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7-5

3학년2반 | 2022.03.07 07:30:41 댓글: 0 조회: 25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file.moyiza.kr/fiction/4353361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6 장 막을 내린 혈전(血戰)


이튿날 장무기는 일찍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밤에 원병들
은 아무런 거동도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아군의 진영을 살펴
보고 나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산 아래를 살펴보았다.

산 아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병들은 형형색색의 깃발을
펼쳐들고 떼지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진영안에서 호
각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기도 했다. 권토중래할 새로운 진법을 구
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가 나무 위에서 내려오자 마침 조민이 가까이 걸어왔다.
장무기는 반색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민매!"

조민은 말쑥한 모습이었다. 간밤에 영롱한 꿈이 아직도 가슴에
여울지고 있는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네. 왜 그러죠?"

장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둘렀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불러 보고 싶었소."

사실 그는 조민과 더불어 원병을 퇴치할 방안을 상의할 생각이
었다. 조민의 명석한 두뇌에서 묘책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
이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불러놓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조민은 몽고의 귀족이 아닌가. 그녀는 부친과 오라버니와 등을
진 채 자기를 따르고 있는데, 다시 그로 하여금 동족을 죽이는
대책을 세워달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래서 장무기는 주춤하다가 말을 얼버무린 것이다.

조민은 그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
었다.

"제 고충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요. 사실 도움이 될 말을 해
줄게 없어요."

장무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안에 껴 앉았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왔
다.

장무기는 조민에게서 신선한 아침 공기보다 더욱 싱그러운 내음
을 느낄 수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과 헤어져 공문대사가 따로 마련해 준 자기의 거
처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나무 위에서
살펴본 원병들의 동태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그들은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지 못했지만 오랜 훈련을 쌓아올린 질서정연
한 군기가 있었다.

한데, 군호들에게는 그러한 면이 부족했다.

원병은 어제 첫 번째 공격을 시도하다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
쳐 일단 패주했지만 새로운 진용을 구축해 진격해 올 게 분명했
다. 장무기는 어제와 똑같은 술책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도저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배회하다가 어젯밤에 조민이 준 구음
진경을 훑어보았다. 난해한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장무기는 다시 무목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몇 줄 읽어 내려가자
우연히 병곤우두산(兵困右頭山)이란 다섯 글자가 눈에 쏙 들어왔
다.

병곤우두산(兵困右頭山), 병사들이 우두산에 갇혔다는 뜻이 아
닌가. 장무기는 퍼뜩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자세히 읽어 내
려갔다.

그 내용은 악비(岳飛)가 왕년에 금병(金兵)에게 포위되어 어떻
게 위기를 넘겼으며 어떻게 용병술을 전개해 불리했던 싸움을 승
리로 이끌었는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장무기는 절로 무릎을 내리치며 소리질렀다.

"하늘이 날 돕는구나!"

그는 곧 무목유서를 갈무리하고 조용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지
금 군호들이 모여 있는 소실산의 상황은 왕년에 악비가 우두산에
갇혔을 때와 틀리지만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병법과 묘책은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었다.

악비의 전술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용병술을 읽
고 난 장무기는 내심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도
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묘책이 많았다.

장무기는 곧 손가락으로 찻잔의 물을 찍어 도형을 그리며 악비
의 전술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진법을 구상
해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지금의 상
황에서는 적의 숫자가 워낙 많으므로 정정당당한 진법으로 승리
를 쟁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변칙적인 포
진을 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장무기는 곧 대웅보전으로 옮겨가 공문대사로 하여금 군호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했다. 삽시간에 각 문파의 인물들이 모두 대웅
보전에 모이게 됐다.

장무기는 한복판에 우뚝 서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 난 후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오랑캐 병마가 바로 우리의 코앞에 몰려와 있습니다. 그
들은 얼마 후에 다시 대대적인 공세를 펴올 게 분명합니다. 우린
비록 어제 작은 승리를 거두어 오랑캐들의 예봉을 꺾었지만 그들
이 만약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 벌떼처럼 몰려온다면 막아내기가
어려쥭oREGENUMVALUE,IPFINDNEX재지만 여러분들께서 이끌
어 주셔서 염치 불구하고 당분간 통솔권을 쥐게 되었으니, 오늘
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몇 가지 명령을 내려야겠습니다."

