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5

3학년2반 | 2022.02.26 07:41:12 댓글: 0 조회: 52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238
화산논검(華山論劍) 제21권 7부 신조협 양과후전 III
제목: 화산논검 제21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제17장 철창묘에서의 만남
제18장 서역신교의 보물
제19장 인골염주의 비밀
제20장 철혈남아
제21장 서역신교의 전세교주
제22장 형제의 정분
제23장 정(情)은 흐르고 흘러
제24장 거와를 삼킨 양과
제17장 철창묘에서의 만남
칠월 초이렛날 양과는 객방에서 온종일 쿨쿨 자고 나서 날이 어슴푸레해졌을 때에야 자리에
서 일어났다. 무채접을 찾아 이리저리 하자고 말하고 나서야 그들은 행장을 수습하고 병장
기를 지닌 채 슬그머니 가흥성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경공을 써가며 족히 한 시진이나 달렸을 때 앞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천 마리나 되는 까마귀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무렵이 되자 요란히 울어대며 날
고 있었다.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양과는 철창묘 부근에 당도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철창묘
에는 오대(五代) 때의 명장인 철창(鐵擔) 왕언장(王彦章)을 모신 영정이 있었다. 묘 옆에는
높은 탑이 서 있고 그 탑 꼭대기에는 까마귀 무리들이 세세대대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
고장 백성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철창묘의 까마귀들은 신병 (神兵)과 신장(神將)들이 변
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감히 까마귀를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까마귀들이 번식해서 이처럼 많아지게 된 것이었다.
양과가 멈추어 서자 무채접이 물었다.
"이봐요, 다 왔나요?"
양과가 머리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옆에 있는 죽림 속으로 들어가 철창묘 옆에 다가가서
몸을 숨겼다.
이윽고 한 사람이 철창묘 쪽으로 걸어왔다. 몽롱한 달빛을 빌려 살펴보니 그 사람은 사방을
살피고 있었는데 오른쪽의 빈소매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무채접이 놀라 소리를 지르려
고 하는 것을 양과가 급히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무채접이 양과의 손을 치우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조협 양과가 아닌가요?"
양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임잔 사람을 잘못 보았어. 저 사람이 진짜 양효비인걸.'
양효비가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안의 공기가 좋지 않은 모양인지
그는 손으로 코를 싸쥐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접아, 모든 게 임자에게 달렸어. 절대 두려워해선 안돼."
무채접이 대답하고 나서 가벼운 걸음걸이로 죽림을 나와서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 양효비가 별안간 손에 목검을 들고 뛰쳐나오며 낮은 목소리로 물
었다.
"누구얏!"
무채접이 깜짝 놀라면서 손으로 콩콩 뛰는 가슴을 붙잡고서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양효비, 저예요. 접아예요."
양효비는 그 말에 접아보다 더 놀랐다.
"접아, 임자가 어떻게 이 곳에 왔나?"
무채접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올 수 있는데 제가 올 수 없단 말인가요?"
그녀가 안에 들어서자 양효비도 뒤따라 들어와 문을 잘 닫아놓았다.
본래 양과는 이런 계산을 했었다. 그는 양효비가 철창묘에 와 '긴요한 물건'을 넘겨받게 될
것이므로 기필코 일찍 당도해서 실수를 피하려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과는 무채접을 들여보내 양과로 변장한 양효비를 가짜 양효비로 간주하고
실랑이를 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그 틈에 물을 흐려놓고 고기를 잡는 식으
로 순조롭게 오독방의 그 '긴요한 물건'을 넘겨받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묘 안에 들어선 무채접은 코를 찌르는 까마귀 똥냄새를 맡고 이 묘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횃불을 밝혀들고 맞은 편에 있는 철창 왕언장의 상을 비춰보려
했다. 하지만 철창이 있어야 할 위치가 텅 비어 있었고 철창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
실 그 철창은 일찍이 이십여 년 전에 황용이 가져다가 창 끝은 없애버리고 쇠로 된 자루만
을 강남칠협(江南七俠)의 우두머리인 비천편복 가진악에게 보내 쇠지팡이로 쓰게 했던 것이
다.
양효비가 또다시 물었다.
"접아, 임잔 어떻게 여길 왔나?"
무채접은 그가 양과인 줄로만 알고 양과가 자기에게 사전에 말한 계책대로 머리를 굴렸다.
'신조협이 어디에서 본 방의 이 일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다행히도 양공자님이 묘한 계
책을 세워두었지. 어디 한번 이 자를 한바탕 속여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난 무채접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양효비, 전 집법사자인 언니의 명령을 받들고 당신에게 알려 줄게 있어 왔어요. 그 긴요한
물건을 넘겨받는 지점을 바꾸게 되었으니 당신은 돌아가세요."
"그게 정말인가?"
"당신은 언니의 말도 믿지 않나요?"
"그럼 어느 곳으로 바꿨소?"
"사실 장소는 변경되지 않았고 역시 이 철창묘로 정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달라져 칠월 초
여드렛날 즉, 내일 저녁으로 정했어요."
그 말에 양효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쉬더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행히 역시 이 곳이라니까 됐어. 만일 항주로 고쳐 정한다면 지쳐 죽을 지경일 거요."
무채접은 그가 자기 말을 믿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린 어서 돌아가죠."
양효비는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에서 무채접의 아리따운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보자 엉큼한
생각이 나서 가까이 다가오며 히죽거렸다.
"접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더니 임잔 더 이뻐졌구려. 난 임자 생각을 몹시 했었어."
양효비가 이러면서 무채접의 손을 쥐려고 하자 무채접은 횃불을 그에게 내밀었다. 양효비가
깜짝 놀라 뒤로 급히 물러났다.
"접아, 임…… 임자 왜 이러나?"
"장난을 해본 거죠."
무채접이 깔깔거리며 이렇게 대답해놓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양과란 이 놈이 5년 전에는 품으로 기어드는 오군영도 마다하더니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색을 밝히는 걸까? 양효비와 똑같은 물건이구나. 그래도 양효비는 이젠 많이 달라졌는데 이
양과는 이전보다 몹시 나빠졌어.'
양효비는 무채접이 정말 자기와 장난을 치려는 줄 알고 또 가까이 다가오며 부드러운 음성
으로 구슬리기 시작했다.
"접아, 난 정말 임자 생각을 몹시 했어. 요 며칠새 난 밥맛도 없고 물마저 마시기 싫을 정도
로 온통 임자 생각만 했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비비면서 당장 눈물을 흘릴 것처럼 굴었다. 무채접이 그 꼬락서
니를 보고 이를 악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네놈이 양과인 줄을 내가 모르는 줄 아나 본데 흥, 나를 차지하려는 꿈도 꾸지 마라.'
무채접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밤도 깊었으니 우린 객점으로 돌아가는게 좋겠어요."
"임잔 어디 묵었나?"
"가흥부에 묵었지요."
양효비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가흥부는 이 곳에서 너무 멀어 돌아간다고 해도 밤이 깊어서야 당도할 수 있을 걸. 헤헤,
그러지 말고 우린 이 묘에서 쉬면서 얘기나 나누자구."
무채접은 아주 조급해졌다. 이 자가 자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이윽고 그 '긴요한 물건'을 가
진 사람이 오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채접은 하
는 수없이 다시 웃는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
"양공자님, 이 곳은 너무 더러워요. 우리 함께 후전(後殿)으로 가지요."
"그게 좋겠어."
양효비가 얼싸 좋아라고 무채접의 손에서 횃불을 받아 들고서 후전 쪽으로 향했다. 무채접
은 뒤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양효비가 후전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들어가자구."
무채접이 후전으로 들어서자 양효비가 문을 잠갔다. 무채접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이래요?"
"날씨가 차서 접아가 추워할까봐 그러는 거야."
양효비가 히죽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무채접은 조심스럽게 방석 위에 앉은 채 속으로 빌
었다.
'양공자님, 어서 물건 가져온 사람을 만나고 와서 절 구해 주세요.'
양과는 철창묘 옆 죽림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무채접과 양효비가 나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기가 무채접으로 하여금 양효비를 속여서 데리고 가도록 꾸며놓았는데 양효
비가 무채접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혹은 무채접이 묘 안에 있는 자가 진짜 양효비라는
걸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일이 시끄러워지고 악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양과는 싸우는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애써 양효비로 변장한 것은 오독방으로서는 아주 중요
한 그 물건을 수중에 넣어 그것을 빌미로 오독방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것인데 그것이 틀어
질까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는 오독방이 중원의 무림에 대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
는지도 매우 알고 싶었던 것이다.
밤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추위가 엄습해왔다. 벌써 해시(亥時)가 되었다. 양과가 바라보니
철창묘의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양과는 숨을 몰아쉬고는 살금살금 묘 문앞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엿들으니 묘안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어 묘안을 살폈다. 안은 온통 캄캄했는데 말소리가 약간 울려 나오기는 하나
아주 미약했다. 조심스럽게 목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말소리는 후전으로부터 울려나오고 있었다. 양과가 뒷문 가까이 다가서자 은은한 불빛이 틈
으로 새어나왔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양효비의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접아, 나의 귀여운 접아. 여기 내게로 오라구."
그러자 무채접의 놀란 목소리도 들려왔다.
"당, 당신 가까이 오지 말아요!"
보아하니 양효비가 가까이 다가갔는지 또다시 무채접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더 가까이 오면 난, 난 가만있지 않겠어요."
곧이어 병장기를 뽑아드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러자 양효비가 한숨을 쉬면서 말
하는 것이었다.
"접아, 임자가 줄곧 내게 시집 올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난 다 알아. 기실 나도 조만간에 임
자에게 장가들게 되리라고 믿어."
"조만간이라니, 그래 그게 어느 땐가요?"
무채접이 양과를 견제하느라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양과는 살그머니 문 쪽으
로 걸어갔다. 문밖을 나서려고 할 때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양과는 문 뒤에 숨어서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오솔길로 네 사람이 오고 있었는데 3남 1녀였다. 그 중에서 키가 큰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
로 말했다.
"아가씨, 그들이 오지 않은게 아닌가요? 왜 귀신의 그림자조차 없을까요?"
양과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은 독주여니 완안방방이었
고 우람한 체구의 사내는 혁중달이었던 것이다. 그 밖의 두 사람은 모용협과 탁장청이었다.
양과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들은 본래 서로 원수지간이었는데 어째서 함께 있는 것일까? 모용협과 탁장청은 당
세의 젊은 협객으로서 강호에 유명한데 어째서 저런 여마두와 함께 휩쓸려다니는 것일까?'
모용협이 여러 사람을 제지하며 가만히 말했다.
"그들이 이미 당도했다면 분명 이 철창묘 안에 있을 겁니다. 들어가서 살펴봅시다."
세 사람이 모두 머리를 끄덕이자 모용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혁장군께서 수고하십시오."
혁중달이 "좋아!" 하고는 어깨를 어쓱거리며 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완안방
방이 혁중달을 붙잡으면서 모용협을 향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모용공자님이 친히 들어 가보는게 좋지 않을까요? 나의 이 혁 장군은 동작이 둔해서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예요."
그러자 모용협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사태(師太)께선 안에 매복이 있을까봐 두려워 그러십니까?"
완안방방은 그가 자기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난 확실히 이 묘 안에 매복이 있을까 의심이 가는군요. 당신이 이 점을 미리 생각
했기 때문에 혁장군에게 먼저 들어 가라고 한게 아닌가요? 매복에 걸려도 자신은 손해를 안
본다 그말이지요."
그러자 탁장청이 속으로 요사스런 계집이라며 쓴웃음을 짓고는 태연하게 물었다.
"사태께서는 왜 친히 들어가보시지 못합니까?"
완안방방도 탁장청의 간계를 간파하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모용세가의 모용공자님마저 매복에 걸릴까봐 두려워 하는데 일개 아녀자인 나따위로서는
더군다나 목숨이 두려울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탁장청이 쌀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도우러 온 사람들이라는걸 잊지 마십시오."
"두 분의 호의를 전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이 성사되기만 하면 우리의 서역신교에
서는 당신들을 도와주기로 한 약속을 지킬거예요. 쌍방에게 다 이로운 일인데 누가 먼저 들
어가나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그럼 사태께서 먼저 들어가보시는게 어떻습니까?"
"안돼요, 안돼. 저의 무공으로는 양과를 당해내지 못해요. 우리 네 사람 중에 그래도 모용공
자님의 무공이 제일 훌륭하고 또 지혜와 계책도 있잖아요. 그 어떤 위험도 모용공자님께서
는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모용협이 손을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자질구레한 일로 다툴 건 없습니다. 제가 직접 들어가보지요."
탁장청이 말했다.
"저 분께서 하는 말씀이 진짜 양과라면서요."
이미 완안방방은 자기와 겨룬 상대가 양과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일을 이미 모용협과 탁
장청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용협은 쌍사자표국과 동행하던 양과가 바로 완안방방
이 만난 양과라고 여겼다. 그는 또 맘 속으로 강호에서 신조협으로 널리 알려진 양과가 이
미 대협 곽정과 수준이 엇비슷한 으뜸가는 고수라고 하는 것은 뭔가 와전된 것이라고 여겨
대단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와 겨룬 상대가 양효비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모용협이 살금살금 묘문 쪽으로 다가가보니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묘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아무런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이때 후전에서는 양효비와 무채접
간에 티격태격하는 말소리조차 소강상태에 빠졌는지 들리지 않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렇
지 않았더라면 모용협은 내공으로 그 말소리를 능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양과가 이
곳에 왔다면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분명 자웅쌍사자 동진과 원칠랑을 호위병 삼아 데리고
왔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묘 안의 물건이 기필코 어지럽게 되어있을 것인데 묘 안에는 아무
런 이상한 흔적이 없으니 모용협은 시름을 놓았다.
모용협이 그들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았군요."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완안방방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중요한 일이어서 대체로 자시(子時) 전후해서 시간을 정하게 될 거예요. 그 시각은
밤이 깊고 조용하니까요. 양과의 성미로 보아서 결코 일찍 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 누가
미행하는걸 피할 수 있으니까요."
모용협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 사태께서는 귀교(貴敎)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없겠습니까?
중요한 보물이라도 됩니까?"
"그 물건은 기실 보물이랄 것도 없고 외인들이 보기에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
요. 하지만 우리 교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이니 두 분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본교의 비밀을 누설할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모용협이 또다시 물어볼까봐 이렇게 쐐기를 박으며 토를 달았다.
"자시가 곧 돼가니 우리 모두 죽림 속에 몸을 숨깁시다. 보물을 지닌 자가 당도하자마자 뛰
어나와 그 보물을 빼앗아 가버리는게 좋지 않을까요?"
모용협은 완안방방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 사
람은 묘 옆 죽림 속으로 들어갔다.
묘 안에 있는 양과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가 만일 밖으로 나간다면 그 네 사람이
아까 자기들이 한 말을 엿들은 줄 알기 때문에 선수를 써서 공격하려고 할 것이다.
양과는 어린 시절에 이 철창묘에서 지낸 적이 있었으므로 주위의 물건들을 아주 상세히 알
고 있었다. 양과는 가볍게 몸을 솟구쳐 돌기둥을 안고 묘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 철창묘는
오랫동안 손질하는 사람이 없어 건물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양과는 묘 꼭대기의 담벼
락 모서리의 허물어진 곳에서 청기와 몇 장을 뽑아내 용마루 위에 놓고는 그곳을 통해 기어
나와 철창묘의 다른 한 옆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어린 시절 소룡녀와 함께 고묘파의 무공을 닦았기 때문에 경공이 최상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비록 그의 공력이 6성 정도밖에 회복되지 못했으나 조심히 뛰어내리니 새털처럼 가
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림에서 빠져나온 뒤 오솔길로 꺾어 들어서는 활개치면서 또다시 철창묘 앞으로 걸어
갔다.
양과는 모용협 일행이 숨어 있는 죽림 쪽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문 앞에서 사방을 둘
러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 참, 이 사람 이거 왜 아직도 안오는거야?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문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죽림 속에 숨어 있던 네 사람은 정말 양과
가 방금 당도한 것으로 여겼다.
양과가 자리에 앉자마자 묘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양효비와 무채접이 뜻이
맞지 않아 또 다투는 것이었다. 바깥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다투는 소리가 작게 났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다행히도 모용협 일행이 숨어 있는 죽림이 묘 문으로부터 오십여 보
나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그들은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오솔길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양과는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죽림 속에 숨어 있
는 그 네 사람들이 참을성이 있어서 마구 달려들지 않기를 바랐다.
검은 그림자가 재빨리 걸어오고 있었는데 머리에 차양이 넓은 검은 모자를 눌러 썼기에 얼
굴이 거의 가리워져 있었다.
양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람은 양과를 보고 놀라더니 즉시 흰 수건을 꺼내어 흔드는
것이었다. 양과는 일 보 일 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사람은 수건을 흔들다가 그만
두고 양과가 한 걸음 내디디면 자기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양과는 그 사람의 의도
를 알 길이 없어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 사람도 멈추어서서 더이상 뒷걸음질을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 나오지도 않는 것이었다.
양과가 눈동자를 굴리며 이번에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양과가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자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이었고 양과가 멈추어서면 자기도
멈추어 서면서 십보쯤 되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양과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당신은 왜 이리로 오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대답없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 물건을 갖고 왔습니까?"
그 사람이 일부러 목소리를 눌러가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요? 당신은 원하러 왔소?"
"당신을 기다렸지요.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단 말입니다. 어서 그 물건을 내게 넘겨주시오."
양과는 슬그머니 죽림 쪽을 훔쳐보았다. 지금 자기는 죽림에서 오십보 쯤 떨어진 곳에 있고
물건을 갖고 온 사람은 죽림에서 칠팔십보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만일 모용협과 완안방방
등이 뛰쳐나온다면 자기는 선수를 써서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 '긴요한 물건'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뒤로 이보 물러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물건을 넘겨주어야 할 사람이 아니군."
그 말에 양과는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급히 흰 수건을 꺼내어 몇 번 흔들
면서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요."
그 사람이 앞으로 몇 발짝 가까이 오면서 차양이 넓은 검은 모자를 벗어들었다.
"양공자님, 당신일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군요."
그 사람을 자세히 바라보고 난 양과는 너무나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임, 임자가?"
그 사람이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뜻밖이겠지요? 하지만 나도 뜻밖이에요."
제18장 서역신교의 보물
양과는 옆에 있는 죽림 속에 강적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잊고는 찾아온 사람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길다란 머리칼을 풀어헤친 그 사람은 한 쌍의 아름다운 눈매에 웃음을 머금고 자기를 바라
보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오군영이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새빨간 입술을 벌리더니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양공자님, 당신이 물건을 넘겨받으려 올 줄 알았더라면 이처럼 곡절을 겪지 않았을 걸 그
랬군요."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알 길이 없는 양과는 어찌할 바를 몰라 "엉?" 하고 한마디 소리를 내
었을 뿐이었다.
어제 확도 일행 다섯이 호송마차를 덮쳤을 때 마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기실 양효비가 마
차 밖으로 뛰어나가기 전에 그는 오군영과 계책을 미리 의논해두었던 것이다. 양효비는 확
도가 틈을 엿보아 습격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그에 대한 응전의 태세를 갖추었던 까
닭에 자기가 마차에서 뛰어내린 뒤 오군영에게 마차 밑판에 있는 암문(暗門)을 열고 그 아
래로 내려가 숨어 있으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때 확도는 양효비의 거동만 주시하다 보
니 오군영이 마차 밑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군영은 마차 밑을 통해 수림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이리 밖에 있는 기울어져가는 빈집 속
으로 뛰어들었다 오군영은 양효비와 모용협이 서로 싸우는 것을 먼 발치에서 보았는데 과연
양효비는 5년 동안에 무공이 부쩍 늘어 모용협과의 싸움에서 몇 합을 겨뤄도 승부를 가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확도와 그의 사대제자가 나타나 마차를 둘러쌌다.
확도 일행이 마차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히 그 부근을 샅샅이 수색하리라
고 짐작한 오군영은 자기가 이 곳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양효비와 이 허름한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기는 했지만 정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혼자
먼저 데나 칠월 초이렛날 자금소갑을 철창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 다음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감히 가흥부엔 가지 못하고 농가를 찾아 투숙했다. 칠월 초이렛
날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비로소 자금소감을 가지고 총총히 철창묘로 온 것이었다.
양과는 이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5년 동안이나 보지 못하다가 다시 만난 오군영은
더 예뻐 보였다. 비록 남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 때문에 더욱 영준하고 씩씩해 보여 양과는
속으로 매우 기뻤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가 오독방의 물건을 가지고 양효비와 연
계하려는 것으로 봐서 그녀 또한 오독방의 제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군영은 양과가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웃는 얼굴로 수줍은 듯 말했
다.
"양공자님, 전 정말 당신일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아마도 큰 사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죠?"
오군영은 이렇게 묻고 나서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했다.
'아버님께서 내게 자금소갑을 철창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라고 분부하셨는데
양효비일 줄은 몰랐구나. 그래 이 모든 것을 아버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계략을 꾸미시고 내
게 이 곳에서 저 사람과 만나게 하셨단 말인가?'
예까지 생각이 미친 오군영은 수줍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양과를 흘깃 바라보
고는 머리를 숙였다. 삽시에 가슴속에 다정한 정이 괴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품 속에
서 자금소갑을 꺼내 양과에게 넘겨주었다.
양과가 그 자금소갑을 넘겨받으려 할 때 갑자기 죽림 속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려오면서
완안방방 일행이 뛰쳐나왔다. 양과는 깜짝 놀라 급히 자금소갑을 품 속에 넣으면서 소리쳤
다.
"오소저, 어서 가자구 !"
오소저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죽림 속에서 네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완안방방이 먼저 검을 뽑아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본 교의 보물을 어서 내놓아라!"
모용협의 무공이 한 수 위였기에 나중에 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한옥검을 뽑아들고 몸을
훌쩍 날리면서 검으로 양과의 목덜미에 있는 대추혈을 내찔렀다. 양과는 이미 그의 공격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긴 옷소매를 뒤로 내쳤다. 그러자 세찬 강기가 뒤로 밀려가면서 모용협
의 한옥검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 틈을 타 양과는 왼손으로 얼빠진 듯이 서 있는 오군영
의 허리를 잡고 몸을 훌쩍 날렸다.
모용협은 팔이 찡하게 저려옴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이놈을 하루 동안 보지 못했더니 그 사이에 어쩌면 공력이 또 이렇게 늘었을까?'
하지만 더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는지라 모용협은 경공을 써가며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
다.
완안방방과 탁장청도 모용협 곁으로 뛰어와 두 개의 검날을 거의 동시에 내뿜었다. 양과가
또다시 옷소매를 뒤로 내치니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검들이 한쪽으로 밀려났고 양과
의 옷소매가 두 검날에 의해 두 줄로 반자 가량 찢어졌다.
아까 모용협은 힘을 다 쓰지 않았기에 한옥검이 예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 그저 밀
려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양과의 옷소매가 완안방방과 탁장청 두 사람 검의 합친 힘을 막
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모용협은 이미 양과와 오군영의 앞을 가로 막아서게 피었다. 모용협이 오군영을 알
아보고 한옥검을 치우면서 물었다.
