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4

3학년2반 | 2022.02.26 07:39:39 댓글: 0 조회: 53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237
제13장 황약사의 가르침
그말에 양효비는 흠칫 놀라서 머뭇거렸다.
'양과는 분명 내가 자기 모습으로 분장해서 여염집의 여인들을 간음한 사실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를 만나러 간다면 그는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이 제자는 볼일이 있는데요."
주백통이 화를 벌컥 내며 대답했다.
"이 놈아, 네까짓 놈이 무슨 볼 일이 있단 말이냐? 이번엔 절대로 널 놓치지 않겠다. 그랬다
가는 이 노완동이 제일 두려워 하는……."
주백통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양효비는 주백통의 속마음을 눈치채고선 말했다.
"사부님께서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전 어머님 영전에 가서 무서운 귀신이 되여 사부님
을 못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 말에 노완동은 겁이 나서 수염을 부르르 떨고 얼굴까지 하얗게 질렸다.
"제발 그러지 말아."
양효비는 자기 계책이 효험이 있자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사부님, 이제 앞으론 제 말대로 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이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는 게지? 저 놈이 시키는대로 한다? 이 노완동에게 대로에
서 소변을 갈기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러나 가령 남의 똥을 먹으라고
한다면 큰 일이 아닌가? 그런데 저 놈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제 에미 귀신을 불러서 날 못살
게 굴 것 아닌가?'
노완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사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제자는 절대로 사부님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주백통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자가 스승을 괴롭혀서야 말이 되나? 좋아, 이 노완동은 네말을 듣겠다."
양효비는 너무 기뻐 연신 세 번이나 절을 하고 나서 말했다.
"사부님께서 정말 이 제자의 말대로만 하신다면 아주 재미있게 놀 수 있지요."
"그럼, 어서 말해봐. 어떻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주백통이 안달을 하면서 묻자 양효비는 눈동자를 굴리며 주백통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짐
짓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제가 양과를 놀려주려고 하는데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지요."

"양과가 네 미혼처를 빼앗았으니 좀 놀려줘도 괜찮은 일이지.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
냐?"
노완동이 재미있는 표정으로 대구하자 양효비가 물었다.
"사부님이 보시기엔 제가 누굴 닮은 것 같습니까?"
주백통은 양효비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다가 말했다.
"넌 이 노완동의 제자이니 원래 날 닮아야 하지만 눈썹이며 머리칼이 모두 까매서 날 닮은
구석이란 하나도 없단 말이야. 누굴 닮았는지 알 수 없군 그래."
"다시 한번 자세히 보세요."
"글세 모르겠다니까. 그런건 재미없어."
양효비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사부님, 제가 양과를 닮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주백통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손뼉을 쳤다.
"맞아, 과연 양과 아우를 닮았군! 히히, 혹시 자넨 양과의 아들 아닌가? 그럴 수야 없겠지.
둘은 나이 차도 얼마 안나니까. 그리고 자네가 그의 아들이라면 이 노완동은 양과와 같은
항렬이 된단 말야. 황약사는 양과의 할아버지뻘 되는데 그럼 난 황약사를 백부로 불러야 하
니 안될 일이지. 절대 안될 말이야."
주백통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기가 황약사보다 항렬이 한급 떨어지게 될까봐 겁을
냈다.
양효비가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양과는 저와 같은 항렬이 되는데요."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제가 양과를 닮았으니, 분장만 잘 한다면 사부님도 알아 보시지 못할 겁니다."
"믿어지지 않아. 외팔이 흉내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단 말야."
"사부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양효비는 그렇게 말하고 점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시정삼걸은 두 사제간이 뭐라고 수작하는지 알 길이 없어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서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양효비가 점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급히 물었다.
"양공자, 뭐하시려는 게요?"
그러나 양효비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점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 사람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점포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사람은 오른 팔 소
매가 비어 있었고, 허리에는 목검을 차고 있었다.
"이거 양과 아우 아닌가?"
주백통은 소리치면서 마주 달려갔다. 양과는 주백통을 향해 예를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백통 형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 아우는 형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자 주백통은 양과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내 제자가 임자 모습으로 분장하고 있는데 좀 기다리면 나올 거네. 그때 똑같나 한번 봐주
게."
그러자 양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양효비입니다."
시정삼걸은 양과의 모습을 다시 보자 화가 치밀어올라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어 그를 둘러쌌
다.
"음란한 도적이 감히 다시 돌아오다니."
그때 주백통이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이 양과 아우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네. 싸울 생각이 있으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나
하게."
퉁소 부는 선비가 분을 삭이지 못한 듯 거두절미하고 용서를 구했다.
"주백통 선배님, 우리가 분부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리 퉁소로 양과의 목을 내찔렀다. 양과가 얼른 피하면서 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
었다.
"여러분은 정말 저를 알아 보시지 못하겠습니까?"
"너같은 음란한 도적놈은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어."
수교장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전 양효비입니다."
양효비는 갑자기 옷소매로 오른 팔을 내보이면서 히히거렸다.
시정삼걸과 주백통은 모두 깜짝 놀랐다. 주백통이 그의 오른손을 만져보니 과연 사람의 손
이었다. 주백통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니…… 니가 과연 내 제자 양효비가 맞는가?"
그러자 양효비가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사부님, 제 변장술이 어떻습니까?"
"거 참, 묘하군. 대단하군 그래."
양효비는 주백통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속삭였다.
"사부님, 제자가 양과로 변장해서 강호를 배회하면 두 사람의 신조협이 생기게 되는 것 아
니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주백통이 어린아이마냥 손뼉을 치면서 마냥 좋아했다.
"물론 재미있고 말고. 하하하, 넌 정말 노완동의 제자다워. 넌 네 사형 야율제보다 백배 낫
다."
야율제는 당금 개방의 방주였고 또한 대협 곽정의 사위였다. 하지만 노완동이 보기에 야율
제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양효비 보다 못해 보였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절대 이 일을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이일을 양과가 알게 되면 재미
없어지니까요."
그러자 주백통이 두 눈을 꿈벅거리며 대답했다.
"제자 말이 옳아. 양과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잔 말야. 그러면 양과가 죄를 뒤집
어 쓰겠지. 그렇게 되면…… 하하하 생각만 해도 재미있네."
주백통은 이미 양과가 대경실색하는 모습을 본 것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양효비는 의기양양해서 간사한 계책을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사부님, 가흥 서호 가에 철창묘(鐵槍廟)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양과의 아버지 양강(楊康)이 바로 철창묘에서 죽었다는 말을 황용에게 들은 것 같군."
"7월 초파일날 그 곳에서 만나기로 하죠. 그 후에 제자는 스승님에게서 무공을 열심히 배우
겠습니다."
주백통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왜 하필 칠월 초파일에 만나야 하나?"
"사부님께서는 여로에 산수 구경을 하실 수 있지만 이 제자는 유감스럽게도 요긴한 일이 있
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부님을 모시고 함께 놀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주백통은 양효비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다짐한 일도 있고 해서 풀이 죽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 노완동은 또 황약사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보다."
그 말에 급히 양효비가 다짐을 하며 다그쳤다.
"그렇지만 절대로 이 일을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왜?"
"사부님께서는 그저 제 말대로만 하세요. 때가 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겁니다."
주백통을 따돌리고 나서 양효비는 시정삼걸 앞으로 다가왔다.
"세 분께서는 양과와 대적할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야 물론이지요."
시정삼걸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제게 방법이 하나 있는데 세 분께서 제 말대로 하시겠습니까?"
양효비가 이렇게 운을 떼자 퉁소 부는 선비가 성급히 대답했다.
"그 음란한 도적을 죽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불 속이라도 뛰어들 작정이오."
양효비는 간사스러운 계책이 착착 들어맞자 더더욱 기뻤다.
"그렇다면 더욱 좋지요. 제가 양과로 변장할테니까 세 분께서는 저와 함께 가도록 합시다.
가는 길에 허튼짓을 해야 하는데 요란하게 하면 할 수록 좋겠지요?"
그 말에 수교장은 코를 벌름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협의를 지키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양과의 됨됨이를 알게 할 수가 없지요. 그 놈
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야만 의협심을 가진 수많은 강호인들이 그 놈을 찾아 없애버리려고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쉽게 그 놈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통쾌
한 일입니까?"
초혼도사도 그 말을 듣고는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 계책은 묘하기는 하지만 폐단이 있단 말이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양과를 대적해내기가 힘듭니다. 그자는 무공이 고강해 우리 힘만 가
지고는 굴복시키기가 어렵지요."
그러자 퉁소 부는 선비가 머뭇머뭇하더니 어정쩡한 기색으로 질타했다.
"그런데 당신 말대로 하면 우리 이름도 땅에 떨어질텐데 어떻게 강호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이오?"
"옛날 서시(西施)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기 몸을 오왕 부차(夫差)에게 허락하는 것
조차 꺼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그까짓 미미한 이름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개인의
일은 소리(小利)이고 천하의 일이 대의(大義)지요. 양과를 하루빨리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그
만큼 천하가 하루라도 편안하지 못할 게 아니겠습니까?"
시정삼걸은 처음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효비가 주백통의 제자인데다가 자기 이름
이 더럽혀지는 것도 마다 하지 않기에 자기들같은 미미한 인물들은 더욱 두려울 것이 없다
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시정삼걸은 양효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양효비는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면서 양과의 모습으로 변장했다. 그는 시정삼걸을 거느리고
그 성을 떠나 쌍사자표국의 호송대열을 찾아 가흥 쪽으로 향했다.
양과와 황약사는 손을 잡고 객점으로 들어갔다. 양과가 오랜만에 만난 황약사를 대접하려고
요리를 많이 시키려 했으나 황약사가 극구 말렸다. 황약사는 요 몇 년 간 수많은 도승들과
초야에 묻힌 은사들을 방문하다 보니 마음이 깨끗해져 육고기는 거의 먹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래 묵은 술 한 단지와 냉채 한 접시만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양과는 자기도 모르게 체내에 채설주 독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시정삼걸
같은 시원찮은 인물들조차 대적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황약사가 당장 양
과의 맥을 짚어 보았다.
"어떻습니까?"
양과가 묻자 황약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절정곡의 정화의 독은 해독하기가 어렵지만 채설주의 독 또한 양이 과하면 큰일일세. 자네
는 절정내공을 닦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5년 전에 벌써 그 독으로 죽고 말았을
것일세."
황약사는 자기가 만든 구화옥로환(九花玉露丸)을 십여 알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구화옥로환으로도 그 독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채설주의 독을 얼마간이라도 누를 수
는 있으니 도움이 될 걸세."
양과는 고마움을 표하고는 그 자리에서 구화옥로환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운기
를 해보았더니 갑자기 온 몸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차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과연 신약(神藥)이군요. 저의 공력이 일성 쯤은 회복된 것 같습니다."
황약사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일렀다.
"자네 몸 속에 있는 채설주 독을 제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네."
"가르쳐 주십시오."

"첫째 방법은 그 독을 쓴 자를 찾는 것이네. 그에게는 분명 해독약이 있을 것이네. 내가 알
기론 채설주는 서역의 설봉(雪峰)에서 나는 것이라 그 독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해독약을 구
하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네. 그런 해독약은 20년 만에 한알씩 만들어낸다고 하네. 그
래서 채설주 독을 제거하는 해독약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 역시 일리가 있
는 말이네. 만일 자네가 서역으로 그 해독약을 구하러 갔다가 중원 무림을 적대시하는 신교
(神敎)의 무리들이라도 만나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일세. 중원에 온 독주여니의
수중에 해독약이 한 알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하지만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명
도 없었다네. 설령 운좋게 그녀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녀가 순순히 해독약을 내놓을리가 있
겠나."
양과는 그 말에 큰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방법은 더욱 어려운 것이네. 남해에 신선도(神仙島)라는 섬이 있는데, 사실 이 섬
에는 신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해의 오독방(五毒幇)이란 무리들이 웅거하고 있네."
양과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캐물었다.
"오독방이라뇨? 일찍이 대리국에 오독방이 나타났었지만 금세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남해에 오독방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대리국의 오독방은 비록 종적을 감췄지만 그래도 후계자는 남아 있을 것이네. 자네가 거와
장에서 본 벽사신군이 바로 그 중의 한 놈일세. 하지만 남해의 오독방은 대리국의 오독방과
는 아무런 상관도 없네. 남해의 오독방은 예부터 중원과는 왕래가 없는데다가 그것을 아는
사람도 아주 적지. 그런데 근년에 그 오독방 인물들이 강남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하네. 행적
이 아주 신비롭고 필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단 말일세."
그 말에 양과는 '종남산의 고묘에 5년이나 은거하고 있는 동안 무림에 많은 변화가 있었구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독방의 독을 쓰는 재주는 가히 전무후무한 독법(毒法)이라 할 수 있네. 아마도 중원 무림
의 그 어떤 사독고수라도 오독방과 대적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일세. 그러니까 오독방
방주의 허락을 받기만 하면 자네 몸 속에 있는 채설주 독은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다네."
"오독방 방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노부가 그 오독방 방주와 좀 안면이 있네. 그 사람 이름은 여노악(黎老鍔)이라고 하는
데, 40년 전에 중원에 온 적이 있었지. 그때 이 노부는 혈기왕성한 때였고 우연히 그와 말다
툼이 생겨 오륙백 합이나 싸웠었지."
황약사 같은 인물이 오륙백 합이나 싸웠다면 그 싸움이 정말 대단했으리라는 생각이 든 양
과는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황약사는 입가에 가볍게 미소마저 흘리고 그 때의 결투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이 노부와 여노악은 모두 기진맥진해서 싸움을 중단하게 되었고 승부를 가리지 못했네."
황약사는 양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그와 나는 서로 탄복을 했었지. 만일 자네가 그 사람을 찾아가서 내 이름을 대면 혹
시 그 사람이 옛정을 봐서 도와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객점 문어귀로 눈썹까지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나
타났다. 그는 황약사를 보더니 다짜고짜 달려 들어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황약사, 임자는 규칙도 몰라? 왜 중도에서 도망간 거우?"
그때 객점 문어귀에서 주백통에게 밀려 넘어졌던 몇 사람이 뛰어들어와서 주백통을 보고 고
함을 질러댔다. 주백통은 황약사와 양과에게 눈을 부라리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소리쳤다.
"모두 꺼져 버려. 이 할애비가 남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이지도 않아?"
그러자 한 장대한 사내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 놈이 누구의 할애비란 말이냐?"
그 말에 주백통은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그걸 몰라? 물론 네 할애비지. 손자야 어서 이리 오너라. 할애비가 네게 술을 먹여주마."
주백통은 황약사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집어다가 그 사내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 사내는 화가 머라 끝까지 치밀어 주먹으로 주백통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주
백통은 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술잔을 그의 입술에 갖다대는 것이었
다. 그 사내가 욕설을 퍼붓느라 입을 벌린 틈을 타 주백통은 벌써 술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
사내는 급체를 했는지 딸꾹질을 하면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노완동은 그 꼴을 보고 요절복
통했다.
양과는 급히 일어나 쫓아들어온 몇 사람을 막고 나서 주백통을 대신해 양해를 구하고 은자
스무 냥을 꺼내 나누어줌으로써 간신히 일을 진정시켰다.
양과를 바라보던 주백통은 양효비가 양과로 변장한 일을 말할까말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 참고 히죽거리며 웃기만 했다. 양과는 방금 일로 웃는 줄 알고 말했다.
"형님, 또 이렇게 장난을 치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게 됩니다."
"난 밖에 나가 소피를 좀 봐야겠네."
황약사는 주백통에게 시달리기가 싫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주백통이 그의 옷소매를
틀어쥐고 말했다.
"황약사, 또 도망칠 속셈이구만. 이번엔 이 노완동이 절대 속지 않을거야."
"이 세상에 날 잡아둘 사람은 없네."
황약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팔을 홱 당겼다. 황약사는 주백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쏜살
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좀 기다리란 말이야."
주백통도 큰 소리를 지르며 문 밖으로 쫓아나갔다.
양과가 재빨리 문 밖으로 나와보니 황약사와 주백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주백통의 목소리만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양과는 속으로 '채설주 독만 없었더라
면 이 두 고수들과 경공을 겨루어 볼 수 있을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다음날 양과는 성을 나오며 황약사가 했던 말을 회상했다.
'남해로 가 보자. 오독방 방주 여노악을 만나 채설주 독을 제거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한편
남해신니의 행방도 알아보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여노악은 남해에서 오래 살았으니 남해신
니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해신니를 찾게 되면 자연히 소룡녀와도 만날 수 있지 않겠
나?"
양과는 농가에서 말 한 필을 사서 남쪽으로 향해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오십 리
도 못가 점심 때가 되자 양과는 앞에 보이는 촌락으로 말을 몰았다.
그 촌락은 매우 커서 족히 백호가 넘는 인가가 있는 듯했다. 마을로 들어가던 양과는 마을
입구에 있는 고목 아래 한 여인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 손을 모아쥔 채 읍을
했다.
"이 마을에 요기할 만한 주점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고개를 들어 양과를 보더니 겁에 질린 얼굴을 하더니 곧 몸을 일으켜 천
방지축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양과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 얼굴과 옷차림을 둘러봤지만 아무 이상한 데
가 없었다.
'아마 저 여인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검을 차고 있으니 나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군.'
양과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몰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과를 본 사
람마다 집으로 도망가서는 문을 꽁꽁 닫아걸고는 숨소리마저도 죽이는 것이었다. 양과는 영
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길 옆에 술집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말에서 내려 들어
갔다.
술집 안에는 마을 사람 셋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양과를 보더니 모두 황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술집 주인은 노인이었는데 그도 겁먹은 표정
으로 얼굴이 백짓장처럼 되어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양과는 자리를 잡고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장, 술 한 병과 삶은 쇠고기 그리고 구운 떡을 좀 갖다주시오."
주인이 얼이 나간 기색으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술과 고기를 가지고 오는데 두 손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주인은 술과 고기를 재빨리 식탁 위에 내려놓자마자 몸을 돌려 돌
아가려고 했다. 양과는 그들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는 주인을 불러세우며 물
었다.
"모두 나를 보고 무슨 귀신이나 보는 것처럼 외면하고 도망가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
까?"
주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모두들 대협님의 선풍도골에 겁을 집어먹고……."
그 말에 양과가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이름 있는 대협도 아니고 허리에 목검을 차고 있을 뿐인데 무서울 게 뭐란 말씀이오?"
주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계산대로 돌아가 버렸다. 양과는 음식을 먹고 나서 품 속에
서 은자를 꺼냈다.
"계산합시다."
그러자 주인이 어쭙잖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대협님의 은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내가 강도라도 된단 말이오?"
그 말에 주인은 겁이 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양과는 기분이 나빠서 은자 하나를 던져주고 술집을 나왔다. 말에 올라 마을을 빠져나오면
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군. 타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슬금슬금 피하고 밥을 주고도
돈을 안 받으려 하다니.'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말을 달리자 눈 앞에 성이 하나 나타났다. 입구에는 금빛 나는 글씨
로 '철검보(鐵劍堡)'라고 씌어 있었다. 이 철검보라는 마을은 강남에서 유명한 곳으로 성 안
에 사는 사람마다 검을 쓸 줄 알았고 보주(堡主) 사도인(司徒仁)은 내공이 대단하고 검술이
뛰어난 데다가 음양칠검(陰陽七劍) 설칠검(薛七劍), 장홍일검(長虹一劍) 유여홍(柳如虹), 만
리비선(萬里飛仙) 주만리(周萬里), 귀사신차(鬼使神차) 임소차(林小차)라고 불리는 네 검객을
수하에 두고 있었다. 이 네 검객은 비록 이삼심살 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었지만 벌써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양과는 철검보의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한
여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양공자님, 당신이시군요?"
양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지만 거리가 멀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 여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 무채접이에요. 왜 절 모르는 척하나요?"
그 여인은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성문을 열리자 그 여인은 붉은 조랑말을 타고
양과 앞으로 달려나왔다.
양과가 바라보니 과연 무채접이었다. 5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무채접은 다 큰 처녀로 자
랐고 그 전보다 키도 컸고 몸매도 날씬해져 더욱 아름다웠다. 양과는 반가워하며 입을 열었
다.
"과연 무채접 아가씨였군."
무채접이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늘 저를 접아(蝶兒)라고 부르셨는데 왜 갑자기 점잖게 구세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언제 접아라고 부른 적아 있었나?'
무채접이 뒤쪽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양효비, 이 곳엔 엿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점잔 떨 것 없다구요."
양과는 그제서야 짐작이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무채접이 자기를 양효비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양효비와 이 무소저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점심 때 요기하러 들어갔던
마을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겁을 내고 슬금슬금 피한 것도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일이었
다. 그러고 보니 양효비란 놈이 내 모습으로 변장해서 나쁜 짓을 한 게 틀림없어. 그래서 만
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는 겁을 내고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거지.'
무채접은 양과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속상한 듯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양효비, 당신은 진짜 신조협도 아니면서 왜 점잔을 떠는거죠? 어서 절 따라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철검보 쪽으로 말을 몰았다. 양과는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무…… 접아, 임잔 이 곳에서 뭘 하나?"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절룩거리면서 되물었다.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 걸요. 당신은 가흥의 철창묘로 가신다면서 왜 이 길로 가시나요?"
그 말에 양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 양효비가 가흥 서호가의 철창묘로 가려 했구나. 근데 그가 왜 그곳으로 가려 하는 거
지?'
무채접이 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교태를 떨었다.
"당신은 이 곳에 저를 보러 오셨지요?"
양과가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채접이 또 종알거렸다.
"이봐요, 당신은 가는 곳마다 정을 주면서 얼마나 많은 양갓집 규수들을 짓밟았나요? 난 당
신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미련을 버릴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요. 모
두들, 모두들 색마인 당신을 미워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채찍으로 양과의 잔등을 가볍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양과는 무채접
이 자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그
래서 그도 양효비 흉내를 내고는 히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난 접아와 늘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처녀들을 집적거리게 되는 거야. 그건 모두
접아 때문이지."
무채접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말했다.
"백주에 그런 말을 하다니 얼굴도 두껍군요. 난 양갓집 규수예요. 당신이 매파를 내세워 정
식으로 청혼하기 전에는 손가락 하나 건드릴 생각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양과는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양효비가 그렇게 비열하게 구는데도 이 아가씬 그런 놈에게 정을 주고 있구나. 정말 이해
할 수 없군.'
무채접은 양과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흥, 분명 또 오군영을 생각하는 거죠?"
그러더니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후, 요 몇 년 간 당신은 그 여잘 내내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 오소저는 신조협 양과를 맘
에 두고 있단 말예요. 그 여자가 비록 당신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지만 당신은 그녀를 차지하
지 못하고 말 거예요, 그 오소저는 정조를 양과에게 바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아예 그런
생각일랑 꿈에서도 하지 마세요."
양과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어지러워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무채접이 말했다.
"속으로 내키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지요. 당신은 양과보다 무공도 못하고 명성도 없기 때
문에 아무런 인기도 없어요. 그저 가짜 신조협 노릇만 할 뿐이지 저를 빼놓고는 당신을 진
심으로 좋아하는 여인은 없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양과는 마음이 착잡했다. 양효비에게 시집가겠다고 해놓고 오군영은 왜 자기
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자기는 소룡녀를 빼놓고 그 어떤 여인도 마음에 두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이건 안돼!"
