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08

3학년2반 | 2022.02.13 07:15:13 댓글: 0 조회: 32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497
의외(意外)의 사태(事態)
포목이 떨어지자 심지어 모용산마저 약간의 품고 있던 의심을
버렸다. 소선녀와 모용쌍은 더욱 얼굴에 살기를 띠우며 당장이라
도 강별학을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자기가 강별학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
고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죽은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상대방 손에 들려 있는 장검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예사사람이었다면 지금쯤 필시 큰소리로 열띤 변명을 했겠
지만 그는 결코 변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남보다 뛰어나서
그렇게 태연한 것이 아니라 설사 자기가 변명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해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 역시 치밀한 계획으로 많은 사람을 곤경에 몰아 넣고
그들로 하여금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했었던 까닭에 자신의 입장
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또한 그는 변명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해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그들의 관계는 실로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이 세상에서 소
어아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관계를 확실히 해명할 수 있는 자는 아
무도 없었다. 그러니 변명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용쌍은 두 눈을 부릅뜨
며 모용산에게 눈길을 돌려 물었다.
"삼매! 너는 지금도 할 말이 있느냐?"
"우선 저 자를 반항 못하게 잡고 보아요."
소선녀는 그녀의 이런 말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그녀의 말
이 떨어지자 마자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장검으로 일격을 뿜어냈
다.
그녀의 검법은 신속하고 날카로운 반면 모용쌍의 검법은 악독하
고 거셌다.
모용산의 검법은 비록 소선녀보다 신속하지도 못했고 모용쌍보
다 악독하지도 못했지만 눈만은 매우 날카로왔고 정신 또한 맑았
기에 뿜어낸 매 일 검마다 깨끗하여 상대방이 반드시 막아야만 했
다.
이들 세 사람의 장검은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녀들은 어릴 때
부터 같이 자라왔고 또한 같이 무공과 검법을 연마했던 까닭에 초
식의 배합은 물셀 틈 없었다.
이렇게 되자 흑의인의 무공이 비록 고강하고 뛰어났지만 과히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들의 공세를 몇 초 막던 그는 갑자기
검법을 격렬하게 변경했다. 그것은 그가 진격으로 후퇴한 작전이
었다. 쉽게 말해서 그녀들로 하여금 공세를 조금 늦추게 하고 도
망가려는 방법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격투의 경력이 많아 그가 갑자기 검법을 변경하
는 것을 보자 이미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승자박(自繩自縛)에 삐지고 말았다. 왜냐하
면 그가 도망가려 하자 그녀들이 더욱 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소선녀와 모용쌍은 점점 목숨을 걸고 그에게 덮
쳐갔기 때문이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흑의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솟아나 흑
두건을 적셨다!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천하에 이름을 떨친 모용가
문의 자매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모용자매의 진실한 장점은 검법이 아니고 암기와 경공에
있었다. 다만 그녀들이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가 도망갈
까봐 방어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뿜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휙'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모용산산은 이미 '분화불유'라
는 일 초로 흑의인의 얼굴을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그는 검빛이
그칠 줄 모르게 현란했기 때문에 허초인지 실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의 이 초식은 적을 상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으며
다만 상대방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선녀와
모용쌍에게 좋은 공격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 그를 붙잡고자 함이
었다.
그러나 흑의인은 재빨리 이 초식을 피해냈으며 동시에 검을 위
로 뻗쳐냈다. 과연 그는 역시 고강한 고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소선녀와 모용쌍은 마치 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서로 엇갈리며 허공에 무지개빛을 발하였다. 그녀들은 좌우로 나
누어 검을 뿜어냈던 것이다.
그녀들이 사용한 이 초식들은 별로 신기하고 교묘한 것은 아니
었지만 두 개의 검이 배합된 지금 실로 더없이 거센 위력을 발휘
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들은 흑의인의 사방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일보직전의 하루살이 같았다.
그러나 흑의인은 모용산의 일격을 막은 후 갑자기 손에 쥐고 있
던 장검을 버렸다. 그리고는 번개를 잡을 듯한 속도로 몸을 솟구
쳐 모용산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일 초의 변화는 실로 위험천만한 것이었고 아울러 완전무결
에 가까운 교묘함도 곁들어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 외에는 생각
해낼 수 없는 초식이었다. 심지어 소어아마저 갈채를 터뜨릴 뻔하
였다.
모용산산은 그가 검을 버리고 자신의 손목을 낚아챌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하고, 그녀가 그 점을 발견했을 땐 이미 손목이 그에
게 잡혀 있었으며, 그의 몸은 또한 자신의 품안으로 달려옴을 발
견할 수 있었다.
흑의인은 곧 남은 한쪽 손으로 그녀의 목을 살며시 누르며 사나
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이 계집애의 생명을 살리고 싶으냐?"
이때 흑의인의 등은 완전히 소선녀와 모용쌍의 공격권 내로 들
어와 있었다. 언제라도 그의 등에다 쥐고 있는 장검을 꽂을 수 있
었다.
그렇건만 모용산의 생명이 그의 손아귀에 쥐여있는 지금 그녀들
은 그저 장검으로 흑의인을 겨누고 있을 뿐 감히 섣부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녀들이 검을 움직이기만 하면 모용산산은 즉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흑의인도 감히 경거망동
을 하지는 못했다.
모용쌍은 이때 안타까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빨리 내 동생을 놓아 주어라! 그렇지 않는다면 이 검이 심장에
박힐 것이다!"
흑의인은 그녀의 이러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냉소만을 터뜨렸다.
"너희들이 이 검을 거두지 않으면 내가 먼저 이 계집을 죽이겠
다."
"당신이 먼저 놓아요. 그러면 우리도 당신을 놓아 주겠소!
소선녀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부쳤다.
흑의인은 소선녀의 이러한 말을 듣자 껄껄 웃으며 눈알을 부라
렸다.
"여인이 선(先)이고 남자는 후(後)하란 것이 이 세상의 예의이
고 도리이니 너희들이 먼저 검을 거두어라!"
이번에는 모용쌍이 나섰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나 역시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
쌍방은 모두 경거망동들을 하지 못했고, 또한 섣불리 놓아 주지
도 못했기에 잠시 동안 서로 버티게 되었다. 소선녀와 모용쌍은
모두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너무 조급한 나머지 얼굴
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모용산산은 추호의 다급함이나 초조한 감을 찾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목소리조차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언니, 절대로 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자는 나에게 해된
짓을 할 용기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흑의인은 여유만만했다.
"참는데는 나도 남보다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으니 이대로 버
티어 간다해도 나에게는 무방하오."
소선녀는 점점 크게 화가 돋았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작정이오?"
"당신들이 나를 놓아줄 때까지 버틸 작정이오."
이렇게 되자 소선녀는 너무나도 조급한 나머지 몸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바보 같은 계집!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조급해 하냔 말이
다. 때가 되면 도울 사람이 어련히 오지 않을까봐.......)
바로 이때 먼 곳에서 세 인영이 나는 듯이 다가왔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당 안까지 당도했다. 그들은 바로 남궁유, 진검 그리
고 고인옥이었다!
소어아, 모용자매 그리고 소선녀는 모두 크게 기뻐했다. 반면
그 흑의인은 모용산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거
나 당황해 하지는 않았다. 진검이 온 이상 더욱 모용산을 죽게 내
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저 자기가 모용산을 잡고 동안은 도망갈 궁리를 할 필요가 없
다고 생각했다.
진검은 자기 처가 남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보자 얼굴색이 크
게 변했고, 고인옥은 강호경력이 가장 적었기에 이 광경을 보자
더욱이 멈칫하며 놀랐다.
소선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인옥에게 말을 던졌다.
"이 바보 같은 사람아! 빨리 가서 도와주지 않고 왜 그렇게 멍
청하게 서있는 거야?"
흑의인이 이 말을 듣자 재빨리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내가 이 여인을 없애버리겠다!"
진검이 제일 당황했다.
"이......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이오? 서로 좋게 타협을 하십
시다."
"이 일은 사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쯤 되어버렸으
니 설사 내가 해명을 한다해도 당신들은 믿어 주지 않을 것이오.
모든 말은 내가 이 사당을 나간 후에 하기로 합시다!"
모용쌍은 진검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절대로 저 자를 놓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저 자는 매우 교활
한 자니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요!"
이때 남궁유는 포목 위에 쓰인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움이 가득
찬 음성으로 흑의인을 향해 말했다.
"각하께서는 정말 강 대협입니까?"
흑의인은 그저 '흥!'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선녀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대협은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질 대협이오? 이 자가 바로 강별
학입니다!"
모용산이 초조한 음성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제 걱정 마시고 구매를 찾으셔요."
남궁유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듯 말을 했다.
"우리들이 조금 전에 강 대협의 거처를 찾아 봤지만......."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즉시 어딘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들이 만약 강별학의 거처에서 모용구매를 찾았다면 절대
로 이토록 겸손하게 그를 '대협'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용산산도 매우 조급하게 알고 싶은 듯 다그쳐 물었다.
"구매가 그곳에 없단 말이지요?"
모용산의 물음에 진검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구매만 걱정하지 말고 우선 당신 자신의...... 자신의......."
남궁유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구매는 강 대협의 거처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모두 어떤 자에게 놀림을 받았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하마터면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 나올 뻔했다.
(도대체 이 일이 어찌된 것일까? 모용구매가 어째서 그곳에 없
단 말인가? 혹시 이 녀석들이 집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그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시 진검의 말소리가 들려왔
다.
"우리들이 방금 화무결 화공자와 철심난 철 소저도 만나봤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구매는 오래 전에 실종된 것이지 절대로 강
대협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궁유가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화공자께서 또한 이 일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다고 하
며 우리에게 여간 조심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지요. 그리고 만
약 철 소자의 병세가 완전히 완쾌되기만 했다면 당장이라도 와보
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용쌍은 맥이 풀린 듯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선녀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설마 철심난도 강별학과 한편이 되어 우리를 속이지는 않겠
지!"
모용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일은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강 대협께서 정말 그 은이 탐났다면 구태여
자신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 자신이 이곳에
왔다해도 우리를 몰라볼 리가 만무하지 않겠어요? 더구나 그는 구
매를 숨기려면 다른 곳도 많은데 무엇하러 자신의 거처에 숨긴단
말입니까?"
이 문제점들은 사실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러나 남궁유와 진검이 강별학의 거처에서 모용구매를 찾아냈다면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진검이 발을 굴렀다.
"당신은 벌써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왜 강 대협과 싸움
을 벌렸던 것이오?"
그는 흑의인이 놓아줄 기세가 없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자기 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쌍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가...... 강 대협께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어떻
게 오해란 것을 알겠어요?"
침묵만 지키던 흑의인은 그제서야 껄껄 웃으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설사 불초가 해명한다해도 소저께서 불초의 말을 믿
어 줄 수 있었단 말이오?"
모용산산은 눈알을 굴리며 갑자기 흑의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가 정말 강별학 강 대협입니까?"
이 한마디가 떨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다시금 의심을 품게 되었
다.
이때 흑의인은 모용산의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걷어 올
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불초가 강별학이든 아니든 그 결과는 마
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흑두건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
진검은 이때 모용산의 옆까지 다가서서 작은 음성으로 살며시
물었다.
"여보 당신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소?"
모용산산은 웃음띤 얼굴로 남편의 손을 잡는 한편 두 눈은 유심
히 흑의인을 지켜 보았다.
"저희들이 강 대협님인줄 모르고 이렇게 많은 강 대협님의 부하
를 죽였으니 참으로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오직 강 대협님의 처
벌을 바랄 뿐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강 대협'이란 세 글자를 매우 힘주어 불렀고 또
한 연거퍼 세 번이나 그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부인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쌍방이 싸움을 하게 되면 자연히 부상당하는 자도 있고 사망한
자도 있기 마련인데 어찌 부인을 탓하겠습니까? 오직 암암리에 우
리에게 골탕을 먹인 자를 정말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갑자기 소어아가 숨어있는 곳으로 돌려
졌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의 눈길도 일제히 그의 시선을 따라 그
곳으로 향했다.
모용쌍이 먼저 큰소리로 외쳤다.
"옳은 말씀이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
다!"
소선녀도 원한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그런 자가 나에게 잡힌다면 나는 먼저 그의 팔 다리를 분
질러 놓고 그에게 왜 이렇게 악독한 계책을 꾸몄는가를 물어 보겠
습니다."
그러나 흑의인은 웬일인지 냉소만을 터뜨렸다.
"소저에게 그런 수고를 끼쳐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불초 자신부
터 그를 놓아줄 수 없으니 말이오."
그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소어아의 은신처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렇게 많은 절정의 고수들이 한 사람을 포위했으니 제아무리 무
공이 뛰어난 사람이라해도 그 포위망을 뚫고 나갈 생각은 버려야
할 판이었다.
소어아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미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
게 잡히는 날엔 필시 사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스스로 파 놓은 구덩이에 자기가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는 이 경각에 백여 가지의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그러나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때 흑의인의 냉소가 들려왔다.
"일이 이쯤 됐는데도 귀하께서는 나오지 않을 작정이오?"
모용쌍이 질세라 한마디를 거들었다.
"댁은 벌써부터 그놈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도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흑의인이 그제서야 해명을 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날아온 암기가 불초의 부하를 상하는 것을 보
자 부인들이 미리 설치한 매복인줄 알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소어아는 속으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네 놈의 눈알은 정말 개눈 같이 밝구나!)
그는 생각나는 대로 욕을 뱉어내기는 했지만 이번에 자신이 이
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는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
같았다.
이때 흑의인의 차디찬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친구께서 그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불초가 활을 쏘라고 명령하
겠소."
모용쌍은 이때 갑자기 옆에 서 있던 흑의 대한의 손에서 화살을
뺏아들고 큰소리로 소리쳤다.
"모용집안의 활솜씨를 맛보아라!"
소어아는 전에 모용쌍의 침실을 구경했을 때 그녀가 이미 활에
대하여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든 살든 간에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인의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호호호! 이곳은 참으로 번잡하군요. 혹시 무슨 재미난 구경거
리라도 발생했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사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
다.
산발을 하고 바보 같이 깔깔 웃으며 유령처럼 서 있는 여인은
모용구매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모용구매는 도대체 어디 갔었단 말이냐? 어째서 또 갑자기 이
곳에 나타났단 말이냐?)
이렇게 생각한 소어아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
여문을 몰랐다. 심지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였다.
모용자매는 모용구매를 보자 놀랍고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
편 일제히 입을 열었다.
"구매! 너를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들은 재빨리 모용구매에게 달려가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언니들의 울음섞인 목소리와 반가운 행동과는 달리 모용
구매는 망연히 그녀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깔깔
거리며 웃기만 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나는 당신들을 모르겠는데요?"
모용쌍이 이 말을 듣자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구매! 너...... 너는 이 언니도 몰라보겠단 말이야?"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용산산도 눈물이 가득찬 얼굴로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구매! 너는 어쩌다가 이 모양으로 되었단 말이냐?"
모용구매는 그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런 대꾸
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인옥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
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구매! 나는 알겠느냐?"
소선녀도 발을 굴렀다.
"구매는 자기의 언니들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당신을 어
떻게 알아본단 말예요?"
소선녀의 이러한 말을 듣고 고인옥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
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진검과 남궁유의 얼굴에도 비통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때 남궁유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구매는 아마 어떤 큰 자극을 받고 이렇게 된 모양이니, 집으로
데려가서 안정시키고 한동안 요양시킨다면 차차 나을 것입니다."
모용쌍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누가 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누구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소선녀도 울음이 복받쳤다.
"구매는 죽은 소어아가 돌연 부활한 것을 보고 너무도 놀란 나
머지 이 모양이 된 거예요. 사실 소어아는 죽지 않았고 일부러 구
매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는데."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소어아가 누구냐?"
"소어아는...... 성은 강씨고 나이는 비록 많지 않지만 머리 속
은 온통 나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고, 남을...... 남을 골탕
먹이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에요."
모용쌍은 소선녀의 말을 듣고 크게 대노했다.
"지금 그 놈이 어디 있느냐?"
"지금쯤은 아마 죽었을 겁니다."
순간 모용쌍은 멈칫했다.
"너는 방금 그가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그가 죽었다니
도대체 그는 살아있느냐? 아니면 죽었느냐?"
"처음에는 죽지 않았었지만 그 후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소선녀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놈은 귀신도 놀라는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
람이 분명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곤 했으니, 그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도 감히 그가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이때 흑의인이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 놈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소선녀가 그의 말을 재빨리 받으며 쳐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아시죠?"
"최근에 와서 내가 그를 본 적이 있으니까요."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내가 보기엔 그는 지금쯤 바로 이......."
그는 마치 숨어있는 사람이 바로 소어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처럼 말했다. 순간 소어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러나 흑
의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모용구매의 입에서 탄성이
발해졌다.
"소어아!...... 소어아!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그녀가 무언가 기억을 되찾는 기미가 보이자 모든 사람들이 다
시금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모용쌍이 다시 떨리는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생각해낼 수 있느냐?"
모용구매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더니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은 둘째 언니군요."
모용쌍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기쁨의 눈
물을 흘렸다.
모용산산도 너무 기뻐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구매, 구매...... 하늘이 너를 불쌍하게 여긴 까닭에 다시 기
억할 수 있도록 한 모양이구나."
모용구매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셋째 언니...... 제가 다시 언니를 뵐 수 있다니 이것이 꿈이
에요? 아니면 생시에요?"
그러나 이 한 말을 던진 그녀는 두 눈썹 밑에 애수가 서리며 통
곡하기 시작했다.
그들 자매가 서로 웃고 울며 한데 뭉친 것을 남몰래 지켜보던
소어아도 눈시울이 붉어져오는 것을 느꼈다.
모용구매는 본시 그의 원수였고 또한 제 정신을 되찾은 지금,
그의 계획이 산산조각 났을 뿐만 아니라 모용자매가 그를 찾아 복
수할 것을 방비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웬일인지 가슴 속 깊
은 곳으로부터 뿌듯한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마음을
느꼈던 것은 자신마저 자기를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피를 가진 인간이라고 보아야 했다.
이때 그 흑의인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희비가 교차되는 현상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 강소어란 작자가 모용자매의 동생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
니 무예계의 인물은 누구라도 그를 가만 놓아 두지는 않을 것입니
다."
그가 지금까지 가지 않은 것은 바로 소어아를 상대하기 위해서
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모용가문의 아가씨들이 기쁨 때문에
그 일을 잊을까봐 다시금 일깨우려는 속셈이었다.
과연 모용쌍이 눈물을 거두면서 원한이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내가 만약 그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알기만 하면 당장
잡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그 녀석이 지금쯤 아마 바로......."
흑의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모용구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실 이번 일은 소어아만 탓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
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히 소어아였고, 그 다음은
바로 소선녀였다.
그녀는 참다 못해 다급하게 물었다.
"그 놈을 탓하지 않고 누구를 탓한단 말이냐? 너는 그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지니고 있지 않느냐?"
모용구매의 입가에 처량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나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보고 그 당시는 매우 놀라고
심지어 정신마저 조금 이상해졌지만, 얼마 안 되어 점점 맑은 정
신을 되찾았어요."
모용쌍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그렇게 일찍 정신을 되찾았으면 왜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단 말
이냐?"
"그건 다른 한 사람이 해를 가했기 때문이에요."
"그놈이 누군데?"
"바로 강별학이에요."
그녀가 원한에 서린 듯 이렇게 내뱉자 소어아마저 어리둥절해졌
다.
(강별학이 왜 그녀에게 해를 가했을까? 만약 강별학이 그녀에게
해를 가했다면 그녀가 맑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벌써 도망가야
했을 텐데 왜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있단 말이냐? 혹시 그가 죽고
싶어서 환장이라도 했단 말인가?)
소어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모용구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놈은 제가 맑은 정신을 되찾은 것을 보고 다시 미혼약으로
저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저의...... 저의 정조를 빼앗으려 했어
요. 오직 그도 모용가문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 말예요! 그는 매일
같이 저를 괴롭혀 왔는데 조금 전에야 비로소 저에게 도망갈 기회
가 생겨 이렇게 빠져나온 거예요."
그들은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강별학이 억울함을 당했다고 생각했
지만, 이제는 친히 모용구매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히
믿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이리하여 모용쌍은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흑의인을 향해 소
리쳤다.
"강별학! 네 이 흉악하고도 악당 같은 놈아! 우리가 하마터면
너의 속임수에 넘어갈 뻔 했구나!"
남궁유도 웬만하면 큰소리를 안 냈는데 이번에는 크게 노해 있
었다.
"원래 구매가 스스로 도망 나왔구나! 어쩐지 우리가 조금 전에
강별학의 거처를 뒤졌을 때 찾지 못했지. 다행히 하느님의 도움으
구매를 이곳으로 보냈으니 이것은 정히 하늘의 뜻이다!"
그의 이러한 외침 속에 그들은 흑의인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아아는 정히 놀랍고도 기뻤지만 어
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일이 이렇게 확대될 줄이야! 모용구매
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소어아가 설사 천하에서 제일가는
총명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를 것이다.
이때 모용쌍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강별학! 네 놈은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러나 그 흑의인은 또다시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한 걸음 나섰
다.
"내가 언제 강별학이라고 했소?"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흑두건을 벗었다. 순간 모든 시선이 일제
히 그의 얼굴로 집중됐다. 그러나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흑의인
의 얼굴은 과연 강별학이 아니었다.
남궁유 등 사람들은 모두 강별학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강별학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들은 얼이
빠진 듯 망연자실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모용쌍이 물었다. 모용산산도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어왔
다.
"만약 당신이 강별학이 아니라면 진짜 강별학은 어디에 있단 말
이오?"
"흥! 강별학은 바로 이곳에 있소!"
그 흑의인은 갑자기 소어아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네 놈이 그래도 나오지 않겠느냐?"
이러한 외침소리와 함께 그는 번개 같이 신속한 일격을 뿜어냈
다!
의외(意外) 속의 의외(意外)
소어아는 그 흑의인의 번개 같은 일장이 덮쳐오자 다시금 놀랐
다. 그러나 당황함 속에서도 재빨리 일장을 뿜어내어 막으며 큰소
리로 소리쳤다.
"네 놈이야 말로 강별학이 변장한 놈인데 감히 누구를 속이려드
느냐?"
그 흑의인도 그와 똑같은 말로 외쳤다.
"네 놈이야 말로 정말 강별학이 변장한 놈인데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냐?"
그러자 소어아는 대노하여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이 강별학이 아니면 누구냐?"
역시 흑의인도 똑같이 받았다.
"네 놈이 강별학이 아니면 누구냐?"
소어아는 눈을 굴리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고는 급히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별학! 이 악당 같은 놈아! 개만도 못하게 자기의 조상을 모
독하다니. 너는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다."
