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06

3학년2반 | 2022.02.13 07:12:32 댓글: 0 조회: 41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495
주방(廚房)의 소어아
소어아는 단숨에 십여 리를 달린 후 어느 황막한 강가에 쓰러졌
다.
그날 밤 역시 별빛이 밝은 밤이었다.
그는 일을 벌이고 나자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
러나 또다른 무거운 것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자기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필시 해홍주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순결한 그녀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이별의 슬픔을 안겨주고만 것이
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탓하지 말라. 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나도 떠나
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행방이 알려진 이상 그곳에 계속 있을 수
가 없었다."
하늘의 별들이 마치 모두 해홍주의 눈동자 같았고, 그 모든 별
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소어아는 더 이상 별들을 바
라볼 수가 없었기에 자기의 눈을 감아버렸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소어아는 그곳으로부터 떠났다. 그는 정처없
이 걸어갔다.
어느 날 그는 그리 작지 않은 한 마을에 당도했다. 그는 큰 길
을 걷지 않고 작은 소로를 택해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길은
대부분 집의 주방쪽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밥 향기가 그의 허
기진 배를 더욱 저주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주방 앞에 서게
됐다.
그 주방은 골목에서 가장 컸다. 그는 멍하니 그곳에 서서 한참
이나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주방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나와
그의 온 몸을 적셨다.
주방의 뒷문에서 동그란 얼굴 하나가 내밀렸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보지 못 했구나."
"괜찮습니다."
그 동그란 얼굴은 웃으며 다시 들어갔다. 약 두 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지난 후 그 동그란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소어아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을 발견하자 해죽이 웃었다.
"밥이 조금 있으니 와서 먹지 그래?"
소어아는 싱긋이 웃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는 안
으로 들어가 단숨에 여덟 그릇의 밥을 먹어 치웠다. 배불리 먹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그 동그란 얼굴을 가진 사람은 줄곧 소어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어아가 절을 하고 막 가려하자 그는 소어아의 앞을 막
아서며 입을 열었다.
"그릇 닦을 사람이 한 명 필요한데 싫지 않다면 이곳에서 일하
지 않겠니? 절대로 너를 굶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는 양이 매우 큽니다."
"밥집에서 양이 큰 사람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나?"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물통을 찾아 들었
다.
"닦아야 할 그릇이 어디 있습니까?"
이튿날 소어아는 이곳이 바로 오호춘반관(五湖春飯館)의 주방이
란 것을 알았다. 또 그 동그란 얼굴의 소유자가 바로 이곳의 요리
사인 장장귀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리하여 소어아는 그릇닦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자 그 누구에게도 발견될 걱정은 없었다.
장장귀는 종종 저녁 시간이면 소어아와 술을 나누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소어아는 적지 않은 술을 마셨지만 말은 기껏해야 세마디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무공비급의 요점을 생각했다. 마치 상사병이라도 걸
린 사람처럼 한시도 그 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주방을 찾아왔다. 그는 흥분을 가라 앉
히지 못 하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봐, 자네들 오늘 만큼은 더욱 힘을 내주기 바라네. 오늘 여
기에 어떤 손님이 왔는지 아나? 삼상지방 제일의 영웅호걸이 오늘
이곳에 오셨다네. 이것은 나의 체면이 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한 자네들의 영광이네."
소어아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주인은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대답했다.
"철무쌍(鐵無雙) 철 어른이다. 무예계에서는 그를 애재여명(愛
才如命)이라 부르지, 삼상지대의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그래요?"
요리를 다 만든 그는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가 오호춘에 들
어온 후 처음으로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삼상지방 무예계의 맹주인 애재여명 철무쌍의 이름은 그에게 더
없이 큰 유혹을 주었다. 그는 그 인재를 아낀 나머지 외동딸을 이
대취에게 시집보냈던 삼상지대의 맹주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인물
인지 보고 싶었다. 사람을 먹는 이대취를 감히 사위로 맞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 소어아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풍들이 아담한 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소어아는 병 풍 사이
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상의 한가운데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비단옷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온화해 보였고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소어아는 첫눈에 그가 바로 철무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무쌍의 오른쪽에는 독수리 같은 코를 지닌 중년의 사내가 앉
아 있었다. 사방을 바라보는 그의 눈 또한 독수리 같이 날카로와
보였다.
그리고 철무쌍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서하
십칠 표국의 총표두인 기발산하 동권철장진중주 조전해였다.
소어아는 이 자가 아미산 뒷산에 있는 동굴에서 자기를 옥노선
배라고 불렀던 일을 생각하자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
았다.
그러나 가장 소어아의 눈을 끈 것은 철무쌍의 뒤에 공손히 서있
는 두 명의 자의 소년(紫衣少年)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스무 살 안팎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매우
공손한 태도를 하고 있었지만 소어아는 첫눈에 그들이 이 좌석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자의 소년은 짙은 눈썹에 눈이 컸고 거무스름한 얼
굴이 마치 검은 표범과 같았다.
오른쪽에 있는 자의 소년은 준수한 얼굴에 글공부를 깊이 한 선
비와 같은 인상이었지만 눈초리만은 칼날 같이 예리했다.
이 두 소년은 술 주전자를 들고 철무쌍을 대신하여 좌석에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무쌍의 자식이 아
니면 필시 그의 제자인 것 같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조전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향
하여 인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철노선배님의 초청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마음껏
즐기고 얌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도리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하
고 싶은 말이 있기에 이렇게 일어섰습니다."
철무쌍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좋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보시오."
곁에 있던 독수리 같은 사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조 총표두께서 할 말씀이 계시다니 저희가 어찌 감히 듣지 않
겠습니까?"
조전해는 말을 시작했다.
"단합비(段合肥)선생께서 관외에 운반하고자 하는 은은 우리 양
하연표가 먼저 맡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예계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독수리 같은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저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조전해는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 총표두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면 어찌하여 그 거래를
뺏아가셨습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형신응 여봉이 의리있는 영웅
이라는 말을 들었소. 그런데......."
형신응 여봉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객은 물건을 비교하는 법, 이는 무예계의 도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우리가 찾아간 것도 아니고 단합비께서 우리 삼상연
표에게 부탁을 했는데 나보고 받지 말라는 말이오?"
조전해는 대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 양하연표가 당신의 삼상연표보다 못 하단 말이
오!"
여봉은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고객이 그렇게 보는데 나보고 어
쩌란 말이오?"
조전해는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다...... 좋아......."
그는 갑자기 철무쌍을 향하여 절을 하며 소리쳤다.
"철 어른께서는 삼상연표와 매우 두터운 관계가 있으시니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시라고 부탁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
만......."
그는 주먹을 쥐고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삼상연표가 이토록 우리 양하연표를 무시하니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저 여씨란 놈을......."
여봉은 냉소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를 어쩌겠단 말인가?"
"어디 두고보자. 내가 이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성을 갈겠다."
철무쌍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웃었다.
"조 총표두께서는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내 술부터 받으십시오."
조전해는 철무쌍이 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철 어른......."
철무쌍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노부는 삼상지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삼상지대의 무예계에 속하
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노부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소. 여봉
또한 따지고 보면 노부의 조카쯤 됩니다. 이 자리에서 노부가 표
두를 화나게 하고 보낸다면 노부가 겨우 얻은 명성이 완전히 무너
지는 것이 아니겠소?"
이 말을 들은 조전해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철 어른의 뜻은 저를......."
"노부의 뜻을 모르겠단 말이오?"
조전해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칼을 잡게 되었고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대한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봉의 얼굴에는 냉소가 가득찼고 눈동자 또한 칼날 같이 예리
하게 빛났다.
조전해는 또박또박 말했다.
"철 어른께서는 저를 이곳에서 못 나가게 할 작정입니까?"
철무쌍은 껄껄 웃었다.
"노부는 단지 표두를 이곳에 남겨서 몇 마디를 해주고자 하는
것 뿐이오."
그는 갑자기 여봉에게 눈길을 돌리며 정색을 했다.
"노부가 만약 자네에게 그 거래를 양하연표에게 돌려주라고 한
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여봉의 얼굴색은 크게 변하였다. 생각 밖의 얘기라는 눈치였다.
"그것...... 그것을......."
"노부는 절대 억지로 자네보고 물러서라고 하지는 않겠네. 그러
나 지금의 일은 분명히 자네의 잘못이라고 알고 있어. 자네가 만
약 나의 제안을 받아준다면 노부는 형산에 있는 그 엽차밭을 삼상
연표의 영토로 돌려 놓겠네. 무예계에서는 인과 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 심사숙고한 후 행동을 취하기 바라네."
여봉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엽차밭은 어른의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이니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
다."
철무쌍은 여전히 껄껄 웃었다.
"그까짓 재산이 뭐가 그리 대단스럽단 말인가?"
조전해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얼굴을 붉히며 포궐의 예
를 하였다.
"철 어른께서는 이토록 인자하고 의리가 드높은데, 저는 그토
록...... 그토록......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 거래는 삼상연표
가 맡도록 하십시오."
여봉의 굳었던 표정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별말씀 다 하십니다. 이 거래는 분명히 양하연표가 먼저 맡았
으니 양하연표가 해야지요. 조 총표두께서 만약 더 이상 사양한다
면 저는 더욱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두 사람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서로 잡아 먹을 듯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서로 사양을 하고 있으니 병풍 뒤에 숨
어서 보는 소어아로서도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과연 철무쌍은 무예계를 영도하는 사람답구나. 한바탕의 큰 싸
움을 순식간에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양할 줄 아는 군자
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이때 다시 철무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 정 이토록 사양한다면 이 거래를 양하연표와 삼상연표
가 같이 맡는 것이 어떻겠소?"
이 말을 들은 조전해와 여봉은 모두 찬성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소어아는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냉각하여 주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조전해가 여봉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여형, 이번 일이 무사히 성공하길 빌면서 축배를......."
그러나 그는 말을 완전히 끝내기도 전에 얼굴의 근육이 갑자기
한곳으로 몰렸다. 잠시 후 그는 사지의 근육이 경직되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따라온 네 명의 대한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큰일났다. 독이다...... 총표두께서 중독되셨다."
철무쌍의 얼굴색도 크게 변했다.
"이...... 이 어떻게 된 일이냐?"
조전해의 부하 중 한 명이 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신들이 모른단 말이오!"
여봉은 그 소리를 듣자 대노하며 상을 내려쳤다.
"너의 말은 무슨 뜻이냐? 그렇다면 우리가......."
그러나 그 역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조전해와 같이 처음에는 얼
굴의 근육이 한곳으로 몰리더니 잠시 후에는 사지의 근육이 뻣뻣
해지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놀라움과 당황함으로 부산한 가운데 소어아는 그 선비 같은 자
의 소년이 살며시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오호춘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소어아는 주방으로 뛰어들어
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 난리가 나 있었으므로 주방에는 아무
도 없었다.
그 자의 소년은 창과 삼장 거리 정도에 멈추어섰다. 굳이 밖에
까지 쫓아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소어아는 가만히 숨을 죽이
고 열린 창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장운!"
"풍권잔운!"
암호가 오간 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사람
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고 또한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성공했나?"
"네,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그 흑의인의 말소리를 들은 소어아는 귀에 많이 익은 목소리임
을 알아차렸다.
소어아는 그들의 얘기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창가에 더욱 가까
이 다가서다가 그만 그릇 하나를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곧 흑의인과 자색옷의 소년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어아는 일부러 바닥의 그릇을 줏어들고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
다.
"큰일났군! 오늘 벌써 그릇을 세 개나 깨뜨렸으니 분명 경을 칠
거야. 어! 그런데 당신들은 뉘시요?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말도 없
이 들어오는 거요?"
소어아는 그럴 듯하게 연극을 했다. 흑의인과 자색옷의 소년은
아무말도 없이 소어아를 한동안 쳐다보다가는 몸을 돌려 문을 나
섰다.
그러나 그 순간 흑의인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몸을 날려 소어아
의 등에 있는 신추혈을 점해왔다. 이 신추혈은 척중혈 위에 위치
하고 있는 사람 몸에 있는 사혈 중 하나였다.
소어아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혈도의 위치를 옆으로 약 반촌
쯤 옮겼다. 이것은 무공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이혈대법이었다.
흑의인은 그 일격이 분명히 소어아의 신추혈에 맞았고 또 그가
소리조차 내지않고 쓰러진 것을 보자 필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
였던지 냉소를 터뜨렸다.
"왜 이곳에 머물러 있었나! 이것은 네가 자진해서 택한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자의 소년도 따라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 놈은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원망하겠
습니까?"
흑의인은 웃음을 그치자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분을 잘 감추고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알고 있습니다."
"남의 의심을 사지 않게 어서 가보아라."
"네! 알겠습니다."
그들은 갈라서 각자의 길을 갔다.
그들은 주방에서 일하는 일꾼이 이토록 신비하고도 오랫 동안
실전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꿈에서도 생각지 못 했을 것이
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처리한 이번 일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안 생각했을 뿐, 다시 소어아를 살펴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아직도 땅바닥에 쓰러져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하
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만은 한시도 중단되지 않았다.
(저 흑의인의 음성이 강옥랑과 매우 닮았다. 만약 저 녀석이 정
말 강옥랑이라면 철무쌍의 제자가 그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들
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는 문득 옛날 강별학의 비실( 室)에서 발견한 진귀한 독약이
생각났다.
(소혼산(消魂散)...... 미인루(美人淚)...... 칠보단장(七寶丹
腸)...... 탈명단(奪命丹)...... 일적봉후(一滴封候)...... 산혼
수(散魂水)...... 설백정(雪魄精).......)
그러다가 소어아는 문득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백정...... 옳다. 바로 그거다! 그들의 중상으로 보아선 분
명히 설백정이다."
그는 일어나 행주치마를 벗어 숯으로 설백정을 치료하는 비방을
적었다.
조전해와 여봉의 얼굴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들은 얼마 전
만해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으나 지금은 죽은 사람 같이 움직이
지도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중독됐는지 또한 언제쯤 발작할런
지 모르는 까닭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다. 그것은 물론 움직이면 독이 더욱 빨리 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무쌍의 얼굴에도 이미 웃음을 찾아볼 길이 없었다. 수십 년
경력을 가진 그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독일가? 누가 이 독을......."
그 선비 같은 자의 소년이 그의 뒤에 서서 응답했다.
"혹시 이 식당의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 한 짓이 아닐까요?"
"만약 술과 안주 속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내가 가장 많이 마시
고 먹었으니 내가 먼저 쓰러졌어야 할 것이 아니겠나?"
이번에는 그 짙은 눈썹을 가진 자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 독은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사부님
조차 발견하지 못 했으니......."
철무쌍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독약은 필시 중원(中原)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호에서 수십 년을 돌아다닌 내가 왜 본 적이 없
단 말이냐?"
이때 갑자기 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의 예측이 옳습니다. 이 독약은 중원의 것이 아니라 실은
천산(天山)의 설백정(雪魄精)입니다."
그 음성을 따라 병풍 뒤에서 한 인형이 허공을 날아가며 뭔가
물건을 떨어뜨렸다.
"행주치마 위에 적은 것이 설백정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비방
이니 어서 약을 지으십시오. 중독된 사람들은 아직 살릴 수 있습
니다!"
그의 말은 매우 빨랐고 신법 또한 빨랐다. 말을 반쯤 했을 때
이미 사람이 사라졌고 마지막 두어마디는 십여장 밖에서 들려왔
다.
객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굴색이 변했다.
철무쌍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놀라운 신법이다!"
그는 급히 그 사람이 던져주는 물건을 줏어보았다. 그것은 기름
기가 가득찬 행주치마였고 위에는 과연 기이한 비방이 적혀있었
다.
철무쌍은 잠시 바라본 후 뇌이었다.
"설백정? 그것이 설백정일줄이야......."
다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일제히 말했다.
"그렇다면 총표두를 살릴 가망이 있겠군요!"
그러나 선비 같은 자의 소년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차
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이것도 악인의 계책인 줄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조전해의 손을 쥐어 잡더니 놀라움이 가득찬 소리를
질렀다.
"옳은 말입니다. 그놈이 필시 또 우리까지 해치려고 한 짓일 겁
니다. 설백정은 독이 중독된 사람의 몸이 얼어야 할 터인데......
그런데 총표두의 몸은 뜨겁습니다."
철무쌍은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사람이 얼어죽기 전에는 춥다고 느끼
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 속에서 타죽는 듯한 감을 느끼는
법이다. 이런 감각은 친히 겪어보지 못 한 자는 알 수가 없다."
선비 같은 자의 소년이 물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내가 얼어 죽을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 했
다.
하지만 그의 눈은 살며시 그 기름기가 가득찬 행주치마를 바라
보고 있었다.
소어아는 이미 마을을 벗어났다.
그는 물론 오호춘식당이 그가 더 이상 머물 수 있는 곳이 못 됨
을 알았다.
그는 아직까지 자기의 얼굴을 내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나타나자마자 무예계를 떠들썩하게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소어아가 도대체 어떠
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또다시 목적없이 며칠을 돌아다녔다. 사흘째 되는 날 밤
그는 또다시 강가에 도착했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었
다. 그는 혹시 다시 한 번 그 곡예사들을 실은 낡아빠진 배를 보
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비록 천한 생활을 하면서도
인격만은 조금도 천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해홍주의 그 맑고 큰 눈동자를 보고 싶었던 것은 진정
아닐까?
강물 위에는 배가 적지 않았지만 그 낡아빠진 배만은 찾아볼 길
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유랑을 하고 있겠
지.......
소어아는 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한참이나 움직일 줄 몰랐다.
이때 갑자기 그의 몸 뒤에서 사람의 옷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게 했소."
소어아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지만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또다시 말했다.
"왜 홀로 오셨소. 나머지 두 분은 어디에 계시오?"
소어아는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짜증이 난 눈치였다.
"왜 대꾸하지 않는 것이오?"
소어아는 그때서야 고개를 돌리며 웃음띤 얼굴을 했다.
"댁들은 아마 사람을 잘못 봤나 봅니다."
그는 앞에 서있는 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키와 몸집이 모두 크고 빨간 옷을 걸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다름아닌 이명생이었다.
가운데 의젓하게 생긴 사람은 바로 이명생의 부친인 금사 이적
이었고, 오른쪽에 위치한 사람은 자색 얼굴에 짧은 수염을 길렀는
데 그가 바로 자면사 이정(李挺)이었다.
이 세 사람을 본 소어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얼굴색마저
변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는 못 했다.
소어아는 많이 자랐고 얼굴에는 기름기와 때가 가득찼기 때문에
옛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금사 이적이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잘못 봤구나."
이명생이 옆에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 거지 같은 자식아, 왜 이곳에 서있느냐?"
소어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잘 때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명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소리를 질렀다.
"어서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면사 이정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왔다!"
강물 위에는 한 척의 작은 배가 나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고 배
위에는 세 명의 흑의 인영(人影)이 타고 있었다.
약방(藥房)의 소어아
소어아는 그 자리를 뜨는 척하다가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갈대
밭 속으로 숨어 들었다.
배가 강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흑의인들은 이미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제일 앞에 선 흑의인은 몸집이 매우 거대했고, 그의 뒤를 따르
는 자는 작고 튼튼한 체구였다. 마지막으로 오는 사람은 가냘픈
몸매가 여자인 것같았다.
그들은 흑의에 흑두건을 쓰고 있었고 거의 눈마저 가리고 있었
다. 또한 그들의 손에는 모두 길고 검은 보자기가 들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그들의 무기인 듯했다.
그들 쌍방은 칠팔장쯤 되는 거리에서 일제히 발을 멈추어 섰다.
금사 이적이 먼저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댁들이 바로 자칭 인의삼협(仁義三俠)이오?"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진 흑의인도 차가운 음성으로 응답했다.
"그렇소."
"우리 표국은 근래에 몇 번이나 봉변을 당했소. 모두 당신들이
한 짓이오?"
"그렇소."
이적은 대노했다.
"우리 쌍사표국이 도대체 댁들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괴
롭히는 것이오?"
"원한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또 적지도 않소."
이적은 냉소했다.
"댁들은 계속 강탈에 성공했고 우리는 댁들의 소굴을 찾지 못
했으니 댁들로서는 숨어있는 것이 상책일 텐데 왜 우리를 이곳까
지 불러낸 것이오?"
"무예계의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조전해와 여봉이 비록 중독
되어 죽지는 않았지만 양하연표와 삼상연표의 위신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소."
이적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이번에는 이정이 냉소를 터뜨렸
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관계없다고는 볼 수 없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삼상연표와 양하연표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으니 단합비와의 그
거래는 당연히 당신들의 쌍사표국으로 돌아같 것이으."
