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绝代双骄 03

3학년2반 | 2022.02.12 08:31:48 댓글: 0 조회: 365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306
초록뱀의 사나이
소어아는 흑지주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형님이라고? 당신은 키도 나보다 작은데 당신이 날더러 형님이
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흑지주는 언성을 높였다.
"강호에는 날 형님이라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
하지만 난 허락해 본 일이 없지. 그런데 넌......."
철심난은 어느 사이엔가 일어서서 소어아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듣지도 보지도 못 한 듯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
다.
"그나저나 흑 노제, 넌 재주가 좋더구나......."
"날더러 뭐라고 불렀지?"
"흑 노제, 우리 가서 한 잔 하는 게 어때?"
"이제 곧 너에겐 큰 화가 닥칠 테고 내가 아니면 그 어느 누구
도 너를 구하지 못 해. 네가 날 형님이라고 부르면 이익이 많을
걸."
철심난은 급한 나머지 소어아의 목이라도 잡아끌고 '형님'이라
부르도록 권하고 싶었으나 소어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흑 노제, 나에게 무슨 재난이 닥친다는 거요. 말 좀 해주시
오."
흑지주는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싸늘하게 웃었
다.
"좋아, 난 너를 돕고 싶었는데 네가 그토록 건방지게 구니 도와
줄 필요가 없겠다."
그가 말을 하면서 손을 들자 옷소매에서 무엇인가 실 같은 것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풀려 날아갔다.
소어아는 눈을 깜박깜박하며 그것을 자세히 보려 했으나 이미
흑지주가 뒤따라서 몸을 날렸고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야
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소어아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탄복했다.
"말투가 건방지다 했더니 경공이 과연 무섭군."
"그의 독문무공인 '신주승공 . 은사도처'는 강호에서 따를 사람
이 없어."
"그게 뭐길래?"
"들은 바로는 그의 옷소매에 있는 것은 남해에 사는 천 년 묵은
거미의 실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검으로 잘라도 끊기가 어렵데.
그가 그 거미줄을 던지면 일이십 장까지 날아간다는데 거미줄이
닿는 곳엔 줄 위의 은침이 추격해 달려든다는 거야."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 자식은 이상한 데가 있지만 재미도 있어. 연마한 무술도 괴
이하고 재미있군. 그런데 그 놈은 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지? 또
왜 나이든 것을 좋아하는 거야?"
"강호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어. 그러니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는 키가 작다
고 하거나 어리다고 하는 것을 극히 불쾌하게 여기지. 그런 말을
해서 눈밖에 난 사람은 곧 죽고 말아."
"그럼 왜 날 살려두었지?"
"확실히 이상한 일이야. 그를 동생이라고 불렀으니 필시 네 혀
를 잘라버렸어야 했을 텐데."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곧 눈을 바로
뜨고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우리에게 곧 큰
화가 미친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
고 가버렸네......."
"무슨 화가 미치겠어. 잊어버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이다.
"너...... 너 무슨 일이야? 뭘 봤어? 뭘 봤길래 그래?"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너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내 병을 네가 드디어 알고 말았구나. 이 병은 어릴 때 전염 됐
는데 지금까지도 고치지를 못 했어."
철심난은 물론 그의 병이 바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합합아에게
서 전염된 병임을 알 리가 없었다.
"대체 뭘 봤길래 그래?"
"뭐 대단한 게 아니니까 보지 않아도 돼!"
"내가 놀랄까봐 그러는 모양인데, 보지 않으면 더 궁금한 것
이......."
소어아는 곧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 여자...... 이 여자야! 보고 싶으면 봐라!"
말의 엉덩이 아래쪽에 작은 뱀이 한 마리 있었다. 그 뱀은 추악
한 녹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그것이 살아 있
지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보면 볼수록 몸이 오싹해
지고 소름이 끼칠만큼 음산했다.
철심난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뱀......벽린사......청해지영 . 식녹신군!"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물었다.
"뭐라고?"
그녀의 얼굴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넌 모를 거야...... 모를 거야."
"살아있는 뱀이라도 그렇게 겁먹진 않겠다."
"내가 두려운 것은 이 뱀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야."
"죽은 것을 두려워하다니 그건 또 무슨 이유야?"
철심난은 깊이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 벽린사는 바로 청해지영 . 식녹신군의 표시야. 그러니 그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말이지. 흑지주의 말대로 화가 가까이 미친
거야."
"그 식녹신군은 어떤 사람이지?"
"넌 십이성상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듣지 못 한 것 같기도 한데."
소어아의 말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그녀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 십이성상은 최근 삼십 년 동안 흉명을 날린 강호에서 가장
잔혹하고 악독한 강도들이야. 평시엔 손을 잘 쓰지 않지만 일단
그들이 나서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삼십 년 동안 십이성상은 단 한 번 밖에 실패가 없었데."
"이 뱀은 십이성상 중의 한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구만?"
"그렇지. 이 식녹신군이 바로 십이성상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고
교활한 사람이야. 그의 소굴은 청해에 있는데...... 아! 그가 날
노릴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십이성상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연남천에게 당한 것이야. 그들
이 만약 연남천의 보물과 검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찌 놓
칠 리가 있겠어?"
"너는 나이도 많지 않은데 알고 있는 것도 많구나."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강호에 나왔기 때문에 강호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지."
"알고 있는 것이 많으면 두려움도 많아지지. 모르는 게 더 좋겠
어."
소어아는 말을 하며 웃어버렸다. 철심난도 씁쓸히 따라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지?"
"이기지 못 하면 도망가야지."
철심난이 중얼거렸다.
"도망? 잘 될까?"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 황급히 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자
그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그때서야 두 사람은 얼굴이 답
답한 걸 느끼고 가면을 벗어던졌다. 작은 백마는 너무 달린 탓인
지 입가에 흰 거품을 흘렸다.
소어아는 그것을 가볍게 닦아주면서 말했다.
"소백채야, 수고가 많구나. 미안해......."
철심난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이상해, 너는 사람보다 말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
니......."
"그것은 말이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욱 친절하기 때문이야."
"누가 너에게 친절치 못 하단 말이야. 난......."
"네가 나에게 친절하단 말이야? 내가 걷지 못 하면 넌 날 업고
몇십 리 길을 가주겠어? 게다가 넌 내가 위험할 때 두고 가버리지
않았어?"
철심난은 할말이 없었다. 겸연쩍은 듯 한참만에야 쓴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네 말을 들으면 울지도 웃지도 못 하겠어."
"말을 아껴줘 봐. 말은 절대로 너를 버리고 가지 않아...... 쓸
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날이 어느덧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산모퉁이로 작은 마을이 보
였다. 그 마을의 굴뚝들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그 청
회색 연기가 아침의 쾌청한 대기 속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철심난은 경탄했다.
"아! 저 연기를 봐!"
"검고 더러운 게 뭐가 보기 좋다는 거야?"
철심난은 금방 샐쭉해졌다.
"넌 저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니?"
"저 연기의 가장 좋은 점은 우리가 곧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뿐이야."
길 옆으로 한 청색의 짧은 옷을 입은 노인이 집앞에 서서 담배
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날씨가 좋겠군. 이불을 꺼내서 말려야겠는데."
그 노인에게로 말을 몰아 간 소어아는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웃으며 말했다.
"폐가 되시겠지만 저희 남매에게 요기할 것을 좀 주실 수 있겠
습니까?"
노인은 소어아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다시 말위의 철심난을 바
라본 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집이 누추하다고 꺼리지 않는다면 어서 들어오시오."
소어아도 따라 웃으며 목례를 한 후 철심난을 말에서 내리게 했
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참 친절한 노인인데."
"너 같은 풍모를 가진 사람이 요구하는 일인데 어떻게 거절하겠
어."
그녀는 이 말을 하고는 그만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어아는 그녀의 붉은 뺨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너의 이쁜 얼굴을 봐서 그런 거야. 비록 늙은이지만 눈이 멀지
는 않았어."
철심난과 소어아는 함께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상을 닦고 네쌍의 젓가락을 놓더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잠깐 기다려요. 내가 가서 마누라가 밥을 얼마나 했는
지 보고 올 테니."
그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소어아의
허기진 배는 꼬르륵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백발의 노파가 고기와 야채를 얹은 쌀밥 두 그릇을 들
고 나왔다. 그 노파는 밥을 상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두 분이 먼저 드시구려. 사양말고, 식으면 맛이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남매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노파가 부엌문으로 들어가자 소어아와 철심난은 수저를 들었다.
그때 밥그릇을 잡던 철심난이 손가락을 귀에 갖다대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정말 뜨거운데!"
순간 소어아는 눈에서 반짝 빛을 내더니 돌연 철심난의 손에 든
젓가락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왜그래?"
소어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밥그릇을 상에 뒤집었다.
밥 속에는 작은 독사들이 토막난 채 들어 있었다.
철심난은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
"뱀...... 십이성상!"
그들은 빠른 동작으로 부엌으로 달려 갔다.
담배를 태우던 노인이 땅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는 독에 중독
되어 얼굴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한 노파가 굴뚝 옆에
쓰러져 있었는데 역시 안색이 검었다. 밥을 가져다 준 노파는 아
니었다.
"철심난이 그의 뒤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독하군......악독해...... 아, 정말 아슬아슬 했어."
소어아도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노인네들까지도...... 지독한 놈!"
"난...... 이미 우리가 벗어나지 못 할 줄 알고 있었어."
이때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소어아는 즉각 달려나갔다.
한 마리의 뱀이 말의 다리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소어아는 곧 옷
을 찢어 휘둘러 뱀을 떨어뜨리고는 밟아버렸다. 그리고는 백마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소백채, 두려워 마라. 아무도 너를 해치지는 못 할 거야. 나를
죽이지도 못 할 것이고."
그는 철심난을 안아 말위에 올려놓고는 급히 말을 몰았다. 백마
도 위험을 알고 있는 듯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작
은 마을을 벗어났다.
철심난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정말 위험했어. 밥을 조금이라도 먹었다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잖아."
"넌 어떻게 뱀이 들어있는 것을 알았지?"
"넌 그릇에 손을 대고는 몹시 뜨거웠다고 했지. 그런데 노파는
아주 쉽게 쟁반도 없이 손에 들고 나왔어. 필시 독사장을 연마했
을 거야. 시골 노파가 그런 무공을 연마할 수 있었겠어?"
철심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떤 일도 네 두 눈을 피하지는 못 하는군."
그때 돌연 앞 길에서 풀포기가 움직였다. 그러더니 백여 마리의
청색 뱀들이 기어나오는 게 아닌가!
철심난은 비명을 질렀고 소어아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옆으로
난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좁았고 나무가 많았다. 소어아
는 속력을 줄여 천천히 나아갔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으나
마음속으로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이때 백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바로 앞에 드리워진 나뭇가
지에 한 마리 큰 뱀이 감겨있는 것이 아닌가! 이 뱀 역시 초록색
을 띠고 있었고 크기는 팔뚝 굵기 만한 것이었다.
철심난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소어아가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
그는 급히 나무에서 뱀을 잡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철심난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여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여자들은 모두 뱀을 무서워하
지."
"단도를 이리 줘!"
철심난은 단도를 건네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심해! 피가 몸에 튕기지 않게 해치워야 돼."
"흥......."
소어아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돌연 자기의 팔을 길게 갈랐
다.
철심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너......."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라며 말을 잇지 못 했다. 소어아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검은 색이었다.
소어아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소리쳤다.
"아, 드디어 당하고 말았구나!"
땅에 떨어진 독사를 보니 움직이질 않았다. 철심난은 안색이 변
하면서 말했다.
"아-아! 이 뱀은 이미 죽어 있었어. 그 놈은 뱀의 몸에다 연검
을 감추고 거기다 독을 칠해둔 거야. 그걸 모르고 만졌으
니......."
소어아는 팔뚝을 꽉 붙들고 있었다.
"너는 정말 영리하다. 참 머리가 좋은 아이인데."
"다......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독은 뺏지만 무......무사하겠
어?"
소어아는 땀방울을 흘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사해...... 반 시간 후면 괜찮아질 거야."
철심난은 곧이 들을 수 없다는 듯 말에서 뛰어내리며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거......거짓말!"
"그래...... 지금 그 자식을 만나야 돼. 비록 피를 빼냈지만 그
리 오래 견디지는 못 할 거야."
철심난은 그의 품에 달려들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해독할 길이 있을 거야. 네가 몰라서 그래......."
소어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독을 사용하는 병가들 틈에서 자랐어.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그는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까지 띠워가며 이야기했다.
철심난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어서 해독약을 배합해야지."
"물론 해독약을 배합해야지. 시간이 나면."
"너...... 넌...... 날 놀리는 거야?"
"그러나 해독약은 석 달 정도 걸려야 배합할 수가 있어."
철심난은 땅에 쓰러져서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이런 때까지 나를 놀릴 수가 있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지?"
그녀는 눈물이 통곡으로 변했다.
"넌 사람도 아냐! 자기의 생사까지도 농담을 하다니. 남의 심정
은 어떤지 상관도 하지 않고......."
소어아는 그녀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서 휘둘렀다.
"보이느냐? 이게 바로 보물 지도다. 갖고 싶느냐?"
그는 두 번을 계속 외쳤다.
나무 위에서 과연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나의 것이 될 테니 성급히 굴 필요는 없지!"
한 사내가 녹색 옷을 입고 나무잎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의 마
르고 긴 몸이 나뭇가지를 타고 있었는데 마치 몸에 뼈가 없는 것
같았다. 한쌍의 가늘고 작은 눈은 꼭 독사 같았다.
철심난은 그를 바라보자 마치 차가운 뱀이 자기 옷깃 속에 들어
오기나 한 듯이 소름이 쫙 끼쳐옴을 느꼈다.
소어아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게 정말 너의 것이 될까?"
벽사신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지금 당장에 그것을 바친다면 목숨은 구해 주겠다."
철심난이 급히 소리쳤다.
"그에게 줘, 하여튼...... 네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아."
벽사신군이 말했다.
"역시 여자가 영리하군."
소어아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럼! 이 여자는 영리하고 난 좀 모자라지."
돌연 소어아는 그 종이를 입 속에 넣어버렸다. 순간적인 일이었
다.
벽사신군이 '쉭' 하는 소리를 내며 뛰어내리더니 말 위에 앉아
있는 소어아를 잡고 무섭게 소리쳤다.
"뱉어라!"
그러나 소어아는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말에서 끌려 내려온 후
그 종이를 다 삼키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못 하지!"
"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걱정하지 마. 지도는 잘 외워두었으니까. 그러니 날 죽게 하면
넌 한평생 보물을 못 찾을 걸."
벽사신군이 놀라면서 손을 놓았다.
소어아는 언제나 처럼 유유자적 했다.
"내가 너라면 즉각 해약을 내놓겠다. 내가 살아나면 지도를 다
시 그려 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은 손을
못 움직이지."
벽사신군은 그를 바라보더니 살도 없는 얼굴에 잔혹한 미소를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너 같은 자식에게 협박을 당할 줄 아느냐?"
"내 말이 틀렸나?"
"그 양피지는 삼켰다 해도 뱃속에 남아 있을 게다. 너의 배를
해부하면 꺼낼 수가 있어."
소어아는 겉으로는 유유자적하고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가슴
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때 철심난이 나섰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당신은......."
벽사신군이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안 된다고? 두고 봐라?"
그는 허리에서 날카로운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소어아는 계책을 잘 썼지만 이때 만큼은 적절한 방법이 생각나
질 않았다. 그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철심난이 벽사신군을 향해
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병이 완쾌되지 않아 별 힘을 쓸
수가 없었고 벽사신군은 단 일장에 그녀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말았다.
"뱀을 죽이는 것이 너의 재주라면 배를 해부시키는 것은 나의
장기야. 그러나 안심해, 단번에 너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을 테
니."
소어아는 긴장으로 온통 땀투성이었다.
"고맙소......."
"배를 해부해서 그 종이를 꺼내도 너는 죽지 않을 거야......
난 너를 천천히 죽게 해야겠어!"
"하지만 손쓸 때 조심해. 오늘 아침 뱀새끼 몇 마리를 먹었는데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을 걸. 뱀이 다치면 안 되니까."
벽사신군은 크게 노했다.
"자식, 죽을 때도 입을 놀려!"
그가 검을 뻗는 순간 '창' 하는 소리가 났다.
소어아가 가지고 있던 단검으로 그의 검을 막은 것이었다. 소어
아는 이어 계속 몇 번을 공격하였다.
벽사신군은 가볍게 피하면서 웃었다.
"함부로 힘을 쓰지 마라, 독성이 발작되면 빨리 죽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자 곧 날카로운 공격을 시
작했다. 소어아는 손발에 힘이 없어져 곧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이
를 악물고 버티고 서있었다.
철심난은 벌써 정신을 잃었고 소어아도 점점 힘이 빠져갔다. 일
검이 소어아의 가슴에 상처를 냈다.
소어아는 가슴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자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배를 해부당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나 강어는 오늘
희귀한 경험을 하는군."
그런데 그때 '탕 . 탕 . 탕'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벽사신군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조각조각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벽사신군은 공중에서 몸을 한 번 뒤집은 뒤 나무 위로 오르며
독사 같이 작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에게 손을 쓴 사람이 누구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 말소리는 바로 소선녀의 목소리인 듯했다.
소어아는 의아한 중에도 위기를 벗어나 기뻐했었으나 이 목소리
를 듣자 온 몸에 찬물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 벽사신군의 손이나
소선녀의 손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벽사신군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당신!...... 아가씨......."
그 말소리가 다시 서서히 들려왔다.
"너는 이 길이 어디로 통하는 길인지 알고 있겠지? 어디서 감히
떠들어!"
소어아는 돌연 숙였던 고개를 쳐들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모용가(慕容家)의 아가씨
그것은 소선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록 비슷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소선녀는 이렇게 느린 어투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녹색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팔에 바구니를 끼고서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몸이 매우 가냘프고 호리호리했다. 커다란 두 눈은 우수
에 젖어 있었고 절색이라할 용모는 아니었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검고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년이 따르
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아직 어려 보였다.
아가씨는 연약한 규각천금(閨閣千金)아가씨 같았고, 그 소년은
얌전한 세가(世家)소년 같았다. 벽사신군은 이 두 사람을 보자 마
치 목에 칼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구(九) 아가씨."
녹의 소녀는 담담히 말했다.
"좋아,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군. 그러나 여기가 어딘지는 잊은
모양이지? 여기서 남의 배를 해부하겠다니 간이 너무 크구나."
그녀의 안색은 냉혹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경멸과 냉담함을 내
보이고 있었다.
소어아는 이 소녀의 신분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녀는 귀족의
풍모를 지닌 것 같으면서도 일면 마치 들에서 자라난 듯한 야성미
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야릇함에 더해서, 나이로 보아 세상에 대
해 아름다운 환상과 희망을 품어야 할 때였지만 마치 승려처럼 세
상사에 냉담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벽사신군이 고개를 더욱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여기까지도 금지구역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서......."
"이제는 알았느냐?"
"예."
"그럼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겠지?"
백사신군은 참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순간 검빛이 빛나자 그의 왼팔이 떨어졌다. 자신의 팔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었다.
소어아는 놀랐다. 그러나 그 구 아가씨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
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가거라!"
그 말이 끝나자 벽사신군은 나뭇가지 사이로 나는 듯 달아나버
렸다.
돌연 철심난이 소리쳤다.
"안 돼요! 그를 보내선 안 돼요."
그녀는 언제 깨어났는지 일어나려 애를 쓰다가는 다시 풀썩 쓰
러지고 말았다.
"녹의 소녀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철심난은 소어아를 가리켰다.
"그는 독에 중독되었어요. 벽사신군의 해독약이 필요해요. 그것
이 없으면 그는......그는......오늘을 넘기지 못 할 거예요!"
"그의 생사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이때 뒤에 섰던 소년이 돌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구(九) 누나, 그 사람을 구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아가씨도 몹
시 몸이 아픈 듯 한데......."
"그들을 구하고 싶으면 구해라.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몸을 돌린 그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버렸다.
소년은 땅에 누워있는 철심난을 바라본 후 고개를 숙이면서 말
했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큰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뗐다.
철심난은 떨리는 소리로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가씨...... 제발 부탁이니......제발......."
소어아는 사라져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차하게 굴 것 없어. 우리도 가지!"
"그러나 너...... 넌......"
소어아는 큰소리로 딱잘라 말했다.
"살게 되면 사는 거고 죽게 되면 죽는 거지 뭐 그리 야단이야.
그리고 생각해 봐, 나이도 어린 저 여자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나
를 구하겠어? 괜히 사람만 난처하게 하는 거라고."
그가 철심난을 부축하면서 두어 걸음 떼어 놓았을 때였다. 돌연
그 소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멈추어라!"
소어아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갔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심사를
건드렸던 것이다.
"왜? 내가 이곳에서 죽으면 길을 더럽힐 텐데."
그는 한마디를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 같았는데 녹의 소녀가 이미 그의
갈 길을 막아버렸다.
"넌, 이제 죽지 않아...... 그러나 내가 너를 굳이 구하는 이유
는 모용누이가 못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야."
소어아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그 말에 대꾸했다.
"난 널더러 나를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죽고 싶으면 죽
는 거지 남의 관심은 필요 없어."
"난 너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너는 죽지도 못 해."
"그래?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짓이니까 나를 구해준다 해도 감
사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구 아가씨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한마디 내뱉었
다.
"날 따라와!"
길이 끝나는 곳에 하나의 장원이 보였다. 그 장원은 산을 등지
고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나 은은한 풍취가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정원이 보였고 공을 들여 가꾼 수목과 화초들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어아는 계속 헐떡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현
기증을 느껴 넘어질 듯 하자 소년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를 부
축했다.
소어아는 고마운 듯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하오, 당신의 이름은?"
소년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고인옥(顧人玉)!"
"당신은 마음이 착하군. 하지만 너무 얌전해서 꼭 여자 같아.
어찌 말을 하기도 전에 얼굴부터 붉히지?"
"나......나......."
그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눈도 컸다. 그래서 소어아는 그
가 혹 남장을 한 여자가 아닌가 했다.
구 아가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몇 개의 문을 지나 한
자그마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짧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고인옥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누추하지만 여기가 나의 거처요."
철심난은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남자가 살고 있는 유일한 방이군요."
소어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그럼 여긴 여자만 산단 말이야? 참 듣도 보도 못 한 희한
한 곳이군."
고인옥이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모용누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소?"
"강호에서 남들이 부르는 인간구수(人間九秀)가 아닙니까?"
철심난이 말을 하자 고인옥은 얼굴을 다시 붉히면서 가벼운 소
리로 긍정했다.
"그렇죠."
소어아는 철심난에게 말했다.
"넌 이들을 알고 있었구나?"
"이 아홉 자매는 무공도 뛰어나고 자색 또한 빼어나지. 그래서
천하의 명문 제자들이 모두 모용가(家)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거야."
"그래서 시집들은 다 갔어?"
"듣기엔 제일 작은 구매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명한 소년 영웅에
게 시집을 갔지."
소어아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십이성상까지도 그녀를 두려워 하는군. 구매를 귀찮게
했다가는 그 자매들이나 형부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는 말을 하는 중에 얼굴이 점점 검푸른 빛을 띠어갔고 숨을
쉬기도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으며 고인옥의 어깨
를 툭툭쳤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여기서 지내게 되었소?"
