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3

3학년2반 | 2022.02.26 07:37:58 댓글: 0 조회: 55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236
화산논검(華山論劍) 제20권 7부 신조협 양과후전 II
제목: 화산논검 제20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제9장 백의 여인(白衣女入)
제10장 협곡 속의 음모
제11장 미인을 구한 영웅
제12장 양과로 변장한 양효비
제13장 황약사의 가르침
제14장 교언영색
제15장 오독방의 음모
제16장 칠월 초이레
제9장 백의 여인(白衣女人)
그런데 이때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두 여인은 하늘의 선녀가
내려오듯 옷자락을 날리며 땅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앞에서 웃고 있는 꽃같이 예쁜 여자는 무채접이고 그 뒤에 있는 긴 머리칼에 얼굴이 추하고
흰옷 입은 여인은 바로 양과가 자기 아내 소룡녀라고 여기고 있는 그 백의 여인이었다.
양과는 달려나가려고 하다가 멈췄다. 양과 앞에서 자기가 소룡녀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백의 여인 아닌가? 그런 소룡녀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소룡녀임을 밝히겠는가?
양과는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며 그들을 가만히 엿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웃음소리는 무채접의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완안방방 앞으로 와서 방긋 웃었다.
"가긴 왜 가요, 언니."
완안방방은 무채접과 초면은 아니었지만 무채접의 내력은 알 수 없었다. 완안방방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모용공자와 탁공자가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겠어요? 중원 무림의 뜻을 대표해 그
런다니 빈승이 거역할 수 있어야지요."
그러자 무채접은 모용협과 탁장청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어느 분이 중원 무림의 맹주이십니까?"
"중원 무림의 맹주는 대협객 곽정이란 분이시오."
모용협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엔 무림 맹주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소. 우린 물론 맹주가 아니오."
무채접의 말에 모용협이 대답했다.
그러자 무채접은 완안방방에게 말했다.
"들었죠? 저 두 사람은 중원 무림의 맹주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그들의 말은 중원 무림의
뜻을 대표할 수 없어요. 듣지 말아요."
"그럼 아가씨는 무림의 맹주이시오?"
탁장청이 코웃음쳤다.
"나도 아니에요."
무채접이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면 아가씨도 이런 일은 간섭하지 마시오."
그러자 무채접이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백의 여인을 보며 말했다.
"언니, 저 사내들 좀 봐요, 억지 부리는 것 좀 봐요. 자기들이 개밥에 도토리처럼 끼어들어
남의 일에 참견하면서 우리보고 참견한데요."
백의 여인도 그 말에 동감인듯 고개를 까딱했다.
"아니, 이게 누구를 욕해?"
탁장청이 눈썹을 곤두세웠다. 검자루를 틀어쥔 손에선 또 퍼런 핏줄이 용솟음쳤다. 그래도
무채접은 그냥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할 말을 다했다.
"욕하다니요? 욕하긴 누가 욕했다고 그래요? 개밥에 도토리라는데 그쪽이 개밥이에요 도토
리이에요? 난 그쪽 보고 그런 말 한건 아니에요. 그 따위 억지 부리지 말라구요."
잽싼 입에 비해 목소리만은 은방울 굴러가듯 매끄러웠다.
탁장청과 모용협은 화가 나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입이 무거워 말을 잘 못하는 탁장청
은 노기에 몸을 떨었다.
"이게…… 이게, 좋다, 어디……."
"좋냐구요? 좋지 않구요. 난 무공도 좋고 마음씨도……."
그러더니 그녀는 탁장청을 보고 눈을 흘겼다.
"가만, 참 별 사람 다 봤네. 함부로 남의 처녀보고 좋니 나쁘니 하다니? 그거 너무 경박하잖
아요?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그러자 탁장청은 황소처럼 울부짖으며 이윽고는 그 녹슨 칼을 꼬나들었다. 무채접은 놀란듯
이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입만은 가만있지 않았다.
"화났어요? 노발대발 화가 머리끝까지 났나요? 그쪽은 절정공자님의 아드님이시라면서요?
절정공자님의 절정검이 대단함은 나도 알아요. 세상에서 최고로 신비한 오혈궁(烏血宮)을 쳐
부쉈기에 절정공자란 이름만 들어도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러니
나 같은 일개 아녀자가 그런 분을 무서워하지 않을 리 있겠어요?"( 풍류여마 매초풍 을 참
조하라.)
그 말에는 무채접이 탁장청 앞에서 물러선 것은 절정공자의 체면을 봐서 그런 것이지 탁장
청이 무서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었다.
과묵한 탁장청이지만 총명하기에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아버지 이름만 믿고 어쩐다는 건가?"
무채접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녜요. 난 그런 말 안했어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다 해요, 그러나 호부견자(虎父
犬子)란 말은 들은 것 같아요."
그러자 탁장청이 돌연 기합 소리를 내며 녹슨 검으로 무채접을 내찔렀다.
그리 빠르지도 않고 그 초식도 일반적인 것같은 탁장청의 검은 곧장 무채접의 가슴을 향했
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탁장청은 명성만 높았지 기실 무공은 그렇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채접은 대적을 만난듯 긴장했다. 무채접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피하던 그
검은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며 날아왔다.
'과연 대단한 절정검이로구나. 만만히 봤다간 큰코 다치겠네.'
무채접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러나 탁장청의 검은 초식이 변하지 않
은 채 곧장 그녀의 가슴을 겨누고 찔러왔다. 무채접은 눈부신 빛이 번쩍이는 단검을 꺼내
탁장청의 검을 막고는 요자번신( 子飜身)의 초식을 써서 백의 여인 뒤로 날아갔다.
"언니, 저 사람 검술이 그만하면 괜찮지요?"
탁장청은 무채접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까불더니 피하긴 왜 피하지?"
그러자 이번엔 백의 여인이 말했다.
"이기지 못하겠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런데 강호의 소협(少俠)이란 분이 처음부터 다
짜고짜 그런 독랄한 초식을 쓰실 수 있나요?"
탁장청은 손으로 그 녹슨 검을 쓸었다.
"절정검법 자체가 사람 죽이는 검법이요.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면 검술을 연마할 필요가 뭐
있겠소? 그리고 검법이란 것도 필요가 있겠소?"
백의 여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번 잘하시는군요. 듣자니 탁공자님 검에 죽은 사내가 적지 않다는데 여자를 죽여본
적은 있는지 모르겠네요?"
"죽여야 한다면 남녀를 구별할 필요가 없지요."
"그럼 좋아요. 어디 귀하의 절정검법을 내가 좀 보기로 하죠."
그러더니 백의 여인의 손이 번쩍였다. 무채접의 손에 쥐어진 단검과 똑같은 단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검자루엔 보석이 가득 박혔고 검날은 매미날개처럼 얇았다.
"언니, 이것두요."
무채접이 자기 손에 쥐었던 단검을 백의 여인에게 주었다. 백의 여인은 단검 두 자루를 좌
우 두 손에 갈라쥐었다. 단검 둘은 서릿발처럼 번쩍였다.
이 때 해는 수림 저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백의 여인은 쌍검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날이 너무 양아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저건 쌍익검(雙翼劍)이오!"
모용공자가 놀라 부르짖었다. 백의 여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모용공자님 견식이 과연 넓으시군요. 중원에서 이미 사라진 남해쌍익검(南海雙翼劍)을 다
아시다니?"
그러니 무채접이 토를 달았다.
"모용세가 장서실엔 권법 책만 해도 수천 종이 있대요. 그리고 이삼백 년 간 강호에 나타난
각종 기이한 병기들을 그려놓은 도표도 있고요. 그러니 쌍익검 같은 걸 왜 모르겠어요."
"허허, 우리 모용세가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많군요. 고명한 견식 정말 놀랐습니다."
모용협이 빙긋 웃었다.
무채접은 입을 삐죽하고는 더 말을 안했다.
계속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양과는 하마터면 또 뛰쳐나갈 뻔했다. 백의 여인의 목소리가 아
내 소룡녀의 목소리와 꼭 닮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쓰는 쌍익검이 남해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양과는 남해신니가 소룡녀를 데리고 갔을 것이라는 황용의 말이 떠올랐다.
저 백의 여인이 소룡녀이기 쉽다. 몸매도 소룡녀같고 목소리도 소룡녀같은 데다가 남해 출
신이 사용한다는 단검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양과는 당장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는 또 참
았다.
가만, 초식을 보자. 무슨 초식을 쓰는가를 보면 정말로 알 수 있으리라. 소룡녀라면 꼭 고묘
파의 무공 초식을 쓸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소룡녀가 아니라 해도 부인할 수가 없는 일!
백의 여인은 쌍검을 모았다가 허공을 가르며 물었다.
"탁공자님, 왜 선수를 안 쓰세요?"
"사내 대장부가 여인에게 선수를 쓰겠소? 그쪽에서 먼저 시작하시오."
그러자 무채접이 또 까르르 웃었다.
"정말 그런 말 하기가 부끄럽지 않나요? 방금 적수공권인 나를 죽이려고 검으로 찔러 왔잖
아요? 그 땐 사내 대장부가 아니고 여자였나요?"
"이게, 정말……."
"정말 어쩌겠다는 거예요? 우리 언니가 여기 있어요. 자중하세요."
"탁공자님, 이 애하고 입씨름 말고 어서 시작하세요. 입씨름에선 이 애를 못 당합니다. 이길
것 같아요?"
탁장청은 화가 나서 발뒤축을 구르며 녹슨 검을 내찔렀다. 무채접하고 싸울 때와는 달리 이
번 검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검 끝이 백의 여인의 오른쪽 어깨를 겨누고 유성처럼 날아갔
다.
백의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 차디찬 웃음을 짓더니 오른손에 쥔 단검으론 탁장청의 검을 쉽
사리 쳐내리고 왼손에 쥔 단검으로는 탁장청의 두눈을 내찔렀다. 탁장청은 황급히 뒤로 물
러났다. 백의 여인은 더 공격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탁장청을 차디찬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 그건 무슨 초식이오?"
백의 여인은 좌우 두손으로 각기 다른 초식을 쓰며 한쪽으로는 막고 한쪽으로는 내찔렀는데
탁장청은 그 초식을 알 수 없었다.
"두렵거든 그만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이 사람들을 억지로 서역으로 쫓지는 마세요."
백의 여인은 독주여니 완안방방과 혁중달을 가리켰다.
"난 이때까지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오."
탁장청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그는 절정검 중의 최고인 일검삼생(一 劍三生)의 초식을 썼다. 일검삼생이란 일검이
삼식(三式)으로 변하는데 그 각각은 모두 상대방을 죽음에 처넣을 수는 있는 비법이었다. 탁
장청의 검은 먼저 백의 여인의 인후를 내찔러오다가 그녀의 중복(中腹), 단전을 차례로 내찔
렀다. 어느 곳이든 찔리기만 하면 죽는 급소였다.
백의 여인은 왼손의 검으로는 호선을 그리며 자기 중복과 단전으로 찔러오는 검을 막아내고
오른손의 검으로는 탁장청의 옆구리를 찔렀다. 막고 찌름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빈틈이라고
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탁장청은 번개같이 피하긴 했지만 그 사이 벌써 흰적삼 옆구리가 반자 가량이나 찢어졌다.
이 두 합에 비록 피는 보지 않았지만 쌍방의 수준 여하는 분명해졌다. 탁장청은 자기 재간
으로는 이 백의 여인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껏해야 오십 합을 못 넘겨 이
여자에게 참패를 당할 판이었다. 가면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추한 얼굴과는 달리 음성은
스무살 안팎의 예쁜 미녀같은데 이런 절묘한 천하 신공을 언제 어떻게 배웠을까?
"아가씨 존성대명은 어떻게 쓰시오?"
탁장청이 물었다.
백의 여인은 못들은 척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신 무채접이 내쏘았다.
"그 따위로 놀면서 언니 이름을 물어볼 낯이 있어요? 우리 언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예요.
이름을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못된 생각을 했다간 큰코 다칠줄 알아요."
탁장청은 화도 나고 가소롭기도 해서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모용협이 나서며 읍을 했다.
"내가 보건대 아가씨의 무공은 노완동 주백통 선배님의 좌우호박지술 같은데, 확실히는 모
르겠습니다. 구체적인 초식이 주백통 선배님과 또 다르니 말입니다."
"그만큼 아시는 것만 해도 대단한 셈이죠. 더 자세한 건 묻지말아 주세요."
백의 여인은 얼음장같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보고 더 알려 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바보예요."
무채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용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런 두 아가씨가 나타났을까? 하나는 입심이 세고 하나
는 무공이 절정고수이고. 나와 탁장청은 그 누구도 저 백의 여인의 적수가 못 된다. 저 여인
의 무공이 세상 최고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두손으로 각각 다른 무공 초식을 동시에 쓰고
있기에 마치 무림 고수 둘이 검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런데 방어와 공격을 빈틈없이 하니 우
리 같은 무공으로도 쉽게 이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모용협은 크게 웃었다.
"아무튼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두분의 말씨를 보아서는 강남 오월(吳越) 출신 같은데 그
거면 우리와 같은 중원 무림의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중원을 해치고 있는 독주여니
같은 서역 마녀를 비호하는 겁니까?"
그러자 무채접이 또 내쏘았다.
"비호는 무슨 비호예요? 불공평한 일이 있으니 나서는 거지. 불공평한 일을 보고 가만 있는
게 호걸협사인가요?"
모용협은 입심 센 무채접과는 상대하기 싫었다. 잘못하다간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채접의 말은 일소에 붙여버리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완안방방은 독활한 여자입니다. 중원에 와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악행을 벌써 얼
마나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마녀인데 그래 두분께서는 그냥 이런 마녀를
비호하겠다 이겁니까?"
"그래 그런 짓을 하는걸 정말 직접 봤어요?"
무채접이 반박하듯 물었다.
"글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친구들이……."
모용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채접이 가로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죠? 귀로 들은 것은 믿을 수 없으니 눈으로 봐야 정말로 안
다, 이런 말 아녜요? 이 말도 몰라요?"
"내 친구들은 모두 거짓말을 모르는 당당한 사내 대장부들이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을거
요."
"가만, 내 한 가지 물어보자구요. 가령 어머니 아버님이 다툰다고 합시다. 그럼 그쪽은 할아
버지 할머니에게 가 그대로 고해바치겠어요, 아니면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겠어요?"
모용협은 무채접이 왜 그렇게 묻는지 그 목적을 알 수 없어 생각나는대로 대답했다.
"물론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야죠."
"그러니 보세요. 자기네 육친들에게도 거짓말을 하는데 친구들 사이야 더 말할 게 있어요?
심보 나쁜 친구가 무조건 완안언니를 해치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이
게 큰 잘못이 아니고 뭐예요?"
그제서야 자기가 무채접에게 말꼬리를 잡혔음을 알고 모용협은 적이 화가 났다.
"그래도 내 수십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모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소?"
"사람들 입이 모이면 금을 녹이고 요언이 쌓이면 뼈가 녹는대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래도
사내들은 괜찮지만 우리 여인들의 경우는 말도 말아요. 어떤 여인이 어떻다 누가 말만 하면
사내들은 모두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지요. 그렇잖아요?"
그러자 탁장청이 콧방귀를 뀌었다.
"모용협, 저런 계집애와 입씨름만 하겠소? 둘이 합쳐 거꾸러뜨리고 맙시다."
무채접이 가소롭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참, 사내 대장부라는 사람들이 그런 말 하기가 부끄럽지도 않나요? 어떻게 무능력하면 사
내들 둘이 우리 언니 혼자하고 겨루어 보겠대요?"
"혼자는 왜 혼자. 거기까지 둘이지. 그래 이 대 이로 해보자."
"이 사람들 봐. 내 무공이 시원찮은걸 알면서도 이 대 일로 겨루기가 부끄러우니까 억지로
나를 끌어들이네. 어쩌겠어요. 들어주기 싫어도 들어줘야지. 언니하고 같이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당당한 협객님들이 앞으로 강호에 나서기 어렵지 않겠어요?
혼자 힘으로 안 되니 둘이서 겨우 한 여인과 무예를 겨루었다는 소문이 나돌면 말이에요.
어쩌겠어요. 소원 성취 시켜주는 셈 해야지……."
무채접은 모용협과 탁장청을 이렇게 약을 잔뜩 올리면서 아미자(蛾眉刺) 한 쌍을 꺼내들며
자세를 잡았다.
"자, 겨뤄 보려면 해보죠."
그러는 것을 백의 여인이 가볍게 옆으로 밀었다.
"한쪽으로 가 있어. 나 혼자라도 문제 없으니까."
"조심하세요."
무채접은 한쪽으로 물러섰다.
"걱정말아."
모용협과 탁장청은 서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한다 하는 소협객으로 불리는 우리 둘인데 둘
이서 아가씨 하나와 무예 겨룸을 하다니? 이건 이겨도 자랑할 게 못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 대 일로 겨룰 수도 없다. 상대방이 너무 강하기에 그렇게 겨루면 영락없이 이쪽이 패하
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은 이런 생각으로 머뭇거렸다. 이때 완안방방이 백의 여인 곁에
섰다.
"아가씨께서 날 도와주시는데 내가 수수방관하면 예의가 아니겠지요?"
그리고 검을 꼬나들었다. 백의 여인 혼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완안방방까지 백의 여인의
편이 된다면 이기기는 다 글렀지 않은가?
모용협은 진퇴양난에 빠진 꼴이 됐다. 그는 완안방방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독주여니, 우리 중원 무림과 원수를 지겠다 이거요?"
그 말에 완안방방은 아까와는 달리 호기에 찬 소리로 깔깔 웃었다.
"중원 무림? 그런 말로 날 놀라게 할 생각은 말아요. 내가 이 아가씨와 손잡은 것은 순전히
천하 여성들을 위해 기개 한번 떨쳐 보자는 뜻일 뿐예요."
그때 양과가 나무 뒤에서 달려나왔다. 그는 백의 여인을 보고 외쳤다.
"소룡녀, 여보. 저 비구니는 나쁜년이오.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는 살인 마녀요. 과거
적련선자 이막추보다 더 지독한 년이오."
난데없이 뛰쳐나온 사나이, 그것도 다른 사나이가 아니라 신조협 양과임을 본 여러 사람들
은 모두 놀랐다.
그 동안 나무 뒤에 숨어서 백의 여인의 무공을 훔쳐보던 양과는 백의 여인의 무공이 고묘파
의 무공과 좀 다르지만 중원 무공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백의 여인이 쓰는 좌우호박지술
은 주백통이 창안한 무공인데 소룡녀도 그것을 수련했었다. 백의 여인의 무공초식은 고묘파
의 무공과 다른 것은 아마도 남해신니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이리라. 양과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 백의 여인이 소룡녀가 틀림없다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독주여니가 백의 여인과
연합을 선포하자 급히 뛰쳐나온 것이었다.
무채접은 양과가 백의 여인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양과가 백의 여인에게 치근덕거리려
는 줄 알고 달려와 막았다.
"신조협이라는 분이 왜 이러세요? 자중하세요. 신조협이란 명성이 아깝지 않아요?"
'명성이 뭐 어떻단 말인가? 자중할 일이 뭔가? 내가 뭘 잘못했길래?' 양과는 무채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무채접을 거뜰떠 보지도 않고 백의 여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무채접이 아미
자 한 쌍을 번쩍이며 양과의 앞을 막았다.
"내가 이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당신 같은 호색한을 그냥 둘 수는 없어요."
"호색한? 아이고, 그런 소린 마시오. 저 백의 여인이 내 아내 소룡녀인줄 난 다 안다니까.
비록 얼굴에 인피가면을 썼지만 난 다 알아요. 내 아내 소룡녀를 빼놓고는 좌우호박지술을
아는 여자가 이 세상엔 없어. 소룡녀, 여보…… 소룡녀."
백의 여인의 눈에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뭐라고 하셨죠?"
"뭐라긴 뭐라고 했겠어, 내 아내 소룡녀라고 했지. 고묘파 전인(傳人) 소룡녀라고 했지. 날
모르겠소? 나 양과요 양과! 왜 자꾸 나를 피하는 것이오?"
양과를 본 독주여니는 놀라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거와장에서 양과가 모용협을 격퇴하는
것을 직접 본 완안방방은 채설주 독이 양과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지금 양과는 백의 여인을 자기 아내 소룡녀라고 부르지 않는가. 정말 백의 여인이
양과의 아내라면 백의 여인은 양과의 말을 듣고 나를 공격할 것이다. 거기에 모용협과 탁장
청까지 합세해서 공격한다면 난 영락없이 목이 달아날 것이다. 독주여니는 얼른 혁중달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혁중달을 데리고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수림 속으로 달아났다.
"저 마녀를 붙잡아라!"
양과가 급히 소리쳤다. 독거미 채설주의 독해를 입어 고생하는 그는 독주여니를 한없이 증
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급선무는 소룡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주여니
완안방방을 추격하지 않았다. 추격한다고 해도 무공이 줄어든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혼자서
완안방방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양과 대신 모용협과 탁장청이 완안방방을 추격하여 쫓아갔다.
"여보, 내가 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며 지난 세월을 살아왔는지 아오? 당신과 만날 이 날을
위해서 만가지 고생을 다 참으며 견뎌왔는데 왜 자꾸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만 하오? 그
래 절정곡 벼랑에 쓴 약속을 잊었단 말이오?"
"절정곡 벼랑에 쓴 약속이라니오?"
백의 여인이 물었다.
"중독된 몸을 치료하기 위해 남해신니를 따라나설 때 벼랑에다 새겨놓은 약속이 있지 않소?
16년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리니 부부간 깊은 정 잊지 말고 약속을 지키세요 하는 서약의
글을 새겨 놓지 않았소? 여보, 그래 그 약속도 잊었단 말이오?"
양과는 거의 애원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아니, 별 미친 사람 다 봤네요. 우리언니가 어떻게 당신 부인이 돼요. 호호호, 별 일도 다
있네. 우리 언니를 취하려고 야단하는 남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댁처럼 그런 괴상망측한 수
단으로 구혼하는 사람은 보다 보다 처음이네요. 분명히 알려 주지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은
애당초 버리세요."
무채접이 양과를 흘겨보며 야단이었다.
"아니오, 내가 잘못 볼 리 없소. 이 사람은 분명 내 아내요."
양과는 고집스레 말했다.
"언니, 이런 생억지가 어디 있어요. 이런 뻔뻔스러운 사람은 난 보다 처음이야."
무채접은 백의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백의 여인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얘, 어서 가자. 날 따라오기나 해."
그러더니 소매자락을 휙 뿌리쳤다.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자 옷자락이 너풀거렸다. 무
채접도 급히 따라갔다.
"여보 여보."
다급해진 양과도 경공을 쓰며 따라갔다. 그러나 무공이 태반이나 줄어든 양과로서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두 여인의 그림자가 수림 저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눈
뜨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양과는 괴로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삼럼 속을 비틀비틀 걸
어갔다. 목적도 없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녀는 왜 자기가 소룡녀임을 자인하지 않는 것일까? 그 놀라는 모습만 봐도 소룡녀가 분명
한데. 몇 년이 흘렀다고 나를 몰라 볼 리가 있겠는가? 아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려서
부터 오누이처럼 고묘에서 같이 자라며 무예를 연마했던 그들이 아닌가? 커서는 사랑이 싹
터 서로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았던 그들이 아닌가? 혹시 그녀가 이미 해독을 했는 데다가
남해신니의 불이신공(不二神功)까지 수련했다고 나 양과를 깔봐서 그러는걸까? 그러나 그녀
가 내 사부였을 때도 날 깔보지는 않았지 않은가?
아니면 용녀에게 다른 어떤 말 못할 고충이라도 있단 말인가. 매 16년 만에야 한번씩 중원
에 오는 남해신니가 이 16년 내로 용녀와 내가 만나는 것을 엄금했단 말인가. 아니, 그것도
맞질 않다. 금방 무채접을 빼놓고 주위에 누구도 없었질 않은가. 용녀는 아무 거리낌없이 나
와 마주 서 있지 않았는가. 혹은 금방 그녀의 말을 들어봐선 이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못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무슨 약이라도 먹어 기억이 아예 없어졌단 말인가.
양과는 생각할 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일 저일 지나간 일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양아버지 서독 구양봉의 모습도 떠오르고 자기가 개구리 무공으로 무씨 형제들을 때려눕히
던 일도 떠오르고 곽정을 따라 종남산에 올라가서 도인들과 싸우던 일도 떠올랐으며 자기가
전진교에서 마냥 모욕 당하던 일도 떠올랐다. 소룡녀와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도 떠올랐으며
구지신개 홍칠공이 설산 위에서 왕지네를 마구 씹어먹던 일도 떠올랐고 곽부가 독침으로 소
룡녀를 찌르던 일, 자기가 외팔이가 된 후 신조 독수리를 친구로 삼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
올랐다. 그리고 동해의 격랑 속에서 열심히 수련하던 일이며 또 다른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양과는 눈앞이 아른거림을 느꼈다. 그 속에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수림이 돌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천지만물이 마구 돌아갔다.
