좀 보세요."
"뭔데 그러니?웬 호들갑이니? 다 큰 계집애가 그렇게 경망스러워서 어떻게 하겠니?"
그러면서 미랑은 홍아가 가리키는 쪽을 보다가 대경실색했다. 담장의 흰 벽에 사발만한 크
기로 거미 다섯 마리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얼룩덜룩한 색깔의 거미였다.
"아니…… 이건. 왜 이런……?"
미랑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동네 개구쟁이가 한 일이겠지요. 홍아와 청아는 어서 지우지 않고 뭐하는 거니? 아씨가 놀
라시는 게 보기 좋아 가만히 있는 거니?"
추동은 미랑이 스무살이 된 아들이 있는 지금에도 옛날처럼 여전히 아씨라고 부르고 있었
다.
청아와 홍아는 걸레로 거미 그림을 지우고선 다시 흰 회로 덧칠을 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보니 양효비가 머리를 숙인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랑은 아들이 꾸지람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얘야, 이 에미가 너무했는지 모르겠구나. 다 그 괴한 때문에 생긴 일이지. 이젠 너를 그렇
게 호되게 나무라지 않으마. 왜 말이 없니? 말 좀 해 봐라. 에미 속 태우지 말고."
모자간의 대화를 들은 추동은 남몰래 탄식했다. '자식을 저렇게 키우다니? 저건 도리어 자
식을 망치는 일인거야. 그 괴한한테 혼난 것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야. 그래야 정신을 차릴
거 아냐?' 지금에 와선 추동도 양과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양효비를 애지중지
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효비가 잘 되는 일이라면 그녀는 어떤 고초도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양효비는 온갖 나쁜 짓만 하고 다니니 정말 큰일이었다.
아들이 마냥 말이 없자 미랑은 안타까워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아들의 부은 손에 약을
발라주며 달랬다.
"얘야, 다시는 안그러면 되잖니? 너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둘 게. 너만 기뻐하면 난 마음이 놓
인단다."
그 모습을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던 추동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아니, 입이 붙었나? 어머니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왜 도통 말이 없는 거예요?"
그제서야 양호비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얼굴이 백짓장 같았다.
놀란 미랑은 아들을 끌어안고는 물었다.
"왜 그러니? 얘야, 왜 그러니?"
추동은 얼른 양효비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 괴한에게 내상(內傷)을 입지 않았나 해서다. 그
렇다면 큰일이었다. 양효비는 나이도 어리고 무공이 심후하지 못해서 내상을 입으면 지금까
지 배운 무공이 모두 없어질 뿐더러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양효비는 몸을 떨면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와 추동…… 원수진 사람이 누구죠? 없어요?"
미랑은 그 말에 놀라 흠칫했다.
"원수진 사람? 없단다. 육가장에서 우린 본분을 지키면서 지나가는 들개에게도 떡을 던져주
며 살아왔는데 누구하고 무슨 원수를 졌겠니?"
그 말에 양효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집 담벼락에 거미를 다섯 마리 그려 놓았을까요? 이상하죠?"
"추동이 말했잖니? 개구쟁이들이 장난친 것이라고."
"그럴리가 없어요. 우리가 외출할 땐 언제나 대문을 잠그고 다니잖아요. 담장도 높고 근처엔
나무도 없는데 어린애들이 무슨 수로 들어온단 말예요?"
미랑이 육가장에 왔을 때 무뢰한들이 찾아와 치근덕거리자 미랑은 담장을 높이 두르고 육중
한 대문까지 달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무뢰한들이 담장을 넘어올까봐 그 주위에 있는 나무
들까지 몽땅 베어버렸다. 지금 아들의 말을 듣고보니 그 거미 그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
각이 들었다.
무공을 배워 세상 견식이 미랑보다 넓은 추동이 물었다.
"어디서 무슨 얘기라도 들었나요?"
양효비는 차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제 정신이 든 듯 대답했다.
"전 오늘 가흥성 안에 갔다가 무서운 얘길 들었어요."
"무서운 얘기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미랑이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무슨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가흥성에서 저는 임가네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셨어요."
사실 양효비는 가흥성에 들어가자마자 도박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가 지금 말하려고 하
는 일은 어느 도박꾼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제 성 안에 있는 장씨 나으리집 식솔 열 두 사람이 갑자기
몽땅 죽었다는 게 아니겠어요. 게다가 집에 있던 전가지보(傳家之寶)인 미옥 하나도 없어졌
다는 거예요. 그 장가네 하인의 말에 따르면 그전에 예쁘장하게 생긴 비구니가 탁발하러 왔
다가 부처님께서 장가네 미옥을 마음에 들어하신다고 말했대요."
"그런 일이 있었남? 장씨 나으리는 갑부지만 지독한 구두쇠라 그 미옥을 내줄 리가 없지."
추동의 말이었다. 그러자 미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비구니도 무례하구나. 어떻게 남의 집 보물을 그냥 달래지?"
"그래요. 장씨 나으리도 그 말을 듣고 대노해서 그 비구니를 쫓아버렸대요. 그런데 그 다음
날 장씨 나으리 집안 식솔 열둘이 몽땅 죽어 버렸대요. 그 미옥도 없어지구요."
양효비의 얘기에 미랑은 손을 내저었다.
"얘야, 됐다. 이젠 그런 끔찍한 소리 그만해라. 듣기만 해도 무섭고 불길하네."
"아니에요. 그 일은 우리 집과도 틀림없이 관계가 있어요."
"뭐라고?"
어머니의 말에 양효비는 한숨을 지었다.
"어머니, 장가네 식구들이 몰살당한 그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세요? 그 집 벽에 누군가
큰거미를 열 두 마리나 그려 놓았대요. 그 그림이 오늘 우리집 벽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단
말예요."
그 말에 미랑과 추동은 크게 놀랐다. 양효비가 계속 말을 이었다.
"거미 열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열두 사람이 죽었거든요. 우리집엔 다섯 마리를 그려
놓았는데, 보세요. 우리 식구가 다섯이잖아요? 안그래요?"
양효비는 말할 수록 겁이 나서 이빨이 부딪치도록 떨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니?"
어머니의 물음에 양효비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까지 굴렀다.
"그럼 생명에 관계된 일인데, 제가 어찌 허튼소리를 하겠어요? 사람들 말은 그 예쁜 비구니
가 흉수일 거래요. 그 비구니 별명이 독주여니(毒蛛女尼 : 독거미 비구니)래요."
"독주여니?"
추동과 미랑은 놀라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얘기를 내가 왜 못들었을까?"
추동은 눈을 깜빡이며 말하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양효비는 '강호사람들과 나만큼도
접촉이 없으면서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하며 추동을 비웃었다. 물론 추동이 자신의 스승이라
는 점을 고려하여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추동이 놀라는 것을 보면
독주여니란 이름을 처음 듣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집에 왜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독주여니가 집을 잘못 안 것인가? 아니면 친구들이 장난
치느라고 그려놓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양효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마을에 사
는 친구를 찾아가 혹시나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장난을 한 친구들은 없었다.
양효비가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날이 저물어 집집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
다.
양효비는 어머니 그리고 추동과 함께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닭고기도 생선도 있었지만 도
무지 입맛이 없었다. 지금까지 기호를 그려놓고 사람을 죽였다는 흉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라 그 심란함은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양효비네 식구들은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모두 손에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평소
추동이 양효비에게 무예를 가르치느라 장만해 두었던 병장기들이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등불을 둘러싸고 앉아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만약
독주여니가 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준비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청아와 홍아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손에 있던 칼까지 떨어뜨렸다.
전란을 겪어본 미랑도 겁이 나 몸을 웅크렸으며 평소 육가장에서 우쭐거리던 양효비도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독주여니가 칼을 들고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겁을 먹다니.' 추동은 가볍게 한숨을 쉬
었다.
그러나 사실 추동도 겁이 났다. 추돌은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몸소 겪어보지도 못했
고 또 양효비가 들려준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 때문에 적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침
착한체하며 뜰로 뛰쳐나가 외쳤다.
"누구요? 도대체 누구인지 이름을 대시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과연 강호인의 그것과 비슷한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
자면 강호인들은 싸우기 전에 반드시 통성명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밖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태풍전야의 고요처럼 조용하다가 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놈, 도적이면 냉큼 물러가라. 이 추모(某)가 목을 치기 전에."
추동의 호통소리에 양효비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선 등잔불을 훅 불어 껐다. 이것이야
말로 대담하고 주도면밀한 강호 협객의 행동이지. 양효비는 자기를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
다.
대문 밖은 다시 잠잠했다.
그러다가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하룻밤만 묵고 갈 수 없겠소? 은자는 충분히 드리겠소. 제발 하룻밤만 묵도록 해
주시오."
그제서야 집안에 있던 다섯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아야, 네가 나가보아라. 만일 나이 있든 사람이거든 절대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
추동이 말했다. 그러나 청아는 겁에 질려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애군!"
추동은 그렇게 나무라며 등잔불을 켜들고 나갔다.
대문을 열려던 추동은 혹시 독주여니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 쪽문을 열고 밖을 비
추어 보았다. 추동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비구니는 아니었지만 다름아닌 바로 낮에 보았던 외팔이 괴한이었다.
그 괴상한 새도 옆에 있었다.
추동은 쪽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우리집 공자를 다치게 하고선 무슨 염치로 온 거요? 뭐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낮에 잡히
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추동은 그렇게 말하곤 돌아서려고 했다.
문밖의 양과가 차디차게 웃었다.
"난 좋은 마음으로 왔는데, 이렇게 냉대하다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가 가엾은 다섯 생
명을 위해 이렇게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지."
"시끄러워요. 어서 썩 물러 가세요."
추동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양과는 눈썹을 찌푸리고 소맷바람을 일으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누구냐?"
추동이 돌아오자 미랑이 물었다. 추동은 낮에 본 그 괴한이라 고 말했다.
"날벼락 맞을 놈, 감히 우리집을 또 찾아오다니? 내가 없애버리겠어."
양효비는 칼을 빼들고 뛰쳐나가려는데 미랑이 저지했다.
"넌 대갓집 공자인데 그 따위 괴한과 싸운다면 체면이 서겠니?"
그래서 모두들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양효비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예삿일이 아니야. 그 괴한은 필시 독주여니와 한패일 거라구. 아니면 그 괴한이 독주여니일
지도 모르지!"
"비구니라면 여자지 어떻게 남자일 수 있겠니? 그 괴한은 남자가 분명하잖니? 그 괴한이 독
주여니일 리가 있겠니?"
"어머닌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여자가 남장을 한다거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은 강호에
서는 보통 일이라구요. 추동의 말도 못들었어요? 그 괴한도 무슨 가면을 썼다고 하던데 그
렇다면 비구니로 가장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추동도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글쎄, 제 말이 맞다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낮에 왜 우리에게 못된 짓을 했겠어요?"
양효비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겼다. 그래도 미랑은 그 말이 미덥지 않았다.
"우리가 그 괴한을 만난 것은 낮인데, 언제 그가 거미 그림을 그려놓을 수 있겠니?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려져 있었잖니. 그럼 그 괴한이 분신술이라도 썼단 말이니?"
"그 괴한의 신법(身法)이 번개같았어요. 예전의 제 사부님보다 빨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 우
리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먼저 와서 그림을 그려놓을 수도 있죠."
추동의 말에 양효비도 흥분하며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그 괴한의 무공이 얼마나 괴이한데요. 그따위 거미 그림은 단숨에 그려놓을
수도 있죠."
강호의 이인(異人)들을 흠모해온 양효비인지라 낮에 그렇게 혼이 나고도 양과의 무공에 대
해선 이렇게 환상적인 추측까지 하며 떠들어댔다. 바로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랑네 사람들이 위를 바라보자 그 웃음소리는 어느새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은 지붕 위에서 문쪽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검자루를 쥐고 있던
추동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는 피돌기마저 멈춘 듯 했다. 이번엔 창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
렸다.
양효비는 입김을 불어 등잔불을 꺼버렸다. 그와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창호지가 뚫
렸다. 양효비의 입김에 꺼지려던 등잔불이 다시 살아났다.
깜짝 놀란 양효비는 다시 세차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나 등잔불은 흔들렸을 뿐 꺼지지 않았
다.
창 밖에서 또 깔깔깔 하고 웃는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또 불어 봐라. 입김이 얼마나 센지 보자꾸나."
창 밖의 여인은 창호지 구멍을 통해 양효비의 입김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양효비는 그
여인에게 지지 않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힘껏 입김을 불었다. 어쨌든 등잔불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그러나 그 순간 창밖의 여인도 입김을 불었다. 등잔불은 이번에도 꺼지지 않았다.
양효비는 열번이나 똑같이 해보았지만 결코 등잔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그 여인은 계속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시지."
그런데 양효비가 꾀를 썼다. 자신의 몸으로 창호지 구멍을 가로막은 채 입김을 불었던 것이
다. 그제서야 등잔불이 꺼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자 창 밖의 여인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웃었다.
"꽤 약은 녀석이군. 제 애비…… 어쩌면 제 애비를 저렇게 닮았을까."
여인의 그 말에 양효비는 가슴이 섬뜩했다.
무슨 말이지? 저 계집이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알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는 사이 미랑은 양효비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집 가운덴 검을 들고 있는 추동의 그림자
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넌 도대체 누구냐? 영웅호걸이라면 정정당당히 나서야지 이게 무슨 덜 되먹은 수작이냐?"
추동의 말에 그 여인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거미 그림을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럼 네가, 네가 바로 독주여니?"
집안의 다섯 사람은 모두 흠칫하고 놀라는데 미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흥, 이제야 알아보시는군. 그래, 미랑 그 동안 잘 지냈나?'
"날, 날 어떻게 알지?"
미랑이 물었다.
"내가 왜 널 모르겠는가. 난 널 알 뿐만 아니라 죽이러 왔다. 벽에 그린 거미를 보았겠지?
모두 다섯 마리. 이 집에 있는 다섯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야."
독주여니가 이렇게 말하자 추동이 외쳤다.
"이 추동이 있는 한 어림없다. 우리 아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우린 다섯이나 되는데
너 같은 중년 하나를 어쩌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독주여니는 또 깔깔대며 웃었다.
"내가 혼자인 줄 알았더냐? 혁장군, 어디 있지?"
"여기 있소이다."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우람한 그림자 하나가 창가에 비쳤다. 그 우람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을 보고 추동은 가슴이 떨렸다.
"혁장군은 어서 들어가서 저 다섯을 단번에 해치우시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창살이 부서지면서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집안으로 냉큼 들어섰다.
추동은 재빨리 검을 내찔렀다.
그런데 무엇인가 둔탁하게 검을 내리치는 바람에 추동은 검마저 땅에 떨굴 뻔했다.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끼며 추동이 급히 물러나며 살펴보니 그 사내의 손에는 거치른 낭아봉이 들려
있는 게 아닌가.
사내는 추동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잔불을 붙이고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가서
섰다.
그곳으로 회색 승복을 입은 비구니가 들어서는데 자세히 훑어보니 아주 예쁘게 생긴 얼굴이
었다. 그리고 일거수 일투족이 대갓집 규수를 방불케 할 만큼 매우 우아했다.
이 두 남녀가 낮에 호숫가에 서 있던 바로 그들이었다.
독주여니는 등불 앞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미랑을 바라 보았다.
"날 모르겠어?"
"아니, 네가? 어쩌면 이럴 수가……"
미랑의 음성은 놀람 그 자체였고 열린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천성이 방탕한데다 홀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으로 버릇이 없는 양효비는 그 어린나이에 무수
히도 여자들을 품어 보았지만 독주여니를 보고는 그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주여니의 자색도 자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사나이들의 넋을 빼앗는 그 무언가
가 있었다.
양효비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미랑은 아들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독주여니만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완안방방(完顔芳芳)이란 여자다. 십년이 넘었는데도 기어이 찾아왔구나."
등불심지를 돋우며 독주여니가 말했다.
"미랑은 그 동안 잘 지냈겠지? 이 산 좋고 물 좋은 강남에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 대금국
황제도 이 강남땅을 차지하려고 눈이 빨갰었지."
독주여니의 눈에는 원망의 빛이 서렸다.
"넌 여기서 잘 살았겠지만, 그 동안 난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알아?"
완안방방은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난 저 서쪽 끝에 가 불등(佛燈)을 외로이 벗삼아 매일 채소 나부랭이만 먹고는 목숨을 연
명했지. 그 고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것이야."
완안방방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내가 왜 그 고생을 참아 왔는지 알아? 바로 오늘을 위해서야!"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분한지 가슴을 들썩들썩거렸다.
양효비는 그녀의 들썩거리는 가슴을 보자 승복 안에 있을 탐스러운 젖무덤에 생각이 미쳤
다.
완안방방이 눈치를 챘는지 앞으로 나서며 양효비의 뺨을 두 번 슬쩍 후려쳤다. 양효비는 마
치 볼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림을 느꼈다.
제자리로 돌아간 완안방방이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 따위가, 하긴 그 경박하고 음탕함은 꼭 제 애비를 닮았구나. 그 못난 인간의 자식
임에 틀림없어."
어머니와 추동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자 양효비는 얼굴 둘데를 잃었다.
양씨네 모자 앞을 막고 있던 추동은 완안방방이 그렇게 쉽게 자기를 피해 양효비의 귀쌈을
갈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추동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저 비구니가 좀 더 힘을 줬더라면 양효비는 죽었을 거야. 저 독주여니의 무공은 나보다 훨
씬 고장한 것같군.'
추동도 그만 투지를 잃고 말았다.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미랑은 스물이 다 된 양효비를 아직 갓난애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 때
문에 아들의 호색(好色)은 상상도 못했다. 미랑은 완안방방을 꾸짖었다.
"행패를 부리려면 나한테 부려라. 철없는 애한테 왜 손을 대는 거냐? 죽이려면 날 죽여라."
"죽고싶다 이거냐? 그렇게 쉽게 죽일 것 같으냐? 그때 네년이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가 갈리는데, 내가 쉽게 널 죽이겠어?"
완안방방은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 도대체 저 비구니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 여자가 왜 우리를 죽이려 하죠?"
양효비가 의아스러운 듯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밤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미랑은 그 일을 아들에게 말해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네 아버지와 나는 죽마고우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고 또 두 집의 지위도 비슷했기에
양가 부모님들의 뜻에 따라 정혼을 했단다. 그런데 저 행실 나쁜 완안방방이 네 아버지를
유혹하려고 했지. 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하셨다. 저 완안방방은 화가 나서 집을 나간건데
그 분풀이를 지금 우리 모자에게 하려는 모양이다."
그 말에 완안방방은 대노하며 소리쳤다.
"허튼소리 집어치워. 천생연분은 바로 그 사람과 나였어. 네가 끼어들어 우리를 갈라놓았던
거야. 뻔뻔스러운 년. 네년은 염치도 없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저 못난 자식까지 낳았었
지. 흥! 내가 너희들을 살려둘 것 같으냐?"
그리고 사내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어서 저것들을 해치워라."
그 사내는 허리를 굽실거려 대답하고선 솥 뚜겅같은 손을 내밀어 미랑을 움켜쥐려고 했다.
"혁중달( 伸達)! 금나라 중신이셨던 우리 아버님이 네 목숨을 구해준 일을 잊었느냐? 그런
데도 우리를 죽이겠다는거냐?"
그 말에 혁중달은 내밀던 손을 움찔하고 멈췄다.
옛날에 혁중달은 일개 하급 장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술에 취해 군법을 어겼다. 금나라 황제
는 그를 참수하려 했으나 미랑의 아버지가 사정하여 구해줬던 일이 있었다. 혁중달은 그 은
혜를 생각하자 차마 미랑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혁장군! 우리 아버님께서 장군을 등용해서 이만큼 된걸 잊었단 말인가? 또 그 동안 내가
뒤를 봐준 은혜도 잊었단 말인가?"
완안방방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완안방방의 눈매에는 사나이를 매혹시키는 그 무엇
이 있었다.
그러자 혁중달은 발을 굴러 내달으며 미랑을 잡으려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아씨를 건드리지마."
추동이 외치며 혁중달의 왼손목을 노리곤 검을 휘둘렀다.
혁중달은 오른손에 잡고 있던 낭아봉으로 추동의 검을 막았다.
미랑은 뻗쳐오는 혁중달의 손을 보고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아들을 끌어당기면서 그 자
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추동의 힘은 혁중달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낭아봉에 검이 튕겨나는 바람에 어깻죽지가 다
저렸다. 그러나 아씨가 위급한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추동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태을
검법의 수도추화(數刀追花)라는 초식을 썼다. 검 끝이 섬광을 발하며 혁중달을 향했다.
혁중달은 기합을 지르면서 낭아봉으로 추동의 검을 후려쳤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추
동의 검은 두동강나고 그 힘에 밀려 추동은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추동은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다가 '욱' 하고 피를 한움큼 토해냈다.
혼비백산한 양효비였지만 무공을 조금이나마 배운 처지라 급한 김에 얼른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홍아를 끌어당겨 혁중달을 막았다. 혁중달은 홍아를 한손으로 움켜쥐더니 벽에다
패대기를 쳤다. 홍아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홍아는 비명도 못지르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혁중달은 미랑과 양효비의 팔목을 왼손으로 모아쥐고 완안방방 앞으로 끌고갔다.
양효비는 반항하려 했으나 힘이 달려 꼼짝할 수 없었다.
완안방방은 그들 모자를 보고는 싸늘하게 웃더니만 품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뚜껑을 열어 얼룩덜룩한 큰 거미를 잡아내서 미랑의 이마에 올려놓고선 깔깔거
렸다.
"네가 피하긴 어디로 피해? 어디 얼마나 오래 사는가 한번 볼까?"
제2장 협객행(俠客行)
그 거미는 벽에 그려진 거미와 똑같은 것이었다. 얼룩덜룩한 무늬와 털이 부스스하게 난 다
리가 등잔불 밑에서 그렇게 무섭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거미를 미랑의 이마 위에 올려
놓자 그녀는 질겁하며 비명을 지르고 혼절하고 말았다.
모골이 송연한 일이었다.
"어머니, 정신차리세요. 정신차리시라니까요."
양효비가 울먹였다.
완안방방은 손가락으로 거미의 등을 꾹 눌렀다. 거미는 놀랐는지 미랑의 입술로 기어가 깨
물었다. 양효비는 놀라 연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독거미는 입을 떼지 않았다. 독거미의
독액이 미랑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절했던 추동은 양효비의 소리에 깨어났다. 그녀는 미랑의 입술에 얼룩덜룩한 거미가 붙어
있는 것을 보자 완안방방이 한 짓임을 알았다. 추동은 몰래 운기(運氣)하여 벌떡 일어나 뒤
에서 완안방방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어디 죽어 봐라."
