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추리소설모음 4

3학년2반 | 2022.01.27 10:22:25 댓글: 0 조회: 42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472

어둠의 바다 어둠의 소리


이시마 지로(일본) 지음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무더운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고 바다는 어쩐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
다.
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후갑판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후
갑판에는 이미 한 승객이 있었다.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선 그 남
자는 계속해서 어두운 바다를 쳐다 보고 있었다.
"오늘밤은"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뒤돌아 보는 남자의 얼굴은 해골처럼 앙상한 모습이었다. 눈은
움푹 패어 들어갔고,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오늘밤은..."
남자는 가라앉은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엷은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웃었다.
나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서서 함께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언제나 나를 어쩐지 슬픈 기분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바
다 속에 있는 어느 누군가가 부르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지독히 더운 밤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남자는 말라빠진 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저는 이런 밤이 좋은걸요. 어쩐지 무시무시한게 재미있지 않습
니까?"
나는 별난 남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가 질문을
해 왔다.
"이 배에 유령이 나온다고 하는 소문이 있던데요. 알고 계십니
까?"
"유령이라니요?"
내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우리들같은 승객중의 한 사람인데, 자살을
했답니다. 오늘처럼 무덥고 바람도 없는 밤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사내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었습니
다. 바로 이 자리에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서있는 여기에서 말입
니다."
남자는 내 얼굴을 슬쩍 살펴보면서 히쭉 웃었다.
"바다에서 건진 그 시체에는 오른쪽 팔이 없었답니다. 배의 스
크류에 절단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은 어두운 바다에서 희끄무레하게 물거품이 일고 있는
스크류의 뒤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유령이 나오는 거군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잃어버린 오른 팔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겁
니다. 오늘처럼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에 바다가 묘하게 조용한
밤이면 한 남자가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답니다. 그러다간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스스로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아니, 그 남자가 자살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게,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겁니다. 돈에 쪼달린 것도 아니
고, 실연했기 때문도 아니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남자는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마..."
남자는 우물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아마, 그 바다를 바라보는 중에 모든게 싫어져버린 것이겠지
요. 그래서 무엇인가에 끌려들어가는 것처럼 바다에 뛰어들었을
겁니다. 저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모
든걸 잊고 이 바다의 밑바닥에서 잠들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그렇
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둠에 잠겨서 조용히 나를 부
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바다에 뛰어들었던 겁니다."
나의 오른 팔이 없는 것을 사내가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 때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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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미


엔도 슈샤꾸 지음


이년전 유월의 이야기이다.
아침부터 안개같은 비가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계속해서 내리고
있던 일요일 저녘무렵이었다.
일요일이긴 하지만 내게는 끝내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었다.
오전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 이따금씩 고개를 들고 쳐다보
면, 뜰 쪽으로 난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서서히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섯시경에야 겨우 일이 끝났다. 수첩을 펴 보니 그 날은 여덟
시에 요쓰야의 백자암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백자암에서는 오늘밤 내 숙부가 간사로 있는 작은 회합이 있었
다. 그리 대단한 회합은 아니었다. 숙부처럼 한가한 중역이나 의
사들이 모여서 한달에 한번씩 식사라도 함께 한 뒤에 진기한 것을
견학하기도 하고 좋지 못한 필름을 몰래 틀어보기도 하면서 즐기
는 유별난 회합이었다.
그 회합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오늘밤 나는 숙부로부터 특별히
부름을 받고 있었다. 오늘밤은 이른바 "괴담회"라고 하여, 실제로
유령을 보았거나 요괴를 만났던 사람을 손님으로 불러서, 회원들
이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운 나쁘게도 그 전년인 12월, 나는 같은 작가인 M씨와 아따미에
놀러가 서 등골이 서늘한 경험을 했다. 그 친구나 나나 유령 따위
는 조금도 믿지 않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서 함께 불가사의한 일을 겪으면 역시 기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괴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껏 유령
이 있다고는 믿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무언가 물리적인 원인이
있는데 우리들이 그렇게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숙부는 그 이야기를 오늘 백자암의 회합에서 얘기해달라고 전화
로 청해 왔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내 자신이 이미 잡지에다 써
버렸기 때문에 이제 다시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여덟시반경, 빗속을 택시로 달리며 요쓰야로 향했다. 안개비는
줄곳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지하철 공사
로 성문 부근은 매우 혼잡하여 내가 타고 있는 택시도 좀처럼 앞
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느때 같으면 성문에서 오분이면 가는 백
자암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백자암은 다까하시 호우끼라는 풍류객이 지은 요정이다. 사람들
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뜰안이 훌륭하고 채식요리
도 일품인 곳이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회원들이 모인 객실에 들어갔을 때 괴담회
는 이미 열려 있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한밤중에 하는 것이 좋
을 듯 싶지만, 회원들중에는 바쁜 사람도 있는 모양이어서 밤이
되자 곧 초대한 손님의 체험담을 시작한 것같았다. 그래도 객실
안을 아주 어둡게 해서 탁자의 한 가운데에는 보기 흉칙할 정도의
새빨간 갓을 씌운 스탠드를 켜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눈이나 코가 어쩐지 으스스한 분장을 해놓은 것 같은 효과를 주도
록 숙부가 고안한 낸 것이리라. 내게는 그것이 몹시 우스꽝스럽게
만 보였다.
"어서 오렴."
복도 가까이의 간사 자리에서 숙부는 내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앉게. 조금 이따 모두에게 소개할테니."
회원들은 거의가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었다. 커다란 탁자를 둘
러싸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담배를 피기도 하면서 묘하게 초대 손
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참 한가한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 역시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
다. 사회적으로도 일단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일에
시간을 없애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새빨간 갓을 씌운 스탠드를 앞에 두고 열심히 자신의 체험담을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회사의 계장이었다.
오년전, 그 사람이 야마구찌시의 역전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겪
었던 이야기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이층의 다다미방으로, 옆
방과는 장지 하나로 간막이를 한 것으로 보였다.
한 밤중에 문득 눈을 떠 보니 새파란 달빛이 비치는 창문 가까
이에서 한노파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노파는 자신
을 바라보면서 장지쪽으로 기어가듯이 걸어가면서 이내 모습을 감
추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키가 작은 남자는 지금 생각하기만 해도 두렵다는 듯이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는 깜박 졸았습니다. 다시 잠이 깨서 보니까 아까의 노
파가 달빛 속에서 또 다다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인은 아주 열을 올리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같았지만 듣고
있는 내게는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포감이 치밀어 오지
않은 것이다.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나처럼 따분해 하
고 있는 것같았다. 자주 무릎을 움직이기도 하고 이야기하는 초대
손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흔히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시골의 여관에서 한밤중에 옛날
그 방에서 목을 맨 노파의 망령을 본다......이건 조금도 재미가
없는 이야기이다.'
정말 조금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모인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뜰 쪽에 가까운 구석에 안색이 몹시 창백하
고, 그러면서도 단정한 생김새를 한 청년 한 사람이 무릎에 양손
을 놓고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방도 나를 의식하
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까닭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무심
코 시선을 피하면서,
"저 사람, 어떤 분인가요?"
작은 소리로 살짝 숙부에게 물어 보자,
"글쎄, 회원중 누군가가 데려온 모양인데. 처음 보는 손님이
군."
숙부도 조금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마구찌 여관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메꾸로의 덴겐병원
에서 근무하는 아베라는 이름의 조금 살찐 의사가 탁자 앞에 앉았
다.
"나는 의사이지만 정신분석의는 아니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연구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베의사는 그렇게 서두를 깔면서, 사년전 쯤에 신변에 일어났
던 사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최근의 새로운 한 심리학에 의하면 꿈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예견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베의사는 그
학설을 쓴 책을 읽고 나서, 날마다 밤중에 눈을 뜨면 자신이 본
꿈을 준비해 둔 노트에 쓰는 장난을 해 보았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환자가 아닌 결핵에 걸린 여자의 임종에 입회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병원은 메꾸로의 덴겐병원이었지만, 병실에서는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그는 혼자서 그 말라빠진 여자환자의 손을
잡고 그녀가 숨을 거두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꿈은 거기
서 끊긴 채로 잠에서 깼다.
"그 때는 달리 아무런 생각도 않했습니다..... 여느때처럼 노트
에 그 꿈 내용과 날짜를 적어놓았지요."
아베의사 역시 말솜씨가 어쩐지 서툴렀다. 억양이 없는 음성으
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삼개월후---
그는 숙직을 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간호부가 그를 깨었다. 이
층의 독실에서 오래전부터 입원하고 있던 인후결핵에 걸린 처녀의
숨결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것이었다.
급한 바람에 그녀를 담당하고 있던 동료의사를 부를 짬도 없었
다. 아베의사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처녀는 눈을 감고 새하얀 팔
을 침대에서 축 내려뜨리고 있었다. 간호부로부터 캠퍼주사 도구
를 받은 그는 이제 이 환자는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족에게 연락하세요. 어서 가족에게."
간호부를 전화실로 달려 보낸 다음 아베의사는 처녀의 손을 잡
아보았다. 그러나 맥은 벌써 끊어져 있었다. 병실 안에는 그와 그
환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언젠가 꿈에서 본 일이 생각나서 무언가 소름이
끼쳤습니다."
얼떨결에 그는 처녀의 손을 놓았다. 사실 그는 더 이상 환자의
팔을 잡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환자는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일단 힘없이 시트에 내려뜨려졌던 새하얀 처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후의 경직현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
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천히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아베의사의 손바닥 쪽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무심코 병실에서 복도로 뛰쳐나온 그는 간호부와 부딪쳤다. 그
런데 두사람이 다시 방을 들여다 보았을 때 처녀의 사체는 어두
운 전기불 밑에서 양손을 가슴에 포갠 채로 말끔한 모습으로 침대
에 가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나는 의사이니까 과학만능주의의 입장입니다만....,
아직까지도 그날밤의 불가사의한 사건은 전혀 이해가 되지않습니
다."
아베의사는 빨간 색의 갓을 씌운 스탠드에서 얼굴을 들어올리고
잠시 말없이 탁자의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좀 전의 것보다도 재미가 있었지만, 의사의 화술이
서툴렀던 때문인지 그렇게 무섭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 마음
에는 아무래도 그런 괴담을 의심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우선 도
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두개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개를 쳐들자 앞서의 그 창백한
얼굴을 한 청년이 또---
물끄러미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불유쾌한 기분이
들어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다음 다음이 자네가 말할 순서이네. 잘 부탁해. 그 때 모두
에게 소개를 해 주지."
숙부가 살짜기 내게 귀엣말을 했다.
예의 그 아다미의 체험담을 가능한 한 간략히 말하고 나는 머리
를 숙여 절하고는 객실을 나왔다. 숙부가 부탁한 용무를 마친 이
상 언제까지 이런 한가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할 기분이 도저히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다음날 넘겨주지 않으면 안될 또
하나의 원고가 남아 있었다.
"벌써 돌아가는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숙부가 복도에까지 마중을 나왔다.
"네."
하녀가 걸쳐주는 레인코트에 손을 넣으면서 나 역시 언짢은 기
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암의 현관을 나서자 바깥은 여전히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
다. 비는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요쓰야
성문의 큰 길을 자동차들이 흙탕물을 튕기며 몇대인가 그냥 지나
쳐버렸다. 생각해 보니 오늘밤 이런 어리석은 회합에 얼굴을 내밀
기 위해 시간을 너무 손해본 것 같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오는 택시마다 손님이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
는 언제나 그렇지만 차를 잡는데 아주 애를 먹는다. 나는 몇번이
나 헛되이 손을 들었다가는 내리며, 레인코트의 옷깃을 세운 채로
안개비에 젖어있었다.
바로 그 때, 한 대의 대트선 택시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흐린
유리창으로 손님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틀렸군.
나는 단념을 하고 전철 역 쪽을 향하여 차도를 건너가려고 했다.
대트선 택시의 문이 열리면서---
손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앞서 백자암의 객실에서 나를 물끄러
미 응시하고 있었던 그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었다.
"어디까지"
그의 목소리는 여자처럼 높았다.
"가십니까?"
내가 하다뀨엔선의 세이죠우라고 말하자,
"저는 끼다미이니까 괜찮으시다면 이 택시에 같이 타고 가시지
요."
나는 조금전 이 청년의 무례함에 기분이 약간 좋지 않았던 일을
잊어버리고 몇번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택시는 빗속을 달려 곤다하라를 지나 가이엔에 이르고 있었다.
차에 들어갔을 때부터 느꼈지만, 차 안에 역겨운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녹슨 구리를 긁었을 때와 같은 비린내였다. 사람의 피에
도 이런 냄새가 난다. 나는 개솔린과 기계의 기름이 비의 습기로
인해 이런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회합이었지요."
나는 청년에게 무엇을 말해야 좋은지 알 수없기 때문에 모호한
말로 회합의 사람들을 비꼬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네,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더군요..."
내가 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조금 머리를 숙여 예의를 차
리자 이쪽도 그만 싫어진다.
"아무 것도 아닌걸요. 중간에 제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
더군요."
빗발이 조금 세어졌는지 작은 돌맹이를 튕기는 듯한 소리가 오
른쪽 유리창쪽에서 울렸다. 운전수는 묵묵히 핸들을 잡고 있었다.
차는 신궁의 외원 안을 달리고 있었다.
그 비린내가 다시 역하게 코를 찔렀다. 청년이 조금 몸을 움직
일 때마다 그 냄새가 자욱하게 풍겼다. 그러나 상대방이 안색이야
창백할망정 몹시 단정한 생김새와 몸가짐을 한 청년인 이상 그의
체취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모임은 처음이셨습니까?"
"네."
청년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아는 사람이 회원으로 있어서요.]
"아뭏든 지루한 모임이더군요. 괴담회라고 하는게 다 그런 모
양이죠."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변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인만 무섭다, 무섭다,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듣고 있
는 쪽은 그만큼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니까요."
"네."
다시 그 녹슨 구리 비슷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야마구찌 여관의 이야기말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하품이 나오던걸요."
"그래도 덴겐병원의 ...... 그 의사의 체험담은 흥미가 있었습
니다."
청년은 창백한 얼굴을 앞으로 향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억양이 없고 감정이 베어 있지 않는 말투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운전대의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꼬리를 잃어버려서---
하는 수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고 하자,
"억."
청년은 이쪽을 향하여 외쳤다.
"죄송합니다만 불은..... 저는 담배냄새를 싫어해서요."
두 사람은 그 때부터 흥이 깨진 기분으로 오랫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때 나는 갑자기 묘한 것을 깨달았다. 반드시 묘한 것
이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 무릎 위에 깔끔하게 놓여진 청년의 새하얀 두 손의
손가락이 몹시 길었다. 손가락은 마치 긴다리거미의 다리처럼 길
고 가늘었다. 그보다도 더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 청년이 털투
성이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새하얀 손가락의 관절과 관절의 사이
에 그것도 가늘고 기다란 털이 새까맣게 엉겨붙은 채 나 있었다.
하긴 잘 생각해 보면 이건 진기한 일은 아니다. 신경질적인 도시
인에게는 흔히 이러한 손을 가진 사람이 있는 법이다.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운전수 한 사람만 핸들을 꺾으면
서 잇달아 다른 차를 추월해 가고 있었다. 이런 비에 이런 속도를
내서는 위험할텐데 --- 그렇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아뭏든 이 청년은 기묘한 인물이었다. 스스로 나를 차에 태워
놓고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려고 하면 싫어한
다. 거기에 억양이 없는 텅 빈듯한 목소리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떠도는 저 비린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창백한 얼굴을 앞으로 향한 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에 나는 흥미가 일어났다.
그것은 자동차의 백밀러였다. 청년은 아까부터 20분간이나 백밀
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저런 모임에 나가는 것은 넌더리가 납니다."
나는 다시 한번 화제를 만들기 위해 아까와 똑같은 말을 한심
스럽다는듯이 되풀이했다.
"바로 여기였습니다."
"네?"
나는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여기에서 그랬지요."
청년은 그 낮고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개월전이었습니다. .... 오늘밤처럼 비가 내리는 밤이었습니
다."
택시는 우에도오리에서 세이죠우로 향하는 좁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 부근에서부터 조금씩 무사시노 평원의 자취가 어린 수
풀과 밭과 농가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비에 젖은 마을길에
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없었다.
"저는 시부야에서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왔을 때, 길 한 가운데에서 한 여자가 두 손을 흔들며
혼자 서 있었습니다. 운전수가 무심코 차를 멈추었지요."
청년의 말에 의하면 여자는 유리창을 두드리면서 세이죠우까지
가면 차에 태워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히 부탁을 하는 것 같
았다. 아까부터 아무리 기다려도 빈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
기 때문이다. 레인코트 아래에 랩 슈츠를 입고 검은 핸드백을 든
삼십 가까운 나이의 여자였다. 어딘가의 술집 여자로도 보였다.
"태워주셨습니까?"
나는 조금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네."
"그거 참 재미있군요. 예쁜 여자였습니까?"
"네, 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백밀러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
는 목소리로,
"반 쪽 얼굴만 그랬죠."
"반 쪽 얼굴만이라니요?"
차에 오르자 여자는 비에 젖은 우산을 도어에 세워 놓고 레인코
트를 벗었다. 빗방울이 청년의 양복에 떨어지지 않게 주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날 탄 택시는 루노차였다. 밧데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해서 차내등은 어두었다. 두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은 차를 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이 길을 세이죠우 쪽으로 해서 달리고 있었습니
다. 시간도 바로 이맘때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전의
아까 그 길모퉁이에서 차가 약간 미끄러졌습니다."
차바퀴가 비에 젖은 길에서 갑자기 옆으로 미끄러지자 차는 한
순간에 안정을 잃어버렸다.
날카로롭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택시는 오른쪽의 밭에 빠
지려고 하였다.
여자가 그 때 손으로 청년의 무릎을 잡으면서 무심코 얼굴을 그
쪽으로 향했다.
여자의 반 쪽 얼굴에 검붉은 종기가 가득 나 있는 것이었다. 종
기는 작은 점처럼 이마에서 눈까지, 눈에서 뺨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차내등은 어두웠고 여자가 탔을 때에도 종
기가 없는 옆 얼굴밖에 보지 않은데다가, 새빨갛게 진무러진 또
하나의 얼굴을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청년은 역시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
것도 흔히 있는 괴담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까 지나치게
백자암의 회합을 비난했기 때문에 청년은 자신이 간직해 둔 체험
담을 이야기할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웃
었다.
"화상이었습니까, 그 진무른 얼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피부병이었습니까?"
"거미였습니다."
"거미......"
"당신은....."
그 때 청년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엷은 비웃음이 천천히 떠올랐
다. 사람을 바보처럼 여기는 듯한 보기 싫은 비웃음이었다.
"당신은 도둑거미를 알고 계십니까?"
"아니, 모릅니다."
"다리가 긴 회색의 거미입니다. 남지나해나 대만에 있는데, 규
우슈우에서도 산골에서 가끔 발견이 됩니다. 허지만 도오꾜오의
세다까야에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거미가 어떻게 했단 말입니까?"
"사람의 피부에"
여전히 백밀러를 바라보면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의 피부에 그 거미가 알을 낳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대만이나 남지나해에서 사람이 자고 있는 밤에 도둑거미가 천정
에서 검은 물처럼 똑똑 떨어진다. 천천히 얼굴이나 손발에 찰싹
달라붙어서 적당한 장소를 찾으면 거기에 독이 든 이빨로 피부를
문다. 그리고는 엉덩이에서 침을 내어 피를 빤 자국에다 작은 알
을 낳는다. 가려움은 벼룩처럼 심하지 않고, 이의 가벼운 입만큼
이나 가볍기 때문에 자는 사람도 거의 깨는 일이 없다. 알에서 부
화한 유충은 사람의 피부 속에서 피를 양분으로 하면서 성장을 해
간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처음에는 흔한 피부병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어
느병원엘 가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도오꾜오대학의 피부
과에서 진기한 도둑거미의 이빨자국임이 판명되었던 거죠."
나는 침을 삼켰다.
무언가 생리적인 혐오감에 사로 잡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자기
의 피부 속에 거미가 무수한 알을 낳고, 검은 유충이 꿈실거리며
내 피를 빨아먹고, 꿈실거리며 성장해 간다.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이야기였다.
"정말입니까, 그 이야기는?"
"네..."
청년은 다시 엷은 비웃음을 입술에 떠올렸다.
"그 여자가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두운 차내등 밑에서 여자는 자기의 추함을 사과하고나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나 있는 얼굴의 종기의 하나를 손가락으로 찌부
러뜨렸다. 그 피가 얼룩진 작은 손톱에 다리가 5, 6개 달린 거미
의 유충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 눈으로 말입니다. 여자의 피투성
이가 된 손톱 위에서 다리가 달린 유충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어둠 속을 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오른쪽
유리창으로 돌려 이 불유쾌한 이야기를 잊으려고 했다.
저 비린내가 다시 코를 스쳤다. 돌아다 보니까 청년이 거의 내
머리 부근에까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차가 미끌어져서요."
차는 미끌어진 일이 없었다. 청년은 왜 속이 들여다 보이는 이
런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얼굴
을 가까이 대었을 때 그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것과 동시에 등골
이 서늘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청년은 멍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립니다."
"여기에서요.... 끼다미에 가시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요 근처의 친척에게 갑자기 볼 일이 생각나서요..."
나는 뭐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차를 세우자 그는 예의바르게
머리를 숙이고는 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마의 땀을 손으로 씻으면서 --- 왜
그가 거짓말을 했을까를 멍청히 생각하고 있었다.
"손님."
운전수가 핸들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기분나쁜 사람인데요. 제가 방금 백밀러로 보았는데, 저 남자
는..... 손님의"
".........."
"손님의 머리에 입을 바짝 갖다대더군요. 마치 피라도 빠는 것
같더라구요."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차 안의
라이트를 밝게 하자 그런대로 기분이 나아졌다.
차내등이 조금 더 밝아졌다. 바로 그 때 나는 발견했던 것이다.
방금까지 청년이 걸터앉아 있었던 장소에서....
다리가 긴 회색의 도둑거미 한 마리가 빛에 놀라며 달아나고 있
는 것을...




-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사나이 (The kindest man in the world) -
by 헨리 슬레서(Henry slesar)

"쉰 아홉이라고요 ? 네에"라고 데니슨은 흐뭇해하며 철컥 소리를 내어 서
류가방두껑을 닫았다. "분명히 말씀이지요, 루이스씨. 그런 나이의 사람하
고 보험계약을 맺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들이 그런 일을
바라지 않는다는의미는 아닙니다. 생명보험을 드는 데는 너무 나이가 많다
든가..또는 너무 젊다든가..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검
토해 보기로 하십시다.어떤 보험 담보를 당신이 가지고 계신지, 가족분들을
위해서 앞으로 어느 정도의 비축이 필요한지, 그런 일을 말씀이지요. "
데니슨은 호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자 금 펜촉을 만지작거리며 손질했
다.
"볼펜이라는 물건은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어서 말씀이지요"라며 그는 싱
글거렸다. 그러고 나서 방금 한 말이 얼마나 진부하게 들렸겠느냐는데에 생
각이 미치자 제풀에 사뭇 화가 치밀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험금 수령인은 부인으로 하실 건가요?"
긴 겉옷을 입고 그 호텔 방 안의 거의 반대쪽 창가에 앉은 사나이는 소매
에 감싸인 가느다란 팔을 들어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바라보니그 모습은 마치 괴상한 새,지금이라도 잿빛 융단위를 천천히 겨냥
하면서 날아오르려 하고 있는 까마귀처럼 보였다.
"아니"라고 사나이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나한테는 아내도 없고 딸린 식
구조차없어요"
꼭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데니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화는 라스 팔마스를 담당하고 있는 사무실을 통해서 예고도 없이 걸려 왔
었다.그리고 전화를 건 주인공은 데니슨을 지명하며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이 달에 영업 성적이 오르지 않아도 안달을 내고 있던 데니슨은 왜
자기가 지명됐는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또 호텔을 임시 숙소로 삼고 있
는 단기 체류자가 왜 종신적인 생명보험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괴이쩍게 생각하지도않고 이렇게 찾아 온 것이다.
긴 겉옷을 입은 사나이가 되풀이했다.
"난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어요. 이렇다하게 살펴줘야만 하는 상대 따위
는아무도 없다구요"
"알겠습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데니슨은 그렇게 말했다."그러시
다면보혐 계약의 목적은..."
"나는 계약을 맺고 싶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하지만 제가 사무
실에서 받은 바로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었지. 조 데니슨을 말이야. 바로 당신 말이요"
여느 때의 조바심나는 간지러운 응어리가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라 데니슨은
상대의 속셈을 캐내려고 실눈을 떴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네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루이스라고 자기 소
개를 한 사나이는 킥킥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업어다 난장을 맞히는
짝인데,조,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니.."
"알았어요. 손들었어요"데니슨은 맥없이 말했다. "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
요?"
"조, 이렇게 말한다면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계에서 가장
상냥한사나이라구.자네한테 친절을 베풀어주고 싶어서 멀리 3천 마일 거리
를 내달아왔다네.그러니까 조,자네가 집을 나섰을 때...도대체 무슨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나는 자네 행방을 놓쳐 버렸다고 생각
했었지.그러던참에 내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우연히도 사립 탐정이기는
하지만,그 사나이가 이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서 자네를 ㄳ아낸거야.생명보
험 외판원을 하고있다더군. 보험이라니! 아주 웃기는 일이라구. 어때,그렇
지 않는가? 만일 네티가 자네 회사의 보험에 들어 잇다면 자네는 그녀를 죽
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그런 일은 생각해 볼 수가 없나,조?"
긴 겉옷을 입은 사나이는 깍지낀 두 손을 무릎에 얹어 대답을 기다리고 있
었다. 잠깐 뒤에 데니슨이 말했다.
"당신은 윌프레드 코비이겠지요?"
"그래. 그렇다네.자네를속이고 여기로 불러낸 것은 미안하지만, 달리 방법
이 없었어.그렇게 했던 것도 서로 오해를 풀고 홀가분해지고 싶어서라네.그
러니까 나는 벌써 성깔이 가라않아 있다구.아주 깨끗하게 화를 풀어 없앴다
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앙상한 손을 내밀면서 발을 질질 끌며 다가
섰다.
"악수해 주겠나,조? 화해해 주겠어?"
데니슨은 내밀어진 손을 노려보았다. 그러고 나서 히죽거리다가 마치 도전
하기라도 하듯이 그 손을 잡자 딱 한 번만 아래위로 흔들었다.
"이거, 고맙네"라며 코비는 킥킥 웃었다. "어떤가? 그다지 좋은 기분은 나
지않겠지? 방금 말한대로 나는 자네에게 친절을 베풀러 왔어.진심으로 말하
고있다네. 다른 친구를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로 자네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
각하고있는 걸세."
"다른 친구라니?"
"그렇다네.파울러에다가 필 헤플화이트며 월리 월드론을 말이지. 알겠지?
나는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네. 아주 벌써부터 말일세. 그리고 일부러 손
을 써서 그들한테 보상하려고 했다구.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런 원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지. 그러니까 네티
를 죽였던 일에대해서 말일세."
데니슨의 입술이 긴장한 것처럼 움직였다. 파울러.헤플화이트.월드론. 아
주오랫 동안 들어 본 일이 없던 이름이다... 그가 가정 사정으로 할 수 없
이 뉴욕을등진이래로.
"그랬었군요"하고 그는 말했다."우리를 용서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시름이 놓이는데요,코비씨.그건 그렇고, 이제 나는 돌아가야 하겠는
데..."
잠깐 기다려,조. 자아,기다려 주게나.자네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다른 친
구들을 용서했었는지 듣고싶지 않은가? 이건 실제로 중요한 일이라구. 그러
니까말이지, 나는 자네한테도 똑같이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자네 협력이 있어야만 한다네. 어떻게 친절을 베풀어주면 되는 것인지를 가
르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일세."
데니슨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무릎 위에 얹은 서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오래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는데"라고 그는 말했다.
"하기는 나는 지금보다 열 살이나 더 젊었지"라고 코비는 말했다."그렇긴
하더라도 기껏 10년의 세월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지 이상할 정도
야. 나는 쉰 살에 가까왔지만 마치 스무살 안팎의 젊은이처럼 활력에 넘쳐
있었지.네티 덕분에 말일세. 그 사람은 서른 한 살이었어. 아니면 둘이던
가.. 몇 번이나물어 보았어도 분명하게 털어 놓지않더군. 나이에 관해서는
그다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였기 대문이지. 자네한테도 그걸 보여주
고 싶었어,조...물론 생전의 것을 말이지. 네티 한테서는 생기가 넘쳐 흐르
고 있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눈과 입에서 쏟아지고 있을 정도였다네. 파데렙
스키가 피아노 건반에서 하고있는것처럼 하루에도 몇번이나 감정의 음계를
달려 오르내리길 할 수가 있었다구.확실히 함께 지내기 쉬운 여자는 아니었
다네. 하지만 헤어져 지내는 것이 더 어려워.
내가 그 호숫가 집을 사들인 것은 결혼해서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무렵이
었어. 그 해는 모든 것이 순풍에 돛단배였지... 내 보잖것 없는 회사는 대
회사로 발 전하려고 하고 있었다네. 그 때 마침 네티가 나한테 들어와 있
던 상담을 받아들이라고 조르더구먼. 그러니까 요구에따라 회사를 다른 사
람한테 넘기고 단둘이서 세계를 돌아다닌다든가 재미있게 웃으며 지내자는
것이었어. 실제로 그만큼이나 웃는 일을 좋아했던 여자는 보지 못했어! 나
는 아직 은퇴하는 데까지의결심은 서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호숫가 집을
사들였지. 그리고 네티의 작은 요트도 말이지. 그건 생일 선물이었다네. 정
확하게 몇 살의 생일인지는 알 수가 없어. 네티는 그다지 나이에 관해서...
오오라, 이건 벌써 말해 두었었지?
그녀가 왜 요트를 타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는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
지.
우리가 단둘이서 요트를 타고 달릴 때면 여자는 꽤액꽥 소리를 냅다 지르면
서구석에 처박혀 늘어붙어 있었을 뿐이었고, 뭍에 닿을 때까지는 거의 꼼짝
달싹도하지 못했으니까 말일세. 다만 그 날만은... 어느 날의 일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조... 날씨가 좋은 데다가 거울같은 호수면에 문득
유혹을 느껴 혼자서 배를 띄웠던 거라구. 틀림없이 멋진 모습이었다고 생각
해... 그 기다란 금발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말이지. 자네들 패거리가 등불
에 몰려드는 나방처럼 끌려들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내가 진정으로 무었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겠는가? 나는 말이지, 네티가
그화려한 모터보트를 타고 휩쓸려다니고 있는 자네들 네 사람을 알아 보았
던 게틀림 없다고 생각하네. 입술연지처럼 새빨간 크리스크라프트를 타고
휩쓸려다니는 네 사람의 사나이를 보고 그 여자가 바람이 났던 게 틀림 없
다고 생각한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알아듣겠지?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 전
면적으로 자네들을나무랄 생각이 없다네.
문제는 말이지, 네티는 전혀 요트를 조종할 솜씨 따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는데에 있어. 자네들이 웃는다든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전속력으로 그 여자
쪽으로돌진해 왔을 때, 그리고 자네들의 보트가 일으켰던 물결이 그 여자의
조그만 요트를 물에뜬 코르크처럼 휘저었을 때, 네티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
버렸어. 아마도 자네들은 언제 그 여자가 뱃전에서 물에 빠져들었는지도 몰
랐겠지... 분명히검시 심문에서도 그렇게 진술했었지 않은가? 그런데 말슴
이야. 그 여자가 뱃전에서 떨어지는 것을 가령 보았다고 하더라도,아무 걱
정할 것도 없다,선체를 붙들고 기어 오르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어. 그리고 자네들은 그걸 확인하러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지. 그렇
지, 조? 자네도 다른 친구들도 말일세. 물에 빠진 그 여자를 그대로 내팽개
친 채로 돌아와버린거지
아무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모르고 있어. 그 여자가 떨어졌을
때머리를 다치기라도 해서 의식을 잃었던 것이나 아닐까? 그것도 확실한 걸
알수가 없어. 실제로 나로서는 그렇게 됐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네... 네티
는 어떤고통도 꺼리고 있었으니까 말일세. 치과의사 하고의 예약을 어기는
가 하면 두통이 일면 아스피린을 땅콩같이 씹어댔지. 그러니까 여자가 고통
을 격었다고 나는생각하고 싶지않다네... 먹은 물이 허파를 채우고 입안 가
득히 차서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모른 척하고 죽게 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일세. 나는 60마일 떨어진 곳에, 그나마 소란한 도심지에 있었
어... 하지만 알 수가 있겠지.그 여자가 사람 살리라며 울부짖었더라면 반
드시 내 귀에 들려왔을 거라고 생각하네.
어떻든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이해해 주겠지, 조? 그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거라구. 그런 협박조 말투를 늘어 놓았던 거지. 검시 검문에서의
자네들얼굴... 네 개의 비석과 같은 자네들 얼굴을 떠올리면 나는...! 배심
원들의 그평결을 들었을 때 나는 바보처럼 추태를 부렸지만, 자네들은 틀림
없이 한시름놓았겠지? 이해해주면 고마운 일이겠는데, 나는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네, 조. 누구한테 물어 보아도 괜찮아... 내 공동 사업자
나 내 단골 손님,내경쟁자까지도 내가 본디 얼마나 상냥한 사나이인지를 말
해 줄 것이라고 믿네.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마음이 가라앉았어. 일어났던 일을 고쳐 생각하고
네티의 죽음을 자네라든가 다른 사나이들의 책임으로 몰아댔던 것은 틀린
일이라고 납득하게 됐다네. 그동안에 그런 투로 추태를 부렸던 일이 켕겨지
기 시작하더라구.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어떻게 보
상하면 좋은 것인지, 도무지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없던 채로 있었지...
그러니까 리버시티 클럽에서 우연히 파울러하고 부딪칠때까지는 말일세.
그건 네티가 죽고 1년 이상이나 지났을 때였어.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 그 무렵에 우리 네티가 정확하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내는 대에는 꽤나 힘이 들었었는데도 파울러를 보고 파울러라고 알아
보는 데는아무런 수고도 들지 않더구만. 그는 거기에 있었지. 값비싼 삼베
저고리를 입고예쁘장한 여자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는데, 형편이 괜찮아
보였고 군턱이 조금 달렸고 해서 활기에 넘쳐 있더군. 그 뿐만이 아닐세.
위스키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네... 싫어도 눈에 비친 일이었지만 말일지.
파울러에 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치의 약점이 술이었다는 것도 말이지?
나도 그게 얼마나 심했었는지는몰랐었지... 그치가 댄스 홀 한가운데 쓰러
져서 웨이터한테 사지가 잡혀 들려 나갈 때까지는 말일세.
나는 그치의 짝이 되는 여자가 불쌍해지더군. 그래서 다가가서 말을 걸어
보았다네. 성질이 괜찮은 아가씨였어. 루이스라는 애였는데, 사교계에 데뷰
한 지도 얼마되지 않은 귀여운 아가씨더라구. 머리는 그다지 신통하지가 않
았지만,네티하고 닮은 초록색 눈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도 나
한테는 충분한 추천장이 되는 셈이었지.
파울러의 술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 되어 있는지를 가르쳐 준 것은 그 루이
스였다네. 불쌍하게도 그치는 말이지, 포도주나 리큐르에 대해서는 여느 사
람과 마찬가지로 제법 감정할 줄 안다고 치고 있었는데 말씀이야. 실제론
그랬는지도 모르지... 뭣보다도 시간도 돈도 넉넉하게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일세. 다만 문제는 그무렵에 그 친구의 소득이 갑자기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다는 점이지. 그 친구가 일하고 있는 주식 중개 회사에서는 주정뱅이는
아무리 감정을 잘하는 친구라고 하더라도 훌륭한 경리담당 중역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친구는 디너 파티라든가 주말 별장에로의 초대
같은 것도 정력적으로 감당해내고있었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술탓으로 친구
를 잃어가고 있었지. 이대로는 조만간에 지위도 사교상의 친구도 건강도 고
스란히 그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리겠지...그리고 그렇게 되면 불쌍한 파울러
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든 나는 그이야기를 듣고 정말 안 됐더구먼. 그리고 당장에 자문자답
해보았다네... 어떻게 하면 내 상냥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가 있을
까하고말일세.
2주일쯤 지나서 나는 파울러의 주소를 알아냈지... 친구가 되는 사립탐정
이 수고해 준 거지. 거기가 어딘고 하니 지저분한 장소였어. 시내에서도 가
장 낮은지대에 있는 싸구려 단칸 아파트였다네. 하지만 루이스가 그치한테
좋은 영향을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숨어서 기뻐했어. 두 사람은 약혼
한 사이였지만,약혼했을 때 그 여인이 내걸었던 첫째 조건이 그 친구한테
절대 금주를 서약시키는 일이었다네.
실제로 선량한 여성의 애정이 타락한 우리를 얼마나 새 출발을 시켜주는지
는 정말 놀라울 정도라구. 그렇지 않은가? 파울러도 그로부터 6주일 이상이
나 아주 훌륭하게, 착실하게 부지런을 떨더구먼. 다른 직업을 발견한 그 친
구는 말하자면 지루한 중산계급으로서의 명망가의 길을 치닫고 있었던 셈이
지. 참으로 불쌍한 친구야!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그 친구를 도와주는 일, 그러니까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단조로운 미래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밖
에 없을것 같았어. 나는 그 친구의 익명의 후원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제일
먼저 어떤 술감정가 한테라도 잘 어울리는 선물을 보냈어... 저스테리니 앤
드 브루크스의 1875년산 코냑 한 병 이었다네. 코냑에 관한 것은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구먼? 그것은 말이지, 어느 왕이라든가 무슨 대관식을 기
념해서 만든 최고급 브랜디 명품이라구. 어김없는 콜렉터 취향의 일품이거
든. 파울러와 같은 콜렉터라면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 , 마음으로 그것을 기
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유감스럽게도 그 친구는 그것을 너무 기뻐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 친구가 가엾은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본 루이스는 거의 약
혼을 취소하는 지경으로까지 갔었다네. 하지만 그 여자를 잃게 되는 위기에
직면한 것을 알게되자 파울러는 마음을 고쳐먹고 앞으로는 절대로 금주 서
약을 깨뜨리지 않겠노라고 약속했어.
그래서 나는 그 다음에 1955년 샤토 무통 로토실트 한 케이스를 보내 주었
지. 그 극상품 명주인 포도주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어서 귀중품이 되고 있
거든. 그런 값비싼 붉은 포도주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
지 않겠어? 식사 때마다 조금씩 즐기는 정도라면 말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루이스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라구. 그래서
가엾은 파울러 녀석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걸 깡그리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됐더라네. 거의 모두라고나 말해야할까... 그 녀석 짓이니까는 한 병 아니
면 두 병쯤은 감쪽같이 어딘가에 감추어 두었음에 틀림없겠지.
어떻든 그 녀석은 그 훌륭한 행실에 대해서 포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 했네. 그래서 나는 글렌리베트라고 하는 극상품 스카치 위스키를 또
보냈는데 , 그 친구는 그걸 마음껏 즐겼음에 틀림없겠지.그뒤로는 줄줄이
1924년 특산 마알, 마르키 단제르뷰 한 병씩, 알마냑, 드메누 보안네르 한
병씩, 샤토 슈바르 블랑 한 케이스씩, 게다가 베렌나 존넨와 아우스레제의
1959년짜리 한 케이스, 그리고... 그렇지, 루이스였지. 물론 그 여자는 마
지막에 그 친구를 버렸지. 그리고 차라리 그런쪽이 훨씬 나았어. 어ㄳ거나
그 아가씨에게도 정말 다루기 힘든 나쁜 영향을 미치게 돼 있었으니까 말일
세. 그래서 그 여자가 사라지자나는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파울러한테 샴
페인을 보내주었다네... 루이 레드레르 크리스탈 브류트 1955년짜리 일품
한 병을 말이지.
파울러가 마침내 그 싸구려 아파트에서조차 지낼 수가 없게 된 것은 가엾
은 일이었어. 그 친구가 집 없는 신세가 되어 빈민굴의 더러운 뒷골목을 헤
메고 다니게 되니까 그 친구한테 선물을 보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게 돼
버렸다네. 그 친구가 병이 들어서... 폐렴었던 거 같은데...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
지 않겠지. 그 친구의 양친은 멀리 위스컨신에서 달려와 장례식을 떠맡았
어.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장례식이었던 모양이야... 공교롭게도 나는 참
석할 수 없었지만 말일세.하지만 조화만은 보내 주었다네.