"그래서?"
"이번 거래는 매우 엄청난 것이라 당신의 쌍사표국은 당신들의
능력만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소. 당신은 반드시 남의 힘을
빌릴 것이오. 그러니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는 그것을 강탈할 수
가 없소."
"옳은 판단이오."
흑의인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 까닭에 내가 당신들을 불러낸 것이오. 삼상연표와 양하연
표가 그 거래를 맡지 못 한 이상 당신들도 절대로 그 거래를 맡을
생각은 하지 마시오."
말을 마치면서 그는 갑자기 검은 보자기에서 한 자루의 푸른빛
이 번쩍거리는 무기를 빼들었다. 그 무기는 예리한 갈구리였고 갈
구리 손잡이엔 한 송이의 매화가 달려있었다.
금사 이적의 입에서 놀라움이 가득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매화다."
"당신이 이 무기를 알고 있다니 경력이 그래도 쓸만하군!"
이정이 옆에서 소리쳤다.
"감히 무기를 내놓다니 담력이 작지는 않구나! 우리가 너희의
모가지를 베어가는 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과연 그렇게 될까?"
이렇게 말을 주고 받는 동안 나머지 두 흑의인도 매화구를 빼들
었다. 그들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작고 튼튼한 흑의인은 이명생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신법이
날쌔고 초식 또한 악독했다. 그는 마치 이명생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듯 추호의 빈틈이 없는 살수를 퍼부었다.
흑의 여인은 자면사 이정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그녀의 신법 역시 매우 가볍고 민첩했으며 손에 쥐고 있는 매화
구는 재빠른 속도로 신기한 초식을 퍼부었다.
자면사 이정은 노련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의외의 외문병기
를 만나자 자기의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 하고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금사 이적은 이미 그 거대한 흑의인과 대응하고 있었다.
이적은 호북지방에서 도법(刀法)에 제일가는 자라는 칭호를 받
고 있었으며 손에 쥐고 있는 자금도(紫金刀)는 무서운 위력을 지
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흑의인의 무공은 그보다 더욱 깊은 것 같았고
손에 쥐고 있는 매화구로 그의 자금도를 나꾸어 채려했다. 이렇게
되자 이적은 자기의 도법을 완전히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투는 실로 격전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소어아
는 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매화구의 신기한 초식 외에는 별
볼 맛이 나지 않았다.
그가 연마하고 있는 무공비급은 바로 천하무공의 절정이었고 이
적등의 무공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까닭이었다.
결투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난처한 것은 이명생이었다. 사십 초
가 지나자 그는 뒤로 물러다니며 날카로운 공격을 겨우 받아 내기
만 할뿐 한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반대로 그 작고 튼튼한 흑의인은 더욱 용맹해졌다. 이때 이명생
의 칼이 갑자기 매화구에게 낚아채였다.
이렇게 되자 이명생은 혼비백산했다. 그의 앞가슴은 완전히 상
대방의 공격권 내로 들어갔고 그저 한 주먹만 가하면 즉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흑의인은 그에게 일격을 가하지 않고 그의 따귀를 한
대 후려쳤다.
"우선 이것으로 빛을 갚았다."
이명생은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며 물었
다.
"빚을 갚는다고?"
흑의인은 냉소를 지었다.
"매화문의 제자는 은(恩)과 원(怨)을 분명히 하고 빚진 것이 있
으면 꼭 갚는 성질이 있어!"
"하...... 하지만 내가 언제......."
흑의인은 큰소리로 외쳤다.
"네가 죽을 때가 되면 무엇을 빚졌는가 이야기해 주지!"
그는 매화구로 또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갑자기 한가닥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하나의 인영이 매화
구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단지 '쉭!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뿐인데 세 자루의 매
화구가 모두 하늘을 향하여 날아갔다. 두 자루는 갈대밭 속으로
떨어졌고 한 자루는 강물 속에 빠졌다.
흑의인들은 손목에 진통을 느끼며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
앞에는 한 명의 소년이 나타났는데 희고 준수한 얼굴에 바람에 나
부끼는 옷이 천상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
보기엔 그토록 허약해 보이는 소년이 그렇게 높은 신법을 사용
할 수 있다니 그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년을 본 소어아는 더욱 놀랐다. 강옥랑! 저 얼굴이
창백하고 웃음이 음침한 소년은 바로 강옥랑이 아닌가! 그리고 강
옥랑의 무공이 언제 저렇게 증진했단 말인가!
소어아는 곧 그 문제의 해답을 얻었다. 사실 강옥랑도 그 무공
비급을 외웠기 때문에 만약 이 년 동안 아무런 증진도 없었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쌍사와 이명생은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반대로 흑의인은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도와줄 사람을 청해 놓았구나!"
이적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보기엔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의 무공이 어떻소?"
흑의인들은 서로 한번씩 쳐다보더니 곧 몸을 돌려 돌아가려 했
다. 그러나 강옥랑은 재빨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웃음띤 얼굴
로 빈정 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는 아직 가지 못 합니다. 우선 저의 질문 한 가지를
대답해 주셔야 겠습니다!"
거대한 흑의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뭣을 알고 싶나?"
"이 아가씨께서는 얼굴을 가리셨는대 도대체 너무 예뻐서 가린
것이오. 아니면 너무 못 생겨서 가린 것이오?"
작고 튼튼한 흑의인은 대갈일성을 하면서 강옥랑의 가슴을 향해
일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손목을 이미 강옥랑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의 손목을 잡은 강옥랑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이어 흑인의
몸이 허공을 날아 강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댁들께서 정 말하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강옥랑은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흑의인의 몸을 스쳐지
나가 그 소녀의 앞에 섰다.
흑의 소녀는 재빨리 쌍장을 퍼부었다. 그러나 또 순식간에 그녀
는 양손을 강옥랑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발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강옥랑을 걷어찬 무릎이 도리어 저려왔다.
"부디 소저가 아름답게 생겼기를 빌 뿐이오. 그렇지 않다면 내
실망이 너무 클 것이니까."
흑의 소녀의 음성은 울부짖음으로 변해갔다.
"너...... 너 이놈...... 어서 이 손을 놓지 못 하겠느냐?"
물론 강옥랑 손을 놓아줄 리는 없었다. 흑의 소녀는 피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그녀의 얼굴을 가린 흑두건이 강옥랑의 손
에 들어가고 말았다. 별빛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의 눈
은 마치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그녀를 본 소어아는 놀라움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해홍주! 그 흑의 소녀는 바로 해홍주가 아닌가!
강옥랑은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재미있다, 재미있어. 과연 절세미녀였구나."
이명생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그 계집이다. 바로 그......."
"이 소저를 아시오?"
"저 계집이 바로 그 해씨 곡예단에 있던 계집입니다. 백능소 형
님이 바로 이 계집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저 난쟁이가 아
마 바로 그날 저에게 따귀를 한대 맞은 놈일 겁니다. 어쩐지 저에
게 빚을 갚는다 한다 했죠!"
"갈수록 더욱 재미있어 지는군. 매화분의 제자가 강호의 곡예사
가 되었다니......."
그 거대한 흑의인도 체념한 듯 흑두건을 벗어 던졌다. 그는 바
로 곡예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대노하여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손을 놓아라!"
"못 놓아줄 것도 없다. 그러나 너는 우선 나에게 그날 일장(掌)
에 백능 소공자를 죽인 자가 누구이며, 또한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밝혀라!"
해홍주가 끼어들며 쏘아부쳤다.
"네가 그분을 찾으려하다니, 그런 꿈은 꾸지도 말아라!"
강옥랑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꿈도 꾸지 말라고......."
그는 갑자기 손에다 힘을 주었다. 해홍주는 아픔을 참지 못 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너 같은 놈은 그분의 하인도 될 자격이 없다."
마지막까지 말한 그녀의 음성은 분명히 아픔이 뼈속까지 파묻혀
들어간 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꾹참고 말을 끝냈다.
단장은 대갈일성을 하면서 강옥랑의 등을 향하여 일격을 가했
다.
강옥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장의 손은 어느 사이에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끼어들어가 더 이
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단장은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얼굴에 식은 땀이 가득
찼다.
왕년엔 그도 무예계를 주름잡던 인물이었는데 이토록 새파란 소
년에게 망신을 당하게 되자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늙었구나......."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사람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신추혈이 아파 죽겠구나! 이놈, 어서 내목숨을 내놓아라!"
그 목소리는 예리하고도 비참한 것이 사람의 음성 같지가 않았
다.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강가에 있는 갈대밭에서 솟아나왔다. 온
몸에 기름때가 끼고 산발한 그는 바람에 흔들거리며 강옥랑의 앞
으로 다가갔다.
강옥랑은 등뼈가 오싹함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 네가......."
소어아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 나쁜 놈아, 내가 너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나를 죽인단 말
이냐! 이젠 네 목숨을 내놓아라."
강옥랑은 이미 해홍주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너...... 너......."
그는 떨려서 말조차 하지 못 했다. 쌍사와 이명생도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소어아는 스산하게 말했다.
"왜? 도망가려고...... 너는 도망갈 수 없어...... 도망가지 말
고 어서 목숨을 내놓아라!"
해홍주는 두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외
쳤다.
"소매다. 그렇죠! 당신은 소매죠?"
모습은 비록 달라졌지만 그 눈빛만은 해홍주가 뼈에 사무칠 정
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잊지 못 할 그 눈동자인데 그녀
가 어찌 그를 알아볼 수 없었겠는가!
그녀는 말을 마치자 돌연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
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강옥랑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재빠른 속도로 허공에다 몸을 날
려 소어아를 향하여 칠장(掌)을 퍼부었다.
그의 이 장법(掌法)은 실로 낙엽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허공에
는 온통 그의 장(掌)들 뿐이었다.
단장 등사람들이 이 기묘한 장법을 보자 얼굴색 마저 변했다.
특히 해홍주는 안타까움과 자책감에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또 나를 죽이려 하나? 너는 이미 나를 한 번 죽였으니 이
젠 또다시 나를 죽일 수 없다!"
소어아는 강옥랑이 퍼부었던 일곱장을 맞고도 멀쩡히 제자리에
서있었다. 그토록 빨랐던 일곱장이 그의 옷소매에조차 닿지 못 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모두 놀라며 멍하니 서있었고 강옥랑
은 더욱 놀란 나머지 대갈일성하면서 또다시 일곱장을 퍼부었다.
이 일곱장은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고 악독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이번에도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그
일곱장은 또다시 허공을 치게 되었다.
소어아는 여전히 킬킬 웃었다.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젠 믿겠나?"
강옥랑은 몸을 떨었고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다른
사람들도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보고 등뼈가 오싹함을 느꼈다.
그들도 무예계의 고수급에 속했기 때문에 강옥랑의 그 장법이
얼마나 기묘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무공
이 뛰어난 고수라도 가만 선채로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분명히 움직이지 않았다. 강옥랑의 열네장
(掌)은 정말 형제가 없는 귀신의 몸에 적중한 것으로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친히 목격한 사실을 믿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그 장법은 소어아와 강옥랑이 지하궁궐에서 얻은 무공비급에 나
와 있는 것이었다. 강옥랑이 일장을 날리자 소어아는 이미 그가
어느 곳을 공격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살며시 움직여 피할 수 있었
던 것이었다.
해홍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찼다. 그것은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놀라움과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
소어아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오는 한편 강옥랑
은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손발이 힘
을 잃었고 더 이상 공격을 퍼부을 용기를 상실하고 있었다.
쌍사와 이명생은 먼 곳에 물러서 있다가 끝내는 돌아서서 전력
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옥랑도 허공에다 몸을 날리더니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소어아는 그들을 쫓아가지 않고 그들의 달려가는 뒷 모습을 바
라보며 웃음띤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난 아직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정말 아직은 죽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이때 해홍주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꺼
냈다.
"소매,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요?"
소어아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누가 소매요? 나는 귀...... 귀신......."
해홍주가 그의 앞에 다가오자 그는 번개같이 삼장 밖으로 날아
갔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몸을 날려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홍주는 강가로 달려가 울부짖었다.
"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왜 강가로 찾아왔습니까?..... 당신
이 만약 나를 보고 싶었다면 왜 나를 보자마자 떠나갑니까?
왜...... 왜......."
단장은 하늘을 향하여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 딸을 달래기 시
작했다.
"왜냐고? 인간에겐 대답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
것을 누가 일일이 대답해준단 말이냐? 홍아, 내 말을 들어라.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를 잊어라. 아니면 너는 일생 동안 슬픔 속에
서 지내야 된단 말이다!"
밤이 깊었다.
소어아는 강물 위에 떠있었다. 차가운 물은 마치 침대 같았고
더없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동안이었지만 자기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보고나자
저윽이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또 그는 며칠 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드디어 오늘로서 알
게 됐다.
그 선비 같은 자의 소년이 암암리에 강옥랑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과 강옥랑이 쌍사표국의 숨은 지도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조전해와 여봉이 중독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
다. 그들이 마신 술은 바로 그 선비 같은 자의 소년이 따라주었던
것이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돌연 대나무로 된 막대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필시 나를 물에 빠진 사람이라 착각하고 구하려 하는 것이겠구
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매우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눈을
감았다.
그는 여러 사람이 자기를 배위로 끌어올린 것을 느꼈다. 어떤
사람이 그의 가슴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녀석은 명이 꽤 길구나. 다행히 우리를 만났으니 말이다. 아
직 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들은 그에게 뜨거운 물을 마시게 하고 사지를 주물러 주었다.
이때 갑자기 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생긴 놈인가, 나에게 보여 주어라."
소어아는 또다시 사람들이 자기를 들어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감고 있었다. 갑자기 앞이 환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으로 보아 선창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 우렁찬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 놈이 죽었나 살았나?"
소어아는 그제서야 눈을 뜨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살았소!"
그는 눈을 뜨자 길고 굵은 담배대를 들고 있는 한 대한(大漢)을
발견했다.
그 대한은 쥐고 있던 담배대로 소어아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소
리쳤다.
"살아있었으면서 왜 죽은 시늉을 했느냐?"
소어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문득 무엇인가 이상한 생각
이 들었다. 소어아는 그 대한을 살펴보다가 가슴이 불룩하고. 허
리가 가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대한은 놀랍게도 여자였을 뿐만
아니라 몸집만 작다면 아주 미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소어아는 매우 다정하게 웃었다.
"당신은 여자이면서 왜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지요?"
그 눈이 큰 여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군줄 아느냐?"
"당신이 누구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어쩐
지 시집가기가 힘들것 같다는 말을 나는 해주고 싶소."
그는 원래부터 말을 삼가하지 않은 성미였다. 이 이 년 동안 그
는 무척 말을 삼가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지금 또다시 옛날
버릇이 되살아나 장난끼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 눈이 큰 여자는 대노했다.
"네가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소어아를 매고 들어온 소년들은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 그를 향
하여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소어아는 일부러 보지 못 한 척하
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왜 못 한단 말이오? 난 하고싶은 말은 하는 성미요."
그를 들어매고 들어온 소년들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단합비 어른의 따님이시고, 무예계에서 여맹상이라 칭
하는 분이다. 그러니 앞으로 말을 삼가해라!"
소어아는 웃었다.
"아가씨가 바로 단합비의 따님인줄은 몰랐구려! 아가씨의 부친
께서는 많은 은을 관외에 보내고자 한다던데 그런 일이 정말 있습
니까?"
소어아의 말은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여맹상의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나?"
소어아는 그녀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딴전을 피웠다.
"이배에 실은 약초는 관외에서 운반해온 것이오?"
여맹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움이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너는 어떻게 이 배에 약초가 실려 있는 것을 알았지?"
"나는 이배에 약초가 실려 있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약초들
이 인삼, 녹용, 계피, 오가자...... 란 것도 알고 있소!"
그는 한꺼번에 많은 약초의 이름을 말했다. 분명 그것들은 이
배에 실린 약초들이었다.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약초 속에
파묻혀 자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매우 흔해 빠진 약초 뿐만 아니
라 희귀한 약초들을 한군데에 몰아 넣고 알아맞추라고 해도 일일
히 알아맞출 수 있는 그였다.
여맹상은 더욱 놀라며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얼마가 지나
자 기쁨이 도사린 표정으로 바뀌더니 담뱃대를 빨았다. 그녀는 담
배연기를 소어아의 얼굴에다 내뿜었다.
"이 녀석이 약초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 줄은 미처 몰랐구나!"
소어아는 담배연기로 인해 눈물마저 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는 눈을 비비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약초에 대해서 그저 잘 아는 것만이 아니야. 남보다 더욱 많이
알고 있지. 만약 당신이 정말 여맹상이라면 나를 당신의 약국에서
일하도록 초처해야할 것이오."
여맹상은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어아의
얼굴에 뿜지는 않았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갑자기
한마디 말을 던졌다.
"이놈을 옷을 갈아 입힌 후 경여당으로 보내라."
안경 경여당은 안휘 지방에서 가장 큰 약방이라 할 수 있었다.
소어아는 그곳에서 약창고를 관리하는 두목이 되었다.
그는 매장에 와서 약을 팔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
킬 우려가 없었다. 매일같이 약 몇 가지를 조제하고 창고를 한 번
둘러보면 그가 할 일은 다 마치는 것이었다.
그는 며칠이 지나자 그 단합비란 사람이 양자강 근처에서 가장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근처의 돈벌이 될 만한 장사는 그
가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 여맹상이란 여인은 바로 그의 외동딸이었다. 원래 그녀에게
두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남
들이 모두 그녀를 삼소저라고 불러왔다.
그 삼소저란 여인은 자주 경여당에 찾아왔지만 소어아를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소어아도 또한 그녀를 상관하지 않았다. 소어
아는 그녀가 겉보기에는 무섭게 생겼지만 마음은 더없이 착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어아가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질 않자 그녀는 더욱 더
열심히 경여당에 찾아오곤 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서너 번씩 찾
아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어아를 보지는 않았다. 물론 소
어아는 더욱 상소저를 쳐다볼 리 만무했다. 그저 매우 재미있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어느날 소어아는 의자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겨울의 태
양빛이 그의 몸에 쏟아지고 있었기에 그는 매우 나른하여 눈을 지
그시 감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삼소저가 그의 앞에 걸어와 담뱃대로 그가 앉아 있
는 의자를 톡톡 두들겼다.
"이봐! 어서 일어나!"
소어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를 보았다.
"당신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이오?"
"이곳에 너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이봐가 아닙니다."
삼소저는 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껄껄 웃었다.
"저번에 너는 관외로 운반하고자 하는 은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
는데 어떻게 알았지?"
"왜요? 그 은이 어떻게라도 됐소?"
삼소저의 음성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 은을 남에게 강탈당했어!"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뺐겼다고?...... 그 은은 쌍사표국이 호송을 맡지 않았었소?"
"그들이 맡았지."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 일이다! 쌍사표국이 맡은 이상 빼앗길 이유가 없었을
텐데."
삼소저는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쌍사표국이 맡은 은은 잃어버리는 법이 없단 말이냐?......
흥! 내가 보기엔 그 이씨란 놈들은 원래부터 밥통이야!"
"그 이씨란 놈들을 밥통이 아닌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소."
"그것이 누구지?"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꺼냈다.
"그것엔 많은 사연들이 숨겨져 있으니 당신이 알 것은 못 됩니
다.
그리고 사실 나......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오."
삼소저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하나마나야."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한마디를 물었다.
"은을 가로채 간 자가 누군지 아시요."
"은은 야밤중에 객잔에서 갑자기 실종 되버렸어. 그런데 분명히
문을 연 적이 없고 창문도 꼭 닫혀있었다는 거야. 은을 지킨 사람
들도 분명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 했다더군. 마치 은이 스스로 날
개라도 달려 날아간 격이 되었지."
"그렇다면 정말로 괴상한 일이군요. 은을 가로챈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면 아마 은을 지켰던 쌍사표국의 사람들이 눈과 귀가 닫혀
있었던 모양이오."
"그들은 남을 원망할 수도 없게 됐지."
"그들이 배상하게 되나요?"
삼소저는 역시 냉소를 터뜨렸다.
"바지를 저당할망정 배상을 해야지."
소어아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더욱 괴상한 일이군. 나는 어쩌면 그들이 스스로 잃
어버린 척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물어줘야 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들이 먹통들이기 때문에 은을 잃어버린 것이야. 매우
단순한 일이지."
"보기에 단순한 일일수록 복잡한 내막이 있지요."
삼소저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이지?"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나도 무슨 뜻인줄 모르겠소."
삼소저는 웃음띤 얼굴로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바보냐 아니면 천재냐?"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약 바보였다면 생활이 아마 지금 보다는 훨씬 즐거웠을
것이오."