고인옥은 얼굴이 또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은근히 철심난
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거...... 이건 어머니의 뜻이오 난......."
그때 언제 왔는지 모용구 아가씨가 걸어 들어왔다.
"이건 외숙모의 뜻이고, 너는 여기에 있기가 싫단 말이지?"
고인옥은 당황했다.
"나......난 그런 뜻이 아니야."
모용구매는 싸늘하게 웃었다.
"고 나으리! 여기엔 당신을 부른 사람도 없고 여기에 남으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외숙모는 너를 보배라고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해."
그녀는 고인옥을 바라보며 작은 병을 소어아 앞에 있는 탁자 위
에 던졌다.
"반은 마시고 반은 상처에 발라. 세 시간쯤이면 회복될 거야.
그럼 가거라."
말을 마치자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나가려하였다.
소어아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난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어. 널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
으니 나에게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남들은 비록 너를 보
배로 취급할지 몰라도 난 안 그래."
모용구매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 병의 약을 마신 뒤
입술을 빨면서 말했다.
"이 약은 어찌 맛이 꼭 식초 같지?"
뒤따라 나머지 약을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모용구매의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불이 날 것 같았다.
"난 비록 너를 구했지만 너를 죽일 수도 있어!"
소어아는 혀를 내밀면서 웃었다.
"넌 그러지 못 할 거야. 넌 보기엔 무서워도 마음이 착해."
어찌된 일인지 모용구매의 창백한 얼굴이 붉어졌다.
"나가! 지금 당장 나가라.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다
시 한 번 만나게 되면 난......난 너의 혀를 자르고 너의 눈알을
판 후 죽여버릴 테다!"
고인옥은 크게 놀랐다. 그는 이제까지 냉담한 구 아가씨가 이처
럼 큰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이처럼 악독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질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느물거렸다.
"난 물론 갈 거야. 돌아와 달라고 부탁이나 말어."
모용구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것을 참으려니까 온몸이
떨렸다.
"너......너, 이......."
이때 밖에서 구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용구매, 너 어디 있니?......작은 언니가 널 보러 왔다."
모용구매는 그 소리를 듣자 입술을 깨물며 소어아를 한 번 지긋
이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소어아는 놀랐다. 얼굴의 웃음기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철심난 역시 안색이 변하면서 몸을 떨었다.
"혹시......혹시 소선녀 장청이 아닐까?"
고인옥이 말했다.
"그렇소. 그녀는 구 누이와 친구요."
소어아는 체념한 듯 의자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이렇게 작군......."
소선녀의 말소리가 정원에서 들려왔다.
"우리 구 아가씨 정말 너무 하신데. 연락도 한번 없고."
"언니 같은 유혼이 어디에 가서 죽었는지 알아야지."
"야, 우리 구 아가씨가 말도 많이 늘었는데! 게다가 오늘은 얼
굴이 발그스름한 것이 정말 예쁘구나. 말해봐. 이 몇 달째 또 몇
사람이나 구혼을 해왔지?"
"생각하기도 싫어!"
"물론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겠지. 하지만 마음 속으론......."
모용구매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나는 한평생 시집을 가지 않을 거야."
소선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억양을 바꾸며 말했다.
"그래, 하긴 남자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지. 모두 죽어야 돼. 특
히 잘 생기고 말 잘하는 놈은."
철심난의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우린 어...... 어떻게 하지?"
소어아는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길게 탄식을 할
뿐이었다.
"해치울 수도 없고 달아나지도 못 하니 아무런 수도 쓸 수가 없
는 거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선녀가 달려 들어왔다.
"그렇지! 역시 너였구나. 과연 너 이자식, 여기에 있었구나!"
소어아는 그녀를 보자 웃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래간만이군, 잘 있었소?"
모용구매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청 언니, 그를 알아요?"
"알지, 알고말고.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소어아는 돌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물을 필요없어. 나는 모용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나를 죽
이려면 어서 죽여라. 부상을 당해서 반격할 염려도 없으니."
소선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네가 반격하면 또 어쩔 거냐?"
"내가 반격을 하면 넌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도 못 하지."
소선녀의 손이 번쩍 들리더니 소어아의 왼쪽뺨에 가서 철썩하고
떨어졌다.
"뭐라고?"
소어아는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난 말을 하지 않겠어. 내가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넌 두번
씩이나 내 손안에 있었지만 난 너를 가엾게 여겨서 두 번 다 용서
했어. 내가 바보지. 오늘 너의 손에 죽는 것도 싸지."
모용구매가 옆에 섰다가 참을 수 없어 물어봤다.
"청 언니, 정말 두 번씩이나?"
소선녀는 온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 했
다.
소어아는 모용구매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모용 아가씨, 그녀더러 나를 죽이게 하시오. 비록 당신 집에서
죽게 됐지만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소."
소선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내가 너를 못 죽일 줄 아느냐?"
"물론 죽이겠지. 그 유명한 소선녀 장청이 누구를 두려워 하겠
어? 더군다나 난 반격도 하지 못 하는 사람인데!"
소선녀는 대노했다. 곧 손가락으로 이마의 태양혈을 점해 왔다.
소어아는 피하지도 않았다. 철심난은 마음이 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이때 모용구매가 소어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선
녀는 급히 자세를 거두면서 소리쳤다.
"구매, 넌 그녀석을 도우려는 거냐?"
모용구매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만약 다른 곳에서라면 상관 않겠지만 여기서는 내 체면을 생각
해줘."
"그렇다면 그를 죽인 후 너에게 사죄를 하겠다."
"이 장원이 생긴 후 지금까지 여기서 피를 본 적은 없어. 좀 기
다려."
소선녀는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너......너는 이 자식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몰라."
"비록 그렇더라도 그가 여길 떠나간 후에......."
소선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난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몇 번이나 소어아를 향해 손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모
구매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계속 따르면서 갈길을 막았다.
소선녀는 모용구매가 방해를 하자 더욱 분노가 끓어올라서 소어
아를 어떻게든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결국 그녀의 가느다
란 손가락이 연속적으로 모용구매를 일곱 번이나 공격했다.
모용구매는 몸을 가볍게 움직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언니, 언니가 먼저 나에게 손을 쓴 것이니 나를 원망 말아요."
소선녀는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어느 누구도 막지를 못 해. 너도 마찬가
지야...... 너는 모용가의 그 침과 화살을 사용해 봐......."
말의 끝나기도 전에 돌연 몸 뒤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럴 필요없어!"
한줄기 매우 날카로운 장력이 소선녀를 향해 뻗쳐갔다.
소선녀는 엎드려 피하면서 소리쳤다.
"좋아, 고소매! 너도 나에게 손을 쓰는구나!"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의 별명이 고소매로군. 사람은 비록 얌전해도 무
림세가의 사람 같이 무술이 대단하구나.)
사실 옥면신권 고인옥의 이름은 이미 강호에 약간 알려져 있었
다.
소선녀는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쳤다.
"너희들, 사양할 필요는 없어. 자 덤벼!"
소어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사양할 필요는 없어. 빨리 싸워라.)
그러나 고인옥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장 아가씨가 누나에게 손을 쓰지 않는다면 어찌 제가 감히 손
을 쓰겠소."
소선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알고보니 고가신권의 전인(傳人)은 쓸데없는 자식이로군. 너는
구매에게 아양만 떨줄 알았지 아무 것도 못 한단 말이야."
고인옥은 가만히 서있을 뿐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소선녀는 발을 옮겨 디뎠다.
"모용구, 덤벼라. 너의 보배인 철교낭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한꺼번에 모두 써 보시지."
"언니가 여기서 살인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싸우겠어?"
소어아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소선녀도 남에게 막힐 때가 있군."
"너는 내가 그들과 싸우기를 바라는 모양이구나."
"싸우기 싫으면 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지?"
소선녀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하더니 찬찬히 말했다.
"난 가야겠어. 네가 여기서 한평생을 산다면 아마 어쩔 수 없겠
지. 하지만 대문을 나서기만 해봐라, 죽여버릴 테니."
몸을 돌린 그녀는 모용구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이녀석에게 시집을 가서 한평생 지켜준다면 몰라도 그렇
지 않다면 결국 이녀석은 내 손에 죽고 말 거야. 지금 너와 싸우
면 남들은 내가 오히려 너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는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남기며 방을 나가버렸다. 소어
아는 놀란 표정이었다. 소선녀가 정말 가버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모용구매는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언니는 마음의 변화를 알기가 어렵구나. 아! 천하에 그녀만이
나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어......."
소어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천하에 너희들 두 사람만이 영웅이란 말이지?"
"물론이지."
"그럼, 강호에서 누가 제일이지?"
"그녀는 일을 예측할 수 없게 처리하고, 성질도 변화가 많아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역시 그녀가 강호에서 제
일 무서운 사람이지."
"당신은?"
"난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어."
"당신이 강호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녀가 두번째로 처진단 말이
지?"
"흥."
모용구매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안 했다.
소어아는 심각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겼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넌 확실히 천하제일이야!"
모용구매가 담담히 웃자 소어아는 다시 말했다.
"너의 혼자 도취하는 재주는 확실히 천하제일인 것 같다."
모용구매의 심경변화를 읽고 있던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본래 남자만 자아 도취를 하는 줄 알았더니 여인도 그렇구
만. 그리고 남자보다 더 심해. 그러나 강호에 나가보면 당신보다
심한 사람이 더욱 많지. 당신은 문을 닫고 혼자 앉아서 자기가 천
하제일이라고 자처하는데 그런 것은 나도 할 수가 있어."
"너......너......."
"네가 비록 나의 목숨을 두 번씩이나 구했지만 그건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야. 난 부탁을 하지 않았으니 네 기분을 억지로 맞
춰줄 필요는 없겠지?"
"좋......좋아!"
그녀는 비록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온몸이 떨
려왔다. 그녀는 본래 쌀쌀할 뿐더러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
는데 어찌된 일인지 소어아의 두세 마디 말에 미치도록 화를 돋우
고 있었다.
고인옥이 소어아에게 걸어와 말했다.
"누이는 당신에게 잘 대했는데 왜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는 거지
요?"
"난 그녀를 화나게 하고 싶어. 그녀가 화를 내면 보통 때보다
몇 배 예쁘기 때문이야."
고인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모용구매 쪽으로 돌렸다. 창백
한 얼굴이 붉어지니 확실히 더욱 예뻤다.
고인옥은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과연 예쁜데!"
"너......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해?"
고인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처음의 모습
으로 돌아갔다.
"아니......아니......예쁘지 않아. 화를 내면 무서워."
철심난의 마음은 복잡했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듣고는 웃지 않
을 수 없었다.
이때 어디선가 두 소녀가 모용구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 아가씨......구 아가씨......."
모용구매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화풀이
라도 하려는지 크게 소리쳤다.
"시끄럽구나? 난 귀머거리도 아닌데!"
두 소녀는 급히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구 아가씨."
그 두 소녀는 소어아를 힐끔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방을 이미 정리해 놓았습니다. 아가씨는 지금......."
"물론 이제 가봐야지. 매일 하는 일인데 무얼 물어 보느냐?"
이 두 소녀는 종래에 구 아가씨가 이런 투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네' 하고 대답한 후 숙인 고개
를 들지도 못 하고 물러섰다.
모용구매는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고 도련님은 할 일이 없으면 여기서 그들을 지키시오. 싫다면
억지로 권하진 않겠소."
"난 할 일이 없소......."
그는 계속해서 대여섯 번이나 같은 말을 했다. 모용구매는 이미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어아는 철심난을 한번 쳐다보고는 모
구매의 뒤를 따라나갔다.
고인옥은 정신이 나간 듯 모용구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
다. 철심난도 기운없이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고인옥이 자기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했다. 그러자 철심난도 덩
달아 탄식을 했다.
"당신은 그녀에게...... 참 친절하군요."
그녀는 입으로는 고인옥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마음 속으로
는 소어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인옥은 저토록 모용구매에게 친절한데 소어아는 나에
게.......)
그녀는 잠시 후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녀를 좋아하지요?"
"나...... 난 모르겠소."
"모른다고요?"
"남들은 모두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며 나 자신도 그녀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러나......그러나
난......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것뿐이오."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에요."
고인옥은 힐끔 그녀를 한눈으로 쳐다본 후 고개를 숙였다.
"당신......당신도 좋은 사람이오!"
모용구매는 정원을 지나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넌 무엇하러 왔지?"
소어아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난 오고 싶지 않았지. 하지만 내가 거기 그대로 있으면 소선녀
가 틈을 봐서 나를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내가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더라도 너의 체면을 상한다면 되겠어?"
모용구매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아무소리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소어아는 절뚝거리면서 계속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를 걷다
가 소어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제대로 걷지를 못 하니 나를 좀 부축해 주겠어?"
모용구매는 그를 상관않고 더욱 빨리 걸음을 옮겼다.
"좋아, 이렇게 빨리 걷다가는 가뜩이나 몸이 상해있으니 결국
지치고 피곤해서 죽을 테지. 내가 죽으면 시체를 소선녀에게 갖다
주시오. 그러면 소선녀가 다시는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야."
모용구매는 이 말을 듣자 비록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어도 걸음
이 느려졌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평소에 남자를 무시하는 듯 행동하다가도
정말 남자를 보게되면 내숭이나 떨지. 어이! 당신은 내가 남자라
서 부축할 용기가 없는 모양이지?"
모용구매는 드디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축하지 못 한다고? 흥 난 다만."
"넌 다만 하기 싫단 말이지? 하하! 세상에 자기가 못 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그리 흔한가?"
모용구매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곧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바삐 걸어나갔다.
"네 손은 정말로 작구나! 나의 반밖에 되지를 않아......."
그는 입으로는 계속 지껄이고 있었으나 눈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길게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건축된 형식이 틀렸
고 창문의 색깔도 틀렸다. 소어아가 세어보니 전부 아홉 채였다.
필시 모용구매의 규방인 듯했다.
첫번째 집 창문은 엷은 노란색 휘장이 쳐져 있었다. 모용구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집속의 집기와 이불 등 모두가 엷은 노란색이
었고, 간단한 물건들이 무척 우아하게 느껴졌다.
모용구매는 모든 것을 자세히 살폈다.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
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이 당신 큰언니의 규방이오? 곧 방문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더러우면 되겠어?"
"그렇지요. 비록 돌아오지 않는다해도 모든 것을 깨끗이 보존해
야지요. 당신들 자매는 정말 좋겠구려."
그는 이제까지와 달리 말투가 바뀌어갔다. 모용구매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펴가며 입을 놀렸다.
"당신의 큰언니는 필시 우아하고 온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일 것
같군요. 아, 이런 여인은 세상에 보기 드물지. 그 남편이 누구인
지 모르겠군."
모용구매가 아무리 사람과 이야기를 하기 싫어한다 해도 그녀
역시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세상엔 물론 큰언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 그러나 억지로
라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의 큰형부지."
"그가 누구지?"
"미옥검객(美玉劍客)의 이름을 넌 들어봤겠지."
그녀는 이 얄미운 자식과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러
나 어찌된 일인지 또 말을 하게 되었다. 이 자식이 그녀에게 하는
말은 바로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화제들 뿐이었다. 소어아는 그녀
를 화가 치밀게 만든 후라도 두세 마디로 그녀의 기분을 변화시킬
수가 있었다.
두 번째의 집은 붉은색이었다. 붉은색의 벽에 붉은 활이 걸려
있었고 단검도 걸려 있었는데 그 칼집까지도 붉은색이었다.
"너의 둘째 언니는 필시 큰언니와는 틀려서 시원한 사람이겠군.
때때로 성질이 나쁘긴 해도 마음이 좋아서 남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겠는 걸."
모용구매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드디어 물어봤다.
"네가 어떻게 알지?"
"아까 소선녀의 말을 듣자니 모용가는 암기가 교묘한 모양이지?
하지만 당신 둘째 언니는 활을 사용하니 성질이 통쾌함을 좋아
해서일 거요. 작은 암기를 사용하기 싫어해서가 아닐까?"
"음, 그리고는?"
"그리고 아무래도 검이 길면 안전하고 짧으면 위험하지. 당신
둘째 언니가 사용하는 것은 단검이니 성미가 필시 용감해서일 거
야."
모용구매의 고개가 자연히 끄덕여졌다.
"둘째 언니의 검법은 매서웁기가 제일이지."
"하지만 당신 둘째 형부의 무술은 별로 높지 않겠는 걸."
그가 돌연 이런 말을 하자 모용구매는 놀라면서 이상한 표정으
로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본 후 그제서야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둘째 형부는 남궁세가(南宮世家) 일파의 독자이지. 남궁
세가의 무술은 뛰어나지만 둘째 형부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아서
그래서......."
"바로 그거야."
"뭐가?"
"당신 둘째 언니가 시집을 가면서 무기를 여기에 남겨 놓은 것
은 자기의 무술로 남편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지. 그래서
그녀가 남편보다 무술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고, 그녀가 얼마나
이해성이 많고 착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지."
모용구매는 그를 몇 번 바라본 후 세 번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세번째 방의 창은 검은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자연히 광선
이 어둡게 비쳤다.
그러나 장식은 잘해 놓았으며 화판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장기
판도 있었다. 그림 아랫 부분에는 '모용여래'라는 글이 있었다.
필시 자기의 솜씨일 것이다.
소어아는 눈길을 사방으로 돌리면서 웃었다.
"당신의 이 셋째 언니는 필시 재녀이군. 다만 성질이 너무 오만
하고 우울하겠는 걸. 옛날부터 재녀는 다 똑 같은 성질이지."
"그녀는 햇빛을 싫어했지만 빗소리는 좋아했지. 빗소리를 들으
며 그림을 그리곤 했어. 인간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 하늘에서 내
려온 빗소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난 이미 오랫동안 언니를
보지 못했어."
"셋째 형부는 어떤 사람이지?"
"그도 무림 절정의 제자야. 그림이나 음악 모두를 잘하지. 그리
고 스물 아홉 살 때는 벌써 양광무림맹주가 되었지."
"정말 잘 어울리겠군."
소어아는 모용구매의 뒤를 따라 작은 집 하나하나를 지나갔다.
여덟째의 집을 지나갈 무렵 모용구매의 표정은 아주 온화스러워
졌고 눈동자에도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소귀(小鬼) 소어아가
마치 딴사람인 것 같이 느껴져 이것저것 묻고 이야기하는 동안 아
홉번째의 방에 도달했다.
이 방의 설비는 아주 정교하고 치밀했다. 모용구매가 소어아를
주시하며 물었다.
"너는 이 방이 나의 방임을 알고 있겠지? 너는 내가 어떤 사람
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겠어?"
소어아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
더니 돌연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방의 주인과 앞의 방들의 주인은 아주 다른 것 같은데."
모용구매는 눈에 잠시 웃음이 떠올랐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물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지?"
"이 방 안의 녹색은 자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애. 저런 자질구래한 물건들은
자신의 유치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정말 속되기 짝이 없고......."
그의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용구매의 안색은 마치 구
리의 녹과도 같이 시퍼렇게 변했다.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였
다.
소어아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틀린 것이었다면 화낼 필요가 없는 것이고 만약 맞는
다고 해도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지."
모용구매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소어아가 그녀의 뒤를 따라 꾸불꾸불 청석으로 되어 있는 통로를
지나자 통로가 끝나는 곳에 청동문이 하나 나타났다.
소어아는 그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굳
게 닫혀 있는 문은 이 장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으며 괴이한
느낌과 신비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모용구매가 황금색의 열쇠를 꺼내 문에 뚫려있는 조그만 구멍에
끼웠다. 굳게 닫혀있던 육중한 문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한가닥의 싸늘한 기운이 퍼져나왔다.
소어아는 이 방의 구조가 만춘류의 방 구조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의 사면에는 각양 각색의 약초가 가득 걸려있는
데다가 연단을 만들 때 쓰이는 구리솥과 구리 난로들이 놓여 있었
다.
만춘류의 방은 기와를 덮은 지붕에 벽돌로 쌓여진 벽에 둘러 싸
여 있었지만 이곳은 지붕과 사방의 벽이 모두 거대한 청석으로 둘
러싸여 있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만춘류의 방에서는 사철 봄 같
은 따스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에서는 음침하고 몸서리 처지는
한기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모용구매는 청동문을 닫고 서있었는데 그녀의 창백한 양볼이 이
곳에 들어오자 더욱 창백해졌다.
"다재 다능한 여장부, 구 아가씨께서 나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혹 나의 병을 치료해 주려는 마음에서 인가요?"
"그렇지!"
"독은 벌써 해독 됐는데, 무슨 병을 고친단 말이오?"
"너의 몸에는 없어야 될 것이 한 가지 더 붙어 있기 때문이지.
만약 그것만 없었다면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모용구매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너의 혓바닥이지!"
소어아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다가 멀찌감치 물러서며 말했다.
"당신처럼 예쁜 여자가 나에게 화를 내다니, 정말 나는 행운아
인데."
"이곳에 있는 약초는 모두 아주 진귀한 것이니 함부로 날뛰지
않는 것이 좋을 걸."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소?"
"날뛰고 날뛰지 않고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렇지만 이 약
중에는 보기(補氣)를 해 주는 영약도 있고 목숨을 빼앗는 독초도
있어. 만약 독초를 건드려 중독 된다면 그때는 아무도 너를 다시
구하지는 못 할 걸."
"나를 아주 겁주는군. 나는 담이 작아서 겁나게 하는 말을 들으
면 놀라 자빠지는 데 소질이 있어."
"단지 네가 얌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다면 아무도 너의 머리카
락 하나 건드리지 못 할 것이지만......."
"당신만 나와 함께 있어 준다면 아무도 감히 나를 상하게 하지
는 못 하겠지."
"연공(練功) 할 시간이 되었군. 그럼 나는 가볼 테니까......."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나도 함께 갑시다."
모용구매가 날카롭게 외쳤다.
"만약 나를 따라 온다면 다른 사람이 너를 상관하기 전에 내가
바로 너를 죽여버리고 말테다."
소어아가 탄식하듯 말했다.
"정말 당신 같이 아름다운 여자라면 남들은 단지 한번 짓는 가
벼운 미소를 보기만 해도 넋을 빼앗겨 자빠질 거야. 그런데 무슨
연공이 필요하단 말이야. 무예를 너무 단련하면 몸마저도 늙어버
린단 말이오."
모용구매는 그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또 다른 청동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다시 황금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이 문 안으로 한 걸음이라도 발을 디밀고 들어 온다면 그
때는 절대 살아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철컥' 하고 문을 잠궜다.
소어아는 천천히 허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여인......정말 여자들의 큰 병은 바로 천하의 남자들을 바보
같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야. 어리석은 여인...... 내가 이곳에 있
는 약초 가운데 독초와 영약조차도 구별하지 못 할 줄로 알다니.
말해주지. 나는 어려서부터 약초더미 속에서 자랐단 말이야. 내가
약초에 대해서는 아마 너 보다도 알고 있는 것이 많을 걸."
소어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방안의 약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그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껄껄 웃
으며 또 중얼거렸다.
"그녀가 나를 겁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이곳에 있는 약초는
모두가 희귀하고 좋은 것 뿐인 걸. 만 숙부께서 몇십 년간을 구하
려 해도 구하지 못 했다는 것도 서너 가지가 있군. 보아하니 내
복도 과히 나쁜 편은 아닌 모양인데."
