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04

3학년2반 | 2022.02.12 08:33:12 댓글: 0 조회: 41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309
사라졌던 사나이들
소어아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원숭이들이 눈을 껌벅이
며 절벽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몇십 마리의 원숭이들이 어디
서 왔는지 모두 그의 모양을 흉내내 절벽 위로 고개를 약간 내밀
고 몸은 절벽에 붙이고 있었다. 그는 아미산에는 원숭이들이 무척
많고 또 사람 흉내를 잘 낸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꾸역꾸역 모여든 원숭이들을 보자 그는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는 그들을 쫓아버리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쉬...... 가라......."
그러나 원숭이들은 그의 고약한 인상을 흉내내며 '지지' 하는
소리만 계속할 뿐이었다.
소어아는 원숭이들 때문에 화무결에게 들키게 될까봐 걱정이 되
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원숭이들을 치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몇
십 마리의 원숭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소어아에게 손을 내밀었
던 것이다. 평시라면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지만 절
벽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만
약 원숭이들이 달려 들기라도 하는 날에는 떨어지고 말 형국이었
다. 절벽은 십여장(丈) 아래서부터는 안으로 처져 있었다. 그래서
만약 그 밑으로 떨어진다면 붙잡을 곳도 없었다.
그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소리조차 낼 수도 없었
다. 그는 급하게 두 손으로 절벽 위의 끝을 잡으려고 하다가 그만
수중의 단도를 떨어뜨리며 아래로 오륙장(丈)이 미끄러져 내려왔
다.
단도가 밑으로 떨어진 지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바닥에 부딪치
는 소리가 되돌아 울리지를 않았다. 도대체 이 절벽은 얼마나 깊
은 것일까!
그는 전신이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절벽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잡을 만한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천하의 가장
총명한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원숭이 손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
하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돌연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이 '지지' 소릴 내면서 서로 서
로 손을 잡아 늘어뜨리며 소어아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래! 이놈들아 날 좀 살려다오!)
소어아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원숭이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러나 동료들의 손을 잡고 소어아에게 다가온 원숭이는 그저 소어
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칠 뿐이었다. 그 바람에 소어아의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두 눈
을 감고 비참하게 한마디를 내뱉았다.
"끝났어...... 소어아가 원숭이들에게 죽음을 당하는구
나......."
그러나 바로 이때였다. 장난을 치던 털이 복실복실한 원숭이의
손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 원숭이의 손힘은 무섭도록 강했다.
순간 옷이 찢어지면서 그의 몸이 허공에 떴다. 소어아는 비명소리
조차 내지 못 했다. 그의 몸이 막 밑으로 떨어져 갈때 다른 원숭
이 팔이 뻗쳐지며 이번에는 그의 머리를 나꿔챘다. 소어아는 눈물
이 나도록 아팠다. 그러나 그 힘에 몸이 균형을 잡으며 멈칫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또 다른 원숭이의 손이 그의 발목을 잡더니 허
공에 집어던졌다. 원숭이들이 그를 공처럼 던지며 놀기 시작한 것
이었다.
소어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할 수도 소리를 지
를 여유도 없었다. 그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을 때 그는
돌연 털퍼덕 하고 그의 몸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동안 어지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만히 누워 깊은 숨
을 쉬었다. 얼마가 지나 차츰 정신이 수습되자 그는 눈을 뜨며 상
체를 일으켰다.
그때 돌연 가느다란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널 떨어뜨리겠어!"
이 가느다란 목소리는 원숭이 소리 같기는 했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원숭이도 말을 한단 말인가? 아니면 요괴라도 나타났
단 말인가!
소어아가 주위를 살펴보고 비로소 자기가 절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절벽에 나있는 동굴입구에 내던져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둠 속을 주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넌 도대체 누구냐."
"하하...... 글쎄."
"넌...... 넌 사람이냐?"
"내가 사람일 것 같으냐?"
소어아는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래 날 어쩔 셈이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소리가 일며 동시에 검은 그림
자가 동굴 안으로부터 튀어나오며 그에게 손을 뻗쳤다. 소어아는
아직 어지럼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절벽에 매달
려 있느라고 지쳐 방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피하려 해도 밖은
다시 절벽이었으므로 그러지도 못 하고 꼼짝없이 혈도를 그 손에
내주고 말았다.
하나의 털복숭이 원숭이가 그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이 원숭이
는 소어아 만큼이나 컸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원숭이는 몸에 옷을 걸쳐 입고 있었는데 비
록 초라하긴 해도 확실히 사람이 입는 옷이었다. 게다가 얼굴이
흡사 사람의 모양과 똑 같았다. 그러나 두 눈은 눈알이 파여나가
움푹 꺼져 있었다. 소어아는 놀랐다. 이 원숭이는 장님이면서도
다만 예민한 감각으로 자기의 혈도를 점했던 것이다.
제일 이상한 점은 이 원숭이가 머리 카락과 수염이 길게 자라있
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원숭이
같았다.
그 원숭이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엇 같은가?"
"사람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하단 말이지."
"만약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 했다면 그저 원숭이로 생각했겠
지."
그는 느낀 그대로를 말해버렸다. 이미 생사의 문제를 염두에 두
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괴물이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
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원숭이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
다.
"말해 주지. 난 원숭이 중의 사람, 사람 중의 원숭이지. 난 사
람이라 해도 맞고 원숭이라 해도 틀리진 않아."
"사람 중의 원숭이...... 원숭이 중의 사람. 그렇다면 네
가......."
이때 또다른 한 사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의 거짓말을 듣지 마라. 그는 사람이야. 다만 생긴 모양
이 원숭이 같지. 그리고 원숭이와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
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것 뿐이야."
동굴은 매우 넓었다. 동굴의 뒷 쪽은 거의가 암흑이어서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말소리는 그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당신은? 당신은 또 누구요?"
그러자 한 사람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는데 역시 온통
장발이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병을 않았던 것처럼 바짝 말라있
었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았다.
소어아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군...... 그러나 도대체 누구요? 어째서 이런 곳
에 있소? 또 어찌 이런 모양이오?"
"그 사람에게 물어봐라."
그 원숭이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흥! 저런놈 이름은 알 것도 없다. 난 십이성상 중의 헌과신군
이다. 하지만 넌 나이가 어리니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
다."
그러자 곁에 서있던 사나이가 눈빛을 번뜩이며 큰소리로 말했
다.
"네놈 같은 짐승의 이름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나 무림에서 빈
화만천, 낙지무성의 심경홍이라 하면 그 누가 모른다고 할 수 있
겠는가?"
헌과신군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개소리 하지 말아라. 사람들은 우리 십이성상의 이름만 들어도
도망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비웃으며 헐뜯었다. 소어아는 그들이 친구가 아
니고 서로가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원수가 같은 굴에서
십사 년이나 함께 갇히어 있었다니 그 동안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
지 소어아로서는 알 길이 없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부딪쳐 폭
발할 것 같았으나 그 누구도 먼저 손을 쓰진 않았다.
헌과신군이 또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지금은 이 자식이 왔으니까 혼자 외로울 일이 없어.
이제는 널 죽여도 괜찮단 말이야."
심경홍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놈 목숨을 여지껏 붙여 놓았더니 간이 커졌구나. 너야말로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소어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말참견을 했다.
"그렇다면 당신들 두 사람은 서로 원한이 있는 데도 서로 죽이
지 않고 그토록 오래 함께 있었단 말인가요? 그리고 그 십사 년의
세월을 당신들은 시종 이처럼 싸우고 욕하면서 지냈소?"
심경홍이 씁쓰레한 웃음을 띠었다.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어찌 그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겠나."
헌과신군이 말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난 벌써 그를 죽였을 거야!"
"그런데 당신들은 왜 탈출할 생각은 하질 않는 겁니까?"
소어아의 물음에 헌과신군은 탄식을 했다.
"나갈 수 있었다면 벌써 나갔지."
소어아가 다시 물었다.
"나가지 못 한다면 어떻게 해서 들어온 것이죠?"
심경홍이 대답했다.
"줄을 사용했었지."
"그럼 당신들이 내려온 뒤 누가 그 줄이라도 끊었단 말이오?"
헌과신군이 입가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누가 줄을 끊는단 말이야. 그때는 귀신도 없었어."
소아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줄이 어디로 갔죠?"
헌과신군은 옛일을 회상하는지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고개를
젖히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녀석은 그 물건들을 보자 너무 기뻐서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지. 그래서 내가 불로 줄을 태워버렸던 것이야."
심경홍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난 보물을 찾아들고 나가려 했지만 이미 줄은 타버리고 없었
어. 그렇게 해서 보물들을 훔쳤던 저놈과 운송을 맡았던 나 심경
홍이 강호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야. 저 미련한 녀석은 나의 암기
가 무서워 감히 달아나지는 못 했지만 여기를 우리의 무덤으로 만
든 것이야."
심경흥의 말이 끝나자 헌과신군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너의 암기가 무서워 달아나지 못 한 것이 아니야. 다만 기
회를 봐서 너를 해치우고 그 보물을 다시 차지하려 했던 것뿐이
지. 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여기를 나가지 못 하고 있으니......."
소어아는 여기까지 말을 듣자 비로소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
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이토록 긴 세월
동안 당신들이 무엇으로 목숨을 이어 왔는가 하는 것이오?"
"그건 당연히 내 재주지!"
헌과신군의 자신있는 말에 소어아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름마따나 헌과신군이니 자연히 원숭이에게 헌과하도
록 할 수 있었겠죠?"
"원숭이의 성질은 천하에서 내가 가장 잘 알지. 돌을 원숭이들
에게 던지면 곧 그들은 먹을 것을 동굴 밖에서 던져오지."
"그들이 던진 것도 돌이면 어떡하죠?"
헌과신군은 껄껄 웃었다.
"밖의 절벽은 백장의 높이야. 어찌 돌이 있겠나......."
"그렇군요. 원숭이들은 먹을 것을 줍는 것이 돌을 줍는 것보다
는 쉽겠군요."
"원숭이가 먹는 것이면 우리도 먹을 수 있지. 하지만 그놈들은
자기들이 잊을만 할때마다 가끔씩 이 장난을 받아줄 뿐이야. 결코
한 장난을 오래하는 법이 없어."
소어아는 불현듯 그들의 메마른 몸을 보았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랬었군요."
"이제부터 네가 먹을 것도 그런 것에 불과해. 그러나 안심해도
좋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만난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 뿐인데 굶
어 죽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심경홍이 한마디 거들었다.
"난 이 원숭이의 얼굴은 신물이 나도록 쳐다봤다. 이놈이 널 굶
어 죽게 한다해도 내가 못 하게 할 거야."
헌과신군은 오랫만에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 연상 껄껄 웃으면
서 지껄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집안 사람이야. 어쩌면 사오십 년을 같이
살지도 모르지. 너의 이름이 무엇인지 좀 들어보자."
"강어."
"강어...... 강어...... 네가 정말 물고기라면 얼마나 좋겠나.
홍소어, 청증어, 선어...... 아! 날것으로 먹는다 해도 참 맛이
좋을 거야."
헌과신군의 입에서는 군침이 돌았다.
"지금와서 보니 한 마리 물고기의 가치가 보물보다 더 크구나.
지금은 여기있는 모든 귀한 보물로도 한 마리의 고기를 구할 수
없으니...... 향기로운 그 맛 그리고 그 국물......."
소어아는 헌과신군의 말에 빙그레 웃음을 띠우며 심경홍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물건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너도 보고 싶으냐?"
"보물을 보는 것도 재미있죠."
"좋아. 내가 보여 주지......."
심경홍이 일어서서 움직이려 하자 헌과신군이 소리쳤다.
"그건 내 것이야. 만지면 죽여 버릴 테다!"
그러나 그는 돌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
더니 표정을 바꾸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상자를 가져왔
다. 형편없이 녹이 슨 검은 상자였다. 헌과신군은 조심스럽게 상
자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눈이 부시도록 호화찬란한 빛이 발하여
졌다.
헌과신군은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어아! 보았느냐? 이게 모두 내 것이지...... 난 아쉽게도 직
접 볼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모두 내 것이야. 내가 너에
게 천분의 일만 주어도 너는 한평생을 편안히 살 거야."
소어아는 그의 말에는 상관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휘황찬란한
보물을 한참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애석하군 애석해."
헌과신군도 따라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를 하나 살 만한 이런 보물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었으
니 정말 애석하지."
"난 그것이 애석하다는 게 아니오."
"이런 일이 애석하지 않으면 천하에 또 무엇이 애석하다는 말이
냐?"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당신들이 날 너무 늦게 만났다는
것이오."
"우리가 너를 늦게 만나다니?"
"당신들이 만약 일 년 전에 날 만났다면 꽃 같은 세계에서 제왕
같이 편안히 일 년을 살았을 것이오. 또 십 년 전에 만났다면 십
년을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오."
헌과신군은 소아어의 이 말을 듣자 고개를 갸우뚱 했다.
"너의 말은?"
"내 말은 당신들이 이전에 날 만났더라면 내가 벌써 당신들을
구출했었을 것이라는 말이오."
그러자 한손으로 심경홍을 붙잡으며 헌과신군은 숨도 쉬지 못
할 정도로 껄껄거리며 웃었다.
"너도 들었지? 알고보니 십수 년 만에 온 손님이 미친 놈인 모
양이야."
심경홍은 소어아의 큰 두 눈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헌과신군이 말했다.
"이 자식 말을 믿어?"
심경홍이 말했다.
"그가 우릴 속일 이유가 없지."
"이곳은 어떤 수를 써도 안 돼. 우리가 십수 년 동안이나 생각
을 해봤지만 안 된 것을 이 꼬마가 금방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당신들의 머리구조가 나와 틀리기 때문이오."
이 말에 헌과신군은 노했다.
"너의 머리가 나보다 좋단 말이냐?"
"저의 머리는 당신들보다 이십 배 이상은 잘 돌아가죠."
"개똥 같은 소리."
"각하께선 화를 내지 마시오. 댁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나 내
머리는 천하에 둘도 없으니까."
헌과신군은 어린아이에게 비웃음을 당하자 골이 잔뜩났다.
"좋아. 그렇다면 그 방법을 말해봐라. 쉰소리를 하면 죽여버릴
테다."
"만약 나갈 방법이 있다면 어떡하겠소?"
"훌륭한 계략만 있다면 난 널 존경하겠지."
"제가 어찌 그걸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각하께서 자신이 있다
면 내기를 할까요?"
"무슨 내기를."
"내가 석 달 내에 당신을 여기서 구출하지 못 하면 나의 목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석 달......하하. 네 머리가 병이라도 난 모양이다. 삼 년이라
해도......."
"삼 년은 필요 없소. 단지 삼개월이오. 이 삼개월 내에 정말 당
신을 구출하면 어떻게 하겠소."
"내가 열 개의 목을 바쳐도 좋아."
"각하의 목은 별로 예쁘지가 않아서 남에게 주어도 받지 않을
거요. 하나라도 많은데 열 개라면 더욱 귀찮소. 만일 각하가 지신
다면 날 무시했으니 다만 몇 대 때리겠소."
"좋아, 너 이자식.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내가 진다면 어
떻게 하든 좋다. 그러나 네가 지는 날에는 너를 죽이고 말겠다."
"그럼 결정한 것이죠?"
"그래 어디 해보자."
"그러나 내가 당신을 어떤 수로 구출하든지 내 뜻을 따라야 하
오."
"좋다. 너의 말을 듣지."
"좋아요. 삼개월, 우선 팔다리의 혈도를 좀 풀어주시오."
헌과신군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소어아의 혈도를 풀
어주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소어아는 몸을 풀듯 허리에 손
을 얹고 몇 번 몸을 뒤틀더니 돌연 상자에서 가장 큰 보석을 꺼내
굴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버려지는 보물들
심경홍은 소어아가 보물을 던지는 것을 보자 크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헌과신군은 어리둥절해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뭐야?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네놈이 지금 밖으로 던진 것은 혹
보물이 아니냐?"
심경홍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소. 보물이오."
"너......너 미친 놈아.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느
냐?"
"물론 알고 있죠."
"거기있는 보물 하나를 던지는 것이 대궐 같은 집 한 채를 던지
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죠."
"그래...... 그런데 넌......."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겠다고 한 말을 벌써 잊었소?"
"너...... 넌 날 구하려는 거냐, 아니면 날 죽이려는 거냐?"
"돈이 목숨보다 중하다고 생각되면 그만 두시오."
"그러나 넌...... 대체 왜 보물을......."
"헌과신군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 할 것으로 이미 예상했었소.
그러나 당신도 모른단 말이오."
그는 심경홍을 가리켰다.
"짐작은 가지만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
"이 보물을 던지면 원숭이들은 필시 서로 다투어서 받으려 할
것이오."
"그렇지."
"내가 백 개의 보물을 던졌다 칩시다. 최소한도 오십 개는 그들
이 받아 갈 것이오."
"원숭이들의 허영심은 사람과 비슷하지."
"이 오십 개의 보물 중 단 하나라도 어느 누가 보게 되면 필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보물이 있는 곳을 찾으려 할 것이오."
"만약에 내가 보았다 해도 그럴 거야."
"보물이라는 것이 그렇소. 비록 발견한 사람이 숨기려 해도 소
문은 결국 수백 수천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오."
"바로 그렇지."
"그렇게 되면 여기를 혈안이 되어 찾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
지요."
심경홍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지. 그렇게 되면 각종 사람들이 다 모여들 것이다!"
"이제 알겠소? 사람들이 이곳을 뒤지게 된다면 우리가 못 나갈
걱정은 없소. 이토록 간단한 방법도 생각을 못 했으니 정말 우습
지 않소?"
헌과신군은 소어아를 안고서는 미친 듯이 웃으며 좋아 어쩔 줄
을 몰라했다.
"넌 과연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놈이다."
이리하여 그 많은 보물들을 소어아는 마치 복숭아씨를 던지듯
던져버렸다. 그가 보물을 던질 때마다 헌과신군의 얼굴은 움찔움
찔하면서 웃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첫날엔 한 개의 마뇌와 한쌍의 옥벽을 던졌지만 다음날은 다섯
개를 던졌다. 그 후 소어아가 던지는 보물이 많아질수록 헌과신군
의 안색은 어두워져만 갔다. 입에서는 이따금 이런 말이 흘러나왔
다.
"총명한 사람아, 총명한 사람아, 넌 얼마의 돈을 던졌는지나 아
느냐? 네가 던진 것을 은으로 따진다면 이 절벽보다 더 높게 쌓였
을 것이다."
이래째 되던 날, 헌과신군은 이마에서 땀방울을 주룩주룩 흘리
며 주먹을 쥐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총명한 사람아, 총명한 사람아, 만약 네가 실패하면 내가 어떻
게 널 죽일 줄 아느냐?"
"내가 이 보물들을 완전히 다 던져버려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
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사실 그의 손도 힘이 빠졌다. 오늘로서 반 이상을 던졌는데도
한 사람도 나타나질 않았다.
헌과신군은 드디어 상자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건드리지 마라. 그 누구도 이것을 건드리지 마!"
"당신은 정말 돈이 필요한가요?"
"난 이 보물들을 위해서 십오 년 동안이나 고생했어. 이 보물들
을 네가 다 없애버리면 내가 이 동굴에서 나간다고 해도 무슨 재
미가 있겠느냐?"
"그 말씀도 도리에 어긋난 것은 아니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
각해 보시오. 진주를 한 알만 더 버리면 사람이 올지도 모르지 않
소?"
헌과신군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모저모로 생각을 했다.
"이거......."
"정말 한 알이오, 딱 한 알에......."
헌과신군은 드디어 소어아의 설득에 지고 말았다.
"아! 내가 졌다."
헌과신군은 눈알만한 크기의 진주를 꺼내서는 자신이 직접 굴밖
으로 던져버렸다.
한 알을 던지게 되자, 다음에는 두 알, 두 알이 세 알...... 또
이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사람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헌과신군이 소어아의 옷을 잡아 당기더니 이를 갈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너 이녀석, 할 말이 있느냐?"
"어쩌면 한 알만 더......."
"한 알만 더 던지면 된단 말이지?"