원래 완안방방은 추동의 무공 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추동이 혁중달에게 맞아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기에 더욱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랬기에 추동에게 허리를 붙잡힌 것이
지, 안그랬다면 십수년 무공을 연마한 그녀가 추동에게 잡힐 리가 없었다.
이어서 추동은 완안방방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려 했다.
"이 마귀 같은 년, 죽여버릴테다."
그러나 완안방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추동의 손이 자기 목에 닿으려는 찰나
번개같이 허리를 낮추며 머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추동의 손은 도리어 자기 얼굴을 찔러버린 셈이 되었다.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십년 동안 무공을 연마해 온 추동이기에 그 손 힘이 보통 무사
들보다는 훨씬 강했다. 그런 손으로 자기 얼굴을 찔렀으니…… 추동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
러졌다.
완안방방이 돌아보니 추동은 자신의 손가락에 찔려 눈알 하나가 튕겨나오고 유혈이 낭자했
다.
"흥, 천한 노비로 그만하면 충성이 갸륵하다만, 아쉽게도 주인을 잘못 만난 게야."
완안방방이 코웃음치며 비웃었다.
추동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피로 물든 다른 한눈으로 완안방방을 쏘아보며 결
사적으로 덮쳤다.
"혁장군, 이년을 아예 없애버리시오."
완안방방이 명령하자 혁중달은 낭아봉으로 추동을 후려갈겼다. 추동의 머리는 박살나 으깨
지고 몸은 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완안방방은 양효비를 쳐다보며 다소 부드럽게 물었다.
"내가 예쁘니?"
혼비백산해서 떨고 있던 양효비는 이를 부딪치며 대답했다.
"예, 예…… 예쁘죠."
완안방방은 그 말에 탄식했다.
"보라구. 아들까지 내가 미인임을 아는데, 네 못난 애비는 저 천한 계집을 위해 날 버렸단
말이다. 내 앞에선 달콤한 말만 하고 뒤에 가선 저 계집과 붙은 거지."
그러더니 눈에 살기를 띠며 양효비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이 놈 양강, 네 놈을 내 손으로 기어이 죽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한이구나. 왜 죽었
어? 왜 일찍 죽었냔 말이야. 왜?"
완안방방은 미친듯이 양효비를 차고 때렸다. '아이고, 아이쿠' 하고 양효비는 연방 비명을
질러댔지만 한번 폭발한 완안방방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날뛰
다가 기운이 빠졌는지 완안방방은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던 중 청아가 몰래 문 밖으로
기어나가는 것을 보고 잽싸게 날아올라 그 뒷덜미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우지끈하는 소리
와 함께 청아는 목이 부러져 절명했다.
그리고 나서 완안방방은 미랑을 깨우고 말했다.
"오늘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흥, 난 네년이 채화주에 중독되어 한 열흘 모진 고생을 하다가
저승길로 가게 만들 거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양효비를 거머쥐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난 네년과 네 자식놈이 고생하면서 조금씩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테다."
추동도 이미 죽고 온 집안이 피바다가 된 것을 본 미랑은 비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독거미를 어쩌지는 못하고 아들을 껴안으며 통곡했다.
그것을 본 완안방방은 매우 흡족해하며 검을 꺼냈다.
"네년이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니, 내 그 자식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칼로 도려낼테다. 뼈다
귀만 남을 때까지 말이야."
완안방방은 깔깔 웃으면서 검을 꼬나쥐고 양효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창 밖에서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흠칫 놀란 완안방방이 소리쳤다.
혁중달이 이미 밖으로 뛰어나간 뒤였다. 몸은 비대해 보여도 행동은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잠시 후 혁중달이 돌아왔다.
"밖에는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내가 잘못 들었나."
완안방방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는 다시 양효비에게 다가서려는데 미랑이 자기 몸으로
아들을 가렸다.
"죽이려면 날 죽여라. 이 애는 아무 상관도 없다."
미랑의 말에 완안방방은 코웃음쳤다.
"네년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리고 미랑의 혈도를 찍고선 다시 검 끝을 양효비의 목에 겨누었다.
이때 창 밖에서 또 인기척이 났다. 조금전 보다 더 큰 코웃음 소리가 두번이나 났다.
"밖에서 까부는 놈은 도대체 누구냐?"
화가 난 완안방방이 소리쳤다.
"이 할미의 검 맛을 보고싶은 게로군."
그러자 혁중달도 외쳤다.
"독주여니가 여기 계신다. 이 놈 죽고싶어 환장했냐?"
그런데 혁중달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얼음같이 냉혹한 얼굴이 창밖에 나타났다. '저런, 송장
같은 얼굴 좀 보게.' 완안방방은 오싹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그 사람은 바로 양과였다.
낮에 서호가에서 독주여니와 혁중달이 미랑을 노려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양과는
무슨 일이 터지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 육가장에서 문전걸식을 할 때 육가장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육가장은 그의 의매 정영과 육무쌍의 고향이기도 했으
므로 이 기회에 양과는 마을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래 그는 이 괴이한 남녀를 미행하려 했는데 그만 말을 타고 달려온 양효비에게 막혀버렸
던 것이다.
밤이 되자 양씨 집에 잠입하여 창밖에서 엿듣고 있던 그는 미랑을 노려보던 그 심상치 않은
여인이 요사이 강호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마녀 독주여니 완안방방임을 알게 되었다.
원래 양과는 대문 밖에 머물러 있다가 독주여니가 정말 나타나면 자기가 나서서 막으려 했
다. 그런데 추동이 냉대하고 양효비가 자신을 독주여니와 한 패로 여기자 괘씸한 생각이 들
어 떠나 버렸던 것이다.
자기는 선의에서 도와주려 했는데 도리어 면박을 주다니. 언제부터 육가장 사람들의 인심이
이렇게 흉흉하게 되었을까? 양과는 생각할 수록 분하기만 했다. 욱 하는 성미에 오기마저
센 양과는 소룡녀와 홍칠공(洪七公) 그리고 곽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안중에 없었다. 그
런데 미랑네 사람들이 자기를 외팔이라고 깔보다니, 그 생각을 하자 양과는 자기 오른팔을
잘라버린 곽부가 더욱 원망스러워졌다. 팔만 온전했더라면 양효비보다 더욱 영준하게 보일
텐데…….
호숫가에 이른 양과는 소룡녀와 같이 지내던 때를 회상했다. 이 세상에서 소룡녀만이 외팔
이임을 꺼리지 않고 진정으로 그를 사랑해주었다. 그가 동해를 떠나 서쪽으로 오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거나 측은하게 생각할 뿐 진정한 마음에서 친구로 대해주는 사
람은 보지 못했다. 양과는 사랑하는 아내 소룡녀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미
련이 없다는 생각에 격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검으로 호수의 물을 내리쳤
다. 호수의 물은 마치 폭탄이 터진듯 치솟아올랐다.
양과는 버드나무에도 일장을 날렸다. 대번에 버드나무는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동강이 나
며 호수 위에 떨어졌다. 호수 물이 튀며 그 위에 비친 달 그림자가 산산조각 났다.
그는 어두컴컴한 서호를 바라보며 소룡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룡―녀, 소―룡―녀!"
그러다가 그는 호수를 떠나 달빛이 가득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달빛 그림자도 흐느낌으
로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신조 독수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 넓은 천하에 이 양과가 설
자리가 없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차라리 종남산 활사인묘(活死人墓)에 돌아가 소룡녀가
쓰던 물건이나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양과는 이런 생각을 하며 북쪽을 향해 걷고 있었
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육가장에 다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독주여니가 살인하러 왔을테고 자칫하면 이미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씨 집 식구들은 근본적으로 독주여니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양과는 알고 있었
다.
그런데 바로 그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양과는 발걸음을 늦췄다.
'독주여니가 벌써 손을 쓰는구나. 양씨네 식구들이 나를 붙잡아두었으면 화를 면했을텐데
사람을 업신여기다가 저런 화를 당하는거야. 화를 당해도 싸지.'
이렇게 생각하며 그곳을 떠나버리려던 그의 눈앞에 대협 곽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인들은 곽정을 대협이라고 칭찬하지 않는가? 그것은 곽정이 의협심에서 약한 사람을 구해
주고 포악한 자를 제압하여, 크게는 나라를 위해 양양에서 몽고기병을 막았고 작게는 여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 남이 죽어가는데 모욕 좀 당했다
고 그냥 가버리면 되겠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양과는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뛰어갔다.
양과가 도착한 것은 바로 완안방방이 막 검으로 양효비의 살점을 떼어내려고 한 순간이었
다. 양과는 코웃음으로 완안방방을 놀래켜 손을 못쓰게 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양과의 괴이한 모습에 완안방방도 적이 놀라면서도 이 사람이 가면을 쓴 것이라
고 짐작했다.
"도대체 넌 누구냐? 감히 이 할미 앞에서 방정을 떨어?"
"당신이 독주여니오?"
양과의 물음에 완안방방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주여니가 이렇듯 미인일 줄은 미처 몰랐구려."
평소에 완안방방은 이런 말을 들으면 자기를 희롱하는 줄 알고 그냥 두지 않았지만 오늘밤
은 달랐다. 원수를 갚으러 왔기에 심기가 불편하던 중에 양과가 정색하며 하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그 말이 좋게 들렸다.
잠시 후 양과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면수심의 마녀라니……."
"이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혁중달이 낭아봉을 치켜들고는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 덤볐다.
"허, 여보시오. 그 손에 든게 뭐요? 시커멓고 굵은 게 꼭 불쏘시개같네 그려."
양과가 웃으며 계속 비아냥거렸다.
대노한 혁중달이 낭아봉으로 양과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양과가 번개처럼 머리를 숙여 피하
자 혁중달의 낭아봉은 벽을 치는 꼴이 되었다.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산산조각나
허물어져 내렸다.
미랑은 그제서야 양과와 그 옆에 있는 신조 독수리를 보고 낮에 양효비의 손을 다치게 한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나타난 것이 복인지 화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가 완안방방
의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잔꾀에 능숙한 양효비는 반갑게 외쳤다.
"대협객님, 낮에 제가 무례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절을 하려해도 이렇게 된 처지라 어
쩔 수가 없습니다."
양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효비에겐 호감이 없었다. 양효비가 그의 시선을 끌고자 또 다시
아양을 떨었다.
"대협객님께 절을 올려 사죄할 생각이 굴뚝같지만 이 마녀에게 붙잡혀 움직일 수가 없습니
다. 대협객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 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죽는 사람의 말은 진실하다고 했으
니, 들어주십시오."
"좋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자."
양효비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양과는 그렇게 대답했다. 양효비는 정
색하며 말했다.
"대협객님께서는 속히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이 마녀는 독랄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대협객의
무공으로도 이 마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저같은 거야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대협객
님같은 분이 이 마녀의 손에 죽는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어서!"
정색하고 하는 말이 그처럼 간곡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양과는 그 말에 감동했지만, 이내 양효비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속으로 웃었다. '이
녀석이 격장법(激將法)을 쓰는구나. 약을 올려 내가 독주여니와 싸우게 할 심산이로구나. 새
파랗게 젊은 녀석이 제법 머리 회전이 빠르구나. 꾀로 말하면 황용 사모님보다 더하지만 문
제는 이 녀석의 심성이 바르지 않다는 것이지. 네가 격장법을 안 써도 내가 할일은 할건데,
기분 잡치게 잔머리를 굴려? 그러나 내 이미 작정을 하고 왔으니 너희 두 모자의 목숨은 구
해주지.'
이에 양과는 화가 난 척하며 말했다.
"내가 이 마녀한테 진다구? 좋다, 어디 똑똑히 잘봐라. 누가 지는지?"
양과는 무너진 벽을 넘어와 완안방방과 맞섰다. 양효비는 자기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내심 좋아했다.
벽을 넘어오는 양과의 날쌘 솜씨에 완안방방은 흠칫 놀랐다. 보통 경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절묘한 경공을 지닌 사내가 여기엔 왜 온 것일까? 그러나 완안방방도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양과의 끊어진 오른팔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출충한 경공을 가졌다해도 외팔
이 주제에 이 독주여니를 어쩌겠는가? 게다가 누더기에 목검 뿐이니 완안방방은 자신만만해
서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쳤다.
"거지 같은 게 협객 흉내를 내겠다구? 영웅호걸이 다 죽었구나. 너같은 게 영웅호걸을 자처
하고 나서니?"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양과는 진짜로 화가 났다.
"오냐, 난 영웅호걸이 아니라 밥 빌어먹는 거지다. 이 거지는 남을 업신여기는 개자식들만을
족치러 다닌다."
"흥, 좋아. 검을 써라."
"검? 너 같은 것에게는 검도 필요없지."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선 뜰로 나가 석자쯤 되는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었
다.
"개를 족치는 데 이것이면 충분하겠지."
달빛 아래 늠름하게 서 있는 양과의 얼굴에는 호걸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양효비는 부러운 눈길로 양과를 쳐다보았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만 있다면 태어난 보람
이 있지. 양효비는 양과에게 갈채를 보냈다.
양과도 슬쩍 웃어 보였다. '강자와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호걸을 흠모하는 저 성격만은 나랑
비슷하군.'
양과의 모습에 놀랐던 완안방방은 혁중달을 돌아보았다.
"혁장군, 저 미친놈을 어서 끌어 내시오."
강호에 나서고부터 언제나 조심해온 독주여니는 적수의 초식을 파악하기 전에는 직접 출수
하지 않고 언제나 혁장군을 먼저 내세웠다. 그래서 적수의 초식을 파악한 다음에야 자신이
직접 나섰다.
혁중달은 완안방방이 시키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시행하는 충복 같은 인간이었다. 혁중달
이 그녀에게 반한 지는 이미 오래다. 완안방방이 정사(情事)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쪽으로
갈 때 따라가 함께 지낸 지도 10여 년이 넘었다. 어쩠든 완안방방의 명이라면 혁중달은 절
대 복종하였다.
혁중달은 낭아봉을 들고 양과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 놈, 어디 재주 좀 부려 봐라."
그 말에 양과는 혁중달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꼴을 보니 무공을 좀 아나 본데 먼저 출수하게. 난 약자에게는 언제나 선심쓰기를 좋아하
지."
혁중달은 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라 수염을 곤두세우며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초식으로 낭아
봉을 내리쳤다. 그러자 양과는 해저로월(海底撈月)의 초식으로 나뭇가지를 들어올리며 혁중
달의 낭아봉을 막았다. 그리고는 타구봉법(打狗榛法) 중의 인자결(引字訣)의 묘수로 낭아봉
을 한쪽으로 끌어당겼다. 낭아봉은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얼떨떨해진 혁중달은 다시 낭아봉을 주워들고 내리치려 하였으나 양과의 나뭇가지에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낭아봉이 나뭇가지에 닿기만 하면 옆으로 끌려가며 엉뚱한 곳에 힘없이 떨
어졌다. 혁중달이 이마를 찌푸리며 아무리 애를 써도 허사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양과를 똑
바로 내려칠 수가 없었다.
혁중달은 금나라 군대에서도 이름난 용사였는데 다가 완안방방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고명
한 이인의 가르침을 받아 낭아봉 쓰는 법이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오
늘 양과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양과가 지금 쓴 타구봉법은 홍칠공과 황용에게 직접 전수받은 천하 일류의 술수가 아닌가.
게다가 양과의 무공이 혁중달보다 몇 수 위였다. 그러니 혁중달이 별 수 있겠는가? 숨을 헐
떡거릴 정도로 공격에 공격을 가했지만 도무지 양과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혁중달의 기가 한풀 꺾인 것을 본 양과가 소리쳤다.
"이 무지막지한 놈아, 아직도 해볼테냐? 이젠 자빠져 쉬라구."
그리고는 갑자기 반자결(拌字訣)을 써서 나뭇가지로 혁중달의 두 다리를 후려쳤다. 달빛에
번뜩이는 천만개의 나뭇가지가 사방에서 후려쳐오는 것같아 혁중달은 이리저리 몸을 피해보
았지만 눈앞이 어지러워 결국은 '쿵' 하고 나가 떨어져버렸다.
"어르신이 시키는대로 하는구나. 하하, 이 어르신이 뭐라고 했나? 네깐 놈의 무공은 내 발꿈
치에도 못미친다니까."
그래도 혁중달은 다시 일어나 오기를 부려보았다. 그러는 것을 완안방방이 말리며 나섰다.
양과 앞에 나선 완안방방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대협은 누구시길래 꼭 나와 대결을 하겠다는 것이죠?"
처음엔 이 외팔이 사내를 업신여겼던 그녀였지만 외팔이 사내가 나뭇가지 하나로 곰같은 혁
중달을 아주 가볍게 제압하는 것을 보고 곧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가볍게 볼 사내가 아니
란걸 깨닫고는 말투도 조금전과는 달리 훨씬 부드러워졌다. '할미'라는 말 대신에 '나'라고
했던 것이다. 이 외팔이 때문에 오늘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양씨 집에 복수
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기에 그녀는 양과를 떠나게 할 묘책을 궁리했다. 하지만 그녀의 꿍
꿍이를 알아차린 양과는 타이르듯 말했다.
"출가 승려라면 마땅히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법인데, 여기서 도리어 살인을 일삼으니 불문
(佛門)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본래 양과는 이 마녀를 없애버리려고 했으나 소룡녀 생각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져 살인할
생각은 지금이 없었다.
"당신이 이 나뭇가지를 끊어버릴 재간이 있으면 살려주겠소."
양과의 말에 완안방방도 자존심이 뭉개져 몹시 화가 났다. '내 일을 방해한 것만으로도 괘
씸한데 날 업신여기기까지 해? 이 녀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 그렇지 않으면 이 독주
여니가 무슨 낯으로 강호를 돌아다닐 수 있겠는가?' 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럼 어디 호걸의 재주를 한번 봅시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깨를 한번 흔들었다. 어느새 출수한 검 날이 양과의 가슴 앞까지 뻗쳐왔
다. 신법이 번개같은 양과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옛날의 적련선자보다 더 지독한 여인이구나!"
"적련선자?"
완안방방이 말했다.
적련선자 이막추! 그녀는 양과에겐 사백(師伯)이 되고 소룡녀에게는 사저(師姐)였다. 그녀는
과거 강호를 횡행하면서 육가장의 육입정 부부를 도륙하는 잔인한 짓을 했다. 그 당시 완안
방방은 서쪽에서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중원에 다시 돌아왔을 땐 적련선
자는 이미 절정곡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어버렸다. 적련선자의 말만 들어도 치를 떨던 수많
은 강호인들도 이젠 그녀의 이름을 잊고 있었다. 그러니 완안방방이 적련선자를 알리 없었
고 10년 전에 육가장에서 생긴 그 끔찍한 일도 모르고 있었다.
적련선자와 여러번 대결해 봤던 양과는 이막추가 비록 악인이지만 무공은 실로 대단하며 또
완안방방처럼 돌연한 습격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무공을 펼친다고
생각했다.
완안방방은 자신의 첫 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어 또 검을 날렸다. 처음 공격은 초식이
없는 공격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두 번째 것은 내공을 써서 곧장 찔러온 것으로 대단히 위협
적이었다. 선뜻선뜻한 검날의 기세가 양과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양과는 마녀의 검술에 무척 놀랐다. 이 마녀가 어디에서 이런 검술을 배웠을까? 이막추처럼
어느 명문의 도사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양과는 손을 쓰지 않고 우선 고묘파의 절정경공
(絶頂輕功)으로 그녀의 검날을 살짝 피하면서 독주여니의 무공 초식을 관찰했다.
완안방방도 양과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 '좋아, 그래봐라. 그 사이 맹공격을 퍼부어 우
위를 점해야겠다. 네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한들 견뎌낼 수 있는지 보자.'
그녀는 갑자기 검법에 변화를 주어 자신의 문파에서 가장 위력 있는 난피풍(亂披風)이라는
초식을 썼다. 검과 사람이 일진광풍처럼 동시에 양과에게 육박해 들어가는데 옷자락이 날리
고 승모가 벗겨져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승려는 삭발을 하고 수행하는 법인데 그녀는 머리
카락을 그대로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쌩쌩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달빛에 흩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칼은 그녀의 모습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이게 했다. 지난날 구음백골조(九
陰白骨爪)로 이름난 철시 매초풍의 모습처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만 개가 넘는 검틀이 양과를 찌르고 베는 것 같았다. 외팔이 양과는 험난한 파도 속에서 이
리저리 부대끼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보였다.
미랑파 양효비는 눈앞이 아찔해서 서로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양과를 위해 기도만 하고
있었다. 양과가 독주여니에게 당한다면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완안방방의 검술을 본 양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가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해도 양과에
게는 애들 장난으로 보였다. 저런 무공을 가지고 어떻게 옛날의 적련선자마냥 강호를 떠돌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양과 자신도 자기 실력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미 몇 년간의 수련을 통해 그의 무공은
대협 곽정이나 동사 황약사 그리고 남제 일등대사 등과 같은 절정고수들에게 뒤지지 않을만
큼 강해졌다는 느낌만 있을 뿐, 과거의 적련선자의 무공에도 미치지 못하는 완안방방의 무
공이 차라리 애들 장난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의 무공 중 제일 위력이 있는 난피풍 검
법이 아무리 굉장하다 해도 양과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완안방방의 검날을 양과는 대수롭지 않게 슬쩍슬쩍 피해 버렸다. 그녀는 아무리 기를 쓰고
덤벼들어도 양과의 옷자락 한번 스치지를 못했다.
'난피풍'이란 검법은 중원에 없는 서역의 검법이었고 양과는 오늘 그것을 처음 보았다. 양과
는 그녀의 검날을 피하면서 그 검법을 매우 자세히 살펴보았다. 볼수록 참재력이 무궁무진
한 검법이었다. 양과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그것을 본 완안방방은 갑자기 희색을 띠며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왜 탄식하는 거지?"
양과는 대답하지 않았다.
독주여니와 공격은 매우 빠르고 변화무쌍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찌르는
힘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저 세 치만 더 찔러 와도 양과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구니가 선심을 써서 봐줬단 말인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양과를 잡아먹을 듯 덤비는
것을 보면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완안방방은 아직 내공이 모자랐던 것이다. 난피풍이 서역무공의 정수이기는 하지만 그
녀는 내공 수련이 아직 부족해서 그 검법의 위력을 충분하게 발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
의 작금 재간으로는 세 치가 아니라 세 푼도 더 내찌를 수가 없었다.
