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김성종 - 비련의 화인 2

3학년2반 | 2022.01.30 07:58:18 댓글: 0 조회: 55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944
11. 중대한 과실

"홍 선생한테 중대한 과실이 있더군요."
허걸은 벽에 기대 앉아 팔짱을 끼고 홍상파를
바라보았다.
상파는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리며 힘없이,
"네, 인정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한 모습이 몹시 절망적으로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끈하게 잘생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절망에 빠진 초라한 모습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데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핼쑥했고 두 눈은
불면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조태는 홍상파가 영 못마땅하다는 듯 입맛을 쩍
다시며 그를 외면 했다. 상파가 경찰에 협조하지 않아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사실에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범인은 돈을 챙겼으니까 다시는 전화를 걸어 오지
않을 거요. 목적을 달성한 마당에 괜히 전화질을 해서
꼬리를 밟힐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아이를
찾은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냔 말이야. 놈은 아이도
돌려주지 않을 모양이야. 유괴범 치곤 묘한 놈이야.
대부분의 유괴범들은 돈을 챙기면 인질을 돌려보내게
마련인데 이놈은 좀 이상해. 장인 장모라느니 하면서
능청을 떠는 걸 보니까 아이를 데리고 살 모양이야.
어린애를 좋아하는 변태 성욕자인지도 모르지."
조태는 홧김에 이렇게 지껄이고 나서 상파를 힐끗
쳐다보았다.
상파의 얼굴에 경련이 스쳐가는 것 같았다. 돈
일억이 문제가 아니었다. 애지중지하는 딸이 변태
성욕자의 제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제 실수를 인정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닙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시 좀 힘을 써주십시오. 앞으로는 결코
독자적인 일은 없을 겁니다. 경찰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협조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홍상파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를
조아리자 조태가 마침내 화를 벌컥 냈다. 그는
홍상파를 홍 선생이라고 부르는 대신 당신이라고
불렀다.
"당신이 부탁하든 안 하든 우리는 어차피 수사를
해야 해요! 왜 그런 줄 알아요? 우리는 경찰이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한다 이겁니다! 우리가 협조해
달라고 할 때는 외면하고 이제 와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나서 우는 소리를 하니 이거 놀리는
겁니까 뭡니까?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경찰이
골탕을 먹는단 말입니다!"
그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송합니다."
상파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음처럼 말했다. 뚱보
형사는 조그만 눈으로 상파를 째려보면서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죄송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단 말이오. 결정적인 실수를
말이오!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당할지 몰라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앞으로
범인한테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으면 수사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요. 무얼 가지고 수사를 하라는 겁니까?
앞으로 형식적인 수사를 한다고 해서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오. 이 모든 게 당신 탓이니까! 결과를 놓고 볼
때 당신은 범인을 도와 준 꼴이 되고 말았어요!
일억을 가져 간 그놈은 이제 그 돈으로 보다 안전한
곳에 숨게 되겠지. 그리고 청미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상파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청미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분명히 너무
심한 말이었다. 그러나 홧김에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단계로써는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어, 어째서 우리 청미가 죽었을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상파는 열에 뜬 눈으로 조태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주눅이 들어 있던 얼굴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조태는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아 아차 했지만,
내친김에 속에 있는 말을 몽땅 꺼내 놓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첫째, 범인이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변태 성욕자일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놈은 야욕을 채우기 위해 당분간
청미를 데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당분간이지
오래 데리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위험하니까
말입니다. 청미가 유괴된 지 벌써 오늘이
닷새째입니다. 그 동안 놈은 야욕을 채울 대로 채웠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돈도 받았고 하니까 그
애를 돌려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애를
돌려주지 않고 있고, 자기가 데리고 살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청미가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놈이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놈이 변태 성욕자가 아닌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에는 더욱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돈도 받았으니까 청미를 돌려보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모든 유괴범들의
공통된 플레이이니까요. 그들이 페어 플레이 정신에
투철해서가 아니라 인질을 데리고 있는다는 것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쓸모 없어진
인질을 뭣하러 더 이상 데리고 있겠습니까. 돈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인질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인질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치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있죠."
조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파의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우는 모습은 특이했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 소리내어 우는
것보다도 더욱 비통해 보였다.
그의 우는 모습을 대하자 조태의 분노는 눈 녹듯이
스르르 풀렸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 청미가 죽었다면…… 나도
죽어야지요……. 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죽였는데……
무슨 낯짝으로 살겠습니까……."
조태는 담배를 꺼내 상파에게 권했다. 그리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어느 경우에나
예외라는 게 있으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주저앉으면 청미를 영영 못 찾을지 모릅니다."
"청미는 죽었습니다."
상파가 넋 나간 사람처럼 말했다.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있던 허걸이,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 가능성이 아닙니다. 홍
선생께서 우리에게 협조하고 싶다면 아무쪼록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이런 사건의 경우 피해자측에선
절망에 빠진 나머지 가정이 파탄되는 수가 많습니다.
어떤 가능성에도 마음의 대비를 해서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상파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 갔는데 손끝이 너무
떨리고 있어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일억 잃은 것은 큰 실수지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저도 거기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습니다. 우리
청미는 살아 있을까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상파가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꾸만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청미는 살아
있습니다."
허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보기에 홍상파는
놀라울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회 생활에서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시련에 부닥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더없이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홍상파는 마치 그런 인간의
전형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 답변하셨겠지만 제 질문에도
답변해 주십시오. 사실대로 답변해 주셔야 합니다."
허걸은 팔짱을 풀고 상파를 바라보았다.
"제가 사실대로 답변하지 않은 게 있습니까?"
상파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그럴지도 모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물어
보십시오."
상파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허걸은 조태처럼 감정의 기복을 내보이는 일이 없이
단정하고 야무진 태도로 하나하나 물어 나갔다.
한 손에 수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볼펜을 들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적어 두려는 그의 모습은 마치
형사라기보다는 취재 기자 같았다.
"홍 선생은 어제 저녁 여섯 시 십 분 전에 종로
보신각 뒤에 있는 목마 다방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 시간이 여섯 시였던
것은 다 알고 계시겠지요. 오 분쯤 지나니까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카운터 아가씨가
제 이름을 부르기에 카운터로 가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범인의 전화였습니다."
"협박 전화를 걸어 오던 그 자의 목소리였나요?"
"네, 바로 그 자였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먼저 돈부터 물었습니다. 돈을 가져 왔느냐고
하기에 가져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왜 안 오느냐고
했더니 능청떨지 말라고 하더군요. 자기 눈에는
주위에 경찰이 깔려 있는 게 보인다고
했습니다.그래서 다방에 들어갈 수 없으니 지하철을
타고 시청 앞으로 오라는 거였습니다. D빌딩 지하에
있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든든히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행을 따돌리라고 말했습니다.
미행이 있는 한 놈은 절대 안 나타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행을 따돌렸나요?"
"제가 볼 수 있는 미행자는 한 명이었습니다. 그
미행자를 따돌리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D빌딩 지하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 도착한 것은 일곱 시 조금
전이었습니다. 거기서 범인이 시킨 대로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자장면을 다 먹고 나자 범인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놈은 그 집 자장면 맛있지
않느냐고 능청을 떨었습니다. 제발 만나 달라고 하자
아직 미행자가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서툴러서 미행자를 완전히 따돌리지 못했다는
거였습니다."
"계속 그 목소리였나요?"
"네, 그놈 목소리였습니다."
"전화가 걸려 온 게 몇 시쯤이었나요?"
"그 중국집에 들어간 지 이십 분쯤
지나서였습니다."
"다음을 이야기해 보십시오."
"중국집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로
가라는 거였습니다. C극장 옆에 당구장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 들어가서 당구를 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청량리까지 가는 동안 아무 일 없었나요?"
"아무 일 없었습니다."
"당구장에는 몇 시에 들어갔나요?"
"여덟 시경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죠?"
"그때그때마다 시간을 보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라고 허걸은 생각했다.
"거기서부터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허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태도 눈은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눈치였다.
"당구장에 도착해서부터 말입니까?"
"네, 거기서 말입니다."
상파는 잔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조금 들뜬
목소리였다.
"계단을 밟고 이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당구장
안에는 손님이 많았는데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가 다섯 개 있었는데 그 중 한
개만 비어 있고 모두 손님으로 차 있었습니다.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저한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벤치에 앉아 땀을 닦고
있으려니까 종업원 아가씨 미스 황이 다가와 누구와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없다고 하니까 그럼
다른 손님과 한 게임 치겠느냐고 했습니다.그 경황에
당구칠 마음이 있을 리 없었지만 남의 영업 장소에
들어와 할일 없이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잠시 치기로
했습니다. 당구를 쳐본 지 수년이 지났지만 과거 제
당구 실력은 꽤 알아주는 편이었습니다. 미스 황이
저한테 붙여 준 상대는 장발의 청년이었습니다. 참,
그 청년은 어떻게 됐습니까?"
"혐의가 없어서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괜히 저하고 당구를 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군요."
"할 수 없는 일이죠. 자, 다음을 이야기하십시오."
"그 청년이 오천 원씩 걸고 하자고 하기에 그렇게
하고 당구를 쳤습니다만 신경은 딴 데에 가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그때 가방을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에는 의자 위에다 놔두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여 당구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출입구 쪽에도 신경이 쓰이고 전화
쪽에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랐으니까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들고
카운터로 갔습니다. 미스 황에게 가방을 맡기면서 잘
좀 봐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홍상파를 찾는
전화가 걸려 오면 바꿔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허걸은 볼펜을 들고 있는 손을 쳐들었다.
"그런 다음 다시 당구를 쳤습니까?"
"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가방을 어느 쪽에 내려놨습니까? 미스
황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어느 쪽에 내려놨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가 되묻는 것으로 보아 그 점에 대해서는 조
형사로부터 조사를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가방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밑으로 내려놓았을 텐데 어느 쪽에
내려놓았느냐 이겁니다."
"글쎄요……."
상파는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네, 잘 생각이 안 납니다. 그것보다도 미스 황이
가방을 어느 쪽에 내려놓는지 눈여겨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에
내려놓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가방에 대해서 그렇게 무심했습니까?
일억이나 들어 있는 돈 가방인데 말입니다."
"그 아가씨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자에
있던 것을 카운터에 맡긴 겁니다."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허걸은 방바닥에 놓여 있는 조 형사의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거기에 성냥불을 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
가 깊이 빨았다.
몇 달 만에 피워 보는 담배였다. 가슴 속에 쌓여
있는 답답함을 풀어 버리려고 오랜만에 피워 보는
것이었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홍상파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해가 갑니다.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젊은 친구와 당구를 치고 있는데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하기에
당구를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그곳을
나와 종로에서 내려, S호텔에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하라고 말했습니다. 거기 가 있으면 찾아오겠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바로 나갔나요?"
"네,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나갔습니다."
"그때가 몇 시였나요?"
"여덟 시 사십 분경이었습니다."
"게임은 도중에 중단했겠군요?"
"네, 그 청년한테 오천 원을 내준 다음 카운터로
가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그 다음 가방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미스 황이 검정 007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이거죠? 하고 묻기에 그런 줄 알고 들고
나왔습니다."
"가방을 점검해 보지 않았습니까?"
허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미처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가방이 그렇게도 비슷해 보였나요?"
"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방구석에 놓여 있는 범인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색깔도 같고 크기도 같습니다. 무게까지도
비슷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부분이 접합되는
철제 부분이 좀 다릅니다."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제 것은 좀 얇은 편인데 범인 것은 두껍습니다.
그리고 내부 색깔이 다릅니다. 제 것은 붉은 색인데
저것은 녹색입니다."
"홍 선생 가방은 어디서 구입한 것인가요?"
"N백화점에서 구입했습니다."
"홍 선생께서 조금만 주의를 해서 가방을 보았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게 제 불찰이었습니다."
상파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음을 이야기해 보십시오."
"호텔에 도착한 게 아홉 시 십 분. 그리고 오 분
후에는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805호실에
투숙했습니다."
"방 안에서는 무엇을 했나요?"
"서성거리다가 기다리는 데 지쳐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방송국의 무슨 프로를 보셨나요?"
"어느 방송국인지는 모르겠고, 코미디 극을 잠깐
보다가 껐습니다. 범인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은 한
시간 남짓 지나서였습니다. 시계를 보니까 그때가
열시 반 경이었습니다. 놈은 대뜸 나보고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돈을 전해 줄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까 놈은 웃으면서 돈은 이미 자기 손에
들어와 있다고 했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가방을
한번 열어 보라고 하기에 전화를 끊지 않은 채 가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안에는 돈 대신 신문지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상파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돈을 가져 갔으니까 약속대로 청미를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놈이 하는 말이 청미가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청미가
자기하고 살고 싶어한다고 하면서 그 애를 잊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홧김에 욕을 퍼붓자 놈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을 깨고 상파가
중얼거렸다.
"그놈을 잡으면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허걸은 상파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하고 말했다.
상파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범인의 인상 착의는 황미숙 양에 의해 대강
밝혀졌습니다. 황 양이 말한 범인의 모습을 홍 선생은
당구장에서 보지 못했나요? 놈은 홍 선생이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역시 당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놈은
당구를 치면서 홍 선생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놈을 보지 못했습니까?"
"글쎄, 그때 당구장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당구장 안에는 스무 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범인이 나이든 축에 끼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홍 선생께서는 그곳에 혹시 범인이 먼저 와 있지
않을까 해서 눈여겨보았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어떻습니까?"
"눈여겨본 것은 사실이지만 범인이 자기 얼굴에
범인 표시를 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놈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저는 그곳에 범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놈이 사람들이
보는 데서 공공연히 저와 접촉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경찰에 포위될 경우 도망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범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조태가 길게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12. 코브라파를 잡아라

홍상파의 7월 18일 오후 5시부터 10시 30분까지의
행적.
5시:범인으로부터 6시 정각에 종로 보신각 뒤
‘목마’다방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받다.
6시 10분 전:자가용 편으로 보신각 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다. 현찰 일억이 들어 있는 007가방 휴대.
6시 5분:범인으로부터 시청 앞에 있는 D빌딩 지하
중국 음식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다방을 나서다.
6시 55분:지하철 편으로 D빌딩 지하 중국 음식점에
도착.
7시 15분:범인으로부터 청량리 C극장 옆에 있는
당구장으로 오라는 전화 받고 중국 음식점을 나서다.
8시:청량리 C극장 옆에 있는 당구장에 도착.(이보다
앞서 7시 20분경에 범인이 당구장에 나타남:당구장
종업원 황미숙의 증언)
8시 40분:범인으로부터 종로 S호텔에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하라는 전화 받고 당구장을
나서다.(이때 가방을 잘못 들고 나감. 범인은 오 분
후 홍상파의 돈 가방을 들고 나감)
9시 15분:종로 S호텔 805호실에 박철민이라는
가명으로 투숙.
10시 30분:범인 전화 받고 가방이 바뀐 것을 확인.