군웅들은 일제히 호응을 했다.

"분부에 따를 것이니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오장기사는 명을 받으시오."

예금기의 장기사 오경초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몸을 숙
였다.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그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교주께서 자기를 첫 번째
발령(發令) 대상으로 꼽아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는 미리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교주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분부해도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다고!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장기사는 들으시오. 이 순간부터 본교 예금기 형제들을 이끌
고 군기(軍紀)를 맡아 주시오. 어느 영웅호걸을 막론하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예금기의 칼과 도끼로 징벌해
주시오. 설령 본교의 원로와 무림에 명망 높은 선배님이시더라도
예외일 순 없소."

오경초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곧 품 속에서 작은 깃발을 꺼내 두 손으로 높이 받쳐 들었
다.

오경초는 강호에서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
들 처음에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광장에
서 오행기가 유감없이 위력을 펼쳐 보인 후로부터 군호들의 생각
은 달라졌다.

그들은 오경초의 깃발에 따라 오백 자루의 화살과 장창, 그리고
오백 자루의 단부(短斧=짧은 도끼)가 동시에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하늘을 날으는 재주가 있는 자라 할지라
도 삽시간에 묵사발로 변할 것이니 오경초가 깃발을 펼친 것을
보자 모두 등골이 서늘했다.

장무기가 오경초에게 군기를 맡긴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
다. 그는 무목유서에서 공감이 가는 한 귀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치군지도(治軍之道) 엄령위선(嚴令爲先), 군을 다스리는데 있어
지엄한 명령 계통을 확립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장무기는 소림에 모인 군호들이 여지껏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타인과 공동협력하는 것을 쑥스러워 했으며 심
지어 굴욕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개개인이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무
리로 형성되었을 때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만약 강력한 명령
계통을 확립하지 않으면 그들을 움직이기가 어려울 것이고, 따라
서 훈련이 잘된 몽고병과 겨룰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장무기는 무엇보다도 예금기 장기사로 하여금 군기를
맡으라는 명령을 첫 번째로 하달한 것이다.

장무기는 군호들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협조를 구하는 바입니다."

그는 대전 앞에 높이 쌓아올린 돌병풍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 중에서 저 돌병풍을 단순에 뛰어넘을 수 있는 자가
있으시면 지금 직접 솜씨를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군호들 중에 이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나타
냈다.

'빌어먹을, 이런 긴박한 마당에 우리들더러 아무 상관없는 높이
뛰기를 하라하니, 장난도 아닐 테고.....'

이때 장송계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뛰어넘을 수 있네."

그는 곧 대전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당
파 제운종의 신법을 전개해 돌병풍을 뛰어넘었다. 돌병풍은 이
장 남짓쯤 되었다. 장송계의 실력으로선 그 정도의 높이를 뛰어
넘는 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뛰
어넘지 않아도 그의 경공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장송계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장무기의 요
구대로 돌병풍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어 유연주, 은이정, 양소,
위일소, 은야왕 등 일류 고수들도 일일이 장무기의 요구를 행동
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자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언짢은 기분을 갖고 있던 사
람들도 따라서 돌병풍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경공술
을 과시하기 위해 허공에서 절묘한 변화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
었다.

사백여 명이 돌병풍을 뛰어넘은 후 더 이상 나설 자가 없었다.

군호들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권법과 장법에 뛰어
났거나 무기를 잘 사용하는 인물 중에서도 경공이 평범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이 장 남짓한 돌병풍을 단숨에 뛰어 넘기엔 벅찼
다. 그들은 스스로의 단점을 알고 있으므로 무리하게 돌병풍을
뛰어넘으려 하지 않았다.

장무기가 대충 파악해 보니 돌병풍을 뛰어넘은 사백여 명 중에
는 소림 승려가 태반을 차지했다.

'소림은 무림 제일 문파로 알려졌는데 과연 소문대로군. 단지
경공술 한 가지만 보아도 다른 문파보다 고수가 많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겠군.'

장무기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유이백님과 장사백님, 그리고 은육숙님께선 경공술이 뛰어난
여러 영웅들을 이끌고 우리 전체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게끔 허
장성세(虛張聲勢)를 해 주십시오. 그것은 적을 뒷산으로 유인하
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을 뒷산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하
면....."