소어아는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로 그렇소."
"쓸데없는 소리, 난 이미 속은 거야. 그런데 네가 또......
또......."
그는 원숭이 같은 두 손으로 소어아의 목을 잡으려고 달려들었
다.
바로 이때 갑자기 심경홍어 탄식하듯 외쳤다.
"왔어!"
절벽의 동굴 안으로 사람의 머리가 내밀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머리의 중앙에 길처럼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모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바람에 날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검은 눈썹은 길게 위
로 치켜 올라가 있었으며 눈두덩 밖으로 툭 불거져 나와있는 눈알
의 흰자위에 빨간 핏줄이 서려있는 것이 무척 살기가 감돌아보였
다.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동굴 속의 세 사람을 바라보
았다.
소어아와 심경홍은 이 한쌍의 눈을 바라보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표정과 생기가 없는 한쌍의 눈동자
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잔인한 공포를 자아냈고 신비스럽
기까지도 하였다.
헌과신군은 이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소리쳐 물었다.
"뭐지? 뭐가 나타난 거야?"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 방문객은 비호같이 날아들어 왔다.
그러나 그는 손도 발도 몸도 없었다. 다만 하나의 머리만 날아들
어 왔을 뿐이었다.
그 사람의 머리가 벽에 부딪치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때 동굴 밖에서 원숭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동시에 하나의
원숭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소아어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숨을 들이키더니 욕을 퍼부었다.
"원숭이 놈들이 까불고 있었구나?"
그러나 자세히 보니 이 사람의 머리는 결코 원숭이에 의해 잘린
것이 아님을 알아 낼 수 있었다.
헌과신군은 그 머리를 쳐들고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서있
었다.
심경홍이 중얼거렸다.
"이것은 필시 첫번째로 보물을 찾아 온 사람일 것이다."
헌과신군이 이를 갈면서 말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목을 잘리우고 말았으니."
"누가 죽였는지 모르겠군."
소어아는 동굴 밖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
로 말했다.
"그를 죽인 사람이 곧 올 것이오!"
그러나 '그를 죽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불안하고도 기대에 찬 긴 밤이 지나가자 어느덧 서광이 동굴 안
으로 비쳐들어 왔다.
동굴 밖으로부터 하나의 사람의 손이 나타났다. 다섯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듯 흔들거렸다. 아침 서광에 의해 비친 그
손은 신비스럽기만 했다.
심경홍이 달려가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남에게
짤린 팔이었고 피가 군데군데 굳어 무서운 빛을 띠우고 있었다.
또한 손목 근처엔 오래 전에 입은 듯한 깊은 상처가 있었다.
또 이상한 원숭이 웃음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심
경흥의 손에서 그 팔을 가로채 만져 본 헌과신군이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머리 다음이 팔이니 다음에는 냄새 나는 발이겠군."
소어아도 이때 한마디를 했다.
"어제 그 머리와 이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오!"
"네가 어떻게 알지? 그 손에게 물어 보았단 말인가?"
"그 머리의 피부는 이 손과는 전혀 달랐소. 찬찬히 만져 보시
오. 그리고 그 손은 매우 오랫동안 무술을 단련한 사람의 것임이
틀림없소. 혹 어제 그 사람의 머리를 벤 사람일지도 모르오."
심경홍이 돌연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
다.
"그렇다. 그 말이 맞아!"
헌과신군은 팔을 내던지며 말했다.
"흥, 넌 또 그것을 어떻게 알지."
"난 당연히 알지."
그는 장탄식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 그 머리는 모르지만 이 손은 내가 알고 있지."
소어아가 불쑥 물었다.
"그 칼자국이?"
"그렇지. 그 손목에 있는 칼자국은 내가 남긴 것이야. 내가 약
을 발라 주었고 쾌유하는 것을 보았지. 내가 어찌 그때의 일을 잊
을수 있겠나!"
그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을 띠고 있었다.
헌과신군이 물었다.
"네가 그를 다치게 하고 또 약을 발라 주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
지?"
"이 사람이 바로 옛날 강호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철표두 금도수
의 금도 철여룡이지. 그와 나는 좋은 친구였었는데 총표두 자리를
두고 오해가 생겨서 그만...... 나중에 내가 잘못을 알고 사과하
려 했지만 그는...... 아무말 없이 사라졌었지. 이미 이십 년 전
의 일이야. 이십 년 동안을 보지 못 하다가 오늘 이렇게 만났는
데......."
그는 오해로 갈라선 친구에 대한 회한으로 목이 메이는지 고개
를 돌려 헛기침 소리를 계속 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동굴 밖은 점차 밝아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따스한 여
름냄새를 풍겨왔고, 때때로 원숭이들의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입구를 바라보던 심경홍이 돌연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생각해 봐. 정말 그들이 여기를 찾아온 것일까?"
"그랬을 겁니다."
헌과신군이 스산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하나의 머리와 팔 하나가 왔지만 분명히 누구
다른 이가 올 거야.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난 상관하질 않아.
다만 그가 줄을 내려주기만 하면 돼. 흐흐흐, 그리고 줄을 내려준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돼. 내 보물에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어."
"그러나 그가 필요로 하는 것도 사람이 아니고 보물일 테니 들
어올 때 우리를 죽일는 지도 모르지."
"누구도 날 죽이진 못 해...... 이 동굴에선 내가 어디에 있는
지 조차 눈치채지 못 하게 그를 죽일 수 있어."
"온 사람이 당신의 친구라도 당신은......."
헌과신군이 크게 한바탕 웃으면서 말했다.
"친구? 난 일곱 살 때부터 친구가 없었어. 친구라는 말을 들으
면 구역질이 나지."
헌과신군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 두 사람도 살고 싶으면 절대로 허튼 짓을 해선 안 돼. 그
렇지 않으면......."
그때 돌연 '쉬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어떤 물체 하나가 날아들
어 왔다. 심경홍은 재빨리 몸을 날려 그것을 손으로 잡았다. 그것
은 강철로 만든 푸른빛이 도는 검이었다.
"사람은?"
"사람?...... 필시 죽었을 것이오. 이것도 원숭이가 던진 것이
오. 검의 주인이 죽질 않았다면 이런 검이 어찌 원숭이 손에 들어
갔겠소?"
소어아의 말에 심경홍은 칼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그렇다. 검이 있으면 사람도 생존하고, 검이 검집을 떠나면 사
람도 죽지......."
그가 들고있는 검의 손잡이는 '검재인재 검망인망'이란 여덟 글
자가 씌어 있었다.
곁에 있던 소어아가 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필시 이름있는 검객인 모양이군요."
심경홍은 검을 소어아에게 내밀었다.
"여덟 글자 외에 무엇이 있는가 보아라."
검에는 그 글자들 외에 금으로 세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
다.
소어아는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특별한 것은 없소. 다만 세 개의 동그라미가 더 있을 뿐이오."
"그렇지. 다만 세 개의 동그라미야...... 하지만 이 세 개의 금
동그라미로 금은을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있지. 원수들을 서로 타
협하게 할 수도 있고 좋은 친구를 갈라 놓을 수도 있어."
"그 동그라미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 세 개의 동그라미는 추혼탈명 삼환검객 심양의 표식이지.
이 표기로 대하(大河)를 아무런 장해 없이 다닐 수 있는 것이야."
"허! 그 심씨가 그토록 큰 세력이 있단 말이오?"
"이 삼환검은 바로 지금 천하에 있는 십칠 개 명검 중의 하나
야. 삼환투월의 수법이 심양의 손에서 쓰이게 되면 정말......."
듣고만 있던 헌과신군이 비웃듯 말을 막았다.
"되지도 않는 소리군."
심경홍이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넌 어찌 당대의 명가를 모욕하는가?"
"네가 말한대로 무림의 명가라면 어찌 그 삼환검이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지 못 하고 너의 손에 있느냐 말이다."
심경홍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길게 탄식했다.
"삼환검객도 이런 곳에서 죽게되다니 정말 뜻밖의 일인데. 이렇
게 된 것을 보면 보물에 유인되어 온 사람이 굉장히 많은 모양이
다."
소어아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이 절벽 위에서는 꽤 재미있는 전투가 벌어질 텐테 그걸
보지 못 하는군요."
"그렇지. 지금 이 절벽 위에선 필시 많은 무림 친구들이 피를
흘리며 격투를 벌리고 있을 거야. 이 모든 일이 너 때문에 일어났
으니 괴로워해야 할 텐데, 너는......."
소어아는 입가에 계속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소위 무림의 고수라는 자들이 몇 가지 보잘 것 없는 보물 때문
에 서로 죽이고 싸우고 있소. 모두 하는 짓이 병신들 같으니 어찌
비웃지 않을 수가 있겠소?"
심경홍이 한참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가만히 고개를 숙이
며 길게 탄식했다.
"몸 이외의 물건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걸다니 곰곰이 생각하
면 정말 병신짓이야. 그러고 나...... 나 역시 그렇지 않을까?"
"당신도 나와 종종 이야기하게 되면 필시 총명해질 것이오."
소어아의 말이었다.
이날도 기다림 속에서 하루가 지나가버렸다.
자정이 지났으나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
나 긴 하루가 다 지나간 이때 동굴 밖 어둠 속에서 갑자기 떠들썩
한 소리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잠을 청하던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
리며 짜증섞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들이 삼경인 밤중에 왜 저리 떠들지?"
심경홍도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앉아 있었다.
"원숭이들은 밤을 싫어하는데 이렇게 떠드는 것으로 보아 필시
원인이 있을 것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며 원숭이
들이 다시 동굴 안으로 십여 개의 물건을 던졌다. 동굴 속은 어두
웠기 때문에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숭이들은 마치 그들의
임무라도 끝마쳤다는 듯 웃음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소어아는 더듬거리며 물건을 하나 주워 심경홍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무엇인줄 아시오?"
심경홍은 물건을 받아들자 잠시 만져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오구검이군. 이 병기는 이미 다년간 강호에 보이질 않았고 수
법도 사라졌는데......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고수아닌 사람
이 없어."
"또 하나의 고수가 죽은 모양이군요."
소어아는 더듬더듬하더니 또 하나의 물건을 줏어들었다. 심경홍
이 곁에서 물었다.
"그건 무엇이지?"
"이건 둥그런 물건이고 미끄럽고 줄이 달려있군요. 유성추 같기
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나도 무엇인 줄은 모르겠는
걸요."
심경홍은 다시 침울해졌다.
"둥그렇고 미끄러운 것?...... 강호의 오문(五門) 중 가장 악독
한 무기인 오독벽력 뇌정주가 아닐까!"
"오독벽력 뇌정주! 위엄있는 이름이군요."
"이 오독주를 사용하는 수법은 유성추와 별로 다를 것이 없지.
다만 그 공 속에는 암기가 감추어져 있어. 싸움이 불리하게 될 경
우 암기들이 쏟아져나오는 기묘한 무기야. 이 무기의 주인인 양정
은 감히 남들이 함부로 대적 못 하는 고수야."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양정이라는 사람은 그 수법을 발휘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군요. 그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은 정말 초고수급인 모양입니
다."
"또다른 물건은? 조심하게. 함부로 건드리지는 말아. 독이 있는
병기도 있을 게야."
"손에 이미 천을 감았소. 음, 여기에 칼이 있는데 구환도 같은
걸요. 어휴! 무게가 오십근은 되겠어요."
"오십근의 구환도라니...... 그 사람의 무공도 금도수 철여룡보
다 뒤떨어지지 않아. 탕마도 중윤일 거야."
"여기에 판관필이 있군요. 이것도 매우 무거운데. 이렇게 무거
운 무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보통이 아니겠는 걸."
"이리 좀 다오."
심경홍은 판관필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거기엔 몇 글자가 양각
되어 새겨져 있었다.
'불의자망'
심경홍은 중얼거렸다.
"과연 생사판 조강이군. 그...... 그도 죽었단 말인가? 이 생사
판 조강은 혈을 때리는 데 제일인자이지. 일신의 무공은 무림에서
따를 사람이 없는데 누가 그를 죽였을까? 누가 그를 죽일 수 있다
는 건가!"
"어쩌면 그가 죽지 않고 무기만 잃었을 지도 모르오."
심경홍은 탄식했다.
"강호의 고수들은 자기의 무기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하는데 무
기가 원숭이 손에 있으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리라고 생
각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렇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다시 서광이 동굴을 비추기 시
작했다. 그리 밝지는 않았으나 사람의 시력으로 충분히 땅에 떨어
진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있었다.
땅에는 오구검, 뇌정주, 판관필, 구환도 외에도 두 개의 검과
줄이 달려 있는 은창, 한쌍의 호두구, 세 개의 철담, 두 개의 암
기 주머니가 있었다.
심경홍이 검을 하나 줏어 살폈다. 그 검은 가볍고도 종이처럼
얇았다.
"이것이 '용봉쌍비 원앙검' 중 자검인 '경봉'이지. 웅검 '신용'
은 어디로 갔을까. 아! 용봉검객은 일세의 영웅이고 강호의 사람
들은 '용봉비익 익상구천'이라 하는데 이제는 검마저 짝을 잃고
돌아다니다니."
그는 탄식을 하면서 '경봉' 검을 놓은 뒤 바닥의 무기들을 바라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는 무겁게 탄식을 하면서 중얼
거렸다.
"이 고수들이 모두 이곳에서 죽다니 정말 뜻밖의 일인데. 아마
이런 싸움은 이 백 년 안에는 벌어진 적이 없을 거야."
"이 사람들은 필시 일시에 죽은 것 같아요. 한꺼번에 이렇게 많
은 고수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두려워지는데요.
혹 누구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
아. 하지만 일곱, 여덟은 있지. 그 중에서 무공이 가장 높고 가장
악독한 것은 역시 '이화궁'의 두 궁주야...... 하지만 그 둘은 하
늘의 선녀인데 어찌 세상의 보물 때문에 손을 쓰겠어. 손을 쓴 사
람은 그녀들이 아닐 거야."
"그렇다면 또 누가 있을까요?"
"십대악인 중 무술이 가장 높은 혈수 두살과 광사철전도 이런
수단은 없을 걸."
"그 두 사람은 불가능하지요."
"그렇지. 게다가 그 두 사람은 벌써 다년간 행방을 모르고 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악인곡'에 들어갔다지. 그리고 광사철전이
그들을 죽였다면 무기들도 완전히 분쇄해버려 남겨두지 않았을 거
야."
"그리고는?"
"또 몇 사람이 있지만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없어."
"무엇 때문에요?"
"그 사람들은 비록 무공은 강해도 정의가 있는 일대 협객이기
때문에 결코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말하자면......."
심경홍은 그저 언중(言中)이었지만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말하자면 천하제일검 연남천 같은 분이지. 그가 이 몇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아마 간단히 해치웠을 것이야. 그러나 악도가 아
니면 손을 쓰는 일이 없으니 그 분은 아니지."
"아! 사나이 중의 사나이야! 사나이가 세상을 살려면 연남천과
같이 살아야지요! 남들이 이름을 말할 때 존경을 표시할 정도로
말이오."
심경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
하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헌과신군이 씁쓸히 웃으면서 두 사람 사이
에 끼어들었다.
"흥! 그는 내 계책에 휘말렸으니 지금은 백골이 되어 누워있을
거야."
심경홍이 소리쳤다.
"허튼소리! 난 십오 년이나 그를 보지 못 했지. 하지만 하늘과
땅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그 대영웅은 필시 잘 지내고 있을
게야."
이 말을 듣는 소어아는 눈이 젖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려
는 듯 고개를 숙여 하나의 암기 주머니를 펼치더니 그 속에 든 암
기를 모두 내놓았다.
주머니 속에는 열세 개의 독침이 들어 있었다. 그 중 일곱 개는
검고 빛이 없는 철질이었고 또 많은 독모래가 있었다. 심경홍은
어깨를 흔들며 안색이 변했다.
"천중당문 사람도 왔군."
"이 암기들은 만진 흔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천중당문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암기는 빠르기가 귀신도 피할
수 없다던데...... 그러나 이번에는 손을 쓰기도 전에 독수를 당
했으니 이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야."
"손을 쓴 사람이 당신이 말한 그 몇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도대
체 누구일까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군."
소어아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곧 올겁니다. 기다려 보죠."
헌과신군은 벌써부터 무서운 얼굴을 하고 가만히 운기조식을 하
고 있었다.
어느덧 밤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저녁이 되었다. 그때 굴 밖에서
다시 하나의 손이 내밀렸다. 이번 손은 매우 가늘고 아름다운 여
자의 손이었다. 그러나 이 한 점 결점도 없는 섬세한 손에서는 처
절하고도 요염한 냄새가 풍겼다. 손은 가볍게 동굴의 돌벽을 쳤
다. 손이 움직였고 손가락도 움직였으니 절대로 죽은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곧이어 가느다랗고 달콤한 웃음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
려왔다.
"안에 누가 계신가요?"
마치 옆집의 부녀자가 할 일이 없어 놀러왔을 때처럼 가볍고도
애교있는 목소리었다.
헌과신군과 심경홍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면서 서로 바라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넋을 잃은 듯 서있다.
단지 소어아만이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게 뉘시오?"
"사람이 있으니 나와서 문좀 열어주세요!"
"어이, 내가 가게에서 설탕을 사 먹고 돈을 주지 않았더니 문은
그 사람이 들고 갔소이다."
밖의 말소리가 깔깔거리며 한바탕 웃었다.
"그 설탕 장수는 참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렇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설탕장수가 당신의 처남이라던
데."
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발이 아파서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으면 하는데 어떠세
요?"
"물론 좋소. 그러나 조심하시오. 우리집 문턱은 좀 높아서 발이
걸릴 염려가 있소."
"고맙소."
그 아름다운 손이 가볍게 벽을 잡는 듯하더니 그녀의 몸은 벌써
굴 속으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동굴 입구에 나타난 여인은 녹색치마를 입고 귓가에 들꽃을 꽂
은 작고 귀여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내려서더니 사뿐사뿐
걸어들어 왔다. 그녀의 걸음은 매우 가벼웠고 몸매는 정말로 아름
다웠다.
순간 어둠 속을 뚫고 헌과신군의 몸이 훌쩍 위로 치솟는 듯했
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일장의 광풍을 내뻗으며 그 여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 녹색치마의 여인은 허리를 약간 구부리더니 번개같이
재빠르게 헌과신군의 뒤로 돌아가 섰다.
헌과신군은 잠깐 당황하는 듯하였으나 다시 두번째 손을 쓸 준
비를 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가라고 하면 나갈 텐데, 왜 그렇게 무섭게 손을 쓰죠?"
그 목소리는 마치 꽃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달콤하였다.
"너...... 너......."
녹색치마의 여인은 헌과신군을 무시한 채 눈을 들어 굴 속을 둘
러보다가 소어아를 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분 도련님이 날 들어오지 못 하게 했다면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헌과신군은 정말 기가 막혔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소어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살포시 웃어보
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제가 여기에 머물기를 원하신다면 소첩은 종이 되
어 당신의 시중을 들어드리고 옷을 빨고 밥을 짓겠습니다."
소어아는 그때까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드디어 한
바탕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종보다 내 부인이 되는 것이 좋겠소."
"당신이 정말 소첩을 마누라로 삼는다면 저는 기뻐서 죽을 것이
에요. 난 십 년 동안을 헤맸지만 당신 같이 총명한 남편감은 만나
보지 못 했어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무엇이 애석하다는 말이오?"
"애석하게도 나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당신이 서른 살
이 되면 나는 이미 노파가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날 버
릴 테고 난 마음이 아플거예요."
한마디도 진실된 말이 아님을 소어아로서도 알았지만 웬 영문인
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 속이 기뻤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큰소리로 껄껄 웃어 제꼈다.
"나의 나이가 너무 적다 하질 않고 자기의 나이만 많다고 하니,
당신 같이 착한 여자를 내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당신의 말이 정말이든 거짓이든 난 영원히 기억할 것이에요."
헌과신군이 사이에 끼어 들었다.
"내가 만약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으리께서 이곳의 공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밖에
준비한 줄을 타고 나갈 수가 있소."