7월 19일 아침이었다. 허걸은 해장국을 먹는
자리에서 자신의 수첩에 정리해 둔 것을 조태에게
보였다.
"이게 뭐지?"
"홍상파의 어제 행적을 시간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허걸은 그것을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거기서 어떤
단서 같은 것을 잡을 수는 없었다. 조태는 그것을
건성으로 훑어보고 나서 허걸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그들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홍상파를 나무랄 일도
못 되었다. 수사관들이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미행했는데도 돈 가방을 잃었으니 그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부모된 사람으로서는 수사에 협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일억의 거액을 던져서라도
자식을 찾고 싶은 것이 부모된 사람의 심정이다.
홍상파는 부모로서 가장 부모다운 행동을 했을
뿐이다. 허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태가
질문을 던져 왔다.
"홍이 범인으로부터 시청 앞에 있는 D빌딩 지하
중국 음식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게 여섯 시 오
분이었어. 그리고 거기에 도착한 게 오십 분 뒤인
여섯 시 오십오 분이었고. 십 분 정도면 충분할
거리인데 어째서 오십 분이나 걸렸지?"
"그건 미행자를 따돌리느라고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조태의 조그마한 눈이 더욱 작아졌다. 그는
뚝배기에 남아 있는 국물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나서 말했다.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어. 왜 하필
그 집 아이를 유괴했는가 하는 점, 하나밖에 없는 그
집 아이를 왜 점 찍었는가 하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네, 저도 그 점을 생각해 봤습니다만 아직 뭐라고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범인한테서 전화도 걸려 오지 않고…… 어떡하면
좋지?"
허걸은 뭐라고 답변할 말이 없었다. 범인한테서는
더 이상 전화가 걸려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뭘 가지고 수사를 하느냔 말이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겠죠.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한……."

해가 뜨자 도시의 거리는 더워지기 시작했다.
폭염 아래서는 수사도 제대로 안 된다. 그러나 청미
유괴 사건을 맡은 수사관들은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담 수사원만도 오십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수사는 보다 구체적인 방향으로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그 첫째는 청미가 살해되어 어딘가에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그 시체를 찾는 일이었다. 시체를
찾아내면 단서가 잡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째는 범인이 가져 간 일억의 행방을 쫓는
일이었다. 그 돈의 일련 번호를 경찰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이 그 돈을 사용할 것에 대비,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백화점이나 음식점, 술집,
터미널, 역, 담배가게 등에 수사 요원이나 정보원을
배치하든지 또는 지폐의 일련 번호를 가르쳐 주어
문제의 지폐가 나타나는 대로 경찰에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셋째는 당구장 종업원 황미숙의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를 수만 장 만들어 시내 요소요소에 붙이든지
뿌려 신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넷째는 청미가 아직 살해되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하여 그녀의 사진을 수만 장 찍어 시내에
배포함으로써 신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자 홍상파는 따로 시내 각 일간지에 딸을
찾는 광고를 게재했다. 딸이 있는 곳을 알려 주든지
찾아 주는 사람에겐 천만 원의 현상금을 주겠다고
단서를 달았다. 그것은 경찰에게도 해당되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수사는 자연 공개 수사가 되고 말았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청미의 외삼촌인 송태하
기자가 여러 보도 기관에서 몰려온 기자들을
상대했다.
거의가 잘 아는 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커피 한 잔씩을 제공한 다음 잘 부탁한다고만 말했다.
이왕 수사가 공개될 바에는 철저히 공개되어
전국민적인 관심사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홍상파의 아내 송묘임은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온몸에 열이 나는 데다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입원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홍상파는 회사에 휴직원을 제출했다. 기한은 일단
육 개월로 잡아두었다.
허걸은 홍상파와 함께 N백화점에 가서 007가방을
하나 구입했다. 그것은 홍상파가 돈 일억 원을 넣어
가지고 다녔던 가방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수사본부로 가지고 와 신문지만 들어 있는 범인의
가방과 비교해 보았다. 상파가 말했던 대로 두 가방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주 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두 가방이 이렇게 비슷하지? 아무리 검정색
007가방에다 돈을 넣어 가지고 오라고 했다지만
어쩌면 이렇게 비슷하냔 말이야? 검정색 007가방도
종류가 아주 다양할 텐데 말이야.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태가 가방을 열었다 닫으며 물었다.
"저도 그 점이 좀 이상했습니다. 우연이라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렇게 보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짚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범인이 돈 가방을 미리 봐두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이지? 범인이 돈 가방을 어떻게 미리
봐두었다는 거지?"
그 자리에는 마침 송태하 기자도 있었다. 허걸의
말에 그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범인은 홍상파
씨를 나오게 해서 돈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게
했습니다. 그 사이에 가방을 보아둔 것입니다.
거리에서, 또는 전철 속 같은 데서 보아 두었겠죠.
그러고 나서 비슷한 가방을 구입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시간은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그럴 듯하군."
조태는 맥빠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홍상파를 데리고 종로 보신각 뒤 목마
다방으로 갔다. 시간도 일부러 어제와 같은 시간에
맞춰 나갔다. 송태하 기자가 기어코 따라오겠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동행을 허락했고, 그래서
일행은 모두 네 명이 되었다.
태하는 아예 신문사로부터 이번 사건만을
전담하라는 허락을 받아낸 터였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른 기자들처럼 냉정하게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취재에만 전념할 수 없는 애로가
있었다.
사실 그는 취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카를
찾는 것이 더욱 큰일이었다. 취재 따위야 뒷전의
일이었다.
홍상파는 어제의 행적을 남들 앞에서 되풀이해
보인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그런 것을 내색할 처지도 못 되거니와 어떻게든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형사들이 시키는
대로 가방을 들고 먼저 목마 다방으로 들어갔다.
범인 역은 허걸이 맡았다. 모든 것이 어제 일어났던
그대로 재연되었다. 조태와 송태하는 홍상파의 뒤만
따라다녔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기
때문에 상파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가면서
행동했다.
허걸은 시간에 맞춰 상파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고 그때마다 상파는 지시대로 움직여 주었다.
당구장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먼저
허걸이 007가방을 들고 당구장에 나타나 카운터의
황미숙에게 가방을 맡기고 그녀가 소개해 준 어떤
청년과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도중에 그는 카운터로 와서 황 양에게 가방을
달라고 하여 그 안에서 무엇인가 꺼내는 척하다가
가방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처음과는 반대쪽에
가방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황미숙이 그것을 얼른
받아 그대로 책상 안 오른쪽에 세워 놓았다.
사십 분 후 홍상파가 역시 비슷하게 생긴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가방을 황
양에게 맡기고 황 양이 소개해 주는 모르는 청년과
내기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황 양은 상파의 가방을
책상 왼쪽에 내려놓았다.
허걸은 상파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카운터로 가서
황 양에게 말했다. <가방 좀 잘 봐줘요, 중요한 것이
들어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상파의 가방을 가리켜
보였다. 황 양은 눈웃음을 치며 알았다고 말했다.
허걸은 여덟 시 사십 분경에 함께 당구를 치고 있는
청년에게 잠깐 실례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다음 당구장
한쪽에 있는 공중 전화로 갔다. 동전을 집어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황미숙이 수화기를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당구장이죠? 네, 그렇습니다. 손님 중에
홍상파라는 분 있으면 좀 바꿔 주십시오. 잠깐
기다리세요.> 잠시 후 홍상파가 나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지금 뭐 하고 있지요? 당구 치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그곳을 나와 지하철을 타시오.
종로 2가에 가서 S호텔에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하시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홍상파는
청년에게 일이 있어 먼저 나가 봐야겠다고 말하고
게임비를 지불한 다음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치르고는
가방을 달라고 말했다.
<이거죠?> 황미숙이 검정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상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받아 들고 당구장을 나갔다.
오 분 후 허걸이 카운터로 다가섰다. 그는 계산을
치른 다음 가방을 달라고 말했다. 황미숙은 잠자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허걸은 그것을 들고
당구장을 빠져 나왔다.
호텔에 도착한 홍상파는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했다. 허걸은 공중 전화로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에 박철민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방으로 이 전화를 연결시켜 주시오.>
잠시 후 홍상파가 나왔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찰은 없습니다. 빨리 이리로 와서 돈을 가져
가십시오. 돈을 가져 가라고? 돈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가방을 열어 봐. 이럴
수가! 바꿔치기했군. 어디서 바꿔치기했지? 아무튼
좋아. 약속대로 우리 청미를 돌려보내. 청미는
돌아가고 싶지 않대. 나하고 살고 싶다는 거야.
청미는 잊는 게 좋아.>
허걸은 당구장을 다시 찾아갔다.
"돈 가방을 가져 간 그 자와 당구를 함께 친 청년을
보면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겠나?"
황미숙은 눈을 깜박거리고 나서 대답했다.
"네,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보는 청년이라고 했지?"
"네, 하지만 그 사람 친구들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 친구들은 여기 가끔 들러요."
허걸의 낯빛이 굳어졌다.
"지금 여기에는 없나?"
"오늘은 오지 않았어요."
"그 친구들이 여기에 오면 나한테 알려 줘요."
허걸은 그녀에게 수사본부의 전화 번호와 자신의
이름을 대주었다.
"그 청년의 특징 같은 걸 아는 대로 말해 봐요."
"키는 중간 정도였어요. 눈이 크고 체크 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어요. 아, 그리고 이마에 흉터가
있었어요."
"나이는?"
"스물 댓 정도 됐어요."
그 청년을 찾을 수 있다면 단서가 잡힐지 모른다고
허걸은 생각했다. 단서가 잡히지 않더라도 그는
범인과 한참 동안 당구를 쳤으니 범인의 얼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이 당구장에 들어선 것은 일곱 시 이십
분경이었다. 그리고 당구장을 나선 것은 여덟 시
사십오 분경이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이십오 분 동안
당구장 안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동안 그는 그
청년과 당구를 쳤다. 따라서 그 청년은 범인의 얼굴을
충분히 보아 두었을 것이다.
수사본부로 돌아온 허걸은 몽타주 작성을 며칠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유는 몽타주 작성을 보다
정확히 만들어 줄 수 있는 인물의 신병을 곧 확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임
수사본부장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신임 수사본부장은 정년 퇴임을 일 년 앞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수사 계통에서만 삼십 년 넘게 몸담아 온
그는 자신의 경력에 어울리게 노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래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퇴임을 일 년
앞둔 지금은 무슨 일에나 흥분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인 것이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당구장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거기에 잠복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허걸은 조태와 함께 다시 당구장에 갔다. 당구장의
문 닫는 시간은 일정치 않지만 대개 열 시쯤이면
끝난다고 했다. 그들은 문 닫을 때까지 당구를 치다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수사본부로 돌아왔다.
낮에 북적거리던 수사본부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본부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친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얼굴만 보고도 허걸은 새로운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시일이 지나야 놈이 돈을 쓰고 다닐 거야. 아주
조심해서 말야."
수사본부장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영리한 범인이라면 경찰이
지폐의 일련 번호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함부로 돈을 쓰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하면 그 돈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찰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미의 시체 수색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시체가
어디쯤 묻혀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실시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대단히 막연한 가정하에서 서울 근교
야산이나 강변을 중심으로 아주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는 만큼 금방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것 역시 기다리고
기다려야 할 일이었다.