양과는 쿵하고 넘어졌다. 혼절해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업고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원한 물이 입안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맛이 아주 썼다. 그러나 그는 그 물을
넘겼다. 그러다가 그는 또 정신을 잃었다. 칠흑같은 어두움이 그를 감쌌다.
닭우는 소리에 깨어난 양과는 자신이 어느 농가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오렌지색의 아침 햇살이 방안의 간소한 침상에 아름다운 색채를 뿌려주고 있었다.
양과는 혼절한 가운데서도 언젠가 맡은 적이 있는 약냄새를 맡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
은 농부가 약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늙은 농부는 양과가 깨어 난 것을 보고는 벙긋 웃었다.
"젊은이, 깨어났군 그려. 어서 약을 마시게."
양과는 자애로움이 온몸에 스며든 듯한 늙은 농부가 내미는 약사발을 받아 의심없이 꿀꺽꿀
꺽 마셨다. 노인은 게슴츠레 웃는 눈으로 양과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난 자네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까 봐 아주 걱정했었지."
"노인장,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침상에서 힘겹게 내려온 양과는 두 무릎을 꿇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노인은 양과를 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자네의 명이 아직 다 하지 않은거야. 명이 다하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 자넨 이레
동안을 깨어나지 못했어. 체내의 열이 대단하더군. 이 늙은것의 의술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
어 보이더니만 그래도 임자의 명이 길어서 끝내는 이렇게 소생을 하는구먼. 임자의 체내에
조금이라도 있던 생기마저 없었더라면 신선이라도 구해내기 어려웠을 거네. 신의(神醫) 화타
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구해내기 어려웠을 걸세."
"이레나 혼절해 있었다구요?"
양과는 놀라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 낮밤이었지. 그 동안 밥은 한숟갈도 못먹고 탕약만 겨우 넘겼지. 그래서 임자는 지금
기운 하나 없이 사지가 나른한거네."
그리고 나서 노인은 죽 한 그릇을 떠왔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들게. 밥맛이 돌아오게 하는데는 죽 이상 없지. 밥맛만 돌아서 밥만
제대로 먹기 시작하면 기운이 날걸세."
양과는 그 죽그릇을 받아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러자 정신이 한결 들었다. 그 후 사흘이 지
나서야 완쾌 되었다. 하루는 노인이 그를 데리고 산으로 소풍을 나갔다. 노인이 계속 자기의
끊어진 오른팔을 보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시죠? 뭐가 이상해서 그러십니까?"
"아니, 이상해서가 아니라 축하해 주고 싶어 그러네."
"에?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보건데 임자는 심기 고오(高傲)하고 성질이 날카로워 조만간에는 큰 화를 자초할 사
람이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눈이 있어 임자의 한팔만 없도록 한 것이지. 다시 말하면 임자의
예기를 좀 꺽어 앞으로 평안무사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말일세."
"노인 어른 좀더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양과는 노인의 말이 이해가 잘 안갔다.
"비유를 해서 말하자면 이렇지. 자네를 화덕에서 갓 꺼낸 보검이라 하세. 비록 높은 열기로
그 빛이 눈부시다고는 하나 굳센 물건을 치면 버티지 못하고 도리어 검이 끊어져 버리거든.
그러나 그것을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면 강도가 몇 십배 몇 백배로 높아져 보검다워진단 말
일세. 알겠나?"
"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과는 기뻤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석양이 지고 삼림에 어둠이 깔리는 이 정경이 지금 임자의 심경인듯 한데 임자는 젊디젊은
사람이 어째서 이 칠순노인 보다도 시름이 많고 마음이 무거운 겐가?"
양과는 소룡녀와 자기의 일을 숨김없이 죄다 토로했다. 서로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양과는 그 노인을 전세지교(前世之交)처럼 믿었다.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장탄식을 했다.
"정으로 괴로워 하는 것은 정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일세."
"그런줄 저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내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을 칼로 후비는 것
같습니다."
양과는 한숨을 쉬었다.
"강호에 나서면 자기를 걷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네만 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심지어
는 자기 원수를 죽이는 재미를 버리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자네로 말하면 미색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지."
양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렵니다."
"아내를 찾으러 떠나겠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속세의 사람이니 붙잡지는 않겠네만 내 권고할 말이 한마디 있네."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의 자네 무공으로는 험악한 강호에서 일 당하기 쉬운터, 생명을 보호하려거든 체내에
있는 극독을 속히 빼버려야 할거네."
"노인어른께서 해독해 줄 수 없겠습니까?"
노인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런 재간은 없네."
그 이튿날, 그는 노인과 눈물로써 작별하고 산을 내려왔다. 소룡녀를 찾으려면 우선 체내의
채설주 독부터 뽑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종남산을 향해 걸었다. 종남산에 이른 그는
산뒤를 돌아 고묘 앞으로 갔다. 고묘 앞은 이미 산 같은 바위로 막혀 있었다.
양과는 고묘 옆 관목림 속에 옥봉 둥지가 몇 개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룡녀
가 기르던 것이었다. 그 옥봉을 찾으면 노완동 주백통처럼 그 벌독으로 채설주 독을 뽑을
수가 있었다. 양과는 자기가 운기만 잘 하면 그리 큰 문제없이 채설주 독을 뽑으리라 생각
했다.
그런데 벌둥지들은 누구에게 파괴 당했는지 부셔져 있었고 옥봉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
다. 뒤산을 헤매며 반나절을 찾아봐도 옥봉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 양과의 명이 이것으로 끝난단 말인가?"
양과는 절망감에 싸여 고묘 앞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벽 위에 쓰인 글이 보였다.
"양과 아우, 나 노완동은 원래 옥봉을 잡아다 아우의 독을 빼주려고 했는데 잘못해서 그만
옥봉들에게 공격을 당하게 되었네. 그래 달아나게 되었네. 에크, 옥봉들이 또 몰려오네. 난
도망 가……."
마지막 '네' 자도 미처 못 써놓은걸 보니 급하긴 되게 급했던 모양이었다.
'노완동 형님이 동기는 좋은데 결국은 이렇게 날 해쳤구려.
양과는 탄식을 했다.
양과는 냇가로 가서 물밑을 통해 고묘로 들어갔다. 과거 그들이 쓰던 물건들은 제대로 다
있었으나 사람은 그 때 사람이 아니다. 아내의 종적은 찾을 길 없다. 양과는 소룡녀가 내공
을 수련하던 한옥상(寒玉床)에 엎드려 한바탕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여기서 열심히 수
련하여 자신의 무공으로 체내의 극독을 뽑아버릴 결심을 했다.
고묘파의 조사 임조영과 왕중양이 남겨놓은 무공을 참고하고 거기다가 몇년 동안의 체험을
더해서 독을 빼는 운기를 했다.
눈 깜짝할 사이, 수년이 지났다. 양과는 비록 체내의 채설주 독을 완전히 뽑아버리지는 못했
지만 그 동안 그 독에 아주 익숙해져서 어느 때 발작을 하고 어느 때 운기해서 눌러야 하며
어떻게 극독을 피하고 진기를 운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무공은 원래의 무공 절반으로 회복되었다.
어느날 역서를 보며 헤아려보니 고묘에 들어온 지 어언 5년이나 되었다.
비록 오성(五成)의 무공 밖에 회복이 안 돼 정상급 고수들과는 겨루기 어렵겠지만 강호에
나설 수는 있게 된 것 같았다.
양과는 고묘를 나와 종남산을 내려와 남쪽으로 향했다.
제10장 협곡 속의 음모
백화가 만발하고 봄빛이 무르익는 강남은 예부터 문인들이 동경하는 고장이었다. 봄빛에 물
든 푸른 강물 위로 일엽편주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배 위에는 노를 젓는 사공 외엔 뱃머리
에 한 젊은이가 서있을 뿐이다.
강기슭엔 나무들이 푸르르고 먼 산은 아지랑이에 가리워 아물거렸다. 그러나 소년은 이 수
려한 경치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그 당시 유행하고 있는 노래를 불렀다.
물고기 가득 싣고
정든 이 돌아오네
기슭에 선 처녀
가슴이 뛰네
아뿔싸
그만 이끼에 미끄러져
꽃치마 강물에 폭 적시누나
"이봐요, 시끄러워요."
젊은이가 버럭 화를 냈다.
뱃사공은 젊은이를 흘낏 보고는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묵묵히 배만 저었다. 손님의 기
분을 고려해서였다.
옷자락을 날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는 젊은이의 마음은 자못 무거운 듯했다.
예순이 되어 보이는 사공은 심심한 듯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 부모님과 다투었소? 왜 기분이 그렇소이까?"
그러나 젊은이는 못들은 척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기 경치가 얼마나 좋습니까? 양편 기슭에 있는 경치들을 구경하노라면 아무리 좋지 않던
일도 싹 잊혀지지요. 기분이 아주 좋아진단 말입니다. 비단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부잣집 자
제분이 분명하신데 뭐가 부족해서 시름이 그리 많소이까?"
그러자 젊은이는 휙 사공을 돌아보고 눈을 부라리며 분통을 터뜨리듯 매몰차게 말했다.
"내 일엔 상관 마시오!"
사공은 얼른 고개를 숙여 외면했다. 성미도 더럽군. 선의로 물어보는데 눈을 왜 부라리고 지
랄이야.
물결따라 내려가는 작은 배는 거침이 없었다. 젊은이의 찌푸렸던 미간이 점점 펴짐에 따라
검자루를 틀어쥐고 있던 손도 점차 느슨해지게 되었다. 협곡 하나를 지나자 젊은이는 긴 한
숨을 내쉬면서 뱃머리에 앉았다.
젊은이는 사공을 돌아보며 조금 전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겸연쩍어 하며 말을 걸었다.
"방금 부르던 노래를 들으니 노인장은 생업이 고기잡이인가 보구려?"
"그렇소이다."
"이번 뱃길이 적어도 80리는 될 텐데 돌아올 땐 어떻게 돌아옵니까? 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지는 못할거고……."
그러자 사공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고기잡이 철인데 이렇게 갔다오면 고기잡이철은 놓친거죠. 하
지만 공자님께서 주시겠다는 은자 스무 냥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면 한 사오 년 걱정 없
이 살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런 헌 배를 아까워 하겠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은자 스무 냥이면 이런 배를 일여덟 척은 살테니까요."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재물을 모으다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글쎄 그 말은
다 믿을 것은 못되지만 은자 좀 많아서 나쁠 리 있습니까?"
"내가 목적지에 이르러 은자를 주지 않으면 어쩌겠소?"
그러자 사공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 늙은 것이 육십평생에 어떤 인물인들 못 봤겠습니까? 벼슬하는 나으리들, 강도, 좀도둑,
힘 없는 백성들, 몸 파는 여자들 별의별 사람을 다 대해 봤지요. 그렇기에 사람은 좀 볼 줄
압니다. 내 어찌 공자님이 법 있는 집 자제분임을 모르겠습니까? 은 스무 냥으로 이 늙은
것을 욕보일 분이 아님을 난 눈짐작으로도 알 수 있지요."
"허허, 그 말이 고마워서 한 푼 에누리 없이 주어야겠군요."
젊은이도 껄껄 웃었다.
"더군다나 공자님께서는 선금으로 은 열 냥을 미리 주셨잖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이번 뱃길
은 벌이가 괜찮은 셈이지요."
"그러고보니 사공께선 계산이 아주 빠릅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강폭이 좁아지는 협곡이 나타났다. 양
편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절벽 위는 수림이었다. 강물은 협곡을 요동치며 달려갔다.
"조심하시오, 공자님."
사공은 노를 틀어쥐며 뱃머리를 바르게 하더니 이어 긴 삿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돌 하
나가 앞에 보이자 삿대로 그 돌을 밀며 배를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양편에서 함성이 요란하게 일더니 절벽 위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모두 한결같이 검은 옷에 흑두건을 쓰고 손엔 귀두도를 들었다.
대경실색한 젊은이가 검을 확 뽑아들고 무거운 음성으로 사공에게 명령했다.
"어서 몰아 나가시오. 어서요."
사공은 사색이 되어 말도 제대로 못했다.
"공…… 공자님…… 이걸…… 이걸……."
"저자들이 감히 내려오지는 못할 것이오. 겁내지 마시오."
작은 배는 쏜살같이 나아갔다.
그런데 배밑이 텅 하고 무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암초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배는 물살
에 밀려 후미가 옆으로 돌았다.
"삿대로 빨리 미시오."
젊은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당황한 사공은 그저 덤벙대기만 했다. 사공이 삿대로 앞을 밀어
배를 암초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물살이 너무 세서 배
가 움직이질 않았다.
젊은이는 사공을 밀치고 삿대를 빼앗아 쥐더니 끙하고 힘을 주어 삿대를 내밀었다. 그 긴
삿대가 활등처럼 휘어지더니 배가 비로소 한자 반 가량 뒤로 밀려나왔다.
사공은 급히 노를 저어 암초를 피하려고 애를 썼다. 절벽 위에 있는 검은 옷 입은 자들은
고함만 질렀지 어느 놈도 감히 뛰어내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젊은이와 사공이 같이 힘을
쓴 후에야 배는 암초에서 몇 자 가량 떨어져 나왔다. 젊은이는 한숨을 내쉬며 삿대를 뱃전
에 걸쳐놓았다.
그런데 물을 따라 내려가던 배가 또 탕하고 암초에 부딪혀 심하게 흔들렸다.
화가 난 젊은이는 삿대를 들고 일어섰다.
"제기랄, 재수도 드럽게 없군."
그때 왼쪽 기슭 위에서 한 사람이 너털 웃으며 말했다.
"거와장 소장주, 헛심 쓰지 마시오. 우린 물 밑에 쇠난간을 단단히 세워놓았거든요. 글쎄 물
고기로나 변하면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괴한은 커다란 덩치였고 손엔 큰 귀두도를 들고 있었다.
배 위의 젊은이는 거와장의 소장주 오군량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늠름한 사나이가
돼 있었다.
오군량은 강기슭 절벽 위에 서 있는 자가 귀두방의 풍노사임을 알아봤다. 요 몇년 동안 귀
두방의 세력은 무척 커졌는데, 귀두방 방주 송무적의 수족의 하나인 그도 그 사이 작은 두
목이 돼있었다.
오군량은 화가 나서 마구 지껄였다.
"너 같은 놈이 다 내 앞에서 주접을 떠느냐? 너희들 방주는 어디에 있기에 감히 내 길을 가
로막느냐? 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들!"
그래도 풍노사는 요란한 웃음소리로 협곡을 진동시켰다.
"오늘의 귀두방이 5년 전과 같은 줄 아는가? 그 때는 우리가 거와장을 두려워 했지만 지금
은, 적어도 이 풍노사 눈에는 종이 호랑이로밖에 안 보인다네."
노기충천한 오군량은 검으로 풍노사를 겨냥하며 소리쳤다.
"용기가 있거들랑 어디 내려와봐라, 이놈."
"내려 오라면 못 내려갈 줄 아느냐?"
풍노사는 당장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러는 것을 한 사람이 뛰쳐나오며 말렸다. 늘 단짝처럼 붙어다니는 이후아였다. 이후아는
여전히 바짝 마른 원숭이상이었다.
"저 놈은 도마 위의 고기 꼴인데 무슨 걱정인가. 가만 있으라고."
"저 놈이 너무 지랄한단 말이야."
"이제 잡으면 베어 죽이든 저며 죽이든 임자 맘대로 분풀이를 할건데 뭘 그리 서두르나? 저
놈이 자네 약을 올리는 건 잔꾀란 말일세. 저 험지로 내려가기만 해봐. 저놈이 좋다하고 자
네를 해칠 것이네."
"글쎄, 그럴 수도 있겠군."
풍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군량은 기우뚱거리는 뱃머리에 두발을 버티고 서서 칼을 꼬나들고 위엄있게 소리쳤다.
"강도질하는 놈들치곤 대담성이 없구나. 그런 쥐새끼 같은 담력을 가지고 강도질을 어떻게
하지?"
그러자 이후아가 깔깔대며 웃었다.
"오냐, 우리 담은 쥐새끼 담이다. 네 담은 무슨 담이냐? 황소같은 담을 가졌기로서니 독 안
에 든 쥐가 되었는데 어쩌겠느냐? 듣자하니 검술이 대단해서 강남의 젊은 검협으로 자처한
다는데 그말 들으니 구역질만 난다. 형제들, 구역질 나오, 안 나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귀두방 무리들이 웩웩 하고 헛구역질하는 하는 흉내를 냈다. 오군량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다 하얗게 질렸다.
"이 놈들, 개수작 말고 어서 길을 열지 못하겠느냐? 올라가면 네 놈들 뼈도 안 남기리라!"
그러자 이후아가 또 깔깔거렸다.
"올라와? 어디 올라와 봐. 경공이 대단하다면서?"
"올라오면 진수성찬 잘 대접해주지. 핫하하……."
오군량은 양쪽 절벽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석 장 높이는 돼 보였다. 자기 경공으로는 날아오
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어오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간 귀두방 무리들이 내던지
는 돌이나 암기에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오군량은 진퇴양난에 빠져 속수무책이었다. 협곡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이후아가 큰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가 상류에서 오는 배를 막아라!"
그리고는 오군량을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오 소장주님, 그저 마음 푹 놓고 거기서 쉬기나 하시오. 방원 오십 리 안은 모두 우리 세상
이니 절대 안전하다니까요."
그 말에 오군량은 더욱 불안해졌다.
점심 때가 되자 귀두방 무리들은 가지고 온 술과 고기를 내놓고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군량은 급히 오느라 식량을 준비해 오지 않아서 사공과 묵묵히 강물만 떠마시고 있었다.
이후아가 고깃덩이 하나를 배로 내던지며 히히 웃었다.
"자, 그건 내가 상으로 주는 거외다. 잡수시오."
오군량은 콧방귀를 뀌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네 놈 따위들이 주는 음
식은 안 먹는다.
그러나 노숙을 하며 이틀이나 제대로 못먹은 배에선 마냥 꾸르륵 소리가 났고 창자가 요동
을 쳤다.
'호랑이도 들판에 나서면 개한테 무시당하는 법, 그런대로 먼저 주린 배를 채우고 보자.'
오군량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깃덩이를 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얼른 손을 떼었다.
'가만, 이후아가 이런 선심을 쓸 놈인가? 이 고기에 독약을 넣었으면 큰일이 아닌가?' 그런
데 사공이 굶주린 눈으로 군침을 삼키며 그 고깃덩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옳다. 저 사공에게 고깃덩이를 주자. 고기에 독약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공으로 시험해보자.'
"고기가 먹고 싶으면 드시오. 난 안 먹겠소."
오군량의 말에 사공은 잠깐 망설였다.
"공자님께서 드시지요."
"난 배 고프지 않소. 노인장이나 드시오."
사공은 그 고깃덩이를 집어들더니 볼이 미어지게 먹어댔다. 오군량은 이제 사공이 중독되어
넘어지기만 하면 귀두방 무리들을 욕하며 놀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반시간이 지났는데도 사
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트림을 하더니 배 위에 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았다.
거와장의 소장주인 오군량은 독약을 사용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는 사공이 자는
것을 보고 고기에 독약이 없음을 알고선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깃덩이를 사공한테
넘겨주지 않는건데. 넘겨줘도 한 조각만 베어줄걸. 한 조각만 베어주고도 시험해 볼 수 있었
지 않나. 그러면 고깃덩이를 내가 거의 다 먹고 배부르게 잠을 잤을 텐데…….'
그런데 이때, 이후아가 벼랑 위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와장 사람들 참 잘한다. 자기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공을 가지고 시험을 해봐? 아예
우리처럼 드러내고 살인 방화하는 게 더 낫지. 그런 졸렬하고 몰염치한 짓을 한단 말인가?"
"사공이 늙은 노인이라 존대하느라고 먼저 대접했다. 자식들, 뭘 알고 떠드는 게냐?"
이후아는 코웃음을 치더니 또 고기 한 덩이와 술 한 주전자를 내려보냈다.
"네가 감히 그 고기와 술을 먹는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오군량은 술냄새와 고기냄새를 맡으니 군침이 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술과 고기를 먹으면 네가 정말 목을 넘길테냐?"
"그렇다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이후아가 소리쳤다.
"네가 사내 대장부냐?"
"내 비록 강도지만 식언은 안하는 사람이야. 너같지는 않아."
그러자 풍노사도 그 옆에서 거들었다.
"이후아는 일구이언 안 하는 사람이다. 내가 보장한다. 이후아가 식언하면 내 머리를 내놓겠
다!"
오군량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 고기와 술에는 구미가 당겼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앞선 고기에 독이 없다고 이번 고기에도 독약을 넣지 않았다고
는 할 수 없는 일, 가딱하면 그들의 꾀에 속아 해를 입는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공에게 줘서
시험해 본다면 이후아 무리들이 나를 또 졸장부라고 놀려댈 것이다.'
오군량은 한동안 결정하지 못하여 고기와 술을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자 이후아가 냉소를 띠며 소리쳤다.
"먹기 싫으면 올려보내. 술과 고기를 올려보내란 말이야!"
오군량은 혹시 독이 손에 묻을까봐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고 발끝으로 술주전자와 고깃덩어
리를 절벽 위로 차올렸다. 술주전자도 고깃덩어리도 석 장 높이로 날아올라 이후아에게 떨
어졌다.
"허, 그 녀석 발길질이 제법인데."
이후아가 감탄했다. 귀두방의 다른 무리들도 오군량의 재간에 탄복했다.
오군량은 아무튼 놈들에게 본때 한번 보였다고 내심 기뻐했다. 이후아는 술과 고기를 부하
한 놈에게 주며 말했다.
"저 오가 녀석이 보는 데서 임자가 먹어봐. 우린 저 녀석들처럼 독약이나 쓰는 비열한 인간
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란 말이야."
오군량은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코웃음만 쳤다. 그 부하는 시키는대로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
"똑똑히 봤지. 어떠냐? 내가 술이나 고기에 독약을 넣었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무사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술과 고기를 먹은 부하가 배를 끌어안고 펄쩍 뛰어오르
더니 그만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그 부하는 협곡 바위 위에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버렸다. 그 소리에 놀라서 깨어난 사공이 그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보더니 비명
을 질렀다.
이후아와 풍노사도 놀라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저 술과 고기는 모두 내가 가지고 온 건데 독약이 들어있을 리 없어. 절대 그럴 수 없지."
풍노사의 말에 이후아가 덧붙였다.
"글쎄 나도 독약을 넣지 않았는데. 알았다. 분명 저 오가놈이 한 짓이다."
"난 발끝으로 차올렸을 뿐인데 독약을 넣을 수 있겠나, 이 머저리같은 인간들아."
풍노사도 그 말엔 동의를 표했다.
"하긴 그래. 독약이야 손으로 놓는 법이지 발끝으로 어쩐다는 말은 못들었거든."
그러나 이후아는 이를 갈았다.
"거와장은 천하삼절독 중에 하나인 거와가 있는 곳이야. 그런 거와장에서 소장주로 있는 저
녀석은 독약 쓰는데 이골이 난 사독고수(使毒高手)란 말이야. 그런 놈이 우리 눈에 띄게 독
약을 넣겠나? 우리 모르게 독약을 넣는 재간이 따로 있겠지."
"자네 말도 그럴 듯하네. 이것 참, 어느 말을 믿어야 하지."
"어느 말을 믿다니? 저 녀석 말을 믿으면 어떻게 되나? 그럼 내가 독약을 넣어 내 부하를
죽였단 말인가?"
"하긴 자네 말이 그럴 듯하네만……."
풍노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오군량, 이 놈! 우린 네 목숨을 해치지 않았는데 왜 우리 부하를 독살시키는게냐?"
오군량은 냉소를 띠고는 소리쳤다.
"너희들 버릇 좀 가르치느라고 내가 재주 좀 부려봤다. 그만하면 거와장 사람들이 무서운
줄 알았을 테니 어서 길을 열어라. 지체했다간 내 이 검이 용서치 않으리라!"
귀두방 무리들은 비록 살인과 겁탈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강도 무리들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
두 칼과 창으로 공개적으로 싸우지, 암암리에 암기를 쓰거나 독약을 쓰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오군량이 자기네 귀두방 부하 한 사람을 독살시켰음을 본 귀두방 무리들은 두려워하기는 커
녕 오히려 격분하여 떨쳐 일어났다. 그들은 오군량을 소인배라고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오군량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이다. 오군량이 상대를 안하자 귀두방 무
리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이후아는 부하들이 떠드는 것을 제지하고
오군량에게 외쳤다.
