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남제 단지홍 1

3학년2반 | 2022.02.21 07:23:13 댓글: 1 조회: 32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file.moyiza.kr/fiction/4350122
[화산논검4부] -
남제 단지홍편

제1장 천룡사에 감춰진 비본
우레가 울고 번개가 번쩍이는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번개가 들이칠 때마다 산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엎어져 있는 사원이 퍼뜩퍼뜩 드러났다. 진노한 하늘은 마치 이 거대한 사원을 모조리 짓부숴 버리려는 듯싶었다. 시퍼런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파르룽 굉음에 천지가 푸르르 떨었다. 우레가 잠시 멈칫할 때마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 흐들거리는 웃음 소리, 혹은 간장을 에는 듯한 곡성 소리마저 감때사납게 끼여들어 등골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원은 조금도 아랑곳없이, 마치 혼수 상태에 빠진 듯 잠잠하기만 했다. 다만 문루 위 칠흑 같은 편액(扁額)에 송나라 선황 신종(神宗)이 친히 쓴 '천룡사(天龍寺)' 라는 황금및 세 글자만
이 기세등등하게 위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순간, 한껏 기승을 부리던 천둥 번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고, 추적추적 빗소리만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 천지는 다시 적막에 잠겨 들었다. 그 즈음 문득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사원
앞에 떠올랐다. 어둠 속에 드러난 윤곽은 제각각으로 하나는 비쩍 마르고, 하나는 작달막하니 똥똥하고, 하나는 섬뜩하리만치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은 천룡사 편액을 올려다보며 싸늘히 냉소를 날렸다. 그러더니 그중 하나가 성큼 몸을 솟구쳐 두 장 높이나 날아올라 삽시에 문루 위 편액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치고는 훌쩍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셋은 주먹 을 쳐들며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그래도 천룡사엔 대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몇 백근은 족히 될 듯싶은 육중한 천룡사 문은 굳게 닫힌 채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셋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동문동당(同門同黨)이라 눈짓 한번으로도 대번에 뜻이 통했다.
먼저 비쩍 마른 자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성큼성큼 대문으로 다가가 한 손 손바닥을 척 갖다 붙였다. 별것 아니라는 듯 그저 그러고 있을 뿐인데도 잠시 후 대문은 장정 한 여남은 명이 들이미는 것마냥 쩌그덩쩌그덩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뿐 육중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땅딸보가 나섰다.
"아우는 저리 물러서. 이제 형님이 솜씨를 좀 보여 주지."
말라깽이는 머쓱해서 물러섰으나 천룡사 대문에는 손바닥 자리가 한치 깊이나 패어 있었다. 땅딸보는 손가락 마디를 톡톡 꺾으며 어정어정 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몽톡한 손가락을 확 펴 문에 대고는 안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문 열어라. 냉큼 이 문 열지 못해?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문전박대하다니 인정도 사납구나. 이렇게 밤새도록 비바람 속에 세워 둘 작정이냐? 에잇 고약한 놈들!"
땅딸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대문을 확 긁어 내리자 문에 박힌 주먹만한 쇠못들이 투두둑투두둑 퉁겨 나와 획 날아갔다. 그러자 땅딸보는 한껏 신명이 나서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대문을 긁어댔고, 쇠못 퉁겨 나오는 소리가 어둠 속을 진동했다.
그래도 사원 안에선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형님, 이 절간엔 늙은 화상이고 젊은 화상이고 싹 뒈져 버린 모양이오."
그러자 아마 맏이인 듯 백의를 걸친 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묵묵히 사원을 쏘아보았다. 연달아 즐비하게 늘어선 추녀들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삐쭉삐쭉 치솟아 있었다. 이름 그대로 천룡사였다.
이윽고 백의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인같이 쨍쨍했다.
"천룡사는 운남에서 제일 큰 사원이다. 사람이 없을 리 없어. 천하의 무예 고수들이 수두룩할걸세. 그렇지 않고서야 그 보배를 지금까지 대대로 지켜 내려올 순 없었을 테지."
"하기는 큰형님 말도 맞소. 하나 한 놈도 기어 나오질 않으니 좀 이상하잖소? 가만, 아예 대문을 박살내 버릴까? 얼마나 견디나 한번 해 보자."
그때, 백의 사내가 쓱 그를 가로막았다. 산같이 육중한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이 열리며 사원은 차츰차츰 몸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만 괴괴하게 내려앉아 있을 뿐, 내부를 분간키는 어려웠다. 의당 있어야 할 인기척도 없었다. 한참을 지나도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문을 열어 놓았으니 소란 피을 것 없이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겐가?'
셋은 작정을 못한 채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강호의 험악함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자칫 섣부르게 나갔다가는 무슨 올가미에라도 걸려들지 않을까 내심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천룡사에서 친히 문까지 열어 주는데 꽁무니를 뺀다면 강호에서 비웃음만 살 게 뻔했다.
마침내 백의 사내는 마음을 다잡고 목청을 높였다.
"천룡사 주지는 들으시오. 대사막의 막북삼괴(漠北三怪)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소."
그리고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문 안으로 성큼 한 발 들여놓았다.
말없이 비를 맞으며 적막에 잠겨 있는 천룡사는 적이 안온했다.
그 무슨 살기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강호에서 굴러 온 이 세 사람은 이 평화로움에 오히려 주춤 놀랐다.
'제길, 어째 시원찮은걸. 이런 맥빠지는 절간이 천하 무림이 우러러 마지않는 성지라니. 강호에 자자한 명성은 다 뭐란 말이냐. 이따위에 도시 그 귀한 것이 있을 성싶지 않구나.'
세 사람은 시큰등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 커다란 사원 어디에서 천룡사 주지 일속(一俗) 대사가 도를 닦고 있는지 종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의 사내는 조급한 마음에 또다시 호기롭게 외쳤다.
"천룡사 사람들은 들으시오. 막북삼괴가 요긴한 일로 천룡사 주지를 만나러 왔소. 주지를 불러 주시오!"
그때였다. 불현듯 캄캄하던 사원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발이 불빛에 반사돼 현란함을 자아냈다. 세 사람은 눈이 부셔 일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번쩍 뜨고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이윽고 삐꺽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황색 승복을 입은 노승 둘이 천천히 다가와 공손히 읍을 했다.
"먼 길 오신 시주님들 같으신데 어서 선방(禪房)으로 드시지요."
"우리 같은 불청객도 천룡사에선 반갑게 여기는지 모르겠소."
"저희 사원을 찾아 주신 시주님이시면 모두 저희 사원의 귀객이지요. 어서 선방에 드시어 비를 피하십시오."
노승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합장했다. 셋은 으쓱해져서 두 노승의 뒤를 따랐다.
선방에 들어가 앉자 말라깽이가 먼저 점잔을 빼며 운을 뗐다.
"우리는 천룡사에 천하 없는 무예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 수 배울까 하여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노선사(老禪師)께서 천하의 기학(奇學)인 일양지공(一暘指功)을 한번 보여 줄 순 없겠소?"
노승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저희 천룡사는 변강 소국 대리(大理)의 일개 사원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 절세의 무예라니요, 허허허……. 어디서 헛소문을 들으신 게로군요."
그러자 백의 사내는 입 꼬리가 일그러지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정녕 이럴 테요?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대리 단씨 (段氏)의 일양지공이 다 헛말이라? 일양지공이 천하 절학(絶學)이라 남에게는 절대 비밀에 부친다는 것까지 알고 왔으니 따돌릴 생각일랑 아예 접으시오! 우리 삼형제는 그 일양지공을 한번 보고자 불원천리 예까지 온 것이오. 어서 보이시오!"
세 사람의 기색은 자못 살기가 등등했다. 두 노승은 오늘 일이 상서롭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쉬기를 권했다. 그러자 막북삼괴는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노승들을 쏘아보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아우들, 이자들은 우리들이 솜씨를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백의 사내는 한마디 외치더니 서서히 몸을 기울이는 듯하다가 노승 옆으로 획 날아가 잽싸게 그의 손목을 콱 틀어쥐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노승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단아한 고승의 풍모 그대로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래도 귀사에 무예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테요?"
백의 사내는 강때 사납게 으르댔다. 노승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곁에 있던 노승이 분기탱천하여 백의 사내를 덮치려
하자 그는 되레 한 팔을 휘휘 저었다.
"사제, 사제…… 그만……."
그는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그러자 노승은 주먹을 불끈 쥔채 백의 사내를 노려보기만 했다.
백의 사내는 일순 분근착골(分筋錯骨) 초수를 펼치며 노승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다. 순간 수백 마리 뱀에게 온몸을 물어뜯기는 것 마냥 혹독한 고통이 밀려와 노승은 연신 신음 소리를 뱉어 냈다. 백의 사내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렸다.
"일양지공만 가르쳐 주면 놔주지."
"시주님, 일단 그 손부터 놓고 말씀하시오. 우리들은 무예를 모르오. 설사 안다고 해도 당신들처럼 심성이 곱지 못한 사람들한텐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소!"
곁의 노승이 분을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말했다. 그러자 땅딸보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심성이 어쩌고 어째? 그래, 너희 천룡사 놈들 심성은 어떠냐? 어디, 심성 고운 천룡사 놈들 맛 좀 봐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땅딸보는 팔짝팔짝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노승의 가슴팍에도 못 미칠 정도로 키가 작은 땅딸보가 노승의 코끝에 닿을락말락하니 뛰어오르니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
었다. 그러나 그의 내력은 보통이 아니라서 그가 뛰어오를 때마다 그 내력의 힘이 노승에게 확확 밀려가, 노승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한편 난데없이 막북삼괴가 나타나 소란을 피우자 천룡사 화상들은 모두 깨어나고, 반야원(般若院)에도 어느새 아홉 선사(禪師)가 나와 좌정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갈한 모습으로 한치도 흐
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자태였다. 한가운데 앉은 화상이 제일 젊어 보였는데, 용모가 수럭하고 맑은 기품이 우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선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지님, 아무래도 우리가 나가 봐야 할 모양입니다."
한 화상이 넌지시 의향을 건네자 젊은 화상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러 사숙님과 사형님들, 그럼 제가 한번 나가 보지요."
젊은 화상은 다소곳이 여덟 화상들 앞을 물러나와 선방으로 향했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고 조용히 선방으로 들어섰다.
막북삼괴는 살기를 내뿜으며 이제 막 두 노승을 옥죄고 있었다.
한 노승은 팔이 꺾이고 허리가 눌린 채, 또 한 노승은 바닥에 나뒹굴어진 채, 느닷없이 덮쳐 든 세 무뢰한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젊은 화상은 고고한 자태로 태연자약하게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그러자 막북삼괴는 소리난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우리가 귀사의 노승 두 분과 담소중이니 거기선 참견하지 마시오!"
말라깽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두 노승은 다 죽어 가면서도 반색을 하며 외쳤다.
"아이고, 주지님?"
그 소리에 막북삼괴는 흠칫 놀라 그러쥐었던 노승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똑바로 그 젊은 화상을 쏘아보았다.
"소승이 천룡사 주지 일속입니다. 천하에 욕(欲)은 많으나 나는 하나뿐이니 일욕(一欲)인데, 일욕이 곧 일속(一俗)입니다."
막북삼괴는 일속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통성명을 하느라고 저러나 할 뿐이었다.
"자네가 천룡사 주지라, 이 말이렷다? 그렇다면 어디 일양지공을 한번 보여 봐라. 그저 견식이나 좀 넓히려고 그러는 것이니!"
땅딸보가 사뭇 거드름을 피우며 대뜸 나섰다. 그 말에 일속은 초연히 웃으며 천천히 응대했다.
"청룡사의 무공은 단지 호신용일 뿐, 다른 사람과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 분께서는 극구 천룡사의 무예를 보시고자 하나, 보여 드릴 수 없으니 죄송합니다."
"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로군!"
백의 사내는 대번에 남색이 사나워지며 거칠게 내뱉었다. 일속도 웃음을 거두고 사뭇 엄숙하게 되물었다.
"그래 세 분께서는 소승을 죽이고야 말겠다. 이 말씀입니까?"
"그걸 또 말해야 알겠느냐? 천룡사 일양지공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백의 사내가 외치자 그 말을 신호로 막북삼괴는 일속을 빙 둘러쌌다. 그와 동시에 백의 사내는 일속의 머리 위로 대뜸 손을 내뻗쳤다. 이제 그가 손끝만 까딱하면 일속은 불귀의 객이 될 판국이었다.
"흐흐흐…… 네 놈들이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너희들의 이 주지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어서 썩 내놓지 못할까!"
땅딸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두 노승은 기겁을 하며 냉큼 달려 들었으나 말라깽이의 일 장에 힘없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우리는 막북삼괴다. 나는 맏이 백응향비(白應向飛), 저기 저 땅딸보는 둘째 왜금차호(矮禽且虎), 그리고 이 말라깽이는 막내 세타명사(細駝明獅)다. 우리는 오로지 천룡사 비본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 비본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지."
백의 사내, 백응향비는 짓씹듯 뇌까렸다. 그가 여전히 손을 뻗치고 있는데도 일속은 여유작작 웃음을 머금은 채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천룡사 일양지공을 꼭 가르쳐 달라, 바로 그 말씀이지요?"
의외로 일속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백응향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중이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으나 천룡사 주지라고 나서는 걸 보아하니 필시 일양지공을 몸에 익히고 있음에 틀림없다! 일이 의외로 순조롭겠는걸!'
그러나 두 노승은 일속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속 대사가 막북삼괴에게 순순히 일양지공을 전수해 준다면 큰일 아닌가. 노승 중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주지님, 안 됩니다. 저들은 심보가 고약한 놈들입니다."
그러자 왜금차호가 눈을 부라리며 훌쩍 날아올라 노승의 뒷덜미를 낚아채더니 검 끝으로 목을 겨누었다. 한마디만 더 소리치면 죽일 기세였다.
"세 분께선 그만 무례한 행동을 거두심이 좋겠습니다."
일속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침착하게 말했다. 백응향비는 냉소를 쳤다.
"천룡사 일양지공 비본만 주신다면야 여부가 있겠소?"
"참, 내가 한 가지 잊고 있었소이다. 천룡사 비본을 보자시지만 저희 천룡사에는 사규(寺規)가 있으니 어쩝니까? 천룡사 사규에는 본 사의 승려가 아니고는 그 비본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일속은 짐짓 농조로 말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백응향비는 싸늘하게 한마디 내쏘고는 손을 홱 치켜 들었다.
"이래도 말 못하겠느냐?"
"좋소! 그렇게도 일양지공이 보고 싶다는 말이지요?"
일속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손가락을 들었다. 백응향비는 일속이 그저 손가락을 쳐드는 것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수리에 선뜩 하는 기운이 감돌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백응향비는 가소롭다는 듯 일속을 노려보았다.
하나 왜금차호는 백응향비의 머리를 쳐다보고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울상이 되어 더듬거렸다.
"마, 맏…… 형님…… 아이고 맏형님……."
세타명사도 그의 머리만 멍하니 바라볼 뿐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말도 못했다. 백응향비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이 화등잔만해져서는 얼른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그는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정수리가 온통 반질반질한 것이 머리칼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일속이 단지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단번에 머리칼을 통째로 날려 버리다니……. 그는 혼이 다 빠져 버릴 지경이면서도 애써 속내를 감추며 조심스레 일속을 뜯어보았다.
그렇다고 백응향비가 그 정도로 물러설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악이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
"이 정도로 물러설 막북삼괴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 사원은 떼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응향비가 먼저 날아오르고 뒤이어 왜금차호, 세타명사도 일속 대사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승들은 덤벼들 생각은 않고 한켠으로 물러서서 팔짱을 긴
채 느긋하게 구경만 했다.
막북삼괴에게 둘러싸인 일속은 긴장한 빛이라곤 하나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팔소매를 너울거렸다. 그러다 가끔 손가락 하나를 세워 가볍게 툭툭 내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팍팍 지풍(指鳳)이 일
며 매서운 바람이 세 사람에게 밀어닥쳤다.
막북삼괴로 말하면 대사막을 주름잡던 효웅(梟雄)들로서 그곳에선 무공으로 이름깨나 떨치던 자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만 일속 앞에서는 털 뽑힌 장닭 모양 겁을 잔뜩 집어먹고 주춤거리며 불시에 공격해 오는 지풍에 반 걸음도 채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응향비는 속이 덜덜 떨리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호기롭게 외쳐댔다.
"어서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아라. 안 그랬다간 이 천룡사는 재앙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일속은 코대답도 않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춤을 추듯 가볍게 팔소매를 너울거렸다. 그럴 때마다 팍팍팍 매섭게 지풍이 휘몰아치며 막북삼괴를 죄어 들어갔다. 셋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
속을 막아냈지만 무슨 수를 써도 허사였다. 진작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의 머리칼마저 뭉텅뭉텅 날아가 버린 터였다. 일순 일속이 한층 힘을 가하자 막북삼괴는 더 이상 버터 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셋이서 일시에 한데 엉켜 나가넘어지고 말았다.
일속과 두 노승은 두 솥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막북삼괴, 당신들이 우리 천룡사의 절세 무학인 일양지공 비본을 보려 한다면 당신들은 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천룡사의 중은 될 수가 없지요. 천룡사는 대리국의 국사(國寺)니까요. 설사 천룡사에 들어와 중이 된다 하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흘러야만 당신들은 일양지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양지공은 대리 단씨 가문의 가학(家學)이기 때문이오. 소승은 천룡사 중이 된 지 얼마 안 되지만 단씨 가문 사람이기에 일양지공에 대해 얼마간 알고 있는 겁니다
."
일속의 말에 백응향비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아니, 방금 일속의 지풍에 단단히 혼이 난 터라 도저히 입을 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네 셋이 이 천룡사에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왜금차호는 눈망울을 뒤룩거리며 일속을 쏘아보다가 물불 가리지 않고 소리를 내질렀다.
"일속 대사, 잔말 말고 어서 천룡사 비본을 내놓아라! 끝끝내 못 내 놓겠다면 이판사판으로 싸워 볼 테다!"
그러더니 왜금차호는 벌떡 일어나, 괴상하게 생긴 붓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붓 두 개를 놀리며 붓 끝으로 일속의 앞가슴 대혈을 향해 똑바로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일속 대사가 손가락을 한 번 가볍게 내두르자 그의 붓 두 개는 대번에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연이어 일속이 한 번 더 손가락을 들어 혈도를 가리키자 그는 혈도가 찔려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응향비는 눈알이 뒤집혀서는 아우성을 치면서 몸을 솟구쳤다.
일속이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려고 기를 모으기 전에 그 틈을 타 잽싸게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으스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백응향비가 획 몸을 날리자마자 일속은 어느새 새끼손가락에 기를 모아 백응향비를 겨누고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것도 다 일양지공이냐? 그런 아이들 장난 같은 짓은 당장 집어치ㅇ!"
백응향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순간 어떤 강력한 힘이 온몸을 잡아채는 듯하더니 정신이 아찔해지며 가을 낙엽 떨어지듯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제길, 신공(神功)은 신공이로군!"
백응향비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혼자말로 나직이 투덜거렸다.
백응향비까지 그 지경이 되자 세타명사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저 일속을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토록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으니 중년 나이에도 천룡사 주지가 됐겠지. 일양지공은 실로 천하 기학 중에서도 기학이다. 일거수일투족이 저렇게도 힘이 있고 자유로을 수가 있는가.'
그는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되자 막북삼괴는 일양지공에 대해 더욱 침을 흘리게 되었다. 그들 셋은 오금을 못 펴고 주저앉아서도 날카롭게 일속을 노려보았다.
"일속 대사, 이 자리가 무덤이 된다 해도 일양지공 비본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이 막북삼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 그러니 천룡사가 피로 물들기 전에 어서 그 비본을 내놓기나 하시오!"
백응향비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외쳐댔다. 막북삼괴는 자기들이 지닌 암기(暗器)들을 믿고 끝끝내 일양지공 비본을 손에 넣고자 대들고 있는 것이었다.
"천룡사가 대리의 국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물과 불에는 결코 견디지 못할걸!"
백응향비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금 덧붙였다. 천룡사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수작이었다.
"세 분 시주님은 소 심줄보다 질기시군요. 고작 그따위 재간으로 우리 천룡사를 어떻게 하겠다구요? 정말 가소로울 따름이오."
일속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또다시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세타명사가 흠칫 놀라 백응향비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나중에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만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백응향비는 일속의 손가락을 노려보다가 도저히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좋소! 오늘은 이만 가지! 그러나 후일, 필히 다시 찾아을 테니 대비나 단단히 해 두시오. 오늘은 사정을 두어서 그저 방어만 했으나 그때 가선 우리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자, 아우들 이만 가세나!"
백응향비는 짐짓 배에 잔뜩 힘을 넣고 외쳤다. 그러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도 일속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백응향비 뒤에 바싹 붙어서서 줄레줄레 문께로 걸어갔다. 밖에선 이미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공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의 웃음이라기보다는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기피한 소리였다. 뒤미처 숱한 사람들이 사원 지붕 위를 치 달려오는 듯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뒤따랐다. 한 순간 웃음 소리는 뚝 멈추고 발자국 소리도 멎어 버렸다. 천룡사는 일순 정적에 잠겨 들었다.
이윽고 웅근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날카롭게 내리꽃혔다.
"천룡사가 대단하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고 있는 터, 일양지가 천하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음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렇다고 대리국에서 감히 이 노옹을 얕보진 못하겠지."
크게 외치는 소리도 아니요, 먼 곳에서 나는 듯싶었지만 그 목소리는 적이 또렷했다. 소리만으로도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말소리가 끝나자 어느새 문 밖에 사람이 사뿐 내려서는 기척이 전해 왔다. 이어서 손을 대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문이 스르르 열리고 험상궂게 생긴 웬 노인이 하나 나타났다. 불긋불긋한 얼굴엔 군살이 불뚝불뚝 튀어나왔고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얼룩덜룩한 범가죽 옷을 걸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적마다 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이는 족히 오륙십은 됐으련만 그 기상이 흥맹하기 그지없었다.
"또 오셨군요."
일속은 탄식하듯 말했다. 달갑지 않은 손님임이 분명했다.
노인은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어제쳤다.
"일속 대사, 지난번엔 자넬 따르는 졸개들이 많아 어찌어찌 날 이겼는지 몰라도 이번엔 그리 수월치 않을걸."
그리고는 막북삼괴를 힐끔 보더니 고개 한 번 끄덕이지 않고 텁텁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막북삼괴가 아닌가?"
백응향비는 벌써부터 이 노인의 흉맹스러움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노인은 대체 누굴까? 누군데 자기들을 알고 있을까? 하긴 천하에 자기가 알고 있는 영웅호걸들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지만
이 영감이 누군지는 도시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언젠가 전지(塡池) 옆에 백 살하고도 열 살도 더 먹은 노인이 하나 살고 있는데, 그 노인은 행동이 괴이하고, 악한 짓이든 착한 짓이든 분별 없이 제멋대로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아마 이 노인이 그 영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응향비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당돌한 말씀일지 모르겠사오나 노인께서는 강호 모두가 칭송하는 전변노조(塡邊老祖)가 아니십니까? 이거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노인은 막북삼괴가 자기를 노조라고 칭하자 적이 흐뭇하여 얼굴에 희색을 띠며 ,쩔껄 웃었다.
"자네 막북삼괴도 여기 일양지 비톤을 얻으러 왔겠다? 쯧쯧쯧,
그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부질없는 짓. 일양지공은 이 천룡사를 지키는 대리 단씨의 전가지보야. 한데 그런 것을 그래 그렇게 수월하게 자네들한테 내줄 성싶던가?"
"노옹께서 그렇듯 이 사원의 고충을 잘 알고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순순히 돌아가 주십시오."
일속이 얼른 끼여들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백응향비네 셋은 전변노괴를 더욱 열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된 채 그저 한시 바삐 줄행랑을 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운수 좋게도 이 전변노괴가 왔으니 힘을 합쳐 일양지 비본을 얻게 되면 그보다 더 큰 수확이 어디 있으랴.
"일속 대사, 전번엔 내가 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번 더 겨루어 볼 일념으로, 내 그새 몇 가지 법술을 새로이 익혔지. 이번에도 내가 진다면 차후론 절대 천룡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네."
전변노괴는 호기롭게 내뱉었다.
"노옹, 저는 일속입니다. 천하 세상일은 만사라지만 전 일속일 따름이외다."
일속의 대답에 백응향비는 새삼스럽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불문에 입문한 사람들은 자고로 무념(無念), 무진(無塵), 무속(無俗), 무생(無生)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데 저 중은 어찌하여 일속이라 자처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직도 속세에 그 어떤 미련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
"하면 거기는 아직 그 어떤 속념 (俗念)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이 말이오?"
백응향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뜸 물었다. 의표가 늠름한 일속은 종사(宗師)의 풍모를 차리며 점잖게 읍을 하고 말했다.