대개 무공을 익히는 자들은 고수를 만나면 기뻐하는 법이다. 난피풍 검법을 본 양과도 마치
금은보화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가 난피풍 검법을 외우고 있는데 양효비가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꽤 그러세요?"
양과와 독주여니의 싸움을 보느라 미랑은 자기 입술에 매달린 독거미를 잊고 있었던 것이
다.
그 독거미는 독액을 내뿜고는 한동안 쉬었다가 독액이 몸에 차면 다시 내뿜었다. 그런데 양
과가 오는 바람에 완안방방은 그 독거미를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새 독거미는 독액
을 모았다가 이번엔 옆으로 기어가 미랑의 귓볼을 깨물었다.
두 번이나 독거미에 물린 미랑은 그 중독의 여파로 또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양효비는 놀라
어머니를 붙잡으며 소리쳤지만 감히 손으로 그 독거미를 떼어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
다가 퍼뜩 스치는 것이 있어서 부서진 탁상 다리를 쥐어들고 독거미를 쳐서 땅에 떨군 다음
때려죽였다.
그 독거미를 곁눈질로 본 양과의 뇌리에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 독거미는 채설주(彩雪蛛)라는 거미지?"
양과가 물었다.
"견식이 꽤 넓군 그래. 서역에 있는 채설주를 다 아니 말이야."
완안방방이 비아냥거렸다.
이 채설주는 서역 설산 정상에 사는 거미로서 천하삼독(天下三毒)의 하나였다. 옛날에 금륜
법왕(金輪法王)이 중원의 절독명가(絶毒名家)들과 자웅을 가리려고 이 거미를 가지고 와서
노완동 주백통과 소룡녀를 동굴에 가둔 적이 있었다. 그때 소룡녀는 옥봉(玉蜂)의 도움으로
다행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룡녀는 양과에게 채설주라는 독거미를 보면 각별히 조
심할 것을 알려줬던 것이 생각났다.
"당신은 금륜법왕과 어떤 사이오?"
양과가 물었다. 오로지 금륜법왕만이 이 채설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완안방방은 자지러질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금륜법왕은 내 사형이다. 그가 중원에 온 적이 있지. 그에게 단단히 혼났나 보지?"
양과는 콧방귀를 뀌었다. 금륜법왕에게 진 것이 아니라 소룡녀와 함께 그를 이기기도 했으
며 또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그 일들은 자기 혼자 한 것
이 아니라서 지금 완안방방 면전에서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양과가 말이 없자 완안방방은 자기 추측이 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의기양양해졌다.
"서역의 신공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 어서 물러 가거라."
"당신네 사형제들은 모두 독랄한 인간들이로구만. 오늘은 가만 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양과는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검마냥 탁 내리쳤다. 바다의 험난한 파도가 치
솟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동해에서 매일 목검을 휘두르며 거친 파도와 싸우던 기세
였다. 내리친 것은 한낱 나뭇가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 서슬은 과거 현철중검(玄鐵重劍)
과 거의 다름없었다.
천으로 만든 완안방방의 검집이 거기에 맞아 쭉 찢어지고 그녀는 무령의 광풍에 밀려 비틀
거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검을 쥐었던 팔뚝은 지독하게 저
렸다.
"악마 같은 계집, 오늘은 봐 줄 수가 없다."
양과는 전진하며 나뭇가지를 내질렀다.
나뭇가지와 검이 맞부딪쳤다.
그런데 나뭇가지는 그대로 있는데 그녀의 검만 멍하고 두동강이 나버렸다.
나뭇가지는 계속 그녀의 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기진맥진한 완안방방은 '이젠 죽었구나' 하고는 눈을 질끈감았다.
예쁜 얼굴이 죽음을 앞두고 일그러지는 것을 본 양과는 급기야 사랑하는 아내 소룡녀가 중
독되어 괴로워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미용술에 능한 완안방방! 마흔이 넘은 나이건만 그 얼굴은 서른 미만의 절세가인의 얼굴을
방불케 했으며 헤친 머리에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소룡녀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소룡녀……."
놀란 양과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거둬들였다.
그런데 와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혁중달이 낭아봉으로 그 나뭇가지를
내리쳤던 것이다. 완안방방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본 혁중달이 그녀를 구하려고 달려
들었던 것이다.
나뭇가지는 부러졌으나 혁중달의 낭아봉도 나뭇가지의 강기에 튕겨나가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혁중달의 어깨도 탈골된 듯 저려왔다. 그래도 혁중달은 허풍은 있어 소리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씨에겐 손도 대지 마라."
멈칫하는 사이에 혁중달이 대들자 양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양과는 혁중달도 함께 없앨 작정이었다.
위기를 넘긴 완안방방은 양과가 다시 공격할까봐 급히 뒤로 몸을 뺐다. 양과는 인정사정 없
이 그녀를 뒤쫓았다. 양과를 피할 방법을 잃은 그녀는 별 괴물 같은 녀석이 다 있다는 생각
에 그만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양과가 들고 있는 것이라곤 반밖에 남지 않은 나뭇가지인
것을 보고 기뻐했다.
"남아일언중천금!"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양과는 멈칫했다.
"싸우기 전에 뭐라고 했지? 나뭇가지만 끊어지면 진 것으로 한했잖아? 그러면 우리한테 진
건대 왜 달려들어?"
괴팍한 성미에 세속의 예의범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양과였지만 신용은 가장 중요하게 생
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잠깐 방심하던 탓에 혁중달에게 당한 것을 후회했다.
"좋아, 약속을 지키마. 살려줄테니 어서 꺼져 버려!"
완안방방은 사면받은 죄수처럼 기뻐하며 대문으로 줄행랑을 쳤다. 혁중달은 혹시 양과가 다
시 출수할까봐 뒤를 경계하며 그녀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런데 완안방방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잊지 말아요. 이번엔 이 처녀에게 진 거라구요."
그녀는 아직 시집을 안갔다는 이유로 언제나 이렇게 처녀로 자처하고 있었다.
양과는 코웃음만쳤다.
"대협객님, 왜 저런 마귀년을 놓아주시는 겁니까?"
양효비가 소리쳤다.
양과는 그 말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리어 양효비의 말이 귀찮게 들려을 뿐이었다.
"내가 뭘하든 네가 상관할 게 뭐냐?"
양과가 쌀쌀맞게 대답하자 양효비는 입을 다물었다.
'뭐가 잘 났다고 야단이야? 나라면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앨텐데…….'
그러면서 양효비는 자기에게 힘이 없음을 한탄함과 동시에 그동안 무공 연마를 소홀히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그때 완안방방이 깔깔거리며 또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래야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양과는 그녀가 복수하려는 심산에서 그런다는 것을 알았으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는 떳
떳하게 말했다.
"성은 양이고 이름은 과요. 자는 개지(改之). 종남산 고묘파 사람으로 지금은 천하를 유랑하
고 있는 처지요. 가족도 없는 홀몸이니 두려운 게 없소."
그 말에 완안방방은 무슨 영문인지 얼굴을 붉히며 떠나가 버렸다.
육가장을 나서자 뒤따라오던 혁중달이 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씨, 방금 그 외팔이가 자신을 양과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요새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조협이 아닌가요?"
그 말에 양과 옆에 있던 독수리를 떠올린 완안방방이 깜짝 놀랐다.
"일인일조 독비독행(一人一雕 獨臂獨行)! 맞아, 바로 신조협이야."
독주여니와 혁중달이 떠난 뒤, 양과는 미랑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미랑의 얼굴은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노완동 주백통이 채설주에게 물린 상황을
얘기했던 소룡녀의 말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주백통은 내공이 심후한 사람이었지
만 미랑은 무공을 모르는 보통 여인이니 중독 상태가 더 위중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
다.
천하삼독의 하나인 채설주의 독성에 비견할만한 것은 없었다. 한번 물리면 끝장일텐데 두
번이나 물리고서도 아직 미랑의 숨이 붙어 있으니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완안방방이 미랑을 즉시 죽게 하지 않고 한 십여일 고생하다가 죽게 하려고 사전에
채설주에게 해독약을 조금 먹여 독성을 약화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즉시 절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날 가능성도 없었다.
"대협객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양효비의 물음에 양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자니 독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해독약도 가지고 있다 합니다. 대협객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독주여니를 추격해 해독약을 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양효비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했다.
건방진 녀석이지만 효성은 갸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양과는 탄식을 했다.
"소용없는 일이네."
"왜죠? 해독약만 있으면 어머니는……."
양효비는 고개를 들었다.
"그건 모르는 소리야."
양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 천하 제일의 무공을 갖춘 주백통도 채설주 때문에 죽을 뻔했지. 그런데 미랑같이 가냘
픈 여인이 채설주에게 물린 지 반 시간이 넘었는데 해독약을 구해온다고 해도 어떻게 목숨
을 건질 수 있겠는가? 양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방금 전 독주여니를 보내면서도 해
독약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양효비는 계속 애걸복걸하며 매달렸다.
"대협객님, 제발 우리 어머님을 살려 주십시오. 마지막 말이라도 나눌 수 있게 단 몇 분이라
도 살려주십시오."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미랑을 회생시킬 수는 없다 해도 임종 전에 아들과 몇 마디
라도 나누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양과는 미랑을 가부좌 틀게 한 다음 그 뒤쪽에 앉아 손바닥을 미랑 등의 독맥(督脈)에 대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미랑의 체내에는 이미 채설주의 독이 빠른 속도로 퍼져 힘을 뻗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양과
가 손바닥을 대는 순간 극독이 양과에게 옮겨올 뻔했던 것이다. 대단한 독이었다. 양과는 즉
시 손에 내력을 가해 진기를 주입시켰다.
그러나 채설주의 독은 중원의 여느 독과는 달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독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미랑이 내공 수련을 한 사람이라면 양과와 서로 내외 협공을 통해 사정이 좋아질 수도 있었
다. 그러나 미랑은 보통 여인인데다 혼미한 상태여서 오로지 양과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
었다.
시간이 경과되자 양과의 정수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진기를 밀어넣기 시
작한 것이다. 양효비는 그 옆에서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효비는 죽어 있는 독거미를 내려다보았다. 등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독
거미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던 양효비는 땅바닥을 기고 있는
채설주 두 마리를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거미…… 독거미! 저기 독거미가 또 와요."
진기를 주입해 미랑의 몸에서 독을 빼느라 전신의 규혈(竅穴)을 모두 막고 있던 양과는 양
효비의 비명이 내장을 진동시키는 바람에 자칫했으면 주회입마될 뻔했다.
그는 독거미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눈을 떠 바라볼 수 없었다. 양과는 서서히 내공을 거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랑 체내의 극독이 양과에게 밀려왔다. 하는 수 없이 양과는 또 진
기를 주입하며 막았다. 그러나 양과는 미랑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우선 미랑의 체내에
맹렬한 기세로 뻗치고 있는 극독을 눌러놓아야 손을 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겁한 양효비는 채설주 두 마리가 양과의 몸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러다가 비로소 양과가 쓰던 나뭇가지를 주워들고는 채설주를 털어버리려고 했다. 그러
나 채설주가 얼마나 단단히 붙어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효비는 나뭇가지를
버리고 탁자 조각을 찾았다.
이때 채설주는 스물스물 기어올라 이미 양과의 목덜미에 도달해 있었다.
양효비는 급히 탁자 조각으로 채설주를 쳐냈다. 그러나 이미 채설주 두 마리가 양과의 목덜
미를 깨문 후였다.
채설주 두 마리를 떨군 양효비는 벽돌로 그것들을 찍어 짓이겨 버렸다.
채설주가 양과를 깨물었을 때 마침 그는 진기를 주입해 미랑의 독을 눌러놓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채설주의 극독이 그의 경맥으로 침투하는 바람에 황급히 목 뒤에 있는 경맥들을 폐
쇄하고 눈을 떴다.
"대협객님, 독거미에게 물렸는데 괜찮으세요?"
양효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다행히 채설주가 독액을 내뿜을 때 양효비가 막 그것들을 떨궈 내었기에 양과의 몸에 침투
한 독은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다.
"웬 일이지? 채설주가 또 나타나다니?"
양과가 혼자 중얼거리듯 물었다.
"글쎄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양효비는 납작해진 채설주를 가리키며 으쓱해 했다.
"제가 저 두 놈을 죽여 버린 거예요."
양과는 일어나며 어둠에 싸인 주위를 살펴보았다. 활사인묘 안에서 소룡녀와 몇 년을 지내
는 동안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
나 지금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독주여니가 다시 돌아와 한 짓일까?' 양과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양효비가 말했다.
"대협객님, 그 마녀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요?"
맞았다! 완안방방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기회를 봐서 복수하려고 다시 온 것이었다. 독주
여니는 양과가 미랑을 치료해주는 것을 보고 천재일우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녀는 채설주
두 마리를 꺼내 몰래 들여보내고선 혁중달과 함께 밖에서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양과가 일어나 주위를 살피자 얼른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채설주가 양과를 문 것을 똑똑히 봤는데 왜 말짱한 것일까?'
그들은 양과가 이미 백독의 침투에도 끄떡없는 금강신(金剛身)이 된 줄 알고 내심 탄복했다.
그리고는 몰래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 그들 둘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더니 번쩍 치켜들었
다.
"핫하하, 재미있군. 사내녀석이 비구니와 함께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서 안을 홈쳐보다니.
분명 좀도둑들이겠지?"
완안방방은 반항하려 하였으나 대추혈(大推穴)이 잡혀 전신이 마비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
다.
쥐도 새도 모르게 뒤로 다가선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무공은 신조협 양과를 능가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완안방방이 소리쳤다.
"손 놓으시오. 사내가 함부로 여인의 목을 움켜 쥐다니. 무슨 짓을 하려는거요?"
그 소리를 들은 신조 독수리는 양과에게 주의를 주려는 듯 울음 소리를 냈다. 이때 양과는
채설주의 독이 전신에 퍼짐을 느끼고 얼른 진기를 써서 그것을 눌러버리느라고 바깥 동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양효비는 미랑이 눈 뜨는 것을 보고 상태를 알아보는 데 급급했다.
정원에선 허공에 치켜들린 혁중달이 소리치는데 그를 잡고 있는 사내는 좋다며 키득거렸다.
"비구니가 지껄인 말대로라면 너희들을 놔줘야 한다는 건데. 어디 말 좀 해봐라, 너희 연놈
단 둘이서 이 야심한 시각에 왜 붙어 다니는 게야? 무슨 짓을 하느라고 붙어다녀? 비구니
도 중은 중인데 불문의 법도를 지켜야지. 이게 뭐만 말이야? 계를 어기고 사내를 따라다니
는 너같은 비구니는 불제자들에게 넘겨 벌을 받게 해야 당연하겠지? 그런데 누구한테 넘긴
다? 하하하, 그래! 일등화상이 적합하겠군. 남제 일등화상은 한때 대리국의 황제로도 있었
지. 그 인간은 무뚝뚝해서 좀 재미없는 인간이지. 그저 엄하기만 해서 철장방 방주 구천인도
그 앞에선 꼼짝을 못했었지. 너같이 발칙한 비구니는 일등대사에게 맡겨 벌을 받게 해야겠
다.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거야. 하하하."
그 말에 독주여니는 질겁했다. 정직하기로 유명한 일등대사의 일양지(一陽指) 무공은 천하에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일등대사는 이 독주여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독주여니는 얼
른 사정했다.
"제발, 그러지만 말아주세요. 어떤 벌도 감수할테니 일등대사에게만은……."
그러나 일등대사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 혁중달은 멋도 모르고 독주여니를 위안하려고 했
다.
"아씨, 겁내지 마시오. 이 몸 어떤 일이 있어도 아씨를 보호할 테니까요."
"하하하, 어디 이런 녀석이 다 있을까? 비구니한테 반해서 난리를 쳐? 난 이런 놈을 제일
싫어 하거든."
그러면서 그 사내는 혁중달을 뒤로 확 팽개쳤다. 혁중달은 석 장이나 날아가서 큰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혁중달은 자기를 던진 사내가 백발의 노인임을 볼 수 있었
다.
"이 늙은 놈아, 우리 아씨를 빨리 놔주거라. 늙은 것이 뒈지지는 않고……."
혁중달은 그래도 입은 살았는지 고함을 치고는 객기를 부렸다.
"흐흐흐, 뭐라고? 내가 왜 죽어? 난 늙을수록 새파랗게 젊어가는 늙은 아기 노완동인데. 으
하하하."
백발 노인은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옛날에 주백통은 소룡녀의 벌통을 훔쳐가 옥봉(玉蜂) 다
루는 기술을 배워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소룡녀에게 그 기술을 배
우고 싶었지만 훔친 주제에 낯 뜨거워 도저히 소룡녀를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그 옥봉이라는 꿀벌들을 한무리 거느리고 사방을 떠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오늘 가흥
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옥봉 다루는 기술이 시원찮아 벌들이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벌
들을 뒤쫓다 보니 밤에 여기 육가장에 이르게 되었고 독주여니와 혁중달이 수상한 짓을 하
고 있는 것을 보자 살며시 다가가 그들을 와락 붙잡았던 것이다. 집안을 들여다 보던 노완
동은 양과를 발견하고 기뻐 소리쳤다.
"이게 누군가? 아우 아닌가? 그래, 제수씨도 함께 있나?"
노완동은 소룡녀가 있을까봐 은근히 겁이 났다. 왕년에 훔친 일을 들먹이면 재미없을 것 같
았다.
그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살피다가 그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채 독주여리를 달랑 치
켜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여보게 아우.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뜻밖일세."
그 말에 완안방방은 식은땀이 흘렀다. '노완동이라고? 이거 야단났네. 이 노완동이 양과와
한패라면 난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여보게 아우. 왜 말이 없나?"
그러나 역시 양과는 대답이 없었다. 운기 중이라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완동이 다가서도 그가 계속 말이 없자 노완동은 투덜거렸다.
"아내 말을 듣고 나를 나쁜 인간 취급하는 건가?"
소룡녀가 실종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모르는 노완동은 소룡녀가 그 옥봉에 관한 일을
양과에게 얘기해서 그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여보게 아우. 이 노완동이 세상에서 가장 명백한 이치 하나를 가르쳐 주지.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게 뭔지 아나? 바로 여자야. 여자들 말은 도통 믿을게 못된다구. 그러니 여자 말을
믿고 친구를 버리면 못쓰지. 알겠나? 아우…… 거 곽정 그 바보 같은 녀석 보라구. 원래 나
와는 의좋은 형제나 다름없었는데, 그 괴팍한 황용에게 홀리더니 이 형님도 버리더란 말이
야. 임자는 그러지 말게나. 알았나?"
그런데 갑자기 양효비가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쥔 채 욕을 해댔다.
"이 지독한 것아! 내 오늘 사생결단을 내리라."
양효비의 눈에 살기가 번득임을 본 주백통은 잠시 얼떨떨했다.
"이 자가 왜 이러지? 도대체 나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어서 그러는거야? 우린 생면부지인
데……."
그리고 양효비가 덮쳐오는 것을 보고서도 어쩌는가 한번 보자는 심산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투닥투닥 사람치는 소리와 함께 완안방방의 비명과 욕설이 들렸다. 그제서야 영문을
안 노완동이 눈을 떴다.
"이 비구니 버릇을 가르치겠다는걸 난 또……. 그래 잘한다. 버릇 좀 고쳐줘라. 난 여자에겐
절대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니 네가 대신 혼 좀 내줘라."
노완동은 완안방방을 치고 차고 하는 양효비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완
동은 완안방방을 내려놓았다. 계속 그러고 있자니 힘이 들었던 것이다.
땅에 떨어진 완안방방은 꼼짝 못하고 양효비에게 얻어 맞기만 했다. 대추혈을 찍혀 반항하
려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 철포삼(鐵布衫 : 창 칼에 찔려도 끄떡없는 무공)
같은 무공을 갖추지는 못한 터라 얻어 맞는대로 피멍이 들었고 그 아픔은 뼈를 깎는 듯했
다.
양효비는 처음엔 그녀의 몸만을 때리다가 때릴수록 화가 나자 이젠 완안방방의 얼굴을 가차
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완안방방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퉁퉁 부어올랐다.
평소 자기 얼굴을 아끼고 자랑하며 늘 거울을 맞대고 분단장을 하던 완안방방은 그 예쁜 얼
굴이 망가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완안방방은 이를 갈았다.
"이 자식아, 이 할미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그때 어디 두고 보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노완동은 양효비가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보고 말렸다.
"됐네 됐어. 그러다가 사람 잡겠네. 관가에 끌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무섭지 않아? 이 노
완동은 관가 포졸들이 제일 무서운데."
"저년이 우리 어머니를 해쳤어요."
씩씩거리며 양효비는 완안방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뭐? 저 비구니가? 나이 어린 비구니가 네 어머니를 해쳤다구? 무슨 얘긴지 자세히 해보아
라."
노완동은 미랑을 돌아봤다.
"저 여인이 네 어머니냐? 무슨 말을 하려는가 보다."
양효비는 얼른 미랑 곁으로 갔다.
"어머니, 어때요? 좀 나아요?"
"좀 괜찮다. 할 말이 있단다."
정신을 차린 미랑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미랑은 몇번 탄식하더니 말을 이었다.
"너하고만 말인데, 네 아버지는…… 네 아버지는……."
미랑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양효비는 급히 어머니의 입가에 귀를 댔다. 그러나 미랑은 입
술을 몇번 움직이다가 고개를 떨구더니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갑자기 양효비가 한동안 대
성통곡 했다.
"울긴 왜 울어? 네 어머닌 아직 죽지 않았어."
노완동이 양효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양효비가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어머니가 다시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미랑은 주백통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시우?"
도리어 노완동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신선님, 이리 좀 오세요."
미랑이 불렀다.
이때까지 '신선님'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는 그 말이 좋아서 다가갔다. 그런데 미랑
이 노완동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니, 이거. 이 손 놓으시오."
노완동이 놀라서 소리쳤다.
젊은 시절 실연을 당한 적이 있는 주백통은 여자들이 달려드는 것을 제일 귀찮고 두려워했
다.
"한 가지만 허락하세요. 그러면 손을 놓겠어요."
미랑이 말했다. 노완동은 한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라도 들어주고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
다. 노완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제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신선님을 찾을 겁니다."
