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이 7ㅡ욕조안의 멋진기계

뉘썬2뉘썬2 | 2023.12.24 06:10:59 댓글: 4 조회: 311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33360
7


솔직히 말하자면 그일을두고 나는 몇년정도 민웅이를 원망햇다.민웅이가 그러지 말앗어야 햇다고
말이다.방심하면 가시 같은 말들이 민웅이를 향해 튀여나갓다.마치 나중에 닥친 모든불운이 민웅
이탓인 것처럼.

그러나 사실은 불운은 늘 기분나쁘게 도사리고잇엇다.잠시라도 잊으면 말도안되게 끔찍한짓을 저
질러 우리를 환기시키면서.


((((아주 가까이에잇어.))))


이만큼 널 흔들어놓을수잇어.쉽게 죽일수도잇어.그런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
지고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하다.내가 삼팔선을넘은 할아버지의 불운
에서 태여난것처럼.나의뿌리는 불운이요 나를 키운것도 불운이요 내가끝내 다다를 결말역시 불운
이다.말할수잇는 사람은 적겟지만말이다.


민웅이가 담배 때문에 폐에 물이차서 고생하는걸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보고나서야 마음이 풀렷
.민웅이는 어렷고 어쩌면 아직도 어리다.민웅이만 수미에게 상처를 준건 아니엿고 그빌어먹을
사과창고에서 두사람은 동시에 다쳣다.


나는 민웅이의 폐에대해서는 알앗지만 수미와 수미의 다친부분이 어찌해나가고 잇는지는 오랫동
안 알지못햇다.알고싶엇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일것이다.주수미든 바꾼이름으로든 통증없이
는 부를수 없엇기 때문에.수미와 민웅이중에 민웅이를 고른건 아니엿다.그모든일은 그런식으로 일
어나지 않앗다.선택이 아니엿다.


주연이가 수미네 반에 놀러갓다가 교실뒤 거울아래 폐지함에서 수미의 다이어리 속지들을 발견햇
.수미의 다이어리는 거의 성경책만햇다.중학교때부터 증식해온것이라 잘못만지면 오래된 반짝
이풀이 떨어지곤햇다.잡지에서 오린 연예인들,색이 금방빠져서 코팅해놓은 스티커사진들,온갖종
류의 티켓들,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며 편지,노래가사와 이런저런 시 베낀것들로 불룩햇다.




민웅이 관찰기라 불러도좋을 일기한뭉치는 작은집게로 봉해져잇엇다.과장하면 외장형 뇌라고해
도 좋앗다.그것이 묶인채로도 아니고 뿔뿔이 흩어진채로 폐지함을 가득채우고 잇엇으므로 발견
하지 못햇다면 오히려 이상햇을것이다.


더하여 수미가 일주일넘게 아무에게도 편지를 보내지 않은것도 일종의 증거가 되엿다.수미는 쉴
새없이 편지를쓰는 아이엿다.심지어 수업시간의 대부분도 편지를 쓰며보냇다.학교에는 중앙계
단쪽 복도에 학년별 우체통이 잇엇고 학교안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잇엇다.수미는 여러반에 흩
어진 우리에게 돌아가며 편지를썻다.학교우편으로도 보내고 직접 들고도왓다.도통 답장이라곤
하지않던 찬겸이까지 달에한번은 수미의 편지를 받앗으므로 여자애들의 경우 수미의 편지로만
서랍하나를 채울수잇을 정도엿다.




내용이 특별하거나 새롭지는 않앗다.보통 두세장이지만 요약하자면 나너무 심심해,넌왜 나한테
편지안써?’정도엿고 문구점에서 귀여운 인형을 봣는데 돈이없다.하지만 사고말거다.같은 무해한
계획같은것도 가끔잇엇다.한창 음성메세지가 유행이던 시절에는 사서함이 수미가 녹음해놓은
노래들로 늘꽉찰 정도로 수미의 성격은 일관됏다.민웅이에게 뿐만아니라 우리모두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전송햇다.그즈음 다소 뜸해졋다해도 편지가 아예 뚝 끊긴건 이상햇다.