그러자 무채접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뭐가 안된다는 거예요? 오군영이 5년 동안 당신을 만나지 않은게 다행이고 당신이 강호에
서 양과로 변장하고 다니는 것을 모르는 게 더욱더 큰 다행이죠. 만일 이런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더욱 당신을 멸시하고 깔볼 거예요. 오소저가 당신이 양갓집 여인의 정조를 짓
밟는 패륜아란 것을 알게 되면 당신에게 시집가려고 하겠어요?"
양과는 양효비를 구해주다가 채설주 독에 중독되었는데 뜻밖에 양효비가 남을 해치는 살인
마가 되어 갖은 악행을 일삼으며 또 도처에서 자기 이름을 더럽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래서 양과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은혜를 모르는 놈은 천벌을 받을 거야."
그러자 무채접이 당연하다는 듯이 당돌하게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당신은 바로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어요. 당신은 양과의 이름을 더럽혔어
요. 당신은 여인들을 농락하면서 또 오소저와 양과에게 나쁜 맘을 먹고 있어요. 한 번에 세
가지 이득을 얻으려 하고 있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양과를 흘낏 보면서 푸념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바로 당신의 그런 교활함을 좋아한단 말예요."
양과는 크게 탄식하면서 양효비를 만나기만 하면 기어이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철검보에 들어서자 철검보의 제자가 나는 듯이 보고를 올리러 달려갔다. 보주 사도인이 십
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사도인이 양과를 보고 예를 올리면서 인사를 했
다.
"소인이 장세사자(長勢使者)를 영접하러 나왔소이다."
양과는 잠시 흠칫하고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어떻게 장세사자가 되었단 말인가? 양효비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양과는 도대체이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어 물었다.
"저는 사도인이라고 하는데 사자와는 한 번 대면했던 인연이 있소이다."
그 말에 양과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인은 철검보의 보주이고 명망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양효비 같은 소인배를 공경하게
대하는 것일까? 아마도 저 사람은 이 양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무슨 장세사자라는 이름
을 두려워 하는 것일 게다.'
"양공자님, 당신 왜 그러세요? 사도인 보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잊었단 말씀예요?"
무채접이 말하자 사도인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교화사자(敎化使者)님, 그만 웃기시오. 양대협님께서 공무다망하시어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양과는 무채접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무채접이 교화사자라니…… 분명 양효비와 같은 무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문파
에 소속 되었기에 철검보를 굴복시킬 수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들은 철검보의 의사청(議事廳)으로 들어갔다. 사도인은 양과와 무채접을 가운데 자리에 앉
히고 자기와 제자들은 그 양옆에 앉았다. 양과는 본래 사양하려고 했으나 무채접이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가운데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 자기도 무채접의 옆에 앉았다. 양과는 당분간
본색이 드러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 차림인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민
첩했다. 그 노인은 머리칼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색은 울긋불긋하여 마치 노완동
주백통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주백통처럼 익살스러워 보이지 않고 아주 흉악
해 보였다. 그는 손에 커다란 철간(鐵 )을 들고 있었는데 힘깨나 쓸 것 같아 보였다.
무채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과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무채접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
었다.
"청룡타주(靑龍舵主)님, 누가 왔나 보실래요?"
그 노인은 양과를 힐끗 바라보고선 아니꼬운 듯한 인상을 짓더니 무채접의 다른 한 옆쪽에
앉으면서 말했다.
"난 이미 장세사자가 왔다는 말을 들었수다. 저 사람은 자기 일을 보러 가지 않고 이곳에
와서 뭐하는 게요?"
양과가 무채접에게 속삭였다.
"청룡타주가 화가 난 것 같은데, 난 저 사람의 미움을 산 적이 없소."
그러자 무채접도 양과에게 귓속말을 했다.
"호청룡(胡靑龍) 저 늙은이는 늘 당신을 곱지 않게 보고 있으니 저 사람 신경 건드리는 일
은 하지 마세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채접 저쪽에 있는 호청룡에게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면서 인사했
다.
"청룡타주님 안녕하시오?"
"이 호씨는 물론 잘 있소. 그래 당신은 내가 불편하기를 바라고 있소?"
호청룡은 철간을 발 앞에 세워놓고 시비를 걸 듯 말을 받았다.
양과는 면박을 당하자 머리를 굴렸다.
'양효비는 이 무리들 속에서 인간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한 양과는 입을 다물고 더 말하지 않았다.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제자 한 사람이 와서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다고 알리자 모두 식당으
로 갔다.
식당에는 십여 개나 되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양과, 무채접, 호청룡과 사도인이 상좌에
앉고 수십여 명이나 되는 철검보의 소두목들이 각기 나머지 상에 앉았다.
사도인이 웃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장세사자가 이렇게 갑자기 왕림하실 줄 모르다 보니 술과 요리가 시원찮습니다. 양해해주
시기 바랍니다. 내일 정식으로 술좌석을 마련해서 사자님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양과가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해진미가 따로 없군요. 전 만족합니다."
그 말을 듣고 무채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양효비가 오늘은 어째서 이런 태도로 나올까? 이전 같으면 한바탕 욕설을 해댔을텐데.'
양과의 활달한 태도를 보고 그녀는 적이 기쁜 마음이 되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어. 저 사람은 반드시 이후 큰 사람이 될 거야.'
사도인이 술잔을 들고 일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방주님께 영광 있으시길! 그 분께서 무림을 통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뭇사람들도 분분히 일어나 손에 술잔을 들고 말했다.
"방주님께 영광 있으시길! 그 분께서 무림을 통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양과는 이것이 무슨 의식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하는대로 따라했다. 그 의식이 끝나자 모두
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사도인이 친히 양과, 무채접, 호청룡에게 안주를 권하고 술을 따랐는데 태도가 아주 극진했
다. 양과는 약간 사양하는 척하다가 한나절 길을 서둘러 오느라고 배가 몹시 고팠기에 누구
보다 먼저 수저를 들었다.
호청룡은 아직 젓가락도 들지 않고 왼쪽 첫 번째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네 사람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네 사람은 사내 셋에 여인 하나였는데 모두 용모가 준수했고
거동으로 보아 평소에 무공을 잘 닦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호청
룡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왜 아까 일어나지도 않고 입도 열지 않은 거요?"
사도인이 급히 호청룡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저 분들은 방금 장성 이북에서 돌아오다보니 이 곳의 규칙을 모르고 있지요. 청룡타주님께
서는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호청룡은 그제서야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사도인이 그 세 사나이와 한 여인을 힐끔 살펴보더니 호청룡에게 술안주를 집어주었다. 그
러자 호청룡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사보주님, 당신은 정말 친절한 분이시오. 하하하."
사도인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지요."
그러자 호청룡이 눈알을 부라리면서 소리쳤다.
"저가 아니라 소인이라고 하란 말이야. 알아들었나?"
사도인은 황망히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인, 알아들었습니다. 알아듣고 말고요."
"청룡타주님, 저 분이 일시 실수한 것이니 너무 그리 따지지 마세요."
무채접이 사도인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자 호청룡이 큰 소리로 말했다.
"사도인은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반감을 품고 있는 거요. 이 호씨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
떻게 저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단 말이오?"
그때 그 네 사람 가운데서 영준해 보이는 한 젊은이가 식탁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청룡타주님, 말씀이 지나치시오. 사도인 보주님을 좀 존중하란 말입니다."
그러자 호청룡이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소리쳤다.
"넌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 호씨에게 대꾸하는 게냐?"
사도인이 또 급히 다가와 말렸다.
"타주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들은 모두 방금 와서……."
호청룡이 말허리를 자르며 사도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저 놈들이 장성 이북에서 갓 돌아왔다는 것은 이 호씨도 알고 있어. 그런데 어쨌단 말이
야? 그래 돌아와서는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야? 이 호씨는 임자가 저 건방진 놈들을 어떻게
처치하는지 두고볼테야."
호청룡이 이렇게 말하자 그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함쳤다.
"우리 보주님을 어서 놓으란 말이오."
호청룡은 너무 화가 나서 수염마저 부르르 떨렸다. 그는 철검보의 제자들이 무례하게 달려
드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반란이다 반란이야! 사도인, 어서 저 놈을 끌어내 참수하란 말이야."
호청룡이 이렇게 소리 지르자 사도인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무채접에게 와서 도움을
청했다.
"교화사자님, 당신이 좀 청룡타주에게 사정해 주십시오. 저 제자는 정말 방금 돌아왔기 때문
에 이 곳의 새 규칙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채접이 쌀쌀한 태도로 말했다.
"저 젊은이는 성미가 너무 급하니 잘 다스려야겠어요."
사도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할 수 없다는 듯 그 영준한 젊은이에게 다가가서 큰소리를
쳤다.
"네 놈이 담도 크구나. 그래, 아직 물러가지 않고 뭐하는 게냐?"
"잠깐 기다려."
호청룡이 손으로 막으면서 그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를 불러세우고는 거드럼을 피웠다.
"네 이름이 뭐냐?"
그 영준한 젊은이는 사도인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자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전 주만리라고 합니다."
호청룡이 일어나는데 그 눈빛이 각별히 흉악해 보였다.
"그 유명한 사대검객 중 하나인 만리비선 주만리였구나. 넌 마땅이 소인이라고 자칭해야 돼.
알겠느냐?"
호청룡이 이렇게 말했지만 주만리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떳떳하게 말했다.
"이 주모는 철검보의 제자로서 보주님의 호령만 들으며 따라서 보주님 앞에서만 소인이라고
자칭할 따름입니다."
"대담하구나."
사도인이 식탁을 손으로 치면서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이 곳은 네가 건방지게 나설 만한 곳이 아니야."
사도인은 주만리가 호청룡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형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주만리를 어서 나
가라고 호령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호청룡에게 웃는 얼굴로 굽신거렸다.
"타주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십시오. 저 주만리란 녀석은 말할줄 모르는 놈입니다. 소인이 타
주님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는 술잔을 들고 호청룡 앞에 가서 술을 권했다.
호청룡이 손으로 술잔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린 후 잽싸게 주만리에게로 다가가서 소리쳤다.
"주만리, 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주만리가 손으로 검자루를 잡은 채 노기 어린 표정으로 호청룡을 쏘아보았다. 호청룡이 손
에 든 큰 철간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그래, 내게 손을 쓸 셈이냐?"
그러자 한 중년 사내가 일어나서 주만리를 눌러앉혔다. 그리고 그는 좌석에서 일어나 호청
룡에게 다가와 읍을 하고 나서 사정했다.
"전 설칠검이라고 합니다. 저의 셋째 동생이 괜한 성질을 부린 것 같습니다. 청룡타주님께서
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호청룡은 설칠검을 아래 위로 자세히 뜯어 보고 나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들 설칠검의 음양철검 초식은 귀신도 당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그게 진짠지 가짠지 모
르겠구먼."
그러자 설칠검이 예의 겸손을 떨며 대답했다.
"저의 무공은 보잘 것 없고 검술도 시원찮습니다. 음양칠검이란 이름도 그래서 생긴 것입니
다. 강호 친구들이 놀리느라고 달아준 거지요."
호청룡이 설칠검 뒤에 있는 사내와 여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마 사대검객 중 장홍일검 유여홍과 귀사신차 임소차이겠구먼?"
설칠검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저의 둘째 동생과 넷째 동생입니다."
"잘 됐군. 사대검객이 모두 모였구나. 이 호씨가 한 수 가르쳐 주마."
호청룡은 껄껄거리며 큰 소리로 웃더니 네 검객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즉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인이라고 해라."
실내는 쥐죽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사도인은 긴장된 모습으로 네 명의 애제자들을 주시
했다. 호청룡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이젠 더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니 천명에 맡기고
네 제자가 순조롭게 고비를 넘기기만을 속으로 빌고 있었다.
양과가 무채접에게 속삭였다.
"이건 너무하지 않소?"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흘기면서 나무랐다.
"당신도 좀 배워야겠어요. 언제부터 마음이 그렇게 연약해졌어요? 당신은 비록 방주님을 본
적은 없지만 방주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해요. 무림을 통일하려면 반드시 무력으로 위협해서
사람들을 복종시켜야 해요. 그래야 감히 반역할 생각을 못하게 되는 거예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은 아주 잔학하고 냉혹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데……. 아마도 이 사람들의 방주라는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호청룡이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소리쳤다.
"무릎을 꿇어라."
사도인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면서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설칠검, 유여홍, 주만리, 임소차! 너희 넷은 어서 무릎을 꿇어라."
설칠검이 가소롭게 여기고는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틀어쥐었다. 호청룡이 맨발로 바닥을 탁
구르며 위협했다.
"본 타주의 명령에 항거하면 어떻게 되는 줄 모르느냐?"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사내 대장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설칠검은 떳떳한 남아의 기상으로 말하면서 보주 사도인을 바라보았다. 사도인은 창피한 기
색으로 머리를 숙이면서 감히 제자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호청룡이 소리쳤다.
"죽는 것보다 더 처참하게 되고 말 거다. 듣기에 음양칠검을 대적할 자가 없다더구나. 그래,
이 호씨가 견식을 넓혀 보고자 한다."
호청룡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곧장 다가오는데 비록 나이는 쉰이 넘었지만 신
법은 아주 빨랐다.
설칠검은 얼른 검을 뽑아들었다. 두 장 남짓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그 싸늘한 검기(劍氣)를
느낄 수가 있었다. 곧이어 한 갈래의 검망(劍綱)이 설칠검의 몸 앞을 감싸며 막아섰다.
양과도 검을 쓰는 사람이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훌륭한 검술이로군!'
설칠검의 검망은 늘어났다 수축됐다 하면서 음칠검(陰七劍), 양칠검(陽七劍)의 각 하나씩의
검이 칠검으로 변해 도합 98검이 되었다. 이것이 두 갈래의 검벽(劍壁)을 이루면서 좌우 양
쪽에서 호청룡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호청룡이 약간 뒤로 물러서자 두 갈래의 검벽이 하나
로 합쳐지면서 곧장 앞으로 찌르고 나오는 것이었다.
호청룡은 두 눈을 부릅뜨고 천신(天神)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기합을 지르며 철간을 휘둘러
검벽 복판을 들이치고는 즉시 철간을 회수하면서 훌쩍 뒤로 물러났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벽이 갈라 터지면서 검우(劍雨)가 사방으로 날렸는데 설칠검의 손에는 검자루만 남아 있
었다. 다시 보니 설칠검의 머리도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머리 없는 몸뚱이가 털썩하고 쓰러졌다.
철검보의 제자도 모두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설칠검의 음양칠검 초식이 방금 시전되어 위력이 미처 완전히 발휘되기도 전에 호청룡의
철간에 맞아 머리가 박살나다니? 당연히 호청룡의 무공은 보주님의 무공보다 아주 높을 것
임은 명약관화다.'
사대검객 중 나머지 세 검객은 설칠검의 비참한 죽음을 보자 비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유
여홍이 뛰어나와 의형(義兄) 설칠검의 수급과 시체를 벽쪽으로 갖다놓고 눈물을 흘렸다.
"형님, 이 아우가 원수를 갚아드리겠습니다."
유여홍은 곧 검을 뽑아들고 호청룡에게 달려들었다.
유여홍은 장홍일검으로 유명했다. 그는 이 절기로 일찍이 호두산(虎頭山)의 용호표(龍虎豹)
삼형제를 한 칼에 요절냈던 것이다. 그는 그 이름난 절기 장홍일검의 초식을 펼쳤다.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섰다가 갑자기 튀어오르며 공중에서 사람과 검이 일체가 되어 일직선으로 호
청룡에게 날아들었다. 도중에 검끝이 바르르 떠는가 싶더니 여덟 송이의 검화(劍花)를 그림
으로써 호청룡이 피할 곳을 봉쇄했다.
양과로 말하면 검술로는 당세에 따를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장홍일검 초식의 허점을
파악하고는 못내 아쉬워했다.
'장홍일검 초식은 맹렬하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방어에 소홀한 측면이 있구나. 만일 내력
이 청룡타주에게 못미치면 당장 피를 토하고 죽고 말 것이다.'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호청룡의 큰 철간이 옆으로 날아들었다. 호청룡은 그 여덟
송이의 검화에 현혹되지 않고 곧장 유여홍 쪽으로 철간을 휘둘러 유여홍의 검끝을 들이쳤
다. 검과 철간이 맞부딪치며 울려나오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튕기더니 유
여홍의 검도 설칠검의 검과 마찬가지로 산산조각이 났다. 유여홍은 미처 몸을 수습할 사이
도 없이 '앗' 하는 순간에 호청룡의 철간이 유여홍의 머리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호청룡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두르자 유여홍의 시체는 벽쪽에 있는 설칠검의 시체 옆으로
날아가 철썩하고 떨어져 뇌수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호청룡은 철간을 입으로 가져가 혀끝으
로 거기에 묻은 피와 뇌수를 깨끗이 핥고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 모습에 뭇사람들은 모두 두 눈이 휘둥그래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양과도 놀라서 무채
접에게 속삭였다.
"저 청룡타주는 짐승이로군."
무채접은 고개를 돌리고 메스꺼움을 참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요? 저 분은 인육까지 먹는대요. 그것도 산사람의 고기를 말예요.
사람을 붙잡아서는 깨끗이 씻지도 않고 한입 한입 뜯어 먹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다가 토할 것 같았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양과는 한 숨을 쉬고 나서 또 속삭였다.
"설칠검, 유여홍의 검술이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자면 적어도 십 년의 노력이 필요했을텐데,
애석하게도 자질이 썩 뛰어난 사람들은 아니었군. 그 검망은 매우 출출해서 파리조차 그 속
을 뚫고 지나갈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음양칠검의 초식을 극한에 이를 정도로 익히지 못한
거야. 음칠검과 양칠검이 서로 합쳐질 때 한 곳에 자그마한 틈이 생긴 게 보이던데 바로 이
틈을 청룡타주가 노렸던 거야."
무채접은 마치 생면부지의 사람을 대하듯이 양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긋 웃으며 말했
다.
"이번에 강호를 돌아다니더니 당신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남의 무공을 그렇게 정
확하게 평가하다니, 도중에 신선을 만나 가르침이라도 받았나요?"
양과는 웃기만 한 채 아무 말이 없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그까짓 것쯤은 나 스스로도 깨우칠 수 있는 거지 뭐."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흘기면서 나무랐다.
"그 몇마디를 듣고 보니 당신같아 보이지 않아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군요."
"날 비웃는 거야?"
양과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채접을 간지럽혔다. 무채접이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깔깔거렸다.
"그러지 말아요.또 싸움이 시작될 것 같아요."
그때 만리비선 주만리와 귀사신차 임소차가 한꺼번에 뛰어나왔다. 그들은 사대검객에 속함
과 동시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비록 혼인을 언약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다녀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청룡 앞에 나란히 섰다. 비록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지만 그 수려하고 영준
한 용모만은 감출 길이 없어 마치 벽옥으로 깎아 만든 한 쌍의 조각품 같았다. 그들을 보면
서 양과는 자기도 모르게 '훌륭한 한 쌍이군!' 하고 혼잣말을 했다. 소룡녀와 헤어진 후 갖
은 고통을 맛본 그는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
물이 핑 돌았다. 무채접은 당장 벌어질 싸움에 주의를 집중하느라 양과의 감상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만약 봤더라면 무채접은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캐물었을 것이다.
주만리가 검으로 호청룡을 가리키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빚을 졌으면 돈을 갚아야 하는 법이다. 늙은이, 각
오는 돼 있겠지?"
임소차도 한마디 했다.
"셋째 오빠, 저런 악마와는 긴 말 할 필요도 없어요."
임소차는 그렇게 말하며 검으로 찌르려 했다.
호청룡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 대 일로는 안되겠으니까 둘이 함께 달려 드는구나. 하하하, 잘 됐다. 수고를 덜 수 있으
니까. 그래, 이 늙은이가 너희 두 연놈들과 한바탕 질펀하게 놀아주지."
호청룡은 철간으로 임소차의 검을 막으며 아래쪽을 휩쓸었다.
임소차도 두 발로 바닥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철간이 그녀의 발밑을 휩쓸
고 지나갔다. 주만리가 호청룡의 정수리 위로 솟구쳐 오르면서 검으로 그의 뒷덜미를 찔렀
다. 호청룡이 기합을 지르며 몸을 낮추어 검을 피하더니 뛰어오르면서 철간으로 주만리를
내리쳤다. 호청룡은 비록 체구가 크고 쉰이 넘은 나이였으나 경공술은 훌륭했다.
주만리는 미처 검으로 막을 사이가 없자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며 옆으로 석 자 남짓 비켜났
다. 그는 만리비선의 별호답게 확실히 경공술이 뛰어났다.
세 사람이 모두 바닥에 내려섰다. 임소차가 구사하는 검술의 날카로움은 사내 못지 않은 것
이었다. 주만리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아래쪽을 향해 검을 내리 찔렀는데 그 기세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의 검술은 비록 유여홍보다는 못했지만 임소차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그는 경
공술이 뛰어나 허공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었으므로 여러 번의 공격을 가한 뒤에야 바닥에
내려서곤 했다. 그래서 경공을 이용한 검술공격이 호청룡을 아주 괴롭혔다.
호청룡은 싸울수록 힘이 넘쳐나듯 용맹해졌고 공격 기세 또한 더욱 날카로워져 상대방이 미
처 몸을 가다듬기도 전에 초식을 바꾸곤 해 이 대 일의 싸움이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
다.
양과는 구경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그것을 보고 무채접이 물었다.
"왜 그러는 거죠?"
양과는 계속 싸움을 지켜보다가 대답했다.
"주만리와 임소차의 무공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결과가 좋지 못하겠는데."
"내가 보기엔 아주 걸맞은 호적수 같은데 당신은 저 젊은 남녀가 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청룡타주는 내공이 심후하고 무공이 뛰어나기에 시간이 길어지면 꼭 그들의 허점을 찾아낼
거요. 그러다가 갑자기 초식을 바꿔서 저 두 젊은 남녀들을 요절내 버릴 거요."
그러자 무채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호청룡의 무공을 이미 그렇게 다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난 아주 유감스러울 따름이오."
"뭐가 유감스럽단 말예요?"
"주만리와 임소차는 전도가 창창한 인물들인데 이제 죽게 되었으니 유감스럽지 않소?"
무채접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당신은 원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혈인이 아니던가요? 아마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여색에 마음이 동해서 그런 것 아녜요? 흥, 임소차의 젊고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 그러는 것이지요. 저 새하얀 피부에 마음이 끌린다면 가서 도와주시지 그래요."
"난 그럴 생각도 없고 게다가 난 저 여자를 이길 수도 없어."
"그따위 거짓말을 누가 믿어요. 나라도 십 합만 싸우면 저 계집애를 이길 자신이 있는데 당
신은 나보다 무공이 높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을 누가 믿겠어요?"
양과는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양효비에게 그만한 무공이 있었단 말인가? 그 자식의 잔꾀는 곽백모 황용을 능가할 정도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상황이 돌변했다. 주만리의 검 쓰는 속도가 빨라져 공중에서 연신 열 번의 연쇄공격을
가하더니 호청룡의 전후좌우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임소차가 오른손의 검으로 호청룡의 철
간을 견제하면서 왼손을 언뜻 후두부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 개의 금비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쏜살같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절기인 귀사신차의 초
식이었던 것이다.
양과는 생각했다.