그는 서너 가지의 약초를 골라내어 으지직으지직 씹어 먹기 시
작했다. 만약 모용구매가 옆에서 보았다면 정말 놀라 자빠졌을 것
이다.
약초들 중에는 몇 가지 희세지물(稀世之物)이 있어 소어아도 이
제까지 보지 못 했던 것이었다. 만춘류가 그림을 그려 가며 가르
쳐준 것이기에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환약을 만든
다면 한 알만 가지고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는 기
사회생의 명약들이었다.
소어아는 그러한 진귀한 명약을 마치 소가 여물을 씹어먹듯 으
적거리며 잠깐 사이에 모두 먹어 치웠다.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밥통형( 兄), 형은 참으로 복도 많소 그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 눈망울을 두리번거리더
니 구리솥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단약 한 알을 꺼내 맛을
보았다. 그러더니 쉬지 않고 입에 집어 넣으면서 몇 웅큼은 품속
에 간수해 넣었다. 더 이상 넣어 둘 곳도 없고 먹을 수도 없게 되
자 그는 남은 단약을 모두 뒤섞어 놓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
음지으며 중얼댔다.
"너는 한가로와 아무 일도 할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일거리
를 만들어 주지."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단약들은 모용구매가 다시 종류별로 분
류해 내려면 적어도 삼사 일은 걸릴 정도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데 소어아는 십여 종의 약초와 단약을 마음껏 먹고 나자 약
의 효력이 발생하려는지 뱃가죽이 불에 타는 것 같이 뜨거워지고
몸 전체에 열이 올랐다. 그리고 입술이 타는 것처럼 바싹바싹 마
르는 통에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후 그는 품속에서 구불구불한 구리줄을 꺼내더니 청동문의
열쇠 구멍에 집어 넣고 나서 히죽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내가 들어가지 못 할 줄 알았지? 어디 네가 뭘 하고 있는
지 한 번 봐야겠다."
그는 문에 귀를 대고 구리줄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곳......이곳 바로 여기로구나!"
'철컥!' 하며 청동문이 열렸다.
그 방 안은 밖의 방보다 더욱 추운 듯 음산한 한기가 쏟아지듯
뻗쳐 나왔다.
"정말 시원한 걸, 이제 살 것 같군!"
그는 전신이 불에 타오르는 것 같이 열이 나던 차에 차가운 공
기를 들어마시자 몸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껄
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구 아가씨! 내가 들어 왔습니다. 당신이 연공을 하고 있다면
나도 소란을 피우지는 않겠소!"
말을 하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그는 얼떨떨해짐을 금할 수 없었
다.
석실 안에는 굴 같이 파여져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겨울
에 보관해 둔 듯한 얼음이 가득 쌓여 있었다. 모용구매는 바로 그
얼음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다리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소어아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들은 것이 결코 적지 않
았지만 알몸의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떠한 것에도 놀라지 않
던 그가 지금은 놀라움에 멍하니 서있었다.
모용구매는 눈을 뜨고 있었고 그를 보는 눈에는 놀라움과 분노
와 창피함이 뒤엉킨, 말로서는 형용할 수조차 없는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굳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움
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어아는 차를 반 잔 정도 마실 시간 동안이나 넋을 잃고 있다
가 돌아서며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아가씨, 어디 계신가요? 어디 계신지 보이지 않는군요!"
그의 그러한 행동은 비록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지만 모용구
매는 분명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마음
이 안정됨을 느꼈다.
소어아는 한편으로는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걸음을 옮겨
막 문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홀연 벽에 걸려 있는 아홉 폭의 그림이 눈에 띄자 호기
심에 다가가 그것을 바라 보았다.
첫째장의 그림에는 알몸인 여인이 얼음 위에 서있는 것이 그려
져 있었고 그 옆에 몇 줄의 조그마한 글씨가 씌여 있었다.
"화석신공(化石神功)은 반드시 처녀만이 익힐 수 있는 것으로
이 화석신공 입문의 제일보는 삼 년의 세월이 필요하고 구결(口
訣)은 다음과 같다."
그 구결이라는 것은 이러했다.
"化石神功, 功成九轉, 肌 . 化石, 物不傷, 九轉功成.........
화석신공이 구할 정도 이루어졌을 때는 피부가 마치 화석 같이 어
떠한 물체라도 조금도 손상시킬 수 없게 되니 천하무적의......."
소어아는 그곳까지 읽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이 귀공(鬼功)이라는 것이 바로 산 사람을 미이라로 만드는 것
이었구나. 모용구매는 이러한 귀문의 무예를 익히고 있었으니 누
구를 대하더라도 얼음 같이 차갑게 대하게 된 것이 당연하지!"
두 째번의 그림을 보니 거꾸로 선 알몸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
다. 옆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功成二轉, 由逆爲正......이 무예의 두번째의 관문은 꺼꾸로
서기를 바로 선 것 같이 하는......."
소어아는 계속해서 읽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괴상 야릇한 귀문의 무예를 익혀 돌덩이 같이 단단
하고 얼음 같이 차가운 성격으로 변해 버린다면 비록 천하 무적의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한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세번째의 그림은 모용구매의 지금 자세와 꼭 같은 것이었다. 그
것을 보고 나서 소어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세째번의 무예를 익히고 있을 때 나의 눈에 띄게 되어 정말 다
행이야. 만약 저 여자가 이 무예를 모두 익혔다면 과연 어떻게 변
했을지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하군!)
그는 더 이상 들여다 볼 필요조차 없다는 듯 벽에 걸려있는 아
홉장의 그림을 모조리 뜯어내어 버렸다. 그것을 본 모용구매는 수
치스러움과 분노가 변하여 애걸하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
다.
소어아는 뒤돌아 보지조차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요. 나
를 원망하지 마시오. 당신 같이 좋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괴상스
러운 것에 정신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무모한 짓을 하고
있소?"
모용구매는 비록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를 향해 애걸하지도
않았고 욕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약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아마도 소어아를 삼켜버리고 말았을런지 몰랐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오직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소어아가 아홉 장의 그림을 찢어 움켜
쥐고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만 뚝 뚝 흘리고 있을 뿐
이었다.
얼음 위의 물고기
소어아는 아홉 장의 그림을 모조리 동로(銅爐)에 넣어 태워 버
린 다음,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담을 넘어 재빨리 산장을 빠져
나갔다. 그는 철심난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즉흥적으로 해치우는 이러한 행동이 어찌 생각하면 잘하는
일 같기도 했고 또 어찌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잘잘못을 가릴 수 없었지만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마음만은 후련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그는 걸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점
점더 이상해져옴을 느꼈던 것이다. 마치 전신이 부풀어 오르는 듯
했고 뱃속은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화끈거리며 창자를 끊어 놓을
듯한 통증이 왔다.
그는 '헉헉' 숨을 내쉬며 재빨리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서늘
한 그늘 밑이라 바람이 불어와 조금이나마 몸의 열이 식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움직일 수조차 없어 나무
에 몸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지금 누가 나타난다면, 소선녀가 나타나는 것
이 나을까, 그렇지 않으면 모용구매가 나타나는 것이 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전신에 열이 났고 부풀어 오
르는 듯한 느낌과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은 불에
타는 것처럼 바싹 말라들어 갔다.
"조그만 샘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내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물, 물...... 물인데!"
이때 돌연 한 사람의 차가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흥, 너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바로 너의
몸이 담겨질 관이야!"
소어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카롭고 서늘한 한 자루의
칼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놀랍고 얼떨떨한 가운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인은 정말 무섭기 이를 데 없군. 한
번 여인의 손에 걸려들면 평생토록 도망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겠는 걸. 당신은 모용 아가씨요? 아니면 소선녀요?"
"너는 아직도 그 계집애가 너를 구해주려니 하고 바보 같은 생
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
소어아가 돌연 껄껄 웃기 시작하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잘 됐군...... 잘 됐어...... 바로 당신이었군. 그렇다면 나의
운수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구만."
소선녀로서는 소어아가 지금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가 아니라 모용구매라는 것이 전혀 뜻밖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싸
늘하게 말을 뱉었다.
"그래! 잘됐구 말구. 나도 운수가 아주 좋은 편이지. 예상대로
네가 이리로 왔으니 말이다."
소어아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찌르려면 빨리 찌르시지."
"흥! 그렇게 빨리 서둘 필요는 없지. 일단 모가지를 베어버리면
떨어진 모가지로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긴 단번에 내 목을 쳐버리면 너의 분이 풀리겠느냐? 히히헛!
내가 만약에 너였더라도 아마 그렇게 싱겁게 끝내지는 않을 거
야!"
소선녀는 비웃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 당하고 싶다는 거지? 어디 말 해보아라. 소원대
로 해 줄 테니까."
"나 같으면 우선 불이나도록 한 번 후려친 다음 얘기를 해도 할
걸."
소선녀가 냉소하며 차갑게 쏘아부쳤다.
"흥, 넌 내가 너를 때리지 못 할 줄 아는 모양이지?"
"너는 아마 이를 갈며 나를 죽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
런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나를 마주하고는 단 한 대도 갈기지를
못했단 말이야!"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뺨에 일격을 얻어 맞았고 동시에
발길로 등을 걷어 차였다.
소선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질렀다.
"말 한 번 바로 잘했다. 잘했어. 이 못된 자식! 내가 너를 때리
지 못 할 줄 알았느냐......."
그러나 소어아는 땅을 뒹굴며 낄낄대고 웃기만 했다.
"아주 시원한 걸...... 정말 시원해......."
사실 소어아는 그녀를 약올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시
원함을 느꼈다. 몸에 열이 오르고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던 차에
그녀가 등을 걷어차고 마구 때리자 싸늘한 느낌에 열이 식어버린
듯했던 것이다.
소선녀는 그의 말을 듣고 약이 올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
다.
그녀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말했다.
"좋다. 정말 시원하다면 아주 얼게 해주지."
그녀는 또다시 소어아의 등에 일격을 가했다.
"안 돼, 아직 너무 가벼워...... 좀 더 세게 때릴 수는 없겠
나?"
소선녀는 그의 말에 분통이 터져 오장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어아를 바라보니 정말로 고통스러운 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이함을 금치 못 했다.
사실 이때 소어아의 체내에는 십여 가지의 영단묘약이 뒤섞여
효력을 발생하고 있었으므로 주먹이 아니라 철추로 내리친다 하더
라도 그를 상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소선녀는 손에 멍이 들 정도로 있는 힘껏 그를 때렸으나 소어아
는 그래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 시원하다. 시원해, 좀 더 세게......."
소선녀는 손발에 멍이 들도록 때려도 아파하기는 커녕 분통이
터질만큼 계속 지껄이고 있는 그를 보자 그만 아연해져서 더 손을
쓰기조차 망설여졌다. 그때, 돌연 등 뒤에서 싸늘한 어조의 말소
리가 들려왔다.
"다 때린 거야?"
소선녀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등 뒤에 모용구매가 서있었다. 그
녀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으며
손끝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직 다 때리지 못 했어. 어떻게 하겠느냐?"
"좋아, 그렇다면 계속해서 때리도록 해요."
소선녀는 그녀의 말을 듣자 도리어 얼떨떨해 하다가 다시 노하
며 외쳤다.
"내가 다 때렸다면 네가 또 어찌하겠느냐?"
"만약 언니가 다 때렸다면 나에게 양보해 줘."
"이곳은 너의 집이 아니야. 네가 나의 일에 간섭한다면 나
도......."
"내가 저놈을 구하러 온 줄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소선녀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저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럼 저놈을 죽이러 왔단 말
이야?"
"그래요. 바로 저놈을 죽이려고 왔어!"
그녀는 돌연 소어아의 곁으로 달려가더니 한 자루의 비수를 꺼
내 곧장 내리 찌르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는 이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이젠
정말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두려움 같은 것이
멀리 사라졌다. 소어아가 눈을 똑바로 뜨고 비수를 응시할 때 갑
자기 한광(寒光)이 뻔쩍 하더니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소선녀의
단검이 번개와 같이 모용구매의 비수를 가로 막았다.
모용구매가 노했다.
"저놈을 꼭 죽이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구하려는 거
야?"
소선녀가 냉소하며 대답했다.
"너는 저놈을 굳이 구하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죽이려고 하
지?"
"언니는 상관할 필요가 없어."
"나는 꼭 참견해야 되겠는데!"
모용구매는 팔을 쳐들더니 번개같이 빠르게 비수를 다시 내리찌
르며 말했다.
"어느 누가 나를 말린다 해도 지금 나는 저놈을 반드시 죽여버
리고 말겠어."
소선녀는 다시 단검을 쳐들어 그녀의 비수를 쳐냈다.
"너는 내가 저놈을 죽이려는 것을 방해했지. 나도 지금은 네가
죽이지 못 하도록 막을 테다."
모용구매는 뒤로 다섯 자 정도 물러서며 검을 거두더니 냉소했
다.
"좋아, 그렇다면 언니가 죽여버리도록 해. 나는 옆에 서서 구경
만할 테니까."
소선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어떨떨해하더니 단검을 쳐들
던 손을 돌연 내리면서 냉소했다.
"네가 죽이라고 하면 나는 죽이지 않겠어."
"그건 도대체 무슨 심보지?"
"내가 무엇 때문에 너의 말을 듣고 행동해야 된단 말이냐?"
"방금까지도 죽여버려야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구해주려고 하
는 것을 보니 언니는 아마도...... 아마도 저놈을......."
소선녀는 그녀의 말을 듣자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방금까지도 구해주려고 하다가 지금에 와서 오히려 죽이
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아마도 네가 저놈을......."
모용구매의 창백했던 얼굴에도 붉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엉터리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너의 말이 정말 엉터리지!"
두 사람은 서로 칼을 쳐들더니 바람을 가르며 공격을 가했다. '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손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을 느꼈
고, 비틀거리며 서로 몇 발자국씩 뒤로 밀려났다.
그때 갑자기 두 사람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탄식을 발했다.
소어아가 어느 곳으로 사라져버렸는지 종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소선녀가 분함을 못 참겠다는 듯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외쳤다.
"모두가 네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모용구매 역시 분함을 못 참겠다는 듯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외
쳤다.
"언니가 끼어들어 가로막는 통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뗐고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
고는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붉혔다. 소선녀는 모용구매를 모용구매
는 소선녀를 바라보았다. 소선녀가 고개를 숙이자 모용구매도 역
시 고개를 숙였다.
결국에 가서는 소선녀가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그놈을 절대 놓칠 수는 없지!"
모용구매도 거의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소선녀가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이번에 잡으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써서 죽여버리자!"
소어아는 자기가 현재 경신술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도저히 도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하지 않
고 오히려 허를 찔러 모용산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나왔던 길을 따라 들어가 모용구매가 연공을 하던 방까지
도달했다. 그는 문을 닫아 건 다음 얼음이 쌓여있는 동굴에 사지
를 쭉 벌리고 누워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소선녀와 모용구매가 하던 짓을 생각해보자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두 사람이 협녀나 또한 재
녀로 보일른지 몰라도 소어아의 눈에는 단지 그렇고 그런 여자에
불과했다. 세상남자들은 천차만층이지만 여자는 모두 똑같다는 생
각이 들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는 누워있던
얼음판 위에서 일어나 얼음을 깨부순 다음 으적거리며 일곱 여덟
덩어리를 먹어 몸을 식혔다. 그리고는 다시 얼음 위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잠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잠결에 '덜컹'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깨어난 소어아는 움직이지
도 못 하고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소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추워!"
그녀의 목소리에 이어 모용구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어머니께서 이 얼음 저장고를 만드신 것은 아버님이 더위를 몹
시 타시기 때문에 더울 때 즐겨 잡수시는 빙잔산매탕을 만들 얼음
을 저장하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후에 나는 다른 용도로 써 왔
지."
"무슨 용도로 썼는데?"
모용구매는 한동안 묵묵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있더니 낮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게 되버리고 말았어."
그녀의 어조에는 실망과 상심의 빛이 역력했고, 원망과 독기가
가득히 서려 있었다.
"너는 그 소귀가 이곳에 다시 들어와 숨었으리라고 생각해?"
"......."
소선녀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도 너무 소심해졌는 걸. 그놈이 그렇게 간이 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어디로 도망쳐버렸는지 모르겠네......."
소선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놈은 정말 귀신같이 날쌔고 꾀가 많은 놈이야. 다음에 붙잡
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조건 베어 버려야겠어. 그렇게 하면
아무짓도 못 할 테니까."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다시 '덜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
가 났다.
(다행스럽게도 여자들은 조그만 것에는 자세히 파고 들지만 큰
것은 수박 겉핥기로 지나쳐 버리거든. 만약에 다시 들어와 살펴본
다면 그때는 나도 끝장이지만.)
또다시 차를 두어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누워있었다. 이제는
몸이 싸늘해져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일어
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만약 얼음 위에서 운기 조식을 하고 앉아 있었다면 약효가
단전에 몰려들어가 반드시 놀라울만한 공력의 증가가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 누워 잠만 잤
기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셈이었다.
소어아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열쇠 구멍을 통하여 밖을 내다 보
니 소선녀와 모용구매가 아직도 그 방에 있는 것이 보였다.
소선녀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
고, 모용구매는 뻣뻣하게 서있었는데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이
두려움까지도 느끼게 했다.
철심난도 그 방 안에 있었다. 그녀는 약솥 앞에 쭈그리고 앉아
뒤섞여 있는 약을 몇 개의 구리통 속에 한 알씩 한 알씩 골라 담
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용구매를 골려주려고 한 일이 도리어 그녀를 골려주는 결과
가 되고 말았군. 모용구매는 내 일로 그녀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일을 시키는 것이로구나.)
소선녀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돌연 일어서더니 철심난에게 다
가갔다. 철심난은 놀라움에 손에 쥐고 있던 환약을 떨어뜨리고 그
녀를 주시했다.
소선녀가 탄식하듯 하는 말이 열쇠 구멍을 통하여 들려왔다.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우리들은...... 모두 그 놈에게
골탕을 먹은 동병상련의 같은 처지니까!"
철심난은 고개를 푹 숙이고 결국 웃깃에 한 방울씩 눈물 방울을
흘렸다.
소선녀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리와 봐, 내가 도와줄 테니 빨리 끝내자. 보아하니 이 환약
을 모두 정리하기 전에는 모용 아가씨께서 우리에게 식사 대접도
하지 않을 모양이니까 말이야."
모용구매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들을 응시할 뿐 일말의 웃음조
차 띠우지 않았다.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소선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흉악해 보였는데 사실은 마
음이 따뜻한 여자였구나. 그러나 사실 여인들은 저렇지 않은 사람
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아무리 흉악하고 악독한 여인이라
도 몇 마디 말로 칭찬을 해주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순순히 말을
듣게 된다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소선녀가 또다시 말했다.
"그 지도...... 너는 정말 그 지도를 그놈에게 주었냐?"
"틀림없이 내가 그 사람에게 주었어요."
"그 사람에게 주었다구, 무엇 때문에 그놈에게 주었지?"
"저는...... 저는......."
"보아하니 너도 적지 않게 그놈에게 당한 것 같군. 너
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철심난은 갑자기 일어서며 큰소
리로 소리쳤다.
"내가 주고 싶으면 아무에게라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일에 대해서는 참견할 필요가 없어요."
소선녀는 얼떨떨해하다가 실소했다.
"누구에게 소리를 치는 거야!"
철심난이 날카로운 어조로 따지듯이 말했다.
"무예가 비록 나보다 고강하다 할지라도 나를 조롱할 수는 없어
요!"
"아무도 너를 비웃지는 않아. 너를 비웃은 것은 아니야!"
(소선녀는 겉은 강하나 속은 부드러운 외강내유의 성격이고, 철
심난은 겉은 부드러우나 속이 강한 외유내강의 성격이로군. 저 모
구매의 성격은 과연 어떨까? 저 여자는 그 귀문의 무예를 익혀
겉으로 보기에도 얼음같이 차지만 아마 속마음도 얼음같이 차가울
것 같아. 세 사람 중에서 아마 제일 다루기 힘든 사람이 모용구매
일 게야.)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선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철심난은 겸연쩍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핍박한다면 설사 죽는다 해도 굽히지 않지
만 일단 부드럽게 대해주면 어쩌지 못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선녀가 다시 말했다.
"그 지도를 자세히 봐두기는 했겠지?"
"......."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요."
"그 보물이 탐이 나서 묻는 것이 아니야. 단지 나는...... 그
놈이 반드시 그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네가 그곳을
기억만 해낸다면 함께 그곳으로 가려는 거야. 내가 너를 대신해서
화풀이를 단단히 해주겠어."
"나는 정말로 그곳을 기억하지 못 해요. 정말 거짓말이 아니에
요."
소어아가 열쇠 구멍에 눈을 대고 다시 안을 들여다 보자 철심난
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
어아는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철심난은 보물을 숨겨 둔 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
어. 그런데 말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군. 무엇 때문에 속이고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해서는 설마 아닐 것 같고. 지금도 나 때문에 고
통을 받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걸? 여지껏 나
에 대해 나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잖아. 도리어 다른 사람이 나쁜
말을 하면 화를 내니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알 수 없는 걸. 무엇 때문에 그러던 간에 여자의 마음은 정말
로 이상 야릇해, 알 수 없군.)
그때 모용구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가는 손에 조그마한 그릇
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소선녀가 물었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납이야."
소선녀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납이라니? 납을 가져다가 도대체 무얼 하려는 거야?"
모용구매는 납이 들어 있는 그릇을 화로에 얹어 녹이면서 잔인
하고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 방은 이제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 버렸어. 납을 녹여 열쇠
구멍을 막아버리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아무도 다시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고, 또 누가 들어가 있다 해도 도저히 나올 생각은
하지 못 할 것이니까!"
소어아는 그녀의 표독스럽고 득의만만한 웃음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던 차에 그녀가 이런 말을 하자 가슴이 덜
컹 내려앉았다.
사실은 모용구매는 소어아가 그 속에 있는 것을 이미 발견했었
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소선녀나 철심난이 구해줄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소어아를 산 채로 가두어 죽이려
는 것이었다.
소어아가 크게 놀라며 잠시 당황하다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
음에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모용구매가 잽싸게 움직이더니 이내
납이 녹은 물로 열쇠 구멍을 완전히 메워버렸다. 소어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밖의 소리조차 듣지 못 하게 되
었다.
소어아는 분통이 터졌다. 문을 발길로 걷어 차며 욕을 하기 시
작했다.
"모용구매! 이 요부, 악마 같은 년아. 너는 왜 그리 마음이 사
납고 악독하냐? 나는 너의 부모를 죽이지도 않았거니와 너를 강간
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꼭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내
가 너의 말라빠진 몸뚱이를 보고도 아무 흥미가 없었길래 망정이
지 만약 너를 어떻게 했더라면 너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
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욕을 하기 시작하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까지도 모
조리 튀어나왔다. 그는 악인곡에서 어려서부터 자라왔기 때문에
욕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고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욕을 만약 모용구매가 들었다면 아마도 분통이 터져 죽었
을 것이다. 그러나 사면이 거대한 청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두
께가 한자가 넘는 문은 열쇠 구멍마저 막혀있어 소어아의 차마 귀
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을 밖에서는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욕을 지껄여 보았지만 입만 아플 뿐이라는
것을 소어아는 알고 있었다. 소어아는 서성거리며 빠져 나갈 방법
을 궁리해 보았지만 얼음을 보관해 두기 위해 견고하게 만들어진
이방은 조금의 틈도 없었다. 감옥으로는 안성맞춤으로 아무리 궁
리해 가며 찾아보았지만 바늘 구멍만한 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방이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고? 사람을 가두어 두기에는 다
른 어느 곳보다도 좋은 걸. 이제 나는 동태같이 얼어 죽겠군."