"오소저, 당신이었군?"
"전데 어떻단 말인가요?"
"당신이 어째서 양과와 같은 이런 사악한 소인배와 함께 있는가 말입니다."
"내가 누구와 같이 있든 당신이 상관할 게 있나요. 이 사람이 사악한 소인배라면 남의 물건
을 빼앗으려는 당신은 정인군자란 말인가요?"
모용협은 정면으로 면박을 당하자 얼굴이 벌개지며 알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정말 뜻밖이군. 거와장에서 줄곧 본분을 지키고 있던 여인이 서역신교의 보물에 눈독을 들
이고 있을 줄이야?"
그 말을 들은 오군영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뭐 서역신교의 보물이라구? 모를 소리구나. 그래 저 자가 자금소갑을 말하는 걸까? 아버지
께서 이 자금소갑은 귀한 물건이니 절대 잃어버리거나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
셨는데, 어째서 그것이 서역신교의 보물이란 말인가?'
양과가 목검을 꺼내들고 큰 소리를 질렀다. 완안방방과 탁장청이 겁이 나서 흠칫 물러서자
양과가 독설을 퍼부었다.
"모용협, 탁장청, 너희들은 강호 협객의 신분으로서 독주여니의 나쁜 짓을 도와준단 말이냐?
실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 일이구나!"
완안방방이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양과, 너희 오독방이 우리 서역신교의 보물을 훔친 것은 그래 잘한 일이냐?"
혁중달도 뒤이어 따라와 낭아봉을 쳐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내 보물을 내놓아라!"
양과가 목검으로 곧장 내어 찌르자 혁중달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완안방방이 오군영
을 쏘아보며 비꼬아댔다.
"얌전한 오소저가 오독방의 제자일 줄은 정말 뜻밖이야. 거와장을 오독방의 분타로 만들 작
정인가봐. 허 참, 5년 전 거와장이 천하에 보기드문 육십여 종의 독물을 산 것도 지금 생각
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군."
이 말을 들은 양과 또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난날 오자경이 거와장에서 천하의
사독고수들에게 독물을 살 때 매번 무채접의 눈치를 봐 가며 흥정한 것으로 보아하니 거와
장은 오독방의 분타임이 분명했다.
"오독방이라니?"
오군영이 양과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인가요?' 하고 묻는 것만
같은 눈길이었다.
양과는 오군영이 이미 오독방의 제자라고 짐작하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소저, 임잔 연극을 하고 있군. 그래 이 양과가 그처럼 쉽사리 속을 줄 아는가?'
양효비가 후전에서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무채접은 그를 양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부득불
아미쌍자를 뽑아들고 자기 몸을 지키려 했다.
묘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양효비가 깜짝 놀라서, 먼저
철창묘를 빠져나갔다. 일순 멍해진 무채접도 양효비가 나가는 바람에 뒤따라 나왔다.
양효비가 바라보니 먼 곳에서 대여섯 사람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모두
고수였다. 그 중 포위된 사람은 외팔이였는데 그가 쓰는 검에서 파도소리가 울려나오는 것
을 보니 신조협 양과가 분명했다. 양효비는 겁이 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는 사지가 벌벌 떨렸다.
무채접은 양과가 포위된 채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되어 아미자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
갔다.
양효비는 양과로 변장한 채 강호에서 갖은 악행을 저질러왔는데 5년 전에 양과의 위력 있는
무공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두렵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 생각
할 여지도 없이 철창묘의 뒤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만일 양과의 눈에 띄기만 하면 목숨
을 건질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무채접은 양과만 생각하다 보니 양효비가 슬그머니 도망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가
까이 가 보니 모용협, 탁장청, 완안방방 그리고 혁중달이 양과와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
다. 모용협과 완안방방이 한패가 된 것을 본 무채접은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어리벙벙
해졌다.

양과의 신변에 있는 여인이 오군영인 것을 보고서야 무채접은 놀라는 한편 속으로 딸을 내
보낸 오자겸을 비난했다. 지난날 오군영이 양효비와 약혼까지 했던 일을 무채접은 훤히 알
고 있었다. 그래서 무채접은 속으로 두려운 생각마저 가졌다.
'양공자님은 시종 오군영을 잊지 못해 했는데 오늘 이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났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무채접은 자기 사랑 '양효비'가 오군영과의 옛사랑이 다시 싹틀까봐 걱정스러웠다.
양과는 무채접이 도와주려고 뛰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가 양효비로 분장한 사실이 탄로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약간 불안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접아, 그 자는 어디로 갔나?"
그 자란 곧 양효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무채접이 싸우는 한편 큰 소리를 질렀다.
"그 자는 안을 거예요. 아마 돌아갔겠지요."
'양효비는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 겁이 나서 도망친 거야.'
완안방방은 양과의 조력자가 또 나타난 것을 보고 못마땅해했다. 그녀는 혁중달에게 무채접
을 대적하게 하려다가 혁중달이 무채접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알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탁공자님, 수고스럽겠지만 저 무채접을 막아 주세요. 저와 모용공자님은 합심해서 양과와
오군영을 사로잡을테니까요."
탁장청이 여전히 녹슨 검으로 양과를 공격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시시한 계집애 하나를 가지고 뭘 걱정합니까."
"저년은 보통 계집이 아니에요. 오독방의 교화사자라 만만치가 않아요."
무채접은 탁장청이 자기를 깔보자 화가 나서 아미자로 찌르려고 하면서 비아냥댔다.
"그럼 네놈이 시시한 계집애에게 혼 좀 나봐라."
탁장청이 다급하게 몸을 돌리며 검으로 아미자를 막았다. 땅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잡은 손
이 찡하고 저려와 탁장청은 자기도 모르게 짧은 비명 소리를 질렀다. 탁장청은 속으로 만만
한 계집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검을 곧추세우고는 무채접과 싸우기 시작했다. 탁장청이
검을 휘두르자 아홉떨기의 검화(劍花)가 피어나면서 무채접의 아홉 곳의 치명적인 급소를
위협했다.
무채접은 아미쌍자로 탁장청의 공격을 막는데 네 송이의 검화밖에 막을 수 없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두 송이의 검화가 무채접의 한 쌍의 젖무덤을 겨냥하고 날아오자 무채접이 얼굴을
붉히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색골 같은 놈이 망녕되게도 젊은 협객이라 사칭해 왔구나."
기실 탁장청의 절정검술 하나 하나의 초식은 모두 상대방의 치명적인 급소를 위협하는 것으
로서 절대로 여인을 희롱하기 위한 장난이 아니었다. 여인의 유방이란 사실 치명적인 부위
여서 탁장청은 상대방의 목숨을 노린 것이지 무채접을 희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탁장청은 무채접이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해 콧방귀를 뀌었다.
"허튼 소리."
탁장청은 다시 검으로 무채접의 옆구리를 위협했다.
탁장청의 검술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본 무채접은 아미자로 사십구로의 이형검술로 응전하기
시작했다. 그 검술이 괴이하고 예측하기 어려워서 한동안 그들 두 사람은 일진일퇴를 거듭
했다.
고수 한 사람이 자기들과의 싸움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양과와 오군영의 상대는 쉬워진 셈이
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 모용협, 완안방방, 혁중달과 결사적으로 싸웠다. 양
과는 끊임없이 발길을 옮겨 되도록 자기가 고수들인 모용협과 완안방방을 대적하고 오군영
에게는 손쉬운 상대인 혁중달을 맡겼다.
오군영은 5년 전만 해도 혁중달의 적수가 될 수 없었지만 5년 동안에 부지런히 무공을 수련
하여 배울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익혔을 뿐만 아니라 노완동이 전수해준 칠십이로공명권까지
숙지했다. 지금은 검을 쓰고 있었지만 왼손으로는 때때로 공명권을 사용했다. 그리고 노완동
이 그녀에게 전수해준 것은 정통현문내옹(正統玄門內功)이어서 그녀의 내력을 단단하게 길
러준 데다가 그녀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이형검술까지 합치다 보니 그 위력은 실로 대단했
다. 그래서 삼십여 합을 싸워 혁중달을 쩔쩔매게 만들자 혁중달은 때때로 뒤로 물러서서 숨
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양과는 범이 포효하고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싸웠다. 그는 혼자서 모용협과 완안방방 두 고
수와 싸우는데 공격에 이성의 힘을 넣고 방어에 8성의 힘을 넣었다 이때 양과는 무채접이
자기의 무공 초식을 보고 자기의 신분을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 따위는 할 겨를이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자기의 검술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동해에서 익힌 검
술은 실로 이미 천하의 검술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으로 초식이 고풍스럽고 그 위력 또한 대
단했다. 하지만 이 검술은 심후한 공력과 상호보완적으로 쓰여야만 그 신통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었는데 이때 그의 공력은 6성밖에 회복되지 못했던 탓에 검술의 위력은 퍽 줄어들
었다. 다행히도 양과는 눈썰미가 좋아 천하 무공의 허점들을 상대가 펼치는 초식에서 능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목검은 모용협과 완안방방의 초식 중의 허점을 노렸고 이에
두 적수는 검으로 방어를 하는 데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기에 양과는 백여 합까지 지탱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채접은 처음에 괴이한 이형검술로 탁장청을 몰아붙였는데 사십여 합이 지나자 탁장청은
점차 그녀의 초식을 간파하여 더는 수세에 몰리지 않게 되었다. 탁장청이 맹렬한 기세로 반
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무채접은 공력이 달려서 빈번하게 몸을 피해 한 발짝씩 물러설 수밖
에 없었다.
무채접이 갑자기 왼손에 들고 있던 아미자를 거두었다. 탁장청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입방아를 찧었다.
"당해내지 못하겠는 모양이군."
무채접이 피식하고 야릇한 미소로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네놈이야말로 당해내지 못하겠는 모양이구나."
탁장청은 그녀가 더욱 괴이한 다른 무공을 사용하려는 줄로만 알고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지는 게 싫다면 죽는 수밖에 없지."
하고는 막돼먹은 소리를 퍼부으면서 검으로 그녀의 목을 찔렀다.
무채접은 아미자로 검을 막으려 했으나 미처 방어할 새가 없자 대경실색하여 공중제비를 돌
며 물러났다.
"기세가 사납군!"
무채접이 말하자 탁장청은 몸을 앞으로 계속 뻗으면서 검으로 무채접의 목을 찌르려 했다.
무채접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왼손을 내치는데 어둠 속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탁장
청은 급히 숨을 죽였으나 벌써 흰 연기를 약간 들이마신 탓에 검을 쓰는 기세가 늦어졌다.
무채접이 그 틈을 타 위험에서 벗어나며 깔깔거리며 조롱을 했다.
"탁가야, 내가 무서운 줄 이젠 알겠지?"
탁장청이 횐 연기를 흩어버리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건 뭐냐?"
무채접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미혼향이야. 탁가는 그래 그 향기도 맡아 보지 못했나?"
탁장청은 자기가 약간 들이마신 그 횐 연기가 참으로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무채접이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한번 더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우리 오독방에서 특별히 만든 특제 미혼향으로 강호에서 늘 보는 미혼향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조금만 들이 마셔도 내력을 깡그리 상실하는 거야."
탁장청은 그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과연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그가 무채접을 검
으로 다시 찌르자 무채접은 아미자를 휘둘러 검을 물리쳤다. 귓전을 때리는 차가운 금속성
과 함께 하마터면 검이 탁장청의 손에서 튕겨나갈 뻔했다. 탁장청이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
다.
"조그만 계집년이 독랄하기도 하구나!"
"내가 극독 약물을 섞지 않았으니 다행인 줄로만 알아라. 이제부터 너는 공력을 몽땅 잃은
밥통이란 걸 알아야 해."
무채접은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는 상대를 제압했다.
사실 연무를 이루는 독약이란 모두 독성이 작은 바 무채접이 하는 말은 큰 소리를 치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독방은 연무를 일으키는 독약만으로 중원의 무림을 제압
할 것이지 이처럼 힘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탁장청의 공력이 몽땅 상실되었다고 한
말도 무채접이 위협하느라고 한 말이었다. 사흘을 넘기지 않아 약효가 사라지면 저절로 회
복되는 것이었다.
탁장청은 오독방이 갖가지 독약과 독물을 가지고 강호를 횡행하고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었
기에 종래로 만만찮은 상대로 보고는 업신여기지 못했다. 그래서 무채접의 말을 듣고는 놀
라서 허둥거리며 큰 소리를 질렀다.
"모용형 난, 난 저 조그만 계집년의 미혼향에 중독되었소."
탁장청은 연거푸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몸이 나른해져 평소의 그 냉정하고도 오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탁장청은 곰곰이 생각해 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만일 미혼향이 정말 무채접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면 왜 이 틈을 이용해 달려들어 죽이지 못한단 말인가, 오독방
의 제자들이란 인자하고 사정을 봐주는 무리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무채접은 탁장청이 미혼향 연기를 얼마나 들이마셨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탁장청
의 공력이 대단하여 그까짓 독연쯤은 두려워하지 않을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탁장청이 눈
이 휘둥그래져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고도 의심을 품었으며 그가 일부러 꾸며대면서 자기를
유인한 다음 검으로 찌를까봐 겁을 냈다. 그래서 오히려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멀찌감치 물
러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용협은 이미 완안방방과의 협공으로 양과를 제압할 수 있게 되었는데 탁장청의 비명을 듣
고 머리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탁장청의 표정은 똑똑히 볼 수는
없었으나 그가 비틀거리는 폼이 미혼향에 깊이 중독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나서 양과를 내버려두고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가 탁장청을 부축했다.
그들이 계략에 넘어간 것을 보자 무채접은 양과에게 달려갔다. 그래서 오군영까지 모두 셋
이서 협공하자 몇 합만에 완안방방과 학중달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며 쩔쩔매기 시
작했다.
때가 된 것을 보자 무채접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양공자님, 우린 어서 가지요."
양과는 무채접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자금소갑을 이미 수중에
넣었기에 완안방방 일당들과 더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오군영, 무채접과 함께
나는 듯이 도망쳤다.
완안방방은 추격하고 싶었으나 혼자 힘으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을까봐 겁이 나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세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빤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혁중달이 어정쩡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가씨, 우린 어떡하죠?"
완안방방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탁장청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탁공자님, 당신은 정말 중독되었나요?"
"난 그 흰 연기를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공력을 몽땅 잃었습니다. 독랄한 계집이
었어요."
완안방방은 사독고수였기에 다가와서 탁장청의 맥을 짚어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탁공자님, 당신은 그 계집년의 간계에 넘어갔어요."
"하지만 난 정말로 진기를 운행시킬 수 없는걸요."
"난 그년의 미혼향이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아요. 당신은 독을 아주 조금 흡수
했기에 그 당시에 즉시 진기를 운행시켰더라면 무사하게 되었을 거고 무채접도 사로잡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한데 당신은 그 계집년의 허튼 소리에 속아넘어갔기에 이젠 독이 단전까지
흘러 들어갔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완안방방은 속으로 탁장청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사흘이 넘지 않아 독성이 저절로 무력해지고 무사하게 될거예요."
모용협은 그녀가 불만이 가득한 것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사태님, 너무 걱정마시고 다시 방법을 강구합시다. 양과는 분명 가흥성 안으로 갔을테니까
우리도 그 곳에 가서 수색합시다."
"범을 산으로 돌려보낸 셈이지요. 그놈이 본교의 보물을 다른 놈에게 넘겨주었다면 그놈을
잡아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모용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사태님 생각은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즉시 추격해야지 무슨 딴 방법이 있나요?"
"지금 동생의 공력이 몽땅 상실되어 경공을 쓸 수도 없는데 따라잡으려 해도 쉽지 않을 겁
니다."
완안방방은 서역신교의 보물을 빼앗아올 생각이 급했기에 탁장청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탁공자님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우리 셋은 추격하지요.
혁중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옳수다. 아가씨 말씀이 일리 있습니다. 저 사람이 무공을 몽땅 상실했다면 이젠 아무 쓸모
도 없지요."
그 말에 탁장청은 화가 나서 검을 뽑아 들고는 후려칠 기세다.
"네놈이 감히 이 탁모를 업신여기느냐."
얼굴마저 시뻘겋게 달아올라 붉으락푸르락하고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는 진기를 움직일
수 없어 보통 사람과 다를바 없게 되었고 분을 억누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들뜨고
쉽사리 격해져 지난날의 그 침착하고도 냉정하던 성격과는 많이 달라져 보였다.
혁중달이 낭아봉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탁가야, 넌 이제 본 장군의 적수가 아니란 말이다."
혁중달은 5년 전 거와장에서 있었던 그 싸움에 대해 줄곧 원한을 품고 있었다. 모용협이 탁
장청 앞으로 나서며 을러댔다.
"혁장군은 남이 위험에 처한 틈을 이용할 셈입니까?"
완안방방도 혁중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급히 싸움을 말렸다.
"모두 한 집안 사람이 아닌가요. 양과를 추격하는 일이 중요하단 말이에요."
"양과란 놈이 아직 가흥에 있다면 절대 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지 못할 겁니다."
모용협의 지혜와 모략이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완안방방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모용공자님께서는 어떤 묘책이라도 있나요?"
"저는 이번 걸음이 순조롭지 못하리라는 걸 이미 짐작했지요. 그래서 십여 명의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이미 부탁해놓았습니다. 이 친구들은 모두 수하에 이목이 밝은 형제들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과가 가흥에 들어서기만 하면 즉시 알 수 있지요."
완안방방이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모두 모용공자님께 맡기겠어요."
완안방방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손을 합장하는 것이었다.
양과는 오군영, 무채접과 함께 이십여 리를 도망간 뒤에야 발걸음을 늦추고는 가쁜 숨을 골
랐다
무채접이 손으로 가슴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유, 겁나 죽을 뻔했다니까요. 철창묘 밖에 사대고수가 매복하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그녀는 당황하고 지친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양과의 어깨에 매달리며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
렸다. 오군영은 양과를 자기와 동행하던 양효비인 줄 알고 있었기에 무채접이 그에게 교태
를 부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언짢았다.
"양공자님이 지켜주는데 무소저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지 않나요?"
무채접도 방금 양과가 오군영과 손잡고 싸우는 것을 보았기에 속으로 아니꼬와 배알이 뒤틀
렸다.
"물론이죠. 양공자님이 날 이처럼 좋아하시는데 왜 지켜주지 않겠어요?"
그들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양과는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오군영은 속으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저 이가 길에서 끊임없이 나를 사모하는 심정을 토로해 보이더니 지금은 무채접과 팔짱을
끼고 있는 걸 보면 나를 희롱하느라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오군영이 곰곰 생각해보니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고
도 싶었으나 여인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채접은 오군영이 대꾸가 없는 것을 보자 속으로 득의양양해 어떻게 하면 이 사내가 저 오
군영에게 마음을 두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혼자 주판알을 튕겼다. 그리고 거의 계산을
해놓고는 오군영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소저, 당초에 오소저가 홧김에 이 이에게 시집가겠다고 하고서는 그 뒤 시집가지 않은
건 이 이가 여인들을 건드리기 좋아하는 사내라 꺼렸기 때문이 아닌가요? 참, 소저는 대갓
집 규수라 물론 도덕 있고 맘에 드는 낭군을 고르려 했겠죠. 하지만 난 그런 건 대수롭게
생각지 않아요. 무조건 이 이가 좋으니까요. 이 이가 그 어떤 나쁜 짓을 하든 난 상관하지
않아요."
무채접은 이렇게 말하면서 양과의 몸에 더욱 바싹 기대면서 머리까지 그의 어깨에 얹는 것
이었다. 이 말을 듣는 양과는 마치 얼음 구멍 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몸이 오싹해졌다.
'무채접이 이런 말을 하는걸 보면 아직 나를 양효비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오군영은 줄곧 나를 자기의 양과로 여기고 있는데 의심이나 품게 되지 않을까? 만일 오군영
이 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무채접도 의심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일이 들통
나면 내일 취선루에서 소룡녀를 만나는 일도 시끄러워질 거다.'
사실 오군영도 줄곧 양과를 양효비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양과의 이런 근심은 쓸데없는 것이
었다.
오군영은 양효비가 마차 안에서 한 말이 그냥 해본 소리라고 단정지어버렸다. 오군영도 도
도한 성미를 가진 여인이라 쌀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양공자님, 축하드려요. 무소저도 근심할게 없어요. 이 오군영이 5년 전에 한 말은 과연 홧
김에 한 말이었으니 절대로 무소저가 맘에 들어하는 낭군을 빼앗지는 않을 거예요."
오군영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 손을 모아 쥐고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토를 달았다.
"자금소갑은 당신들에게 넘겨주었으니 저의 일은 끝난 셈이에요. 전 가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군영은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양과는 오군영이 어째서 자기를 양효비로 알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오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오군영은 멈추어서기는 했으나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양공자님, 무슨 일인가요?"
"지금 어디로 가는거요?"
오군영은 한숨을 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만일 내게 진심으로 대해준다면 난 당신을 따라 강호를 떠다니게 될거예요. 하지
만…….'
오군영은 이렇게 생각하고서는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거와장으로 돌아가겠어요."
양과는 그녀가 5년 전의 일을 계속 맘 속에 새겨두고 원한을 품고 있는 줄로만 알고 말했
다.
"양모, 양모는 정말 임자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지난날 자기 때문에 양효비와 오군영의 혼사말이 오가게 되었는데 지금 양효비가 오독방의
장세사자가 되어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에 오군영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다.
"이 양효비는 접아가 말한 것처럼 정을 한 길로 쏟지 못하고 도처에서 여인들을 건드리는
사람이야. 설사 5년 전에 오소저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오소저를 망칠 수밖에 없었어. 다행히
하늘에 눈이 있어 이 인연이 끊어졌기에 망정이지 이건 소저에게는 행운인 셈이야."
그 말을 듣고 무채접이 이상스러이 양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이가 하필 자기 체신을 깎는 말을 할 건 뭔가?'
무채접은 양과의 심정을 알 길이 없어 그저 이 사내가 오군영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이라고 생각했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자기에 대한 성의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무채접은 이렇게 생각하자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고 오히려 오군영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
래서 그녀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가 된양 위로의 말을 전했다.
"오소저 같은 분은 분명 맘에 드는 낭군을 만나게 될 거예요."
오군영은 양효비가 정말 자기에게 정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되자 가슴이 찬비를 맞은 것처럼
서글퍼졌다. 그래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인사치레를 했다.
"두 분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하고는 가냘픈 허리를 비비꼬며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양과는 우두커니 선 채로 오군영이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오군영
이 양효비에게 완전히 정을 끊은 것이 기뻤지만 깨끗하고도 착한 오군영이 하필 거와장에서
살면서 오독방의 사람이 된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무채접이 양과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그 여잔 이젠 멀리 갔는데 지금껏 뭘 보세요?"
양과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또다시 종알거리며 비아냥댔다.
"그 여자가 그처럼 아쉽다면 왜 쫓아가지 않나요? 이 곳에서 상사병을 앓을 필요가 있어
요?"