헌과신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십오 년 동안이나 굴 속에
파묻혀 있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밖으로 나갈 수 있다니 꿈 같은
얘기였다.
"정말인가?"
"마음을 놓지 못 하시겠다면 먼저 올라가도 좋아요. 그 다음에
우리가 올라가죠. 이분 도련님이 마지막으로 상자들을 들고 올라
오게 하면 돼요."
헌과신군과 심경홍은 마음 속으로 이 여자가 필시 사람 백 명을
죽여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여마귀라고 생각했다. 정체도 불
분명할 뿐 아니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마음이 동했다.
"그 방법은 정말 좋은 방법이오. 다른 사람이 먼저 올라간다면
원숭이 형은 필시 마음을 놓지 못 할 것이오. 그러나 원숭이 형이
먼저 올라가면 보물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줄을 끊지는 못 할 것
이오."
헌과신군은 소어아의 제안을 들으며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계속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심
경홍과 헌과신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혹시 무슨 나쁜 마음이라도 있는 줄로 아세요?"
헌과신군이 큰 마음이라도 먹은 듯 소리쳤다.
"좋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우선 올라가서 보자!"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조급해서 기다
릴 수가 없었다. 아! 따스한 햇빛, 코 속을 간지럽히는 싱그러운
바람, 여기저기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갖가지 새들의 노래소리,
이 모든 것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는 굴밖으로 손을 내밀어 더듬었다. 과연 그곳에는 하나의 굵
은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녹색옷의 여인도 이곳에 갇히게 된
다. 그러니 기회가 생겼을 때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내가 먼저 올라가 봐야겠다.)
헌과신군은 머리 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하면서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주저하는 빛이 하나도 없이
그대로 몸을 날려 줄을 잡았다. 그는 통쾌했다. 그는 큰소리로 껄
껄 웃으며 소리쳤다.
"심경홍, 네가 뒤따라......."
그러나 미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신을 비틀면서
만장의 절벽 밑으로 떨어져버렸다. 그의 만족스러워 하던 웃음소
리는 비참한 비명으로 변해버렸다.
심경홍은 아연실색했다.
"이건...... 이건......."
그러자 녹색치마의 여인도 안색이 파랗게 변하면서 떨리는 소리
로 말했다.
"이거...... 이거 어찌된 일이죠!"
심경홍은 눈에서 악독한 불빛을 발하며 무서운 소리로 내뱉았
다.
"그건 당신에게 물어야 할 말이오!"
"그 노인장이 나이를 너무 많이 잡수셔서 줄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닐까요?"
심경홍은 분노했다.
"이런 악독한...... 당신이 줄에다 무슨 짓을 해놨을 거요."
"줄은 아무 이상 없었어요. 분명히 제가 조금 전에 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믿지 못 하겠으면 한 번 줄을 당겨보세요."
심경홍이 막 손을 내밀어 줄을 당기려는 순간 소어아는 재빨리
가로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이 줄 속에 독침이 숨겨있다면 당기는 순간 아마 맛이 좋을 걸
요."
심경홍은 급히 손을 거두면서 무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그렇다. 이 줄에는 독침이 감추어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헌과
신군이 어째서 손을 놨지? 예상대로 넌 참으로 악독한 여자구나."
그러자 녹색치마의 여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전...... 전 가겠어요."
그녀는 뾰루퉁하게 토라져서 줄을 잡고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녹색치마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는 심경홍은
속으로 애가 타고 후회스러웠다. 그가 좋은 기회를 놓치는구나 하
는 생각으로 안타까와하며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
알 수 없는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소어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
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벌써 당신이 돌아올 줄 알았소."
"본래 당신들을 상관하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 비참한 것 같아
서...... 아! 난 마음이 왜 이렇게 약할까? 정말 나 자신도 모르
겠군."
그녀는 심경홍을 바라보았다.
"이젠 당신도 나를 믿겠죠?"
이쯤되니 심경홍은 정말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혼란이
왔다. 그는 심지어 헌과신군이 정말 줄을 잘못잡아서 떨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당신이 정 믿지 못 하겠다면 손에다 천을 감고 올라가 보면 되
잖아요?"
여인의 말에 심경홍은 동굴 밖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그는 고개를 돌려 음침한 동굴 속을 바라보며 십오 년의 고된
세월을 생각했다.
그는 이번 기회가 정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되었던지 망서리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소어아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날 보지 마시오. 나도 좋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내 생
각엔 줄이 끊기지는 않을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어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수 있었겠소?"
심경홍은 굳은 결심을 한듯 줄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어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가 올라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
다. 한 자 두 자...... 그가 십여장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자 소어
아는 마음을 놓았다. 그때서야 그는 여인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당신이 선인인지 악인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 순간 절벽에 늘여져있던 줄이 돌연 끊어졌다.
심경홍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면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귀를 찢는 비참한
비명소리만이 메아리치며 들려올 뿐이었다.
소어아는 완전히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얼마가 지났을
까. 그는 혼자서 넋두리 하듯 중얼거렸다.
"당신...... 당신...... 당신은 정말 사람을 속이는 악마군."
"어! 그래?"
"당신은 독침을 숨겨 그 늙은 원숭이를 죽였고 또 줄을 거의 끊
어놓아 심경홍을 죽였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무공으로도 그런
묘책을 쓰지 않고 그들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건 재미가 없지 않아요? 난 이제
까지 살아오는 동안 직접 사람을 죽여보진 않았어요. 모두 그들이
죽고 싶어서 죽은 것뿐이오."
"그러나 난 아직 알 수 없는 일이 있소. 줄이 끊어졌는데 당신
은 어떻게 올라갔었소?"
"여기도 좋은데 왜 올라갈 생각을 하지요?"
소어아는 말문이 막혔다. 넋을 잃고 머리를 가로 저으며 쓴웃음
을 지었다.
"여자가 말을 하는데 미처 이해하지 못 한 것은 당신이 처음이
오."
녹색치마의 여인은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부드러웠
다.
"당신 친구가 내 손에 죽었는데 복수할 생각이 없소?"
"당신을 이길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복수를 하겠
소? 더구나 당신 말대로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좋아서 한
일로 죽은 것인데."
"그래도 속으로는 날 원망하고 있겠죠?"
"그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였소. 지금 그들이 죽
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겠소?"
녹색치마의 여인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소어아를 말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
"너 같은 애는 처음 보는데."
"흥! 이제 당신은 날 죽여도 좋소."
"널 죽이면 내가 혼자서 외롭지 않을까?"
"당신...... 당신은 올라갈 생각이 없단 말이오?"
"난 날개도 없는데?"
"정말 여마귀다운 말솜씨로군."
"내가 여마귀라면 너는 소마귀야."
소어아의 입에서 탄식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건 맞소. 하나는 여마귀, 하나는 소마귀. 이 동굴에서 한평
생을 같이 살게되면 어쩌면 많은 요귀들을 낳게 될지도 몰
라......."
"너 같은 꼬마자식도 애기낳는 짓을 아느냐? 그러나 난 암돼지
도 아닌데 어찌 많은 애기를 낳을 수 있겠어?"
"우린 이 동굴에서 아무 할 일이 없으니 자연 애낳는 일밖에 더
할 일이 있겠소? 가난한 집안에 왜 애기가 많은 줄 아시오? 그들
은 할 일이 없어서 그 짓만 했기 때문이오."
"넌 어린 나이에 알고 있는 것도 많구나."
"당신은 내가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을 거
요."
"그러나 정말 너의 애기를 낳으려면 삼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기다리긴 왜 기다린다는 거요? 지금 시험해도 무방한데."
"아아, 네가......."
이때 갑자기 광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미친 듯한 웃음소리
는 매우 우렁차면서도 두려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흥, 소씨 계집애. 넌 달아날 수 없을 걸. 난 벌써부터 네가 그
아래로 내려간 줄을 알고 있었어. 내가 여기에 계속 있을 것이니
너는 한평생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 소리는 먼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하였으나 마치 귓가에
서 소리를 치는 것처럼 귀가 울렸다.
순간 녹색치마의 여인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자는 목소리가 굉장히 크군. 세상에 저렇게 큰 목소리는 몇
안 될 텐데. 그런데 그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요? 당신
이오?"
"음!"
"누구지?"
"그는...... 그는 사람도 아니고 요괴야."
"당신은 한평생 여기에 있는 한이 있더라도 올라가지 않을 거
요?"
"만약 네가 올라갈 생각을 한다면 저 노괴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럴 거야."
"내가 왜 모르겠소? 오장육부를 철강처럼 연마하지 않고서야 어
떻게 저런 큰소리를 지를 수 있겠소. 만약 수박 겉핥기 식으로 무
공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창자가 터져나왔을 거요."
"그는 무술도 깊고 고강할 뿐만 아니라 수단도 악독하지."
"그렇다면 당신보다 더 독하고 악하단 말이오?"
"넌 몰라. 그는......."
이때 다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올라오는 게 좋아. 넌 거기서 오래 있지를 못 해. 내가
하루를 더 기다리면 너의 죄가 그만큼 커지지."
녹색치마의 여인은 하얗게 질려 벌벌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
다. 소어아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토록 그가 무섭소?"
"넌 몰라. 그의 손에 한 번 걸려들면 어떻게 당하는지를. 그는
내가 스스로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지."
"그도 당신을 약간은 두려워 하는 것 같은데."
"그가 날 두려워해?"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가 왜 내려오지 못 하지?"
녹색치마의 여인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넌 아직 몰라...... 그의 속은 세상 누구도 몰라. 그가 내려오
지 않은 것은 어떤 꾀가 있어서일 거야."
그의 말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소씨, 정말 올라오지 않을 텐가?"
녹색치마의 여인은 입술을 깨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내가 열을 헤아릴 때까지 올라오지 않는다면 난 너에게
십여 일의 고생을 하게 만들 테다. 네가 죽기 직전까지 너를 혹독
하고 잔인하게 고생시키지 않는다면 난 사람이 아니다."
소어아가 계속 눈을 깜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로 사람이 죽는 것도 못 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
이군."
소어아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지금부터다. 하나!"
녹색치마의 여인은 완전히 혼이 나간듯 땅바닥에 주저앉아 움직
이질 못 했다. 귀 옆에 꽂은 들꽃이 떨리기 시작했다.
헤아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둘!"
소어아는 무슨 벗어날 곳이라도 찾는지 동굴을 샅샅이 살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흉악하다면 혹시 십대악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녹색치마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십대악인을 그와 비교한다면 어린애와 장정의 비교지."
"십대악인보다 더 악독하단 말이오?"
"최소한 십 배 이상은 악독하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지."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셋!"
"그 사람의 이름이 뭐요?"
"넌 모를 거야."
"그가 십대악인보다도 더 악독하다면 이름이 났을 텐데."
"사람을 무는 개는 짖지 않는 법이야. 알겠어? 이름이 없는 개
일수록 더욱 무섭지."
소어아는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
다.
"그말도 일리는 있지......."
밖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넷...... 좋아. 너 정말 올라오지 않을 모양이구나. 내가 어떻
게 너를 처치할 것인가 듣고 싶지 않느냐?"
그러더니 미친 듯 웃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너를 잡으면 먼저 너의 눈알을 파내고 열흘 동안 소금 속에 묻
어두겠다."
소어아가 말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인가 본데. 하지만 그런 짠 살코기는 아무도
먹지 못 할 걸."
녹색치마의 여인이 말했다.
"내가 스스로 죽으면 그는 화를 너에게 돌려서 너를 비참하게
죽일 거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힘없이 동굴밖을 향해 걸어갔다.
"뛰어내릴 거요?"
"내 생각엔 함께 뛰어내리는 것이 좋겠는데......."
"나도 뛰어내리라는 거요?"
여인은 생기를 되찾은 듯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나 혼자 죽는 것은 외로운데 같이 죽어 주겠어?"
소어아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생사람 보고 함께 죽자고? 그것도 혼자 죽는 것이 너무 외로워
서...... 흐! 이런 요구는 또 처음 들어보는데."
"난 너를 좋아해서 같이 뛰어내리자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넌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걸!"
그 우렁찬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일곱!"
소어아는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해요?"
"넌 총명한 사람이라면서 그것도 몰라?"
"좋아요. 우리 같이 뛰어내립시다."
"정말?"
"함께 뛰어내리는 것만이 아니고 안고 뛰어내릴 테요."
마주선 두 남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났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
보며 웃음을 띠었다.
"좋아...... 당신이 좋아."
이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덟! 이제 둘 남았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너는 곧 잡힌
다."
소어아는 성큼 그녀 앞으로 다가서더니 팔을 뻗었다.
"어디를 안아줄까요?"
"마음대로 해. 내 몸의 어디라도 좋아."
소어아는 조금 더 다가서서 나긋한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몸에
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소어아의 정신을 흐리게 했다. 그녀는
소어아의 손길이 몸에 닿자 순간 전율을 느낀 듯 움찔했다.
"당신 정말 향기롭소...... 당신을 안고 죽는 것이 나의 최상의
운명인 모양이오."
"넌 정말 귀여운 애야. 너에게 안겨 죽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인
듯 싶다."
밖에서 더 큰소리가 들려왔다.
"아홉, 계집애야, 생각했느냐? 난 벌써 아홉을 헤아리고 있어!"
"꼭 안아줘. 좀더 힘차게 안아줘. 우린 이제 뛰어내리는 거야."
"뛰어요!"
그는 이렇게 말은 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 했다. 잠시 서
서 두 눈을 감고 있던 소어아는 문득 인생의 무상함이라도 느꼈는
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죽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
"곧 알게 될 거야......."
그들은 서로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는 둘 다 눈을 감았다. 그리
고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몸을 부둥켜안은 채 그 깊은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름도 모르는 남과 무조건 같이 죽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일을
과감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어아 외에 또 누가 있으랴!
그의 귓전에는 오직 윙윙거리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고
몸뚱이는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떨어져 내려갔다. 소어아는 공포
보다는 아득한 느낌과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아래로 내려갈수
록 속도가 빨라졌고 마치 몸이 찢기는 듯도 했지만 전신에 묘한
쾌감을 맛보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넌 도대체 총명한 거냐? 아니면 바보냐?)
바로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진동하더니 떨어지는 속도가 완전히 늦추어졌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죽는 기분이 어때?"
"좋아, 좋은데......."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양쪽 산벽
으로 나무들이 있었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천천히 바람을 타고 날
으는 꽃잎처럼 보였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는 행운아야. 죽는 기분도 맛보았고 정말 죽지는 않았으니
말이야."
"이거...... 이거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고개를 좀 들어봐라."
그들 위로는 이상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우산 비슷한 것으로
그 여인의 등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많은 천으로 이은 오색찬란한
커다란 천이었다.
소어아는 마치 구름을 탄 듯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껄껄대
고 웃으면서 큰소리로 지껄였다.
"이거 재미있는데. 당신이 생각해 낸 것이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 오색천이 바람에 날리며 그들을 뒤덮었고 그들은 서로 껴안
은 채 땅을 뒹굴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치마에서 작은 칼을 꺼
내 줄을 끊더니 애교있게 웃으면서 한숨을 돌렸다.
"귀여운 녀석, 이제는 손을 놔도 돼."
그러나 소어아는 더욱 힘있게 꽉 껴안으면서 상기된 얼굴로 바
라보았다.
"난 놓지 않을 테야. 날 너무 속였어. 정말 미치지 않은 게 다
행이야. 그래서 벌로 좀더 안고 있어야겠어."
"너 이 자식! 넌 도대체 총명한 인간이냐? 병신이냐?"
"그 한마디는 방금 내 자신에게도 물어 보았었는데 내가 왜 모
르겠어?"
"내가 보기에 넌 바보야!"
소어아는 그녀의 몸을 풀면서 일어섰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했다.
"당신은 정말 날 속였다고 생각하는 거요?"
"음."
"말해두지만 난 벌써부터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을 알았소. 그래
서 같이 뛰어내리자고 한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자살할 사람
이 아니오."
"어! 그래?"
소어아는 가슴을 쭉 폈다. 수일 동안 흙을 밟아보지 못 한 탓인
지 기운이 저절로 솟았다.
"세상에 나 강어를 속일 사람은 없소."
"난 이제야 네가 아이가 아닌 것을 느꼈어. 넌 어른이야. 그리
고 사나이지. 너 같은 사나이는 지금껏 보질 못 했어."
그녀의 눈동자 속엔 칭찬하는 빛이 감돌았다. 소어아는 가슴이
더욱 넓어진 듯했다. 자기가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녹색치마의 여인은 눈을 돌리며 길게 탄식했다.
"비록 죽지 않았다 해도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이런 곳에 오게
되었으니...... 모든 일을 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어. 날 버려선
안돼."
소어아는 이렇게 자신이 강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또 이렇게
용기와 자신을 얻은 적도 없었다.
그는 큰소리로 장담했다.
"날 믿으시오. 모든 일에 후회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넌 정말 훌륭해요. 난 사람을 잘 택했다는 걸 알지."
녹색치마의 여인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곧 소어아에게 말했다.
"좋아. 빨리 방법을 생각해서 이곳을 떠나자."
이곳의 지세는 마치 술병의 밑바닥 같았다. 사방이 깍아지른 절
벽이라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이곳이 그들의 생각과 달리 축축한 습지가 아니라
는 것이었다. 습지는 커녕 오히려 따스하고 건조했다. 발밑은 진
흙이 아니었고 질이 좋고 부드러운 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촉감이 좋은 담요와 같았다.
사방이 나무와 풀과 꽃으로 동산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있
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 고요했고 오직 깊은 정적만
흐르고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한 점 바람도 없이 풀잎 하나
하나도 마치 돌로 조각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무슨 방법을 생각했어?"
"여자의 유일한 결점은 말이 너무 많다는 거요. 그 점만 고치면
꽤 괜찮아질 텐데...... 이제부터 입 좀 다물고 나에게 생각할 시
간을 줘요."
"좋아, 모든 말을 들을 테니."
그녀는 부드럽게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소어아는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열일곱, 여덟 바퀴를 돌았다. 그
러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곳은 아무런 소리도 없지? 또 당신은 어째서 아무 소릴 않는
거요?"
"뭐라고? 날더러 입다물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랬던가?......."
그는 다시 몇 바퀴를 더 돌았다.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러
다가는 돌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뭐가 아니란 말이야?"
"없어."
"무엇이 없다는 거야? 말을 해봐."
"아직도 모르오?"
"난 머리가 나빠서."
"내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오. 그 늙은 원숭이와 심경홍 두 사
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올라갔단 말인가?"
"그들은...... 그들은 이미 죽었겠지."
"그렇소. 죽었겠죠. 그러나 시체가 없단 말이오. 근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들의 뼈다귀 하나도 못 봤소.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해
도 흔적이 남았을 거야. 더군다나 여기엔 고양이도 없는데 무슨
호랑이가 있겠어?"
"정말 그들의 시체를 보지 못 했어?"
"없어. 도대체 뼈다귀도 없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자신을 믿지 못 하겠는지 사방을 두리
번거리며 찾았다. 녹색치마의 여인도 따라서 근처를 뒤졌다. 그곳
은 별로 넓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두세 번을 더 찾아보았다. 나
무밑은 물론 풀 속도 모두 뒤져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체는 그
만 두고라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두 사람의
죽은 흔적이 없었다.
소어아는 돌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정말 귀신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녹색치마의 여인이 몸을 흠칫하더니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귀신? 요즈음 귀신이 어디 있어?"
"귀신이 없다면 그 두 사람이 어디를 갔겠소. 그들이 죽었다면
시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 시체가 없으니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요."
"만분의 일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어디에 갔을까? 하늘로 날아올랐나? 땅으로
꺼졌나? 그들이 은신법을 썼을까? 또는 여기에 사람을 뼈까지 먹
는 요괴가 있단 말인가?"
녹색치마의 여인은 떨리는 소리로 소어아의 말을 막았다.
"제발 그만해. 정말 무서워. 나...... 이런 이상한 일은 일찌기
보질 못 했어."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야."
"우리 빨리 가자. 이곳은 무서워."
"가자니? 어디로 간단 말이오?"
"아무 묘책도 없어?"
"사실 나도 방법이 없소."