차츰 추위가 몰려왔다. 서서히 온 몸이 덜덜 떨리며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곧 단정히 앉아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진기
가 온 몸에 퍼지자 슬슬 졸음이 왔다.
소어아는 원래 무예를 즐겨 익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멀건
히 눈을 뜨고도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운기
조식을 해서라도 몸을 덥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천하에 찾아보기 어려운 총명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 무예 같은 것은 별 쓸모없는 것이
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고 무서운 상대라 할지라도
자기의 머리털 하나 건드릴 수 없는데 구태여 무엇 때문에 힘들여
가며 무예를 익혀야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에 비로소 십여 가지 영약의 효력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고 잠을 자는 통에 대부분의 약효를 헛되게 상
실하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
약의 힘이 진기를 따라 온 몸에 퍼짐과 동시에 공력이 크게 증
진됨을 느낀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아지경에 뼈져 들어갔
다.
생사에 관한 일 같은 것은 마음에도 두지 않았다.
염소와 황소
그렇게 하여 얼마가 지났을까. 몇 시간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
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휴식할 때면 품속의 약을 꺼내어 먹곤 하
여 배고픔이나 추위는 느끼지 못 했다.
그러다 품속의 환약마저 거의 떨어지고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자 이곳에 갇혀 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나보다 하는 생각으
로 자포자기가 되어 멍하니 앉아만 있게 되었다. 신선이 아닌 바
에야 아무 것도 먹지 못 하게 되면 결국 허기가 지게되고, 허기가
져 운기조식조차 하지 못 하게 되면 얼어 죽게 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같이 총명한 사람이 옴짝달짝 못 하고 결국 여인의 손
에 죽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
랐다. 그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 병신 같은 강어! 마음을 곱게 써봐야 아무 소용도 없군.
만약 일찍이 소선녀와 모용구매를 죽여 버렸다면 오늘 같은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는 만춘류에 대해서도 원망을 금치 못 했다. 만약 만춘류만
아니었다면 철두철미한 악당이 되었을 것이고, 비록 사람들의 원
망이나 욕은 얻어 먹을지라도 최소한 호인보다는 오래 살 것이라
는 생각이 무럭무럭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추위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허기 때문에 속이 쓰린
것을 참아가며 계속 중얼거렸다.
"에이, 죽으면 죽는 거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은 다 죽는
것이 아닌가. 죽는다면 다시는 여자들의 아귀다툼 같은 것은 듣지
않게 될 테니까 그점 만은 좋겠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돌연 추위가 많이 가셔진 것을
느꼈다. 더욱이 더운 열기까지 느끼게 되자 깜짝 놀라 주위를 둘
러보았다. 이상스럽게도 큰 얼음덩어리들이 모두 녹아내리고 있었
다. 손을 내밀어 벽을 만져보니 놀랍게도 불같이 달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용구매 그년이 나를 얼려
죽이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안풀려 쪄 죽이려는 것인가? 아니지,
자기 집을 모두 태워버리면서까지 불을 지를 리는 없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불이란 말인가?)
그는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사방의 석벽을
만져보니 삼면은 불타고 있는 것 같이 뜨거워 손을 댈 수 없을 정
도였다. 오직 산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쪽 벽만이 조금 덜 뜨거
울 뿐이었다.
소어아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홀연히 깨달았다는 듯 중얼
거렸다.
"그렇다. 아마도 모용가의 원수들이 나타나 살육을 벌였을 뿐
아니라 불까지 지른 모양이로군. 그렇지만 이 멍텅구리 같은 놈들
아, 모용가의 것이라면 풀뿌리까지 다 태워버려도 상관이 없지만
천하제일의 총명한 사람까지 해를 입혀서야 되겠느냐!)
한식경 정도가 지나자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모두 녹아 소어아
는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얼음이 녹아내린 물이라 차가웠지만
그속에 잠겨 있다보니 그리 못 견딜 만큼 차지도 않았다.
소어아는 웃을 모두 훌훌 벗고 나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기 시작
했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천천히 몸의 때를 밀며 속으로 생각했
다.
(어차피 인상을 써봐야 소용이 없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던데 목욕하고 죽은 귀신은 적어도 지저분하다는 소리는 안
듣겠지.)
물은 점점 따뜻해졌다. 잠시 후엔 곧 물이 끓을 것 같았다.
소어아는 마치 뜨거운 냄비 속에 집어 넣은 살아있는 생선 같이
팔딱거리며 물 속을 왔다갔다 했다.
불길에 의해 벽이 부숴져 나갈만도 했는데 이 석벽들은 어떻게
나 단단한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금도 한 군데 가지 않았
다.
그는 점점 기운이 빠졌다. 몸이 점차 가라앉아 코까지 물에 잠
기게 되자 '꼴깍'거리며 몇 모금의 물을 마시고 말았다.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거대한 한 그릇의 선어탕(鮮魚湯)이로군. 이것을 나혼자
만 먹게 되다니 정말 아까운 일인 걸......."
이 때 갑자기 문밖에서 팡! 팡! 하며 희미하게나마 문을 두드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그 소리를 듣자 정신을 수습하고 몸에 균형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잘됐다. 이제야 누가 나와 함께 선어탕을 나눠 먹으려고 온 모
양이군!"
그가 재빨리 헤엄을 쳐 문쪽으로 다가가자 열쇠 구멍을 막고있
던 납이 녹아내리고 없었다. 못 같은 것만 가지고 쑤셔도 문이 단
번에 열릴 것이라고 좋아하고 있을 때 돌연 문이 활짝 열렸다. 맹
렬하게 휩쓸려 나가는 물과 함께 소어아는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밖에 있던 두 사람은 문 안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쏟아져 나오
자 깜짝 놀라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마치 털을 뽑기 위해
뜨거운 물에 담궈낸 닭같이 흠뻑 물을 뒤집어 썼다. 더욱이 물 속
에서 벌거벗은 사람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으므로
더욱 놀랬다.
소어아는 물길에 의해 멀리 밀려간 채 함부로 날뛰어서는 안 된
다고 자신을 억누르며 죽은 듯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누운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니 앞에 있는 사람은 거대하고 우람
한 몸집에 디룩디룩 살이 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구레나룻
이 덥수룩하게 덮혀 있었고 비록 물을 온통 뒤집어 썼지만 씩씩한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황소를 연상케 했다. 소어아는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안심이 됐다.
사지가 발달되어 있고 몸집이 우람한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통이
거의 비어있다시피 단순해서 조금만 꾀를 써도 잘 복종하며 굽신
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고는 간담이 써늘해져옴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곰의 등판같이 어깨가 널찍했
고 반대로 허리는 가늘었다. 그의 무우같이 길쭉한 얼굴엔 염소
수염이 나 있었고 가는 눈썹에 조그만 실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산양(山羊) 우리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도 그를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 못 할 괴상한 생김새였다.
그는 삐쩍 마른데다가 키도 작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앞가슴
을 보자 그 우람한 사나이보다 열 배나 더 두려운 상대로 느껴졌
다.
소어아는 그들이 바로 십이성상 중에서도 가장 그 모습이 사람
같지 않고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백양과 황우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 두 사람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한동안 어리둥절해하더니 황우
가 백양에게 입을 삐쭉거리며 말을 했다.
"역시 너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됐어! 너는 선조 때부터 덕을 쌓
지 못 했고 전생에 많은 죄를 지었을 거야. 나는 벌써부터 너의
말을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기로 했었는데 이번에 또
너한테 당하고 말았구나."
백양이 그 말을 받았다.
"내 말을 들어. 너에게 이익이 될 테니까."
황우가 괴상 야릇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익이 된다고? 구정물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뒤집어 쓰는
것이 이익이냐? 너는 이 방 문을 열면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 도대체 보물이 어디에 있어?"
백양이 소어아를 가르키며 말했다.
"저놈이 바로 보물이지."
"저 조그만 놈의 비린내 나는 몸뚱이는 이 대형(李大兄)이라 해
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너 이 잡초나 씹어 먹는 염소 같
은 놈아, 너는 도대체 저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소어아는 백양을 보고 나서 걱정이 됐었지만 지금 그들의 말을
듣고는 안심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껄껄 웃으며 말했다.
"늙은 염소야, 늙은 염소야! 어찌 여기를 왔느냐?"
황우는 그의 말을 듣자 어리둥절해졌다.
"어, 저놈이 우리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이 대형(李大兄)한테서 십이성상 중에서 황우가 제일 용맹
스럽고 백양이 제일 지혜롭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그런데 뜻
밖에도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는데."
황우가 대소했다.
"과찬이지요. 정말 괜한 칭찬이고 말고요!"
그러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우리 이...... 이 대형을
알고 계시나요?"
"대형께서 나에게 말하기를 십이성상 중에 황우는 자기의 후배
일 뿐만 아니라 조카뻘이 된다고 했는데 노형이라고 부르다니?"
황우는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제가...... 제가......."
"선후배의 관계가 분명한데다가 조카뻘이 되니 너는 그분을 숙
부라 불러야 하거늘 이렇게 선후배 관계를 어지럽히는 말을 하다
니...... 만약 대형이 알게 된다면 아주 언짢게 생각할 것이야."
황우가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형제! 절대로 그분에게 말하지 마
시오."
소어아가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 '형제'라는 말은 나에게 한 말이 설마 아니겠지?"
"네, 네! 그렇구 말구요. 작은 숙부님! 나는, 아니...... 저
는......."
백양이 돌연 냉소하며 끼어 들었다.
"얼토당토 않은 놈에게 넋이 빠지다니, 도대체 너는 정신을 어
디에 두고 다니는 놈이냐?"
황우가 눈을 부릅뜨며 꾸짖듯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정말로 저 조그만 놈이 이 노 선배님과 같은 항렬일 것 같으
냐? 흥! 저놈의 나이는 이 노 선배님의 동생은 커녕 아들의 나이
보다도 어릴 것이다."
황우가 머리를 계속 긁적거렸다.
"그렇지만...... 모든 말이 다 옳은데 어떻게 하지?"
"바보 같은 놈! 저 놈은 네가 한 말을 듣고 꾸며서 대꾸한 것에
불과한 거야...... 묻겠다. 넌 무엇 때문에 이 모용산장에 왔지?"
황우가 끼어 들며 대답했다.
"저 놈은...... 저 분은 그 모용 계집애에게 갇혀 있었던 것이
야."
백양이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너는 이 방이 무엇하는데 쓰려고 만든 것인지도 모른단 말이
냐? 모용 그 계집애가 미친년이 아닌 다음에야 연단을 만들고 보
물을 두는 밀실에다가 사람을 가둬둘 것 같아? 저놈은 틀림없이
모용가의 단약이 어느 곳에 숨겨져 있는지 알고 훔치러 온 좀도둑
이다. 그래서 바로 내가 저 놈이 보물이라고 한 것이야."
소어아가 냉소를 터뜨렸다.
"이 바보 멍텅구리 같은 놈아. 이곳이 꼭 연단만을 만들고 보물
만을 두는 곳이란 말이냐? 사람을 가두어 두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모용 계집애가 미친년이 아닌 다음에야 보물을 둔
곳에 무엇 때문에 물을 가득 채워 놓았겠느냐?"
황우가 손뼉을 치며 대꾸했다.
"옳아, 옳구 말구...... 바꾸어 말하자면 나의 이 손은 여인의
몸을 쓰다듬을 수도 있고 따귀를 때릴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말
이지. 연단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서 사람을 가둬둘 수 없다는 법
은 없거든."
"그렇지. 그리고 네가 이대취 형과 거의 비슷한 나이이면서도
후배인데다가 조카뻘이 되는 셈인 것과 같이, 비록 나이가 많이
차이난다고 해서 그와 내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
황우가 또다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백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구 말구. 저분의 말이 모두 옳아. 생각해 보게. 우리 용
대형(龍大兄)의 여동생도 이제 겨우 십여 살 밖에 더 됐나."
백양이 냉소를 또 터뜨렸다.
"이 세상에 사오십 살을 살도록 애들한테 당하는 사람은 아마
자네 밖에 없을 걸세. 그렇지만 나는...... 흥! 나를 믿게 만들려
고 하려면......."
소어아가 돌연 손짓을 해 그를 불렀다.
"이리 오게. 내가 보여줄 것이 있으니."
물이 질펀하게 고여있는 바닥에 누워 있던 그는 백양이 다가오
자 마치 미꾸라지같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두 손 두 발을 모두 써
눈깜짝할 사이에 대여섯 차례나 연거퍼 후려갈기고 걷어찼다.
이 괴상야릇한 수법은 세상에서 오직 이대취만이 할 수 있는 특
이한 것이었다. 그 효과는 놀라운 것이지만 보통 때는 쓸 수 없는
것으로, 병든 척 하거나 죽은 척 하고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불
시에 습격을 가하는 수법이었다. 이대취같이 외모는 그럴 듯하지
만 내심이 간악한 사람 외에는 생각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
었다.
백양은 얼마나 놀랐는지 염소가 아니라 한 마리의 토끼, 그것도
죽어서 축 늘어진 토끼같이 맥이 빠졌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일어나 앉아서 낄낄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너는 나를 못 믿겠느냐? 비록 재수가 없어서 그 계집애
에게 봉변을 당하기는 했지만 이 대형의 사제(師弟)인 것만은 틀
림없다."
백양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고, 황우
가 공손하게 세 번 읍하고 나서 말했다.
"작은...... 숙부님...... 비록 난 지 삼 일 밖에 안 됐다 해도
당신은 이 숙부님의 형제임에 틀림없으니 저에게는 작은 숙부님이
되는 셈이지요."
"산양,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백양도 그제서야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물었다.
"이노선배님께서는 곡중에 아무 일도 없이 안녕하시겠지요?"
소어아는 느릿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대형 뿐만 아니라 두 대형(杜大兄), 음 대형(陰大兄), 도
대저(屠大姐) 모두 안녕하시지."
황우가 천진스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 숙부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정말 좋겠는 걸. 모용가의 조
무라기 같은 계집이 아무리 날쎈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라
해도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그년을 두려워 하지는 않겠는
데......."
이때 소어아가 물었다.
"자네들이 그녀들을 도망가게 한 것이 아니었나?"
황우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우리들이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사실 모용가의 단약을 훔치기
위해 우선 형세나 살펴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모
용산장'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소어아가 웃으며 말했다.
"모용가의 영약은 정말 탐이 나는 것이긴 하지."
황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막상 여기와 보니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도
없더군요."
소어아가 놀라며 물었다.
"사라지다니?"
"사람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깨끗이
쓸어가지고 가버렸지요. 대문도 잠그지 않고 단지, '망입자사(妄
入者死-함부로 들어 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글귀를 적은
종이 한 장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더군요. 흥!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올 일이지요!"
"정말 웃기는 계집애군. 게다가 그 계집애는 방귀보다도 더 구
린년일뿐 아니라 독사보다도 더 악독한 년이지. 어쨌든 자네들이
여길 후련하게 태워버렸으니 내가 자네들에게 술을 한 잔 사지."
황우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좋죠. 아주 좋구말구요."
"백양, 자네는 어떤가?"
"그렇게...... 하시겠다면...... 저도...... 응당 하시는 대
로."
"자네가 싫다면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네. 다만 이 대형을 만나
면 술 한 잔 같이 마시기도 힘든 사람이 됐더라고 전하면 그만이
니까 말일세."
백양이 떠듬거렸다.
"누가...... 제가 싫다고 그랬......."
소어아는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가볼까. 그런데...... 옷은 입고 가야겠지?"
소어아는 자기가 술을 마시는 데는 천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모
두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취하지 않음은 물론 배도 부르지 않았다
는 점이었다.
황우와 백양 두 사람은 마시라고 하면 마시고 마시지 말라고 하
면 마시지 않고, 모든 것을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 고분하게 복종
했다. 그가 가자고 하면 가고, 그가 쉬자고 하면 쉴 뿐 며칠을 같
이 돌아다녔으나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지조차 않았다. 기실 소
어아는 호기와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들을 데리고 한동안 돌아다녀
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길을 걸으며 그들은 적지 않은 강호의 인물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소어아 일행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길을 비켜갔다. 그들
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도 두 십이성상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는
그만 멀찌감치 피해버려 감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어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검문관에 들어섰을 때, 소어아는 앞의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피해갔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멀찌감치서 그들의
뒤를 따라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공손하고 존경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말도 걸어오지는 않았다.
소어아는 황우와 백양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다는 듯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두워질 무렵 그들은 검각에 도달해 객주집을 찾아 투숙했다.
"대면주와 함께 마랄계를 먹는 것이 좋겠는 걸. 비록 먹으면 땀
이 나지만 먹을수록 더욱 먹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이 마랄계야!"
황우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구 말구요. 대면주에다가 마랄계! 정말 좋습니다."
보통 때에는 소어아가 한마디만 하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
게 황우, 백양 두 사람이 재빨리 필요한 것들을 장만해 왔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두 사람 모두 말로만 모두 좋다
고 할뿐 움직이려 들지를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어아는 한동안 기다리다가 물었다.
"좋다고 하면서 무엇 때문에 가져오지 않는가?"
황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가지고 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너희들이 가져 오지 않겠다면 설마 나보고 가져오라는 것은 아
니겠지?"
백양이 빙그레 웃었다.
"어찌 감히 소숙부님께서 가져오시도록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가져오지도 않고 또 점원을 불러 시키지도 않는다면
대면주와 마랄계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아니면
땅에서 솟아 나온다는 것이냐?"
황우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알게 됩니다."
소어아가 궁금히 여기며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노라니까 홀연
밖에서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문이 열렸
다.
그리고는 누군가 커다란 쟁반을 디밀었는데 거기에는 마랄계와
고기찜, 시원한 재료로 만든 안주, 두판어 한 접시, 큼직한 사발
에 가득 담겨져 있는 월모계탕과 큼직한 술병 등이 놓여져 있었
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방향(芳香)이 풍겨오는 것을 보니 과연 대
면주임에 틀림없었다.
소어아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너의 두 사람도 왕귀운반법을 할 줄 알았구나."
황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왕귀운반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효자현손운반법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그랬었나!"
백양이 설명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지껏 저희들의 뒤를 따라 오던 자들을 보셨겠지요?"
"나는 자네들이 보지 못 했는 줄 알고 있었지."
"그 녀석들이 바로 저희들의 효자현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네들의 문하였다는 말인가?"
"문하는 무슨 문하입니까. 저는 알지도 못 하는 녀석들입니다."
"자네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뒤를 따라 왔
다는 말인가?"
황우가 웃으며 다시 끼어들었다.
"강호의 사람들은 '십이성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곳에 반드시
큰 장사판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십이성상은 오직 진귀
한 보물만을 빼앗고 금은 같은 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은 슬그머니 저희들 뒤를 따라와서 그런 것을 나눠먹는 것입
니다."
백양이 끼어들며 보충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 십이성상은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있
는 흑도 친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하물며 잡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까지도 빠짐없이 저희들에게 알려주곤 하지요."
소어아는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십이성상은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모든 것을 훤하게 알
수 있구나. 원래부터 천수천안을 갖은 줄 알았더니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알려준 것이었군!'
황우가 껄껄대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죽어라고 심부름만 하고 한푼도 못 건지
게 되는 것이지요."
백양도 대소했다.
"하지만 지놈들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니, 우리들은 즐겁게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양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들의 웃음소리는 아주 호탕스럽고 컸다. 그러나 말소리만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아주 작았다.
그들은 아주 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싶다
는 말 한마디만 꺼내면 어느 사이에 그들 앞에 상이 대령해있곤
했다.
소어아는 관으로 들어선 후 더 이상 동쪽으로는 가지 않고 방향
을 서남쪽으로 바꾸었다. 면양, 미산을 지나쳐가는 것을 보니 아
마도 아미로 가는 것 같았다.
소어아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 지방의 더운 술과 매운
안주가 입에 맞는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연신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아미에 도달하자 소어아는 황우와 백양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
고 객잔을 빠져 나가더니 깊은 밤이 되어서야 총총히 돌아왔다.
이렇게 삼 일 동안을 계속했으나 황우와 백양은 한마디도 그 이
유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소어아에 대해 복종하고 따르기를 마치
아들이 아버지 말에 순종하는 것같이 했다. 아마도 은퇴한 지 오
래된다는 이대취를 사갈(蛇蝎)처럼 두려워하기 때문인 듯했다.
삼일째 되는 날 오후, 소어아는 혼자서 시가지를 두루 돌아 다
니고 있었다. 크고 작은 주루나 음식점에는 곳곳에 강호의 인물들
로 보이는 이들이 몇몇씩 앉아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앉아 술만
들이킬 뿐 여느 저자거리에서처럼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매우 행동을 조심하는 듯 보였다.
길에는 단정한 도복에 가늘고 긴 검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순라
를 돌고 있었다. 그들은 오만스러운 표정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느
릿느릿 걸으며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들이 아미문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미
검법의 신속하고 날카로움은 천하무적이라고 알려져 있고 더구나
이곳은 바로 아미산의 아래로 아미제자들의 지반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음으로 문하 제자들의 눈초리에 오만스러운 기색이 서려 있
음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어아는 한바퀴 쭉 돌아보고 나서 향대(香袋)를 하나 산 다음
얼마 간의 절인 야채와 쇠고기 튀김 등을 사 가지고 객잔(客殘)으
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황우, 백양 두 사람은 단정
하게 자리에 앉아 음식이 다 식도록 젓가락 한 번 대보지 않고 기
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소어아가 웃으며 말했다.
"삼 일 동안이나 마치 시골 아가씨처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
다니 정말 이상한 걸. 시가가 아주 번화하고 좋더군. 자네들도 구
경하고 싫지 않은가?"
황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보고 싶기야 하죠. 하지만 이 아미산 아래서는 점잖게 방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더 나
은 일이지요."
"아미파의 조무라기들이 뭐 그리 겁이 난단 말인가?"
황우가 한숨을 내쉬더니 잔을 들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 하기로 하지요. 자...... 제
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소어아는 사가지고 온 것을 풀어 놓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이곳의 절인 야채와 쇠고기 튀김은 세상에 널리 알려
진 유명한 것이라고 하더군. 맛 좀 보도록 하게."
"말 한마디면 효자현손들이 즉시 대령할 텐데 무엇 때문에 낭비
를 하시며 이런 것을 사오십니까? 하지만 주시는 것이니 사양하지
않고 먹겠습니다."
백양은 몇 점 먹어보더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황우
도 젓가락을 쉬지 않고 집어 먹었다.
소어아는 술을 두어 잔 연거퍼 마시고는 흥취가 난다는 듯 웃으
며 말했다.
"보아하니 아미파의 검법이 알려지기는 괘 알려진 모양이더군.
강호의 친구들이 이곳에 와서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들의
검법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봐야겠는 걸?"
황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소숙께서 한 번 손을 쓰시면 아미파의 쥐새끼 같은 놈들은 무
서워 벌벌 떨겁니다."
백양이 향대를 주시하며 물었다.
"소숙께서는 아미산으로 가시렵니까?"