7월 21일 목요일, 그러니까 허걸과 조태가 당구장에
잠복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오후 네 시 조금 지나 네
명의 청년들이 당구장에 들어섰다.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것이 얼른 보기에도 건실한
청년들 같지가 않은, 건달 같은 모습들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짝을 지어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허걸은 카운터의 황미숙을 바라보았다. 황미숙이
의미 있는 눈짓을 보내며 빗을 꺼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허걸은 즉시 본부로 지원 요청을 했다.
상대는 네 명이었으므로 둘이서 그들을 감당하기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삼십 분쯤 지나자 본부 요원 열 명이 당구장에
들이닥쳤다.
당구에 열중하고 있던 손님들이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조태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실례합니다. 경찰입니다. 저쪽 네 사람한테
용무가 있으니까 다른 분들은 당구를 치셔도
좋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명 중 한 명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수사관들은 남은 세 명에게 우
하고 달려들었다. 세 명은 일제히 품속에서 칼을
빼들었다.
수사관들은 의자를 집어 들고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놀란 손님들은 다투어 밖으로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당구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칼을 버려!"
허걸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포위망을
뚫으려고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칼을 버려!"
어느새 수사본부장이 들어와 소리치고 있었다.
"버리지 않으면 쏠 테다!"
그는 권총을 뽑아 들더니 청년들을 겨누었다.
그래도 그들은 칼을 버리려 들지 않았다.
"열 셀 동안까지 칼을 던지고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
사살하겠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
여덟……아홉……열!"
주름투성이의 노회한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벼락치는 것 같은 소리가 탕 하고 났다.
뒤에 걸려 있던 대형 거울이 박살이 나자 청년들은
혼비 백산해서 칼을 던지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형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먼저 이 층에서 뛰어내렸던 청년은 다리가 부러져
도망가지도 못한 채 차에 실려 있었다.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세 명은 수사본부로 데리고 갔다.
다리가 부러진 자의 이름은 한동식이었고, 다른 세
명은 이길재, 김평오, 서삼수였다.
그들에 대한 심문은 밤새 계속되었다. 한 가지를
대놓고 묻지 않고 스스로 털어놓도록 유도했다.
한편으로는 지문을 조회하고 주소지의 경찰서에도
연락을 취했다.
새벽 네 시경에 서삼수가 먼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문 조회 결과 그는 전과가 없었다. 이길재도 전과가
없었다. 그러나 한동식과 김평오는 강도 전과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지명 수배중이었다.
"……조직 이름은 코브라입니다. 저는 멋모르고
가입했다가 어쩔 수 없이 그만 그런 짓을 하게
됐습니다."
서삼수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말해 봐. 우리한테 들어와 있는 신고와
그리고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정보와도 맞아야 하니까
자세히 말해 봐."
형사들은 긴장했다. 이제 바야흐로 청미를 유괴해
간 범행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저는 두 번밖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창동에 있는 주택을 털었습니다."
형사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여자들도 건드렸지?"
서삼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놈들은 가장 악질적인 강도 강간범들입니다."
그들을 추적해 온 형사의 말이었다.
"청미는 어디 있지?"
이 질문에 서삼수는 처음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청미가 누굽니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요."
"거짓말 마! 홍청미 말이야! 너희들이 유괴해 간
소녀 말이야!"
허걸은 코브라파의 강도 강간 행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오로지 유괴 사건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기대에 어긋나게도 서삼수는 펄쩍
뛰었다.
"유괴라니요? 어린이를 유괴해 간 적은 없습니다!
맹세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도 강간에 대해서는
자백을 했지만 청미 유괴 사건에 대해서만은 금시
초문이라는 표정들이었다.
형사들은 그쪽으로 어떻게든 이야기를 끌어내
보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13. 그는 왜 살해되었나

코브라파의 일당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수사관들은 유괴 사건 쪽으로 그들을 몰아붙였지만
그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하고 나왔다.
허걸은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너희들 가운데 오른쪽 이마에 흉터 있는 놈 이름이
뭐지? 미남 말이야. 체크 무늬 남방에 머리가 긴 놈
말이야."
"강치수입니다."
"어디 가면 그놈을 만날 수 있지?"
"강남에 있는 디스코홀에서 내일 밤 여덟 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네 명이 아무
연락 없이 한꺼번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
겁니다."
그 디스코홀의 이름은 ‘이스탄불’이었다.
7월 22일 밤이 되자 전담 수사 요원 이십 명이
이스탄불로 출동했다. 그들은 각자 여자 한 명씩을
데리고 디스코홀에 잠입해 들어갔다.
수사본부에서 요원들에게 여자를 붙여 준 것은
아니었다. 수사본부장은 각자 책임지고 여자 한
명씩을 데리고 몇 시까지 정해진 장소로 나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각자
여자를 구하러 나갔던 그들은 놀랍게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여자를 한 명씩 달고 나왔던 것이다.
사실 본부장은 반 수 정도만 여자들을 달고 나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한 명씩 달고
나왔으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고 말았다.
본부장은 수사비만 축내게 되었다고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을 문전에서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본부장은 결국 그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여자들의 직업은 각양 각색이었다. 다방 레지,
미장원 아가씨, 여대생, 과부, 여동생에다 자기
부인까지 데리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조태는 단골로
드나드는 술집 여주인을 데리고 나왔고, 허걸은
아내를 불러냈다.
허걸 부부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나들이하는 것이 가능했다. 저녁을 사줄 테니
나오라고 하자 허걸의 아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더니,
"웬일이세요?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하면서 몹시 기뻐했다.
요원들은 4인 1조가 되어 행동했다. 조태와 허걸,
그리고 다른 요원 두 명은 강치수 담당이었다.
이스탄불 맞은편에는 여섯 대의 차가 주차해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자가용들이었다. 본래가
그곳은 노상 주차장이기 때문에 거기에 차가 주차해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교통 순경이 나타나 먼저
주차해 있던 차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그 여섯 대를
주차시켰던 것이다.
먼저 주차해 있던 차의 주인들이 따지고 들자 교통
순경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협조해 달라고
사정하다가, 도대체 그 사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 보자고 늘어붙자 나중에는 나 몰라라 도망가
버렸다.
여섯 대의 차 중 다섯 대의 차 속에는 남녀 한 쌍씩
앉아 있었다. 얼른 보기에는 데이트족 같았지만
남자들은 모두 수사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손에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차 속에는 수사본부장이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세 사람 중 두
명은 수사 요원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코브라파의
서삼수였다.여섯 대의 차는 모두 불을 끄고 있었다.
허걸은 아내를 불러낸 것을 후회했다. 그는
아내에게 몹시 미안했다. 그녀는 잔뜩 부어서 그를
외면한 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 이젠 저까지 끌어들이는군요. 기가
막혀서……."
"미안해. 하는 수 있어야지. 여자를 데리고
나오라는데 나야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데리고 나올
만한 여자가 있어야지. 나한테 여자란 오직 당신
하나뿐이잖아. 자, 그러니까 이해하라구."
허걸이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뭐? 저녁을 사준다고요? 갈비탕 한 그릇
사주고…… 기가 막혀서……."
아내가 화를 낼 만도 한 것이 그들 부부가 밖에서
만난 것은 꼭 여섯 달 만이었다. 그녀는 소녀처럼
잔뜩 기대에 부풀어 나오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
구경을 시켜 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아주 소박한 바람이었는데 웬걸, 남편은 그런 소박한
바람에 찬물을 끼얹고 만 것이다.
"나 먼저 집에 갈래요."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허걸은 질겁하고 아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안 돼, 가면 안 돼! 잠깐이면 끝날 테니까 좀
기다려.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어?"
"놔요! 가겠어요!"
바로 그때 무전기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다.
"5조 나와라!"
본부장의 목소리가 차내를 울렸다.
허걸은 아내를 놓고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5조!"
"손님이 나타나셨다! 흰 티셔츠를 입은 놈이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와 동행이다!"
손님이란 강치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허걸은 이스탄불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흰
티셔츠 차림의 청년이 빨간 티셔츠를 입은 계집애와
함께 출입구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허걸의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그런가 봐."
젊은 남녀가 안으로 사라지자 허걸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아내도 따라 내렸다.그녀는 이제 집에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홀은 어느새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거의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허걸 부부는 조태가 자리잡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놈이 나타났습니다."
허걸은 턱으로 강치수를 가리켰다.
"저쪽에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 놈입니다."
"빨간 티셔츠 입고 있는 계집애하고 같이 앉아 있는
놈 말인가?"
"네, 바로 그놈입니다."
옆 테이블에는 같은 조원 두 명이 여자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허걸은 그들에게도 강치수를 지적해
주었다.
강치수가 앉아 있는 긴 테이블에는 다른 네 명의
청년들이 동석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여자들도
앉아 있었다.
"일당들이 다 모인 모양이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침내 수사본부장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
명의 수사 요원과 함께 구석 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가 호각을 불어대면 수사 요원들은 행동을
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섯 명이 몰려 앉아 있는 것이 행동을
개시하는 데 장애 요인이 되고 있었다. 따로따로 앉아
있다면 조별로 기습하기에 아주 좋으련만 놈들은
하필이면 몰려 앉아 있었다.
코브라파 다섯 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두목을 비롯한 네 명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웬일이야, 누가 연락 못 받았어?"
강치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몹시 빠른
말투였다.
네 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짝이
없었는데 강치수의 애인에게 춤 한번 추자고 손을
내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일어섰다.
그들이 플로어로 나가자 다른 세 명도 여자들을
데리고 일어섰다.
자리에는 이제 강치수 혼자 남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 조의 수사 요원들이 각자 여자들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플로어에서
춤을 추다가 그들을 덮칠 모양이었다.
"슬슬 일어서 볼까?"
조태가 허걸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제일 불리하겠는데요."
그때 웨이터가 강치수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강치수는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웨이터가 내미는 메모 쪽지를 받았다.
"이게 뭐야?"
"어떤 손님이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누가?"
강치수는 얼굴을 치켜들고 웨이터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있는 남자 손님이 부탁했습니다. 3번
룸입니다."
홀 한쪽에는 룸이 몇 개 달려 있었는데 커튼으로
내부를 가리도록 되어 있었다.
강치수는 메모지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어두워서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이터 불을 켜서 그것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빨리 피하라. 너희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다.
경찰이 너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출구는
봉쇄되어 있으니 화장실 창문을 통해 달아나라.’
강치수는 라이터 불을 껐다. 그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은 플로어에서 춤추고 있는 친구들에게
향했다. 그들에겐 신호를 보낼 여유가 없었다. 만일
신호를 보내면 경찰이 덮칠 것이다.
그는 공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의식했다. 날카로운
눈들이 번득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몸을 일으켜 3번 룸 쪽으로 향했다. 네 명의
수사 요원들은 토끼눈이 되어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치수는 커튼을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메모 쪽지를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는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허걸이 조태에게 물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칠까?"
본부장에게 좀 기다려 달라는 사인을 보낸 후
그들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들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그 주위에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강치수는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조금 있자 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나왔다. 강치수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흘겨보면서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키 높이에 사람이 겨우 하나 빠져 나갈 수 있는
창문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창문에는 나무 창살이
견고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창살 하나를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보기보다는 나무토막이 쉽게
빠졌다. 창살은 모두 네 개 달려 있었다. 못이 빠질
때 나는 끽끽 하는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창살을 하나씩
떼어 냈다.
이윽고 창살을 모두 떼어 내자 다음에는 창문을
뜯어 냈다. 창문은 먼지가 쌓이고 깨어지고 해서
더럽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하나의 직사각형 공간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몸이 호리호리한데다 움직임이 재빨라서
도망치는 데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장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장어는 벽을 타고 기어올라갔다. 먼저 머리를
밖으로 빼내 주위를 살펴보았다. 밖은 좁은
골목이었는데 몹시 어두운데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는 잘 됐다 싶었다.
숨을 몰아 쉰 다음 상체를 먼저 밖으로 뽑아 냈다.
다음에는 오른쪽 다리를 창틀에 걸쳤다. 몸을
돌리면서 두 다리를 차례대로 밖으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디스코홀이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은 일 층에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화장실
창문에서 골목 바닥까지는 별로 높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는 격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비틀거렸다. 발을 잘못 디딘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구부려 오른쪽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아이구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를 덮쳤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전혀 색다른 고통이 등을 꿰뚫고
들어왔다.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그는 상체를 뒤틀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너…… 너…… 너는……."
그의 입을 새로운 고통이 틀어막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복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으으윽!"
장어는 천천히 무릎을 꺾었다.
이윽고 그의 몸뚱이가 상대방의 발치에 흡사 썩은
통나무처럼 쿵 하고 쓰러졌다.

허걸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화장실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조태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글쎄, 그런 것 같은데……."
조태도 조그만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올라가 볼까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이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요란스럽게 홀 안을 울렸다. 그것을
신호로, 그때까지 춤을 추고 있던 수사 요원들이 네
명의 코브라파 청년들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홀 안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욕설이 어지럽게 난무했고, 탁자와 술병이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허걸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그 뒤를
조태와 두 명의 다른 요원들이 따라왔다.
"조심해!"
뒤에서 조태가 소리치는 것도 듣지 않고 허걸은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홀에서 일어나는 소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롭게 소변을 보고 있던 두 명의
청년들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듯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아가씨 한 명이 대변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눈을 부릅뜨고 두 명의 청년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한쪽도 강치수는
아니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청년 한 명이 바지 지퍼를 끌어올리며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허걸은 아가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가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덜컹거렸다.
"아무도 없나요?"
하고 허걸이 물었다.
"이상해요. 문은 안으로 잠겨 있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응답이 없어요."
아가씨는 급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가 급하게 됐군."
하고 조태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안에서 아가씨가 오줌을 누다가 기절해 버린
모양인데요."
소변을 보고 난 또 한 청년이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이 안에 아가씨가 들어갔나요?"
허걸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청년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청년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문을 부숴!"
조태가 소리치자 수사관 한 명이 문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몇 번 그렇게 잡아당겨 보았지만 문은 도무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저리 비켜!"
조태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끙 하고 힘을
쓰면서 그 육중한 몸을 통째로 문에다 내던졌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날벌레 한 마리뿐이었다.
"이럴 수가……."
허걸은 나무 창틀 조각을 구둣발로 냅다 걷어찬
다음 휑하니 뚫려 있는 창구멍을 바라보았다.
"빨리 밖으로!"
조태가 먼저 고함치면서 계단을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홀 안은 여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네 명의
코브라파 청년들은 저마다 잡히지 않으려고
발악적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수사관들에게 꼼짝없이 몰리고 있었다.
수사관 한 명은 한 청년의 등을 타고 앉아 팔을
뒤로 꺾어 손목에 수갑을 채우느라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이스탄불 뒤 좁은 골목으로 맨 처음 뛰어든 조태는
하마터면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람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몸이 비대하면서도 그럴 때는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는 그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앞을
노려보았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골목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느다란 불빛
속에 사람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뒤따라온
수사관들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치수 아닙니까?"
허걸이 마침내 신음을 토해 내듯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대꾸하려 들지 않았다.
"어디 가서 플래시 좀 빌려 와!"
조태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치자 수사관 두
명이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침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태와 허걸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빗방울이 차츰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소낙비가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플래시를 구하러 갔던 수사관들이 플래시를 켜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강치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향하고
있었고, 얼굴 근육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손은 복부 위에 얹혀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칼이
손잡이 부분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옷도 손도 모두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런 모든 것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빨리 구급차를 불러!"
조태가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고, 한 사람이 골목을
뛰어나갔다.
"차가 오기 전에 끝나겠는데요."
라고 허걸이 중얼거렸다.
그는 무릎을 꺾고 앉아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강치수를 내려다보며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강치수! 너는 왜 죽어야 하지?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했지? 그자가 누구야? 말해 봐, 누구냔 말이야!"
강치수의 호흡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한참 만에 내쉬곤 했다. 여러 사람들의 발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강치수! 우리는 경찰이야!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어! 넌 살아날 수 없어!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봐! 한마디만 말이야!"
강치수의 오른손이 조금 쳐들려지는 듯하다가 도로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허걸은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이 조용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강치수의 입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2……4……3……."
그는 계속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 이상 소리가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말해 봐! 잘 안 들려! 좀더 큰 소리로 말해 봐!"
갑자기 강치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더 이상 숨을 내쉬지 않았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이다.
허걸은 허공을 향해 떠 있는 눈을 감겨 주면서
중얼거렸다.
"2,4,3이라고? 그게 뭐지?"
허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뭐라고 그랬지?"
수사본부장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암호 숫자 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2,4,3이라고 했습니다."
"2,4,3이라고? 그게 뭐지?"
"모르겠습니다."
허걸은 다시 엎드려 강치수의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메모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14. 정보가 새고 있다