여인도 무서워 하지만 귀신도 두려워 하는 노완동은 몸까지 떨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님께서 저 마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만 봐도 무공이 신조협보다 몇 배 월등함을 알
수 있어요. 제가 죽음을 앞두고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랍니다. 제 아들 양효비를 제자로 받
아 주세요. 무공을 가르쳐서 앞으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신선님이라고 부르더니 이런 철부지 녀석을 떠맡기려고 그런 거구나. 신선님이란 말 한마
디 값 한번 비싸구나' 하면서 노완동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미랑이 또 다그쳐 물었다.
"신선님, 왜 대답이 없으신거죠?"
노완동은 난감했다. 제멋대로 자란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는 싫었다. 야율제(耶律齊)란
녀석 하나를 제자로 받았다가 생고생을 했던 그였다. 다행히 야율제가 개방 방주가 되는 바
람에 그 고생에서 풀려났는데 또 제자를 받으라니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있나?
"죽은 귀신이 신선님을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구는 것을 견딜 수 있을는지요. 그러시다면 허
락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말에 노완동은 펄쩍 뛰었다.
"아이고, 허락한다니까. 허락하면 되지 않소? 제발 그 소리 좀 그만하시오. 나 말고 다른 사
람이나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시구려. 저 양과나 곽정 아니면 황용이나 동사 황약사……."
그러나 그러는 사이 미랑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양효비는 어머니에게 엎어지며 대성통곡했다. 노완동은 망설였다. 미랑이 죽었으니 이 틈에
도망가 버릴까? 그러나 미랑이 정말로 귀신이 되어 따라다니면 어떡하지? 노완동은 안절부
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바닥에 있는 채설주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지르며
눈깜짝할 사이에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아이쿠, 독거미! 독거미 좀 봐!"
그러나 새로 받아들인 제자에 생각이 미친 노완동은 다시 돌아와 양효비를 치켜들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채설주의 독에 중독되어 죽을 뻔했던 노완동이었기에 채설주 그림자만 봐도 걸음아 나 살려
라 하고 줄행랑을 친 것이었다.
양과는 그 동안 주백통이 와서 법석을 피우는 것을 두눈을 뜨고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운기조식 중이라 조금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완동과 인사도 하지 못했던 것이
다.

노완동은 채설주에 중독되어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옥봉의 독으로 채설주의 극독을 밀어내
고 살아났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양과는 체내의 채설주 독을 진정시켜 놓고 나서 노완동에
게 옥봉을 불러오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노완동은 죽은 채설주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도
망쳐버린 것이었다.
양과는 낙심했다. 노완동이 갖고 있는 옥봉 말고는 오직 종남산의 고묘에만 옥봉이 있을 뿐
이었다. 그런데 종남산이 여기서 얼마나 멀리 있는가? 종남산의 옥봉을 지금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과는 뜰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완안방방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윽박질러
해독약을 빼앗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이제 체내의 독을 진정시킨 다음 그녀의 몸
에서 해독약을 찾아내리라고 작정했다.
완안방방은 두 눈을 꼭 감고 말없이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주백통이 찍은 혈도를 풀어야 하
기 때문이었다. 버드나무 위에 걸려 있는 혁중달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씨, 괜찮아요? 좀 나아요?"
그저 간혹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소리칠 뿐 도리가 없었다.
완안방방은 질색했다.
'저런 바보 녀석같으니라구. 무슨 목소리가 저렇게 커? 그러다가 남의 일 간섭하기 좋아하
는 강호인들이라도 몰려오면 어쩌려구?'
그러면서도 완안방방은 운기조식을 멈추지 않았다. 주백통은 완안방방에게 장난을 친 셈이
었지 악의는 없었다. 그래서 혈도를 누를 때 그다지 힘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완안방방의
무공으로는 한 시간 쯤 그렇게 운기조식하면 혈도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양효비가 완안방
방을 마구 치고 차고 할 때 부지불식 중에 그녀의 혈맥 몇 곳을 쳐놓아서 그만 모든 혈맥이
봉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완안방방이었기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혈맥을 다시
풀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혁중달도 주백통에게 혈도 몇 군데를 찍혔다. 혁중달은 힘은 장사였으나 내공 수련은 부족
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혈도를 풀 수가 없었다. 도리어 애쓰면 애쓸 수록 혈도가 더 막혀
버렸다.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아왔다. 육가장에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양효비네 집은 다른 집들과는 좀 떨어진 육가장의 변두리에 있었다. 그래서 밤에 양효비네
집에서 일어난 일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서호가엔 안개가 피어오르고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옅은 운무(雲霧)를 헤치고 나귀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곧이어 한 묘령의 여인이 탄 나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
다. 분홍색 적삼에 흰 치마를 입고 붉은 신발을 신은 여인은 나귀 위에서 허리를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다.
나귀가 양씨네 집 앞을 통과할 때 그 여인은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무너진 벽과 아수라장
이 된 뜰이 보이자 '어머나' 하며 나귀를 멈췄다. 그리고는 뜰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피투성이가 된 한 비구니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벽을 통해 집안을 보니 흉하게 생긴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날카로운 눈길을 하고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누더기를 걸친 외팔이 사내가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
었다.
묘령의 여인은 또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귀에서 내려 천천히 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그녀는 담벽 아래 머리가 깨진 채 누워 있는 여자 시체를 보았다.
묘령의 여인이 안으로 더 들어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아가씨. 어서 도로 나오시오. 우리 아씨를 건드리면 안되오."
묘령의 여인이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를 보시오. 이 나무 위를!"
혁중달이 나무 위에서 또 소리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그를 본 묘령의 여인은 깔깔거리며 웃
었다.
"거기서 뭐해요? 새 잡으려고요?"
"거 무슨 허튼 소리요? 난 장군이오. 장군이 애들처럼 새잡이를 하겠소?"
혁중달은 기분이 상했다.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혁중달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본 그
묘령의 여인은 그 사내가 우스꽝스럽게 생각됐다.
"호호, 죄송해요. 대장군님을 몰라뵈었으니 큰 죄를 지었네요. 그런데 새잡이도 안하신다면
서 나무 위에는 왜 올라가신거죠?"
"보면 모르오. 이 장군은 남에게 혈도를 찍혔거든. 그 놈이 날 여기로 던진거요."
혁중달은 십팔구세로 보이는 이 어린 계집애가 혈도가 뭔지 알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그 여자를 위해 진심으로 말했다.
"여긴 골치 아픈 곳이오. 어서 여기를 떠나요, 알겠소?"
"왜 자꾸 떠나라고 하시는 거죠? 무슨 나쁜 일을 저질러놓고 눈에 띌까봐 그러는거 아녜
요?"
그러면서 묘령의 여자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여자가 완안방방에게 다가서자 혁중달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이쿠 야, 어서 나오지 못해!"
그러나 그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더 들어가 봐야지."
완안방방 곁에 다가선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완안방방의 코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어머, 아직 살아 있네."
"너 거기서 물러서지 못해? 이 혁장군님에게 혼 좀 나겠어?"
혁중달이 또 악을 쓰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혁중달은 완안방방이 스스로 운기조식하며 혈도를 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누
가 건드리면 만사가 어그러진다.
혁중달은 젊은 여자애가 완안방방의 운기조식을 망쳐놓을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가만 있어요. 걱정 말라구요.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묘령의 여인이 비웃듯 혁중달에게 말했다.
"알다니, 뭘 알아?"
"장군이라 자처하는 당신이 강도질 하러 왔다가 이 비구니를 해친거죠. 그래서 내가 알까봐
자꾸 가라는 거죠? 내가 뭐 가라면 가는 사람인가? 먼저 이 비구니를 의생한테 데려다 주
고 당신하고 결판을 낼거야."
그리고 묘령의 여인은 완안방방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기만 하면 아씨의 운기가 끝장난다고 생각한 혁중달이 다급해서 소리쳤다.
"그러지 말아. 그러지 말아요. 아이고, 건드리면 큰일난다니까."
제3장 거와회의(巨蛙會議)
묘령의 여인은 손가락으로 완안방방의 몸을 슬쩍 눌렀다. 스스로 혈도를 열고 있던 완안방
방은 등이 시원해지면서 대번에 혈맥이 열리고 막혀 있던 혈도들이 모두 풀어졌다.
완안방방이 눈을 뜨니 한 묘령의 여자가 자기를 바라보며 방실방실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완안방방은 일어나 그 처녀에게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염했다.
"시주님, 고맙습니다. 시주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묘령의 여인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샛별같이 밝은 눈에 꽃같이 아리따운 얼굴, 천진난만
한 성격이 퍽 사랑스러워 보였다.
"시주님의 은혜로 살아나고서도 존함을 모른다면 평생 유감일 것입니다."
완안방방이 다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알려드리지요. 이름이 예쁘지 않아요. 그렇다고 웃지는 마세요. 전 성은 무
(巫)가이고 이름은 채접(彩蝶)이에요."
"네, 그러세요. 좋은 이름이네요. 시주님의 예쁜 모습과 딱 어울리네요."
그 말에 무채접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스님의 법호는 어떻게 되시죠?"
"법호는 아직 따로 없습니다. 이름은 방방이고 성은 복성으로 완안이에요."
"그럼 스님은 여진 사람인 가보죠?"
무채접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완안방방은 웃는 낮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완안방방은
쌩하고 뜰 밖으로 날아가 혁중달을 나무 위에서 내려놓고 혈도를 풀어준 다음 다시 바람처
럼 돌아왔다. 그 동작이 마치 물찬 제비같이 신속했다.
"아주 대단한 경공이시네요."
무채접이 탄성을 자아냈다.
"가르쳐 드릴까요? 배우실래요?"
완안방방이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채접을 제자로 삼을 생각이 있었
다. 방금 혈도를 푸는 것을 보고 무채접 무공의 모자라는 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나,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무채접은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나 이내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우리 사부님과 언니가 타 문파의 무공을 배우지 못하게 하니 큰일이에요. 스님의
호의는 진정 고맙습니다만……."
완안방방은 그 말에 고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무공이 능히 강호를 종횡할 수 있는 일
류인데다가 독주여니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이가 수천인데 요 조그만 계집애가 감히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을 거부하다니! 생각같아선 한번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자기
혈도를 풀어준 것을 고려해 그저 웃고 말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
았다. 내공이 높았던 까닭에 얼굴에 있던 피멍도 어느덧 없어지고 부기도 많이 내렸다. 완안
방방은 그 전의 미모를 다시 되찾은 것이었다.
저런 미모의 중년 부인이 불가에 몸을 맡겨 비구니가 되었다니 이런 아까운 일이 있나? 무
채접은 내심 놀랐다. 어린 나이지만 총명한 무채접은 완안방방이 무슨 사연이 있어 출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씨,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혁중달은 집 안에 있는 양과를 가리켰다.
원수 미랑은 이미 죽었지만 그 아들 양효비는 주백통이 데리고 가버린 것을 생각하니 양효
비마저 죽이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양과만 없었더라면 양효비는 벌써 죽었을 거
야. 그리고 밖으로 피했다가 미치광이 같은 노완동에게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양과 탓이렷다.
"내 모든 일을 망쳐 놓았는데 살려둘 수야 없지? 죽여버려!"
완안방방이 검을 꼬나 쥐고는 양과에게 다가가자 혁중달도 급히 따라갔다.
곁에서 양과를 지키고 있던 신조 독수리는 그들이 살기등등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날카롭
게 쏘아보며 꽥꽥 울었다.
"혁장군! 저 괘씸한 짐승부터 죽여버리시오."
"예."
혁중달은 냉큼 달려들어 낭아봉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신조 독수리는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왼쪽 날개를 들어 막았다. 삼십근이 넘는 낭아봉이 신조 독수리의 날개에 두
자나 튕겨나갔다. 혁중달은 어깻죽지가 찌릿했다.
"망할 놈의 짐승, 힘이 굉장하군!"
혁중달은 씨익 웃었다.
신조 독수리는 힘도 무척 셌지만 무공도 일류 고수에 못지 않았다. 일전에 양과는 칠십근이
나 되는 현철중검으로 신조 독수리와 겨뤄본 적이 있는데 끝내 이기지 못했다. 그런 신조
독수리가 혁중달의 낭아봉을 무서워할 리 있겠는가?
혁중달은 다시 덤벼들며 낭아봉으로 내리쳐 보았으나 이번에도 날개에 튕겨나 움찔하며 몇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싸움엔 이골이 난 혁중달도 힘으로는 안 될 줄 알고는 이번엔 빠르고 교
활한 술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조 독수리는 힘뿐만 아니라 무공 기예도 대단했다. 신조 독수리는 검마 독고구패
에게 무공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신조협 양과에게도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혁중달 같은 일
개 무부(武夫)는 안중에도 없었다. 몇 합 지나지 않아 신조 독수리는 혁중달의 낭아봉을 덥
석 물고 잡아채며 두 날개로 쳤다. 혁중달은 낭아봉을 빼앗기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조 독수리의 무공이 고강함을 알게 된 완안방방과 무채접은 모두 크게 놀랐다.
완안방방은 이를 악물더니 검을 휘두르며 신조 독수리에게 대들었다. 날카로운 검 날이 신
조 독수리의 두 날개를 이리저리 찔렀다. 신조 독수리는 그 검 날을 피하며 뒤로 한걸음 물
러섰다. 신조 독수리 무공의 허점을 발견한 완안방방은 신이 나서 검을 더욱 빨리 휘둘렀다.
신조 독수리의 날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검을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몇 합을 싸우지
않아 신조 독수리의 날개깃이 검날에 베어 여러개 떨어졌다. 그래도 신조 독수리는 완강히
싸웠다. 또 신조 독수리는 날개에 검을 맞았다. 다행히 신조 독수리의 가죽이 두껍고 질기기
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양과는 운기조식을 하며 체내에 퍼지고 있는 채설주의 독을 누르고 있었다. 이미 두 시간
동안 그렇게 눌러 왔기에 독은 경맥 안으로 더 이상 침투하지 못했다. 양과의 귀에 완안방
방이 휘두르는 검 소리가 쌩하고 날카롭게 들렸다. 양과가 눈을 떠보니 신조 독수리의 날개
가 그녀가 휘두른 검에 의해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신조 독수리를 감격의 눈길로 바라보던 양과는 중독된 자기 몸을 무시하고 뛰쳐나가 목검을
휘둘렀다.
채설주 독에 중독되어 꼼짝 못할 줄 알았던 양과가 갑자기 뛰어들며 목검을 휘두르자 완안
방방은 놀라며 얼른 검으로 막았다.
그러나 양과의 목검은 보기와는 달리 바다의 파도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검에
맞았으나 목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 도리어 완안방방이 뜰쪽으로 튕겨나갔다.
목검을 짚고 양과가 소리쳤다.
"오늘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어서 도망가거라."
무채접은 죽은 사람의 얼굴같이 무표정한 양과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목검 하나로 완안
방방의 예리한 보검을 단번에 물리쳐 버리는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젯밤 양과에게 단단히 당한 완안방방은 그와 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더 싸워봤댔자 승산
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완안방방은 달아나 버렸다. 혁중달도 급히 그 뒤를 따랐
다.
그 광경을 본 무채접도 어쩐지 불안하여 양과를 보고 한번 웃고는 나귀를 타고 떠나 버렸
다.
그들이 떠나자 양과는 비로소 가면을 벗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
고 살갗엔 푸른빛이 감돌았다. 방금 완안방방을 쫓아보내느라 진기를 쓴 사이에 채설주의
독이 경맥 속으로 침투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독을 제거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다행히
채설주들이 독을 다 뿜기 전에 양효비에게 맞아 떨어졌으니 그 정도지. 만약 채설주가 독을
다 물었더라면 양과는 노완동처럼 혼절해서 거꾸러졌을 것이다.
채설주 같은 극독이 일단 경맥에 침투하면 진기를 운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체내의
진기의 운용이 빠를수록 중독이 심화되기 때문이었다. 운기를 멈추고 신조 독수리와 함께
집을 나온 양과는 신조 독수리에게 눈짓을 했다. 신조 독수리는 날개를 펄럭거려 미랑의 집
을 허물어 미랑의 시체를 덮어 버렸다.
신조 독수리와 양곽, 일인일조(一人一鳥)는 육가장을 떠났다.
양과는 진기를 운행할 수 없었기에 무공이 평소에 비해 반이나 줄었다. 이런 무공으로 강호
를 떠도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원수를 만난다면 살아남기도 힘들 것이다.
더욱이 목검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적수공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양과는 가흥성으로 가 장
검을 한 자루 사서 허리에 찼다.
또 생각해보니 외팔이라는 사실과 신조 독수리 때문에 남의 눈길을 끌기가 쉬울 것 같았다.
그는 신조 독수리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지금 내 무공이 반이나 줄었으니 나를 따라다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독고 선배님의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니?"
신조 독수리는 헤어지기가 서운하다는 듯이 낮은 소리로 꾸륵꾸륵 울었다.
"나도 너를 떠나보내기 싫지만 강호엔 강적들이 너무 많아.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남의 눈
에 띄기가 너무 쉬워. 게다가 난 종남산의 고묘에 돌아갈 결심을 했거든. 그 곳으로 가자면
넓은 강을 건너야 해. 그런데 넌 그 강을 건널 수 없잖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눈치로 양과의 결심을 알아차린 신조 독수리는 꾸꾸꾸하
고 몇번 울음을 삼키더니 서쪽을 향해 성큼성큼 떠나버렸다.
신조 독수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물이 글썽해 있던 양과는 발걸음을 북쪽으로 돌려
종남산으로 향했다. 고묘에 가서 채설주의 독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양과는 원래 변덕이 심했다. 그러나 몇년 동안 열심히 수련하며 심신을 안정시켰기에 정서
도 무척 평화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어젯밤 채설주에 중독되고 보니 옛날의 그 본성이 다시
살아났다. 남호를 보고 있자니 어릴 때 문전걸식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예전에 비바람을 피하던 한 토굴에 이르렀다.
모든 게 지난날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여기서 적련선자 이막추가 육입정 부부를
죽였고 양과는 후에 의형제가 된 정영과 육무쌍을 알게 되었으며, 자기 팔을 끊어버린 곽부
도 만났던 것이다. 팔을 잘린 그 고통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옛날의 성미가 살아난 양과
는 곽부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곽부는 이미 개방 방주인 야율제와 결혼을 했고 양양(襄陽)에서 곽정과 황용을 따라 원나라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양과는 복수심에 불탔으나 지금의 줄어든 무공으로는 그들 네 사람
이 아니라 곽부 혼자도 당해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목적없이 걸어가던 양과는 자기
도 모르게 다시 가흥성으로 돌아왔다. 비단가게 앞을 지나던 그는 갑자기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동해를 떠나 이곳에 오는 동안 적지 않은 무림 호걸들을 없앴으니 이 외팔이가 어떻다는
소문이 이미 강호에 확 퍼졌을 거야. 남의 눈을 속이려면 이 외팔 형상부터 고쳐야 해.'
양과는 가게에 들어가 검은 천을 샀다. 그리고 객점에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그 천을 팔뚝
굵기만큼 똘똘 말았다. 그 다음 그것을 끊어진 팔뚝에 매달고 오른팔이 다친 것처럼 보이게
끈으로 묶어 목에 걸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그럴 듯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어 상투를
다시 틀고 새옷을 입으니 영준하게 생긴 모습이 되살아났다.
객점을 나온 양과는 남들의 반응도 살펴볼 겸 거리 구경을 했다. 길가에 있는 젊은 여자들
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본 양과는 의기양양해졌다. 그의 아버지처럼 풍류를 좋아
하는 양과였지만 소룡녀에게 반한 뒤부터는 자제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곽부와 육무쌍 그
리고 절정곡의 공손록악(公孫緣 )의 질투와 원망을 했다. 그런데 지금 원래의 천성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긴 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백의 여인이 수양버들처럼 호리호리한 몸매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용녀!"
양과는 기뻐서 그렇게 소리치며 달려가 그 여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그 백의 여인은 얼른 어깨를 움츠리며 몇 발짝 뛰어가더니 돌아서서 쏘아보았다.
"왜 이래요?"
백의 여인의 얼굴을 본 양과는 흠칫 놀라며 이내 한숨을 지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주 추하게 생긴 여자가 아닌가. 거무튀튀한 얼굴에다 두 뺨엔 여드름이 보
기 끔찍할 정도였다.
"용녀인 줄 알았더니……."
양과는 겸연쩍다는 듯이 말했다.
"용녀?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죄송합니다. 잘못보고 그만……."
양과는 읍하며 사과를 했다.
백의 여인은 양과를 훑어본 후 좀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
"그렇게 덤벙대다니……."
그런데 양과는 이 백의 여인이 나무라는 말투조차 소룡녀와 비슷한데 또 한번 놀랐다.
그때 한 여자가 달려왔다.
"언니, 왜 그래요? 누구하고 다투는 거죠?"
그 여자를 본 양과는 또 놀랐다. 그 여자는 바로 독주여니를 구해준 소녀 무채접이었던 것
이다.
가면을 벗고 또 오른팔도 위장했기에 무채접이 그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무채접은 백의 여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언니, 저 사람은 누구예요?"
그리곤 양과에게 다가섰다. 양과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다."
그러자 무채접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수작을 하는 사람을 어디 한두번 본 줄 알아요? 우리 언니는 벌써 이런 일을 여러번
당했다구요."
양과는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저런 추녀에게도 치근덕거리는 사람
이 있단 말인가? 글쎄, 이 동생이라면 모를까.'
백의 여인은 무채접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쓸데없는 말 말고 어서 가자. 늦겠어."
그리고는 무채접의 손을 끌고 가버렸다.
무채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과는 실망했다. 무공은 비록 줄었다지만 청력은 여전했다. 그
래서 그는 무채접이 백의 여인에게 소곤거리던 말을 다 들었던 것이다.
"언니가 변장을 해서 그렇지. 안그랬다면 저 사람에게 귀찮은 일 당할 뻔했어요."
그 말에 백의 여인은 그 어떤 슬픈 사연이 있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양과는 비로소 그 백의 여인이 일부러 그렇게 변장한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저 백의 여인
은 누군가? 혹시 소룡녀가 아닌가?' 그는 곧 두 여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가흥성을 벗어나자마자 두 여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양과는 급히 나무 뒤로 숨
었다. 무채접이 가던 길을 되돌아 다가왔다. 그녀는 양과가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소리
쳤다.
"숨지말고 나와요. 숨긴 왜 숨어?"
양과는 별수 없이 나무 뒤에서 나왔다.