양과는 그제야 머리를 돌리며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허튼 소리 말고 어서 성으로 돌 아가자구. 가서 한바탕 자고 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지. 내
일 임자의 언니도 만나 봐야잖아,"
두 사람은 가흥 쪽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무채접은 길을 걸으면서 허튼 생각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오군영 같은 미인이 왜 이토록 꼼짝을 못할까? 저 이가 자기 앞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가흥성으로 돌아오자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객점에 들어가서 각자 방에 들
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군영은 양과와 작별한 뒤 십여 리를 달려왔다. 그녀는 앞에 사냥꾼이 겨울에 임시로 쓰는
초가 한 채를 발견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초가 안에는 나무침상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고 그 위에는 건초가 한 벌 깔려 있었다. 침
상 위에 걸터앉은 오군영은 심란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 양효비와 동행하면서 그
가 협의를 행하고 도처에서 양과의 '죄행'을 벗겨주려고 애를 쓸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
서도 애틋한 정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맘 속에서 미움의 굴레를 벗
어 던지고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자기가 5년 전에 이미 군웅들의 면전에서 양효비에게 시
집가겠다고 말한 일을 생각했다. 지금의 양효비는 무공 수준이 대단히 높을 뿐만 아니라 의
협심까지 갖춘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기에 오군영은 한 평생을 그에게 의탁하려는 마음까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양효비로 분장한 양과가 한 뜻밖의 말들은 오군영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자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서 오군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군영아, 넌 이 5년 간에 본디 맘 속에 정이란 것이 다 말라버렸고 천하의 사내들을 골수에
사무치게 미워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의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 그 사람
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한단 말이냐? 그 사람은 희롱하느라고 그런 것이 분명한데 넌 왜 그
사람을 이토록 사모한단 말이냐?'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군영은 검을 빼들고 조심스런 목소
리로 물었다.
"누구요?"
"임자가 미련을 끊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미련을 끊을 수 있단 말이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탄식하더니 문을 열었다. 이윽고 외팔이 사내가 웃는 얼굴로 초
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는 벌써 날이 밝기 시작했기에 오군영은 그 사람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양효비, 당신은 이 곳에 원하러 왔나요?"
들어온 사람은 진짜 양효비였다 그는 철창묘 밖에서 양과를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해서 삼십
육계 줄행랑을 놓아 이렇게 이 초막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양과가 무엇 때문에 지난 밤
에 철창묘 밖에 와서 다른 사람들과 싸웠는지 아무래도 그 궁금증을 풀 수가 없었다. 그가
한창 이 일을 생각하느라 골몰하고 있을 때 밖에서 사람의 발짝소리가 나기에 가만히 초막
을 빠져나와 초막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초막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오군영인 것을 발견한 양효비는 문 옆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
는데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군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통해 그녀가
이젠 자기를 좋아해서 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도 탄식하는 척하
면서 이렇게 초막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오군영이 눈물을 닦고 나서 물었다.
"당신은 줄곧 내 뒤를 밟았나요?"
양효비는 멀뚱히 있다가 가만히 내막을 생각해 보았다.
'임자가 이 곳으로 오는 걸 내가 어찌 알았겠나?'
"아니야."
오군영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비아냥조로 따져 물었다.
"당신은 무소저와 놀지 않고 왜 절 따라 왔나요?"
그 말에 양효비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철창묘에서 무채접과 작별한 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래 저 여자가
철창묘 밖에서 내가 무채접에게 달라붙는 걸 엿들었단 말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씨익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 여자와 그런 건 장난이야. 임잔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지 말라구."
그러자 오군영이 눈을 부릅뜨면서 앙탈을 부렸다.
"어서 말해요. 당신은 뭣 때문에 날 따라왔나요?"
"난 정말 임자 뒤를 밟지 않았어. 사실 난 이 곳에 임자보다 먼저 도착했어. 이 침상 위의
건초도 내가 펴놓은 거야."
오군영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초막에는 사람이 거처하지도 않는데 침상 위
에 건초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러니 양효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방해한 거군요."
"아니야. 암, 아니고 말고 헤헤. 난 발걸음소리를 듣고 나쁜 놈이 온 줄 알고 숨으러 나갔었
지."
그 말을 듣고 오군영은 흠칫 놀랐다.
'저 사람이 밖에 숨으러 나갔다면 아까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었을 거야. 야유, 이런
창피한 일이…….'
양효비가 웃음을 띠면서 침상에 걸터앉자 오군영은 오히려 발딱 일어섰다.
"임자도 앉으라니까,"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오군영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 쪽으로 걸어가자 양효비가 화살처럼 앞질러 달려와 문을
막아섰다.
"오소저, 왜 가려고 하는 거야? 내가 임자에게 물을 말이 있다니까."
"뭘 물으려구요?"
임잔 나하고 동행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났지. 난 임자가
확도에게 잡혀간 줄로만 알고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어."
그러자 오군영은 양효비와 함께 마차 안에서 지내던 일이 생각나 가슴이 저려왔다.
"그 일은 말해서 뭣해요? 무소저를 좋아하면서 하필 날 속일 건 뭔가요?"
양효비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더니 꺽꺽거리며 변명했다.
"난, 난 그 여자와 건성으로 그런 거야. 그 여자가 내게 어찌나 감겨드는지. 그래 내가 어찌
그 여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겠냐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절 상심하게 만들었어요, 안 그래요? 조금 전에 당신이 그 여자와 죽자 살
자한 것도 가짜란 말인가요?"
"조금 전이라구?"
"그럼요. 조금 전에도 당신이 말씀하지 않았나요? 흥, 당신은 방금 한 말도 잊어버리는군
요?"
"마차에서 임자와 헤어진 후 임잘 만난 일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거야? 병이 나서 헛소리
를 하는거 아냐?"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오군영의 이마를 짚어 보려고 했다. 오군영이 뒤로 물러
서면서 소리쳤다.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
양효비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오소저, 임잔 방금 나와 임자가 만났던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
"뻔히 알면서도 묻는군요."
"임자가 아까 임자와 나 그리고 무소저까지 세 사람이 한 곳에 있던 것처럼 말하지 않았
나?"
"우리 세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 제가 귀신과 함께 있었단 말인가요?"
양효비는 갑자기 뭔가를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아이구,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필시 그 양과란 놈이야. 오소저, 임자가 방금 만난 건 나 양효
비가 아니고 분명 양과일 거야."
오군영이 눈을 끔벅거리며 되물었다.
"양과란 말인가요?"
"분명 양과야. 접아가 내게 생소한 사람을 만난 듯한 기색을 지어 보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군."
오군영도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당신이 양과로 변장했듯이 양과도 당신으로 변장했군요."
"맞아. 그 자가 나로 변장하고 접아를 속이고 임자도 속인 거야."
오군영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거듭 자기의 잘못을 말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군요. 바로 당신을 비방하려는
것이었군요. 하지만 무소저는 그에게 아주 뜨겁게 대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러했듯이 그
여자도 양과를 양효비로 아는 모양이에요."
"맞아. 접아는 내게 정을 두고 있지만 내게 거절당했거든, 양과 그 호색한이 나로 변장해서
접아를 꼬신 거야."
오군영은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의문이 풀리자 아주 유쾌함을 느꼈다. 오군영은 양효비를 바
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을 오해했군요."
오군영은 이렇게 말하고는 옷깃을 여미며 절을 했다. 양효비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
키면서 물었다.
"다 그 양과란 놈이 맘이 나쁘기 때문이야. 그런데 임잔 이 깊은 밤에 철창묘에 원하러 왔
나?"
"아버님께서 어떤 물건을 칠월 초이렛날 밤에 철창묘로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물건을 받을
사람이 양과일 줄은 생각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런 오해까지 일어나게 되었군요."
"임자가 갖고 온 것은 자금소갑이 아닌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른 암호 없이 흰 수건을 흔들기로 했지?"
오군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효비의 얼굴이 대번에 먹구름이 일더니 잿빛이 되었다. 양과의 계책을 알아챈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양과, 네놈이 날 해쳐 죽이는구나!"
"그 자가 당신을 어떻게 해쳤는데요?"
"그 자금소갑을 넘겨받을 사람은 나였어. 이건 양과가 접아의 입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된
게 분명해. 그래서 나로 가장하고 그 자금소갑을 넘겨받은 거야."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 통탄하면서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그 말을 들은
오군영은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길에서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뜻
밖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돌아가서 아버님께 어떻게 말씀드린단 말인가?
"이걸 어떡하면 좋아요.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이에요?"
오군영은 통곡하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었다. 양효비는 그래도 강호에
서 오래 굴러먹은 자라 곧 정신을 차렸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다. 자금소갑을 도로 뺏을 방법이나 강구해
야 되겠다. 그러지 않다가 방주님께서 아시게 되는 날이면 난 목이 열 개라도 목숨을 부지
할 수 없게 될거다.'
생각해 보니 내일 취선루에 가서 자금소갑을 집법사자에게 넘겨주기로 되어 있는데 자금소
갑을 넘겨받지 못했기에 넘겨줄 물건도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또 모골이 송
연해지는 것이었다.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오더니 이윽고 아침 노을이 초막 안으로 비쳐들었다. 오군영의 몸이
노을 빛을 받아 아름답게 물들었다. 양효비는 오군영의 황홀한 모습을 취한 듯이 바라보면
서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쨌든 자금소감을 잃어버렸으니 오늘 집법사자를 만나러 가지 말고 자금소감을 도로 뺏을
계책을 강구해야겠다.'
오군영의 아리따운 자태에 이끌려 양효비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군영의 곁에 앉아 부드
러운 어조로 물었다.
"임잔 뭘 생각하나?"
"자금소감을 양과에게 빼앗겼으니 전, 전 어떡하면 좋아요?"
"괜찮아. 내가 묘책을 생각해냈는데 자금소감을 꼭 도로 빼앗아 올 수 있어."
"양공자님, 그게 정말인가요?"
"나마저 믿지 못하겠나? 모용협, 탁장청, 확도 같은 사람들이 다 내 적수가 못되는데 그까짓
쩨쩨한 양과란 놈쯤이야 말할 것이 있나?"
오군영은 그를 믿었기에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야 아주 좋지요. 무슨 묘책인지 어서 말씀해 보세요."
"아직 때가 안됐거든."
"제게도 알려주지 못하나요?"
양효비가 음흉스런 눈길로 오군영의 봉긋한 젖무덤을 훑으며 히죽거렸다.
"알고 싶은가?"
"물론 알고 싶죠."
양효비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잠시 뜸을 들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무슨 조건인가요?"
"임잔 5년 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오군영은 얼굴이 붉어지며 머리를 숙인 채로 모기소리 같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
다.
"무슨 말인가요?"
"임자가 내게 시집오겠다고 대답한 말 말이야."
오군영은 부끄러워 귀밑까지 새 빨개졌으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양효비는 그녀의 버
드나무가지같이 날씬한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면서 다시 말했다.
"내 필생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오군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양효비는 더욱 대담하게 입술을 그
녀의 귓가에 가까이 갖다대었다. 그는 향긋한 체취를 느끼자 심신이 마구 취하는 것만 같았
다.
"그것은 바로 임자와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를 하는거야."
오군영은 요 며칠 사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양효비를 완전히 믿고 시름을 놓고는 머리를
굴렸다.
'양효비는 단지 5년 동안에 무공고수가 되었고 지혜와 모략에 있어 모용세가의 젊은 협객
모용협을 능가하고 양과보다는 더군다나 우월하다. 내가 저 이에게 시집가게 된다면 모든게
뜻대로 될 수 있을거야.'
양효비가 오군영의 볼에 입을 맞추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양효비는 두 팔에 힘을 주면서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오군영이 입을 열었다.
"절 놓아주세요."
양효비의 불타는 듯이 뜨거운 몸을 느낀 그녀는 더는 벗어날 힘이 없었다. 양효비가 오군영
의 옷섶 사이로 손을 밀어넣으려 하자 그녀는 기를 쓰며 앙탈을 부렸다. 오군영이 당황하며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난 당신을 사랑한 지 아주 오래란 말이오. 날 불쌍하게 여겨줘."
양효비가 거친 숨을 내쉬며 애걸했다. 오군영은 양효비의 손목을 꼭 틀어쥐고 새빨개진 얼
굴로 말했다.
"우린 아직 예식도 올리지 않은 처진데 이래선 안돼요."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걸 온 천하가 다 아는 판인데 또 무슨 예식이 필요하단 말이오?"
양효비의 품에 안긴 오군영은 육신이 나른해져 더 반항할 힘이 없었다.
"양공자님, 그럼 맹세를 하세요."
"저는 하늘에 맹세하옵니다. 오소저와 부부의 의를 맺은 뒤 한 평생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하늘의 벌을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저 세상에서 개, 돼지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오군영은 섬섬옥수로 양효비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런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그저 당신이 절 잘 대해주고 맘 속으로 절 잊지만 않는
다면 전 죽어도 한이 없을 거예요."
양효비가 무척 감동한 듯 말했다.
"금생금세 (今生今世)에 난 임자 한 여자만을 좋아할 거야."
양효비가 두 손으로 오군영의 옷끈을 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지고 눈같이 새하
얗고 부드러운 여인의 알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양효비는 불타오르는 정욕을 참
을 길이 없어 다급히 오군영에게 덮쳐들었다. 오군영은 두 눈을 꼭 감고 자기 몸을 그가 하
는대로 맡겨 버렸다. 불쌍하게도 그녀는 한맘으로 영웅호걸에게 시집갈 꿈을 꾸었지만 결국
은 승냥이의 아가리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천하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간사한 호색한의
감언이설 때문에 연정에 빠져 신세를 망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정사를 끝내고서 양효비는 오군영의 살결을 어루만지며 갖은 애무와 아첨을 다 떨었다. 사
랑에 도취된 오군영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낭군을 만난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
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스러운 발짝소리가 나기에 두 사람은 급히 옷을 걸치고 일어섰다. 밖에
서 누군가 말했다.
"여기에 초막이 있군. 저기에 들어가서 숨이나 돌리자구."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양효비와 오군영은 미처 옷도 다 입지 못하고 황망히 땅바닥에
내려섰다. 양효비가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는 침상 위에 있던 옷
을 거둬 쥐고 오군영의 팔을 끌면서 침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오군영이 귓속말로 물었다.
"이봐요. 바깥에 어떤 사람들이 왔나요?"
양효비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면서 "쉿"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귓속말로 대답했다.
"확도와 그 사대제자들이야."
오군영도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저 사람들이 이 곳으로 들어오지 않을까요?"
발걸음 소리가 바로 문 앞에서 들려왔으므로 양효비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급히 손으로
오군영의 입을 막았다. 그는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서 확도와 그의 사대제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사부님, 우리가 밤새 찾았지만 귀신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군요. 이젠 피로하고 배도 고
픈데 이 곳에서 쉽시다."
그 굵다란 목소리로 보아 미련하게 처사하는 임맹일 것 같았다. 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좋겠어. 정신이 들면 그때 가흥으로 돌아가지,"
침울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도 대사형 진웅의 목소리 같았다.
"정말 이상해요. 양과란 놈이 이 곳으로 오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단 말입니다."
임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날씨가 너무 어두운 데다가 양과의 경공이 또한 너무 대단해서 따라잡지 못한 것
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그말에 연무가 못 마땅한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만일 셋째 사형이 평소에 경공을 부지런히 연마했더라면 어젯밤에 양과를 따라잡았을 거
요. 모두들 셋째 사형 때문에 녹초가 되었다니까."
그러자 임맹이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나의 경공이 시원찮기는 하지만 동생도 나보다 나을건 없어."
진웅이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우리가 고생스럽게 몇 백 리나 뒤를 밟아왔는데 중요한 대목에 와서 놓쳐 버렸단 말이야."
그 어조는 분명히 세 사제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곧이어 그는 정말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
을 이었다.
"만일 동생들이 너무 느리지만 않았더라면 나와 사부님은 기필코 양과를 따라잡았을 거야."
그러자 연무가 투덜거렸다.
"그럼 왜 먼저들 쫓아가시지 그랬어요? 우리는 천천히 뒤따라 갔어도 되지 않습니까?"
진웅이 훈계를 했다.
"그래도 잘했다고 말대꾸로군. 정말 사부님께서 화가 나 돌아가시는 걸 보려고 그러나?"
양효비는 침대 밑에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확도네 일행이 호송대열의 뒤를 밟아
줄곧 가흥부까지 따라왔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젯밤에
성을 나온 뒤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마침내 그들을 떨구어버린 것인데 그들이 밤새도록
찾아 헤맸을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투지들 말아. 장기, 초막 안에 들어가 안에 사람이 있나 없나 살펴보아라."
장기가 "예" 하고 대답하는데 연무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런 초막에 누가 들겠소?"
그러자 임맹이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사람이 있다면 둘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일남일녀가 말이야."
초막 안에 있던 양효비와 오군영은 그 말을 듣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 곳에 있
는 것을 정말 눈치를 채고서 저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는 지레짐작을 하고서 깜짝 놀랐다.
곧이어 연무가 히죽거리며 질펀한 얘기를 퍼질러 놓았다
"왜 하필 일남일녀요? 이남이거나 이녀는 안된다는 거요?"
임맹이 덧붙여 이죽거렸다.
"자네는 몰라. 이런 초막이야 남몰래 정을 주고받는 남녀들이나 찾아드는 것이지."
그러자 연무가 웃으며 소리쳤다.
"둘째 사형, 그럼 어서 가서 사통하는 연놈을 붙잡아 오우!"
양효비는 침상 밑에서 갖가지 신발을 신은 열 개의 발이 초막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
다.
장기가 아부조로 말했다.
"사부님, 앉으시지요."
곧 자주색 비단으로 겉을 씌운 신을 신은 사람이 점잖게 들어와 몸을 돌리더니 침상에 걸터
앉은 눈치였다. 그 한 쌍의 발이 바로 양효비의 눈앞에 있었다. 양효비와 오군영은 겁이 나
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양효비는 속으로 계산했다.
'아까 너무 조급하게 굴었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독표창을 꺼내 뿌릴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 뿌리면 백발백중일 거고 확도 한 놈만 제압하면 무사하게 몸을 뺄 수 있을거야.'
그러나 지금 확도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조금만 소리를 내면 발각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양효비는 독표창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장기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누워서 쉬십시오."
확도가 머리를 끄덕이며 제자들에게도 자선을 베풀 듯 말했다.
"방안에 건초가 넉넉하니까 너희들도 땅바닥에 펴놓고 눈을 좀 붙이거라. 반시진쯤 지나서
양과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가봐야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침상 위에 좌정한 채 두 눈을 감았다.
네 명의 제자들도 각기 건초를 한아름씩 안아다가 땅바닥에 펴고는 드러누웠지만 누구도 침
상 밑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도 침상 위에 편 건초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기
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약간만 눈길을 이쪽으로 돌려도 양효비와 오군영은 꼼짝 못
하고 들킬 형세였다.
두 사람은 침상 밑에서 너무 긴장해서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윽고 코고는 소리가 나더
니 사대제자들이 모두 잠이든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침상 밑에 웅크리고 있
는 두 사람은 몸이 불편해서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양효비는 공력이 비교적 깊어서 견디
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오군영은 방금 양효비에게 처녀의 몸을 망가뜨려 원기가 상한
탓에 숨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확도는 초막에 들어섰을 때 네 제자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침상 밑에서 숨소리가 나는 것
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조용히 있자니 비록 네 제자들이 코를 골고 있기는
하지만 침상 밑에서 나는 숨소리를 듣게 되었다. 확도는 급히 눈을 뜨고 땅바닥으로 뛰어내
리면서 소리쳤다.
"침상 밑에 있는 게 어떤 놈들이냐? 어서 나오지 못해?"
네 제자들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며 각기 병 장기들을 뽑아들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확도가 침상 밑을 가리키며 분부했다.
"저 밑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아라."
네 제자가 땅바닥에 엎드려 침상 밑을 들여다보다가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환성을
올렸다. 연무가 정신없이 웃어댔다.
"사부님, 정말 사통하는 남녀 한 쌍이 있군요!"
임맹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저 년놈들 좀 봐요. 옷도 미처 입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방금 그 짓을 했나 보군요. 아유,
저 여잔 살결이 새하얗고 부드러운 게 마치 백설같군요."
네 제자들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갖은 음담패설들을 다 늘어놓았다. 양효비와 오군영은 너
무도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들은 확도 일행이 얼굴을 알아볼까봐 겁이
나서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확도가 웃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사통하는 년놈들이었구나. 진웅아, 저 년놈들을 내쫓아라."
진웅이 침상 밑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이봐, 이 개돼지만도 못한 년놈들아. 듣지 못했느냐? 우리 사부님께서 너희 년놈들더러 물
러가라고 하신다."
그러자 네 제자들이 한바탕 웃어제쳤다.
그러자 양효비가 얼른 오군영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몇 마디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겉옷
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상머리 쪽으로 해서 문 쪽을 향해 벌벌 떨며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임맹이 침대머리 쪽으로 뛰어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좀 기다려!"
그리고는 확도에게 돌아서서 남성의 본성을 드러냈다.
"사부님, 이 계집년 살결이 아주 흰데요. 우리 네 형제는 아직 계집맛도 보지 못했는데
……."
그러자 연무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좋지요. 이 제자도 구미가 당기는데요."
장기도 맞장구를 쳤는데 다만 큰 제자 진웅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도가 웃으면서 입
을 열었다.
"제기랄, 네놈들은 모두 굶은 고양이들처럼 비린 것만 밝히려 드는구나. 좋아, 본 광야는 여
기서 생생한 춘궁도(春宮圖)를 구경할 참이다."
오군영은 당황해서 급히 양효비의 몸 뒤로 물러섰다. 양효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양효비의 여자까지 가지고 놀아보려구?'
하지만 이 처지에선 어쩔 수가 없어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통사정을 했다.
"나으리, 제발 우릴 놓아주십시오. 좀 있으면 이 여자의 오빠 여섯이 찾아올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반주검이 될 것입니다."
장기가 물었다.
"뭐, 이년에게 오빠가 여섯이나 있나?"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 오빠들은 모두 무공을 연마한 사람들입니다. 가흥의 여섯 호랑이라
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무서운 사람들이지요. 주먹으로 한대씩만 때려도 소인은 살
아남지 못합니다. 한 주먹이면 이 목숨은 끊어지고 말겁니다."
진웅이 그 말을 듣더니 입을 열었다.
"가흥육호(壽興六虎)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이봐, 세 동생들. 시끄러운 일 작작 만들
고 저 년놈들을 내보내."
그러자 임맹이 눈을 부라리며 딱 잡아뗐다.
"가흥십호가 있단들 겁날 게 뭐유?"
그러자 양효비가 다시 통사정을 했다.
"나으리께서는 두렵지 않겠지만 전 두려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린 어젯밤에 도망쳐 나왔는
데 저 여자의 오빠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제가 자기들의 누이동생
을 꼬셔서 이리로 온 걸 알아차리고 즉시 달려 올겁니다."
장기가 물었다.