"소승은 생사와 선악에 대해서는 이미 간파했습니다만 시비(是非)에 패해서는 아직 포기를 못하고 있습지요. 그래서 세상일에 부딪히기만 하면 우선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 보게 되는 것이오. 말
하자면 이 일속(一俗), 즉 이 시비 속념 하나만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백응향비는 그 말이 같잖기 그지 없었다. 시비를 포기하지 못했다면 기실 생사에 대해서도, 선악에 대해서도 간파했다고는 할 수 없는 노룻 아닌가. 그렇다면 일속은커녕 응당 다속(多俗)이라 해
야 옳을 터, 백응향비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어젖혔다.
"그렇다면 일속은 빈말이로군. 그대는 다속이야, 다속! 집념이 강하고 시비에 얽힌 온갖 속념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일속이라고 자처하다니, 역겹다, 역겨워."
이에 일속은 순간 깨닫는 바가 있어 똑바로 백응향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딴은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어요. 정말 왜 일속이라고 했지? 다속이라 하지 않고……."
모름지기 불문에 몸담은 사람들이란 모두 항시 자기 주위를 돌아보고 늘 반성하며 또 그 속에서 그 어떤 선리(禪理)를 깨쳐 보려고 골몰한다. 차제에 일속 역시 그러했다. 그는 백응향비의 말에 그 어떤 선리가 있는 듯하여 그것을 따져 깨쳐 보려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변노괴는 원래 백응향비의 말을 듣고 내색하진 않았으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한심한 자식, 중한테 교리를 가르치려 들어? 이거야 정말 눈먼 봉사가 앞장서겠다는 격이 아닌가 ?'
그러나 천만 뜻밖으로 일속이 백응향비의 말에 적이 얼굴이 상기된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는 입이 절로 벌어지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보아하니 이 막북삼괴도 여간이 아니구나. 말 몇 마디 안 하고도 일속을 잴쩔매게 만들었으니……. 어쨌든 잘됐다!'
전변노괴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뜸 내뱉었다.
"일속, 자넨 틀림없는 속인(俗人)이야! 자, 그렇게 넋 놓고 있지 말고 어서 나하고 누가 더 센가 다시 한 번 가루어 보자니까, 필시 내가 이기겠지만, 그땐 자네 영락없이 그 천룡사 보배를 꺼내
보여야 하네."
그러자 일속은 언뜻 정신을 차린 듯 정색을 하며 말했다.
"노옹께서는 수차례나 천룡사에 왕림 하셨으니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소승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오나 천룡사 일양지공은 대리 단씨 가문의 가학으로, 남에게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다니 까요."
일속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백응향비가 따지듯 물었다.
"사원 사람들은 불문에 입문한 사람들 아니오? 불문에 입문한 사람은 물욕이 없어야 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독점할 생각은 말아야 하는 거요. 참기름 서너 병을 얻어도 자기는 혀끝에 묻혀나 보는
정도고 나머진 모두 부처님께 공양함이 불문의 교리이거늘 천하의 천룡사가 그 잘난 비본을 독점해서야 말이 되겠소? 세상에 내놔서 무림 창생들에게 득을 줘야지, 그렇게 숨겨만 두고 있는 것은 불문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 아니오?"
일속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말 역시 그럴 법한지라 그는 다시금 자기가 왜 다속이라 이름하지 않고 일속이라 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편 전변노괴는 전변노괴대로 자기 좋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난 세 번이나 왔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새파란 일속한테 지고 말았다. 하나 오늘은 재수가 좋을 것 같군. 일속이 백응향비 말에 정신이 어지러워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지. 암, 없고말고. 이 기회에 손을 쓰면 범이 토끼를 잡는 격이다.'
"일속, 자, 어서 한번 겨루어 보자. 겨루어 보자니까!"
전변노괴는 발싸심이 나서 재촉을 해댔다. 곁에 있던 두 노승은 몹시 불안한 기색으로 일속을 바라보았다. 일속 대사가 저렇듯 정신을 엉뚱한 데 팔고 뒤숭숭해 있으니 자칫 당하고 말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마음을 졸이며 일속을 바라보기만 할 뿐, 두 노승은 감히 전변노괴에게 대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중에서 천룡사 주지이며 대리 단씨 가문 사람인 일속만이 일양지에 능했고, 따라서 전변노괴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오
직 일속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순 일속이 정색을 하며 외쳤다.
"아니, 노옹께선 이미 저에게 세 번이나 지셨는데 또 뭘 겨루시자는 말씀이오?"
"흥, 일속! 이걸 봐라."
전변노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뼈다귀 한 개를 척 내보였다. 보아하니 죽은 지 오래 된 영양의 뼈로 닳아서 반들반들한 것이 여러 사람 손을 거쳤음에 틀림없었다.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다. 청해(靑海) 대사원 탑이사(塔爾寺)의 승축법기(憎祝法器)다. 자, 이걸 우리 둘 사이에 놓고 서로 내력을 내치되 이 법기엔 금 하나 내지 않는다면 그쪽이 이기는 것으
로 하자."
"법기라군요? 그렇다면 안 되지요! 법기를 쳐서야 됩니까? 다른 것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법깁니까? 다른 것으로 합시다."
일속은 의아했다. 그러자 전변노괴는 껄껄 웃었다.
"일속, 이 작자야. 자낸 정말 다속이군, 다속! 이건 그저 법기일 뿐이네. 부처님 공경이야 마음에 달린 것,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법기라고 해서 신경 쓸 필욘 없지 않나. 내가 이 물건이 법기라
고 밝혔으니 망정이지, 아무 말 안 했다면 자네가 법기인지 뭔지 알 턱이 있는가? 그랬으면 이걸 쳐 갈기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어서 내기나 하자니까. 남들이 들으면 자네를 뭐라고 비웃겠나?"
일속은 언뜻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여 급히 읍을 하며 대답했다.
"노옹께서 일깨워 주시니 고맙습니다."
둘은 영양 뼈를 중간에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막북삼괴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영양 뼈를 내쳐 누가 먼저 부스러뜨리는가 하는 내기라면 몰라도 금 하나 내지 않고 파두는 내기를 하다니. 그거야 힘만 적게 쓰면 되는 터, 식은죽 먹기 아닌가.
그러나 정작 일속과 전변노괴가 마주앉아 공격 태세를 취하자 막북삼괴는 대번에 기색이 달라졌다. 그렇게 우습게 볼 내기가 아닌 성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양 뼈를 갖고 승부를 가르는 내기라면야 각기 제 마음대로 힘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렇지가 않았다.
문제는 서로 상대방이 내치는 기문을 이기면서 영양 뼈를 쳐야 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면 쓰러지게 된다. 그것을 방지하려면 자연 두 켠이 서로 경계하면서 있는 힘을 다 내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힘을 다 쓰면서도 복판에 있는 영양 뼈를 상하지 않게 하자면 강유(剛柔)가 결합된 대단한 무공이 있어야 했다.
힘이 너무 강하면 복판에 있는 뼈가 부스러질 것이고 약하면 상대방의 힘에 못 이겨 꼬꾸라질 판이었다. 막북삼괴는 하나같이 가슴이 서늘했다. 그러나 이윽고, 일속 대사와 전변노괴를 번갈아 보던 백응향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어쨌든 전변노괴는 미리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왔을 테니 일속보다는 승산이 클 터였다.
' 변노괴가 이기면 우리 막북삼괴한테도 아주 유리하다.'
일속 대사와 전변노괴는 영양 뼈를 복판에 놓고 좌정하여 선뜻 손을 쓰지 않고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일속은 먹같이 시꺼먼 전변노괴의 손바닥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윽이 바라보고는 말했
다.
"시주님께서는 절기인 흑심장(黑心掌)을 수련하셨군요."
노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속은 내심 전변노괴가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한 순간 팍 소리가 일며 한 가닥 장풍이 일속 앞으로 확 밀려왔다. 일속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영양 뼈도 일속 쪽으로 반 자 가량이나 날아왔다. 장풍은 적이 알맞춤했다.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셌다면 영양 뼈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그보다 약했다면 일속에게 그런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없었을 터였다.
전변노괴는 처음 공격이 뜻대로 되자 득의양양하게 일속을 다그쳤다.
"자, 어떤가? 이젠 그만 두 손 들지그래!"
기실 전변노괴는 오랫동안 머리를 쥐어짜 이 내기를 고안해 냈다. 그는 일속과 벌써 세 번이나 겨뤘지만 일속이 익히고 있는 대리 단씨의 가학인 일양지공 앞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었다. 해서 이번에는 이런 엉뚱한 내기를 궁리해 냈던 것이다.
일속은 영양 뼈를 보며 생각했다. 전변노괴가 툭하면 천룡사로 달려와 시끄럽게 구는 것을 막으려면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전변노괴가 다시는 이 불문의 평화를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다.
'내 스스로는 무속(無俗)을 바란다만 세인이 무속을 허용치 않고, 그나마 바라는 일속마저도 이 전변노괴가 허용치를 않으니 별도리가 없구나.'
일속은 내심 자탄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썼다. 일속이 식지를 들어 팍 하고 지풍을 내치니 영양 뼈는 노괴 쪽으로 반 자 가량 도로 날아갔다. 일양지공에도 이렇듯 강유가 결합되어 있을 줄 미처 몰랐던 전변노괴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 켠으로 밀려온 영양 뼈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일양지공은 본래 일종의 양강지공(陽剛之功)으로서 한 손가락으로도 상대방의 강검철창(鋼劍鐵槍)도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절기중의 절기였다. 일양지공은 크게는 큰 산도 무너뜨릴 수 있고 작게
는 쇠구슬도 부술 수 있는, 예컨대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깨쳐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공이다. 전변노괴는 일양지공의 이런 강한 일면만을 알고 있었을 뿐 거기에도 강유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이런 내기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런 내기라면 양강한 일양지공에 영양 뼈는 여지없이 박살날 게 뻔했고 일속은 톡톡히 망신만 당해 비본을 안 내놓고는 못 배기지 싶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은 번갈아 한 번씩 공격을 했다. 영양 뼈는 그들이 내치는 기운에 밀려 둘 사이를 휙휙 날아다녔다. 전변노괴는 노심초사하며 이제나저제나 이 탑이사의 법기가 일속의 지풍에 부서지려나 애를 태웠다. 그러나 영양 뼈는 부서지기는커녕 그저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그러는 모양을 지켜 보면서 막북삼괴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내력은 갈수록 기세를 더해 지금은 아주 강한 기운을 서로에게 내뿜게 되었다. 영양 뼈 아니라 세상 어
떤 단단한 물건이라도 그 사이에서 당장 박살날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도 영양 뼈는 두 사람 사이를 열심히 오가고만 있지 않은가.
그때였다. 문득 탁 소리가 나며 영양 뼈가 드디어 짝 두 동강이나 버렸다. 그런데 그것은 불행히도 일속의 손이 아니라 전변노괴의 손에서였다. 막북삼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듯 양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일속은 빙그레 웃으며 읍을 했다. 노괴는 분이 끓어올라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좋다. 이번은 네가 이긴 걸로 치지. 하지만 다음 내기는 그리수월치 않을 게다. 다른 내기를 한 번 더 하자."
"다른 내기라니요? 무슨 내기요? 졌으면 의당 순순히 돌아가셔야지 또 내기를 하자니, 대체 무슨 말씀이오?"
일속의 말에 전변노괴는 두 눈을 부릅뜨며 윽박질렀다.
"일속 대사, 그쪽이 주인이고 나는 객이다. 그걸 잊었는가? 주인이 객을 내쫓는 법도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겨루어 보자. 그래도 내가 지면 그땐 순순히 물러
나지."
노괴는 막무가내로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일속은 하는 수 없겠다는 듯 시답잖게 한마디했다.
"정 그러시다면 또 한 번 가르침을 받아 보지요."
막북삼괴는 전변노괴가 이번엔 또 무슨 재주를 부려 보려고 저러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변노괴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일찍이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이 천하에 독보적이라 죽은 사람도 기사환생(起死還生)시킨다는 소릴 들은 터, 하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그런 재간이 있다는 걸 도시 믿을 수가 있겠
나. 본시 무예란 사람을 죽이는 데 쓰는 것이거늘, 오히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무예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오죽이나 좋겠나.
소문대로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이렇게 해 보자. 내가 내 무공으로 사람 하나를 죽일 테니 자낸 자네 무공으로 그 사람을 살려 보란 말이네. 살려낸다면 내가 진 것으로 하지."
일속은 표정을 굳히고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로 난처한 노룻이었다. 무룻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만민을 구하는 것이 불가의 섭리거늘, 전변노괴의 청을 받아들여 노괴가 먼저 사람을 죽 이고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면 기실 자기가 두 눈 멀정히 뜨고 살생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자의 도리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내기라면 찬성할 수 없소이다."
일속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전변노괴는 한창 몸이 달아 있는 터라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찬성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 불문에선 사람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환생시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목전에서 살생하는 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지요. 이번 내기는 서로 비긴 걸로 치고 어서 돌아 가십시오."
그러자 전변노괴는 코방귀를 뀌었다.
"비겼다고 하자구? 아니 겨뤄 보지도 않고 어떻게 비겼다고 하잔 말인가? 내가 이길 수도 있는데 비겼다고 하자?"
그러는데 한켠에서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노승이 한걸음 성큼 나서며 일속에게 읍을 했다.
"주지님, 소승으로 내기를 걸어 보시지요."
일속은 이 내기가 아주 위태로운 것인지라 말없이 그 노승을 바라보기만 했다.
"주지님, 부처님께서는 내가 지옥엘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엘 가겠느냐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번 일로 설사 제가 지옥엘 간다 하더라도 추호도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노승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일속도 더는 말을 못하고 전변노괴의 내기에 응하고 말았다.
노승은 두 사람 사이에 앉아 결부좌를 한 채 조용히 선정(禪定)에 빠져 들었다. 일속과 전변노괴는 모두 운기(運氣)를 시작했다.
전변노괴는 노승의 심맥을 내리치려는 것이고, 일속은 그것을 막아 노승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한판이 막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일속이 노괴의 장풍을 막을 수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할 경우엔 노승은 당장 심맥이 끊겨 꼬꾸라질 것이었다.
일속은 먼저 노승에게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이런 위험한 일을 자처해 나선 건, 모두 천룡사가 재난을 면케 하기 위함이었다.
'일속아, 이 경난(慶難) 사숙의 선공(禪功)을 보아라. 얼마나 깊고 두터우냐. 목숨이 걸린 이런 위태한 순간에도 낮색 하나 변치 않으니, 사숙에 비하면 넌 얼마나 부족하냐.'
일속은 이렇듯 자신을 힐난하며 노괴를 바라보았다. 전변노괴는 연신 헤헤거리고 있었다.
한편, 한켠에 서 있던 백응향비는 전변노괴의 꾀가 참으로 비상하다고 경탄해 마지않고 있었다. 전변노괴가 정말로 이번에 일속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일양지공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속
의 손을 통해 천룡사의 고승 하나를 죽이는 것이 된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천룡사의 모든 중들은 일속을 원망하게 되고, 일속도 참괴에 빠질 것이다. 그때 가서 전변노괴는 일양지 비본을 내놓으라고 일속을 다그쳐 일속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할 심산임에 분명했다. 백응향비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섬뜩하리만치 정적이 휘감돌았다.
한 순간, 정적을 깨며 전변노괴가 소리쳤다.
"일속, 이제 손을 쓸 터이니 조심하게!"
일속은 손바닥으로 노승의 심장을 막아 보호하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손을 쓰시오."
전변노괴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한 번 흩뿌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세우면서 일 장을 팍 내쳤다. 엄청나게 큰 힘이 노승에게 훅 밀려왔다.
일속은 노괴가 도대체 얼마나 큰 힘을 쓸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노승의 심맥을 보호하고 있는 터에 자신의 손에다가 무작정 온몸의 힘을 다 모을 수도 없었다. 그 힘이 너무 크면 자칫 그의 손으로 노승의 심맥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얼마만한 힘을 넣어야 노승의 심맥을 다치지 않고 노괴의 장풍을 막아낼 수 있을지 진정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무룻 무예를 겨룸에 있어 방어는 어디까지나 피동적이며 소극적일 뿐, 일속은 이렇게 막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나 다행히도 이번의 이 일 장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일속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이어 전변노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큰소리로 외쳤다.
"자, 조심하라구!"
그는 흐흐흐 웃더니 죽을 힘을 다 내어 장풍을 팍 내쳤다. 그러자 노승은 욱하고 가슴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앉은걸음으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 왈칵 피를 토했다.
"이봐, 이젠 졌지? 흐흐흐…… 이젠 졌지?"
전변노괴는 일속을 손가락질하며 징그럽게 웃어댔다.
일속은 노괴가 얼마만한 장풍을 내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노괴가 장풍을 내치는 찰나에 그 힘을 가늠하여 자기 손의 역도(力道)를 맞춤하게 재빨리 높였다. 그러나 비록 순간적인 차이였을 망정 일속은 한발 늦고 말았다. 노승은 결국 크게 상해 버렸다.
일속은 분기탱천하여 재빨리 전변노괴에게 손을 쓰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노승이 더듬더듬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부, 부처님 말씀에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라사대 내, 내 몸에 고기가 많으니 가히 너희를 배, 배부르게 할 수 있도다. 그러니 수리개가 마, 말하기를 내 보기엔 횐 비둘기 한 마리보단 저, 적은
것 같다. 그, 그러자 부처님은 그럴 수가 있나 하고 사, 살점을 베어 내 저울에 달아 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온몸의 사, 살점을 다베어 내고서야 저울의 근수가 비, 비슷해졌다……."
노승은 안간힘을 쓰며 불전(佛典)을 외우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연거푸 피를 토해냈다.



제2장 일양지신공
대리 단씨의 전가지보인 일양지공은 천하에 독특한 절세의 기공이다. 무림의 허다한 문파 중 소림파(少林派)의 무예가 출중하고는, 달리 일양지공을 비견할만한 것이 없었다.
대리 단씨는 일국의 황족으로 명성 높은 무림세가(武林世家)요, 거기다가 일양지공까지 갖추어 그 칭송이 천하에 자자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은 세세에 드문 일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물론 무예를갖춘 명문지족이 일찍이 없지 않았으나 대리 단씨처럼 그 명성과 위세가 현혁(顯赫)한 가문은 몇 안 되었다.
천룡사 노승은 전변노괴의 장력에 심맥이 크게 상하긴 했으나 그나마 일속의 보호로 숨이 아주 끊기지는 않았다.
전변노괴는 이 한 번 장풍에 판가름이 났다고 생각했다.
'내친김에 천룡사 중 놈 한두 놈은 더 맥을 끊어 놔야겠다. 그래야 이 천룡사 중 놈들 앞에 내 위신이 서지. 또 그래야 이 일속녀석을 궁지에 몰아넣어 일양지 비본을 뺏을 수 있다.'
백응향비가 보니 제아무리 일속이라도 이번에는 영락없이 당하고야 말 것 같았다. 전변노괴가 득의양양하게 비웃음을 날리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장풍을 내 쏘는데도 일속은 두 번 다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할 뿐 맥을 못 추고 있는 것 아닌가. 백응향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일순 일속의 이마에 땀방울이 숭글숭글 내돋고 머리 위로 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그런데 그 김은 묘하게도 한데 서려 흩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전변노괴는 흠칫 놀랐다. 그는 번번이 일속에게 지긴 했으되 기실 그를 그리 대단치 않게 여겨 왔었다. 일양지공이라는 절학을 익혔다뿐, 그렇지 않다면 제깟 놈이 감히 자기 적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속의 머리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보니 자기가 수십 년 간이나 연마해 온 내력과 견줄 만하지 않은가? 전변노괴는 적이 두려웠다.
반야원의 여섯 노승은 일속이 나간 뒤로 그때껏 눈을 내리 감고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잠이 든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좌정해 있었다. 그중 한 선사가 문득 눈을 뜨며 말했다.
"전변노괴야 그리 염려할 위인은 아니나 이제 곧 그보다 더 강한 적수가 올 것이니…… 하, 이 일을 어찌할꼬!"
빗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날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다.
전변노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노승의 심맥은 탁 끊어져 나가고 말 터인데, 조급해할수록 웬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변노괴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다잡은 다음, 혼신의 힘을 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미 기운이 다한 것이다. 전변노괴는 그만 맥이 탁풀려 두 팔을 툭 떨군 채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제야 일속은 얼굴이 불콰해지도록 웃었다.
"목숨은 다치지 않았으니 이만해도 다행입니다."
노승도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다소 펴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주님의 은덕으로 요행 죽음은 면했으니, 고맙습니다."
일속은 노승을 부축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전변노괴는 또 지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제정신을 차린 듯 얼굴이 온통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는 못 끝내! 다시 해야 돼!"
"일언이 의당 중천금(重子金)이어늘 무림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 어찌 이렇듯 식언을 하십니까?"
일속은 정색을 하따 한마디 내쏘았다. 전변노괴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씩씩거리더니 이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애먼 막북삼괴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소리소리 질렀다.
"모두 네 놈들 탓이야. 너희 막북삼괴 놈들만 없었어도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는 건데 너희 놈들이 온통 내 기를 흩트려 놓았어!"
졸지에 덤터기를 뒤집어쓴 막북삼괴는 어이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 차는 격 아닌가. 제풀에 제가 나가떨어지고는 엉뚱하게 트집을 잡다니……. 세 사람은 하나같이 두 눈
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전변노조님, 우리가 비켜 드릴 테니 어디 한번 우리 없는데서 겨루어 보십시오."
백응향비가 불쑥 내뱉었다. 말은 정중하게 했으되 비로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전변노괴는 대번에 한색이 하얗게 질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뭣이? 네 따위 것들이 내 일에 참섭을 하려 들엇?"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백응향비에게 한 주먹 힘껏 내질렀다. 다음 순간퍽 소리가 나며 백응향비는 동가슴을 부여잡은 채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시건방진 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렷! 내 오늘은 이쯤에서 사정을 두겠지만 앞으로 한 번 더 주둥아릴 놀렸다간 목숨이 남아 나지 못할 줄 알아라!"
전변노괴는 호통을 치며 발길질로 백응향비를 힘껏 밀치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백응향비는 몸을 추슬러 일어날 염도 못 내고 뻘건 피를 울컥을컥 토해냈다. 얼굴마저 흙빛이 되어서는 눈까풀을 까뒤집고 땅바닥을 정신없이 기어다녔다.
"아이고, 형님! 이걸 어쩌나, 이걸 어째……."
세타명사는 안달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땐 이미 중상을 입은 노승도 다른 노승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고 일속만이 남아 운공양식(運功養息)을 하고 있었다.
왜금차호는 일속의 눈치만 살피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조르르 달려가 넙죽 꿇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대사님 한 번만 봐 주십쇼! 어리석은 생각에 일양지 비본을 탐내기는 했으나 애시당초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었습니다요. 대사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저희 형님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네 ?"
일속 대사는 눈을 내리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백응향비는 곧 숨이 꺽꺽 넘어가면서도 왜금차호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 놈, 둘째야! 구차하게시리 목숨을 구걸하다니, 당장 집어 치우지 못할까! 어서 부축이나 해라. 가자!"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실은 그 역시 낙담하여 눈앞이 캄캄했다. 사원 문 밖을 나서면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전변노괴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앞가슴에 있는 참명혈(斬命血)을 직통으로 내질렀는데 혈 (穴)도 사혈 (Ff穴)이거니와 그 힘도 가히 돌을 빠갤 만했다. 백응향비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속은 눈을 내리감은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때 불현듯 염불 외우는 소리가 들려 오고 이내 문이 열리더니 노승 여덟이 줄지어 걸어왔다. 맨 앞에 더 늙으려야 늙을 수도 없을 만큼 연로한 노승이 꼿꼿이 등을 세우고 자못 위엄 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눈샙꼬리는 뺨까지 휘늘어져 봉황 문양을 그렸고 얼굴엔 불긋불긋 혈기가 돌았다. 학수동안의 도(道)가 높은 고승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주님이 탐심(貪心)을 버린다면 부처님께서도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고승은 막북삼괴 앞으로 곧장 다가오더니 적이 정중하게 말했다. 막북삼괴는 대사막에서 지내며 서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사내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똘똘 뭉치지 않았더라면 그 메마른 중사 속에서 그나마의 명성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왜금차호와 세타명사는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고 있다가 고승의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다 듣겠습니다."
백응향비는 이 고승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둘째, 셋째야, 그런 말은 듣지도 말아라. 난 이미 심맥이 끊긴터, 백방이 무효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나 세타명사는 백응향비가 뭐라든 아랑곳 않고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일심으로 고승에게 사정사정을 했다.
"대사님께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어떤 분부라도 다 따르겠습니다. 일각이 급하옵니다. 저희 형님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귀 사원을 위해 죽으라 하셔도 기꺼이 죽겠나이다."
고승은 장탄식을 했다.
"모름지기 탐심이 사람을 성나게 하고, 성이 나면 노(怒)하게 되고, 노하면 원(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원은 화를 부르게 되지요. 세 분이 진작에 이러한 인과 관계를 아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게 아닙니까."
세타명사는 자기가 이렇듯 애원하는데도 고승이 자꾸만 쓸데없는 말만 하자 화가 치밀어 홱 고개를 돌려 왜금차호를 바라보았다.