약(藥)을 찾는 사람들
이튿날도 역시 태양이 찬란한 맑은 날씨였다. 소어아는 여전히
그의 자리에 앉아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그는 사지를 쭉 뻗고 매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
은 마치 모든 잡념을 잊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많은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은이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누가 그 은을 가로챘을까?)
그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때 삼소저가 다시 나타났다.
소어아는 살며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는 재빠른 걸음으로 소어아 앞에 다가섰다. 그녀는 큰소
리로 말을 건네왔다.
"이봐, 너의 예측이 틀렸어."
소어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하는 말
에 흥미를 느껴 즉시 되물었다.
"그 일은 단순해, 조금도 복잡하지 않아."
"그래요?"
"내가 조금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 은을 다시 찾아왔다고
하더군."
소어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누가 찾아왔다고 합디까?"
"그 사람은 너와 비슷한 나이인데 실력만은 너와 천지차이래.
너도 만약 이렇게 게으르지만 않았다면 혹시 그의 십분의 일쯤은
따를 수 있을런 지도 모르지."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강옥랑이라는 사람이 아니오?"
순간 삼소저는 멈칫했다.
"네가 그를 어떻게 알지?"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알지요. 알고 말고요...... 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
소......."
삼소저는 그가 미친 듯 웃는 것을 보자 한참이나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미친거 아냐?"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껄껄거리며 웃었다.
소어아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 아래 빨간 장삼을
걸친 삼소저가 차가운 바람 속에 서있었다.
그녀를 본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야밤에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이오? 만약 입맞추어 달라고 온
것이라면 내일까지 기다릴 수도 있지 않소?"
삼소저는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
어 얼굴까지 붉혔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너에게 알려주려고 이렇게 찾아 왔어."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이런 야밤을 무릅쓰고 찾아왔소?"
삼소저는 크게 숨을 들어 마셨다.
"그 일은 과연 단순하지가 않더군."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단 말이오?"
"그래...... 내가 조금 전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 은을 다시 잃
었다는 거야."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크게 놀라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창문 밖
으로 뛰어나왔다.
"그 소식이 확실하오?"
"틀림없어."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은을 다시 잃다니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누가 그 은을 뺏어갔단 말이오?"
삼소저의 입에서는 한숨이 섞여 나왔다.
"몰라."
"이번에도 야밤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오? 쌍사표국의 표두들이
이번에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 했단 말이오? 그들이 같은 장난
을 또다시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어리석지 않을까? 그들처
럼 총명한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일을 했을까?"
"이번에는 전과 달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오? 이번에 잃은 은은 그들이 배상할 필
요가 없단 말이오!"
"그래. 확실히 그들은 배상하지 않아도 돼."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어째서......?"
삼소저는 고개를 숙이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원인은 간단하지. 쌍사표국의 표두, 표사 그리고 일꾼들인 아
흔 여덟 사람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었어. 남은 자라곤 오직
한명의 마부 뿐이야."
소어아는 할 말을 잊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갑작
스레 큰소리로 물었다.
"그 강옥랑은 어디 갔소?"
"강옥랑은 쌍사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가 은을 찾아오지 않았소."
"그는 은을 찾아온 후 하루도 머물지 않고 즉시 떠나갔어. 그것
이 영웅호걸이 행하는 길이 아닐까?"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낄낄 웃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웃음
은 냉소로 변했다.
"참으로 훌륭한 영웅호걸이군! 아마 그는 벌써부터 은을 다시
이 잃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을 거요."
"너의 말은 두번째 은을 강탈한 사람이 첫번째와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가능성이 없단 말이오?"
"불가능해."
"무슨 이유로?"
"첫번째 은을 강탈해간 자는 이미 강옥랑에게 살해됐어. 그는
은을 가지고 올 때 강탈해간 사람의 목아지도 함께 가져왔지."
"악독한 수단이로군!"
삼소저는 한참이나 그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
다.
"또, 두번째 은을 강탈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어. 쌍사표국의
아흔 여덟 명의 생명이 그 한 사람의 손에 끝이 난 거야."
소어아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아흔 여덟 명의 생명
을 앗아갔단 말이오? 무예계에서 누가 이토록 악독한 수단을 지니
고 있단 말이오?"
"듣자니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라 하더군."
"그를 본 자가 있었소?"
"물론 유일하게 죽지 않은 그 마부이지."
"그렇다면 그는 왜 살해되지 않았지?"
삼소저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비명소리가 들리자 급히 말먹이통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고 하더군. 비명소리가 약 서너 잔의 차가 식을 시간 정도밖에 계
속되지 않았다는 거야."
"음! 매우 빠른 실력이로구나!"
삼소저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이 살해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 마부가 느끼
기에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는 그 거대
한 노인이 칼을 들고 미친 듯이 웃으며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데.
그 노인은 원래는 흰색옷을 입고 있었는데 걸어나올 때는 완전히
핏물로 물들어 빨간색이 되었다고 하더군."
소어아는 그녀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했다. 그는 냉소
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 마부가 매우 자세하게도 보았군요."
"그는 그저 한 번 바라본 후 더 이상 볼 용기가 없어서 날이 밝
은 후에 기어나왔는데 그때 그의 은은 완전히 식은 땀에 젖어 있
었다고 해."
소어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꼭 옛이야기 같이 들리는데...... 죽음에서 겨우
살아난 사람이 모든 점을 그토록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과연 천재라 아니할 수 없군요."
삼소저는 싱긋이 웃었다.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도 그 사람의 기억력이 매우 비상하다고
생각했지."
"당신은 언제 그 소식을 들었소?"
"바로 반 시간 전에 들었어."
"그 일은 언제쯤 발생 했었지요."
"어젯밤에 발생한 것이야."
"소식이 어떻게 이토록 빨리 올 수 있었나요."
"비둘기로 편지가 날아온 것이야.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수천
리 내의 일흔 여덟 군데의 마을엔 모두 우리집에서 설치해 놓은
비둘기 통이 있지."
"당신은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나에게 알려주려고 달려왔소?"
삼소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소어아는 갑자기 음성을 높였다.
"내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토록 급히 나에게 전해주
려고 한 것이오? 당신은 밥먹고 할 일이 없소?"
삼소저는 멈칫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것은...... 나는......."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며 호령하듯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 은을 훔친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
단 말이오?"
삼소저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이란 말이오?"
삼소저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얼굴마저 빨개졌다. 그러나 그녀
는 역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음성으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오직...... 오로지 네가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상
하게 여긴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거야......."
"친구라고? 나는 단지 당신이 고용한 일꾼에 불과한데 왜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삼소저의 얼굴은 더욱 더 빨개지면서 더욱 낮게 숙였다. 그러더
니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우물거렸다.
"나...... 나도 잘 모르겠어."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껄껄 웃었다.
삼소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왜...... 웃는 거야?"
"내가 당신을 안 이후 처음으로 당신을 여자 같다고 느꼈소."
삼소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있더니 갑자기 소리
내어 통곡했다. 그녀의 온몸은 힘이 완전히 빠진 듯 맥없이 벽에
쓰러졌다.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우는 것이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도 여자 취급을 받
아보지 못 했어. 심지어 아버지도 나를 남자로 취급했으니 말이
야. 그러나 나...... 나는 분명히 여자야."
소어아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남자로 취급받는다면 확실히 괴로운 일이었겠지요."
삼소저는 몸을 돌려 소어아의 품으로 기어 들었다.
"오직 너만이 나를 여자로 취급했어."
그녀의 음성은 약간 상기된 채 떨고 있었다.
소어아는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그저 고개 만
끄덕이며 달래기에 바빴다.
"그런...... 암 그렇고 말고. 당신은 원래부터 여자이니 누구라
도 여자로서 대해줘야지."
"그러기에 난...... 난 널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또한
그렇기에 나는 내가 궁금히 여기는 모든 일을 말한 거야. 이 세상
에 너 외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 정말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그들은 모두 내가 배짱이 좋고 매우 사납고 무섭다고 생각하
지. 그러나 사실..... 사실 나도 여자야. 세상의 모든 여자와 똑
같은 여자야."
"옳은 말이오. 그들은 확실히 당신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삼소저는 흐느낌을 점점 그쳐갔다. 그녀는 소어아의 어깨에 몸
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모두 괜찮지만 오직 허전한 것만은 참지 못 하겠어.
어떤 땐 너무 허전해서 미칠 것만 같아.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어."
그녀는 이제 소어아가 자기의 연인인 양 속마음에 간직하고 있
는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하였다.
"당신은 실로 가련한 여인이군요."
소어아는 위로의 말을 했다.
삼소저는 신음과 같은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너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지금 나에게 당장 죽으라고 해도
서슴지 않고 죽을 수 있겠어. 아무런 한도 없이 말이야."
"그러나 나는 당신을 조금도 동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말을 들은 삼소저는 갑자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너...... 너......."
"당신은 남의 동정을 받고 싶은 거요?"
삼소저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아무말도 하지를 못 했다.
소어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남에게 여자 취급을 받고 싶지요?"
"원래부터 여자이니 당연히 여자취급을 받아야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악이 바친 듯한 음성이었다.
소어아는 웃었다.
"당신이 진정 남에게 여자로 취급을 받고 싶다면 우선 자신 스
스로가 여자 행세를 해야 되지 않겠소? 그런데 당신은 매일 같이
남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니 어찌 남에게 여자 취급을 받을 수 있
겠소."
삼소저는 달려와 손을 번쩍들고 소어아의 따귀를 후려치려 했
다.
그러나 그 손은 끝내 소어아의 뺨을 후려치지는 못 했다. 한참
이나 멍하고 서있던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이봐요 삼소저. 돌아가서 내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그
은에 관해서는 지금의 나로선 확실한 대답을 해줄 수 없소. 그러
나 보름 내로 진상을 알려 드리겠소."
말을 마친 그는 또다시 창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창문을 닫으며 살며시 그 틈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삼소저는 아직도 멍하니 서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그제
서야 떠나갔다.
소어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여자! 여자는 왜 이리 귀찮을까?...... 제아무리 성격이 괄괄
한 여자도 귀찮게 구는 점만은 매일반이구나."
소어아는 매우 깊은 잠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은을 잃은 사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그 일에 대한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단지 그의 예측을 증명하는 것 뿐이었다.
그가 매우 달게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사람들이 그의 방 안으로
들이닥쳐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려 앉혔다. 옷을 입히며 신발을 신
기고 난리가 났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약방의 대리주인도 끼어 있었다. 소어아
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월급날도 안 됐는데 벌써 사람을 납치하려고 합니까?"
대리주인은 그의 단추를 끼어주며 옷음띤 얼굴로 말했다.
"놀라우면서도 기쁜 소식을 알려주마..... 주인 어른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그는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인 어른께서 종업원을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일이다. 그런데
오늘 놀랍게도 이곳 안경에 찾아오셨을 뿐만 아니라 즉시 너를 만
나자고 하시니 이것은 너에게 큰 영광이다."
이리하여 그는 영문도 모르게 마차에 끌려 올라갔다. 약 한 잔
의 차가 식을 시간이 지나자 거창하게 큰 장원 앞에 당도했다. 그
는 장원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이 장원은 너무나도 큰 까닭에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
다. 소어아는 준수한 소년을 따라서 약 한 잔의 차가 식을 시간을
걸은 후에야 뒷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뜰 안에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고, 자
그마한 정자가 꽃밭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경치는 실로 그림과
같이 아름다와 보였다.
그를 인도해 준 소년이 앞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주인 어른께선 바로 저 방 안에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
오."
소어아는 문앞에 서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금빛 찬란한 치마에다 푸른색에 흰 꽃무늬가 수놓아진
비단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연지를 약간 바르고 있었고 높
게 빗겨 올려진 머리채에는 금으로 만든 봉황새 모양의 비녀가 꽂
혀 있었다. 또 포도알만한 크기의 진주가 그녀의 귀바퀴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소어아는 그녀가 바로 여맹상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삼소저인 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분명히 소어아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봤으면서도 역시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저 살며시 그에게 눈짓만 보냈다.
이 광경을 본 소어아는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만약 그녀의
옆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을 보지 못 했다면 벌써 웃었을 것
이다.
바닥에는 두터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큰 옷을 걸친 통통한 사
람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얼른 보기에 그는 마치 큰 공과 흡사
했다.
그의 앞에는 백옥으로 만든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백옥
상자는 한 개의 백옥 덩어리를 깎아만든 것이었는데 크기는 작아
도 만 냥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한 마리의 귀뚜라미였다.
소어아는 몸을 굽히고 한참이나 그 귀뚜라미를 바라보았다. 그
러더니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 놈은 많은 사람을 죽였겠습니다."
그 통통한 사람이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도 귀뚜라미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애를 낳는 것만 제외하고는 제가 모르는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그 통통한 사나이가 낄낄 웃었다. 기쁜 표정이었다.
"얘야, 네가 말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냐?"
이 사람이 바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재번 단합비였다.
삼소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단합비는 또다시 껄껄 웃었다.
"너의 사람 보는 눈도 제법 쓸만하구나."
소어아는 어리둥절했다.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무말도 하지 말아라.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말이다...... 자 우선 나를 일으켜라. 힘 주고...... 그래야지 착
한 아기지."
그는 겨우 바닥에서 일어섰다.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그의 모습
은 마치 십여 리의 길을 걸어 온 사람 같았다. 그는 가슴을 매만
지며 호흡을 조절했다.
"너는 불고기의 진미를 알고 있느냐? 어떤 산해진미도 불고기를
따라가지는 못 한다."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대체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단합비는 손을 저으며 인자한 얼굴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무 것도 알 필요 없다......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줄 테니 말이다. 너는 그저 여기서 밥이나 먹어라. 나의 요
리사가 만든 불고기는 천하 제일이라 할 수 있단다."
그는 아무말도 못 하고 불고기만 먹었다. 단합비는 전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새벽에 달게 잠자다가 불려와서
하루종일 먹고 놀다가 날이 저물자 다시 약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슨 까닭으로 자신이 단합비에게 불려 갔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
가 다르게 느낀 것은 경여당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소어아를 지극히 존대했고 그 앞에서 공손해졌다. 소어
아는 궁금했지만 그 누구도 별 말을 해주지 않았다.
소어아는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으로 목욕을 한 후
침대에 누웠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자, 육계, 서각, 웅담......."
그 약들은 큰 추위나 혹은 큰 열이 났을 때 병을 치료하는 약들
이었다. 뒤이어서 대리주인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이 약방에 있는대로 모두 주시오. 조금도 남김없이 말이오."
이때 다른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경여당엔 약창고가 있겠지. 우리를 약창고까지 인도해라."
이 사람의 음성은 매우 크고 우렁찼다.
소어아는 이 말들을 듣자 문득 무언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일어나 문을 열어보자 대리주인이 이미 두 대한의 사이에 끼
어 억지로 끌려가고 있었다.
소어아는 살며시 뜰에 숨어 들어가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 보
았다. 약방의 종업원은 과연 그들이 요구하는 약초를 통째로 모아
큰 보따리에 쌌다.
소어아는 작은 돌을 주워 들었다. 그들이 약 보따리를 문밖에
있는 마차 위에 실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가볍게 그 돌을 튕겼다.
그 돌은 '쉭'하고 허공을 가르며 약보따리의 한 구석을 때렸다.
불빛이 별로 밝지 않은데다 그의 동작이 매우 재빨랐기 때문에 그
누구도 눈치 채지는 못 했다.
그는 이 일을 처리한 후 뜰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하늘에 반짝거
리는 별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또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려는 모양이로구나......."
밤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매우 잠잠했고 약방의 종업원
들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여전히 별빛
이 감싸주는 뜰에 앉아 있었다. 이토록 조용하고 한적한 밤에 그
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별안간 조용한 밤공기를 가르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
아는 곧 긴장을 하고 유심히 그 소리를 들었다.
말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말발굽 소리가 일제히 멈추었다.
곧이어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라, 빨리 문을 열어라. 급한 환자가 있으니 약초를 조
금 파시오."
우렁찬 외침소리 속에는 초조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자고 있던 종업원들은 그 외침소리에 일제히 깨어났다. 응답하
는 소리, 재촉하는 소리, 문 여는 소리로 순식간에 밤의 적막이
깨졌다.
소어아는 중얼거렸다.
"만약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이들 세 사람은 틀림없이 부자, 육
계, 서각, 웅담 등 이미 조금 전에 다 팔려버린 약초를 찾을 것이
다."
그의 짐작은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조급한 음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부자, 육계, 서각, 웅담......."
점원들은 놀랐다. 오늘은 왜 이리 그 약들을 찾는 사람이 많을
까? 그들의 대답은 물론 '없다'였다.
그 조급한 음성의 소유자는 이 말을 듣자 더욱 조급해 했다. 돌
연 성질을 벌컥내며 말했다.
"이토록 큰 약방에 어찌 그런 약들이 없다는 말이오?"
그 사람은 키가 여섯 자밖에 안 됐고 예리한 눈에 핏발이 가득
서있었다. 점원은 살기가 가득찬 그의 표정을 보자 감히 대들지는
못 하고 웃음띤 얼굴로 좋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 약방은 백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슨 약이
든 모두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이 약초들을
두 시간 전에 모두 팔렸습니다. 어른께서는 다른 곳을 찾아가 보
십시오. 혹시 다른 곳엔 있을런 지도 모르니까요."
소어아는 살며시 걸어가 약방 안을 살폈다. 그 대한의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보였다. 그는 안타까운 듯 왔다갔다 하며 어
쩔줄 모르고 있었다.
"이 성 안에 있는 모든 약방에 어찌 그 약들만 떨어졌단 말이
냐?"
약방의 문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한 명의 대한이 문 밖에서 두
필의 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의 입에는 흰 거품이 가득
차 있었고, 먼 길을 달렸는지 땀에 젖은 몸집이 불빛에 번들거렸
다.
또다른 한 사람은 말 위에 앉아 약간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사람은 검은 수건으로 머리채를 감싸고 있었고 검은 옷을 걸
치고 있었다. 별빛이 그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여자였다.
손에 촛불을 든 점원은 그들을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돌연 촛불이 흔들리며 말 위에 앉아 있던 흑의 여인이 몸
을 날려 점원 앞으로 다가셨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녀의 눈동자는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점원은 놀라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촛불이 흔
들리자 뜨거운 촛농이 흘러내려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는 뜨거
움을 참지 못 하여 촛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촛불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흑의 여인의 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촛불 또한 꺼지지 않았
다.
밝은 촛불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창백하여 마치 죽은 시체가 관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점원을 주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 약들은 같은 사람이 사갔나?"
점원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더듬거렸다.
"네...... 두 사람이 한꺼번에 그 약들을 통째로 사갔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날카롭고 차가와졌고 원망이 가득찬 듯했
다.
그 점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갔다.
"모...... 모릅니다....... 저희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어찌 감
히 고객의 내막을 알려고 하겠습니까?"
흑의 여인의 예리한 눈동자는 아직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
치 그가 말한 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려는 것 같았다.
그 점원은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다행히 그 흑의 여
인은 몸을 돌려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갔다.
밤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이 한 장의 종이를 날렸다.
그 점원은 마치 꿈을 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촛불이 땅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몸을 숙여 촛불
을 들었다.
촛불이 돌연 또다시 흔들거렸다. 그 점원은 재차 놀라며 방금
들었던 촛불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촛불은 이번에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았고 또한 꺼
지지도 않았다. 번개 같은 손이 또다시 그 촛불을 받았던 것이다.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든 그는 소어아를 발견했다.
소어아는 촛불을 든 채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그녀일 줄은 미처 몰랐구나!"
점원은 그가 바로 소어아인 것을 알고야 조금 안심한 듯 가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당...... 당신은 저 여인을 아시나요?"
"물론 알고 말고!"
"그...... 그녀는 누구입니까?"
"그녀의 이름은 하노라 하며 이화궁의 시녀란다......."
그는 말을 하며 몸을 굽혀 바람에 날리고 있는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그 종이 위에는 약국의 이름들이 쭉 적혀 있었다.
그 점원도 다가와 그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
았다. 그 약국 이름을 본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것은 우리 성 안과 성 근처에 있는 모든 약방들의 이름들인
데......."
소어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 종이를 버리고 간 것을 보니 필시 이 근처에 있는 모든 약
국을 다 뒤지고도 그 약초를 구하지 못 했다는 증거다......."
"이상해요. 왜 사람들이 갑자기 그 약초들을 구하려 할까요?"
"그야 물론 그들에게 괴상한 병을 앓는 환자가 있는 까닭이겠
지."