이어 장무기는 자세한 전략을 얘기해 주었다.

유연주 등은 입을 모아 알겠노라고 대답하며 그의 명을 받들었
다.

장무기의 지시에 따라 유연주 등은 매복과 퇴로 차단, 정면공
격, 측면기습을 할 자들을 안배했다.

양소 등은 장무기의 절묘한 계책에 탄복했다. 동시에 빈틈없는
명령 하달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들은 장무기가
무목유서에 수록된 병법을 응용한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장무기는 안배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공문방장과 공지신승 두 분께서는, 아미파의 여러분들을 이끌
고 사상자를 돌보는 일을 맡아 주십시오."

주지약이 떠나갔기 때문에 아미파의 제자들은 통솔할 자가 없었
다. 장무기는 그들이 자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지휘를 하지 않고 공문, 공지의 휘하
에 귀속시킨 것이다.

과연 장무기의 명령이 하달되자 아미파의 제자들은 묵묵히 명을
맏아들이며 이의를 표하는 자가 없었다.

장무기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음성에 웅후한 진
력이 담겨져 있어 마치 거종(巨鍾)을 치듯 찌렁찌렁 울려퍼졌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벼르어 오던 때가 온 것인지도 모릅니
다. 이번 기회에 중원의 협사들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 오랑
캐를 무찌릅시다."

군호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그들은 장무기의 치밀한 안배
와 진지한 격려에 사기가 충천하였다.

곧 이어 열화기의 교도들이 짚단과 장작 따위를 소림사 앞 넓은
공터에 쌓아 올려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
아 올랐다.

후토기는 미리 흙으로 불길을 차단하는 흙벽을 만들어 놓아 불
길이 각처 불전에 만연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
자 수백 칸이 되는 불전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라 마치 소림
사 전체에 불길이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 산 아래서 새로운 공격을 서두르고 있던 원병들은 소림사
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자 입을 모아 소리쳤다.

"놈들이 절을 태우고 달아나려 한다!"

"어서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라!"

이와 때를 맞추어 유연주가 백 오십여 명의 경공이 탁월한 군호
들을 이끌고 소실산 좌측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원병이 이미 요란한 북소리와 더불어 겹겹이 대열을
형성해 추격해 왔다.

군호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날아오는 원병의 화
살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어 장송계가 이끄는 두 번째 군
호들이 산중턱으로 달려 내려오는가 싶더니 사면팔방으로 흩어졌
다. 은이정은 군호들을 이끌고 세 번째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군호들은 모두 등에 큼지막한 봇짐을 둘러메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헌 옷가지와 이불, 나무 토막 등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봇짐을 챙겨 달아나는 것처럼 원병의 눈을 속이는 방편인 동시에
화살막이 역할도 톡톡히 해주었다.

주위에 짙은 연기가 깔려 있어 원병들은 달아나는 군호들의 숫
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만(二萬) 병력중에 만
명은 추격을 하고 나머지 만 명은 본 진영에 남아 변화에 대비했
다.

이것을 확인한 장무기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양좌사, 역시 오랑캐 장군은 병법에 능통한가 봅니다. 온 병력
을 동원해 추격하지 않고 절반 가량이 산 아래 좌진(坐鎭)하고
있으니 일이 복잡하게 되는군요....."

양소도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글쎄..... 우리의 술책을 눈치챈 게 아닐지....."

그도 전략이 엉뚱한 결과를 빚어 장무기가 원망의 대상이 될까
봐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때 산 아래서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두 패의 원병 천
인대(天人隊)가 좌우로 갈라지며 새로운 공격을 전개했다. 그들
은 산 위를 향해 좌우협공을 펼친 것이다. 산길은 험하고 가파르
지만 원병들이 몰고 있는 몽고마(蒙古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쳤다. 게다가 장창철갑(長槍鐵甲)으로 무장한 군사들이라
서 그 기세가 호호탕탕했다.

이 이천(二千)명의 철갑기(鐵甲騎)가 산 중턱까지 진격해 오자
장무기의 손짓에 따라 열화기의 교도들이 부채꼴로 흩어져 잡초
속에 잠복했다.

이천 명의 철갑기가 다시 앞으로 백여 장 가량 전진해 오자 신
연(辛然)의 휘파람을 신호로 하여 분통(噴筒)에서 기름이 분출되
고 잇따라 불화살이 날아가자 원병들은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으앗!"