'호청룡의 전후좌우가 주만리에게 봉쇄된 데다가 철간까지 임소차의 견제를 당하고 있으니
아마 귀사신차의 초식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때 무채접이 말했다.
"저것들이 죽으려고 저러나?"
양과가 그 이유를 물으려고 하는 찰나 두 마디의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호청룡이 위험한 찰나 갑자기 손에 들었던 철간을 놓아 버리고 훌쩍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주만리는 검으로 사방을 봉쇄하는 데만 골몰하다보니 그가 위로 빠져나가리라
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허를 찌르고 호청룡이 장법으로 주만리의 가슴에 일격을
가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만리의 흉골이 부서지고 말았다. 호청룡은 주만리가 통증
때문에 공격을 멈춘 틈을 타서 공수탈도(空手奪刀)의 초식으로 그의 검을 빼앗아서 임소차
에게 던졌다.
임소차는 자기의 귀사신차의 초식이 실패하자 멍하게 서 있었는데 그만 날아오는 검에 가슴
팍을 찔렸다. 내공을 실어 던진 검이기에 가슴팍을 관통하고 벽에 가서 꽂혔다.
호청룡은 바닥으로 가뿐히 내려와 다시 철간을 들고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주만리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가까스로 임소차의 곁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겨우 한마디 했다.
"누이동생, 난…… 난 영문을 모르겠어."
"저 놈이 어떻게…… 사대검객의…… 허점……을 알지요?"
임소차는 입가로 피를 벌컥벌컥 내쏟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주만리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비통한 모습으로 머리를 들어 보주 사도인을 쏘아보며 물었
다.
"보주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도인은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호청룡이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발로 주만리를 걷어찼다.
"이 멍청한 자식아, 똑똑히 알고나 죽어라. 사대검객이 절기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절기라도 허점은 있게 마련이야. 잘 생각해봐. 너희들의 허점을 너희들 말고 또 누
가 잘 알고 있는지 말이다."
주만리가 놀란 기색으로 사도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보주님, 그러면 보주님이…… 우리들의 약점을 저 놈에게 알려주었단 말입니까?"
사도인은 입을 굳게 다문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만리는 안색이 달라지며 이를 악물었다.
"보주님, 당신은 우리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분이신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해친단 말입니
까?"
사도인이 탄식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하는 수 없었다."
주만리는 얼빠진 듯이 있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고는 입으로 선혈을 분수처럼 쏟으며
고꾸라져 버렸다.
이 참상을 본 철검보의 제자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검
자루를 거머쥐고 결사적으로 싸우려 했으나 보주라는 사람이 이미 남의 수하가 된 처지이고
또한 목숨을 걸고 싸워 봤자 모두 호청룡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목숨만 잃을 것이 뻔했다.
호청룡이 고함을 쳤다.
"금후부터 누구든 본 방을 감히 배반한다면 이런 꼴을 당하리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리고 나서 그는 사대검객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 다시 식탁에 앉아 기분좋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양과는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느 문파에 속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철검보의 보주와 그 제자들이 이
처럼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것일까? 무소저가 이 무리의 교화사자라니. 그렇다면 용녀는
언니이므로 역시 이 사교(邪敎)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용녀는 성격이 온화하고 심
지가 착한 여인인데 어떻게 이런 사교의 인물들과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용녀
는 남해신니가 아닌 딴 사람에게 끌려간 것이 아닐까? 무소저도 천진난만한 성품을 지닌 여
잔데…… 그렇다면 이 여자도 살인귀란 말인가?'
양과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머리가 복잡해져 얼떨떨해졌다.
무채접이 속삭였다.
"전 음식을 먹을 수가 없네요. 양공자님, 우리 밖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가죠."
양과도 피비린내 나는 장소에 앉아 있기 싫었기에 일어나서 무채접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서야 무채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근심이 가득한 기색으로 입을 열
었다.
"날마다 사람 죽이는 일이 생기니 정말 메스꺼워요."
"두려운가?"
"습관이 돼서 무서울 것은 없어요."
양과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게 싫다면 왜 떠나지 않지?"
무채접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을 놀리는 것을 재미로 삼는군요. 그래, 당신은 감히 떠날 수 있겠어요?"
"왜 못해? 난 간다고 말하면 가는 사람이야, 아무도 날 말릴 수는 없어."
무채접이 손가락으로 양과의 이마를 힘껏 찌르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 언니처럼 자유롭게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당신은 독이 퍼지는 게
두렵지 않나요?"
양과가 손을 떨면서 물었다.
"언니? 언니는 지금 어디 있소?"
무채접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색마같으니라구. 언니가 어떤 사람이라고 당신 같은 색마가 넘봐요. 언니의 검에 찔려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참 이상하네요. 평소에 당신은 언니만 보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더
니만 지금은 바람기 있는 말을 다하네요. 갈수록 대담해지는군요. 당신 같은 색마와 살인귀
는 남겨 둬서는 안된다는 말이 옳긴 옳아요. 차후 계책을 꾸며 방주 자리를 빼앗으려 할테
니까요."
양과는 못들은 척하고 졸라댔다.
"무소저, 언니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난 언니를 만나고 싶어."
무채접은 놀란 표정으로 양과를 바라보더니 뽀얀 손바닥을 양과의 이마에 갖다댔다.
"열이 있는 것 아녜요? 정말 언니가 당신에게 화내는 것이 두렵지 않나요?"
양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난……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무채접이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조금도 내 생각은 하지도 않는군요?"
양과는 정신이 들어 웃으면서 대꾸했다.
"접아, 나의 귀여운 접아. 난 긴요한 일을 당신 언니에게 알리려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
어."
"정말이에요?"
양과는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무채접은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당신은 입에다 꿀을 잔뜩 바르고 다니는 사람예요.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다니까
요."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용녀를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괜찮아.'
제14장 교언영색
양효비가 호송마차에 돌아와 보니 오군영은 그 속에서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양효비
는 안심하고 호송대열에 급히 떠나라고 명령했다.
어둠이 내리자 수교장은 말에 채찍을 가해 양효비가 타고 가는 마차 밖에 와서 물었다.
"양공자, 이젠 날이 퍽 저물었는데 계속 길을 가시려오?"
양효비가 마차 안에서 대답했다.
"물론 계속 가야지요. 뿐만 아니라 되도록 빨리 가야 합니다. 그 이리 같은 놈에게 따라잡히
는 날에는 당신이나 나나 다 살아남지 못할테니까요."
그가 말하는 이리란 양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은 양효비 자신이 양과로 변장하고 있
는 만큼 그 이름을 그대로 쓰기가 불편했던 까닭이었다. 수교장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
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양공자는 주백통 선배님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어. 생각이 아주 주도면밀해서 나 같은 사람
은 통째로 찜쪄 먹을 수도 있을거야.'
날이 몹시 어두워지자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호송대열의 전진 속도는 매우 더뎠다.
오군영은 잠이 깨자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옆에 누군
가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당신은 누구세요?"
오군영이 물었다.
그러자 양효비가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임잔 목숨을 구해준 은인마저 잊었단 말이오?"
오군영은 낮에 일어났던 일을 얼핏 기억해 내고는 변명을 했다.
"제가 술을 지나치게 마셔 취했었나 보군요."
"취하기만 했었겠나? 아주 인사불성이었지."
오군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허리끈
이 많이 늦추어진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제가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요?"
"사내 대장부가 술에 취해 옷 좀 벗어던지는 거야 탓할 일도 아니지."
그 말에 오군영은 깜짝 놀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정말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오군영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양효비는 어둠 속에서 머리를 끄덕였다. 오군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큰일났구나. 저 사람이 내 몸을 봤으니 남자로 변장한 사실을 알았을텐데. 어쩌면 좋지?'
5년 전에 그녀는 나체로 양과에게 덤볐다가 거절당한 것을 지금껏 치욕으로 간주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술을 마시고 이렇
게 된 것이었다. 오군영은 얼굴이 새빨개지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히 밤이었으
니 망정이지 대낮이라면 상대방이 내가 당황해 하는 꼴을 빤히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양효비는 계속 이렇게 놀리다간 오군영이 창피한 나머지 화를 내게되면 뒷수습이 어렵겠다
고 생각했다.
"사실 악공자는 뱃살을 좀 드러냈을 뿐이고 다행히 이 마차 안에만 있었기에 딴 사람은 보
지 못했소. 우리 둘은 모두 사내들이니까 무방하지 않소?"
양효비가 이렇게 거짓말을 하자 오군영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사내에게 여인의
몸을 보게 했으니 아무리 취중에 일어난 일이라 해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난 악공자의 피부가 백설같이 희고 부드러운 것을 보고 깜짝 놀랐소. 혹시 묘령의 소녀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오."
양효비가 그렇게 말하면서 큰소리로 웃어대자 오군영은 아주 난처해졌다. 그래서 억지웃음
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양대협님은 정말 농담을 좋아하시는군요. 전 당당한 사내지 절대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 말에 양효비는 속으론 웃으면서도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오. 이 양모는 처음 보자마자 임자가 사내 대장부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비웃음이 섞인 말도 지금의 오군영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오군영이 또 갑자기 물었다.
"그러면 양대협님께서 제 옷섶을 여며 주셨나요?"
"산중의 바람이 찬데다가 술을 마신 뒤라 악공자가 감기나 들지 않을까해서 옷섶을 여며준
것이니 달리 생각하지 마시오."
그 말을 들은 오군영은 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양효비가 거듭 악공자라고 부르면서
안심을 시켜주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큰 수고라고 그러나? 하하, 임자가 다행히 여자가 아니었으니 그렇지 만일 여자였다
면 이 양모의 행동이 얼마나 경박한 것이었겠나? 아마도 원칠랑을 데려와야만 했을 거야.
원칠랑은 바람기가 좀 있는 여자라 악공자의 모습이 영준한 데다가 피부까지 희고 부드러운
것을 보았으면 상사병이라도 났을 거야."
양효비가 이렇게 말하면서 요란하게 웃어대자 오군영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래서 그는 양효비를 따라 대범하게 웃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쌍사자표국의 총표두 동진이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대협님, 앞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나 한번 가 볼까요?"
그는 원래 '마음에 드는 처녀'라고 말하려다가 그 마차에 또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하고선 이렇게 귀띔했던 것이다. 양효비는 지금 온통 오군영에게 마음이 쏠려 있어서 산촌
의 처녀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오군영의 면전에서 난봉꾼의 본색을 차마 드러
내서는 안 되었기에 급히 대답했다.
"임잔 먼저 가 보게. 나머지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동진은 자기 마차로 돌아갔다.
"마음에 드는 것이란 뭐죠?"
오군영이 물었다.
"오, 이 양모가 마음에 드는 제자 몇을 받아들여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 것이오. 그런데 유감
스럽게도 지금껏 괜찮은 사람들을 찾지 못했소. 동진 총표두는 열성적인 사람이라 나보다
더 서두르는 것이오. 저 사람은 '스승이 제자를 찾는데 삼 년이 걸리고 제자가 스승을 찾아
오는데 삼 년이 걸린다'는 이치를 잘 모르는 모양이오."
그 말을 들은 오군영은 멍해져서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인생은 짧고도 고달픈 것인데 마음 속의 벗은 찾기도 어렵구나. 어찌 삼 년 사이에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나 자신이 잘 처신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수밖에. 거와장에서 신랑감
을 얻으려고 한 일도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나만 이렇게 사내로 변장하고 강
호를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양효비가 마차 밖으로 나갔다. 오군영은 흔들거리는 휘장을 바라보
면서 계속 생각했다.
'저 사람의 몸놀림은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민첩하구나.'
아직도 오군영은 양효비가 신조협으로 변장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양효비는 시정삼걸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세 분들은 이제 행동하시오."
그러자 시정삼걸이 물었다.
"어떻게 행동하란 말씀이오? 양공자께서 분부를 내리시오."
양효비는 앞에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을에 방화하고 사방에다 신조협이 이 곳에 왔노라고 떠들어 대시오."
그 말에 퉁소 부는 선비가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백성을 해치는 일은 우리가 할 짓이 아니오. 난 정말 못하겠소."
그러자 양효비가 정색하며 말했다.
"대사를 이룸에 있어 백성의 가옥을 좀 희생시킨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뭐가 있겠소? 차후
모든 일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해도 그 오명은 모두 나 한 사람이 짊어지고 세 분들은 결코
연루시키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래 우리 시정삼걸이 이만한 일도 감당못한단 말이오? 부처님께서는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서 누구를 지옥에 들어가게 하랴'고 말씀하신 적이 있소."
초혼도사의 말이었다. 갑자기 부처님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면 이 자가 진짜 도사인지 아닌
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야 대장부답군요. 자, 절 따라오십시오."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 쪽으로 향했다.
시정삼걸도 급히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곧 마을에서는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가축들이 울부짖으며 백성들의 곡성이 울려 퍼졌다.
양효비는 시정삼걸들과 함께 닥치는대로 방화를 하고 잽싸게 돌아왔다. 그 후로도 양효비는
마을이나 성을 지날 때마다 시정삼걸들과 함께 신조협 양과의 이름을 내걸고 방화를 했다.
시정삼걸은 처음엔 꺼림칙하게 생각했으나 곧 익숙해져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양
효비는 그들에게 재물을 약탈하라고 시켰으며 심지어 사람까지 죽이게 했다. 시정삼걸은 점
차 그같은 일에 재미가 붙었는지 양효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략질을 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기 시작했다. 양효비는 또 민가의 여인들을 유린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다. 의협심이 강했
던 시정삼걸은 어느덧 악마로 변해 있었다.
양효비가 마차로 돌아오자 오군영은 마을에 웬 큰 불이 났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듣자니 마을에 강도가 들었다는 게요, 내가 시정삼걸을 데리고 갔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져버렸소. 우린 강도 몇 놈을 죽이고 은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소."
양효비의 거짓말에 오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양과는 이렇게 협의를 행하기에 사람들이 대협으로 부를 만도 하지. 이 사람은 부드럽고
남을 자상하게 돌볼 줄도 알지 않는가? 참, 저 사람이 소룡녀를 그렇게 못잊어하지 않았더
라면 난 저 사람에게 시집갔을 거야. 그런데…….'
오군영은 5년 전의 사건 이후 양과를 매우 미워했지만 요 사이 양과로 변장한 양효비가 목
숨을 구해 주고 술에 취한 자기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데다가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바람에
가슴속에 가득했던 분노가 어느새 온화한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양효비는 어둠 속에서 오군영을 바라보는 한편 속으론 계책을 세우며 말했다.
"악공자는 취중에 거와장 어쩌고 저쩌고 하던데 혹시 거와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니
오?"
오군영은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전, 다만 남들이 거와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따름이에요.
그래, 제가 뭐라고 허튼소리를 하던가요?"
"그렇단 말이오? 거 참, 이 양모는 거와장을 잊을 수 없는데……."
그러자 오군영이 마음이 끌려 물었다.
"양대협님께서는 거와장을 잘 알고 계시나요?"
양효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양모는 거와장의 사위가 될 뻔한 적이 있었소."
오군영은 전혀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것 참 재미있었겠네요. 말씀하시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양효비는 일부러 탄식하며 말했다.
"거와장 장주에게는 오군영이란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악기며 바둑이며 서화(書畵)며 온갖
재능을 다 갖춘 여자였소. 그 여잔 화용월태(花容月態)에다 색예쌍절(色藝雙絶)하다는 말을
들을 만했지요. 화를 내지는 마시구려. 임자는 어딘가 그 오소저를 닮은 구석이 있소. 그래,
내가 임자를 처음 봤을 때 아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오."
그 말을 듣고 오군영은 속으로 말대답을 했다.
'내가 바로 오군영인데 비슷하다 뿐이겠어요?'
"악공자, 이처럼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무공까지 아는 여인을 천하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소?"
오군영은 그가 자기를 칭찬하는 바람에 적이 마음이 흡족했다.
"하지만 양대협님께서는 유감스럽게도 오소저의 마음을 모르고 계시네요."
"허 참, 그걸 임자가 어떻게 아오?"
오군영은 말이 잘못 나갔음을 느끼고 말을 돌렸다.
"아까 당신이 거와장의 사위가 될 뻔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당신이 오소저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는 이야기 아녜요?"
양효비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악공자는 정말 총명하시군요. 거 참, 난 사람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그 좋은 인연을 놓쳐
버리고 지금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으니……."
오군영은 만연에 웃음을 띠고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듣자니 그때 거와장 사위로는 양효비라는 젊은이가 선택되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아니고
말예요."
양효비는 드디어 오군영이 낚시바늘에 걸렸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니까, 듣자 하니 그 양효비가 이 양모를 오해하고 분연히 거와장을 떠났다고 하더
군."
오군영은 비록 양효비에게 그다지 정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속으론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늘이 정해주는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
지요."
그러자 양효비가 말했다.
"듣자니 양효비는 5년 동안 이름난 스승을 모시고 열심히 무공을 닦아 이젠 일류 고수가 되
었다고 하더군."
오군영이 놀라며 물었다.
"양효비는 본래 무공이 시원찮았는데 어떻게 5년 동안 그처럼 돌비맹진(突飛猛進)해서 일류
고수가 됐죠?"
그러자 양효비는 득의양양해서 대답했다.
"이 양모는 양효비의 목숨을 구해줄 때 그가 무공이 시원찮은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가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머리도 좋은 것을 간파했다오. 그런데 그 후 양효비의 자질을 높
이 산 스승이 무예를 전수해서 일류 고수가 된 모양이오."
오군영은 양효비가 잘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또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 있나요?"
"듣자니 그 사람은 웅심을 품고 큰 일을 준비한다고 들었소만."
오군영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고 양효비가 또 입을 열었다.
"악공자, 하나 물어 봅시다. 오군영은 양모에게 시집와야 합니까, 아니면 양효비에게 시집가
야 합니까? 어디 임자가 한 번 말해보시오."
오군영은 망설였다.
'내가 만일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에게 반드시 시집가야 한다면 물론 신조협 양과를
선택할 거야. 그러나 난 5년 전에 뭇사람들 앞에서 양효비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던
가? 비록 화난 김에 내뱉은 말이기는 했지만 도로 담을 수는 없지? 만일 양대협의 말대로
양효비가 이미 고수가 되고 웅심을 품고 있다면……. 그런 그가 날 찾아온다면 그땐 난 어
떡해야 하나?'
양효비는 오군영이 대꾸가 없자 눈치를 살피며 또 말했다.
"내가 보기엔 오소저가 양효비에게 시집가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아."
그러자 오군영이 물었다.
"예? 그럼, 양대협님은 오소저에게 장가들 생각이 없단 말씀인가요?"
양효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 양과에게는 이미 소룡녀라는 아내가 있지 않나? 비록 잠시 이별하고 있기는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 잊을 수가 없다네. 하늘도 무심하지 않다면 나와 소룡녀를 반드시 만날 수 있
게 도와줄 걸세. 오소저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룡녀보다는 못하고 말고."
그 말에 오군영은 침울해졌다.
'나와 양과는 결국 인연이 없는 모양이구나.'
양효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소저에게 마음을 두었더라면 이미 5년 전에 장가를 갔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도 후
회하지는 않아. 그런데 양효비는 늘 오소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데 오소저와 혼인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어. 그땐 오소저가 그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깔보았지만 이젠 양효비
가 이미 고수가 되어 손짓만 해도 만 명의 사람들이 호응한다고 하더군."
오군영이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성공했는데 왜 저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을까요?"
그러자 양효비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고명한 점이야. 고인들이 말하기를 무공으로 이름이 나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았나? 큰 일을 성취한 후에야 이름이 나는 법이지. 지난날 전진교의 조사 왕중양도
명성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화산의 비무대회에서 일등을 하자 그 이름을 천하에 날리
게 되었던 거지. 양효비도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길을 가는 도중에 양효비는 오군영에게 갖은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객점에 묵을 때마다
되도록 오군영과 한 방에서 잠을 자려고 억지를 부렸고, 그렇게 해야만 친구 사이의 친분이
두터워진다며 의뭉스러움을 드러내고 했다. 오군영은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가 하자
는대로 했고, 또 변장한 것이 들통날까봐 두려워 옷도 벗지 못하고 잠을 잤다. 양효비는 일
부러 모르는 척하고 요란스럽게 코를 골았고 결코 오군영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
운 수단을 써서 오군영이 자발적으로 자기 품에 안겨야만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가흥에 이르러서야 양효비는 한 가지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
"악공자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길이오? 난 이번 여행길에서 참다운 벗을 만나 유쾌하기
짝이 없었는데 혹시 악공자의 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나 모르겠네."
오군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린 지금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전 가흥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내일
이면 도착하겠군요."
'저 여잔 가흥으로 가려는 게 아니고 거와장으로 돌아가려는 것일 게다.'
양효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선 오군영을 붙들어 둘 묘책을 떠올리고는 웃으면서 말했
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확도 일당들이 분명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을 걸세. 우리가 가
흥에서 작별하면 악공자가 그들에게 잡혀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오군영은 바로 그 점이 걱정되는 터라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양대협님께서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양효비는 잠시 궁리를 하는 척하다가 운을 뗐다.
"아마 이렇게 하는 것이……."
오군영이 다급히 졸랐다.
"이렇게 하다니요? 어서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양효비는 일부러 근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 계책이 묘하기는 한데 악공자를 난처하게 만들 것 같아서……."
"확도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지 참아낼 수 있어요."
양효비는 그제서야 결심을 한듯 오군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군영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머리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양효비가 말했
다.
"만일 악공자가 여인으로 변장하지 않는다면 벗어나기 힘드네. 임잔 준수하게 생겼으니 여
자로 변장하면 아주 근사할 거야. 그러면 확도의 무리가 절대 임자를 알아 보지 못할 걸세."
오군영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양과가 나를 알아 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확
도에게서 벗어나 자금소갑을 제때 가져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오군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양효비는 얼른 원칠
랑에게서 여자 옷을 한 벌 얻어다가 마차 안에 들여놓은 뒤 밖에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자 오군영이 불렀다.
"양대협님, 이젠 들어오세요."
양효비가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눈 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여장을 한 오군영이
앉아 있는데 마치 그림 속의 선녀 같았다.
양효비는 일부러 놀란 체하며 말을 더듬었다.
"임…… 임자가……."
오군영이 힐끔거리며 말했다.
"제가 어떻단 말씀예요?"
양효비는 말을 몹시 더듬거렸다.
"임잔 도대체 사낸가? 여인인가? 정말 눈에 익은 것 같은데……."
오군영은 5년 전보다 퍽 아름다워졌고 키도 커졌기에 양효비가 못 알아보는 것이라고 여기
면서 여전히 남자임을 강조했다.
"전 당당한 사내요."
양효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임잔 분명 오군영 소저야. 난 알 수 있어."
오군영은 그가 확실히 자기를 알아본 것을 확인하자 더는 속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요. 전 오군영이에요. 요 며칠 동안 양대협님을 속였으나 달리 생각하지는 마세요."
양효비는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오군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웃죠?"
양효비가 눈물이 날 정도로 웃다가 말했다.
"이 양모가 오소저를 사내로 잘못 보았으니 어찌 우습지 않겠나? 하하하."
오군영도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여인이 강호를 돌아다니자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기에 사내로 변장한 거죠. 양대협님
께서는 5년 동안 잘 지내셨겠죠?"
그리고 오군영은 5년 전에 자기가 벌거벗은 몸으로 양과에게 덤벼들던 일을 생각하고는 얼
굴을 붉혔다.
