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모음 3

3학년2반 | 2022.01.27 10:00:19 댓글: 1 조회: 24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kr/fiction/4345465

完全氾罪의 名手 (원제: 빨간 방)

by 江戶川亂步 (Edokawa Ranbo)

[ 1 ]
이상한 흥분을 찾아 모여든 7명의 의젓한 사나이들이(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일부러 그것을 위해 특별히 만든 <빨간 방>의 주홍빛 비로오도
로 싸은 푹신한 안락의자에 제각기 기대앉아, 오늘밤의 주인공이 무언가 색
다르고도 괴이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
다.
7명의 사나이들의 한복판에는 이 역시 주홍빛 비로오도로 덮인 하나의 크
고 둥근테이블 위에 옛 조각이 새겨진 촛대에 받쳐진 세 자루의 굵은 촛불
이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타오르고 있었다.
방의 둘레에는 창이나 입구의 도어조차 남김없이 천정에서 마루바닥까지
새빨간 무거운 비단술이 풍부한 주름을 이루며 쳐져 있었다. 로맨틱한 촛불
빛이 그 정맥에서 갓 흘러나온 피처럼 거무스레한 비단술 겉에 우리들 7명
의 별나게 큰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촛불의 흔들림
에 따라 몇 개의 거대한 곤충이기라도 한 듯이 비단술의 주름의 곡선 위를
펴졌다가 오물아들었다하면서 기어다니고 있었다. 항상 그렇거니와 그 방은
나로 하여금 마치 기막히게 큰 생물의 심장 안에 앉아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심장이 크기에 알맞는 둔중함으로 덜컹
덜컹 뛰노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촛불을 통해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의 벌겋
게 보이는 그림자가 많은 얼굴을 시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들은
이상하게도 가면처럼 무표정한 채 꼼짝달싹도 안하는 것같아 보였다.
이윽고 오늘밤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는 신입회원 T씨는 앉은 채로 촛불
을 바라보면서 다음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음영의 상태 때문에 해골
처럼 보이는 그의 턱이 말을 할 때마다 덜덜 마주치는 모양을 마치 기괴한
꼭두각시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심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2 ]
나는 내 자신의 생각으로는 틀림없이 멀쩡한 정신이라고 믿고 있고, 사람
들도 그렇게 대해주고 있읍니다. 그러나 정말 멀쩡한 정신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읍니다.미치광이인지도 모릅니다.
어쨓든 나라는 인간은 이상할 만큼 이 세상이 하찮은 것입니다. 살아 있다
는 것이 도무지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 얼마 동안은 여느 사람들처럼 여러 가지 도락에 잠긴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무엇이고 간에 나의 타고난 지루함을 위로해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제 이것으로 이 세상의 재미있는 일은 그만인가, 정말
형편없군, 이런 실망만이 남을 뿐이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차츰 무엇을 하
는 것이 숫제 귀찮아졌읍니다. 가령 이러이러한 오락은 재미있다. 아마 너
를 기쁘게 해줄 게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되면, 오오, 그런 것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당장 해봐야지, 이렇게 벼르는 대신 먼저 머리속으로 그 재미 있
는 일을 이모저모 상상해 보는 것읍니다. 그리고 온갖 상상을 되풀이한 결
과는 언제나 '뭐 대단한 것이 못된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판이라 나는 어떤 기간을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않고, 그저 먹고 잠
자는 생활
만 했었지요. 그리고 머리 속에서만 여러 공상을 하면서 이것도 신통치 않
다, 저것도 지루하다, 이렇게 깡그리 밀쳐내면서 죽는 것보다도 괴로운, 그
러면서도 남이 보기엔 팔자 좋은 안이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내가 차라리 그날 그날 입에 풀칠 하기 힘든 환경이었다면, 이렇게는
안되었을 겝니다. 하다못해 강제된 노동이드라도 어쨓든 무언가 할 일이 있
으면 행복하죠. 아니면 내가 기막힌 부자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마 그 돈의 힘으로 역사상의 폭군들처럼 기막힌 사치나 피비린내나는 유
희나 그밖의 내가 꿈꾸고 있는 온갖 즐거움에 잠길 수가 있었을 테지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보나마나 "그야 그렇지. 그렇지만 이 세상 일
에 질력이나 있는 점에서는 우리 역시 네게 뒤지지 않지. 그래서 이런 클럽
을 만들어, 색다른 흥분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 역시 어지간
히 지루하니까 우리 회원이 된 것이겠지." 이렇게 말씀 하실 겝니다.사실
그렇지요. 나는 굳이 지루하게 그 따위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던 게
지요. 그리고 당신들이 지루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밤 이 자리에 참석해서 세상에서도 보기드문 별난 신
상 이야기를 하려고 결심한 것이니까요.
나는 이 아래층 레스토랑에는 노상 드나들고 있어, 자연 여기 계시는 주인
양반하고도 자별한 사이가 되어, 훨씬 전부터 이 <빨간 방>의 모임에 대한
애기를 들었고 수차 입회 하라는 권고조차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내가
여지껏 입회를 안한 것은 내가 실례의 말씀인지는 몰라도 여러분과는 비교
가 안될 만큼 지루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와 탐정 놀음 말씀인가요?
강령술이나 심령상의 실험 말씀인가요? 형무소나 간질병병원이나 해부학교
실 따위 참관 말씀인가요? 아직도 그런 것에 다소라도 흥미를 품으실 수 있
는 여러분은 그래도 행복한 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형집행을 엿볼 계획
을 세우고 있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조차 전혀 놀라지 않았지요. 그럴 것이
나는 주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엔 이미 그런 흔해빠진 자극에는 질려있
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막힌 유희, 이렇게 말해선 약간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마는, 나로서는 유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 그 즐거움에 정
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희, 즉 장난이란 느닷없이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놀라실지도 모릅니
다마는... 살인(殺人)입니다. 진짜 살인 말씀입니다. 게다가 나는 그 장난
을 발견한 뒤로 이제까지 다만 지루함을 덜고자 백 명에 가까운 남녀나 어
린애의 목숨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면 내가 이제 그 무서운
죄악을 뉘우치고 참회를 하기 위해 이런 얘기를 꺼내는 모양이라고 짐작하
실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지요. 나는 조금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
읍니다.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아,
기막힌 일입니다. 나는 근래에 와서 그 살인이라는 자극에조차 싫증이 나버
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남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일에, 그 아편에 빠져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나 역시 목숨은 아까웠던지 이것만은 손에 대지 않
으려고 했지만, 살인에도 싫증을 느끼게 된 판국이니 이제 자살이라도 뜻하
기 전엔 달리 자극을 구할 길이 없잖겠읍니까? 나는 이제 조만간 아편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겝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다못해 정신이 말짱한 사이에
누군가에게 내가 해온 것을 말해 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엔 이<빨간 방>
의 분들이 가장 안성마춤이 아니겠읍니까?
그런 까닭에 나는 실은 여러분의 동료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만 나의
이 별난 신상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어 회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
히 신입회원은 반드시 첫날밤 이 모임의 뜻에 알맞는 얘기를 하기로 되어
있어, 이렇게 오늘밤 그 동안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입
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한 3년쯤 전의 일이었지요. 그 무렵은 방금 말씀드린 것
처럼 온갖 자극에 지쳐 버려 아무런 보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지루함이
라는 이름을 지닌 동물처럼 하는 일 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 해 봄, 봄이라
고는 해도 아직 추울 때였으니까 아마 2월말이나 3월 초순쯤 되었을 겝니
다. 어느날 밤 나는 묘한 일을 겪게된 것입니다. 내가 백 명이나 되는 사람
의 목숨을 빼앗게 된 것은 그날밤의 일이 동기가 되었지요.
어딘가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보낸 나는 아마 한 시쯤 되었을까요, 약간 얼
근해 있었읍니다. 추운 밤인데 어슬렁어슬렁 차도 타지 않고 집쪽으로 걷고
있었지요. 골목하나만 돌면 바로 우리집인, 그 골목길을 돌아가려니, 웬 사
나이가 몹시 허둥지둥 뛰어나오고 있더군요. 우리는 서로 부딪칠 뻔했지요.
사나이는 더한층 놀라더니 어렴풋한 가로등 불빛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자
갑자기 "이 근처에 병원이 없나요?" 이렇게 묻는 게 아닙니까. 말을 들어
보니 그 사나이는 택시 운전사인데 방금 한 노인을(그런 밤중에 혼자 돌아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 부랑자였을 겝니다) 치어 대단한 상처를
입혔다는 것입니다. 딴은 그러고보니 바로 앞쪽에 한 대의 택시가 서있고,
그 곁에 사람같은 것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더군요. 파출소는 멀고, 게다가
부상자의 고통이 심해서 운전사는 우선 병원부터 찾으려고 허둥대며 달려온
모양이에요. 나는 그 근처의 지리는 훤했기 때문에 병원도 잘 알고 있었지
요. 그래서 곧 이렇게 가르쳐 줬읍니다.
"왼쪽으로 조금 가면 또 왼쪽에 빨간 등불이 달려 있는 집이 있소. M병원이
라고 하죠. 그곳으로 가서 깨워 보시구려."
그러자 운전사는 곧 부상자를 업고 M병원으로 달려갔지요. 나는 그의 뒷모
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나는 독신
입니다.---노파가 깔아 준 이부자리로 들어가 곧 잠들어 버렸읍니다.
실상 아무 것도 아닌 일입니다. 만일 내가 그대로 그 사건을 잊어버리기만
했드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릴 일이었지요. 그런데 이튿날 잠이 깼을 때 나
는 전날밤의 그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 부상자는 살았
을까, 이런 필요치 않은 생각을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사
실을 깨달았읍니다.
"가만 있자, 이거 큰 실수를 저질렀는걸."
나는 깜짝 놀랐읍니다.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마
저 잃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부상자를 M병원으로
보낸 것일까요?
"왼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에 빨간 등불이 달려 있는 집이 있소..."
이렇게 한 말도 모두 기억하고 있읍니다. 어째서 그 대신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K병원이라는 외과 전문 병원이 있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내가 가르쳐 준 것은 소문난 엉터리 의사
였고, 게다가 외과쪽은 제대로 기술이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M병원과는 반대쪽이고, M병원보다 가까운 곳에 훌륭한 설비가 갖추
어진 K라는 외과병원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
요.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잘못 가르쳐 주었는지, 그 때의 야릇한 심리상태
는 지금도 역시 알 길이 없읍니다만, 아마 순간적으로 깜빡 잊고 착각을 했
던 모양입니다.
나는 적지않이 염려가 되기에 가정부 노파를 시켜 알아 보았더니, 부상자
는 M병원 진찰실에서 숨을 거둔 모양입니다. 어디 의사건 그런 부상자를 싫
어할 것은 당연합니다. 하물며 밤중 한 시였으니까 무리도 아니었지요. 한
동안 기다리게 해놓고 간신히 부상자를 받아 들였을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
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때 만일 의사가 "나는 전문의가 아니니까 K병
원으로 데려가시오." 이렇게라도 했다면, 혹시 부상자는 살았을는지도 모릅
니다. 그런데 그는 터무니없이 자기 분수도 잊고 그 환자를 처리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패한 것입니다. 소문을 듣자니 M의사는 당
황해 버려 굉장히 오랫동안 환자를 주물러댄 모양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읍니다. 이 경우 가엾은 노
인을 죽인 것은 과연 누구일까요? 운전사와 M의사에게도 각기 책임이 있음
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법률상의 처벌이 있다면, 아마 운전사의 과실에 대
해 행해질 터이지만, 사실상 가장 중대한 책임자는 이 내가 아닐까요? 만일
그 때 내가 M병원 말고 K병원을 가르쳐 줬다면 부상자는 살았을는지도 모르
는 것입니다. 운전사는 다만 부상을 입혔을뿐입니다. 죽인 것은 아니지요.
M의사는 기술부족으로 실패한 것이니까 이 역시 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우연의 과실이었다고 생각한 경우지만, 만일 그것이
과실이 아니라, 그 노인을 죽여버리자는 나의 고의(故意)에서 나온 것이었
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나는 사실상 살인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
까? 그러나 법률은 운전사를 벌하는 일은 있어도 사실상의 살인자인 나에
대해서는 아마 의심조차 품지 않을 겁니다. 그럴것이 나하고 죽은 노인하고
는 안면조차 없는 판이니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은 자명하니
까요. 그리고 설령 의심을 받드라도 나는 그저 병원이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고 대답만 하면 되지 않겠읍니까? 안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살인범에 대해 생각해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나는
이 자동차사건으로 비로소 그 점을 깨달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얼
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릅니다. 그 어느 때 나 같은 인간이 아무런 이해관계
도 없이 고의로 틀린 의사를 가르쳐 주거나 해서 그렇지 않으면 건질 수 있
었을 목숨을 부당하게 잃어버리게 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후 내가 실제로 해보고 성공한 일이지만, 시골 노파가 행길을
건너려고 막 한 발을 내딛었을 때, 물론 그곳에는 전차니 버스니 택시니 마
차 따위가 쉴 새없이 달리고 있으니까 노파의 머리는 보나마나 혼란을 일으
키고 있을 겝니다. 그때 차가 쏜살같이 달려와 노파의 바로 뒤까지 이르렀
다고 가정합시다. 그 때 노파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대로 건너가면 별
것이 아니지만, 누군가가 큰 소리로 "할머니 위험해요!" 이렇게 외치기라도
한다면, 그만 허둥거리게 되어 잠시 꾸물댈게 분명합니다. 만일 차가 급정
거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할머니 위험해요!"라고 외친 한 마디가 노파를
죽이게 만들 수도 있지요. 아까도 말씀드린것 처럼, 나는 언젠가 이런 방법
으로 시골사람 한 사람을 보기좋게 죽여 버린 일이 있어요.(T씨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우리를 둘러보고 싱긋 웃었다)

[ 3 ]
이 경우 "위험해요!" 이렇게 외친 나는 틀림없는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누
가 나의 살의(殺意)를 의심할 것입니까? 아무런 원한도 없는 낯선 인간을
다만 살인의 흥미 때문에 죽이려는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할 사람이 있을까
요? 게다가 "위험해요!"라는 주의의 말은 아무리 해석해도 호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표면상 감사는 받을지언정 결코 원망을 들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
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안전한 살인법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쁜 짓은 반드시 법률에 저촉되어 그에 상당한 처벌을 받
는 것이라고 믿고, 어리석게도 안심하고 있읍니다. 누구이건 간에 법률이
살인을 그대로 두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않고 있지요. 그런데 이제 말한 두
가지 실예(實例)에서 유추 할수 있는, 전혀 법률에 저촉될 염려가 없는 살
인법이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라는 것의 두려움에 소름이 끼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죄악의 여지
를 남겨 준 조물주의 여유를 다시없이 유쾌하게 생각했지요. 나는 그야말로
이 발견에 미쳐 날뛰었읍니다. 실상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리하여 나는 이런 종류의 살인으로 그 죽을 것같이 못견딘 지루함을 잊
기로 했읍니다. 절대로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살인, 어떤 셔얼록 홈즈라도
알아낼 수 없는 살인, 아아,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 뒤로 나는 3년
동안에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에 잠겨 어느새 그 지루함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읍니다. 여러분, 웃지마십시오. 나는 백 명의 목숨을 빼앗을 때까지는
절대로 중간에서 이 살인을 그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석 달 전입니다. 나는 마침 99명 만을 끝냈지요. 그리고 이제 한
명이 남게 되었을 때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그 살인에도 싫증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됐건 그 99명을 어떤 식으로 죽였느냐? 물론
99명 중 단 한 사람에게도 원한 따위는 없었고, 다만 남이 모르는 방법과
그 결과에 흥미를 품고 한 짓이니까, 나는 한 번도 같은 방법을 되풀이하는
짓은 안했지요. 한 사람을 죽이고나면, 이번에는 어떤 새 방법으로 해치울
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낙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내가 한 99명의 제각기 다른 살인법을 모조리 말씀
드릴 여가도 없고, 게다가 오늘밤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그런 개개의
살인법을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극악무도한 죄악을 범해가면서까
지 무료함을 잊으려고 한, 그리고 또한 마침내는 그 죄악에조차 싫증이 나
버려 이번엔 나 자신을 망치려 하고 있는 이 묘한 나의 심정을 말씀드려,
여러분의 판단을 바라기 위해서였으니까 그 살인방법에 대해서는 그저 몇
가지 예만 들기로 하겠읍니다.
이 발견을 한 지 얼마 안되어서였는데, 이런 일도 있었읍니다. 우리집 근
처에 한 안
마장이가 있는데, 이 친구가 불구자에게 흔히 있는 아주 심한 고집장이였
지요. 남들이 여러 가지로 주의해 주면, 오히려 그 반대를 취해, 눈이 안보
인다고 바보 취급 말아라, 그 만한 것은 나 역시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반드시 상대방의 말에 거슬리는 짓을 하는 거에요. 정말 대단한 고집장이지
요.
어느날 내가 행길을 지나가려니 저쪽에서 그 고집장이 안마사가 오더군요.
그는 건방지게도 지팡이를 어깨에 얹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오고 있는 거에
요. 마침 그때 그거리에는 전날부터 하수도 공사가 시작되고 있어, 행길 한
쪽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혜쳐져 있었는데, 그는 장님이라 길거리의 푯말 같
은 것은 안보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그 구덩이 곁을 태평스럽게 걷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자 나는 문득 하나의 묘안을 생각해냈읍니다. 그
래서 다정하게 "여보게." 이렇게 안마사를 부르고(흔히 안마를 부탁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지요)
"위험해. 왼쪽으로 비키게."
이렇게 외쳤지요. 이 말을 일부러 농담 투로 말한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이
렇게 하면 그 는 평소의 성질로 보나마나 놀리는 줄 짐작하고는 왼쪽으로
비키지 않고 우정 오른쪽으로 비켜날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
다. 과연 그는
"에헤헤... 농담도 잘하셔."
어쩌고 말대답을 하면서 다짜고자 반대방향인 오른쪽으로 물러섰으니 견딜
재간이 있읍니까. 순식간에 하수도공사 구덩이 속으로 한쪽 발이 빠지면서
족히 2백여미터나 되는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읍니다. 나는 놀란
듯이 구덩이 언저리로 달려가서 뜻대로 되었나 하고 들여다 보았읍니다.
그는 머리라도 얻어맞았는지, 구덩이 속에 늘어져 있고, 구덩이 가상이에
온통 튀어나온 날카로운 돌에라도 찍혔는지 머리에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
읍니다. 그리고 혀라도 깨물었던 모양으로 입이나 코에서도 역시 출혈을 하
고 있더군요. 얼굴빛은 창백하고, 미처 신음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읍니다.
이리하여 이 안마사는 몇 시간은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었지만, 드디어 절
명해 버렸지요. 내 계획은 보기좋게 성공했읍니다. 누가 나를 의심하겠읍니
까? 나는 이 안마사를 평소 단골로 삼고 있었고, 결코 살인의 동기가 될 만
한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게다가 표면상은 오른쪽에 구덩이가 있는
것을 알고 피하라고 일러 준 것이니까 나의 호의를 인정하는 사람은 있어
도, 그 친절한 말에 무서운 살의가 숨겨져 있었다고 짐작할 사람이 도시 있
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아아, 그 얼마나 무섭고도 즐거운 장난입니까! 교묘한 트릭을 생각해냈을
때의 필경 예술가의 그것과도 맞먹는 환희, 그 트릭을 실행할 때의 으쓱으
쓱한 긴장, 그리고 목적을 이루었을 때의 말할 수 없는 만족, 게다가 또한
나의 희생이 된 남녀가 살인자가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피 투성이가 되
어 신음하는 단말마(斷末魔)의 광경, 이런 것들이 그 얼마나 나를 미쳐날뛰
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이런일도 있었읍니다. 그것은 여름철의 몹시 흐린 날의 일이었
는데, 나는 어느 교외의 양옥집이 듬성듬성 서 있는 한적한 동네를 걷고 있
었지요. 그리고 마침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콘크리트 건물 뒤쪽을 지나
갔을 때였읍니다. 문득 묘한 것이 눈에 띄더군요. 그것은 그 때 내 코 끝을
스치고 날쎄게 날아가던 한 마리의 참새가 그 집의 지붕에서 땅으로 쳐져
있는 굵은 철사에 앉기가 무섭게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튕긴 것처럼 밑으
로 굴러 떨어져 그대로 죽어 버린 것입니다.
묘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고 자세히 보니, 그 철사는 양옥집 지붕 꼭대기에
있는 피뢰침 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물론 철사에는 껍데기가
덮혀져 있었지만, 방금 참새가 앉았던 부분은 어찌된 셈인지 그것이 벗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쩌다가 공중전기
(空中電氣)의 작용인가 무언가로 피뢰침의 철사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어, 그게 바로 이것이었고나 생각했지요. 이런일
을 보기는 처음이라, 나는 어지간히 신기하게 생각하고 잠시 그곳에 서서
철사를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병정놀이라도 하고 있었던지 아이들의 한 떼가 왁작지껄 골목에서
나왔고, 그 중의 대여섯 살쯤 되는 사내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저쪽으
로 가버렸는데 혼자 남기에 무엇을 하나 보고 있자, 그 피뢰침 철사 앞 둔
덕에 서서 앞단추를 풀자 소변을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을 본 나는 다
시금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읍니다. 중학시절에 물이 전기의 도체라는
것을 배운 일이 있읍니다. 꼬마가 서있는 둔덕에서 그 철사의 벗겨진 부분
에다 소변을 누는 것은 손쉬운 일입니다. 소변은 물이니까 역시 도체임이
틀림 없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 꼬마한테 이렇게 말했읍니다.
"꼬마야, 그 철사에 오줌을 눠봐. 닿을 수 있니?"
그러자 어린아이는 "그까짓 것 문제없어. 보라구요."
그러더니 자세를 바꾸어 철사가 드러나 있는 부분을 향해 힘차게 오줌줄기
를 뻗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그것이 철사에 닿기가 무섭게 정말 무섭더
군요. 꼬마는 깡총 춤추듯이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털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
읍니다. 나중에 들으니 피뢰침에 이렇게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은 매우 드
문 일이라는 것이었는데, 어쨓든 이렇게 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인간이
감전되서 죽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경우는 물론 제삼자인 나는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았읍니다. 다만 소식
을 듣고 달려나와 어린아이의 시체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는 모친에게 정중
한 애도의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읍니다. 나는 희생시키려고 벼르고 있던 어
떤 친구,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그 사나이한테 손톱만큼도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랫동안 다시없는 친구로 사귀고 있었던 사나이였읍니다마
는, 내게는 오히려 그런 사이 좋은 친구를 말 한 마디 없이 웃으면서 순식
간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이상한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와 같이
보우슈우(房州)의 몹시 두메진 바닷가로 피서를간 일이 있읍니다. 물론 해
수욕장이라고 할 만한 곳은 못되었고, 도시에서 온 손님이라곤 우리 두 사
람 말고는 미술 학도인 듯싶은 사람이 몇 명, 그것도 바다에 들어간다기보
다는 그 근처의 바닷가를 스케치북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였지요.
이름난 해수욕장 처럼 도시 처녀들의 풍만한 알몸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
고, 여관이라고는 싸구려 여인숙 같은 곳인 데다가 음식도 신통치 않아 몹
시 쓸쓸하고 불편한 곳이었지만 내 친구라는 게 나와는 달리 그런 한적한
장소에서 고독을 즐기는 편이었고, 나는 나대로 어떻게 해서든 이 친구를
처치할 기회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던 판이라, 그런 두메에 며칠씩 묵고 있
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나는 그 친구를 바닷가 부락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있는 얼핏 보면
단애(斷崖)처럼 되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읍니다. 그리고 다이빙을 하기
에는 안성마춤인 곳이라고 하면서 옷을 훌훌 벗었읍니다. 친구도 얼마간 수
영 기술은 있었던 만큼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십상이라면서 나를 따라 옷을
벗더군요.
그리하여 나는 그 낭떠러지 끝에 서서 두 손을 곧장 머리위로 뻗치고 하나
둘 셋,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는 기막힌 고선(孤線)을 그으면서 거꾸로
해면으로 뛰어들었읍니다. 텀벙하고 몸에 물이 닿는 순간 가슴과 배의 호흡
으로 재빨리 물을 가르고,두세 척(尺)을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비어(飛魚)
처럼 저쪽 수면에 몸을 나타내는 것이 다이빙의 요령입니다마는, 나는 어렸
을 때부터 수영에 능숙하여 이 다이빙 따위도 식은 죽 먹기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슭에서 얼마만큼 떨어진 수면에 목을 내놓은 나는 입영(立泳)을
하면서 큰소리로
"이봐, 어서 뛰어들어."
이렇게 친구에게 말했지요. 그러자 그는 물론 아무 것도 모르고 좋다면서
힘차게 물속으로 뛰어들었읍니다.
그런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속으로 들어간 채 그는 다시는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지요... 나는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 바다 밑에는 수면
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큰 바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미리 그것을 알아
두었고, 친구의 솜씨로는 다이빙을 하면 반드시 깊숙히 들어갈 것이며, 따
라서 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칠 것이 뻔하다고 짐작하고 한 일 이었던 것입
니다. 잘 아실 테지만 다이빙의 기술은 능숙한 사람일수록 이 물 밑에 가라
앉는 율(率)이 적게 마련이고, 나는 그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바위에 부딪치
기 전에 저쪽으로 떠오를 수 있었지만, 그 친구는 다이빙 솜씨가 아직 서툴
러 영락없이 머리를 바위에 부딪친 것입니다.
과연 잠시 있으려니 그는 다랑어의 시체처럼 해면에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파도에 밀려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절해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그
를 안고 기슭으로 헤엄쳐 가 그대로 부락으로 달려가서 여관 사람에게 사태
를 알렸읍니다. 그러자 어부들이 달려와서 친구를 간호해 주었지만, 뇌를
심하게 다쳐 소생할 가망은 없었지요. 보니 머리끝이 대여 섯 치나 갈라지
고, 그 머리가 놓여진 땅에는 숱한 피가 엉겨붙어 있더군요.
내가 경찰의 취조를 받은 것은 그 동안 단 두번 뿐이었는데, 그 하나가 이
때였읍니다. 그럴 것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니까 일단 취
조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하고 그 친구와는 친한 사이이고, 다
툼질 한 번 없었다는 사실이알려져 있었는데다가 당시의 사정으로는 나 역
시 그 바다 밑에 바위가 있는 것을 몰랐고, 다행히 나는 수영이 능숙하여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는 서투른 나머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던 만큼 나에 대한 의심은 금새 풀렸고, 나는 되려 경찰관에게 친
구를 잃으셔서 안됐다는 위로의 말조차 들었지요.
아니, 이런 식으로 일일이 예를 들고 있다간 한이 없읍니다. 이쯤 말씀드
리면 여러분은 나의 이른바 절대로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살인법을 대충 이
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이런 식이었지요. 어떤 때는 서커스를 보
는 구경군 틈에 섞여 있다가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부끄러운 야릇한 자세를
보여 높은 곳에서 밧줄을 타고 있던 처녀애를 추락시켜 보기도 하고, 불이
난곳에서 아이를 찾아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는 아낙네에게 아이는 집안에
누워 있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런 암시를 주어 그 여인을 불
속에 뛰어들게 만들어 태워죽이기도 하고, 또는 난간에 기대어 뛰어 들려는

처녀의 등 뒤에서 느닷없이 "잠깐!" 이런 소리를 질러, 그렇지 않으면 자살
을 단념했

을지도 모르는 그 처녀를 순간적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등, 말하
자면 끝이

없읍니다마는 벌써 밤도 이슥한 데다가 여러분도 이런 참혹한 얘기는 더 듣
고 싶지도 않으실 테니, 끝으로 한 가지 색다른 얘기를 하고 마무리짓기로
하십시다.
이제까지 얘기한 것은 번번히 한 번에 한 사람을 죽인 그런 것이지만 그렇
지 않은 경우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과 3년 남짓한 사이에
99명이나 죽일 수야 있겠읍니까? 그 중 에서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그렇지요, 작년 봄의 일이었읍니다. 여러분도 그 때 신문을 보셨으
리라 생각합니다마는 중앙선 열차가 뒤집혀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낸 일
이 있었죠? 바로 그것입니다.

[ 4 ]
뭐 방법이란 누워서 떡먹기였지요. 오직 그것을 실행하는 고장을 찾느라고
시간이 걸렸을 뿐입니다. 다만 처음부터 중앙선 연선(沿線)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럴 것이 이 선은 계획에 가장 편리한 산 속을 지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차가 전복한 경우에도 중앙선에는 평소 사고가 많
으니까, 또 일어났고나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리기 쉽기 때문입
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런 곳을 찾아내느라 어지간히 힘이 들었지요. 결국 M역
근처의 벼랑을 사용하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일주일 이상은 걸렸지요. M역에
는 온천이 있었고, 나는 그곳 여관에 묵으면서 매일같이 온천 물에 잠기기
도 하고, 근처를 돌아다니는 등, 온천객을 가장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열
흘이나 묵고 있어야 했지요.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날 여느때 처럼 그
근처의 산 속을 산책했읍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5리쯤 떨어진 어느 언덕 꼭대기에 올라 어둠이 깃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 언덕 바로 밑에는 기차의 선로가 커어브를 그리며
달리고 있고, 선로 저쪽에는 이곳과는 반대로 험준한 골짜기가 퍼져 있고,
그 밑에 개울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물아물 보일 만큼 떨어져 있었지요.
잠시 있자 미리 정해 놓은 시간이 되더군요. 나는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
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정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 체하며 이 역시 미리 찾
아 놓은 커다란 돌맹이를 발길로 찼읍니다. 그것은 좀 차기만 하면 틀림없
이 언덕에서 마침 선로 위쯤 되는 곳으로 굴러 떨어질 위치에 있었던 것입
니다. 나는 만일 실패하면 몇 번이건 다른 돌을 걷어찰 작정 이었는데, 보
니 그 돌은 안성마춤으로 한 가닥 레일 위에 얹혀 있더군요.
반 시간 뒤에는 하행열차가 그 레일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쯤엔
벌써 어두워질 터이고, 그 돌이 있는 곳은 커어브 저쪽이니까 운전사가 깨
달을 까닭이 없지요. 그것을 확인하자 나는 급히 M역으로 달려가서(5리쯤
되는 산길이어서 족히 30분 이상이 걸렸지요) 역장실로 헐레벌떡 뛰어들어
외쳤읍니다.
"큰 일 났읍니다! 저는 이곳 온천에 와 있는 사람인데, 방금 5리쯤 떨어진
선로 위쪽 언덕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언덕에서 달려 내려오는 길에 돌을 언
덕 밑 선로 위로 차버렸어요. 만일 그곳을 열차가 지나면 틀림없이 탈선될
거에요. 자칫하면 골짜기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거 야단났는데요. 그
돌을 주워내려고 길을 찾았지만, 지리도 잘모르는 데다가 그 벼랑을 내려
갈 방도가 없어 하는수 없이 이리 달려왔는데, 어쩌면 좋죠? 속히 그 것
을 주워낼 수 없을까요?
그러자 역장은 깜짝 놀라면서
"이거 큰일 났군. 방금 하행열차가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다른 때 같으
면 지금쯤 그 곳을 훨씬 지났을 텐데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였지요. 그런 당황한
문답을 되풀이 하고 있는 사이에 열차전복, 사상자 불명이라는 보고가 간
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달려온 그 열차의 차장에 의해 들어왔읍니다.
나는 당연히 하룻밤 M경찰서로 끌려가서 취조를 받았는데, 이것은 이미 계
획에 들어있는 일입니다. 실수가 있을 리 없었지요. 물론 나는 매우 꾸지
람은 들었지만, 이렇다할 처벌은 받지 않았읍니다. 나중에 듣자니 그 때의
내 행위는 형법 120조라나요, 그것에조차 해당되지 않았다더군요. 그 120
조라는 것도 벌금형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씀입니다. 어쨓든 이렇게 해서
나는 돌맹이 하나로 에에, 그게 아마 열 일곱 명이었지요. 17명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는 일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런식으로 99명의 인명을 빼앗은 사나이입니다. 그런데도
뉘우치기 커녕은 이런 피비린내나는 자극에조차 싫증이 나버려, 이번엔 자
신의 목숨을 희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잔학한 내
소행에, 저것 보세요, 그렇게들 눈살을 잔뜩 찌프리고 계십니다. 그래요.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못할 극악무도한 행동이 분명합니다. 그
렇지만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가면서까지 이 못견디도록 무료함을 느껴
야 했던 내 심정도 좀 살펴달라는 겝니다. 나라는 인간은 그런 짓이라도 꿈
꾸는 것 외에는 달리 이 인생에 손톱만큼도 보람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판단해 주십시오. 나는 미치광이일까요? 그 살인광
이라는 것일까요?