열심히 심문하지도 않앗는데 수미는 펑펑울면서 털어놓앗다.누구보다도 민웅이를 오래 지켜보앗
던 수미니까 아무리 민웅이가 아무렇지 않은척 심지어 여자친구를 대하듯이 대해주어도 알고잇
엇다.


다 망쳐버렷다고 얼굴에 쓰여잇는걸.”

아마도 전광판만하게 쓰여잇엇을 것이다.


죽어버릴거야.”

ㅇㅏ니 잠깐 조심하기는 한거야?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주연이가 실제적인걸 물엇다.

끝까지 하지도 않앗어.”

수미가 더울기 시작햇다.


끝까지 할수도 없엇던거야 나랑은.”

나는 한마디도 하지못하고 잇엇다.머릿속에서 말이 너무 많아졋다가 하얗게 지워졋다가
를 반복햇기 때문에 두통이 심하게왓다.


괜찮아.아무일도 아니야.나도해봣고 우리 언니들도 해봣어.별일 안일어나.”

송이의 단정한 선언에 모두 조용해졋다.똑 같은 얼굴이다섯,강력한 모계사회에서 자란 송
이는 그정도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수미를 진정시켯다.


어쩌다보면 친구끼리 할수도잇어.다시 친구가 되면돼.”

진짜?”

진짜.”

그러나 물론 진짜가 아니엿다.그럴수잇는건 송이정도다.이후 송이의 경쾌한 연애일화와 우
리에게 남겨진 숱한 가르침들을 떠올리자면 우리중에 관계에 탁월한건 송이뿐이엿다.나머
지는 머저리들이엿다.

수미가 울음을 그칠때쯤에는 내가 털어놓을 타이밍을 놓쳣다.그 비오는 목요일은 좀 이상
한 날이엿다.그날 수미와 민웅이처럼 나와 주완이도 함께 욕조에 잇엇다.그건 커다란 욕조
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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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ㅡㅡ그래서 이번 남자친구는 어때?

송이 ㅡ휘엿어.

나 ㅡㅡ뭐가?

송이 ㅡ뭘까.(웃음)

나 ㅡㅡ(내래이션)그날이후로 송이의 남자친구를 볼때면 휜놈 휜놈 하는 생각밖에 들지않앗
.송이가 걔랑 빨리 헤여져서 다행이엿다.

ㅡㅡ

임신해서 배가늘어진 작은개가 사라졋기 때문에 우리는 빗속을 헤맷다.개들이 늘 움직이던
경로엔 누렁이와 큰개밖에 없엇다.네마리중에서 그나마 어리고 건강한 개들이엿다.

텁텁이 어디갓어?작은개는 어디두고 왓어?”


주완이가 개들에게 물엇다.개들은 대답할수만 잇으면 할것 같은 눈으로 주완이를 되올려봣다.
젖은 개들에게선 어쩔수없이 젖은개 냄새가 낫는데도 주완이는 마구 목덜미를 만졋다.두마리
를 잘 회유해서 바싹말린 폐헝겊더미에 앉혓ㄷㅏ.비가 와서인지 아니면 사라진 두마리 때문
에 의기소침해서인지 웬일로 개들이 말을 잘들엇다.


우산도 없엇고 우산이 잇엇다해도 그렇게 바람과함께 날리는 비는 피할수 없엇을것이다.후드
를 뒤집어쓰고 주완이와 나는 말없이 걸엇다.손을 잡앗다가 놓앗다가 옆으로 섯다가 앞뒤로
섯다가햇다.


새끼들을 낳으러 갓는지도몰라.텁텁이가 먼저 자리를 봐둔거지.그리고 데리고간거야 작은개
.”

나는 나의 낙관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말햇다.그러자 하주가 뒤돌아보앗다.

