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ㅡ 벤 웨더스태프

단밤이 | 2024.01.17 00:21:35 댓글: 0 조회: 199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0903
The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


벤 웨더스태프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신기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때때로 죽지 않고 영원히 오래오래 살 것 같은 확신이 드는 것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포근한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홀로 서서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높은 곳을 바라보라. 그렇게 서서 점점 색이 변해 붉어지고 짐작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는 희끗한 하늘을 쳐다보면, 어느새 동쪽을 향해 절로 탄성을 터뜨리게 되고 천 년, 천 년, 또 천 년 동안 매일 아침 한결같이 떠오르는 태양의 변함없는 웅장함에 심장이 멎을 듯해진다. 바로 그때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고 느낀다. 그때 잠시 동안이지만 그런 예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노을 지는 숲속에 홀로 서서, 신비로운 짙은 황금색 정적이 나뭇가지들 사이와 아래로 비스듬히 비치는 모습을 보며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천천히 들려주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그 사실을 안다. 몇백만 몇천만의 별들이 기다리며 지켜보는, 짙푸른 한밤의 거대한 고요함에도 확신하게 될 때가 있다. 때때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그런 확신을 한다. 때때로 누군가의 눈에 비친 모습도 그런 확신을 준다.
사방으로 높다란 담장이 에워싼, 숨겨진 정원에 들어가서 봄을 처음으로 보고 듣고 느꼈을 때, 콜린도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온 세상은 한 소년에게 눈부시게 아름답고 다정하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봄은 하늘 같은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찾아와 자신이 불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정원에 몰아넣었을지도 모른다. 디콘은 일을 하다가 몇 번이나 손을 멈추고 서서, 점점 커져가는 경이로움으로 눈을 빛내며 살며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야! 정말 근사허구만.” 디콘이 말했다. “난 열두 살이구 곧 열세 살이 돼요. 그 13년 동안 수많은 오후를 보았어요. 허지만 지금 이곳 오후만큼 근사헌 오후는 첨 보아요.”
“그렇구먼, 이곳은 근사헌 곳이야.” 메리는 말하고, 환희를 억누르지 못해 한숨을 폭 쉬었다. “장담허는데, 지금껏 세상에서 이 정원만큼 근사한 덴 없었어.”
“니들 생각엔.” 콜린이 꿈을 꾸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여 여기 이곳은 모두 날 위해서 부러 만든 거 같지 않어?”
“세상에!” 메리가 감탄을 했다. “요크셔 말을 꽤 허잖아. 넌 일류급이야, 정말루.”
그리고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세 아이는 휠체어를 자두나무 아래로 밀고 갔다. 자두나무에는 눈에 덮인 것처럼 흰 꽃이 만발했고, 벌들이 윙윙 노래를 하고 있었다. 자두나무는 요정 왕의 머리 위로 펼쳐진 휘장 같았다. 근처에는 역시 꽃이 만발한 벚나무들도 있었고, 막 분홍색과 흰색 꽃송이가 올라온 사과나무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에 꽃망울을 활짝 터트린 나무가 보였다. 덮개처럼 꽃들이 만발한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아름다운 눈처럼 땅을 내려다보았다.
메리와 디콘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원을 가꾸고, 콜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아이는 콜린에게 이제 막 입을 벌리는 꽃송이들, 아직 입을 꼭 다문 꽃송이들, 이파리에 막 푸른 기미가 돌기 시작한 잔가지 조각들, 풀밭에 떨어진 딱따구리 깃털, 일찌감치 부화하고 남은 텅 빈 새 알껍데기 등을 살펴보라고 가져다주었다. 디콘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툭하면 멈춰서 땅에서 솟아났거나 나무를 따라 이어진 자연의 놀라운 모습을 콜린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치 마법 나라 왕과 여왕의 초대를 받고 와서 왕국에 있는 온갖 신비로운 풍요로움을 실컷 구경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 울새를 볼 수 있을까?” 콜린이 말했다.