소어아는 기운없이 한마디 뱉더니 곧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이곳에는 이상한 점이 있어. 난 그 점을 꼭 알아봐야겠어."
그는 사방을 다시 살폈다.
"이곳에 필시 다른 사람이 있을 거야."
"이런 곳에도 사람이 있을까?"
"이 땅 좀 봐요."
"풀은 풀일 뿐이지...... 그런데 왜?"
"야생의 땅이라면 풀이 이토록 깨끗하게 자랄 수 있을까? 이곳
은 반드시 사람이 있어 자주 손질을 하는 것 같소."
"아 그렇지. 넌 정말 머리가 좋아. 거기다 눈도 좋고."
둘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사람
이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녹색치마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난...... 난 생각하기도 싫어. 생각하면 무서워."
"당신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도 족해
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 그도 생각이 돌지 않아 머리가 아팠
다.
날이 저물었다. 계곡은 깊숙한 곳이라 더더욱 날이 빨리 저무는
것 같았다.
소어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주위를 돌았다. 어느덧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곤 꽃이나 풀뿐이었다. 먹을
것은 눈을 뒤집고 찾아 보아도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결
국 굶어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소어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항상 세상에 못 할 일을 없다
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누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미
친놈 아니면 병신이라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한참이나 이렇게 주위를 맴돌던 소어아는 혼자 중얼거렸다.
"잠을 자자. 우선 잠을 자고 보자. 깨어나지 않도록 잤으
면......."
이때 녹색치마의 여인이 그를 불렀다.
"이리와요...... 빨리 와봐."
소어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어아는 큰소리로 불렀다.
"당신 어디에 있소? 당신은 은신법을 배웠단 말이오?"
"여기야, 여기!"
그녀의 목소리가 나무 뒤에서 들려왔다. 그 나무는 굵은 고목이
었다.
그는 급히 달려갔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나무 뒤에 꿇어앉아 있
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오직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을 뿐
이었다.
소어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엇을 하고 있소? 불공을 드리는 것이오?"
녹색치마의 여인이 손을 내저었다.
"빨리 와서 여길 좀 봐."
소어아는 그녀 곁에 앉아 한참을 살펴보았다.
"여기는 아무 것도 없는데...... 아! 맞았어. 있구나!"
그 나무는 밑둥에서 두 자 정도 되는 부분까지와 그 위가 약간
나뭇결이 틀렸다.
"이 나무껍질은 자주 사람이 만진 듯해. 왜 사람이 나무껍질을
만져야 하지? 이 나무는 필시 기계가 장치되어 있는 문일는지도
모르지."
"당신은 머리도 꽤 좋고, 또 눈도 괜찮구려."
소어아의 칭찬에 녹색치마의 여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고마워."
소어아는 대꾸하지 않고 일어서서 나무를 몇 번 두드려보았다.
"이 속에 누가 있소?"
비밀통로
소어아에게는 수시로 농담을 잘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 나무를 두드리며 한 말은 그저 무의미한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나무 속이 비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 한 것이
었다. 그는 물론 누가 자신의 말에 대답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
다.
그렇다. 그 나무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나무 껍
질이 돌연 열리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는 깜짝 놀라 즉시 뒤로 대여섯 장쯤 날아갔다. 한편 녹
색치마의 여인은 놀란 나머지 꿇어앉은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 했
다.
나무 속은 비어 있었다.
소어아는 나무 속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안에 있는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어서 나와라."
소어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나무 앞으로 다가섰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떨리는 소리로 가로 막았다.
"들어가지 말아. 안에......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니."
"두려울 게 어디있어? 이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정말
무서운 것이 있다면 왜 나오질 못 하지!"
"그럼 네가 들어가겠어?"
막상 그런 물음을 받자 소어아도 잠시 망설여졌다.
"들어가......들어 가야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론 들어가야지. 이곳이 유일한 단서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아봐야지!"
향기로운 냄새가 서서히 코끝에 풍겨왔다. 오향을 묻힌 닭을 솥
에 삶는 그런 향긋한 냄새였다.
소어아는 냄새를 맡자 군침이 저절로 돌았다.
"이 속에 필시 사람이 있을 것이야. 귀신은 닭을 먹지 못 할 테
니. 또 요괴가 닭을 먹는다 해도 구워서 먹진 않으니...... 사람
이라면 두려울 것도 없지."
그가 하는 말은 녹색치마의 여인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더욱 더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북돋우는
말이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정말 들어가겠다면 각별히 조심해."
"물론 조심해야죠. 무슨 일을 하건 난 항상 조심해 왔어요. 그
렇지 않고서야 어찌 오늘날까지 살아 있겠소?"
"그는 나무밑에서 돌을 하나 줍더니 굴 속으로 던졌다.
'툭'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다지 깊지도 않은데."
"과연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군."
소어아는 다시 가슴을 펴면서 용기를 냈다.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들어가 볼 테니."
"안 돼 안 돼. 나 혼자만 밖에 남게 하다니. 난 두려워. 나도
같이 들어갈 테야. 네 옆에 있어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지."
"아, 여자, 역시 여자군......좋아요. 같이 들어가요. 하지만
내곁에서 떨어지면 안 되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채찍으로도 날 쫓아버리진 못 할 거야."
그들은 나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은 매우 좁았고 그리 깊
지는 않았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소어아에게 몸을 기대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
다.
"이상한데, 여기에도 사람이 없잖아?"
나무 속 굴의 주위는 불과 다섯 자였다. 한 사람을 감출만한 곳
도 없을 넓이였다. 만져보니 놀랍게도 사방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
었다. 마치 철로 만든 통 같았다.
소어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데, 닭의 향기가 어디서 풍겼을까?"
"그 향기는 이 밑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서있는 곳이 갑자기 밑으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소어아의 품속에 안긴 채 떨리는 소리로 속
삭이듯 말했다.
"이게 웬일이지? 우린 어떡하지?"
"두려워 마시오. 무엇이 두렵다고 그래요? 우리 어떻게 되는가
구경이나 해봅시다."
두 사람의 몸은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사방은 어둡고 마치 통
속에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소어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
왔고 물기에 젖어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
던 여자가 간이 이토록 조그맣게 변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
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어아의 생각은 달랐다.
(여인, 아! 여자는 역시 여자야.)
철통은 드디어 멈추었다. 앞으로 문이 열리며 광선이 비쳐들어
왔다. 닭고기의 향기도 더욱 짙어졌다.
소어아는 몸을 엎드려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하나의 길이 있었
고 그 양벽은 정밀하게 조각된 석벽으로 쌓여 있었다. 벽에는 등
롱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소어아가 중얼거렸다.
"자식! 이런 곳에다 화려하게도 치장해 놨군."
이때 처참한 비명소리가 나면서 그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더니
속의 철통이 내려가는지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녹색치마 여인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부단히 흘러나왔다.
"불......사람살려, 사람살려요. 불......."
당황한 소어아는 허둥지둥 달려가 손을 내밀어 문을 열려고 했
다. 그러나 그 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오직
녹색치마 여인의 다급하고 처절한 울부짖음만이 계속 들려 올 뿐
이었다.
"불......나를 태어죽인다. 부탁이오...... 살려줘! 뜨거
워......."
처절한 소리는 소어아를 더욱 다급하게 만들었고 소어아의 온
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고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 문 역시 철
강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전력을 다해도 소용이 없었
다.
녹색치마 여인의 처참한 비명소리만이 그의 귓 속을 후벼팠으며
그 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난 견디지 못 하겠어......부탁이야 날 빨리 죽게해 ! ......
제발......."
점차 소리가 작아지더니 급기야 조용해져 버렸다. 소어아는 손
을 놓고 넋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철통 속에서 그대로 타죽어버린 모양이다.
그 여자는 비록 악독하게 헌과신군과 심경홍을 죽였고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한때 모든 것을 그에게 의지 했었다. 그
런데 이렇게 끝장이 나버리다니.......
(그녀가 사람을 잘못 택했다. 잘못 택했어.......)
소어아의 눈은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는 돌연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너, 이 괴물 들어라. 네가 누구든 간에 잘 들어라. 너는 나를
놀라게 할 수 없다. 더구나 날 죽일 수도 없어. 그러나 난 꼭 너
를 죽일 테다."
그러나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만 메아리쳐 되돌아올 뿐이었다.
소어아는 이를 갈면서 큰걸음으로 다시 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
어들어갔다. 땅 속의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맨끝에 다시 하나
의 문이 보였다. 문에는 인물과 화초가 조각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손을 내밀어 가만히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은 잠겨 있
지 않았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어아의 생각은 결코 자기는 죽지 않는
다는 확신 뿐이었다. 그가 죽어야 했다면 방금 녹색치마의 여인과
함께 타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 지하도의 주인은 그를 죽이지 않
고 살려놓은 것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해결나지 않는
생각이 많으면 더욱 괴로워질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
는 그였다.
문 뒤로 하나의 청당(廳堂)이 나왔다.
창문이 없는 것 외에는 여느 부자집 화청(花廳)과 별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청내에도 여전히 사람은 없었다.
소어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여기의 주인은 상당한 괴물인 듯한데 매우 사치를 좋아하는구
나."
그의 중얼거림은 한 목소리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뭘 그리 두리번거리고 있는가?"
그 남자의 말소리는 매우 느렸고 부드러웠다. 얼핏 여자 목소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소어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느냐?"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는 날 볼 수 없지만 난 너를 볼 수 있지."
소어아는 사람을 발견하지는 못 했지만 하나의 문을 찾아냈다.
그는 걸어가 그 문을 열었다. 또 하나의 화청이 나타났다.
그 청당의 중앙에는 탁자가 한 개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하늘색
의 큰 그릇이 놓여있었다. 오향닭의 향기는 바로 그 속에서 풍긴
것이었다. 그릇 안에는 붉게 요리된 닭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어(江魚)! 그 닭은 연하게 요리되었네. 자네를 위해서 준비
된 것이야."
"너......네가 어찌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이곳의 주인은 세상 일을 모르는 게 없어."
"도대체 날 어쩌자는 거냐?"
"네놈은 참 간이 크구나. 여기까지 와서 함부로 떠들다니. 정말
너의 간이 크다면 그 닭을 먹어봐라.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소어아는 탁자 위의 닭을 바라보았다. 닭은 과연 향기롭고 먹음
직스럽게 보였지만 그것을 먹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없었다.
(죽을까? 졸도할까? 미쳐버릴까? 그러나 반대로 닭을 먹지 않으
면 또 어떻게 될까? 굶어죽겠지.)
"내가 못 먹을 줄 알았느냐?"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닭을 집어들어 먹기 시작했다.
"좋아. 넌 과연 간이 크구나."
소어아는 바지에다 손에 묻은 기름을 쓱쓱 문질러 닦아가며 재
빨리 먹어 치웠다.
"내가 무엇이 두려워 피하겠느냐? 네가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
이 닭에 독이 있다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날 죽이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텐데 꼭 이렇게 귀찮게 닭을 먹일 것까진 없지 않느
냐?"
부드러운 말소리가 다시 조용히 들려왔다.
"넌 그 닭에 독이 없는 것으로 아느냐?"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닭 속에 독이 있다는 말인가?"
"넌 알고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귀찮은 일도 굳이 마다하지 않
고 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좋아하지. 그렇다
면 나도 틀렸군......."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는 몸을 가누지 못 하고 그 자리에 쓰러
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어아는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
온몸이 나른한 것을 느꼈다. 주위는 깜깜했고 더욱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어둠 속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어! 이제 깨어났는가?"
"음......."
"넌 지금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별하겠
는가?"
"모르겠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는가?"
"모르겠다."
"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할지 짐작하겠느냐?"
"모르겠다."
그 목소리는 드디어 파안대소하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하! 네가 드디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을 하는구나. 좋아,
매우 좋다. 이제야 좀 겸손해졌군."
소어아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할 말이 없었던 것이
다.
이 때 돌연 사방에서 등불이 환하게 켜졌다. 소어아는 눈이 부
셔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차 반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으며
자기가 처음에 쓰러졌던 곳에 그대로 누워 있음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사방에 일곱, 여덟 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그
의자 위에는 하늘하늘한 긴 옷을 입은 소년들이 앉아 있었다. 나
이는 모두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였다. 모두 청순하고 깨끗한 생김
새였다. 그들은 모두 남자이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꼭 여자 같기
도 했다.
소어아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너희들이 바로 이곳의 주인이냐?"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너희들 모두가 이곳의 주인이 아니란 말인가?"
일곱, 여덟 사람은 하나 같이 맥빠진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분명히 산사람인데도 죽은 자들 같이 생기가 없었다.
소어아는 큰소리로 호령했다.
"너희들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냐? 왜 나타나지를 않느냐? 그도
너희들처럼 남자도 여자도 아닌 맥빠진 병신이라면 꼴보기도 싫
다."
그 사람들은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다만 빙그레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후 그 중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를 비웃지 말아라. 삼개월 후 너도 우리와 똑 같은 신세가
될 테니."
"개소리 마라!"
"왜? 믿지 못 하겠는가? 네가 철로 만든 인간이라도 그녀에겐
견디질 못 해."
"그녀라니? 그녀가 누구냐?"
"그녀가 바로 우리의 여왕이야."
"여왕? 누가 여왕이야?"
이때 방울처럼 애교가 뚝 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바로 이곳의 여왕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소어아는 눈앞에 나타난 여인을 보자 그
만 기절할 뻔했다.
그녀는 바로 조금 전에 불에 타죽은 녹색치마의 여인이었던 것
이다.
소어아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오직 눈동자만 계란보다 더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화장실 속의 은신처
녹색치마의 여인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하에 가장 총명한 사람! 세상엔 정말 널 속여넘길 사람이 없
을까?"
소어아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시체를 보이지 않았고, 당신은 지하도를 찾
을 수 있었군. 이제보니 당신이 여기 주인이었어. 당신은 확실히
날 속여 넘겼소."
"나에게 탄복하였느냐?"
"정말 탄복했어...... 벌써부터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사람을
속여서 죽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여요괴라고."
"내 궁전이 어때?"
"그래 좋소. 정말로 좋은데요."
"나의 비녀들은?"
소어아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놀라면서 말했다.
"비녀라니......이들을 말하는 거요...... 이들이 모두 당신의
비녀란 말이오?"
녹색 치마의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자는 마누라를 셋 넷씩 거느리는데 여자라고 안 된단 말인
가?"
소어아는 쓴웃음밖에 안 나왔다.
"안 될 거야 없겠지......."
이 말을 하던 그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날더러...... 설마 당신의 비녀짓을 하라는 뜻
은 아니겠지?"
"아니야."
소어아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난 널더러 나의 황후가 돼달라는 거야."
소어아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대소하며 배
를 움켜쥐고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웃었다. 그녀는 자기를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할 정도로 웃겼던 것이다. 평생에 이토록 웃어본
적은 기억에 없었다.
녹색치마의 여인이 물었다.
"기쁜가?"
"기쁘오. 정말 기쁘오. 난 무슨 미친 짓이든 다 생각해 보았지
만 그러나 꿈에라도 내가 황후가 될 줄은 몰랐군요."
"하기 싫은가?"
"내가 왜 싫어하겠소? 세상에 몇 명이나 되는 남자가 황후의 자
리에 앉아보았겠소?"
그는 뛰어올라 탁자에 앉았다.
"어이! 너희들은 새로운 황후에게 인사도 하지 않느냐?"
소어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단지 세 번, 세 번만 인사를 하면 돼. 너무 많이 할 필요는 없
어."
소년들은 일제히 녹색치마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들은 인사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인사를 끝냈으면 나가거라. 난 임금과 술이나 마셔야겠다. 빨
리 나가......황비들아! 너희들이 이렇게 임금 가까이서 떨어지지
않으면 황후가 화가 난다. 황후가 화가 나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게야."
소년들이 그를 쳐다보며 마치 정말 요괴를 발견한 듯 고개를 설
래설래 흔들며 서서히 물러나갔다.
소어아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황후가 된 기분은 정말 좋군."
녹색치마의 여인은 허리를 못 펴도록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 이 녀석, 재미있는데. 내가 여기서 지낸 십여 년 동안 오늘
처럼 즐거워 본 적은 없었지."
"오늘부터 매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지. 당신은 비록 '미사인
불배명'이라 하지만 난 당신을 혼이 빠지게 할 거야."
돌연 그녀의 입가에 이제까지 떠올랐던 웃음이 싹 가셔버렸다.
"네가......네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소미미, 난 당신의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야. 십대악인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당신은 보기엔 소녀처럼 젊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최소한 사십은 됐지. 그러나 안심 하시오. 늙었다고 하
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심사가 맵고 늙은 여자일수록 더욱 좋아
하오."
녹색치마의 여인은 넋을 잃은 채 묵묵히 서있었다.
"거기 서있지 말고 이리와서 황후와 재미 있게 지내야지."
"너는 단 하나의 사실을 잘못 알았어."
"어?"
"난 금년에 서른 일곱 살일 뿐이야."
소어아는 히히 웃었다.
"당신이 열 일곱이라도 괜찮소. '영원토록 여자와는 나이를 말
하지 마라' 이런 말은 어려서부터 들어왔소."
"다른 일은 몰라도 여자의 나이를 잘못 말하면 그것도 더 먹게
얘기하면 봉변을 당할 거야."
"다른 일로는 나의 실수를 발견하기 힘들 거요."
소미미는 소어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다른 것은 틀리지 않았어. 내가 바로 소미미야."
그녀는 소어아의 앞으로 걸어와서 그 꽃 같은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놓고 빙그레 웃었다.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아름다웠고 그녀의 웃음 또한 부드럽고
향기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따뜻한 웃음 뒤에는 잔혹함이 감
추어져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을 그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히히 웃으며 지껄였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너......."
"십대악인도 친구가 있다면 바로 나요. 강어."
"네가......감히 자칭 십대악인의 친구라고?"
"당신은 내가 좋은 사람인줄 아셨소?"
"넌 물론 좋은 사람이 아니지. 그러나 넌 너무 작아. 아직 악인
이 될 수는 없어. 여하간 내가 보기엔......넌 늙은 요괴들이 보
낸 것 같은데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어찌 날 알고 있지?"
"노요괴 중 몇 명을 알고 있지."
소미미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명이나?"
소어아는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소미미를 바라보았다.
"난 지금까지 상대를 앞에 두고 피해본 적이 없어...... 하하!
웃음은 가장 좋은 무기야...... 조심해서 죽여 피를 너무 흘리면
고기가 맛이 없어져...... 살아 있는 놈도 죽은 놈도 내 손은 못
피해...... 난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는 않을 거야. 그러다 완전
히 여자가 될 지도 몰라......."
그는 몇 마디 말을 하며 혈수 두살, 소미타 합합아, 불흘인두
이 대취, 반인반귀 음구유, 불남불녀 도교교 등 다섯 사람을 흉내
냈다.
그 목소리와 말투가 기가막히게 비슷해서 마치 그들이 눈앞에라
도 나타난 것 같았다.
소미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애교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녀석, 그들을 알고 있느냐?"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것 같소?"
"그들을 알지 못 하면 어찌 그들 흉내를 그렇게 똑같이 낼 수
있겠어. 너와 같은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노괴물들을 알고 있
지?"
"난 어릴 때부터 악인곡에서 자랐어."
소미미는 곧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랬었군. 그래서 이렇게 조그만 요괴가 생기게 됐군."
"음."
"그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지?"
"당신을 만나면 극히 조심해서 절대로 죽음을 당하지 말라는 거
요.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이 아주 악독한 사람이라던데."
"그들의 말을 믿는가?"
"글쎄, 당신 같이 예쁜 사람 손에 죽는다면 나쁠 것도 없어."
소미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요녀석!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내가 오히려 죽겠다."
"이젠 술을 좀 마셔도 괜찮겠지."
술을 가져온 사람은 한 어린 아이였다. 그는 얼굴이 깨끗하게
생겼으나 병이 든 것인지 마르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는 술병을
놓고 상을 차리면서 연신 슬쩍슬쩍 소미미의 앞가슴을 훔쳐보고
있었다.
소미미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작은 색마야! 넌 뭘 보느냐?"
그 어린 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면서 당황했다.