"말짱하게 생긴 사람이 왜 여인의 뒤를 따라다니는 거죠? 팔 하나를 다치고도 정신 못차리
면 내가 그 나머지 성한 팔마저 분질러 놓을테야."
무채접은 화가 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런게 아니라 난 저 처녀의 진짜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서……."
소룡녀 생각 때문에 양과는 자제력을 잃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다른 집 규수의 얼굴은 왜 보겠다는 거죠? 이봐요, 제 정신예요?"
그래도 양과는 앞으로 한발짝 더 다가가 굽신 절까지 했다.
"어쩐지 저 아가씨가 헤어진지 몇 년 되는 제 아내 소룡녀 같아서 그러니, 양해해주세요."
그 말에 무채접은 침을 뱉었다.
"무슨 소리요? 언니는 아직 숫처녀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맞고싶어서 하는
소리지."
무채접은 말할 수록 골이 더 나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양과의 뺨까지 후려치려고 했다. 양과
는 얼른 피했다.
"아가씨, 이러지 마시오. 성이 무씨지요?"
그 말에 무채접은 흠칫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디 이렇게 흉측한 사람이 다 있을까?"
무채접은 양과를 호색한으로 알고 화가 나서 양장을 내지르는 척하다가 갑자기 발을 날렸
다.
양과는 그 기습에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무공이 줄어든 그의 동작은 뜻대로 되지 않
았다. 양과는 아랫배를 힘껏 채였다. 그는 배를 끌어안으며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
의외로 발길질 한번에 상대방을 격퇴한 무채접은 의기양양했다.
"이젠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거 알았죠? 또 따라오기만 해봐라. 이번에 왼팔을 분질러 놓
을테니까."
그리고 돌아서서 백의 여인에게 뛰어갔다.
"용녀, 여보 용녀. 왜 날 모르는 척하는거요? 남해신니가 허락하지 않아서 그러는거요?"
양과는 아픔을 무릅쓰고 외쳤다.
그러나 두 여인은 대답도 없이 경공을 쓰며 가볍게 날아가버렸다. 그런데 그 나는 모습도
용녀와 비슷했다. 그렇지만 남해신니가 소룡녀에게 중원에 없는 무공을 더 가르친 탓인지
그 경공에는 어딘가 괴이한 면이 있었다.
양과가 아픔을 참고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 두 여인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
는 이번엔 어떡하든 소룡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다.
가다보니 한 농가에 말이 여러마리 있기에 비싼 값에 한 마리를 샀다. 그 말을 타고 채찍을
가하며 달렸지만 농가에서 수레나 끄는 말이었던지 속도가 아주 느렸다.
그렇게 가다보니 세 갈림길이 나왔다. 양과는 말고배를 낚아채며 잠시 망설였다. 어느 길로
가야 하지?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말을 탄 사람 십여 명이 달려왔다. 앞서 오는 자는
깡마른 얼굴에 등에는 귀두도(鬼頭刀)를 메고선 연신 채찍질을 해대면서 외쳤다.
"물러서라, 물러서!"
양과가 급히 옆으로 비켜서자 그들은 왼쪽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가벼운 차림에 귀두
도를 메고 있었다.
양과는 허리를 굽히고 왼쪽 길을 살펴보았다. 금방 난 새 말발자국 외에 전에 난 말 발자국
도 무수히 보였다. 그런데 가운데 길과 오른쪽 길엔 말발자국도 없었고 풀이 자라 길을 덮
고 있었다.
백의 여인과 무채접이 무슨 일이 있다고 했지? 아마 십여명의 사내들이 찾아가는 일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지?
양과는 말을 몰아 왼쪽 길로 향했다.
그는 귀두도를 멘 사내들을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그들이 탄 말은 모두 준마들이
었다. 그러나 양과가 타고 있는 말은 농가에서 구한 것이었기에 처음엔 겨우 따라갈 수 있
었지만 밥 한솥 지을 시간이 지나서부터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다급해진 양과는 죽어
라고 채찍질을 하며 말을 몰아댔다.
갑자기 말이 푹 하고 쓰러졌다. 양과는 황급히 뛰어내렸다. 길 옆 풀 속에 쓰러진 말은 땀투
성이에다가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너무 지쳐 쓰러진 것이었다. 양과가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서 가서 용녀를 만나야 하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양과는 탄식을 내지르며 말을 버리고 길을 나섰다.
사오리를 못가서 조그마한 마을이 보였다. 수초들이 파랗게 자란 호수가 푸른 숲에 둘러싸
인 마을 곁에 있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양쪽에서 장정이 달려오더니 창을 겨누고 소리쳤다.
"누구요?"
앞서 온 말 발자국이 마을 안으로 곧장 나 있는 것을 본 양과는 거짓말을 했다.
"방금 온 사람들과 함께 온 사람이오. 타고 오던 말이 병이 들어 쓰러지는 바람에 이렇게
혼자 걸어온 것이오."
"그럼 귀두방(鬼頭幇) 사람이란 말이오? 그런데 왜 귀두도는 없는 것이오?"
그제서야 그 십여 명의 사내가 귀두방 사람들이란 것을 안 양과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보다시피 이렇게 오른팔을 다쳐서 칼 쓰기가 불편해서요. 그래서 안 가져온거요."
장정들은 양과의 오른팔을 보고 그 말을 믿었는지 들어가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
아 또 장정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양과는 아까처럼 또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장정들이 말
했다.
"오늘 이곳에서는 거와회의(巨蛙會議)가 열리고 우리 장주님 아가씨께서 신랑 선택을 하시
는 날이오. 손님들에게는 청첩장을 보냈으니 귀두방의 호걸이시라면 청첩장을 보여주시오."
양과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청첩장은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함께 가지고 갔을텐데, 못봤소?"
"못봤는데……."
장정들은 서로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다급해진 양과는 화가난 척 언성을 높였다.
"내가 팔을 다쳐 물건을 지니기가 불편한데다가 도중에 재수없이 말까지 거꾸러지더니 여기
서도 이렇게 홀대를 받다니, 아니 이곳 사람들은 손님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접하오?"
그 소리에 장정들은 당황했으나 청첩이 없는 자는 결코 들여놓지 말라는 장주의 엄명이 있
었기에 그냥 양과를 막고만 있었다.
그래서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데 안에서 청년 한사람이 나타났다. 스물서넛에 몸이 꽤 실
해 보였다. 그는 자주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는 옥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있었다.
"왜들 그러나?"
장정 하나가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 이 사람이 청첩도 없으면서 들어가겠다 합니다."
양과는 그 청년이 묻기 전에 의연하게 말했다.
"소장주(小莊主)이시군요?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어서. 그러나 먼 데서 이렇게 왔는데 여기
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뜻밖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양과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환해지며 벙긋 웃었다.
"모용세가(慕容世家)의 모용협 모용공자가 아니십니까?"
'들리는 바에 따르면 모용협은 무림에서 늦게 이름난 청년이지만 그 명망이 개방 방주 야율
제에 버금간다고 하던데 이 소장주가 왜 나를 모용협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양과가 짐짓 그런 척하며 말했다.
"나같은 미천한 사람의 이름이 소장주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크게 웃었다.
"모용공자님의 대명을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엄친께서는 공자님께 청첩을
보내시고 마냥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거 부끄럽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정말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오군량인데 그저 아우처럼 대해 주십시
오."
"아니 그럼 오형은 내가 늙은이로 보인단 말이오?"
"정말 이렇게 재미있는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둘은 나란히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무공이 대단한 모용협이기에 아주 오만할 것으로
알았는데 뜻밖에도 겸손하고 농담까지 하는지라 오군량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문에 모용공자께서는 동정호 수채(水寨)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열세 명 중에 아홉을 죽이
고 셋을 중상 입혔다고 하더군요. 달아난 사람은 겨우 채주 한 사람 뿐이라지요?"
오군량의 말에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을 위해 도적을 제거하는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조금 한 것
뿐이죠."
"모용공자님께선 한 팔을 다치고서도 왼손만으로 동정호 수채에서 가장 센 놈을 죽여버렸다
면서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원래 그렇게 된거군. 그래서 이 청년이 날 보자마자 모용협으로 오인한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양과가 물었다.
"장주님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취현청에서 각지에서 온 영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리로 가시죠."
"오형, 이 아우가 부탁할 게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든지 하십시오, 힘이 닿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들어드리지요."
"아주 쉬운 일입니다. 내 이름을 오형만 알고 계시고 다른 이들에겐 알리지 말았으면 하는
소청입니다."
"그건 왜죠?"
오군량은 이상하다는 듯이 양과를 바라보았다.
"강호에 이름이 좀 났더니 호승심 강한 사람이 또 무공을 겨뤄보자고 나설까봐 그럽니다.
보시오. 이런 팔로 내가 어떻게 겨루기를 할 수 있겠소?"
"하긴 그렇군요. 그러나 저희 아버님은 만나 보셔야죠."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양과가 웃었다. 양과를 서실로 데리고 간 오군량이 말했다.
"제가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오군량이 나가자 양과는 서실을 둘러보았다. 거문고, 바둑, 책과 서화 그리고 문방사우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어릴 때 황용에게 글 읽는 것을 배운 양과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글 읽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글 읽는 사람들을 부러워 했다.
'앞으로 소룡녀와 더불어 청산심곡에 은거해 매일 독서와 무공연마로 낙을 삼으리라. 그처
럼 즐겁고 신선같은 생활이 또 있을까?'
밖에서 가벼운 발짝 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에서 멈췄다.
"아버님, 계세요?"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치렁치렁하게 드리워진 발을 걷어올리며 예쁜 처녀 하나
가 들어왔다. 처녀의 복색은 소박한 편이었고 장식물도 많지 않았으나 얌전하고 매우 청순
해 보였다.
처녀는 양과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공자님은 누구세요?"
"모용협입니다."
양과의 대답에 처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모용세가의 모용공자님이시군요. 죄송합니다."
"그쪽은……."
양과도 답례를 하며 물었다.
"전 거와장 장주인 오자겸의 딸로 이름은 군영(君瑛)이라 합니다."
캐물은 것도 아닌데 자기 신분을 이렇게 상세하게 말하는 것을 본 양과는 이 처녀가 상당히
순진하다는 생각에 빙그레 웃었다.
"오군영 아가씨로군요. 인사 늦어 죄송합니다."
오군영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저희 아버님을 기다리고 계셨죠? 저도 아버님을 찾던 중인데요. 그래서 여기
에 와본 것인데, 그 말을 남기고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그리고 오군영은 급히 나가버렸다.
부끄럼을 타며 몸을 비비꼬는 처녀의 교태를 보자 양과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재미있는 처
녀군. 마치 자기가 내 집으로 잘못 뛰어든 것처럼 부끄러워 하다니…….'
이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아버님, 아버님을 찾아온 것인데……."
"그래 무슨 일로?"
"별로, 별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군영은 달아나버렸다.
오자겸과 오군량이 발을 걷어올리고 들어왔다.
"공자님께서는 방금 우리 집 딸애를 보았겠습니다."
오자겸이 말했다.
"예. 미인에다가 예의도 밝아 대갓집 규수로 손색이 없습니다."
양과가 대답했다.
오자겸은 아들보다 뚱뚱하고 얼굴이 불그레했다. 보신을 아주 잘한 노인이었다. 그는 여유로
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거와회의가 끝나면 우리 딸의 남편을 고르게 되는데, 하하하, 어느 영웅을 그 애가 선
택할 지 모르겠군요."
"그같은 미모와 재능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방법을 쓰십니까? 매파들이 벌써 문턱이 닳도
록 드나들었을 텐데요."
양과의 말에 오군량이 대답했다.
"문턱이 닳을 정도는 아니지만 매파들이 매일이다시피 찾아온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제
동생은 무공을 좀 안다고 눈이 높아 웬만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지요. 유명한 절정공자
(絶情公子) 탁운백(卓雲白)의 둘째 아들 탁장청(卓長靑)도 눈에 안 찬다고 하니 어쩌겠습니
까? 그저 눈만 높은 애라니까요?"
오군량은 그렇게 자기 동생을 나무라는 척하면서 은근히 자랑했다. 양과는 그저 빙그레 웃
을 뿐이었다.
"탁장청과는 저도 교분이 좀 있지요. 그의 절정검법은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검술로 유명한
전진교의 후배들 중에 그 사람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전진교를 미워하는 양과는 이 기회에 전진교를 깎아내렸다.
"우리 딸애가 눈만 높아서 걱정입니다. 그 아이가 어느 영웅을 택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도
리어 난 그 영웅이 싫다고 할까봐 걱정입니다."
오자겸은 정말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생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빼놓고는 그럴 사람이 없을 걸로 보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라니요?"
오자겸이 물었다.
"첫째는 결혼을 하지 않는 불가의 승려들이고, 둘째는 머저리 아니면 바보들이죠."
양과의 말에 오자겸과 오군량이 모두 껄껄 웃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늙은이도 마음이 놓입니다."
'내 말에 마음이 놓이다니?'
양과는 오자겸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데 오자겸이 양과를 취현청으로 청했다. 취현청
은 호숫가에 있었는데 창문을 통해 바라보니 가흥의 남호처럼 크지는 않으나 서호처럼 경치
좋은 호수가 가까이에 보였다.
취현청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백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양과는 조용히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거와장이란 마을에 비해 취현청은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사오백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
는 규모였다. 그래서 백여 명 밖에 앉지 않은 취현청은 아직 빈자리가 무척 많았다.
양과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귀두방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 깡마른 자가 복판에 앉
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자가 귀두방의 두목인 듯했다.
양과는 혹시 백의 여인과 무채접이 있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뜻밖에 독주여니 완안방방이 있었다. 취현청에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양과는 완안방방에게 들통이 날까봐 겁이 났다. 무공이 줄어든 지금 그녀와 싸운다면 열 합
도 못돼서 그녀의 칼에 황천객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혁중달의
적수도 되지 못할 것이다.
양과는 육가장에서 썼던 인피가면도 벗었고 또 이렇게 오른팔도 가장했으니 그들이 알아볼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과는 좀 안심이 되었다.
오군량이 박수를 쳐서 좌중을 조용하게 했다.
"저희 아버님께서 각지의 영웅들을 청하셨는데, 이렇게 수고를 마다하고 각지에서 왕림해주
신 영웅호걸님들을 대단히 환영하는 바이며, 저희 마을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때 왼쪽에 있던 한 사람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시오. 우리가 왜 왔는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요."
작은 키에 녹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그는 푸르스름한 피부색에 둥글고 작은 눈이 살기로 번
득였다. 보기에도 구역질이 날 만한 인상이었다.
오군량은 그 말에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예, 그럼 벽사신군(碧蛇神君)의 말대로 하지요. 지금부터 거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장정 하나가 들어오더니 오씨 부자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오씨 부자가 급히 밖
으로 나갔다.
녹색 두루마기를 걸친 사람이 벽사신군이라는 말을 듣고 좌중은 거의 모두 놀란듯 했다. 벽
사신군 곁에 앉아 있던 몇몇은 자리를 피하기조차 했다.
벽사신군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양과는 옆에 있는 백의 서생에게 조용히 물어보았
다.
"저 벽사신군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벽사신군 말입니까? 저 사람은 전남( 南) 대리국(大理國) 사람으로 뱀 기르는데 명수지요.
그리고 자신도 마치 독사처럼 극독을 지니고 있는데 누구라도 저 벽사신군에게 물리거나 장
에 얻어 맞으면 큰일납니다. 그전의 서독 구양봉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저 벽사신군에
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 이빨에도 독이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답니다.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한쪽에서 독주여니를 지켜보던 귀두방의 깡마른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웃긴 왜 웃어요?"
완안방방이 쏘아붙였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가르쳐 주시겠소?"
깡마른 사내는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말해 보시오."
"오늘은 거와장 장주님의 딸이 신랑을 선택하는 날인데 비구니가 뭐하러 온거요? 신랑을 택
한다니 물론 여자를 택하는 것이 아닐거고 비구니를 택할 것은 더더욱 아니잖소?"
그러자 귀두방의 사내들이 포복절도했다.
"아마 비구니도 어느 영웅을 골라잡으려고 왔겠지. 뭐."
"저 봐, 나이는 좀 있어도 피부는 처녀같잖아? 날 싫어하지 않는다면 며칠밤 남편 노릇을
해 줄 수도 있는데."
그 말에 주위에 있던 흑도(黑道) 무리들 수십 명도 같이 웃어댔다. 나머지 사람들은 가만 있
었다. 다만 명문대가의 자제들 몇몇이 귀두방의 작태를 큰 소리로 비난할 뿐이었다.
양과는 비록 완안방방과 원수지간이었지만 천성이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서 그런지 그녀를 희롱하는 귀두방의 수작이 귀에 거슬렸다. '죽일 놈들!'
양과는 속으로 귀두방을 욕하고 있었다.
이때 혁중달이 일어나서 눈을 부라렸다.
"어느 놈이 우리 아씨를 또 희롱하기만 해 봐라. 이 장군이 가만 있지 않을테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쯤 큰 키에 사십근이나 되는 낭아봉을 쥐고 서 있는 혁중달은 위
엄스럽기가 천장(天將) 같았다.
왁자지껄 떠들던 무리들은 입을 싹 다물었다. 오직 귀두방 무리 몇몇만이 계속 지껄여댔다.
"혁장군. 가서 어느 놈이 죽고싶어 환장해서 계속 지껄이는지 물어보시오."
"예!"
혁중달은 완안방방의 명에 따라 앞에 있는 사람들 석 줄을 한번에 휭하고 뛰어넘어 대청 복
판에 서서 외쳤다.
"어느 녀석이 죽지 못해 안달이냐?"
그 우람한 몸이 물찬 제비처럼 가볍게 날아 오르는 것을 본 귀두방 무리들은 슬금슬금 혁중
달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때 귀두방의 그 깡마른 자가 말했다.
"풍노사, 자네가 한번 나가 겨뤄보지."
그러자 곁에 있던 사내 하나가 혁중달 앞으로 가슴을 내밀고 걸어나갔다.
"야, 넌 왜 아직 자살도 안해?"
그 말에 혁중달은 얼떨떨해졌다.
"자살? 자살은 내가 왜 해?"
"인마, 사내 대장부가 그것도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놈이 할 짓이 없어 계집 종노릇을 해?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하겠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 벌써 목을 맸겠다. 그래도 창피한 줄
모르고 여기에 나왔어?"
뭇 사람들의 폭소가 터져나왔다. 노기충천한 혁중달이 고함을 지르며 철퇴같은 주먹으로 풍
노사의 면상을 내질렀다. 특별한 초식은 아니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풍노사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움직여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소림장권(少林長拳) 중의 발산
타호(撥山打虎)의 초식으로 우장(右掌)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혁중달은 급히 주먹을 회수하며 발길을 날렸다. 이렇게 둘은 서로 왔다갔다 하며 열
일곱 합을 싸웠다. 그러던 중 혁중달이 일부러 왼발이 걸려 왼쪽으로 쓰러지는 척했다. 그것
이 계략인지 모르는 풍노사는 냉큼 뛰어들며 혁중달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혁중달은 번개같이 몸을 낮추며 오른다리로 풍노사의 다리를 후렸다. 풍노사는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혁중달이 몸을 솟구치는가 싶더니 방
향을 밑으로 틀어 두 팔굽으로 풍노사의 가슴을 내리찍으려고 했다.
그러자 귀두방 중의 한 사람이 날아 나오며 팔을 뻗쳐 혁중달의 팔꿈치를 막았다.
"꺽다리 같은 놈아. 나와 한번 놀아보자."
원숭이 같이 야윈 사내였다. 이름도 이후아(李 兒)였다. 이름처럼 날쌘 사내였지만 그도 혁
중달의 적수가 아니었다. 이때 자기 동료들의 도움으로 일어난 풍노사까지 덤벼들어 이 대
일로 혁중달과 격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기 부하들의 무능함을 본 귀두방의 두목은 화가나서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 맞은편에
서 완안방방은 득의양양해져 깔깔거리며 웃었다.
"귀두방의 누구신데, 왜 나한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했죠?"
"난 송무적(宋無敵)이오."
"그럼, 귀두방 방주이시군. 이거 실례인데요."
완안방방의 비아냥거림에 송무적은 그녀를 노려 보았다.
"여보시오. 독주여니. 가흥의 장대인을 누가 죽였소? 당신이 죽인거지?"
송무적의 물음에 완안방방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불가에 시주를 안하겠다기에 내가 목을 베어버렸소."
"그 사람이 우리 귀두방 제자임을 몰랐단 말이오?"
그 말에 완안방방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장대인은 귀두방의 제자로서 귀두방의 장물을 보관하고 파는 일을 맡고 있었다. 오늘 귀두
방 방주 송무적이 말하지 않았다면 완안방방은 물론 좌중의 군웅들 중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완안방방이 바로 귀두방의 돈 줄 하나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송무적이 좌시
할 수 있겠는가? 완안방방은 일시적인 실수로 귀두방과 원한을 갖게 된 것을 잠시 후회했
다. 그러나 서역에서 여기 강남까지 오며 자기 마음대로 살육을 벌여온 그녀는 두려운 게
없었다.
"내가 장대인을 해쳤다고 뭘 어쩌겠다는거요?"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갚아야지."
송무적의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좋아요.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오. 내 목숨 뺏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아요?"
완안방방은 태연한 척 코웃음을 쳤다.
송무적은 의자 팔걸이를 부서질 정도로 쾅 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취현청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혁중
달과 귀두방 무리들도 싸움을 멈추고는 모두들 문밖을 주시했다.
거와장 장정 둘이 곤두박질 하듯 밀려들어왔다. 그 뒤로 사내 다섯이 따라 들어왔다. 처음
들어온 사내는 황색 비단 두루마기를 걸친 귀공자 복색에 부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일곱 여덟으로 보였고 영준하게 생겼지만 그 얼굴엔 오만함과 일종의 교활함이 것들어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네 사람은 모두 스무살 또래의 젊은이들로 흉악하게 생긴 얼굴에 허
리엔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 뒤로 오자겸과 오군량이 급히 들어왔다. 오자겸은 그 귀공자 복색을 한 사내 앞을 가
로 막으며 고함을 질렀다.
"청첩도 없이 들어와 우리집 노복들에게 행패까지 부리다니 이런 무례한 법이 어디 있소?"
그러자 그 자는 뒤를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다른 사내 하나가 품에서 얼른 붉은색 청첩 하
나를 꺼내 흔들었다.