"네가 이년을 이리로 끌고온 걸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알고 말고요. 전번에도 그 사람들이 이리로 붙잡으러 왔었는데 다행히도 제가 빨리 내빼는
바람에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참, 저 여자의 큰오빠는 힘이 황소같이 센 사람이어서 한 주먹
에 청기와를 올린 담벽을 무너뜨립니다. 둘째 오빠는 처마 위로 날아 오르고 바람벽으로 걸
어 다닌답니다. 셋째 오빠는 열아홉 가지나 되는 암기를 사용할 줄 알지요. 넷째 오빠는 도
사인데 쇠를 흙깎듯하는 보검을 갖고 있습니다. 다섯째 오빠는 숱한 독사들을 기르고 있고,
여섯째 오빠가 받아들인 서른일곱이나 되는 제자들은 모두 가흥부의 악패들이지요."
양효비가 이렇게 한바탕 불어대자 네 제자들은 질겁했지만 간사하고 교활한 확도는 대번에
허점을 짚어냈다. 확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년의 여섯 오빠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라면 본 왕이 한번 그들을 만나보련다. 네 생
각은 어떠냐?"
양효비가 연거푸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안돼요."
"왜 안된다는 거냐?"
"그 사람들은 모두 성미가 사나워 절 때릴 뿐만 아니라 당신들도 때릴 겁니다. 그 사람들은
숫자가 많기에 여러분들은 도망갈 수도 없을 겁니다."
확도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제자들아, 이놈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너희들이 맘대로 저 년을 데리고 놀아도 상관없
다. 모든 후과는 이 친왕이 담당할 터이다."
네 제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면서 침상을 둘러싸고 손을 내밀어 침상 밑을 더듬었다.
양효비는 어쩔 수 없이 침상을 후닥닥 뒤엎으며 확도한테 달려들었다.
제19장 인골염주의 비밀
양효비는 오군영의 손을 잡고 방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확도는 그가 말을 번지르하게 잘하는 것을 듣고 보통 만만한 놈팽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미 태세를 갖추고 있던 그는 침상이 뒤엎어지는 것을 보고 훌쩍 몸을 날려 문어
귀로 뛰어가 양효비와 오군영을 막아섰다. 사대제자는 일제히 여덟 개의 장을 날려 침상을
짓이겨버렸다.
양효비가 온힘을 다해 장을 날리면서 확도를 물러서게 하려 했으나 확도는 비켜서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맞장을 내쳤다. 두 장이 맞부딪쳐 "쾅"하는 소리가 나자 확도는 한 걸음 밀려
나면서 하마터면 문밖으로 튕겨나갈 뻔했다. 양효비도 이보 뒤로 밀려났는데 내공으로 말하
면 확도가 양효비보다 나은 것이 확연했다.
확도가 양효비를 알아보고 눈썹을 종긋거리며 웃었다.
"이제보니 노완동의 보배제자가 이 곳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었군……. 하하, 실례했소 그려.
실례 했다니까."
양효비는 바지만 입고 상반신은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오랫동안 양과로 행세하다 보니 확
도가 이렇게 부르자 오히려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양효비도 곧 깨닫고 멋쩍게 웃으며 대꾸
했다
"거와장에서 한번 만난 뒤로 세월이 어느덧 5년이 지났군요. 확도 친왕께서는 평안하십니
까? 제가 옷을 입지 못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사대제자들도 곧 알아보았다. 진웅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이놈이 5년 전에는 무공이라고는 몰랐는데 이젠 고수가 되었군요."
그는 양효비가 확도와 맞장을 치는 것을 보았기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도는 그 와중에서도 호색의 근성을 드러내며 오군영의 몸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오군영
은 짧은 속곳만 입은 채로 총망히 겉옷을 걸쳤는데 그것도 남장을 할 때의 검은 두루마기여
서 젖무덤이 드러나고 새하얀 종아리가 그대로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양효비의 등 뒤에 숨
으려고만 했다. 확도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바지와 검은 모자를 보자 의심이 버럭
들었다.
'이 여자는 남장여인이었군. 내가 추격한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과 아주 흡사하구나.'
더 자세히 뜯어보려고 했지만 양효비의 몸이 그녀를 가리고 있었다. 양효비가 물었다.
"확도, 당신은 무얼 보는거요?"
확도가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처녀가 구면인 것 같구려. 아마도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해서."
양효비는 화가 나서 말했다.
"이 여잔 양모의 처로 당신을 만난 일이 없소. 무례하게 굴지 마시오."
연무가 히히덕거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바로 보실 수 있도록 제가 저 여잘 들어올릴까요?"
그러자 임맹도 거들먹거리며 토를 달았다.
"그렇고 말고. 우리 사부님께선 눈썰미가 좋으시고 미녀를 잘 감별하시거든. 양효비, 당신은
이럴 때 우리 사부님에게 저 여잘 잘 보아달라고 부탁하게."
양효비는 화가 나서 속으로 이를 악물었으나 이 확도의 사제간을 심히 꺼리고 있는 탓에 참
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확도가 소리쳤다.
"끌어왓!"
이 자들이 당장 손을 쓰려는 줄 알고 오군영은 놀라서 눈을 들어 힐끔 바라보았다. 확도가
천천히 바라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에 익다 싶었더니 이상한 일이 아니구만. 거와장의 금지옥엽이구려."
확도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기들이 추격하던 자가 바로 남장을 한 이 오군영이
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양효비가 모든 것을 간파한 확도를 향해 말했다.
"오소저에게 오빠 여섯이 없다고 하지만 거와장에는 수백명의 제자들이 있고 독물 또한 부
지기수이니 당신들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절대 오소저를 모욕해선 안되오."
"본 친왕은 당신들을 괴롭히진 않겠소. 그저 오소저가 물건 한 가지를 내놓기만 바라오."
"무슨 물건 말이오?"
"자금소갑을 내놓으란 말이오."
양효비는 속으로 오독방의 제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들이라고 업신여기고 있었다. 비밀유
지를 해야하는 대사임에도 기밀을 누설해 떠들썩하게 만드니 자금소갑을 잃어버린 것도 하
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양효비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면
서 말했다.
"무슨 소갑을 말씀하시는 게요? 우린 소갑이라고는 갖고 다닌 적이 없소."
확도가 실눈을 한 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공자야 소감이 없겠지만 오소저는 지니고 다녔단 말이오."
"없었는데요. 보다시피 우린 행장마저 없는데 그걸 어디에다 넣고 다녔겠소?"
진웅이 실눈을 가늘게 뜨고는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자금소갑은 작은 물건이라 몸에다 지니고 다닐 수 있소. 당신이 옷을 벗어놓으면 우리가
수색하겠소."
그러자 양효비가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대꾸했다.
"옷도 입지 못했는데 어디에다 감추었단 말이오. 보려면 어서 보시오."
임맹이 헤헤 웃으면서 오군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린 당신에게 흥미가 없으니 저 여잘 조사할테요."
그러자 연무가 징그럽게 웃으며 토를 달았다.
"아마도 저 여자의 가장 은밀한 곳에다 감추었을 걸!"
그러자 사대제자들이 요란하게 웃어댔다. 오군영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소리쳤다.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사대제자들이 서로 마주보더니 장기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가 우릴 무례하다고 말하는군."
그러자 연무가 한술을 더 뜨는 것이었다.
"하하, 화를 낼 줄도 아네 그려."
임맹도 끼어들었다.
"화를 내니 더 예뻐 보이는군."
진웅이 오군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기왕 우릴 무례하다고 말한 이상 우리도 체면을 볼 것 없이 저 여자의 몸을 수색하세. 우
리가 무례하게 군들 저 여자가 어쩔 것인가."
사대제자들이 오군영을 둘러싸려고 들었다.
양효비가 대노하여 쌍장을 내쳤다. 그 위력이 대단해서 사대제자들은 모두 뒷걸음질을 쳤다.
놀란 진웅이 소리쳤다.
"하, 이놈이 과연 무공이 대단히 늘었구나. 손힘이 무서운데."
그러자 연무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저 놈을 죽여라!"
확도가 손을 흔들면서 물러서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저 놈을 대적할테다."
확도가 오른쪽 발을 내디디며 무릎을 굽히고 왼쪽 발을 뒤로 해서 활쏘는 자세를 취하면서
오른쪽 장을 앞으로 날렸다. 양효비가 숨을 들이쉬며 배를 흠칫 견장시키며 약간 뒤로 이동
했다. 양효비는 그 틈에 오른쪽 장을 확도의 오른팔 밑으로 들이밀어 그의 오른팔을 잡아채
면서 오독방 사십구로 장퇴법 중의 영사파미(靈蛇擺雇) 초식을 썼다. 확도는 급히 몸을 주저
앉히고 오른쪽 장을 주먹으로 만들어 양효비의 오른쪽 옆구리의 경문혈을 가격했다.
양효비가 옆으로 피하면서 왼쪽 장으로 확도의 면상을 가격했다. 확도가 얼굴을 뒤로 젖히
면서 오른쪽 손가락으로 공중을 내지르자 양효비가 갑자기 괴이한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등
을 확도쪽으로 향했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길 때 확도가 그 틈을 타서 앞으로 일보 내디디
면서 장력으로 상대방을 가격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양효비가 뒤로 몸을 젖히면서 오른손의
장지와 식지 두 손가락으로 확도의 눈을 찔렀다.
확도가 양효비의 이 뜻밖의 괴이한 초식에 놀라서 몸을 웅크리자 양효비는 그 틈에 두 손가
락으로 상대방의 머리가죽을 긁어 확도는 온몸에 식은 땀을 흘렸다. 확도가 화가 나서 소리
를 지르며 손을 들어 양효비의 오른쪽 손목을 잡으려 했으나 양효비는 벌써 몸을 돌려 쌍장
을 사권(蛇拳)으로 만들어 가지고 연거푸 상대방의 눈을 재빨리 들이 찔렀다. 확도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두 팔로 막았다.
갑자기 양효비가 오른쪽 발을 들어 영사파미 초식 중의 파미의 초식으로 걷어찼는데 확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발끝에 오른쪽 옆구리를 채여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도 아프기만 했을
뿐 갈비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대제자들은 자기들의 사부가 얻어맞자 제각기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양효비는 자기
의 괴이한 초식이 효과가 있자 그 기세로 달려들어 확도를 제압하려고 했는데 네 제자가 병
장기를 들고 달려들자 확도를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오군영은 급히 허리띠를 매고 나
서 종아리가 드러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들고 양효비와 협공했다.
확도는 양효비가 단지 5년 동안에 일류의 무공을 닦은 줄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이런 망신
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창피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제자들아, 양효비는 내가 맡을 테니까 저 오군영을 잡아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양효비에게 달려들었다.
양효비는 여전히 그 사십구로 장퇴법으로 대처했으나 확도가 이미 그 초식에 봉변을 당했던
탓에 더는 속지 않아 두 사람의 싸움은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졌다.
진웅은 부채를 들고 임맹은 칼을 들고 장기와 연무는 검을 사용해서 오군영을 공격했다. 오
군영은 손에 장검을 들고 이형검술을 썼는데 비록 양효비처럼 높은 기량의 솜씨를 보이지는
못했지만 사대제자들을 완전히 수세로 몰아넣었다. 이 사대제자들은 일찍이 오군영의 적수
가 되지 못했지만 오늘 그녀는 옷을 제대로 입지 못했기에 무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옷자락이 펄럭이면 맨살의 다리가 드러날까봐 두려워 이형검술 중의 평범한 초식만
을 골라 쓰다 보니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할 수가 없었다.
진웅은 그녀가 꺼리고 있는 점을 알아채고 부채로 끊임없이 세찬 바람을 일으켜 검은 옷의
아랫자락을 펄럭여 맨살의 다리가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 오군영은 다급히 왼손으로 옷자락
을 꼭 틀어쥐면서 검으로 진웅을 연속 찔러댔다.
"음험한 놈 같으니."
오군영이 욕설을 퍼붓자 진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적수의 약점을 공격하는 거지 음험한 행실이 아니다."
연무가 하하 웃어대며 놀려댔다.
"오소저, 우리 사형제가 임잘 붙잡게 되면 그때 더 추잡스런 일이 벌어지게 돼."
오군영은 창피하고 화가 났지만 더욱더 듣기 구차한 말이 튀어나올까봐 더는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검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꼭 틀어쥐다 보니 교묘
한 초식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격보다는 방어에만 치중해 어느새
열세에 몰렸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봐, 집안에서 싸우고 있군. 나도 끼어야지."
곧이어 문 어귀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그는 이날 밤에
철창묘에서 양효비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낮에 할 일이 없어 사방으로 쏘다니
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구경거리가 생긴 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확도는 주백통을 보자 겁이 나서 안색이 달라졌다. 그가 옆으로 훌쩍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제자들아, 이젠 그만하고 빨리 가자."
그는 장을 날려 벽을 허물고는 먼저 빠져나갔다. 주백통이 양효비의 사부인 것을 알고 있는
네 제자들도 그가 자기의 제자를 도와주러 온 줄 알고 모두 확도를 따라 나는 듯이 도망쳤
다.
주백통이 소리쳤다.
"이봐, 구경 좀 하려는데 가긴 어딜 가는 거냐!"
주백통이 살펴보니 집안에는 옷을 채 입지 못한 제자 양효비와 오군영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그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주백통이 물었다.
"이봐 제자, 저 놈들이 임자의 옷을 벗겼나?"
"사부님께서 때마침 와주셨습니다. 확도 그 놈이 이 제자의 옷을 벗긴 건 사부님을 욕보인
겁니다."
"난 그 사람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그 사람이 왜 날 욕보이러 하겠나?"
"그 놈이 저를 보고 자기 스승 금륜법왕의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
까. 전 그 말에 불복했지요. 사부님의 무공이 그 금륜법왕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단 말입니
다."
"그렇고 말고. 금륜법왕은 내게 패하기까지 한 자인데 여하를 막론하고 그 자는 천하의 으
뜸이 아냐. 나의 사형 중양진인만이 천하의 으뜸인 거야."
"이 제자도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그 확도란 놈이 기어이 믿지 않으면서 사부님이 이젠
나이가 많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비단 금륜법왕만 이길 수 없는게
아니고 심지어 자기의 적수도 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 놈이 감히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그 놈은 또 세 합만으로 사부님을 거꾸러뜨릴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는게 아니겠습니까?
난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그자들과 싸우기 시작한 겁니다 "
주백통이 그 말을 듣더니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날 부아를 돋우어 죽일 작정이구나. 부아를 돋구어 죽일 작정이야!"
"확도가 이처럼 사부님을 깔보는데 가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백통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이 노완동이 그 놈들을 혼 좀 내줘야지."
주백통은 이렇게 대꾸하더니 확도 일행이 빠져나간 허물어진 담벽을 통해서 그 자들을 추격
하기 시작했다.
양효비는 원래 주백통에게 확도네 사제들을 없애버리게 하려고 계책을 꾸몄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오군영이 급히 주섬주섬 옷을 입으면서 나무랐다.
"이봐요. 당신은 주백통 선배님을 속이지 말아야 했어요. 그 분은 당신 사부님이 아닌가요?"
"나의 사부님은 성미가 괴상하기에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우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그렇지만 오군영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사대제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
람이 문밖으로 내다보니 확도가 앞장서서 나는 듯이 달려가고 뒤를 이어 사대제자들이 울며
불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끝에 처져 있는 연무와 임맹의 두 볼에는 손바닥자국이 나
있었다. 노완동이 확도네 사제의 뒤를 쫓아가며 때리고 있었다. 이윽고 도망갔던 확도네 사
제들이 다시 돌아왔다가 또 황급히 도망가는데 진웅과 장기의 얼굴에도 각기 자주빛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주백통에게 귀쌈을 맞은 것이 분명했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또 도망갔다.
양효비와 오군영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들은 주백통이 정말 노완동으로 불리기에 손색
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수를 찾아 보복하는 것도 이처럼 우습고도 재미있었던 것이다. 문밖
으로 나서려는데 확도네 사제간이 또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확도의 두 볼에도 자주빛 손바닥자국이 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가에서는 피까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 그는 제자들보다 더 호되게 매를 맞은 모양이었다. 사대제자
들은 각기 머리 위에 풀(草)로 표식을 달고 있었고 주백통이 그 뒤를 쫓으면서 소리쳤다.
"도적을 팝니다, 도적을 팔아요! 누구든 이 도적을 사게 되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양효비가 주백통을 보고 외쳤다.
"사부님, 그 놈들을 몽땅 죽여버리시오 !"
하지만 주백통은 그때 이미 멀리 달려가고 없었다.
오군영은 양효비의 몸에 바싹 기댔다. 기왕 그에게 몸을 의탁한 이상 더는 남장을 하지 않
겠다고 작정했다. 아름답게 긴 머리칼이 어깨에 내리 드리웠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사람에
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더욱 어여뻐보였다. 양효비는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에 반해 참지 못
하고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날 따라가자구."
"아무래도 당신을 따라가야죠."
오군영이 대답하고나서 자금소갑이 생각난듯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우린 어떻게 해야 자금소갑을 도로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양효비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양과, 내가 정말 네놈을 두려워한다고 여기지 말아라. 네놈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기 때문
에 네놈을 감히 죽이지 못했던 거야.'
가흥의 취선루는 바로 남호 옆에 있었다. 호수의 수면 위에 가벼운 운무가 끼고 작은 배 몇
척이 떠다니고 있었다. 수면의 절반 가량 되는 곳에는 새파란 마름잎들이 등등 떠 있어 더
없이 아름다웠다.
양과는 혼자서 취선루 밖으로 나왔다. 무채접은 양과를 따라 가흥부로 오기는 했으나 다른
사정이 있었다. 말하자면 집법사자의 허락 없이는 감히 양과와 함께 취선루로 올 수가 없었
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집법사자와는 친자매같이 지내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집법사자의 비
위를 건드려 화를 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채접은 양과에게 집법사자를
만나면 자기가 가흥부에 와 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옆에 방해하는 사람없이 소룡녀와 만나 지난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여긴 양과는 속으
로 다행으로 생각했다. 양과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쪽에는 '취선루'란 금빛나는 세 글자
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소동파가 쓴 것이었다.
양과는 이 호화로운 술집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유년시절에 가흥에서 거지노릇을 할 때 감히
이 근처에 올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안쪽을 향해 걸어가니 술집 복판에 자
주및 박달나무로 만든 패쪽이 걸려 있고 거기에는 '태백유풍(太白遺風)'이라는 네 글자가
씌어 있었다.
수수한 의복을 입고 있는 양과를 하인은 본체만체 했다. 양과가 층계를 오르려 하자 하인이
급히 달려와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그럽니까?"
"위에 올라가려고 그러네."
하인이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술과 안주는 아래 층에 있습니다. 위층에는 이름난 요리사들이 만드는 요리만을 파는
데 손님께선……. 헤헤."
그는 말끝을 더 잇지 못했다.
그 자가 깔보는 바람에 양과는 화가 나서 두루마기 소매를 뿌리쳐 하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왔다. 하인이 뒤쫓아왔지만 양과가 어찌나 빨리 층계를 오르는지 미처 따라잡을 수가 없
었다.
위층으로 올라와서야 양과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헐떡거리며 뒤쫓아 올라온 하인이 다시 앞
을 막아섰다.
"이 분이 정말 사리도 모르는군요. 위층의 귀한 요리를 당신 같은 이는 사서 드실 수도 없
습니다. 이 곳에 앉아 있는 손님들 중에 어디 당신 같은 분이 한 분이라도 있는가요."
양과가 둘러보니 뭇 식길들이 모두 능라주단(綾羅綢緞)으로 몸을 감은 사람들이었고 무명옷
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양과는 은자 한 덩이를 꺼내어 하인에게 주었다.
"이거면 상등 술좌석 한상이 되겠는가?"
하인은 멍해졌다가 그제서야 헤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넉넉합니다. 나으리, 안으로 들어 가시지요."
양과가 콧방귀를 뀌고는 창옆에 놓인 식탁에 앉았다. 그 사이 하인은 술과 요리를 장만하러
아래로 내려갔다.
양과는 호수와 산의 경치를 바라보자 금방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지만 곧 소룡녀와 만날 생
각을 하니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 가흥은 옛날 월(越)나라 때부터 이름난 도시로 이 곳에서 나는 배가 미주(美灌)처럼 달
고 향기롭다고 해서 춘추전국 시대에는 이 곳을 취리(醉梨)라고 불렀다. 그 당시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이 곳에서 오나라 왕 합려(閨閭)와 싸워 크게 이겨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교
통을 텄다. 남호에는 또 이름난 특산물로 몰각릉(沒角菱)이 있는데 그 맛이 달콤하고도 향기
로워 천하의 으뜸이었다. 그래서 호수의 수면 위에는 마름잎들이 특히 많았고 해마다 늦은
여름이면 수면 위는 마치 비취를 깔아놓은 것만 같았다.
바로 눈앞에 이런 선경(仙境)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양과는 그것을 마음껏 감상할 여유가 없
었다. 양과는 다만 어떻게 하면 소룡녀가 자기를 알아 볼 수 있게 하고 그녀를 오독방에서
이탈하게 함으로써 그 무슨 집법사자니 하는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가 한창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층계를 따라 십칠팔세 쯤 되는 두 여인이 사뿐히 올라
왔다. 티끌 한점 묻지 않은 백의 차림을 한 두 여인은 용모도 괜찮게 생겨서 삽시에 많은
식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양과는 그녀들이 어느 부잣집 시녀인줄로만 알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두 여인은 곧장 양과 앞에까지 다가와서는 사뿐히 절을 했다.
"양공자님, 일찍 오셨군요."
양과는 얼떨떨해서 '엉?' 하고 대꾸했다.
'이 여인들이 어떻게 날 알아보는 겐가?'
그 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여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양과는 경계심을 가지고 슬며시 진기를
운행시켜 뜻밖의 사태에 대처 했다.
그 여인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건은 갖고 오셨나요?"
양과는 속으로 또 한번 움찔 놀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만일 그 물건을 갖고 오지 않았다면 아가씨는 오시지 않을 거예요. 양공자님께서는 사실대
로 알려주세요."
양과는 속으로 이 두 처녀는 필시 소룡녀가 보낸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에게 오시라고 하오."
"그럼 좋아요."
그 처녀는 기쁜 기색으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함께 온 처녀와 함께 몸을 돌려 층계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백의로 단장한 여인이 올라왔다. 걸음걸이가 아주 가벼웠는데
긴 머리카락을 어깨쪽으로 풀어내렸고 용모는 아주 추했다. 양과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용녀, 임자가 정말 온 것이란 말인가? 정말 5년 전에 거와장 밖에서 본 백의 여인이 이 여
자란 말인가?'
양과는 일어나서 양효비의 모습을 흉내내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예를 올렸다. 집법사자가 양
과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는 걸어와 그의 맞은 편에 앉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요술을
피워 꽃바구니 한 개를 꺼냈는데 그 속에는 생화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여자는 꽃바구
니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서 손으로 가리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다 넣으세요."
양과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바로 그녀야."
양과가 이렇게 머뭇거리며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집법사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또
다시 재촉했다.
"꽃바구니 속에 넣으세요."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품속에서 비단으로 싼 자금소갑을 꺼내더니 꽃바구니 속에 넣
었다. 집법사자가 비단보자기를 펼쳐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객들은 이번에 온 백의 여인이 용모가 추한 것을 보자 흥미를 잃었던지 고개를 돌리고 모
두 저희들끼리 한담을 나누었다.