필 헤플화이트하고는 우연히 만났던 게 아니라구. 친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내는지를 벌써 알고 있었으니까 말일쎄. 그러니까 이쪽에서 손
을 써서 그 친구를 찾아냈던 걸세.
애초에 첫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필이라는 사나이가 친절을 베풀기 어려운
상대가 될 것 같다는 일쯤은 알고 있었지... 그 친구는 모든 것을 갖고 있
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일세. 사업상으로는 번창하고 있는 선글라스 제조
회사의 공동 경영자 였어. 게다가 풍채가 좋지, 사나이답지, 학력도 있지,
인품도 훌륭하다네. 또 기적에 기적이 겹쳤다고나 할까, 아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아주 크게 기뻐했었다네,
조... 결혼 생활에 관한 내견해는 자네가 잘 알고 있는 대로야.
그 여섯 달 이전에 그 친구는 린다 피셔라고 하는 매력적인 여자 하고 결
혼했지. 그 여자는 헤플화이트네 회사에서 비서 노릇을 하고 있던 여자라
네. 그 회사는 여러 부문에서 많은 젊은 여성을 고용하고 있는데, 그렇더라
도 그 친구의 결혼은 회사 안팎에서 조금은 뜻밖이라고 받아 들여지고 있었
네. 왜 그러냐구? 자네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아름다운 여성만 보면 사족
을 못쓰는 것은 언제나 그 친구의 약점이었어. 그리고 린다는 그 친구의 데
이트 상대 가운데서도 가장 매력 적인 존재였던 셈이지.
어떤 뜻에서 그 친구가 그런 젊은 나이로... 몇 살이던가? 스물 다섯
살?...결혼했다는 것이, 서둘러서 결혼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던 거
야. 나는 마흔이 넘을 때까지 결혼 하지 않았는데, 사나이라는 것은 그쯤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한 여자를 지키고 몸을 도사리는 결심이 서게 되는
거라구. 만일 필의 기준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한 가지에만 있었던 것이라
면 그 친구는 아직도 돛대위에 깃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나 밖에 말할
수가 없다네. 나는 거기에서 생각해 보았지. 그 친구한테 그런 걸 보여주는
것으로 친절을 베풀어 주어야겠다고 말일세.
내가 처음에 헤플화이트네 사무실에 들여보낸 여성은 도나 드브리스라고
하는
여자였는데, 믿어줄 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한때 실제로 비서 코스를 밟은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일을 해낼 만큼의 자격을 갖고 있었지. 그건 실질적으로 놀
라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네... 왜 그러냐면, 미스 드브리스는 열 다섯
살 적부터 그 신선한 머리에 월계관을 써 왔으니까 말이네. 얼마 동안 그
여자는 미스 뭐라든가 하는 칭호를 독차지 하고 있었지. 그런 다음에 속옷
광고 모델로서 카메라맨들한테 인기를 얻었고, 다시 최근에는 세 번의 공연
으로 말아먹은 뮤지컬 레뷰에 출연해서 그 화려한 경력에 금상 첨화가 됐
어.
그 여자는 그 일자리에 채용됐고,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대로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 두 달 남짓 지나는 사이에 필은 린다의 헤어 컬러를 둘둘
만 머리,크림을 바른 얼굴,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의 형편없는 부스스한
눈 같은 것에다가, 몸맵시가 나무랄데 없고 향수 냄새마저 풍기는 산뜻한
도나의 매력을 자연 대비시켜볼 수 밖에 없게 되었지. 필은 늦게까지 일하
게 됐고, 당연히 도나도거기에 맞추어서 잔업을 맡게 됐지. 결과는 뻔한 가
정 싸움, 눈물, 짐꾸리기라는 차레가 된 거야. 필은 후회한 끝에 화해를 위
해서 충분히 납득이 가는 조치를취했어. 말하자면 도나를 해고 한 다음에
깨끗하게 그 여자와 손을 끊고 영원히충실한 지아비가 될 것을 서약한 셈이
지.
그 다음에 나는 트레이시를 들여보냈다네.
트레이시는 도나 드브리스보다도 더 한결 아름다웠어. 그 여자의 아름다음
은 잡지라는 잡지의 표지를 장식 했는데, 미국 잡지에서 그 여자의 커버 걸
로서의 매력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내셔날 지오그래픽, 포풀러 메카닉을
비롯한 기껏 몇몇 잡지 뿐이었다네. 그 때문에 그 여자의 얼굴은 고스란히
알려져 있어서 새삼스럽게 그 아가씨가 비서를 지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
나게 할 수가 없었지.
나는 다른 소개 방법을 생각해냈지...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말일
세.
트레이시는 선글라스 모델을 지망하고 있다는 구실로 헤플화이트씨를 만나
러갔지. 그 친구는 광고 대리점에 그 여자를 보냈는데, 그에 앞서 점심이라
도 같이 하는 게 어떠냐는 투로 이야기가 돌아갔더라네. 그 뒷일은... 그렇
지, 역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말이야. 그 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일세.
린다가 필이 새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두 달로 충분
했다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니까 그 여자는 재판에 따른 별거 생활이외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더구먼... 변호사들은 한몫 잡았지. 여러 달 뒤에 또
다시 새로운 화해가 성립되더라구. 트레이시는 팜피지에 들어앉아 필한테서
받은 위자료로 살게 됐고, 린다는 다시 한번 헤플화이트 집안의 여왕벌로
군림하게 된 셈이지.
그 다음에 나는 이로우나를 들여보냈다네. 이로우나는 도나 드브리스만큼
이나 화사하지는 못했어, 옷차림은 도나만큼이나 세련돼있지 못했고 헤어스
타일에도 그렇게 손질이 잘 가 있지 않았지.또 그 여자는 트레이시만큼이나
예쁘지 않았어. 머리카락도 눈도 까맣고 입술은 너무 두터웠지. 몸매도 조
금은 육감적이었던 것 같았네. 하지만 그 여자는 필 헤플화이트네 생활에
파고 들더니,이번에는 마침네 린다의 가정적 행복도 종지부가 찍혔지. 완전
하게 말일세. 린다는 마치 맥베드에 나오는 세 사람의 마녀의 넋에 씌운 것
처럼 소동을 부렸더라네. 그러자 마침네 필도 견딜 수가 없어서 짐을 싸들
고 나가려고 하자, 일반적으로 모욕당한 마누라들이 하는 짓거리이상의 짓
을 해버렸다네. 뒤에서 그 친구의 등허리 한가운데를 겨냥해서 총을 쏘아버
렸지.
이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할텐가, 조? 그렇다네.가엾은 필의 결혼 생활
은 비극으로 끝장이난거야. 아니,요행히 목숨은 건졌지. 총알은 등뼈를 박
살냈고, 한쪽 콩팥을 망가뜨려 버렸다네. 그 친구는 완전한 폐질자,구들장
을 짊어지고 있는 환자가 돼 버렸지만 살아있기는 살아있어. 현대외과 의술
이라는 것은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듣기로는 한 번인가 두 번인
가 스스로 손목을 잘라 모처럼의 의사들의 공적을 물에 떠내려보낼 뻔했지
만, 다행히 목숨에는 탈이 없었지. 나는 해마다 그 친구한테 크리스마스 카
드를 보내고 있다네.
그 다음은 가엾은 월리 월드론이야. 하기는 그 친구가 죽은 것은 알고 있
겠지? 심장 발작이라던가? 허허, 웃을 일이 아니라구. 이런 일로 웃는다는
것은 발칙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말일세. 그러니까 그걸 심장 기
능 정지라고 부를 수가 있겠지... 아무라도 죽을 때는 심장이 멎을 테니까
말이네. 히지만 말일세. 거기에는 조금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구. 그야 자
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월리 월드론을 찾아내자마자 그 사나이한테 친절
이라는 것을 어떤 방향 으로 돌려주면 좋을지를 깨달았다네. 가엾은 파울러
의 경우하고 아주 닮아 있더구먼... 자신의 약점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었
으니 말이지.
내가 그 사나이를 붙든 것은 라스 베가스에서였어. 심리학자가 노름군의
충동적인 강박감인가 하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 말을 들어
보면 노름군이 주사위를 굴리든지 칩을 얹어 놓는다든지 하는 것은 모든 것
이 사랑 때문인 것 같다는 거야. 판돈을 걸때마다 그 친구들은 운명의 여신
한테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소원을 걸고 있어. 어쩐지 나한테는 기묘하게 들
려오지만, 내노라하는 학자들은 그러게들 말하고 있다네.
어쩐지 월리는 굉장히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던것 같았어. 왜냐하면 충동적
인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주사위 노름군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친구야
말로 어김없이 그런 존재였으니까 말일세. 내가 라스베가스에서 붙들었을
때 그녀석은 네바다 주에서 찾아낼 수 있는 선의와 신용을 마지막 티끌까지
깡그리 털어내버린 끝에 동부로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지. 이 세상에서 그
친구한테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호숫가에 있는 귀틀집과 문제의 입술
연지 빛깔과도 같은 크리스크라프트 뿐... 둘 다 어느 인심 좋은 아저씨의
유산이었다네.
그 친구는 그 집을 팔아챙기고 보트도 팔아 버렸다네. 모두 쳐서 6천 달러
였는데, 에드워즈라는 사나이한테 말이지. 그건 월리한테 대한 나의 최초의
친절이었어. 그러니까 에드워즈는 내 대리인 이었단 말일세. 귀틀집쪽은 사
들인 채로손을 대지 않았지만, 보트쪽은 불을 질러 침몰 시켜 버렸네. 어린
애 장난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어.
그 보잘 것 없는 돈을 월리가 얼마나 빨리 써 버릴 것인지를 몰래 지켜본
다는 것은 아주 재미있었다네. 자초지종을 속속들이 지켜 본 내 친구 사립
탐정마저도 월리가 그 돈을 탕진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네. 절반은 몽땅 내기분배 방식의 경마에서 날려버렸어. 나머지는 시내에
있는 여기저기의 지하실이라든가 차고 안에서 벌어지는 사설 노름판에서 주
사위 노름으로 탕진해 버렸지. 모두 쳐서 6주일... 1주일에 천 달러 꼴이었
다네. 그 돈이 몽땅 없어질 때까지 말일세. 동전한닢 남지 않은 알거지가
돼 버렸지. 그래서 나는 그 친구한테 친절하게 해주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
은지를 깨달았네. 낭비할 수 있는 큰 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그 친
구가 궁색하면서도 어떻든가 나날을 지낼수 있을 만큼이나 찔끔찔끔 내주는
쪽이 좋지.
어느날 나는 그 친구한테 현금으로 백 달러를 보내주었어. 내 친구 사립탐
정 의 보고에 따르면, 그 돈이 우편으로 닿았을 때 그 친구는 얼마 동안 어
안이 벙벙해서 제대로 입도 벙긋하지 못했던 것 같더라네. 커낼 스트리트에
웨버라고 하는 사나이가 있는데, 월리의 친구로서 책방을... 그리고 술가게
도... 벌이고 있는 사나이지. 월리는 이 웨버네 아파트로 내달아가서 자신
의 괴이쩍은 행운에대해서 불어댔어. 웨버는 심한 꼽초로 괴로워하고 있었
는데, 세상에 대해서 비뚤어진 눈을 가지고 있던 청년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옛이야기를 끌어내서 그 친구한테 경고했었다고 생각
되네. 하지만 월리는 그것을 코웃음으로 넘겨버렸지. 그날밤에 그 친구는
그 백달러를 주사위 노름에서 탕진해 버렸다네. 테이블앞에 앉아 반 시간이
채 못되는 사이에 말이지.
이튿 날 다시 우편으로 50달러 지폐 한 장이 배달됐어. 그 친구가 기운을
차린데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네. 실제로 사뭇 신명이 난 그 친구는 그 50달
러를 털어내서 술이니 음식이니 하는 것들을 사들이고 그것들을 들고 웨버
네 아파트에 축하하러 달려갔더구먼. 두 사람은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고 웃
어댔다네. 그리고 월리는 감격한 나머지 앞으로는 노름에서 손을 떼고 착실
한 직업을 잡겠노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어.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짐
작하고 있지... 그렇게 보는 까닭은 월리가 그 이튿 날 직업소개소로 찾아
가서 여기저기로 면접을 받고 다녔기 때문일세.
그래서 나는 다시 2백 달러를 보내주었는데, 그 친구는 다시 비밀 노름판
뛰어 들더구먼. 그 날밤 그 친구는 용케도 수백달러 남짓이나 땄고 이 이튿
날밤에는 그것을 갑절로 불리려고 다시 나섰다네.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승
부였지. 운명의 여신은 그 친구를 사랑했어. 그 주말에 그 친구는 삼사천
달러나 벌었는데, 판돈이 더 큰 노름판에 나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마침
네 그 기회가 왔다네... 릿치 에디가 물주가 돼서 호텔 설루드에서 벌어지
는 비밀 주사위 노름판에의 초대였지.
릿치 에디에 관해서는 내 친구 사립탐정이 여러가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더구먼. 주먹이 판을 치던 시대로 돌아가는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
고 말하더라구.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네... 우리 친구인 월리가 이와 같은
폭력적인 사나이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말일세. 그
런데도 월리는 그런 초대를 받아 들이고 가진 돈을 몽땅 챙기고 나섰어. 어
쩐지 그 녀석은 행운도 가지고 갔던 것 같았네. 그렇다는 것은 그 날밤에
크게 따서 8천달러쯤이나 벌었으니까 말일세. 릿치 에디는 순순히 그 친구
를 돌려 보내줬지... 다만 아주 정중하게 다시 판을 벌일 것을 약속받은 다
음이었지만 말일세.
어느 날 밤에는 월리가 잃었는데, 그나마도 아주 형편없이 잃었어.여섯 시
간동안의 줄달음질 승부가 끝났을 때 그 친구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금전적으로도 녹초가 돼 있었다네. 그 친구는 부끄러움도 남의 눈총
도 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에디한테 울고불고 매달려 판에 남을 수 있도록
밑천을 빌려달라, 약간의 자금을 빌려 달라고 통사정 했더라네. 릿치 에디
가 군말없이 들어준 것은 말할 나위가 없겠지.
호텔 설루드를 나섰을 때 월리는 이 노름판에 5백 달러 빚을 지게돼서 머
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네. 나는 그 친구한테 5백 달러를 보내주었어.
월리가 재빨리 빚을 갚는 데에 아주 만족한 릿치 에디는 다시 지불 유예 기
간을 연장해 주었고, 이번에는 월리가 4천 달러의 빚을 짊어졌다네. 그 주
말에는 그 친구가 릿치 에디한테 진 빚이 1만 2천 달러로 불어나 있었어.
말할 나위도 없이 나도 더 이상 월리한테 돈을 보내고만 있을 수는 없었지.
그 친구가 닥치는대로 그것을 노름판에 쏟아 붓기만 했으니까 말일세. 자네
도 이해해 주겠지?
실제로 그건 동정심을 살 만한 광경이었다네... 아침마다 다시 우편으로
기적이 날아들어 자신을 궁지에서 구해줄 것이나 아닌가 하고 월리가 우편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말일세. 하지만 그러고 있는 사이에 차
차 그 친구도 이제 돈은 부쳐져오지 않을 것이고, 릿치 에디한테 빚을 갚기
위해서는 다른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 릿치
에디는 기다리다지쳐 월리한테 보복 수단을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끔찍한 결과를 빚을것 같았네.
빚이 생기고 2주일 뒤, 월리는 도무지 그걸 갚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되자
밤중에 몰래 아파트를 빠져나갔지. 그 길로 웨버네 아파트를 찾아간 그 친
구는 어떻게하든지 릿치 에디하고 그 밑에 있는 살인 청부없자들한테 들키
지 않게 감싸달라고 책방 주인에게 통사정 했다네. 웨버는 그 부탁을 받아
들인 끝에 월리를 감싸주고 먹여주는 등 안전을 보장해 주었어. 하지만 말
일세, 조, 우리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를 자네도 알
고 있겠지? 아무리 우리가 친절하게 해 주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친구는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되레 우리 자비심에 반발해 오는 걸세. 먹은 놈이 앙
물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웨버네 좁다란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월리
는 속을 끓이다 못해 신경질이 돼서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게 됐다네. 그러
다가 마침네 어느 날 웨버한테 대고 웨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밉살스러
운 존재라며 얕보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말았거든.분통이 터진 웨버는 몰래
아파트를 빠져나와 곧장 릿치 에디 한테 내달았다네.
그렇지. 월리의 사인은 심장 마비였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작이었단 말일세.
자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맞춰 볼까, 조? 자기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겠지.
자아, 들어 보라구. 이렇게 된 거지. 월리가 죽은 뒤 나는 친구가 되는 사
립탐정한테 부탁해서 자네 행방마저도 캐내 달라고 당부해 두었지. 그런데
그 결과는 자네가 그 거리를 버리고 양친의 집까지 버렸는가 하면 일자리
지 버렸다는것 뿐이었지. 그 사람이 찾아낸 것은 그것 뿐이었다네.
자네 코는 사냥개 코처럼 예민하더군, 조. 자네가 전문적인 범죄자였다고
치더라도 그만큼 멋지게 발자취를 감출 수가 없었을 걸세. 하지만 그렇기에
자네는 멋지게 해치울 수가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뭐가 어렵다고 하
더라도 신출나기가 몸을 숨기려 들었을 때만큼이나 행방을 캐내기가 어려운
일은 없다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경찰의 실종자 수색 담담한테 가서
물어 보면 알게 되겠지. 꽤나 오래 걸려 간신히 나는 자네를 따라 잡은 걸
세. 천신만고 끝에 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네를 찾아낸 셈이라네. 하지만
말일세, 조. 나는 이리로 와서 한 달이나 됐고 내 친구 사립 탐정도 마찬가
지야. 그런데 두 사람 다 자네에 대해서는 자네가 여기에 도착한 이상의 사
실은 아무것도 알고있지 못했네. 이사람아, 조. 어떻게 자네한테 도와주면
되는 지를 가르쳐 주지 않겠나?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어떻게 친절을 베풀
어 주면 되는 지를 말해 주지 않겠나?"

조 데니슨은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그 때문에
손가
락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다른 친구들하고 똑같이... 그런 말인가?"
"그렇다네"라고 코비가 말했다. "다른 친구들하고 똑같이 말일세. 내가 검
시신문 자리에서 입에 담았던 갖가지 악담, 자네하고 다른 친구들한테 품고
있던 당치도 않은 증오심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보상할 수 있도
록 길을 열어 주게나."
"내 약점을 알고 싶다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으면..."
"그것이야말로 네놈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데니슨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파울러는 주정뱅이였어... 그래서 네놈은 네놈의 더러운
선물인가로 그 친구를 죽였어. 필 헤플화이트는 여자한테 눈이 어두웠어.
월리 경우는 노름이지..."
코비는 그 괴조(怪鳥)와 같은 웃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자네 경우는 뭐지, 조? 자네는 나한테 자신의 약점을 말하고 싶지
않은가?"
데니슨은 코비의 의자 곁으로 다가가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런 다음에
느닷없이 손을 뻗치고 타월천의 긴 겉옷을 거머쥐자 괴조를 연상시키는 사
나이를 잡아 일으켰다.
"이 더러운 살인자"
그는 이빨 사이로 밀어내듯이 말을 뱉았다. 그리고 겉옷을 힘껏 흔들어댔
기 때문에 그 속의 말라깽이 몸이 까딱까딱 흔들렸다.
"나는 친절을 베풀어 주려고 하고 있다네"라고 코비는 떨면서 말했다. "자
네가 네티한테 친절을 베풀어 준거나 마찬가지로 말일세, 조. 자네나 다른
친구들이..."
"이 살인자야!"
조 데니슨은 소리치고 나서 이번에는 상대의 뼈가 앙상한 어깨를 붙들었
다. 그가 세차게 흔들어대는 바람에 갈대 줄기와 같이 가냘픈 목 위에 위태
위태하게 얹어 있는 코비의 머리가 끄떡끄떡 흔들리며 빛이 바랜 핑크빛 살
덩어리와 겁에 질린 새까만 눈동자만이 드러나 보였다.
"이 살인자야!"
데니슨은 다시 소리치며 점점 기세를 더하는 기계의 피스톤처럼 더욱 손놀
림을 빨리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코비의 뼈가 녹아 흐늘흐늘해져 버린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인형처럼 휘늘어졌고, 온몸 안의 뼈마디가 내고 있던 뿌
드득거리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됐다. 데니슨은 지금이 몇 시쯤이
나 됐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도 코비가 정확하게 언제 죽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6시 10분 전쯤이었읍니다"라고 마이너 경위가 말했다. "그 시각에 데니슨
은 로비에 내려 와 접수계에 있는 사나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했어
요. 접수계 사나이는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고, 데니슨은 로비에서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사인은?" 총경이 물었다.
"피해자의 목뼈가 부러져 있었읍니다. 하지만 총경님. 이 데니슨이라는 사
나이한테는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진술서를 받고 있으니까요"
마이너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저로서는 그 사나이를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동정하다니? 왜지?"
"분별이 있는 사나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비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화
가 울컥 치민 바람에 정신없이 그랬을 뿐이라고 진술하고 있읍니다. 분명하
지는 않지만 똑같은 일이 몇 년인가 전에도 있었다나요... 아버지와 말다툼
하다가 느닷없이 두들겨 팼던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그녀석은
크게 후회해서 집을 뛰쳐나왔고 일자리도 걷어치워 버린 끝에 여기 서부까
지 건너왔다는 것이지요."
"으음" 총경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분별이 있는 사나이라는 것은 그런 사나이를 두고 말하는 건가, 자네 생각으
로는 ?"
"아주 울컥해지기 쉬운 성격이던데요" 라고 마이너가 말했다."우리는 누구나
가 약점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THE END -






한 단어에 천 달러 (One Thousand Dollars A Word)
by 로렌스 블록(Lawrence Block)

편집장 이름은 워런 주크스였다. 그는 여위고 선이 날카로운 사내였다. 기
다란 손가락이 달린 긴 손을 가졌으며, 입술도 얇았다. 그의 검은 머리는
정수리와 관자놀이 쪽이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끼까지 갖춘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반면 트레배썬은 편집장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꼭 통나무같고 매끈
하지가 못하다고 느끼면서,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나서도 아직 잠을 다 털어
버리지 못한 곰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크스가 입을 열었다.
"앉아요, 짐. 당신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지요. 벌써 다른 원고를 가져
왔나요? 당신이 글을 써내는 속도는 변함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도대
체 그런 이이디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나의 이런 질문이 이젠 식상할 때가
되었겠죠."
제임스 트레배썬은 정말로 짜증이 났다. 사실 트레배썬이 짜증스러워 하는
것은 그것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속마음과는 좀 다
른이야기가 나왔다.
"아니오, 워런. 새로 원고를 써온 게 아닙니다."
"그래요?"
"난 지난번 원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할까 하고 왔어요."
주크스는 당황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전화로 이야기를 했잖아요. 좋은 작품
이고, 잡지에 실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제목이 뭐였
더라? 말장난을 좀 한 제목이었는데... 금방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범죄의 바느질 한 번>이었지요."
"맞습니다, 맞아요. 괜찮은 제목이고 좋은 이야기였지요. 그리고 당신의
독특하고 짜임새 있는 문체가 작품 전체에 일관하고 있어서 좋았지요. 그런
데 뭐가 문제지요?"
"돈입니다."
편집장이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돈이 좀 급하신가 보지요? 제가 오늘 오후에 증서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그러면 다음 주, 초에는 수표를 손에 쥐실 수가 있을 겁니다. 안됐지
만그것이 제가 해들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짐. 우리의 협조가 이 정도면
아주 빨리 되는 것 아닌가요?"
"시간 문제가 아닙니다. 액수 문제이지요. 그 작품 고료가 얼마입니까, 워
런?"
단어 수량에 따라 원고료를 계산하므로, 워런은 트레배썬이 쓴 작품의 단
어수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평소와 같지요, 뭐. 그 작품이 얼마나 길었더라? 3천 단어 아니었던가
요?"
"3천 5백 단어입니다."
"그러면 얼마가 되는 거지? 한 단어에 5센트씩, 3천5백 단어면? 175달러
가 되는 건가?, 맞아요?"
"맞습니다."
"당신이 그 액수를 다음 주 초, 가능한 한 빨리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뭐, 원하신다면 내가 전화를 걸어드릴 테니까 직접 와서 가져가셔도 좋고,
그러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바쁜 우체부 아저씨들을 통해서 보내는 시
간인 이틀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뭐라 그러셨어요?"
"액수말입니다."
트레배썬이 말했다. 그는 이 대화를 계속해 가는데 큰 곤란을 겪고 있었
다. 트레비썬은 오는 길에 주크스에게 얘기할 원고를 마음 속에 써놓았었
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원고에 쓰인 대로 말이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입을 열었다.
"난 돈을 좀 더 받아야겠어요. 한 단어에 5센트라... 그건 돈도 아닙니
다."
"그게 우리가 주는 고료요. 짐, 이제까지도 그렇게 지불해 왔고."
"맞습니다."
"그런데요?"
"내가 이 잡지에 얼마 동안이나 글을 써왔는지 아시나요, 워런?"
"꽤 오래 됐지요."
"이십 년입니다, 워런."
"정말요?"
"꼭 이십 년 전인 지난 달에 '실을 매달리다'라는 작품을 당신들에게 팔았
지요. 그건 2천 2백 단어짜리였어요. 그 때 당신들이 고료로 110달러를 주
었지요."
"그런데요?"
"워런, 나는 20년 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받는 단가와
똑같이 받고 있어요. 내 수입만 빼고 모든 물가는 오른 셈이지요. 내가 당
신네 잡지에 처음 글을 실었을 때는 5센트면 캔디바 하나를 살 수 있었습니
다. 워런, 최근에 캔디바를 사본 적이 있나요? "
주크스는 허리띠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캔디바를 사먹으면, 이 옷에 맞지 않게 될 거요."
"지금 캔디바는 40센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35센트 짜리도 있어요. 그
런데 나는 여태 한 단어에 5센트를 받고 있습니다. 캔디바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그게 좋겠소, 짐."
"대신 잡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이 내 '실에 매달리다'를 사주
었을 때 가판대에서 당신네 잡지가 한 권에 얼마였는지 기억납니까? "
"내 기억엔 35센트였던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25센트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35센트로 올랐지요. 그
다음엔 50센트. 그 다음엔 60센트, 그 다음엔 75센트였어요. 지금은 얼마에
팔립니까?"
"한 부에 일 달러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거래 작가들한테 한 단어에 5센터를 줍니다. 정말 탐욕
스럽게 돈을 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안 그래요, 워런?"
주크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푹 낮추어 말했다.
"짐, 당신이 잊고 있는 것도 있어요. 우리 잡지는 20년 전만큼 이익이 남
지않습니다. 사실은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빡빡해요. 당신 종이 값에 대해서
좀 압니까? 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곧 캔디바 값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나도 종이 값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 동
안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 외에도 인쇄비,우송비, 또 내가 이야기하
고 싶지도않고 당신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들이 아주 많아요. 당신은 잡
지 값이 한권에 일 달러 하니까 우리가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사실 비용들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단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한 가지만 빼고요"
"그게 뭔데요?"
"자료에 대해 지불하는 비용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 잡지 독자들이
잡지를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야기,플로트와 인
물들, 산문과 대화,단어들,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런 것들
에 대해서는 20년 전과 똑같이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와 똑같은 가격
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지요."
주크스는 입에서 파이프를 떼더니, 파이프 속을 청소하기 시작하였다.트레
배썬은 자신의 생활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집세,식료품값...그
가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멈추었을 때 워런 주크스가 말했다.
"수요와 공급이오, 짐."
"그게 무슨 말 입니까?"
"수요와 공급이란 말입니다. 내가 한 단어에 5센트 주는 걸 고집한다면 우
리 잡지에 글을 싣기가 힘들어질 것 같소? 저기 있는 저 종이 뭉치들이 보
이시오? 저게 다 오늘 아침 우편으로 들어온 것들이오. 저 원고들 열 개 가
운데 아홉 개는 잡지에 실리기만 한다면 돈을 안 받아도 좋다는 신인 작가
들 것이오. 나머지 10퍼센트는 프로들이 쓴 것이지요. 이 프로들도 원고를
다시 반송 받는 것보다는 한 단어에 5센트라도 받는 쪽을 간절히 바라고 있
소. 그런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난 당신이 쓴 거라면 거의 뭐든지 사고 있
어요, 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당신 작품을 좋아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
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오. 당신은 우리와 함께 20년 동안 일을 해왔소. 우
리는 엣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거요. 그러나 당신이 우리한테
분명하게 단어 당 5센트 이상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도 분명하게 어느
누구에게도 5센트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소. 첫째로 예산이
넉넉치 못하기 때문이오. 둘째로 그 이상 지불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
오. 따라서 난 당신에게 5센트 이상을 지불하는 대신에, 당신의 원고를 되
돌려줄 수밖에 없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트레배썬은 이 말을 몇 분 동안 곰곰히 씹어보았다. 그는 할 말이 몇가지
떠올랐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주크스에게 편집장의 보수는
그 동안 얼마나 올랐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
용이 있단 말인가? 5센트를 받고 쓰느냐,아니면 안 쓰느냐 하는 두 가지 선
택밖에 없다. 그것이 이 문제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짐! 증서를 보낼까요? 아니면 '범죄의 바느질 한 번'을 되돌려 줄까요?"
"내가 그걸 돌려받아서 뭘 하겠습니까, 워런? 그냥 한 단어에 5센트를 받
겠습니다."
"내가 더 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아니, 다 이해하겠습니다."
"당신네 작가들도 조합을 만들어 놓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좀 집단적인
힘이 생겼겠지요. 아니면 당신이 다른 걸 써보던가. 아시다시피 우리 잡지
사는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중이오. 만일 우리가 원고료를 더 인상해야 한
다면, 아예 잡지사 문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소. 하지만 원고료가 더 후한
분야도 있어요."
"워런, 나는 추리소설만 20년 동안 써 왔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
오. 나원참, 난 그래도 내가 이 분야에서는 명성이 있는 줄 알았는데. 확고
한 기반이 있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물론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도 당신 작품을 우리 잡지에 싣는 것 아니
겠소. 내가 편집 일을 하는 한, 그리고 당신이 글을 쓰는 한, 나는 기꺼이
당신작품을 살 거요."
"한 단어에 5센트를 주고 말이지요."
"그게..."
"워런,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요즘 생활이 좀 어려워서요. 그게 전부
입니다."
주크스는 일어서더니 책상을 돌아 트레배썬에게로 다가섰다.
"짐, 이제 잊읍시다. 이제 다 털어놓고 보니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함으로서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한번 새롭게 해본 것뿐이
지, 뭐 다른 게 있었겠소? 이제는 당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을 거요. 그럼,
이제 집에 가서 뭔가 충격적인 것을 써가지고 나한테 가져와요. 만일 그 작
품이 당신이 평소에 써왔던 전문 작가적 수준에만 도달해 있다면, 당신은
또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게 수입을 두배로 늘리는 방법이 아니겠소? 생
산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오."
"좋은 생각입니다."
"물론 좋은 생각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또 다른 시장을 겨냥한 작품도 한
번 써보도록 해요. 짐, 나는 당신이 분야를 확대해 나가는데 너무 늦었다고
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한 당신을 잃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당신이 우리
가 지불하는 고료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면, 그 때는..."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한 단어에 5센트.'
트레배선은 낡은 타자기 앞에 앉아 흰 종이를 응시했다. 종이는 작년에 한
묶음 당 일 달러가 올랐다. 그러나 트레배썬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질은 낮
아졌다.
'내가 정성을 다해 선택한 단어들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 올랐어. 내 단어
들만 계속 5센트에 거래되고 있는 셈이야.'
트레배썬은 생각했다.
'당신의 분야를 확대해 나가는 데 너무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주크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말하긴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트레배썬도 다른 시장을 겨냥해 써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
지만 그가 재주가 있었던 것은 추리소설뿐이었다. 그의 사고는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생생한 소설적 아이디어들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
좀 긴 장편을 써보려고 하면 번번이 중간에서 무력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단편 작가였다. 단편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종종 중요 작가 선집 같
은 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그런 대로 많
이 써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이렇게 한 편을 써내고 또 한편을 써내야 하는 최저 생
활로 살아가는 데 지쳐버렸다. 그리고 한 단어에 5센트씩 받아서 생활하는
데도 질려버렸다.
한 단어에 얼마나 받아야 제대로 받는 것일까?
만일 한 단어에 25센트를 받는다면 최소한 캔디바의 인상율은 쫓아가는 셈
이 된다. 물론 20년이란 세월 동안에 발전도 없은 늘 똑같이 사는 것으로만
만 족할 수도 없었다. 만일 한 단어에 1달러를 받는다고 쳐보자. 실제로 그
만큼버는 작가들도 있었다. '빌어먹을.' 그 이상으로 벌어대는 작가들도 있
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작가들, 영화 대본을 쓰고 여섯 자리
숫자의 돈을 받는 작가들, 글을 써서 부자가 되는 작가들...
'한 단어에 천 달러.'
이 구절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 단순한 말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무
의 식 중에 그는 앞에 있는 타자기에 그 구절을 두드렸다. 그리고 트레배썬
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줄로 옮겨 가서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두
드렸다.
'한 단어에 천 달러.'
트레배썬은 그 구절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아이
디어가 용솟음처럼 치솟았다. 평소의 판에 박힌 사고 방식을 넘어선 아이디
어였다.
'그래, 왜 그래선 안 되겠는가? 왜 내가 한 단어에 천 달러를 받으면 안
되는가? 왜 내가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왜 안되겠는가?'
그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빼서 구겨 쓰레기통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집어던
졌다. 트레배썬은 새 종이를 타자기에 끼우고 그 흰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한 단어씩 한 단어씩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트레배썬은 좀처럼 자기가 쓴 단편을 고쳐 쓰는 일이 없었다. 한 단어에 5
센트씩 받고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오랜 세월 이 일을 하면서
단 한 번에 넘겨줄 만한 원고를 만들 정도로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트레배썬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원고를 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종이를 새로 끼우고,그것을
다시 빼서는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하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마음에 드는 글을 찍어낼 수 있었다.
트래배썬은 그것을 네댓 번 읽은 후에 타자기에서 꺼내서, 다시 한번 읽
어 보았다. '이제 됐어.'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면 간략,명료하고 요
점이 분명했다.
트레배썬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주크스가 나오자 그가 말했다.
"워런이요? 당신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소."
"새 작품을 하나 썼나요? 반가운 소식이군요."
"아니 그것 말고 다른 충고 말입니다. 나는 새로운 분야로 확대해 나가기
로 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정말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좀 큰 일을 하기
로 했습니까? 장편소설?"
"아니, 짧은 겁니다."
"좀 더 돈벌이가 되는 분야인가 보군요?"
"물론입니다. 내가 오늘 오후에 할 작업으로 난, 한 단어에 천 달러를 받
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천 달러 라구요? ..."
주크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놀란 개가 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글쎄, 난 당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짐. 하지만 엄청난
행운이 따르기를 기대합니다. 한 가지만 말해두지요. 당신이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게 너무 기쁩니다."
트레배썬은 자기가 쓴 것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나는 총을 가지고 있다. 이 종이 봉투에 십 달러, 이십 달러, 오십 달러
짜리 헌 지폐로 삼만 달러를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어리석은 머
리를 내 총알로 날려버릴 수밖에 없다."
단어 수는 모두 30개 였다. 트래배썬이 말했다.
"물론 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지요. 워런?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난
껄껄 웃으면서 은행으로 갈 거요."