양효비가 웃음을 그치더니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소저, 5년 동안 난 줄곧 임자를 생각했고 한시도 임자를 잊은 적이 없소."
양효비가 이렇게 말하자 오군영은 얼굴을 붉히고 정색하며 말했다.
"양대협님은 절 놀리시는 거예요?"
양효비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임잔 내가 정말 양과인 줄 아나?"
오군영은 깜짝 놀랐다.
"당신이 양과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예요? 세상에 외팔이로 목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에요."
양효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오른팔은 몸에 맨 거요."
그는 오른팔을 내밀어 보였다가 다시 감췄다.
오군영은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당신…… 당신은?"
"두려워 마시오. 내가 비록 양과는 아니지만 나 역시 성은 양이고 이름은 효비요."
"양……."
오군영이 놀라서 그렇게 부르려고 하자 양효비는 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낮게 말하라구."
오군영은 자세히 그를 뜯어보다가 결국 알아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양과로 변장한 거죠?"
양효비는 탄식하면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이었다.
오군영이 불쾌한 기색으로 따져물었다.
"당신이 양대협의 모습으로 변장한 것은 무슨 심보예요?"
그러자 양효비는 무슨 고충이라도 느끼는 표정으로 말했다.
"흥, 그게 무슨 대협이라고? 진짜로 말하면 그는 악마야."
"양과는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예요.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헐뜯을 수가 있어요?"
오군영이 면박을 주었다.
"그래, 그 사람은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당신과 나의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해주었소. 나에
겐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소, 비록 당신이 끝내 내 아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난 그래도
양과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난 마땅히 그 사람이 시키는대로 해야 하고 그가 무슨 일
을 하든지 도와 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은 나도 알고 있소? 내 말이 옳지 않소?"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군영을 바라보았고 그녀도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마주보고만 있었다.
양효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문을 다시 열었다.
"양과는 내 마음 속의 대영웅, 대호걸이었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행실은 사람들의 존
경을 받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자 오군영이 의아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양대협님은 광명정대하고 협의를 행하시는 분인데 왜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겠어요?"
"사람이란 누구나 변할 수 있는 법이오. 양과는 요 몇년 사이에 결국……."
양효비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자 오군영은 답답한 나머지 독촉했다.
"결국 어떻게 되었단 말예요? 그렇게 더듬지 말고 속시원히 어서 말씀하세요."
양효비는 계속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아주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오소저는 요 몇년 동안 양과가 저지른 행실에 관한 소문도 듣지 못했단 말이오?"
오군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난 그 동안 문을 닫아걸고 무공만 익혔었지. 이 사람들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대
신해 사소한 일 몇 가지만 처리했을 뿐 강호의 일들은 자세히 알 수 없었어. 그러니 자연히
양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누가 그에 대해 말해 주려 해도 난 외면하고 달아나 버렸
으니……."
양효비가 말했다.
"임자는 천금소저로 규방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양과의 일을 알 수 없었던 거
요. 그 사람은 강호에서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유부녀를 간음하는 등 갖가지 악행을 저질
러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단 말이오."
"그가, 그럴 리가 없어요."
오군영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양효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호란 원래 복잡한 곳이니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겠소? 양과는 일찍이 전진교를 배반하
고 사부인 소룡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사람이오. 임잔 그의 오른팔이 왜 잘렸는지 알고 있
소? 그 사람이 양양에서 대협 작정의 딸 곽부의 미모에 반해 억지로 겁탈하려고 하다가 곽
부가 대노하여 검으로 양과의 오른팔을 잘랐던거요. 그런 자가 무슨 일인들 저지르지 못하
겠느냔 말이오."
오군영은 원래 양과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양효비가 정색하며 하나하나 따지듯
이 말하자 망설이다가 이내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양효비가 계속 말을 이었다.
"5년 전에 나는 임자와 작별한 후 유명한 스승을 찾아 열심히 무공을 닸았소. 얼마 전에야
다시 강호에 나왔다가 양과의 악행을 알게 돼 아주 가슴이 아팠소. 양과는 나를 구해준 은
인이고 또 도리에 맞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거와장에서 임자에게 결코 무례를 범하지 않
았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그래서 나는 방법을 강구해 양과의 명성을 바로 세워
줄 생각을 했던 것이오."
오군영이 쌀쌀맞게 물었다.
"당신이 양과로 변장한 게 그의 명성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나요?"
그 말 속에는 조소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양효비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양과로 변장해서 길에서 협의를 지키고 남들을 도우면서 가는 곳마다 양과를
위해 변호해 왔소. 그러다가 뜻밖에 확도의 수중에서 소저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오."
오군영이 들어보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는 듯했다. 양효비는 분명 확도를 쫓아 버렸고
오는 길에 자기를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으며 벗으로 대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군영은
또 얼마간 믿게 되었다.
양효비는 가끔 오군영의 눈치를 살폈다. 오군영이 고개를 숙이고 앵두 같은 입술을 잘근잘
근 씹는 것을 보고 자기 말이 먹혀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효비는 계속 말을 이었
다.
"휴, 난 실로 알 수 없소, 양과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흉악하게 변했는지 말이오.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텐데……."
양효비가 양과의 오명을 씻어주려 했다는 말에 오군영은 이렇게 말했다.
"양과는 소룡녀를 깊이 사랑하고 항상 그 생각에만 빠져 있다가 세월이 흘러도 만나지 못하
자 심리가 이상해진 모양이군요. 하지만 마땅히 그런 악행은 저지르지 말았어야 해요."
양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오. 듣자니 그 사람이 악행을 할 때는 마치 미치광이같다고 하더군. 휴, 유
감스럽고 불쌍한 일이지."
그때 호송대열이 갑자기 정지했다. 앞쪽에서 길잡이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비켜. 어서 비키란 말이야! 네놈이 귀머거리 시늉을 하는구나. 이 어르신이…… 아이
고, 네놈이 감히 사람을 쳐?"
이윽고 길잡이의 비명소리가 연속 들려왔다.
곧이어 동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왜 길을 막고 사람을 치는 것이오?"
그러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양과를 찾는다. 어서 그 자를 불러내란 말이야."
"네놈이 뭔데 감히 양대협님을 찾는 게냐? 그런다고 양대협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곧이어 서로 치고 받고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양효비가 휘장을 걷고 바라보니 앞쪽에서 동진이 벌써 자주색 적삼을 입은 젊은이와 싸우고
있었고 그 뒤로 또 흰옷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양효비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모용협과 탁장청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저 사람들이 왜 양과를 만나려 하는 거
지? 보아하니 호의를 품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총표두 동진은 모용협과 탁장청을 알지못해 그들이 양과를 만나겠다고 시끄럽게 굴자 한바
탕 싸움을 하게 된 것이었다. 동진은 대력응조공(大力鷹爪功)을 써서 연거푸 모용협을 할퀴
려 들었다. 모용협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물었다.
"당신은 혹시 웅사 동진 아니시오?"
"이 동모의 대명을 알았으면 어서 무릎을 꿇고 죽기를 기다리란 말야."
모용협은 동진에게 더 이상 양과와 휩쓸려다니지 말라고 충고할 생각이었지만 동진이 경거
망동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이 모용협이 네놈을 두려워하는 줄 아느냐?'
그렇게 생각한 모용협은 반보 내디디면서 오른손바닥으로 동진의 면상을 가격했다.
동진은 모용협의 장법이 매서운 것을 보고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서며 왼발로 몸을 지
탱했다. 그는 왼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모용협의 오른쪽 팔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
의 손가락은 마치 강철 같아서 그것에 걸리기만 하면 근육과 힘줄이 모두 끊어지고 말 형편
이었다.
모용협은 급히 오른팔을 들었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쳤다. 동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철조강
탁(鐵爪鋼豕)의 초식으로 오른발을 내디디면서 오른 팔굽으로 모용협의 가슴을 치려 했다.
모용협은 왼쪽 발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왼손바닥으로 동진의 이마를 가격했다. 동진은
얼른 갈고리 모양의 오른쪽 손으로 모용협의 왼쪽 어깨를 끌어잡으려 하다가 중도에 갑자기
장으로 바꿔 바깥쪽으로 휘두르는 척했다. 그는 모용협의 왼쪽 팔굽이 잡힐 때 힘껏 끌어당
기려고 했던 것이다.
모용협은 동진의 손가락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진기를 왼팔에 운행시
켰다. 동진은 모용협의 왼쪽 팔굽을 끌어잡는 순간 그의 근육이 쇠처럼 단단함을 느꼈다. 그
래서 놓았다가 다시 잡으려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동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훌륭한데!"
그러자 모용협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됐군!"
동진은 대노하여 허보(虛步) 자세를 잡고 매처럼 두 팔을 펼친 채 갑자기 오른손을 모용협
의 오른팔 아래로 밀어넣고선 상대방의 왼쪽 손목을 막았다가 급히 뒤로 잡아당기면서 오른
팔을 낚아챔과 동시에 좌장으로 모용협의 오른쪽 어깨를 누르려 했다. 모용협은 얼른 오른
손으로 막으면서 상대방의 오른손을 받는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면서 휙하고 회전했
다. 그는 동진의 오른쪽 팔을 자기 왼쪽 어깨 쪽으로 잡아당긴 다음 다시 왼손으로 동진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갑자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동진은 비명을 지르며 모용협의 머
리 위로 날아가버렸다.
동진이 모용협에 의해 한 장 남짓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지려 할 때 갑자기 마차에서 휙하는
소리와 함께 자사 원칠랑이 나타나서 남편의 허리를 받았다. 그 덕에 동진은 다치지 않고
착지할 수 있었다. 모용협이 뒷짐을 지고 득의양양한 자세로 서 있었다. 동진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소림사의 제자요?"
"내가 왜 소림사의 제자란 말인가?"
"당신이 방금 쓴 초식은 모두 소림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소림제자가 아니겠소?"
모용협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에 쓴 백원반기(自猿搬技)의 초식은 확실히 소림파의 무공이지. 하지만 소림사의 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 무공을 쓰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소?"
"그럼 당신은 누구요?"
그때 탁장청이 모용협 옆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모용세가의 모용공자도 모른단 말이오?"
그 말에 동진과 원칠랑은 깜짝 놀랐다.
"당신이 바로 모용공자란 말이오?"
"그렇소."
모용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옆에 계시는 분은 분명 절정검법으로 이름난 탁장청 공자시겠군요?"
"그렇소."
탁장청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동진은 원래 이 두 강호의 젊은 협객들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협에게 당하고
나서 바로 예를 갖춘다는 것은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방금 실례를 범했는데 동진 총표두님께서는 달리 생각하지 마시오."
모용협이 사과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원칠랑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당신은 젊은 협객이시고 우리 부부는 표사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달리 생각하겠어요. 저의 남편이 다쳤다.하더라도 찍소리도 못할텐데요."
그 말에 모용협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입심 좋은 여인네군.' 하고 생각했다.
모용협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실로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저와 탁공자가 이렇게 온 것은 쌍사자표국과 맞
서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원칠랑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왜 호송대열을 가로막았나요? 할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씀하세요. 우리 쌍사자표
국은 무섭지 않아요."
탁장청이 원칠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그마한 쌍사자표국이 어찌 이렇게 망령되게 군단 말이오?"
그러자 원칠랑이 눈을 부릅뜨며 대들었다.
"당신은 왜 날 노려보는 거죠? 내 미모가 탐나서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이런 여자와는……."
탁장청은 화도 나고 기가 막혀 채 말을 맺지 못했다. 모용협이 탁장청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린 다만 신조협 양과에게 볼 일이 있을 뿐이오."
"양대협은 이 곳에 없으니 두 분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동진은 그들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모용협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양과가 여기에 없다면 뒤쪽에 있는 마차엔 누가 앉아 있는 것입니까? 확인해 주실 수 있겠
습니까?"
동진은 머리를 굴렸다.
'이 모용협이란 사람은 보통이 아니구나. 양대협이 뒤쪽 마차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니.'
하지만 동진은 모용협이 넘겨짚고 하는 말인 줄은 알지 못했다. 모용협은 일찍이 양과가 쌍
사자표국을 따라 남행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호송대열에서 양과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
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림짐작으로 말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다.
"당신들은 양대협을 무슨 일로 만나려 하는 것이오? 말을 하시면 이 동모가 보고를 올리겠
소."
동진이 그렇게 말하는데 모용협은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누군가 밖을 살펴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큰소리로 꾀쳤다.
"양과가 신조협의 이름으로 도처에서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갖은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본인은 하늘을 대신하여 도의를 실행해 이 도적을 없애버리려
고 이렇게 왔다."
그는 다시 마차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양과, 사내 대장부라면 딴 사람을 연루시키지 말고 썩 나서라."
마차 안에서 이 말을 들은 오군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모용협과 탁장청은 모두 이름난 젊은 협객인데 그들도 양과가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
하는구나. 그렇다면 양효비의 말은 모두 사실이렷다. 양과가 지난 날에는 아주 영웅답더니
작금에 와선 이렇게 마귀가 될 줄이야.'
그녀는 양효비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양공자님, 당신은 더 이상 양과와 연루되지 말고 나가서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그러자 양효비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양과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므로 난 무슨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나
서서 양과를 대신해서 변호해야만 하오."
"모용협과 탁장청은 무공이 대단한 사람들예요. 당신…… 당신은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 거
예요."
"오소저, 오늘의 양효비는 5년 전의 양효비가 아니오."
"그래도요?"
"5년 전에 내 무공이 시원찮자 임잔 내게 시집오려고 하지 않았었지."
이렇게 말하고 난 양효비는 애원에 찬 눈길로 오군영을 한참 바라보더니 마차 밖으로 뛰쳐
나갔다.
오군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이는 정말 내게 정을 두고 있구나. 그렇지 않다면야 그 눈길이 그토록 애원에 찰 수 있
겠어? 저인 전적으로 날 위해 5년동안이나 무공을 열심히 연마한 거야. 난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모용혈이 한창 양과의 악행을 열거하고 있을 때 양효비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모용협, 임잔 하늘을 대신해서 도의를 행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양모가 일부러
죽으러 왔다."
양효비가 큰 소리로 외치더니 미친듯이 웃어대는 것이었다. 손에 칼자루를 잡은 모용협은
탁장청과 함께 한걸음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양과, 네놈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러자 양과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이 양모는 광명정대한 사람인데 어찌 악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너희들은 함부로 남을
모함하지 말아라."
양효비의 이 말은 마차 안에 있는 오군영이 들으라고 한 것임이 분명했다. 과연 오군영은
그 말을 듣고 감동했다.
'은인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용협과 대적하려는 양효비는 정말 대장부다.'
사정을 알 수 없는 모용협은 양과가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하곤 당장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양과, 네놈이 악행을 저지른 것은 만인이 알고 있으니 변명하지 말아라."
탁장청도 옛날 자기 아버지 절정공자 탁운백이 이름을 날리던 그 녹슨 검을 뽑아들고 소리
쳤다.
"살인했으면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자 양효비가 대답했다.
"모용공자 탁공자. 임자들은 당세의 유명한 젊은 협객들인데 그래 둘이 함께 수적 우위를
믿고 한 사람에게 달려들려고 하오?"
모용협이 소리쳤다.
"잔소리 말고 검이나 뽑아라."
양효비가 목검을 뽑아들고 반격하려고 할 때 원칠랑이 나서면서 그에게 고혹적인 눈길을 보
내면서 말했다.
"양대협님, 천천히 나서세요. 우리 부부가 모용공자와 싸우렵니다."
양효비도 묘한 눈길로 원칠랑을 바라보고는 물러섰다. 그는 원칠랑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의 바람기에 끌려 한번 건드려 볼 심산이었지만 동진이 원칠랑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
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자웅쌍사자 동진과 원칠랑은 나란히 모용협 앞에 나
섰다. 원칠랑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용공자, 듣자니 당신 가문은 학식이 해박하다 해서 한수 배우러 나선 거예요."
그러자 탁장청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형님, 저 두 사람은 이 아우에게 맡기십시오."
"아우, 동진의 갈고리 손을 조심하게나."
모용협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러났다.
탁장청은 녹슨 검을 수평으로 내뻗고 오른팔을 어정쩡하게 편 채 눈으로는 동진과 원칠랑을
보지도 않고 자기의 검끝만 보면서 서 있었다.
원칠랑이 또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기 검만 보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꽃도 좀 봐야죠."
그러자 탁장청이 말했다.
"난 이 검에서 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피라니?"
원칠랑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다. 난 사람의 피를 보고 있다."
탁장청의 대꾸였다.
"누구의 피란 말예요?"
"자웅쌍사자의 더러운 피 말이다."
"큰소리 치는군."
원칠랑이 대노하여 욕설을 퍼붓더니 만도로 탁장청의 옆구리를 비스듬히 후려쳤다.
동진도 때를 놓칠세라 두 손을 갈고리 삼아 탁장청의 정수리와 목을 끌어잡으려고 했다. 그
러나 탁장청은 마치 그러한 공격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러 표사들과 길잡이들이 이젠 탁장청도 끝장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탁장청의 녹슨 검이
약간 가볍게 떨리는 듯했다. 동진은 검기가 자기의 두 손목에 미치는 것을 느끼자 얼른 두
손을 회수했다. 원칠랑의 만도가 탁장청의 몸에 거의 닿으려는 찰나 탁장청의 검이 그것을
막았다. 검과 칼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원칠랑은 손아귀가 찡하고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힘이구나.'
탁장청의 녹슨 검끝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동진과 원칠랑의 목을 노렸다. 탁장청의 쌍검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던지 자웅쌍사자는 어쩔 수 없이 세 발짝이나 뒤로 물러섰다.
"독랄한 초식이로군."
그러자 원칠랑이 말을 받았다.
"결사적인 태센대요."
탁장칭은 검을 빗겨세우더니 처음과 같이 두 팔을 별로 펴지도 구부리지도 않은 채 팔을 내
밀었다. 그는 눈길을 검끝에 돌리면서 말했다.
"절정검술은 사람을 죽이는 검술이오. 목숨을 걸 생각이 아니라면 아예 덤비지 마시오."
동진은 원칠랑과 서로 마주보고 나서 큰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표사일이란 게 원래 목을 내놓고 하는 일인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해?"
그러자 원칠랑이 깔깔거렸다.
"물론 죽는 거야 두려운 일이지."
원칠랑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의아해 했다. 탁장청은 냉소를 짓다 만 표정이고 동진 또한
멍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전 훌륭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난 남이 허풍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죠."
원칠랑은 이렇게 말하더니 칼로 내리쳤다. 동진도 기합을 지르며 공격에 나섰다.
"결사적으로 할테면 이 나으리도 끝까지 함께 놀아 주지."
원칠랑은 점점 칼을 빨리 휘두르면서 비아냥거렸다.
"이 에미도 끝까지 놀아 주마."
원칠랑의 도법은 오랑캐들 것이라 그 동작이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실속이 있었고 매 초식이
아주 실용적이었다.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은 절정검법과 다를 바 없었다.
탁장청은 한동안 이 두 부부에게 쩔쩔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공이 높았기 때
문에 십여 합이 지난 뒤부터는 점차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절정검법은 과연 대단한 것
으로 초식마다 동진과 원칠랑의 급소를 위협했다. 동진과 원칠랑은 실수라도 할까봐 매우
조심했다.
순식간에 삼십 합이 지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탁장청이 점점 유리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동진과 원칠랑은 결혼한 지 십 년이나 되
어 평소에나 또는 적을 만나 싸울 때나 언제나 손발이 잘 맞았다. 탁장청의 공력은 확도보
다 조금 떨어졌는데 확도는 동진과 원칠랑 그 둘을 상대로 싸워 손쉽게 이겼었다. 그러므로
순리대로 따지자면 이 부부는 탁장청의 적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진과 원칠랑은
확도의 서역 무공을 깔보다가 당할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탁장청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으므로 탁장청이 쉽게 완승할 수는 없었다.
양효비는 싸움을 흥미있게 구경하다가 오군영 앞에서 무공솜씨를 과시하고픈 생각이 났는지
모용협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이리 오시오. 이 양모는 당신네 모용세가의 무공을 한번 보고 싶소."
그리고는 목검을 꺼내 모용협을 몇번 찌르는 척했다.
모용협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양과가 비록 흉악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성이 자자한 인물인데 행동이 왜 이렇게
가벼운 것일까?'
모용협은 양과를 두 번밖에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5년 전 일이라 이 신조협이 가짜라
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양효비는 뒤쪽에서 오군영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지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그래서 그 본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협이 검을 뽑아들면서 말했다.
"양과, 네놈이 숱한 악행을 저질러 세상 사람들의 버림을 받았으니 차라리 자결하여 천하에
보답하려무나."
그러자 양효비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큰소리를 쳤다.
"이 양모를 만난 것이 모용세가의 불행인 줄이나 알아라."
"엉?"
모용협의 외마디 물음이었다.
"모용세가는 수백 년 동안 흥성해 왔는데 네놈 대에 이르러 몰락하게 되었구나. 오늘 네놈
의 목이 이 양모의 검 아래 날아간다면 모용세가는 대가 끊기겠지?"
양과가 계속 큰소리 쳤다.
그 말을 듣고 여러 표사들이 박장대소하며 동진과 원칠랑을 응원하는 한편 모용협을 골려
주었다.
모용협은 약간 노한 기색을 띠며 흥하고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양효비는 자기 의도대
로 돼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 모욕을 줘서 모용협의 실수를 유발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용협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난 무공을 충분히 닦지도 못했고 당신처럼 명성도 떨치지 못했소.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는 알고 있으며 무예를 좀 안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백성들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
소."
그 말에 양효비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생각을 굴렸다.
'이 모용협이란 자는 절대 얕잡아 보아서는 안되겠군.'
양효비는 목검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모용협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뒤로 일보 물러설 뿐이
었다. 양효비가 연속 두 번이나 목검으로 찔렀지만 모용협은 여전히 뒤로 물러서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양효비가 물었다.
"모용협, 왜 검을 뽑지 않는 게냐?"
그러자 모용협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양공자께서 이런 무공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아주 탄복하는 바이오. 그러
니 몇 수 더 보여 주시오."
사실 모용협은 상대방 무공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불패의 기반을 닦아놓으려는 것이었다.
양효비는 화가 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무시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구나.'
양효비가 살수(殺手)의 초식을 쓰려고 하는데 모용협의 손에 들린 검이 부르르 떨면서 번쩍
했다. 양효비는 깜짝 놀라며 적수의 수중에 있는 검은 매우 예리한 무기라고 생각했다.
모용협이 입을 열었다.
"내 검 이름은 한옥(寒玉)이라고 하는데 수백 년 전 주검명사(鑄劍名師) 광야자(廣野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목검을 들고 있으니 순리상 내가 유리하다고 생
각하오. 또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기도 하오. 그러니 당신 검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과연 모용세가의 자손답고 무림의 명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소. 말 그대로 과연 고명하시오.
이 양모는 탄복해 마지 않소."
"됐소. 충분하오."
모용협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양효비는 머리를 굴렸다.
'모용협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 공정하게 말하고 있구나. 하지만 내가 철검으로 바꾼다면
분명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거야. 허리에 차고 있는 목검은 무슨 장식품이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검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심해야 되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양효비는 노려보며 말했다.
"이 양모는 이젠 목검을 쓰는 데 습관이 되었소."
모용협은 흡족하게 생각했으나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는 권고하지 않겠소."