"나는 원래 자네들과 함께 가서 자네들의 시야를 좀더 넓혀주려
고 생각했었는데 자네들이 꺼려하니 나 혼자서라도 가도록 하겠
네."
황우가 물었다.
"언제쯤 산에 가시렵니까?"
"내일 아침에 떠날까 하네."
황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깝게도 계획이 바뀔 것 같군요?"
소어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계획이 바뀐단 말인가?"
황우는 그를 주시하더니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백양이 음침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병신같은 조무라기 놈아! 그게 궁금한 모양이지?"
백양이 갑자기 욕을 하자 소어아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땅'
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매우 노하여 소리쳤다.
"이 늙은 염소 같은 놈아, 네가 감히......."
그러나 소어아는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 하고 비실비실 바닥에
쓰러졌다. 술에 미혼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백양은 대소했다.
"야, 이 얼뜨기 같은 놈아! 이젠 왜 못 가게 되는지 알겠지?"
황우가 의기양양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우리들이 네가 무서워 얌전히 따라다닌
줄 아느냐?"
"네놈...... 네놈들은 무엇 때문에......."
백양이 여전히 음침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우리들이 모용산장에 간 것이 단지 단약 때문은 아니었다. 흥!
그깟 계집애가 만든 싸구려 약 때문에 우리 십이성상이 움직일 줄
알았더냐?"
황우가 끼어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주지. 우리들은 바로 너를 찾으러 갔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백양이 질세라 또 한마디 거들었다.
"네가 연남천의 보물지도를 가지고 있는 줄은 이미 알고 있었
다. 사노칠(蛇老七)은 너를 잡으려고 비둘기를 날려 연락해 우리
를 불렀지. 우리들이 도착했을 땐 모용 그 계집년은 어디론가 사
라져버리고 없었어."
황우가 계속 뒤를 이었다.
"산장을 모조리 뒤져보았으나 네 놈을 찾을 길이 없자 홧김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린 것이야."
"집이 모두 불에 타버렸을 때 우리들은 우연히 그 석실을 발견
하게 된 것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네 놈은 도대체 무슨 되지 못
한 짓거리를 했기에 물감옥에 갇혀 있었느냐?"
황우가 끼어들며 대답했다.
"그거야 이상스러울 것도 없지. 모용 그 계집년은 원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소어아는 그들이 말을 하는 동안 한숨만 내쉬고 있다가 이윽고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단지 너희 두 놈만 남아있게 되었느냐?"
황우가 나섰다.
"우리들은 네놈이 꾀를 잘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놈을 핍
박해 봐야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을 말할 것 같지도 않고 또 무슨
얕은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너의 말에 고분 고분하
게 속아 넘어간 척 했어. 그래서 여지껏 네놈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모르는 척 너의 말에 순종하며 참아 왔던 것이다."
"황우는 네가 가는 곳이 반드시 연남천의 보물이 있는 곳일 테
니 어디로 가든 묻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따라 가자고 했
지. 흥, 네가 황우에게 꼼짝없이 당했지?"
소어아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황우를 주시하며 물었다.
"바로 네가 생각해 낸 의견이었단 말이냐?"
황우가 대답했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할 줄 알았더냐? 이 멍텅구리 같이 제
꾀에 제가 빠져드는 어리석은 놈아!"
아미산으로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탄식하였다.
"과연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해선 안 되겠군. 바보도 그런 꾀가
있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 했는 걸."
백양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에서 저놈에게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야. 너처럼 당한 놈들
이 하나 둘이 아닌데 웬 탄식이냐?"
"그러나 넌 어떻게 이대취를......."
황우는 빙긋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린 네가 광사철전(狂獅鐵戰)의 딸과 같이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십대악인 중 하나의 이름을 말했는데 넌 과연 속
고 만거야. 사실 예전에 그와 면식이 있기는 있었지. 말한대로 조
카뻘이 되기는 해."
소어아는 쓴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그건 우연의 일치야. 네가 운이 좋았다고 치자. 하긴 나도 이
상히 여기기는 했지. 십이성상은 흉명이 드높은 악당들인데 어째
그렇게 말을 잘 듣나 하고...... 아! 나도 남에게 당하는 날이 있
었군!"
황우는 크게 웃었다.
"넌 자신이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실력으로 강
호에서 먹고 살려면 아직 멀었어."
백양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마음 속에 계획하는 것이 없었다면 널 그렇게 고분고분
시중까지 들며 따라다녔겠어? 흥! 만약 이대취가 나타난다면 산채
로 껍데기를 벗겨버리겠다."
황우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네가 그 보물의 소재지를 찾게 되면 그 후에 너를 죽이
려고 했는데 네놈은 혼자서만 좋아라고 돌아다녔지. 그래서 우리
는 하는 수 없이 결국 너에게 두 잔의 미혼탕(迷魂湯)을 마시게
한 거야."
백양이 또 얘기했다.
"하여튼 지금 우린 그 보물이 바로 아미산에 있는 것까지는 알
아낸 것이 아니겠어?"
황우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네가 만약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말한다면 널 용서할지도
몰라. 넌 똑똑하니 못난 짓은 안 할 거야. 고생하기 전에 나에게
말해줄 수 없을까?"
소어아가 아무런 말도 없이 다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비웃으
며 바라보자 백양은 크게 분노했다.
"이 못난 놈아, 우리가 널 실토하도록 못 할줄로 아느냐!"
"늙은 염소야, 넌 내가 정말 너희들에게 당했는 줄 아느냐!"
황우는 비웃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말이나 해봐라."
소어아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해도 너희들은 다 듣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황우는 히히 웃으며 물었다.
"정말인가?"
소어아도 히죽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거짓말이야. 그 쇠고기 속엔 독약이 없었어. 암, 조금의
독약도 없었지."
이 말을 듣자 황우는 안색이 일그러지며 웃음을 거두었고 백양
은 소어아의 옷깃을 당기며 소리쳤다.
"야, 이 바보야, 뭐라고?"
소어아는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난 바보야. 그래서 비록 내일 보물을 찾으러 가야 하고
또 너희들을 따돌려야 했지만 그렇다고 음식에 독을 넣을 생각까
지는 할 수가 없었어."
"너...... 너...... 어서 해독약을 내놔라!"
소어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난 바보니까 응당 너희들에게 해독약을 주고 날 죽이
길 기다려야 하겠지. 하하! 이놈들아! 너희들은 보물을 찾을 때까
지는 날 죽이지 못 하지. 그러나 난 너희들과는 처지가 달라. 하
하! 미혼약은 깨어날 수 있지만 독약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거야."
이때 황우는 돌연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백양의 어깨를 툭 쳤
다.
"이놈이 또 수작을 부리는 것 뿐이야. 어찌 우리가 그 말을 믿
겠어!"
소어아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날 믿어선 안 돼. 지금 너희들이 다섯번째의 갈비뼈
밑에 있는 유근혈 옆을 만져보면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 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만져볼 필요도 없지."
그의 '만져볼 필요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황우, 백양
두 사람은 모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섯번째의 갈비뼈 밑에 있
는 유근혈로 손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뼈 밑을 만져보더니 모
두 안색이 변하여 서로 마주본 재 꼼짝하지를 못 했다.
소어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얼마 동안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거야. 그러니 날 죽
일 시간은 있지."
비록 자기를 죽이라고 했지만 만약 그들이 소어아를 죽이면 해
독약은 누가 주겠는가?
"너...... 넌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백양의 말에 소어아가 대답했다.
"내가 만약 너희들이라면 우선 해약을 준 후 나의 비위를 맞춰
주겠다. 영원히 내 말을 듣겠다고 맹세를 하고 추호도 배반하지
않겠다는......."
소어아는 일부러 약기운이 도는 것처럼 조금씩 말을 흐리기 시
작했다.
"그 독약은 즉석에서 해독할 수 있는 약이 없어. 그리고 독약을
만든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독약의 성분을 모르는 법이지. 그러
니...... 너희들이 다른 어떤 해약을 구해먹는다 해도 소용
이...... 없을 거야. 믿지 못...... 못 한다면 시험해 보아도 무
방해."
황우와 백양 두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것도 아니
라 목숨을 걸고 시험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 일
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우선 맹세를 해서 해독약을 얻은 뒤 그를 죽여도 늦진 않겠지.
목숨을 구하는 데 맹세하는 것쯤이야.......)
두 사람은 아무소리 않고 꿇어앉자 충성을 맹세한 뒤 공손히 해
약을 소어아의 입 속에 넣었다. 다른 일이라면 기다릴 수 있지만
목숨만은 기다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나 흘렀을까, 소어아는 분연히 일어서서는
몸의 먼지를 툭툭 털더니 두 사람을 향했다.
"십이성상의 해독약은 과연 용하군."
이 말에 황우는 마른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당신 해독약은 더욱 용하리라 믿소."
"해독약? 무슨 해독약?"
소어아의 엉뚱한 말에 백양과 황우는 마치 갑자기 뒷통수를 얻
어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네...... 네가......."
"성급히 굴지마라. 너희들을 속인 것이 아니니까."
그는 웃으면서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해독약은 사실 내 몸에 있었는데 너희들은 왜 내 몸을 뒤지지
않았지? 아, 사람들은 때로 너무 남을 믿는단 말야."
백양과 황우는 소어아를 씹어먹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숨을 구하는 일이 중요했다. 황우는 소어아의 손에서 재빨리 해
독약을 나꿔채 급히 꿀꺽꿀꺽 들이켰다.
갑자기 백양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넌...... 넌 왜 그렇게 많이 먹지!"
황우는 천천히 병을 건네주었다.
"난 덩치가 좀 커서 많이 먹어야 돼."
백양은 급히 남은 해독약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소어아를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잡종아! 네가 이제 어디로 달아나겠느냐.)
그러나 소어아는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다가섰
다.
"이제 아프지 않나?"
두 사람이 유근혈을 짚어보니 과연 아프지가 않았다.
"이 해독약은 효과가 빠른데!"
백양의 말에 소어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만져보라고 한 곳은 기혈이 교류하는 곳이라
서 조금이라도 만지기만 하면 아프지. 하지만 지금은 기혈이 이미
그곳을 지났갔으니까 아플 리는 없을 거야."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 화가 극도로 치밀었다.
백양이 소리쳤다.
"이 작은 잡종! 네가 우리를 속였구나!"
"그렇지 난 너희들 늙은 잡종들을 속였지. 내가 정말 독약을 넣
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겠는가!"
황우는 분기충천했다.
"좋아. 우리가 당했다! 그러나 우리도 바보는 아냐. 너에게 말
해 둘 것이 있어. 비록 네가 해약은 먹었지만 아직 한참 동안은
진기를 이용할 수 없어. 네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목을
꺽어 놓아야겠다."
"정말? 그럼 보물은 어떻게 찾지?"
"흥! 그럼 내가 헛소리를 한 것으로 해두자. 내가 어찌 널 죽일
수 있겠어? 다만 너의 한쪽 귀와 코와 한 손과 하나의 다리를 잘
라 버리겠다."
"아유, 무서워. 정말 겁나는 소리를 하는군!"
"두려워할 필요까지는 없어. 내가 널 잡아 먹진 않을 테니까.
다만 네 살덩어리로 개나 먹일 뿐이지."
황우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서서히 소어아에게 다
가섰다.
그러나 소어아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바보야! 이젠 시간이 됐다."
황우는 손을 펼치며 달려들려 하다가는 어찌된 영문인지 몸이
흔들리면서 안색이 검게 변하더니 풀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
의 눈은 여미 정기를 잃고 있었고 입에선 개거품을 내뿜었다.
백양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거...... 이거 어찌된 일이지?"
"아무 것도 아니야. 음식 속엔 독이 없었지만 해독약 속엔 독이
있었지. 또 너무 욕심을 내서 많이 먹었기 때문에 먼저 쓰러졌을
뿐이야."
백양은 노도와 같이 큰소리를 치며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그러
나 그는 공중에서 부르르 떨더니 나뭇잎처럼 힘없이 떨어져버렸
다.
소어아는 박장대소했다.
"하하! 조심해라, 다칠라......."
이때 돌연 창밖에서 싸늘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어린애에게 당하다니, 너희 염소와 황
소는 그래도 사람을 볼 낯이 있는가?"
"누구요?"
창문이 약간 열리는 듯하더니 마치 뱀이 미끄러지듯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벽사신군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어떠십니까, 앉아서 술이라도 한 잔 하실까요?"
벽사신군은 음산한 걸음걸이로 불쑥 앞으로 나섰다.
"말해 두지만 그들이 술 속에 넣은 미약은 나의 독문이지. 약의
효력은 내가 잘알고 있어. 그러니 말을 하면서 시간을 벌려고 꾀
를 써도 소용없어. 네가 진기를 이용하게 되기 전에 내가 손을 쓸
테니까."
소어아는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이번 만큼은 난 빠져나가지 못 하겠군."
"그렇지!"
벽사신군은 대답을 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우와 백양을 내
려다보았다. 그들 두 사람은 눈만 멀건히 떴을 뿐 몸은 모두 무감
각상태여서 사지를 움직이지도 못 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약
은 벽사신군의 약보다 열 배는 더 무서운 것이었다. 벽사신군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사람 반, 귀신 반의 강시독(毒)이로구나!"
소어아가 말을 받았다.
"당신은 견식이 넓군요. 이 두 분은 별로 배부르게 드신 건 아
니지만 반 시간 내에 시체가 될 것이오. 설사 죽진 않는다 해도
금후론 좀 엉성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게요."
황우, 백양은 이 소릴 듣자 등에서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벽사신군이 어쩔줄 모르고 있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보물을 세 사람이 나누면 너무 적지 않을까. 더군다나 두 분은
길에 표시를 해두겠다고 했는데 표시가 어디에 있었지?"
황우, 백양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벽사신군은 다시 그들을 향해 냉소했다.
"두 분은 평소 귀신이 좋다했으니 이번에 정말 귀신이 되보는
것도 재미 있겠군."
이 말을 내뱉은 그는 소어아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혈도를 점하는 것은 좋으나 좀 가볍게 해주시오. 난 지금 기력
이 별로 없소. 너무 심하게 손을 써서 내가 죽어버린다면 반드시
후회할 거요."
"난 너의 혈도를 점하지 않겠다. 다른 방법을 쓰지. 아프진 않
고 좀 가렵기는 하겠지만 짜릿한 맛이 일품인데 아마 여자를 안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을 걸?"
그가 말을 하면서 팔을 쳐들자 푸른 빛을 내는 작은 뱀들이 그
의 옷소매에서 흘러나왔다. 뱀은 마치 지렁이처럼 가늘었으나 바
람처럼 날쌔게 움직이는 것이 놀랍도록 민첩했다.
소어아는 비록 담이 크다고는 하나 시퍼런 뱀이 허를 날름거리
며 다가오자 안색이 절로 변하며 온 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
다.
벽사신군의 옷소매 속에서는 마치 뱀굴처럼 삽시간에 열 마리가
넘는 작은 뱀들이 흘러나왔다. 그것들은 소어아의 몸을 기어오르
자 옷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차갑고 매끈한 작은 뱀들이 피부를
스르륵 핥아가며 지나가자 정말 야릇한 감정이 일어나며 몸이 뒤
틀려왔다.
이 모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벽사신군은 흉물스러운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열 명이 넘는 여인들이 동시에 널 안아주는 맛이 어떠
냐?"
"여인을 안는 맛이 이렇다면 총명한 사람들은 모두 중이 되버리
겠는데."
"흐흐, 넌 아직 진짜 맛을 못 보았어!"
"부탁이오. 난 이런 걸 맛보고 싶지는 않소."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을 안내해 드리리다."
벽사신군은 눈동자가 크게 움직이더니 가만히 물었다.
"이 아미산 근처에 보물이 있는가?"
"틀림없소."
벽사신군의 입가엔 웃음이 돌았다.
"그렇다면 오늘밤 안으로 그 보물을 보게 되겠군."
"볼 수 있을 뿐더러 가지고 갈 수도 있을 거요."
"그렇다면 가자."
"간다고? 이...... 뱀들은?"
"이 많은 미인들이 널 안고 있으니 네가 복이 많은 줄을 알아야
지."
"그러나 이 미인들이 날 안고 있으니 내가 어찌 움직일 수가 있
겠소."
"순순히 움직이기만 한다면 널 잘 대해줄 것이야. 하지만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그녀들의 앵두 같은 입이 널 애무하게 될 지도
모르지. 흐흐 하하......."
소어아는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기침소리조차 크게 못 낼 형편이었다.
방을 나오자 마침 지나가던 한 종업원이 소어아에게 인사를 했
다.
"도련님 당신......."
그러다가 그는 소어아의 얼굴을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
파랗게 질려 졸도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내 모습이 별로 예쁘지는 않은 모양이지. 양 귀에 뱀이 또아리
를 틀고 있고, 손목과 목에도 뱀이 감아 돌고 있는데다 또 콧등에
까지 한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다니고 있으니...... 마치 귀걸이,
목걸이, 팔찌를 차고 있는 것 같잖아? 기회가 있으면 이 장식품들
을 모두 모용구매에게 주어야지."
그가 이렇게 꿍시렁거리는 동안에도 벽사신군은 그저 무표정하
게 뒤를 따라올 뿐이었다.
소어아가 다시 말했다.
"사실 지도는 보물의 위치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지를 않았지.
사흘이나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겨우 그곳이 아미도장 뒷산 근처라
는 것을 알아냈는데 결국 당신 좋은 일만 해준 셈이군."
말이 끝나자 검은 수건이 그의 머리를 감싸버렸다. 벽사신군의
소행이었다.
"저기까지는 너의 안내가 필요하지 않아. 순순히 날 따라오는
것이 좋을 거야. 다른 생각일랑 아예 먹지도 말고."
소어아는 연거퍼 탄식을 하며 말했다.
"왜? 내가 누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라도 청할까봐 그러시오?
이 세상엔 나의 원수가 있을 뿐 친구는 없소."
"닥쳐!"
"제기랄! 말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인가? 맹인처럼 남을 따라 다
니는 신세가 된 마당에 또 벙어리처럼 말도 못 하게 되었으
니......."
벽사신군의 걸음이 빨라지면 그 역시 걸음을 빨리했고, 벽사신
군이 걸음을 늦추면 그도 따라서 천천히 결었다.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지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얼마를 걸어 갔을까, 갑자기 벽사신군은 소어아를 잡아끌며 길
옆 잡목 속으로 들어갔다.
(이 녀석이 뭘 발견한 모양이구나.......)
다급한 듯하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벽사신군의 목소리가 소어아
의 귓전에 들려왔다.
"소릴내면 죽여버리겠다."
이때 약 육칠 장 떨어진 곳으로 부터 두런두런거리는 사람의 말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이었다.
"철심난 계집애가 여기에 와서 사라졌는데......."
"아마 이미 우릴 발견했을 거야."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은 소선녀와 모용구매가 틀림없었다. 소어
아의 가슴은 크게 뛰기 시작했다. 만약 다른 때 이 두 사람이 자
기근처에 있는 것을 알게 됐더라면 벌써 달아날 궁리를 했을 것이
다. 그러나 소어아는 이때 만큼은 두 사람이 빨리 왔으면 하고 속
으로 안타까와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꼼짝할 수 없는 곤경
에 처한 그는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그녀들이 빨리
자기를 발견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게다가 만약 그녀들이 벽
사신군을 쫓아내기만 한다면 자연 살 방도를 또 꾸며볼 수 있지도
않겠는가!
소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 계집애를 찾아야 돼. 그래야 그 악당 녀석도 잡을 수가
있어."
"맞아. 반드시 그 녀석을 잡아야 돼. 그 녀석의 심장을 꺼내서
그 빛깔이 어떤가 꼭 봐야되겠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검은색......."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는 가까와졌다가는 다시 차츰 멀어져갔
다.
소어아는 다급해졌다. 그들에게 당장이라도 자기가 여기에 있다
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뱀들이 몸에 붙어있는 이상 어찌할 도
리가 없어 애만 바짝바짝 탔다.
결국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모용구매와 소선녀는 일부러 철심난을 풀어주고 그 뒤를 따라
온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애초부터 철심난이 지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 한다는 것을 미심쩍게 생각했구나. 또 이미
내가 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철심난을 쫓는다면 보물과 나를 다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모용구매는 날 직접 그렇게
가두어 놓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 이 여인도 연 백
부의 보물에 대해 욕심을 품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백양과 황우
의 말로는 집안까지 다 정리해버리고 길을 떠났다고 했는데 그 이
유는 또 무엇일까?)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소선녀와 모용구매는 완전히
사라졌는지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벽사신군은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그들이 사라졌는지를 확인한 후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철전의 딸년도 이미 지도를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자! 우
리가 빨리 선수를 쳐야겠다. 여기는 이미 아미 뒷산이다. 이제부
터는 네가 길을 안내해라."
벽사신군이 검은 수건을 벗겨내자 소어아는 중얼거렸다.
"장님노릇도 하기 쉬운 일은 아니군."
유난히 밝은 별빛이 소어아의 눈동자에 비쳐들어왔다.
동굴 속의 관(棺)
아미산은 험준했다. 더군다나 산 뒷편에는 몇십 장이 넘는 절벽
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들이 위로 올라갈수록 운무가 꾸역꾸역 산 주위를 감싸기 시
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주위를 분간 못 할 정도의 구름에 묻혀 버
리게 되었다.
험한 길을 한참 걷는 동안 두 사람은 모두 호흡이 거칠어졌다.
"아직 멀었나?"
벽사신군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다.
"왜? 내가 일부러 늦장이라도 부리는 것 같소? 그 보물을 찾기
전까지는 짜증내지 말고 날 잘 구슬리는 것이 좋을 거요. 보물을
찾은 뒤에 날 처치해도 늦진 않을 테니까."
"마음놓게. 보물을 찾은 뒤에도 너를 죽이지 않고 잘 대해줄 테
니까 너는......."
갑자기 벽사신군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 이녀석아! 어디로 갔지? 빨리 나와...... 어서 나오란 말
이다."
한 순간에 소어아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 벽사신군도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벽사신군은
당황하여 눈망울이 주먹만 해져서 소리쳤다.
"너 이녀석아! 네가 정말 나오지 않는다면 휘파람을 불겠다. 그
러면 넌 죽고 말어. 네가 어디로 달아난다 해도 소용없는 짓이
야!"
벽사신군은 당황했다.
"그 벽사는 부골지저라고도 하는데 나의 명령 없이는 한평생 너
에게 매달려 다닐 것이야. 네가 죽을 때까지 말이야."
돌연 곁에서 '푸우'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에 있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오!"
벽사신군이 눈을 돌리자 덤풀 속에서 손목에 뱀이 감긴 소어아
의 손이 불쑥 나왔다. 뒤로 동굴이 있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어느 사이에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들어 오시오. 여기가 바로 보물이 있는 장소의 입구요."
벽사신군은 부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보물이라는 말
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다급히 동굴 입구로 달려가 덤불을 제
쳤다. 굴 속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온 몸을 감쌌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연남천만이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지...... 아! 연남천아, 연남
천, 결국은 남의 손에 네 보물이 들어가는구나! 하하하!"
동굴 속은 코 앞도 보이질 않을 만큼 어두웠다. 벽사신군은 곧
품속에서 작은 횃불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이 물건이 무엇인줄 아나? 사실 난 이번 길을 위해 많은 준비
를 했지. 이 불씨는 삼백 냥의 은을 주고 노화아에게 구한 것이
지. 하룻밤을 꼬박 새운다 해도 꺼지질 않을 거야."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횃불이 꺼져버렸다.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괜찮은 물건이군."