크고튼튼한 개들은 그대로잇고 늙고작은 개들만 사라진게 이상하지않아?”

누가 어쨋을거란 얘기야?”


주완이는 근처 보신탕집에 가보자고햇다.나는 보신탕집 아저씨가 아빠친구니까 아빠를통해
물어보겟다고 약속햇다.비에젖은 우리가 거기까지 걸어가 혹시 개를 잡앗느냐고 물어보는건
아무래도 결과가 좋지않을 것 같앗다.

하주 그만가자.추워.”

체온이 떨어질대로 떨어졋는데도 돌아가지않고 완고하게구는 주완이에게 나는어쩐지 공격받
는 느낌이엿다.멀게 느껴졋다.마치 이동네와 내가아는 사람들이 개를 잡아먹기라도 한것처럼
굴엇다.백ㅍㅓ센트 그러지 않앗으리라고 확언할수 없어서 더화가낫다.



염소고 너구리고 뱀이고 고아먹을수 잇는건 사실 다고아먹는 아저씨들이엿다.그래도 먹엇더
라면 더일찍 먹엇을거고 더큰녀석들을 먹엇을거라는게 나름의 반대논리엿으나 그런말들은
하기싫엇다.


입술이 파래졋어.”

나는 주완이의 손길을 피햇다.몸이 떨리는게 짜증이낫다.덜덜떠는 여자애 따위 한번도 되고싶
지 않앗다.평소에 체온이 높은편인게 자랑이엿다.약해보이고 싶지않앗다.오히려 내가 하주를
보호해주고싶엇다.

미안해.인도에서 키웟던 개가잇어.그개도 사라져버렷거든.”

나는 그개를 알고잇엇다.유심히 보지않앗지만 책꽂이에잇는 액자중 하나에서 본것같앗다.
상이라하나 견상이라하나 아무튼 그런게 흐릿한 개엿다.

이름이 뭐엿어?”

점순이.”


그러고보니 흰바탕에 갈색무늬엿다.나도모르게 허탈해서 웃엇다.자기개는 점순이라 부른주
제에 나한테 개들이름을 대충지엇다고 뭐라햇단말이냐.

너라면 좀더특이하게 이름을 지을줄 알앗어.”

예를들면?”

몰라.영화배우 이름이라든지.”

내가지은건 아니지만 점순이는 좋은이름이엿어.좋은개엿고.”

갑자기 없어진거야?”

주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햇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점순이가 엄마아빠대신 죽엇다고 믿고잇어.”

?”

점순이가 사라진날 엄마아빠가 탄 차가 고가도로 끄트머리에서 길밖으로 떨어졋거든.비가
와서 미끄러졋어.다행히 고가가 거의끝나는 지점이라 많이 높은곳에서 떨어진건 아니엿지만
차는 폐차해야햇어.그런데 엄마아빠는 타박상 정도엿고말이야.나중에야 그날 점순이가 사라
진걸 알앗는데 아무래도 엄마아빠대신 죽은거같아.”

차가 좋앗던게 아닐까?”

“..독일차엿지만 그래도 점순이 덕일거야.”


비이성적인 이야기엿지만 그게 우리엄마아빠한테 일어난 일이엿더라면 나도 개가 댓신죽엇
다고 생각할 것 같앗다.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쉽게 수긍하기 마련이기도햇다.

개들은 그렇게 순정하고 그렇게 사람대신죽어.”

뉴델ㄹㅣ의 길거리로 사라진 점순이를 찾을방도는 없엇고 이후로 개를키울 기회가 없엇던 주
완이는 욕구불만 애견인이된 모양이엿다.


촉감이 그리워.사람이 보고싶은거랑은 달라.아무리 스킨십이 많은 가족도 그렇게 서로를 만
지진 않잖아.개는 손으로 그리워.언젠가는 다시 키우고싶어.”