"아니......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와 뜨거운 짓을 하고 싶으냐?"
어린 아이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소미미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자, 입 맞추어라. 무엇이 두려우냐?"
그 소리를 듣자 어린 아이는 접시를 놓더니 그녀를 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소미미는 그의 따귀를 쳐 쓰러뜨리며 소리쳤다.
"더러운 입, 빨리 가서 입이나 닦아라. 빨리 꺼져!"
넘어진 그 소년은 온통 얼굴에 살기를 띠우고 눈에 한없이 악독
한 빛을 품었다.
그렇지만 일어설 때는 매우 가련한 표정을 했고, 얼굴을 붉히며
서서히 걸어 갔는데 잘 움직이지도 못 하는 것 같다.
소어아가 물었다.
"저 어린 아이도 당신의 비녀요?"
소미미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왜 질투가 나나?"
"당신은 어린 아이까지 못 살게 하는군."
"저 녀석은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히 악독해. 더군다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지독한 색마야. 너보다 더 악한 놈이지."
"그럴 리가. 난 색마는 아니지만 세상에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어. 내가 보기엔 가련한 모습이 필시 많은 괴로움을 당한 것 같
은데."
"난 죽을 때까지 그놈을 괴롭힐 거야."
"왜 당신이 그 애를 미워해야 하오? 그는 어린앤데."
"그 자식도 그 자식이지만 그 애비를 생각하면...... 천하에 그
놈 애비보다 더 악독한 사람은 없지."
"어! 그가 음구유보다 더 음험하고 이대취보다 더 악독하다고?"
"음구유가 음험하고 이대취가 악독한 것은 남들이 알고나 있지.
그러나 그놈의 애비는 나쁜 짓을 했어도 당세의 대협이라 불리우
니까 하는 얘기야."
"당신까지도 그를 나쁜 놈이라 하니 필시 정말 악독한 사람이겠
군."
사실 그의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넌 그 사람을 나쁜 놈이라 하지만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
지.......)
잠시 후 그 어린 아이는 다시 몇 개의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소어아는 소미미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술 마시기 전에 우선 기름 같은 것을 빼야지."
"못난이."
"황후가 소변을 볼 땐 비녀가 옆에 있어야지?"
그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끌어 당겼다.
"자, 날 안내해라."
"조심해. 빠져서 배불리 먹지 말고, 여기 술이 기다리고 있어."
그 아이는 목을 몇 번 움추리더니 앞장서 갔다.
소어아는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
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소어아가 물었다.
"너의 성이 무엇이지?"
"강(江)."
"너도 강씨야? 재미 있는데."
"네, 재미있죠."
"보기엔 네가 나보다 작은 것 같은데."
"네 작죠."
"참 멋대가리 없는 대답만 하는구나."
그 어린 아이는 여전히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물으시면 전 무엇이건 대답해야죠."
"긴장하지 마라. 난 널 괴롭힐 생각이 없어."
"네, 감사합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지?"
"옥랑이오."
소어아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사방을 두루 살핀 뒤 다시
물었다.
"이상한데. 여기는 지하인데 많은 사람들의 대소변이 어디로 나
가게 될까...... 그나저나 넌 여기온 지 얼마나 됐지?"
강옥랑이 대답했다.
"일 년이오."
"일 년...... 어떻게 이곳에 왔지?"
"각하께선 어떻게 왔죠?"
"음, 맞았어. 물론 소미미가 너를 데려 왔겠지...... 여기엔 필
시 밖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텐데, 아느냐?"
"몰라요."
"찾아보지도 않았느냐?"
"네."
"넌 나가고 싶지 않으냐?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아?"
"여기가 아늑하고 좋아요."
소어아는 돌연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너 이 자식. 난 네가 죽도록 빠져 나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
날 속이지는 못 해. 나와 협력을 한다면 우린 같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
강옥랑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이 담담할 뿐이었다.
"소변이 끝나셨다면 돌아가서 술이나 잡수시지요."
소어아는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해 두어라!"
강옥랑은 여전히 목을 움추린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소어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생각하
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소미미가 웃으며 반겼다.
"기름이 많았나 보군. 난 정말 네가 떨어진 줄 알았지."
소어아는 배를 만지면서 웃는다.
"이 배가......."
이때 강옥랑이 돌연 소리쳤다.
"그가 소변을 보러 간 것은 거짓이었소. 그는 나에게 통로를 알
아내려 했고 또 같이 달아나자고 했오."
소미미는 눈을 치뜨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강어! 정말로 나가고 싶은가? 정 그렇다면 그에게 물어 볼 필
요가 없어. 네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내가 말해주지."
소어아는 조금도 두려운 빛을 띠지 않고 오히려 대담해진 태도
로 나섰다.
"난 악인곡에서도 십 년 이상을 살았소. 그런데 왜 여길 떠나겠
소. 여기가 악인곡보다 더 나쁘단 말인가? 난 단지 이 자식을 시
험해 봤을 뿐이오. 이 자식 말을 믿는 거요?"
"사실 네가 정말이든 거짓이든 그 애에게 물어봐야 소용이 없
어...... 이곳을 나가는 길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녀는 강옥랑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성실할 줄은 몰랐는데."
강옥랑이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 있게 되면 다른 어디라도 갈 생각이 나질 않아요."
"하지만 이 작은 색마야. 오늘밤부턴 아무 생각 말고 가서 잠이
나 자거라."
강옥랑은 소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사람을......."
소어아는 귀엽다는 듯 가볍게 강옥랑의 따귀를 때린 뒤 말했다.
"질투는 아직 할 자격이 없어. 꺼져라."
강옥랑은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돌려 조용히 물러갔다.
소어아가 히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자식, 과연 나쁜 놈이군."
"그는 나쁜 놈이지. 하지만 너도 좋은 놈은 아니야."
"그럼 나를 죽여버리지 그랬소."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날 죽이기가 아까워서지."
소미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맞았어. 난 널 죽이기가 아까워. 네가 어느 정도 재주가 있는
지 두고 봐야지...... 지금 내가 시험해 보고 싶구나."
그녀는 나무의자에 가만히 기댔다. 춘색이 만면에 어려 부드러
운 모습이었다. 아니 도발적이고 요염했다. 넓은 실내에 단 두 사
람만 있을 뿐이었다.
"빨리 오지 않고? 내가 가르쳐야 하나?"
"여인이 서른다섯이 되면 늑대나 호랑이 같아진다던데 과연 그
렇군."
"두려운 모양이구나?"
"내가 세상에 뭘 두려워 하겠소."
"그럼......무엇을 기다리는 거야?"
"난 다만 당신이......."
그들의 대화는 갑자기 강옥랑이 달려오는 바람에 끊겨졌다. 그
는 창백한 얼굴로 달려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어요......큰일......큰일 났어요......."
소미미는 분노하여 불의의 불청객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무엇이냐?"
"죽었어요......모두 죽었어요."
소어아가 물었다.
"누가 죽었단 말이냐?"
"빨리...... 빨리...... 가보세요...... 그들이...... 그들
이......."
말을 다 마치지도 못 하고 그는 그 자리에 졸도해 버렸다.
소미미와 소어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체! 도처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젊은 소년들은 모두 죽어
넘어져 있었고 산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팔다리가 끊기거나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짓뭉
개지기도 했다.
"이거......이거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늙은 요괴가 몰래 침입한 것이 아닐까?"
"불가능해. 절대로 불가능 하다고! 이곳의 입구를 알 리가 없
어."
그녀는 입으로는 '불가능'이라 말했지만 혹시 하는 두려운 생각
이 들었다. 그녀는 문밖으로 달려가며 고개를 돌리더니 무서운 소
리로 말했다.
"나를 따라 오면 난 너를 죽여버릴 테다."
"안심하오. 남의 비밀을 보고는 절대로 오래 못 산다는 말을 알
고 있지......난 더 살고 싶소."
그는 소미미가 비밀출구로 가는 줄은 알았으나 그 뒤를 쫓지는
않았다.
소미미가 앞문으로 사라지자 소어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리
를 갸우뚱거리며 그들이 있던 방으로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
용히 돌아왔다. 그러더니 무슨 속셈인지 문 뒤에 가만히 숨어버리
는 것이 아닌가.
잠시 있자니 강옥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살피는 듯했지만 문 뒤에 숨은 소어아를 발견하지는 못 했
다.
소어아는 호흡을 죽이고 꼼짝않고 지켜보았다.
강옥랑이 돌연 소리를 질렀다.
"강 공자, ......강어! 주인 어른! 어디계시죠?"
소어아는 가슴이 뛰었으나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강옥랑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불현듯 일어섰다. 그는 제
비보다 빠르고, 고기보다 민첩하게 순식간에 방 옆의 작은 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작은 문은 바로 그가 소어아를 데리고
용변을 보러 지났던 문이다.
소어아도 그 작은 문에 다가가 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옥랑은 주저하는 빛도 없이 그 용변 보던 곳으로 들어갔다. 소
어아도 즉시 몸을 제비처럼 날려 뒤를 추적했다.
강옥랑은 변소 뚜껑을 열고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허리를 누가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를 잡은 사람
은 소어아였다.
"너 혼자 달아나선 안 되지."
강옥랑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농담 마시오."
"누가 농담을 한다는 거야?"
"소인......소인은 단지 소변을 좀 보려고."
"개소리 마라. 뚜껑을 열고 들어가서 변을 보나?"
"난......난......."
"그럼 똥을 먹고 싶어서?"
"똥은 해독이라고 들었는데 난 중독이 되어서 그래서......
난......."
"너 이 자식, 날 속일 생각은 말아라. 정 실토하지 않는다면 널
끌고 소미미를 찾아 갈 테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람들을 모두 죽
인 것이 너라고 얘기해 주지."
강옥랑은 전신이 떨려왔다.
"난......난 아닌데......."
"넌 그들을 죽이고 소미미를 떠나게 한 뒤, 그 동안 고심해 놓
은 방법으로 달아나려 했겠지?"
"당신......당신은......."
"이렇게 됐으니 말이지만 네가 아무리 간사해도 내 눈을 벗어날
수는 없어. 난 벌써부터 네 속마음을 알고 있었지. 살고 싶으면
나와 협상하자."
강옥랑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탄복했오. 좋아요.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내가 몸을
감출 곳이 바로 이 똥통이오. 내가 일 년이란 긴 시간 동안 구멍
을 파 놓았어요."
"정말 재미있어. 똥통에 숨으려고 하다니. 냄새가 풍기지 않
나?"
"살기 위해선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죠."
"난 지독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중 가장 지독한 것은 아
마 너일 듯 싶구나. 나 자신도 탄복을 했어."
"빨리, 시간이 없어요. 빨리 손을 줘요. 내가 안내 할 테니."
"너는 길이나 깨끗이 해라. 내가......."
그러나 소어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옥랑은 발을 들어 소어
아를 가격했다. 그 수법은 매우 정확하고 악독하였다.
그러나 소어아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고 그가 발길
질을 하자 몸을 돌리며 가볍게 그의 양다리의 혈도를 점해 버렸
다.
그는 즉시 하체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말했잖아. 너는 나를 이기지 못 한다고. 빨리 가라."
"나......난 걸을 수가 없소."
"발을 움직이지 못 하면 기어서라도 가야지."
강옥랑은 더 이상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지 조
그마한 횃불을 꺼내 불을 붙이더니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똥통 옆으로는 하나의 긴 굴이 뚫려 있었다.
소어아는 악취 때문에 코를 막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얼마 후
냄새가 좀 가시자 소어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남들은 날더러 작은 요괴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작은
요괴다."
동굴에는 이미 등잔과 이불이 준비되어 있었고 두 항아리의 물
과 술단지가 한 개가 놓여 있었으며 그리고 말린 고기와 곱창, 떡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자 저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넌 정말 용이주도한 놈이구나."
강옥랑은 구석에 주저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은 뱀처럼
비분과 원한의 빛이 서려 있었다.
소어아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어아로서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소어아로서는 어려운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며 오히
려 그의 흥미를 돋굴 뿐이었다.
지하는 매우 조용했다. 소어아는 여기가 확실히 안전한 곳이며
그들을 찾아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불 위에 누워서 곱창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똥통 속에의 피난소, 똥통 속에의 곱창...... 강옥랑! 넌 정말
천재야."
강옥랑은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천재라......."
"똥통 속에 구멍을 파고 숨는다. 하하! 확실히 기발한 생각이
야. 소미미가 아무리 철저하게 감시를 했어도 용변을 볼 때까지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소, 하지만 천재가 이런 생각을 실천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아시오?"
"말해봐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내가 대변을 볼 때 몰래 비밀 통로를 팠다는 사실은 알
았지만, 그러나 이런 지하 통로를 파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또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아시오?"
"음, 확실히 힘들고 오랜 작업이었겠지."
"사람은 하루에 한두 번 이상은 대변을 보지 않소. 그러니 대변
을 너무 자주 보면 남에게 의심당하는 것쯤도 알겠지요? 나는 하
루에 한두 번 밖에 오지 못 하는 이곳에서 이 긴 굴을 뚫어야 했
소."
소어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우물쭈물했다.
"음, 이건......."
"그나마 짧은 시간에 내가 온갖 힘을 다하여 땅을 팠다면 대변
은 언제 보았겠소. 사람이 영원히 대변을 안 볼 수는 없는 것 아
니겠소?"
"으 네가 만약 정말로 대변을 보았다면 땅을 팔 시간이 없었겠
지. 네가 또 땅을 판다면 대변 볼 시간이 없었겠고. 그럼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해요?......당신은 죽을 때까지도 모를 거요. 당신 같
은 도련님은 절대로 나와 같은 소인이 어떻게 고생을 했는지는 모
를 것이오."
그는 눈을 치뜨고 이를 악물며 차근히 계속해서 설명해 갔다.
"난 쭈그리고 엎드려 손으론 땅을 파며 대변을 보았소. 조금의
시간도 낭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내로
옷을 벗는 것도 배우게 됐지요. 대변과 흙이 나의 옷을 더럽혀서
는 안 되니까......."
소어아는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수중에 쥐고 있던 곱창을 내려
놓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열지 못 했다.
강옥랑이 그 반토막의 곱창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토록 허약한지 아시오!"
"너......음......너......."
강옥랑이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내가 허약한 것은 되도록 대변을 적게 보기 위해서 굶은 탓이
오. 게다가 먹지 않아야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먹고 싶
어도 많이 먹을 수가 없었소."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바탕 껄껄거리며 웃더니 또 다시 말
을 시작했다.
"이것이 천재의 일 년 동안 생활이었죠. 일 년 동안 개 같은 생
활을 해서 이런 동굴을 얻었죠.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지내게 되었으니."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으냐?"
"무슨 이유요?"
"말해주지. 넌 과연 천재일런지 몰라. 그러나 난 천재 중의 천
재야. 나 같이 총명하다면 굳이 자기가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
강옥랑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던지 고개
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난 정말 당신만 못 하오."
그 말은 찬사의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소어아
는 마치 큰 조롱을 당한 것 같았다.
사실 이 창백하고 작은 소년은 확실히 그보다 총명하지 못 했고
그보다 기지가 있지도 못 했다. 그러나 악독하기로는 소어아 보다
더 무섭고 지독했다. 더구나 그 인내심은 소어아가 한평생을 따라
가도 못 따를 것이었다. 소어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의 적수가 있다면 바로 이 여우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곧 한 사람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렇다. 진정한 소어아의 적수는 강옥랑이 아니라 다른
이였던 것이다.
화무사 무결공자였다. 그는 악독하지도 간사하지도 않았다. 다
만 깨끗하고 부드러웠으며 예의가 바르고 품위가 있었다. 무술 외
에는 아무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아무런 무서운 점이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
다. 그의 사람됨은 마치 바다 같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자식은 정말 알지 못 하겠어. 내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라면 굉장한 사람이지......."
소어아는 강옥랑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지. 그 사람은 결코 영
리한 사람 같지가 않아. 그러나 네가 아무리 재주를 잘 부려도 그
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야."
"음."
"네가 무슨 수단을 써도, 어떤 수를 써도 그는 손해를 보지 않
을 것이고, 손해보는 사람은 바로 네 자신이 되는 게지."
"난 그런 사람을 이제까지 보지 못 했는데."
"네가 죽지 않는다면 꼭 한 번은 만날 날이 있을 거다."
강옥랑은 중얼거렸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러다가 그는 돌연 안색이 크게 변하며 소리쳤다.
"큰일났어."
소어아는 이 용의주도한 놈의 안색이 변한 정도이면 필시 심상
치 않은 일인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당신......당신 들어 올 때 똥통의 뚜껑을 닫았소?"
소어아는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빛이 눈에 역력했다.
"아, 아니, 잊고 안 닫았는 걸."
"우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면 그녀가 필시 사방을 수색할 텐
데, 그녀가 만약에......."
"넌 너무 조심성이 많구나. 과연 그녀가 우리가 똥통 속에 있다
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조심을 해야지요. 너무 소홀히 했다간 죽을 염려가 있으
니까. 당신은 소미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오?"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몰라서 그녀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어. 게다가 만약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면 무공이 뛰어나도 감
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녀는 요괴야."
"그녀의 무공은 당신의 상상밖일 거요. 들리는 말로 그녀는 일
생에 칠백여 명의 정랑이 있었다면 그중엔 칠대검파(七大劍派)의
제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소.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한 수법
도 당하지 못 했다고 하오."
"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겠군. 내가 다시 돌아가 몰래 똥통 뚜
껑을 닫아야겠나봐."
"잠깐. 무슨 소리가 나요."
강옥랑은 돌연 이렇게 말을 하며 귀를 벽에다 갔다 대었다.
발각된 은신처
소어아도 곧 귀를 벽에다 대고 신경을 집중했다.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소미미가 분노에 날뛰며 욕하
는 소리일 것이다.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던 강옥랑은 소어아를 바
라보았다.
"절대로 내가 지하에 숨어있는 것을 모르게 하려고 했었는
데...... 내가 다른 방법으로 달아났을 것으로 생각하게 하려 했
는데 다만 그 뚜껑이......."
"내 생각엔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그녀가 똥통의 뚜껑까지 주의
를 기울이게 될 것 같지는 않아."
"그러길 바라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릴 찾지 못 하면 오랫동안 저 위에 지체하지는 않을 거요.
부하들이 아무도 없는데 그녀가 혼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죠."
"그렇다. 그녀는 반드시 떠날 거야."
"길어야 반 달 동안만 여기서 견디면 돼요. 그때쯤이면 그녀도
여기를 떠나고 없을 거요. 그땐 그녀를 걱정할 필요없이 달아날
수 있소."
"비밀 탈출구를 알고 있느냐?"
"천하에 절대로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비밀이란 없소."
"좋아. 우리 반 달 동안만 기다려 보자. 지하에서 보름을 지내
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그는 벌렁 누워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다만.......너에게 미안한 것이 있군. 너의 혈도를 풀
어 줄 수 없으니 말이야."
"당신......당신 정말 나를 이대로 내버려둘 작정이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지...... 밤낮으로 같이 생활을 해야
하는데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어?"
소어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깜박 잊었군. 내가 점한 혈도는 네 힘으론 절대 풀지 못
하지."
말을 마친 소어아는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강
옥랑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음식을 집어먹고 술을 마시기 시작
했다.
얼마 후 그는 얼굴에 불그레한 취기를 띠운 채 잠이 들었다.
등잔불이 소어아의 잠든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강옥랑은 그의
붉그레한 얼굴을 쳐다보며 소어아의 호흡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소어아의 호흡이 고르게 안정된 것이 깊이 잠이 든듯 하자 강옥
랑은 두 다리의 경맥을 만져보았다. 그는 소어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가 무슨 점혈수법을 썼는지 자기로선 풀 도리
가 없다.
그러나 강옥랑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소어아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고 피곤했는지 코고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강옥랑은 그를 주시하며 서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소
어아의 머리를 지나쳐 몇 권 놓여있던 책 중에 한 권을 집어들어
급히 펼쳤다.