왜금차호는 도리질을 해 보였다. 우선 맏형의 목숨을 살리려면 무슨 모욕이든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타명사는 화를 속으로 꾹꾹 삭였다.
노승은 함께 온 일곱 선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룡사는 정지(淨地)입니다. 이 사람의 죄는 크나 불문의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구해 주십시다."
다른 노승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백응향비가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구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고승들은 즉각 백응향비를 둘러싸고 앉아 그의 몸에 손을 얹었다. 일양지공으로 그의 몸에 공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이었다.
이 대리 국사 천룡사의 본래 이름은 숭성사(崇聖寺)였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은 숭성사라 부르지 않고 대개 천룡사라고들 했는데, 여기에는 이 국사에 대한 깊은 존경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대리국이 흥성하게 된 것도 이 사원 덕이 컸다.
천룡사는 대리성(大理城) 밖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사원에는 탑이 세 개 있는데, 당나라 초에 세워진 이 탑 세 개 중에서, 제일 큰 탑은 16층으로 높이가 200여 자나 되었다. 탑 꼭대기에는
'대당 정관위 지경덕 조(大唐貞觀尉遲敬德造)' 라고 새겨 놓았다.
천룡사에는 다섯 가지 보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탑 세 개였다.
백응향비는 두 눈을 힘없이 감은 채, 가냘프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 반은 저승 문을 넘어선 이 백응향비를 도로 살려내기란 그리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여덟 고승 중 여섯 고승이 저마다 그의 여섯 개 맥을 짚어 눌렀다. 한 고승은 엄지손가락으로, 한 고승은 식지로, 또 한 고승은 중지로 그의 심맥을 짚었고, 다른 고승들도 제각기 손가락을 써서 여섯 개 심맥을 짚었다.
그 여섯 개 맥이란 수지육맥(手之六脈)인 태음폐경(太陰肺經), 궐음심포경(豚陰心包經), 소음심경 (少陰心經), 태양소장경(太暘小腸經), 양명위경(陽明胃經), 소양삼초경(少陽三焦經) 등이었다.
일양지공은 과연 신공으로 여섯 고승이 혈도를 누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응향비는 따뜻한 기운이 육맥을 따라 서서히 가슴속으로 흘러 들면서 차츰차츰 심장이 열리는 감을 느꼈다. 한참이나 지나서 여섯 고승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말없이 읍을 했다.
성미가 불 같은 왜금차호는 백응향비가 아직도 두 눈을 감은 채로 있는 것을 보고는 속이 탔다.
"아니, 이러고 그만둘 참이오? 하다 말고 그래 저대로 팽개쳐 두면 어쩌란 말이오? 어서 끝까지 책임을 져요, 책임을!"
세타명사도 십분 걱정스런 기색으로 백응향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백응향비는 몸을 꿈틀거리더니 또 서너 차례 피를 토하고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오래 전부터 천룡사 일양지공의 육맥신검(六脈神創)이 신묘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제야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됐습니다. 이 은혜 실로 백골난망이외다."
"아니, 형님, 여전히 그 지경인데 그래, 그런 말이 나와요? 저 중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자 백응향비는 기가 탁 막혔다. 이 무지막지한 둘째 입에서 그 무슨 총명한 말이 나오리란 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바이나 자기 목숨을 살려 준 은인에게 눈치코치 없이 구니 여간 낯뜨겁지 않았다. 백응향비는 왜금차호의 말엔 대꾸도 않고 다시금 정중하게 말했다.
"여러 고승들의 구명지덕은 앞으로 두고두고 보답해 드리겠나이다."
백응향비는 겨우겨우 허리를 일으키며 세타명사에게 어서 부축 하라고 눈짓을 했다. 그래도 왜금차호는 여전히 낮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구명지덕이고 뭐고, 형님 그럼 그냥 돌아가시겠다는 거요? , 형님이 그랬잖소, 이 대리 천룡사의 일양지공만 배우면 천하에 무서울게 없다고! 그런데 불원천리 예까지 와서 이렇게 멋없이 돌아가겠다는 거요?"
그러자 백응향비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왜금차호가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저 여덟 노승과 일속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노룻이었다.
백응향비의 기색이 마땅치 않음이 역력하자 눈치 빠른 세타명사가 얼른 나섰다.
"둘째형님,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부축이나 하세요. 어서 여길 뜨자구요!"
"잘 생각하셨소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절대 이 대리 천룡사의 일양지 비본을 넘보지 마시오! 천룡사에는 다섯 가지 보배가 있는데 그 다섯 보배 중에서 일양지 비본말고 천룡사 세 탑도 보배 중에 보배로 꼽히지요. 그 탑 세 개만큼은 다음날 시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소승이 친히 구경시져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일속이 읍을 하며 말했다.
백응향비는 간신히 몸을 굽혀 답례했다. 원래는 천룡사에 오면 단단히 트집을 잡아 일양지 비본을 뺏어 갈 작정이었는데 도리어 이렇게 큰 낭패를 보고 거기다 은덕까지 입고 떠나게 되니 실로 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금차호는 마뜩찮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뻐들뻐들하니 백응향비를 부축했다. 백응향비는 둘째와 셋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겨 대문 쪽으로 향했다.
일속과 여덟 고승이 문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세 사람은 읍을 하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 갔다.
일속과 여덟 노승은 막북삼괴가 산비탈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리 천룡사에 한동안 큰 재난이 따를 것 같습니다."
고승들은 일속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대사막의 막북삼괴까지 쳐들어와 비본을 뺏으려 하는 판이니 앞으로 그런 자들이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횐 눈썹의 노승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대개 스스로 걱정하여 마음이 번거로워지는 법이거늘 일속은 그럴 필요가 무엇이오?"
일속은 노승에게 깊이 허리를 굽혔다.
"사숙께서 일깨워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막북삼괴는 백응향비를 부축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채 반 리(里)도 못 와서 벌써 힘이 빠져 버렸다.
"동생, 여기서 좀 쉬세나."
"그럽시다."
왜금차호가 한마디하자 세타명사도 백응향비를 길 옆으로 눕히고 나란히 앉았다.
비 온 뒤라 날씨는 그런 대로 선선했다. 세 사람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제각각 심란한 마음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언뜻 어디선가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여어, 이게 누군가? 막북삼괴 아닌가?"
왜괌차호는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누구야?"
소심한 세타명사는 덜컥 겁이 나서 일어서지는 못하고 허리만 어정정하게 일으키며 물었다.
"게 누구요? 왜 나와서 말을 못하시고 그러는 게요?"
그러나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응답이 없었다.
백응향비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간신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세타명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님, 염려 붙들어 매요. 저런 녀석쯤이야 이 세타명사가 상대할 테니."
그리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어서 냉큼 나와서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다시금 앵앵거리는 소리만 들려 왔다.
"자네들 막북삼괴는 정말 바보들이군. 헤헤헤…… 그래 그 늙은 중 놈들한테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면서? 보배산에 들어갔다가 낭패만 보고 빈손으로 돌아오다니, 그래, 이런 등신들이 어디 있나?"
막북삼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네 놈은 누구냐? 누군데 꼴같잖게 남의 일에 참견이냐, 참견이. 그럼 네 놈도 천룡사엘 다녀왔다 이 말이냐?"
왜금차호가 볼멘 목소리로 외쳐댔다.
"아니, 아니, 난 아직 못 갔지. 내가 천룡사엘 못 가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두려워서……."
계속 목소리만 들려 왔다.
막북삼괴는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야 진짜 알 수 없는 노룻 아닌가. 오직 한 사람이 두렵다니, 그게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그걸 왜 자기들한테 떠들어대고 있는 걸까.
"그래, 천룡사의 누가 두렵다는 게냐?"
왜금차호가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노래하듯 말했다.
"천룡사 중들 중에 일양지공을 아는 사람은 아홉 정도 되지. 그 중에도 일양지공을 정말로 팔구 할 정도 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인데……."
성미 급한 왜금차호는 상대방이 우물쭈물 변죽만 울리는 것에 부아가 나서 다그쳐 물었다.
"그래, 그게 도대체 누구냐니까?"
"그 사람은 바로 노화상 고선(枯祥)이다!"
왜금차호는 궁등이를 탁 쳤다.
"옳아, 우리 형님을 치료해 준 바로 그 노화상! 그 중이 형님을 치료할 때 보니까 손에서 발하는 공력이 대단하더군. 손가락 끝에서 막 식식 소리가 나더라니까. 공력이 깊지 않으면 그런 소리가
날 턱이 없지."
세타명사는 갈수록 미심쩍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군데 우리 형제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요?"
"내가 누군가는 알 필요가 없다. 네 놈들이 일양지 신공을 앗아 내려면 나부터 먼저 찾아야 한다는 걸 알기만 하면 돼!"
목소리는 여전히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은 채 한껏 이죽거렸다.
백응향비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보았다.
'저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필시 저자 역시 천룡사를 찾아가는 녀석임이 분명해. 뭔가 단단히 준비를 갖춘 모양인데, 천룡사 내막에도 훤한 것 같고……. 저자가 가면 과연 그 비본을 앗아 낼 수 있을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우리 막북삼괴에게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이윽고 백응향비가 한마디 던졌다. 비록 중상은 입었을지언정 목소리는 우렁찼다.
"이상하다. 이상해. 강호에서 날 모르는 자라곤 하나도 없는데 너희 세 놈만 모른단 말이지? 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다. 기어코 날 보겠다면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네 놈들 목숨이 붙어날까 걱정이구나."
목소리는 신명이라도 나는 양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백응향비는 잠시 말이 없더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좋소, 맘대로 하시오. 나오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나오라고 강요할 우리도 아니오. 무예가 모자라 이 꼴이 된 처지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소. 우린 이제 대 사막으로 돌아가 다시는 운남 땅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요."
그러자 상대방은 또 깔깔깔 웃어댔다.
"아아, 이것 봐. 그렇게 기운 없이 돌아가려 하다니 애석하다, 애석해! 이왕 온 바에야 목적을 달성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쩌나?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또 없을 텐데."
막북삼괴는 제각각 속궁리를 해 보았다.
'말을 들어 봐서는 강호에서 이름난 명인 같은데 천룡사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큰소릴 칠 수야 없지. 대체 누구인가? 도시 알 수가 없군. 강호에 이름이 뜨르르한 서역 구양봉인가? 아니면 천하 제일의 방(努)인 개방(芍幇) 방주 소씨 거렁뱅이? 그도 아니면 금방 낭패를 보고 달아난 전변노괴?'
"어서 썩 나와! 정작 코빼기도 못 내밀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누군지 어서 낯짝을 보이란 말야."
왜금차호가 성마르게 소리쳤다.
"좋아, 좋아. 정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 존안을 보여 주지. 상대방은 깔깔 웃었다.
순간 막북삼괴 앞으로 짙은 연기 같은 것이 확 끼쳐 오더니 이내 스멀스멀 사라지고 희뿌여니 사람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윽고 뚜렷이 상이 잡혔다.
참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막북삼괴라고 자칭하는 그들보다도 더 괴상망측한 몰골이었다. 머리 꼭지는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눈은 수수알처럼 작은데다가 가늘디가는 목은 남들보다 곱절이나
길었다. 그런가 하면 그나마 다리라고 붙은 것은 몽톡하니 짧아서 흡사 키 낮은 관목 사이에 세워 놓은 밀랍 인형 같았다.
"어때, 실컷 봤냐? 그래, 보신 소감이 어떤가?"
그는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말했다.
왜금차호는 그 생긴 모양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천하에 자기보다 못생기고 키가 더 작달막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보면 볼수록 자기보다 더 못난 것이 신통해서 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재미있는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분명 재미있다 그랬겠다? 재미있긴 뭣이 재미있냐?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냥 날 두려워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만 만하게 보인다 그거지?"
대추씨 머리는 수수알 같은 눈을 모로 뜨며 발끈했다. 그러자 왜 금차호는 배를 부여잡은 채 간신히 한마디했다.
"아이고, 만만하고 뭐고 그래 그 꼴을 해 가지고 나한테 상대나 되겠느냐? 나보다도 목 하나는 없겠는걸. 그래 가지고 무슨 수로……."
왜금차호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또다시 웃어젖혔다.
"그래, 만만하단 말이지? 정말 내가 두렵지 않단 말이지? 꼴같 잖게 허풍이 센 녀석이로군. 사람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날 무서워했다! 내 친어머니마저도 날 무서워했다구. 그런데도 뭐? 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내 이름이 뭔지 알기나 해? 이름만 대도 너희 놈들은 벌벌 떨 거다."
막북삼괴는 그 말에 코웃음만 쳤다. 세상 구경 할 만큼 하고, 그 만큼 견식도 넓다 할 수 있는데 이름 때문에 벌벌 떤다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 있다.
"내가 누군고 하니, 바로 운남의 충피(蟲皮)다!"
그러자 막북삼괴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대리에는 강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 여럿 있는데, 그중 으뜸이 천룡사 고승들이고, 황족 단씨 가문의 몇몇 고수들도 손꼽을 만했으며 또 대추씨 머리 이강(壽羌) 만족(蜜族) 충피 역시 결
코 매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충피는 운남에서도 독을 제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막북삼괴도 충피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는 터이나 그 충피가 이렇듯 한심하게 못났을 줄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세타명사는, 내심 겁이 나면서도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몰골이 너무나 한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것 봐라, 웃어? 이 운남에서도 대놓고 내 면전에서 웃는 사람이 없고, 하물며 한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리 단씨네도 나를 보고 함부로 웃지 못하거늘. 감히 네 놈들이 나를 보고 웃어 ? 그렇담 네 놈들이 대리 단씨네보다 더 세다는 뜻인가?"
그래도 세타명사는 코방귀만 뀌었다.
'쳇 이름만 뜨르르했지, 이제 보니 다 허명이었군, 허명! 대추씨만한 녀석이 세면 얼마나 세다구 저따위로 거들먹거리는 거야. 기분도 그렇잖은데 어디 오늘 실컷 곯려나 줄까보다.'
그러다가 세타명사는 문득 백응향비의 상세(傷勢)가 걱정이 되었다. 마냥 입씨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계속 지체되면 백응향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는 역정을 내듯 시답잖게 한마디 내뱉었다.
"됐다, 됐어! 충핀지 뭔지 대충 내막을 알았으니 어서 물러가기나해!"
충피는 막북삼괴가 이렇듯 무례하게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그는 발끈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내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다. 어디 너희 세 놈 다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그러자 세타명사는 웃으면서 침을 퉤퉤 뱉었다.
"대사막을 주름잡는 우리 막북삼괴가 겨우 이까짓 대리국 정도를 겁낼 성싶으냐?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젠 어디서 쥐씨알만한 놈까지 걸려들어 생 난리를 피우는군. 어디 한번 덤벼 봐, 덤벼 보라니까."
"하, 이거 정말 가관일제그려, 가관이야!"
충피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자 왜금차호도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손바닥만한 대리국에 거추장스런 게 뭐 이리도 많아. 우리 삼형제가 천룡사에서 당한 분풀이나 해 줘 버려? 그나마 여기서 그 수치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에 나선단 말인가. 좋다!'
왜금차호는 백응향비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 좀 계시우. 내 동생과 더불어 저 놈에게 혼찌검을 내 줘야겠수."
백응향비는 그저 땅딸보를 바라보며 입술만 실룩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개중 가장 세심하고 재간 있는 위인은 백응향비였다. 그는 늘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둘째의 성미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간신히 죽다 살아난 백응향비로서는 도저히 말리려야 말릴 염도 못 내고 그저 두 아우가 하는 양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충피는 두 사람이 다가들자 온몸을 비틀어대며 히히거렸다.
왜금차호는 이 난쟁이 괴물과 싸울 생각을 하니 신명이 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싸울 때면 언제나 키 때문에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난쟁이 괴물과는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자기가 훨씬 더 크니 내려다보며 난쟁이 괴물의 가슴패기를 마음대로 콱콱 내지를 수 있으리라.
땅딸보 왜금차호는 난쟁이 괴물에게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내지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네 눈엔 우리 막북삼괴가 만만해 보이더냐? 난쟁이 똥자루만한 녀석이 겁도 없이!……"
왜금차호는 주먹으로 충피의 머리통을 투닥투닥 방망이질을 해댔다. 바위라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리통을 북 치듯이 하는데도 충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
히 서서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세타명사는 한곁에 물러서서 지켜 보고만 있다가 사세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자 안 되겠다 싶어 잽싸게 달려들어 난쟁이 괴물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충피는 끄떡도 안 했다.
"흥, 감히 먼저 손을 쓰다니, 버르장머리없는 녀석들이로군. 어이, 거기 땅딸보! 내 네 녀석부터 손을 봐 주겠으니 어디 한번 맛을 보아랏!"
충피는 왜금차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왜금차호는 대로 하여 외쳤다.
"이 멍청한 놈아! 다른 놈들은 널 무서워하는지 물라도 우리 막북삼괴는 어림도 없어. 너 따위는 시들방귀로밖에 안 여겨!"
"시들방귀고 나발이고 주둥아리 닥치고 그걸 보기나 하라니까!"
충피는 손가락으로 왜금차호의 주먹을 가리키며 여유작작 내뱉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왜금차호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충피에게 연신 휘둘러대던 왜금차호의 한쪽 손이 이미 시꺼멓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사이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에 오싹 식은땀이 돋았다.
"너 이…… 이 놈…… 이 놈……."
왜금차호는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주르르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네 놈은 나한테 중독됐어. 네 놈이 꼼짝 않고 가만 있는다면 반시간은 더 살 수 있겠지만, 한마디할 때마다 그만큼 명이 줄어든다는 걸 명심해라. 말 한마디에 살아 있는 시간이 줄어든대도 마냥 지껄일지 내 어디 두고 보리라."
충피의 그 한마디에 왜금차호는 낮빛이 사색이 되어서는 입도 벙긋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백응향비는 애가 타서 충피에게 몇 마디 사정해 보려고 손을 내둘렀지만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왜금차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털썩 엎어져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서는 정신없이 대굴대굴 굴렀다.
"나…… 나…… 나 좀……."
그는 눈까지 벌겋게 충혈되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마치 목이라도 졸린 사람마냥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세타명사는 왜금차호와 백응향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몸을 홱 돌려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한바탕 박장대소를 하더니 세타명사에게 한번 잡아 보라는 듯 요리 피하고 조리 피했다. 충피가 하도 날쌔게 피하는 통에 세타명사는 헛손질만 하다가 숨을 헉헉거리며 제자리에 우뚝 섰다.
"이 독충 같은 놈아!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행패냐?"
세타명사는 악에 받쳐 으르렁댔다.
"그래, 네 놈 말마따나 네 놈들과는 원수진 일이 없지! 천룡사라면 몰라도."
충피는 여유만만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세타명사는 귀가 번쩍 뜨여 황급히 말했다.
"우리도 천룡사와 원수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한편인 셈이다. 자, 어서 해독약을 써서 둘째형님을 살려내 넷이 함께 천룡사로 가서 원수를 갚자!"
충피는 있는 대로 입을 삐쭉거리며 같잖다는 듯 세타명사를 쏘아 보았다.
"그따위 얕은 꾀를 쓰려 들다니! 뭐? 네 놈들하고 같이 가서 원수를 갚아? 천룡사와 원수진 것도 나고, 원수를 갚는 것도 나다! 네깟 놈들이 그래, 도움이나 된다더냐?"
세타명사는 면박을 당하자 무안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금차호는 온몸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아,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기 몸을 마구 잡아뜯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 살점을 마구 잡아뜯으며 성난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백응향비와 세타명사는 처참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 제발 둘째형님 좀 살려 주슈."
세타명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애원했다. 그러나 충피가 들어줄 리 만무였다. 되레 그는 웃음을 질질 흘리며 왜금차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본자 세타명사는 한껏 독이 올라서 이를 사리물고 사납게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충피는 슬쩍 피하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네깟 막북삼괴들이 날 어쩌겠다구? 까마귀 링 잡아먹을 생각하지도 마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충피는 손을 한 번 척 내둘렀다. 그러자 시뿌연 연기가 세타명사에게 훅 휘몰려 왔다. 세타명사는 얼른 몸을 솟구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밑에서 뭔가가
힘껏 잡아채는 듯한 감을 느끼며 그는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이를 치고는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애를 썼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들 막북삼괴가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은 삼괴가 아니라 세 마리 벌레에 불과하다. 이 충피보다 더 작고 못난 세 마리 벌레 말이다. 흐흐흐……."
충피는 건들거리면서 세타명사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막북삼괴야,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죽지 않고 살아나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리라!"
세타명사도 그만 중독이 됐는지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죽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고, 가려워! 아이고 나죽는다, 나 죽어."
그리고는 왜금차호처럼 자기 옷을 마구 찢어발기고 제 몸을 있는 대로 잡아뜯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려움을 견딜 수 없는지 마침 곁에 비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자 그는 냉큼 집어 들어 제 살점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타명사의 온몸은 피가 낭자해졌다. 그는 몸을 뒤틀며 충피에게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살려 주시오, 제발 좀 살려 줘……."
그러나 충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날더러 살려 달라고? 제 손으로 할퀴고 제 손으로 칼질을 해대고선 날더러 살려 달라니, 그래 내가 어떻게 살려 준단 말이냐? 살려 주려 해도 살려 줄 재간이 있어야지."
그러자 세타명사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네 이 놈 충피야,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 해도 네 놈을 끝까지 찾아내 씹어 먹고야 말리라. 네 놈을 꼭 잡아……."
그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일순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그리고는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한켠에 쓰러져 있는 왜금차호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였다. 충피는 왜금차호 쪽으로 건들건들 걸어가더니 능청스레 가벼운 한숨까지 지었다.
"그래도 네 놈은 조용히 뻗었군그래."
두 눈 뻔히 뜨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굳게 맹세한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백응향비는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충피도 저주하고 일어나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도 저주하면서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윽고 충피가 설핏 곁눈질을 하더니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넌 맏이이면서도 아우들이 다 죽어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하는구나. 그리도 살고 싶으냐?"
충피는 백응향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백응향비는 꺽꺽거리며 말을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왜 우, 우리를 죽이는……."
충피는 히죽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천룡사의 일양지공 비본을 노린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날 이때껏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구. 만일 너희들이 일양지공을 익혔다면 지금 이 꼴로 죽지는 않을 게야……."
"우리가 도, 돕겠다는데도 왜 우리를 죽이는……."
백응향비는 가까스로 한마디 한마디 토해 냈으나 도저히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충피는 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고 째지는 소리로 소름 끼치게 웃어젖혔다.
"아무튼 넌 이젠 죽는다. 네 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 내 알려 줄까? 넌 바로 천룡사 때문에 죽는 거다."
백응향비는 그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왜 천룡사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걸까……. 그는 의아한 눈길로 충피를 올려다보았다.
충피의 손은 어느새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백응향비는 닥쳐 올 고통을 미리 알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용히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충피는 힘껏 목을 졸랐다. 일순 백응향비는 심하게 퍼들거리더니 이내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충피는 그의 목을 턱 놓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인지 뒷짐을 진 채 세 사람 사이를 한등안 서성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중얼거렸다.
"이렇게 놔둔다면 천룡사 덕 보게 하는 것 아니야?"
그는 왜금차호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더니 비수 하나를 슬쩍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왜금차호의 등을 더듬어 한 곳에 비수를 푹 꽂았다 뺐다. 방금 죽은 시체라 따뜻한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됐어, 됐어, 이만하면 충분하다."
충피는 적이 흡족해하며 약 한 봉지를 꺼내 칼자국이 난 왜금차호의 등에다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흘러 나오던 피가 순식간에 멎었다.
충피는 다른 두 시체에도 똑같이 이렇게 칼로 째고 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내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어디선가 두 장정이 바람같이 달려와 머리 꼭지가 땅에 닿도록 공손히 인사를 했다.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너희 둘은 밤낮을 이어 가며, 이 시체들을 대 사막으로 옮겨라. 가서는 대막(大漠) 옥수(玉樹)를 찾아라. 찾거든 그녀에게 시체를 건네고 말해! 훌륭한 세 제자가 그만 천룡사 중 놈들한테 해를 입어 죽었다고 말이야."
둘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라. 그녀의 이 귀한 제자들 시체에 내가 약을 넣어 주어 시간이 지나도 시체가 이렇게 생생하다고 말야. 그러면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천룡사로 찾아갈 것이다."
"예, 예, 분부대로 거행합죠."
두 장정은 크게 읍을 하더니 어디론가 힁허케 달려갔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를 몰고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막북삼괴의 시체를 마차에 던져 넣고는 자기들도 냉큼 올라타 채찍을 힘껏 휘두르며 북으로 향했다.
"그 늙은 여괴가 저걸 보기만 하면 대번에 펄펄 될 게다."
충피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흐드러지게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때 갑자기 천룡사의 아침 종소리가 쩌렁쩌렁 고막을 울려 놓았다.
"아무래도 그 일속인지 뭔지 하는 주지 놈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도대체 상대가 될 만한 작잔지 한번 겨뤄 봐야 하잖겠어……."