몸에 불길이 붙은 원병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
져 뒹굴고 말들도 놀라 길게 울부짖자 삽시간에 아수라장을 연출
했다.

원군은 군기가 엄해 비록 선발대가 실패했지만 후속대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들은 호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삼 개 천인대가 말을 타지 않고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
해 왔다.

열화기가 화염을 뿜어내자 다시 수백 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
나 나머지 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목숨을 걸고 몰려왔
다.

그러자 홍수기의 장기사 당양(唐洋)이 흑기(黑旗)를 힘차게 떨
쳤다. 순간 독수가 분출되었다. 잇따라 후토기가 독사를 뿌리자
원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비록 수백 명이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산봉우리까지 진격해
왔으나 예금, 거목 양기에 의해 섬멸되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 아래서 요란한 북소리가 들
리더니 오 개의 천인대가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횡대(橫隊)로 편
성해 천천히 진격해 왔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흡사 거대한 철성
(鐵城)이 이동해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열화, 독수, 독사의 공격으로선 별로 신통한 효과
를 거두지 못했다. 장무기는 거목기로 하여금 거목을 굴려 공격
을 시도케 했지만, 몇 차례 구멍이 뚫릴 뿐 역시 원병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공문대사는 그것을 보자 당황해졌다.

"장교주, 군호들을 이끌고 속히 떠나도록 하시오. 중원 무림의
훗날을 위해서라도 원기(元氣)를 보존해야 하오. 오늘 비록 패할
지언정 머지 않은 장래에 권토중래를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당황해 하는 것이 어디 공문대사뿐이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마
찬가지였다. 그들이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에 홀연 산 아래서 새
로운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한 자루의 불화살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산채가 울릴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양소는 크게 기뻐했다.

"교주, 우리의 구원 병력이 당도한 모양이오!"

산 위에서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크게 일고 말굽소리가 뇌성처럼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구원군
의 숫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무기가 즉시 소리 높여 외쳤다.

"구원군이 당도했다. 총공격을 합시다!"

산 위에 있는 군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제각기 무기를 떨
쳐 아래로 쳐들어갔다.

장무기가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들, 오랑캐의 우두머리부터 노리시오!"

즉시 군호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오랑캐의 우두머리부터 노려라!"

몽고군은 열 명을 최소 단위로 하여 십인대(十人隊)라 일컬었
다. 이들을 지휘하는 자는 십장(十長)이었다. 그 위로 백인대(白
人隊), 천인대(千人隊), 만인대(萬人隊)로 편성되어 철저히 명령
에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곧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질서이기도
했다. 장무기는 그 질서부터 파괴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만약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장
무기의 의도가 실천에 옮겨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겹겹의 장
애물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병이 산비탈길
에 흩어져 싸움을 펼치고 있어 한결 수월했다.

원병이 비록 강하다고 하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무림 호걸들에
미치지 못했다. 삽시간에 백부장(白夫長)과 천부장(千夫長)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원군들은 명령을 하
달하는 우두머리를 잃자 우왕좌왕하며 혼란을 빚기 시작했다.

장무기 등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산 아래서 펄럭이는 깃발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쪽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서
(徐)자가 크게 수놓아져 있고, 북쪽 깃발은 상(常)자였다.

서달과 상우춘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본디 회서(淮西)에 있
었는데 마침 예남(豫南)으로 돌아왔다가 포대화상 설불득의 전갈
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교주가 소실산에 갇히게 된 사실을
알자 즉각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밤을 세워가며 달려온 것이다.

이 무렵 예남 일대는 명교 의군(義軍)과 원군(元軍)이 여러해에
걸쳐 싸움을 벌여왔기 때문에 땅덩어리를 서로 나누어 갖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달, 상우춘의 행군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틀도 채 안 되어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서달과 상우춘이 이끌고 있는 교도들은 대부분 많은 전투 경험
을 갖고 있는데다가 숫적으로도 우세해 달려오자마자 원병을 서
쪽으로 몰아붙여 패주케 했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다. 흡사 밀물
이 밀려오듯 원병들의 숫자를 잠식해 갔다.