- THE END -


一金 七萬六仟貳百원整
by 西村京太郞 (Nishimura Kyotaroh)
그 사나이의 얼굴에 기억이 없었으니까 처음으로 온 손님이 분명했다.40대
끝말이거나 50대 초쯤 되는 나이로, 간장이라도 나쁜지 묘하게 거무스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히 인상이 좋은 사나이는 아니었지만, 이쪽은 장사
속이고, 게다가 본시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서 오십쇼." 하면서 미
소를 지어 보였다.사나이는 힐끗 싱끼찌의 얼굴을 보고나서 잠자코 거울 앞
에 앉았다. 그리고는 졸린 듯이 하품을 했다. 이발관에 오면 묘하게 졸음이
오는 손님이 있거니와, 이 사나이도 아마 그런 축에 드는지 모른다. 흰 머
리가 듬성듬성 섞인 단단한 머리칼이었다. 물로 적시고 눕히면서 "잘릅니
까?" 하고 싱끼찌는 거울 속의 사나이의 얼굴에 대고 물었다. 사나이는 눈을
감은채 "아아" 이렇게 낮은 소리로 끄덕였다. 눈 밑의 피부가 늘어져 있다.
아마 거치른 생활을 해온 모양이라고, 남의 일에 대해 흥미를 품는 싱끼찌
는 짐작했다. '이 손님은 무슨 장사를 하고 있을까'싱끼지는 가위질을 하면
서 거을속의 사나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싱기찌는 손님의 직업을 이것저
것 상상하는 것이 좋았고, 비교적 잘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손님만은 좀체
로 판단할 길이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니고, 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니까 여느 샐
러리맨 같으면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이다. 정년퇴직 후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아니다. 상점주인 이라면 좀더 고지식해 보일 테
고, 이 근처의 상점주인이라면 낯이익다. '깡패족일까?' 이렇게도 생각했지
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느낌은 나빠도 무서운 생각은 들지않는다. 모르겠고
보니 싱끼찌는 더한층 사나이의 직업이 알고 싶었다. "줄곧 더우니 정말 따
분하군요?"
싱끼찌는 가위를 움직이면서 사나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구먼" 사나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과히 뵌 기억이 없는데, 이 근처에 사시나요?" "
그렇다고 해두지." 사나이는 억양도 없이 말한다. 그러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아니다. 말하기가 귀찮으면 잠자코 있을 것
이다. "실례지만 손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내 직업 말인가?" "
네." "무얼로 보이나?"
"아까부터 생각해 보고 있는데, 도무지 모르겠군요. 손님의 직업을 알아맞
추는게 제 자랑 입니다만." "그래?" "물장사를 하시나요?" "아니 불원 알
게 될테지. 앞으로 자주 올 셈이니까." "아이구, 이거 고맙습니다." 싱끼
찌는 절을 꾸뻑 했다.머리를 감고나서 면도를 시작한다. 뜨거운 타올을 얼굴
에서 벗기고 비누를 칠하고 있으려니 사나이는 눈을 감은 채 "이 가게는
당신 혼자 하고 있나?" 이렇게 반대로 질문을 했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을
보니, 사귀기 힘든 느낌의 사나이지만, 본시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누라하고 둘이 하고 있는데, 오늘은 애를 데리고 친척집에 갔답
니다." "부인하고 둘이?" "네,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죠."
싱끼찌는 어깨를 흠칫하고 웃어 보이고나서 면도칼을 손에 들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얼굴의 살갗을 잡아 본다. 거치른 탄력없는 피부였다.이런 것
은 깍기가 무척 힘들다. "눈썹 밑도 깍습니까?" "아아"
사나이는 끄덕이고나서 갑자기 눈을 뜨고 싱끼찌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이
름은 노무라 싱끼찌지?" "그렇습니다만..." 싱끼찌는 멍청한 얼굴로 "아,
문패를 보셨군요?"
"아니, 당신일은 전부터 알고있지." "헤에. 저는 손님을 모르고 있는데
요."
"난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구." "그래요? 헤에."
"가령 석 달 전에 당신이 운전하고 있던 자동차가 유치원에서 돌아가는 계
집애를 치어죽인 사실도 말야." 면도칼을 든 싱끼찌의 손이 공중에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눈 밑에 있는 사나이의 얼굴이
갑자기 이상하게 부풀어올라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죽었어."
사나이는 즐거운 듯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 사고 뒤에 열심히 신문을 읽었을 테니까 죽은 사실은 알고 있으렸
다?" "....." "목격자가 없어,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
데, 사실은 딱 한 사람 목격자가 있었지. 나라는 목격자가 말야. 얼굴빛이
파랗군." 새삼스럽게 경찰에 일러바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염려마소. 그
보다 빨리 면도를 끝내 달라구. 비누칠을 한 채 이러고 있으니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군."
"미안합니다." 싱끼찌는 얼빠진 대답을 하고 면도날을 사나이의 얼굴에
댔다.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다. 사나이는 싱긋 웃었다. "이봐 얼굴을 베지
말라구."
싱끼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며시 사나이의 뺨을 민다. 거칠거칠한 피부
의 느낌이 싱끼찌의 손에 전해져온다.사나이는 기분이 좋은듯 또다시 눈을
감았다.
"그 자동차는 팔아버린 모양이지?" "네" "아무래도 그편이 안전하구먼."
"손님."
싱끼찌는 손을 멈추고, 필사적인 눈으로 사나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대
체 목적이 뭐죠?" "무슨 소리지?" "날 협박하러 왔나요?" "그런 끔찍한 애
기는 그만 하자구. 그보다도 난 이발관에 오면 잠이 드는 버릇이 있단 말
야. 자고 있을 테니까 차분히 밀어 달라구." 사나이는 입을 다물었다. 싱끼
찌는 면도날을 갈면서 거울속의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도 안색이 창백
하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차분해야 한다' 싱끼찌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사나이는 경찰에 알
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지 않은가? 경찰에 알릴 작정이라면, 석 달씩이
나 놓아 둘 리가 만무하니까, 이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사나이의 목적
은 협박이 뻔하다. 싱끼찌의 머리에 예금통장의 숫자가 떠올랐다. 분명히
26만원쯤 있을 것이였다. 현재의 가게는 빌려쓰고 있기 때문에 하루 속히
점포를 마련하고자 부지런히 모우고 있는 돈이지만, 이 금액으로 사나이가
그 사고에 대해 잊어 준다면, 모두 내주어도 상관없다. 돈은 또 모으면 되
는 것이다. '그렇지만...'
싱끼찌는 언젠가 본 범죄영화 생각을 했다. 딱 한 번 공갈을 치는 범인의
영화같은 것이 있었는가? 모두 한 번 협박에 성공하면 옳다구나 싶어 수없
이 뜯어가는 것이다. 이 사나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돈 이
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일 밖에.이럭저럭 면
도도, 아이론도 끝났다.
"당신 솜씨가 제법 좋군."
사나이는 만족스러운듯 거울 속의 자기의 얼굴를 바라보고, 머리를 만져
보았다. 졸림이 가득 찼던 눈이 묘하게 생생하다. "이 일은 벌써 오래 됐겠
군?" "십 년째 하고 있죠." "그렇다면 안심야. 마음이 동요돼서 면도날로
푹 찍을 염려는 없을 테니까."
사나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한다. 싱끼찌는 잠자코 있었다. 사나이를
베어 버리고 싶어졌었기 때문이다. "좋은 솜씨야."
사나이는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의자에서 내려 거울 속의 자기 모
습을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늘 당신집으로 오기로 해야겠군." "앞으로?" "당신처럼 솜씨가 있는 사람하
곤 오래오래 사귀고 싶으니까."
사나이는 거만스러운 태도로 어깨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털고나서 "그런데
참 얼만가?" "사백 원입니다." "솜씨에 비해선 싸구먼." 사나이는 포켓에
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거기에다 <일금 4백원>이라고 적어 넣고는 싱끼찌
앞에 놓았다. "영수증이라구." 그리고는 거울 속의 자기에 반한 것 같은 자
세로 싱끼찌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자주 쓰게 될 것 같아 아예 인쇄해 뒀다네."
사나이의 말대로였다. 금액을 적는 난이 비어있을 뿐이고,<노무라이발관귀
하>와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의 두 이름이 아래위로 인쇄되어 있었다.사나
이의 이름은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름보
다도 싱끼찌는 노무라이발관이라고 인쇄된 글자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인쇄되어 있는 사실에 사나이의 강한 의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사나이는
앞으로도 수없이 싱끼찌를 협박할 작정인 것이다.
빈 난에 적혀지는 금액은 오늘 4백원이지만, 다음에는 더 커질 것이다. 그
리고 그 다음에는 더 크게...

싱끼찌는 가위에 눌려 눈을 떴다.
그 사나이가 다녀간 지도 닷새가 지났는데, 잠이 들기만 하면 영락없이 가
위에 눌려 소스라쳐 잠을 깨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았기고 세 식구가 구걸
을 하고 다니는 꿈이었다. 일어나 앉으면 온 몸이 땀에 베어 있다. 시계를
보면 12시가 가까왔다. 정작 밤중에 잠을 못자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힘들어진다. 이발사로서는 그야말로 낙제감이다. 싱끼찌는 찬 물로 얼
굴을 씻고는 흰 웃옷을 입었다. 가게로 나가자 이웃 아이의 머리를 깍고 있
던 아내인 후미꼬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이렇게 근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무리? 난 아프지 않다구." "그래도 요즘 밤에 땀을 흘리고 있잖아요?"
"애기아버지 어디 아픈가요?" 어린애를 따라온 모친이 싱끼찌의 얼굴을
본다. 싱끼찌는 억지로 웃으면서 "좀 감기를 들어놔서요." 이렇게 말했다.그
때 그 사나이가 나타났다. "어서오세요." 후미꼬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
다. 싱끼찌는 외면을 하고 있었다.사나이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싱끼
찌는 마지못해 굳은 표정으로 다가가서 "아직 안자랐어요." 이렇게 말했다.
사나이는 눈을 감자 "오늘은 면도를 좀 하려고 말이야." 이렇게 천천히 말
했다. "내가 밀어도 되지만, 일전의 당신 솜씨에 반해 버렸거든." "고
맙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후미꼬는 싱글거리고 있다. 사나이는 눈을 뜨
고 후미꼬를 보았다. "이쪽이 아주머니군" "네" 싱끼찌는 퉁명스럽게 말
하고는 의자를 쓰러뜨렸다. 사나이는 다시금 기분 좋은 듯이 스르르 눈을 감
았다.
"제법 미인이군.게다가 부지런하구." "싫어요. 미인이시라뇨?" 후미꼬는
미태를 보이고 있다. 이 사나이는 아내까지 끌어들일 작정인가? "맞벌이라
면 남아돌아가서 걱정이겠구먼?" 사나이가 말한다. 싱끼찌는 사나이의 말뜻
을 재빨리 알아채고 얼굴를 굳혔다. 맞벌이로 모우고 있으니 협박할 만한 보
람이 있다는 뜻이리라. 후미꼬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지도
않답니다." 이러면서 웃고 있다. 싱끼찌는 사나이와 아내가 말을 나누는
것에 신경이 쓰여져 뜨거워진 수건을 사나이의 얼굴에 덮었다. 이대로 수
건 위에서 눌러대고 있으면, 사나이는 죽을 것 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번
쩍였지만, 그는 천천히 수건을 벗기고 표정 없는 얼굴로 면도를 했다. 끝
나자 사나이는 전처럼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고나서
또다시 그 쪽지를 꺼냈다. "면도 값은 얼마였나?" "이백원 입니다." "양
심적인 값이군."
사나이는 추켜세우듯 말하고 펜을 달렸다. 쪽지를 받은 싱끼찌의 얼굴이
붉어졌다.
5천 2백원정. 이렇게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앞 찾집에서 기다리
지."
사나이는 싱끼찌의 귀에다 속삭이고는 거듭 거울을 보고나서 천천히 밖으
로 나갔다.
"빌어먹을!" 싱끼찌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린애의 조발이 끝나,싱
끼찌가 빠찡꼬에서 따온 카라멜을 주고 있던 후미꼬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
았다.
"왜 그래요? 당신." "아무 것도 아냐." 싱끼찌는 허둥지둥 고개를 흔드
었다. 교통사고 이야기는 후미꼬에게도 하고 있지않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애를 치어 죽여다고는, 같은 또래의 딸을 키우고있는 그녀에게 도저히
말할 수는 없었다.
"가오루는 어떻게 됐지?" "유치원이 끝나는 것은 늘 한 시가 아녜요? 아
직 열두 시 조금 지났는 걸요."
"그랬었군." 싱끼찌는 쓴웃음을 짓고나서 "잠깐 나갔다 올께." 이렇게 후
미꼬에게 말했다. 샌들을 걸치고 세째번집인 찾집으로 갔다. 가게는 텅 비
어 있고, 제일 안쪽 테이블에 그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싱끼찌를 향해 손
을 들고나서 그가 앉자 말했다.
"이 찾집은 느낌이 좋군. 앞으로는 이곳을 연락장소로 쓰고 싶은데."
"연락 장소?" "마누라 앞에선 당신 입장이 거북할 테니까. 그런데 영수증
에 적은만큼 가져왔을테지?" "갖고왔다구." 싱끼찌는 포켓에서 접은 5천
원짜리를 꺼내 남자 앞에 던졌다. 사나이는 싱긋 웃고 그 돈을 포켓에다 넣
었다.
"이제 합계 오천 육백원을 빌린게 되는군. 틀림없이 장부에 달아 둘 테니
까."
"흥! 갚아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렇게 화내지 말게나."
"당신은 그 오천원이 우리 부부한테 얼마나 큰 돈인지 알기나 하슈? 하루
종일 둘이 벌어도 오천원이 안될 때가 많다구." "그런건 나하고 관계가 없다
구." 사나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게다가 이런 잔돈푼으로 교통사고 비밀
이 지켜진다면 싸다고 난 생각하는데?" "그건 어린애가 갑자기 뛰어나왔기
때문이었고,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피할
틈이 없었다구." "그 말을 경찰이 믿어 줄까?" "당신은 목격자니까 잘 알
고 있을 게 아냐?"
"글쎄, 만일 내가 경찰에가서 당신이 스피이드를 지나치게 내고 있었는 데
다가 한눈을 팔고 있었다고 증언하면 대체 어떻게 될까?" "빌어먹을!" 싱
끼찌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그러나 사나이는 여전히 웃
고 있을 뿐이다. 그 웃는 얼굴은 너는 아무리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실례해야지." 사나이는 전표를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코오피 값은 내가 내지. 덕분으로 주머니는 두둑하고, 백원짜리 영수증을
끊는 것은 귀찮은 일이니까 말야."

그로부터 5일 후 사나이는 또다시 나타났다. 면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아내
인 후미꼬는 좋은 손님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사나이가 적은
금액은 1만 2백원이었다. 이런 식이면, 다음에 왔을 때는 곱인 2만원을 요
구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4만원으로 불어날 터이니 이렇게 가
다가는 이내 파산해 버려, 그 꿈처럼 정말 세 사람이 길거리를 헤매게 될는
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해야지...'
싱끼찌는 조바심을 했다. 그렇다고 경찰에 가서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라
는 사나이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할 수도 없다. 그런 짓을 하면 3
개월전의 교통사고건이 드러나 버릴 터이고, 그 사나이는 태연히 과속운전
이였다고 증언할 것이다. 아무래도 징역은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
기 혼자라면 교도소에 들어가도 되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다. 싱끼찌는 생각
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한가지 대항수단을 강구했다. 사나이는 3개월전의
교통사고를 미끼로 이쪽을 협박하고 있다.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사나이의 약
점을 잡아내어 상쇄하는 수밖에 방법은없다.공갈을 일삼는 인간이니까 보나
마나 전과쯤은 있을 것이다. 떳떳지 못한 점도 있을테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싱끼찌는 정기휴일인 월요일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신문에 광고가
나있던 흥신소를 간다(神田)로 찾아갔다. 이름과는 달리 막상 찾아가 보니,
지저분한 빌딩의 이층만을 쓰고 있는 작은 회사 였다. 사무실안에는 서른 서
너 살 가량의 남자가 혼자있었다. "다른 사원들은 모두 조사차 나가고 있지
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싱끼찌는 이
런 보잘것 없는 흥신소로 괜찮을까 의심하면서 "한 사나이에 대해 조사를
해주시오."
이렇게 말하자 상대방은 책상 위에 노우트를 펼치고 "신상 조사군요?" "
아뭏든 그 남자에 관한 것은 모조리 조사해 주슈." "그 사람의 이름은?"
"이기라시 고오사부로오." "예능인 같은 이름이군요. 주소는?" "그건 알
수없소." "주소를 몰라가지곤 좀 어렵겠는데요." "주소는 몰라도 그 사람이
오는 곳은 알고 있으니까 그 뒤를 미행하도록 하시죠"
싱끼찌는 이가라시가 가게에 오면 즉시 연락할 테니까 그 때는 옆에있는 찾
집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모조리라고 하셨죠?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까지 조사하면 되겠읍니까? 가령 전과유무까지 조사하라고 하나요?"
흥신소원이 이렇게 물었다. 싱끼찌는 전과라는 말에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
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뭏든 이 남자에 대한 일은 무엇이건
알려주슈." 싱끼찌가 조사를 의뢰한 다음날 이가라시가 또다시 불쑥 나타났
다. "금방 수염이 자라버렸단 말야." 이가라시는 턱을 만지면서 비어 있는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오늘은 양복 가슴포켓에 빨간 손수건을 꽂고 있다.
싱끼찌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그의 얼굴에 뜨거운 타올을
올려놓고, 그 사이에 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어제의 흥신소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싱끼찌는 "부탁하겠네."이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그가 돌아
와 타올을 벗기자 이가라시이는눈을 뜨고 "면도질하랴, 전화를 걸랴 대단히
바쁘구먼." 이렇게 위로인지 비꼬임인지 모르는 투로 말했다. "부탁한다니,
뜻깊은 전
화구먼?" "친구한테 돈을 꾸어달라고 한 거라구. 당신한테 뜯기는 통에 말
야."
"낡은 수라구." "뭐가?" "내 동정을 끌려고 해봤자 헛일이라는 거지. 게
다가 나는 당신한테 아직 일만 오천 팔백원 밖엔 꾸지 않았어. 단 세 식구
에 맞벌이라면, 적어도 이삼십 만원의 저금은 있을 거란말야. 그러니까 친
구한테 돈을 빌린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싱끼찌는 대답을 않고 면도칼을 갈기 시작했다. 우정 위협하듯
썩썩 소리내어 갈았지만, 이가라시이는 기분좋게 눈을 감은 채였다. 전화의
상대방을 친구가 아니라고 꿰뚫은 것은 빈 틈 없는 사나이지만, 설마 흥신소
원이었다고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사나이의 약점을 잡을 수만 있
으면, 꼼짝못하게 해줄테다. 1만 5천 8백원도 되찾아 보이겠다. "오늘은 아
주머니가 안보이는군."
눈을 감은 채 이가라시가 묻는다. 싱끼찌는 면도칼을 들고 다가서면서 말
했다.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구. 교대로 식사를 하고 있지." "그게 맞벌이의 괴
로움이구먼?" "이것 봐. 협박을 당하는 것은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구. 이
일에 마누라나 딸을 끌어들이면 그 땐 당신을 죽여 버릴 테야." 싱끼찌는 사
나이의 눈 위에서 면도칼을 움직여 보였다. 이가라시는 눈을 뜨고 싱끼찌
의 얼굴과 희게 빛나는 면도칼을 번갈아 보았다. "난 협박 따읜 한 일이 없
다구. 당신하테 그저 돈을 빌리고 있을 뿐이지. 영수증도 꼬박꼬박 주고 있
단 말야." "돌려줄 생각조차 없으면서." 싱끼찌는 씹어배앝듯이 말했으나,
이가라시는 어느세 눈을 감아 버리고 있었다.
"속히 좀 해줬으면 좋겠군." 면도가 끝나자 이가라시는 당연한 것처럼 그
영수증에다 2만 2천원이라고 적어 싱끼찌에게 내밀었다. "그 찻집에서 기다
리라구."
싱끼찌는 외면을 하고 말했다. 그는 우정 시간을 끌다가 찻집으로 갔다.여
전히 손님이 없었고, 입구께에 흥신소원이 신문을 펼치고 앉아 있었다.싱끼
찌는 그옆을 지나 안쪽에 앉아있는 이가라시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선 채로
만원짜리 두 장을 이가라시 앞에 던졌다. "그걸 갖고 속히 꺼지라구. 당신
얼굴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난단말야."
"그렇게 싫어하지 말라구.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귀고 싶으니까."
이가라시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신소원은 싱끼찌에게
눈짓을 하고 이가라시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흥신소로부터의 보고는 좀체
로 오지 않았다. 사흘째에서야 전화연락이 왔고, 두 사람은 찾집에서 만났
다.
"이가라시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은 모조리 알아냈지요." 흥신
소원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고는 가방에서 얄팍한 보고서를 꺼내 싱끼
찌 앞에 놓았다. 싱끼찌는 그것을 받고 말했다. "직접 말해 주는 게 좋겠군.
이가라시란 대체 어떤 인간이지?" "나이는 오십삼 세, 영화배우, 아니,전에
배우였다고 말하는게 정확할겝니다."
"배우?" "텔레비에도 몇 번 나온 일이 있죠. 그렇지만 영화의 경우도,
텔레비의 경우도 단역뿐입니다. 인상이 나빠,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라든
가, 공갈자 같은 역이 많았던 것 같아요." "공갈자라?" 영화나 텔레비에
서 하고 있던 역을 이번에는 직접 하고 있단 말인가? 거울 속의 자기 얼굴
을 자주 들여다 보던 사실도 이해가 간다. 배우였을 때의 버릇일 테지.
"연기가 신통치 않아, 차츰 영화에서도 텔레비에서도 역을 주지 않게 됐
고, 지금은 전혀 출연 교섭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럼 돈이 궁하겠군?"
"수입은 제로인 데다가 달리 재주가 없으니까요." "가족은?" "나이가
훨씬 아래인 부인하고 대학에 갓 들어간 아들이 하나 있죠." "수입은 없는
데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있단 말요?"
"부인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생활이 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싱끼찌에게 있어서는 나쁜 연락 이였다. 수입이 없이 외아들을 대학에 보
내고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처럼 잡은 싱끼찌
라는 돈줄을 좀처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전과
는?" 약간의 기대를 걸며 물었으나 흥신소원은 "없읍니다. 전에 그와 같이
일한 사람들을 만나 알아 봤는데,그사람은 악역전문이였지만 기막히게 사람
이 착해, 나쁜짓이란 절대로 못한다고 입을모아 말하던 걸요." "그 놈들의
눈이 어떻게 된 거야."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뇨."
싱끼찌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막히게 착한 사람이라구?'
보나마나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돈이 없어진 순간에 갑자기 악인으로 탈바꿈했는가? 어쨌거나 싱끼
찌에게 있어서는 늑대로 밖에 안보인다. 피에 주린 늑대다. 전과가 없다면,
반대로 그 늑대를 위협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전과는 없는지 모르지만, 소문
은 어떻소? 나쁜 소문은 없었나?"
"전혀 못들었는데요. 영화를 좋아했지만, 재능이 없는 게 치명상이었다,
이게 유일한 비판이였으니까요. 아 참, 그리고..." "그리고라니?"
"오늘밤 영화에 이가라시가 나옵니다.<악인들을 죽여라>라는 십년전의 영화
인데요." 보고는 그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조사비로 1만원을 빼았겼다. 상
대방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수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협박
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 사나이가 찾아
와서 돈을 요구하면, 이제껏처럼 순순히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날밤 싱끼찌는 혼자서 텔레비의 심야영화를 보았다.오래된 영화였다.배
역의 마지막께에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영화는 전
형적인 활극물이었다. 주연남배우가 거리를 지배하는 깡패들을 모조리 쓰러
뜨리고 주연여배우인 꽃파는 처녀와 맺어진다는 껄렁한 내용이다. 이가라시
의 역은 꽃파는 처녀를 협박하는 악덕고리대금업자였다. 차용증서를 미끼로
자기의 첩이 되라고 강요한다. 과연 서투르기 짝이 없는 연기였다. 여주인공
역인 여배우쪽도 서툴러, 두 사람의 연기는 영락없이 만화 였다. 이가라시
는 그 뒤에 이내 조무라기 깡패에게 살해되어 버리거니와,싱끼찌는 따
분해져서 텔레비를 꺼버렸다. 흥신소원의 말대로 서투른 배우이다. 영화에
서도, 텔레비에서도쫓겨나게된것은당연한노릇이라고생각했다.그러나 방법은
서투르지가 않다. 배우로서는 낙제드라도 진짜 공갈자로서는 가히 일품이
다.
또다시 닷새가 지나갔다.
오늘쯤 이가라시는 또 올것이다. 그리고 전의 곱인 4만원을 요구할지도 모
른다. 싱끼찌는 각오하고 가게에 나와 있었으나, 낮이 지나고 저녁 때가 되
어도 이가라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밤이 되어 8시에 가게를 닫았는
데, 그 때까지도 이가라시의 부은 것 같은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차를 마시고 석간을 펼쳤다. 그리고는 깜짝놀랐다.사회면에서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의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린애를 살리려고 노인 부상>
그것이 제목이였다. 기사에 의하면, 행길로 뛰어나간 어린애를 구하려고
때마침 지나가던 이가라시가 자동차 앞으로 뛰어나가다가 다리에 부상을 당
했다는 것이다. 어린애는 무사하고, 다리에 붕대를 감은 이가라시가 어린애
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정신없이 뛰어나갔는데, 어
린애가 무사해서 다행이였다. 누구나 하는 일을 한 것뿐이죠." 이것이 이
가라시의 이야기였다.
싱끼찌에게는 신문에 나있는 이가라시가 그를 협박하고 있는 사나이와 동
일인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상태였는지, 보고 있지 않았
던 싱끼찌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동차 앞으로 뛰어 나갔다는 것이니
까 깔려죽을 위험도 있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를 살리고자 죽음
의 위험을 무릎쓰고 뛰어드는 사나이와 태연히 싱끼찌를 협박하는 사나이
와, 도대체 어디서 연결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는 그
사나이였다. 동명이인은 아니다. 게다가 사고가 있었던 장소로 보아 이가라
시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이였던 것이다. 협박하러 오는 도중에 목숨을 걸고
어린애를 살린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신경일까? 싱끼찌는 이가라시라는
사나이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모르는 가운데에 한 가닥 희망을 찾아
내려고 했다.
'혹시 그는 갑자기 선심으로 돌아와 어린애를 살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협박도 중지해 줄는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다음다음날 오후가
되어, 싱끼찌는 그것이 덧없는 희망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가라시가 다리
를 절면서 여느때처럼 가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저께 사고로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
냐?"
여전히 면도를 시키면서 이가라시는 낮은 소리로 비꼬았다.
"그렇지만 난 이렇게 멀쩡하지. 미안하구먼." "언제까지 내게 달라붙을
작정이지?"
"일생 동안이라고 해둘까.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일생이라구?"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싱끼찌는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다.
곁에서 젊은 남자의 머리를 깍고 있던 후미꼬가 놀란 듯이 돌아보았기 때문
이다.
"아무 것도 아냐." 싱끼찌는 후미꼬에게 말했다. 이가라시는 눈을 감고 싱
글거리고 있다. 그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싱끼찌는 가까스로 참았
다.
면도가 끝나자 이가라시는 마술사가 비둘기를 꺼내는 것 같은 제스처로 그
영수증을 포켓에서 꺼내자 <4만 2백원정> 이렇게 적어넣고 싱끼찌에게 내밀
었다.
"4만" 두배를 요구할 것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싱끼찌의 안색이 변
했다.
"그런 돈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나?" 후미꼬는에게 신경을 쓰면서 그는 낮은
소리로 말하고는 이가라시를 노려보았다. 이가라시는 졸린 것 같은 눈으로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아직 두 시라구." "그게 어쨓다는 거야?"
"은행은 세 시까지 열려 있다, 이 말씀이지." 이가라시는 싱글거리고나서
"그럼 그 찾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싱끼찌
는 노여움보다도 절망을 느꼈다. 협박이란 한 번 맛이 들리면 계속되게 마
련이다. 동시에 요구액은 마구 불어나는 법이다. 다음에는 보나마나 8만원을
요구할 것이다. 후미꼬 몰래 저금을 찾아내서 4만원을 이가라시에게 주기는
했지만, 싱끼찌는 더이상 견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경찰에 갈 수는 없
다.이렇게 되면 남은 수단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가라시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날 밤늦게 싱끼찌는 다짜고짜 "이사를 합시다."
이렇게 후미꼬에게 말했다. 후미꼬는 멍청해져서 물었다.
"왜요? 이제서야 단골도 제법 생겼는데." "아뭏든 이곳이 싫어졌다구. 견딜
수 없을 정도야." "가오루 문제는 어떻하죠? 유치원도 옮겨야 할 테구."
"당신이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여기서 나가겠어." 싱끼찌는 소리쳤다. 후
미꼬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다른 데로 옮겨도 돼요. 하지만 한
마디만 묻겠어요."
"뭐야?" "이번 일, 그 자주 오는 쉰 두어 살 된 손님하고 관계가 있죠?"
"그 사람하곤 상관 없는 일이야." 싱끼찌는 얼굴을 돌리고 배앝듯이 말했
다. 후미꼬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세 식구가 이튿날로 당장 도오꼬오
변두리로 옮겼다. 정작 도오꼬오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싱끼찌도, 후미꼬도
도오꼬오 태생이어서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달리 기
술이 없는 싱끼찌는 이발관 간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럭저럭 가게도 정
리가 되어, 후미꼬가 가오루를 새 유치원으로 데리고 간 날, 싱끼찌는 가게
의자에 맥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26만원 있었던 저금도 이가라시에게 빼았기
고, 이번 이사 통에 써버려 거의 없어졌다. 또다시 한 푼 두 푼 모아야 한
다. '언제나 셋집이 아닌 내 집과 가게를 갖게 될것인가?' 모두가 이가라시
라는 남자 탓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입구에 인기척이 났다. 그는 반사
적으로 돌아보고 "어서 오싶쇼." 이렇게 웃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웃음은
퍼지지를 않고 중간에서 얼어붙어 버리고말았다. "굉장히 찾았어, 이 사람
아." 이가라시는 좁은 가게안을 힐끗거리며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싱
끼찌는 잠자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여움으로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가라시는 그런 싱끼찌의 심정을 무시해 버리고 빈 의자에
앉더니 "전처럼 면도를 부탁하겠네." 이렇게 느릿느릿 말했다. "그 영수증
도 갖고왔으니까." "자아, 이 사람아, 빨리 해치우자구."
이가라시의 말에 싱끼찌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내려 타월찌는 용기 쪽으
로 갔다. 굳어진 얼굴로 타올을 꺼낸다. 기계적으로 이가라시가 앉아 있는
의자를 쓰러뜨리고 눈 밑으로 온 거무죽죽한 얼굴에 뜨거운 수건을 얹었다.
타올을 벗기자 이가라시는 웃으면서 싱끼찌를 올려다 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군." 놀리듯이 이렇게 말한다.
"병이 난 것이라면 속히 고쳐야지. 당신은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란
말야."
"잠자코 있어 줘." 싱끼찌는 우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면도칼을 손
에 들었으나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간신히 만났는데 그렇게 화를 낼 거야
없잖아?" 이가라시는 즐거운 것 같았다.
"기뻐해 달라구. 앞으로는 계속 사귀고 싶으니까." "잠자코 있어 줘." 싱
끼찌는 뒤틀린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잠자코 있어 달라구. 부탁이야." "좀 웃으면 어때? 손님한텐 상냥하게 대하
는 것이 장사의 요령 아냐?"
이가라시는 웃고 있다. 싱끼찌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겨드랑밑에 땀이
배어왔다.
"가만히 있어 달라는데 모르나?"
"그렇게 쏘아대지 말고 좀 웃어 보라니까. 난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구,"
"시끄러워!" "그것 참 굉장히 겁을 주는군. 아하, 그렇구먼. 오늘이 당
신이 죽인 여자애 명일(命日)이였구나? 그래서 기분이 언짢다, 이 말씀인
가?" 문득 싱끼찌의 귀에 이가라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가라
시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싱끼찌
의 눈 밑에서 이가라시의 입이 우물우물 움직이고 있다. 푸르스름하게 늘어
진 피부가 삐끗삐끗 움직이고있다. 그것은 추악한 연체동물처럼 보였다. 보
기 흉하고 기분나쁜 생물이다. 싱끼찌의 착란한 머리가 어렸을 때 뭉개죽인
배추벌레를 연상시켰다. 이것은 그 버러지다. 뭉개버리면 파란물이 나오는
진드기다. 보기흉한 버러지는 밟아죽여야한다. 나이프로 동강을 내버려야
한다. 푸르죽죽한 버러지는 싱끼찌의 눈 밑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싱끼찌는 손에 든 면도칼을 힘있게 들어올렸다. '자아, 벌레를 죽이는 거야.
그 징그러운 배떼기를 나이프로 푹 찢어죽이는 거야.' 갑자기 <끼악!> 하는
기막힌 비명이 들리고, 싱끼찌의 눈 앞이 시뻘개졌다. 싱끼찌의 어렸을 때
의 세계가 느닷없이 꺼져 버리고, 현실의 세계가 되살아났다. 싱끼찌의 손에
서 벗어난 면도칼이 이가라시의 흰목에 깊이 박혀 있었다. 선지피가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넘치고 있었다.싱끼찌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랐다. "살
려 줘!" 싱끼찌는 목쉰 소리로 외쳤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피는 연거푸
쏟아나오고 있었다. 이가라시의 얼굴은 어느새 흙빛이였다. "웃..." 갑자기
이가라시가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움,직,인,탓,이,라,고,말,하,는,거
야..."
이 말만이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그것이 이가라시의 마지막 말이였다. 싱끼
찌에게는 그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협박자인 이가라시가 목숨을 걸고
어린애를 살린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피는 여전히 흘러나오
고 있었다. 그러나 이가라시 고오사부로오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싱끼찌는
처음 살인용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용의내용은 이내 업무상중과실치사로
바뀌었다. 경찰은 살인의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찰이 오기 전
에 이가라시의 포켓에 있던 영수증은 불테워 버렸으니까,어디로 보나 이발관
주인과 단골손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목을 면도하고 있을 때 그 손님이 갑자기 목을 움직이는 바람에."
이렇게 싱끼찌는 말했다. 그러면서 이가라시의 마지막 말을 생각해내고 있
었다.
"내가 움직인 탓이라고 말하는 거야." 이렇게 분명히 그 사나이는 말했다.
다 죽어가는 판에 그 협박자는 왜 그런 상냥한 말을 한 것일까? 싱끼찌에
대한 판결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이였다. 싱끼찌 자신 형량의 가벼움에 깜
짝 놀랐을 정도였다. 물론 영업정지 였으나, 싱끼찌에게 있어서는 그쪽이
고마웠다. 만일 영업이 용서되었댔자
흘러나오는 피가 눈 앞에 어른거려, 면도칼을 잡을 수 있을리가 없었기 때
문이다.
"빈민가로 돌아가 막일이라도 할 테니까." 이렇게 싱끼찌는 말했다.
후미꼬도, 가오루도 살던 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했다. 두 번째 이사
를 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는데 웬 중년여인이 찾아왔다. 낯선여자였는데 "이
가라시의 처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싱끼찌의 안색이 달라졌다. "밖에서 듣기로 하죠."
싱끼찌는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후미꼬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알리
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싱끼찌는 창백한 얼굴로 기모노 차림의 여자를
보았다.
"내가 주인을 죽였다고 말씀하시러 오신 겁니까?" "아아뇨." 부인은 천천
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무슨 일로?" "주인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당신
앞으로 된 유서가 나왔기에 가지고 온 것입니다." "유서라구요?" "네"
여인은 두툼한 봉투를 싱끼찌에게 넘겨주자 이내 사라졌다. 그 봉투에는 분
명히 <노무라 싱끼찌님에게 드리는 유서>라고 적혀 있었다. 싱끼찌는 당장
봉을 뜯었다.