양과는 집법사자가 무슨 눈치라도 채게 될까봐 두려워 눈길을 돌리고 자기의 신분을 숨기며
물었다.
"집법사자께서는 무슨 다른 분부가 계십니까?"
집법사자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나서 대답했다.
"방주님께선 당신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시고 당신이 최근에 받아들인 무림 사람들
을 거와장에 모이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어요."
양과는 이미 무채접의 입을 통해 거와장 장주 오자겸이 오독방의 주작분타의 타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또다시 물었다.
"모두 주작분타에 모이게 된다면 무림 여러 문파들의 의심을 사게 되지 않을까요?"
집법사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양효비, 당신은 갈수록 총명해지는군요."
"모두 방주님과 집법사자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아부하는게 습관이 됐군요. 본 사자는 최근에 모용세가에서 무슨 모략을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우리 오독방을 건드려보려고 그러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조심해야겠어요. 됐어
요, 이젠 가보세요."
이때 하인이 술과 요리를 가져왔다.
"저의 자그마한 성의이니 집법사자께서는 받아주기 바랍니다."
집법사자는 약간 망설이는 듯 싶더니 주위의 식객들 중에 의심스런 인물이 없는 것을 보자
비로소 머리를 끄덕였다.
양과가 손수 술을 따르고 요리를 집어주면서 성의를 다했으나 집법사자는 시종 술잔을 건드
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양과가 또다시 요리들을 주문하고 나서 머리를 굴렸다.
'이게 바로 용녀가 즐겨 먹던 음식이었지.'
양과가 이렇게 생각하고 웃는 얼굴로 권했다.
"사자께서는 음식을 좀 드십시오."
집법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신이 어떻게 제가 이런 요리를 즐긴다는걸 아시나요?"
양과는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고 또 머리를 굴렸다.
'우리 두 사람이 고묘 속에서 여러해나 함께 있었는데 내가 왜 임자의 식성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집법사자는 여전히 음식을 들지 않았다. 양과는 좀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감히 더 권하지 못하고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일을 묻고 싶은게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집법사자가 창밖의 남호를 굽어보면서 담담하게 대꾸했다.
"말씀하세요."
"자금소감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물건인지 알고 싶은데요?"
집법사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쌀쌀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당신은 소갑을 열고 그 속의 물건을 보지 않았단 말씀이세요? 전 믿고 싶지 않아요,"
양과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린 다면 확실히 소갑을 열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갑 속에는 보통구슬
한 꾸러미가 들어있을 뿐이더군요. 겉으로 보건대 고옥(古玉) 같기도 했지만 옥은 아닙니다.
그리고 석질 (石質)도 아닌 것 같고 말입니다."
집법사자는 흐릿한 눈길로 계속 호수의 경치를 멀거니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건 인골염주(人骨念珠)예요."
"인골염주라구요?"
집법사자가 손으로 턱을 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사람의 뼈로 만든 거예요, "
"염주알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그다지 둥글지도 않고 크기도 서로 다른게 이상하다는 생
각은 했지요. 게다가 색깔이 검은 것도 있고 휜 것도 있어서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았습니
다."
"이 인골염주는 서역신교 특유의 염주예요. 서역신교에 있는 많은 법기(法器)들은 모두 사람
의 뼈로 만든 것이에요."
"훌륭한 염주들도 많은데 그런 걸 쓰지 않고 하필 사람의 뼈로 염주를 만들다니요? 참 희한
하고 괴상한 일이네요."
"사실 보통 사람의 뼈로는 염주를 만들 수 없어요. 오로지 도를 훌륭히 닦은 장로라야 그가
죽은 후 뼈로 염주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집법사자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마치 깊은 사념에 빠지기나 한 듯 가벼운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말하건대 이런 인골염주에는 마귀와 사악한 것을 제어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는 거예요. 이 인골염주가 도대체 몇 알로 되어 있는지 아시나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을 깜박거리면서 이렇게 묻자 양과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심심해서 세어 보았는데 모두 백여덟알이고 아주 질긴 붉은 실로 꿰어 있더군요."
집법사자가 약간 놀라는 기색으로 또다시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이 이처럼 자세한 사람인 줄을 모르고 난 이전에 당신을 좀 깔보았군요."
"그건 모두 집법사자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집법사자가 그 말에 콧방귀를 뀌고 나서 말을 이었다
"백여덟알의 염주는 천강(天 )의 수자에 상응하는 것이지요. 서역에는 천장(天葬)을 하는 풍
속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둬 새, 짐승, 벌레들이 먹게 한답니다. 장
로들은 그래서 천장을 하고 나서 자기의 뼈로 법기들을 만들어 줄 것을 몹시 원한대요. 인
골염주는 도를 닦은 장로의 손가락뼈나 미륜골(眉輪骨)로 만든 거예요."
원래 손가락뼈와 미륜골은 신교 제자들의 수행과 관계가 아주 많은 것이었다. 미륜골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한데 모였으므로 수행자의 일생의 공업(功業)을 말해주는 것이고 손가락
뼈는 늘 법기며 염주들을 주무르던 것이므로 역시 수행에 크게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손가
락뼈 염주는 만들기가 비교적 쉬웠는데 손가락 뼈를 몇 토막내서 실로 꿰기만 하면 되었다.
보통 몇 명 되는 사자(死者)들의 손가락 뼈를 가지고 한 꾸러미의 염주를 만들 수가 있었다.
하지만 미륜골 염주는 그것을 만들기가 백배나 어려운데 자금소갑 속의 인골염주가 바로 미
륜골을 갈아 만든 것이었다.
신교의 장로들이 죽게 되면 그 뼈들을 추려서 거기에다 귀금속을 씌워 법기들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미륜골을 뜯어내는데 각별히 굳은 탓에 뜯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뜯
어낸 뼈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오랫동안 갈아야만 했다. 신단(神壇)에는 자기의 뼈를 갈아
인골염주를 만들어주기를 원하는 장로들이 아주 많았던 탓으로 미륜골과 손가락 뼈를 갈아
염주를 만들 때마다 법호(法號)들을 외우곤 했는데 미륜골 한 개를 갈아도 최저 몇 만번 내
지 몇 십만번이나 법호를 외워야 했으니 그 어려움은 보통 사람이 견뎌낼 바가 아니었다.
미륜골 염주 한 꾸러미를 다 만들어 보물 광주리에 담고 나서는 두 번째 장로의 소망을 들
어줘야 했는데 마찬가지 방법으로 염주를 만들어야 했다. 때로는 뼈를 갈아 염주를 만드는
장로가 한 평생을 일해도 염주 한 꾸러미를 채 만들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다
른 장로가 이어받아 이 일을 계속하곤 했다.
양과가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러니 한 꾸러미의 미륜골 염주는 결국 백여덟 명이나 되는 사자의 목숨이란 말이군요."
집법사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갖고 온 자금소갑 속의 미륜골 염주는 또 다른 점이 있어요."
"뭐라구요?"
"이 미륜골 염주는 그 각 한 알의 염주가 모두 서역신교 중에서 수행이 가장 훌륭한 호교
(護敎)장로가 죽은 뒤에 그들의 미륜골을 갈아서 만든 것이에요. 이러한 호 교장로는 몇 년
에 한 사람 나타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에요. 그러니 이 염주는 최저 오륙백 년이
걸려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인데 3년 전에야 막 백여덟알이 다 차게 되었던 거예요. 그러니
공덕이 원만해진 것이지요."
"우린 이런 인골염주를 어디에다 쓰려는 겁니까?"
집법사자는 설명해주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서역신교의 교주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교주는 서역신교 전세(轉世)교주가 세상에 돌아온 이라고 하는데
능히 모든 제자들에게 호령을 내릴 수 있고 서역의 여러 왕들도 그 명령을 듣는다고 하더군
요."
"잘 알고 있군요."
하고 집법사자는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인골염주가 이처럼 진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인 까닭에 교주가 세상에 돌아온 후의 신
물(神物)로 되어 있는 것이죠. 3년 전 서역교주가 귀천(歸天)했는데 사전(死前)에 말하기를,
3년 후에 이 인골염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전세(轉世)로서 새 교주가 될 거라
고 했대요. 그 분은 내세에 자신이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를 정 해두었는데 수하의 한 장로
에게 염주를 그 곳으로 가져가라고 분부했지요. 이 기밀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방주님이 믿
음직한 제자들을 파견해서 그 장로를 죽이고 염주를 빼앗아올 수 있었어요."
양과는 그 속에 깃든 음모에 대해 약간 짐작이 가기는 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어 다시
캐물었다.
"우리는 이 인골염주를 어디다 쓰는 겁니까?"
집법사자는 거기에 뭐 물을 게 있느냐는 듯이 괴이한 눈길로 힐끗 바라보고 나서 침울한 어
조로 대답했다.
"이 인골염주가 있으면 금년에 태어나는 아이를 마음대로 골라서 그 아이가 서역교주라고
선포할 수 있지요."
"인골염주가 교주가 세상에 돌아온 신물인 이상 서역신교에서 부득이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려. 우리가 이 염주를 수중에 틀어쥐기만 하면 능히 전체 신교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본 방에서 사용하려는 것이겠지요."
집법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은 둔한 사람은 아니군요."
그 말을 듣고 양과가 득의 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 계책은 실로 지독하구나, 딴일 오독방이 서역신교를 통제해서 서역신교에게 오독방에
귀의하도록 명령한다면 그들은 부득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중원 무림
의 위기가 목전에 닥치게 될 것이다. 완안방방이 결사적으로 인골염주를 빼앗으려고 한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아마도 서역신교에서는 인골염주가 오독방으로 흘러간 걸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집법사자가 일어나며 꽃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드세요. 난 가야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또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양과가 그녀에게 소룡녀의 일을 털어놓고 말하려는 찰나 두 처녀가 급히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처녀가 집법사자 앞에 와서 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래 층에 의심스러운 사람 몇 명이 있는데 위층으로 올라오려고 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층계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아마도 십여 명이 되는 듯싶
었다.
완안방방과 혁중달이 앞장서서 올라오고 그 뒤로 모용혈과 탁장청, 그리고 십여 명에 가까
운 이상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손에 병장기들을 들고 있었다.
모용협이 탁장청에게 공력을 운행시켜 독을 제거해주었던 까닭에 탁장청은 이젠 몸이 완전
히 회복되어 있었다.
완안방방이 깔깔 웃어대며 말했다.
"양과, 네놈이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갈테냐?"
혁중달이 손에 낭아봉을 들고 외쳤다.
"어서 본교의 보물을 내놓아라."
양과는 이들과 함께 온 사내들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보고 모두 만만한 작자들이 아니라
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슬그머니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완안방방이 그것을 보고 엄포를
놓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소용없어. 네놈이 재간이 있거든 어디 호수에 뛰어내려 보려무나. 하
지만 호수 위에도 우리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양과가 밖을 내다보니 과연 멀지않은 곳에 세 척의 작은 배들이 노를 저어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손에 병장기를 든 사람이 넷씩 타고 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이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집법사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짐작하고는 꽃바구니를 양과에게 넘겨주고는 발을 구
르면서 귓속말을 했다.
"당신 먼저 가세요."
양과는 멍하니 있다가 눈치를 챈뒤 다시 물었다.
"저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집법사자는 강적들의 포위를 당했으나 여전히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가면을 쓴 까닭에 안색
은 비록 알아볼 수 없었지만 눈길에는 조금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신 가고 싶은데로 가세요. 내가 당신을 찾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녀가 갑자기 옷소매를 내치자 두 갈래의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와 삽시
에 사방으로 퍼졌다.
양과는 그녀가 어떻게 자기를 찾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무공이 이미 동사 황약사
와 같은 상급무공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깨닫고는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양과가 쾅
하고 두 발을 힘껏 구르자 마루에 구멍이 뚫렸고 그는 그 구멍을 통해서 아래로 떨어져내렸
다.
탁장청은 전번에 겪은 일도 있고 해서 횐 연기가 뿜어 나오는 것을 보자 바로 숨을 죽였다.
모용협과 완안방방 등도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숨을 죽이고 장력으로 흰 연기를 흩어버렸
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식객들은 그 흰 연기를 마시고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백의의 두 여자가 구멍 앞에 지켜 섰고 집법사자는 벌써 층계어귀까지 날아 내렸다.
모용협이 큰 소리를 질렀다.
"어서 양과를 추격해서 가지고 있는 꽃바구니를 빼앗아라!"
모두들 집법사자가 층계 어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자 양과처럼 마루에 구멍을 뚫고 빠
져나가려 했다.
이때 백의의 두 처녀가 네 개의 옷소매를 동시에 내치니 백여 마리의 독충들이 흩어져 나와
마룻바닥에 확 깔렸는데 전갈, 왕지네, 독사, 거미 등 온갖 종류의 벌레가 다 있었다.
모용협은 독충에게 물릴까봐 겁이 나서 급히 식탁 위로 뛰어올랐다. 몇몇 사내들이 층계 어
귀쪽으로 몸을 날렸다가 모두 집법사자의 옷소매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밀려 제자리로 돌아
왔다.
"여러분, 조급해하지 마시오."
완안방방이 소리치더니 품속에서 나무함을 꺼내는 것이었다.
완안방방이 장갑을 끼고는 나무함에서 채설주 두 마리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채설주는 삼
절독 중의 하나라 모든 독충들이 다 두려워하는 터였다. 그래서 숱한 독충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루를 뚫고 내려가자!"
모용협이 소리치더니 먼저 두 발로 마루를 쾅 하고 굴렀다. 그때 집법사자가 소매를 휘둘러
그의 두 다리를 휩쓸었다. 모용협은 세찬 바람에 놀라 옆으로 비켜났다. 집법사자의 긴소매
가 또 다시 휩쓸자 모용협은 다급해서 식탁 위로 또다시 뛰어올랐다.
뭇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분분히 바닥에 뛰어내리자 집법사자가 또다시 두 옷소매를 휘
두르며 뭇사람들의 다리들을 휩쓸었다. 그런데 그 두 옷소매가 단숨에 수십 갈래로 변하며
세찬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누구나 대력이 자기에게 마구 밀려옴을 느끼
고는 황급히 식탁 위로 뛰어올라갔다.
혁중달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낭아봉을 쳐들어 내려쳤다. 집법사자가 긴소매를 휘두르자 소
매와 낭아봉이 맞부딪쳐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낭아봉이 혁중달의 손에서 하마터면 빠져나
갈 뻔했다. 집법사자가 다시 한번 소매를 휘두르자 혁중달은 낭아봉을 틀어쥔 채 창문 밖으
로 날아가 호수물에 떨어져 허우적거렸다.
뭇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이 백의 여인의 무공이 이미 최고봉에 달한 수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긴 옷소매에 내공을 불어넣어 혁중달의 낭아봉에 맞아도 천이 조금도 찢어지지 않
는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모용협이 다급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병장기로 옷소매를 잘라버려라!"
모두들 병장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뛰어내리면서 집법사자의 한 장이나 되는 긴 옷소매를 내
리쳤다. 결국 그 긴 옷소매가 순식간에 태반이나 잘려나갔다 모용협이 손에 한옥검을 들고
진기를 검에 운행시켜 집법사자를 찌르는데 삽시에 몸서리치는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었다.
집법사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기를 운행시켜 한기를 막았다. 그녀는 두 손에 단검을 갈라
쥐었는데 검날의 길이가 두자 남짓 밖에 되지 않고 칼날이 매미날개처럼 얇았다. 그런데 그
녀가 전광석화처럼 돌아서 검을 휘둘렀는데 어찌나 신속무비한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 바삐 병장기로 자기 몸들을 막았다. 집법사자는 마치 바람처럼 사람들 사
이를 드나들면서 거의 동시에 각각의 사람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모용협을 비롯한 그 무리들은 집법사자의 맹렬한 공세를 막다 보니 양과를 추격할 겨를이
없었다. 완안방방은 급한 중에도 꾀가 생겨 불시에 백의의 두 처녀에게로 달려가 검으로 찌
르려고 했다. 두 처녀도 장검을 뽑아들고 맞섰으나 실력 차이가 너무도 현격해 세 합만에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모용협이 그제야 깨닫고 외쳤다.
"상(常)형, 유(劉)형, 어서 가서 저 흰옷 입은 계집년들을 공격하시오!"
깡마른 한 사내와 또 다른 난쟁이 사내가 흰 옷 입은 두 처녀에게로 달려갔다. 그 깡마른
사내는 상청(常靑)이라 하는데 손에 구절철편을 들었고 그 난쟁이는 유대덕(劉大德)으로 쌍
도끼를 들었다. 두 사람은 모용협의 의형제로서 무공이 고강했다.
두 처녀는 두 고수가 공격하러 세차게 밀려오는 것을 보자 연방 뒤로 물러서다보니 벌써 벽
언저리까지 물러섰다. 몇 합 싸우고 보니 검을 든 손마저 나른해졌다. 상청이 고함을 지르며
구절철편을 휘둘렀는데 곧바로 두 여인의 쌍검이 구절철편에 맞아 검 두 자루가 저만치 날
아갔다. 유대덕이 쌍도끼를 쳐들고 기세 사납게 내리찍으려 들자 두 처녀는 기겁해서 비명
을 질렀다.
집법사자가 급히 달려와 장검으로 쌍도끼를 막았다.
모용협이 그 틈을 타서 소리쳤다.
"어서 가자."
모용협이 먼저 층계를 내려갔고 잇따라 나머지 사람들이 벌떼처럼 밀려 내려갔다. 상청과
유대덕이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집법사자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양과는 마루를 뚫고 곧바로 아래 층에 놓인 식탁 위로 떨어졌다. 양과는 두 발을 구르더니
문 어귀 쪽으로 씽 날아갔다. 아래 층에 있던 사람들은 천장의 널이 떨어져내리 고 한 사람
이 그 구멍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술집이 무너져내리는 줄로만 알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벌
떼처럼 밖으로 밀려나왔다. 양과는 술집 밖에서 칼을 든 몇몇 사내들이 순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 무리 속에 섞여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그 사내들은 사람들이 밀려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와 살펴 보려고 했으나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구 밀고 나오는 바람에 온전히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양과는 그 틈을 타
서 도망쳤다 부리나케 도망을 치고 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살
펴보니 다름 아닌 양효비와 오군영이었다. 원래 양효비는 집법사자의 행적을 가만히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자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집법사자가 바로 이 곳을 떠날 것이라고 생
각했었다. 양과가 이미 취선루에 들어갔던 까닭에 양효비는 아직 형편을 모르고 있었던 것
이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집법사자가 나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양효비는 마음이 조급해
졌다. 만일 집법사자가 가흥에 남아 있을 때 자기가 자금소갑을 잃어버린 일이 드러나게 된
다면 기필코 큰 화가 머리 위에 떨어질 판이었다.
취선루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사태가 좋지 못함을 깨달은 양효비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
다. 때마침 양과가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사람들 무리에 섞여 빠져나오는 것을 본 양효비는
삽시에 가슴이 써늘해졌다.
'저 양과란 놈이 기필코 내 모습으로 변장해 집법사자를 속였을 거다. 오군영과 함께 저 놈
의 앞을 가로막아야겠다.'
이때 양효비는 옷을 고쳐입고 더는 양과의 모습으로 변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양과의 명
성이 이미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계속 양과로 변장하고 다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가흥에 두 사람의 양과가 나타난다면 분명히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넌 이젠 왜 이 양모의 모습으로 변장하지 않은 거야?"
양효비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대꾸했다.
"더이상 당신 모습으로 변장할 일이 없지. 강호의 공적(公敎)이 된 양과의 모습으로 변장했
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
양과는 오군영이 양효비와 함께 나란히 서서 자기를 쌀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이
상하게 느껴졌다.
"오소저, 임잔 왜 이런 자와 함께 휩쓸려 다니는 거요?"
양과가 이렇게 말하자 오군영이 콧방귀를 뀌더니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양랑(楊郎)은 호의를 갖고 당신이 저지른 죄를 무마하려 애쓰는데 당신은 오히려 양랑을
해치려 드는군요. 어서 내 자금소갑이나 내놓으세요."
오군영이 양효비를 양랑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양과는 깜짝 놀랐다. 그 말은 양효비를 남편
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닌가. 거와장은 오독방의 주작분타이므로 저 여자가 양효비와 한
무리에 속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양과가 한숨을 쉬고 나서 입을 열
었다.
"오소저가 이 더러운 무리에 속할 줄은 몰랐구려,"
오군영이 또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자금소갑은 돌려주지 않을 셈인가요?"
양효비가 일부러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양과, 당신은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난 그것을 보답하기 위해 도처에서 당신을
대신해서 죄책을 당했소. 당신이 만일 자금소갑을 돌려준다면 난 지나간 일은 따지지 않겠
소. 하지만 돌려주지 않는다면……. 본 공자가 사정을 두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양과는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양효비, 난 5년 전에 네놈을 구해주지 말아야 했어!"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꽃바구니를 허리에 매달고 목검을 뽑아들었다. 양효비는 양과의
공력이 원래의 6성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놈과 싸워서는 안 된다. 좀 지나서 집법사자가 나오면 함께 손을 잡고 저 놈을 공
격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오군영은 양과가 자기를 속이고 자금소갑을 빼앗아간 일이 분해서 다짜고짜 검으로 찔렀다.
양과가 긴 옷소매를 날려 그 검을 내쳤다. 오군영이 검을 돌려 양과의 옆구리를 찌르는 척
하더니 다시 검을 돌려 옆구리의 윗부분을 찔렀다. 이것은 바로 이형검술 중의 괴이한 초식
이었다.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저 여잘 잘못 보았구나 원래 저 여자도 사방(邪幇)인물이었군 '
그리고 양과는 목검으로 오군영의 검을 물리쳤다. 양효비가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본 양과는
먼저 오군영부터 제압하려 했다.
"양랑, 어서 날 도와줘요 !"
오군영은 양과의 맹렬한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양효비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양
효비는 하는 수 없이 장검을 들고 도와주려고 나서기는 했으나 아주 조심했으며 공격보다는
자기 몸의 요해헐을 방어하는데 주력했다.
양효비는 자기의 검과 양과의 검이 마주칠 때 상대방의 힘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을 느끼고
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양과가 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일까?'
담이 좀 커진 양효비는 오른손의 검으로 몸을 막는 한편 왼손의 검으로 공격했다. 그는 집
법사자를 따라 신선도의 오독방에 가자마자 그녀를 따라 장검을 익혔는데 집법사자는 일부
러 그에게 왼쪽으로 쓰는 검을 더 많이 익히게 했었다. 시일이 지나자 왼쪽 손의 검이 오른
쪽 손의 검보다 더 위력이 있게 되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집법사자가 양효비를 데리
고 돌아온 것은 그가 양과와 용모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로 하여금 양과의 이름을
내걸고 중원 무림의 각 파벌들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십여 합을 겨루고 나서 양효비는 양과의 무공이 소문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님을 느끼
게 되었다. 그래서 대담하게 쌍검으로 빈번히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니 삽시간에 위력이 대
단해졌다. 비록 장검을 쓰기는 했지만 양효비 또한 이형검술의 초식을 써 오군영과 좌우로
호응을 했기에 더욱 괴이해 보였다.