개를 키워본적이 없는 나는 적당히 웃엇고 우리는 하주네 집으로 돌아왓다.


당연히 바로 마른옷을 빌려줄줄 알앗는데 주완이가 너무도 태연히 욕조에 물을받기 시작햇으
므로 나도 태연한척 그곁에 서잇엇다.추워서인지 흥분해서인지 횡격막과 늑골이 제멋대로 따
로 움직여서 숨이 잘 쉬여지지 않앗다.몸살이 날것 같은 기분이엿다.


맨발로 그춥고 건조한 욕실에서서 욕조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렷다.금세 온기와 증기가 퍼졋
으므로 얼른 물에 들어가고싶은 마음뿐이엿다.

그욕조는 내가 그때까지 봐온 여느욕조보다도 컷다.요즘나오는 원형이나 부채꼴의 거품을 뿜
어내는 화려한 월풀욕조는 아니엿다.일인용이지만 길고깊어서 다리가 긴 외국인이 충분히 눕
겟다 정도의 느낌이엿는데 그때는 정말 커보엿다.



우리집의 조그맣고 오래된 욕조는 목욕용도로는 거의 쓰이지않고 김장철에 배추나 재는데 이
건정말 목욕을위해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물건이구나 싶엇다.


어디까지 벗어야하나 망설이는데 주완이가 바지만 벗고 젖은 티셔츠와 박스팬티를 입은채 물
에들어갓다.무릎을 모으고는 날보고 웃엇다.팬티야.남자애의팬티.팬티구나.평범하고 새것도아
닌 네이비 스트라이프 팬티엿다.짙은색이라 물에젖으니 물풀 같은 느낌이엿다.



나는 까만바탕에 모서리에 작은 체리자수가잇는 심플하고 유치한 디자인의 팬티엿기에 이건
수영복이야,수영복이야하고 자기최면을 걸수잇엇다.역시 티셔츠를 입은채 물에들어갓다.주완
이가 호스가잇는 쪽에 불편하게 앉앗으므로 나는 편하게 등을기대고 뜨거운물에 코밑까지 몸
을담갓다.


발목을 꼬고앉아잇는데 주완이가 내발을 쭉 자기쪽으로 당기고는 부드럽게 종아리 뒤쪽을 마
사지해주엇다.나는퍼뜩 각질이 밀릴까봐 걱정이되여서 몸이 굳고말앗다.그 전주에 엄마랑 목
욕탕에 다녀와서 다행이엿다.



내가 굳어버리자 하주는 마사지를 멈추고 선반에서 배스솔트를 꺼냇다.처음에는 보라색을,
가 좋아하니까 그다음엔 오렌지색을 뿌렷는데 결국은 이도저도아닌 색이 되여버렷다.


물속에 잇는동안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앗다.다리와 다리가 포개여졋고 고개와 고개가 거의
맞닿아잇엇지만 그뿐이엿다.물이 될것같앗다.하주의 턱으로 주르륵 물방울이 흐를때마다 하
주가 녹아내리는게 아닐까,열기로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햇다.




뜨거운 물을 보충햇지만 곧 식엇다.손가락이 쭈글쭈글해지지는 않앗으니 그리 오래는 아니
엿을텐데도 길고가늘고 점착성이잇는 시간이엿다.


물을빼기 시작할 때 키스도 시작햇다.어지러웟는데도 물이빠지는게 싫엇다.싫다고 말하지않
고 입술에 매달렷다.하주의 입술은 얇고 색깔도 옅엇지만 이상할 정도로 주름이없고 팽팽해서
플라스틱으로 떠낸것같이 보엿다.장난감처럼 보이는 입술이여서,나는 주완이가 소년인형이
아닌걸 확인하고 싶엇는지도 모르겟다.