한편,유연주 등이 이끄는 별동대를 추격해 간 만 명의 원군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은 경공이 뛰어난 고수들을 이끌고 미리
계획한 대로 서쪽 산곡(山谷)을 향해 질주해 갔다. 물론 중간중
간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
었다.

골짜기 안으로 원병을 유인한 군호들은 미리 절벽 위에서 드리
워 놓은 밧줄을 타고 질서있게 위로 올라갔다. 이제 골짜기 입구
만 봉쇄하면 원병은 독 안에 갇힌 쥐나 다름없었다.

이때 원병의 만부장은 비로소 군호의 숫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군호들을 추격하는데만 전
념하다가 뒤늦게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니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
여 있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즉시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우르르, 꽝!

마치 천둥번개인양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골짜기 입구 쪽에서
거목과 바윗돌이 굴러떨어져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잇따라
절벽 위에서 열화와 독모래, 독수, 그리고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
아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패주하던 원군 제 이진이 골짜기 앞까지 밀
려왔다. 그들은 골짜기가 봉쇄된 것을 보자 사방으로 흩어져 달
아났다.

장무기와 서달이 뒤쫓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안타까와했
다. 만약 사전에 연락이 닿았다면 원군 제 이진마저 골짜기 안으
로 몰아넣어 한꺼번에 섬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장무기는 원병이 반으로 나뉘어져 군호들을 추격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구원 병력이 이렇게 빨리 당도 하리라고
는 실로 뜻밖이었다.

역시 병법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항상 다각도의 가능성까지 참고
로 하여 작전을 세워야만 했다. 무목유서에 수록돼 있는 전법은
아주 훌륭한 것이지만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지만 그 위력
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었다.

만약 서달과 상우춘이 적시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소림이 겁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골짜기 안에 갇힌 원병 제 일진도 제 이진
에 의해 구출되었을 것이다.

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원병을 계속 추격하는 한편
수하들을 시켜 바윗돌을 옮겨오게 하여 골짜기 입구를 더욱 단단
하게 봉쇄시켰다. 이어 궁수(弓手)들을 시켜 절벽 위로 올라가
골짜기 안을 향해 화살을 집중 발사하도록 명하였다.

원군들은 절지에 갇혀 반격할 재간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
는 것은 화살과 독물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몸을 숨기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후 상우춘도 수하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오랜만에 재회를
하는 장무기와 상우춘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우춘은 상황을 대충 듣고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바윗돌을 치우고 골짜기 안으로 쳐들어가 오랑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게 좋겠소!"

서달은 웃으며 말했다.

"골짜기 안은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으니 놈들은 오래 버티
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될 것이니, 구태여 우리가 수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상우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찬동했지만 그래도 아쉬
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직접 쳐들어가 죽이는 게 속시원할 텐데....."

그는 비록 서달보다 나이가 많지만 평상시 서달의 뛰어난 지략
에 탄복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명령권을 서달과 상우춘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났
다. 서달과 상우춘은 오랜 전투 경험을 살려 적시에 적절한 명령
을 내렸다. 그들의 명령에 따라 명교의 교도들은 달아나는 원병
을 추격했다.

이날 밤 소실산 아래에서는 환호성이 진동했다. 명교의 의군과
각 문파의 호걸들은 통쾌한 승리를 자축했다.

군호들은 소림사에서 계속 채식만 해왔기 때문에 자축을 핑계로
하여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오장제(五臟祭)를 치루
었다.

술좌석에서 장무기는 상우춘의 건강을 물었다.

"내가 일러준 약방문대로 약을 계속 복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우춘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교주, 염려할 필요 없소이다. 보다시피 이 상우춘은 황소처럼
건강하지 않소이까? 한 끼에 고기 세 근과 밥 여섯 그릇 정도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가 있소. 그리고 일단 싸움이 붙으면 사흘 밤
낮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소이다."

그의 말은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무기는
호청우가 왕년에 한 말이 늘 마음의 부담이 되어 그에게 꼭 약을
복용하도록 권유했다. 그러자 상우춘은 겉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 속으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달은 잔에 술을 가득 따루어 장무기에게 권했다.

"교주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장무기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 버렸다.

서달이 다시 말했다.

"속하는 평상시에 교주님의 전륜한 무공과 빼어난 인품을 존경
해 왔는데, 병법에 있어서도 깊은 견해를 갖고 있을 줄이야.....
실로 본교의 홍복(洪福)이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온
한민족의 홍복입니다."