"이건 청첩이 아니고 뭐요? 여기 거와장 청첩이라고 분명히 써 있잖소?"
"그 청첩은 하남 중주협(中州俠)에게 보낸 것인데 어떻게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오? 거
기 쓰인 이름을 보시오."
오군량의 말에 그 사내는 씩하고 코웃음을 쳤다.
"중주협? 무슨 개떡같은 중주협이야? 우리 사부님 일장(一掌)에 꺼꾸러지는 놈이……."
그 말에 좌중은 놀랐다. 중주협은 권법으로 이름난 협객이었다. 그런데 이 귀공자가 그런 중
주협을 이겼다고? 그럼 이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좌중은 이 귀공자의 무공에 놀라면
서도 그가 중주협에게 보낸 청첩을 들고 무례하게 뛰어든 행동은 모두 못마땅해 하고 있었
다.
양과는 이 귀공자가 바로 몽고의 확도 왕자( 都王子)임을 첫 눈에 알았다. 양과는 오늘 확도
왕자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역 금륜법왕의 제자로 양과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도 취현청에 들어오자마
자 양과를 알아보고서는 크게 놀라 그냥 도망갈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양과가 얼른 못본
척하자 이 교활한 인간은 양과에게 무슨 곡절이 있음을 눈치챘다. 게다가 자기 옆에는 그런
대로 무공이 쓸만한 제자들이 넷이나 있지 않은가? 확도 왕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
다.
확도는 오자겸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내 이름은 확도라고 하오. 들어보셨소?"
이 자리에 군웅들은 확도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반이 넘었다.
그들은 확도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과거에 확도는 흑도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종남산
전진교에서 크게 소란을 피웠고 수차 중원 무림에서 시끄러운 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확도
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림에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많았다.
소룡녀가 실종되기 전 양과는 그녀와 함께 금륜법왕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는데 확도는
죽음이 두려워서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그리고는 종적을 감춰 세인들은 금륜법왕이
문파를 정리하느라 그를 죽여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확도가 제자 넷을 거느리고 거와장에 갑자기 나타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오자겸은 확도가 온 것이 불길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확도를
몰아낼 수 없어서가 아니다. 거와장의 무력으로 확도의 무리들과 싸워 이길 수도 있었다. 그
러나 거와회의가 시작되려는 마당에 될 수 있으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자
겸은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던 것이다.
"확도 왕자이신 것을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아버지……."
오군량이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오자겸이 막고는 주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확도 역시 자
리를 잡고 앉아서 곁눈질로 완안방방을 훔쳐 보았다.
금나라와 원나라는 적국 사이였다. 금나라는 원나라에 망했다. 그래서 완안방방은 나라없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었다. 완안방방과 확도는 모두 금륜법왕의 수하였지만 그 둘은 견원지간
의 사이였다. 완안방방은 금나라 여진인이었지만 확도는 원나라 몽고인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확도가 금륜법왕을 배반하자 둘 사이는 더욱 악화되어 마치 물과 불처럼 상극이 되
어버렸던 것이다.
확도는 완안방방보다 두 살 위였다. 그러나 완안방방은 금륜법왕의 사매(師妹)이고 확도는
금륜법왕의 제자여서 완안방방이 확도의 고모뻘이 되는 것이다. 금륜법왕을 배반한 확도는
고모를 어떻게 없앨지를 암암리에 궁리하고 있었다.
완안방방은 확도를 멸시했다.
'사문(師門)을 배반한 놈! 사형 금륜법왕을 대신해 저 배은망덕한 놈괌 징벌하리라.' 그러나
완안방방은 자기의 무공으로는 확도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를 써서
좌중의 고수들과 확도가 원수 사이가 되게 한 다음에 손을 쓰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그들이 속으로 서로 없앨 궁리를 하고 있는데 오자겸이 거와회의의 시작을 선포했
다.
오군량이 휘파람을 길게 한번 불었다.
그러자 창 밖 호수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천만 마리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어대더니 그 중에서 점차 특히 우렁찬 울음소리 하나가 나머지 모든 소리를 제압하고 분
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건강한 갓난아기가 목청껏 우는 것 같았다.
"저 개구리가 거와입니다."
"저 거와를 잡아다 구경시켜 주실 수 없습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또 다른 사람 하나도 덩달아서 말했다.
"정말 구경 좀 합시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뭡니까? 천하삼절독(天下三絶毒) 중의 하나인
거와를 보러온 게 아니겠습니까?"
오자겸은 대답 대신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거와가 규방의 처녀요? 왜 그렇게 내보이기를 꺼리는 거요?"
누군가가 한 농담에 여럿이 웃었다.
"그런게 아니라 아직 때가 안돼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거와를 내놓으면 여러분들이 가지
고 온 독물(毒物)들이 겁먹고 달아날까봐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오자겸의 말에 한 사람이 반박하고 나섰다.
"거와가 그렇게 세단 말인가?"
그런데 이때 오군량이 또 휘파람을 높게 불었다. 그러자 개구리 울음소리가 일제히 딱 멈추
는 것이었다. 호수에는 마치 개구리가 한 마리도 없는 듯 조용해졌다.
자고로 말이나 개, 매나 뱀을 길들인 자는 많지만 개구리를 길들인 자는 처음 보는 일이었
다. 더구나 거와장처럼 천만 마리의 개구리를 이렇게 길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이었다.
오자겸이 말했다.
"천하삼절독엔 채설주, 정화(情花), 거와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서역의 설산에 사는 채설주
는 오늘 독주여니가 가져왔을 것이고 절정곡에서 나는 정화는 몇 년 전에 이미 모두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소이다. 그러니 그 외엔 지금 우리 마당에 있는 거와가 있을 뿐입니다. 유
감스럽게도 천하삼절독 중 이젠 두 가지만 남은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거와회의를 개최한
목적은 여기 오신 영웅호걸님들의 의견을 모아 천하삼절독에서 빠진 한 가지를 보충하기 위
함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온 독물들을 내놓고 서로 겨루게 해 그 중 어느 독물이 천
하삼절독에서 빠진 정화를 대신할 수 있겠는지를 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제서야 양과는 이 거와회의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양과는 천하삼절독의 두 가지인 정화
와 채설주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한 사람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 소룡녀의
실종도 그 정화라는 독초와 관련이 깊었다. 천하삼절독을 증오하고 있던 양과는 어떻게 하
면 그것들을 세상에처 없애버릴까 하고 궁리를 했다.
그때 한 사람이 대청 한가운데 로 나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읍을 했다.
"본인은 호주(湖州) 사람으로 성은 부(傅)이고 이름은 방(方)이라 합니다. 강호에서 불리는
별호는 소염라(小閻羅)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가지고 온 물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상자 하나를 풀어서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반자나 되는 큰 지
네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부방의 발 주위를 이리저리 기어다녔다. 온 몸이 시뻘건 것이
끔찍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지네에게 물릴까봐 두 발을 오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것
을 본 부방은 의기양양했다.
"이건 5년이나 기른 지네로 그 독이 대단합니다. 이 지네보다 천 배 백 배나 되는 소나 말
도 한번 물리기만 하면 당장 죽어 버립니다."
"지네 독이 아무리 세다 해도 소나 말같이 큰 짐승을 어떻게 물어 죽이겠소?"
누군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한번 보여드리지요. 장주님, 소나 말을 내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부방은 자신에 차 웃었다.
"그까짓 짐승 한 마리 못 내놓겠습니까?"
오자겸은 노복에게 명령해 소 한 마리를 즉시 끌고오게 했다. 부방이 나뭇가지로 지네의 머
리를 소에게 돌려놓고 약을 올리자 지네는 그 많은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소에게 기어갔다.
그것을 본 소가 놀라 울부짖으며 물러섰다. 그러나 지네는 어느새 소 다리 위로 기어올라가
한 입 깨물고는 재빨리 내려왔다. 그러자 소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푹 쓰러지면
서 흰거품을 물고 죽어버렸다.
군웅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부방의 지네보다 못한 독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을 웃기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방은 지네를 다시 상자 속에 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번엔 마포(麻袍)를 입은 사람이 나섰다. 노란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고 이마엔 노란 띠
를 질끈 동여맨 사람이었다.
"자, 이젠 내 물건을 한번 보시오."
"호걸의 이름부터 말하시오."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그 사람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무이산 산사람으로 성도 이름도 없는 사람이외다."
그리곤 품속에서 자색이 나는 마른 풀 한 줌을 꺼냈다.
"이것은 우리 가문에서 삼대 동안 길러낸 단장초(斷腸草)이외다."
"단장초? 그게 뭐 대단하다고 그 야단이야?"
누군가 비웃었다. 그러자 산사람은 대노하여 그 말의 임자를 가리켰다.
"이 자식아, 뒈지고 싶거들랑 이 단장초를 한잎만 먹어봐."
"이 자식이 누구에게 욕지거리야!"
비웃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오자겸이 급히 일어서며 말렸다.
"여러분, 오늘은 독물을 비교하러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게 아니잖소? 두 분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오."
그러자 그 사람은 투덜거리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무이산 산사람도 언제 화를 냈나 싶게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오장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서로 싸우러 온 게 아니죠."
산사람은 방금 자기와 싸울 뻔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노형, 내가 아까 한 말은 노형을 놀리려고 한 것이 아니오. 이 단장초는 우리 조상님께서
천하 팔십 두 가지 단장초를 모두 모아 서로 교배시켜 만든 새품종이외다. 그 독성은 보통
단장초의 백 배 이상입니다. 한잎만 먹어도 당장 절명하고 맙니다. 우리 가문에만 있는 해독
약 말고는 백약이 무효이외다."
그리고는 오자겸을 돌아보며 말했다.
"믿지 못하시겠으면 하인 하나를 데려다가 어디 한 잎 먹게 해보시오. 죽나 안죽나?"
그러자 군웅들이 술렁거렸다. 저걸 말이라고 하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아는 녀
석 아닌가? 그런데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는 몇몇 녹림 대도들은 그게 좋겠다고 찬조를 하기
도 했다.
양과는 오자겸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자점도 사람 생명으로 그 독초를 시험하려
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자겸은 뜻밖에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쉽게 승락했다.
"어려울 게 없지요. 마침 우리 마을에 들어와 거와를 훔치려다 잡힌 자가 하나 있소. 여봐
라, 그 자를 끌고 오너라!"
잠시 후 장정들이 오랏줄에 꽁꽁 묶인 청년 한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그를 본 양과는 하마
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그 청년은 바로 미랑의 아들
양효비였다.
노완동의 제자가 되어 따라가더니 어떻게 여기에 잡혀 있는 것일까? 양과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양효비를 본 완안방방은 매우 기뻐했다. 원수를 갚겠다고 찾아봤지만 종내 소식을 알 수 없
었던 양효비가 이렇게 제발로 나타나다니. 그녀는 좋아서 깔깔 웃어댔다.
"저 인간은 가흥성의 무뢰한이지요, 저런 인간은 사방팔방을 떠돌며 좀 도적질이나 하는 개
종자이므로 죽여도 아까울 게 없지요."
완안방방을 알아본 양효비도 두 눈을 부릅떴다.
"괘씸한 년, 어머니와 추동을 죽인 이 마귀 같은 년아! 내 죽어 귀신이 돼서라도 너를 용서
하지 않으마."
"잘 한다. 그 욕 한번 시원하다."
귀두방 방주 송무적은 양효비의 욕설에 맞장구를 쳤다.
"송방주, 사람 많다고 날뛰지 마시오. 난 두려울 게 없소."
"우리 일은 마무리할 때가 올테니 그때 두고 보자구. 오늘은 각처의 영웅들이 모였으니 흥
을 깨기 싫어 잠시 놔두는 거라구, 흥!"
송무적은 콧방귀를 뀌었다.
"두고 보자.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하는지?"
완안방방도 물러서지 않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무이산 산사람은 양효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오장주님, 바로 이 인간입니까?"
오자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이산 산사람은 단장초 한 잎을 떼서 양효비의 입에 처넣으려
고 했다. 양효비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도리질 했다. 그러자 그 산사람은 왼손 두 손가락으
로 양효비 두뺨의 협거혈(頰車穴)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고서는 오른손으로 단장초
를 밀어넣으려고 했다.
"그만, 손을 멈추시오!"
좌중이 돌아보니 오른팔을 다친 듯 목에 줄을 걸고 있는 청년이었다.
'모용공자가 왜 그러지?',
오자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양과는 양효비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참혹하게 죽은 미랑을 생각해 그는 미랑의 후대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
이다. 게다가 양효비는 노완동 주백통의 제자가 아닌가? 양과를 아우처럼 잘 대해 주는 주
백통을 그는 늘 고맙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은정을 보답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 이
주백통의 제자를 구할 수 있으면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 수도 있겠지……."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거요?"
무이산 산사람은 양과를 쏘아보았다. 양과는 이제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군량이 나서며 말했다.
"이 분은 강남의 유명한 모용세가 모용협 공자님이시오. 모용공자님께서 이 거와회의에 참
석해 주신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고 있소."
양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좌중에 모용협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큰일이었다. 자기
정체가 드러난다면 그보다 더한 수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자기의 정체
를 알아차린 사람이 없는 듯했다. 그제서야 양과는 안심이 되었다.
양과는 무이산 산사람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귀하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시험을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소나 말을 가지고도 시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아니오, 난 꼭 사람으로 시험하려 하오. 그런다고 당신이 날 어쩌지는 못하겠지."
무이산 속에 묻혀 지내던 그 산사람은 무림의 영웅호걸들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
서 모용세가라 해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이산 산사람은 또 양효비의 입에 단장초를
밀어넣으려 했다.
양과가 또 소리쳐 막았다. 그리고 오자겸에게 말했다.
"오 장주님,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런 훌륭한 회의에서 살인을 하다니오? 부유한 거와장에
우마가 많은데 사람 대신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용 공자님의 인자한 마음에 감동하는 바입니다만 거와장엔 거와를 훔친 자는 죽인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독초를 먹지 않는다 해도 오늘내로 죽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죽일
바에 좀 일찍 죽인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자겸의 말에 무이산 산사람은 양과에게 고함을 쳤다.
"보라구. 장주님께서도 동의하셨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는 또다시 단장초를 양효비의 입에 처넣으려고 했다. 다급해진 양과는 벌떡 일어나
절묘한 경공술을 발휘해서 산사람 앞으로 제비같이 씽하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오른 손
목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내게 더 좋은 방법이 있소."
채설주에 중독되어 무공이 반이나 줄어든 양과였지만 고묘파의 장기인 경공술은 아직 그대
로 있어서 나는 것이 마치 신선같았다. 소룡녀의 무공은 장춘진인 구처기보다는 못했지만
경공술만은 그보다 앞섰다. 전진교 사람들도 소룡녀의 경공술을 보고 무공도 구처기를 능가
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양과가 사용한 고묘파 경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군웅들은 모용협의 경공만 봐도 그 실력이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무이산 산사람은 오른손을 급히 빼면서 물었다.
"좋은 방법? 그게 도대체 뭐요?"
양과는 단장초를 뺏어 쥐었다.
"기어코 사람으로 시험해 보겠다면 나를 갖고 해보시오."
그리고 단장초를 입에 넣고 얼른 씹어 삼켰다.
이 돌연한 행동에 군웅들은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다.
제4장 사주상박(蛇蛛相拍)
무이산 산사람은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아이쿠, 자살하려는 게요? 어서…… 어서 해독약을 드시오."
그리고 그는 검은색을 띠는 커다란 환약 하나를 양과의 입에 밀어넣으려고 했다.
양와는 해독약을 받아쥐며 웃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소. 보다시피 난 이렇게 무사하니까."
"그럴 리가 없소. 이 단장초는 맹독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한 잎만 먹어도 당장 쓰러지는데
당신은 정말 괜찮소?"
무이산 산사람은 목소리가 떨렸다.
오자겸도 자리에서 일어나 양과를 꾸짖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이럴 것까지는 없지 않소? 그러다 잘못되면 이 늙은이가 어떻게 강호
인을 대하겠소? 어서 해독약을 드시오."
양과는 크게 웃으면서 겁에 질린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한 양효비를 가리키며 말했
다.
"내가 무능하여 저 애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기에 하는 짓입니다.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
으면 오장주님께서는 저 애를 용서하지 않으실 게 아닙니까? 내가 저 애 대신 단장초를 먹
었으니 죽고 사는 것은 내 문제니 여러분들께서는 괘념치 마시오."
오자겸은 답답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용세가의 세력은 보통이 아니다. 무림의 친
구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모용협이 거와장에서 죽은 것을 알면 그들이 가만 있겠는가? 얼
마 지나지 않아 큰 화가 거와장에 닥칠 것이다.
오자겸은 애원했다.
"모용공자님, 어서 해독약을 드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냥 두시오. 그 모용공자가 어디서 수모를 당해 이 기회에 자살하려는지도 모르지."
확도가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세력에 무공까지 고장한 모
용협이 뜻밖의 수모를 당했다면 젊은 혈기에 자살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추측이었
다. 그들은 확도의 속셈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양과와 적대시하고 있는 확도는 지금 양과
가 왜 모용협으로 가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양과가 바보처럼 단장초를 먹자
속이 다 시원했다.
양과는 확도를 노려보았다. 그는 원래 해독약을 먹으려 했으나 확도의 말에 오기가 나서 아
예 그 해독약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해독약은 호수에 떨어졌다.
"내가 저 해독약을 먹는다면 나의 말이 모두 거짓이 될 것이오. 사람 목숨을 위해서 그랬다
는 것도 말이오. 오장주님, 제게 살 방법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오자겸은 진퇴양난의 심정이었다. 가법(家法)대로 하자면 양효비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모
용공자가 양효비 대신 단장초까지 먹어가면서 그를 살려달라고 했다.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허허, 모용공자님 말씀이 그러시다면 따르는 수밖에요."
양과는 오자겸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양효비에게 물었다.
"넌 왜 오장주님 네 거와를 훔치려고 했지?"
양효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답했다.
"모용대협님, 저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사람이며 그때 피난가던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거
와가 뭔지도 모르는데 왜 훔치려고 했겠습니까?"
그러자 오군량이 소리쳤다.
"이 도적놈이 또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네가 거와가 사는 오목대(烏木臺) 아래 엎드려 거
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보고 다가가 붙잡았는데도 거짓말이야? 내가 널 붙잡지
않았다면 넌 이미 거와에게 물려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를 살려준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양효비가 이렇게 말했지만 오군량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듣기 싫어.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고 죄나 인정하라구."
"소장주님, 이 철없는 애가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
양과가 말하는데 양효비가 급히 말을 가로챘다.
"맞아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제가 거와를 훔치고 싶어서 그랬나요 뭐? 모두 그 노망한 늙은
이가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죠, 뭐."
"노망한 늙은이라니, 누구?"
양과는 내심 짐작되는 이가 있어 다그쳐 물었다.
"저기 있잖아요? 저기……."
그때 천장에서 너털웃음소리가 나더니 대들보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리며 양효비를 붙잡았
다.
"이놈, 내가 노망한 늙은이라구? 어디 봐, 내가 정말 그렇게 늙었냐?"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양과는 안심했다. '노완동이니까 양효비같은 애를 시켜 그런 짓을 하
게 한 거지.'
노완동은 양효비의 따귀를 한 대 후려쳤다.
"이놈아 내가 누구냐? 네 사부잖아. 제자놈이 사람들 앞에서 제 사부를 욕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
좌중에서 주백통이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안방방, 확
도, 그리고 양과도 그만하면 무림에선 알아주는 고수급인데 주백통의 침입을 사전에 알아차
리지 못했다. 양과는 비록 무공이 반이나 줄었지만 청력과 시력은 여전했는데도 말이다. 노
완동이 처음부터 대들보 위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것을 알
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불쑥 나타난 노완동 주백통의 무공은 양
과의 의부인 서독 구양봉이나 구지신개 홍칠공도 따르지 못하리라.
좌중은 모두 노완동 주백통의 무공에 경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직 완안방방만은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중원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주백통
에 관해 아는 것이 적었다. 육가장에서 주백통에게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갑자기 습격
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잘들 논다. 사제지간에 욕하고 때리다니. 둘 다 똑같은 놈들이지 뭐. 그리고도 무슨 낯으로
강호를 돌아다녀?"
그러나 노완동은 흐흐 하고 웃기만 했다.
"맞아, 육가장에서 본 바로 그 비구니구만. 흐흐, 아직도 그 꺽다리 사내와 같이 다니나? 그
래 언제 국수 먹여줄 건가? 이 노완동도 좀 얻어먹어야지. 흐흐."
혁중달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나 완안방방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완안방방은 실연
을 한 후 아직까지 처녀였던 것이다. 혁중달과 함께 강호를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녀는 그를 자기의 충실한 노복으로 여기고 부려먹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노완동의 말
에 노기충천했다. 그녀는 얼른 검을 뽑아들고 튀어나오면서 노완동을 덮쳤다.
"아이고 큰일났네. 비구니가 사람 죽인다."
노완동은 얼른 양효비를 들어 앞을 막았다. 오랏줄에 묶인 양효비는 꼼짝 못하고 그저 놀라
서 악만 썼다. 너무나도 갑자기 생긴 일이라 양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장풍 소리가 팍팍 몇번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노완동이 양효비를 끌고 밖
으로 내뺐다. 바닥에는 오랏줄이 끊어져 널부러져 있었다. 그것은 완안방방의 보검에 의해
끊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본 군웅들은 탄성을 질렀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어떻게 양효비
의 몸은 전혀 다치지 않게 하고 완안방방의 검에 오랏줄만 끊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천
하에 이런 재주가 다 있을까?
완안방방도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을 뿐 달리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노완동 주백통
과 다시 싸울 생각이 싹 가셨다. 자기 무공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
았던 것이다.
양과도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독되지 않았다. 해도 양과는 결코 노완동의 흉내조
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마침 문 입구에 서 있던 혈기왕성한 오군량이 검을 뽑아들고 노완동의 앞을 막
았다.
"선배님께서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고 하나 이렇게 방약무인하게 행동하셔도 되는 겁니
까?"
"이봐 젊은이. 절정곡 이야기를 못들었나? 절정곡 놈들이 큰 고기그물로 날 잡으려 했어도
끝내 어쩔 수 없었지. 그래,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자네가 날 어쩌겠다는 말인가?"
주백통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오자겸이 큰 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
"이 녀석아, 선배님께 그 무슨 고약한 말버릇이냐? 어서 물러서지 못해."
그러자 노완동은 오자겸을 돌아보며 눈을 꿈떡꿈떡 깜빡였다.