모든게 식어가기직전 가장 뜨거울 때 젖은티셔츠를 벗엇다.등이 딱딱햇지만 움직임이 많앗던
건 아니엿다.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외국브랜드의 콘돔을 찾아낸후 몸을겹쳣다.링크라 해야
할지 도킹이라 해야할지 우린 멋진기계 같앗다.정교하고 귀한 부품들이 외부로 노출되여잇는
무방비상태의 기계.



연결되엿고 흘럿고 그와중에 주완이가 손바닥으로 자기가슴께를 여러번 쥐엿으므로 나는 걔
가 죽어버릴까봐 걱정되엿다.


인도에서 따라온 낡은건조기에 옷들을 말렷다.그건조기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번더햇다.두번
째는 훨씬 편안한 느낌이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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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것도 아니고 앉은것도아닌 저대로라면 디스크가 걸릴게 뻔한자세로 책을 읽고잇는 주연
.책은 두껍고크다.

나 ㅡㅡ뭐읽어?

주연 ㅡ이집트 미술에대한 책.

나 ㅡㅡ재밋어?

주연 ㅡ슬퍼.

나 ㅡㅡ왜?

주연 ㅡ그때사람들도 맥주는 사랑하고 외국인은 미워해서.그런거라면 나아진게 없잖아?

나 ㅡㅡ맥주 그때부터 마셧구나.

주연 ㅡ무덤벽에도 맥주만드는 과정이 가득가득해.몇백년동안 맥주맥주맥주야..너그거알아?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은 이집트인이 아니엿던거.그렇게 외국인을 싫어햇으면서 마지
막 왕조는 그리스인들이 해먹게둿거든.

나 ㅡㅡ그렇게 될까봐 미리 싫어햇던게 아닐까?서로 침략하던 시대엿잖아.

주연 ㅡ지금은 아니야?막연하게 뭔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
는건 지금도 똑같잖아.아 그리고 이거웃긴다?마지막 왕조의 한왕은 페르시아가 쳐
들어오는 바람에 만들어놧던 근사한 석관을두고 피난갓거든.그석관이 어떻게 됏게?

나 ㅡㅡ깨졋어?

주연 ㅡ욕조가 되엿어.바닥에 배수구멍을 뚫어서는 그안에서 목욕을햇대.

나 ㅡㅡ재밋는 책이네.

주연 ㅡ크게 재밋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진이좋아.죽은왕에게 키스할 듯 고개를돌린 사자머
리 여신같은거말야.

ㅡㅡ


열어보거나 뜯어보기싫은 모든것들을 침대밑에 밀어넣는 나쁜습관이 잇엇다.상자에 담앗
지만 상자도 내용물도 결국 종이엿으므로 엄청난 종이먼지가 쏟아져나오기에 이르럿다.
국 모조리 버리기로 결심햇다.

그래도 한번 읽어보고 버려라.그렇게 버리는게 아니야.”

학생때 주고받은 편지도 다 보관하고잇는 엄마가 말햇다.하지만 엄마의 편지는 조그만 철
제상자에 전부 들어간다.내가받은 편지들은 대형 소포상자 몇개에도 차고넘치기에 상황이
다르다.침대곁에 쭈그리고앉아 몇시간동안이나 이상자저상자를 열어보앗다.


편지의 대부분은 수미가 쓴것이엿고 종종 이제 죽고없는 친구나 선배의것도 나왓다.그동
안 죽은사람들의 편지위에서 자고잇엇다니 그건 좀이상한 기분이엿다.상자를 뒤적일때마
다 반짝이 풀들이 자글자글 소리를내며 부스러졋다.

송이가만든 크리스마스카드도 잇엇다.송이의것은 유난히 입체적이고 독창적이여서 매해
내심 기대햇던 기억이낫다.펼치면 튀여나오거나 실을당기면 끌려나오거나 착시를 유도하
기도햇던 수제장치들은 여전히 날웃게햇다.