그 속에는 빳빳한 종이가 하나 끼워져있었다. 강옥랑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는 찬찬히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조심스레 그 종이
를 몇 번 접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 종이를 신발 속
에 넣을려하다가 결국 머리털 속에 쑤셔 넣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서 그는
탄식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얼마 후 그도 잠에 취해 버렸다.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 소어아가 눈을 뜨며 일어났다.
강옥랑의 얼굴을 보는 소어아는 씽긋이 웃고 있었다. 그의 눈에
서는 장난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넌 날 못 속여. 넌 무슨 일이라도 날 속이지 못 해.)
강옥랑의 호흡은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 깊은 잠에 들어있는 듯
했다.
소어아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강옥랑의 눈썹 위에 몇 번 흔들어
본 뒤 코에 갖다대고 호흡을 가늠해 보았다.
이 작은 여우는 정말 잠에 골아 떨어진 것이었다.
소어아는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어 강옥랑의 수혈
을 향했다.
강옥랑이 그 순간 탄식을 하며 말했다.
"갖고 싶으면 가지고 가시오. 왜 나의 혈도를 찾는 거요?"
소어아는 놀랐다.
"알고보니 너도 자질 않았군."
강옥랑이 쓴웃음을 띠웠다.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 있는데 어찌 잘 수가 있겠소."
"넌 잠든 척 하는 재주도 보통이 아니구나. 정말 속았는데."
"피차 일반이죠."
"재미 있어...... 너의 머리에 감춘 것을 좀 볼 수 있을까?"
"내가 안 된다고 할 수가 있겠소?"
그는 쓴웃음을 띠우며 머리 속에서 그 쪽지를 꺼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소어아에게 넘겨주며 길게 탄식을 했다.
"하늘이 무심해서 우릴 만나게 하였군."
소어아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강옥랑이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보아 절대 예사 물건이 아
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 종이를 펼쳐보자 '픽' 하고 웃어버렸다.
"만족스럽소?"
"매우 만족하지."
"당신의 일생에 이런 귀중한 물건은 보지 못 했을 것이오."
"물론 이 종이는 아주 귀중한 것이야."
그는 말을 마치자 꺼리낌 없이 그 종이를 북북 찢기 시작했다.
강옥랑은 한평생 이토록 크게 놀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안색
이 무섭도록 창백해지면서 떨리는 소리로 우물거렸다.
"당신......당신...... 당신 무얼 하는 거요? 당신은 이 종이의
가치를 알고나 있소?"
"나, 물론 알고 있지."
"알고 있다면 왜 찢어버리는 거죠?"
"비단 알 뿐만 아니라 보기도 했었지......나도 한 장이 있었으
니까."
강옥랑은 마치 뒷통수를 쇠망치로라도 한 대 얻어 맞은 듯했다.
"당신......당신도 한 장이 있었다고?"
"나도 한 장이 있었지. 그래서 그 보물이 있는 곳까지 가보았
지."
강옥랑의 이 비밀종이는 바로 철심난이 소어아에게 준 것과 똑
같은 연남천의 보물지도였다.
"당신...... 당신은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곳까지 가보았단 말
이오! 거짓말이 아니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강옥랑은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그 보물......그 보물이 당신의 손에 있단 말이오?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네가 먼저 이 보물지도가 어디서 얻게 됐는지 이야기해 준다면
나도 말해주지."
"그 말을 내가 믿어도 되겠소?"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난 거북이야."
강옥랑의 얘기가 시작됐다.
"이 보물지도는 내가 아버님의 서재에서 훔쳐낸 것이오."
"그럼 너의 부친은 또 어디에서 지도를 얻었지?"
"난 모르오. 정말 몰라요."
"내가 듣기엔 너의 부친이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 하던데, 그 분
은 참 좋은 아들을 두었군."
소어아는 탄식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강옥랑을 힐
끗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물건까지 훔치니 이런 좋은 아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가 어렵지?"
강옥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만 난......."
"넌 보물을 찾기 위해 아미산에 왔겠지. 하지만 뜻을 이루기도
전에 소미미의 손아귀에 붙잡혔단 말이지?"
"운이 나빠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쯤......."
"네가 그녀를 만난 것이 다행이야. 만일 그녀를 못 만났다면 아
마 지금쯤은 송장이 됐을 걸."
강옥랑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왜요?"
"너의 아버지도 너 같은 아들을 둔 것이 다행한 일이야. 네가
그 지도를 훔치지 않았다면 남에게 속아 고생을 하거나 죽었겠
지."
강옥랑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속다니요?"
"사실대로 말해주지. 이 보물지도는 가짜야. 아무 것도 아닌 종
이쪽지에 불과해.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보물을 찾아온 사람들이
서로 죽이도록 계략을 꾸민 것이야."
강옥랑은 완전히 넋을 잃었는지 한참 후에야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죠?"
소어아는 화가 나는지 큰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하지만 난 꼭 그 놈을 찾아 낼
거야. 날 속였으니 이번엔 내가 맛을 보여줘야지."
"그래서 당신은 나의 지도가 어디에서 생겼나 물어 보았군
요......."
이때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미미의 목소
리였다.
"강옥랑......강소어! 이 나쁜놈들아 너희들 그 밑에 있구나!"
소어아와 강옥랑 두 사람의 손발은 모두 차가워졌다.
소미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소릴 안 내도 소용이 없다. 너희들은 그 밑에 있는 것이 틀림
없어."
강옥랑이 떨리는 소리로 소어아에게 속삭였다.
"그녀......그녀가 계책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오."
"아니야. 지금 그녀는 똥통을 향해서 부르짖고 있어. 그렇지 않
다면 우리가 이렇게 뚜렷하게 소릴 들을 수가 없지."
"그 뚜껑...... 그 뚜껑이 말썽일 것이라 생각했더니 기어이."
"저 여자, 정말 무서운데......."
소미미의 웃음섞인 목소리가 또 울려 들어왔다.
"강옥랑, 넌 정말 천재구나. 똥통에다 구멍을 파다니. 냄새는
나지 않는가?"
소어아는 낄낄거리며 강옥랑의 어깨를 쳤다.
"들어봐, 그녀가 널더러 천재라고 하는군."
"당신......당신은 이런 순간에도 웃음이 나온단 말이오?"
"생각을 해봐라. 내가 왜 웃지 못 하겠는가?"
"당신......당신은 그녀가 두렵지 않소?"
"그녀가 우리가 어떤 수를 쓸 줄 알고 여길 기어 들어 오겠어?
그녀의 성질로 봐선 밖에서 기다리지도 못 할 걸."
강옥랑은 생각을 거듭하더니 결국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녀는 절대 그런 모험은 하지 않을 거요. 또 밖에서
기다린다 해도 오래 기다리지 못 할 것이오."
소미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 악당들아! 어서들 나오시지?"
소어아는 그제야 크게 소리쳤다.
"너 이 늙은 요괴년아! 네가 들어와 보시지?"
"너희들 정말 나오지 않겠어?"
"넌 왜 들어오질 못 하지?"
소미미는 깔깔 웃으며 소어아의 말에 대답했다.
"너희들은 밑에서 구린 냄새를 맡고 죽겠단 말이냐?"
"안심하시오. 우린 죽지 않아. 여기는 매우 아늑한데. 거기다
곱창이 있고 술도 있으니 내려와서 술이나 같이 마셔보지 않겠
오?"
"너희들은 구린 냄새를 좋아하지만 난 그 냄새가 싫다."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동안 끊겼다.
"하긴 난 너희들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낫겠다."
"그래요?"
"너희들이 올라오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단번에 너희들을 죽일
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너무 억울하게 너희들을 죽이는 셈이
지. 난 너희들을 천천히 죽여야해."
"그럼 네가 무슨 방법으로 우리를......."
소어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러나 곧 그 소리도 멈추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웃어봐라, 이 나쁜 놈들아! 왜 웃지 않는 거지?"
강옥랑은 완전히 기세가 꺾였다. 그는 안색조차 파랗게 질러 간
신히 한마디 했다.
"주인 어른...... 주인 어른......."
그러나 다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강옥랑, 소어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꽝'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이어 굴의 입구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강옥랑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끝났어......."
"악독하군...... 결국 이런 수를 쓸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
데......."
강옥랑이 비통한 표정을 한 채 중얼거렸다.
"이제는 뚜껑이 필요 없어졌어요......."
"비록 밖을 막았지만 다른 구멍을 팔 수도 있잖아?"
"그녀가 그 정도 앞가림을 못 하겠어요? 분명 그 위에 철판과
석판을 덮었을 거요......."
"그럼 위로 파보는 것은 어떤가?"
"당초에 여기를 건축할 때 물이 밀릴까봐 그 위에다 한자 폭의
석판을 덮었지요."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강옥랑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이제는 네가 나에게 이상한 마음을 먹지는 않겠지."
"보름......보름 후엔 이곳에서 굶어 죽을 뿐이오."
소어아는 실망에 찬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 차려라. 울상을 하지 말고. 최소한도 반 달 동안은 살 수
가 있어......난 본래 몇 번이나 죽은 셈이지만, 이젠 정말 죽은
셈치지."
강옥랑은 세 시간 이상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앉
아서 두 눈을 뜨고 넋을 잃은 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와는 반대로 소어아는 술단지를 통째로 들이켰다. 그는 강옥랑을
예닐곱 번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자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혼자 홀
짝 홀짝 술을 마셨다.
그는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자기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사
람은 바보일 뿐이야."
그 소리에 강옥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넌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서 말도 못 하느냐?"
"그렇소. 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소."
소어아는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셨다.
"넌 내가 두려움이 없는 줄로 아느냐? 사실 나도 죽음이 두렵
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바보 병신이야. 혹은 미친 사람이지. 그
러나 지금은 꼭 죽어야 하는데 어쩌겠나?"
그는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취기가 얼굴에 가득했다. 또 중얼
거렸다.
"난 지금 너의 심경을 알 수 있어. 죽기 전의 느낌을 난 몇 번
씩 경험했지. 그러나 난 죽지 않았어. 난 물에 빠져도 죽지 않았
고 불에 타도 죽지 않았어.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았고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죽을 지도 모르지.
굶어죽는다...... 이렇게 죽는 방법은 한 번도 맛보질 못 했으니
정말 재미있을 거야. 재미 있을 거야!"
소어아는 술을 몇 모금 꿀꺽꿀꺽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유감이 있다면...... 난 지금 후회하고 있어. 방금 소
미미와 재미를 좀 볼 걸. 아, 어린 시절에 바람피우지 않으면 또
언제 피우랴......."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소변을
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강옥랑이 입을 열었다.
"취하셨군요?"
"취해서 죽는 게 낫지. 취해서 죽는 것이 굶어서 죽는 것보다
좋겠지......."
이때 강옥랑이 갑작스럽게 일어섰다. 그러더니 소어아의 목덜미
를 향해 손을 내려쳐갔다.
지하궁궐
그러나 소어아는 취중이었지만 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곧 몸
을 돌려 그의 한 장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몸은 그 충격에 의해
동시에 뒤로 튕겨져 흙벽에 부딪쳤다.
소어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가...... 네가 나를 죽이려고."
"나라고 왜 당신을 죽일 수 없오?"
"이런 때 나를 죽여?"
"물론이오."
"결국엔 같이 죽어야 할 몸인데도 네가 왜......."
"이곳의 식량은 단지 한 달치 뿐이오. 그런데 당신이 오는 바람
에 보름 밖에 먹질 못 하게 됐오. 당신을 죽이면 내가 반 달은 더
살 수 있오."
"아, 원인이 바로 그것이냐? 보름 더 살기 위해 나를 죽이겠다
는 거냐?"
"반 달만 더 살아도 좋죠...... 아니 하루만 더 살아도 좋은
데."
그는 방금 그런 일을 저질렀어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쓴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난 네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악독
한 놈인지는 몰랐지. 마음씨의 악독함은 네가 천하에서 제일이라
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당신은?"
"너에 비하면 난 마치 늙은 아주머니지."
이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은 이미 강옥랑 앞에 다가가
있었다. 이 동굴은 작았다. 그는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강옥랑
의 얼굴을 때릴 수 있었다.
이 한장이 정말 빨랐는지 혹은 강옥랑이 그가 손을 쓸 줄을 미
처 생각하지 못 했는지, 아무튼 그 한장은 확실히 적중하였다. '
팍' 하는 소리가 나며 강옥랑은 쓰러지고 말았다.
"너는 보기엔 말라 보여도 볼따구니엔 살이 꽤 많구나."
강옥랑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 어쩌자는 거요?"
소어아는 아무 대답도 없이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강옥랑은 더욱 울상이 되었다.
"당신......당신이 정말......."
"넌 나를 죽이려 하는데 내가 왜 너를 죽이지 못 한단 말이냐?"
강옥랑의 얼굴은 마치 죽은 고기의 배때기와 같았다. 그는 떨리
는 소리로 다시 말했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 할 텐데 당신은......당신은 왜......."
"그 말은 옳아. 그러나 넌 만약 내가 너를 죽이면 보름을 더 살
수 있다고 말해 주었지."
강옥랑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나......난 정말 죽어야 해......정말 죽일 놈이야......."
그 순간 그는 돌연 온 몸을 날려 소어아의 배를 향해 부딪쳐 왔
다. 그의 머리가 그리 딱딱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소어아의 배보
다는 단단했다.
소어아는 벌써부터 그의 양다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고 두 손
도 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머리 만큼은 주의하지 못
했다.
그는 마치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배를 움켜 쥐고는 한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했다.
강옥랑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제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지?"
그는 전력을 다해 발로 소어아의 턱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소어아는 신음을 하며 고개조차 들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옥랑이 발을 올려차자 그는 배를 쥐고 있던 손을 갑자기 내밀어
강옥랑의 오른발을 안아 비틀어버렸다.
강옥랑은 처참한 소리를 냈다. 그는 몸이 뒤집히면서 땅에 쓰러
져 코피를 쏟았다.
소어아는 그의 등에 올라 앉아 한바탕 껄껄거렸다.
"확실히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어."
강옥랑이 신음소리를 내며 더듬거렸다.
"정말 모르겠군. 모르겠어......."
"무엇을 모르겠단 말이냐?"
"그렇게 세게 배를 받아 버렸는데도...... 아직도 기운이 있다
니."
"아 그거! 말해 주지. 난 사람을 때리는 재주는 얼마 없어도 맞
는 재주는 있어. 너보다 몇십 배 강한 사람도 날 쓰러뜨릴 생각은
말아야 해."
"난 탄복했어. 정말 탄복을 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나보다
강하군. 그러나 날 정말 죽이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정말 날 죽이
려 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어요."
강옥랑은 간사한 말로 소어아의 기분을 맞춰 목숨을 구하려 하
였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의 말이 듣기에 기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묘한 노기가 들었다.
소어아는 칼 같은 것으로 이 자식의 목이나 다른 말랑말랑한 곳
을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은 칼이 없었다. 칼이 있다 해도 등을 남에게 돌리
고 있을 때에는 목을 찌를 수가 없는 것이 무림의 도리였다.
그는 기회를 기다려 천천히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분명히 강옥랑이 자기를 죽일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옥랑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은 강
옥랑이 무슨 방법으로 자기를 죽일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여
하튼 소어아는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이니 그 동안 누가 먼저 죽던 아슬아슬한 재미나 느껴보자
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어아가 이런 생각으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때 강옥
랑의 몸이 돌연 힘차게 솟아 오르며 그를 튕겨냈다. 키가 큰 사람
은 제대로 서있지 못 할 정도의 작은 동굴이었기 때문에 소어아는
머리를 '퉁'하고 천장에 부딪치고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강옥랑도 한참 후에야 기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우선 소어아의 목을 잡고 껄껄 웃었다.
"당신은 진정 날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을 꼭 죽여야 하
오."
그는 손에다 힘을 주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그는 다만 졸도해 버린 것이었다.
강옥랑은 손을 다시 놓았다. 그는 소어아가 졸도해 있을 때 죽
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소어아가 목숨을 구하려고 발버
둥치는 것이 보고 싶었다.
소어아는 깨어날 줄 몰랐다.
강옥랑은 땅에 뒹굴던 술단지를 주워 남을 술을 단숨에 소어아
의 머리에 부었다. 이렇게 그의 손이 술단지를 잡고 있을 때 돌연
소어아의 양손이 뻗치더니 강옥랑의 목을 힘껏 올려쳤다.
강옥랑은 놀라며 술단지로 소어아의 머리를 내리쳐려 했다. 그
러나 소어아는 알고나 있었다는 듯 몸을 굴리며 양발을 날렸다.
그의 발은 강옥랑의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차버렸다. 술단지는 바
닥에 박살이 나 버렸고 강옥랑은 거꾸러져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호흡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 하는 듯했다.
소어아는 혀를 내밀며 얼굴에 묻은 술을 핥았다.
"애석하군. 술을 버리는 사람은 오줌을 네 주전자쯤 뒤집어 쓰
는 벌을 받아야 해!"
강옥랑의 몸은 땅에 엎어진 채 이따금 꿈틀댈 뿐이었다.
소어아는 그를 끌어 당기며 말했다.
"죽는 척 하지마. 또 무슨 수작부릴 것이 있으면 한번 해봐라."
"당신......당신......당신 또 싸우자는 거요?'
"그냥 있으면 심심하지. 여기서는 술먹고 싸우는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어? 지금은 술도 없으니 싸울 수 밖에 없지."
"나......난 싸우고 싶지 않소."
"싸우지 않으면 안 돼."
"무슨 말도 들어주겠소. 하지만......."
"싸우는 것만은 싫단 말이냐?"
"당신......당신은 정말로 꼭 싸우겠소?"
"그야 물론이지."
강옥랑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좋아요, 내가 좀 쉰 후 다시 싸우기로 합시다."
"그것도 괜찮겠지."
그는 잡았던 강옥랑을 놓아 주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앉았
다.
강옥랑의 하얀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소어아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때때로 난 당신이 도대체 사람인가 싶소."
"하하, 내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냐?"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어디 있소?"
"나 외에는 확실히 나와 같은 사람이 없겠지."
강옥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머리를 감싸쥐고는 다시는 말
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누워서 한동안 천정만 바라보고 있더니 옆으로 돌아누
웠다.
"난 우선 잠을 잘 테니 휴식이 끝나면 나에게 알려라."
강옥랑은 그를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손을 쓰려다가 참고 또 참
았다. 결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미치도록 화가나 있었다. 단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나타
내지 않는 것 뿐이었다.
등잔불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어아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다.
"큰일났군."
"뭐가 큰일났다는 거요. 큰일은 벌써부터 일어났는데 무슨 더
큰일날 것이 있겠소?"
"잠이 들었던 나까지 알고 있는데 네가 모르고 있단 말이냐!'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날 칼로 찔러죽이는 생각을 했겠지. 그렇지?'
"당신......당신......."
"네가 날 죽일 기회는 오지 않을 걸, 우리는 곧 숨이 막혀 죽을
것이야."
그러고 보니 등잔불이 한층 작아져 있었다. 결코 기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새삼 호흡이 점점 거칠어져 옴을 느꼈고 눈도 점차 무서
워짐을 인식했다.
"넌 날 죽이려 해도 반 시간을 살 수 없을 거야."
강옥랑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반 시간...... 반 시간......."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난 굶어죽는 줄 알았더니 숨이 막혀 죽게 됐군. 그것도 좋아!
세상에는 숨이 막혀 죽은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야."
"당신은 매우 기쁜 것 같은데 언제까지 그 기쁜 모습이 계속될
지 모르겠군요."
"체!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심사가 뒤틀린 소리를 하다니, 내가
그렇게도 미운가?"
"흥!"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너보다 강하기 때문이지?"
"어쩌면 우린 태어날 때부터 원수였는지도 모르지요."
불빛이 더욱 희미해졌다. 소어아는 점점 꺼져 가는 불빛을 바라
보면서 중얼거렸다.
"술! 죽일 놈의 술! 네가 모두 버려 버렸으니 이젠 또 무엇으로
취한단 말이냐?"
그는 눈길을 바닥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깨진 술단지가 흩어져
있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소어아는 물단지를 잡고 몇 모금 들이켰
다. 그러나 물맛이 어찌 술맛과 같겠는가. 소어아는 물단지를 바
닥에 던져 깨버리며 소리쳤다.