[ 5 ]
이리하여 오늘밤의 주인공의 기막히도록 야릇한 신상이야기는 끝났다. 그
는 얼마간 핏발이 선, 그리고 미치광이 같은 희멀건 눈으로 우리의 얼굴을
하나 하나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의 말에 대꾸하여
비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는 다만 무기미하게 춤을 추는 촛불에 비
추어진 6명의 긴장한 얼굴이 꼼짝도 않고 늘어서 있었다.
문득 도어 근처의 비단술께에 번쩍 빛나는 것이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그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차츰 커졌다. 그것은 은빛의 둥근 물체로서 마치 보
름달이 숱한 구름을 헤치고 나타나는듯이 빨간 비단술 사이에서 서서히
원형을 그리면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웨이트리스의 두 손에 받쳐든 음료를 나르는 커다란
은쟁반 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만상을 몽환화 (夢幻化)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이 <빨간방>의 공기는 그 흔하디 흔한 은쟁반을 마치 사
로메극(劇)의 노예가 내미는 그 예언자의 목이 올려진 은쟁반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입술이 두꺼운 반라(半裸)의 노예 대신에 여느때의 아
름다운 웨이트리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쾌활하게 7명의 사나이들 사
이를 돌아다니며 음료를 나르기 시작하자 그 세상과는 동떨어진 환상의 방
에 세상의 바람이 불어온 것같은 것이 어쩐지 조화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
다.
"이봐 쏠 테야."
갑자기 T가 이제까지의 이야기소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차분한 억양으로
이렇게 말하며 포켓에서 하나의 번쩍거리는 물체를 꺼내 웨이트리스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깜짝 놀라는 우리의 목소리와 탕!... 하는 권총 소리와 깟하고 까무라치는
여자의 비명, 그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권총에 맞은 여자는 아무 일도
없고, 다만 무참하게 깨진 그릇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왓하하하."
T가 미치광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구. 핫하하... 하나짱, 보기좋게 넘어갔지? 하하
하하."
그렇다면 아직도 T의 오른손에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은 정말 장난감
권총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어머나, 깜짝 놀랐어요... 그거 장난감이에요?"
T와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로 짐작되는 웨이트리스는 그러나 아직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거니와, 그렇게 말하면서 T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좀 봐요.어머, 영락없이 진짜 같군요."
그녀는 수줍음을 감추듯이 그 장난감이라는 6연발을 손에 들고 한 동안 들
여다 보고 있더니 이윽고
"속상해 죽겠으니 나도 한 방 쏴줄 테야."
그러더니 왼팔을 구부리고, 그 위에 권총 자루를 올려놓고는 건방진 자세
로 장난삼아 T의 가슴을 겨누는 것이었다.
"네가 쏠 수 있어? 어디 쏴보라구."
T는 싱글거리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못쏠 것 같아요?"
탕!... 전보다도 더한층 날카로운 총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으으으...."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기미한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T가 의자에서 불쑥 일
어았다가 털썩하고 마루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수족을 버둥거리면서 고
통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농담인가? 농담치고는 너무나도 생생한 신음 아
닌가!
우리는 모두들 그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이웃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촛대
를 들어 T에게 비추었다. 보니 T는 창백한 얼굴을 간질병자처럼 경련시키며
마치 상처받은 지렁이가 꾸불텅거리듯 온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
리고 풀어헤쳐진 그 가슴의 검은 상처에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뻘건 피
가 흰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난감이라고 말한 6연발 권총의 두 번째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던 것
이다.

[ 6 ]
우리는 오랫동안 멍하니 자리에 선 채 꼼짝도 안했다. 괴이한 이야기 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심한 쇼크였다. 그것은 시간으로 따
지자면 불과 얼마 안되는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의 내
게는 우리가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던 사이가 굉장히 긴 것 처럼 생각되었
다. 그럴 것이 그 순간적인 경우에 고통스러워 하는 부상자를 앞에 두고
내 머리에는 다음 같은 추리가 작용할 만한 여유가 충분히 있었으니까.
(뜻밖의 사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처음부터 T의
오늘밤 프로그램에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일을 하기에는
가장 알맞는 이 <빨간방>을 최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이는 이 사
나이의 괴이한 성질로 미루어 당치않은 짐작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 그 권
총을 장난감이라고 믿게 해놓고 웨이트리스에게 발포케 한 기교 따위는 다
른 살인의 경우와 공통되는 그 독특한 방법이 아닌가?
이렇게 해 놓으면 웨이트리스는 절대로 벌을 받을 염려는 없다. 그곳에는
우리들 여섯명이나 되는 증인이 있는 것이다. 결국 T는 그가 남에게 한 것
과 같은 방법을, 가해자는 조금도 벌을 받지 않는 방법을 그 자신의 경우에
응용한 것이 아닐까?)
나 이외의 사람들도 모두 각기의 감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
마 나와 똑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실상 이 경우 그렇게 밖에는 달리 생
각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무서운 침묵이 방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엎드린 웨이트리스의
슬픈듯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빨간 방>의 촛불
빛에 비추어진 이 비극의 장면은 이 세상의 사건으로서는 너무나도 몽환적
으로 보였다.
"키, 키, 킥, 킥...."
느닷없이 여자의 흐느낌 외에 또하나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그것은 이미 신음을 그치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T의 입에서 새어나
오는 것 같았다. 얼음같은 전률이 등줄기를 달렸다.
"킥, 킥, 킥."
그 소리는 더한층 커져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빈사상태의 T의 몸
이 휘청 휘청 일어섰다. 일어서고나서도 여전히 "킥킥킥"하는 묘한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가슴속에서 짜여내지는 고통의 신음소리 같기도 했
다. 하지만...혹시...오오, 역시 그랬었는가? 그는 뜻밖에도 아까부터 견디
기 힘든 웃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이게 뭔지 아시겠읍니까?"
그러자 아아,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이제껏 그렇듯 흐느끼고 있던
웨이트리스가 갑자기 쾌활하게 일어서는가 싶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비비꼬며 이 역시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씀이에요."
이윽고 T는 멍청해진 우리 앞에 하나의 작은 원통형의 것을 손바닥에 얹어
내놓으면서 설명했다.
"쇠불알로 만든 탄환이란 말입니다. 안에 빨간 잉크가 잔뜩 들어있어, 명
중하면 그게 터지게 돼 있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이 총알이 가짜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까부터의 내 신상 이야기라는 것도 모조리 엉터리란 말씀이
지요. 그래도 연극이 제법 그럴듯하죠?.... 그래 지루하신 여러분, 이런
것으로는 여러분이 찾고 계시는 그 자극이라는 것이 안될까요?"
그가 이렇게 트릭 풀이를 하고 있는 사이에 이제껏 그의 조수 노릇을 하던
웨이트리스에 의해 스위치가 젖혀진 모양이리라. 갑자기... 대낮 같은 전등
빛이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희고 밝은 광선은 순식간
에 방안에 떠돌고 있던 그 몽환적인 공기를 일소해 버렸다.
그곳에는 폭로된 마술의 트릭이 추한 시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홍빛 비
단 술이건, 빨간 카아펫이건, 같은 테이블 크로우드며, 안락의자, 심지어
는 그 유서 깊어 보이는 은촛대마저 어쩌면 그렇게 빈약해 보였는지. <빨
간 방> 안에는 이제 어느 구석을 뒤져 보아도 꿈도, 환영도 그림자조차 보
이지 않는 것이었다.
-THE END-




전문 협박자 (The Honest Blackmailer)


by Patricia Moyes



전문 협박자로서 인생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매우 미묘하고
때로는 위험하기도한 한 직업을 택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 직
업은 판단력과 교묘한 솜씨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무엇보
다도 전문 협박자는 너무 욕심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해리
베서머가 너무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아직도 런던에서 그
직업으로 돈을 잘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리는 그의 직업을, 관습적인, 그리고 거의 고전적이라 할 만한 경로를
거쳐 택하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북쪽 시골에 사는 중하층 출신의 무뚝뚝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해리가 별로 뛰어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어
쨌든 그런대로 학교를 마치고 런던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 아들이 용기와 독립심을 가진 사내라는 것을 보
여주는 증거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리가 메트로폴리탄 경찰국에 훈
련생으로 들어갔다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는 더욱 기뻐하였다. 그들은 자기
아들이 사내로서 사회 생활을 제대로 시작한다고 보았던 것이며 또한, 그것
이 아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 아들
이 형사반장으로까지 출세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해리의 경찰 생활은 별로 즐겁지 못했다. 일은 너무 힘들었
고, 근무 시간은 길었으며, 보수는 또 너무 적었다. 그러나 경찰 생활이
그에게 값진 경험과 훈련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때문에 해리는
경찰에서 물러난 뒤에도 어렵지 않게 아주 명망 있는 사립탐정회사의 조사
원이라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 해리는 이혼사건 같은 것들 때문에 짜증스럽게 발로 뛰어다니는 일
을 해야만 했다. 당시의 영국법에서는 이혼을 하려면 고용된 탐정이나 찾
아낼 수 있는 야비한 증거들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리가 빈틈
없이 일을 잘한 덕택에, 그는 시간이 지나자 보다 민감하고 흥미 있는 사
건들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사건들이란, 사회적으로 지명도도 있고
돈도 있는 고객들이 어떠한 이유 때문에 법에 호소하지 않고 사립 탐정에
게 맡기는 사건들이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 그는 아무리 미사어구를 갖
다 붙여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약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
침내 해리는 전문 협박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해리가 협박의 근거들, 예를 들면 편지, 사진, 테
이프 등을 찾아내고 그것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해리는 사건을 맡았을
때 그런 증거들을 찾아내고 확보한 다음, 회사에는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
다. 그러면 고객은 자기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런 증거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고객이 다른 회사에 부탁하여 증거를 찾아달라고 할 수도 있었
다. 이 때 다른 회사에서도 증거를 찾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었
다.
해리는 그런 식으로 가치 있는 증거들을 모았는데, 이제 그것을 어디다 보
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해리는 자기가 살던 교외의 집을 남에
게 세주고, 런던 반대 편에 비슷한 집 하나를 가명으로 빌었다. 해리는 이
집 지하실에 안전 금고를 하나 설치하고, 또 암실도 마련했다. 그리고 사진
을 현상하는데 필요한 장비들도 갖추었다. 해리는 중요인물에게 해를 끼
칠 수도 있는 자료들을 상당량 손에 쥐게 되자, 회사를 퇴직하고 본격적
으로 전문 협박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직업적 협박자가 결혼을 할 것이냐 독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은
논의할 여지가 있는 문제다. 아내는 사회의 한 평범한 구성원으로 존재하
는 데 유용한 외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매우 은밀한 세계로 끌어들이는 일이 된다. 해리는 멋진 해결책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저금과 부모가 남긴 작은 유산을 합쳐서 런던 교
외의 작은 세탁소를 하나 냈다. 세탁소에는 살림집도 하나 딸려 있었다. 그
런 다음에 그는 예쁘고 상냥하지만, 별로 똑똑하지는 않은 수잔이라는 여자
와 결혼했다. 그녀는 가게를 운영하고 완전히 합법적인 일들을 다 처리했
다.
수잔은 또 다른 교외에 있는 셋집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해리
가 자주 집을 비우는 것은 북쪽 지방의 부동산 문제 때문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들이 세탁소 운영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풍
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은 그 부동산 사업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해리는 협박업에서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피협박자로부터 돈을 받아
내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도 안 되고,
문서나 은행 기록이 남아서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거
는 조건은 항상 돈을 현금으로 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일에 세탁소가 중
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봉고차를 한대 사서 그 옆면에 <빠른 세
탁>이라고 페인트로 썼다. 그리고 특별한 배달을 할 때에는 자기가 직접
이 차를 몰고 다녔다. 물론 해리가 배달을 나가는 집이란 대개가 다 피협박
자들의 집이었다.
해리는 혼자서 두 가지 역활을 했다. 하나는 가명으로 협박을 하는 역활
이었고, 또 하나는 단지 세탁소 차를 몰고 배달만 하는 역활이었다. 이렇
게 되면 피협박자의 눈에는 이들 둘이 별개의 두 인물로 보이게 마련이었
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일 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면,
피협박자는 세탁물을 맡긴다. 해리네 세탁소에서 실제로 그 옷들을 세탁해
서 가져다 주면, 피협박자는 세탁비를 준다. 물론 그 속에는 입막음의 대
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피협박자가 집에 고용인을 두고 살 정도로
부자라 해도(대개가 다 그랬지만), 그 고용인은 세탁물과 세탁비를 건네주
면서도 내막은 하나도 모르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해리는 자기가 일하는
방식을 자랑스러워 하였다.
몇 년 간은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갔다. 그러나 점차로 해리는 런던의 현대
사회가 스캔들에 대해 점차 관용적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우선 배우들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협박 대상에서 제외되어 나
갔다. 이제 그들은 해리같은 사람한테 협박을 당해도 면전에서 웃어넘길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스캔들을 신문사에 팔아넘길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해리의 엄격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심지어 귀족들 조
차도 협박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다만 왕가와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관계
를 유지하고 있는 귀족들은 예외였다. 세무서 관리들은 여전히 협박의 대상
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무서 자체가 내부의 범범자들을 효
과적으로 잡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리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다. 동성
애도 더 이상 범죄가 아나었다. 오히려 이름난 사람들이 그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 유일하게 해리의 손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가와 외교관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리고 인플레이션
때문에 전문협박자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 갔다.
그 유명한... 그냥 X씨라고 해두자... 그 유명한 X씨도 해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확고한 손님의 한 사람이었다. X씨는 국회의원이었으며, 어떤 부서의
차관이었다. 품위 있는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부유한 귀족 출신의 아
내와 결혼했고, 북부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단체인 아일랜드 공화국군에
대한 무자비하고 단호한 태도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리는 X씨가 젊은 아
일랜드 남자와 동성애 관계를 즐기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해리는 편지와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X씨는 그 아일랜드인
을, 켄싱턴에 있는 자신의 멋진 주택에서 한참 떨어진 동부 런던의 이슬링
턴 변두리의 한 은밀한 아파트에 숨겨두고 있었다. 더욱이 그 아일랜드인은
북아일랜드 테러리스트들과 불법적 연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강한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해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협박의
조건이었다. 또한 이제는 해리와 X씨 사이에는 일종의 신뢰감, 우정이라고
까지 부를 수도 있는 감정이 교류되고 있었다. 해리가 X씨에게 2주일에 한
번씩 요구하는 금액은 그 정도 사실을 폭로하지 않는 대가로는 적절한 액
수였으며, 해리는 X씨의 추문을 악용하는 일도 결코 없었다. 더욱이 해리는
X씨 부부의 옷은 특별히 잘 세탁하고 다림질 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이 관계는 해리가 과욕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오랫 동안 지속될
수 있는 관계였다.
불행의 시작은 해리가 일 주일 동안에 고정 고객 두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
이었다. 한 사람은 강력하고 사내다운 대중 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였
는데, 그가 그만 협박의 근거가 되는 사실, 즉 자신이 해군 사병과 동성애
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스스로 써서 책으로 내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의 책의 판매 부수는 두 배로 증가하게 된 반면, 해리가 확보하
고 있는 증거 사진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 한 사람은 국
회의원이었다. 이 사람의 경우는 당국에서는 발견 못했는데, 해리가 발견
한 탈세가 협박의 근거였다. 그 국회의원은 어느 날 편지를 뜯어보다가 폭
발물이 터져 죽고 말았다. 아일랜드의 테러리스트들이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정치가들에게 보내는 폭탄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해리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이중 충격을 받자 격한 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
는 X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그리고 마치 유권자 가운데 한 사람이 보내는
것처럼 해서 하원으로 그 편지를 발송했다. 선거구의 세율에 대해서 긴급
하게 국회의원과 상의할 것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영국의 모든 유권자
는 그러한 문제로 자기 지역구의 국회 의원과 이야기를 나눌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에는 그런 모임을 위해서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맨
처음에 해리가 X씨를 접촉하게 된 것도 이런 방법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번
에 보낸 편지에는 X씨가 아는 해리의 가명을 썼다. 해리는 X씨의 비서로부
터 답장을 받았는데 다음주에 면담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X씨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왜 협박자가 편지를 보냈는가에 대해 짐작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짐작은 옳았다. 의회의 면담실에서 X씨를 만난 해리
는, 그 주 말로 예정된 다음 세탁 배달 때부터 세탁료를 3배로 인상해야겠
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X씨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X씨는 지금이 인플레이션 시
대이며, 자기도 액수가 인상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해리는 계
단이 있는 줄 알고 허공을 밟았을 때처럼 놀랐다. 그는 X씨가 최소한 반대
하는 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X씨가 말을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읍니다. 오늘은 은행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
고 내일 아침에는 나토 회의 때문에 벨기에에 가야 합니다. 수표라도 받으
시겠습니까?"
해리는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조건을 아실 텐데요. 현금만 받습니다."
X씨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만일 다음 달까지 기다려 주
신다면..."
"나는 이번 주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라야 합니다."
해리가 말했다. 해리도 나름대로 제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X씨의 얼굴에서 생기가 돌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런던 공항에는 은행이 있는데 내일은 은행 문을 열 거
예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돈을 찾아서 보내드리지요."
"보낸다고요?"
"우편으로요. 주소를 적어주시면..."
"안됩니다. 나는 그 세탁소로 현금이 그런 식으로 도착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른 주소는 없습니까? 무슨 비밀 주소 같은 것은..."
"그런 식으로 꼬리를 밟으려 들지 마십시오. 나는 의원님 집에서 현금으로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X씨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
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어느 선까지는 그렇지요." 해리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내가 런던 공항에서 돈을 봉투에 넣어 우편으
로 우리집으로 보내지요. 물론 내 필적을 감추어야겠지만, 그건 어렵지 않
을 겁니다. 그 봉투에 친전이라고 써놓지요. 친전이란 말 밑에 줄을 세 번
그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금방 알아보실 수 있겠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 나한테 온 우편물들은 현관에 있는 대리석 탁자 위에
놓아 둡니다. 어떤 탁자를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우리집 집사가 세탁할 옷
들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보낸 돈봉투를 직접 집어 넣으란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군요."
해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요."
이제 해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리가 말을 이었다.
"의원님과 사업을 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의원님은 정말 신사이
십니다."
그날 저녁 X씨는 그가 사귀고 있는 젊은 아일랜드인한테 말했다.
"패디, 내가 그 편지 폭탄을 한번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 걱정하지마. 내가 그것을 알아보고 바로 경찰한테 갖다주면 되잖아.
요새 내가 보기에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아일랜드 독립주의자들
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패디가 대답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내일 아침에 런던 공항에서 편지로 부쳐야만 하네."
"너무 시간이 촉박한데요."
"자네는 할 수 있어."
"글쎄요... 좋아요, 알았습니다. 할 수 있겠지요."
"내가 편지 봉투에 주소를 쓰지. 봉투 하나 주게. 작지 않은 걸로."
"예, 의원님."
패디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띠우고 장난으로 경의를 표하며 대답했다.
그가 커다란 봉투를 하나 가져왔다.
X씨는 봉투위에 일부러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필체를 대문자만 사용하여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었다. 그는 봉투 위쪽의 왼쪽 구석에다가 '친전'이
라 쓰고, 밑줄을 세개 그었다. 그러고 나서 X씨는 봉투를 패디에게 건네주
었다.
"폭탄은 신문지 같은 걸로 두툼하게 싸도록 하게. 봉투가 꽉 찬 것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네. 알겠나? 다 알아들었어?"
"예, 의원님."
패디가 다시 장난으로 경의를 표하며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곧 아이들을 만나서 일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자넨 좋은 젊은이야."
3일 후, 해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세탁소 차를 몰고 X씨의 켄싱턴 집에 도
착했다. 그 집 집사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해리가 세탁물을 가져오는 동안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집사는 훌륭한 가정에서 훈련을 받았었기 때
문에 세탁소 사람같은 장사꾼들을 정문 현관으로 들인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뒷마당의 바깥 채 오두막을 비싼 값을
받고 팔아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집사가 사라지자마자 해리는 탁자로 갔다. 약속대로 봉투가 있었다. 봉투
는 꽉 차 있었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겉에 쓴 글씨가 약간 위장을 하긴 했
지만 X씨의 글씨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리가 봉투를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자, 그때 집사가 세탁물을 들고 나타났다.
"화요일까지 세탁을 해오겠습니다."
해리는 현관문을 나서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나 해리는 평생 그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러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오자마자 도저히 참
을 수가 없어 봉투를 뜯어보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와 자동차, 옷, 그리
고 X씨의 현관 앞 계단 일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해리는 사실 탐욕이라는 죄 외에도 또 한 가지 커다란 실수를 했다. 그는
그 주에 벨기에에서 나토 회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다. X씨는 그 때 지방에 있는 누이동생네 집에 가 있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서, 커다란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경찰은 능률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고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현장에서 그들은 봉투 조각을 발견했다. 집사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친전
표시가 있는 봉투가 폭발 뒤에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그 봉투
를 세탁소 사람이 가져갔을 거라고 했다. 그 세탁소 사람이 훔쳤을 가능성
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가져갈 봉투와 헛갈려서 잘못 들고 갔을 가능성
이 더 많았다는 것이 집사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탁자에는 세탁소 이름이
쓰여져 있는 봉투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X씨의 이름으
로 된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 액수는 청구서 액수대로 3파운드 30센트였
다.
해리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경찰은 죽은 사람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주었다. 즉 해리가 잘못 알고 다른 봉투를 집어간 것으로 결론을 내려주었
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X씨에게 다행스럽게도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을 축하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있었다. 패디는 X씨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위가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패디가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X씨의 말대로, X씨가 이중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게 퍼져 있을 정도여서 X씨가 폭탄 테러라는 자작극
을 꾸밀 정도라면, X씨는 그 소문을 없애기 위해 정말로 아일랜드 독립주
의자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X씨는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인물이 되어버린다. 이런 생각이었다.
X씨는 해리를 처치해 버렸기 때문에 아주 가벼운 기분이었다. 하느님의 은
총을 입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기분 속에서 X씨는
해리가 죽은 지 두 주 후에 의회의 우편함에 들어 있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편지를 뜯어보았다. 순간 그의 머리가 날아가버렸다.
이런 식으로 참담하게나마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셈이다.


- THE END -


시체이동 - A -
by 佐野 洋(Sano Yo)


"만약 그 전화가 녹음되어 있었다면..."
오이카와 류이치로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전화가 녹음 되었고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었다면, 사건은 분명 다른 식으로 설명 되었을 것이
다.
그 전화란 10월 4일 월요일 밤 10시 20분경, 이나무라 가즈히꼬한테서 걸
려온 전화를 말한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한동안 이 전화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신문기자
의 윤리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니까, 이 기록을 그 전화에서 시작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하나의 자료가 있다. 월간지 '분류(奔流)' 4월호에 실린 대담이
다. 그 일부를 발췌해 보자.

아나무라: 산이라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전에 좀 묘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연을 하러 어느 지방 도시에 갔을 때였는데, 역에 도착해
보니 주최측에서 강연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서 부근을 자동차로 안
내해 주더군요. 지방 도시에서 흔히 겪는 일이지만, 시내를 조금만 달리
면 금방 산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시노다: 그래요. 게다가 행정구역으로는 산도 시에 포함되어 있고.
이나무라: 도로는 포장되어 있었지만, 다른 자동차와 엇갈린 건 두세 번뿐
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어쩌면 이 산 속에는
시체가 수없이 잠들어 있을 게 아닐까....
시노다: 시체가요? 그곳이 전국시대 때 전쟁터였나요?
이나무라: 아니, 그렇게 오랜 옛날 시체가 아니라 현대, 즉 자동차가 인간
의 발이 되기 시작한 뒤의 시체를 말하는 겁니다.
시노다: 교통사고 말인가요?
이나무라: 과연 시노다 씨는 선량하시군요. (웃음) 아마 지금까지 남을 죽
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웃음)
시노다: 아아, 살인을 해서 시체를 산 속에 버린다는 뜻이로군요.
이나무라: 그래요. 한 예로 오쿠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젊은 여자를 드
라이브시켜 주겠다고 꾀어서는 산 속으로 끌고 가 폭행한 뒤에 죽이고, 그
시체를 묻어버린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어떻게 발견되었지요?
그 사람이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오쿠보가 체포된 뒤 현장에 끌려가서 이
근처라고 말하길래 파보았더니, 비로소 거기에 시체가 있더라는 식이지요.
저절로, 즉 행인이나 개가 발견한게 아닙니다. 그걸로 유추해 보면,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산 속에는 수많이 시체가 묻혀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
습니다.
시노다: 그렇군요. 어느 삼나무 숲 속에 이파리가 유난히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것을 수상쩍게 여긴 형사가 뿌리 근처를 파
보았더니 시체가 있었다. 이런 추리소설은 어떻습니까? (웃음)
이나무라: 어때요, 우리 둘이서 함께 써보지 않겠습니까? (웃음)
하지만, 소설이라면 그걸로 통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히 발견
되진 않을 겁니다. 설사 삼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르고 싱싱하다 해도,
거기에 주목할 형사가 과연 있을까요? 설령 주목했다 해도 산림 소유자한
테 허락을 받아야 하고, 사람도 동원해야 합니다. 확신도 없이 땅을 파헤
칠 수는 없는 겁니다. 따라서 완전범죄란 건 뜻밖에 간단하지 않을까....
시노다: 하지만 아까 얘기한 오쿠보처럼 지나가는 여자를 산 속으로 끌고
가서 죽이는 건 이른바 완전범죄와는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아니, 이야기
가 아무래도 이상한 방향으로 빗나가버린 것 같군요. (웃음)
이나무라: 상관없으니까 계속합시다. 인간에게는 완전범죄가 하나의 꿈이
니까 '여행과 꿈'이라는 이 대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니예요. (웃
음) 그러니까 요컨데 시노다 씨는 계획 범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까?
시노다: 꼭 계획범죄여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정신이상자의 우발
적인 범죄여서는 곤란하다는 얘기지요.
이나무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가령 내가 누군가를 죽여서 시체를 산 속에
묻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한테도 죽이고 싶은 인간이 한 두 명은 있으니
까요.
시노다: 그럴 경우, 어디서 그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현장까지 데려가서
죽인 다음 시체를 파묻어버리면 간단하지만, 현장에 데려가기가 쉽지 않습
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친구한테 그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내일
토요일, 이나무라 선생이 드라이브 시켜 준다고 했다'든가...아무리 입막음
을 해두어도 여자라면 친구한테 그만 자랑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요.
이나무라: 하아, 상대는 여잡니까? 이거 영광이로군요. (웃음) 상대가 여
자라면 확실히 그런 위험은 있습니다.
시노다: 그렇다고 해서 시내 아파트에서 죽인 다음 시체를 운반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도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이나무라: 밤이면 어떻습니까? 설사 일제검문이 있다 해도 트렁크까지 열
어보라고 하진 않겠지요? 죽인 직후라면 냄새도 나지 않을 테고.
시노다: 신호등 앞에 서 있을 때 뒷차가 부딪치는 바람에 트렁크가 열리면
어떻게 합니까? 또는 그날 우연히 과격파가 무기를 운반한다는 정보가 경찰
에 들어와서, 트렁크까지 조사한다든가...
이나무라: 완전범죄를 저지르려면 그런 것까지 생각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시노다: 그래요. 경찰 검문에 걸린다 해도 교묘히 속여넘길 수 있을 만한
대책이 서있어야겠죠. 경찰이 거수경례를 하고 보내줄 만한 대책이 말입니
다.
이나무라: 그게 아주 좋은데요. '그럼 부디 안전운전하십시오.'하고...(웃
음)

...월간지 '분류'는 종합잡지로 분류되어 있다. 그렇다고 난해한 논문을
중심으로 한 딱딱한 종합잡지가 아니라, 정치와 스포츠,때로는 섹스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내막 기사나 로포등으로 취급하는 잡지다.
그리고 이 '여행과 꿈'이라는 제목의 대담기사에서는 참석자의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직함을 적어놓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나무라 가즈히꼬는 자
운대 사회심리학 교수, 시노다 료스케는 문학평론가였다.
이나무라 가즈히꼬의 직함이 대학교수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
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모습을 정확이 전달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노다 료스케에 관해서는 이 기록과 특별한 관계가 없기 깨문에 생략하
겠다.)
대학교수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학자를 연상한다. 이나무라도 학자임에
는 틀림없지만, 훌륭한 학자라고 이유만으로 <분류>편집자가 그를 대담에
끌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나무라는 ...아니, 이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여기서는 그의 직함
이 대학교수만은 아니라는 사실만 지적해 두고 넘어가자.
지루하게 인용한 대담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찰이 거수경례를 하고 보내줄
만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시노다 료스케가 말하고, 이나무라가 거기에 맞장
구를 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 즉 '마네킹 파티 사건'에 바로 그런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담에 나온 그 말이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싹이 트고 자라서 그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두번째 자료로 '중앙일보' S현 지방판 기사(10월 7일자)를 제시 하겠다.
S현 지방판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일방통행'이라는 고정란이 있다.