막상내용은 내년에도 잘부탁해정도로 축약되는게 매년 반복이엿지만 말이다.그것들은
차마 버리지못하고 따로 챙겨두엇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않는 동창생들이 성의없게 쓴 롤링페이퍼 몇장도 버리기로햇다.귀찮게
코팅까지 해놓다니.별로 오래 좋아하지도 않앗으면서 붙엿다뗏다햇던 보이밴드들의 포스
터도 버렷다.모패츠와 핸슨형제들은 다 잘지내고잇을까.

신문기사 스크랩북 두권도 뜬금없이 튀여나왓다.자진해서 햇을리없으니 방학숙제쯤 되엿
을것이다.온통 복제동물들 사진으로 범벅이엿다.복제양,복제소,복제원숭이에 대해 다루면
서 뒤죽박죽 엉망이된 세상이 올까봐 걱정하고 잇엇다.


삽화에는 히틀러가 끊임없이 복제되는 모습이 그려져잇엇다.나는 그기사들을 오리고 붙이
면서도 정말로 그런세상이 오리라고는 믿지않앗던 것 같다.어쨌든 전지구적으로 흥분상태
엿던 것은 분명하다.


스크랩북에는 그밖에도 사십삼년만에 공개된 이중섭의 자화상,몸무게가 십킬로그램이 넘
는 슈퍼토끼의 사진,중국청소년 범죄의 심각함을 다룬 칼럼,화성탐사선 마스폴라랜더의 착
륙실패보고,캐세이퍼시픽 항공승무원들의 웃음서비스 파업스케치,푸코의 추내부 방사선조
사 결과,오스카 와일드 흉상에대한 특집기사,스페인의 시각장애인 앵커우먼 인터뷰,20세기
마지막 부분일식 관측,대한제국 관리의 68퍼센트가 일제총독부 관리가 되엿다는 내용의 기
획기사,만화캐릭터 뽀빠이의 결혼소식,다이옥신에 의한 모유오염에 대한 발표,확산되여가
는 화장문화에대한 토론,클린턴 대통령을 비꼰 만화,엘니뇨현상에 대한 설명도,획기적인 다
이어트 알약예고,찰스왕세자와 카밀라 파커볼스의 공개데이트 사진,병에담긴 아인슈타인뇌
의 세계여행단신,레즈비언 테니스선수가 받앗던 차별에대한 기사,파푸아뉴기니 북부해안의
해일에대한 해외뉴스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붙어잇엇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자리의 사건들에만 관심을 보이는듯하다.조금 획굵은 뉴스라면
코소보 사태와 동티모르 독립운동에 대한게 포함되여잇긴 햇는데 뉴스자체보다는 어린아이
들의 사진때문에 유난히 많이오려둔 것 같다.



난민보호소 천막이나 철책에 기대거나 매달린 아이들의 이미지에 흔들렷을뿐이지 뭘제대로
이해한건 아니엿다.그렇게 똑똑한 학생은 아니엿으니까.


오래된 기사중에는 2011년에서 2020년에대한 예상이 담긴것도 잇엇다.질병은 반으로줄고
식량은 두배가 될거라는 낙관적인 내용이엿다.이 낙관성이 종자회사들 배만불렷구나 생각
하니 슬퍼졋다.



유전자 조작으로 맞춤재능을 갖춘 아기들이 출산되고 암사망률은 90퍼센트 감소될거라고
도 햇다.자폐증과 정신분열증이 사라지고 체외인공자궁이 등장할것을 미리 축하햇다.




불과 몇십년전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엿다.호들갑 떨지말라고
그방향은 아니라고 여전히 별로 나아지지 않앗을뿐더러 오히려 더나빠진 지금의 이세계를
과거로 전송해줄수 잇다면..



하지만 개중에는 실제로 이루어진것도 잇다.3D TV와 안경형 모니터는 정말 나왓으니까 말
이다.그걸로 영화나보며 계속 오지않을것들을 기다리라는 계시같다.