“쫌 지나면 자꾸 볼 수 있어요.” 디콘이 대답했다. “알에서 새끼들이 부화허면 울새는 바빠서 정신이 하나두 없을 테니깐요. 울새가 제 몸뚱이만 한 벌레들을 물구 위루 앞으루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여요. 울새가 둥지루 가면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녀석이 어느 큰 입에 젤 먼저 먹일 넣어줘야 할라나 마음을 못 정하구 허둥댈 정도라니깐요. 사방에서 입을 벌리구 짹짹거리는 새끼 새들이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몰라요. 울새가 새끼들이 쩍 벌린 부릴 그득그득 채워주려구 먹일 찾으려구 다니는 모습을 어머니가 보시구는, 울새에 비하면 어머닌 할 일이 하나두 없는 거나 다름없다구 생각하셨대요. 다른 사람들은 못 보았다지마는, 어머니는 그 작은 친구들 몸에서 땀 같은 게 뚝 떨어지는 거를 보셨다구 그러셔요.”
아이들은 이 이야기에 배꼽이 빠져라 깔깔거리며 웃다가, 웃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전 콜린은 비밀 정원에서는 속삭이거나 작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당부를 들었다. 콜린은 그 규칙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이 좋았기에,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한창 신이 나 흥분하다 보니 속삭이는 소리 정도로 웃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날 오후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것으로 가득 채워졌고, 매시간 햇살이 점점 더 황금색으로 변했다. 디콘은 휠체어를 장막 같은 무성한 나뭇가지 아래로 다시 밀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풀밭에 앉더니, 제 피리를 꺼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미처 알아볼 여유가 없던 것이 콜린 눈에 들어왔다.
“저기 무척 늙은 나무가 있어, 그렇지?” 콜린이 말했다.
디콘이 풀밭 맞은편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고, 메리도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네.” 디콘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디콘의 목소리는 매우 상냥하게 들렸다.
메리가 그 나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지들이 여전히 회색이고, 어디에도 잎사귀가 보이지 않아.” 콜린이 말했다. “거의 죽은 것 같아, 그렇지?”
“그래 보이는구만요.” 디콘이 말했다. “허지만 저 나무 온몸을 뒤덮은 장미들이 잎사귀와 꽃을 활짝 피우면, 죽은 부분들이 거의 다 가려질 거여요. 그러면 죽은 나무처럼 안 보일 테죠. 세상에서 젤 아름다운 나무가 될 거여요.”
메리는 여전히 그 나무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골몰했다.
“커다란 나뭇가지가 뚝 부러진 것 같아.” 콜린이 말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궁금해.”
“아주 옛적에 부러졌어요.” 디콘이 대답했다. “이야!” 느닷없이 안도하며 콜린에게 손을 내려놓았다. “저 울새를 보셔요! 울새가 저 있어요! 제 짝을 위해 먹일 찾구 있나 봐요.”
콜린은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울새를 보았다. 부리에 뭔가를 문, 가슴이 빨간 새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울새는 풀밭 위를 화살처럼 날아,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모퉁이로 쑥 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콜린은 다시 쿠션에 등을 기대며 킥킥 웃었다.
“울새가 여자 친구에게 차를 가져다주나 봐. 지금 다섯 시일지도 몰라. 나도 차를 마시고 싶어졌거든.”
이렇게 두 아이는 한시름 놓았다.
“마법이 울새를 이곳으로 보내준 거야.” 나중에 메리가 디콘에게 살짝 이야기했다. “나는 마법이었다는 걸 알아.” 메리와 디콘은 콜린이 혹시 10년 전에 가지가 부러진 그 나무에 대해 물어볼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디콘은 가만히 서서 곤란한 듯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 나무하구 다른 나무하구 아무 차이두 없는 거처럼 보이게 굴어야 해요.” 디콘이 말했다. “그 나무가 어째 부러졌는가 절대루 말할 수 없잖어요, 가여운 도련님. 혹시라두 그 나무 이야길 꺼내면 우리는, 우리는 즐거운 척해야 해요.”
“그렇구만, 그래야겠구만.” 메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메리는 그 나무를 봤을 때 자신이 영 즐거워 보인 것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디콘이 말한 다른 이야기에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디콘은 곤혹스러워하며 빨간 머리를 연신 문질렀지만, 어느새 푸른 눈동자에 선하고 편안한 기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크레이븐 부인은 매우 젊구 사랑스럽구 그런 분이셨어요.” 디콘은 우물쭈물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크레이븐 부인이 미슬스웨이틀 맴돌면서, 줄곧 콜린 도련님을 보살폈을 거라구 생각하셔요.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들이 모두 그러는 거처럼 말이여요.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어머니들은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 부인은 지금껏 그 정원에 계셨을 거예요. 그래서 우릴 여기루다가 불러 정원을 가꾸게 하구, 도련님을 모시구 오라구 하신 거여요.”