수사반이 죽은 강치수에게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숨을 넘기기 직전에 중얼거린
‘2,4,3’이라는 암호 같은 숫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메모 쪽지였다.
‘2,4,3’이라는 숫자는 수사관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숫자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반면
메모 쪽지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빨리 피하라. 너희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다.
경찰이 너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출구는
봉쇄되어 있으니 화장실 창문을 통해 달아나라.’
그것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것을 한 번씩 읽어
본 수사 요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의 수사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수사본부장은 흥분한 나머지 책상을 두드리며 수사
요원들을 쏘아보았다. 그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체포 직전에 정보가 새어 나감으로써 범인
체포에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지도 모를 인물을
잃었으니 말이다.
"클럽에서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자의 인상이 당구장에서 돈 가방을 가지고 간 자의
인상과 흡사합니다. 웨이터의 증언입니다."
조태가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웨이터를 데려다가 신문했던 것이다.
그 웨이터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달해 주었던 청년인데, 그 바람에
장시간은 아니지만 수사본부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 자가 바로 범인이야! 범인은 대담하게도 나이트
클럽 안에까지 들어왔던 게 분명해! 그 메모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클럽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 놈은 그러니까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다가
달아난 거야!"
본부장은 억울해 못 견디겠다는 투로 말했다.
수사 요원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사건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제
사건은 단순한 유괴 사건 정도가 아니었다. 엄연히
살인 사건으로 확대된 것이다.
"놈은 왜 기를 쓰고 그 메모지를 강치수에게 전달해
주려고 했을까?"
본부장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거야 강치수를 유인해 내어 제거하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한 수사관이 재빨리 말했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강치수는 놈이 누군지 알고
있어. 그래서 범인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강치수를
제거한 거야. 문제는 범인이 우리가 이스탄불을
덮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점이야. 이건
정보가 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야. 정보가 새고
있어! 이 중에 누군가가……."
본부장은 마지막 말만은 차마 할 수 없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범인은 적시에 나타나서 강치수를 제거한 것
같습니다."
허걸이 말했다. 그 역시 정보가 새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수사 정보가 새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었다.
"왜 정보가 새고 있지? 범인이 수사본부 안에 도청
장치라도 했단 말인가?"
"범인은 혼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범이 있지
않고는 수사 정보를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제부터 여러분이 신경을 쓸 것은 수사 정보가 새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야. 이 안에서 주고받은 말을
밖에 나가 흘리면 절대 안 돼.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것은 일단 내 허가를 받고 나서 하도록. 그리고
정보가 새고 있는 곳을 빠른 시간 안에 알아내야 해.
그걸 알아내면 범인은 체포한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본부장은 조태와 허걸을 따로 불러 정보가
누구로부터 새고 있는지 그것을 탐지해 내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범인이 혼자가 아니고 공범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수사본부를 나서면서 허걸이 조태에게 물었다.
"글쎄,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범인은 혼자일
수도 있습니다. 수사 정보란 우연히 얻어 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난 우연이라고 생각지는 않아."
"저도 우연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정보가 어디서 새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내지?"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죠.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까운 데서 우리들의 움직임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사건이 제1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해.
유괴 사건이 마침내 살인 사건을 몰고 왔다고 생각해.
제2, 제3의 살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청미는 이미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더 커졌어.
강치수를 칼로 찔러 죽인 잔인성으로 보아 인질을
지금까지 살려두었을 것 같지가 않아."
"강치수를 살해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예외라는 것에 저는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언제나 변수가 작용하게 마련이니까요."
"자넨 언제나 낙관적이야."
경찰은 코브라파 일당을 밤새 신문했다. 죽은
강치수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들의 다른 범죄 행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경찰은 오로지 그들이 유괴범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번 유괴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추궁해 들어갔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우면서 신문한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괴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범인의 얼굴을 알지도 못했다.
홍상파가 일억을 날리던 날 밤 코브라파 일당은
당구장에 있지도 않았다. 오직 강치수만이 당구장에서
범인과 당구를 쳤던 것이다.
강치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몸이 아니었다.
천호동에 있는 사글세방에는 그의 아내와 일곱
살짜리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만삭이 된
몸으로 형사들을 맞이했다.
형사들은 먼저 범인의 몽타주를 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본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까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형사들은 다시 몽타주를
보이면서,
"이놈이 바로 당신 남편을 죽인 범인이오. 집에 한
번쯤 찾아왔을 텐데 그래도 모르겠소?"
하고 다그쳤지만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신원 조회 결과 강치수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칠 년
전 그는 강도 강간으로 사 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경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전과가 없었다. 그러나
코브라파 일당을 족친 결과 그 동안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열다섯 건이나 되었다.
허걸은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해 준 이스탄불의
웨이터를 다시 한 번 만나 보았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자세히
말이야. 이건 아주 중요한 거니까 귀찮겠지만
사실대로, 그리고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요."
지칠 대로 지친 웨이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이야기했는데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그 손님 전에 본
적이 있나?"
"아뇨, 처음이에요. 그 손님이 들어온 것은 오후
여덟 시경이었어요. 룸을 달라고 하기에 3번 룸으로
안내했어요. 어떤 아가씨하고 함께 왔었어요."
웨이터의 말이 그 아가씨는 미인측에 들기는 어려운
그저 그렇고 그런 차림의 좀 야한 여자였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는 것이 못생겼기 때문에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손님은 맥주 네 병과 안주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아홉 시쯤 되었을 때 저를 불렀습니다. 술값을
미리 계산하면서 거스름돈 오천 원을 저에게 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메모 쪽지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흰 티셔츠를 입은 청년을 가리키면서 그
청년에게 쪽지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전해 주었을 뿐입니다. 전 그 사람
알지도 못하고,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웨이터는 피곤에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이 클럽을 떠난 것은 언제였나?"
"그러니까 쪽지를 전해 주고 나서 바로 가보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여자와 함께 사라졌나?"
"네, 3번 룸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요."
"쪽지를 전해 받은 청년은 뭐라고 했나?"
"이게 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3번 룸에 있는
손님이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3번 룸에 가보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때는 그
손님이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3번 룸에 있던 그 손님 인상 착의를 말해 주겠나?
자세히 말이야."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테가 검은
안경이었습니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나이는 마흔쯤
돼 보였습니다. 턱은 뾰족했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말투가
몹시 느리고……어쩐지 기분 나쁜 목소리였습니다.
머리는 기름으로 발라 붙였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흰색 사파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허걸은 다음에 강치수의 애인을 만나 보았다.
그녀는 강치수가 피살되던 날 밤 그와 함께
이스탄불에 춤추러 왔던 아가씨였다.
그녀는 여대생으로 강치수를 알게 된 지는 두 달쯤
된다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강치수에게 아내가
있는지도 모른 채 그와 결혼까지 약속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치수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 사람 본 적 있나요? 강치수와 자주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허걸은 범인의 몽타주를 내보였다.
"본 적 없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2,4,3’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떻게 수사 정보가 새어 나갔을까. 정말 공범이
있는 것일까.
범인은 앞으로 좀처럼 자신을 노출시키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하긴 자신을 노출시킬 일도 앞으로는 별로
없을 것이다.
범인은 지금까지 두 번 자신을 노출시켰다. 한 번은
당구장에 나타나 돈 가방을 챙겨 갈 때, 또 한 번은
강치수를 제거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나타난 것이
그것이다.
놈은 수사 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삼갈 것이다. 일단
위험 요인을 제거한 이상 수사 정보에 접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수사원 외에 수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먼저 생각난 사람이
홍상파였다.
홍상파·송묘임·송태하·송지회로 이어지는
얼굴들이 어지럽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과 함께
기자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 홍상파:그는 유괴된 청미의 아버지다. 그에게
어떻게 의심을 둔단 말인가.
* 송묘임:그녀는 청미의 어머니다. 그녀를 의심할
수는 없다.
* 송태하:그는 청미의 외삼촌이다. 왜 조카를
유괴하겠는가.
* 송지회:그녀는 청미의 이모이다. 그녀 역시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 기자들:그들은 항상 수사 본부에 드나들면서
정보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수사반:정말 곤란한 상대다. 의심하는 것은
좋지만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지는 말자.
그러고 보니 아무도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
모두가 신원이 확실하고 청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일단은 모든
주위 사람들을 의심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해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사관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을
일단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짚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청미의
외삼촌인 송태하 기자였다. 그는 청미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수사 정보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기자가 아닌가.
그는 물론 경찰이 이스탄불을 덮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이 모르는 것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정보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를 맞대 놓고 신문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송태하 기자의 일과는 아침 아홉 시에 신문사에
출근하여 한 시간 가량 머물다가 수사본부로 가서
그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 다음 오후 다섯 시에
신문사로 돌아와 여섯 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퇴근 후에도 그는 수사본부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 깊어서야 팔 층에
있는 누나의 아파트로 가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강치수가 살해된 지 이틀 후, 그러니까 7월 24일
오후 다섯 시 조금 지나 J일보 사회부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전화통 앞에 앉아 있던 기자가
전화를 받더니 그것을 송태하 기자에게 넘겼다.
"나……장만두네, 잘 있었나?"
태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누구시라구요?"
"장만두라니까. 기억하겠나?"
"아이구, 난 또 누구시라구요! 하도 오랜만에
전화를 주셔서 미처 못 알아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인사가 지난 후 상대방은 물었다.
"저녁에 시간 좀 낼 수 없겠나?"
태하는 난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를
만나야 할 이유 같은 것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온 사람한테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따져 묻기도 곤란했다.
그런 것도 그런 것이지만 그는 퇴근 후에 약속이
있었다.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었다. 그들은
10월쯤 해서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두 달 전
맞선을 보고 서로 마음에 들어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조카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일주일이
넘었다.
그도 여자가 보고 싶었고 여자도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네, 좋습니다."
그는 장만두를 만나 보기로 했다. 뭔가 부탁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여섯 시 반에 어떤가?"
"일곱 시면 좋겠는데요."
태하는 여섯 시 반에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만났다.
그리고 중요한 일로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 차만 한 잔
마시고 일어섰다. 그의 애인은 모욕을 당한 듯
얼굴빛이 붉어졌다.
일곱 시 오 분에 그는 장만두와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섰다. 장만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구
년 만의 대면이었다.
장만두는 많이 늙어 있었다. 이제 마흔인데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 보였고 얼굴의 주름살도
훨씬 많아져 있었다. 그는 중키에 마른 편이었고
얼굴빛이 조금 검어 보였다.
젊은 시절의 희망을 접어 둔 채 외롭게 나이
들어가는 중년 사내의 초라함 같은 것이 그의 몸에는
배어 있는 듯했다.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의 맑은
눈빛이었다. 누나가 이 남자에게 끌린 것은 저 눈빛
때문이었을 거야 하고 태하는 생각했다.
장만두. 그는 송묘임의 과거 애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한 채 비련으로 끝나야
했다. 그것이 순전히 누이 때문이라는 것을 태하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다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를 마시는 동안은 의례적인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뭐 여전하지. 지금은 K여고에 있네."
그는 수학 교사였다. 송묘임은 여고 시절 그에게
수학을 배웠다. 그러니까 그는 송묘임의 은사인
셈이었다.
"자제분은 몇이나 되십니까?"
그 질문에 장만두는 쓸쓸하게 웃었다.
"난 아직 결혼을 못 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뭉클한 것이 가슴에 와닿는 것을
태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괜한 것을 물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장만두가 그의 누이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누이와 헤어진 뒤
아직까지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누이와 장만두가 어떻게 맺어지게 되었는가는
태하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은
집안이 다 알도록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
태하도 그를 좋아했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법 없이도 살 만큼
선량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그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일개 평교사에게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나이 차이가 많다느니
신랑측이 너무 가난하다느니 하는 것들이 들먹여졌다.
사실 장만두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그는 오
남매의 맏이였다. 그리고 부모가 다 살아 있었다.
따라서 결혼하면 묘임이 그 집안에 들어가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시동생들의 뒤치다꺼리까지 맡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묘임의 집안에서 한사코 반대하고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묘임은 그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녀 앞에 홍상파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를 보자 그녀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는 잘생기고 멋진 사내였다. 그리고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는 남자 같았다. 그에 비해 장만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학 교사였다.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장만두를 떠나 홍상파의
품에 안겼다. 그것이 지금부터 구 년 전의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그를 배신한 셈이었다.
태하는 그때 누나를 신랄하게 비난했었다. 그때
그는 대학생이었는데, 누나의 배신 행위가 더없이
비열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세월이 흐르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장만두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뇌리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참, 제가 J일보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셨습니까?"
"우리는 각별한 사이였지 않았나. 난 항상 만나지는
못해도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지. 그리고 난 J일보
애독자 아닌가. 사회면 기사 끝에 실리는 자네 이름을
보고 자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자네 기사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네."
"그러셨군요."
묘임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은 그의 말마따나 각별한
사이였다. 태하는 앞으로 매형이 될 그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누나가 그와 헤어짐으로 해서 태하
역시 그를 만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차를 마시고 난 그들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두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태하를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자네 누나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
알고 있지."
글라스에 맥주를 따라 주면서 만두가 말했다.
마침내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태하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누님 댁은 풍비 박산입니다. 모든 것이 정지
상태입니다."
"아이 이름이 청미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아주 귀여운 아입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나?"
"절망적입니다."
태하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장만두의 얼굴이 더욱 검어지는
듯했다.
"왜 하필 그 애를……."
만두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왜 하필 그 애를 유괴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5. 과거의 애인