그는 강별학이 이름있는 사람이기에 필시 자신을 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부러 이렇게 욕설을 뿜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흑의인도 똑같은 욕설을 퍼부었다.
"강별학! 이 악당 같은 놈아, 개만도 못하게 자신의 조상을 모
독하다니. 너는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다."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자기의 계획대로 들어맞아
가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 네 놈의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는 없을 망정 네 놈
스스로가 네 자신을 욕하는 것을 들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
려가는 것처럼 시원하구나! 하하하하...... 참으로 웃기는구나.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욕하는 추잡한 인간도 있으니 말이다."
그 흑의인도 그와 같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설사......."
그 역시 소어아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되풀이했다.
이렇게 서로 욕설을 퍼붓는 그들은 보기엔 둘다다 강별학이 아
닌 것 같았지만 분명히 그들 중 한 명은 강별학일 거라는 확신을
남궁유 등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진
짜 강별학인지 그들로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때 모용산이 입을 열었다.
"강별학의 무공은 강남 무예계의 제일인자라 하는데 틀림없는
말이겠죠?"
모용쌍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 이들 중 무공이 더 뛰어난 자가 필시 강별학일 것이
다."
그녀들은 다시금 입씨름이 한창인 흑의인과 소어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매우 유심히 그들이 행하는 무공을 바라보았다.
권과 발을 휘날리고 있는 그들은 비단 공력이 매우 깊었을 뿐만
아니라 초식 또한 극히 괴이하고 치밀했으며 변화 또한 엄청났다.
모두 절정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러다가 상대방에게 당할까봐 실행할 수도 없었다. 흑
의인도 당연히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격투만 할 뿐 여전히 승부의 판가름을 내지는 못
했다.
그저 한 차례의 '와지끈, 우지직......' 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
려왔을 뿐이었다. 무슨 물건이든지 그저 그들의 권풍에 스치기만
하면 즉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권풍을 이겨낼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들은 계속 싸움을 하면서 사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점차
적으로 사당에서 멀어져갔다.
그들은 둘 다 남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
에 당연히 남궁유 등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점
점 멀어져가는 것은 그들이 암묵(暗默)적으로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들의 초식은 여전히 거센 것이었지만 사실은 둘 다 더 이상
결투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제각기 뒤로 곤두박질하며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더니 즉시 몸들을
감추었다.
그 흑의인은 도망하면서도 자신의 체면을 차리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오늘은 비록 너를 놓아주겠지만, 훗날에 다시 내 손에
걸리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소어아도 도망가는 한편 큰소리로 말했다.
"강별학!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다."
두 사람의 달아나는 신법은 모두 번개를 방불할 만큼 신속했다.
모용쌍 등 사람들이 쫓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십여 장 달려나가
있었고 또 그들이 양쪽으로 갈라서 도망치기 때문에 더욱이 누구
를 쫓아야 할지 몰랐다.
바로 이때 수풀 속에서 갑자기 한 인영이 달려나와 소어아의 길
을 막았다. 그는 소어아를 가리키며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이 놈이 바로 강별학이다. 이 놈이 진짜 강별학이란 말이다."
그의 얼굴을 본 소어아는 놀라는 한편 대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놈이 미쳤느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인불이기'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백개
심이었던 것이다.
백개심은 그의 앞을 막아 서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기는 누가 미쳤다는 것이냐? 네 놈 강별학이 정말 미친 모
양이구나."
"네 녀석은 살고 싶지 않느냐? 네 놈은 해독약도 필요없단 말이
지?"
"흥! 누가 누구의 생명을 살린단 말이지? 네 놈이 나에게 골탕
을 먹였으니 당연히 나도 너에게 골탕을 먹여주어야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뒤로 곤두박질을 하면서 다시금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어느덧 모용자매 일행이 사방을 포위하며 소어아를 에워쌌다.
이때 모용쌍이 대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강별학! 만약 이번에 또다시 너를 놓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소어아는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누가 강별학이란 말이오? 공연히 생사람 잡지 마시오. 만약 내
가 강별학이라면 즉시 날벼락을 맞고 죽겠소."
모용산이 눈썹을 치켜 세우며 으르렁댔다.
"당신이 강별학이 아니라면 왜 달아나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했다. 이 말은 그를 더 이상 변명하
지 못하게 했다. 모용쌍은 그가 응답하지 않자 즉시 소리쳤다.
"그렇다! 네 놈이 만약 강별학이 아니라면 왜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어 보이지 않는다는 거냐?"
그녀들은 흑의인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
지만 손에 쥐고 있던 장검으로 연거퍼 공격을 뿜어냈다. 그녀들의
공격은 대우 악독하고도 거셌다.
소어아가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어찌 너희 여자들에게 얼굴을 함
부로 만지게 한단 말이냐? 옛말에 남자의 얼굴 위에 황금이 있고
여자의 손에는 똥물이 있다는데, 내 얼굴에 어찌 똥물을 묻힐 수
있단 말이냐?"
그는 다급한 나머지 나오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그가 이
렇게 말한 목적은 다만 그녀들의 부화를 돋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래야지만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
이다.
과연 모용쌍이 대노하며 노여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응수했다.
"닥쳐라! 네 놈이 감히 누구 손에 똥물이 있다는 것이냐? 아마
네 놈의 얼굴에는 똥벌레가 기어다니는 모양이구나!"
소선녀도 이런 욕설을 퍼붓는데는 빠지지 않았다.
"네 놈이 그저 내 손에 걸리기만 해라. 당장 변소 안으로 집어
넣어 줄 테니까."
그러나 소어아의 얼굴엔 다시 장난끼가 가득찬 웃음기가 어렸
다.
"설사 변소 안으로 빠져들어갈 망정 너희 여자들에게 얼굴을 만
지게 할 수는 없어."
이때서야 그들은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더 이상 그
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옥만은 매우 순진한 사람이었
기에 여전히 그의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참다 못해 입을 열었
다.
"나는 여자가 아니니 나에게 조사를 받지 않겠습니까?"
"원래 당신은 여자가 아니었군요. 난 또 당신이 저 여인들의 여
동생인줄 알고 착각했잖아요?"
소어아도 이렇게 말은 했으나 자기 말이 우스웠던지 웃음을 터
뜨렸다.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쫙'하는 소리
가 들려왔고 그의 상의 앞가슴 쪽이 찢어져 나갔다. 만약 그의 무
공이 많이 진보되지 않았었다면 아마 그는 창자가 튀어 나왔을 것
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계속 지껄였다. 상대방을 미칠 지
경으로 화나게 해야지만 자기가 살아나갈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이미 목숨을 걸었기에 추호도 두려움이 없었다. 일이 이렇
게 된 마당에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옛말이 있지 않
은가!)
이때 그는 진검과 남궁유가 격투 속으로 끼어들지 않고 그저 옆
에서 자기가 도망 못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것을 알고는 다시금 웃
음띤 얼굴로 말했다.
"무예계의 인물들은 모두 모용가문의 사위를 부러워하고 여복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곰보나 코찡찡이에게 장가가
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오."
모용쌍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여 냉소를 터뜨렸다.
"우리 모용자매가 곰보나 코찡찡이보다 못생겼단 말이냐?"
"모용집안 아가씨들의 아름다움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데 내
가 어찌 감히 못생겼다고 말하겠소! 하지만 모용집안의 사위는 뭡
니까? 여편네가 암탉 같이 울고 불고 하며 남과 싸움을 하고 있는
데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서도 감히 한마디도 못하니 말입니다. 그
토록 여편네를 무서워한다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
이오? 만약 내가 모용집안의 사위였다면 벌써 자살을 했어도 몇
번은 했을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매우 재미있다는 듯 약을 올리는 동안, 그의 어깨
에 또다시 일검이 가해졌다. 비록 그 일검이 뼈를 상하게 할 정도
는 아니었지만 검날이 스쳐 지나가자 역시 긴 상처가 나타났고 붉
은 피가 어깨를 완전히 적셨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진검이 냉소를 터뜨렸다.
"난 처음부터 너에게 협공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네가
정 그토록 원한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빠르게 삼 검을 뿜어냈다. 그의 그 삼
검은 매우 거세고도 맹렬했다. 그것은 바로 모용자매의 부족한 점
을 보충한 것이었다.
소어아가 약을 올리고자 했던 계책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다른 한 명의 강적을 자기에게 공격하
도록 만들었으니 참으로 그의 실책은 컸다.
그는 처음부터 이들을 당해내기는 어렵겠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이 합세하여 공격하자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
다.
그는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굴렸을 뿐이지 입은 쉬지 않고 부화를
돋구는 말을 지껄여 댔다.
"남궁유! 너는 왜 한몫을 끼지 않느냐? 혹시 너의 무공이 너무
나도 저속하여 내놓을만한 것이 못 되어서 그러냐? 너는 오직 네
여편네의 힘을 믿고 무예계를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이 말을 들은 남궁유의 얼굴색은 자연 크게 변했고, 노여움으로
음성조차 떨려왔다.
"복결, 부사...... 시풍, 대중...... 환조......."
그가 혈도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세 자
루의 검이 그가 부른 위치를 향하여 덮쳐왔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소어아는 '환조혈'에 또다시 일검을 맞았다. 검붉은 피가 그
의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남궁유는 비록 몸이 허약해 남과 격투할 수는 없었지만, 무예계
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남궁세가'의 어린애라도 남보다 뛰어난
견식을 지니고 있는데 하물며 역대독자인 남궁유였으니 실력은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더욱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불러낸 혈도들은
자연히 소어아가 피하기 힘든 곳들이었다.
소어아는 크게 당황했다.
심지어 약을 올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이때 남궁유가 혈도 이름을 다시 불렀다.
"영문, 중부...... 음시, 양구...... 승부!"
"쉭! 쉭!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삼 검이 뻗쳐나갔다. 또다시
소어아의 '성부혈'이 일 검을 맞았다.
(흥, 네가 부르는 대로 내가 미리 방어하면 되지 않겠나?)
소어아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남궁유가 부르는 위
치를 분명히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피하지 못했다.
옛말에 당사자보다 방관자가 더욱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훈수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흔
히 제 삼자의 훈수도 승부에 판가름이 나곤 하는 까닭이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도 그러는데 하물며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남궁유는 남과 격투할 수는 없었지만 견식과 보는 눈은 그 어떤
절정고수 못지 않게 정확했다.
그는 소어아가 뿜어내고자 하는 초식을 환히 알 수 있었으니 그
가 불러낸 위치는 당연히 소어아의 허점이었다.
이때 남궁유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문, 통곡...... 부사, 귀래, 용천!"
그 '용천혈'은 발바닥 밑에 위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
러한 부름을 들은 소어아는 멈칫했다.
(네 놈들의 검이 설마 내 발 밑을 적중할 수 있단 말이냐?)
이때 모용산의 검이 그의 '부사' '귀래'의 양혈을 향해 지쳐 들
어왔다.
본시에 그는 그 검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검들이 그의 피할
길을 막았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정확하게 판단해 보지도 않고
재빨리 검을 쥔 모용산의 손목을 걷어찼다.
이리하여 그는 모용산의 공세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틈을 이용하여 모용쌍의 검이 덮쳐왔고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의 '용천혈'에 적중했다.
소어아는 두터운 가죽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 검은 그
에게 별로 큰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신이 오싹함
을 느꼈고 또한 어느 결에 식은 땀이 흘러 나왔는지 목욕이라도
한듯 온 몸이 축축했다.
남궁유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계속 혈도의 이름을 불러갔
다.
"신당, 심유...... 위중, 음곡...... 결선!"
소어아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 '결선혈'을 방비했다. 그렇건
만 등이 서늘해지면서 '회양혈'에 또다시 일검을 맞았다.
그는 비록 협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어떠한 고수가 그를
협공한 것보다 더욱 더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쯤 되자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거의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끝장인가 보구나.......)
그가 살려는 생각을 막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먼 곳에서 모용
구매의 비명소리와 외침소리가 아울러 들려왔다.
"사람 살려...... 강별학! 네 이 악당 같은 놈아...... 셋째 언
니...... 둘째 언니...... 나 좀 살려주어요......."
외침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모용산산은 그 음성을 듣자 즉시 당황한 빛이 얼굴에 확연히 드
러났다.
"큰일났다! 우리가 구매를 홀로 사당에 놓아 두었군요."
모용쌍도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다.
"구매가 왜 따라오지 않았단 말이냐?"
소선녀도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강별학이 그쪽에 있나 보군요."
고인옥도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정말 강별학이 아니군요!"
제각기 한마디씩 던진 그들은 곧 모용구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단지 남궁유만이 남았다. 그는 갑작
스레 소어아에게 읍을 하며 공손히 한마디 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소어아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천하의 공처가 중에서 당신이 아마 일일자일 것이오. 당신 같
은 사람은 정말 어떤 여자와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궁유는 조금도 화나지 않은 듯 엷은 미소까지 지어가
며 말을 받았다.
"귀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군요. 마치 각문각
파의 장점을 모아 새로운 자신의 무학을 창작한 것 같이 말입니
다. 다만 초식을 뿜어낼 때 아직까지 미숙한 점이 있어서 가끔 허
점이 생깁니다. 그것은 아마도 귀하께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느라
고 무학방면에는 정신을 기울이지 못한 탓 같습니다. 후일 그 점
만 고친다면 설사 내가 옆에서 공격한다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오."
소어아는 그의 겸손한 교훈을 듣자 갑자기 멈칫하며 의아한 생
각이 들었다.
"당신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남궁유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귀하께서 강별학이 아닌 까닭이오. 강별학이 초식을 뿜
어낼 땐 절대로 귀하 같이 서툴지는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소어아는 대노했다.
"당신이 벌써 그 점을 알아차렸으면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불초는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소. 그러나 귀하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욕망에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지금 구매가 또다시 강별학
에게 납치 당했으니 당연히 그 욕망을 희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다시금 읍을 한 후 신법을 펼치더니 나는 듯이 모용쌍 등
의 사람들을 쫓아갔다.
남궁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소어아는 여전히 그가
한 말을 되풀이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귀하께선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느라고 무학방면에
는 정신을 기울이지 못 한 듯.......)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이 말은 정확히 내 단점을 지적했구나. 보아하니 무림세
가의 후예라 과연 남보다 뛰어난 안력을 지니고 있다. 너무 그들
을 얕봐선 안 되겠다."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남궁유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앞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빨리 손인불이기
백개심을 찾아서 복수하려는 생각이 꿀떡 같이 일어났다.
이렇게 걷는 동안 그는 갑자기 백개심의 행동이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데 머물렀다.
이개심은 어째서 갑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심지어 해
독약도 필요없다고 하니 말이다!...... 또 모용구매는 어떻게 된
것일까? 왜 갑작스레 내 편을 들어 주었을까? 그녀는 정말 강별학
에게 납치당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도대체 어
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찾지 못 했는데 그녀는 어째서 나타났을까.
매우 이상스럽게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내편을 들어주었단 말이냐? 그녀가 만약 제정신을 차렸다면 나를
죽이기도 바빴을 텐데 어째서 나를 도와주었단 말이냐?)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리하여 그는 모든 잡념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때 그는 온 몸
에 입은 상처가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는 숲속으로 가서
한 그루의 큰 나무를 찾아 그 아래서 휴식을 좀 취하기로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약물로 자라왔기에 몸은 실로 물샘과도 같았
다. 때문에 이 정도 상처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처에서
비록 질식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와도 별로 걱정은 안 되었다.
별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동쪽 하늘이 차츰 밝아왔다. 숲속에서
는 새들의 노래소리가 즐겁게 들려왔고, 대지에는 한가닥의 형용
하기조차 어려운 평화스러움과 조용함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
었다.
소어아는 두 눈을 감으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남의 일에 너무 많이 참견했나 보구나! 하지만 밥만
먹고 아무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 일들은
모두 나에게 찾아온 것이니 설사 피하려고 한들 피할 길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태어날 때부터 얌전하
게 살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저 삼사 일 동안만 할 일
없이 지낸다면 즉시 못 견딜 정도로 전신이 쑤시곤 했다.
조용하고도 평화스러운 이 숲속에서 그는 차츰 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오랫만에 포근히 잠을 자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휴식을 취할 운명이 아닌지 갑자기 한 사람의 외침
소리가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소어아...... 소어아......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소어아는 재빨리 땅바닥에서 일어났고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혼
잣말을 했다.
"또 나에게 무슨 일이 찾아 왔구나...... 그런데 이 사람은 누
굴까? 내가 숲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그 사람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어아! 나는 당신이 이 숲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서
나오셔요. 당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드려야 해요...... 왜 아
직도 나오지 않는 거지요?"
이 음성의 주인공은 모용구매 같았다.
소어아는 크게 기뻤다. 그는 만면에 희색이 가득찼다.
(만약 정말 모용구매라면 참으로 잘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찾으러 갈 참이었잖은가!)
그는 기댔던 나무 위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때 산발한 채 아침 안개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내려온 여신
같이 살며시 찾아온 여인은 틀림 없는 모용구매였다.
소어아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그녀 앞으로 뛰쳐 나왔다.
"이봐!"
모용구매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으며 매우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또 나를 놀라게 하여 기절시키려는 모양이지요?"
소어아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
다.
"잠시 동안 보지 못 했더니 소저는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소."
모용구매는 더욱 애교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동안 못 보았더니 당신도 역시 더욱 준수해진 것 같아
요."
"하하! 모용구매도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또한 애교를 부릴 줄
알다니 참으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여인이라면 모두 애교를 부릴 줄 압니다. 다만 여자들은 상대
를 봐서 애교를 부릴 뿐이지요."
"소저는 이제 나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까?"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는 말을 못들었어요?"
소어아의 입에서는 이름 모를 한숨이 새어나왔다.
"옳은 말씀이오. 여자에겐 사랑도 쉽게 변하는 것인데 하물며
원한은 더욱 쉽게 잊을 수 있겠죠."
모용구매는 큰 눈을 깜박거리더니 다시 웃음띤 얼굴을 했다.
"여자를 사랑해 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알 수 없는 거예요. 당신도 혹시 사랑의 상처라도 입은 적이 있나
요?"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여자들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입은 피
해자 중의 한 사람이지요."
모용구매는 여전히 웃었다.
"누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혹시...... 혹시 그 철 소저
가 아닙니까?"
'철 소저'란 세 글자를 들은 소아아의 가슴은 칼로 비벼파듯 아
픔을 느꼈다.
그는 큰소리로 그녀의 말에 부정이라도 해야 시원할 것 같았다.
"아니오!"
"그렇다면 누구죠?"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바로 모용구매요."
갑자기 모용구매는 미친 사람처럼 깔깔 웃었다.
"내가 언제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소어아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는 입을 쫑긋하며 또박또
박 말했다.
"당신은 모용구매가 아니오!"
모용구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모용구매가 아니라면 누구요? 당신은 혹시 미친 것이 아
니오? 나마저 몰라보니 말예요."
소어아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한참이나 뜯어보더니
드디어 껄껄 호탕스러운 웃음을 웃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당신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라는 말씀이지요?"
소어아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아 쥐며 기쁨이 가득찬 목소리
로 목메인 듯 외쳤다.
"도교교...... 도 고모이죠! 그렇죠?"
그 '모용구매'란 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그를 바라
보더니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참으로 총명하구나. 너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말이
다. 이 천하에서 내 변장술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것이다."
"저도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속으로 '이 모용구매
진짜 모용구매가 아닌데, 그러면 누가 이토록 똑같이 변장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나라고 짐작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 고모가 정말 이곳에 왔다고
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 고모가 악인곡에서 나올 줄이야 저
는 꿈 속에서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이 소리를 들은 도교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소어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도 고모도 한숨 쉴 때가 있다니...... 정말 미처 생각지 못했
습니다. 고모는 무엇 때문에 악인곡에서 나왔으며 또한 어떻게 저
의 일을 알고 모용구매로 변장하여 저를 구했습니까?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문을 모르겠군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아 단숨에 모두 물어보았
다.
도교교는 표정을 달리하며 말했다.
"네가 연거퍼 나에게 이토록 많이 물어보니 나보고 어떻게 대답
하라는 것이냐?"
소어아는 차분히 물었다.
"고모는 악인곡을 떠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마...... 아마 반 년은 넘었을 것이다."
"근 이 년 동안 저의 행방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
는데, 고모님은 어떻게 저의 일을 알고 또한 어째서 모용구매
변장하셨지요?"
"악인곡에서 나온 후 너의 걸작을 몇 가지 들었지만 확실한 너
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지. 수소문도 해봤지만 여전히 너의 행
방을 알 길이 막연했었어."
소어아는 매우 의기양양한 듯 눈을 깜박거렸다.
"물론 알 까닭이 없겠죠. 제가 만약 숨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에서 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너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봤지만 결국에는 못 찾았지. 그
런데 며칠 전 우연히 너를 만났지."
"저와 만났다고요? 왜 저는 모르고 있었죠?"
"비단 너와 만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너와 얘기도 나누어 보
았는데!"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의아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
다.
"참으로 이상하군요...... 저와 말까지 했다니......."
도교교는 깔깔거렸다.
"너는 무척이나 흉악해졌더군. 두 눈을 부릅뜨고 마치 나를 잡
아먹을 듯 했지. 나는 정말 너의 그 흉악한 눈초리가 무서워서 너
를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리 도망갔단다."
그녀의 이야기 속엔 다분히 과장된 말도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
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다. 그러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알았어요! 도 고모가 바로 그...... 그......."
"내가 바로 나구 형제 집에서 일하는 그 멍청한 시녀였단다."
"참으로 탄복했습니다. 그토록 똑같이 변장할 수 있었으니 말입
니다. 저는 정말 그 멍청한 시녀가 고모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
어요."
도교교는 소어아가 하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의 음성을
흉내내며 말했다.
"당연히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내가 만약 숨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다행히 고모가 저로 변장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저로 변장했다면 아마 저도 누가 진짜 강소어인지 분간하지 못했
을 거예요."
그는 한참이나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
고 정색을 했다.
"하지만 그날까지 고모는 저를 만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고모가 점이라도 치신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이상 제가
나구의 집에 갈 것이라 미리 알 수 없었잖아요. 안 그래요?"
"나는 신이 아닌데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겠니?"
"그러면 고모가 어째서 그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고 그곳에서 저
를 기다렸습니까?"
"나는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곳에 숨어있었던 것이 아니야."
"저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곳에 숨어있었단 말입
니까?"
도교교의 눈 속에서 갑자기 한가닥의 흉악한 빛이 솟구쳐 나왔
다.
"나구 형제 때문에 내가 그곳에 숨은 것이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깨달은 듯 흥미가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알았어요. 고모는 그들 형제와 원한이 있죠?"
"그 속의 비밀을 너는 알지 못한다!"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단 말입니까?"
"내가 이번에 악인곡에서 나온 것은 한편으로는 너를 찾기 위해
서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두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
어."
"그들이 바로 고모님이 찾고자 하는 사람들입니까?"
