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8회)

죽으나사나 | 2024.02.17 10:18:41 댓글: 6 조회: 717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7710
너를 탐내도 될까? (8회)  그 말 진심 아니죠?
하아~. 
김도하 본부장을 만나 정신이 나간 듯  당당하게 제안서를 내밀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와달라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권기혁 대표 비서실에서 연락이 올 줄 몰랐다.
점심에 같이 식사를 하자니...
아아아아...
대표실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비웃던 그 모습을 생각하니 또 소름이 끼쳤다.
아니지.
밥을 같이 먹자는 건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거지? 계약 유지를 한다는 말 아니겠어?
그래! 희망을 갖자!
고급 한정식 가게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화장실로 들어와 심호흡을 하고 있던 하정은 온몸에 칭칭 감겨있던 근심 걱정을 털어내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정자세로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권기혁을 보았다. 인기척에 기혁이가 고개를 살짝 돌렸고  아까까지 당당했던 걸음이 많이 쭈글해진 하정과 눈이 마주쳤다.
"6분 늦으셨네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하는 기혁이 말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주차를 하는 게 시간이 좀 걸렸어요."
화장실에 한참을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앉으시죠."
"네."
하정은 당당하지 못한 몸을 다시 움츠리며 기혁이 앞자리에 앉았다. 
"일단 식사를 하시죠."
"네."
기혁이가 수저를 들자 하정이도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바로 수저를 들었다. 삐걱거리는 몸은 제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는 하정이한테 몹시나 불편한 자리였지만 기혁은 두 번 밖에 안 본 여자랑 마주 앉아 먹는 밥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교양 있게 한술 두술을 떴다.
드디어 기혁이가 수저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는다. 
"저..."
입을 벌렸는데 너무 낮게 뱉은 음성이 기혁이한테는 안 들렸는지 대꾸 없이 잔을 들더니 차를 마시는 기혁이.
"대표인 나한테 쫓기자마자 바로 본부장을 찾아갈 생각도 하고. 원래 그렇게 무모한 겁니까?"
잔을 내려놓으며 기혁이가 하정한테 시선을 맞추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저 시선.
안 보고 싶다.
"원래는 아닙니다."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그러는 거예요.
[뭐? 사직서? 윤 팀장.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회사가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 퇴사를 한다고?]
기혁이한테 처량하게 쫓기고 그 다음 날 부장님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더니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다만 지금 나한테는 이런 게 다 중요하지 않다고요. 난 이제 곧...
[사직서는 못 본 걸로 할게. 진짜 그만두고 싶다면 적어도 이번 사태는 해결하고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영진 그룹에 대해 공부를 했다. 인터넷 기사란 기사는 다 뒤지고 그룹 내 관계도도 보고...
주 특기인 전공을 살려 남의 회사 사업에 제안서까지 만들어서 들이밀었다. 뉴스에서 본  권기혁이 가장 신뢰를 한다는 본부장을 찾아서.
"취지는 좋은데 사실 윤하정 씨 제안 그대로 진행을 하려면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에요."
"네?"
문제가 많으면 못 본 걸로 해주세요… 흐엉. 
제안서 얘기 말고 저희 회사 계약 건에 대해서 좀...
"납품일을 미뤄줄게요."
"네??"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귀가 좀 어두우신가 봐요."
또 또 저 삐딱한 태도.
"아니. 그게...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들만 하셔서 잘못 들었나 해서요."
"제대로 들으신 거 맞고요. 납품일을 미루어줄 수 있긴 한데 제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셔야 합니다."
엥? 무슨 질문까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하정이가 다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쳤다.
"내가 그쪽 회사 납품일을 늘려줘야 하는 이유 다섯 가지를 대세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하정에 비해 그녀를 쳐다보는 기혁이 눈빛은 참으로 고요했다.
오늘 진짜 귀가 잘 안 들리는 걸까?

그래. 잘못 들은 걸거야. 

​하정이가 눈만 껌뻑껌뻑 대며  빤히 쳐다보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건 기혁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죠?“

무슨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이유 다섯 가지를 갖다 대라니.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다시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혁의 질문에 하정이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권대표… 진심이구나. 

납품일을 늘려야 하는 이유 다섯 가지라….