점원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무슨 병일까요? 얼마나 큰 추위와 큰 열이기에 그 약으로 치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무슨 병인줄 알고 있나요?"
그는 고개를 들며 소어아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촛불이 또다
시 땅바닥에 놓여져 있을 뿐 소어아는 이미 온데 간데 없었다.
대장원(大莊園)에서의 추격
소어아는 몇 채의 건물을 날아 지나가자 곧 그 세 필의 말을 발
견할 수 있었다. 말이 달리는 속도도 매우 빨랐지만 소어아의 신
법을 당할 리는 만무했다. 말은 길을 달리고 있었고, 소어아는 지
붕 위로 추격하고 있었다.
(하노가 무슨 이유로 급히 그 약초를 구하려 하는 것일까? 무슨
독이길래 이화궁의 영약(靈藥)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단 말인가?)
그는 문득 뭔가를 알아낸 듯 또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을 놓은 사람은 벌써부터 그들이 그 몇 가지의 해독약을 필
요로 할 줄 알고 미리 성 근처에 있는 약을 모조리 사갔다. 이것
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그들은 중독된 사람을 사지로 몰아 넣을
속셈이다. 이토록 악독한 수단을 지니고 있는 자가 과연 누굴까?
중독된 사람은 누굴까? 혹시 화무결이?)
말은 약 두세 잔의 차가 식을 시간을 달린 후 드디어 어느 높은
담 앞에서 멈추었다. 담 아래는 자그마한 문이 있었는데 어떤 부
잣집의 뒷문인 것 같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하노는 말에서 내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어아도 허공에 몸을
솟구쳐 박쥐처럼 높은 담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담 안에는 큰 뜰이 있었고, 흐르는 시냇물과 구름다리 그리고
수풀 속에 파묻혀 있는 정자가 한 채 있었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
경치는 실로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풀 속으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하노는 그 길을 달렸다. 소어아는 나뭇가지 위에 날아 올라가
그녀를 따라 소리없이 추격했다.
그녀는 이윽고 수풀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소어아도 이미 수풀
속에 파묻혀 있는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어아는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그의 시야에 화무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준수하고 자신만만했던 얼굴이 지금은 초
조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하노를 보자 곧 다급히 물었다.
"약은 어디에 있느냐?"
하노는 작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못 구했습니다."
사실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화무결은 이미 그녀의 표정에
서 일의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듣자 얼굴
색이 크게 변했다.
"왜?......못 구했단 말이냐?"
평상시 화무결의 일거 일동은 매우 침착하고 조용했을 뿐만 아
니라 여자를 대할 때는 더욱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지금
의 그의 태도는 안절부절 못 하고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소어아는 그의 행동을 보고 중독된 자가 필시 그와 매우 친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화무결은 보기에는 매우 다정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더없이 오
만한 사람이라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
다.
(도대체 누가 중독이 됐길래 저토록 신경을 쓰는 것일까?)
소어아는 그 중독된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느라고 하노와 화
무결이 또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을 듣지 못 했다.
그가 다시 그들에게 주의했을 때 그들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
고 있었다.
창호지 위로 불빛에 비친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그림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약간 떠는 듯 그 모습이 매우 초조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물론 화무결이었다.
또 한 그림자는 높은 모자에 긴 수염을 길렀고 단정히 앉아 있
는 모습이 매우 엄숙해 보였다. 소어아는 한참이나 주의깊게 그를
바라 보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돌연 한줄기의 침착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도와 주는 법이니 공자께서는 너무 걱정하
지 마십시오...... 실은 하노 소저께서 이번에 빈 손으로 돌아 오
리라고 저는 이미 짐작했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이때 화무결의 한숨 소리와 함께 말하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몇 가지 약은 귀중한 것이지만 구하기 힘든 약은 아니지 않
습니까? 이토록 크나큰 안경성에서 그 몇 가지 약을 구하지 못 한
다니 말이 됩니까!"
"이것은 매우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자님은 지
금 너무 당황하고 초조해 있기 때문에 생각해내지 못 하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그 독을 놓은 사람은 자기가 놓은 독이 큰 추위와 큰 열의 약
으로만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는 공자님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렇
다면 그가 이 성 근처의 약을 모조리 사가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이
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음성은 강별학이의 목소리었다.
그의 악독한 수단과 영악한 지혜를 생각하자 소어아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소어아는 숨소리조차 주의하며 가만히 귀를 기
울였다.
화무결의 원한이 가득찬 음성이 들려왔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 자는 필시 벌써부터 저의 영약으로도 그
빙설정영의 독을 해독할 수 없다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
데...... 그는 그녀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렇게 사지에 몰아 넣
으려고 하는 것이죠!"
소어아는 이들이 말하는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알 길
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란 여인이 누구인지도 도무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매우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강별학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자가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어쩌면 그녀가 아니고 공자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화무결의 음성도 들려왔다.
"하지만 저는 강호에 나온 후 누구와도 원한을 맺은 일이 없습
니다. 그런데 그는 왜 저를 해치려고 했을까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요? 저는 도저히 그럴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
다."
"공자님이 그 자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다면 제가 알아낼 수 있
습니다."
화무결은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
다. 잠시 후 그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당신의 뜻은......."
강별학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공자님이 철소저의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저를 따라 다녀올 수
만 있다면 저는 그 범인을 알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철소저! 중독된 사람이 철심난이란 말인가!)
소어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자칫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질 뻔했
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작지 않은 소리를 냈다.
순간 화무결의 그림자가 일어섰고 사나운 음성이 아울러 들려왔
다.
"누구냐?"
소어아는 크게 긴장되어 갑자기 당황해버렸다.
이때 강별학의 음성이 뒤따라 들려왔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불과한데 무슨 사람이 있
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너무 신경과민이시군요. 아무 걱정하지 말
고 우선 저와 같이 철소저의 병세나 살펴 보십시다."
그들의 그림자가 창가에서 사라졌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정히 하느님이 도와 주는 것이다. 강별학은 매우 영악
한 놈인데 오늘 만큼은 실수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문득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강별학은 매우 영악한 놈이라 절대로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
을 것이다. 그러니 필시 그가 또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것이
다!)
소어아는 실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강별학의 속
셈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는 즉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역시 때가 늦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두 줄기의 인영이 제비 같이 허공을 솟구쳐 지나왔던 것이
다.
소어아는 놀라움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그들은 강
별학과 화무결이었다.
화무결의 반짝거리는 눈에는 원한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아마
그는 소어아가 독을 놓은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강별학의 몸도 비록 허공을 날고는 있었지만 화무결보다는 뒤떨
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경공이 화무결을 따르지 못 하기 때문
이아니라 자기가 앞장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계산한 까닭이
었다.
소어아는 무공이 몇 년 동안 많이 진전되기는 했지만 이 두 사
람보다는 아직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죽
음의 고비를 넘겼기에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하체에다 진기를 집중시켰다. 앉아 있던
나뭇가지가 즉시 '부지직'하며 끊어지며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갔다.
강별학과 화무결은 공격태세를 갖추고 몸을 솟구쳤기 때문에 그
위력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 같았다. 소어아가 만약 옆으로나 혹
위로 피했다면 필시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
었을 뿐만 아니라 도망갈 기회도 생겼다.
강별학과 화무결은 급격히 방향을 변경할 수가 없었고 몸을 돌
린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였다. 소어아는 재빨리 그들의 발 밑을
지나 달려 갔다.
선기(先機)를 잡은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앞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그들이 몸을 돌리고 추격할 때는 이미 늦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순간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소어아의 지금 경
공으로는 충분히 도망갈 수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임기응변은 정말 재빠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공을 나르고 있던 강별학은 몸을 멈추지는 못 했지만
손바닥을 재빠르게 뒤로 내밀었다. 많은 은빛들이 소어아의 등을
향하여 덮쳐갔다. 그는 손에 벌써부터 암기를 쥐고 있었던 것이
다.
또한 허공을 나르고 있던 화무결도 갑자기 한 발을 내밀어 나뭇
가지를 걷어차며 나뭇가지의 힘으로 탄력을 이용해 몸의 방향을
변경했다.
그의 이러한 동작은 실로 빨랐다. 강별학이 뿜어낸 암기의 속도
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이 변화는 극히 짧은 시간에 발생했다.
소어아가 암기가 허공을 스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은빛의 암
기들이 이미 그의 등에 적중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의 몸은 허공을 날고 있었기에 더욱 위로 솟구칠 수는 없었
다. 그는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리며 번개같이 옆으로 굴렀다. '
푹, 푹,......' 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려왔다. 암기들은 모두 그
의 옆 땅바닥에 박혔다.
사지에서 겨우 벗어난 소어아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화무결이
벌서 자기의 머리 위에 당도한 것을 발견했다.
도망하기는 커녕 피할 곳조차 없었다.
허공을 날고 있던 화무결은 갑자기 곤두박질하며 소어아를 향하
여 쌍장을 일제히 퍼부었다.
그의 신형(身形)은 하늘을 누비는 용과 같이 민첩했다. 하늘을
덮을 듯한 장력은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위세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땅바닥에 박혀있던 암기들이 무슨 압력을 받
아서인지 갑자기 튕겨나와 화무결을 향하여 날아갔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던 까닭에 화무결로서도 전혀
피할 길이 없었다.
강별학도 상대방이 자기가 뿜어낸 암기를 무기로 삼을 것이라고
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그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화무결은 격(擊)하던 쌍장을 갑자기 합하였다. 그 암기들
은 그의 손바닥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손에서 튕겨졌다.
소어아는 장풍으로 땅바닥에 박힌 암기를 튕겨 솟구치게 한 후
뒤로 솟구쳐 물러나며 다급한 정세 속에서도 눈길을 힐끗 돌려봤
다.
화무결의 그런 놀랄만한 내력을 보자 감탄을 금치 못 하여 큰소
리로 외쳤다.
"멋지군!"
강별학도 그의 불가사의한 임기응변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친구. 자네는 매우 멋진 신력을 지니고 있군. 그런데 무
슨 용건으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말해줄 수는 없겠나?"
소어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것은 내일 만나서 이야기 합시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하
겠소!"
화무결이 말을 받았다.
"이것 보시오. 당신은 너무 훌륭한 신력을 지니고 있어 불초가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애석하오."
그러나 소어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력을 다
하여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겹겹이 쌓인 건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나쳤으나 아직도
그 집을 벗어나지는 못 했다.
(이것은 누구의 집이기에 이토록 넓단 말인가?)
이때 강별학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보아하니 저 친구는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신력이 훌륭할 뿐
만아니라 지호 또한 뛰어나니 무예계에 젊은 영웅이 나타난 것이
오. 불초가 만약 사귀지 않는다면 불초의 죄가 아니겠소?"
그는 말투가 여유만만한 것이 소어아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지 못 하게 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
화무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옳은 말씀입니다. 오직 경공만해도 중원의 일인자는 못 되더라
도 손꼽힐 정도로는 충분합니다."
강별학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이자는 경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내력 또한 무척이나 두터우니
잡을 수 있을런 지 큰 의문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소어아는 지붕 위에서 뛰어 내렸다. 뜰의
길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나무가 엄청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강별학은 그가 지붕 아래로 뛰어 내려갈까봐 잡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얘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영악한 사람이었기 때
문에 강별학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활로를 알아낸 것이었다. 만약
강별학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놀라움과 당황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하지 못 했을 수도 있었다.
강별학은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실책을 탓했다.
소어아는 수풀 속을 한동안 달리다가 한 창문을 열고는 재빨리
날아 들어갔다.
밤이었기에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는 장원이 이토록 크니
빈 방이 필시 많을 것이라 생각하여 무조건 뛰쳐 들어왔던 것이
다.
과연 그곳은 빈 방이었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비로소 숨을 돌렸다. 그러나 순간 '쉭'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화무결이 이미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고 곧 뒤따
라 강별학도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방 안은 매우 어두 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던 소어아는 매우 어두웠던 까닭에 상에 부딪혀버
리고 말았다.
강별학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 순순히 나오시오. 불초는 강별학이라 부르오. 친구
가 내력을 밝힌다면 불초는 강남의 대협이라는 명성을 걸고 친구
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보장하겠소."
소어아는 그저 잠잠히 숨을 죽였다. 강별학의 음성이 또다시 어
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만약 불초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중엔 후회해도 늦소."
소어아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살며시 부딪쳤던 상을 들어
강별학의 음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왼
쪽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는 왼쪽 구석에 필시 문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던 까닭에 그쪽
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과연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 상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문을 열고 달려들어갔다.
그 방은 밖의 방보다 더욱 어두웠다. 그러나 어둠은 그에게 유
리한 것이었다. 소어아는 어둠 속에 숨어 속으로 어떻게 도망갈까
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강별학
이 밖에서 불을 밝힌 것이었다.
불빛이 밝혀지자 화무결이 곧 안으로 들어왔다.
소어아는 재빨리 방에 있는 의자를 들어 그를 향하여 내던지며
번개 같은 속도로 후퇴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창문을
뚫고 나갔다. 허공을 나른 그는 곤두박질을 하더니 또다른 한 창
문을 뚫고 들어갔다.
그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자 장원에서 자던 모든 사람들이 깨어
났고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강별학이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장원 안에 살인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이곳에
있으니 여러분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사방에 불을 밝혀
주시고 나와서 돌아 다니지만 않는다면 고맙겠습니다."
소어아는 강별학의 이러한 말을 듣자 정신이 아련해왔다. 장원
안이 크게 소란해지면 도망가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더
욱이 불이 밝혀지면 도망가기는 커녕 숨을 곳조차 없어지게 될 것
이 뻔했다.
사방에서는 계속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협의 음성이다. 우리는 강 대협의 분부에 복종해야 한
다."
뜰 안팎의 모든 불이 완전히 밝혀졌다.
소어아는 고개를 돌려 자기가 숨어 있는 방을 두루 살폈다. 비
로소 이곳이 서재인 것을 알았다. 이 서재의 장식은 매우 아담했
다. 그러나 상 위에는 이상하게도 수예용 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서재 안에 어찌 여자가 쓰는 수예기구가 있을까?)
이때 강별학과 화무결이 서재의 창문 밖에 당도했다.
소어아는 방문을 향하여 급히 물러섰다.
이때 문 뒤에서 갑자기 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요?"
이것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문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소어아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
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즉시 기쁨으로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서성대지 않고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별학은 자신의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 여자의 방으로
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화무결 또한 여자 앞에서 실례를 범하
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침대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자 번개같이 그녀
에게 덮쳐가 그녀의 입을 막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
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면 아무소리도 내지 말아라!"
그는 알지도 못 하는 남의 처녀 방 안으로 달려들어 왔기에 좀
미안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록 여인의 입과 어깨를 눌
렀지만 그리 힘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의 힘은 매우 거셌으며 실력 또한 보통이 아니었
다. 소어아는 양손을 도리어 그녀에게 낚아 채였다.
소어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힘을 주어 양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를 깔고 앉아 팔꿈치로 그의 목구멍을 세차
게 누르고 있었다.
소어아는 약간의 실책으로 그녀에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는 있는 기력을 다하여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조금도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한숨을 쉬
며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래도 여자에게 당할 팔자인가 보군!"
이때 강별학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소저, 그 강도가 소저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과연 소어아의 예측대로 그는 들어오지는 못 하고 그저 밖에서
물어볼 뿐이었다.
소어아는 두 눈을 감고 잡아 가길 기다렸다.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조금 전에 어떤 사내가 방 안으로 달려 들어 왔어요.
그러나 그는 이미 뒷창문으로 달아났어요. 그 방향으로 미루어 보
아 꽃밭이 있는 곳 같으니 강 대협께서는 어서 그곳으로 가보세
요."
소어아는 여인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밖에서 강별학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소어아는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멍하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아 주었다.
소어아는 드디어 참지 못 하고 물었다.
"소......소저께서 왜 저를 구했습니까?"
그 여자는 그의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도리어 창문의 비단천을
내렸다.
어두웠던 방 안은 더욱 어두컴컴해졌다. 소어아는 재빨리 침대
에서 일어나 정색을 하며 물었다.
"불초는 소저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해줬으니 그 이
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군요?"
"당신이 나와 정말 초면인가요?"
"저를 아는 여인이라면 모두 저를 죽이려하지 절대로 저를 구하
지는 않습니다."
그 여인은 깔깔 웃었다.
"당신은 나의 음성조차 몰라보는 것을 보니 크게 당황한 모양이
군요."
그녀의 조금 전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고 속삭이는 듯한 것이
었으나 지금의 이 웃음은 남자의 패기가 가득차 있었다.
소어아는 즉시 그녀의 음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놀라움이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당신은 삼소저요?"
"드디어 나를 생각했군요."
소어아는 놀랍고도 기뻤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소?"
"여기가 나의 집인데 여기에 있지 않고 어디로 가라는 말이지
요?"
소어아는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째서 이곳이 바로 단합비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했단 말인가? 좌우지간 이 놈의 집은 정말 엄청나게 크군요.
어디가 나가는 길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삼소저도 웃음띤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나도 이 집안에서 길을 잃어 버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강별학과 화무결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소?"
"바로 강탈당한 그 은 때문에 온 거예요."
"정말 우연한 일들이군요. 강별학이 당신의 집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당신의 방으로 달려들어올 줄이야......."
삼소저는 웃었다.
"그들은 내가 당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마 꿈 속에서도 생각
지 못 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어찌 당신의 말을 믿
겠소?"
강별학은 단합비의 딸이 절대로 강도를 구할 까닭이 없다고 생
각하여 그녀의 말을 믿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어째서 강 대협과........"
소어아는 냉소가 가득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 대협...... 흥, 그 놈이 무슨 강남의 대협이오!"
삼소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무예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강 대협의 명망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가 만약 대협이 아니라면 누가 대협될 자격이
있지요?"
"그가 만약 대협이라고 불릴 수가 있다면 거지 하발이 개새끼
나발새끼들이 모두 대협이 될 자격이 있겠소!"
삼소저는 웃음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당신은 아마 그에게 무슨 원한을 지니고 있는가 보군요. 실은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집에서 은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찾아온 것으로 봐도 알 수 있지 않아요?"
소어아는 계속 냉소를 터뜨렸다.
"그것은 고양이가 쥐에게 세배하는 격이오. 결코 좋은 마음을
먹고 하는 행동이 아니오."
"그가 좋은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무슨 나쁜 마음을 먹었나 말
해보세요."
"그의 마음은 당신이 평생 가도 이해 못 할 것입니다."
삼소저는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 소어아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아
무 말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화공자도 강...... 강별학이 모셔온 것입니다."
"그래요."
"듣자니 그 화공자란 분은 무예계의 제일가는 영웅일 뿐만 아니
라 또한 천하제일의 미남자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그의 그
여자 같은 모습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아요."
소어아는 그녀가 화무결을 욕하는 것을 듣자 더없이 속이 시원
해졌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역시 당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군요."
"저...... 저......."
어둠 속에서 소어아에게 손을 잡힌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고 가
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녀는 소어아가 무슨 난폭한 짓을 할가봐 무척이나 두려워하면
서도 오히려 포옹해 주기를 바랐다. 바로 이때 소어아가 갑자기
그녀를 쓰러뜨리며 그녀의 몸위를 덮쳤다.
삼소저의 온 얼굴은 불같이 타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당신은 무엇을 하는 거예요."
"쉬-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요."
"저...... 저...... 안 되요...... 안 됩니다......."
그녀는 한사코 안 된다고 했지만 눈은 오히려 감겨져 있었다.
여자가 눈을 감을 때는 바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
다.
그러나 소어아는 벌떡 일어나 숨을 돌렸다.
"참으로 위험천만했오. 조금 전에 지붕 위를 사람이 날아 지나
갔는데 당신은 못 들었소?"
삼소저는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저 허무하게만 느껴
졌고 사방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와는 멀리멀리 떨어진 것만 같았
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난 아무 것도 듣지 못 했어요."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한 화 공자란분의 친구중에서 중독된 사람이 있나
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어제 오후 그 화공자란 분과
강 대...... 강별학은 함께 외출을 나갔고 철소저란 아가씨는 혼
자서 객실에 남아 있었죠. 바로 그때 어느 사람이 화공자에게 선
물을 가지고 왔대요. 그러나 화공자가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철소
저가 그 선물을 대신 받은 모양이에요. 그 선물 중엔 떡 종류가
조금 있었는데 철소저는 아마 그것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빵 속에 독이 있을 줄이야......."
소어아는 철심난이 화공자와 함께 이곳에 왔을 뿐 아니라 그녀
가 바로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쏠
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누가 선물을 가지고 왔었죠?"
"글쎄요. 집안의 하인들은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요."
"그녀는 뭐라고 했소?"