도교교는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십 년 전 십대악인 중 다섯 명이 악인곡으로 쫓겨들어왔지.
그때 상황은 매우 위급하고 다급했기에 그들은 많은 중요한 물건
들을 휴대할 겨를이 없었어!"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고모와 숙부 두 백부 몇 분들은 오랫동안 강
호를 휩쓸고 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얻은 물건도 많았겠지요. 또한
고모와 아저씨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은 당연히 매우 진귀한 것들
이었겠구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 물건들을 버리기가 매우 아
까웠지.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휴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악인곡까지 운반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누구에게 그 부탁을 했습니까?"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강호에서 친구라고는 전혀 없었다. 다
만 십대악인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겨우 조금 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교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직 남은 다섯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
지. 그러나 그 광사 철전은 화가 나면 심지어 자기의 생명도 생각
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손인불이기 백개심은 비단 믿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대취와
뼈에 사무친 원한을 지니고 있으니 더욱 그에게 부탁할 수 없었
어."
"만약 악도귀 헌원삼광에게 부탁하면 그는 도박하여 완전히 잃
을까봐 더욱 안 되었겠군요!"
도교교는 참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그 악도귀는 비록 평생 동안 도박으로 지내왔고 자신
이 누구보다도 도박에 명수라고 자부했지만 여전히 자주 바지까지
잃곤 했단다."
"옛말에 도박을 취미로 삼아 자주하면 신선이라도 잃는다 했는
데 하물며 그는 도귀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 물건들을 '미사인불배명' 소미미에게 운반
을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우리
가 그녀를 찾아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지만 끝내는 헛수고로 돌아
가고 말았던 것이야."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땅바닥 속에 숨어 들어갔는데 당연히 찾지 못했겠
지.)
그는 이 말을 해야 좋을지 안 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끝내는
하지 않았다.
이때 도교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거듭한 우리들은 결국 구양 형제에게 부
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그 구양 형제가 바로 '병명전편이'와 '영사불흘휴'란 칭호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 그들은 매우 구두쇠인 까닭에 그 물건들을 그들에게
부탁하면 절대로 잃어버릴 우려는 없었지."
"제가 보기엔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욱 믿을 수 없는 존재
라 생각합니다. 그들 형제는 죽어도 이득을 얻겠다는 칭호까지 갖
고 있으니, 고모와 아저씨들이 그 물건을 그들에게 부탁한 것이
양을 호랑이 입에 갖다 준 격밖에 되지 않았겠는 걸요?"
"그 당시 우리도 그점을 생각 못한 건 아니었지만 구양 형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이득을 상관하지 않고 살인을 일삼는 혈
수(血手) 두살인 까닭에 절대로 감히 그 물건들을 삼키지 못할 거
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들 형제는 혈수 두살이 이미 악인곡으로
쫓겨 들어갔으니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정말 그 물건들을 삼켰던 것이야."
"그들 형제는 창자가 터져 나올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단 말이
오? 감히 고모나 아저씨들의 물건을 삼켰으니 말입니다."
도교교의 말 속엔 원한이 가득히 서려 있었다.
"악인곡에서 이십 년 동안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물건을
보내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는 한 언제든 복수해야겠
다고 맹세했지."
"그러기 때문에 고모가 악인곡에서 나오자 마자 그들을 찾으려
고 했던 것이군요?"
"그렇다."
"그 구양 형제가 혹시 나구 형제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도교교는 또박또박 끊어가며 힘주어 말했다.
"나구 형제가 바로 구양 형제야!"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어쩐지 그들의 수단이 악독하다 했죠! 저는 벌써부터 그들의
정체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그들의 생김새
가 구양 형제와는 조금도 닮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이죠?"
"이십 년 동안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을 부운 듯이 뚱뚱하게 키
웠단다. 그들은 원래 젓가락 만큼이나 말랐었어. 그러나 지금은
뚱뚱하게 키운 까닭에 심지어 얼굴의 생김새마저 달라졌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다. 그들 형제는 정말 누구보다도 영악하며
가장 훌륭한 변장술을 생각해낸 것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자연적으로 불어난 살로 변장한 것은 어떤
변장술보다 더욱 훌륭할 거예요. 그들이 그러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으니 과히 천재라 아니 할 수 없군요."
"나는 구양 형제를 찾다 못찾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나구
형제가 근래에 와서 해낸 일들을 듣게 됐어. 나는 곧 그들을 의심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지. 첫눈에 그들을 알아본 나머
지 그들이 옛날 피골이 상접했던 구양 형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
지 않았단다."
"고모는 그래도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더욱 확실하게 조
사하기 위하여......."
도교교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 시녀를 단칼에 죽여버리고 그 시녀로 변장했지."
"고모 같은 총명한 사람이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니 당연히 알아
차릴 수 있는 사람이 없겠죠."
"그 동안 나는 그들이 바로 구양 형제란 것을 알아냈어. 다만
즉시 그들의 정체를 파헤치면 그들이 달아날까봐 경거망동을 못한
것이야. 더군다나 설사 그들을 잡을 수 있다해도 그 물건들을 숨
긴 장소를 말하지 않을까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 물건들이 숨긴 장소를 알 때까지 복수에 불
타는 마음을 억지로 참는단 말씀이에요?"
"만약 내가 인내력이 강하지 않고 줄곧 지금까지 참아오지 않았
다면, 지금쯤 너는 이미 지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점은 제쳐놓고라도 고모
가 그 멍청한 시녀로 변장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모용구매와 접촉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그토록 흡사하게 변장할 수 있었겠
어요!"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띠웠다.
"처음엔 그 정신착란을 일으킨 소녀가 모용구매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 그러나 의아심은 있었지. 그래서 할 일 없을 때마다 심심
풀이로 그녀의 인피가면을 만들었단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금 같
은 짧은 시간 안에 변장도구도 지니지 않은 내가 어떻게 그녀로
변장할 수 있었겠느냐!"
소어아는 눈알을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냉소
를 터뜨렸다.
"고모가 이 가면을 만든 것은 심심풀이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뭣 때문에 이 인피가면을 만들었다는 말이냐?"
"고모는 필요할 때가 되면 그녀를 없애고 그녀의 모습으로 변장
하려고 하였죠. 그렇게 되면 그 나구 형제가 더욱 고모를 의심하
지 않는 한편 고모가 조사하고자 하는 일이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과연 네 녀석의 머리는 비상하구나. 내 마음 속의 일들을 완전
히 파헤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괴인(怪人) 동 선생의 출현
"고모의 그 계획이 비록 치밀했지만 뜻밖에 제가 모용구매를 데
려가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고, 그 가면 또한 고모에
게 여전히 가치를 잃었죠. 그러므로 고모는 폐물 이용격으로 심심
풀이로 저를 살려준 것에 불과하죠!"
"네 녀석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내가 성의껏 너를 구해준
것이 오직 폐물 이용이며 심심풀이로 밖에 생각 되지 않느냐?"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을 할 뿐 그녀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도교교는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발견할 때부터 너에게 온갖 정신을 다 기울였어. 그
원인은 네가 구양 형제와 함께 있는 것이 필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까닭이지. 어제 새벽, 너와 흑 지주가 모
구매에게 편지를 쓰라는 말도 나는 엿들었단다."
그녀는 애교가 가득찬 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밖에서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 너희들은 벌써 구양 형제
에게 들켰을 것이다."
소어아는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체하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설사 그들에게 들켰다 해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습니
다."
"내가 공연히 도와줬나 보구나!"
"고모는 그 편지에 관한 내용을 들었기에 제가 사당에 갈 것이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도교교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나는 백개심을 만난 적이 있단다."
그 말에 소어아는 다시 놀랐다.
"백개심! 고모는 언제 어디서 그와 만났어요?"
"네가 진흙으로 무슨 놈의 '흑살최명단'인가 하는 것을 만들었
을 때 나는 이미 그곳에 있다."
소어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다. 고모가 그 근처에 숨어있는데 제가 왜 고모를 발견
하지 못했을까요?"
"너의 지금 실력으로는 나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지.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백개심과 마주보고 있었던 까닭에 손짓으로 그보고
외치고 떠들라고 했지! 너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그 당시 너는 자신의 실력에 도취되어 있었으니 어찌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겠나!"
"어떠한 상황아래서도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나 보군
요."
소어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불현듯 무엇이 생겨난 듯 중얼
거렸다.
"어쩐지 방금 백개심이 저보고 해독약을 달라지 않는다 했지요.
그는 벌써부터 고모에게 그것이 진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었군
요. 제가 그에게 진흙을 독약이라고 먹였으니 그는 당연히 저에게
골탕을 먹이려 했겠죠.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약 이 우연한 일들이 이토록 정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늘
이 너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다."
소어아는 정색을 했다.
"그 일들이 보기엔 매우 우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인과
응보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더없이 합리적이지요."
"오직 골탕을 먹은 자는 강별학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골탕을 먹이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사람을 골탕먹
이는 것이 가장 재미있죠. 만약 성실한 사람을 골탕먹일 것이면
차라리 집에서 발닦고 낮잠이나 자는 편이 낫습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도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나쁜 사람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정히 좋
은 사람에게 골탕먹이는 것보다 재미있겠지! 더군다나 그런 자들
에게 골탕을 먹인다 해도 그는 자신이 재수없다고 생각할 뿐이지
절대로 떠들며 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누군가 설혹 네가 그에게
골탕을 먹여 주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오히려 너에게 탄복할 뿐
이지 결코 복수할 사람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소어아의 입가엔 기쁜 웃음꽃이 활짝 핀듯 했다.
"그러므로 고모도 저와 같이 그저 나쁜 사람에게만 골탕을 먹여
주고 좋은 사람에게는 그냥 놓아 두세요. 비단 남에게 골탕을 먹
이는 것은 흥겨움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복수를 당
할까봐 숨어 살 필요도 없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이 한마디는 도교교를 추켜주는 말이기도 했지만 따끔한 충고이
기도 했다. 소어아는 계면쩍은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고모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인곡에서 나왔습니까? 저
는 여전히 알 수가 없군요."
도교교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에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이 똑같은 말을 그녀는 두 번이나 계속 했고, 또한 할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듯 했다.
소어아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혹시 '악인곡' 무슨 예측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발생한 게 아녜
요?"
"누가 아니래!"
그녀의 말은 거의 체념에 가까웠다. 소어아의 얼굴색이 크게 변
하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고가 고모로 하여금 악인곡에서 나오게 했으니 필시 매우
엄청난 것이겠군요?"
"정말 매우 엄청난 사고였지."
소어아는 조급한 마음에 견딜 수 없어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예요?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도교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이때 갑자기 쉭'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고 따라서 한 인영
이 나무가지 위에서 뛰어 내려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찾았다
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흑 지주였다.
소어아는 놀라운 표정이었으나 웃으며 말했다.
"너로구나. 왜 이제야 왔느냐? 조금 전에 참으로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발생했었는데 너는 하나라도 구경했니?"
"하마터면 영영 너희들과 만나지 못할 뻔했다."
소어아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반짝거리던 비단옷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고 머리도 헝크러진 것을 보았다.
"너는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흑 지주는 원망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네가 나보고 전하라는 그 놈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무엇 때문에
이 꼴이 되었겠느냐?"
"그 편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느냐?"
"내가 편지를 가지고 남궁유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살며시 집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책
상 위에다 놓았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어아는 벌써 안타까움이 가득찬 표
정으로 발을 굴렸다.
"너는 무엇 때문에 집 안까지 들어갔느냐? 그저 편지만 집 안에
던져 놓으면 되지 않았겠니?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시녀가 이미
남에게 잡아 먹혔는데 자신의 거처를 아무나 드나들도록 소홀히
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흑 지주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져 나왔다.
"내가 너무 경솔한 탓으로 그 점을 미리 깨닫지 못했다. 내가
편지를 책상 위에다 놓자마자 갑자기 한가닥의 긴 채찍이 나에게
휘날려 왔고 내 손에 쥐어 있던 편지를 빼앗아 갔다네! 그래서 나
는 나의 경솔함을 깨닫고 급히 도망가려고 작정했지. 그러나 벌써
창문과 대문앞은 사람들로 가로 막혀 있었지."
"그들이 집을 비워 놓은 것은 바로 너로 하여금 방 안으로 들어
가라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남궁유와 모
용쌍이 사는 방을 남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놔 둔단 말이
냐?"
흑 지주는 소어아의 탓하는 소리에 크게 노했다.
"나는 평생동안 떳떳이 살아왔는데 그런 교활한 계책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너는 성인군자라서 그런 속임수를
알 까닭이 없지."
흑 지주는 그제야 비로소 화가 가라앉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당시 나는 크게 당황한 나머지 그냥 뚫고 나가려 했지. 그
러나 사방의 창문과 대문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어. 특히 암기를 퍼붓는 수법은 더욱 절묘해서 비단
뚫고나갈 수 없음은 물론 심지어 그들 손에 잡히기 일보직전이 되
었다네."
"그들이 그 편지를 본 이상 당연히 너를 놓아줄 리 만무하지!
그런데 그들은 너의 정체를 알고 싶은 까닭에 너에게 중상을 입히
지는 않았겠지."
"나도 그들이 그저 내 정체를 알려고 할 뿐이지 나를 죽일 생각
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어. 그들의 암기는 나의 치명적인 위치에
가해 지지는 않았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그들 손아귀에
들어갔을 거야."
"모용가문의 암기는 정말 소문대로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
나 보구나....... 그런데 너는 그들의 포위망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그들보다 실력이 더욱 더 뛰어났다고 할 수 있지 않
겠는가?"
그러나 흑 지주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만일 나 혼자의 힘이었더라면 도망 나온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
다."
"그렇다면 누가 너를 도와 주기라도 했단 말이냐?"
"내가 그들에게 잡히기 바로 일보 직전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날
듯이 집안으로 들어왔지. 고인옥의 가전(家傳) 신권(神拳)도 무예
계에서는 매우 알려진 것이고 나 자신의 무공 또한 뛰어 났는데,
그 사람이 그저 옷소매를 가볍게 흔들했을 뿐인데 고인옥은 벌써
나가 자빠졌지."
이 말을 들은 소어아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군데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이냐?"
"그처럼 뛰어난 무공을 난 평생 본 적이 없어. 심지어 꿈에서도
그토록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
어."
"네가 그토록 탄복하는 걸 보니 정말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
나보구나!"
"그 사람은 그저 옷소매를 가볍게 몇 번 흔들거렸지. 그러자 암
기들이 도리어 뿜어낸 사람들을 향하여 덮쳐 갔어. 그들이 뿜어낼
때보다 더욱 거센 힘을 지니고 말이다.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자기들의 암기를 피하기에 바빴지. 바로 그때 그 사람은 나를 겨
드랑이 밑에다 끼고 밖으로 나는 듯이 솟구쳐 갔어."
그렇게 말한 그는 부끄러웠던지 쓰디쓴 미소를 짓다가 말을 이
었다.
"그의 겨드랑 밑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때 그는 가
볍게 몸을 솟구쳤는데 벌써 칠팔장 밖으로 날아갔다네. 구름을 타
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
"너는 점점 더 신기하게 얘기를 해 나가는구나. 이 세상에서 그
토록 뛰어난 경신술을 지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이야?"
흑 지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할 테지만 심지어 친히 목격한
나까지도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어. 너 자세히 생각해 보아라. 만
약 그 사람이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무공을 지니지 못했다면 어찌
나를 겨드랑이 밑에다 낄 수 있단 말인가?"
"옳은 말이야! 너를 겨드랑이 밑에 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에 정히 없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렇게 했는 걸."
"지금 너는 그래도 그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하겠니?"
듣고 있던 도교교가 갑갑한 듯 드디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지요?"
흑 지주가 응답했다.
"그 사람의 몸집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
었어. 나는 그에게 차 한 잔 식을 시간 밖에 끼어다니지 않았는데
온 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어."
도교교는 그 사람의 몸집이 별로 크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야 숨
을 돌릴 수 있었다.
소어아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나?"
"그의 얼굴에는 흉칙한 청색의 구리가면이 가려 있었고, 두 눈
은 형용하기 조차 어려운 음산한 빛이 도사리고 있었어. 심지어
배짱이 두둑하다고 자부한 나도 그의 얼굴을 단 한 번 바라보고는
더이상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 등뼈가 오싹해지고 소름이 꽉
끼쳐 두 손은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지."
소어아는 그의 눈빛 속에서 아직도 놀라움과 공포에 질려있다는
걸 발견하였다. 자신도 등줄기가 오싹함을 느꼈고, 심지어 간담이
서늘해져옴을 느꼈다.
도교교가 다시금 참다 못하여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나를 껴안은 채 동산 위로 달려 올라가 한 그루의 매우
큰 나무 위로 몸을 올리더니 그제서야 나를 벌어진 나무가지에 놓
았지. 그때 나의 온몸은 완전히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움직이지도 못 했어. 그저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까봐
말이다."
소어아가 물었다.
"그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그 자신도 나무가지에 앉아 차디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
었지. 한마디 말도 없고 말이다. 그가 앉은 가지는 매우 연약한
것이라 간난 아기가 그 위에 앉는다 해도 부러질 정도였는데 그는
매우 편안한 것 같이 보였어."
"그는 정말 괴상한 사람이구나...... 무공이 너무 뛰어난 사람
은 모두 괴상한 성격에다 괴상한 버릇을 지니고 있나보지!"
도교교가 그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 그는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
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말입니
다."
"그 당시에는 나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더군."
도교교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고생을 했겠는데요."
"그래요. 그는 한동안 기다리더니 내가 아무말도 할 기미가 없
자 갑자기 나의 두 곳의 혈도를 점한 후 나를 나무 위에 놓아 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도교교를 바라보았다.
"모용소저께서는 정신이 회복됐습니까?"
도교교는 깔깔댔다.
"정신이 회복됐냐고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 한마디를 던진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날듯이 달아났다.
이러한 광경을 본 흑 지주는 깜짝 놀랐다.
"모용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가지 말아요."
그러나 도교교는 멈추지 않았고 벌써 멀리로 사라져갔다.
흑 지주는 달아나는 도교교를 뒤쫓아 가려했다. 그러나 소어아
가 재빨리 그를 잡으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게 놓아 주어라."
흑 지주는 의아한 눈동자로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어째서...... 어째서......."
"그녀를 걱정하지 말고 우선 네가 당한 일이나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흑 지주의 머리 속에는 의아한 생각이 가득찼다.
한참이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더니 결국 다시 이야기를 계
속했다.
"그때 바람은 점점 세게 불어 몸은 좌우로 흔들거리고 나무가지
도 마치 끊어지려는 듯 흔들렸지. 하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
할 수 없었으니 간은 정말 콩알만하게 되었다네."
"그는 너의 생명을 구했는데 왜 다시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까?"
"차라리 그가 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같이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게야.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나는 놀랍고 당황한
한편 분노도 느꼈지. 심지어 그의 살결을 씹어 먹고 싶은 충동까
지 느껴졌어. 그러나 그의 그 귀신도 놀랄 무공을 생각하니 평생
이 다가도 아마 복수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나무 위에서 내려왔지?"
흑 지주는 그 당시를 생각하는지 쓰디쓴 고소가 입가에 잠깐 번
졌다.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할까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 내 앞
에 나타나 내 마음을 환히 본듯 갑자기 나에게 물어왔어. '너는
복수하고 싶은가?' 하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환히 볼 수 있다. 비록 네
가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눈으로 이미 모든 것을 완전히
털어 놓았으니 말이다.'
"그가 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나는 더욱 더 악독한 눈초리로 그
를 노려 보았지. 그리고 속으로 설사 네가 나를 나무 아래로 밀어
버린다 해도 이렇게 나무 위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는 밀기는 커녕 도리어 '나는 너의 생명을 구
해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은혜를 갚을까 생각하지는 않고 미리 복
수할 궁리만 하느냐' 하는 것이었어."
"참으로 묘한 사람이구나!"
"그 당시 나는 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지. 원한은 비록 갚아야
했었지만 은혜도 아니 갚을 수는 없었지. 나 흑 지주가 어찌 은혜
를 잊고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오직 그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났으니 비단 복수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혜를 갚으려 해도 어떻게 갚아야할지 막연했어. 어떤 때
는 은혜를 갚는 것이 원한을 갚는 것 보다 더욱 어려웠으니 말이
다."
"너의 그러한 생각이 아마 또 그 사람에게 들켰을 것이다."
"과연 그는 또 다시 내마음 속을 훤히 읽는 듯이 내가 말을 꺼
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너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 걱정
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어. 나는 그저 콧방귀를 뀌며 아무말도
대답하지 않았지. 그때 그는 또 다시 입을 열었어. '너는 다른 사
람을 위하여 편지를 전해줄 수 있는데 나를 위해서도 편지를 전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결국 참다 못해 그에게 물었지. '그저 내
가 당신을 대신하여 편지를 전해 주기만 하면 은혜를 갚는 것이
오?' 그는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어
나보고...... '누구에게 전해 주라는 것인지 네가 어디 한 번 맞
혀 보아라.'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지. 그러자 그는 나보고 그
편지를 화무결에게 전하라고 하더군."
소어아는 눈에서 빛이 번쩍거리며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이 점점 재미있게 벌어져 나가는데? 그와 화무결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지? 왜 너보고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지. 그가 분명
히 직접 화무결에게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혹시 그는 화무결과 만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지."
"설사 그가 화무결과 만나고 싶지 않다해도 그의 그렇게 뛰어난
경신술로 아무도 모르게 화무결의 침대 위에 편지를 갖다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흑 지주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소어아를 바라보며 웃음
을 터뜨렸다.
"분명히 매우 간단한 일이라도 그저 네가 생각하기만 하면 즉시
복잡하게 변해 버리는구나. 원래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너의
해설을 듣고 도리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그 일의 내막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을 것이네......."
흑 지주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혹시 그는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나
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소어아도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와 같은 괴상한 사람은 확실히 그런 괴
상한 생각을 해낼지도 모르지. 너는 비록 남에게 은혜를 빚지고
싶지 않겠지만 그 역시 남에게 은혜를 빚놓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
르니 말이다......."
"바로 그럴 것이다. 나는 남에게 빚지고 싶지 않고 또한 남에게
빚을 놓고 싶지도 않아. 서로 빚지는 것이 없어야지만 꺼리낌 없
이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말이야. 만약 누가 나에게 은혜를 갚으
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나 역시 무척이나 괴로움
을 느낄 테니까."
"그렇다면 너희들은 똑같은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그가 너를 구했다 했지....... 그런데 그 편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너는 보았느냐?"
갑자기 흑 지주는 노여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나 흑 지주를 남의 편지나 함부로 엿보는 사람으로 봤단
말이냐? 그가 나의 혈도를 풀어 준 후 나는 즉시 그 편지를 화무
결에게 갖다 주었지. 심지어 편지 봉투 위에 무어라고 적혀 있는
지도 보지 않고 말이다."