모용협의 검에서 서릿발 같은 빛이 번뜩이자 양효비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
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전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모용세가가 무림에서 수백 년 간 명성을 떨쳐온 데는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병장기
마저 저렇게 진귀하니 집안에는 다른 보물들도 많을 것이다.'
양효비는 진기를 운행시켜 온몸에 돌리고 나서야 한기를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
기 목검으로 모용협의 미간을 찔렀다. 모용협은 번개같이 뒤로 물러서면서 한옥검으로 목검
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양효비의 목검이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호선을 그리면서 단전을
겨누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용협이 재차 목검을 막으려 하는데 양효비의 목검이 다시 미
간을 향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용협은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한옥검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
었기에 미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목검을 막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급히 상반
신을 뒤로 눕히며 곧장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양효비의 목검이 거의 모용협의 얼굴을 스
쳐 지나가듯 했고 모용협은 결국 한 장 남짓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방금의 위기를 생각하
자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양효비는 첫수에 모용협을 궁지에 몰아넣자 자기도 모르게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모용협, 이 양모의 목검이 당신의 그 한옥검보다 못하오?"
모용협은 대답하지 않고 공격했다. 그는 한옥검을 마구 휘두르면서 광풍처럼 양효비를 몰아
쳤다. 순식간에 번뜩이는 검날 빛이 양효비를 온통 둘러쌌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흉맹해
짐에 따라 한기가 뻗어나와 더운 여름날인데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은 마치 늦가을 바람을 쐰
듯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양효비도 마치 얼음구멍 속에 들어온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그래서 급히 진기를 운행시켜
전신을 따뜻하게 했다. 한옥검의 한기를 막아내는 한편 흉맹한 공격을 막아내자니 아주 힘
이 들었다. 하지만 양효비도 만만치 않아서 목검으로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허점을 골라
서 찔러댔다. 게다가 양효비의 검술 초식은 아주 괴이해서 앞가슴을 노리다가도 갑자기 뒤
로 돌아가 하반신을 세 곳으로 공격했으며 또다시 갑작스럽게 검끝으로 목을 노리곤 했다.
모용협은 매번 승기를 잡을 때마다 양효비의 이런 괴이한 초식에 걸려들어 몸을 피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목검끝이 날아들어와 자기의
급소를 위협하는 것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용협은 싸우면서 양효비의 검술을 눈여
겨보았는데 어떤 것은 눈에 익은 듯하면서도 어디에서 본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용
협은 강호의 친구들이 양과의 검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늘 들어왔었다. 그들은 양과가
비록 목검을 사용하지만 그 검을 휘두를 때면 격렬한 파도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검세가 날
카롭고도 위력이 태산같아 당세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모용협은 지금
양과가 펼치는 검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검법이 듣던 것과는 달랐
고 곳곳에 괴이한 동작이 들어 있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에 있는 오군영도 무척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모용협보다 더욱 놀라 눈을 크게 뜨
고 쳐다보았다.
'양효비의 검술은 우리 가문의 절기인 사십구로의 이형(異形)검술이다. 그런데 초식은 거의
흡사하지만 양효비가 사용하는 기법은 더욱 변화가 심하고 극히 오묘해서 우리 가문에 전해
오는 검술은 도무지 미칠 바가 못 된다.'
오군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효비가 만났다는 스승과 거와장은 무슨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자기 가문의 검술은 양효비가 펼치는 검술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
다.
양효비와 모용협은 오륙십 합이나 싸웠으나 실력이 엇비슷해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양효비는
오군영의 면전에서 모용협을 일격에 격패시킴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모
용협도 검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려 천하 무림에 이름을 떨쳐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은 싸움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양효비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용협, 당신이 이처럼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증거를 없애 버리려는 수작
이 아닌가?"
그러자 모용협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튼소리 마시오. 본인은 무림을 위해 해를 제거하자는 일념뿐이오."
그러자 양효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이 양모는 모두 그 무슨 정인군자(正入君子)나 호협의사(豪俠義士)가 아니잖소? 석
달 전 저녁에 난 모든 것을 들어서 다 알고 있단 말이오."
그 말에 모용협은 속으로 깜짝 놀라며 안색이 변해 캐물었다.
"당신이 뭘 들었단 말이오?"

양효비가 기세를 약간 늦추면서 입을 열었다.
"석 달 전에 난 아무개에 게서 모용세가의 화원에 있는 정대누각(亭臺樓閣)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또 갖가지 화초들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서 그 화원에 들어가서 진
기한 꽃구경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는 소리가 나지 않겠소? 그래 큰 차
나무 뒤에 숨어서 엿듣자니 당신과 탁공자가 무슨 의논을 하고 있었지……."
중요한 대목에서 양효비는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모용협은 걸리는 게 있었던지 검으로 찌
르면서 협박했다.
"어서 말해 보시오. 도둑놈처럼 그래 무엇을 엿들었단 말이오?"
양효비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신비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난 당신들이 어떠어떠한 나라니 또 어떠어떠한 대업이니 하는 말들을 들었소. 솔직히 말해
서 난 듣고도 잘 모르겠으니, 헤헤, 당신은 걱정할 필요없소."
그러자 모용협은 더욱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차나무 뒤에 숨어 엿듣고 있었구만. 만일 그때 알았더라면 내가 절대 당신을
놓아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오."
양효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놀려댔다.
"그때 당신은 날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했었지.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경공술이 너무나도
형편없었기에……."
모용협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오늘 당신이 어디로 숨는지 한번 봅시다."
"이 양모는 당신이 호송대열을 가로막았을 때부터 내게 덤비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
소.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그때 이미 사라졌을 것이오. 하지만 난 모용세가의 그 신비하다
는 무공을 한번 겪어 보고 싶었소."
양과는 이렇게 말하며 목검으로 내찔렀다.
모용협이 한옥검을 들어 목검을 막았지만 양효비는 피하지 않았다. 두 검이 부딪쳤다. 양효
비가 사용하는 것은 목검이라 설사 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예리한 한옥검과는 비할 것
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공력도 비슷하니 목검이 부러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모용협이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목검 끝에서 금속빛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것이 보였다.
"당신의 목검 속에……."
모용협이 의외라는 말투로 입을 여는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효비가 상대방이 놀
란 틈을 타서 목검으로 가슴팍을 내찔렀다. 모용협은 방어할 태세를 미처 갖추지 못하자 급
히 진기를 끌어올려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러나 동작이 약간 늦었던 탓에 옷섶이 찢어지고
가슴에 한자쯤 되는 상처가 생겼다. 삽시간에 상처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그가 입
은 옷이 자주색 옷이었기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
양효비가 즉시 뒤따라가며 목검으로 쾌속무비하게 연속공격을 퍼부었다. 매번 모용협의 치
명적인 급소를 내찔렀다. 양효비가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모용협, 오늘이 당신 제삿날이오."
여러 표사들과 길잡이들은 양효비와 모용협이 싸우면서 나누는 말들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런데 순식간에 양효비가 우세를 점하고 모용협이 수세에 몰리자 모두들 환성을 올렸다.
탁장청은 동진, 원칠랑 부부와 싸워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그들 부부가 호흡이 잘 맞고
방어만 한 채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승기는 잡지 못했다. 구경꾼들이 양효
비가 이겼다는 환성을 올리는 바람에 탁장청은 그 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속으로 깜짝 놀랐
다.
'양과는 과연 무서운 놈이로구나. 모용형님도 적수가 되지 못하다니.'
탁장청은 연속 두번 검을 내질러 동진과 원칠랑을 물러서게 한 다음 나는 듯이 양효비의 뒤
쪽으로 달려와 검으로 찔렀다.
양효비는 뒤쪽에 살기를 느끼고선 급히 검을 돌려 막았다. 두 검이 맞부딪치면서 두 사람은
손이 찡하고 저려옴을 느꼈다. 동진과 원칠랑이 또 소리를 지르면서 뒤쫓아와 일시에 여러
사람이 혼전을 벌였다.
확도는 사대제자들과 함에 정말 쌍사자표국의 호송대열을 멀찌감치에서 뒤따르고 있었다.
호송대열이 묵는 곳에서 그들도 묵었고 호송대열이 주야로 전진하면 그들도 쉬지 않고 추격
했다. 다행히 중도에서 농가의 말 다섯 필을 샀기에 그들은 그다지 지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웅은 호송대열의 표사들과 모용협, 탁장청이 한데 어울려 혼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말했
다.
"사부님, 양과가 싸우느라고 경황이 없을 때 그 검은 옷 입은 놈을 사로잡읍시다."
확도도 그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양과가 아무리 날고 뛰는 재주가 있다 해도 분신법은
모를테니 마차 안에 있는 검은 옷입은 사람을 돌볼 겨를은 없을 것 같았다. 확도는 이리저
리 머리를 굴렸다.
'양과의 무공으로 말하자면 모용협은 절대 적수가 될 수 없을텐데 왜 승부가 나지 않는 것
일까? 양과의 검술이 이전과는 아주 다르고 거와장의 검술과 비슷해 보이는데. 그래, 저것이
요 몇년간 스스로 익힌 무공이란 말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고묘파의 그 가볍고 날랜 검술
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확도는 지금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오직 자금소갑을 빼앗는 생각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생
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대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뒤쪽에 서 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이때 표사들과 길잡이들은 모두 싸움 구경을 하느라고 마차를 지키는 사람이 없
었다. 그래서 확도와 사대제자들이 마차를 포위했을 때에도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확도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무공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사람이 마차 안에서 갑자기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휙하고 휘장을 걷으
면서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대제자들은 포위망을 형성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도망가지 못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갔던 확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마차 안을 샅샅이 뒤
졌으나 마차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늘려 있어 사람은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군영은 어디로 갔을까?
제15장 오독방의 음모
날이 저물어 새빨갛게 불타던 저녁노을도 사라지고 하늘은 온통 어둠에 뒤덮였다. 초롱초롱
한 별들이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의 눈동자처럼 하늘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양과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한동안 뭇별들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무채접의 아리따운 얼굴
을 눈여겨보았다. 무채접은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속으로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룡녀를 한번만이라도 만나 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은 없을텐데.'
무채접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정말 언니를 만나고 싶나요?"
그러자 양과가 선뜻 대답했다.
무채접이 또다시 따져물었다.
"정말 언니에게 알릴 일이 있나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약간 달아오른 듯 홍조를 띠었다. 이처럼 아리따운 처
녀 앞에서 그는 거짓말하기를 원치 않았다. 아마도 그의 천성이 그랬던 모양인지 그는 아리
따운 여인 앞에서는 늘 마음 속에 있는 말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백의 여인인 자기 아내 용녀를 만나볼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무채접이 또다시 한숨을 쉬고 나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제게 먼저 알려 줄 수 없나요?"
양과가 고개를 젓자 무채접이 흘낏 흘겨보며 말했다.
"언니와 난 가장 친해요. 언니의 일은 내가 알고 있고 내 일은 언니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내게 이야기하는 건 언니에게 이야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양과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마찬가지가 아니야."
"무슨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제가 전하기로 되어 있어요. 이건 규칙인데 그래 당신은 잊었단
말씀이에요?"
양과는 맘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양효비로 분장한 내가 어찌 이런 규칙을 알 수 있으
랴.' 하고 생각했다.
"물론 잊지 않았지. 하지만 일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직접 만나서 얘기
하지 않고는 안 돼."
그러자 무채접이 예견하고 있었다는듯이 말했다.
"흥, 이런 날이 오리라는걸 전 이미 짐작했어요. 당신의 무공이 갈수록 늘어 날 능가하게 되
니까 이제부턴 저의 말을 듣지 않을 작정이군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애초 내가 당신을 우리 무리에 끌어들일 때 당신이 날 어떻게 대했나요? 당신은 거의 날마
다 내게 찾아와서 잘 보이려 했고 내 무공이 여차여차하게 고명하고 내 얼굴이 여차여차하
게 예쁘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금생에는 나 한 여자만을 좋아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요? 그리고 또 구역질나는 말도 당신은 나한테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제 당
신은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어요?"
양과는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했다.
'양효비, 네놈은 어디 가나 이처럼 교활하게 행동했으니 내 어찌 네놈을 용서할 수 있으랴.'
양과는 양효비가 여인들에게 속정은 주지 않고 겉정만 주는 그따위 행실을 본디 미워하고
있었던지라 이렇게 대답했다.
"난, 난 그런 자가 아니야."
그러자 무채접이 매정하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당신이 만일 박정한 사내가 아니라면 천하의 모든 사내들이 다 성인군자(聖人君子)겠네요.
당신이 도처에서 여인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걸 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휴, 사내들
이란 모두 다 그러니까요. 가장 정직하고 협의를 지킨다는 대협객 곽정도 젊은 시절에는 몽
고의 화쟁(華箏)공주를 연모했다 하니 당신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그 말에 양과는 또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곽정 백부도 황용 백모 이외의 여인에게 정을 주었단 말인가? 정말 뜻밖이구나.'
양과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무채접은 그가 자기가 한 말에 감동받은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돌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교태를 부렸다.
"당신이 그 어떤 여인을 좋아하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전 그래도 여전히 일편단심으로
당신을 좋아해요."
양과는 몽롱한 가운데 그녀의 이런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애원에 찬 얼굴을 바라
보니 과거의 소룡녀와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하마터면 얼싸안을 뻔했다. 그는 자기
도 모르게 무채접의 나긋나긋한 섬섬옥수를 잡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임자가 어떤 사람으로 변하든지 간에 난 한평생 임자 한 사람만 좋아할
거야."
무채접은 양과가 자기를 소룡녀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양과가 자기
손을 꼭 쥐고 애정에 가득찬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자기 손을 빼내는 척하다가 도리어 양
과의 손에 더 깊이 맡기는 것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말이 당신의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전 아주 기뻐요. 하지만
전 절대로 언니에게 눈길을 주지 말라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겉보기에 언니는 남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하고 당신에 대해서도 업신여기지는 않지만 언니의 성격이 무섭다는 걸 전
알고 있어요. 언니의 화를 돋우기만 하면 당신 따위는 목숨도 건지지 못할 테니까, 그 무슨
무림에서 위풍을 떨쳤다고 운운할 수도 없게 될 거예요."
양과는 점차 제정신이 들자 꼭 쥐고 있던 무채접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무채접은 양과가
두려워 그러는 줄 알고 말했다.
"언니는 선녀같이 아름답고 무공도 아주 대단해서 당세 무림 중에서는 아마도 방주를 제외
하곤 언니와 맞설 자는 없을 거예요. 언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자기를 신선으로 생각하
고 있어요. 언니의 안중에는 방주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범부속자(凡夫俗子)로 보일
따름이에요. 당신이 언니에게 잘 보이려고 해도 결과는 오로지 하나뿐이에요."
"그게 뭔데?"
양과가 묻자 무채접이 대답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지요."
양과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난 그래도 그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어."
무채접이 또다시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하고 나는 듯이 뛰어가 버렸
다.
"그럼 당신은 죽으러 가 보세요!"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양효비, 네놈은 무소저를 정신착란에 걸릴 정도로 유혹해서 내가 소룡녀도 만나 볼 수 없
게 했구나. 휴, 양효비는 실로 이 양과에게는 애물단지 같은 놈이다. 그 놈을 만난 후부터
난 도처에서 위험을 당하고 도처에서 방해를 받지 않았는가.'
이때 철검보의 보주 사도인이 제자 넷을 데리고 초롱불을 든 채 다가왔다. 사도인이 읍을
하면서 말했다.
"장세사자께서 예 계셨구만요. 전 몹시 근심했었습니다. 장세사자께서는 방에 돌아가셔서 쉬
시죠."
양과가 그를 따라 걸으면서 물었다.
"본방의 무소저와 청룡타주를 빼놓고 다른 사람이 또 이곳에 있습니까?"
사도인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제외하고 그 두 사람이 있을 따름입니다."
양과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실망했다.
'용녀가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니 무소저가 그녀를 만나게 해 준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구
나.'
사도인은 양과를 친히 방으로 안내한 후 인사하고 나가려 했다. 양과가 생각 끝에 물었다.
"사도인 보주님께서는 제가 어디로 가려 하시는지 아십니까?"
사도인은 안색이 바뀌며 대답했다.
"저는 원래 방중의 대사를 감히 알아 보려 하지 않았으니 장세사자께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양과는 속으로 한탄해 마지 않았다.
'명성이 혁혁한 철검보의 보주마저 이처럼 두려워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과가 또다시 물었다.
"무소저는 어디 계십니까?"
이때 밖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내게 직접 묻는 게 좋겠어요."
곧이어 무채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도인이 급히 인사하고나서 물러갔다.
양과가 무채접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 앉으라니까."
무채접이 쌀쌀맞은 소리로 말했다.
"필요없어요. 당신을 일깨워 드려야겠어요. 칠월 초이레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길을 떠나
지 않다가는 대사를 그르치게 될 거예요."
"무슨 대사란 말이오?"
양과가 묻자 무채접이 앵토라져 이젠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건 당신의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해야지 나에게 왜 물어요. 만일 정말 일을 그르쳤다가
는 방주님 면전에서 벌을 받을 사람은 당신이지 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자 양과가 알았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충고 감사하오."
무채접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좋아요. 전 가겠어요."
양과가 얼른 문앞을 막아서면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접아, 나와 함께 얘기나 좀 나누자구."
무채접은 방안에 들어간 뒤 줄곧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가 말했다.
"난 양대협님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양과는 명석한 두뇌를 굴리기 시작했다.
'난 지금까지 이 사악한 무리의 이름마저 모르고 있으니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 이 여잘
가지 못하게 해야겠다.'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입에 발린 말로 다독거렸다.
"나의 귀여운 접아, 왜 내게 화가 났나?"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무채접이 가벼운 앙탈을 부리며 양과의 손에서
벗어나면서 눈을 흘겼다.
"그래도 언닐 만날 생각이에요?"
무채접이 묻자 양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자가 있다면야 난 임자의 언니가 천 명, 만 명이 있다 하도라도 만나지 않겠어."
그러자 무채접이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전 속으로 당신을 미워하는데요."
양과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여자의 속마음과 겉마음은 표리부동할 때가 많았다. 입으로는
미워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었다. 양과가 씨익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임자가 날 미워하면 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해."
그러자 무채접이 새하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면서 대꾸했다.
"죽느니 사느니 하는 불길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양과가 그 틈에 그녀의 손을 틀어쥐며 말했다.
"내게 화를 안내겠다고 대답해. 그럼 다신 이런 말을 안 할테니까."
그러자 무채접은 그에게 그냥 자기 손을 맡긴 채로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제가 화를 낼 생각이었다면 이미 당신이 백번이나 기막혀 죽도록 만들었을 걸요."
양과가 물었다.
"접아, 임잔 내가 무슨 독이 발작할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하던 데 그래 내가 중독되었나?"
무채접이 깔깔거리더니 말했다.
"이번에 가시게 되면 당신은 안목이 많이 고명하게 되고 사대 검객 무공의 허점도 파악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건망증도 고칠 수 있게 될거예요."
양과도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태연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말이오?"
무채접이 애교를 부려가면서 말했다.
"건망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본방의 충심환(忠心丸)을 복용했다는 걸 어떻게 잊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양과는 마음속으로 '충심환이라니? 그건 또 뭐지?' 하고는 어정쩡한 웃음을 웃어제
쳤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하지만 난 그 약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러자 무채접이 자세를 고쳐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만일 본 방을 이탈하려고 한다면 이미 충심환을 복용했기 때문에 본 방은 당신을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당신은 더이상 해독약을 얻을 수 없어서 자연히 독이 발작하고 말 것
이에요."
양과가 그 말에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방을 배반하고 도망갈 수 있겠나? 농담은 그만 하라구."
양과는 이렇게 한 가지 한 가지씩 유도 질문을 해서 무채접으로 하여금 내막을 토해내게 했
다. 본래 이 방의 주요한 제자들은 누구나 충심환을 복용했는데 이른바 충심환이란 기실 일
종의 특별한 독약이었다. 만일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일 년 후에는 반드시 독이 발작
하게 되는데 피부부터 썩기 시작해서 점차 안으로 파고들어가 마침내 오장육부가 썩어 죽게
되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방주는 바로 이 충심환을 가지고 뭇제자들
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감히 배반하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양과가 감탄해서 혀를 차면서 말했다.
"보아하니 철검보의 보주 사도인도 그 충심환을 복용한 거로군."
그러자 무채접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양공자님, 당신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당신이 직접 사도인에게 충심환을 복용하
게 해놓고서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죠?"
그 말에 양과는 속으로 움찔 놀라면서 급히 얼버무렸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사도인은 무공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 그 약을 복용한 뒤
진기를 모아 그 충심환을 눌러두었다가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토해 버렸을까봐 걱정인 거
지."
그러자 무채접이 말했다.
"충심환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마자 녹아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리 재주가 비상하다
하더라도 속수무책인 거지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양효비란 놈은 실로 가증스러운 놈이구나. 자기만 사악한 무리에 가담했으면 그만이지 남
을 협박해서 사도(邪遼)에 빠지게 하다니. 사도인이 이 사악한 무리들을 염라대왕처럼 두려
워한 나머지 사대검객들의 허점을 말해 줘서 그들이 호청룡에게 죽게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양과는 계속 생각했다.
'사도인이라면 무림에서 명망을 널리 쌓고 의협심 강한 대장부였는데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
하는 졸장부가 되었구나. 또 철검보의 수백 명 부하들까지 연루시켜 사악한 무리의 노복으
로 만들었구나. 만일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싸웠더라면 철검보가 어찌 사교(邪
敎)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었으랴.'
"당신은 또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그 처녀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난 지금 처녀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내를 생각하고 있어."
무채접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물었다.
"당, 당신에게 그런 취미도 있었나요?"
양과도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대답했다.
"엉뚱한 상상을 하기는. 난 그 사도인이 겁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에요. 당신 같은 사람인 줄 아세요?"
그러자 양과는 의문을 풀어 보고자 쉴새없이 그녀의 마음을 떠보면서 말했다.
"내가 만일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결사적으로 싸울지언정 전체 철검보 사람
들이 연루되도록 하지는 않겠어."
그 말에 무채접이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이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마음먹었다면 철검보는 재앙을 면치 못했을 거예요."
"엉?!"
놀란 표정을 짓자 무채접이 또다시 말했다.
"철검보에는 무공을 익히는 사내들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그에 딸린 처자들이 있어요. 사도
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가족들이 능욕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지요. 흥, 당신은
사도인의 딸을 보지 못했나요? 그 사람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까봐 두려워서 당신은 그 사
람의 딸을 건드리지 못했지요."
그 말에 양과는 씨익하고 웃으면서 주접을 떠는 척했다.
"나는 접아가 시키는대로만 하잖아."
그리고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채접이 양과의 품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으
면서 말했다.
"이번에 보니 당신은 실로 많이 변했군요. 여행중에 견식이 많이 늘었을 뿐 아니라 그 전처
럼 색을 몹시 밝히지도 않는군요. 철검보의 처녀들과 색시들을 보고도 그전처럼 눈길이 게
슴츠레 하지도 않구요. 휴, 당신이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전 당신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
겠어요."
양과는 속으로 품에 안긴 이 여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소룡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는 가
느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무채접은 양과의 품에 한참이나 안겨 있었어도 양과가 예전과는 달라져 경박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주 기뻤다.