"이 뻔뻔한 놈아. 그런 짓을 하고도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는 놈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 게
다."
그러자 풍노사도 덩달아 한 마디 내뱉었다.
"낯가죽이 이 귀두도보다 더 두꺼운 것같아."
그 말에 옆에 있던 무리들이 흐아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자, 우린 좀 편히 쉬세. 저 녀석이 얼마나 견디나 쉬면서 지켜보세."
이후아는 퍼질러 앉았다. 다른 놈들도 뒤따라 앉았다. 술을 마시며 떠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은자를 내서 도박을 하는 놈도 있었다. 오군량을 내려다보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귀두방 무리들이 장차 어떤 짓을 하려고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오군량은 아예 눈을 감고 배
위에 앉아서 폐목양신(閉目養神)을 했다. 사공은 그 피투성이 시체를 본 뒤로부터는 선창 안
에 틀어박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어느새 석양이 서산으로 뉘엇뉘엇 기울고 있었다. 귀두방 무리들은 솥을 걸고 밥을 짓기 시
작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꿩도 몇마리 튀겨서 국을 끓였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를 맡자 오군량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손으로 강물을 연신 들이마셨다.
그러나 허기만 더할 뿐이다.
오군량을 본 이후아는 냉소를 하며 꿩다리 하나를 오군량의 발 앞에다 내던졌다.
"술이 없어 안됐소만 꿩다리나 잡숴보시오."
이후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제길, 빨리 먹기나 해!"
풍노사는 눈을 부라렸다.
"미친 놈들, 이 오군량이 너희 강도들의 음식을 먹을 줄 알았더냐!"
오군량은 노기에 찬 눈길로 올려다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모르시는 말씀. 강도의 음식엔 독약을 절대 넣지 않는다는걸 모르신단 말인가. 믿지 못하겠
으면 한번 자셔보라구."
이후아가 비아냥거리자 다른 녀석들도 떠들어댔다.
"자식, 먹으라면 잔말 말고 먹기나 하지. 웬 말이 그리 많담."
오군량은 꿩다리를 먹고 싶었지만, 체면이 깎이는 것같기도 하고 또 꿩다리에 독이 묻어 있
을까봐 겁이 나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사공도 꿩다리를 보고는 못 참겠다는 모습이었다.
"공자님께서 안 드시겠으면 그 꿩다리를 제게……."
"드시려면 드시오. 내 음식도 아닌데."
오군량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공은 잽싸게 꿩다리를 채가더니 정신없이 먹어댔다. 강호의
험악함을 모르고 저렇게 먹다가 죽은 영웅호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사공은 꿩다리 하
나를 다 먹고 한 시간이 족히 지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군량은 또 심히 후회되었다. 이 귀두방 무리들이 독약을 원래 쓸 줄 모르는가? 아니면 알
지만 안 쓰는 것인가? 그러나 오군량에게 먹을 것이라곤 흐르는 강물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날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찬 바람이 강물을 출렁거리며 불어왔다. 배는 뒤집어질 듯 기우
뚱거렸다.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오군량은 추위까지 겹쳐 잠을 잘래야 없었다. 게
다가 어둠을 타고 귀두방 무리들이 내려올까봐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주위는 지척을 분간 못할 정도로 깜깜해졌다. 오군량은 추위를 견
디다 못해 사공에게 물었다.
"무슨 옷이라도 여벌이 없습니까? 추워 견딜 수가 없군요."
"글쎄, 나…… 나도 그만 여벌은 안 가지고 왔지요."
사공은 추위에 너무 떨려 말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오군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와장에 있었으면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음식에 호의호식 걱
정없이 지낼 것인데, 아버지께서 파견해서 어쩔 수 없이 떠났다가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그
러나 극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아버지가 나를 파견할 리가 없다. 일은 중하고 길은 험하기
에 나를 파견했을 것이다. 어제만도 고수 셋의 추격을 겨우 물리쳤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
또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오군량은 위를 쳐다보았다. 양쪽 절벽 위도 캄캄했다. 귀두방 무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
았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두방 무리들이 내가 지닌 이 물건을 빼앗으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런데 왜 내려와 빼앗지
않는 것일까? 오군량은 묵묵히 천지신명에게 기도만 드렸다.
'귀두방 무리들이 사라지게 하소서. 제게 행운을 주셔서 이 화액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
옵소서.'
동이 터오자 오군량의 심기도 조금 나아졌다. 북방 사막의 겨울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그 밤이 갔으니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군량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의심에 차 두리번거렸다. 사공이 느릿느릿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강도들이 다 갔는가 봅니다."
오군량은 심기가 가벼워졌다. 기도 드린 보람이 있구나. 날 어쩌지 못하겠으니 밤에 슬그머
니 가버렸구나. 그러고 보면 놈들이 내 물건을 빼앗으려 그런건 아닌 모양이다. 오군량은 품
에 손을 넣었다. 금으로 만든 작은 갑인 자금소갑(紫金小匣)이 단단하게 만져졌다.
그런데 강 양안에서 함성이 일면서 검은 얼굴에 검은 옷을 입은 괴한 수십 명이 절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귀두방 무리들은 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군량은 다시 긴장했다.
바위 위에 올라선 풍노사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 오가 놈아, 그래 간밤엔 잠 잘 잤느냐?"
"오냐, 강물에 일렁이는 배를 요람 삼아 푹 잘 잤다, 왜?"
오군량은 일부러 오기 있게 대답했다.
"거짓말!"
오군량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까지 했다.
"못 믿겠으면 그만 두라구."
풍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후아를 돌아보았다.
"저 자식이 어젯밤 정말 잘 잤으면 큰일인데. 우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나? 그러면
또 무슨 방법으로 저 놈을 잡지?"
이후아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저 놈이 자네를 속이는 거야, 알겠어?"
"날 속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가 여기 그냥 있는데 제가 편안히 잘 수 있었겠어? 꽃같은 미인을 안겨줘도 우리 때문
에 그 짓도 못할 거네."
그때 옆에 있던 사공이 오군량에게 말했다.
"공자님, 어젯밤 정말 주무셨습니까? 제가 보건대 밤새 못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공자님
께서 그냥 한숨을 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 못 이루는 것을 제가…… 아이구, 눈언저리
가 다 검어졌네요."
그 말을 들은 이후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보라구, 내말이 어떤가. 우린 다 알고 있어. 넌 춥고 배 고파서 밤새 눈 한번 못 붙였겠지
만 우린 밤새 편안히 잘 잤거든. 이런 고생 넌 아마 난생 처음일거다. 핫하하……."
오군량은 화가 나서 사공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또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목이 달아날 줄 알아."
그 바람에 사공은 질겁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오군량은 절벽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후아나 풍노사는 대답하라. 도대체 네놈들이 노리는 건 뭐냐?"
이후아와 풍노사는 서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우린 네 재물을 빼앗자는 것도 아니다. 네 몸에 지닌 은냥도 얼마 안 됨을 알고 있거니와
네 목숨도 몇푼어치 안 됨을 알고 있다."
이후아의 대답에 오군량은 노기를 참으면 또 물었다.
"그럼 왜 이러느냐?"
"우린 오직 물건 하나를 빌릴 생각뿐이다."
풍노사의 말이다.
"난 이번 길이 바빠 보물 같은건 못 지니고 왔으니 허리에 찬 이 보검이 가장 값진 물건일
뿐이다."
오군량이 능치며 대답했다.
"우리 귀두방은 종래로 귀두도를 써왔다. 검같은 건 질색이다. 네 그 따위 검은 돈은 주며
가지래도 싫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너에게서 빌려야겠다. 네 몸에 자금소갑이 있지? 안에
구슬이 있는 자금소갑 말이다. 우린 그걸 좀 빌렸으면 한다."
이후아의 말에 오군량은 가슴이 섬뜩했다. 과연 귀두방 무리들이 노린 것이 이것이구나. 그
러나 오군량은 소리내어 웃었다.
"난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내 몸엔 자금소갑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없고 구슬인지 뭔지 하는 건 더구나 없다. 구슬이야 여인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난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다."
"우리가 빌리려는 건 남자들이 쓰는 구슬이다."
이후아의 말이었다.
"뭐? 남자들이 쓰는 구슬?"
"남자 중에도 여자를 건드리지 못하는 남자들이 쓰는 구슬, 알겠어?"
그러자 풍노사가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중이 쓰는 염주, 알았지. 중은 여자를 건드리지 못하잖아? 하긴 비구니를 건드리는 돌중놈
들도 있지만."
그리고 풍노사는 무엇이 좋은지 낄낄대며 웃었다. 다른 녀석들도 따라 웃었다. 오군량은 코
웃음을 쳤다.
"하지만 나는 화상이 아니야. 같이 논 여자도 한둘이 아니란 말야. 적어도 열여덟은 될 거
다. 나 같은 사람이 중들이 쓰는 염주를 가지고 있을 턱이 있겠나? 나는 지금까지 불교를
믿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 따위 소리 그만 작작하고 어서 구슬이나 내놔!"
이후아가 소리쳤다.
오군량은 눈을 부릅떴다.
"없는 물건을 어떻게 내놓으란 말이냐?"
그러자 풍노사가 부하들에게 손짓을 휙 하면서 뭐라고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귀두방 무리
들은 즉시 활을 꺼내들고 세찬 물결에 전후좌우로 기우뚱거리는 작은 배를 겨누었다.
"오군량 이 놈, 좋은 말로 할 때 구슬을 바쳐. 내 말 한마디면 넌 당장 고슴도치가 된다. 잘
생각해 보란 말이다."
"우리 거와장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내 대장부들이다. 그깐 화살을 두
려워 할 줄 아느냐!"
그러면서도 만일에 대비해서 오군량은 몸을 선창에 숨겼다.
"활을 쏘아라!"
풍노사가 명을 내리자 수십 개의 화살이 오군량과 사공의 머리 위로 획획 지나갔다.
사공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무릎에 박은 채 벌벌 떨었다.
풍노사가 또 호령했다.
"오군량 이 놈, 그래도 구슬을 내놓지 않을 셈이냐? 정말 화살이 가슴팍에 맞아 구멍이 뚫
려야 정신 차리겠느냐?"
"헛소리 하지마라. 네 따위 겁도 안 난다."
오군량이 호기있게 되받아쳤다. 풍노사는 이후아를 보고 수군거렸다.
"저 자식이 계속 버티는데 어떡하지?"
"방주님께선 무슨 묘책이 있을거야."
"아예 활로 쏘아 죽여버리지."
"그러지 말아. 놈이 활에 맞아 강물에로 떨어지면 큰일이야. 그 깊고 세찬 물살에 어디 가서
시체를 찾겠나? 시체를 못 찾으면 자금소갑은 어떻게 찾나? 그러면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
불이 된단 말이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그럼 어떡하나? 그럼 저 자식을 그냥 저렇게 내버려둔단
말이야?"
"내 말했잖아, 방주님께 무슨 묘책이 있을거라구."
"방주님? 백리 밖에 있는 방주님이 무슨 묘책이 있어? 참, 모를 소릴 하는군."
이후아는 풍노사의 말엔 더 대꾸를 안하고 오군량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오군량 이놈아, 우리가 엄포로 화살을 쏘는 것은 네 그 구슬 때문에 그러는거지 네가 아까
워 그러는건 아니다. 사실 우린 널 손쉽게 생포할 수도 있다. 하루 낮 하루 밤 먹지도 자지
도 못해 지칠대로 지친 놈이 아니더냐?"
"몸이 지친 것만은 사실이다만 네깐 놈들은 겁나지 않는다. 백명이 몰려와도 겁나지 않아."
오군량의 대꾸에 이후아는 코웃음만 쳤다. 그런데 이때, 사공이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서 주
워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시퍼렇게 날이 선 귀두도로 오군량의 머리를 찍어 왔다.
순식간에 당하는 일이라, 오군량은 급히 검으로 사공의 귀두도를 막았다. 검과 칼이 마주치
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오군량은 그 진동으로 검을 놓칠 뻔했다. 사공의 힘은 보통이 아
니었다.
위급한 김에 오군량은 자기 문파의 검법 중에서 공격형인 괴이한 초식을 썼다. 그의 검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개같이 사공을 공격했다. 사공을 잠시 물리친 오군량이 물었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사공은 귀두도를 들고 날카롭게 오군량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늙은 영감이 아니
었다. 어떻게 변장을 했는지 몸이 날래기가 젊은 사람같았다. 사공은 차디찬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내가 누구 같아 보이느냐?"
음성도 늙은 사람의 음성이 아니다. 우렁차고 위엄 있는 음성이었다. 오군량은 그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사공이 백발을 벗어제쳤다. 가발이었다. 검은 머리
칼이 드러났다. 사공은 또 흰수염도 뜯어버렸다. 흰수염도 가짜였던 것이다. 마른 얼굴에 차
디찬 원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귀두방주 송무적이구나!"
오군량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5년 전 거와장에서 열린 거와회의에서 송무적의 인상은 너무나 깊었다.
"오 소장주님, 기억력도 대단하시고 검술도 5년 전에 비해 대단히 늘었습니다."
송무적이 빈정거렸다. 자기네 방주가 이렇듯 느닷없이 나타나자 강 양안에 있던 귀두방 무
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풍노사가 이후아의 어깨를 툭 치며 기뻐했다.
"방주님이 배에 계시는 것을 넌 벌써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어, 인
마."
"알면 그 성미에 가만 있었겠어? 자칫하면 사전에 들통날 텐데."
"하긴 그래."
풍노사는 푼수같이 헤벌쭉하게 웃었다.
"자, 이젠 자금소갑을 내놓으시오, 순순히."
송무적이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작부터 꾸민 음모로구나."
오군량의 말에 송무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나를 추살하려던 자들도 부하들이겠지?"
"부하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모자라고는 할 수 있겠지."
"글쎄 귀두방에 그렇게 유능한 제자들이 있을 수 없지."
그 말에 송무적은 코웃음쳤다.
"그런 소리 마시오. 어쨌든 당신은 지금 도마 위에 올라앉은 고기, 조롱 안에 든 새가 되었
으니……."
"흥, 그럴 수야 없지."
오군량은 검으로 송무적을 내찔렀다.
"흥, 칼 물고 뜀뛰긴가."
송무적은 칼로 막으려 했다. 그런데 송무적의 가슴을 찔러오던 오군량의 검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송무적의 단전을 찔러오는 바람에 송무적은 급히 아래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 찰
나, 오군량의 검은 어느새 또 송무적의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송무적의 무공으로는 오군량의 검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오군량의 검이 송무적의
가슴 앞 반자 가까이에 이르렀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송무적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어
서, 두 발로 배바닥을 탁 굴렀다. 천근의 힘을 가진 발구름이었다. 오군량이 휘청하고는 검
은 빗나가 송무적의 곁을 스쳐지나고 말았다.
"교활한 놈!"
오군량은 또 검을 내찔렀다. 역시 그 괴이한 초식이었다. 송무적은 막아낼 수가 없어서 배
후미로 내뺐다. 그 뒤는 강물이었다. 그의 옷자락이 강바람에 펄럭였다.
강 양안의 귀두방 무리들은 놀란 소리를 질렀다. 오군량은 송무적을 물에 빠뜨려 버리려고
검을 휘둘렀다. 송무적이 물에 빠져도 죽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물에 빠뜨려 놓기만 하
면 귀두방의 기세를 대번에 꺾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송무적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뜻밖에도 송무적은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오군량의 머리 위로 씽 날아가면서 칼로 오군량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오군량은 급히 머리
를 숙여 피하면서 검을 내찔렀다. 뱃머리에 내려선 송무적이 냉소를 보냈다.
"그 잘난 검술로 날 어쩌겠다구? 당년 노완동 주백통에게 당했듯이 내게도 당해봐라."
"허튼소리 말고 칼이나 받아라."
오군량은 검분삼로(劍分三路)의 초식으로 송무적의 좌우 옆구리와 미간으로 검을 찔러갔다.
송무적은 칼을 휘둘러 막았다. 조금 전처럼 그렇게 당황하지 않고 좀 침착해진 자세였다.
거와장 검술은 중원 각 파의 검술과 많이 달라서 그 검술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막아내
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송무적은 5년 전, 노완동 주백통이 오군량의 검법을 하나하나 깨버리
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수준의 차이로 송무적은 노완동같이 오군량의 검법을 이기
는 표리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그 구경 한번으로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귀두도 재간으로는 거와장 검법을 이길 수 없음을 그때 통렬히 느끼고 요 5년간 어떻게 하
면 거와장 검법을 이길 수 있을까를 늘 궁리해왔다.
방금 오군량과 처음 겨룰 때 송무적은 당황하여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으나 몇 합을 싸우고
나니 도리어 깨닫는 바가 있게 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단순히 무공을 수련한 경력을 보면 젊은 오군량은 송무적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오군량
의 검술이 괴이한 검술이라 송무적은 처음엔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오군량은 며칠간 계속된 허기와 노독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송무적은
먹기도 제대로 먹고 자기도 제대로 잤기에 정력이 왕성했다.
둘이 삼십여 합을 싸우고 나자, 오군량은 진땀이 나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손에 잡은 검도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송무적은 신이 났다. 그는 오군량의 힘을 빼버릴 목적으로 오군량의 공격을 막기
만 하다가 드디어는 자기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오군량의 검을 자기 칼로 탕탕 내리쳤다.
굶주려 속이 빈 오군량은 그 진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오군량은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배 위에서 피하면 어디로 피하겠는가. 자칫 강물로 떨어지기 쉬웠다. 오군량은
점점 기운이 빠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송무적의 귀두도가 그의 검을 연신 몇 번 더 내
리치자 오군량은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다가 그만 배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송무적의 기쁨
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오군량이 물에 빠지면 자금소갑을 어떻게 찾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는데 이렇게 오군량이
배 위에 주저앉았으니 이젠 그런 근심은 할 필요가 없었다.
송무적은 아예 죽일 생각으로 온힘을 다해 칼을 내리쳤다.
오군량도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두 팔이 더욱 더 저려서 그의 검은 점점 더
힘이 없어졌다.
양안 귀두방 무리들의 응원소리는 더욱 높아만 갔다. 풍노사는 귀두도를 추켜들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댔다.
오군량은 두팔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눈앞엔 어지럽게 별들이 보였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달
짝지근한 것이 목으로 욱하고 올라왔다.
오군량은 왈칵 피를 토했다.
그런데 이때, 이후아는 맞은 편에 있던 자기네 무리들 속에서 뜻하지 않는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자기네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마른 자 하나가 번개같이 좌충우돌하며 검을
휘두르는데 자기네 부하들은 반항다운 반항 한번 못해 보고 가을바람에 낙엽지듯 나가 쓰러
지고 있었다.
"아니, 저건 웬 놈이야? 우리 사람인가?"
이후아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사실 그건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자기네 편은 귀두도를 썼지 검은 안 쓰는 법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복색이 자기네와 같은 것이 이상했다.
그 사이, 그 사람은 어느 결에 절벽에 이르더니 절벽을 제비처럼 날아내렸다. 양안의 사람들
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의 경공술은 날렵하기 그지 없었다. 강심에 있는 돌 위로 사뿐 날아내린 그는 이어
두 발을 굴러 배 위로 날아올랐다.
이때 오군량은 피를 토하고 혼절해 쓰러져 있었고 송무적은 칼을 들어 오군량을 요절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기우뚱했다. 송무적은 누군가가 배에 뛰어오른 것을 직감했다.
"방주님 뒤에, 뒤에 사람이 있어요?"
이후아가 소리쳤다.
송무적은 몸을 휙 돌렸다. 시퍼런 검이 그를 향해 찔러오고 있어 칼로 내치려 하자 그 사람
의 검날은 방향을 돌변시켜 송무적의 왼쪽 눈을 찔러왔고 도중에 또 초식을 바꾸어 단전을
찔러왔다. 송무적은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거와장 제자냐?"
그 사람은 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도 없이 또 연속 십수 번을 공격해 왔다. 송무적은 그 검
을 막느라고 죽을 고생이었다.
상대방의 검술은 오군량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오군량보다 더 기기묘묘하고 괴이했다. 힘은
오군량보다 못한 것 같았으나 기술은 오군량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연속 공격을 하다가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송무적의 정수리를 계속
내리찔렀다. 송무적은 그 검을 황급히 막으면서 배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은 오군량 곁에 내려서더니 품에서 단약(丹藥) 한 알을 꺼내 오군량의 입에 넣어주
었다. 오군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그는 자기를 구하러 온 사람을 보고 기뻐 소리
쳤다.
"어서 여길 빠져 나가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집어 오군량에게 건네주었다.
자기네 집의 단약을 먹은데다 자기편 사람 하나가 늘었는지라 오군량은 대번에 정신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송무적 이놈아,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그리고는 오군량도 같이 송무적을 공격했다.
자기가 바야흐로 전승을 거둘 찰나에 난데없는 놈이 뛰어들어 오군량을 구해 일으킨 데다가
새로운 사람의 검술이 오군량보다 나은 것을 본 송무적은 사기가 떨어졌다. 게다가 하나도
어려운데 둘이 공격하니 송무적은 막을 재간이 없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생각
하고는 몸을 솟구쳐 절벽으로 날아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벼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활을 쏴라! 활을!"
송무적은 다급히 소리쳤다.
새로 온 사람은 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물밑에 있는 쇠난간을 발로 디디고 두손을 배밑에
넣어 배를 위로 받쳐들었다. 허약해진 오군량은 돕지는 못하고 묻기만 했다.
"혼자서 되겠나?"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양안의 귀두방 무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오군량은 새로 온 사람의 앞에 서서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새로 온 사람은 내력을
두 팔에 힘껏 쏟아 배를 번쩍 들어서 쇠난간 넘어로 내던졌다.
"어서 와요, 어서!"
오군량이 소리쳤다.
'난 왜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오군량은 자기가 바보같이 생각되었다.
배를 던진 그 사람은 발밑의 쇠난간을 디디며 몸을 솟구쳤다. 그런데 화살 두 개가 그 사람
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팔만 뒤로 돌려 날아오는 화살 두 개를
덥석 잡았다.
귀두방 무리들이 또 활을 쏘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몸을 날려 배에 올랐고 배는 거센
물살을 타고 벌써 삼십 장 밖에 가 있었다.
절벽 위에 오른 송무적은 조금전의 일을 생각하니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이후아가 그
기분을 위로해 주려는 듯 말했다.
"글쎄 귀신도 모를 일이라니까요. 제자들을 파견해 방원 오십리를 샅샅이 수색해 수상쩍은
놈은 한 놈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놈이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네
요."
"이제 확도 왕자가 이일을 알면 야단맞는다. 우리가 오군량을 놓친 줄 알면 확도 왕자가 가
만 있을까?"
풍노사가 말했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확
도와 그의 사대제자가 달려왔다. 오군량이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확도는 대노하여 송무적을
꾸짖었다.
"내가 그만큼 밀어주었는데 그 보답이 이거란 말인가?"
송무적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며칠만 더 말미를 주시면 그 염주를 꼭 빼앗아 오겠습니다."
"그만두시오. 내가 직접 나서야지. 그렇지 않다간 그 염주가 어느 악당의 손에 들어갈지 누
가 알겠나?"
그리고 사대제자를 데리고 말을 달려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후아가 말했다.
"방주님, 저것들한테 이런 천대를 받고 가만 있을 수 있습니까?"
송무적은 한숨을 쉬었다.
"몽고의 위세가 솟아오르는 해같은데 어쩌겠나. 송나라는 조만간 그들에게 먹히고 말거야.
그런데 저 확도는 허명만 있던 왕야(王爺)였는데 근 몇 년 어떻게 했는지 원나라 황제의 총
애를 얻고 진짜 왕야가 되었거든. 그러니 저 왕야와 등져서는 재미없단 말이야. 게다가 저
확도는 중원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고 무공도 대단하니 우리 귀두방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존재야."
그리고는 송무적은 무리를 둘러보며 한마디 더 부언했다.
"앞으로 누구든지 확도와 그 사대제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환이 그칠 날이 없게 되리라."
두 사람이 탄 배는 잠깐 사이에 몇 리를 내려갔다. 험지를 벗어난 오군량은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새로 온 사람은 그에게 건량을 건네 주었다. 오군량은 그걸 게눈 감추듯 했다.
"얘, 마침 네가 왔으니 말이지. 아니면 난 벌써 죽었다."
새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오군량의 누이동생 오군영이었다.
5년 전 밤.