"노화아 그놈이 날 속이다니."
"그를 나무랄순 없지요. 당신이 너무 큰소릴쳐서 그 입김에 불
이 꺼져버린 것이오."
벽사신군은 다시 횃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발을 떼어놓
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서 앞서 가던 벽사신군이
갑자기 안색이 돌변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소어아는 재빨리
고개를 빼내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에는 세 구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그 시체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파란 빛을 내는 무기를 들
고 있었다.
벽사신군은 손을 내밀어 시체를 만져보았다. 시체는 비록 차가
왔으나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벽사신군은 횃불을 갖다 대며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순간 벽사신군은 안색이 파리하게 변하며 횃불을 쥔 손을 떨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보고섰던 소어아가 물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금...... 금능삼검(金陵三劍)이야!"
"꽤 알려진 인물들인 모양이지요."
"비단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일류 고수들이야. 이들이 어떻
게 여기에 와 있을까?"
그 생각은 소어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상한데...... 하지만 여하간에 이 사람들은 죽어버렸으
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소?"
벽사신군은 음침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들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이 동굴 속
에 있을 거야. 저 시체들을 봐. 그 사람은 몇 번 손을 쓰지 않고
도 순식간에 금능삼검을 죽인 모양이야."
"이상하다. 그가 누굴까? 그는 또 어떻게 여기에 와 있을까?"
"지도가 여러 장일 리는 없고 그 지도는 네가 가지고 있었는
데......."
이때 돌연 수중에 있던 횃불이 다시 꺼져버렸다.
벽사신군은 비로소 누가 몰래 손을 쓰는 것임을 눈치챘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누구냐?"
순간, 어둠을 뚫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말이 맞소. 금능삼검을 죽인 사람은 이 동굴 속에 남아
있소. 그 사람이 바로 나요."
그 목소리는 평온하며 아무런 특징도 없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런 음침한 굴 속에서 그러한 목소리를 듣게되자 오히려
두려움이 고조되었다.
"당신...... 당신은 누구요?"
"나를 볼 용기가 있소?"
벽사신군도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두려운 생각에 손을 떨
면서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불을 켰다.
그 불빛을 타고 한 회의인(灰衣人)이 동굴 속으로부터 걸어 나
왔다. 그의 얼굴은 회색이 감돌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대패로 민 듯이 반듯한 것이 마치 달걀 귀신 같았
다.
소어아는 이 사람이 가면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것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이 서늘해 왔다. 그가 코와
입을 가린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왜 눈도 가렸을까. 눈을 가리
고도 어떻게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벽사신군은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나지막히 신음을 하듯
말했다.
"다...... 당신은 회색 박쥐?"
회의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했다.
"잘 보았다."
"그럼, 그 올빼미는......."
더듬거리는 벽사신군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왈칵 선혈을 토하
며 쓰러졌다. 누군가 암수를 가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다시 횃불
이 꺼져버려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깜깜해져 버렸다.
소어아가 놀라서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있는데 뒤로부터
불빛이 새어들어 왔다. 소어아는 깜짝 놀라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별다르게 특별한 곳은 없
었다. 다만 눈이 무서울 정도로 컸다.
회의인이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벽사신군을 내려다보며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회색 박쥐가 여기에 있으니 올빼미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
마주서서 앞사람과 이야기할 때도 뒤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바보
야."
회의인의 말이 끝나자 그 올빼미 같이 큰 눈을 가진 사나이가
소어아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여길 왔는가 물어보고 싶은 걸."
소어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소?"
묘두응(猫頭鷹-올빼미)은 그 큰눈을 더 크게 떴다.
"내가 말을 했다니 그게 무슨 얘기냐?"
"연남천의 보물지도는 단 한 장 뿐인데 당신이 말을 하지 않았
다면 어떻게 우리가 여길 찾을 수 있었겠소. 당신은 우리의 힘을
빌어서 회편폭(회색박쥐)을 죽인 뒤 혼자 보물을 삼키려고 하지
않았소. 왜 지금 와서 배신하는 것이오. 몇 푼 은자가 아까와졌
소?"
묘두응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놈이 그런 계책을 쓰다니 필히 마두가
될 놈이구나!"
"맞았소. 그러니 당신은 어서 나를 죽이시오. 그래야 당신 일이
누설되지 않을 테니."
"그래, 너를 죽여 마두의 싹을 잘라버리겠다."
묘두응은 양손을 동시에 내밀었다. 열손가락이 마치 독수리의
발처럼 소어아의 목을 향해 뻗쳐갔다.
소어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 공격을 피해 몸을 급히
움직였다가는 당장 사미인들의 입이 가만 있지를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회편폭이 한 걸음 나서며 묘두응의 행동을 저지했다.
"잠깐 이런 조그만 아이에게 독수를 가할 필요가 있소?"
갑작스레 회편폭이 나서서 자기를 막자 묘두응은 손을 거두며
투덜댔다.
"왜 나를 막는 거요. 이 어린 녀석의 말을 믿는다는 거요?"
"너와 나,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지도인데 이 사람들이 어떻
게 알았는가 이상하지 않아?"
묘두응이 크게 소리쳤다.
"너와 나는 이십 년간이나 교제를 해 온 터인데 날 믿지 못 하
겠다는 말이냐?"
"장님은 남에게 속기가 쉬우니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좋다! 네가 이 보물을 혼자 차지하기 위해 생트집을 잡는 모양
인데 난 벌써부터 장님들이 흉물스럽다는 말을 들어왔다. 남들이
하는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것이 한스럽구나......."
묘두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편폭은 한줄기 장력을 발해 묘
두응의 횃불을 꺼버렸다. 묘두응이 분기탱천해서 소리쳤다.
"좋아! 좋아! 넌 정말 독수를 가하는구나!"
잇따라 계속 손바람 소리가 동굴 속에서 오갔다.
소어아는 회편폭은 장님이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사용하는 독
특한 무술이 있음을 짐작했다. 묘두응 역시 제아무리 어둠 속에서
물건을 분별할 수 있다 해도 역시 약간의 불빛이라도 있었을 때의
얘기였다. 그는 확실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뿌드득하고 뼈마디가 부숴지는 소리가 나면서 묘두응의 신음소
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넌...... 넌 하루만 지나도 후회할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어아는 숨을 삼키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회편
폭이 묘두응을 죽인 후에는 자기에게 손을 쓸 것이라는 것을 너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돌연 회편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너 어디 있지? 왜 말을 하지 않는 거니? 네가 그의 음모
를 알려줘서 감사할 참이었는데."
그 목소리는 서서히 소어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장님이긴 했
으나 높은 무공을 지닌데다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나 가벼
운 숨소리로도 충분히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다른 감각
이 발달해 있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소어아는 온 몸
에서 진땀이 흠뻑나 옷이 몸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이제 보니 네가 여기에 있었구나. 왜 빨리 달아나질 않지?"
소어아는 이를 악물었다. 땀방울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는 흘러내리는 곳이 가려워도 긁지를 못 하고
꼼짝 달싹 하지를 못 했다. 평생토록 이렇게 무서워해 본 적이 없
었다.
회편폭의 손은 점점 더 가까와져 그의 목 주위까지 왔다. 회편
폭의 조용하고도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널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겠어. 가볍게 점해서 편안히 죽여
주지. 그러니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네가 보물 얘기를 퍼트리고
다니면 나도 영영 편히 지내질 못 해."
이때 갑자기 회편폭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너...... 너의 목에......."
회편폭이 소어아의 목을 점하려는 순간 소어아의 목을 감고 있
던 뱀이 그의 손을 물어버린 것이었다.
소어아는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쉽게도 당신은 지금 나의 호신사를 건드렸소. 하하! 날 죽이
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뱀...... 독사......."
몇 마디도 채 입밖으로 내보지 못 하고 화편폭은 땅바닥에 풀썩
쓰러져 절명하고 말았다.
소어아는 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자 기쁜 가운데서도 한편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벽사신군이 키운 독사는 너무나도 악독
한 맹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회편폭아, 나는 이미 네가 꼭 치명적인 급소를 노릴 것으로 예
상했지. 그런데 급소란 급소는 모두 독사가 휘감고 있었다. 그래
서 난 피하지 않고 네가 손을 쓰길 기다렸지. 아! 본래 날 해칠
독사가 날 구한 결과가 되었구나. 천하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일
이 많아."
그는 긴장감에서 풀려 허탈감에 빠졌다. 위기 일발의 순간에 그
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회편폭과 도박을 했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수습하며 어둠 속에서 벽사신군의 불씨를 찾으려고
더듬거렸다. 그러나 함부로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사미인의
무서운 위력을 방금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소어아의 입에선 저절로 장탄식이 새어나왔다.
"부골지저! 이건 정말 부골지저군. 그들을 떨어뜨리지 못 할바
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이때였다. 불빛이 뻔적하더니 한 사나이가 횃불을 높이 들고 걸
어들어 왔다.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이런 동굴 속에서도 위엄이
당당했다.
그는 소어아와 땅에 쓰러져있는 시체들을 보고는 놀라서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멈추어서서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뉘시오?"
소어아는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나도 모르면서 강호를 나다니는 것이오?"
"그럼 약간은 이름이 있는 인물인 모양이지?"
금의의 사나이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내가 바로 서하십칠가(西河什七家) 표국의 연맹총표두 기발산
하동권철장진중주(氣拔山河銅拳鐵掌震中州) 조전해(趙全海)요. 이
이름을 그대는 필시 들어보았겠지!"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이름이 길고 꽤 위엄이 있는 것 같군. 그러나 당신은 내가 누
구인줄은 모를 거요."
금의 대한 조전해는 피식 웃었다.
"내가 강호의 졸부(卒夫)들 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
"내가 바로 만사지성, 만검지존, 만왕지왕, 삼산오옥과 남북 육
십삼성에 적이 없는 경천동지 옥왕자(驚天動地 玉王子)이오.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난 일찍이 강호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질 못 했는
데."
"당신은 비록 듣지 못 했지만 돌아가서 스승에게 물어보면 알
거요. 강호의 늙은 사람들은 날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지."
조전해는 이 말에 대단히 노했다.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아이가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
나!"
"당신은 내 나이가 어린 줄 아시오?"
"내 아들도 너 보다는 어리지 않다."
"당신은 무공이 극에 달하면 다시 젊어진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
했소?"
조전해는 놀라면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소어아가 계속 말했다.
"오늘 난 이미 사람을 많이 죽여서 더 이상 살생을 하고 싶지
않소. 당신은 사나이니 용서해 주겠소. 어서 가시오."
조전해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이 놈의 자식이 누구를 놀려?"
"당신은 우선 죽은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가 한 번 보시오."
조전해는 시체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자세히 보고는 안색이
변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들은 악적이라 나의 손에 응징받았을 뿐
이오."
조전해는 다시 소어아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땅바닥의 시체들과
귀와 코에 독사들이 휘감겨 있는 소어아의 괴이한 모습은 그 말을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는 드디어 포권의 예를 하고 인사를 했다.
"노형은 후배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이때 돌연 동굴 입구로부터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움직임은 너무 빨라서 그들이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
보는 순간 이미 그들로부터 두세장 거리까지 다가왔다.
"설화도(雪花刀), 넌 정말 나와 목숨을 걸겠느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검법은 그 신속함이 관외무쌍이라고 들었소. 그래서 난
벌써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데 오늘
어찌된 영문인지 보물을 두고 마주치게 됐으니 우리들의 생사를
가늠해야 되겠지!"
이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소어아는 궁금중이 나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설화도는 여자인 모양이지요?"
조전해가 탄식 비슷하게 말했다.
"그녀는 바로 지난 날 강호에서 이름을 떨쳤던 삼나찰(三羅刹)
중의 하나인데 칼 쓰는 법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러 역사가 있
는 삼호단문도팽가자제(三虎斷門刀彭家子弟)도 당하질 못 하지
요."
"다른 한 사람은?"
소어아의 물음을 조전해가 다시 받았다.
"설화도의 말로 미루어 보아 이 사람은 필시 장백검파(長白劍
派)중의 거물 관외신용검 풍천우(馮天雨)일 거요. 이 사람의 검법
은 매우 신속하여 정말 관외무쌍이오."
"난 정말 늙었구나. 후배 중에 이름있는 사람을 모르니."
조전해는 이맛살을 깊게 찌푸렸다.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곳이 이토록 은밀한데 어찌 이 많은 사
람들이 왔을가? 이상하다...... 이상해......."
이때 다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검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였는데 하나는 깡마른 체구에 검은 옷을 업고 있었
고, 또 한명은 백의(白衣)의 여인으로 수중의 유엽도를 자유자재
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어아는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의 무술은 쓸만하지만 결점이 너무 많아. 만약 내가
손을 쓴다면 그들은 단 몇 수도 막지 못 할 걸."
소어아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들은 곧 손을 멈추었다.
"전해, 당신이 어찌 여기에?"
조전해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래간만이오. 아직 예전 모습 그대로 변하지를 않았군."
"고마와요. 여기서 당신을 보다니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인
데...... 십일 년을...... 음...... 십이 년이 됐군요. 한 번도
날 찾아 오지도 않고...... 명성이 나면 옛사람은 다 잊는 모양이
군요."
조전해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나...... 나......."
관외신용검 풍천우가 돌연 싸늘하게 말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알고보니 옛애인들이 만났군. 그러나 유
옥여에다 조전해를 더한다 해도 난 두려워하지 않아!"
설화도 유옥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소어아를 한 번 힐끗 바라
본 뒤 입을 열었다.
"당신 제자입니까? 기괴한 모습이군요."
조전해가 말을 받았다.
"이분이 바로...... 옥...... 옥노선배님이오."
유옥여는 눈을 크게 떴다.
"노선배라고?"
조전해가 다시 말했다.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금능삼검, 회편폭, 묘두응, 벽사신군
등은 모두 이분 노선배의 손에 죽은 것이오."
이 말이 나오자 유옥여는 물론이고 풍천우도 놀라 두 눈이 주먹
만해지며 안색이 변했다. 풍천우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선 뒤 소어
아를 좌우로 살피면서 수중의 검을 더욱 힘차게 쥐었다.
소어아는 속으로는 배꼽이라도 잡고 뒹굴며 웃고 싶었지만 시치
미를 떼고 입을 열었다.
"유 아가씨도 보물 지도가 있소?"
유옥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어아는 눈길을 풍천우에게 돌렸다.
"당신은?"
"만약에 지도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소?"
"지금까지 모두 여섯 장의 지도가 나타난 셈이야. 하나의 보물
에 여섯 장의 지도가 나타났으니 이상한 일이군."
풍천우가 언성을 높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던 간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보물의
주인이야!"
"지금 죽는 것도 좋지. 하지만 그 보물을 보지도 못 하고 죽으
면 너무 애석하지 않을까?"
풍천우는 소어아의 말에 놀라며 수중의 검을 슬그머니 내렸다.
조전해가 끼어 들었다.
"옥노선배의 맏이 맞소. 나중이야 어쨌던 우선 들어가 보는 것
이 좋겠소. 보물을 본 후 다투어도 늦진 않을 테니."
"연맹표두의 견식이 제일 높군."
소어아는 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벽사신군의 품속에 무엇이 있나 좀 보게나."
벽사신군의 품속에서는 세 개의 자주색 대나무 통이 나왔다. 그
각각에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나의 통에는 '미혼', 또 하나의 통에는 '해독', 세번째 통에
는 '사양(蛇糧)'이라 쓰여져 있었다.
통을 바라보는 소어아의 눈은 기쁜 빛이 역력했다. 그는 이 사
양으로 몸에 붙은 '사미인(蛇美人)'을 떨어뜨려 버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에 잠기더니 통을 그냥 품속에 넣어버렸다.
그는 작은 뱀을 계속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동굴은 매우 깊었다. 굴곡이 심한데다 은밀하면서도 차가왔다.
소어아가 제일 앞에 섰고 조전해는 횃불을 높이 든 채 바로 뒤
에 섰다. 그 뒤를 따라서 풍천우가 긴 검을 손에 굳게 쥔 채 따라
들어왔고 유옥여가 마지막이었다.
얼마를 가자 동굴이 차츰 훤해지면서 종유석이 사방에 늘어져
있는 모양이 보였다. 여러 가지 색깔이 아롱져 신비스러운 아름다
움을 자아냈다.
천기백괴의 종유석들 사이에 두 개의 횃불이 꽂혀 있었고 그 불
빛 밑으로 다섯 사람이 보였다.
그 다섯 사람 중에 세 사람은 서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마주 보
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네 개의 손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마치
전력으로 결투를 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중 하나는 노랑색 장삼을 걸친 화상이었고, 또다른 한 사람
은 삐적 마른 노인이었는데, 이 둘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나고 있었다.
서있는 세 사람도 안색이 무겁게 보였다.
이때 소어아를 비롯한 네 사람이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들은 눈
길 한번 돌리지 않고 결투에 열중해 있었다.
소어아가 뒤돌아 보니 조전해, 유옥여, 풍천우 등은 안색이 전
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다섯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단 알 뿐만 아니라 이 다섯 사람에게 경계와 두려움
마저 느끼는 듯했다. 아마도 이 다섯 사람의 무공과 명성이 그들
보다 훨씬 고강한 것 같았다.
조전해의 입 속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 다섯 명의 늙은 괴물들이 어찌 여기에 왔을까?"
소어아도 입을 열었다.
"괴물이라 부를 정도면 필시 굉장한 인물들이겠군."
"선배께서는 회남왕가(淮南王家)의 대력응조신공(大力鷹爪神功)
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일문의 무술은 이미 칠십 년간이나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죠."
조전해의 말을 소어아가 받았다.
"음! 들어본 적은 있지."
"저 마른 노인이 바로 지금 응조문의 제일 명가로 사람들은 흔
히 시인여계(視人如鷄) 왕일조(王一爪)라 하지요."
"시인여계? 무슨 뜻이지?"
조전해는 쓴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그 자신이 지은 이름입니다. 뜻은 어떤 사람이든 그의 눈에는
병아리로 보인다는 것이죠."
"호기있는 이름이군. 건방지기도 하고."
소어아는 말을 하며 그들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노란옷
의 화상은 몸이 우람하고 당당했으며 앉은 키가 왕일조보다 고개
하나는 더 컸다. 그에 비해 왕일조는 왜소하고 비쩍 말랐다. 하지
만 그 역시 강건해 보였고 툭 튀어나온 눈이 불길을 내뿜고 있었
다.
이때 이들을 바라보던 소어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작은 소
리로 말했다.
"자네가 보기엔 저 두 사람 중에 누가 병아리 같은가?"
조전해도 웃고 싶었으나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 헛기침 소리를
내고는 목소리를 가라 앉히며 다시 설명했다.
"저 황의승인이 바로 오대산 계명사의 황계대사(黃鷄大師)이십
니다."
"병아리 만한 것은 독수리라 하고 또 독수리 만한 것이 병아리
라하니 웃기는 짓거리군."
이때 황계대사의 곁에 서있던 파란 옷을 입은 노인이 나지막 하
지만 차갑게 말했다.
"닥쳐!"
소어아는 그 파란옷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왕일조와 황계대사의 네 손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자는 또 뭐라는 녀석이지?"
조전해는 안색이 변하면서 그 파란옷의 노인을 바라본 후 다시
소어아의 얼굴에 붙어 있는 뱀들을 힐끔힐끔 훔쳐 보면서 낮은 소
리로 설명했다.
"저 사람이 바로 기공이 해외(海外)와 해내(海內)에 유명한 일
치개산 소운거사(嘯雲居士)입니다. 그는 황계대사와 수십 년간 교
분이 두텁고 생사를 같이하는 교정이지요."
"목숨을 같이 하는 교정인데 왜 황계대사를 도우지 않지?"
조전해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왕일조도 자기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뒤에 서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손천남으로 검과 손을 동시에 사용하는 명수이고,
또 하나는 창법 세가의 석동구문 장문인 구정파 구칠해지요. 왕씨
집안과 구씨 집안은 오래 전부터 교분이 두터웠습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황계대사와 왕일조의 신분은 남이 도움을 줄......."
"개똥 같은 신분은! 왕일조가 혼자 왔다면 소운 늙은이가 손을
안쓸 리가 없었을 것이야."
소어아는 큰걸음으로 걸어가 구청파에게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요사이 지내기가 어떤가?"
구청파는 소어아를 쳐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날 알지? 넌 누구냐?"
"당신은 날 모르지만 난 당신을 알고 있지. 그리고 지금 난 조
전해, 풍천우, 설화도 유 아가씨, 세 사람을 데리고 당신을 도우
려던 참이야. 당신과 손천남은 소운 늙은이에게 손을 쓰게. 내가
이 황계중을 천당으로 보내도록 책임지지."
구청파는 놀랍고도 기가 찼다. 그가 어리둥절하여 있을 때 소운
거사가 분노의 대갈 일성을 크게 지르자 불빛마저도 흔들거렸다.
순간 왕일조와 황계대사의 마주대고 있던 네 개의 손바닥이 떨어
졌다.
이 다섯 사람이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만한 무공이 있어서였다.
반응의 신속함이 웬만한 고수들이 감히 따를 정도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긴 검들이 검집을 떠났으며 은색의 휘황찬란한 검날들
이 공중을 갈랐고 황계대사의 몸은 마치 노란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르듯 유연하고 신속하게 두장 밖으로 날아갔다. 왕일조 역시 과
연 독수리처럼 날쌔게 뒤로 몸을 날렸다.
소운거사가 소리쳤다.
"흥! 왕일조. 네놈들이 수작을 부린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
구나."
소어아는 고개를 젖히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당신 다섯은 이제 보니 강호의 도적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
군. 서로 믿질 못 하고 남의 속셈이 흉악하려니 지레 짐작이나 하
고."
소운거사의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넌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긴장 하지 마시오. 난 누구도 돕지 않겠소. 다만 보물
을 찾기 전에 서로가 싸우게 되면 원한만 쌓이지 않겠소? 그래서
난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을 뿐이오."
소어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던 왕일조는 눈을 독수리처럼
뜨면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날 모르오?...... 저 사람에게 물어보시지."
그는 손으로 조전해를 가리켰다. 정기가 번뜩이는 눈동자들이
일시에 조전해의 몸으로 옮겨졌다.
조전해는 고개를 숙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 분이 바로 옥노선배이시지요...... 바로......바로......바
로 만사지성, 만검지존, 만왕지왕, 삼산오옥에 적수가 없고 천지
를 진동시킨 옥왕자이신......."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해 했다.
"비록 몇 자가 모자라도 마찬가지야! 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 했
다고 한다면 정말 귀를 막고 세상을 산 것이지."
왕일조는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쳤다.
"꼭지도 안 떨어진 애송이 녀석이 그런 이름을 써!"
조전해가 급히 막았다.
"이거...... 금능삼검, 회편폭, 묘두응과 벽사신군 등이 모두
이분 옥노선배의 손에 죽었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왕일조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눈이 휘둥
그레졌다.
그 중 소운거사가 조전해를 바라보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물었
다.
"그 사람들이 이 사람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지?
네가 직접 보았느냐?"
