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모음 5

3학년2반 | 2022.01.27 10:27:36 댓글: 0 조회: 60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473

남자들만의 하룻밤
( A NIGHT OUT WITH THE BOYS )
BY ELSIN ANN GRAFFAM

어두워서 한 방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자가 놓인 방 한가운데로 더듬거리며 걸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실내 공기는 아내의 향수처럼 숨이 막혔다. 의자를 끌어다 낯선 남자 옆에 앉
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보았지만 낯익은 얼굴
은 없었다.
나는 조지아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옆에 앉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재떨이를 바라보았다. 재미있게 생긴 재떨이었다. 적어도 그날
밤 그 때까지 어떤 것보다도 내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었다. 지난 주에 편지가 왔을 때
겉봉을 뜯은 건 아내였다.
"자요!"
아내는 겉봉을 뜯은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예쁘게 인쇄한 종이였다.
"맞은편에 사는 인상 좋은 남자가 가지고 왔어요. 무슨 회의 초대장이래요.
한번 다녀오세요."
"가라구? 무슨 회의인데?"
나는 외투를 벗고 편지를 받았다.

아래와 같이 초대합니다.
브라이아웃 남성 클럽 연차총회.
때 : 1월 8일 (일) 오후 8시.
곳 : 알즈 레스토랑 람즈룸.
당신의 동포, 그렌 레이놀즈.

"흠, 모르겠어. 이 남잔 전혀 모른다구. 이런 클럽 이름도 들은 적이 없어."
내가 말했다.
"가시래두요! 이웃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이리 이사온 지 벌써 두 달
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잖아요."
조지아는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를 냈다.
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슈퍼마켓 같은 데서 한두번 조지아의 수다
를 들으면 누구든 찾아올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이 근처 사람들은 조용한가보군."
내가 말했다.
"동부 사람은 고향 사람만큼 붙임성이 없나 봐요."
조지아는 빈정대는 말투였다.
"이봐 조지아, 그 이야기는 그만둬. 우린 당신 때문에 정든 집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왔어."
"어머, 당신 지금 나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그건 다 당신 잘못이에요. 내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아세요."
"알았어, 조지아."
"아빠의 돈이 없었으면 당신은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내가 없었
으면 어떻게 되었구요!"
"그래, 내가 나빴어. 피곤하니 이제 그만... "
조지아는 아니꼽다는 듯 웃으면서 오렌지색 머리칼을 마포 걸레 같이 흔들며
말했다.
"옷은 뭐가 좋을까? 짙은 갈색 양복에다 내가 사 준 새 넥타이를 매고... "
아내는 내가 입고 갈 옷을 일일이 참견했다. 지금까지 14년 간 하루도 빼지 않
고 그래 왔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 8일 밤, 나는 브라이 아웃 남성 클럽 연차총회에 나오게 된 것이
다. 몹시 진저리치면서, 도대체 <연차총회>를 하는 클럽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봉사 클럽? 아니면 친목회? 그렇다고 해도 1년에 한 번이라니...
참석자들이 다 모인 것은 8시쯤이었다. 거의 모두 지친 슬픈 얼굴들이었다.
장의사 지배인의 모임? 아니면 자살미수자 클럽인가?
"이제 전부 모인 것 같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처럼 알파벳 순으로 시간
은 1분씩."
연단에서 레이놀즈가 말했다.
50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슬프고 피로한 기색으로 단 위로 올라 갔다.
"해리 아담스입니다. 내 아내는, 내 아내는.."
남자는 불안한지 이마에 땀을 닦았다.
"올해는 최악의 해였습니다. 여러분은 내 아내가 미인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행복하게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
위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하루 종일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릅니다. 어떻
게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융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을 안 들어주면 집에
있는 돈을 몽땅 가지고 나가겠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없어, 이 은행 저 은행에
서 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융자해다가 필요한 모든 것을 사 주었습니다. 그래도
밍크 코트니 다이아몬드니 하고 조릅니다. 나는 돈도 다 써 버리고 더 이상 융자
도 할 수 없어..."
"1분입니다. 해리!"
작은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사람과 교대했다.
"브라우닝입니다. 마누라의 성화로 장모가 집에 들어왔어요. 나는 마누라와 사
이가 좋지 않은데 이번엔 상대가 둘이 된 겁니다. 쨍쨍거리지 않나, 트집을 잡지
않나, 그것도 스테레오로 말입니다.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5분만 늦게
들어가도 둘이서 시끄럽게 야단이고, 마누라의 생일이나 장모 생일을 잊어버리기
라도 하면 그때는... "
브라우닝은 단상에서 레이놀즈를 보았다.
"아직 괜찮습니까?"
"10초 남았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젊지 않습니다.
나는..."
"1분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람, 나는 황홀해서 앉아 있었다. 정말 멋진 생각이다. 1년에 한
번씩 모여 아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혼자 끙끙 앓던 것을 속시원히 토해
놓는다. 이런 멋진 모임에 나오기를 주저했다니!
다음에는 도먼이란 사람이 나왔다. 이 남자의 부인은 너무 먹어대서 체중이 280
파운드나 되는 거구로 변했다.
다음은 프린. 그의 부인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믿어 지금까지 서른 여섯 명의
의사를 찾아다녔다.
하워드의 처는, 손님이 오지 않을 때는 틀니를 빼고 천연덕스레 집 주위를 걸어
다닌다. 그리고 아내가 새 스포츠카를 1년에 서너 번씩 들이받는다는 그라츠, 남
편이 좋아하는 헌 옷을 전부 자선단체에 내주었다는 모건의 아내.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난 특별히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점을 밝혀
두겠다. 그러나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아내가 내게 한 짓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멋진 일이었다.
나는 단상에 올라가 레이놀즈를 보았다.
"시작하시지요."
레이놀즈가 상냥하게 말했다.
"프레디 나프라고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 제 비서였습니다. 나이는 스물
셋, 이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그걸 저 냉혈동물인 마누라가 냄새를 맡
고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행동을 소문내고, 그 창녀한테서 떨어지기 위해서는 아
주 먼 데로 이사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니는 창녀가 아닙니다. 다시는 그녀와
만날 수 없겠지요. 아직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마누라는 옛날 일을 끄집
어내서 지금도 뇌까립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잊고 싶지만 그게 안 됩니다.
아내가 항상 생각나게 만들지요."
"프레디 1분입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단에서 내려올 때, 마이크에다 대고 힘껏 소리쳤다.
지금까지 39년 동안 이처럼 기분 좋은 적은 없었다. 막힌 걸 토해낸 듯 시원해
서 자꾸 웃음이 나와, 자리에 돌아온 나는 다른 남자들 이야기는 반도 듣지 못
했다.
아버지는 바보라고 아이에게 가르치는 오웬스의 부인, 대학을 졸업해서 남편보
다 더 똑똑하다고 믿는 쿠엔튼의 부인, 늦게까지 자고 집안일은 전부 남편에게
시키는 스미스의 부인, 그리고 남편의 옷을 직접 만들어 불황시대 영화에나 나
오는 몰골로 다니게 하는 즈게이의 부인 - 오늘 밤도 그는 그런 차림이다- 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싱글거리며 앉아 있는 남자가 내 시선을 끌었다.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싶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
는데, 레이놀즈가 떠들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자, 그럼 투표에 들어가도록 하겠
습니다. 조지,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 주세요."
"투표?"
나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이 남자의 부인은 남편이 외출하는 게 싫을
때는 남편의 가발을 감춰 버린다고 한다.
"그래요, 우리들 가운데서 제일 악처를 가진 남편을 뽑는 거지요."
나는 프레디 나프라고 썼다.역시 제일 나쁜 마누라를 가진 사람은 나라는 생각
이 들어서이다.
그렌 레이놀즈는 종이를 모아 정리한 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처음 나온 회원이 뽑혔습니다. 프레디 나프. 그의 애인을 창녀라고
욕한 부인의 남편입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레이놀즈의 축하를 받았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
지만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영예일 것이다.
그러자 슬픈 표정이 한풀 꺾인 사내들이 모두 주위에 몰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중 몇몇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 뒤, 모두 로비로 가서 한잔 마실 때, 나는 바 구석에서 레이놀즈를 발견하고
술잔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굉장한 아이디어입니다! 몸에 누적된 것을 배출한다는 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클럽은 누구 생각입니까?"
"내 생각이오. 지난 5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모였습니다. 내가 회원을 관리하고
있어 당신도 참석해 주기를 바란 겁니다. 당신 부인도 상당한 호걸이신 것 같기
에... 그렇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가만히 계셨나요? 당신이 만든 클럽이라면
서..."
"나요? 나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누라는 벌써 4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것 참 안됐군요."
나는 갑자기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니 계속 웃고 있는 분은 누굽니까?"
"게일 마크레랑 말입니까? 수도국 직원이지요."
"아, 그렇군요. 집사람이 그랬는데, 마크레랑 부인이 지난해 끔찍한 사고로 죽
었다고..."
레이놀즈는 싱긋 웃으며 내 팔을 토닥거렸다.
"맞습니다. 마크레랑이 작년 투표에서 뽑혔으니까요."



썩은 감자
( PURE ROTTEN )
BY JOHN LUTS


5월 25일 오전 7시, 롱아일랜드 호스큐 저택. 클락 호스큐에게 걸려 온
전화.
"호스큐인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라. 편지와 달라서
전화는 단서를 제공하기 쉽다. 전화 연락은 이번뿐이다. 짧게 끝내겠다.
네 딸 이모진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 앞으로 편지에는 <썩은 감자>라 쓰
겠다. 응석받이로 싹수가 글러먹은 열 살박이 부잣집 딸에게 꼭 알맞은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알리겠다. 네 집 근처에 우드로드란 길
이 있을 것이다. 그 막다른 곳에 지금은 빈집이 되어 버린 거버 농장의
건물이 있다. 그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둔다. 오늘 밤 가지고 가라.
매일 밤 조사를 해봐라. 이 일을 부인 이외의 경찰이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그 즉시 개구쟁이의 목숨은 없어진다고 생각하라. 우린 곧 알
수 있다. 앞으로 성실하게 해라."
찰칵.

5월 25일
호스큐 앞
썩은 감자에 관한 지난번 거래의 계속이다. 물품을 상처 없이 회수하고
자 한다면 백만 달러를 지불하라. 조사해 본 결과, 당신이 충분히 지불
할 수 있는 금액이라 판단했다. 당신이나 부인이 그 돈으로 가슴앓이에
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싼 가격이다. 편지로 대답을 해라. 내일 밤 10시
이후 거버의 우편함을 조사하겠다. 그때까지 편지를 넣어둬라.

당신을 존경하는 스내처 상회 A. 스내처

5월 26일
스내처 앞
썩은 감자를 상처내지 마라. 경찰에는 알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아내와 나는 당신 지시에 충실히 따르겠다. 그러나 당신
들 조사원은 실수를 했다. 내게 백만 달러의 지불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는 나 자신도 확실히 모르는 바다. 조사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건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협력할 작정이다. 물론 썩은 감자에 조금이라
도 위해를 가한다면 즉각 협력을 철회한다.

마음 아파하는 클락 호스큐

5월 27일
호스큐 앞
엉터리 소리 마라. 백만 달러는 간단히 마련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전면
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으니 썩은 감자의 대금을 75만 달러로 깎아준다.
우리로서는 어떤 방법이어도 좋다. 빨리 이 물품의 거래를 끝내고 싶다.

단호히 A. 스내처
스내처 앞
나는 이 편지를 조용한 우리 집 베란다에서 쓰고 있다. 우리 집이 어렇
게 조용해진 것은 요 몇 년 사이 처음 있는 일이다. 덕분에 사건을 곰곰
히 생각할 수가 있어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당신들이 최초의
금액을 25퍼센트 다운시킨 데서, 당신들이 이성적인 인간임을 알았다.
우리도 당신들에게 지지 않는 이성적인 인간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백만
달러의 4분의 3이란 액수는 잘 알다시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금액은 아
니다. 내 지위를 가지고도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는 일 없이 단시일 내
에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좀더 깎아주지 않겠는가?
이성적인 클락 호스큐

5월 29일
호스큐 앞
썩은 감자는 그냥 놓아두면 더 썩어 버리니 저장하기가 어렵다. 사실 우
리 회사로서는 오히려 폭탄 쪽이 다루기는 쉽다. 그러한 점에서 수수료를
50만 달러로 조정해서 곧 배달하고 싶다. 이제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마
지막 금액이다. 이 물품을 마지막으로 우린 다른 사업을 하고 싶기 때문
이다.
더욱 단호히 A. 스내처

스내처 앞
이번 요구액의 인하로 당신들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더 잘 알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내는 썩은 감자가 없어져 -잠시 동안이라고해도 -
지독히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모피 코트나 보석을 사 주면 슬픔
이 덮어진다는 걸 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여자와 결혼할
때는 친구나 사업 파트너를 선택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장점과 함께
단점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의 아픈 마음도 신속하게 치유되고 있
으며 처음의 슬픔이나 불안도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내 의견은 아내와
달리 50만 달러는 아무래도 비싸다는 생각이다. 만 단위로 해주지 않겠는
가?
클락 호스큐

5월 30일
호스큐 앞
도리가 없다. 이제 9만 달러다!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니까 잘 알아서
하도록. 내일 밤 거비 우편함에 넣어둬라. 그렇지 않으면 썩은 감자를 처
분하겠다. 우린 지금 아주 어려운 상태에 있다. 우린 살인이 목적이 아니
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증은 없다.

A. 스내처

스내처 앞
오래된 위궤양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나는 지금 이 협상을 매우 객관적
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얼마가 되었든 빨리 몸값을 지불하
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9만 달러 역시 만만치가 않다. 당신이 편지에 썼
듯이 물품을 처분해도 좋다. 처분했다는 증거를 보이면 다음 편지와 함
께 거버 우편함에 2천 달러를 넣어두겠다. 나는 당신들 요구대로 경찰에
는 알리지 않았으니 누구에게도 -아내까지 포함해서- 이 거래의 결말을
알릴 필요는 없다.

존경하는 클락 호스큐

5월 31일
호스큐
당신은 미쳤다. 이건 사람 목숨이다. 우리는 살인이 목적이 아니다. 그
러나 당신은 한 가지 옳은 말을 했다. 그래, 건강은 돈과 바꿀 수가 없
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내일 밤 썩은 감자를 그대로 돌려주겠
다. 대신 수수표와 보관료로 5천 달러를 내라.
스내처

스내처 앞
당신의 제안을 충분히 고려한 결과 역시 거절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울러 당신들이 보관중인 물품은 좋을 대로 처분하여 주었으면 한다.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클락 호스큐

6월 1일
클락 호스큐 앞
삼가 인사드립니다.
오늘 스내처 상회의 임원회의가 열려 어쩔 수 없이 두 임원은 부사장
이 되고 새 사장으로 나를 인정했습니다. 스내처 상회에서 당신에게 보
낸 편지 사본과 당신이 우리에게 보낸 답장이 전부 여기 있습니다. 아
이를 유괴하는 데 대하여 법률은 엄합니다만 아이를 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하지 않습니다.
반면 법률은 아이에 대해서는 엄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초범이기까지
하면 대부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벌받지 않지요. 이 편지 다발을 경찰
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시다면, 내일 밤 거버의 낡은 우편함에 50만 달
러를 넣으세요. 난 재정신입니다. 돈은 잔돈이 좋습니다만 50달러짜리
나 백 달러짜리여도 상관없습니다.

스내처 상회, 썩은 감자




=================================================================
두 사람의 엘러리 퀸 - 엘러리 퀸의 미스터리

줄리언 사이먼즈

이 책('위대한 탐정들 The Great Detectives')에서 다루고 있는 7명의 명탐정 가
운데 있어서 엘러리 퀸 만큼 우리를 당혹케 만드는 인물은 없다. 그것은 그에 관한
자료가 결핍돼 있기 때문이 아니라 - 그의 가족사에 있어서 어떤 놀랄 만한 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때로는 너무나 상호
모순된 것이어서 전기를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의 해석을 위한 노력을 팽개치
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상호모순된 사실들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떤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떻든 표지에 엘러리
퀸의 이름이 쓰여 있는 30여권의 장편소설 및 단편집 속에 있는 사실들을 우선 개
관해 보기로 하자.
내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엘러리 퀸의 이름이 쓰여 있는 초기 이야기들의 작
자은 엘러리 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은 엘러리 퀸에 의해 단지
<J.J.McC>이라고 밖에는 밝혀지지 않는 어떤 신사에게 구술된 것이고 그것을
J.J.McC이 뉴욕 시경의 기록을 참조하면서 소설의 형태로 꾸민 것이다. J.J.McC의
준비 노우트는 군데군데 아주 흥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퀸 이야기 가운데 최초
로 세상에 출간된 [로마 모자의 비밀(The Roman Hat Mystery)] 속에서 J.J.McC은
자기가 이탈리아의 어느 산촌을 찾은 일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옛 친구인 퀸 씨
일가를 만나게 됐노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전에 뉴욕시경의 경위였던 리처
드 퀸과 그의 아들 엘러리의 아내인 "멋진 여자"와 "할아버지를 빼다 놓은 듯이 닮
은" 그들의 어린애, 그리고 쥬너 라는 갖가지 집안 일을 맡아 하는 고아를.
퀸 부자는 이제 범죄수사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여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정착생활
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웨스트 87번가에 있는 그들의 집은 "그들의 활동기에
수집된 갖가지 진품들을 모아 놓은 반(反) 사적(私的)인 박물관"이 되어 있다. 우
리는 티로가 그린 퀸 부자의 초상화나 리처드 퀸이 애용한 피렌체산의 값비싼 구형
코담배갑 따위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J.J.McC은 후기 소설들 속에서 그들이 은퇴
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고 또 그들에 관해 보다 상세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우리는 퀸이 그들의 진짜 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 부자는 - 특히 금세기 10
년대와 20년대에 있어서 - "뉴욕 시 경찰기구에 없어서는 안될, 혹은 <주요한>이라
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톱니바퀴들"이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네덜란드 구두의
비밀 참조-원주). "10년대와 20년대에 있어서"란 1910년 - 1920년의 기간을 말한
다. 독자들은 여기에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러리 퀸의 소설 중 1920년대 후반 이전에 쓰여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또 어떤 사건들은 2차대전중이나 혹은 전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
해서 나로서는 J.J.McC이 고의적으로 우리를 속여왔다는 가정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 하면 초기 소설들의 출간시기는 맞다는 것
그리고 [로마 모자][프랑스 분(粉)][네덜란드 구두] 등등의 미스터리는 20년대 말
과 30년대에 일어났다는 것은 등장인물의 언어와 행동으로 보아 명백하기 때문이
다.
다행히 우리는 뉴욕에 있는 그들의 집이 아직 박물관이 되기 전이었을 때의 모습
을 상세히 묘사한 것을 갖고 있다. 그들 부자는 웨스트 87번가에 위치한 후기 빅토
리아 양식의 브라운스톤 저택 맨 윗층에서 살았다. {퀸가}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참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고 길쭉한 현관 홀이 나타난다. 현관 홀의 한쪽 벽
에는 사냥꾼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커다란 융단이 걸려 있다. 그 융단 아래쪽에
는 미션식(미국 남서부의 초기 가톨릭 포교단 특유의 양식-역주) 테이블이 무겁게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피지로 갓을 씌운 전등과 청동으로 만든 간이 책꽂이가
놓여 있다. 책꽂이에는 세 권으로 된 [아라비안 나이트] 한 질이 꽂혀 있고, 그밖
으로는 미션식 의자 두개와 바닥에 조그만 양탄자가 깔려 있는 것이 이 홀에 있는
것의 전부인데, 이 음침한 홀과는 대조적으로 거실은 아주 넓고 쾌적하게 만들어져
있다. 거실에는 천장까지 닿는 서가가 3면에 쭉 들어서 있다. 나머지 한쪽 벽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나 있는데 그 안에는 쇠살대로 둘러진 화로가 있고 벽난로 상단에
는 단단한 참나무로 선반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위쪽에는 리처드
퀸이 뉴른베르크의 펜싱 교사한테서 받은 검 두자루가 X자형으로 걸려 있다 - 그의
학생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 밖에 전등, 안락의자, 호도나무로 만든 구식
탁자, 밝은 색깔의 소파 따위가 보인다. 이 방이 바로 퀸 부자가 그들의 시간의 대
부분을 보냈던 곳이다. 이 방의 한쪽에 나 있는 스윙 도어(안팎으로 열리는 자동식
문-역주)를 열면 바로 주방이 된다. 엘러리와 그의 아버지는 각각의 침실을 갖고
있으며 쥬너에게도 작은 방이 하나 주어져 있다(퀸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로마 모
자의 비밀][프랑스 분의 비밀][왕은 죽었다]를 참조-원주).
퀸가의 아파트는 폭력행위의 무대로서는 그곳에서 남쪽으로 52블록 떨어져 있는
네로 울프의 저택과는 비교가 되지 못할 것이다. 퀸가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가장
난폭한 사건은 아마 저명한 벤디고씨 가족을 살해한 두 범인이 그 사건을 맡은 퀸
부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파트에 침입해 들어온 사건일 것이다([왕은 죽었다]참조
-원주). 우리는 두 주요 거주자에 대한 아주 유명한 초상을 갖고 있다. 리처드 퀸
경위는 키가 5피이트 4인치(대략 170cm정도)에 지나지 않으며(포와로와 마찬가지로
그도 경찰관 채용에 있어서의 신장 규제를 어떻게 회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다. 두 눈과 숱이 많은 머리카락과 콧수염은 모두 회
색이며 섬세한 손을 갖고 있으며 코담배를 애용한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한
인간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기민하고 정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이다. 그의 관
찰력은 탁월하며 인내심은 거의 무한하다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리처드 퀸의 부모
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면 그가 경찰에 투신하기 이전에 대해서도 독일
에서 대학에 다녔다는 사실 외에는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아들의 지력
이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바, 그 점에 있어서 아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거의 존경하는 태도라 할 수가 있다. 초기의 한 소설에서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엘
러리의 두뇌는...... 나의 어리석음이란......"이었다([프랑스 분의 비밀]참조-원
주).
자신의 재능에 대한 리처드의 지나친 자기폄하에 대해 엘러리는 때로 오만한 태
도로 이를 긍정하고 있다(우리는 지금 초기의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엘러리가 곧잘 '페이터'(pater:아버지의 속어-역
주)라고 부른 그의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
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어떤 사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
이 있다. "가엾은 아버지 !([미국 총의 비밀]참조-원주) 그분은 훌륭한 경찰관이긴
하지만 비젼이나 상상력이 전혀 결여돼 있어. 이 직무에 있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인데 말야." 또 다른 어떤 사건에 있어서는 자기 아버지를 "선량한 폴로니우스"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아버지로, 허풍만 떠는 늙은이-역주)라고 부른 적도
있다([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참조-원주). 엘러리는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그를 - 좀 안된 말이긴 하지만 - 하버드의 속물이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퀸의 하버드 시절에 관해서는 [아프리카의 여행자]참조-원주).
그러나 그의 학식이 대단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점은 이미 [그리
이스 관(棺)의 비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스터리는
- 책으로 출간된 퀸의 모험 가운데에서는 네번째에 해당되는 것이긴 하지만 - 바로
엘러리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여기서 그는 독일어로 괴테를 인
용하고 불어로 루쏘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 및 기타의 초기 소설들 속에
서 그는 호머, 플라톤, 오비디우스, 콜리 키버, 나폴레온, 유리피데스, 바이런 등
수다한 인물들에 관해 정통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곧잘 "나는 적어도 여기
까지는 칸트와 같은 생각입니다."라든지 "옛적의 푸블리우스 시루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라는 등의 말로 사건의 어떤 면에 관한 코멘
트를 시작하곤 했다(칸트의 인용 등에 대해서는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그리스 관
의 비밀]참조-원주). 그리고 가령 자기 여비서를 가리켜 "이제는 고인이 된 수수께
끼 같은 우리 매력적인 필생"이라 부른 것처럼, 흔히 여러개의 단어를 배열하여 익
살맞은 말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러나 엘러리를 젠체하는 청년이라 부를 수는 있
을지라도, 주어진 증거로부터 논리적인 추론을 이끌어 내고 또 그가 설명을 해준
뒤에야 비로소 명백해지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있어서의 그의 천재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그의 천재성은 [네덜란드 구두][그리이스 관][이
집트 십자가]등의 미스터리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엘러리의 외모를 보자면 키는 아버지보다 6인치 더 크며(엘러리의 키에 관해서는
[로마 모자의 비밀] 참조-원주)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언제나 <본드가(런
던의 고급 상가-역주)에서 맞춘 것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닌다(엘러리의 옷차림
에 관해서는 [프랑스 분의 비밀]참조-원주). 그리고 항상 사슬이 달려 있는 테 없
는 코안경을 쓰고 있는데 이 안경 너머에서 그의 은회색 눈이 번뜩이고 있는 것이
다. 특히 골치아픈 문제점에 부딪쳤을 때에는 이 코안경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우아
한 동작으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그는 가벼운 지팡이를
갖고 다니며 담배는 파이프로 피우기도 하고 궐련을 그대로 피우기도 하는데 문제
가 잘 안풀릴 때에는 줄담배를 피워댄다(사슬달린 코안경이나 담배 피우는 습관,
지팡이 등에 관해서는 몇몇 책에 언급되어 있다-원주). 뉴욕 시내에서는 스스로 차
를 운전하지 않지만 시외로 나갈 때에는 뒤센버그 승용차를 직접 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승용차는 1924년형 두 좌석짜리 무개차인데 후미에 무개 접좌석이
부착돼 있다. 겨울에 그는 때로 낡은 너구리 모피 코트를 입고 방한용 귀덮개를 쓴
채 지붕과 양측면의 커텐을 올리고 뒤센버그 차를 몰기도 한다([최후의 일격]참조-
원주).
엘러리는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과음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여성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들 쪽도 마찬가지다. 그는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
에서 아이린 시웰을 매력적인 촌색시라 불렀으며 또 [스페인 곶의 비밀]에서 로자
고드프리는 그를 두고 코안경만 벗으면 잘생긴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상의 사건
들은 모두 그가 결혼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일 것이니 왜냐 하면 그는 [모의 살인]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참조-원주)사건(이것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사건이다)에
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이탈리아로 떠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여가에 탐
정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흑창(黑窓)사건]과 [꼭두각시들의 살인]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두권의 책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뉴욕의 식구는 쥬너로 해서 끝난다. 그러나 이 쥬너에 대해서는 그가 아주 어렸
을 때부터의 고아였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엘러리는 그를 항상
<우리 대단한 쥬너>라고 불렀다. 우리는 또 쥬너가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는데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스페인 곶의 비밀]참조-원주).