'이 분이 실로 좋게 변했구나. 그전 같았으면 내가 이처럼 주동적으로 나오면 두 손으로 마
구 어루만지면서 그 짓을 하려고 혈안이 됐을텐데.'
무채접은 오히려 양과가 자기를 마음껏 애무해 주기를 바랐다. 세상의 일이란 모두 이러한
법! 일이 생기기를 바랄 때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할 땐 없던 기회
가 자꾸 생기는 법이니 이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접아, 임잔 청룡타주와 함께 이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양과가 묻자 무채접이 대답했다.
"일이야 아주 많지요. 철검보의 제자들 가운데서 무공이 괜찮고 충성심이 강한 자들을 십여
명 골라서 심복으로 만들어야 하고 또 복종하려 들지 않는 자들은 굴복시켜야지요."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실로 어려운 일이군. 임자와 같은 처녀들이란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즐겁게 지내야 하
는 건데."
그러자 무채접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요 며칠새 난 속상해 죽을 뻔했어요. 이 곳의 처녀들과 색시들은 저만 보
면 마치 귀신이나 만난 것처럼 앞다투어 도망가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청룡타주도 매일 엄한 표정으로 지내야 하니 재미가 없을 걸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당신이 이렇게 절 보러 오셨군요."
양과도 웃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는 소리를 내뱉고는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임자를 만나러 온 셈이야."
그 말에 무채접이 상냥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만일 이 일이 언니나 방주님 귀에 들어가면 당신은 욕을 먹게 될걸요.
당신의 이번 행로는 중요한 일이 아주 많은데 당신이 중도에 철검보에 들렀으니 대담하다고
할 수밖에요."
양과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청룡타주가 방주님에게 보고하지는 않을까?"
"당신도 두려운 모양이지요. 호청룡은 자기 일에 바빠서 당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의 일에 관계도 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그 분은 당신의 이번 임무가 무엇인지도 똑
똑히 모르고 있으니까요."
양과가 재빨리 물었다.
"접아, 그럼 임잔 나의 임무를 알고 있겠군?"
무채접이 반짝이는 눈길로 미소를 머금고 은근히 과신하고 있었다.
"저야 물론 알고 있죠. 언니가 이미 제게 알려 주었으니까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양어깨를 어쓱거려 보였다.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태도에 아주 희
열을 느낀 양과가 짐짓 물었다.
"그럼 임자가 알고 있는가 볼까? 내가 도대체 뭣하러 간다고 생각하나?"
이렇게 묻자 무채접이 아무런 의심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가흥 서호가의 철창묘에 가서 칠월 초이렛날 밤, 손에 흰 수건을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당신에게 중요한 물건을 넘겨 주기로 되어 있잖아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가흥성 취선루(醉仙樓)에 가 술을 마시기로 되어 있지요."
"또 그 다음에는?"
무채접이 깔깔 웃더니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없어요. 언니가 여기까지 알려 주었으니까요. 제생각에는 그 뒤의 일은 언니가
달리 지시할 것 같아요."
양과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한껏 치켜올려 주
며 말했다.
"맞았어. 이런 말까지 임자에게 알려 주는 것을 보면 언니가 임자를 아주 신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무채접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무채접은 양효비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까닭에 양효비의 임무에 관련되는 일을 알려달라고 언니에게 졸라댔던 것이고 언니도 무채
접이 양효비를 연모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서 알려줬던 것이었다.
무채접이 보드라운 팔로 양과의 목을 끌어안은 채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양공자님, 당신이 절 데리고 함께 가면 좋지 않겠어요? 온종일 더러운 사내들과 상대해야
하는 이 곳이 전 싫어요."
그러자 양과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나도 사내인데 그래 난 더럽지 않나?"
무채접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깔깔거렸다.
"그럼 당신은 자기가 아주 향기롭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양과가 머리를 숙이고 분을 바른 무채접의 얼굴냄새를 맡으면서 말했다.
"난 그다지 향기롭지 않지만 임잔 아주 향기롭구만 그래."
무채접은 그가 덮쳐들까봐 겁이나 후닥닥 일어나며 말했다.
"당신이 훌륭하게 변한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다 거짓이었군요. 한 시간도 안 돼서 본색을
드러내고 마네요."
양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계속 따라 붙으면 어쩌랴 싶었는데 마침 잘 됐다.'
무채접은 양과에게서 세 발짝 떨어진 곳까지 물러선 뒤 따져물었다.
"이봐요, 당신은 도대체 절 데리고 갈 거예요 말거예요?"
양과는 일부러 못알아들은 척하면서 되물었다.
"임잘 어디로 데리고 가란 말야?"
그랬더니 무채접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농담으로 받기예요. 흥, 당신이 내게 발목 잡힐까봐 두려워하는 줄
저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도처에서 바람을 피우는데 방해가 되겠죠?"
양과는 곰곰 생각했다.
'무소저와 동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이 기회에 이 사악한 무리의 내막도 좀더 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과는 대범하게 대답했다.
"임자와 동행하는건 내가 바라고 있던 바인데 왜 싫다고 하겠나?"
무채접은 너무 기쁜 나머지 희희낙락하며 양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양과도 아주 좋아하는
척하며 왼팔로 그녀의 버드나무 가지같이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양과는
오랫동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다가 미인을 품에 안게 되니 여인의 향긋한 체취와 부드러
운 살결의 감촉에 가슴이 뛰고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양과는 금생에 다만 용녀만을 가까이 하고 절대로 다른 여인의 생각을 품지 않으련다.
이 맹세를 위반하면 하늘과 땅의 징벌을 받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라.'
무채접도 처음으로 사내와 포옹하는 것이라 정신이 흐릿해지고 몸이 나른해져 마치 술에 취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발정기의 암캐처럼 암내를 풍겼다.
"당신은 왜 오른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지 않나요?"
양과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얼버무렸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데 조심을 해야지."
무채접은 양과의 점잖은 태도를 보고 약간 실망해서 천천히 손을 풀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언제 출발할 거예요?"
양과는 이 곳은 오래 묵을 곳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무채접이 짝사랑에 깊이 빠져 자기를
더 없이 믿고 있기는 하지만 청룡타주 호청룡이란 자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기에 묵는 시간
이 길어지면 허점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일이 바쁘니 지금 당장 떠나야겠어."
그러자 무채접이 못마땅해 하면서 말했다.
"지금 말인가요? 날도 어두워졌는데 하룻밤 쉬고 떠나도 늦지 않아요. 하필 밤에 떠날 필요
가 뭐 있어요."
양과가 웃는 얼굴로 그윽히 쳐다보며 말했다.
"밤에 떠나야 남의 눈에 띄지 않을거 아냐."
무채접은 양과가 이 밤에 철검보를 떠나자고 한 데에는 딴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
겼다. 즉 양과가 들에서 자기와 단둘이 자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고 감히 더 생각하기가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양과의 제의에 몹시 흥분해서 자
기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밤하늘엔 뭇별들이 반짝이고 길가의 풀밭에서는 갖가지 벌레들이 울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면서 길을 떠났다.
철검보의 대문을 나올 때 성을 지키던 제자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누구도 성문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는 청룡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부릅뜨고는 큰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청룡타주만 두렵고 난 두렵지 않단 말이냐?"
성을 지키던 제자들이 황급히 성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그들은 무채접이 두려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채접은 묘령의 아리따운 소녀였고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을 지키는 철검보 제자들은 양과로 변장한 양효비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단번에 세 사람씩이나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양과를 대단히 두려워했다.
철검보에서 멀어질수록 길 양옆에는 인가라고는 보이지 않자 무채접은 갈수록 긴장했다. 그
녀는 양과가 색심이 발동하여 아무때고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기를 말잔등에서 끌어내린 뒤
어두운 수림 속으로 안고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불안한 생각을 하면
서 이따금씩 양과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해 혼란
스러웠다. 긴장된 마음이 공포감 때문인지 아니면 기대감 때문인지…….
사실 양과는 결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단지 되도록 빨리 철검보를 떠나 청룡타
주의 그 흉악하고도 예리한 눈길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일찍이 무
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철검보의 보주 사도인이 쩔쩔매는 모양을 보고 있기가 난처했던 것이
다. 게다가 칠월 초이렛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양과는 제때 가흥의 철창묘에 도착해서
양효비란 이 작은 마
두를 없애 버리는 동시에 이런 사악한 무리의 이른바 '대사(大事)'를 방해하고 싶었던 것이
다.
근 한 시진이나 길을 달렸어도 양과에게서 다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무채접은 도리어
참을 수가 없어서 앙탈을 부렸다.
"좀 천천히 갈 수 없나요?"
양과가 돌아다보며 그녀의 표정을 살핀 후 조용하게 물었다.
"접아, 지친 모양이지?"
무채접이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비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전 철검보에서 여러 날이나 갑갑하게 지냈는데 당신과 함께 나왔다가 더욱 갑갑함을 느끼
게 될 줄은 몰랐어요."
"무슨 할말이 있거든 하라구."
그러자 무채접이 입을 실록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몇 마디 더 하면 안 되나요?"
"무슨 말을 할까?"
"아무 얘기라도 좋아요. 그저 이처럼 침묵하지 않기만 하면 돼요."
양과가 생각나는대로 우스갯소리 몇 가지를 하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기분이 좀 풀렸다.
"이전엔 당신이 음탕한 농담만 해서 듣기 싫어 죽을 뻔했는데 이젠 많이 달라졌군요."
"그따위 음담패설은 지나치게 많이 들으면 진저리가 나는 법이야."
"이야기 또 하나 해보세요.",
"난 많이 했으니 이번엔 임자가 얘기할 차례야."
"전 재미있는 얘기 할 줄 몰라요."
"그럼 다른 얘기를 해보라구."
"무슨 얘길 할까요?"
양과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우리 교(敎) 안에서 생긴 일들을 얘기해 보라구. 난 교를 떠나 있은 시간이 긴 데다가 어떤
일은 똑똑히 기억나지 않아."
"그럼요. 당신은 본 방에 대해 정말 너무 아는 게 없어요. 우리 오독방이……."
무채접이 말문을 열자 양과는 깜짝 놀라 말고삐를 세차게 움켜쥐고는 물었다.
"접아 지금 뭐라고 했나?"
무채접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되물었다.
"우리 오독방 얘기를 꺼냈지요. 왜 그래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어서 얘기해봐."
양과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사악한 무리가 본래 오독방이었구나. 그런데 운남의 대리국에서 오래 전에 종적을 감춘
오독방이 부활한 것인지 아니면 남해의 오독방인지 알 수 없는 걸.'
"우리 오독방은 사십 년 전 방주 여노악이 창립했다고 해요."
그말을 듣고 양과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남해의 오독방이로구나. 황약사 선배가 내 몸의 채설주 독은 오독방이 제거할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우연히 오독방에 속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더군다나 양효비가
요 몇 해 사이에 오독방에 가담했을 줄은 더군다나 뜻밖이군.'
양과는 내심 아주 기뻤다. 자기 몸에 있는 채설주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오독방을 마침내 찾
았다고 생각하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양과는 5년 동안이나 채설주라는 극독의 고통
을 맛볼대로 맛보았고 그것이 또 언제 발작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발작하
기만 하면 골수를 긁어내는 듯이 아팠고 5년 동안에 무려 스무 번 정도나 발작했던 것이다.
비록 근년에는 점점 뜸하게 발작하기는 했지만 필경 다시 또 발작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매번 이것을 생각할 때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우리 여방주님은 재능이 있고 계략이 대단한 분이었대요. 본 방은 개방과 같은 이름난 파
벌들처럼 역사는 길지 않지만 방중에 인재들이 가득하고 이미 강남에 있는 이십여 개의 크
고 작은 무리들을 통제하고 있어요. 본방은 처음엔 청룡(靑龍), 백호(白虎) 이 두 개의 분타
밖에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청룡, 백호,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 네 개의 분타와 그 밖
에도 신아(神鴉), 영사(靈蛇), 비어(飛魚), 거해(巨蟹), 독갈(毒蝎)의 오당(五堂) 및 집법(執
法), 교화(敎化), 장세(長勢) 삼대사자와 팔대 호법(護法)을 갖추고 있어요."
무채접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양과는 오독방의 내막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본래 방주
여노악은 천하에 전란이 그칠 사이 없고 무림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서 무림을 독점할
생각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네 개의 분타를 동서남북 사방에 파견해서 세력을 펴게 했
으며 갖은 수단 방법을 이용해서 문하생들을 많이 갖고 있는 문파의 장문인이나 두목들에게
오독방의 충심환을 복용시킴으로써 각 문파들을 통제했던 것이다. 만일 장문인들이나 두목
들이 불복하면 해독약을 공급해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면 일 년 후에는 독이 발작해서 몸
이 썩고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죽기까지 했다. 집법, 교화, 장세 이 삼대사자는 네 개 분타
의 행사를 연락하고 서로 호응하게 하는 일을 책임졌다. 집법사자는 무채접의 언니였는데
비록 같은 사자라고 해도 집법사자는 방주 여노악의 총애를 받아 오독방 중에서의 지위가
방주 다음이었다. 그래서 집법사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
기에 네 개의 분타에서 무릇 큰 행동을 취해야 할 때는 모두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신아, 영사, 비어, 거해, 독갈 이 오당은 여노악이 3년 전에 꾸려놓은 것으로서 이미 도처에
서 무공 고수들을 끌어모아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이 커져 역시 중원의 무림에 잠입하여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양과는 무채접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드디어는 안색까지 달라지면
서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첫 손가락에 꼽히는 대협 곽정과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인 개방은 모두 원나라 군대의
남침을 막아내느라고 바빠 무림의 분쟁을 돌볼만한 겨를이 없다. 강남 지역을 두루 살펴보
면 그 어떤 문파를 막론하고 오독방과 세력 균형을 유지할만한 능력이 없다. 그런데 지금
오독방이 충심환을 이용해서 귀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강남의 철검문 등 스무여 개 문파
를 통제하고 있으니 일단 소동을 일으키기만 하면 그 파장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무림의 여러 문파들이 각기 몇 십 년 동안 경거망동 해왔다고 하지만 오독방의
행사가 가장 지독하고 사악해서 실로 가증스런 무리라 하겠다. 만일 오독방이 제멋대로 하
도록 내버려 둔다면 기필코 무림이 대대적인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무채접은 신이 나서 네 개의 분타에서 통제하는 각 문파들이 사용하는 수단들을 얘기했지만
양과는 이젠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소룡녀가 생각났다.
'용녀가 어찌하여 집법사자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가 어째서 오독방 방주의 수하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의 본성으로 말하면 절대로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정말 사악
한 마수의 포로가 되었단 말인가? 용녀는 심지가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이니 필시 오독방의
간계에 넘어가 무슨 미혼약을 복용했을 것이다.'
양과는 생각하면 할 수록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무채접이 그 소리에 놀라서 물었다.
"왜 이를 가는 거죠?"
양과는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담담한 표정으로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런데 집법사자인 언니가 가흥의 취선루에서 날 기다리게 되는가?"
무채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언니는 행적이 묘연해서 때로는 저도 언니가 어디 계신지 똑똑히 몰라요. 이번에 언닌 그
런 말씀이 없었는 걸요."
"내가 보기엔 그녀가 좀 이상한 것 같아."
"그건 무슨 말씀이죠?"
"난 언니가 방주가 준 무슨 약을 복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채접이 깔갈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 있나요? 방주님이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언닌데요. 방주님은 가장 비밀
스러운 무공까지 언니에게 전수해 주었는데 어찌 언니에게 약을 복용하게 했을까요? 언니는
또 병도 없는 걸요."
양과가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난 일찍 한 이인(異入)에게 관상 보는 법을 배운 적이 있는데 언니가 분명 어떤 독약을 복
용해서 본성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아냈어.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왜 늘 냉랭한 모습을 하
고 있는가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난 무채접이 또 웃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말잔등에서 떨어질 뻔해서 양과가
급히 부축하기까지 했다.
무채접이 깔깔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야말로 독약을 복용해서 본성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이번에 돌아오신 걸 보니 비단
성격만 달라진 게 아니라 하시는 말씀마저 이상한 걸요. 히히히, 언닌 원래 성격이 그래요.
언니가 당신에게 냉랭한 태도를 취하는 건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종래로 좋은 심보를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언니의 용모는 선녀보다도 더 아름다우니 당신이 나쁜 심
보를 품을까봐 겁을 내고 있는 거예요."
양과는 무채접의 놀림에 좀 면구스러운 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임잔 소시적부터 언니와 함께 지냈었나?"
"저의 부모님은 방주님의 벗이셨는데 남해의 한 작은 섬에 살았다고 했어요. 어렸을 때 방
주님이 늘 우리집에 놀러와서는 제게 무공을 가르쳐주곤 했죠. 십 년 전에 아버님과 어머님
이 선후하여 돌아가시자 방주님은 저를 불쌍히 여겨 제게 자기의 신선도로 가자고 하시더군
요, 그러면서 자기가 새로 자질이 뛰어난 여제자를 받아들였는데 제게 그녀와 친구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여제자가 바로 언니였어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속으로 생각했다.
'집법사자는 십 년 전에 신선도에 갔었구나. 십 년 전이라면 바로 용녀가 실종된 그 해다.
정황으로 보아 집법사자가 소룡녀임이 분명하구나. 그런데 곽백모께서는 용녀를 남해신니가
데려갔다고 하더니 어째서 여노악의 신선도에 가게 되었을까?'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급히 물었다.
"방주님께선 어떻게 집법사자를 받아들이게 되었지?"
그러자 무채접이 대답했다.
"방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언니는 원래 남해신니의 제자였대요. 그런데 방주님께서 언니의
자질이 좋은 것을 보고 꾀를 써서 빼앗아왔대요. 남해신니는 매우 화가 나서 언니를 도로
빼앗아가려 했는데 본방의 제자들이 신선도를 아주 철통같이 지키는 바람에 남해신니가 접
근할 수 없었대요. 그래서 남해신니는 사흘 동안이나 욕설을 퍼붓다가 체념한 채 돌아가고
말았대요."
그 말에 양과는 더욱 놀랐다.
'곽백모께서 하신 말씀처럼 용녀는 먼저 남해신니에게 갔다가 용녀 자질을 탐낸 여노악이
빼앗아다가 제자로 삼은 거다. 곽백모의 말씀에 의하면 남해신니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던
데 여노악을 당해내지 못한 것을 보면 여노악의 무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강한 것 같
다. 나의 공력이 완전히 회복된다 하더라도 아마 그의 적수가 못될 것 같구나.'
양과는 생각하면 할 수록 기가 죽어 그저 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둔 채 아무 생각없이 몸을
맡기고 있었다.
무채접은 양과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이봐요, 뭘 생각하고 계세요?"
"우리의 방주님께서 독약을 사용하는 데는 능란하겠지만 천하삼절독을 어찌 보시는지 모르
겠군. 난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무채접이 잠깐 뜸을 들여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방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자기는 천하의 모든 독물의 독성을 다 제거할 수 있다고 하더군
요."
"서역의 '채설주'의 기이한 독은 비할 바가 없다고들 하던데 방주님께서는 그 독도 제거할
수 있을까?"
"천하삼절독이 무슨 희귀한 것이라고 그래요? 방주님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게 바로
정화, 거와, 채설주 이 삼절독인데요."
무채접은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다. 기실 오독방 방주 여노악은 독약에 의거하여 무리를 짓
다 보니 자연히 천하의 모든 독약과 독물들에 대해 상세한 연구를 했다. 그는 줄곧 천하삼
절독을 어렵게 여기다 보니 7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야 천하삼절독을 제거하는 해독약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그 뒤에야 천하삼절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었다.
양과가 또다시 물었다.
"접아, 임자도 능히 채설주의 독을 제거할 수 있나?"
양과는 기대에 찬 눈길로 무채접을 바라보았지만 마침내 실망하고 말았다.
"제게는 방주님과 같은 그런 재간은 없어요."
무채접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실로 기대와는 어긋났다.
양과는 한탄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방주님을 빼놓고 이 세상에 채설주의 독을 제거할만한 사람이 더는 없겠군."
"아마 언니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언니는 비단 방주님한테서 무공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독
약을 만들고 가려내고 해독하는 방법도 모두 배웠으니까요. 참. 당신은 채설주에 대해 왜 그
렇게 흥미를 갖고 있나요?"
그러자 양과가 태연을 가장하고 말했다.
"완안방방이 채설주를 가지고 있거든. 만일 내가 그년과 대적하게 되면 그년이 십중팔구 채
설주를 사용할까봐 두려운 거요. 만일 해독약만 있게 되면 그깟 년쯤은 두렵지 않겠는데
말이야. 이게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이지."
그러자 무채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양공자님, 당신은 실로 지모가 깊고 안목이 있는 분이에요."
양과는 이처럼 아리따운 여인의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아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으쓱 내밀면서 시를 읊듯이 말했다.
"대장군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에 있는 싸움의 승리를 결정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무채접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의 심보를 나무랐다.
"당신은 배 속에 온통 나쁜 궁리만 들어찬 사람인데 어떻게 대장군으로 자처할 수 있나요?
조그만 무뢰한에 불과할 따름이에요."
그러자 양과는 손으로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지르면서 농담을 했다.
"임자가 감히 본 장군을 깔보다니."
무채접이 깔깔 웃어대며 자기가 말잔등에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옆으로 피하려다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양과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무채접을 땅에서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
다. 무채접은 심하게 떨어졌던 탓에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당신은 남을 못살게 굴 줄도 아시네요."
양과는 속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별빛 아래에서 무채접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가련한 모
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양과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접아, 날 쥐어박아."
"당신을 때려서 뭣해요?"
"그래야 분이 풀리지. 어서 쥐어박으라니까."
양과가 눈을 감고 때리기를 기다리자 무채접은 정말 손을 쳐들고 말했다.
"정말 때릴 거예요."
양과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기왕 때릴 바에야 나의 접아가 기쁘도록 얼마든지 때려도 돼."
무채접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먹으로 양과의 가슴팍을 앙증맞게 두어 대 때리고 말았다.
"어서 때리라니까."
"벌써 다 때렸는 걸요."
양과가 눈을 뜨고는 농담까지 했다.
"모기가 문 것만큼도 아프지 않은데."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흘기면서 대꾸했다.
"난 때리지 못하겠어요."
양과는 그녀가 마치 소룡녀인 것만 같아 갈수록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때리는 게 아니야."
무채접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내게 방법이 있어. 내 말대로 하면 임자의 분이 풀릴 뿐만 아니라 나도 아주 기쁠 거야."
"무슨 방법인데요?"
"임잔 손도 안 쓰고 발로 차지 않고도 날 때릴 수가 있어."
무채접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때려요?"
그러자 양과가 손가락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를 임자의 입술로 때리란 말야. 아무리 많이 때린대도 아프기는커녕 난 기분만 더욱
좋아질거야."
그 말을 듣고 난 무채접은 삽시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아
랫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당신은 나빠요. 정말 나빠요."
양과가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시 말잔등에 올라타고 두 발로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말
은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채접도 급히 말잔등에 오른 뒤 바싹 뒤쫓아오며 소리쳤
다.
"나쁜 사람 같으니. 내가 채찍으로 후려갈길테니 두고봐요!"
양과가 당황한 척하면서 외쳤다.
"이크, 야단났구나. 자기 사내를 때리려는 여인이 여기 있으니 좀 보시오."