충피는 갑자기 몸이 달아 천룡사를 향해 홱 돌아서서는 천룡사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이 시각, 천룡사에선 중들이 대응보전(大雄資嚴) 앞에 한 줄로 늘어서서 조과(早課)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을 정중히 모신 대웅보전은 자못 장엄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선법(祥法)과 이루 다 밝히지 못할 현묘한 도리들이 이 자비로운 부처님 아래 감돌고 있었다.
양 옆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각종 법기들, 종과 북, 북채와 경직들이 올려져 있었다. 모두 부처님께 재배하며 생령들을 위해 복을 주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었다. 큰 중이나 작은 중이 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목청을 가다듬어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적이 숙연했다.
충피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천룡사 경내로 숨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가사를 몸에 걸친 일속 화상이 복판에 좌정한 채 여러 중들과 더불어 염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화상들이 염불하는 양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있는 성싶기도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독경에 열심일 수 있는가?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웅얼거리고 있는 품이라니, 쯧쯧……. 어디 이럴 때 독약을 한번 슬쩍 뿌려 봐? 염불에 정신이 팔렸으니 누구 소행인지 알 게 뭐야.'
충피는 기둥 뒤로 더 바싹 다가갔다. 눈앞에 문득 내리드리운 불번(佛幡)이 보였다.
'저 불번 뒤에 숨어서 손을 쓰면 저 놈들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정신없이 우왕좌왕할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그는 날쌔게 불번 뒤로 몸을 옮겼다.
바로 그때, 잠시 독경 소리가 멎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노승이 말했다.
"어제 만과(晩課)에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지금 주지님께 물어 보시오."
그러자 중 하나가 나와 합장을 하고는 물었다.
"소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읽으매, 범법지법(凡法之法)이 무슨 전례(典例)인지 알 수가 없으니 주지님께서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일속은 또렷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강해(講解)를 시작했다. 중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응보전에는 오직 일속의 말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넌 너대로 불경을 강해하고 난 나대로 독약을 뿌려 보자. 너희 네 천룡사 중들이 하나같이 다 내 독약에 꺼꾸러지는데도 그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는지 어디 두고 보자.'
충피가 이렇게 작정하고 막 손을 쓰려 할 찰나였다. 갑자기 일속이 말을 뚝 그치더니 불쑥 한마디했다.
"오는 자는 맞이하고 가는 자는 놔두라고 하였거늘, 시주님께선 어이해서 숨어 계시기만 하는 겁니까?"
그러더니 일속은 충피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팍소리가 일며 진력 한 갈래가 충피가 숨어 있는 불번쪽으로 획 몰아쳤다.
'아차, 들켰구나.'
충피는 이렇게 된 바에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한 갈래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중들에게 획 날아갔다.
그러나 일속은 이미 충피 앞에 날아와 우뚝 서 있었다.
"여기는 조용한 불문인데 어이하여 소란을 피우시오?"
그러자 충피는 일속에게도 독약을 훅 끼얹었다. 그는 일속의 무예가 경지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는 터, 좀전보다 독약을 더 많이 뿌렸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일속에 게도 끼쳐 갔다. 일속은 흠칫했다. 충피는 그 모양을 보고 일속이 자기 꾀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기뻐서 소리쳤다.
"쓰러친다. 잘도 쓰러진다."
과연 노승 몇이 픽픽 쓰러지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그대는 운남의 충피가 아닌가?"
일속은 엄하게 물었다. 충피는 희희낙락하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대꾸했다.
"그래, 내가 충피다. 나 충피가 아니고는 누가 이렇게 천룡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더냐?"
"나무아미타불. 무슨 연유로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게요?"
"왜 사람을 해치냐구? 이봐, 너희들은 모두 구도자라고 자처하며 정직한 체한다마는, 정작 남을 해치는 천하 제일의 무예를 암암리에 수련하고 있지 않느냐? 잔말 말고 어서 일양지공 비본이나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단번에 이 절 중 놈들 씨를 말려 버릴 테니."
그러면서 충피는 턱짓으로 다른 중들을 가리켰다. 벌써 게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된 사람, 신음을 연발하는 사람, 두 눈 뒤집고 허우적대는 사람…… 실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충피는 독살스럽
게 웃어댔다.
"너희들이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단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라."
비록 지금은 꼿꼿이 서 있지만 일속도 이미 중독되어 있으니 충피는 마음을 턱 놓고 또 독살을 피웠다.
"어서 일양지 비본을 내놓으라니까. 천룡사 중 놈들 씨를 말리기 전에!"
그러나 일속은 조용히 충피를 지켜 보기만 했다. 충피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행히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았는데 지금 일양지 비본을 앗아 내지 않으면 이런 호기가 언제 또 찾아오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얻기 힘들다.'
충피는 잽싸게 한 노승 앞으로 다가가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해? 일양지 비본은 어디다 숨겼지?"
그 노승도 단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양지공을 익히고 있었다. 노승은 충피를 엄하게 꾸짖었다.
"이 지독한 소인배야! 재간이 있으면 떳떳이 서로 겨루어 볼 일이지, 몰래 독약을 써? 이런 비겁한 작태가 어디 있느냐?"
그러든 말든 충피는 느물느물 웃기만 했다.
"뭐 비겁해? 그래 비겁하다 해도 좋다! 뭐라 해도 좋으니 어서 일양지 비본이나 내놔! 더 버티다간 이 큰 절간에 한 놈도 못 남아 날 테니."
충피는 대뜸 한 발 더 다가들어 손으로 노승의 눈꺼풀을 꼬집어 뜯으며 으르댔다.
"말하겠어, 안 하겠어? 냉큼 말하지 않으면 네 놈 두 눈을 아예 쏙 뽑아 버릴 테니 어서 말을 해, 말을!"




제3장 충피의 간계
노승은 그래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충피는 발싸심이 나서 일속에게 안달을 해댔다.
"일속 대사, 어서 일양지 비본을 내놓으라니까."
그는 정말 노승의 눈을 뽑을 기세였다.
"일양지공은 다만 호신을 위해 쓸 뿐, 당신 같은 자가 가져 가면 필연코 남을 해치는 데 쓸 것인즉, 우리는 결단코 못 내놓소!"
일속은 장탄식을 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이 늙은 중의 눈알을 뽑아 버리겠다!"
충피는 한층 더 열을 냈다. 기실 그에게 붙잡혀 있는 이 노승은 천룡사의 큰 스님으로 일속과는 항렬이 같은 일진(-瞋) 화상이었다. 그는 충피의 위협에 낮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충피, 네가 나를 죽인다 해도 얻는 것은 내 이 쓸모 없는 몸뚱어리뿐, 아무리 일양지 비본을 앗아 가려 해도 헛수고일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외로 노승이 꼿꼿하게 나오자 충피는 일순 주춤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그 당장에 노승을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천룡사 중들을 협박해 일양지 비본을 내놓게 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 노승이 추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충피는 애가 달았다.
바로 그때였다. 등뒤에서 크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충피는 흠칫 놀라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일양지공이 그토록 알고 싶소? 일양지공이라면 나도 얼마간 알고 있으니 내가 알려 드리면 안 되겠소?"
옥같이 하얀 얼굴에 샛별같이 밝은 눈, 머리를 꼼꼼히 틀어 올리고 황금및 도포를 걸친 웬 사람 하나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제법 풍채가 늠름했다. 필시 천룡사 중은 아닌 듯싶었다.
"넌 누구냐? 누군데 일양지공을 안다고 나서는 게냐?"
충피는 미심쩍은 얼굴로 외쳤다.
상대방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일거일동에는 사뭇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무림 대가의 체풍이 완연했다.
"일진 대사를 놓아주시오. 그러면 내 일양지공을 가르쳐 드리겠소."
충피는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나 그의 기세에 눌려 좀전과는 다르게 다소 어눌하게 물었다.
"당신이 일양지공을 가르쳐 준다고요? 대관절 당신이 뉘신데 그리 호언장담하는 게요?"
"이분은 대리국의 황제 폐하시오."
일속이 정색을 하며 정중히 대답했다.
그 말에 충피는 움찔했다. 몸에 걸친 황포(皇袍)며 행동거지, 말하는 품새까지, 대리 황제 단지흥임이 분명했다. 충피는 속으로 뜨끔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단박에 일진 대사를 팽개치며 냉랭히 말했다.
"대리 황제가 아니라 대송(大宋) 황제가 온다 해도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할 줄 아시오!"
대리 황제 단지홍은 일국의 제왕답게 관후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 자약하게 충피를 굽어보았다.
"세인들은 일양지를 무슨 절세의 무예로 알고 있는 모양이오만 실은 한낱 내공심법(內功心法)에 불과하오. 일양지공만 있으면 천하를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들 여기지만 그건 진정 모르고 그러는 것이오. 그러니 일양지공을 탐하여 스스로 자기를 해칠 필요가 무엇이오?"
"그따위 소린 그만두시오. 대리 단씨가 이 일양지공 덕에 세세대대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당신의 명성이 이 대리에서 혁혁하게 된 것도 다 일양지공 덕이지 뭐
요? 그런데 그따위 입에 발린 소리로 나를 쫓아내려 하다니 속 들여다보이는 수작 작작 하시오! 어쨌든 일양지 비본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이 사원에 있는 중들은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하니 그리 아시오!"
충피는 계속 입을 놀려댔다.
"허허, 일양지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 라는데도 자꾸 이러는구먼. 종래로 남한테는 전수해 주는 법이 없기에 그것 때문에 남들에게는 그리도 신기해 보이는 것뿐이오. 아무튼 대리 단씨가 아니면 누구한테 라도 일양지공을 전수시켜 줄 수 없소이다."
단지흥의 말에 충피는 독이 올라 수수 알만한 눈을 부라리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좋다. 정녕 나한테는 못 주겠단 말이지? 내 당장 이 늙은 중놈의 눈깔을 뽑아 버리겠다!"
"그 대사도 대리 단씨 가문의 사람이니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일양지 비본은 내놓지 않을 것인즉, 헛되이 남의 생명만 해칠 필요가 무엇……."
대리 황제 단지흥이 계속 천연덕스럽게 같은 말만 되풀이하자 충피는 악이 받칠 대로 받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의 눈에 손가락을 푹 꽃았다. 노승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의 눈에선 금세 시뻘건 피가 쏟아져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였다.
충피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씩씩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래도 못 내놔, 엉? 이래도?"
노승은 여전히 널브러진 채 가까스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는 일속과 단지흥 쪽으로 번갈아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폐하, 소승은 비록 눈은 멀었지만 오히려 속은 환하옵니다. 저런 불한당 같은 놈한테 우리 대리 단씨의 일양지 비본을 빼앗기면 천하 무림의 질서가 엉망진창이 될 터인데 제가 어찌 제 일신을 보호하겠습니까? 정녕 저는 괘념치 마옵소서!"
"이 놈이 그래도 주둥아릴 놀려! 어디 한 번 내 손에 죽어 봐라!"
악이 날 대로 난 충피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도 노승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충피는 당장이라도 내리칠 듯 사나운 기세로 노승의 정수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노승은 미동도 않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적이 숙연한 자태였 다. 그 순간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충피의 귓전을 때렸다. 충피는 흠칫 놀라 일진 대사의 머리에서 주춤 손을 뗐다. 과연 단지홍은 내력이 대단한지라 그 고함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울릴 듯했 다.
"이 놈, 일진 대사를 더 이상 다쳤다가는 네 놈 목숨도 이 자리에서 끝장날 줄 알아라. 도를 중히 여기는 천룡사 고승들이 네 놈을 그냥 내 버려두려 해도 내가 네 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쳇, 그쪽은 황제니까 아무나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다는 걸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나는 그리 수월하게 죽일 수 없을걸!"
충피는 내심 더럭 놀라면서도 한껏 이죽거리고는 일진 대사의 손목을 텁석 그러잡으며 그의 혈도를 눌렀다. 혈도를 눌린 일진 대사는 옴짝달싹 못하고 충피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충피는 일속이나 단지흥 무리들이 자기를 공격할 것에 대비해 일진대사를 방패로 삼을 작정으로 그를 부여안고 공중으로 휙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연이어 팍팍소리가 일며 단지흥의 일양지 지풍이 충피를 향해 뻗쳐 갔다. 그 날카로운 기랑(氣浪)에 충피는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충피는 대리 단씨 일가의 무예가 고강함을 잘 알고 있
는지라 황제인 단지흥의 무예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되어 사뿐 땅에 내려 노승은 팽개쳐 두고 지체 없이 몸을 홱 솟구쳤다.
단지홍은 충피를 일격에 꺼꾸러뜨리려 했으나 약삭빠른 충피가 날쌔게 몸을 빼는 바람에 그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
"좋다! 너 죽고 나 죽고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
충피는 이를 바드득 갈며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몇 번 돌더니 사뿐 떨어져 내렸다.
"네 놈들이 날 죽여? 허, 그러려면 먼저 저승 문 앞까지 갔다 와야 할걸!"
순간 공중에서 하얀 가루 같은 것이 천룡사 중들의 머리 위로 하얗게 날아 떨어졌다. 충피가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이미 독을 뿌린 것이었다. 천룡사 중들은 아우성을 치며 독약을 피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손을 번쩍 치켜 들어 일양지공으로 팍팍 지풍을 내쳤다. 그와 동시에 하얀 독가루는 한켠으로 쓸려 갔다.
'제기랄, 네 놈 때문이야. 네 놈만 아니었으면 벌써 천룡사 일양지 비본을 손에 넣었을 텐데. 내 오늘 네 놈을 가만 자들 수 없다.'
충피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단지흥! 네가 일국의 황제라도 오늘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면서 충피는 날려 오는 독약 가루를 날쌔게 한줌 걷어 잡아서는 다시 단지흥을 향해 힘껏 내뿌렸다.
그러자 단지홍은 일순 휘청했다.
충피는 쾌재를 부르며 깡충깡충 뛰었다.
"꼴좋다, 꼴좋아! 일국의 황제가 강호 사람과 겨뤄 보겠다고 나서더니 저 꼴 좀 보라지. 어때, 내 독가루 맛이?"
그러면서 속으로는 퍼뜩 잔꾀를 굴렸다.
'단지흥이 중독됐으니 이젠 슬슬 돌아가 볼까? 내가 가 버리면 제가 어쩔 테야. 황제고 뭐고 치신 가릴 것 없이 내 처소까지 따라와 애걸애걸 하겠지, 해독약을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대리 국사 의 이 많은 중들이 모두 살아 남지 못하는데 제가 애걸하지? 않고배겨?'
충피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냉큼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천룡사 중 놈들아! 네 놈들은 지금 나, 대리의 기충(寄蟲) 충피에게 중독되었다. 이레 안으로 창산(蒼山) 석굴에 와서 날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들 모두 반미치광이가 될 테니!"
충피는 징그러운 웃음을 흩뿌리고는 지붕으로 담장으로 이리저리 내달아 이내 사라져 버렸다.
충피가 사라지자 단지흥은 절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넓은 경내 여기저기에 천룡사 중들이 가루를 뒤집어쓰고 널브러져 있었다.
주지인 일속도 중독되어 한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른 노승들보다 심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말소리가 들릴락말락 가냘프고 낯빛이 창백하니 점점 더 파리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천룡사 중들 거개가 중독되었으나 단지홍은 좀체로 그 독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언뜻 운남 만족들이 쓰는 좀 독의 일종인 고독(蠱壽) 같기도 했는데, 만일 그렇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독이라고 하는 이 독은 각종 독을 먹여 키운 좀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 독성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 독은 좀을 기른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누구도 해독할 수가 없었다.
일속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폐, 폐하, 이, 이렇게 친히 천룡사의 재앙을 물리쳐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단지흥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며 잠시 말이 없었다.
'비록 이 천룡사 중들의 생명은 잠시 구했다고 하나 허다한 노승들이 좀 독에 중독되었으며 또 그 해독 방법도 모르고 있다. 충피를 찾아가면 그 방법을 알 수 있겠으나 가서 그저 사정만 한다고 쉽게 말을 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충피가 욕심 내는 것이 천룡사의 일양지 비본인즉 그것을 내주지 않는 한 해독 방법을 알기란 요원한 일이다.'
단지홍은 한동안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이 급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창산 석굴에 한번 가 봐야겠소. 어떻게든 충피에게 사정하여 해독약을 구해다가 천룡사 여러분을 치료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을 것 같소."
"천룡사 일로 폐하께 심려를 끼쳐 실로 황공하나이다. 그러나 폐하께선 더는 염려 마십시오. 저희가 어떻게 방도를 강구해 보겠사옵니다."
일속은 혼미한 중에도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말했다.
"이번 충피의 간계로 상한 사람은 대부분 천룡사의 무예 고수들이오. 그런데 충피를 찾아 또 사람들이 떠난다면, 그 사이 누가 사원을 지키겠소?"
단지홍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속은 더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궁에도 고수들이 있은즉, 내 사대 시위를 데리고 충피 놈을 찾아가리다. 놈이 감히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오."
일속도 궁리를 해 보았으나 오로지 그 방법밖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천룡사 중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충피를 당해 낼 도리가 없으니 황제에게 의지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었다.
"폐하의 황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단지흥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젊은 주지를 바라보았다.
"천룡사는 우리 대리국의 호국사(護國寺)가 아니오. 단씨 가문이 대를 이어 가며 대리국을 다스리게 된 것도 모두 천룡사의 은덕을 입어 그리 된 것인데 이만한 일을 내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일속은 단지흥의 말에 다시 한 번 크게 읍을 하였다. 단지흥은 일속과 상론하여 뒷일을 맡기고 화급히 천룡사를 떠났다.
단지흥은 황궁에 들어서는 길로 곧장 태감을 불렀다.
"어서 사대 시위를 들라 이르라."
이 궁중 사대 시위는 단지흥이 황제가 된 이후 궁성에 들어온 사람들로 원래 대리의 무림 고수들이었다. 한 사람은 신과(新料)에 급제하여 대리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선비 출신이요, 또
한 사람은 농부였는데 황제의 칙명을 받잡아 시위가 됐으며, 다른 한 사람은 창산 아래 이해(溥海)에서 낚시를 업으로 삼던 어부였다가 황제의 시위가 되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창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단지흥의 눈에 들어 시위가 되었다. 이들 넷은 황제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모두 무예가 고강한 대리의 고수들이었다.
사대 시위는 차례로 들어와 허리를 굽히고 칙명을 기다렸다.
"내 경들애게 한 가지 큰일을 맡기려 하네. 창산 석굴에 천하에 악독한 놈이 하나 있는데 강호에선 그 놈을 대리 기충 충피라고들 한다네, 그 놈은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다 맡아 놓고 하는 놈이야. 경들이 당장 그 놈을 찾아내서……."
"폐하, 저희 네 사람도 이미 그 놈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장 그 놈을 찾아내 목을 쳐 올리겠습니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미가 급한 농부가 먼저 나섰다.
그러자 어부도 덩달아 외쳤다.
"식은죽 먹기 이옵니다. 넷이 다 갈 것 없이 누구 하나만 붙여 주십시오. 소인이 실수 없이 해치우겠습니다."
황제는 두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저지하고는 정색을 하며 엄하게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네. 그 놈을 죽여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필히 살려는 두되 무슨 꾀를 써서라도 그 놈에게서 좀 독의 해독약을 받아 내라는 것이네. 지금 천룡사 여러 사부님들이 그 놈의 좀 독에 중독되어 있는데 사부님들을 살려내는 길은 오로지 그것뿐이야."
넷은 일순 어리벙벙해졌다. 충피 하나쯤 요절내는 것은 어렵지않은 일이나 죽이지 않고 굴복만 시켜 해독약을 내놓게 하기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 놈은 강호의 누구도 겁내지 않고 제멋대로 횡행하는 놈이 아닌가!
단지홍은 그들의 기색을 눈치채고는 빙그레 웃었다.
"나도 같이 가겠네."
그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엔 놀라움이 비꼈다. 황제가 친히 가려 하다니……. 선황이 스스로 퇴위하여 천룡사에서 화상이 된 후 얼마 안 있어 열반하고 이 단황 단지흥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지 이제 겨우 2년이었다. 그런고로 황위(皇位)의 보위가 막중하거늘 어떻게 일국의 지존을 그 만황(萬荒)한 지역에, 그것도 하잘것없는 충피란 놈을 찾으러 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안 될 일이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그 일은 저희 넷에게 맡겨 두시고 옥체를 보존하소서. 수일 내로 칙명을 시행하고 돌아와 복명하겠나이다. 만승의 용체(龍體)로 그 불모의 땅을 어떻게 가시겠다고 그러시옵니까?"
농부가 제일 먼저 나서서 극구 황제를 말렸다. 그러자 선비도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그자는 예의라고는 도무지 모르는 야만인이옵니다. 잘못 가셨다가 만의 하나라도 변고를 당하실까 저어되옵니다."
그래도 단지홍은 웃음을 지은 채 막무가내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리라는 이 작은 나라에서 황제를 하려면 우선 인의를 베풀어야 하네. 선황께서도 황위에 연연치 않고 인의를 지키셨거늘 내 어찌 즉위한 지 2년이 되도록 궁성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리. 저마다 황위를 지키느라고 궁문 밖을 얼씬도 않는다고 나를 비웃지 않겠는가? 천룡사는 호국대사요, 천룡사가 아니고는 우리 단씨 가문의 오늘이 있을 수 없거늘, 천룡사를 위하는 일에 내 무엇을 아끼겠나. 내 경들과 더불어 친히 갈 것인즉 더는 다른 말을 말게."
황제의 결심이 이러한 이상, 넷은 어명을 받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섯 사람은 급급히 서둘러 이내 관복을 벗고 변장을 했다. 사대시위는 각각 글 읽는 선비, 농사짓는 농부, 나무하는 나무꾼, 고기 잡는 어부로 복색을 갖추고 단지홍은 의젓한 풍류 공자로 꾸몄
다.
단지흥의 복색은 참으로 그럴듯해 그 누구도 황제인 줄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너부죽한 얼굴에선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빛이 흘렀고, 숱 많은 짙은 눈썹 밑에선 가을 물처럼 맑은 눈이 그윽이 빛났다. 크지도 작지도 알은 맞춤한 체구에, 젊은 영웅 청년의 풍모가 완연히 빛났다.
그 모습을 보고 네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농부가 짐짓 한마디 던졌다.
"폐하, 그런 복색으로 창산 깊은 골에 들어 가시면 하늘의 신선이 내려온 줄 알고 그곳 미녀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겠나이다!"
그러자 단지홍은 그저 빙그레 웃어 보이며 선뜻 길을 나섰다. 네 사람도 웃는 남빛으로 줄레줄레 뒤를 따랐다.
길은 매우 험난했지만 다섯은 모두 건장한 장정들이라 피로를 무릅쓰고 발걸음을 다그쳐 내리 이틀을 걸었다. 그쯤 되자 황궁에서 아주 멀리까지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다섯 사람은 창산에 이르렀다. 창산에 들어가자 사방엔 산들이 청첩이 둘러서고 여기저기 석굴들도 꽤나 많았다.
산 아래 마을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섯 사람은 상론을 하여 아무래도 충피의 거처를 찾으려면 일단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물어 보자고 입을 모았다. 충피는 자기가 창산 석굴에 있다고만 했었다. 이 많은 산 이 많은 석굴 중 도대체 어디에 그 놈이 있는지 눈짐작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그것이 첩경일 터였다.
다섯 사람은 도로 산을 내려가 마을에 이르렀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른 무슨 특별한 날인지 두건을 쓰고 허리에 띠를 두른 이만 토족들이 하나같이 싱글벙글 기쁜 낯으로 오가고 있었다.
단지흥 일행은 그들 속에 끼여들었다. 그랬더니 지나가는 남정네들은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수군덕거리고, 여인네들은 소리를 죽이며 연신 킥킥거렸다. 중원 사람들 복색도 아 니요, 이곳 토호민들의 복색도 아닌 그들의 차림새가 괴상망측하다고들 여기는 모양이었다. 기실 이 다섯 사람 눈에도 이곳 사람들의 복색은 괴상망측하기 그지 없었다.
이곳 남정네들은 햇볕에 타서 정실정실한 위통을 그대로 드러낸 채, 다만 허리에 달랑 단도만 차고는 단도를 번쩍거리며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었다.
여인들은 명주 술이 이마에까지 휘늘어져 한들거리는 꽃 두건을 썼는데 그 명주술 안으로 불타는 여인들의 눈이 반짝였다. 여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개중에서도 유독 단지흥에게 눈길이 쏠리는 것이었다.
"제가 가서, 충피의 석굴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오겠습니다."
농부는 소곤거리더니 성큼성큼 여인들 앞으로 걸어갔다. 단지흥의 준수한 용모에 흠뻑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하던 여인들은 농부가 자기들 쪽으로 다가가자 다소 거리를 둔 채 하나들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농부는 그 여인들중 하나에게 대뜸 물었다.
"이봐요, 충피네 석굴이 어디 있는가 아시오?"
"뭐라고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생글생글 웃음을 짓던 여인의 낯빛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농부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다그쳐 물었다.
"충피의 석굴 말이오.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오."