* * *

비평가들은 흔히 퀸의 모험들을 몇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있으며 그 제 1 기는 제
10권 [도중의 집]에서 끝난다고 말한다. 네빈스(Francis M.Nevins)는 [왕가의 혈
통]이라는 그의 포괄적인 연구서에서 퀸의 스토리들 가운데 서로 구별되는 4개의
시기가 있음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그러나 네빈스씨와 기타의 비평가들은 [도중의
집]이후에 발간된 거의 모든 책에 등장하는 엘러리 퀸은 앞에 등장한 엘러리 퀸과
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엘러리 퀸
의 미스터리]라고 붙인 이유가 이제 명백해 졌을 것이다. 케네디 암살 사건에 관해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됨에 따라 오스왈드가 두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
것처럼 엘러리 퀸도 두사람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앞에서 퀸의 작품들 속에는 상호모순된 사실들이 담겨있다는 말을 했었는데
이제 그것들을 열거해 보여줄 계제에 이른것 같다. 첫번째의 엘러리 퀸은 코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갖고 다녔는데 반하여 두번째의 엘러리(예를 들어 [꼬리가 여러개
달린 고양이][더블 더블][악의 기원]등에 등장하는)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최후의 일격]이 엘러리의 첫번째 사건이란 말
을 듣는데 그러나 그 사건에 있어서 엘러리가 지팡이나 코안경의 어느 것도 착용하
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사건을 다름아닌 엘러리 II의 첫번째 사건이라고 단정케 하
는 요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 보려고 나서기만 하면 상위점은 많
이 발견될 것이다. 엘러리 I이 사용하는 언어는 개성적이며 때때로 오만한 기색을
드러내지만 엘러리 II는 유식한 미국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를 쓰고 있다. 엘러
리 I은 술을 언제나 적당하게 마실 뿐이지만, 엘러리 II는 헐리웃의 새로운 천재
야크 붓쳐와 한병의 브랜디를 나눠 마시고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다([네
개의 심장]참조-원주). 또한 엘러리 II는 엘러리 I이 그처럼 즐겨 애용하던 인용구
들을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는다. 엘러리 I은 추론이 틀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반하여 엘러리 II는 적어도 한번 이상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고 있다. 한 사건의 말
미에서 그는 "나는 여기 나의 두번째 희생자의 무덤 위에 앉아 있다."고 반성하고
있다([여러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참조-원주). 또 엘러리 I과 엘러리 II는 범죄
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스페인 곶의 비밀]의 말미 부분에서 엘러
리 I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기로, 그
리고 범죄를 하나의 수학문제로 취급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살인범의 운명은 그러한
것들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겁니다." 엘러리 II는 [사잇문]에서 스스로 위
조행위를 범함으로써 살인범을 자살하게끔 유도한 다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꺼림
칙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있으며 "그러고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하고 생각한다.
엘러리 II는 탐정 기량에 있어서 엘러리 I에 뒤진다. 그는 [마지막 일격]의 수수
께끼를 푸는데 4반세기 이상을 소요한다. 때로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으며([왕은 죽었다]참조-원주), [삼각형의 제 4면]에서는 - 네
빈스씨의 말마따나 - 분명히 "참을성 많은 아버지 덕택에 지적 오류를 범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엘러리 II는 아버지와 이야기할 때나 또는 남에게 아버지에 관해
서 이야기 할 때 엘러리 I과 같은 오만함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리고 아버지를 더이
상 "페이터"라 부르지를 않는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모순점은 많이 있다. 독자들도 사건들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곧 다
른 모순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엘러리 I은 탐정소설을 쓰는데 엘러
리 I은 항상 일반 장편소설을 쓰는데 골몰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요컨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있어서, 엘러리 퀸이
라는 탐정은 두사람이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두번째의 엘러
리를 엘러리 II라고 불렀는데 그보다는 미지의 사상(事象)에 대한 전통적인 기호인
X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 더 나을 것이다. 엘러리는 [도중의 집]으로 끝나는 10건의
사건 및 단편집에 수록된 사건의 대부분에 관여했으며 그 나머지는 X 퀸이 관여한
것이다. 엘러리는 은퇴하고 이탈리아에 가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 있
어서의 중심인물은 X인 것이다. 나는 이상과 같은 나의 해석에 잘못이 있는가 하는
것을 찾아 보았는데 그 결과 이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귀절은 적었다 - 아주
적었다 - 는 사실을 아울러 부기한다. [재액의 거리] - 이 사건은 뉴 잉글런드의
라이츠빌을 무대로 한 모든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X 퀸이 다룬 사건이다-에는 지팡
이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코안경은 언급돼 있다. 이러한 몇 안되는 예외는
J.J.McC이 과도적 과정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이다(J.J.McC이 후기에는 더이상 서문을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후기의 모험을 계속
해서 기록해 나갔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전의 주석자들이 유명한 엘러리 퀸
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두번째의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자
연스럽게 모든 사태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증거를 더 요구한다면 두 사람이 여성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
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도중의 집]참조-원주). 엘러리는 짐짓 점잔을 빼는
말투로 "괜찮은 여자가 몇명 있었기는 하지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엘러리의 태도
와, [스타들의 이야기]라는 고십란을 담당하고 있었던 헐리웃의 여기자 폴라 패리
스를 보았을 때의 X의 감정을 비교해 보라. X는 폴라 패리스를 가리켜 그가 여태까
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열정과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매력있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단지 도어를 열어 주거나 택시를 타
거나 내릴때 거들어 주어야 할 사람 이외의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역
사적인 순간 단단한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던 그의 여성 혐오증은 산산히 부서져
소멸해 버렸고, 그는 속수무책인 채로 그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
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이탈리아에 기다리는 처자를 두고 있는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 X는 폴라에게 홀딱 빠져 외출하는 것을 심히 꺼려 하는 그녀의 <군중공포증>을
고쳐 준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를 따라 경마장이나 야구장, 축구장 같은 곳에 나타
나게 되는데, 그러한 시합이 있을 때마다 X는 엘러리와는 달리 스포츠에 대한 열성
을 보여준다([사람이 개를 물다][트로이의 말]참조-원주). 헐리웃에서 영화촬영을
위해 일해 주고 있었던 그는 "지금까지 뉴욕 시리즈는 한번도 빼먹어 본 적이 없
어."하고 폴라에게 투덜댄다. 그녀가 함께 구경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하자 그
는 <아버지에게 티켓을 사 놓아 달라고 전보를 치며>, 뉴욕의 야구장 스탠드에 앉
아서는 땅콩과 비엔나 소시지를 먹으며 경건한 어조로 빅 빌 트리(그는 곧이어 피
살당한다)는 <메이저 리그 사상 가장 위대한 사우드 포(왼손 투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X는 여성혐오증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다. 그의 친절한 말
해 응하여 폴라가 결혼한 뒤에도 그런 말들을 해 주겠느냐고 묻자 그는 - 그녀가
그냥 해 본 말일 뿐이라고 고쳐 말할 때까지 - 얼굴이 창백해 지며 숨이 막혀 버린
다. X의 폴라에 대한 관계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는 여성에 대해서 엘러리보다는
훨씬 민감하다 : [재액의 거리]에서의 패트 라이트에 대한 그의 감정("당신의 이
머릿결을 보노라면 난 몸이 달아오릅니다.")이나 [악의 기원]에서의 델라이어 프라
이엄에 대한 감정("델라이어, 난 비열한 놈이 아닙니다. 당신도 음탕한 여자가 아
니구요.")을 보라.
이밖에도 증거가 될 수 있는 귀절은 넘칠 정도로 많이 있다. 엘러리 I과 엘러리
II-내가 X라고 부른-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
르게 된다 : X는 과연 누구인가 ?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은 궁극적으로 추측의 영역 내에서 전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솔직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퀸가의 배경에 대해서, 퀸이라는 것이 그들의 본래의 성이 아니
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엘러리는 뉴욕의 토박이었지만([스페
인 곶의 비밀]에서 매클린 판사가 이야기한다-원주) 그의 아버지도 미국에서 태어
났을까 ? 리처드 퀸이 독일에서 대학을 마쳤다는 사실은 그의 태생이 유럽이 아닌
가 하는 암시를 준다. 또 나는 <퀸가>가 19세기 말엽의 유태인 학살때 독일이나 동
구의 어느 나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온 유태인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리처드 퀸의 초기 경찰생활의 후견인이었던 매클린 판사라면 아마 몇가
지 의문점을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나(그리고 리처드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
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이 판사는 돌아간 지 이
미 오래다. 퀸가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은 미스터리로 남지만 아뭏든 엘러리는
나에게 조숙하게 머리가 발달한 유태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이제 다음과 같은 나의 결론은 더이상 놀라운 것이 못될 것이다. 즉 X는 엘러리
퀸의 형제, 그중에서도 거의 틀림없이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미국을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요긴한 일로 생각되었다. 이 방문길 - 아아
치 굿윈과, 필립 마알로의 원형이었다고 믿어지는 사람을 만나 보았던 동일한 방문
길 - 에 나는 프레데릭 대니 씨를 찾았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엘러리 퀸의 모든
문제에 가장 정통해 있는 사람이다(프레데릭 대니와 후일의 맨프레드 리와 엘러리
퀸의 연결에 관해서는 많은 범죄소설의 참고자료가 있다-원주). 뉴욕 교외에 위치
한 라아치먼트라는 쾌적한 읍에 살고 있었던 대니씨는 내 착상을 정중한 태도로 경
청해 주었는데, 그의 정중한 태도에는 즐거움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이
야기를 마치자 그는 "매우 훌륭한 착상입니다."고 말했다. 이 말이 그의 코멘트의
전부였는가 ?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그는 전에 몇번 만났을 때부터 그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조심성스러
운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사이먼즈씨, 선생은 사람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해 간다는 사
실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이츠빌에서 정신적인 고향을 발견한 엘러
리는 초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오만한 젊은이가 아니라는 선생의 말은 아마 분명히
맞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그도 성인이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 진짜 인간이 된
것입니다. 나로서는 그가 물리적인 의미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제창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그럼 코안경이나 지팡이는 어떻게 된 걸까요 ?"
"지팡이는 하나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코안경도 아마 마찬가질거구요. 그는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엘러리는 이탈리아에 처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선생께서는 그것도 의장에 지나
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 그리고 X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어떻게 설명
해야 하나요 ? 우리가 초기 소설들 속에서 엘러리가 스포츠 게임을 보러 갔다는 귀
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 ? 또 폴라 패리스만 하더라도......"
그는 손을 들어 내 말을 가로막으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폴라 패리스
따위의 이야기를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나로서는 선생의 이론은 훌륭한 것이
긴 하지만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
니다. 자 어떻습니까. 요새는 런던이 어떻게 변했는지요 ?"
그와의 대화는 나를 고무시켜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념하지 않았다. 나는 만약에 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는 J.J.McC의 정체만 알아
낼 수 있다면 그가 내 생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인
지를 틀림없이 판정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준비 노우트의 대
부분은 말미에 [뉴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점에 비추어 보아 그는 경찰 당국과
긴밀한 접촉단계에 있었던 변호사였을지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은퇴한 경찰관들을
찾아가 물어 보았는데 결국 헛되이 시간을 보냈을 뿐 J.J.McC을 아는 사람은 한사
람도 만나지 못했다. 또 한때는 맥큐(J.J.McCue)라는 판사가 어떤 소설 속에서 하
나의 작지만 그래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발견하고 흥분하기도 했다([얼굴
을 맞대고]참조-원주). 그러나 조사 결과 그 판사가 퀸가의 친구이긴 하지만 서문
같은 것을 쓴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동안 나는 정돈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서문 가운데 두 편은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여졌다는 것, 그리
고 그중 하나에는 그냥 <노오탬프턴>이라고만 적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나
의 탐색이 끝을 본 것은 이 매사추세스 주 노오탬프턴 읍에서였다.
노오탬프턴은 뉴우 잉글랜드 지방 특유의 쾌적한 소읍이었는데, 이 읍은 주로 유
명한 [스미드 칼리지], 여자대학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스미드
칼리지]는 읍의 중심부에 있었다). 내가 신비에 싸여 있는 J.J.McC의 정체를 알아
낸 것은 이 [스미드 칼리지]에서 로마어를 맡고 있는 교수 한 분과 이웃 [애머스트
칼리지]의 한 명예교수분을 통해서였다 - 나는 그가 항상 J.J.McC이라는 이니셜로
만 자기 존재를 나타내 왔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와 비슷한 가명을 쓰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변호사가 아니라 뉴욕에 본부를 둔 커다란 보험회사
의 부총재였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범죄행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서 자신의 여가시간의 전부를 퀸 부자가 처리한 사건들에 관해 기록하면
서 보냈을 정도였다. 그가 노오템프턴과 관계를 맺게 됐던 것은 그의 누이가 30년
이상 이 읍에서 살아왔던 연고였다. 독자 여러분은 앞 문장들의 시제가 과거형이라
는 것을 이미 깨달으셨을 줄로 안다. J.J.McC은 6년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상이 나의 추적의 전부였느냐 ?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미스 McC을 찾아 갔
다. 그녀는 자기 오빠의 취미(그녀는 그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의 문서들을 조사해 보는 데에는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그녀의 집은 하얀 페인트칠을 한 미늘벽 판자로 외벽을 두른 아담하고 예쁜 집이었
는데 그의 문서들은 그 다락방 안에 있었다. 다락방은 오래 묵은 먼지가 켜켜이 쌓
여 있어서 판지로 커버를 씌운 십여개의 서류철을 뒤지는 동안 나는 온몸에 먼지를
둘러썼다. 서류철은 주로 보험업무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나의 고생에 보답
이 없지는 않았다.
엘러리 I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여러 건의 사건에 관한 메모 가운데에서
나는 그와는 다른 것으로 보이는 단편을 발견해 냈던 것이다. 중심인물은 이름이
댄이라고만 밝혀져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가 엘러리의 동생 댄 퀸이라는 사실은 의
심할 여지가 없었다([최후의 일격]에 의하면 엘러리는 1905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
어 있으나, 이는 분명히 '하버드 틴'과 모순된다. 나는 [최후의 일격]은 댄의 작품
이며, 그의 출생년도가 1905년이라 생각한다-원주). 그는 [애머스트 칼리지]의 재
학생이었는데 그 동창생들의 눈으로 볼 때는 [애머스트 칼리지]가 하버드에 결코
못지 않은 대학이었다([애머스트 칼리지]가 실제로 존재하였으며 높은 명성을 가졌
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원주). 나는 언젠가 엘러리가
하버드에 다녔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동생은 다른 대학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여하간에 내가 발견해 낸 단편은 스토리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고 하나의 일화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20년대 중반에 쓰
여진 것이었는데, <20년대의 문투로 쓰여진> J.J.McC의 이 이야기 속에서 댄은 젊
었을 때의 엘러리와 명백히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엘러리 퀸의 동생
에게 속하는 것이 틀림없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예민한 두뇌를 보여 주고 있다.
<...중략...>

* * *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즉 내가 이 원고를 프레드
대니씨에게 보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나로써는, 비록 날짜에 관한 이 트
릭은 아주 오래된 수법이긴 하지만, 나는 빅토리아 여왕과는 달리 재미있게 읽었노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밖의 점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보아 이 위대한 전문가는 위 원고에 그다지 감명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엘러리 퀸이 두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




친절한 살인
- write by Nedra Type

존 존슨은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친절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내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혼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메리는 친
절하고 예쁜 데다가 상냥한 동반자였으며, 다른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준 적
도 없었다. 게다가 메리는 결혼 이후 한 번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훌륭한 요리사였고, 카드도 아주 잘했다. 또 마을에서 메리만큼 손님접대를
잘하는 주부도 없었다.
존은 아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애석했다. 그러나 존은 아내에게
떠나겠다고 말해서 창피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겨우 두 달 전에, 20주년 결
혼기념일을 맞아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되자고 서로 다짐했
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축하해 주는 많은 친구들 앞에서 그들은 영원한 사랑
을 맹세했었다. 그들은 운명의 여신이 자비를 베풀어서 그들이 함께 죽을 수
있도록 해주길 기원하기도 했다. 어쨌든 존은 메리를 내동댕이 칠 수 없었다.
그것은 비열한 짓이었다.
그가 없는 삶이란 메리에게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메리에게는 한창 번
창하는 가게가 있다. 그러나 메리는 진짜 장사꾼은 아니었다. 가게를 연 것은
그들의 옆집에 살던 그리어가 집을 내놓아서 장난 삼아 한 것이었다. 문 하나
로 두 집이 연결될 수 있도록 벽의 일부를 허무는 일 외에는 전혀 수리나 개
조하지 않았다. 그 잡화점은 단지 사랑스러운 남편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시
간을 보내기 위한 것뿐이라고 메리는 말했다. 메리가 사업 수완이 대단하긴 했
지만 가게는 메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다. 사실, 가게는 온통 뒤죽박
죽이었다. 그래서 존은 심기가 좀 불편했었다. 가게 안이 너무나 복잡해서 위
험해 보였던 것이다.
그랬다. 메리의 관심은 존에게 있었다. 가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메리에게는 가게 이외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이 있어야만 했다.
만약 존이 메리와 이혼한다면 아무도 메리를 음악회나 연극에 데리고 가지 않
을 것이다. 저녁 만찬이나 메리가 좋아하는 오락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존이 없으면 메리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당해서 혼
자가 되면 메리는 만찬 대신에 점심 식사에나 초대되는, 노처녀나 과부 신세로
따돌려질 것이다.
존이 이혼을 요구하면 메리는 받아들일 것이 확실했지만 메리를 그러한 삶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메리는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여자였다. 아니다. 존은 메리
에게 이혼을 요구해서 그녀에게 모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메리는 존중받아야만
하는 여자였다.
존이 사업차 렉싱턴으로 여행을 갔을 때 레티스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존이
어떻게 그러한 기적을 후회할 수 있겠는가? 존은 레티스를 만난 이후의 6주 동안
만큼은 활기에 차서 살았다. 그것과 비교해 보면 메리와의 삶은 타고 난 재와 같
았다. 레티스를 만난 이후로 존은 시력을 찾게 된 장님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제야 소리를 듣게 된 귀머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레티
스 역시 존을 사랑하고 그와 결혼하기를 열망한다는 것이었다. 레티스는 그와 결
혼할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레티스는, 그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존은 메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데 고심했다. 분명히 큰 어려움 없이. 조
그마한 사고로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가게 안은 발디딜 틈 없이 허접쓰레기들로
온통 가득 차 있어서 아주 이상적인 장소였다. 육중한 대리석 흉상이나 상들리에,
그리고 난로 안의 장작을 받치는 받침쇠 등 모든 것이 메리를 순식간에 하늘나라
로 보내는 데 사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 말씀하셔야 해요."
그들이 렉싱턴에 있는 호텔에서 다시 만났을 때 레티스가 재촉했다.
"이혼을 위한 조치를 취하셔야만 해요. 그러셔야 해요. 아내에게 우리 얘기를 하
세요."
레티스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음악적이어서 존은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하지
만 메리에게 레티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존은 자기 자신에게 조차 레
티스가 나타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메리의 상냥함에 비해 레티스는 우아했다. 레티스는 메리만큼 이쁘거나 매력적이
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티스를 싫어할 수는 없었다. 레티스와 함께 있으면 존은 열
정적이고 능란한 애인이었지만 메리와 함께 있을 때는 유순하고 신중한 남편이었다.
레티스와의 시간은 언제나 절정에서 사는 느낌이었지만,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메리에게는 존이 레티스와 몇 번 만나면서 알게 된 놀라움은 전혀 없었다. 레티스
는 대지,공기,불,물, 그 네 가지 원소였다. 하지만 메리는... 아니다. 존은 그들을
비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서로 매력을 비교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레티스에게 바에 가자고 막 말하려는 순간, 존은 쳇 플레밍이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접수계로 가는 것을 보았다. 쳇 플레밍이 렉싱턴에는 웬일일까? 그러나
누구나 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것이다. 부정한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이 발각될지
모른다. 어떤 곳도 그들에겐 안전하지 못했다. 쳇 플레밍은 조금도 만나고 싶지 않
은 사람 중의 하나였고, 특히, 다른 여자와 함께 맞부딪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떠벌일 것이다. 메리도 소문을 듣게 될
것이고 그녀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존은 레티스 옆으로 몸을 움츠렸다. 쳇은 접수계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존은 쳇
이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자신과 레티스를 볼 수 있기에, 그 상태로 있으면 들킬 것
이다. 존은 레티스에게 대충 변명을 하고 나서 신문 가판대 쪽으로 옆걸음질쳐, 쳇
이 접수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잡지로 얼굴을 가리
고 있었다.
가까스로 그들은 들키지 않았다.
존은 그들의 애정을 값싼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애정을 정당하고 영
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 해야만 했으나, 동시에 메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이 나라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 간다. 왜 그의 소중한 메리라고 해서
그 사망자 명단에 들 수 없겠는가? 왜 메리는 살해되지 않고 죽을 수 없는가?
존은 다시 레티스에게 겁이 난다고 말했다. 레티스는 걱정스러웠지만, 침착하고 단
호했다.
"그것 보세요. 제가 계속 얘기했잖아요. 아내에게 즉시 말하셔야만 해요. 이런 상
태론 계속 살 수 없어요. 무슨 말인지 분명히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당신이 옳소. 가능한 한 빨리 어떻게 해보겠소."
"즉시 하셔야 해요."
삶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메리 역시, 존과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메
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실, 메리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한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케네스가 메리의 가게에 들어와 모차르트의 흉상이 있는지 묻기 전까지
메리는 아주 순진한 부인이었다. 물론 가게에는 모차르트의 흉상이 있었다. 메리의
가게에는 바흐는 물론, 모차르트의 흉상도 여러 개 있었고, 베토벤과 빅토르 위고,
발자크, 세익스피어, 조지 워싱턴과 괴테등 다양한 흉상들이 있었다.
고객들은 보통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데, 케네스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메리도
자신의 이름을 답례로 말했고, 그리고 나서야 그가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주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모차르트의 흉상에 맞아죽고 싶지는 않고, 방을
부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저의 고객이 모차르트의 흉상으로 집을 장식하겠다고 고
고집 하는군요. 다른 것도 좀 볼 수 있습니까?"
메리는 그에게 가게 안을 모두 보여 주었다. 후에 메리는 그들이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케네스는 처음으로 들른 그날 아침을 메리의 가게
에서 거의 다 보냈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그는 장롱들 때문에 어지럽고 발디딜 틈
없는 작은 뒷방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장롱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연 다음
메리에게 손을 뻗었다.
"어쩌려고 이러세요? 제발, 손님이 들어올 것 생각해 보세요."
"그냥 놔둡시다."
케네스가 말했다.
메리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일어났다. 나중에
메리는 존이 가끔씩 사업차 여행을 떠나면, 케네스가 와서 싫증나지 않는 키스 세례
를 퍼부으며 밤을 세우고 가겠다고 말해 주기를 갈망했다. 그녀는 이제 외롭지 않았
다.
장롱들로 가득 찬 작은 뒷방은 케네스와 메리가 은밀히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들
은 그곳에 소파를 갖다놓았다.
하루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너무나 서로에게 열중해 있어서 누가 오
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존슨 부인, 어디 계세요? 뭘 좀 사고 싶은데요."
메리는 손님을 맞기 위해 나가면서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으려고 애를
썼다. 메리는 립스틱이 번진 것도 알고 있었다.
손님은 브라이언 부인이었는데, 마을에서 가장 수다를 잘 떠는 여자였다. 브라이언
부인은 메리 존슨이 가게에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고 떠벌일 것
이다. 존도 이제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브라이언 부인은 정신이 없었다. 브라이언 부인은 펜실바니아
의 독일인처럼 성질이 급해서, 벌써 버터 만드는 틀과 그릇을 고르고 있었다.
나중에 메리가 케네스에게 얘기했듯이 운좋게 들키지 않은 것이다.
"난 당신을 깊이 사랑하오. 당신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난 살금
살금 기어들어오는 것에 아주 넌더리가 나오. 난 더 이상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소.
이해하겠소? 우린 결혼해야만 하오. 당신 남편에게 이혼하고 싶다고 얘기하시오."
케네스는 마치 이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계속해서 이혼 얘기를 꺼냈다. 메리가
20년 동안 사랑해 온, 친절하고 성실한 남자와 어떻게 이혼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의 행복을 짓밟을 수 있겠는가?
만약 존이 죽기만 한다면, 왜 그에게는 심장마비가 일어나지 않는가? 매일 수천 명
의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죽는다. 왜 메리의 소중한 존이라고 해서 갑작스럽게 죽을
수 없겠는가? 모든 것이 간단해진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조차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메리가 전화를 받자 케니스는 버
럭 화를 냈다.
"빌어먹을. 메리, 오늘 오후는 웃기는군. 이건 모욕이오. 난 더 이상 살금살금 다닐
수 없소. 당신이 손님과 버터 만드는 틀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동안 문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소. 우린 곧바로 결혼해야 하오."
"네, 알아요. 참으세요."
"난 참을 만큼 참았소.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메리는 그의 말뜻을 알았다. 만약 케네스를 잃는다면 메리의 삶은 끝장 일 것이다.
메리는 존에게서는 이런 감정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었다.
소중한 존, 어떻게 그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존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와
있었다. 그는 혼자서는 10년도 더 못 살 것이다. 그의 존재는 모두 메리에게 집중되
어 있는 것이다. 존은 메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살았다. 그는 외롭게 살아갈 것이
다. 메리가 없으면 그는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은 존이 안됐기 때
문에 그를 초대할 것이고 모두가 <불쌍하고 처참한 존>이라고 부를 것이다. 존이 죽
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존은 자신을 소홀히 할 것이고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을 것이고, 형편없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야만 할 것이다. 메리는 존을 그
렇게 만들 수 없었다.
왜 케네스와 이 미친 짓을 시작했을까? 왜 그 멍청한 여자는 자기 음악실에 모차르
트의 흉상을 갖춰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단 말인가? 왜 케네스는 더 싼 가격으로 모
차르트 흉상을 파는 거리의 많고 많은 가게를 놔누고 메리의 가게로 사러 왔단 말인
가?
그러나 메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케네스와의 새로운 삶은 존과 사는 것보
다 더 나을 것이다.
오직 단 한 번이면 될 것이다. 메리는 존을 처치할 수 있는 훌륭하고, 빠르고 효과
적이고, 흉측하지 않은 방법을 곧 생각해내야만 했다.

존이 그날 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
러워 보였다. 생각해 보니 메리와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레티스를 생각하자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존은 자
신이 하려는 일을 해야만 한다. 존은 메리를 가능한 한 신사다운 방법으로 죽여야
만 했고, 그것을 바로 그날 밤 해야 했다. 그 동안 존은 메리가 그를 위해 준비한
저녁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통때처럼 점잖아야 했는데, 존은 개
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존은 살인을 해야 했다. 치즈 케이크를 먹으면서까지 한 여자를
죽일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듯했다. 존이 냉정한 것만은 분명히 아니었다.
존은 메리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뚜렷한 계획을 세워놓지 못했다. 만약 메리를 가게
로 데려갈 수 있다면, 조상(彫像)들이 잔뜩 있는 가게 구석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
을 것이다.
메리가 미소를 지으며 존에게 커피를 건네 주었다.
"커피를 좀 많이 드셔야겠어요, 여보. 오래 운전을 하셨으니까요."
"음, 그래. 그러지. 고맙소."
존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메리를 흘끗 보았다. 메리의 얼
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존은 아내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오랜 세
월 동안 같이 살았기 때문에 메리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이 틀림없었다. 메리는 그
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틀림없이 알 것이다. 메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혼여행 이후 메리가 존에게 지은 미소 중에서 가장 훌륭한 미소였다. 다시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여보, 잠깐만 실례할께요. 가게에 가서 꼭 좀 봐야할 게 있는데 지금막 생각났어
요. 금방 올께요."
메리는 서둘러 식당을 나가 거실을 가로질러 가게로 갔다.
그러나 메리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존은 커피를 두어 모금 더 마시고는 왜 메리
가 늦는지 알아보려고 가게로 갔다.
메리는 존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존은 메리가 상들리에가 환하게 켜진
방 한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메리는 존을 향해 등을 보인 채 받침대에 놓인 조상
들 옆에 있는 프랑스풍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메리는 조상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역시 존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메리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이다. 메리는 어깨
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메리는 그들이 함께 살아온 세월이 끝났음을 알게
된 것이다. 메리의 어깨는 마치 그녀가 혼자 웃을 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메리가
웃고 있든, 울고 있든, 뭘 하든 간에 존은 메리의 기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놓치
기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메리의 머리 위에서 빅토르 위고와 벤자민 프랭클린 등
여러 사람의 흉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저 슬쩍 밀기만 하면 그것은 메리의 머
를 강타할 것이다.
그는 밀었다.
너무나 간단했다.
불쌍하고 귀여운 여자. 불쌍한 메리.
그러나 그것은 최상의 것을 위해서였고, 존은 그가 한일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존은 그게 그렇게 쉽게 끝나고,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더 놀랐다. 만
약 그 일이 그토록 쉽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난 주에 했을지도 모른다.
존은 아주 침착했다. 존은 마지막으로 메리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난 다음
식당으로 돌아갔다.
존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의사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의사는
경찰에게 그것이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증명해 줄 것이다. 존은 한 번 슬적 민 것 외
에는 거짓말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존은 메리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흉상이 떨
어져 메리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존은 서두르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그는 레티스를 생각
했다. 레티스에게 그들이 이제는 확실하게 같이 살 수 있고,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엔
결혼할 수 있다고 기분좋게 전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존은 레티스에게 전화하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존은 차분한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느꼈다. 그는 그토록 긴장이 풀어진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뒤의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졸리기까지 했다. 그는 이렇게 졸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거실의 소파에 누워야만
했다. 그것이 의사에게 전화하는 것보다 더 급했다. 그러나 존은 소파에 갈 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식탁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팔이 달랑 거렸다.
메리와 존의 친구들은 아무도 두 사람의 죽음이 왜 동시에 일어났는지 의심하지 않
았다. 그들은 가게가 언제나 난장판 이라서, 그날 밤 메리가 뮈에 걸렸거나 비틀거
리다가 조상을 건드려 그것이 머리에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은 메리가 그렇
게 된 것을 보고 슬픔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며 메리가 없이는 살 수 없
다는 것을 느낀 존은 그 막막한 상실감을 풀기 위해 많은 수면제를 커피에 넣어 마
시고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 모두 지난 결혼기념일 파티 때 존과 메리가 함께 죽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생
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그 누구보다도 애정이 깊은 부부였다.
사람들은 메리와 존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해도 감상적이 되었고, 그들이 함께 죽은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깊고 확고한 사랑만
큼 마음을 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원하던 대로 같은 날 밤 죽은 것은
감미롭고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취미를 가진 여인

- 아토다 다카시 -


" 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살짝 꽃을 바치는 관습이 있어요.
나도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그런 부인을 자주 보았지요. "
만약 누군가에게 기묘한 < 취미 > 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는다면 노구치
게이코는 분명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하지만 게이코가 정말 해외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게이코는 몇 년 전부터 M 시내 맨션에서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교제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어 몇몇 배달원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게이코의 근무처는 어딘가의 연구소 아니면 도서관인 듯 싶었고 그 수입
으로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있었다. 그 동생 또한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매우 조용한 청년이었다.
노구치 게이코가 언젠가 집 근처의 꽃집 주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 오래 전에 아주 열렬히 사랑하던 약혼자가 죽었는데...... 그 때 일을
되새겨 보면 어쩐지 다른 사람의 일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
그러나 정말로 그녀에게 그런 드라마틱한 이별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진실
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션 안에서의 소문으로는, 동생을 잘 보살피는 기특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독특한 분위기의 올드미스로 통하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살 정도.
머리를 숏 커트하거나 핑크색 원피스를 입는다거나 언제나 젊게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장 밑에 숨겨진 기미와 주
름살이 그대로 드러나 숨겨진 나이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 누구 좋은 사람 없을까 ? "
" 그 얼굴로는. "
" 그래, 상대방의 일생을 망칠 악녀 타입이지. "
주위 사람들은 이런 식의 말들을 했지만, 그런 화제에 오르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 여자는 사람들의 소문에서 오르내리지 않게 되면 그때는 마지막이다.>
이러한 격언이 사실이라면 노구치 게이코는 정말로 그 < 끝 > 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살고 있었으며, 맨션 계단에서의 주민들 회의에서도
게이코가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총총히 외출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는 한 그
녀 생각을 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맨션
의 벽은 두텁고 튼튼했다. 회색 건물은 게이코의 생활을 절대로 밖으로 드
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의 < 취미 >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아무도
알 리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게이코에게 그러한 < 취미 >가 있다는 것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함께 살고 있는 동생까지도......
10월의 어느 맑은 가을 아침, 세탁소 점원이 계단에서 새카만 옷을 입은
게이코와 마주쳤다.
" 오늘은 아주 점잖은 차림새구나. "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세탁소 점원은 곧 그 이유를 알았다.
시각은 10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출근 시간치고는 조금 늦었으며 게다
가 게이코는 팔에 묵직한 국화꽃 다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 아는 사람 중에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나 보군. >
그 점원은 생각했다.
여자의 움푹 팬 눈은 분명 밤샘을 한 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
그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무관심하게 되받았다.
" 오늘은 아무것도 없어요. "
그녀는 그 말만 하고 바쁘게 사라졌다.
맨션을 나온 게이코는 그대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으나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초조한 모습으로 연신 손목시계를 보고 있다가 빈 택시가 오
는 것을 보고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 S시 사거리까지요. "
운전 기사는 마치 왕의 근위병이라도 되는 양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며
게이코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꽃다발만을 끌어안고 있었다.
10분정도를 달려 택시는 S시에 도착했다.
" 여기서 세워 주세요. "
게이코가 차를 세운 것은 큰길에서 주택가의 좁은 길로 구부러지는 모퉁
이였다. 전신주에는 검은색 테두리의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손가
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는 표시와 함께 < 야마구치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게이코는 그 안내 표시를 곁눈으로 흘끗 보기는 했으나 그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땅을 밟았다.
이윽고 흑백의 휘장이 보였으며 비닐을 씌운 화환 5,6 개가 바람에 흔들
리고 있었다. 게이코는 그 문 앞에 섰다.
집 안에서는 막 고별식의 독경이 끝난 모양이었다.
문에서부터 아주 좁은 정원으로 조문객들을 위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고
늦게 도착한 두세 명이 분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코는 그 줄로는 가지 않고 꽃다발을 안은 채 현관을 돌아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더니 곧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향냄새와
꽃향기가 자욱했다.
제단 앞에 간편한 옷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 그럼 됐습니까 ? 관을 내가겠습니다. "
그가 말했다.
장의사의 행동은 언제나 신중하고 조용하나 동작은 사무적이고 민첩했다.
그는 제단 뒤로 들어가 꽃과 제물을 옮겨 놓고 말했다.
관을 정원과 접해 있는 복도에 옮겨 놓고 장의사는 관 뚜껑을 열었다.
노파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어색하게 합장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 자, 마지막 인사입니다. "
장의사의 말에 따라 가족과 친척들이 한두 사람씩 관 주위로 모여 들었
다.
" 할머니..... "
젊은 아가씨가 무릎을 구부리고 관 옆으로 다가섰다. 눈물이 흰 상복으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관은 사
람들이 바치는 꽃으로 점점 파묻혀 갔다.
" 자, 이제 됐지요 ? "
장의사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어느 사이엔가 게이코가 관 옆에 서 있
었다.
게이코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 할머니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
마치 조그맣게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어느 정도 주위에 있던 사람에게 들렸는지는 알 수 없
었다. 게이코는 가슴에 안은 꽃다발을 살그머니 죽은 사람의 발 옆에 놓았
다.
" 그러면 이제 이별입니다. 가족과 친척 되시는 분들은 돌로 못을 때려
주십시오. "
장의사가 무표정하게 관 뚜껑을 닫고 재빠른 동작으로 못 하나만을 쳤다.
톡 톡, 톡 톡......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풍습인가 ? 친족들은 돌을 가지고 머리를 들이
밀은 채 못을 내리쳤다. 이 의식이 끝나면 이번에는 장의사가 망치를 사용
해 본격적으로 못을 내리칠 것이다.
" 그러면 다시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
관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들려 밖에 있는 영구차로 향했다. 사
람들의 무리도 밖으로 움직였다.
그때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났다.
" 이봐, 여기 놓여 있던 부의금 봉투 못 봤나 ? "
" 아니오, 모르겠는데요......"
상복을 입은 남녀가 입씨름을 하고 있었지만 게이코는 머리를 숙인 채 지
나쳤다.
현관을 돌아 밖으로 나가자 관은 이미 차 안으로 옮겨 행렬이 이어져 있었
다.
그때 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왔으나 이미 장례
식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는 행렬의 중간에 선 채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리 표현을 하자면, 장례식은 드라마 같았다.
고인을 중심으로 문상객들은 각자의 마음 속에 이어지는 줄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문상객들 모두가 서로 친분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
이 옆에서 손을 합장하고 있다 해도 누구 하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그렇게 합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테
니까......
솔직히 이야기 해서, 인간의 일생은 나중에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가
지를 치게 되는 법이다. 때문에 고인이 어디서 누구와 무슨 관계가 있었는
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상객 명부에서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 이 사람 누구지 ? >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 야마우치 가 > 의 할머니는 최근 몇 년간 중풍으로 누워 있었으며, 외
부 사람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다. 병으로 쓰러지기 전에도 오랜 기간 < 은
거 > 생활을 했으므로 그 기간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가 있었다
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할머니는 전쟁의 종군 간
호부로 외지에서 근무했던 적도 있으며 종전 뒤에는 큰 병원의 내과 부장으
로 근무했던 일도 있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일도 있
을 법한 이야기였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검소하고 조용하게 치러졌지만, 그러한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모르는 문상객이 나타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
도 < 야마우치 가 >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게이코는 호화롭게 지붕을 장식한 차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더니 마치
마음 속의 실을 끊는 것처럼 발길을 돌려 사람들의 행렬에서 방향을 바꾸었
다. 그리고 아주 빠른 발걸음으로 큰길로 나가 마침 도착한 시내 순환 버스
에 올라탔다.
버스는 번화가 정류장에 게이코를 내려놓았다. 양품점, 레코드 가게, 과
자점, 과일 가게, 장어집 등이 늘어서 있었고, 모퉁이의 신장 개업한 빠찡
꼬 가게에서는 손님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행 옆 보도에는 포스터 파는 사람이 좌판을 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햇
볕에 그은 남자가 봉제 동물 완구를 산처럼 쌓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 하나 사십시오, 하나 사세요. "
게이코는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본래는 이 앞의 백화점에 갈 생각
이었으나 여기서도 물건만 적당하다면 상관없다고 마음을 정한듯했다.
" 어때요 ? 아이에게 선물 하나 하시면 ? "
" 네......"
" 백화점 가격의 삼분의 일입니다. "
" 네......"
게이코는 악어 인형을 손에 들고 보았다. 자동차의 뒷 좌석에 놓음직한
커다란 쿠션이었다.
" 악어요, 좋지요. 집 지키는 꼬마가 좋아할 겁니다. 분명히..... "
인형을 파는 상인은 장례식에 다녀온 엄마가 아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악어는 동그란 눈으로 게이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게이코는 잠시 그 악어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다시 비닐 판 위에 내려놓더
니 이번에는 거북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 아, 좋지요. 좋아. 거북이예요. 거북이. "
" 거북이..... 아이가 좋아할까요 ? "
" 그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제일 인기 있는 걸요. 우라시마 타로의 이야
기도 있지요. 텔레비젼의 만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파충류는 어딘지 그로테스크하고 어른 취향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
도 있었다. 싫다고 하면 소용없지......
" 저 기린은 얼마죠 ? "
목둘레가 약간 굵지만 꽤 귀여운 느낌이었다.
" 2천 엔입니다. 깍아서 천 8백 엔으로 해드리지요. "
게이코는 팔을 굽혀 안아 보았다. 반대쪽 팔에 닿을 정도로 긴 목이었다.
" 천 5백 엔에 주세요. "
" 곤란한데요. 그러면 남는 게 없다구요. 좋습니다. 천 6백 엔에 드리지
요. 미인 아주머니에게 크게 서비스해 드리는 셈치고....."
" 좋아요. 포장해 주세요. "
손님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승낙했다.
커다란 짐을 안은 게이코는 길을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 악어가 더 좋을 걸 그랬나 ? >
혼자 중얼거리며.....