언제 당신에게 살해될지 모르므로 이 유서를 적어 둡니다. 나는 바보 같은
배우였읍니다. 단역 밖에는 못받는 데다가 그 단역 역활마저 제대로 못한 배
우였읍니다. '였읍니다' 라고 쓴 것은 현재의 나는 영화에서도 텔레비에서
도 부르지않는 가엾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3세의 내게는 배우 말고는 그
나마 할 일이 없읍니다. 그배우의 길마저 끊겨 버렸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 것이지요. 물론 나 혼자라면 자살이라도 하면 그것으로 만사 끝장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아내도있고,대학에 갓 진학한 아들이 있읍니다. 죽더라도 하
다못해 목돈을 남겨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5백만원짜
리 생명보험에 들어있읍니다. 5백만원이 있으면 아내와 아들도 그럭저럭 살
아나갈 수 있을 겝니다. 문제는 자살로는 생명보험이 안나온다는 것 입니
다.운수사납게도 내 몸은 간장이 조금 나쁜 것 외에는 매우 건강합니다.
자연사나 병이나서 죽기를 기다리다가는 우리 세식구는 굶어죽게 됩니다.
이렇다면 남는 것은 사고사거나, 누구에게 살해되는 도리 밖에 없읍니다.
그런 때 당신의 사고를 목격한 것입니다. 기억해 둔 차넘버로 당신이 이발관
을 차리고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당신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당신
을 협박해서 궁지에 몰아 넣으면 아마 나를 죽여 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실행에 옮기기까지 석 달이 걸렸읍니다.알지도 못하는 당신을 나를위해 이용
한다는 사실에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을 치고 뺑소니를 친
나쁜놈이니까 이용해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읍니다. 또, 한 가지 이
유는 내 연기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였읍니다. 나는 워낙 얼굴이 험상스러
워, 영화에서건, 텔레비에서건 악역만 맡아왔는데, 본시 연기가 서툴러 비
웃음만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협박해 보았자 상대를 안해 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망설였던 것입
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갈이라는 것을 연구했읍니다. 당신은 실소(失笑)
하는 대신 안색을 변하는 것이었읍니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노릇입니
다. 30년 가까운 배우생활 동안 한 번도 만족할 만한 연기를 못해 본 내가
배우가아닌 지금 연기로 성공했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악인이 아니라, 평
범하고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때 나는 괴로워졌읍니다. 어린애를 살리
고자 차 앞으로 뛰어든 것은 그 탓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애를 살리
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죽이기 위해서였읍니다. 그 때 죽었다면 보험회
사는 설마 내가 자살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하지만 운수좋게,
아니, 재수없게 나는 죽지를 못했읍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별 수없이
당신한테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협박하면서 요구액수
를 곱으로 늘려나갔읍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나에 대한 증오도 배가
(倍加)해 갈것이라 계산한 까닭입니다. 이윽고 당신은 나를 죽일 것입니다.
당신이 손에 든 면도칼이 내 목숨을 끊을 때, 나는 만족하며 죽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5백만원의 돈을 이제껏 나를 위해 고생해온 아내와
아들에게 남길 수 있다는 만족감 입니다. 또하나는 최후에 와서 기막힌 연
기를 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끝으로 당신에게
뜯어낸 돈을 동봉해둡니다.
일금(一金) 七만 六천 貳백원정(그 중 이발료 1천 2백원).
- THE END




무서운 少年


by 森村誠一 (Morimura Seiichi)

사가라 마끼꼬는 슈우퍼 마아켓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등골이 서늘해
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느때는 식료품 사입을 가정부한테 맡겨두고 있었지만, 그날은 그녀의
공휴일이라 외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끼꼬 자신이 오래간만에 찬거리를 사
러 나온 것이다.
슈우퍼에서 집으로 향하는 도중 왕복 차량이 두 대가 다닐 수 있는 너비의
도로를 횡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택가 한복판을 꿰뚫는 도로이거니와, 포
장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차들은 어지간히 빠른 속도로들 달리고 있다.
앞쪽 도로 곁 보도에 대여섯 명의 애들이 모여 있었다. 국민학교 4,5학년
쯤 되는 아이들이다.
'우리 마사오하고 비슷한 나이또래군.'
마끼꼬는 속으로 자기의 아들과 비교하면서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를
앞지르고 한 대의 승용차가 달려갔다. 차가 아이들 가까이까지 다가갔을 ㄳ
느닷없이 한 아이가 자동차 앞으로 뛰어나왔다.
'위험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은 그녀 앞에서 차는 급브레이크를 걸었
다. 차바퀴와 노면이 맞닿는 불길한 소리.
"임마! 위험하잖아?"
운전사가 아이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무사했단 말인가? 잔뜩 겁을 집어먹
고 눈을 뜨니, 뛰어나온 애는 길 반대편으로 무사히 건너가 입장이 난처한
듯 울고 있다.
운전사도 상대가 어린애이고 보니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달려
갔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을 누르며 마끼꼬는 주의를 주었다.
"아, 마사오군 아주머니군요?"
아이들 속에서 이렇게 말을 걸어온 자가 있었다. 보니 마사오와 같은 학년
의 오오노 소오이찌라는 아이였다.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애였다.
"어머, 오오노군."
"아줌마, 놀랐나요?"
"그럼, 깜짝 놀랐다구. 심장이 멈추어지는 줄 알았지."
"지금 그건 <가로지르기장난>이라는 거예요. 요새 굉장히 유행하고 있다구
요."
"가로지르기장난이라구?"
"자동차가 아주 가까운 데까지 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앞을 가로지르
는 거라구요. 차 제일 앞쪽을 가로지른 놈이 일등이 되는 거예요. 지금 가
로지른 나까다군은 그 짓을 못해서 비겁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방금 그렇
지 않다는 걸 여러 사람 앞에서 증명해 보인 거라구요. 역시 체조박사라
하면 잘 한단 말야."
나까다군은 체조솜씨가 뛰어난 애였다.
"어머나, 기막한 장난들을...."
마끼꼬는 너무나 놀라와 잠시 멍하고 있었다. 우리집 애도 이런 위험한 장
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앞으로 절대로 안돼요. 가로지르기장난 따위 야만인 같은 짓이야. 그런
짓 못해도 조금도 비겁하지 않아요. 만일 또다시 그런 짓하면, 선생님한테
일르겠어요."
"왜 나빠요? 우리 용기를 시험해 보고 있는 거라구요."
오오노 소오이찌는 마끼꼬를 불만스러운 듯이 노려보았다. 힘께나 쓰는 애
로써 클라스의 망나니였다. 부친은 마끼꼬의 남편 사가라가 경영하는 회사
의 수위로 일하고 있다.
"용기는 그런 짓으로 시험하는 게 아네요. 만일 말을 안들으면, 아버님한
테 일르겠어."
소오이찌의 겁 없는 시선은 누그러졌다. 그는 엄한 아버지가 질색인 것이다.
"마마, 왜 그래?"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보니 아들인 마사오가 싱글거리며 서
있다. 최근 다니기 시작한 피아노 렛슨에서 돌아오는 도중인 모양이다. 마
사오는 오오노 소오이찌와는 대조적으로 늘 클라스의 톱 자리에 서 있다.
국민학교 시절은 공부를 잘 하는 애나, 완력이 센 애가 세도를 부린다. 강
경파인 소오이찌도 마사오에게 한 풀 꺾이고 있는 모양 같았다.
마사오는 오른손에 제법 큰 보자기꾸러미를 들고, 왼손으로 웬 허리가 굽
은 노파의 손을 잡고 있다.
"마사오, 그 할머니는?"
마끼꼬는 아들과 함께 있는 낯선 노파를 미심쩍은듯 보았다.
"어머, 이 아기의 어머니슈? 이 근처에 있는 집을 찾아오다가 이 도령한테
길을 물었더니 글쎄 데려다 주겠다고 여기까지 짐을 들어다 주지 않았겠수?
정말 친절한 아기에요. "
노파는 주름 투성이 얼굴 가득히 감사의 뜻을 띄우고 고개를 연거푸 숙였다.
"어머나. 그랬었군요? 애가 도움이 돼드릴 수 있어 저 역시 기쁘군요."
다른 아이들의 악질적인 장난을 꾸짖은 직후였던 만큼 마끼꼬는 자랑스러
운 심정이었다.
'역시 우리 애는 달라.'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아들의 선행이 거의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행해진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아, 아 자리에 학교 선생님이라도 지나가 주었으면.'
마끼꼬는 오히려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도 우리 마사오를 좀 본받으려무나'
마끼꼬는 악동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이제 알았겠지?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장난 하면 못써요."
마끼꼬는 아이들에게 못을 받아 놓고 마사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노
파와 헤어지자
"마마, 대체 왜 그래?"
마사오가 질문을 되풀이했다.
"방금 오오노군들이 글쎄 가로지르기장난을 하고 있었다구요. 마사오는 설
마 그런 장난 안할 테지?"
"마마, 그게 정말이야? 요새 유행하고 있지만, 우리 선생님이 절대로 해선
안된다고 그러셨어. 좋아 내일 학급위원회에서 말해 줘야지."
"그렇지만 그 일 때문에 오오노군이 마사오를 못살게 굴지 않을까?"
마끼꼬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그 애에게는 어린이답지 않은 음험
한 것이 느껴진다. 어른의 주의를 받고도 불만스러운 듯이 노려보던 그 겁
없는 얼굴. 그것은 국민학교 4년생의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기막한 아이가 찬바람도 쏘이지 않게 키우고 있던 마사오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무슨짓을 할는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그것보다도 잔학한 데가 있다. 그들의 잔학성은
태어나면서 지닌 그대로이다. 가장 약한 자를 언제나 따돌리고 학대한다.
어린이 세계의 서열은 어른의 사회보다도 엄하고 철저하다.
아무리 학대를 당해도 부모나 선생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뒤의 보복이 두
렵기 때문이다.
어른들 빰치는 협박이나 공갈이 어린애 세계에서는 그대로 통하고 있는 것
이다.
마사오가 설마 그런 따돌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상대가 보통
어린이의 척도로는 헤어릴 수 없는 오오노 소오이찌이고 보니 근심이었다.
"마마는 그런 근심을 하고 있수?"
마사오가 웃었다.
"하지만 오오노라는 애 무섭잖니?"
"무섭다구해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걸 보고도 잠자코 있으면 안된다구.
아무리 센 상대라도 나쁜 짓은 용서치 않는 게 용기 아뉴?"
"그래, 맞아요. 그게 참된 용기란다."
그것은 가로지르기놀이의 만용과는 질이 다른, 사나이의 참된 용기이다.
그것을 우리애가 가지고 있다. 마끼꼬는 마사오를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사
랑스럽게 느꼈다.

오오노 소오이찌가 불량소년으로 마아크된 최초의 사건은 반 년쯤 전에 일
어났다.
소오이찌가 하급생을 괴롭히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사기와 히도미라는 같
은 학급의 여생도가 선생에게 그 사실을 일렀다.
선생은 소오이찌를 불러 꾸짖었다. 그런데 그 때 그만 사가와 히도미의 이
름을 입 밖에 내고 만 것이다.
"앞으로는 하급생을 때리지 않겠어요."
소오이찌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사과했다.
며칠이 무사히 지났다. 그 며칠 뒤 사가와 히도미가 귀여워하고 있던 고양
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히도미는 어두워질 때까지 찾아다녔으나 고양이
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근처 단지(團地)에 있는 소각로(燒却擄)로 쓰레기를 태우러
간 한 주부는 아궁이 문을 열자 상자 나브랭이가 잔뜩 쳐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반드시 그 때마다 불살라 버리도록 되어 있다. 단지
의 규칙으로 야간에는 태울 수 없기 때문에 간혼 내막을 잘 모르는 입주자
가 그대로 쓰레기를 놓아두고 가는 일이 있다. 이렇게 되면 뒤에 온 사람
이 낭패를 보는 것이다.
주부는 투덜대면서도 자기가 가지고 온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불을 지폈다. 종이뿐이기 때문에 이내 불이 힘차게 타올랐다. 아궁
이문을 닫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무서운 비명이 일어났다. 이어 아궁이 안
에서 무언가 날뛰는 기척이 났다. 주부는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순간
아궁이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비명과 날뛰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동물이 산 채로 불태워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궁이는 한창 타오르
고 있는 판이라 주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참 뒤에서야 근처 사람들을 불러모아 아궁이를 가까스로 열었다. 동물성
의 알퀴한 고약한 냄새가 쏟아져나왔다. 주부들 가운데에는 가슴을 움켜쥐
고 도망치는 사람조차 있었다.
소각로 안에는 절반쯤 타다 남은 고양이의 시체가 있었다. 뗄감이 부족했
기 때문에 탄화(炭化)까지 되지는 못했다. 무참한 외형으로도 히도미의 고
양이로 판정되었다.
단지 입주자 중에 어젯밤 소각로 근처로 어슬렁대던 오오노 소오이찌의 모
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의당 소오이찌가 고양이를 잡아다가 꼼짝 못하게
잡아매어 아궁이 안에 쳐넣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난 몰라요."
하지만 그는 태연히 부정했다.
"정말 거짓말을 않고 있다면,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라구."
소오이찌는 태연히 선생의 눈을 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선생쪽이
었다.
마끼꼬는 그 사건이 생각나기에
"마사오, 오늘 학교에서 오오노군하고 나까다군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니?"
이렇게 물어 보았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요새 싸움을 한 일 없느냐구?"
"아, 생각나요."
마사오가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니?"
"오오노가 청소당번을 빼먹은 걸 나까다가 선생님한테 일렀기 때문에 오오
노 녀석 아단맞고 있었다구."
"어머, 역시 그렇구나."
"뭐가 그렇단 말야?"
"아, 아무 것도 아냐. 너 오오노하고 놀면 안된다."
"오오노하곤 반이 틀리니까 같이 놀 수 없는걸."
"같은 반이 되더라도 놀면 안돼요."
"왜 그래? 엄마."
"왜라니? 엄마 말대로 해요."
"알았어. 엄마 이상하다."
"지금 얘기 오오노한테 하면 안된다."
마끼꼬는 참으로 무서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오오노 소오이찌는 청소당번을 빼먹은 사실은 젖혀 놓고 고자질한 친구를
원망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위험하고 음흉한 보복을 하려고 한 것이다.
다행히 나까다군은 무사했지만, 만일 그 애가 차에 치이기라도 한다면, 교
모하게 짜여진 살인이 아닌가? 게다가 그것을 국민학교 4학년생이 짜낸 것
이다. 미성년인 어린
애가 범인인 이상, 설령 살인범이 드러나 보았자 책임을 추궁할 수도 없다.
오오노 소오이찌는 그것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장례가
들여다보이는 무서운 아이이다.
마끼꼬는 그날밤 마사오가 잠든 뒤, 오오노 소오이찌의 부친에 대해 남편
에게 물어보았다.
"진지한, 책임감이 강한 사나이라 일을 잘 한다구. 왜 오오노가 어떻게 됐
나?"
마끼꼬는 그의 아들인 소오이찌에 대해 이야기했다.
"좀 문제아로군.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누구나 다소 그런 잔인한 면이 있
게 마련이라구. 나 역시 개구리니 도마뱀 따위를 곧잘 해부하곤 했지. 그렇
게 신경을 안써도 아마 괜찮게 될 거야."
"개구리나 도마뱀을 죽이는 것하곤 뜻이 달라요. 그 애한텐 살의가 숨어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 사람, 살의라니 그런 오우버 센스야. 아마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그런 꼴이 돼버린 사실이 어린아이 성격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테지만 말야."
남편은 엽차를 마시면서 마끼꼬를 나무랐다. 소오이찌의 부친 오오노는 전
에 택시 운전사 였는데 충돌사고가 일어나 다리병신이 되었다. 그것을 딱하
게 생각한 마끼꼬의 남편 사가라가 자기 회사에 수위로 채용해 준 것이
다.
수위라고는해도 회사 안의 보안은 계약가아드맨에게 일암하고 있는 만큼
간단한 안내나 접수사무뿐이었다. 오오노의 입장에서는 사기라에게 채용되
지 않았으면 일가가 길거리에서 헤매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사가라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오오노의 근무상태는 매
우 양호했다.
"다른집 애 근심보다도 마사오는 어떻소?"
"그 애는 손톱만큼도 걱정 없어요. 너무 훌륭해서 되려 근심이 될 정도군요."
마끼꼬는 낮에 마사오가 노파를 보살펴 준 이야기를 했다.
"허어, 그랬었군?"
남편은 만족한 듯이 끄덕였다. 비지니스에는 수완가인 그도 외아들에게 약
해지는 것이다.

나이또오 히로시의 열대어는 유명했다. 자택에 커다란 수조를 만들어 놓
고, 엔젤휘쉬, 굿삐, 블랙 테트러, 스마트라 따위 초심가에게 맞는 열대어
를 키우고 있는데, 서어머스탓트, 에어펌프, 휠터를 설비하고, 수조 안에
는 각종 물풀을 배치하는 한편, 먹이도 생사료, 건조사료, 배합사료 등 밸
런스를 생각하며 주고 있는 실정이라, 참으로 국민학교 생도라고는 할 수
없는 취미였다.
나이또오의 클라스에서도 몇 마리의 엔젤휘슈와 굿삐를 기르고 있는데, 이
역시 그가 기증한 것이다. 먹이는 물고기당번을 정해 놓고 교대로 주고 있
지만, 아무래도 나이또오가 가장 열심히 보살피게 마련이었다.
먹이도 나이또오가 만든 것을 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물고기당번
에 약간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나이또오 히로시가 가져온 먹이보다 오오
노 소오이찌가 가져온 쪽을 물고기가 즐겨 먹게 된 일이다.
오오노의 먹이는 배합사료였는데, 시판(市販)되고 있는 것과도 달리, 그가
독특하게 배합해서 만든 모양이다. 이것을 주게 되면서부터 물고기의 발육
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클라스 아이들의 소오이찌를 보는 눈이 달라져왔다. 그의 그 때까지의 이
미지는 매우 나쁘다. 현대의 아이들은 작은 어른이며, 클라스의 등급은 완
력에서 테스트 성적으로 옮아갔다. 그저 완력만을 과시할 뿐, 테스트가 하
위의 거치른 아이는 비록 두려워들은 하지만, 클라스 전체로부터 경멸되고
소외된다.
'작은 어른의 사회'에 있어서는 테스트 성적 다음에 무언가 특기를 지난
자가 존중 받는다.
엎드려뻗쳐 운동이 가장 센 아이, 동물에 강한 아이, 곤충에 강한 아이,
마라톤에 강한 아이들이 한쪽 분야의 권위 였다.
나이또오 히로시는 물고기박사의 별명이 있을 정도로 그 분야의 권위자였
다. 그런데 오오노 소오이찌가 그 이상의 우수한 배합사료를 '발명'한 뒤
로 그의 권위인 박사호를 소오이찌에게 빼앗기게 될 판국이었다.
의당 히로시는 명예를 만회하고자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고생
해서 새로 배합한 사료를 갖다 주어도 물고기들은 오오노 소오이찌의 먹이
쪽으로 몰리는 것이다.
"오오노, 정말 근사하구나."
"그 사료, 어떻게 만들었니?"
"좀 가르쳐줘."
"오오노가 열대어 사료를 만드는 박사인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젠 오오노가 물고기박사야."
이제껏 클라스에서 소외되고 있던 소오이찌에게 갑자기 인기가 집중되었
다. 그런 모양을 히로시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고기 박사인 그로서는 그 이상의 굴욕은 없었다.
며칠 후 하교길에서 나이또오 히로시는 오오노 소오이찌를 만났다. 두 사
람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등하교때 길에서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 소오이
찌는 히로시의 뒤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나이또오, 할 얘기가 있다구."
그는 주위에 같은 클라스의 생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말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다구?"
히로시는 겁을 집어먹고 물었다. 그는 소오이찌가 싫었다. 자기의 영역으
로 침략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고, 태권도 솜씨 따위를 자랑하며 완력
으로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그에게 전부터 야만인 같은 혐오를 품고 있
었던 것이다.
이제는 국민학생의 세계에도 폭력이 활개를 칠 여지는 없어져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그짓을 하려고드는, 마치 동물적 인간을 보는 것 같은 공포
감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봐, 너한테 내가 만든 금붕어먹이를 줄까?"
"뭐라구?"
순간 나이또오 히로시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사실은 말야, 난 과히 금붕어...가 아니고, 그 열대어 말야, 흥미가 없다
구. 이 사료도 사실은 말야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이웃에 살던 대학생 아
저씨가 만들어 준 거라구. 그래서 난 만드는 법을 몰라. 그 아저씨, 이사해
버렸거든. 그래서 인제 사료를 만들어 달랠 수 없게 됐다구. 이거 다 없
어지기 전에 너한테 줄려구 가져왔어. 넌 물고기박사니까 똑같은 걸 만들
수 있잖아?"
소오이찌는 그러면서 봉투 같은 모양의 비닐 봉지에 든 사료를 내밀었다.
"정말 받아도 되는 거니?"
느닷없는 호의에 히로시는 어리둥절했다. 하기는 몇 번이나 소오이찌에게
사료를 나눠달래야겠다고 벼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프라이드
가 허락하지 않았다. 소오이찌에게 사료를 받는 것은 물고기 박사의 권위
를 버리고 전면적으로 항복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판인데 저쪽에서 받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게다가 상대방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를 노려,
말을 걸어온 것이다. 히로시는 소오이찌가 무언가 함정을 파려는 것이 아
닐까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이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구. 사료를 내가 만든 것이 아
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창피하단 말야."
소오이찌의 말투는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참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히로시는 그제서야 경계심을 풀었다.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하면 곤란한 것은 오히려 히로시쪽이다. 그런데 그것을 소오이
찌한테서 발설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야말로 안성마춤이었다.
"이렇게 많이 받아 미안한테."
"괜찮아. 난 이제 금붕어 따윈 질렸다구. 그럼 잘 가라."
"빠이빠이, 고맙다."
히로시는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그의 물고기박사로서의
권위는 유지될 것이다. 느닷없는 침입자는 히로시의 영토에 흥미를 잃고 사
라져 버렸다.
소오이찌에게 받은 사료를 참고로 해서 좀더 좋은 사료를 만들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야지. 히로시의 가슴은 저절로 마냥 부풀었다.
이변(異變)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다.
"히로시! 큰 일 났다. 물고기가 모두 물에 떠 있어."
아직 잠자리 안에 있던 히로시는 모친의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잠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는 모친의 목소리를 듣고 뛰어일어났
다.
수조 곁으로 달려가보니, 그의 보물인 열대어가 모두 배를 보이고 물 위에
떠 있었다.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
"마마! 어떻게 된 거야?"
히로시는 얼굴이 창백해서 울먹였다.
"마마 역시 모르겠어요. 히로시, 어제 뭔가 나쁜 것이라도 먹인 게 아니니?"
모친의 목소리도 겁을 먹고 있었다.
"아무 것도 나쁜 것 주지 않았다구. 언제나 주고 있는 먹이 밖에..."
그러다가 히로시는 긴장했다. 사료는 하루에 세 번 정도, 10분쯤 걸려 먹
을 수 있는 분량을 주고 있는데 어제 마지막 사료로 오오노 소오이찌한테
받은 것을 사용한 사실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나쁜 것이 섞여 있었다면, 그 사료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사료는 이제까지 학교의 물고기가 그렇게 잘 먹고 있었는데..'
그 사료와 소오이찌가 준 사료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히로시는
소오이찌의 말만 믿고 받은 것뿐이다. 그 사료 안에 만일 소오이찌가 독물
을 섞어 놓았다면?'
히로시의 머리 속에서 무서운 연상이 치달았다.
'하지만 왜 소오이찌가 그런 못된 짓을? '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히로시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괴물도감을 소오이찌
가 빌려달라고 했었다. 그 도감은 고릴러나 안기라스에서 최근의 괴수에
이르기까지, 울트라맨, 미라맨, 가면라이더 등이 항목별로 신장, 체중, 탄
생지, 무기 등의 상세한 해설이 적혀 있다. 아이들로서는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책이었다.
그러나 현재 절판이 되어 있어, 헌책가게에서라도 찾아내기 전에는 구할
수가 없다. 그것을 소오이찌는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에게 빌려주면,
언제 돌려줄지 모른다. 그에게 책이나 학용품을 빌려준 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이 숱하다.
그런 위험인물에게 자기의 보물을 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히로시는
딱잘라 거절했다. 아마 그 때의 일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런 무서운 보복
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 소오이찌가 공짜로 사료를 줄 리가 없다. 사료와 교환조건으로
도감을 빌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기분좋게 사료를 주었다.'
그 때 사료 안에 무언가 나쁜 것은 없는지 살펴봤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
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귀중한 물고기는 몰살을 당한 뒤였던 것이다.
"개자식! 오오노 새끼, 오오노 이 개새끼, 그런 놈은 뻗어 버려라!"
발을 구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히로시에게
"오오노가 어쨌길래 그러니?"
이렇게 모친이 물었다.
히로시는 어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이 문제는 그대로 넘겨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짓
치고는 너무나도 악질이다.
그녀는 마침 일어나 나온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히로시, 오오노한테 받은 사료 아직도 남아 있니?"
부친은 과연 사태를 침착하게 보았다. 그는 아들에게서 그 증거품을 회수
하자 그것을 가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서도 깜짝 놀랐다.
설마하고 생각하면서도 이과교사가 사료의 성분을 분석해 보니, 일반적인
사료에 섞여 스미치온이라는 유기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살충제로
사용되는 비교적 저독성의 농약이지만, 델리게이트한 열대어에게 사료와 함
께 주었다가는 끝장이 날 것은 분명했다.
학교측도 사태를 중시했다. 동급생의 열대어에게 농약이 섞인 사료를 주어
독살을 꾀었다는 것은 도저히 어린아이의 지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
료에 맛을 보고 주는 수도 있는 만큼, 자칫하면 사람의 입에 들어갈 염려
도 있다.
교장과 교감, 그리고 담임교사는 오오노 소오이찌를 불러 엄중히 조사했
다. 그러나 소오이찌는 태연하게 부정했다.
"난 나이또오군한테 사료 같은 것 준 일 없어요."
소오이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이또오보다 좋은 사료를 만든 게 아마 굉장히 화가 났던 모양이예
요. 그래서 괜히 거짓말을 꾸며낼 거예요."
이렇게 주장을 하고 나오니, 그가 나이또오 히로시에게 사료를 넘겨주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학교측은 부득이 아직
남아 있다는 문제의 사료를 소오이찌에게 제출케 했는데, 물론 거기에는
독물 따위는 없었다.
소오이찌는 나이또오 히로시에게 준 사료에만 농약을 넣은 의심이 농후했
지만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나이또오 히로시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오오노 소오이찌의 새로운 사료 때문에 그의 물고기박사로서의 권위가
떨어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였다. 소오이찌가 주장한 대로 히로시가 질투
하고 있었던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선생들도 난처했다. 소오이찌에 대한 의심은 농후ㄳ고, 학교측도 그의 짓
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데 경솔한 말은 할 수 없
었다.
결국 사건은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
오노 소오이찌의 '무서운 아이'라는 이미지는 선생들 사이에 정착된 것이
다.
"엄마, 어디 갔었수?"
외출에서 돌아온 마끼꼬를 뜰에 있던 마사오가 재빨리 알아냈다.
"어머, 오늘은 일찍 왔구나?"
오늘은 일주일 중에서 수업시간이 가장 많은 날이라고만 믿고 있던 마끼꼬
는 약간 놀라면서 아들을 보았다.
"갑자기 선생님 연구수업이 있게 됐다구. 마마, 어디 갔다 왔어?"
"물건좀 사러갔다 오는 길이야. 그런데 그 꼴이 뭐니? 흙 투성이 아냐?"
"무덤을 만들고 있다구."
"무슨 무덤? 이상한 걸 묻으면 안돼요."
"열대어야."
"열대어?"
그 때 마사오와 함께 구덩이를 파고 있던 친구도 이쪽을 보았다.
"어머, 나이또오군."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나이또오가 기르던 열대어가 모두 죽었잖아?"
"알고 있어요. "
'오오노군이 독을 넣었잖아? 이렇게 말하려다가 가까스로 꾹 참았다. '
"나이또오네집은 아파아트 아냐? 뜰이 있어야지. 들판에 묻는 것은 싫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집 뜰을 빌려준 거라구."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나이또오 히로시가 꾸뻑 절을 했다. 마끼꼬는 자기 아들이 친구와 물고기
를 위해 무덤을 제공해 주고 있는 상냥한 심정이 기뻤다.
"아냐. 괜찮아요. 아주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줘라."
마끼꼬는 흐뭇해서 끄덕였다.
"엄마한텐 말 안했지만."
마사오가 우물우물 말했다.
"왜 그러니?"
복도쪽으로 가려다가 마끼꼬는 멈추어 섰다.
"저어.."
"왜 그러냐니까? 정말 이상하구나. 어서 말해봐요."
외출시간이 약간 길어졌으므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의 준비에 마음이 조
급해져 있었다.
"사가와가 키우던 고양이 있잖아?"
"고양이가 어찌 됐길래?"

- 이 이야기는 무서운 소년 B에서 이어집니다.




무서운 소년 B

by森村誠一(Morimura Seiichi)


분명히 그 고양이도 오오노 소오이찌가 태워죽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지껏 말 안했지만, 그 고양이도 여기다 묻어 줬다구. 사가와네집도 아
파아트기 때문에 내가 무덤을 제공해 준 거야."
"어머나?"
"엄마, 잠자코 있어서 미안해. 하지만 고양이는 기분나쁘게 생각할까 봐
서, 그랬어."
"좋아요. 용서해 줄게. 그렇지만 앞으로는 엄마한테 얘기해야 돼요. 그런
데 참 고양이 옆에 물고기를 묻으면, 먹히지 않겠니?"
"정말 그렇구나? 하지만 조금 떼어놓고 묻었으니 괜찮을 거야."
"다 묻고나거든 간식을 먹으러 와요. 손을 잘 씻고 말야."
고양이를 묻었다니 약간 기분이 언짢지만, 마끼꼬는 흐뭇한 심정으로 방으
로 들어갔다.