양효비에게 오해를 사고 화가 난 김에 양과에게 몸을 주려고 했던 오군영은 양과에게 거절
당하자 비분겨워 검을 들어 자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마침 주백통이 와 그녀를 막았던 것
이다.
주백통은 그때 양과와 제자 양효비도 찾아볼까 했으나 그 자리를 뜨면 오군영이 또 자살할
까봐 그러지 못했었다.
날이 거의 밝아오는데 도 양과와 양효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도 없
었다. 조급해진 주백통은 오군영을 끌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죠?"
"어디로 가긴? 아가씨를 집으로 돌려 보내야지."
"난 안가요.집으론 못가요. 난 아버지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어요."
"아가씨를 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면 난 양효비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수가 없어요. 양효
비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으면 미랑의 귀신이 날 못살게 굴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 양
과가 극독에 중독되었는데 그 아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리고 주백통은 더이상 말을 안하고 오군영을 마구 끌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오군영은 죽어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양과한테 그렇게 된 다음, 군웅들
앞에서 죽어도 양효비를 따라가겠다고 맹세하다시피 한 오군영이 아닌가? 그런데 이틀도 못
돼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오군영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주백통은 화가 나서 꼼짝 못하도록 오군영의
혈도들을 꾹꾹 눌러놓았다. 그리고는 오군영을 손에 번쩍 들고 거와장을 향해 나는 듯이 달
려갔다.
날이 채 밝지 않은 데다가 주백통은 길이 익숙지 않아 오군영에게 길을 물어보며 달렸다.
거와장에 돌아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한 오군영이니 길을 제대로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주백통은 오군영이 가르쳐 주는대로만 달렸다. 결국 거와장과는 점점 멀
어지기만 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오군영조차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되였다.
길을 잃자 주백통은 거와장으로 가는 일을 단념해버렸다.
"양과가 중독된 채설주 독은 오직 종남산 옥봉이라는 벌독으로만 뺄 수가 있거든. 그러니
우리 아예 종남산으로 가자. 그 독을 빼려고 양과는 종남산에 가 있을거야."
주백통의 말에 오군영은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녀는 거와장으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어딜 가
도 무방했다. 둘은 북쪽을 향했다.
가는 길에 심심해 죽으려 하는 주백통을 위해 오군영은 어렸을 때 했던 놀이를 주백통과 하
기도 했다. 주백통은 기분이 좋아서 오군영과 무예 겨룸도 했는데 그녀의 무공이 시원찮음
을 보고 아주 정성들여 세심히 가르쳐주곤 했다. 이렇게 종남산까지 오다보니 그 사이 오군
영의 무공은 몇 갑자나 늘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남산 고묘까지 와 보니 양과가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은 오군영을 그 곳에서 기다
리게 하곤 자기는 옥봉의 꿀을 담은 병을 들고 옥봉을 모으러 갔다. 꿀 냄새를 맡은 옥봉들
이 분분히 날아와 주백통의 몸에 붙어 웅웅거리며 날아다녔다. 옥봉한테 쏘여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는 노완동 주백통은 겁이 나서 황급히 옥봉들을 쫓았다. 그러자 옥봉들은 적이
공격한 줄 알고 달려들어 주백통을 쏘려고 하였다.
혼이 난 주백통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는 수림 속으로 도망가다가 옥봉 둥지를 보기만 하
면 발로 짓밟아버렸다. 그러자 온 수림 속의 옥봉들이 총 출동해 주백통에게 달려들었다. 주
백통은 벌에 쏘여 아우성을 치며 옷으로 얼굴을 감싸고 수림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군영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아이고, 말도 마라."
주백통은 석벽에다 양과에게 남기는 글을 부랴부랴 써놓고 오군영을 끌고 종남산 아래로 내
뺐다.
주백통이 종남산에서 그런 짓을 안하고 닷새만 더 있었다면 양과를 만났을 것이다. 그런데
양과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인지, 양과가 종남산에 이르렀을 땐 옥봉들은 주백통 때문
에 어디론지 다 달아나버린 후였다. 그래서 실망한 나머지 양과는 고묘에서 홀로 5년이란
세월을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벌에 쏘인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행을 했다.
오군영은 주백통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와 무공을 가르쳐준 은덕을 생각해서 친딸처
럼 주백통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주백통은 그것이 고마워서 자기가 제일 자랑하는 칠십이로
공명권을 오군영에게 전수해 주었다. 원래 기초가 있는 오군영은 한 달이 좀 넘자 공명권을
익혔다. 물론 그 속의 깊은 이치를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시일이 좀더 걸려야 했다.
그런데 노완동에게는 늘 떠나지 않는 근심이 하나 있었다. 양효비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는다면 미랑의 죽은 귀신이 달라붙을까봐 늘 걱정이었다. 양효비한테 무공을 전수해 주자
면 양효비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양효비를 찾으러 다니자니 오군영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오군영을 데리고 다니자니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주백통은 또 오군영을 거와장
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오군영이 아무리 울며불며 애원을 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
다. 오군영이 마지막엔 죽겠다고 협박했는데도 주백통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는 오군영
의 혈도를 또 꾹꾹 눌러서 거와장까지 데려다놓고는 뺑소니쳐 버렸다.
딸애가 돌아오자 오자겸 내외는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겨 이렇게 돌아
왔는지 알 수가 없어 딸애에게 물어보았지만 딸애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오군영은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년
이 지나자 오군영은 비로소 점차 밖을 나다녔는데 복색도 아예 남장으로 해버렸고 부모들께
는 자기를 아들처럼 대해달라고 했다. 딸이라고 절대 부르지 못하게 했던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군영을 장중보옥으로 애지중지 길러온 부모들은 딸애가 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딸
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독 오군량만은 오군영을 그냥 누이동생으로 불
렀다. 오군영은 오군량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군량은 기운이 돌자 자금소갑을 오군영에게 넘겨주었다.
"얘, 조심해야 한다. 길흉을 예측하기 어려운 길이다."
"안다니까."
"우린 원래 호두탄에서 만나기로 했잖니? 그런데 어떻게 내가 위급한 줄 알고 달려왔지?"
"내가 호두탄 수림에서 노숙하다가 우연히 귀두방 제자 둘을 보게 되었거든요. 그래 그들
뒤를 따르니까 이것들이 글쎄 염주가 어떻고 누구를 막아 어떻게 한다고 수군거리잖아요?
그래서 난 귀두방이 오빠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을 따라 그냥 올라왔지
요. 협곡까지 와보니 송무적과 오빠가 싸우는 것이 보이대요. 그래서 달려들어 구한 것이죠,
뭐."
"그렇다면 나는 그 귀두방 제자 둘에게 감사드려야겠구나."
오군량은 여유를 찾은듯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오빠, 이젠 기슭으로 나가 집에 돌아가. 아버지 걱정하시겠어. 어서 가 소식 알려드려야죠."
"내가 좀더 바래다 줄게."
"그만두라니까요. 오빠는 내상을 입었잖아요? 악당들이 달려들어도 싸우지 못하고 오히려
신세를 져야 될 판이면서도."
"정말 얘, 난 도무지 그 영문을 모르겠다. 넌 왜 남자 복색을 하고 다니는 거냐? 너 인물이
아깝다. 그 인물에 치장하고 나서면 널 따를 귀공자들이 한둘일까, 부지기수지."
"글쎄, 내 일에는 상관 말아요. 나도 오빠 일은 상관 안할테니까."
오군영은 뾰루퉁해졌다.
"오, 그래 그래, 더이상 말하지 않으마."
"여자들이야 값이 있나?"
오군영이 혼자 중얼거렸다.
오군량은 기슭으로 올랐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리고 오군영을 불렀다.
"동생, 이번 길에서 난 신조협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어. 넌 못들었니?"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아요. 난 정말 듣기 싫어."
오군영이 화를 냈다.
"오, 그래 그래.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릴 했구나."
그러더니 오군량은 제 갈 길로 걸어갔다.
오군영을 태운 배는 그냥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그녀는 강안에 무르익은 봄빛을 구경하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했으나 '신조협'이란 세 글자가 계속 머리 속에 끈질기게 떠올랐
다.
"양과도 사내 대장부가 아니고 양효비도 사내 대장부가 아니야. 모두 내가 미워하는 졸장부
들이야."
제11장 미인을 구한 영웅
창망한 저녁빛이 비추었단 강물 위로 피어오르는 엷은 안개가 강 양안으로 흘러갔다. 저녁
빛은 점점 짙어가고 안개도 점점 짙어 열 장 밖은 어렴풋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름 모르는
성 하나가 점점 뚜렷이 보였다.
배를 기슭에 댄 오군영은 바위 위로 뛰어올라가서 발로 배를 힘껏 밀어버렸다. 배는 물길
을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안개에 삼켜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귀두방 무리들이 가만있지 않고 자기를 추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테면 그
러라지. 이젠 사람 없는 빈 배나 쫓을 뿐이지 내 행방은 너희들이 모를거다.'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성 안으로 걸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엔 행인이 드물었다.
오군영은 행낭에서 차양이 큰 검은 모자 하나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녀는 모자 차양을 아
래로 푹 당겨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계속 가다보니 길 옆에 등롱 하나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등롱에는 회우객점
(匯友客店)이라는 네 글자가 또렷이 박혔다. 그 집의 대문은 주홍색이었다. 창문으로 흘러나
오는 불빛에 대문 양옆에 붙인 주련이 똑똑히 보였다.
사면팔방에서 오시는 손님은 맞아 모시고
동서남북으로 가시는 손님은 배웅해 드린다.
오군영이 그 문 앞으로 다가가니 객점의 하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뛰쳐나왔다.
"안으로 드십지요."
그리고는 오군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또 말했다.
"안에는 상등 객방들이 있습니다요. 밤낮으로 더운 물을 끓여 올리고 식사도 대접해 올립니
다. 소주(蘇州)의 명 요리사를 모셔다가 요리를 만들어 올립지요. 좋은 술과 이름난 안주, 없
는 것이 없습니다. 꼭 손님의 마음에 들겁니다."
오군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은 한동안 너스레를 떨고 나서야 손님의 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손님
은 넓은 차양으로 얼굴을 가렸다. 괴상한 손님이다. 분명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일 것이
다. 도적놈인지도 모르겠다.' 하인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러나 이미 말을 한 이상
손님을 내몰 수는 없었다.
하인을 따라 문을 들어선 오군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이자 그녀는
낮은 소리로 하인에게 분부했다.
"상등 방을 한 칸 내주게."
"예, 마침 누 위에 한 칸이 비어 있습니다. 오르시지요."
오군영은 하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상등 칸은 왼쪽에 있었다. 하인은 불을 켜주며 말
했다.
"손님, 저녁을 드시려면 아래층에 내려가셔서……."
오군영이 손을 내저었다.
"술과 안주를 이리로 가져오게."
"누 아래 내려가시면 손님 구미대로 청해서 드실 수 있고 또……."
"이 사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지?"
오군영은 차양 아래로 하인을 노려보았다. 하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인은 황급히 물러갔다.
오군영은 방문을 닫고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맞은편 누 위에 있는 사람이 건너다볼까 봐서
였다. 그리고는 또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안에 숨어 있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
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모자를 벗고 침대에 앉아서 가슴에 품은 물건을 만져보았다. 자금
소갑은 그대로 있었다.
아버지는 왜 나와 오빠를 시켜 이 물건을 갖다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아버지께서 재삼 조
심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오빠도 이번 길이 위험하다고 하는 걸 봐서 이 자금소갑이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며 잃어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도대체 왜 그리 중요한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하인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오군영은 하인더러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은
비녀를 뽑아서 안주마다 찔러보았다. 이상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놓고 술과 안주를 먹
었다. 그리고 나서 하인을 불러 상을 치우게 하면서 당부했다.
"만약에 누가 나같은 사람이 객점에 들었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해야 하네. 알겠지?"
"알았습니다. 누가 와서 검은 옷 검은 모자를 쓴 영준하게 생긴 공자님이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그런 분은 없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아첨하는 말만 골라하는 것이 하인의 습관이었다.
오군영은, 자기를 '영준하게 생긴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말이 그저 듣기 좋게 하는 말임을
알았으나 여하튼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하인에게 은자 다섯 냥을 내주었다. 하인은
기뻐서 굽신 절을 하고 나갔다.
오군영은 다시 문을 닫아걸고 불을 끈 다음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요 몇
년 남장을 하고 아버지 분부를 받아 강호를 다니다 보니 옷입고 잠자는 게 습관이 된 그녀
였다. 더욱이 이번은 다른 때보다 책임이 무거웠다.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
다. 만약 악당들이 야습을 해온다면 옷을 벗고 자다가는 꼭 어려움에 처하고 말리라
다른 방들에서 들려오던 두런두런하던 말소리도 점점 들리지 않고 하인이 대문 닫아거는 소
리가 들렸다. 오군영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를 그렇게 잤는지 모른다. 오군영은 창호지가 뚫리는 것같은 소리에 퍼뜩 깨었다. 그녀
는 살그머니 침대를 내려와 검을 꼬나들고 창문을 노려보았다.
오군영은 창호지에 무엇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뚫린 창호지 구멍으로 무슨 막대기 같
은 것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오군영은 고양이가 기어가듯 발끝 걸음으로 살금살금 창문 옆으로 갔다. 창 밖에서 들이민
것은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였다. 그 끝에서 흰 연기 같은 것이 풍겨나왔다. 누군가 창밖에서
미향(迷香)을 태워 안으로 불어넣는 것이 분명했다.
오군영의 대답은 쌀쌀했다.
"아니, 그 대협님이란 말 그만하게. 사실 나도 보통 사람에 불과해."
"천하에 이름난 양대협님인데 제가 어떻게 보통사람 대접하듯 해요?"
양과는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럼 마음대로 하게. 그런데 여하간 이 양과가 자네에겐 구명지인이 아닌가? 그러면 은인
인 셈인데 은인 앞에선 최소한 자기 진실한 신분을 밝혀야 하잖을까?"
오군영은 잠시 생각했다가 거짓말을 했다.
"성은 악(岳)이고 이름은 한남(恨男)이에요."
"악한남이라. 악한남이라니, 아니 왜 남자를 미워한다는 거지? 어느 남자가 임자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는가? 가만, 임자는 남자가 아닌 모양이지. 핫하하……."
오군영은 화가 나서 얼굴이 다 새파래졌다. 그러나 상대방과 싸울 수는 없었다. 호송하는 마
차는 이미 삼십여 리를 달려왔다. 오군영은 휘장을 열고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밖은 아직도 위험한데. 두렵지 않소?"
오군영은 흥하고 콧방주를 뀌고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그녀는 곧 멀리 뒤쪽에서 따
라오고 있는 그림자 몇을 보았다. 확도네 무리 다섯이었다.
양과는 오군영을 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부를 재촉하여 마차를 빨리 몰게 했다. 그런
데 얼마 안 있어 오군영이 휘장을 들치면서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양과는 웃음이 나왔지
만 내색하지 않고 일부러 놀라는 기색을 지으며 물었다.
"왜 도로 들어오지. 마차 안에 잊고 간 물건이 있나?"
오군영은 얼굴이 붉어져 더듬거렸다.
"아, 아니. 그런게 아니고 마차 안이 그래도……."
"마차 타는 게 걷기보단 편하다 이건가?"
오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과를 곁눈질하다가 얼른 외면했다. 양과에게 아직도 감정이 있
었으나 그것이 전같지는 않았다. 목숨을 구해준 덕도 있거니와 이렇게 거듭 자기 마차에 앉
히는 것도 사실은 고마웠다. 사람의 마음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감동이 되지 않으랴.
점심 무렵이 되자 동진이 표사 하나를 양과에게 보내 점심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총표두에게 여쭙게. 우리 이 공자께서 무척 지친 모양이니 적당한 장소에 마차를 세우고
점심 요기나 든든히 하고 길을 떠남이 어떤가 하고 여쭙게나."
양과의 말에 표사는 굽신하고는 앞으로 말을 달려갔다. 이윽고 일행은 길옆 수림에 마차를
멈추고는 술과 고기를 내놓았다. 수림 속에 술판을 벌려놓고 희희낙락 술을 마셔대기 시작
했다.
동진이 직접 여아홍(女兒紅)이란 술 한 단지에 삶은 쇠고기 몇 덩이와 싱싱한 과일들을 안
고 와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양대협님께선 어디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마차 안에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밖으로 나
오셔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시겠습니까?"
"나는 이 악공자와 마차 안에서 먹겠네. 총표두는 우리 걱정말고 가 드시게."
동진이 물러간 다음 양과는 술 한 사발을 가득부어 오군영에게 내밀었다.
"악공자, 초면이지만 일면이 여구(如久)하단 말이 있잖나? 우리 이 사발의 술을 쭉 비워버리
는 게 어떻겠나?"
오군영은 평소 술을 극히 적게 먹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 행세를 하는 판에 술을 안 마시면
상대방이 웃을 것같아 술사발을 받아 쭉 들이켰다. 독한 술이었다. 오군영은 캑캑거렸다. 양
과는 핫하하 웃으며 오군영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공자는 너무 지쳐 있군."
오군영은 얼른 몸을 옆으로 비키면서 양과의 손을 피했다. 한참만에야 기침이 멎은 오군영
은 입을 악물며 양과 앞에 있는 술사발을 가리켰다.
"난 이미 쭉 마셨는데 대협은 마시지도 않았네요."
양과는 외팔로 술사발을 들어 단번에 쭉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도 얼굴빛 하나 변함이 없었
다. 오군영같이 양볼이 빨갛게 달아오르진 않았다.
"자, 이젠 안주를 들어야지."
양과는 쇠고기와 과일을 가리키고는 자기부터 먹기 시작했다.
오군영은 남자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음식 먹는 습관은 여자들의 습관에서 벗어나질 못했
다. 양과처럼 탐스럽게 먹는 것이 아니라 야금야금 오래 씹어먹었다. 양과는 그것이 재미있
다는 듯 키득 웃었다.
"악공자는 음식 먹는 것도 선비처럼 먹네."
오군영은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자기도 한입 크게 베어물
고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이래도 선비예요?"
양과는 웃으며 또 술 한 사발을 부어 오군영에게 권했다.
"영웅답다니까. 탄복했네. 자, 또 한 사발 마십시다."
그리고는 또 자기부터 한 잔 쭉 들이켰다.
'흥, 너도 나한테 탄복할 때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오군영은 5년 동안 맺혔던 감정이
스윽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또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이라면 양과의 칭찬이 진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독주 한 사발을 쭉 마셨으니 술기가 올라 판단력이 무디어졌다. 그녀는 그저 자기
좋을대로 생각했다.
'이봐요 양과씨, 그렇게 날 얕잡아보더니 이젠 탄복을 한다고? 그때는 내가 먼저 품에 안겨
도 싫다고 밀어내더니, 그래서 이렇게 모욕을 참으며 살아오게 하더니. 봐요. 난 이젠 양과
씨와 마주앉아 술까지 마시게 되었죠? 두고 보세요. 양과씨를 이길 때가 꼭 있을테니까. 그
때는 날 깔보지 못할테죠.'
술을 두 사발이나 마신 오군영은 흠뻑 취했다. 홍조 띤 얼굴이 더욱 요염해 보였다. 그녀는
히히 웃으며 양과를 욕했다.
"양과씨, 양과씨, 이봐, 당신이 뭐 잘났다고. 난, 난 당신이 미워! 죽이고 싶도록 미워! 밉단
말이야."
제12장 양과로 변장한 양효비
양과는 오군영이 술에 취하여 정신이 흐릿해진 것을 보고 또 술 몇 잔을 권했다. 오군영은
빈속에 술을 마신데다가 또 처음으로 독한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완전히 취해 마차 속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술에 취해 쓰러진 오군영의 모습이 유난히 예쁜 것을 보고 양과는 그녀와의 만남과 5년 전
거와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오군영, 임잔 내가 남장을 한 임자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가? 임잔 너무나도 자신의
변장 모습을 과신한 것 같으니 난 임자와 하루 밖에 같이 있지 못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임
자의 용모는 잘 알고 있단 말이야.'
양과는 오늘 아침 오군영이 호송대열 앞으로 달려와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를 때 마차 안에
서 슬그머니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확도가 쫓아오자 오군영은 두려운 나머지 저도 모르
는 사이에 여인의 자태를 드러내고 말았지만 확도는 쌍사자표국의 여러 표사들과 격전을 치
르느라고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과는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던 것
이다. 하지만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양과는 오군영이 남장을 해 어딘가 눈에 익기는
했지만 누구라는 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뒤 마차를 타고 동행하면서 오군영이
자기에게 아주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은인으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악한남'이라고
자칭하는 바람에 갑자기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양과는 그녀가 취하여 쓰러지자 표사들에게 어서 길을 떠나자고 재촉해 호송대열은 다시 출
발했다. 양과는 차체의 진동에 따라 흔들거리는 오군영의 자태를 보고 몹시 흥분되었다. 그
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어루만졌으며 머리를 숙여 앵두같은 입술
을 빨았다.
양과는 손으로 오군영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오군영의 옷섶을 헤치고 몸을 어루
만졌지만 오군영은 술에 취해 양과가 허튼짓을 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양과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누르기가 어려웠으나 길에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다가
주위엔 사람이 많아 거북했으므로 객점을 찾아 투숙하려고 길을 서두르라고 호령했던 것이
다.
마침 하늘이 도와주기라도 한듯 삼사십 리도 채 못가서 작은 시가지가 나타났다. 호송대열
은 비교적 큰 한 객점 앞에 멈추어 섰다.
양과는 수레가 멈추기가 바쁘게 오군영을 품에 안고 객점의 객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
다. 뒤에 따라오던 동진은 영문을 몰라 문밖에서 물었다.
"양대협님 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계속 길을 떠나시지 않으시렵니까?"
"이 곳에서 묵겠소. 내가 부르기 전에는 찾아와서 시끄럽게 굴지 마시오!"
동진이 또 무어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아내 원칠랑이 뒤에서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당신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나요?"
"뭘 말이오?"
그러자 원칠랑이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눈을 흘기면서 대꾸했다.
"얼뜨기 같으니, 양대협이 악한남을 눈에 들어한 건 그 여자가 생각났기 때문인 거예요."
그 말에 동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악공자는 사내인데 그렇다면 양대협님이 같은 사내끼리……."
원칠랑이 키득키득 웃으며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남편을 약올렸다.
"당신은 참말 눈치가 무뎌요. 악가가 남장을 한 여인이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니……."
동진은 그제야 깨닫고 원칠랑을 끌어안으며 귀엣말을 했다.
"오늘 길을 더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우리 부부도 모처럼 재미를 볼 수 있게 되었어."
"나도 당신이 엉뚱한 맘을 먹고 있을 줄 이미 알아챘어요."
그래서 그들 두 사람도 서로 끌어안고 객방으로 들어갔다.
양과는 오군영을 침상에 뉘어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군영, 임잔 애초엔 날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이젠 따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되었어."
양과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허리띠를 풀었다. 양과가 속옷을 벗기려하자 갑자기 창
밖에서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났다.
'여긴 이층이고 창 밖에는 난간도 없는데 어째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까? 내가 잘못들은
것일까?'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잠시 멈췄던 손놀림을 계속하여 또다시 오군영의 속옷을 벗기기 시작
했다. 그런데 창 밖에서 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양과는 손놀림을 멈추고 큰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넌 누구냐?"
하고 창밖에 있는 사람이 되물었다.
"이 어른은 신조협이라고 부르는 양대협이시다. 나를 아는 놈이면 이 양모가 하시는 일에
방해를 말고 물러가도록 해라."
그러자 창문이 드르륵하고 열리더니 한 사람이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 사람은 양과와 꼭
같은 차림새를 하고 허리에 목검을 차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오른팔이 없었다. 뿐만 아니
라 얼굴도 양과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얼떨떨해졌다.
"넌 누구냐?"
"그러는 넌 도대체 누구냐?"
"이 어른은 신조협 양과……."
양과가 놀라서 이렇게 대답하다가 갑자기 히죽거리는 얼굴로 덧붙였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난 신조협 양과의 가까운 친구란 말이오."
외팔이는 상대방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이 양모에게 너같은 친구는 없어."
이 외팔이야말로 진짜 신조협 양과였는데 그는 종남산에서 나와 밤낮으로 길을 다투며 남해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5년 전에 그 백의 여인을 만나고선 그녀가 바로 애처 소룡녀라
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 강호에 다시 나온 양과는 모진 결심을 하고는 남해로 가서 소
룡녀를 찾으려고 작정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소룡녀가 다섯 가지 몽혼약을 먹어 자기를
몰라보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모든 사정을 똑똑히 말해주리라고 작심했던 것
이다. 그와 소룡녀의 부부간의 정은 다른 사람들과 비길 수 없이 각별했던 것이다.