메리는 디콘의 그 이야기가 마법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메리는 마법의 힘을 굳게 믿었다. 마음속으로는 디콘이 주위 모든 것에 마법을 일으켰다고 믿었다. 물론 선한 마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디콘을 그렇게 좋아하고, 야생동물들도 디콘이 친구라는 사실을 안다고 여겼다. 메리는 콜린이 위험천만한 질문을 한 순간에 디콘의 재능이 울새를 불러오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궁금했다. 디콘이 오후 내내 마법을 부려서 콜린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것 같았다. 콜린이 비명을 지르고 베개를 치고 물어뜯는, 미치광이 짐승처럼 굴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심지어 콜린의 창백한 상앗빛 피부조차 전과 달라 보였다. 정원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얼굴과 목과 양손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홍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콜린은 이제 상아나 밀랍이 아니라, 살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세 아이는 울새가 두세 번 제 짝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오후 티타임이 떠올라 콜린은 차를 꼭 마시고 싶어졌다.
“가서, 하인에게 바구니에 먹을 것을 넣어 진달래 길로 가져오라고 해.” 콜린이 말했다. “그러면 너랑 디콘이 여기로 가져오면 되잖아.”
근사한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하얀 식탁보를 풀밭 위에 펼치고 뜨거운 차와 버터 바른 토스트, 크럼펫 빵을 늘어놓자 배고픈 아이들은 즐겁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먹이를 찾으러 나온 새들 몇 마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잠시 들렀다가, 매우 적극적으로 빵 부스러기들을 조사했다. 밤과 껍질은 케이크 조각을 가지고 나무 위로 쪼르르 올라갔고, 검댕이는 버터가 녹아든 크럼펫 빵을 반 조각이나 물고 구석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콕콕 쪼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도 보며 목쉰 소리로 의견을 말하고는, 마침내 기분 좋게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날 오후 아늑한 시간이 서서히 흘러갔다. 태양은 기다란 황금 창 같은 햇살을 던졌고, 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주위를 휙휙 날아다니는 새들도 드물어졌다. 디콘과 메리는 풀밭에 앉아 있었다. 간식 바구니는 언제든지 저택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잘 정리되었다. 콜린은 이마를 가린 풍성한 앞머리를 뒤로 넘긴 채, 쿠션에 기대 누워 있었다. 콜린의 얼굴빛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오늘 오후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어.” 콜린이 말했다. “하지만 내일 다시 올 거야. 모레도, 글피도, 그다음 날도.”
“신선한 공기를 배가 터지게 마실 거지, 그렇지?” 메리가 말했다.
“공기 말고 다른 건 안 마실 거야.” 콜린이 대답했다. “봄을 봤으니까, 여름도 볼 거야. 이곳에서 자라는 것들을 몽땅 다 볼거야. 이곳에서 나도 자랄 거야.”
“그래 되실 거여요.” 디콘이 말했다. “오래전 사람들이 한 거처럼 우리두 여기서 산책을 하구 땅두 일구어봐요.”
콜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산책을 한다고!” 콜린이 말했다. “땅을 일궈? 내가?”
콜린을 힐끔 바라보는 디콘의 눈빛이 미묘하게 조심스러웠다. 디콘도 메리도 콜린에게 다리가 어떤지 물어보지 않았다.
“마땅히 그러셔야죠.” 디콘이 확고하게 말했다. “도련님두, 도련님두 다른 사람들처럼 다리가 있잖아요.”
메리는 콜린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조금 겁을 먹었다.
“사실 내 다리는 멀쩡해.” 콜린이 말했다. “하지만 너무 가늘고 약해. 다리가 덜덜 떨려서 서 있기가 두려워.”
메리와 디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겁내지 않으면 도련님두 설 수 있어요.” 다시 밝아진 디콘이 말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질 테니깐요.”
“그럴 수 있을까?” 콜린이 물었다. 그리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한동안 정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고요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정말 분주하고 흥미진진한 오후를 보냈다. 콜린은 아주 편안하게 쉬는 듯 보였다. 동물들조차 돌아다니기를 멈추고 옹기종기 모여 아이들 근처에서 쉬었다. 검댕이는 낮은 가지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졸린 듯 눈동자 위로 회색 눈꺼풀을 내렸다. 메리는 까마귀가 순식간에 코를 골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사방이 고요했기에, 콜린이 반쯤 머리를 들고 느닷없이 공포에 속살거리듯 소리치자 모두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저 사람 누구야?”