소어아는 웃음띤 얼굴로 장난하듯 말을 받았다.
"너든 과연 군자답구나. 그러나 화무결이 그 편지를 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내가 이렇게 조급히 너를 찾으려는 원인은 바로 화무결이 그
편지를 본 후 매우 이상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흑 지주의 말이 매우 진지해졌다.
소어아는 즉시 다그쳐 물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했느냐?"
"그는 '내가 강별학과 사귄 지는 비록 얼마 안 됐지만 이미 서
로 매우 깊게 아는데 어찌 소문을 듣고 그를 악인이라고 취급하겠
습니까? 그 선배님은 너무나도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하고 말했
어."
"뭐? 그렇다면 그 괴인이 전한 편지가 강별학과 관련이 있단 말
이지? 듣자 하니 화무결로 하여금 강별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으
라는 것 같구나."
"바로 그거야!"
소어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 괴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강별학을 도와 주려는 것
이지?"
"화무결이 그러한 말을 하자 나는 즉시 '그 선배님은 누구입니
까?' 하고 물어 보려 했어. 하지만 화무결은 이미 먼저 나에게 물
었지. '댁은 그 선배님을 친히 봤으니 참으로 영광이라 할 수 있
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겠군. 그 분은 얼
굴에 혹시 청동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화무결도 그를 만난 적이 없었나 보구나."
"그런 모양이야."
"화무결은 그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이지?"
"본시엔 나도 매우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화무
결이 강호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이화궁주가 그에게 당부하기를,
훗날에 만약 동 선생이란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그의 말을 어겨서
는 안 된다고 또한 그 동 선생이란 분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모
두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더군."
"그 괴인은 동 선생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구나. 참으로 그의 사
람됨과 똑같은 괴상한 이름이로구나!"
"이화궁주가 또 말하기를, 그 동 선생이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인(奇人)이라 하고 무공은 더욱 천하 제일이라 했
다는군. 심지어 이화궁주 자신마저 자기가 그 동 선생에 비하면
아득히 떨어져 있다고 했단 말이야."
소어아의 얼굴색이 또 크게 변하며 놀라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화궁주 같이 오만불순한 사람도 그런 말을 할 줄 안단 말인
가? 만약 이화궁주마저 그에게 탄복했다면 그 동 선생이란 작자의
무공은 확실히 무서울 정도로 뛰어나겠군."
흑 지주는 한숨을 쉬어가며 말했다.
"그러므로 그 동 선생이란 작자가 강별학을 도와주고 있는 이
상, 네가 강별학을 이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
지."
소어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얼굴을 달리 하며 자기의 추리를 내세웠다.
"내가 보기엔 그 동 선생이란 작자가 필시 강별학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만약 그가 친히 도울 생각이 있었다면
절대로 화무결에게 그러한 편지를 띄우지는 않았을 터이고, 더욱
너보고 갖다 주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결은 그 동 선생의 말을 완전히 들었으니 필시 끝
까지 강별학을 도와줄지도 몰라. 그와 같은 인물이 강별학을 도와
주고 있는 이상 너는 골치를 꽤나 썩힐 것이다."
그렇건만 소어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리 대수롭지도 않아."
흑 지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갑
자기 한마디를 던졌다.
"잘 있거라."
그의 이러한 말을 들은 소어아는 급히 놀라며 물었다.
"어디로 갈 작정이냐?"
"비록 은혜는 갚았지만 원한은 아직 갚지 않았다."
이 말이 떨어지자 소어아는 더욱 놀라서 물었다.
"너는 그 동 선생을 찾아서 복수할 셈이냐?"
"왜? 그러면 안 되나?"
"하지만...... 하지만 그의 무공이......."
"그의 무공이 나보다 뛰어나기에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복수
도 못한단 말이지? 흑 지주가 약한 자에게만 강하고 강한 자에게
는 약한 사람인줄 알았는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분명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잖느냐?"
흑 지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기껏해야 목숨 하
나 잃을 뿐이지! 누구도 나 흑 지주를 함부로 나무 위에 매달 수
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를 편안히 지내게 하지는 않겠어!"
하고 외치면서 그의 몸은 이미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그의 등 뒤에 쏘아 보냈다.
"이 녀석의 성질이 정말 개똥보다 더럽고 바위보다 더욱 단단한
고집불통이구나...... 하지만 그 녀석의 귀여운 점이 바로 그런
점 아닌가?"
지금 소어아에겐 또 다른 세 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
다.
첫째, 진짜 모용구매는 어디 갔단 말이냐?"
둘째, 악인곡에서 도대체 무슨 엄청난 일이 발생했단 말인가?
셋째, 동 선생이란 작자는 누구이며, 강별학과 무슨 관련이 있
고, 또한 왜 강별학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이때 날은 이미 완전히 밝아 있었다. 소어아는 얼굴에 쓴 가면
을 벗었다. 대낮에 그는 이대취의 얼굴로 남과 만나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문제들은
정말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는 천하 제일의 총명한 사람이 되
는 것이 실로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쓰디쓴 미소가 번진 얼굴로 중얼거렸
다.
"누가 만약 천하 제일의 총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아마 그는
바로 천하 제일의 멍청한 놈일 것이다."
큰 길에는 행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십중팔구는 모두 동
쪽으로 가고 있었다. 또한 그들 모두가 무예계의 인물들인 것 같
았으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팔목에다 검은 헝겊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한 빛들이 가득차 있었고 입으로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들이 바로 어제 천향당에 가서 상을 치룬 사람들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팔목에 검은 헝겊을 메고 있는
것은 철무쌍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에서인 것 같았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왜 모두 얼굴에 기쁨
이 가득차 있을까?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때 갑자기 기이하고도 장식이 화려한 포장마차 한 대가
나는 듯이 달려와, 별안간 소어아의 옆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마차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조
급함이 가득찬 음성으로 외쳤다.
"빨리 올라타!"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용모는 매우 밝고 아름다웠지만 피부는 보기에 극히 거
칠었다. 그녀는 바로 모용구매로 변장한 도교교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변장술이라도 변장한 후의 피부는 여전히 거칠
게 보였다. 다만 웬만큼 주의해서는 발견할 수 없었을 뿐이다.
소어아는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 안의 장식은 더욱 화려했고, 방석은 두텁고 부드러웠으며
컸다.
소어아는 참지 못하여 말을 꺼냈다.
"고모는 정말 방법도 많군요. 어디서 이 마차를 얻었죠?"
도교교는 그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내가 한참이나 너를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 그 흑 지주
란 녀석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느냐?"
"우리는 동 선생이란 자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모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도교교는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 녀석을 구한 자가 바로 동 선생이란 말이냐?"
"고모도 그를 알고 있습니까?"
도교교는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그런 이름을
들었다."
소어아는 그녀가 필시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
릴 수 있었다. 다만 도교교가 하기 싫은 얘기는 그 누구도 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계곡(溪谷)의 무술 시합
소어아는 도교교가 동 선생을 이야기할 때 말을 더듬자 속이 시
원치 않았으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큰 마차도 서쪽
에서 동쪽을 향하면서 바로 그 강호 친구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이리 바삐 몰려가는 거지요."
"재미보러 가는 거지."
소어아는 웃음 섞인 말로 다시 물었다.
"재미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요. 어떤
재미있는 일이지요?"
"천하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문파의 제자와, 강호에서 지위가
가장 높고 힘이 센 집단이 싸우니 재미있는 일이 아니냐?"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화무결과 모용가의 사람들이 아니오?"
도교교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바로 그렇다."
"강별학의 일 때문이 아닌지요?"
"그 일이 아니면 또 무슨 일이겠느냐?"
그녀는 한바탕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야 말을 계속했
다.
"남궁유와 진검이 강별학을 찾아서 싸우려고 들었는데 화무결이
계속 강별학이 깨끗하다고 보증을 하자, 무술로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모양이야. 강호 사람은 이화궁의 사람
도 좋고 무림세가의 사람도 좋지만 화를 내게 되면 모두 마차를
끄는 사람이나 가마를 드는 사람과 같이 유일하게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싸움이야!"
소어아는 눈에서 빛을 냈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일은
오늘 새벽에야 일어났는데 어째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알고 왔지
요?"
"이것은 필시 강별학이 사람을 시켜서 그들에게 통지 했을 거
야. 그는 자신이 화무결의 도움이 있으니 반드시 이길 것으로 생
각하여 그것을 알리기 위해 자연히 많은 사람의 구경꾼이 필요 했
겠지."
"그렇지요, 모용가가 비록 강하더라도 화무결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지요...... 그렇다면 세상에는 정말 화무결을 상대할 사
람이 없을까요?"
"오직 너 뿐이지."
소어아는 도교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
이런 문제를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때
그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즉
시 화제를 바꾸었다.
"고모와 하던 말이 흑 지주에 의해 중단되었었는데, 악인곡에서
도대체 무슨 큰 일이 벌어졌었지요?"
도교교의 입에서 또다시 예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너는 곡에 만춘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그는 매일 나를 약물에 담구어
서 난 머리가 돌 정도였는데요. 그 결과 지금 나는 사람을 때릴
재주는 없어도 맞는 재주는 있지요. 바로 그가 나를 훈련시킨 결
과입니다."
"너는 만춘류의 집에 있는 사람 중에 약상자라 하는 사람을 아
니?"
소어아는 놀랐으나 안색을 바꾸지는 않았다.
"물론 알지요.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약을 먹었지요. 만춘류가
새로 구해온 약을 꼭 그가 먼저 먹어 보았으니까요."
도교교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바라보면서 한 자 한 자 또렷하
게 말했다.
"십 개월 전에 만춘류와 그 약상자가 실종됐어."
소어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웃고난 뒤 말했다.
"그게 무슨 큰 문제라도 되나요? 왜 그 말을 하며 긴장하지요?"
"너는 그 약상자가 누구인줄을 아느냐?"
소어아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누군데?"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옛날 강호에 검을 휘두르면 십
장밖에서도 검풍을 느끼게 할 수 있고, 또 수염과 머리를 다 잘라
도 아무런 느낌을 느낄 수 없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를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지요. 그는 연남천 같은데 그
렇지요?"
도교교의 입에서 다시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연남천 외에 누가 있겠니?"
"그러나 그는 벌써 죽은 게 아니에요?"
"그는 죽지 않았어! 그가 바로 그 약상자야."
소어아는 일부러 놀란 듯 물었다.
"약상자가 바로 천하에서 검법이 가장 날쌘 사람이라니,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인데요. 그러나 검법이 그토록 뛰어났다면
어찌 그런 모양이 되었을까요?"
"이것도 너 때문이지. 우리는 그의 손에서 너를 구하기 위해 부
득이 그를 상하게 한 거야."
그녀는 아주 영리하게 말을 했다. 소어아가 만춘류에게서 이 일
의 비밀을 듣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녀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는 몰래 탄식을 하면서 혼자 생각했다.
(연남천은 비록 나의 은인이고 또한 대협이라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당신들이 비록 악인이라도 이 몇 년 사이에
이미 나와 많은 정이 들었는데 내가 어찌 그를 위해서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겠는가. 왜 나를 속이려 하지!)
엄격히 말해서 소어아는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는 피가 끓고 감정이 풍부하고 표면에는 강직하게 보여도 속으
로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만 하면 그를 불덩어리에 집어 넣었다. 그
는 좋아할 것이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비록 자기가 속았
고 피해를 봐도 그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를 화나게
하면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는 성미였다. 그는 자기가 매우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충동을 느끼면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자기가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때때로는 누구보다도
바보스럽다고 느꼈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그의 일생은 다채로운 일생이었다. 옛날
이나 지금이나 어느 영웅도 모두 의지를 중시하지 않고 감정을 내
세워 왔던 것이다.
소어아는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웠다.
"나를 위해서라고요? 그와 내가 무슨 관계이지요?"
"이 일을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천천히 하기로 하자. 다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너 때문에 연남천과 싸우게 되었고, 연
남천이 가버렸으니 우리는 이 악인곡에도 계속 머물 수 없게 되었
어."
"왜요?"
"악인곡은 비록 강호인에게는 금지로 취급되고 있으나, 연남천
이 다시 들어 올려고 하면 천하에 또 누가 그를 막겠느냐? 그는
옛날에도 한 번 속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더욱 조
심할 것이다."
그녀의 교활스러운 눈에 공포의 빛이 번쩍였다. 그녀는 길게 한
숨을 내쉬면서 힘없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이번에 다시 오게 되면 우리 같은 악인은 귀신이 되어 버
릴 것이야......."
"고모가 생각하기엔...... 그의 무술이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고
생각해요?"
"그의 무술은 비록 아직은 다 회복되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그
만춘류가 반드시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연구했을 거
야.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를 악인곡에서 데리고 나갔겠니!"
"그렇겠군요. 무공은 필시 얼마 동안은 회복되지 않았을 거예
요. 그렇지 않다면 그는 벌써 그들에게 복수하러 갔을 거예요. 그
러나 만춘류는 그를 데리고 달아났으니 필시 그를 치료할 자신이
있었을 걸요."
"그의 상처가 언제 완쾌 될런지는 모르지. 어쩌면 삼 년이나 오
년을 기다려야 하고 어쩌면 팔 년이나 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도 모르지. 난 다만 시간이 갈수록 좋다고 생각해."
"그러나 지금쯤 이미 치료를 끝냈는지도 모르지 않아요?"
도교교는 몸을 흔들면서 그를 바라보더니 불쑥 말을 던졌다.
"너는 그가 빨리 쾌유되기를 바란단 말이지!"
"그렇게 희망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
을 수는 없지요."
도교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더니 다시 탄식을 발하며
말했다.
"그렇지, 어쩌면 그가 벌써 회복되었는지도 모르지. 또 이미 우
리를 찾고 있을지도......."
눈길을 창 밖으로 돌린 그녀는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마차가 빨리 달려 갈수록 채찍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빨
리 그 용호의 혈투를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소어아는 창 밖으로 눈을 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연남천이 지금 어디에 갔을까? 우리는 정말로 그가 보고 싶은
데......."
삼면이 둘러싸인 능선 밑에 하나의 작은 계곡이 있었고 능선 위
에는 남녀 노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심지
어는 나무 위에도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차는 계곡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기에 저 얌전한 서생 차림이 이화궁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
가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고는 믿기 힘든데."
"들리는 말에는 지금 강호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으며, 심
지어는 강 대협도 그에게 매우 탄복하였다는 데 이 말이 정말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네가 믿지 못하면 한 번 시험해보지 그래."
그 사람은 혀를 내밀면서 웃음 속에 농섞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살아서 우리 마누라를 봐야겠어."
또 한 사람의 탄식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나이가 젊고 무술도 천하 제일 고수이며 사람도 그렇게
잘생겼으니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거야."
또 하나의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것은 마치 천지교자란 넉자가 그를 표현하기 위하여 생긴 말
처럼 느껴지는 걸. 나도 그와 같은 날이 돌아오면 만족하겠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부러움의 소리가 들리므로 소어아는 매우
듣기 언짢았다. 도교교가 그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너는 이 말을 듣기가 마음 속으로는 매우 거북하겠지?"
소어아는 눈을 크게 뜨면서 언짢은 표정을 했다.
"내가 속이 거북하다고요? 난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는 확실히 천지교자이지. 하느님은 마치 좋은 것으로만 모두
그의 몸에 모아놓은 것 같애. 그렇지?"
소어아가 짖궂게 그녀에게 이상한 얼굴을 하면서 그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냈다.
"그렇지?"
"그가 설사 천지교자라지만 우리 소어아도 그보다 못하지는 않
지. 미래의 강호는 너희 두 사람의 천하가 될 것이야."
소어아는 돌면 마차 문을 열고 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구경을 해야겠는데 고모는?"
"너나 가 봐라.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해야돼."
"무슨 일이오?"
"방법을 생각해서 그 구양 형...... 나구 형제를 이 마차로 데
리고 올 수 있겠니?"
"이 마차에 태울수만 있다면 온 능선의 사람을 모두 이 마차로
데려올 수도 있어요."
마차에서 내린 소어아는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마부를 바라보니 그 마부도 수염을 매만지면서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소어아는 사람 틈에 끼어들어가 능선 위로 올라갔다.
능선 주위에는 수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 앉으면 모
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무 위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돌연 고개
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정말 이상한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사의 동굴 위에 앉다니. 만약에 엉덩이를 독사가 물기라도 하면
어찌 하려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 위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리면
서 혼잡을 이루며 우왕좌왕했다.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하던 그가
이미 나무 위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깨끗이 그의 탄식에
속은 셈이다.
이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어이 친구, 너는 이 나무가 뱀의 동굴이라 하면서 왜 올라가는
것이지?"
그러자 소어아는 웃으면서 답했다.
"뭐? 내가 방금 그런 말을 했던가?"
그 사람들이 다시 입을 모았다.
"네가 분명히 말을 했잖아?"
"난 다만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사의 동굴에 앉는다고 했
지, 이 나무가 독사의 동굴이라고는 하지를 않았오. 여러분들이
잘못 들으셨겠지요?"
그 사람들은 놀라움과 분노를 나타냈다. 소어아는 다시 혼잣말
로 중얼거렸다.
"강남 대협과 모용집의 아가씨들이 여기에서 일을 하는데 떠들
어대는 사람은 죽고 싶은 거야."
그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우러나는 분통을 참을 수밖에 없
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 위로 다시 기어 올라갔고 올라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였다.
소어아는 나무 위에서 계곡 안팎의 광경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가 너무 좋다고 생각하여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좋은 위치를 얻으려면 수단이 없어선 안 되지......."
계곡 내의 빈터에서 하나의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 마차를 타
고 온 화무결은 한가롭게 창문에 기댄 채 마침 마차 속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강별학이 그의 옆에 앉아서 계속 사방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
다. 조금도 '대협'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강남 대협의 다정한 태도와 겸손한 생활은 바로 강호 사람들이
가장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다른
많은 대협들보다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다고 느꼈다. 소어아는
쳐다보면서 욕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소어아는 나구 형제를 발견했다. 이 두 사람은 크고 뚱뚱한데다
다른 사람들 머리 하나는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모용집안의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를 않았다. 사방의 강
호 친구들은 이미 그들이 너무 오만하다고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조금도 애태우지 않고 얼굴은 더욱 유쾌한 표정을 지
었다. 그는 타고 온 마차 속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의 예리한 두
눈은 부드럽게 변했다.
소어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마차 속의 사람이 누구일까? 화무결은 정말 철심난과 다정한
사이이며 그녀를 이 자리에도 데려왔단 말인가?)
사람들이 소동을 벌리는 가운데 열두 명의 검은 옷을 입고 찬란
한 허리띠를 맨 덩치 큰 사나이들이 세 개의 가마를 들고 들어왔
다.
또한 더불어 따르고 있었고 그 작은 가마에는 예쁜 세 사람의
계집애가 타고 있었다. 그녀들이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자 사람
들은 가려워도 어디를 긁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듯한 태도를 짓곤
했다.
가마가 정지하자 세 명의 계집애들이 내렸다. 그들이 큰 가마앞
으로 다가가 휘장을 젖히자 세 명의 절세가인이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바로 모용쌍 모용산과 소선녀 장청이었다. 그들은 모
두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도 했으며 마치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
는 귀족 집안의 아가씨와 같았다. 절대로 사람을 죽이는 여호걸
강호 고수 같지는 않았다.
능선 위에서 관전을 기다리던 강호 친구들은 대부분이 모용구매
자매의 이름을 들어봤지만, 그녀들을 본 사람은 매우 적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이 밝아지면서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은 넋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소어아도 얌전하게 뒤에서 따
라가는 아가씨가 바로 옛날 초원을 달리면서 사람을 죽이던 소선
녀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얌전했다.
소선녀는 오늘 만큼은 각별히 치장을 잘 차렸다. 그녀는 긴 신
을 벗고 구슬신을 신었으며, 바지를 벗고 치마를 입었으니, 걸어
갈 때에도 옛날처럼 그렇게 급하지 않았다. 깨끗한 얼굴에 약간의
화장까지 했다.
소어아는 몰래 엷은 미소를 띠웠다.
(저러면 좋지. 저래야 여자 같군...... 그러나 그녀는 평일에는
싸움차림을 하고, 정말 싸울땐 또 이런 모양을 했는데 무엇 때문
일까? 혹시 화무결의 넋이라도 잃게 하여 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화무결의 눈은 과연 마차 속에서 경계를 하는 것보다 놀라움에
차 있다고 하는 것이 적합했다.
모용산인 연보산은 제일 앞에 걸어가면서 웃음띤 얼굴로 화무결
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들이 한발 늦게 와서 공자를 기다리게 한 것을 용서하시
오."
그녀가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하는데 화무결이 어찌 여자 앞에
서 실례를 할까. 그래서 즉각 길게 인사를 한 뒤 역시 미소를 띠
우며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 일찍 온 것 같
소."
모용산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멋있는 공자님도 계시니 자연히 일찍 나와
서 구경을 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들은 일이 좀 바빠서 공
자와 같이 구경을 못 했오이다."
"부인께서는 너무 겸손하시오. 제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공자께서야말로 정말 겸손하고 다정하오. 어느 집의 아가씨가
복이 많아서 공자를 시중드릴 수 있겠소?"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을 하니 마치 정말 봄나들이 나온 명문규
수와 공자 같이 조금도 불쾌함을 찾을 수가 없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이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들의 모양으로 보아선 싸
울 것 같지 않은데!)
화무결이 또 말했다.
"남궁 공자와 진 공자도 곧 오시게 되겠지요?"
"그들은 집에 볼 일이 있어서 모두 돌아갔소!"
화무결은 잠깐 놀라운 빛을 보였다가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이 오지 않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죠?"
"이 일은 다만 우리 자매와 공자간의 일이오!"
모용쌍이 따라 말참견을 하였다.
"모용가의 일은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요."
화무결은 다시 놀랐다.
"그러나...... 부인들은 너무......."
모용쌍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 자매가 비록 그들의 처이긴 해도 그러나 처의 일들은 때
때로 남편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수가 있소. 우리 모용자매가 어
찌 마누라의 일에 간섭을 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겠소?"
이번에는 모용산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공자께서도 남편의 일에 참견하는 마누라를 좋아하지는 않으시
겠죠?"
이 자매는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식으로 말해왔다. 화무결은 넋
을 잃고 아무 소리도 못했고 소어아는 몰래 웃으면서 혼자 생각했
다.
(모용가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정말 복이야. 분명 남궁유
와 진검은 화무결과 싸우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도 그녀들에 의해
그들의 이름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한 남편으로 취
급하게 되니 말이다.)
남궁유와 진검의 신분으로는 남과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그
러나 그들이 화무결과 싸우면 필시 패하고야 말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장 총명한 방법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의 마누라들을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필시 그녀들
의 무술이 자신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어아는 이
런 추측을 했다.