"그건...... 그건 물론 내가 직접 보았죠. 그들의 시체는 바로
입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는 정말 목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마음 속으로 믿고 있었
다. 더군다나 이때의 형세는 이미 기정화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왕일조, 구청파, 손천남, 소운, 황계는 서로 바라보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소어아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길들이 이미 방금 전
과는 달랐다.
이 사람들은 조전해의 말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양하십칠가
표국연맹 총표두의 이름만으로도 전당포에 가서 몇 냥의 은을 바
꿀수 있을 정도로 그는 신용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연신 사방을 둘러보면서 입을 뗐다.
"하나의 보물에 여러 장의 지도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
이오. 여러분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싶지 않소?"
아마도 그들은 이런 말을 조금 전에만 들었다면 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앞에 있는 기인의 신분을 눈
으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일조, 황계대사는 그 말을 듣고 심각
히 생각해보자 과연 거기에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때 동굴 천장쪽에서 가느다란 빛이 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시간이 됐군!"
왕일조는 손을 휘둘러 두 개의 횃불을 모두 꺼버렸다. 오직 달
빛만이 구멍을 통해 석순을 비췄다.
왕일조가 먼저 석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몸이 움직이
자마자 황계대사의 긴 소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또 소운의 칼이
이미 구창파와 손천남을 향해 지쳐들어가고 있었으며, 설화도 유
옥여의 번개 같은 세 번의 공격에 풍천우도 두 번이나 반격을 하
였다. 순간적으로 혼전이 일어났다.
소어아는 홀로 떨어져서 이 모습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급하지? 아직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형편이야. 보물을 찾아낸 후 다시 싸워도 될 텐데 도대체
웬일들이지?"
빛이 닿은 석순은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횃불을
다시 붙여들고 이 신비스러운 입구를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돌
계단이 드러났다.
왕일조, 황계대사, 구청파, 소운거사, 손천남, 조전해, 풍천우,
유옥여...... 이런 순서로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면서 계단
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무거운 표정들이었다.
소어아는 마지막으로 들어섰다. 얼굴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지
만 그 역시 약간의 흥분 상태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또한 긴장
에 싸여 있었다.
한참을 걸어들어가 계단의 끝에 거의 다 이를 때였다. 돌연 왕
일조가 '아' 하는 탄식소리를 내자 뒤따르던 황계대사도 '아' 하
는 괴이한 소리를 질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일파종주의 신분이
다. 웬만한 일로 함부로 기성을 지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뒤따르
던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그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 하고 소릴 지르더니 넋을 잃고 입을 다물지 못 했
다.
돌계단 끝에는 다만 몇 개의 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음산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검은 관들은 불빛을 받아 번쩍이며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옥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조전해의 품속으로 다가서면서 관을 세어보았다. 그 관은
모두 열세 개나 되었다.
이 관을 둔 커다란 석실에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영패가 두 자루의 촛불빛을 받고 있었다.
"역대조사지영위(歷代祖師之靈位)."
"이것은 누구의 소재지?"
소어아의 물음에 구청파가 무거운 소리로 대답했다.
"듣기에 아미산에 금지(禁地)가 있다던데 바로 아미파 역대 장
문인의 시체를 매장하는 곳이라고 했지. 혹시 여기가 아닐까?"
금지(禁止)의 난전(亂戰)
황계대사는 아미산의 금지(禁地)라는 말을 듣고는 이맛살을 찌
푸렸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빨리 이곳을 물러나는 것이 좋겠소."
소운거사가 대답했다.
"그렇소. 남의 금지에 함부로 들어서는 것은 무림의 큰 죄악이
오."
왕일조가 눈빛을 반짝이며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빨리 물러들 갑시다."
황계대사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드디어는 돌아섰다. 이
때 풍천우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대사 잠깐! 남의 계책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황계대사는 움찔하며 되물었다.
"계책? 무슨 계책?"
"세상에 관 속보다 보물을 감추는 데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
소."
황계대사는 잠시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운거사와 왕일조는 벌써 그 중 하나의 관쪽으로 달려들고 있
었다.
그 때 돌연 사방의 석벽에서 여덟 개의 문들이 일제히 열리더니
밝은 불빛이 새어나와 석실 안의 사람들을 비추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밝은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다만 불빛
뒤에서 사람과 검빛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는 있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한마디의 차갑고도 냉엄한 말소리가 불빛 뒤에서 우렁차
게 들려왔다.
"어디서 온 광도(狂徒)들인데 감히 본문의 성지에 침입하는고!"
잇따라 또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성지에 함부로 침입하는 것은 죽을 죄인데 물어 볼 것이 무엇
이오."
이 사람의 음성은 느렸지만 그 속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황계대사가 말을 받았다.
"신석도장이 아니시오. 도장께선 오대 황계대사도 모르시겠단
말이오?"
"성지에서는 옛정을 이야기하지 않겠소."
이 말이 끝나자마자 수십 개의 검빛이 불빛 뒤에서 석실 안의
사람들을 향해 마구 휘둘러졌다.
소어아는 검빛이 지쳐들어 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질 못 했다.
검도 무서웠지만 뱀이 더욱 독했던 것이다. 그는 돌연 하늘을
향해 대소하며 웃어버렸다.
그가 웃자 그의 몸에 감겨 있던 독사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혀
를 날름거렸다.
그를 향했던 검날은 공중에서 검세를 멈추었다. 불빛 아래 나타
난 것은 두 명의 자주색깔 옷을 입은 도인이었다.
왼쪽의 도인이 번쩍이는 검날을 소어아의 가슴을 향하면서 무서
운 소리로 호통쳐 물었다.
"너 이자식, 무엇이 우습단 말이냐?"
"내가 웃는 것은 너희 아미파가 잘난척만 했지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병신들이기 때문이지!"
주위에서는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너 이 자식아, 지금 뭐라고 했지?"
소아어는 눈을 깜박깜박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묻겠는데 우리가 성지에 침입한 것을 어떻게 알았소?"
"아미산은 함부로 다니지 못 하는 곳인데 사람이 침입했으니 모
를 턱이 있겠느냐?"
"내 생각엔 너희들이 이미 매복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누군가
미리 알려준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미리 알아내는 재주라
도 있단 말이냐?"
그 도인은 무섭게 소리쳤다.
"그건 네가 관계할 바가 아니다."
"나와 관계가 되는 일이다. 우리가 오기 전에 분명 너희들에게
고하는 사람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안 그런가? 흥! 너희들이 우리
가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조전해가 멀리서 소리쳤다.
"그렇소. 이 모든 것은 비밀을 고해 바친 사람의 함정이오. 우
리끼리 싸우게 하고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격렬한 소리가 나더니 몇 사람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도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냉랭한 소리로 쏘아부쳤다.
"함정이라고? 무슨 함정이야?"
소어아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손을 멈추면 내가 자연히 이 함정의 음모를 말하겠
소......."
그때 오른쪽에 있던 도인이 소리쳤다.
"그 자식의 술수에 휘말리면 안 되오."
"그렇다. 우선 이 녀석을 잡고 이야기해도 늦진 않다."
소어아는 두 사람이 손을 써 독사를 놀라게 하면 자기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후회가 막급했다. 왜 독사를 이대로 남
겨 두었던가!
그는 급한 김에 자기 품에 있던 세 개의 통을 두 명의 아미도인
에게 던져버렸다.
그 도인들이 검을 내리치자 통이 즉각 여섯 개로 토막이 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던 미혼약, 해독약, 독사의 먹이 등이 공중에 뿌
옇게 날렸다.
두 노인의 검은 잠시 느려지는 듯 싶더니 여전히 맹렬하게 소어
아를 향해 뻗어 들어왔다.
이 때 돌연 '치, 치, 치, 수십 번의 소리가 나더니 탁자 위의
촛불과 석벽의 문에서 흘러나오던 강렬한 불빛이 한꺼번에 꺼지고
말았다.
소어아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그의 귓전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벽으로 몸을 붙여."
소어아는 이 말소리가 무척이나 부드럽고 또 많이 듣던 목소리
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따뜻한 정을 느끼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철심난인가."
상대방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소어아는 가만히 벽쪽으로 옮겨가면서 가볍게 탄식을 했다.
"지금에서야 너의 암기 무술이 나보다 강하다는 걸 알겠군. 그
짧은 순간에 십여 개의 불을 끌 수 있는 재주는 나로선 도저
히......."
철심난이 대꾸했다.
"불을 꺼버린 것은 내가 아냐."
소어아는 놀랐다.
"네가 아니면 누구냐?"
불이 꺼지자 잠시 동안은 조용했었지만 다시 고함소리가 일어났
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또 누가 침입했지?"
"빨리 불을 켜라! 빨리! 빨리!"
철심난이 소어아의 말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불이 다시 켜졌다.
소어아와 철심난은 동시에 목소리를 죽이며 탄식을 했다. 철심난
이 보니 소어아의 얼굴에 벽사신군의 뱀이 기어다니는 것이 아닌
가. 하지만 소어아가 놀란 것은 영당 안에 나타난 사람 때문이었
다.
불빛 아래 두 사람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소어아는 단숨
에 십여 개의 불을 꺼버린 이가 필시 무공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
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두 명의 가냘픈 소녀가 아닌가!
이 금지된 영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림에 명성을 떨치
는 인물들이거나 아미파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백의
소녀는 어느 사람도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싸늘한 표정만을 담고
있었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두 소녀를 보자 의아
한 마음과 놀라움에 손을 쓸 생각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
다.
소운거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가 금지에 함부로 침입했는데도 아미 제자들이 눈만 번뜩
이면서 그냥 바라보다니 이것도 전에 없던 일인데......."
신석도장은 안색이 침중했고 사방의 아미 제자들도 노한 기색을
띠우고 있었다.
둥근 얼굴의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하노 언니 들었어요? 알고 보니 이 아미산은 우리가 오지 못
하는 곳이었군요."
하노가 비웃듯 말을 받았다.
"천하의 어느 곳이든 우리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
는 것이지 어느 누가 우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신석도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무서운 목소리로 외쳤
다.
"어디서 온 계집들인데 말투가 그리 무엄한가!"
이 말소리가 떨어지자 두 명의 아미 제자들이 검빛을 번뜩이며
즉각 두 백의 소녀의 복부를 향하여 찔러갔다.
그러나 백의 소녀들은 바라보지도 않고 검빛이 거의 몸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아냈는데 어느 누
구도 그녀들이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았을 때는 오른쪽 사람의 검이 왼쪽 사람의
머리에 꽂혀 버리고 난 후였다.
영당에 모여있던 모든 고수들은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신석도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화접옥이 아닌가?"
하노가 담담히 대꾸했다.
"눈이 밝군요."
둥근 얼굴의 소녀가 말을 받았다.
"이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았소? 그래도 우리가 너무
큰 소릴 쳤단 말인가?"
신석도장이 말했다.
"아미파와 이화궁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두 아가씨께선 어인
일로 오셨소?"
하노가 대답했다.
"우리는 별 뜻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오. 단지 당신이 연남천의
보물을 꺼내주기만 하면 되오. 그렇다고 우리가 갖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좀 구경하자는 것 뿐이오."
"연남천의 보물?"
둥근 얼굴의 소녀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시침떼지 마시오. 빨리 꺼내 보시오. 이행치 않는다면......
흥!"
"연남천과 본파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어지 여기에 연남천의 보
물이 있겠소?"
그는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돌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알겠소. 흥, 여러분들도 필시 보물을 위해서 왔군."
왕일조, 황계대사 등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화궁의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필시 함정일 거요. 모두가 속았소.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된다면 남의 계책이 적중하는 것이지."
둥근 얼굴의 소녀가 물었다.
"도장의 뜻은 연남천의 보물이 여기에 있지 않단 말인가요?"
신석도장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난 들어본 일조차 없소."
둥근 얼굴의 소녀가 하노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 언니, 그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하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난 천생에 남의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구의 말이든 간에 난 믿
질 못 해!"
신석도장은 그녀의 대답을 쓰디쓰게 받아들였다.
"아가씨가 믿질 않는다면 하는 수 없소."
둥근 얼굴의 소녀는 냉소했다.
"뭐가 하는 수 없다는 거죠? 우린 수색을 해봐야겠소."
신석도장의 안색이 변했다.
"수색을 한다고?"
"그래요! 내가 보기엔 이 몇 개의 관들이 보물을 감추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요. 그러니 관을 열어서 공개해 보도록 하시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미 제자들은 모두 얼굴에 극도의
분노를 띠었으며 신석도장도 억지로 분노의 기색을 참으며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관 속에는 본파 역대 선사의 유해가 있소. 천하에 그 누구도
열지 못 하오."
둥근 얼굴의 소녀가 냉소했다.
"그럼 그렇지! 관 속에 정말 시체 뿐이라면 보아도 무방하지 않
겠소? 우리가 뼈다귀라도 훔쳐갈까봐 그러오? 못 보게 한다면 문
제가 있는 거요."
신석도장은 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언성을 높였다.
"누구든 관을 열려면 우리 아미 제자들을 모두 죽인 후에 하시
오."
둥근 얼굴의 소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꼭 그렇게 해야겠소?"
"이화궁은 너무 무례하오. 우리 아미파는 당신들과 죽도록 싸우
겠소!"
신석도장은 손에 긴 검을 움켜진 후 번쩍 번쩍 빛나는 검날을
소녀의 목을 향해 지쳐들어 갔다.
그는 너무나 크게 노해서 그 한 검에 자기 평생의 힘을 다한 것
이다. 그 검은 정말 번개와 같이 날쌨고 무서운 공력이 집중되어
주위 사람들을 다 놀라게 했다.
백의 소녀들은 역시 신석도장에 비해 공력이 뒤져 있었기 때문
에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두 사람은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 아미 제자들의 수십 개의 검이 서로 교차하며 두
소녀를 공격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비록 절묘의 신법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이 수십 개의 분노에 찬 검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철심난은 돌연 소어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나......."
"뭘 하는 거야?"
"난 황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었는데 그녀들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어. 또 사실 네가 아까 위험에 처했을 때도 다행히 그녀들
덕분으로 무사하게 되었던 거야. 지금은 그녀들이 위험에 처해있
어. 그런데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어?"
소어아는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
"그녀들은 이화궁 사람이야. 아무리 곤란에 처해있다고 해도 남
의 도움을 바라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말이 맞소."
말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신형(身形)이 소어아의 곁을 스쳐갔
다. 불빛 아래에서도 소어아는 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심지어는 옷의 색깔도 분간이 안 됐다. 그는
이토록 신속한 신법은 본 적이 없었다.
순간,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리더니 수십 개의 긴 검이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아미 제자들은 하얀 그림자가 눈앞을 지나
는 듯하는 순간 손이 찌르르 하는 것을 느끼며 모두 수중의 검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 하나씩 뒷걸음질 치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석도장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신을 수습하며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여전히 그 두 명의
백의 소녀만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있을 뿐 하얀 그림자는 이미 사
라지고 없었다.
신석도장은 입술을 깨물면서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
다.
"하는 수 없지!"
그리고는 긴 검을 들고 자기의 목을 향하지 않는가! 그는 항거
할 수 없는 경이로운 무술에 아미파의 명성이 끝나 버리는 것을
보고 는 죽음으로 속죄하는 길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하나의 손이 그의 몸 뒤에서 쭉 뻗어나오더니
가볍게 그의 손에서 검을 앗아갔다.
신석도장의 수중에 있던 검은 그와 함께 평생을 있으면서 수많
은 무서운 싸움을 겪었고 한번도 그의 손을 떠난 일이 없었다. 신
석도장은 사색이 되고 기가 막혔다.
이때 하나의 백의 소년이 그의 몸 뒤에서 서서히 걸어나왔다.
"도장께서는 제자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귀파 도우
(道友)들께서 아가씨들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면 제자도 절대 손을
쓰진 않았을 거요."
그 소년은 기껏해야 열셋, 넷의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이미 많은 무림 고수들도 생각지 못 할 경지에 이르른 듯했다. 게
다가 그는 보통 세가(世家)의 백마(白麻)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고귀한 기품이 이미 세상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 세마디 말만 입밖에 냈을 뿐 담담히 서있었다. 그
러나 그의 늠름한 풍채와 태도에 많은 가인(佳人)을 알고 있는 설
화도 유옥여까지도 도취하고 말았다. 은창세가의 구창파도 어렸을
적에는 풍류가인이었지만 이 소년을 보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잠시 동안 여러 무림의 고수들은 넋을 잃고 그 소년을 바라
보고 서있었다.
신석도장은 매우 놀랐으나 이 소년의 멋진 풍채와 예의바른 태
도에 긴장을 풀고 예를 갖추었다.
"귀하도 혹시 수옥곡 이화궁에서 오신 분이오?"
백의 소년이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제자의 초라한 이름은 화무결이라 하고 말씀하신대로 이화궁에
서 왔습니다. 본 궁중의 사람이 다년간 강호에서 활동하지 않아
많은 예절을 잊었으니 실례를 범한 일이 있으면 여러분의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손을 모으고 서서 얘기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 배인 귀한 기품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마치 천성이 겸
손한 웃사람에게 친절한 대우를 받을 때처럼 어려워하는 감정이
생겼다.
이때 하노가 다시 나서며 약간은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집 공자께서 오셨으니 관을 열어 볼 수 있겠죠?"
신석도장이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화무결이 재빨리 가로챘
다.
"보물에 대한 일은 필시 거짓일 거요. 난 다만 여러분들이 남의
간사한 계략에 빠지지 않길 빌겠소. 오늘의 일은 다시 말하지 않
기로 합시다."
황계대사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나무아미타불, 공자는 자비로우십니다."
왕일조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또 싸우고 싶어 하겠소. 남이 옆에서 보고 웃을 짓을 계
속할 수는 없소."
구청파, 손천남 등이 같이 입을 열었다.
"공자의 말이 맞소. 우리는 이만 물러갈까 하오."
신석도장은 그들이 물러설 의사를 밝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공자, 고맙소!"
실로 처참한 살육의 위기가 무결공자의 두세 마디 말로 무사히
지나가게 된 것이었다.
유옥여 등은 시종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철심난도 그를 보면
서 입가엔 탄복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어아가 돌연 '흥'하며 콧방귀를 뀌더니 큰걸음으로 밖으
로 걸어나갔다. 철심난은 약간 주저하다가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쫓
아 나갔다.
뒤에 처저있던 조전해가 급히 불렀다.
"옥 대협, 옥노선배님......."
하노도 소리쳤다.
"어이! 아가씨 왜 가는 거요?"
몇몇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소어아를 불렀으나 그는 고개도 돌
리지 않고 앞만을 향하여 터벅터벅 굴 속을 빠져나갔다.
동굴 밖은 이제 약간의 안개가 깔려 있었다. 아름다운 달빛이
그 운무를 비추니 정말 아름다운 밤 경치였다.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던 소어아는 얼마를 걸어 간 뒤 큰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쫓아오던 철심난도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와 앉았다.
"보물을 찾던 일이 이렇게 끝나다니 정말 뜻밖이야."
"아직 미련이 남았어?"
"이런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보물지도 때문에 천신만고의 모험을
무릎쓰고 여기까지 왔으니 정말 가만히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어."
"싸다 싸."
철심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가 모용산장에서 날 버리고 간 것을 원망하지는 않겠어, 하
지만......."
"원망하면 또 어쩔 테야?"
철심난은 너무 섭섭했다.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자 얼
굴이 상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너...... 넌 어찌 말을 그렇게 해?"
"난 본래 그런 사람이야.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말아......
흥, 잘해주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될거 아냐!"
철심난은 소어아가 결코 자신이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
을 느끼자 여자 본래의 수줍음으로 두 볼이 빨개졌다.
"언제 아미산에 왔어?"
"흥!"
그러나 철심난은 여전히 부드럽게 대했다.
"그 독사들은?"
"흥!"
철심난은 도리없이 등을 마주대면서 돌아 앉았다. 한참 동안을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어아가 먼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
다.
"그 자식 신기하던데!"
철심난은 듣지 못한 척 대꾸가 없었다.
소어아는 꽤 한참을 기다렸으나 철심난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
을뿐 아무 반응이 없자 등으로 그녀를 밀어부쳤다.
"어이, 벙어리. 내가 한 말 들었어?"
"벙어리가 어떻게 남의 말을 들을 수가 있어?"
"그럼 넌 분명히 들었잖아? 네가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어
떻게 대답을 할 수가 있지? 네가......."
둘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던 두 남
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앉았다. 철심난이 먼저 옮겨왔는지
소어아가 먼저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통쾌하게 웃던 소어아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자식 정말 신기하던데."
철심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수옥곡 이화궁은 지금 천하무림의 성지라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이화궁의 유일한 전인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놈은 남의 눈에 겸손하게 보이려고 구린내를 풍긴단
말야. 흥, 개똥이지! 게다가 꼭 계집애 같아."
철심난은 그의 말에 그저 웃음을 짓고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
다.
"그런데...... 이상해. 그 사람은 너와 아주 많이 닮았어. 모르
는 사람들은 너희들을 형제라고 할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생겼다면 죽는 게 낫겠어."
철심난은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위 틈을 빠져 나온 나무 줄기를 뽑아 던지며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것은 그런 조잡스러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재미있는데!"
"어...... 누가 그를 좋아하는데?"
"너."
철심난은 움찔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미쳤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눈이 빠지도록 그를 바라보았지.
네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자꾸 그의 편만 들어주
는 거야?"
철심난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화가 났던지 이
를 갈면서 으르렁 댔다.
"좋아.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 죽도록 좋아 한다고 치자. 여
하간 넌 내 무엇도 아니니 네가 상관할 필요는 없잖아?"
그녀는 발을 비비면서 다시 등을 돌려버렸다.
또다시 풀포기를 뽑아 던지며 소어아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
다.
"흥, 조잡스러운 늙은이 같았는 걸."
"넌 그 사람이 여자 같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웬 늙은이 타
령이야?"
"나......난 그가 늙은 할머니 갔다는 거야."
철심난은 다시 '푸하' 하고 웃어버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소어
아는 말을 계속했다.
"뭘 웃는 거야?"
"너 질투하고 있구나."
"내가 질투를 해?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그러나 자세를 고쳐앉은 그는 탄식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지금 정말 질투하고 있는지도 몰라."
소어아의 심각해진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애교 있는 미소를 지
으며 그의 품속에 안기려던 철심난은 새삼 놀라며 입을 열었다.
"참! 독사...... 독사들을 떼내야 할 텐데......."
"정말 그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어."
탄식이 섞인 목소리였다.
"벽사신군이 죽었으니 지금은 그 누구도 이것들은 떼낼 수 없을
거야. 아!"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몸에 독사가 있으면 여자애들이
날 괴롭히지는 못 할 테니까."
"흥! 남은 진지하게 묻고 있는데 넌 농담하고 있어?"
보기 싫은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던 그녀
는 갑자기 웃음을 띠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무슨 방법?"
"독사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 아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그 방법이 묘하군."
"칭찬해주니 부끄러운데."
"그러나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어."
"또 무엇인데?"
"이 독사들은 중이 아니야."
철심난은 무슨 이야기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중이 아니니 아무 것이나 먹는단 말야."
"독사...... 독사들이 굶으면 네 살과 피를 먹겠군."
"넌 정말 천재 아동이야. 이제서야 생각해 냈으니."
철심난은 부끄러웠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는 철심
난의 훌쩍이는 목소리가 애원이라도 하듯 들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 내가 보기엔...... 다만...... 다
만......."