열대어소동이 있은 지 석 달 가량이 지났다.
해가 바뀌자 겨울형 기압배치의 날이 이어져, 간또오지방의 비 한 방울 안
온 날은 60일이나 넘게 되었다. 공기는 너무나 건조해져 매일같이 화재가
발생했다. 그것도 하루에 몇 건씩 발생한다. 공기의 건조상태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느낌마저 들을 정도였다.
방 안을 걸어다니기만 해도 몸에 정전기가 축적되어, 금속에 닿을 때마다
퍽하고 방전한다. 몸에는 비록 해롭지 않다고는 해도 기분나쁘기 짝이 없
다.
마끼꼬가 살고 있는 지역은 도심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사철연선(私鐵沿
線)으로서, 2,3년 전만 해도 아직 무사시노(武藏野)의 모습이 남아 있었지
만, 최근에는 단지나 공장이 진출해 들어와 시가지로서 나날이 발전해가
고 있다.
이 지역에도 이상건조 때문에 매일 화재가 일어나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었다. 일단 불이 나면, 건물이 건조해 있어,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버린다. 소방차가 달려올 무렵에는 볼길의 확대를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민들은 불을 내면 마지막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주민들의 불안에 기름을 뿌리는 것 같은 악질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 다섯집에 각기 엽서가 배달되었다. 거기에는 국민학교 생도가 쓴 것
같은 유치한 글씨로 <화재를 위안합니다.>라든가, <불조심>이라든가, 혹은
<불씨에 부디 조심하시라>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글귀로 보건데 흔히 있는 화재위안이거나, 화재예방을 강조한 엽서이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다. 처음에는 엽서를 받은 사람들도 과히 신경을 쓰
지 않았다. 누군지 이상건조하의 주의를 강조하는 것 정도로 예사로 넘겼
다.
그런데 그로부터 2,3일 간격으로 같은 내용의 엽서가 연거푸 배달된 것이
다. 사람들은 그제서는 이상히 여겼고, 공연히 불안해졌다. 연일 화재가
일어나고 있는 판국이라 주민들이 불안히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지?"
특히 <화재발생을 위문합니다.>라는 엽서를 받은 사람들의 불안은 컸다.
이 말은 결국 현실적으로 불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
인가?
"이것은 불을 질르겠다는 예고가 아닐까?"
이런 불안을 품게 될 사람들은 그 엽서를 경찰서로 가지고갔다. 경찰도
장난치고는 지나치게 악질이라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소인의 발신지는 이 지역 관할우체국이다. 만일 범인이 우정 이 지역까지
와서 부친게 아니라면, 근처사람의 소행이라는 것이 된다.
이어 필적이 문제가 되었다. 매우 유치한 필적인 데다가 오자가 두 개나
있었다. 필적을 속이고자 특히 글씨를 바꾸어 쓴 상황은 엿보이지 않는다.
필적전문가 역시 이렇게 감정했다.
"국민학생이 쓴 것 같은 글씨인데, 혹시 정말 국민학생이 쓴 것인지도 모
른다."
이런 추측이 생겨났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치한 오자도 납득이 간다. 엽
서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없는가가 조사되었다.
그 결과 엽서를 받은 집의 애들이 모두 같은 국민학교 4학년생이며, 같은
학급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간단하다.
엽서의 글씨가 그 클라스 전생도의 필적과 비교되었다. 글씨는 오오노 소
오이찌가 쓴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오오노가 불리웠다. 아직 열 살 짜리 국민학교 생도인 만큼 취조도 신중하
다.
그러나 소오이찌는 태연하게 요즈음 화재발생이 잦아, 동급생의 집에 주의
를 환기시키고자 엽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럼 왜 네 이름을 적어넣지 않았지?"
"여자애들 집이기 때문에 창피해서 그랬어요."
"왜 몇 번씩 보냈지?"
"매일 불이 일어나 근심이 돼서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할려구요."
이렇게 되고 보니, 상대가 어린아이기도 하고, 악의의 증명이 힘들었다.
엽서의 글귀로 보건대도 극히 흔한 화재위안편지라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
다.
오오노 소오이찌는 평소 호의를 품고 있던 여생도에게 자기의 호의를 암시
하기 위해 엽서를 보냈다는 것이다. 좀 조숙하기는 하지만, 국민학생의
의사표시로서는 충분히 생각될 수 있는 일이였다. 그것에서 협박의 고의를
찾아내기란 지난(至難)한 일이다.
또한 가령 협박이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당자는 16세 미만이므로 형사처분
을 받지 않는다.
"만일 오오노가 이 만한 법률지식을 알고 협박한 것이라면, 정말 대단하
군."
"설마하니 그렇기야 할라구. 국민학교 사학년짜리야. 우리집에도 같은 나
이의 꼬마녀석이 있지만 매사에 아직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구."
"여생도한테 보내는 러브레터 대신 화재위문편지를 보냈다니, 정말 무서운
애구먼."
범인은 판명되었으나, 경찰은 범죄의 존재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5명의 여생도가 선생에게 호소했다.
"오오노군은 우리보고 이과 노우트를 빌려달라고 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빌려주면 안돌려 줄 것 같아, 주지 않았어요."
"오오노군은 아마 그 일 때문에 그런 장난을 한 거예요."
여기에 협박의 동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쩌는 수가 없었
다. 여생도들은 모두가 그 학급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었다. 그녀들의
노우트는 다른 남생도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오오노 소오이찌가 그 사실에 대한 보복을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을 화재위문편지와 연결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뭏든 이 사건으로 선생이나 학부모들은 오오노 소오이찌에 대해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애는 악의 천재야."
어떤 선생은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멀잖아 기막힌 사건을 일으키겠는걸."
학교측은 마치 폭탄이라도 안고 있듯이 오오노 소오이찌를 대하고 있었다.

"앞으론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 없다구."
땀을 비오듯 쏟으며 서로 엉켜 만족을 나눈 몸에서 땀과 쾌감의 여운이 가
신 뒤의 나른한, 그러나 도취에서 깨어난 목소리로 마끼꼬는 말했다. 암컷
의 욕망을 채운 뒤에는 이내 모친과 아내로서의 의식이 되살아났다.
"왜요? 주인이 눈치를 챘나요?"
행위가 끝난 뒤에도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마끼꼬의 풍만한 젖가슴을 만
지작거리고 있던 사나이가 물었다.
"그게 아네요. 마사오를 속일 수 없게 됐다구. 얼마 전까지만해도 내 가슴
에 매달려 있던 아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근래 갑작스럽게 어른스러워져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니까. 일전에 당신을 만나고 돌아갔을 때도 마마, 요즘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어, 이러는 통에 깜짝 놀랐다구."
"별다른 뜻 없이 말했을 거예요."
남자는 이 여자가 갑자기 자기에게서 물러서 버린 경우의 일을 생각했다.
이제껏은 이 맛 있는 육체가 찾으면 찾는 그만큼 얼마든지 기분좋게 주어
졌다. 무료는 고사하고 실컷 먹고난 뒤 그쪽에서 용돈까지 주었다.
"그렇치않아. 그 애 분명히 이상히 여기고 있다구. 어디 갔었느냐구 꼬치
꼬치 캐묻는다니까. 슈우퍼나 미장원 핑계로는 안통한다구. 얼마 전에도 미
장원에 갔다온다고 했더니, 헤어스타일이 똑같다는 바람에 가슴이 내려앉
을 정도로 놀랐지 뭐야?"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구요."
사나이는 어떻게 해서든 마끼꼬의 불안을 씻어 주고 싶었다.
"난 말야, 마사오가 당신과 내 관계를 아무래도 눈치채고 있는 것같이 여
겨져. 그래서 도무지 불안한 거라구."
"온, 별 말씀을. 국민학교 사학년짜리라구요."
"전엔 남편 앞에서 흔히 당신 얘기를 했었는데, 근래에 와선 전혀 한 마디
도 않게 됐다구. 부자연스럽잖아? 똑똑한 애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린애란 금새 싫증이 나버리게 마련이라구요. 마사오군한테는 난 이미
과거의 인간이니까요. 그보다도 부인, 한 번만 더 해도 되잖아요?"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남자는 욕망이 부채질된 모양이다. 마끼꼬의 가
슴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오늘은 안돼. 슬슬 가봐야 한다구. 오늘은 마사오가 일찍 돌아오는 날이
야."
"곧 피아노를 배우러 갈 게 아닙니까?"
"오늘은 선생이 여행을 가서 쉬는 날이라구요. 그래서 다른 날 보자고 했
더니, 당신이 도통 말을 안들어 주잖아?"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앞으론 너무 고집부리면, 그만 작별인사를 해야 된다구. 아뭏든 오늘은
이제 그만이야."
마끼꼬는 사나이에게 틈을 주지 않고자 침대에서 빠져나오자 돌아갈 채비
를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사나이의 몸 밑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던 요염한 여인
의 살갖이 순식간에 정숙한 아내의 위장으로 가리워져간다. 채비를 끝나
면, 이미 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 눈뜬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
사나이는 자기의 팔 안에서 이내 멀어져가는 여자의 변신하는 모양을 미련
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부인, 이번엔 언제 만나 주시겠읍니까?"
"내쪽에서 연락해 줄게. 당신쪽에서 연락하면 절대로 안된다구. 내 주위엔
많은 눈이 빛나고 있으니까 말야. 자아, 어서 돌아갈 준비를 하라구. 차를
탈 수 있는 데까지 당신 차를 타고 갈 테니까. "
마끼꼬와 사나이의 사이는 2년째이다.
젊은 사나이의 체력은 참으로 우람스러워, 일에 쫓기는 남편이 미처 가라
앉히지 못하는 무르익은 여자의 몸의 욕망을 꺼주는 절호의 핀치히터였다.
처음 젊은 사나이는 자기의 욕망본위로 행동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
이 작용했다. 그래서 단단히 다짐을 받고 시작한 불장난이거니와, 그 점
상대는 계약정신이 발달해 있어 육체의 대차관계로서 끝내 주었다.
사나이는 경제적으로 궁해 있었다. 속성에 관계없이 더불어 즐긴 이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쪽이 육체의 손료(損料)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데이트의 비용은 모두 마끼꼬가 부담한 데다가 교섭 때마다 사나이에게 돈
을 지불했다. 그것은 손료인 동시에 그녀의 안전의 보장료이기도 했다.
사나이는 계약을 지켰다. 육체의 대차관계 이상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
다. 그에게 있어서도 그 편이 좋았던 것이다. 마끼꼬 덕분으로 같은 나이또
래의 사나이들이 빠지는 격렬한 성적 기아도 없다. 노상 충분히 채워지는
데다가 용돈마저 듬뿍 받을 수 있다. 그의 동료 중에는 생활을 위해 클럽에
나아가 여자한테 몸을 팔고 있는 자도 있다. 돈을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
려서 상대할 수도 없다.
이런 것에 비해 그의 경우는 매우 질이 좋은 여체를 포식하는 것으로 보수
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관계는 없었다.

그는 마끼꼬를 만날 때마다 조금도 돈에 묶인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
히려 자기의 즐거움과 욕구로서 만나고 있었다. 정신이 따르지 않는 육체
만의 대차관계치고는 기막히게 즐거운 데이트가 벌써 2년째 계속되고 있
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껏 정기적으로 만나
고 있던 것이 일정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마끼꼬의 형편에 의한 것이었
다.
이제까지는 데이트 날짜나 시간을 일일이 서로 연락하지 않아도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로 가있으면 반드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끼꼬쪽에서
종종 안나타나게 되었다. 본인은 나오고 싶지만,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외아들 마사오가 커져, 정기적으로 부친이 없는 시간을 노려 외출하는 모
친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습소나 학교육성회 모임
에도 시간을 빼앗기게 되었다. 튼튼한 보좌역할을 하는 사람이 생겨, 남
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불어났다. 이런 여러 사정이 합쳐져 두 사람의 비밀
데이트 시간을 침범해온 것이다.
이리하여 수요공급의 밸런스가 무너졌다. 마끼꼬에게 있어 사나이는 어디
까지나 남편의 대용물이다. 마네리즘에 빠지기 쉬운 부부생활에 자극을 주
기 위한 액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를 만나는 횟수가 좀 줄었다고해서
이내 욕구불만이 되는 일은 없다.
이에 비해 사나이는 마끼꼬 밖에는 욕망의 돌파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에게서 차단되면, 단숨에 심한 성적 기아로 굴러떨어진다. 그것은 동시
에 그의 경제위기마저 초래한다.
그들의 안정된 계약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람과도 헤어져아 할 때다!'
마끼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이켜보건데 굉장히 즐겼다. 그에게는 남편
같은 교모하고 소프트한 기교는 없었지만, 퍼내도 한이 없는 샘 같은 체력
으로, 자기 자신 주체할 수 없는 여자의 관능의 불길을 어지간히 가라앉혀
주었다.
그러나 그 쾌감에 취해 언제까지나 욕심을 부리고 있다가는 언제 꼬리를
잡히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현재라면 남편도 눈치를 못채고 있고, 즐거운
추억만을 남기고 헤어질 수 있다.
'정말 이제 그 때가 온 거야.'
마끼꼬는 생각했다.
이곳은 노상 이용하고 있는 모텔이다. 차를 탄 채로 그냥 드나들 수가 있
고, 종업원과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줄곧 이용
하고 있다. 지불은 미터에 표시되는 금액을 슈터에 넣으면 된다. 남의 눈을
피하는 정사를 위해 설계된 것 같은 설비였다.
모텔에서 만난 그들은 한껏 욕정을 풀고는 차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사나
이의 차로 함께 간다. 모텔로 차를 부르는 것보다도 그편이 안전하다고 마
끼꼬는 믿고 있다. 사나이의 차를 타고 있어도 별로 이상한 것은 없다. 요
는 모텔에 드나드는 현장을 발견당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요 앞 다리 앞에서 내려 줘요."
잠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마끼꼬는 모텔을 나선 자동차가 안전권에 마침
내 닿았다고 보고 윗몸을 일으켰다.
"뭔가 사고가 있었던 것 같군요."
다리 앞쪽에 경찰백차와 구급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담 좀 곤란한데."
마끼꼬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럼 다리 지나서 세워 줘요."
이렇게 고쳐 말했다.
별로 경찰에 대해 떳떳치 못한 짓은 하고 있지 않지만, 남편의 눈을 속인
불륜 뒤 경찰관의 시선에 닿는 것은 저항이 있다. 사나이 역시 마찬가지였
던지 스피이드를 더 냈다.

오오노 소오이찌는 아까부터 추운 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만간
한 대의 차가 올 것이다. 파란색의 칼로라, 차번호도 알고 있다. 절대로
잘못 알아서는 안되었다. 하기는 목표를 삼고 있는 자동차가 접근하면 연
락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
그의 눈 밑에는 끊임없이 자동차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온갖 차종과
형형색색의 보디컬러, 다리 위는 한산한데 비해 차도는 간단없이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차가 저절로 흘러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이따
금 다리를 건너가는 통행인도 소오이찌에게 하등 주의를 하지 않는다. 차
를 좋아하는 국민학교 생도가 다리 위에서 열심히 통행차를 관찰하고 있
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여보세요, 차가 왔다. 파란 칼로라, 번호는 XXX,지금 다리로 간다, 오
버!"
느닷없이 그의 목에 늘어뜨린 작은 기계가 속삭였다. 그것은 휴대용 트랜
시버였다.
"오우케이."
소오이찌는 대답하고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손에 들었다.
마끼꼬가 탄 차는 다리로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은 문득 다리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
을 보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시이트에 몸을 쓰러뜨리고 있는 자세였기 때
문에 다리 위까지 보인 것이다. 그 크기와 모양으로 미루어 어린아이 같았
다.
차는 그 아이가 서 있는 바로 밑을 향해 나아갔다. 마끼꼬의 시선에서 어
린아이가 사라져 가려고 한 순간, 어린애의 손에서 무엇인지 작은 검은 물
체가 튕겨저나왔다. 무언가 차를 향해 던진 모양이다.
"위험해요!"
외쳤을 때 그 물체는 본넷 위에 부딪쳐 흩어졌다. 섬광과 불빛이 솟아올
랐다. 차는 급브레이크의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센터라인을 넘었다. 앞쪽
에서 오고있던 차가 달려왔다. 또 다시 커다란 굉음과 불기둥이 청각을
빼앗고 시야를 찢었다.
그대로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트랜시버가
"그만, 그만 두라구!"
이렇게 말해왔을 때는 이미 화염병은 오오노 소오이찌의 손을 벗어나 있었
다. 조준을 해서 던진 병은 보기좋게 명중하여 기막힌 불길을 흐트러뜨렸
다. 순간적으로 불덩어리가 된 목표물은 센터라인을 넘어 대향차(對向車)와
충돌해서 더한층 불길을 내뿜었다.
자기의 대단치 않은 행동이 이런 대참사를 불러일으킨 사실이 믿어지지 않
아 잠시 멍하고 있던 소오이찌는 백차니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나
서야 제 정신이 들어 허둥지둥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마침 근처에 작은 교통사고가 있어 경찰관이 와있었기 때문에 소오이찌는
이내 근처에서 잡혔다.
마끼꼬와 같이 타고 있던 사나이는 구급차로 병원으로 운반되는 도중 죽었
다. 대향차의 운전사도 2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마끼꼬는 가벼운 상처만 입
었을 뿐이였다.
경찰의 시선을 피하고자 반사적으로 시이트에 몸을 쓰러뜨리듯 하고 있었
기 때문에 충격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의 상처보다도 정
식적인 쇼크쪽이 컸다.
경찰의 조사에 대해 오오노 소오이찌는
"화염병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어린아이의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3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또한 질주하
고 있는 차를 향해 다리 위에서 화염병을 던진다는 것도 어린아이의 장난이
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열 살 짜리 소년의 장난이 불러일으킨 결과치고는 너무나도 중대했다. 경
찰은 오오노 소년이 트랜시버를 가지고 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시가지 2킬
로, 평야에서는 20킬로 정도를 교신 범위에 담을 수 있는 고성능의 것이
였다.
트랜시버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교신상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의당 그 상대방이 누군가가 문제가 되었다. 오오노 소년은 트
랜시버를 통해 누군가의 지시하에 화염병을 던진 것은 아닌가? 하는 억측
이 떠돌았다.
'만일 교신상대가 어른이라면'
사건은 전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어린이를 시켜 살인을 했다면, 이
는 참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진, 게다가 비열한 범죄이다.
그러나 오오노 소오이찌의 배후에 수상한 어른의 존재는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소오이찌가 피해자들에게 원한을 품었으리라 짐작되는 점도 없었다.
경찰에서는 현장 주변의 트랜시버 소유자를 이잡듯이 뒤지기로 했다.

사건발생 3일 후, 두 형사가 이미 퇴원한 마끼꼬를 자택으로 찾아왔다. 한
사람은 관할서의 계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부인, 이번엔 정말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하셨읍니다."
계장은 정중히 초대면의 인사를 마친 뒤 날카로운 눈으로
"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놔서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마끼꼬는 의당 올 것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실려갔을 때 다른
경찰관이 간단한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끼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선 돌아가신 오바다씨인데요. 부인과는 어떤 관계였나요?"
"오바다 선생 말씀이죠? 그 얘기는 벌써 드렸는데요. 일 년 전에 우리집
가정교사로 채용했었던 청년으로, N학원 대학의 학생이예요."
"그 오바다씨의 차에 어째서 함께 타고 계셨나요?"
"외출했다가 우연히 자동차 안에서 불러세우기에 중간까지 편승한 것뿐예
요."
남편에게도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외출했다가 우연히라구요?"
형사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그것을 보고 마끼꼬의 가슴을 두근거렸다.
형사는 무언가 꼬투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인, 우리는 부인의 프라이버스를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수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실 그대로의 말씀을 듣고 싶다, 이 말씀
입니다."
"난,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마끼꼬는 떨리는 가슴을 누르고 계속 잡아떼었다.
"실은 돌아가신 오바다씨의 포켓에서 어느 모텔의 성냥이 나왔지요. 그래
서 그 모텔을 조사해 봤답니다. "
계장은 포켓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개피 뽑더니 성냥을 그었다. 그 성냥은
그녀가 사나이와 이용한 모텔의 서어비스 성냥이였다. 마끼꼬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훨씬 전부터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죠?"
계장은 천천히 연기를 토해내면서 비수로 찌르듯이 말했다.
"끝내 숨길 작정은 아니였어요. 제발 주인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마끼꼬의 버팀은 이내 무너졌다.
"우리도 부인의 프라이버시를 폭로하는 게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
이 안계실 때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 제게 묻고 싶다는 것은?"
마끼꼬는 형사들이 찾아온 뜻이 다른 것에 있음을 알고, 일단 안삼하면서
물었다.
"오바다씨와의 관계를 아드님한테 눈치채게 한 기색은 없읍니까?"
"글쎄요, 워낙 날카로운 애라, 혹시."
마끼꼬는 최근 아들이 자기를 보는 눈이 의심을 띄우고 있었던 것 것은 사
실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것이 대체?"
"만일 아드님이 부인과 오바다씨의 관계를 알았다면, 오바다씨를 미워했을
테죠?"
"네, 그것은.."
그러다가 마끼꼬는 형사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설, 설마 그 애가 그런 끔찍한 짓을...그,그렇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닐테죠?"
마끼꼬는 너무나도 무서운 연상에 신음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계장은 말끝을 흐렸다.
"보나마나 오오노가 당찮은 말을 한 게군요? 그 애는 무서운 애랍니다."
"오오노 소년은 트랜시버를 갖고 있었읍니다."
"그게 마시오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런데 불행히도 댁의 아드님과 사건 직전에 교신하고 있었던 사실이 떠
오른 겝니다."
"설마? 차엔 내가 타고 있었다구요. 아무리 오바다 선생이 밉더라도 나까
지 같이 죽이려들 리가 없어요. 마사오는 죽은 열대어나 고양이를 위해 무
덤을 만들어 줄 정도로 착한 애에요.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애랍니다."
마끼꼬는 형사가 당차않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람? 하필이면 마사오를 의심하다니.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
마끼꼬는 형사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잡히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화를 버럭
냈다. 형사는 그녀의 노여움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말했다.
"오오노 소년이 좋지 않은 소문을 뿌린 아이라는 것은 우리 역시 알고 있
읍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화재위문편지사건으로 우리도 골치를 앓았었으
니까요. 우리는 오오노 소년이 그동안에 일으킨 사건의 관계자를 거듭 조
사해 봤지요.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읍니다."
"그게 우리 마사오하고 관계가 있단 말인가요?"
"불행히도 있읍니다."
계장은 불행히도라는 말을 힘을 주어 말했다.
"우선 열대어에 독을 투약당한 나이또오군인데, 그 애는 학급에서 이과 성
적이 일등 입니다. 댁의 마사오는 이등입니다. "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아뭏든 들어 보십쇼. 이어 고양이를 소살(燒殺)당한 사가와 히도미는 산
수가 일등이였읍니다. 이 역시 댁의 마사오군이 이등입니다. 화재위문편지
를 받은 다섯 명의 여자애들은 음악이 마사오군보다 모두 우위입니다."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거죠? 우리 마사오는 슈우퍼맨은 아니니까요. 모든
학과에서 일등을 모조리 차지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믄요, 그렇고말구요. 마사오군은 종합성적으로는 언제나 톱이였읍니
다. 과목에 따라서는 이등 이상인 것도 있을 테지요. 그런데 여기 마사오
군이 쓴 작문이 있읍니다. 선생님한테 빌려왔읍니다만, 잠깐 읽어 보시
죠."
계장은 한 장의 원고용지를 마끼꼬 앞에 내밀었다. 마끼꼬는 그가 왜 그런
것을 가져왔는지 이상히 여기면서 아들의 작문을 읽어 보았다.

- 나는 크면 아빠처럼 사장이 되고 싶다. 사장은 첫째다. 나는 일등만이
좋다. 이등이될 바에는 차라리 꼴찌가 났다. 국어도, 산수도, 이과도, 음악
도, 체육도 모두 일등을 차지 하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한다. -

읽고 있는 사이에 마끼꼬는 심증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가로지르기놀이를 하고 있던 나까다군은 체육이 뛰어나, 체조박사라고 불
리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장난의 배후에도..'
아들을 중심으로 한 무서운 상상의 윤곽이 떠올랐왔다. 그러고 보니 아버
지는 언제나 아들에게 일등을 하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마사오는 공부를 잘 하는 애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일에 유달리 뛰어난 재
능을 나타내는 타이프는 아니고, 모든 과목을 고루 잘 하는 애였다. 그래서
각 과목별로는 2등이나 3등이 많았지만, 종합점수로는 항상 1위였다.
마사오는 그 사실을 안타까와하여 전부 일등을 차지해야 한다고 버티고 있
었다. 최근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게 된 것도 음악에서 늘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애들을 따라넘기기 위해서였다. 4학년이라는 시기는 아이들의 경
쟁심이 우려날 때이다. 학교측에서도 생도들의 의욕을 북돋고자 경쟁을 부
채질한다.
가령 가정학습을 해온 아이에게는 은으로 된 실, 한문 받아쓰기 성적순으
로 금, 은, 동의 라벨을 준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실이나 라벨의 수집경
쟁을 시작하여 누가 제일 많은지 내기를 한다. 마사오가 모은 것은 그 수에
있어 클라스 넘버 원이였다.
마끼꼬도 마사오의 일등을 향한 이상한 집착이 근심이 되어, 모두 일등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좀더 어린이다운 장난도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일등을 하지하기 위해 라이벌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오오노
소오이찌를 이용했다니? 역시 경찰관의 오우버 센스야.'
"마사오가 일등을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고해서 오오노군 사건하고 관계가
있다곤 할 수 없잖아요? 이것은 순진한 어린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당찮
은 짐작이예요."
"그게 짐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떠올랐단 말입니다."
계장이 딱한 듯이 마끼꼬의 얼굴을 보았다.
"어떤 증거죠?"
"오오노 소년이 트랜시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로 사건 직전에 누군가와
교신했다는 추측을 하게 됐죠. 그래서 현장 주변의 트랜시버 소유자들을 샅
샅이 알아 본 겝니다. 그랬더니."
계속해도 되겠냐는 듯이 계장은 마끼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끄덕였
다.
"그랬더니 연락용으로 트랜시버를 사용하고 있는 근처 음식점이나 가게 사
람들이 분명히 그 시간에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
다는 겝니다. 파란 칼로라, 번호는 XXX, 방금 다리로 간다. 준비하라!...
문제는 다음 말이올시다."
계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안돼, 마마가 타고 있어. 그만 두라구! 스톱, 그만 두라구!"
마끼꼬는 머리에서 피가 순식간에 물러남을 느꼈다.
그 때 언제나 내리는 다리 못미처 지점에 순경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더 지나온 일이 생각났다. 오바다만을 죽일 작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마사오는 내린 것으로 알고 있던 어머니가 아직도 차에 타고 있는 사실을
알고 오오노를 제지했지만, 때가 늦은 것이다.
마끼꼬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계장의 목소리만이 아련히 들려왔다.
"번호는 분명히 오바다씨의 차번호 올시다. 마시오군은 외아들이죠. 오바
다씨의 차에 타고 있던 당신을 엄마라고 부를 아이는 마사오군 이외엔 없
소."
"하지만, 왜? 왜 마사오가..."
마끼꼬는 마지막 신음처럼 꿈틀거렸다.
"부인, 이번 기회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시는 겝니다. 당신한테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하는 모친과 존경하고 있던 가정교사가 부친과 자기를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의 쇼크는 아마 대단한 것이였을 걸요.
마사오군은 그것을 혼자의 가슴 속에 넣어두고 있었죠. 이번 사건은 그 쌓
이고 쌓인 노여움의 폭발한 결과일 겝니다."
형사의 말을 듣고 보니, 마사오의 1위를 향한 이상한 집착은 그 무렵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오오노 소오이찌가 불러일으킨 일련의 사건도. 마
사오는 모친에 대한 마음의 상처와 울분을 그런 식으로 발산시키고 있었단
말인가?
"오오노 소년은 모두 털어놨읍니다. 마사오군한테 협박당하고 있었다는 사
실을 말입니다. 오오노군의 부친은 마사오군 아버님 회사에 근무하고 있읍
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오오노군의 부친을 자기 아버지한테 말해서 목아
지를 시키겠다고 위협했다는 겝니
다. 오오노군의 부친은 몸이 부자유합니다. 직장을 잃으면 다시 취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던 거죠. 오오노군은 부모를 사랑
하고 위하는 마음씨착한 애였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마사오군은 겉은 우등생의 마스크를 쓰고, 실은 부모의 세력을
미끼로 약한 자를 괴롭혀온 겝니다. 물고기의 사료도, 화재위문편지도 마
사오군의 아이디어였답니다. 트랜시버와 화염병도 마사오군이 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지만 부인, 순진한 어린애의 가면 밑의
무서운 새 얼굴을 만든 것은 바로 당신 입니다. "
'바로 당신 입니다' 형사의 마지막 말이 마끼꼬의 귀에 수없이 울렸다.
그것은 어느새 고양이나 열대어나 오바다를 죽인 범인은 바로 나라는 말로
바뀌고 있었다.

- THE END -





작은 전쟁
write By - William Brittain


제이크 랜디스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교실로 들어가 지팡이를 분필 상자에
걸어놓고,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철제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왼
쪽 다리를 들어 가장 편안한 위치로 놓았다.
그 다리는 5년 전에 교통사고로 못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별로 슬프지 않
았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그리고 스포츠 영웅이나 제2의 프레드 아스테
어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50명의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
반드시 성한 다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지팡이는 여러 모로 쓸모가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검술을 성명하거나 아이들이 수업중에 딴전을 피우
지 않게 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기는 했지
만, 앞질러가는 축구 선수들에게 부축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고, 아이들이
먼저 와서 부축해 주기도 해다.
제이크는 성적이 떨어지는 반 아이들의 시험지를 꺼내 읽기 시작해다.
"보스턴 티 파티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식민지 사람들이 계획한 것 이
었다."
아이고, 세상에! 철자도 엉망이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군.
그때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려서 제이크는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더니
수학 선생인 하비 캐시디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시간 좀 낼 수 있나, 제이크?"
"그럼, 들어오게, 하브, 하지만 수학에 관한 얘기하면, 난 아이들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이상하게만 풀려고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
네. 자넨 아이들에게 철자법과 각뿔의 체적부터 정확히 가르쳐야겠어."
"하지만 2백 년 동안 인간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보다
는 낫다고 생각하네."
캐시디가 씨익 웃으며 말을 받고는, 학생 책상에 팔을 기대며 갑자기 웃음을
거뒀다.
"제이크, 자네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알렉 휘트닌이라고 있나?"
"있지, 3교시에 가르치지. 그애는 저쪽 창문 옆에 앉아. 그런데 왜 그러나?"
"그 녀석이 어떻다고 생각하나? 시험 성적 얘기가 아냐. 성격이 어떤 것 같
나?"
제이크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군. 그 애는 거의 말이 없어. 그리고 질문할 때는
일부러 나를 당황하게 하려는 질문만 하지. 그리고 심각하지는 않지만, 목이
좀 아픈 모양이더군. 과학을 가르치는 마벨 퍼치 선생은 그 녀석을 아주 좋아
하는 것 같더군. 그런데 그건 왜 묻나?"
제이크는 다시 발을 편하도록 옮겼다.
캐시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알렉이 나를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야."
제이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뭐라고? 알렉은 1학년치고는 좀 건방지기 하지. 하지만 자네는 2백 파운드
는 나갈 테니 그 녀석이 자네를 움직이게 하려면 대포라도 쏴야할거야. 그리
고 그 녀셕이 자네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한다>는 건 또 뭔가? 자네도 잘 모
르는 거야?"
캐시디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어제 7교시였어. 평소보다 수업이 좀 일찍 끝나서 남은 10분 동안 아이들에
게 숙제를 하라고 시켰지. 그리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창문을 모두다 최대한
높이 열라고 했지."
"창문을 높이 열어?"
"그 교실은 학교의 끝 쪽에 이네. 기억나나? 거기 창문은 바닥에서 2인치 정
도 아래 있어. 그래서 그 창문 주위로 다닐 때는 조심하라고 이사가 늘 잔소리
하잖아. 어쨌든, 아이들은 아인슈타인처럼 실험을 하고 있었고, 나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어. 교실을 등지고 있었지만,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네. 한두 녀석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지만,
종이나 연필깎이가 필요하면 사용하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러는가 보다고 생
각했지."
"하브, 도대체 얘기의 핵심이 뭐야?"
"나는 내가 왜 돌아섰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돌아서 보니 알렉이 창문
버팀대를 창처럼 어깨 위로 들고 있는 거야. 그 녀석은 내가 돌아서자마자 그
걸 나한테 던졌어. 그 창문 버팀대는 나에게서 약 2인치 정도 벗어나서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 날아갔지. 보도에 부딪히면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더군."
"이봐, 우리 반 아이들도 창문 버팀대를 가지고 놀아. 존 왕과 싸우는 로빈
후드나 원탁의 기사 흉내를 내면서 칼 싸움을 벌인다구."
캐시디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젠장, 이건 농담이 아냐! 나는 균형을 잃고 창 밖으로 떨어질 뻔했고. 거기
는 2층이었단 말이야. 만약에 내가 그때 돌아서지 않았다면 그 녀석이 나를 그
걸로 찔러댔을지도 모른다구!"
"진정하게, 하브. 그래, 알렉이 버릇이 좀 없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자네를
해칠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아마 자네보다 그 녀석이 더 놀랐겠지."
제이크가 달래듯이 말했다.
캐시디는 머리를 저었다.
"교사 생활 10년에 나는 그 녀석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훤
하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네. 그 녀석은 겁을 먹지 않았어. 그 녀석은 마치,
마치...."
"마치, 뭐?"
"실망한 것처럼 행동했어."
캐시디가 조용히 말했다.
잠시 동안 교실에 침묵이 흘렀고, 시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이구, 이봐. 알렉이 왜 일부러 그런 짓을 하겠나?"
"그 녀석은 며칠 전에 내가 출제한 시험에서 50점을 받았어. 올해 들어 처음
으로 낙제 점수를 받은 거지."
제이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자네는 자네가 낙제 점수를 준 애들이 다 무섭겠군?"
"알렌은, 달라. 그 녀석은 시험지를 돌려 받을 때부터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설명할 수는 없어. 그냥 느낌일 뿐이야. 그 녀석이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를
보면 알 수 있지. 자네도 그런 느낌이 어떤 건지 알 거야. 그리고 나만 알렉
휘트닌이 무서움 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냐."
"또 누가 있는데?"
"매니 쉘버그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더군. 그 선생은 올해 1학년 야구 코치를
맡았어. 지난 주에 선수를 뽑은 모양인데, 알렉을 탈락시켰나 봐. 그날, 연습
이 끝나고 나서, 그 녀석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라커 룸으로
매니를 찾아왔다더군. 그때 매니는 콘택트 렌즈가 하나 빠져서 바닥을 뒤지고
있었는데, 알렉이 왔길래 같이 찾아 봐 달라고 했었다는군. 그런데 5분쯤 뒤에
매니가 역기 걸이 밑에 있을 때 역기 하나가 굴러떨어졌다는 거야. 2백 파운드
짜리 역기가 3피트 위에서 사람 위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제이크?"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연이었겠지."
"하지만 역기가 역기 걸이에서 저 혼자 튀어나올 수는 없네. 누가 들어 올리
지 않으면 말이야. 그리고 매니는 알렉이 라커 룸에서 나가는 소리를 전혀 듣
지 못했다는 거야. 알렉이 역기 걸이에서 역기를 들어올렸을 수도 있고, 또.."
"매니가 기어다니다가 어깨로 역기를 건드렸을 지도 모르지. 수백 가지의 가능
성이 있을 수 있네. 이봐, 하브. 자네는 바보가 다 되어 가는군. 자네가 낙제
점수를 주었기 때문에 알렉이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마벨 퍼취
선생은 알렉에게 몇 번이나 낙제 점수를 주었지만, 두 사람은 옥수수 창고 속
의 쥐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있잖아. 자네가 알렉이 괴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녀석은 왜 그 여선생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건가?"
"그건 모르겠어. 제이크, 하지만 지금부터는 몸조심해야겠어. 자네도 몸조심
하라구. 그 녀석은 누군가를 죽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놈은 사람을 죽이면서
아주 즐거워할 놈이야."