블록담부터 옆의 헛간까지 마치 가리개처럼 휘장이 쳐져 있었다.그러나
삼륜차의 한쪽 바퀴가 보였다.
골목에는 5,6 살 정도 되는 꼬마들을 데리고 젊은 엄마들이 많이 모여 있
었다. 모두들 눈이 토끼같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찍한 얼굴의
계집아이 하나만이 엄마와 마찬가지로 손수건을 꼭 쥐고 몇 번이나 과장된
몸짓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조립식 주택의 현관에는 발이 걸려 있었다.
< 상중, 이치오카 쇼, 향년 6세.....>
" 갑자기 덤프 트럭이 덮쳤지 뭐예요. "
한 아이의 엄마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 그래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아빠와 함께 있었다는데. "
" 애 아빠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죠. 아이가 함께 가기는 했지
만 심심하니까 혼자 나갔다가 그만...... "
" 아빠도 어쩔 수 없었겠네요. "
" 그래요...... "
" 조금 전에도 흐느끼더라구요. "
문 앞에 조그마한 접수대가 놓이고 그 옆에는 협동 조합과 농업 단체의
이름이 붙어 있는 화환이 있었다.
아이의 아빠는 분명 어딘가에 근무하는 샐러리맨으로 취미는 골프. 어디
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가 틀림없었다.
화환 옆에 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따분하다
는 듯 선하품을 했다.
문상객 한 사람이 접수대로 다가가 부의금 봉투를 꺼냈다.
갑자기 집 안에서 통곡 소리가 났다. 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빼
고 살폈다. 아이들은 제각기 가로수 사이를 빠져나가 집 정원으로 들어갔
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정원 한쪽 끝에 뚜껑이 열린 채 관이 놓여 있었다.
" 쇼야 ! 쇼! "
아이 엄마가 굳어 있는 아이의 볼에 자신의 까칠한 볼을 대고 있었다. 소
년의 머리는 붕대로 감겨 있고 한쪽 눈은 그 아래 가려져 있었다. 노란색과
흰색의 국화가 차례로 관 안에 던져졌다.
이곳의 장의사는 놀랍게도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별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얼굴을 밖으로 향 한 채 가을 해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우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 그러면 관을 닫겠습니다. "
갑자기 한 여자가 관 옆에 다가섰다. 기린 인형을 팔에 안고......
" 유치원에서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는데......"
다음은 말꼬리를 흐렸다.
약간 뚱뚱한 아이의 아빠가 쓰러지려는 아이 엄마를 부축하며 여자를 보
았다.
" 이걸 안고 같이 가거라."
아이 아빠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관 뚜껑이 나무 소리를 내며 시야를 가리더니 소년도 기린도 사라져 버렸
다.
딱 딱 딱 딱......
" 여러분, 끝나셨습니까 ? 그럼 관을 내가겠습니다. "
관을 내갈 준비가 되고 아이 아빠와 장의사가 관을 옮겼다.
여자는 살짝 현관으로 가 관 뒤를 따르듯이 밖으로 나왔다. 문 옆에서 쥐
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곁눈질로 남자를 보
았다.
남자는 종종걸음으로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졸린 듯한 눈으로 뒤쫓았으나
곧 문 안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접수대 옆에 섰다.


" 이봐, 겐.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빠찡코를 하고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남자는 변함없이 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졸린 듯한 눈매도 여전했다.
" 누구야, 교로 아니야 ?"
교로라고 불린 남자의 이름은 아마도 눈매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뒤룩뒤룩 눈망울을 굴리는 날카로워 보이는 남자였다.
" 이런 데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그래서 되겠어 ? "
교로의 눈이 웃음을 머금자 갑자기 상냥한 얼굴로 바뀌었다. 본래는 부드
러운 남자일지도 몰랐다.
" 그래, 아직 근무시간이기 때문이지. 벌써 돌아가는 거야 ? "
" 그래. "
" 자, 함께 가지. 구슬도 벌써 다 됐는데 뭘. "
" 이 가게는 들어오기가 힘들다구. "
" 알고 있어. "
겐은 최후의 한 발을 세게 당기더니 결과는 보지도 않고 일어섰다.
출구 부근에서 건달같이 보이는 종업원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하며 인사를 했다.
겐은 인사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물었다.
" 지금 무엇을 쫓고 있나 ? "
" 이번 가을은 흉작이야. "
" 괜찮지 않나 ? "
" 개점 휴업에다...... 다시 해야 하는 숙제에다. "
" 숙제 ? "
" 그래, 신사 안에서 강간 살인이 있었지 ? "
" 그래. "
" 살인과 녀석들 참 끈질겨. "
" 단순 강도와는 이야기가 다르니까. 자네는 어때 ? "
겐은 뒤틀린 검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 부의금 도둑. "
그는 한쪽 볼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그다지 화려한 사건은 아니었다.
" 많아 ? "
" 응, 조금씩. 금액은 별것 아닌데 여기저기서 조금씩 긁어 모은다구. 장
례식은 끊임없이 이어지지, 어디서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어. "
" 그래서 검은 넥타이야 ? "
" 응. 매일 분향하러 돌아다니니까. "
" 아주 향냄새가 몸에 배겠네. "
" 하지만...... 장례식을 좋아하는 녀석 중에 범인이 있지 않을까 ? "
" 스님과 장의사밖에 더 있겠어 ? "
" 그래, 좋아하지는 않아도 매일 장례식에 참석하면 내세의 공덕을 쌓는
다든가......"
"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네. "
" 장례식마다 마주치는 여자가 있어. "
" 뭐야 ? 자네 일이잖아. 그 여자가 범인이야 ? 부의금 도둑......."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는데다 수법도 모르겠
어."
두 사람은 번화가의 교차로까지 와 있었따. 석양을 받아 그림자가 길게
보였다.
겐의 몸이 갑자기 긴장했다. 맹견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 왜 그래 ? "
" 응...... 먼저 돌아가. "
쥐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 저 여자가 백화점엘 들어간다......>
겐은 그 뒷모습을 쫓았다.
교로가 아랫입술을 내밀며 그를 보고 있었다.
< 아무래도...... 냄새가 나. >
겐은 뛰어가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처으에 본 것은 어딘가의 할머니 장례식이었다. 그렇다. < 야마우치 가 >
라고 했든가. 그 집에서 부의금을 도둑맞았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교통 사고를 당한 아이의 집. 거기서는 피해가 없
었다.
< 그곳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눈을 크게 뜨고 살폈기 때문이다. >
그 다음날은 술집 주인의 부친 장례식, 전 교장의 장례식, 자궁암으로 죽
은 샐러리맨의 부인, 자살한 철도 노동자, 은행 과장의 어머니......
요 2,3 일간 가는 곳마다 그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진한 화장에 변함없
는 눈매에...... 오늘은 핑크색 옷이지만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피해를 본 것은 두 집뿐인데, 경찰의 감시를 알아차린 것일까 ? 아무리
보아도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올드미스로 보인다. 교활한 절도범으로는 보
이지 않는데..... 그녀는 앞잡이이고 다른 동료가 있는 것일까......
겐은 배고하점 입구에서 그녀를 따라잡았다.
여자는 곧장 안내계로 걸어갔다.
" 스포츠 용품점은 어디예요 ? "
" 에스컬레이터로 6층 까지 가세요. 올라가서 오른쪽 코너에 있습니다. "
쥐색 양복의 남자는 1,2 미터 뒤에서 그녀를 뒤따랐다.
여자는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아무리 보아도 전형적인 올드미스인데. >
저 나이가 되어서도 핑크색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 모자라다는
증거다.
생리 때 갑자기 훔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질투심에 휩싸여 치정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절도범이라면...... 남
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포츠 용품점은 곧 눈에 띄었다. 판매장은 한산해서 지켜보기가 쉬웠다.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상한 행동은 전혀 없었다.
" 감사합니다. "
점원으로부터 종이 가방을 건네받은 여자는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와
백화점을 나가더니 한눈도 팔지 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저 복장이라면 장례식에 갈 리 없다. 오늘은 시내에 장례식이 있지도
않을 뿐더러. >
그래도 남자는 여자의 뒤를 계속 쫓았다.
여자는 버스를 내려 맨션 안으로 사라졌다.
슬며서 근처의 평판을 물어 보았지만 < 남자 동생을 잘 돌보는 색다른 여
자 > 라는 이외에 이렇다 할 만한 소문은 없었다. 특별히 돈이 궁색한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생활이 윤택해졌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 추측이 틀린 것일까 ? 좋아, 2,3 일 더 지켜보자. >
겐은 경찰서로 전하를 걸고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중에
잠시 빠찡코를 하고.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찰서에 나가 보니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교로가 히죽히죽 웃으며 겐 쪽으로 다가왔다.


장례식을 치르는 입장에서 보면 각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있을테지만
참배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이곳도 저곳도 다 그 모습이 그 모습이다.
흑백의 휘장, 향냄새, 그리고 여자들의 울음소리. 의식의 순서도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날 이케우치 가의 장례식에서 아주 다른 점을 찾으라면 문상객 중에 젊
은 학생이 많았다는 점이다. 금단추의 청년들이 3,40 명이나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장례 방식도 어딘가 어색했다.
모두의 얼굴에 친구의 죽음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떤 것이다.
여학생들은 모두 겁에 질린 새끼양처럼 모여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슬피
울고 있는 사람은 고인과 친했던 여자 친구인 것 같았다.
노구치 게이코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정원의 나무들 옆에 겐과 교로가 서 있었다. 겐은 졸린 듯이, 교로는 큰
눈을 번뜩이며......
" 올까 ? "
" 안 오는게 아닐까 ? "
" 함께 산 사람은 동생이 아닌 것 같아. "
" 그래, 주위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 맞아, 학비를 대주고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키워 준다는 거야 ? "
파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벗겨진 머리에 초라
한 느낌의 중년이었다.
" 여기 계시다고 들어서요......"
그는 말을 하며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 아, 그러니까, 당신은 저, 시청의......"
교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의 직업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했던
것이다.
" 네, 그렇습니다. "
" 이미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
번뜩이는 눈으로 벗겨진 머리를 쳐다보았다.
" 네."
" 당신 생각이 틀림없는 것 같군요. "
" 네,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요즈음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요. "
" 정말 그렇지요. "
" 저도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요. "
" 그래요. "
" 화로에서 꺼냈을 때, 뼈는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뭔
가 이상했어요. "
" 형사의 추측도 그렇습니다. "
" 다리와는 다른 곳에 다리뼈가 하나 있었어요...... 시체의 다리는 그대
로 있었거든요......"
" 네."
" 그리고 다음 시체의 경우에는, 신경을 너무 써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
만 손 하나가 많았어요. 그 다음에는 허리뼈가 유난히 많은 것 같았구
요......"
교로가 겐에게 말했다.
" 국화꽃 다발이라면 손목 정도는 감출 수 있어. 기린 목은 팔처럼 구부
러져 있고. 다리 하나를 넣는다면......"
" 악어 인형일까 ? "
" 그래, 그거야. "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 그래서 일단 경찰에 알리려고 했습지요. "
문 근처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부의금 도둑이 아니야. "
" < 동생 >은 여자의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언제까지나 속박당하고 싶지
는 않았던 거야. 여자의 속셈이야 뻔한 거고.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고 했겠지만 여자가 가만 놔두겠어......"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관을 내갈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ㄳ어지는 듯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관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재빨리 옆으로 갔다.
게이코는 자신의 눈 언저리를 만지고 있었다.
" 스포츠맨이었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마음껏 뛰십시오. "
교로 형사가 뒤돌아서서 파란 옷의 남자에게 물었다.
" 지금까지의 뼈는 팔과 다리, 그리고 허리...... 그것뿐이었습니까 ? "
" 네. "
머리 벗겨진 남자가 대답을 하고 있을 때, 여자의 손은 약간 찌그러지게
부풀어오른 럭비공을 관에 넣고 있었다.


< THE END >



키드 카듈라
By - Jack Ritchie


밤이 되어서 체육관 문을 막 닫으려고 할 때 키가 큰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모자, 옷, 신발, 외투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입은 그는 지퍼 가방을 들고 있
었다.
그의 눈도 검은색이었다.
"권투선수 매니저입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성기에는 좋은 애들이 몇 명 있었지."
그렇다. 애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정말 좋은 애들은 아니었다. 그 중 채피
스트라우스가 가장 뛰어난 애였다. <링 매거진>이 그애를 라이트 웰터급에서
10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때 한 번이었다. 순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상대
선수를 신중히 골라야만 했는데, 상대 선수로 갈리니오를 만났다. 그것은 재
앙이었다. 그 다음에는 네 번을 계속 져서 스트라우스는 은퇴할 수밖에 없었
다.
"당신이 내 매니저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링에 오르고 싶습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체격이 좋았다. 중량이 1백 90파운드는 될
것 같았고, 키도 6피트 1인치 정도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본 것처럼 창백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몇 살인가?"
그는 조금 몸을 움직였다.
"권투선수의 이상적인 나이는 몇 살입니까?"
"이것 보게. 이 주에서는 40이 넘으면 링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불법이야."
"난 30입니다. 제 출생 증명서를 보시면 알 겁니다."
그가 재빨리 말했다.
난 웃었다.
"이봐, 친구. 권투에서 30은 고개를 넘어가는 나이야. 시작할 나이가 아니라구."
그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나는 건강합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말입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시적인 얘기군.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에 10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그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10대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
실, 내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는 편
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그는 지퍼 가방을 내려놓고 역기가 놓여 있는 매트로 가서는 마치 어린 아이가
딸랑이를 집어들 듯 역기를 쉽게 들어올렸다.
나는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일에는 취미가 없어서 그 역기 무게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진스키가 한 시간 전에 투덜거리며 그 역기를 들어올
렸던 것을 봤었는데, 비진스키는 그보다 두 배는 더 들어 올릴 수 있는 헤비급인
데도 땀을 줄줄 흘렸었다.
나는 약간 놀랐지만, 여전히 관심은 없었다.
"그래, 자네는 아주 힘이 좋군. 여기서 운동하는 투척(投擲) 선수 중에서도 자네
만큼 힘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네. 그들은 클럽 같은 것도 만들었지. "
그가 눈을 부릅뜨자 생기가 있어 보였다.
"역기를 들어올려 봤자 돈이 생기지는 않아요. 난 많은 돈이 필요해요. 최근까지
만 해도 돈 때문에 신경을 쓴 적은 전혀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그저 갖고 있는
돈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됐는데, 어느 날 오후에 내가 빈털터리가 된 걸 갑자기 알
았지 뭡니까."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가 입은 옷은
비싸 보였지만, 조금 낡은 것이었다. 아마 너무 오래 입어서 낡았거나 입고 자서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스포츠 신문을 보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게 권투라는 것을 알았
어요. 돈이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 트렁크와 신발을 샀죠. 하지만, 글러브는 좀 빌
려야겠어요."
그가 지퍼 가방을 가리켰다.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당장 링에 오르고 싶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체육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체육관에는 알피 보건 외에는 아무도 없
다.
알피 보건은 좋은 아이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는 펀치도 제법 있어서 링에 꿈
을 걸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섯 번 싸워서 모두 이겼는데, 세번은 KO로 이겼고,
세 번은 판정으로 이겼다. 하지만 그의 장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정상에 오르기
에는 실력이 부족했다.
나는 좋다고 생각했다. 이 신사에게 테스트 기회를 준다고 큰일날 것도 아니고,
어쨌든 테스트가 끝나면 나는 사무실에 있는 간이침대로 가서 자면 그만이니까.
나는 알피를 불러서 말했다.
"이 멋쟁이 양반이 자네하고 몇 라운드 뛰어 보고 싶다는구만."
알피도 좋다고 대답하자 그 낯선 사람은 라커 룸으로 가서 검은색 트렁크로 갈아
입고 나왔다.
나는 그에게 글러브를 끼워 주고 알피와 함께 링에 오르게 한 뒤, 양쪽 코너로
라고 말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고 공을 올린 다음, 담뱃불을 붙였다.
알피는 늘 그러는 것처럼 코너에서 링의 약 4분의 3까지 뛰어 나서 낯선 사람을
공격했다. 알피가 라이트를 던치고 레프트 훅을 날리자, 그 낯선 사람은 어깨를 으
쓱했다. 그리고 나서는 레프트를 휙 뻗었다. 그런데 정말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의 레프트가 알피의 턱에 꽂히자 알피는 링 바닥에 나가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한 방에 끝난 것이다.
나는 성냥불에 손가락이 데는 것을 알고서야 황급히 불을 껐다. 그리고 나서 링으
로 올라가 알피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숨은 쉬고 있었지만,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
지 못했다.
더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레프트 한 방이 - 그리고 턱에 작렬하는 소리가 -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알피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나 체육관 안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핥았다.
"이봐, 자네 오른손은 어떤가? 자네 왼손하고 비슷한가?"
"실제로는 오른손이 더 낫죠."
그의 가능성을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이봐, 자네 펀치는 인상적이군.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시합이 펀치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냐. 자네 맷집도 있나?"
그가 마치 처음으로 치아 교정기를 끼운 아이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날 쳐보세요."
왜 안 쳐보겠는가? 그가 맷집이 있는지 즉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알피
의 오른손 글러브를 벗겨 손에 끼었다.
한참 때는 - 물론 30년 전이지만 - 네 오른손 주먹도 꽤 괜찮았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파괴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라이트가
그의 턱에 꽂혔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내 손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링을 깡총깡총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은 머리칼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내가 손이 어떻게 됐나 살피려는데 알피가 와서 보고는 부러지지 않았다고 얘기
해주었다.
알피는 비틀거리면서도 으르렁거리며 다시 붙을 준비를 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알피는 착하긴 했지만, 지혜롭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만해, 알피. 다음에 다시 하자구."
나는 알피에게 샤워나 하라고 말하고는 그 낯선 사람을 내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름이 뭔가?"
"카듈라라고 합니다."
카듈라? 아마 푸에르토리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셀트가 조금
있었다.
"좋아. 지금부터 키드 카듈라라고 부르지. 나는 매니라고 부르게."
나는 담뱃불을 붙였다.
"이봐, 내가 자네는 뭔가 만들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서 한 걸음씩 시작하자구. 먼저 내일 아침에 내 변호사를 만나서 계약
서를 쓰세."
키드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불행하게도 내일 아침에는 힘들겠는데요. 오후도 그렇구요. 아침과 오후가 아니
면 불가능합니까?"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안 되는 거야?"
"나는 포토포비아에 걸렸어요."
"포토포비아라는 것이 도대체 뭐야?"
"햇빛을 견딜 수 없는 병이에요."
"발진이나 뭐 다른 것이 생기나?"
"발진보다 조금 더한 거죠."
나는 담배를 씹었다.
"그 포토포비아라는 게 자네가 시합하는 데 지장을 주나?"
"지장 없습니다. 사실, 난 그것이 내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죠. 어쨌든, 모
든 시합은 저녁으로 시간이 잡혀야 합니다."
"그거야 힘들지 않지. 요즘엔 모든 시합이 어느 곳에서나 밤에 열리니까. 키드,
내 생각엔 우리가 주에서 위탁하는 병원에 가더라도 포토포비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데다가 그들이 트집 잡지 않
도록 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해. 포토포비아는 찾아내지 못하겠지. 그렇지?"
"보통 감각이면 찾아내지 못하겠죠."
그가 이번에는 활짝 웃었는데, 나는 그때서야 그가 왜 활짝 웃지 않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입 양쪽에 하나씩 아주 큰 이빨이 2개 있었다. 나같으면 움푹 패이건 말
건 뽑아 버릴 것이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매니, 내가 앞으로 돈을 잘 버는 게 가능할까요?"
누군가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돈 얘기를 꺼내면 나는 지옥에나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키드 카듈라라면 예외이다.
"물론이지, 키드. 하지만 내 생각엔 자네는 돈을 쓸 데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전 특별히 돈을 쓸 데는 없어요. 하지만 집세를 내지 않으면 주인이 쫓아내겠
다고 해서요."
다음 날 아침 11시쯤에 하나한에게 전화가 왔다. 토요일 밤에 있을 맥카들 대
자블롱의 중요한 일전에 대한 얘기였다.
맥카들은 하나한의 자존심이고 기쁨이었다. 그는 헤비급인데, 스타일도 갖추고
스피드도 있었다. 게다가 젊었다. 하나한은 그를 신중하게 키우며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맥카들은 챔피언감은 아니지만 은퇴하기 전에 큰 돈을 만
질 수는 있을 것이다.
"매니, 토요일 대전에 문제가 좀 생겼어. 자블롱이 바이러스에 감염된채 체중
검사를 받아서, 제명되었어.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한데 자네 체육관에 제대
로 해낼 만한 사람이 없겠나?"
자블롱은 18승 10패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10패 중에서 여섯 번을 KO로 졌
다. 그러나 18번 이긴 다음에 내리 열 번을 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기록상으로
는 그다지 나쁜 전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한이 자블롱을 대신으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생각했다. 체육관에 나오는 서너 명의 베테랑이 생각났는데, 그
들은 지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키드 카듈라가 생각났다.
새로 온 아이 같으면 3라운드짜리 연습 경기부터 시키면서 천천히 기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는 카듈라라면 기다리지 않고, 지름길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생각났네, 하나한. 어젯밤에 나를 찾아온 키드 카듈라라는 아이가 생각
나는군. 그는 아마 자원할 거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 전적이 어떻게 되나?"
"몰라. 그는 외국 선수야.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것 같아. 그가 지금까지 싸운 전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은 있는 거야?"
"그럼, 그가 어떤지 보려고 링 위에 잠깐 동안 올려 봤었지. 그의 레프트는 죽여
준다구. 하지만 라이트를 쓰는 것은 못 봤어. 어쩜 오른손도 죽여줄지 모른다네."
하나한이 관심을 보였다.
"그 밖에는?"
"그는 아주 낡아빠진 옷을 입고 와서는 빈털터리가 된 눈물나는 얘기를 하더군.
그리고 35살쯤 되었을 거야. 틀림없어."
하나한은 좋아했다.
"그래, 좋아. 하지만 너무 쉽게 쓰러져서는 곤란해. 한 2회 정도는 버틸 수 있겠
나?"
"하나한, 난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네."
그날 저녁, 키드 카듈라가 체육관에 나타나자마자 나는 그를 변호사에게 데리고
간 다음, 경기장에 데리고 가 신체검사를 시켰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그날 밤
총수입의 10퍼센트를 우리가 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썼다.
나는 카듈라에게 등 뒤에 아무런 글씨도 없는 겉옷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좋아
하는 검은색이었다. 우리는 링으로 나갔다.
맥카들은 이 지역 출신이어서 팬이 많았다. 경기장의 반은 맥카들이 아는 사람들
이었다. 아주 형편없는 경기장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정말 좋았었는데.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다.
우리는 상품을 링 안으로 올려놓았다. 공이 울리자 맥카들이 우리 편 코너로 사
인을 보내고는 춤을 추며 코너에서 나왔다.
그러나 카듈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뭘 해?"
내가 물었다.
"자 보라구, 키드. 무대 공포증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나가서 싸우라고."
키드는 고개를 돌려 링 한가운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심판과 맥카들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더니 코너에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카듈라가 날린 레프트가 맥카들의 턱에 꽂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어젯밤의 알
피 보건처럼 맥카들도 똑같은 자세로 나가떨어졌다.
심판조차 깜짝 놀라서 카운트를 몇 초 있다가 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운트까지 포함해서 19초 만에 경기가 끝난 것이다.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맥카들이 경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의외
의 선수가 이기면서, 경기가 너무 빨리 끝나 티켓 값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탈의실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하나한이었다. 그의 얼
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카듈라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는 나를 구석으
로 끌고 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매니?"
나는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하나한,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펀치였다고 맹세할 수
있네."
"럭키 펀치였다는 건 맞는 말이야. 경기장을 예약하는 대로 다시 재대결을 갖게
될 거야."
"재대결?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하나한. 하지만 나는 그 경기에선 키드의 수입
을 보장해야만 해. 그건 신성한 신용 같은 거야. 그래서 재대결을 할 때는 입장
수입의 10퍼센트가 아니라, 60퍼센트를 그에게 잘라줘야할 거야. 그렇지 않나?"
하나한이 격분했지만 자신의 기록에 얼룩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화를 참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내가 예상했던 50대 50으로 결정을 보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날 밤에 내가 체육관 문을 닫고 사무실로 갔을 때, 키드는
내 사무실에서 텔레비젼을 보면서 앉아 있었다. 드라큘라 영화의 한 장면이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그는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흡혈귀 영화는 참을 수가 없어. 영화라도 말이야. 나는 논리적인 것
을 좋아하는데 그런 영화들은 비논리적이거든."
"비논리적이라구요?"
"그렇지. 한 명의 흡혈귀가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으면 당한 사람도 역시 흡혈귀
가 되지, 그렇지? 그러면 이제 두 명의 흡혈귀가 생기는 셈이지. 1주일 후에 그들
이 둘 다 피에 굶주려 관에서 나와 두 명의 피를 또 빨아 먹는단 말씀이야. 그러
면, 흡혈귀는 네 명이 되지. 또 1주일 후에 네 명의 흡혈귀가 나와서 피를 빨아
먹으면 이제 여덟 명의 흡혈귀가 생기지."
"아, 네. 그리고 21주 후에는 당연히 1백 4만 8천 5백 7십 6명의 흡혈귀가 생길
거라는 말이죠?"
"그렇겠지. 그리고 30주 정도가 지나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모두 흡혈귀
가 돼서 1주일 후에는 더 이상 피를 빨아먹을 사람이 없으니까 모두 굶어 죽겠지."
키드는 그 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은 현명하시군요, 매니. 하지만 이 가공의 흡혈귀들은 자신들이 피를 빨아
먹은 사람들이 모두 흡혈귀가 되어서 경쟁자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피를 빨
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빈혈 상태로 놔두든지 해서, 분명히 자제할
거에요. 그러지 않으면 모두가 더 나빠질 거라는 것을 알 테니까요."
나는 텔레비젼 볼륨을 줄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권투 시합 얘기를 꺼냈다.
"이봐, 키드. 나는 자네가 또다시 맥카들을 몇 초 안에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
네. 하지만 권투 시합이라는 것은 쇼 비즈니스라는 것도 기억해야 되네. 사람들은
20초짜리 시합을 보려고 입장권을 사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관중들에게 얼마 동
안은 시합을 보여줘야 해. 그래서 맥카들과 다시 싸우게 되면, 몇 라운드만 끌라
구. 너무 세게 때리지 말고 말야. 최소한 5라운드라도 한 다음에 해치우란 말일세."
나는 담뱃불을 붙였다.
"너무 잘해도 나중에는 상대 선수를 고르는 데 어려움이 있을 테고, 우린 장래를
생각해야 하네. 연속 KO는 좋은 거야, 키드. 하지만 너무 쉽게 이기는 것처럼 보
이지는 말라구."
다음 1주일 동안 맥카들과 재대결을 기다리면서, 나는 키드에게 어떤 훈련도 시
킬수 없었다.키드는 로드 워크는 물론이고, 거울 앞에서의 섀드 복싱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뭔가 완벽하게 하고 싶은 기분을 접어두고, 그 상태로 놔두었다.
키드는 주소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존심이 있어서 그가 사는 지저분
한 집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전화도 하지 않
았다. 하지만 이틀에 한 번씩 정도는 밤에 체육관에 나타났다.
맥카들과의 두번째 시합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쉽게 끝낼 수 있었다. 키드는 4
라운드까지 게임을 보기 좋게 끌고 간 다음, 5라운드에서 빠른 라이트 한 방으로
맥카들을 해치웠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시합을 큰 어려움 없이 가질 수 있었다. 키드 카듈라는 돌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키드도 시합에서 두세 번 다운을 당하게 하는 전략
을 세웠다. 그래서 키드가 펀지를 날릴 때는 맷집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처럼 보
이게 했다. 그러자 펀치깨나 있는, 거친 선수를 데리고 있는 모든 매니저들이 키
드를 쓰러뜨릴 기회를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다음 해에 입곱 번 시합을 가졌는데, 물론 키드가 모두 KO로 이겼다. 그
러자 다른 지역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돈이 제법 벌리기 시작하자. 나는 키드를 한 여섯 달 정도만 더 키우고 싶
었다. 그러나 키드가 뭔가 다른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
는 뭔지 말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리고 키드는 이제 유명해져서 방송의 관심도 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스
타일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무척 친절했고 기자들의 주소를 묻기까지 했지만, 내
가 알기로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답례차 방문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10번째 승리를 거둔 - 9라운드에 어비 왓슨을 KO로 이겼는데, 왓슨은 다
운이 되는 순간에도 펀지를 날렸다 -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무실에 앉아 머지
않아 체육관을 팔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체육관의 관리를 맡길 날을 꿈꾸며 있
었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보통 체격에 평범하게 생긴,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귀부인이 들어와서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검은 머리에 코가 좀 컸으나 관심을
가질 만한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키드 카듈라 씨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글쎄요. 그는 불쑥불쑥 나타나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스케줄이 있어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언제 나올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의 주소를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는 그걸 비밀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녀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말했다.
"약 2주 전에 전 해리엇 고모를 만나러 갔었죠. 그런데 돌아올 때 늦게 출발해
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주 어두워지고, 비까지 만나게 되었어요. 전 정말 방향
감각이 없어 눈에 익은 길을 찾아내려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어요. 그
런데 제 차가 진창길에 미끄러져 도랑에 빠지고 말았죠. 차를 꺼낼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전 포기라고 거기 앉아서 차가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아주 이상한 꿈을 꿨는데,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
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보니,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제 차 문 옆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그는 제가 깨어나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군요. 정신
이 들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전화가 있는 곳까지만 태워다 줄 수 있겠
느냐고 물었죠. 그는 차를 도로에 주차시켜 놓았었는데, 저를 주유소까지 태워다
주더군요."
그녀의 목 한 쪽에 모기에 물린 듯한 자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그는 고맙다고 말도 하기 전에 제가 전화하는 사이에 차를 몰고 가버
렸어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저는 계속
생각이 나서..."
그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어젯밤 뉴스를 보고 있는데, 스포츠 시간에 키드 카듈라의 얼굴이 텔레
비전에 나오더군요. 전 그가 주유소까지 태워다 준 사람이 틀림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죠.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봤더니 당신이 그의 매니저라고 하면서 체육관 주
소를 가르쳐 주더군요. 그래서 그분을 찾아 뵙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키드를 보게 되면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리죠."
그 여자는 계속 선 채로 무슨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그분에게 돌려드릴 것도 있어요. 돈주머니에요. 안에 1천 달러가 들어
있었어요. 구조차가 도랑에서 차를 끄집어낼 때 제 차 옆에서 발견했어요."
"그럼 저에게 주시죠. 제가 키드를 보면 전해 주겠습니다."
그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불행하게도 돈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왔어요."
그리고는 지갑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냈다.
"제 이름은 캐링턴이에요. 다프네 캐링턴요. 저희 집 약도를 그려 드릴께요. 좀
복잡하거든요. 우리는 집을 <캐링턴 애리>라고 불러요. 혹시 들어 보셨나요? 작
년에 <품위 있는 집과 정원>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어요. 카듈라 씨는 물
론, 언제든지 오셔도 돼요. 그러면 그 돈주머니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키드 카듈라가 그 다음 날 저녁에 체육관에 왔을 때, 다프네 캐링턴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그녀가 놓고 간 약도를 건네주었다.
키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1천 달러를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전 돈주머니를 사용하지도 않아요."
나는 씨익 웃었다.
"나도 자네가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하지만 그 여자는 자네를 만나
기 위해서 1천 달러를 낼 모양이군. 그 여자의 말 중에서 사실인 부분이 있나?"
"그래요.... 그 여자를 주유소까지 태워다 주기 전에....그 전에, 그 여자가 차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죠."
"지난 주에 샀어요. 비행기를 타기에는 좀 어중간한 곳엘 가야해서요."
"어떤 모델인가?"
"1974년형 폭스바겐이에요. 모터는 상태가 썩 좋아요. 하지만 차체는 좀 수리를
해야겠어요."
그는 내 책상 귀퉁이에 앉아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여자는 링컨 컨티넨탈을 몰더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키드. 자네도 곧 링컨 컨티넨탈을 몰고 다닐 테니까."
우리는 이제 간격을 두고 시합을 치러야 했다. 매달 아무하고나 싸울 수는 없었
다. 갈수록 실력이 있는 상대와 싸우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
을 끌어서 큰 돈을 벌 수 있도록 선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번 더 싸워서 이겼고, 그 시합은 모두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그래
서 기분이 좋을 텐데도 키드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가 내 사무실로 와서는 선언을 했다.
"매니, 저 결혼할 겁니다."
나는 약간 놀랐지만,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많은 권투선수들이 결혼을 하니까.
"그 행운의 아가씨는 누군가?"
"다프네 캐링턴이에요."
잠시 후에야 나는 그 이름이 누군지 생각났다.
"그 다프네 캐링턴 말인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네가 잘못 결정했다고 생각하길 바라네, 키드. 그 귀부인은 그다지 잘생긴 얼
굴은 아냐."
키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키드, 생각해봐. 그녀는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
"곧 어울리게 되겠죠."
갑자기 나는 상황의 핵심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다.
"키드, 자네가 돈 때문에 그 귀부인과 결혼하지는 않겠지, 그렇지?"
그가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 얼굴을 붉혔는지도 몰랐다.
"왜요? 전에라도 그랬을 거에요."
"하지만, 키드. 돈 때문이라면 그 여자와 결혼할 필요 없어. 자네는 곧 자네의
돈을 갖게 될 거야. 큰 돈을 말야. 백만 달러를...."
그가 시선을 피했다.
"매니, 난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하지만 친척들이 대부분이죠.
아마 내가 링에 오른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 조금은 강
력하게 - 제 가문을 생각하라고 충고하더군요. 내가 돈 때문에 링에 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거라면서요."
그는 계속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전 오랫동안 곰곰히 생각했어요, 매니. 그리고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어요. 전 권투 선수가 될 수는 없어요. 더구나 프로 선수가 될 수는 없어요.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심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어떤 행복이든 성취
하려면 누구든 자존심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계급을 인정해야만 해요, 매니."
"계급? 귀족 같은 것 말인가? 자네가 백작이나 뭐 그런 거라는 말인가? 자네가
명문가의 후손이야?"
"그래요. 친척들이 제 곤궁을 해결해 주려고 돈을 모으기까지 하고 있어요. 하지
만 전 친척들의 자선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럼 자네는 돈 때문에 귀부인과 결혼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이봐요, 매니. 여자의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이
유에요. 그리고 또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돈 때문에 시합을 하지 않아도 되구요."
우리는 계속해서 입씨름을 벌였고, 나는 그에게 링에서 버는 돈이 그에게 - 나에
게도 -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얘기하면서, 좀더 심사숙고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는 약간 물러서는 기미가 보였고, 체육관을 떠날 때는 최소한 얼마 동안
잘 생각해 보기는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났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나는 극도로 신경
이 예민해져 있었다. 어느 날 저녁 10시 30분경이었다. 알피 보건이 봉투를 하나
들고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 봉투를 보자마자, 그 속에 암담함이 들어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것을 여는데 손이 떨렸다. 나는 키드 카듈라의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매니.