"왜 하필 그 애를……."
만두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괴로운 표정으로 담배만 피우다가 이윽고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태하를 바라보았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네."
이 사람은 아직도 누나를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태하는 가슴이 쓰려 왔다. 한 번도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그는 마흔 살이나
먹은 사나이의 그와 같은 순수한 감정이 퍽이나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감사합니다."
"난 자식을 길러 보지는 않았지만……그런 경우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네."
"정말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환장할 지경입니다.
유괴야말로 범죄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범죄입니다."
"내가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신문을 보고는
전율했네. 하필이면 누님한테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했네."
"누님의 딸을 보신 적 있습니까?"
"유괴된 아이 말인가?"
"네, 그 아이 이름이 홍청미입니다."
만두의 시선이 태하의 눈길을 벗어나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마치 과거를 더듬는 것 같았다.
"그 아이라면……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우연히 본
적이 있지. 오 년 전인가 육 년 전에……고궁에서 본
적이 있어. 가을이었는데……고궁에 노란 은행잎이
비단처럼 깔려 있었는데……그 위를 귀여운 아기가
아장 걸음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지. 그때
누나는……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지.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
누나는 아이가 몇이지?"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눈길은 호수처럼 깊이 잠겨
있었다.
"그 애 하나뿐입니다."
"저런……정말 충격이 크겠군."
그는 미간을 모으며 혀를 끌끌 찼다.
"만일 청미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되면 누님의 가정은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말 겁니다."
"정말 큰일이군, 큰일이야."
만두는 크게 한탄했다.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시간마다
피가 마르는 기분입니다."
"그럴 테지. 신문에 보니까 누나가 입원했다고
하던데 좀 어떤 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가 결국 의식을 잃는
바람에 병원으로 실려 갔었죠. 지금은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만……청미가 돌아오기 전에는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나?"
"을지로에 있는 H병원입니다."
"내가 한번 가보고 싶은데……."
만두는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에 태하는 멈칫했다. 비로소 장만두가 왜
갑자기 그를 만나자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태하는 얼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누나가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거기서 혹시나 매형이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누나의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안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야, 몇 호실인지만 가르쳐 주게. 이럴 때
찾아보지 않고 언제 찾아보겠나.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좀 가르쳐 주게."
태하는 난처했다. 누나를 만나 보겠다는 만두의
의지는 의외로 강경한 것 같았다. 생각 끝에 결국
태하는 만두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509호실입니다."
"병실에서는 누가 간호하고 있나?"
"아마 어머니 아니면 지회가 간호하고 있을
겁니다."
지회도 만두를 알고 있었다.
"사실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자네한테 연락을
취한 거지. 내가 하는 짓이 과연 옳은 짓인지 그른
짓인지 따지기에 앞서……그런 불행을 당했는데 모른
체하고 있을 수가 없었어."
"감사합니다. 누나도 형님을 보시면 기뻐할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 저하고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쁘지 않나?"
"괜찮습니다."
그들은 병원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묘임은 특실에 입원해 있었다. 청미가 유괴된 이후
지금까지 내내 울고만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붙어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넋빠진 상태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아무것도 먹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링거 주사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인 지회는 자신이 경영하는 의상실은
종업원들에게 맡겨둔 채 잠시도 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언니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하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묘임은 여전히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지회는 책을 보고
있었다.
두 여자는 태하의 표정부터 살폈다. 반가운
소식이라도 없을까 해서였다. 태하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무슨 소식 없었어요?"
그래도 지회가 가느다란 희망을 품은 채 물었다.
"없어."
태하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손님이 왔는데……."
묘임은 말없이 태하를 바라보았고 지회는 누가
왔느냐고 물었다.
"장만두 씨가 오셨어요."
태하는 누나에게 똑바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스쳐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머, 그분이 여긴 웬일이에요?"
지회가 놀라서 물었다.
"문병 오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모시고 왔어."
"오빠도 참, 이제 와서 그분을 모시고 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어쩌자는 게 아니야. 순수한 뜻으로 받아 줘서
나쁠 것 없잖아."
"형부라도 오시면 어떡 할려고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건 걱정 마."
태하가 묘임을 보니 그녀는 어느새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핏기 없이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는
분명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옷 매무시를 고쳤다.
"언니, 어떡하실래요?"
지회가 묘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묘임은 갑자기 딴 사람이 된 듯했다. 정색을 하고
문 쪽을 바라봤다. 태하는 밖에 기다리고 있는 만두를
불러 들였다.
만두는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띤 채 병실로 들어섰다.
묘임과 만두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두의 시선이 지회에게 향했다.
지회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지회가 먼저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인사했다.
"아, 지회……."
만두는 성숙할 대로 성숙한 미녀를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가 여고생일 때 보고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태하가 눈짓을 보내자 지회는 병실을 나갔다.
태하도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병실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만두는 침대가로 다가섰다.
묘임은 과거의 애인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만두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묘임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이는가 했더니 이윽고 야윈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두가 옆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떨리는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몸에 얼굴을 묻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우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는 여자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 이상으로 정감어린
모습이었다.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일
수는 없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모습을 취할 수가 있었다.
한참 울고 난 묘임은 고개를 들어 과거의 애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들릴락말락하게,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남자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군. 너무 야위었어. 이러면 안 돼. 힘을
내야지. 힘이 없으면 아이를 찾지 못해. 강하지
않으면 범인을 이기지 못해."
"그 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요. 자다가도 들려서 잠을
깨곤 해요. 우리 청미를 찾아 주세요. 청미가
없으면…… 전 살 수 없어요. 우리 청미를 찾아
주세요."
그녀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남자의 손에 얼굴을
비비면서 흐느꼈다.
"왜 하필 그 애를……. 죽일 놈 같으니……."
남자의 얼굴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그 애가 없으면 전 살 수 없어요. 그 애가
없어졌을 때……제일 먼저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선생님밖에 생각나지 않았어요. 오늘도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이렇게 오신 걸
보니까……신비한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결혼하셨죠?"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그녀는 만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결혼할 수가 없어,
도저히……."
여자는 남자의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떨리는 소리로,
"선생님……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무슨 소용 있어."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했어요. 시간이 흐르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은 더욱
깊어 가기만 했어요."
"그런 생각은 집어치워요. 모두 과거의 일이야.
한때의 불장난으로 생각하면 돼."
남자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다.
"불장난이 아니에요. 선생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이렇게 찾아오시지 않았어요. 선생님의 그
눈빛을 보고 저는 알았어요. 선생님의 감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여기 찾아온 것은 옛날 감정을 품고 찾아온
게 아니야. 나는 옛날의 그 감정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야. 오해하지 마."
"그럼 왜 오셨어요? 두 분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실려고 찾아오셨어요?"
"모른 체할 수가 없었어.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나서 오래도록 생각해 봤어. 결국 무엇엔가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태하를 찾았었지."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아요. 용서해 주세요."
"벌써…… 용서했어."
여자는 어깨를 떨었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왜 하필 그 애를……."
그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혼자말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한테 또 한 번 죄를 지었어요."
남자는 아무 대꾸 없이 등을 보인 채 장승처럼 서
있었다.

허걸 형사는 병원 건물 맞은편 골목에 서서
병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줄곧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송태하 기자를 미행해서 그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송 기자보다도 그와 함께
병원에 들어간 그 비쩍 마른 중년의 사나이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처음 보는 사나이였다. 나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송 기자와 그 사나이는 친구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묘임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함께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녀를 문병 온 것 같았다. 묘임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 아닐까. 관계가 있다면 어떤 관계일까. 단순한
친척 관계가 아닐까. 아무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송 기자와 그 사나이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허 형사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그들을 미행했다.
송태하는 현역 기자이기 때문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그에게 미행을 눈치채일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허
형사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따라갔다.
얼마쯤 걸어가던 그들은 이윽고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허 형사는 별수없이 밖에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이미 열 시가 지나고 있었다. 생각 끝에
그는 조태에게 전화를 걸어 지원을 부탁했다. 상황
설명을 하고 나서 수사 요원 두 명만 급히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십 분쯤 지나 조태는 수사 요원
두 명을 데리고 직접 달려왔다.
두 명은 송 기자에게 얼굴이 팔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카페에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고 나왔다.
"두 사람은 카운터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서 바텐더에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좀 들어 두라고 해."
그 형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카운터를
피해 한쪽 구석진 곳에 앉아 바텐더를 불렀다.
바텐더는 여자였다.
그녀가 의아한 듯 다가오자 형사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바쁘기 때문에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형사는 잠시면 된다고 하면서 그녀를
붙들어 앉혔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주고
나서 용건을 이야기했다.
"자,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팁을 주자 그녀는 안 받으려고 했다. 형사는 억지로
그녀의 손에 팁을 쥐어주고 나서 다시 들르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것도 모르고 송태하와 장만두는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 카페에서 나온 것은 열한 시 십 분
전이었다. 그들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까의 그
형사가 급히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세 사람은 송
기자와 장만두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허걸과 조태는 차도 건너편으로 건너가 그들을
미행했다. 차도 이쪽에서는 형사 하나가 그들을
따라갔다.
갑자기 송 기자가 손을 번쩍 들어 빈 택시를
잡았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장만두 혼자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조태는 이쪽에 있는 형사에게 빨리 택시를
잡아타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허걸도 급히 택시를
잡았다.
"앞차로 가겠습니다, 뒤차로 오십시오."
한 택시에 둘이 타는 것보다는 따로따로 타고
미행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허걸이 먼저 혼자서
택시를 잡아타고 출발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거리에는 빈 택시가 즐비했다. 허걸이
뒤돌아보니 조태도 막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이제 송
기자는 형사들의 미행 대상이 아니었다.
세 명의 형사들은 이십오 분쯤 지나 어느 아파트
앞에서 다시 만났다. 맨 먼저 도착한 것은 박이라는
성을 가진 형사였다. 그 뒤를 이어 허걸이 택시에서
내렸고 조금 후에는 조태가 탄 택시가 굴러 들어왔다.
그곳은 서민 아파트 단지였다. 낡은 아파트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는 공간에 형사들은 한동안
서 있었다.
"아, 저기 불이 들어왔습니다. 저 집인
모양입니다."
박 형사가 손을 들어 오 층을 가리켰다.
"저 안으로 들어갔나?"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아파트 입구를 가리키며
형사 반장이 물었다.
"네, 저리로 들어갔습니다."
서민 아파트 단지라 경비실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들어가 보지."
조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걸은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괜히 헛다리 짚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더라도 안 됩니다.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반장님은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조태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밤이 늦었다고
해서 내일로 일을 미룰 수가 없었다.
"자네는 아까 그 카페에 전화를 걸어 봐. 우리는
반장을 만나 볼 테니까."
박 형사는 공중 전화를 찾아 달려갔다. 마침 단지
안에 공중 전화가 있었다. 카페에서는 그때까지
형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박 형사의 전화를 받았다.
반장은 형사들의 방문을 받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밤늦게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쳤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장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형사들은 불안해 하는 그녀를 밖으로
불러냈다.
"저기 저 집은 몇 호입니까? 저기 오 층에 불이
켜져 있는 집 말입니다."
"506호예요."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어떤 남자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어요."
"중키에 마른 남자 말입니까? 나이는 마흔
안팎이고……."
"네, 맞아요."
"뭐 하는 사람입니까?"
"학교 선생님이래요."
"어느 학교에 나가는가요?"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어요. 여학생들이 가끔
찾아오곤 해요."
"혹시 그 집에 어린 소녀가 없던가요? 여덟 살쯤 된
소녀 말입니다."
"그런 애는 없던데요."
"우리가 이렇게 찾아와서 그 사람에 대해서 물은 걸
누구한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하면
큰일납니다. 아시겠죠?"
"이야기 안 해요."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장 뭐라고 하는데……. 잠깐 기다려 보세요,
수첩에 적어 놓은 게 있으니까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박 형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유괴된 아이에 대한
것이었답니다. 그 사람은 송묘임을 잘 아는 것
같았답니다. 송 기자가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아는 체를 하곤 했답니다. 송 기자는 그
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렀답니다. 그 사람은 송묘임과
청미에 대해서 몹시 걱정을 늘어놓은 모양입니다."
"송 기자가 그 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조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그런 모양입니다."
"헛다리 짚은 거 아니야?"
조태가 허걸을 향해 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되는 형인지 알아봐야죠."
허걸은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쏴아 하고 쏟아졌다. 그들은
비를 피해 아파트 건물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반장 여인이 달려왔다.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장만두라고 해요."
라고 말했다.
"만두라고요? 이름 한번 잊어먹지 않겠군."
그들은 관할 파출소로 가서 장만두의 카드를
찾아보았다. 파출소에는 관할 구역 주민들에 대한
신상 조사 카드가 세대별로 비치되어 있었다.
장만두는 세대주였다. 나이는 마흔 살이었고 현재
K여고에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은 그와 예순셋의
노모뿐이었다.
"마흔 살이나 먹었는데 혼자란 말인가?"
조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K여고로 가봐야겠습니다."
허걸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조태는 박 형사를 본부로
돌려보내고 못마땅한 얼굴로 허걸을 따라갔다.
"밤 새에 끝장을 볼 셈인가?"
"이런 상태에서 두 다릴 뻗고 잘 수야 없지
않습니까."
K여고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거의 사십 분 가까이
달려서야 그곳에 닿을 수가 있었다.
숙직 근무를 보고 있던 두 명의 교사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조태는 신분을 밝힌 다음 직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좀 보자고 했다. 장만두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묻지 않았다.
두 명의 젊은 교사는 파자마 바람으로 그들을
교무실로 안내했다.