양과는 이곳을 지나다가 앞길에 악당들과 도적들이 많이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 객점에
묵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어 자기 일에 지장 받지 않으려고 모든 것
을 똑똑히 알아본 뒤 다시 길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가 막 객방에 들어서는데 밖에서 누군
가가 양대협님 하고 불렀다. 양과는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밖으로 나와보니 한 사람은 사
내이고 한 사람은 여인이었는데 자웅쌍사자 동진과 원칠랑이었다. 자웅쌍사자 거동을 본 양
과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로 짐작하고 경공을 써서 양과가 묵은 객방의 창 밖에 붙어선
채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양과는 가짜 양과를 쏘아보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임잔 도대체 누구야? 왜 이 양모의 모습으로 분장했느냐 말이야?"
가짜 양과는 줄곧 침대 앞을 막아서 있다가 그제서야 살그머니 휘장을 젖히면서 간사한 웃
음을 흘리더니 오른팔을 벌려 양과에게 예를 올렸다.
"양대협님, 저는 5년 전에 양대협님께서 독주여니 완안방방의 마수에서 구해준 양효비입니
다."
양과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양효비라구? 이 사람의 용모가 어째서 이토록 나를 닮았단 말인가? 이전에 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게다.'
양과는 종남산의 고묘에서 열심히 수련하다보니 이젠 지나간 일을 많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양효비'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자 또 다시 5년 전에 있었던 가흥 남호
가에 있는 육가장의 일이며 거와장의 일 등 여러가지 풍파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양과는 워낙 이 양효비의 사람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다만 그가 고독하게 보내는 것
을 불쌍하게 여겼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고 보니 어쨌든 반가운 생각
이 들었다. 양과가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양효비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5년 동안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다했지요."
"자네 사부님 주백통은 잘 계시나? 그리고 자네 아내 오소저도 잘 있겠지?"
양과는 주백통과 오소저의 소식을 듣지 못해 몹시 궁금했다. 양효비가 여전히 입가에는 조
소섞인 쓴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그날 밤 양대협님께서 말씀도 없이 떠나신 후 사부님께서도 종적을 감춰 어디로 가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요 근년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노완동 주백통이 늘 장난을 좋아하는지라 제멋대로 이 제자를 팽개치고 어디로 떠난 것도
그럴만한 일이라고 양과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주백통이 오군영을 데리고 종남산에 갔다
가 후에 그녀를 거와장으로 돌려보낸 일을 몰랐기 때문에 다시 물었다.
"그래 오소저는 어디에……."
그러자 양효비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속궁리를 했다.
'오군영과 수작을 해놓고는 지금에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난 이
미 오군영과 부부가 되었을텐데 당신이 무슨 낯으로 내게 오군영의 일을 묻는건가?'
오군영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알기만 하면 양과가 그녀를 데리고 갈 것 같아 양효비
는 또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소저는 제가 영웅답지 못하다고 지금껏 내게 시집오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거참, 제가 5
년 동안이나 애걸복걸했지만 기어이 대답하지 않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양과는 머리를 끄덕였다. 5년 전에 백의 여인이 만나주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양과는 큰 정신적 타격을 받았고 거와장에서 오군영과 양효비 사이의 혼사말까지 오가게 되
었던 것인데 이제는 후회해도 때가 늦은 것이다.
'심성이 바르지 않은 양효비같은 자가 어찌 오소저의 짝이 될 수 있으랴. 다행히 이들 두
사람의 혼사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난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구나.'
양과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적이 기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양효비의 뒤를 건너다보며 물었
다.
"침대엔 누가 누워 있나?"
깜짝 놀란 양효비가 쿵쿵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얼버무렸다.
"이 여자는 이 고장 유곽 여잔데 술에 취했죠."
이렇게 말하는 양효비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렇지 않아도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술냄
새가 나는 것을 느꼈던 양과는 그 말을 정말로 여기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창녀와 뒹굴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
그러자 양효비가 머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전 지금껏 장가를 들지 못하다보니 여색이 뭔지도 모르고 남들 부부 간이 서로 재미를 보
는 게 아주 부러웠지요. 그래서, 그래서…… 큰맘 먹고 이런 짓을 하는 겁니다."
양과는 어미가 자식을 한평생 아끼는 마음이 결국 양효비의 이런 품성을 낳게 했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꾸짖었다.
"그런데 자낸 왜 이 양모의 모습을 하고 있나?"
양효비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날 밤 양대협님께서 떠나가시자 저는 육친도 없고 의탁할 곳도 없었지요. 사부님마저도
종적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후에 저는 거와장으로 가서 장인한테 몸을 의탁하려 했으나
거와장 장정들에게 뭇매를 맞고 쫓겨나고 말았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한 방책이 떠오르
지 않아 이렇게 양대협님 흉내를 내게 된겁니다."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양과를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양대협님은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서 '신조협'이란 세 글자만 꺼내도 흑백(黑白) 양도(兩道)
에서는 한 수 접어주지 않습니까? 제가 대협님의 모습으로 분한 것은 그저 밥술이나 얻어먹
으려는 것이지 다른 망녕된 짓거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양과는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으나 나쁜짓을 한 증거는 없기에 한바탕 훈시나 할
생각이었다.
"이후로는 다시 내 이름을 차용해서는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사정을 두지 않을테다!"
양효비는 연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를 말씀입니까, 두번 다시 이런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차후 만에 하나 또다시 양대
협님의 대명을 어지럽힌다면 천하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과가 멸시를 하며 우습게 여기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주백통 형님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게. 그때 그 분이 자네를 데려다가 무공을 전수해
주게 할 터이네. 그 후로는 자넨 자네 힘으로 살아나가도록 하게."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양효비에게 은자 스무 냥을 던져주며 토를 달았다.
"이걸로 점포를 꾸리고 장사나 하게."
양효비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표했다.
"양대협님의 커다란 은혜에 감시드립니다. 제가 금생에는 이 은혜를 갚지 못하겠지만 내세
에는 꼭 보답하겠습니다."
양과는 탄식하면서 지난일을 생각했다.
'네놈이 한맘으로 옳은 것을 배우고 위인이 충후했더라면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줄 일도 없었
을 거다.'
양과는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침대를 가리키면서 호령했다.
"얼른 저 유곽의 창녀를 쫓아버리게. 금후 이런 여인들과 다시 상종을 해선 안되네."
그리고나서 양과는 또 은자 열 냥을 꺼내 양효비에게 주면서 말했다.
"억지로 웃음을 팔고 살아가는 저 여인의 인생살이도 쉽지는 않을걸세. 이 은자는 저 여인
에게 주게."
양효비는 은자를 받아들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양대협님의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꼭 나쁜 버릇을 고치겠습니다."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대답했다.
"어서 저 여인을 내보내게."
그러자 양효비는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 여인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졌고 술에 완전히 취해 양대협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까 걱
정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양대협님께선 우선 객방으로 돌아가셔서 쉬도록 하십시오.
그럼 제가 저 여잘 유곽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다시 양대협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더는 날 찾아오지 말게. 하지만 난 자네의 일거일동을 은밀히 감시할테니 또 다시 허튼짓
을 했다가는 내 용서하지 않을 걸세."
양과가 을러대는 소리가 어찌나 무시무시했던지 양효비는 벌벌 떨었다. 양과는 그가 겁을
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옷소매를 털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양효비는 문틈으로 양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는 침대 곁으로 돌아와 휘장을 들치고 아직도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는 오군영을 내려다보
았다. 새까맣게 윤기가 나는 머리칼이 풀어헤쳐지고 봉긋한 젖무덤이 드러난 그녀를 보고
양효비는 또다시 정욕이 불붙듯 일었지만 양과가 다시 뛰어들어올까봐 겁이 나서 급히 오군
영의 옷매무새를 제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양과로 분장하고 나서 가만히 동진과 원칠랑을 불러다가 원칠랑에게 오군영을
마차로 데려가게 했으며 동진에게는 호송대열을 이끌고 급히 시가지를 떠나라고 분부했다.
모든 조치가 끝나자 양효비는 더이상 외팔이 흉내를 내지 않고 양과가 있는 객방으로 와서
가볍게 문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게."
양효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양과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양효비가 읍을 하고 나서 말했다.
"양대협님께 아룁니다. 그 창녀는 이미 유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또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
요?"
양과는 내심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넨 이 곳에서 점포를 한칸 사놓고 장사하면서 기다리게. 이후 내가 주백통 형
님을 찾게 되면 자네를 찾기 쉬울 것 아닌가?"
"예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다른 일이 없으니 자네를 따라 함께 갈 터이네."
양효비는 속으로 '이크 이거 야단났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양과
가 눈치라도 채게 될까봐 거짓웃음을 얼굴에 머금고는 양과를 따라 객점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앞에서 마주오는 바람에 양효비는 그만 깜짝놀라 얼른 머리를 숙
이고 양과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마주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웅사 동진이었는데 그는 걱정
이 되었는지 일부러 객점 밖에서 '양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진은 양과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다가오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대협님께서는 이렇게 떠나시렵니까?"
동진은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짜 신조협 양과인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양과는 객점에서 동진이 양효비의 방문 밖에 서 있던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가 양효비에
게 속은 것을 폭로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양효비가 자기의 등 뒤에 숨어 안색이 하
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선 사연을 대충 짐작하고는 그대로 지나갔다.
동진이 양과 곁으로 다가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양대협님, 방향이 틀리는데요."
양과는 동진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일이 있으니 임잔 날 따라오지 말게."
동진은 멍한 기색으로 머리를 굴렸다.
'양대협님의 말투와 기색이 왜 달라졌을까?'
동진은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수 없어 더는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양과는 양효비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길 양옆에는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었는데 지나가는 길손들이 많아 꽤나 흥청거려 보였다. 양과는 길 양옆의 점포들을 살피는
데 정신이 팔려 앞쪽에서 세 사람이 자기를 쏘아보며 마주 걸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
다.
복판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한가로운 선비의 옷차림에다 허리엔 퉁소를 차고 있었는데 그 퉁
소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구리로 만든 것이었다. 왼쪽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멜대를
멘 뚱뚱한 장사꾼이었는데 멜대의 한 끝에는 가마를 얹은 화로가 걸려있었고 가마안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멜대의 다른 한 끝에는 상자가 걸려 있었다. 그 상자에는 반죽해놓
은 밀가루와 이미 빚어놓은 물만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기에 그는 물만두를 파는
장사꾼 같았다. 오른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도사였는데 손엔 초혼번(招魂幡)을 들고 있었는
데 깃대는 쇠로 만든 것이었고 그 끝에 일부러 백포를 드리웠으며 그 백포에는 빨간 글자로
몇 자 써 놓았다.
이 세 사람은 차림새가 각기 유별난데다 아무렇지도 않게 세사람이 일렬로 함께 걷고 있었
는데 그 모습이 아주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물만두를 파는 사람은 사람들의 배를 부르게 해
줄 수 있고 퉁소 부는 선비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동경을 불러 일으켜줄 수 있었으며
도사는 지나간 과거사를 회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이 열발짝 정도 가까이 다가왔을 때 드디어 양과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양과는
초혼번의 그 백포에 '양과야, 넌 죽일 놈이다'라는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도사가 양과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
"양과야, 네놈은 죽일 놈이야."
그러자 영문을 알 수 없는 양과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를 닦는 분이 어찌 그런 허튼 말씀을 하시우? 이 양모가 당신에게 미움을 산 일은 없는
데 말이오."
"맞아. 임잔 빈도들에게 미움을 산 일이 없고 죄지은 일도 없어."
도사 복장을 한 자가 말하면서 선비와 장사꾼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계속 이었다.
"하지만 넌 그래도 죽일 놈이야."
여전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양과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하여 세 분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세 분은 어디서 온 신성(神聖)들이십니까?"
선비가 구리퉁소를 꺼내 한 곡조 불어댔다. 퉁소 소리는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그리고나
서 선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는 퉁소 부는 선비야. 양과야, 넌 신조협으로 자칭하면서도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지."
장사꾼이 멜대를 내려놓더니 밀가루 반죽을 떼어내 재빨리 십여 개의 물만두 껍질을 만들더
니 눈깜짝할 사이에 물만두를 빚어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교장(水餃張 : 물만두 만드는 장씨)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나의 무공이 너보다 못할
것이지만 난 여전히 정의를 위해서 네놈의 고기로 만두속을 만들테다. 안되겠어! 안되겠어.
네놈은 나쁜 짓을 많이 했기에 네놈의 고기에선 아마도 나쁜 냄새가 날거야. 그래서 만두를
빚어도 사려는 사람들이 없을 거야. 난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하고 싶지 않아."
양과는 그들을 자세히 훑어보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두 손을 마주잡고 읍을 했다.
"당신들은 시정삼걸(市井三杰)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퉁소 부는 선비가 비아냥거렸다.
"지나친 말이야. 우릴 시정의 세 무뢰한이라 부르는 사람은 있어. 무뢰한이면 무뢰한인 거지
어찌 신조협과 함께 놓고 비길 수 있겠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초혼도사가 몇 마디 더 거들었다.
"무뢰한이 좋은 물건짝은 아니지만 남의 처자를 간음하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지는 않아."
장사꾼도 팔소매를 더더욱 걷어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짓거리는 그 무슨 대협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한 것이지 우리 세 무뢰한은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양과는 그 말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져서 다그쳐 물었다.
"그럼 세 분은 이 양모가 그따위 짓거리를 했다는 말씀이군요? 이 양모가 그래 그따위 추잡
한 짓거리를 하는 줄 아십니까?"
수교장이 만두 껍질을 만들면서 히히덕거렸다.
"이백리 길을 가는 동안 양가집 여인 다섯을 간음하고 열셋을 죽이고 스물일곱을 상하게 하
고 남의 재물 두 상자를 약탈한 게 그래 네가 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 소리를 들은 양과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양모는 종래로 도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이 양모의 소행이 아닙니다."
퉁소 부는 선비가 쌍심지를 돋우고는 단호히 말했다.
"일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악한이 외팔이 사내고 허리에 목검을 찼다고 말했어. 천하를
다 돌아다녀도 그런 차림새를 한 자가 네놈을 빼놓고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이때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저마다 얼굴을 마주보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정삼걸은 때를 만났다는듯 한바탕 양과
의 죄상을 떠들어댔고 그래서 모두들 그 말을 듣고는 양과란 놈을 죽여버려야 한다며 술렁
거렸다.
양과는 문득 짚이는 곳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마땅히 있어야 할 양효비가 없었다.
양효비는 자기가 시정삼걸과 시비를 가리는 사이에 이미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양
과는 생각했다.
'분명 양효비란 놈이 내 모습으로 변장해서 악한 짓을 한 모양이로구나. 흥, 그 놈이 이런
나쁜 놈이 된 줄을 생각지도 못했구나. 기어이 이 놈을 붙잡아서 다그쳐야겠군. 그러자면 이
사람들 속을 빠져나가야겠는데.'
초혼도사가 양과의 앞길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도망칠 셈이냐?"
양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양모는 도망치려는 게 아니라 도망친 진짜 범인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놈을 잡
아오면 당신들은 진상을 알게 될 것입니다."
초혼도사가 초혼번을 흔들어대며 두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입에 발린 말로 우리를 속이려구."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세 분이 말씀한 그 일은 절대 이 양모가 한 짓이 아닙니다. 딴놈이 이 양모의 이름을 대고
한 짓이니 세 분께서는……."
퉁소 부는 선비가 냉소를 지으면서 빈정거렸다.
"그따위 잔재주로 누굴 속이려고 그러느냐. 그래 네놈은 우릴 세살 먹은 어린애로 아느냐?
양과야, 네놈이 수치를 아는 놈이라면 우리가 손을 쓰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양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들은 정녕 이 양모를 믿지 못하겠습니까?"
시정삼걸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양과는 시정삼걸이 협의심을 갖고 있을 줄로 믿었는데 그들
이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보자 분한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곽백모 황용이 도처에서 나를 오해했고 종남산의 전진교에 이르러서는 또 그 소
코도사의 업신여김을 받았으며 소룡녀와 부부를 맺었을 때는 천하 무림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래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오늘은 시정삼걸이 또 기어이
나를 나쁜 놈으로 모는데 이 양과의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도 고달프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난 양과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그 모든 짓을 꼭 이 양모가 한 짓이라고 생각합니까?"
초혼도사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양과, 넌 열 몇 살 때 벌써 전진교를 배반했고 그 뒤에는 스승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이
모든 짓거리가 그래 대역무도한 짓이 아니란 말이냐? 너로 말하면 간음하고 약탈하는 짓거
리를 밥먹듯 하는 놈이니 네가 만일 사내 대장부라면 자인하란 말야."
수교장도 덧붙여 말했다.
"양과 말고 누가 스스로 한 팔을 자르고 목검을 쓴다더냐?"
양과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당신들이 천하의 모든 나쁜 짓들을 이 양모의 머리에 들씌운다 하더라도 난 그걸 감당해낼
테요. 흥, 그래 당신들이 감히 날 어쩔 셈이오?"
초혼도사가 그들 일행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양가란 놈이 망녕되게 구니 우리가 손을 쓰세."
그는 이렇게 말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둘러서서 구경하던 뭇사람들도 분분히 물러서며 손
가락질을 해댔다.
수교장이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번개같이 놀리자 만두 껍질이 쏟아져나와 곧장 양과 쪽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만두 껍질이 눈발처럼 날아가자 구경하던 뭇사람들은 잘한다
고 소리를 질러댔다.
양과는 제일 먼저 날아온 열 개의 물만두 껍질을 오른쪽 옷소매로 털어버리기는 했으나 극
심한 진동을 느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만두 껍질이 마치 철편으로 된 암기에 못지 않았는
데 그제야 수교장의 내공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양과는 시정삼걸들이 각기 뛰어
난 절기들을 갖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왔지만 그 수준이 이 정도에 달할 줄은 정말 뜻
밖이었다.
만두 껍질이 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오는 바람에 양과는 이미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도
망치려고 해도 그의 지금의 경공으로는 만두 껍질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더 빨리 피할 수는
없었다. 양과는 큰소리를 지르면서 내기를 오른쪽 옷소매에 운행시켰다. 그러자 삽시간에 옷
소매가 잔뜩 부풀어 올랐고 그런뒤 몸을 돌리면서 옷소매를 차륜처럼 빙빙 돌렸다. 그러자
양과의 옷소매에 맞아 만두 껍질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마치 동전이 맞아 튕겨나가는 것
처럼 뚱땅뚱땅하는 금속소리가 났다.
밀가루 반죽을 다 쓰고나자 수교장은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속으로 은근히 양과의 공력
을 찬탄했다. 양과도 동작을 멈추고나서 고개를 쳐들며 소리질렀다.
"당신들에게 또 무슨 재주가 있다면 이 양모가 또 가르침을 받으려 하오."
그러자 초혼도사가 소리쳤다.
"이 음란한 도적놈아, 너무 잘난체 하지 말아라."
그리고 초혼도사가 초혼번으로 땅을 휩쓸었다. 양과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초혼번이 튕겨나 초혼도사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깜짝 놀란 초혼도사가 소리질렀다.
"훌륭한 내공이로군."
그러면서 초혼도사는 초혼번을 또다시 휘둘렀다. 양과의 옷소매가 팽팽히 불어나더니 초혼
번과 옷소매가 맞부딪쳤다. 그런데 초혼번에 달린 백포가 펄럭거리면서 양과의 면상으로 날
아들었다. 양과는 감히 그것을 손으로 받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초혼도
사는 초혼번의 깃대로 창처럼 양과를 내찔렀다.
양과는 냉소를 머금으면서 뒤로 슬쩍 물러섰다. 초혼번 끝이 양과의 가슴에서 반 자 되는
곳까지 날아오다 말았다. 도사의 힘도 빠지고 깃대도 한껏 내뻗었기에 더 이상은 내밀기 어
려웠다.
초혼도사가 손으로 초혼번의 깃대를 누르자 초혼번 끝에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나오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검은 연기 속에서 세가닥의 불
꽃이 곧장 양과를 향해 날아왔다.
양과는 초혼도사의 손이 움직일 때 벌써 기미를 채고 조심했기에 검은 연기가 뿜어나오기
시작하자 얼른 숨을 죽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 독기를 품은 연기 속에 암기까지
섞여서 나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암기에 독이 있을까봐 겁이 나서 감히 손으
로 받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한다거나 진기를 운행시켜 옷소매로 털어버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양과는 급한 나머지 부득불 목검을 뽑아 휘둘렀다. 날카로운 물체가 목검에 부딪쳐 튕겨나
는 소리가 세 번 남과 동시에 세 개의 암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표창이었
다. 온통 새까만 것으로 봐서 극독을 발라놓은 것임이 분명했다.
양과는 식은땀을 흘리기는 했으나 다행히 무사했다.
"이까짓 재간으로 이 양모를 죽이겠다니…… 너무 우습군!"
이렇게 말하자 수교장이 멜대를 쳐들고 큰소리를 질렀다.
"초혼도사, 우리 힘을 합쳐 저 음란한 도적을 쳐죽입시다."
초혼도사와 수교장은 각기 초혼번과 멜대를 들고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수교장은 초혼도사
보다 더 강한 내공을 닦았기에 세찬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멜대를 휘둘러댔다.
'어려서부터 음란한 도적이란 누명을 뒤집어 썼는데 지금껏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은 생각지 못했구나.'
속으로 이렇게 한탄하고 나서 양과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난 네놈들에게 이 양모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똑똑히 보여줄테다."
그리고 양과는 왼쪽 옷소매로 초혼번을 쳐내는 동시에 오른손에 든 목검으로 수교장의 멜대
를 막았는데 수교장이 놀라서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과연 훌륭한 검술이군."
이윽고 멜대가 휙 돌더니 양과의 아랫도리 쪽을 휩쓸었고 초혼도사의 초혼번도 양과의 등허
리를 찔러왔다.
양과도 뛰어난 검술을 보여주면서 진기를 목검에 운행시켰다. 비록 중독되기 전보다는 못했
지만 그래도 수교장과 초혼도사의 기를 누르기에는 넉넉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퉁소 부는 선비가 소리쳤다.
"내력을 다 해 싸우란 말이오. 알아들었소?"
그러자 수교장과 초혼도사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소."
그리고 나서 초혼도사가 또다시 말했다.
"선비님, 우린 당신만 믿겠소. 그려."
두 사람이 내력을 쓰기 시작하자 초식이 전보다 좀 느리기는 했으나 멜대와 초혼번이 한번
씩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양과도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진기를 목검과 옷소매에 더 많이 불어넣었다. 비록 세 가지
병장기가 서로 맞부딪치는 일도 없었지만 주위에 삼삼오오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
두 더욱 큰 압력을 느껴 분분히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과는 그들과 생사가 걸린
결투에서 만일 자기의 공력이 8성 쯤만이라도 회복되기만 하면 단칼에 저 두 개의 병장기를
동강내 버리고 저 두 놈의 목숨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과는 비록 우세
를 점하기는 했지만 대번에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십여 합을 싸우자 세 사람의 머리에서는 모두 열기로 인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퉁소 부는 선비가 쓴웃음을 짓더니 구리퉁소를 슬그머니 입술에 가져다대고 불기 시작했다.
그 퉁소 소리는 마치도 벽력치는 소리 같았는데 이 소리를 듣고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시정삼걸은 협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라 퉁소 부는 선비는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 생
각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퉁소 소리로 구경꾼들을 쫓아버린 다음 수교장과 초혼도사와 함
께 양과를 대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구경꾼들이 멀리 흩어져 달아난 뒤에야 퉁소 부는 선비는 다시 퉁소를 들고 진기를 잔뜩 모
아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도 대해의 파도가 노호하고 산이 무너지는 듯 요
란했다.
그 소리를 듣자 양과는 마치 오장이 마구 뒤틀리는 듯해서 얼른 공력을 운행시켜 대적했다.
악전을 치르며 슬그머니 퉁소 부는 선비의 동정을 엿보았다. 그런데 수교장과 초혼도사는
마치 그 퉁소 소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듯 점점 세차게 공격했다.
갑자기 퉁소의 소리가 흐느끼는 듯 애달픈 곡조로 바뀌어 마치 무수한 귀신들이 곡성을 지
르는 듯 사람의 애간장을 들끓게 하는 것이었다.
양과의 마음도 그 곡조에 말려 들어갔는지 자기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회상하게 되었으며 아
내와 이별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처지를 생각하고선 당장 검을 내 버리고 한바탕 통곡
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수교장은 양과의 검 휘두르는 기세가 퍽 약해진 것을 간파하고 더
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양과는 휘두르는 멜대의 힘이 더 커진 것을 보고서야 갑자기 제정신
을 차리게 되었다.