"그래도 오장주는 사람 보는 눈이 있군. 오장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들을 용서해줘야겠군.
나도 다시는 거와를 훔치려고 하지 않겠네."
"역시 네가 제자를 시켜 거와를 훔치려 했구나. 자, 칼을 받아라."
오군량이 불쑥 검을 내찔렀다. 노완동의 왼쪽 어깨를 향하던 검은 중도에서 아래로 향하더
니 다시 올라오며 노완동의 오른쪽 옆구리를 위협했다. 실로 기괴한 검술이었다. 왼쪽 어깨
를 찔러 오는 줄만 알고 대비했다간 큰 낭패를 볼 검술이었다. 그렇다고 왼쪽 어깨를 찔러
오는 것이 허수(虛手)인 줄 알고 배로 찔러오는 것만 신경 쓰다가도 큰 일을 당할 검법이었
다. 그 검을 받는 사람이 노완동이 아니라 자기라면 그 일파삼절(一波三折)의 검술을 막아낼
수 있을지 군웅들은 자신이 없었다.
수년 동안 동해에서 검술을 연마하여 경천동지할 경지에 이른 양과는 그 검술을 우습게 보
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공이 반으로 줄어 있었기에 그와 대결을 펼친다 해도 그 검술
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주백통은 이 청년이 날뛰는 것이 성가셨다. 그는 오군량의 검을 손쉽게 슬쩍 피하더니 공수
탈백인(空手奪魄刃)의 초식으로 그 검을 슬쩍 빼앗아 쥐었다.
"우리 사부님 잘한다. 이런 솜씨는 우리 사부님 밖에 없을거야."
양효비 때문에 골치가 아픈 주백통이었지만 그의 탄성을 듣고나니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입이 헤벌어졌다.
어쩔 수 없이 양효비를 데리고 육가장을 떠난 주백통은 그 동안 양효비를 떼어버리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랑이 귀신이 되어 따라다닐까봐 두려워 그러
지 못했다. 훌쩍거리는 양효비를 보살피자니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 앞쪽으로 마을이 하나 보였다.
거와장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엿듣고 거와장에 독성이 세기로 천하 무쌍한 거와라는 개구리가
있는데, 그것이 채설주, 정화와 더불어 천하삼절독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
늘 거와장에서는 거와회의를 하고 아울러 장주 딸이 신랑감을 선택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
다.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훌쩍거리고만 있는 양효비에게 말했다.
"넌 내 제자이니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알았지? 지금 이 사부님은 네게 어서 가서
거와를 훔쳐올 것을 명령한다."
평소 좀도둑질을 해 본 적이 있는 양효비였지만 마을 사람들이 칼을 들고 경계를 철통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감히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노완동이 벌컥 화를 냈다.
'그래, 사부님 명을 거역할 셈이냐? 그럼 좋다. 난 너를 사문에서 쫓아내겠다.'
이렇게 엄포를 놓으면 양효비가 질겁해서 달아나 버리리라. 그러면 노완동은 노완동대로 자
유롭게 다닐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양효비도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주백통
없이는 자기 장래의 포부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부님, 그게 아니고요. 제자의 무공이 시원찮아서 그럽니다. 마을 안에 들어가다 붙잡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사부님께서 제자를 잘못 거두었다는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명석한 두뇌를 가진 양효비가 둘러치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말아라. 널 마을 안으로 데리고 갈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주백통은 양효비를 거와가 있는 오목대 밑으로 데리고 갔다.
"봤지? 거와는 저 오목대 위에 있다. 잡아오기만 하면 된다. 난 가볼 곳이 있다."
노완동은 그곳을 슬쩍 빠져 나오면서 속으로 웃었다.
'바보같은 녀석. 거와가 뭔지도 모르지? 이제 거와에게 죽을 거야. 무공이 시원찮아서 거와
에게 죽는 것이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노완동은 이제 귀찮은 녀석을 떼버리게 됐다는 생각에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그때 사람 살리라는 양효비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주백통은 좀 안쓰러
운 생각이 들었다. '양효비가 비록 내 손에 죽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쨌든 장사라도 잘 지내 지하에 가서 제 에미라도 잘 만나게 해줘야지.'
그런데 오군량과 마을 장정 몇 사람이 양효비를 포박해서 끌고 나왔다. 노완동은 급히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양효비가 죽지 않고 붙잡혀 버렸으니 노완동도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마을 장정들이 양효비를 지하 감옥에 처넣는 것을 본 주백통은 덮쳐들어 양효비를 구해내려
고 했다. 그러나 장정들의 입에서 곧 거와회의가 시작 된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천하
사독고수(使毒高手)들이 모여 재주를 부린다고 하는 말에 노완동은 구경이 하고 싶어졌다.
잠시 양효비를 내버려둔 노완동은 살그머니 취현청으로 가서 남몰래 대들보 위로 올라가 숨
었다.
그러다가 무이산 산사람이 양효비에게 단장초를 먹이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쨌든 양효비
는 자기 제자였다. 제자가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막 출수하려는데 양과가 나서서 양효비 대선 단장초를 먹어버리는 게
아닌가? 주백통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저 단장초 먹는 법은 필시 소룡녀가 가르친 게 틀림없어. 그런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있
다니. 양과를 스승으로 모시고 단장초 먹는 것을 배워볼까?' 그러다가 주백통은 머리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전진교의 시조 왕중양이 내 사형이고 전진교와 고묘파의 근본을 따진다면 소룡녀는 손녀뻘
이 된다. 그러면 양과는 내 증손뻘이 아닌가? 만약 내가 양과를 사부로 모신다면 우리 장문
사형(掌門師兄)은 양과를 사숙으로 모셔야 할 것이고, 구처기나 마옥같은 전진칠자(全眞七
子)들은 그의 손자뻘이 되고……. 에고, 이게 무슨 콩가루 집안이냐? 그럴 수야 없지. 없다
마다. 이 일을 마옥같은 이가 알면 나를 찾아와 얼마나 책망할까?' 그러는 사이 양효비가
자기를 '노망한 늙은이'라고 악다구니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노완동은 화가 나서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오군량의 검을 앗아쥔 주백통이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이 검법의 이름이 뭔가? 왜 내가 아직 못보았지? 좀 가르쳐 주겠나?"
애들처럼 구는 주백통이었지만 무공은 매우 좋아해서 신기한 무공만 보면 배우지 못해 안달
하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오군량의 신기한 검법을 보고선 배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백
통은 장유유서의 구분 같은 것은 염두에 별로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곽정과도 의형제
를 맺었고 양과를 아우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음이 즐거우면 나이어린 사람은 모두 아우라
고 불렀다.
"그 검이나 돌려주시오."
오군량이 소리쳤다.
"글쎄 검은 돌려줄테니까, 내게 그 검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나?"
"이 검법은 우리집의 가전 무공인데, 어떻게 남에게 가르쳐 줍니까?"
그러자 주백통은 눈을 끔뻑거리며 무슨 꿍꿍이 수작을 생각 했는지 오군량을 향해 소리쳤
다.
"좋아. 검은 돌려주지. 그러나 가지말고 반드시 나와 겨루어야 한다."
좌중은 그 말이 한심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히히덕거리며 웃었다.
세상에 싸움을 구걸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주백통이 왼손을 척 뻗으니 그 검은 어느새 오
군량의 손으로 건너갔다. 오군량은 깜짝 놀라며 검을 받았다.
"자, 이젠 날 찌르라구. 찔러 보라니까."
오군량은 주백통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화가 벌컥 났다.
"찌르라면 못찌를 줄 알아요?"
오군량의 검은 주백통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오는듯 하더니 어느새 아래를 후리면서 주백통
의 무릎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주백통은 그 검을 슬쩍 앗아쥐었다.
"허 이 아우 보게. 검이 왜 그리 늦나? 좀 더 빨리 해봐. 이 노완동이 자네 나이 때 어땠는
지 아나? 자네는 꿈도 꿀 수 없을거야."
그리고 주백통은 오군량에게 검을 다시 넘겨주었다.
이렇게 둘은 찌르면 빼앗아 돌려주고 돌려주면 다시 찌르기를 마냥 계속했다. 오군량은 이
늙은이가 어떻게 자기 검을 빼앗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 늙은이가 말끝마다
자기를 코흘리개 취급을 하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어디 또 한번 빼앗아 봐요."
오군량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등사무(龍騰蛇舞)의 초식으로 춤추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국은 또 주백통에게 검을 빼앗겼다.
아무리 새로운 초식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번번이 검만 뺏겼고 그때마다 주백통은 오군량을
곯렸다. 혈기왕성한 오군량은 그 수모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초식을 바꾸어 대들었
다. 이렇게 싸울수록 오군량은 화가 나서 검이 갈수록 흉포해졌다. 그런가 하면 노완동 주백
통도 싸우면 싸울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계속 오군량의 약을 올리는데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오군량이 계속 새로운 초식
을 써야 주백통은 오씨네 그 가전 검법 전부를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노완동은 생각대로
되어간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구경했다. 오군량의 검술을 찬탄의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보다
주백통의 귀신같은 무공에 더욱 경탄했다. 그들 둘이 벌서 십여 합을 싸웠는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거와장 장주 오자점도 구경하느라 다른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좌중은 모두 주백통 같은 절세고수의 무공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
하며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일초일식(一招一式)이 모두 지극히 교묘해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각자의 수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극도로 난 오군량은 자기 검술 49초식을 모두 쓰고 난 다음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자
다시 제일초식으로 돌아갔다.
"됐어. 겨우 49초식 밖에 없잖아?"
주백통은 기쁜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우님, 검술이 대단해. 이제 이 노완동이 알게 됐으니 작별을 해야겠지?"
그리고 주백통은 양효비를 끌고 오군량 곁을 슬쩍 빠져 날아갔다. 오군량이 급히 검을 내질
렀으나 이미 주백통과 양효비는 열 장 밖에 날아가 있었다.
오늘 같은 악전고투를 오군량은 평생 처음 해보았다. 49초식의 가전 검법을 다 써 보았지만
주백통을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번번이 주백통에게 검을 빼앗겼으니 세상에 이런 망신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그 정도이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주백통이 살수를 펼쳤다면 자기 목숨
이 남아 있을 리 있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오군량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나 같은 것은 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연마해도 그 늙은이 발뒤꿈치에도 못 미칠거야."
오군량은 탄식하며 검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오자겸이 다가가 그 검을 주워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주백통 선배님은 당대 정상의 고수이시다. 나도 그 양반의 무공 십분의 일도 못 따라가는
데 너야 말할 것도 없지.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양과 옆에 앉아 있던 백의공자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소장주님 검술도 우리 후배들 중에선 일류에 속하지요. 주백통 선배님께서도 소장주님의
무공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오군량은 백의공자에게 읍을 했다.
그런데 자리에 돌아가 앉으려던 오자겸이 문득 양과를 보고 급히 물었다.
"모용공자, 공자는 어떻소? 단장초 독이 퍼지지 않았소?"
오자겸은 그제서야 독초를 삼킨 양과를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군웅들도 오자겸의 말에 모
두 양과를 바라보았다. 노완동이 나타나 법석을 피우는 바람에 모두 양과가 단장초를 먹은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양과는 얼굴빛이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극독에 중독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고맙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무사합니다."
양과의 대답에 무이산 산사람은 눈을 번쩍 떴다.
"무사하다니, 무사할 수가 없을텐데. 이 단장초를 삼키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양과는 빙긋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좌중은 양과에게 무슨 신기한 해독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무이산 산사람의 단장초는 양과가 먹고도 끄떡없자 그 맹독성을 인정받을 수가 없었
다. 그래서 다른 독물들과 비교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사실 무이산 산사람의 단장초는 그 독성이 천하에 비길 것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것
이었다. 그리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해독약이 아니면 절대 해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양과
를 만나는 바람에 그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옛날 절정곡의 정화에 중독된 양과는 그 독을 해독할 수가 없어 고생했다. 그런데 한 천축
(天竺)의 이승(異僧)이 독으로써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양과는 그 이
승이 시키는대로 매일 조금씩 단장초를 일년이 넘게 먹어 정화의 독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 동안 양과가 먹은 단장초를 합치면 족히 너댓 근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단장초에 면역
력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무이산 산사람이 가지고 온 단장초의 독성이 보통 단장초의 독
성보다 백 배가 세다 해도 양과가 먹은 것은 얼마 안되기에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
다. 양과는 단장초를 먹을 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무이산 산사람의 단장초는 보통의
단장초와는 달랐으므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큰 모험을 한 셈이었다. 다행히 별
일 없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와회의는 계속되었다.
군웅들은 계속 자기가 가져온 독물들을 내놓았다. 독충을 내놓는 사람, 독사를 내놓는 사람,
사약(死藥)이나 독단(毒丹)을 내놓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천하삼절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벽사신군이 가져온 독
사들이 손꼽혔지만 그래도 천하삼절독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백의공자가 옆에서 말할 때 양과는 그 목소리가 약간 쉰듯하면서도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래서 자세히 뜯어보니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양과가 유심히 쳐다보자 백의공자는 눈을 힐끗 흘겼다. 그제서야 양과는 이 백의공자가 바
로 무채접임을 알았다. 남장을 한 것이었다. 무채접은 여기 있는데 아까 본 백의 여인은 어
디 있단 말인가? 그 백의 여인은 꼭 소룡녀같았는데…….
무채접이 여기 있는 것을 보면 그 여자도 분명 같이 왔을텐데. 무채접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아가씨, 그 동안 별일 없었소?"
양과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자 무채접은 긴장하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모용공자님, 오는 길에 무례하게 군 것을 용서해 주세요. 지금 우리 신분을 밝히면 안돼
요."
"그 부탁은 들어줄테니 언니는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오."
그러자 무채접은 양과를 노려보며 톡 쏘았다.
"협객으로 이름난 공자님께서 어떻게 그런 경박한 말씀을 하시죠? 체통을 지키세요."
양과는 얼굴을 붉히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게 아니오.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그 언니의 모습과 헤어진 지 오래 되는 내……."
"오래 된 누구 말이에요?"
"헤어진 지 오래 되는 외사촌 누이동생 같아서……."
양과는 차마 아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머리를 돌려버렸고 말끝을 맺지 못했
다.
그런데 그때 벽사신군이 독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 조용히 하세요."
대청 복판으로 나선 벽사신군은 두 팔을 수평으로 들었다. 그러자 그 푸른 소매 안에서 푸
른 뱀 두 마리가 서서히 기어나왔다.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독사의 눈은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천천히 기어나온 두 마리의 독사는 벽사신군의 두 팔을 감으며 머리를 꼿
꼿이 치켜들었다. 공격자세였다. 벽사신군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
를 냈다.
"대리국에선 이 뱀을 죽엽청(竹葉靑)이라 부르오. 이 뱀으로 유명한 술을 만들지요. 그러나
내가 기른 이 죽엽청은 죽엽청이라 부르지 않고 벽사라고 하오. 매일 독충들만 먹여서 길러
그 독이 몸에 배어 그저 한번 물리기만 하면 신선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오."
"과장하기는……."
무채접이 들릴듯 말듯한 작은 소리로 속삭었다.
"과장이라니? 저 뱀독이 얼마나 지독한 줄 아시오?"
양과의 말에 무채접은 또 눈을 흘겼다.
"모용세가의 무공이 강하다고 아무거나 다 아는 척하는 거예요? 그래, 독사에 관해 얼마나
알아요?"
"그거야 물론 아가씨가 더 잘 알겠지만……."
"쉿, 저기나 보세요."
무채접은 다시 벽사신군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어느새 벽사신군의 몸엔 독사가 열댓마리나 기어다니고 있었다. 벽사신군의 두루마기 안에
는 독사들이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보통 사람들과 같
이 앉고 눕고 하는데 옷안에 있는 독사들에게 물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벽사신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몸에도 뱀이 스물거리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벽사신군은 스르륵 스르륵하고 입으로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곧 사방에서 같
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군웅들은 기겁하며 비명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발치마다 뱀
들이 똬리를 틀고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의자 위로 뛰어
올라 섰다. 태연히 앉아 있는 사람은 오직 완안방방, 혁중달, 무채접, 양과 그리고 오장주와
그의 아들 뿐이었다.
의자 위에 올라선 확도가 소리쳤다.
"당장 뱀을 거둬라."
그렇게 흉악하게 생긴 그의 제자들도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확도가 주위를 의식해 제
자들의 따귀를 후려치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완안방방과 오자겸은 채설주와 거와의 주인이니 벽사같은 것은 두려워 하지 않을 수도 있었
지만 일개 처녀에 불과한 무채접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양과가
유심히 살펴보니 무채접의 발 옆에까지 기어온 독사들은 그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재빨리
방향을 틀어 도망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는 몸에 뱀을 쫓는 그 어떤 약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약도 없는 양과는 그저 담력 하나로 딱 버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양과이기에 그만큼 고생도 많았다. 지금도 발치에 있는 벽사에 소
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 억지로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양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본 무채접은 그의 담력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쓴웃음
을 지었다. 득의양양한 벽사신군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벽사들은 모두 그에게로 기
어가서 대가리들을 꼿꼿이 치켜들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며 방금의 작태를 부끄럽게 여기며 다시 각자 제 자
리에 앉았다.
"모용공자님께선 정말 담도 크시네요?"
무채접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양과는 슬며시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웃었다.
"우리 의부님께서는 뱀 기르는 고수이셨지요. 그래서 전 뱀을 전혀 무서워 하지 않는답니
다."
"그러세요? 근데 의부님이 누구시죠?"
양과의 의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서독 구양봉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을 댈 수는 없었
다.
"강호인이 아니랍니다. 말해도 모를 것이오."
무채접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정말일까하는 의심을 품은 심정이었다.
그때 귀두방 무리들이 웅성거리며 벽사신군을 비난했다. 독사들로 사람들을 놀래킨 것을 말
이다.
벽사신군은 그 비난엔 신경 쓰지도 않고 음흉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너무 놀라게 해서.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 벽사의 무서움을
어찌 알겠소?"
그러자 확도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렇게 잘난체 하지 말고 어디 개방하고 싸워 보시오. 개방 거지들은 개를 때리거나 뱀을
잡는데는 귀신들이니까. 그 벽사들을 가지고 개방과 싸워 이긴다면 천하가 탄복할 거요."
"확도 왕자께선 근 몇 년 동안 강남에 오지 않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적어도 팔십 명이
넘는 개방 제자들이 뱀에 물려 죽었소. 거와장으로 오는 도중에도 개방 오대제자 중의 하나
가 뱀에 놀라 줄행랑을 쳤소."
그리고 벽사신군은 언성을 높였다.
"독주여니, 그리고 오장주님! 두 분께서 가지고 있는 채설주와 거와랑 이 벽사를 겨루게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자겸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독물들끼리 서로를 참살하도록 거와회의를 연 것이 아니오. 그러면 얼마나 살풍경하겠소?"
그러자 벽사신군은 허허하고 웃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럼 어느 분께서 나와 겨뤄 보겠소?"
그러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벽사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자기들이 가지고 온 독물들이 너무 적었다. 도대체 어떻게 가
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벽사신군이 가지고 온 뱀은 무려 삼사백 마리가 넘었다. 중과부적
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오자겸의 말대로 독물들끼리 참살하는 것을 구경하고자 여기
에 온 것은 아니다. 군웅들은 자기들이 아끼는 독물들을 이유없이 죽이기는 싫었다.
그런데 확도가 자기 무공을 믿고 접선을 펼쳐들며 말했다.
"난 독물은 모르오. 벽사신군께서 이 몸과 무공을 겨뤄보지 않겠소?"
벽사신군은 오기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또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무공은 본인의 장기가 아니오. 해 보겠으면 내 벽사들과 해보시오."
그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라고? 나보고 뱀 따위하고 싸우라고?"
"그러면 또 어쨌단 말이냐? 청첩도 없이 뛰어든 뻔뻔스러운 놈! 여기 앉아 있는 영웅호걸들
이 참고 있으니 제 세상인 줄 알아? 너같은 놈은 뭇매를 맞아도 싸."
둘은 서로 으르렁거렸다.
유혈이 낭자한 싸움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잠시 동안 흘렀다.
오자겸이 급히 일어서며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말렸다.
"두분 모두 참으십시오. 모두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을텐데, 하필이면 여기 거와
장에서 명분없는 싸움을 하려 하십니까?"
"옳소! 싸우려면 다른데 가서 싸우라구. 거와회의가 뭐 싸움턴가? 장주님 체면도 생각해야
지."
누군가 외쳤다. 무리 속에는 꼭 아부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확도는 벽사신군을 혼내주고 싶었지만 벽사신군이 무공을 겨룰 생각도 안하는 데다가 그 옆
에는 수백 마리의 뱀들이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바람에 가슴이
떨렸다. 확도는 투덜거리며 앉았다.
"외람되지만 제가 벽사신군과 한번 겨뤄볼까요?"
그때 독주여니가 천천히 걸어나오며 뱀무리 옆으로 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백사들은 분
분히 뒤로 물러섰다.
"헤헤, 이렇게 하십시다. 채설주가 천하삼절독 중의 하나이니 내 벽사와 겨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벽사는 지지 않을 게요."
벽사신군은 독주여니가 자기에게 덤빌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오자겸이 말렸다.
"독주여니, 오늘 회의는 천하삼절독을 보충하자는 것이지 천하삼절독의 위세를 보이는 자리
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빈승도 삼절독의 위세를 보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독주여니가 말했다.
"그럼 왜……?"
독주여니가 확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과 난 모두 서방 교파에 속했지요. 저 사람은 내 사질(師姪)입니다. 저 사람이 비록
사문을 배반하는 용서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그것은 우리 내부 사정이니 다른 사람들이 왈
가왈부 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벽사신군이 그 잘난 벽사로 내 사질을 협박했으니 이것
은 우리 서방 교파를 우습게 여긴 게 아니고 뭡니까?"
그러자 군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사문을 위한 일이니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일이었
다. 독주여니의 말에 오자겸도 잠자코 있었다.
격노한 벽사신군은 입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여긴 장소가 협소해서 벽사들이 제 능력을 다 발휘하기 어려우니 해볼테면 넓은 장소로 나
가 해봅시다."
"좋다. 그러잖아도 사내들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참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귀두방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독주여니는 지금 누구를 욕하는 거냐?"
풍노사가 소리쳤다.
"누구를 욕하든 웬 참견이야?"
그러자 풍노사가 길길이 날뛰면서 마구 욕설을 해댔다.