양과는 다행히도 이미 이형검술을 겪어본 적이 있었으므로 비록 양효비와 오군영이 양쪽에
서 협공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넉넉히 대처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싸울수록 짧디짧은
5년 동안에 어떻게 양효비의 검술이 이처럼 신속히 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았지만 도
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싸우고 있는 차에 취선루 앞에서 순찰을 하고 있던 몇몇 사내가 달려와서 양과를 보
더니 두말 않고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양과는 설상가상의 위기에 빠졌음을 느꼈다. 그는 급히 천하에 하나뿐인 고묘파의 경신보법
으로 좌충우돌하면서 이쪽으로 찌르고 저쪽으로는 옷소매를 내치면서 그들이 사면포위를 할
수 없게 했다. 양효비는 급히 달려온 사내들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이 진짜 양과를 치려 하
는 것인지 아니면 가짜 양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왕 원조군
이 생겼으니 물이 흐린 틈에 고기를 잡듯 이 틈에 양과를 사경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
런데 갑자기 한 사나이가 화를 내며 소릴 질렀다.
"양과, 이 오독방의 주구야, 어서 순순히 목을 내놓거라!"
그 말을 들은 양효비는 깜짝 놀랐다.
'이크, 일이 잘못되는 판이구나. 이 사람들은 기실 나를 노리고 달려온 게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효비는 큰소리를 질렀다.
"맞아, 양과란 놈이 신조협으로 불리면서도 사방(邪幇)에 가담하여 갖은 악행을 하니 모두들
저 놈을 때려죽여야 하오!"
그 말을 들은 오군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젯밤에야 비로소 자기 아버지
와 양효비가 오독방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독방이 어떤 무리라는 것은 알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양효비가 오독방을 '사방'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데다가 이렇게 많
은 사람들이 오독방의 제자를 죽이러 온 것을 보자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생
각했다.
'아버지는 충직한 분이신데 아버지께서 오독방의 제자가 되셨다면 그 오독방은 어쨌든 사방
일 수는 없는거야.'
뭇 사람들이 오독방의 제자 양과를 죽이라고 고함을 치는 사이에 두 사람이 달려왔다.
쌍사자표국의 총표두 동진과 부총표두인 그의 처 원칠랑은 객점에서 양효비를 기다리다가
심심하다 못해 남호로 유람을 나왔었다. 그들은 '오독방'이니 '양과'니 하는 소리를 듣게 되
자 영문을 알아보려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양과가 한 무리나 되는 사람들의 포위에 빠져 아주 위험하게 된 것을 본 자웅쌍사자는 급히
병장기를 꺼내들고 말 잔등에서 훌쩍 솟아오르며 큰소리를 질렀다.
"양대협님, 안심하십시오. 우리들이 왔습니다."
이들 두 부부는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동진은 대력응조공을 써서 왼쪽으로 할퀴고 오른쪽으
로 갈겼는데 그 용맹을 막을 자가 없었다. 원칠랑도 만도를 들고 용맹하게 나섰다. 두 사람
이 싸움무리에 끼어들자 순식간에 형세가 바뀌었다.
양효비는 동진이 달려와 자기를 공격하자 급히 소리쳤다.
"동진 이 사람, 나란 말이야!"
그러자 동진이 말했다.
"그래, 바로 너를 때리려는거야!"
양효비가 그의 공격을 막으면서 말했다.
"내가 바로 양과……, 아니, 아니 임자가 섬기던 양과는 나란 말이야!"
동진은 자기가 모신 사람이 가짜 양과인줄 몰랐기에 두 개의 갈고리 손을 번갈아 내밀면서
소리쳤다.
"도적놈이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는거냐!"
양효비가 다급해서 외쳤다.
"임자가 이미 나의 충심환을 복용하고서도 감히 내 말을 듣지 않는거야?"
양과가 기민하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맞아. 임자는 이미 본 방의 충심환을 복용하였은즉 난 임자에게 저 놈을 죽이라고 명령하
는 바일세."
"소인이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
동진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양효비에게 연속적인 맹공격을 펼쳤다. 양효비는 조급해져 쩔쩔
맸다. 생각같아선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동진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짜 양과로 변장해서 동진을 속인 것을 후회했다.
원칠랑은 오군영의 앞까지 뚫고 들어왔다가 그녀를 보고 멍해져서 물었다.
"아유, 임자는 양대협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째서 이제는 저 놈을 따라다니
나?"
오군영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헷갈리고 있어요. 저 사람이 바로……"
양과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년은 이젠 양모를 배반했네."
원칠랑이 "뭣?"하고 분노하며 소리 지르면서 만도를 휘두르며 마구 내려찍으며 앙칼지게 나
무랐다.
"조석으로 변심하는 도적같으니라구. 양대협님마저 감히 배반한단 말이냐?"
오군영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도 못하고 그녀와 고전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양과가 안도
의 숨을 몰아쉬고는 목검으로 한 사나이를 베어버리고 또 옷소매를 내쳐 다른 한 사나이를
삼 장이 훨씬 넘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양과의 신용(神勇)스러움을 보고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양과는 그 틈에 훌쩍 몸을 날렸다.
그때 모용협 등이 취선루에서 쫓아나와 곧바로 양과의 앞을 막아섰다. 완안방방이 검으로
연거푸 찔러 대면서 소리쳤다.
"양과, 어서 그 꽃바구니를 내놓아라!"
모용협도 덩달아 외쳤다.
"꽃바구니만 내놓으면 죽이지는 않겠다."
양과가 검을 휘둘러 완안방방을 뒤로 물러서게 한 뒤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완안방방이 검을 비껴든 채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양과가 허리에 매고 있던 꽃바구니를 풀어내고 그 속에서 자금소갑을 꺼낸 뒤 흔들어 보이
며 조롱을 했다.
"모두들 이 물건 때문에 이 난리겠지?"
완안방방의 눈에 기쁜 빛이 감돌았다.
"빨리 나에게 넘겨."
그러자 모용협이 외쳤다.
"무슨 소리. 양공 나에게 넘기시오."
탁장청이 검으로 양과의 목을 겨누면서 소리쳤다.
"모용공자님께 넘겨주란 말이오."
양과가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이 물건을 내놓으면 가도 되겠지?"
모두들 동시에 입을 맞춘 듯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넘겨주어야 할까?"
완안방방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내게 넘겨줘야지요. 이 사람들은 모두 빈승이 본교의 보물을 되찾는걸 도우러 온 사
람들이에요."
그러자 모용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것이오. 내가 제일 힘쓴 사람이란 말이오. 비록 사태님의 일을 돕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보물이 어떤 것인지 보기나 해야죠."
그 말에 완안방방은 안색이 달라지며 힐난했다.
"모용공자님, 당신은 약속을 잊었나요?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아요."
모용협이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무슨 약속을 했다고 이러는 것인가?"
모용협이 아무 꺼리김 없이 시치미를 딱 잡아떼자, 탁장청이 고개를 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완안방방을 빼놓고는 모두 모용협과 탁장청의 친구들이라 그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완안방방이 정색하며 따졌다.
"탁공자님, 그때 당신도 그 장소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
요?"
"이 탁모는 요 며칠간 내내 모용형과 함께 있었지만 모용형이 사태님과 무슨 약속을 하는
걸 본 일이 없어요."
완안방방이 화가 나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자 탁장청이 말을 받았다.
"사태님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난 똑똑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탁모는 종래로 심
지가 곧고 보면 본대로 말하는 사람이라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탁공자님과 모용공자님은 모두 강호의 젊은 협객들로서 틀림없는 사람들이니 우린 이 분들
을 신임하오."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완안방방 편을 들었다.
"독주여니는 중원에서 명성이 그다지 좋지 못해 이 양모와 처지가 비슷하오. 때문에 이 양
모는 이 여자를 신임하는 바이오."
그리고는 자금소갑을 꽃바구니에 담아서 완안방방에게 던져주었다. 완안방방이 황급히 그
바구니를 받아안았다. 양과는 뭇사람들이 그 바구니를 주시하는 틈을 타서 도망쳤다.
완안방방이 꽃바구니에서 자금소갑을 집으려고 할 때 옆에 있던 얼굴이 싯누런 무뢰한 같은
사내가 다가오더니 꽃바구니를 툭 쳤다. 완안방방은 하마터면 그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나쁜 놈 같으니 눈깔도 없느냐?"
얼굴이 싯누런 그 사내가 두 손으로 꽃바구니를 잡으면서 말했다.
"사태님, 노여워 마십시오."
완안방방이 손으로 꽃바구니를 더듬어 보다가 "엉?"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손을 들이밀
어 꽃바구니를 더듬었으나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완안방방이 급히 바구니를
거꾸로 들어 그 속에 담긴 꽃을 쏟아 보았지만 자금소갑은 여전히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
었다.
완안방방은 붉으락푸르락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양과가 자금소갑을 이 바구니 속에 넣는걸 똑똑히 보았는데 왜 없는 것일까?"
얼굴이 싯누런 사나이가 다시 모용협 곁으로 와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금소감이 없어졌으면 양과가 한 짓이지. 사태님께서 그걸 보지 못한 거라니까요."
완안방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가 자금소강을 도로 넣을 때 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는걸요. 절대 틀
림없어요."
그러자 그 싯누런 얼굴의 사나이가 말했다.
"그렇다면야 사태님 눈이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그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까 완안방방에게 수모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게 분명했
다.
완안방방이 그 사나이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까 임자가 꽃바구니를 툭 건드렸는데 분명 임자가 자금소갑을 훔친 거야."
그 사나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면박을 주었다.
"아유, 그건 억울한 말씀입니다. 난 호의로 당신의 꽃바구니를 받들어주기까지 했는데 당신
은 생사람을 잡는군요."
완안방방은 면박을 당하고 나서 그와 옥신각신할 마음이 없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당신의 성함은 어떻게 쓰시나요?"
누군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은 풍자귀(馮子貴)라 하고 강호인들은 죽어도 손해보지 않을 자'라고 부른답니다."
완안방방이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강남신투(江南神倫) 풍자귀이겠군요?
풍자귀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다 강호 친구들의 과찬이지요. 저는 무엇이나 다 훔치지만 한 가지 물건만은 훔치지
않는답니다 "
완안방방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물건 말이에요?"
풍자귀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곱게 생긴 중년의 비구니는 훔치지 않지요."
그 말이 나오자 모두들 홍소를 터뜨렸다. 완안방방은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자
기의 미모에 대해 종래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네놈이 죽고싶어 환장했냐?"
완안방방이 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검으로 내찌르려고 들었다. 풍자귀가 모용협의 뒤로 피하
며 엄살을 떨었다.
"모용공자님, 목숨 좀 살려주십시오. 이 비구니가 사내를 훔치는 건 고사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군요."
뭇사람들은 또 한번 홍소를 터뜨렸다.
모용협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사태님, 노여워 마십시오. 풍자귀는 농담을 좋아할 따름이지 절대 악의는 없습니다."
완안방방은 지금 심중에 자금소갑 생각밖에 없었기에 풍자귀와 옥신각신할 생각이 없었다.
"모용공자님께서 책임지고 훔쳐간 자금소갑을 빈승에게 돌려주세요."
그러자 풍자귀가 큰소리로 말했다.
"난 훔치지 않았습니다."
모용협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를 두둔했다.
"이 사람은 확실히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야 자금소갑이 어떻게 내 손에 있을 수 있
겠습니까?"
하고는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을 쳐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의 손 위에는 확실히 그 자금소감이 놓여 있었다.
제20장 철혈남아
자금소갑을 본 완안방방은 지금 당장 그것을 빼앗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한스러웠다. 그
녀는 그것을 풍자귀가 훔쳐서 모용협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모두
다 모용협의 친구들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래 양과가 쉽사리 보물을 내놓을 줄 아셨나요? 그래 그것이 빈 소갑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실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모용협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자금소갑을 열어보려고 했다. 모용협이 머리를 숙
이는 틈을 타서 완안방방이 후닥닥 뛰어나오며 재빨리 자금소갑을 빼앗으려고 들었다. 모용
협이 자금소갑을 치우면서 손에 들고 있던 한옥검으로 완안방방의 가슴을 겨누면서 말했다.
"사태님, 하필 이렇게 급하게 굴건 또 뭡니까?"
완안방방이 움찔하며 천천히 물러서면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양과의 수작에 속을까봐 걱정돼서 그래요."
그러자 모용협은 설마 했지만 은근히 염려하고 있었기에 태연한 척 가장했다.
"이 꽃바구니는 집법사자가 양과에게 넘겨준 겁니다. 그는 아래 층에 뛰어내린 뒤로 지금까
지 격전을 치르느라 소갑 속의 물건을 꺼낼 겨를이 없었지요. 사태님께선 너무 걱정이 앞서
시군요."
완안방방은 답답했지만 섣불리 대항할 수 없는 처지라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연하게 또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 소갑 속의 보물이 진짜라는걸 어떻게 아나요?"
모용협이 웃으며 그녀의 음흉스러움을 간파하고는 항상 방어 태세를 늦추지 않고는 대답하
였다.
"저는 소갑 속에 서역신교 전세교주의 신물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그것은 역대 장
로들의 미륜골로 만든 염주인데 모두 백여덟알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었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겠습니까?"
완안방방이 그들의 수작에 넘어간 걸 알고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아마도 염주를 그 양과란 놈에게 도적맞은 듯싶어요."
"저의 친구들이 줄곧 그 놈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인골염주로 바
꿔치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뜻밖의 실수를 면하려면 그 염주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세요. 제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알
수 있어요."
모용협은 오히려 그 자금소갑을 품 속에 집어놓고는 뒷짐을 지고는 거드럼을 피우며 말했
다.
"제 생각엔 사태님도 이 인골염주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뭇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완안방방은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마음 속의 고충을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양효비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양효비를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양효비와 오군영뿐만 아니라 자웅쌍사자까지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진과 원칠랑은
양과가 떠나자 더 싸울 마음이 없어 떠나간 것이 분명했다. 양효비는 모용협 등을 보자 역
시 오군영을 끌고 꽁무니를 뺀 것이었다
이때 혁중달이 손에 낭아봉을 들고 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와 큰 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양과를 잡았나요?"
완안방방은 대답을 하려다가 먼 곳에서 집법사자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는 것을 보자
혁중달을 끌고 길 옆의 숲 속에 숨었다. 집법사자가 백의의 두 처녀를 데리고 걸어왔다.
땅에 떨어져 있는 꽃바구니를 발견한 한 처녀가 그것을 주워들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양공자님에게 일이 생긴 게 아닌가요?"
집법사자가 한 마디의 대답도 없이 그 꽃바구니를 내버리고는 총망히 앞으로 내달았다. 두
처녀도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혁중달은 겁이 나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집법사자가 멀리 간 뒤에야 그는 한숨을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난 호수에 빠졌다가 언덕에 기어오른 뒤 곧 취선루로 뛰어갔었지요. 층계를 오르려고 하는
데 꽝꽝하는 소리가 나면서 천장에 큰 구멍이 두 개가 생기는 게 아니겠어요. 쌍도끼를 든
난쟁이와 구절철편을 든 말라깽이가 떨어져내립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모용협의 의형제인 유대덕과 상청이죠."
혁중달이 완안방방의 말을 듣고는 놀란 소리를 지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아가씨가 걱정되어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지요. 그런데 이때 집법사자와 그 두 처녀가
내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위층에서 아무런 동정도 없는걸 봐서 난 아가씨와 모용협 모두 잘
못된 줄로만 알았죠. 그래 올라가서 집법사자와 승부를 내려고 했었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무공 고수들이 아닌가요? 집법사자가 아무리 날고뛰는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는 없는 거예요. 혁장군이 너무 덤볐다니까요."
그런데 그 난쟁이와 말라깽이가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서 집법사자를 막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난 슬그머니 층계 밑으로 돌아가서 그 집법사자를 불시에 공격하려고 했었지요,"
그 말을 듣고 완안방방이 머리를 끄덕이자 혁중달이 다시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애석하게도 그 말라깽이와 난쟁이는 무공이 너무 약했단 말입니다. 층계 어귀로 가자마자
집법사자에게 걸려 대번에 곤두박질을 당했지요. 참, 그런데 이상한 건 집법사자의 옷소매
한쪽이 많이 떨어져나간 것이었어요. 아마도 그 계집년이 옷소매를 휘둘러 날 호수로 내던
질 때 힘을 지나치게 썼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찢어진 거겠죠?"
그 말을 듣고 완안방방이 슬그머니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집법사자의 그 옷소매가 그처럼 쉽사리 찢어지는 것인 줄 아는 모양이지 ? 우리들
이 얼마나 힘을 들였는데…….'
혁중달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계속 주절거렸다.
"그런데 말라깽이와 난쟁이는 그렇게 둔한 사람들이 아닙디다 그려. 다시 일어나자 집법사
자는 내버려두고 백의의 그 두 처녀에게 달려들었지요. 집법사자는 말라깽이와 난쟁이를 물
리치고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그 말라깽이와 난쟁이가 또 덤벼들었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라깽이가 득의양양해서 '모용공자님이 이젠 그 양과란 놈을 잡았을 거다'하고 말하니
집법사자는 쓴웃음만 지을 뿐 대꾸는 하지 않습디다. 전 그 말을 듣고 아가씨가 분명히 모
용협 등과 함께 양과 놈을 추격하러 간줄 알아차렸죠. 그래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완안방방이 속으로 생각했다.
'집법사자가 방금 이 곳을 지나갔으니 상청과 유대덕을 때려눕혔거나 죽였을 거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급히 말했다.
"어서 가지요."
"어디로 가잔 말입니까?"
하지만 완안방방은 벌써 잰걸음으로 취선루 쪽으로 발걸음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혁중달도 그 뒤를 바싹 따랐다.
취선루에 돌아와 보니 주인과 숱한 하인들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몇몇 하
인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땅 위에 주저앉아 있는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상
청과 유대덕이었는데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아마도 중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주인은 완안방방과 혁중달을 보더니 싸움질하던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하인들과 함께
질겁해서 뒤로 물러섰다.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미 사람을 보내 관청에 알렸습니다. 당신들은 뭣하러 다시 돌아오셨는지요?"
완안방방이 상청과 유대덕의 신변으로 다가가자 몽둥이를 든 몇몇 하인들은 그녀가 사람을
빼돌리려 온 줄 알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혁중달이 큰소리를 지르며 낭아봉을 휘두르자 몽
둥이들이 사방에서 난무하고 하인 두 사람이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완안방방이 상청
과 유대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가지요."
혁중달이 "예"하고 대답하더니 낭아봉을 치우고 한 손에 한 사람씩 두 사람을 번쩍 들었다.
하인들은 혁중달이 이처럼 괴력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감히 막을 생각을 못하고 길을 내주
었으며 그들이 취선루를 나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는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혁중달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청이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사태님, 우릴 어서 객점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모용공자님도 이젠 당도했을 겁니다."
완안방방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물론 당신들을 데리고 모용협을 만나러 가고 말고요."
유대덕은 그녀의 말투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져 다시 물었다.
"사태님께선 일부러 우리 형제를 데리러 오셨습니까?"
"그럼요. 모용협은 당신들이 죽고 사는걸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이렇게
다시 온 거예요."
앞에서 네 사나이가 급급히 마주 오고 있었는데 앞장선 자는 풍자귀였다. 나머지 세 사람도
완안방방은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촉산괴걸 능소, 소염라 부방, 그밖에 선비 차림을 한
사람이었는데 모용세가의 총관 소이(蘇二)선생이었다.
풍자귀는 상청과 유대덕이 내상을 입은데다가 혁중달의 손에 병아리처럼 들려 있는 것을 보
자 몹시 가슴아파하며 말했다.
"어서 이 두 형님을 업세."
그러자 촉산괴걸 능소가 유대덕을 업고 풍자귀가 상청을 업었다. 완안방방이 두 팔을 벌리
며 그들을 막았다.
"사람은 내가 구했으니 내가 친히 모용협에게 넘겨주고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소이선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까 모용협을 따라 취선루에 오지는 않았지
만 그에게서 실정을 들었던 것이다.
"사태님의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완안방방은 모용세가에 지혜가 뛰어난 두 사람이 있다는 말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소제갈(小諸葛)'이라고 불리는 주명(朱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이 소이선생
이었던 것이다. 완안방방이 그 말을 받았다.
"옳지 않다니요. 소이선생은 어떤 고견을 갖고 계시는지요."
소이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상청 형과 유대덕 형이 그래 모두 병아리들이란 말입니까?"
완안방방이 깔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분들은 물론 병아리가 아니지요."
"병아리들이 아닌 이상 중한 내상까지 입었으니 조심스럽게 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런 일로 어떻게 혁장군에까지 감히 누를 끼치겠습니까? 역시 우리에게 넘겨야지요."
"그건 안돼요. 모용공자님에게 누가 그 분의 두 의형제를 구했는가 하는걸 친히 알려야겠어
요."
"사태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주 합당한 대책을 말씀드리지요."
"어서 말씀해보세요."
"먼저 우리들이 객점 밖까지 업고 가서 혁장군에게 넘겨드리지요. 그러면 혁장군의 수고도
덜 수 있지요. 혁장군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혁중달은 그것이 계책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대뜸 웃으면서 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좋지요. 이 두 사람을 합치면 삼백 근은 넉넉히 될 건데 본 장군도 좀
힘에 부치는 일이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상청과 유대덕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완안방방이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사태님께선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여하를 막론하고 빈도는 이 사람들을 넘겨주지 않겠어요. 흥, 당신들은 돌아들가시고 모용
협에게 자금소갑을 갖고 와서 바꿔 가라고 전하시오."
그 말을 듣자 소염라 부방이 화를 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상청 형과 유대덕 형을 인질로 삼자는 심사군요. 너무나 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군
요?"
능소도 눈을 부릅뜨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지껄여댔다.
"저 여자가 독주여니라 불리고 심보가 엉큼하며 수단이 지독한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그러자 완안방방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옳게 말씀했어요. 난 어떤 짓이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소이선생이 웃으면서 점잔을 가장하고는 말했다.
"의논하면 될 일인데 뭘 그러십니까? 사태님께서야 자금소갑을 돌려달라는 거겠지요?"
완안방방이 아니꼬운듯 콧방귀를 뀌자 소이선생이 계속 말을 이었다.
"기실 우리 모용공자님께선 인골로 만든 그런 염주를 본 일이 없어서 호기심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요. 허허, 모용공자님께선 어린시절부터 호강스럽게 자란 분이시라 근 삼십이 되었
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답니다. 이젠 구경도 실컷 했으니까 사태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면
꼭 돌려드릴 겁니다."
완안방방이 입을 비쭉 내밀며 대꾸했다.
"소이선생은 과연 지모가 대단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절대로 속지 않을테니까 날 깔봐선
안돼요. 돌아가서 모용협에게 전하세요. 두 시진이 지난 뒤에도 자금소감을 보내지 않으면
내가 그에게 한 가지 선물을 보내겠다고요."
"무슨 선물입니까?"
완안방방이 상청과 유대덕 두 사람을 가리키면서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들은 어쨌든 중상을 당한 사람들이 아닌가요? 난 저 사람들의 팔 한짝씩을 떼내어
선물로 삼겠어요. 어때요?"