"그것은 너무 과찬의 말씀이오. 오늘의 대승은 두 분의 공로이
며 또한 송대(宋代) 충신인 악비가 남긴 무목유서 때문이오. 본
인은 아무런 공도 내세울 것이 없소이다."

서달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목유서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무기는 품 속에서 그 얇은 비단을 꺼냈다. 바로 도룡도에 숨
겨져 있던 무목유서였다. 그는 서달에게 건네주며 <병곤우두산>
귀절을 가리켰다.

"한 번 읽어보면 내 말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오."

서달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읽어 내려갈수록 표정
이 진지해졌다. 결국 그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목유서에 수록된 용병술은 실로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상
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심오한 것이군요. 만약 악비 무목공(武穆
公)께서 오늘날까지 살아계셨다면 몽고 오랑캐들은 벌써 중원에
서 쫓겨났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목유서를 공손하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
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열 여섯 글자에 담
긴 참뜻을 난 오늘에서야 깨달았소. 소위 <무림지존>은 도룡도
그 자체의 위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소장된 무목유서를
가리키는 것이었소. 이 병법으로 적을 상대하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니 결국은 호령천하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고 단순히 도룡도의 예리함만으로 어떻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
겠소? 서대형(徐大兄), 이 병법기서(兵法奇書)를 드릴 테니 부디
무목공의 유지에 다라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민족의 금수강산을
다시 되찾아 주시오."

서달은 다른 생각을 할 엄두도 없이 놀라움이 앞섰다. 그는 황
급히 사양을 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어디서나 발에 채일 돌맹이 만큼이나
하찮은 속하가 어찌 감히 교주님의 이러한 후사를 받을 수 있겠
습니까?"

장무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서대형,사양하지 마시오. 나는 한민족의 장래를 생각해 이 병
서를 드리는 것이오."

서달은 두 손으로 병서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손이 떨렸다.

장무기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항간에 나도는 말 중에서 <의천불출, 수여쟁봉>이란 두 귀절이
더 있는데 그 또한 깊은 진의가 담겨져 있소. 지금 의천검은 비
록 절단되었지만 언젠가는 이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의천
검에도 절세의 무공비급이 담겨져 있기 대문에 그 의천신공(倚天
神功)과 의천검의 위력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오. 도룡도에 숨겨진 병서로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
되 만약 대권을 잡은 후 국태민안을 돌보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
여 폭정(暴政)을 한다면 필시 의천검을 쥔 영웅이 나타나 그 자
의 수급을 취할 것이오. 백만 웅병(雄兵)을 거느리고 천하를 다
스린다 해도 의천검의 일격을 피하진 못할 것이오. 서대형, 내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리라 믿소."

서달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감히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속하, 교주님의 금언을 가슴깊이 새겨 무목유서에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무목유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공손하게 큰 절을 네 번
올렸다. 무목유서를 남긴 악비 무목공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다. 이어 장무기에게도 재삼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훗날 서달은 과연 빼어난 용병술로 원군을 상대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어 결국 몽고인을 새외(塞外)로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대막(大漠)에 위명을 떨치고 일대 공업(功業)을 세
웠다.

그리고 소림대첩이 있은 후로부터 중원의 영웅들이 모두 자발적
으로 명교에 귀속하여 장무기의 호령에 따라 움직였다.

명교는 수백 년 동안 사교(邪敎)로 멸시와 질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장무기의 출현으로 인해 중원 군웅들을 호령하는 용(龍)
머리의 위치로 부각되었다. 동시에 그것이 한족(漢族)을 중흥하
고 대하강산(大河江山)을 되찾는 기틀이 된 것이다.

최종에 이르러 주원장(朱元璋)이 야심을 품고 간교한 음모를 전
개해 장무기를 밀어내고 용좌(龍座)에 앉을 때까지 명교의 역할
이 지대했다.

주원장은 비록 자신을 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의 공로를
말살하려 했지만 명교의 공로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여 다
른 것은 고사하고 국호를 명(明)으로 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명조(明朝).