"화공자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인사불성이었고 전혀 말을
할 수가 없었죠."
소어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어찌 함부로 남이 가지고 온 물건을 먹었을까?"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선물을 보내온 사람은 아마 그녀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이때 삼소저는 부러운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철소저란 아가씨는 정말로 더없이 친절하고 아름다와요. 그
녀와 화공자는 정말 천생연분이라 아니 할 수가 없지요. 그녀가
만약 살지 못 한다면 이는 더없이 애석한 일이에요."
소어아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의 말은 그녀와 화......."
"그들이 서로를 아끼는 다정한 모습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
금 부러움을 자아내지요. 특히 화공자가 그녀를 대할 때는 정말
더 이상 다정할 수 없고 더 이상 친절할 수 없으며, 더 이상 부드
러울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어아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을 느꼈다. 참다 못
한 그는 드디어 큰소리로 외쳤다.
"못된 놈!"
"누......누가 못된 놈입니까?"
소어아는 그녀의 질문을 받자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독을 놓은 사람을 못된 놈이라고 욕했오."
"지금 이 시간까지 화공자와 강별학은 독을 놓은 사람이 누군지
를 모르고 있어요."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혼자 두 눈을 부릅뜨고 웃
음 띤 얼굴로 말했다.
"비록 그녀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줄 수는 있지만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단 말이지......히히......히히히......."
삼소저는 그의 이러한 말을 듣자 매우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왜 그러지요?"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더욱이 매우 기분이 상쾌하고 좋습
니다. 정말 지금보다 더욱 상쾌할 때도 정히 없었어요."
삼소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당신은 여기 있는 것이 정말 좋아요?"
여자들이 자신에게 도취하는 재주는 정말 고명한 구석이 있었
다.
소어아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다가 갑자기 또 삼소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데 들어주겠
소?"
삼소저의 얼굴은 또다시 빨개졌고 가슴이 또한 울렁거리기 시작
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무슨 부탁이든 모두 들어 드리지요."
"내 부탁은 남에게 발각되지 않게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는
것이오."
삼소저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온 몸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드디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당신은 지금 가시려고 해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삼소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나를 따라 오세요."
"고마워요. 고마워."
삼소저는 바로 그 순간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여기에 강도가 나타났습니
다."
소어아는 얼굴색이 즉시 새파랗게 질렸다. 재빨리 삼소저의 손
목을 낚아챘다.
"당...... 당신 왜 이러는 것이오?"
삼소저는 전혀 그의 말에 대꾸하지를 않았다. 순식간에 옷자락
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강별학이 창밖에서 소리를 질
렀다.
"소저, 놀라지 마십시오. 강도가 어디 있습니까?"
소어아는 놀랍고도 한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여자...... 나를 가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해
치려고 들다니! 나는 벌써부터 여자는 모든 화의 시초란 것을 알
고 있었으면서도 어쩌자고 또 이 여자를 믿었단 말인가!)
그는 필사적으로 빠져 나가기로 작정했다. 그가 공력을 끌어올
리는 순간 삼소저가 제지하며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저는 조금 전에 어느 사람이 철소저가 거처하는 곳으로 달려가
는 것을 보았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무결의 놀란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아! 큰일이군. 그 놈이 우리를 따돌려 놓고 철소저를 해치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어서 그곳으로 갑시다."
부산하게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들은 번개같이 먼
곳으로 사라졌다. 소어아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쓰디쓴 미소를 지
었다.
"깜짝 놀랐잖소."
"안심하세요. 나는 절대로 당신을 해치는 일을 하지는 않을테니
까요."
소어아는 머리를 갸웃뚱거리며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
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만 당신이 이곳에서 빠져나
갈 수 있잖아요. 이것을 걸치고 나를 따라 오세요."
소어아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쏭달쏭 했다.
"여인, 도대체 여인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모르겠구나."
"뭘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은 내가 보아온 여자 중에서 가
장 착한 여인인 것 같소."
삼소저는 방긋 웃었다.
"내가 만약 정말 착하다면 조금 전 같은 계략을 생각해내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자를 이해하지 못 한다고 말한 것입니
다.
얌전하고 착한 여자도 어떤 때는 계략을 쓸줄 알고, 가장 남을
잘 속이는 여자도 어떤 때는 바보 같으니 말예요."
다행히 삼소저는 몸집이 매우 컸기 때문에 소어아가 그녀의 장
삼을 걸쳐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복도를 빠져나왔
다.
뜰 안에는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삼소저가 오는 것을 보자 멀리
서부터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릴 뿐 감히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
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삼소저는 소어아를 옆문이 있는 곳까지 인도하여 문을 연 후 고
개를 돌려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별빛이 소어아의 꺼질 줄
모르는 의지와 장난기가 곁들어 있는 매력이 가득찬 얼굴을 비추
고 있었다.
삼소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당신은 다시 나를 찾아 주겠어요?"
"그야 물론이지."
그는 말을 하며 이미 재빠른 동작으로 달려나갔다.
삼소저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넋을 잃
고 서 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가닥의 아쉽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우러나왔다. 그것이 애수(哀愁)인지 기쁨인지는 알 수 없
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
다.
그녀는 드디어 완전한 하나의 여인이 된 것이었다. 그녀의 이러
한 느낌은 사춘기의 소녀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어느 여자를 막론하고 이러한 느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여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어아는 급히 경여당으로 달려갔다.
경여당이라는 금색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별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났다. 소어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코로 냄새를 맡으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드디어 그는 주저
앉았고 기쁨이 가득찬 탄성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여기 있군."
길 위에는 한 뭉치의 약초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약 육칠 자
떨어진 곳에도 한 뭉치의 약초가 떨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 한 뭉치 한 뭉치의 약초를 따라갔다. 그가 돌로 그
두 명의 대한이 사간 약초 보따리에 자그마한 구멍이 나게 한 것
은 바로 약초가 새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약초만 따라간다면
당연히 그 약보따리가 어느 곳으로 운반됐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
이다.
한참이나 걸은 후 그는 더 이상 고개를 숙여 찾아보지 않아도
밤바람에 불어오는 약냄새로 충분히 길을 계속 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걷고 또 걸어 약 두 잔의 차가 식을 시간을 걸었더니 길
이 황막해지며 작지 않은 연못이 길옆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
다.
푸른 물결이 달빛 아래서 반짝거렸다. 연못 옆에는 푯말이 세워
져 있었고 그 위에는 글씨가 몇 자 적혀 있었다.
'趙府魚塘 嚴禁 鈞(조부의 연못, 낚시를 금지함)'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토록 큰 연못이 개인 소유의 연못이라니. 이 조씨란 사람도
보아하니 권력있고 돈있는 사람인 모양이구나)
그는 연못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연 큰 장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장원은 연못 옆에 건축한 것이라 독특한 풍취가 있었
다. 또한 약초의 냄새는 바로 그 장원 안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
다.
깊은 밤인데도 그 장원 안에는 아직도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소어아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살며시 그 장원으로 다가갔다.
거무튀튀한 대문 위에도 몇 줄의 글씨가 씌여 있었다.
'천향당(天香塘) 지영장(地靈莊) 조(趙).'
(음! 기세(氣勢)로 보아 이 조씨란 작자는 권력이 있고 돈이 많
을 뿐만 아니라 필시 무예계에 속하는 인물이겠구나. 야밤에도 잠
을 자지 않는 것이 필시 뭔가 나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근처의 지세를 살펴본 후 허공에 몸을 솟구쳐 박쥐 같이
장원 안으로 날아 들어가 불빛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커다란 화청(花廳)이었다.
소어아는 지붕 위에 거꾸로 매달려 손가락으로 침을 묻혀 창호
지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었다. 화청(花廳)안에는 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화청의 장식은 매우 화려했고 상 위에 놓인 안주 또한 진수
성찬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고 작은 보따리에 많은 약초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바로 부자, 육계, 서각, 웅담 등의
약초 들이었다.
이 때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든 간에 세 분이 저희 장원에 찾아온 것은 불초의 큰 영광
입니다. 그러니 축배를 드십시다."
이 자는 주인의 좌석에 앉아 있었고 기나긴 얼굴에 짧은 눈썹,
독수리 같은 코와 예리한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보기에 위맹스러
운 감이 없지 않았다.
(이 자가 아마 바로 그 조씨란 사람인 모양이다.)
이때 또 다른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 장주님께서 이렇게 저희를 후대하시니 오히려 우리가 좌불
안석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웃음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저희 형제가 조 장주님의 손님이 될 수 있는 것은 더없이
큰 영광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도리어 조 장주님에게 한 잔을 권
해드려야지요."
이 두 사람은 모두 똑 같이 둥그스름한 얼굴에 모가지가 굵었
고, 또한 웃을 때는 똑 같이 두 눈이 완전히 감겨져 보이지 않았
다. 그리고 말할 때는 똑 같이 침착하고 생김새도 똑 같았다.
(흥! 이 두 뚱뚱보는 정히 똑 같이 생겨구나. 천하에 쌍둥이도
많지만 이들 같이 똑 같은 형제도 드물 것이다.)
이때 네번째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은 백발이 성성했고 은빛 찬란한 수염에다 매우 위엄스
럽게 보였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소어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
름 아닌 삼상지대 무예계의 영도자인 애재여명 철무쌍이었다.
(독을 놓은 자는 바로 철무쌍이었구나! 어쩐지 철심난이 손쉽게
선물에 포함된 음식을 먹었구나 했지. 애재여명 철무쌍의 이름을
누가 믿지 않는단 말인가! 철무쌍도 강별학 같이 겉으로만 매우
인하고 의리가 강한 것처럼 꾸몄을 뿐 사실 속 마음은 여우 같이
영악하고 늑대 같이 악독한 놈이었구나. 그런데 그는 왜 철심난을
해치려고 했을까?)
조씨 장원(莊園)
소어아는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속에는 놀라움과 의아심도
곁들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여실히 드러난 사실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해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조 장주가 또다시 술잔을 들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노선배님과 나(羅)씨 형제분들은 모두 무예계에 이름을 떨친
영웅인데도 불구하고 초라한 저희 지영장을 찾아와 주셨으니 실로
저 조향영(趙香靈)의 영광입니다. 자 여러분 저의 술을 받으십시
오."
나씨 형제는 이 말을 듣자 즉시 술잔을 들어 조 장주의 술을 받
았다.
하지만 철무쌍은 꼼짝하지도 않았다.
왼쪽 좌석에 앉은 뚱뚱보는 철무쌍이 술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즉시 웃음띤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 형제는 이름도 없는 후배인데 어찌 감히 철노선배님과 맞
술을 하겠습니까? 만약 장주님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철노선배님과
한 자리에 않지도 못 했을 것입니다."
다른 한 뚱뚱보도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만약 무예계의 인물들이 저희 나삼(羅三), 나구
(羅九)형제가 철노선배님과 한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는 말을 듣는
다면 기절초풍할 것입니다."
철무쌍은 그제서야 껄껄 웃었다.
"두 분은 너무 겸손하시군. 자 보잘 것 없는 노부가 한 잔 따라
드리지."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해도 올려주는 말에는 못 당한다고 하
더니 철무쌍 같이 굳센 사람도 역시 올려주는 말에는 못 당하는구
나! 이 나씨 형제는 사람을 치켜 세우는데 이토록 능통한 것을 보
니 필시 좋은 놈들이 아닐 것이다! )
이때 다시 조향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분은 모두 너무 겸손하십니다. 철노선배님은 덕망이 드높으
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자(長者)이지만, 나씨 형제
두 분도 무예계에서는 보기 드문 호걸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철무쌍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다
시 말을 이었다.
"철노선배님께서도 아실런지 모르지만 나씨 형제는 비록 최근
몇 해 전에 무예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태호 칠살을 없애고 뒤
따라 제노 오호를 물리친 후 태행산에서 단 둘의 힘으로 삼도 십
팔관과 맞섰습니다. 그 싸움은 정말 용감했고 당당했었습니다. 하
늘도 놀라고 땅이 흔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도 노부는 왜 전혀 듣지 못 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철노선배님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두 형제분은 자신의
공로를 결코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
을 아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얼마나 영웅다운 행동입니까?"
철무쌍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띠었다.
"훌륭하오, 훌륭해! 이토록 훌륭한 분들을 사귀지 않는다면 노
부의 과실일 것이오. 그런데...... 두 분께선 보아하니 쌍둥이인
것 같은데 왜 한 분은 세째고 한 분은 아홉째입니까?"
나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배들은 단지 숫자로 이름을 삼았을 뿐입니다."
나구도 웃으며 말했다.
"실은 제가 첫째고 얘가 둘째입니다."
철무쌍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군요. 모르는 사람이 당신들의 이름을 들
으면 아마 나구란 분이 형이고 나삼이라는 분이 동생이라고는 생
각지 못 할 거요."
그는 잠시 동안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어느 명사의 제자인지를 모르겠군요? 또한 두 분은 왜
이렇게 뒤늦게 강호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까?"
나구가 대답했다.
"저희 형제는 어릴 때부터 무술을 좋아했기에 집에서 몇 구를
배웠을 뿐이지 스승은 없습니다. 또한 마흔 살 때까지 어머님께서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감히 무예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 하고 있다
가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강호를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철무쌍의 입에서 한숨이 섞여 나왔다.
"음, 두 분은 영웅일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한 효자들인 줄을
미처 몰랐군요."
이번에는 나삼이 한마디 했다.
"별 말씀 다하십니다."
"그런데 그 칠살, 오호, 삼도 십팔관은 모두 무예계 흑도에 이
름을 날린 고수들인데 두 분이 그들을 해치울 실력이 있으면서 훌
륭한 스승이 없다니 노부는 전혀 믿을 수가 없군요."
"후배가 선배 앞에서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철무쌍은 여전히 미소를 띠워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실로 보기 드문 천재이겠군요. 자신들이 창
작한 무공이 그토록 훌륭하니 말입니다. 노부에게 두 분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겠소?"
나삼아 말했다.
"선배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찌 감히 잘 하지도 못 하는 무술을
꺼내겠습니까?"
"두 분이 만약 노부에게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노부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 할 것이오."
나구가 웃으며 말했다.
"후배들의 무술은 정말 내놓을만한 것이 못 됩니다."
"두 분은 노부의 이런 자그마한 청마저 들어주지 못 한단말이
오?"
나삼이 말했다.
"후배는 정말 노선배님 앞에서 저속한 무술을 내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철무쌍은 정색을 했다.
"노부의 체면을 봐서 부디 응답하기를 바라오."
이때 조향영이 웃음띤 얼굴로 끼어들었다.
"철노선배님의 칭호는 애재여명이라 하오. 두 분이 그토록 훌륭
한 천재란 말을 들으셨으니 벌써부터 구미가 당기실 텐데 두 분이
철노선배님의 흥을 꺾어서야 되겠습니까?"
나삼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장주님도......."
조향영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실은 나도 두 분의 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나구는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그러시다면 후배들이 명을 거역할 수는 없군요."
이 두 형제는 비록 뚱뚱했지만 키가 무척 컸다. 두 사람은 옷소
매를 걷어 올리고 대청에서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향영과 철무쌍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봤을 뿐만 아니라 심지
어 창밖에 있는 소어아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나구는 쌍장을 연거퍼 휘날렸는데 그가 하고 있는 형은 놀랍게
도 '쌍반장'이었다. 나삼도 쌍권을 일제히 뿜어냈다. 그가 하는
형은 '대홍권'이었다.
'쌍반장'과 '대흥권'은 무예계에서 가장 흔해빠진 무술로 심지
어 마차를 끄는 인부들도 조금은 할 줄 아는 형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비록 일반 수사들 중에서는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철무쌍 같은 무예계 고수의 눈에는 볼만한 가치조차 없
는 것이었다.
철무쌍은 멍하니 두 형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 형제의
무술이 저속함에 놀란 것이었다.
그들은 형을 완전히 펼친 후 숨조차 헐떡거리며 읍을 하더니 웃
음띤 얼굴로 말했다.
"노선배님이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철무쌍이 떱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응......응......."
조향영은 당황함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나씨 형제의 무공은 가장 흔한 것이지만 실용적인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노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철무쌍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옳은 말이오......."
그는 비록 '옳은 말이오'라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실망감을
감추지는 못 했다. 그는 나씨 형제에 대하여 정히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들에 대해서 더욱 더 구미가 당겼다.
(이들 형제는 자신들의 무술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저속한 무
공을 펼치는구나.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비단 자신의 무공을 감
출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경계심마저 희박하게 만들기 위해서야.
남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숨기려 하니 이 얼마나 영악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이들을 필히 경계해야 되겠구나!)
소어아는 그들이 필시 뭔가 나쁜 계책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는 없었
다.
이 때 조향영은 또다시 술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비록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때문에 잠을 못 잤지
만 덕분에 나씨 형제의 무공을 보았고, 또한 철노선배님과 한 자
리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욱 기쁜 일이 어디 있겠
습니까!"
소어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문도 알 수 없는 일?......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바로 이때 갑자기 장원밖에서 수레소리와 말울음 소리가 어울려
들려오기 시작했다.
철무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또 왔단 말이오?"
그의 몸은 대청밖을 향하여 솟구쳤다.
과연 장원밖에는 마차가 달려 오고 있었다.
장원의 문이 열리자 그 마차는 안으로 급히 달려 들어왔다. 그
러나 이상하게도 마차 위에는 마부가 없었다.
조향영은 일꾼들에게 마차 위에 실은 물건들을 꺼내라고 명했
다. 그것은 적지 않은 보따리들이었고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것
은 역시 그 부자, 육계, 서각, 웅담 등이었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향영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오? 하루밤 사이에 계속 일곱,
여덟 번씩이나 똑 같은 약초를 보내오다니, 도대체 누구의 짓이며
무슨 영문에서 보내 오는 것일까요? 혹시 누가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철무쌍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이 약초들은 모두 매우 진귀한 것들인데 누가 이토록 진귀한
약초들을 가지고 장난을 하겠소? 노부가 보기엔 이것에 필시 악독
한 계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약초들은 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약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씨 형제께서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있습니까?"
나구가 웃음띤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철노선배님은 강호 경력이 많으시니 철노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틀림 없을 것입니다."
나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철노선배님이 만약 모르신다면 저희는 더욱 알 수
가 없죠."
철무쌍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노부는 정말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군요."
그들은 알지 못 했지만 소어아는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약초를 이곳까지 보내 온 것은 화무결로 하여금 독을 놓은 사
람이 철무쌍이라 오해 하겠끔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원래 그들의
계략이었구나...... 이 얼마나 악독한 계략이냐! 애석하게도 나
강어가 이것을 발견했으니 너희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갑자기 살며시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연지를 파는 상점을 찾아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가 그 상
점에서 나올 때에는 손에 많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날이 샐 무렵에 그는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변장을 했다. 그의
얼굴색은 하얗고 두 눈은 부운 것 같았으며 돼지 같은 코에 마치
기생집에서 심부름 하는 일꾼 같이 보였다.
새벽에 성 안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침식사를 파
는 밥장사 집이었다. 소어아는 가장 큰 밥장사 집을 찾아가 마음
껏 먹었다.
식사를 끝낸 후소어아는 새벽장이 선 장터를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유심히 주위를 살피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키가 큰 그 사내는 손에 새장을 들고 사람이
많은 곳만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은 새장을 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가만 있지를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으례히 다른 사람의 주머니 속
에 있는 은자들이 모두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소어아는 그의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드문 곳에 이
르자 소어아는 돌연 그의 어깨를 내려치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친구의 실력은 보통이 아닌데 그래!"
그 키큰 소매치기는 즉시 고개를 돌리며 대노했다.
"이 새끼야, 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냐?"
그는 소어아의 얼굴을 향하여 일장을 뿜어 댔다.
그러나 소어아는 단지 두 개의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고 또한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그토록 크고 몸집이 좋은 사
내가 즉시 비명을 터뜨렸다.
"누가 개새끼냐?"
그 소매치기는 아픔을 참지 못 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제가 개새끼입니다. 틀림없이 개새끼죠. 도련님, 재발
이 개새끼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도련님에게 드릴 테니 말입니다!"
"내가 묻는 몇 마디에 솔직히 대답만 한다면 나는 너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가져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채워 주겠다. 어
떠냐, 한번 대답해 보겠느냐?"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너는 천향당 지영장이란 곳을 알고 있느냐?"
"소인이 만약 그곳도 모른다면 어떻게 이 고장에서 돌아 다니겠
습니까?"
"그 조 장주란 분은 어떠한 사람이냐?"
