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6

3학년2반 | 2022.02.26 07:42:46 댓글: 0 조회: 375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239

제21장 서역신교의 전세교주
합포가 양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인골염주가 정말 임자의 수중에 있나?"
양과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장로님, 확도는 이 양모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인골염주가 정말 저의 수중에 있다고 보십니
까?"
합포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똑똑히 알겠네. 저 놈이 임자와 나를 싸우게 하고선 그 틈에 도망가려는 속셈이겠지. 흥,
이 변절자야. 실로 교활하구나."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더니 확도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합포의 가슴에 있는 대혈을 찌름
과 동시에 왼주먹으로 양과를 들이쳤다. 두 사람은 미처 방비할 겨를이 없어서 각기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났다.
확도가 부채와 주먹으로 공격한 것은 결코 진짜로 싸우기 위한게 아니었고 합포와 양과를
물러나게 하려는데 있었으므로 그는 막 몸을 돌려 나는 듯이 뜨락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무
채접은 바싹 추격하다가 확도가 뜨락의 담장을 뛰어넘는 것을 보자 아미쌍자로 종아리를 찔
렀다. 그러자 확도는 부채로 아미쌍자를 막으면서 담장을 넘었다.
"변절자야, 도망갈 생각을 말아라."
합포가 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추격하기 시작했다. 양과는 합포가 변절자를 없애버리려고 하
는 기회를 틈타 확도를 죽여버리려고 합포와 함께 추격했다. 두 사람은 담장을 뛰어넘었지
만 확도가 이미 백보 밖으로 도망쳤으므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교활한 변절자 같으니."
합포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소리 지르면서 주먹으로 담벽 밖에 있는 나무줄기를 들이치자 사
발만한 굵은 줄기가 대번에 부러져 버렸다. 양과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티베트인은 정말 대단한 괴력을 가졌구나.'
객점으로 돌아온 합포는 양과와 무채접을 자기가 거처하는 방으로 청했다. 늙은 장로는 침
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앓아 있었는데 표정이 아주 쓸쓸해 보였다. 합포가 노장로를 향해
합장하고 예를 올린 다음 서역 사투리로 몇 마디했다. 노장로가 눈길을 들어 양과와 무채접
두 사람을 바라보고 나서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한바탕 지껄여댔다.
양과가 알아듣지 못하자 합포가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나의 사부님인 옥륜법왕(玉輪法王)일세. 두 분이 내가 변절자 확도와 싸우는걸 도
와주었다고 해서 특히 감사를 표하는 것이네."
양과가 웃으면서 옥륜법창을 향해 두 손을 마주잡고 예를 올렸다.
"대단치 않은 일이니 칭찬하실 바가 못됩니다."
합포가 양과의 말을 통역해서 들려주자 옥륜법왕은 그 말을 듣고서 아무런 대꾸없이 또다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합포가 다시 말했다.
"나의 사부님께서는 지극히 아끼시는 법기(法器) 한 가지를 잃어버린 까닭에 기분이 언짢아
하시니 두 분께서는 달리 생각지마오."
"옥륜법왕께서는 무슨 법기를 잃어버리셨습니까?"
"미륜염주(眉輪念珠)를 잃어버리셨네."
그 말에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훔친 그 인골염주일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 염주가 그렇게도 중한 물건입니까?"
"임자는 중원 사람이니까 실정을 잘 모를걸세. 내 사부님의 그 미륜염주는 알이 모두 백열
개인데 백십 명의 열반장로(灌槃長老)의 미륜골을 갈아 만든 거라네. 중원 사람들은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서역에서는 지존(至尊)한 법기로서 사악한 것을 쫓고 흉한 것을 피하
게 할 수 있는 보물이라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과는 속으로 아주 미안한 생
각이 들었다 자기는 단지 그 인골염주를 가지고 가짜로서 진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에
사용했지만 남이 그토록 아끼는 물건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양과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갑자기 물었다.
"저는 금륜법왕이란 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존사(尊師) 옥륜법왕과 깊은 인연
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금륜법왕은 저의 사부님과 어린 시절의 다정한 친구였는데 한 분은 금륜법왕으로 자침하고
다른 한 분은 옥륜법왕으로 불렸던 걸세. 하지만 금륜법왕은 서역의 한 파를 거느리고 무기
(武技)를 편애하는 데로 나갔고 저의 사부님께서는 밀종에 귀의하셨다네."
그러자 무채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듣자니 금륜법왕께서는 무공이 대단하다고들 그러던데 제 생각에는 당신의 사부님께서도
분명 아주 고강한 무공을 닦으셨을 것 같아요."
합포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주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사부님의 무공이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고
있네."
무채접은 그 말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은 저 분의 제자가 아닌가요? 제자가 왜 스승의 무공을 똑똑히 알지 못하단 말이에
요?"
"그건 나의 사부님께서 이미 이십 년이나 무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네."
"거참 이상하군요. 무예를 배워서 쓰지 않다니요."
합포는 부드러운 눈길로 옥륜법왕을 바라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무공을 배우는건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 즉 대도(大道)를 증득하는 하나의 방
편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네."
무채접이 깔깔거리다가 옥륜법왕의 정숙한 모습을 보고는 감히 큰 소리로 웃지 못하고는 목
소리를 낮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들 출가한 사람들은 참말로 괴상하군요. 옥륜법왕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셨다면 제자인
당신은 왜 무공을 애써 닦나요? 그건 사부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요?"
양과가 슬며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귓속말을 했다.
"접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합포는 아까의 그 부드러운 눈길과는 달리 초롱초롱한 눈길로 숙연히 고개를 쳐들며 말했
다.
당신들의 중원 무림에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같이 받아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말이 있
지 않나? 나와 사부님의 수행에도 좀 다른 점이 있네. 나는 지금 마도(魔道)가 성행하고 있
으므로 우선 사악한 마귀들을 쫓아내야만 무상의 신력 (神力)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네."
이렇게 한담을 하는 가운데 양과와 무채접은 옥륜법왕과 합포장로가 남방으로 전세교주를
영접하러 일부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옥륜법왕과 합포장로는 전세교주의 신물인 인골
염주가 강탈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신력(神力)이 무변(無邊)하다는 것을 깊이
믿고 있었기에 교주가 인세(人世)에 강림하는 팔월 열닷새가 되면 인골염주가 반드시 전세
교주의 신변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과가 물었다.
"교주께서는 어느 곳에 강림하십니까?"
그러자 무채접도 웃으면서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저도 전세교주님을 정말 만나보고 싶어요."
합포가 두 사람을 바라보니 양과는 아주 씩씩해 보이고 무채접은 활발하고 사랑스러워 보였
다. 합포는 이 두 사람이 정인군자라고 깊이 믿었기에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이 곳에서 서남쪽으로 칠백 리를 가면 '와불(默佛)'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네. 산의 남쪽에
서 팔월 열닷새의 새벽에 붉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를 때 교주님께서 강림하게 되시네, 교주
님께서 강림하실 때 길상스러운 구름이 온 하늘에 덮이게 되지만 그런데……."
양과와 무채접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단 말씀인가요?"
합포가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마도가 날로 성하는 바람에 교주님이 강림하실 때 뭇마귀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것이
네. 그래서 정사(正邪)간에 반드시 일장의 격전을 치르게 되겠지만 종국에는 사악한 것이 바
른 것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네. 십만제신(十萬諸神)들이 좌우에서 옹위하는 가운데 인골
염주와 교주님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고 마도는 반드시 멸망되고 말 것이네. 하지만 뭇마귀
들이 죽어갈 때 천지가 진동하게 되므로 우리들이 서로 지켜주어야 하네."
무채접은 그 말이 너무나도 신비스럽고 또 그다지 믿어지지 않아 다시 물었다.
"교주님께서 팔월 열닷새에 와불산 남쪽에 강림하게 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시나요?"
합포가 두 손을 합장하면서 말했다.
"교주님께서 3년 전에 귀천(歸天)하시면서 가르쳐 주셨네."
"당신들도 와불산으로 가시겠네요?"
합포는 그 말에는 미간을 찌푸리고 굳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양과는 무채접의 손을 잡아끌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무채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전 그 무슨 교주님이 능히 전세(轉世)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아요. 그런데 내세(來世)의
출생지와 시간까지 안다고 하는군요."
양과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으면서 물었다.
"임자는 와불산 남쪽이 어느 곳인지 알고 있나?"
무채접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용세가에서 지금 와불산 남쪽으로 가고 있을거야."
"맞아요. 모용협이 인골염주를 빼앗았는데 때가 되어 옥륜법왕과 합포장로가 와불산에 당도
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군요!"
무채접이 이렇게 대꾸하고나서 머릿속에 그 형상을 그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완안방방은 분명 옥륜법왕과 합포장로가 한편이어서 그들이 손을 잡고 모용세가와 싸우게
될 거예요. 양쪽 세력의 실력이 비슷하니 일장 악전을 피할 수 없을거고 양쪽이 모두 큰 손
실을 보게 될 거예요. 양공자님, 이것이 바로 당신의 묘책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오독
방은 어부지리를 얻게 되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요."
양과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점쳐 보았다.
'모용협은 가짜인 전세교주의 신물을 손에 넣고도 보물로 여기고 있을거다. 완안방방은 방
법을 강구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조만간 옥륜법왕과 합포장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싸움은…… 내가 가짜 인골염주로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에 벌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장
난으로 완안방방과 모용협을 놀리느라고 그렇게 한 것인데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한
데 상황이 긴박해서 분명 악전이 벌어질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오독방이 끼어든다면 죽고 다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양과는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가 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본 양과는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합포장로와 옥륜법왕
은 출가한 사람으로서 마음씨가 선량하다. 그들이 강남에 온 것은 전세교주의 일 때문인데
자기로 인해 모용세가의 사람들과 악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러다가 큰 손실이라도
당하게 되면 이것은 커다란 죄악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품 속에 든 인골엽주를 만지작거리다가 양과는 그 인골염주를 합포장로에게 넘겨줘서 합포
사제간이 평안무사하게 교주를 영접할 수 있게 하기로 작심했다. 완안방방, 오독방과 모용협
이 가짜 인골염주 때문에 서로 치고 받는 것에 대해 양과는 전혀 관계하고 싶지 않았다.
양과는 몸을 일으킨 뒤 방문을 열고 나가 옥륜법왕과 합포장로가 묵고 있는 객방 밖으로 왔
다. 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양과가 몇 번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양과가
소리쳐 불렀다.
"합포장로님, 옥륜법왕님."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려고 하다가 그제서야 문을 잠가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때 한 하인이 지나가다가 웃
으며 물었다.
"손님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이 방에 묵고 있는 두 사람의 티베트인들은 어디로 가셨소?"
"방금 계산을 마치고 떠나셨습니다."
양과는 급히 하인 곁을 떠나 아래층으로 내려와 객점 문을 나섰으나 옥륜법왕과 합포장로는
이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양과는 다시 객점으로 돌아와 하인을 찾아 물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방금 한 어린애가 뼈로 만든 비녀 한 개를 갖고 와서 두 티베트인을 찾았지요. 그들은 비
녀를 보더니 두말없이 떠났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살펴보았더니 그 비녀는 좀 거
칠게 만든 것이기는 하나 여인의 물건이었습니다. 허허, 그런데 그 두 티베트인은 무슨 약속
이나 있었던지 그 어린애를 붙잡고 캐묻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어린애가 말하기를 한 아름다
운 비구니가 그 애를 이리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 비구니는 어디 있다든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양과는 머리를 굴렸다.
'그 비구니는 아마 완안방방일 것이다.'
"그 두 티베트인은 어느 쪽으로 가던가? 동쪽인가 아니면 서쪽인가?"
하인은 그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양과는 조급해졌다. 만일 완안방방이 옥륜법왕과 합포를 만났다면 기필코 그들과 함께 모용
협에게 인골염주를 찾으러 갔을거고 그러면 싸움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양과는 옥륜
법왕과 합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큰 가흥에서 그들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
가? 완안방방은 취선루에서 싸움을 겪고 난 뒤라 분명 어디에 숨어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
다.
이때 무채접이 나오더니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양공자님, 왜 여기에 우두커니 서 있나요? 날도 어두워졌는데 제게 술이라도 한 잔 사주셔
야죠."
양과는 떨떠름해 하다가 오늘이 바로 칠월 초여드레라는 생각이 났다. 노완동이 양효비와
철창묘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자기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들어 바
라보니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웠다. 그래서 양과는 무채접과 함께 대충 저녁밥을 먹었다.
무채접은 또 양과에게 남호에 가서 야경을 구경하자고 졸랐다. 양과는 취선루에서 싸움을
한 통에 몹시 피로하니 푹 쉬어야겠다며 구실을 만들었다. 무채접은 양과를 끔찍이 사랑하
다 보니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서 객방으로 돌아갔다.
무채접을 보내고 나서 양과는 물건을 정리한 다음 문을 잘 잠그고는 불을 졌다. 그리고 방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발짝소리가 나더니 문을 두드렸다.
"양공자님, 양공자님. 잠이 들었나요?"
무채접이 고독함을 견디다 못해 또 찾아왔다.
양과는 일부러 기지개를 켜면서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잠이 들었댔어. 무슨 일인가?"
문밖에서 무채접이 약간 침묵하다가 가벼운 탄식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럼 전 가겠어요."
양과가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밖은 먹을 퍼부은듯이 캄캄하고 사람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창문으로 조용히 뛰어내려 경공을 써서 성 밖을 향해 달렸다. 얼마 지나
지 않아 성을 벗어난 그는 뒤에 미행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고 나서 곧장 철창묘로
향했다.
철창묘는 싸늘한 달빛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는 이 곳에서 죽어 곽정의 손에 의해 철창묘 뒤에 매장되었다고 어머니가 하시던 말
씀이 희미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열두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양과는 어머니의
화장한 재를 가져다가 아버지의 묘소 옆에 묻었다.
철창묘의 뒤쪽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묘소를 살펴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무릎까지 차
올라 있었다. 그는 풀을 한 포기 한 포기 다 뽑고나서 묘소 앞에 꿇어앉아 어머니가 병이
중한 기간에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을 그 참상이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통곡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자기도 가파른 인생길에서 사랑하는 아내마저 지켜내지 못한 처지가 더군다나 괴
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울고싶어도 눈물조차 말라버려 꺼억꺼억 거리며 마른
울음을 울었다.
양과는 천천히 품 속을 뒤져 길에서 사온 지전을 꺼내 불에 태우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발
짝소리가 들리기에 그는 황망히 지전을 수습하고선 숲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완동이 털레털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손에 삶은 닭 한마리를
들고 걸으면서 뜯어먹고 있었다. 양과 부모의 무덤 앞까지 오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
이었다.
"양효비 그 나쁜놈이 정말 담도 크구나. 사부와 한 약속도 있는데 아직도 오지 않다니."
묘소를 살펴보더니 노완동은 또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양강의 묘가 아닌가? 허, 양과 아우가 효성스럽지 못하군. 와서 절도 하고 가토도 좀
해드려야지, 에참, 옆에 또 무덤이 있네? 아참, 이건 양과의……."
자세히 생각해보더니 노완동은 그게 아니라 했다. 몇 달 전에 양과를 만난 적도 있는데 이
렇게 빨리 죽을 수는 없고 죽었다 하더라도 이 곳에 묻혔으면 무덤의 흙도 새로 파올린 것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난 노완동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십중팔구 양강 부인의 무덤일테지. 말하자면 양과 아우의 어머니 말이야."
주백통이 무덤 앞에 주저앉다가 자리가 푹신한 감이 들자 엉덩이 밑의 풀을 밀어내면서 또
다시 두 무덤을 번갈아보았다.
"어참, 누가 와서 벌초를 했네 그려?"
별안간 귓볼을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이 불자 주백통은 오한을 느껴 자라목처럼 모가지를 쑥
집어넣고는 몸서리를 쳤다.
'아마 양강 부부가 아들이 와서 가토를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무덤 밖을 나와 벌초를 한게
다.'
이렇게 생각한 주백통은 갑자기 주위에 귀신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질겁한
그는 마구 뒹굴고 엉금엉금 기면서 철창묘 쪽으로 도망갔다.
숲 속에서 걸어나온 양과는 주백통이 귀신이 무서워 도망갔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주백통은 절세의 무공을 갖춘 사람인데 왜 귀신을 무서워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노완동이 풀더미에 내버린 삶은 닭을 집어드니 아직도 따뜻했고 한쪽 다리 밖에 뜯어
먹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는 무채접과 저녁 식사를 할 때 기분이 언짢아 밥을 몇 술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반나절이나 통곡을 했더니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양과는
그 삶은 닭을 마구 뜯어먹고는 닭뼈를 풀더미 위에 버렸다.
갑자기 또 발짝 소리가 들리기에 이번에는 틀림없이 양효비일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숲 속
에 몸을 숨겼다. 그는 양효비를 죽여 수난당한 무수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작심
했다.
하지만 걸어온 사람은 양효비가 아니라 여전히 주백통이었다. 그는 자기가 귀신을 두려워했
던 일에 무척 화가 났던 것이다.
'나 이 노완동은 저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같은 인물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귀신
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만일 황약사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웃다가 이빨이 다 빠질게다.'
옛날 황약사가 그를 도화도에 십여 년이나 가두어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는 곳마다
황약사와 맞섰는데 만약 황약사에게 비웃음을 당한다면 그것은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
다.
주백통은 재빨리 걸어오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요망한 잡귀들아, 모두 나오거라. 이 노완동은 천하에서 무공이 으뜸이라 너희들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그 무슨 대가리가 떡이건 귀신이건 나을 놈은 다 나오거라. 병들어 죽은 귀신
이건 뭐건 나올 놈은 다 나오거라. 이 노완동이 네놈들의 귀싸대기를 갈겨줄테다. 그밖에 목
매달아 죽은 귀신."
이렇게 말하던 그는 목매 죽은 귀신은 한 자도 넘게 시뻘건 혀를 빼물고 있다는 말이 생각
나자 또 무서워서 감히 더 떠들어대지 못했다. 그는 목매달아 죽은 귀신이 정말 뛰쳐나올까
봐 두려웠다.
무덤 앞에 이르러 주백통은 중얼거렸다.
"양강, 이 노완동은 임잘 알고 있고 또 임자의 아들 양과와는 형제처럼 지내고 있어. 그러니
임잔 아들의 큰 형님을 해쳐서는 안되는 거야. 아니, 아니. 양강은 구처기 그 낯가죽 두꺼운
놈의 제자였지. 나 노완동은 구처기의 사숙이었으니 나보다 항렬이 두급이나 아래가 아닌
가? 그런데 만일 내가 양과의 큰형이라고 한다면 양과는 양강의 아들이니 이 노완동은 양강
의 아들이 되는 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수록 노완동은 자기가 밑지는 것 같아 큰형 노릇을 안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
했다.
머리를 숙이다가 양과가 먹다 남긴 닭뼈를 바라본 노완동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건 내가 내버린 닭이 아닌가? 다리 한짝밖에 먹지 않았는데 어째서 뼈만 남았을까?"
그는 또다시 귀신 생각이 났다. 양강의 귀신이 나타나 닭을 뜯어먹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너
무나도 겁이 나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주백통은 나는 듯이 철창묘 앞으로 달려오더니 묘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신묘(神奫)에
숨으면 악귀가 감히 잡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묘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나왔는데 주백통과 맞부딪칠 뻔했다. 깜짝 놀란 주
백통은 묘 안에서도 귀신이 나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돌려 또 도망가기 시작했
다 그런데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왜 도망가십니까7"
양효비의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백통은 삼십여보 쯤 달려나가다가 멈추어
서기는 했으나 감히 돌아다보지는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양효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부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 양효비니 물론 사람이지요."
그제야 주백통은 몸을 돌려 달빛에 비친 그가 양효비인 것을 알아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요자식이, 그래 사부님까지도 조롱할 셈이냐?"
양효비는 영문도 모르고 욕을 먹자 이상한 듯 물었다.
"제자가 어찌 감히 스승을 놀리려 들겠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주백통은 그제서야 약간 진정된 듯한 기색으로 물었다.
"넌 오늘 밤에 뭣하러 날 불렀나?"
양효비는 본래 오늘 저녁부터 주백통에게 무공을 배우려고 결심했었는데 잠시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제자의 아내를 기억하십니까?"
"기억 안나. 기억나지 않는다니까. 흥, 장가드는 사내들이란 모두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없
어."
주백통은 젊은 시절에 실연을 당해 본 까닭에 누구나 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줄
로 알고 있었다. 양효비가 말했다.
"이 제자가 기억나게 해드리죠. 사부님께서도 생각이 나실건데요. 5년 전에 거와장에서 이
제자는 거와장 장주의 금지옥엽인 오군영에게 장가를 들다보니 사부님에게 무공을 마저 배
우지 못하고 말았지요.."
"오, 그런 일이 있었지. 이 노완동이 널 장가들게 한 게 오히려 널 해쳤어."
하지만 주백통은 또 오군영을 데리고 종남산으로 갈 때의 일이 생각났다. 자기가 벌에 쏘였
을 때 길에서 오군영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아 아주 감동되었던 것이다.
"오군영이 그 처년 마음씨 하나는 괜찮았어."
"그런 여인을 제자가 아내로 맞이하면 어떻겠습니까?"
"괜찮지."
그런데 양효비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오군영이 말입니다. 천 사람 만 사람 중에서 고른 그 여자가 유감스럽게도…… 유감스럽게
도……."
양효비가 말을 꺼내놓고 말끝을 얼버무리자 주백통은 답답하다 못해 안달이나 다그쳐 물었
다.
뭐가 유감스럽단 말인가?"
"오군영이 모용협에게 잡혀갔습니다."
"모용협이 그 여잘 잡아다간 뭣 한대? 하하, 이 노완동이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5년 전에 모
용협이 그 여자에게 장가들려고 한 것을 이 노완동이 묘한 계책을 써서 그 여자가 임자에게
시집오도록 했었지. 모용협은 그 여자가 곱고 얌전한 데다가 벌한테 쏘인 상처도 치료할 줄
아는 걸 보고 억지로 잡아다가 장가들려고 하는 모양이야."
양효비는 '벌한테 쏘인 상처도 치료할 줄 안다'는 말이 무슨 일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
고 주백통이 그저 허튼 소리를 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자 양효비는
5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모용협이란 놈이 오군영에게 나쁜 심보를 품고 있은지 오래다. 이번에 오군영을 잡아갔으
니 꼭 강제로 사욕을 채울 것이다.'
자기 여자가 남의 품에 들어가게 될 운명에 처한 것을 생각하니 양효비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발길로 문을 걷어차니 문짝이 부서졌다.
주백통이 손뼉을 치면서 지껄였다
"계집을 뺏기더니 화가 났구나, 화가 났어!"
주백통은 마치 남이 화를 입은 게 자기에게는 좋은 일이나 되는 것처럼 좋아서 야단이었다.
양효비는 발길질을 하고 나니 화가 약간 풀린 듯 해 또 가만히 지나간 일들이 돌이켜보았다
'난 수없이 많은 여자와 놀아 보았지. 그 중에는 용모가 오군영보다도 뛰어난 여자가 여럿
이나 되고 말이야. 하지만 바람을 피우고 난 뒤 그 여자들 중에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여자
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군영이 모용협에게 잡혀가니 어째서 이처럼 견디기 어려
운 것일까?'
양효비는 자기가 바람을 피우는 일에 무슨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껴본 일이 없었고 그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진심을 쏟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양효비, 넌 전도가 양양하고 큰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 판이니 여색에 사로잡히지 말고 대
장부의 본색을 떨쳐야 하느니라.'
양효비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침묵을 깨는 듯 주백통이 입을 열었다.
"이봐, 왜 말이 없는 거야?"
양효비는 더는 오군영을 생각지 않고 그녀를 구해달라고 주백통에게 부탁하지 않기로 작정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 제자는 오늘부터 사부님을 모시고 무공을 닦으렵니다."
그 말에 주백통은 이거 큰일났구나 생각하고는 딴전을 피웠다.
"임자, 임잔 정말 내게 무공을 배우려나?"
"이 제자는 사부님의 무공을 모두 배우기 전에는 절대 그만두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 노완동이 매일 임자와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구 말구요. 제자도 매일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아야지요."
주백통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간사스러운 양효비가 또 미랑의 귀신을 들먹
이며 못살게 굴까봐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양효비는 아주 기뻐하면서 머리숙여 몇 번이나 절을 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제게 무공을 전수해 주십시오."
"임자는 무얼 배우려나?"
"사부님께서 아시는 무공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백통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애초에 사형 왕중양을 따라, 말하자면 전진교의 조사님에게서 무예를 배웠는데 그 분
께서 아는건 나도 모두 알게 되었지. 그러니까 전진교의 무공을 내가 모두 배웠다는 거야.
다만 난 사형처럼 그렇게 기교가 절정에 이르지 못했어. 만일 내가 숫총각의 몸을 망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만 말하지, 그만 말해! 난 또 오호권(五虎拳),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육
합권(六合拳), 칠성권(七星拳), 구궁장(九宮掌), 황약사의 낙영신검장(落英神劍掌)도 몇 가지
초식 쯤은 알고 있어. 임자 보게나."
주백통은 도화도주의 낙영신검장의 초식을 몇 가지 배워 황약사가 보인 초식과는 별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실 그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백통이 또 떠들어댔다.
"이밖에도 지쟁권(地趙拳), 지쟁곤(鎔越棍), 복마장(伏蜜杖), 벽공장(劈空掌), 주사장(朱砂掌),
삼자권(三子拳)이 있고 홍칠공의 강용십팔장(降龍十八掌)도 이 노완동은 쓸 줄 알아. 그저
본을 뜨는 정도이기는 하지만……. 하하, 후에 나 스스로 공명권을 창시했고 또 학형권(鶴形
拳), 응조권 (鷹爪拳), 소림장권(少林長拳)도 배웠어."
"사부님, 사부님의 가장 우수한 무공이 어느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주백통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물론 이 노완동이 창안해낸 칠십이로공명권이지."
"됐습니다. 저는 먼저 칠십이로공명권을 배우렵니다."
노완동이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묘책을 마련했는지 헤헤 웃으며 달래듯이 조용히 말했
다.
"칠십이로공명권은 이미 임자의 색시에게 전수해 주었으니 임잔 색시에게 배우도록 하게나.
임자의 색시가 나보다는 참을성이 있으니까 더 잘 가르쳐 줄 걸세."