얼굴이 부옇게 사라진 스티커사진 한뭉치도 쓰레기통행.왜어떤 스티커사진은 아직도 또렷
하고 또 어떤 것은 부옇게 되엿을까?인화방식의 차이겟지만 어쩐지 깃든마음의 문제처럼
느껴지기도햇다.



어린시절 좋아하던 오르골인형도 쓰레기통행.곰팡이가 피여서 어쩔수없엇다.인형은 쓰레
기통에 내가 뭘더 던져넣을때마다 팅 티링 하고 끊어진 멜로디를 연주햇다.한때 소중햇던
것들을 버리면 그런소리가 나는구나 나는 과거의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는 감상들
에 슬퍼졋다.


독한년 하루만에 어떻게 이걸 죄버리니?”

엄마가 분리배출통과 쓰레기통을 들여다보곤 욕햇다.욕먹어 마땅하다.

버리지않은건 찬겸이한테 빌렷다가 미처 돌려주지못한 게임 CD몇장.이걸 돌려주면 좋아할
지 짜증을 낼지 알수없다.


0024.MPEG

운전을하는 찬겸이.목과등이 완전히 굳어잇다.

나 ㅡㅡ너그렇게 운전하면 일자목돼.

찬겸 ㅡ운전할 때 말걸지마.

찬겸이의 얼굴위로 거리의 빛들이 지나간다.신호등과 가로등과 온갖밤의 별들이.핸들을 꽉
쥔 찬겸이손.

나 ㅡㅡ(내래이션)똑똑한애가 왜 운전만은 그렇게 못하는것일까.예전에 찬겸이 차를타고 지
하주차장에 내려갓는데 내려갈 때 액셀을 밟는바람에 플룸라이드를 타는 기분이엿다.
둘다 비명을 질럿다.

ㅡㅡ


찬겸이가 아침버스에서 공부를 멈추고 게임설정집을 펼쳐보기 시작한게 그쯤이엿다.그이
상한 목요일이 지나고나서의 언젠가부터.공부 스트레스도 잇엇겟지만 우리들 사이에 떠도
는 공기를 깔끔한 성격의 찬겸이가 견디지 못햇던게 아닐까 짐작한다.자세한 것을 알고잇
엇든 모르고잇엇든 말이다.


게임도 아주 중독적으로는 하지않앗을거다.찬겸이는 어떤것에도 쉽게 중독되는 사람이 아
니다.선천적으로 중독에약한 사람은 극히 일부뿐이라는 연구결과에 대해 읽은적잇다.중독
되는 뇌를 가지고 태여나지 않앗는데도 무언가에 중독된다면 그건 중독대상이 문제가 아
니라 다른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겨울 찬겸이는 틈만나면 게임설정집을 펼쳐들고 잇엇다.경전을 읽는 종교인처럼 경건한
자세로 한자한자를 복기햇다.


그때 옛날에말야 주로 무슨게임 햇엇어?”

창세기전,파이널 판타지,이스이터널,파랜드 택틱스,악츄러스,워크래프트 원투.”

정확히 언제인지 부연하지도 않앗는데 찬겸이가 주르륵 대답햇다.그러곤 덧붙엿다.

요즘엔 영 재미가없어.”

이제안해?”

이제 안하는게 아니라 그때도 잠시만 한거야.별로 오래 안햇다니까.”

그럼 요즘은 뭐해?”

골프.”

재밋어?”

열심히는 안해.”


어떤것에도 그다지 중독되지않고 열심이 아니라면 찬겸이는 꽤 행복한 상태일지도 모르
겟다.주연이가 회사일이 잘안풀릴 때 인터넷쇼핑과 홈쇼핑을 과도하게 하는모습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든다.택배아저씨들은 백미터밖에서도 주연이를 알아보고 가벼운 경적을
울렷다.지금 아가씨 물건을 가져간다는 뜻이겟지만 그럴때마다 주연이는 멋쩍어햇다.