퉁소 소리가 높았다가는 낮아지고 강해졌다가는 약해지고 하면서 소리가 점점 실오라기처럼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 여린 곡조의 퉁소 소리는 비수가 돼 마치 사람의 골수를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이때 양과는 공력이 5성 밖에 회복되지 못했고 체내엔 여전히 채설주의 독이
잠복하고 있는데다가 수교장, 초혼도사 두 고수들의 협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실로
퉁소 부는 선비의 그 퉁소 소리를 견뎌내기 어려워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고 초식이 무력해
졌다.
선비는 양과가 퉁소 소리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한번에 끝장낼 듯이 진력을 끌어모아 대
번에 양과를 죽여 백성을 위해 악한을 제거해 버리려고 했다.
양과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며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그는 배속에서 기가 용솟음쳐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
합' 소리를 지르며 목검과 옷소매를 곧장 내찔렀다.
수교장과 초혼도사는 양과가 정신이 흐릿해지면서도 이런 무서운 초식을 쓰리라는 것을 미
처 생각지 못했던 탓에 급히 뒤로 여러발짝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과는 어린시절 서독 구양봉을 따라다니면서 '개구리공'을 닦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구양봉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탓에 전수해 준 '개구리공'도 원 모습과는 몹시 달랐다.
하지만 양과는 그것을 배운 뒤 매번 위험에 처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활용함으로써 두 번
이나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목숨이 위태롭자 '개구리공'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된 것이었다.
양과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수교장과 초혼도사와 함께 어울려 세찬 기세로 싸우기 시작했
다. 그런데 '개구리공'은 사람의 내력을 몹시 소모하는 초식이므로 양과는 더이상 날카로운
초식을 쓸 수 없었다.
양과가 막 시정삼걸에게 당하려는 찰나 갑자기 먼 곳에서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그 퉁소 소리는 선비가 부는 퉁소 소리처럼 살기 등등하지 않았고 오히려 봄날의 햇빛처럼
따사롭고 감로수처럼 감칠 맛이 났다. 선비의 퉁소 소리가 순식간에 멀리서 들려오는 퉁소
소리에 잦아들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선비는 깜짝 놀라면서 급히 퉁소 불기를 멈췄다. 만일 계속 맞서서 퉁소를 불다가는 저쪽의
퉁소 소리에 끌려들어가 스스로 불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퉁
소 불기를 멈춘 선비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 현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퉁소 소리는 몇 리 밖에서 났었는데 순식간에 가까워져 벌써 시가지 언저리에서 나는 것
이었다. 이윽고 청포를 입은 노인이 표연히 나타나더니 손에 옥소(玉簫)를 들고 서 있었다.
보폭은 크지 않으나 예사 사람이 질주하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몸매가 깡마른
체형이었으나 단단한 모습이 엿보였고 수염이 새하얗고 눈에는 정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는
퉁소 부는 선비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임자의 퉁소 소리엔 살기가 가득해서 불길하네. 아주 불길하단 말일세."
그 노인을 알아본 양과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읍을 했다.
"황도주님이셨군요. 후배 양과가 인사를 드립니다."
그 노인은 수십년 간 천하에 이름을 떨친 동사 황약사였다. 20여년 전에 곽정과 황용이 결
혼해서 동해의 도화도에 거주하자 워낙 조용한 것을 즐기고 사위의 무뚝뚝한 성미에 불만을
느낀 황약사는 혼자 도화도를 떠나 강호를 넘나들며 선도(仙島)를 방문하고 명산에 오르면
서 방랑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과가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곳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만일 선배님께서 이렇게 오시지 않
았더라면 이 후배는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약사는 못마땅한 듯 질타하는 것이었다.
"날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나? 양과, 이 꼬마 친구. 임잔 실로 기억력이
나쁘구만."
황약사는 워낙 예절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동사(東邪)'라
는 별호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제가 너무 기쁜 탓에 깜박했습니다. 황도주님께서는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황약사는 그제서야 잠깐 미소를 지어보였다가 이내 정색했다. 옥소를 집어넣고 난 황약사가
퉁소 부는 선비 등 세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저 세 사람은 시정삼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양과가 대답하자 수교장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와 손을 모아쥐고 인사했다.
"귀하께서 바로 대명을 떨친 도화도의 황도주이시군요. 소인이 다행히 환도주님을 우러러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정삼걸 중 나머지 두 사람도 함께 앞으로 걸어나와 예를 올렸다.
황약사는 못 본 척하면서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황약사는 시정삼걸의 이름을 들
어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협의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워낙 성미가 괴팍한
탓에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못 본 척하고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개방의 명성이 강호에 자자할 때 황약사는 노방주(老幇主) 구지신개 홍칠공에게 내심 탄복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를 만나서는 덤덤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러니 시정삼걸 따위의 인
물들은 황약사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무례하게 구는 황약사를 바라보면서 퉁소 부는 선비는 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했다.
'당신이 비록 선배이고 고인이기는 하지만 예절이야 차려야 하지 않겠소?'
선비는 불쾌했다. 게다가 아까 자기의 퉁소 소리가 황약사한테 눌렸던 까닭도 자기가 일시
소홀하여 낭패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도주님께서는 어떻게 양과란 이 음란한 도적을 알고 계십니까?"
황약사는 양과와 마음이 맞아 벗으로 사귀고 있던 터라 퉁소 부는 선비의 말을 곧이 들을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설사 양과가 풍류스러운 짓거리를 좀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황약
사는 양과가 세속규범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칭찬을 할 판이었다.
황약사는 퉁소 부는 선비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양과의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여러 해 동안이나 서로 만나 보지 못했는데 우리 어디 가서 한바탕 얘기나 나누세. 자, 술
집으로 가 술잔이나 나누자구."
황약사가 양과의 손을 잡아끌고 자리를 떠나려 하자 퉁소 부는 선비는 창피를 당한 끝에 화
가 나서 소리쳤다.
"그 음란한 도적을 데리고 가지 마시오."
그 말에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협의를 지키는 당신의 마음을 갸륵하게 생각해서 난 더이상 따지지 않겠소. 그러니 작작
시끄럽게 굴란 말이오."
퉁소 부는 선비가 대노하여 구리퉁소로 양과의 잔등을 내질렀다. 황약사가 두루마기 옷소매
를 뒤로 날리자 퉁소 부는 선비는 내력을 이기지 못채 자기도 모르게 십여 발짝이나 뒤로
밀려나가고 말았다. 퉁소 부는 선비가 겨우 몸을 가누고 나서 말했다.
"황도주님, 당신이 이 음란한 도적을 비호하니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무례하게 군다고 원망
하지 마십시오."
잇따라 그는 황약사와 양과의 앞길을 막아섰다. 수교장과 초혼도사도 두 사람의 뒤를 지켜
서서 이 두 사람이 출수하기를 기다렸다.
황약사가 퉁소 부는 선비를 쏘아보는데 그 눈길에는 마치 불꽃이 이는 듯싶었다.
"이 늙은이가 아무개를 데리고 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퉁소 부는 선비는 아주 협의심도 강하고 굴욕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자기가 황약사의 적
수가 되지 못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떳떳이 맞서는 것이었다.
"황도주님께서는 비록 강호의 대선배이시지만 갖은 악행을 다 저지른 이 음란한 도적을 비
호하신다면 저 또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황약사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종래로 이처럼 나에게 말대꾸를 하는 놈은 없었어."
퉁소 부는 선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딴 사람은 감히 그러지 못해도 저는 그럴 수 있습니다. 선배의 명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
더라도 도리 앞에서야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황약사는 그 말을 듣고서 오히려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퉁소 부는 선비의 자태를
뜯어보면서 이 젊은이의 성미가 자기 사위 곽정을 얼마간 닮았다고 생각했다.
황약사는 지난날 곽정의 올곧은 성격에 극히 반감을 느껴 자기딸 황용과 곽정의 인연을 여
러번이나 끊어놓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뒤 나이가 들고 불같은 성미도 많이 누그러진 뒤
에는 작정을 좋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황약사는 퉁소 부는 선비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
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됐네. 이젠 가도록 하게. 이 늙은 것이 임자와 티격태격할 생각은 전혀 없네."
이런 말이 황약사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황약사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다행으로 느끼고 벌써 종적을 감추었을 것
이다.
"황도주님이 임자의 무례한 소리를 따지려 하지 않을 때 어서 썩 물러가시오."
양과는 호의를 품고 협의를 지키는 이 시정삼걸을 가상히 여겼다. 그는 이 세 사람이 괜히
황약사를 노엽게 했다가 개죽음을 당할까봐 이렇게 권고하고 타이른 것이었다.
퉁소 부는 선비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양과가 호랑이의 위풍을 빌려 처신하는
여우처럼 가증스러웠다. 그래서 퉁소부는 선비는 화를 벌컥 내면서 삿대질을 해가며 황약사
와 양과 두 사람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네놈들이 한통속이 되어 놀아대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 음란한 도적놈의 소행이 저 황약사
가 시킨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비록 무공은 변변치 않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네놈들을 없애버리겠다."
수교장과 초혼도사는 그 말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곧이어 초혼도사가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
다.
"통쾌하게 말했소. 하늘이 굽어보거늘, 우린 기어이 저 음란한 도적을 죽여버려야 하오."
수교장도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토를 달았다.
"목숨을 버리게 되더라도 만고에 이름을 길이 남기자."
황약사는 남의 모함을 가장 싫어했기에 대노하여 퉁소 부는 선비를 거머쥐려고 했다. 퉁소
부는 선비는 황약사가 무서운 인물인 줄 알고 있었기에 구리 퉁소를 마구 휘둘러댔다. 황약
사가 퉁소부는 선비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수교장과 초혼도사도 각자 멜대와 초혼번
을 휘두르며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양과는 시정삼걸이 황약사의 적수가 못 되는 줄을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한쪽으로 비켜섰
다. 그는 황약사가 대노하여 시정삼걸을 때려죽일까봐 몹시 걱정됐다.
황약사는 뒤쪽에 세찬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앞에 있는 선비에게 달려들면서 멜대
와 초혼번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또 퉁소 부는 선비의 공격권내로 들어갔다. 하지만
퉁소 부는 선비가 아무리 구리통소로 사정없이 찔러대도 황약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
려들어 대번에 손으로 선비의 뒷덜미에 있는 대추혈을 찌르자 선비는 갑자기 몸을 꼼짝 못
하게 되었다.
황약사는 퉁소 부는 선비를 손에 틀어쥐자마자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 뒤쪽으로 던져 버렸
다. 퉁소 부는 선비는 곧장 수교장과 초혼도사 쪽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각자의 병장기로 황
약사를 내찌르려 하다가 갑자기 자기편 사람이 날아오는 바람에 급히 멜대와 초혼번을 양옆
으로 틀면서 퉁소 부는 선비를 받아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천천히 날아오던 선비가 어떻게
된 일인지 가까이 오면서 점점 가속도를 내 수교장과 초혼도사 두 사람에게 부딪쳐 시정삼
걸은 모두 한꺼번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양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들을 애처롭게 여겼다.
'황도주님의 불같은 성미가 많이 누그러졌는가 보구나. 그러지 않았다면 저 시정삼걸이 어
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난 양과가 급히 입을 열었다.
"황도주님, 우린 술마시러 갑시다."
그 말에 황약사도 머리를 끄덕였다.
시정삼걸은 허무하게 나뒹굴었다가 급히 일어나 또 다시 병장기를 집어들었다. 그들은 악다
구니를 쓰면서 황약사와 양과에게 달려들었다.
황약사와 양과 두 사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는데 황약사가 옷소매를 뒤로 내치자 그 옷
소매가 시정삼걸의 병장기 세 개를 휘감는 것이었다. 황약사가 다시 옷소매를 휙 잡아당기
자 그 세개의 병장기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이십여 장 높이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시정삼
걸은 그것을 보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시정삼걸이 병장기를 손에 집어들었을 때는 이미 황약사와 양과 두 사람은 멀리 떠나간 후
였다. 초혼도사가 두 눈을 껌벅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황약사는 과연 무서운 사람이야. 저 사람이 그 음란한 도적을 비호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가 없어."
나머지 두 사람도 꼭 같은 생각이어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한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교장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그 음란한 도적을 죽여 버리지 못하고서야 우리 시정삼걸이 무슨 낯으로 해를 입은 사람들
을 다시 대한단 말이오?"
퉁소 부는 선비는 아까 황약사의 그 귀신 같은 무공과 신법을 생각하면서 탄식했다.
"금생에 황약사의 뒷덜미조차 만져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낯을 들고 산단 말이오? 죽
는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이지."
그리고는 구리퉁소로 자기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죽어 버리자. 이 강호에 더는 시정삼걸이 있을 수 없다."
초혼도사도 이렇게 말하더니 초혼번으로 자기 가슴을 찌르려 했다. 수교장은 자기의 동료들
이 모두 죽으려 드는 것을 보고 역시 손칼을 꺼내어 목을 찔러 자결하려 했다.
갑자기 길 옆에 있는 점포 안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더니 시정삼걸들에게 다가와서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구리퉁소, 초혼번과 작은 손칼들을 번개같이 빼앗으며 소리쳤다.
"대장부들이 왜 이처럼 생각이 짧은 게요? 정말 수치스럽구만!"
시정삼걸들이 바라보니 깨끗하게 생긴 젊은이였는데 양과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
다. 시정삼걸들은 급히 물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리들을 구하려는 거요?"
그 사람은 다름아닌 양효비였다. 그는 양과와 함께 시가지로 나왔다가 기세흉흉하게 마주
걸어오는 시정삼걸들을 보자 일이 뒤틀린 것을 알아차렸다. 양효비는 시정삼걸들이 자기를
알아볼까봐 겁이 나서 양과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길 옆에 있는 점포 안으로 슬쩍 피
해 몰래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과가 황약사를 따라 떠나간 후 시정삼걸들이 자결하려 하는 것을 보자 양효비는
점포에서 나와 그들의 병장기들을 빼앗은 것이다. 양효비는 다시 병장기를 시정삼걸들에게
돌려주고나서 두 손을 모아쥐고 읍을 했다.
"저는 양효비라고 부르는데 양과에게 아내를 빼앗긴 한을 품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수교장이 아주 기뻐하며 대꾸했다.
"이거 우릴 알아주는 벗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려."
양효비가 머리를 꾸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 원래 양과와 가까운 벗이었고 서로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지요. 그런데 5년 전에 짐승
같은 그 놈이 저의 미혼처를 간음했답니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내 대장부라
고 하겠습니까?"
퉁소 부는 선비가 약간 의심이 생겨 물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런 원수놈을 두고 왜 나와 싸우지 않았었소?"
양효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 다른 생각이 있었지요. 제가 옆에서 보니까 세 분이면 넉넉히 그 놈을 죽여 버릴 수 있
겠더군요. 그런데 중도에 그 황약사란 놈이 뛰쳐나올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거참, 저는 이
제 끝장이 났구나 하고 속으로 한탄했지요. 황약사란 놈이 양과를 비호하는 한 누구도 그
양과란 놈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만일 뛰어나왔더라면 양과란 놈이 수치
스러운 김에 황약사를 꼬드겨서 저를 죽여 버릴 게 아닙니까? 제가 죽는 건 아깝지 않지만
그렇게만 되면 양과란 놈이 계속 이 세상에서 주접거리며 숱한 양갓집 여인들을 해치게 되
지요. 그래서 저는 일단 분한 마음을 참고 우선 목숨을 보존했다가 조만간에 양과란 놈을
죽여 버린 다음에 웃으면서 구천에 갈 생각을 했던 거지요."
그 말을 듣고보니 아주 그럴 법했다. 게다가 양효비의 표정도 아주 엄숙해서 믿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퉁소 부는 선비는 감동한 나머지 두 손을 모아쥐고 말했다.
"당신의 뜻은 아주 장하오. 하늘도 감동할 것이오. 만일 양과란 이 음란한 도적을 죽여버릴
수 없다면 그건 정말로 하늘의 눈이 멀었다고나 할 일이오."
그때 갑자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한 점포의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내렸다. 눈썹이며 수염이며 머리칼이 새하얗게 센 사람인데 온몸에 어린애의 장난감을 주렁
주렁 달아매고 있었다. 다름아닌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양효비의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하딸게 질렸다.
'제기랄, 사부님은 양과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아마 내가 양과를 음해하는 소리를 분
명 들었을 거야. 사부님이 날 잡아서 양과에게 끌고 가면 내 목숨이 온전히 붙어있을 리 없
을거야.'
그래서 양효비는 바삐 도망가려고 했다.
주백통이 대번에 양효비의 옷깃을 거머잡고 깔깔 웃어댔다.
"이봐 제자,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또 도망가려고 그러나?"
주백통은 5년 동안이나 줄곧 양효비를 찾아 헤맸다. 그는 장난질을 그칠 새가 없었으나 양
효비를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늘 편하지 않았다. 그는 미랑이 무서운 귀신이 되어 자
기를 물고 늘어질까봐 항상 걱정되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동사 황약사를 만나 그와 무예를
겨뤄보겠다고 떠들어댔다. 황약사는 노완동과 싸울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해서 퍽 골
치가 아팠다.
"노완동, 임잔 양양으로 황용이나 찾아 가게. 그 앤 자네와 놀기 좋아할 걸세."
"그렇지 않아도 난 황용을 찾아갔었어. 그런데 그 애가 그 곽정이란 얼빠진 녀석과 함께 성
을 지키는 데만 바빠 나를 상대할 겨를이 있어야지. 임자의 그 둘째 외손녀 곽양(郭襄)이 아
주 놀기 좋아하고 꾀가 많은 계집애더구만. 신통하게도 황용을 닮았는데 너무 어려서 별로
데리고 놀 맛이 안나더구만. 아 참, 우리 둘이 술래잡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임자가
날 붙잡는 게 좋겠수, 아니면 내가 임자를 붙잡는 게 좋겠수?"
황약사는 몸을 뺄 궁리로 말했다.
"내가 임잘 쫓을테니 어서 도망가게."
노완동 주백통은 황약사가 정말 자기하고 술래잡기를 하려는 줄 알고 씽하고 도망가기 시작
했다. 하지만 한참 도망을 가도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이 없자 머리를 돌려 찾아보았더니 황
약사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노완동이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황약사, 이 작자가 나와 놀지 않으려고 속였구나!"
그래서 그는 황약사를 찾아 헤매면서 붙잡게 되면 톡톡히 시비를 걸리라고 작심했다.
여러 날 동안 황약사를 찾아 헤매다가 이 작은 성밖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성 안에서 옥소 소리가 울려왔다. 그 옥소 소리를 들은
노완동은 뛸듯이 기뻐했다.
'분명 황약사가 심심해 나와 놀자고 옥소를 부는 것일 게다.'
이렇게 생각한 노완동은 즉시 성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때 황약사는 선비가 부는 퉁소 소
리에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옥소를 불어 그 살기를 흩어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
는 옥소를 꺼내 불면서 성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주백통은 성 안에 들어서자 황약사가 시정삼걸들을 쓰러뜨리고는 양과와 함께 가는 것을 보
았다. 노완동은 화가 나서 툴툴거렸다.
"황약사, 임자는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젊은 애 셋을 때려눕힌 게 큰 자랑으로 아
는구만?"
노완동이 황약사와 양과 두 사람을 쫓아가려는 찰나 또 시정삼걸들이 자결하려고 드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이 세 놈은 멍청한 놈들이로구나. 황약사에게 얻어맞았다고 해서 자결을 하려들다니.'
그때 그는 도화도에서 황약사에게 수 없이 얻어맞았지만 종래로 자결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일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견뎌오며 이젠 구음진경까지 완벽하게 익혔기에 다시 대결하
게 되면 황약사는 자기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노완동은 그들의 꼬락서니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5년 동안이나 애써 찾고
있던 제자 양효비가 불쑥 튀어나와 시정삼걸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기쁜 것은 드디어 양효비를 찾았으니 이후 미랑의 귀신이
물고늘어질까봐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화가 난 것은 자기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너무나도 알아주지 못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망쳐놓았기 때문이었다.
주백통에게 붙잡힌 양효비는 너무나 겁이 나서 발발 떨다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양
을 떨었다.
"사…… 사부님, 이 제자는 사부님을 찾느라고 죽을 고생을 다 했습니다."
주백통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넌 날 찾았다지만 나도 널 찾았어. 그런데 웬일인지 쉽게 찾아낼 수 없더란 말이야."
"아마도 우리 사제간이 서로 길이 엇갈려 딴 방향에서 헤맨 것 같군요?"
주백통도 손을 들었다 놓으며 수긍했다.
"음, 일리 있는 말이야. 이 사부님을 닮아 총명하군."
시정삼걸은 주백통을 몰랐기에 양효비를 슬그머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당신의 사부님은 어떤 분이시오?"
그러자 양효비는 가슴을 으슥 내밀면서 큰소리를 쳤다.
"저의 사부님은 강호에서는 노완동이라고들 부르지요. 지금도 천하에서 제일가는 고수지요."
양효비는 주백통의 제자로 들어갈 때만 해도 '노완동'이라는 세 글자가 강호에서는 쩡쩡 울
리는 별호임을 모르고 있었다. 근 5년 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니 자기 스승이 강호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아주 흥분되었다.
시정삼걸은 이 늙은이가 노완동 주백통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다지 믿어지지 않았다. 퉁소
부는 선비가 달려와 주백통을 향해 두 손을 마주잡고 읍을 했다.
"선배께서 바로 전진교의 조사 왕중양 왕진인의 사제이신 주백통 노선배님 이십니까?"
"내 이름은 그렇게 길지 않아. 난 나고 내 사형은 내 사형인거지. 난 또 노선배도 아니니 임
자들은 날 노완동이라고 부르면 돼."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부르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럼 노완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르겠나?
할애비, 할아범이라고 부를텐가, 아니면 외할애비라고 부를텐가?"
주백통이 이렇게 대꾸하며 배를 붙잡고 요란스럽게 웃어대는 바람에 시정삼걸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양효비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 분들은 사부님이 정말 노완동이 맞는가 하고 의심하는 겁니다."
그 말에 주백통이 어정쩡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래 내가 노완동이 아니라면 또 누가 노완동이란 말인가? 그래 너란 말이냐?"
"사부님이 무공을 좀 보여드려야 저 사람들은 믿을 겁니다."
그러자 노완동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저 사람들에게 황약사를 대적하듯이 내게 덤벼들라고 해. 내가 황약사보다 더
멋지게 저 사람들의 병장기들을 빼앗을테니."
시정삼걸은 주백통의 속셈을 알지 못해 병장기를 든 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양효비가 입
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공격만 하시오. 세 분이 무사하리라는 건 제가 보장하지요."
그러자 주백통도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노완동은 절대로 황약사처럼 지독하게 자네들을 자결하도록 핍박하지는 않을 거
네."
퉁소 부는 선비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우리들을 근심하는 게 아니라 노인장께서 실수라도 하실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주백통은 화를 벌컥 냈다.
"뭐라구? 임자들이 그래 이 노완동을 깔볼 셈인가? 그래 내가 황약사보다 못하단 말이지?"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며 선비의 손에 들려 있던 구리퉁소를 빼았더니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구리퉁소의 한쪽 끝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그것을 본 시정삼걸은 깜짝 놀라 주백통의 신공이 기가 막힐 정도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야비한 놈들!'
오군영의 눈은 이 때 이미 어둠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아무리 달빛이 없는 밤이라도 밖은
집안보다 좀 밝아서 창문 밖에 사람이 있다면 어렴풋이나마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
지 창 밖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질 않았다.
'미향을 쓰는 놈이 은신술을 쓸 줄도 아나?'
거와장 출신인 그녀는 독약에 대한 지식도 깊거니와 독약을 해독하는데도 대단히 능했다.
미향같은 혼미약은 그녀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만든 해독제 단
약을 한 알 먹고 조용히 침착하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향 연기가 온 방안에 자욱해졌다. 그런데도 미향을 불어넣는 자가 보이
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때, 창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잖아? 코끼리라도 방안에 있으면 중독돼 자빠졌겠네."
"가만 좀 더 기다려 봐. 저 자는 거와장에서 온 고수란 말이야. 독약을 쓰는 재간이 우리보
담 몇 배나 뛰어난 놈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해. 미향을 계속 태워 넣어. 한참은 더 해야 돼."
그러더니 미향 연기가 또 흘러 들어왔다.
바깥에 있는 놈들이 자기 신분까지 대충 알고 있는 걸 봐서는 재물을 탐내서 온 놈들은 결
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몸을 숨기고 있는 것만 봐도 여간 교활한 놈들이 아니었다.
"이젠 됐잖아?"
이윽고 창 밖에서 한 놈이 수군거렸다.