"안돼요. 전 사부님에게 직접 배우렵니다."
이렇게 말하는 양효비는 본래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려 했으나 얼굴 표정이 굳어져 보기 딱
할 정도였다.
"제자, 웬일인가? 표정이 왜 그처럼 험상궂은 거야? 그런 표정을 짓는데는 임자가 나보다
못할 거야."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우스황스러을 정도로 기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때, 나의 얼굴 표정이 임자보다 더 험상궂게 보이지?"
주백통이 이렇게 횡설수설 지껄여댔으나 양효비는 굳은 표정으로 시선은 다른 곳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런데 주백통은 양효비의 두 눈이 점점 휘둥그래지고 점점 대경실색 하는 것을
보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마도 내 뒤에 귀신이 왔나보다.'
이렇게 생각한 노완동이 천천히 머리를 돌렸는데 과연 핼쑥한 얼굴 표정을 한 사람을 보게
되자 겁이 나서 도망칠 뻔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양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양과의 음침한 얼굴은 더더욱 무서워 보였다. 양과가 한 걸음 한 걸음
씩 다가오자 양효비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백통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양과의 어깨를 철썩 쳤다.
"양과 아우, 임자가 이 노완동의 간담을 떨어지게 할 뻔했네 그려."
양과는 입을 실룩이면서 웃으려 했으나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주백통이 입을 열었
다.
"임자는 어떻게 여기 왔나? 참 일이 묘하게 되었군. 오, 아마도 부모님 묘소를 찾아온 게로
군."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고서 갑자기 물었다.
"백통 형님, 저 사람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입니까?"
주백통은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 노완동은 절대 제자를 두지 말았어야 해. 내 몸도 피로해 죽을 지경인데."
양과가 양효비를 쏘아보며 말했다.
"백통 형님, 형님은 정말 훌륭한 제자를 두셨구려."
주백통은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기는 했으나 양과의 기색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아우, 왜 그렇게 기분이 상해 있는 건가?"
양효비는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듯 간사한 웃음을 띠면서 입을 열었다.
"양…… 양공자님, 안…… 안녕하시오?"
"물론 잘 있구말구. 다행히 소인배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으니까."
양효비가 아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양공자님은 지혜와 계략이 출중하고 무공이 고강한데 어느 놈이 감히 해칠 수 있겠습니
까?"
"누군가가 이 양모로 변장해서 갖은 악행을 저질러 강호인들은 이 양모를 골수에 사무치게
미워하고 있어. 그래 임자는 소문도 듣지 못했나?"
양효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시치미를 뚝 뗐다.
"정말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이렇게 대꾸하는데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노완동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원래 그 일 때문에 화가 났군 그래. 하하, 노완동의 제자가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더
군다나 변장술은 아주 고명해서 숱한 사람들을 속였거든……."
주백통은 아주 재미 있다는 듯이 손으로 배를 철썩철썩 때리기까지 했다. 양과는 미간을 찌
푸린 채 속으로 생각했다.
'백통 형님이 좋은 것과 나쁜 것도 분간하지 못하는걸 보면 이 양효비란 놈에게 완전히 속
고 있는 게 틀림없어.'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백통 형님, 형님은 그래 양효비가 내 모습으로 변장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른 걸 알고 계십
니까?"
양과는 사실을 들어가며 양효비가 저지른 죄행을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말이 정말인가?"
"믿어지지 않으시거든 보배 제자에게 물어보시구려."
주백통이 양효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자, 양과 아우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인가?"
주백통은 이렇게 물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제자가 양과로 변장하고 다닌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 저 놈이 천리에 어긋나
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면 용서할 수가 없는 거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 노완동의 명성마
저 더러워지게 된다.'
양효비가 눈알을 한번 굴리더니 간사스럽게 대꾸했다.
"양과, 내가 당신의 모양으로 변장하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그런 죄악은 내가 저지른 게 아
니오."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주백통에게 돌아서서 변명했다.
"사부님, 사부님의 제자가 어찌 그런 비열한 소인배이겠습니까?"
주백통이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끔벅거리더니 양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노완동의 제자이니 기껏해야 소관동의 짓거리나 했겠지 나쁜 짓까지 했을라구."
그러자 양과가 면박을 주었다.
"그렇다면 강호에서 신조협의 악행에 대한 소문이 떠도는 건 또 누가 한 짓이란 말입니까?"
양효비는 기어이 안면몰수 하고는 흉계를 꾸며냈다.
"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에참, 양공자님, 당신은 비록 저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는 하지만 남을 모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내 대장부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과감하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당…… 당신은 자기가 한 짓을 내게 덮어씌울 작정이십니
까?"
양과가 대노하여 목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아직도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을 작정이냐?"
양효비가 급히 주백통의 뒤로 몸을 숨기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저 사람을 좀 보세요. 창피하니까 화를 내는군요."
양과가 당장이라도 요절을 낼 듯이 또 소리를 질렀다.
"양효비, 이 음험한 소인배야. 어서 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겠느냐!"
양효비가 이제는 태연을 가장하고 탄식하듯 꾸며대며 헐뜯기 시작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분이시니 똑똑히 알 수 있을겁니다. 저 양과는
아내를 잃은지 오래라 정신착란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예쁜 여인을 보면 자기
의 아내인 줄 알고 맘대로 폭행을…… 에참, 저 사람이 색에 미쳐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니 참 불쌍하지요."
그 말에 주백통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노완동은 저 사람과 용녀 사이의 감정이 아주 좋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렇게 오랫
동안 부부가 생이별을 하고 있으니 색에 미치게 되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지."
하지만 노완동이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는 지금까지 장가도 못 들었으나 여색에 미쳐본 일도
없거니와 또 여색을 뼈를 갉아먹는 악귀로 간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매양 자기 생각
으로 남도 그러려니 생각했기 때문에 또 방금 자기가 한 말을 부정했다.
양과는 주백통과 더이상 언쟁을 하기 싫었기에 큰소리를 질렀다.
"백통 형님, 어서 비켜주시오, 이건 양모와 저 나쁜놈 간의 은원이니 우리끼리 해결하겠수
다."
"그 말도 일리 있군."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이 옆으로 물러서자 양효비도 같이 물러
서면서 여전히 주백통의 등 뒤에 숨는 것이었다.
"임잔 왜 자꾸 내 뒤에 숨나?"
주백통이 뒤를 돌아다보며 이렇게 말하자 양효비가 탄식하면서 또 꿍꿍이를 꾸며대는 것이
었다.
"양과는 무공이 대단한 사람인데 이 제자가 그와 싸우는건 양을 호랑이의 아가리에 넣는 것
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게 어디 공정한 일인가요?"
"양과는 기껏해야 임자보다 몇 살 더 먹었을 따름이야. 저 사람을 이기지 못하면 임자의 무
공이 못한 것을 탓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저 양과 아우는 성품이 관대하기에 비
록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목검으로 요해처가 아닌 곳을 몇 곳 구멍만 내주고 말거
야. 절대 임자의 목숨은 해치지 않을거야."
그 말을 들은 양효비는 거의 혼이 나갈 뻔했다.
'양과가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온 것이나 저렇게 노기등등한 기색을 보면 꼭 나를
죽이고 말거다.'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가 또다시 주백통에게 말을 걸었다.
"사부님은 왜 그처럼 얼떨떨해 하십니까?"
"이 노완동은 속이 빤하고 눈도 밝아. 왜 나보고 얼떨떨해 한다고 하는 건가?"
"이 제자가 양과의 적수가 못되는 걸 알지 않습니까?"
주백통은 양과가 5년 전에 채설주에 중독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양과의 걸음걸이가 온
건한 것을 보고 이미 해독이 된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양효비가 오독방의 집법사자에게
무공을 배워 일류 무공 고수가 된 줄은 모르고 있었기에 양효비가 꼭 패하리라고 믿고 있었
다.
"임자야 물론 양과 아우의 적수가 아니지."
"이 제자가 패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면 세상 사람들은 사
부님의 무공이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공이 변변치 않은 제자를 길러
냈다고들 말하게 되겠지요."
노완동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 얼떨떨해졌다.
'이 노완동은 무공으로 이 세상을 누를만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이므로 남에게 무공이 보
잘것없다는 후문을 듣게 되는걸 제일 싫어한다.'
노완동은 한평생 황약사에 대해 가장 불복해오는 터였다. 하지만 황약사의 제자들은 누구나
무공 고수였는데 흑풍쌍살(黑風雙殺) 진현풍(陳玄風)과 매초풍(梅超風)은 일찍이 풍운을 주
름잡았던 사람들이고 그의 딸 황용도 일찍이 개방의 방주로 있었고 사위 곽정은 더군다나
당세의 대협인 것이다. 노완동의 제자가 양과에게 패한다면 황약사가 비웃게 될 터이니 이
를 어쩐단 말인가? 그래서 주백통은 조급하게 양효비에게 물었다.
"그럼 어떡했으면 좋겠냐?"
"사부님께서 저 사람에게 통사정을 좀 해보십시오. 저 사람이 사부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존
중하는 만큼 그렇게만 하시면 이 제자와 더 옥신각신하지 않을 겁니다."
주백통이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양과에게 말했다.
"양과 아우, 이 놈은 이 노완동의 제자이니 체면 좀 봐주게."
양과가 눈썹을 곤두세우고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백통 형님, 저 불초한 제자놈을 빨리 산문에서 쫓아내라고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양효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양과, 당신은 담도 크구려. 사부님의 체면조차 보아드리려 하지 않으니 당신은 사부님을 안
중에도 두지 않는군요."
그러자 주백통이 입을 열었다.
"그래, 임잔 이 노완동 같은건 안중에도 없구만 그래."
"백통 형님, 저 놈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 양모는 저 놈을 죽여버리지 않고는 그
만두지 않을 겁니다."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주백통을 에돌면서 검으로 양효비를 찌르려 했다. 양효비는 뒤에
서 주백통의 두팔을 붙잡고 빙빙 돌았다. 그 바람에 양과는 하마터면 검으로 주백통을 찌를
뻔하고는 급히 검을 비켰다. 그는 주백통을 에돌아 또다시 양효비를 쫓았다. 양효비는 계속
주백통의 두 팔을 틀어잡고 뱅뱅 돌면서 양과를 피했다.
"쥐새끼같은 놈이 교활하구나."
양과는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 주백통과 양효비의 머리위에 뛰어올라 목검으로
양효비를 찌르려 했다. 양효비는 급히 신형을 낮추면서 주백통의 몸을 끌어당겨 주백통의
몸으로 검을 막으려 했다. 주백통은 검이 날아드는 기세가 아주 무서운 것을 보고 두 팔로
양효비를 뿌리치고 몇 보 훌쩍 뛰어 물러났다.
"양과, 임잔 이 노완동까지 치려나?"
양과는 주백통이 몸을 비킨 것을 보자 앞에 드러난 양효비를 검으로 찍으려 했다 그는 심중
에 원한이 꼭도에 달했던 탓에 검날에서 삽시에 파도소리 같은 옹골진 소리까지 났다. 양효
비는 도적이 제발이 저린다는 격으로 감히 검을 뽑아들어 맞서지 못하고 계속 주백통의 뒤
에 뛰어와 숨으려 했다. 양과가 공중에서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쥐새끼같은 놈아, 어디로 도망가느냐!"
양과가 검으로 찌르자 그 중간에서 양효비의 몸을 막아서게 되었던 주백통이 깜짝 놀라 소
리를 질렀다.
"나 이 노완동까지 함께 죽일 작정인가!"
그리고는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양과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처음에는 목검으로 찌를 때 힘을 다 쓰지 않고 어서 주
백통이 피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주백통이 몸을 피했으니 양과는 목검으로
양효비를 향해 마구 내찌르기 시작했다.
양효비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또다시 주백통의 뒤에 숨으려 했으나 미처 그럴 겨를이 없
었다. 그래서 양효비는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쌍검을 뽑아 양과의 목검을 막았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힘이 검을 통해 맞부딪치자 양효비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양효비는 5년 전
에 양과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완안방방을 패배시키던 모습을 회상하고는 갈수록 겁이
났다. 그는 양과의 노기등등한 기색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주백통의 등뒤로 도망가
서 벌벌 떨었다.
양과도 세찬 진동을 받아 기혈이 마구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 자식이 오독방의 장세사자 노릇을 하더니 과연 고강한 무공을 닦았구나.'
기실 양과는 공력의 6성 밖에 발휘할 수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양효비보다 무공이 약간 나을
따름이었으며 육칠백 합을 싸우지 않고는 승부를 가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양효비
는 일찍부터 양과의 무공이 이 세상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것만 알고 자기가 양과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도적이 제 발이 저린다고 기까지 질리다보니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백통은 제자인 양효비가 겁이 나서 벌벌 떠는 꼬락서니를 보자 아까 하마터면 양과의 검
에 찔릴 뻔한 일이 생각나서 화를 버럭 냈다.
"양과, 임잔 정말 이 노완동이 안중에도 없나?"
양과는 이런 급한 판에 주백통과 시비를 가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입
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검으로 찌르면 주백통이 피하게 되고 양효비가
숨을 곳이 없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백통이 왼쪽 장을 내치는 것이 아닌
가? 그 힘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양과의 검이 빗나갔다. 뒤이어 주백통이 좌우로 연속 공격
하는 칠십이로공명권 중의 역타산문(力打山門)의 초식으로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양과는
불시에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끼고 급히 물러섰다.
주백통은 양과가 자기와 맞서 악전을 치르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자기의 주먹을 피해 물
러서자 속으로 생각했다.
'양과 아우의 무공이 이미 절정에 올랐는데 왜 나의 이 초식을 당해내지도 못하는 걸까? 아
까 양과가 양효비에게 검을 휘두르는걸 보니 힘이 그전처럼 맹렬하지 못하던데 아마도 그
채설주의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양과가 부드러운 어소로 말했다.
"백통 형님, 당신…… 당신은 왜 저 놈을 비호하는 겁니까?"
주백통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대답했다.
"저 놈은 내 제자야. 임자가 업신여겨서는 안돼!"
"하지만 저 놈이 갖은 악한 짓을 다 했고 이 양모의 이름을 도처에서 더럽혔단 말입니다."
그러자 주백통이 펄펄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아무 것도 관계하지 않아. 노완동의 제자를 누구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단 말야!"
양과는 화가 나서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듯했다. 만일 젊은 시절의 성미 같았으면 주백통
과도 한바탕 싸우려고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십여 년 동안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좌절도 많이 겪어보았고 또 그만큼 성숙해졌던 것이다.
'백통 형님이 비호하는 한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봤자 저 놈의 털 한오라기도 다칠 수 없을
거다. 백통 형님은 심지가 단순한 사람이니 꾀로 해보아야 할 것이다.'
양과는 갑자기 철창묘 안을 들여다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황도주님, 어서 와서 날 도와주십시오."
주백통이 과연 그 꾀에 넘어가서 물었다.
"황노사가 묘 안에 있나?"
양과가 득의 양양한 기색을 지으며 말했다.
"난 형님이 나쁜 놈을 감싸줄걸 이미 알아차리고 일부러 황도주님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
다."
황약사의 이름만 꺼내면 주백통은 겨루어보지도 않고 아예 불복하는 성미였는데 허풍을 떨
어보았다.
"황노사는 이 노완동의 적수가 못돼 !"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비꼬았다.
"그래도 황도주님은 한 손만 가지고도 형님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씀합디다."
그러자 주백통이 하늘이 낮다고 펄펄 뛰면서 소리쳤다
"허튼 소리야, 허튼 소리! 황노사는 워낙 허풍떨기 좋아하는 자야. 임자는 어서 그 놈을 이
리 불러내게!"
그러자 양과가 비위를 긁어댔다.
"백통 형님, 황도주님은 한 세대의 종사가 되는 신분이신데 형님과 겨루려 하겠습니까?"
그러자 주백통은 더욱 화를 내며 펄펄 뛰면서 철창묘 안에 대고 외쳤다.
"황노사, 어서 나오너라! 노완동이 오늘 밤에 네놈과 자웅을 가르고야 말테다!"
양과가 한술을 더 뜨면서 약을 올렸다.
"황도주님은 형님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데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러자 주백통은 화가 치밀었다.
"그 놈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들어가서 붙잡으면 되지 않나?"
그리고는 묘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 했다.
양효비는 주백통과 황약사 사이에 그 무슨 은원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양과가 하는 말
을 듣고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주백통이 묘 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할 때에야 그는 양과의
궤계를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부님, 같이 들어갑시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양효비도 주백통과 함께 묘 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양과가
양효비의 앞을 가로 막아서며 쓴웃음을 지었다.
"양효비, 난 네놈을 구해줄 수 있었지만 죽여버릴 수도 있다."
양과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교룡파랑(蛟龍酸浪)의 초식으로 내리찍었다. 양효비가 이를
악물더니 해저노월(海底據月)의 초식으로 양과의 검을 막았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양효
비는 여러 발짝이나 밀려났다.
양과가 곧이어 단전에 힘을 주면서 목검으로 곧게 내찔렀다. 그 기세가 매서웠기에 양효비
는 오른쪽 검으로 막으면서 왼쪽 검으로 내찔렀다. 그런데 양과의 목검이 별안간 위로 쳐
들리면서 양효비의 오른쪽 검을 피하더니 다시 앞가슴을 겨누고 날아드는 것이었다. 그 기
세는 아까보다도 더욱 맹렬하여 양효비는 급히 왼쪽 검으로 막았다. 그런데 양과의 목검이
반대방향으로 아래쪽으로 날아들었다. 양과의 이 초식은 노해축랑(怒海逐浪)이라는 초식으로
바다의 파도를 모방해서 마치 파도처럼 연속해서 끝없이 공격하는 것이었다. 연신 열번이나
공격했는데 매번 그 기세가 더욱 매서워지는 것이었다.
양효비는 양과를 원래 당해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데다가 양과의 공세가 점점
더 강해지자 당황해서 자기의 교묘한 이형검술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되는대로 막기만 했
다.
이렇게 양효비는 피동적으로 막기만 하고 양과는 계속 공격을 가했다. 양과가 만들어낸 검
술의 장점은 바로 공세에 있었기에 그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양효비는 일방
적으로 몰리면서 식은 땀을 흘렸다. 양과는 검을 휘두르는 한편 분노하며 부르짖었다.
"네놈이 은혜를 원수로 갚으니 사내자식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대할 면목이 있느냐!"
양효비는 도적이 제 발이 저린다고 점점 더 겁이 나는 데다 창피한 생각까지 나서 두 팔에
맥이 풀려 그만 양과의 목검에 맞아 쌍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양과가 화살같이 달려와 목
검 끝을 양효비의 목에 들이대고 소리쳤다.
"어서 무릎을 꿇어라."
양효비는 그만 넋이 나가 자기도 모르게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때 노완동 주백통은 철창묘 안에 뛰어들어가 한바퀴 샅샅이 훑었으나 황약사를 찾지 못하
고 도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양과, 황노사는 철창묘 안에 없구만 그래! 그 놈은 도대체 어디 있나? 황노사란 놈, 나오기
만 해봐라! 이 노완동이 네놈과 자웅을 가를테다."
주백통은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희미한 달빛 아래 주위의 나무숲만 어슴푸레하게 보일 뿐 사
람의 그림자라고는 없었다
양과는 양효비를 굴복시키자 기분이 좋아 통쾌하게 웃었다.
"황도주님은 아예 오지도 않았습니다."
"잘 하는구만. 임자가 날 속여?"
이렇게 대꾸하던 주백통은 양효비가 양과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양과가 검 끝으로 그의 목
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양과 아우, 정말 그 놈을 죽이려나?"
양효비가 애걸했다.
"사부님, 절 구해주십시오."
주백통이 소리쳤다.
"두려워말아, 내가 구해줄테니."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고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양과가 칼끝을 양효비의 목에 바짝 들이
대면서 소리쳤다.
"백통 형님, 제자를 죽일 생각이면 다가오시구려."
양효비는 급하다 못해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사부님, 다가오지 마십시오."
주백통은 양과가 양효비를 죽일까봐 걱정돼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화가 나서 뇌까렸다.
"내가 그 쪽으로 다가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사부님, 오지 마십시오. 오시면 이 제자는 죽고 맙니다."
양효비는 겁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주백통은 양과의 눈에 살기가 넘친 것을 보고 사태의
엄중성을 깨달았다.
"임잔 정말로 저 놈을 죽이려나?"
양과는 주백통의 말에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
"이깟 놈은 죽여버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노완동은 정말 알고도 모르겠네. 임자가 그 놈을 죽여버릴려면 애초에 왜 목숨을 구해
줬나? 그리고 왜 이 노완동이 저 놈에게 무공을 전수해주게 하려고 궁리했었나?"
"처음에 절 이 놈이 용서해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서 죄악을 저지를 줄 몰랐지요. 이 양
효비가 오독방의 장세사자란걸 아셔야 합니다."
주백통은 비록 강호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장난을 치며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아왔지
만 오독방에 대한 소문은 여러 번 들었기에 두 눈을 치켜뜨고는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 놈이 어찌 사방의 제자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양과가 검 끝을 바짝 양효비의 목에 들이대며 외쳤다.
"양효비, 스스로 말해라."
양효비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공자님, 사부님 ! 이 제자는…… 이 제자는 5년 전에 두 분과 헤어진 뒤 가까운 육친도
없었습니다. 때마침 오독방의 집법사자와 교화사자가 와서 이 제자를 찾았습니다. 그 여자들
은 제게 오독방에 가입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제자는 일시의 탐욕
때문에 그만……."
주백통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양효비가 사방에 가담한 그 일은 그다지 크게
생각지 않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무슨 집법사자며 교화사자란 말이냐?"
"그 여인들과 본 제자는 오독방의 3대사자인데 집법사자가 권력이 가장 크고 세력이 방주인
여노악 다음입니다. 교화사자는 무채접인데 사부님도 알 겁니다."
양과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물었다.
"집법사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그래 이름도 성도 없단 말인가?"
"그 여잔 과연 이름도 성도 없습니다. 방중의 제자들은 그녀를 사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소
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방주의 깊은…… 아니, 아니 깊은 총애를 받고 있지요."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나?"
"집법사자는 몸매가 아름답고 목소리가 맑아 아마…… 아마도 경국지색인가 봅니다."
"허튼 소리 말아."
"양공자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독방에서 5년 동안 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걸요. 하지만 일찍 오독방에 가담한 제자들이 하는 말은 들었지요. 집법사
자의 용모는 세상을 놀라게 할만큼 아름다워 마치 선녀가 하강한 것 같다구요. 하지만 그
때문에 숱한 시끄러움이 있었답니다. 듣자니 무공이 극히 고강한 제자 둘이 그녀의 용모에
반한 나머지 서로 질투를 했다지요. 그래서 큰 싸움까지 붙어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다
치기까지 했답니다. 여방주 여노악은 믿음직한 제자 하나를 잃은 것이 너무 가슴아파 그 뒤
로는 집법사자로 하여금 인피가면를 쓰게 했지요."
양과는 아주 실망하고 말았다. 양효비의 말도 무채접의 말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양과는 속
으로 탄식해마지 않았다.
'세상에 미녀들이 수없이 많지만 소룡녀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아주 적을 거다. 경국지색이
면서도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신공을 갖고 있는 여인은 당세에서는 곽백모 황용을 빼놓고는
오로지 용녀 한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비추어 추측해보면 집법사자는 용녀임에 의심
할 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집법사자가 오독방에 가담한 시간과 용녀가 실종된 시간이 맞
아 떨어지지 않는가?'
주백통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양효비, 넌 왜 하필 양과로 변장했었느냐? 이 노완동이 이제야 알리는데 네가 한 짓은 양
과가 장난으로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게 아닌 것 같아."
양효비가 양과를 힐끔 바라보고나서 대답했다.
"5년 전에 이 제자는 양과가 오군영을 끌어안고 아주 뜨거운 사이인걸 보게 되었지요. 그래
서……."
"넌 그래서 양과에게 보복하려 했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 그 말은 왜 하지 않는 거지?"
양효비는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독방에서 양효비를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집법사자는 그에게 왼손으로 쓰는 검을 위주로 배우게 했는데 이것은 차후 신조협 양과로
변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양과의 강호에서의 명망을 이용해 각 문파의 고수들을
오독방에 받아들임으로써 세력을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과가 갑자기 강호에 나타
나는 바람에 오독방의 계획이 뒤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나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양효비, 보아하니 넌 죽지 않고는 안되겠다."
양효비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애걸했다.
"사제간의 정을 생각해서 사부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의 사부란 말이냐? 노완동이 언제 너같은 제자를 두었단 말이냐? 천하가 이 노완동
은 야율제 하나밖에 제자를 두지 않았다는걸 알고 있다. 야율제는 천하에서 제일 큰 방인
개방 방주로 있고 곽정 아우의 귀염을 받고 있는 사위란 말이다."
노완동은 이렇게 눈알을 부라리면서 양효비를 제자로 받아들인 일까지 승인하지 않으려 들
었다.
"사부님께서는 인의를 지키시는 분인데 그래 제자가 비명에 죽는걸 보고만 계신단 말씀입니
까?"
"난 널 죽이지 않고 용서할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 양과 아우가 용서하지 않으니 노완동은
하는 수가 없어."
양효비는 급한 중에도 죄가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주백통, 당신이 만일 내 목숨을 구해주지 않는다면 내 어머니의 귀신이 꼭 당신을 잡아갈
거외다."
주백통은 미랑의 귀신을 제일 무서워했기에 안색이 달라졌다. 그는 급히 양과에게 귓속말을
했다.
"양과 아우, 저 놈을 놓아주게,"
"안됩니다."
"임자가 저 놈을 놓아주지 않다가 미랑의 귀신이 와서 이 노완동에게 달려들면 어떻게 하겠
나?"
양과는 속으로 한 가지 꾀가 생각나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랑의 혼백은 이미 환생했습니다."
"임자가 그걸 어떻게 아나?"
"미랑이 어젯밤 꿈에 나타나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지 않다면야 이 동생도 그녀의 귀신이 무
서워서 이렇게 양효비를 감히 찾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양효비는 그들 두 사람이 뭐라고 속삭이는지 알 수 없었으나 주백통의 얼굴에 웃음기가 내
비친 것을 보자 자기가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어서 와서 절 구해주십시오."