"조 장주님께서는 백만장자일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매우 호방
한 까닭에 흑백 양도에서 모두 알아 주는 사람이죠. 그런
데...... 단
합비가 이곳에 온 이후 그 분은 모든 장사를 단합비에게 빼앗겼
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분을 참지 못 하고 힘으로 단합비를 무찌
르려고 했지만 단합비도 많은 무예계의 인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다가 그들의 실력 또한 조 장주님이 거느리고 있는 무사들보다 뛰
어났기에 감히 행동을 취하지는 못 했죠."
소어아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음, 그러면 그렇지...... 조향영이 철무쌍을 모셔온 것은 필시
그 명성으로 단합비를 꺾을 생각이었겠구나. 그러나 그것이 남에
게 이용당할 줄이야. 그는 아마 미처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 소매치기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 지도 모르고 그저 애원했다.
"도련님, 이젠 이 손을 놓아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음, 너는 이 고장에서 자랐으니 지영장의 일꾼을 몇 명쯤은 알
고 있겠구나?"
"네! 알고 있습니다."
"나를 지영장에 하루만 묵도록 해준다면 너에게 은 삼백 냥을
주겠다. 그렇게 하겠느냐?"
소매치기는 은 삼백 냥을 준다면 마누라까지 팔 수도 있는데 어
찌 응답하지 않겠는가?
지영장 같은 곳엔 당연히 벼라별 인물들이 다 있었다. 그중에
당연히 소매치기의 친구도 있었다. 소어아는 그들 속으로 끼어들
었다. 조향영은 아침 일찍 대청으로 나왔다. 그의 맑은 정신과 태
연한 모습은 어제 밤새도록 술을 마신 기색을 추호도 찾을 수 없
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장사를 하는 사람들 같았고 조향영을 보자 머
리를 숙이고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소어아는 먼 곳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앞을 지나가는 일꾼
하나를 잡고 물어보았다.
"저 사람들은 뭣하는 사람들이오? 이렇게 아침 일찍 뭣하러 왔
습니까?"
"저분들은 모두 각처에 있는 점포의 대리주인들이오. 저 분들은
매일같이 아침 일찍 장주님을 찾아 뵙고 전날에 장사한 사항을 말
씀 올립니다. 저분들 외엔 저희 장주님은 아침에 다른 손님을 만
나지 않지요."
소어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댁의 장주님이 뵙지 않으려 해도 뵐 수밖에 없는 손님도 있을
것이오."
이 일꾼은 당연히 소어아의 말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알 까닭이
없었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누가 감히 우리의 천향당 지영장에 와서 시비라도 걸 수 있단
말이오?"
소어아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단합비는 어떻소?"
그 일꾼은 즉시 원한이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저희 장주께서 언젠가는 그 돼지 같은 놈을 불고기 해먹을 것
입니다."
"댁의 장주님과 단합비는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었군요."
그 일꾼은 여전히 원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본시 저희 장주님께서는 장사를 매우 순조롭게 했었는데 그 단
합비란 작자가 이곳에 온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를
일삼았소."
"어떻게요?"
"그는 저희 장주의 점포가 있는 곳만을 찾아 맞은 편에 같은 점
포를 차리곤 했소. 또 저희 장주님의 단골을 알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갔죠. 우리 천향당과 단합비는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업전쟁과 정말 전쟁이 똑 같이 무섭군요. 보아하니 상업상의
원한은 전쟁터의 원한보다 더욱 뼈에 사무치게 느껴지나 봅니다."
"장사를 해도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 도리요. 단합비 같이 비겁
한 수단을 쓰는 자는 정말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조향영은 이미 그 대리주인들과
의 얘기를 마쳤다. 그는 차를 마시며 하인에게 분부했다.
"가서 손님들이 일어났나 봐라. 만약 일어나셨으면 차를 대접하
고 이곳 대청으로 모시고 오너라."
소어아가 장원의 사방을 돌아보고 다시 왔을 때는 철무쌍과 나
구 그리고 나삼이 이미 대청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괴상한 일을
토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방문 밖에 있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었다.
(만약 내 생각이 틀림 없다면 이제 그들이 올 때가 되었다!)
바로 그 시각 문 밖에서 한 차례의 음성이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이 명첩을 댁의 장주님에게 올리십시오."
문지기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장주님은 오전에 손님을 뵙지 않습니다. 그러
니......."
순간 말이 끊어졌다. 그는 명첩 위에 적힌 이름에 심히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소어아도 그 음성을 듣자 긴장되는 한편 기쁘기도 했다.
(왔다, 왔어. 과연 왔구나! )
문지기는 재빨리 대청으로 달려와 명첩을 올렸다.
조향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 명첩을 보았다.
그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강 대협 강별학께서 오셨습니다."
철무쌍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려했다. 순간 이때 대청 밖에
서 굵고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불초 강별학이 장주님을 만나고자 하는데 장주님께서 만나주지
않겠단 말이오?"
두 사람이 성큼성큼 대청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강별학이었고 그의 뒤를 따르는 자는 매우 준수하고도 보
기드문 미남청년이었다. 또한 뒤에는 네 명의 대한이 가마를 들고
따라왔다. 가마에는 염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대청에 있던 사
람들은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조향영은 급히 그들에게 달려가 읍을 하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초가 강 대협께서 찾아 오시는 것을 몰랐기에 미리 나가서
마중하지 못 했으니 널리 용서하십시오."
강별학은 만면에 회색이 가득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 왔기에 용서를 받아야 하는 쪽은 오
히려 우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향영은 손님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야 그 미남청년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 미남청년의 얼굴색은 무쇠 같이 파랗고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조향영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으
나 억지로 웃음을 자아냈다.
"이 형께서는 누구입니까?"
강별학은 담담히 말했다.
"이 분은 화무결이란 화 공자님입니다."
그는 일부러 매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조향
영, 철무쌍, 나구 그리고 나삼은 모두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철무쌍은 화무결을 위아래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분이 바로 근 몇 해 동안 천하에 이름을 떨친 무결공자란
말입니까? 과연 젊고 준수하며 정히 인간 중에 용(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하하, 만나 뵈니 참으로 기쁘오, 공자!"
그러나 화무결의 음성은 차디찼다.
"저도 만나 뵈어서 기쁩니다."
조향영이 한마디 건냈다.
"이 분은 철무쌍 철노선배님입니다. 두 분은 벌써부터 서로의
명성을 들었을 테니 제가 상세하게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두
분의 나형은......."
그는 나구와 나삼을 한참이나 장황하게 소개했다.
그러나 화무결은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은 듯했으며 무엇
인가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화청을 향하
여 몸을 날렸다.
그가 화청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는 그의 손에는 한 뭉치의 약
초 꾸러미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과연 그 약초들이 모두 여기에 있군요."
화무결은 말을 하며 바로 가마로 달려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갔
다.
조향영이 그의 이러한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 했
다.
"이 약초들은 혹시 공자님 것입니까? 불초는 누가 이 약초들을
보내왔나 하고 궁금해 하던 참인데, 어젯밤......."
강별학이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장주님은 정말로 이 약초들을 누가 보냈는지 모르십니까?"
조향영은 그를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또 화무결의 얼굴색
을 살피더니 곧 그 약초가 크나큰 음모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강별학이 그의 말에 응답했다.
"이 일을 말하자면 매우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화 공자님의
장래 부인이 될 소저를 중독시켜 놓은 후, 성 근처에 있는 그 독
을 해독할 수 있는 약초를 모조리 사간 것입니다."
"화 공자님의 장래 부인이 될 소저를 사지에 몰아 넣을 속셈이
었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약초를 모조리 사간 사람이 바
로 그 독을 놓은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강별학은 눈빛을 번뜩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바로 그렇게 된 일입니다."
조향영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며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 해독할 수 있는 약초들이 바로 이 화청에 있는 것
입니까?"
강별학이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조향영은 깜짝 놀라며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하지만 불초는 정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
군요......그 약초들은 단지 어제 누가 보내 왔을 뿐입니다."
화무결은 살기가 가득한 냉랭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누가 보낸 것이오?"
"불초도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강별학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모른다고요? 그렇다면 누가 밥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 진귀한
약초를 남에게 공짜로 보낸단 말입니까? 조 장주께서는 나를 세
살 먹은 아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니 말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향영은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고, 이마
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철무쌍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노부가 어젯밤 이곳에 있었기에 조 장주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
라고 보증할 수 있소! 그 약초는 분명히 남이 보내온 것이고 또한
조 장주께서는 확실히 그 약초를 보내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
오!"
강별학은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조 장주께서 만약 모르신다면 귀하께서는 알고 계시겠군요?"
철무쌍은 대노했다.
"당신......당신 뭐라고 했소?"
강별학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
고 그의 말에도 물론 응답하지 않았다.
주위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계책(計策)속의 계책(計策)
화무결은 약초를 쥐고 가마 속으로 몸을 디밀었다. 가마 속에
있는 사람은 철심난이었다. 그는 해독약을 철심난에게 먹였다.
조제를 하지 않는 생것이라 비록 약효가 완전히 발휘되지는 않
았지만 아쉬운대로 해독을 할 수는 있었다. 화무결은 자신의 깊은
내력으로 약효를 도왔고 잠시 후에 가마 속에서는 신음소리가 들
려왔다.
화무결은 비로소 숨을 깊게 내쉬며 찬찬히 몸을 돌려 철무쌍 등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실로 더없이 날카로왔고 보
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누가 독을 놓았소?"
조향영은 이마에서 흘러 내려오는 식은 땀을 닦았다.
"불초는 정말 모릅니다."
철무쌍도 약간 불쾌한 음성이었다.
"이것은 필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음모
요!"
강별학은 나구와 나삼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 약초들은 정말 철노영웅과 조 장주가 사온 것이 아니오?"
나구와 나삼은 서로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나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형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철무쌍은 그들의 대답을 듣자 크게 노했다.
"너희들은 분명히 알고 있지 않느냐! 어젯밤 너희들도 이곳에
있었으니 모든 것을 친히 목격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번에는 나삼이 나섰다.
"저희 형제는 오직 약초가 스스로 왔다는 것을 알 뿐이지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소. 혹시 장삼(張三)인지 혹은 이사(李四)
인지 아니며 혹시......."
그는 철무쌍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강별학이 그의 말을 받았다.
"혹시 철노영웅의 제자인 줄도 모른다는 말이겠군. 그렇소?"
나구와 나삼은 또다시 서로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실 강별학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강별학은 철무쌍을 한참이나 유심히 훑어 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는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소?"
철무쌍은 분노가 가득찬 눈으로 나씨 형제를 노려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과 무슨 원한이 있길래 나를 죄인으로 만들려는 것
이냐? 어디 그 이유나 말해 보아라!"
나구가 말했다.
"저희 형제는 오직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강별학이 말했다.
"두 분은 정히 의리의 사나이들이군요. 불초는 정말 두 분을 존
경합니다. 돌이켜볼 때 철노영웅은......흥!"
철무쌍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았다.
"노부가 어쨌단 말이냐?"
강별학은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은 채 가마곁으로 다가섰다.
"철 소저! 철 소저, 깨어났소?"
철심난의 음성이 신음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네......지금 매우 추워......."
"철 소저, 누가 독을 놓았나를 알고 있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 대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긴장
속에 파묻혔다.
"제......제가 중독 되었었나요? 저도 누가 독을 놓았는지는 모
르겠어요."
조향영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이때 철심난의
말이 다시 새어 나왔다.
"저는 단지 철무쌍 철노선배님이 보낸 음식을 먹고 나자 온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어요. 인사불성이 되었던 모양이죠?"
그녀의 이 몇 마디가 떨어지자 대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철무쌍은 억울한 듯 발로 땅을 차며 안타까와했다.
"너......네가 어찌 사람을 모독하느냐?"
강별학이 그의 앞을 막았다.
"일이 이쯤 됐는데 당신이 아직도 변명한다면 사내 대장부가 아
니지 않겠소!"
철무쌍은 대노한 음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노부는 이 여자와 원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
하는데 무엇 때문에 해치려고 했겠느냐?"
강별학이 화무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화공자께서 철노영웅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화무결은 정말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도 꾹
참고 있었다. 물론 그도 대노하였지만 역시 꼼짝하지도 않고 침착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 도리
가 아니겠습니까?"
강별학은 웃음띤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강별학은 가마를 들고 들어온 일꾼을 향하여 손짓을 했다.
"너, 이리 오너라."
그 일꾼은 강별학의 분부에 따라 그의 앞에 다가서며 절을 했
다.
"강 대협께서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철무쌍 등 사람들은 강별학이 왜 이토록 긴장된 순간에 가마를
드는 일꾼을 불렀는지 이해하지 못 하였다. 강별학은 엷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철노선배님이 조금 전 하시는 말씀을 너는 다 들었느냐?"
"소인은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네가 보기엔 그가 철 소저를 해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꾼의 이러한 대답을 듣자 철무쌍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강별학은 역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독을 놓은 사람은 철노영웅이 아니겠군 그래!"
"아닙니다. 그 독은 철노영웅이 놓은 것입니다."
"너는 어째서 철노영웅이 놓은 독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철노영웅이 독을 놓은 목적은 본시 화공자를 해치고자 하는 것
이었을 겁니다. 다만 철 소저가 화공자를 대신하여 화를 당했겠지
요."
강별학은 일부러 눈썹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철노영웅은 화공자와도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화공자를 해
치고자 하겠는가?"
그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철무쌍은 대노한 음성으로 그의 말
을 가로챘다.
"그렇소. 노부가 왜 그를 해치고자 하겠소?"
그 일꾼은 철무쌍의 그토록 큰 외침 소리를 듣고서도 조금도 당
황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이려 할 때는 당연히 원인이 있기 마련이죠. 예를 들
면 질투 때문에 죽일 수도 있고, 원한이 있어서 죽일 수도 있고,
또한 남에게 나쁜 일을 한 것이 발각되었을 때도......."
철무쌍은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노부는 평생을 떳떳이 살아왔는데 네 녀석이 감히 노부의 인격
을 모독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그의 외침소리는 우뢰소리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고 지영장에서
잔일을 하는 일꾼들도 모두 그 소리에 놀라 벌벌떨며 얼굴색이 변
하였다. 그러나 그 가마를 들고 온 일꾼은 여전히 태연했다.
철무쌍 등 사람들은 강별학에게 속한 가마를 드는 일꾼조차 이
토록 담이 크고 달변인 것을 보자 감탄을 금치 못 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그 가마를 드는 일꾼이 다른 사람이 변장한 것이 틀림없
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심히 그 일꾼을 바라보았
고, 보면볼수록 아는 사람 같다고 느껴졌다. 철무쌍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지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좋다! 사람들 앞에서 노부가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했는지 어
디 한 번 똑바로 말해 보아라!"
그 일꾼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쁜 짓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의 닭이나 개를
훔치는 것도 나쁜 짓이죠.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은 남의 표은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은 일입니
다."
철무쌍이 너무나도 대노하여 음성마저 떨렸다.
"너......너는 노부가 누구의 표은을 훔쳤다는 것이냐?"
"예를 들면 단합비 어른의 표은이라 할 수 있죠."
"단합비? 너냐......너......."
"단 어른과 조 장주가 서로 용납할 수 었는 사이라는 것은 이
근방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단 어른이
은을 남에게 뺏앗긴다면 사고자 하는 물건을 당연히 살 수 없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이 근방에서 조 장주의 장사를 가로채는 사
람은 아무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노부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냐?"
그 일꾼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철노영웅이 만약 암암리에 단합비의 표은을 빼앗는다면 비단조
장주에게 사례금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물건을 사고자
하는 은도 철노영웅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너...... 계속 말해 보아라."
"본시 철노영웅은 아무에게도 이 일을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
했겠죠. 설사 강호의 인물들이 이 일을 조사하고자 하더라도 절대
로 철노영웅님을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단 어른께서 화공자를 초청했을 줄이야 철노영웅으로서
도 미처 생각지 못 했겠지요. 물론 철노영웅도 화공자께서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명확
히 밝혀 낼까봐 선수를 치려고 화공자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속셈이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이 말들은 확실하게 철무쌍을 범인으로 취급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만약' '혹은' '예를 들어서'란 말투를 썼었지
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철무쌍이 범인이라고 지명한 것이었다.
철무쌍은 대노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이 악독한 놈! 노부가 너의 그 더러운 입을 찢어 놓을 테다!"
본래 성격이 급했던 철무쌍은 호랑이 같이 그 일꾼을 향하여 덮
쳐가며 연달아 장을 펼쳤다.
철무쌍은 삼상(三湘)지대의 무예계를 영도하는 자였기에 무공이
실로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대노한 상태에서 거침없이 손을
썼기 때문에 일장 밖에서도 장풍의 거셈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날카롭고 잔인한 수법으로 가마를 드는 일꾼을 상
대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 일꾼은
필시 철무쌍에게 죽음을 당하리라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강별학이 바로 그 일꾼의 옆에 서있었는데도 불구
하고 추호도 그 일격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장풍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뒤로 밀려 나갔다.
놀랍게도 그 일꾼이 철무쌍과 일장을 맞부딪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밀려 나간 사람은 그 일꾼이 아니
라 장력으로 무예계에 이름을 날린 삼상지대의 대협객인 애재여명
철무쌍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향영 등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에 탄성을 발했다.
소어아는 그 일꾼으로 변장한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고 애타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발한 장세(掌勢)는 무예계의 정종(正宗)이
면서도 상승(上乘)에 속한 무공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그로구나!"
철무쌍은 일장 밖으로 떠밀려난 후에도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몇
발자국을 더 밀려 나갔다. 만약 조향영이 재빨리 달려 나와서 그
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분명히 무거운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강별학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철노선배님은 역시 늙었군요."
철무쌍은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너......너......."
"선배님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이때 조향영이 큰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불초가 할 말이 있소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독을 정
말 철노영웅이 놓은 것이라면 어째서 선물을 보낼 때 철노선배님
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겠습니까? 또한 어째서 해독약을 굳이 이곳
에다 놓아 두겠습니까? 마치 귀하에게 일부러 잡으러 오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까?"
그 일꾼은 급히 응답했다.
"만약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를 않겠죠. 그러나 철
노영웅은 남들이 결코 자신을 의심할 리가 없다고 오히려 그 허를
찌른 것입니다."
"그러나......그러나......."
조향영은 평상시 자신이 매우 달변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지금은
가마를 드는 일꾼에게 말이 막히고 말았다.
이때 강별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공자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화무결은 천천히 말했다.
"천하의 영웅들이 이 일을 안다면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것입
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화무결은 시선을 돌려 대청에 있는 사람을 두루 바라본 후 철무
쌍과 조향영의 얼굴에다 시선을 멈추었다.
"지금은 정오(正午)이니까 내가 두 분에게 반 낮의 시간을 드리
겠소. 그때까지 두 분은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럼 불초는 오늘밤 자정에 이곳에 다시 찾아 오겠소."
그는 읍을 하며 몸을 돌려 밖을 향해 나갔다.
강별학도 읍을 하며 한마디를 남겼다.
"불초는 오래 전부터 철노선배님의 높으신 이름을 앙모해 왔었
는데......그러나......아!"
긴 한숨을 내쉬며 그도 몸을 돌려 밖을 향하였다.
소어아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 하였다.
(어쨌든 간에 그들이 이대로 떠나간 것은 정히 대협객다운 행동
이로구나. 하지만 화무결은 진심에서 여유를 주는 것이고 강별학
은 일부러 대협객인 척 하는 것이야.)
조향영 등 사람들은 화무결 일행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갑자기 철무쌍이 울부짖는 음성으
로 외쳤다.
"저 못된 놈들......."
그의 입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다. 가마꾼과 맞부딪쳤던 그 일격
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신을 당
하지 않으려고 솟구쳐나오는 피를 억지로 삼켰기 때문에 말을 하
지 못 했던 것이었다.
조향영은 그가 그토록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는 웬지 마음이 씁쓸해져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어서 뒤에 가서 좀 쉬십시오. 다를 일은 나중에 상
의하기로 하고 지금은 노선배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입
니다."
철무쌍은 비참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밤은 당신과 나의 마지막 밤인데 상처를 치료해 무얼 하겠
소!"
"아마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갔으니......."
철무쌍은 껄껄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들이 떠났으니 노부가 도망이라도 갈 수 있단 말이오? 노부
는 평생 동안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는데 말년에 와서 억울함을 당하고 죽어야 하다니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구려!"
조향영은 쓰디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철무쌍 같은 신
분과 지위를 지닌 사람에게 도망을 가라는 것은 차라리 죽음을 택
하라고 하는 것보다도 더욱 못 할 말이었다.
철무쌍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을 했다.
"일이 이쯤 됐으니 차라리 자정이 되기 전에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되겠군!"