"됐다. 이만하면 코끼리 두 마리도 거꾸러졌겠다. 그래도 조심해야 돼, 저놈은 귀두방 방주
송무적의 눈 앞에서 오군량을 구해가지고 간 놈이야. 무공이 보통 아니거든."
그러더니 사람 그림자 둘이 창문에 비쳤다.
오군영은 검을 내찌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칫 똑바로 찌르지 못하면 오히려 불리하다고 생
각하며 '놈들이 달아나서 제 무리들을 끌고 오면 시끄럽게 될 것이 틀림없다. 가만히 있다
가 놈들이 방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해치우자. 한 놈은 죽여버리고 한 놈은 붙잡아 문초를
해보자. 도대체 귀두방과 무슨 관계가 있는 놈들이고 어느 놈이 이렇게 거와장을 노리고 있
는지 알아보자.'
창 밖의 두 놈이 창문을 살며시 열고는 미향 연기가 흩어져 빠져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방안
으로 뛰어들었다.
두놈은 모두 몸집이 우람한데 한놈은 칼을 들고 다른 한 놈은 검을 들고 살금살금 방안을
더듬어 나갔다. 방안이 어두워 보이지 않자 각별히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들 뒤에 서 있게 된 오군영은 그 중 한 놈을 검으로 쿡 찔렀다. 그런데 그 놈도 조심성이
보통이 아닌지 뒤에서 다가오는 무형의 검기를 느끼고 얼른 옆으로 피했다. 그렇지만 미처
제대로 피하지 못해 오군영의 검에 놈은 왼팔을 찔렸다.
그래도 놈은 재빠르게 오군영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오군영은 그 칼을 살짝 피하면서 이번
에는 검을 쥔 놈을 내찔렀다. 왼팔을 찔린 놈은 그제야 통증이 오는지 왼팔을 손으로 부여
잡았다.
"난 당했네."
연이어 검을 쥔 놈이 오군영과 싸우면서 중얼거렸다.
"야단났네. 이 녀석에겐 미향도 통하지 않네. 우린……."
그러다가 오군영의 검을 막느라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오군영은 칼을 든 놈의 어디가 상했는지 딱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공격 능력을 상실했
음을 알고 검을 쥔 놈만 공격했다.
그런데 칼을 쥔 놈은 왼팔만 다쳤으므로 오른팔로 계속 오군영을 공격해왔다. 오군영은 하
마터면 칼에 맞을 뻔했다. 두 놈의 연합 공격을 받는 바람에 오군영은 벽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군영은 이 둘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약함을 알고 거와장의 그 괴이한
검법으로 반격하는 한편 왼팔로는 주백통이 전수해준 칠십이로공명권을 썼다.
오군영의 검을 막기에 급급한 두 놈은 오군영이 왼손으로 공명권을 쓸 줄은 생각도 못했기
에 연신 그녀의 왼주먹에 얻어맞곤 했다. 그러나 오군영은 오른손의 검을 위주로 했기에 왼
주먹은 힘이 그리 세지 못했다. 놈들은 공명권에 얻어 맞아 아픔에 소리를 내질렀지만 치명
적인 것은 아니었다.
"안 되겠다. 달아나자!"
검을 쥔 놈이 고함치며 자기 먼저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 칼을 쥔 놈도 따라 달아났다.
오군영은 쫓아가며 칼을 쥔 놈의 뒤를 검으로 찌르려 했다.
그런데 칼을 쥔 놈의 부상당한 왼팔이 뒤로 번쩍이는가 싶더니 무엇인가 구부러진 물건이
오군영의 얼굴로 날아왔다.
오군영은 그것이 무슨 특수한 암기인지 알 수 없어서 급히 검으로 내리쳤다. 땅에 떨어진
다음 주워보니 두 놈이 미향을 불어 넣었던 대나무 막대였다. 중간이 직각으로 굽어져 있었
다. 두 놈이 창문턱 아래에 숨어서 직각으로 굽은 대나무 관으로 방안에 미향을 불어넣었기
에 오군영은 방안에서 그 놈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군영이 뒤쫓아나가 누각 아래로 뛰어내리니 놈들의 검은 그림자가 벌써 성 밖으로 달려가
고 있었다. 오군영은 경공을 써서 놈들을 바싹 쫓았다.
원래 오군영의 경공은 시원찮았다. 그런데 노완동 주백통에게서 몇 달 가르침을 받은데다가
근 몇 년 열심히 수련했기에 그 진보가 대단했다. 오빠 오군량도 지금은 경공이 그녀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 오군영의 무공은 꽤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기에 대나무 관을 보느라 잠깐 시간을 지체했지만 그래도 힘을 쓰니 새가 나는 듯 해서
성 밖 얼마 못가서 그 두 놈을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휘영청 높이 떴다.
오군영은 몸을 솟구쳐 그 두 놈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면서 검을 내리쳤다. 두놈은 급히 칼
을 들어 검을 막았다.
그 두 놈의 앞길을 막으니 그들은 대경실색하며 뒤돌아서 달아났다. 오군영은 또 그 놈들을
날아넘어 앞을 막았다. 몇 번 이렇게 하자 두 놈은 더 달아날 생각은 못하고 병장기들을 꼬
나들고 겁에 질린 얼굴로 오군영을 노려보았다.
오군영은 달빛 아래에서 그 두 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도의 사대제자들 중 셋째인 연무
와 넷째인 임맹이 아닌가.
"네놈들이었구나."
연무와 임맹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자가 어떻게 우리를 알지? 우리는 이 자를
모르는데.'
5년 전 거와장에서 열린 거와회의에서 오자겸은 사위를 고르는 일로 풍파를 겪은 일이 있었
다. 때의 오군영은 예쁜 미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때의 오군영의 모습을 본 군웅들은 오군영
의 화용월태(范容月態)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오군영은 남장을 했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매도 5년 전 그 가녀리
고 어여쁜 규수의 몸매가 아니라 어딘가 위풍당당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연무와 임맹이
알아볼 리가 없었다.
임맹은 스스로 혈도를 눌러 왼팔의 통증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겁은 나는지 떨리는 음성으
로 물었다.
"우리, 우릴 어떻게 알지?"
오군영은 코웃음을 쳤다.
"확도와 한패가 되어 나쁜 짓만 하는 놈들을 누군들 모르겠느냐? 도대체 네놈들이 나를 해
치려는 까닭이 뭐냐? 확도 그 놈이 시켰느냐?"
그때 옆에 있는 수림에서 차디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확도 왕야가 귀하에게 무슨 죄되는 일을 했기에 이놈 저놈 하시며 야단이시오?"
그러더니 수림에서 세 사람이 튀어나왔다. 자색 두루마기를 입고 접선을 흔들며 앞에 선 자
가 확도였다. 그 뒤로 수제자 진웅과 둘째 제자 장기가 서 있었다.
연무와 임맹은 지옥에서 구명 은인을 만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급히 확도의
뒤로 가 숨었다.
"사부님, 저 자는 아주 음험하고 악독합니다. 저 놈은 저를 이렇게 상처도 냈지만 글쎄 사부
님까지 무엄하게 모욕했단 말입니다. 사부님이 누굽니까? 지금 대원국(大元國)의 왕야이신
데."
그러자 진웅이 연무와 임맹을 꾸짖었다.
"쓸모 없는 인간들, 둘이서 저 조그만 놈을 못이겨. 다행히도 사부님께서 너희들을 염려해
여기까지 나오셨으니 망정이지 까딱했으면 너희들 목숨도 날아갈 뻔했잖아?"
연무와 임맹은 급히 확도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잘못을 빌었다. 확도는 점잖게 손을 내저
었다.
"그만됐다. 한 집안 식구들끼리 사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데."
그리고 확도는 오군영을 아래 위로 훑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쓰시오? 어쩐지 퍽 눈에 익은 모습 같은데."
오군영은 확도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모자를 푹 눌러썼다.
"내가 누군가는 중요치 않소. 귀하는 원나라의 지체 높은 왕야라면서 어째서 부하들을 시켜
미향으로 사람을 해치려 하는 게요? 당신들 원나라 사람들은 다 이렇게 비열하고 몰염치하
오?"
그러나 확도는 성을 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입은 싸구만 그러나 아깝게도……."
"아깝다니?"
"아깝게도 그 재주에 주인을 잘못 만났단 말이지."
"거기 주인은 누구요? 원나라 황제 몽가가 아니오?"
확도는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황제님이시지. 폐하께선 조만간에 천하를 통일할 것이니 귀하께서 원나라에 귀의만
한다면 본 왕야가 귀하의 부귀영화를 보장하겠소."
그 말에 오군영은 발끈 화를 냈다.
"퉤, 더럽다. 너희들 오랑캐 족속들은 살인 방화, 못하는 짓이 없음을 세상이 다 알고 저주
하고 있다. 내 비록 군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라를 팔아 일신의 부귀를 누릴 사람
은 절대 아니다.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확도는 그 말에 움찔하며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귀하께서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본 왕야도 더 권하지 않겠소. 그러나 한 가지. 오늘 밤 목
숨을 부지하려면 몸에 지닌 그 물건만은 고스란히 내놓아야겠소."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사대제자들이 즉시 오군영을 에워쌌다.
'이 확도가 과연 내 품에 있는 자금소갑을 빼앗으러 왔구나.'
오군영은 이런 생각에 분연히 말했다.
"아마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거다."
확도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얘들아, 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녀석에게 서역 무공의 본때를 한번 보여주어라."
"스승과 문파를 배반한 이 배반자야, 무슨 낯이 있다고 서역무공 운운이냐. 뻔뻔한 놈."
오군영의 욕설에 확도의 분노가 드디어 터져나왔다.
"저 놈을 당장 죽이렷다!"
사대제자들이 달려들었다. 오군영은 전후좌우로 단번에 검을 네번 내찔렀다. 사대 제자들은
공격은 못하고 오군영의 검을 막기에 급급했다. 오군영은 또 그렇게 번개같이 네번 내찔렀
던 검날이 급히 그들의 단전을 찔렀다. 네 제자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아래를 막았다.
그 기회에 오군영은 무공이 제일 약한데다가 왼팔까지 다친 임맹을 맹공격했다. 임맹은 앗
소리를 지르며 귀두도로 오군영의 목을 치려했다. 오군영은 슬쩍 맞받아치며 임맹의 옆구리
를 검으로 후리치는 척했다. 그러자 임맹은 오른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귀두도를 내려 오군
영의 검을 막았다. 그런데 오군영의 그 동작은 허수였다. 오군영의 검은 중도에서 호선을 그
으며 빗내려가면서 임맹의 왼다리를 찔렀다.
사대제자들 중에서 무공이 제일 높은 편인 진웅은 오군영의 뒤로 가서 접선으로 오군영 등
뒤의 독맥대혈(督脈大穴)을 찌르려고 했다. 오군영은 급히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진웅
은 그것을 그냥 오군영의 허위동작으로 간주하고 계속 접선을 내질러갔다. 그러나 오군영의
이번 검은 허중유실(虛中有實)로 진웅의 손목을 후려쳤다. 거기에 맞았으면 진웅의 손목이
성할 리 없으련만 진웅 역시 날랜 놈이라 단발 비명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곤두박질치며 피
했다. 그러나 미처 제대로 피하지 못해 진웅의 옷자락이 오군영의 검날에 한 자 가량이나
찢어졌다.
임맹의 왼다리는 오군영의 검에 찔려 두 치 깊게 상처가 났다. 임맹은 아픔을 참지 못해 땅
에 주저앉고 말았다.
임맹이 다치고 진웅이 후퇴하자 장기와 연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스승 앞이라 물
러나지도 못하고 대들었다. 오군영은 경공을 써 그들의 검 끝을 피하며 그들 옆으로 돌아섰
다. 그러면서 검으로는 놈들의 손목을 후려치고 왼주먹으로는 놈들의 면상을 내질렀다. 장기
와 연무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연신 얻어맞았다. 얼굴이 붓고 코피가 터져 둘은 꼴불견이
되었다.
오군영은 놈들이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연속 공격을 가했다. 두 놈은 쩔쩔매며 뒤로 후퇴
했다. 그런데 오군영의 몸 뒤로 세찬 바람이 덮쳐왔다. 그녀는 미처 몸도 못 돌리고 검만 돌
려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한장 거리나 날아가버렸다.
확도가 손을 쓴 것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자기 제자들을 물리쳤다. 이 따위 것들을 제자로
받았을까 하는 노여움의 표시였다. 그러나 사대제자들의 무공 기초가 시원찮음을 확도가 오
늘에야 안 것은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충성스런 자들을 고를 수 없어 그런대로나마 자기의
수족으로 써온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본 왕야에게 귀순하든가 자금소갑을 내놓겠다고만 하면 살려줄 수 있다."
"그런 꿈은 꾸지도 마라. 네가 나를 어쩌겠다구? 이 공자님이 네게 질줄 아느냐?"
"음, 비슷해."
그러더니 확도는 돌연 오군영의 미간의 인당혈(印堂穴)을 접선으로 찔러왔다. 오군영은 즉시
검으로 막았다. 그러자 확도는 접선을 펼쳐 오군영의 목을 노렸다. 오군영은 뒤로 피하면서
검을 내찔렀다. 찌르면 피하고 반격을 가하면 막으면서 겨뤘다.
그래도 확도의 무공이 오군영을 능가했다. 금륜법왕이 제일 좋아하는 제자였는데다가 근 5
년 동안 무공 연습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했기에 그의 무공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오군영은
노완동 주백통의 가르침을 받긴 했지만 확도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그래서 열 몇 합이 지나
자 오군영은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확도는 기세가 올라 연속 오군영을 공격했다. 접선을 모아 그 끝으로 오군영의 대혈들을 찌
르는가 하면 접선을 펴서 오군영의 목을 베려고도 했다. 접선의 가장자리는 무쇠라도 두동
강 낼 수 있었고 그 날카로움은 오군영 손에 있는 보검에 못지 않았다.
오군영은 이런 강한 적수와 처음 싸워보는 것이었다. 비록 투지는 높았으나 투지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힘이 점점 쇠약해져 감을 느낀 오군영은 젖먹던 힘을 다 냈으나 점점 지탱
하기가 어려워졌다.
문득 확도가 접선으로 오군영 인후의 천돌혈(天突穴)을 찔러왔다. 오군영은 급히 고개를 뒤
로 젖혔다. 그러자 확도는 접선을 펼쳐 그녀의 면상을 후려쳤다. 오군영은 놀라 급히 금강철
판교(金剛鐵板橋)의 초식으로 뒤로 돌며 피했다. 그런데 그러자니 머리에 썼던 검은 모자가
확도의 철선에 맞아 땅 위에 떨어졌다.
앞으로 나서며 새로운 공격을 하려던 확도가 멈칫 섰다.
달빛 아래 예쁜 여인 같은 사내가 서 있었다. 확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누구지? 눈에 왜 이리도 익을까?"
오군영은 확도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겁이 났다. '5년 전에 나를 억지로 탐내다가 양과에게
저지 당한 확도가 아닌가. 오늘 확도가 날 알아보면 그 음심이 새로이 발동할 것이 틀림없
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면 놈은 나를 능욕하려 달려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오군영은 방
법 하나를 생각해서 확도에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날 알 수도 있을 거다."
확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군영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몸을 솟구쳐
수림 속으로 날아갔다. 확도는 아차 하고 오군영을 추적했다. 사대제자들도 그 뒤를 바싹 따
랐다.
확도는 삼십여 장 거리를 쫓아가서야 오군영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오군영은 수림 속을 요
리조리 피해다녔지만 확도와 그 사대제자들의 포위를 뚫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오군영은 포위를 벗어나려고 허둥지둥 앞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십여 리를 달려가니 나무들
이 성기고 또 얼마를 가니 수림이 끝나고 큰길이 나타났다. 확도가 쫓아오며 소리쳤다.
"네가 이젠 어디로 될테냐!"
여자의 몸인데다가 무공 또한 확도보다 못한 오군영인지라 숨이 차고 다리가 휘청거려 당장
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확도에게 잡히기만 하면 자금소갑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
려니와 그 보다도 짐승같은 놈한테 능욕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군영은 이를
악물고 계속 달아났다.
승산이 선 확도는 그리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잡아놓은 노루인데 걱정할 게 뭐냐 하는 태
도였다. 그는 그저 오군영과 스무발짝 쯤 사이를 두고 계속 쫓아갔다.
"잘 뛴다. 그래 네가 얼마나 더 달아나는가 보자."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 격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산모퉁이 옆을 돌아서니 마차 두 대와 말을 탄 이십여 명의 무리가 마주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때이기에 멀리서도 말을 타고 오는 사내들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는 몸에 병장기들을 지니고 있었고 마차에는 황색 삼각표기(三角 旗)를
달았는데 깃발에 쓴 글자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오군영은 그것이 표국( 局)의 표사( 師)들이 호송하는 화물차란 것을 알고는 급히 달려가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쳤다.
재물을 호송하고 있는 표국은 쌍사자표국(雙獅子 局)이었다.
이 쌍사자표국은 당시 송나라에 선 명성도 유명하지 못하고 돈벌이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니
었지만 이 표국의 총표두의 이름만은 온 강호에 퍼져 있었다.
그 총표두는 둘인데 부부간이었다. 남편은 웅사(雄師) 동진(董進)이었고 여인은 자사(雌師)
원칠랑(阮七娘), 합쳐서 쌍사자라고 했다. 웅사 동진은 호랑이도 맨손으로 잡는 힘을 가져
바위도 두 손으로 부술 수 있었다. 그는 강남 응조문(鷹爪門)의 수제자였다. 자사 원칠랑은
한인(漢人)이 아닌 대리국 내의 만이(蠻夷) 족인데 만도(蠻刀)라는 칼을 잘 썼다. 그녀는 용
모가 절륜하여 동진의 총애를 깊이 받았다.
2년 전 일이었다. 웅사 동진과 자사 원칠랑은 아주 중요한 호송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 도중
절강성 동쪽 황풍채에서 그들은 강남십호(江南十虎)라 일컫는 열 명의 녹림 대도들과 맞닥
뜨리게 되었다. 용호상박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 강남십호는 모두 동진 부부에게
몰살을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강남십호를 잡아 관가의 현상금으로 금 오만 냥까지 타게 돼
한때 그 명성이 천하에 크게 울렸다.
호송대오 앞으로 오군영이 뛰어들자 맨 앞에 오던 표사가 창을 꼬나들며 외쳤다.
"서라, 누구냐?"
오군영은 두 손을 가슴에 맞잡으며 읍을 했다.
"길가던 객상인데 도적을 만났습니다. 쌍사자표국의 의협함은 익히 들었사오니 도와주십시
오."
그런데 곧이어 따라온 확도가 접선을 접어 오군영의 혈도를 찌르려 했다.
"네가 뛰긴 또 어디로 될테냐!"
오군영은 옆으로 얼른 피하며 소리쳤다.
"쌍사자표국 분들이 여기 있다."
쌍사자표국 같은건 안중에도 없는 확도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지껄였다.
"쌍사자표국? 쌍사자표국이 어떤 물건짝이지?"
"무엇이 어째?"
쌍사자표국의 앞에 선 표사가 화가 나서 창으로 확도를 찔렀다. 확도는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접선을 한데 모아 표사의 창 끝을 눌렀다. 표사는 창대를 쥔 뒷손을 돌려
창을 자기 앞으로 당기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당겨도 창은 확도의 접선에 딱 붙은듯 떨
어지질 않았다.
표사는 창을 빼낼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고성을 지르며 창을 내찔렀다. 그러자 확도가 슬
쩍 접선을 앞으로 당겼다. 표사는 그만 자기 힘에 확도가 당기는 힘까지 합쳐져 창을 꼬나
쥔 채로 말위에서 곤두박질치며 떨어졌다.
확도는 표사의 궁둥이를 발로 슬쩍 걷어찼다. 표사는 두 장밖에 있는 길 옆 수풀에 날아가
떨어져버렸다.
아픔을 참고 일어선 표사는 창을 다시 움켜쥐고 단발의 기합소리을 냄과 동시에 확도를 공
격했다.
확도는 코웃음을 치며 접선을 접으면서 창 끝을 한쪽으로 슬쩍 미는 동시에 한 손으로 표사
의 창대를 거머쥐고 순수견양(順手牽羊)의 초식으로 표사를 내동댕이 쳤다. 표사는 또 저만
치 날아가 나뒹굴었다.
"이 도적놈아, 이 죽일놈아!"
표사는 일어나 악다구니를 하면서 또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데 호송대오에서 한 사람이 말
에서 내리더니 표사를 막았다.
"자넨 가만 있게."
표사는 확도를 노려보며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말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작달막한 키에
얼굴엔 수염이 성기었고 손엔 아무 병장기도 없었다. 그는 확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존성대명을 어떻게 쓰시오?"
"나는 대원국 왕야 확도다."
확도는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면 종남산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는 그 몽고 왕자 확도란 말이오?"
확도는 그 말이 자기를 칭찬하는 줄 알고 우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람도 고
개를 끄덕였다.
"잘 만났소, 마침 잘 만났소."
이 때 확도의 사대제자들도 당도했다. 오군영한테 왼팔과 왼다리를 상한 임맹이 오군영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하며 분을 늙이지 못한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왜 저 놈을 잡아죽이지 않습니까, 사부님."
그런데 '잘 만났다'는 소리를 연속 두번하던 그 사람이 얼굴에 가득 노기를 띤 채 확도에게
물었다.
"작년 추석날 밤 소주에서 열여섯살 가량 된 소녀를 잡아다가 강간하고 죽인 놈이 너지?"
그 말에 확도는 흠칫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작년 추석날 그는 소주성 밖에서 한 예
쁜 여자를 납치해다 하룻밤 재미를 실컷 보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스스로 자진을 해 버렸
다. 이런 일쯤은 확도에게 있어서는 늘상 있는 일이어서 사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이런 일이 자랑스럽지 못한 일임을 알고 있어서 이 같이 많은 사람 앞에서 승
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장기가 곁에 있다가 뇌까렸다.
"허 참, 저 놈이 어떻게 그 일을 알까?"
이 말은 스스로 자인한 셈이었다. 확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바보같은 놈이 다 있나.' 하고는 장기를 내심 못마땅해 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 사람은 쌍사자표국의 표사로서 이름은 기만봉(紀萬錄)이었다. 확도에게
잡혀가 강간당하고 죽은 그 처녀는 바로 기만봉의 사촌 누이동생이었다. 언제나 그 원수를
갚으려고 별러오던 참인데 오늘 이렇게 확도와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 가슴
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기만봉은 냉큼 뛰어오르며 확도의 태양혈을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확도는 얼른 허리를 굽혀 그 주먹을 피하고 기만봉에게 장풍을 날렸다. 기만봉은 왼팔굽으
로 장풍을 막고 오른주먹을 또 내질렀다. 확도는 얼른 그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오른손으로 기만봉의 손목을 잡았다. 이와 동시에 확도의 왼손도 기만봉의 팔목을 잡아 아
래로 당겼다. 기만봉의 손목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 기만봉은 오른손을 뽑아낼 수가 없었
다.
놀란 기만봉은 왼주먹으로 확도의 면상을 내치는 허위 동작을 하면서 오른손을 콱 당겼다.
확도는 기만봉의 왼주먹을 피하느라 기만봉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얼떨결에 놓아버렸다. 팔
을 겨우 빼낸 기만봉은 알 수 없었다. 서역파인 확도가 중원의 금나수법(擒拿手法)을 어떻게
이리도 잘 알까?
확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넌 안되겠다. 그 따위 무공 갖고 내게 덤벼들어? 그러지 말고 가서 쌍사자를 오래라. 암컷
수컷 다 오래라."
"요 쥐 새끼같은 자식, 건방지게 굴지마. 내 이 빈주먹 두 개만으로도 너 같은 개대가리는
문제없이 까뭉개버린다."
그리고는 확 뛰어나오며 오른주먹을 확도에게 내질렀다. 대단한 힘을 가진 주먹이었다. 그러
나 확도도 만만치 않았다. 확도는 그 주먹을 침착하게 피하고는 잽싸게 기만봉에게 반격했
다. 둘은 권법을 주고받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기만봉은 강남 복호권파(伏虎拳派)의 고수였다. 어려서부터 명사(名師)를 따라 다니며 무공
을 훌륭하게 배운데다가 쌍사자표국에 들어가 강호를 다니면서 몇 백번을 싸워 경험도 풍부
했다. 비록 무공 수준이 전체적으로는 확도보다 못했지만 권법만은 일류여서 위급한 고비마
다 기이한 초식이 나오곤 했다. 거만한 확도도 기만봉의 주먹만은 얕잡아보지 못했다.