주백통과 양과는 서로 마주보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양과가 목검으로 양효비의 목을 툭 치
자 양효비는 금방 벙어리가 되었다.
"양효비, 네놈은 죽을 때가 됐어."
양과가 양효비의 목을 들이찌르려 하자 양효비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쥐새끼같은 놈,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제가 이 곳에서 사부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하나는 사부님에게 무공을 배우기 위함이고 다
른 한 가지는 우리 아버님의 유해가 어디 묻혔는가 하는걸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백통이 요란하게 웃어대다가 입을 열었다.
"난 네놈의 애비를 알지도 못하는데 그가 어디 묻힌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저의 아버님도 강호 사람이었기에 사부님에게 물을 생각이 난 겁니다."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안색이 까맣게 변하더니 또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양공자님께 부끄럽고 사부님께 부끄럽습니다. 오늘 밤에 꼭 죽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죽기 전에 아버님의 묘소나 찾아 절이나 좀 해서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 싶습니다."
양과는 미랑이 죽을 때의 그 참상이 생각나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네 아비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제게 귓속말로 저의 아버지는 원래 금나라의 왕족 출신으로서 이름
이 완안강(完顔康)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버님은 한인(漢人)의 아들이고 성씨가 양
(楊)씨 입니다."
주백통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럼 너의 애비가 양강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3년 전에 제가 아버님의 옛 부하를 찾아서야 아버님이 벌써 돌아가셨다는 것
과 철창묘 부근에 묻혔다는걸 알게 되었지요. 사부님께서는 저의 아버님이 어느 곳에 묻혔
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주백통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양효비를 바라보다가는 양과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닮았구나, 닮았어. 임자들이 형제가 아니라면 나 이 노완동이 성을 갈겠어. 이상한 일이구
만. 양과 아우의 어머니는 미랑이 아닌데 임자들은 어째서 형제가 되었을까? 그럼, 임자들은
배다른 형제란 말야?"
그 말을 들은 양과는 깜짝 놀랐다. 자기에게 이런 이복동생이 있을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원래 양강은 생전에 난봉을 부리기 좋아했는데 먼저 양과의 어머니와 살을 섞었고 그 뒤에
는 완안방방과 미랑에게 반했었다. 완안방방은 질투가 심한 여자라 미랑과 사통하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서역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양효비는 주백통이 말하는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해 물었다.
"사부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너와 이 양과는 형제란 말이다."
노완동이 탄식하는 모습은 전혀 노완동답게 보이지 않았다. 양효비가 양과를 바라보며 물었
다.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내 아버지가 바로 양강이고 역시 금나라의 왕족이었는데 이 철창묘에서 돌아가셨어."
양과가 이렇게 말하자 양효비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22장 형제의 정분
주백통은 양과와 양효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제간에 싸우게 될 줄 어찌 알았겠나?"
양과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목검을 떨어뜨렸다.
'곽백모께서 우리 아버지가 이러니 저러니하고 비난하던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원래
난봉을 부리기 좋아해 도처에서 여인들과 정사를 가졌었구나.'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원
망어린 시선을 하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양과는 갑자기 마음이 처연해졌다.
양효비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자기가 양과의 이복동생이기에 죽을 고비에서 살아
나게 되었고 차후 강호를 돌아다니게 되면 신조협의 동생이기 때문에 어깨가 올라갈 것임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는 좋은 생각만 하다보니 어머니가 하늘의 영험을 얻어 남편의 불충
함을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양효비가 일어나 양과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형님, 당신이 정말 저의 형님입니까?"
주백통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더 이를데 있나? 임자들의 아버지가 양강인게 틀림이 없어. 이 노완동은 아버지를 가려보
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네."
양과는 반생을 고독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혈육을 만나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양효비와 주백통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과 아우, 이 사람 미치지 않았나?"
양과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누가 이 양와가 외톨이라고 말했더냐? 하하하, 내게도 형제가 있게 되었어! 내게도 형제가
있게 되었단 말이야."
양효비는 아주 감동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형님, 우리 형제가 손을 잡기만 하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고 무서울 게 없을겁니다."
양과가 양효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동생, 우리 형제는 다시는 외롭지 않게 되었어. 안그래?"
"그럼요. 우리는 이젠 일가친족을 찾았으니 더는 외롭지 않지요."
"비록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우린 한 형제란 말이야."
"우리는 훌륭한 형제이지요."
양과가 양효비를 잡아끌며 말했다.
"이 형을 따라 가자."
"어디로 가잔 말씀입니까?"
"동생, 그래 아버님 묘소에 안가보겠나?"
양효비가 기뻐하며 물었다.
"묘소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양과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 두 형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철창묘 뒤로 향했다.
달빛이 고요히 비치고 있고 주위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철창묘 뒤의 잡초 속에 고독한 묘
두 기가 있었다. 양과가 좀 큰 봉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곳이 바로 아버님의 묘야."
양과가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양효비도 지난날 고아로 지내던 설음이 북받쳐 올
라 슬피 울었다. 두 형제는 서로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양과가 울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동생, 네가 이전에 어떤 몹쓸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난 괘념치 않겠어. 하지만 아버님 묘
앞에서 우리 맹세하자. 이후로는 잘못을 고치고 새 사람이 되겠다고……."
양효비는 이 몇 년 간에 갖은 악행을 저지른 일이 아주 창피하게 느껴져 큰소리로 맹세했
다.
"아버님, 형님 효비는 지금까지의 잘못을 철저히 고치고 형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제가
만일 맹세를 어긴다면 천벌을 받겠습니다."
양과가 만족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 넌 더는 오독방같은 사방의 그 무슨 장세사자이니 하는 노릇을 하지 말고 그 자들과
관계를 끊도록 하거라."
양효비가 그 말을 듣고 얼떨떨해 하다가 말했다.
"형님, 이건……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양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오독방은 행위가 괴이하고 나쁜 심보를 품고 있어 천하사람치고 미워하
지 않는 자가 없는데 왜 그 자들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단 말이냐?"
"형님, 그렇지 않습니다. 오독방 방주 여노악은 선공이 세상에서 으뜸인데다가 지혜와 계략
이 출중하고 수하에 부하들이 매우 많아 중원까지 퍼져 있습니다 지금 중원의 무림이 비어
있고 우두머리가 없는데 우리 두 형제가 이 기회를 타서 큰 뜻을 펴게 되면 차후에 끝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길 수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 간은
동사, 서독, 남제, 북개의 천하였으나 지금은 우리 양씨 형제의 천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양효비는 흥분해서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양과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동생이 오독방에 오래 묻혀 있다 보니 이처럼 명리를 탐
내는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형으로서 동생을 잘 인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미소를
띠우며 다시 말했다.
"오독방은 충심환을 가지고 여러 큰 문파들을 통제하고 있고 함부로 인명을 해치며 수단이
악랄하기 그지없다. 이게 어디 대장부가 할 짓이냐. 동생, 너는 그래서는 안된다."
"형님, 이 동생이 비웃는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형님의 생각은 너무나도 밝았습니다. 옛날
삼국시대에 조조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천하사람들을 등지더라도 천하사람들이
나를 등지게 하지 못하게 하겠다(寧敎我負天下人 不敎天下人負我)'라고 말입니다. 예부터 공
명을 이룬 영웅호걸들 중 이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네가 말하는 도리를 나는 잘 모르지만 난 사람 노릇을 할 바엔 정정당당해야 하고 남의 업
신여김을 받지 말아야겠지만 남도 업신여기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해."
"이제야 알 만하군요. 형님께서 절세의 무공을 연마한 몸이면서도 이처럼 가난하고 빈털터
리인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군요. 휴, 형님, 강호에서 남을 업신여기지
않으면 반드시 남의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 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그 사방의 장세사자 노릇을 하겠단 말이냐?"
"저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뭐냐?"
"그까짓 장세사자가 뭐 아까울 게 있습니까? 시기가 되면 저도……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아
직 시기가 이릅니다."
"그럼 넌 무림에서 왕노릇을 해보려는 생각이지?"
양효비는 웃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색으로 보아 묵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양과는 또 생각했다.
'이 동생이 무서운 야심을 가지고 있구나. 지금 하는 행동을 봐서는 앞으로 패왕 노릇을 하
게 되면 무림이 기필코 큰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자들과 생이별
을 하고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구나. 만일 이 놈의 나의 동생이 아니라면 어찌 더
살려둘 수 있으랴?'
노완동은 줄곧 양씨 형제의 뒤편에 서 있었다. 두 형제가 자기를 아랑곳하지 않게 되자 노
완동은 속으로 불평이 가득해 결국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봐, 임자들 형제들이 이제 서로 만났다고 이 노완동은 아는 척도 안 할 작정인가?"
양효비가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이 제자가 형님을 만나 기쁜 마음에 잠깐 사부님을 잊었습니다요."
양효비는 주백통의 곁으로 오면서 말을 이었다.
"이 제자는 언제나 사부님을 맘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양과는 주백통이 기뻐하는 모양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이 동생은 말주변이 기막히게 좋군. 그러니 총명하고 영리한 무채접도 이 동생에게 반해서
제 정신을 못차리는 거겠지. 솔직하고 단순한 백통 형님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만일
이 동생이 나쁜 짓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기필코 강호에 큰 해를 끼치게 될거다. 남이라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내 동생이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수수방관하
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난 양과는 양효비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타이르듯 말했다.
"동생, 넌 내 말대로 오동방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양효비가 떨떠름해 있다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형님, 농담은 그만 하십시오. 저는 오독방의 장세사자로서 중임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독방이 무림을 통일하게 되면 저의 전도도 빛나게 될 것인데 왜 오독방을 떠나야 한단 말
입니까? 오히려 형님께서 시국을 깨달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계속 데 돌아
다니지 말고 이 동생을 따라가서 손잡고 같이 일해봅시다."
양과가 고개를 젓더니 마치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넌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오독방이 사람들을 얼마나 해치고 있는 줄 잘 모르고 있는거다.
넌 ……."
"오독방이 확실히 사람들을 해치고 있지만 결코 나 양효비를 해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뿐
만 아니라 이 동생은 헤아릴 수 없는 이득을 보고 있지요."
"네가 보는 이득이란 기껏해야 제멋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강간하고 민재를 강탈하
는 것이겠지?"
양효비는 형의 어조가 좀 다른 것을 느꼈다.
'형님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째나 신경을 쓰고있군.'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효비는 얼굴에 웃음을 발라가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형님은 남들의 허튼 소리를 믿지 마십시오. 그저 오독방의 세력을 빌어 이름을 좀 날리자
는 것일 따름인데요."
"군소리 할 것 없어. 이 형이 살아 있는 한 네가 그 무슨 장세사자 노릇을 하게 할 수는 없
어."
양효비는 양과가 화를 낼까봐 두려워 화제를 돌렸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까짓 머리아픈 일은 그만 얘기하고 가서 기분
좋게 술잔이나 나눕시다."
양효비가 이렇게 말하자 주백통이 얼씨구나 하고는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럼, 형제간이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가서 술을 마시는 게 요긴한 일이지."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도 곧 떠오르겠는데 임자들은 날 따라오게."
하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어디로 갈까요?"
양효비가 이렇게 묻자 주백통이 대답했다
"멀지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데 그 곳의 술집을 내가 알고 있네."
"이 새벽에 벌써 술집이 문을 열었을까요?"
양과가 말하자 양효비가 대꾸했다.
"우리 셋이 가면 어느 놈이 감히 문을 안 열겠습니까?"
"맞아! 이 노완동이 가는 곳이면 누구든 문을 열어야지 안그러면 점포를 짓부셔놓고 말거
야."
주백통은 손뼉을 쳐가며 우쭐거렸다. 양과는 기가 막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십리 쯤 되는 길을 걸어 마을에 당도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때라 부지런한 농부도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마을은 매우 조용했다. 주백통이 두 칸자리 초가집 앞에 와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술집이야."
양과가 바라보니 그 초가집은 아주 초라해서 바람벽의 흙이 여러군데 떨어져 나갔고 문 앞
의 열 발자국 쯤 되는 곳에 서 있는 장대에 주막이라는 글자가 씌어있었다.
"왜 멍하니 서 있나? 어서 들어가세. 임자들은 이 술집이 촌스러워 보인다고 그러는 거지?
사실 이 집에서 만드는 화계(化鷄)라는 요리는 천하일미야. 개방의 내노라하는 요리사들도
이런 요리는 만들어내지 못해."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고나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윽고 집안에서 늙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우?"
"주인, 문 열어. 손님이 왔어."

"이렇게 일찍 말입니까? 날이 밝거든 다시 오시지요."
주백통이 다시 문을 세차게 두드리면서 소릴 질렀다.
"나야. 어제 내가 이 집에서 화계 한마리를 다 먹었잖았나? 왜 잊어버렸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우?"
"나 노완동이야. 어제 내가 임자에게 은자 다섯 냥을 주었잖아. 어서 문을 열라니까."
"어제 주신 은자는 오늘 셈으로 치지 않으니 돌아가주시오,"
그러자 주백통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봐, 이 늙다리야 그래 문을 열테냐 말테냐? 내가 문짝을 박살내버리기 전에!"
주백통은 자기의 나이는 생각지도 않고 집주인만 늙다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집주인은 두려운 생각이 났던지 빼꼼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름살이 가득한 늙은 얼굴이
나타났다. 주백통이 그 늙은이를 아래위로 뜯어보다가 물었다.
"이봐, 임잔 누구야?"
"내가 주인이외다."
"그런데 어제 있던 주인은 이 노완동처럼 흰 수염이 가득하던데 임자 수염은 검은 털과 흰
털이 한데 섞인 수염이로구만."
그 늙은이는 노완동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어제 주인은 어제 주인인거고 오늘은 내가 주인이외다."
"그런데 난 어제 주인에게서 또 주인 한 사람이 있단 말은 못 들었는걸."
"그럼 당신은 모르겠구만요?"
"모른다니까."
"당신이 모르는 일이야 그밖에도 아주 많지요."
주인이 곱지않은 눈으로 주백통을 힐끗 쳐다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백통은 눈을 껌벅거
리면서 면박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천진스럽게 웃었다.
"재미있어. 재미 있다니까."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며 손을 저어 양과와 양효비를 들어오라고 불렀다.
"날 따라 들어오라니까."
세 사람은 술집으로 들어섰다. 주백통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이봐, 새로 온 주인. 우리에게 화계 세 마리를 만들어 주게."
늙은이가 못마땅한 듯 대꾸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큰 나무쟁반에다 삶은 닭 두마리를
담아가지고 와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난 세 마리를 요구했는데 왜 두 마리 뿐이야?"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며 손으로 닭의 다리를 뜯다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유, 식은 거로구나!"
"어제 두 마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밤이 지난 닭이 그래 식지 않을 수 있겠수? 만일 더운
닭고기를 드시겠거든 돌아가셨다가 낮에 오시라니까요."
주인이 뾰르퉁한 기색으로 이렇게 대꾸하자 주백통은 화가 났다. 하지만 배가 몹시 고팠던
지라 우선 허기진 배나 채우고 나서 그때 주인과 따져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식은 닭 밖에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술이나 가져와."
늙은이가 술 한 단지를 가져왔다. 양효비가 술을 따른 다음 술잔을 들고 말했다.
"제가 사부님과 형님을 위해 한 잔 마시겠습니다."
양효비가 건배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술잔을 비웠다. 술이 세 순배 쯤 들어가자 세사람은
비로소 몸에 온기를 느꼈다. 몇 마디의 말이 채 오가지 않아 또다시 오독방의 이야기가 화
제에 올랐다.
"형님, 제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사람마다 뜻이 다르지요. 형님께서는 벼락출세를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이 동생은 언제나 그 생각 뿐입니다."
양과가 술잔을 식탁에 내려놓더니 눈썹을 곤두세우며 말했다.
"내가 너의 형인만큼 꼭 관계해야겠다. 더는 그 사교와 내왕을 가져서는 안돼!"
"내 하고 싶은대로 할테니 누구도 상관 못해요."
양과가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서며 소리쳤다.
"너 뭐라고 말했니?"
주백통이 양과를 자리에 눌러앉히며 나무랐다.
"임자들 두 형제가 얼굴을 익힌지 이제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쌈질이야? 그래 배를 불리지
도 않고 싸워볼 참인가. 허허, 이 노완동은 쌈구경을 제일 즐기거든."
양과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자 양효비도 덩달아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 두 형제는 서로 노
려보았다. 주백통이 한입 가득 입이 비어지도록 닭다리를 게걸스럽게 뜯더니 술을 한잔 쭉
들이켜고는 말했다.
"임자들이 먹을 생각이 없거든 이 노완동이 화계 두 마리를 다 먹어치울테야. 배고프면 내
가 다 먹어치웠다고 탓하지 말어."
두 형제는 각기 자기 심사 때문에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었고 주백통만 맛있게 먹었다. 주
백통이 갑자기 일어났다.
"부엌 아궁이에 불이 있는가 살펴보아야지. 이 화계는 따뜻할 때가 제일 맛있거든"
혼자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부엌에서 '푹푹' 하는 소리가 나더니 주백통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그 늙은
주인이 소리쳤다.
"내가 네놈을 죽여버릴테다!"
그 다음에 연이어 주백통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 살인이야. 사람 살려……."
양과와 양효비는 모두 깜짝 놀랐다.
'노완동은 무공이 대단한 사람인데 그가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지르다니? 그러면 주백통을
죽이려드는 사람은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란 말인가?'
그들 두 사람이 부엌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하는 차에 주백통이 벌써 주방에서 쫓겨나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 뒤로 늙은 주인이 손에 한자나 되는 식칼을 쳐들고
주백통을 쫓아나왔다. 그 늙은 주인이 식칼을 차바퀴 돌리듯이 휘두르며 찍으려고 드는데
주백통은 마치 방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기나 한 듯 휘청거리면서 도망쳤고 몇 번이나 찍
힐 뻔했다.
주백통이 양효비의 등 뒤에 와 숨으며 애걸했다.
"제자. 날 살려줘."
양과는 속으로 웃으면서 주백통이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이 무엇 때문에
저토록 화를 내며 식칼을 들고 주백통을 죽이려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효비가 늙은 주인의 동작을 보니 무공이 겨우 삼류에나 갈 형편이었다. 식칼이 눈 앞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자 양효비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냉큼 손을 써서 식칼을 든 늙은이의 손
목을 잡아 그대로 그 늙은이의 면상을 찍었다. 늙은이는 얼굴에 식칼이 박힌 채 비명을 질
렀다
늙은이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는데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콸콸 흘러내렸다. 양효비가 땅바
닥에 떨어진 식칼을 주워들고 칼자루까지 들어가도록 늙은이의 배를 힘껏 내찔렀다. 그러자
칼끝이 늙은이의 등 뒤로 빠져나왔고 그 늙은이는 땅 바닥에 쓰러져 죽어버렸다.
양과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미 다친 사람을 죽…… 죽일 것까지야 있나?"
양효비는 그 늙은이를 죽이고 나서야 화가 풀렸던지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죽어 마땅하지요."
"왜 죽어 마땅하단 말이냐?"
"저 놈이 사부님을 죽이려 들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제자로서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노완동 주백통은 벌써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제자가 훌륭해. 그 놈은 죽어도 싸! 이 놈이 이 노완동을 죽이려 들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
람을 묶어놓고 팔아먹으려 들었거든."
양과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저 사람이 남을 팔아먹으려 했다구요?"
"저 주방에 가서 보게나. 이 노완동은 배가 고파."
주백통은 손으로 주방을 가리키고는 더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양과와 양효비가 서로 마주보고 나서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보니 짚더미 옆에 두 사람이 쓰
러져 있었는데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그들 두 형제는 모두 이 두사람을 알아보았는데
다름 아닌 모용협의 의형제 상청과 유대덕이었다.
'이 사람들이 어째서 이 곳에 묶여 있는 걸까?'
양과는 이렇게 생각했다. 양효비도 이 두 사람이 완안방방에게 잡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곳에 숨겨져 묶여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보아하니 죽은 그 늙은 주인은 완안방방의 수
하임이 틀림없었다. 양효비가 짚더미 속에 사람의 옷 같은 것이 내비치는 것을 보고 그 짚
더미를 헤쳐 보았더니 백발 노인의 시체가 나왔다. 양효비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알만하군. 이 노인이 진짜 주인이고 아까 가짜 주인 놈에게 살해당한 거군."
양효비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웃는 얼굴로 양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형님, 이 동생이 사람을 잘못 죽이지는 않았군요."
양과는 대꾸하지 않고 다가가서 상청과 유대덕의 아혈(啞穴)을 풀어준 뒤 물었다.
"임자들은 왜 이 곳에 있는 건가?"
상청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죽이려면 죽여라 이 상모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다."
유대덕도 씩씩거리며 말했다.
"양과, 우릴 시원스레 죽여다오."
그들 두 사람은 비록 늙은이가 양과 형제의 손에 죽은 줄은 알고 있었으나 자기들이 양과
형제와는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이 두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완안방방의 수중에
있기 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여겼다. 양과는 처음부터 모용세가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었는데
양효비로 변장했기 때문에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그래 내가 임자들을 죽여야 하나?"
"그럼 당신이 우릴 놓아주겠소?"
양과의 말에 유대덕이 반문했다. 유대덕과 상청은 집법사자에게 중상을 입은 몸이라 빠져나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양효비가 짓궂게도 유대덕을 발길로 걷어차며 악담을 했다.
"난쟁이같은 녀석, 우리 형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네놈은 무슨 물건짝이기에 감히 이 유대덕을 훈계하는 거냐!"
그는 양효비를 모르고 있었다. 양효비가 난폭하게 변해 유대덕의 귀쌈을 때리면서 윽박질렀
다.
"제길할, 그래도 말대답이냐?"
유대덕이 입으로 피를 토하더니 또 악다구니를 썼다.
"용(龍)도 물 밖에 나가면 개미한테 뜯긴다더니. 제길, 이 나으리가 묶인 몸이 아니면 네놈
을 죽여버렸을 거다."
그러자 상청도 그에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토를 달았다.
"동생, 그까짓 쬐그만 놈에게 뭘 화낼게 있소?"
양효비는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자 상청의 가슴팍을 호되게 걷어차며 악에 바쳐 소리쳤
다.
"기억해둬. 이 나으린 오독방의 장세사자 양효비야."
양과가 양효비를 말리며 타일렀다.
"이 사람들은 이미 내상을 입고 묶인 몸이 아니냐? 이런 사람들을 업신여겨서는 안돼."
유대덕이 상청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양과 그놈이 오독방의 장세사자라고 하던데 어째서 어째서 저 쬐끄만 놈도 장세사자
라고 하는 것일까요?"
"아마 오독방엔 장세사자가 두 사람인가?"
상청도 이상하게 생각되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양효비가 득의양양해서 껄껄 웃었다.
"신조협은 나의 형님이시다 너희들은 강호에 신조협이 두 사람 나타났단 말도 못들었느냐?"
그러자 상청이 두 눈을 멀뚱히 뜨고는 대답했다.
"들은 것 같구먼."
양효비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기실 다른 하나의 신조협은 이 양모가 분장한 거야. 하하, 결국 강호의 군웅들을 속여넘겼
지."
상청이 양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말이 정말이오?"
양과가 양효비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내 이름을 도용해서 갖은 나쁜 짓을 다 하고서도 득의양양해서 진상까지 다 까발기는
구나. 내가 만일 이 일을 승인한다면 모든 내막이 똑똑히 드러나기야 하겠지만 너는 숱한
사람들의 과녁이 되고 말거다.'
양과는 털어놓고 말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주춤거리며 망설였다. 그런데 양
효비가 거드럼을 피우며 또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의 형님은 비록 장세사자는 아니지만 이미 오독방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나보다
지위가 더 높아질 거다. 형님,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양과가 소리쳤다.
"동생, 허튼 소리 하지 말어. 난 절대 사방에는 가담하지 않을거야."
상청과 유대덕은 이들 두사람이 '형님, 동생' 하고 부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의형제인지 친
형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한통속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대덕이 능글거리며 비
꼬는 투로 말했다.
"당당한 신조협이 정말 사방 사람인 줄은 생각도 못했지."
"이 양모는 사방 사람이 아니야."
양과가 급히 이렇게 말하자 상청이 면박을 주었다.
"당신이 사방 사람이 아니라면 어제 어째서 사방의 집법사자와 취선루에서 만났고 그 계집
년이 서역신교의 보물을 탈취하도록 도와주었소? 그리고 왜 우리와는 원수를 지는 거요?"
양과는 그 말에 답변하기가 어려워서 그저 얼버무리듯 했다.
"이 양모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사방의 졸개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야. 이 양모
가 집법사자와 만나게 된 것은 ……."
"그래 그건 뭣 때문이오?"
상청이 이렇게 따져묻자 양과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난 아내인 소룡녀를 만나려고 그랬는데 그걸 어떻게 입밖에 꺼낸단 말인가? 만일 소룡녀가
사방의 집법사자라는 것이 드러나기만 하면 큰 우환거리가 될거다.'
상청이 비꼬며 뇌까렸다.
"도적이 제 발 저리는 법이지. 대장부라면 툭툭 털어놓고 말해야지 왜 그렇게 꺽꺽거리는
거요?"
유대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맞장구를 쳤다.
"형님, 저 사람은 나쁜 놈들을 도와주고 협의를 지키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원수로 치부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러자 양과가 눈을 흘기며 일침을 가했다
"퉤, 너희들이 어찌 협의를 행한다고 감히 자칭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유대덕이 그래도 주둥이는 살아 있어 그들의 주장이 옳다며 대꾸했다.
"우리가 협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래 당신들 같은 음험한 소인배들이 협의를 행한단 말이
오?"
"너희들이 협의를 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남의 보물을 넘보느냐?"
"서역신교는 줄곧 중원의 무림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소. 우리가 그들의 보물을 빼앗
는 것은 그들에게 중원 무림의 본때를 보이기 위한 거요. 당신들의 오독방이 서역신교를 협
박해서 중원에 해를 끼치려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단 말이오."
"그럼 넌 중원의 무림을 위해서 그런다는 말이지?"
"모용공자님은 군웅들을 거느리고 오독방과 대항하면서도 또 서역신교에도 대처하고 있으니
당세의 호걸이라 할만하지 않소? 하지만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 당신들 소인 배들
이 어찌 군자의 속을 알 수 있겠소?"
갑자기 밖에서 노완동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술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어서 나가, 나가란 말이야."