째깍 째깍…

룸 안에 비치되어 있는 벽시계 초침 소리 빼고는 거의 정적이 감도는 이 공간. 하정이는 머리를 굴리는 소리도 상대방한테 들릴까 두려웠다. 

또 마른침을 꿀꺽 삼킨 하정은 굳었던 표정을 억지로 풀며 배시시 웃었다. 제발 좀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건만 기혁이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게 그러니까…”

모르겠다. 일단 밀어붙이고 보자. 얼렁뚱땅 넘어갈 인물이 아니다. 

”저는 마케팅팀에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한 계획 전략을 꾸준히 해왔었고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영진 그룹과의 콜라보 사업은 앞으로 저희 리더스 시장을 더 크게 넓힐 수 있는 큰 디딤돌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코로나로 힘들었을 소기업한테 대기업과의 콜라보 기회를 주신 대표님한테 감사의 말씀을…”

”아, 내가 질문을 하나 빼 먹었네.“

”네?“

”이런 뻔한 대답은 빼고 다섯 가지.“

하??

이때 하정은  분명히 ‘대표님, 미치신 거죠?’ 라는 기가 차다는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을 거다. 

하정이 뜻을 알아차렸는지 기혁이 눈썹이 꿈틀댔다. 

“힘드시면 없던 일로 하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허리를 펴는 기혁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저 저, 대표님. 생각났습니다. 다섯 가지 이유.“

급하게 뱉고 말았다. 일단 자리에 다시 앉아서 차분히 얘기를 끝내야 했으니. 

그제야 기혁이 다시 자리에 착석한다. 

이상하다. 권기혁 대표가 원래 이렇게 이상한 걸로 사람 피 말리는 성격이신가? 뉴스를 보았을 땐 회사서 곁을 잘 주지 않는 얼음 같은 대표긴 해도 사람이 이상하다는 글은 못 봤는데. 직원들 경험담도 다 그냥 보여주기 식이였나. 

“이유의 첫 번째는, 저희 회사 실수가 있었는데… 그건  당연히 절대 하면 안 되는 기본적인 실수였다는 건 인정합니다. 기업 간의 가장 첫 번째 신뢰가 시간 약속인데 그걸 못 지킨 회사는 아웃 당해도 싸죠. 근데 이번에 영진 그룹에서 요청한 발주 수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저희 쪽에서 애를 좀 먹었습니다. 저희는 이쪽 분야 전문이 아니었고…“

”전문 분야가 아닌데 밀어붙인 우리 회사 문제다?“

서늘한 질문에 하정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꼭 그 뜻은 아니지만 코로나 이후로 공장에는 많은 인력들이 빠져나간 상태라 사실 무리였던 건 맞습니다.  이 계약을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서 진행한 것도 있었습니다. 저희 하청업체도 그렇습니다. 거의 쓰러져가던 소기업들이 영진 그룹 같은 대기업의 그 따스한 손길에 희망을 가진 겁니다.”

코로나 사태로 3년 넘게 많은 기업과 소상인들이 해외의 길이 막혔다. 대기업도 피해가 막중했겠지만 워낙 튼튼한 자금과 지지대가 있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지만 김포공장 같은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소기업은 거의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미 폐업을 한 기업도 물론 많았지만. 

그 공장도 하정이가 두발로 뛰어다니면서 직접 찾은 업체였다. 

“두 번째 이유.“

긴 한숨을 쉬며 기혁이한테 들을 쓴소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예상치 않은 말이 귓등으로 흘러들어왔다. 

어? 이렇게 대놓고 우는소리를 했는데 인정해 준다고?

오올??

희망이 보이자 그늘로 축 처졌던 하정이 두 눈이 순간 별처럼 반짝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음.. 보자. 난 서면으로 제출하는 제안서는 강한데 실전은 약한데… 

윤하정. 잘 생각해 보자. 