"이 돌중같은 년아. 분명히 우리 귀두방 보고 냄새가 난다고 한거지?"
그 말에 독주여니는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세상에 별난 놈이 다 있네. 스스로 자기 욕을 하다니?"
풍노사는 입씨름으로 독주여니를 이길 수 없었다. 하긴 여인네들과 입씨름 해서 이길 수 있
는 남자들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으…… 이년이……."
풍노사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아가 웃으며 불쑥 튀어나오더니 한마디 했다.
"풍노사 오늘 자넨 계집운이 텄네 그려."
"계집운? 이춘원에 있는 취화 말고는 다른 계집은 아직 품어본 적이 없는데."
직설적인 풍노사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그 말에 군웅들은 박장대소했다. 귀두방 방주 송무적은 화가 나서 풍노사를 노려보았다. 귀
두방 망신을 혼자서 다 시키다니…….
이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또 아무렇게나 찌껄였다.
"옛말에 매도 사랑이고 욕도 사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 중년이 욕하는 것을 보게. 그건 자
네하고 친해지자는 거야."
"흥, 저런 계집은 돈주고 가지라 해도 싫어."
풍노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목소리마저 높였다.
이후아가 맞장구를 치며 껄껄 웃었다.
"말 한번 잘 했네. 그 말 한번 잘했어. 독주여니가 아무리 화장을 잘 하고 있다지만 자네 옆
에 서면 어머니로 보일테니까."
그러자 풍노사가 이후아의 어깨를 퍽 하고 한대 후려갈겼다.
"뭐가 어째? 우리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망할 놈, 네 에미라고나 해라."
이후아는 공연히 한대 얻어맞자 화가 치밀었다.
"뭐 이렇게 둔한 놈이 있지? 내가 약 올리려고 저 중년을 욕하는 것도 몰라? 다 늙은 계집
이 창녀짓을 하겠단다고 욕하는 것도 몰라? 이 등신아!"
그제서야 이후아의 속셈을 안 풍노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런걸 모르고, 그래 많이 아프냐? 그렇게 돌려 말할 필요가 뭐 있어? 대놓고 갈보라고 욕
하지."
그러자 또 군웅들은 박장대소했다. 정말 어리석어도 저렇게 어리석을까? 완안방방은 욕을
먹는 입장에서도 그들의 유치한 행동에 깔깔하고 웃었다.
"자, 이젠 개싸움 그만 구경하고 밖으로 나갑시다."
오자겸은 완안방방과 벽사신군의 소행을 모두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릴 재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손님들을 인도하여 문밖에 있는 연무장으로 나갔다.
연무장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는 일곱자 높이의 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양 옆엔 도창검극(刀槍劍戟), 부월구차(斧越鉤叉), 편간추조(鞭磵錘 ) 등 십팔반 병장기가 줄
지어 서 있었고, 석쇄(石鎖), 석돈(石墩)같이 힘 기르는데 쓰는 도구들도 잘 갖추어져 있었
다. 북쪽 나뭇가지에는 인형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암기의 표적이었다. 이렇게 넓고
설비가 잘 갖추어진 연무장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만 봐도 거와장의 위력을 가히 알고 남
음이 있었다. 비록 거와장의 명성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군웅들은 이제 막 벌어지려는 혈투를 구경하기 위해서 그 주위에 늘어섰다.
완안방방과 멀리 떨어진 벽사신군은 독사들을 선후 다섯 줄로 나누어 대기시켰다. 그는 뱀
다루는 재주는 대단했지만 무공은 삼류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완안방방이 자기에게 무공을
쓸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벽사신군의 독사들은 한줄에 오륙십 마리씩 늘어서 있었고 벽사신군은 완안방방과 몇 장이
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독주여니 네가 경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뱀으로 친 진법을 부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렇게 생각한 벽사신군은 자신만만했다.
완안방방은 혁중달을 뒤로 물러서 있게 한 다음 수백 마리의 징그러운 뱀들을 태연하게 보
고 있었다. 회색의 승복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니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는 더욱 돋보였
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불가에 입문해 비구니로 늙는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 아니던가! 이
런 미모를 부질없이 낭비하는 것은 자신의 비운일 뿐만 아니라 천하 사나이들의 비운이기도
하다. 군웅들 중에는 그렇게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방금 이후아에게 욕을 먹었던 풍노사도 입을 헤벌리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군웅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완안방방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완안
방방은 빙그레 웃으면서 벽사신군에게 말했다.
"벽사신군, 자 재주를 부려 보시지."
자신만만한 벽사신군은 쓰쓰쓰 하는 기분나쁜 괴이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뱀들이 대가리를
한자 반이 넘게 치켜들었다. 뱀들이 시뻘건 혓바닥을 낼름거리자 온 연무장이 순식간에 뱀
비린내로 가득찼다.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무공이 시원찮은 사람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고 약은 사람들은 바람부는 쪽으로 얼굴을 돌
렸다. 나무를 부여잡고 토하는 인간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물을 기르는 자신들의 자존심과 무공을 믿고선 태연하게 서 있
었다.
벽사신군의 괴이한 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러자 뱀들은 흉맹한 눈길로 쏜살같이 앞으로 기어나왔다.
맨 앞줄의 독사들은 이미 완안방방을 둘러쌌다. 이제 곧 공격할 태세였다. 완안방방은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허리가 예쁜 꽃가지처럼 한들거렸다.
"벽사신군, 이 잘난 뱀으로 날 놀래키기만 할 셈이오?"
취현청에서 완안방방과 원수처럼 싸우던 풍노사마저 고개를 돌렸다. 저 아름다운 미녀가 이
제 뱀밥이 되고 마는구나. 그러나 궁금하기는 했던지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이후아가 그
의 옆구리를 축하고 찔렀다.
"저 비구니에게 반했지?"
"허튼소리 하덜 말어."
풍노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래? 하하하. 저년은 장대인을 죽였잖아? 조만간 두목이 저년을 붙잡아
원수를 갚을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두목에게 사정해서 자네가 한 이틀 데리고 놀게 해 주
겠네."
그때 벽사신군이 신호를 멈췄다. 그러자 뱀들은 마치 조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
다가 벽사신군의 입에서 다시 그 괴이한 소리가 나자 뱀들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순식간에
완안방방의 발밑까지 쳐들어왔다.
그런데도 완안방방은 깔깔대고 웃더니만 품에서 슬쩍 상자를 꺼내 장갑 긴 손으로 채설주
네 마리를 꺼내 사방에 떨구었다.
찻잔 접시만큼이나 큰 채설주들은 즉시 진공해오는 벽사들을 마주보고 기어갔다. 벽사들은
얼룩덜룩한 거미들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강적을 만난 오합지졸처럼 머리를 돌려 황망히 달
아났다.
다급해진 벽사신군이 죽어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채설주에 겁을 먹은 벽사들은 죽어라고 달
아나기 만 했다. 그 중 몇 마리가 채설주와 붙어 보았지만 즉시 채설주에 물려 죽었다. 선두
의 뱀들이 달아나자 후미에 있던 뱀들도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뱀들은 서로 경주를
하듯 앞다투어 도망갔다. 벽사신군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러도 허사였다. 뱀들은 없
어지고 채설주가 다가오는 것을 본 벽사신군은 머리를 감싸고 도망갔다.
완안방방은 깔깔 웃으면서 채설주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벽사신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던 그녀는 즉시 손을 거뒀다. 벽사신군의 옷소매 속에는 아직 십여 마리
의 벽사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 물리기라도 한다면 큰 일이었
다. 완안방방은 멈춰서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살려 주겠다. 다시 또 우리 서방 교파를 업신여겼단 봐라."
벽사신군과 뱀들은 맞은 편에 있는 숲속까지 달아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먼 길을 온 노독이 아직 안 풀려서 뱀들이 그런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벽사신군은 더듬으며 변명했다.
취현청 안에서는 벽사신군의 뱀들에 기겁했던 군웅들은 벽사신군의 꼴을 보고선 비웃느라고
난리였다.
벽사신군은 비위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뱀들은 놔두고 혼자 군웅들 속으로 돌아왔다. 그
러나 완안방방과 확도를 감히 쳐다보지는 못했다.
확도는 사숙이 되는 완안방방이 분풀이를 해주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기가 완안방
방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확도는 이를 악물더니 벽사신
군 곁으로 갔다. 둘이서 손잡고 완안방방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그때 소염라 부방이 고함을 질렀다.
"여러분들! 이제 볼 것은 다 보았으니 이젠 오장주님의 거와를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군웅들이 화답의 환성을 올렸다.
오자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이젠 거와를 안 보여드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려."
그리고 아들에게 눈짓을 했다. 오군량은 식지를 오므려 입에 물고선 휘파람을 몇 번 불었다.
그러자 호수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오군량은 잠시 있다가 다시 휘파람을 세번 불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손바닥보다 더 큰 개구리 열마리가 휙 하고 땅으로 뛰
어올라 연무장으로 다가왔다.
"저것들이 거와요?"
누군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것들은 그냥 보통 개구리에 불과하죠."
오군량의 말에 모두들 혀를 찼다.
"보통 개구리가 저렇게 크다면 거와는 적어도 고양이나 개만은 하겠소이다 그려."
어느새 연무장엔 그런 개구리들이 천여 마리나 모여들었다. 개굴개굴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거와는 언제 나오는 거요?"
부방의 물음에 오자겸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저기 보시오. 지금 오고 있잖소?"
군웅들은 오자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백여 마리의 개구리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뛰어오는데 그 가운데서 범종을 울리는 듯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취현청 안에서 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들으니 귀청이 찢어질 것 같네."
풍노사가 말했다.
"글쎄, 울음소리는 큰데 거와는 왜 안 보이는 거지?"
이후아가 눈을 꿈뻑이며 말했다.
백여 마리나 되는 개구리들은 오자겸 앞에 와서 멈췄다. 개구리 울음소리는 굉장한데 거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군량은 석자쯤 되는 오목봉(烏木棒)을 개구리 머리 위로 내밀며 휘파람을 계속 불었다. 그
러자 어린애 주먹보다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그 위로 뛰어올랐다. 그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범종을 울리듯 쩌렁쩌렁했다. 오자겸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보시오. 이 개구리가 천하삼절독의 하나인 바로 거와요."
군웅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거와, 클 거(巨)자니까 커도 굉장히 큰 개구리인 줄 알았
는데 이게 뭔가? 온 몸이 새파란 그 개구리는 무척 작은 것이었다. 이마 위에 빨간 뾰두라
지가 하나 솟아 있을 뿐 보통 개구리와 다른 점이 없었다. 정말 이게 거와란 말인가? 오자
겸은 군웅들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이 말했다.
"이게 바로 거와요. 작다고 깔보지 마시오. 독성이 최고로 강한 개구리요. 거와의 거(巨)자는
그 몸이 거대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독성을 가리키는 말이외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소. 이 조그만 개구리에게 그렇게 강한 독이 있단 말입니까?"
벽사신군은 그렇게 말하면서 벽사 한 마리를 개구리에게 휙 던졌다.
개구리는 뱀에게 잡혀먹히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손가락만한 뱀도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개구리를 집어삼키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리 거와라도 하늘이 정한 자연의 이치를 깨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벽사신군은 그렇게
생각하며 벽사가 거와를 한 입에 삼켜 버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강호를 편력하여 견식이
넓은 군웅들도 벽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도 개구리는 뱀에게 잡혀먹
힌다는 자연의 이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거와의 머리 위로 날아간 벽사는 덥석 거와를 삼키려 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거와는 뱀 대가리가 닿으려는 찰나 개굴하고 한번 울었다. 그러자 벽사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땅에 툭 떨어지더니 죽어 버렸다. 다른 개구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그
벽사는 뼈만 남았다. 개구리들이 달려들어 뜯어먹어 버린 것이었다. 개구리가 뱀을 먹다니?
천하에 이런 일이? 군웅들은 깜짝 놀랐다.
벽사 때문에 화가 난 거와는 오목봉 위에서 앞다리를 들고 일어서더니 개굴개굴하고 크게
울었다. 부풀어오른 배는 핏빛으로 새빨갛게 변했다. 오자겸이 황급히 소리쳤다.
"뒤로 물러 서시오. 어서 빨리."
여러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데 거와는 입을 벌리면서 연분홍색이 나는 독
무(毒霧)를 확 내뿜었다. 독무는 바람에 퍼지면서 여러 사람을 감쌌다.
"어서 숨을 죽이고 물러 나시오. 어서!"
그러나 이미 군웅들은 조금이나마 독무를 마셨기에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고 있다간 정말 죽겠다는 생각에 저마다 황급히 경공을 써
서 독무 밖으로 뛰쳐나갔다.
독무는 한참이 지나서야 바람에 점점 흩어졌다.
"이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거와가
벽사신군이 던진 뱀에 화가 나서 그런 것입니다. 다행히 거와가 독무만 내뿜었기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습니다."
그제서야 진정한 오자겸이 말했다. 그리고 해독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말 천하삼절독이란 말을 들을 자격이 있군요."
부방이 찬탄했다.
"만약 거와가 독액을 내 쏘았더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것에 맞으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오군량이 말했다. 그러나 송무적이 비아냥거렸다.
"소장주님이야 해독약이 있으니까 별일 없겠지요, 뭐."
오군량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소. 거와의 독액에는 해독약이 없소."
"그렇다면 거와장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매일 거와의 위험 속에서 신경이 쓰여 어떻게
사느냐 말입니다."
양과가 물었다.
"예, 우리 거와장 사람들은 모두 매일 특제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거와에 중독되면
또 해독약을 먹죠. 그러기에 무사한 거죠. 만약 사전에 그런 특제약을 먹지 않고 있었다면,
중독되면 영락없이 죽습니다."
그때 노완동 주백통이 또 난데없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내 제자 양효비가 명이 길긴 길구나. 거와를 훔치러 들어갔는데도 그런 봉변
을 당하지 않았거든. 그때 거와가 독즙만 한방 봤더라면 그 녀석은 황천길로 갔을 게고 난
부담이 없어졌을텐데……."
그는 거와가 양효비를 죽이지 않은 것을 도리어 원망했다.
"어디 보자. 이 거와가 내 뜻을 안 들어 줬지? 언젠가 이 노완동이 이 거와를 한발에 밟아
죽일 거다."
그리고 경공을 써서 또 수풀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군웅들은 모두 각 지역에서 날고긴다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오씨네 부자를 포함한 그 누구도
주백통을 막을 자가 없었다. 주백통은 마치 무인지경을 드나들듯 했던 것이다. 오자겸은 단
지 이 괴이한 주백통이 다시 거와를 죽이겠다고 하지 않기만을 남몰래 바라고 있을 뿐이었
다.
취현청으로 돌아온 군웅들은 천하삼절독에서 빠진 정화 대신 무엇을 선정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러나 모두들 자기가 가지고 온 독물들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결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어느 것도 채설주나 거와에 비길 것이 못되었다. 그
들은 계속 갑론을박 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자겸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
다.
"여러분, 아무래도 오늘 회의에서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몇 년 후 때가 되면 다시 거와장에서 제2차 거와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기이한 독물들이 더 많아지겠지요? 그때 또 한번 진기한 구경을 하도록 합시다."
군웅들의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자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느 한 이인의 부탁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여러분
에게도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확도가 그 말에 흐흐 하고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빨리 하시오. 난 오장주님 따님의 신랑 선택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니 딴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이다."
오자겸은 저런 쳐죽일 놈 하고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사문을 배반한 뻔뻔스러운 놈, 간교하기 그지없고 음탕하기 그지없는 놈, 너 같은 놈이 내
딸을 탐내? 내 딸을 처녀로 늙어죽게 해도 너같은 놈에게는 시집 안보낸다.'
그러나 얼굴엔 웃음만 띤 채 오자겸이 말을 이었다.
"방금 말씀드린 이인은 속세를 떠나 강호엔 발도 들여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유일한
취미는 천하의 독물들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가지고 온 독물들을 그 자에게 바치라 이 말씀이오? 그건 안 되겠소. 남
이야 어떻든 나는 못 내놓겠소이다."
뱀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벽사신군의 말이었다.
오자겸이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게 아닙니다. 모두들 정성을 다해 기른 독물들인 데 그렇게 뺏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이인도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요?"
"그 이인의 선대 어른들께서 누대에 걸쳐 조정의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이인께서는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해치는 간신들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기도 했지만 바
보같은 임금 아래에서 신하로 있기도 싫었던 까닭입니다."
"거 대단한 사람이군요? 지금 벼슬아치 치고 좋은 사람 하나도 없지요. 황제는 더욱 나쁘고,
거 참 잘한 일이외다."
무이산 산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오자겸은 그 말엔 상관하지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그 이인의 집은 누대 고관대작을 지낸 결과 금은보화가 부지기수로 있답니다. 내가
그 일부를 보았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 한자 높이 산호(珊湖)만 해도 십 수 그루가 있더란
말입니다."
산호는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한자 높이가 되려면 적어도 백년은 묵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것은 깊은 바다 밑에 있어서 캐내기도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자 높이나
되는 산호 값은 얼마나 될까? 가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산호가 하나도 아니고 십 수
그루나 있다니? 귀두방은 강도질을 일삼는 비적들이다. 송무적은 오자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이인은 지금 어디 계시오?"
송무적이 물었다. 오자겸은 그를 힐끗 보고 담담히 말했다.
"그 이인은 때론 바다에 있기도 하고 때론 심산 속에 있기도 해서 도대체 그 정처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독물 수집을 즐기는 그분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데 새로운 것만 보면 만금
도 아끼지 않지요. 그분은 제가 거와회의를 연다고 하자 기이한 독물 몇 가지를 사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값은 얼마든지 치를 수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말에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술렁거렸다.
극독을 지닌 독물들을 왜 키우는 것일까?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기르는 것 아닌가?
흥정이 잘 돼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면 이 한평생 호의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그 이인이 도대체 얼마나 내겠답니까?"
누군가 물었다.
"이렇게 합시다. 독물을 팔 마음이 있으신 분은 먼저 값을 불러보시오. 그러면 제가 알아서
받아드리겠습니다."
오자겸의 말을 듣고 군웅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당장에 자기들이 가지고 온 독물들을 치켜들고는 값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공정하게 값
을 부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말도 되지 않게 높은 값을 부르는 자도 있었다.
오자겸은 대범하게 그들 각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고 당장에 어음을 끊어주며 독물을 사들였
다.
그러자 독물을 목숨같이 아끼던 사람들도 나서서 흥정을 했다.
연무장에서 취현청으로 돌아온 양과는 모두들 원래 자리로 가 앉기에 자기도 그냥 무채접의
곁에 앉았다. 취현청 안의 군웅들 모두가 오자겸을 에워싸고 흥정을 하고 있었지만 양과와
무채접만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양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군웅들의 속물같은 근성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명성이 자자한 영웅호걸들이 돈에 목숨을 걸고 저런 추잡한 모습을 보이다니? 탐욕이란 역
시 인간 모두에게 있는 모양이군.'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모두 돈만 아는 소인배들이요. 가짜 영웅들이라니까, 안 그렇소? 아가씨?"
그러나 무채접은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양과가 고개를 들자 무채접은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곤 했다. 때로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때로는 이마를 찌푸리기도 했고 그러다간
갑자기 얼굴에 방실 웃음을 띠기도 했다.
무채접이 방실 웃는 것을 볼 때마다 양과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의 아내 소룡녀에겐 그런
꽃같은 웃음이 없었다. 칠정(七情)을 억누르고서야 배울 수 있는 고묘파의 내공을 익혔기 때
문에 소룡녀는 다정한 말도 어여쁜 웃음도 없었다. 온종일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던 것이
다. 뒤에 양과의 아내가 되어 정욕은 생겼지만 그래도 표정은 언제나 담담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처녀에게서 꽃같은 웃음을 보게 되자 양과는 넋을 잃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돌아보니 노완동이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양과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우, 저 자들은 모두 장사에 미쳤구만. 근데 아우는 여기서 뭐하고 있나? 은자가 탐나서
그러나?"
"전 금은을 돌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가서 놀지 않겠나?"
"제자가 있잖아요? 제자하고나 노세요."
주백통은 흰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양효비 말인가? 재미없어 어디 놀겠어? 뱁새눈이 마치 도적놈같아. 그 녀석은 도통 아부
밖에 모른단 말씀이야. 이 주백통은 내 말에 자꾸 대들어야 재미있어 하거든. 양효비가 그런
것을 알 리 있나? 그 녀석이 내 첫번째 제자 야율제처럼 그저 굽신거리기만 하면 난 답답해
죽을거야."
"사실 그 애는 그렇지 않아요. 농담과 익살이 얼마나 많은데요?"
양과가 웃으며 말하자 주백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랑거리는 것을 빼놓고 그 자식은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무공도 얼마나 한심하다고. 이
노완동의 제자가 그 모양일 수가 있나? 앞으로 꼭 내 얼굴에 먹칠 할 놈이야."
의지할 데 없게 된 양효비의 처지가 소년 시절의 자기와 비슷한데 동정을 느낀 양과는 계속
양효비를 두둔했다.
"사실 양효비는 자질이 좋은 애죠. 형님께서 며칠만 잘 가르치면 그 무공이 일취월장할 것
입니다."
그러자 주백통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질이 아무리 좋다해도 자네를 따를 수는 없지. 난 가르치기 싫어."
주백통이 정말로 못마땅한듯 투덜거렸다.
"형님께서 무공을 안 가르쳐 주다가 그 애 어머니 귀신이 나타나 귀찮게 하면 어쩌려고 그
래요?"
이 말에 주백통은 섬뜩했다. 그는 그 말이 제일 겁났다.
"그 귀신이 어디 있지?"
"어젯밤 제 꿈에 미랑이 왔다갔거든요. 미랑은 형님께서 양효비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고 화
를 내면서 어디 보자고 벼르던데요."
양과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럼 어쩌지? 이걸 어쩐다?"
주백통은 겁이 나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몸을 떨기까지 했다.
"양효비를 찾아 가장 높은 무공을 가르쳐 주면 될 것 아닙니까?"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과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아우 말이 맞네. 그 말대로 하지."
그리고는 또 취현청 밖으로 사라졌다.
양과는 고개를 돌려 다시 무채접을 바라보았다. 무채접은 계속 흥정하는 것만 정신없이 바
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 것일까? 양과는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았다. 바빠서 얼굴에 땀
이 흥건한 오자겸이 때때로 무채접에제 눈길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오장주와 무채접은 도
대체 어떤 관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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