* 6일 오후 6시 10분께, 254번 국도 옆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잠시 쉬고
있던 현경기동순찰대 T순경(24세)은 황급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 T순경의 눈앞을 지나쳐간 세 대의 승용차에 발가벗은 여자들이 타고 있
었기 때문이다. T순경이 당장 뒤따라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도쿄 번호판을 단 문제의 자동차를 뒤따라간 T순경은 다시 한번 깜짝 놀
랐다. 발가벗은 여자인 줄 알았던 것은 실은 마네킹이었기 때문이다. 운전
하고 있던 학생의 이야기로는 가루이자와의 별장에서 열리는 파티에 장식품
으로 쓸 인형이라고 한다.
* 마네킹이라면 '외설물 진열죄'도 '정원초과'도 되지 않는다. T순경은 그
차들을 보내고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심코 중얼거렸다. '감기 걸리지 않을
까....'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중앙일보' S지국에 근무하는 사쿠라이 고지 기자였
다.
사쿠라이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금년 4월에 중앙일보사에 들어와 2주일
동안 수습기자로 일한 뒤 S지금에 배속되어, 지금은 주로 경찰을 담당하고
있다.
이 사쿠라이한테 도쿄 본사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10월 7일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그가 근처 식당에서 배달해온 튀김국수를 다 먹고 젓가락을 놓았을 때, 마
침 눈앞에있는 전화가 따르릉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여자의 목소리가
물었다.
"중앙일보 S현경 기자실이죠? 거기에 혹시 사쿠라이 씨 계십니까?"
"내가 사쿠라이인데요."
"여긴 본사 교환이에요. 논설위원실 오이카와 씨의 전ㄳ니다."
"네? 나한테요?"
사쿠라이는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그때는 이미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사쿠라이입니다만."
그는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논설위원은 직속상관은 아니
다. 하지만 갓 입사한 풋내기 기자한테는 구름 위의 존재라 해도 좋았다.
게다가 오이카와 료이치로는 '중앙일보'논설위원이자 사회평론가로서 다른
잡지나 주간지에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쿠라이는 입사하기 전부터 그
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논설위원인 오이카와라고 합니다."
"네, 존함은 익히 알고..."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오이카와는 사쿠라이가 무심코 입밖에 낸 아첨에 기분이 상한 듯 쌀쌀하게
대답했다. 수화기를 쥔 사쿠라이의 왼손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S현 지방판에 실린 '일방통행'이라는 고정란을 읽고, 지국에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 물어봤더니 자네라고 하더군. 그래서 전화했는데...."
"네, 쓰긴 제가 썼습니다만, 데스크가 많이 고쳐버려서..."
사쿠라이는 변명조로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가 쓴 기사의 마지막
부분은 "T순경은 그 차들을 보내고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중얼거렸다. '넋
을 잃고 바라보다가 사고 내는 차가 없었으면 좋으련만.'이었는데, 정작 발
표된 지면에는 '감기 걸리지 않을까.'로 나와 있었다.
아마 데스크는 '지켜보다'와 '바라보다'로 하면 '보다'가 겹친다고 생각하
여 고쳤겠지만, '감기 걸리지 않을까'는 너무 장난스러운 것 같아서 사쿠
라이는 불만이었다.
그런 불만이 있었기에, 오이카와의 질문을 받자 그만 변명조의 대답이 튀
어나와 버렸을 것이다.
"고쳤다 해도 줄거리까지 바꾼 건 아니겠지?"
"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학생의 주소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뇨, 못 들었는데요."
"못 들었다면, 자네가 듣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순찰경관은 알고
있지 않을까?"
"글쎄요. 그건 잘..."
"으음." 오이카와는 헛기침을 했다. "선배로서 충고하겠는데, 기사에는 이
름을 내지않는 경우에도 그런 사실 관계는 정확히 짚어두어야 돼. 훗날 무
엇에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가능하면 방금 내가 말한 것을 조사해 주지
않겠나? 즉, 그 학생의 주소와 이름, 또는 어느 대학 학생인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한테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그런 건 아닐세. 다만 마네킹을 사용한 파티라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을
뿐이야."
"네, 즉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
사쿠라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사쿠라이는 오이카와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곤 했다.
"과연 달라요. 그렇게 짧은 기사를 읽고도 뭔가를 냄새맡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본사에서 전화를 걸어 조사해 보라고 하셨겠지요."
그러나 오이카와가 발표한 공식 논평을 믿는다면, 사쿠라이의 칭찬은 좀
지나친 것 같다.
오이카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때는 아직 사건 냄새 따위는 전혀 맡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마네킹
이 일종의 죽부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러나 이 논평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오이카와는 앞으로도 잠깐 언급했듯이 10월 4일 밤에 이나무라 가즈히코한
테서 전화를 받았고, 그 전화 때문에 어떤 심증을 이미 갖고 있었는지도 모
른다.
그런데 오이카와는 그런 심증이나 선입관으로 움직였다고 여겨지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죽부인'이라는 핑계를 생각해냈다고 추측
할 수도 있다. 모든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사실만을 중시하는 것이 저
널리스트로서 그의 신조였다.
사쿠라이가 T순경, 즉 도모니가 헤이고 순경을 만난 것은 그날 저녁이었
다.
도모나가는 현경 경찰관 숙소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마침 비번이어
서 사쿠라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외출한 뒤였다. 그래서 숙소에 돌아오
면 전화해 달라는 전갈을 남겨두었더니, 6시쯤 기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사쿠라이는 지국 옆에 있는 '쓰카사'라는 작은 식당으로 도모니가를 초대
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쓰카사'라면 외상이 통하니까, 주머니 사정을 걱정
하면서 술을 마실 필요는 없었다.
도모나가는 처음 얼마 동안은 웬지 자리가 불편한 것 같았다. 사쿠라이가
그와 말을 나눈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사쿠라이는 어제 현경 순찰대 당직실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도모나가
가 동료한테 마네킹 자동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우연히 엿들었다. 그
래서 그는 도모나가를 직접 면담하여 다시금 그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썼지
만, 그 전에는 도모나가와 아무 교제도 없었다.
그래서 도모나가는 사쿠라이의 초대를 기분나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술을 두 잔쯤 단숨에 쭉 들이키더
니 굳어 있던 태도도 풀리기 시작했다.
"글쎄요...." 도모나가는 사쿠라이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소나 이름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요."
"면허증은 봤을 거 아닙니까?"
"그건 봤지만...하지만 정규 면허증이고, 사진도 틀림없이 본인 것이었기
때문에 기록해 두진 않았습니다."
"차가 석 대였다고 했는데, 세 사람 모두 면허증을 봤습니까?"
"일단 봤습니다. 하지만 무리예요. 면허증을 보았다고 사람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야 그렇겠지만...그래도 색다른 이름이라든가..."
"잠깐만요." 도모나가는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보니, 히라
바야시라는 이름이 있었어요. 우리 대장과 성이 같구나 하고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그게 두번째 차였던가?"
"자동체 세 대에 살아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타고 있었습니까?"
"한 대에 한 사람씩, 운전자뿐이었아요. 나머지는 모두 알몸이었습니다.
그게 참 묘하더군요. 선두차를 들여다봤을 때는 움찍했어요. 마네킹도 그
렇게 발가벗고 앉아 있으니까 묘하게 요염하고."
"마네킹은 몇 개나 되던가요?"
"앞좌석에 두 개, 뒷좌석에 네 개였을 겁니다. 앞좌석 뒷좌석 모두 비좁아
보였으니까...."
"그러면 전부 합해서 열여덟 개인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도모나가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확실치 않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앞차에는 분명 여섯 개가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대째와 세대째는 꼼꼼히 세어보질 않아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사쿠라이는 얼핏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두 대
째나 세 대째에 진짜 여자가 섞여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쿠라이는 물어보았다.
"사타구나께가 검은 건 없었나요?"
"검다니요?"
"그러니까 장난으로 털을 그려넣은 마네킹이라든가..."
"털 같은 게 그려져 있으면 일단 외설물이라는 혐의가 걸리니까, 그대로
돌려보내진 않습니다."
"아아, 그런가요? 사쿠라이는 웃었다. "아무리 마네킹이라도 털이 있으면
외설물이 되는군요."
"그렇게 되지 않나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런데 세번째 차 뒷좌석에 탄
마네킹은 허리에 수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어요. 어쩌면 털이 그려져 있
었는지도 모르지요."
"조사해 보진 않았습니까? "
"그것 참 이상하더군요. 왠지 그 수건을 벗겨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상대는 인형이니까 전혀 거리낄 게 없는데 말예요."
"아깝군요. 그중에 진짜가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도모나가는 놀란 듯이 사쿠라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제는 날이 흐렸고, 여섯시라면 벌써 어둑어둑해질 때가 아닙니
까? 게다가 도모나가 씨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진짜와 마네
킹을 구별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글쎄요, 아무리 날이 어두웠다 해도..."
도모나가는 자신없는 듯이 대답했다.
사쿠라이는 도모나가와 헤어진 뒤, 도쿄에 있는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었
다. 지금쯤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여 사원명부에 실려 있는 자택
전화번호를 돌리자, 오이카와가 전화를 받았다.
사쿠라이의 보고를 다 듣고 나더니 오이카와는 "그거 참 재미있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 세번째 차에 탄 인형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는 점 말일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어쩌면 거기에 진짜 여자가 섞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
다."
"흐음, 진짜 여자라...왜 그런 생각을 했지?"
"별장에서 열리는 파티에 남자만 셋이선 간다는 게 왠지 부자연스럽지 않
습니까? 요즘 학생들은 대개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파티를 열 때는 여자도
데려가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자도 참가하는 파티라면, 그 여자들도 당연히 차에 태워 데려갈
겁니다."
"그러니까 세번째 차에는 그 여자친구들이 타고 있었다는 건가?"
"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여자들은 왜 알몸이 되어야 했지?"
"경찰관을 놀려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아니면 단순히 엉뚱한 짓을 해서
남의 눈을 끌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요즘 학생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
진 애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
"학생의 심리는 젊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오이카와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이
름은 알아봤나?"
"아뇨, 경찰관도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학생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네, 그건 그렇지만...."
사쿠라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오이카와에게 꾸중을 받고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어때? 자네가 한번 조사해볼 생각은 없나?"
"네, 그야 물론..."
"신문에 실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 하지만 주간지용 기사는 될
지도 모르지. 그럴 경우에는 내가 주간지에 소개해 주겠네. 주간지용으로
긴 기사를 써보는 것도 문장 연습이 되니까. 어떤가, 해볼 텐가?"
"네, 하겠습니다."
사쿠라이는 의욕적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선 목격자부터 찾아봐야 돼. 주유소라든가 국도변 식당 같은
데 가서 물어보고, 택시나 정기적으로 그 길을 지나다니는 트럭 운전수들한
테도 물어보게, 그런 사람들 중에는 차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고, 그런 증언을 모으다보면 그 자동차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도 알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하던 대로 계속하지 않으면
곤란해."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N현의 R읍에 '학자촌'이라는 동네가 있다. 원래는 R읍의 공유지이지만,
별장용으로 임대한 곳이다. '학자촌'이라는 명칭은 임차인을 모집할 때 대
학강사와 조교수및 교수와 명예교수로 자격을 제한 했기 때문이다.
학자와 그 가족들이 찾아와 조용히 휴식을 취하거나 집필할 때 사용하는
별장이라면, 전국 각자에서 볼 수 있는 신흥 별장지처럼 도시의 번잡함이
묻어 들어오지도 않을 거라고 읍 당국이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땅을 분양하지 않았던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전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
다.
토지사용료는 시가의 절반 정도라고 한다. 조용한 별장지로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빌려준 것은 아니었다.
그 '학자촌'A26호의 주인은 국립대학 조교수인 다도코로 준이었다.
10월 8일 오후 5시경, 다도코로는 승용차를 운전하여 '학자촌'으로 들어갔
다.
9일이 토요일이고 10일이 일요일에다 체육의 날이어서 11일이 휴일이기 때
문에, 사흘동안 계속되는 연휴 기간을 이용하여 오래 전부터 재촉받고 있던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마을 입구에 관리사무소가 있는데, 우편물이나 신문도 이 사무소로 배달
되고, 호별 배달은 하지 않는다. 이 언저리부터 오르막길이 계속되어 자전
거로 배달하려면 무척 힘이 들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 때도 이 사무소까지 내려와야 한다. 그 점이 부동산회사가 조성
한 별장지와 다른 점이었다.
불편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 그 대신 전화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다. 하
루에 한 번 우편물을 가지러 사무소까지 내려가는 것도 좋은 운동이 되었
다. 다도코로는 여기에 별장을 지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도코로는 관리사무소 앞에서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렸다. 관리인이 창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부터 11일까지 별장에 머물겠다고 말한 뒤, 그
는 다시 차를 움직였다.
도로는 간이포장되어 있었는데, 승용차 두 대가 간신히 엇갈려 지날 수 있
을 정도의 폭이었다. 무척이나 가파른 비탈이고, 게다가 시야도 좋지 않았
다.
다도코로는 충돌사고가 날까봐 차를 천천히 몰았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주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어
느덧 10월에 접어들어 있었으므로, 별장 주인들은 거의 다 대학이 있는 도
시로 돌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다도코로는 차의 속력을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언저리에서는 천천히 달리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무들은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별장을 '녹풍정(綠風亭)'
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이렇게 단풍이 짙어지면 녹풍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
색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핸들을 쥐고 있었다.
다도코로가 그것을 발견한 것도 이렇게 천천히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그의 오른발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밝고 있었
다.
도로 왼쪽은 완만한 비탈을 이룬 잡목립인데, 그 나무 틈새로 하얀 여자
다리가 보인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는 나중에 읍사무소 직원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남잔지 여잔지 알 수가 없
는데, 순간적으로 여자 다리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인간의 판단력이란
창졸간에도 그렇게 확실한 걸까요? 아니면, 내가 남자여서 여자 다리라고
생각한 걸까요. 이건 제법 재미있는 현상인데요."
다도코로는 자동차 엔진을 끄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비탈이니까 들어갔다
기보다 내려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처음에는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점점 확실한 모습을 나타냈다.
분명히 발가벗은 여자였다.
이 단계에서 그가 곧바로 사람을 부르러 가지 않은 것은 용기보다 오히려
호기심 탓이었을 것이다.
다도코로는 가까이 다가가면서, 저 여자는 아마 죽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
다.
"물론 한쪽 다리가 하늘을 치켜올라가 있어서 시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생
물이라기보다 물체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다도코로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2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을 때에야 비로소 다도코로는 그것이 마네킹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커다란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고, 온몸에
서 힘이 쭉 빠졌다. 무의식중에 온몸을 바싹 긴장시키고 있었던 모양이
다.
이어서 그는 마네킹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서 약 1미터쯤 아래쪽에 또 하나가 있고, 더 아래쪽에는 대여섯 개의
마네킹이 하얀 알몸을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방향과 모양도 가
지각색이었다.
다도코로는 혀를 차면서 자동차까지 돌아왔다.
도대체 누가 저런 곳에 묘한 것을 버렸을까. 다도코로는 두 손을 두드려
더러운 것을 털어낸 뒤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는 엔진을 걸고 곧장 '녹풍정
'으로 향했다.
이 도로는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따라서 이 길을 지나가는 차가 싣고 있던 마네킹을 떨어뜨린 거라고는 생
각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다 실수로 떨어진 거라면 그렇게 깊은 숲속까지 들어가 버릴
리도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마을'에 몰래 숨어들어와 그것을 버리고 갔다고밖에는 생
각할 수 없다.
그러나 다도코로는 관리사무소까지 되돌아가서 그것을 알리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간의 시체라면 급히 알릴 의무도 있겠지만, 단순한 물체가 버려져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도로의 일부에 가로놓여 통행을 방해하는 것도 아
니고, 별로 미관을 해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중에 관리사무소에 내려
가는 길에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앙일보' S지국 기자인 사쿠라이 고지는 10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문제
의 마네킹을 실은 세 대의 승용차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
다.
그 이틀 동안 그는 상당히 무리를 했다. 논설위원인 오이카와 류이치로는
'틈이 나면 조사해 보라'고 말했지만, 사쿠라이는 그 틈을 일부러 만들어냈
던 것이다.
석간 마감시간인 2시까지는 출입처를 떠날 수 없었지만, 기사 마감이 끝나
고 잠깐 쉴 시간이 되면 그는 취재용 오토바이를 타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도모나가 순경한테도 세 대의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전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아아, 그 차요? 봤어요." 이렇게 말한 것은 어느 주요소 종업원 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발가벗은 여자들이 차에 가득 타고 있었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가까이 다가가기가 겁이 났
어요. 뭔가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게 아닌가 해서요. 아니, 정말이예요. 이
런 장사를 하고 있으면 벼라별 일이 다 생기거든요. 과격파가 폭탄이라도
싣고 오면 큰일이라고 전에도 우리끼리 얘기한 적이 있으니까, 그런 걸 연
상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가까이 가봤더니 인형이잖아요? 어이구 맙소
사."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물론 했지요. 무엇을 할 작정인지, 흥미가 있었으니까요. 별장에서
난교 파티를 열 거라고 하길래, 설마 했더니 '이건 죽부인 이에요' 하더군
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죽부인이라면 그렇게 여봐란 듯이 운반할
리가 없는걸요. 내 생각엔 아르바이트인 것 같아요. 대학생처럼 보였으니까
요. 그런 인형을 만드는 공장이 있잖아요? 거기서 백화점이나 양장점 같
은 데 배달하러 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학생이라고 말했습니까?"


시체이동 - B -

by 佐野 洋(Sano Yo)


"말하진 않았지만, 기름 값을 낼 때 정기승차권 지갑 같은 걸 꺼냈는데,
거기에 세이난 대학 마크가 찍혀 있었어요."
"세 사람 모두 그랬나요?"
"세 사람이라뇨? 내가 본 진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는데요. 나머지는 모
두 빨가벗은 마네킹이었어요."
"그럼 세 대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아니, 기름을 넣으러 온 건 한 대뿐이었어요."
그러면 나머지 두 대는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다른 길로 빠졌나하고 사쿠
라이는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조금 떨어진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그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버스정류장 옆에 담배가게가 있고, 그 부근은 도로폭이 약간 넓어져 있다.
거기에 차를 세우고 자동판매기에서 주스를 뽑아 마시고 있었다고 담배가게
여주인이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스트립쇼 선전인 줄 알고, 기분나쁘니까 빨리 가달라고 말
했지요. 그랬더니 그중 한 사람이 '우리도 창피해요. 하지만 아르바이트니
까 어쩔 수가 없어요.' 하더군요.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N현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유소 종업원도 담배까지 여주인도 자동차 번호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담배가게 여주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기름을 넣은 것이 선두차인 듯
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주스를 마시면서 쉬고 있던 두 사람은 세번째 자동차가 오자 그차를 앞세
우고 뒤따라 갔다는 것이다.
사쿠라이는 알아낸 내용을 오이카와 류이치로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따라서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N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N현에 가보지
않으면 별장 파티의 상황도 알 수 없고, 우리 지국의 힘만으로는 주간지용
기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흐음, 학생 아르바이트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럼 파티란 건 뭡니까?"
사쿠라이는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네킹 파티'에 흥미를 품
고 취재를 지시한 오이카와가 이제 와서 '학생 아르바이트'설로 기울어져
버린 것이 불만이었다.
"아니, 그후에 알아낸 사실로 미루어보면 파티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일세."
"그러면 그후 뭘 좀 알아냈습니까?"
"응, 오늘 아침 동서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는데, 보지 못했나?"
"동서신문요? 일단 읽어보긴 했지만....어떤 기산데요?"
"그럼 그쪽으로 간 지방판에는 실리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N현 R읍의 잡목
림 속에서 마네킹이 발견됐네. '학자촌'이라는 별장지역인데, 일부로 거기
들어가서 버리고 간 모양이야. 짓ㄳ은 장난인지도 모른다고 기사에는 씌
어 있었어."
"별장지역이라고요? 그럼 그 별장에서 파티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밖에도 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우리 N지국에도 문의해 봤다네. 그런데 오늘은 휴간일이라서 지국에는 당
직 한 사람밖에 없더군."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니요?"
사쿠라이는 캐물었다. 무언가 새로운 자료가 들어왔다면, 자기한테도 그것
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서신문 기사에는 발견된 마네킹이 모두 열일곱 개라는 거야. 그런데 자
네가 도모나가 순경한테서 얻은 정보에는 전부 열여덟 개였던 것으로 되어
있어. 그게 차이점이야. "
오이카와의 대답이었다.
"그럼 하나가 모자라는 셈이군요. 하지만 도모나가 순경도 정확히 세어보
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처음부터 열입곱 개였는지도 모르지요.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쨌든 자네는 다시 한번 도모나가 순경을 만
나서 물어보거나 다른 목격자를 찾아서 정확한 갯수를 조사해 주지 않겠
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쿠라이는 그 단계에서는 아직 오이카와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
갯수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이때 오이카와는 그 마네킹과 이나무라 가즈히코를 결부시키고 있
었다고 한다.
"아니, 신문기자의 직감 같은 건 아닙니다. 때마침 내 머릿속에서 '학자촌
'이라는 말이 이나무라와 연결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문기사에서
'학자촌'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이나무라를 연상했던 겁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기사를 보고 이나무라를 연상했다는 것만으로
오이카와가 이나무라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 10월 4
일 밤의 전화 내용이 겹쳐서, 마네킹과 이나무라를 연결하는 고리가 더 튼
튼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이카와가 '학자촌'이라는 말을 들고 금방 이나무라 가즈히코를 연상한
것은 이나무라도 N현 R읍의 '학자촌'에 별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그 인사장을 받았을 때, '학자촌'이라니, 웬지 이상한 이름이
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그때 이나무라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별장이라니, 팔자좋군. 잘 팔리는 탤런트 교수는 역시 달라."
"아니, 별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수수한 산장이야. 읍사무소에서 주선해 줘
서 건축비도 싸게 먹혔어. "
"자네가 하는 일이니 어련하겠나. 별장이 생기면 젊은 여자애들을 데려갈
작정이겠지?"
그것이 2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대화는 오이카와의 말을 그대로 적은 것이지만,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 두 사람은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 동안의 사정을 두 사람의 공통된 친구이자 수빙출판사 편집장인 오다니
세이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두사람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대학 때 학부는 달랐
지만, 여름방학 때는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대등한 관계라기보
다는 오이카와가 이나무라를 돌봐주고 있었던게 아닐까요? 오이카와의 장
인이 자운대 이사를 맡고 있던 관계로, 이나무라를 자운대 조교수로 초빙
한 게 5년쯤 전일 겁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다른 신문보다 앞서서 이나
무라의 논평을 실었지요. 아마 그것도 오이카와가 추천해준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문에 자주 이름이 나오면서 이나무라도 탤런트 교수라고 불
리게 된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나무라는 화를 낼지 모르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이처럼 이나무라 가즈히꼬의 두 친구인 오이카와와 오다니가 이나무라를 '
탤런트 교수'라고 부르는 이상, 그 점에 관해 설명해야할지도 모른다.
'중앙일보'자료실에는 유명인사에 관한 신상 카드라는 것이 있다. 정치,경
제,문화,예술,스포츠 등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에 대해 생년월일과 학력,경
력,업적,가족관계 등을 적어둔 카드다.
거기에 따르면 이나무라 가즈히코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다.

* 이나무라 가즈히코

(1) 1934년 4월 14일 도쿄 출생
(2) 학력: 국립 S대학 문화부 사회학과 졸
(3) 경력: 사립 은하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사립 자운대 조교수와 교수(심
리학)
(4) 주요 저서: '유형별 여학생론(수빙출판사),'부도덕한 도덕론(수빙출판
사)'등 다수
(5) 기타: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자주 출연
(6) 가족: 처 료코(1946년생)(재혼,전처인 미치코와는 사별)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

인사 카드에는 취미란도 있는데, 이나무라 가즈히코의 취미란은 비어 있
다.
오이카와는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이나무라도 바둑이나 장기, 그리고 마작 같은 것도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그보다도 이나무라는 젊은 여자애들
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겁니다. 나한테도 자랑을 하곤 했지요."
그런데 '중앙일보' 사회부가 이나무라 가즈히코의 신변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12일부터인 모양이다.
여기에는 '버려진 마네킹'과 이나무라 가즈히코가 관련이 있다고 믿은 오
이카와의 확신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사회부 기자 두 명은 이나무라 가즈히코의 주변에서 한 여성이 갑
자기 모습을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아나무리 가즈히코는 자택과는 별도로 하마마쓰에 아파트를 하나 빌려서
작업실로 쓰고 있었는데, 그 아파트 관리인은 '중앙일보'사회부 기사의 집
요한 질문에 굴복하여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이나무라 선생댁을 자주 찾아오던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술집 여자는 아니고, 아마 대학생인 것 같았어요. 아주 똑똑해 보이는 아가
씨였습니다. 밤에 여기서 잔 적은 한 번도 없고, 돌아갈 때는 선생이 밖까
지 바래다주러 나와서 택시를 잡아주었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통 보이지 않
는군요."
또한 그들은 어느 여류작가한테서 이나무라가 간사이 지방으로 강연여행을
하러 갔을때 아가씨 한 사람을 동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연회는 세 번 열렸는데, 그 여자는 세 번 다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이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는 것이다.
"빨간 스커트가 썩 잘 어울리는 아가씨였어요. 나는 첫날 연단 위에서 그
아가씨를 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여자로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튿날에도 똑같은 아가씨가 있지 않겠어요? 강연회는 다른 도시에서 열렸
는데 말예요. 게다가 앉은 자리도 같았어요. 그러니 싫어도 눈에 뛸 수밖에
요. 사흘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출판사 사람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처음에는 애매하게 얼버무렸지만, 결국에는 이나무라 씨가 몰래 데리고 온
여자인 것같다고 인정하더군요. 방은 다르지만 우리 일행과 같은호텔에
묵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어요. 이
나무라 씨한테 어이가 없다기보다 그 여자애가 왠지 애처로워서..."
이 여류작가도 아파트 관리인도 결코 입이 가벼운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
다. 그러나 유능한 두 기자는 몇 가지 자료를 들이대며 이런 증언을 끌어냈
다. 그 자료는 어쩌면 오이카와가 그들에게 주었을 지도 모른다.
'자랑하는 이야기'를 들은 오이카와라면 그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해
도 이상할게 없다.
한편 '중앙일보' G지국에도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6일 밤 7시경 G현
경 순찰차가 문제의 승용차 석 대를 검문했다는 것이다.
G현은 S현과 N현의 중간에 끼어 있다. 그러무로 S현에서 N현으로 가려면 G
현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검문한 사람은 G현 경찰국 E경찰서 순찰부장인 우시코메였다.
그러나 그가 문제의 승용차를 검문한 이유는 S현경의 도모나가 순경과는
달리 그 승용차의 '정원초과' 때문이었다.
순찰차는 세 대의 승용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벌써 상당히 어두워졌기 때문에, 뒷자석에 탄 사람이 알몸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머릿수로 보아, 아무래도 정원초과인 것 같
았다. 그래서 맨 뒷차에 정지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앞의 두 대도 역시 정
원초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찰차는 급히 세 대의 승용차를 추월하여 맨 앞으로 나가서 한꺼번에 정
지명령을 내렸다.
결과는 역시 S현경의 경우와 똑같았다. 마네킹은 인형이니까 옷을 입고 있
지 않아도 나무랄 수는 없고, 물건인 이상 '정원초과'에도 해당되지 않는
다. 불문에 붙이는 게 당연하다.
순찰차의 경우에는 무전장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우시코메 순찰부장은 함
께 탄 순경과 상의한 뒤, 무선으로 본서에 연락을 취하여 발가벗은 마네킹
을 승용차에 실어 운반해도 되는지 어떤지를 문의했다고 한다.
본서의 대답은 특별히 '외설성'을 띤 인형이 아닌 한 단속할 근거가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시코메 부장이 이때 마네킹의 수를 분
명히 세어보았다는 사실이다.
한 대에 여섯 개씩, 모두 합해서 열여덟 개였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마네킹은 열여덟 개였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G지국이 이런
정보를 얻은 것은 '발가벗은 마네킹을 실은 승용차'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본사의 의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국의 경찰 담당 기자가 관
할서를 돌아다니며 물어본 끝에 이 정보를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사건을 다루는 중앙일보사의 방식은 상당히
대규모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실 문제의 캠페인이 시작된 뒤, 언론계 일각에서는 '중앙일보'의 이상한
열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일요일판 '일보토픽'이라는 특집 페이지를 갖고 있다. 그때
그때의 색다른 화제를 읽을거리로 꾸민 특집이다.
10월 17일자 일요일판의 '일요토픽'은 승용차에 나누어 탄 발가벗은 마네
킹들'이라는 제목이었다. '마네킹 사건'이 하나의 사건으로 이 신문에 실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기사에서는 우선 사건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 10월 6일 18시, T현경 T순경이 발가벗은 여자들을 태운 승용차 석 대를
발견, 오토바이로 추적하여 불심검문한 결과, 그 여자들이 실은 마네킹이라
는 것을 알았다.
* 10월 6일 18시 30분경, W주유소 종업원 H씨는 문제의 승용차 가운데 한
대에 기름을 보급.
이런 식으로 사실을 나열한 뒤, 목격자와 증언과 다도코로 죠교수가 '학자
촌'에서 마네킹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가 그 조교수의 사진까지 곁들여 자
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또한 잡목립 속에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마네킹의 섬뜩한 사진도 상당히
크게 실려있었다. 그 사진에는 'R읍 제공'이라는 출처가 밝혀져 있었다.
다도코로가 발견한 이튿날 관리사무소에 알려, 관리인이 그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수수께끼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누가 무슨 목적
으로 이런짓을 했는가 하는 수수께끼이고, 또 하나는 열여덟 개였던 마네
킹이 왜 열일곱 개밖에 발견되지 않았는가,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갔는가
하는 수수께끼였다.
그 기사에서는 이런 수수께끼를 분석하거나 추리하지는 않았다. 기사의 마
지막 문장은 '이 문제에 대한 의견과 추리를 보내주십시오'로 되어 있었
다.
훗날 오이카와 류이치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아무 승산도 없이, 단순한 화제로 그런 기사를 실은 건 아닙니다.
그 단계에서는 이미 꽤 많은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신문
사는 대개 갖고 있는 자료를 경찰에 넘기고 경찰이 수사하기를 기다리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이
런 상태로는 경찰이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고, 두번째는 정보출처
와 관련된 문젭니다."
특히 두번째 문제가 커다란 이유였다고 한다. 정보출처란 바로 앞에서 이
야기한 전화를 말한다.
10월 4일 밤에 아나무라의 전화를 받고, 오이카와 류이치로는 이미 하나의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화 내용을 경찰에 알리는 것은 윤리상 문제가 있고, 전화를
녹음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오이카와 한 사람이고, 따라서 객관적 가치가 없다
는 말을 들어도 별수없다.
그래서 여러가지 사실들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이나무라를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문제의 전화 내용을 밝혀도 좋을 것이다.
다음은 오이카와 류이치로가 기억을 더듬어 그 전화 내용을 재생한 기록이
다. 오이카와는 이것을 마지막에 극적으로 이용하여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때: 10월 4일 오후 10시 20분
곳: 오이카와 류이치로의 자택 서재
(전화벨이 울린다. 오이카와가 수화기를 집어든다.)
오이카와: 여보세요.
이나무라: 아아, 잘 있었나? 이나무라야.
오이카와: 웬일이야, 이런 시간에. 옆에 귀여운 아가씨라도 있는 거 아냐?
이나무라: 뭐? 아니, 없어. 이상한 말은 그만둬. 그런데 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건 신문기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들어주면 좋겠는데, 괜찮겠지?
오이카와: 잠깐만. 신문기자로서 듣지 말라고 하면 곤란한데. 물론 자네
말대로 하고 싶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사로 쓰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어.
물론 그럴 경우에도 자네가 취재원이라는 건 밝히지 않겠지만.
이나무라: 그래? 가령 내가....아니, 방금 얘기한 건 잊어주게.
오이카와: 별일이군. 잊으라면 잊겠지만, 용건은 그걸로 끝났나?
이나무라: 할수없지. 그보다, 언젠가 자네가 말한 적이 있었지? 나와 시노
다 료스케 씨의 대담에 대해서 말일세. 자네가 말한 그 트릭이라는 걸 좀가
르쳐주지 않겠나?
오이카와: 뭐?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야?
이나무라: 무슨 얘기라니? 잊어버렸나? 그럼 됐어. 실례했네.
(전화는 끊어졌다.)
이렇게 전화가 끊어진 뒤, 오이카와는 금방 그 '트릭'이라는 걸 생각해냈
다.
그래서 당장 이나무라의 작업실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나무라는 작업실에
없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트릭'이란 무엇이었을까.
'분류' 4월호가 책방에 나온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오이카와는 어느 파
티에서 이나무라를 만나 '여행과 꿈'이라는 제목의 대담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 한다.
"그거 아주 재미있던데. 특히 일본 전역의 산 속에 시체가 수없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왠지 자네의 지금 심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
어."
"내 심경? 그게 무슨 뜻이지?"
"이나무라 가즈히코도 마침내 자비심을 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는 뜻이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산을 볼 때마다 지금까지 울린 여자들을
생각하고..."
"바보 같은 소리."
이나무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다른 데로 가려고 했다. 오이카와는 얼른
뒷말을 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좀 지나쳤다고 반성 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시체를 이동하는 이야기가 나왔었지? 그후 묘안이 생각났나?"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그래? 이제 그 대담 얘기는 그만둬."
"그래? 모처럼 좋은 트릭을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오이카와는 그런 말을 남기고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오이카와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좋은 트릭을 생각해낸 건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그렇게 지껄였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나무라가 전
화로 그 트릭이라는걸 가르쳐달라고 말했을 때도, 그때의 일이 금방 생각
나지 않았던 겁니다."
신문기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이나무라가 말한
것, 거기에 대하여 오이카와가 대답을 회피하자. 당장 그 이야기를 철회한
것은 언제까지나 오이카와의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선 전화 목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이렇게 글자를 써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느낌이지만, 목소리에 절박한 울림이 담겨 있었어요. 게다가 느
닷없이 그 트릭 이야기를 꺼내고."
오이카와는 10월 4일 이후에도 몇 번 이나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일요토픽'으로 제1탄을 쓴 뒤에도 '중앙일보' 취재진은 여러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우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마네킹 제조업체를 알아낸 것이다.
물론 형사들처럼 제조업체를 남김없이 조사해서 알아낸 게 아니라 어떤 착
상을 시험해 보았더니 운좋겠도 그것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하마마쓰에 있는 이나무라의 아파트 근처에서 탐문 조사를 하고 있던 기자
하나가 거기서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네킹 공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밤늦게 그 부근을 돌아다니다가, 유리창 너머로 발가벗은 여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목욕탕인가 하고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보았더니, 그
곳이 바로 마네킹 공장이었다.
그는 N현 R읍에서 발견된 마네킹을 그 공장 주인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아, 이건 우리 공장에서 만든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런 마네킹을 열입곱 개 내지 열여덟 개 구입한 사람이 없
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있게 대답해 주었다.
10월 5일 점심 때쯤, 젊은 남자가 승용차를 갖고 왔다는 것이다.
"승용차는 몇 대였습니까?"
"한 대예요. 트렁크에 가득 채우고 뒷좌석에도 쌓으면 열여덟 개쯤은 문제
없이 실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네킹은 연식이어서, 힘껏 누르면 약간은
들어가니까요."
공장 주인은 직접 마네킹의 몸을 눌러서 보여주었다. 마네킹에도 연식과
경식이 있는데, 연식은 비닐로 만든 장난감 인형처럼 손도 구부러지고, 옷
을 입히기 쉬운 장점이 있다고 한다.
"갯수는 열여덟 개였습니까?"
"그래요.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는 열여덟 개라는 수를 계산해내는
것 같더군요."
"젊은 남자라고 하셨지요? 몇 살쯤 됐습니까?"
"글쎄요. 학생 같은 인상이었어요. 만나면 알겠지만, 지금 당장 특징을
생각해내라면..."
쉰 살 남짓한 공장 주인은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세이난 대학으로 조사하러 간 기자는 마네킹을 자동차에 실어 R읍
까지 운반한 학생 두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아르바이트 알선위원회 같은 곳에 가서 물어보는게 어떠냐'는 오이
카와의 조언을 토대로 그 위원회를 찾아갔더니, 위원 한사람이 그 일을 알
선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숭용차로 짐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 남학생 두 명. 단, 승용차를 소유하
고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이었다. 보수는 한 번 왕복하는 데 5만 엔이었고,
휘발유값은 별도였다. 보수가 좋은 탓인지, 게시하자마자 응모자 두 명이
나타나 그들로 결정한 모양이다.
학생의 학년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간단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 중에서 뜻밖이었던 것은 마네킹을 R읍까지 운반한
세 학생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고용주였다는 점이다.
"진짜 고용주는 다른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앞에 나타난 건 그 남
자뿐이었어요."
두 사람은 그 남자의 지시에 따라 6일 오후 2시경 세다가야 공원 앞에서
자동차를 갖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고용주'인 학생이 역시 승용차를 타고 왔다.
"그 자동차에 마네킹이 실려 있었어요. 그때는 검은 헝겁으로 씌워져 있었
지만. 그것을 두 대의 차에 여섯 개씩 싣고, 그 남자도 똑같은 여섯 개를
싣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S현에 들어갈 때까지
는 마네킹을 뒷좌석에 눕혀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라고 하더니, S
현에 들어가자마자 인형을 그런 식으로 ㄳ혀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길을 끌
었어요."
"차의 순서는?"
"S현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 사람이 앞장섰어요. 하지만 인형을 좌석에 앉
힌 뒤로는 그 사람이 맨 뒤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도중에 경찰이 검문하면
어떻게 대답하라는 것까지 자세하게 지시 했어요."
"그런데 그 자동차 번호는?"
두 학생은 그 번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육상운수국에 조회한 결과, 그 번호를 가진 차는 이나무라 가즈히코의 소
유로 되어있었다.
'I교수를 둘러싼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기사가 '중앙일보'에 실린 것은 자
동차 번호가 밝혀진 이튿날이었다.
그 기사에 나온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1) I교수의 별장이 문제의 '학자촌'에 있다.
(2) '학자촌'에서 발견된 마네킹의 제조공장은 I교수의 작업실 근처에 있
다.
(3) 마네킹을 운반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동차 가운데 한 대는 I교수의 승
용차였다.
이처럼 마네킹 사건에는 I교수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기사는 이 점을 요령있게 활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 기사에는 I교수의 변명도 실려 있었다.
"묘한 일로 떠들어대서 정말 성가시다. 나는 그런 마네킹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 짓을 해봤자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단지 여러가지 사실
이 부합된다고 해서 소동을 피우는 건 그만두어달라. 그리고 나와는 관계없
는 일이지만, '마네킹 사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범죄도 아니고, 큰 신
문이 떠들어댈 만한 일도 아니지 않는가. 내 승용차는 10월 4일경 친한 사
람한테 빌려준 사실이 있다. 그 차는 7일 아침에 내가 일어나 보니 작업실
앞에 놓여 있고, 열쇠는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돌려주러 왔는데 내가 자고
있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빌려간 사람의 이름은 사정이 있
어서 밝힐 수 없다. "
이것이 I교수, 즉 이나무라 가즈히코의 변명이었다.
신문사 쪽에서는 이 담화를 '중앙일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모양이
다.
이튿날에는 'I교수의 주변에서 모습을 감춘 한 여성'에 초점을 맞춘 기사
가 실렸다.
우선 강연여행에 몰래 따라간 여자가 소개되고, 이어서 아파트 근처에 사
는 주민의 이야기를 통하여 I교수와 친밀한 사이인 듯한 여자의 모습이 요
즘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여
류작가와 아파트 관리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취재원을 감추기
위해 이런 식으로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I교수는 이 여성이 어느 사랍대학 4학년에 다니는 무라세 교코양이라고 말
하면서, 사실은 차를 빌려간 것도 무라세 양이라고 설명 했다. 하지만 그
대학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여학생이 없으며, I교수가 말한 무라세 양의
주소에도 해당자가 없었다고 그 기사는 보도 했다.
기사 말미에는 추리작가인 하타 료의 논평이 실려 있었다.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일이 아주 복잡미묘해진다. 무
라세 양이 갑자기 사라진 사실과 '마네킹 사건'을 결부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대단히 불행한 사태를 암시하고 있다. 열여덟 개의 마네킹
가운데 시체가 하나 섞여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타 료의 논평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서 쓰고 있지만, 이나무라 가즈히코
가 무라세 교코를 죽이고 그 시쳬를 어딘가에 숨긴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하타 료는 시체운반의 트릭으로 마네킹이 사용되었다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아마 이 기사를 읽은 사람은 모두 하타와 똑같은 생각을 품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이나무라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마침내 자살의 길을 선택했다.
자살 장소는 오이카와의 자택이었다.
오이카와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나무라는 자기 입장을 오이카와에게 설명
하러 왔다고 한다.
그는 오이카와가 '마네킹 사건' 보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
양이다. 논설위원쯤 되면 사건 취재와는 직접 관계를 가질리가 없다고 상식
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견해를 사회부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여겨진다.
오이카와는 이나무라와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나무라는 처음에는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
지만 내가 여러가지 모순점을 지적하고, 무라세 교코의 진짜 이름과 주소
를 밝히라고 요구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 여자는 지금 아무한
테도 방해받지 않을 곳에 있다. 중앙일보가 모든 조직을 동원해서 조사해도
모를 거라고 말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웃었습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이나무라에게 말했다.
"자네는 완전범죄를 해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사실 지금은 사라진 여자
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시체를 운
반했는지도 몰라.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범죄일지도 모르지만, 사회
적으로는 아마 매장당할 거야. 물증이 없다 해도, 중앙일보가 지적한 사실
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세상 사람들은 자네를 계속 의심
할 테니까,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매스컴에도 발붙일 곳이 없어질 거야. 그
러면 모처럼 완전범죄를 저질렀어도 아무 소용이 없지 않나."
"아니, 괜찮아." 이나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자네 신문사를 명예
훼손죄로 고소할 작정이야. 중앙일보는 아마 중요한 건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할 테니까. 재판에서 내가 피해자라는 게 밝혀지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
의 동정을 받을 수 있어."
"재판에서는 자네가 져."
오이카와는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진다고? 왜?"
"나한테는 녹음테이프가 있으니까. 10월 4일 밤, 자네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녹음해 뒀어. 그때는 자네가 흥분해 있었는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
였어.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 신문사는 마네킹을 당장 자네와 결부시킬 수
있었고, 캠페인을 시작할 수도 있었어. 아무 물증도 없이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애?"
"녹음했다고? 거짓말이겠지?"
이나무라는 불안한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정말이야. 이게 바로 그 녹음테이프야. 자네가 자수하지 않으면, 다음번
에는 이게 지면에 실릴지도 몰라."
오이카와는 이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그것은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준비해둔 가짜 테이프였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녹음
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오이카와는 이렇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나무라 앞
에는 주스잔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한두 모슴 마셨습니
다. 아나무라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살할 작정으로, 내가 한눈을 파는 사
이에 주스에다 독약을 타둔 모양입니다. 끔찍한 소리를 지르면서 목을 쥐
어뜯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렸습니다."
사건은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막을 내렸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한쪽이 독물에 중독되어 죽었으니까, 살아남은 오이카
와도 경찰에서 상당히 엄격한 취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이카와에게는 이나무라를 죽일 동기가 없었고, 한편 이나무라에
대한 의혹은 지나칠 만큼 많았다.
결국 경찰은 오이카와의 진술이 옳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공개한 전화 내용은 이나무라에게 그렇게 치명적이라고
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녹음테이프가 있었다고 해서, 왜 그는 자살을 선택했을까.
그 점이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였다.
거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0월 4일의 전화에는 오이카와가 공개한 것과는 달리 휠씬 더 중대한 내용
이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는 발표할 때 그 중요한 부분
을 숨겼다.
어쨌거나 마네킹 트릭의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었
다. 추리작가 하타 료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러나... 최근 어떤 사람한테서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나무라는 자
운대 이사가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 같다는 소문이
었다. 그렇다면 오이카와 한테도 이나무라를 죽일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매스컴에서 각광받는 이나무라의 입은 쉽게 틀어막을 수 없다. 그래
서 이나무라 살해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무라세 교코라는 여자가 가명으로 이나무라에게 접근했다가 일부러 모습
을 감춘다. 그리고 무라세는 이나무라의 자동차를 빌려, 그것을 오빠나 동
생에게 다시 빌려준다. 무라세나 그 형제를 고용한 사람이 오이카와라면,
이것이야말로 완전범죄가 아닐까.