나흘 후, 알렉 휘트닌은 제이크 랜디스의 첫번째 시험에서도 낙제 점수를 받
았다. 수업이 끝나고 제이크는 알렉에게 남으라고 했다. 교탁 앞에선 알렉은
아직도 젖살이 포동포동해서 잘 익은 봉숭아 같았다. 그러나 머리를 귀 밑까지
기르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알렉은 마치 군인처럼 머
리를 바싹 치켜서 짧게 잘라다.
"선생님, 전 이 시험에서 61점 이상은 받아야 합니다."
알렉은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 점수를 달라는 것 같았다.
"알렉, 넌 인지 조례(1765년, 영국이 식민지에 부과한 세금)에 대해선 아주
잘 썼다. 하지만 질문은 미국 혁명의 세 가지 원인을 쓰라는 것이었어. 넌 다
른 두 가지는 빼먹었어."
"선생님, 전 한 가지 원인을 깊이 파고들면 선생님이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
각했습니다. "
알렉의 목소리가 빈정거리는 투로 변했다.
"네가 잘못 생각한 거다. 질문은 아주 명확했어."
"4점만 더 주시면 충분할 텐데요. 낙제를 면하려면 말예요."
그것은 부탁하는 것이 아니였다. 명령이었다. 제이크는 신병시절 이후로 그런
말투를 들어보지 못했다.
"당장 나가거라, 알렉."
제이크가 엄하게 말했다. 알렉은 등을 구부리고 교실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이제 30초 후면 저 문으로 아이들이 들어온 거다. 그때까지 네가 나가
지 않으면 아이들이 들어와서 네가 내 발에 차여서 저쪽 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볼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제이크는 농담을 하고는 웃었다.
그러나 알렉은 표정이 바뀌었다. 그 표정을 본 제이크는 마치 얼음물을 뒤집
어쓴 것 같았다. 알렉의 눈에 가득 찬 악의는 제이크가 지금까지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뒤틀린 얼굴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캐시디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알렉은 아무 말도 없이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제이크는 그날 하루종일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알렉은 다른 학생들처럼 낙제한 것에 대해 선생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화를
내야 했다. 제이크는 알렉이 교실에서 나가기 전에 얼핏 지었던 표정을 생각
할 때마다 얼굴에 뭐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에 제이크는 숙제 검사를 했다. 연대표를 보면서 일을 했
는데, 거의 다 끝냈을 때 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관리인은 아닐 텐데, 칼 스테트너는 한 시간 전에 청소를 다 끝냈을 것이다.
"누구요?"
제이크가 소리쳤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제이크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절름거리며 홀로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제이크는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수압을 이용해서 문을 여닫는 남학생용 화장실 문이 스르르 닫혔다.
제이크는 화장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의 신발이 하얀 타일 바닥에 끌리는 소리
가 났다.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누군
가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제이크는 다시 홀로 나왔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
만이 작게 들렸다.
교실 뒤쪽 계단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제이크는 비틀거리며 계단
으로 걸어갔다.
"거기 누구야?"
그가 소리쳤다.
"이봐, 대답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학교 안을 돌아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제이크는 층계 아랫쪽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얼핏 들렸다.
"숨바꼭질할 셈이냐?"
제이크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좋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한번 보자."
제이크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힘들여서 왼발을 첫번째 계단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오른발을 내디디면서 손으로 난간을 꼭 붙잡았다. 이제 한 계단 내려왔
다. 23계단을 더 내려가야 한다. 물론, 그 꼬마 녀석을 잡을 수는 없겠지만,
악착같이 계단을 내려가 보면, 학교를 나가는 그 녀석을 뒤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계단.
세 계단.
그리고 그 다음에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네번째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는 순간, 지팡이 끝에 달린 고무 부분에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지
팡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제이크는 균형을 잃으면서 본능적으로 다친 다리를
내밀었지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제이크는 굴러 떨어졌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고, 옆구리에 통증을 느꼈다. 손
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고, 다시 계단을 구르자, 시멘트로 만든 계
단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이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채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면서, 사향 냄새 같은 달짝지근한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계단 밑에 굴러 떨어진 제이크는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정신이 얼얼하고, 눈 앞에서 별이 반짝였다. 제이크는 머리가 아프고 귀가 멍
했지만, 한참 후에 안간힘을 다해 팔과 성한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아픈 다리
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제이크는 몸을 비틀어 일어서서 자신이 떨어져 내린 20여 개의 계단을 올려다
보아다. 운이 좋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높이에서 굴러 떨어지면 팔 다
리가 부러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목이나 척추가 부러질 수도 있을 텐데. 왜
미끄러졌을까...
왼손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비비자 미끈거렸다. 손가락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누군!"
학교 화장실에서 쓰는 액체 비누가 제이크의 손바닥에 잔뜩 묻어 있었다. 지
팡이와 신발에도 비누가 묻어 있었다. 제이크는 손수건으로 비눗기를 닦아내고
아주 고통스럽게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위에서 네번째 계단에 비누가 잔뜩 칠해져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교실 밖에서 소리를 내고는 그를 죽이려고 복도로 끌어낸
것이 틀림없다.
누굴까?
알렉 휘트닌?
그날 저녁 제이크는 집에서 상처를 찜질하면서 알렉 휘트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곰곰히 생각했다. 누구에게 말해 볼까? 하지만 누구에게 말하지? 제이크는
자신이 지난 주에 하비 캐시디의 말을 비웃었던 것이 생각 났다. 아냐. 다른
선생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어 .
경찰에 말해 볼까? 그들은 증거를 대라고 할 텐데.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계단에 비누가 묻어 있었을 뿐인데 그것은 우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의 표정도 증거이긴 하지만, 경찰에게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그러나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그 녀석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려고
할지 모른다.

다음 날, 제이크는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학생 지도실에 가서 알렉 휘
트닌의 생활 기록부를 조사해 보았다. 참고할 만한 것이 많지만 않았다. 알렉
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더비 가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
었다. 그 호화스러운 지역에 집을 가지려면 틀림없이 알렉의 아버지는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알렉은 최근에 세워진 친달 파크 학교를 졸업했다. 처음
6년 동안의 성적은 D와 F가 많지 않은, 보통 성적이었다.
7학기에 들어서는 많이 달라졌다. 성적이 점점 더 저조해지기 시작했는데,
영어에서만 F가 3개 있었다. 제이크는 미소를 지었다. 그해의 출석표에는 알
렉이 총 25일 결석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제이크는 그 전 해의 출석표를 살펴 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알렉은 6학기
내내 17일밖에 결석하지 않았다. 결석한 날들의 간격이 아주 넓었기 때문에
병이나 사고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8학기에도 별 차이는 없었다. 성적은 더 나빠졌고, 결석 일수도 많아졌다.
담임을 맡았던 봅 하우저만이 생활 기록부에 몇 마디 덧붙여 놓은 것이 있었
다.
10월 17일 -- 알렉은 늘 혼자 다님. 내성적임. 바람직하지 못할 정도로 내
성적임
1월 29일 -- 평상시에는 온화한 소년임. 그러나 가끔씩 친구들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움.
2월 27일 -- 중간 시험 이후로는 시무룩해짐.
4월 15일에 적어 놓은 말에는 줄이 여러 개 그어져서 지워져 있었다. 제이크
는 뒷장의 볼펜 자국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첫자는 <오>자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씨를 몇 개 더 알아볼 수 있었다.
"오....<-알레....하려...해..."
제이크는 거기까지 읽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냈다.
"오늘 알렉이 하려고 했던 것은..."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봅 하우저만 선생은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쓴 것 같았다.
제이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를 들어 친달 파크 학교에 전화를 했다.
교환수가 하우저만 선생이 수업중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크가 전화를
바꿔 달라고 얘기하자 교환수는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제이크가
급한 일이라고 거듭 말하자. 교환수는 마지못해서 하우저만을 바꿔 주었다.
"어이, 제이크! 올해 들어서 한 번도 못 만났군. 언제.."
"이봐, 봅, 수다 떨 시간이 없어. 자네가 작년에 가르쳤던, 알렉 휘트닌에
대해서 빨리 설명해 보게, 난 자네가 마지막으로 써놓은, 지워 버린 말을 알
고 싶네. 그거 생각나나?"
하우저만은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제이크. 생각나네. 하지만 그 기록은 이제 부모들도 다 알고 있는 걸
세. 그리고 골치가 아파질지도 모르는..."
"이봐, 나한테 말 못할 게 뭔가. 자네가 하는 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
네. 약속하지. 자 어서 말해 보게."
"그 아이는 문제가 있어. 그애 아버지는 황소 같은 사람이지. 자신이 소유하
고 있는 회사의 직원들과 똑같이 아들을 다루려고 하는 사람이야. 입증할 수
는 없지만, 알렉의 성적이 나쁘면 알렉을 두드려 패는 모양이야. 시험을 잘못
볼 때마다 알렉은 하루나 이틀씩 결석을 했는데, 다시 학교에 나올 때는 얼굴
에 멍이 들어 있더군. 내가 봤네."
"그랬군.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닐세. 자네가 생활 기록부에 써
놓은 말이..."
"제이크.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가만 있지 않겠네. 난 알렉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믿고 있어. 웃지 말게. 정말이야."
"난 웃지 않았어. 봅. 어떻게 했는데?"
"우리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어. 알렉은 주연을 맡았었지. 그 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이야. 그 녀석은 누구든지 똑같이 흉내낼 수 있거든, 그 녀석이 어
느날 교실 앞에서 내 흉내를 내는 것을 우연히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래서.."
"공연 3일 전에 알렉이 문법 시험 시간에 컨닝하는 것을 잡았지. 그래서 그
녀석을 연극에서 빼버렸어. 다음 날 결석했더군. 자네도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알 거야."
"그애 아버지가 또 때렸나?"
"물론이지.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그 녀석이 왔더
군. 당연히 알렉은 배역이 없었네. 나는 무대 위에서 배역을 맡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밑으로 내려가려고 무대 앞으로 걸어갔지. 바로 그때, 커튼의 균
형을 잡은 추(錘)가 떨어져서 내가 서 있던 곳의 판자가 박살났지. 나중에 정
신을 가다듬고 애들도 조용해졌을 때, 추를 매달고 있던 로프를 살펴보았지.
잘린 흔적이 있었어. 그리고 재니터라는 아이가 알렉이 무대 위의 방을 몰래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고 말해 주더군. 알렉은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고 대답했
지. 나는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어. 하지만 그때부터 그 녀석의 행동을
기록하기 시작했지.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낫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제이크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하우저만이 했던 말을 곰곰히 생각
해 보았다. 봅 하우저만, 매니 쉘버그, 하비 캐시디, 그리고 이제는 나 역시
계단에서 그 <사고>를 당했다. 알렉 휘트닌은 낙제 점수를 받을 때마다 선생
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냐. 그렇지 않을 거야. 과학 선생인 마벨 퍼취 선생에게는 아무런 짓도 하
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생활 기록부를 보면, 7학기 때 담임을 맡았던 새디 트
래스카 선생도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제이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봅 하우저만이 8학기 때 담임을 맡기 전까지 알렉을 가르쳤던 선생은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여자 선생들과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역
시 여자 선생에게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 선생은! 알렉의 체면을 손상시켜서, 아버지에게 끔찍하게 매를
맞게 한 남자 선생은 알렉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이
해되었다.
살인자.
제이크는 알렉이 모든 남자를, 부당하게 벌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아버지에 대한 분풀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알렉의 삐뚫어진 성격에는 자존심이 상하게 할지라도 여자 선
생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시킬 만은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
렉은 자기 자신의 기대치만큼 자신을 대접해 주지 않는 모든 남자들과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너무나 치밀해서 공격을 받은 사람만이 그러한 전쟁이 존
재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속수
무책일 뿐이었다.
다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날 저녁, 제이크는 일부러 7시까지 기다렸다가 알렉의 집에 전화를 걸었
다. 제이크는 알렉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으면 싶었고, 만약 알렉이 전화를
받으면 끊었다가 다시 전화할 생각이었다.
"새무얼 휘트닌입니다. 누구 십니까?"
마치 베이스 드럼 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이름은 랜디스입니다."
"렌디스? 아, 네. 알렉의 선생님이 시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랜디스 선생님?"
제이크는 사내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무우라도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 했다. 지금까지의 사건과
의심스러운 점들을, 제이크는 다른 선생들의 이름만 빼고는 다 말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아들에게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
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이크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제이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알렉의 아버지가 화를 벌컥 내리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제이크는 자신이 그 황소 같은 사람 앞에서는 대놓고 아들이 살인범
기질이 있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지레 겁을 먹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
렉의 아버지는 어떤 협박을 먼저 할까? 해고시키겠다고 할까? 아니면 소송?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제 아들 녀석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짓을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 한번 오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좀 할 수 없을까요?"
제이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수화기를 쳐다보았다.
"오늘 밤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알렉은 영화나 보라고 내보내지요. 한 시간 후쯤 오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휘트닌의 집은 정면을 자연석으로 만든 구식 건물이였고, 힌덴버그 제플린 호
를 정박시켜도 될 만큼 컸다. 제이크는 절름거리며 벽돌 계단을 올라가 벨을
눌렀다. 문 옆의 조그만 금속 박스에서 붉은 불이 비치더니 거기에서 휘트닌씨
의 목소리가 들렸다.
"랜디스 선생님이십니까?"
"네, 접니다. 휘트닌 씨."
"문은 열려 있습니다. 들어 오세요. 저는 거실 바로 오른쪽 서재에 있습니다."
제이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농구 코트만한 크기였는데, 낮은
책걸상이 놓여 있고 대나무 무늬의 벽지가 발라져 있는 데다가 이국적인 상들리
에가 걸려 있어서 마치 일본 집 같았다. 벽에는 사무라이의 칼까지 걸려 있었다.
제이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전등이 2개 켜져 있기는 했지만 실내는 어
두웠다. 거실 끝쪽에서 환한 불빛이 보였다.
제이크는 푹신한 양탄자를 지나 서재 문 앞까지 갔다. 서재는 마치 남북 전쟁
당시의 물품을 광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이 꾸며놓은 것처럼 총의 뇌관과 총알부터
반합, 그리고 남부 동맹의 깃발까지, 남북 전쟁의 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새무얼 휘트닌은 서재 한가운데 링컨이 썼을 것 같은 책상에 앉아 있
었다.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은 마치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 같았고, 그의 입은 꾹
다물려 이어다. 그는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책상을 누르
고 있는 듯했다. 아주 따뜻한 밤이었는데도 그는 밝은색의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어서 무척 완고해 보였다.
제이크는 서재로 들어가면서 잔기침을 하고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손가락이 떨려서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제이크는 당황하지 않
으려고 애를 썼다.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책상의 한 쪽에는 찻잔이 있었는데, 물은 담겨져 있지 않고 바닥에 하얀 가루가
잔뜩 담겨 있었다.
새무엘 휘트닌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빳빳이 굳어 있었다.
그의 소매와 손등에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다.
알렉 휘트닌이 벌이고 있는 작은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였다. 그리고 알렉으로서
는 당연히 가장 먼저 해치워야 했던 적이었다.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랜디스 씨."
등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는 제이크가 한 시간 전에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
였다.
그 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이야. 누구든지 흉내낼 수 있거든.
봅 하우저만의 말이 생각났다.
칼집에서 사무라이 칼을 꺼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제이크 랜디스는 이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무 쓸모없는 지팡이를 바라보며
알렉 휘트닌이 두번째 승리의 외침을 지를 때를 기다렸다.




집에서 멀리 떠난 또 다른 집

- write by Robert Bloch

나탈리가 아무도 없는 하이타워 역의 플랫폼에 도착한 시간은 9시였다.
기차가 연착했던 것이다.
그 역은 밤에는 폐쇄되는 모양이였다. 주위에 마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간이역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나탈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
다. 나탈리는 당연히 브레이스거들 박사가 직접 마중 나오리라 생각했었
다. 런던을 떠나기 전에 나탈리는 삼촌에게 전보를 쳐 도착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기차가 연착되었기 때문에 나왔다가 돌아갔는지도 몰랐다.
나탈리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공중 전화를 발견
했다. 브레이스거들 박사의 마지막 편지가 지갑 안에 있었고, 거기에는 그
의 주소와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탈리는 가방을 뒤져서 편지를 찾자
마자 공중 전화 부스로 걸어갔다.
전화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지루할 만큼 오래 기다린 뒤에 교환수가 전
화를 연결시켰는데, 전화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공중 전화 부스의 유리벽을 통해 역 건너편의 언덕을 보니 통화가 어려운
이유를 알 만했다. 나탈리는 여기가 서부지방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음 때문에 거의 고함을 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기에
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없어지자 이제는 뒤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탈리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음을 정확히 해서
말했다.
"전 나탈리 리버스예요. 브레이스거들 박사님 계십니까?"
"누구라구요?"
"나탈리 리버스요. 난 그의 조카딸이예요."
"그의 뭐라구요?, 아가씨?"
"조카딸요. 그와 전화를 할 수 있을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잠깐 동안 더 커진 듯 했다. 곧 찌렁찌렁 울리
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훨씬 알아듣기가 쉬웠다.
"브레이스거들 박사요. 우리 나탈리구나. 뜻밖이로구나."
"뜻밖이라구요? 제가 오늘 오후에 런던에서 전보를 쳤잖아요."
나탈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약간 조바심이 섞여 있는 것을 느꼈다.
"전보가 도착하지 않았나요?"
"이 지역에서는 전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걱정이란다."
브레이스거들 박사가 나탈리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전보를 못 받았다. 하지만 넌 분명히 전보를 쳤겠지."
그가 다시 웃었다.
"어디 있는 거냐, 얘야."
"하이타워 역에 있어요."
"아이구, 이런. 완전히 반대 방향이구나."
"반대 방향요?"
"피터비 씨 집에서 말이다. 네가 전화하기 방금 전에 그들이 전화를 했
단다. 맹장이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던데, 아마 그저 위경련에 지나지 않을
게다. 하지만 곧 가기로 약속했단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일반진료를 한다고는 말하지 않으셨잖아요?"
"급한 경우에는 한단다. 얘야. 이 지역에는 의사가 많지 않아. 다행히,
환자도 많지 않지만 말이다."
브레이스거들 박사가 다시 킬킬거리고 웃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넌 기차역에 있다고 했지? 네가 바로 플러머 양을 보내서 차로 널 데
리오게 하마. 짐이 많으냐?"
"여행가방분이예요. 나머지는 배로 세간살이와 함께 올 거예요."
"배?"
"제가 편지에 쓰지 않았던 가요?"
"아, 맞아. 그랬었지. 그래, 그건 아무 상관없다. 플러머 양이 곧바로 갈
거다."
"플랫폼 앞에서 기다리겠어요."
"뭐라고? 크게 말하거라. 잘 들리지 않는구나."
"플렛폼 앞에서 기다리겠다구요."
"아, 여기선 작은 파티가 열리고 있단다."
브레이스거들 박사가 다시 킬킬거리고 웃었다.
"제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제 말은, 제가 가는 게 싫으시면..."
"천만에! 그들은 머지않아 떠날 거다. 넌 플러머를 기다려라."
나탈리는 전화를 끊고 플랫폼으로 되돌아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스테이
션 왜건 한 대가 나타나더니 길에서 미끄러지며 길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서 멈췄다. 조금 구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은, 키가 큰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
가 나타나서는 나탈리를 손짓으로 불렀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자, 이제 이걸 뒤로 던져 넣겠어요."
그 여자가 말하고 나서 가방을 들어올려 차 뒤쪽에 던져 넣었다.
"자, 이제 당신이 탔으니 갑니다!"
나탈리가 문을 채 닫기도 전에 플러머는 급히 차를 몰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속도계가 금방 70까지 치솟아 오르자 나탈리는 겁이 났다. 플러
머는 나탈리가 초조해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미안해요. 박사님이 환자 때문에 외출하셔서, 오랫동안 집을 비울 수
없어요."
"아, 네. 손님들요. 삼촌이 말했어요."
"박사님이요?"
플러머 양이 교차로에서 급하게 차를 꺾어서 타이어에서 날카로운 소리
가 났지만, 속도는 줄이지 않았다. 나탈리는 얘기를 하면서 걱정을 잊으려
고 마음먹었다.
"제 삼촌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나요?"
"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호주로 이민을 가셨거든요. 전 영국
은 이번이 처음이예요. 사실, 제가 캔베라를 떠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구
요."
"가족과 함께 왔나요?"
"가족들은 두 달 전에 자동차 사고로 모두 돌아가셨어요. 박사님이 말씀
안 하시던 가요?"
"아니요. 난 박사님과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요."
플러머가 잔기침을 하고는 길을 가로질러 차를 회전시켰다.
"자동차 사고요? 어떤 사람은 운전할 때 완전히 무관심해요. 그건 박사
님 말씀이죠."
플러머는 고개를 돌려 나탈리를 쳐다보았다.
"그럼 여기서 살려고 오는 건가요?"
"네, 물론이예요. 삼촌이 제 후견인으로 지명되었을 때 편지를 썼죠. 그
래서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편지로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
하잖아요."
플러머는 조용히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탈리는 빨리 말해 주었으
면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조금 초조해요. 사실, 전 지금까지 정신과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요?"
플러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아주 운이 좋군요. 난 몇 번 봤어요.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죠.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브레이스거들
박사는 최고예요. 아주 관대하시죠."
"삼촌의 일이 잘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런 종류의 환자는 부족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부자들 가운데서요. 당
신의 삼촌은 혼자서 훌륭하게 해오셨어요. 집과 모든... 당신도 보게 될
거예요."
다시 한 번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차가 회전을 하더니 멀리 숲 한가
운데 있는 웅장한 집과 연결된 넓은 차도 앞에 으리으리한 대문을 향했다.
내려진 차창을 통해서 나탈리는 희미한 빛줄기를 보았다. 그 불빛만으로도
삼촌 집의 화려한 모습은 잘 보였다.
"어머, 이런."
나탈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손님들요. 오늘은 토요일 밤이잖아요. 저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돼버
린 것 같아요."
플러머가 나탈리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는 그렇게 엄숙한 곳이 아니예요.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박사님이 이런 말을 했었죠. 여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또 하나의 집이라고 말이예요."
플러머가 연달아 잔기침을 했다. 차는 위풍당당한 검은색 리무진 바로
뒤에서 급정거했다.
"이제 내리세요."
플러머는 아주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면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 계단
위에 갖다 놓고는, 고개를 끄덕여 나탈리를 불렀다. 플러머는 문 앞에서
열쇠를 찾았다.
"문을 두드려 봤자 소용없어요. 아무도 듣지 못할 거예요."
문이 열리자 나탈리가 전화를 했을 때 상상해던 시끄러운 장면이 눈앞
에 펼쳐졌다. 플러머는 안으로 들어갔으나 나탈리는 아직도 문 앞에서 머
뭇거렸다.
"빨리 와요, 빨리!"
나탈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플러머가 문을 닫았다. 나탈리는 밝은 집 안
으로 갑자기 들어서는 바람에 눈이 부셨다.
나탈리는 어딘지 썰렁하게 느껴지는 긴 복도에 서 있어다. 바로 앞에는
큰 계단이 있었고, 난간과 벽 사이 모퉁이에는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있었
다. 그리고 왼쪽에는 검은색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에 브레이스거들 박
사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패가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의 사무실일
거라고 나탈리는 생각했다. 오른쪽은 커다란 응접실이었는데, 창문에는 육
중한 커튼이 쳐 있었고 밤이어서인지 덧문도 닫혀 있었다. 떠들썩한 소리
가 들리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나탈리는 계단을 향해 홀로 가로지르면서 응접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십여 명의 손님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몸짓을 섞어 얘기하며
큰 테이블에 가득 몰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술병이 있었
는데 손님들은 그 사실에 만족한 듯했다. 갑자기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탈리는 손님 중에 하나가 박사의 호의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
했다.
나탈리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응접실 입구를 급히 지나가면서, 플러머
가 자신의 가방을 들고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플러머는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탈리가 계단까지 가자, 플러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곧바로 올라갈 생각은 아니겠죠?"
플러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리로 와서 인사하세요."
"난 먼저 기운을 좀 차리고 싶어요."
"내가 먼저 가서 당신의 방을 치워 놓겠어요. 박사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단 말이예요."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씻은 다음에..."
"박사님은 이제 곧 돌아오실 거예요. 그를 기다리세요."
플러머가 나탈리의 팔을 붙잡더니 운전할 때처럼 빠르게 그 환한 방으
로 나탈리를 끌고 갔다.
"이분은 박사님의 조카딸이예요. 나탈리 리버스 양인데, 호주에서 왔어
요."
그녀의 목소리는 손님들이 얘기하는 소음에 파묻혀 거의 안 들렸는데도
몇 몇이 나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작고, 쾌활해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반쯤 빈 술잔을 흔들며, 고개를 까딱해서 나탈리에게 인사를 했다.
"먼 길을 오셨군요."
그가 잔을 내밀었다.
"당신은 틀림없이 목이 마를 거요. 자, 이걸 마셔요. 난 다른 걸 마시면
돼요."
나탈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테이블 주위의 사람들 속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해밀턴 소령이예요. 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좀 취하지 않았나 걱정이군
요."
플러머가 속삭였다.
플러마가 가버리자 나탈리는 자신의 손에 있는 잔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다.
"제게 주시지요."
회색 머리칼에 검은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남자가 나
탈리에게 다가와 잔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당신이 저 소령을 용서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군요. 파티 기
분 때문이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남자와 활기에 차서 얘기하고 있는, 목과 어
깨가 심하게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를 가리켰다.
"이 자리는 송별회이기 때문에..."
"아, 자네 여기 있었구만!"
플러머가 해밀턴 소령이라고 했던 그 작달막한 남자가 손에 새 잔을 들
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나탈리 옆으로 다시 왔다.
"자게 다시 왔습니다. 꼭 부머랭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소?"
그가 폭소를 터뜨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네 호주 사람들은 부머랭을 쓰지 않소? 갈리폴리에서 당신네 호주
사람을 몇 명 봤었죠. 물론, 그건 당신 세대 이전의 좀 오래된 얘기요. 아
마.... "
"그만 하게, 소령"
그 키 큰 남자가 나탈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탈리는 그가 있
는 것에 안심이 되었고, 이상하게 친밀한 같은 것을 조금 느껴졌다. 나탈
리는 전에 어디선가 그를 보았던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탈리는
그가 소령에게 걸어가서 그의 손에서 잔을 뺏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봐, 그만 하면 됐어, 이 늙은이야. 그리고 이제 자넨 가야 할 시간이
야."
"가기 전에 한 잔만.... "
소령이 주위를 둘러보며 애원하듯이 손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마시고 있다고!"
소령이 술잔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그 키 큰 남자는 피했다. 그는
나탈리에게 어깨 너머로 웃어 보이고는, 소령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소령은 술에 취해서 과장되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탈리는 그 방을 둘러 보았다. 피아노 앞에 혼자 앉아 있는 나이 든 여
자 외에는 아무도 나탈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나탈리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나탈리는 자신이 축제 속에 끼어든 침입자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탈리는 황급히 몸을 돌려 목과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탈리는 갑자기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 플러머를 찾으려고 문 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플러머는 보이
지 않았다.
홀로 걸어가서 나탈리는 계단 위쪽을 살펴보았다.
"미스 플러머!"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탈리는 홀 건너편에 있는 방 문이 조금 열려 있
는 것을 얼핏 보았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플러머가 손에 가위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나탈리가 다시 부르기도 전에 플러머는 종종걸음으로 다른
쪽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나탈리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딘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파티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나탈리는 플러머를 따라갈
생각으로 계단 앞으로 가로질러 갔지만, 자신도 모르게 열린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나탈리는 삼촌의 상담실이 틀림없을 것 같은 그곳을 호기심에 가득 차
서 들여다보았다. 방은 아늑했고, 책이 빽빽이 꽂힌 서가 앞에는 육중해
보이는 가죽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벽 근처의 한구석에는 치료용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는 전화기 한 대가 뎅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고, 꾸불꾸불한 가는 갈색 선
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었다.
선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나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의 갈색 선을 내려다보았다.
나탈리는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전화선이 뭔가에 의해서 예리하게 잘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스 플러머!"
나탈리가 플러머의 손에 들려 있던 가위를 기억하고는 중얼거렸다. 하
지만 왜 전화선을 잘랐을까?
나탈리가 돌아서자 바로 그때, 그 키 큰 잘생긴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
다.
"전화는 필요 없어요."
그는 나탈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결국은, 이게 작별의 파티라고 당신에게 말해야겠군."
그가 웃었다. 나탈리는 그에게서 이상한 친밀함을 다시 느꼈고, 이번에
는 그것이 확실해졌다. 역에서 전화했을 때 전화를 통해서 그와 똑같은 웃
음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농담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당신이 브레이스거들 박사죠, 그
렇죠?"
나탈리가 소리쳤다.
"아니요. 아가씨. 아무도 당신이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소. 당신이 온다
고 전화했을 때 우리는 막 떠나려는 참이었소. 그래서 뭐라고 말을 해야만
했지."
그는 방 안으로 걸어들어 오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 삼촌은 어디 있죠?"
"거기."
나탈리는 그 키 큰 남자와 함께, 소파와 벽 사이의 공간에 있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나탈리는 한 순간도 더 참고 볼 수가 없었다.
"지저분하지."
그 키가 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지. 일을 끝내고 나서 저 사람들은 술을
취하도록 마시려고..."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공허하게 울렸고, 나탈리는 파티의 소음이 사
라진 것을 느꼈다. 나탈리는 그들이 모두 문 앞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들의 틈이 벌어지면서 플러머가 방으로 재
빨리 들어왔는데, 구겨지고 잘 맞지도 않는 유니폼 위에다 어울리지 않게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런! 시체를 발견했군!"
플러머가 헐떨거리며 말했다.
나탈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플러머에게로 걸어갔다.
"당신이 어떻게 좀 하세요. 제발!"
"물론이지. 위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못 봤겠지? 박사의 직원들 말이
야. 끔찍한 광경이야."
사람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나탈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플러머의
뒤로 섰다.
나탈리가 애원을 하듯이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왜 그랬어요. 이건 미친 짓이예요! 삼촌은 의사였어요."
나탈리가 울부짖었다.
"귀여운 아가씨."
플러머가 재빨리 문을 잠그며 중얼거리자, 사람들이 나탈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긴 정신병원이야....."