"강옥랑 이놈! 난 아무래도 네 얼굴에 오줌을 뒤집어 씌워야 되
겠다."
그러나 이때 소어아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이, 봐라...... 이것 좀 봐!"
"보라고......무엇이 볼 게 있겠소."
"이 물 좀 봐......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물론 흐를 테고, 또 낮은 곳으로 흐르겠죠!"
소어아는 구석을 바라보며 눈에 점점 생기를 띠었다.
"봐라! 물이...... 전혀 물이 고이질 않는구나."
강옥랑도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며 돌아 보았다.
"그렇군. 물이 고이지 않았군."
"물이 고이지 않는다면 흘러내려 간다는 증거야. 또 물이 흘러
나갈 수 있다면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는 거야. 이곳은 지하인데
어떻게 물이 흘러내려갈 구멍이 있을까?"
소어아는 깨진 단지를 한 조각 줏어들자 힘껏 땅을 파기 시작했
다.
강옥랑은 넋을 잃은 듯 선채로 두 손을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흡이 더욱 곤란해짐을 느꼈다. 미약한 불빛이 점점
흐려지더니 아주 꺼져버렸다.
소어아는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며 구덩이를 계속 파내
려 갔다.
"그래 그래. 아래쪽이 아니구나. 이렇게 옆으로......."
'퍽' 하고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소어아의 '어이
쿠!' 하는 비명이 들렸다.
강옥랑은 손으로 소어아가 있던 자리를 더듬으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강형...... 강형, 어디 계시오?"
구덩이 바깥쪽에서 소어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어이 강옥랑, 불을 켜라! 빨리 불을 켜!"
강옥랑은 더듬더듬 등잔불을 찾아 불을 켰다.
소어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컴컴한 구멍만 구덩이 안
으로 나 있을 뿐이었다. 음침하고 퀘퀘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
러 들어왔다.
소어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길! 빨리 불을 가져와라."
강옥랑은 뚫린 구멍으로 몸을 내밀었다. 순간 몸이 허공에 뜨는
것을 느꼈다가는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강옥랑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팔각형의 벽
이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회랑 같은 곳이었다. 벽은 각 면이 철로
된 것도 있고 청동으로 된 것도 있었으며 석판으로 된 것도 있었
다. 심지어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다행이도 그들이 있
던 곳은 나무 벽의 뒤였다. 그 벽이 나무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
금쯤 숨이 막혀 저승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 회랑에는 탁자도 없고 의자도 없이 크고 작은 기관들이 많았
다. 그것들 역시 철로 된 것도 있고 돌로 된 것도 있으며, 물론
금으로 된 것도 있었다.
강옥랑이 숨을 깊이 들어 쉬고는 중얼거렸다.
"아이고 하느님, 여기가 어디지? 이곳이 내가 파 놓은 동굴과
벽하나 사이였단 말인가?"
소어아는 횃불을 만들어 회랑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기관들 하나하나가 무엇에 쓰이는가를 생각하며 유심히 그
것들을 살폈다.
강옥랑은 정신을 수습하자 일어나 금벽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이 벽은 정말...... 정말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구나!"
그때 소어아는 손으로 기계 하나를 누르려 하였다. 그 모습을
본 강옥랑은 놀라 소리쳤다.
"당신......당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는 이것들을 그냥 놓아 둘 그런 참을성이 있는가?"
그는 강옥랑에게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이건 어쩌면 지옥의 문일지도 몰라."
강옥랑도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 맞장구를 쳤다.
"정말 재미있군요."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움추리며 기계에 손을 댔다. 그러자 '징
'하는 소리가 나면서 기계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로 된 벽이
회전하며 하나의 문이 되어 열렸다.
소어아는 신기한 심사를 누를 길이 없었다.
"봐라, 지옥문이 열린다."
그의 새로운 모험이 또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횃불을 하나씩 들고 방으로 걸어들어 갔다. 불쾌하고 역
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빛에 바닥을 가득 채운 물체들이 눈
에 드러났다. 방 안에는 뼈만 앙상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소어아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강옥랑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벌써 몇십 년 전에 죽었구나. 그들은......그들은
모두 굶어죽은 것이오. 그들의 모양을 좀 보시오. 죽기 전에 미칠
지경에 달했을 것 같소. 그들......그들의 손을 좀 봐요."
소어아는 자기도 이렇게 될 뻔한 일을 생각하자 욕지기가 나서
울컥하며 그 동안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버렸다. 악취가 코를 찔렀
다.
강옥랑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으면서도 조소를 띠우고 말했
다.
"이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필시 여기를 건조한 기술자들일 것이
오. 바보들일 테지요. 바보들이 아니라면 어찌 남을 위해 이런 집
을 건립하였겠소? 이런 비밀스러운 집을 만든 주인이 어찌 그들을
살려 둘 수가 있었겠소!"
"너는 이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도 전혀 동정이 가지 않
는 모양이구나."
"이들은 바보짓을 해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했을 뿐이오, 무슨
동정의 여지가 있겠소."
"좋다. 좋아. 악인소굴에서 십 년을 배웠지만 내가 너보다 못
하니 앞으로는 너에게 배워야겠구나."
그들은 몸을 돌려 그 방을 나섰다.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이곳을 누가 건축했을까. 천하에 누가 이런 자본이 있었단 말
인가?"
"강옥랑이 최소한 당신 같은 가난뱅이는 아니겠지."
"자식 나에게 농담을 하는구나. 잊지마라. 난 수시로 너를 죽일
수가 있어."
강옥랑이 한발 물러서며 안색이 변했다.
"당신......당신......."
"너무 겁먹지는 마라. 말조심하라는 것뿐이니까."
"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형
님께서 용서하셔야죠. 나...... 난 마음 속으론 당신을 형님 같이
생각하고 있소."
"네가 내 친동생이 아닌 게 다행이다."
그는 횃불을 치켜들면서 팔각의 회랑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금, 은, 동, 철, 유리, 돌, 나무, 흙 등 각기 재료가 다르단
말이야......."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렇게 했을까요?"
"무슨 짐작이라도 가느냐?"
"난 모르겠소. 그래서 나 역시 형님한테 물어 보고 싶었던 거
요."
"똑똑히 들어두어라. 내가 두 가지 말을 하겠다."
"형님, 분부하십시오."
"첫째, 이제부터 나를 형이라 부르지 말 것. 기분이 이상해 소
름이 끼친다."
강옥랑은 곧 고개를 숙이며 잠잠했다.
"둘째, 앞으로 내 앞에선 병신인 척 하지 마라. 네가 영리한 사
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매우 영리해. 네가 바보인 척 해도 소
용이 없어."
강옥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제 네 생각을 말해 봐라."
"내 말이 맞을 지는 모르지만......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벽을
만든 것은 그 여덟 개의 벽 뒤에 서로 다른 방이 있기 때문이 아
닐까요?"
"둘째는?"
"둘째는 이 기계에 관한 것이오. 돌 기계는 석벽을 통제하는 것
이며, 금기관은 금벽을 통제하는 것 같아요."
"좋아......계속 말해봐라."
"그런데 여기에는 기관의 손잡이가 금, 은, 동, 철, 유리, 돌,
나무 일곱 뿐이니 자연히 실제로는 일곱 개의 방이 있는 셈이지
요."
"그렇다. 그중 돌로 된 기관은 벌써 움직여 보았고 여섯 가지
기관이 남은 셈이지."
잠시 숨을 돌린 소어아가 또 말을 시작했다.
"말해 봐라. 먼저 어느 벽을 시험하는 것이 좋겠느냐?"
"금쪽을!"
"좋았어. 이번에는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 같군. 내 생각
도 먼저 금벽을 시험해 보는 게 좋겠다. 사실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어?"
무림(武林)의 보물들
황금의 기관을 돌렸다. 과연 황금 벽이 스르르 움직이며 열렸
다.
금빛의 벽 뒤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정교
하게 세공된 것을 제외하고는 금이나 은으로 된 것은 거의 없었
다. 그 안에 든 보물들은 사람이 평생에 한 번도 구경하기 힘든
절묘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강옥랑은 넋을 잃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혈색이 감돌았고 손
가락은 바르르 떨려왔다.
소어아는 그저 보물들을 한바퀴 쓱 둘러 보고는 기쁨과 희열이
교차하는 강옥랑의 얼굴을 보며 미소지었다.
"좋으냐?"
"나......나......."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더듬거렸다.
"이런 보물을 보고 세상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오!"
"네가 그렇게 좋다면 이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 하자!"
강옥랑은 또 한번 놀랐다. 그는 의아하여 소어아를 멍하니 바라
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 보물들은 당신이 먼저 발견했으니 당신 것이오. 난......난
조금이면 족해요."
"난 필요없어."
"필요없다니요?"
소어아를 또 다시 바라본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나의 목숨조차도 당신의 것인데 이것들을 나에게 주지 않는다
해서 무슨 원망이 있겠소."
"넌 내가 너를 시험하는 줄 알고 있느냐?"
"나......난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말해 두지만 난 정말 필요없어. 조금도 필요없어."
"왜...... 왜요?"
"이 물건들은 배가 고프다고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이라고
생각하고 마실 수도 없잖아? 보관하기도 귀찮고 남이 빼앗아 갈까
봐 걱정도 해야하니 필요없다는 거야."
소어아는 금 벽 안을 한바퀴 돈 후 중얼거렸다.
"이곳의 모든 것은 죽은 것이야. 여기도 출구가 없어."
강옥랑은 별안간 껄껄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신이라도 봤느냐?"
"이 물건들은 나도 필요 없어요."
"어, 그거 신기한데. 왜?"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인데 이때 이것이 무슨 필
요가 있겠어요?"
소어아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결코 비웃음이 아니
었다.
"넌 정말 치료할 수 없을 정도의 병신은 아니었구나. 난 금이나
은 같은 것을 위해 목숨을 파리처럼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
데 그들의 머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소어아는 동기관을 돌렸다.
가지각색의 무기와 암기들이 그 벽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어떤 무기들은 소어아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몇몇 무기들
은 소어아가 전연 보지 못 했을 병더러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이었
다.
소어아는 그 중 하나의 검을 뽑았다. '차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날카로운 검빛이 번뜩였다.
"좋은 검이다!"
"그 검은 과연 좋은 검이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소용이 없지
요."
강옥랑이 다른 무기를 하나 집어들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무기가 무엇인지 아시오?"
그것은 금룡(金龍)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의 뿔이 좌우로 뻗
쳐 있었으며 초록색의 혀를 토해내고 있었다.
"채찍 같은데."
"그래요. 이것은 채찍이오. 그러나 이것은 구현신룡 귀견수라는
것으로 보통의 채찍과는 많이 다르오."
"그래? 어디 어떤 무기인지 얘기를 좀 해봐라."
"이 채찍은 단지 휘둘러 적을 공격하는 기능만을 가진 것이 아
니오. 우선 채찍의 자력이 적의 암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소. 양쪽
의 뿔은 갈퀴 같은 무기들을 제압하며, 용의 혀로는 사람의 혈도
를 집고, 입은 남의 검을 무는 작용을 하지요. 이런 것 외에도 한
쌍의 눈은 철환으로 발사되고 역시 입에서도 열세 개의 '자오문심
정'이 발사 되지요. 또 필요할 때엔 온 몸의 비늘도 발사할 수 있
어요. 이 무기의 내력을 어떤 사람도 피할 수가 없지요."
"무서운 무기군."
"천하에 이와 같은 무기는 전부 두 개 밖에 없다고 하며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있지요."
"이것 말고 또 하나는?"
"이 무기는 강호에서 멸절된 지 이미 오래 됐소. 이것 말고 또
하나가 있지만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오."
"너는 젊은 나이에 이런 멸절이 된 독문 무기까지도 잘 알고 있
구나."
"단지 우연히 남에게 들은 것뿐이오. 아버님은 교제가 넓은 분
이라서 친구분 중에 한두 명의 '만사통(萬事通)' 선생들도 끼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 병기를 쓸 줄도 알겠군?"
"내가......이것을 사용할 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무기를 놓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계속해
서 소어아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도
강옥랑의 수중에 있는 '귀견수'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어아가 입을 열었다.
"이 무기를 지니고 다닌다면 필시 강호에 이름을 나릴 수 있겠
군. 나는 쓸 줄도 모르니 네가 가져 가거라."
강옥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을 받았다.
"나 역시 소용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쓸데없는 무기를 남겨 둘 이유는 없겠지."
소어아는 순간 검을 휘둘러 그 천하에 가장 독한 독문 무기를
부수어 버렸다.
강옥랑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좋아요.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어요. 남의 손에 들어가기 전
에......."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는 것만 같았다.
소어아는 수중의 검을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좋은 검이야. 좋은 검이구나. 난 본래 너를 몸에 휴대할 생각
이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여기에 두는 것이 좋겠어. 나 같은 사람
은 손이 비어도......."
이때 강옥랑이 그를 불렀다.
"봐요...... 여기를......."
하나의 해골이 구석쪽으로 누워있었다.
그 해골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골격이 검은 색으로 변색
해 있었다.
강옥랑이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이 사람은 왜 여기에서 죽었을까?"
"무덤에 갇혀 있지 않으니 이곳의 주인이겠지. 또 여기의 주인
이라면 무림의 고수일 것이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가 여기의 주인이었다면 어찌 이렇게 죽었을까? 그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아선 반항한 흔적은 없는데......."
"골격의 색깔로 보아서는 중독이 되어 죽은 것 같은데요."
"맞았어. 그렇구나."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마주쳤다.
"이제 보니 그는 남의 독약 암기에 적중했군!"
두 사람은 곧 검은 골격에 무수한 은침이 박혀 있는 것을 찾아
냈다.
이번엔 소어아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 천절지멸투골천심침(天絶地滅透骨天心針)은 과연 천하의 제
일 암기지......."
그때 무엇을 발견한 듯 강옥랑은 몸으로 소어아의 눈길을 막아
서며 한편으로는 헛기침을 하면서 슬슬 발걸음을 옮겼다.
소어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우도 감기는 속여 넘기지 못 하는 모양이지?"
강옥랑은 심하게 기침을 하며 허리를 굽혀 몸을 숙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는 척하며 바닥의 물건을 주워 재빨리 품속에 집어 넣
었다.
강옥랑은 기쁨을 억누르는 대신 일부러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만약에 이곳의 주인이라면 어째 하필 이곳에서 암살
을 당했을까?...... 그러나 만일 그가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면 이
곳에서 죽을 리가 없는데."
"음! 여기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들어 오지도 못 했겠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여기엔 더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아."
"아주 많은 무서운 비밀들일 겁니다."
"세상에 무서운 비밀이란 없어. 세상의 모든 비밀은 다 재미있
을 뿐이야........"
두 사람은 어깨를 마주하고 그곳을 걸어 나왔다.
철벽이 이동하며 열렸다.
강옥랑이 먼저 들어섰다. 사방을 살피던 그는 돌연 소어아를 부
르며 뒤로 물러섰다.
"무엇이 있길래 그러지?"
"서있는 골격을 본 적이 있어요?"
"서있는 골격?......처음 듣는 얘기인데."
"곧 볼 수 있오."
"서있는 골격이라. 그것 참 재미 있는 일이구나."
이 철로 만든 방은 이제까지 보아 온 어느 방보다 훨씬 크고 유
난히 높았다.
넓고 음침한 방에는 구석으로 다섯 개의 탁자가 있었을 뿐이었
고 한 가운데에 쓸쓸히 두 개의 골격이 서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살은 벌써 썩어 없어졌고 골격만이 앙상히 남아
있었다.
소어아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이것은 일남일녀(一男一女)일 거야. 죽기 전에 서로 껴안고 손
을 놓지 않은 모양인데...... 어쩌면 정사였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서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아! 그 점을 생각지 못 했군. 이 방면에서는 내가 나보다 경험
이 풍부하지. 그나저나 저 두 사람이 모두 남자라면 왜 서로 껴안
고 있을까?"
이렇게 말을 하면서 두 개의 골격 앞에 다가가 선 소어아는 길
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두 사람은 생각대로 둘 다 남자인 걸."
"뭘 좀 알아 냈어요?"
"음."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여기에 갇혀 죽게되자 서로를 위
로한 모양이군요. 교제가 깊은 사이였던 모양이지요."
"아니야. 이 두 사람은 교제가 좋지 않았을 뿐더러 극히 나빴
어."
"어떻게 그건 알았지요?"
"너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어."
두 해골은 서로 꼭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양 옆구리에 갈비뼈를 부숴뜨리고 박혀 있었다. 왼쪽 사
람의 양손이 맨손으로 뼈를 뚫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무서운 장력
인가! 그러나 그 사람 역시 가슴 뼈가 일곱 여덟 개나 부러져 있
었고 상대방에게 잡힌 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악투
고전 끝에 서로를 죽인 것이었다.
강옥랑의 놀라움은 더욱 고조되었다.
"무서운 무공이군! 무서운 장력이야! 이 두 사람은 모두 무림
절정의 고수임에 틀림이 없소. 그런데 어찌 여기에서 죽었을까!"
'좌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두 개의 골격이 그가 소리치는 진동
에 의해 허물어져 내렸다.
소어아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까 그 독살당한 시체는 뭐고...... 또 이들은...... 이들은
왜 서로 싸워 죽여야만 했을까?"
그들은 마음 속에 가득 의구심을 품은 채 구석에 있는 탁자들로
눈길을 돌렸다. 각 탁자 위에는 문방사우가 갖춰져 있었고 또한
몇 권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 중 한 탁자로 다가가 책을 들춰보던 소어아는 돌연 안색이
변하며 탄식소리를 냈다. 강옥랑 역시 다른 탁자의 책을 뒤져 보
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책들은 최고의 무공이 기록된 책들이있던 것이다. 한참 후
소어아가 먼저 숨을 내쉬면서 강옥랑을 바라보았다.
"이제 알겠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곳에는 본래 다섯 명의 최고 고수들이 있었어. 그들 다섯 사
람은 같이 이 방에서 무공을 연마하며 얻은 것을 책에 기록한 것
이야."
"그렇군요. 고수가 무공을 연마하는 소재지인 이상 방이 커야지
요."
"다섯 사람의 고수 중 우리는 이미 세 사람을 보았어. 이 다섯
이 함께 있었다면 그 세 구의 시체가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들도 한꺼번에 같이 죽은 것일 게야. 내 말이
틀림 없다면 다른 두 구의 시체도 집안 어딘가에 필시 있겠지."
"그럴 지도 모르죠."
"가자."
강옥랑은 그제서야 책에서 눈을 뗐다.
"가요?......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비밀을 풀어봐야지."
" 그러나 이 책......이 무림의 비록이 적힌 책들은 어떻게 하
죠?......."
"여기에 그냥 둔다고 해서 그것들이 달아나지는 않아."
"이젠 나도 내 마음대로 해야겠는데......."
강옥랑은 싸늘하게 말을 내뱉으며 품속에서 금색의 통을 꺼냈
다.
소어아는 흠찔 놀라며 중얼거렸다.
"천절지멸투골천심침......."
"본래 이 집을 나서게 되면 이것으로 당신을 상대하려고 했었
지.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서두를 수밖에 없소."
"날 죽이려는 거냐?"
"당신이 이 철절지멸투골천심침을 피할 수 있다면 몰라도 세상
에 그런 재주가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지."
"좋아. 정 그렇다면 날 죽여도 할 수 없지."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
"침통이 비어 있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나?"
강옥랑은 금방 안색이 변하면서 침통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다니!"
"침통이 비어 있지 않으면 어찌 땅에 버려졌겠나...... 이 속의
투골침(透骨針)은 벌써 아까 그 사람에게 사용된 것이야. 빈 침통
은 땅에 버린다는 간단한 도리도 모른단 말인가. 똑똑한 네가 그
런 생각도 못 했어?"
"당신......당신......."
"난 이미 네가 방금 기침하는 척하면서 침통을 줍는 것을 보았
어. 그 침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널 그냥 줍도록
내버려 두었겠나!"
그는 웃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천절지멸투골천심침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
니야. 옛날 유명했던 신수장(神手匠)이라는 단 한 사람만이 이것
을 만들 수 있었지.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이 비어 있는 침통은
폐품이나 똑 같아...... 하하."