- THE END -




행선지 없는 차표

by 西村京太郞(Nishimura Kyotaroh)
[ 1 ]
비가 그치자 어둠이 깔렸다. 폭 1미터 가량의 배수구가 섬찟한 느낌을
주며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9월 중순의 둥근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근처 공단주택으로
돌아가는 샐러리맨 한 사람이 몹시 취한 걸음거리로 배수구를 따라 길을
걸어왔다. 중년 샐러리맨으로 1주일에 두세 번은 반드시 취해서 돌아온다.
때로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배수구의 뚜껑 언저리를 지나치기도 하지만,
용케도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가로등이 있는 곳에 오면 꼭 서
서 오줌을 누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 곳으로 오게 되면 자
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늘의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배
수구를 향해 유유히 배설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여느 때도
사람의 통행이 뜸한 부근인데, 새벽 2시가 지나자 더없이 적막해져서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기분이 되어 버린다. 그는 이날 밤도 여전히 이 곳에
오자 서서 구름 사이의 달을 올려다 보면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자연
스럽게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서주 서주로 인마는 나아갔다.
서주는 좋은 곳인가 살기 좋은 곳인가
그는 갑자기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중년이라고는 하나 전쟁 경험이 있
을정도의 나이는 아니다. 다만 군가라면 음치인 그도 부를 수 있으니까 취
하기만 하면 그저입에서 흥얼대는 것 뿐이었다. 다음 가사를 몰라서 '살기
좋은 곳인가'라고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이크!" 하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새까맣게 더러운 수면
에 사람의 얼굴이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불알이 오그라 들며
배설되던 오줌이 그쳤다.
"더러운 물 속에 둥둥 떠 있던 얼굴이 나를 보고 빙긋 웃어보이는 듯했
읍니다."
몇 분 후에 달려온 경찰관에게 입술을 떨며 말했지만, 물론 이것은 착각
이었다.
배수구 속에 떠 있던 시체의 얼굴은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통
의 흔적조차 없이 이상하게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일 가슴에 깊은
자상이 없었다면 자살한 것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
나 자상이 있고, 또 그것이 치명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
므로 그것은 분명히 살인이였다. 관할 소관인 이다바시 경찰서에서 형사들
과 감식과 직원들이 함께 나와 투광기를 켜놓아서 평소에는 어두운 배수
구 언저리가 별안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복장으로 봐서는 샐러리맨 같은데." 우에다라는 민완형사가 폐수로 검게
더러워진 시체를 내려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샐러리맨 모양이었으나 별로 엘리트 사원같은 느낌은 없었고, 곤색 양복의
깃도 구식이며 좁았다. 나이는 40세 정도로 보였다, 윗옷 안쪽에 후지하
라라는이름이 박혀져 있었지만, 그 금색 자수도 터져 있었다. "이런 것이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데요."
감식과 직원 한 사람이 젖은 종이 조각을 우에다 형사에게 건네주었다.그
손을 젊은 이노우에 형사가 들여다 보았다. "이상한 것인데요? 국철 기차
표 같은데 보통 것에 비해서 크기가 배 정도나 되고..."
확실히 보통 표의 2배 정도였는데 동경 시내의 환상선의 그림이 인쇄되
어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 차표라구." 우에다 형사는 후배인 이노우에에게 설명했
다.
"요금은 3백엔. 이 표는 동경 시내라면 몇번이고 도중 하차를 할 수 있
어."
"잘 아시는군요." "전에 이와 똑같은 차표를 가진 시체를 본적이 있어
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차표를 씁니까?" "그 때 동경역에 물어보았더니 하
루에 6-15매는 팔린다더군.그 대부분이 세일즈맨 같지만." "그렇군요. 세
일즈맨에게는 편리한 차표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젊은 이노우에 형사는 감
탄한 듯 수긍했다가 곧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런데 이 시체는 아무리
보아도 세일즈맨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우에다 형사도 동감이었다. 세일즈맨은 기업의 초병이란 말을 듣는다.
말하자면 그 기업의 얼굴이다. 새 양복을 깨끗하게 입고 유행하는 넥타이
를 매는 것이 통례다.그런데 이 시체는 유행에 뒤진 양복을 입고 있고 넥
타이 또한 싸구려인데다 우선 양복깃에서 회사의 배지를 찾아볼 수 없었
다.
[ 2 ]
후지하라 히로다로오가 <행선지 없는 차표>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자유 차
표를 사용하게 된 것은 그의 기묘한 성격 때문이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 흔한 표현대로 말하자면 후지하라의 생활은 평범했지만 행복했었다. 비
록 아이는 없었지만 얌전하고 요리 솜씨가 좋은 아내 가스꼬가 있었다. 후
지하라 자신은 고교밖에는 나오지 못했지만 열심히 일한 덕으로 회사에서
계장으로 승진했다. 정년까지 근무한다 해도 겨우 과장대리 정도밖에는 더
승진하지 못하겠지만,출세욕도 없었다.아내인 가스꼬는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취미라
면 모형 모델을 만드는 정도였다. 소년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모형
모델 만들기는 그의성미에 맞았던 것 같다. 돈도 별로 들지않는 샐러리맨
에게는 아주 제격이라 할 수 있었다.
2월말 어느날 40세까지 드러나지않았던 자신의 기묘한버릇을 눈치채지 못
했다면 후지하라는 그대로 평온한 가정생활을 계속했을 것이고 죽음을 당
하지도 않았을것이었다.
그날 오후 5시에 회사 일이 끝나자 후지하라는 언제나처럼 이께부꾸로역
에서 야마노데선을 탔다. 신쥬꾸로 나와 다시 전철을 갈아타고 20분 정도
가면 그의 집이 있다. 곧바로 가면 6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아내가 준비해 놓은 저녁식사를 들고 목욕을 하고는 잠자기 전
까지 모형 모델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언제나처럼의 생활이었
다. 그러나 그날 이께부꾸로역 개찰구를 통과하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행
동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다고는 하나 소심한 그로서는 엄청
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야마노데선은 환상선이기 때문에 반대로
가는 것을 타도 2,30분 가량 늦기는 하지만 신쥬꾸에 가게 된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대한 반역과 음모가 아니라 다만 약간의 외도를 하는 기분이
었다. 러시아워여서 전차는 만원이었고 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조수의
간만처럼 승객이 우르르 내리기도 하고 몰려들기도했다. 다행히 후지하라
는 도중에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앉게 되면 눈의 위치는 자연히 서
있는 사람의 허리로 가게 된다.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손이나 허리의
모습이 때로는 퍽 재미 있기도 했다. 손을 바지 앞 부근을 가리듯 서있는
중년 사나이는 아마 바지 지퍼가 느슨해져 앞이 벌어지는 것에 몹시 신경
을 쓰는 듯했다.
5,6분마다 손이 바지 뒤 호주머니로 돌아가는 젊은이는 지갑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핸드백이 반쯤 열려져 있는 것조차 모
른 채 태연히서 있는여자도 있고, 또 그 옆에 여드름 투성이의 고교생인
듯한 소년이 그 핸드백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다. 전차가 신바시에 가
까와졌을 때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가는 손가락 끝이 맵시 있게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안호주머니에서 검은 가죽지갑을 끄집어 내는 것을 보았
다. "엇!" 무심코 소리를 내지를 뻔하다 후지하라는 참았다. 두터운 가죽
지갑이 솜씨 좋게 소매치기의 손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등줄
기에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후지하라는 소매치기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와 비슷한 나이의 사나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매치기를 잡을까 역원에게 알릴까 어쩔까 하는 마음은 전혀 일어나
지 않았다. 후지하라는 다만 멍 하니 그의 작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아
름다운 손가락을 바라다 보기만 했다. 소매치기 당한 남자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는 소매치기의 그 능
란한 솜씨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가죽지갑이 채이는 순간
후지하라를 엄습한 쾌감, 신쥬꾸에 와서도 그 감미로운 쾌감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그는 다음 역까지 부지중에 더 가고 말았다.
[ 3 ]
그날부터 후지하라의 생활태도는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그처럼 좋아했
던 모형 모델 만들기조차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훌륭한 배나 비
행기를 완성해도 전차속에서 본 그 한순간의 등줄기를 가로질러간 흥분에
비한다면 아무런 감격도 느낄수 없 었다. 다음 날부터 의식적으로 반대로
가는 전차를 타기로 했다. 다시 한 번 그뛰어난 마술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여간해서 그 소매치기와 만날 수 없었다.
신문에서 중앙선 전차 안에서 소매치기 피해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자 그
는 다음 날은 일부러 동경역에서 중앙선을 탔다.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뒤바꾸고 있는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홉살 때 그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여자 아이의 지우게를 훔친 일이 있
었다. 그 순간 흥분해서 부지중에 바지를 적신 일이 있었지만, 31년간 잠
자고 있었던 그 버릇이 우연하게 눈을 뜬 때문일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는 것과 소매치기의 현장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것 역시 옳
지 않은 줄 뻔히 알면서도 그는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자연히 전차
속에 그런 인간을 눈으로 찾고 있었다. 동경 시내에서는 언제나 2-300명의
소매치기가 전차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후지하라는
그 후 한 번도 그런 현장을 볼 수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면 우습지
만, 그 때부터 그의 눈은 차 안의 승객들 호주머니와 핸드백을 줄곧 눈여
겨 보게 되었느데, 얼마 안가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의외로 조심성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뒷 호주머니
에 지갑을 반쯤 내놓고도 태연한 젊은이, 핸드백이 열려져 있는데도 알지
못하고 친구와 재잘거리고 있는 젊은 아가씨. 중년 남자들 중에도 가방을
선반에 내던져 놓고는 신문을 읽거나 멍청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문득 이렇다면 자기 자신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아홉살 때 좋아하는 여자 아이의 지우개를 훔친 것처럼. 그
렇게 생각을 하자
지난 번과 똑같은 격렬한 전율이 그를 엄습했다. "요즘 좀 이상해요. 당
신."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아내인 가스꼬가 이렇게 말한 것이 바로 그 때부
터였다.
"뭐라고?" 내심 당황한빛을 감추면서 묻자 가스꼬는 "눈매가 이상해요.핏
줄이 드러나고,잠이 좀 부족한 게 아니예요?" "그런가봐.요즘 일이 바빠서
고단한지 잠도잘안와."
"그럼 오늘 밤부터 뒷방에서 주무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가스꼬는 그렇
게 말했다.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당분간 방을 따로 쓰기로 했다.그
때 이후이상스럽게 아내를 안을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안아도 그런 생
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 무드가 무르익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사태가 재
미 없게 벌어지고 있었다. 후지하라는 자기 자신을 유능한 엘리트 사원이
라고 생각한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13년간 이렇다 할 잘못 없이 일을 해
왔다.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성실한 사람으로 통하고 있었다. 인사과 후생
계는 남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일이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비교적
알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하는 3명. 그 중 하나는 여사원으로
초급대학을 갓 졸업한 에바다 유리꼬라는 스물 한 살 가량의 여자였는데
어느날 별안간 그녀는 후지하라의 상사인 인사과장에게 그에 대한 것을 직
접 하소연했다.
"이제 더 참을 수 없어요." 유리꼬는 금방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말을 해봐요." 일류대학을 나온 아직 30대의 젊
은 나이인 인사과장은 선물로 받은 홍콩제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면서 유리
꼬에게 말했다.
"계장이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아요." "후지하라군이? 그는 성실한
사람인데 그런 못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저만이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여간 거북해하지 않아요."유리꼬는 같은과
의 몇몇 여사원의 이름을 대고 "거짓말이 아닙니다.물어봐주세요.""구체적
으로 어떤 눈으로 보지?"
"제 몸을 햝아 올리는 듯이 보아요." "핥아 올리는 것처럼이라!"
인사과장은 별로 매력을 느낄수 없는 유리꼬의 몸을 고개를 갸우뚱하고
쳐다보았다.
"근무시간 중에도 그렇게 보나?" "근무시간 중에는 그렇지 않지만, 아침
에 만나거나 퇴근할 때 그렇게 보아요. 무서워서 저는..." 유리꼬는 큰소
리로 말했다.
만일을 염려해서 곧 다른 여사원에게 물어보니 모두 한결 같이 후생계장
의 눈매가 이상하다고 말을 했다. 인사과장은 내버려 둘 수도 없어 후지하
라를 과장실로 불렀다.
"후지하라군." 과장은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후지하라에게 군(君)자를 붙
여서 불렀다. "나는 본래 고루한 소리는 하지 않는 주의야. 일에 지장이
생기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자네 밑에 있는 에바다양이 내게 호소
를 해왔어. 자네가 이상한 눈으로 자기를 본다고 말야. 다른 여자 사원들
도 같은 소리를 하더군. 어쩐 일이지? 부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
서 젊은 여사원에게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후지하라는 변명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녀들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들이 가지고 다니는 핸드백인 것이다.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모르고 있었읍니다. 죄송합니
다. 이후론 주의 하겠습니다."
어쨓든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후디하라는 새파
래졌다. 13년간을 일해온 회사다. 목이 달아나면 곤란하다. 어떻게든 묘한
버릇을 고치려고 생각했다. 전차를 타도 눈을 감고 승객을 쳐다보지 않
겠다고 결심을 했다. 물론 회사 여사원에게 대해서도 같았다. 회사에세
는 눈을 감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얼굴만 보도록 노력했
다. 그런 억지스런 노력을 계속하고 있던 중에 짖궂게도 이번엔 그 자신이
안호주머니에 넣어 둔 지갑을 감쪽같이 차 속에서 소매치기 당하고 말았
다. 그것도 월급날 다음 날이어서 한 달분 용돈 20000엔을 아내에게서 받
아 그대로 전부 그 안에 넣어 둔 채였다. 생각해 보면 혼잡한 차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후지하라는 소매치기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봉
이었을 것이다. 보통 때라면 숨기지 않고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아내에게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자신의 마음 속에는 그
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한 푼도 없게 된 용돈은
카메라와 테이프 레코오더 등을 전당포에 잡혀 적당히 보충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을 수 없게되었다. 이렇게 되면 도루아
미타불이다. 전처럼 싫어도 시선은 자연히 승객들의 핸드백이나 호주
머니나 가방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3월 상순 어느 날 후지하라는 야마노데
선 전차 안에서 소매치기 담당인 형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 4 ]
언제나처럼 차 안은 러시아워로 붐비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 30세 가
량의 여자가 서 있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은 전혀 매력이 없는 여자였
다. 그러나 후지하라의 눈은 그녀가 매고 있는 핸드백에 고정되어 있었
다. 완전히 고리가 풀어져 있어 지갑이 엿보였다.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예능 주간지를 열심히 보고 있엇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이
상태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후지하라는 생각했다.
만일 손을 뻗어 소매치기를 하면 아마 기막힌 기분이 될 것이다.아홉살
때의 그 쾌감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했을 때처
럼 달콤한 전율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안 돼.' 그는 이렇게 생각
하고 급히 핸드백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자제력은 2,3분밖에는
지속되지 않았다. 부지중에 시선이 그리로 돌아가 버렸다. 저대로라면 진
짜 소매치기에게 당할 것이다. 여자는 여전히 주간지에 열중
하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지갑이 곧 핸드백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빨리 핸드백에 고리를 채우라구' 이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이처럼
마음을 괴롭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모른체였다. 작게
기침을 해보았지만 그것도 헛수고였다. '제발 다음역에서 내려 줘.'
이렇게 빌어보았으나 그것마저 허사였다. 여자는 여간해서 내릴 것 같지
도 않았다.
핸드백은 열려진 채였다. 지갑이 통째로 보였다. 마치 훔쳐가 달라는
듯이.
후지하라에게는 이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부지중
에 손이 나갈지도 모른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음 역에서 내가 내리
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아직 신쮸꾸는 아니었지만 후지하라는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그의 오른 손이 핸드백에 가 닿았다. 손가락 끝이 지
갑을 만졌다.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굵고 억센 팔이 뻗어오더니 그의 손
목에 채워졌다. "뭣하는 거야!"
후지하라가 부지중에 소리를 지르자 키가 크고 얼굴이 햇볕에 그을은 사
나이가
"얌전히 굴어!" 하고 굵은 소리로 꾸짖었다. "소매치기 현행범으로 체포
한다."
"무슨 소리야. 난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헛소리 말어. 핸드백에 손
을 넣어 지갑을 잡은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형사가 소리질렀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소매치기야
"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후지하라는 무심결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
다. 그는 역전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갔다. 키 큰 소매치기 담당계 형사는
의자를 뒤로 돌려앉더니 턱을 내밀고 후지하라를 노려보았다.
"나는 계속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어. 당신은 계속 그 핸드백을 노리고 있
었어.하겠나 하고 감시하고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전차를 내리는 척하
면서 행동을 하더군."
"아닙니다. 나는 소매치기가 아닙니다." 후지하라는 주머니를 뒤져 신분
증과 정기권을 꺼내 형사에게 보이면서 "나는 확실한 회사의 사원입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회사에 일아봐 주십시오. 벌써 13년이나 이 회사
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형사는 약간 의외라는 듯이 콧소리를 내더니
"샐러리맨이 돈이 궁해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단 말이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핸드백이 열려있어서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
던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의해 주지 않았지? 이 정기권을 보면 당신이 내리
는 역은 신쮸꾸야. 그런데 세 정거장 전에 내리려 하다니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 "그것은..."
말하려다가 후지하라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알 수 가
없었다. 손이 핸드백에 닿은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손가락이 지갑으로 간
것은 과연 우연인지 어떤지 그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 때 형사가
없었다면 그의 손가락은 틀림없이 지갑을 낚아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역시 소매치기할 생각이었군." 형사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 5 ]
후지하라는 전과가 없었으므로 훈방되어 그날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같은 회사 사람이 그 사건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의 상
사인 인사과장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만일 인사과장이 대범한 사람이었다
면 그 사실을 그대로 접어 두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결국 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를 감싸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회사는 13년 간이나 성실하
게 봉사해온 그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즉시 그를 해고 했다. 징계 면직이었기 때문에 퇴직금도 나오지 않았
다. 아내인 가스꼬에게는 불황 때문에 회사가 문을 닫았다고 거짓말을 했
다. 직장을 잃은 후지하라는 새 직장을 얻기 위해 매일 동경 시내를 쏘다
녔다. 그때 자유 차표라는 편리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실업자 생활
은 정말 괴로웠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 오직 유일한 의지가 된것은 아내인
가스꼬였다. "걱정 말아요." 가스꼬는 웃는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
대신 내가 일을 하겠어요." 가스꼬는 씩씩하게 말했다. 그 뿐 만아니라 그
녀는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일하기 시작했다. 후지하라는 아내를 다시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10년이나 같이 살아온 아내였지만 너무 평범
한 여자로밖에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아내에게 그런 면이 있었
다니 그로서는 신기하기조차 했다.
가스꼬의 직장이 바로 역에 있는 스낵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굳이 반대할
수도없었다.
"곧 새 직장을 얻어 당신을 안심시킬 거야." 그는 가스꼬에게 말했다. 후
지하라는 자유 차표를 사서 시내로 매일 일터을 찾아다녔다.신문을 보거나
전주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보면서 마음에 내키는 회사를 찾아가 보았지
만 직장을 얻기는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지금은 불경기이다. 게다가 40세
의 중년 남자로서 특수 기능조차 없는 그로서는 여간해서 직장을 구하기
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예의 그 나쁜 버릇 또한 방해 요인이었다. 자유 차
표로 전차를 타게 되면 어쩔 수가 없었다. 눈이 자연히 승객들의 핸드백
이나 호주머니를 쫓았다. 마치 마약 같았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만으로도
지쳤다. 이럴바엔 차라리 남의 지갑이나 시계를 낚아채 버리는 편이 훨
씬 마음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돈이 꼭 필요해서만이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지갑을 낚아채는
순간에 얻는 희열과 스릴를 맛보고 싶었다.
그 충동을 억누르고 피로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후지하라는 "미안해."
하고 가스꼬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허탕을 쳤지만 내일은 꼭 일을
찾아낼 테니까." "천천히 찾아 봐요.생활은 어떻게든 꾸려갈 테니까요."
가스꼬는 웃는얼굴로 대답하곤 했다."
"일은 고단하지 않아?"
"고단하긴 하지만 손님들이 모두 좋은 분들이어서 오히려 즐거워요."
가스꼬는 요즘 갑자기 화장이 짙어진 얼굴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 6 ]
스넥에서 일을 끝낸 후 가스꼬는 <좋은 손님> 한 사람과 어느 여관 방에
서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상대는 스스끼 고오조오
라는 28세의 남자였다. 바텐더 일을 하고 있지만, 2년 전까지는 조직 폭
력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그 시절 싸우다 다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스스끼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
정말 남편을 죽이고 싶단 말야?" 하고 물었다. "그래요."
가스꼬는 침대 위에서 조금씩 군살이 붙기 시작한 허리를 만지작거리면
서 대답했다.
"죽이고 싶도록 싫다면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어때?"
"그러면 돈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렇지. 재산도 없고 집도 없고..."
가스꼬는 잔뜩 얼굴을 찡그려 말하면서 침대 위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스끼는 젖은 몸을 타올로 벅벅 문지르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죽이면 돈
이 생기나 그럼?"
"생명보험에 들었어." "얼마짜리?"
"3천만의 배액 보험. 예기치 못했던 사고로 죽으면 배인 6천만엔이 들
어와."
"살해당해도?" "그럼,만일 죽여준다면 당신에게 1천만엔을 주겠어." "나
쁘지않은데."
스스끼는 타올을 허리에 두르고 소파에 앉았다. "해주는 거지?"
가스꼬가 묻자 스스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탁자위의 담배를
집어들면서
"여자는 무서워." "뭐가?"
"10년간 같이 살아온 남자 아냐? 그런데 죽여달라니, 어떻게 된 게 아
냐?"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은 결혼 초기 뿐이었어." "그뒤로는 마지못
해서였단 말야?" 스스끼는 묘하게 웃으며 가스꼬를 향해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가스꼬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으로 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할
까, 좋은사람이긴 하지만 출세할 가능성도없고 우선 그런 노력조차 해보려
는 의욕마저없어. 나는 10년간 그를 늘 경멸해 왔어." "경멸이라..." "
물론,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남자로 참고 살아야지 하나 하는 생각이 없었
던 건 아냐. 어쨓든 성실하고 얌전했으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갑자기
거짓말을 하면서 날 속였어." "회사가 망해서 실직했다는 말 말야?" "
정말 회사가 망했으면 화내지도 않겠어.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보았더니
회산 아무렇지도 않았어. 무언지 모르지만 잘못해서 면직당한 거야.10년간
을 같이 살아왔는데 사실을 말하지 않고 나를 속였다는 점을 도저히 용서
할 수가 없어."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모르겠어. 13년간이나 근무한 회사에서 쫓겨나면서 퇴직금도 받지 못했
으니까."
"이젠 넌더리가 난단 말이지?" "그래요.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면 그런 남
자와 10년간이나 꾹 참고 살아온 댓가를 한 푼도 못받게 돼. 위자료를 받
고 싶어도 저금한 것도 없지 집도 없지..." "그래서 보험금을 타내기로
한 것이구만."
"10년간을 봉사해 준 댓가에 대한 당연한 보수야." 가스꼬는 천장을 바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그녀는 남편 후지하라를 증오하고 있었다.
후지하라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았을 때부터 가스꼬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스낵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그녀 자신의 성격도 변하고 말았다. 손님인 남자들의 이런 저
런 농담에 즐거움 조차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 후지하라와의 10년간
의 생활이 전혀 헛된 시간이었던것처럼 생각되기도했다.소중하고 화려해
야 할 청춘시절을 쓸쓸하게 헛되이 보냈다는것에대한 후회감이 강한분노심
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후지하라는 그
것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
억지춘향격인 생각이었으나 가스꼬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6천만엔이란 큰 돈이 들어왔을 때의
일을 이것저것 상상해 보았다. 상점을 가지고, 세계여행을 하고.... "남편
은 자기가 생명보험에 든 사실을 알고 있어?" "몰라요. 의심받지 않기 위
해서 나도 들었지만." 가스꼬는 알몸인 채 스스끼의 앞을 지나 욕실로 들
어갔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고치면서
"이봐요. 정말 죽여 줄거야?" 하고 스스끼에게 물었다. "1천만엔은 틀림
없겠지?"
"보험이 나오면 곧 줄께." "남편은 매일 일자리를 찾아다닌단 말이지?"
"그래요. 자유 차표를 사서 동경시내를 쏘다니고 다녀요." "자유 차표라
니?"
"3백엔으로 살 수 있는데 시내라면 몇 번이라도 갈아탈 수 있는 전철 차
표에요. 행선지가 씌여 있지 않은 차표." "그것 괜찮은데." 스스끼가 웃
었다.
가스꼬는 짙게 입술연지를 바르면서 "무엇이 우습지?"
"나와 당신이 저승이라는 행선지를 준다는 말이지.그렇게 생각하면 어쩐
지우스워서."
"웃고 있지만 말고 확실하게 죽여 줘야 해." 거울 속에서 가스꼬는 얼굴
을 찡그렸다.
"걱정 말어." "당신도 후지하라처럼 자유차표를 사서 하루 그의 뒤를 밟
아보지 그래. 그리고 어디 적당한 장소에서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것도 괜찮겠지."
"증거는 남기지 말아요." "다 알고 있어 내게 맡겨 두라구." "부탁해
요."
가스꼬는 욕실에서 나오자 "마음을 정했으면 다시 한 번 더 안아 줘."
남자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35 살이지만 아이가 없기 때문에 탄력있는
육체였다.
"당신도 어지간하구먼." 스스끼는 굵은 팔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는
"남편과는 상당한 기간 동안 남남으로 지낸 모양이지?"
"회사에서 목이 달아나기 전부터 잠을 잘 잘 수가 없다고해서 각각 방
을 따로 쓰고 있어. 벌써 반년 가까이 관계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이 몸이 참질 못하겠군."
스스끼는 가스꼬의 둥근 엉덩이를 철썩 하고 소리가 나게 때렸다. 가스
꼬는 콧소리를 내면서 스스끼의 목에 매달려 그의 귓밥을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꼭 후지하라를 죽여 줘야 해."
[ 7 ]
이틀 후.
스스끼는 손에 익은 단도를 안 호주머니 속에 깊숙히 감추고 후지하라의
뒤를밟았다.
아침 10시 후지하라는 언제나처럼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섰다.
전철로 신쮸꾸로 나와 언제나처럼 3백엔짜리 자유 차표를 샀다. 스스끼가
뒤따라같은 표를 사자 창구의 역원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계속해
서 두 장이 팔리는 일이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지하라는 야마
노데선을 안으로 도는 홈으로 나오자 벤치에 앉더니 매점에서 산 신문을
펴들고 우선 구인광고를 훑어 보기 시작했다.
스스끼는 5,6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으로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후
지하라가 내키는 일거리를 찾아 내지 못했는지 초조해하는 모습을 역력하
게 드러내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165센티 정도겠군.' 스스끼는 자
기가 죽일 상대의 키를 냉정하게 측정해 보았다. 몸무게는 60킬로가 겨우
될 것 같았다. 완력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겁이 많아 보이는 것이 무엇
보다 고마웠다. 그렇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끼는 후지하
라를 해치우는데 대해서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걱
정되는 것은 상대가 죽이기 쉬운 인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고, 죽인 후
자기에게 혐의가 없도록 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스꼬는 오늘 하루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로 했으니까 경찰에 조사를 받아도 안전할 것이다. 문
제는 스스끼자신이다.가스꼬와의 관계가 드러나게 되면 경찰의 취조를 받
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전과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행스럽게도 스낵에는 손님 한 사람만이 있었다. 그러나 가스
꼬가 유부녀이기 때문에 밀회할 때 마다 몹시 조심을 했다.그것이 좋았
다. 현장에 증거만 남기지 않는다면 경찰이 자기를 의심할 리가 없었다.
후지하라는 일어나서 홈으로 들어온 전차에 탔다. 스스끼도 곧 같은 차에
탔다. 후지하라는 손잡이에 매달려 창 밖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못
난 놈이다.'
스스끼는 생각했다. 저 나이로 행선지가 없는 차표를 사가지고 매일 일거
리를 찾아다닌다니 배알도 없는 인간이라고 경멸했다. 게다가 아내에게조
차 배반당하고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니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
다. '이런 못난 인간에게는 내가 행선지를 정해 주는 편이 오히려 좋은 일
인지도 모르겠군.'
스스끼는 아전인수격으로 생각을 했다. 후지하라는 시나가와역에서 내려
역 근처 자동차 수리공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일을 못얻었는지 실망한표정
으로 힘없이 걸어 나왔다.같은 일이 하루 종일 되풀이되었다. 야마노데선
내의 역을 몇번이나 도중 하차해서 작은 공장과 운송회사를 찾아다녔다.
주로 중소기업만 찾아다니는 이유는 대기업에서는 임시직도 중년은 채용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에서도 필요한 것은 젊은 노동
력이었으므로 후지하라의 구직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어디를 찾아가도 일
자리가 나서지 않자 후지하라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져가는 것을 스스
끼의 눈으로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노획물의 체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늑대와 같은 마음으로 스스
끼는 후지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8시가 지날 무렵 후지하라는 이다
바시 역전 앞에 있는 국화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스스끼는 잠깐 망설이다
가 곧 뒤따라 들어가 후지하라 옆에 가서 않았다. 후지하라는 힐끗 뒤따
라 들어온 스스끼를 보았지만 아무 표정도 없이 곧 눈을 아래로 깔았다.
스스끼는 후지하라와 같은 라면을 주문하고 잠자코 먹으면서 주의깊게 후
지하라를 관찰했다. 1천만엔짜리 물건이다. 후지하라는 배가 고파서 이 곳
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것 같았다. 그는 라면을 먹
다 말고 수저를 놓고는 카운터 뒤에 있는 음식점 주인에게 조심스레 말
을 걸었다.
"이 집에서 점원을 모집하고 있는 것 같군요."
아무리 해도 일거리를 찾을 수 없자 중국음식점 점원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를 채용하지 않겠어요?" "손님을요?"
얼굴이 붉고 뚱뚱한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후지하라를 보았다. "안
됩니까?" 후지하라는 이미 실망한 표정이다. "우리집에서 필요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에요.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몸도 많이 움직여야
하고..." "배달이고 뭐고 다 하겠습니다." "간단히 하겠다고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노릇입니까? 그런데 손님은 가족이 있으시죠?" "네, 아내가 있
어요." "그럼 더욱 안됩니다. 우리는 먹고 잘 점원을 구하고 있습니까요."
"그렇습니까?" 후지하라는 마치 자신이 거절한 것처럼 미안한듯 고개를 숙
이고 100엔짜리 동전 세 개를 카운터에 놓고는 허전한 걸음으로 음식점
을 나왔다. "중년은 곤란해." 주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스스끼도 밖으로 나왔다. 후지하라는 바로 역으로 가지 않고 어깨를 늘어
뜨린 채 불이 없는 쪽으로 힘없
이 걸어갔다. 오늘도 결국 일거리를 얻지 못했으니 이대로는 집으로 돌
아가기 괴로운 듯한 몸짓이었다. 스스끼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후지
하라는 어두운 쪽으로만 걸어갔다. 마치 밝은 장소가 두려워서 빛으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걸음걸이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점점 뜸해졌다. 이다바시역
에서는 이미 어지간히 떨어져 있었다.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집이
없는 도로 좌측으로 배수구가 보였다.희미하게 물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스스끼는 안호주
머니 속에서 단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후지하라에게 다가가 그의 등
을 툭 쳤다. 순간 후지하라가 돌아다 보았다. 그 어깨 언저리가 벌써 비에
흠씬 젖어 있었다.
"날 알고 있겠지?" 스스끼가 얼굴을 후지하라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 중국음식점에 있던 분이 아닙니까?" 후지하라는 지친 목소리로 말
했다.
"그것 뿐이야?" 스스끼는 짓굿게 물었다. 원래 잔인한 성격의 남자였다.
보기만 해도 약하고 피로에 지친 상대를 보자 그냥 죽이기만은 아깝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좀 더 괴롭힌 후에 죽이고 싶어졌다. "전에도 어디
서 본 일이 있습니까?"
"태평한 작자로군." 스스끼는 잔인하게 웃었다. 후지하라는 당황한 얼굴
로 잠자코 있었다. 스스끼는 힐끗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고는 "난 당
신 부인을 잘 알고 있지."
"그렇습니까?" "놀라지 않는군." "그런 곳에서 일을 하다 보면 손님과
친해진다 해도 어쩌는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나는 친한 정도의 손님이 아냐. 여관에서 같이 잔 일도 있어."
"...."
"갑자기 안색이 변하는군.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가르쳐주지. 부인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 어리섞고 거짓말쟁이고 기력이 없는 당신
에게 벌써부터 진저리를 내고 있어." "나와 헤어지자는 겁니까? 그렇다
면 그것도 좋다고..."
"상당히 이해심이 많은데. 그렇지만 부인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거
야.재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당신과 참고 살아온 10년간을 돈으로 돌려 주
었으면 하고 있단 말야."
"내게 그런 돈은..."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이 죽어만 주면 돈은 들어오
게 돼 있어. 게다가 당신은 행선지 없는 차표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느라
고 상당히 지쳤을 거구.
이 정도에서 행선지를 정해 주지. 이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구." 스스
끼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가든지 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후지하라에게는 그런 기력마저 없는지 파랗게 질린 얼
굴을 한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오금이 붙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이렇
게 되니 스스끼에게는 짚으로 만든 인형을 찌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
다.
"원통하거든 부인을 원망하라구."
몸을 바짝 들이대고는 가슴에 깊숙히 단도를 꽂았다. 직각으로 찌르지
않았기 때문에 피는 거의 튀지 않았다. 그 순간 후지하라는 웬지 빙긋 웃
는 것처럼 보였다.
[ 8 ]
"그 때는 나도 역시 섬찟하더군. 죽어가는 순간에 웃는 놈은 처음 보았
으니까."
스스끼는 그날 밤 늦게 가스꼬를 만났을 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말
했다.
가스꼬는 창백한 얼굴로 "죽는 것을 확인했죠?"
"내가 실수할 것 같아? 죽은 것을 확인하고 배수구에 처넣었어." "증거는
남기지 않았겠지요?" "걱정 말어. 남편의 죽음과 내가 관련된 것은 아무것
도 남겨놓지 않았으니
까." "아무도 못보았겠지요?" "내가 그런 서툰 짓을 하겠어? 사람이 없
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찔렀으니까. 단도도 깨끗하게 처리하고 왔고."
스스끼는 몹시 갈증이 난듯 가스꼬가 따라 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남편 호주머니는 뒤지지 않았어. 보통 살인의 경우는 신원을 감
추게 마련이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게 하면 보험금 지급이 더디니까."
"경찰이 내게 이것저것 묻겠지요?" 가스꼬도 맥주를 마셨다.
"남편이 죽었는데 당신이 조사를 안받을 수 있겠어? 하지만 알리바이가
있으니까 염려 없어." "당신 말대로 저녁 때까지 친구집에 있었고 저녁
부터는 스넥에서 일을 했
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구만. 한 가지 주의하고 있으면
돼.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이름을 말하지 말아. 그리고 내게는 알리바이가
없으니까 보험금이 나올 때까지 만나지 않는 쪽이 좋겠어."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주겠죠?"