전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해 정말 후회하고 있지만, 결국 링을 떠나
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이 저의 장래에 대해 큰 희망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상황하에서 우리는 당신이 말했던 백만
달러를 벌 수 있을 겁니다.
이제 행운을 빌며 작별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 당신에게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고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키드 카듈라.

나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은 건 아니라고? 봉투 안에 수표라도 넣었나? 나는
봉투를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게 아니
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계속 서 있는 알피 보건을 쳐다보았다.
그가 씨익 웃었다.
"날 쳐보세요."
나는 알피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었는데, 목에 모기에게
물린 듯한 큰 자국이 2개 있었고, 입 양쪽에 큰 이빨이 2개 나 있었다.
"나를 쳐보세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1주일 내내 실망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그를 후려쳤다.
내 손이 부러졌다.
나는 의사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을 때 웃지 않았다.
이제, 나 자신이 키드 카듈라를 대신하게 되었다.



현실의 경계선
( OVER THE BORDER LINE )
- By Francis M. Nevins Jr

"아시겠죠? 난 어떻게든 막아야 했어요."
"막는다구요? 서더랜드 부인, 뭘 막는다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앤 죽었어요. 그 남자가 죽였다구요!"
"누굽니까, 서더랜드 부인?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굴 죽인다는 건가요?"
"당신이 날 그렇게 쳐다보는 것으로 봐서, 도통 믿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군요.
폴리 부장, 날 미친 노파로 생각하지요?"
"아니, 천만에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침대 밑에 간첩이 숨어 있다고 항상 경찰이나 FBI를 불러대는 그런 노인
으로 생각하나요? 그렇죠?"
"서더랜드 부인, 그건 오햅니다."
"아니면 왜 믿지를 않아요?"
"그건 말이죠, 부인. 믿지 않는 게 아니구요. 에 뭐랄까? 글쎄,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군요, 사정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질문에는 전부 다 대답해 드렸어요, 폴리 부장."
"예, 그건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
"또 뭔가요?"
"자, 이렇게 합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 주시는 거예요. 도중
에 말을 막지는 않을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요,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콜다와 딤 얘기부터
시작하지요. 콜다와 딤 프랭클린.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예요. 그 사람들을 보
고 있으면 죽은 남편과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지요. 정말 사이가 좋은 부부라구
요. 물론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결혼했을 때 여잔
이미 임신중이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결혼한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못 되죠.
게다가 아이는 딤의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방탕아 파스의 아이였어요.
"저, 서더랜드 부인."
"도중에 말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했죠?"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혼란스럽군요. 해링턴 파스가 누굽니까?"
"폴리 부장, 잘 듣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돼요. 어쨌든 잠자코 있어 주세요."
"네."
"어디까지 말했더라?"
"해링턴 파스입니다."
"아, 그랬지. 해링턴은 부잣집 망나니 아들이죠. 아버지는 파스 일렉트로닉스사
의 사장이구요. 잘 아시죠? 수완 있는 유명한 사업가죠. 하지만 해링턴은 아버지
를 전혀 닮지 않았어요. 정말 그 같은 아들을 둔 파스 부인은 큰 걱정일 거예요.
늘 이상한 차를 몰고 다니며 사고를 일으키니까. 아버지는 1년 내내 뒤치다꺼리에
바쁘죠. 나라면 내쫓는 한이 있더라도 바르게 교육을 시킬 텐데.... 자기 책임은
자기가 지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다 술고래인 걸요. 참, 콜다 이야기로 다
시 돌아가자면, 그땐 아직 딤과 결혼하지 않았어요. 딤은 스탠튼이란 여자를 사귀
고 있었으니까. 길게 속눈썹을 붙인 아주 화려한 여자였어요. 그런 여자가 뭐가 좋
다고, 글쎄. 아, 어쨌든 콜다 말이에요. 어머니가 몇 번씩 수술을 받다 죽어 혼자
외톨이가 되었을 때죠. 의지할 데가 없어 아무한테나 기대고 싶은 꽤 위험한 상태
였다구요. 그걸 저 방탕아 해링턴이 알아채고 접근한 거죠. 그래서 저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탁 차버리더군요. 콜다가 임신한 것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죠."
"그건 파스의 아이였나요?"
"그러나 그렇게 말했죠. 폴리 부장, 이야기를 좀더 주의깊게 들어주세요. 어쨌든
그즈음 스탠튼이란 여자도 딤을 떠나 해링턴과 친해졌어요. 내 생각에는 끼리끼리
잘 만났지 않나 싶지만요. 한편 딤은 실연을 당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우려되
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콜다를 만난 거예요. 딤이 산부인과 의사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지요?"
"아뇨."
"오, 그랬나요? 하여간 딤은 산부인과 의사예요. 또, 병원 아가씨들은 의사 중에
서 딤이 제일 핸섬하다고 했어요. 그러나 담 자신은 그런 건 전혀 문제 삼지 않았
지만요. 그런데 어느 날 아까도 말했듯이 콜다가 진찰을 받으러 왔지 뭐예요. 딤
은 콜다에게 임신이라고 가르쳐주었죠. 그 말을 듣고 콜다는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비틀거리다가 그만 딤의 팔에 안겨 어린애처
럼 울고 말았어요. 딤은 엉겁결에 콜다를 안아준 것인데 그 순간에 사랑이 싹튼
모양이에요. 그때 사정은 잘 이해가가요.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바로 그
런 식이었으니까요. 단, 난 임신하지 않았고 서더랜드는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였
지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누군가 자신에게 부딪쳐 왔을 때 그게 자신의 짝
인지 아닌지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안다는 사실이죠. 서더랜
드와 내가 그랬고 콜다와 딤이 그랬어요. 딤이 프로포즈하던 날은 잊을 수가 없군
요. 콜다는 임신 8개월로 그동안 둘은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나와 결혼해
줘요.> 딤이 말했죠. 그런데 콜다는 <그럴 수 없어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애까지
임신해서 당신과 결혼한다면 당신 입장이 곤란해요.>라고 거절했어요. 난 하마터
면 큰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안 돼, 콜다! 딤은 너를 사랑하고 있어. 바보같이
행복해질 기회를 놓쳐선 안돼!> 하고 말이죠.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딤
이 똑같은 말을 했거든요. 딤은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당신이 있어
난 용기를 얻었소. 만약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난 살아갈 의미를 잃는 거요.>
그래서 결국 콜다는 프로포즈를 받아들였고, 곧 두 사람은 결혼을 했어요. 딤은 아
이를 자기가 받아냈죠."
"부인, 그것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
"폴리 부장,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아이구, 미안합니다."
"두 사람은 아주 행복했어요. 아이도 전혀 해링턴을 닮지 않았구요. 하지만 난 아
직 안심할 수 없었어요. 언젠가는 비극이 일어나리란 예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것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닥칠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더군요. 사실 난 그 불길한
예감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요. 삼조이 선생한테 가서 수면제를 받아왔을
정도죠. 수면제를 지나치게 먹다 죽은 노인을 알고 있어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지만
말예요. 노인만이 그런 건 아니죠.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술에 취해 마시는
것이 제일 위험하지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요. 어쨌든 난 콜다와 딤이 걱정
되었어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일어난다
는 생각에 꼬박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어요. 그러다 하루는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
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어요. 뭐라고 할까, 여자의 직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게 되었죠. 해링턴이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콜다를
죽인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 해링턴은 얼마 전 스포츠카를 샀어요.
굉장한 소리를 내는 외제차죠. 사람들은 이미 그가 무서운 속도로 온 시내를 돌아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죠. 어떻게든 그런 일
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했어요. 서더랜드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난 얼마나 충
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물론 우리 그이가 받힌 것은 외제차는 아니지만요. 난 슬퍼
죽을 지경이었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고가 일어날 줄 뻔히 알면
서도, 아무 대책도 없이 두고 볼 수만은 없었지요. 어떻게든 해야죠. 하지만 어떻
게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런 우연한 일이 있다니! 조카
생일 선물을 사러 5번가에 나왔다가 47번지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 라디오 시티와
록펠러 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 말이에요. 아시죠, 거기? 그런데 그 레스토랑 안
에 해링턴이란 녀석이 있지 뭡니까! 나는 옆으로 가서 <파스 씨죠?>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자는 빙긋 웃더군요. 막돼먹은 사내지만 웃는 얼굴은 호감이 갔어요. <파
스 씨,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해링턴은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지만 일어나 의자를 권하더군요. 난 자리에 앉았죠. <파스 씨,
분명시 말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난 잘 알아요.> <어떻게 되죠?> 그가 또 웃
으면서 말했어요. <당신, 그 이상한 외제차로 콜다 프랭클린을 죽일 거죠?> 같은
얼굴에는 죄의실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그저 살인을 즐기는 거죠. 정말 지
독한 악당이에요. 그러다가 그자가 잠깐 실례하겠다며 회장실로 들어갔어요. 그때
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달았어요. 삼조이 선생한테서 받은 핸드백 속의 수면제를
꺼냈지요. 그리고 그걸 그자의 커피 속에 넣었어요. 그런 다음 곧장 집으로 돌아와,
모든 게 끝났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죠. 그리고 여기 이렇게 자수하러 온 겁
니다. 내 이야기는 이것뿐이에요."
"알겠습니다."
"내 말을 믿어주시는거죠?"
"예, 믿지요, 부인."
"한 가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 이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는 점
이에요. 딤과 콜다와 아이를 위해서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시겠죠, 폴
리 부장?"
"예, 알 것 같군요."
"이제 이 사건의 수사는 끝났네."
"부장님, 전 머리만 아프군요."
워렌 형사가 말했다.
"아직 수사가 덜 끝난 것 아닙니까? 맥스웰의 커피에 약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사
실과 일치해요. 그리고 아까 그분은 보이가 보았다는 여자와 똑같구요. 하지만 테
일러 맥스웰을 왜 그분이 <해링턴 파스>라 부르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워렌, 테일러 맥스웰은 배우라구."
"그게 무슨... "
"신상명세서를 보았는데 말야. 그는 몇 해 전 TV드라마 <살아가는 의지>에 나왔
더군."
폴리 부장이 말했다.
"그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이 바로 해링턴 파스였다네."





릴리의 비누
( THE MISSING INGREDIENT)

BY - GEORGE DE RUTHNER LYON
가스렌지 위에서 큰 놋쇠 냄비가 보글거리며 신비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저 미들턴은 빗자루의 몸통으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그 걸쭉한 액체를
뒤섞었다. 끈적한 혼합물 표면에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비난하는 눈으로 자
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밑에서 올
라온 거품 때문에 조각나 사라져 버렸다. 거품이 터질 때마다 기름냄새가 났
다. 이 악취, 이것이 문제였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아내의 침실로 갔다. 화장대 앞에는 연고나 크
림, 향수가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용기가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향수병 하
나를 아무렇게나 잡고 그는 다시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너무나 허둥
대서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간신히 난간을 붙잡아 추락을 모면했다.
로저는 향수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흉내내어,
"비누야, 아름다운 비누야."
라고 노래하면서 다시 빗자루를 집어들어 휘저었다.
"부디 아내에게 꼭 맞았으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녀가 보지 못해서 유감천만이다. 이것도 완성
되면 그건 모두 아내 덕택이다. 마루를 싹싹 문질러서 정육점 도마보다 청결
하게 표백해 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 병원 같은 냄새를 풍길 때까지 벽을
씻어낸 건 누구인가? 특히 피부에 관한 한 릴리 미들턴만큼 자부심이 강한 사
람이 있을까? 확실히 그녀는 아름다운 피부를 갖고 있고, 그것은 그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 피부에 지방의 팽창을 억제할 만
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들뜬 콧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 재촉했다.
"로저, 당신은 화학 선생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내 피부에 맞는 비누를 만들
어주지 않죠? 내 손을 봐요. 이렇게 거칠어졌어요."
"알았어, 여보. 해보겠어."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이 연구에 착수했다. 거의 모든 비누의
원료로 쓰이는 가성(苛性) 알칼리 용액은 충분히 있었다. 문제는 동물성이건
식물성이건 간에 알맞은 지방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지방을 시험해
보았다. 오일, 그리스, 희귀한 천연물질, 값비싼 합성물질 등 대학강사의 적은
봉급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갖가지 품목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을
섞어도 그녀가 바라는 품질의 비누는 나오지 않았다. 들고양이나 들개 따위의
작은 동물이 로저에게 최초의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을 주
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를 매슥거리게 했다. 그는 동물 애호가
였던 것이다.
지금 막 완성한 비누에는 이제까지 부족했던 유일한 성분인, 그녀의 피부에 꼭
맞는 질 좋은 지방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벌써 충분한 열처리도 마쳤다. 그는
냄비를 불에서 내려 식힌 후 개구대 속에 쏟아 넣었다. 엷은 황색 막대가 50개.
"로저, 안 잘 거예요? 벌써 11시가 넘었어요."
머릿속에는 일뿐이지만, 그녀의 이런 말을 듣고 그는 남은 유성 혼합물을 마루
에 쏟았다.
매일 밤 이런 식이었다.
"로저, 이제 대충 끝났겠죠? 어서 주무시러 오세요."
결혼한 날 밤은 이젠 먼 옛날의 일인데도 마치 신혼 첫날밤의 신랑신부처럼,
그때도 그녀도 날씬하고 인형 같았다. 지금이라고 그녀가 인형 같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가 보기 흉하게 튀어나온 큐피드 인형이다.
"작년의 곡선이여, 지금은 어디에, 아아, 지금은 어디에?"
그는 때로 시적인 기분을 내어 이렇게 자문하고 곧 이렇게 자답했다.
"몹시 부풀고 튀어나왔으니, 이것이야말로 작년의 곡선의 영락한 말로구나."
비누를 막대기 모양으로 굳히면서 그는 자신의 비누에 뭔가 이름을 붙여야겠다
고 생각했다. <릴리 비누>는 어떨까? 그래, 친근함이 있어서 좋군. 하지만 이름
을 어떻게 붙이는가 하는 따위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못 된다. 그는 이
비누를 팔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름을 붙여두면 마음속으로 부르지 않고 정확
히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
에 그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찍 일어나서 죽 늘어놓은 멋진 비누를 황홀하게 바라보았
다. 그 중 하나를 손에 쥐어 어루만지고 있는데, 뒷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났
다. 그물 너머로 보니 봄날의 햇빛 속에 이웃에 사는 미스 엘비라 보니헤이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곤충의 더듬이 같은 예민한 코를 실룩거리며, 끊임없이 로저
의 어깨 너머로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미들턴 씨. 릴리에게 잡지에서 오려낸 케이크 만드는 법에 관한
기사를 전해주러 왔어요."
"공교롭게 지금 없군요."
"없다구요? 하지만 오늘 오후 함께 쇼핑하러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는 그녀가 마지못해 내미는 손에서 종이조각을 받아들었다.
"언제쯤, 아니 곧 돌아올까요?"
"글쎄요, 급히 캔자스시티에 있는 언니를 병문안하러 갔거든요."
"언니분은 상태가 좋지 않은가요?"
"예, 상당히."
"그게 어젯밤 일이었죠? 댁의 부엌 불이 거의 밤새도록 켜져 있는 것을 보았거
든요. 아 뭐, 그렇다고 제가 옆집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가
끔 밤중에 잠이 깨면 싫어도 댁에 불이 켜진 게 보이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보니헤이스 양. 나는 어젯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죠. 11시 45분
열차를 탈 릴리를 타로 바래다주고 돌아와서 비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
거든요."
"부인이 안 계셔서 쓸쓸하시겠어요."
이렇게 말했을 때에는, 그녀는 이미 집 안에 들어온 상태로 두사람은 부엌에
서 있었다.
"딱하시게도! 남자분 혼자서 지내셔야 하다니... "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내의 향수 냄새를 맡으면 마치 그녀가 옆에 있
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의 손에는 아직 비누가 들려 있었다.
"어머, 정말 로맨틱하군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남자분은 그다지 흔하지 않은
데... "
그녀는 둥근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내가 못 가게 말릴 수는 없
지요. 잠깐 실례해야겠군요."
그는 도망치듯 포치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뒤따라왔다. 그녀는 마치 사냥개
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물었다.
"이 지독한 냄새는 뭐죠?"
그는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말이죠, 특별한 뼛가루입니다. 제가 만들었죠. 조금 나눠 드릴까요? "
"아, 정말 당신은 재주 있는 분이군요. 그런데 그다지 많지 않겠죠?"
"아닙니다. 충분히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져가세요."
그는 약간 작은 주머니에 그 회색 가루를 덜었다.
"이것을 정원에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틀림없이 릴리도 기뻐할 거예요. 왜냐
하면 그녀는 당신 집 정원에 있는 장미를 매우 좋아 하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릴리가 없다는 증거들이 집 안 여기저기에서 확실하게 나타
났다. 가구에도 두껍게 먼지가 쌓이고, 그가 출입할 때마다 생기는 발자국이
마루에 선을 그었다. 누군가 청소를 해줄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진흙투성이의 신발을 벗고 올라오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요? 지금
막 닦아 놓은 마루가 이렇게 더러워졌잖아요!"
이렇게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저는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기로 했다. 문안을 작성해서 그것을 전화로 전하고
있는데, 마루에 불쑥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놀라서 눈을 들어 보니 오
후의 태양을 등지고 엘비라가 서 있었다. 그는 화난 것처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용건이죠?"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가 화나 있다는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엌의 의자 위에 커다
란 장바구니를 털썩 올려놓고 나서 테이블에 접시 두어 개를 늘어놓더니 자기 멋
대로 요리를 데우기 시작했다. 그 냄새를 맡자 로저의 입속에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당신이 전화하는 게 들렸어요. 별로 들으려고 애쓴 건 아니에요. 때때로 그냥
들려오거든요. 저라도 괜찮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어요."
"아닙니다. 그건 그다지... "
"릴리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요. 이웃이라는 게 그래서 좋은거 아닌가요? 하
지만 릴리도 너무 자신만만하게 있다가는 누군가에게 남편을 뺏겨 버릴지도 모르
겠는데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게다가 이건 릴리를 위해서예요. 그녀 역시 당신이 점점 여위어 간다면 슬퍼할
거예요. 이것 좀 드실래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접시를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결국 요리의 대부분과 진한
푸딩을 모두 먹어치운 것은 그녀 쪽이었다.
잠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식탁을 다 치우고 접시를 씻은 뒤 부엌 마루를
대걸레로 닦았다. 그리고 그가 몇 번이나 사양 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두 번
씩 집을 청소하러 오겠다고 우겼다.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당신이 대학에 가 있는 동안에 오겠어요."
그는 지하실 문을 잠가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험실만은 제발 청소해 주
지 않았으면 싶었던 것이다.
대개 그녀는 그가 귀가하기 전에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전혀 그녀를 만날 수 없
었다. 그녀는 찾아올 때마다 그의 집 냉장고를 텅텅 비워놓고 돌아갔다. 로저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 없이 더 많은 전분질의 식품을 사와서는, 그대로 냉장고에 넣
어둔 채 대학에 강의하러 갔다.
엘비라는 부지런한 여자였다. 그녀의 유일한 결정은 냉장고에 너무 집착하는 나
머지 때때로 이상한 곳에 걸레나 양동이를 두고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한번은 애
써서 깨끗히 정리한 로저의 침대 위에 쓰레받이를 깜빡 놔두고 돌아갔다. 그래도
그녀 덕택에 집 안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눈부시게 닦여진 마루는 로저
에게 들어오기 전에 구두를 벗으라고 말없는 명령을 내렸다. 왁스를 발라서 반짝
거리는 가구는 이 위에 뭔가 올려놓을 테면 놓아 봐라는 식으로 그에게 도전적으
로 비쳤다. 때로는 엘비라가 거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
신의 비누의 뛰어난 효과를 보는 것은 역시 즐거웠다. 엘비라의 손이 희고 부드
럽게 그리고 매끈해졌던 것이다. 손가락의 피부는 꼭꼭 채워넣은 소시지 표면처
럼 윤기와 팽팽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 로저는 여느 때보다 빨리 귀가했다. 현관 옆에 그가 주문한 약품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그 꾸러미를 보관하기 위해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곧
바로 실험실(그는 지하실을 이렇게 불렀다)로 내려갔다. 나왔을 때 이층에서 엘
비라가 열심히 청소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로저 당신이에요?"
이제 그녀는 그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렇소, 미스 보니헤이스."
그는 서류가방을 식당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곧 당황하며 다시 그
것을 들어올리고 손수건으로 테이블 표면을 닦고 나서 가방을 서재로 가져갔다.
그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좁은 층계참에 왁스를 바르고 있는 중이었다. 청
소하러 오는 일이 몇 주일 계속되면서 그녀는 훨씬 살이 쩠다. 다만 얼굴만은 그
대로였고, 눈은 여전히 날카롭고 무언가 탐색하는 것 같았다.
"계단 청소는 이제 곧 끝날 거예요.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돌아 오셨네요. 그렇
지 않으면 완전히 청소를 끝냈을 텐데... 로저, 그 멋진 비누를 언제 다시 만들
어주실 생각이죠? 이제 마지막 한 개 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양동이를 들려고 몸을 굽혔다. 그녀의 몸이 이제는 릴리와 똑같이 살쪄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을 느꼈다.
"그건 말이죠,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다시 만들 겁니다. "
그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작업복은 산(酸) 때문에 여기
저기 구멍이 나고 얼룩투성이였다. 그는 즐거운 듯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침실에
서 층계참으로 나왔다. 엘비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난간에서 몸을 쑥내밀고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물건을 두러 갔다가 열쇠를
걸어둔 채 잊고 온 것이다! 마루를 닦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의 실험실 안
에 있는 것이다! 발끈해져서 그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릴리의 향수 냄새가 강렬하게 그를 자극시켰다. 그는 그녀가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경사가 급한 계단 위쪽에 엘비라가 깜빡
잊고 사용중이던 릴리 비누를 놔두었지만, 당황한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구두 밑에서 그 부드러운 비누가 짓뭉개지며 그의 발은 허공으로 붕 떴다. 꼴사
나운 새처럼 팔을 허둥대며 그의 몸이 허공에 날아올랐고, 이내 아직 젖어 있는
마룻바닥에 부딪혀 그는 목뼈가 부러져서 죽었다.




다섯번째 사나이
( EVERY FIFTH MAN )
By - R.L Stevens


내란이 끝나고,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꿈만 같이 생각되었다. 사실 굉장
한 경험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2년 전부터, 난 추방된 사람들과 같이 생활
하며 훈련을 받았다. 나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의 처벌
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았다. 몇 달 동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과 낙하산,
폭약 등의 취급 훈련을 받으며 그날(우리가 코스타네라로 돌아갈 날)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25년이란 일생을 코스타네라의 대도시, 지방 읍, 정글
마을에서 보내왔다. 코스타네라는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도) 나의 조국, 내가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다. 우리는 다이암 장군의 등장과 함께 조국을 떠
나왔지만 드디어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야간을 이용해 낙하산으로 내려 반(反)
다이암 육군 세력과 합류해 수도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빗나갔다. 육군은 마음이 변했고, 우리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곳은 공교
롭게도 다이암 장군 직속부대 한복판이었다. 우리 해방군 65명 중 반수 이상이
땅에 닿기 전에 사살되고, 살아서 착륙한 자도 집중사격을 받았다. 한밤중에 우
리는 아주르 만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옛 성채로 끌려갔다. 그날 붙잡힌 동료는
23명, 그 중 한 명인 토머스는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우리는 성체의 큰 지하감
옥에 갇혀 운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곳은 덥고, 모두가 땀냄새와 곰팡내가 뒤
섞여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 였다. 나는 검은 베레모와 셔츠를 벗고 딱딱한 돌바
닥 위에 눕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동료들과 함께 기다렸다.
이 나라에는 한 가지 관례가 있었다. 과거 수백 년 간, 혁명이 있을 때마다 지
켜져 온 관례였다. 정부는 포로가 된 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끊임
없는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킬 에브리 핍스 맨(Kill every
fifth man)> 즉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나머지는 석방한다. 이
것은 상당히 대폭적인 자비로 반역을 억제하였지만 동시에 나라 안에 반대파를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 석방된 80퍼센트가 단결해 다시 일어 나는 일도 흔
했지만, 처형의 공포로 인해 평화적 수단으로 돌아서는 예도 종종 있었다.
우리(푸른 물가의 성채에 갇힌 23명)가 직면한 것은 바로 그 운명이었다. 누구
든 살아날 가망이 있었다. 살아남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는 다이암 장군의 냉혹한 책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하
감옥의 창살 밖에서 지령문이 읽혀졌다.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을 즉각 처형하고
나머지는 24시간 내에 석방한다.>
그러나 여기서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났다. 담당관은 계속해서 같은 명령을 네
번 더 되풀이한 것이다. 다이암 장군은 똑같은 처형 명령을 다섯 통이나 발행한
것이다. 이제 모두가 처형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감시원이 지하감옥의 문을 열자, 나는 담당관
에게 갔다. 애써 태연한 척 굵은 목소리를 내서 나는 상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23명 전부를 처형할 수는 없다. 그건 명령 위반이다."
담당관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짜아식, 계집애같이 굴지 말고 군인답게 죽으라구!"
"하지만 처음 명령은 다섯 사람 중 한 명을 즉각 처형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
가? 명령대로 해달라. 두번째 명령을 읽기 전에 처형해 달라."
담당관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똑같은 것 아니야? 낮에는 더워진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죽고 싶
나? 지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지만 말야."
"제발 명령대로 해달라."
나는 끝까지 버텼다.
"각각의 명령을 따로따로."
물론 여러분은 이미 내 의도를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다섯 개의 명령을 하나
로 정리해 한 번에 실시하면(의심할 나위 없이 다이암 장군은 그럴 속셈이었다)
23명 전부가 사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따로따로 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9
명은 살아남는다. 나는 수학에 자신이 있었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처음 23명
중 다섯 사람에 한 사람씩 죽으면 4명이고 나머지는 19명. 이 계산을 한 번 반
복하면 3명이 처형되고 나머지가 16. 세번째는 다시 3명이 살해되고 13명이 남
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명이 더 살해되어 9명이 이 성채에서 나갈 수 있는 것
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내가 죽을 가능성은 살아남을 가능성보다 더 크지 않을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담당관이 내가 말한 방법을 채택해 주기만 한다면 난
확실히 살아남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생각해 보라. 처형시 다섯번째 남자를 어
떻게 골라낼지? 아마 제비뽑기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군대니까. 우리
는 일렬로 늘어서서 번호를 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순서로 서야 할까?
알파벳 순?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은 우리의 이름을 모른다. 우리
는 오랜 군대 습관을 따라 설 것이다.
키 순서대로.
나는 지하감옥에서 보낸 하룻밤 사이에, 23명 중 내가 제일 키가 작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방이 작은 키 순서대로 센다면, 그다지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항상 안전하다. 왜냐하면 나는 늘 1번이니까. 그러나 키가 큰 쪽에서부터 센다면
(이쪽이 훨씬 가능성이 크다) 다섯 사람에 한 사람씩 줄어들 때마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다. 번호로 치자면 23번, 19번, 13번, 11번, 그리고 9번. 다섯으로 나누
어 떨어지는 수는 하나도 없다. 내가 처형당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담당관은 영원히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드디어 손에 든 명령서를 한 번 읽더니 마음을 정했다.
"좋아, 알았다. 먼저 최초의 명령을 실행하자."
우린 마당에 늘어섰다. 키 순서대로, 그리고 부상당한 토머스를 두 사람이 부축
하고서.
번호가 붙여져 23명 중 4명이 바다 쪽 벽으로 걸어가서 사살되었다. 나머지 사람
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번째, 3명이 벽을 뒤로 하고 죽었다.
그때 남은 16명 중의 하나가 큰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늘어선 줄 속에서 자
신의 위치를 헤아려본 것이다.
담당관은 제3의 처형 명령을 읽고 3명을 벽으로 걸어가게 했다. 나는 여전히 줄
의 마지막에 있었다.
네번째 명령으로 13명 중 2명이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처형을 명령받은 총 든
병사조차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지쳐 있었다. 태양은 이제 머리 꼭대기에 와
있었다. 한 번 더 수를 헤아려 처형이 끝나면 9명은 자유의 몸이 된다.
"잠깐!"
1번 사내가 번호를 붙이려 했을 때 담당관이 소리쳤다. 나는 공포로 몸을 떨며
앞쪽을 보았다. 토머스가 열 가운데서 쓰려져 옆구리에서 피를 솟고 있었다. 죽
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번호는 11에서 10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수를 세기 시작했고 나는 열번째에 서 있었다.
다섯번째 사내가 열에서 걸어나갔다. 그리고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거기 병신! 앞으로 나와!"
담당관이 말했다.
"네, 차례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데 대해 의아해할 것이다. 내
면밀한 계산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나의 죽음은 확실히 결정되었으니까. 그러나
죽음과 직면해 섰던 그 순간, 나는 전날 밤부터 오전까지 꾹 참고 있던 것을 처
음 실행에 옮겼다. 담당관이 다이암 장군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리라는 것을 조금
도 의심하지 않았다. <킬 에브리 핍스 맨> 그 말이 날 살린 것이다.
나는 베레모를 벗고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려,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을 중
명하였다.