16. 스승과 제자

조금 후 형사들 앞에 인사 기록 카드 묶음이
놓여졌다.
교사 두 명은 형사들 앞에 붙어서서 숨을 죽이고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만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허걸은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영문도 모르는 교사들은 형사가 요구하는
대로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허걸은 재빨리 장만두 교사의 카드를 찾아보았다.
카드가 있었다. 거기에 붙어 있는 사진은 아까 저녁때
송태하 기자와 만난 그 얼굴이 틀림없었다.
허걸은 카드에 적혀 있는 인적 사항을 수첩에다
급히 적어 넣었다.

본 명:장만두(張萬斗)
생년월일:1944년 5월 10일생
본 적:경기도 수원시 ××동 256번지
주 소:서울 도봉구 ×동 175번지 D아파트 5동 506호
가족관계:김순이(61세, 모친)
신 장:171센티미터
흉 위:88센티미터
혈 액 형:AB형
상 벌:없음
담당과목:수학
학 력:S사대 수학과 졸업(1968년)
경 력:H여고(1970·3~1978·5)/K여고(1978·51~)

인적 사항을 모두 적고 난 형사들은 복도에 나가
있는 교사들을 불러들였다.
"매우 미안합니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태는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교사들은 궁금한 눈치를 보였다.
"미안합니다. 말씀드렸으면 좋겠지만 사정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우리가 찾아온 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장 선생님한테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고지식한 교사들인지라 밤 사이에 일어난 일을
교장한테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밤중에 형사들이 학교에 찾아와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교직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조사했다는 것은 교사들이 볼 때는 매우 큰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학교를 나온 형사들은 수사본부로 향하다가 목을
축이기 위해 도중에 어느 맥주 홀에 들렀다. 그들은
생맥수 한 잔씩을 시켜 놓고 앉아 장만두에 대해
이야기했다.
허걸이 적어 가지고 온 인적 사항을 훑어보고 난
조태는,
"마흔 살이나 먹은 사내치고는 이력이 그야말로
단순하고 깨끗하군."
하고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범 대학을 졸업해서
지금까지 교편을 잡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교도 한 번밖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건 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고……그 사람이 송묘임과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병원까지
찾아간 것을 보면 어떤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알아볼 수 있는 한 알아봐. 난 다른 걸
조사해야겠어. 이러다간 정말 미궁에 빠지겠어."
유괴된 아이를 찾기는커녕 일억 원을 날린데다 살인
사건까지 발생한 터였다. 경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 시간에 묘임은 과거의 은사이자 애인이었던
장만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갑작스런 방문은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확실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생각할 때면 그녀는 슬픈 사랑의 종말에 항상
목이 잠기곤 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으며 진실했던가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늦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장만두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그때 그녀는 H여고 3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장만두가 그 학교에 총각 교사로
부임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부터였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의 벽을 허물어뜨려 나갔다.
그리고 묘임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애인 관계로 확고하게 굳어져 있었다.
대학 사 년 동안을 묘임은 완전히 만두의 그늘
속에서 그의 사랑을 마음껏 향유하며 보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동적이라거나 하는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여학교 시절 품었던 선생님에 대한 동경과 사모의
정 같은 것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더 멋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만두가 그녀의 주위에 쌓아 올린 애정의
벽은 높고도 튼튼했다. 그녀는 감히 그 벽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
시기를 그녀의 대학 졸업 후로 두 사람은 잡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 묘임의
부모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묘임은 유복한 집안의 맏딸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엘리트 청년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부모가
오래 전부터 품어 온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교 시절의
선생님과 결혼하겠다니, 그녀의 부모가 볼 때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소리였다.
속된 말로 장만두는 우선 엘리트가 아니었다.
월급이나 받고 근근이 살아가는, 장래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평범한 수학 교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나이도 많은 편이었다. 묘임과의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되었다.
그밖에도 그의 집안은 너무나 가난했다. 부모가
살아 있는데다 그는 오 남매의 맏이였다. 묘임이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 집안에 들어가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넷이나 되는 시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어느 부모가 그런 결혼을 찬성하겠는가.
장만두와의 관계가 그런 이유들로 해서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묘임 앞에 키가 훤칠하게 큰
미남이 나타났다. 바로 지금의 남편인 홍상파였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어머니의 극성 때문이었다.
좋은 남자가 있으니 한번 선을 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그녀는 마지못해 약속 장소에 나가게 되었는데
첫눈에 그만 홍상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홍상파도 그녀에게 반했는지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는 집안도 좋은 편이었고 학벌도 훌륭했고, 재벌
기업의 엘리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모든 점이 묘임의
부모 마음에 들었고, 처녀들이 좋아할 조건과 매력을
그는 갖추고 있었다.
만두와의 관계를 육 년 동안이나 길게 질질 끌어온
것에 비한다면 상파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전광 석화
같았다고나 할까. 그들의 감정은 만난 순간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전에 묘임의 어머니는 만두를 따로 불러 만났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는 언제까지나 스승과 제자로 남아
있어야지 그 관계가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점잖게
꾸짖었다.
철도 없는 나이 어린것을 스승이 유혹했는지,
아니면 묘임이 겁도 없이 스승에게 달려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과거는 과거고 이제는 두 사람 다
제각기 자기 갈 길로 가야 하지 않느냐,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많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맞지
않으니 터무니없는 생각일랑 하지도 말아 달라,
묘임은 곧 결혼하게 될 것 같다 등등.
만두는 그 자리에서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 나와 버렸는데 다음 날 묘임으로부터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되었다.
그때가 결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그녀는 울며 그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행동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 날 밤 그들은 이별의 마지막 의식으로 육체
관계를 가졌고, 그리고 헤어졌다. 물론 그 전에도
육체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그 날 밤의 관계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이 벌써 구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육 년 전, 그러니까
헤어진 지 사 년이 되던 해 가을 어느 날 고궁에서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그때 묘임의 남편은 회사일로 외국에 출장중이었고,
묘임은 그 날 딸애를 데리고 은행잎이 노랗게 깔린
고궁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만두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만두는 그때 혼자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언니, 그 사람 생각하고 있어요?"
지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묘임은 침대 위에 앉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회의 물음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언니, 그 사람 생각하지 말아요."
묘임은 여전히 그린 듯이 앉아 있다.
"지금 와서 어쩌자고 찾아온 거죠?"
지회는 답답했다. 언니가 뭐라고 말해 주면
좋겠는데 벙어리가 됐는지 도무지 말이 없다.
"그 사람이 뭐라고 말했어요?"
"……."
"아직도 독신이라면서요? 혼자 살고 있는 이유가
뭔가요? 아직도 언니를 못 잊어 하고 있나요?"
"……."
"다시 찾아오면 가라고 하세요. 언니가 말하기
곤란하면 제가 말하겠어요. 지금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잖아요."
묘임은 비로소 얼굴을 돌려 지회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 날 저녁, 잠이 오지 않기는 장만두도
마찬가지였다. 못 마시는 술을 꽤 마셨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는 17평짜리 서민 아파트에서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 동안 그는 집안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할 수 있었다. 오 남매의 맏이인 그는 그
동안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켜 내보냈고 아버지의
장례식까지 도맡아 치러야 했었다.
그 힘든 일들을 그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어렵게나마 해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모두
끝내고 나니 그의 나이 어느새 마흔이 다 되어
있었다.
그의 노모는 중년이 다 된 아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밥이며 빨래가 제일 문제였다.
아들이 그 나이에 손수 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한다는
것이 노모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둘째 아들네 집에서 함께 있자는
것을 뿌리치고 지금까지 맏아들 뒤치다꺼리를
해주면서 그와 단둘이 살아오고 있는 터였다.
만두는 그러한 노모에게 더할 수 없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노모를 위해서 하기 싫은
결혼을 아무하고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엄연한 독신주의자였다. 혼자
살기로 결심한 것은 구 년 전 묘임과 헤어지고
나서였다. 그 결심이 흔들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 드러누운 채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었다. 불을 붙인 다음 두어 모금
연기를 내뿜고 나서 몸을 돌려 엎드렸다. 가슴에
베개를 괸 다음 왼손으로 턱을 받쳤다.
밖에는 비내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비바람이
창문을 후려치는 바람에 창문이 떨어져 나갈 듯
흔들거렸다. 지은 지 오래된 서민 아파트였기 때문에
창틀 같은 것들이 이미 뒤틀려 있었고, 그래서 바람만
조금 불어도 위태롭게 덜컹거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지 않은 월급이긴 하지만 제대로 모아
왔다면 번듯한 아파트 하나쯤은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또 그들을 모두
결혼시키느라고 도무지 저축이란 것을 해볼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담뱃불이 빨갛게 달아오르다가
사그라들곤 했다. 간간이 옆방에서 기침소리가
쿨럭쿨럭 들려 오곤 했다.
그는 병원에 들러 묘임을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미 과거의
여자가 아닌가. 얼어붙었던 가슴이 녹으면서 피를
흘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여자한테 무슨 불행이
닥쳤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너무 감상적이었다. 이제 와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단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간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아픔을 같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를 잃은 데 대한
아픔을 말이다.

장만두는 누구일까? 그는 왜 병원으로 송묘임을
찾아갔을까? 그와 송묘임은 어떤 관계일까? 허걸은
의문에 싸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후 그는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병원으로
묘임을 찾아갔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속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일었다.
'그녀는 왜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을까? 이런 경우
만일 청미가 죽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상파와 묘임 부부는 자식 하나 없는 외로운 부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들 부부는 왜 딸 하나밖에 두지
않았을까? 청미가 지금 여덟 살이니까 그 사이에 자식
하나쯤은 더 있어야 옳은 법이다. 청미가 아들이라면
또 모른다. 한국 사람치고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딸 하나만 낳고 단산하는
부부가 있을까. 그 점에서 그들 부부에게는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분명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어떤 식으로 알아보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택시는 어느새 병원
앞에 다가서고 있었다.
묘임 자매는 불안한 눈으로 형사를 맞이했다.
불길한 소식이라도 가져 오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형사가 병원에 입원중인 묘임을 찾아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는 길에 한번 들러 봤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허걸은 그녀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들의 표정에서 비로소 불안한 빛이 가시는 것
같았다.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지회가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찰에 대한 불신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허걸은 마치 경찰을 대표해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기분이었다.
묘임은 이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허걸을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뭐 할 이야기라도 있으신가요?"
허걸이 가지 않고 머뭇거리자 지회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네, 몇 마디 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허걸은 매우 미안해 하면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 그러죠 뭐."
그녀는 선선히 밖으로 나가 주었다.
실내에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허걸은 묘임이 내다보고 있는 창가로 다가가서
그녀처럼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뭇잎과 풀들은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진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나비 두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랑나비들이었다.
병실 안은 냉방이 되어 있어서 시원한 편이었다.
"나는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
집안에는 딸이 하나뿐일까 하고 말입니다."
묘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허걸은 그녀가 듣든 말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남의 자식에 대해서 유난히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 없기 때문이죠. 결혼한
지 십 년째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자식들을 보면 부러워하죠."
굳어 있던 묘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똑바로
허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허걸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는 자식을 기다리는 데 지쳤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아내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내는 임신을 매우 어렵게
하는데다 유산을 잘 하는 체질입니다. 지금까지
아내는 두 번 임신했는데 모두 유산하고 말았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묘임은 아무 말도 해오지
않았다.
"우리 나라 어느 부부치고 딸 하나에 만족하는
부부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보려고
야단들인데 두 분께서는 어째서 딸 하나만 두셨나요?
청미 나이가 여덟 살이 되도록 말입니다."
이번에는 좀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뒤에 낳은 아이를 잃으셨든가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 청미 하나만 낳으시고 지금까지 쭉 아기가
없었나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산하셨나요?"
"아뇨,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그럼 딸 하나만으로 만족하시나요?"
"아뇨, 그이는 아들을 몹시 원하고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그럼 왜 지금까지……?"
그녀는 대답하기 거북한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청미는 결혼하자마자
가졌는데 그 애를 낳고 나서는 아기가 생기지 않아요.
노력해 봤지만 가질 수가 없었어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셨나요?"
"네, 아무 이상이 없대요."
"홍 선생님 쪽은 어떤가요?"
"그이도 아무 이상이 없대요."
"이상이 없는데 임신이 안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하긴 진찰이란 걸 전적으로 믿을 건 못
됩니다만……."
둘 중 누군가 이상이 있겠지. 그러니까 더 이상
아기를 못 낳는 것이겠지. 허걸은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렸다.
"실례지만 간략하게 이력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유괴된 청미의 생모인만큼 지금까지 수사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그 점에서는 홍상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사도 해보지 않고 미리 특정 인물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일 수가
있다. 아무리 피해자의 부모라 해도 말이다. 허걸은
뒤늦게야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력이라니요?"
"우선 생년월일부터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952년 8월 23일생이에요."
"본적은 어딥니까?"
"서울 토박이예요."
"부모님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에서 평생을 보낸
은행원이었다. 지금은 모 은행 은행장으로 일하고
있다. 위인이 고지식하고 청렴해서 별 탈 없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묘임의 어머니 역시 온화한 성품으로 무리 없이
세상을 살아온 여인답게 곱게 늙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묘임의 집에 와 있기 때문에 허걸도 그녀를 자주
볼 수가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곱게 늙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학교는 물론 서울서 쭉 다니셨겠군요?"
"네, H여중고를 졸업하고 Y대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했어요."
H여중고라는 말에 허걸은 귀가 번쩍 뜨였다.
"H여중고라고 하셨나요?"
"네……."
그녀는 갑자기 조심스런 얼굴이 되면서 허걸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허걸은 수첩을 꺼내 장만두의 인적 사항을 적어 둔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분명히 장만두가
1970년 3월부터 78년 5월까지 H여고에 근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허걸은 수첩을 접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장만두에
관한 것을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H여고를 졸업한 게 몇 년도였나요?"
"71년도였어요."
"그리고 그 해에 바로 대학에 들어가셨나요?"
"네……."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스물 다섯에 했어요."
"두 분은 연애 결혼하셨나요? 아니면……?"
묘임은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중매 결혼했어요."
허걸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두 분의 관계는 원만하신가요?"
"네……."
그 대답은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것은 청미 아빠한테 가서 물어 보세요."
"물론 물어 볼 겁니다. 두 분의 말씀이
일치하는지……."
허걸이 복도로 나왔을 때 지회는 지루한 표정으로
복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주보고 섰다. 허걸은 묘임 이상으로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회에게서는 차가운 지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점이었다.