그러자 그 여인은 물론 곁에 있는 여인들까지 하얗게 질려 잡을 새도 없이 냉큼 달아나며 소리쳤다.
"그런 건 우린 몰라요."
농부는 입맛을 다시며 또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충피의 석굴이란 말만 나오면 하얗게 질려서는 황급히 달아나는 것이었다.
일행은 의아해하면서 일단 목이나 축이자며 객점으로 갔다. 그들은 너나없이 대나무통에 담긴 걸쭉한 막걸리만 묵묵히 마셔댔다. 도무지 알수 없는 노룻이었다.
"페하, 사람들이 충피의 석굴을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 피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마도 여기 사람과 충피 사이에는 말 못할 곡절이 있음에 분명하옵니다."
농부가 한마디하자 선비가 뒤를 달았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충피와 원수진 사람을 한두 사람 찾아서 넌지시 물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서 한 작은 점포로 들어섰다. 대나무로 자리를 엮어 파는 점포였는데 노인과 젊은이 한 사람 그리고 한 처녀가 대자리를 엮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무꾼이 은근히 끼여들었다.
"어르신,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엮는 게 아닙니다."
웬 사람이 하나 느닷없이 걸고 넘어지자 노인은 의아한 눈길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뭘 잘못 엮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손님이 나보다 더 잘 엮는단 말이시오?"
"글쎄요, 자고로 모두들 어르신처럼 엮어 왔으니 딱히 틀리다고까지야 말할 수 없겠지만……. 이건 나석(蘿崙)이 아닙니까? 나석은 여기에 좀 변화가 있으면 좋지요. 보세요, 여기 하나밖에 없 는 이 무늬들을 두 개로 만들면 자리가 대번에 환해지지요."
나무꾼의 말에 노인은 반신반의하며 엮고 있던 것을 대뜸 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대자리를 앞에 놓고 척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품이 재법 그럴싸했다. 노인 곁에 있던 젊은이와 처녀도 다가와 고개를 늘여 빼고 나무꾼이 하는 양을 들여다봤다. 나무꾼은 원래 대리의 재간꾼으로 나무하는 일 외에도 어떤 공예든 막힘이 없었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 그리 대수롭지도 않게 손을 놀리는 듯했는데 어느새 자리에는 노인과 두 사람이 여태까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무늬가 생겼다. 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신선이라도 보는 양 경이스런 눈길로 나무꾼을 쳐다보았다.
"아, 정말 훌륭하오. 그런 식으로 엮으면 천하 못 엮어 낼 무늬가 없을 것 같구려."
노인은 감탄하여 연신 중얼거렸다. 곁에 선 처녀도 눈 한 번 깜짝 않고 뚫어지게 나무꾼을 지켜 보았다. 이 마을에선 그래도 손재간이 으뜸으로 꼽히는 그녀였지만 방금 나무꾼의 자리 엮는 손길이 어찌나 빠른지 도시 어떻게 엮어 나가는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휴우, 이런 손재주는 보다 보다 처음인데요."
아들인 듯한 젊은이도 침을 튀겨 가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밖에는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노인은 넋을 잃고 나무꾼의 손길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순 사위가 어두워졌음을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서두르며 처녀에게 탁주를 받아 오게 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네 사람까지 청해 들여 자리에 앉혔다. 곧 탁주가 들어오고 술상이 차려졌다. 노인은 한껏 흥이 올라 척척 술을 따랐다. 단지흥은 내내 웃는 낮으로 예의를 갖춰 노인을 대했다. 노인도 인자하고 박식한 공자가 색 맘에 들어 스스럼없이 흉금을 터놓았다. 젊은사람은 젊
은 사람끼리 앉아서 얘기를 나누며 권커니자커니 술을 마셨다.
처녀는 한쪽 구석에 앉아 한 사람을 남몰래 지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저 더없이 듬직하고 좋아 보였다. 그러나 나무꾼은 처녀의 눈길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술만 마셔댔다. 술을 들이켜는 모습까지, 처녀의 눈에는 나무꾼이 꼭 신선처럼 보였다. 전설 속에 전해 오는 재간뿐 신선이 꼭 그인 것만 같았다. 자기 마을과 인근 어디에도 그처럼 점잖고 조용한 남자는 없다고 그녀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지흥은 이윽고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노인에게 석굴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 말에 노인은 흠칫 놀라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물었다.
"충피네 석굴은 왜 찾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실은 우리 형제 한 사람이 그자의 좀 독에 중독됐습니다. 그 고통이 말이 아니지요.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래 충피네 석굴을 찾아가 해독약을 구하려고 이렇게 길 을 떠나온 것입니다."
노인은 단지흥의 말을 듣고 젊은이와 처녀를 바라보았다. 셋은 서로 눈길만 주고받을 뿐 똑같이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야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충피가 있는 석굴은 화동(花嶠)이라고도 하고, 사인동(死人 )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엔 각 부락에서 모아들인 병신, 미치광이, 유행성 열병 환자들과 요녀가 득실거리지요. 그래서 여느 사람은 감히 접근을 못하고 그들을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그 굴은 이 창산의 귀신 굴이 돼 버렸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마을에 나와 예쁜 여자들을 노략질해다가 충피에게 바친답니다. 그럼 충피는 몇 밤 데리고 놀고는 아랫놈들에게 내주고, 또 새 여자를 구해 오게 한답니다. 정말 악독
한 놈입니다. 그러니 이 산에 사는 사람들은 충피라는 말만 나와도 이를 갈고, 딸 가진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충피네 무리들이 내려올까 늘 전전긍긍이랍니다. 이러다 보니 혼기도 차기 전에 서둘러 시집보내는 집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집에선 아예 밖엔 얼씬도 못하게 가둬 두고 있지요."
젊은이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처녀를 쳐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처녀는 무척 예뻤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이 처녀를 두고 절대 충피에게 들키지 않게 단단히 조심시키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
충피가 이런 여인을 보기만 하면 그 당장에 음심이 동해 끌고 갈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단지홍은 그윽이 처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설부화용으로 전형적인 남국의 미녀였다. 이런 처녀를 어떻게 그 극악한 충피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단지흥의 사대 시위는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벌써 분기탱천하여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씨근덕거려댔다. 단지흥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어르신, 저희가 충피를 찾아가면 아무래도 그 놈과 크게 싸워야할 줄로 압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인데 어찌 가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 놈은 가만 둬서는 안 됩니 다. 저희한테 맡겨 두십시오. 그리고 어르신께선 길만 가르쳐 주십시오. 하면 뒷일은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신선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나도 언제부터 결심한 바가 있소이다. 한두 번은 놈을 피할 수 있다지만 끝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난 언제든 한번은 사생결단을 하기로 진작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놈 충피가 우리 집에 뛰어들기만 하면 목숨을 내놓고 죽기살기로 싸울 심산이었지요. 애지중지 키워 온 여식을 그 악독한 놈에게 그냥 내줄 내가 아닙니다."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에선 분노의 빛이 어른거렸다.
다섯 사람은 묵묵히 노인의 거동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튿날은 이곳의 장날이었다.
단지흥과 그의 시위 넷은 노인의 말대로 저잣거리에 나가서 충피 네 마차를 기다렸다. 그들은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윽고 한 식경쯤 넘었을 때 해골 바가지니 도깨비 화상을 잔뜩 그려 붙인 마차 한 대가 장거리로 달려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차가 나타나자 벌써부터 아우성을 치며 피해 달아났고, 진작에 혼이 나가 한 발자국도 못 떼고 그 자리에 와들와들 떨고 선 이도 있었다.
마차는 저잣거리까지 내처 달려와 멈춰 섰다. 이내 한 사람이 풀쩍 뛰어내렸다.
그자의 모습을 보고 사대 시위는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곳 사람 들이 충피네 석굴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도깨비라고 한다더니 정말 도깨비 형상 그대로였다. 목은 몇 번이나 쭉쭉 잡아당겼다가 퉁겨 놓은 것마냥 살가죽이 질질 밀려 늘어졌고, 낯가죽에도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한데 얽혀 있었는데 거기다 곰보 자국마저 콩마당같이 어지러이 얽죽얽죽해 더럽고 망측하기가 목불인견이었다. 그런가 하면 말라 비틀어진 다리는 길기가 한정이 없어 마치 새 다리
같았다. 추물도 천하에 저런 추물은 없으련만 그는 오히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양 삐뚜룩하니 서서 사람들을 보고 징그럽게 웃음을 흘렸다.
시끌벅적하던 저 잣거리는 쥐 죽은듯이 고요하고 누구 하나 찍소리도 못했다. 놈은 미친 듯이 한차례 앙천대소를 하더니 늘어진 턱주가리를 주억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째서 날 보더니 갑자기 입들이 붙었느냐? 우리가 너희들한테 무슨 행패라도 부린단 말이냐!"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꼭 얼빠진 사람처럼 입가를 씰룩거리며 가까스로 웃는 낯을 보이려 애썼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옴짝달짝을 못하자 놈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지껄여댔다.
"내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주지. 우리 동주( 主)님께서 또 색시감을 고르고 있다. 그러니 어느 집에 예쁜 색시감이 있는지 어서들 말해 봐. 동주님께 시집가면 팔자를 싹 고칠 테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느냐."
오늘은 또 어느 집 처녀가 재앙을 당할지, 사람들은 입도 달싹 못하고 걱정스레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구의 머리 위로 그 화액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놈은 거만스레 한번 휘둘러보더니 천천히 마을사람들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는 연신 괴상한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입가에선 침이 질질 흘러 나왔다.
"전번에 시집간 그 계집은 이미 동주님이 우리 동에 있는 이죽(二竹)에게 하사하셨지.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굉장히 예쁜 처녀애를 골라잡아야겠는데……. 실인즉 또 이번에도 동주님께서 싫증이 나시면 그땐 내 차례거든. 그러니 오늘은 내 색시를 고르는 것이나 진배없잖은가!"
놈은 미친 듯이 낄낄 웃어대더니 이번에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들 듣거라. 전번에 네 놈들이 나를 골짜기에 처넣는 바람에 난 하마터면 산 채로 짐승 밥이 될 뻔했다. 다행히 동주님께서 구해 주셔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다마는 내 아직도 그 원수를 못 갚고 있다. 잘 알아듣겠느냐?"
마을 사람들은 더욱 오금을 못 펴며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낮추 꺾었다. 행여라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 도깨비 같은 사내는 싸늘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는 대자리 점포 주인 영감을 발견하자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봐, 영감! 영감 집에 예쁜 계집애가 하나 있다던데? 출가도 안 했고? 그런데 왜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있는 게야!
어디, 내가 직접 좀 봐야겠다. 정말 소문대로 예쁘면 오늘 밤이라도 영감은 잔치 술을 받아먹을 수 있다구!"
"어허, 이 사람! 안됐네그려. 우리 애는 자네보다도 추물이라네."
노인은 의외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으면서도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뭣이 어째? 이 노인네가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단단히 부었어! 어서 계집을 내 앞에 대령햇! 안 그랬다간 오늘이 영감 제삿날이 될 테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어서!"
그러자 영감의 아들인 젊은이가 대들었다.
"우리 누이동생은 이미 출가했소! 그것도 모르시오?"
사내는 젊은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히죽 웃었다.
"시집을 갔다구? 흥, 그걸 내가 왜 모르고 있었을까? 도대체 누구한테 시집을 갔을까?"
젊은이는 사내의 물음에 미처 대답을 못하고 뒤에 있는 단지흥 일행을 힐끔 돌아보았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은 저 사람들이 안 보이오? 이분들은 성안에서 오신 귀한 손님들이신데 우리 누이는 바로 저기 저분에게 출가했소."
젊은이는 얼떨결에 나무꾼을 가리켰다. 나무꾼은 너무나 뜻밖이라 자기도 모르게 아니라고 하려다가 단지흥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급히 말을 삼켜 버렸다. 저 사내가 또 어쩌는가 두고 보자는 뜻이었다.
사내는 대번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단지흥 일행을 아래위로 ㅎ어보았다.
"아니 그 처녀가 결혼을 했다면 이 어른이 왜 모른단 말이야, 엉?"
원래 이 사내는 오래 전부터 이 집 처녀에게 눈독을 들여 왔었다. 그리하여 노심초사 이 처녀를 예의 주시해 왔는데 그 처녀가 시집을 갔다는 소리는 도통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속이기만 해 봐라. 그때 가선 어찌 되는지 내 본때를 보여 주리라!'
사내는 속으로 쌍심지를 돋우며 나무꾼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 성안에서 왔다고?"
사내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나무꾼은 군말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사내는 시뜻해서 뇌까렸다.
"성안의 놈들은 죄다 오만방자하니 몹쓸 놈들이야. 전번에 우리 동주님이 갔을 때도 성안 놈들이 불손하게 굴어 단단히 노하셨다구. 그래서 성안 놈들만 만났다 하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사내는 코방귀를 킁킁 뀌더니 나무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그래 그 계집하고 잠이나 자 봤냐?"
출신이야 어떻든 나무꾼은 지금은 대리 고관이라 새 다리 같은 자식한테 이따위 짓거리를 당하자 화도 나고 수치스럽기도 하여 낯이 벌게졌다. 그러느라고 그가 더듬더듬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더욱 의심이 나서 다그쳤다.
"어서 대답해! 잤어? 안 잤어?"
그러면서 놈은 칼을 쭉 뽐아 나무꾼의 가슴에 쓱 들이댔다.
나무꾼은 급히 단지흥을 돌아보았다. 단지흥이 허락만 하면 이 따위 놈은 단번에 요절낼 참이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할 수 없이 나무꾼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척하며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소인은 이 고장의 예법을 모르고 그만 이 집 따님과 혼례를…… 혼례를 갖추고……."
그 말에 마을사람들은 또 키득키득 웃었다. 이 고장의 처녀, 총각은 자고로 뭐 별나게 혼례를 갖추는 법도 없이 산속 아무데서나 화톳불을 피워 놓고 몸을 섞으면 그것이 바로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딱히 혼례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혼례였다. 그러니 보통 누가 결혼했고 하지 않았고는 당사자들이 말하기 전에는 남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웃음 소리가 차츰차츰 잦아들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온다, 온다, 저기 온다……."
단지흥이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처녀 하나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바로 대자리 파는 점포 집 딸이었다. 그녀는 이미 만이족(蠻異族)들이 결혼한 표시로 쓰는 꽃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웃사람들 앞으로 사뿐사뿐 다가오더니, 나무꾼의 손목을 잡아 끌며 방긋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요. 어서 오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나는 몸을 한 번 씻고는 내다보고 또 한 번 씻고는 또 내다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어디 와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처녀는 낯을 붉히며 들릴락말락 낮은 목소리로 계속 나무꾼에게 속살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비록 뒤의 말은 똑똑히 듣지 못했어도 추측만으로도 그 말이 무엇인지 능히 짐 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옆구리를 찔러 가며 쿡쿡 웃었다. 이제 새다리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을 덮쳤던 그 공포스런 분위기는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누군가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떠들썩하게 소리까지 쳐댔다.
"어서 가시오, 어서 가. 가서 아래위를 싹싹 한 번씩 잘 씻고 둘이 꼭 껴안고 한바탕 재미를 보시라구!"
그러자 사람들은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사람, 새 다리 사내만이 노기등등하게 나무꾼과 처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르짖었다.
"좋다, 이 년아! 네 년이 씻고 내버린 세숫대야라도 동주님은 마다 않을 거고, 네 년이 먹다 버린 사과라도 마다 않을 것이니 잔말 말고 어서 마차에나 올라!"
그 순간 웃음 소리는 싹사라지고,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입을 꾹 다문 채 처녀와 나무꾼 그리고 성안에서 온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동주 충피는 형편없는 호색한이었다. 그는 무예 하나만 믿고 이곳 구구십팔동(丸溝十八端)을 자기의 세습지로 삼아 어느 처녀든 마음에 들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만약 처녀네 집에서 피해 달아나면 어디까지라도 쫓아가 온 식솔들을 까마귀도 먹기 싫어할 만큼 끔찍하게 죽여 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행여 심기라도 건드리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이날 이때껏 살아온 것이었다.
원래 이 새 다리 사내는 이들이 충피라는 말만 듣고도 오금을 못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무꾼이 그 무슨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자 적이 의아해졌다. 이윽고 단지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네 동주는 언제나 이런 패악만 일삼소?"
사내는 잘생긴 사람만 보면 공연히 심술이 나는지라 단지흥을 보자 대번에 두 눈을 뚝 부릅떴다.
"뭐? 어디서 그따위 말버룻이냐? 넌 누구냐? 대체 어디서 굴러 온 놈인데 함부로 주둥아리질이야. 동주님 독주(毒酒) 맛을 좀 보고 싶어?"
이 구구십팔동에서 충피는 여간해서는 좀 독을 쓰지 않고 대신 독주를 썼다. 그나마 어슷비슷한 적수가 되어야 좀 독을 쓰지, 자기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여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애써 만든 좀 독을 쓸 필요가 하등에 없었다. 그건 그야말로 허투루 낭비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새 다리 사내는 지금 영문도 모르고 고작 독주로 단지흥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네 동주가 아무리 살인마귀라 하더라도 도리는 지켜야 할게 아니오? 이미 출가한 새 색시를 억지로 빼앗아 가는 건, 그래 어디서 배운 수법이오? 그건 강도 짓이 아니오?"
새 다리 사내는 흠칫 놀랐다. 이때껏 자기 앞에서 이렇듯 당당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자들은 어딘지 달랐다. 그는 흘끔 이 다섯의 기색을 살폈다. 이들에게서는 긴장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럭 의심이 들었다.
'대관절 이자들은 누구지? 성안에서 온 놈들이라했는데……. 전번에 동주님이 성안에 다녀와서 심기가 좋지 않아 야단이더니 이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 아냐? 이자들이 진짜 동주님의 적수 들이라면 이거 조심 해야겠는걸…….'
새 다리 사내는 눈알을 뱅글 돌리다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모두들 듣거라. 동주님께서는 처녀 하나를 골라 오늘 밤 화톳불을 밝혀 놓고 재미를 보려 하신다. 한데 네 놈들이 이렇게 방해를 놓다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 줄 알아라!"
그는 성이 나서 붉으락푸르락하고 섰더니 홱 돌아서서 돌아가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야단났는걸. 저 놈이 저대로 돌아가는 날엔 이 마을에 날벼락이 떨어질 텐데. 모르긴 몰라도 이 마을 전부를 도륙내 피바다를 만들고 말지.'
마을 사람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서로들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가 개중 몇 사람이 간신히 용기를 내 쭈뻣쭈뼛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거머잡았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서로 상론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미리성을 내시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 마을에 어디 예쁜 처녀가 저 처자 하나뿐이겠습니까? 저 처녀는 이미 시집을 갔다고 하니 다른 처녀를 고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새 다리 사내는 더욱 시뜻해졌다.
'흥, 네 놈들이 내가 동주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서워 이러는 모양이지만 네 놈들은 한번 호된 맛을 봐야 한다. 그래야 이 구구십팔동의 주인이 누군지를 잊어버리지 않지, 내 동주님을 찾아가 단단히 고해 바쳐야겠다. 동주님이 직접 나서서 이 성안 놈들을 중독시키면 이 놈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게다. 이 성안 놈들을 능지처참을 해서 이 고장 놈들 이 꿈에도 이 놈들 송장을 볼까 두렵게 만들어 놔야겠다.'
"흥, 네 놈들이 내 말을 안 듣고 그처럼 뻗대니 나도 동주님한테 고해 바칠 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느냐!"
놈은 이렇게 뇌까리고는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을 홱 뿌리치고는 마차를 몰아 정하니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마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만 쳐다보고 있다가 냉랭히 표정을 굳히며 단지흥 일행을 똑바로 꼬나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좁혀 들며 그들을 에워쌌다.
'모두 이 다섯 사람 탓이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온 마을이 날벼락을 맞게 됐다. 이제 충피가 보복하러 내려오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선 이 다섯을 내빼지 못하게 해야겠다. 이 다섯을 잡아두어야 우리도 변명할 말이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정작 다섯은 내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충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마을은 또다시 괴괴한 적막에 잠겨 들었다. 아이들마저도 다가올 재난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찍소리도 못했다. 마을엔 죽음 같은 적막이 흘렀다.
단지홍은 고개를 젖히더니 미소를 띤 채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때 갑자기 무거운 침묵을 깨며 처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왜들 이러고만 계세요, 빨리 도망가지 않고. 어서 가세요, 어서 가! 그 놈은 악마예요.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니까요. 어서 피하세요, 어서요!"
처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없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처녀가 아무리 울며불며 야단해도 다섯을 에워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비켜 주지 않았다.
"오빠, 오빠는 왜 가만있어요? 오빠 칼은 나무 찍는 데만 쓰는 거예요? 오빤 사내대장부가 아니란 말예요?"
처녀는 울면서 젊은이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젊은이는 꿈쩍도 안 했다. 젊은이는 내내 머리만 숙이고 있다가 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봐요, 저리들 비키시오, 저리들 비켜!"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여러 사람을 밀치며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래도 다섯은 그대로 주저앉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장 달아나도 충피한테 붙잡힐 판국인데 저렇게 배짱 좋게 버티고 앉아 있으니 죽지 못해 용을 쓰는 격이었다. 그는 발뒤축을 구르며 다섯 사람에게 소리쳤다.
"내 누이동생 일은 염려 말고 어서 떠나시오, 어서 떠나! 여기 있다간 아까운 목숨만 버려요."
그가 하도 안달을 하자 내내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던 나무꾼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서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칼 이리 주시오."
젊은이는 다소 뜻밖이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무꾼이 칼로 사람들을 해치고 달아나려는가 보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기왕 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 여기고 순순히 칼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칼을 받아 쥔 나무꾼은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천천히 칼을 안으로 휘어서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갑자기 두 눈이 휘등그래져서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정은이만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도리질을 했다.
"소용없어요, 소용없다니까요. 그 놈들 독약엔 아무도 못 당해요! 무예로 겨루는 게 아니라 독약을 뿌린단 말이에요."
젊은이가 애타하는 모습을 보며 단지홍은 이 황량한 곳에도 이처럼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적이 감탄했다. 젊은이는 지금 자기 가정의 재앙보다 이 낯선 사람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하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때 먼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온다, 온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소를 맨 우차 두 대가 천천히 이쪽으로 굴러 오고 있었다. 우차 위엔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듯했다. 기악 소리 같은 것도 들려 왔는데 그 소리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우차는 점점 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우차 위에는 여자들만 앉아 있었는데 너나없이 요염하게 눈썹을 그리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피리 소리는 한데 어을리지 못하고 서로 어그러져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그 뒤에 풍막차 한 대가 또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쪽은 앞서 오는 우차와는 달리 사뭇 조용했다. 풍막차에는 좀전의 그 새 다리 사내의 마차같이 해골 바가지나 이름할 수 없이 기괴한 것들이 가득 그려 있었는데 그래도 아까 것보다는 정중해 보였다.
피리를 부는 여인들은 오래 굶주린 사람마냥 탐욕스런 눈길로 남자들을 훑었다.
드디어 우차는 바로 앞에까지 곧추 다가와서 멈춰 섰다. 피리 소리도 멎었다. 술렁이던 사람들도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러나 풍막차 안에는 사람이 없는 듯 한동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제4장 기이한 혼례
"동주님이 오셨다. 모두들 길을 비켜라!"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우차 위의 계집들은 또다시 일제히 피리를 불어대기 시작했다. 잠잠히 가라앉은 위로 가뜩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지니 아예 놋그룻을 박박 긁어대는 것마냥 저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계집들은 자기들 피리 소리에 스스로 도취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불어댔다.
한 계집애가 풍막차의 문발을 들치며 한껏 아양을 떨었다.
"아이, 동주님, 이젠 내리셔야죠."
그러자 열대여섯 살 난 여리여리한 계집애 둘이 쓱 얼굴을 내밀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내려와 섰다. 그들은 나지막한 걸상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차 문발까지 층층이 포개 올려 놓고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동주님, 이젠 내리세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단지흥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일국의 황제인 그도 저런 호사는 마다하는데, 볼수록 기가 막힐 노룻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저런 것만 보더라도 이 구구십팔동에서 충피의 위풍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헛기침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풍막차 안에서 작달막하니 땅에 달라붙은 듯한 사내가 하나 뜨직뜨직 굼뜨게 내려왔다. 키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얼굴도 지지리 못나고 음탕한 빛이 질질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충피였다.
그는 짐짓 근엄한 기색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단지흥 일행에게 눈길이 멈추자 싸늘히 냉소를 지었다.
"호오, 황제께서 예까지 친히 행차하셨군! 그래 여기 와서 느낀소감이 어떠신지? 대리면 다 대린 줄 알았겠지만 여긴 내 구구십팔동이오. 여기선 내가 황제요, 내가!"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일순 얼굴에 놀라는 빛이 어리며, 나직이 술렁임이 일었다.
단지흥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기만 할 뿐 대꾸를 안했다. 충피 같은 소인배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어떻게 전횡을 부리고 있는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게 누구 없느냐!"