상자
( THE BOX )
By - Isak Romun


스트론버그 밑에서 일하는 것은 상자 속에 갇혀 지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난 그렇게 느낀다. 상자 속에 갇혀 있고
스트론버그만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또하나의 열쇠를 발견했다. 스트론버그가 가지고 있
는 것처럼 확실히 상자 뚜껑을 열 수 있는 열쇠. 그놈이 자기 열쇠를 사용
하지 않으니 난 내 것을 써야 한다.
내 열쇠는 <죽음>이다.
일단 결심을 하자 그 결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난 신바람이 나서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스트론버그를 죽일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안 된다.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가장 안전한 법이다. 그러나 난
경험이 없었다.
물론 추리소설이야 읽고 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가공인물을 죽이는 방
법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가보다도 훨씬 잘 해치운 적도 여러 번 있
다.
그러나 차가운 종이 위의 이야기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진짜 인간은 다르다.
스트론버그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놈
은 물고기다. 이제 그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거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낚는다? 난 생각했다. 독살? 단서를 잡히기 쉽다. 자동
차로 치어 버리고 도망친다? 확실하지 않았다. 스트론버그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총? 소리가 나고 피가 흐른다. 게다가 이런 방법들은 모두 간단하지
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있는 재료와 정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계단에서 밀어뜨리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홉킨슨이 와서 2달러를 내라
고 했다. 왜냐고 물었다.
"스트론버그 송별회 때 써야지. 드디어 작자가 퇴직할 모양이야. 자넨 행운
아야. 스트론버그가 그러는데, 후임자는 자네밖에 없다고 하더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진짜일까?
진짜였다. 난 갑자기 상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또, 스트론버그를 죽일 필
요도 없어졌다.
그러자 이제 스트론버그가 인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자가 날 시험하고 훈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저 선량한 사내는 내게 호의를 가져주었던 것이다. 송별회에서 난 스트론버그
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5년이 지난 지금 난 과장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재
미 있지가 않다. 아니, 그 반대다. 관리직이 되자 책임이 무거워졌다. 그건 관
리직만이 져야 할 책임이다. 모두 일을 잘하고 있는지, 우리 과가 실적을 올리
고 있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도 있다. 난 생산을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
나 어떻게 생산을 한단 말인가? 하루 일과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옆에서 우
물거리기를 좋아하는 무능력자들을 데리고...
최악의 문제는 홉킨슨이다. 며칠 전에도 그자는 신경쓰이는 말을 했다. 내 밑
에서 일하는 건 마치 상자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이다.
조만간 인사과와 상담하여 퇴직문제를 고려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신의 은총
( THE GOOD LORD WILL PROVIDE )

BY - LAWLENCE TREAT

4월 3일

주디,
이곳에 온 지도 만 1년이 되었소. 당신 없이 살아온 지난 1년이 퍽 길게 느껴
지는구려. 1년 동안, 나는 고양이가 물을 피하듯 성가신 일은 멀리하고 얌전한
모범수로 지냈소. 내년 4월이면 가석방이 될 거라고 하니, 아이크 아저씨나 당
신은 모내기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참아주기 바라오. 다만 염
려되는 것은, 당신에게 소식이 두절된 것이오. 어찌 된 일인지 무척 궁금하오.
주디, 나는 차만 운전했을 뿐이지 다른 나쁜 짓은 안했소. 그놈들이 권총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한 흉계가 짜여져 있었다는 것도 몰랐소. 그저 바에
서 얼굴을 마주 대했을 뿐 아는 사이도 아니었소. 우연히 수다를 떨더가, 내가
자랑삼아 하트레이 지방에서 개조승용차의 레이서였다고 하고, 차로 벽을 이쪽
에서 올라가 저쪽으로 내리는 정도의 솜씨는 언제든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소.
그랬더니 그들은 그걸 보고 싶다고 했소.
그들은 나에게 다음날 자기들을 은행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올 때는 길이 없
는 뒷산을 차로 넘어주면 지금 당장 돈을 주겠다고 했소. 그래서 얼마를 줄 거
냐고 물었더니, 그 액수가 지금 갚아나가고 있는 은행융자 금액과 거의 맞먹는,
질겁을 할 정도의 액수였소. 나는 그들이 은행에 많은 돈을 저금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구좌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요.
그러니 나 같은 바보가 어디 또 있겠소? 하지만 운은 그리 나쁘지 않은가보오.
그들과 같이 있었다면 나도 죽었을 테니까. 하여간 나는 돈을 받고 그들을 마을
에서 산까지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킨 후 곧바로 당신에게 갔던 것이오.
아이크 아저씨는 라디오에서 뉴스를 들은 순간, 운전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안
듯했소. 그거야 경찰차보다 빨리 달리며, 잘 빠져나갈 수 있는 운전사는 나 말고
없었을 테니까. 나라면 멕시코까지도,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중국까지도 도망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들처럼 공항에서 당하면 끝장이지만, 그러나 나는 받은 돈
때문에 일을 끝마치고 집에 온 것이오.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그들이 5만 달러
를 훔쳤는지, 10만 달러를 훔쳤는지는 모르는 일이오. 나는 밖에 세워놓은 차에
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본 것이라곤 당신에게 준 그 돈뿐이었소. 아까도 말
했지만, 은행에서 훔친 돈이 아니라 그 전날 받은 것이었소.
보안관은 내게 훔친 돈이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쳤소. 하기야 은행강도는 죽었
고, 어디에서도 돈이 나오지 않으니 보안관으로선 의심할 곳이 나밖에 없었겠지.
약간 차를 잘 몬다고 이런 쓸모없는 짓을 한 바보스런 농부는 나밖에 없을 거요.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 있겠소? 당신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지.
당신이 없으니 쓸쓸해서 못 견디겠소. 면회는 언제 올 거요? 건강은? 또, 아이크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고 농사일은 어떤지 궁금하구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4월 10일

월트,
편지 받아 보았어요. 당신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것은 여비가 없어서예요. 그리
고, 지금은 무슨 일이든 저 혼자 해야 하니까요. 아이크 아저씨는 다시 류머티스
가 도저 누워 계세요. 손더스 선생님은 봄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돌아다니지 말라
고 했어요. 5월이 되어야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고 들들 볶아대요. 언젠가 조지가 새 차로 드라이브를 하자기에
잠깐 농장 밖에 나가 기분전환을 하려고 따라 나서는데 아저씨가 쫓아내려 했어요.
조지는 무척 친절하게 대해 준답니다. 당신이 없어 쓸쓸하지 않느냐고 묻기에,
도음이 필요해도 옆에 아이크 아저씨밖에 안 계셔서 쓸쓸하다고 했어요. 조지는
내 말을 조금 오해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알아듣게 설명했죠. 그후, 나는 조지에
게 융자금을 갚지 않으면 농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니 은행 차장인 당신이 편
의를 봐 달라고 했어요. 생각해 본다고 하더군요. 아직 아무 언질이 없지만, 그런
데 난 잠깐이라도 아이크 아저씨와 떨어져 있고 싶어요. 조지가 읍내 새 식당에
데려가서 식사를 시켜주었을 때는 정말 살 것 같더군요.
월트, 당신도 은행가였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드레이 무료 배달구 2호

4월 15일

주디,
당신이 수고하는 건 잘 알고 있소. 게다가 아이크 아저씨까지 보살펴야 하니 정
말 고생이 많구려. 아저씨는 기분이 좋을 때도 화를 잘 내시는데 몸이 불편하니
오죽하겠소. 아마 성인군자라도 참기 어려울 것이오. 그렇지만 주디, 참고 기다
리면 주님이 살펴주실 거요. 내가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오.
그리고 조지한테 부탁한 대출금 상환 지연건, 이런 문제는 종이에 써두는 것이
좋소. 또 혹시 조지를 만난다면 루시 왓킨스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물어보시오.
그 이야기는 여기 같이 있는 어니 테일러에게 들었소. 어니는 헌 편지를 사고 팔
았는데, 우리 집에 소 한 마리나 밀 한 부셀이 있으면 그걸 받고서 편지를 팔겠
다고 했소.
우리 두 사람은 이런 데 들어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었소. 그런 점에서도 어니
와 나는 마음이 잘 맞는다오. 그래서 어니는 조지가 왓킨스에게 보낸 편지 이야기
를 했소. 그러니 이번에 조지를 만난다면 꼭 그 이야기를 해보시오.

월트
주 형무소에서


4월 22일

월트,
조지가 또 식당에 데려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어요. 당신이 편지에
쓴 대로 루시 왓킨스 이야기도 했는데, 다음날 당장 은행에서 상환 연기를 허
가한다는 편지가 왔더군요. 그러나 이것도 소용 없어요. 왜냐하면 그 다음번
조지와 외출했을 때, 아이크 아저씨가 당나귀에 먹이를 주다가 이 사실을 엿
들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힘이 났는지 갑자기 트랙터를 타고 일을 하게 되었
는데 서쪽 큰 도랑에 빠져 버렸어요. 아이크 아저씨는 두세 군데 상처가 났지
만 트랙터는 엉망이 되었지요. 그러니 가을이 된들 무슨 수로 수확을 하며 빚
을 갚겠어요?
나는 이제 지쳤어요. 월트 지쳐서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군요. 주님이 살펴
주신다고 하였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시는거죠, 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드레이 무료 배달구 2호

4월 28일

주디,
전에도 말했지만 어떻게든 참아야 하오. 꾹 참고 있으면 반드시 주님이 살펴
주실 것이오. 꿈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밭에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 묻혀 있다고 하였소. 그러나 아이크 아저씨더러 류머티스 같은 건 털
어 버리라고 말해주오. 나머지 형기는 이제 1년이오. 형기가 끝나면 남쪽 밭
에 묻혀 있는 그것을 파내면 되니까 앞으로 무슨 걱정이 있겠소?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5월 4일
월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있었던 그대로를 쓰겠어요. 아시겠
지만 당신이 끌려가고부터는 아이크 아저씨는 법이라면 이를 갈지요. 그런데
어제 보안관이 부하 여섯 명을 데리고 들이닥쳤지 뭐예요. 화가 난 아이크 아저
씨는 그들을 쫓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와 온 방을 뒤졌지요. 그러나 권총은 내가
감춰놓아서 끝내 찾지 못하고 그냥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어대니까 그들이 잡
아 묶어 버렸어요. 그들과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몸이 풀려 아이크 아저씨는 건
강을 되찾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뭣 때문에 왔고, 무엇을 하려고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통 모르겠어요.
월트, 그들은 당신이 말한 남쪽 밭에 가서 하루종일 땅을 팠어요. 그리고 다음
날도 와서 밭 전체를 구석구석 파헤친 뒤,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화를 내며 투덜
거리더군요. 내가 하도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 있는 형무
소에서 왔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내게 보내는 편지를
검열하다가 남쪽 밭에 무엇이 묻혀 있다고 쓰여 있기에 그걸 찾으려고 파헤쳤다
는 거예요.
월트, 왜 당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군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드레이 무료 배달구 2호

5월 7일
주디,
자, 여보, 빨리 모내기를 시작하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The Bell)
By - Isak Romun


나는 비상계단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자가 매일 밤 이곳을 지나기 때문이
다. 대개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가 이 비상계단을 사용하는 까닭은
주차장에 한 대 남은 자기 차로 가는게 가까워서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자는 오늘 주차장에 가지 못한다.
계단은 가파르고 각이 져 있다. 게다가 딱딱한 금속제이니 말이다. 그자가 내
려올 때, 난 여기서 기다리다가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며 팔을 내뻗는 거다. 팔
이 그자를 계단 밑으로 곤두박질시켜 버린다. 그래도 죽지 않으면 머리를 계
단 모서리에 짓이기면 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보아도 사고다. 이런 가파른
계단을 급히 내려올 때 일어나기 쉬운 불행한 사고.
모든 것은 오늘 아침, 유딕 - 옛 스코틀랜드 고지인의 이름이라고 언젠가 자
신이 말했다. - 유딕 마크가 내 책상 앞에 와서 구부정하게 섰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 마크는 늘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해 그가 그렇게 서 있다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몇 분이 걸렸고, 또 죽을상이 되어 있음을 알아채기까지 다시
몇 분이 걸렸다.
"탈미지, 안 좋은 소식이 있다네."
"안 좋은 소식?"
나는 별로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크는 뭐든 부풀려 말하는 버룻이 있다.
"그래, 스트론버그가 지금 날 해고했다네."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고개가 번쩍 들려지고 공포의 그림자가 심장을 덮쳐
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였다.
내일은 바로 내 차례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그렇게 생
각해 왔다. 그래, 유딕 노인을 쫓아내는 건 날 쫓아 내는 것과 똑같다. 스트론
버그가 이런 식의 관리를 계속해 가는 이상, 도미노식으로 다음에는 누가 쓰러
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마크의 모습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보잘것없
는 풍모. 민틋한 어깨 위에 머리에는 성격을 새기는 판이 너무 약하게 눌러졌
든지, 아니면 판이 닿는 순간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고 만 듯한 희미한 윤곽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얼굴 주위에는 다람쥐 털 같은 것이 최신유행처럼
턱까지 자라있어, 다른 부분은 체제순응형 스타일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
였다.
마크의 이야기는, 그의 풍모가 늘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사는 점과 함께 나를
자극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소리쳤다.
"자넬 그만두라고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크! 자넨 우리 과에 꼭 있
어야 할 사람 아닌가? 그래, 정식통고라도 받았나?"
"이따가 보내겠다고 했어. 저 핑크색 종이쪽지 말이야. 그때 쇼크로 기절하
지 않게 먼저 방으로 불러 구두전달을 한 셈일세."
"오, 그렇다면 아직 괜찮군. 통고를 받기까지는 정식이 아니니까 말일세. 놈
이 그렇다면 하도록 내버려둘 건가, 마크? 어떻게든 해봐야 되잖아?"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마크는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는데 이미 불쌍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방으로 가서, 자네가 없어지면 일이 어떻게 될지 분명히 이야기
하라구. 정말이지, 자네 기술 없이 회사가 어떻게 될건가?"
"아니,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자기를 자랑하는 말은 난 못해."
마크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모를까, 제 스스로 말하는 걸 신용한다고 생각하나?"
"어쩔 수 없지, 그럼 내가 말해 주겠네."
내가 말했다. 물론 가까이 앉은 다른 사원들의 찬탄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가 가서 스트론버그에게 말하지. 걱정 말라구, 마크. 오늘 중으로 일을 처
리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바깥쪽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무언의 성원을 받으며 저 불
길한 녹색 문으로 걸어갔다. 문 맞은편에는 문보다 더 불길한 스트론버그가 앉
아 있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했다. 들어설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또,
사실 난 돌아섰다. 그러자 거기에는 희망에 부풀기 시작한 땅땅한 유딕 마크의
얼굴이 있었다. 난 결심했다. 용기를 떨쳐 다시 앞으로 나가 스트론버그의 비서
미스 프리스비의 항의를 무시하고 문을 세게 열었다. 그 순간 책상 위에 핑크
색 쪽지를 보던 스트론버그가,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이자는 회사 안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쪽지를 보니 아직
이름이 적혀져 있진 않았다. 절호의 찬스다! 나는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스
트론버그가 뭐라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스트론버그 씨, 당신의 그 해고용지는 회사에서 몇 안 되는 우수한 사원을 쫓
아내게 됩니다. 마크는 아주 유능한 자예요. 그를 그만두게 하는 것은 당신 오
른팔을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3일 지나면 입금전표가 일주일치나 쌓
여 버립니다. 그는 우리 과의 기둥이니까요."
나는 그런 식으로 과대선전을 계속했다. 스트론버그는 잠자코 웃기만 할 뿐 아
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내가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자, 스트론버그는
재빨리 나를 제지했다.
"이젠 됐네. 자넨 좋은 사람이군."
그리고 전화를 앞으로 당겨 사내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스 프리스비가 나오자, 스트론버그는 짖듯이 말했다.
"마크를 대줘!"
통화를 기다리는 사이, 스트론버그는 지그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이윽고 연
결이 된 모양이다.
"아, 자네인가? 오늘 아침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해줘. 그래, 해고는 하지 않겠
네. 알았나? 이제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게."
스트론버그는 수화기를 탁 놓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감격했다.
"결코 후회는 안하실 겁니다. 마크는 훌륭한 인재니까요. 여덟개를 주면 아홉
개를 가지고 오는 사내지요."
"여길 오다니 자네도 용기있는 사람일세."
스트론버그는 짤막히 대답하고 앞에 둔 해고용지에 뭔가 적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가? 불쌍한 마크가 잔혹한 농담거리가 되어 버렸나? 그러나 그게 아
니었다. 스트론버그는 지금 막 쓴 종이쪽지 사본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거기 쓰여진 건 바로 내 이름이 아닌가! 2주일 후 해고라는 통고. 내가 해고된
것이다! 나는 그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크나 자네 둘 중 하나를 택할 작정이었네."
스트론버그가 말했다.
"자네가 들어와 그놈 선전을 하기 전까지 마크를 해고할 셈이었지만 말야."
"그건... "
난 이야기할 힘도 없이 울고만 싶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죠."
"안 돼! 마크를 그만두게 하라고 설득한다면 모를까,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스트론버그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나는 동료들과 함께 해고를 면한 마크를 축하해주고 여러 사
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내가 대신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
았다. 모두 득의양양해 하는 축제 분위기를 나 때문에 망쳐 버릴 수는 없다. 하
물며 스트론버그의 자비를, 날 살리기 위해 거부해 달라고 할 수는 더 더욱 없었
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꾸미고 있었지만, 통로 저쪽에 툭 튀어나온 녹색 문에
눈이 가자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쇼킹하긴 하지
만 매우 만족할 만한 행동. 내가 이 비상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꺼림직하기 이루 말할 나위 없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일념이 날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아주 양심적으로 한 시간을 더 남
아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트론버그는 조금 전에 돌아갔으니 이 건물에 남아
있는 것은 마크와 나뿐이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 빌어먹을.





시험날
( EXAMINATION DAY )

- BY HENRY SLESAR


조던 부부는 아들 디키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시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디키의 열두 번째 생일에 조던 부인이 처음 그 얘기를 꺼냈다.
그녀의 걱정어린 말투에 대한 조던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일은 잊어버려. 우리 아이는 잘할 거야."
세 사람은 아침식사중이었다.
디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접시에서 고개를 들었다. 영리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디키는 이 갑작스러운 긴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생일이다. 그
가 바라는 것은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이 작은 아파트 어디에, 아름다운 포장
지와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인지 안
에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질 것이다.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다.
하지만 디키의 날아갈 듯한 기분도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과 아버지의 찌푸
린 얼굴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무슨 시험이예요?"
디키가 물었다.
어머니는 테이블보를 보았다.
"지능테스트 같은 거야. 열두 살이 되면 모두 그 시험을 치르도록 나라에서
정했어. 너도 그 시험을 봐야 한다. 그렇게 신경쓸건 없어."
"학교에서 보는 시험 같은 거예요?"
"비슷한 거다. 자, 만화라도 봐라, 디키."
아버지가 식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디키도 일어나서 그의 장소인 거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산처럼 쌓인 만화책
한 권을 집어들고, 통쾌한 모험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보는 디키의 눈은 공허
했다. 디키는 창가로 걸어가서 밖에 펼쳐진 안개를 힘없이 보았다.
"왜 오늘 비가 내리지? 왜 내일 오면 안 되는 거야?"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정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읽고 있었따.
"왜냐고? 비는 내일 때가 되면 내리는 거야. 그래야 풀이 자라지."
"왜 자라죠, 아버지?"
디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왜 풀은 녹색인가요?"
"나도 몰라!"
내뱉듯이 말한 아버지는 곧 자기 말투가 너무 날카로웠던 것을 후회했다.
그날 오후 다시 생일 축하가 있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화려한 선물 상자를
주었다. 아버지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키스하고 아버지와 여러 번 악수를 나눴다. 생일 케이크
를 자르고 축하는 끝났다.
한 시간 후 소년은 창가에 앉아 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태양은 얼마나 멀리 있나요?"
"5천 마일이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침식사때 디키는 또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시험과 관계가 있다고 안 것은 아버지가 갑자기 그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디키!"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테스트를 받으러 가야 한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
"걱정할 것 없다.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시험을 보니까. 네가 어느 정도
머리가 좋은지 나라에서 알고 싶은 거다. 디키, 단순히 그것뿐이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점수는 좋아요."
소년은 망설이며 말했다.
"이 테스트는 다르다. 이것은 특별 테스트야. 거기에 도착하면 우선 마실 것
을 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지. 그 방에는 기계들이 있고..."
"무엇을 마시는데요?"
"박하 맛이 나는 음료야. 그것을 마시면 네가 정직하게 문제에 대답하게 되는
거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거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야. 정확한 대답을 듣
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까."
디키의 얼굴에 희미한 공포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애매
하게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안심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물론이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착한 아이다, 디키. 틀림없이 잘할 거야. 돌아와서 파티를 열자."
"네."
디키가 힘없이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지정된 시간보다 5분 빠르게 국가교육부 건물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들은 4층
에서 내렸다.
404호실 앞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잘 닦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리스트의 1항목을 보고 조던 부자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방은 법정처럼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느껴졌다. 철제 테이블이 몇 개 있고
긴의자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아버지와 아이들이 있었다. 검은 머
리를 짧게 깎고 입술은 얇은 여자가 용지를 나눠줬다. 조던은 필요사항을 적어
놓고 용지를 사무원에게 돌려주었다.
"곧 시작한다. 이름을 부르거든 저 방으로 들어가거라."
아버지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피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한 소년이 마지못해 하며 아버지의 곁
을 떠나 천천히 문으로 가는 것이 디키의 눈에 보였다.
11시 5분, 조던의 이름이 불려졌다.
"잘해라, 디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테스트가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
디키는 문으로 걸어가서 손잡이를 돌렸다. 방안은 어두웠다. 회색 옷을 입은
담당자가 그를 안으로 오라고 했다.
"앉아라!"
남자는 책상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리처드 조던인가?"
"네."
"너는 분류번호 600-115다. 이것을 마셔라. 리처드."
남자는 책상 위에 있던 플라스틱 컵을 디키에게 주었다. 안에 액체는 버터밀크
처럼 진했지만, 아버지가 말한 박하 맛은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디키는 그것을
마시고 빈 컵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남자는 바쁘게 용지를 쓰고 있는 동안 디키는 졸음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
히 앉아 있었다. 담당자는 손목시계를 본 뒤 디키에게 다가왔다. 그는 안주머니
에서 펜과 비슷한 것을 꺼내어 그 작은 빛으로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자, 따라와, 리처드."
그는 디키를 방안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는 나무로 만든 팔걸이의자 두 개와 컴퓨터가 있고, 소년이 앉자 입 근
처에 마이크가 고정되었다.
"자, 마음을 편안히 해라, 리처드.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한다. 잘 생각해
라. 답을 알면 마이크에 대답을 해라. 그 다음은 기계가 알아서 한다."
"알겠습니다."
"너를 여기 혼자 두고 나간다. 마음속으로 준비가 되면 마이크에 대고 <시작
해>라고 말해라."
"네."
남자는 디키의 어깨를 두드리고 방에서 나갔다.
"시작해!"
디키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기계가 많은 불이 들어오자 작동이 시작됐다.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수열을 계속 말하시오. 1,4,5,10....."

조던 부부는 거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
속은 비어 있었다.
4시가 되자 전화가 울렸다.
부인이 손을 뻗었으나 남편이 더 빨랐다.
"조던 씨입니까?"
억양이 없는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여기는 국가교육부입니다. 당신 아들 리처드 조던, 분류번호 600-155의 시험이
끝났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아들의 지능지수는 법규 84조 5항에 정해진 수치를 넘
었습니다."
남편의 표정을 보고 부인이 울기 시작했다.
"아들의 유체 문제인데... 매장을 국가에 맡기겠습니까, 안수해 가겠습니까?
전화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국가에 맡기면 매장료는 10달러입니다."





두번 돌아온 길
( TWICE AROUND THE BLOCK )
By - LAWRENCE TREAT


밤 12시가 넘어 한 시가 가까워질 무렵, 서니 힐즈라는 작은 집들이 제법
규모 있게 들어선 신흥 주택지의 지하철역에서는 몇 명의 승객이 내렸다.
크고 건강하며 핸섬한 해리는 일부러 제일 늦게 개찰구를 나왔다.
그는 모자와 장갑 나이프를 옷 속에 감추고 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몸
에 지니고 다니며, 오늘 밤일지 아니면 2,3주 후가 될지 모르는 기회를 노
리고 있었다. 그 기회란, 경비원 앞을 눈치채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밤이
다.
계획을 세우고도 해리는 서두르지 않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
러 날을 더 기다렸다. 3년 간이나 메리를 참고 견디었는데 며칠 간을 더
못 참겠는가? 게다가 메리는 지금 백화점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어 매
주 급료봉투를 그에게 건네주고 있다.
메리는 저축액이 불어나는 것을 즐거워하며 얌전하게 급료를 내놓는다.
해리도 돈을 잘 벌지만 전부 써 버린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어느 정도 자
신이 있었지만, 옆집으로 벨마가 이사오자 전까지는 자신의 용모가 이토록
특별난 줄은 미처 몰랐었다.
벨마 같은 여자가 어째서 진력이 나도록 서로 닮은 작은 집들이 늘어선 서
니 힐즈로 들어왔는지 이상했다. 벨마는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한
듯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만난 첫순간부터 두 사람은 두 줄의 고압선이 부딪치듯 불꽃을 튕겼다. 그
리고 두 사람 모두 열렬해졌다. 첫번째 밀회 후 해리는 즉시 야간으로 근무
를 돌렸다. 그렇게 해서 하루종일 귀찮은 문제 없이 밀회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밤이 참기 힘들었다. 벌써 자
기 집은 낯설게 느껴졌으며, 점점 보기 싫어지고 필요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귀여운 작은 고양이."
어느 날, 그는 벨마에게 말했다.
"그 여자한테 무슨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어."
"그러지 말고 사고처럼 보이게 만들면 안 돼요?"
벨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런 짓을 하면 당신도 공범이야."
"그래서요?"
"어떻게 해서든 이혼을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되면 위자료로 돈이 들어가잖아요?"
"당신은 돈이 좋은 모양이지?"
해리가 말했다. 벨마의 검은 눈이 느리게 치켜지며 해리를 쏘아 보았다.
그 후부터 해리는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기회가 왔을 때의 대비책으로 필름
을 한 통 사서 집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지하철이 야간에는 15분 간격으로 다
니는 것도 조사해 놓았다.
오늘 밤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니, 운전석에 운전기사가
졸고 있는 택시가 한 대 있을 뿐 아무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
다.
해리는 차도를 건너 간 보도 블록 위를 걸으면서 지금껏 백 번이상 궁리해 온
것을 다시 검토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나이프에 손을 대보았다. 이것은 화
장실에서 주운 것으로 출처를 알 리 없으며 메리 이외에는 본 사람도 없었다.
경비초소에 가까워짐에 따라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경비초소 옆에
까지 다다르니 심장이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는 기회가 드디어 찾
아 온 것이다. 마이크 호건이 초소에 없다. 때는 왔다!
해리는 침착하게 발을 내딛어 서니 힐즈의 입구, 장식이 달린 문 건너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모자챙을 깊숙이 내려쓰고 코트 깃을 올렸다. 보도로
나와 집 가까이에 가서는 정면으로 뜰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사람이 보면 좀도
둑으로 알 것이다.
좋아, 얼간이들아. 주의깊게 보지 말고 슬쩍 보아라, 아주 슬쩍. 그리고 나중
에 경찰에다 수상한 남자가 몰래 뜰을 지나갔다고 말해다오.
자기 집에 있는 담장 모퉁이까지 가서는, 침착하게 뒤로 돌아 확인해 보았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소리를 죽이며 뛰기 시작했다. 이것저
것 잘되어 간다는 확신이 서자 흥분으로 소리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캄캄했다. 메리의 얼굴이 보인다면, 나
는 절대로 잔인한 인간이 아니라서 주저하고 기가 죽을 것이다. 그는 혼자 중얼
댔다.
<나는 현실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일 따름이다.>
칼을 꺼내서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울퉁불퉁한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팔을 한 번 구부려 보았다. 얼굴이 굳어졌다.
낯익은 복도를 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걸었다. 한 단 올라가서 오른쪽 문을 열
고 문 바로 안쪽에 있는 메리의 침대로 다가갔다.
정신없이 여러 차례 찔렀다. 제일 두려웠던 일이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
다. 그녀는 헉 하고 신음소리를 냈으나 눈은 뜨지 않았다.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왔다. 집을 한 바퀴 돈 후 침실 창 밑에서 멈추었다. 두
꺼운 장갑을 끼고 유리창을 쳤다. 쨍그랑 하고 소리가 났으나, 그것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창을 열어 놓아야지, 그렇게 하면 경찰 눈에는 틀림없이
도둑의 침입으로 보일 테니까.
시계를 보니 6분밖에 안 걸렸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계획을 잘 짰기 때
문이라고 생각하며 또 한번 자신을 가졌다.
다시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되돌아왔다. 이것도 계획의 하나였는데, 콘크리트 보
도를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뛰어감으로써 누군가의 눈에 보이기 위해서였다.
들판을 지나 쓰레기장으로 왔다. 거기서 장갑과 모자를 버렸다. 경찰이 의심할
경우를 대비해서 - 형식상의 조사 - 벨마의 아파트 열쇠를 어둠 속에 버렸다.
그리고 열쇠고리는 호주머니에 넣었다. 언제나 쓰던 모자를 바로 쓰고 빠른 걸
음으로 지하철 출구를 향해 걸어가서 가까운 신문 판매대 그늘진 곳으로 들어갔
다. 느리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
다.
빠뜨린 것이 하나도 없으니 실패는 없을 것이다. 벨마는 침묵을 지킬 이유가 충
분히 있으니 믿을 만하고, 만일 누설을 한다 해도 증거나 목격자가 없다. 더욱이
메리와 말다툼하는 것을 본 사람도 없으며, 그 칼도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아무
런 증거가 없다.
전철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승객이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여 잠시 그 자리
에 서 있다가 밝은 데로 나서며, 지금은 잠을 깬 아까 보았던 택시 기사에게 손
을 흔들면서 옆으로 지나갔다. 야간 경비원이 서 있는 초소로 향했다. 집에 돌아
가서 시체를 발견했을때 호건과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1개월 동안 하
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같은 시각에 초소 앞을 지나갔었다. 호건은 초소에서 나
와 해리에게 미소지었다.
"언제나 이 시간에 돌아오시는군요."
해리도 웃어 보였다.
"늘 그렇지요, 뭐. 참, 언젠가 말한 필름을 사다놓았는데 돈은 필요없고.... "
"너무 미안해서.... "
"지금 드릴 테니 같이 가시죠."
"고맙습니다."
호건은 해리와 나란히 걸으며 성능이 좋지 않은 자기 카메라를 불평하였으나, 해
리는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자기 집 담장을 돌 때, 해리는 열쇠를 꺼내어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와요, 침실에 두었으니 곧 가지고 올게요."
그는 열쇠구멍에서 열쇠를 찌르고 돌렸다. 그런데 도중에서 맞지 않아 다시 빼서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열쇠가 틀린 건가요?"
호건이 다정하게 물었다.
그때 안에서 문이 열리고 잠옷을 입은 메리가 나왔다.
"아, 잘됐어요. 당신이 이제 안심이에요."
해리는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벨마의 문과 똑같은 문에 몸을 지탱하며 믿을 수
가 없다는 듯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메리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소리에 눈을 떴는데, 옆집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내가 당했을지도 모르
니까요."