명태조(明太祖) 홍무(洪武) 원년(元年)에서 시작하여 숭정(崇
禎) 황제가 누루하치의 막강한 세력에 밀려 목매달아 죽을 때 까
지 모두 이백 이십 칠년간 중국 대륙을 다스려 왔다.

명교가 없었다면 명조도 없었을 것이다.

군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실컷 마시고 그 동안 쌓인 긴장을
모조리 풀어 버렸다. 이날 오후가 되자 군호들은 공문, 공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만약 원군이 보복을 하기 위해 다시 소림
을 대거 침공해 올 시에는 군호들이 미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해
일제히 소림사로 달려와 돕기로 약속했다.

서달과 상우춘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소규모의 공격쯤은 소
림 자체에서도 충분히 퇴치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유지해 온 소림은 무학의 본산지로서 차츰 그 위
치가 흔들리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무공
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해 무학 중흥의 디딤돌로 삼았다.

군호들이 선후로 하여 소실산을 떠났지만 아미파의 제자들은 장
문인 주지약의 행방이 묘연하므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마치 미아(迷兒)처럼 우왕좌왕했다.

장무기는 그들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또한 송청서가 들것에 누
워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자 앞으로 다가가 정혜사태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송사형의 상세를 살펴봐도 되겠소?"

정혜사태는 냉랭하게 쏘아부쳤다.

"마음에도 없는 자비는 바라지도 않아요!"

가까이 있던 주전이 보다못해 욕설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우리 교주님께서는 너희들 장문인과의 옛정을 생각
해 이 송가의 상세를 보살펴 주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문을 배반한 파렴치한 녀석을 누가 거들떠 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들은 고맙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주둥아리를 한 발 정도나 내
밀어 심통을 부리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정혜사태는 그의 지독한 욕설에 발끈하여 당장 꾸지람을 주고
싶었으나, 주전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자 또 무슨 충격적인 얘기
를 내뱉을지 은근히 겁이 났다. 입씨름을 벌여 보았자 손해보는
것은 자기일 것이라 판단한 정혜사태는 분노를 억제하며 냉소를
날렸다.

"흥! 우리 아미파의 역대 장문인은 모두 청결한 몸을 끝까지 간
직했어요. 주 장문인이 만약 청결을 잃었다면 어떻게 여지껏 장
문인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겠어요. 흥! 송청서가 본파에 남아 있
으면 주 장문인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니 당장 무당파로 돌
려보내라!"

송청서의 들것을 들고 있던 아미파의 두 제자는 즉시 대답을 하
고 들것을 유연주 앞으로 들고 가 내려놓았다.

주위에 남아 있는 군호들은 정혜의 말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가장 놀란 것은 역시 유연주였다.

"뭐.....뭣이? 그럼 송청서가 아미파 장문인의 부군이 아니란
말이오?"

정혜사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흥! 우리 장문인이 이런 파렴치한 자를 반려자로 삼을 리가 있
겠어요! 장문인께선 단지 장무기가 변심하여 혼례를 파기하자 홧
김에 이 송청서 녀석을 남편으로 삼겠다고 무림에 공포했지만,
흥!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우리 장문인께서는 애당초...."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소 흥분한 탓인지 말을 제대로 잇
지 못했다.

한쪽에 서서 정혜사태의 말을 듣고 있던 장무기는 넋빠진 사람
처럼 잠시 멍해져 있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정혜사태에게 물었다.

"그럼..... 송부인..... 아니 귀파 장문인이 송사형과 부부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확실한 것을 알고 싶었다. 주지약과 송청서, 그는 어느 한
쪽도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이때 들것에 누워 있는 송청서가 몸을 한 차례 뒤척거리더니 나
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장무기 녀석은..... 죽었소?"

정혜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잠꼬대를 하는구나! 그렇게도 장무기를 죽이고 싶으면 죽어 귀
신이 된 후에나 방법을 물색해 봐라!"

정혜는 주전에게 당한 것을 공연히 송청서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았다.

은이정은 정혜가 흥분하여 말을 두서없이 내뱉자 아미파의 다른
제자인 패금의에게 나직이 물었다.

"패사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소?"

패금의는 왕년에 기효부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은이
정이 물어오자 잠시 망설이다가 우선 정혜사태의 양해부터 구했
다.

"정혜사저, 은육협은 본문과 인연이 깊은 분이니 자세한 얘기를
해드려도 괜찮겠죠?"