사라진 문신

- write by Clayton Matthews

서커스단의 밤은 현란한 색깔과 놀이기구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물건을 타는 상인들의 고함 소리로 폭동이라도 난 듯 시끌벅적했지만, 그래도
회전목마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열 명의 기형인>이라는 쇼의 사회를 맡고 있는 버니 매터는 징을 치고, 마
이크에 대고 악을 쓰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자, 여러분! 가까이 오세요. 여기 공짜 쇼가 있습니다. 자, 여
러분, 여기 온갖 기인들이 다 있습니다!"
나는 기인 쇼가 열리는 천막 앞, 몰려드는 사람들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돈
이 좀 들어올 것 같았다. <몬테나 깜짝 쇼>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단원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이봐, 해결사. 아직 거기 있군."
해결사, 그게 내 별명이었다. 진짜 이름은 데이브 콜인데, 이곳 몬태나 서커
스단 사람들은 모두 나를 해결사라고 불렀다. 말 그래도, 나는 필요한 경우에
경찰에게 돈도 좀 찔러 주어 도박판도 열고, 스트립 쇼도 할 수 있게 했다.
경찰이라면 유난히 질색하는 서커스 단원들 사회에서 나는 평화를 유지하고,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못하게 하고, 싸움도 말려 주는 등 법과 같은 역할
을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서커스단의 해결사란 말썽을 없애는 사람을 뜻한다.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월급을 주는 텍스 몬태나 사장 보다 내가 더 힘이 있다
고 말할 수도 있었다.
사실, 그 때문에 매점 텐트에서 카운터를 보는 케이 포스터가 내게 대든 적
도 있었다.
"당신은 다른 곳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 수도 있는데, 왜 서커스단에 남
아 있는 거죠? 당신은 여기서 누리는 권력을 좋아하는 거예요. 작은 연못의
큰 개구리가 되고 싶어하는 거죠."
케이와 내가 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그녀는 서커스단의 생활을
싫어했다. 나는 몇 년 전까지는 변호사 사무실을 갖고 있었는데, 면허 정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생겨서 사무실 문을 닫아야 했다.
어쨌든, 케이는 나와 결혼해 이 짓을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했다. 나
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연못 속의 개구리 어쩌고 하는 소리는 질색이었지만 서커스단 생활은
즐거웠고,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대우도 괜찮았다.
나는 버니를 사람들 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내게 눈
을 찡긋하더니 지팡이를 흔들며 돌아섰다.
"자, 여러분. 이제 제가 기인 몇 명을 맛보기로 불러내겠습니다. 입장료를
몇 푼만 내시면 안에서 다른 기인들도 수두룩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인 쇼는 열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버니는 세 명씩 불러내어 손님을 끌
었다. 그 순서는 바뀔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중기가 있어야만 700파운드가
넘게 나가는 <뚱녀> 살리를 불러내어 무대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버니는 이번에는 <물렁뼈> 샘과 <칼을 삼키는 사나이> 더크, 그리고 <문신
한 여인> 메이를 데리고 나왔다. 기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그런 사람도 있지
만 어떤 사람은 속임수를 썼다. <물렁뼈>는 선천적이지만, <칼을 삼키는 사
나이>는 속임수였다. 그리고 메이는 그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서커
스단에서 1년 남짓 일하면서 열 명의 기인을 포함해 다른 단원들 묘기는 다
알게 되었지만, 메이의 문신만큼은 아직도 볼 때마다 새로웠다. 20년 동안이
나 기인 쇼의 사회를 맡아 온 버니는 메이처럼 완벽한 문신을 한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버니는 공연할 때 사회를 보니까 코
앞에서 메이를 볼 수 있었다.
메이는 30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다. 관객을 끌기 위
해 그녀는 일부러 목에서 발끝까지 덮은 가운을 입고 나왔다. 나는 무대 위
에서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치고 공연하는 그녀를 여러 번 봤는데, 얼굴과 발
을 제외한 그녀의 온 몸은 놀라운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연구해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회화 같았다. 종교적인 그림과 사냥하는
모습, 그리고 유명 인사의 프로필, 성조기 등이 그려져 있고, 배 위에는 돛
을 3개 단 범선이 그려져 있어서 그녀가 배의 근육을 움직이면 범선이 마치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늙고 교활한 버니는 지팡이 끝으로 메이의 다리에 새겨진 문신이 보일랄말
락할 정도로 가운을 들춰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으고 있었다.
거기를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버니는 메이는 놔두고 이제는 <물렁뼈> 샘을
가지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샘도 맛보기를 어떻게 하는
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양쪽 귀를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이거나 손을 펴
서 한 손가락씩 따로 따로 빙빙 돌리는 정도만 보여 주고 있었다. 매점 텐트
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보이
지 않았다.
매점 텐트 안은 공연을 끝내고 온 단원들로 북적거려서 케이도 정신없이 바
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손을 한 번 들어 주고는 뒤쪽으로 가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며 쇼와 놀이기구들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
끝나면 모두 문단속을 잘했는지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비는 내가 할
일이 아니었고 경비원이 두 명이나 있었지만, 나는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았다.
잠시 후 매점 텐트 빼고는 모두 문을 닫았다. 단원들은 자신의 숙소에서 음
식을 해먹을 수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들 그날 수입을 부풀려 얘기하며 떠벌
이고 싶어서 매점 텐트로 몰려들었다. 내가 주위를 돌아볼 생각으로 막 일어
서려는데, 기인 쇼에 출연하고 있는 캔버스 맨이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해결사, 버니가 빨리 오래요!"
"무슨 일인데?"
"메이, 메이가 죽었어요!"
"죽어?"
"살해된 것 같아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조용해 진
것을 보니 우리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곧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나는
캔버스 맨에게 입 다물라고 손짓하고 그를 잡아끌어서 텐트 밖으로 데리고 나
갔다.
우리는 내일 올 손님들을 위해서 길에 깔아 놓은 톱밥을 밝으며 기인 쇼를
하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길 한복판에 있는 전구 외에는 불이 모두 꺼져서
사방은 아주 어두웠다. 포장이 내려진 포장마차는 마치 탐욕스러운 입을 꽉
다문 것 같았고, 멎어 있는 놀이기구들은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버니는 텐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깡마르고 나이를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그는 매표소에 기댄 채 도끼날처럼 여윈 얼굴에 파이프를 물고 빽빽 빨
아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버니? 누가 메이를 죽였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오늘 낮 쇼에서 돈을 좀 벌어서인지 메이가 뭐
좀 할 일이... 그래, 뭐 좀 할 일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문신한 여자 하나 없어졌다고 해서 표가 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마지막 쇼가 끝난 다음 그애 방으로 갔더니 불은 켜져 있는데 문을 두드려도
아무 대답이 없는 거야. 문이 잠겨져 있지 않길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등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더군."
"더크의 칼이오?"
버니는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더크는 칼 먹는 일을 하기
전에 칼 던지는 쇼를 했었는데, 그때 문신을 하지 않았던 메이가 조수 역할
을 했었다. 그런데 칼 던지기가 별로 인기가 없자 더크는 칼을 삼키는 일을
했고, 메이는 문신을 새겼다. 더크와 메이는 한때는 애인 사이였는데, 메이
가 버논 레인스를 만나 그의 권유에 따라서 문신을 새긴 다음 부터 둘 사이
가 나빠졌다. 버논은 매력적인 사내였지만 악당이었다. 그저 사기나 치는 나
쁜 녀석이 아니라 무장강도였다. 그 녀석은 서커스단원으로 위장하고 살면서
시내에 나가서 은행을 털곤 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었다. 텍스 몬테나
사장도 알았다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미드포크라는
마을의 은행에서 경비원을 죽이고 10만 달러를 털었다가 그 돈을 한푼도 써
보지 못하고 잡혔다. 그때서야 우리는 버논이 전과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전과에다 경비원 살인죄까지 더해져서 그는 집행유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
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돈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럼... 가보기나 합시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는 텐트를 돌아 메이의 방으로 갔다. 내가 경찰을 부르자고 말했지만
버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언젠가 내가 경찰을 불러야 하긴 하겠
지만, 서커스단 사람들은 시체가 무릎까지 쌓이더라도 자발적으로는 경찰을
부르지 않을 사람들이다.
우리가 텐트를 돌아 메이의 방 앞에 모여 있는 기인들이 보이는 곳까지 갔
을 때 버니가 내 팔을 붙잡았다.
"들어가기 전에, 해결사, 자네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버니는 주저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뭔데요?"
"그게 좀 해괴한 일이라서...나도 서커스단 밥을 먹으면서 해괴한 일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뭐가 해괴하다는 거요? 말을 해요. 말을!"
"그녀의 문신 일부가 없어졌어."
"뭐가요? 뭐가 없어졌다고?"
"누군가 메이의 등에서 피부를 한 2인치 정도 정사각형으로 벗겨갔어."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문 앞에 모여 서 있는 단원들을 해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메이가 쇼를 할 때 입
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왼쪽 어
깨뼈밑으로 갈색 손잡이의 칼이 꽂혀 있었고, 버니 말대로 등 아래쪽의 피부가
2인치 정도 벗겨져 있었다.
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메이의 피부를 도려낼 때 그녀는 이미 죽
어서 심장이 피를 뿜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버니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내가 물었다.
"어떤 문신이 없어진 거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 많은 문신 중에서 어떤 게 없어졌는지 알 수가 있나."
"혹시 메이의 문신을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나요?"
"내가 알기로는 없네."
"누군가 어떤 문신이 없어졌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버논은 알겠죠. 그가 메이
의 문신을 해줬으니까. 참, 지금 감옥에 있지."
"지금은 없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버니를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탈옥했어. 자네는 모르고 있었나?"
"몰랐어요! 당신은 어떻게 알았죠?"
나는 톡 쏘듯이 물었다.
"메이가 말해 줬어. 버논이 그녀를 만나러 이리 온다고 전화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침울해 있었나 봐."
"버논이 왔나요?"
"왔을지도 모르지만, 보지는 못했네."
"그 녀석이 메이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 녀석이 탈옥을 해서 이리로 온다
는 것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나지 않던가요? 알았어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그럼 최소한 나한테라도 말했어야죠."
버니는 어깨만 으쓱할 뿐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네."
"그랬겠죠. 지금이라도 경찰을 불러야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먼저 더크부
터 만나봐야겠군요. 밖에는 없던데."
"아마 자기 텐트에서 술 마시고 있을 거야. 그 녀석은 아직까지도 메이를
좋아하고 있는데, 메이가 멍청하게도 버논이 탈출했다고 얘기를 한 모양이
더라구."
"모두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군."
"자네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야, 해결사. 버논이 메이를 죽일
줄 누가 알았나? 버논이 메이를 왜 죽이겠어?"
"만약 버논이 죽였다면.... "
나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우리 둘 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버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이가 살해된 것은 사라진 문신 조각 때문일 것이
분명하고, 버논이 범인이라면 문신을 가져간 이유는 한 가지뿐일 것이다. 문
신은 아마 은행에서 훔친 돈을 숨겨놓은 곳의 지도일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거의 1년 동안 메이는 10만 달러가 숨겨진 곳의 지도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내보이면서 걸어다녔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던 셈
이다. 그러나 버논이 그 이유만으로 메이를 죽였을까? 메이와 돈을 나누지 않
으려고?
나는 버니에게 아무도 메이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으라고
말했다. 내가 떠나자 버니는 가죽으로 된 담배 쌈지를 꺼내 파이프에 채웠다.
더크의 텐트는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크는 술을 마시고 있
었는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서 불
을 켰다.
불이 켜지자 더크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많이 취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눈이 부신지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는 희미한 목
소리로 말했다.
"뭐야? 누구야?"
더크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40대였는데, 아무도 그의 진짜 이름은 몰랐다.
서커스단에서는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는 6피트가 넘는 키에 빨래판 처럼 말
라서 허약해 보이는 편이었다. 그의 연기 중에는 불이 켜진 형광등을 삼키는
것도 있는데, 뱃가죽으로 형광등 불빛이 비친다. 불빛이 그의 삐쩍 마른 몸
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묘한기분이 들곤 했다.
"아, 자네군, 해결사. 무슨 일인가?"
더크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나는 충격 요법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가 죽었네, 터크. 살해됐어."
"메이가 뭐....?"
그는 침대에서 일어서다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살해됐다고?"
나는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오늘 밤에 메이 방에 간 적 있나, 더크?"
"아냐.. 물론, 아냐. 내 차례가 끝나고 나서 난 곧장 이리 와서 술을 마셨어
메이는 일찍 들어가던데."
"자네는 아직도 메이를 사랑하나?"
"아니.. 그래, 사랑해.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지. 해결사, 자네도 알잖아."
서커스단에서 결혼이라는 말은 결혼증명서나 목사의 주례가 없어도 가능한 것
이었는데, 1주일에서 평생까지 마음만 맞으면 언제까지나 같이 살 수 있다. 서
커스단에서는 아무도 그런 결혼이 불법이라거나 부도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 그런다고 누가 피해를 보겠는가? 그리고 서로 사이가 틀어지면 둘 중의 한
사람이 끝났다고 말하고 그것으로 서로 끝나는 것이다. 서커스 단원들은 히피
들보다 훨씬 전에 이런 식의 결혼을 해왔다. 세상의 새로운 것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서커스 단원들간의 이런 결혼은 어느 모로 보나 합법적인 것이다.
"자네는 버논이 메이를 만나러 여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더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메이가 말해 주더군."
"오늘 밤에 버논을 본 적 있나?"
"아니...."
더크가 내게 한 발 다가섰다.
"버논이 죽였나?"
"나는 몰라. 자네가 죽였나?"
더크는 한 방 얻어맞은 듯이 비틀거렸다.
"나는 메이를 죽일 수 없어, 해결사!"
"자네 칼 좀 보세, 더크."
"왜?"
"메이가 칼에 찔려 죽었어. 던지는 칼에 말이야."
"그럼, 자네는...?"
"더크, 보여 주게!"
"좋아, 좋다구!"
더크는 침대 밑에서 트렁크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서류 가방보다 약간 크고
납작한 가방을 하나 꺼냈다. 더크는 그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 가방은 안에 벨벳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크기와
모양이 다른 20개의 칼을 집어넣을 수 있는 칸이 있고 가죽 끈으로 묶게 되
어 있었다. 20개의 칸 중에서..18개밖에 없었다. 2개가 비어 있었다.
더크가 숨을 몰아쉬었다.
"2개가 없어졌어!"
"난 그 중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알아. 메이의 등에 꽂혀 있지."
"해결사, 난 맹세코..."
"이 가방을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언젠가?"
"몇 주일 됐을 거야. 녹슬지 않게 가끔씩 닦아 두거든."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없어진 칼이 있었나?"
"아냐. 모두 다 있었어."
"알았어, 더크. 어디로 갈 생각은 말게. 경찰에 연락해야겠어."
"난 아무데도 안 갈 거야, 해결사."
더크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사무실로 갔다. 올해 60 살인 텍스 몬테나는 거인이었는데, 모자 부터
신발까지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텍스가 텍사스 주나
몬테나 주 가장 가까이 가본 것은 미주리 주 서부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서커
스단이 거기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서 가본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진짜 카우보이인 것처럼 카우보이 복장을 즐겨 입었다. 텍스에게 간단하게 상
황을 설명하고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자 그도 동의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아이오와 주였기 때문에 나는 시골뜨기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레이 탐린이라는 보안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보안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흰 셔츠까지 차려입은 아주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발
에 소똥도 보이지 않았다. 그 보안관 역시 곧, 서커스단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불신 같은 것을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살해된 사람이 기인 쇼에 나오는 문
신한 여자이고 누가 그 피부까지 한 조각 떼어갔다는 것을 알고는....
보안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기인이 기인을 죽인 게 뭐 대단한 일이야? 이틀 후면 담당 구역에서 떠날 텐
데 뭐하러 골치를 썩여?>
나는 더크와 버논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다. 그 보안관은 또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탈옥수와 칼 삼키는 놈, 그 둘 중에서 누가 영창에 가든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보안관은 당연히 버논을 용의자로 생각했다. 그는 이미 탈옥수에 살인자인 버
논을 잡았다면 신문에 한두 줄 쯤은 나오겠지만, 지금 여기 없으니 더크라도
취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메이의 시체를 가져가고, 지문 채취하는 사람들이 간 다음에 탐린 보안관은
더크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시가를 물고 이리저리 걸으며
깊이 생각해 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빛이라고는 매점 텐트에서 흘러나오는 것뿐이었
다. 나는 <거울의 집>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더크의 가방에서 없어진 두번째
의 칼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만약 버논이 여기까지 와서 메이를 죽였다면
지금쯤은 멀리 도망쳤겠지.
나는 시가를 땅에 던져 발로 비벼 껐다. 그때, <거울의 집>의 불이 갑자기
켜지고 입구 양쪽에 세워놓은 광대인형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하면서 녹음
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거울의 집>은 손님이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
서 거울을 복잡하게 설치해 놓은 통로를 찾아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인가 싶으면 거울이고, 거울인가 싶으면 문이 있는 착각을 느끼게
된다. 별로 돈벌이는 되지 않지만, 회전목마처럼 고전적인 것이어서 어느 서
커스단에나 하나씩은 다 있는 것이다.
나는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들어서서 길을 잃고
거울의 미로 속으로 자꾸만 거울에 코를 박는 모습은 참으로 우습고 볼 만한
광경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한가운데에 누군가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구조를 잘 알면 들어갔다가 쉽게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방향 감각을 잃을 것이다. 처음
에는 소리쳐 불러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녹음된 웃음소리가 너무 커
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았고, 불을 끄는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그만 두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거울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길을 잃었다. 이리
저리 부딪히고 넘어져서 코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아팠는데, 그래도 그 무릎
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는 뒤에 있기도 하고,
앞에 있기도 했지만, 나는 좀처럼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
빌어먹을 웃음 소리가 계속 들려서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
고 말았다.
한참을 헤매고 난 다음에 그 사람 옆에까지 갈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 옆
에 쭈그리고 앉아서 목덜미에 손을 대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손가락
힘 때문인지 그 사람은 천천히 기울어져서 모로 쓰러져 버렸다. 그는 버논
레인스였다.
나는 더크의 다른 칼을 찾았다.
칼은 버논의 갈비뼈 바로 아래에 손잡이까지 박혀 있었는데, 버논은 아직까
지도 두 손으로 칼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피가 흥건했다.
무릎 끓고 있는 자세로 보건대 버논은 칼 위로 엎어졌든지, 아니면 자살한 것
처럼 보였다. 전형적인 할복 자살 자세였다. 그러나 버논은 동양인도 아닌 데
다가 내 생각엔 자살할 인물도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몸을 수색했다. 메이의 피부 조작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무슨 흔적이나 혈흔 같은 거라도 남아 있나 해서 주머니를 한 번 더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느닷없이 웃음 소리가 멎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너무나 조용해서 고통스
러울 정도였다.
잠시 후에 누군가 스피커로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해결사, 자네 거기 있나? 자네가 보이는데... "
나는 밖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좋아, 거기 있게. 우리가 들어가지."
버니의 목소리였다.
버니와 탐린 보안관, 그리고 경찰 두 명이 내가 있는 곳까지 금방 찾아 왔다.
거울로 이루어진 복도는 그 사람들이 모두 서 있기에는 너무 좁았다. 경찰 둘
은 거의 포개지다시피 했다. 거울에 그들의 모습이 끝없이 반사되어서 마치 나
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웃음 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어서... "
버니는 시체를 보고 말을 멈췄다.
"버논이군. 죽었나?"
"죽었소."
"버논 레인스? 그 탈옥수 말입니까?"
탐린 보안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사람이오, 보안관."
"그럼 이제 다 끝났군. 이자가 와서 여자를 죽이고 자살한 게 틀림없어."
보안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른 말을 했다.
"너무 좁군요. 나갑시다."
보안관은 부하에게 검시관을 다시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 경찰은 나가려다
가 거울에 얼굴을 찧고는 욕을 버럭버럭 해대며 코를 문질렀다. 버니가 앞장서
서 길을 안내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보안관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에서 말한 대로 사건이 해결됐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보안관, 아직도 의문점은 많이 있소."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버논이 메이를 왜 죽였겠소?"
"질투죠. 메이가 그 뭐냐, 칼을 삼키는 사나이를 좋아했잖아요."
"내가 알기로는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버논과 메이 사
이도 마찬가지고, 적어도 메이의 입장에서는 그렇죠. 버논이 은행 강도라는 것
을 알고 메이는 마음을 정한 겁니다."
"하지만 메이는 버논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매주
장소를 바꾸어서 떠돌아다니는 서커스단을 그가 어떻게 그리 빨리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거야 쉽죠. 서커스 성서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까."
보안관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커스 성서요?"
"<오락업계>라는 잡지죠. 거기에는 모든 서커스단의 일정이 나와 있소. 서커
스 단원이면 누구나 그 잡지를 읽어요. 버논처럼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말이요."
보안관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군시렁거렸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만약 버논이 자살했다면 왜 자살했겠소.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말
이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죄책감이나 뭐 그런 거겠죠."
"그럼 메이의 등에서 벗겨간 피부는 어디 있소?"
"그걸 누가 알겠어요. 서커스 단원 중에 누가 식인종인 모양이지."
보안관은 코웃음을 쳤다.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소."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재미있게 들어봅시다."
보안관이 비꼬아서 말했다.
"그 문신 조각은 버논이 턴 은행 돈을 감춰놓은 곳을 그려놓은 일종의 지도일
거요. 버논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탈옥할 수 있을 경우를 생각해서 돈을 숨
겨놓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영원한 지도를 만들어 놓았던 거요. "
"그래서요? 버논이 와서 메이를 죽이고 그 지도를 가져갔다는 말입니까?"
"그의 몸에는 없었소. 내가 벌써 찾아봤소."
"누구 허락을 받고... 좋아요. 지도를 못 찾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누군가가 버논이 이리로 와서 메이를 만나 지도를 찾으려 한다는 것도
알고, 메이를 죽인 다음에 문신 조각을 도려내서 숨어서 기다리다가 버논까지
죽였다는 얘기요. 더크의 가방에서 칼이 하나가 아니라 2개가 없어진 이유가 그
거요. 처음부터 두 명을 없앨 계획이었으니까. 이제 살인범은 마음놓고 10만 달
러를 차지할 수 있겠지."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알 것 같소. 버니?"
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버니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응?"
"문신 조각 어디다 감췄습니까?"
"나...? 자네 정신 나갔군, 해결사!"
"아니오, 내 추리는 정확할 걸요."
나는 시가를 땅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당신은 어떤 문신이 없어졌는지 잘 모른다고 했죠. 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
어요. 당신은 쇼에서 일하는 기인들 중에서 누가 손에 거스러미만 일어나도 아는
사람이요. 그리고 메이는 매일 당신의 코앞에서.. 버니,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 문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겠지만 결국 알아냈을 거요.
매이가 그 정도로 양심적이었고, 당신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겠죠. 당신은 다시
미드포크에 가서 공연할 날을 끈기 있게 참고 기다렸겠지. 그런데 더 이상 기다
릴 수 없게 된 거요. 버논이 탈옥해서 이리로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말이
오. 그래서 당신은..."
탐린 보안관은 다른 건 몰라도 순발력 하나는 끝내줬다. 갑자기 버니가 후다달
달아났는데, 보안관은 20미터도 못 가서 버니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렸다.
경찰은 버니의 가죽으로 만든 담배 쌈지에서 담뱃가루가 묻은 문신 조각을 찾아
냈다.
보안관은 내게 문신을 보여 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농가와 나무, 그리고 가축
들이 그려진 전원 풍경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숫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경도와 위도를 나타내는 숫자 같았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한 나무 옆에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작게 X자 표시가 있었다. 나는 탐린 보안관에게 문신을 돌려주었
다.
"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안관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 말했다.
나는 경찰들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버니를 양쪽에서 붙들고
끌고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모두 잠자리에 든,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
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다 여기 저기 숨어서 보고 있을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서커스 단원 중의 누군가
가<거울의 집>에 불을 켜서 내가 버논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경
찰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아 내가 발견하도록 했을 것이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정적과 평화로움이 물려들었다. 모두 잠자리
로 돌아간 것 같았다. 텍스 몬테나가 내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무실로 갔다.
나는 나중에 버니가 결국 범행 사실을 자백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미드포크에서 공연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여기저기 물어 보았
다. 사람들 말로는 경찰이 마을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 밑에 묻혀
있던 돈을 발견했는데, 문신에 X자 표시가 있던 바라 그것이었다고 한다.



포도주 한 병
- write by Borden Deal
판사는 문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기다렸다. 아내가 15분 전에 전화를 했으니,
이제 앞으로 10분만 있으면 나타날 것이다. 판사는 법정에서처럼 꼿꼿하고 엄
숙하게 앉아 있었다. 얼굴 역시 마음처럼 굳어 있었다.
판사는 덩치가 컸다. 그 큰 몸집 때문에 위엄이 있어 보였고, 주름진 얼굴은
근엄해 보였다. 머리는 희끗희끗한 반백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결혼하던 날보다 더 희어진 것도 아니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하얀 2층집인데, 그의 집은 고목들이 줄지어선 거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 2층집이었다. 그가 지금 아내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
는 의자처럼 낡아서 색깔도 바래고, 여기저기 흠집이 생기긴 했지만 편안한 집
이었다. 이 집은 그의 아버지가 판사였을 때 지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판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음을 좀더 굳게 다져먹
었다. 그리고는 집 근처에 멈춘 자동차 소리와 현관 앞까지 걸어오는 또각거리
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를 조용히 듣
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틀림없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더 보게 될 줄
알았지. 딱 한 번 더.
그녀는 문을 열고 판사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판사님?"
판사는 그녀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들었다. 긴장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밝고 스스럼없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
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안녕, 그레이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어
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려고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
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 헤어 스프레이를 뿌려서 고정시켜 놓은 듯이, 무
슨 모임이나 파티에 갈 때마다 짓곤 하던 그 밝은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판사는 이제야 마침내, 그녀가 나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 했다.
결혼생활 동안 의심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
허영심까지 포함해서....
그레이스는 2층 옷장 속에 가득 찬 값비싼 옷을 놔두고는 떠날 수 없다고 생각
하는 여자였다. 몇 조각의 천 조각 때문에 상처 입은 남자의 가슴을 한 번 더
아프게 해도 상관없는, 허영심에 가득 차고 아주 이기적인 여자였다.
"제 옷을 가지러 왔어요.신경 쓰지 마세요."
그레이스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당신은 정말 가겠다는 말이군."
그레이스가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물론이에요. 당신도 알고 계셨잖아요. 아신 지 1주일이나 됐어요. 오래 걸리
지 않을 거예요. 옷을 꺼내고 나서..."
그레이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신 남자 친구는 어디 있나? 어디 모텔에서라도 기다리고 있나?"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짐을 저 혼자 옮기기가 힘들 것 같다며 도와 주러
왔어요. "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판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그는 혼자서 고통스럽게 뇌까렸다. 판사는 한여름 복더위인데도 리넨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코트를 추스르며 일어서서 뒷주머니에서 38구경 권총을 꺼
내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마치 손가락으로 때리듯 얼굴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큰 나무 그
늘이 드리워져 있기는 했지만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의 콘크리트 도로를 굽
고 있을 태양을 생각하자 금방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판사는 현관 끝까지 가서 차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판사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청년은 아주 잘생겼고 그레이스보다 더 젊어 보
였다. 판사는 계단을 내려가 차 옆으로 가서 차창 안을 들여다 보았다.
"난 그레이스의 남편일세. 자네가 윌리스인 모양이군."
판사는 아무 필요도 없이 말을 했다.
판사는 그 청년의 부드러운 얼굴이 일그러지기를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청년에게 자신이 거친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위험이 전혀 없어 보
인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라며 꾹 참고 기다렸다. 판사는 청년을 차에서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지. 여기 차 안에 앉아 있다가는 더위를 먹을텐데 말
야."
윌리스는 머뭇거리다가 곧 차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보기좋게 그을린 피부에
건장한 체격이어서 반백의 판사 옆에 서니 훨씬 더 젊어 보였다. 판사는 그레이
스가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있을까? 그래, 돈도 있을거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전 오고 싶지 않았지만.... "
윌리스는 차 앞을 돌아 판사 앞으로 다가서면서 판사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짐을 가져가려면 누가 도와줘야 할 거야. 이 무더위에 숙
녀가 힘들게 짐을 들 수는 없지. 난 너무 늙어서... "
판사는 윌리스의 팔을 끌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면서, 집 벽이 두꺼워서 겨울
에 따뜻하게 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여름에는 참 시원하다느니, 요즘 짓는 집
들은 벽이 과자 상자처럼 얇아서 이런 남부의 기후 속에서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다는 둥,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그런데도 계속 날림 공사만 하는 거야. 난 가끔씩 건축업자들처럼 무식한 놈
들도 없다고 생각하네."
윌리스는 판사가 끝없이 말하는 통에 말 한 마디 못하고 집 안까지 들어섰다.
집 안은 시원해서 순식간에 리넨 코트 밑의 셔츠에 배었던 땀이 말라버려 소름
이 돋았다.
"앉게. 곧 돌아오겠네."
판사는 윌리스를 혼자 남겨 두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내려가기
전에 뒤쪽 계단에 서서 귀를 기울였는데, 그레이스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두운 지하실도 시원했다. 판사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지하실
한가운데 있는 전등을 찾아 불을 켰다. 그리고 선반으로 가서 광주리 안에 있
던 술병을 꺼냈다.
그는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술병을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내가 2층에서 아
내를 기다리던 것처럼 이것도 여기서 10년 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며 누워 있었
군. 이제 기다림은 끝났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돼.
판사는 불을 끄고 계단을 더듬거리며 올라갔다. 그는 부엌에서 잔과 병따개를
찾아 부엌 문을 밀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돌아서서 문을 닫고 윌리스를 바라
보니 그는 여전히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판사는 그가
바람 속에서 위험을 감시하려는 사슴 같다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잽싸게 달아
날 수 있으니 젊음이란 참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앉게, 이 사람아. 난 그레이스를 잘 알아. 좀 있어야 할 거야. 기다리는 동
안 이 세리주나 한 잔 하세."
판사는 술병을 들어 보였다.
젊은이는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판사는 모른 척하며 무릎 사이에 병을
끼우고 그 주름진 손으로 병 마개를 비틀었다. 썩은 코르크 마개는 한번 힘을
주자 쉽게 빠졌다.
판사는 즐겨 앉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아직도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윌리스, 이곳은 작은 마을이야. 난 여기서 한평생을 살아왔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여기서 사셨지. 난 여기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판사가 되
었네. 난 아주 오래 전부터 판사일을 해왔어."
판사는 말을 멈추고 잠시 세리주 술병을 바라보았다.
"난 이 마을을 잘 알아. 이 남부 지방의 특성을 말이야. 내가 자네를 죽인다
해도 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어. 자네가 내 아내와 만나던 순간부터 자네는
아주 불리한 입장이 되어 버린 거야. 물론 자네는 그걸 몰랐겠지. 자네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자기 아내의 정부를 쏴 죽였다고 해서 처벌하자
고 할 사람은 1만 명 중에서 열 명도 안 될 거야. 물론, 법은 그렇지 않지.
하지만 세상 일이 법대로만 되는 건 아냐."
윌리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판사는 그가 겁을 먹고 긴장했다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그는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판사는 이제 자신이 무서운 노인
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무서운 늙은이가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도 없는데.
"난 오랫동안 자네를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어. 언제고 나타나기만 하면
말야. 난 아내를 사랑하네. 젊은이들은 늙은이가 젊은 아내를 바보처럼 사랑하
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젊은이들은 광적이거나 정열적인 것, 그리고 욕
망에 대해서는 잘 알지. 하지만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 늙은이의 바보 같은 사
랑은 절대 모를 거야. 그래, 모르지. 젊은이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해. 그래서
난 자네를 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야."
판사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지난날의 추억 때문
에 고통스러워서인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는 법조인이야. 변호사로서, 판사로서 일해왔지. 난 폭력을 경멸
하는 사람이야. 매일같이 법정에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봐온
사람이니까 말일세."
판사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포도주 병을 들어올렸다.
그는 마개를 뺄 때 부스러진 코르크 부스러기가 씻겨 나오도록 자신의 잔에 술
을 조금만 따랐다. 그리고 청년의 잔을 채운 다음, 자신의 잔도 채웠다.
"앉게. 이건 아주 좋은 포도주야. 이런 술을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야."
판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제서야 윌리스는 꼭두각시처럼 어정쩡하게 의자에 앉았다. 잔을 드는 윌리
스를 보면서 판사는 그가 술로 공포를 없애고 용기를 얻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술을마신 윌리스는 오래된 고급 포도주 특유의 부드러운 맛에 깜짝 놀랐다.
"그래. 아주 좋은 술이지. 아주 오래된 술이고. 우리 25회 결혼 기념일에 마
시려고 아껴 두었던 거지."
윌리스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다시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마시게, 어서 어서 지금보다 더 마시기 좋은 때는 없을 거야."
판사의 입술이 비뚫어졌다.
판사는 술이 가득 찬 차가운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술잔을 돌리며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맴도는 술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스와 나는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갔지. 그게... 그녀의 조건 중의 하나
였어. 아내는 한 번도 여행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야. 우리는 프랑스
에서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갔었지.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 오래된
아몬틸라도(스페인산 세리 백포도주)를 숨겨 가지고 온거야. 그레이스의 몸 속
에 숨겨서 세관을 통과했지. 그래도 그때는 법을 어겼다는 것이 아주 낭만적으
로 느껴졌었네. 그렇게 몰래 가져온 술을 우리는 25회 결혼 기념일에 따기로
하고 여태 아껴두었던 걸세. 벌써 10년전이군."
윌리스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꿀꺽꿀꺽 들이켰는데, 잔이 몇모금도
남지 앉자 음미하면서 마시고 싶은지 조금씩 마셨다.
판사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천천히 마시게. 이 술은 음미하면서 마셔야 할 가치가 있으니까 말야. 나는
우리가 불법적으로 들여온 이 술을 맛보기 위해서 10년을 기다렸네. 그리고 앞
으로 15년은 더 기다려야 될 거라고 예상했었지. 하지만 그레이스를 기다리면
서 지금 이 술을 마시는 게 잘된 일인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제가 오직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없어서..."
판사는 손을 내저었다.
"난 자네가 와서 반갑네, 윌리스. 나는 말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내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적격자가 누구겠나? 이 넓은 남부에서 누가 자네보다 더
내 말에 관심을 가져 주겠나? 나이를 먹을수록 대화가 아쉬워지고.. 남는 것은
대화했던 추억뿐이지."
판사가 말을 멈추자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판사는 이제 반쯤 남은 술병을
바라보았다. 반병을 마신 것이다. 술이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따뜻해
져서 판사는 그 편안한 안락 의자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위층에서는 아직 아
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판사는 그레이스가 짐을 싸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최대한 꼼꼼히 짐을 쌀 것이다. 판사는 포도주
한 병을 마실 시간은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레이스를 만났을 때 난 50이었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난 그때
까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처럼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난 한창 때 데이트도 해보고, 춤도 춰봤고 키스까지 해봤네.
하지만 사랑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
판사는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리며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윌리스의 잔에
술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말을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윌리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판사의 얘기를
듣고 있어서 판사는 더 이상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내 비서였어. 잘 익은 브랜디처럼 아름다운, 젊고 유능한 여자
였어. 그녀는 새로 이 동네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몰
랐네. 하지만 1주일도 못 돼서 난 사랑에 빠졌지. 그레이스를 만나기 전에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레이스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영리하기도 했지,
늙은 홀아비와 비서의 애정 행각이 흔히 어떻게 끝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거
야. 자신은 그런 꼴을 당하려고 하지 않았지."
판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조심스래 단어를 골라가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때 그녀가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사무원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다
는 것을 몰랐었어. 물론 알았다 해도 그게 나한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걸
세."
윌리스는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일어섰다.
"더 이상 듣고 싶지... "
윌리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는 앉으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지금의 그레이스는 그때와 달라. 지난 10년 동안 변했고 많이 배웠지. 그래,
얼마나 배웠는지 몰라. 그녀가 음탕했다는 얘기는 아닐세."
판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윌리스는 다시 의자에 앉
았다. 순간적이었던 분노도 가라앉은 듯 판사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판사
는 맛을 음미하면서 오래된 술을 천천히 마셨다.
"그것이 나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네. 난 그레이스를 사랑했지. 내 것으로 만들
고 싶었어. 나이는 들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의 열병을 앓았지. 난 어
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어. 그런데 그녀는 영리해서 나를
교묘히 피했어. 그럴수록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졌지.
그녀의 월급과 휴가비도 올려 주었네."
판사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식으로 1년을 보냈어. 말이 1년이지 정말 너무나 길었어."
판사는 술병을 들어 볼에 비추며 병 속의 액체가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러고는 술잔을 가득 채운 다음 2층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곧 내려오겠군. 그 당시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
었네. 나와 결혼하는 것...이 50의 늙은이와 결혼하는 것이었어. 나에겐 많지
는 않지만 그래도 돈도 좀 있고 명예도 있었거든. 그녀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
기 때문에 난 그녀의 가족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어. 그녀는 한 번도 말해 주
지 않았지. 아마 그녀도 기억하지 못할 걸세. 여자란 집안 내력이나 생일 따위
는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이? 그건 문제가 아니었지. 그레이스는 나를
정열적인 육체를 가진 한 남자로서 대하지 않았어. 권력을 가진 판사로밖에 보
지 않은 거야. 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과거를 잊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위치를 사랑한 거야. 당시에는 나도 그걸 몰랐었지. 오랜 시간이 지
난 동안 아주 조금씩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지. 물론 그레이스는 이 말을 모두
부정할 거야. 우리가 어떻게 결혼하기로 결정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네....
그냘 오후에 내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녀는 1
년 동안 매일 내 앞에서 꼬리만 치다가 무자비하게 나를 나꿔챈 거지."
판사는 윌리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 안 그런가?"
"글쎄요... "
윌리스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 저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어. 그때는 필사적이었지만 말이야.
그녀는 그때 25살이었고, 사무원은 평생 사무원 노릇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저 사람은 이제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아. 오래 전부터 느긋
해졌지."
"하지만 10년 동안 같이 사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레이스에게 화를 내
고 계시지만 10년을 같이 사셨어요."
윌리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판사는 웃었다.
"화? 그레이스는 약속한 대로 내가 만족을 주었어. 나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
도 나눠 갖지 않고 그녀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있었어. 그녀는 나이든 내 심신
에 차고 넘칠 만큼 기쁨을 주었지. 아들까지 낳아 주었으니까.... "
윌리스가 놀라서 움찔했다. 그레이스가 그 얘기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 이었다.
"아들이 있다는 건 몰랐나? 아이 이름은 보비지. 그 애는 지금 멀리 떨어진 곳
에 있는 학교에 있지. 난 아들을 원했는데 갖게 된 거야. 제왕 절개 수술을 하
기 했지만 말야. 애는 하나뿐이고 난 지금 60살이야. 그리고 저 사람은 나와 헤
어지려고 하는 거야. "
"전 그레이스를 사랑합니다. 이해하시거나 믿으실 수는 없겠지만, 전 그녀를..."
"물론 그렇겠지. 그레이스는 대단한 여자야.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최대한 이용
할 줄 알지. 나도 자네가 그레이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네, 자네가 처음은 아니
니까."
판사는 말을 멈추고 술병을 바라보았다. 윌리스는 권하기도 전에 술잔을 내밀었
다.
"한 잔은 더 나오겠군. 그때쯤이면 그레이스도 내려올 거야. 천천히 마시게. 이
런 술을 다시 마셔 보기는 힘들 테니까. 정말 힘들 거야."
판사는 술잔에 검고 울퉁불퉁한 얼굴을 숙이고 제사 술을 따르듯 정중하게 술을
따랐다. 두 사람 모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술이 병목에서 흘러나와 잔에 채워지
는 것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의사에 등을 기대고 잔을 들었다.
"그레이스는 2년전부터 나돌기 시작했어. 내가 58세 되던 해였지. 뻔히 알면서
도 막아볼 도리가 없었어. 나는 그녀가 적당한 사람을 고르면 내게서 떠날 거라
는 것을 알고 있었지. 어쩌면 나는 자네를 기다려 왔는지도 몰라, 윌리스."
판사는 술잔 너머로 윌리스를 보았다.
"그레이스가 자네에게서 뭘 원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군, 윌리스. 정말 궁금
해."
윌리스는 잔을 움켜쥐고 판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그의 손처럼
아무런 떨림도 없었다.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판사를 쳐다보기
만 했다. 그는 할 말이 없어서 판사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난 알 것 같아. 그건 자네 젊은일 거야. 윌리스. 내가 옛날에 그레이스에게서
원했던 것처럼 그레이스는 자네의 젊음을 원하고 있는 거야. 자네는 몇 살인가,
윌리스? 저 사람은 이제 35살이야."
판사가 집이 떠나갈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윌리스가 몸을 움직였다. 판사는 자신의 말이 그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다고 생
각했다.
"전 그레이스를 사랑합니다, 선생님. 아실 겁니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그녀
에게 주겠습니다. 젊은이든, 돈이든..."
"그래, 그래, 알아. 자네가 그러리라는 것을 아네."
윌리스는 허리를 펴고 앉았다.
"제가 여기 오길 잘 했군요. 선생님과 얘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뻐요. 사실 두려
웠거든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그럴 겁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
으로 시달릴 것을 예상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선생님의 그 공평하고 지적인
말씀을 듣고 보니..."
판사는 젊은이의 더듬거리는 말을 아니꼽다는 듯이 듣고 있었다. 윌리스는 술을
빨리 마셔서 취한 것 같았다. 판사는 조금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뭐 있겠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 우리 둘이 이 오래된 술
이나 다 나눠 마시자고 말하고 싶겠지."
판사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자, 마시게.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군. 그 사이에 판사는 주머니에서 38구경
권총을 꺼냈다. 윌리스가 술잔을 비우고 잔을 내릴 때 판사는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총알에 맞기 직전에 윌리스의 깜짝 놀란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둘이 친근하게 앉아 있던 낡은 의사 사이로 쓰러졌다.
판사 역시 놀랐다. 젊은이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나면 쏘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발의 총성은 이 오래된 집을 무너뜨릴 듯 메아리쳤다. 총소리는 마치 어린
아이 울음 소리처럼 들렸고, 그레이스가 못 들었을 리 없었다. 판사는 왼손에 술
병을 들고 오른손에 총을 든 채 일어섰다.
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레이스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올려다보니 그레이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단은 어두침
침했지만 그레이스의 주름진 얼굴은 똑똑하게 보였다. 그래, 당신도 이젠 35살
이야.
"판사님!"
그레이스가 울부짖었다. 평소의 우아함은 볼 수 없었다.
"판사님! 무슨 짓이에요!"
"그레이스. 우리가 아껴왔던 포도주를 우리 둘이 다 작살내 버렸어. 우리 둘이
말이야."
판사는 아직도 연기가 나는 총을 떨어뜨렸다. 총이 마루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
다. 판사는 그레이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전화기 쪽으로 걸어
갔다. 판사는 전화를 하면서도 여전히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포도
주의 마력이 사라져서 이제는 텅 빈, 보통의 낡은 병일 뿐이다.