다시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음산한 비였다. 빗방울이 배수구의 어두운 수면에 작은 방울을 무수히
만들면서 폐수로 더러워진 후지하라 히로다로오의 시체를 씻어 주고 있었
다. "안호주머니에 같은 이력서가 두 통 들어 있습니다." 젊은 이노우에
형사가 우에다 형사에게 말했다.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후지하라 히로다로오라는 것이 이 남자의 이름
인 것 같습니다. 주소는 스기나미구요." "이력서를 두 통씩이나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피해자는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는지 모르겠
군. 자유 차표는 일거리를 찾는 데에도 편리하니까. 범인의 유류품은 없
었나?" "묘한 것이 양복 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묘한 것이라니 지갑 아냐? 피해자의 것이 아니란 말야?"
"피해자의 것은 안호주머니에 있습니다."
"그렇군. 그래 그거 이상한데?"
우에다 형사는 그 가죽지갑을 조사해 보았다.
돈은 3천엔밖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같은 명함이 다섯 장이나 지갑 속에
서 나왔다. 명함 뒤는 멋을 내려고 로마자로 이름을 인쇄했다.
"스스끼 고오조오. 주소는 신쥬꾸이군. 곧 이 작자를 조사해 봐."
우에다 형사는 이노우에 형사에게 말했다.
이노우에가 응낙을 하고 사라진 뒤 우에다 형사는 다시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이 피해자는 웃는 얼굴로 죽었을까?

- The End -



돌아오지 않는다 (원제 : No Comebacks)


by 프레드릭 포사이드 (Frederick Forsyth)



마크 샌더슨은 여자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자면, 애버딘 앵거스
(스코틀랜드산 뿔이 없는 식육용 검은 소)의 등심 스테이크에다 상추의 싱
싱한 속을 듬뿍 넣은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
는 이 메뉴를 늘 즐겼다. 약간이라도 배가 고프면, 그는 언제라도 전화를
해서 빌딩 맨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음식들을 배달시켰다. 그는 그
럴 만한 능력이 있는 부자였다. 파운드로 쳐도 백만장자라고 말할 수 있
었다. 비록 요즘 값어치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가치는 달러에 비해 두 배는
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세 종류의 생활
이 있었다. 런던 실업계의 거물로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엄밀히
말해 세상의 주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샌더슨 같은 사람에게 문자 그대로
의 사생활이란 의미없는 말이겠지만---과, 그리고 그의 숨겨진 생활이
다.
첫번째 생활은 주요 신문의 경제란이나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말해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1960년대 중반, 마크 샌더슨은 런던 웨스트 엔드에 있는
한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비록 제대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머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한 지 이년도 채 되기 전에 그는 처음으로 부동산 거래의 룰과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지만, 그 룰을 합법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
다. 스물세 살 때 그는 세인트 존스 우드에 있는 부동산을 단독으로 맡아,
단 24시간 만에 거래를 성사시켜 1만 파운드를 벌었다. 그는 그 돈을 자본
으로 '해밀턴 부동산'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회사는 그 뒤 16년간
그가 쌓아 올린 부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회사의 이름은 첫 거래한 부동
산이 해밀턴 테라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였는데, 그것이 그가 마지
막으로 한 센티멘탈한 행동이었다. 주택 사업으로 백만 파운드를 번 그는
70년대 초, 사무용 빌딩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었다.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재산은 5백만 파운드에 달했고, 이때부터 사업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세
인트 존스 우드에 있는 부동산을 최초로 거래할 때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그의 사업가적인 자질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었다는 미다스 왕의 손처
럼 금융, 은행, 화학공업, 지중해의 레저산업 등에서 통찰력을 발휘했다.
신문들은 이를 떠들어댔고, 사람들은 '헤밀턴 부동산'이 산하에 십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 그룹으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두 번째 생활인 샌더슨의 사생활도 같은 신문의 몇 페이지 앞에 마찬가지
로 자주 등장했다. 리젠트 공원의 펜트 하우스, 엘리자베스 왕조 풍의 우
스터셔에 있는 전원별장, 루아르 계곡에 있는 성, 당디페 해안의 별장,
요트, 랑보르기니 스포츠카, 롤스로이스, 그리고 회사에서나 집에서 지름 4
미터짜리 원형 침대를 배경으로 젊고 매력적인 병아리 스타들과 찍은 사진
들의 행렬.... 이런 것들은 신문 칼럼에 아주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하였
다. 백만불짜리 여배우와의 이혼에 관한 급보라든가 가무잡잡한 미스 월드
와의 친자 확인 소송에 관한 보도 같은 것들은 오십 년 전 같으면 그를 파
멸로 밀어넣었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단지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만약 증거가 필요하다면, 그리고 요즘은 자주 그런 것이
필요하지만---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웨스트 엔드 사교
계에서는 오히려 흥미있고 감탄할 만한, 충분히 주목 받을 만한 일로 여
겨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기록에 남을 인물인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생활은 그의 숨겨진 생활인데, 모든 것이 한창임에도 불구
하고 그의 숨겨진 생활을 한마다로 요약하자면 '권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마크 샌더슨은 모든 것에 싫증이 나 있었다. 왕년에 한때 그가 만들어냈
던 '마크가 바라는 것을 마크는 얻는다.'라는 경구는 어느새 씁씁한 농담
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에, 마론 브란도 같은 약간 찌푸
린 듯한 인상과 탄탄한 육체의 매력까지 있었으나 고독했다. 샌더슨은 여
자를 원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여자가 아니라 오직 단 한 명의 여자, 그
리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 그리고 가정이라 불려지는 한적한 시골의 보금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를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도 잘 알고 있었다. 바르게 말하면 그는 10년간이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돈 많은 바람
둥이들처럼, 샌더슨이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는 샌더슨을 좋아해 주지 않았
다. 아니면 적어도 공적인 샌더슨--돈과 힘과 명성을 가진--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대부분의 돈많은 많은 바람둥이와
는 다르게 그런 사실을 수긍할 수 있는 자기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세상에 드러낸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겠지만.
그 초여름날 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샌더슨은 자신이 원하는 여
성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루한 자선 파티에서 샌더슨은 그녀를 만났다. 경비를 제하고 난 이익금
을--하다못해 한 잔의 우유까지도--방글라데스로 보내자는 취지를 가진 자
선파티였다. 그녀는 샌더슨이 서 있는 파티장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녀
는 작고 뚱뚱한 체구를 보완하기라도 하듯 커다란 시가를 물고 있는 한 남
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에 미소를 약간 머금은 그녀의
표정으로는, 그녀가 과연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풍만한 그녀의 가슴을 엿보려고 애가 타 있는 남자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샌더슨은 사람들을 헤치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마침 고개를 끄덕여 인
사하는 조그만 영화제작업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다. 그녀의 이름은
안젤라 소머즈라 했다. 그가 잡은 그녀의 손은 싸늘한 감촉이었고 손가락
은 가늘고 길었으며 완벽한 모양의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
는 진토닉으로 보이는--나중에 그냥 토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술 한 잔
을 들고 있었는데, 가운데 손가락에는 가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샌
더슨은 개의치 않았다. 결혼한 여자라 해도 다른 여자들에 비해 별로 어려
울 것이 없었다. 그는 영화 제작업자를 쫓아 버리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
해 그녀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와 다른 데로 갔다. 그녀는 그에게 깊은
육체적 감동을 주었으며 또한 유례없이 그를 흥분시켰다.
소머즈 부인은 큰 키에 평온하고도 고전적인 품위가 흐르는 자태가 매력적
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침착하고 기품있는 분위기는
아름다운 얼굴과도 보기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가슴과
잘룩한 허리, 잘 퍼진 히프에 길게 뻗은 다리라는 식의 말라빠진 80년대 미
인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말아 올렸는데 사치스런
느낌과는 다른 매우 신선하고 건겅한 느낌을 주었다. 입고 있는 단순한 디
자인의 흰색 드레스는 적당하게 황금색으로 탄 그녀의 피부와 잘 어울렸다.
보석류는 달지 않았고 단지 눈언저리에 가벼운 화장을 한 것 뿐이었는데도,
그 모습은 다른 사교계 여인들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나
이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으나 나중에 서른두 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그녀의 황금빛 피부를 보고 샌더슨은, 그녀가 지난 겨울부터 사월까지 스
키 휴가를 즐겼거나, 아니면 봄에 카리브 해에서 순항을 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파티장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나 그녀의 남편
이 그런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
나 두 가지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소머즈 부부는 스페인 해안의 작은 별장
에서 살고 있었다. 두 부부는 남편인 소머즈 씨가 새들에 대한 책을 써서
받는 약간의 인세와 그녀가 영어를 가르쳐 버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몸매와 황금색 피부로 인해 스
페인 계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영국인이었
다. 그녀는 미들랜드에 있는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보기 위해 영국에 왔는
데, 옛 학교 친구의 권유로 스페인에 돌아가기 전에 일주일쯤 런던에서 머
무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와는 어쩐지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그에게
애교떠는 일도 없었고-이것이 특히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부드럽게 농
담을 하는데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짓도 하지 않았다.
"웨스트 엔드 사교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샌더슨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파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 같군요."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잼 단지 속의 한 떼의 앵무새지요."
냉랭하게 샌더슨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마크 샌더슨 씨도 그 중심인물의 한 사람인 것 같던
데요."
그녀는 아주 점잖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이 하는 짓이 스페인까지 흘러 들어갔소?"
"코스타 블랑카에서도 '데일리 익스프레스' 정도는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크 샌더슨의 인생과 생활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물론 그것까지도.."
"깊은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반드시 받아야만 하나요?"
"아니오."
"그렇다면 받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기쁘군요. 왜 그런지에 대해 물어도 좋겠습니까?"
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말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짜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저도 포함됩니까?"
샌더슨은 자기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가슴이 순백의 천 아래서 부드럽게 부
풀어오르다
가라앉는 모습을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글쎄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절반의 기회만 주어졌더라도, 당신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되
셨을 거예
요."
이 말에 그는 잠깐이나마 몸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말이오."
그는 말꼬리를 잡아챘으나, 그녀는 토라진 작은 소년을 대하는 듯 너그러
운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몇 분 뒤 그녀의 친구가 오더니 한참을 지껄이다가 그녀와 함께 떠날 채비
를 하였다. 그는 로비로 나오는 길에 내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낮은
목소리로 청했다. 수년 동안 그가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
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샌더슨이 당연히 사진기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곳
으로 초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고 나서 그녀는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날 밤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샌더슨은 옆에 누워 있는, 이나벨의
가게에서 데려온 비쩍 마르고 무언가 열에 들떠 있는 모델 아가씨를 무시한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윤기나는 갈색 머리가 자신의 옆 베개
를 덮고 있으며, 부드러운 황금빛 살결이 자신의 손에 만져지는 듯한 환상
에 젖어 들었다. 그녀가 보여 준 다른 모습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자
는 모습도 고요하고 평온할 것이라고 그는 내기라도 기꺼이 걸 수 있을 만
큼 확신했다. 샌더슨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다이어트로 비쩍 마른 풋내기 모델의 강아지 귀처럼 늘어진 젖과 흥분을
과장하려고 애쓰는 헐떡거림뿐이었다.
그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어두운 거실에 앉아 커
피를 마셨다. 태양이 저 멀리 원스테드 소택지에서 떠오를 때까지 그는 그
렇게 앉아서 창 밖 공원에 있는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은 로맨스를 만들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이나 두 사람, 심지어는 셋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다.
다음날 밤 샌더슨은 자동차로 그녀를 데리러 갔고 그녀는 곧 내려와 차에
탔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말아 올리고, 손목
부분이 레이스로 장식된 우아하고 아름다운 삼각형의 소매에 흰 깃이 달린
주름진 블라우스와 검은 맥시 치마를 입고, 허리에는 폭이 넓은 벨트를 묶
고 있었다. 에드워드풍의 그런 모습에 그는 흥분을 느꼈는데, 전날 밤에
그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겸손하면서도 지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가 여자에게는 거의 하지
않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녀는 경청해 주었다. 밤이 점점 깊
어짐에 따라 샌더슨은 자기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일시적인 끌림
이 아니며 하물며 단순한 욕정 따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내면의 고요함이나 자제심과 함께, 샌더슨으
로 하여금 안식과 평화를 느끼게 하는 온화함이 있었다.
그는 점점 더 자유롭게 재정상의 업무나 혹은 평소에 간직하고 있던, 경
멸하면서도 어울릴 수밖에 없는 어떤 사회에 대한 권태감 등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단순히 알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여자에게 있어
서는 많이 아는 것보다 이해하려는 태도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밤
이 깊어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
누었다. 그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집에 들러 나이트 캡을 한잔 하지 않겠느
냐는 청을 했으나 그녀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거절했다.
그 주의 중반에 이르자 샌더슨은 마치 열일곱 소년처럼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제일 좋아하는 향수가 무어냐고 묻고, 그녀가 때때로
비행기 안에서 면세로 사는 사분의 일 온스짜리 '미스 디오르'라고 대답하
자, 그는 당장 사람을 본드 스트리트로 보내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병의 '미스 디오르'를 구해 그날 밤으로 선물했다. 그녀는 천진하게 기
뻐하며 받았으나 그 크기에 대해 당장 이의를 제기했다.
"이건 지나친 낭비군요."
그는 난처했다.
"저는 어떤 특별한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꽤나 비쌌을 텐데요."
단정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이건 매우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다시는 저
를 위해 이런 식으로 물건을 사지 마세요. 낭비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말이 되자 샌더슨은 우스터셔의 전원 별장으로 전화를 걸어 풀장의 물을
따뜻하게 데우라고 지시하고, 토요일 내내 둘이서 수영을 즐겼다. 오월의
바람이 차가웠기 때문에 그는 풀장의 삼면을 바람막이용 유리로 둘러 수영
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탈의실에서 나타난 그녀의 하얀 타올지로 만든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샌더슨은 숨이 막혔다.
모든 면에서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그는 내심 다시 한 번 경탄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데이트는 그녀가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그
녀가 묵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세워놓은 롤스로이스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의 드레스 앞자
락을 따라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그녀는 그 손을 부
드럽지만 그러나 단호하게 떼서 그의 무릎으로 되돌려 보냈다. 샌더슨은 그
녀에게 남편을 떠나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프로포즈했다. 그의 태도가 진
지했기 때문에 그녀도 그 프로포즈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
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한때의 기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자동차 창 너머로 어두운 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알고 있어요, 마크.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말았어야 했어
요. 제가 좀 더 일찍 깨닫고 만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나를 사랑합니까? 조금이라도?"
"사랑을 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재빠르지 못해
요."
"하지만 앞으로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잖소?"
다시 한 번 그녀는 여자로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사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호감을 느낀 당신은 스스로가 이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당신도, 당신의 평
판이 만들어낸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의 냉소 밑에 숨겨
져 있는 진짜 당신은 보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게 제겐 아주 좋게 느
껴졌어요."
"그렇다면 남편을 떠나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저는 아치와 결혼했고, 그리고 그를 떠날 수 없어
요."
샌더슨은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스페인에 있을 낯모르는 사내에
대한 분노가 거세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 무언가를 그가 갖고 있는 거요?"
슬픈 듯한 미소가 그녀를 스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약한 남자입니다. 유능하지도 못하고..."
"왜 그를 떠나지 못하는 거요?"
"그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고 있는 거에요. 당신은 나 없
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아치는 그렇지 못해요. 그는 그럴 힘이 없답니다."
"안젤라, 단순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오. 사랑해요. 내 생애의 어떤 것보다
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열망하고, 바라는 거요."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잠시 침묵한 후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여자란 사랑받는 것 자체를 사랑해요. 열망받는 것을 열망하고 바람의 대
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
을 필요로 해요. 아치는 내가 필요해요. 마치 숨쉴 때의 공기처럼요."
샌더슨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당신은 남편 곁에 있을 거군요...'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
지.'"
그는 담배를 짓이겨 껐다.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머리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요. 미안해요, 마크. 그렇지만 이
길이 나의 길이에요. 우리가 훨씬 예전에 만났더라면, 그리고 내가 아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모든 게 달라졌겠지요. 그러나 나는 아치와 결
혼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다음날 그녀는 떠났다. 샌더슨은 자가용 운전사를 보내 발렌시아 항공을
탈 그녀를 공항까지 배웅했다.