양씨 형제가 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혁중달과 장로 합포였
다 완안방방은 상청과 유대덕을 잡은 뒤 모용협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빼앗아갈까봐 두려워
이 두사람을 가흥성 밖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의 술집에 가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래 주인
을 죽이고 매수한 졸개더러 지키게 했는데 그 졸개가 바로 양효비의 손에 죽은 늙은이였던
것이다. 그 뒤 완안방방은 한 객점에서 누군가가 관군과 싸움이 붙었는데 그 중에 장로 한
사람도 끼어있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완안방방은 맘 속으로 서방의 장로는 강남으로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고 대체로는 교주를 맞아가려고 오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찾아가서 만나보았더니 과연 틀림 없기에 옥륜법왕과 합포를 자기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모
시고가서 대책을 상의했던 것이다.
옥륜법왕은 전세교주님이 십만 명이나 되는 중신(衆神)들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그 신물
인 인골염주가 교주님이 세상에 강림할 때에는 스스로 나타나게 될테니 근심할 필요가 없노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합포와 완안방방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친히 상청과 유대덕을
데리고 모용협을 찾아가서 인골염주를 찾아 오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혁중달이 합
포 장로를 데리고 삼창과 유대덕 두 사람을 찾아가려고 왔던 것이다.
혁중달은 주백통이 술을 마시고 있고 상청과 유대덕을 지키던 졸개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이어 양과와 양효비가 부엌에서 뛰어나오자 그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당신들이 어째서 이 곳에 있는 것이오?"
합포가 양과를 보더니 두 손을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양공자님, 안녕하시오?"
양과도 두 손을 맞잡으며 응대했다.
"장로님,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이 아주 화목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혁중달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장로님, 저 놈은…… 우리의 적입니다!"
합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어제 저 사람은 나를 도와 그 변절자와 싸웠드랬소."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의사(義士)가 바로 저 사람인가요?"
합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혁중달이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장로님은 모르실 겁니다. 이 놈이 아가씨와 일찌기 생사를 다투었고 아가씨가 하마터면 저
놈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수다. 저 놈은 오독방 사람이지 절대 벗이 아니외다."
합포가 의아한 눈길로 양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천하의 사람들은 이 양모가 사방의 졸개인 줄로 알아도 장로님만은 믿지 않으실 거지요,"
"빈승은 당신이 오독방의 졸개가 아니라고 믿소."
"독주여니는 비록 서역신교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녀가 중원에서 한 짓은 실로 사람들의 공
경을 받지 못합니다."
양효비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내 어머니도 독주여니의 손에 돌아가셨소."
합포가 혁중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길에서 들은 소문이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여잔 본교의 인골염주를 찾느라고 큰 공
로를 세웠거든. 그 여자의 일을 처리하는 문제는 본교에서 공론하게 될거요."
양과는 속으로 의심쩍은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신교에서 나쁜 짓을 감싸주지 않아 온 일
을 회상하고는 곧 대답했다.
"장로님의 말씀을 전 꼭 믿습니다."
혁중달이 땅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장로님, 이건 우리 사람인데 꼭 양과에게 죽었을 겁니다. 당신은 저 양과를 믿지 마십시
오."
합포도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의심이 좀 생겼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혁장군, 어서 들어가서 그 두 인질이 지금도 있는지 보시오."
혁중달이 대답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양효비가 주방문을 가로막았다.
"못 들어가."
혁중달이 퉁방울같은 눈알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더러운 자식, 죽고 싶으냐?"
혁중달은 낭아봉을 쳐들어 양효비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면서 둔한 머리속으로 계산을 했다.
'내가 이 놈을 죽이면 아가씨가 몹시 기뻐할거야.'
양효비가 주먹으로 낭아봉을 막으려 하자 혁중달이 비열한 웃음을 보였다.
'이 자식은 무공이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이런 둔한 방법으로 목숨을 보전하려 하다니. 내가
내리치면 주먹은 고사하고 바위라도 부서지고 말건테.'
혁중달은 양효비가 일류가는 무공을 닦은 줄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합포가 뒤에서 고함쳤
다.
"혁장군, 안되오."
양효비가 주먹으로 낭아봉을 막는 것처럼 하다가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혁중달의 왼쪽 팔
을 들이 쳤는데 그것은 주먹으로 검을 대신한 이형검술의 괴이한 초식이었다.
이 주먹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도 않았고 힘도 그다지 맹렬하지 않아 혁중달은 대수롭지 않
게 생각하고 혁중달은 계속 낭아봉으로 양효비를 내려치려고 했다. 낭아봉을 막으려던 양효
비의 주먹이 방향을 바꾸어 아래쪽을 향하자 혁중달은 미처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왼
쪽 팔이 양효비의 주먹에 맞았다. 양효비는 비록 힘을 크게 쓰지 않았으나 혁중달 자신이
이미 9성쯤 되는 힘을 썼기에 팔이 그 주먹에 맞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고 말았다.
양효비가 뒤이어 왼쪽 장을 내쳐 혁중달의 오른쪽 손목을 때렸다. 혁중달이 두 손으로 자루
를 잡을 수 없게 되자 낭아봉이 손에서 빠져나와 맞은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벽돌 두
장이 부서져나가고 그 여세로 낭아봉이 땅바닥에 떨어져 일여덟번이나 뒹굴다가 멈췄다. 양
효비는 왼쪽 장으로 가격하고 나서는 곧 이어 오른발로 혁중달의 왼쪽 다리를 걷어차서 자
빠뜨렸다. 그런데 혁중달은 아까 공중에 튕겼던 낭아봉보다 먼저 땅바닥에 자빠져서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합포와 양과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런 변고가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혁중달은 두 번이나 비명을 지르고 나서 오른손으로 부러진 왼팔을 잡고 너무나도 아픈지라
콩알같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더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합포가 혁중달을 부축해서 일으킨 후 양효비를 바라보며 나무랐다.
"당신은 왜 이리도 독랄하오?"
"저 놈이 먼저 낭아봉으로 나를 치려 했단 말이오. 내가 반격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었
을게 아니오?"
합포는 양효비가 싸우는 것을 보고 그의 무공이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혁중달이
근본적으로 양효비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양효비의 간계에 넘어간 것이 분명했지만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합포 장로는 식탁 언저리의 널판지을 뜯어내 먼저 혁중달의 골절된 팔의 뼈를 맞춘 다음 그
것을 대고 잘 싸맸다 그 동작이 어찌나 익숙하고 잽쌌던지 닭을 뜯어먹던 주백통마저도 먹
기를 멈추고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로는 참 신의(祥醫)로구먼. 노완동이 팔다리가 부러지게 되면 꼭 찾아가겠어. 그런데
대가리가 떨어져 나가도 맞춰 넣을 수 있겠나?"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주막이 진동하리만치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합포는 주백통의 성미를 몰랐기에 그가 자기를 놀리는 줄만 알고 소리를 질렀다.
"노인께서는 어찌하여 그처럼 점잖치 못하십니까?'
그러자 노완동이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난 노인도 아니고 늙지도 않을거네. 그러니 그런 말로 이 노완동을 나무라지 말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합포를 바라보았다. 합포의 눈길에서
불꽃이 튕기는 듯하더니 두 주먹을 소리가 나도록 틀어쥐는 것이었다.
"노인께서 연세만 많지 않았다면 내가……."
장로가 이렇게 말하자 농담을 즐기지 않는 합포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양과가 급히 말했
다.
"장로님, 이 분은 중원 무림의 고수 주백통이라는 분인데 모두들 노완동이라고 부르지요. 농
담을 매우 즐기는 분이니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합포는 노완동의 본래 이름은 잘 몰랐으나 이 노완동이라는 별호만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양과가 말하는 것처럼 농담을 즐기는 모양이로구나. 중원의 무림에는 참 괴상한 사
람도 있다.'
혁중달이 점혈법으로 통증을 가라앉히면서 양효비를 흘겨보며 말했다.
"더러운 놈 같으니. 본 장군이 네놈을 죽여버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낭아봉을 들고 또 덤벼들었다. 양효비가 두 팔을 가슴 앞으로 가져가
며 거만한 자세로 비웃었다.
"네놈이 그까짓 재간으로 이 양모의 발뒤꿈치도 때리지 못할 거다."
합포가 혁중달을 막아 나서며 양효비를 나무랐다.
"당신은 사람을 너무 업수이 여기는구만!"
양효비는 합포가 혁중달의 골절된 팔을 싸매는 것을 보았기에 이 사람의 무공이 만만치 않
으리라고 생각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장로님은 명호를 어떻게 부르십니까?"
양과가 앞질러 소개했다.
"동생, 이 분은 서역신교의 장로이신 합포라는 분이야."
양과는 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합포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제 동생 양효비입니다. 실례한 점에 대해서는 장로님께서 너그럽게 생각해주십
시오."
양과는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양효비는 양과가 자기 대신 사과를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주 감동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형님은 무공이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인데 이 따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깍듯하고 공
손하게 대할게 무언가? 이 장인이 비록 신용(神勇)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형제가 두
려워할 필요가 뭐란 말인가.'
합포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 양과가 정인군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혁중
달을 때려 상하게 한 사람이 양과의 동생인데다가 순리대로 한다면 혁중달이 잘못했기에 더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혁중달을 보고 말했다.
"두 인질을 보아야겠으니 어서 안내하시오."
그러자 혁중달이 큰소리를 질렀다.
"장로님, 저 사람들이 나를 때린 데다가 우리 사람까지 죽였는데 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
까?"
합포가 머리를 돌려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양공자님, 나는 당신의 사람됨을 믿소. 하지만 이 일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오?"
양효비가 그 말에 대답했다.
"저 놈이 내 사부님을 해치려 들었는데 죽이지 않을 수 없었소?"
노완동 주백통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렇고 말고. 이 놈이 나 노완동을 죽이려든 까닭에 제자가 죽여버린 거야. 그러니까 임자
가 죽은 놈의 복수를 하려거든 날 찾지 말아."
이렇게 말하고나서 주백통은 손으로 양효비를 가리켰다..
"이 사람을 찾으란 말야."
합포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사제 간도 다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난 합포가 양과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오?"
양과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그렇지만 이 사람은 무공이 전혀 없더군요. 동생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고 다치게
만 만들려고 했는데 결국 죽이고 말았군요, 너무 지나쳤지요."
합포가 두손을 합장하고 탄식했다.
"하늘이시여, 죄악이군요. 죄악이지요. 동생이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지요.
휴!"
"하지만 저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을 죽였으니 죽어 싸지요."
"뭐라구요?"
"시체가 아직도 있습니다."
"내가 들어가 보겠소."
그리고 장로는 부엌으로 들어가려 했다
양효비가 먼저 부엌에 들어가 상청과 유대덕의 앞을 막아섰다. 합포는 뒤따라 들어가서 주
인의 시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혁장군, 이게 어찌된 일이오?"
"우린 인질을 이 곳에 숨겨두어야 했습니다. 만일 주인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그가 관가
에 찾아가 고발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죽였단 말이오?"
혁중달이 머리를 끄덕였다. 합포가 언짢아하더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본교에 대하여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
할 수 없소."
"인골염주를 찾아오기 위해 사람 쫌 죽이는 게 뭐 대숩니까?"
합포가 혁중달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역에 돌아간 후 교중의 호법사자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지만 이후로는 절대 함
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오."
장로가 정말로 노한 것을 보고 혁중달은 겁이 나서 안색이 달라져 분부대로 하겠다고 연거
푸 대답했다. 합포가 다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각기 인질 한 사람씩 데리고 어서 나갑시다."
양효비가 두 사람을 막아서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혁중달이 낭아봉을 쳐들며 소리질렀다.
"더러운 놈 같으니. 또 어쩌자고 그러냐?"
"이 두 인질은 이젠 내 소유가 되었소."
합포가 어정쩡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은 이 인질을 어디에 쓰려는 게오?"
"당신들은 또 뭣에 쓰려하오?"
"모용협이 우리 교의 보물을 빼앗았으므로 난 인질로서 본 교의 보물을 찾아오려고 하오."
"일리있구만. 인질로 보물을 바꾼다니 그 방법이 실로 묘하구먼.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장로
께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신교의 규율에 크게 어긋날 것 같은데요?"
"방법이 없어서 하는 일이오. 내가 보물을 찾게 되면 신전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겠소."
"당신들 티벳인은 심보가 지독하구만. 사람을 잡아 인질로 사용하다니 천리가 용납하지 않
을거요. 나와 형님은 가만 놔두지 않겠소."
합포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가 스르르 놓았다. 그러고는 양과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양공자님, 당신 동생이 나의 대사를 망치려드는데 어떡하면 좋겠소?"
양과가 속으로 생각했다.
'합포가 상청과 유대덕을 인질로 삼아 모용협에게 가서 인골염주를 찾아오려 하고있지만 이
들 쌍방은 그것이 가짜라는 걸 모르고 있는거다. 그들이 만나게 되면 서로 참살하게 될거다.
나는 이 진짜 인골염주를 돌려줌으로써 액운을 면케하고 서역신교를 통제하려는 모용협과
오독방의 야심을 접어버려야 한다.'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인골염주를 합포에게 돌려주려 했다. 이때 상청이 쓴웃음을
짓더니 큰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인골염주를 찾아가려고 신교에서 파견된 사람이오? 양효비가 왜 우릴 내놓으려 하
지 않는지 모르겠소?"
합포가 말했다.
"어서 얘기하시오."
"그건 양효비가 오독방의 장세사자여서 그도 우리를 인질로 삼아 인골염주와 맞바꾸려 하기
때문인 거요."
그 말을 듣고 혁중달도 맞장구를 쳤다.
"아차, 내가 잊었수다. 양과가 오독방의 제자일 뿐 아니라 양과의 동생도 오독방의 제자이며
장세사자란 말이외다. 저 놈들이 과연 우리 전세교주의 신물을 탈취하려 하고 있지요."
합포가 양효비를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이 오독방의 장세사자요?"
합포는 완안방방으로부터 바로 오독방에서 인골염주를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들었기에 풍파가
이처럼 많은 이유를 깨달았다.
양과는 깜짝 놀라 양효비의 음험한 심보를 삽시에 깨달았다.
'내가 만일 전세교주의 신물인 진짜 인골염주를 합포에게 돌려주게 되면 효비와 모용혈이
모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합포는 오히려 사면초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보아하니 효비
는 기어이 오독방을 따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양효비는 상청이 자기의 심보를 까발겨놓자 자기가 소홀했던 점을 몹시 후회했다. 일찌감치
상청과 유대덕의 아혈을 찔러놓은 다음 자기의 세치 혀를 잘 놀리기만 했더라면 형님을 충
분히 자기편으로 끌어올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뒷발질을 해서 상청을 차놓고는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합포, 그런들 당신이 나를 어쩌겠단 말이오?"
상청이 발길에 가슴을 채여 피를 토하더니 소리쳤다.
"이봐, 오랑캐. 양효비가 인질을 빼앗으려 하는데 당신은 저 놈을 가만 놔두겠소?"
유대덕도 덩달아 소리쳤다.
"양효비, 네놈이 이 장로를 죽이기 전에는 절대 우리를 끌고 가서 인골염주와 바꿔오지 못
해. 어서 저 장로를 죽여버려."
상청과 유대덕은 쌍방이 싸우도록 이간질을 했다.
합포가 주먹을 쳐들면서 양효비를 쏘아보았다.
"네놈이 양과의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본 교의 대사를 망치려 들면 용서할 수 없다. 그걸 알
면 어서 비켜라."
양효비가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그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더니 쌍장으로 상청, 유대덕의 머리에 있는 백회혈을 누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만일 감히 손만 쓴다면 내가 장력으로 이 두 놈을 죽여버리겠소. 헤헤, 어디 손을
써보구려."
인질이 죽으면 인골염주를 찾아오기가 어렵게 된다. 합포는 하는 수 없어 한발짝 물러서면
서 짧은 신음을 토했다.
"네놈이……."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상청이 큰소리를 질렀다.
"맞아요. 양효비는 동시에 우리 두 형제를 죽일 수는 없소. 인질이 한 사람만 남아도 당신은
인골염주와 맞바꿀 수 있는 거요."
두 사람은 똑같이 자기가 죽더라도 모용협이 위협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들었다.
그래서 쌍방은 대번에 긴장했고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양과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하고는 입을 열었다.
"동생, 넌 정말 계속 오독방에 남아있으려 하느냐?"
"사람마다 뜻이 다르다고 이 동생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형님께선 더는 권고하지 마
십시오."
양과가 한숨을 쉬고나서 말했다.
"네가 갖은 나쁜 짓을 하고도 지금까지 각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만일 네가 내 동생이 아니
라면 난, 난……."
"형님, 만일 형님이 저를 죽일 생각이라면 절대 반항하지 않겠습니다. 형님께서 양씨 가문을
이어갈 수 있으니 이 동생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양효비의 말은 비장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 동생이 형님을 알게 된지는 반나날 밖에 안되지만 이 동생은……. 알만 합니다. 자 어서
손을 쓰십시오."
양과는 가슴을 칼로 여미는 것만 같았다.
'너와 나 우리 두 형제는 각기 이십여 년이나 고독하게 지내왔다. 이 형이 어찌 너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양효비가 한숨을 쉬며 또다시 말했다.
"형님이 저더러 죽으라는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이 동생이 손을 써서 자결하고 말겠습니
다. 그러면 형님이 손 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양효비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장을 자기의 심장 쪽에 대고 치려고 했다. 양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동생, 그래서는 안돼."
양과는 장탄식을 했다.
"됐어, 됐어. 형이 이젠 더는 너의 일에 관계하지 않으마."
이렇게 말하는 양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 노완동 주백통이 달려 들어오며 소리쳤다.
"왜 이처럼 야단법석인가? 이봐, 제자. 임잔 이 두 사람의 정수리에 손을 얹어놓고 어쩌자는
셈인가? 재미있는 놀이면 나도 좀 해보세."
양효비가 다급해져서 소리쳤다.
"사부님, 어서 물러나십시오. 이 제자가 중요한 일 때문에 그럽니다."
"내가 임자하고 같이 놀아줌세. 어서 그 손을 치우게."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더니 양효비의 손을 상청의 머리에서 치워놓고 자기의 손을 거기에 얹
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재미있는 놀이인가?"
합포는 좋은 틈이 생겼다고 여기고 달려들며 두 주먹으로 각기 주백통과 양효비를 공격했
다. 이 두 주먹은 합포의 10성의 공력이 모두 들어갔기에 그 위력이 대단해 주먹이 아직 닿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찬 강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주백통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당신은 왜 사람을 때리는 거유?"
주백통은 뒤로 훌쩍 물러섰고 양효비도 감히 맞아 싸우지는 못하고 업겁결에 한 손으로 유
대덕을 자기 앞으로 잡아당기며 몸을 막았다.
그러나 합포는 사실 주백통과 양효비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재빨리 상청을 틀어쥐고는 제자
리로 물러섰다. 앞으로 나섰다가 물러서는 그 동작이 아주 신속해서 그것만으로도 공력이
대단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렇게 해서 상청은 합포에게 빼앗겼고 유대덕은 여전히
양효비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혁중달은 합포가 이처럼 날쌔게 인질 한 사람을 빼앗아내는 것을 보고 환성을 지르면서 박
수갈채를 보내려고 했으나 한쪽 팔이 부러졌기에 다른 손으로 낭아봉을 흔들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는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놈 같으니. 우리 합포장로님은 무공이 대단해서 네깐 놈은 상대도 안된단 말이야."
혁중달은 완안방방을 '우리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습관된 것처럼 합포에 대해서도 아무 거
리낌없이 '우리 합포장로님'이라고 불러대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양효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티벳인은 과연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나보다는 무공이 훨씬 강하겠는걸.'
"사부님, 저 놈이 감히 노인에게 손을 대는걸 보니 노인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게 분명하군
요."
양효비가 이렇게 꼬드기자 노완동도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저 사람은 날 때릴 이유가 없거든, 내가 저 사람의 밥을 빼앗아 먹은 것도
아니잖아? 난 화계 두마리를 먹었을 뿐이거든. 오, 그렇구먼. 저 신교 사람들은 채식만 한다
지."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신교의 제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 놈이 관계할 일이 아닌데도 기어
이 관계하려 드는데 어찌 용서한단 말입니까?"
주백통이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합포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오, 대사, 임잔 그래 이 노완동을 참견할 셈인가?"
합포는 인질 한 사람을 이미 빼앗아냈기에 다소 진정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과연 '훌륭한' 제자를 길러냈군요."
그러자 주백통이 두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했다.
"이 노완동이 훌륭한 제자를 길러냈단 말이지? 맞아. 나의 큰 제자 야율제는 비록 둔하기는
하지만 존귀한 개방의 방주로 있으면서 천하의 모든 거지들을 관할하고 있어. 나의 둘째 제
자 양효비는 오독방의 장세사자야. 오독방이 비록 사방이기는 하지만 강호의 호한들이 모두
두려워하거든."
그러자 양효비가 말참견을 했다.
"아유, 사부님! 저 놈은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고 말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능한 늙다리라고 욕하는 거지요. 길러낸 제자가 다 바보들이 어서
큰 제자는 돌대가리이고 작은 제자는 간사한 소인배라는 뜻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격으로 사부님이 둔하고 나쁜놈이라고 빗대어 욕하는 것입니다."
주백통은 그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더러운 놈 같으니. 네놈이 날 그렇게 욕한단 말이냐?"
합포는 속으로 양효비가 이토록 간사하게 구는걸 보면 저 스승도 분명 선량한 자일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어 아무 대꾸도 없이 콧방귀만 뀌었다. 그러자 주백통은 대노하여 합포 쪽으로
달려가며 주먹을 안겼다.
주백통의 기세가 사납고 동작이 날랜 것을 보고 합포는 생각했다.
'이 늙은이가 무공이 실로 대단하구나!'
그리고는 급히 몸을 옆으로 비켰다.
합포는 왼손으로 상청을 틀어잡고 있었으므로 몸을 쓰기가 불편했기에 그냥 주먹으로 싸우
는 수밖에 없었다.
주먹과 장이 맞부딪쳤으나 아무런 울림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합포는 한줄기의 강렬한 힘이
자기의 왼쪽 팔로 끊임없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어서 급히 진기를 운행해서 그것을 막았다.
주백통이 한편으론 놀라면서 껄껄 웃었다.
"괜찮은 놈이군 그래. 이 노완동의 공명권을 받아내다니."
합포는 온몸의 기를 다 모아 막아 내다보니 가슴과 배가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주완동이 우스갯소리까지 하는걸 보면 그 공력이 자기의 사부인 옥륜법왕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거무틱틱한 합포의 얼굴은 아예 새까맣게 변하고 박박 깎은 머리 위
로는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양과는 내심 이 두 사람이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는데 조금만 더 지나면 합포가 기필코 중상
을 입고 패배할 것이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통 형님, 저 분은 나의 훌륭한 벗인데 다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백통은 계속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 더러운 놈이 감히 노완동을 욕했으니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놓아야 해."
그러자 양효비가 얼싸 좋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사부님께서 이 티베트 놈을 죽여버리기만 하면 제가 사부님을 모시고 아주 재미있게 놀아
드리지요."
"그 말이 참말인가?"
"그야 물론이죠. 사부님께서 무슨 놀이를 하시든지 제자가 꼭 대동해드리지요."
양효비가 함께 놀아주겠다는 바람에 주백통은 더욱 기뻐했다.
"이 놈이 이제 얼마 더 견디지 못할거야."
주백통이 이렇게 말하자 양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백통 형님, 합포는 제 친구입니다. 어떻게 좀……."
"이 노완동이 대신 친구해주면 되는 것이지 또 이따위 놈과 친구해선 뭘해? 그것도 서역에
서 온 잡놈과 말이야."
"정 그러시다면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군요."
양과는 이렇게 말하더니 주백통과 합포의 손이 맞닿은 곳을 아래로부터 올려쳤다.
진동하는 굉음 소리와 함께 양과는 두 사람의 내력의 진동을 받아 허공을 날아가 벽에 부딪
혔으나 두 사람의 장과 주먹도 떨어졌다. 주백통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합포는 호흡이 거
칠어지고 안색이 새까맣게 변했다.
"동생, 임자가…… 임자가 이 놈을 돕는단 말인가?"
"백통 형님, 저 효비 동생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합포장로는 정직한 사람인데 어찌 형님을
욕하겠습니까?"
합포장로는 체내의 진기를 조절하느라고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양효비가 그 틈을
타서 앞으로 달려나오며 장으로 합포의 가슴을 내지르려 했다. 양과가 급히 몸을 돌려 양효
비의 장을 막으며 소리쳤다.
"동생, 무례하게 굴지 말아 "
"형님, 형…… 형님은 날 때릴 셈인가요?"
양효비가 어정쩡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하자 양과가 노한 표정을 지으며 동생의 귀쌈을 때렸
다.
"남의 위험한 틈을 이용하는 것은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니야."
"형님……."
양효비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질며 더듬거렸다. 그는 오독방에서 삼대사자로 위세를 떨쳐온
인물이라 이런 모욕을 받아보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비록 귀쌈을 때린 사람이 친형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배속에서부터 치미는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만일 양과의 무공이 두렵지 않
았더라면 아마 손찌검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만일 양과가 지금 공력이 6성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더라도 덤벼들었을 것이었다.
홧김에 동생의 귀쌈을 때린 양과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동생, 이거……."
그러나 말문을 열기는 했지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더듬거렸다. 양효비는 이를 악물
고 양과를 흘겨보더니 주백통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사부님, 어서 저 잡놈을 혼내 주십시오."
주백통은 양과의 기색을 힐끔힐끔 살피면서 대답했다.
"헌데 양과 동생이 죽이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난들 어쩌란 말이야? 이 잡놈은 내 적수도
아닌데 이런 놈과 싸울 거면 아예 황노사와 맞붙어보겠다."
양효비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상청을 빼앗으려 했다. 이때 합포는 이미 한숨을 돌리고 난
뒤였으므로 두 주먹을 단단히 쥐고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덤빌테냐?"
양효비는 양과와 주백통이 모두 자기를 돕지 않자 혼자 힘으로는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았
기에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대덕을 틀어쥐면서 뇌까렸다
"후에 두고보자."
양효비는 곧이어 뒤창문을 깨뜨리며 뛰쳐나갔다. 그러자 양과가 소리쳤다.
"효비야! 효비야!"
양과는 눈물을 머금고 탄식했다.