(이 영리한 모용자매는 무슨 묘책이 있을지?)
강별학은 참고 있다가 그제서야 미소를 띠우면서 말을 걸어왔
다.
"남궁 공자와 진 대협이 오지 않았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을
보겠오?"
모용쌍의 눈이 그의 쪽으로 돌려졌다. 그러더니 얼굴의 웃음을
서서히 감추면서 말했다.
"왜 해결을 못한다는 거요?"
화무결은 기침소리를 낸 후 쓴웃음을 띠웠다.
"제가 어찌 부인들과 싸우겠소?"
소선녀가 큰소리를 치면서 끼어들었다.
"당신이 왜 우리와 싸우지를 못한다는 거요? 왜 우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모용산이 말했다.
"공자께서 우리와 싸우기 싫다면 다시는 우리와 강별학의 일에
참견을 마시오. 강별학은 이미 어린애가 아닌데 자기의 일을 처리
못하겠소?"
그녀의 얼굴은 비록 웃고 있었다 해도 그 말투는 매우 날카로웠
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웃으면서 강별학이 필시 이 말을 그냥 넘
기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강별학은 움직이지도 않고 미소를 띠우면서 말했다.
"강호의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오. 저는 평생에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소. 더군다나 부인들은 잘못 판단하시고 오해
하신 거요."
모용쌍이 화를 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별학, 당신 들으시오. 첫째, 이것은 절대로 오해가 아니고,
둘째, 당신은 우리를 다칠 수도 없을 것이오. 당신은 싸울 준비나
하시오!"
"이 오해는 짧은 시간 동안에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될 지도 모르오. 지금 제가 어찌 부인들에게
손을 쓰겠오? 부인께서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손을 아니 쓸 것이
오."
이 말은 아주 극적으로 유효적절한 말이었다. 군중들은 이미 참
을 수 없어서 환호성을 올렸다. 소어아도 몰래 칭찬을 아끼지 않
으며 중얼거렸다.
"천하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데엔 그 누구도 강별학보다는 못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장소에서 그의 재주를 보이다니."
모용쌍이 분을 참지 못 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분명히 화공자가 당신을 못죽이게 할 것으로 알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데......."
강별학은 담담한 여유를 보였다.
"제가 만약 혼자서 일을 처리 못하면 지금 이곳에 오지를 않았
을 것이오."
소선녀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땐 난처해야 할 텐데 당신은 입이 살아
서 말을 상당히 잘하니 얼굴 두꺼운 정도는 보기가 드물 정도군."
강별학이 크게 한바탕 웃어제꼈다.
"다행히 강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내가 청원할 사
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돌연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그들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
끼어들었다.
"최소한도 강 대협은 절대로 집으로 달아나서 마누라더러 싸우
라고 하지는 않겠지!"
소어아는 자세히 보았다. 이 외침은 바로 그 이름이 나구(羅九)
인 구양정이었다. 그러나 모용자매는 외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녀들은 듣지 못한 척하면서 마음 속으론 강별학과 이야기를
계속해야할까 망설였다. 쌍방의 수단이 비슷하니 더 이상 말싸움
만으로 끌수도 없었다.
화무결은 시종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듣고만 있었다.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에는 그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 성
미였다.
소선녀는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말싸움만 하면 흑백을 가릴 수도 없으니 싸워 봅시다.
내가 먼저 화공자와 싸우는 게 어떻겠소?"
화무결은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 본 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과 나와 싸움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소?"
소선녀는 눈을 치뜨면서 외쳤다.
"왜 못해요? 우리가 전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틀려요!"
화무결은 여전히 미소를 띠울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모용산이 다시 끼어들었다.
"화공자는 필시 여자와는 싸우지 않으려는 속셈이군요?"
"제가 만약 실수를 하여서 부인들이 화장을 못하게 하는 것도
죄인데, 어찌 부인들과 싸우겠소?"
"그럼 공자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소?"
화무결은 침울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제가 보기엔 이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것도 같소. 강형의 인품
은 강호에서 다 알고 있소. 부인......."
모용쌍이 큰소리로 화무결의 말을 막으며 외쳤다.
"이 일은 꼭 해결을 해야겠소. 공자께서 다른 수가 없으시다면
저에게 하나가 있는데."
"어떤 것이오?"
"우리들이 세 가지의 일을 말해서 공자께서 할 수 있다면 우리
들은 다시 강별학을 찾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공자께서 할 수 없
다면 강별학의 일에 상관마시오."
여기까지 들은 소어아는 드디어 깨달았다. 진검과 남궁유가 오
지않고 모용자매를 보낸 것은 다분히 화무결에게 손을 쓰지 못하
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세 가지의 일을 가지고 화무결을
난처하게 만드려는 계산이었다. 다만 화무결이 유혹에 넘어가면
이번 싸움은 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화무결도 바보가 아니라서 약간 침착하게 생각한 뒤 웃
으면서 말했다.
"부인께서 세 가지의 일을 말한 뒤 제가 대답하지 못 한다
면?......."
모용산이 웃었다.
"우리가 어찌 공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겠소?"
소선녀가 또 큰소리로 외치며 끼어들었다.
"이 세 가지의 일을 말한 후 당신이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해 보겠오. 이렇게 되면 공평하겠죠?"
"부인께서 만약에 저보고 자수를 놓게 하면 저는 절대로 못하
오."
모용산산이 말을 받았다.
"이 세 가지의 일은 남녀 누구나 모두 할 수 있을 것이오. 난
다만 공자의 무공과 지혜를 시험해보려는 것뿐이에요."
모용쌍이 따라서 말했다.
"이 세 가지의 일을 공자께서 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다
면 공자의 지혜와 무공은 우리보다 못하다는 거요. 그럼 공자께서
는 다시는 우리의 일에 참견하지를 않겠죠. 그렇습니까?"
화무결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 그렇다면 저는 강호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아무일도 참견하
지 않겠소."
소어아는 이미 모용자매가 세 가지의 일 즉 이상한 일을 들고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몰래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
다.
(화무결아, 화무결, 네가 대답을 하면 속는 것이다.)
군중들은 모두 수근댔다.
"시합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모용자매는 다른 수단을 쓸 모양
이지?"
또 다른 사람의 말이다.
"모용 아가씨가 만약에 화공자더러 땅을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하
면 화공자의 신분으로 어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렇게 되면 지는
거지."
그러나 어느 사람이 반박한다.
"모용가도 강호에 이름이 퍼져 있으니 그런 일들은 하지 않을
거야."
화무결이 비록 말을 가볍게 하기는 했지만 퇴출강호(退出江湖)
네 글자의 비중은 너무 컸다. 그는 지금 명성이 점점 크게 퍼져가
고 있었으며 금후 수십 년의 강호 생애는 필시 화려할 텐데 오늘
지게 되면 그의 명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자세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긴장했고 모용자매는 조용히 상의를 했다.
모용쌍이 드디어 결정을 본듯 돌아서며 말했다.
"공자께서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로 서서 남이 밀어도 넘
어지지 않는다면 공자가 이긴 셈이오."
"그러나 부인께선 몇 사람으로 밀 작정이오?"
모용쌍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약 이백 명으로 합시다."
화무결은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한 뒤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이 말이 나오자 군중들은 모두 놀랐다. 이백 명의 사람이 합하
면 그 힘은 상당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금계독립'의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 간에 한쪽 다리의 힘으로 이백 명의 힘을 견딜 수 있다
고 한다면 그는 머리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다. 화무결은 머리가
돈 사람도 아닌데 어찌 손쉽게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이때 소어아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다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당해낼 수 있다. 등을 벽에 대면 이
백 사람이 아니라 이백만 사람이라도 밀지 못할 것이다.)
소어아는 화무결이 이런 점을 생각했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
나 화무결은 산쪽으로 가지않고 빈터에 서서 한 다리를 들고 미소
를 띠우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셋까지 세면 시작하시오."
모용자매는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그녀들의 눈길에서 기쁜 빛
이 나타났다.
"좋소."
계곡 내외의 몇 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화무결이 질 것으로 생
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탄식을 하기도 했다. 화무결은 아
무 의지하는 것도 없이 빈터에 서있는 것이 이백 사람이 아니라
다만 두 사람으로도 그를 밀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화무결의 무공으로 말하면 백 명의 사나이도 그의 상대가 못됐
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런 기교도 사용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남이 백 근의 힘으로 밀면 상대방은 백 근의 힘으로 막아야하는
것이다.
화무결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가 숫자를 헤아리는 동안 한쪽 발이 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
했다. 그 견고한 돌땅이 그의 발 밑에서 진흙과 같이 힘을 못썼
다.
모용산이 마음 속으로 놀라면서 입을 열었다.
"화공자는 이미 준비 되었는데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지?"
가마를 들던 열 여덟 사나이들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들
이 이미 합의가 돼 있었는지 달리면서 둘째 사람의 손이 첫째 사
람의 어깨에 잡고 셋째 사람의 손이 두번째 사람의 어깨에 잡는
식으로 힘을 모았다. 열 여덟 명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면서 화
무결 쪽으로 달려 갔다.
이렇게 미는 힘은 비단 여덟 사람의 힘을 합한 것일 뿐더러 그
들의 달리는 힘이 더해지는 것이다.
화무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힘을 그대로 받았다.
화무결의 기지(機智)
한 발이 아니고 두 다리로 힘껏 서있는다 해도 그것은 당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군중들은 그가 필시 패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열 여덟 사나이가 힘을 합하여 밀었으나 화무결은 넘
어지지도 않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몸은 더
욱 땅속으로 묻혀갔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들이 용을 쓰면 쓸수록 그의 몸은 더욱 땅
속으로 박혀들어 갔다. 열 여덟 명 사나이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
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화무결의 다리는 거의 두 자나 땅 속에 묻혔다. 그의 다리가 비
록 강철로 만들어졌다 해도 돌 속으로 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런 힘
도 쓰지 않은 것 같았으며 마치 모래 위에 서있는 것 같기도 했
다.
군중들은 모두 마법을 보는 것처럼 넋을 잃었다.
소어아도 역시 넋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이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탄복을 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화무결이 등을 산에 기댔다면 모용자매가 트집을 잡지는
않았겠지만 사방의 관중들은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리고 화무결의 사람됨을 보는 눈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는 돌연 땅에 쓰러지면서 몸 속의 힘이 모
두 빠져버린 듯 일어나지도 못했다.
화무결은 이미 이화접옥의 무술로 교묘하게 그들의 힘을 방향을
돌려 밑으로 처지게 했다. 그들은 화무결을 밀고 있는 것 같았으
나 사실은 땅을 밀고 있었던 것이다.
군중들은 그것의 오묘함을 몰랐다. 그러나 모르면 모를수록 화
무결의 무술에 대해서 더욱 탄복했다. 우뢰와 같은 갈채가 곳곳에
서 터졌다.
모용구매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화무결은 미소를 띠면
서 입을 열었다.
"작은 재주라 부끄럽소?"
모용산산은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웃어 보였다.
"공자의 무공은 과연 불가사의하군요. 우리는 탄복했소."
소선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첫번째의 일은 당신이 성공했다치고 이젠 두번째의 일이 기다
리고 있소."
화무결은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땅에서 뽑았다.
군중들의 갈채 소리는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그러나 마차 속에
서는 여전히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소어아의 가슴은 아파왔
다.
그 역시 비록 화무결의 무공에 대해서 탄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박수소리는 그의 가슴을 찢어놓는 듯 했다.
화무결이 다시 말했다.
"그 두번째의 일은 무엇이오? 부인께서는 분부를 하시지요."
모용산산은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경성에 점심을 파는 집이 있는데 소소주라고 하오. 공자께선
알고 계신지요? 그 소소주에서 만든 팔보반, 천충고는 정말 맛이
좋은 음식들이오."
이때 그녀가 돌연 소소주의 음식 종류를 말하자 군중들은 그녀
의 뜻을 몰라 모두 다 이상하게 여겼다.
화무결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나에게는 두 사람의 친구가 있지요. 그들 모두가 이 두 가지
음식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들었오."
소어아는 자연히 그가 말하는 친구가 누구와 누구인지를 알고,
철심난이 그와 같이 팔보반을 먹는 모양을 생각하니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
모용산이 조용히 애교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음식을 좋아하고 있으며 지금도 잊지 못
하고 있는데 공자께서 좀 구해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다. 화무결더러 점심을 구
해오라 하다니? 이것이 바로 그녀들이 화무결에게 하라는 두번째
의 일일까? 이 일은 너무 도리에 맞지 않았고 또 너무 쉬운 일이
아닌까?
화무결도 마음 속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들의 요구
에 대해서는 종래에 거절을 하지 못해온 그였다.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결국 웃으면서 답했다.
"제가 만약에 부인들을 그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영광
이겠오!"
모용산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오."
화무결이 한참 생각한 뒤에 그녀들에게 말했다.
"제가 사 가지고 올 때는 필시 더운 것일 거요."
모용산이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두 발을 땅에 닿게 하지 않고 다녀올 수 있
겠습니까?"
이 말이 나오자 군중들은 난점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다. 어
떻게 두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안경성에 갔다 올 수 있단 말인가!
안경성은 비록 멀지는 않아도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화무
결의 경공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 번에 그토록 나를 수는 없었
다.
군중들은 화무결이 가볍게 응답하는 것을 보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은 또 하나의 계교였다. 그러나 화무결이 하지 못하고 모
용산이 하게 된다면 화무결의 사람됨으로써 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화무결이 돌연 신발을 벗고 웃으며 말했다.
"나의 양발이 땅에 닿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여부는 이 버선으로
알 수가 있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는 마차를 타지 않고 말도 타지도 않았지만 두 개의 나무가지
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왼손의 가지로 땅을 접하면서 이미 석장밖
으로 날았다. 다시 오른손의 가지로 접하니 사람은 이미 여섯장
밖으로 날라갔다. 멀리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잠깐만 기다리시오. 제가 즉각 올 테니."
그는 한 손으로 한기회수의 경공으로 절정의 무술을 전개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공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잠깐의 시간으
로 수십 리를 왔다 갔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중들은 모두 수근거리며 화무결이 한 손으로 견딜 수 있는지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모용자매의 얼굴은 벌써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이미 긴장에 싸여 있었다.
의논이 분분하던 중에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간 것 같이 느껴졌
다. 잠시 후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화무결이 이미 눈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입에는 물건이 물려 있었던 것이다.
한쌍의 버선은 여전히 흙이 묻지 않은 채 깨끗한 그대로였다.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면서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
다.
"화공자는 과연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안경성을 갔다왔구나."
환호성 속에 화무결은 몸을 뒤짚으며 벗었던 신발을 신었다. 곧
이어 물건을 모용산의 앞으로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제가 명령대로 가지고 왔으니 부인께서는 식기 전에 잡수시지
요."
모용산이 억지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공자, 고맙소!"
그녀는 포장을 뜯었다. 그 속에는 과연 뜨거운 팔보반과 천충고
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잡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이 달고 향기로운 천충고가 그녀의 입속에서는 매우 썼다.
화무결이 사용한 것은 영리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어아
는 그가 비록 영리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끝내는 탄복을 했다.
그는 첫번째의 방법으로 그의 놀라운 내력을 나타냈고, 두번째
의 방법으로 그의 경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가 만약에 이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군중들은
비단 칭찬하지 않았을 분더러 그를 욕했을 것이다.
소어아는 억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때때로 사람의 머리는 영리하지 말아야 돼. 이 모용자매
는 너무 영리해서 남을 놀려볼까 하였으나 결국 손해 보는 측은
그들 자신이야.)
그는 비록 모용자매를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다고 느꼈
다.
모용산산은 억지로 천충고를 먹었지만 정말 그렇게 맛있던 음식
이 이렇게 먹기 어려울지는 몰랐다.
화무결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다 먹은 후에야 입
을 열었다.
"그럼 세번째의 일은?"
성미가 급한 소선녀는 참을 수가 없어서 큰소리로 외쳤다.
"하나의 집이 있는데 문은 닫혀 있어요. 당신은 몸을 위 아래로
문에 부딪치지 않고 또 다른 물건으로도 부딪치지 말고 들어갈 수
있겠오?"
이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 어려운 일
이라도 화무결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어아는 몰래 웃으면서 중얼댔다.
"이 세번째의 일은 두번째의 일보다 더 어려운데. 어떻게 손을
문에 대지 않고 문을 열 수 있단 말인가?"
화무결이 한참 동안 침울하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집이 없는데 이 마차는......."
모용쌍이 말을 받았다.
"마차도 좋아요. 당신의 손이 마차의 문을 건드리지 않고 마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당신이 이긴 것으로 하겠어요."
화무결은 눈길을 모용산 쪽으로 돌리면서 다짐하듯 물었다.
"정말 그렇소?"
모용산이 가만히 계산을 하는 듯 해보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마차와 집은 한 가지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화무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갔다.
"내가 이 일을 해내면 부인은 다른 의견이 없겠죠?"
모용산산은 결정한 듯 말했다.
"공자께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우리들은 물러가겠소."
"정 그렇다면 부인께선 보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마차쪽으로 향했다.
소어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식이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벽공장력으로 마차 문을 열려
는 것일까?)
화무결이 마차 앞으로 다가오더니 돌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
다.
"철(鐵) 아가씨, 문을 여시오!"
마차 속에서 곧이어 은방울 같은 웃음을 웃으면서 한 여인의 목
소리가 새어나왔다.
"네 그러지요."
군중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는 드디어 크게 웃었다.
소어아까지도 참지 못하여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은
방울 같은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자마자 더 이상 웃지를 못했다.
모용자매는 화무결이 마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넋을 잃
고 말았다.
화무결은 마차 속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부인들의 규칙을 위반하지는 않았소. 이미 마차 속에 들
어왔으니 부인께서는 내가 승리한 것으로 하겠지요?"
모용자매는 넋을 잃은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군중들은 모두 웃어버렸다.
화무결이 사용한 방법은 모용자매보다도 또 소어아보다도 더욱
영리했다. 그가 이러한 방법을 마지막으로 사용하자 군중들은 비
록 그를 경멸도 실망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의 기지에 대해 탄
복하는 한편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화공자는 당연히 이겼으니 그 누구도 할 말이 없지!"
모용자매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용쌍은 다시 모용산을 바라보
았다.
모용산산은 억지 웃음을 지을 뿐 아무 방법도 없는 듯 보였다.
그녀가 발을 딛으면서 가마에 올라 타자 모용쌍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소선녀는 강별학을 바라본 후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만족하지 마시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릴 테니."
강별학은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선녀도 고개를 돌렸다. 열 여덟 명의 사나이는 세 채의 큰 가
마와 작은 가마를 들고 급히 산곡을 빠져나갔다.
강별학이 그제서야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화형(花兄)의 기지와 무술은 과연 둘도 없으니 제가 정말 탄복
을 했오!"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화무결은 손을 들어 인사
를 하면서 마차에 올랐다.
소어아는 마차를 바라보면서 마차 속의 철심난을 생각했다. 가
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한참 후 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가 왜 그녀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해야 하나? 이건 확실
히 이상한데?"
철심난이 그의 곁에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녀가 남과 함께 다니게 되자 그는 그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
각 되었다.
그 자신도 철심난이 어찌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이상스러
웠다. 그는 전에 절대로 그녀가 자기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할 줄
은 몰랐다.
그는 마치 자기가 바보인 것으로 느꼈고 미친 것 같이도 생각했
다.
그는 세상에 자기와 같은 병신이 있는 줄 몰랐다. 병신도 가지
가지지만.
병신 같은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가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애를
태운다. 그러나 막상 얻고 나서는 그 즐거움을 모른다. 그러다가
잃어버릴 때는 다시 후회하는 게 통상이었다.
이것도 세상 사람들의 통곡이 쾌락보다 많은 원인인가!
소어아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돌연 사람들 틈에서 두 명의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그는 도교교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나구(羅九) 구양정의 어깨를 가만히 쳤
다. 구양정이 고개를 돌리다가 안색이 변해버렸다.
그는 수시로 남을 조심스럽게 방비해왔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
은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소어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당신은 항상 이렇게 긴장하는 데도 마르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군."
구양정이 그를 알아본 후에야 쓴웃음을 지었다.
"미인도 없고 하니 자연히 매일 먹기만 하지. 그렇게 되면 살만
찌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
소어아는 눈길을 돌리며 웃고 나서 말했다.
"두 분이 벌써부터 내가 그 아가씨를 데려간 줄 알고 있었군."
구양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 외에 그녀가 누구를 따라 가겠소?"
구양정도 따라 웃었다.
"그 계집에게도 흥미가 있어서 그녀를 데리고 갔는 줄 아는 데
요."
그러나 두 사람은 이번에는 계산을 잘못했다. 더욱이 그 계집애
가 도교교인지 모르고 그 계집애도 소어아가 데리고 간줄 알았다.
소어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좋지. 두 개는 하나보다 좋고."
구양정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소. 당신 말이 맞소. 그 말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
오."
세 사람은 계곡을 걸어 나와 어느덧 도교교의 마차 앞까지 다다
랐다. 소어아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가시오. 다음에 다시 봅시다."
구양정이 뜻있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형씨께서는 다시 여인을 만나러 가시는 것이 아니오?"
"혹시......."
그는 유의 무의간에 마차쪽으로 가면서 다시 말했다.
"두 분은 왜 안가시오?"
구양정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다시금 웃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으니 형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소!"
소어아는 일부러 애타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대답했다.
"난 다른 곳으로 가야하오. 두 분......."
구양당이 큰소리로 말을 받았다.
"딴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구양정이 마차로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
우며 박수를 쳤다.
"나의 예상이 과연 맞군. 가인(佳人)이 여기에 있었어."
구양정은 음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옛말에 복숭아를 줬으면 자두라도 받으라 했소. 형씨는 나의
복숭아를 먹었으니 자두라도 내어 놓으시오."
형제 두 사람은 모두 마차에 올랐다.
구양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씨도 올라 오시오."
구양당도 따라 웃었다.
"우리 형제는 두들겨 팬다 해도 가지 않을 거요."
소어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내심 웃고 있었다.
(죽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오늘은 필시 큰 손해를 볼 것이
다.)
그는 못 이기는 척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마차에 올랐다. 타
자마자 탄식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방금 당신들을 피할 걸 그랬어. 내가 왜 인사
를 했지...... 아 너무 재미에 빠져서 그랬나?"
마차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양 형제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교교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부끄러운 것 같이 몸을 꼬았다.
구양정은 다시 크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루 사이인데 아가씨가 어찌 이렇게 더 예뻐졌지?"
구양당도 한마디 거들었다.
"비가 오고나면 꽃이 더욱 예뻐지지. 이런 도리도 모르나!"
도교교는 시종 수줍은 듯이 앉아 있었다.
소어아도 도교교가 어떻게 손을 쓸지 궁금해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다.