사랑이 필요, 그리고 갈망과 욕망에는 매우 미묘한 차이와 단계가 있으
며, 그 어느 것이나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그러나
마크 샌더슨이 이 모든 것에 한꺼번에 사로잡혔다. 오월에서 유월로 접어들
자 그것들은 깊어가는 외로움과 함께 더욱 커져만 갔다. 이전의 샌더슨은
어떠한 일에도 방해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한 십년간을 그렇게 살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도덕적 결함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어떤 것을 원하면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세웠다 하면, 방법 구상, 계획 수립, 그리고 실행이라는
논리적이고 정확한 단계를 거쳐 마침내 반드시 획득하고 말았다. 유월 초
그는 안젤라 소머즈를 획득하기로 결정했다. 그 방법을 구상하는 과정에
서 계속 그의 뇌리를 맴돈 '기도서'의 한 구절이 있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그녀가 다른 종류의 여자, 다시 말해서 재산이나 권
력, 사치나 사회적 명성을 쫓아다니는 여자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터이니까. 그러
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여자라면 그토록 자신이 사로잡히지도 않았
을 것이다. 아무리 고심해도 생각은 돌고 돌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끝은 광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그 돌고 도는 사슬을
깨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임대 중개소에 전화를 걸어 마이클 존슨이란 이름으로 조그만 아파트
를 하나 빌리고, 한 달치의 집세와 그에 따르는 보증금을 현금으로 우송했
다. 그리고 새벽에 런던에 닿게 되니까 열쇠를 현관문 앞 깔개 밑에 넣어
놓으라고 부탁했다.
그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그는 런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합법적인
일이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전하는 사설 조사기관에 전화
를 걸었고 용건을 설명했다. 조사하려는 쪽의 익명을 요구한다는 말을 듣
자 그곳에서는 선금을 불렀고 그는 현금으로 5백 파운드를 속달로 보냈다.
일주일 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일이 완료되었으므로 잔금 250파운드
를 우송하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던 것은 삼일 뒤에 왔다. 봉투를 열어보
니 먼저 간단한 약력이 나왔다. 그는 대충 훓어 보았다. 수십 권밖에 팔지
못하고 오래 전에 절판이 된 지중해에 사는 새들의 생태에 대해 쓴 책에서
복사한 한 장의 인물 사진, 그리고 망원렌즈로 찍은 몇 장의 사진도 들어
있었다. 사진에는 칫솔 같은 수염을 단 빈약한 턱에 작고 좁은 어깨를 가
진 사나이가 찍혀 있었다. 아치볼드 크레이런스 소머즈 소령--'그는 소령이
란 타이틀을 지키고 싶어하겠군'하고 샌더슨이 차갑게 말한--은 본국을 떠
나 알리칸테와 발렌시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스페인의 알리칸테 주 해변에
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별장을 찍은
사진도 몇 장 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의 종이에 그 별장에 사는
부부의 생활 일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에 부부가 나란히 작은 앞뜰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콘덴사네 세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부인은
카스티요를 방문한다.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소령이 별장의 서재에
서 코스타 블랑카 지역의 새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할 동안 그의 아내는 해
안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즐긴다.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측근에게는 집에 있겠다고 알리고, 대신 자신
이 매일같이 회사에 전화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이제 외모를 바꿀 차례였
다.
이 일에는 '게이 뉴스'에 나오는 조그만 이발소 광고가 가장 쓸만 했다.
그는 긴 머리를 바짝 깎아 버리고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했
다. 이 작업은 모두 한 시간 남짓 걸렸는데, 이발사는 이 머리 모양이 2주
일 정도는 충분히 갈 거라고 떠벌렸다.
이발을 한 다음 샌더슨은 곧장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
갔다. 그리고 로비에 있는 짐꾼을 피해 엘리베이트를 이용해서 자신의 아
파트로 들어간 그는 전화로 근래의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기록 보관하는 런
던에서 제일가는 보관소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다. 그곳에는 조회만 전담
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으며 풍부한 신문, 잡지들이 훌륭하게 스크랩되어 있
었다. 삼일 후 그는 마이클 존슨이란 이름으로 그곳의 열람권을 끊었다.
그는 '용병'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료집부터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료집
은 다시 작은 자료집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마이크 호래', '존 피터즈',
'자크 슈마레', '로베르 드나르' 같은 용병 부대의 이름들로 표제를 삼고
있었다. 또다른 작은 자료집들은 카탕가,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로디자
아, 앙골라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조리 읽었다. 자료집의
내용은 뉴스 리포트, 잡지의 기사들, 촌평, 서평, 그리고 인터뷰 기사로 채
워져 있었다. 샌더슨은 책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일반 도
서관에 가서 찾아 읽었다. 예를 들면 안토니 모클러의 '용병의 역사', 마이
크 호래의 '콩고의 용병', 그리고 앙골라에서 사용되었던 '병기의 화력'
같은 것들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스크램의 잡동사니로부터 한 사내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
작했다. 그 사내는 세 번이나 실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
한 책의 저자들도 그에 대해서는 신중한 기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
뷰를 한 일이 없었고 따라서 문서철 속에도 그의 사진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인이었다. 샌더슨은 그가 런던의 어딘가에 살고있을 것이라는 가
정하에서 그를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몇 해 전 우량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를 인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샌더
슨은 소규모의 담배상회, 필름 현상소, 저작 대행 출판사를 함께 인수했었
다. 샌더슨은 쉽게 그 일을 생각해 냈다. 그가 도서관에서 읽은 용병에 대
한 회상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이었기 때문에, 샌
더슨은 용병 출신으로 책을 쓴 한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주 적
은 인세지만 분명히 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저자가 의심할 이유도 없었
고, 주소도 마찬가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샌더슨이 찾아갔을 때 사내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낡은 집에서 이미 오래
전에 한물 간 꼴을 하고 술과 추억에 잠겨 살고 있었다. 샌더슨은 용건이
자기 책을 다시 찍거나 인세에 관한 계약 건이 아니라는 걸 알자 그는 잔뜩
실망하는 눈치더니, 소개비라는 말이 나오자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존슨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샌더슨은 말했다. 전에 용병이었던 어떤 사람이
우리 출판사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내려는 의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었는
데 소재지를 몰라서 곤란을 받고 있다. 다른 회사에서 그러한 권리를 갖
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문제는 그의 주소....
옛 용병은 그 이름을 듣더니 그렁거리며 말했다.
"그 자가 이제 깨끗하게 털어놓는다 이거지. 놀라운 일인걸."
그는 여섯 병의 위스키를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는 헌 노트 뭉치
를 뒤적이더니, 종이 쪽지에 술집 이름을 휘갈겼다. 그리고 샌더슨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그 자식 시내에 나오면 늘 거기서 마시지요."
그날 저녁 샌더슨은 그곳을 찾아갔다. 얼스 코트 뒤에 있는 조용한 술집이
었다. 다음날 밤 그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사진은 본 적이 없지만 용병
기록에서 그에 대한 묘사를 읽은 적은 있었다. 턱에 있는 흉터와 바텐에
게 인사하는 소리로 미루어 그가 틀림없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넓은 어
깨, 적당한 체격이었다. 바의 뒤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샌더슨은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사내의 내리깐 눈과 침울한 입을 훔쳐 볼 수 있
었다. 샌더슨은 그날 밤 그곳에서 사백 야드쯤 떨어진 그의 아파트까지 따
라갔다.
거리에서 불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십 분쯤이 지난 후 그는 아
파트를 노크했다. 용병은 헐거운 검은 바지에 내의 차림이었다. 샌더슨은
용병이 실내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문을 여는 것에 주목했다. 복도의
조명은 방문자를 비추었다.
"휴즈씨지요?"
샌더슨이 물었다.
사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나는 마이클 존슨이라고 합니다."
휴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장을 보여주시오."
"그런 건 없소, 경찰 따위는 아니니까. 들어가도 좋소?"
샌더슨의 질문을 무시하고 휴즈가 물었다.
"여기 가면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누가 가르쳐 주었소?"
샌더슨은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대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사람 당신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더군. 하도 퍼마셔서
이제 자기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소."
휴즈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나타났다. 별로 기분내키는 웃음은 아니었
다.
"그래, 그 자식이었군."
그는 턱으로 실내를 가리켰다. 샌더슨은 그의 앞을 지나서 거실로 들어갔
다.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라한 가구가 드문드문 놓여있는 그런 거
실이었다. 마루 한가운데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뒤따라온 휴즈는 샌
더슨에게 거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샌더슨이 앉자 휴즈도 의자를 가져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아, 그런데?"
"일을 하나 해주시오. 청부지. '한 방 먹인다'고 부른 다지요."
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음악을 좋아하시오?"
갑자기 그가 물었다. 샌더슨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악을 좀 들읍시다. "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서더니 방 구석의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는 라
디오로 걸어가더니 라디오를 켜는 것과 동시에 베개 밑에 손을 넣어 콜트
45자동 권총을 꺼내서 샌더슨 쪽으로 돌아섰다. 샌더슨은 숨을 깊이 들이마
시고 침을 꿀꺽 삼켰다.
휴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올렸다. 용병은 총구 너
머로 계속 샌더슨을 응시하며 옆 서랍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거
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옷을 벗어.'
샌더슨은 속이 뒤틀려 올랐다. 이런 종류의 사내들이 지독하다는 것은 들
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휴즈가 총 끝으로 테이블에서 물러나라는 지시를
했으므로 그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샌더슨을 윗도리와 넥타이,
셔츠를 벗어 바닥에 놓았다. 조끼는 입고 있지 않았다. 다시 총 끝이 아래
를 가리켰다. 샌더슨은 지퍼를 내리고 바지가 흘러 내리도록 했다.
"좋아, 옷을 입지."
총구를 아래로 내렸지만 여전히 손에 쥔 채, 그는 방을 가로질러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상의를 이리 던지시지."
샌더슨은 바지와 셔츠를 다시 입고 상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휴즈
는 늘어진 옷을 아래 위로 흔들어 털어보았다.
"입으시오."
샌더슨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즈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자기 오른손 가까이에 권총을 내려놓고 프랑스제 시가를 피워물었
다.
"이게 모두 무슨 짓이오? 내가 무기를 가졌다고 생각했소?"
휴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도청기를 갖고 있었
다면, 마이크 줄로 당신 불알을 동여매서 소리를 녹음하려고, 당신을 고용
한 자에게 되돌려보낼 작정이었지."
"알겠소, 하지만 무기도, 도청기도 날 고용한 사람도 없소. 말하자면 내가
날 고용한 셈이지. 물론 다른 때라면 사람을 고용하는 편에 속하지만... 진
심으로 말하는 거요. 일을 하나 맡아주시오. 충분한 보수를 주겠소. 나 역
시 신중을 기하고 있는 일이오. 그렇게 해야만 하고."
"나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오."
휴즈가 입을 열었따.
"파크 허스트(영국 와이트 섬에 있는 기결수 형무소)에 가면 능력보다 입
이 더 발달한 청부 패거리들이 가득 차 있소."
"당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샌더슨은 침착하게 말했다. 휴즈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치켜올라갔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이 영국 땅에 살거나 이곳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
람이 아니오. 나 자신이 여기 살고 있거든.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소. 나는
외국인을 윈해요. 일도 외국에서 처리해야 될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사람의 이름이오.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한 사례는 이렇게 준비했소. "
샌더슨은 안주머니에서 20파운드짜리 빳빳한 지폐가 50장 묶여있는 돈뭉치
다발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휴즈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샌더슨
은 돈 다발을 조심스럽게 둘로 갈랐다. 그 한 쪽을 휴즈 쪽으로 밀어 놓고
나머지 반은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처음 5백 파운드는 착수금이오. 나머지는 일이 성공했을 때 지불할 거요.
내가 말한 '이름'의 의미는 그가 나를 만날 것부터 일에 동의할 것까지요.
걱정할 것 없소. 복잡한 일도 아니고 대상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오.
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인물이오."
휴즈는 앞에 놓인 5백파운드를 바라보았지만 집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 친구가 있긴 한데, 몇 년 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지요. 지금도 일을 하
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찾으러 가 봐야 해요."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소."
휴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국제전화는 좋아하지 않아요. 도청이 심하거든, 요즘은 유럽 쪽이 특히
심해요. 내가 직접 가서 찾아봐야겠는데, 그럴려면 2백 파운트 더 들거
요."
"좋소, 이름을 알아주는 조건으로."
"그런데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소?"
휴즈가 물었다.
"없소. 그러나 나도 마찬가지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들면 나를 뒤따라오면
되겠지만, 내가 7백 파운드나 들여서 당신을 속일 필요는 없지 않겠소?"
"물론 그것도 역시 알 수 없지. 그렇게 되면 사람 하나를 더 고용해서 그
걸 막아야겠지. 그럴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약 10초 동안 두 사나이는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샌더슨은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휴즈의 표정에 웃음이 돌아 왔다. 샌더
슨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했다. 그는 샌더슨이 갈라놓은 5백
파운드를 움켜잡았다.
"당신에게 이름을 알려주고 만나도록 해주겠소. 그 친구를 만나서 동의를
얻게 되면 나머지 반과 비용 2백 파운드를 우송해 주시오. 얼 스코트 우체
국 하그리브 송금환으로, 봉투에 잘 봉해서 보통 우편물로 보내시오. 등기
가 아니오. 당신이 일주일 안으로 송금을 하지 않으면 내 친구는 당신이 계
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약속을 파기할 거요."
샌도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 이름을 알게 되겠소?"
"일주일 안에, 당신과는 어떻게 접촉할 수 있소?"
"당신이 아니오. 내가 하겠소."
샌더슨이 말을 잘랐지만 휴즈는 개의치 않았다.
"아까 그 술집으로 전화하시오. 밤 열 시에."
일주일 후 샌더슨은 약속한 시간에 전화했다. 바텐더가 전화를 받더니 곧
휴즈가 나왔다.
"파리의 미올랭 거리에 있는 까페에 가면 당신이 친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요. 다음 주 월요일 정오에 그곳에 있으면 그 친구가 당신을 알아볼 거
요. 그 날짜'피가로'지를 제목이 바깥으로 가게 해서 읽고 있으면 될 거
요. 만약 당신이 월요일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친구는 화요일과 수요일 정
오까지는 거기에 갈 거요. 그뒤에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거요. 그리고
현찰을 가지고 갈것."
"얼마나?"
샌더슨이 물었다.
"5천 파운드쯤. 잘 간수해야 할 거요."
"그게 강탈하려는 짓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알 수 없지. 하지만 그 친구도 역시 카페 어디에다 보디가드를 숨겨 놓았
는지 알 수 없을 거요."
찰칵 하고 끊어진 수화기는 윙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그는 미올랭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 '
피가로'지의 뒤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12시 5분이 되자 앞자리 의자가 당겨
지며 한 사나이가 앉았다. 그는 아까부터 바 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
나였다.
"존슨 선생?"
샌더슨은 신문을 내렸다. 그리고 접어서 옆에 놓았다. 사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검은 눈과 머리카락에 턱이 갸름하고 뾰죽한 코르시
카 인이었다. 이야기는 삼십 분쯤 걸렸다. 코르시카 인은 자신을 칼비라고
소개했지만, 실은 그것은 그가 태어난 고향의 지명이었다. 20분이 지났을
때 두장의 사진이 칼비에게로 넘어갔다. 한 장은 한 남자의 인물사진이었
는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아치 소머즈 소령, 알리칸
테, 온다라, 플라야 칼데라, 산 크리스핀 별장.' 다른 한 장은 카나리아 노
랑색의 덧문이 달린 하얀 색의 작은 별장 사진이었다. 크르시카 인은 천
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해치워야 합니다."
코르시카 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없어요."
그로부터 10분 동안 두 사람은 돈 문제를 이야기했다. 외국에서의 일은 비
용이 많이 들고 특히 스페인 경찰은 어떤 종류의 여행자에게는 극도로 까
다롭다고 코르시카 인은 말했다. 10분 뒤 마침내 샌더슨은 다섯 개의 5백
파운드 뭉치를 상대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섰
다.
"얼마나 걸리겠소."
코르시카 인은 그를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일주일이나 이 주일, 삼 주 정도 걸릴지도 모르지요."
"일이 끝나는 시간을 알고 싶소. 이해할 수 있겠소?"
"그럴려면 당신과 접촉할 수 있는 어떤 통로를 열어놓아야 할 거요."
총잡이가 대답했다. 영국인은 종이에다 전화번호를 갈겨썼다.
"지금부터 3주 동안 런던의 이 전화번호로 통화할 수 있을 거요. 아침 일
곱시 반부터 여덟 시 사이에, 번호를 추적할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하지 말
고 그리고 일은 실수 없도록 하시오."
코르시카 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실패하지 않을 거요. 나머지 돈을 받아야하니까."
"마지막으로."
의뢰인이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쪽에 협의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 돼요. 반드시
그 근처 강도가 저지른 일처럼 보여야 한단 말이오."
코르시카 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도 물론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존슨
선생, 이쪽엔 목숨이 걸려 있단 말이오. 목숨이 아니라도 적어도 토레도
형무소에서 최소한 30년은 썩어야 할 거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거요.
당신한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거란 말이오."

영국인이 떠난 후 칼비는 카페를 나와 미행 여부를 살핀 뒤 파리 중심가의
다른 카페로 갔다. 그는 7월 초 싱싱한 햇살 아래 앉아 새로운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얼간이 하나를 저격하는 일 자체
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안전하게 총을 스페인으로 가지고 들어가
는 방법이었다. 총을 지닌 채 기차를 타고 타리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직행으
로 달려가 세관의 검사와 부딪혀 보는 방법이 우선 생각났다. 그러나 만일
발각되어 잡히게 된다면, 잡는 쪽이 프랑스 경찰이 아니라 스페인 경찰이
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경찰은 전통적으로 직업적인 총잡이들한테
아주 가혹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만약 잡힌다면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
다. 비행기는 고려할 필요 조차 없었다. 국제 테러리스트 덕분에 올리 공
항에서 출발하는 모든 비행기는 모두 철저하고 정밀하게 총기의 유무를 검
사받고 있었다. 옛날 OAS시절의 동료 중에서 프랑스로 귀국하는 위험을 피
해 알리칸테와 발렌시아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 눌러앉은 친구들과는 아직
연락이 가능했었다. 그들과 접촉해서 총을 빌릴 수는 있겠지만 그 방법은
피하기로 했다. 그들과 접촉하는 일은 입에 오르내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이
었다.
마침내 코르시카 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쇼핑을 하러 갔다. 그
는 스페인 여행사 사무실에서 문의를 위해 30분을 쓰고 다시 이베리아 항
공 사무실에서 10분을 지체했다. 그리고 리볼리 거리에 있는 서점과 문구
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교외에 있는 그의 싸구려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발렌시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메트로폴 호텔에 전화를 걸
었다. 하나는 칼비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자신의 여권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으로 두 개의 싱글 룸을 예약했다. 전화로 자신을 칼비라고 소개하고
2주일 후 하루 저녁을 묵기로 했다. 그는 또 호텔 측의 요구대로 예약을 확
인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호텔을 예약한 밤에 발렌시아에
도착하여 다음날 밤 파리로 돌아오는 파리-발렌시아 왕복 비행기 표를 예
매했다.
발렌시아로의 국제통화 연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미 그는 호텔에 보내는
예약 확인 편지를 써 놓았었다. 칼비의 사인을 서명한 후, 서명자인 칼비는
발렌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곳을 두루 여행할 예정이며 파리에서 스페
인의 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호텔로 우송하도록 지시하였으니 호텔에서
는 그 책을 받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보관해 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
다.
만일 그 책이 의심받아 개봉되었다면,호텔에서 여권 이름으로 그 책을 요
구하는 순간 프론트 데스크의 표정 변화가 있을 것이고 자신은 곧장 사태를
파악하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해 둔 것이다. 만약 체포된다 하
더라도 자기는 단지 친구 칼비의 부탁으로 그 책을 찾으려 했을 뿐이지 그
비밀스런 내막을 전혀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왼손으로 칼비라고 서명한 편지를 봉하고 우표를 붙였다. 그리고 그 날 오
후에 산 책을 가공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진짜 스페인 역사책이었
다. 고급 종이에 쓴 비싸고 커다란 책으로서 사진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상당한 무게가 나갔다.
우선 단단한 표지를 책 등쪽으로 구부려 고무 밴드로 묶고 4백 페이지에
알맹이를 식탁의 가장자리에 맞추어 놓고 두 개의 목공용 조이개로 단단히
고정 했다. 총잡이는 그날 오후에 구입한 얇고 예리한 외과용 메스를 들
고 이 종이 덩어리에다 작업을 시작하였다. 한 시간에 걸쳐서 책 가장자리
에서 1인치 반 안쪽의 종이를 잘라내자 가로 6인치, 세로 7인치, 깊이 3인
치의 상자 같은 구멍이 파졌다. 파낸 구멍 안쪽에는 진득진득한 아교가 두
껍게 발라졌다. 아교가 마를 동안 그는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접착제가
굳어버리자 4백 페이지의 종이 덩어리는 다시 펼쳐질 수 없게 되었다.
잘라져서 부엌의 저울에 올라가 있는 1.5파운드의 종이 대신 그 크게에 맞
게 잘라낸 고무 쿠션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는 두 달 전 벨기에
여행때 구입한 브로닝 8밀리 자동 권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용한
콜트 38을 알베르 운하에 버리고 새로 산 것이다. 그는 조심성이 많아서
같은 총을 두 번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브로닝의 총신 끝은 반 인치 정도
되는 소음기를 부착시킬 수 있도록 세공되어 있었다.
자동권총의 소음기라는 것은 소리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다. 텔레비젼 스릴
러에 나오는 소음기는 음향효과 담당자의 조작으로 그렇게 작은 소리를 내
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총은 탄환이 총구를 떠날 때 탄피는
뒤로 밀려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새로운 탄환이 장전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동 권총이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 사용된 탄피가 뒤로 튕겨 나오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총구에 붙은
소음기로는 전체 발사음의 50밖에 죽이지 못한다. 칼비는 뒤가 막힌 리볼
버를 쓰고 싶었으나 책의 파낸 부분에 맞추기 위해 할 수 없이 납작한 쪽을
택한 것이다.
부로닝 부분품 곁에 놓인 소음기는 그 부품들 중 가장 길었다. 전문가인
그는 텔레비젼에 자주 등장하는 샴페일 꼭지 코르크만한 소음기로 소리를
죽이려는 짓은, 마치 휴대용 소화기로 베수비오 화산의 불을 끄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전혀 효과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품 고무 쿠션 위에 소음기와 탄창을 포함한 무기의 다섯 부분이 나란히
놓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탄창을 총 자루
옆 남은 공간에 겨우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각 부분의 형상을 모전 펜으
로 쿠션 위에다 그렸다. 그리고 새 외과용 메스로 그러진 선을 따라 거품
고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밤중이 돼서야 총의 각 부분들은 고무 거품 쿠
션 침대에 평화롭게 누울 수 있었다. 긴 소음기는 책 길이대로 수직으로 누
웠고, 총신과 손잡이 그리고 노리쇠 등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수평으
로 누웠다.
그는 그들 위에 얇은 거품 고무판을 덮었다. 그리고 책 앞뒤 표지에 아교
를 잔뜩 바른 다음 덮어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책을 부엌 바닥에 놓고 식
탁을 들어 꺼꾸로 눌러놓았다. 한 시간 후 책은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칼을
사용하지 않고는 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책을 다시 저울에 달아보았다.
원래 보다 꼭 반 온스가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그는 출판업자들이 고가본이 더렵혀지거나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튼튼한 폴리틴 봉투에 스페인 역사책을 넣었다. 모든 것이
적당했다. 스위치 나이프의 칼날을 가스렌지로 달구어 봉투를 봉했다. 그
는 우송 봉투가 개봉되는 상황을 맞더라도 이 투명한 폴리틴 커버를 통해
보이는 내용을 보고 그냥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책을
서적 우송에 사용되는 대형 봉투에 넣고 클립으로 봉투를 봉했다. 봉투가
접힌 곳에 뚫린 구멍에다 클립을 끼워서 봉했기 때문에 그 구멍을 통해 나
와 있는 연한 금속 클립을 살짝 구부리기만 해도 내용물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가정용 프린트기를 사용해 유명 서점의 라벨을 만들어 붙였
다. 라벨에는 수신인의 성명과 주소를 타이프라이터로 찍어 넣었다.
' 알프레드 칼비 씨, 메트로폴 호텔, 칼레 드 자티바, 발렌시아, 스페인'
다시 그는 프린트 세트로 스템프를 만들어 소포에다 찍었다.
'LIBROS - IMPRESOS-LIVERS.' (서적-인쇄물-서적)
다음 날 아침 편지는 항공 우편으로, 소포는 육상 우편으로 부쳐졌다. 기
차로 가는 것은 열흘 늦다.

이베리아 항공의 칼라벨 여객기는 나니세스 캠프로 진입해서 해가 지듯 활
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낮의 더위가 식지 않아 찌는 듯이 더웠다. 6주
간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파리에서 온 별장 소유자들이 대부분 30여 명의
승객들은, 세관창고에서 늘상 그렇듯이 늦어지는 수화물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칼비는 손가방으로 중형 슈트 케이스 하나만 들고 왔을 뿐이다.
가방을 열어야 하는 신중한 검사가 끝나자 그는 공항 건물을 빠져나와 서
늘한 대기 속으로 걸어 나왔다. 우선 그는 공항 주차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주차장 대부분이 큰 나무들로 인해 공항 건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만족했다. 차들은 나무 그늘 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이곳에 와서 차를 마련하기로 마음먹고 그는 택시를 타
고 시내로 들어갔다.
호텔 종업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협조적이었다. 프론트의 종업원은 코르시
카인이 자신을 밝히고 여권을 제출하자, 즉시 칼비 씨가 보낸 예약 확인 편
지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안쪽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소포를 가지고 나왔
다. 코르시카 인은 친구인 칼비 씨는 운이 나빠서 같이 올 수 없게 되었
으나, 예약한 방 요금은 내일 아침 출발 때 전액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
리고 자신에게 책을 대신 주라고 쓴 칼비의 편지를 꺼내주었다. 프론트 종
업원은 그 편지를 한번 흝어 보고, 두 방의 요금을 모두 지불해 주신다는
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소포를 건네주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 칼비는 소포를 검사해 보았다. 누군가가 열어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금속 클립을 폈다가 다시 접은 흔적이 있었다. 클립 한 귀
퉁이를 붙혀 놓았던 접착제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봉투 안의
폴리틴 커버에는 손 댄 흔적이 없었다. 폴리틴 봉투는 찢지 않는 한 열어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커버를 찢고 칼로 표지를 벗긴 후에 총의 부분품들을 꺼냈다. 총을
조립한 뒤 소음기를 끼우고 탄창 속의 탄환을 점검했다. 모두가 좋았다.
특별히 그가 만든 이 탄환은 작약을 반만 넣었기 때문에 폭발할 때 소리를
줄여줄 것이었다. 폭발력이 반만 돼도 9밀리 탄환은 10피트 거리 안에 있
는 인간의 머리는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칼비는 10피트 이상의 거
리에서는 쏘지 않았다.
그는 옷장 바닥에 권총을 숨기고 옷장 문을 잠근 다음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물고 호텔 앞에 있는 투우장을 바라
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홉 시가 되자 그
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파리의
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것이다)그런 유서깊은 고급 호텔과 잘 어울리는 복장
이었다. 그는 '테레사텔 리알토'에서 저녁을 먹었고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프론트 계원을 통해 다음 날 아침 여덟
시에 마드리드 행 비행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여섯 시에 깨워달라고 부
탁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에 그는 숙박비를 계산하고 호텔을 나와 택시로 공항
을 향해 떠났다. 잠시 후 그는 공항 건물 앞의 주차장 문 옆에 서서 들어
오는 자가용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는 차종과 번호뿐만 아니라 운전자
의 모습도 눈여셔 보았다. 그 중 일곱 대가 비지니스맨 복장의 운전사가 동
행없이 물고 온 차였다. 잠시 후 그는 공항 빌딩의 테라스에서 마드리드 행
비행기를 타러 나가는 승객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주차장에서 눈여겨 본 네 명의 운전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봉투 뒷면에 적힌 것을 보았다. 차는 심카, 메르세데스, 쟈카,
그리고 피아트 600을 스페인 식으로 개조 생산한 작은 스페인 세아트였
다.
마드리드 행 비행기가 떠난 뒤 그는 화장실로 가서 양복을 벗고 크림색 진
과 하늘색 스포츠 셔츠, 그리고 앞에 프른 색 지퍼가 달린 나일론 윈드 브
레이크를 입었다. 총을 타올로 싸서 슈트 케이스에서 꺼낸 부드러운 항공회
사 백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슈트 케이스를 수화물 예치소에 맡기고 파
리행 저녁 비행기를 확인한 다음 주차장으로 되돌아깄다. 그는 세아트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차는 스페인에서 제일 흔했고, 더구나 자동차 도둑
에게는 아주 적합한 부드러운 문 손잡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회
를 노리는 동안 자동차 두 대가 더 들어왔다. 두 운전자가 사라지기를 기다
려 그는 작은 빨간 딱정벌레 차로 다가갔다. 그는 소매애서 쇠파이프를 꺼
내 문 손잡이의 틈새에 꽂은 다음 힘껏 아래로 눌렀다.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차에 탄 다음 그는 안쪽의 후드를 열어 배터리의 +단자와
모터의 단자를 전선으로 연결했다. 단 한 번의 작동으로 차는 출발했다.
그는 주차장을 나와 발렌시아로 뻗어 있는 도로로 차를 몰았다. 마침내 차
는 알리칸테로 나있는 332번 새 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발렌시아에서 온다라까지는 92기로, 마일로는 55마일쯤 되었다. 간디아와
올리바에 걸쳐 있는 오렌지 재배 단지 사이를 지나 그는 두 시간 가량을 느
긋하게 운전했다. 아침 햇살 아래 따분하게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다. 리본
같이 길게 뻗은 황금색 모래밭에는 갈색 피부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
점이 흩어져 있었다. 공기는 뜨거웠고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수평선 위로
안개 같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온다라로 들어온 그는 팔메라 호텔을 지났다. 그는 그곳에서 한때 OSA의
리더였던 라울 살랑 장국의 부관이 추억과 더불어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시내 중심가에서 친절한 사람의 도움으로 플라야
칼데라 마을로 가는 길을 쉽게 알아냈다. 시내에서 2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었다. 주로 망명자들이 살고 있다는 그 별장지로 차를 몰고 들어간 것
은 정오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그는 오래 전에 찢어버린 사진 속에 있는
산 크리스핀 별장을 머릿속에서 그려내고는 근처를 맴돌았다. 해변으로 가
는 길을 묻는 것은 변 문제가 없겠지만 별장의 위치를 묻는 것은 기억에
남을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란 덧문과 하얀 칠을 한 테라코타 벽의 별장을 찾아낸 것은 오후
한시가 되기 약간 전이었다. 정문 옆 기둥에 붙어 있는 타일 문패에 페인트
로 쓰인 이름을 확인하자, 200야드 가량 지나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백을
어깨에 메고 해안으로 향하는 관광객인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집 뒤쪽을 살
폈다. 쉬운 일이었다. 별장 옆의 작은 오솔길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흙길
로 이어져 집들이 늘어서 있는 언덕 뒤쪽의 오렌지 농장을 향해 뻗어 있었
다.
오렌지 나무 뒤에서 그는 과수원의 붉은 흙과 노란색 덧문 별장의 정원에
세워져 있는 낮은 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남자가 정원에 물을 주
고 있었다. 별장 뒤쪽 정원에는 앞의 현관을 향해 나있는 프랑스식 문이 한
점의 바람이라도 더 받아들이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
다.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온다라로 되돌아 갔다.
그는 칼레 닥터 플레밍에 있는 '바 발렌시아'에서 식사를 했다. 그는 세
시까지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커다란 보리새우 구이를 들고 그 지방 특유의
약한 백포도주 두 잔을 마셨다. 세 시에 그는 계산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플라야 마을을 향해 차를 몰고 있을 때, 먼 바다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더
니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위로 천둥 소리가 울렸다. 7월 중순의 코스타 블
랑카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오렌지 과수원으로 통하는 작은 길
옆에 자동차를 바짝 붙여 세웠다. 소음기를 장치한 브로닝 권총을 허리 벨
트에 끼우고 윈드 브레이크 지퍼를 목까지 채운 다음 그는 과수원 숲으로
들어갔다. 숲 저쪽으로 다시 나왔을 때 사방을 몹시 조용했다. 그 지방 사
람들은 더위 때문에 시에스터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낮은 울타리를
넘어 별장 뒤뜰로 들어갔다. 오렌지 나뭇잎에 비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프랑스 식 문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소나기가 지붕의 핑크색 타일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빙그레 웃었다. 이런 빗소리 속에서는
웬만한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실 왼편에 있는 방으로부터 타
자기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그는 거실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총을 뽑아들
고 안전장치를 발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등심초로 만든 깔개를 밟고 열려
있는 서재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소머즈 소령은 무엇이 왜 일어났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는 낯선 사내
가 서재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를 묻기 위해 반쯤 일
어섰고, 그 남자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역시 반쯤 입을 벌렸다.
부드럽고 짧은 소리가 두 번 났고 곧이어 빗소리 속으로 사랒져갔다. 두
발은 모두 소령의 가슴에 박혔다. 세 번째 총알은 2피트 거리에서 수직으로
날아가 관자놀이에 명중했지만, 그는 이미 그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쭈그
리고 앉은 자세로 그는 거실 문 쪽으로 빙그르르 얼굴을 돌렸다...

다음날 밤 두 사람은 미롤랭 거리에 있는 바에서 살인자와 의뢰인으로 만
났다. 칼비가 전날 밤 발렌시아에서 파리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영국인에
게 연락을 한 것이다.
샌더슨은 당장 파리로 달려왔다. 의뢰인은 초조한 모습으로 잔금 2천 5백
파운드를 건네주었다.
"아무 문제 없었겠지요?"
그가 다시 묻자 코르시카 인은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간단했소, 그 소령은 죽었어요. 두 방은 심장에, 그리고 한 방은 머
리를 뚫었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겠지요?"
영국인은 다시 물었다.
"어떤 목격자도?"
"없어요."
코르시카 인은 돈뭉치를 안주머니에다 툭툭 밀어 넣고 일어섰다.
"하긴 마지막에 방해받을 뻔한 일이 있기는 했지요. 비가 몹시 퍼붓는 바
람에 몰랐지만 누군가가 들어와서 내가 시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말았지
요."
영국인은 공포로 사로잡혀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어떤 여자였소."
"키가 크고 갈색 머리의?"
"그래요, 아주 미인이었소."
살인자는 의뢰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경악에 찬 표정을 내려다보고는 툭하
고 그의 어깨를 쳤다.
"걱정할 것 없어요, 선생."
그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거요, 그 여자도 역시 쏘아버렸으니까."