제 목 : 영화관 - 빌 크랜쇼우 ('89년 에드거상 수상작)

영화관 (Flicks)

빌 크렌쇼우
포킷 벨(휴대용 무선 호출기)로 호출받을 것도 없이 이 시간에는 경찰서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때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때 데빈 콜리는 마침 아파트로 돌아와 맥주 깡통을 따서 TV를 켜놓곤 벤치 위에
팔다리를 쭉 뻗고 있던 참이었다.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거리 맞은편에 있는 [매지스
틱]극장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비디오 녹화 스위치를 넣고 깡통맥주를 단숨
에 들이킨 다음 고양이의 물그릇을 갈아 주고 서둘러 샤워를 덮어 쓰고 나서 아파트
를 나섰다. 속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고도 남았다. 우선은 송장부터다. 그 다음에 단짝
인 레이 타스코가 껌을 짝짝하고 씹다 말고 재미있어 하고 있다고나 할까 놀라고 있
다고나 할까 하는 얼굴로 신문보도를 읽고 있을 것이 뻔하다. 날카로운 얼굴의 걸음
연장가방을 든 감식과의 매기 엡스는 현장 상황을 스케치한다든가 조그맣고 흐물흐
물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있든지 하고 있을 것이다. 카메라
를 터뜨리고 사파리 셔츠를 걸친 조 프랭크스는 늘 그렇듯이 능글능글 웃고 있을 것
이다. 그 친구는 노상 능글거리면서도 잔뜩 부어오르고 있는 사나이다. 녀석은 콜리
가 경찰서를 떠나 있었다느니 늑장부렸다느니 하는 잔소리를 늘어 놓을게 뻔하다.
콜리는 언제나 자리를 뜨고 지각하기 일쑤였다.
매지스틱 극장의 남자 화장실 안에는 두 사람의 정복 경찰관이 지켜 서있었다. 영
락없는 남자 화장실임을 가리켜 주는 파랑과 하양의 타일이 깔려 있고 소변, 축축한
냄새, 썩은듯한 구정물, 송진냄새가 물씬거렸다. 모로 쓰러져 있는 쓰레기통에서 똘
똘 뭉쳐진 누리끼리한 종이타월이 쏟아져 나와 있다. 물에 젖어 거무스름하게 물든
종이 중에는 붉게 얼룩진 것도 섞여 있다. 홈통 언저리 바닥에는 물이 쏟아져 몇 군
데인가 조그만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다. 타일 바닥에도 흐릿하게나마 피가 섞여있
다. 가까운 칸막이 안에서 누군가가 게워내고 있었다. 그걸 지키고 있는 경찰관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 콜리가 경찰관들에게 물었다.
"칼로 난도질한 사건입니다, 경위님." 나이 많은 쪽이 말했다. 분명히 스물 여섯
살이고 로페스인가 하는 이름이었다. 콜리는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로페스라고 적혀
있다. 어린 쪽은 시체를 바라보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쪽은 모르는 얼굴이었지
만 웬만해서는 파랗게 질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새파란 얼굴은 살인과 안에도 몇몇 있다. 이런 신출내기와 같은 질려서 칠면조 귓불
처럼 빛깔이 바랜 푸르뎅뎅한 얼굴도 있고, 이틀이나 지난 시체처럼 푸르죽죽한 얼
굴도 있다. 게다가 콜리처럼 닳아빠진 구리쇠처럼 푸른 얼굴도 있다.
"여기서 당했나 ?"
로페스는 머리를 홱 뒤쪽으로 돌렸다. "제 1 상영관에섭니다."
콜리는 칸막이쪽으로 다가섰다. 로페스가 곁을 따랐다. 푸르뎅뎅한 얼굴의 경찰관
은 수도꼭지쪽으로 가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저건 누군가 ?"
"자기 말로는 소매치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손지갑을 슬쩍했을 뿐이
고, 사람이 죽은 줄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쪽을 돌아다 본 소매치기 얼굴은 개기름이 배어 있고 머리카락이 머리에 바짝
눌어붙어 있었다. "몰랐었다구." 녀석은 애원조로 몸을 비틀거리면서 말했다. "정말
몰랐어요. 그건 피였어요, 흐흐흐, 빌어먹을. 피가 묻어 있었다구요. 이 손에....."
녀석은 다시 변기 위에 몸을 구부렸다.
"그 피 속에는 저녀석의 피도 섞여 있나 ?"
"아뇨,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지갑은 수도꼭지 위에 딸린 스테인리스 선반 위에 얹혀 있었다. 피로 얼룩진 손
가락 자국이 묻어 있다. 콜리는 쇠붙이 펜촉을 꺼내서 지갑을 후벼대며 열었다.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있었겠구먼 ?"
"그렇습니다." 얼굴을 닦고 있는 젊은 경찰관이 거울 속에 비친 콜리의 얼굴을 바
라보면서 대꾸했다.
"돈은 그대로 들어 있나 ? 크레딧 카드도 ?"
"예, 그렇습니다."
운전면허증에 적혀 있는 사나이는 쉰 다섯살, 비지니스맨 타입으로 눈에는 생기가
없고 턱이 처져 있다. 눈길은 카메라 렌즈보다 조금 위로 향해 있고, 관공서용 사진
을 찍을 셈으로 미소를 띄워야 할까 어떨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듯한 표정이다. 타일
론 오티스 뱃시, 조지아주 타코아 폴즈라고 적혀 있다.
소매치기가 콜리에게 설명했다. 저 뚱보영감은 나와 같은 줄 끝에서 졸고 있었어
요. 전에 매점에서 돈이 불룩하게 들어있는 지갑을 들고 있었고, 그걸 바지주머니가
아니라 웃저고리 안주머니에 챙기고 있는 걸 보았다구요. 영화가 끝날 무렵에 난 저
영감 곁에 다가가서 발이 채인 시늉을 하고 그자리에 넘어져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
하면서 지갑을 멋지게 빼냈다는 말씀입니다. 그길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지요. 카
드하고 현금만 빼내고 지갑은 버릴 참이었는데, 화장실에 들어가서 보니까 내 손은
피투성이고, 지갑이고 구두까지도 피투성이었어요. 그때 로비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
리길래 지갑을 버리고 손을 씻으려고 했지만 손이 온통 피투성이었어요. 볼수록 피
투성이었다구요. 그러고 있는 참에 누군가가 들어왔다가 이내 나가 버렸어요. 난 숨
으려고 생각했지요. 뭐가 뭔지 잘은 모르지만 어떻든, 이거 정말 야단났다, 그런 느
낌이 퍼뜩 들더란 말씀입니다.
"웩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가느다란 송진과 같은 물보라가 콜리의 안경에 점점이
튕겼다. 콜리는 화장지를 조그맣게 네모로 찢어내 렌즈를 훔쳐냈다. 그런 다음에 소
매치기를 절도와 살인용의로 체포하긴 했지만, 그 사나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아채고 있었다.
"피해자는 이리로 혼자서 걸어왔던가 ?"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로페스가 말했다.
"세일즈맨 대회에 참석하러 왔을까 ? 타스코는 와 있나 ? 타스코 경사는 알고 있
나 말이야 ?"
카메라를 목에서 늘어뜨린 조 프랭크스가 화장실 입구에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어렵쇼, 콜리. 자네가 이 사건을 맡을 참인가, 엉 ? 시체운반차가 기다리고 있
어. 뭘 찍어야 하는지 빨리 일러주게."
콜리는 능글맞게 웃었다. "뭐라니 ? 다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 ?"
"그래, 하지만 말해줘. 나중에 뭐가 모자라니 어쩌니 하고 이쪽 탓으로 둘러대면
골치 아프단 말이야. 여태까지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었지 ?"
"여긴 찍어 두었나 ?"
"그럼. 다 찍어두었어." 프랭크스가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발자국은 찍어뒀나 ?"
"여부가 있나. 발자국도 찍어두었어."
"타월하고 하수구 홈통은 ?"
"그래애. 타월, 하수구 홈통, 칸막이 속, 저 소매치기 녀석, 덤으로 그녀석의 게
워낸 것까지 클로즈업으로 찍어두었어. 그만하면 됐겠지 ?"
"됐어, 조." 콜리가 다시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자네는 내가 뭘 찍어주기를 바
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단 말이야."
"난 자네하고 같이 일하는 게 딱 질색이라구, 콜리." 프랭크스는 자신을 밀치고
밖으로 나서는 콜리에게 그렇게 쏘아댔다. 콜리는 따끔한 대꾸를 생각해 보았지만
골백번 말하지 않았던 말이 거의 없었기에 그저 그래 그래하고만 내뱉았다.
프랭크스가 이미 찍어놓은 카메라 앵글에 대해서 설명했다. 콜리는 새로 몇장인가
를 요구했다. 플래쉬가 번개처럼 시체를 비추었고, 괴로움에 뒤틀린 모습이 콜리의
망막에 박혀 들었다.
타스코가 들어와 수첩을 힐끗거리면서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콜리가 그에
게 소리쳤다. "레이, 거기에 있는 건 지배인인가 ?"
"제가 극장 경영자올시다." 타스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나이가 말했다.
"조금 더 밝게 할 수가 없나요 ?"
"이것도 최대한으로 밝게 한겁니다, 형사님. 아무려나 영화관이니까 말씀이지요."
콜리는 그제서야 몸을 되돌렸다. 프랭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T.O.뱃시는 통로 쪽의 등받이가 높직한 의자에서 왼쪽으로 몸을 기대고 고개를 떨
구어 눈을 뜬 채로 앉아있었다. 피는 넥타이 아래쪽을 고스란히 물들이고 시트에 떨
어져 스크린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손님들이 밟고 로비쪽으로 끌어들이고 있
었다.
"저건 찍어 두었나 ?" 콜리가 물었다. 프랭크스는 끄덕였다.
"아마 다들 콜라 흘린 물쯤 밟은 기분이었을걸."
콜리는 뱃시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상처가 잘 보이도록 머리
를 1, 2인치쯤 끌어올렸다.
"이만하면 보이겠나 ?"
"오우케이. 찍을까 ?"
"머리를 들어올려도 되겠어, 매기 ?"
"그건 괜찮지만요, 경위님의 우악스럽게 큰 발바닥으로 아무데나 밟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콜리는 뱃시의 뒤쪽에 서서 귀짬에 손을 대고 머리를 치켜 올리더니 그 얼굴을 정
면으로 바라보게 하고 턱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플래쉬가 터질때 그는 눈길을 돌렸
다.
"상처는 어떻게 생겼나 ?"
"모조리 잘려있어요. 경동맥, 경정맥, 기관, 다시 경동맥, 경정맥. 아주 날카로운
흉기같아요. 소리칠 겨를도 없었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아마, 한 손
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젖힌 다음 그것으로 단숨에 끝장냈을 것 같아."
"뒤쪽에서 말인가 ?" 콜리는 고개를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커브를 그렸을 겁니다. 화장실에 있는 사나이가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
"천만에, 아닐거야. 구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더란 말이야. 녀석은 앞에서
접근해 들어갔어. 뒤쪽에서가 아니고 말이지."
"지금으로서 알고 계시는 것은요 ?"
"골치가 아프다는 것 뿐이지."
매기가 싱긋 웃었다. "앞으로 더 아프실 걸요."
콜리가 웃음으로 되받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일이야."
콜리는 푸르뎅뎅한 얼굴의 젊은 경찰관에게 시체를 포대속에 넣는 일을 거들게 했
다. 그러노라면 시체에 익숙해지는 연습이 될 것이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익숙
해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체치고는 그다지 엉망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출내기
를 생각해서 그렇게 시킨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런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반시간쯤 모두가 나서서 흉기를 찾아 헤맸다. 콜리는 애초에 찾아낼 수 있을 것이
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흉기는 찾아낼 수 없었다.
콜리는 비디오 장치를 갖고 오게 일렀고 로페스와 신출나기 경찰에게는 다른 영화
를 돌리고 있는 상영관의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를 봉쇄시켰다. 관객들을 로비쪽으
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영화관 주인이 콜리를 곁으로 잡아 끌더니 항의했다. 콜리는 범인이 다른 상영관
으로 숨어 들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화관 주인은 [죽음의 춤]
마지막 상영이 남아 있다, 입장권 매상에 지장을 주는 것과 같은 시끄러운 일이 벌
어져서는 곤란하다, 나도 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피해자라는 따위로 사뭇 투
덜댔다. "난 이 거리에 아홉군데나 영화관을 갖고 있소."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매스컴에 발표하는 것은 삼가해 달라 이 말이
요. 알아 들으시겠소 ?" 콜리는 어떻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영화관 주인은 시비조가 돼서 이 거리에는 한다하는 친구가 몇사람쯤 있
다고 늘어 놓기 시작했다. "이 일을 당신네 상사한테 일러줘야겠어. 당신 이름
은......."
"콜리라고 합니다" 콜리는 그 자리를 떴다. "l과 y사이에 e가 끼어 있다구."
다른 영화도 끝나 관객들이 꾸역꾸역 로비쪽으로 나왔다. 콜리는 거리로 쏟아져
나가는 관객들을 비디오로 찍게 했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두 사람의 정복 경찰관에
게는 다른 상영관에서 흉기를 찾게 했다.
콜리는 현장을 타스코에게 맡기고 경찰서로 돌아와 프랭크스가 사진을 현상하고
있는 암실 곁에서 서성거리면서 기다렸다. 프랭크스는 시체에 매달리고 있는 따위는
재능 낭비라느니, 콜리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덮어놓고 많이 찍으라고 성가시게
몰아댄다느니, 사진을 뽑아 내라고 성화라느니 하는 따위의 투정을 잔뜩 늘어 놓았
다. 콜리는 그게 몸에서 배어 나오는 생트집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프
랭크스는 맥주가 석잔째로 들어가면 늘 웅변조가 돼서 카메라는 거짓말장이다, 사물
을 까발려낸다고는 하더라도 일그러진 형태다, 사진 따위는 허구다, 이렇게 한바탕
터뜨리시 일쑤였다. 콜리는 그런 투정이 이골이 나 있었고, 그 뒤로는 저마다의 사
진이 다른 사진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타협과 평균 속에서 현
실이 떠올라 오기를 바라면서 되도록 많은 사진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콜리는 그
런 과정을 두번 다시 되풀이시키지 않았다. 프랭크스는 투정을 부릴 때는 으례 부리
기 때문이다. 자금이 모이기만 한다면 이따위 일은 걷어치우고 사업을 시작하겠노라
고 프랭크스가 떠들 때도 마찬가지다.
혹시 모르지만 프랭크스에게는 정말 어떤 계획이 있을 것 같다. 그는 진짜 사진작
가가 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콜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프
랭크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밖에 몰랐다. 프랭크스의 콜리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
지인 것 같다. 그런 일은 서로 꺼내지 않기 때문이다.
콜리는 현상액에서 물이 흐르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경찰관 노릇을 하고 있나 ?"
프랭크스는 콜리에게서 사진을 빼앗아 들고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빨강 불 탓으로
프랭크스의 눈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마치 뻔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은 질문이군."
사진이 완성되자 콜리는 그것들을 책상으로 갖고 와서 작업을 할 수 있는데까지
해치웠다. 동쪽하늘이 환하게 밝아 올 무렵까지 그는 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에서 도너츠 가게에 들렸을 때 신문꽂이 스탠드에는 벌써 [뉴스]지 첫판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살인사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나와 있지 않았다.
콜리는 가끔 생각에 잠겨 본다. 인간관계건 무슨 일이건 가릴 바 없이 늘 그는 그
이상 더는 파고 들 수 없는 벽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뻔한 대응으로 되는
대로 다루는 대신에 뚜렷한 해답을 구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형
사 노릇을 그만 두고 보험 사기꾼 노릇이나 해 먹을까 하고도 생각한다. 나는 형사
직업을 싫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분명한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는 살인과 작업에 뭔가 본질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물의 본질
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는 뜻에서 본질적인 것이 있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현실적인
삶의 모습에 육박해 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간직한 이상에 보험 사기꾼 따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하지만 어떤 본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건 나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오지 않는다. 말로 드러낼 수
없는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콜리는 뼈가 흐물흐물해
지도록 지쳐 있었다.
아파트 출입문이 있는 계단 쪽마루는 어두컴컴했다. 둘째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아
넣었을 때 옆칸 출입문의 감시구멍이 컴컴해졌다. 아직 아침 5시 반밖에 안됐는데도
자네리는 벌써 일어나 서성거리고 있다. 콜리는 누가 서 있는지를 자네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자기 방에서 비쳐 나오는 네모진 불빛 속에 몇 초 동안만 서있어 주었다.
하기는 콜리쪽에서도 자네리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1층 우편함에 적혀 있는 이름
과 감시구멍에 와닿는 눈동자, 그리고 서성거리는 발소리와 TV 소리 외에는 아무것
도 몰랐다. 콜리네 고양이가 다가와서 구두에 배인 피냄새를 맡았다.
콜리는 신문과 프랭크스가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냄새가 짙은 고양이먹
이 깡통을 따서 우유와 함께 도너츠 몇 덩어리를 먹었다. 그 다음에 비디오를 되감
고 벤치에 드러누운 채로 전화로 호출 당했던 바람에 보지 못했던 프로그램을 지켜
보았다. 형사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의 형사들은 경찰서에서 형사이
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웃고 있었다. 드라마 속의 형사들은 사물의 줄
거리를 빈틈없이 맞추어낸다. 콜리는 첫 광고가 시작되기도 전에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다.

눈이 뜨였을 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 위에 고양이가 올라앉아 있었다. 고양
이 배밑으로 손을 넣고 내동댕이쳤다. 고양이는 공중제비를 팽그르르 돌다가 네 발
로 사뿐 바닥에 서더니 길게 드러누워 기지개를 켠 다음 발끝을 핥기 시작했다. 실
은 그놈은 콜리네 고양이랄 수가 없었다. 그 아파트로 이사왔을때 먼저 있었던 놈이
다. 또 코르크가 쳐져있는 벽에는 그보다 앞에 세들어 있던 방 주인들의 사진이 온
통 쳐발라져 있었다. 관리인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기가 귀찮았던 것 같다.
"언짢으시거든 버리시지요." "뭘, 괜찮소이다." 사진 속의 여자는 창백한 얼굴의 금
발이었다. 빛을 보지 못했던 여배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모델 ? 사진작가 ? 고양
이와 벽 가득히 제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은 도대체 어떤 부류의 인간일까 ? 사진은
케이스에 챙겨 어딘가에 간수해 놓고 있다. 코르크벽은 다트보드(화살촉던지기의 과
녁)로 삼는다든지 장보기 품목이나 전화번호 메모를 핀업하는 벽으로 쓰고 있다. 8
개월쯤 지났을 때에는 고양이하고도 친해졌지만, 그놈이 얼굴위에 올라 앉는데는 도
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의자에 드러누워 있을때 그짓을 하려드는 것
이다. 언젠가 한번은 창밖으로 거리에 내동댕이쳐버린 일까지 있었다. 콜리네 방은
4층에 있었는데, 네발로 땅바닥에 우뚝 설수 있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고 그때는 생
각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9시 반이었다. 하지만 잠에 들수 없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일하러 나서는 쪽이 낫다.
도중에서 도너츠와 커피 그리고 신문 둘째 판을 샀다. 큼직큼직하게 제목이 박혀
있었다. [공포영화속의 공포. 지난밤 매지스틱 극장에서는 스크린에 뿐만이 아니라
객석 통로에까지 피가 흘렀다...] 굉장한 제목이다. 신문에 걸려들기만 하면 인색한
소매치기나 조지아주 북부에서 건너온 세일즈맨 살해 이야기가 아니라 드라마틱한
살인사건이 돼버리는 것이다. 타스코는 주정뱅이든가 정신병자든가 아니면 마약중독
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내뱉을 것이다. 콜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기묘한
사건이다. 거기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는 도너츠 가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문을 경찰서 책상 위에 얹어 놓았을 때 시간은 벌써 11시가 넘고 있었다.
"우리집 애들도 이런 걸 좋아한다네." 타스코가 말했다.
"어떤 거 말인가 ?"
타스코는 제목을 가리켜 보았다. "이런 공포영화 말일세."
콜리는 신문을 들여다 보았다. 기사에는 사건에 관한 의문점이라든가 추측이라든
가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현장도면 따위가 초록색 붓펜으로 빡빡하게 그려져 있었
다. 콜리는 자신이 그런 메모를 적어 넣었던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먼 서장이 서장실로 오라는 시늉을
짓고 있었다.
"어이구, 이제 겨우 부르는군." 타스코가 말했다.
"많이 기다렸나 ?"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구."
"미안해." 콜리는 서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타스코도 어쩔수 없
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분통을 터뜨리지 말라구, 알아 들었나 ?" 타스코가 말했다.
서장은 방문을 닫고 콜리쪽을 돌아보았다.
"사건 수사상황은 어떤가 ?"
타스코가 콜리에게 눈을 주었다. 콜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서장이 물어뜯을듯이 무슨 말인가 늘어놓기 시작하자 타스코가 얼른 수첩을 펴 들
었다.
"가족이 유해를 확인. 피해자는 세일즈맨 대회 때문에 이 고장에 체재중. 해마다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음. 부인은 한번도 따라오지 않았고, 매점 아가씨가 그를 기
억하고 있음. 말버릇 곧 액센트가 이상했기 때문. 두 번 팝콘에 버터를 더 발라달라
고 부탁했고, 죄송하지만 투의 말씨를 썼음. 달리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음.
숙박처는 플라자 호텔. 싱글 룸에 들었고 함께 숙박한 사람은 없음. 대회에서는 출
석점검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모임에 나갔는지 시내관광을 다녔는지는 분명하지 않음"
타스코는 얼굴을 들어 껌을 짝 하고 소리내어 씹다 말고 콜리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합니다." 콜리가 입을 열었다. "악랄한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은 살인사건이지요. 이번 딱 한번 뿐일지도 모르겠고, 연속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서장은 일부러 짓는듯한 놀란 표정으로 눈썹을 치떴다.
"자네가 일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군." 콜리는 발의 중심을 옮겼다.
"정신이상자라구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레이 ?"
타스코는 어깨를 움츠렸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아직 그렇다고 단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약중독
자가 영화를 보다가 흥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서장은 콜리쪽으로 되돌아 보았다.
"범인이 뱃시라는 사람을 고른 까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콜리는 대회에 참석하러 왔던 뱃시의 행동을 속에 그려보았다. 거리의 군중속에
파묻힌 이름모를 인간이 돼서 더러운 말씨를 쓰는 것도 자유겠고, 그렇게 하고 싶으
면 밤 늦게까지 나다니는 것도 자유였을 뿐만 아니라 술집을 찾아 들어 여자와 노닥
거리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신다든가 굵직한 시가를 피워대는 것도 자유였을 것이
다. 아니, 그 친구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보러 갔을 뿐이다.
시골에 있었다면 살해당하는 일 같은 액운을 만나지도 않았을 인물이다.
"자리가 나빴습니다. 통로쪽은 출입구에 가까우니깐 말씀이지요."
"출입구에 가깝다구 ? 영화관이지 않아, 원 참. 사람이 들끓는 장소란 말이야. 많
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살인사건은 일어날 턱이 없어." 서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앞으로의 방침은 ?" 잠깐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콜리쪽보다 타스코쪽을 돌아보면서 서장이 다그친 것이다.
콜리는 대답하기에 앞서 타스코쪽에 눈을 주었다. 타스코에게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해놓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소매치기 녀석과 종업원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살인사건이 일어
났던 상영관의 관객 이름은 몇사람쯤 챙겨 놓았습니다. 신문사에서도 벌써 몇사람인
가를 점찍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비디오를 보여주고, 다른 상영관에서
나온 관객들 속에 기억이 있는 얼굴이 있는지 없는지를 들어볼 참입니다. 레이는 뱃
시의 행적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우리쪽이 모르고 있는 인간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말씀입니다."
"그게 괜찮겠지. 처리해야 될 일이 산더미같지만, 앞으로 사나흘동안은 이 사건에
전념해 주게나. 갱 관계도 조사해 보라구. 신참한테 시켜본 배짱 테스트였는지도 모
르니깐 말이지. 살인 청부업자의 짓이든지 마약중독자의 짓이라면 단발적인 사건이
라고 말할 수 있겠지."
"내 생각에는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콜리가 끼어들었다.
"또 일어나 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긴가 ? 그렇지 않으면 범인은 붙잡히지 않을 거
라는 이야기겠지 "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타스코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그렇고 콜리 ?" 서장이 서장실을 빠져나가고 있는 콜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일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야. 당분간은 그런 기세
나갈 건가 ?"

콜리와 타스코는 종업원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한 모아놓고 탐
문수사를 벌였다. 극장에 알고있는 얼굴은 없었는가, 뭔가 이상한 일을 목격하지 않
았는가,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을 목격한 일은 없었는가 따위
를 캐물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소매치기 녀석의 사진, 뱃시의 운전면허증, 다른
상영관의 관객들을 찍어 둔 비디오를 보이고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
콜리는 질문을 벌일 적마다 새로운 질문을 이제야 막 시작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
로 하려고 애를 썼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그저 건성으로 되풀이하고 듣고
있노라면 자칫하다간 무엇인가를 놓치기 일쑤인 것이다. 타스코는 늘 빈틈없이 질문
한다. 뭐랄까, 상투적으로 영원히 계속돼 나갈 것만 같은 단조로운 절차에 식상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바윗덩어리처럼 제자리에 틀어박혀 착착 일을 치러 나간다. 시
간낭비라든가 시시껄렁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이지, 왜 그런 짓
을 저지르는 녀석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망할 놈의 범인은 기어코 붙잡아야만 한
다구." 어쩌구 지껄이면서 일을 계속해 나간다. 타스코의 경우 사건의 의미 따위는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든지 하는 일이 없는 것이 도움이 되고 있다. 비아냥대며 그렇
게 지껄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콜리는 그와 같은 자질을 부럽게 느끼면서 때
로는 칭찬까지 해주고 있었다. 다시 일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나, 당분간은 이런 기세로 나갈건가 하고 말이다. 이런 일 따위를 왜 그만두어 버리
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고 때때로 그는 느끼고 있다.
그들은 매기에게 부탁해서 좌석표를 만들어내게 했고, 그 바닥판 무늬에 조그만
핀을 꽂아 나갔다. 빨간 핀은 뱃시, 노란 핀은 탐문수사를 벌였던 상대인 관객, 파
란 핀은 노란 핀에 해당하는 관객이 가로막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좌석이
다. 매스콤은 사건특집을 내서 시청률이나 판매부수를 늘여 나갔다. 그 덕에 많은
관객이 나서 주었다. 하기사 타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현장에 있었노라고 말해 온 사
람들 가운데는 그날 밤엔 화성에 있었다고나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핀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다만 그뿐이었다.
"뱃시의 주위 좌석은 거의 다 메워졌겠지 ?" 콜리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도 일행
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니까 말이야."
"이 고장 사람들치고 이웃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있는 녀석이 있겠나?"
"그건 그래. 하지만 뭔가 보고 있었을 게 아니냐 말이야. 그렇다면 영화라도 이야
기가 되겠지. 우리도 보아둘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두 사람은 경찰 뱃지를 내보이고 7시 상영시간에 들어갔다. 입장권 판매장 아가씨
는 '관객 수가 줄어든 걸요, 더구나 [죽음의 춤]은 말씀이지요' 라고 일러주었다. 타
스코는 팝콘을 고봉으로 한 케이스, 그리고 콜라 두병을 샀다. 그들은 줄 한복판 가
운데서도 한복판 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콜리가 어렸을 적에 본 공포영화는 칠흑과 같은 어둠과 불확실한 것, 그리고 정체
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로 잔뜩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었다. 살인자의 모습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고, 바깥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등골이 오싹한 소리는 바람
에 흔들리는 안테나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인지 아니면 거대한 큰 개가 웅얼대는
소리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둘 다라고도 말할 수 있고 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
고도 말할 수 없었고, 정말 안전한 것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아주 딴판이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면 다음에 희생되는 젊은이가 언제 괴물과 맞부딪치게 될지, 얼마나 잔혹하게 살해
당할 것인지 하는 일 뿐이었다. 새빨간 피가 튕기는 폭력 장면이 이어졌고, 줄거리
가 진행돼 감에 따라 점점 기묘하게, 그리고 그로테스크하게 비현실적으로 발전해갔
다. 콜리에게는 어린애 속임수로 여겨졌다. 하지만 관객한테는 그렇지만 않은 것 같
다. 경찰이라든가 의사가 아닌 바에는 살인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콜리는 관객을 잘 살피기 시작했다.
태반은 40대보다 어렸고 둘이 아니면 그룹으로 와있었다. 남자그룹은 스크린 가까
이나 벽쪽 구석자리를 잡고 있었고, 여자그룹은 한복판쯤에 자리잡고 앉아 뒤돌아본
다든가 두리번두리번 언저리를 돌아본다든지 하고 있다. 데이트하러 나온 패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몸을 어루만진다든가 남몰래 페팅을 나누고 있다. 부부는 부부다
운 간격을 지탱하고 있다. 모두 큰 소리로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크린에
살인귀가 희생자에게로 숨어 다가들자 관객들은 쥐죽은 듯이 영화장면에 눈길을 박
고 있었다. 이윽고 닥쳐 올 것이라고 알고 있던 클라이맥스가 질질 늦추어지자 콜리
는 몸이 굳어 긴장이 자꾸만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 닥쳐왔다. 살인장면
에서 관객들이 비명을 지른다. 희생자가 살해당하고 나자 모두들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이 조용해졌고, 이어서 신경질적인 웃음과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다가
스크린을 바라보고 또는 일행을 돌아보고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았다. 콜리는 소년
세명이 여자 어린이들이 앉아 있는 줄 뒤로 몰래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소년들이
여자 어린이들의 목에 손을 돌린다. 여자 어린이들이 꽥하고 소리치더니 팔딱 튕겨
일어난다. 소년들은 배꼽을 쥐고 웃음을 터뜨린다. 여자 어린이 한 명이 "에스터가
팬티를 적셨어 !"하고 소리치자 관객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스크린에서는 살인
귀가 다음 희생자에게로 다가서고 있다. 그 다음에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어떻게 생각하나 ?"
콜리는 로비로 나서자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다음 상영시간을 기다리느라
고 줄짓고 서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 잔뜩 겁먹게 될 것인지, 지루해질 것인지, 기
분이 으시시해질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콜리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느 것이든지 모두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스코는 여느 때나와 같이 멀쑥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한마디로 공포영화라구."
"괜찮은 축에 들기나 하는 건가 ?"
"글쎄, 우리집 애들한테 물어보기 전에는 뭐라고 할 수 없겠는데."
여름바람은 후덥지근한데다 배기가스마저 머금고 있었다.
"맥주라도 마시러 갈까 ?" 콜리가 물었다.
타스코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아냐,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구. 이블린이
시끄럽게 굴어서 말이야. 그럼 내일 다시 만나자구."
콜리는 더 한번 어디서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않겠느냐고 권해 볼까 하고 생각했
던 참이었지만 이미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들어버렸다. 예전에는 한주일에 한두번씩
맥주를 마시던 그였다. 타스코가 아내 이블린과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사뭇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고양이 낯짝만큼의 뜨락이 딸려 있는 그런 집에 30분 동안이
나 차를 몰고 서둘러 돌아가게 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그건 또 콜리가 정원과 풀이
딸려 있는 쾌적한 아파트에서 거리 맞은 편에 있는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오기 이전
의 일이기도 하다. 타스코는 콜리가 들어 살고 있는 지금의 아파트로 딱 한번 찾아
왔던 일이 있다. 언저리를 두리번거리고 껌을 짝 하고 소리내어 씹으며 놀란 것 같
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짓고 맥주를 다 털어 마신 다음에 돌
아갔다. 타스코가 왜 이리로 이사왔는지를 묻지 않았던 것만 해도 마음이 놓였다 콜
리 자신으로서도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난 다음에 콜리는 다른 상영관에서 나오는 관객들을 찍은
비디오를 다시 틀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카메라를 무시한 채로 딴청을 부린다든지
이쪽을 보지 않고 있는 척 하면서도 단짝을 슬며시 찔러댄다든지 계면쩍은 듯이 카
메라를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짓는 사람이 나타났고, 카메
라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표정을 짓는다든
지 새를 쏘는 시늉을 지어 보인다든가, "엄마, 보세요" 라고 소리친다든가 카메라로
곧장 다가와서 얼굴을 클로즈업 시키는가 하면, 렌즈 앞에 주먹이나 팝콘 케이스를
들이민다든가 손을 흔들어댄다든지, 용용 죽겠지 하는 시늉을 내보이는가 하면 춤을
춘다든가 스트립 쇼걸 흉내를 내는 축도 있었고,카메라를 멍청하게 바라본다든가 브
라운관 너머로 콜리에게 키스를 해온다든지 하는 등 갖가지 일이 벌어졌다. 세 군데
상영관의 관객들을 찍어 놓았는데, 어느 쪽도 대충 비슷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잠들기 앞서 콜리는 신문기사와 프랭크스가 찍은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다. 한복판
에는 뱃시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무더위 때문에 잠이 깼다. 자면서 땀을 흘렸고, 엉뚱한 쪽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시트에 쑤셔넣고 있었다. 실내조명용 작은 전등이 타원형의 노란 빛을 맞은 편 벽에
던지고 있고 방안 일부를 비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히 알
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흐리멍텅한 상태의 정신이 갑자기 흔들려 깨이는 것이 싫
었다. 서너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예전에는 언제나 실내 표시등을 내내 켜 놓고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요새처럼
반드시 다리에 예비 권총을 챙겨 넣는다든가 웃저고리 호주머니에 탄창을 둘씩이나
챙기고 있지도 않았다. TV 앞에서나 침대에서 존다든가 아파트에서 오랜 시간을 보
낸다든지 하는 일도 예전에는 없던 버릇이었다. 콜리는 이런 변화에 대해서 생각하
지 않도록 애썼다. 이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어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고 한잠 더자는 데는 늦은 때다.방안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무더워 견딜 수가 없다. 커피를 불에 얹고 지붕 위로 올라가 타르에 햇빛이
쏟아지기 앞서 강바람을 쐬고 고양이에게 비둘기를 쫓게 하는 것도 괜찮을성 싶다.
커피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동안 벤치에 기대앉아 벽에 발린 사진을 바라보았
다. 한복판에 있는 사진 속의 뱃시는 마치 영화를 보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머리를
들어올려 눈을 뜨고 앉아 있다. 목의 상처가 웃고 있는 것처럼 크게 입을 벌리고 있
다. 그것은 모노크롬의 죽음이다. 영화에 나오는 죽음과는 닮아 있지 않다. 현실의
죽음은 더......다른 것이다. 저도 모르게 어이없이 찾아드는 산문적인 것이고 사운
드트랙도 없다. 아니면 뱃시는 정말 죽어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것은 특수
효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사진속에서 콜리의 손이 뱃시의 머리를 귀 위짬에
서 받치고 있었다. 콜리는 반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문을 닫은 뒤 고양이가 계단을 오르자 자네리의 출입문 감시구멍이 어두워졌다.
콜리가 계단을 올라갔을때 쇠사슬 길이만큼 문이 열렸고 자네리가 틈서리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나무 문짝 가장자리에서 볼이 조금 불거져 나와 불룩해 있었다. 어
깨 너머로 엿보이는 방 안은 가지각색의 TV 불빛에 비치고 있었다.
"뭐하러 올라갔는지를 다 알고 있어, 젊은이." 자네리가 쉰 목소리를 짜냈다.
"깨워 드렸나요 ? 정말 죄송합니다." 콜리는 계단을 오르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른 여덟살은 자네리에게 젊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우리 안테나는 손대지 말아요. 굴뚝 곁에 있는 거야. 난 이제 벌써 7년동안이나
이 빌딩에 들어 살고 있어. 권리가 있다는 말이거든. 알아 들었나, 젊은이 ? 이번에
화면이 흐려 보이지 않게 된다면 경찰을 부르겠어." 문짝을 닫는 소리가 총소리처럼
계단을 타고 울려왔다.