충피는 불현듯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우차 뒤에서 새 다리 사내가 냉큼 뛰쳐나오더니 허리를 낮추 꺾고 굽실거렸다.
"동주님, 저자들입지요. 저자들이 바로 동주님의 희비 고르는 일을 훼방논 자들입니다요."
충피는 그 말에 작은 배를 톡톡 치며 깔깔 웃었다.
"이 멍청한 놈아, 저 어르신이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냐? 저분은 바로 대리국의 황제 폐하시다. 이 놈아, 저런 높으신 분이 이 누추한 구구십팔동까지 몸소 찾아 주시니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한데 네 놈은 무엄하게도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어? 이런 몹쓸 놈!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렷!"
새 다리 사내는 난데없는 불벼락에 어리둥절해져서 눈동자를 굴리다가는 황급히 우차 뒤로 꽁무니를 빼 버렸다.
둘러선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쳐다보았다.
충피는 단지흥을 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폐하, 정말 잘 생각하셨소. 이렇게 해독약을 가지러 오지 않았으면 며칠 내로 천룡사 고승들이 뭐가 되겠소?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켁 뒈져 버리지 않겠소?"
단지홍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도 운남 사람 아닌가? 천룡사는 대리국에 큰 공덕을 베푼 호국사요, 여러 번이나 대리 사직을 안정시킨 바 있네. 자네도 운남 사람이라 천룡사에서 은혜 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곳 스님들을 헤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충피는 히히 웃으며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단황 나으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소리요? 날 찾아 왔으면 두말 말고 어서 일양지 비본이나 내놓으시오. 그러기만 하면 내 약속대로 해독약은 내주지. 중들을 살리고 싶다면 어서 내놓아요! 그저 한 닷새만 지나 보시오, 어떻게 되나. 먼저 온몸에 두꺼비 관등처럼 두들두들 두드러기가 날 거요. 두드러기 안에선 벌레들이 꼬물꼬물 살을 파먹을 거고. 그래도 그 정돈 괜찮소. 이레가 넘어도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천룡사 중들은 모두 끝장이오, 끝장! 살
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이번엔 몸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먼저 간을 파먹고 또 염통에 기어 들어가 염통을 파먹고……. 그때가 되면…… 헤헤…… 그때……."
충피의 말에 누군가 기겁을 하며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나 그말이 너무도 끔찍하여 그 소리마저도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새삼 좀 독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천룡사 중들이 좀 독에 중독됐다니, 그 광경을 떠올리곤 너나없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충피와 맞닥뜨리기 전에는 단지흥도 어떻게 그를 설득해 해독약을 얻어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 보았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대하고 보니 예상대로 모두 헛수고가 될 게 틀림없었다. 말로 설득을 해서 될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놈과 싸우자니 그 역시 간단치가 않았다. 싸워 놈을 죽여 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인다고 해독약이 나오겠는가? 생포한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을 쓰는 놈을 잡기도 어렵거니와 꼼짝없이 잡는대도 무슨 수로 해독약을 얻어낸단 말인가? 실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단지흥이 아무 말도 없자 충피는 안달이 나서 다시 또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먼데서 온 귀한 손님이니 손님 대접을 안 할 수야 없지. 자, 우리 구구십팔동에서는 귀빈 대접을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시오. 야, 새 다리! 너 이리 좀 와 봐. 어서 가서 그 계집년을 좀 데리고 와. 어떻게 생겼는지 우선 인물부터 좀 보자."
그가 한마디 소리치자 아까의 그 새 다리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와 굽실 절을 하더니 다시 헐레헐레 뛰어가 대자리 집 처녀를 끌고 충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팍 내질러 충피 앞에 무릎을 꿇렸다. 처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꾼을 자기 남편이라고 하며 자못 의연하더니 충피 앞에 끌려 오자 그만 질겁을 하여 몸을 벌벌 떨어댔다. 충피는 건들건들 그녀 앞으로 걸어오더니 음탕한 눈길로 아래위를 훌어보았다.
"쓸 만하구먼. 지금 있는 것들보단 그래도 예쁜 축이야. 자, 상을 내줘라."
그는 뒤를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우차 한 귀퉁이에 앉은 여인이 새 다리 사내에게 쇠가죽으로 만든 작은 술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고맙습니다요. 헤헤, 고맙습니다요."
새 다리 사내는 입이 헤 벌어져서 술병을 그러안고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 사이 처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무꾼이나 그 일행이나 충피의 적수는 못 될 것 같았다. 이들이 충피를 대적해 내지 못하면 충피의 독약에 온 마을 사람들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충피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흉포한 자였다.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비칠 몸을 일으키며 충피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가 순순히 자기한테로 걸어오자 충피는 으쓱해져서 연신 입이 벙싯벙싯 벌어졌다. 그는 뱀 가죽같이 징그러운 작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슬쩍 쓸어 보며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파미(巴美)예요."
"파미? 파미? 거 좋은 이름이로군!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야."
충피는 연신 음탕한 웃음을 흩뿌리며 파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가 워낙 작아서 손이 머리에 닿지 못했다.
"자자, 파미! 머리를 숙여야지, 허리도 굽히고. 내 손이 닿아야 쓸어 주지. 내 색시가 되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어 줄 기색이면 넌 눈치 빠르게 머리를 내 손 밑으로 밀어 넣고, 허리를 만져 볼 기색이면 내 손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야 한단 말이야. 그러지 않았다간 내 심사가 뒤틀려 재미 없는 일이 생긴다니까……."
파미는 그 말에 치가 떨렸다.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녀는 나무꾼을 한 번 바라보고 싶었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칫 나무꾼 일행이 큰소리라도 내는 날이면 충피가 악에 받쳐 독약을 뿌릴지도 모르고 그럼 다섯 모두 꼼짝없이 죽게 된다.
'저이들을 구해야 해. 난 저이를 사랑해. 내가 충피에게 잡혀 가 유린을 당할지언정 저이는 구해야 해, 이 구구십팔동 처녀들치고 이 징그러운 놈의 마수를 벗어나기란 어차피 틀린 일인걸.'
그녀는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지만 애써 나무꾼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이는 정말 재간이 뛰어나. 저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데 대한 감미로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진정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그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징그럽고 음충스럽기 짝이 없는 충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라지만 나보다도 못하지 않소? 난 겨우 구구십팔동 동주일 뿐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 넘쳐 귀찮을 지경이거든. 내가 어느 계집이 좋다고 한마디만 하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렇게 갖다 바치잖소? 그럼 난 몇 밤 데리고 놀고는 아랫놈들에게 하사해 주는데 그거 싫다는 놈은 한 놈도 없는 거요. 히히……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도 나 충피처럼 즐겁게 살 수는 없지."
단지홍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충피가 떠벌리는 걸 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대 시위 중 선비는 그들 넷이 함께 달려들면 충피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생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놈을 생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지홍은 충피가 중구난방으로 낄낄거리며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선비에게 급급히 눈짓을 보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면 오히려 큰 낭패만 볼 뿐이었다.
더욱이 생포한다 해도 뾰족한 수도 없는 터, 단지홍은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먼데서 온 손님들한테 우리 고장 혼사 구경까지 시켜 줘야 예의지."
충피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새 다리 사내를 불렀다.
"야, 새 다리, 여기다 화톳불을 지펴라. 난 오늘 밤 여기서 저 계집과 혼례를 치러야겠다."
그러자 새 다리 사내는 별안간 환성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둘씩 입을 벙긋거리며 환성을 올리는 척했다.
뒤미처 우차 위에서 계집애 몇이 우르르 내려와 파미를 에워싸고는 냇가로 끌고 갔다. 그와 동시에 대자리 집 영감과 젊은이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계집애들은 파미를 냇가로 데려가더니 그녀의 머리를 마구 풀어 헤치고는 다시 자기들 식으로 빗어 주었다. 파미는 넋을 놓은 채 그저 계집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둘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피와 그 밤에 지독한 일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나무꾼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충만한 채 그만을 생각하려고 애를썼다.
어느새 달이 떠올랐다.
교교한 달빛이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을 내리비췄다.
화톳불 주변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쭉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충피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파미를 끼고는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키가 어찌나 작은지, 신랑이라고 차려
입긴 했으나 신랑이 아니라 자그마한 어린애가 파미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술판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울적하게 앉아 있었지만 술을 두어 잔 걸치자 거나해져 충피에게 저당 잡혀 있다시피 한 자신들의 신세가 한탄스럽고 뭐고 점점 무감각해져 갔
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취기가 올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살뜰한 정이 담긴 사랑가였다.
산 위에 바위는 나
그대는 나를 껴안은 파초일
바람이 크게 일어도
그대, 가만있어요
나를 꼭 껴안고 가만있어요
나는 계곡에 흐르는 벽계수
그대는 그 물에서 노니는 선녀
내 품에 숨어서
그대 , 가만 있어요
동주님 눈길이 찾고 있어요.
충피는 흥에 겨워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게슴츠레 단지흥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단황 나으리는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이 충피는 어쩌지 못하오. 나한테 조금만 함부로 굴어도 천룡사 늙은 중이고 젊은 중이고 모두 구더기 밥이 될 텐데……."
그리고는 충피는 또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어젖히고는 음탕한 눈빛을 반짝 빛내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황제는 후궁에 희비들이 얼마나 있소?"
단지홍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때껏 살면서 이런 음탕한 짓거리를 대하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그는 입을 딱 닫아 붙인 채 함구 무언 말이 없었다. 그러자 충피는 또 낄낄 웃으며 빈정거렸다.
"기실 우리들은 모두 속세 인간들인데 계집을 싫어할리야 있겠소? 거기도 계집들이 수두룩하겠지만 내게도 내 계집이 허다하다오. 그쪽 계집들도 단황 나으리 말을 잘 듣겠지만 내 계집들도 내 말이라면 설설 긴다오. 그래, 내 위세가 대단하지 않소? 과연 황제와 맞먹지 않느냐 말이오?"
단지홍은 듣기가 거북해 마지못해 한마디 내뱉었다.
"글쎄,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쳇, 내 말을 믿지 않는 게로군! 그럼 믿게끔 해 주지."
아무리 해독약을 얻으러 온 처지라지만, 그리하여 저 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뭇 조심하고 있는 터이지만 황제가 저토록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사대 시위는 너나없이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졌다.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저런 미친놈! 저따위 놈하고 무예를 겨뤄야 하다니, 한심한 일이로다. 완전히 고주망태가 돼서 정신이 가 버리면 저 놈을 잡아 엎어 놓고 해독약을 뺏어 내야겠다.'
사대 시위는 눈을 부릅뜨고 충피를 쏘아보며 기회를 노렸다.
"자, 이리들 오너라!"
충피는 거들먹거리며 제 계집들을 불렀다. 계집 여럿이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산간 벽지에서 나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렇게 여러 계집에게 시중을 받으며 즐기기 때문 아니겠소? 내 이 계집들 좀 보시오. 얼마나 예쁜가. 이 구구십팔동 것들
도 있고, 타고장 것들도 있지만 모두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능이라도 한다오."
충피는 득의양양하게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한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러자 계집들은 충피를 사뿐 안아다가 한 우차 위에 올려 놓고 파미도 그 곁으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는 우차 두 개를 서로 끌어다 붙이고는 바삐 손을 놀리더니 금세 평평한 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이어 네 귀퉁이에 빙 둘러 팔뚝 같은 횃불을 열여섯 자루나 켜 놓았다. 횃불은 피지직피지직 타오르며 침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자, 이제 됐다. 모두들 가까이 오너라!"
충피는 호기롭게 호령을 했다.
단지홍은 이 산간 벽지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이곳 사람들 사이엔 타지와 다른 기괴한 일들이 많음에 놀랄 만큼 놀랐고 충피의 음탕함에도 신물이 날 정도가 되었으나 지금 이 난쟁이가 또 무엇을 하려는 수작인지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충피의 한마디에 계집들은 두말없이 다가들었다.
그녀들은 충피 곁으로 가더니 차례차례로 허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속치마가 다 드러났다. 봉곳한 젖가슴, 탱탱한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교교한 달빛, 이글거리는 횃불 밑에서 그녀들의 모습은 적이 고혹적이었다. 충피는 한 어린 계집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계집은 엉덩이를 흔들어 가며 충피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충피는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받쳐 올리더니 물었다.
"이 동주님이 너와 몇 번을 즐겼느냐?"
그 계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일곱 번밖에 안 되옵니다."
"그래, 그래. 내 몇 번은 더 부르지."
충피는 그녀를 물리며 낄낄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계집이 허리를 비비꼬며 충피에게 달려들었다.
"동주님은 저하고는 벌써 열다섯 번이나……."
충피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열다섯 번? 그렇게나 많이? 으, 질린다, 질려! …… 어떻소, 단황 나으리! 이만하면 신물이 나지 않겠소? 이 계집이 좀 아깥긴 하지만 이제는 새 계집으로 갈아야겠소! 거기 새 다리, 너 이리 좀 오너라."
"예예,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새 다리 사내는 냉큼 뛰어가 충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오늘 밤 내게 새 각시를 골라 바쳤으니 그 상으로 이 계집을 내주마. 네 놈한테는 과분하지만…… 어쨌든 저 애는 네가 가져라!"
그 말에 계집은 눈이 휘등그래졌다. 충피도 싫었지만 이 새 다리 사내는 더 싫었다. 충피에게 몸을 버린 것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집에 있는 부모 형제의 안위가 걱정되어 온갖 애교를 다 부리며 꼭두각시처럼 충피가 하라는 대로 몸을 굴렸는데 이제는 이 천하의 추물 새 다리 사내한테까지 유린을 당해야 하다니, 그녀는 자기의 신세가 처량하여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기분이 상한 충피가 벌컥 성을 냈다.
"이 년아, 울긴 왜 울어? 날 떠나기 섭섭해서 우는 거냐? 섭섭 해도 할 수 없다. 난 네 년에게 진저리가 났단 말이다. 넌 오늘 밤 저 새 다리와 자야 돼, 알겠어? 오늘 밤으로 저 새 다리한테 시집을 가야 한다구!"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 다리 사내는 우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 계집의 손목을 와락 거머쥐고 밑으로 끌어내려 숲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통곡 한 번 못하고 가녀리게 어깨를 들썩이며 애원 어린 눈길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그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할 뿐이었다. 단지흥 일행 역시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마저 점점 멀어져 갔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충피가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단황 나으리,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내 계집들 중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단지흥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경멸 어린 미소를 흘릴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는 충피같이 황음무치한 자와는 무슨 말이고 간에 주고받기가 싫었다.
"단황 나으리는 먼데서 온 귀빈이 아니오? 그러니 내 계집들 중에서 마음대로 하나 골라잡으시오. 한결같이 예쁘고 곱살스러운데, 손님 대접이 그게 아니니 오늘 밤 수청을 들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계집들은 모두 이마를 다소곳이 숙이고 단지흥이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기원하며 가슴을 졸였다.
'아, 황제가 나를 골라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난 황제의 여인이 되고 이 지옥 같은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시는 악마같은 충피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런 행운이 내게 떨어진 다면! ……'
그녀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모두 머리를 들라!"
충피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간절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지홍은 그녀들이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일순 한 여자라도 구해 내는 게 도리가 아닐까 마음 이 약해졌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 먹었다.
'내가 이 구구십팔동까지 온 건 오직 해독약을 얻으려 함이었다. 해독약을 얻어내야만 천룡사 스님들을 구할 수 있다. 충피가 그 어떤 강짜를 부린다 해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 저 놈의 얕은 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단지홍은 여전히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충피, 내게도 여인들은 많다네……."
"아니, 계집 하나를 선사한대도 마다 한다면 이 충피를 하찮게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내가 그렇게 하찮게 보인다면 다른 말은 더 맙시다. 나도 그 잘난 일양지 소린 다신 안 할 테니까 거기서도 해독약 얘긴 꺼내지도 말라구요."
충피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해독약 소리가 나오자 단지홍은 놓칠세라 말꼬리를 잡았다.
"내가 천리를 마다 않고 예까지 온 것이 바로 그 해독약 때문이거늘 어찌 그 얘길 안 할 수 있겠나. 제발 그 약을 좀 주게. 여자는 놔두고 천룡사 여러 대사들 목숨이나 좀 살려 주게."
"그래도 일국의 황제라 이 충피가 미인까지 내드리며 환대를 하는데도 이 구실 저 구실 들이대며 고깝게 받아들이니,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둘이 같이 즐겁게 밤을 지내자는 게 뭐 잘 못되었소? 우리 사이가 이렇게 뻣뻣하고 동고동락을 못하는데 해독약은 무슨 해독약……."
충피는 깐죽깐죽 여간 얄밉게 구는 게 아니었다. 단지홍은 속이 탔다. 저자가 자기 계집을 억지로 떠안기며 자기를 휘어잡으려 하니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켠에 서 있던 선비가 대뜸 끼여들었다.
"동주께서 정말 그렇게 선심을 쓰려 한다면, 좋소이다. 기왕이면 파미를 내주시오."
그 말에 충피는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단지흥에게 물었다.
"뭐라구? 그렇담 정말 황제는 내 새 각시가 마음에 든단 말이오?"
단지홍은 언뜻 선비를 돌아보았다. 선비의 뜻은 분명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 난쟁이 괴물의 손에서 구해 내자는 것이요, 기왕이면 아직 몸을 더럽히지 않은 학미를 구해 내자는 것이었다. 단지홍
은 선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단황 나으리도 참 어지간하구려. 새 각시를 옷도 못 벗겨 보고 그쪽에 넘기란 말이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어떻게 새 계집을 맛도 못 보고 남에게 내준단 말이오?"
충피는 손까지 내저으며 안 된다는 시늉을 했다. 선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받았다.
"이봐요, 동주님! 동주님도 황제 폐하는 멀리서 온 귀빈이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이왕에 환대를 하겠다면 가장 아끼는 물건을 내놔야 도리가 아니겠소? 그래야 더욱 칭송도 받을 거고."
그러자 충피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두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파미와 단지흥을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내뱉었다.
"좋아, 좋아. 그 귀한 일양지 비본을 얻으려면 그 정도 대접은 해야겠지. 이 넓은 구구십팔동에 파미말고도 미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좋소! 자, 파미를 황제 폐하께 내드려라!"
충피는 호령을 내지르고는 단지흥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내 파미는 순순히 내드리지! 단, 단황 나으리,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나으리 역시 이 고장 법도를 따라야 하오! 이 고장에선 화톳불을 켜 놓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혼례를 해야
하오! 황제는 오늘 밤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파미와 성혼을 해야하오. 알겠소?"
단지흥이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충피는 한바탕 운고 나서 덧붙였다.
"우리 구구십팔동 사람들은 성안 사람들처럼 깨이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법도는 갖고 있다오. 즉 각시를 얻었으면 웃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해야 한다 이 말이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다 보는 데서 발가벗고 뒹굴어야 한다는 것이오. 그걸 보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어떻게 믿겠소?"
거창하게 드러내 놓고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게 이 지방법도이긴 했으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따위의 법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충피는 지금 단지흥을 호되게 곯려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애를 태우면서도 아무 소리도 못했다.
단지홍은 아연해져서 사대 시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선비가 나섰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 파미를 내달라고 한 건 순전히 내 동생을 위한 것이었소. 우리 동생과 파미는 이미 약혼한 사이요. 그러니 두 사람이 성혼하도록 해 주시오."
그 말에 파미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충피는 원래 이러니저러니 말만 늘어놓는 덴 딱 질색이라 귀찮다는 듯 소리쳤다.
"참 말도 많군. 좋소, 좋아! 멀리서 온 귀빈이니 뜻대로 해주지. 하지만 꼭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하오."
그리고는 파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우차를 뛰어내려서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나무꾼을 바라보며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침내 나무꾼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깊은 눈길을 좇았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녀는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고 나무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입술을 꼭 맞추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설야의 고행 속에서 모닥불이나 만난 듯 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충피는 심사가 뒤틀려 이죽거렸다.
"저자가 황제의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 밤에는 반드시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파미가 저자의 각시가 됐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 파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가랑이가 찢겨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단지홍은 충피가 허풍을 떠는 건지, 진짜로 이 고장에 이런 법도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충피가 자못 완강하게 나오는 걸로 봐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그는 난감한 눈빛으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대자리 점포에서 나무꾼은 이미 파미의 애잔한 눈길을 느꼈으나 모르는 척 딴청을 했었다. 둘은 어제 처음 만나 그저 하룻밤 한지붕 아래서 따로따로 묵은 일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성혼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충피, 결혼이라는 것이 머디 아이들 놀음인가? 자고로 혼사라함은 인륜지대사이거늘 우리 대리의 풍속을 따라 집 안에서 성혼을 치름이 어떤가?"
단지홍은 격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큰 우차를 왜 몰고 왔겠소? 이 많은 사람들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줄 아시오? 이 사람들은 오늘 밤 각시가 이 우차로 만든 널찍한 침대 위에서 성혼 하는 걸 보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뭘 알기나 알고 하는 말이오?"
충피는 도리질을 해 가며 지껄여댔다.
그러나 파미는 그의 말은 귓전으로 흘리며 나무꾼의 품안에 살포시 기대고는 소곤거렸다.
"나를 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토록 좋은데. 당신이 만일 나를 좋아하신다면 사람들 눈이 뭐 대수예요? 볼 테면 보라지……. 만약 저 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늘 밤 저 놈은 날 죽이고 말거예요……."
파미는 나무꾼에게 꼭 붙어서서 두려운 듯 충피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충피는 그 음탕한 눈빛을 번쩍이며 이 두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남정네들도 자못 흥미롭게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실 파미는 이 구구십팔동에서는 손꼽히는 절색으로 그녀와 단 하룻밤이라도 자고 싶어 남모래 속을 끓인 사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제에 자신들은 원을 못 풀더라도 이 여인이 밤일을 할 땐 어떻게 하는지 적이 호기심이 동해 저마다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단지흥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비도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대리국에서는 명색이 이품(二品) 벼슬을 하는 고관대작인데 이따위 짓거리에 놀아나야 하다니…… 나무꾼은 속만 탔다. 그 역시 방책이 서지 않아 황제와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량하기만 하던 이 마을 사람들도 점점 이성을 잃고 빨리 혼례를 치르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두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을 한시 바삐 보고 싶어 야단이었다.
그쯤 되자 단지홍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무꾼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피 말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꾼은 잠시 주춤하더니 한 순간 결심을 내린 듯 파미의 손을 홱 거머쥐고는 천천히 우차 위로 올라 갔다.
충피는 나무꾼과 파미가 우차로 만든 침대로 올라오는 것을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그들의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다.
나무꾼은 엉거주춤하니 파미를 끌어안았다. 나무꾼의 품에 안겨 파미는 얼굴이 발개져서 속살거렸다.
"어서 하세요, 어서……. 한 번도 사내를 타지 않은 깨끗한 몸이에요. 거기가 가지세요……."
나무꾼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열여섯 자루 팔뚝 같은 횃불이 우차를 대낮처럼 환히 비추는데 어찌 그리도 남부끄러운 짓을 한단 말인가. 그 역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선뜻 결단이 서지 않아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미는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누르지 못해 한 순간 거칠게 나무꾼을 옥죄더니 그를 끌어안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당신 손이 그처럼 재간이 있듯, 난 그 마음도 그처럼 백설같이 선하리라고 믿어요……."
파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나무꾼은 좀체로 파미처럼 열렬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차 주위로 몰려들어 손에 땀을 쥐며 그들을 지켜 보았다. 파미의 아버지는 진작에 돌아갔고 그녀의 오빠만이 두 주먹을 부르쥔 채 충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무꾼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엉거주춤하니 허리춤을 풀어 반나마 및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흘러서야 주춤주춤 파미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그러자 파미는 한껏 달아올라 온몸을 나무꾼에게 찰싹 갖다 붙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파미의 눈빛은 더욱 열정적으로 불타 올랐다.
충피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정색을하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단지홍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이들 두 남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단황 나으리, 어떻소? 또 한 번 단단히 속으셨구려!"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단지홍은 고개를 홱 쳐들며 외쳤다.
"속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네 졸개는 또 내게 중독되었다 이 말씀이오. 풍독(瘟毒)이라는 건데, 저 둘은 한치도 떨어지지 못하고 마냥 저대로 붙어 있어야 한다구요, 히히히…… 한치라도 떨어지면 금세 독이 퍼져 죽고 말아, 으하하하……."
단지홍은 두 눈이 휘등그래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충피는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며 죽겠다고 웃어젖혔다. 단지흥을 또 한 번 골탕 먹였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요절복통할 일이 아닌가! 이제야말로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으니, 구구십팔동은 물론이요 대리와 중원(中原) 천하까지 손아귀에 틀어쥐게 되었지 않은가……. 충피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웃음을 토해냈다.
아니나다를까, 나무꾼은 불현듯 온몸에 오한이 나며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아, 큰일이다. 이거 야단났는데……."
나무꾼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어찌나 떨리는지 이빨이 떡떡 마주치고 눈은 점점 흐릿해 졌으며 동공은 바늘귀처럼 작아졌다.
정신도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파미는 속으로 겁이 덜컥 났으나 조금이라도 위로해 볼 요량으로 나무꾼을 그러안고 애절하게 말했다.