- THE END -



양손으로 목을

by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아내는 말했다. "양손으로 내 목을 졸라주세요. 참 우습잖아요? 당신처럼
몸집이 크고 스포츠맨 같은 사람이 말예요, 이렇게 손이 쬐그맣다니. 손가
락을 꼭 붙여서 졸라보세요. 내가 아플까봐 염려하진 말고요. 당신이 제대
로 할 수 있는지 어떤지 보고 싶어요."
티모테오는 거실에서 나와 바다로 면한 테라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기대었다. 짚으로 이은 지붕을 깎아낸 두 개의 소나무기둥으로 받쳐놓았는
데, 기둥의 군데군데에는 나무껍질이 그대로 붙어 있다. 기둥은 거의 아내
의 목만한 굵기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는 그 한 개의 기둥을 양손으로
잡아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난간에 양손을 짚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뻗어 있는 검은 비구름이 한쪽만 들어올린 장막처럼 해면에 걸려
있고, 바다는 여기저기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녹색과 짙은 보라빛이 섞인
물빛을 번뜩이며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거품은 모습을 보이더니 어느새 바
람에 밀려 수면을 달려가 또 다시 말려들어가서 사라졌다. 이제 곧 폭풍우
가 오겠다고 티모테오는 생각했다. 비가 내리기 전에 시체를 치워야 했다.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목이나 다리에 무거운 것을 매달아서 바닷물
속에 시체를 던져버리는 일은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구덩이를 파는 수밖에 없다. 아무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비
가 오는 가운데 구덩이를 파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고 마음이 편할 리도
없다. 구덩이는 금방 물이 가득 찰 것이고 젖은 모래의 벽은 무너져내릴 것
이다. 게다가 빗물이 그의 얼굴을 때릴 것이다. 험악한 얼굴을.
자꾸만 어두워져가는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번에야말로 손가락을 가
지런히 해서 양손으로 기둥을 꽉 잡아보려고 다시 한번 시도해봤다. 그런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적어도 1센티는 떨어져 있었다. 티모테오는 거실로
돌아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렌지 앞에 서 있었는데 키가 크고 상큼하지 못한 자세 였으며 목은
원추형으로 되어 있어 위쪽보다는 아래쪽이 더 굵다. 짙은 머리카락이 지저
분하고 빽빽하게 큰 부분으로 덮여있는 아래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티모테오는 그 목을 바라보았다. 튼튼하고 크고 근육과 뼈대가 우람하며 앞
쪽에는 종양이라도 생겨 있는지 결후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름 아니라, 표
정이 있기에 보기 싫지는 않다. 그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표정인가. 맹
목적, 본능적이고,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며, 살아가려는 의욕이다.
아내의 네글리제는 주름이 많은 베일로 된 것이었는데 뒤쪽을 터질 듯 풍
만한 엉덩이 부분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곧장 부ㄳ으로 왔기 때
문에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나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티모테오는 엄지손가
락과 인지를 뻗어 핀셋처럼 해서 몸에 닿지 않게끔 조심스레 네글리제를 집
어들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테이블 위에서
섹스를 하자고 요구했을 적에 당신이 만족시켜 주었다는 말이지. 그래, 어
떤 식으로 했는지 보여주지 않겠나."
아내는 항의했다. "몇 년이나 전에 일어난 일이라구요, 당신을 알기 전에.
지금 당신은 망상에 사로잡힌 것 같아요."
티모테오는 끈질기게 말했다. "자, 보여달라니까."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움추렸다. 렌지가 있는 곳에서 떨어지더니
테이블 쪽으로 돌아가 몸을 직각으로 구부리고 배와 유방과 왼쪽 뺨을 대리
석의 면에 밀어붙인다. 다음에는 그 손을 뒤로 가져가서 슈미즈를 끌어올려
하얗고 길쭉한 타원형의 엉덩이를 내놓는다. 그런 자세를 취하자 엉덩이 아
래 갈색의 음모로 해서 거무스럽게 보이는 허벅지 사이의 갈라진 틈이 들여
다 보인다. 다리는 길고 매끈매끈하며 소년의 다리처럼 야위여 있다. 테이
블에 엎드려서 양손은 각각 벌려 귀곁에 둔 채 눈을 뜨고 있는 것으로 봐서
는 대기하고 있는 듯하다. 티모테오가 말했다.
"개구리 같구나. 그러니까 당신이 이렇게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동안에 그
가 목을 죄고 올라타서 그대로 했단 말이지."
아내는 대답을 했다. "그래요, 나를 이런 식으로 해두고 싶어했죠 마치 편
집광처럼, 당신하고 마찬가지였죠." 라고 지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참 있
다가 덧붙였다. "그럼, 당신이 섹스하고 싶지 않다면 이 대리석에 엎드리는
건 힘드니까 난 일어나겠어요." 티모테오는 화를 내며 "일어나지 그래."라
고 대답했다. 그녀는 먼저 네글리제를 다소곳하게 넓적다리 있는 데까지 내
리고 다음에는 머리를 흔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다듬고는 일어났다.
티모테오가 다시 그녀를 보니 렌지 앞에 서서 커피물이 끊기를 지켜보고 있
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 목이 원추형이며 앞부분이 가볍게 부풀어 있는 것
을 확인했다. 남자라면 누가 양손을 휘감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아름답고
젊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목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손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아내가 말했다. "커피 준비가 되었어요. 비스켓을 먹지요. 그보다도 토스
트를 만들어 드릴까요?" 티모테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스켓으로 하겠어.
그런데 삽은 어디에 있는지 일러주지 않겠나. 자루를 녹색으로 칠한 것 말
야." 아내는 청소도구를 놓아두는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티모테오는 삽을
가지고 뜰로 나갔다.
부ㄳ 앞은 시멘트를 바른 빈터로 되어 있어서 부서진 상자, 빈 병 빈 깡통
들이 흩어져 있었다. 빈터 옆은 큰 화단이었는데 티모테오는 그곳에 삐토스
포르를 심을 작정이었다. 그 너머에는 사구의 벼랑이 솟아 있었다. 화단은
햇볕으로 말마암아 흙은 모래가 섞인 ㄳ빛으로, 무척 부슬부슬해서 마치 먼
지 같았다.
시체는 거기에 있었다. 밤중에 옮겨 놓은 것인데 위를 보고 다리와 팔은
벌린 채 머리는 뒤로 젖히고 있었다. 밤에는 삽을 찾지 못했기에 사용하지
못하고 손으로 진흙을 모아 한 주먹씩 시체 위에 뿌렸다. 흙으로 덮는다기
보다 입혀주려는 듯이.
그리고 사실 흙을 덮고 나서 제대로 고르지 못해서 얼굴은 덮여 있었으나,
목은 그의 손가락으로 제대로 죌 수 없었던 가벼운 돌기부분이 바깥으로 나
와 있었다. 가슴도 또한 묘한 브래지어 같은 느낌이 드는 흙 사이로 삐어져
나와 있었다. 하복부는 흙을 듬뿍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배는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다.티모테오는 삽자루를 쥐고 앞쪽 끄트머리로 구덩이의 윤곽을 땅
바닥에 그렸다. 지금은 그 윤곽의 안쪽을 반 미터 깊이까지 파지 않으면
안 된다. 티모테오는 힘껏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부엌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당신은 가끔 정말로 미친
것 같아요. 어젯밤의 일만 해도 그래요, 먼저 지로라모하고 내가 테이블 위
에서 어떤 식으로 섹스를 했는지 알고 싶어서 고문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지
요,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식으로 목을 죄었는가 하고, 그리고 정말로 미
친 듯이 권총을 손에 들고 아래로 달려내려가서 어떻게 했어요, 쓰레기 더
미를 뒤지기 시작한 그 가엾은 들개를 쏘았어요. 그야 괜찮아요. 인가가 있
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집인 걸요,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면 어쩔 뻔했지
요. 자, 구덩이를 파는 건 그만둬요, 묻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요, 안으
로 들어와서 커피를 드세요." 티모테오는 대답했다. "폭풍우가 닥치기 전에
구덩이를 파버렸으면 해."
부ㄳ은 어두웠으며 아내는 생각에 잠겨 테이블 쪽에 시선을 주고 앉아 있
었다. 티모테오는 초조해서 물어봤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말해주지
않겠나." "당신이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뛰어나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권총을 손에 든 그 순간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뭘 하고 있었지?" "지로라모가 했던 것처럼 목을 죄어 달라고 말했
어요. 그런데 문득 당신 손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내 목을 손가
락으로 아주 감쌀 수 있었거든요. 나는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냥 그냥 농담이었죠. 그런데도 당신은..."
"내가?" "뭔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구요.... 이번엔 부탁이에요, 일어나
서 내목에 양손을 감아보세요. 하지만 내가 당신의 눈을 바라볼 수 있겠끔
해줘요. 당신 눈길이 간밤의 것하고 마찬가지인지 어떤지 보고 싶어요."
티모테오는,"당신은 여전히 목을 죄어주었으면 하는 편집광적인 데가 있단
말야."라고 말하면서 그 말대로 했다. 일어나서 아내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목에 양손을 감았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혀서 상대의 눈을 봤다. "아냐,
그때의 그처럼 무서운 눈길이 아니잖아요...."하며 중단시키더니 티모테오
의 한 손을 목에서 걷어내고 뜨겁게 키스를 했다. ".... 그리고 그처럼 맑
았었는데!"
티모테오는 시체의 왼손과 왼발을 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무척 무
거웠으나 그래도 움직였다. 움직이니까 덮여 있던 흙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
럼 흔들렸다. 몸 가운데서 튀어나온 부분은 이미 절반쯤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젠 아주 드러나게 되었다. 그 흙은 땅이 꺼진 것처럼 무너져내렸다. 티모
테오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시체는 구덩이로 미끄러져 떨어져서 옆으로
쓰러져있던 머리를 한 쪽으로 구부리고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반쯤 덮였으며
팔과 다리는 구부러져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티모테오는 다시 삽을 손에 쥐고 먼저 다리에 그러고 나서 차츰 머리 쪽으
로 흙을 구덩이에 던져넣기 시작했다. 지금은 옆으로 향해서 귀에서 가슴
부근까지 보이고 있는 머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노출시켜 두고 싶었다. 그것
은 그녀의 신체 가운데서도 그 오만하고 동물적인 힘과 근육과 뼈의 우람스
러움 때문에 그의 마음을 끌었던 부분이었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자, 그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각에 잠겨 있지
말아요. 뭘 생각하시는 거예요. 개에 관해선가요? 가엾긴 하지만, 우리도
밤에 쓰레기통을 바깥에 내놓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잖아요, 이 해변에는
주인이 바캉스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갈 적에 버리고 간 개가 우글거리고 있
다구요. 자, 커피를 마시고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해변으로 산책이나 나
가요. 해변을 거니는 건 참 멋져요, 특히 모래 위를 비를 맞으면서."
지금 구덩이는 흙으로 가득 메워졌다. 부드럽고 거무스름한 흙으로 평평한
지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데다가 빛깔도 달라서 눈에 띄는 무덤을 형성하고
있었다. 티모테오는 주저하다가 쌓아오린 흙위로 올라가서 흙이 평평하게
될 때까지 정성들여 밟아다졌다. 그리고 삽으로 가득 잿빛의 흙을 떠서 구
덩이 위에 조심스레 뿌려, 파서 뒤집은 흙의 어두운 빛깔을 감췄다.
아내는 "가요."라고 말했다. 티모테오가 물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 입으
러 가지 않나? 아직도 네글리제를 입고 있잖아." 대뜸 그녀는 어깨를 움추
렸다. "이걸 입었다는 건가요? 슈미즈도 옷인걸요." 티모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서서, 계단 쪽으로 향했는데 그 길은
수풀을 지나 사구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평평하게 다지고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구덩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황색
과 갈색의 보기 흉한 들개가 사구 쪽으로 갑자기 나타나 곧장 구덩이로 향
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이윽고 앞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서 티모테
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 이렇게 해놓으면 안심이다. 구덩이는 눈에 띄
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기색도 '느낄' 수가 없다.
아내는 바다를 따라 널려 있는 아직도 건조한 잿빛 모래 위를 앞장서서 걸
어갔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서 모래에 작은 구멍을 열기 시작하더니 차
츰 빗발이 거세어졌다. 이윽고 유리처럼 번뜩이고 소란스러워진 해면을 거
대한 쇠공처럼 우뢰가 굴러갔다. 바야흐로 차갑고 거센 바람에 부추겨진 비
가 질풍처럼 아내를 덮쳤다. 비를 맞은 자리는 네글리제의 베일이 몸에 달
라붙어 창백한 살갗이 비쳐 보였다. 아내는 머리를 어깨 쪽으로 기울여 머
리의 한쪽이 모두 보였다.
아내는 말했다. "양손으로 내 목을 졸라주세요. 참 우습잖아요? 당신처럼
몸집이 크고 스포츠맨 같은 사람이 말예요, 이렇게 손이 쬐그맣다니. 손가
락을 꼭 붙여서 졸라보세요. 내가 아플까봐 염려하진 말고요. 당신이 제대
로 할 수 있는지 어떤지 보고 싶어요."

- The End -






좋은 죽음이 되시기를! (원제:Have A Nice Death)

by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Fraser)


뉴욕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새미 루크에게 특별히 친절했다.
예를 들어 새미가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그 따뜻한 영
접에 새미는 아주 감동을 받았다. 새미는 생각했다. 자라가 얼마나 안심을
할까! 자라(새미의 아내)는 유난히 새미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었
다. 하지만 그것도 그럴 만하다고 새미는 수긍했다. 최소한 과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에서 새미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고,
극도로 긴장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새미는 자라의 여자 친구들
이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실제보다 더 심각한 병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여간 자라가 나서서 매끈하게 처리해 주지 않는 한, 새미가
관계하는 모든 일들이 제대로 되는 게 없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영국에서의 일이었다. 새미는 미국에서는 신경과민이 되지 않을 자신
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미국이라는 신세계에서 치료를 받으면, 다시
는 신경과민이 되는 일이 없을지도 몰라!
예를 들어 공항의 출입국관리소 관리들을 보라, 그들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그들을 그냥 고릴라라고 생각하면 돼요."
여러 번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던 자라의 부자 친구 테스는 아주 음울한
목소리로 '고릴라'라는 말을 발음했었다. 새미도 비행기에서 내려 출입국관
리소에 도착하는 순간, 기관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건장한 사나이들
을 보았다. 그때만 해도 새미는 영국에서의 그 신경과민 상태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새미를 부른 입국관리소 관리는 보호판이
쳐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아주 빈약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보호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새미 자신보다
도 더 빈약한 몸집이었을 것이다. 그 관리는 미소를 띄우며 큰 소리로 외치
고 있었다.
"자, 어서, 어서, 한 가족씩 들어오시오!"
그 말은 한 번에 한 사람, 혹은 한 가족밖에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감이지만 제 아내는 이번에 저와 함께 여행을 오지 못했습니다."
새미는 미안하다는 듯이 그 관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나 같아도 마누라가 안 따라오기를 바랐을 거요."
관리는 더욱 밝은 표정으로 자기 말에 농담으로 응수하는 것이었다.
새미는 당황하여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서 나는 내 아내에 대한 감정
이 당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나는 자라가 나와 함
께 오지 못해서 매우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러나 붙임성 있는
얼굴의 관리는 이미 여권을 검사하고, 커다란 검은 서류철을 휙휙 넘기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작가라...댁이 쓰신 책 이름 하나 일러주시겠소?"
이것이야말로 새미가 자신의 방문 목적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
였다. 새미 루크는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써낸 작가였다. 그 가운데 다섯
편은 깜짝 놀랄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꽤 잘 팔렸다. 이것은 물론
영국에서의 이야기이고 미국에서는 전혀 팔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섯 번
째 장편인 '우는 여인들'은 아마도 그 섬뜩하고 시류를 탄 주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국 미국 양쪽에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미
국에서는 출간 몇 주 만에 굉장한 양이 팔렸고 또 나날이 판매 부수가 증
가하는 추세였다. 영화 판권 ---아마 제인 폰다와 메릴 스트립이 피학대 음
란증 환자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데--- 에 대한 계약도 이미 체결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새미와 계약한 미국의 출판업자는 이제 한 가지 일만
더 하면 '우는 여인들'이 미국에서 완전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
었다. 그 한 가지란 작가를 텔레비젼의 유명 인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작가 자신이 일련의 텔레비젼 인터뷰와 토크 쇼에서 폭력과 여성 피학
대 음란증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열렬히 옹호한다면, '우는 여인들'은 베
스트 셀러의 최상위권에 진입하고 또 그 자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
이 포록 출판사에서 새미의 책을 담당하고 있는 클로다 젠슨의 확고한 신
념이었다.
"새미, 당신은 토크 쇼에서 아주 위대한 인물이 될 거예요."
클로다는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 까마귀처럼 지껄여댔다.
"그렇게 작은 몸집에, 그렇게 귀여운 외모에, 그리고..."
클로다는 누군가를 꿀꺽 집어 삼키기나 할 듯이 입맛을 쩍 다셨다. 새미는
'설마 날 집어삼키는 건 아니겠지'하고 생각했다. 클로다는 여권주의자로
서 그 일에 헌신적이었다. 이것은 전에 클로다가 영국에 건너와 많은 경쟁
을 물리치고 막대한 돈으로 '우는 여인들'의 미국내 출판권을 사들이고 나
서 새미에게 조심스럽게 밝힌 사실이었다. 클로다가 여권론자이면서도 '우
는 여인들'의 출판권을 사들인 이유는, 이런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떼돈을
번 다음 그 돈으로 급진적인 여권론자들의 책을 출판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미는 자신의 책이 결코 여권 신장에 반대되는 책이 아니라
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썼었다. 그리고 아내이자 강한 의지의 여성인 자라도
자신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음을 말하려고 애썼다.
"그 이야기는 토크 쇼 때 마저 해주시지요, 새미."
클로다는 그렇게 새미의 입을 막았었다.
케네디 공항에서 새미가 이 모든 이야기를 어떻게 요령있게, 또 자신에게
유리하게 들려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의자에 앉은 관리가 물었다.
"루크 씨, 방문 목적이 뭔가요?"
새미는 갑자기 자신이 비행기 안에서 긴 여행에 지겨워 술을 너무 많이 마
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록 출판사에서 친절하게도 일등석 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덕분에 잠도 아주 많이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미는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미의 횡설수설에도 그 관리
는 만족스러워 하는 듯했다. 관리는 새미의 여권 여백에 도장을 찍더니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다.
"미국 방문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루크 씨, 자,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물론 즐겨야죠. 틀림없이 즐거울 겁니다. 그리고 오늘 날씨는 뭐 이미 좋
은 것 같은데요."
곧 이어 도착한 유명한 바라쿨라 호텔--클로다가 예약해 준 것이었다--에
서 새미는 더욱 환대를 받았다. 모든 사람들, 바라쿨라 호텔의 모든 사람
들이 새미에게 여행을 즐기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었다.
"자,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호텔의 전화 교환수든, 사람 좋아보이는 엘리베이터 운전원이든, 또 신사
같이 생긴 수위든, 그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말로 인사하였다. 심지어 무
뚝뚝한 표현 때문에 별로였던 뉴욕의 택시 기사조차도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아, 그래야지요, 그래야지요."
새미도 그런 말에 이렇게 응답하곤 했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면서 미국인
특유의 콧소리 발음을 흉내내며 덧붙였다.
"뉴욕은 참 좋습니다."
새미는 장거리 전화에다 대고 자라에게 소리쳤다.
"뉴욕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야."
하도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전화기 속에 메아리가 울릴 정도였다.
"테스 말이, 그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래요. 당신도
아시지만 그 사람들은 진지하지가 못하잖아요."
자라의 목소리는 새미와는 대조적으로 가늘었으며, 전화기 속에서 흐느끼
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로 잦아들었다.
"테스는 출입국관리소에 고릴라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틀
린 말이야. 그러니 방금 한 그 얘기도 틀렸을 거야. 테스가 이 나라 전부
를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테스는 그저 아주 작은 땅조각 하나를 물
려받았을 뿐이라고."
"여보, 정말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자라는 쏘아부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 괜찮아요? 거기서 혼자서도 괜찮으시냔 말이예요?"
대화가 자라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새미에 대한 걱정으로 발전하자, 자라
의 목소리는 점점 강력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낮에는 주로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살아. 토크 쇼 사회자와 사천만의
시청자를 빼놓는다면 나 혼자인 셈이지, 하하하...."
새미는 자기가 곧이어 할 농담을 생각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새미는 이어서 솔직하게 실제로 토크 쇼 전부가 다 방송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시청자가 백만 정도, 아니 백오십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
을 해줄까 말까 망설였다. 그때 자라가 엄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아직 어머니 안부도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사실 자라는 어머니가 아팠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새미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었다. 자라의 어머니도 새미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자
라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새미는 우선 테스의 이야기를 너무 경박하게 무시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어 상냥한 목소리로 자라 어머니에 대한 안부를 물은 다음 전화를 끊었
다. 그제서야 자라의 말이 옳다고 생각이 들어 자기가 너무 별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봐도 그랬다. 만일 런던에서라면 자기
가 감히 테스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히?' 새미는 정
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다.
성미가 강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자라에게는 물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었
다. 자라는 그의 아내니까. 아무리 부부라고는 했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
들이 다 부러워할 만큼 유별나게 다정했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젊은
시절 궁핍할때 내린 결정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는 다시 생각
해 볼 기회가 없었다--그들의 친밀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들의 결혼
은 순간적인 성적 매력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섹
스는 처음부터 그들의 결혼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결혼은 동지적인 어떤 것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월
이 갈수록 유대감은 더욱 강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새미는 과연 런던에
자기들보다 더 진실하게 결합된 부부가 있을까 의심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회상해 보는 것은 마
음에 위안을 주곤 했다. 테스가 그들 부부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
한 것은 아주 최근에 들어서였다. 옷을 고를 때도 테스, 실내장식을 할 때
도 테스, 심지어 커튼을 고를 때도 테스였다. 정말 지옥 같은 일이었다.
이 '지옥 같다'는 것은 새미가 클로다한테 배운 미국 사람들의 표현이었
다. 이쨌든 테스의 그 돈에 힘입어 테스의 의견이 아무데서고 관철되었다.
일하지 않고 번 돈을 경멸해 버리는 자라의 평소 태도를 생각해 볼 때 그것
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하지만 이제 나에게도 돈이 있어. 아주아주 많이 있어. 다 일해서
번 돈이야.'
새미는 자라가 사준 옅은 푸른색 재킷을 입으면서 생각했다. 새미는 바라
쿨라 호텔 자기 방에 있는 거대한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발로 커다란 꽃장
식을 밀었다. 그 꽃장식은 호텔 매니저--아니면 클로다였던가?--가 준 선
물이었다.
'새미 루크, 넌 뉴욕의 정복자야. 아니, 최소한 미국 텔레비젼의 정복자
야.'
이런 터무니없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미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새미는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조그만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 아래로는
리본 같은 길들과 낮은 건물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새미가 보
는 각도에서 그 모든 것들의 중앙에 푸르스름한 녹지대가 있었다. '아마
저기엔 센트럴 파크가 자리잡고 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새미는 지금 자신
이 매우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행복감은 단지 자기 책의 성공이
나 아니면 클로다가 예언했던 텔레비젼에서 얻은 높은 상업적 명성 때문이
아니며, 또한 출판계의 관심 때문만도 아니었다. 사실 출판계 일각에서는
새미의 책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클로다가 예언
했던 일이었다. 새미 루크가 지금 행복해 하는 이유는 자신이 뉴욕에서 아
주 거대하고 놀라울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 사
랑은 그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원이 안 들어와도 계
속 빨갛게 달아오른 석탄이 타고 있는 난로 같은 것이었다. 뉴욕은 빛나
고 그 빛은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새미는 마음 속에서 자신이 이제까
지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고 느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새미는 발코니를 떠났다. 그는 아까부터 세 통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전화도 아마 그것이겠지만, 첫번째 전화는
분명 클로다가 매일 하는 다음과 같은 전화일 것이 분명하다.
"안녕, 새미, 클로다예요...들어보세요, 그 쇼는 굉장했어요. 거기서 녹화
한 것 말이예요. 우선 선전 담당 직원이 그러는데요, 사실 녹화할 때는 신
통치가 않았대요. 그리고 녹화하는 사람들도 당신을 혹평했고요...그런데
실제 방송으로 나와 보니..쭈욱!"
클로다의 신축성 있고 감각적인 입술에서 나오는 신기한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새미, 정말 멋져요. 당신은 정말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도록 만들었어요.
아마 그 여직원은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그 애가 슈메이던가? 조아
니? 그래 조아니. 그 애가 지금 당신한테 미쳐 있어요. 내가 그 애한테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너같이 멋있는 애가 남자한테 미치면 어떡하냐
고, 그것도 유부남한테..."
클로다가 동성인 여성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더욱 허물없이
만들어 주었다. 뉴욕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농담을 허물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기묘한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클로다가 다소 노골적으
로 그런 태도를 보이는 점에 대해 새미는 은근히 충격을 받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클로다가 겉으로는 농담을 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바보
로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 자신도 상당히 여자 같은 구석이 있어요, 새미."
이것이 뭐 꼭 진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새미로서는 은근히 부
아가 치미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클로다가 장난스럽게 자라한테 육체
적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 느낀 당황감보다는 나았다. 클로다는 자라에
게 그런 말을 하면서, 그나마 지금 들어오는 돈이 없다면 새미 같은 남편
을 참아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뉴욕에 오고 보니 새미
자신도 스스럼없이 그런 농담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또한 새미는 자신의 일정을 담당하고 있는 선전부의 그 조아니라는 아가씨
가 자기한테 미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조아니는, 잘
생기고 약탈자 같고 종잡을 수 없는 클로다와는 달리, 자그마하고 상냥했기
때문이다.
전화 벨 소리의 주인공이 될 두 번째 가능성은 바로 조아니였다. 그럴 경
우 조아니는 바라쿨라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후에 텔레비
젼 스튜디오로 녹화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녹화가 끝난 다음에 조아
니는 다시 새미를 바라쿨라로 데려다주고는, 뭐 하나라도 잘못되면 새미의
기분이 상할까 봐 택시 요금까지 지불해 주는 것이다. 새미는 미소를 지으
며 생각했다. 조만간 조아니를 한번 자기 방으로 올라오라고 해야지...거실
이 딸린 호텔 방은 다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된 게 아닌가? 새미는 전에
도 호텔을 많이 이용했지만, 한번도 거실이 딸린 방에서 묵어본 적이 없었
다. 새미의 영국 출판업자들은 책 선전을 하기 위한 여행을 할 때에 작가
에게는 그저 평범한 침실을 주는 낡은 취향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자라가 다시 전화를 거는 경우였다. 방금 전화에서는 새
미가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대화가 마무리
되지 않았다. 그 결과 런던에 혼자 있던 자라가 새미에 대해 걱정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자, 새미의 마음 속에는 은근히 자라에 대한 만족감이 솟아
났다. 하지만 당장은 자신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었다.(물론 조아니만
빼고는...). 새미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새미의 만족감은 산산
히 부서졌다. 전화기에서 저음의 음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에 텔레비젼에서 널 봤어. 새미 루크, 이 나쁜 놈아. 내 당장 네
방으로 올라가서 잘라버리겠어, 네 그 조그만..."
그 다음에는 해부학적 묘사가 상세하게 이어졌다. 그 낮은 목소리가 지껄
여대는 음탕한 말들은 너무 끔찍했고 너무 놀라웠다., 순결한 백색의 호텔
전화에서 한참 동안 그런 소리가 막힘없이 흘러나오면서, 마치 조개 껍질들
이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것처럼 새미의 귀를 고문했다. 마침내 새미는 수
화기를 가슴에 대고, 새로 사입은 파란 양복이 그 목소리를 막아주기를 바
랐다.
한참 후 새미는 이제 그 끔찍한 소리가 끝났거니 하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
다. 전화기에서는 딱 그 시간에 맞추기라도 한 듯이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크 씨, 좋은 죽음이 되시기를!"
이어 침묵이 흘렀다.
심한 구역질이 목을 치밀고 올라왔다. 새미는 구역질을 하며 훌륭한 바라
쿨라 호텔의 화려한 거실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커다란 침실 한 구석에 있
는 화장실이 몇 마일이나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새미는 가까스로 화장실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미는 숨을 헐떨거리며 가까운 침대에 누웠다. 옆에 있는 다른 하나는 자
라를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그때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새미는 수
화기를 들고 그것을 귀에 멀찍이 떼었다. 수화기에서는 호텔 전화교환원의
명랑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올려나왔다.
"루크 씨, 방금 통화 중일 때 코록 출판사의 조아니 라즐로가 전화를 했었
습니다. 곧 다시 전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더러 일단 오늘 오후의
녹화 약속은 취소되었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맥스 사이그랜드가 아직
도 해변에서 작업 중인 일에 묶여 있는 처지라 올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
다. 안됐습니다. 루크 씨, 그건 좋은 쇼인데. 어쨌든 조아니 라즐로가 오늘
저녁에 사인할 책들을 들고 올 거랍니다....자, 루크씨, 좋은 하루가 되
시기를!"
그러고 나서 그 즐거운 목소리의 전화교환원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새
미는 미국에 와서 익숙해진 그 마지막 인사말을 듣고서도 몸을 떨어야만 했
다.
조아니가 호텔 로비 에 있다고 전화를 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조아니는 '우는 여인들'을 들고 방으로 올라가도 좋은냐고 전
화에 대고 물었다. 조아니가 거실 문에 도착했다. 조아니는 커다란 핸드백
위에 두 손으로 책을 받치고 있었다. 조아니의 어여쁜 분홍 얼굴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조아니나 혹은 다른 어떤 여자를 이 꽃으
로 장식되어 번쩍거리는 방에 유혹할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
다. 아주 오래 전에 꾼 꿈같았다.
조아니가 도착하기 전에 새미는 전화를 두 통 더 받았던 것이다. 그 속삭
이는 목소리는 새미의 운명을 점점 대담하게 묘사해 갔다. 하지만 더 심한
짓을 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새미는 첫 전화를 일부러 끝까지 들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말이 나왔다. 이미 새미 자신도 반쯤은 예상했던 일이었
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보니 다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루크 씨, 좋은 죽음이 되시기를!"
두 번째 전화 벨이 울렸을 때, 새미는 전화를 들자마자 다시 꽝 소리를 내
며 끊어버리고는 교환원을 불렀다.
새미는 숨을 헐떨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난 이제 그만 해줬으면 좋겠어요."
"루크 씨, 무슨 말씀이신지...."
"더 이상 그런 전화는...지금은 전화를 안 받겠단 말이오."
"네, 알았습니다."
텔레비젼을 잘 보는 먼젓번의 그 명랑한 교환원 아가씨가 아니었다. 하지
만 똑같이 친절한 목소리였다.
"얼마 동안 루크 씨한테 오는 전화를 연결시키지 않겠습니다. 기꺼이 그렇
게 해드리ㄳ. 그럼 안녕히 계세요. 좋은 저녁이 되시기를!"
이 교환원에게 조금 전에 전화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물어봤어야 했나? 교
환원은 틀림없이 자기 질문을 받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미는 지금처럼
정신없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뉴욕의 명랑하고 비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맨 처음 전화는 이 아가씨가 아니라 그 텔레비젼
을 잘 보는 아가씨가 연결시켜 준 것이 아닌가, 자라...새미는 자라와 이
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자라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라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제가 세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그 호텔 교환대에 앉
아 있는 몹쓸 여자가 연결시켜 주질 않는 거예요. 괜찮으세요? 아까 당신
말씀하시는 게 너무 이상해서 다시 전화를 했던 거예요. 뭔가 들떠 있다고
나 할까, 실제로는 웃기지도 않는데 아무거나 보고 웃으시더군요. 그건 당
신답지가 않았어요, 안 그래요? 뉴욕에 있게 되면 그런 버릇을 얻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당신이..."
"난 괜찮지가 않아. 전혀 괜찮지가 않아."
새미가 말을 막았다. 말하면서도 자기 목소리가 높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는 괜찮았어. 괜찮은 것 이상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안 그래. 전혀
그렇지가 못해."
자라는 새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그래서 결국 새미는 자기가 아까 왜 기쁨에 들떠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
하는 것을 포기해 버리고 말했다. 우선 자라는 새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
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둘째로 새미는 자라의 곁에서 떨어져 있다는 흥
분되는 사실이, 자신의 순간적인 광기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을 깨닫고 죄의식을 느꼈다. 그래서 새미는 자기가 뉴욕에 도착한 이래로
다소 이상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라에게 자
기가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물었다.
일단 자기가 이상했었음을 받아들이자, 자라는 다시 평소의 그 쾌활하면서
도 새미를 염려하는 목소리로 돌아갔다. 자라는 포록 출판사의 클로다에게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보, 난 왜 당신이 당장 클로다에게 전화하지 않으셨
는지 모르겠어요."
자라는 클로다라면 호텔 교환대에 말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선별할 수 있게
끔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불법적인 전화와 합법적인 전화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거기에 대해 새미도 힘없는 말투로 한가지 점을 지적했다.
"어쩌면 클로다가 그 여자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클로다한테는 아주 이상
한 친구들이 몇 명 있으니까."
자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이제 자라는 훨씬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새미는 전화를 끊기 전에 자라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테스가 사업차 미
국으로 날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녀와 술 한잔 하고 싶다고까지
말해 주었다.
조아니가 방에 도착하였을 때 새미는 그녀에게 그 협박 전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아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하자 새미는 은근히 만족감을
느꼈다. 조아니의 담갈색 눈에는 어떤 부드러운 감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아주 무서운 일이예요, 새미. 클로다는 지금 사무실에 없는데...제가 당
장 호텔 매니저와 이야기를 할께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미는 조아니한테 더 이상 조금도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친근함에는 금방 물릴 것 같은 무엇이 있었다. 아마 조아
니에게서는 활달함과 함께 텅 빈 내면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천박함이라고나 할까...아마 테스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뉴욕 사람
들은 결국 진지한 사람들이 못 돼. 조아니가 사인된 책을 들고 떠나려고 하
자 새미는 오히려 기뻤다.
조아니는 '뉴욕 타임스'의 일요일판 서평란 신간 견본을 들고 왔었다. 그
것을 보니 '우는 여인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네 계단 올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새미는 조아니에게 한 잔 더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새미, 좋은 저녁이 되시기를!"
조아니는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클로다의 자동 응답기에 메모를 남겼어요. 내일 전화 드릴께요."
하지만 새미에게 그날 저녁을 좋은 저녁이 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새
미는 자기 방에서 저녁을 먹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라쿨라 호텔 바깥에서
그 속삭이는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 혹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두려웠다.
웨이터가 흰 보자기로 덮은 뜨거운 쟁방을 가져왔다. 새미가 계산서에 서
명을 하자 자동적으로 입에 밴 말을 내뱉었다.
"좋은 날이 되시기를!"
새미는 웨이터가 증오스러웠다.
"오늘은 다 지나갔어. 이제 저녁이야."
새미는 악의가 섞여 있다고 느낄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웨이
터는 새미가 준 팁을 받아 능숙하게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문간에 서 있었
다. 웨이터는 고개를 돌려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지요. 고맙습니다. 루크 씨, 좋은 날이 되시기를!"
웨이터의 손은 이미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새미가 소리를 질렀다. 자기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은 저녁이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신은 지금이 저녁이라고 생
각하지 않는 거야?"
웨이터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전혀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시 말했
다.
"아, 그렇지요, 저녁이지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웨이터가 나갔다.
새미는 술을 진열해 놓은 곳에서 작은 위스키 병을 꺼내 마셨다. 이제 더
이상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커다란 쟁반을 덮은 흰 보자기는 보기도 싫었
다. 조금 전의 그 웨이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쟁반을 들고
나가 복도에 내동댕이칠 용기도 없었다. 일단 바라쿨라를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새미는 어리석게도 자기 방 문을 열려고 하지도 않았
다.
클로다는 사무실에 없다고 했으나, 호텔 전화 교환원들이 그 전화를 연결
해 준 것은 틀림없이 조아니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미가 중
간 중간에 수많은 광고의 방해를 받으면서 텔레비젼에서 젊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던 열 시쯤--새미는 자정까지 기다려 토크
쇼에 나오는 자기 모습을 보려고 했었다--다시 그 속삭이는 목소리의 전화
가 걸려온 것이다. 교환원은 전화를 연결시켜 줄 때마다 새미가 통화할 것
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 건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고 했었다. 그러나 이
번 전화는 그런 절차없이 바로 연결되었다.
이번 전화에서 그 목소리는 아주 급박한 듯이 서두르고 있었다.
"좋은 죽음이 되시기를! 내가 곧 올라갈 거야, 새미 루크."
작은 위스키 병 하나를 더 꺼내 마신 상태였지만, 새미는 교환원에게 항의
하는 자기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직도 그 전화가 온단 말이오. 당신이 무슨 일인가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전화를 막아주는 게 당신이 할 일 아니냔 말이오."
처음 들어보니 목소리의 전화 교환원은 좀 놀란 것 같았지만, 여전히 호의
를 잃지 않고 있었다. '겉치레의 호의일 뿐이야.' 이제 새미는 그렇게 느끼
고 있었다. 설사 그 교환원이 진지하다 하더라도, 어리석다는 것 또한 틀
림없는 사실이다. 십 분 전에 연결시켜 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도 못 하
니 말이다. 새미는 혹시 자라가 다시 전화를 걸까 봐 교환원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연결 시키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혹은 클로다가 전화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그 멍청한 여권론자의보호를 필
요로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어디 가 있는 거야. 그리고 또 바깥 세계와
의 접촉을 완전히 두절하는 것은 너무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이라
는 생각도 들었다. 자라 같으면 뭐라고 충고해 줄까...
자라로 부터 실제로 답을 듣고 나니, 언제나 그렇듯이 그 답은 너무도 간
단한 것이었다. 새미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오늘 야간 업무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누구냐고 물었다. 매니저도 교환원과 마찬가지로 다시 당황한 듯
했지만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협박이라고요, 루크 씨? 당신이 이 바라쿨라에 계신 한 당신은 정말 안
전 합니다. 당연히 우리 호텔에는 경비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지만 제가 올라가서 그 문제를 상의하기를 바라신다면, 저는 기꺼
이..."
올라온 매니저는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텔레비젼에 나온 새미
의 토크 쇼에 대해서만 아니라, 새미가 쓴 책에 관해서도 말을 했다. 그는
자기는 새미의 책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여든셋 되신
노모--그 노모가 투데이 쇼에 나온 새미를 보았다는 것이다--에게도 그 책
을 드렸는데 아주 좋아하시더라는 말도 했다. 새미는 너무 지쳤기 때문에
여든셋의 노모란 분이 도대체 '우는 여인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하고 언뜻
생각해 보기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새미는 매니저의 아주 깍듯한 예절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가고 있었다. 과연 그가 새미의 이야기를 믿
는 것이지 아니면 그저 유명 인사가 지어낸 즐거운 고민을 좀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부터가 분명치 않았다. 이건 도대체 바라쿨라에 오는 손님
들은 심심하면 가상적인 협박 이야기를 지어 내서 항의를 한다는 식의 태
도가 아닌가? 그러나 새미는 역시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자정 무렵에 새미는 다시 텔레비젼을 켜고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
미는 파란 양복을 입고 웃어대는 한편, 유머를 섞어가면서 한 열 번쯤 자
기 자신은 전혀 희한한 새디스트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우는 여인들' 또한 자기 사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반복하고 있었다.
쇼가 끝난 직후 전화 벨이 울렸을 때 새미는 그 전화가 그 협박자임에 틀
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금방 텔레비젼에서 본 자기 자신의 그토
록 활기에 찬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힘을 얻었기 때문에 수
화기를 떨지 않고 들 수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클로다였다. 클로다는 시외로 나갔다가 방금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자동 응답기에서 조아니의 메모를 듣고 전화하는 것이라고 말했
다. 클로다는 새미가 말하는 내용을 주의깊게 들은 다음에, 평소의 그 크
게 떠벌리는 태도와는 약간 다른 말투로 말했다.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네요!"
그런 다음 클로다는 꽤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앤디 워홀 이후로는 그런 장난꾼들이 무슨 짓을 할지 확실히 알 수가 없
게 되었어요. 내일 기자회견을 갖는 것이 어때요? 여론으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고 책을 좀 더 팔 수도 있잖아요. 아니 그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
라. 생각을 좀 해본 다음에 내일 아침 조아니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다행히도 클로다가 알아서 해준다는 것이었다. 클로다는 거기서 또 조금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클로다의 말투는 친절했고, 또 모성애
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라를 연상시키는 말투였다.
"귀여운 새미, 거기 가만 있어요. 내가 그리고 갈께요. 우리는 작가를 잃
고 싶지 않거든요."
새미는 거실과 연결된 그 작은 발코니로 나가 발 아래 까마득한 곳에 꼬리
를 물고 있는 가로등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보지는 못
했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저 아래서 협박자가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두려
웠기 때문이다. 새미는 이제 더 이상 그 가로등 불빛들의 호의를 갖고 반
짝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새미는 클로다
를 떠올렸다. 자라를 대신해 그녀가 나를 구하러 이리로 오고 있다.
클로다는 올라온다는 얘기도 없이 올라왔다. 아마 로비에서 전화를 하면
내가 놀랄까봐 그랬나 보다. 오늘따라 클로다는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
주 장하게 보였다. 클로다는 검은 청바지에 검은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새미는 그 실크 셔츠 속에서 움직이는 클로다의 평범한 근육질의 가슴과 그
리고 선명하게 드러난 젖꼭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마치 그리스의 미남
자, 젊은 운동 선수의 가슴 같았다.
클로다가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귀여운 새미, 누가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하는 걸까요?"
발코니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클로다는 새미에게 작은 위스키 한 병을
더 마시게 하고 자기도 하나 마셨다. 이 명령을 내릴 때 클로다의 모습은
평소처럼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클로다는 또 노예에게 명령하는 주인 같은
태도로 마치 폭탄처럼 생긴 이상한 알약 두 개를 내놓으면서 새미더러 위스
키와 함께 먹으라고 하였다. 그걸 먹으면 달콤한 꿈을 꿀 것이고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하는 그 지저분한 전화도 다시 안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
다.
클로다는 새미 곁에 가까이 붙어 있으려고 하면서 그녀의 긴 팔을 다정하
게, 그리고 뿌리칠 수 없게끔 새미의 어깨에 둘렀다. 그녀가 발코니에 나
가서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자, 세미는 오히려 이런 은밀한 장면에서 빠져나
갈 수 있다고 생각되어 기꺼이 찬성했다.
새미는 앞서 나가 잔 두 개를 들고 난간 가장자리에 서서 맡을 내려다보았
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위스키와 알약이 점차 효력을 발휘함에 따라, 전
에 가졌던 뉴욕에 대한 관대한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이제 더 이상 자신
의 적이 바라쿨라 바깥 저 밑에서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
다.
물론 새미의 그 생각은 옳았다. 왜냐하면 새미의 적은 저 아래 길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발코니, 그의 등 뒤에 말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크고 강한 손에 검은 장갑을 꼈다. 그 장갑은 검은 실크 셔츠의
소매 부분부터 이어지면서 그녀의 온 몸을 검게 물들였다.
"새미 루크, 좋은 죽음이 되시기를!"
새미가 그 익숙한 말이 주는 섬뜩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그는 이미 이십
삼층 아래 뉴욕의 거리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두 개의 위스키
잔도 함께 떨어져 얼음 조각처럼 부서져 버렸다. 위스킨 잔은 새미의 작은
몸뚱아리가 떨어진 보도로부터 멀리멀리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 안에 들었던 위스키도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아무도 그 시간 자기 얼굴
에 위스키 방울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고 신고해 온 사람은 없었다.
경찰이 새미가 타자로 치고 서명을 한 유서를 가져왔을 때 마음 여린 조아
니는 책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서명을 보고 울었다. 유서는 새미가 뉴욕
에 들고 온 낡아빠진 타자기로 친 것이었다. 조아니도 자기가 전날 새미
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새미가 상당히 우울한 상태였다고 말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새미가 알약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위스
키를 마셨다는 사실로도 확인되었다.
웨이터도 같은 점을 확인해 주었다.
"제가 저녁을 가지고 갔을 때 그 분은 매우 심란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덧붙였다.
"또 매우 외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말을 하고 싶어했죠. 그런 사람 아시잖
아요. 내가 나오려고 하는데 자꾸 막았지요.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
예요. 지금 생각하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
지만, 사실 그때는 상당히 바빴거든요."
웨이터는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호텔 매니저도 매우 안타까워했는
데, 그것은 새미의 죽음이 경비소홀의 타살이 아니라 바라쿨라 호텔 발코
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는 상당히 양심적인 태도였다.
그 명랑한 전화 교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믿어지지가 않아요. 난 방금 텔레비젼에서 그 분을 보았었는데!"
다른 교환원은 보다 차분한 태도로 그저 새미가 그날 저녁 내내 전화를 받
을지 안 받을지 결정을 못 내리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 진술했다.
영국의 자라 루크는 새미의 마지막 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가 협박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애처롭게 말했다고 하는데, 그 협박 이야기는 다른
데서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자라는 또 새미가 전에도 정신적으로 파탄을
겪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혼자 여행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이를 혼자 보낸 데 대해 난 평생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자라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포록 출판사의 클로다 제이슨은 그 비극에 대해 장엄한 성명을 발표했다.
자라가 새미의 죽음에 따른 뒤처리를 하기 위해 일 주일 후 미국으로 날아
왔을 때 자라를 마중나간 사람도 클로다였다.
공항에서 자라와 클로다는 분별력을 잃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
는 정도로 행동의 끝을 맺었다. 클로다는 자라한테 바라쿨라에 묵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며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묵게 하였다. 공항에서의 포옹
보다 훨씬 더 짙고 친밀한 포옹이 시작된 것은 그 아파트의 침대 위에서였
다. 그 포옹은 시작은 있었지만 끝은 없었다. 둘 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
"그리고 돈도."
클로다가 대꾸했다. 클로다는 일요일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우는 여인들
'이 드디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자라에게 말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
다.