무채접은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양과의 입이 걸쭉해서 더욱
듣기 끔찍한 소리가 나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비록 근처에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
만 창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장난하면서 전진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환히 밝았다. 그래서 요기를 하고 좀 쉰
다음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다투었다. 해질 무렵에 한 작은 성에 당도했는데 두 사람은 하루
낮 하루 밤을 쉬지 못했던 탓에 몹시 피곤해서 한 객점을 찾아 묵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일찌감치 일어나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양과와 무채접이 숙박비를 계산할
때 주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헤헤, 두 분은 귀객이신데 어젠밤에 태만해서 미안합니다. 공자님과 부인께서 너그러이 양
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무채접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선 화를 냈다.
"무슨 부인이라고 그래요?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요?"
주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젊은 부인은 성미가 사납구나. 그런데 누군가가 이들이 분명 부부간이라고 말한 것 같
은데 내가 잘못 들었단 말인가?'
양과가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말했다.
"주인이 정말 사람을 잘 알아 보는군요. 됐습니다. 빨리 계산이나 해주시오. 우리 부부는 빨
리 길을 떠나야 하니까요."
무채접은 더욱더 얼굴을 붉히면서
"당신……."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며 손으로 때리려고 들었다. 양과가 히히덕거리고는 은자 한덩이를
계산대 위에 집어던지며 주인에게 농담을 했다.
"내 이 새 부인은 성미가 사납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때리려고 들지 않습니까?"
무채접은 창피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주먹으로 양과의 잔등을 쥐어박았다. 숱한 사람들 앞
에서 사실을 까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양과는 몹시 아픈 척하면서 일부러 "아이구!" 하
고 비명을 지르고선 뒤를 돌아보며 놀렸다.
"부인, 왜 쥐어박는 거요?"
무채접이 옆을 힐끔 살펴보니 객점의 몇몇 손님들이 흥미있게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채접은 머리를 숙이고 속으로 생각했다.
'양효비, 이 나쁜 사람 같으니 밖에 나간 다음에 어디 두고보자!'
주인은 은자를 양과에게 돌려주며 웃음을 지었다.
"젊은 공자님, 당신의 숙박비는 벌써 누가 냈습니다. 헤헤, 당신과 젊은 부인은 이제 열흘만
더 지내면 사이가 좋아질 것입니다요."
양과와 무채접은 그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누가 우리의 숙박비를 대신 물었나요?"
양과와 무채접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묻자 주인이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 나으리십니다. 방금 내셨지요."
두 사람이 문 밖으로 나와 바라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장대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얼굴색이 거무스름했고 살찐 뺨에 성긴 수염이 나 있었으며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 웃옷을 입었는데 옷섶을 열어놓아 가슴팍에 시커먼 털이 보였고 허리에
는 만도 한자루를 차고 있었다. 무채접이 미간을 찌푸리며 귓속말로 물었다.
"저 사람을 아시나요? 아주 역겹군요."
양과가 나서서 두 손을 마주잡고 물었다.
"우리 대신 숙박비를 물어주셨습니까?"
그 장대한 사나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황공스런 태도로 절을 하면서 말했다.
"양대협님 안녕하십니까? 양부인님 안녕하십니까? 조그마한 성의라 보잘 것 없습니다."
양과가 의아하게 생각하고는 유심히 살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양대협님께선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저를 잊으셨을 겁니다. 석달 전에……."
양과는 속으로 이 사람은 아마 양효비와 내왕이 있던 사람일텐데 이렇게 되면 자신의 본색
이 드러나 일이 시끄럽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양과가 슬며시 무채접의 눈치를 살피니 그녀
는 이상하다는 기색을 하고 있을 뿐 별다른 의심은 하고 있지 않았다. 양과가 두어걸음 걸
어가 그 사나이를 한쪽으로 끌고가서 말했다.
"이 양모는 확실히 일이 많은 사람이라 당신이 아주 눈에 익은 느낌만 있을 뿐이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 사나이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 곳 청룡방 방주인 독안손(獨眼孫)입니다."
양과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 청룡방은 오독방 청룡분타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그러자 독안손이 겸연쩍어 하면서 대답했다.
"석달 전에 양대협님께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시다가 제가 하늘이 높은지 땅이 낮은지도 모
르고 나으리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결과 대번에 나으리에게 얻어맞아 쓰러지고 말았지요. 전
그때 나으리에게 탄복해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오, 이제야 생각나는구만."
"제가 그때 본 고장의 미녀 두 사람을 나으리께 바쳤습니다요. 헤헤, 그때 나으리께서는 아
주 기뻐하시면서 저를 귀방에 받아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양과는 기억이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생각나는구만 생각나."
그러자 독안손이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띠고는 넌지시 물었다.
"제가 귀방에 가입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양과도 그의 의뭉스러움을 간파하고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내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게 되면 임잘 받아들이겠네."
양과는 또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임자가 이 양모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겠다고 대답해야겠네."
그러자 독안손이 웃음을 실실 흘리며 먼저 선수를 쳐 약삭빠른 말을 건넸다.
"나으리께서 필시 미녀가 필요하신 모양이신데 제가 당장 두엇 붙잡아 오지요."
그 말을 듣고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오독방이 이따위 사악한 놈들을 끌어들이기에 무림의 공해(公害)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양과는 표정을 바꾸고는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임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곳을 떠나 오십리 밖에 있는 산속에 틀어박혀 무공을 닦길
바라네. 이 곳에서 사단과 시비를 일으키지 말게."
독안손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희 무리가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전적으로 이 곳 백성들에게 의지해서 나날을 보내는지라
이건 실로……."
양과가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본 방이 무림을 독점하려는데 네놈이 이처럼 허튼짓을 하면 본 방의 명성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 아니냔 말야?"
독안손이 급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예 예. 시키는대로 하겠으니 양대협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독안손이 양과의 뒤에 십여 보 떨어져 있는 무채접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비위를 맞
추었다.
"양대협님께서는 정말 안목이 높으십니다 그려. 저 처녀는 본 고장의 그 어느 처녀보다도
더 아름답군요."
"임자가 객점 주인에게 저 여자가 내 부인이라고 말했나?"
"그렇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종래로 신변에 있는 미녀들을 부인이라고 부르시더군요."
"임잔 저 여자가 누군지 아나?"
"나으리께서 데리고 즐기시는 미녀겠지죠."
양과가 아부하는 그에게 비웃음을 치고는 되물었다.
"이번엔 임자가 사람을 잘못 보았네. 저 여잔 본 방의 교화사자일세."
독안손이 대경실색해서 낯색이 핼쑥하게 질리더니 급히 무채접 앞으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
고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교화사자께서 광림하신 줄도 모르고 실례되는 말을 많이
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무채접은 장대한 사내가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자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양공자님, 이, 이 사람이 왜 이러나요?"
"그 사람은 이 고장 청룡방주 독안손인데 임자가 내 부인인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임
자에게 사죄하는 거야."
양과가 부인이란 말을 꺼내자 그녀는 또 다시 얼굴이 수줍은 홍당무로 변했다.
"됐어요. 당신을 나무라지 않을테니까 어서 일어나세요. 남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무채접이 이렇게 말했으나 독안손은 감히 일어나지 못하다가 양과가 다시 한마디 하고 나서
야 일어나서 머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양과가 짐짓 엄포에 가까운 주의를 주었다.
"독안손, 임자는 내가 하라는대로 하기만 하면 차후 꼭 좋은 일이 있을거네. 우린 중요한 일
이 있어서 오래 묵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네."
양과와 무채접이 말잔등에 올라타자 독안손이 그 앞을 가로막아서며 품속에서 자그마한 함
한 개를 꺼내 양과에게 주었다.
"저의 조그마한 성의이니 대협님과 교화사자께서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양과가 말잔등 위에서 그 함을 받아 열어보니 그 속에는 고양이 눈 같은 보석이 담겨 있었
는데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었다. 양과는 원래 보석이나 장식품 따위에 흥미
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날 소룡녀와 함께 있을 때 소룡녀가 소박한 것을 즐겨 종래
로 진주며 보석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양과는 진주와 보석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함 속에 담긴 보석을 들여다보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건 무슨 장난감인가?"
무채접이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다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아유, 이렇게 큰 묘안석(猫眼石)도 있나요. 정말 희한하군요."
무채접은 양과의 손에서 보석함을 빼앗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무릇 여인들이란 대
체로 패물 따위에 현혹되는 법이고 소룡녀처럼 진주와 보석을 좋아하지 않는 여인들이란 희
소한 법이다. 무채접은 보석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 보면서 손에서 놓기 아쉬워했다. 그
것을 보고 독안손이 머리를 굴렸다.
'이 여인이 양대협의 신변에 있는 미녀인 줄로만 알았지 교화사자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내가 양대협님을 위해 예물을 준비하면서 여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구나.'
독안손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이를 악물더니 허리띠에 매달았던 고옥(古玉) 한 개를 뜯어
내어 양과에게 상납하면서 말했다.
"묘안석은 교화사자님께 드리고 이 보석은 양대협님께 드리오니 기쁘게 받아주시면 감사하
겠습니다."
"고맙네."
양과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고옥을 받아 무채접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 나서 양과와 무채
접은 말을 채찍질하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쏜살같이 길을 떠났다.
성을 빠져나온 뒤 무채접이 고옥과 묘안석을 들고 흔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양공자님, 이 두 보물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그게 은자로 계산하면 얼마나 가나?"
"묘안석은 워낙 희귀한 물건이고 이 고옥도 얻기 힘든 것이에요. 정말 그 독안손에게 미안
하군요. 제가 보기엔 이 보물들은 각기 천금은 나갈 것 같아요."
"뭐? 그렇게 귀한 물건들인가?"
양과의 말을 듣고 무채접이 멍한 기색으로 있다가 갑자기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왜 웃는 거야?"
"당신이 어리석은 체하는게 우스워 그러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이 이런 보물들을 좋아하는 줄 뻔히 알고 있는 걸요. 조금만 훌륭한 보물이기만 하면
손에서 놓기 아쉬워하더니 오늘은 왜 거들떠보지도 않나요?"
"내가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았나?"
무채접이 두 보물을 양과에게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보물들을 아쉬워하는 걸 전 알고 있었어요. 아까 독안손 앞에서는 점잔빼느라
제게 넘겨 주신 거죠. 이젠 당신이 가지세요."
"내가 이미 준 거니까 임자가 가져."
그러자 무채접이 눈을 힐끔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갑자기 이처럼 통이 커진 게 믿어지지 않아요. 전번에 제가 진주목걸이 하나를 달
라고 하니까 아주 아까워하더니."
"이젠 달라졌어. 난 정말 몽땅 임자에게 주는 거야."
"정말예요?"
"그렇다니까."
무채접이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럼 고마워요. 그런데 이 고옥은 그래도 당신이 허리에 차는 게 더 낫겠어요."
양과는 그 고옥을 받아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양효비가 이처럼 보물을 좋아한다는데 내가 너무 통이 크게 보인다면 오히려 양효비답지
않게 된다.'
무채접도 고옥을 다시 받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이는 결국 좀 아쉬워하는 것 같구나. 강산은 쉽사리 변할 수 있어도 본성은 고치기 어렵
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아.'
무채접은 섭섭했으나 드러내놓고 그 감정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다
시 말했다.
"묘안석도 가지고 싶으면 가지세요."
"우리가 어떤 사인데 네 것 내 것 할 게 있어?"
"우리가 어떤 사인데요?"
"남들이 이미 임잘 내 부인으로 보지 않나? 당신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또 당신 것 아닌
가?"
그 말을 들은 무채접은 부끄러워하면서 채찍을 쳐들고 을러댔다.
"또 그따위 허튼소리를 할래요?"
"또 날 때리려고?"
"못때릴 게 뭐 있어요?"
무채접은 이렇게 대꾸하면서 채찍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다. 양과는 몸을 피하지 않고 오히
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말했다.
"귀여운 접아, 날 좀 때려줘."
무채접은 차마 때리지 못하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언니를 만나게 되면 언니에게 훈계를 받게 될 거예요. 그러니 제가 손을 댈 필요도 없지
요."
길에서 그들이 웃고 떠들고 하는 사이에 어느덧 또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이 객점을 찾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서 손에 창을 든 두 패의 사내들이 달려왔다. 그 두 패는 인원이 각기
열 명씩 되었는데 가까이 달려오더니 양과와 무채접을 둘러싸는 것이었다. 양과와 무채접은
깜짝 놀랐다. 무채접이 아미자(峨眉역刺)를 뽑아들고 소리를 질렀다.
"어쩌려는 거예요?"
둘러싼 사나이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창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양과와 무채접이 멍하
니 서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폭죽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중년사나이 셋이 장검을 찬 채
걸어오더니 양과와 무채접이 탄 말 앞으로 와서 갑자기 절을 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인들이 양대협님을 영접하러 왔소이다."
"당신들은 누구요?"
양과의 물음에 우두머리인 듯한 얼굴이 불그레한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소인은 장창회(長槍會)의 장문인 제초군(齊超群)입니다. 양대협님께서 오시는 걸 몰라 영접
이 늦어진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 청룡방처럼 양효비가 받아들인 부하들일 거다. 양효비란 자가 과연 신통력이 대단
하구나. 이렇게 많은 강호의 호한들을 자기 수하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제16장 칠월 초이레
양과와 무채접은 장창회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계속 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십여 곳
의 촌락과 성을 거쳤는데 사람들은 일찍이 양효비에게 모두들 단단히 혼난 적이 있었기 때
문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또 수많은 방회(幇會)의 악패들이 양효비의 수하에 들어왔던 까닭
에 그들은 양과와 무채접을 신명을 바쳐 받들어 모셨다. 양과도 이들과 어울리는 척하면서
그들에게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훈계했다.
마음이 울적해진 양과를 무채접이 백방으로 달랬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양과는 이젠 양
효비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게 되었다. 그가 간 곳마다 자기 이름을 팔아 갖은 악행을
저지른 바람에 강호에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이 괘씸했던 것이다.
칠월 초엿새가 되자 양과와 무채접은 어느덧 가흥에 도착했다. 물안개로 뒤덮인 남호를 바
라보는 양과의 머리 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5년 전에 육가장에서 있
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비록 독주여니 완안방방의 수중에서 양효비의 목숨을 구
해내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채설주의 극독에 중독되어 지금까지 그 독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극악무도한 무뢰한을 구해준 것이었다.
양과는 무채접을 데리고 가흥성 안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양효비가 칠월 초이렛날 밤에
철창묘에 가기로 되어 있는 만큼 분명 하루 정도 일찍 도착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 가흥성
안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만일 가흥성 안에서 양효비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즉시 손을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양효비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객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앞에서 두 사람이 급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눈치빠른 양과는 그들이 모용협과 탁
장청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무채접을 데리고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모용협과 탁장청
이 지나간 뒤에야 그들은 골목에서 나왔다.
무채접이 양과에게 물었다.
"이상하군요. 듣자니 모용협과 탁장청은 무림 고수들을 모아서 북쪽으로 원나라 군대를 막
으러 갔다고 하던데 어째서 이 곳에 나타났을까요?"
"그들은 강호의 젊은 협객들이라 원나라 군대를 막아 나라에 보은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간주하고 있는거요."
"몇달 전에 모용세가에서 이삼십 명의 고수들을 모아서 함께 북쪽으로 갔다고 하던데 모용
협은 가지 않은 모양이군요."
양과는 이 일에 관심이 없었고 모용협과 탁장청을 만나고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지금 자기
의 명성이 좋지 못한 데다가 그들이 협의를 지키는 사람들이라 만나게 되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앞에서 또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사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인이었
는데 비구니였다. 독주여니 완안방방과 줄곧 그녀를 따라다니는 혁중달이었다. 양과와 무채
접 두 사람은 미처 피할 사이가 없어 그대로 마주 걸어갔다.
양과와 무채접을 본 완안방방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년이 지났건만 완안방방은 그
다지 늙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피부도 부드럽고
말쑥해 보였는데 변한 게 있다면 눈가에 약간 잔주름이 생겼을 뿐이었다.
혁중달이 양과를 알아보고선 급히 거대한 체구로 완안방방의 앞을 막아섰다.
"양과, 그래 어쩔 셈이냐?"
사실 그 행동은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무공은 완안방방보다 퍽 약했고 완안방
방의 제자의 절반 실력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을 보호하는 것
은 사나이의 천성이라 일찍이 금나라의 대장으로 있었던 혁중달로서는 더욱 그럴 만도 했
다.
완안방방은 그의 심정을 알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혁중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서 깔깔 웃어댔다.
"혁장군은 눈이 어둡군. 저 사람은 신조협 양과가 아니라 미랑의 자식 양효비예요."
"아가씨, 저 놈은 양과가 확실합니다. 저 끊어진 팔과 목검을 좀 보십시오."
"양효비가 정말 팔이 끊어졌는지는 전 몰라요. 남들이 알아볼까봐 오른팔을 몸에 비끄러 맸
는지도 모르지요."
그 말을 들은 무채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완안방방이 어떻게 양효비가 양과로 변장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양효비가 양과로 변장하고 강호에 돌아다닌
이후로 그를 알아 보는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양과는 놀라지 않고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을 굴렸다.
'완안방방이 양효비가 양과로 변장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나 본데 내가 무채접과 함께
있으니까 아마도 날 양효비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 여잔 양효비가 양과로 변장할
수 있다면 양과도 마찬가지로 양효비로 변장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군. 약은 자가 제 꾀에
속는다더니 완안방방이 이번에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웃음을 머금고 완안방방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가짜라는걸 어떻게 알았소?"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 난 방금 강호에 신조협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동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서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지. 이 두 신조협 가운데서 하나가 가짜인 게 뻔한 일
이 아닌가. 무채접은 오독방의 교화사자이니 양과는 어쨌든 그런 사악한 무리와 동행하지
않을거야. 그러니 임잔 가짜가 분명해. 안그런가?"
양과가 읍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탄복합니다. 독주여니께선 실로 서방신교의 고명한 인물이 되기에 손색이 없군요. 하지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가 꼭 양효비라고 단정하시는 건가요? 그래 내가 장삼이사(張三李四)
가 될 수는 없단 말씀입니까?"
완안방방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방을 똑똑히 보았다고 믿었다. 무공
고수들은 모두 시력이 각별히 좋았기 때문에 속도가 빠른 상대방의 초식 중에서 자그마한
허점이라도 볼 수 있고 번개같이 날아오는 암기도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완안방방은
고수중의 고수인 까닭에 자기 눈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기억력이
아주 좋아 10년 전의 숙적(宿敵)도 기억할 수 있었고 10년 후에라도 정적(情敵)을 죽여 버
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원수의 아들 용모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가 또다시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가 마치 사람들의 상상 속에
서나 있을법한 무서운 마귀의 웃음소리와 같아 듣기가 아주 끔찍했다.
"양효비, 네가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난 똑똑히 알 아볼 수 있다. 사실 넌 실로
양과와 아주 닮은 데가 있어. 그의 모양을 본떠 변장했을 거야. 하지만 너도 니 애비와 똑같
이 그 음탕한 눈길만은 감출 수 없지. 무소저, 나의 귀여운 동생.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면 저 사람의 눈길이 정말 내가 말한대로인지 아닌지 한번 자세히 보란 말야."
무채접은 완안방방이 시키는대로 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양효비의 사람됨과 개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여인들을 농락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양효비를 좋아하는 것이다.
양과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내 눈길이 그처럼 양효비를 닮았단 말인가? 그래 나도 음탕한 인간이란 말인가? 내
맘 속에는 오로지 용녀만 있을 따름인데. 난 절대로 다른 여인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앞으
로도 그럴건데.'
완안방방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양효비, 5년 전에 양과가 널 보호했던 까닭에 난 널 죽이지 못했다. 거와장에서 넌 이상야
릇하게도 노완동 주백통의 제자가 되었지. 그래서 난 또 널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휙하고 장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양과는 그녀의 새빨간 손바닥을 보고 깜짝 놀라 감히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대수인(大手印)이군?"
"네놈도 좀 견식이 넓어졌구나."
이 몇 년 동안 완안방방은 서역신교 교주의 총애를 받아 서역장법 가운데서 으뜸가는 대수
인장법(大手印掌法)을 배웠던 것이다. 이 대수인장법은 서역신교 밀종일파(密宗一派)에서 나
온 것인데 공력에 따라 구종(九種)으로 나누어진다. 제1종부터 제4종까지는 손바닥이 마치
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는데 그 장에 맞기만 하면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우며 다섯 시진이
지나면 장을 맞은 부위의 근육이 썩기 시작한다. 제5종부터 제7종까지는 손바닥의 붉은색이
점차 옅어지는데 그 장에 맞으면 암홍색의 손자국이 나며 가벼우면 살속이 썩고 중하게 되
면 갈비뼈와 내장이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제8종과 제9종의 무공을 익히게 되면 장심의
붉은 색깔이 없어지지만 장력이 아주 대단해져 철사장(鐵砂掌)과 마찬가지로 장을 맞은 자
는 내장이 파열돼 즉사하고 그 절정까지 연마하면 장풍으로도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양과는 일찍이 금륜법왕이 대수인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완안방방은 매번 양효비를 볼 때마다 소녀시절의 연인을 미랑에게 뺏겨 자기의 말
년이 이처럼 쓸쓸하고 고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무공의 기초가 튼튼한 완안방방은 짧디짧은 7일 동안 대수인장법을 제6종까지 익혔던지라
양과를 보자 마치 미랑을 본 것처럼 눈에서 불꽃이 일었으며 연거푸 장을 휘두르면서 공격
을 가해왔다. 양과는 아직 그 초식을 잘 파악할 수 없어서 고묘파의 그 절묘한 경공술로 완
안방방을 에워싸고 빙빙 돌았다.
무채접은 양과의 보법이 괴상한 것을 보고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으며 단지 양효비의 공력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무채접은 쌍장으로 완안방방을 공격했다. 5년 전에 무
채접은 완안방방의 무공을 본 적이 있었고 그것이 대단히 무서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까
닭에 그녀는 양과와 함께 속전속결을 하려고 작심했다. 그래서 자기 문파의 절기인 사십구
로 장퇴법(掌腿法)으로 완안방방이 미처 손쓸 새가 없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안방
방이 그 초식을 파악하게 되면 이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완안방방은 무채접이 쌍장으로 자기의 배후를 가격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가는 허리를 비비
꼬면서 몸을 돌이켜 쌍장으로 양과와 무채접을 각각 공격했다. 그러나 무채접의 쌍장이 갑
자기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하나는 뒤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완안방방의 머리와 옆구리
로 날아들었다. 완안방방은 그 장법의 신속함에 은근히 놀랐다. 그런데 무채접은 또 쌍장을
거두더니 오른다리를 들어 완안방방의 무릎을 걷어찼다. 만일 그 발길에 채이기만 하면 완
안방방의 무릎뼈가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양과는 5년 전 무채접에게 이 초식에 걸려 넘어졌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쌍장을 휘
두르는 척하다가 발길을 날려 완안방방의 다른 쪽 무릎을 걷어찼다. 그러면서 양과는 생각
했다.
'내가 오독방의 무공을 쓰게 되면 무채접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무채접이 소리쳤다.
"참 훌륭해요."
원래 사십구로 장퇴법이 위력적인 데다가 두 사람이 교묘하게 협공하자 그 위력은 더욱 커
졌다. 무채접은 일찍이 양효비와 손을 잡고 사십구로 장퇴법을 써서 형산칠검(衡山七劍)을
격패시킨 일이 있었는데 오늘 양과가 그걸 써먹는 걸 보자 자기도 모르게 지나간 일이 생각
났다.