'이 양모에게 동생이 있다 해도 이렇게 잔인한 성품을 가진 놈이니……. 휴, 어떻게 하면 좋
단 말인가?'
주백통이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자가 나와 놀겠다고 대답했으니 어서 쫓아가봐야지."
곧이어 주백통도 그 창문으로 해서 훌쩍 뛰어나갔다.
집안에는 양과, 합포, 혁중달과 인질인 상청만 남게 되었다. 갑자기 혁중달이 소리쳤다.
"아유, 양효비 그 나쁜 놈이 유대덕을 갖고 가서 인골염주를 찾아가겠구나. 장로님 우리가
앞질러 가야겠수다."
합포도 깨달은듯이 막 상청을 틀어쥐었다.
"양공자님께서 목숨을 구해준 은혜, 어찌 한 입으로 감사를 표할 수 있겠소."
양과가 한숨을 쉬고나서 대답했다.
"합포장로님, 쫓아갈 필요 없습니다."
"그건 무엇 때문이요?"
양과는 인골염주를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이틀 사이에 두차례나 만나보는 가운데 이 합
포가 사람됨이 정직해서 정이 들었는데 만일 인골염주를 넘겨주었다가 도리어 그에게 화가
미치기나 하면 그것은 아주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포장로님, 와불산 남쪽에 가서 전세교주님을 찾으시게 되면 인골염주가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거 아닙니까?"
그 말에 합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의 사부생도 그렇게 말씀하셨소. 전세교주가 천의(天意)를 받고 나오기 때문에 그 천의를
돌려 세울 자는 없다고 말이오. 하지만 나는 인연이 있어야 연분이 맺어지게 되는 것처럼
교주님의 전세에는 꼭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 인연은 곧 내가 인골염주를 빼앗
아오는 것이오."
"장로님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 양모가 팔월 열닷새에 인골염주가 기어이 전세교주님
의 곁에 가 있게 되리라는 걸 보장하지요."
"양공자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요."
"장로님께서 이 양모를 믿으신다면 이 양모가 시키는대로만 하십시오. 오독방과 모용세가가
서로 참살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이 일은 중대한 일이라 난 양공자님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을 수는 없소,"
"이 양모가 목숨으로 보장할테니 믿어주시겠습니까?"
합포는 한참을 생각해보고 나서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이제 계속 믿지 않는다면 대장부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제23장 정(情)은 흐르고 흘러
합포는 양과와 작별하고 나서 혁중달과 함께 상청을 데리고 술집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걸
어가지 않아 뒤에서 누가 자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장로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
합포가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양과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양공자님, 무슨 일이오?"
양과는 혁중달을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5년 전에 이 양모는 독주여니와 한번 겨루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채설주를 꺼내 공격하는 바람에 그만 채설주에 물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독성이 아직
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나도 그 채설주의 극독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소. 그런
데 완안방방이 그걸 무기로 삼아 중원에서 사람들을 해치다니!"
"장로님께서 제게 해독약 좀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채설주는 서역의 한 파에만 있는 것이오. 우리는 종래로 그런 독물을 기르지 않소. 비록 같
은 신교라 할지라도 우리는 무공만을 닦을 따름이지요. 거참, 그 사람들이 독물까지 함부로
사용하다니 실로 한심한 일이로군."
양과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합포가 혁중달에게 물었다.
"임자에게 해독약이 있나?"
"본장군에게는 해독약이 없기도 하지만 만일 있다고 해도 저런 놈에게는 안주겠습니다!"
"무례하게 굴지 말게! 그럼 완안방방의 수중에는 해독약이 있나?"
혁중달은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지만 감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 아가씨가 해독약 한 알을 갖고 있기는 하지요."
합포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양과에게 말했다.
"양공자님,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그 해독약을 가져다주겠소."
그러자 혁중달이 콧방귀를 뀌었다.
"저 사람은 우리 아가씨의 원수입니다. 아가씬 절대 해독약을 내놓지 않을 거외다."
그러자 합포가 소리쳤다.
"허튼 소리 말아!"
혁중달은 자라목이 돼서 더 이상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서역신교는 위계 서열이 매우 엄격
했다. 합포는 장로이기에 중원 조정의 대신에 못지 않았지만 혁중달은 신교에서 아무런 지
위도 없는 사람이었고 단지 서역의 한 파에 속해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파가 서로 달랐
으므로 합포는 그 경계선을 넘어 함부로 관계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합포는
벌써 혁중달을 호되게 야단쳤을 것이었다.
양과는 아주 기뻐하면서 합포를 따라 가흥성으로 갔다.
완안방방은 객점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상청과 유대덕을 인질로 잡
아두기 는 했지만 모용협측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창 안달복달하고
있는 차에 합포와 혁중달이 돌아왔다. 양과가 합포를 따라온 것을 보자 완안방방은 깜짝 놀
라면서 검자루를 틀어쥐며 물었다.
"양과, 당신은 뭣하러 왔나요?"
그러자 합포가 대신 대답했다.
"이 사람은 내 친구요."
합포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상청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완안방방이 물었다.
"유대덕은 왜 없나요?"
혁중달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유대덕은 양효비가 빼앗아갔수다. 그 놈이 바로 오독방의 장세사자였더군요. 그 놈은 제 팔
까지 이렇게 부러뜨렸습니다."
완안방방은 그 말을 듣고 일이 상서롭지 못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양과가
함께 온 연유를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합포장로님, 양과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데 어째서 친구가 되었나요?"
"자꾸 캐묻지 말고 임자의 그 채설주 해독약이나 꺼내주게."
"장로님께서는 그 해독약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임자가 채설주로 저 사람을 상하게 한 건 본교의 계율에 몹시 어긋나는 일이오. 그러니 어
서 해독약을 꺼내서 저 양공자님에게 드리란 말이오."
"해독약이 제게 한 알 있기는 하지만 절대 저 사람에겐 줄 수 없어요! 장로님, 양과는 이미
오독방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만일 저 자가 아니었더라면 빈도는 벌써 인골염주를 빼앗
아 왔을 거예요."
"저 분은 내 벗이기에 난 저 분을 믿네. 임잔 잔소리하지 말고 해독약이나 꺼내란 말야."
완안방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장로인 합포와 맞설 수는 없었다.
"빈도가 휴대하고 있는 채설주의 극독은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갖고 있는 한 알의
해독약은 원래 내가 쓰려고 준비해 둔 것이에요. 그리고 혹 우리 사람들이 채설주에게 물리
면 치료해 주려고 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어찌 경솔하게 외인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자 혁중달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채설주가 우리 물건이기는 하지만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우리가 물리면 어떡
합니까?"
합포는 그들이 하는 말이 일리가 있기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완안방방이 채설주로 양과를 해쳤으니 그 독을 제거해주는게 그래도 사리에 맞는 일이다.
더군다나 내가 양과 앞에서 큰 소리치며 약속까지 한 이상 어찌 신용이 없게 처리한단 말인
가?'
양과는 이미 합포를 벗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웃는 얼
굴로 말했다.
"장로님의 호의를 이 양모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양모가 채설주에게 중독
되기는 했지만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그저 공력을 쓰는데 좀 지장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
하, 장로님, 이 양모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합포가 급히 양과를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완안방방, 지금 임자가 속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채설주를
잘 보관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물 수 있단 말인가? 본 장로는 해독약을 내놓을 것을 명령하
는 바이오."
이렇게 말하는 합 포장로의 표정은 아주 엄숙했다. 완안방방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로님께서 외인을 돕다가 전세교주님을 영접하는 일을 그르치게 되면 앞으로 전교(全敎)
의 상하 여러분들을 어떻게 대할 셈인가요?"
그 말에 합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나서 양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양공자님, 우리 두 사람은 연분이 있는 것 같으니 나는 당신과 의형제를 맺고 싶소. 주제넘
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소만?"
"주제넘은 생각이라니요? 그건 양과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각기 나이를 따져보니 합포가 양과보다 열살 위였다. 양과가 엎드려 절을
하면서 말했다.
"형님, 동생의 절을 받으십시오!"
합포는 기뻐하면서 양과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동생, 어서 일어나게. 우린 오늘부터 의형제이니 복도 함께 나누고 어려움도 함께 나누세!"
"이 양과는 형님과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기를 원합니
다!"
"좋아!"
두 형제는 서로 포옹하고 나서 유쾌하게 웃었다.
혁중달이 완안방방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합포장로가 양과와 의형제까지 맺는걸 보면 분명히 우리와 맞서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완안방방은 미간을 찌푸렸다. 합포가 완안방방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나와 의형제까지 맺었으니 외인으로 칠 수 없는게 아닌가? 그러리 어서 해독약
을 내놓게."
완안방방은 하는 수 없이 틀 속에 끼워두었던 한 알밖에 없는 해독약을 꺼내더니 달갑지 않
은 표정으로 합포의 손에 넘겨주며 말했다.
"빈도는 장로님의 체면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절대 양과와 교분을 가지려는게 아니에요."
합포는 해독약을 양과에게 넘겨주며 미소를 지었다.
"동생, 이제는 채설주의 독 때문에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네!"
양과는 합포가 자기와 의형제를 맺자는 의도를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형님의 이 고마운 은혜, 이 동생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 사인데 그런 인사치레의 말은 하지 말게나."
합포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완안방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 해독약은 어떻게 복용해야 하나?"
채설주의 극독은 대단한 것이어서 중독되면 대개 목숨을 잃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해독약
만 복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안방방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속이려고 들었
다.
"이 해독약을 복용하려면 반드시 무근지수(無繼之水)가 있어야 해요."
"뿌리없는 물이라니? 오, 빗물(雨水)이란 말이지?"
"그것도 늦가을의 빗물이라야 해요. 또 복용하기 전에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조용히 지내
야만 약효가 제대로 난단 말이에요."
"백일 후면 겨울로 접어들텐데 어떻게 비가 올 수 있겠나?"
"그럼 내년까지 기다리는게 좋지요. 양공자님 체내의 독은 일년 동안 잠복해 있어도 별 상
관이 없어요."
"임자 그게 무슨 말인가?"
합포가 화가 나서 말하자 양과가 그를 말렸다.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동생은 당장 동굴로 들어가 백일 동안 조용히 도를 닦겠습니
다. 백일 후에 마지막 비가 내릴지도 모르지요."
완안방방이 깔깔 웃어대며 대답했다.
"그럼요. 양공자님은 과연 현명한 분이에요. 강남은 날씨가 서서히 차가워지기 때문에 비도
자주 오지요. 빈도는 당신이 속히 해독할 수 있기를 바라겠어요."
완안방방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양과가 8뭘 15일 이후에 이 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전세교주
를 영접하는 일을 그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야말로 소인배의 뒤틀린 심
사를 그대로 드러낸 말이었다. 그러나 영문을 알길 없는 합포가 두 손을 합장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동생은 어서 떠나도록 하게. 휴, 동생이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할 때쯤 되면 이 형
은 이미 전세교주를 맞이해 서역으로 돌아갔을 때일거네."
"그러면 이 동생이 꼭 서역으로 가서 형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좋아, 그때 이 형은 동생을 성대하게 대접할 것일세."
양과는 의형과 작별하고 객점에 돌아와 머리를 굴렸다.
'해독약은 수중에 넣었는데 어디 가서 백일 동안 조용히 지낸단 말인가? 그래, 종남산의 고
묘로 돌아가는게 좋겠다. 시끄럽게 굴 놈도 없으니 조용히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해독약을 품 속에 넣다보니 그 안에 인골염주가 여전히 들어 있음을 알았다.
'안될 일이다. 합포장로와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고 나를 위해 이렇듯 애까지 써 주었는데
내가 어찌 그냥 가버린단 말인가?'
인골염주를 합포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으나 완안방방과 혁중달이 소문을 퍼뜨릴까봐 두려웠
다. 또 합포는 너무나도 정직한 사람이라 사람들 앞에서 혹시 말이라도 꺼내게 된다면 도리
어 큰 재앙이 될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체내의 독을 제거하려던 마음을 떨쳐버리
고 의형인 합포장로가 전세교주를 찾는 일을 암암리에 도와주고 또 친히 인골염주를 줌으로
써 형제 사이의 정분을 다하기로 작심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과는 합포와 완안방방이 상청을 꽁꽁 묶어서 객점을 나가는 것
을 보게 되었다. 양과는 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겨 그들이 북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뒤를 밟았다.
그들은 한동안 걸어가다 다른 한 객점 밖에 도착했다. 이 객점은 아마도 가흥부에서 가장
큰 객점인 것 같았다. 그 입구에는 칼로 무장한 두 장정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관부도 아닌데 보초까지 세우다니 ?'
양과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두 장정이 합포 일행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게 섰거라!"
그 두 장정은 꽁꽁 묶인 상청을 보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상청나리가 아니십니까? 나으리…… 아직 무사하셨군요."
그 두 사람은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었기에 상청이 물었다.
"난 잘 있었네. 모용공자님은 안에 계신가?"
완안방방도 입을 열었다.
"어서 모용협에게 나오라고 해라 내가 상청의 목을 자르겠다고 하더라고 알리란 말이다!"
그 중의 한 장정이 다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들어가서 알리겠소."
그 장정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나는 듯이 객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얼마 안되어 탁장청이 소이선생과 능소, 전방 등을 데리고 나왔다. 탁장청이 상청을 보고 말
했다.
"상청 형님, 고생이 많았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오. 모용공자님은 아직 떠나지 않았소?"
그러자 소이선생이 대답했다.
"모용공자님께선 밤을 도와 떠나셨습니다. 만일 그 분이 떠나지 않았다가는 상청 형과 대덕
형이 위험하게 되니깐요."
상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이미 그랬으리라고 짐작했었소."
모용협은 상청, 유대덕 두 사람이 완안방방에게 인질로 잡히고 또 완안방방이 그 두 사람의
손발을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통에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소이선생이 계책을 생각해냈다.
"공자님께선 먼저 떠나십시오. 완안방방이 협박한다 해도 상청 형과 대덕 형을 쉽사리 해치
지는 못할 겁니다. 공자님께서 이 곳에 계시면 그 여승이 공자님 앞에서 상청 형과 대덕 형
의 수족을 자를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그걸 차마 어찌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모용협은 그 계책을 듣고 나서 소이선생과 탁장청을 남겨 서역신교와 오독방의 거동을 살피
게 하고는 먼저 모용세가로 돌아갔던 것이다.
상청이 말했다.
"대덕 동생은 양효비에게 잡혀갔소, 그 양효비란 놈은 오독방의 장세사자인데 무슨 소식이
없었소?"
"양효비는 벌써 왔었습니다. 대덕 형을 끌고 와서 오군영하고 교환하려고 했죠. 그러나 공자
님이 안 계시자 바로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러자 완안방방이 소리쳤다.
"모용협이 의형제들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리라고는 믿지 않아. 탁장청, 어서 모용
협을 불러내!"
합포도 소리쳤다.
"너희들은 어서 그 인골염주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상청을 요절내리라. 그런
연후에 내가 사정을 두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탁장청이 안색을 흐리며 물었다.
"넌 어떤 놈이냐?"
그러자 상청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전세교주를 맞으러 온 합포장로인데 무공이 대단하오. 탁공자님은 절대 이 사람
을 깔보아서는 안되오!"
그 말을 듣고 탁장청은 속으로 움찔 놀랐다.
'신교에서 빨리도 왔구나. 다행히도 모용형이 이미 떠났으니 망정이지 시끄러움을 면치 못
할 뻔했다.'
먼 곳에 숨어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합포장로가 결국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그러다가 양과는 다시 합포장로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았다.
'하긴 이런 대사를 앞에 두고 누군들 한쪽 말을 그대로 믿겠는가? 제발 싸움이나마 일어나
지 말아야 하는데.'
소이선생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인질이 저쪽 사람들의 수중에 있는 만
큼 싸우게 되면 절대 자기쪽으로선 이득될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이선생은 웃으면
서 말했다.
"사태님께서 못 믿으시겠다면 객점에 들어와 살펴보시지요."
완안방방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객점 안으로 들어가서 사방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과연
모용협은 없었고 그가 묵었던 방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다. 객점 안에서 나온 완안방방
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장로님, 모용협이 정말 인골염주를 가지고 떠나버렸어요."
그 말을 들은 합포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화를 참을 수가 없는지 곁에 있던 사발만큼 굵은
백양나무 줄기를 주먹으로 한 대 치며 소리쳤다.
"가자! 사부님과 함께 추격하자!"
그리고 합포 일행은 상청을 끌고 가버렸다.
탁장청이 검을 빼들고 상청을 구하려고 들자 소이선생이 급히 말렸다.
"저 놈이 힘이 대단한 걸 보니 확실히 남달리 뛰어난 데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러니 우리가
경거망동했다가는 오히려 상청 형에게 더 불리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청이 합포와 완안방방에게 끌려가는 것을 눈을 빤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상청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업이 중요하니…… 난 신경쓰지 마시오!"
소이선생이 말했다.
"상청 형과 대덕 형이 무사한 걸 보았으니 우리도 떠납시다."
소이선생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객방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했다.
'방금 양효비가 오독방의 장세사자라고 상청 형이 말했는데 아마 정말일게다. 그런데 양효
비는 왜 유대덕을 인질로 삼고 오군영과 교환할 생각만 하고 인골염주 말은 일언반구도 하
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 그다지도 색에 미쳤단 말인가?'
인골염주를 도적맞은 후 모용협과 소이선생은 뭇사람들에게 절대 이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
게 했으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즉시 참한다고 명을 내림과 아울러 가짜 인골염주를 만들
일을 의논했었다. 소이선생은 갑자기 바로 오군영을 생포했을 때 인골염주가 사라졌던 일이
생각났다. 오군영은 양효비와 그전부터 같이 있었는데 그때 양효비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
았던 것이다. 오늘 양효비가 찾아와서 오군영만 내놓으라고 하던 일을 생각해 낸 소이선생
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지. 분명 그 양효비란 놈이 인골염주를 훔쳐갔을 것이다.'
그리고 소이선생은 급히 편지 한 통을 써 부하에게 주면서 명했다.
"얼른 빠른 말을 잡아타고 이 편지를 모용공자님에게 전하라. 절대 편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만일 편지를 잃어버리게 되면 모용공자님에게 어떡하든 양효비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
씀드려라."
부하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양과는 양효비가 유대덕을 오군영과 교환해 갔다고 하는 소이선생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오군
영이 모용협의 수중에 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과는 오군영에게 미움을 사기는
했지만 줄곧 자기 때문에 그녀의 일신이 망쳐진 것이라고 자책하는 터였다. 5년 전에 오군
영이 벌거벗은 몸으로 자기 품에 기어들었을 때도 절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
지만 자기에 대한 그녀의 애틋한 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내가 그녀와 한 방에 있었던 게 비록 혼란 속에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명예는 어쨌
든 손상이 간 셈이야. 후에 그녀를 효비와 짝을 짓게 한 것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어. 휴,
이 양모는 오군영에게 낯도 못들 정도로 미안한 짓을 많이 했으니 꼭 그녀를 구해내야 한
다.'
그래서 양과는 가흥을 떠나 와불산을 거쳐 모용세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숲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비명소리와 여러 사내들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뒤섞
여 들려왔다. 그래서 양과는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무슨 수작들이냐?"
네 사나이가 거의 나체가 된 두 남녀를 둘러싸고 희롱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진웅, 장기,
연무, 임맹이었다. 복판에 있는 사람은 확도였는데 벌거벗은 몸으로 여인의 하의를 기를 쓰
고 찢고 있었다.
노한 고함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어 살펴보던 사대제자들은 소리지른 이가 양과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사부님, 양…… 양과가 옵니다!"
확도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진용이 급급히 자주및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쳐주었다. 확
도는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뇌까렸다.
"양과, 또 네놈이 본왕의 길사를 망치는구나!"
"백주에 여인을 강간하려 들다니?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양과가 이렇게 소리 지르며 목검을 빼들고 찌르려고 하자 확도는 뒤로 물러서며 부채를 꺼
내 들었다.
"이 양과야, 본왕은 네놈과 놀 겨를이 없다!"
확도는 이렇게 말하더니 사대제자를 거느리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양과가 앞을 바라보니 한 여인이 땅 위에 쓰러져 있는데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새하얀 나체
가 드러나 있었다. 양과는 두루마기를 벗어 그 여인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그런데 그 여인은 울기만 할 뿐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
시 말했다.
"어서 일어나 옷을 입으시오. 이 양모가 집으로 데려다 줄테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양공자님, 난 이미 저놈들에게…… 혈도를 찔려…… 엉엉……."
양과는 그 여인의 목소리가 아주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과는 머리를 돌려 살펴보다
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접아. 임자로구만?"
무채접은 부끄러움을 못 이겨 대성 통곡했다.
"양공자님, 전…… 전 당신을 대할 낮이 없어요. 절 죽여주세요."
양과가 급히 꿇어앉아 그녀의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부드러운 여인의 살결에 손이 닿자
양과는 당황해서 얼른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 뒤 두루마기를 입혀주었다.
"접아, 임잔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야? 또 어째서 확도란 나쁜 놈을 만나게 되었냔 말이야?
왜 객점에 가만히 있지 못했어? 내가 그나마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임잔
그 나쁜놈에게 능욕을 당할 뻔했잖아?"
그 질책에 무채접은 더욱 치욕감을 느껴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미자를 집어들어 가슴을
찌르려 했다 양과가 급히 손을 놀려 아미자를 빼앗으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무채접은 창백해진 얼굴로 흐느끼며 말했다.
"저의 몸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바쳐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확도란 놈이 제 몸을 보았으
니…… 난 당신을 대할 낯이 없고 말았어요!"
양과는 감동해서 그녀를 품 속에 끌어안으며 다정한 말로 위안을 해주었다.
"귀여운 접아. 이 양모에게 무슨 복이 있다고 임자가 이처럼 내게 마음을 주는거야? 임자가
몸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이 양모는 절대 임잘 버리지 않을거야."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그 용녀도 몸을 버렸었지. 하지만 나에겐 용녀는 영원히 옥같이 깨끗한 순백지신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나는 단지 이 세상의 색에 주린 도적들만을 미워할 따름이었어.'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그는 또다시 물었다.
"접아, 임잔 어떻게 이곳에 온거야?"
"전…… 전 당신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몹시 근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찾
으려고 나왔다가 확도와 그의 사대제자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던 거예요. 혼자 힘이라 이겨내
지 못하고…… 엉엉…… 양공자님, 그놈들을…… 엉엉…… 몽땅 죽여주세요."
양과는 그녀가 자기를 찾다가 음적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감동했다.
"좋아, 내가 조만간에 확도와 그 사대제자들을 깡그리 없애버리고 말거야."
"양공자님, 정말 절 버리지 않으실거죠?"
"내 말을 믿어.
그러자 무채접은 양과를 꼭 끌어안으면서 가슴에 머리를 파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
시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
"그럼 저에게 장가들겠다고 맹세를 해주세요."
"좋아. 난 록 임자에게 장가들겠다고 맹세하지."
무채접은 심히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방금까지 갖은 발악을 다하고 난 끝이라 피로한 나머
지 자기도 모르게 양과의 품 속에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양과는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다 보니 여인의 향긋한 체취가 콧구멍을 간지럽
힘을 느꼈다. 양과는 갑자기 이 여인과 함께 지낸 나날들을 회상했다. 무채접이 가는 곳마다
자기를 졸졸 따르고 미칠듯이 사모하던 일도 생각났다. 갑자기 무채접이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양공자님, 가지 말아요! 가지 말라니까요 !"
"난 가지 않아."
양과가 급히 대답했다. 무채접이 그냥 잠든 채로 있는 것을 보고서야 양과는 그녀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양과는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소룡녀가 생각났다.
'난 이미 금생에 소룡녀 한 사람에게만 맘을 주기로 맹세했다. 그러니 그녀가 어디에 있건
꼭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방금 또 무채접에 장가들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난 왜 이
다지도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을까?'
그리고 양과는 무채접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접아, 방금 내가 한 말을 진짜로 믿지 말아. 절대 진짜로 믿어서는 안돼. 그런데 이 양모는
사내대장부로 어떻게 신의없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양과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무채접이 깨어난 뒤 자기가 한 말을 잊어주기
만을 바랐다
무채접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양공자님, 제게 한 맹세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양과는 부끄러워 얼굴
이 빨개진 채 무채접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접아, 임잔 꿈을 꾼거야. 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자 무채접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천천히 바라보며 말했다.
"꿈을 꾼게 아녜요. 전 당신이 제게 장가들겠다고 한 맹세를 똑똑히 들었어요."
양과는 딴청을 부리면서 그 답답한 상황을 얼버무렸다.
"우리도 이젠 떠나야지."
무채접이 양과의 두루마기를 걸치자 너무 크고 헐렁해서 띠로 허리를 동여맸더니 날씬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굴곡진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그녀는 마치도 산골
농가집의 처녀같아 보여 깨끗하고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과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홀린듯 차 한 잔 식을 무렵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접아. 임잔 정말 예뻐."
무채접이 깔깔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몇바퀴 돌자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각별한 아
름다움을 더해주는 듯 싶었다.
"당신이 좋아하신다면 앞으로 저는 꼭 이 모습으로 단장하겠어요,"
양과는 20여년이나 강호를 떠돌아 다녔기에 여인들이 마음을 한 번 주기 시작하면 결코 돌
아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접아가 이처럼 내가 하는 한 마디의 말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걸 보니 나를 얼마나 깊이 사
랑하는지 알 수 있겠구나.'
양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가 양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야만 무채접의 생각을 돌
려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양과는 말했다.
"접아. 난 임자에게 말할 것이 있어."
"어서 말씀하세요."
"난 한달 남짓 동안 줄곧 임잘 속여왔어."
"저도 당신이 생각이 깊은 분인줄 알고 있어요. 아마 절 놀리느라고 그랬을테죠."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하지. 난…… 난 양효비가 아니야. 사실 난…… 내가 바로 양과야."
"또 사람을 놀리고 있네요."
"내가 한 말은 정말이야."
양과는 이렇게 말하며 옷섶을 헤쳐 팔이 잘려나간 곳을 보여주었다.
무채접은 깜짝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 당신은 정말 신조협이로군요? 왜 절 속였나요?"
"이 양모에게는 실로 말못할 고충이 있었어."
그러자 무채접은 냉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당신이 저에게 좋은 마음을 품고 있을 리는 만무하죠? 그러면 왜 양효비로 변장했나요?"