17. 길고 어두운 터널

지회가 옆으로 그냥 지나치려는 것을 허걸이 불러
세웠다.
"아,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지회는 돌아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이지적인 얼굴이었다. 이 여자는
나를 싫어하고 있구나 하고 허걸은 생각했다.
청미가 유괴된 지 십 일이 지나도록 경찰이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가 형사를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뭣하고 해서 허걸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허걸이 그녀와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갑자기 이야기를 하자고 하자
지회는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다.
"언니에 관한 것인데…… 언니는 왜 딸 하나만
낳았습니까?"
질문이 엉뚱하다고 생각했는지 지회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좀 알아보고 싶어서 물어 본 겁니다. 어느
부부이든 딸 하나에 만족하는 부부는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유괴당했으니……."
그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회는 무언가 생각해 보는 듯 멀리 시선을
던졌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병원에 오셨나요?"
"겸사겸사해서 왔습니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었지만 바람 한 점 없었기
때문에 무더웠다. 아까 병실 안에서 보았던 노랑나비
두 마리가 그들 앞을 지나갔다. 허걸은 참 오랜만에
나비를 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신기한 듯 한동안 나비를 좇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집안에서 모두
걱정하고 있었어요. 언니 부부라고 왜 아들을 바라지
않겠어요? 언니도 형부도 아들을 몹시 바라고 있어요.
아들이 아니라도 하나만 더 갖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나 봐요."
"일부러 자식을 안 갖는 게 아니군요?"
"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가지고 싶어도
아기가 안 생기나 봐요."
"왜 그럴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 가서 진찰해 봤는데
두 분 다 정상이래요. 아기를 갖지 못할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나 봐요. 결혼하고 열 달 만에 청미를
낳은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정상이란 걸 알 수 있지
않아요."
하지만 청미를 낳고 나서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이상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정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정상이라고? 젊은데도 불구하고 아기를 더 이상 낳지
못하는 부부가 정상일 수 있을까? 어딘가 이상이
있기에 아기를 못 낳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자동차에 비유해 보자. 아무리 점검해
보아도 이상이 없는데 자동차가 가지 않는다. 이상이
없는데 자동차가 못 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딘가 이상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가 못 가는 것이다.
송묘임, 홍상파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들은 이상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이상이 있기 때문에 아기를
못 낳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모두 이상이
있든가 아니면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둘 다 이상이 없는데 아기를 못 낳는다는 거……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긴 해요. 하지만 전……모르겠어요."
그녀는 도대체 그런 것이 지금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듯 성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허걸은
그만 머쓱해졌다.
사실 그것은 피해자측에서 볼 때는 더할 나위 없는
한가로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가 유괴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판에 수사관이 왜 아이를 하나밖에
두지 않았느냐, 하는 따위의 질문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이건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질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쓸데없이
여기에 온 건 아니니까요."
"그럼 언니가 아기를 못 낳는 거하고 이번 사건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한 후에 결론을 내리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해 몹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수사는 계속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범인은 멀리 있지 않고 오히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허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정보가 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 사실 때문에 옆에 앉아 있는 송지회라는 여인에
대해서까지도 신뢰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 여자도
범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긴장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는 청미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성실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두 분이 정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함께
병원에 가보셨나요?"
"아뇨, 이야기를 듣고 알았어요."
"누구한테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어머니한테서 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언니한테서도 들었어요. 그렇게 정 의심이 나신다면
언니한테 직접 물어 보시지 그래요?"
"물어 봤습니다만……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두
분 다 정상인데, 이상하게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만
말씀하시더군요."
허 형사는 지회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현재 스물여덟 살로 아직 미혼이고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다. 조카가 유괴되자 가게문을 닫은 채
그림자처럼 언니 곁에 붙어 있다. 이 여자를 믿어도
될까. 한 번 믿어 볼까. 모험을 하지 않고는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저기……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꼭 좀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지회는 잠자코 형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회 씨가 가장 적임자인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의아한 듯 물었다.
"네, 있습니다. 묘임 씨가 청미를 낳을 때, 어느
병원에서 낳았는지 그걸 좀 알아봐 주십시오."
"그건 알아서 뭣 하려구요?"
"글쎄, 그런 건 아실 필요 없고 좀 알아봐
주십시오."
"알고 있어요."
"어느 병원입니까?"
"김효선 산부인과 의원이에요."
"그 병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을지로 4가에 있어요."
허걸은 수첩에다 부지런히 메모했다.
"다음에는 언니 부부가 어느 병원에서 불임 여부에
대해 진찰을 받았는지 그 시기와 진찰을 받은 병원
이름을 알아봐 주십시오. 함께 진찰을 받았는지,
아니면 따로따로 진찰을 받았는지 그 점도 알아봐
주십시오."
"어떻게 그런 걸 알아보죠?"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문제입니다.
부탁합니다."
"직접 본인들한테 물어 보시면 될 거 아니에요?"
"본인들이 알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들 몰래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쉬운 문제가 아닌데요."
지회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본인들 몰래 알아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알아내야 합니다. 본인들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오빠는 물론 부모님한테도 비밀로
해주십시오. 내가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가족들한테까지 그런 것을 비밀로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요?"
지회의 얼굴에 짙은 의혹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허걸은 심히 망설여졌다. 그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짓인지 그른 짓인지 그는
얼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회 씨를 믿고 말씀드리죠. 지금 정보가 새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살해된 강치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지회는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렇다면 만일 정보가 새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급하게 정보를 입수한 범인은
경찰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강치수를 살해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기서 강치수가 살해될 이유가
없습니다. 범인이 강치수에게 남긴 메모 쪽지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보가 우리 가족들한테서 새나갔다는
말씀인가요?"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그 점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수사 정보는
수사관한테서도 기자들한테서도 흘러 나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범인의 귀와 눈이 경찰
수사본부 안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점입니다. 범인이
현재 자유스럽게 수사본부를 출입하고 있는지, 아니면
피해자 가족이나 수사관, 또는 출입 기자들 가운데 그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고 있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을 의심한다는 건 정말 모욕적인
일이에요. 모두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판인데,
위로는 못해 줄망정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는 건 언어
도단이에요! 왜 경찰은 밖에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안에서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까지 수사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된 거 아니에요!"
분노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감정을 앞세워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경찰은 누구나 다
의심하고 있습니다. 일단 청미 양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면 빠짐없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저한테 그런 걸 부탁하나요? 저는
의심하지 않나요?"
"물론 의심하고 있습니다."
허걸의 분명한 어조에 지회는 사뭇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의심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어 부탁하는 겁니다.
물론 이건 모험이지요. 모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탁하는 겁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청미 양 가족이나 친지들 중 그럴
만한 적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누군가를 선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정된 것이군요. 아주 영광이군요."
"빈정거리지 마십시오. 모두 다 청미 양을 찾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어느 병원에서 청미를 낳았고 언니 부부가 어느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도대체 청미를
찾는 일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관계가 전혀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그런 걸 알아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방법은 없습니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알아내셔야 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 모르겠어요. 알아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못 알아낸다고 해서 저를 나무라지는 마세요."
"꼭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우리 둘만이 아는
비밀로 말입니다."
"알겠어요. 누구의 부탁이라고 안 듣겠어요?"
어디론가 사라졌던 노랑나비 두 마리가 다시
나타났다. 허걸은 나비를 눈으로 좇으며 일어섰다.

H여고 서무과 주임은 사십대 중반의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깐깐한 모습의 남자였다. 퇴근 채비를 하던
그는 형사의 방문을 받고는 기급하듯 놀랐다.
이미 지난주 토요일로 1학기가 끝나 학생들은
방학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교직원들은 업무가
밀려 월말까지는 정상 근무하도록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전혀 형사 같지 않아 보이는 자그마한 키의 젊은
형사는 70년부터 72년까지의 졸업생 명단을 요구했다.
그리고 당시의 교직원 명단도 보여 줄 것을 요청했다.
놀란 서무주임은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형사는 거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빨리 보여 달라고 독촉하기만 했다.
서무주임은 형사의 요구를 들어주기에 앞서 먼저
교장한테 형사의 방문과 요구 사항을 보고했다. 조금
있자 교장이 직접 허겁지겁 달려왔다.
허걸은 교직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순진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잠시나마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
좀 미안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찾아온 용건을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다. 단지 과거의
졸업생 가운데 모종의 사건에 연류된 사람이 있어
조사차 들렀다고만 말해 두었다.
졸업생 기록 카드를 조사하던 허걸의 눈에 빼어난
미모의 여고생 사진 한 장이 들어와 박혔다. 바로
송묘임의 사진이었다. 흰 칼라의 제복에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인 소녀의 모습은 너무도 싱그러워
보였다. 그녀는 1971년도 졸업생이었다.
교직원 명단에는 수학 교사 장만두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송묘임의 성적은 상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녀는 본인의 진술대로 여고를 졸업하던 그 해에 Y대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해에 H여고에서 Y대에 입학한 학생 수는 모두
스물아홉 명이었고,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한 학생은
송묘임까지 합해 네 명이었다. 허걸은 스물아홉 명의
인적 사항을 모두 복사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라 그들이 여고 때의
주소지에 살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쯤은 삼십대의 유부녀로 다른 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보면 그들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성싶었다.
또한 그들이 놀라는 것을 본다는 것도 언짢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을 고려하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여형사 엄주희는 펑퍼짐한 얼굴을 한 스물네 살의
처녀였다. 후덕스럽게 보이는 것이 수사 형사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인상이었다.
허걸이 사주는 냉면을 먹고 난 그녀는 다방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녁 일곱 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여보세요, 거기 이미옥 씨 댁인가요?"
"아닙니다."
그녀는 허걸이 적어 준 명단을 들여다보면서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김선희 씨 댁인가요?"
"누구요?"
"김선희 씨 댁이냐구요?"
"그런 사람 없어요."
그렇게 네 번까지 허탕을 치고 다섯 번째에야
가까스로 낚시에 고기가 걸렸다.
"실례지만 박찬희 씨 댁인가요?"
"네, 그런데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경계하듯 들려 왔다.
"저기…… 찬희 지금 집에 있는가요?"
"누구신가요?"
"저는 찬희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이미옥이라고
해요. 미국 가서 살고 있는데 이번에 볼일이 있어
잠시 귀국했어요. 찬희하고는 아주 친했어요. 그 동안
통 연락을 못 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요. 실례지만 어머님 되시는가요?"
박찬희의 어머니는 딸이 시집가서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딸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나서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허걸과 엄주희는 박찬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전화를 걸어 두었기 때문에
박찬희는 긴장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큰 저택에서 사치스럽게 꾸며 놓고 살고
있었다. 건설 회사 사장인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적어도 스무 살 이상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마도 그녀는 그 집에 재취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녀는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응접실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허걸 대신 엄주희가 박찬희를 상대로 입을 열었다.
"전화로 이야기해도 되는데 비밀 보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찾아왔어요."
그녀는 비밀을 지켜 줄 것을 당부한 다음 물었다.
"송묘임 씨를 아시나요?"
"묘임이요? 네, 알아요."
"어느 정도 알고 계시나요?"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 동창이에요. 대학에서는
과가 달랐어요. 그 애는 응미과였고 저는
피아노과였어요."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두 분은 친한 사이였나요? 요즘도 만나고
계시나요?"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만나 보지 못한 지
몇 년 돼요. 묘임이의 딸이 유괴된 것은 신문에서
보고 알았어요. 참 안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동창들끼리 묘임을 위로하러 가자고
말이 나왔지만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닌 것 같아
주춤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직 아이를 찾지 못했죠?"
"네,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송묘임 씨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분은 누구인가요? 아시는 대로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글쎄, 동창들 중 누구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별로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요."
"좀 알아봐 주실 수 없을까요? 동창분들한테 전화
걸어 보시면 대강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허걸이 끼여들면서 말했다.
박찬희는 전화통을 끌어당기더니 여기저기에다
전화를 걸어댔다.
"아, 난데 말이야, 송묘임하고 친하게 지내는 애가
누구니?……묘임이가 누구냐고? 이 애가……이번에
딸이 유괴된 애 있지 않아. 바로 그 애 말이야……그
애하고 가장 친한 애가 누구냔
말이야……모른다고?……누구한테
알아보지?……누구?……아, 옥련이!……옥련이 전화
번호가 어떻게 되지?……"
그녀가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에다 요란스럽게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허걸과 엄주희는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박찬희는 전화를 끊고 그들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바로 이 애가 묘임이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고
있대요."
메모지에 김옥련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묘임이하고 함께 같은 응미과에 들어간 친구예요."
"이 전화 번호는 어디 번호인가요?"
"그 애 집 전화 번호예요."
"혹시 장만두라는 분을 아십니까?"
"장만두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생각이 난다는 듯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아, 이제 생각나요.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었어요. 만두라는 이름 때문에 특별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분을 더러 만나십니까?"
"아뇨,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한 번도 못 만나
봤어요. 묘임이 같으면 또 모르지요."
그녀는 아차 싶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형사들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허걸은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갔다.
"여기서 한 말씀은 비밀을 보장해 드리니까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박찬희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묘임이와 장 선생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묘임 씨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말입니까?"
"네, 흔히 그럴 수 있잖아요."