콜리는 타스코보다 일찍 출근했다.
"호오 ?" 프랭크스가 커피 포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지각을 하지
않다니 ? 어쩐지 알만하구먼."
"알만하다니, 뭘 ?"
프랭크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지각쯤 가지고는 목이 잘리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그만두고 싶으면 사직서를 낼 수 밖에 없다는 말이겠지."
"그래 ? 누가 그만두고 싶어하고 있다는 건가 ?"
"그만두고 싶지 않은 녀석도 있나 ?"
타스코는 콜리가 지각해도 토를 달아 온 적이 한번도 없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
들어섰을때도 콜리가 일찍 나와 있다는 사실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살인과에 있
는 다른 형사들도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들은 오전 꼬박, 그리고 오후 태반을 강 기슭에 있는 창고에서 시간을 보냈다.
타스코, 콜리, 매기, 조 이렇게 빠짐없이 모두 나왔다. 클레오소트, 물고기, 개솔린
의 냄새가 났다. 조무라기 한 명이 배에 12게이지 탄 한방을 얻어맞은 것이다. 매기
말로는 총창의 퍼짐새로 보아서나 눌어붙은 화약상태로 보아서나 총신을 짧게 잘라
낸 총이 쓰였던 모양이다. 마약시장을 주름잡으려고 드는 신흥세력의 움직임에 따른
살인이겠지. 이런 투의 싸움판은 시체가 나뒹굴기 전에는 수습이 되지 않는다. 경찰
이 둘러 놓은 피케트 언저리에 사람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로페스와 그 신출나기
경찰관이 군중정리에 나섰다. 검시 보조원들은 뭐라고 독살스럽게 쏘아붙이면서 시
체를 날랐다. 신출내기도 오늘은 시체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경찰서로 돌아왔을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난 영화를 보러 가겠어." 콜리가 말했다. "저 소매치기 녀석을 데리고 가볼 참이
야. 자네도 따라 올 생각없나 ?"
"뭐하러 가겠다는 거야 ?"
"자네가 말한 것처럼 저 영화속의 뭔가가 범인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어. 영화를
보면 뭔가를 알게 될런지도 모르지."
"이 사건은 더 이상 어떻게 손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따라가겠단 말인가, 안가겠다는 말인가 ?"
타스코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매치기도 꺼렸다.
"내가 쓰는 선심이라구." 콜리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콜리는 뱃시가 앉았던 자리에 앉자 소매치기에게 그때 했던 그대로 되풀이해 보도
록 일렀다. 콜리 자신은 뱃시를 따라 팝콘과 그레이프 소다를 사들고 빈 케이스와
종이컵을 옆자리에 챙겨 놓은 다음, 눈구석자리에 보이는 소매치기의 모습을 보지
않도록 하면서 뒤쪽에 출입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호흡을 가다듬어 영화
에 정신을 쏟았다. 콜리는 어둠속이라든가 주위의 관객들이며 왼쪽에 있는 커다란
빈 통로가 사뭇 꺼림칙해서 견딜 수 없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에는 있는
대로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크린에서는 이
제 겨우 살인귀가 마지막 생존자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효과음악이 쇳소리를 튕겨냈
다. 콜리는 왼쪽으로 몸을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 어린이는 살인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아슬아슬한 순간
에 구조됐다. 구조하러 온 사람들은 살인귀를 죽였고 여자 어린이를 간호했다. 하지
만 살인귀는 죽지 않았고, 나중에야 그가 달아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콜리는
소매치기가 자기 앞에서 넘어지는 것을 느꼈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
었다. 웃저고리에서 돈지갑이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으례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콜리는 관객들이 킬킬 웃기도 하고 투덜대
기도 하면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의자 위에 맥을 잃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청소
부가 걱정스럽게 몸을 흔들며 일어나 달라고 말했다.
남자 화장실을 들여다 보았더니 소매치기가 게워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당분간 형편을 지켜보기로 하겠어." 서장이 말했다. "강기슭의 사건에
매달리도록 하게."
타스코는 껌을 짝 하고 소리내어 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콜리는 입을 다문채로다.
"무슨 문제가 있나, 데빈 ?" "조금 더 이 사건을 쫓고 싶은데요."
"왜지 ? 새로운 실마리나 뭔가를 잡았다는 말인가 ?"
콜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내 지시대로 따르게. 알아 들었나 ?"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엊저녁에 뭔가 잡았나 ?" 타스코가 물었다.
콜리는 어깨를 움추렸다. 그리고 그 뭔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만지면
손어림이 감직한 어둠을 되새겼다. 앉아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찬 공기가
으슬으슬 허파로 밀고 들어와 숨을 뱉아낼 수 없게 된 것처럼 갑갑해졌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돌아버리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나중에
화장실 칸막이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거들어 주었을때 소매치기가 보인 반응에 콜
리는 당혹했고 서투른 짓을 했다고 뉘우쳤다. 소매치기는 팔꿈치로 콜리의 손을 뿌
리쳤고 콜리가 셔츠 주머니에 넣어 둔 20달러짜리 지폐를 두 쪽으로 찢어발겨버렸던
것이다. 피투성이의 손을 생각했던지, 그는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뾰족한 것을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라고 콜리가 입을 열었다. "짐작대로
뱃시는 영화상영 마지막 부분쯤에서 살해당했던 게 틀림없어."
"이상한 일이잖은가 ? 스크린에서 그런 영화가 비치고 있는 판국에, 객석 속에서
어디에 있는 어느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나이프로 남의 목을 그어대다니 말이야."
"그래, 정말 이상한 일이지."
그날밤도 콜리는 영화관에 갔다. 이번에는 대학 부근에서 상영되고 있는 떠들썩한
영화였다. 통로쪽에 있는 가장 뒷자리에서 벽을 등지고 앉았다. 영화는 지난번에 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받아들여지는 느낌도 리듬도 희생자도 새빨간 피범벅도 엇비
슷했다. 관객들은 훨씬 젊고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에 가까왔다. 게다가 지난번보다
더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저 그만그만 비슷해서 스크린에 대고 외치고 투덜거린다든
지, 농지거리를 터뜨리고 엉뚱한 대목에서 웃는다든지, 관객끼리 겁을 주러 들고 하
는 따위로 기묘하고 어딘가 빗나간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은 영화뿐만 아니
라 관객마저도 즐기러 오고 있는 것이었다. 한 집단에 참여하러 온 셈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또 다른 영화관으로 갔다. 맨 뒷줄에 있는 통로쪽 자리에서 벽을
등지고 왜 이런 장소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가를 잊지 않으려고 호주머니속의 탄창
을 만지작거리면서 콜리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 콜리는 사람 그림자가 일어서서 통로쪽으로 다가섰다가 그 자
리에서 우뚝 멎는 것을 보았다. 그 그림자가 왼손을 뻗어 누군가의 머리를 세차게
끌어 당겼을때, 콜리는 온몸이 얼어 굳어버렸다. 비명이 터져 나왔고, 오른손이 턱
밑을 가로 질렀다. 사람 그림자는 몸을 홱 되돌려 통로를 냅다 뛰어 출구쪽으로, 바
로 콜리쪽으로 내달려왔다. 죽였어 ! 콜리는 긴장한 나머지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
았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가만히 있어야 해. 그림자가 바로 곁에 닥쳐왔을 때
콜리는 한발을 불쑥 내밀었다. 사나이는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콜리는 사나이를 타
고 앉아 한쪽 팔꿈치로 그 등을 찍어 누르고 오른쪽 귀 뒤에는 권총을 들이댔다. 그
리고 구급차를 부르라고 소리쳤고, 사나이에겐 손을 벌리라고 명령했다. 어물어물
늑장부리고 있는 사나이의 손등에 콜리는 총개머리를 한방 먹였다. 손가락이 벌려졌
다. 카페트 위에 번뜩이는 물건이 굴러 떨어졌다. 콜리는 2,3초동안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입술 연지였다.
"저어...... 그냥 장난삼아 놀아 보았을 뿐이었는데요."
머리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콜리가 올려다 보았다. 목소리 주인공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목에 칠해진 새빨간 립스틱 줄을 가리켰다.
"그냥 해본 장난이라구요."
콜리는 두 사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경찰서로 연행했다. 호락호락하게는 다루
지 않았다.

신문은 이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갈겨댔다. 어느 신문은 [비번형사, 립스틱 사나
이를 붙잡다]는 제목을 달았다. 콜리는 이런 기사들도 코르크벽에 붙였다.
사무실에서도 놀림감이 됐다. 부상은 입지 않았던가 ? 립스틱 자취는 지워졌나 ?
다음엔 [무고한 사나이]를 조심하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약과였다.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은 립스틱 사나이와 그 피해자격 사나이의 지껄여댐
이었다. 콜리는 이 충격을 타스코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콜리
는 두 사람을 단단히 반성시켜 줄 참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주눅
들기는 커녕 경찰서로 오는 도중에도 내내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너. 진짜로 당했다고 생각했었지 ?" 립스틱 사나이가 입을 놀렸다.
"이젠 죽었다고 생각했다구. 그 순간, 아 이것으로 끝장이라고 말이야." 희생자격
사나이가 그렇게 지껄이더니 뒤통수를 시트에 털썩 내맡겼다. 그때 일행이 타고 가
는 차가 가로등 밑을 지나쳤고, 희생자격인 사나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검
게 변했다. "으으윽 !"
"시끄러 !" 콜리가 물어뜯듯이 호통쳤다. "입다물고 앉아 있어."
그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얼굴을 맞대고 킬킬 웃어댔다.
"연극삼아 놀아 보았겠지."
"그런 척 한게 아니었어. 그렇게도 보였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구. 저 희생자격
사나이는...... 진짜 살인귀라고 생각했었대. 녀석은 사색이 돼서 벌벌 떨었다는 거
야, 레이. 게다가 나중에는 그걸 기뻐하고 있더란 말이야."
타스코는 어깨를 움츠렸다. "헐값에 목숨을 내맡길 놈이지. 그런 오싹한 맛을 좋
아하는지도 몰라. 아니면 영화 주인공쯤 되는 기분일까 ? 영화스타가 될 수 있다는
속셈이겠지. 요새는 누구나 영화스타가 되고 싶어한단 말이야. 워크맨을 머리에 달
고 있기만 하면 녀석의 생활이 영화가 되고도 남겠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단 말이야." 콜리는 의자에 죽
치고 앉은 채로 뒤로 몸을 젖혔다. "오늘 밤도 영화를 보러 갈 참이야.같이 가겠어?"
타스코는 1,2초동안 콜리를 바라보았다. "근무시간 외에도 해나가겠다는 건가, 이
사건을 ?" "가겠어, 안 가겠어 ?"
"지금은 강기슭 사건이 우선이야, 알고 있지 ? 이 사건에는 손대지 않겠어. 이건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말이야." 타스코는 약간 뜸을 들였다. "알고 있지 ?"
콜리는 몸을 앞으로 일으켰다.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
"무슨 뜻이고 뭐고 있나,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난 다만 영화관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을 뿐이라구."
"소리치지 말게. 빌어먹을 ! 요 반년동안 자네는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어. 난
좀비하고 단짝인 느낌이 들었었다구."
"나는 일을 하고 있어. 일도 하지 않고 건들거리고만 있다고 날 비난하는 건 용서
할 수 없어."
"......그러다가 갑자기 시간외 근무까지 하기 시작하다니. 난 자네 단짝이야. 그
러니까, 자네가 어떻게 된 거라도 아닌가 알고 싶을 뿐이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구." 콜리는 심드렁하게 털어 놓았다.
"그래 ?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저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야."
콜리는 일어서서 형사실 방안을 가로질러 커피를 따르러 갔다가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한모금 입에 대더니 "앗 뜨거 !"하고 소리질렀다.
"그랬던가 ? 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가겠어 ?"
타스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구."
정말 바쁜 하루였다. 그래도 콜리는 마제스틱 극장의 9시 상영시간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매표장 아가씨는 경찰 뱃지만으로 통과시켜주면서 좌석은 만원인 걸요, 정
말 꽉 찼어요라고 말했다. 로비는 형편없이 붐비고 있었다. 매점 안의 비디오 게임
에는 두 사람씩 사람이 몰려들어 누군가가 스크린에서 무엇인가를 격추시키고 폭발
음을 냈을 적마다 와아 ! 하고 술렁거렸다. 극장은 뒷자리도 통로쪽에도 빈 자리가
없었다. 콜리는 양쪽 손님 사이에 자리잡아 앉을 수밖에 없었다. 상영중에 관객들은
여느때 보다도 바짝 긴장해 있었고 모두 눈을 크게 떠서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
졌다. 자신의 팔다리가 여느때 보다도 굳어져 있는 것을 알아챘을 때 콜리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다.
립스틱 사나이의 장난 소식은 [발 없는 말 천리 간다]는 말대로 잽싸게 퍼지고 있
었다. 밤마다 콜리는 한두명의 립스틱 사나이를 만났고 그때마다 공무집행상의 질문
을 했다. 콜리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도 그럴 것이 관객의 머리가 홱 젖혀지고 비명
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사람 그림자가 좌석에서 튕겨 나와 통로를 냅다 뛰기 시작했
을 때만 하더라도 그 짓이 장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달려 나가는 사
나이의 손에는 면도칼이 쥐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게임은 벅찬 것이 되어갔다. 팀을
짜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립스틱 사나이 패거리와 희생자격 패거리로 나
뉘는가 하면 서로 역할을 맞바꾸어 소동을 피우다가, 휴식시간에 로비에서 득점을
집계하는 판국인 것이다. 패거리 이외의 관객을 노리는 적도 있다. 처음 얼마동안
콜리는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제풀에 지쳐
귀찮아지고 말았다. 홍백팀으로 갈린 얼치기들 때문에 시간낭비를 일삼고 부상까지
입는 모험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 주일 동안은 밤마다 영화관에 다녔다. 갈 적마다
관객수가 늘어났고 그의 경계심과 긴장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 바람에 극장을 나섰
을 때의 피로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위궤양이 재발했고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됐다.

금요일 밤, 영화가 끝날 무렵에 콜리의 포킷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마구
소리치고 튕겨 일어나는가 하면 자리에 엎드리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차분한 분위
기가 그들을 감쌌고, 모두 제 정신을 차려 자리에 고쳐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뭐야 ?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고 영화 따위는 어떻게 돌아가든 아랑곳없
이 웅성웅성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로비에서 전화를 걸었다. [애스트로]극장의 마지막 상영이 끝난 뒤 시체가 발견됐
다. 목이 그어져 있었다는 통지였다.
콜리는 야릇한 기쁨을 느꼈다.

"어떤 바보녀석이 흉내를 낸 것일까 ?" 이튿날 타스코가 하품을 뱉으면서 말했다.
콜리는 졸리지 않았다. "아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바로 그놈이야."
"지난번 사건이 신문에 상세히 나왔으니깐 말이거든."
"똑같은 놈이라구, 레이."
"알았어, 알았어." 타스코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똑같은 녀석이야."
다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신문을 벌이고 관객 리스트를 끌어모으고 파랑과
노랑의 핀을 꽂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타스코의 질문은
관객에게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아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콜리는 왜 영화관에 갔는지, 떠들썩한 영화는 자주 보러가는지, 립스틱
사나이 게임을 놀아본 적이 있는지 따위를 물었다. 질문 받은 쪽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하는 심경이 돼서 때로는 화를 벌
컥 냈고, 대답을 아예 타스코 쪽에다 대고 하기도 했다. 타스코는 생글생글거리고
껌을 짝 하고 소리내어 씹기도 하면서 진술을 받아 적었다.
콜리는 새로운 사진과 신문기사, 사설, 영화광고 따위를 코르크벽에 붙여 놓았다.
갖가지 사람들이 립스틱 사나이의 장난을 호되게 비난했고, 영화관은 떠들썩한 영화
의 상영을 중지하라든가 극장을 완전히 폐쇄시키라고 들고 나왔다. 마제스틱 극장주
인은 신문에 사설을 투고해서 단 한사람의 이상자 때문에 속박당해도 좋은 일인가,
밤의 괴물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무비올라 극장에서는 무장경
비원을 상주시킨다는 광고를 냈다. 마제스틱 극장은 당신은 밤늦은 상영시간에 찾아
올 용기가 있는가라고 도발적인 광고를 내걸었다. 요새들어 도무지 켜 본 일이 없는
TV의 뒤쪽 코르크벽에는 주말까지 어지럽도록 숱한 사진과 스크랩이 나붙게 됐다.
이제는 타스코도 같이 영화관에 나서게 됐다. 어느 극장 매표창구에도 장사진이
늘어섰고 장사진의 길이는 밤마다 늘어나기만 했다. 무비올라 극장에서는 광고애 선
전한 경비원이 로비나 통로를 누비고 있었다. 마제스틱 극장에서는 공항용 금속탐지
기를 입구에 설치했다. 애스트로 극장에서는 손님에게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입장객
은 신경질적으로 비웃었고 캐그니라든가 보가드 투의 욕지거리를 쏘아댔다. 경비원
은 립스틱을 발견하기만 하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면서 면허를 갖고 있느냐, 단순한
호신용이냐, 아니면 매니아냐, 혹시 FBI냐 하고 따져 물었다. 모두 사뭇 싱글거리고
있었다. 매표장 아가씨는 저런 패거리한텐 두 손 다 들었는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들어간다구." 콜리가 말했다.
콜리와 타스코는 맨 뒷줄의 양쪽 끝에 있는 통로 곁 자리에 벽을 등지고 앉았다.
두사람은 옷깃에 마이크와 이어폰을 달고 있었다. 립스틱으로 장난을 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기는 했지만, 관객은 사뭇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콜리는 몸이
바싹 죄이고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극장 안 구석구석에까지 눈길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가 끝나 지칠대로 지친 몸을 아파트의 벤치에 털썩 내맡긴 콜리는 문득 정신
이 들어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T.O.뱃시가 통로쪽 좌석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콜리의 손이 그 머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무엇 하나 알 수 없
다고 느꼈다.

콜리는 전기면도기 스위치를 끄고 라디오를 켰다. 이른 아침의 프로그램을 담당하
고 있는 디스크재키가 살인광에 관해서 정신과 의사와 인터뷰하고 있었다. 으례 의
사는 전형적인 성격 이상자를 내세울 것이 뻔한 일이다. 차분하고 예의바른 청년,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청년, 섹스를 억제하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 청년.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놀란 끝에 참으로 참한 젊은이었다, 이거 정말 믿을 수 없다
는 따위로 말할 것이다. 콜리는 정신과 의사가 말한 내용을 수첩에 적어 놓았고 나
중에 타스코에게 말해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의사가 말한 것은 이렇다네. 차분하고 내성적인 사람, 성적인 욕구와 표현을
억제하고 있는 사나이로서, 때로는 격렬한 감정의 고조를 경험했고, 아마 영화의 클
라이맥스로 오르가즘에 이르러 살인을 저질렀을 거라는 거야. 이렇게 해서 긴장에서
느슨해지고, 감정이 느슨해짐에 따라 생명력의 흐름이 해방돼서 만족을 맛본다고 말
이지." 콜리는 수첩을 접어 넣었다.
"그게 뭐야 ?" 타스코가 내뱉았다. "돼먹지 않았어. 아무 의미도 없는 말뿐이야.
그게 누구야 ?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여대고 돈을 받아 챙기는 녀석은 ? 아무것도 모
르고 있어."
"나는 그 사나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 콜리가 말했다. "곁에 앉아 이
야기를 듣고 싶은 느낌이 들어. 한잔 사주고 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지르는가를 듣
고 싶다네."
"문제의 이상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가 ?" 타스코는 곁눈질로 콜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 살인광 이야기지." 타스코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친구는 뭔가를 알고 있어."
타스코는 다시 배알이 꼴리는 얼굴이 됐다. "뭘 알고 있다는 말인가 ? 도대체 무
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
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구체
적으로 꼬집어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범인을 붙잡고 만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도대체 왜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가 ?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사실 확인보다, 어떻게 해서 사람들에게 목이 잘리는 위
험을 무릅쓰기까지 하면서 마치 복권을 사러 오기나 하듯이 줄을 짓게 할 수 있는지
를 콜리는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낼 수만 있으면 왜 콜리가 거리로 뛰쳐 나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지, 왜 이런 고장에 머무르고 있는지, 왜 근무시간 이외까지 일
을 하고 있는지, 왜 타르와 벽돌에 에워싸린 갑갑한 아파트에서 빠져 나오고 있지
않는지, 도대체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갖고 있는지 하는 따위의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인생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어." 한참만에야 콜리가 이렇게 입을 열
었다. 타스코는 파리라도 쫓듯이 손을 흔들었다. "알기는 뭘 안다는거야. 놈은 단
순한 이상자......" "아니야, 레이. 이상자라면 우리가 신물이 나도록 숱하게 보아
왔어. 이상자는 이번 경우와 같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의 목을 그어대지는 않아."
천천히 두 사람의 목소리는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해낼지도 모른다구. 그놈은 해낼수 있는지 어떤지 시험하고 있는 거야. 이런 일
도 생각해 보았나 ? 관객들 눈앞에서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에 짜릿한 맛을
즐기고 있는 거지. 아마 그 뿐일 거야."
"그래, 그 뿐이라고 치자. 하지만 영화를 보러 오는 패거리는 녀석이 거기에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도 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거든. 왜지 ? 왜 그러고들 있
는거지 ?"
"어떻든 이대로 영화관에 다니고만 있을 수는 없어, 데빈. 우리한테도 생활이라는
것이 있어." "범행현장을 덮치지 않고는 녀석을 붙잡는다는 게 무리야."
"바보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게. 범행현장을 덮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야. 정
말 얼간이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군." "함부로 말하지 마, 경사."
"쳇, 그만두자구. 빌어먹을 !"
두 사람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면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난 범인을 붙잡고 싶을 뿐이야." "그래, 알고 있어."
타스코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하고 애들 얼굴을
고 싶다구. 그리고 야구 게임도 말이지." 타스코는 다시 콜리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오늘 밤에도 나설 참이야 ? 어쩔건가 ?"

두 사람은 그날밤도 나섰다. 이튿날 밤도, 그 다음날 밤에도. 뒤쪽 출구를 양쪽
다 확보하려고 늘 맨 뒷줄 양쪽 통로곁에 죽치고 앉았다. 타스코는 언제나 영화를
한번만 보고 돌아갔지만, 콜리는 마지막까지 지켜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타스코
가 반대쪽에 앉아 있으면서 기침을 해댄다든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차라
리 속이 편했다. 타스코는 가끔 졸기라도 했지만, 콜리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콜리는 자리에 단단히 도사려 앉아 있었다.
타스코가 돌아가고 없자 콜리는 무방비 상태로 통로에 내팽겨쳐져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칸 안쪽 자리로 옮겨 통로 바로 곁자리에는 레인코트를 덮어 두
고 아무도 앉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9시 상영시간은 대개 만원이어서 모든 객석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 레인코트쪽으로 밀어닥칠 것만 같았다.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한덩이리가 돼서 암흑 속에서 영화쪽을 보고만 있고, 그 속에서 면도날을 가진 사나
이가 숨어 있으면서 혹 몰라도 그를 불러들이며 기다리고 찾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도 느껴졌다. 닷새 동안이나 영화관에 다니고 있으려니까 콜리는 체력이 다 소
모되고 신경이 닳아버렸다.
"이번에는 영사실에 앉아서 지켜볼 참이야." 콜리는 타스코에게 말했다. "그쪽이
더 잘 보일 테니까 말이야." 타스코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끝
장내는 거야, 알겠나 ?" "글쎄,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구." "그래야만 해, 데빈."
영사실로 들어온 콜리는 두꺼운 유리판 너머로 높은 자리에서 거리를 두고 훨씬
넓은 시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영화가 시작되는 것을 기다리
는 관객들 가운데 누군가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이쪽을 바라볼 적마다 자신이 그 눈
에 두드러져 보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사기사는 자동장치로 객석 라
이트를 조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다른 것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일렀다.
영사기는 거대한 경기관총처럼 보였고 유리판에 고무테이프로 테두리쳐진 네모진 구
멍을 통해서 스크린을 겨냥하고 있었다. 콜리는 더 정교한 장치를 예상하고 있었다.
카스코는 영사실 바로 밑의 보이지 않는, 왼쪽 통로 곁의 맨 뒷줄 자리에 벽을 등
지고 앉아 있었다. 타스코의 옷깃에 달린 마이크가 흡수해 들인 관객들의 웅성거림
과 쇳소리의 웃음이며 본디 데리고 와서는 안되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콜리는 넥타이로 안경을 훔쳤다. 몇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기
에 있고, 그 누구도 범인일 수가 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조명이 어두워지고 영사기가 빛을 내뿜으면서 상업광
고에 이어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유리판 속의 네모진 창구멍에서 핀트가 흐린
조그만 영상이 춤을 추어댔다. 빛의 얼룩이 고무테이프 위에 흘리고 있었다. 영사실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사운드트랙은 작은 쇳소리를 쏟아냈다. 이어폰에서는 어김
없이 반 템포씩 늦게 들려오기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다. 유리판 너머로는 웅성거
림과 물결짓는 관객들이 손에 잡힐듯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 너머로 일그러진 거대
한 영상이 스크린 가득히 퍼지고 있다. 콜리는 관객들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누군가
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통로를 향하자 그는 타스코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아
드레날린 탓으로 팔과 다리가 후끈후끈해졌다. 사람 그림자가 통로로 나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화장실인지 매점인지로 걸어 나가자 콜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려
고 애썼다. 뭐라고 해도 여기에 있는 쪽이 냉정을 되찾기가 쉬웠다.
영화는 계속 상영되고 있었다. 콜리는 관중석 복판을 바라보면서 눈의 초점을 흐
리게 했더니 전체의 움직임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모두 움직이
고 있었다. 귀나 코나 머리를 긁적이고, 손을 입에 대고 기침을 하고, 무엇을 먹고,
몸을 흔들고, 데이트 상대에게 팔을 감아 돌리고, 몸을 앞으로 빼는가 하면 뒤로 젖
히고,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다시 스크린에서의 살인행위에 맞
추어 관객이 일정한 형태의 움직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살인동작이 가까워짐에 따
라 소용돌이가 일어났고, 살해 순간에 얼어붙었다가 풀려 나가는 움직임이 관객석
위로 흘러 나갔다. 강하고 격렬한 움직임이 인 다음 조용하고 부드러워진 콜리는 신
경을 집중시켜 천천히 신중하게 숨을 몰아 쉬고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애쓰면서
관객 한사람 한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나갔다.
눈 구석에 빛이 번뜩였다. 쇠붙이에 반사하는 빛이다. 눈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그자리에 고정시킨 다음에 관객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렀다. 머리 하나가 뒤로 젖
혀졌다. 다시 칼날이 번뜩였다. 왔다. 온 것이다. 살인자가 통로로 움직이는 동작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희생자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지금 거기에서 사건
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타스코의 위치에서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콜리는 타스코
에게 알리자마자 쏜살같이 계단으로 튕겨나가 조명 스위치를 넣었다. 타스코가 "그
만둬 !" 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마 희생자에게는 뒤늦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내것이다, 붙잡았다. 사냥감을 붙잡은 것이다. 계단을 세턱씩이나 뛰어
내렸다. 발이 미끄러져 양팔을 휘저으면서 굴러 떨어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구르는
것을 막고 일어서서 매점 뒷문으로 뛰쳐 나가 냅다 뛰면서 권총을 빼냈고, 왼손을
뻗어 카운터를 뛰어넘은 다음 2중문 앞에 우뚝 서서 권총을 겨냥하고 범인이 품 안
에 뛰어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몸을 낮추어 두 손으로 권총을 내뻗고 그자리에 틀어박혔
다. 왼쪽 귀로는 극장안에서 들리고 있는 관객의 소리, 비명, 음악, 그리고 타스코
것이라고 짐작되는 무엇인가를 부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
나지 않는다. 총을 내뻗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세차게 문을 열었다.
조명은 아직도 밝아 오는 도중이었고 영화도 아직 상영되고 있었다. 비명, 성난
목소리, 음악이 이어폰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순간, 콜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수 없게 됐다. 그때 이어폰 속에서 타스코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
려 바라보았더니 타스코는 스크린 밑에 한무리를 짓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비벼 들
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남은 관객들은 제자리에 앉아있는 채로 영화 아니면 그 앞에
서 살인광에게 덤벼드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통로를 달려 타스코를 불렀다. 이어폰 소리가 끊겼고 타스코의 모습도 보이지 않
게 됐다. 사람 무리에 다다른 콜리는 가로 막고 있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자빠뜨리기
시작했다. 그 힘을 되밀어 오는 사람을 때려 눕히자 또 다른 사람이 덤벼든다. 그
얼굴에 펀치를 먹이고 벽쪽으로 붙어 서서 권총을 겨냥했다. 상대는 주눅이 들어 길
을 비켰다. 타스코를 불렀지만 이어폰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팔꿈치로
길을 트고 양손으로 권총 주위에 빈틈을 내면서 방아쇠를 당겨 단숨에 요절을 내려
고 하는 충동과 안간힘을 다해 싸우면서 사람들 틈을 밀고 나아갔다. 허위대가 우람
한 사나이가 뒤돌아보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날아드는 주먹이 슬로우
모션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잽싸게 피하고 상대의 명치에 무릎치기를 먹인 뒤, 사나
이가 거목처럼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턱을 손바닥으로 호되게 쳤다. 사나이
의 커다란 콧구멍의 털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는 스피커 바로 밑이
었다. 음악이 뼈속까지 울려 왔다. 콜리는 그 다음 방해자에게 덤벼들었다.
총소리가 울렸다. 네댓 사람에게 쫓기고 있는 타스코가 총을 천장을 향해서 겨냥
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은 차츰 아래로 향하고 있다. 다음 한 방은 위협사격으로 그
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도 그들은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콜리는 음악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로 외치고 권
총을 위쪽으로 겨냥하여 천장을 쏘았고 다시 쏘아 타스코의 총이 응대하는 것을 들
은 다음 세 방째를 쏘았다. 군중은 구석쪽으로 피해 달아났다. 부상을 입고 피를 흘
리는 사람도 있었다. 콜리는 그들을 가로막아 서려고 한 사람에게 덤벼들어들었지만
반격을 얻어맞았다. 군중은 웃고 떠들고 그를 밀치고 무시해 버렸다. 게다가 지금까
지 자리에 앉아 배기고 있던 사람들까지 군중에 끼어들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패거
리는 손뼉을 치며 "해라해라 !" 하고 소리쳐 부추겼다.
주위에는 몇 사람이나 넘어져 있었다.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면 피를 흘리는 사람
도 있었다. 살인광한테 당한 희생자는 통로쪽 자리에 축 늘어져 있고 뻥하고 열려있
는 목 상처가 천장에 그려져 있는 별무늬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사람 살려어, 개새끼들아 !" 누군가가 몇번씩 그렇게 외쳤다. "개새끼들, 사람
살려어 !" 누군가가 콜리 이름을 부르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타스코다.
"도저히 그만두게 할 수 없었어." 타스코가 말하고 있었다. 콜리는 발밑을 바라보
았다. 사람들은 살인광의 나이프 말고도 그 주위에 있는 물건을 손에 잡히는대로 썼
던 것이다. 살인광의 머리는 분간할 수 없게 돼 있었고 그 목은 거의 몸뚱이에서 떨
어져 나가 있었다. 별안간 격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콜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나이
를 냅다 차 던졌다.
"그만두게 할 수가 없었어." 타스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되뇌었다.
"이놈이 살인광이라고 생각하나 ?" 콜리가 물었다.
타스코는 잠자코 있었다.
"아마 매기라면 알 수가 있겠지. 아니면 검시관이거나." 콜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다구." 타스코가 말했다.
매표 창구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사이에 콜리 귀에는
영화를 마지막까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입장료를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항
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콜리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이튿날 오후도 아주 늦어서였다. 그때까지 18시간동
안 자신의 우중충하고 좁은 아파트, 지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벤치와 2중
자물쇠, 그리고 TV가 있는 방안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 견딘 것이었다. 첫번째 자
물쇠에 열쇠를 끼워 넣기에 앞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깡통맥주를 따서 TV를 켰다. 하지만 화면은 흐리고 마치
온통 눈이 내리고 있는 것처럼 엉망이었다. 영상을 고쳐 보려고 애써도 잘 되지 않
아 부아가 자꾸만 끓어 올랐다. 할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살펴보았더니 안테나가
구부러져 있었다. "자네리 !"
콜리는 문간에 서서 힘껏 도어를 두들겨대며 소리쳤다. 자네리가 뛰쳐나와 4층 계
단 아래로 내려가 거리를 빠져 달아나는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떠올랐다. "나오라구,
자네리 !" 그래도 대답이 없다. 문짝을 들고 걷어 차면사 이름을 한 음절씩 뚝뚝 자
르며 불렀다. "자, 네, 리 !"
"돌아가." 문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자리에서 비켜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
겠어." "나는 경찰이라구." 콜리는 소리치고 경찰 뱃지를 꺼내들고 감시 구멍에 들
이밀었다. "저리 가라구." 잠깐 뜸을 들였다가 자네리가 말했다.
콜리는 문짝에 마지막 발길질을 먹였다.
안테나를 고쳐보려고 했지만 자네리가 받침장대를 비틀어 버리고 와이어를 동강동
강 토막쳐버렸기 때문에 깡그리 망가져 있었다.
잠들기에 앞서 뱃시에 관한 사진과 스크랩을 벗겨냈다. 그리고 앞서 세들었던 방
임자의 사진을 찾아 하나도 남김없이 다시 붙여 놓았다. 그런 다음 그 맞은 편으로
가서 벤치에 걸터앉아 그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모노크롬이었다. 금발에 엷
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 무엇을 찾아 이 고장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든 것들
을 내팽개치고 떠나가 버린 것일까 ? 콜리는 그녀가 퍽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
각해 보았다. 하지만 사진 따위로 무엇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
콜리는 도어를 잠그고 실내 표시등을 꺼버렸다.