풍자귀가 놀라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당신이 감히 그런 짓을 하겠다구?"
"믿고 안 믿는 건 당신들에게 달렸지요."
완안방방은 이렇게 말하더니 혁중달에게 상청과 유대덕 두 사람을 들쳐업게 한뒤 길을 걷기
시작했다. 풍자귀, 소이선생, 능소, 부방 네 사람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어찌할 바를 몰
랐다. 풍자귀가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열었다.
"소이선생, 어떻게 할까요?"
"먼저 모용공자님에게 알리고 봅시다."
그 말에 일행은 황망히 객점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길 옆의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가 우수수 움직이더니 두 사람이 나무에서 뛰어내
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효비와 오군영이었다. 자웅쌍사 동진과 원칠랑이 떠난 뒤 양효비와
오군영은 기실 멀리 가지 않고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양효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듯 중얼거렸다.
"양과가 어째서 자금소감을 그렇게 쉽사리 포기한 것일까?"
그러자 오군영이 대답했다.
"아마 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금소감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양효비는 이미 뭇사람들이 인골염주를 쟁탈하는 목적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는 욕
심이 동하여 그것을 손아귀에 넣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인골염주를 도로 빼앗기만 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서역의 한 파벌을 호령할 수
있으니 일방(一幇)의 종주(宗主)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오군영과 함께 풍자귀 일행의 뒤를 밟아 객점 밖까지 쉽게 따라
올 수 있었다. 풍자귀 일행이 객점으로 들어가자 양효비가 오군영에게 낮게 속삭였다.
"내가 안에 들어가 그들의 동태를 살펴볼테니까 임잔 이 곳에서 기다리라구."
"그 자들이 모두 당신을 알고 있으니 절대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양효비가 뒤따라 들어가보니 풍자귀가 위층으로 올라가기에 그는 아래 층에 잠깐 서 있었
다. 주인이 모용협 쪽의 사람일까봐 조심되어 그는 주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양
효비는 흙을 움켜잡아 얼굴에 바른 뒤 적삼을 벗어서 쌍검을 싼 다음 머리를 숙이고 위층으
로 올라갔다.
멀리 상등객방의 문밖에 장대한 두 사내가 서 있고 수시로 사람들이 그 방으로 드나드는 것
이 보였다. 그들은 대개가 취선루에 갔던 고수들이었으므로 양효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양효비는 머리를 숙인 채 객방 옆에 있는 문밖에 이르러 그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누구요?"
양효비가 얼핏보니 촉산괴걸 능소, 소염라 부방과 몇몇 사나이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양효
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방을 잘못 찾았군요."
계속 앞으로 나가 상등객방으로 들어가니 모용협이 거기에 앉아서 소이선생과 밀담을 나누
고 있었다. 양효비는 감히 그곳에서 서성거리지 못하고 재빨리 문을 거쳐 그 옆방으로 들어
갔다.
양효비가 살펴보니 그 안엔 사람이 없었는데 그가 들어서자마자 또 한 사람이 들어서며 묻
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당신은 누굴 찾는거요?"
그 사람은 뚱뚱한 사내였다. 양효비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혈도를 누른 다음 그
를 끌어다 침상 위에 뉘었다.
그 뚱뚱한 사내는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두 눈을 멀뚱멀뚱 치켜뜨고는 바라보기
만 했다. 양효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할애비가 네 방을 빌려 쓸 테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말거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릴테
다."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이불로 그 사내를 덮고 방문을 잠갔다.
양효비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밖에 버드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는데 무성한
버드나무 가지들이 창문을 가려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간다 하더라도 자세히 볼 수가 없었
다. 양효비가 기뻐하며 창밖으로 빠져나와 살펴보았더니 상등객방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
는데 이쪽 창문으로부터 한 장거리가 좀 못 되었다. 양효비가 살짝 뛰어 두 손으로 그쪽 창
턱을 잡은 후 매미처럼 바람벽에 꼭 달라붙어 방안의 동정을 엿들었다.
방안에서 하는 말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다행히도 모용협과 소이선생이 창문 가까이 앉아 있
었던 탓에 양효비는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소이선생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방법을 강구하십시오. 완안방방이란 년은 지껄인 대로하는 년입니다. 두 시진이 지
난 뒤면 상청 형과 유대덕 형의 팔을 잘라낼 겁니다."
"그럼 자금소갑을 그년에게 돌려 줘야겠구먼?"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이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어찌 쉽사리 돌려줄 수 있단 말인가?
휴, 자고로 대사를 이룩하려면 자그마한 희생은 피치 못하는 법이야."
"공자님께서는 상청 형과 유대덕 형을 저버리고 돌보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아니야. 지금이 바로 사람을 써야 할 때란 말이야. 상청 형과 유대덕 형은 무공이 고강할
뿐더러 재능과 견식이 대단하므로 난 버릴 수가 없네. 그들이 완안방방의 손에 죽게 되었는
데 형제의 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다른 형제들의 마음이 상하게 될거야."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게 인심을 얻는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하지 않습
니까? 공자님은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무엇보다도 인심부터 끌어야 합니다."
소이선생이 이렇게 말하고나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을 쓰시겠습니까?"
"만일 시일을 끌 수만 있다면 우리가 백여 명의 장인들을 불러다가 인골염주 한 꾸러미를
만들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속일 수도 있을거네. 어쨌든 그년은 자금소갑 속의 인골염주를
본 적이 없으니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지 못할거야."
소이선생이 한참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이럽시다. 제가 다시 풍자귀 형님과 능소, 부방을 데리고 완안방방에게 되돌아가서 공자님
이 이미 자금소갑을 갖고 성을 떠났다고 말해 보지요. 혹시 그년이 그 말을 믿고 두 사람을
해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갑자기 객점 밖에서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와서 보고를 올리는 것이었다.
"공자님께 보고합니다. 객점 밖에서 오군영을 발견했는데 벌써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소이선생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군영은 양효비를 늘 따라다니는데 그년이 왔다면 기필코 양효비도 부근에 있을 겁니다.
어서 나가봅시다."
곧이어 어지러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양효비가 창문을 연 다음 머리를 들이밀고 보니 방안에 사람이 없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
방을 살피고 나서 침상 위에 철피를 씌운 녹나무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기에 열어보니 그 속에는 보물이며 은자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고 한 귀퉁이에
자금소갑도 놓여 있었다. 양효비는 아주 기뻐하면서 자금소갑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정작 떠나려고 하다가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보물들을 한 움큼 움켜쥐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협이 돌아와 자금소갑과 보물들을 도적맞은 것을 보면 아마 이 고장 도적들이 한 짓으
로 여길거다.'
양효비는 창문으로 뛰어나와 객점 앞으로 돌아왔다. 나무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살펴보니
오군영이 풍자귀 일행에게 붙잡혀 끌려들어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주 다급해졌다.
'오소저가 왜 이처럼 조심성이 없을까? 모용협이 오소저를 붙잡기는 했지만 어쩔 수는 없을
거고 몇마디 묻고는 놓아줄거야.'
양효비는 자금소갑을 훔친 까닭에 기분이 좋아져 오군영의 일은 아예 뒷전으로 치고 나는
듯이 도망갔다
모용협은 오군영을 붙잡아서 위층으로 돌아왔다가 자금소갑과 보물이 없어진 것을 보고 모
두들 깜짝 놀라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모용협은 과연 이 고장의 도적들이 한 짓으로 여기
고 급급히 가흥의 십여 명 지방 악당들을 찾아가 그들의 부하들을 통해 조사해보았지만 역
시 자금소갑의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용협은 긴급한 정황에서도 당황해 하지 않고
소이선생을 완안방방에게 보내 계획대로 시간을 끌게 했다.
양과가 황망히 전날 자기가 묵던 객점으로 돌아왔다. 객점 문을 들어서니 출가한 사람 둘이
서 주인을 둘러싸고 시비를 가리고 있었다. 그 중 나이먹은 자가 뭐라고 자꾸 지껄여댔는데
서역의 만어(蠻語)였다. 삼십여 살 난 다른 한 사람이 중원의 말을 했는데 억양이 이상하기
는 했지만 능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젊은 자가 주인의 옷깃을 거머잡고 소리쳤다.
"이 곳에 강도가 있소."
그 말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나이는 체구가 건장하고 얼굴빛이 거무튀튀했는데 마치 금강(金剛)같아 보였다. 그가
마치도 병아리를 잡아채듯 주인을 틀어쥐고는 소리쳤다.
"나의 사부님이 물건을 잃어버렸단 말이오,"
주인을 얼굴에 웃음을 발라가며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무슨 물건을 잃어 버렸습니까?"
그 사나이가 손으로 목에 건 염주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이 ……이거 말이오."
나이든 자가 한쪽에서 손시늉까지 해가면서 아주 조급한 표정으로 무어라고 지껄이고 있었
다. 주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물건은 당신들 같이 출가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것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가
져가서 뭘하겠습니까? 대사님께서 조심하지 않아서 어느 곳에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양과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 옆을 지나갔다. 양과는 어젯밤에 취선루에 갈 대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먼저 인골염주의 비밀을 탐지한 다음 집법사자로 하여금 본인이 소룡녀라는 것을
자백토록 하려고 작심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인골염주를 그녀에
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때마침 티베트인 두 사람이 객점에 들게 되었는데 양
과는 나이든 자의 목에 걸려 있는 염주가 자금소갑 속의 인골염주와 극히 비슷하나 약간 거
칠게 가공했을 따름인 것을 발견했다. 두 승려가 묵은 객방을 똑똑히 보아둔 뒤 양과는 무
채접에게 미혼향을 좀 얻어서 객방의 문 틈으로 살살 불어넣었다. 두 티베트인은 아마도 밤
길을 걸어와 피곤한 탓에 잠을 자던 채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양과는 그 사이에 책방으
로 들어가 나이든 자의 염주를 훔쳐내서는 자금소갑 속의 인골염주와 바꿔치기 했던 것이
다.
그러므로 모용협의 수중에 먼저 들어갔다가 후에 양효비에게 도적맞은 인골염주는 전세교주
의 신물인 그 인골염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양과가 자기의 객방으로 들어서니 무채접이 기다리고 있다가 급히 물었다.
"양공자님, 그래 언니를 만났나요?"
양과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취선루에서 생긴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무채접은 자금소갑
이 이젠 완안방방과 모용협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더니 놀라서 안색이 변했다.
"큰일났군요. 큰일났어요."
"왜 그러나?"
"당신이 자금소갑을 잃어버렸으니 방주님께 책을 당하시면 그게 큰일이 아닌가요?"
"비록 자금소갑은 잃어버렸지만 그 자들은 내가 꿩 먹고 알 먹으려는 죄에 걸려들었단 말이
야."
"당신은 이런 일을 당하고도 웃음이 나와요?"
"내가 보기엔 완안방방과 모용협 모두 자금소갑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 같아. 지금쯤 아
마 그 자금소갑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울텐데 결국은 둘 다 큰 손실을 보고야 말걸. 우린
그 다음에 쳐들어가 손쉽게 그 자금소갑을 빼앗아 올 수 있거든."
그 말을 들은 무채접은 일리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또한 우려도 없지 않았다.
"자금소갑을 잃은 건 필경 큰 실수예요. 언니가 당신의 말을 믿어줄까요?"
"내가 그래서 언니를 찾아 해명하려던 참이오, 접아, 임자가 날 데리고 가서 언니를 만나게
해주는 게 어떻겠나?"
"하지만 전 이 곳에서는 감히 언니를 못 만나요. 언니는 날 꾸짖을 거예요. 언니를 찾아가려
해도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야죠?"
그 말을 들은 양과는 움찔 놀랐다. 그가 객점에 돌아온 것은 무채접을 통해 집법사자를 다
시 찾기 위해서였는데 무채접이 그녀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니 정말 의외였다.
"여기에 본 방의 제자들이야 있겠지?"
"있기야 몇 사람 있겠지만 언니의 신분으로 보아 절대 그 몇몇 소졸을 찾아가지 않을 거예
요."
"그럼 언니가 날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만."
"당신도 너무 조급해 할 필요 없어요. 언니를 만나게 되면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통사정을
해보겠어요. 아마도 언닌 당신을 이해해줄 거예요, "
"당신은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을까봐 두려워하잖아?"
"당신을 위해서라면 언니의 꾸지람쯤 듣는 일이 뭐 대단한가요?"
양과는 그 말에 내심 감동되어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꼭 끌어 안았다.
"접아, 당신은 정말 날 잘 대해주는군."
"당신이 변심하지만 않는다면야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잘 대해줄 거예요."
하지만 이 여인이 맘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양효비라는 것이 생각나자 양과는
갑자기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객점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고함을 치고 말이 울부짖었다.
"오독방의 양과야 듣거라. 네놈은 취선루에서 큰 소동을 일으켜 인명을 해쳤으니 어서 나와
포박을 받아라!"
양과와 무채접이 급히 객점 밖으로 나와 보니 기병 한 무리와 보병 한 무리가 당도했는데
이십여 명이 되었다. 양과가 속으로 관군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찾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
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요란히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과, 네놈이 이제 어디로 갈테냐?"
양과가 머리를 돌려보니 확도와 그의 사대제자들이었는데 얼굴에 큼지막한 손바닥 자국이
하나씩 나 있었다. 양과는 그들이 노완동 주백통에게 얻어맞아 그렇게 된 것을 모르고 있었
다.
마군 두령인 도위 (都耐)가 확도에게 읍을 하면서 물었다.
"친왕 나으리, 저 외팔이 사내가 사방(邪幇)의 도배 양과인가요?"
"그렇소. 저 여자도 사방의 인물이니 놓쳐서는 안되오."
원래 확도는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강남에 와 군사정황을 탐지하고 있었으나 외교사절이
라는 명분과 함께 원나라의 의화사자(議和使者)라는 직책을 달고 있었다. 남송의 조정이 무
력하다 보니 확도에게 온갖 편리한 조건을 제공해서 그는 도처에서 제멋대로 행동했다. 확
도 일행은 주백통의 손에 걸렸다가 겨우 살아 도망친 뒤 취선루에서 무림인들이 소동을 벌
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속에 외팔이 사내가 있더라는 말을 듣고 그 사내가 양과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급히 관부에 알려 기병과 보병을 모아 사방을 수색하게 했던 것이다
양과가 외팔이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에 재빨리 이곳에 와 찾게 되었던 것이다.
양과는 그 내막을 몰랐기에 큰 소리를 질렀다.
"여보, 도위 나으리. 확도는 원나라의 친왕이고 대송(大宋)의 숙적인데 당신은 왜 저 놈을
붙잡지 않고 나를 붙잡으려 하는 겁니까?"
그러자 기병 도위가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확도 친왕은 원나라에서 파견한 의화사자인데 네놈이 감히 친왕 전하를 모욕해서 송나라와
원나라, 이 두 나라의 친선을 방해한단 말이냐?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네놈은 사방의 제
자로서 취선루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지 않느냐? 여봐라, 어서 저 놈을 잡아 대령
하라."
십여 명의 보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양과가 목검을 빼어들고 소리쳤다.
"네놈들이 감히 달려들다가는 이 양모의 검이 사정을 두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말아라."
무채접도 아미자를 뽑아들며 소리쳤다.
"양공자님, 쓸데없는 말 할 것도 없어요, 저 자들이 우리를 사악한 무리라고 모욕한 이상 몇
놈을 죽여 화풀이나 하죠."
무채접이 이렇게 말하며 아미자로 한 군졸의 팔을 찌르자 그 군졸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
르고선 칼을 내동댕이쳤다.
보병들은 무채접이 자기들의 동료를 부상 입힌 것을 보자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무
채접은 그들이 자기들을 사방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인정 사정을 두지 않
았다. 그래서 또 두 사람의 군졸이 아미자에 찔려 쓰러졌다. 그 나머지 군졸들은 무채접의
한 쌍의 아미자가 그처럼 무서운 것을 보자 감히 앞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양과와 무채접 두
사람을 에워싸고 고래고래 소리만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기병 도위가 그 모양을 보고 대노하여 소리쳤다.
"저 놈을 잡아라. 뒤로 물러서는 자는 즉시 참하리라."
군졸들은 하는 수 없이 떼거리로 다시 덤벼들었다.
양과는 송나라 군사들이 원나라의 친왕은 붙잡지 않고 오히려 보통 백성을 붙잡는 일이 분
하기는 했으나 같은 송나라 사람끼리 싸워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기는 싫었다. 그는 대노
한 무채접이 군졸들을 더 죽일까봐 두려워 즉시 그녀의 앞을 질러가서 목검을 휘둘렀다. 이
군졸들은 평소에 호강을 하면서 지내다 보니 싸움에 능란하지 못했고 강호인들의 무공에 대
해서는 더군다나 알고 있지 못했다. 양과가 검을 한번 번뜩이자 칼을 잡은 손에 통증을 느
끼며 모두들 칼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군졸들이 자기들의 손목을 살펴보니 콩알만한 흰
점이 생겼을 뿐 피부조차 벗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양과는 목검 끝으로 군졸들 손목의 혈도
만을 살짝살짝 눌러놓았던 것이다.
군졸들이 칼을 떨어뜨리고 우두커니 서 있자 그 기병 도위는 사정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왜 칼들은 내버리는거야? 어서 주워들지 못할까!"
군졸들이 허리를 굽히고 칼을 주워들려 했으나 손가락이 저려 다시 칼을 집어들 수가 없었
다. 그러자 확도가 소리쳤다.
"이건 양과의 점혈법이요. 어서 말을 몰아 저 놈을 참하시오."
기병 도위는 일찍 강호에 점혈법이라는게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말을 채찍질해서 양과에게
달려들었다. 군졸들이 비키면서 길을 내주었다.
기병 도위는 말 위에서 검은 술을 매단 창을 들어 갑자기 양과의 목을 내찔렀다. 그 초식이
정확하기도 했거니와 기세도 등등했으며 뛰는 말 위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무술
솜씨가 과연 군졸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과는 몸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창끝이 거의 닿을 무렵에야 목검으로 곧장 검은 술이 달린 곳을 찔렀다. 기병 도위
는 즉시 극심한 진동을 느꼈고 창이 석자 남짓 공중으로 튀어 올랐으며 하마터면 창을 떨어
뜨릴 뻔했다. 하지만 도위는 창대를 힘껏 틀어잡고 떨어뜨리지 않았다.
양과는 속으로 은근히 감탄하면서 이 도위가 일당백의 용기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유감스럽
게도 변방에 가서 적을 물리쳐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채 이 곳에서 향락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위가 탄 말이 양과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도위가 말고삐를 바싹 당기면
서 큰소리를 지르자 훈련이 잘된 그 말이 소리를 지르면서 앞발을 들고 꼿꼿이 일어서며 양
과를 걷어 차려고 들었다. 양과가 오른쪽 옷소매를 내치자 강풍이 불어 그 말을 자빠뜨려
먼지 속에서 뒹굴게 했다.
기병 도위는 민첩한 동작으로 말이 자빠지는 순간 말 안장에서 훌쩍 뛰어 공중제비를 돌고
착지했는데 검은 술이 달린 창이 여전히 손에 들려있었다. 군졸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양
과도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 그 도위를 대견하게 여겼다.
기병 도위가 창을 휘두르자 즉시 십여 기의 기병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돌격해왔다. 양과가
태산같은 자세로 우뚝 서서 긴 팔소매를 휘두르니 삽시에 사방에서 광풍이 불어닥쳐 가까이
까지 달려간 기병들은 말이건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땅바닥에 나 뒹굴고 말았다.
무채접이 양과의 뒤에서 환성을 울렸다.
"양공자님, 당신은 어느새 이런 무공까지 닦았나요? 정말 멋져요!"
하지만 양과는 속으로 탄식하면서 만일 오른팔이 성하다면 이런 철수공부(鐵袖功夫)를 익힐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기병 도위는 스무여 명의 힘으로도 이 외팔이 사내를 제압할 수 없음을 알고 아주 탄복했
다.
"양과, 당신은 이처럼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 왜 하필 사방의 제자 노릇을 하는 것이
오?"
"도위 나리는 그처럼 훌륭한 재간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북쪽 변방에 가서 적을 물리쳐서
조국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적국에서 온 친왕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도위 면전에서 이처럼 망녕되게 굴다니."
도위가 창피한 나머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창으로 양과의 가슴을 찔렀다. 이번에 양과
는 막지 않고 몸을 틀어 피했다. 기병 도위가 연거푸 양과의 두 어깨, 두 팔굽, 두 무릎을
노리고 여섯번이나 찔렀다.
"도위 나리가 비록 악비 악무목(岳飛 岳武繼)의 육합창법(六合槍法)을 쓰기는 하지만 그 분
같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없는가 보오."
그 말을 들은 도위는 대번에 얼굴이 새빨개지고는 씩씩거렸다. 그는 이름이 장흥국(張興國)
이었는데 지난날 악비의 수하에서 장수직으로 있던 장헌(張憲)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조의 행적을 생각하다 보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변방에 가서 적을 무찔러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도위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확도가 소리쳤다.
"장도위, 어서 저 양과란 놈을 잡으란 말이오."
장흥국은 어쩔 수 없이 군졸들에게 일제히 덤벼들라고 호령하 수밖에 없었다.
무채접이 두 팔을 곧게 펴더니 아미자를 씽씽 돌리기 시작했다. 양과는 그녀가 사람을 죽일
까봐 두려워 급히 말렸다.
"임잔 모든걸 이 양모한테 맡기고 뒤로 물러나 있으시오."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목검을 휘둘러 잠깐 사이에 모든 군졸들의 혈도들을 눌러놓았다.
군졸들은 병장기를 휘두르던 그 자세로 모두 목석처럼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깜짝 놀란 장흥국은 아예 적수가 되지 못함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확도가 뒤에서 독전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또다시 창을 들고 덤벼드는 수밖에 없었다. 양과가 목검으로 창대
를 막아 가볍게 쳐들었을 뿐인데 검은 술이 달린 창은 장흥국의 두 손에서 빠져나와 칠팔
장 높이로 날아올랐다. 양과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장흥국의 혈도를 찔러놓고 나서 입
을 열었다.
"네놈이 원나라와 결탁해서 주구 노릇을 하는걸 보아서는 본래 네 머리를 참해야 하겠지만
너의 창술 재주를 가상히 여겨 살려둔다."
그러자 장흥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죽이려면 군말 말고 어서 죽여라. 본 도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네놈
도 한 가지 일은 모르고 있다."
"엉 ? 내가 무슨 일을 모른다는 것이냐?"
"본 도위가 확도의 명을 따르는 것은 가흥부 대대인(臺大人)나으리의 지시 때문이지 이 장
모가 원하는 바가 아니오."
"그럼 내가 당신을 억울하게 한 거로군."
"본 도위는 악가(岳家)의 육합창법을 배워 악비 장군처럼 나라에 충성으로 보답하려 했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라에 보답하려 해도 길이 막혔구려. 흥, 이런 일을 말해봐야 당신 같
은 사방의 제자는 알아듣지도 못할텐데 무슨 소용이 있담?"