“이번 콜라보 하기로 한 회사가 저희 빼고 세 곳이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내놓은 디자인이 상당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저희가 이번에 빠지게 되면 그 디자인들은 다 묻히게 될 건데, 물론 타 회사에서 디자인을 늘리면 되긴 하겠죠. 제가 좀 알아봤었거든요. 그쪽 회사들도 패션은 전문 분야는 아니었더군요. 저희처럼 전문적인 인력을 고용해서 패션 디자인까지 콜라보 한 게 아니라 거의 영진 그룹에서 제시한 디자인대로 찍어냈던데요? 결국 그러면 영진 그룹에서 디자인한 상품을 타 기업에서 찍어내기만 한 건데 처음 영진 그룹에서 내보낸 이번 사업 취지랑 좀 많이 달라서요.“

긴 얘기를 꺼내면서 하정은 중간중간 기혁이 표정 변화에 신경을 썼다. 별 미동도 없었지만. 

“대- 소기업 협업 사업이지만 이걸 계기로 작은 기업들도 새 사업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목표였잖아요. 영진 그룹을 통해서 기업 이름도 알리고 말입니다. 저희는 영진 그룹에 거의 의존하는 회사들과 다릅니다. 영진 그룹과의 공동상표도 저희한테는 크나큰 영광이지만 저희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희만의 브랜드를 개척해 나갈 거고 꼭 성공을 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이 사업에 매진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 목말라.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마른 하정은 여전히 묵묵히 앉아있는 기혁을 힐끔 쳐다보고는 찻잔을 찾았다. 

차가 없다. 밥을 먹을 때부터 바짝 긴장되어서 다 마셔버린 탓이라..

두리번거리면서 남은 차를 찾는데 기혁이 근처에 있던 차병은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보아하니 따라주겠다는 뜻인 거 같아서 두 손을 공손히 받들어 찻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찻병은 하정이 앞에 매정하게 놓였다. 

직접 따라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차병을 건네주는 거였구나. 

하, 하하…

여러모로 등에까지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하정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벌컥벌컥 차를 들이켠 하정이가 또 입을 열었다. 

“좀 재수가 없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크루즈 선내 컬렉션  제안서가  사실 나쁘지 않죠? 그래서 저는 대표님께서 저희 리더스와 계약을 해지할 거 같진 않습니다.”

기혁이가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더니 어느새 얼굴 근육이 한결 풀린 흐뭇한 표정으로 하정을 쳐다본다. 

어?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

[뭘 그리 빤히 쳐다봐요? 왜요. 어린 꽃송이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예요? 뭐, 내가 꽃송이 중에서도 꽤 예쁜 꽃은 맞지만…]

기혁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고등학생인 은서의 모습이 언뜻 하정이한테서 보였다. 

“대표님도 반하실 거예요.”

하정이 입에서 또렷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기혁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저 여자는. 

기혁이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아, 그 제안서요.”

아…

순간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미쳤네. 

기혁은 어느덧 진득하게 바라보던 하정이한테서 시선을 돌려  창가로 고정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유는 저항할 수 없는 제 제안에 빠지실 거라 더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처음엔 많이 두려웠으나 이제 많이 차분해진 하정이가 금방 자기가 한 말에 고개를 돌린 기혁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까 못 참고 픽 하고 웃은 기혁을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 

“내일 오전 저희 회사로 오세요. 윤하정 씨 브리핑이 필요할 거 같으니까.“

”네…. 네???“

무심코 ’네‘ 라고 대답을 했던 하정이가 깜짝 놀라서 눈꺼풀을 치켜든 채 여러 번 깜빡이었다. 

그러건 말건 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밖으로 나가버린 후였다. 

하, 

내가 우리 회사도 아니고 남의 회사에 가서 브리핑까지 해야 돼??
 
오 마이 갓!!
추천 (2) 선물 (0명)
IP: ♡.214.♡.18
나단비 (♡.252.♡.103) - 2024/02/17 11:25:30

흥미진진한데요. 잘 봤어요 ㅋㅋ

죽으나사나 (♡.214.♡.18) - 2024/02/17 12:40:12

접해보지 못한 분야를 쓰느라 어색합니다. ㅠ

나단비 (♡.252.♡.103) - 2024/02/17 12:59:17

여주인공 심리묘사가 나오니 더 매력있어요 ㅋㅋ

죽으나사나 (♡.214.♡.18) - 2024/02/17 13:42:14

그런가요 ㅋㅋ

Figaro (♡.50.♡.29) - 2024/02/17 13:56:23

작가님 화이팅입니다.ㅋㅋ

죽으나사나 (♡.214.♡.18) - 2024/02/17 16:27:36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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