제 목 : 악당들이 너무 많다 - D.E.웨스트레이크('90년 에드거상 수상작)

악당들이 너무 많다
(Too Many Crooks)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뭐가 들리지 ?" 더트맨더가 속삭였다.
"바람소리야." 켈프가 응수했다.
더트맨더는 앉은 자세로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있는 켈프의 눈에 일부러 플래쉬
를 들이댔다.
"바람이라구 ? 여긴 터널 속이야."
"지하에 개천이 흐르고 있으니까 지하의 바람인지도 모르지. 그쪽 벽은 벌써 끝났
나 ?" 켈프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으로 두 방이면 돼." 더트맨더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자 플래쉬의 불
빛을 켈프의 등 뒤로 이어지는 텅 빈 터널쪽으로 옮겼다. 그것은 구불텅한 하수구이
며 그 태반이 직경 3피트 이하였다. 돌덩이와 잡동사니, 오래된 쓰레기 사이를 몸부
림치며 뒹굴듯이 전진하여 폐업한 구둣방의 지하실 구석에서 모퉁이 은행의 벽까지
40피트나 지속하고 있었다. 하수도국에 근무한다고 속이며 더트맨더가 상수도국에서
입수한 지도에 의하면 이 벽의 반대편이 은행의 주요 금고실인 듯 하다. 앞으로 두
방만 더 쏘아대면 더트맨더와 켈프가 장시간 손으로 더듬고 할퀴어온 이 비뚤어진
네모난 콘크리트벽이 안쪽 바닥으로 무너지며 금고실이 보이게 되리라는 계산이었
다.
더트맨더가 한 방을 쏘아댔다.
다시 한 방을 쏘았다.
콘크리트의 덩어리가 금고실 바닥에 떨어졌다.
"잘 되었군." 누군가가 말했다.
"뭐라구 ?" 순간적으로 주저했으나 자신을 달래지 못하여 더트맨더는 대형 해머와
플래쉬를 놓고 벽에 난 구멍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두리번거렸다.
틀림없는 금고실이다. 더욱이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정장을 한 사나이가 손을 뻗쳐 더트맨더의 손을 잡더니 아래 위로 움직이면서 더
트맨더를 구멍에서 금고실 쪽으로 끌어들였다.
"훌륭하신 솜씨입니다, 형사양반." 그가 말했다. "강도들은 밖에 있습니다."
더트맨더는 자신과 켈프가 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밖에 ?"
슬랙스에 버스터 브라운의 깃이 달린 상의를 입은 둥근 얼굴의 여인이 말했다.
"다섯 사람입니다. 무기를 들고."
"무기까지 들고 ?" 더트맨더가 말했다.
콧수염을 기르고 앞치마를 두른 채 네 잔의 커피와 두 잔의 카페인리스 커피, 한
잔의 홍차를 얹은 판지의 얇은 상자를 들고 있는 배달원이 말했다.
"우리 모두가 인질이야. 나는 목이 달아날거야."
"그쪽은 몇사람인가요 ?" 정장의 사나이가 더트맨더의 뒤에 있는 켈프의 신경질적
인 웃음을 보면서 물었다.
"두 사람 뿐입니다." 더트맨더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도우려는 사람들이
켈프를 구멍에서 끌어올려 금고실 바닥에 세우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정말 인질로 가득차 있었다.
정장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카니입니다. 이 은행의 지점장이지요. 당신
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은행의 지점장에게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 더트맨더가 말했
다. "네, 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나는 저어, 디담즈 형사이며,
저쪽은 저어, 케리 형사입니다."
더트맨더는 자신이 미워졌다. 어째서 디담즈란 이름을 댔단 말인가 ? 글쎄, 은행
의 금고실 속에서 가명이 필요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
은가 ?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예, 디담즈입니다. 웰즈 지방의 이름이지요."
"네에." 카니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무
장도 하지 않았군요 ?"
"네, 하지 않았습니다." 더트맨더가 말했다. "우리는 저어, 인질 구호반입니다.
총을 발포해서는 안되며 당신들처럼 저어, 민간인들에게 미치는 위험도를 높이고 싶
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말 빈틈이 없군요." 카니가 동의했다.
눈을 조금은 흐리게 뜨고 딱딱한 웃음을 보이며 켈프가 말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당장에 여기를 빠져나가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일렬로 서서 질서있게 이 구멍
을 통해서......"
"놈들이 오고 있어요 !" 금고의 문 옆에 서있던 멋장이 여인이 말했다.
모두가 움직였다. 놀라운 일이다. 모두가 일제히 위치를 바꾼 것이다. 벽에 나 있
는 구멍을 숨기려고 움직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금고실의 문에서 좀 더 떨어지려고
움직이는 사람, 더트맨더의 뒤로 돌아가기 위하여 움직이는 자도 있었다. 별안간 더
트맨더는 자신이 이 금고실 안에서는 크고 둥글며 육중한 금속 문짝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문짝은 육중하게 천천히 열려가고 있었다.
문은 반쯤 열린 위치에서 멎고 세 사나이가 들어왔다. 검은 스키 마스크, 검은 가
죽자켓, 검은 작업복,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우지(Uzi) 경기관총을 차려종 자세
로 들고 있었다. 눈은 냉담하고 매섭게 보였고, 손가락은 우지의 금속제 표면을 만
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서 있을 때도 발은 안정감을 잃은 듯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사소한 일에도 과잉 반응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조용히 해 !"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중의 한 명이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
의 인질들을 두루 살폈다.
"누군가를 밖에 세워둬야겠어. 경찰놈을 신용할 수 있는지 지켜봐야 하겠어."
그 사나이는 더트맨더가 생각한대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봐, 자네 !"
"네." 더트맨더가 대답했다.
"이름이 뭐야 ?"
금고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가 말한 이름을 이미 듣고 있었으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디담즈..." 더트맨더가 말했다.
강도는 스키마스크의 구멍 저편에서 더트맨더를 노려보고 있었다.
"디담즈라구 ?"
"웰즈 지방의 이름이오." 더트맨더가 설명했다.
"그래 ?" 하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지 총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오라 ! 디담즈."
더트맨더는 앞으로 나서며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광경을 어깨 너머
로 힐끗 바라보고 분통이 터질 정도로 더트맨더의 입장에 서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하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켈프조차도 신장 4피트의 어린아이로 보이게끔 행동하
고 있었다. 금고실의 문응 나서자 각기 손에 총을 든 신경질적인 광인들에게 둘러싸
였다. 이윽고 놈들에게 연행되어 가장자리에 책상이 놓인 복도를 지나 간막이를 통
과하여 은행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그곳은 엉망이었다.
폭이 넓은 벽에 높이 걸려있는 시계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듯, 그때의 시간은 오
후 5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행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귀가했을 시간이
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더트맨더는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3시의 영
업종료시간 직전에(더트맨더와 켈프는 이미 터널 속에서 지상에서의 시간 따위는 상
상조차 못하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화려한 작자들은 총을 휘두르며 은행에 쳐
들어왔던 것이다.
단순히 휘두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벽과 출납 카운터의 합성수지 반투명 패널
에는 톱니처럼 생긴 구멍이 점과 점을 잇는 퍼즐처럼 이어져 있었다. 휴지통, 파이
카스의 화분 등이 뒤집혀져 있었으나 다행히 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적어도 더트
맨더의 시야에는 시체가 뒹굴어있지 않았다. 정면으로 나 있는 창의 큰 유리가 중심
부 위에 총탄으로 깨져있고, 두 사람의 검은 복장의 강도가 몸을 꾸부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대부(貸付)는 저렴한 이자'라고 쓰여진 포스터 뒤에서, 또 한 사람은
'개인 적금은 높은 이자로'라고 쓰여진 포스터 뒤에서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거
리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불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태를 짐작하니 놈들은 총을 휘두르면서 3시 직전에 쳐들어왔다가는 신속하게 철
수할 생각이었으나 승진을 노리는 약삭빠른 행원이 경보장치를 누르고 말았기 때문
에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인질사태를 벌이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전세계
의 모든 사람들이 [삼복더위의 오후(주:Dog Days Afternoon)]를 보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경찰이 강도의 헛점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사살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
로 최근의 인질 교섭은 종전의 그것보다 어려운 것이다. 은행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이런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고 더트맨더는 씁쓸히 회상하고 있었다.
우두머리격인 강도가 우지 총으로 그를 쿡쿡 찔렀다.
"퍼스트 네임이 뭐지 ? 디담즈."
댄이라고는 대답하지 말아야지 하고 더트맨더는 다짐했다. 절대로 댄이라고는 말
하지 말아야지. 그는 입을 열었다.
"존 !"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비상사태에서 뇌의 작용을 의지처로 하
여 필사적인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마음이 놓이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
았다.
"좋아, 존. 여기에서 기절하지는 말라구." 그 강도가 말했다. "네놈이 할 일은 매
우 간단해. 경찰은 대화를 갖고 싶어하지. 오직 대화를 원하며 부상자를 내고 싶지
않다는거여. 따라서 네놈은 은행 밖으로 나가서 경찰이 사격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란 말이야."
"알겠소 !" 더트맨더는 말했다.
"좋은 일은 서두르는것이 좋다고 했지, 존 ?" 강도가 말하고 나서 다시 우지 총으
로 그를 쿡쿡 찔렀다.
"약간 아픈데요." 더트맨더가 말했다.
"사과하지. 빨리 나가라구 !" 강도가 매섭게 말했다.
다른 강도 중의 하나는 검은 스키마스크 구멍으로 보이는 눈이 긴장으로 붉게 충
혈된 채 더트맨더에게 상체를 구부리며 소리쳤다.
"처음부터 다리에 한 방 쏘아줄까 ? 여기에서 기어나가는 것이 소원인가 ?"
"나가겠어, 나간다구." 더트맨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교적 냉정한 첫번째의 강도가 말했다. "인도의 가장자리까지 가거든 서라구. 차
도에 한 발이라도 내려놓으면 네놈의 대가리를 날려주겠어 !"
"알았어."
더트맨더가 다짐을 하고 깨진 유리조각을 밟으며 힘없이 열려있는 문으로 다가가
서 밖을 보았다. 거리 저편에는 버스와 순찰자, 경찰, 트럭이 늘어서 있고 각각 청
색과 백색의 배합으로 지붕에는 적색등이 붙어있었다. 그 뒤쪽에서는 경관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었다.
"음 !" 더트맨더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비교적 냉정한 강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기(白旗)라든가 표적이 될만한 것은 없나 ?"
강도는 우지 총의 총끝을 더트맨더의 옆구리에 갖다댔다.
"나서라구 !"
"알았어 !"
더트맨더는 앞으로 몸을 돌려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밖으로 나섰다.
대단한 시선들이었다. 대로 저편에 있는 청색과 백색의 차 뒷쪽에서 많은 긴장된
얼굴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퀸즈 지구의 주택가 중심부의 한가운데에 해
당되며 붉은 벽돌의 값싼 아파트 옥상에서는 사격반의 멤버들이 망원경의 조준기를
들여다보며 더트맨더의 주름잡힌 이마를 조준하고 있었다. 이 지구의 좌우 양쪽을
가로질러 간격을 두지 않고 버스가 봉쇄하고 있으며 그 너머에는 구급차와 흰 가운
의 의사들도 보인다. 여기저기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손들에서 라이플과 권총이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흘렀다.
"나는 강도의 일당이 아니야 !"
더트맨더는 소리치고 두 손을 든 채 인도의 가장자리를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자
신의 등 뒤에 있는 무장한 또다른 신경질적인 작자들이 이 말을 듣고 동요하지 말기
를 기원했다. 아마도 등 뒤의 작자들은 배신을 당했다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것
이다.
그러나 등 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방에서는 확성기가 나타나 순
찰자 지붕에 얹힌채 그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인질인가 ?"
"물론이다 !" 더트맨더가 소리쳤다.
"당신의 이름은 ?"
이제는 그만하면 좋을텐데 하고 더트맨더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디담즈 !"
"뭐라구 ?"
"디담즈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디담즈라고 했나 ?"
"웰즈 지방의 이름이다 !"
"정말인가 ?"
확성기를 사용하고 있는 사나이가 동료와 상의하고 있는 동안 잠시 멎었다가 다시
확성기가 소리쳤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 ?"
뚱딴지 같은 질문이 아닌가 ?
"글쎄, 저어..." 더트맨더는 좀더 큰소리로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쳤
다. "사실은 다소 긴장된 상태다."
"인질 중에 부상자는 있는가 ?"
"아니, 없다. 부상자는 없다. 이곳은... 저어... 이곳은...평온한 상태다."
더트맨더는 그런 생각이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새겨지게 해주십사 하고 간절히
빌었다. 앞으로도 이 인도의 한복판에 서있게 된다면 어쨌든 그렇게 빌 수 밖에 없
었다.
"상황에 변화는 있는가 ?"
변화라니 ?
"글쎄,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았으나 흡사..." 더트맨더가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니 ? 자네는 어떻게 된 게 아닌가, 디담즈 ? 그 은행에
두시간 이상이나 있었다구."
"아차, 그렇지 !" 그 사실을 잊고 있던 더트맨더는 두 손을 내리고 인도 끝까지
전진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렇지 ! 두 시간이야 ! 두 시간 이상이야 ! 오랜 시간동안 있었지 !"
"은행에서 떨어져 좀더 가까이로 오라구 !"
더트맨더가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리니 보도의 가장자리에 두 발의 끝이 걸려있었
다. 가벼운 걸음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어 !"
"잘 들어 디담즈 ! 여기에는 긴장한 남녀가 많이 있다. 그 은행에서 떨어지라고
말하고 있단 말이야 !"
더트맨더는 설명했다. "안에 있는 작자들은 내가 인도에서 내려서는 것을 싫어한
단 말이야. 그렇게 하면 저어..., 저어 말이야,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
야. 그것뿐이야."
"이봐 ! 디담즈 !"
더트맨더는 등 뒤에서 부르고 있는 그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시점
에서는 전방의 일에만 계속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 새로운 이름에
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디담즈 !"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
"네놈은 두 손을 드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확성기에서 들리는 소리.
"참, 그렇지 !" 피스톤이 엔진의 실린더 블록에서 스팀을 뿜어내듯 더트맨더의 두
팔이 위로 올라갔다.
"들었다 !"
"디담즈 ! 빌어먹을, 네놈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탄환 한발을 먹여주어야겠
어 !"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두 손을 내리고 더트맨더는 뒤로 돌아섰다.
"미안해 ! 나는 그런... 나를 보라고... 주의를 하고 있잖아 !"
"두 손을 들고 있어 !" 확성기로부터의 목소리.
더트맨더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두 손을 너무 높이 쳐들었기 때문에 옆구리가 아
파왔다. 오른쪽을 곁눈질하면서 도로 저편의 군중에게 호소했다.
"잠깐만 ! 놈들이 안에서 말을 걸어왔다구 !"
그리고는 왼쪽을 곁눈으로 보니 비교적 냉정한 강도가 문의 테두리 옆에 쭈그리고
있었으나 종전만큼 냉정하지는 않은 듯이 보였다.
"뭐야 ?" 더트맨더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놈들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하겠다. 네놈을 통해서 말이야 !" 그
강도가 말했다.
"좋다, 좋은 생각이야 ! 그러나 어째서 전화로 요구하지 않는 거지 ? 요컨대 일반
적인 경우라면..."
붉은 눈의 강도가 거리 건너편의 저격반에 몸을 노출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교
적 냉정한 강도를 어깨로 밀어붙였다. 눈이 붉은 강도가 더트맨더에게 소리치고 있
는 순간 비교적 냉정한 강도가 저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일을 상기시키려고 한 짓이지, 좋아 ! 나는 분명히 실수를 했어. 흥분한 나머
지 교환대를 날려버렸어. 다시 한번 흥분해달라는 거지 ?"
"아니야, 그만두자구 ! 잊고 있었단 말이야. 잊었을 뿐이야 !"
더트맨더는 소리치며 두 손을 높이 쳐든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강도들이 붉은 눈의 강도를 저지시키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붉은 눈의 강도
는 소리치면서도 우지 총을 더트맨더쪽으로 돌리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치웠단 말이야 ! 모든 사람 앞에서 일을 망쳐
놓았단 말이야 ! 그런데도 네놈은 나를 놀려대고 있어 !"
"잊고 있었단 말이야, 사과하지 !"
"잊을 리가 있나 ! 그런 것을 잊는 자가 있을라구 !"
다른 세 사람의 강도는 붉은 눈의 강도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여러모로 달래
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더트맨더와 비교적 냉정한 강도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그 두 사람을 거기에 남겨놓았다.
"잘못했어, 잊었을 뿐이야. 지금은 다소 주의가 산만한 상태야. 지금와서 갑자
기..." 더트맨더가 말했다.
"네놈은 위험한 말을 했어, 디담즈 ! 그러니까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놈
들에게 말하란 말이야 !" 그 강도가 말했다.
더트맨더는 끄덕이고 나서 얼굴을 도로 저편으로 돌리고 소리쳤다.
"놈들이 이제부터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내가 놈들의 요구사항을 중계하
는 거야 ! 놈들의 요구야, 내 요구가 아니라구 !"
"기꺼이 듣겠다, 디담즈 ! 인질 중에서 부상자가 나오지 않는 한은."
더트맨더는 동의를 표명한 후에 얼굴을 은행 쪽으로 돌리고 강도에게 말했다.
"됐어 ! 무척 논리적이야. 물론 그렇게 되어야지. 작자들은 매우 좋은 말을 하고
있어."
"입을 닥쳐 !" 강도가 소리쳤다.
"알겠다." 더트맨더가 응수했다.
강도가 입을 열었다. "먼저 옥상으로부터 저격반을 철수시킬 것."
"알겠어. 나도 동감이야."
더트맨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로 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옥상으로부터 저격반을 철수시킬 것 !"
"그 밖에는 ?"
확성기가 응수해왔다.
"그리고 대로의 봉쇄를 해제하라. 그런데 방향은 어느 쪽으로 할까 ?"
"북쪽의 봉쇄망이야."
더트맨더는 정면의 교차로를 차단하고 있는 버스를 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동쪽이 아니고 ?"
"아무래도 좋아." 강도는 점차 성급해졌다. "왼쪽 모퉁이야."
"오케이 !"
더트맨더는 얼굴을 거리 저편으로 돌리고 소리쳤다.
"대로 동쪽의 봉쇄를 해제할 것 !"
두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턱으로 그쪽 방향을 가리켰다.
"북쪽이 아니고 ?" 확성기가 반문을 해왔다.
"그렇게 나오리라고 생각했지"라고 강도가 말했다.
더트맨더가 소리쳤다. "그렇다 ! 왼편 모퉁이야 !"
"오른쪽이란 말이지 ?" 확성기가 응답했다.
"그렇다 ! 그쪽에서 보면 오른쪽,내가 봐서는 왼쪽이다. 놈들이 봐서 왼편이야 !"
"그 밖에는 ?"
더트맨더는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얼굴을 은행쪽으로 돌렸다.
"그 밖에는 ?"
강도는 그를 노려보았다.
"확성기의 소리는 나에게도 들린다구, 디담즈. '그밖에는'하는 그놈의 말은 나에
게도 들린단 말이야. 놈의 말을 하나하나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구, 되풀이는 그만
둬 !"
더트맨더가 말했다. "좋아, 되풀이는 하지 않겠어."
"차가 필요하다." 강도가 다시 말했다. "스테이션 웨건이다. 인질을 세 사람 데리
고 갈테니까 큼직한 스테이션 웨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도 미행을 하지 말 것."
더트맨더가 반신반의하며 반문을 했다. "이봐,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 ?"
강도가 그를 응시했다. "머리가 돌지 않았느냐고 ?"
"그래, 저 작자들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을텐데."
더트맨더가 말했다. 대로 저편의 작자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놈들이 하는 짓이란 자동차 바닥에 소형 전파발신기를 장치하는
일이야. 그렇게 하면 실제로 미행하지 않아도 거처는 저절로 밝혀지는 셈이지."
다시 다급해진 강도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놈들에게 말해야지. 전파발신기를 부착시키면
인질을 사살해버리겠다고 말이야."
"음, 그러나..." 더트맨더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어디가 잘못되었나 ?" 강도가 따지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네놈은 무척
따지기를 좋아하는 놈이군, 더트맨더. 네놈은 단순한 전달인에 불과하다구. 나보다
도 이 일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나 ?"
물론 잘 알고 있지. 더트맨더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밖에 내는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설명했다.
"다만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야. 유혈 사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지. 그리고 생각나는데, 뉴욕 시경(市警)은 저어... 헬리콥터를 가졌단 말
이야."
"빌어먹을 !" 하고 강도가 말했다. 그는 여러 잡동사니가 흩어져 있는 은행 안에
서 망가진 문짝 뒤에 쪼그리고 앉아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더트맨더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 디담즈. 네놈은 머리가 좋단 말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더트맨더는 눈을 깜빡거렸다.
"나에게 당신들의 도망갈 길을 생각해달라는 거지 ?"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보라구. 잔소리 말고 생각해보란 말이야."하고 강도가 제안
했다.
더트맨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을 높이 쳐든채 차단된 교차로를 응시하며 자
신을 강도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정말 사태가 곤란하게 되었군."
"디담즈, 그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단 말이야."
"그렇겠군. 가능한 길을 가르쳐주지. 저기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버스 한대를 달
라고 요구하란 말이야. 지금 당장에 한대를 얻게 되면 시한최루탄 같은 것을 장치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지 ?" 검은 스키마스크의 강도가 다소 창백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질 전원을 데리고 나온단 말이야." 하고 더트맨더가 말했다. "인질 전
원을 버스에 태우고 당신네들 중의 한 사람이 운전하여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간단
말이지. 예를 들면 타임즈 광장이 좋겠지. 거기에서 버스를 세워 인질 전원을 석방
하고 도망치는 거야."
강도가 따지고 들었다. "그래서 ? 우리에게 무슨 득이 있다는 거지 ?"
더트맨더가 대답했다. "글쎄, 스키마스크나 가죽자켓, 총 등을 버리고 당신들도
도망을 치는 거야. 2,30명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단 말이
야. 러시아워의 타임즈 광장 한가운데니까 모두가 인파 속으로 파고든단 말일세. 성
공할지도 모르지."
"음, 그럴지도 모르지. 오케이. 그럼 그자들에게... 뭐라고 한다지 ?"
"뭐라구 ?"
더트맨더가 되풀이했다. 위로 쳐든 왼팔의 저편을 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수령격
인 강도는 동료의 한 사람과 흥분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붉은 눈의 광인
이 아닌 다른 강도이다. 수령격인 강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망할 것 ! 이리로 돌아오라구, 디담즈 !"하고 더트맨더를 쳐다보았다.
더트맨더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나에게..."
"잔소리 말고 돌아오란 말이야 !"
"알겠어. 내가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놈들에게 말해야겠어."
강도가 소리쳤다. "빨리 오라구 ! 서툰 짓을 하면 알지 ? 디담즈, 나는 지금 기분
이 좋지 않단 말이야 !"
"오케이 !"
얼굴을 대로 저편으로 돌리며 한 순간이나마 등을 기분나쁜 강도들에게 보이고 싶
지는 않았으나 더트맨더는 소리쳤다.
"지금 당장 은행으로 돌아오라고 놈들이 말하고 있다. 잠시 다녀와야겠다."
두 손을 여전히 쳐든 그는 조금씩 옆으로 걸음을 옮겨 인도를 횡단했다. 그리하여
가까운 문으로 은행에 들어섰다.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꽉 잡고 은행 안쪽으로 던져
버렸다.
더트맨더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하였으나 넘어진 화분을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
다. 돌아보니 다섯명의 강도 전원이 늘어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놈들의 표정은
생선가게의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고양이처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으며 흡사
굶주린 이리떼 같았다.
"음..." 더트맨더는 신음했다.
"이제는 이놈 하나뿐이야." 강도 중의 한 명이 말했다.
"그러나 이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이야." 또 한 명이 덧붙였다.
세 번째의 강도가 말했다. "곧 알게 될테지 뭐."
"아무도 버스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깨닫게 될테지."
수령격의 강도가 말하며 더트맨더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디담즈, 지금은 네놈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애."
더트맨더는 자신이 이 작자들의 동료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번이나 자신에게 들려
줄 필요가 있었다.
"이유가 뭐지 ?"
다른 강도 한 명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머지 인질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이야."
눈이 휘둥그레진 더트맨더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말을 해버렸다.
"터널이야 !"
갑자기 은행 안이 조용해진 것만 같았다. 강도들은 사이에 방해되는 유리창도 없
이 직접 생선을 보고 있는 고양이처럼 더트맨더를 응시하고 있었다.
"터널이라구 ? 터널에 대해 알고 있나 ?"
수령격인 강도가 천천히 되풀이했다.
"조금은 알고 있지. 이를테면 사나이들이 터널을 파고 있었지. 당신들이 와서 나
를 끌어내기 직전에 그들은 금고실에 도착했을테지."
"그런데도 네놈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
"그거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더트맨더는 안절부절 못하
는 심정이었다.
붉은 눈의 광인이 다시 자동소총을 휘두르며 고함치면서 돌진해왔다.
"네놈이 터널을 판 거야 ! 네놈의 터널이야 !"
우지의 흔들리는 총구를 더트맨더의 코끝에 들이댔다.
"진정하라구,진정하란 말이야 ! 이자는 단 하나 남은 인질이야. 손대지 말라구 !"
수령격인 강도가 소리쳤다.
붉은 눈의 광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우지 총을 내렸으나 다른 동료에게 돌아서
며 말했다.
"내가 교환대를 날려버린 것을 아무도 잊지 않았어. 절대로 잊지 않고 있단 말야.
이 자는 여기에 있지도 않았어 !"
강도들은 모두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더트맨더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했
다. 나는 인질인지 모르지만 호락호락한 인질과는 다르지. 왜냐하면 나는 은행의 금
고실까지 터널을 팠던 사나이이자 약 30명의 목격자에게 얼굴이 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은행강도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경찰로부터도 도
망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수천명의 경관들로부터...
그렇다면 나는 이 인색한 도둑들에게 사로잡혀있단 말인가 ? 내 자신의 장래는 정
말 이놈들이 이 궁지에서 도망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단 말인가 ? 만약에 그렇다면
상황은 불리하다. 이 작자들은 자력으로 회전목마에서도 도망칠수가 없다.
더트맨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아, 먼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라고 ? 언제부터 네놈이 동료가 되었지 ?" 하고 수령격인 강도가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끌어들였기 때문이야. 따라서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트맨더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지시하지 말란 말이야. 해야 할 일쯤은 우리도
알고 있어 !"
"나는 당신들의 유일한 인질이야. 간섭하지 말라구. 거기에다 당신들을 보아하니
나는 당신들이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잘 들어
두라구.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금고실의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야 할 일이
야."
강도중 하나가 멸시라도 하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인질은 없단 말이야. 듣지 못
했나 ? 인질이 도망간 후에 금고의 문을 닫다니, 그런 말도 있나 ?" 그 강도가 말하
며 크게 웃었다.
더트맨더는 그 강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터널은 양면통행(兩面通行)이야."
강도들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히 몸을 돌려 은행의 안쪽을 향해 돌
아갔다. 전원이 달려갔다.
"이런 일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다급해하는 친구들이군."
더트맨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은행의 정면쪽으로 걸었다. 꽈
당 ! 멀리 뒷쪽에서 금고실의 문이 소리를 냈다. 더트맨더는 흩어진 복도를 빠져나
가자 다시 인도로 내려서서 두 팔을 쳐들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봐요 !" 그는 소리치며 사격반 전원에게 보이도록 얼굴을 내밀었다.
"이봐, 다시 내가 왔다. 디담즈야 ! 웰즈의..."
"디담즈 !" 은행의 구석자리에서 격분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이리로 돌아와라 !"
"싫어 !"
그것을 무시하고 공포를 느끼면서도 착실한 페이스로 움직였다. 두 손을 쳐들고
얼굴을 앞쪽으로 내밀며 눈을 크게 뜨고 더트맨더는 인도를 향해 왼편으로 전진하면
서 소리쳤다.
"다시 밖으로 나간다 ! 그리고 도망칠 생각이다 !"
그리고 나서 두 손을 내리고 두 팔꿈치를 겨드랑에 대고 길을 차단하고 있는 버스
쪽으로 모든 힘을 다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뒤에서 다다다 하며 연속 발포가 일어나고 빵
빵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피웅, 탕탕, 파방 하는 대 교향곡이 울려퍼졌다. 더트맨
더의 발끝은 강철의 용수철로 변하고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처럼 몇번이나 허공
을 가르며 도로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버스의 벽이 점점 가까와졌다.
"여기다, 여기야 !"
제복의 순경이 양쪽 인도에 나타나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뒤에 숨기 좋도록 열
려있는 도어와 경찰차 등의 대피장소를 가리켰다. 그러나 더트맨더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스다 ! 그는 허공에 몸을 날렸다가 아스팔트에 강하게 떨어지자 가장 가까운 버
스 아래로 굴러갔다. 뒹굴고 또 뒹굴어 머리, 팔꿈치, 귀, 코, 몸의 다른 부분을 딱
딱하고 더러운 물체에 부딪치게 했다. 그리고 버스 아래를 통과하여 일어섰다. 비틀
거리며 눈알을 굴리면서 많은 의사들이 구급차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광경을 응시
했다. 의사들은 자리에 선 채 그를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더트맨더는 몸을 왼편으로 돌렸다. 의사들은 그를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맡고 있는 일은 건강한 사람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경관들은 버스를 치우지 않
는 한 그를 추적할 수가 없다. 더트맨더는 두 팔을 활개치며 날 수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의 철새처럼 뛰기 시작했다.
터널 저편의 가장자리에 있는 폐업한 구두방의 왼쪽을 지났다. 그 가게 앞에 세워
두었던 도주용 차는 이미 없었다. 더트맨더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3블록을 달린 지점에서 콜택시가 사전에 영업소에 전화연락도 하지 않고 그를 태
우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뉴욕 시에서는 허가를 받은 택시만이 거리에서 손을
드는 손님을 태우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더트맨더는 딱딱한 뒤쪽 좌석에서 헐떡거
리며 그 운전수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더트맨더가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니 그의 정숙한 아내 메이가
거실에서 나타났다.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 기뻐요. 라디오도 텔리비젼도 그 사건으로 야단들이에
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다시는 집에서 나가지 말아야지." 더트맨더가 말했다.
"만약에 앤디 켈프에게서 전화가 걸려와서 '이봐, 대단한 일거리가 있어. 간단히
해치울수가 있어'하고 제의해 오면 이제는 은퇴했다고 말해야 겠어."
"앤디가 와 있어요. 거실에 있다구요. 맥주 마시겠어요 ?"
"그거 좋지." 더트맨더는 간단히 대답했다.
메이는 부엌으로 가고 더트맨더는 다리를 끌면서 거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켈프
가 소파에 앉아 깡통맥주를 손에 든 채 즐거운 듯이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는 현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더트맨더는 그것을 응시했다. "이건 뭐야 ?"
켈프는 싱긋 웃고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요전에 우리의 일이 제대로 된 것은 아득한 옛날의 일이었지. 존, 자네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변했다구. 이것이 돈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그 금고실의 돈이란 말이지 ? 어떻게 해냈지 ?"
"자네가 그자들에게 끌려나가고 나서 말이야... 그런데 그자들은 체포되었지." 켈
프는 스스로 자기 말을 중단시켰다. "생명을 잃는 일도 없이 말이야... 어쨌든 나는
금고실의 여러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지. 강도들로부터 이 돈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돈을 전부 반출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들어냈지. 그리
고는 구둣방 앞에 세워두었던 나의 가짜 순찰자의 트렁크에 돈을 넣으면 내가 그것
을 보관하기 위해 지서에 운반해 갈 수도 있고, 그 동안에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오
늘 시련의 피로도 풀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의한 거야."
더트맨더는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인질들에게 금고실의 돈을 반출시켰군."
"그리하여 우리 차 트렁크에 넣게 했지. 그렇게 된 거야." 켈프가 말했다.
메이가 들어와서 더트맨더에게 맥주를 건네주었다. 그는 쭉 한모금 마셨다. 켈프
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경찰은 자네를 찾겠지. 그 이름의 사나이를 말이야."
메이가 끼어들었다. "도무지 나는 알 수가 없어요. 디담즈라니 ?"
"웰즈 지방의 이름이지." 더트맨더가 설명했다. 그리고는 커피 테이블 위에 쌓인
현금 더미에 웃음을 보냈다.
"나쁜 이름이 아닌데." 그가 말했다. "기억해 두어야지."




추천 (0) 선물 (0명)
IP: ♡.75.♡.93
23,40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단밤이
2023-12-27
0
141
단밤이
2023-12-27
1
212
단밤이
2023-12-26
0
196
단밤이
2023-12-25
0
189
단밤이
2023-12-24
0
131
단밤이
2023-12-24
0
116
뉘썬2뉘썬2
2023-12-24
1
205
뉘썬2뉘썬2
2023-12-24
1
259
단밤이
2023-12-24
0
211
단밤이
2023-12-24
0
132
단밤이
2023-12-24
0
106
단밤이
2023-12-23
1
200
단밤이
2023-12-23
0
197
단차
2023-12-22
0
190
단차
2023-12-18
1
322
단차
2023-12-17
2
246
단차
2023-12-17
2
563
단차
2023-12-17
2
488
단차
2023-12-16
1
232
단차
2023-12-16
1
233
단차
2023-12-16
0
175
단차
2023-12-16
0
133
단차
2023-12-15
0
138
단차
2023-12-15
0
157
단차
2023-12-15
1
210
단차
2023-12-15
0
132
단차
2023-12-15
0
179
뉘썬2뉘썬2
2023-12-15
1
183
뉘썬2뉘썬2
2023-12-15
1
220
단차
2023-12-14
0
20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