조향영은 그의 그러한 넋두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급히
철무쌍의 옷소매를 부여 잡았다.
"노선배님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자정이 되려면 아
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을런지도 모
르지 않습니까. 제발 그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철무쌍의 입에서는 탄식어린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우리들이 제 아무리 변명을 잘 한다해도 그 진짜 범인을 잡기
전엔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이토록 넓은 세상 어디
에 가서 진범을 찾는단 말이오? 더군다나 우리에겐 반 나절의 시
간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조향영은 슬픈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반 나절...... 자정......."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차츰 기울어가고 있었다.
철무쌍은 앙천대소했다.
"강별학, 화무결! 노부는 너희들을 탓하지 않겠다. 너희들로서
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 너희들이 노부에게 반 나절의 여
유를 주는 것은 바로 너희들의 인자함이다. 노부는 그것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여기겠다."
그는 울컥 붉은 피를 토해내며 기침을 하였다. 붉은 피는 그의
옷을 완전히 적셨다.
조향영은 그를 부축하여 겨우 뒷방으로 모셔 놓았다. 그리고 그
는 고개를 돌려 나구, 나삼 형제를 바라보며 쓰디쓴 표정을 지었
다.
"댁들은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소?"
나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철노선배님은 너무 비관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일
이 매우 손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향영은 크게 기뻐했다.
"빨리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구는 사방을 한 번 살펴본 후 조향영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
리로 말했다.
"그저......."
이때 대청 안은 매우 소란했기 때문에 그들이 작은 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가 없었다.
소어아도 그 소란함을 틈타 대청으로 들어왔다. 소어아는 대청
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는 척하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귀를 기
울였다.
"우리로서는 선수를 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만약 단합비와 그
의 딸을 이곳까지 납치해온다면 강별학도 아마 함부로 행동을 취
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소어아는 달려가서 그의 따귀라도 몇 차례 갈
겨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가 말한 것은 계책이 아니라 오
히려 완전히 조향영과 철무쌍을 사지에 몰아 넣자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조향영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
다.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
다면 무예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표은을 강탈한 사람이 정말 우리
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정말 변명할 여지가 없
습니다."
소어아는 그의 말을 듣자 안도를 했다.
(옳은 말이다. 과연 조향영은 바보가 아니로구나)
이때 나구가 또다시 조향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장주님은 왜 그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십니까? 이 일은 오로
지 우리가 시간적인 여유를 갖자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일단 단합
비와 그의 딸을 납치하면 단합비에 속한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서
투른 행동을 할 수 없을 테고, 우리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진범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저 진범만 잡고 다시 그들 부녀를 곱게 집
에 모셔다 주면 누가 감히 장주님에게 무어라 하겠습니까?"
조향영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들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불초는 그래도 웬지 깨름칙 하다고 느껴지
오......."
나구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또 충동질
을 했다.
"장주님은 강별학과 화무결의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어떻게 감
당하려는 겁니까? 아마도 오늘밤을 살아서 넘기지는 못 할 것입니
다."
조향영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그는 어쩔 수 없다
는 듯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막상 자신이 없었던지 머뭇 머뭇하다
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떻게 단합비의 그 넓은 장원에서 그들 부녀를 납치한
다는 거요?"
나구는 입가에 자신 있다는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에 대해서 장주님은 걱정을 아니 하셔도 됩니다."
나삼이 끼어들었다.
"화무결과 강별학은 우리가 설마 그런 생각을 하리라곤 결코 생
각지 못 할 것입니다. 그 두 사람만의 눈만 피하면 저희들이 충분
히 해낼 수 있습니다."
조향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두 분이 도와 주시겠습니까?"
나구가 응답했다.
"장주님의 신세를 졌으니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조향영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급히 큰 절을 했다.
"두 분이 이토록 의리가 좋으시니 불초가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나구는 재빨리 그를 일으키며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주님이 이러시면 저희가 도리어 부끄러워집니다."
소어아는 곁에서 이 모든 광경을 똑똑히 보았고 또 들었다.
(이 나구란 놈은 더없이 악독하구나. 일을 더욱 크게 확대해놓
고 자기가 그 혼란 속에서 이득을 볼 작정인 모양이구나.)
이때 나구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행동을 개시 하겠습니다."
조향영이 응답했다.
"두 분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다면 그저 분부만 하십시오."
"다른 것은 필요치 않고 오직 여덟 명의 일꾼만 저에게 빌려 주
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가마를 들고 저희를 따라 오라고 분부하
십시오."
"좋습니다."
그는 급히 사람들을 불렀다. 곧 적지 않는 사람들이 그에게 달
려왔다. 소어아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채의 가마를 들고 오자 나구가 먼저 올라가 앉아 입을 열었
다.
"이 가마엔 비록 지금 우리 두 형제만 타고 있지만 돌아올 때에
는 아마도 단합비 부녀가 타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차에 걸려있는 염을 내렸다.
"단합비의 장원이 어디 있는지 너희들은 알고 있느냐?"
어느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알고 있고 말고요. 우리들은 몇 번이나 그의 집을 불질러
버리려고 마음먹었었지요."
나구가 말했다.
"그럼 좋다. 지금 즉시 떠나자꾸나."
일곱 명의 일꾼과 소어아는 가마를 들고 출발했다.
그 일곱 명의 일꾼은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 매우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약 한 그릇의 밥을 먹을 시간 동안을 가자 멀찍한 곳에 단합비
의 장원이 보였다. 붉은 색 대문 앞에 칠 팔 명의 사나이들이 앉
아 있었다.
한 일꾼이 입을 열었다.
"앞에 있는 집이 바로 그 단합비란 놈의 우리입니다. 나 어른께
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나구가 가마 속에서 말했다.
"곧장 들어가라."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 하는 한편 생각에 잠
겼다.
(이들이 강별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 일꾼은 더욱 더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의아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합비에겐 문을 지키는 개새끼들이 매우 많은데 만약 그들에
게 물린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나구가 다시 그 말에 응답했다.
"너희들은 그저 내 말대로 들어가기만 해라. 그 문지기 녀석들
은 절대로 너희들을 물지 못 할 테니까."
가마를 든 일꾼들은 서로 마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
하였던지 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들이 문 앞에 당도하자 단씨 장원의 일꾼들이 그들의 갈길을
막으며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이봐! 너희들은 뭣하는 놈들이냐? 거기 서 있거라!"
소어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돼지를 잡으러 온 사람이다. 빨리 비켜라!"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물론 일부러 일을 망치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강별학을 나오게 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나씨 형
제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단씨 장원의 일꾼들은 과연 대노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왔
다.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느냐?......."
이때 갑자기 '휙! 휙'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단씨 장원의 일꾼
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그들이
왜 쓰러졌는 지를 몰랐다.
소어아의 눈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리했기 때문에 몇 가닥의 검
은 빛이 가마 속에서 날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씨 장원
의 들은 땅바닥을 몇 번 구르더니 드디어 꼼짝하지 않았다.
(나구는 정말로 악독한 수단을 지니고 있구나! )
소어아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옴을 금치 못 했다. 조씨 장원
의 일꾼들은 더없이 놀라 넋을 잃고 있었다.
나구의 웃음띤 얼굴이 가마 밖으로 잠시 나왔다.
"이젠 문지기 개새끼들이 더 이상 짖지 못 하니 안심하고 들어
가거라."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찾고 또다시
안을 향하여 걸어 들어갔다.
이때 문 안에서 또 칠 팔 명의 사나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역시 '휙! 휙!
휙!' 하는 소리가 나자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미처 대문 밖으로 달려나오지 못 한 몇 명만이 겨우 봉변을 면
했다. 그들은 놀라서 뒤돌아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
다.
"다들 모여라. 다들 모여라. 문 밖에서 악마가 들어오고 있다."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소란스러우면 필시 강별학이 나올 텐데 나씨 형제는 그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구나.)
나구와 나삼은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껄
껄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어서 들어가자꾸나."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용기백배하여 있는
기력을 다하여 나는 듯이 달려 들어갔다.
겹겹으로 싸여진 뜰을 지나자 안에서 수십 명의 무기를 든 사내
들이 달려나왔다. 그러자 암기가 허공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앞을 가로막았던 사람들이 또 적지 않게 쓰러졌다.
그 중 한 명의 자의 대한이 얼굴색을 바꾸며 큰소리로 외쳤다.
"가마 속에서 날아온 암기가 보통이 아니다. 우선 후퇴하자."
그 사람의 동작은 민첩했고 무공 또한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단씨 장원의 일꾼들은 그의 말에 따라 뒤로 물러섰다. 이때 뒤
에서 갑자기 한 사람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됐다. 우리가 모두 나왔으니 안심해라."
뒤따라 또 한 사람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시비를 걸어온 사람이 암기를 쓸 줄 안단 말이냐?"
자의 대한이 그의 말에 응답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주고받는 동안 다섯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손에 모두 방패를 들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자의 대한에게 방패
를 던져주었다.
칼빛이 번쩍거리자 여섯 명의 대한이 나는 듯이 덮쳐왔다.
소어아가 그들의 신법(身法)을 보고 당장 그들이 바로 단합비가
거닐고 있는 무사(武師)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합비는 한
나라를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였기 때문에 그가 거느리고 있는 무
사들도 당연히 보통이 넘었다.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덜컥 겁이 났다. 무사들은 제각기 방패로
가슴을 가린 채 가마를 향해 칼을 뻗치며 달려들었다.
이때 호탕하게 웃는 기나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순간 한 인영이 가마 속에서 솟구쳐나와 앞에 있는 두 명의 가
마꾼을 잡아 뒤로 던졌다.
무사들은 그저 눈앞에 인영이 번쩍거리는 것을 느꼈을 뿐인데
이미 한 명의 얼굴이 동그란 뚱뚱보가 그들 앞에 서있는 것을 발
견했다.
그 뚱뚱보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불초를 모르시겠단 말이오?"
무사들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모두 넋을 잃은 듯 서로를 바
라보았다. 혹시 이 뚱뚱보가 자기쪽 사람의 친구일까봐 서로 묻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뚱뚱보에게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나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여러분이 정 불초를 모르신다면 불초도 여러분을 낯선 사람으
로 취급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맨 앞에 서 있던 무사의 손목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우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비명소리가 새어나왔
다.
그 무사는 손목이 완전히 부러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쥐고
있던 칼도 두 동강이로 부러져 있었다. 다른 다섯 명의 무사들은
놀랍고도 또 분기가 탱천하여 손에 쥐고 있던 창과 검 그리고 칼
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나구는 태연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양가창(楊家槍)의 제자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군. 그
일초의 '봉점두(鳳點頭)'는 적어도 십오 년의 경력을 지니고 있겠
는걸. 정히 날쎈 창법이라 아니할 수 없군."
그 창을 쥔 무사는 분명 북파(北派)양가창의 제자였다. 그는 일
초를 다 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이 자기의 내력을 알게된 것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 하였다. 그 순간 그의 창은 약간 느려졌고
창끝이 상대방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나구는 오른손으로 창끝을 잡고 몸을 반쯤 틀더니 상대방의 창
으로 왼쪽에서 공격해온 일검을 막는 한편 오른쪽에서 공격해온
자의 대한을 향하여 웃음띤 얼굴로 한마디를 던졌다.
"팽염조(彭念祖)어른께서는 요즈음도 몸 건강히 잘 있는가?"
그가 말한 팽염조는 남파(南派)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장
문인이었고 그 자의 대한은 바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자기의
스승의 성함을 듣게 되자 멈칫했다. 그는 급히 물었다.
"당신은 저희 스승님을 아십니까?"
나구는 빙그레 웃었다.
"모른다!"
나구의 입에서 '모른다'란 세 음절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왼쪽
손바닥이 이미 자의 대한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토록 웅장한 그의
몸집은 이 일격을 맞고는 나는 듯이 뒤로 밀려나갔다.
또한 동시에 그 창끝을 잡힌 무사는 한가닥의 크나큰 힘이 창을
따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창을 버리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창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자신의 무기에 자신의 생명을 잃었던 것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얼굴색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손에 비록 무기
를 들고 있었지만 감히 꼼짝하지도 못 했다.
나구는 여유있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 세 명의 무사들을 해치운
것이었다.
그의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그 예리한 눈초리와 수단의 앙큼함과
악독함은 실로 소어아가 평생 동안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지금의 이 나구는 아무리 봐도 어젯밤 대홍궐(大洪拳)을 펼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소어아가 놀라고 있는 동안 세 명의 무사 중 한 명이 또 쓰러졌
다. 나머지 두 명의 무사는 다리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나구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젠 나를 알겠지!"
그 나머지 두 무사는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압니다......알고 말고요......."
"하하 두 분은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소?"
그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르신네는......어르신네는......."
"나의 성은 나씨고 이름은 구라고 부르오."
"네! 네! 어르신네가 바로 나구 어른이죠."
나구는 만면에 웃음을 띠웠다.
"두 분이 불초를 아신다니 정말 기쁜 일이오. 귀찮겠지만 나를
단합비 단 어른에게 인도해 주지 않겠소?"
이 말을 들은 두 무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
나구는 즉시 안색을 달리하며 화가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까짓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두 분께서 응낙해주지 못 하겠단
말이오?"
그들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는 한숨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저희를......."
그러나 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슉! 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가닥의 검은 빛이 뒤에서 날라와 그들의 등에 적중했
다. 그들은 무서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한 사람의 기나긴 웃음과 말하는 음성이 어울려 들려왔다.
"내가 이미 단 어른을 모셔왔으니 너희들이 길을 인도해주지 않
아도 된다!"
나삼이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왼손에는 단합비가 잡혀 있었고, 오른손에는 단삼소저(段
三小 )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나구가 이곳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나삼은 살며
시 뒷뜰로 달려 들어갔던 모양이다. 단삼소저는 비록 무공을 조금
은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나삼의 적수가 되지 않았던 까닭에 끌려
나왔던 것이다!
사방에는 아직도 수십 명의 단씨 장원의 인물들이 남아있었지
만, 나삼이 그들의 주인을 끌고 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
면서도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 신비한 나씨 형제는 과연 손쉽게 단합비 부녀를 납치했던 것
이다. 소어아는 놀랍고도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강별학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때 단합비는 너무나도 놀라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나
삼의 분부에 완전히 복종하는 눈치였다. 그는 나삼의 분부에 따라
가마에 올라탔다.
삼소저는 두 눈을 방울 같이 부릅뜨고 있었지만 저항하기엔 상
대들이 너무 강했다. 결국 그녀는 나삼에 의해 가마 위로 밀려 올
라갔다.
나삼은 히히덕 거리며 웃었다.
"이봐 친구들, 어서 가마를 들고 가야지."
나구도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이 가마는 별로 작지 않으니 우리들도 올라가서 타자꾸나. 친
구들 수고 좀 해주시오!"
그는 나삼과 함께 가마 위로 올라탔다. 한 가마에 두 명씩 타자
나무로 된 바닥이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설사 가마가 더욱 더 무거웠다해
도 기꺼이 들고갈 용의가 있었다.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소어아는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강별학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는데, 혹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
단 말인가? 그들은 벌써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
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혹시 그들은 나구와 나삼이 이렇게 하리라
고 미리 알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단 말인가? 나구와 나삼이
어떻게 강별학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혹 그들 형제는 벌써부터
강별학과 연락이 있었단 말인가?)
소어아는 한숨을 쉬며 여러 모로 생각해보았다.
(강별학은 정말 악독하고 무서운 놈이로구나. 악독한 계책 속에
더욱 더 악독한 계책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이 천하에 나 강어
외에는 아마 그의 악독한 계책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가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가마는 이미 옆길로 꺾어 돌아
갔다.
돌연 앞에서 한 채의 가마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
었다. 가마를 들고 오는 자는 바로 그 말을 잘하는 일꾼이었다.
그 가마 뒤에는 두 필의 말이 따르고 있었는데 말 위에 탄 자는
강별학과 화무결이었다.
소어아는 또다시 놀랐다. 그는 문득 무엇인가 생각나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비켜라. 너희들은 이 가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고 있
느냐?"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화무결과 강별학을 보자 이미 벌벌 떨고
있다가 그의 이러한 외침소리를 듣자 더욱 놀라 식은땀마저 흘러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강별학은 그의 말을 따라 가마를
옆으로 비키라 분부했다.
소어아는 가마를 들고 지나갈 때 일부러 그 말을 잘하는 마부와
부딪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는데 너는 나를 알고 있느냐?"
그러나 그 일꾼은 전혀 그의 말은 듣지 못 한 것처럼 고개를 숙
이며 그의 옆을 그냥 지나쳤다.
가마가 서로 엇갈려 지나간 후 조씨 장원의 일꾼들은 비로소 한
숨을 돌렸다.
소어아는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다.
(과연 내 짐작이 틀림없구나. 저 나씨 형제란 놈들과 강별학은
벌써부터 내통이 되어 있었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이
가마 속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구나.)
이것은 철무쌍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일격이었다. 그가 만약
그래도 자신이 은을 강탈한 것과 독을 놓은 일에 관련이 없다고
변명한다면 천하의 많은 사람 중에서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철무쌍(鐵無雙)의 죽음
단합비 부녀는 드디어 지영장으로 잡혀 들어갔다. 지영장의 모
든 사람들은 패기를 되찾았고 몇 년 동안이나 뼈에 사무친 원한을
겨우 풀었기에 웃음을 금치 못 하였다.
조향영은 비록 이 일에 부당한 점이 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몇
해 동안 자기를 괴롭혀 온 원수가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 왔으니
그 기쁨은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 하여 한숨만 내쉬
었다.
(그래! 지금은 실컷 웃어 두어라. 우는 시간이 금방 다가올 테
니 말이다.......)
단합비 부녀는 몇 명의 사내에게 이끌려 뒷뜰로 밀려 들어갔다.
조향영은 이미 축연을 차렸고 제삼 술잔을 들어 올렸다.
"두 분이 이토록 불초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셨으니 불초는 죽
어도 두 분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삼은 웃음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뭐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닙니다. 장주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조향영은 마지 못해 행한 일이라 별 묘책이 없었다. 그는 한숨
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불초는 다만 큰 일을 작게 하고 작은 일은
없애는 것이 소망입니다. 조금 있다가 강별학께서 이곳에 오신다
면 나는 잘 해명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우리를 탓하
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단합비 부녀를 놓아 줄 것입니다."
나구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장주님은 그래도 해명을 하실 작정이십니
까?"
조향영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혹시......혹시......."
나구는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쌍방은 서로 맞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젠 장주님이 그 일과 관계가 없다고 아무리 해명해봤자 강별학은
그것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조향영은 얼굴색이 크게 변하며 당황스럽게 말했
다.
"그렇다면......그렇다면 결국 두 분이 노부를 해친 셈이 아니
겠습니까?"
이번에는 나삼이 냉소를 터뜨렸다.
"우리 형제가 죽음을 무릅쓴 끝에 겨우 얻은 것이 장주의 이러
한 말씀입니까?"
조향영은 이 말을 듣자 즉시 자신의 실언을 알아차리고 웃음띤
얼굴로 사과했다.
"불초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실언을 했으니 두 분께서는 부디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불초는 너무 당황하고 초조한 나머지 어떻
게 해야 할 줄을 모르니 두 분께서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
오."
나구는 얼굴표정을 풀고, 웃음띤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화해할 수 없을 때는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향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 하여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
다.
"싸워요?"
나구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강별학과 화무결의 그 뛰어난 무공에 불
초는...... 불초는......."
나구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려가며 조향영의 태도를 살폈다.
"화무결과 강별학의 무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장주님께서
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삼도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이었다.
"장주님! 힘으로 안 될 땐 지혜로 상대하라는 말을 못 들으셨습
니까?"
조향영은 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지혜로 맞선단 말입니까?"
나구가 그의 말에 응답했다.
"단합비 부녀가 이미 장주님의 손에 들어온 이상 강별학이 설사
이곳에 찾아온다 해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 할 겁니다."
조향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요?"
나구는 사방을 한 번 둘러본 후 살며시 속삭이며 말했다.
"장주님은 그저 궁수들을 이 대청 사방에 매복시켜......."
나삼은 미소 지으며 나구의 말을 이어 받았다. 두 사람은 손발
이 척척 맞았다.
"강별학과 화무결이 이 대청에 들어 오기만 하면 설사 목숨이
열 개 있다해도 살아 나가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음성이 매우 높았다.