- THE END -



슬 픔

by 김 성 종


나는 눈을 뜨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십대의 그 사내는 너무 오래 기다린
데 대해서 완연히 낙담한 기색을 보이면서 나에게 힐끗 시선을 던져 왔다.
눈빛으로 보아 그는 몹시 피로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비쩍 마른 데다가
낡은 점퍼 차림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내가 그를 무시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소파 쪽으로 옮겨 앉으며 사무적으로 간단히 물었다. 오후에 들어서
면서 날시가 부쩍 더워지고 있으므로 나는 거의 지쳐 있었고, 사람과 이야
기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사내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머뭇머뭇,
"저..... 좀 볼 수 없을까요? 사망자 명단 말입니다."
하고 말했다. 마디가 굵고 거친 손으로 보아 그가 품팔이 노동자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좀 찾아 볼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여기에 묻혔어요?"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곤란해요. 이 국립 묘지에 묻힌 사람이, 10만이 넘는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찾아요."
이 친구를 될수록 빨리 내쫓은 다음 이번엔 아예 숙직실에 들어가서 낮잠
을 자야겠디고 생각하면서 나는 밖을 내다 보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 밑에
서 수만개의 묘비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나에게 준 인상은
언제나 하얗다는 것뿐이었다.
"꼭 찾아야 될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힘드시다면 명부만 보여 주십시오.
제가 직접 찾아 보겠습니다."
"안된다니까요. 여기에 분명히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한번 편리를 좀 봐 주십시오. 이거 약소합니다만..."
사내는 갑자기 청자 두 갑을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그러고는 초조한 듯
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졸음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굴 찾는 겁니까?"
"제 아들입니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가지 오게 됐어요?"
"사실은 1.4후퇴 때 아들 하고 둘이서 남하했는데, 부산에서 그 애를 잃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해서....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말씀이군요."
나는 조금 웃어 보이면서 호의적으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고향이 어디죠?"
"평양입니다."
"아들 이름은?"
"이동운입니다. 동녁 동, 구름운자를 쓰지요. 지금 살아 있다면 서른 두
살, 선생님 또래는 되었을 겁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실내에는 심부름하는 아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직접 카아드를 찾
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 카아드를 뽑아 그 중
에서 이가(李哥) 명단만을 하나 씩 훑어 보았다. 20분쯤 지나 다시 귀찮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녁 동, 구름 운... 이 동운이라고 그랬죠?"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 그렇습니다."
사내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원적이 평양 어디에요?"
"사동(寺洞) 25번지...."
"이리 오시요!"
나의 고함 소리에 사내는 허둥지둥 내 쪽으로 다가와서 카아드를 들여다보
았다.
"1940년 5월 9일, 생년월일 맞아요?"
내 질문에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카아드만을 뚫
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는데, 책상 위에 올려 놓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1967년 10월 월남에서 전사했습니다. 청룡 하사였었군요. 을지 무공 훈장
을 받았고... 유언에 따라 모든 돈을 고아원에 기부했습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군요. 모처럼 이렇게 찾으셨는데.... 안됐습니다. 함께 가시죠. 묘지까
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사내는 꿈 속을 걷는 것처럼 입을 벌
린 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국립 묘지에서 관리인을 맡아 본 지가 5년이 넘었지만 오늘과 같은 이런
일을 겪기는 처음이었다. 21년 만에 만난 아들이 죽어 있다니,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계속 더위만을 느꼈다.
아들의 묘지 앞에 이르자 사내는 묘비를 확인해 보고 나서, 그 주위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그러고는 내가 거북하게 서 있는 것을 알자,
"감사합니다. 이제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으므로 다만 슬픈 표정으로 목례를 한 다음 그 자리를 얼른 피했
다. 우는 것을 구경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유쾌한 일이 못 된다. 사실
나는 어느 정도 울음 소리에 질려 있었다. 도중에 뒤돌아 보니 사내는 여전
히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담배 두 갑을 서랍 속에 넣고 쇠를
채운 다음 숙직실로 들어가 드러누워 잠이나 자고 싶었다. 여자와 함께 어
젯밤을 고스란히 ㄳ혔기 때문에 나는 대단히 피로 했다.
이윽고 나는 즉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도중 아까의 그 사내가 피를 토하
며 우는 꿈을 구었는데, 잠을 께고 나서도 그 때문에 기분이 불쾌했다.
밖은 한낮이 기울고 이미 석양이 되어 있었다. 불현듯 사내의 일이 궁금해
서 나는 묘지 쪽으로 가 보았다.
사내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묘비 앞에 소줏병과 술잔을 하나 놓은 채 그
는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이제 그만 가시죠."
라고 말했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
이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곱시까지는 나가셔야 합니다."
이 말에 사내는 고개를 쳐들었는데, 술을 마셨는지 붉게 달아 오른 얼굴이
땀과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열에 뜨고 충혈된 두 눈이 나를 정면으
로 쏘아보았을때, 나는 차마 그를 맞바로 볼 수가 없었다. 크게 무안을 당
한 기분으로 나는 그 자리를 물러섰다.
처음 얼마 동안은 사내에 대해서 마음이 켕겼지만 밤이 되자 거의 잊을 수
가 있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다가 짐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잠이 께자마자 무엇을 잊은 듯한 서운한 기분을 느꼈
다. 한참 동안 방 안을 ㄷ리번거린 다음에야 나는 밖으로 뛰쳐 나갔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릴 때 발등에 떨어지는 이슬의 감촉이 무척 상쾌했
다. 나는 어제 갔던 묘지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묘지에 닿은 나는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이 동운 하사의
묘비는 나둥그러져 있었고, 묘지도 파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 속에는
유골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한번 휘둘러 본 다음 재빨리 구덩이를 메우고 그위에 전처럼
묘비를 세워 놓았다. 이 일 때문에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곤욕을 치뤄야 했지만, 웬일인지 그 사나이의 행위에 대해서 기분
나쁜 생각은 들지 않았다. <1972.8>

- The End -




사람이 개를 물었다

사람들은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고 말했다. 예컨대 뉴스란 무었인가, 신문사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독자에
대한 기자의 정열이나 윤리는 무었인가 등 신문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모
두 배울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를 꿈꾸던 나는 그 말에 솔깃해서 열심히
일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나는 참으로 우연하게 취직이 되어서, 사람이 하루 24시간 동안 살아가면
서 매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우연과 마주치며 사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
리고 그 우연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기자에게는 어떤 우연이든 행
운이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어느 조그마한 동네의 터미널
에 내렸을때, 내가 들고 있던 타이프 라이터가 그 마을의 신문 발행인이자
편집자이며, 기자이기도 한 어떤 신사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그 신사는 우
리가 흔히 말하는 민완기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내
타이프 라이터를 보고는 내가 최소한 글을 읽고 쓸줄은 알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취직이 된것이다.
나는 시릴 플래그라고 밝힌 그 신사와 함께 터미널을 나와 슈퍼마켓 위층
에 있는 사무실로 갔다. 낡은 리놀륨 바닥에 벽시 색깔이 누렇게 바랜 좁은
사무실 안에는 책상 두개와 의자 몇개, 그리고 시들어 가는 제라늄 화분이
두어게 있었고, 중요해 보이는 종이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어서 나는 마치
복잡하고 정신없는 신문 세계의 단면을 본듯 전율을 느꼈다.
"여기야."
플래그 씨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그는 진짜
기자처럼 보였다.
"멋있군요."
"다른 녀석이 사라졌어."
플래그 씨는 간단하게 말했다.
"누가요?"
"자네 전임자 말야."
"다른데로 갔나요?"
"다른데로 간건 확실해. 더이상 묻지 말게, 아무도 그가 왜, 어디로 갔는
지는 모르니까."
플래그 씨는 몇주 지난 '대쉬'지를 보여주었다.
'공동편집인이 사라지다'라는 머릿기사가 있었다. 그는 다시 신문을 내려
놓았다.
"완전 매진ㄳ지. 몇달 만에 가장 큰 기사였어. 누가 사라졌다는 것 만큼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은 없지."
"언젠가 다시 나타나겠죠."
"그렇지 않아. 이곳에서는 누가 사라지면 영원히 사라지니까."
별로 기분좋은 말은 아니었다. 플래그씨는 전에있던 사람이 사라진 것을
조금도 걱정스러워 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것이 나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되
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앤드루 거버라고 합니다"
"자네는 기자와 신문의 관계가 어떤건지 아나, 거버? 그건 마치 의사와 환
자와의 관계처럼 신성한 것이네. 신문에 실린 기사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해 보면, 뉴스의 전달은 하늘이 준 천직과도 같은거
야. 또 우리는 항상 대중에게 정보와 지식은 전달하되 절대 그 출처를 밝혀
서는 안되는 거야. 무슨말인지 이해하겠나, 거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리규정도 있네. 여기서 일하기 위해서는 자네도 그 규정을 지키
겠다는 맹세를 해야되네."
"알겠습니다."
"좋아."
우리는 악수를 했다.
며칠 만에 나는 내 일에 익숙해졌다. 큰길이 내 책상에서 보였기 때문에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만일 다른 마을이라면
그런 위치가 취재에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 마을에서는 별 도움이 되
지 안았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서 특별한 일이 거의 없었고 매일매일이 똑
같았던 것이다.
몇 주를 그렇게 지루하게 지내고 나자 이 마을에는 신문이 필요없다는 생
각까지 들게 되었다. 마을 시계의 태엽을 감아줄 사람과 그 사람이 술 한잔
할수 있는 선술집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출생과 사망, 그리고 거의 없는 경사 따위 외에는 신문에 쓸 것이
없었다. 몇주 동안 출생이나 사망 기사조차 없을때도 허다했다. 그것만 봐
도 이 동네가 얼마나 평범했는지 알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플래그씨는 도끼 살인사건이나 홍수, 전염병 발생같은 큰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는 것처럼 지치지도 않고 열심이었다. 나도 가끔씩은 지면을 채
우기위해서 저녁노을에 대해서 쓰기도 하고, 학교에 가서 크리스마스나 아
이스크림, 자전거 따위등의 주제로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위기가 닥쳐왔다. 1면을 채울 기삿거리가 전혀 없었다. 마
을 전체가 정지된 것 같았다. 날씨 조차 몇주동안 똑같았다. 나는 내 책상
에 앉아서 개미새끼 한마리 움직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 주일주
신문을 낼 생각을 하니 아득해졌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발행해 왔따는 우
리 신문사의 전통이 깨지려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내 인생
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플래그 씨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자기 책상에 앉아서 펜에 잉크를 ㅉ
기어서 종이에 뿌려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겠느냐고 물었다.
"난국이라고?"
플래그씨는 여전히 잉크를 뿌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그는 마치 무엇에 홀린것 처럼 계속해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일이 없었나요?"
"자주 있었지. 자네가 여기오기 몇주 전도 바로 이랬었지. 그때는 자네 선
임자가 사라지는 바람에 위기를 면하긴 했지."
"그런데 이제 새로운 위기에 처했군."
"어떻게 하죠?"
"상상력을 동원해야지. 분석만 할 게 아니라 창조를 하란 말이야. 생각해
보세나."
그는 턱을 손으로 받치고 벽을 노려보면 신중히 말했다.
"어떤 시체를 다시 파내서 시체부검을 해야한다고 하면 어떨까. 아냐, 그
건 몇년전에 써먹은거야."
나는 그가 익살을 부린ㄴ다고 생각했다. 그때 플래그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 여지껏 벽에 아무 쓸모도 없이 걸려있던 산탄총을 내려 총신에 뿌옇게
쌓인 먼지를 불어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겨 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총알을 꺼내 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는 총을
꺾어 총알을 장전했다. 그러고 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모자를 쓰게"
나는 모자를 쓰고 그를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뒷계단으로 가
서 플래그씨의 차에 탔다. 그리고는 플래그씨와 나 그리고 산탄총 셋이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먼지 나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어떤 사람이 걸어
가는 것을 보았다.
"아, 짐 영감이군."
플래그 씨는 기쁜듯이 말했다. 그는 차를 세우고 총을 든채 차에서 내렸
다. 나도 뒤따라 갔다. 플래그씨가 신문기자 특유의 날카롭고 영리한 눈으
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맹세한거 기억하나?"
"네,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짐 영감이 우리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영감은 우리를 보고는 노망기 있는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
다.
"사냥 나왔나, 시릴?"
"네, 아주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사냥이죠."
플래그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총을 들어올려 짐영감을 겨냥한 뒤에 방아쇠
를 당겼다.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화약연기가 없어지자 나는 용기를 내
서 짐 영감 옆으로 갔다. 영감은 길바닥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
었는데, 가슴에서는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는 아무도 모를것이다.
"좋아. 이건 자네 특정이야. 머릿기사를 '누군가에게 의해 살해된 짐 펜'
이라고 쓰게. 초안을 잡아봐."
플래그씨는 총구에 입을대고 연기를 불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주 좋은 기삿감이야."
그는 총을 차안에 던지고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몇장 찍었다.
"좋아. 오늘밤 영감의 가족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나는 사설을 쓰겠
어. 빌어먹을, 더럽게 덥구만."
황톳길 위의 살인사건. 그것은 특종이었다. 그 얘기는 마을사람들의 따분
함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우리는 신문 한 판 전체를 취재기사와 가족인터뷰
기사로 채웠고, 그 다음판은 장례식 기사로 채웠으며, 사설로 다음판까지
더 채울수 있었다. 플래그씨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그 재판 과
정까지 취재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걸로 다섯 판이나 찍어냈군. 난 만족하네. 알겠나, 거버? 가끔씩은 대
중을 위해서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해야하네. 언젠가는 자네도 자네 신문을
갖게 될꺼야. 그때 지금 내가 가르쳐 준것을 잊지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
지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몇주동안을 공포에 떨며 지내야만 했다.사람들 얼
굴을 볼수가 없었다. 양심의 가책때문에 일이 끝나자마자 코트깃을 세워 얼
굴을 숨기고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그때서야 내 선임자에게 뭔가 나쁜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생명도 위험하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기삿거리가 없으면 내가 '대쉬'지의 희생양이 되어
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를 만들기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녔고, 그러
다 보니 내 자신은 훌륭한 기자가 되어갔다. 어쨌든간에 훌륭한 기자가 되
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달 후에 전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쓸 기삿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플래그씨를 바라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
나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그가 어떤일을 저지를지 몹시 궁금했다. 플래그
씨는 몇시간 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없애 버릴 궁리
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한두번 쳐다보기까지
하는것으로 보아 내가 그의 머릿속에서 기삿거리가 되고있는것은 확실해 보
였다. 그의 날카로운 회색 눈은 깊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가 갑자기 손집을 하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그러나, 거버. 왜 그렇게 놀라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난 좀 일찍 퇴근해야 겠네."
"벌써요?"
"그래, 나가서 기삿거리가 있나 찾아봐야 겠어. 뭘 쓰긴 써야 하니까."
그가 나간 후에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
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단 하나 다행인것은 최근에 편집자가 사라졌지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편집자가 사라져 봤자 별로 흥미있는 기삿
거리가 안될거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가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기삭거리가 없어서 위험을 계속되었다. 플래그씨는 30
분쯤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모자를 쓰고는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
는 바짝 긴장한 채 로봇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 차
에 탔다.
우리는 차를 타고 한산한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총은 별에 걸어둔
채 가져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쓸 모양이었다.
그때 한 여자가 길을 건너는 것이보였다. 플래그 씨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
아 그 여자를 치어버렸다. 그 여자는 마치 삽질을 당한것 처럼 다리부터 공
중으로 치솟아 한바퀴 돌고는 단장이 잘 된 길 옆 화단에 떨어졌다. 나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떤가?"
"아직 움직이고 있어요."
"그럼 됐어. 기사가 되겠지? '뺑소니 차가 여자를 치고 도망치다.' 라고
쓰면 되겠군. 청소년이 모는 차였다고 할수도 있을 거고, 도로 안전 협회를
비난하는 기사를 쓸수도 있을거야. 또 운전면허 발부 공부원이 뇌물을 받고
부적격자들에게 면허를 발부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좋아. 다음 사거리에서 내려 줄 테니까, 돌아가서 저 여자를 취재하게.
이름을 정확히 알아야 해."
그 뺑소니 사건으로 우리는 2주일 동안 기사를 쓰면서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리고 뇌물에 관한 기사로 인해서 사과문과 정정 기사를 써야
했지만,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면허 발부 공무원들을 더 의심했다. 플래그
씨는 아주 유쾌한 것처럼 보였고, 나 역시 급박했던 내 생명에 대한 위협이
사라져서 안심할수 있었다.
하루는 플래그씨가 기자 수업이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많이 배웠나?"
"네. 아주 많이 배웠습니다."
플래그씨는 약간 불안한 눈으로 내 표정에서 뭔가 찾아내려는 듯이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 역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지난 신문들을 훑어보았다. 어떤
것들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였는데, 그것들을 읽자 흥분이 일었다. 몇년
전의 신문에는 학교와 병원에 불을 지를 미친 방화범에 관한 기사도 있었
다. 그리고 다른 신문에는 곡마단의 사자 우리를 누군가 열어놓아서 사자가
뛰쳐나와 세 사람을 물어 죽이고 경찰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도 있었
다. 그릭 걸 스카우트 들이 캠프파이어를 하는 곳에 누가 수류탄을 던졌다
는 기사도 있었다. 그 수류탄 사건은 여덟번에 걸쳐서 게재됐는데 대부분
인터뷰 기사였다. 그리고 플래그씨가 인간미 넘치는 기사를 써서 편집자 협
회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엄청난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집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
고 밤새 줄담배를 피우면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신문기자들만이 느낄수있는
스릴과 흥분을 처음으로 알 것 같았다. 아직까지 유괴나 익사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릭 폭탄 테러도 없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플래그씨에게 앞으로
이런것들 중에서 하나를 제안하면 그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참을수 없을 정도로 흥분이 된 상테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또다시 기삿거리가 전혀 없는 때가 왔다. 우리는 사무
실에 앉아 있었다. 플래그씨는 어느때 보다도 더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나는 특종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사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
다.
"거버.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군."
플래그 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인지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모양이었다. 뺑소니 기
사조차 그가 예상했던 것만큼 성공적이지 않았었다.
"제가 뭘좀 쓰고 있습니다."
"좋아. 다 쓰면 좀 보세."
그 기사를 다 쓰고 나서 나는 일어섰다. 나는 그즈음 내가 진짜 기자가 되
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쓴 기사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훌륭
한 내 기사의 머리글이 큰 글씨로 씌어있었다
<편집자 상을 수상한 신문발행인, 사무실에서 피살>
나는 플래그씨가 놀라서 돌아서기도 전에 서진(書鎭)으로 그의 머리를 내
리치기 시작했다. 한 번 더.........그리고 다시 한 번....... .

추천 (0) 선물 (0명)
IP: ♡.75.♡.93
kimabcd (♡.189.♡.185) - 2022/01/27 10:01:43

잼있는글 잘 읽고 갑니다 ^^

22,93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1-31
0
151
3학년2반
2022-01-31
0
162
3학년2반
2022-01-31
0
227
3학년2반
2022-01-30
0
166
3학년2반
2022-01-30
0
137
3학년2반
2022-01-30
0
208
3학년2반
2022-01-30
0
245
3학년2반
2022-01-30
0
292
3학년2반
2022-01-29
0
364
3학년2반
2022-01-29
0
231
3학년2반
2022-01-29
0
167
3학년2반
2022-01-29
0
116
3학년2반
2022-01-29
0
115
3학년2반
2022-01-27
0
171
3학년2반
2022-01-27
0
126
3학년2반
2022-01-27
0
246
3학년2반
2022-01-27
0
307
3학년2반
2022-01-27
0
204
3학년2반
2022-01-26
0
199
3학년2반
2022-01-26
0
116
3학년2반
2022-01-26
0
114
3학년2반
2022-01-26
0
100
3학년2반
2022-01-26
0
107
3학년2반
2022-01-25
0
147
3학년2반
2022-01-25
0
101
3학년2반
2022-01-25
0
95
3학년2반
2022-01-25
0
115
3학년2반
2022-01-25
0
88
3학년2반
2022-01-24
0
108
3학년2반
2022-01-24
0
9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