<푸른 십자가>

지은이 : 체스터턴
1장

그 날 아침 하와위치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세계적으로 유

명한 봐란탄 탐정도 끼여 있었다.



그는 연한 회색 자켓에 새하얀 조끼를 걸치고, 푸른 리본이 달린 밀짚 모자를 쓴 가벼운

몸차림이었다. 거무스름한 피부의 이 사나이는 턱에 까칠까칠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이러한 그를 누가 보아도, 회색 자켓 속에 총알을 잰 권총이 감추어져 있고, 조끼 주머니

에 경찰 수첩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볍게 눌러 쓴 밀

짚 모자 밑에, 온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파리 경찰국의 이름 높은 탐정 봐란탄의 놀라

운 두뇌가 있다고, 그 누가 생각이나 할까.



그는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도둑 '프랑보우'의 뒤를 쫓아, 벨기에에서 런던

으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으로 건너온 도둑 프랑보우는 때마침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가톨릭 교도들의 감사절

미사 소식을 듣고, 그 복잡한 때를 이용하여 한몫 단단히 보려고 기회를 노리는 참이었다.



도둑의 왕자라고 할 만큼 그 이름이 유명한 프랑보우가, 갑자기 도둑질에서 손을 떼고 감

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림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벌써 몇 해 전의 이야

기였다.


그는 구름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엉뚱한 뱃심을 가진 사나이로서, 대담한 짓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언젠가는 재판소에서 판사를 거꾸로 치켜들고,



"피가 온몸에 고루고루 잘 돌게 해 주마."



하며, 한참 들고 서 있었던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경찰관을 양쪽 겨드랑이에 한 사람

씩 껴안고는 파리의 거리를 쏜살같이 달리기도 했다.



그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교묘하기 짝이 없는 범

죄를 저지르는 등 번번이 경찰을 골탕 먹이곤 했다.



목장을 경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1마리의 젖소도 기르지 않으면서, 더구나 1대의 마

차나 1홉의 우유도 없으면서 체로리앙이란 우유 상회를 벌여 놓고, 수많은 집을 단골로 매

일 우유를 배달해 준 일도 있었다. 즉, 남의 집 문 앞에 배달해 놓은 우유병을 자기 단골집

에다 살짝 옮겨 놓으면서 돌아 다니는 것이었다.



또, 그는 단 한 사람의 나그네를 골탕 먹이기 위하여, 집집마다 붙어 있는 문패를 밤중에

모두 지워 버리고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자그마한 우체통을 만들어 조용한 시골이나, 시가지에서 좀 떨어진 교외에 세워 놓

고, 그 통에 넣은 편지를 모두 거두어 간 일도 있었다.



또 그는 몸놀림이 아주 빨랐다. 몸집은 엄청나게 컸지만 귀뚜라미처럼 잘 뛰어다녔고,

원숭이처럼 나무에 잘 올라갔다.



그래서 그는, 제아무리 파리에서 이름을 날리는 탐정 봐란탄이 자기의 뒤를 따라다닌다고

해도, 조금도 겁을 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러한 프랑보우였으므로, 봐란탄 탐정도 어떻게 하면 그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곰곰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프랑보우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보우가 아무리 몸이 날쌔고, 꾀가 많고, 변장을 잘한다 해도 워낙 키가 컸기

때문에, 더디를 가나 대번에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봐란탄 탐정은 사과를 파는 여자를 보거나 또는 귀부인을 만나거

나, 키가 큰 사람이면 남자고 여자고 간에 무심히 지나치지를 않았다.



만약 지금, 프랑보우가 교묘하게 변장을 해 가지고 봐란탄 탐정이 타고 있는 이 기찾간에

뛰어든다고 해도, 그것은 목이긴 기린이 변장한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곧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찻간에는 하아위치에서 탄 사람과 도중에서 탄 사람을 합쳐 모두 여섯 사람뿐이었다.



몸집이 작은 역원 한 사람이 종점까지 간다면서 둘째 번 역에서 탔다.



'웨섹스'주의 시골 정거장에서는 장을 보러 가는 농부 세 사람과 홀아비 한 사람이 탔는

데, 모두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 맨 마지막에 올라탄 사람은 가톨릭교의 신부로

서, 그는 런던까지 간다고 멀했다.



이 신부의 모습을 보자, 봐란탄 탐정은 저절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고 있

었다. 신부는 마치 방금 선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한 농부의 얼굴 같았고, 또한 공처럼 동그

란 얼굴에 왕방울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신부는 종이로 싼 보따리를 4개나 들고 있었는데, 매우 소중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그것

들을 건사하느라고 쩔쩔맸다. 게다가 함께 들고 있는 허름한 우산이 자주 떨어지는 바람에,

이것을 줍는 모습이 여간 우습지 않았다.



봐란탄 탐정은 신을 믿고 있지 않는 터라, 신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신부는, 자기가 들고 있는 이 종이 보따리 속에 푸른 보석을 박은 순은제 귀중

품들이 들어 있다고 손님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남에게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이 순박한 신부의 태도에, 봐란탄 탐정은

약간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2장

이윽고 기차가 스트래트퍼드역에 닿자, 신부는 짐을 껴안고 찻간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신

부는 깜박 잊고 내린 우산을 가지러 다시 찻간으로 올라왔다.


이 때 봐란탄 탐정은 그를 붙들고, 아무에게나 자기의 물건을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라고 친절하게 귀띔해 주었다.


물론 신부와 이야기하는 이 짧은 동안에도 봐란탄 탐정의 눈은 쉴 새 없이 신부의 아래 위

를 주의 깊게 살폈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여자건 남자건 닥치는 대로 키가 1미터 80센

티미터가 넘는 사람이면 모두 살펴보는 것이었다. 도둑 프랑보우의 키는 1미터 90센티미터

나 되었다.


봐란탄 탐정은 리버푸울역에서 차를 내렸다. 우선 그는 런던 경찰국으로 가서 필요한 일에

대한 의논을 했다. 그러고는 리버푸울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기로 했다.


빅토리아 거리를 지나 넓은 광장으로 나선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광장은 순 런던

식으로 되어 있었고, 지붕이 높다란 집들은 모두 빈집같이 조용했다. 광장 한복판에는 관목

이 네모꼴로 심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처럼 외롭게 보였다. 그

런 집들 가운데 유난히 우뚝 솟은 식당이 한 채 있었다.


그 건물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문 앞에는 조그마한 나무를 심은 화분이 놓

여 있었고, 오렌지빛과 흰무늬가 엇갈린 차일이 드리워 있었다.


봐란탄 탐정은 담배를 피워 문 채 한참 동안 이 건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수한 프랑스 사람인 봐란탄 탐정은, 모든 사건을 자신의 지혜로운 머리를 써서 해결했다.

지금 그는 그러한 논리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만약 프랑보우가 런던에 나타났다면, 그는 윔블던의 가난한 사람으로, 또는 메트로폴의 호

텔에 묵고 있는 돈 많은 사람으로 그때 그때 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넓은 범위 속

에서 그를 찾아내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막연할 때면 곧잘 우연한 것에 의지해 보려는 습성이 있다. 실마리를 찾아 그

것을 풀어 가면서도 때때로 그 실뭉치가 잘 풀리지 않으면, 그는 다시 실마리를 찾기 시작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경찰이나 일반 시민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과는 전혀 먼 곳에 관심을 두었

다. 빈집이라든가 막다른 골목 등, 뒷골목이란 뒷골목은 모두 찾아다녔다.


봐란탄 탐정은 지금 이 식당의 그 의젓한 모습에서 그 무엇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돌층계를 올라가서 창문 곁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

고 커피를 청했다. 시간은 벌써 아침 식사 때가 지났지만, 봐란탄 탐정은 아직 조반을 먹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간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니 그도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그는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달걀 프라이를 시키고 나서, 커피에

설탕을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프랑보우의 일로 가득 차 있다. 프랑보우가 이 때까지 잡히지 않고 교묘하

게 피해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탐정이라는 직업에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

나 그는, 자기의 탐정으로서의 두뇌가 프랑보우의 범죄적 두뇌에 결코 지지 않는다고 생각

했다.


<범죄자가 독창적인 예술가라면, 탐정은 그 비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쓸쓸히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얼른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커피잔에 무

심코 소금을 넣었던 것이다.


그는 설탕 그릇을 조사해 보았다. 틀림없이 '설탕'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

로 이 속에 소금이 들어 있을까?


그는 그 옆에 있는 소금 그릇을 살펴보았다. 그릇에는 '소금'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으나 맛

을 보니 설탕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떤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밖에 또다른 이상이 없는가 하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흰 종이를 바른 벽에 무슨 국물을 뿌린 것 같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봐란탄 탐정은 얼른 보이를 불렀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보이가 달려왔다.


"이 설탕 맛 좀 보게. 그래 이 식당은 이것으로 손님을 끄는건가?"


그러자 보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이 집은 매일 손님에게 이런 짓궂은 장난을 하나? 소금과 설탕을 바꿔 넣어 주니, 서비스

치고는 너무 고약하군."


보이는 손님이 빈정거리는 까닭을 알자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예예, 죄송합니다. 그런 싱거운 수작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쩌다 실수를 해서 이렇게

실례를 범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보이는 굽실거리며 설탕 그릇과 소금 그릇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곧 주인을 데리고 나왔다. 설탕과

소금을 맛본 주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때 보이가 무엇인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소리쳤다.


"앗, 그렇지 그래! 아깐 신부 두 사람이 여기 앉았었지!"


"뭐? 신부 두 사람이?"


"예, 두 사람의 신부였습니다. 저 벽에다 수우프를 끼얹어 놓고 갔어요."


"뭐, 벽에다 수우프를 끼얹어?"


보이는 벽을 가리켰다. 주인은 그제야 말을 시작했다.


"예, 제 얘길 좀 들어 보십시오. 저 꼴이 된 얘기를......."


봐란탄 탐정은 수상스럽다는 듯 눈초리를 날카롭게 빛내며 그 이야기를 재촉했다.

3장

"실은 오늘 아침, 문을 열기가 바쁘게 임찌감치 두 사람의 신부가 들어와서는 스프를 주

문했습니다. 스프를 다 마시고 나자 한 신부가 셈을 치르고 그냥 나가 버렸는데도, 나머지

한 신부는 느린 성미 탓인지 자기의 짐을 건사하느라고 꾸물꾸물 늑장을 부리는 것이었습니

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마시다 남긴 스프를 저 벽에다 끼얹는 것이 아니겠어요? 마침

나도, 저 애도 안에 들어가 있다가 놀라 뛰어 나오니 벌써 벽은 저 지켱이 되었고, 그 신부

는 문 밖으로 나간 뒤였습니다. 손해가 될 것은 별로 없지만 괘씸한 생각이 들어 뒤쫓아 거

리고 나갔습니다만, 그 땐 벌써 저 골목을 두 신부가 막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봐란탄 탐정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쓰고 스틱을 들었다. 여태까지 캄캄하게

막혔던 일이 환히 트이는 듯 싶었다.



그는 이 이상한 일을 캐 보기로 했다. 그는 셈을 치르고 문 밖으로 나와, 두 신부가 사라

진 골목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봐란탄 탐정의 눈은 어떤 흥분 상태에서도 냉정과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어떤 과일 가게 앞을 막 지나치려 할 때, 마침 그의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다시 걸음

을 돌려 가게 앞으로 와보니, 여러 가지의 과일들이 가득히 쌓여 있고, 그 과일의 이름과 값

을 적은 푯말이 죽 꽂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먹음직스런 귤

과 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이 쌓인 곳에는,



<탄지이르산 최고급품. 귤 2개에 1페니.>



라는 푯말이 꽂혀 있고, 반대로 귤이 쌓인 곳에는,



<최상 최고의 맛, 브라질산 밤. 1파운드에 4펜스.>



라고 가격표가 바뀌어 꽂혀 있었다.



과일 가게 주인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봐란탄 탐정은 주인을 향해, 푯말이 잘못 꽂혀 있다고 일러주었다.



주인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잔뜩 화가 난 채로 푯말을 바꿔 꽂았다.



봐란탄 탐정은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주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런 말을 묻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알아볼 이링 있어서

그럽니다."



가게 주인은 여전히 화가난 얼굴이었다.



"도대체 푯말이 바뀌어 꽂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디 참고로 좀 듣고 싶은데요. 이 밤

과 귤의 가격표가 엇갈려 꽂힌 것은 두 사람의 신부와 무슨 관계는 없는지요?"



봐란탄 탐정의 이 말에, 과일 가게 주인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여보, 여보시오!"



상점 주인은 꽥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구요? 당신으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나타나서 공연히 참견이오? 당신은 아까 그

패들과 잘 아는 사이란 말이요? 그럼 그 녀석들한테 말이나 전해 주시오. 두 번 다시 물건

들을 엎어놓기만 하면 천하에 없는 신부라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당장 그 자리에

서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말이오."



"뭐요? 신부가 이 과일을 엎어 버렸다구요?"



봐란탄 탐정은 동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인의 기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예, 마구 엎었소. 이 사과들이 구럴 한길까지 흩어져 나갔을 정도로..... 이렇게 다시 쌓

아 놓지 않았다면 나한테 혼났을 거요. 암, 단단히 혼을 내주고 말고!"



"대체 그 신부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저 두 번째 골목에서 왼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마 광장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래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봐란탄 탐정은 과일 가게에서 나와 두 번째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 곳에는 순경 한 사람

이 있었다.



"여보시오, 혹시 이 근방에서 신부 두 사람이 지나가는 걸 못 보았소?"



"예, 보았소. 한 사람은 주정군같이 길 한복판에 떡 버티고 서 있었소."



"어느 쪽으로 갔소? 어느 쪽으로?"



"저 길로 다니는 노란 버스를 타고 햄스테드 쪽으로 갔소."



봐란탄 탐정은 바삐 경찰 수첩을 꺼냈다.



"자, 당신의 동료 두 사람만 속히 불러 주시오. 그들의 뒤를 쫓아야 할 테니....."


봐란탄은 이렇게 내뱉듯이 말을 던지고 버스 정류소로 뛰어 갔다.



이윽고 아깐 만났던 경찰관이 다른 경찰관 한 사람을 데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우린 무슨 일을 해야지요?"



봐란탄 탐정은 스틱 끝으로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버스 위층에 올라가서 얘기합시다."



봐란탄 탐정과 두 사람의 경찰관은 노란 버스의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택시로 가면 버스로 가는 것보다 갑절은 빠를 텐데요."




경찰관이 이렇게 말하자, 봐란탄 탐정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옳은 말이오. 가는 방향을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그럼 이제부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봐란탄 탐정은 침울한 얼굴로 연방 담배만 빨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름을 잡는 듯한 일을 하고 있소. 단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 둘 것은, 어디

서든지 좀 이상한 일이 없는가 사방 팔방을 잘 살펴야 되는 일이오."


"이상한 일요? 무슨 일인데요?"



"이상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을 마친 봐란탄 탐정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노란 버스는 북쪽을 향해 천천히 달

다.


이미 몇 시간이 지난 듯 버스는 지루하게 달렸으나, 봐란탄 탐정은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4장

두 경찰관은 탐정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공연히 버스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화도

났으나, 한편으로는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배도 고파지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은 훨씬 지났는데도 런던의 북쪽 시골길은 끝없이 이어지고만 있었다.


그러나 아직 타프넬 공원 가까이밖엔 오지 못했다.


버스는 여전히 털털거리며 달렸다. 봐란탄 탐정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창 밖의 경치만을

바라보았다.


겨우 캄텐타운을 막 지나갔을 때, 두 경찰관은 견디다 못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윽고 봐란탄 탐정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두 경찰관을 깨우고 버스를 세웠다. 두 경찰

관은 깜짝 놀라 굴러 내리듯 버스에서 내렸다.


봐란탄 탐정의 손가락은 길 왼쪽에 있는 창문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오색이 찬

란한 궁정과도 같은 커다란 호텔 창문이었다.


창문 위에 큼직한 글씨로 '요리'라고 쓴 걸 보니, 호텔의 식당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창

문에는 다른 창과 달리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드디어 단서를 잡았다!"


봐란탄 탐정은 스틱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저 깨어진 유리창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다!"


탐정은 두 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천천히 점심을 들

면서 깨어진 유리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보게, 저것 좀 보게. 유리창이 깨어진 것 같은데?"


점심값을 치르면서 봐란탄 탐정은 호텔의 보이에게 너지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보이는 허리를 굽혀 잔돈을 거슬러 주며 대답했다. 봐란탄 탐정이 그 거스름돈에 더 많은

팁을 보태어 다시 건네주자, 호텔 보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런데 손님, 꼭 여우한테 홀린 것처럼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이상한 일이라니, 무슨 일인데?"


봐란탄 탐정의 가슴은 몹시 뛰었다.


"사실은 조금 아까 이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뜨기 신부 두 사람이 들어와서, 아주

값싼 런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셈을 치를 때, 한 신부가 돈을 내더니 거스름돈도 받지 않

은 채 그냥 나가 버리는 거여요. 그래 그 때까지 나가지 않고 있던 키가 작달막한 신부에게

거스름돈을 내주다 보니, 글쎄 돈이 계산서의 세 배나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신부님, 돈을 더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키가 작은 신부가,


'음, 그래?'

하며,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더란 말씁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신부님, 돈을 더 내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계산서를 들여다보았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인데?"


"저는 틀림없이 계산서에 4실링으로 적었는데, 글세 다시 보았을 땐 14실링으로 되어있지


않겠어요."


"그거 참, 이상하군!"


봐란탄 탐정의 눈은 반짝 빛났다.


"그래서?"


"그런데 신부님은 참 이상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밖으로 나가면서,


'여하튼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그러면 그 남은 돈은 창에 낄 유리 값으로 쓰도록 하게.'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저는 다시,


'예? 창이 어떻게 되었는데요?'

하고 되물었지요.


'음, 이렇게 깨뜨려 줄 테니.'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산 끝으로 멀쩡한 유리창에 저렇게 구멍을 뚫어 놓았어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세 사람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중의 한 경찰관이 말했다.


"우린 미친 사람을 뒤쫓고 있는 게 아닙니까?"


보이는 더욱 신이 나는 듯 말으 말을 계속했다.


"참 저도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얼마 동안으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지요. 그 사

이에 키 작은 신부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먼저 나간 신부를 따라서 파록가 쪽으로 사라지

고 말았습니다."


"파록가!"


봐란탄 탐정은 외치듯 한 마디를 남기더니, 밖으로 뛰어나와 파록가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길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는데, 가로등이 없어 어둑어둑

했다.


모든 것이 쓸쓸하기만 한 거리에 저녁빛이 점점 짙어 갔습니다. 아무리 런던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라난 경찰관들이라 해도, 지금 자기가 어디를 걸어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햄스

테드 광장으로 나가는 길 정도로 짐작할 뿐이었다.


일행은 갑자기 불빛이 환한 거리고 나섰다. 봐란탄 탐정은 화려하게 꾸며진 과자점 앞에

서자,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가 초콜렛 1개를 샀다. 그리고 무얼 좀 물어 보려고 우물

쭈물하고 있는데, 안주인이 먼저 말을 건넸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바싹 마른 이 여자는, 봐란탄 탐정의 훌륭한 옷차림을 유심히 보

다가 그의 뒤에 서 있는 경관을 보자 두 눈이 빛났다.


"저, 혹시 선생님께서는 조금 전에 놓고 가신 종이 보따리 때문에 오신 게 아닌가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 물건은 벌써 소포로 부쳤으니 안심하셔요."


"예? 종이 보따리라니요?"


"예, 아까 두 신부님이 잊고 가신 건데요."


봐란탄 탐정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섰다.


"그 종이 보따리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십시오."


"예예, 그건 저........"


안주인은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안 됩니다. 한 30분 전이지요. 신부님 두 분이 오셔서 박하 사탕을 사시고는, 한 두어

마디 무슨 얘길 하신 다음 그대로 저 광장 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중의 한분이 다시 들

어와서는, 지금 종이 보따리 하나를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 두루 찾아

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그 보따리가 별로 소중한 것은 아니지

만, 어디서든 발견하는 대로 좀 보내달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주소를 일러 주셨지요. 그리고

우편요금까지 내 주고 가셨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계실 때는 그렇게 찾아도 없던 부따리

가 엉뚱하게도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곧 소포로 부쳤지요. 그 주소는 똑똑히 기억되지

않습니다만 웨스트민스터.......뭐라든가? 웨스트민스터 뭐라고 했는데.....? 그 일 때문에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 아닙니까?"


"뭐 좀 알아볼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햄스테드 광장은 어딘가요?"


"예, 저 길로 곧장 10분쯤 가시면 됩니다"


봐란탄 탐정이 더 묻지도 않고 뛰어가는 바람에 두 경찰관도 그 뒤를 따랐다.


그 길은 좁고 어두컴컴했다. 이윽고 넓은 광장에 나왔을 때,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하는 저쪽에는 밝은 빛이 조금 남아 있어싿. 하늘에는 벌써 하나 둘 수정

같은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남

녀들도 있고, 그네를 뛰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한쪽 언덕에 서섬 멀리 초원을 바라보던 봐란탄 탐정은 그가 찾으려는 것을 끝내 찾고야

말았다.


움푹 팬 길가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있는 검은 옷차림의 신부를 보

았던 것이다.


두 신부는 마치 2마리의 개미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봐란탄 탐정은 곧 한 시부는 키가작고,

또 한 신부는 키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키가 큰 신부는 약간 허리가 굽어 있었다.


탐정은 스틱을 내두르며 바그게 뒤쫓아갔다.


그들과의 거리는 차차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모습이 뚜렷해지자 봐란탄 탐정의 가슴은 울

렁거리기 시작했다. 키가 큰 신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작은 신부는 전에 그가 기찻간에서

만났던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봐란탄 탐정은 이것으로 이미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 키가 작은 신부는 웨섹스주의 신

부인 브라운으로서, 이번 런던에서 열리는 감사절 미사에서 여러 나라로부터 모이는 교구

신부들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보여 주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그 십자가는 푸른 보석을 박은

은십자가였다.


그 시골 신부가 기찻간에서 '푸른 보석이 박힌 은십자가'라고 지껄였던 것이 바로 문제으ㅢ

십자가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봐란탄 탐정의 귀에까지 흘러들어왔으니, 도둑 프랑보우의 귕에도 들어갔

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둑 프랑보우가 그 귀중한 십자가를 훔치려고 계획할 것은 물론이었다. 더구나

보석을 들고 가는 신부는, 우산과 종이 보따리를 아무렇게나 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

게도 보석 자랑까지 늘어놓지 않던가!


양같은 어리석은 이 신부는 이리같이 사나운 프랑보우에겐 도무지 문제가 될 수도 없을 것

이다.


프랑보우같이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도둑이, 일류 배우처럼 신부로 변장하고, 브라운신

부를 이 햄스테드 광장으로 끌고 오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봐란탄 탐정은 조롱 속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된 저 순박한 신부를 불쌍하게 여겼다.


한편, 고양이같이 앙큼하게 신부의 탈을 쓰고 있는 프랑보우에 대해서는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이상 야릇한 사건들이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해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도대체 웨섹스에서 런던으로 올라오는 신부한테는 푸른 보석이 박힌 은십자가를 훔친다는

사건이, 식당 벽에다 수우프를 끼얹은 일이랑, 과일 가게에서 귤과 밤의 가격표를 바꾸어 꽂

은 일이랑, 유리 값을 먼저 내놓고 유리창을 깨뜨린 일 등, 이 잇달은 사건들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봐란탄 탐정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바로 눈앞에 도둑 프랑보우를 바라보는 그는, 이 놈을 체포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

했다. 봐란탄 탐정의 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그토록 줄기차게 프랑보우를 쫓아다녔지만 번번히 놓치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분함을, 이번

기회에 깨끗이 씻어 버려야만 했다.

5장

검은 두 그림자는 정신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푸른 빛으로 뒤덮인 언덕을 걷고 있었

다.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리는 성싶었다.


이윽고 쓸쓸한 언덕배기에 이르렀다. 봐란탄 탐정과 두 경찰관은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

까워지자 노루를 잡는 사냥꾼처럼 나무 뒤에 숨기도 하고, 덤불 속을 기어가기도 하면서 그

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이성'이란 말이 아이들 같은 목소리로 되풀이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뿐이

었다.


이윽고 그들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세 사람은 갑자기 빽빽이 들어찬 나무

들 때문에 두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당황한 봐란탄 탐정은 언덕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폈

다. 두 신부는 호젓한 나무 밑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금빛으로 물들어 있던 서녘 하늘은 벌써 잿빛으로 변하고, 별들은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

다.


봐란탄 탐정은 두 경관에게 몸을 숨기라 이르고, 살금살금 나무 뒤로 기어가 그들의 이야

기를 엿들었다.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봐란탄 탐정은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 세

상의 어느 신부가 하는 이야기와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신부는 상당히 고상한

학식을 가진 듯, 종교적인 문답을 조심스럽게 벌이고 있었다.


키가 자그마한 신부는 별다른 이야기가 아닌데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지껄였다. 그러나

상대방 신부는 아까부터 머리를 수그린 채 대답이 없었다.


"중세기에 살던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더없이 훌륭하게 생각했다오."


"아무렴."


키 큰 사나이는 갑자기 머리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요즘 사람은 툭하면 이성을 쳐들지만 그러나 몇 억이나 되는지 모를

저 별들을 쳐다볼 때면, 누구든지 우리 머리 위에는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스런

우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아니지, 아니야. 이성은 어디에나 두루 필요한 것이지. 가령 지옥의 끝이라 해도 그것이

필요할 것이오. 세상에서는 교회가 너무 이성을 무시한다고 비난하지만 당치도 않은 말이오.

이 땅 위에서는 단지 교회 하나만이 이성에 의해 하느님과 이어져 있는 것이오."


키가 큰 사나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누가 알리오, 저 무한한 우주를......."


"무한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물질적인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달막한 신부는 무릎을 고쳐 세우고 상대방을 마주 보며 힘있게 말해다.


"진리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의미는 무한이 아닙니다."


봐란탄 탐정은 두 경찰관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임나를 찌푸리며

손톱 끝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두 경찰관은,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쓸쓸한 저녁에 이

언덕으로 끌려 나와 신부들의 잠꼬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지돔 hffkT다.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봐란탄 탐정은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신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작달막한 신부가 말했다.


"이성과 정의의 법칙은 하늘의 별에까지 이어져 있지요. 우리들 머리 위에 있는 저 하늘을

보십시오. 저 별 하나하나가 다이아몬드 아니면 사파이어 같지만, 저기에도 이성과 정의의

법칙이 다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팔의 평원에도 진주의 골짜기에도 '너희는 훔치지 말

라'는 표지가 다붙어 있지요."


봐란탄 탐정은 이제 더 참을 수 없어, 살금살금 길가로 기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크 큰

사나이가 하도 잠잠하게 앉아 있는 바람에 의심스러워 다시 주저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여전히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키 큰 사나이는 비로소 입을 열

었다.


"과연 지당한 말씀. 그러나 역시 올바른 세계란 우리들의 이성을 초월한 높은 곳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천체의 신비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요. 우리는 다만 그 앞에 머리를 숙

일 뿐........"


여기까지 이야기한 키 큰 사나이는 갑자기 목소리와 태도를 바꾸어 가지고, 뜻하지 않은

말을 내던졌다.


"이봐, 자네가 가지고 있는 푸른 십자가를 이리 내놔! 어물어물하면 짓밟아 버릴 테야!"


그런데,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어야 할 작달막한 신부는, 의외로 동그란 얼굴을 들어 태연

히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다. 이 시골뜨기 신부에게는 공갈과

위협도 통하지 않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기가질려 넋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넌 내가 누군 줄 아나?"


이렇게 외치며 키 큰 사나이는 다시 소리쳤다.


"난 프랑보우라는 도둑이야! 얼른 푸른 십자가를 내놔!"


"안 돼!"


작달막한 신부는 단 한 마디로 딱 잡아떼었다.


그러자, 신부의 가면을 벗은 프랑보우는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허허....., 그럴 것이다. 넌 그걸 내놓고 싶지 않겠지? 네가 왜 내놓기 싫어하는지 말해 볼

까? 내가 벌써 선수를 쳐서 갖고 있기 때문이야. 여기 이렇게."


작달막한 신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기 소리만하게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프랑보우는 아주 신이 나서 말했다.


"정말이지, 거짓말이 어디 있어? 나는 똑같은 종이 보따리를 만들어 진짜인 네 것과 바꿔

쳤단 말야. 네가 들고 있는 건 가짜야 가짜. 이 수법은 좀 낡은 것이지만 이번에 써먹었지."


"옳지, 옳아!"


작달막한 브라운 신부는 이상하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과연 나도 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프랑보우는 브라운 신부의 말에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너도 들은 일이 있다고? 어디서 그걸 들었어?"


브라운 신부는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 준 사람은 우리 교회에 참회하러온 신사였다. 그의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20년 동안 종이로 포장한 물건을 바꿔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

여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나는 벌써부터 당신을 의심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참회하

던 사람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나를 의심했다고?"


프랑보우의 목소리는 살기에 차 있었다.


"그래 어떻게 눈치를 챘지? 이런 곳으로 끌고 온 게 수상해서.....?"


"아닙니다. 실은 오늘 아침,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

신 소매 밑에 숨겨둔 팔목의 비밀 장치를 보았기 때문이지요."


"뭐라고?"


프랑보우는 깜짝 놀라 부르짓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어?"


"적어도 교구를 가지고 있는 난데......."


6장(완결)

신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부의 뜻밖의 말에 프랑보우는 눈썹을 여덟 팔자로 만들며 어리둥절해했다.


"바로 하아틀플에서 내가 보좌 신부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 교구민 가운데 팔목에 비밀

장치를 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란 것을 대번

에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나도 소중한 푸른 십자가를 잘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바꿔치기를 해서 도로 그 푸른 십자가가 든 종이 보따리를 찾아 가지고 이리로 오

는 도중에 두고 왔습니다."


"뭣, 도중에 두고 왔다고?"


프랑보우의 목소리는 떨렸다.


"뭐 그런 정도입니다."


브라운 신부는 여전히 태연했다.


"내가 아까 과자점에서 박하 사탕을 살 때, 종이 보따리를 놓고 가지 않았느냐고 안주인에

게 물으면서, 그 보따리가 나오건든 우편으로 부쳐 달라고 주소를 일러 주고 왔습니다. 실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두 번째로 과자점에 갔을 때 슬쩍 그 보따리를 두고 온 것

입니다. 지금쯤은 아마 과자점 안주인이 그것을 찾아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내친구에게 부쳤

을 것입니다.


하아틀플 교회에서 참회하던 신자로부터 들었는데, 그 사나이는 언제나 정거장에서 훔친

손가방을 이런 수법으로 자기 집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꾀가 많은 녀석이지요. 교회

를 가지고 있으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답니다."


프랑보우는 얼른 자기가 가지고 있던 종이 보따리를 꺼내어 포장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안

에서는 십자가는커녕 길쭉한 납덩이가 나왔을 뿐이다.


"나는 도저히 네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너 같은 시골뜨기 신부한테 그런 꾀가 있다고 믿어

지질 않아. 어디에다 푸른 십자가를 감춘 것이 틀림없어. 이 근처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

으슥한 곳이야. 얼른 내놓지 않으면 빼앗아 버리고 말 테다!"


"힘으로는 안 됩니다. 첫째 내게는 그 십자가가 없고, 둘째로 이 근처에 전혀 다른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프랑보우가 브라운 신부에게 한 발 다가섰으나, 신부는 태연하게 말했다.


"저 나무 밑을 보십시오."


브라운 신부는 봐란탄 탐정이 숨어 있는 곳을 가리켰습니다.


"힘이 센 경찰관 두 사람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정이 숨어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따라왔는지 이상하지요? 사실은 내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말씀드릴까요? 나도 많은 범인들과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여러 가지를 알고 있습니

다. 처음에 나는 당신이 도둑인지 아닌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의 정

체를 알아 내려고 생각했지요. 보통 사람의 경우 커피 속에 소금이 들어가면 뭐라고 한 마

디 할 텐데, 당신은 그냥 아무 말도 없이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습니다. 또한 보통사람

이라면, 식당의 계산서에 자기가 먹은 것보다 값이 3배나 비싸게 적혀 나오면 주인에게 따

질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계산서에 장난을 해 놨었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잠자코 그 값을 치

렀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봐란탄 탐정은 프랑보우가 사납게 브라운 신부에게 달려들리라 생각

했다.


그러나 봐란탄 탐정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달싹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당신이 아무런 단서도 남겨 두지 않으려고 그러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

래 단서를 남겨 놓는 역할을 내가 했지요. 그리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르는 곳마다 소

문거리가 될 것을 남겨 두느라 무척 애를 썼습니다. 별로 큰 일이 아닙니다만 식당 벽에다

수우프를 끼얹었는다든가, 과인 가게의 사과 상자를 엎어 버리고 귤과 밤의 가격표를 바꿔

놓는다든가, 유리창을 깨뜨려 놓는다든가, 일부러 그런 일들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덕분에

내 푸른 십자가를 무사히 보호할 수가 있었고, 경찰관에선 좋은 단서를 남겨 주었지요. 어쨌

든 당신은 죄악의 밑바닥에까지는 가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이, 남의 못된

짓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내 직업으로

도 당신이 진짜 신부가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었지요."


"어떻게?"


프랑보우도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당신은 이성을 몹시 공격했는데, 그것은 엉터리 신학자만이 하는 수작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브라운 신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건사하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세 사람이 재빨리 뛰어나왔다.


프랑보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깊이 머리극 숙여 봐란탄 탐정에게 인사를 했다.


봐란탄 탐정은 인사를 막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세. 내게 인사를 해선 곤란해, 프랑보우. 우리 둘은 저 신부님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

네."

봐란탄 탐정과 도둑 프랑보우는 모자를 벗고 브라운 신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 키가 작달막한 시골 신부는 여전히 동그란 눈을 껌벅거리며 우산을 찾기에 바빴

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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