소어아는 먼 곳에서 이 말들을 듣고 속으로 그들에게 욕하는 것
을 잊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놈의 계책이냐! 강별학 같은 인물이 그런 낡아빠
진 계책에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조향영이 만약 그들의
계책에 따라 행동한다면 자신의 죄를 더욱 더 무겁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설사 강변학이 그를 죽인다 해도 무
예계의 인물 중 그를 위하여 나서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계책을 들은 조향영은 얼굴색이 크게 변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은 그 계책이 성공되리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나삼은 웃음띤 얼굴로 나구의 말을 이었다.
"다만 나중에 장주님께서 저희 형제의 공로를 잊지 않을까 걱정
될 뿐입니다."
조향영은 그제야 비로소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했다.
"불초가 어찌 감히 두 분을 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시 안색이 변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만약 성공하지 못하는 날엔......."
나구가 급히 정색을 했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장주님께서 다른 좋은 계책이라도 있단 말
입니까?"
조향영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는 쓰디쓴 미소를 지
었다.
"나에게도 별다른 계책이 없소.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악독하
지 못 한 자는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없다고 했소. 나 조향영은 그
들과 끝까지 맞서는 수밖에 없군요!"
나구는 그의 말에 찬성하는 뜻에서 박수를 치며 크게 기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장주님의 말은 정히 영웅호걸의 본색입니
다!"
나삼도 찬성하는 뜻에서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 강별학이란 작자가 곧 이곳으로 달려올 테니 우리는 급히
일을 서둘러야 겠군요."
조향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음성으로 밖을 향해 명령했
다.
"형제들, 어서 화살을 가지고 사방에 매복해라. 그리고 내가 술
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활을 쏘아라!"
나구가 말했다.
"매복이 다 끝나면 장주님은 철노선배님을 모셔 오십시오."
나삼이 빠질 리가 없다.
"철노선배님이 빠진다면 일이 제대로 안 됩니다."
강별학의 계책은 과연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조향영은
비단 자신이 강별학이 파놓은 함정을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걸
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철무쌍까지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강별학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철무쌍의 세력을 소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강별학을 반대하는 무예계의 세
력이 점점 작아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어아는 두 눈을 감았다.
(강별학의 악독한 계책을 때려부술 방법이 없을까?)
날이 저물 무렵.
철무쌍은 대청 안에 앉아 있었다. 몸은 비록 똑바로 앉아 있었
지만 그 표정이 더없이 초라하게 보였고 또한 눈도 옛날 같은 빛
을 잃고 있었다.
나구와 나삼은 매우 의기양양했고 조향영도 흥겹게 보였다.
대청 사방에는 이미 삼십여 명의 궁사가 매복되어 있었고, 뜰에
는 너댓 씩의 조를 이룬 일꾼들이 모여 있었다. 소어아도 그 속에
끼어있었다.
이때 갑자기 장원 밖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장원 안
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일제히 긴장하여 굳어졌다.
말발굽소리가 드디어 멈추었다. 그러나 대청에 들어온 사람들은
강별학이 아니라 일곱 명의 검을 찬 소년들이었다. 그들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즉시 철무쌍에게 큰 절을 했다.
이들은 바로 철무쌍의 '십팔제자(十八弟子)' 중의 고수들이었
다. 그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을 보자 비단 철무쌍은 크게 위
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향영도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소어아는 그들을 보자 기뻐하는 가운데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들 일곱 명 중에 우두머리인 자는 바로 강옥랑과 내통이 있
는 그 얼굴색이 창백한 녹의 소년(綠衣少年)이었다.
그는 공손이 입을 열었다.
"제자들이 늦게 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어아는 속으로 가만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늦게 온 것이 아니고, 마침 잘 온 것이다. 나는 지금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철무쌍은 또다시 슬픔에 잠겨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은 비록 스승이 걱정되어 찾아왔지만 사실 아무런 소용
도 없다......이번 일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결코 경
거망동 하지 말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차례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한가닥의 인영이 대청 뒷쪽 창문에서 날아 들어와 '펑'하는 소
리와 함께 땅바닥에 굴러떨어진 후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활을 쥐고 있었고 등에는 화살주머
니를 메고 있었다. 바로 조향영이 사방에 매복한 궁수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 모습을 본 조향영의 얼굴색은 크게 변했다. 철무쌍도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 했다.
바로 그 순간 비명소리가 또 들려왔으며 또 한 명의 궁수가 대
청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장원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
렸다. 비명소리가 연이어지면서 대청 안에 수십 명의 궁수들이 겹
겹으로 쌓였다.
이 광경을 본 철무쌍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머뭇거렸다.
"이......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조향영이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때 날카롭고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자신의 죄를 더욱 크게 하는구나!"
말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형이 가볍게 대청으로 날아 들어왔
다.
그들은 물론 강별학과 화무결이었다.
조향영은 푹 하고 의자에 쓰러지더니 또다시 일어날 힘이 없는
듯 눈만 말똥거렸다.
강별학은 뒷짐을 지고 냉소를 터뜨렸다.
"철노영웅께서는 이까짓 매복으로 불초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
했소? 만약 정히 그렇게 생각했다면 철노영웅은 불초를 완전히 장
기판의 졸로 본 것이오."
철무쌍은 태연하게 우렁찬 음성으로 응답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노부는 전혀 모르오!"
"흥! 만약 철노영웅의 허락이 없었다면 조 장주도 아마 함부로
이렇게 하지는 못 했을 것이오!"
철무쌍은 대노했다.
"조향영! 너......말해 보아라. 도대체 누가 너에게 이런 비겁
한 수단을 사용하라고 했느냐?"
조향영은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 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것은......그것은......."
바로 이때 나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나운 음성으로
외쳤다.
"우리 형제는 그저 철노영웅과 조 장주가 영웅이라 생각하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이곳까지 찾아왔소. 그런데 두 분이 이토록 비겁
할 줄이야......."
나삼도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섰다.
"우리 형제는 비록 잘나지는 못 했지만 이와 같은 비겁한 자들
과는 함께 어울릴 수 없소. 지금부터 지영장에 아무리 큰 일이 발
생한다 해도 우리 형제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겠소!"
조향영은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
물거리다가 크게 외쳤다.
"두 분이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이 모든 것은 두 분의 계책이
아닙니까?"
나구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조향영! 그 죄를 우리에게 씌울 작정이오?"
나삼도 따라서 한마디 했다.
"네가 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아마 너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
을 것이다."
조향영은 대노하여 울부짖는 음성으로 외쳤다.
"너......너 이놈......네 놈이......."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던 화무결이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끼
어들었다.
"두 분께서는 그래도 할 말씀이 있습니까?"
철무쌍은 이를 악물며 분함을 참지 못 했다.
"노부......노부......노부는,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는 또다시 피를 토하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이 노인은 너무
부화가 치민 나머지 기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문하생들은 이 광경을 보자 대노했다. 어떤 제자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부축했고, 어떤 제자는 검을 빼내어 공격을 하려했
다. 바로 이때 그 얼굴색이 창백한 녹의 소년이 큰소리로 외쳤다.
"일이 확실하게 판명되기 전까지 여러분들은 경거망동을 하지
마시오!"
강별학이 정색을 하며 한 걸음 나섰다.
"옳아!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옳고 그름을 따져보지 않고 도와
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여러분들이 만약 흥분 속에서
도 강호도의(江湖道義)를 판가름 할 수 있다면 무예계의 인물들은
필시 여러분을 존경할 것입니다."
그 녹의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또한......."
순간, 강별학이 우렁찬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고도 모르겠다는 말이오?"
녹의 소년은 쓰디쓴 표정을 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저희들을 무정하다고 하지 마시고 그저 사부님 스스로
저지른 일을 하늘이 용서치 않는 것이라고 탓하십시오. 제자들은
대의(大義)를 위하여 사부님을 배반......."
그는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땅
바닥에 던졌다.
나머지 여섯 명의 철무쌍 제자들도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자
세 명은 그와 같이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땅에 던졌고 나머지
세 명은 손에 쥐고 있던 장검(長劍)을 땅바닥을 향해 내려버리고
말았다.
강별학은 여전히 우렁찬 음성으로 호령하듯 말했다.
"철무쌍과 조향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 일과 관계가 없으
니, 그저 이들을 도와주지만 않는다면 불초는 절대로 해를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
조향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나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나를 이렇게......."
그러나 강별학은 여전히 태연했다.
"불초는 귀하와 아무런 원한도 없지만 강호도의를 위하여 오늘
은 당신을 가만히 놓아 둘 수 없오!"
조향영은 이를 악물더니 갑자기 울부짖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
다.
"좋다! 네가 단합비를 위하여 나를 없애고자 하는구나. 하지만
단합비가 지금 내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만약 나를 죽인
다면 그도 살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강별학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냉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게 될까?"
그는 갑자기 손짓을 했다. 대청 뒤에서 두 채의 가마가 들려나
왔다. 앞의 가마를 들고 있는 일꾼은 바로 그 말을 잘 하는 하인
이었다.
이때 강별학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마 속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은가?"
조향영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이때 그 달변이
능통한 일꾼이 가마의 염(簾)을 걷어 올렸다. 안에는 단합비가 웃
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조향영은 비통한 표정을 하고 사방을 한 번 둘러 보더니 갑자기
울부짖는 외침 소리를 터뜨리며 미친 듯이 대청밖으로 달려나갔
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강별학은 그를 막지 않고 그저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네가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대청 밖을 달려 나간 조향영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내민 손에
의해 수풀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귀
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 몇 마디를 들은 조향영은 마치 선약
(仙藥)을 먹은 듯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때 철무쌍이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화무결은 그가 정신을 되찾은 것을 보자 입을 열었다.
"당신이 힘들여 얻은 명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소. 스스로 목숨
을 끊게 해드리지요."
화무결은 매우 침착하고 태연하게 그 말을 했고 표정 또한 매우
고상했다.
강별학은 몸을 숙여 녹의 소년의 장검을 주워 들더니 천천히 철
무쌍의 앞에다 내밀었다. 그는 차디찬 눈동자로 철무쌍을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철무쌍은 하늘을 바라보고 긴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하늘도 무심하구나. 나 철무쌍이 어찌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
단 말인가!"
그는 비참하고도 날카로운 눈으로 자기의 문하생들을 한 번 둘
러 보았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심지어 녹의 소년도
고개를 숙였다.
철무쌍은 패기를 되찾은 듯 큰소리로 외쳤다.
"나 철무쌍은 바로 이곳에 있으니 너희들이 진정 나 철무쌍이
죄를 지었고 정히 이땅에 남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서 와서 내 생명을 끊어라!"
그의 눈은 빨갛게 선 핏발이 타오르고 있었고 분노와 억울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차 있었다.
강별학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그 가마를 들었던 일꾼은 도리어 앞으로 한 걸음 걸어나
왔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자는 누구도 죽일 자격이 있다. 다른 사람
이 너를 불쌍해서 못 죽인다면 내가 죽이겠다!"
바로 그 순간 한가닥의 우뢰와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강옥랑! 넌 정말 악독한 놈이구나."
순간, 그 웅변에 능통한 일꾼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재빨
리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전에 도망갔던 조향영이었다. 그는
얼굴이 비록 창백했지만 가슴을 떳떳이 내밀고 있었고 음성 또한
매우 우렁찼다.
그가 대청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자 강별학 등 사람들은 그제
서야 비로소 그의 뒤에 또다른 한 사람이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는 푸른 색의 옷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에는 대나
무로 만든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마치 허공을 나는 것
같아서, 마치 조향영의 몸에 붙어 다니는 유령같이 보였다. 사람
들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말이 달변인 일꾼은 재빨리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태연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강 소협 같은 분이 어찌 가마를 드는 일꾼을 하겠소. 당신은
죄를 짓더니 정신까지 돈 모양이구려."
조향영은 여전히 큰소리로 소리쳤다.
"강옥랑! 비록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못 속인다. 네가 단합비의 표은을 강탈한 후 이곳에 와서 가마를
드는 일꾼으로 변장한 목적은 오직 철노영웅님의 생명을 빼앗아가
고자 함이 아니냐? 네가 그렇게 하면 무예계의 영웅들은 그저 철
노 영웅님이 가마를 드는 일꾼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할 뿐이지,
너희 인자스러우면서도 의리가 강한 척하는 '강남 대협' 부자의
간계에 희생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할 것이다. 강옥랑!
너희 부자가 하는 일은 정히 심사숙고한 후에 행하는 일이라 추호
도 빈틈이 없구나!"
그 말에 달변인 일꾼은 여전히 미친 듯이 웃었다.
"여러분들 들으셨습니까? 이 놈이 감히 표은을 강탈한 자가 강
소엽이라 하니 말입니다...... 단 어른께서 보시기엔 저놈이 미친
놈 같지 않습니까?"
단합비의 눈에는 한가닥의 교활한 빛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
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조향영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의 그 말은 무슨 증거가 있소? 만약 강 소협이 표은을 강
탈 할 마음이 있었다면 뭣하러 표은을 되찾아 주었겠오?"
조향영이 응답했다.
"표은을 처음에 잃은 것은 쌍사표국과 강옥랑이 짜고서 한 짓이
오. 그리고 그 표은을 다시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배상을 해야 하
기 때문에 도로 돌려준 것이오."
단합비가 다그쳐 물었다.
"그들이 뭐하러 그렇게 하겠소!"
"그들이 그렇게 한 목적은 비단 무예계에 강옥랑의 이름을 날리
기 위해서 일뿐만 아니라 또한......."
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단합비는 다시 다그쳐 물었다.
"또한 어쨌다는 말이오?"
"또한 두번째 표은을 강탈한 사람이 강옥랑일 거라고 의심할 사
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쌍사표국에 속한 사람들이 어째서 한꺼번에 그렇
게......."
조향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쌍사표국의 사람들은 강별학 부자의 자그마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소. 강옥랑은 그들을 자기의 계책이 탄로나지 않게 한 것이오.
또한......."
"또한 어쨌단 말이오?"
"또한 쌍사표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몰살당해야 그 표
은을 배상할 사람이 없게 되지 않겠소? 이리하여 그 엄청나게 많
은 표은은 고스란히 강 대협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오!"
강별학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그 달변의 일꾼에게 눈짓을 했
다.
그 일꾼은 다시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죽을 마당에 남을 모독할 셈인가?"
그는 번개같이 조향영에게 덮쳐갔다. 그의 달려가는 속도는 시
위를 벗어난 화살과 같았다.
조향영이 깜짝 놀란 나머지 피할 길이 없어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순간 화무결이 번개같이 달려들어가 조향영을 밀어냈다.
그 일꾼이 이미 뿜어낸 쌍장은 걷잡을 수 없이 뻗쳐나가 화무결
을 향했다. 그러나 화무결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왼손바닥으로 오
른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는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그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의 이 장사단완(壯士斷腕)이란 일 초는 진정 내가 정종의 최
상승 무공이었고, 실로 곤륜대구실 중의 현애륵마보다 더욱 뛰어
난 무공이었다.
그가 이러한 무공을 펼치자 철무쌍마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
졌다. 강별학도 화무결에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훌륭한 무공이며 뛰어난 실력이군요......."
가마를 드는 일꾼은 놀라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화무결을 바라보
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은 왜......."
화무결은 웃음띤 얼굴로 그의 말을 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게 해야하고 또
그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설사 우리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 말할 자유는 주어야하지 않겠소. 안 그렇소?"
그 말에 달변인 일꾼은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공자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화무결은 조향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장주께서 하신 이 말씀들은 증거가 있습니까?"
조향영은 한참이나 멍하고 서 있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쌍사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일 초를 반격하지도 못 하는 짧은
순간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남쌍사 두 분의 무공이
약하지도 않은데...... 화공자께서도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지
만 반격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많은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잠깐잠깐씩 멈칫거리면서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남의 말을 전하는 듯 보였다. 강별학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번개 같이 그의 몸 뒤에 있는 사나이를 노려 보았다.
화무결이 천천히 대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필사 무공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많은 사람들이 반격한다면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을 다 죽일 수
는 없을 것이오."
조향영이 다시 말했다.
"이 천하에 무공이 공자님보다 뛰어난 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죠?"
화무결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설사 있다 해도 많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 일을 해명하려면 단 한 가지 가능성 밖에는
없습니다."
"무슨 가능성이오?"
"그것은 필시 강남쌍사와 매우 친한 친분관계를 지닌 사람이 저
지른 일일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그가 자기들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위조차 하지 않는 상황 아래서 당한 것
입니다."
이렇게 말한 조향영은 갑자기 껄껄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만면에는 화색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강옥랑 밖에 없지요!"
"하지만 간신히 살아난 그 마부의 말에 의하면 그들을 죽인 자
는 위엄스럽게 생긴 노인이라 하지 않았소?"
"변장술은 매우 신기한 것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지요. 그
가 가마를 드는 일꾼으로 변장할 수 있다면 당연히 위엄있는 노인
으로도 변장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곧이어 또 계속 말했다.
"그가 그 마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그의 입을 통하여 거짓
을 전달하려는 목적입니다....... 설사 그 마부가 숨어 있었다 해
도 어떻게 그토록 무공이 뛰어난 사람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단 말
입니까?"
그는 또다시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 주위를 한 번 뚫어 보더
니 생각해낸 듯 또 말을 이었다.
"또한 그 마부는 혼이 빠지도록 놀란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할 수가 있으며 확실하게 말할 수가 있겠소. 아마 그
마부도 그들과 한 패일 것입니다......."
그는 또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뒤에 있는 유령 같은 사나이
에게 또 지시를 받는 것 같았다.
"잠깐만! 내가 조금 전엔 틀리게 말했소. 그 마부는 아마도 저
일꾼일 것이오. 바로 강옥랑이란 얘기요. 또한 그 쌍사표국 사람
들을 죽인 자는 아마도 강별학일 것입니다!"
강별학은 갑자기 앙천대소하며 입을 열었다.
"난 본시 너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려 했는데 네가 이토록 내 인
격을 모독하니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이때 갑자기 한가닥의 기압소리가 들려왔다. 그 일꾼은 어느새
그 유령 같은 사나이의 몸 뒤로 다가가서 허공에 몸을 솟구쳐 곤
두박질을 하며 쌍장을 번개 같이 그 사나이의 등을 향하여 뿜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뒤를 향하여 일장을
뿜어냈다.
이 일격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지만 바로 그 일꾼의 빈틈을 노린
것이었고 또한 피하지 않을 수 었는 것이었다.
그 일꾼은 도리어 자신의 방위에 바빴다. 그는 재빨리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피했다. 그는 두 눈을 부
릅뜨고 그 유령 같은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일군의 무공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무공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유령 같은 사나이의 가벼운 일장조차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것을 보자 그 놀라움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일꾼 자신도 자기의 그토록 거센 일장이 애들의 손짓 같은 취
급을 받자 정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유령 같은 사나이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킬킬 거리며 웃었
다.
"너, 나를 아느냐?"
"너......너는 누구냐?"
"너는 비록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다......나는 죽
어도 너를 잊을 수 없단다!"
그의 음성은 매우 스산했고 정히 유령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았
다.
일꾼은 이러한 음성을 듣고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며 떨리는 음
성으로 말했다.
"너는......너는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이냐?"
그 유령은 여전히 스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벌써 얘기하지 않았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유령이라고 말이
다!"
그는 한 발걸음씩 다가섰고 그 일꾼은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밀
려 나갔다.
대청은 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밝았지만
왠지 음침하고 침울하게 느껴졌다.
그 일꾼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공포심이 역력했다. 그의 이러한
표정과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게 했
다.
화무결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추호도 그 유렴의 공세를
막을 생각이 없는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때 강별학이 두 눈을 깜박거리며 마치 뭔가 눈짓을 했다.
돌연 녹의 소년의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이 들려왔다.
"아! 큰일났다! 저의 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께서
자살 하셨습니다!"
이 비명소리에 즉시 모든 사람의 눈길은 그 유령 같은 사나이의
몸에서 철무쌍에게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한 자루의 장검이 철무쌍 목구멍에 꽂혀 있었고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가 그이 온몸을 완전히 적시고 있었다.
예리한 검이 목구멍에 박혔기 때문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 것이었다. 그의 양손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장검을
찌른 것 같기도 했고 장검을 빼내려고 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눈은 분노에 가득차 있었고 또한 두려움과 놀라움 그리고
원망이 함께 서려있는 눈동자는 녹의 소년을 뚫어지게 노려 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은 일시에 얼굴색이 변하며 넋을 잃고
말았다.
강별학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중얼거
렸다.
"철무쌍께서는 과연 영웅답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마
음으로 이렇게 자살을 했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죄를 탓하지 맙
시다. 아뭏든 그는 이미 죽었으니 말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 유령 같은 사나이가 갑자기 큰소리
로 외쳤다.
"거짓말 마라! 철노선배님은 절대로 자살한 것이 아니다!"
- 제4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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