"우리는 같이 다니긴 했지만 이 양모는 임자를 깍듯이 존중해 왔어. 내가 나쁜 심보를 품었
더라면 능히 이럴 수 있겠어? 이 양모에게는 실로 말못할 고충이 있었다니까."
"당신 스스로 말씀하지 않았나요! 날 속였다고 말이에요."
"5년 전에 이 양과는 집법사자가 바로 나의 아내 소룡녀일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난
진상을 밝혀보려고 양효비로 변장했고 그래서 임자도 속였던 거야."
"그래서 진상을 밝혀냈나요?"
"집법사자는 몸매나 어조가 소룡녀임에 틀림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오독방에 당도한 때와
소룡녀가 실종된 시기가 일치하거든. 다만 집법사자의 진짜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을 따름
이지. 하지만 그처럼 고명한 무공을 가진 데다가 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은 소룡녀
를 빼놓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럼 당신은 언니가 바로 소룡녀라고 단정하는 거로군요?"
양과가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무채접이 다시 물었다.
"소룡녀가 바로 언니라고 쳐요. 그럼 언닌 당신의 아내인데 왜 당신을 보고 아는 척도 하지
않나요?"
"아마 서로 만나기로 한 그 16년이란 기한이 채 차지 않은 이유 때문이 아니면 그녀가 일종
의 미혼약을 복용했기 때문일거야. 아마도…… 아마도 그녀에게도 무슨 다른 고충이 있다고
봐……."
"흥, 난 그걸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어서 말해봐."
양과가 이렇게 묻자 무채접은 입을 열듯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양과는 무채접의 어깨
를 틀어쥐고 다그쳐 물었다.
"접아, 어서 말해봐.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니가 진짜 소룡녀라고 하더라도 당신들 부부는 이처럼 여러 해나 헤어져 있었던 건 틀림
없는 사실이잖아요. 당신이 언닐 미칠듯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언니가 이미 변심했는지도 모
르죠."
"그럴 리 없어. 그녀는 절대 변심하지 않을거야. 소룡녀는 나와 정이 아주 깊었으니 절대 변
심할 리가 없어!"
"아마 언닌 당신보다 무공이 썩 강한 남자에게 맘이 쏠렸을 거예요. 만일 그 남자가 다년간
줄곧 언니를 아껴 주었다면 언니가 감동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단정할 수 있겠어요? 사실 천
하의 여인들이란 모두 다 같은 거예요. 누구든 애무해주기만 하면 진짜로 사랑이 생기지는
않더라도 몸을 허락하게 마련이거든요."
"그렇다면 용녀가 이미 딴 사내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언니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요."
양과는 그제서야 약간 시름이 놓였다.
"접아, 내가 임잘 속인 걸 원망하지 말아줘……. 허허허, 하지만 임자가 왜 원망하지 않겠
나."
그러자 무채접이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당신은 정말 절 속였다고 생각하나요?"
"양효비가 나로 변장하니까 나도 그 방법대로 양효비로 변장했거든. 임자가 날 양효비로 잘
못 알았는데, 그것이 내게 속은게 아니고 뭐야?"
"그래 당신은 제가 정말 당신한테 속은 줄 아시나 보죠?"
"임자가 날 믿지 않았더라면 이 여러 날 사이에 임자가 어찌 그처럼 내게 잘 대해줄 수 있
었겠나……. 임자가 양효비를 좋아한다는걸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당신은 잘못 알고 있군요."
"뭐라구?"
양과가 놀라서 이렇게 묻자 무채접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사실, 철검보에 있을 때부터 전 당신이 양효비로 변장한 걸 알아차렸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깔깔 웃어대면서 숲 밖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은 양자가 그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임…… 임자가 날 알아 보았다구?"
무채접은 흥분해서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으며 두 눈동자는 머루알처럼 반짝였다.
"양효비는 본방에 가담한 뒤부터 온종일 저와 함께 무공을 닦은 사람인데 똑같이 변장했다
고 제가 그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할 것 같나요?"
"하지만 집법사자는 날 알아보지 못하던걸."
"언니는 양효비의 경망스런 성격을 싫어했던 까닭에 매번 무공을 전수해주고는 총망히 떠나
버리곤 했어요. 그러니 자연히 양효비에 대해 아주 익숙하지는 못했던 거죠."
"임자가 진작에 나를 알아보았다면 왜 폭로하지 않았나? 나와 함께 가흥까지 와서 오독방의
대사까지 망쳐놓지 않았나?"
"사실 여방주님은 저의 양부라 전 하고 싶은대로 해왔고 아버님도 절 간섭하지 않았어요.
전 교화사자의 직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저 그것으로 위풍
을 좀 부릴 뿐이죠. 오독방에서 하는 일이 수없이 많은데 당신 때문에 한두 가지가 엉망이
된다 해도 별로 대수로울 건 없는 일이에요."
양과는 비로소 이 여인이 제멋대로 행동하기 좋아하는 성격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생각했
다.
'여노악이 이런 수양딸을 데리고 있자니 골치깨나 아픈 일이 많겠구나.'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임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왜 나를 따라왔나?"
양과는 이렇게 묻는 한편 속으로 생각했다.
'임잔 이런 짓을 하면서 그래 효비에게 혼날 일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무채접은 한동안 양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눈치도 없는 사람같으니라구. 앞으로 전 당신 일에 상관하지 않을래요!"
무채접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급히 획 돌아서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양과는 그녀가 왜 화
를 내는지 알 수 없어 뒤따르면서 말했다.
"접아, 임자에겐 말할 수 없이 미안해. 임자가 주는 벌이라면 그 어떤 벌이라도 받을 생각이
있어."
그러자 무채접이 멈추어서서 고개를 돌리더니 따져 묻는 것이었다.
"제가 당신 보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 있나요?"
양과는 뜻밖의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더러 죽으라고 하겠다니,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무채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영웅호걸이신데 아녀자를 속인 하찮은 일로 죽을 수야 없지요. 만일 소룡녀가 당신
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당신은 죽을 수 있나요?"
그 말을 듣고 또다시 어리벙벙해진 양과는 머리를 굴렸다.
'용녀는 나에 대한 정이 깊어 절대로 내게 죽으라고 하지는 않을거다. 도리어 그녀는 내가
나쁜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날 떠난 것이 아닌가? 용녀가 정말 내게 죽으라고 한다
면 난 절대로 주저하지 않을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과는 자신에 찬 소리로 대답했다.
"용녀가 내게 무엇을 시킨다면 난 그대로 할테야. 그녀가 만일 죽으라고 한다면 난 그녀 앞
에서 주저없이 죽고 말겠어!"
무채접이 그 말을 듣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 가지고,
"훌륭해요. 아주 훌륭해요. 난 당신이 그러리라는 걸 이미 짐작했어요."
하고 말하더니 나는 듯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양과가 몇 번이나 불렀으나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양과는 뒤쫓아가려고 하다가
생각을 돌려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양과는 자기가 오군영을 구해내게 되면 무채접이 시끄럽게 굴 수도 있으므로 제 갈 데로 가
도록 내버려두자고 생각했다.
양과는 경공술을 써서 반 시진쯤 달리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경공을 쓰면 빠르기야 하지만 말처럼 계속 달릴 수는 없다. 말을 구하지 않으면 모용협을
따라잡는다 해도 그때쯤 되면 몸이 완전히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칠, 팔리를 가면 거와장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양효비로 변장해 장세
사자의 명의를 대고 오장주에게서 말 한 필을 빌린 후 오군영이 잡혀간 일을 알려주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 양과는 급히 풀 숲으로 몸을 숨겼다. 소이선생, 탁장청,
능소, 전방 등이 십여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말에 채찍질을 해가며 달려오고 있었다. 탁장
청은 길이 세 갈래로 난 곳에 이르자 서쪽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이선생, 저 앞이 바로 거와장이오."
소이선생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오자겸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마 우리에게 악담을 퍼붓게 될겁니다. 그때 탁공자님께
서는 꾹 참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은 내 아버지와 교분이 있는 분이시니 이 탁모가 좀 참도록 하지요."
이렇게 말하고나서 인마는 모두 서쪽 길로 접어들었다.
양과는 이 사람들이 거와장으로 원하러 가는지 알 수 없어 지름길로 경공술을 써가며 그들
을 앞질러 거와장에 당도했다
거와장의 대문 앞에는 여러 명의 장정들이 파수를 서고 있었다. 양과는 슬그머니 높은 담벽
을 훌쩍 뛰어넘었다. 때마침 한 장정이 담벽 안쪽에서 오줌을 누려다가 양과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외쳤다.
"누구냐?"
창과는 즉시 그자의 혈도를 찔러놓고선 옷을 벗겨 갈아 입었다 그리고 잡초를 오른쪽 팔소
매에 쑤셔넣은 다음 파란 색깔의 모자를 쓰고 흙을 얼굴에 발랐다. 그랬더니 거와장의 장정
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때 대문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탁장청 일행들이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소염라 전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공자님이 방문했다고 어서 오장주님께 알려라!"
파수를 보던 장정 하나가 나는 듯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오자겸, 오군량 두 부자가
장정 여러명을 데리고 대문 입구로 나왔다.
"탁장청, 임잔 뭣하러 왔나?"
오군량이 이렇게 외쳤다.
거와장은 오독방의 주작분타였고 요 몇년 사이에 모용세가와는 아귀다툼을 하느라고 옥신각
신하다 보니 탁장청과 내왕을 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군량은 첫마디
부터 말투가 곱지 않았다.
"이 탁모가 오장주 부자를 만나뵈러 왔습니다."
탁장청은 공손하게 대답하며 두 손을 모아 쥐고 예를 올렸다.
양과가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발짝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보
니 백여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병장기를 들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장정 하나가 양과의 옆을
지나가다가 귓속말로 물었다.
"임잔 왜 병장기를 지니지 않았나?"
"난…… 난……."
"아직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은 게 아닌가?"
양과가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 장정이 양과에게 주홍색의 환약 한 알을 주면서 말
했다.
"어서 복용하게. 오장주께서는 주로 거와를 쓰신다네."
그 장정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대오를 쫓아 바삐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 장정의 신형이 눈에 퍽 익어 보이기는 했지만 얼굴을 자기 얼굴보다도 더 더럽게 만들어
놓았기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손에 주홍색 환약을 받아든 양과는 5년 전에 거와
가 독을 뿜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것이 정말 해독약이란 말인가? 그 장정이 나를 속인 거라면 어쩌지?…… 그럴 리는 없을
거다. 그 장정이 내가 이 마을의 장정이 아니라는걸 알았다면 벌써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난 양과는 얼른 해독약을 삼키고는 그 장정들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숱한 장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 탁장청 일행은 뒤로 한장 남짓 물러섰다. 소이선생
이 말잔등 위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장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긴장하십니까. 하하하‥‥‥ 우린 절대로 악의를 품고 온게 아
닙니다."
오자경도 선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귀빈들이 오셨는데 이 늙은이가 어찌 공손히 마중을 나오지 않겠나? 모두들 여로에 피로했
을 터인데 마을로 들어가 쉬도록 하게."
오자겸이 연이어 소리쳤다.
"어서 이분들에게 길을 열어드려라!"
그 소리와 함께 당장 길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손에서 칼을 놓지 않은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품이 귀빈을 맞이하는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군량이 위풍당당하
게 말했다.
"탁공자님, 소이선생. 자 들어가시지요!"
탁장청이 들어가려고 하자 소이선생이 제지했다. 소이선생이 귓속말을 했다.
"탁공자님, 정말 들어가시렵니까?"
"만일 들어가지 않는다면 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지 않겠소?"
"탁공자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들은 적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지 않
습니까? 우리들을 끌어들여 사면포위를 하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어찌 이 탁모가 저까짓 놈들을 두려워한단 말이오?"
소이선생은 세 치나 되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필부의 객기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저 자들은 수가 많으니 꼬임에 빠지지 말아야지요."
탁장청은 하는 수 없이 노기를 누르면서 대답했다.
"선생의 말씀을 따르리다."
맞은편에 있던 오군량이 또다시 큰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왜 들어오지 않는거요? 이 마을에 호랑이라도 숨어 있단 말이오?"
그러자 한 장정이 맞장구를 쳤다.
"소장주님. 저 모용세가의 놈들은 본래 쥐새끼처럼 담이 작은 놈들이지요. 나으리와 노장주
나으리의 위풍에 겁을 집어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제 소견 같아서는 저 자들이 겁이 나서
오줌똥을 내갈기지 않도록 병장기를 치워버리는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여러 장정들이 홍소를 터뜨렸다. 오군량은 웃음을 참으면서 짐짓 점잖은 척하면서
말했다.
"탁공자님은 그래도 강호에서 명성이 난 젊은 협객이신데, 너희들이 무례한 소리를 해서는
안돼!"
오군량은 그리고 나서 탁장청을 향해 두 손을 모아쥐며 말을 이었다.
"탁공자님, 들어가십시다! 장정들이 절대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 마십시오……. 하하
하…… 두려워 말란 말입니다."
깔보는 말투가 확연했기에 탁장청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검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임자가 감히 이 탁모를 깔볼 셈인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런데 난 정말 알 수 없구려. 탁공자님은 그처럼 거센 척
하면서 왜 들어오지 못하는 거요?"
그러자 몇몇 장정들이 또다시 조롱하기 시작했다.
"감히 들어오지 못하겠거든 어서 썩 물러가란 말이여!"
"여봐, 저 박씨는 저기에 서서 뭣하고 있는 거야?"
"히히히, 아마도 우릴 위해 파수를 볼 셈이라는군?"
탁장청은 두 눈을 부릅뜨다가 다시 실눈으로 만들더니 눈에 살기를 담고 있었다. 소이선생
이 급히 말렸다.
"탁공자님, 그러지 마십시오……."
하지만 탁장청은 곧장 말안장 위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대문 쪽으로 훌쩍 날아들어 가는 것
이었다. 오군량이 검을 뽑아들면서 말했다.
"탁공자님은 들어오는 솜씨가 남 다르군. 날아서 들어오다니……."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탁장청은 벌써 오군량 앞에 당도해 검으로 내찔렀다. 오군량은
급히 검으로 막았으나 그 기세가 대단해 막아낼 수 없을 줄 어찌 알았으랴? 탁장청의 검날
끝이 목에서 반자도 채 못되는 거리까지 날아들자 오군량은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땅 위에
서 연거푸 두 번이나 뒹굴었다. 겨우 위험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참으로 꼴불견이 되었다.
장정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오군량은 창피한 끝에 화가 나서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탁가야, 잘난 척 말아라!"
탁장청은 상대방의 검술을 알고 있었던지 몸을 피하지도 않고 여전히 검으로 오군량의 목을
내찔렀다. 오군량의 초식은 원래 아래쪽으로 찌르다가 중도에 방향을 바꾸어 위쪽을 찌르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탁장청이 미리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오군
량은 탁장청의 검끝이 자기 목으로 날아오자 그 초식의 뒷부분을 사용할 생각도 못한 채 또
다시 뒤로 훌쩍 물러서며 땅 위로 뒹굴지 않을 수 없었다. 탁장청이 한 가지 초식으로 대번
에 오군량을 두 번이나 땅 위로 뒹굴게 한 것은 그들의 수준차를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었
다.
오군량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얼굴이며 머리에도 흙이 잔뜩 묻어 더러운 거지꼴이 되
었다. 그러자 뭇장정들 속에서 킥킥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군량이 화가 나서,
"입 다물지 못해!" 하고 소리치자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몇몇 심복들이 달려와 오군량의 흙먼지를 털어주려 하자 오히려 그가 말렸다.
그 장면을 구경하던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홍소를 터뜨리며 추잡한 욕설을 곁들였다.
오군량은 처음으로 탁장청과 겨뤄보는 것이었다. 그전에 비록 탁장청의 '절정검술'이 기막히
게 날카롭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기가 한 합도 겨
루어보지 못한 채 당해내지 못했으면 스스로 자신의 무공으론 상대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함에도 오군량은 자기가 일시 상대를 경시한 까닭이라고 여기고 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탁가야! 어디 본 소장주의 초식을 또 받아보거라!"
오군량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검을 쳐들자 즉시 눈이 아물거릴 정도로 검날 빛이 사방으
로 번쩍거려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탁장청은 태연자약한 기색
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속임수를 써보려는 수작이군 "
탁장청이 그 검날 빛의 중앙으로 검을 내찌르자 검날 끝은 바로 오군량의 목을 겨누며 날카
롭게 파고 들었다. 오군량은 자기가 휘두르는 검 안쪽으로는 바람조차 새어 들어올 틈이 없
다고 믿고 있던 차에 상대방의 검날 끝이 거침없이 쑥 들어오는 바람에 그만 깜짝 놀랐다.
"이크, 이건 또 무슨 초식이지?"
오군량은 기를 쓰고 검으로 상대방의 검을 막아 보려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검날 끝
이 자기 눈 앞에서 반짝거리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초식이구나. 피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땅 위로 뒹굴면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만 또다시 체면이 깎일 것이고 거와장의 수치
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탁장청의 검끝은 벌써 오군량의 목에서 세 치도 안되는 곳까지 들
어왔다. 오군량은 대경실색했지만 이젠 뒤로 나뒹굴 겨를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뭇장정들이 깜짝 놀라 일시에 칼을 들고 탁장청을 찌르려고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거리가
멀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소장주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 휙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건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탁장청의 검끝에 땅하고
부딪혔다. 그 바람에 탁장청의 검끝은 오군량의 목 옆으로 비켜나게 되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오군량은 대경실색해서 뒤로 열여덞번이나 뒹굴었다. 그는 이제 완전
히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한 장정이 외쳤다.
"소장주님, 다치셨군요."
오군량은 그제서야 목이 화끈거림을 느껴 손으로 더듬어보니 손에 시뻘건 피가 잔뜩 묻었
다. 아마도 검날 끝에 긁힌 것이 분명했다. 피와 흙이 한데 섞여 있었기에 좀 먼 곳에 서 있
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가 중한 줄로 알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죽을 고비에서 빠져나온 오군량은 한 쪽으로 피해서 상처를 싸맸다.
탁장청이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니 자기의 검날 끝에 와 맞은 물건은 푸른색의
옥반지였는데 세 조각이 나 있었다.
탁장청은 옥반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방향을 살펴보았으나 3장 되는 거리밖에 푸른 버
드나무만 서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놈이냐?"
탁장청이 소리를 질렀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탁장청이 오자
겸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당신에게 구원자가 있는 모양이구만? 그놈에게 어서 나오라고 하시오!"
오자경도 탁장청과 마찬가지로 의혹에 싸인채 속으로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거와장 안에는 이런 고수가 없는데. 3장도 넘는 곳에서 자그마한 옥반지를 던져 탁장청의
검이 빗나가게 하다니. 이 늙은 것도 이런 재간은 없지 않은가? 숱한 암기를 쓰는 고수들도
이런 재간을 부리기는 쉽지 않을텐데 이 고인이 암암리에 거와장을 돕는걸 보면 최악이라
해도 모용세가의 벗은 아닐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난 오자겸은 기회를 빌려 탁장청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탁공자님, 더 찾지는 말게. 이 마을의 장정들이라면 누구나 이만한 재간이 있음을 알아두게
나."
탁장청은 그 말이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걱정됐다. 숨어 있는 고수가 자기에게 암기
를 던진다면 막아내기가 힘들 것이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자경이 입을 열었다.
"임잔 이곳에 무슨 일로 왔나?"
"물론 좋은 일로 왔지요."
"그래? 내 아들의 목숨을 해치려고 살수를 쓰는 사람이 좋은 일로 왔을 수는 없을텐데."
"노장주님도 이 탁모와 검술을 한번 겨루어보실 생각이십니까?"
"탁씨가문의 '절정검술'이 무림에서는 독자적인 것이고 초식을 한 가지씩 쓸 때마다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더네만…… 허허…… 이 늙은이는 줄곧 그 말을 믿지 않았었지.
이 기회에 한번 공자에게 배워볼까 하네,"
오자겸은 이렇게 말하더니 한 자루의 고송보검(古松寶劍)을 뽑아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용이
울부짖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나는데 그야말로 훌륭한 검이었다.
탁장청은 그것을 보고 속으로 움찔 놀랐다.
'오장주의 공력이 대단한 데다가 저 보검도 보통 검이 아니니 아주 조심해야겠구나.'
오자겸은 서릿발같은 검날 빛을 자랑하며 다시 말했다.
"탁공자님이 보기에는 이 검이 어떠하오?"
"훌륭한 검이군요."
"이 늙은이는 십팔년이나 이 검을 써보지 않았네. 십팔년 전에 이 검으로 하내(河內)의 열세
도적을 죽였고 소림(少林) 동두승(銅頭僧)의 목을 잘랐었지. 휴, 십팔년이 지났으니 지금도
이 검이 훌륭한 검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뭇장정들은 노장주가 오랫동안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은 일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 고
송보검을 뽑아든 것은 탁장청을 죽임으로써 아들을 대신해 복수를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 상처를 다 싸매고 난 오군량도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그 망녕된 놈을 죽여버리십시오!"
그러자 오자겸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들아, 이 애비가 저 놈을 산 채로 잡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오자경이 이렇게 큰 소리를 치자 탁장청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놈에게 어디 그럴만한 재주가 있나 보자!"
그 말에 오자겸은 흉악한 눈길로 사방을 쓸어보며 대꾸했다.
"뭐야? 그래 어디 한번 내 솜씨를 보아라!"
오자겸은 고송보검을 쳐들더니 검끝으로 탁장청을 겨누었다. 탁장청은 오자겸의 이 공격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기세를 갖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역시 검을 쳐들어 오자겸의 가슴
을 겨누었다. 사생결단의 싸움이 당장 벌어질 판이라 모두들 두 눈이 휘둥그래진채 숨조차
마음놓고 쉬지 못했다.
소이선생은 탁장청이 실수라도 하게 되면 돌아가서 모용협을 만날 면목이 없을 거라고 생각
했다. 진짜 싸움이 벌어진다면 거와장측은 사람 수가 많은 데다가 천하의 삼절독에 속하는
거와까지 있기에 자기네로서는 유리할 게 없다고 판단되었다.
소이선생은 귓속말로 능소와 전방에게 옆에서 거들라고 부탁한 후 말에서 내렸다. 그는 잰
발걸음으로 탁장청의 곁에 와 오자겸을 향해 손을 모아 읍을 했다.
"오장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귀한 몸을 상하게 되면 큰 일 아닙니까?
탁공자님은 노장주님의 조카뻘이 되는 분이니 널리 관용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만일 임자의 아들이 남에게 수모를 당했다면 임잔 관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나?"
"저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남의 수모를 당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오군량은 노장주님
의 아들이고 제 아들이 아니니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 말을 듣고 오군량이 소리쳤다.
"아버지, 그 놈이 우리 부자를 모욕하는군요!"
오자겸도 놀리려고 하는 말로 판단하고는 소이선생을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네놈도 죽고싶어 찾아온 게로구나!"
"전 죽으러 온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죽으러 온 게 아니지요. 우린 노장주님께 기쁜 소식
을 알리려고 온 겁니다. 댁의 따님이…… 에참, 오장주님께서 화를 내시니 후일 다시 오도록
하지요.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소이선생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탁장청을 끌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오자겸이 급히
외쳤다.
"잠깐 기다리게. 임자가 내 딸이 어떻다고 말했나?"
오군량도 급히 달려나오며 물었다.
"내 여동생이 어디 있나? 어서 말해!"
소이선생은 오씨네 부자를 향해 절을 하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노장주님, 축하드립니다. 소장주님, 축하드립니다."
오군량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사설은 그만둬!"
오자겸은 속으로는 다급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을 띤 채 말했다.
"이 늙은 것이 기쁠 일이 무언가?"
"댁의 따님이 이미 훌륭한 신랑을 택했는데 그래 이게 기쁜 일이 아닙니까?"
오자겸은 속으로 생각했다.
'군영은 5년 전에 혼사문제로 변고를 겪은 끝에 천하의 모든 사내를 미워하게 되지 않았는
가? 그래서 스스로 사내차림을 하면서 다시는 여인노릇을 않겠노라고 맹세까지 한 처지인데
어찌 밖에 나가 신랑감을 택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난 오자겸이 다시 물었다.
"소이선생, 그게 무슨 말인가?"
"댁의 따님은 벌써부터 모용공자님에게 시집을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만일 5년 전의 그
변고만 없었던들 따님께서는 벌써 모용세가의 작은 부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휴, 생각하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그러자 오군량이 큰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그따위 허튼 소리를 집어치워라. 그래 내 누이동생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거
냐?"
소이선생은 오군량을 힐끔 바라보고나서 천천히 말했다.
"소장주님의 누이동생은 가흥부에서 다시 우리 모용공자님을 만났지요. 만나자마자 반해 한
사코 모용공자님에게 시집가겠다고 하는군요. 모용공자님도 소장주님의 누이동생을 사모해
온지가 오래라 두 남녀가 만나자 서로 떨어질 줄 모르더군요.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와
불산의 모용부로 갔습니다."
오군량은 그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애가…… 그 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정든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건 아주 좋은 일인데 여기에 그 무슨 되고 안될 일이 있단 말
입니까? 그들 한 쌍은 물 본 기러기요, 꽃 본 나비같이 서로 떨어질 줄 모르고 있답니다. 그
래도 저와 탁공자님은 정신이 말짱한 사람들이라 이 희소식을 전해 노장주님과 소장주님의
시름을 덜어드릴 생각이 났던 겁니다. 그런데 후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런 수모까지
당하게 되니, 휴, 그래 이게 한심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소이선생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섭섭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오자겸이 실눈을 뜨면서
물었다.
"듣자니 모용공자님은 작년에 장가를 들어 그 색시가 임신까지 했다던데 어떻게 또 내 딸
과……."
"그게 무슨 난처한 일입니까? 오소저가 모용공자님과 서로 뜻이 맞고 정이 들었으니 소실로
들어앉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러자 오군량이 화를 내며 소리질렀다.
"천금같이 귀한 내 동생이 어떻게 남의 첩노릇을 한단 말이냐? 허튼 소리 말아라!"
탁장청이 콧방귀를 핀며 말참견을 했다
"그 여자가 먼저는 양과와 한 방에 들었었고 그 뒤에는 양효비에게 시집갔었는데, 그런 천
한 여자가 모용공자님의 첩이 되었으면 만족할 일 아니오?"