강옥랑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솟아 뚝뚝 떨어졌다.
"나......난 진정 당신을 죽일려는 것은 아니고...... 다
만......."
그는 손에 있던 침통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난 알고 있어. 네가 농담을 했을 거야."
"난 정말 이제까지 당신을 형처럼 생각했어요. 지금 다시 맹세
를 할 수도 있어요."
"그래, 그래. 그렇게 나를 형님처럼 모시는데 네가 어찌 나를
죽일 마음을 품었겠나?"
"형님이 제 마음을 아신다니 제가 안심을 해도 되겠군요."
"자! 그럼 나갈까?"
"네."
대답을 한 강옥랑은 고개를 숙이고 걸어나갔다.
소어아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의 뒷통수를 향해 퍼져나갔다.
지하궁궐의 비밀
소어아와 강옥랑은 여섯 개의 방들을 차례로 열어 나갔다.
소어아는 유리로 만든 기관의 손잡이를 돌렸다.
강옥랑의 입에서는 탄식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네 개의 방에는 모두 나갈 길이 없었지만. 하지만......."
"안심해라. 남은 두 개의 방 어디엔가는 반드시 나갈 길이 있을
거야."
"제발 그래야죠."
"석실(石室)은 무덤이었고 철실(鐵室)은 무술연마장이었다. 그
리고 동실(銅室)은 병기창고였는데...... 이 방 안에는 과연 무엇
이 들어 있을까?"
"혹 침실이 아닐까요?"
"후후! 이 방에는 귀신이 있을 걸."
이윽고 벽이 움직이며 문이 스르르 열리자 돌연 한 마리의 거대
한 사자가 달려나와 강옥랑의 몸을 덮쳤다.
너무나 갑작스런 기습에 강옥랑은 혼이 빠지도록 놀라 뒤로 일
곱 여덟 자를 급히 물러섰다.
소어아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사자는 버릇없게도 문에 기대어 죽어서 우리 강 공자까지
놀라게 하는구나."
강옥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이런 맹수가 살고 있었다니......."
"그것도 필시 무슨 연유가 있겠지."
소어아는 아직도 놀라 떨고 있는 강옥랑의 손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회색유리 방 안에는 사방으로 벽장이 들어차 있었다. 그 벽
장속에는 크고 작은 병들이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들은 불빛을 받
자 기묘한 광채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넌 이 병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이 가느냐?"
"그렇다. 그들이 이 사자를 키운 것은 이 독약을 지키기 위해서
였어."
"그러나...... 감히 어느 외인(外人)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겠
소? 굳이 지킬 필요가......."
소어아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 것이야."
"서로를 감시하다니요?"
그 다섯 고수는 서로 호의적인 관계가 결코 아니었어. 하지만
그 다섯이 서로 견제를 하고 있는 이상 무공으로 독수를 가할 수
는 없었겠지. 그러니 자연히 상대방을 해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은 바로 독을 사용하는 것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들 서로는 그
런 속셈을 알고 있었을 테고 그 방비로 이 독약이 가득찬 방에는
사자를 넣어 뒀겠지. 이 사자만 있다면 독약을 훔치려는 사람은
필시 발각이 되고 말았을 테니, 안 그런가?"
"그렇군요. 밖에서 누가 침입하지 못 한다 해도 그들 서로가 서
로를 믿지 못 했다면 마땅히 이곳에 방비를 세워 둘 수밖에 없었
겠죠."
"네번째 사람의 시체가 여기에 있군."
소어아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뼈들 중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 그 사람은 사자에게 먹힌 모양이지요?"
소어아는 다시 두 개의 뼈를 집어들며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여기에는 사자 외에 호랑이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호랑이?"
"강한 자가 이기는 법이지. 처음엔 사자와 호랑이가 같이 사람
을 잡아 먹었겠지만 결국 배가 고픈 두 마리 짐승이 서로 싸우게
된 거야."
이때 강옥랑은 가벼운 탄식소리에 이어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
다.
소어아가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기뻐하나?"
"좀 돌아보시오."
강옥랑은 하나의 검은 죽통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옆
에 있는 벽장에서 꺼낸 모양이었다.
"난 운수가 정말 좋은데, 이런 보물도 찾게 되니."
"그게 뭐지?"
"당신은 이것도 모르니 정말 무식하군. 옛날 절변의 제일검객이
었던 철진도장도 바로 이 물건에 죽었단 말이오."
"난 정말로 모르겠는데."
"말하지요. 이것은 바로 옛날 백수궁의 오독천수요, 극히 적은
양만 몸에 묻어도 곧 즉사하고 말지요."
"그렇다면 절대로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물론 소어아의 농담 섞인 말이었다. 강옥랑은 웃어버렸다.
"당신은 모르는 척하는 거요? 정말 모르는 거요?"
소어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다면......그렇다면 정말 날 죽이려고?"
"이번엔 빠져나갈 생각을 마시오."
소어아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날 죽여야만 하나? 잊지마라. 난 너를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어."
"그건 당신문제요.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좋아 좋아......."
소어아는 여전히 농이 섞인 말투로 여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선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보아라."
그가 손에 꺼내든 것은 바로 강옥랑이 바닥에 버린 천절지멸투
골천심침의 침통이었다. 그것을 본 강옥랑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고 껄껄 웃었다.
"이제보니 당신은 놀라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오. 그런 빈
통으로 날 놀라게 하려는 거요?"
"빈통이라고, 어떤 것이 빈통이라는 거냐?"
"당신...... 당신이 아까......."
소어아의 입가에는 다시 그의 독특한 웃음이 퍼져갔다.
"그렇지. 내가 빈통이라고 했었지. 그건 내가 너를 속인 것이
야. 생각 좀 해봐. 그런 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언제 거짓말을
하겠나?"
"흥! 또 나를 속일려고? 이 침통은 분명히 썼던 것인데......."
"그래, 썼던 것이야. 하지만 몇 번이나 썼는지 아나?"
"어! 몇 번...... 이라니?"
"이 친절지멸투골천심침은 제작하기가 어려워 한 통으로 세 번
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지."
그는 크게 웃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번 사용할 때마나 번거롭게 다시 그 신수장을 찾아야 한다
면 누가 불편한 것을 사용하겠나? 이렇게 간단한 도리도 생각 못
한단 말인가?"
강옥랑의 안면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신...... 당신은 어쩌자는 거요?"
"생각을 해봐. 너의 오독천수가 빠르겠는가 아니면 나의 천절지
멸투골천심침이 빠르겠는가?"
강옥랑은 손이 자꾸 떨려왔다.
"당신...... 당신이 날 속일 생각은 마시오."
"널 속인다고? 나는 어릴 때부터 악인곡에서 자랐어. 이런 암기
에 대해서는 너보다 몇 배 더 잘 알아."
"형님은 과연 견식이 풍부해요. 난 상대도 안 되겠어요."
강옥랑은 천천히 벽장에 다시 오독천수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 독특한 웃음을 연상 지어보이며 그를 향해 서서히 다
가갔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큰 실수를 하는 거지. 안 그래?"
"동......동생의 장난이 과했으니 형님...... 형님이 용서를 하
십시오."
그는 떠듬떠듬 말을 더듬으며 계속 뒤로 물러섰다.
"너는 확실히 영리한 녀석이야. 알고 있는 것도 많아. 그러나
나보다는 적어! 약간이긴 하지만......."
소어아는 통 위의 홈을 손가락을 가볍게 눌렀다. 수중에 쥐었던
통이 돌연 '철컥' 하는 소리를 냈다. 강옥랑은 전신에 있는 힘이
일시에 빠져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침통에서는 아무 것도
발사되지 않았다.
얼굴에 기묘한 웃음을 띤 소어아는 벽장에서 오독천수를 꺼내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녀석, 이 침통은 비어 있어. 천절지멸투골천심침은 일발에 백
삼 십 개야. 그리고 침통만 갈아끼워 사용하게 되어있지."
강옥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졸도해 버렸다. 그는 분노를 스스로
이기지 못 했던 것이다.
강옥랑이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이 돌아오자 소어아는 그의 얼굴
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네가 섭섭해 할까 봐 남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너도
우선 뭘 좀 먹으려무나."
소어아는 언제 꺼내왔는지 곱창이며 떡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소매로 입을 닦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젠 방이 하나만 남았구나. 출구는 필시 그 방에 있
을 거야."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한 그들은 드디어 은기관을 천천히 잡아
돌렸다.
그곳은 진정 지하궁궐이었다. 소미미의 방도 호화스러웠지만 여
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금세공품과 가지각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여섯 개의 문이 있었는데 각문에는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주먹만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정교하게 직조된 두텁고 부드러운 융단위를
걸어갔다.
소어아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다섯 사람인데 어찌 여섯 개의 방이 있지. 그렇다면
여섯 사람이 있었나? 아까 그 방에는 분명 다섯 개의 탁자가 있었
는데."
그들은 첫번째 방을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 방은 여자의 규방이었다. 그 방 역시 복도 못지 않
게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칠보를 수놓은 화장대에는 화장 도
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하나의 골격이
누워 있었는데 머리카락이나 장식물들로 미루어봐서 여자라는 것
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소어아는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손가락으로 양미간을
긁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강옥랑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아까 그 골격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기억이 나느냐?"
"남자예요. 여자라면 골반이 더 컸을 거예요."
"방이 여섯이고 이번엔 여자다. 그리고 탁자는 다섯이었
고......."
그들은 마음 속에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서둘러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두번째 방도 역시 규방이었으며 침대에는 여자의 시체
가 있었다. 세번째, 네번째 방도 마찬가지였다.
소어아는 계속 고개를 가로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곳엔 다섯 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야. 그 고수들은 모
두 마누라를 데리고 왔어."
소어아는 다시 무엇을 생각하는 지 한참 동안이나 턱을 쓰다듬
다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간에 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시에 죽어버린 것이 분
명해. 그리고 분명히 내부인의 소행이야. 생각해봐. 첫번째 인물
은 무기고에서 암습을 받았어. 반항하거나 싸운 흔적이 없지. 두
번째와 세번째 인물은 철로 된 방에 갇힌 채 서로에게 살수를 가
했고 네번째 인물은 독약을 두는 방에 갇혀 사자의 밥이 되고 말
았어. 분명이 모든 사람을 잘 알고 있고 또, 지하궁궐 내부의 구
조에 통달한 사람이 독계를 쓴 것이야. 그리고 여자들의 시체를
보면 모두 단정히 누워 있고 싸운 흔적이 없어. 싸움을 해서 죽은
것도 아니고 독살당한 것도 아니야. 독은 반드시 그 뼈에 흔적을
남기니까. 단지 혈도를 점해 둔 것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자연
히 죽일 의사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들을 그냥 놔두고 갈 리가 없
지. 그러니 필시 이 모두를 죽인 그 인물도 죽어버린 것이야. 그
래 틀림없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도 죽어버린 거야. 물론 외부
인의 소행이 아니야. 외인(外人)이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
로 보아 그는 필시 무슨 기묘한 사연으로 목숨을 다한 거야. 아!
그는 누구일까. 그 다섯 고수중 하나일까? 아니면 마지막 여섯번
째 방이 새로운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다섯번째 방을 들어섰다. 그 방의 침대에는 두 개의 골
격이 있었다. 하나는 남자였고 또 하나는 여자였다. 그들은 옷을
걸치지 않은 채 포개져 있었고 사내의 등뼈가 산산조각이 난 것으
로 보아 단 한 번의 일격에 숨을 거두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섯번째 사람이군요."
"이 사람은 극도로 기분을 내고 있을 때 뒤에서 일격을 맞았군.
여자까지도 그 충격에 같이 죽고 말았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
히 드러났어. 이들은 모두 이 지하궁궐의 주인에게 살해당한 거
야."
"그건 어째서......."
"남녀가 정사를 나누면서 방문을 잠그지 않았겠나? 열쇠를 가진
사람만이 몰래 들어와 등 뒤에서 일격을 가할 수가 있지. 열쇠를
지닌 것은 자연히 주인이 아니겠나?"
"그렇군요. 그럼 저 여섯번째 방이......."
여섯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방 안의 광경을
보게 되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멈춘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불빛에 모자를 쓰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가 탁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상을 누르고 있었는데 막
일어나려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당황함과 분노가 얽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다가 자세
히 보니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돌리자 침대에는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녀 역시 시신
이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고 얼굴 색깔은 파리했지만 세상에 보기
드문 미녀였다. 강옥랑도 소어아도 일찍이 이런 절색의 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가 비록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소어아가 탄식을 했다.
"이 여자가 살아있을 땐 필시 많은 사내들이 목숨을 걸고 그녀
의 애정을 구하려 했을 거야. 소미미도 그녀에 비하니 정말 추녀
로군."
"세상에 이런 절색이 또 있단 말인가!"
"이들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소."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지?"
"보시오. 이들의 옷은 아까의 그 시체들의 옷만큼이나 삭았소.
옷만 삭고 시체는 썩지 않았으니 기이한 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
소. 보아하니 저 여자는 탁자에 있는 남자를 독살한 뒤 자신도 자
살한 것이오."
"대체 이들과 그 다섯 부부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렇게 많은 인
력과 재화를 소비해 이 지하궁궐을 건립한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
까? 게다가 이렇게 일시에 모두 명을 달리했으니...... 정말 알
수가 없군."
두 사람은 비록 드물게 보는 영리한 머리의 소유자였지만 도저
히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는가 하고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때 소어아는 여자의 화장대 위에 조그마한 두루마리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두세 번 제치더
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기에 있다. 모든 비밀이 여기에 있어."
그 두루마리는 노란색의 견직으로 짜여진 것으로 가느다란 글자
가 빽빽히 쓰여 있었는데 분명 여자의 필적이었다. 둘은 책을 펴
들고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방영희, 그녀의 집안은 본래 강남의 유명한 부호
세가로 귀족이었고, 화평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러나 어느 날 그 평화롭고 유복했던 가정은 풍지박살이 나고 말았
다.
그녀가 네 살 때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소주에 있는 친척을 보
러갔다 돌아와 보니 그녀의 온 집안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가솔
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몰살당한 후였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그녀가 자
세히 써 놓지는 않았지만 거기엔 필시 많은 고난과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그녀가 열세 살이 되던 해 모녀는 드디어 그 원수의 이름을 알
아냈다.
구양정!
당대인걸 구양정! 그녀의 원수는 강호에서 가장 이름 높은 인물
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감히 도전할 자가 없는 고수였고 또한 억
만장자였다. 그는 많은 재산을 뿌려 사람을 모았으며 중원 각지의
세력들과 연맹을 맺었고 들리는 바로는 흑도의 인물들까지도 그와
교분이 있었다. 그녀는 비록 약간의 무술을 연마했으나 일개 여자
의 몸으로 그 거대한 상대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
는 그 모친이 가슴에 가득 한을 품고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구양
정에서 시집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녀의 절제미모를 미끼
로 복수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는 칠대검파의 무술시합장으로 향하는 그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계획대로 그의 배필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그
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구양정에게 복수할 기회를 종시 얻을 수가
없었다. 항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그는 공사다망한
일이 많았고 게다가 밤에도 그녀의 방에 들어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흔란스러웠다.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그녀에게는 복
수할 기회도 역시 얻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비록 원수에게 짓밟히
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잠자리를 외면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
던 것이다.
소어아는 그 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필시 구양정인 모양이군."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무림계에서 지위와 명예가 그만 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구양정이 이런 지하궁궐을 지어놓고 여기서 세
월을 보내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계속 읽어보자."
가슴 속에 복수의 날만 기다리며 가모(家母)의 자리에 충실하던
그녀는 차츰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
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록 부부간의 정을 나누지는 못 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구양정의 아내로서 자연 그를 이해하고 흠모하는 마
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안식구의 원수가 아닌
가! 그녀는 초조함과 혼란으로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는 날이 없
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와 함께 이 지하궁궐로 오게 되었다.
알고보니 구양정이 일 년에 수개월씩이나 집안을 비우곤 했던 이
유는 바로 이 지하궁궐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하궁궐은 그 두사람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구양정은 이곳으로 당시 강호의 최대 고수 다섯 사람을 데려온 것
이었다. 아내까지 동반한 그들은 두문불출 여기에서 하늘을 뒤흔
들 절세의 무공을 창조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하고 연구했다. 그
다섯 사람은 그간의 경험과 지혜를 합하여 무공의 가장 깊고 오묘
한 경지를 찾아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는 구양정이 그들 앞에서
는 후세에 영원히 공명을 떨치는 영웅이 되자고 얘기했으나 사실
그가 강호를 제패할 야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
고 그 무공이 완성되는 날이 그 다섯 사람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
라는 것도 알았다.
책의 다음 장부터는 그녀의 감정이 복받쳤던지 군데군데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이 지영궁에 와서야 비로소 그는 부부지간의 운우지정을 나누
었다. 그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나에게 애정을 기울여 주었다. 아!
그는 나에게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었고 내가 자기에게 보수의 칼
을 갈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나는 손을 쓸 기회가 있었으나 시종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악연
(惡緣)이나 나의 지아비인 이 사람. 어쩌면 그 역시 나만큼 불쌍
한 인간인지 모른다.
그는 한번 왔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 서글픈 인생을 평생 목숨
을 건 싸움과 온갖 계교 속에 살아왔다. 웃음을 띠우고는 있으나
언제 등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강호의 인물들 속에서 한편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야심의 격정으로 잠못 이루는 그 아내인 나에게
까지 마음을 편히 쉬지 못 하고 살아왔다. 휴식과 안락이 없는 살
벌한 생활은 그의 마음을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가 여기에 와 나와 처음 밤을 지새던 날 그는 마치 어린아이
처럼 나의 가슴에 안겨 두 눈에 눈물을 축축히 흘렸다.
'이제야 당신을 믿고 내가 의지하니 당신은 나를 용서하구려.'
그는 나를 으스러질 듯이 안았다. 그에게 나같이 연약한 여자가
무슨 의지가 된단 말인가. 내가 그의 의지가 될 정도로 그가 고달
픈 삶을 살았단 말인가.
드디어 어젯밤 그 절세의 최고 무공은 완성되었다. 그의 속마음
을 알고 있는 나는 제발 나와 여기서 동기간처럼 지내던 그들의
아내들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나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
웠던지 독계로 그들을 제거한 후 그 아내들은 혈도만 점하여 살려
놓았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은 그 지아비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변
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들 역시 그의 손에 희생
되고 말리라. 결국 원수를 맺은 그녀들을 살려 놓아 후환을 만들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이 방으로 올 것이다. 아! 이
젠 더 미룰 수가 없다. 그는 나의 모든 가족을 죽였고 결국 나의
어머니도 그의 손에 직접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한을
이기지 못 해 구천에 떠도는 원귀가 되고 말지 않았는가! 아! 하
늘은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고통을 주는가! 이제 그
와...... 나...... 그리고...... 그리고 뱃속의 이 아기는 죽음으
로서 이 업보를 끝내는 수밖에 없다."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소어아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강옥
랑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원수를 갚고도 같이 목숨을 끊다니, 참 여인의 마음이라
는 것은......."
소어아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껄껄 웃었다.
"누가 시간을 여인을 이해하기 위해 써버린다면 그 놈은 미친
놈 아니면 병신이지."
강옥랑은 넋이 나간 듯 잠잠히 말했다.
"지아비로서 섬기던 남자를 죽여야 했고 뱃속에는 그 씨앗이 자
라고 있었으니...... 원수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인 그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세상을 더 살아갈 수가 있었겠소. 더구나 그녀는
그를 사랑했으니......."
소어아가 강옥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허! 넌 꼭 여자 같은 구석이 있어."
"여자 같다고요?"
"넌 수완이 악독하고 친구의 껍데기를 벗겨놓을 정도로 잔인해,
하지만 어떤 땐 겁이 많고 예민하며 변덕이 심하지. 남자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 여인의 마음이나 그렇게 변화가 많지."
그는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소미미가 너를 소색마라 부르지 않았다면 난 정말 네가
여자인 줄 알았을 거야."
- 제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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