"너무 염려 말아요. 다 괜찮아요. 동주 말을 들었지요? 내가 그냥 당신을 끌어안고만 있으면 죽지는 않는대요."
단지흥과 시위 세 사람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볼 뿐, 누구 하나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날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파미와 나무꾼을 지켜 보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개중에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몸이 후끈 달아올라 서로 짝을 지어 으슥한 골짜기로 달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거개는 좀전의 자기를 질책하며 근심스런 기색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충피는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단지흥을 기분 좋게 쳐다보며 으르댔다.
"단황 나으리, 이제 순순히 일양지 비본을 내 놓으시지. 해독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룡사 중들을 고치는 약뿐 아니라, 당신의 저 시위를 해독시키는 약도 당장 내놓겠어! 그래, 일양지 비본 은 어딨지?"
단지홍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무꾼이 저대로 날마다 파미를 끌어안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일양지 비본을 내주고라도 나무꾼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이마에는 골 깊게 내천자가 그려졌다.
"단지흥, 일국의 황제 주제에 제 시위 하나 못 살려내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는가? 자, 어서 일양지 비본을 척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도 모두 저 꼴이 돼."
충피는 사뭇 득의양양했다.
"폐하…… 저 놈의 허튼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저와 이 여인이 죽을지언정…… 일양지 비본을 저 놈한테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비본을 얻으면 저 놈은 더욱 흉악해져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천하를 제 맘대로 주무를 것입니다……."
나무꾼은 더듬거리면서도 성마르게 외쳐댔다. 그러자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이 앞뒤 분간도 못하는 놈아, 당장 죽게 된 놈이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으냐! 너희 두 년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으나 잠시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그 당장 죽는다, 죽 어!"
세 시위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제각각 선비는 검, 농부는 쇠갈퀴, 어부는 쇠로 만든 노를 들고 미친 듯이 휘둘러댔 다. 그러나 충피는 여간 날쌘 게 아니었다. 놈은 소리를 지르며 획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피하더니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는 땅에 사뿐 내려섰다.
"나 같은 것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대리국의 황제라고? 히히히…… 그 이름이 무색하구나."
충피는 지들거리더니 낯색을 굳히며 짧게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러자 우간 밑에서 난데없이 독충과 독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만큼 큰 전갈, 두 자는 됨직한 긴 독사, 그외에 이름 도 모르는 독충들이 새까맣게 땅을 뒤덮고 충피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네 사람을 포위해 들어왔다.
단지흥 일행은 즉각 몸을 피하려 했으나 때를 놓치고 말았다. 우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사방으로 튀었다.
"야단났다. 동주가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과 독사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었다.
선비는 검을 들어 서슬 푸른 검기(劍氣)를 내뿜었다. 빗발치는 검기가 무지개를 이루며 독충들의 접근을 막아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독충들은 물불 안 가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농부는 돌개바람이 일 정도로 쇠갈퀴를 세차게 휘둘러댔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리 오래 견딜 수는 없었다. 무거운 쇠갈퀴를 정신없이 휘둘러대니 숨이 가쁘고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손을 놓으면 황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에 농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쇠갈퀴를 휘둘러댔다.
어부도 쇠로 만든 노를 바람이 씽씽 일 정도로 힘차게 휘두르며 독충들을 내리쳤다. 어부의 쇠로 만든 노는 농부의 쇠갈퀴보다는 쓰기가 한결 가뿐했지만 몰려드는 독사와 독충들을 다 막아내기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독충들은 지독하게 악취를 내뿜어 속이 메슥거리고 골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래도 어부는 분을 못이기며 눈을 질끈 감고 닥치는 대로 마구 내리쳤다. 대가리가 터져 납작하게 된 독충과 독사들이 바닥에 확 깔리기 시작했다.
가운데 선 단지흥은 잠시 망설였다. 자기 혼자만이 라면 내공으로 이 벌레들을 일시 막을 수는 있으련만 시간을 오래 끌수록 사대 시위의 신상은 위태해지고 만다. 단지홍은 일순 마음을 굳히고 일양지공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지풍이 팍팍 소리를 내며 뿜어 나가자 과연 독충과 독사들은 배때기가 터지며 연신 죽어 나자빠졌다.
팍팍팍, 그는 일양지공을 번개같이 사방으로 내질렀다. 순식간에 독충과 독사들이 죽어 널브러져 새까맣게 땅을 뒤덮었다.
단지흥 일행은 향을 세 대 피울 시간 동안이나 독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으로는 조수마냥 끝없이 밀려드는 이 독충과 독사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게다가 충피의 계집들은 무슨 발광이 났는지 충피 뒤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계속 독충과 독사들을 부리고 있었다. 구구십팔동 그 많은 산과 골골의 독충과 독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불러 다 단지흥 일행을 물어뜯게 할 참인 것 같았다. 단지홍은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이젠 다 글렀구나, 해독약을 구해 천룡사 중들을 살려 보자 했더니 해독약은 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문제가 아니나 대리의 호국사가 나에 이르러 파멸당하게되니 죽어도 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폐하, 저희 셋이 막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농부가 소리쳤다.
"지존께서 이렇게 수난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어서 여기를 피하십시오, 어서!"
선비도 애가 달아 소리쳤다.
"폐하, 어서 가십시오. 차후 저 독충 같은 놈을 잡거든 저희들의 원수나 꼭 갚아 주십시오."
어부도 숨을 바투 쉬며 외쳤다.
단지흥은 비록 자기 목숨이라도 자기 멋대로 함부로 여길 수 없는 황제의 신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위 넷을 사지에 버려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군신간이라 해도 정은 수족 같고 형제나 다름없거늘, 어떻게 저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피하겠는가. 단지홍은 장탄식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은 그만두게.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수리 개에게 뜯기기를 자원하셨거늘, 나도 내 몸을 저 독충들에게 뜯기게 할지언정 자네들을 버려 둘 수는 없네."
그 말에 선비, 농부, 어부 세 사람은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네 사람은 아무 방비도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제 처연히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자지러지는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순간 싱글벙글 입이 헤벌어졌던 충피도 우거지상이 되어 버렸다.
뒤미처 단지흥 일행 앞에 출연히 여인들 몇이 나타나 떡 버티고 섰다.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몸매로 보아 여자들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아무 말도 없이 충피를 노려봤다. 이윽고 충피가 어깨를 몇 번 으쓱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니, 여긴 왜 왔습니까? 난 무당할미의 규례를 위반하는 짓은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여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단지홍은 충피가 이 여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들이 나타나자 충피는 더는 독사들을 몰아대지 못하고 그녀들의 눈치만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대관절 이 여인들은 누구인가. 어떤 여인들이기에 저 기세등등하던 충피마저 저 모양 저 꼴로 꼼짝못하는 것일까, 이 여인들이 그 어떤 신기(神技)라도 갖고 있는 걸까.'
단지홍은 자못 궁금하였다. 그 여자들이 단지흥 일행을 막아 선채 묵묵부답으로 입을 닫아 붙이고 있자 충피는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외쳐댔다.
"아이고 답답해라. 무슨 분부가 있는지 말씀을 하십시오. 내 분부대로 다 해 드리리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개중 한 여인이 느직느직 입을 열었다.
"이봐 충피, 무당 할머니께선 어서 이분들을 놓아주라는 분부시다."
충피는 화가 벌컥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더니 꼭 그 짝이 아닌가. 하지만 눈알을 팽그르르 굴리며 아무리 궁리해 봤자 별 뾰족한 수가 없자 그는 퉁퉁 부어 올라 볼멘소리로 외쳤다.
"무당 할미 분부라면 놔줘야지 딴 도리가 없지만서도 내 명도 없이 다시 한 번 더 우리 구구십팔동에 발을 들여왔단 봐라. 그땐 절대 용서 없어!"
"그래 무당 할머니 칙명에 불만이란 말이냐?"
한 여인이 힐책했다. 그러자 충피는 속이 뜨금하여 억지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이고, 그런 게 아닙니다요. 언감생심 무당 할미의 칙명을 어기다니요. 그저 찢어진 입이라 말이 나가다 보니 그만……."
충피는 말꼬리를 흐리며 여인들 너머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아직도 살기가 등등했다. 이번에 단지흥을 놔주면 앞으로 일양지 비본을 뺏을 이런 호기는 영영 못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놓아주지 않았다가는 무당 할미한테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충피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요, 내 저것들을 놔주면 그만 아니오!"
그래도 여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것들을 놔준다는데도 왜 또 이래요? 무슨 분부가 또 있다는 말이오?"
"저 우차 위에 있는 남자도 놔줘야지. 어서 바지를 입혀."
한 여인이 엄하게 말했다. 충피 킥킥 웃었다.
"무당 할미도 아랫도리를 벗고 있는 사내를 좋아할 텐데 귀찮게 시리 옷을 입힐 거 뭐 있소? 옳아, 알았다! 이젠 사내도 귀찮다 그거겠지. 거 참 아쉬운데. 이 세상에 저 녀석처럼 힘센 놈도 드문데……. 그런데 참, 당신네들도 무당 할미처럼 아랫도리를 벗어 던진 사내가 귀찮소? 그렇다면 정말 아깝게 됐는걸, 저런 황소 같은 놈이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니……."
충피는 음탕하게 킬킬거렸다. 그러나 여인들은 충피가 지껄이건말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충피는 입으로는 추잡한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감히 여인들의 명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계집들을 시켜 나무꾼에게 해독약 한 알을 먹이게 했다. 그러자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그때껏 정신을 잃고 있던 나무꾼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와 희멀거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가 아직도 파미와 한 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급히 아랫도
리를 가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충피의 계집들은 나무꾼에게 다가가 그를 파미에게서 떼놓고는 옷을 입혔다. 나무꾼은 영문을 몰라 그녀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 버려두었다. 그녀들은 이어서 파미를 부축해 일으켰다. 파미도 혼이 난 터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애절한 눈길로 나무꾼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가면을 쓴 여인들은 다시 충피에게 명했다.
"저 우차에 제대로 풍막을 올려라. 우리가 써야겠다."
충피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별수가 없었다. 그는 계집들에게 우차에다 풍막을 올리게 해서는 그 우차를 여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어 독충과 독사들을 한켠으로 몰아내 단지흥 일행이 우차에 오르도록 길을 터주었다.
"충피는 듣거라, 여기 이분은 대리 황제로 먼데서 온 귀객인데 너는 지금껏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 그래도 다행히 큰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일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무당 할머니가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의 호통에 충피는 그저 머리만 긁적거렸다. 좀전의 그 위풍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는 간다!"
한 여인이 채찍을 휘투르며 소리쳤다. 우차는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타. 충피는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파미는 첫사랑을 나눈 이 믿음직한 사내를 향한 애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언제까지나 우차를 바라보았다.
얼마를 갔을까? 단지흥 일행 다섯은 마냥 우차 안에 갇혀 있자니 갑갑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큰 병을 앓고 난 뒤처럼 기진맥진해 있는데다가 그 무당 할미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자기들을 불러오라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글저 우차안에 가만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당 할미는 적일 수도 있었다. 그들 다섯은 좌정한 채 잡념을 떨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내력을 모았다.
굼뜨게 굴러가던 우차는 마침내 한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이제야 오네요. 할머니께선 금방도 근심이 돼서, 일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던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풍막 안으로 들려 왔다.
"그래 할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할머니한테 찾아가 아뢰어야 할 게 아니냐?"
이쪽 여인이 묻자 상대방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님은 지금 연공(練功)을 하고 계시는데 방해했다가는 큰일 나게요?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노여움을 사면 잡아먹으라고 거기를 사내아이에게 줘 버리면 어떡해요."
"그럼 좀 있다가 올라가 아뢰게. 우리 일은 뜻대로 되어 사내 몇놈도 붙잡아 왔다고 말야."
"알았어요!"
상대방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이어 발자국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풍막 안에 갇힌 채 단지흥 일행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밖으로 나가야지, 여기서 이렇게 틀어박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지홍은 마음을 굳히고 벌떡 일어나 문발을 들치고 우차에서 뛰어내렸다. 시위 네 사람도 잇달아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들 다섯은 눈앞의 광경에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제5장 숙녀동 할머니
눈앞엔 커다란 굴이 시꺼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굴 앞에는 천년 묵은 영물 같은 새하얀 원숭이들이 어지러이 뛰어다니고 코끼리 몇 마리가 자루같이 기다란 코를 흔들며 둔하게 어
슬렁거렸다. 더욱이 머리에 털이 한줌도 없이 빤빤한 큰 독수리들이 지붕같이 어마어마한 날개를 파닥거리며 무쇠 갈퀴 같은 단단한 발톱을 세우고 낚아챌 듯이 단지흥 일행의 머리 위를 바투 날아다녔다.
대리에서 태어나 남방의 짐승들을 숱하게 보아온 그들이건만 이렇게 무지막지한 것은 처음 보는지라 모두들 얼이 빠졌다,
'대관절 이 무당 할미란 여인은 어떤 여인이기에 이런 흉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걸까, 충피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단지홍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곳 여자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더욱이 하나같이 이 이방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네끼리 뭐라고 수군덕거리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단지홍은 갈수록 의아하기만 했다.
옷차림새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이 횐 천으로 국부만 살짝 가렸을 뿐 봉곳한 젖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품새로 사내 앞에 서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앞가슴을 가릴 줄도 몰랐다. 개중에 한 여자는 손톱이 어찌나 긴지 매 발톱같이 끝이 꼬부라져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정말 기이한 일이야. 도대체 굴안한 무엇이 있을까?'
다섯 사람은 의아함을 풀 길이 없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멀찌감치 서서 굴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였다. 안에서 작은 계집애 하나가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 나왔다. 자그마한 젖봉오리가 도드라진 앙증맞은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계집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께서 어서 들어오라는 분부십니다."
그 말에 다섯 사람은 선뜻 굴 쪽으로 다가서서 굴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려다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굴 안에는 천장, 바닥, 벽 할 것 없이 온통 크고 작은 뱀들이 무더기로 엉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계집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뱀 위를 밟으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겁내지 말고 어서 들어오세요."
계집아이는 재촉했다.
일행은 도저히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못 내고 어린 계집애가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쥘 뿐이었다. 저렇게 마구 밟으면서 걸 어가다가 뱀들이 독이 나서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고 저 매끌매끌한 종아리를 한 번만 물어 버려도 저 애는 당장 혼절해 쓰러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괴이하게도 짓밟힌 뱀들은 계집애를 물기는 커녕 스르르 한옆으로 피해 기어가는 것이었다.
"야, 재밌어, 정말 재밌는데, 왜 안 들어와요? 그냥 걸어오면 되는데."
계집애는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뱀들이 이렇게 득실거리는데 자칫하면……."
단지흥은 머뭇거렸다.
"뱀이 무서워서 그래요? 아니, 허우대가 멀정한 사내들이 그래, 뱀을 무서워한단 말예요? 뱀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함부로 여자를 겁탈하기나 하는 당신들 사내들과는 다르다고요."
계집애는 흐드러지게 웃어젖히며 능청을 떨었다. 기껏해야 열두어 살밖에 안 돼 보이는데, 말하는 품새는 영락없이 갖은 풍상을 다 겪은 늙수그레한 아낙이었다. 아직 사내를 알 나이도 아닌데 남
녀간의 일을 어쩌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는 것일까, 단지흥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야,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너희들 할미가 청해서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뱀으로 길을 막다니, 이게 손님 접대하는 예의냐?"
그러자 계집애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조롱하듯 말했다.
"글쎄요, 당신들 중에 황제 폐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사내들은 모두 구린내 나는 것들이에요. 구린내 나는 사내들이란 워낙 우리 숙녀동(淑女洞)에는 가까이도 못 오게 하는 법인데 할머님께서 오늘은 웬일로 그쪽을 부른 건지 나도 알 수가 없군요. 어쩌다 명이 떨어졌으니 그렇지 제멋대로 발을 들여놨다간 목숨이 남아 나지 않는다구요."
그리고는 계집애는 잔뜩 눈을 부릅뜨고 다섯 사람을 노려보았다. 조그마한 계집애가 그렇게 나오자 되레 깜찍해 보였다.
"어쩔 거예요? 걸어오겠어요, 아니면 오지 않고 계속 거기 있겠어요? 그러겠다면 내 가서 할머님한테 말하지요, 할머님이 만나기 싫어 오지 않으려 한다고……."
그리고는 계집애는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아가씨, 서두르지 말아요. 우리가 곧 건너간다는데도!"
선비가 소리쳤다. 단지홍은 선비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충피가 무당 할미를 두려워하는 걸로 봐서 무당 할미에게 일심으로 매달려 보면 천룡사 중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선 무당 할미를 만나 보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집애는 그때껏 아가씨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대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가씨라구요? 그 말 참 듣기 좋네요. 구린내 나는 사내가 말은 제법 얌전한데요. 좋아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내 당신들을 안으로 안내하지요."
단지홍은 이 말에 계집애가 뱀들을 내쫓고 길을 터줄 줄 알았다.
하나 계집애는 생각 밖으로 그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외쳐대기만 했다.
"안으로 안내 하겠다는데 도 왜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거예요? 우리 할머님을 만나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어서 이 뱀 위를 걸어서 오라니까요."
분명 일행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단단히 놀려 주자는 수작이었다.
"그럼 좋다! 이곳에서 손님 대접하는 법도가 그러하다면야 우리도 별수없다. 죽든 살든 뱀을 밟고 건너 갈밖에."
단지흥이 말했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저희가 먼저 건너가 볼 테니……."
사대 시위가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는 것을 보고 계집애가 또 손뼉을 치며 톡 끼여들었다.
"뱀들이 뭐가 무섭다고 서로 밀고 당기고 그 난리예요? 정말 할머님 말씀이 맞아. 세상 사내들이란 모두 옹졸하고 못났다더니, 명색이 사내들이 왜 저 모양이지?"
자그마한 계집애가 멋모르고 지껄여대는 소리라도 사대 시위들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
'내 오늘 뱀한테 물려 만신창이가 되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길 건너가야겠다. 한다 하는 대리의 사대 시위가 한낱 계집애의 비웃음거리가 되어서야 면목이 말이 아니다.'
"내 먼저 건너가 보리다."
선비가 나섰다. 그러자 사대 시위 중 성미가 제일 급한 농부가 소리쳤다.
"잠간, 내가 먼저 가겠소!"
농부는 다음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농부가 꾸물거리는 뱀을 밟기 시작하자 넷은 가슴을 졸였다. 방금 여자 애가 건널 때처럼 뱀들이 가만있어 줄까? 그렇지 않으면 큰일 아닌가.
농부는 조심스레 발을 옮겨 디뎌 벌써 중간까지 들어갔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었다. 뱀들이 알아서 스르르 피해 주는 것이었다.
일순, 계집애가 난데없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네 사람은 너나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집애의 휘파람 소리는 뱀들을 부리는 신호였다. 선비는 다급하여 더 볼 것 없이 손을 들어 계집 애한테로 장풍을 내쳤다. 그러자 계집애는 튀어나온 바위 모서리 뒤로 날쌔게 몸을 숨겼다.
과연 뱀들은 계집애의 휘파람 소리에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듯 대번에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일제히 농부에게 달려들었다. 잠간 사이에 얼룩덜룩한 뱀들이 농부의 온
몸을 친친 감고 꾸물럭거렸다. 흡사 몇 천 갈래 동아줄이 농부의 몸을 꽁꽁 동이고 꿈틀거리는 형상이었다. 뱀들은 농부의 얼굴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농부는 기겁을 하며 몸에 감긴 뱀들을 떼내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꼼짝 말아욧. 꼼짝만 하면 죽어요."
계집은 손뼉을 쳐 가면서 웃어젖혔다.
단지홍은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얼른 큰소리를 내지르며 손가락 하나를 뻗쳐 들어 팍하고 지풍을 날렸다. 농부의 얼굴을 깨물려고 쉭 다가든 독사 한 마리가 지풍에 맞아 힘없이 툭 떨어졌다.
"화아, 거기도 그런 재간이 있네요. 우리 할머님에게만 그런 재간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하지만 내 다시 말하는데 더는 움직이지 말아요. 이제 정말 움직이기만 하면 뱀들이 저 사람을 베만 남기고 다 뜯어먹을 거예요."
계집애의 말에 단지홍은 화급히 농부에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
농부는 몸을 휘감고 꾸물럭거리는 뱀들을 보지 않으려고 그 눈을 질끈 감고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옳지,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요. 꼼짝 않고 있으면 뱀들도 물지는 않을 거예요. 알았어요?"
자그마한 계집애는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이번에는 뒤에 있는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 어떻게 할래요? 한 사람이 건너오기도 저렇게 힘든데 다섯이 다 무사히 건너올 수 있겠어요?"
네 사람은 이 조그만 계집애가 무슨 수작을 꾸미느라고 그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또 재잘댔다.
"내 보기엔 아무래도 못 건너와요. 그럴 바엔 차라리 돌아가고 말겠네. 어때요, 여기 이 사람도 놓아줄 테니까 굴을 빠져 나가 돌아가겠어요?"
단지흥은 저 계집애가 자기들을 한번 떠보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기란 실로 지난했지만 그렇다고 예까지 찾아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터, 뱀에 물려 죽을지언정 도저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얘, 그러지 말고 길을 터주렴. 너희 할머님을 꼭 만나야겠으니."
단지홍은 마음을 다잡고 계집아이를 구슬렸다. 이 숙녀동이라는데가 어린 계집마저 저토록 지독하니 그 할미라는 여인이 어떠할지 안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설사 무사히 들어가 그 할미를 만난다고 해도 뜻을 이를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되고 안 되고는 부딪치고 볼 일이다.
"자, 건너가세나."
"폐하, 오지 마세요. 이리로 오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농부는 자기 안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소리쳤다.
"아니네! 죽고 살고는 하늘에 맡길 뿐, 자 가세."
단지홍은 태연자약하게 미소까지 머금고 말했다.
그쯤 되자 세 시위는 새삼 단지흥에게 탄복을 금치 못했다.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천룡자 중들을 살려내려 하는 그 의리와 각오에 사뭇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세 시위들은 정중히 읍을 하며 굴 안으로 성큼 한 발 들여놓았다. 단지홍도 뒤따랐다. 그러자 어린 계집애는 눈이 휘등그래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이렇듯 참말로 건너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계집애는 다급히 소리쳤다.
"건너오지 말아요! 정말 건너오지 말아요! 뱀들한테 잡아먹히면 난 몰라……."
그러나 네 사람은 아랑곳 않고 한걸음 한걸음 뱀이 득실거리는 속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뱀들이 앞을 다투어 달라붙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네 사람의 몸에도 뱀들이 새까맣게 기어올랐다. 넷은 더 나아갈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고, 이젠 난 몰라. 정말 미련한 사내들이야. 그렇게 오지 말라는데 말을 안 듣고 왜 온단 말이야. 자기네들이 무슨 신선이라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고집을 부리긴. 이젠 정말 까딱도 하지 말아요. 까딱만 했다간 죽어요. 정말 모두 죽고 말아요. 아이 참, 난……."
어린 계집애는 미처 말을 맺지도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러더니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일행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 아이에게도 뱀을 막는 재간은 없구나. 그렇담 이제까지 계집애의 짓궂은 장난에 놀아난 꼴이로군. 그렇다면 그 무당 할미라는 여자는 만나 보지도 못하고 예서 이렇게 값없이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인가?'
계집애는 이제 마구 소리소리 질러대기 시작했다.
"야단났어요. 누구 좀 와 봐요! 어서 좀 와 봐요! 이 구린내 나는 사내들이 뱀한테 친친 감기고 말았어요, 네? 어서요!"
징그러운 뱀들은 다섯 사람의 몸에 새까맣게 들러붙어서 연신 꾸물거렸다. 사대 시위들은 잔뜩 긴장한 탓에 안면에 경련이 일 듯했지만, 단지홍은 애써 마음을 누르며 태연히 말했다.
"인명은 재천(在天)인 법, 뭐가 두려워서 이까짓 뱀들을 무서워 하겠는가."
그 말에 사대 시위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황제께서는 저토록 당당하신 데 우린 이게 뭔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으랴.'
사대 시위는 바싹 정신을 가다듬고 이를 사리물었다.
"얘야, 이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느냐?"
단지흥이 물었다.
"난 몰라요. 들어 오겠으면 들어와 봐요. 하지만 죽어도 내 탓은 아녜요. 목숨이 대수롭지 않거든 어서 들어와 콱 물려 죽으라구요. 어차피 사내들이란 모두 개 같은 작자들인데, 개죽음을 당하라지, 뭐."
계집애는 자포자기하여 불쑥 내뱉더니 마침내는 풀썩 주저앉아 발을 동당거리며 펑펑 울어댔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휘파람을 불어 골탕을 먹이고는 이쪽에서 저를 어쩌지도 않는데 울긴 왜 운단 말인가. 계집애는 미친 듯이 훌쩍이더니 일순 벌떡 일어나 안으로 뛰쳐 들어가 버렸다.