18. 사랑의 미로

박찬희와는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았다.
송묘임과 장만두가 과거에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정도밖에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허걸은 박찬희가 가르쳐 준 김옥련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 날은 밤이 늦었기 때문에 다음 날 열한
시경에 집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김옥련은 S여대 회화과 전임 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같은 동기들 중에서 그래도 성공한 축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 역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다가 허걸을 맞았다.
방학중이라 그녀는 집에 있었다.
교양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친구에 대해 입을 열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숙하게
생긴 그대로 몹시 입이 무거웠다.
"두 분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유괴된
청미 양을 찾기 위해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묻는 대로 숨김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다. 아니 미인이기는커녕
여자치고는 못생긴 편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품위가
그것을 커버하고 있어서 못생겼다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수고 많으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병원에 가서
묘임이를 만나봤습니다. 너무 기가 막힌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어요. 그 애는 저를
붙잡고 울기만 했어요."
김옥련의 두 눈에 물기가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허걸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알아서
이야기해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은 다음 마침내 허걸이
기다리고 있는 내용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문제를 제삼자가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수사에 관련된
것이니까 말씀드리겠어요. 묘임이는 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워낙 미인이어서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어요. 특히 장만두 선생님은 그
애를 유난히 귀여워해 주셨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나오시니까 묘임이도 선생님을 따르게 됐어요.
묘임이는 저한테 숨김 없이 선생님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애들보다는 비교적 그 두 사람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신 건 3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였어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가까이 지내게 됐는데…… 관계가
심각해지면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됐어요. 두
사람 관계는 스승과 제자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은 정말로 깊이 사랑했어요. 묘임이도 선생님도
정말 순수했어요. 그들의 사랑은 육 년 동안
계속됐지요. 묘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으니까. 그들은 묘임이가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제가 보기에 그들의 사랑은
어떤 힘으로도 갈라놓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만큼
사랑이 진실하고 강렬했다고나 할까요. 저는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길 바랐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말을 끊고 그녀는 다음 말을 잇기가
힘들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침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에 그녀는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묘임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알려 왔어요. 그것도 불과 일주일을 앞두고
저한테 알려 왔어요. 그때의 놀라움이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저는 기대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어요.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하곤 했어요. 두 사람의 결별은 순전히
묘임의 일방적인 처사였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놀랐어요. 제가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육 년 동안 사랑해 온 사람을
저버리고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와 결혼하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일로 저는 묘임이를
다시 보게 됐어요. 지금까지 내가 친구를 잘못 보아
왔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침착한 그녀도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가 묘임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허걸은
알 수 있었다.
"송묘임 씨는 왜 장 선생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나요?"
"그 이유란 것이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어요. 서로
이상이 안 맞다거나 성격이 안 맞는다면, 그런 이유로
헤어졌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요. 아시겠지만 묘임이네는 살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여유 있는 집안이에요. 아버지가
은행장이었으니까요. 묘임이가 상류 가정인 데 비해
장 선생님은 가난한데다가 형제가 많았어요. 더구나
장 선생님은 맏이였어요. 그리고 묘임이와 장
선생님은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됐고요. 거기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선생님의 직업이었어요. 학교
교사라는 것은 결혼 조건으로는 매우 불리한 것인가
봐요. 대학을 졸업하고 집안이 좀 괜찮다 싶은
아가씨치고 학교 교사와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여고 때야 사춘기 때니까 뭣 모르고 선생님을
따르지만 일단 대학을 다니고 사회에 나오게 되면
여고 때의 선생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죠.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 것 저런 것을 들어
묘임이 부모님은 한사코 장 선생님과의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부모님이야 반대하시는 게
당연하겠지요. 딸을 좀더 잘사는 집안에 시집보내고
싶은 게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이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그때 묘임이 부모는 장 선생님을 직접 만나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결정권은 묘임이에게 있었어요. 아무리
부모님이 완강히 반대하시더라도 본인이 굳은 결심을
밝히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성사가 됐을 거예요.
그런데 묘임이는 그러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모든
것을 부모님 결정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아주
소극적으로 나갔어요. 제가 보기에는 묘임이 자신이
이미 장 선생님과 결혼할 의사가 없었던 것 같았어요.
그 애는 새로 나타난 남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입니까?"
"네, 지금의 남편인 홍상파 씨였어요. 그분은
묘임이가 반할 만큼 미남이었고 집안도 좋았고 학벌도
훌륭했어요. 누가 보아도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신랑감이었어요. 결국 묘임이는 선생님을 버리고
홍상파 씨와 결혼하고 말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묘임이와 홍상파 씨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지요.
지나칠 정도로 축복해 주었어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비통에 잠겨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장
선생님이었어요. 묘임이가 결혼하고 나서 저는 장
선생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분을 몇 번 만났어요.
그때 그분의 비통에 잠긴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생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시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
같았으니까요. 저는 선생님이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서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빌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묘임이를 결코 잊지 못하셨어요. 그 후 저도
결혼하게 돼서 선생님을 뵐 기회가 없었어요. 수년
후에 한 번 뵈었는데 선생님이 그 상처에서 벗어나신
것 같아서 저는 몹시 기뻤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선생님이 결혼하시지 않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어요.
선생님은 다른 여자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신가
봐요. 상처에서 벗어나시긴 했지만 배신의 상처가
앙금처럼 가라앉아 여자를 가까이 하기가 두려우신가
봐요. 아마 선생님은 결혼하시지 않고 평생을 혼자
사실 것 같아요."
허걸은 이 여자가 장만두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고, 또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필요
이상으로 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십오 년 전 한때 가르침을 받았던 교사한테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감투성이의 작업복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때로는 살짝 감정을 드러내 보이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장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습니까?"
"일 년 전에 한 번 뵙고는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그녀는 약간 당황해서 말했다. 허걸은 일어설
듯하다가 도로 주저앉으며 김옥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육 년 동안 사랑했다면……관계가 아주
깊었겠군요?"
"서로 사랑했으니까요."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 말은 어느 정도 관계가 깊었는가 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그 사랑이라는 것이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정신과 육체가 일치된
사랑이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그 정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묘임 씨가 모든 것을 숨김 없이 이야기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그래도 짐작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허걸은 그 점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옥련은
한사코 대답하기를 피했다.
그런 것을 물은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였다 해도 이미 결혼을
약속했고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라면 물어 보나마나
육체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장만두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을 지니고
있고 금욕적인 인물인지는 몰라도 십중 팔구는 미녀의
육체를 탐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남자의
반응이 아닐까.
교사로서 사춘기 소녀를 애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도덕적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가 묘임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형사가 가고 난 뒤 김옥련은 몹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형사가 묘임과 장 선생님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하고 간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혹시 장
선생님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장만두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만나고 있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사모했었다. 장만두와의 관계는 묘임이
그를 버리고 결혼하고 난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그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기
시작한 것은 그가 H여고에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
총각 선생을 처음 본 순간 사춘기 소녀는 그만 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못생긴데다 너무도 수줍음을 잘
탔다. 장 선생과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기절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녀에 비해 묘임은 얼굴도 예쁘고 명랑했다.
그녀는 별로 수줍음도 타지 않았고 장 선생님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그러한 그녀를 옥련은 먼
발치로 바라보면서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관계가 육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묘임을 앞세우고 간접적으로 장 선생님과
접촉할 수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장 선생님과
묘임이 만나는 데 들러리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장 선생님에게 연모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둔 채 무표정하게 그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관심을 가장한 채 장 선생님과 묘임이 만나는 것을
지켜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가 장 선생님에게 그 동안 숨겨 온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묘임이 결혼하고 난
직후부터였다.
묘임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전 옥련에게 부탁처럼
한 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옥련은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난 장 선생님을 배신하고 떠나는 거야. 난
그렇다고 하지만 넌 그러지 마. 장 선생님을 진실로
위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난 네가 장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넌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 여자의 육감이라는 거 있지 않아.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난 아주 나쁜 애였어. 난 네 앞에서 장
선생님과 데이트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
네가 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어. 나라는 년은 그렇게
못돼먹었어. 용서해 줘. 나는 너만큼 장 선생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는지도 몰라. 너만큼 장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장 선생님을 잘 부탁해.
장 선생님을 그대로 두면 위험해. 그분은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비탄에 잠겨 있어. 그분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부탁이야,
제발 장 선생님한테 가봐."
옥련이 비탄에 잠겨 있는 장 선생님을 찾아간 것은
묘임의 부탁 때문이 아니었다. 묘임의 말대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스스로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그에게 향한 연모의 감정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 선생님은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묘임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밖의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옥련은 지성으로 장 선생님을 만나러
다녔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온통 장 선생님한테 쏟아 부었다.
장 선생님이 자신과 결코 결혼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따르고 섬겼다.
집안의 강요로 별로 마음에도 없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고 난 뒤에도 장 선생님에게 향한 그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장 선생님이 그녀의 몸을 요구했다면 그녀는
서슴없이 자신을 내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의 관계는 애인 관계도, 그렇다고
스승과 제자만의 관계도 아닌 아리송한 관계로
지속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감정도
많이 가라앉고 세속적인 남녀 관계를 뛰어넘은 순수한
관계로 승화되어 있었다.
옥련은 장 선생님이 이번 사건에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장만두 선생님은 그야말로 청렴한
교육자였다. 그를 볼 때마다 그녀는 깨끗한 선비를
보는 것 같았고, 바로 그 점에 그녀는 반했던 것이다.
그런 분이 유괴 사건에 관련되었을 리 없다. 하지만
형사들이 그분에 대해 조사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그대로 모른 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형사는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마침내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장만두는 마침 집에 있었다.
"저 옥련이에요."
"아, 옥련이……."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 왔다.
"선생님, 제가 점심 사드릴게 나오세요."
"점심은 무슨……."
그는 언제나 사양한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까 나오세요."
"지금 좀 바쁜데……."
"묘임이하고 관계된 일이에요."
그 말에 그는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뭣하니까 나오세요. 선생님
뵙고 싶어요."
"알았어, 나가지."
장 선생님을 만나기는 한 달 만이었다. 형사한테는
일 년 전에 만나고 통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나고 있는
셈이었다.
한 시간 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들은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선생님 미워요."
"왜?"
"제가 만나자고 하니까 바쁘다고 하시더니 묘임이
때문이라고 하니까 금방 나오시지 않았어요?"
"난 또 뭐라고……. 사실 바쁜데 나왔어. 묘임이는
지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잖아. 우리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해. 그저께 난 묘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녀왔어. 눈 뜨고 못 보겠더군."
"벌써 다녀오셨군요. 저도 어제 갔다 왔어요. 저를
붙잡고 어떻게나 우는지 혼났어요."
식사가 날라져 왔지만 만두는 거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옥련이 어서 먹자고 말했지만 그는 완전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고 잠을 못 잤는지 두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
묘임이가 현재 받고 있는 고통이 선생님에게 전해져
온 모양이라고 옥련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다.
"묘임이하고 관계된 일이라는 게 뭐지?"
"선생님 식사 드시면 말씀드리겠어요."
옥련은 맥주를 잔뜩 따라 주면서 말했다. 만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반 이상 하고 났을 때 옥련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사가 다녀갔어요. 오늘 아침에 다녀갔어요."
만두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잠자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묘임이와 제가 친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찾아와서는 선생님과 묘임이와의
관계를 물었어요."
거기까지 말해 놓고 그녀는 만두의 표정을 살폈다.
만두의 얼굴 위로 경련이 스쳐갔다. 순간적으로
스쳐간 것이지만 옥련의 눈에는 그것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금방 창백해졌고 입술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형사는 선생님과 묘임이와의 과거 관계에 대해서
물어 왔어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온 눈치였어요."
"그래서 뭐라고 말했지?"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두 분이 스승과
제자였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서 육 년 동안에 걸친
관계를 소상히 이야기해 줬어요. 두 분이 왜 결혼하지
못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그 형사는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내 뒷조사를 하고 있는가 보군."
만두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하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말을 잘못했나요?"
"아니, 상관없어."
"사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모른다고 잡아뗄 수도
없었어요. 그 형사가 하도 집요하게 물어 왔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숨길 필요가 뭐 있겠냐
싶어……."
"잘 했어, 숨길 필요도 없는 이야기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새 밖에 나가면 미행을 당하는 기분이었어."
"형사들이 미행했나 보죠?"
"나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사건이 사건인만큼 그럴 수 있는
일이지."
그는 애써 침착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왜 경찰에서 선생님에 대해 조사를 하죠? 전
걱정이 돼서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린 거예요."
"뭐 별일은 없을 거야. 형식적인 조사에 불과할
거야. 강력 사건이 일어나면 다방면으로 수사하게
마련이니까 나에 대해서도 조사하는 거겠지."
"선생님에 대해 묻는 형사의 표정이 몹시
심각했어요. 저는 겁이 나서 혼났어요."
"걱정할 건 없어. 우리가 진실로 걱정해야 할 것은
청미의 생사야. 어린애가 유괴되어 보름이 지나도록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만두의 선량한 눈빛에 물기가 비치는 것 같았다.
옥련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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