요리도 하지않으면서 진공 믹서기를 삿다가 나에게 주엇고 영양제를 쟁엿다가 유효기간
을 넘겨버렷다.최근에는 제철농산물에 꽂힌 모양인지 옥수수,감자,피망,참마 등을 연달아
사서 여기저기 나눠주느라 정신이 없엇다.나는 크고휑한 잠긴문들이 많은집에 혼자앉아
서 홈쇼핑을 보거나 찜솥에 옥수수 하나를 덜렁 삶아먹는 주연이를 떠올리기 싫엇다.

그에비해 송이의 중독은 흔하디흔한 커피엿다.커피를 아마존의 주술사보다 더진하게 마
실거다.왜굳이 갈아먹고 내려먹나 싶을정도로 원두소비량이 많아서 차라리 그냥 원두봉
지를 거꾸로들고 입안에 탈탈털지 싶엇다.대학때까지도 커피에 별로 취미가없던 송이엿
으나 승무원생활을 할 때 남미와 중동,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다채로운 커피맛
에 눈을뜬것이다.


근데 후배들은 어딜가든 스타벅스 커피만 먹으려고 그래.”

커피맛을 잘모르는 나는 후배들입장도 이해가갓다.낯선도시에서 그나마 덜낯선걸 찾게
되는 심리를 말이다.누구나 송이처럼 아무렇지않게 모험적일수 잇는건아니다.아랍아저
씨들과 카펫에앉아 커피를 마시는일에는 작게라도 분명 용기가 필요할듯햇다.



송이가 커피를 가져오면 나는 초콜릿을 한점 입에물고 커피를 마셧다.그럼 어떤 커피든
다맛잇다.송이와 수도없이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에는 중독되지않고 다크초콜릿에 중독
되엿다니 우습다.

민웅이는 몇번쯤 금연을 시도햇지만 그리 투철하지않앗고 성과도없엇다.민웅이가 우리
중에 가장빨리 죽을지몰라도 겉으로는 제일 건강해보인다.

수미가 현재 어떤것에 중독되여 잇는지는 알수없다.아마 메신저 비슷한게 아닐까.SNS
서 활발히 활동하고 잇는지도 모른다.찾아보면 알수잇겟지만 그러고싶진않다.



일부러 흰종이에 까만 사인펜칠을 하고 그위에 다시 밀크펜으로 편지를썻던 아무내용없
는 편지들을 쓰며 그렇게 열광적으로 말을걸엇던 수미니까 지금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잇을것이다.
추천 (1) 선물 (0명)
이젠 너의뒤에서 널 안아주고싶어
너의모든걸 내가 지켜줄께

넌 혼자가아냐. 내손을잡아
함께잇을께
IP: ♡.169.♡.51
단밤이 (♡.252.♡.103) - 2023/12/24 06:37:17

학교 다닐적에 친한 친구랑 쪽지 주고받기 하던게 생각이 나요. 내용은 별거 없었어요. 중국에 집에 작은 박스안에 모아놨어요. 저와 친한 친구가 애교가 많아서 하교하고 헤어질때마다 쪽지(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운)를 주면 제가 집에 가서 읽어보고 답장을 써서 이튿날 주곤 했어요.

뉘썬2뉘썬2 (♡.169.♡.51) - 2023/12/24 11:38:01

난 학교때 친구랑 다퉛는데 걔가 사과쪽지를 보냇드라구요.아까는 내말투가 너무탁해서
자존심땜에 그랫엇다고.생각해보니 난 어렷을때부터 말하기 싫어햇는데 일단 말을하면
사정없이 팩폭햇던것 같앗어요.

단밤이 (♡.252.♡.103) - 2023/12/24 11:43:33

어릴때는 T였나요? ㅋㅋ 친구랑 다퉈도 그때는 하루 지나면 풀리고 그랬었죠.

뉘썬2뉘썬2 (♡.169.♡.51) - 2023/12/24 14:30:07

어렷을땐 소심하고 꽁햇죠.지금도 그런게 잇겟지만 성격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햇댓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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