십수 합을 이렇게 싸우다보니 확도는 기만봉의 복호권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는 꾀가 생겼
다. 그는 허점을 보이며 기만봉을 유인했다. 기만봉은 확도가 기만술을 쓸까봐 우려하면서도
복수심이 솟구쳤는데다가, 가만 보니 확도의 두 팔이 벌려져 있음을 보고 허점을 간파했다.
기만봉은 주먹으로 확도의 가슴팍을 죽어라고 내질렀다.
구경하던 표사들은 모두, 이번엔 확도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만봉, 조심해라!"
그러나 마차 안에 있던 사람만이 그렇게 외쳤다.
확도의 이 동작은 이미 상대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는 유인 동작이라 두 손을 양쪽으로 벌
릴 때는 이미 두 팔에 힘을 넣어 곧이어 두 손을 모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기만봉
이 주먹을 내지르자 확도의 두 손은 번개같이 합쳐졌다. 그 속도가 극히 신속무비해서 남들
은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기만봉의 팔목이 뚝 부러졌다. 확
도의 두 손이 엇갈려 모이면서 기만봉의 팔목을 잡아 비틀어버린 것이었다.
기만봉은 앗 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확도는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기만봉의 사타구니를 왼
발로 힘껏 차버렸다. 독랄한 짓이었다. 뭇사람들은 확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여자들의 젖가슴과 남자들의 사타구니는 치지 않는게 강호인들의 법도였다. 그런 짓을 하는
자를 강호인들은 무림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독
랄한 확도는 그까짓 강호의 법도같은건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기만봉을 죽여 다른
사람들을 겁주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즉 확도의 발길이 기만봉에게 날아가는 순간,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번개
같이 확도에게 날아왔다. 기만봉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사람의 거리는 멀고 확도의
발은 빨랐다. 그 사람은 일갈하며 뭔가를 확도의 무릎에다 집어던졌다. 크지 않은 물건이나
화살보다 더 빨랐다.
확도의 발길질이 기만봉의 사타구니를 내지를 수는 있었지만 그러자면 확도의 무릎이 날아
오는 물건에 온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확도는 자기 몸이 더 아까웠다. 그는 다리를 얼른
당기면서 접선으로 그 물건을 내쳤다.
땅에 떨어져 부서진 것은 옥패였다.
날아온 사람은 중등키에 오관이 단정했고 수염이 없었다. 눈빛의 날카로움을 봐도 보통 수
준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청색 비단장삼을 입었는데 허리엔 옥패를 달았던
명주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확도를 쏘아보았다.
"그대는 강호에 이름 있는 무림고수이건만 어떻게 이런 졸렬한 수단으로 내 표사를 대하는
거요?"
확도도 그 사람을 가만히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대가 쌍사자 중의 웅사 동진이오?"
그런데 마차 안에서 돌연 한 여인이 뛰어내렸다. 저고리도 치마도 노을이 불타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남편 곁으로 온 그녀는 은방울 구르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이 분은 웅사이고 난 원칠랑이에요."
"자웅 쌍사자는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더니 정말 그렇구만. 그런데 좀 아깝구나."
확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원칠랑을 쏘아보았다.
"아깝긴 무엇이 아깝단 말이에요?"
"그대 같이 미목 청수하고 살갗 고운 미인이 지아비를 따라 강호를 다니며 풍찬노숙하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소?"
"그렇게 말하는 저의가 뭐요?"
원칠랑은 방긋 웃기까지 했다. 확도는 그 웃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 고생말고 날 따라 북쪽 원나라에 가서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면 어떻겠소?"
원칠랑은 까르르 웃더니 갑자기 확도의 얼굴에다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는 눈썹을 곤두세
우며 욕을 해댔다.
"원나라 왕야라는 종자들은 모두 이렇게 호색한들인가?"
확도는 화가 치밀었으나 웃음을 흘리며 태연한 척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았다.
"침도 향기롭군. 그러니 입은 더욱 향기롭고 달콤하겠지. 남자들 애간장을 얼마나 녹였을
까?"
확도가 자기 처를 희롱함을 보자 불같은 성미를 지닌 웅사 동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두
손으로 확도의 인후를 움켜조이려고 했다. 이미 칠성까지 연마된 그의 대력응조공(大力鷹爪
功)이었다. 그의 손가락들에선 무서운 강기가 흘러나왔다.
확도는 뒤로 얼른 피하며 접선으로 동진의 옆구리에 있는 경문혈(京門穴)을 후려쳤다. 동진
은 살짝 피하고 이번엔 오른손으로는 확도의 정수리를 내리치고 왼손으로는 확도의 앞가슴
을 내질렀다. 그런데 확도의 몸이 언뜻 하더니 어느새 동진의 배후로 가서 왼손으로는 동진
의 등을 치고 접선으로는 동진의 등뒤에 있는 혈도들을 마구 찔렀다.
몸돌릴 틈이 없는 동진은 한지발총(旱地撥 )의 초식으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몸을 돌려 열
손가락을 확 펴며 내려왔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러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확도는 급히 접
선을 펼쳐 동진의 두 손을 후려갈겼다. 동진은 그 소리를 듣고 얼른 피하면서 땅에 내려섰
다. 아무리 자기 손가락이 무쇠같다 해도 확도의 접선도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확도는 접선을 폈다 모았다 하면서 왼손으로도 계속 장풍을 날렸다. 횡련(橫練)을 연마하여
창 칼이 몸에 들어가지 않는 동진이었지만 장풍에 맞아 내장의 기와 피가 해를 입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확도는 자기가 동진의 대혈을 매번 명중하여 내지르곤 하는데도 동진은 감각조
차 느끼지 못하는 듯하는 것이 이상했다. 마침내 그는 동진의 횡련이 극히 높은 경지에 이
르렀음을 알고 아예 접선은 걷어버렸다. 그리고는 서역무공 중의 대력장법(大力掌法)을 써서
장풍으로 동진의 내장을 해칠 생각만 했다.
그들은 이십여 합을 싸웠다. 동진은 패하지는 않았으나 열세에 처했다. 그것을 본 원칠랑이
만도를 뽑아들고 달려들어 남편과 협력하여 확도와 싸웠다.
만도는 길이는 백자나 되나 칼날은 아주 좁았다. 싸움판에선 중원 무림의 사람들이 쓰는 칼
보다 퍽 쓰기 좋았다. 그리고 원칠랑이 만도를 쓰는 법도 중원 무림의 도법(刀法)과는 많이
달랐다. 그 도법은 예쁘게 단장한 원칠랑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맹렬한 도법
이었다. 원칠랑의 무공은 동진에 비하면 좀 약한 편이었지만 그 칼은 매서웠다.
금종조(金鐘 ), 철포삼(鐵布衫), 십삼태보()三太保) 같은 횡련 무공을 배우지 못한 확도는 한
손에 든 접선으로는 원칠랑의 만도를 막고 한 손으로는 동진을 공격했다. 이렇게 되자 동진
도 반격을 시작해서 둘은 드디어 공세를 이루었다.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확도와 동진 부부는 벌써 오십여 합을 싸웠다. 자기네 표사 기만봉이 당하고 자기 아내가
희롱당한데다가 쌍사자표국까지 모욕을 당한 동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그저 단번에 확
도를 죽이지 못해 펄펄 뛰었다. 그는 힘을 남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강한 초식만 썼다. 그러
다보니 시간이 길어져 기운이 빠졌다. 원칠랑도 마찬가지로 한 칼에 확도를 찍어죽이려고
급급하다 보니 이때에 이르러선 기력이 다해갔다.
하지만 수십년 무공을 수련한 내가(內家) 고수인 확도는 원래 힘이 충분했고 간교하기까지
한 그는 힘을 남겨 두느라고 장사자의 공격을 그저 막기만 할 뿐 전력을 다해 반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쌍사자들의 기력이 다하기만 기다렸다. 그러기에 몇 십 합을 싸웠어도 확도는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다시피 했다.
드디어 동진과 원칠랑의 기력이 다했음을 알아차린 확도는 반격을 시작했다. 기력이 다한
동진과 원칠랑은 수세에 몰려 이젠 막기만 할 뿐이었다.
두 총표두가 위급해지자 표사들은 달려들어 그들을 도울까 생각했으나 총표두의 명이 없었
으므로 그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확도의 사대제자들은 자기들이 나아가 스승을
도우면 상대방의 그 많은 표사들이 달려들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면 확도네 쪽이 손해였다.
그래서 그들도 그대로 서 있었다.
오군영도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녀도 나가 도와주지는 못했다. 자웅쌍사자의 체면이 손상
될까봐서였다. 물론 오군영이 자웅쌍사자를 도와 삼 대 일로 싸우면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긴다 해도 셋이서 하나를 이겼다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게 된다. 자존심
이 강한 자웅쌍사자들에겐 그 또한 수치가 아닌가. 그들이 오군영이 도와주려고 나서는걸
달갑게 여기겠는가?
확도는 싸울수록 대담해졌다. 그런데 동진과 원칠랑은 이미 숨이 가빠 헉헉거릴 정도였다.
확도는 한손으론 장풍을 날려 동진을 물리치고 접선으론 원칠랑의 만도를 막았다. 그리고는
원칠랑의 앞가슴을 손바닥으로 내쳤다. 원칠랑은 미처 피할 새가 없어 앗 소리를 질렀다. 확
도의 그 손바닥에 맞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런데 확도는 자기 손바닥이 원칠랑의 앞가슴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생각을 고쳐 먹고 슬
쩍 원칠랑의 불룩 솟아오른 젖봉오리를 쓸어만졌다.
"거 가슴 참 좋다."
확도는 껄껄 웃었다. 원칠랑은 대번 얼굴이 새빨개져 이를 갈며 칼로 확도를 내려쳤다.
"이런 죽일 놈!"
그러나 확도는 그 칼을 쉽게 피하고는 동진의 공격을 물리치며 주절거렸다.
"네 부인 젖가슴이 좋던데. 크고 몽글몽글한 게 제법이더라. 그런데 살갗이 흰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그러자 연무가 좋다고 웃으며 떠들었다.
"그거야 옷을 찢어보면 알 것 아닙니까?"
임맹도 음탕하게 웃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사대제자들도 좋다고 또 껄껄 웃었다.
동진은 그저 확도를 갈갈이 찢어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는 화가 난 사자가 되어
포효했다. 그의 표사들은 총표두에게 미안하고 확도에게 모욕을 당한 것같아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확도를 죽일놈이라고 이를 갈았다. 확도는 제자들의 말에 신명이 났다.
"셋째 말이 옳다. 내가 저 미인의 정통을 보여주마."
그리고는 원칠랑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옷깃을 쥐려고 했다. 원칠랑은 놀라서 죽어라고 칼을
휘둘러 확도를 막았다.
"확도, 이놈! 이 죽일 놈!"
동진이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들어 확도의 등을 움켜쥐려고 했다. 확도는 급히 동진에게 강
한 장풍을 세번 연거푸 날렸다. 동진은 십여 발짝이나 뒤로 밀려났다.
확도는 또 원칠랑에게 달려들었다. 원칠랑은 또 칼을 휘둘러 막았다. 그런데 확도는 씽하고
원칠랑의 뒤로 날아갔다. 원칠랑이 급히 돌아서 칼로 후려치자 확도는 또 씽하고 원칠랑의
뒤로 날아갔다. 원칠랑은 다시 급히 돌아서며 칼로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그 칼은 확도의
접선에 막히고 확도의 왼손이 어느새 가슴 앞까지 뻗쳐왔다. 원칠랑은 급히 왼손바닥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원칠랑의 장법은 확도에 비하면 완전히 무기력한 것이었다. 확도의 왼
손은 거침없이 뻗쳐 어느새 원칠랑의 동정깃을 붙잡았다. 확 소리가 나더니 원칠랑의 옷이
쭉 찢어져 나갔다. 그녀의 희고 봉긋한 젖가슴이 내보였다.
원칠랑은 악 소리를 지르며 칼을 땅에 떨궜다. 그녀는 두팔로 앞가슴을 가리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확도와 사대제자들은 좋다고 히히더 거리며 웃어댔다.
"볼만하냐? 더 보고 싶냐? 그럼 잡아다가 저 미인의 옷을 벗겨볼까?"
확도의 지껄임에 진웅이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보고싶기만 하겠어요. 전 여자가 어떤 맛인지 그 맛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동진은 약이 오를대로 올라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확도를 거
꾸러뜨릴 수가 없었다.
"모두들 달려들어라, 저 놈을 회쳐서 돼지 밥으로 주자!"
동진이 소리치자 표사들이 일제히 달려드는데 뒤쪽 마차에 있는 휘장 안에서 점잖은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무리 재간이 없다고 무리싸움을 하다니. 내 한 손으로도 확도 그놈을 당장 잡을 수 있거
늘."
높지 않은 음성이나 확도 무리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저력에
찬 음성이었다. 내공이 심후한 자가 분명했다. 확도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쌍사자표국에 이
런 고수가 있다니,
순간 동진의 얼굴이 밝아지며 얼른 그리로 달려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며 인사를 했다. 방금
전의 그 위엄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확도 놈이 소인의 처와 쌍사자표국을 견딜수 없이 모욕하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 저놈의
버릇을 좀 고쳐주십시오."
동진의 말은 그처럼 공손할 수가 없었다.
확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진이 굽실거리는 것을 보면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강호에서 신
분이 대단히 높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문파의 고수일까.
그때 휘장이 펄럭 하고 움직였다. 그러더니 어느새 한 사람이 확도 앞에 이르렀다.
굉장히 큰 키는 아니었다. 이목이 준수하게 생긴 스무예일곱살 쯤 돼 보이는 젊은이었다. 회
색의 무명단삼을 입었는데 오른 편 팔소매가 홀쭉한 외팔이고 허리엔 목검을 한자루 찼다.
"내가 누군줄은 알겠지?"
그 사나이는 확도를 노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확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
르게 중얼거렸다.
"양, 양과. 양과가 어떻게 여기에……‥."
"나를 알아보긴 알아보는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듣자니 독주여니 완안방방이 그
대를 잡으러 사방으로 다닌다던데 그대는 그래도 의연히 자유롭게 잘 살고 있구먼. 대단하
오."
"뭐요, 그런건 그런건 아니고……."
확도는 얼버무렸다.
"그대는 천하무적으로 천하미색이란 미색은 다 섭렵을 했는데도 원칠랑 자색에는 못견디겠
다, 이건가?"
그러면서 양과는 동진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총표두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닌가?"
"예, 그렇기도 하겠지요."
동진이 굽실거렸다.
"확도, 원칠랑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저 마차 안에 들어가 그 한을 푸시오. 나 양과가 여
기 있으니 그 누구도 감히 그대를 막지 못할거요."
확도는 양과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양과와 몇 차례 싸워 혼이 난 확도는 양과가
보통이 넘는 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과가 그렇게 말하자 확도는
도리어 긴장했다. 그는 뒤로 두어걸음 물러서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우스갯소리를 좀 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소."
그는 양과의 무공을 겁내고 있었다. 양과가 여기 있는 이상 이젠 모든 일이 틀렸다는 생각
이 들었다.
"거 참 안 됐구만. 우리 이 아주머님은 너무 순진해서 그런 농담은 받아들이질 못해요. 그러
니 그런 농담은 그만두는 게 좋겠소. 아주머니가 노여워 울며불며 그대를 어떻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하면 그대에게 큰 재미가 없을텐데. 그렇지 않소?"
확도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또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양공자 말도 그럴 법한 말이오만……."
"그러면 어서 여기를 떠나지 않고 왜 이러고 있소? 나하고 겨뤄볼 생각이 있어서 그러오?"
"그런 뜻은 절대 아닌데……."
"아하, 이것 좀 보게? 언제나 시원시원하던 확도 왕야께서 오늘은 왜 이러나. 사춘기에 들어
선 처녀 애들보다 더 부끄러워하며 우물쭈물하니?"
그 말에 표사들이 키득거렸다. 확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본 왕은 도주범 하나를 추적하고 있었소."
그러면서 오군영을 가리켰다. 양과는 오군영을 돌아보았다.
"과연 확도 왕야의 말 그대로인가?"
양과의 출현으로 오군영은 온 몸의 피가 다 엉키는 것 같았다. 5년 전의 일들이 하나 하나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양과의 말에 냉랭히 대답했다.
"양대협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자의 말이 옳은 소리로 들립니까? 그러면 나를 저
자에게 넘겨줘도 어쩔 수 없겠지만, 저 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 일엔 간섭을 말아
주시오. 난 무공이 시원찮은 무명 소졸이니 양대협님 처분에 맡길 따름입니다. 마음대로 하
시오. 절대 후회하지는 않으리다."
양과는 빙그레 웃었다.
"공자는 어디 사람이오?"
"산야에 묻혀 있는 촌부에 불과하니 더 묻지 말아주시오."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확도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공자님이시군. 이 공자님과 단독으로 얘기 좀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소?"
양과가 여기 있는 한 자금소갑을 가지긴 다 틀렸으니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한 확도는 대답했다.
"신조협의 말인데 천하 누가 감히 어기겠소. 본 왕은 신조협의 의사를 따르리다."
그리고는 사대제자를 데리고 풀이 죽어 가버렸다.
확도가 가자 오군영은 동진에게 읍을 하며 감사했다.
"살려준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차후 꼭 보답하겠습니다."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그런 말 마시오."
"그럼 저는 가겠습니다."
오군영은 그러고는 길을 떠나려 했다.
"양 한 마리를 늑대로부터 구해 주었더니 도로 늑대굴로 뛰어드는구나. 가소롭군, 가소로
워."
양과가 웃었다. 그 말에 오군영은 걸음을 멈췄다.
'확도가 자금소갑을 단념할 리 없다. 그러니 수림 어디 숨어서 나를 기다릴 수도 있다. 표국
사람들이 떠나면 뛰어나와 날 붙잡으려 할 것이다. 양과는 대장부는 아니지만 방금 한 말은
일리있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한 오군영은 표국 사람들과 같이 있을 생각도 했다. 그러나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있기는 싫었다. 오군영은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마차에 오른 양과가 휘장을 들고 점잖게 말했다.
"날이 밝았는데 어서 가야지. 이러다간 시일이 늦어지겠네."
동진은 부하들을 독촉해 다시 말에 올라 길을 서두르게 했다.
동진은 첫번째 마차 휘장 안으로 들어가, 놀란 아내를 좋은 말로 위로했다. 마차는 빠른 속
도로 달려갔다. 오군영도 할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달려야 했다.
그것을 본 동진은 오군영을 자기 마차 안으로 불러들일 생각에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
러나 양과가 그러지 말라고 눈짓하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오군영이 여반남장한 여자임을
알 수 없는 동진은 이 영준하게 생긴 공자가 마차 안에 들어왔다가 자기 처를 유혹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양과는 앞에서 달리고 있는 오군영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양과가 혼자서 마차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니 편하긴 한데,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해 죽
겠네."
오군영은 못들은 척했다. 양과는 눈을 한번 굴리고는 또 말했다.
"이 양과가 마귀는 아니잖아? 외팔밖엔 없는데 왜 사람들은 날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지. 이
봐요 공자, 그런 고생 말고 이 양과 마차 안으로 들어와요, 어서."
오군영은 고개도 안돌리고 그냥 달리면서 대꾸했다.
"양대협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같이 하찮은 초민백성이 어떻게 감히 양대협님과 자리를
같이 하겠습니까?"
그러자 양과는 허허 하고는 너털 웃음을 웃었다.
"이 양과는 본인을 대협객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공연히들 그러는 것이오. 글쎄 공자가 스스
로 그렇게 결정했다면 난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자 오군영은 걸음을 멈추었다가 양과의 마차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는 양과의 맞은
편에 앉아서 코웃음을 쳤다.
"대협객이면 단가, 뭐."
양과는 웃었다.
"누가 대협객이면 다라고 했나, 난 그런말 안 했어. 대단하긴 사실 공자가 대단해. 다른 사
람들은 모두 이 양과를 두려워 하는데 공자만은 이 양과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거든.
정말 대단하오이다. 감탄하오이다. 감탄해 마지 않소이다."
양과는 읍까지 했다. 오군영은 흥하고 코방귀를 뀌면서 외면했다.
마차는 어느새 십여 리를 달려갔다. 양과는 꼼짝 않은 채 오군영을 자꾸 훑어보았다. 오군영
은 모자 차양을 내려쓰려고 하다가 그제서야 확도의 접선에 모자가 떨어졌다는 기억이 났
다.
"왜 날 그렇게 유심히 보죠?"
오군영은 화를 내며 물으니 양과는 눈을 音벅거리며 말했다.
"공자의 속눈썹이 왜 그리 길지? 남자 속눈썹이 이처럼 긴건 난생 처음 보는데."
"별걸 가지고 다 그러네."
"그리고 임자같이 영준한 젊은 공자도 처음 보는데. 여자 옷을 입으면 미인으로 자처하는
그런 여자들도 당신 앞에선 꼬리를 내릴거야."
"양대협님, 그런 실없는 농담 그만 하실래요."
"그럼 그만하지."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양과가 또 물었다.
"공자는 장가를 갔나?"
"장가는 무슨 장가를 가요?"
"그럼 됐어. 이 양과가 비할 수 없이 예쁜 처녀 하나를 알고 있는데 중매를 서줄까 해서 하
는 말이네. 어떤가? 생각있나?"
"양대협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런 수고는 그만두십시오."
그래서 그들은 황약사를 공격하던 초식대로 달려들었다. 주백통은 비록 소매가 긴 옷을 입
지는 않았으나 좌우호박지술을 써서 왼손으로는 앞에서 구리퉁소를 빗발같이 휘두르는 선비
의 뒷덜미를 어느새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와 동시에 멜대와 초혼번을 붙잡아 공중에 던져
버렸는데 아까 황약사가 던질 때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노완동은 한 손으로는 선비를 붙잡은 채 오른손을 여전히 뒤쪽으로 뻗고 있었는데 이윽고
공중에 날아올라갔던 멜대와 초혼번이 똑바로 그 손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시정삼걸은 그것
을 보고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시정삼걸은 앞다투어 주백통 앞에 달려와 읍을 했
다.
주백통이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래 황약사가 나보다 멋지게 해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양효비가 또 주백통을 추켜 올렸다.
"사부님의 무공이 황약사보다 월등히 낫고 말고요. 아마 황약사는 사부님이 이 부근에 계시
는 걸 알아차리고 사부님 앞에서 망신을 당할까봐 급히 도망친 것 같군요."
주백통은 자기를 추켜올려주는 바람에 기분이 퍽 유쾌해졌다. 주백통이 양효비에게 물었다.
"이봐, 방금 네가 양과가 네 미혼처를 차지했기에 복수를 하느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던데
그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러자 양효비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사부님께선 아직 모르고 계십니까? 5년 전에 양과는 오군영을 눈에 들어 했지요. 이 제자
는 양과가 저의 목숨을 구해준 까닭에 부득불 사부님 곁을 떠나게 된 겁니다."
"오군영이 자살하려고 맘 먹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거참, 양과가 소룡녀에 대한 감
정이 너무 깊어 잊으려고 하지 않았거든."
양효비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소룡녀가 실종된 지 여러 해 되었고 양과도 장년이 된 사나이인데 색에 마음이 끌리게 되
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 제자의 미혼처는 건드리지 말
았어야죠."
주백통이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난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듣고싶지 않아. 자, 가자. 우린 황약사를 찾아내서 그가 왜
나와 술래잡기를 하지 않고 날 속여가며 그대로 줄행랑을 쳤는지 하는 거나 따져물어 보도
록 하자구."

추천 (0) 선물 (0명)
IP: ♡.221.♡.30
23,49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3-30
2
51
나단비
2024-03-30
2
85
나단비
2024-03-29
2
107
나단비
2024-03-29
1
52
나단비
2024-03-29
1
50
나단비
2024-03-28
1
58
나단비
2024-03-28
1
48
나단비
2024-03-28
1
39
나단비
2024-03-27
1
42
나단비
2024-03-27
1
57
나단비
2024-03-27
1
68
나단비
2024-03-27
1
55
나단비
2024-03-27
1
45
나단비
2024-03-26
1
37
나단비
2024-03-26
1
43
나단비
2024-03-26
1
49
나단비
2024-03-26
1
69
나단비
2024-03-26
1
87
뉘썬2뉘썬2
2024-03-26
1
118
뉘썬2뉘썬2
2024-03-26
1
97
나단비
2024-03-25
0
92
나단비
2024-03-25
0
76
나단비
2024-03-24
0
59
나단비
2024-03-24
0
118
나단비
2024-03-07
0
435
나단비
2024-03-07
0
406
나단비
2024-03-07
0
438
나단비
2024-03-06
1
493
뉘썬2뉘썬2
2024-03-05
1
472
뉘썬2뉘썬2
2024-03-04
1
511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