"당신이 정말 나라에 보답할 마음만 있다면 어째서 양양에 있는 대협 곽정에게 가지 못하는
거요?"
"일이 이미 이 지경이 된 이상 말을 해도 무방하겠군. 장모는 이미 몇십 명 형제들과 연락
해서 양양에 가기로 했는데 본래 오늘 저녁에 가흥에서 도망치려 했었소. 유감스럽게도 이
장모의 목숨이 당신 손에 끊어지게 되었으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도 물거품이 되었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 표정은 비분에 차 있었다. 양과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
다고 생각해서 통쾌하게 웃었다.
"이 양모가 비록 오독방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송나라 사람으로서 원나라 오랑캐를 뼈에 사
무치게 미워하고 있소."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검을 들어 봉해놓은 장흥국의 혈도를 풀어준 뒤 손을 마주잡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
"도위께선 일로에 무사히 가시기를 바라오."
장흥국이 손발을 놀려 보면서 물었다.
"당신…… 정말 날 놔주는 거요?"
양과가 땅에 떨어진 창을 집어다가 장흥국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도위, 어서 가보시오."
장흥국이 멍하게 서 있다가 양과 앞에 달려와 몇 번이나 절을 했다.
"이 은혜 무슨 말로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장흥국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몸을 돌려 가고자 하는 길로 걸어갔다
'훌륭한 철혈남아로군.'
양과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장흥국은 야음을 틈타 성을 벗어나 양양의 군대로 찾아갔다. 그는 대협 곽정을 따라 전장에
서 앞장서 돌격하면서 여러 차례나 전공을 세웠다. 그는 곽정과 함께 전사해 천고에 그 이
름을 남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확도는 장흥국이 양양으로 가서 원나라 군대와 대적하겠다는 말을 듣자 대노하여 추격하려
고 했다. 그러나 양과가 몸을 날려 확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대송국에 이런 애국맹장들이 있는데 어찌 오랑캐들의 남침을 용인할 수 있겠느냐?"
확도가 눈썹을 곤두세우면서 소리쳤다.
"양과, 네놈이 이미 수많은 내력을 소모했는데도 거센 척 할테냐?"
확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부채로 양과의 왼쪽 가슴을 내찔렀다. 양과가 왼쪽 발로 뒤로 물러
나면서 부채를 피하더니 오른쪽 옷소매를 휘둘러 강풍을 일으켰다. 확도가 뒤로 훌쩍 물러
났다가 다시 달려들면서 부채로 찔러 대다가 갑자기 부챗살을 활짝 펼쳐서 그것으로 양과의
목을 자르려고 했다. 양과가 목검으로 부채를 물리침과 동시에 발길로 걷어찼다. 확도가 공
중에 훌쩍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부채로 계속 양과를 베려고 했다.
"마침 잘 내려오는구나."
양과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내력을 목검으로 옮겨 위를 향해 찌르는데 삽시에 노한 파
도와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확도는 세찬 바람이 자기 얼굴로 불어오자 감히 양과의
검술에 맞 서지 못하고 착지했다. 그는 다시 부채를 접어서 양과의 대혈들을 노리고 연거푸
십여 번이나 찔렀다.
옆에서 진웅, 장기, 연무, 임맹 사대제자들은 이 두 고수의 열전을 제정신을 잃고 구경하면
서 슬그머니 그 중의 절묘한 초식들을 따져보곤 했다. 갑자기 진웅이 무채접을 보더니 다급
하게 소리쳤다.
"동생들, 우리도 저년을 잡아버리세."
진웅이 이렇게 소리치고 나서 부채를 들고 먼저 달려들었다. 장기, 연무, 임맹도 각기 병장
기를 뽑아들고 진웅과 함께 무채접을 둘러쌌다.
무채접은 양과와 확도의 싸움을 넋을 놓고 구경하면서 그들이 한꺼번에 공격해오는 줄은 눈
치채지 못하고는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었다.
'양효비의 검술이 어째서 이토록 초식이 달라졌을까?'
이렇게 생각하던 무채접은 진웅의 부채가 시야에 들어오자 황급히 아미자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장기와 연무 두 사람의 쌍검이 각기 무채접의 양 옆구리로 날아들었고 임맹이 그녀
의 배후에서 큰 칼로 정수리를 호되게 내려쳤다. 무채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면서 아미
쌍자로 장기, 연무 두 사람의 눈을 찔러 그들로 하여금 공세를 늦추게 했다. 그리고는 곧 가
는 허리를 비틀더니 두 검 사이로 빠지면서 뒤에서 떨어지는 큰 칼의 일격을 피하며 연환원
앙각(連環鴛鴦脚)의 초식으로 훌쩍 몸을 솟구치는 동시에 발로 맞은편의 진웅을 걷어찼다.
무채접의 이 몇 가지 동작은 빈틈없이 맞물렸고 공격과 방어가 긴밀히 결합되어 사대제자들
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진웅이 그들을 돌아보고 서로 눈짓을 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동생들, 힘을 합쳐 동시에 저년을 족치세?"
사대제자들은 또다시 무채접을 포위했는데 두 사람이 공격하면 옆의 두 사람은 방어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역할 분담이 아주 분명했다. 원래 사대제자들은 확도를 따라 강호를 다
니면서 여러차례 수난을 겪었다. 그래서 확도는 그들에게 서로 연합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익히게 했는데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이 공격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옆에서 방어하면서 호응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사대제자들은 오군영과 싸울 때 바로 이 전술을 이용
하여 그럴듯한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때 사대제자들이 앞뒤로 서로 호응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무채접은 조급한 나머지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하마터면 여러번이나 그들의 병장기에 다칠 뻔했다. 사실 무채접은
이형검술의 정수를 깊이 알고 있었으나 오군영은 아직 이형검술의 7할 정도 밖에 익히지 못
했었다. 그녀는 또 주백통의 칠십이로공명권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무공에서는 어쨌든 무채
접에 비하면 좀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대제자들이 밀접하게 연합하는 바람에 무
채접은 도리어 오군영이 몇 달 전에 이 사대제자들을 크게 이겼던 것처럼 할 수가 없었다.
칠팔십 합을 싸우고 나자 무채접은 쌍검으로 이형검술을 쓰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허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대제자들이 두 사람이 공격할 때 두 사람이 옆에
서 방어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빈틈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방어하는 자는 단지 동료만을
보호할 수 있을 뿐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한 무채접은 그들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진웅이 부채로 무채접의 앞가슴에 있는 대혈을 찌르고 장기가 검으로 배후에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들이칠 때 연무와 임맹은 각기 검으로 진웅과 장기의 요해처를 방어해주고 있었다.
무채접은 아미쌍자로 부채와 검을 갈라놓고는 연무와 임맹이 공격을 발동하기 전에 선제 공
격을 했다. 진웅과 장기가 각기 한 번 공격을 발동한 뒤 본래 연무와 임맹이 공격하고 진웅
과 장기가 방어를 해야했지만 무채접이 아미쌍자로 선제 공격을 했던 것이다. 진웅과 장기
는 공격이 끝난 뒤 미처 방어 태세를 잡지 못했고 연무와 임맹도 그녀가 아미쌍자로 선제
공격을 하는 바람에 공격을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진웅과 장기 두 사람은 이전에 하던 습관대로 앞으로 전진하면서 연무와 임맹의 방어
를 도우려고 하다보니 사대제자가 모두 방어를 하는 상태가 되었다. 무채접은 아주 기뻐하
면서 아미쌍자로 공격하려던 것을 허수로 만들고 중도에서 돌아쳐 진웅과 장기를 찔렀다.
이것은 바로 괴이하고도 예측하기 어려운 이형검술 중의 절묘한 지동타서(指東打西)의 초식
이었다. 진웅과 장기 두 사람은 습관대로 전력을 다해 연무와 임맹의 방어를 도우려다가 뜻
밖에 아미쌍자가 날아오자 자기를 보호할 겨를이 없어 황급히 뒤로 벌렁 자빠지면서 땅바닥
에 뒹굴었다. 아미쌍자가 그 두 사람의 얼굴가죽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연무와 임맹 두 사람은 원래대로 하자면 다음번에는 마땅히 진웅과 장기의 방어를 도와야
했는데 그 두 사람이 땅바닥을 뒹굴면서 물러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미처 방어 자세를 취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게 되었다
무채접이 기회를 놓칠세라 연무와 임맹의 단전을 찌르는 척 하다가 갑자기 아미쌍자로 그들
의 목을 찔렀다. 연무와 임맹은 그녀가 이렇게 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검과 칼로 각기 아미
쌍자를 막아 '땅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미쌍자가 비켜갔다. 그런데 무채접이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아미쌍자가 또다시 그 두 사람의 단전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연무와 임맹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장기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윗부분을 막은 상태로 있었
다. 그런데 무채접의 아미쌍자가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자기들의 단전을 향
해 날아올 줄 어찌 알았으랴.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각기 뒤로 훌쩍 물러났으나 이미 아미자
에 두치 남짓한 깊이로 찔리게 되었는데 그들이 훌쩍 뛰는 바람에 그 상처가 또 세치 남짓
한 길이로 찢어져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하여 옷을 적시게 되었다.
임맹이 손으로 상처를 싸잡으면서 소리쳤다.
"옳지 않다, 옳지 않단 말이야."
"뭐가 옳지 않단 말이냐?"
연무가 점혈법으로 지혈을 하는 한편 대꾸하는 것이었다.
"임자가 속였단 말야."
"내가 뭘 속였어 ?"
"임자의 동작은 괴상하여 매번 초식을 쓸 때마다 아래쪽의 세 길로 공격하다가는 중도에 방
향을 바꾸어 위쪽의 세길로 공격해 오고, 위쪽의 세길로 공격해 오다가는 또 중도에 방향을
바꾸어 반드시 아랫쪽의 세길로 공격해 왔으며, 왼쪽을 찌르다가는 오른쪽으로 꺾어 오른쪽
을 찌르다가는 반드시 왼쪽으로 꺾어들였었지. 그런데 아까 임잔 우리들의 단전을 공격하다
가 본디 방향을 꺾어들어 우리들의 목을 겨누어야 했는데 그냥 단전을 내찔렀단말야. 그래
이게 속인 게 아니고 뭔가?"
무채접이 하도 어이가 없는 듯 깔깔 웃고나서 대꾸했다.
"당신은 실로 기민한 사람이군요. 본 방의 무공 초식까지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까요. 그런
데 내가 초식을 변화시켜선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임자의 이번 공격은 조금도 변화를 보인게 없고 실로 우둔한 초식이란 말야."
"하지만 당신은 둔한 초식에 걸려들어 다쳤으니 더욱 둔한게 아니고 뭔가요?"
그 말에 연무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 계집애야. 네년이 감히 이 나으리를 둔하다고 말하느냐."
그는 상처의 동통도 아랑곳 않고 검을 들어 찌르기 시작했다. 진웅과 장기도 아파서 땅바닥
을 구르다가 다시 덤벼들었다.
무채접은 그들이 사면포위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가볍고도 괴이한 보법으로 동쪽으로 몇 걸
음 뛰다가는 서쪽으로 몇 걸음 뛰곤 했다. 사대제자들은 처음에는 그래도 뒤에서 바싹 뒤쫓
았으나 마침내는 경공이 약한 연무와 임맹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장기
도 뒤떨어지고 오로지 진웅만이 여전히 무채접의 뒤를 바싹 쫓았다.
무채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두 손을 뒤쪽으로 향하면서 아미
쌍자를 곧게 내찔렀다. 진웅이 비틀거리다가 아미쌍자에 찔릴 뻔했으나 부채로 급히 앞을
막았다.
무채접이 나는 듯이 뒷걸음질을 하면서 위 아래로 아무런 초식도 없이 마구 찔러대기 시작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던 까닭에 진웅은 미처 몸을 돌릴 겨를이 없자
역시 무채접처럼 뒷걸음질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채접의 발걸음은 극히 가볍고
동작이 빨랐으나 진웅은 발걸음이 느려 아미쌍자에 번번이 가슴과 배를 찔렸는데 다행히 무
채접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그 상처들이 한치 깊이 밖에 되지 않았다.
때마침 장기가 신속히 따라오는 바람에 무채접은 또다시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진
웅이 옷자락을 헤치고 살펴보니 가슴팍과 배에 무려 삼십여 곳이나 찔려 피가 샘솟듯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진웅은 깜짝 놀라 몸을 바로 가누지 못했다. 만일 그 상처가 조금씩만 더
깊었더라면 목숨이 정녕 끊어졌을 것이었다.
양과와 확도가 객점의 큰 뜨락에서 싸우고 있을 때 무채접이 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진웅은 담벽 옆에 웅크리고 앉아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고 세 사람은 여전히 결사적으로 무
채접을 뒤쫓아왔다. 아까 기병 도위가 데리고 왔던 군졸들은 양과가 목검으로 가볍게 점혈
했었지만 그것이 저절로 풀린 다음 모두 앞다투어 꽁무니를 내빼버렸다.
객점의 주인과 하인 그리고 뭇손님들은 외팔이 사내 혼자서 기병과 보병 수무여 명을 무찔
렀을 뿐 아니라 가흥부에서 용맹무적으로 이름난 기병 도위 장흥국마저 제압하는 것을 보자
모두 겁이 나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무채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장기는 사형처럼 잘못될까봐 두려워 바싹 추격하지 못하
고 아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무채접
이 비웃으며 놀리는 것이었다.
"와서 날 붙잡으렴. 보아하니 네놈은 뻔뻔스런 개같구나."
놀림을 당한 장기가 대노하여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네년이 감히 날 개라고 욕한단 말이냐?"
"개라도 뻔뻔스런 개란 말이다."
무채접이 이렇게 대꾸하며 양과와 확도의 다른 한쪽으로 싸고 돌았다. 장기는 너무나도 화
가 나서 그녀를 쫓을 생각만 하다 보니 앞뒤가리지 않고 나는 듯이 앞질러가서 가로막으려
고만 했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서 확도와 양과가 악전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잊고 달려가다
가 그대로 확도와 충돌하게 되었다.
양과는 확도와 근 백 합이나 싸웠지만 아직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자기의 재간
과 진기를 다해 싸우고 또 매번 초식을 사용할 때마다 극히 강한 힘을 응집시켰으므로 그
주위의 한장이 넘는 곳에서도 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장기는 무채접만 쫓아가려고 직
선으로만 달리다 보니 확도에게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그가 몸을 피해 보려
했지만 벌써 때가 늦었던 것이다. 고수들이 싸울 때는 세찬 힘이 먼 곳까지 뻗치게 되므로
그것이 다른 물체와 부딪치게 되면 반드시 반동력이 생기게 되는 법이었다.
확도는 격렬한 싸움을 하는 중에 갑자기 몸 뒤에 이상한 느낌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힘껏
반동력을 내보냈다. 빵 하는 소리와 함께 풀썩 하더니만 연이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기가
한 장이나 멀리 날아가 땅에 쓰러져서는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확도는 제자의 비명을 듣
고서야 사람을 잘못 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제자가 왜 자기 뒤로 가
만히 왔는지 알지 못했다.
장기가 다시 후닥닥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물었다.
"망할년 같으니, 네년이 이 나으리를 해치면 내가 네년을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테다."
무채접도 도망가는 척하면서 놀리느라고 손벽까지 쳤다.
"뻔뻔스런 개, 눈이 멀었는지 조심하지 않다가 줄똥 갈겼네."
그러는 사이 연무와 임맹이 장기를 앞질러 달리게 되었다. 장기는 아프고 분한 중에도 묘한
꾀를 생각해냈다.
'이 계집애가 어찌나 빨리 뛰는지, 또 사부님과 양과를 싸돌아 달리니까 우린 실로 따라잡
기가 어렵다. 나무그루 밑에서 토끼가 부딪치기를 기다리듯이 나도 그렇게 해보자.'
장기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채접이 양과와 확도의 주위를 반쯤 돌다가 장기가 앞에서 막아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
뻔뻔스런 개가 좀 약아졌는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채접은 멈춰서지 않고 오히려 발걸
음을 더 빠르게 하고서는 곧장 장기를 향해 뛰어갔다.
장기는 무채접이 자기를 향해 돌진해 오자 오히려 당황했다.
'이 계집애가 속력을 내 더 빨리 뛰어오다니 미친거 아냐?'
장기가 검을 들어 무채접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무채접은 장기와 십보쯤 떨어진 곳에 와서
부터는 아미쌍자를 재빨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채접이 가까이에 오자
장기가 검으로 힘껏 내찔렀다. 하지만 검은 무채접이 휘두르는 아미쌍자에 맞자마자 장기의
손에서 빠져 공중으로 튕겨나갔다. 장기는 검을 떨어뜨린데다가 아미쌍자가 마구 날아들어
오는 것을 보자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무채접은 원래 그를 죽일 생각이었
으나 연무와 임맹이 바싹 추격하는 바람에 손을 쓰지 못하고 그의 몸만 밟고 지나갔다.
무채접의 발이 입과 코를 밟자 장기의 입에 진흙이 가득 묻었다. 동시에 향긋한 냄새도 났
는데 그것은 아마도 무채접의 꽃신에서 나는 냄새인 것 같았다. 장기는 무채접의 발을 잡아
채지 못한 것이 아주 후회스러웠다.
장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연무와 임맹이 달려왔다. 연무가 장기의 몸 위로 훌쩍 뛰
어넘어갔다. 임맹은 연무 뒤를 바싹 따라붙는 바람에 장기가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장기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 장기가 욕설을 퍼부었다.
갑자기 객점 대문이 쾅하고 열리면서 붉은 두루마기를 걸친 장년의 사내가 달려나와 확도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네놈은 변절자야! 확도 이놈."
그는 이렇게 독설을 퍼붓더니 느닷없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주먹 힘이 대단한 것
을 보니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확도가 깜짝 놀라 왼쪽 장으로 그 주먹을 막았는데 아주 심한 진동을 느꼈다. 얼떨결에 공
격을 당한 확도가 물었다.
"너 이놈……. 왜 본 왕을 공격하는 거냐?"
그러자 그 사내는 또 주먹을 휘두르며 물었다.
"네놈이 그래 확도가 아니냐?"
확도가 그 주먹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 바로 본 왕이 확도이시다."
그러자 그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바로 네놈을 죽이려는 것이다."
그 사나이가 연속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 힘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었다.
확도는 양과와 그 사내의 협공을 받자 견디기 어려워 몸을 빼 거의 십보나 물러서더니 큰소
리로 물었다.
"이봐, 임잔 출가한 사람이라 본 왕은 임자와 옥신각신할 생각이 없어. 그래 임자가 무엇 때
문에 본 왕에게 무례하게 구는지 그것부터 어디 말해봐."
그 사나이는 거무스레한 얼굴의 살이 푸르락거리더니 코를 실록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
다.
"나는 서역신교의 장로인 합포(哈布)며 금륜법왕의 벗이다. 그 분은 그림까지 그려 가지
고…… 너 같은 변절자, 변절자를 잡으려 하고 있어."
너무도 격분한 탓에 그러지 않아도 서투른 중원말을 더군다나 꺽꺽거리는 것이었다. 뒤이어
그 사나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서역 오랑캐말로 한바탕 지껄여대는 것이었다.
확도는 어렸을 때부터 금륜법왕 문하에서 수학했으므로 서역 오랑캐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원래 금륜법왕은 서역으로 돌아온 뒤 확도가 사문을 배반한
일을 서역신교 각 지파들에 퍼뜨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확도의 그림을 사방에 나누어 주어
모든 신교제자들에게 변절자를 잡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확도는 그 말을 듣
더니 안색이 하dig게 질렸다.
장기를 비롯한 사대제자들은 무채접을 추격하다 말고 다가와서 물었다.
"사부님, 저 사내가 뭐라고 지껄였습니까?"
"저 분은 금륜법왕의 벗인 합포장로이시다 "
장로는 신교에서 지위가 높은 직책으로 중원의 사원으로 말하면 방장(方丈)에 해당한다. 하
지만 그들은 당지(當地)의 정사(政事)에도 참여할 수 있어 권력이 매우 커서 중원 불문(拂
門)의 제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로가 그처럼 존귀한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리도 넘는 강남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확도가 안색이 달라진 것은 완안방방을 빼놓고
도 합포장로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강남으로 와서 변절자를 없애 버리려 하기 때문이
었다.
확도는 사방을 살펴보고 다른 신교의 제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약간 안심했다. 그는 장기의
귀에 대고 조용히 몇마디 지껄이고 나서 큰소리로 물었다.
"합포장로님께선 가흥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변절자 같으니! 그래 본 교의 기밀을 탄지할 셈이냐?"
그말을 듣고 확도는 속으로 시름이 약간 놓였다.
'만일 합포장로가 일부러 날 없애버리려고 왔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 게 아닌가? 그
러니 아마도 다른 요긴한 일이 있을거다. 아마도 전세교주의 신물인 그 인골염주와 관계되
는 일이 아닐까?'
사대제자들은 슬금슬금 문 쪽으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합포가 확도에게 다가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변절자야 ! 어서 무릎을 꿇고 포박을 받아라!"
이때 사대제자들은 이미 문을 빠져나가 나는 듯이 도망갔다. 무채접과 양과는 그들을 아랑
곳하지 않았다
확도가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 왕은 원나라 황제의 어전 대신이요. 당신이 함부로 찾아와선 안되는거요."
그는 서역신교를 배반했었기에 도적이 제 발 저리다고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퉁방울 같은 눈알을 부라리는 합포의 우람진 체구는 마치 금강(金剛)을 방불케 했고 기가
질린 확도는 그에 비하면 마치 보잘것없는 조그만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원나라 황제를 끄집어내어 날 위협하지 말아. 원나라 황제도 본 교의 변절자를 감히 비호
하지는 못할거야."
합포가 단호하게 이렇게 잘라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신교는 서역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
고 있어서 서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교의 신도였기에 원나라 황제는 별볼일 없는
확도 때문에 신교의 미움을 사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확도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합포에 대
한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합포는 열여섯살 때부터 서역신교의 수제자였고 스무 살쯤 되었
을 때는 당당이 무공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밀종권(密宗拳)에 아주 정통하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순금으로 만든 항마간(降廳杆)을 잘 썼는데 일찍이 밀종을 분리시키려 시도하는
적지 않은 고수들을 진압한 바 있었다.
합포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조여오며 소리쳤다.
"무릎을 꿇어라."
확도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아부했다.
"장로님, 노여워 마십시오. 장로님께서는 사부님쪽 말씀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양과가 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도는 금륜법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제가 그 장소에 있었지
요."
"긴 말은 할 필요가 없어. 교주님께서 전세(轉世)하시기 전에 이미 법지(法旨)를 내려 확도
가 본교의 변절자라고 지정하였은즉 쉽사리 용서할 수가 없단 말이야."
학도가 '교주'라는 말을 듣더니 갑자기 눈앞이 훤히 트이는 듯이 큰소리를 쳤다.
"합포장로님, 당신은 전세교주님의 신물인 인골염주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아시겠지요?"
합포가 멍해 있다가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어. 내가 이번에 온 것도 전세교주를 맞이 해서 서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인골염주는 이미 오독방의 제자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합포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학도가 손으로 양과를 가리키며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인골염주가 이 놈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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