이 다섯 사람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온몸을 감고 꿈틀대는 뱀을 떼쳐 내지도 못하고 뿐더러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어쨌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기어코 할미를 만나야 한다."
단지홍은 네 시위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성미 급한 농부가 먼저 앞으로 발자국을 뗐다. 그러나 채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그는 뱀에게 물리고 말았다. 농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순식간에 온몸이 뻣뻣해져 더는 꼼짝도 못했다.
"페하, 저는…… 저는 더……."
농부는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그대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단지흥은 등골에 식은땀이 확 내뱄다. 우리 군신 다섯이 오늘 예서 이렇게 뱀의 먹이가 되고 마는구나 싶었다. 그는 경황 없는 목소리로 급급히 외쳤다.
"자네들은 꿈쩍도 하지 말게, 나 혼자 들어 가야겠네."
그러나 세 시위가 그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를 옹위하고 들어가 그 할미를 만나 보고야 말겠습니다. 이런 지독한 노친네 한테는 따금하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해욧!"
그들은 한결같이 증오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라 눈에 불을 켜고는 뱀들을 마구 짓밟으며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나무꾼이 비명을 내질렀다. 독이 잔뜩 오른 뱀에게 사정없이 한방 물려 버린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통분해서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는 푹 꼬꾸라져 버렸다.
단지홍은 분기탱천하여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선비, 어부 두 사람 역시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죽음을 각오한 이상 한시 바삐 그 노파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걸음 못 가서 이번에는 선비가 와락 어부를 붙잡았다.
"폐하, 빨리…… 어서…… 어서 여기를 벗어나…… 어서……."
선비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도 점점 가늘어지고 촌각 만에 그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천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꼭 이 할미를 만나고야 말리라. 이 한 목숨 잃을지언정 정녕 내 그 년을 가만 놔둘 수 없다?'
단지홍은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폐, 폐하! 조심……."
마지막으로 남은 어부마저도 말을 못 맺고 또 꼬꾸라졌다.
'내 그 년을 찾아 사대 시위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단지흥은 눈에 불을 켜고 이빨을 바드득 갈며 정신없이 달려 들어갔다. 수많은 독사한테 온몸이 친친 감겨 있어 다리를 떼놓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사한테 물려 죽는다는 것도, 급히 내달리면 내 달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도,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노파를 찾을 수 있는지도, 그는 그 어떤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렸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는지 모른다. 그는 문득 영롱한 빛에 눈이 부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으로 정신없이 뛰어왔는지라 그는 숨을 후 들이켜고는 얼른 사위를 둘러보았다. 독사들은 간데없고 수없이 많은 종유석들이 굴 천장을 가득 메운 채 온통 삐죽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머리를 찌를 정도로 낮게 드리운 그 종유석들이 수백 개의 등불처럼 오색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굴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복판에는 김이 무럭무럭 피
어 오르는 큰 온천까지 하나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물위로 언뜻 무엇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풀어진 머리칼이었다. 머리는 보이지 않고 머리칼만 떠있는 걸로 보아 필시 죽은 사람인 모양이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산 사람이라면 저러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단지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무당 할미라는 여인은 악독해도 이만저만 악독한 게 아닌 듯했다.
그런데 불현듯 흩어진 머리카락이 서서히 한데 모아지더니 여인의 머리가 물 밖으로 쓱 올라왔다. 단지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도 고개를 들리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적이나 놀란 듯 대뜸 내쏘았다.
"거…… 거기 누구예요?"
단지흥은 일순 사대 시위의 얼굴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울분이 치받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 그 할미인지 뭔지 하는 년은 어디……."
단지홍은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물을 필 요가 없었다. 눈앞의 저 여인이 그 할미가 분명했다. 소름이 끼칠정도로 온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것이 백 살은 족히 넘어 보였다. 단지홍은 흥물을 보듯 경악스런 눈길로 그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단지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적이 놀랐다.
느닷없이 뛰어들어온 이 사내는 옷이 후줄근히 젖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독사들이 친친 감겨 있었다. 개중 몇 마리는 단박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바깥 사람이 이 숙녀동엔 뭐 하러 왔나요?"
노파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리따운 소녀의 목소리마냥, 은쟁반에 은방을 굴리듯 낭랑했다.
"먼저 거기서 대답하시오, 당신이 무당 할미요? 나는 무당 할미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오!"
단지홍은 격하게 외쳤다.
"이렇듯 무례한 사람은 처음 보겠군! 맞아요, 내가 무당 할미예요. 아무튼 할말이 있어 왔다니 어디 들어나 봅시다."
노파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단지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주워섬겼다.
"나와 나의 네 시위는 본래 목숨을 구해 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었소. 그런데 우리를 뱀 구덩이에 몰아넣고 시위 넷을 죽여 버렸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어서 거기서 나오시오! 내 사대 시위의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니!"
그러자 노파는 단지흥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재미난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껏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그것 참 모를 일인데요. 그 말을 듣자면, 같이 온 사대 시위는 모두 죽었는데 거기선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당신 말대로라면 사대 시위야 원래부터 명이 그뿐이라 죽은 것이고 거기 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 예까지 온 것인즉, 나를 탓할 건 못 되지 않아요?"
'정말 언어도단도 이런 언어도단이 있는가? 더 입씨름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흥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린 집어치워! 내 너의 머리를 잘라 사대 시위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리라."
"참 이거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날 죽이지 못해 야단이니 큰일이군요. 글쎄 정 그것이 소원이라면 싸워 봐야지 어쩌겠소?"
노파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온천에서 나올 줄 알고 잠시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노파는 나올 생각을 않고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등을 돌려야 옷을 입지요!"
'제기랄, 저깟 쭈글쭈글한 할망구가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 모양이지? 주름지고 말라 비틀어진 몸뚱어리에 춘정이라도 일까봐?'
단지홍은 가소롭기 그지없어 코웃음을 쳤다.
"잡아먹진 않을 테니 어서 나오기나 하시오."
노파는 몹시 부끄러움을 타는 계집애모양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나 참, 성화로군! 하는 수 없지. 그냥 나가리다."
단지홍은 한켠에 서서 노파가 물위로 솟아 나오는 모습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나체를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만 뜻밖으로 노파의 살결은 백옥같이 희고 처녀처럼 탄탄했다. 게다가 미끈한 팔이며, 그 섬섬옥수란…… 그때껏 황중에서 숱하게 궁녀들을 대해 봤지만 이처럼 눈부신 자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단지 몸매만 본다면, 그 노파는 물위에 곱게 피어난 부용이나 용궁의 용녀(龍女)에 비견될 만했다.
노파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미끈한 알몸으로 한들한들 단지흥한테로 다가와서는 방실 웃었다.
"단황 나으리, 기왕 이 굴 안으로 들어왔으면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요."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이 노파가 무슨 요술을 부려 몸은 어떻게 처녀처럼 변신했지만 얼굴만은 어쩌지 못했나 보다. 몸매가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얼굴만 쳐다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오만 정이!'
단지흥은 비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죽일 테면 죽여 보시오. 싸우다 죽는다면 그나마 한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내게 진다면 내 손을 더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스스로 자결을 해야 하오."
"맞았어,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거기 몸에 아직 독사들이 감겨 있는데! 난 그 독사들을 떼 줄 순 없어요. 테 주기만 하면 거기서는 당장에 일양지공을 쓸 거고 그럼 내가 당하게 되거든요."
노파는 한마디 내뱉더니 요염하게 호호호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젊디젊은 처녀들이 남정네를 홀리며 웃는 웃음과 같이 기가 막히게 나긋나긋했다.
'파파 할미인데도 웃음 소리 하나는 사내들 간깨나 녹이겠는걸. 이 웃음 소리만 들어 봐도 얼마나 요망한지 대번에 알겠다.'
단지흥은 한층 냉엄하게 말했다.
"일양지공? 좋소. 내 오늘 일양지공이 뭔지를 직접 보여 주지."
말은 옹골차게 하면서도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노파의 나체에 눈길이 갔다. 빙골설부(米骨雪賦)랄까, 희디흰 살갗도 그렇지만 처녀의 젖가슴처럼 탄탄하게 도드라진 젖봉오리가 단지 흥의 눈길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순간적이나마 별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단지홍은 이빨을 사리물었다. 노파는 짐짓 단지홍을 유혹하려는 듯 미동도 않고 한동안 서 있다가 아주 천천히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보고 있다가 퍼뜩 머리를 흔들었다.
'요망한 것! 저 나이에도 남정네를 유혹하려 하다니. 하긴 몸매가 저토록 아리따우니 한창 피어날 땐 뭇사내들의 애간장깨나 녹였을 게야.'
이윽고 노파는 옷을 다 주워 입고 정성 들여 머리를 빗어 올리고는 단지흥을 향해 똑바로 섰다. 옷을 다 입는 데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이나 걸린 듯했다. 노과는 여전히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나와 싸우지 않는 게 어때요? 내 휘파람 한 번이면 그몸에 감긴 독사들이 일제히 대가리들을 쳐들고 당신의 그 잘생긴 얼굴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을 텐데. 그러면 이 굴을 나가기는커 녕 아주 딴 세상으로 가게 된다구요. 그러니 우리 그만 화해를 해요. 황제고 뭐고 거추장스러운 건 다 걷어치우고 여기 남아 나와같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노파는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단지흥은 어이가 없었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내 일양지공이나 받아라!"
단지홍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려 노파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자고로 이런 만이 (蠻異)의 굴 안에는 천생적인 이인(異人)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대부분은 각기 독특한 요술과 법 술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들과 싸우려면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러나 노파는 금방 그 어떤 생각에 도취되어 한창 몸이 단 참이라 단지흥의 공격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흥이 내친 지풍은 그녀의 몸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아이 참, 일국의 황제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점잖지 못하게!"
노파는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순간 단지홍은 흠칫하며 이미 내친 손가락의 방향을 급히 돌렸다. 그러자 지풍은 노파를 바싹 비켜 나가 기세 좋게 석벽을 때렸다. 순식간에 석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지홍은 원래 노파에게 손을 내뻗칠 때 이 노파가 여자라는 것을 고려할 새도 없이 잽싸게 손을 썼었다. 오직 이 악귀를 단번에 쓰러뜨리려는 일념으로 곧바로 그녀의 젖무덤에 있는 유돌대혈(乳突大穴)을 향해 일양지 지풍을 내쳤던 것이다.
그때 돌연 여인이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 단지홍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무리 노파라도 여인임에는 틀림없는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는 여인의 가슴에 지풍을 내친다는 것은 남자로서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기는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
노파는 단지흥이 왜 자기를 죽일 좋은 기회를 이렇게 포기하는가 잠시 의아했으나 곧 그 영문을 깨닫자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자, 이젠 내 솜씨를 보시겠어요?"
노파는 말을 마치자마자 매섭게 장풍을 날렸다. 단지흥은 얼른 몸을 피했다. 노파의 무예 역시 매우 출중했다. 그 손이 얼마나 빠른지 여느 사람 같으면 채 서너 합도 못 되어 꼬꾸라지고 말 터였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노파는 여느 때 없이 애를 먹었다. 단지흥은 좌우 두 손을 다 쓰면서 일양지 지풍을 가로세로 정신없이 팍팍 내쳤다. 노파는 그때마다 살짝살짝 피했지만 그 지풍에 스치는 바람에 노파의 옷엔 벌써 구멍이 뺑뺑 뚫려 버렸다.
단지흥은 손을 쓰기 시작하면 몸에 감긴 독사들이 가만 안 있을거라는 우려도 없지 않았으나 이렇게 된 바에야 그깟 뱀이 무서워서 공격을 늦출 수도 없는 터였다. 일단 이를 악물고 싸우기 시작하니 뱀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뿐더러 기이하게도 뱀들은 단지흥을 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여 일양지공을 내치고 또 내쳤다. 그럴수록 내력은 더욱 강해지고 한층 신묘해져서 노파마저도 감탄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팍팍팍 연거푸 세 차례 지풍을 내쳤다. 노파는 그 순간 잠시 틈을 보였던지라 머리채에 그대로 지풍을 맞고 말았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노파의 머리채는 삽시간에 풀려 흐느적거리며 미끄러져 내려 노파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 내 머리! 내 머리칼을 이렇게 망치는 법이 어딨어요?"
노파는 어린 소녀가 하는 양으로 울먹울먹하며 투정을 부렸다.
기이하게도 노파의 머리칼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흑발이었는데 그녀는 필시 그 머리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어찌하든 간에 코방귀만 뀌었다. 사대 시위를 죽인 원수인데 머리칼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려도 시원치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노파는 목숨 따위엔 관심도 없는 듯
아예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얼굴을 감싸쥔 채 엉엉 울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남을 업신여기며 약을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단지홍은 노기를 풀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 운남의 남만(南蠻) 동굴에서 수족 같은 사대 시위를 잃고 천룡사 고승들을 살릴 해독약을 얻기도 다 글렀으니……. 나 자신도 살아서 나갈 가망이 거의 없 다. 이제 더 볼 것이 무에 있는가. 이 노파를 죽여 다시는 죄업을 못 저 지르도록 목숨을 끊어 놔야겠다!'
"그 동안 지은 죄를 안다면 죽기를 아까워 말아라."
단지흥 엄하게 호통쳤다. 그러자 노파는 문득 울음을 그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들어 되묻는 것이었다.
"내가 죄악이 많다니 무슨 말이에요? 난 선한 사람은 한 번도 죽인 적이 없어요."
"선한 사람은 죽인 적이 없다고? 내 시위 넷은 그래 누구 손에 죽었느냐?"
그러자 노파는 한껏 교태를 부리며 웃어젖혔다.
"그럼 그 넷이 내 손에 죽었단 말이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똑똑히 봤어요? 뱀에게 물렸다고 다 죽는다는 법이 어디 있나요? 물려도 죽는 사람이 있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내심 자기 시위 넷은 분명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단지흥은 그 말에 일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노파 말대로 사대 시위가 살아 있다면 구태여 이 노파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 시위들은 죽었소. 난 그들이……."
단지흥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시 바삐 노파를 제압해 두려고 번개같이 손을 뻗어 노파의 혈도를 찍었다. 노파는 꼼짝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긴 머리채가 얼굴을 뒤덮어 흡사 천년 묵은 요괴가 하나 서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카락 사이로 굴벽 석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노파는 악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를 이렇게 능욕하려면 아예 날 죽여요, 죽여 버려."
노파는 속이 터져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얘들아, 그 네 녀석의 시체를 어서 이리 메고 오너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숙녀동의 여인들이 사대 시위의 시체를 들것에 메고 들어왔다. 들것에 반들이 누운 넷에게선 숨소리 하나 들을 수가 없었다. 네 시위의 시체를 보자 단지홍은 가슴 미어지는 듯하여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노파를 절대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때 노파가 또 소리쳤다.
"이제 혈도를 풀어 줘요. 어서 풀어 달라는데!"
"풀어 달라구? 내 시위들을 환생시키기 전엔 절대로 풀어 줄 수 없다."
단지홍은 노기충천하여 인정 사정 없이 내쏘았다.
"이제부터 내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온 숙녀동의 여인들이 다 당신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내 몸을 달라고 하셔도 선뜻 바치겠으니 어서 날 풀어 줘요."
"네 몸? 말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내 너 같은 요귀를 없애 버리지 않고서는 이 한을 풀 길이 없다."
단지흥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노파는 영롱하게 까만 눈동자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애련한 눈빛이었다. 단지홍은 얼른 그 눈길을 피해 버렸다.
'이건 구미호다, 구미호! 사람들을 홀려 잡아먹는 구미호! 이런 구미호는 냉큼 죽여 버려야 세상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다!'
단지홍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 살려 뒀다간 아무 득도 없으니 넌 죽어야만 해! 단 네 사혈(死穴)을 찔러 편하게 죽게는 해 주지."
그리고는 그는 서서히 손가락 하나를 뻗쳐 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게 굉음이 일었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노파도 보이지 않고 사대 시위의 시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직 그 혼자 천길 지옥 속으로 떨어지듯 몸이 쑥 꺼지며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떨어져서야 비로소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영문을 몰라 허등지등 사위를 살폈다.
넓지도 않은 그곳은 돌벽이 빽빽하니 사방을 막고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이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독사들은 마치 무슨 신호라도 들었는지 다투어 그의 몸에서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벽 밑으로 난 구멍을 향해 구불구불 기어가더니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뱀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그는 한결 온몸이 거뜬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사방 돌 벽에 눈길이 닿자 그는 새삼스레 절망감으로 치를 떨었다. 빽빽한 돌 벽엔 빠져 나갈 만한 틈이라고는 한치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몇 십 길이나 되는지 아득한 꼭대기 위에 희미한 빛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만 그 요망한 노파의 간계에 빠져 이 나락에 떨어져 죽는 길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이젠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이렇게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그는 체념하듯 마음을 비우고 축축한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운공을 하여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누르며 그는 차츰 망아(忘我)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꼭대기 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요, 이젠 노여움이 좀 사그라지셨나요? 할머님이 끼니를 갖다 드리래서 가져 왔는데 드시겠어요?"
단지흥은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시장하던 참이라 먹을 것을 가져 왔다는 말에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하튼 주는 밥이야 먹고 봐야지. 그런데 이거 빠져 나갈 길이 없으니 큰일이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도 아니다. 내가 없으면 왕위는 동생이 이어받으면 되지만 천룡사 중들의 목숨은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천룡사가 망하면 대리국의 존망도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다.'
단지홍은 안달이 나서 크게 외쳤다.
"밥보다도 당신네 무당 할미를 보내시오. 할말이 있소."
그러자 꼭대기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뻔뻔스럽게 우리 할머님이 목욕하시는 걸 훔쳐 보았다면서요? 할머님은 지금 매우 노여워하고 계시니 할말이 있으면 저희들한테 해요. 전해 드릴 테니."
단지홍은 선뜻 대꾸를 않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리를 말해서 들을 노파가 아니었다. 그런 바에야 구구이 사정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렇게 손 놓고 멍청히 있을 수도 없는 터, 그는 속이 탔다.
"어쨌든 노파를 만나야겠소. 내가 직접 말해야 해!"
단지흥은 또 소리쳤다.
"그럼 올라와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그런데 한 가지, 올라오려면 이 독약을 마셔야 돼요. 그래야 할머님을 만나게 해 주겠어요."
그리고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에 자그마한 병을 하나 매달아 밑으로 내렸다. 받아 보니 작고도 깜찍하게 생긴 옥석으로 만든 약병으로 '빙청여아심갱심(氷淸女탔tl更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
단지홍은 그 말뜻을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음장 같은 여인의 냉혹한 마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독약을 내려보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단지흥은 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연히 그 약병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계집애들이 웃으며 재잘댔다.
"할머님 말씀이 정말 맞는데. 저 사람이 꼭 마실 거라더니, 봐, 정말 마셨잖아!"
"별걸 갖고 다 호들갑이야. 할머님 예측이야 언제나 귀신 같지 않았니? 할머님이 마실 거라면 꼭 마시게 되는 거야."
"그것 참, 할머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거지? 독약을 마시래도 마시고. 참 한심한 황제로군. 남이 죽으라면 죽는 그런 황제가 무슨 황제야."
"얘, 그런 말 말고 좀 내려다봐. 눈여겨보라구! 얼마나 잘생긴 황제님이시게. 세상에 없는 미남자지? 너 저 황제한테 시집 안 가련? 그러면 적어도 황비(皇妃)가 되는 거야, 황비! 황비가 되면 어떤지 아니? 여직껏 꿈도 못 꾸어 봤지? 한번 돼 보련, 응? 한 번 돼 봐!"
"얘 얘, 난 싫다. 너나 해라! 네가 황비로 나서겠다면야, 기왕에 죽을 거, 저 황제도 마다하지 않을걸. 그런데 저 황제가 이제 할머님 손에 덜컥 죽게 될 텐데 그러다 같이 순장을 당하면 어쩌 냐?"
"너 정말 그런 얄궂은 소리만 할 테야, 엉 ? 날더러 어서 죽으라고 제사를 드려라, 제사를! 고약한 계집애같으니라구!"
둘은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느라고 밑에서 독약을 마신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흥은 급해서 소리쳤다.
"난 이미 독약을 다 마셨소! 빨리 나를 끌어올려 무당 할미를 만나게 해 줘야지 왜들 그러고만 있는 거요?"
여자들은 그제야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며 밧줄에 큰 바구니 하나를 매어 흔들흔들 내려보냈다. 단지홍은 이미 기력이 다하여 기다시피 간신히 바구니에 올라앉았다. 여인들이 영차영차 바구니를 끌어올렸다.
단지흥이 마신 독약은 보통 독약이 아니었다. 단지흥은 운공을하여 그 독을 단전 한곳으로 모아 놓을 수는 있었으나 몸 밖으로 내뿜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 노파는 무슨 작정으로 이 독약을 내
려보낸 것일까.
처녀 둘은 단지흥을 올려 놓고는 또 실랑이를 했다.
"네가 안아라. 네 황제가 아니냐? 네가 안아 할머님한테 데려다줘."
"어머나, 왜 내가 안고 가? 누가 황비인데. 황비가 안고 가야지."
둘은 단지흥을 흘끗흘끗 곁눈질하며 얼굴이 도화색이 되어 속닥거렸다. 그러다 둘은 서로 힘을 도와 단지흥을 안아 들고 석굴 안의 넓은 방으로 데려갔다. 정교한 조각품이며, 도자기로 정갈하게 꾸며진 그 방에선 마치 중원 명문귀족의 규방(閨房)처럼 향내가 풍겼다. 이런 처녀의 규방 같은 곳으로 왜 자기를 데려온 것인지, 단지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어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파가 문발을 들치고 들어왔다. 그는 단지흥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함정 안이 어땠어요? 편하게 쉬었어요?"
단지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내 사대 시위를 죽인 것만으로도 성이 안 차 나까지 이렇게 능멸을 하다니…….'
단지흥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 것을 보고 노파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할말이 있다고 했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어디 해 보세요."
단지흥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아 선뜻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눈길이 노파의 목덜미에 닿았다. 백설같이 하얗고 보드라운 미인의 목이었다. 얼굴만 아니라면 천하에 이런 미인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징그럽게 웃고 있는 쪼글쪼글한 노파의 상판때기에 눈길이 미치자 그는 더한층 성이 나서 버럭 소리를 내 질렀다.
"난 대리국의 중차대한 국사를 다 제쳐놓고 여기 왔소. 사대 시위의 목숨보다도, 내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
단지흥의 말에 노파는 어째서인지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인데요? 어서 말해 보세요."
"먼저 수고스럽지만 대리에 있는 내 동생 단지방(段智方)에게, 황제의 제위를 이으라 전해 주시오."
그러자 노파는 아주 실망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말이 있다 할말이 있다 하더니 고작 그게 다예요? 황제로 있으려니 성가신 일이 많아 그러는 모양인데 걱정 말아요, 내가 대신 처리해 줄 테니깐."
노파는 단지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또 말을 이었다.
"듣건대 황제들은 열에 아홉은 모두 탐욕스럽다는데 거기는 그래 일호백응(-呼百應)하는 황제 자리가 귀찮단 말이에요? 그럴 리야 없겠지요. 황제를 그만두겠다는 말은 진정이 아니지요? 내 말 만 들으면 독을 해독시켜 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 마음껏 황제의 낙을 누리세요. 그 무궁한 부귀영화를 왜 발로 차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 말만 들으면 죽을 때까지 복락을 누리게 해 줄 텐데……. 어때요?"
단지흥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우리 단씨 가문 사람들을 모르고 하는 말이오. 단씨 가문엔 지금까지 대대로 환위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 분이 대여섯이나 되오. 남들은 황위를 다투느라 형제간에도 파를 흘리고 싸운다지만 우리 단씨 가문은 결코 그렇지 않소."
노파는 그 말엔 별다른 대꾸도 않고 난데없이 딴소리를 했다.
"그런데…… 황제의 궁전에도 희비는 있겠지요?"
"물론 있소. 희비를 아니 거느리는 황제가 어디 있소? 나도 황위에 오를 때 황비가 하나 있었소만……."
그러자 노파는 그의 말을 자르며 호들갑스럽게 웃어젖혔다.
"그래 어때요? 그 황비가 마음에 들어요? 그 황비를 사랑해요, 응?"
"제왕의 생활을 모르면 그런 말은 마시오."
"아니, 그렇다면 그 황비가 싫다는 건가요?"
노파는 눈에 띄게 반색을 하며 다그쳐 물었다. 단지흥은 괘씸하기 짝이 없어 언성을 높였다.
"어쩌자고 시시콜콜 요것조것 묻는 거요? 궁중의 일을 알아서 뭣 하려고!"
무당 할미는 아랑곳 않고 깔깔 웃었다.
"내 적당한 사람을 하나 골라다가 거기 대신으로 대리 황궁으로 보낼 셈 이거든요. 정말 거기처럼 꾸며서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에요. 그러면 대리국은 내 손아귀에 있는 거나 진배없지 않아요? 호호호…… 자 뒤를 돌아봐요, 어떤가?"
단지홍은 그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자기 등뒤에 자기와 생김새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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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이다 (♡.50.♡.153) - 2022/02/21 20: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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