마차는 갈수록 속도를 더해가며 인적을 빠져나가서 황야의 너른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구양정은 얼굴을 찌뿌리며 조급한 기색을 나타냈다.
"형씨의 보금자리는 어찌 이토록 멀지?"
소어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두를 먹고 싶으면 좀 참아야지."
이번에는 구양당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때 도교교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애교있게 웃었다.
"다만 그 자두는 맛이 이상해서 당신들은 잘 먹지 못할 거예
요."
구양 형제는 동시에 놀라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러나 구양정이 곧 껄껄 웃었다.
"아가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지?"
도교교는 이제까지 부끄러워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맹랑하게
말을 받았다.
"벌써부터죠. 이미 이십 년이 되었어요."
구양 형제의 안색이 변했고 은근히 차문을 힐끔 바라보며 뛰어
내릴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도 고모는 어찌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지. 일을 그르칠 텐
데.......)
이때 '푸'하는 소리가 나면서 마차 좌석 밑에서 돌연 네 개의
손이 뻗쳐 나왔다. 구양 형제는 꿈 속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좁은 마차 안이라 앞에 있는 사람이 돌연 달려든다 해도
방비하기가 어려운데 엉덩이 밑에서 손이 뻗혀 나오다니!
그들의 양팔은 이미 네 개의 손에 잡혔고 그 손은 굵은 쇠줄로
조이듯 둘을 꼼짝 못하게 해버렸다.
구양정이 극도로 놀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형...... 형씨 당신이...... 어찌 이렇게?"
소어아도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나에게 묻지 마시오."
구양정은 도교교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건 아가씨의 행위요?"
도교교는 살살대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누구냐?"
그녀는 누가 말을 물어오면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
지않고 오히려 반문하는 버릇이 있었다.
구양 형제는 말투를 듣자 얼굴에 혈색이 조금도 남지 않을 만큼
창백해졌다.
구양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지금도 나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나...... 우리 형제가 어찌 아가씨를 알겠소?"
"나를 모른다면 왜 그토록 무서워하지?"
구양정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무서워? 누가 누구를 무서워해......."
구양당도 껄껄 웃으면서 농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 형제는 아가씨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도교교는 탄식을 했다.
"구양정, 구양당, 시치미를 떼봐야 소용없어."
구양정은 정말로 시치미를 뗐다.
"구양정이 누구요?......."
구양당 역시 딱 잡아뗐다.
"우리가 듣기론 그들이 바싹 마른 사람이던데...... 하하......
하하......."
그는 크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으로 얼굴의 근육이 딱딱해
져서 크게 웃을 수가 없었다. 도교교는 싸늘하게 그들을 바라보면
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구양당은 몇 번인가를 건성으로 웃고난
후 구양정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구양정인가?"
구양정이 대꾸했다.
"내가 만약에 구양정이면 너는 구양당이겠지."
"알고보니 우리가 구양정, 구양당이군...... 하하 재미있어."
"마른 사람이 이렇게 뚱뚱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나? 원참!"
도교교는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뚱뚱해지는 약이라도 먹은 모양이지."
"그렇소. 우리 형제는 정말 그런 약을 먹었을 거요. 하하."
도교교는 싸늘한 눈빛을 내며 말했다.
"지금은 때가 됐어. 너희들이 약을 토할 시기가 말이야."
"이거...... 하하 하하!"
구양당이 구양정의 말을 받았다.
"그거...... 하하 하하."
이것을 본 소어아는 그들이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추측
하고 있었다.
이때 돌연 마차 좌석 밑에서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구양 형제는 이십 년 동안 하얗게 늙었고 뚱뚱하게 되기도 했
지만 '하하하'고 웃는 법도 배웠군. 그들을 내 제자로 삼는 게 어
때?"
심술궂은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다.
"정말 저 놈들을 제자로 삼게 되면 내 바지까지 빼앗기고 엉덩
이를 드러낸 채 길거리로 나앉게 될 것이오. 하하."
형제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었
다.
그리고 곧 구양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두 분 형님을 엉덩이로 누르게 됐군요. 정말 죄송스럽
소."
백개심이 자리 밑에서 그의 독특한 웃음을 지어가며 말했다.
"그건 상관없어! 도 누님은 이 속을 내 집 침대보다 잘 꾸며 놓
았지. 술도 있고 고기도 있으니......."
합합아도 다시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너희들의 큰 엉덩이가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구역질이 나서 먹지 못할 뿐이야."
구양당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두 분이 손을 놓지 않으면 저희가 일어 설 수가 없고 일어서지
를 못하면 두 분이 밑에서 불편하게 있어야만 하니...... 도 누
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도교교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간단하지? 너희들이 먹은 약을 토하면 손을 놓을 것이야."
백개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면 죽던가."
합합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인데."
구양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도 누님께서 맡긴 물건은 벌써부터 악인곡에 갖다 줄 생각이었
는데, 다만......."
도교교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말했다.
"다만 물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지?"
구양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 누님의 말이 틀림이 없소. 당신들이 입곡한 이듬해에 그 물
건들을 몽땅 남에게 빼앗겼소. 우리는 누님을 노하게 할까봐 그래
서...... 그래서......."
구양당이 말끝을 이어 받았다.
"그래서 피해다니며 나타나지를 못했소."
도교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누가 빼앗아 갔지?"
구양정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노중달이오."
구양당도 옆에서 거들었다.
"바로 그 남천 대협이라는 사람이오. 바로 두살 형님이 처음 강
호에 들어섰을 때 팔을 자르려고 했던 그 자식이지요."
도교교가 갑자기 깔깔 웃었다.
"합형, 이놈들의 거짓말이 재미있지 않소?"
합합아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과연 그렇군. 우리가 노중달에게 묻지 못할 것을 알고
는......."
백개심이 히히 하며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은 증명하기가 어렵지."
구양정이 큰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이오."
구양당의 언성이 높아졌다.
"만약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하늘이 나를 죽일 것이고 그
리고 다음 세대는 돼지로 태어날 것이오."
도교교는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합합아와
백개심 두 사람도 잠잠했다.
구양 형제는 번갈아 한마디씩 입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변명을
했지만 도교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듯 창 밖만을 쳐다보고 있
었다.
이때 돌연 마차가 멈추더니 창 밖에서 한 사람이 얼굴을 안으로
들이 밀었다.
그 얼굴은 매우 얼음처럼 싸늘하고 투명해 보였다.
구양 형제는 그 얼굴을 보자 마치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
해져 온 몸을 벌벌 떨었다. 구양정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
다.
"알고보니...... 두살 형님도 여기네 계셨군요!"
다시 모인 사람들
구양 형제는 조금 전까지도 열심히 변명을 했었으나 두살의 얼
굴을 보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소어아는 혈수 두살을 보자 웬지 모르게 친밀한 느낌이 들고 반
가와 인사를 올렸다.
"두 대숙, 안녕하셨습니까?"
"음, 잘 있었는가?"
소어아를 바라보는 그 순간만은 그의 눈길 속에도 부드러움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러나 눈길을 구양 형제의 몸으로 옮겼을 때
는 살기가 철철 넘쳐 몸이 오싹할 정도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탁'하는 소리가 나며 쇠뭉치와 같은 것이 마차의 창문 위에 걸
쳐졌다. 바로 혈수 두살의 손이었다.
그는 마차 문을 연 후 아무말도 하지 않고 구양당의 얼굴을 강
타하기 시작했다. 이십여 차례나 주먹질을 하고 나서야 그는 싸늘
하게 입을 열었다.
"날 알아 보겠지?"
구양당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웃음을 억지로 지으
며 겨우 입을 열었다.
"동...... 동생이 어찌 두 형님을 몰라 보겠소?"
두살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알아본다는 말이지!"
두살은 구양 형제의 오른쪽 무릎의 독비혈을 짚고는 구양정을
몇대 후려쳤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무서운 소리로 외쳤
다.
"내려와!"
"동...... 동생의 다리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데 어찌 내려 가
겠소?"
"다리를 쓰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내려 와야지."
구양 형제는 서로 바라본 후 얌전히 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교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두 노대는 수단이 좋군. 구양 형제가 꼼짝하지 못하고 쥐
가 고양이를 본 것 처럼 벌벌 기니 말이야."
합합아가 마차 밑에서 나오며 끼어들었다.
"흉악하고 교활한 사람일수록 내가 상대할 방법이 있지."
마차는 황야의 한 저택에 멈추어져 있었다. 마차를 몰던 사람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합합아는 소어아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하, 그간 얼마나 많은 여자를 유혹하고 죽게 했지?"
소어아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삼백 명도 못되요."
합합아는 그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아직 멀었군. 금후에는 더욱 노력을 해!"
"더 유혹을 계속하면 나도 죽고 말 게요?"
소어아는 말을 하면서 돌연 다리를 뻗어 뒤에 걸어 오던 백개심
을 걸어 넘어뜨렸다. 백개심은 곧 벌떡 일어나면서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그 독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결코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구나."
"아직도 멀었으니 더 두고 보시지."
백개심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난 견딜 수가 없는데. 더 하다간 나의 목숨을 앗
아가겠는 걸!"
그들은 모두 황야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낡은 대청 위엔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무엇인가가 끓고 있었다.
한 사람이 불가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조금 전에 마차를 몰고
왔던 사람 같았다. 인피가면을 했는지 이렇게 더운 날씨에 불가에
앉아 있는데도 이마에 한 방울의 땀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들어 오면서도 마치 그를 보지 못한 척 했다.
도교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어아야, 빨리 이 대숙을 만나 보고 싶지 않느냐? 요 몇 년
사이에 그는 매일 같이 너를 생각했었지. 어쩌면 그는 너의 살을
먹고 싶어서 그러는지도 몰라."
소어아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한 번 인사도 못갔으니 이 대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
합합아가 끼어들었다.
"그건 몰라도 적어도 오늘 만큼은 화가 나있지...... 하하 도교
교가 그에게는 마차를 몰게 하고 백씨는 마차에 앉게 했으니 그는
가슴 속이 터질 것만 같았을 거야."
소어아는 걸어 가면서 한바탕 웃었다.
"이 대숙, 정말 화를 내지 마세요. 사람이 화를 내면 고기가 쉬
어요."
이대취는 참을 수 없었던지 웃기 시작했다. 그는 소어아의 손을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 이자식아, 아직 그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
"그것이야 말로 진리인데 내가 어찌 잊겠어요?"
이때 구양 형제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온몸과 얼굴이 흙투성이였고 두 마리의 큰 돼지 같았다.
혈수 두살은 싸늘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라오면서 그들이 느
려지기만 하면 옆구리를 한 번씩 걷어찼다. 두 사람을 대하는 것
이 집에서 키우는 집 짐승을 다루는 것 보다도 못하였다.
"이십 년 이래 처음으로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군. 크
게 경축하는 연회라도 열어야지."
도교교는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강호에서 우리가 모두 모였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놀라서 간이 떨어질 거야."
이대취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간이 떨어져 버리면 안 되지. 간이 얼마나 맛있는데."
소어아는 가만히 그들을 보며 자기 어린시절을 회상하자 마음
속에 아련한 감정이 가득찼다.
이 사람들은 비록 악인들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눈에는 사람마다
친숙한 얼굴이었다.
소어아는 기뻤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해칠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도교교가 침묵을 깨뜨렸다.
"음 노구만 아직 도착을 안했군. 무슨 일이 생겼나? 왜 아직도
오질 않을까?"
이대취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일을 할 때 극히 비밀스럽게 하지. 어쩌면 벌써 와
있는지도 몰라. 혹시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때 구양정이 땅을 기면서 웃음 섞인 말로 이야기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저도 여러 형님들이 모인 것을 보니 매우 기쁘오."
구양당 역시 급히 웃으면서 구양정의 말에 한마디를 더 부언했
다.
"정말 술을 마시고 경축을 해야겠군요."
"그래! 하지만 우리 돈을 너희가 다 가로챘으니 어찌 술을 살
여유가 있겠나?"
도교교의 말이었다.
구양정이 그 말을 황급히 받았다.
"도 누님이 동생을 놓아주시기만 하면 동생은 즉각 그 노씨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라도 물건을 빼앗아 오겠소."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살이 그의 팔을 잡어 비틀었
다.
"두형, 나는 거짓말을 안 했소. 제발 살려주시오."
두살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싸늘했다.
"물건이 어디에 있지, 말해봐?"
"정말...... 정말 노중달이......."
두살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쳤다. 그의 입에서는 '
달'이란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졌고 그 속에는 세 개의 이빨이 함
께 섞여 있었다.
도교교는 화로에 꽂혀 있던 벌겋게 단 쇠젓가락을 뽑아 들고 가
볍게 구양당의 목에 대며 애교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두형처럼 수단이 악독하지 못해서 너를 때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불덩어리의 맛을 좀 봐야지."
구양당은 땅을 뒹굴다가 이대취의 앞으로 굴러 애원을 했다.
"제가 말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이형, 당신...... 옛날의
친분을 보아서라도 제발 좀 봐 주시오."
이대취는 탄식을 했다.
"도 누나가 너를 아프게 했는가?"
"아파...... 죽겠오."
"어디가 아픈가?"
"온 몸이 아프오. 더욱이...... 더욱이 목은......."
이대취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가만히 매만졌다.
"여긴가?"
그의 목소리에는 농담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구양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음...... 네...... 바로 거기요."
"좋아, 내가 그 살을 베어버리지. 그러면 아프지 않을 거야."
구양당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그는 말조차 제대로 잊지 못했다.
"이...... 이형, 당신이......."
구양당이 더듬거리는 사이 이대취는 벌써 신발 속에서 작은 칼
을 빼어 들고는 구양당의 목에서 살점을 도려 내었다. 그는 그 살
점을 불 위에 올려 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불고기는 소금과 후추가루를 치면 맛이 좋아지지. 그런데 오늘
은 후추가 없어."
그는 옆에 놓인 단지 속에서 소금을 꺼내서 살에다 뿌린 뒤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었다.
소어아는 살점이 불에 타는 소리를 듣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
다. 더구나 먹는 소리를 듣고는 토하고 싶었다.
백개심, 도교교도 모두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왝'하는 소리가 나면서 구양당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
몸의 살점이 남에게 먹히는 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
다.
이대취가 또 다시 중얼거렸다.
"요 몇 년 사이에 너희들은 무술을 열심히 연마했구나. 살점이
탄탄한 것이 탄력이 있어."
구양당의 얼굴은 피가 범벅인데다 토한 것까지 묻어 있어서 사
람의 모습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짐승처럼 땅을 기면서 통곡을 했
다.
덩치가 큰 남자가 땅을 기면서 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흉했
다. 이대취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구양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도 몸이 아프냐?"
구양정이 겁에 질려 우물거렸다.
"아...... 아프지 않소. 조금도 아프지 않소."
이대취는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가련한 듯이 말했다.
"정말 불쌍하군. 노대가 너를 이토록 만들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어?"
구양정이 파리하게 질렸다.
"정말 아프지 않소......."
이때 두살이 다가서더니 발로 그의 얼굴을 걷어차며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프겠지?"
구양정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데다 너무 아파서 말을 하지
도 못했다.
이대취가 싱긋 웃었다.
"지금은 필시 아플 테니 내가 아프지 않게 해주지!"
그는 다시 칼로 그의 얼굴에서 살점을 베어 낸 후 불에다 구워
먹으면서 말했다.
"이상한데. 이 고기는 돼지 간이 아닌데 어째서 돼지 간 냄새가
나지...... 부어 오른 살은 맛이 없구나. 네 놈은 요즘 몸이 안
좋은 모양인데."
소어아는 분명히 이 구양 형제가 누구보다도 악한 줄은 알고 있
었으나 그들의 모습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구양정이 소리쳤다.
"말을 하겠오. 그 물건들은 아직 건재하오. 노중달은 손을 대지
도 않았오. 모두 거짓말이었으니 용서하시오."
소어아는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말을 할 바엔 왜 일찍 말을 하지 않고 꼭 남이 이런 방법으로
상대하게 하고야 마는가!)
도교교도 그제서야 웃었다.
두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물건이 건재하다면 어디에 있지?"
구양정이 떨리는 소리로 말을 받았다.
"말을 한 후에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소?"
합합아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우리는 본래 형제와 같은데 어찌 너희들을 죽이겠느냐?"
그러나 구양당은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두 노대가 보증을 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소."
혈수 두살이란 사람은 비록 악한 사람이었지만 말을 하면 꼭 실
천을 하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두살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직하게 말을 하면 절대로 너의 목숨은 다치지 않겠다."
구양정은 안심이 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건들은 바로 구산의 어느 동굴에다......."
구양당이 급히 말을 받았다.
"제가 지도를 그릴 수 있소."
옆에 있던 이대취가 그의 어깨를 치며 탄식을 했다.
"진작 말을 했더라면 너의 고기를 먹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야."
잠시 후 지도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손을 동시에
내밀었다. '퍽 퍽' 하며 주먹이 오가다가는 네 쌍의 손이 동시에
거두어 졌다.
이대취는 분을 참아가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 지도는 두 노대에게 보관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마
음이 놓이질 않으니까."
"그렇소. 두 노대 외에는 나도 안심을 할 수 없소."
그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동안 창 밖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
났다.
합합아가 재빠르게 말했다.
"하하, 음 노구는 역시 영리한 사람이군. 우리는 한 나절의 시
간을 허비했는데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알맹이를 빼먹으
니......."
"나는 편했는 줄 알아?"
도교교가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왜, 귀신이라도 봤소?"
"방금 귀신을 만났지."
"무슨 귀신? 목 매어 죽은 귀신이라도 보았느냐?"
합합아의 조롱섞인 말이었다.
음구유는 눈길을 소어아의 몸으로 돌리며 돌연 음산하게 웃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소어아, 네가 말해 봐라. 무슨 귀신이지?"
소어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웃었다.
"두 백부를 잡을 수 있는 귀신은 얼마 없지요. 그러나 두 백부
를 무섭게 하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있죠."
도교교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연남천을 만난 것이오?"
"그를 만났다면 여기에 올 수 있었겠오? 다만 멀리서 그를 봤을
뿐이야. 완전히 공력을 회복한 것 같았어."
소어아는 이 말을 듣자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대취,
합합아, 백개심, 도교교 등 여러 사람들은 안색이 모두 변했다.
더욱이 도교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발 앞으로 나서며 재차 물
었다.
"그...... 그는 어디로 갔지?"
"내가 어찌 어디로 갔는지 알겠어? 이쪽으로 오는지도 모르지."
이 말이 떨어지자 천하에서 악명이 높은 십대악인들도 안절부절
했다. 이대취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여기는 확실히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빨리 가자."
합합아도 따라서 일어섰다.
"누구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탄복을 하겠어."
구양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 속에 끼어들었다.
"제발 부탁이오. 나도 데리고 가 주시오. 나...... 나는 연남천
을 보고 싶지 않소."
백개심도 탄식했다.
"연남천...... 연남천, 그를 본다면 바로 제삿날이 되는 거야."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며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몰래 탄
식을 했다.
(어떤 사람이든 연남천과 만나게 되면...... 아! 내가 비록 혼
자 잘났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연남천도 사람이다. 연남천이 할 수 있는 일을 강소어가 왜 못한
단 말인가!)
이때 구양정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튕기더니 그의 한
팔과 하나의 다리가 도교교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구양당이 당황한 나머지 소리쳤다.
"두 노대, 당신...... 약속을 하지 않았소. 당신...... 당
신......."
도교교가 웃으면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두 노대는 다만 너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고 했지 다른 것을
약속하지는 않았어!"
그녀는 말을 하면서 이번에는 구양당의 한 팔과 한 발도 짜르고
는 단지 속의 흰설탕을 그들의 몸에 뿌렸다.
개미들이 그들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구양당이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나를 죽이시오. 빨리!"
"두 노대가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
어!'
도교교의 말에 구양정은 이를 부드득하며 갈았다.
"당신...... 당신은 악독하군. 정말로 악독한 수단이야!"
도교교는 껄껄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너의 손에 걸렸다면 몇 백 배나 더 악독하게 했을 걸."
소어아는 혼자 석양에 서 있었다. 도교교, 백개심, 이대취, 두
살, 음구유는 모두 가버렸다. 그들은 모두 귀산으로 갔다. 그들은
소어아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소어아도 따라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다만 그들의 마지막 말만을 기억했다.
"좀 조심 하거라. 연남천을 조심하고 강별학을 무너뜨려라. 우
리를 따라 오면 불편도 많으니 그대로 지내거라. 금후에 우리가
찾아 오겠다."
소어아는 그들의 말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마음은 돌연 연남천이라는 세 글자에 부풀어 있었다.
그의 몸에는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약간 식어 있었
을 뿐이었는데 지금 또다시 연남천이 그의 피를 들끓게 만든 것이
었다.
(연남천, 나는 왜 연남천을 따를 수 없을까? 왜 도교교에게 배
웠을까? 이대취, 두살, 합합아, 음구유...... 왜 나는 연남천처럼
떳떳하게 적과 맞설수가 없을까? 오히려 도교교와 이대취를 본받
고 있으니...... 몰래 못된 짓이나 하고.)
구양 형제의 비참한 신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소어아는 돌연 몸을 돌려서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양 형제는 피밭에 누워 있었다. 개미들이 그들의 몸에 새까맣
게 붙어 있었다. 그들 몸의 고통은 정말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
였다.
그들은 소어아가 온 것을 보자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이오. 나를 죽이면 감사하겠소."
소어아는 탄식을 하면서 두 사람을 우물가로 엎고 가 깨끗이 목
욕을 시켜 주었다.
구양 형제는 소어아가 그들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다. 그들의
눈초리 속에는 놀라움과 감격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소어아는 중얼거렸다.
"내가 돌연 이렇게 자비롭게 된 것을 이상히 여기는가? 난 비록
너희들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너희들
을 처분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양정이 그를 바라보면서 못 믿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당신...... 당신이 나를 구한다면 나는...... 필시 보답을 하
겠소."
"네가 살 수 있다면 내가 구해주지. 그러나 보답은 필요 없어!"
구양정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보물은 귀산에 있지 않소."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소어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귀산에 있지 않다고?"
구양정은 그 어느 누가 보아도 음침한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에
쓴웃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 못했을 거
요."
구양당은 아픔을 참느라고 입술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한 번 헛걸음을 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
야."
구양정이 역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산에서 돌아 온다고 해도 적어도 목숨의 반은 귀산에
두고 와야지."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우리 형제가 말한 곳에는 보물이 없을 뿐더러 악마가 있지. 꿈
속에서도 귀산에 악마가 숨어 있을지는 모를 거야."
구양당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그들은 연남천만 두려워 할 줄 알았지. 그러나 이 악마는 연남
천보다 십 배는 더 무서워. 십대악인도 그와 비하면 어린애가 돼
버리는 거지."
"내가 왜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을까?"
"네가 모르는 일은 아직도 많아."