오군량이 대노하여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네놈이 감히 허튼 소리를 계속 할테냐!"
탁장청도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소장주는 그래 또 한번 땅바닥에서 뒹굴어볼 생각인가?"
그 말에 오군량은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나서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오자겸은 속으로 생각했
다.
'내 딸 군영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이상 모용협이 마음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경솔하게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먼저 소식이라도 알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애가 모용협과 성혼을 했다면 탁장청과 소이선생이 어찌 이 거와장에 와 소동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난 오자겸이 다시 물었다.
"소이선생, 할 말이 있거들랑 시원히 털어놓고 할 것이지, 하필 남의 귀한 딸을 욕보일거야
있나?"
"노장주님께서는 과연 시원시원하십니다. 제가 털어놓고 말씀드리지요. 댁의 따님은 정말 모
용공자님과 함께 모용부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장주님께서 부녀 사이의 정분을 생
각해서라도 이후로는 모용세가를 원수로 치부하지 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임자가 이 일을 믿게 할 자신이라도 있나?"
그러자 소이선생이 품 속에서 진주목걸이를 꺼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노장주님께서는 이 물건을 알아보시겠지요?"
햇빛을 받아 진주목걸이가 밝은 칠색 무지개 같은 빛을 휘뿌렸다. 오자겸이 자세히 바라보
니 그것은 바로 딸이 아끼는 보물이었다. 그 목걸이는 백팔십 알의 진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알알이 윤택이 나고 크기가 아주 고른 일품가는 보물이었다. 그 진주목걸이는 딸이 줄곧 목
에 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옷깃에 가리워 있어 외인은 눈으로 볼 수조차 없었다. 만일 그
녀가 직접 벗어 내놓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강제로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소이선생이 진주목걸이를 흔들면서 다시 말했다.
"노장주님께서는 이젠 믿으시겠습니까?"
"그래…… 내 딸이 직접 임자에게 넘겨주든가?"
"아니올시다. 모용공자님께서 제게 넘겨주셨지요."
그 말을 들은 오자경이 속으로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딸년이 이미 모용협과는 서로 살을 섞은 부부지간이 된게 분명하구나. 이 늙은
것의 주요한 과업은 오독방 주작분타의 타주로서 모용세가와 대적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놈
과 인척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그런데 딸년이 하필 그놈에게 시집갔으니 이걸 어쩐단 말인
가?'
제24장 거와를 삼킨 양과
오군량이 오자경의 옆에 와서 귓속말을 했다.
"아버지,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군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니?"
"여동생이 모용협과 좋아하는 사이라면 저 놈들이 감히 이렇게 방종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이게 첫번째 이상한 점입니다."
오자경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이 애비도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두 번은 또 뭐냐?"
"누이동생이 입으로는 양과와 양효비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고 말했지만 전 그 애가 속
으로는 양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요. 단지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워하게 된 거지요.
저번에 저와 헤어질 때 내가 그 애에게 양과가 또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말을 하니까 당장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그 애는 양과를 끝내 잊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 애는
절대 모용협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 소이선생의 손에 있는 목걸이가 그 애의 물건인건 너도 알겠지?"
"혹시 누이동생이 실수해서 잃어버린걸 저 놈들이 주워서 우리 부자를 속일 수도 있는 거지
요. 그도 아니라면 혹시……."
"계속 말해 보아라."
"혹시 그 애가 정말 모용협의 수중에 떨어졌을 수도 있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 애가……."
"저 놈들이 그 애를?"
오자겸이 놀란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
"그 애의 몸에 지닌 물건까지 저 놈들의 수중에 들어간걸 보면 모용협이란 나쁜 놈이……."
"이젠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오자겸은 이를 갈며 이렇게 말허리를 잘랐다. 오자겸이 다시 소이선생과 탁장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서 말해. 임자들은 도대체 나의 딸을 어떻게 했나? 사실대로 말해!"
소이선생은 오씨네 부자가 십중팔구 계략에 말려든 것을 보자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댁의 따님은 이미 모용공자님의 소실이 되었고 이것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댁
의 따님은 거와장과 모용세가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도 사실입
니다."
오군량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 애가 왜 임자들에게 신물(信物)만 가져가게 하고 편지는 보내지 않았는가?"
"따님이 편지를 써선 뭣하겠습니까?"
"나의 누이동생은 문장을 잘 쓰는데 이런 대사에 맞춰 돌아오지 못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편지 한 장 써보내지 않았겠느냐? 흥, 네놈들이 그 앨 잡아간 게 분명하다!"
탁장청이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면 어쩔 셈이냐?"
그러자 오군량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말을 들으셨습니까? 저 놈들이 과연 누이동생을 잡아갔군요!"
소이선생이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모용공자님이 청해서 모셔간 거지 절대 강제로 끌고간게 아닙니다."
오자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자…… 임자들은 내 딸을 어떻게 했나?"
"오소저는 이미 모용공자님의 소실이 되었는데 노장주님께서 무슨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이젠 침대 위의 일이 돼버린 셈이지요."
"짐승같은 놈…… 모용협이 강호의 젊은 협객으로 자처하는 몸으로 어찌 이따위 비열한 짓
을 한단 말이냐?"
"노장주님께선 딸을 아끼시겠지요?"
"네 딸이 이런 모욕을 당했다면 그래 네 놈은 가슴이 아프지 않단 말이냐?"
"하지만 그 여잔 당신 딸이지 내 딸은 아니오."
오자겸은 단번에 소이의 목을 자르고 싶었으나 이를 갈면서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말해봐, 모용협이 무슨 조건이면 그 애를 놓아보내겠다고 하던가?"
"아까 제가 똑똑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우리 두 가문이 화목하게 지내기를 희망한다고 말
입니다."
"이 늙은이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테냐?"
소이선생은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대답했다
"따님께서 귀한 소실로 들어앉게 되었는데도 노장주께서는 여전히 모용세가와 원수로 지내
려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모용부 백여명 노복들의 호위 하에 댁의 따님을 나체로 이 마을로
호송해 오는 수밖에 없군요. 길마다 아마 수천수만명이 귀댁 따님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
려고 구름처럼 모여들 것입니다. 물론 모용공자님께서 따님의 털 한 오라기도 다치지 말도
록 하라고 분부는 하실 것입니다만."
그 말을 들은 오자겸은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거와장이 그런 큰 수치를 당하게 된다면, 온 집안식구가 다 자결한다 해도 그걸 씻어버리
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심한 모멸을 받자 오자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 놈들이 감히 그럴 수 있느냐?"
"왜 못한단 말씀입니까? 게다가 우리는 사방에 소문을 퍼뜨릴 작정입니다. 댁의 따님이 산
도적 들에게 잡혀갔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강호에서는 그 누구도 모용세가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모용세가는 강호에서 이름난 무림세가(武株世家)인데 그런 더러운 짓
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하하!"
그 말을 들은 오자겸은 다급해서 비지땀을 흘렸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군량이 말했다.
"모두들 우리 오독방이 음험하고 독랄하다고 말하지만 모용세가는 본방보다 훨씬 지독하구
나."
그러자 탁장청이 대답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천의(天意)를 따르는 건데 대사를 이루려면 작은 일에 구속을 받지
말아야지."
"너희들이 무슨 대사를 이룬단 말이냐?"
소이선생이 기다렸다는듯이 말을 받았다.
"오독방을 누름으로써 천하의 창생(蒼生)들이 독약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어찌 대
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탁장청도 맞장구를 쳤다.
"도리에 맞는 말이지."
소이선생이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오자겸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오장주님, 허락한 것으로 치겠습니다. 기실 오독방의 주작분 타주 노릇을 하는 게 뭐가 좋
은 점이 있습니까? 곳곳마다 오독방의 지시와 구속을 받아야 하니 모용세가처럼 활개치며
살 수 있습니까?"
"이 늙은것도 남의 구속을 받기는 싫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뭐가 유감스럽단 말씀입니까?"
"이 늙은 것에게는 실로 말못할 고충이 있네."
소이선생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노장주님께서는 충심환을 복웅하셨나보군요."
"임자가 어떻게 그 일을 아나?"
"오독방에서 충심환을 가지고 수하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건 이젠 비밀이 아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많은 문파들을 오독방에 귀속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 소이선생이 이런 액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늙은 것을 도와줄 수는 없겠나?"
소이선생이 짐짓 생각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노장주님께서 모용세가와 손을 잡기만 한다면 제가 반년이 넘지 않아 충심환의 독을 제거
할 해독약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해독약을 그처럼 쉽사리 얻을 수만 있다면 충심환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네. 천
하에는 정화, 거와, 채설주란 삼절독이 있었는데 정화가 멸종된 후 그 삽절독의 빈 자리를
충심환이 메우지 않았나? 방주님을 내놓고는 이 독을 제거할 만한 사람은 없네."
"저는 종래로 자신이 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반년을 넘기지 않아 반드시 충심환의 독을
제거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면 오독방이 무너지게 될 것인데 노장주님께서는 주작분타
의 타주이니 아마 사면초가에 빠진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근거없이 임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 만일 반년 후에도 내게 해독약을 갖다주지 못
한다면 자네 목숨은 죽은 목숨이 되는거야!"
"오장주님께서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지요. 좋습니다. 장주님께선 반년 사이에
모용세가를 원수로 치부하지만 마십시오. 그러면 따님이 평안무사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모용공자님이 친히 충심환의 독을 제거하는 해독약을 보내드릴 것입니다."
그러자 오자겸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흥정이야 늙은 것이 마다할 리가 있나? 하하하, 소이선생, 탁공자님 한 번 싸워보고
나서야 벗으로 사귈 수 있단 말도 있지 않은가? 자,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세."
소이선생은 오자겸이 늙은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미심쩍은 생
각이 들었다. 만일 마을 안으로 들어간 다음 잔꾀를 쓴다면 아주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것
이다.
"저와 탁공자님은 또 볼 일도 있고 하니 그만 폐를 끼치고 물러 가렵니다."
소이선생이 탁장청을 끌고 돌아서려 하자 오자경이 재빨리 걸어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
다.
"우리가 원수지간에서 벗이 되었는데 어찌 술 한 잔 기분좋게 나눠보지 못하고 그냥 섭섭하
게 헤어지겠나? 자, 두 분을 마을 안으로 모시겠네!"
오자겸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좌우를 향해 힐끔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장정들이 길을 내줌과
동시에 대문을 막아섰다. 탁장청이 안색이 달라지며 물었다.
"왜 이러는 거요?"
탁장청은 오른손으로 또다시 검자루를 잡았다. 소이선생도 오자겸이 계략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선웃음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오장주님께서 너무 극진하십니다 그려. 우린 귀장에서 얼마간 묵어가야 하겠지만 정말 요
긴한 일이 있어 그러니 노장주님께선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자겸은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임자들이 남지 않으려 하는걸 보니 이 늙은이를 깔보는 모양이구만."
탁장청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래 우릴 강제로 묵게 할 작정이시오?"
"어찌 그럴 수 있겠나? 하지만 모용협이 내 딸을 붙잡아둔 데다가 자네가 내 아들을 망신까
지 시켰으니 이 늙은 것이 임자들을 붙들어두지 못한다면 이 거와장이 너무 나약한 곳으로
손가락질 받지 않겠나?"
"당신은 이 탁모를 억지로 붙들어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오자경이 앙천대소를 하고 나서 말했다.
"탁공자님의 절정검술이 대단해서 강호의 다른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안색이 달라진다고
하더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곳은 탁부(卓府)도 아니고 모용세가도 아니야. 묵고 안 묵
는건 임자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야."
탁장청이 쏴르륵 하고 검날을 절반쯤 뽑다가 소이선생에게 제지당했다. 분을 억누를 길이
없는 탁장청이 오자겸을 향해 윽박질렀다.
"늙다리야. 네놈이 죽고싶어 이러는거야?"
소이선생도 차디찬 눈초리로 오자겸을 쏘아보며 말했다.
"오장주께선 따님에게 뜻밖의 사고라도 생기게 되는게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요?"
"임자들을 붙잡아두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에게 뜻밖의 사고가 나게 될거란 말이야."
오자겸이 이렇게 대답하며 손짓을 하자 백여명의 장정들이 병장기를 번뜩이며 탁장청과 소
이선생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대문 밖에 있던 촉산괴걸 능소와 소염라 전방은 이 모습을 보자 십여명의 무사들을 거느리
고 도우려고 달려왔다. 전방이 말잔등 위에서 삼고동차(三股銅叉)를 흔들며 소리쳤다.
"탁공자님, 소이선생, 두 분께선 당황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구해드리지요!"
능소도 장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어서 사람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거와장을 평지로 만들어 버릴테다!"
소이선생이 미소를 머금으며 오자겸에게 말했다.
"우린 내외로 협공해서 정말 이 마을을 평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자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너희들 마음대로 될 성 싶으냐?"
순식간에 능소, 전방과 십여명의 무사들이 대문 앞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거
와장의 높은 담벽 위에 수십명의 장정들이 활을 들고 나타났다. 이때 오군량도 이미 담벽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가 호령하자 삽시에 화살들이 벌떼처럼 날아갔다. 그 활들의 시위
소리는 아주 대단했다.
능소, 전방 등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춰 세우고는 병장기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내는
한편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가 아주 빨
라 대여섯이나 되는 무사들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뒤이어 날아온 화살에 또 몇
명의 무사들이 맞았다. 전방이 탄 말도 화살을 맞고 후닥닥 뛰어오르더니 급히 뒤로 도망쳤
다. 능소와 그 나머지 여섯 명의 무사들이 탄 말도 모두 화살을 맞았기에 말을 내버리고 물
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본 소이선생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오장주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소이선생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오자겸이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이 노부는 오독방 주작분타의 타주인데 그 이름이 그래 허명뿐인줄 알았느냐? 만일 너희들
이 조용히 포박을 당하면 고통을 덜 받게 해주마."
수행무사들이 태반이나 화살을 맞은 것을 본 탁장청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무사들은 모
두 모용세가의 정예(精銳)들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이 탁모가 네놈들을 가만히 놓아둘 줄 아느냐?"
탁장청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빼들자 소이선생도 검을 뽑아들었다. 소이선생은 속으로 먼저
우두머리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두머리를 잡게 되면 풀려 나오는 거야 식은 죽 먹
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무공을 갖춘 장정들에게 사면포위를 당하면 사태가 좋지 못하
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이선생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탁공자님 먼저 저 늙다리부터 사로잡읍시다!"
탁장청도 같은 생각이어서 두 사람이 함께 오자겸에게 달려들었다.
오자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으며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넓은 소매 속에 넣
고 있었는데 소이선생과 탁장청 두 사람이 십보가 못되는 거리에 이르자 갑자기 손을 번쩍
꺼내는 것이었다.
명주로 짠 번들거리는 장갑을 낀 손바닥 위에 주먹보다 약간 작은 청개구리가 놓여 있었다.
그 청개구리의 머리 위에는 새빨간 도드라기 한 개가 나 있어 각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
다.
탁장청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거와로구나!"
탁장청의 아버지인 절정공자 탁운백은 오자경과 약간 교분이 있는 사이였고 또한 탁장청이
오군영을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이 있어서 늘 거와장에 드나들었던 까닭에 그는 이 거와를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오자겸이 드디어 삼절독의 하나인 거와까지 꺼내자 그는 놀란 소리
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이선생은 거와를 본 적이 없었지만 탁장청의 놀란 소리를 듣자 얼른 발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거와의 위력을 알았기에 얼른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나려 했다.
이때 오자경이 손가락으로 거와의 이마에 있는 새빨간 도드라기를 살짝 눌렀다. 그러자 거
와가 "개굴" 하고 울면서 입을 크게 벌리니 삽시에 소이선생, 탁장청 두 사람에게 독액을
분무했다.
소이선생과 탁장청은 뒤로 훌쩍 물러나기는 했지만 독액이 퍼지는 속도가 더 빨라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쌌을 뿐만 아니라 대문 안팎까지 퍼졌다.
거와장의 장정들은 미리 해독약을 복용했기에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탁장청과 소이선생
은 해독약을 복용하지 못했기에 급히 숨을 죽이고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결국
은 그 독무를 좀 들이 마시게 되었다.
오자겸은 두 사람이 호흡을 멈추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자 너털웃음을 터뜨렸
다.
"이 노부의 충심환 독을 제거하려면 먼저 너희들이 네 몸에 있는 거와의 독을 해독해야 할
걸. 이 노부는 충심환을 복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주님께 일편단심 충성을 다할테다. 모
용협이 너희들을 파견해서 이간질을 하려구? 흥, 너희들은 상대를 잘못 찾았다!"
소이선생과 탁장청 두 사람은 감히 입도 열지 못한 채 오자겸을 쏘아보았지만 어지럽고 두
통이 오기 시작함을 느꼈다.
오군량이 담장 위에서 내려와 탁장청 앞으로 다가오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이 탁가놈아, 그래 아직도 행패를 부릴테냐?"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으로 탁장청의 귀쌈을 때렸다 탁장청은 머리를 한쪽으로 비키면서
검으로 들이쳤다. 오군량은 탁장청이 거와의 독에 중독되어 손을 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
기에 미처 방비할 새가 없어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동작이 늦은 탓에 아랫배가 반자
길이로 갈라져 삽시에 선혈이 콸콸 치솟으면서 의복을 적셨다.
오군량은 대노하여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내가 네놈을 죽여버리고야 말겠다!"
오군량은 검으로 마구 들이 찔렀으나 유감스럽게도 적수가 되지 못한 까닭에 한 합만에 격
퇴당했고 하마터면 탁장청의 검에 찔릴 뻔했다. 그래서 오군량은 더는 감히 덤벼들지 못하
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큰 소리를 질렀다.
"좋아, 네놈은 지독하구나. 그 독이 퍼진 다음에 네놈을 없애 버릴테다!"
탁장청은 진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독성이 진기를 따라 더욱 빨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탁
장청은 머리가 어지러워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소이선생이 급히 탁장청을 부축했다. 소이
선생도 원래 공력이 심후하지 못해 역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탁공자님이 자기 무공만 믿고 마구 대문 안으로 들어서더니 액운을 면치 못하게 되었구나.
만일 우리 두 사람이 사로잡히게 되면 오씨네 부자가 우리를 인질로 삼아 모용부로 가서 오
군영과 교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와장을 제압할 수 없게 되고 이전에 세운 공로가 깡
그리 없어지게 되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구나.'
오군량이 때가 되었다는 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탁장청의 머리를 잘라내어 능소와 전방에게 갖고 가게 해야겠다. 모용혈에게 거와장의 위
력을 알게 해야겠다!"
오군량이 이렇게 소리치고 나서 검으로 탁장청의 목을 찍으려 했다. 탁장청은 검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는데 반격할 힘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추호의 두려
움도 없이 노한 눈길로 오군량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거와장의 장정들은 속으로 감탄을 금
치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손을 멈추거라 !"
오자겸이 자기 아들을 말렸던 것이다.
"죽여서는 안된다!"
"왜 그러십니까?"
"탁장청은 모용협의 의형제로서 모용협의 한 팔이나 다름없다. 만일 저 놈을 죽인다면 모용
협이 홧김에 군영을 죽일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걱정이 많으십니다. 우리 수중에 아직도 소이선생이 인질로 남아 있는데 모
용협이 어찌 자기의 군사(軍師)를 버리려 하겠습니까?"
"소이선생이 비록 모용세가의 군사라고는 하지만 지위가 총관인 '소제갈' 주명에게도 미치
지 못하니 탁장청과 비길 바가 못된다. 이 놈을 죽이는 것은 별 상관이 없다."
"그럼 아버지는 소이선생을 죽여버리고 탁장청은 남겨둘 작정이군요."
오자경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오군량이 한숨을 쉬고 나서 탁장청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놈은 재수가 좋은 셈이다 !"
그러더니 오군량이 탁장청의 얼굴을 십여 차례나 쥐어박자 탁장청의 코와 입으로 선혈이 흘
러내렸다.
오군량은 곧이어 소이선생을 발로 차서 넘어뜨린 뒤 검을 높이 쳐들고 소리 질렀다.
"오늘이 너의 제사날이 되는 줄 알아라!"
소이선생은 너털웃음을 웃고 나서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모용공자님, 제가 당신을 도와 대업을 이를 수 없게 되어…… 실로 유감입니다! 유감이지
요!"
소이선생은 두 눈을 꼭 감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장정들 속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와 척하고 장을 날려 오군량의 옆구리를 내질
렀다. 오군량은 쳐들었던 검을 내리며 한 옆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이 미쳤느냐?"
오군량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장정을 쏘아보았다. 그 장정은 온 얼굴에 흙을 잔뜩 발랐는데
장을 쓰는 솜씨가 기도 막히거니와 그 힘도 대단했다.
'우리집 장정들 중에 언제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뭇장정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오자경이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장을 쓰는 솜씨를 봐서는 거와장의 제자같지 않은데 외인이 어떻게 거와장 장정들 속에 혼
입하여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장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소이선생을 붙잡으면 되는 거지 죽이기까지야 할 필요가 있소?"
오군량도 이 장정이 거와장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고 따져 물었다.
"네놈은 누구이기에 감히 본 거와장에 잠입해 들어왔느냐?"
"난 당신들 부자가 남을 너무나도 업신여기는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거요!"
오군량은 화가 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 미친놈을 죽여라 !"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검으로 그 장정의 아랫배를 내찔렀다. 그 장정은 검을 피하기는커녕
주먹으로 오군량의 면상을 호되게 쳤는데 그 힘이 정말 대단했다. 오군량은 허수로 아래쪽
을 찌르는 척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위쪽을 찌르려 했지만 이 사람도 탁장청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무공초식을 환히 꿰뚫어보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군량은 아
까처럼 뒤로 나자빠지면서 데굴데굴 땅바닥에서 뒹굴 수밖에 없었다
그 장정은 탁장청과 똑같은 초식으로 오군량을 땅바닥에 나뒹굴게 했지만 적수공권인 것을
보면 아마도 탁장청보다 무공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오군량은 일어나서 다시 덤벼들려 했으나 어느새 그 장정의 주먹이 또다시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자 역시 땅바닥으로 뒹굴지 않을 수 없었다. 오군량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속으
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아까는 탁가란 놈에게 몰려 땅바닥에서 뒹굴었고 이번엔 또
이런 놈에게 몰려 땅바닥에서 뒹굴다니.'
오군량은 창피끝에 화가 나서 다시 검을 들고 달려들려고 했다.
오자겸이 훌쩍 몸을 날려 아들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군데 감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요?"
그 장정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오른쪽 팔소매에 밀어 넣었던 짚을 꺼내고 얼굴에 바
른 흙을 깨끗이 닦아버리는 것이었다. 영준한 모습을 드러낸 그 장정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
했다.
"오장주께서는 아마 이 양모를 알아보시겠지요?"
"양효비?"
하고 오자겸이 놀라서 물었다.
"어쩌면 당신이……."
오자겸은 양과를 양효비로 잘못 알았다. 오자겸은 양효비가 장세사자가 되어 신조협 양과로
분장해 사처로 다니면서 요언을 퍼뜨리고 많은 문파들을 항복시킨 탓에 방주 여노악의 환심
을 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딸 오군영에게 자금소갑을 갖고 가게
함으로써 자기 딸과 양효비간의 옛정이 다시 살아나게 되면 사위로 삼을 궁리를 했던 것이
다.
양과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양모를 알아보셨다면 오장주님께선 이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이 늙은 것이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이지 않으면
되죠."
그러자 오군량이 물었다.
"아버지, 저 사람이 어떻게 장세사자가 되었습니까?"
"양공자님께서는 본교의 장세사자이시다. 어서 와서 인사를 올리거라."
오군량은 어정쩡한 기색으로 서 있다가 다가와서 예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인 오군량이 장세사자님을 뵙습니다."
양과는 오씨네 부자가 자기를 동생인 양효비로 알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
다.
"어서 일어나게나."
양과가 이렇게 말하자 오자겸이 또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이 늙은 것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소이다. 사자님께서 우리 거와장에 숨어 계신걸 보니 방
주님께서 제게 무슨 의심이라도 품고 계시는게 아닙니까?"
"방주님께서는 귀댁의 따님이 모용협을 따라 갔다는 소식을 듣자 의심을 품으시고 이 양모
를 보내 내막을 똑똑히 알아온 다음 조처를 내리려 하고 있지요."
오자겸은 그 말을 듣고 창백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는 방주님에 대해 모든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자님께서는 통촉하여 주시옵서소."
"방금 벌어진 일을 본 사자가 다 보았으니 그대로 방주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오자경이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사자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 사자는 귀댁의 따님이 확실히 모용협에게 끌려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노장
주께서는 따님을 어떻게 구해내시려고 하는지요?"
"이 늙은 것이 탁장청을 딸과 교환하려고 하는데 사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노장주님께서는 소이선생을 놓아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하십시
오. 그래야 능소, 전방 두 작자가 소식을 왜곡해서 전하는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귀댁의 따님이 위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자님께서는 아주 사려가 깊으시군요. 즉각 놓아보내도록 하지요."
"그러자면 먼저 저 놈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는 도
중에 독이 더 퍼져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양과는 아까 소이선생이 충심환의 독을 제거할 해독약을 얻을 자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소
이선생을 놓아보낼 생각이 났던 것이다. 만일 정말로 해독약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각 문파들
이 더는 오독방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되니 그것은 무림을 위해 아주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자겸이 급히 대답했다.
"사자님의 명대로 하리다!"
오자겸은 장정들에게 분부해 해독약 한 알을 소이선생에게 먹인 뒤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소이선생은 고개를 돌려 탁장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탁공자님, 제가 먼저 돌아가 모용공자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려 탁공자님을 반드시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탁공자님……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소이는 능소, 전방 그리고 여러 무사들을 거느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와불산의 모용
부로 떠났다.
소이선생 일행이 멀리 떠나간 뒤 양과는 두 손을 모아쥐며 말했다.
"이 양모도 떠나렵니다."
"양공자님께서는 좀 묵었다 가시지요. 이 늙은 것이 음식대접이나마 할까 합니다."
"양모는 중책을 짊어진 몸이라 이만 떠날까 합니다."
오자겸은 대문을 열게 하고 양과를 전송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오자겸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백의 차림에 머리를 풀어헤친 추녀가 벌써 그의 옆에 날아와 내렸다. 오자겸은 급히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말했다.
"집법사자님……."