'양공자가 이렇게 나와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을 보면 옛날 일을 잊지 않은 거야.'
그러나 무채접은 양과의 이 초식이 겉으로는 몹시 비슷한 것 같으나 아무 위력도 없다는 것
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완안방방은 급히 일학충천(一鶴中天)의 초식으로 두 장이나 넘게 훌쩍 뛰어오르면서 생각했
다.
'양효비란 놈이 나의 대수인장법을 피하는 신형보법(身形步法)이 아주 대단하구나. 그런데
그의 쌍장과 퇴법은 무채접보다 훨씬 못하구나. 그러니 저 놈은 경공이나 알 따름이고 아무
무공도 없는 놈이다.'
완안방방은 양효비가 이미 으뜸가는 고수가 되었단 말을 들었지만 지금 의심이 생겼던 것이
다.
그때 혁중달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면서 낭아봉을 무채접에게 휘둘렀다. 그는 태산압정
(泰山壓頂)이란 초식을 썼는데 이 초식은 천근의 무게로 상대방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흉포
한 초식이었다. 무채접이 몸을 피하면서 한 쌍의 아미자를 뽑아들었다. 혁중달이 소리쳤다.
"아가씬 저 양과란 놈을 죽여버리시오. 이 계집년은 제가 해치울테니까요."
"혁장군, 조심하세요. 그년은 오독방의 교화사자이고 장법과 퇴법이 괴상하니 얕봐서는 안돼
요."
완안방방이 이렇게 말하고선 몸을 돌려 양과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그렇게 되자 양과도 한결 시름이 놓였다. 혁중달이 무채접과 맞서 싸우게 되면 그녀는 자기
가 스스로 창조해낸 검술과 고묘파의 무공을 써도 그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 양과는 이미 공력이 6성 쯤은 회복되었으므로 자신만만하게 완안방방과 어울려 싸울
수 있었다.
처음에 양과는 다만 무채접의 장퇴법만 흉내내서 고묘파나 전진교의 무공 중에서 그와 유사
한 초식만으로 상대했을 따름이지만 기를 운행시키고 힘을 쓰는 것은 모두 자기가 닦은 무
공을 이용했다. 완안방방은 양과의 초식이 무채접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 이유를 즉시 알 수는 없었다.
양과는 진짜 자기의 무공을 쓰지 않다 보니 처음엔 완안방방의 적수가 되지 못했었다. 그래
서 십여 합도 못되어 견뎌내지 못해 방어자세를 바꿔 여전히 민첩한 몸놀림으로 피하기만
했다. 또 십여 합을 싸웠는데 완안방방은 그가 피하기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조급증이 나서 빈번히 대수인장법을 쓰면서 양과를 공격했다.
또 몇 합을 싸워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양과는 진짜 무공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장법
에 돌연한 변화가 생기더니 쌍장이 몸 뒤로도 움직이며 사방에서 장이 빗발치듯 했다. 이렇
게 장이 사방팔방에서 완안방방에게 날아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묘파의상승장법(上乘掌法)
이었다.
완안방방은 양과가 갑자기 무공을 바꿀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놀란 완안방방이, "네놈
이……." 하고 말머리는 꺼냈으나 양과의 장풍 때문에 쩔쩔매느라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
다. 그래서 완안방방은 대수인장법으로 방어하기에 바빴다.
양과는 동사 황약사가 준 구화옥로환을 복용한뒤 공력이 1성 쯤 회복되기는 했으나 완안방
방이 5년 사이에 무공을 어느 정도까지 닦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고묘파 무공 중에
서 가장 무서운 장법을 쓰면서 그 사이에 간간이 전진교의 장법을 섞어 쓰기도 했다. 옛날
고묘파의 조사(祖師) 임조영(林朝英)이 만들어낸 장법은 전적으로 전진교의 장법을 누르기
의한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 장법을 일기일정(一奇一正)이라 한다면 이 두 가지를 합쳐 사
용하는 것은 기정상합(奇正相合)이라 각 장법의 허점들이 미봉되어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
런데 양과는 좌우호박지술을 쓸 줄 모르다 보니 한 손으로는 전진교의 장법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묘파의 장법을 써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다만 먼저 전진교의 장법을
쓰고 나서 다시 고묘파의 장법을 이어서 쓰곤 했다. 그렇게 해도 한동안 완안방방은 견뎌내
기 힘들어 했다.
연속 오십여 합이나 싸웠지만 완안방방은 아직 격패당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양과는 속
으로 아주 조급했다. 본래 그는 속전속결을 하고 선제공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연되다 보면 무채접이 자기가 사용하는 무공이 오독방의 것이 아
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분명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속전속결
을 못하자 완안방방은 점차 기를 펴고 대수인끙법으로 연속적인 공격을 가해와서 승부를 가
르기가 어렵게 되었다.
무채접은 요 며칠 사이에 양과와 함께 다니면서 그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곳곳에서
자기를 다정하게 돌봐주었던 까닭에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이전의 양효비보다 퍽 나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이것이 양효비가 나이를 먹어 세상물정을 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그녀는 사랑에 빠져 근본적으로 양과에 대해 눈꼽만큼도 의심을 두
지 않았다. 그녀는 혁중달과 싸우면서도 마음은 절반쯤 양과에게 가 있었다. 그녀는 양과가
사용하는 초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못했고 다만 그가 이기기만을 바랐다.
혁중달은 천생으로 신력(神力)을 갖고 있는 데다가 완안방방의 가르침까지 받았던 까닭에
무공의 진보가 매우 빨랐다. 하지만 후반생에 와서야 출가한 몸이고 보니 대성하기는 어려
웠던 탓에 무채접과의 싸움에서 실력이 엇비슷한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양과는 무채접이 자꾸 자기쪽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
"접아, 어서 혁중달을 물리치고 와서 날 도와줘."
양과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하마터면 완안방방의 공격에 걸려 대수인장에 얻어맞을 뻔
했다.
그때 날은 더 어두워져 길에는 행인들이 더욱 드물었다. 용기 없는 사람들은 아예 멀찌감치
피해 도망갔고 담이 큰 사람들이 먼곳에 서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곁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저것 봐. 저 비구니는 비록 기세가 흉흉하기는 하지만 분명 미인인 것 같아."
"자낸, 이젠 나이도 먹었는데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으니 저 비구니라도 데려가는게 어떻겠
나?"
"일리있는 말일세. 좀 있다가 저 여인이 외팔이 사내에게 맞아 쓰러지면 내가 가서 빼앗아
올테야."
"저 여잔 출가한 몸이라 기필코 자넬 따르지는 않을 걸세."
"저 여자가 얻어맞아 다치게 되면 내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내가 억지로 덤비면 제까짓
것이 무슨 용 빼는 수가 있나?"
그말에 구경꾼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완안방방이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몸에서 표창을 꺼
내어 던졌다. 그 사나이는 무공을 모르는 데다가 날까지 어두웠던 탓에 그 표창에 목을 맞
았다. 비록 거리가 석장 남짓 되었으나 완안방방이 전력을 다해 던진 표창은 그 사나이의
미간에 명중해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살인이야!"
뭇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눈깜짝 할 사이에 구경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양과가 그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사람이 말은 경박하게 했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잖아."
양과는 이렇게 말하면서 장을 날렸다. 이 장에는 약간 탄력이 있어서 칠할쯤은 앞 방향으로
나가고 삼할쯤은 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완안방방이 뒤로 훌쩍 물러섰으나 뒤로 되돌아오는 그 삼할의 힘에 부딪쳐 앞으로 비틀거렸
다. 양과가 그 틈을 이용해서 또 일 장을 날렸다. 그러자 완안방방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몸
이 쏠리는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해서 두 발로 땅을 차고 몸을 솟구쳐 양과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양과가 급히 신장낙운(神掌落雲)이라는 장을 일장 내갈겼다. 완안방방은 경공이
아주 뛰어나서 공중에서 양과와 맞장을 치고는 공중으로 또 한번 더 날아올랐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완안방방은 벌써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삼십구로 난피풍 검술 중의
사운횡도(斜雲橫渡)란 초식을 썼다. 양과도 목검을 뽑아들고 파도소리와 같은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완안방방은 한 갈래의 대력이 자기에게 몰려듦을 느끼고 급급히 검을 비키면서 물
러났다.
양과는 동해의 사나운 파도 속에서 스스로 익힌 검술을 썼는데 그 기세가 비할 바 없이 맹
렬했고 마치 밀물처럼 끊임없는 공격의 연속이었다.
완안방방은 양과가 처음에 무공 초식을 바꿀 때에도 약간 의심이 들었는데 이번에 그가 자
기가 만든 검술을 쓰자 자기가 5년 전에 바로 이 검술에 의해 패배를 당했던 일이 생각났
다. 깜짝 놀란 완안방방이 물었다.
"너, 너는 도대체 양효비인가 아니면 양과인가?"
양과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했고 완안방방도 전력을 다해 그 공격을 막아내느라
더 물어볼 경황이 없었다.
혁중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채접이 있는 힘을 다해 응전하다가 이형검술
(異形劍術) 중의 괴석임립(怪石林立)이란 초식을 써서 혁중달의 낭아봉을 물리치고 아미쌍
자로 혁중달의 왼쪽 어깨에 세치 남짓한 상처를 냈던 것이다.
상처를 입은 혁중달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는데 세찬 바람소리가 일도록 낭아봉을 휘둘러
댔다. 그러나 무채접은 더욱 침착하게 응전했다. 이형검술은 힘으로만 이기려고 하는 무공을
제압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검법이었다. 혁중달이 낭아봉을 차바퀴 돌리듯이 휘둘러 무채접의
주위를 감싸다시피 했지만 무채접은 마치 살랑살랑 나는 나비처럼 교묘하게 빠져서는 왼쪽
을 치는 척하다가는 오른쪽으로 덮쳐들곤 했다.
무채접은 혁중달이 미친 듯이 달려들자 도리어 아주 재미있어 하면서 아미자를 들고 낭아봉
의 좌우로 이리저리 잽싸게 피하면서 혁중달의 옆으로 훌쩍 뛰어갔다가는 또다시 그의 등뒤
로 훌쩍 뛰어넘어가곤 했다. 혁중달은 마치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요란한 소리를 지르면
서 낭아봉을 마구 휘둘러댔다. 무채접이 깔깔 웃어대며 또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놀려
댔다.
"이 꺽다리야. 네놈이 날 때리지는 못하겠지?"
그러자 혁중달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쬐끄만 계집년 같으니, 이 장군이 네년을 기어이 때려죽이고 말겠다."
혁중달이 휙하고 낭아봉을 휘두르자 무채접이 그것을 살짝 피했다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
에 혁중달은 깜짝 놀랐다. 미처 낭아봉을 끌어다 앞을 막을 겨를이 없어 무채접이 아미자로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을 뻔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경실색하는 혁중달의 꼬락서니가 재미있는지 무채접은 아미자로 그의 가슴팍에 두 치 남
짓한 상처 두 곳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혁중달이 너무 아파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면서
낭아봉으로 무채접을 후려갈기려고 했으나 무채접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혁중달이 멍청히 서 있다가 물었다.
"넌, 넌 왜 날 죽이지 않는 거냐?"
"꺽다리야, 넌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는 것을 본 적도 없니? 쥐가 고양이 발톱 밑에서 도망
갈래야 도망갈 수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걸 말야."
"고양이가 쥐를 잡는 걸 본 장군이 물론 봤고 말고."
"그럼 넌 자기가 고양이 앞의 생쥐 같다는 생각이 안드니?"
혁중달은 그제서야 이 계집애가 자기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낭아봉을 치켜들고 마구 달려들었다. 무채접은 피하기만 하면서 이따금씩 아미
자로 혁중달의 몸을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했으나 너무 깊이 찌르지는 않았다. 그러자
눈깜짝할 사이에 혁중달은 몇 곳에 상처를 입고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너무 아파서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때 갑자기 앞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려오더니 사오십 명 되는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들은 손에 초롱을 들고 있었는데,
"살인범을 놓치지 마라!"
누군가 큰 소리를 질렀다.
네 사람은 싸움을 멈추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관부로 달려가 이 곳에서 한 사내가 죽은 사
실을 알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완안방방은 혁중달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매우 가슴
아파하면서 무채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 계집애야. 후에 두고 보자."
"내가 그때를 기다려 줄게."
무채접이 이렇게 놀려대자 혁중달이 낭아봉을 들고 다시 덤비려 했다. 완안방방이 그를 말
렸다.
"우린 이젠 가지."
"왜 간단 말입니까? 본 장군은 저 무씨라는 계집애를 죽여 버려야 분이 풀릴 겁니다."
"저렇게 군사들이 몰려온 걸 보지 못했나요?"
혁중달은 달려온 군사들을 보고 나서 입을 비쭉 내밀었다.
"송나라 군사라는 것들이야 모두 초개같은 것들이지. 본 장군은 저런 놈들을 얼마나 죽였는
지 모릅니다."
"혁중달, 도대체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완안방방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혁중달은 비록 사내 대장부였지만 완안방방의 말을 고분고
분 듣는 사람이라 무채접을 흘겨보고 나서 완안방방을 따라 골목으로 사라졌다.
양과와 무채접도 군사들과 실랑이를 하기 싫었기 때문에 길옆의 집 위로 뛰어올라 지붕을
넘어 도망갔다. 군사들은 대부분 무림 사람들이 경공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날도적들이군! 날도적들이야!"
양과와 무채접은 서로 마주보면서 웃더니 객점 쪽을 향해 지붕들을 건너뛰어갔다.
그때 갑자기 십여 장 되는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붕으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검은 그림자는 양과와 무채접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양과는 그 검은 그림자가 적인지 자
기편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무채접을 끌고 반대쪽 방향으로 뛰었다.
뒤쫓아오는 검은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소리쳤다.
"두 날도적은 게 섰거라. 나는 가흥부(嘉興府) 천자제일호(天字第一號) 신포(神捕)다."
양과는 사태가 좋지 못함을 느꼈다. 신포들은 대개 무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대적해
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양과는 무채접과 함께 기를 쓰고 도망갔다. 그런데 그 검은 그림
자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웃으면서 소리쳤다.
"난 초상비(草上飛)라고 부르는데 경공이 천하에서 으뜸이다. 너희들은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어."
양과와 무채접은 전력을 다해 날았지만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는 경공술이 더욱 고명하여 이
젠 두 장 남짓한 곳까지 따라왔다. 무채접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관부에…… 저런 재주꾼이…… 다 있나요."
검은 그림자가 그들의 뒤에 가까이 와서 호탕하게 웃었다.
"어서 멈춰서 내게 백번씩 머리를 조아려라. 그럼 놓아줄테다."
양과와 무채접은 감히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앞으로 내뛰기만 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성에
서 나와 남호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갔다. 뒤에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는 따라잡을 생각이 없
는지 한 장이 좀 못되는 거리를 두고 따라오면서 어서 멈추어서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끊임
없이 권고하는 것이었다.
무채접이 속으로 생각했다.
'방금 내가 고양이 앞의 생쥐라고 혁중달을 놀렸더니 이젠 우리가 고양이 앞의 생쥐 신세가
되었구나. 이 사람의 경공이 이처럼 높은 것을 보면 무공도 나와 양과보다 퍽 높을거다. 오
늘 밤 저 사람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겠구나.'
붙잡혀서 옥에 갇힌 채 누추한 몰골을 하고 있을 자신의 처지를 상상해본 무채접은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양과와 함께 기를 쓰고 도망갔다.
양과도 이런 낭패스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무채접에게 귓속말을 했다.
"접아, 잠시 후에 갑자기 돌아서서 저 놈이 손쓸새 없이 공격하자구.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거야."
무채접도 그 말을 듣고 생기없이 그렇게 하자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속도를 늦추어 갑자기 멈추고 뒤로 몸을 돌리면서 장을 날렸다. 검은 그림자는
바짝 따라오다가 몸을 피할 겨를이 없어 하마터면 양과와 무채접의 장에 얻어맞을 뻔했다.
그 검은 그림자는 급히 몸을 훌쩍 날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 사람이 이런 형편에서도 장에 맞지 않고 벗어나는 것을 본 무채접은 속으로 깜짝 놀라면
서 그 사람의 무공이 이미 자유자재의 경지에까지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무채접이 양과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어서 도망가자구요."
양과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물었다.
"이 사람의 경공이 우리들보다 훨씬 뛰어나면서도 왜 우릴 바싹 따라와 앞을 막아서지 않고
뒤만 슬슬 쫓아왔을까?"
무채접이 고개를 흔들자 양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자기의 경공이 고명한 것을 믿고 우리가 기진맥진해지면 쉽게 붙잡으려고 그러
는 거야."
"교활한 놈이군요. 우리 한번 결사적으로 싸워 보죠. 누가 이길지는 모르잖아요."
무채접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양과와 무채접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그들로부터 삼 장 남짓한 곳에 가서 착지했
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멍해 있다가 묻는 것이었다.
"이봐, 임자들은 왜 도망가지 않는 거야? 그래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할텐가?"
"우리가 왜 도망가며 또 왜 절을 해야 되냐?"
무채접이 이렇게 소리 지르자 그 사람은 머리에 쓴 자기의 관모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신포라서 너희들은 겁이 나 도망가지 못하는 거지. 안그래?"
"아니야. 우린 너만큼 빨리 달리지 못하기에 기진맥진해서 잡히긴 싫단 말이야. 너의 계책에
넘어가지 않겠어."
"그 처녀가 아주 영민한데. 이 신포의 묘계까지 간파했단 말야. 하하, 어서 머리들이나 조아
리라구. 한 사람이 백번씩 모두 이백번이야."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며 걸어오다가 또다시 갑자기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가 무서운 적수
라는 것을 깨달은 양과가 목검을 뽑아들며 소리질렀다.
"당신이 포두든 신포든 상관없이 이 양모는 당신의 무공을 좀 배워 볼 생각이오."
그 사람이 또 두어걸음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이봐, 임, 임잔 양효빈가 아니면 양과인가?"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관모를 벗어들자 별빛 아래 그의 백발이며 흰 눈썹이며 흰 수염을 한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드러났다.
"노완동?"
양과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무채접도 알아 보고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주선배님께서 포두로 변장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옥에 갇힐 뻔했
군요."
노완동 주백통이 양과를 자세히 뜯어보며 다시 물었다.
"임잔 도대체 양효빈가 아님 양과인가? 오, 아마도 양과이겠군. 5년 전에 거와장에서 임자가
이 처녀와 함께 앉아 있더니 오늘 또 함께 있군 그래. 이제 소룡녀를 잊은겐가?"
양과는 '소룡녀'란 말을 듣더니 속으로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는 주백통이 정말 자기를 알아
볼까봐 겁이 나서 급히 웃는 얼굴로 예를 올렸다.
"임잔 양효빈가. 하하, 임잔 정말 양과와 똑같이 변장했구만. 하하, 사부인 나마저 알아보지
못하겠다니까. 강호에서는 양과가 분신법을 쓰는 줄로 알 거야."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기분좋게 웃자 양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어째서 이 곳까지 오셨습니까? 또 어째서 포두로 변장하고 우리 뒤
를 추격하셨습니까?"
"저런, 임자가 나더러 칠월 초여드렛날 철창묘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았나? 그래 잊었단 말
인가? 아유, 임자는 내가 너무 일찍 온걸 나무라는 건가?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이."
그 말을 들은 양과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주백통이 왜 제자에게 이처럼 조심스럽
게 행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양효비가 미랑의 귀신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주백통
이 겁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 주백통은 칠월 초여드렛날 철창묘에서 양효비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는 심
심한 나머지 일찌감치 가흥으로 와서 이날 저녁에 할일이 없어 거리를 쏘다녔던 것이다. 그
러다가 관군들이 '날도적'을 붙잡으려고 야단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자 애들 같은 장난기
가 불쑥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 관군 속에 끼어들어 관군의 모자 하나를 빼앗아 쓰고 도망쳤
던 것이다. 그래서 포두로 변장하고 '날도적'의 뒤를 놀이삼아 추격했던 것이다.
"이봐 제자? 기왕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칠월 초여드렛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네. 무슨
분부가 있거들랑 어서 말하게."
"제자가 어찌 감히 사부님께 분부하겠습니까?"
주백통은 양효비가 화를 내는 줄로만 알고 어두운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억지로 얼굴에 웃
음을 띠면서 입을 열었다.
"헤헤, 귀여운 제자. 임잔 절대 미랑의 귀신을 불러오지 말게. 내, 내가 임자에게 무공을 전
수해 주려는데, 어때?"
양과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안됩니다. 이미 칠월 초여드렛날로 약속했으면 칠월 초이레도 안된 오늘 저녁에는 더군다
나 안됩니다."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귀여운 제자, 그렇게 하자구."
"안됩니다."
주백통이 하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좋네, 좋아. 그럼 노완동은 이젠 잠자러 가야겠네. 그건 괜찮겠지?"
양과가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주백통은 마치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훌쩍 뛰어올라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라져 버
렸다.
무채접이 물었다.
"그 분은 당신의 사부님이신데 왜 그처럼 무례하게 대하나요? 이상하군요. 그 분이 뭣 때문
에 당신을 두려워할까요? 당신들 두분 중에 도대체 누가 사부님인지 알 수가 없군요."
"임잔 그렇게 알려고 할 필요가 없어. 자, 우리도 돌아가자구."
무채접은 발길을 옮기려 하지 않고 멀리 호수를 바라보았다. 먼 곳의 유람선에 등불이 반짝
거리고 노래소리와 웃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등불 빛이 수면에 길다란 그림자들을 던져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
"양공자님, 밤중의 남호도 이처럼 아름답군요."
"유감스러운 건 북쪽 변방엔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때인데 이 곳은 춤과 노래가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이오. 그러니 송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무채접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는 양과의 머리 속에는 황용이 도화도에 있을 때 가르쳐 준 시
구가 떠올랐다.
창녀는 망국의 한을 모르는가
강 건너에서 후원의 꽃을 노래하네.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그때는 그 시구의 뜻을 똑똑히 알지 못했었는데 오늘 남호의 야경을 보자 갑자기 그 시구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유, 양공자님이 마치 우국지사가 된 듯하군요. 히히히."
양과는 탄식해 마지 않았다. 곽대협이 양양에서 원나라 군대를 맞아 항거하는 위무당당한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삽시에 온 몸에 붉은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곽정 백부는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재난 속에서 구원하니 실로 진정한 대협답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자기는 '신조협'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지만 협의를 지키는 일은 하지 못했다고 생각
되었다. 오독방은 무림지사들이 원나라 군대를 막으러 북쪽으로 간 틈을 타서 무림을 독점
하려고 하고 있는데 자기가 이 일을 알고서야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만일 단신으
로 이 사악한 무리를 없앨 수만 있다면 분골쇄신 하더라도 달갑고 또 그래야만 협객의 이름
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소룡녀를 찾아 부부의 연을 다시 이어야만 의(義)를 지켰
다 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감히 협의를 지켰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무채접은 양과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의 손을 잡고는 호숫가를 따라 거
닐면서 남호의 야경에 심취해 있었다. 양과는 아주 흥미를 가지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때때로 그녀와 마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채접은 다정한 정에 사무쳐 무시로 양과의
팔을 꼭 끌어안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달콤한 말을 속삭였
다. 양과는 이따금씩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21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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