구양정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 악마를 만나면 그들의 비참함은 우리의 십 배나 더할 거
야."
소어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너희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람을 해치는구나!"
구양정은 눈 알을 몇 번 굴리더니 대답했다.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우리를 살려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들을 사지(死地)로 가게 했지. 나 구양정은 바
로 목숨을 걸어서도 이익을 봐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구양당 역시 웃음을 지었다.
"우리 두 사람 형제의 목숨으로 다섯 사람의 목숨과 바꾸는 것
은 큰 이익이야. 나 구양당은 바로 죽어도 손해는 안 보는 거야."
이 두 사람은 죽음 직전인데도 이때의 웃음은 그토록 만족스러
울 수가 없었다. 이미 고통이나 생사의 문제는 완전히 잊어 버린
사람들 같았다.
소어아는 그들이 고통스러움을 참아가며 웃는 모습을 보자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이 분명 죽는 줄 알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을 해치기 위해서 죽어가는 것이군. 참으로 보기 드문 녀석들이
야."
이 두 형제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웃는 소리조차 점차로 미약해
져 갔다. 구양당은 구양정에게 뒹굴어 와서 수근대기 시작했다.
"형, 우리 그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이 자식에게 말할까?"
"이 자식은 천생에 좋은 놈이 아니야. 보물을 얻은 후 더욱 많
은 사람을 해칠 놈이야. 우리가 죽은 뒤 이 자식이 우리의 보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구양당이 크게 웃었다.
"그래 그래. 형은 과연 현명한 사람이야."
그들은 웃으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숨을 이어가기 조차
힘들어 보였다.
소어아는 탄식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좋은 말을 한다던데 너희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좋은 말을 하지 못하는구나."
"우리...... 우리는 살아서는 악인이고 죽어서도 악한 귀신이
될거야."
구양당이 한마디 하자 구양정이 말을 받았다.
"너에게 말하는데 사실 보물은...... 한구성 팔보리상가 골목의
오른쪽 세번째 노랑색의 문이 있는 집에 있어."
구양당이 간신히 웃음띤 얼굴로 거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필시 보물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숨겨 놓을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는 보물을 인적이 많은 곳에 숨겨 두었지.
그들은 꿈 속에서도 생각을 못할 거야."
두 사람의 말소리는 점차 약해졌다. 듣기 조차 어려워졌고 그들
의 상처에서도 차츰 피가 말라갔다.
소어아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좋아, 귀신이 되고 싶다면 되어 보아라. 그러나 너희들은 잊지
말아라. 귀신이 되는 것도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구양 형제는 일제히 웃음을 그쳤다.
그들은 동시에 지옥에서의 고생을 상상했다.
(머리는 소, 얼굴은 말인 사나운 짐승, 또 칼과 같이 날카로운
산,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
구양당이 돌연 소리쳤다.
"난 악한 귀신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나는 지옥에 들
어가고 싶지 않아."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구양정은 방금까지도 크게 웃으며 호기를 부렸으나 지금은 이미
눈물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용서해 주게."
"용서해 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염라대왕은 아니오."
구양당이 사경을 헤매며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이오. 우리의 보물로 좋은 일을 하시오."
"그렇다. 우리는 나쁜 일들을 너무 많이 했으니 너는 우리를 위
해 대신 속죄할 기회를 가져라."
소어아는 두 형제를 번갈아가며 살피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
했다.
"이상하군. 많은 사람들이 몇 푼 돈으로 속죄를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거 너무 웃기는 것이 아닐까?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천
당에는 모두 부자만 있겠군. 가난한 자들은 모두 지옥에 들어가야
하고."
구양 형제는 동시에 비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제발 부탁이니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오."
"너희들도 두려울 때가 있는 모양이구나."
구양정은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계속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었다.
소어아는 고개를 돌리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만약 천하의 악인들이 모두 당신들의 모습을 본다면 나쁜 일을
할 마음을 고쳐먹을 거야."
그는 탄식을 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들 말대로 하지. 지금에 와서 참회하는 것은 늦기는 했지
만 그러나 하지 않은 것보다는 좋지. 이제 안심을 해라."
소어아는 얼굴을 깨끗이 씻고 하늘색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
었다.
그는 비록 만 하루 동안 눈을 부치지 못했지만 정신은 또렷하고
맑았다. 다만 배가 좀 고팠을 뿐이었다.
그는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음식점인 장원루를 찾아서 배불리 식
사를 했다.
사방에서 모여든 강호 친구들은 여전히 안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장원루의 탁자도 반 이상을 무림 호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어아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조춘형도 오늘밤에는 이 장원루에 오셨군."
조춘형이라고 불리운 사람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강 대협께서 고맙게도 청첩을 보내 주셨소. 그래서 오늘 밤에
는 나도 여기에 와서 한 잔하고 싶었오."
그가 말소리를 일부러 크게 하니 주위의 사람들은 자연히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눈초리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자 또 많은 사람들이 청첩장을 꺼내서 자랑을 하니 청
첩장이 없는 사람은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해졌다. 강남 대협께서
손님을 초대하는데 자기의 이름이 없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
인가!
소어아는 우스워 하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강별학은 무슨 낯으로 손님을 초대했으며 또 초대된 손님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소어아에게는 웃기
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창가의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돌연 놀라면서 말했다.
"강 대협이 잔치를 벌이자는 것은 화공자를 축하하려는 것인데
화공자는 강 대협의 체면도 보지 않고 가버리다니."
다른 한 사람이 또 말했다.
"화공자와 강 대협은 생사를 초월한 교제관계이고 화공자는 강
대협을 도왔는데 어찌 강 대협에게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을까?"
세번째의 손님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오늘은 날씨도 청명하니 화공자는 필시 자기 미래의 처를 데리
고 성 밖으로 구경을 갔을 거요. 정말 떠난 것은 아닐 것이오."
소어아도 창가로 와서는 밖을 내다 보았다.
동쪽에서 달려오는 하나의 마차 속에서 검은 머리의 여인을 볼
수가 있었다.
화무결은 흰 옷을 입고 잘 생긴 얼굴에 천리마를 타고 마차의
옆을 따라가면서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어아는 이런 광경을 바라보게 되자 넋을 잃고 말았다.
이때 이층의 사람들은 모두 창가로 몰려와 바라보고는 부러워하
는 소리를 냈다.
"화공자, 재미가 좋소?"
화무결은 고개를 들고 담담히 웃어버렸다.
이층의 사람들은 자기를 보지 못할까봐서 서로 다투어 밖을 바
라보는데 소어아는 그에게 발견될까 봐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연남천의 출현(出現)
화무결의 마차가 지나가자 이층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자리로
돌아 갔으나 소어아만은 여전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
렸다.
"내가 이렇게 피하는 것도 언제까지 일까? 그렇다면 나는 한평
생 피해야만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밖으로 달려 나갔
다.
그는 무슨 일을 생각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모를 닮은 점이었다.
강풍과 화월노가 이런 성미가 아니었다면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이화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랴. 강씨 집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해야하고, 한 사람을 좋아하면 죽을 때
까지 좋아하는 성미다. 강풍은 비록 겉으로는 다정하고 연약했으
나 실은 강철보다 더욱 강경한 사람이었다.
이 점이 바로 소어아가 아버지를 닮은 점이다.
따뜻한 햇빛 속에서 행인들은 모두 노곤한 졸음을 느끼고 있었
다. 이때 거리에서 뛰어 가는 사람을 보자 이상함을 금치 못했다.
소어아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도 상관하지 않고 빨리
달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화무결의 마차를 따라 잡았다.
마차는 이 때에 성을 막 나갈려고 하고 있었다. 화무결이 말하
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종일 들어 앉아 있었으니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겠
소......."
이 때 한 사람이 큰소리로 불렀다.
"화무결, 잠깐만!"
화무결은 약간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고삐를 잡자 철심난이 창문
사이로 고개를 약간 내밀었다. 소어아는 이미 앞으로 달려가고 있
었다.
소어아가 갑자기 나타나자 화무결은 크게 놀랐다. 화무결도 믿
지 못할 정도였는데 철심난이 놀란 것은 더욱 당연했다.
소어아는 참으면서 철심난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다만 계속 화무
결을 노려보면서 한바탕 웃고는 말을 했다.
"내가 너를 찾아올 줄은 몰랐었겠지. 그렇지?"
"정말 뜻밖의 일인데."
그는 그저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자살하러 온줄 알겠지?"
"그렇다."
그의 말은 간단 명료했다.
소어아는 크게 웃었다.
"너는 정말 성실하군. 그러나 이것은 항상 그 누구도 너를 두려
워 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화무결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그렇다!"
다시 그의 말은 짧막했다. 화무결을 바라보면서 소어아도 웃음
이 나오지 않았는지 큰소리로 대신했다.
"네가 정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다면 나를 찾지 않고 내가 너를
찾기를 기다렸지?"
"나는 본래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너를 찾을 필요는 없
었지. 그러나 너를 본 이상 너를 죽여야 해."
철심난이 그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돌연 마차 문을 열며 달려
나왔다. 소어아의 앞을 막은 그녀는 곧 큰소리로 원망하듯 말했
다.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당신을 찾아왔으니 죽일 수는 없어요."
소어아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버렸다.
화무결의 안색이 금시 변하면서 드디어는 입도 열지 못했다.
철심난은 소어아를 바라보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당신은 왜 저를 이토록 험악하게 대하죠?"
소어아는 그녀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고 화무결을 노려볼 뿐이
었다.
"이 난(蘭)이 너의 미혼처라고 들었는데 왜 나의 일에 간섭하는
거지? 나는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데!"
철심난은 입술을 힘차게 깨물었다. 피가 흐르고 눈에는 눈물 방
울이 맺혔다.
소어아가 어떻게 그녀를 대하든 간에 그녀가 소어아를 본 이상
소어아는 채찍으로도 그녀를 쫓아버리지 못할 것이다.
화무결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네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
소어아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
"내가 남의 구원이 필요하면 어찌 너를 찾아 오겠느냐?"
그는 돌연 웃음을 끝내고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마음 속으로 알고 있겠지.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죽기
위해서 너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내가 왜 왔
는가 궁금해 할 거야."
"바로 그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나를 죽이려 해도 나를 죽이지는 못 해. 나 자신도 너 때
문에 애태우고 있어. 더군다나 너는 나를 죽이려 하지만 내가 너
를 죽이려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네가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걸."
"너는 내가 너를 죽이지 못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도 네가 나
를 죽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끌고 나간다면 이백 년
이전에는 네 말이 맞는 것인지 내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를 거야.
내 마음 속으로도 애태우고 있을 뿐이지. 너는 나보다 더욱 애타
고 있을 거야. 그래서 오늘 온 것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이
다."
화무결의 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어떻게 해결 할 생각인가?"
"네가 한 곳을 정해라. 삼 개월 후에 내가 반드시 그곳에 가서
너와 사생 결단을 할 테다. 생사를 판가름 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달아나지는 못할 거야."
화무결이 담담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절대로 달아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겠지?"
"네가 약속하는 건가?"
"그렇다."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말했다.
"그러나 삼 개월의 약속 날짜가 되기 전에는 네가 나를 보아도
못 본 척 해야 하며 나와 싸울 수도 없어!"
화무결은 침울하게 생각해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소어아가 재차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찾지 않으면 삼 개월 동안 너는 나를 찾지 못할 거
야. 이 조건은 손해가 아닌데 왜 대답을 안 하지?"
화무결이 서서히 대꾸했다.
"네가 말한 조건에는 필시 무슨 함정이 있을 것이다."
소어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너는 그럼 약속하지 않겠다는 거냐?"
화무결은 돌연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삼 개월 후에는 내가 무한(武漢) 일대에 있을 테니까 나를 찾
으면 돼."
"좋아. 네가 그토록 나를 믿으니 너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을 것
이다."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철심난은 그가 자기를 바라보기를 기다렸으나 그러나 그는 시종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철심
난은 여전히 넋을 읽고 서 있었다.
화무결은 조용히 말 위에 앉아 있을 뿐 그녀를 재촉하지도 않았
다.
마차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 마차가
왜 떠나지 않는가 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그 누가 그들의 육체는 비록 거기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
은 벌써 먼 곳으로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랴!
얼마가 지났는지 몰라도 한참 후에야 철심난은 몸을 움직여 마
차의 문을 열었다. 화무결이 여전히 마차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부터 뜻모를 감정이 우러나왔다.
마차를 몰던 사람은 이 한쌍의 남녀가 다투는 것도 모르고 그녀
가 마차에 오르자 즉각 소리를 내어 마차를 성 밖으로 몰았다.
화무결은 철심난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는데, 지
금 성을 나온 후 서로 마음을 풀기가 어려워졌다.
철심난은 계속 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림 같은 정경도 그녀
의 눈에는 황무지처럼 보였다.
마차를 몰던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 척 웃으면서 물었다.
"공자와 아가씨께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화무결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짓으로 앞을 가리킬 뿐이었다.
울창한 나무숲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고 조그만 개울이 숲을 지
나면서 초가을의 햇빛을 받아 은빛을 띠우고 있었다.
멀리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개울 옆에서 햇빛을 쬐고 있었고,
마차 곁에는 꽃향기와 새소리가 가득했고 땅은 진흙으로 덮여 담
요를 펴놓은 것 같았다.
화무결은 말에서 내려 나무에 기대선 채 평화로운 풍경에 도취
해 있었다. 그의 흰옷이 바람에 휘날릴 뿐 그 모습은 목석 같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철심난은 가볍게 마차 문을 열고 연약한 걸음으로 화무결의 곁
으로 다가가 넋을 잃고 풍경에 취해있는 화무결에게 조용히 물었
다.
"당신은 분명히 그 속에 어떤 함정이 있는 것을 알면서 왜 대답
을 했지요?"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내쉴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철심난은 재차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화무결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결국 하지 못하
는 했다.
철심난은 그의 옆을 지나면서 꽃을 꺾었다. 그녀는 이 무명의
꽃을 들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왜 말을 하지 않지요?"
화무결은 담담히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좋을 때가 있지."
철심난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당신의 가슴 속에는 많은 할 말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
는데요. 말해 보세요. 나는 언짢아 하지는 않으니까요."
"내마음 속의 말들은 그대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오?"
"이 이 년 동안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보살폈고 당신이 없었다
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나는 과거에 당신 같이 다정한 사람
을 보지 못했어요."
화무결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나의 일생 중에 그처럼 나를 나쁘게 대해주는 사람도 처음이에
요. 그러나 나......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를 보면 아무 생
각도 없어져요."
화무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말은 나에게 할 필요가 없었어!"
철심난의 어깨가 떨었다.
"나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자세히 말을 하지
않으면 더욱 괴로워요. 더욱 미안한 느낌이 들거든요."
화무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어찌 그대의 책임인가?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당신...... 왜 나를 원망 않죠? 왜 나를 이토록 좋게 대하는
거죠? 당신...... 당신......."
그녀는 나무에 기대며 울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결국 눈을 뜨고 다정히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주려 했
다.
그러나 손을 내밀다가 곧 거두면서 하늘을 향해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날이 저물었으니 이제 어서 돌아갑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가 길게 허리를
편 후 중얼거렸다.
"젊은 나이에 그런 작은 일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어리석다.
너희들이 크면 세상에는 더욱 많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화무결은 그에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가 중얼거리는 작은
소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의 귀에 모두 들렸다.
철심난은 울음을 그치면서 고개를 들어 그 사나이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허리를 편후 돌연 일어선다.
그가 일어서지 않았을 때는 몰랐으나 그가 일어서니 화무결과
철심난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앉아있을 때에는 고양이
같았으나 막상 일어서고 보니 마치 맹호와 같았고, 한쌍의 눈에서
는 번개 같은 광채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매말랐으나 짙은 눈썹과 수염, 그리고 생기가 도는
눈동자, 이런 것들로 보아선 그의 나이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많은 천하 영웅들을 보았지만 그의 눈에 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형용할
수 없는, 즉 사람을 놀라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
다가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몸을 움추려야 하는 위엄 또한 도
사리고 있었다.
한쌍의 움직이는 눈동자가 더욱 사람을 무섭게 꿰뚫어 보고 있
었다.
그 남루한 차림의 사나이는 화무결을 바라보면서 약간 놀란 듯
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닮을 리 없는데. 남의 일
은 상관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일...... 그의 일에는 내가 도와
줘야지."
화무결과 철심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했다. 그
런데 이 사나이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우 느린 걸음 걸
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화무결 앞에까지 걸어와 있었다.
이때 화무결은 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부옇게 퇴색돼 가는 검은 옷이 걸쳐 있었고 다 떨
어진 짚신에 한쌍의 큰 손은 무릎을 덮을 만큼 길었으며 허리에는
녹이 슨 철검이 달려 있었다.
이 사나이는 아래 위로 화무결을 몇 번 훑어본 뒤 돌연 웃으면
서 입을 열었다.
"너는 마음 속으로 이 아가씨를 좋아하는가?"
화무결은 꿈에도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기에 약간 당황했
다.
"그건......."
그 사나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은 거야. 사나이 대장부가 그런 말
도 하지를 못한단 말이야!"
화무결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가 침묵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 좋다는 거야? 전부 개소리
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남이 어찌 네가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느냐 말이다."
화무결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처럼 말을 했다면 그는 필시 속되다고 했을 것이지
만 웬지 이 사나이의 말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
다.
철심난은 얼굴이 비록 빨갛게 변하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말했
다.
"어떤 말들은 그가 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어요."
그 사나이의 눈에서는 즉각 빛이 뻗어나와 그녀를 쏘아 보았다.
"좋아, 매우 좋았어. 너는 그보다 통쾌하구나. 이런 여자 아이
라면 그뿐 아니라 내가 봐도 좋아할 거야."
만약에 다른 사람이 철심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그녀의 성
질로 미루어 보아 필경 그에게 따귀를 갈겼을 것이다.
그러나 철심난은 다만 고개를 숙일 뿐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
다.
"하하, 정 그렇다면 그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알겠군."
철심난은 다시 용기를 냈다.
"알아요."
"너도 그 사람을 좋아하나?"
"나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화무결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숙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 사나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크게 웃었다.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겠군. 너희 두 사람
이 서로 좋아한다면 내가 중매할 테니 여기서 식을 올리지!"
이 말이 나오자 화무결과 철심난은 모두 놀랐다.
"귀하께서 농담하시는 것이 아니오?"
그 사나이는 화무결의 말에 눈을 뜨며 큰소리를 쳤다.
"이것이 어찌 농담이야. 이 땅과 새울음 소리와 꽃의 향기, 그
리고 좋은 날씨에 너희 두 사람이 여기서 식을 올리면 얼마나 좋
으냐."
그는 말을 할수록 의기양양해 하며 그저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촛불이 어찌 햇빛과 비하겠느냐? 세상의 모든 담요는 이 흙의
향기와 비할 바가 아니야. 너희 두 사람은 빨리 이런 좋은 날씨에
서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나 자신도 통쾌
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화무결은 그의 말을 듣고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를 몰랐
다. 철심난은 그 자리에 선채 넋을 잃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
다.
그녀는 이때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화무결의 마음을 아
프게 할 수는 없었다.
화무결은 그녀의 눈치를 살핀 뒤 돌연 입을 열었다.
"귀하께선 비록 좋은 뜻이지만 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소."
그 사나이는 웃음을 멈추었다.
"응답하지 않는 건가?"
화무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 사나이는 화를 벌컥 냈다.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제가...... 다만......."
"알겠어, 네가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싫어할까봐 그러는구
나. 그러나 그녀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거지?"
화무결은 생각을 거듭한 후 천천히 말했다.
"어떤 말들은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을 때가 있소."
그 사나이는 탄식을 했다.
"넌 분명히 그녀를 미치도록 좋아하는데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과연 네 애비의 아들답구나."
화무결은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 사나이는 벌써 철
심난을 보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느
냐?"
철심난은 고개를 숙였다.
"나...... 난 아니...... 그러나......."
그 사나이는 노하여 소리를 쳤다.
"너희들 둘이 젊은 나이에 어찌 말을 할 줄도 모르는가?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빨
리 꿇어앉아서 식을 올려라. 누가 싫다고 한다면 나는 몽땅 죽여
버릴테다."
화무결도 그가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화를 내며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결혼을 강요하는 사람은 처
음이오."
"네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너를 못 죽일줄 알아 그러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면서 허리의 칼을 빼 옆의 나무쪽으로 휘둘러댔다. 보기엔
녹이 슬어서 못 쓸 것 같았으나 단칼에 거대한 나무가 소리없이
두 동강이 되어버렸다.
철심난과 화무결은 벌써부터 이 사람의 무술이 뛰어날 것으로
생각은 했으나 그의 검력이 이토록 불가사의 한 줄은 몰랐다.
"이 검은 비록 녹슬었어도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애를 죽이는 것
은 손쉬운 일이야. 너희들 어떻게 하겠는가?"
철심난은 화무결이 그 사람을 노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이
사람의 무술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화무결도 그의 상대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심난은 마음이 약했다. 비록 화무결이 소어아를 못 다치게는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남이 화무결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좋아요."
사나이는 그제야 크게 웃었다.
"그래야 도리이지. 너희들은 천생배필이야. 지금은 어려워해도
결혼만 하면 나에게 감사할 것이야."
화무결이 돌연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절대로 안 되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끝까지 버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도 좋다고 했는데 너는 왜 싫다하는 것이냐?"
화무결은 철심난이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래서 그는 철심난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절대로 강요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노골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겉으로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피는 끓고 있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정열적인 사
람의 후예이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 곁에서 자라
왔기 때문이었다.
화무결은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대답 못하오. 당신이 죽이고 싶다면 죽이시오."
"당신......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단 말예요?"
철심난의 다급해진 목소리였다.
화무결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비록 소어아와 조금도
같은 점이 없어도 성질 만큼은 똑같았다.
"너는 평생에 고통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대답을 못하겠는가?"
"절대로 대답 못하오!"
"좋아! 네가 평생 동안 통곡을 하게 하는 것보다 지금 죽이는
게 좋겠다."
그는 검빛을 빛내면서 화무결을 향해 찔러갔다.
그의 검은 온몸의 힘을 쓰지 않았으나 매우 빠르고 절묘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철심난은 멀리서도 이 검기에 숨이 막히는데 바로 앞에선 화무
결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파'는 소리가 나면서 화무결이 비록 검을 피하기는 했으나 옥
관이 끊겨서 머리가 흐트러졌다.
검의 위력이 이렇게 큰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철심난은 급히 소리쳤다.
"선배님, 멈추시오. 그가 대답을 못하는 것은 나 때문이에요.
제가 진심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나를 죽여 주시오!"
그녀가 놀란 나머지 속마음의 얘기를 폭로하니 화무결은 가슴이
아파왔다. 온 힘을 다해 세 번을 공격한 뒤 죽음도 상관 없다는
듯이 검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오히려 검을 거두면서 웃었다.