디콘과 메리가 벌떡 일어섰다.
“남자?” 두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되물었다.

콜린이 높은 담장을 가리켰다.
“저기 봐!” 콜린이 흥분해 속삭였다. “어서 보라고!”
메리와 디콘이 고개를 홱 돌려 그곳을 보았다. 사다리 꼭대기에서 담 너머로 세 아이를 보고 있는 벤 웨더스태프의 성난 얼굴이 불쑥 솟아 있었다! 노인은 메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내가 홀아비가 아니구 너가 내 딸이면.” 노인이 소리쳤다. “아주 호되게 매질을 할 거구만!”
벤은 마치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 메리를 혼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위협적으로 사다리를 한 단 더 올라섰다. 하지만 메리가 다가가자 노인은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사다리 꼭대기 단에 서서 메리를 향해 주먹만 흔들었다.
“난 너가 영 마뜩치 않았어!” 노인이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첨 봤을 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구. 얼굴은 누렇게 떠서는 비쩍 마른 애가 불쑥 나타나가지구 꼬치꼬치 캐묻구 여기저기 들쑤시구 다니구. 누가 절 반겨준다구 말이야. 어쩌다가 나하구 친해졌는지 모르겠구먼. 그 울새만 아니었어두. 빌어먹을 자식.”
“벤 웨더스태프 영감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메리가 소리쳤다. 메리는 아래쪽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벤 영감님, 내게 길을 알려준 건 그 울새였어요!”
그러자 벤 영감은 당장이라도 메리가 있는 곳으로 담장을 타고 내려올 기세였다. 그만큼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머리에 피두 안 마른 못된 녀석아!” 노인이 메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 잘못을 울새한테 뒤집어씌워? 그 녀석은 그런 짓을 할 정도루 뻔뻔허지 않어! 그 녀석이 길을 알려줬다구! 그 녀석이! 에이! 이 못된 녀석아.” 메리는 노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노인의 호기심이 화를 이겼기 때문이다. “대체 어째 여기루 들어갔냐?”
“길을 알려준 건 울새였다니까요.” 메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울새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어요. 그리고 영감님이 주먹을 자꾸 휘두르면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벤 영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먹을 가만히 두나 싶더니, 입을 떡 벌렸다. 메리 뒤편에서 풀밭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영감의 호통에, 콜린은 너무 놀라서 그저 똑바로 앉아 홀린 듯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 콜린은 냉정을 되찾았고, 디콘에게 거만하게 손짓을 했다.
“저기까지 날 밀고 가!” 콜린이 명령했다. “담장 가까이 밀고 가서, 저 사람 바로 앞에 세워!”
벤 웨더스태프 영감이 보고 입을 떡 벌린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치스러운 무릎 담요와 쿠션을 깐 휠체어가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국왕이 탄 마차가 다가오는 듯 보였다. 그 휠체어에는 새까만 속눈썹이 난 커다란 눈에 여윈 하얀 손을 오만하게 뻗은 어린 라자가 어명이라도 내리려는 듯 뒤로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휠체어는 벤 웨더스태프의 바로 코앞에 멈췄다. 그러니 벤의 입이 떡 벌어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라자가 물었다.
벤 웨더스태프의 표정은 정말 볼 만했다. 핏발이 선 늙은 두 눈이 유령을 보기라도 한 듯 바로 앞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벤은 보고 또 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냐니까?” 콜린이 한층 더 오만한 태도로 물었다. “대답해!”
벤 웨더스태프는 마디가 불거진 손을 들어, 눈을 지나 이마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떨리는 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냐구요?” 벤이 말했다. “알죠. 알다마다요. 그 얼굴에서 도련님네 어머님의 두 눈이 나를 똑바루 바라보구 있으니깐요. 세상에,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 도련님은 가엾게두 몸이 온전치 않을 건데.”
콜린은 자기 등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콜린이 똑바로 앉았다.
“내 몸은 멀쩡해!” 콜린이 격노해서 소리쳤다. “멀쩡하다고.”
“콜린 몸엔 문제 없어요.” 메리도 불같이 화를 내며 담장으로 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콜린 등에는 핀만큼 작은 혹도 없어요! 내가 봤는데,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단 하나도 말이에요!”
벤 웨더스태프는 다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아무리 봐도 부족하다는 듯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벤 영감의 손이 떨리고, 입이 떨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벤은 배운 것이 없고 요령도 없는 늙은이라, 그저 들은 이야기를 기억할 뿐이었다.