집법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양효비가 아니라 진짜 양과이니 어서 붙잡도록 해요."
집법사자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날씬한 허리를 비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림 속으로 날아
들어 가는 것이었다.
뭇장정들은 그 추한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귀신같이 동작이 빠른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오자겸은 양과의 뒤에서 외쳤다
"양공자님,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대문에 이르자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양과는 오자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장주님, 무슨 일입니까?"
"사자님, 이리 오십시오. 이 늙은 것이 알릴 일이 있습니다."
양과는 하는 수 없이 도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오자겸은 아직 양과가 공력의 6성밖에 회복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했기에 거와장의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을까봐 속으로 아주 걱정했다.
'집법사자가 나보고 저 놈을 잡으라고 했지 꼭 생포하라는 말은 없었지 않았는가. 그러
니…….'
오자겸은 갑자기 거와를 꺼내 양과 쪽을 향해 거와의 이마 위에 있는 그 빨간 도드라기를
힘껏 눌렀다. 거와가 종소리같이 우렁찬 소리로 "개굴개굴" 울어대면서 두 뒷다리를 길게
뻗었다. 거와를 본 양과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노장주님, 무엇 때문에……."
양과는 잽싸게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러나 이때 거와는 이미 입을 쫙 벌리고 새빨간 독액줄기를 분수처럼 내뿜었으며 그것은
곧장 양과의 면상을 향해 날아왔다. 양과는 그 새빨간 독액줄기가 화살보다도 더 빨리 날아
오는 것을 보자 미처 옆으로 피할 겨를이 없어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새빨간 독액줄기가 양과의 면상을 스치고 지나가 맞은편에 있던 장정에게 날아갔는데 그 장
정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독액줄기에 맞았고 또 독액방울이 튀어 다른 다섯명의 장정도
맞게 되었다. 이 장정들은 새빨간 독액에 맞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양과는 이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비록 일찍이 거와가 극독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위력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천하의 삼절독 가운데 기세로
말하면 거와가 내뿜는 이 새빨간 독액이 가장 무서운 것 같았다.
거와는 적을 독액으로 격중하지 못하자 "개굴개굴개굴"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오자겸의 손
바닥 위에서 풀쩍 뛰어 양과가 있는 쪽으로 두장 남짓한 곳까지 날아오는 것이었다.
양과가 다시 뛰어 물러나려고 할 때 이미 양과의 턱에 달라붙은 거와가 "개굴" 하는 소리를
내면서 또다시 독즙을 내뿜으려고 했다. 양과가 대경실색하여 "악" 소리를 지르자 거와가
미끄러져 양과의 입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과는 목안이 몹시 간지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그 거와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뭇사람들은 양과가 삼절독의 하나인 거와를 삼켜버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천하에 거
와는 단 한 마리 뿐으로 거와장은 이 거와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흥성했고 오자경도 또 거
와 때문에 오독방의 주작분타 타주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오자겸은 한동안 멍해 있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양과! 어서 그 거와를 토해내라!"
오자겸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장을 내갈기며 미친 듯이 양과에게로 달려갔다. 거와를
삼키고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던 양과는 오자겸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두 눈에 쌍불을 켜고
미쳐 날뛰는 마귀처럼 장을 들어 내갈겼다.
두 사람의 장이 맞부딪치자 "펑"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두 사람은 각기 충격을 받아 뒤로
밀려났는데 오자경이 양과보다 반발짝쯤 더 밀려났다. 오자겸의 공력이 양과보다 못한 것이
분명했다. 오자겸이 부르짖었다
"어서…… 내 거와를 토해내거라!"
"나더러…… 나더러 어떻게 토해내란 말이냐."
오자겸은 다급해서 제 자리에서 마구 날뛰다가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멈추어서서 말
했다.
"어서 기를 거꾸로 운행시켜 거와를 토해내란 말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내가 진기를 움직이겠소."
양과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진기를 움직여 위 속의 거와가 나오게 하려고 애썼다.
일단 진기를 역행시키자 위 속에 있던 거와가 견디기 어려웠던지 폴딱폴딱 뛰다가 진기에
부딪혀 몸체가 파열되고 말았다. 양과는 갑자기 창자를 끊어 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땅
에 쓰러지고 말았다.
거와의 체내에는 극독이 가득차 있었기에 몸체가 파열되자 순식간에 극독이 양과의 체내에
서 움직이는 진기를 따라 온몸에 퍼졌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 극독이 퍼졌는데도 양과는
죽지 않은 것이었다.
오자경이 큰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내 거와를 토해내란 말이다 !"
오자겸이 양과의 복부를 수십번이나 주먹으로 들이쳤으나 양과는 지각을 잃은 채 정신을 차
리지 못했고 오자경이 내지르는 주먹만이 요란한 소리를 낼 뿐 감각이 마비됐는지 통증도
없었고 온몸이 뻣뻣해졌다.
갑자기 양과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손으로 오자겸을 떠밀어 버리고선 무서운 소리를 지르는
데 그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뭇 사람들은 양과가 이제는 온몸에 거와의
독이 퍼졌으므로 양과의 손에 긁히거나 물리면 중독될까봐 분분히 뒷걸음질을 쳤다.
오자경도 거와의 극독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까이 가서 건드릴 생각도 못한 채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양과, 제발 비네. 어서 내 거와를 돌려주게!"
오자겸은 거와가 너무 아까워 울상을 지은 채 거와를 돌려 달라고 부르짖을 뿐이었다. 오군
량이 큰 소리를 질렀다.
"누구든 거와를 구해낼 방법만 말하면 본 장주가 황금 이천냥을 상으로 주겠다!"
오군량이 연거푸 두 번이나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황금의 유혹이 아
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을 목숨과 바꾸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나더니 집법사자가 수림 속에서 날아왔다. 구천선
녀(九天仙女)같은 집법사자가 오자겸의 앞에 착지했다.
오자겸이 통곡하며 말했다
"사자님께서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제 거와를 구해주십시오!"
집법사자는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의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내가 말하는대로 하면 그 거와를 능히 구해낼 수 있어요."
"집법사자님, 똑똑히 알려주십시오. 제가 그대로 하겠습니다."
집법사자가 웃으면서 미친듯이 소리 지르는 양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의 배를 가르기만 하면야……."
오자겸은 제 정신이 번쩍 든 듯이 요란하게 웃어댔다.
"집법사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자겸이 보검을 뽑아들려 하자 오군량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은 좀 쉬십시오. 제가 해보지요!"
"오냐, 조심하거라."
오군량은 양과에게 두 번이나 패해 땅바닥에 뒹굴었기에 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검을 들고 양과 앞으로 달려가 찌르려고 하는데도 양과는 뒹굴기만 할 뿐 조금도 저항할 엄
두도 내지 못했다.
오군량이 양과의 배를 가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손을 멈추어라!"
불의의 인물이 쏜살같이 달려와 장으로 오군량의 어깨를 떠밀어버렸다.
"네놈이 감히 나를 막아?"
오군량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남루한 옷을 벗어던지자 회색
두루마기가 드러났고 또 모자를 벗자 아름다운 머리칼이 어깨 위로 풀어져내리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오독방의 교화사자 무채접이었다.
원래 그녀는 양과에게 화를 내고 도망갔으나 멀리 가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양과에 대한 정
을 끊을 수가 없어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양과의 뒤를 밤
아 거와장에 잠입했던 것이다 양과는 탁장청, 소이선생을 놓칠까봐 길을 다투는데만 골몰하
다 보니 누가 자기 뒤를 밟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채접은 장정으로 변장하고 사람들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다. 양과에게 해독약을 주었던 사
람이 바로 장정으로 변장한 무채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양과가 거와를 삼킨 것을 보자 당
장 뛰어 나가고 싶었으나 이미 그 자리에 나타난 집법사자에게 꾸지람을 들을까봐 은근히
속만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양과가 배까지 갈리게 될 액운을 당하게 되자 무채접은 더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뛰쳐나왔던 것이다.
오군량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참 이상하구나. 먼저는 양과가 장정으로 변장하고 뛰어나오더니 이제는 또 다른 외
인이 장정으로 변장해서 양과를 구하러 오다니…….'
오군량이 큰 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7"
"내가 누군 줄 모른단 말이냐?"
"내가 네 년같이 추한 년을 어찌 안단 말이냐?"
오군량이 이렇게 말하며 검으로 찌르려 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무채접은 얼굴에 진흙을
바른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녀는 양과를 뒤로 잡아끌면서 소리쳤다.
"이 사람은 장세사자이니 죽여서는 안돼!"
"집법사자께서 이놈이 양과라는 걸 밝혀냈는데 감히 날 속이려 들어?"
오군량이 검으로 또다시 찌르려 들자 무채접은 집법사자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감히 아미자
는 꺼내들지 못하고 양과를 끌고 대문 쪽으로 도망갔다.
"그년을 놓치지 말아 !"
오군량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뒤를 쫓아왔다.
무채접은 경공이 대단했기에 비록 양과를 옆에 끼고 있었지만 서너 발짝만에 오군량을 멀리
뒤로 떨쳐 놓았다. 대문에서 열 발걸음쯤 되는 곳에 이른 무채접은 몇 명의 장정이 칼을 들
고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까짓 몇 명 되는 장정쯤은 아무렇게도 여기지 않았
기에 무채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하더니 오자겸이 무채접 앞을 가로막았다. 무채접은 발
걸음을 범했다. 뚫고 나가자니 자기는 아예 오자경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오자겸이 손에 고송보검을 들고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더러운 계집년 같으니. 어서 양과를 내려놓아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줄테다!"
무채접은 눈동자를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장주님,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직 알아보지 못했나요?"
"네년이 황실의 공주라고 할지라도 양과는 내려놓아야 한다!"
무채접은 하는 수 없이 옷소매로 얼굴에 바른 진흙을 닦아내고 나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봐요!"
"무소저, 당신이?"
무채접은 식지를 입에 갖다대며 말했다.
"어서 날 내보내주세요."
오자겸은 집법사자쪽을 바라보았다. 무소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채
접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무채접은 방주의 딸이 아닌가. 오자겸은 무채접의 미움
을 사서 방주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무채접은 오자겸을 흘겨보며 양과를 옆에 긴채 오자겸 옆으로 지나갔다. 뭇장정들은 장주가
꼼짝 못하는 것을 보자 무채접이 대문을 통해서 나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집법사자가 의아하게 여기면서 날아왔다.
"게 섰거라!"
무채접은 집법사자의 목소리를 듣자 오히려 더 빨리 달아났다. 집법사자는 의심이 버럭 나
서 순식간에 무채접의 앞을 가로질러 가서는 막아섰다. 그녀는 무채접을 알아보자 그만 깜
짝 놀랐다.
"접아,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무채접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기에 생떼를 쓰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깔깔 웃었다.
"언니도 이곳에 있었군요."
"넌 왜 이 사람을 구해주는거냐?"
"내가 구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검에 찔려 죽는걸 어떡해요?"
"넌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기나 하니?"
"이 사람이야 양효비지요."
"이 사람은 양효비가 아니라 양과야."
무채접은 맘속으로 다소 당황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생떼를 썼다.
"이…… 이 사람은 양효비예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어서 길을 비켜주세요. 구해주지 않았
다가는 우리 오독방의 훌륭한 일꾼 한 사람을 잃게 돼요."
"이 언니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그 사람의 오른쪽 팔이 있나 없나 살펴보면 될게 아니니?"
"아마 언니 눈이 잘못되었나 봐요."
무채접은 이렇게 말하며 집법사자 옆으로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집법사자가 양과를 틀어쥐
려 하자 무채접이 장으로 막았다. 그러나 집법사자는 무채접의 장을 피하면서 단번에 양과
를 빼앗았다. 오군량이 쫓아와서 말했다.
"제가 양과의 배를 가르겠습니다! '
오군량이 검으로 양과의 배를 가르려 하자 무채접이 아미자를 꺼내 가로막았다.
"물러서 !"
무채접이 욕설을 퍼붓자 오군량은 이 여인이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화를 내는지 알 수는 없
었지만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몇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썩 물러서란 말야!"
무채접이 소리 지르자 오군량은 멀찌감치 물러섰다. 무채접은 집법사자를 대문에서 멀리 떨
어진 곳까지 데리고 가서 애걸했다.
"언니, 양공자님을 용서해주는게 좋지 않겠어요?"
집법사자가 양과를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내게 양과를 용서하라는 거니?"
"저 이…… 저 이가 불쌍해서 그래요."
"저 사람은 장세사자로 변장해서 인골염주를 빼앗아갔다. 본 방의 대사를 그르쳐 놓았는데
그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니? 더군다나 저 사람은 이미 거와를 삼켰으니 그걸 얼른
꺼내지 않으면 천하 삼절독 중의 하나가 또 소실되어 본방에 불리하게 된단 말이야."
무채접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양과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언니, 이 동생이 이렇게 빌게요."
"접아, 너 왜 이러니?"
집법사자는 울상이 되어 있는 무채접을 바라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마 네가 양과를……."
무채접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드디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요. 전 저 이를……."
"넌 저 사람을 사랑한단 말이야? 저 사람이 본방의 원수인데도 말이니?"
"전 더는 다른걸 고려하지 않기로 했어요."
"네가…… 네가 몸을 저 사람에게…… 더럽혔는가 보구나?"
"전 아직까지 몸을 깨끗이 지키고 있어요. 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양공자님에게 주었어요."
집법사자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는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한숨을 쉬고 나서 엄한 눈
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돼. 이 언니는 네가 이처럼 함부로 행동하는걸 허락할 수 없어."
무채접이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언니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평생 잊지 않겠어요."
"안된다!"
양과는 차차 정신이 들어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무채접을 보았다.
"접아…… 접아……."
무채접이 양과에게 다가와서 부축해주었다
"양공자님 , 당신…… 지금 어때요?"
양과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난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임잔 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나?"
머리를 들고 집법사자를 본 양과는 놀라서 소리쳤다.
"용녀…… 임…… 임자인가?"
집법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늘 나를 용녀라고 부르는 걸까?'
양과가 다시 말했다.
"용녀, 임잔…… 그래 날 모르겠어? 난 양과야."
"당신이 신조협 양과인건 알고 있어요."
그러자 양과는 속으로 기쁨을 금치 못했다.
"용녀, 임자가 드디어 날 알아보는군. 우리 부부는 드디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었어."
양과가 이렇게 말하자 집법사자는 오히려 화를 냈다.
"무슨 부부란 말이에요? 그렇게 망녕되게 굴지 마세요. 본 사자는 당신을 죽이고 거와를 꺼
내야겠어요!"
무채접이 양과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언니, 양공자님은 언니가 자기의 아내 소룡녀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언니는 몰인
정하게도 저 이를 죽이려고 하는군요?"
"내가 소룡녀라구? 내가 왜 소룡녀란 말이니?"
"언니가 그렇게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럼 신선도로 오기 전의 일들을 잊었단 말씀
이에요?"
"그렇다면 어쩐단 말이니?"
"양공자님은 언니가 바로 소룡녀라고 말씀했어요. 극독에 중독된 것을 남해신니가 구해 줬
다고 했어요. 언니, 잘 생각해보세요."
집법사자는 애써 생각을 더듬어보다가 다시 말했다.
"난 이전의 일이 생각나지 않아. 얘, 저 나쁜 놈 편에 서서 날 속이려들지 말아."
그러자 양과가 말했다.
"이 양모는 종래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용녀, 임잔 분명 무슨 미혼약을 복용한 거야."
집법사자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큰 소리를 쳤다.
"허튼소리하지 말아요! 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집법사자가 갑자기 장을 내치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장 밖에 있는 나무의 가지와 잎
들이 우스스하고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새된 소리를 지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장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양과는 목이 갈라지는 소리로 외쳤다.
"용녀……! 가지 마오……! 날 두고 가지 말아!"
하지만 집법사자의 흰 옷 입은 모습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고 양과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졌
다. 무채접은 거와장 사람들이 뛰쳐나와 해치기라도 할까봐 양과를 들쳐업고 다른 방항으로
내뺐다.
십여 리 길을 달리고 나서야 무채접은 비로소 양과를 바위 위에 내려놓고 이마에서 흘러내
리는 땀을 훔쳤다. 양과는 눈물마저 말라버린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접아, 용녀가 기억을 상실한 것을 임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
무채접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과에게 마음이 쏠리다보니 그가 자기
곁을 떠날까봐 두려워 줄곧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하루라도 더 끌어야 양공자님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수 있거든.'
아까는 사정이 급했기에 무채접은 사실을 조금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채접이 양과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숨을 구하는게 급한 일이니 어서 그 거와를 토해버리세요."
"거와는 내가 진기를 쓰는 바람에 파열되어 죽어버렸어. 그리고 독기가 온몸에 다 퍼졌기에
이젠 어쩔 수가 없어. 하늘이 꺼지고 땅이 솟아난다 해도 이젠 살아날 방도는 없는거야."
"이걸 어떡하죠? 이걸 어떡하냔 말이에요?"
양과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극독이 온 몸에 퍼졌는데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쉽지 않은거야."
"당신은 공력이 대단해서 완안방방의 채설주의 독에도 죽지 않았으니 거와의 독도 당신을
죽일 수는 없을 거예요."
양과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몸에 두 가지의 절독이 퍼져 있으니 이번에는 아마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마 거와장놈들이 쫓아오는가봐요."
무채접이 놀라서 다시 양과를 업고 사방을 둘러보자 전부 민둥산 투성이여서 몸을 숨길 만
한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채접은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과를 업은 몸으로 나는 듯이 달려오는 말들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이십여 명의 말탄 사람이 그들을 빙 둘러쌌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 신조협 양과같군요."
무채접이 살펴보니 귀두방 무리들이었고 말을 한 사람은 이후아였다.
귀두방 방주 송무적이 귀두도를 든 채 쓴웃음을 지었다.
"양과, 처녀의 등에 업혀 가다니 우스워 못보겠다. 어서 내려라!"
그러자 이후아가 대꾸했다..
"방주님, 저 양과의 안색이 아주 끔찍한데 중상을 입은게 아닐까요?"
풍(풍)씨네 넷째가 물었다.
"확도 왕야께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송무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양과가 정말 중상을 입었다면 저 놈을 잡아서 확도에게 상을 달라고 해야지.'
5년 전 거와회의에서 송무적은 무채접과 만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무채접은 사내로
변장을 했었고, 지금은 무채접이 양과의 두루마기를 입은 데다가 머리까지 풀어헤쳐 송무적
은 알아보지 못했다. 만일 승무적이 그녀가 오독방의 교화사자인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
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무채접은 양과를 내려놓고 한 쌍의 아미자를 꺼내 들
었다. 송무적이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붙잡아라!"
이후아가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보게들, 저 미인을 다치게 해선 안되네."
풍씨네 넷째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저 년이 병장기를 갖고 있는데 어떻게 다치지 않게 할 수 있겠나?"
그러자 이후아가 눈을 흘기면서 귓속말을 했다.
"방주님 눈길을 좀 보게나. 십중팔구 저 년이 맘에 드셨는가 보네."
풍씨네 넷째는 그제야 이후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말에서 장정 다섯이 뛰어내려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둘러싸는 것이었다. 중상을 입은 양과
와 연약한 여인뿐인 것을 보자 그들은 병장기조차 손에 들지 않았다.
무채접은 속임수를 쓰느라고 일부러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애걸했다.
"당신들…… 당신들 가까이 오지 말아요 !"
그러자 장정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계집애야. 어서 아미자를 던져버리고 우릴 따라 가잔 말이다!"
"우리 시중을 잘 들어주면 맛있는걸 먹고 마시게 해주겠어…… 히히히…… 어서 오란 말이
야."
다섯명의 장정이 가까이 접근할수록 무채접의 두 손은 더 심하게 발발 떨리고 목소리도 더
떨리는 것이었다.
"제…… 제발 빌겠어요. 당…… 당신들은 우릴 용서해주세요……."
무채접의 애절한 하소연을 듣고 다섯 장정들은 온몸의 긴장감이 사라져 경각심을 늦추었다.
그때 무채접이 갑자기 몸을 솟구치더니 두 발로 공중에서 다섯 장정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다섯 장정은 미처 방비도 하지 못한 채 각기 가슴을 채여 모두 피를 토하며 흙먼지 속에 나
뒹굴며 죽 어버렸다.
귀두방 무리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아녀자가 이런 무공을 갖
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부하 다섯 명이 무채접의 발길질에 허무하게 널
부러지는 것을 보자 송무적은 대노하여 소리질렀다.
"저 년을 잡아죽여 라!"
또다시 여섯 명의 장정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무채접은 아미 자로 이형검술을 써서 순식
간에 장정 둘을 찔러 죽였다. 그러자 나머지 네놈은 깜짝 놀라 감히 싸울 생각도 못하고 뒤
로 물러나 버렸다.
풍씨네 넷째가 고함을 지르면서 말 안장에서 훌쩍 솟아오르더니 '역벽화산(力劈華山)'의 초
식으로 무채접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무채접의 아마쌍자는 작고 깜찍한 것이다. 그래서 정
면으로 상대방의 병장기를 막지는 않고 옆으로 몸을 번개같이 피하면서 연거푸 내찔렀다.
풍씨네 넷째는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당황해서 아무 초식도 없이 귀두도를 마구 휘두르기만
했다.
무채접은 마치 한 마리 나비가 흉맹스런 짐승을 둘러싸고 빙빙 돌듯이 경공을 써가면서 잽
싸게 공격했다. 일곱 합도 채 안되어 무채접이 아미자로 풍씨네 넷째의 왼쪽 어깨를 푹 들
이 찔렀다. 풍씨네 넷째는 너무 아파서 오뉴월의 개처럼 비명을 질렀으나 좀처럼 물러서려
고 하지 않았다. 또 두 합쯤 싸우다가 풍씨네 넷째는 또 허리를 찔렸다.
이후아가 소리쳤다.
"내가 자네를 돕겠네!"
송무적은 무채접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보자 이후아가 풍씨네 넷째와 협공한다고 해도 당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기가 직접 나서더라도 우세를 점하기는 어렵겠다
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아, 넌 사람들을 데리고 양과를 사로잡도록 해라.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 방주와 함께
저 계집년을 사로잡자구나!"
송무적은 이렇게 호령하고 나서 십여명 장정들을 거느리고 무채접을 둘러쌌다.
이후아가 장정 세 사람을 데리고 양과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양과는 단말마의 통증을 느끼
고 있었는데 무채접의 처지가 위험해지고 또 몇 놈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을 보자 뛰어
일어나 싸우려고 했지만 일단 진기를 움직이자마자 심한 복통이 나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
다.
"양공자님을 해치지 말아!"
무채접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구하려고 했으나 송무적이 칼로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더러운 년아, 아직도 양과를 구해보려고 그러느냐, 제 목숨도 건사하기 어려운 주제에!"
송무적이 귀두도로 내리치자 무채접이 날쌔게 피하면서 아미자로 내찔렀다. 무채접은 싸우
는 도중에 틈을 봐서 여러 번 뚫고 나가려고 했으나 전후좌우에서 귀두도를 든 장정들이 마
구 공격하는 바람에 어찌 해볼 겨를이 없었다. 무채접은 장정 둘이 양과를 말잔등에 올려놓
는 것을 빤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무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후아, 이젠 확도왕야를 모셔와도 되겠네."
이후아는 대답하고 나서 소리나는 화살 두 대를 쏘았다. 아마 확도와 연락하는 신호인 것
같았다.
이윽고 먼 곳에 있는 수림으로부터 같은 화살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흰 형체가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는 준마보다도 빨랐고 눈 깜
짝할 사인에 벌써 실여 장 되는 곳까지 날아왔다.
무채접이 그것을 보고 기뻐서 소리질렀다.
"언니, 빨리 와서 절 구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송무적을 비롯한 귀두방 무리는 깜짝 놀랐다.
'저기 오는 사람이 언니란 말인가? 어쩌면 무공이 저렇게 대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확도마저도 당해낼 것 같지 못한데 일이 시끄럽게 되었구나.'
그 사람은 과연 집법사자였다. 그 여자는 귀두방 무리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더니 무슨 초식
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흰 형체가 몇번 번쩍하자 장정들이 손에 들었던 귀두도가 연이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송무적이 귀두도로 내리찍었다. 그런데 집법사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긴 옷소매를 내치자 송
무적은 칼을 든 채 삼장 남짓하게 날아가 버렸다. 송무적은 공중에서 두 번이나 연거푸 공
중제비를 돌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누고 착지할 수가 있었다. 송무적이 바라보니 그 사람은
아주 추하게 생긴 여인이었는데 벌써 무채접을 제자들의 포위권 밖으로 끌고 나왔다.
"누구냐?"
송무적이 이렇게 물었지만 그 여인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채접이 입을 열었다.
"언니 , 제 때에 와주셨어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와 양공자님은……."
무채접은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양과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양과가 말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귀두방의 제자 두 놈이 좌우에서 호위하며 나는 듯이 뚫고 나가고 있
었다.
이후아가 송무적을 돕느라고 그 부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채접은 쉽사리 그 두 제자를
땅바닥에 넘어뜨려 놓은 다음 양과를 업고 집법사자의 곁으로 달려왔다.
송무적이 다시 제자들을 끌어모아 집법사자, 무채접, 양과를 포위했다. 송무적이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귀두방이 무서운 줄도 모르느냐?"
무채접이 작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대답했다.
"귀두방이었구나. 그런데 감히 이처럼 미쳐 날뛴단 말이냐?"
"너희들이 양과만 내려놓으면 본 방주는 살 길을 열어주겠다."
"넌 우리들이 어느 문파인줄 알기나 하느냐?"
"본 방주는 바로 그걸 묻는거다."
"우리는 오독방의 제자들인데 나는 교화사자이고 나의 언니는 집법사자야."
"너희들은 오독방의 이대 사자로 가장해서 본 방주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지?"
"네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방법이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오독방을 만난만큼 양공
자님을 붙잡아갈 궁리는 아예 하지 말아라."
"너희들 하찮은 두 여인이 양과를 지켜낼만한 재간이나 있느냐!"
그러자 무채접이 집법사자에게 말했다.
"언니, 저 놈들에게 다시 한번 본때를 보이세요."
송무적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집법사자가 대단한 고수임을 본 그는
그저 이 세 사람을 포위한채 확도일행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때 먼 곳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인물들이기에 귀두방 방주마저도 제압하지 못하는가?"
-제22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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