"강씨, 과연 소 같은 성질이군. 그러나 너의 아버지보다는 약간
병신이야. 그녀가 정말 싫고 대답도 하기 싫으면 어찌 너를 위해
죽겠는가!"
화무결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강씨란 말이오?"
사나이는 놀랐다.
"네가 강씨가 아닌가?"
철심난도 따라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정말 강씨가 아니에요. 그는 화무결이에요."
사나이는 자기의 머리를 만져보면서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
거렸다.
"네가 강씨가 아냐? 일이 이상한데. 너는 강씨와 똑같이 생겼단
말이다."
화무결도 손을 쓰는 것을 멈추고 이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나이는 탄식을 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강씨가 아니면 결혼을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
가고 싶으면 가거라."
그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돌아섰
다.
화무결과 철심난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어리둥절 하는 사이 사나이는 걸어가면서 혼자 계속 중얼거릴 뿐
이었다.
"이 소년이 강소어가 아니라고? 이상한데......."
철심난은 이 소리를 듣자 놀랍고도 기뻐서 급히 물었다.
"선배님은 혹시 그이가 강소어인줄 알고 결혼하라는 것이 아니
었어요?"
사나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 비록 너희들이 정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강소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참견을 하지
않았을 거야."
철심난은 생각을 참지 못하고 '호호'하고 웃어 버렸다.
"당신은 아시는군요. 제가 강소어 때문에 그와 결혼을 할 수 없
다는 것을."
그러나 화무결을 바라본 후 말을 더 계속하지 못했다.
화무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지 우뚝 서있기만 했다.
사나이는 철심난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화무결을 바
라 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알겠어. 알고 보니 네가 말한 나쁜 사람이 바
로 강소어로구나. 너희들은 결혼을 할 수 있는데 강소어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사나이는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그는 평생 동안 검법만을 잘 사용하고 강호에서 고생만 했기 때
문에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천하를 종횡무진으로 섭
렵하였기에 그 어느 무서운 무술도 그의 앞에서는 간단하게 변하
면서 그가 한 눈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은 무술보
다 더욱 어렵고 더욱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화무결은 이런 웃음을 듣고 분노를 이기기 어려웠으나 억지로
참으면서 돌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가고 싶으시오?"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화무결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당신의 무공 실력을 보고 싶소."
사나이는 웃었다.
"나는 너의 가슴이 따끔했을 줄 알고 있으니 어디 한번 네가 때
려 봐라."
화무결도 역시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의 무술이 지극히 강하더라도 나의 일장을 당하지는 못할
터이니 막지 않으면 자살 행위요!"
말을 하면서 일장을 가했다.
이 한 손이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악독하여 피하기가 어려
운 수법이었다.
사나이의 눈길이 빨라지면서 다급히 말했다.
"좋은 장력이군!"
그는 천성이 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이때 이런 소년 고수의 무
술이 어떤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왼손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화무결의 장력이 돌연 오른 쪽으로 뻗히면서 교묘하게
변하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 독보로 세상에서 말하는 '이화접옥'이었다.
화무결이 사용을 하면 상대방이 공격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를 때
리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나이는 급히 돌아서 천하에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하
는 이화접옥을 피해 버렸다.
화무결은 그제서야 크게 놀랐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사나이가 다시 그를 마주할 때에는 안색이 변했고 무서운 소리
를 질렀다.
"너는 이화궁의 제자냐?"
"그렇소!"
사나이는 하늘을 향해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나는 평생 이화궁의 무술을 시험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여기서 이화궁의 제자를 만나다니......."
맑은 웃음소리에도 나무 잎이 흔들려 떨어졌다.
철심난이 한걸음 나섰다.
"선배님은 이화궁과 무슨 원한이라도......."
사나이는 웃음을 그치고 다시 소리를 쳤다.
"내가 바로 이화궁과 큰 원수가 있는 사람이지. 내가 십 년 동
안 검을 손질해 온 것을 이화궁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자는 것이었
어......."
철심난은 놀란 나머지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옴을 느꼈다.
화무결이 돌연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연남천! 당신은 연남천이지요!"
이화궁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연남천이다. 이 하늘 아래서 연남
천 외에는 또 어느 누가 이화궁과 맞서고 이화궁의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고 하랴!
화무결이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철심난도 생각이 났다.
숙질상면(叔姪相面)
화무결과 철심난은 넋을 잃고 있다가 사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내가 바로 연남천이다!"
철심난은 온 몸 속의 피가 머리로 치솟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
까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무결은 잠시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서있다가 옷을 벗어 정성
스럽게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철심난에게 다가가 양손
으로 그 옷을 건냈다.
사실 그가 이러한 동작을 취한 것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감
정의 평온을 찾아보려 한 것이었다.
철심난은 그가 자기에게 주는 옷을 묵묵히 받을 뿐 그의 무겁고
도 복잡한 심경은 알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옷을 잘 보관했다가 이화궁으로 보내시오!"
철심난은 그제서야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을 받은 뒤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당신...... 정말 그 사람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연남천과 겨뤄보는 것은 무술을 배운 사람의 일대 희망이오.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말투는 비록 침착하고 평온했지만 창백한 얼굴은 흥분으로
빨간 빛이 감돌았고 호흡 또한 거칠었다.
철심난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냥 이곳을 떠나세요. 내가 대신 그를 막으면
그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화무결은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일생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화궁을 위한 것이
오.
내가 어찌 여길 피한단 말이오!"
그의 말소리에는 매우 무거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또 사실 내가 강소어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나와 원한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화궁을 위해서였소. 석 달 후에 그를 만나거든
그에게 말해주시오. 비록 그를 죽이려고 했었지만 조금도 내가 원
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이 나를 원망
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철심난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당신은 왜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나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지를 못 하고......."
화무결은 하늘을 향해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누구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지?"
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자기의 비통함을 드러내는 말
이었다. 비록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비통
함은 태산 같이 깊었다.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 누가 당신의 이러한 뼈저린 고통을
알겠어요! 또 남들은 당신이 빈틈이 없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누가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없이 죽고 사는 것
조차 남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연남천은 곁에 서서 화무결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무결, 너는 과연 '이화궁'의 제자구나! 이번 싸움의 성패에
상관없이 이화궁의 이름이 너로 인해서 빛날 것이다."
"감사하오."
"그러나 너도 알아야 될 것이 한 가지 있다. 너 뿐만 아니라 세
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설혹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지.
어쩌면 그들의 삶이 더 슬플 수도 있지."
화무결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당신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한단 말이오?"
연남천은 한참 동안 침묵해 있다가 돌연 하늘을 향해 기괴한 탄
성을 발했다. 그의 소리는 너무나 맑고 처량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화무결은 길게 탄식을 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은검을 꺼냈다.
"오늘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도 나를 위해서는 아니오!"
철심난은 그가 항상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화궁의
무공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 줄로 알았었다. 그녀는 화무결
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가 손 안에 쥐고 있는 검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손가락 같았
다. 다섯 자의 길이로 전체가 은빛으로 번쩍거렸고 즉각 손을 벗
어나 나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비록 검이었지만 마치 고무로 만든 것처럼 휘어질 수가
있는 특이한 무기였다.
이것을 본 연남천은 눈에서 빛을 발하면서 그 괴이한 무기를 담
담하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무기까지 꺼내 들었으면서 왜 아직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 화무결은 왼손으로 은검을 튕겼다. 순간 '
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검은 찬란한 무지개 빛을 발했다.
검이 움직이자 검에서 솟아 나오는 빛이 눈부신 광채를 번뜩이
며 날렵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연남천은 검을 들고 마치 태산처럼 서 있었다. 화무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돌연 화무결의
검세가 방향을 바꾸었다.
화무결은 여러 가지 수법으로 유혹했지만 연남천은 결코 속지
않았고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를 뿐이었다.
알고 보니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른 것이었다.
철심난은 검의 변화를 똑똑히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쉭쉭' 하며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화무결은 일곱 번
의 공격을 했으나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초식은 '이화궁' 검법 중에서도 가장 교묘한 것이었다. 그러
나 화무결은 계속 일곱 번의 허검을 찌른 것이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현란한 검빛 아래서 그것이 허검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지극
히 어려웠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을 피하려 애를 쓰게 되지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모두 검초의 계산 속에 있게 되는 것이었
다.
일곱 개의 허검은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상대방이 물러
설 길을 완전히 봉쇄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의 비기(秘技)였고, 천하의 어느 검파와도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검빛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이 일곱 검의 초식
은 연남천 앞에서 완전히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이 일곱 번의 초식을 끝내자 이번에는 연남천의 검이 빛
을 내면서 화무결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 검은 아무런 변화없이 팽팽히 찔러 들어갔으며 매우 빠르고
맹렬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화무결은 자신의 검법이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해도 우선 이 검
은 피해야만 했다. 연남천은 검풍을 일으키면서 세 번을 지쳐들어
갔다.
그의 검은 결코 허식이 아니었다. 매우 단순한 검초였지만 연남
천의 손에 들린 검은 실로 신기한 위력을 발했다.
화무결은 가까스로 검을 피한 뒤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그의 검은 온통 은빛을 발했고 연남천은 빛에 휩싸여 버렸다.
화무결은 연남천을 둘러싸며 돌았지만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
지 않았다. 화무결의 검빛은 물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연남천은
마치 흐르는 물 속의 바위와 같았다.
화무결의 이러한 검법은 연남천의 검법을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공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했기 때
문에 화무결이 감히 따르지를 못했다.
화무결은 비록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지
만 사실 그 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검풍에 꽃잎들이 날리며 화림(花林) 안에서는 그야말로 다시 보
기 힘든 용호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어아는 한 잠 푹 자고 싶은 생각에 여관에 들었다. 그러나 많
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오갔고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옷을 줏어 입고 여관의 대청으
로 나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여관은 본래 진검과 남궁유가 묵었던 곳이었다. 여관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떠나버리자 여관은 텅 비어 버려 소어아를
제외하곤 단 하나의 방에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방은 분명 인기
척이 있었으나 문과 창들이 모두 꼭꼭 닫혀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문을 꼭꼭 닫고 있는 것을 보자 소어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얘기를 엿듣기 위해 그 방의 창가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때 돌연 한 청의를 입은 사나이가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손
에 말채찍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 마차를 몰고 온 것 같았다. 그
는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외쳤다.
"강 나으리께서는 여기에 계십니까?"
소어아는 얼굴색이 변했다.
(강별학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소어아는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강별학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냐?"
"소인은 단귀입니다. 방금 화공자를 성 밖에까지 모신......."
"왜 네가 여기를 찾아 왔지? 화공자는 어디 있느냐?"
"화공자는 성 밖에서 웬 기인(奇人)과 마주쳤습니다. 소인은 급
히 돌아와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이제야 겨우 나으리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강별학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화공자는 무슨 일을 당해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그토록 애
태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나...... 화공자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듯 보였습니
다. 철 아가씨께서도 애태우고 있는 것을 보면 필시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강별학은 단귀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내가 가보지."
이때 방 안에서 돌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선 가보아라."
"오늘밤 늦게까지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강별학은 급히 단귀를 따라 나가버렸다.
소어아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강별학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 그리 급하게 서둘러 그
의 신원을 파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누가 화무결에게 어려움을 주는지 먼저 알고 싶었
다.
소어아는 화무결과는 비록 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무결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자 적잖이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문 밖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큰 길에서는 경공을 보일 수가
없어 그리 빨리 갈 수는 없었다. 성을 빠져 나가자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성을 빠져 나오자 강별학은 차내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화공자는 그 사람과 대적을 해봤는가?"
"그는 공자님의 옥관을 끊어버렸고 공자님도 그에게 일장을 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공자님의 일장을 피해버렸습니다."
"음, 화공자의 일장을 막을 수 있다니 굉장한 실력이구나. 그는
어떻게 생겼던가?"
"그 사람은 매우 키가 컸습니다. 옷은 저보다 더욱 남루했고 생
김새도 매우 신기했습니다."
강별학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던가?"
"사십 살 내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오십이 다 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또 어찌보면 서른 살도 같
고 하여튼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토록 신비한
사람은 종래 본 적이 없습니다."
강별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 사람은 허리에 철검을 차고 있었는데 이미 녹이
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별학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그는 한동안 넋
을 잃은 사람처럼 있다가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조용히 마차를 몰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 세우
도록 해라. 알았느냐?"
단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강별학의 말을 아니 들을 수도
없었다.
화림(花林)에서 약 이십장(丈)의 거리를 두고 마차는 멈추었다.
"아! 화공자와 그 분이 싸우고 있어요!"
강별학은 이미 화림 안에서의 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기가 싸인 곳에는 한 사람이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
다.
화무결은 몸을 매우 가볍게 움직이며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그
러나 강별학 또한 안목이 높았다. 그는 곧 화무결이 교묘하게 공
격하고는 있지만 감히 쳐들어 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연남천의 무서운 검기가 하
늘을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강별학은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며 중얼거렸다.
"연남천, 틀림없이 연남천일 것이다."
그는 비록 화무결과 싸우는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
지만 연남천 외에는 다른 사람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별학은 연남천이 다만 이화궁의 검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서 화무결을 죽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단귀는 그 검기를 보며 화무결이 걱정되는지 진땀을 흘렸다.
"강 나으리, 화공자를 돕지 않을 겁니까?"
"당연히 가야지."
단귀는 반가운 듯 기쁜 얼굴을 보이면서 말했다.
"강 나으리는 화공자의 친구이시니 꼭 화공자를 도울 줄을 알았
습니다."
이때 강별학이 마차 문의 손잡이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왜 마차 문이 열리지를 않지. 고장인가?"
단귀는 마부석에서 내려와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문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강 나으리께서는 너무 급해서 문을 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가 말을 하며 고개를 들자 강별학은 싸늘한 눈초리로 단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귀는 그 음산한 얼굴과 살기가 가득찬 눈초리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강 나으리...... 무슨 일......."
강별학은 음산하게 웃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남의 일에 참견하면 못 써. 오래 살지 못 하니까."
단귀는 놀란 나머지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달
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강별학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단귀는 애원했다.
"강...... 강 나으리...... 소인은...... 당신 위해 위험을 무
릅쓰고......."
"나는 네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너를 좋은 곳으로 보내
자는 거다."
"소인...... 소인은......."
그러나 검은 이미 깊숙이 그를 찔러 들어갔다.
강별학은 천천히 단검을 뽑아 피가 자기 몸에 튀지 않게 했다.
그가 사용한 검은 바로 '정소(情銷)'의 보검이었다.
강별학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화무결을 구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협객이라는 이름
이 이 자식 때문에 손상을 당해선 안 되지...... 네가 없어지므로
나 강남 대협이 이름을 보전하는 것을 원망하지는 말아라......."
그는 조용히 마차에서 뛰어 내려 발길을 돌렸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을 빙 돌아 성내로 향했다.
화림에서는 계속 악전고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별학은 날렵하게 신법을 써 달리며 중얼거렸다.
"화무결, 너를 구해주고 싶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야. 그러나
나로서는 연남천을 감당할 수가 없구나. 해마다 이때가 돌아오면
내가 잊지 않고 너를 위해 향을 피워 놓겠다. 안심하고 눈을 감아
라!"
소어아는 성을 벗어나자 마차 바퀴 자국을 쫓아 한참을 달렸다.
얼마 후 그는 멀리서 마차와 화림 속에서 뻗쳐나오는 검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빨리 화림 속의 악투를 보고 싶었다. 화무결이 누구와 대
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을 뿐만 아니라 화무결의 검법을 자세히
봐두어야 금후에 그를 상대할 준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연 굳게 닫힌 마차 문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발
견하였다. 혹 강별학이 죽었다는 말인가?
소어아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마차 안에는
눈을 부릅뜨고 통한에 찬 얼굴로 단귀가 죽어있었다.
시체를 자세히 살펴본 소어아는 곧바로 마차에서 나와 화림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소어아는 제일 먼저 철심난이 눈에 들어왔다. 화무결이 걱정되
는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이때 돌연 긴 기압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나의 검광이 하늘을 향
해 치솟아올랐다. 화무결은 손에 쥐었던 칼을 놓치며 뒤로 물러섰
다.
곧이어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화무결은 비단 소어아를 죽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소어아의 연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무결이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 무엇 때문인지 소어아
는 가슴이 뜨끔거리며 피가 끓었고 그와 화무결 간의 원한도 잊어
버렸다. 그는 급히 몸을 날렸다.
연남천은 길게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검을 들어올렸고 철심난은
하얗게 질려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연남천이 검을 막 내려치려는 순간 소어아는 번개같이 달려가
화무결의 앞을 가로 막으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되오!"
철심난은 갑자기 소어아가 나타나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연남천은 눈에서 빛을 내며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무서운 소리로
호통쳤다.
"너는 누군데 감히 나의 검을 막느냐!"
철심난은 고개를 돌려 연남천을 향했다.
"그가 바로 소어아예요!"
"강소어, 강소어가 바로 너란 말이냐?"
소어아도 그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당신...... 당신은 바로 연남천 백부님 맞지요?"
철심난이 옆에서 대답했다.
"그가 바로 연(燕) 노선배에요."
소어아는 놀랍고도 기뻤다.
그는 급히 달려가 연남천의 품에 안겼다.
"연 백부님! 정말 뵙고 싶었어요......."
연남천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강소어!...... 강소어, 나 연 백부도 네가 보고 싶었다."
철심난은 천애고아인줄 알았던 소어아가 친척이 있고, 더구나
그가 천하에 이름이 난 연남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놀랍고도 기
뻐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때 연남천이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 화무결이 이화궁의 제자라는 것을 아느냐?"
"알고 있어요."
"너는 너의 부모를 죽인 자들이 바로 '이화궁주'라는 것을 모르
지는 않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는 어릴 때 어느 신비스러운 사람이 그에게 이 일을 말해주었
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의 행적이 불확실했기 때문
에 이화궁의 사람이 정말 자기의 원수라고는 믿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연남천이 그런 말을 하자 그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심난이 탄성을 발했다.
"그래서 이화궁주가 화...... 화무결에게 당신을 죽이라고 했군
요!"
연남천은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저 녀석의 목숨을 구하려는 거지?"
"저...... 저......."
그는 자신도 왜 화무결을 구했는지 몰랐다. 다만 속으로부터 무
언지 모르지만 구해야만 할 것 같은 강한 힘이 소어아로부터 화무
결을 구하도록 만든 것 같다.
연남천이 돌연 철검을 내밀며 소리쳤다.
"네가 직접 그를 죽여라!"
소어아는 고개를 돌려 화무결을 쳐다보았다.
화무결은 이미 연남천의 검기에 의해 기절해 있었고 꽃잎들이
그의 창백한 얼굴에 떨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어요."
소어아의 말을 들은 연남천은 대노했다.
"왜 그를 죽일 수가 없다는 거지. 그가 너의 원수라는 것을 알
면서도! 더군다나 그는 꼭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데!"
"저...... 저......."
그는 역시 탄식소리만 낼 뿐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러더니 무슨 생각이 불쑥 머리에 떠올라서 소리쳤다.
"저는 이미 그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석 달 후에 생사를 판
가름 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연 백부님께서 그를 다치게 한 지금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연남천이 놀라면서 돌연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좋아! 너는 과연 사나이구나. 과연 내 둘째 동생의 아들이
다...... 동생아, 너의 아들이 이토록 훌륭하니 이젠 편히 눈을
감아도 되겠구나!"
그의 웃음소리는 점차적으로 공허하게 변해갔다.
소어아는 가슴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땅에 꿇어 앉아서 흐
느꼈다.
"연 백부님, 제가 지금껏 한 일을 생각하니...... 아! 다시는
아버님의 명예를 더럽히게 하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연남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자책하지 말아라. 누구든 간에 너
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
나 내가 알기로는 너는 그리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어."
"연 백부님 저는......."
연남천은 다시 크게 웃으면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 연남천은 내 둘째 동생 강풍에게 너와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웃음 속에는 기쁨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철심난은 곁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
다.
그녀의 마음 속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소어아의 고통은 연
남천이 위로해주지만 그녀의 심정은 그 누가 알고 위로해준단 말
인가!
그녀는 소어아가 화무결의 손에 죽지 않기를 바랐으나 역시 소
어아가 화물결을 죽이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서로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어아가 화무결을 구하자 그녀는 무한히 기뻤다. 그들의 원한
도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이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수 사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 꼭 한 사람이 죽어야만 원한이 풀
리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소어아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싶었고 모든 것을 희생해 구해냈던 소어아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가 진정되자 연남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도교교와 이대취 등이 악인곡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느
냐?"
"예!"
연남천은 눈에 빛을 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나 보았느냐?"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 백부님,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연남천은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찌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비록 백부님을 해치려고는 했었지만 어쨌든 간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나를 키웠고 이제는 옛날
처럼 그렇게 극악스럽지는 않습니다."
연남천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크게 웃어제꼈다.
"너는 보기엔 강경해도 마음이 굉장히 약하구나."
소어아도 따라서 웃었다.
"연 백부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연남천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들이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용서해 주겠다."
소어아는 뛸 듯이 기뻤다.
"그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정말 기뻐할 겁니다.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연남천은 철심난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미소를 띠우면서 부드
러운 음성으로 소어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젠 저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라. 나만 너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구나."
소어아는 돌연 안색이 변하여 차갑게 내뱉았다.
"저는 모르는 아가씨입니다."
"뭐? 모르는 아가씨라고?"
"예.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소어아가 하는 얘기를 들은 철심난은 너무 어이가 없었고 슬펐
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해 구해주었건만, 그렇게 애타하며 보
고 싶어 했건만 정작 소어아의 입에서는 자기를 모른다는 차가운
한마디의 말이었으니.......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달려가버렸다.
소어아는 입술을 깨물며 서 있었다.
연남천은 철심난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소어아에게 고개
를 돌렸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소어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는 머리가 좀 이상하게 된 모양이에요."
연남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희 젊은이들의 일은 정말 모르겠구나!"
소어아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연남천은 자세히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물었
다.
"혼자 다니겠는가 아니면 나를 따라 다니겠는가?"
소어아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활짝 웃었다.
"연 백부님을 따르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에겐 할 일
이 없어져 재미가 없을 거예요."
"하하하! 너는 과연 기백이 있구나."
"하지만 나는 백부님과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어요......."
"내일 이때 다시 여기에 오겠다.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겠다."
그는 미소를 띠우면서 소어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소어아는 그가 그렇게 금방 갈 줄은 몰랐다. 그는 웃으면서 중
얼거렸다.
"연 백부님은 정말 성질이 불 같구나. 무슨 일을 하려는지 궁금
하군."
그는 연남천이 철심난과 같은 방향으로 갔다는 것을 유의하지는
못했다.
그는 화무결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
다.
한참 후, 화무결은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소어아를 보자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 여기에?"
소어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화무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소?"
소어아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제5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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