도대체 '다만' 어쩌자는 것인지 그녀도 말하지 못 했다.
그때 길 저쪽에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계집애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정말 알 수가 없네!"
"결코 멀리 달아날 수 없어. 곧 잡히게 될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소어아와 철심난은 동시에 안색이 변해
갔다.
철심난이 목마저 꽉 잠긴 소리로 말했다.
"소선녀!"
"그리고 모용구매!"
"우리...... 우리 빨리 달아나."
그러나 그들이 앉아있던 곳은 막혀있는 길의 중간이었다. 유일
한 통로라면 바로 소선녀가 걸어 오는 길 뿐이었다.
철심난의 손발이 차가워졌다.
"이거...... 이거......."
"우선 여기라도 피하고 의논해 보자."
두 사람은 신법을 써서 자취를 감추었다. 소선녀와 모용구매
조금 전에 그들이 앉아있던 바위곁까지 왔다.
소선녀가 말했다.
"아미산은 정말 괴이한데. 우리도 길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
니...... 마을로 돌아가기도 너무 늦었고......."
"산을 뒤져 봐도 소용없을 거야.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겠어."
소선녀와 모용구매는 그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소선녀가 앉은
자리는 바로 조금 전 소어아가 앉았던 곳이었다. 두 사람은 앉자
마자 눈을 감더니 잠이라도 청하려는지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소어아와 철심난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어떻게 해야 무사히 달
아날까를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가 생각나
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소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춥지 않아? 난 막상 잠을 자려니까 추워서 잠이 안 오는데."
"언니는 정말 귀엽게 자란 아가씨로군. 이런 날씨가 춥다니. 눈
보라가 치는 벌판이라도 난 춥다고 하지 않을 걸."
소어아는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넌 춥지 않겠지. 넌 물론 알몸으로 빙판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재주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
해야지.)
또 얼마가 지난 뒤 소선녀가 갑자기 불쑥 일어서는 것이 보였
다.
"네가 춥지 않은 건 재주가 있어서 그렇지. 난 못 견디겠어."
"못 견뎌도 참아야지."
"구 아가씨, 이 언니를 얼려 죽이지 않으려면 나무라도 찾아 불
좀 피워봐요."
일이 이쯤되자 모용구매도 포기했다는 듯 서서히 일어났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더니 소어아와 철심난이 몸을 감추고 있는 곳
으로 걸어왔다.
소어아는 머리털이 모두 일어서는 듯했다.
(아! 어떡하지. 정말 실수했는 걸. 내가 어찌 이런 곳을 택했
지. 여기에 나무들이 있으니 오늘로 죽고 마는구나.)
그들이 숨은 곳은 단 하나의 고목 뒤였다. 고목은 불을 때기가
가장 적당하니 소어아가 재수없다고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철심난은 식은 땀으로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거기다 몸이 떨리
기 시작했다.
소선녀와 모용구매가 더욱 거리를 좁혀 가까이 다가오자 철심난
은 더욱 심하게 몸을 떨었다.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나뭇가지들이
같이 어울려 흔들렸다.
소선녀는 옮기던 발을 멈추고 귀를 쫑긋했다.
"좀 들어봐...... 무슨 소리지?"
"안심해 언니. 귀신은 없을 테니."
모용구매의 말에 소어아는 한 계략이 떠올랐다. 그는 즉시 머리
를 풀어 헤치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철심난은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니 정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소선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
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귀신은 없더라도 독사가 나오면 무섭지."
모용구매의 말소리가 싸늘하게 들려왔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그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하나의 괴물이 어두
움 속에서 튀어 나왔다.
소선녀는 혼비백산하여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
렸다. 그러나 모용구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누구냐?"
괴물의 음산한 목소리가 주위의 밤공기를 타고 스산하게 번져나
갔다.
"모용구매...... 모용구매, 넌 나를 잘도 해치웠어. 아! 춥구
나. 난 추워. 귀신이 되어서도 추워! 모용구매, 모용구매, 내 목
숨을 돌려다오."
형제의 첫 대면
모용구매는 소어아의 모습을 발견하자 온 몸이 얼어버린 듯 뻣
뻣해져 버렸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손가락으로 소어아를 가
리키며 떨리는 소리로 더듬거렸다.
"네가...... 네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하고 쓰러져 졸도해 버렸
다. 또한 소선녀도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소어아는 파안대소하며 웃어제꼈다.
"뱀아! 나중엔 어떻게 되더라도 우선 감사를 드린다. 벌써 두
번씩이나 나를 구했으니 말이야."
철심난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 나오
면서 눈을 크게 뜨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소어아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이에요?"
"어찌된 일인지는 너도 봤으니 알겠지."
"하지만...... 언제 모용구매가 너에게 손을 썼다는 거지. 얼어
죽은 귀신? 나...... 난 정말 모르겠어."
"그래, 여자애는 몰라도 돼요. 여자애들은 알면 알수록 귀찮아
져. 그러니 내가 이정도 실력이 있다는 것만 알면 돼."
"넌 정말 재주가 좋아. 모용구매까지도 놀라서 졸도해 버렸고
소선녀도 달아나버렸으니 이런 일은 그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거
야!"
소어아는 기절해 쓰러져있는 모용구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내가 그녀를 어떻게 할 것 같아?"
"졸도한 채로 두고서 그냥 가버리겠지."
그녀는 소어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호, 혹시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몇 차례 때려서 속을 풀려
는 것은 아냐?"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철심난의 말에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이거...... 그럼 그 방법도 족하지 않단 말인가?"
"물론 부족하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를 죽이겠다는 거야?"
"만약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녀가 날 죽이길 기다리는 거
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기절해 있는데...... 그건 좋은 일이 아니
야."
"좋지 않다고? 그녀가 날 죽이려 할 땐 무순 정당한 방법을 썼
는줄로 알아?"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아니겠어?"
"여자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난 정말, 그럴 줄은...... 네...... 네 심사가 이토록 악독한
줄은......."
철심난은 말끝도 제대로 맺지를 못 하였다.
"보고 싶지 않다면 멀리 가도 좋아."
철심난은 그의 의사를 꺾을 수 없음을 알자 더 이상 버티지 않
고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소어아는 크게 호흡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크게 뜨면서 모
구매를 향해 중얼거렸다.
"독사에게 널 물게 해야지. 독사가 독한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독한가 보자."
그는 축 늘어진 모용구매의 손을 잡아 올려 자기의 목에 감겨있
는 독사에게 가져다 댔다.
달빛이 완연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긴 눈썹은 비록 졸도해 있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
이기에 족했다. 그녀의 손은 싸늘했으나 더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주었다.
소어아의 손은 나른해져 갔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를 돌감옥에
가둔 것과, 또 자기를 산채로 얼리고 굶겨 죽이려고 한 것을 생각
하자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날 원망마라. 네가 날 죽이려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절대로
널 죽이려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가 굳은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막 독사에게 넘겨 주려는
순간 사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그런 수단으로 여자를 죽이는 것은 사내 대장부의 체면을 깎는
일이 아니겠소?"
"누구냐?"
그는 다름 아닌 이화궁의 무결공자였다. 또 그의 뒤로 세 사람
이 서 있었다. 두 명은 백의 소녀였고 또 한 사람은 뜻밖에도 철
심난이었다. 세 명 계집애의 여섯 눈동자는 마치 그를 삼키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어아도 속으로는 매우 화가 치밀었으나 얼굴에는 웃음을 띠면
서 여전히 모용구매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당신의 말은 내가 이 여자를 죽여선 안 된다는 말인가?"
화무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하오. 비록 당신에게 못 할
일을 했더라도 여자라는 것으로 보아 용서하셔야죠."
"정말 관대한 공자이시군. 세상에 당신 같은 남자가 있는 것은
정말 여자들의 복이오. 천하의 모든 여자들이 모여서 당신에게 금
기(金旗)라도 하나 드려야겠군."
그는 소어아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는 기색이 없이 담
담했다.
"과분한 말씀이오."
"하지만 어떤 여자가 지금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눈을 감고 죽이길 기다리겠소. 아니면 반격하지도 않
고......."
"만약 내가 그녀에게 못 할 짓을 했다면 그녀에게 죽음을 당한
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거요."
"좋소! 하지만 그 여자가 당신한테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때도 그녀를 죽이지 않겠소?"
"그래도 남자는 모름지기 여자에게 양보를 해야죠."
소아어는 쓴웃음만 나왔다.
"당신은 그런 생각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군. 당신 말대로라
면 세상남자들은 모두 황하에 빠져 죽어야 겠군."
"그럴 필요는 없소."
소어아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 보면서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
지를 몰랐다. 이 사람이 정말 자기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인지
혹은 못 알아 들은 체 하는 것인지, 또 이 사람이 총명한 것인지
병신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평온
함이 드러날 뿐,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정말 겉모양처
럼 온순하기만 하다면 소어아는 벌써 따귀라도 한 대 올려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정의 고수였던 것이다.
소어아는 탄식조로 말했다.
"당신의 뜻은 날더러 이 여자를 놓아 주라는 것인가?"
"귀하가 그녀를 놓아 주어야 영웅의 행동이지요."
"이 여자가 후일 날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하겠소?"
이 질문에 화무결은 잠시 망설였다.
"금후의 일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좋아, 이 여자를 죽인다면 난 영웅이 아니고 사내 대장부도 아
니지. 그녀가 날 죽이면 당연한 일이고 그러니 난 꼭 이 여자 손
에 죽어주어야 하겠군. 그렇지 않소?"
"난 그런 뜻은 없고 다만......."
"당신이 어떤 의도에서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길 수가 없으니 당신의 말을 듣지. 하지만 나중에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있게 되면 이 여자를 죽여서 당신에게 보여 주겠어."
말을 마치자 그는 모용구매의 손을 놓아 버렸다.
"당신이 무서워서 내가 순복한 것으로 칩시다. 여자를 데리고
가시오."
화무결은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감사하오."
두 백의 소녀가 나비처럼 사뿐히 다가와 모용구매를 부축해 안
아 일으켰다.
둥근 얼굴의 소녀는 소어아를 향해 한마디 쏘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 공자가 여기서 없었다면 난 벌써 당신을 죽였을 것이오.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었을 텐데."
"당신 마음대로 말해 보오. 뭐라고 욕해도 좋아. 당신은 여자이
니까. 여자는 원래부터 남자를 욕해도 때려도 좋으니. 그렇지 않
소 화공자?"
"여자에게 욕을 당하는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는 사람이오. 어떤
남자는 여자들이 욕하기도 싫어하는 것이오."
"하...... 하하, 그렇다면 난 굉장히 영광인 걸. 앞으로 더 많
은 여자들이 날 욕하거나 죽이려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영광
을 위해 참을 거야!"
"그렇게 되기를 빌겠소."
소어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화무결은 이화궁에서 자랐다. 그곳엔 화무결 외엔 어떤 남자도
없었고 그는 어릴 때부터 오직 여인들만의 교육과 보살핌을 받았
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소어아가 자란 곳은 남자들만의
세계였고 여자라고는 없었다. 굳이 있다면 불남불녀 도교교의 반
쪽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두 사람은 생각하는 점과 성
격이 완전히 틀렸다.
하노는 철심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가씨! 우리 같이 갑시다."
철심난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난......"
그녀는 고개를 숙였으나 눈은 소어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둥근 얼굴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저런 남자를 상관해서 뭘해요. 우릴 따라가요."
하노가 화무결을 훔쳐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집의 공자도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여기에서 소어아의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가라 가. 넌 어서 그들을 따라가라. 네가 날 따라오더라도 난
귀찮기만 해."
철심난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
라보던 둥근 얼굴의 소녀는 그녀를 끌어 당기며 위로했다.
"그를 상관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가요."
화무결이 웃으며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리는 순간 품에 안겨있던
모용구매가 혼절한 중에 헛소리를 했다.
"소어아...... 강어, 날 놔 줘...... 날 놔 줘!"
그 말에 화무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토록 조용하고 평온
하던 얼굴이 흥분한 기색을 띠우고 있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소
어아 앞에 섰다.
"당신이 바로 강어! 소어아란 말이오?"
"나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던가?"
화무결은 한동안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미안 하다니? 당신이 나에게 무엇이 미안하다는 거요?"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니 말이오."
이 말이 나오자 주위의 사람들은 일시에 긴장했다.
"머리가 돈 것 아니오? 왜 갑자기 날 죽이려는 것이지?"
"당신이 강어이기 때문에 난 당신을 죽여야 하오. 천하에 단 한
사람 내 손에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
오!"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알겠소. 누가 날 죽이라고 시켰군?"
"스승님의 명령이오."
이때 철심난이 끼어들었다.
"당신 스승이 왜 그를 죽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왜?......."
그녀는 소어아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둥근 얼굴의 소녀가 그녀
를 붙잡았다.
소어아와 화무결 두 사람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잠시 후 소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난 본시 당신을 이길 수가 없어 쭉 기회만 노려 왔어.
그러나 지금은......."
그는 양팔을 뻗치면서 화무결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물론 그의
무공으로는 화무결의 적수가 못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붙어
있는 독사를 이용해 생사를 결판내려 한 것이었다. 그는 화무결의
목숨을 앗아낼 뿐더러 자신의 생명도 버리려 직접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진기가 돌자 즉각 뱀들이 반응해 그의 몸을
물었고, 그는 곧 전신이 무감각해지면서 화무결의 앞에 다다르기
도 전에 허공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소어아는 눈을 떴다. 주위가 안개에 싸인 듯 모든 것들이 희미
하다가는 차츰 정신이 돌아오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은
임시로 지은 듯 소박하지만 단아한 대나무집으로 실내에는 실연기
가 피어오르는 향로가 하나 있었고 역시 대나무로 엮어 만든 침대
위에 자신이 눕혀져 있었다. 침대 바로 옆벽으로 몇 가지 병기가
걸려 있었는데 한눈에도 보기 드문 명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정신이 깨어나자 독특한 향기가 소어아의 코속으로 스며들었다.
꽃의 향기 같기도 하고 약 냄새 같기도 했으나 자세히 맡아 보니
여인의 향취인 것도 같았다.
소어아는 한참을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난 분명히 살아날 길이 없는 독사에게 물렸다. 누가 날 구했을
까? 혹 화무결이? 하지만 화무결은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
가!)
"깨어났소?"
그는 머리맡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화무결을 비추고
있었다. 그 눈썹, 그 얼굴, 그 의연한 태도 등 정말로 세상에 드
문 미남자라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던 듯했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
색이 없었다. 이것도 소어아를 탄복하게 하는 것중 하나였다. 만
약 소어아라면 그렇게 침착하고 여유있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
이다.
소어아는 즉시 암암리에 진기를 운용해 보았다. 몸에는 별 이상
이 없었다.
그는 또 자기 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독사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입을 열었다.
"음, 당신이 날 구했소?"
"그렇소."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독사의 독에서 날 구할 수가 있었단 말
이오?"
"이 선자향과 당신이 복용한 소녀단은 만독을 해결하는 것이
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소?"
"난 지금도 당신을 죽여야 하오."
"당신이 날 죽여야 한다면 왜 이런 진귀한 약으로 나를 치료했
소?"
"내가 직접 당신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오. 당신을 다른 일로 해
서 죽게 해선 안 되오."
소어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어째서 직접 날 죽여야만 하오?"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 그렇게 할 뿐이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또 소어아가 먼저 입
을 열었다.
"꼭 당신 손으로 나를 죽여야 한다고 명령했단 말이오? 내가 다
른 사람과 관련돼서 다른 일에 죽으면 안 되다니. 그게 무슨 뚱딴
지 같은 말이오?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소?"
"난 물어볼 필요가 없소."
"그럼 당신은 의견도 없단 말이오?"
"본궁의 엄명은 그 누구도 위반해선 안 되오."
"매우 성실한 사람이군. 하긴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도 꼬박
꼬박 다 대답을 해주지."
"어떤 사람이라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난 사실대로 말
할 뿐이오. 당신을 죽이는 것과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과는 관계
가 없소."
"당신이 직접 날 죽여야 하오?"
"꼭 그래야 하오."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당신은 날 죽이지 못 할 거요."
"좋아, 몇 발 물러 서시요. 나 좀 일어 납시다."
화무결이 천천히 일어서서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너무나 성실하오. 그러나 정말로 성실한 것인지 허위인
지는 아직 모르겠소."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침대 옆에 걸려있던 단검을 꺼내면서 침
대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화무결은 묵묵히 쳐다볼 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매우 침
착한 태도였다. 천만 명의 고수를 명령할 만한 그런 인물이었다.
"난 당신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오."
소어아의 말에 화무결은 그저 묵묵히 대답했다.
"그렇게 될까?"
"그렇게 되지!"
단도를 돌려 잡은 소어아의 손이 양가슴을 겨누었다. 그제서야
화무결도 당황했다.
"당신...... 당신 무얼 하려는 거요?"
"조금만 다가오면 난 자살해 버리겠다. 한평생 직접 날 죽일 생
각은 하지마라."
화무결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서있었다. 그는 소
어아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 했었다.
물론 무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것들에 있어 화무결이 앞선 것
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임기응변으로 따진다면 화무결보다는 소어
아가 훨씬 재빨랐다. 고고한 이화선자와 악인곡의 악도를 어찌 비
교하랴!
소어아는 화무결의 태도가 재미 있었던지 한바탕 껄껄대고 웃었
다.
"당신이 직접 날 죽이려면 다음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오."
화무결의 태도를 주시하면서 소어아는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섰
다. 화무결로서는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소어아
가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어아는 문밖으로 나섰어도 소홀히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화무결에게 향한 채 조심조심 물러섰다. 문밖은 안
개 속에 싸여 있어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화무결은 꼼짝 못 한 채 서있다가 다급한 듯 문앞까지 뛰어나와
소리쳤다.
"강어...... 빨리 걸음을 멈추시오."
소어아는 무섭게 외쳤다.
"당신이 멈추시오. 한 발만 움직인다면 난 곧......."
화무결은 문간에 멈추어 섰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방울져 흘
러 내렸다.
"빨리 멈추시오. 당신은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소. 뒤에
는......."
그때 소어아의 뒤로 물러서던 발걸음이 허공을 밟아 버렸다. 비
명소리가 나며 소어아는 절벽 밑으로 떨어져갔다. 그의 뒤에는 깊
은 낭떠러지가 있었던 것이다.
화무결은 소어아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나 구할 길이 없었다.
화무결은 기력이 빠진 듯 문에 기댄 채 짙은 안개 속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큰 땀방울들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비명소리가 나자 어디선가 철심난이 급히 달려왔고 두 명의 백
의소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철심난은 화무결 앞으로 바싹 다가
서며 물었다.
"누가 소릴 질렀죠. 그 사람이 아닌가요?...... 그가 아닌가
요?......."
화무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가 어디에 있죠?"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당신......당신......당신이 그를...... 당신이 그를 죽
였죠!"
앞으로 달려든 그녀는 주먹을 쥐고 비오듯 그의 가슴을 때렸다.
화무결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하는 듯 그대
로 서있었다.
백의 소녀들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손을 써 철심난을 제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화무결은 오히려 손을 들어 그들을 막으면서 부드
럽게 말했다.
"난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 다만 그 사람이......그 사람이
혼자 실족하여 절벽으로 떨어진 것 뿐이오."
철심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 그이를 죽이지 않았단 말예요?"
"난 이제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소."
화무결은 오히려 위로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닌 것을 이해하오. 난 당신을 나무라
지는 않겠소."
철심난은 넋을 잃고 서있었다. 마음이 공허하여 아무 것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고통스러움도 슬픔도 느낄 수가 없
었다.
"철 아가씨! 가서 좀 쉬십시오. 당신은......."
"네...... 좀 쉬어야 할려나 봐요. 좀 쉬어야겠어요......."
돌연 그녀는 미친 듯이 절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소어아, 기다려. 나도 함께 가서 쉴 테니......."
그러나 그녀가 절벽 끝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화무결의 손이 그
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힘껏 뿌리쳤지만 마치 어린 아이가 철
벽을 밀려고 용을 쓰듯 소용이 없었다.
철심난의 얼굴은 온통 눈물 투성이었다.
"날 놔 줘요......날 놔요...... 왜 같이 가는 걸 막는 거예요.
그가 혼자 가기에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이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누가 밑에서 죽었단 말이오?...... 혼자서 조용히 죽을 수 있
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
우유빛 색이 감도는 짙은 안개 속에서 한 날씬한 사람의 그림자
가 유령같이 서서히 나왔다. 다름 아닌 모용구매였다.
본래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은 마치 시신과도 같이 더욱 창백해
져 있었고 크고 활발하던 두 눈도 이미 옛날의 광채를 잃고 흡사
바보같이 보였다.
철심난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소어아는 드디어 죽었어요. 기뻤죠...... 그가 바로 절벽 밑에
서 죽었어요."
모용구매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여기서 죽지 않아. 여기에서 죽은 사람은 그가 아닐 거
야."
그러더니 돌연 킬킬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그는 벌써 모용산장에서 죽었지. 내가 직접 죽였어...... 사람
이 절대로 두 번을 죽진 않을 테니. 내 말이 맞지?"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는 미치도록 웃어 제꼈
다.
화무결은 가련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하노를 불렀다.
"하노, 이 아가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모
양이오. 어서 데리고 가서 좀 쉬게 하시오."
모용구매는 여전히 낄낄 웃으며 지껄였다.
"내가 직접 그를 죽였지. 또 난 내 눈으로 직접 그의 귀신을 봤
지! 하하, 당신들은 귀신을 봤나?"
그러자 철심난이 광소하면서 말을 이어 받았다.
"어느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 해요. 이 세상에 그를 죽일 수 있
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뿐이에요......."
광소가 다시 통곡으로 변하면서 악쓰듯 소리쳤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죽였어요. 그는 자신을 파멸시켰어요.
왜 총명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게 되나요......."
그렇다. 총명한 사람들은 항상 똑똑한 척 하다가 일을 저질러
놓고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 만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런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소어아는 그런 류
의 사람보다 좀더 똑똑했다. 사실은 그가 절벽의 허공을 밟은 것
은 거짓이었다. 그는 고의로 화무결을 속인 것이다.
그는 백양과 황우와 함께 아미산 근처에 있을 때 보물의 위치를
찾기위해 이미 사흘이나 혼자 돌아다니며 아미산 구석구석을 헤매
고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문밖으로 나서자 곧 그 지형을 짐작할
수 있었고 자기 뒤에 절벽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걸음을 옮긴 것이
었다. 다행히 그 계산은 들어맞았고 그는 이미 몸에 진기를 가득
모은 상태에서 방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절벽 두어장(丈) 아래서 그는 오른 손의 단도를 절벽에 꽂
고 왼손으로는 나무를 잡아 당기며 절벽에 매달렸다. 거기에는 빠
른 눈치와 세밀한 판단, 거기다 큰 용기가 있어야 했다. 다른 이
들이라면 몰라도 화무결 같은 고수 중의 고수를 속이는 것은 일대
의 모험인 것이었다.
그는 절벽에 매달려 철심난의 통곡소리와 모용구매의 허탈한 웃
음, 그리고 화무결의 부드러운 음성들을 모두 듣고 있었다.
얼마 후 사람들의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
면서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올라오자 그는 머리를
내밀고 절벽 위를 조용히 살펴보았다.
절벽 위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안심하고 절벽 위로 올라서
기 위해 팔 다리에 힘을 모았다.
바로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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