“도련님은, 도련님 등이 굽지 않았다구요?” 노인이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콜린이 소리쳤다.
“도련님은, 도련님 다리가 굽지 않았다구요?” 벤의 목소리는 더 쉬었고 더 떨렸다.
너무 심한 질문이었다. 평소에 콜린이 짜증을 터뜨리며 쏟아내던 기운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콜린을 뚫고 나왔다. 지금껏 콜린은 다리가 굽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소곤거릴 때조차 말이다. 그런데 벤 웨더스태프 영감이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콜린의 몸 상태에 대해 어떤 억측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자, 라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머릿속에서 이 순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분노와 상처 입은 자존심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힘으로 콜린을 가득 채웠다. 불가사의하다고 할 만한 기운이었다.
“이리 와!” 콜린이 디콘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다리를 덮고 있는 담요를 찢어버릴 기세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리 와! 이리 오라고! 어서!”
디콘이 얼른 옆으로 갔다. 그 순간 숨을 죽인 메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콜린은 할 수 있어! 콜린은 할 수 있어! 콜린은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메리는 소리를 죽인 채 최대한 빨리 말했다.
분노에 찬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무릎 담요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디콘이 콜린의 팔을 부축했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드러나며 얇은 두 발이 풀밭을 디뎠다. 콜린은 똑바로 섰다. 똑바로 말이다. 화살처럼 곧았고, 놀랍게도 키가 커 보였다. 콜린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기묘한 두 눈을 번득였다.

“나를 봐!” 콜린이 벤 웨더스태프에게 소리쳤다. “자, 나를 보라고! 당신! 나를 봐!”
“도련님이 저처럼 똑바루 섰어요!” 디콘이 소리쳤다. “요크셔에 사는 다른 남자애들처럼 똑바루 섰다구요!”
메리는 이어진 벤 웨더스테프의 행동이 말도 못 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벤은 목이 멘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늙은 손으로 손뼉을 쳤고, 주름진 두 뺨 위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세상에!” 벤이 감정이 복받치듯 말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거였구먼! 도련님은 욋가지처럼 말랐구 유령처럼 창백허지만 혹은 단 한 개두 없구려. 도련님은 어른이 되실 거요. 신이 복 내리시길!”
디콘이 콜린의 팔을 단단하게 잡긴 했지만, 콜린은 비틀거리지 않았다. 더 꼿꼿하고 바르게 서서 벤 웨더스태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영감의 주인이야.” 콜린이 말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실 때는. 그러니 내게 복종해야 해. 이곳은 내 정원이야. 정원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 이제 영감은 사다리를 내려가서 긴 산책로로 가. 그곳에서 메리 양이 영감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곳으로 데리고 올 거야. 영감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영감이 끼어드는 건 싫지만, 이제 영감도 우리 비밀을 알게 되었군. 서둘러!”
벤 웨더스태프의 주름진 늙은 얼굴은 여전히 까닭 모르게 쏟아진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노인은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두 발로 꼿꼿하게 선, 깡마른 콜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구! 도련님.” 벤 영감이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아이구! 우리 도련님!” 그러더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정원사가 하듯 모자를 살짝 만졌다. “네, 주인어른! 네, 주인어른!” 그리고 시킨 대로 사다리에서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23,51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2-29
0
92
나단비
2024-02-29
0
137
나단비
2024-02-27
1
96
나단비
2024-02-27
0
69
나단비
2024-02-27
0
72
나단비
2024-02-27
0
71
나단비
2024-02-27
0
79
나단비
2024-02-26
0
80
나단비
2024-02-26
0
108
나단비
2024-02-25
0
97
나단비
2024-02-25
0
107
나단비
2024-02-24
1
156
나단비
2024-02-16
0
120
나단비
2024-02-16
0
136
나단비
2024-02-16
0
90
나단비
2024-02-16
0
110
나단비
2024-02-15
0
129
나단비
2024-02-14
1
475
나단비
2024-02-14
0
95
나단비
2024-02-14
0
82
나단비
2024-02-13
0
106
나단비
2024-02-12
0
111
나단비
2024-02-12
0
144
나단비
2024-02-11
0
180
나단비
2024-02-11
0
140
나단비
2024-02-11
0
112
나단비
2024-02-11
0
94
나단비
2024-02-11
1
421
나단비
2024-02-10
1
159
나단비
2024-02-10
1
16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