정혜는 코를 벌름거리며 상기된 음성으로 말했다.

"인연은 무슨 인연이냐? 인연이 없어도 얘기해 줘야 하고 인연
이 있어도 얘기해 줘야 한다. 우리 장문인은 청청백백한 몸이야!
저 송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너희들도 장문인 팔에 순결을
상징하는 수궁사(守宮砂)가 찍혀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
사실을 모든 무림인에게 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미의
백 년 전통이 손상될 거야....."

은이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정혜사태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횡설수설하
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는 다시 패금의에게 말했다.

"패사매, 정혜사태께서도 윤허를 했으니 어서 소상히 얘기해 주
시오. 나의 송사질이 어떻게 해서 귀파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귀
장문인과 어떤 관계가 얽혀 있는지 자세한 것을 알아야 문중으로
돌아가 스승님께 말씀드릴 게 아니겠소? 이번 일은 귀파와 무당
의 공동사이니 만치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양파의 우호가 손상되
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오."

패금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송소협의 인품과 무공은 뛰어나 강호에서 찾아보기 드문 인
재임을 잘 알고 있는 바예요. 그는 단지 한 순간 그릇된 생각으
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 거예요. 우리 장문인께선
그가 장무기를 죽여 파혼의 치욕을 설욕해 준다면 정식으로 그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약속했나 봐요. 그래서 그는 본파에 투신하여
장문인으로부터 새로운 기공(奇功)을 전수받았어요. 일전 영웅대
회에서 장문인이 갑자기 자신을 <송부인>으로 칭하여 송소협의
아내로 자처하자 본파의 제자들은 모두 매우 의아해 했어요. 그
날 장문인께선 각 문파의 고수들을 굴복시키고....."

주전이 즉시 끼어들었다.

"그것은 우리 교주께서 일부러 양보한 것인데 허풍을 떨고 있
군!"

패금의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그날 밤에야 궁금증을 풀 수 있었어요. 장문
인께서 <송부인>이라 자처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죠. 장문인께서
직접 왼팔을 드러내고 팔에 찍혀 있는 수궁사를 확인시켜 주었어
요. 그 수궁사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이 붉었어요. 청결
한 저자(妻子)의 몸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죠. 장문인께선 일부러
장교주의 마음을 흐트러 놓기 위해 송부인이라 자처한 것이라 했
어요. 장교주의 무공이 워낙 고강해 자신의 실력으로 당해낼 수
없기 대문에 비상수단을 쓴 것이죠. 그녀는 본파의 명예를 위하
여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감수했어요."

패금의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끔 낭랑한 음성
으로 말을 이어갔다.

"본파의 제자는 남녀로 구성돼 있으며 혼례를 금한다는 문구는
없어요. 하지만 창파조사이신 곽조사 이래 청결을 지키는 처자에
게만 가장 심오한 무공을 전수해 주는 전통이 이어져 왔어요. 그
래서 모든 제자가 입문할 때 스승님이 직접 팔뚝에다 수궁사를
찍어 주는 게 관례로 되어 있어요. 매년 곽조사의 탄일이면 스승
님께서 수궁사를 검사하시곤 했어요. 왕년에 기사저께선 바로 그
것 때문에....."

여기까지 말한 패금의는 아랫 말을 얼버무렸다.

은이정은 그녀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왕년에 기효
부는 양소에게 몸을 잃었기 때문에 처녀의 상징인 수궁사가 사라
져, 마침내 멸절사태에게 발각당한 것이다.

은이정은 양불회와 부부의 연을 맺은 후 날이 갈수록 정이 두터
웠다. 그러나 아직도 기효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풀
리지 않는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은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양소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양소는 눈
물이 그렁그렁하여 고개를 돌린 채 소매로 눈물을 찍어 내고 있
었다.

패금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다시 말했다.

"은육협님, 우리 장문인께선 명교 장교주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
기 위해 뜻하지 않은 물의를 빚은 것이니 우리로선 송소협의 몸
이 하루속히 완쾌되길 바랄 뿐이예요. 은육협께서 문중으로 돌아
가시면 장진인과 송소협에게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잘 드려주세
요. 저 역시 이번 일로 인해 양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은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의 이 사질은 하극상의 엄청난 죄를 저질렀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하오. 본파에 이러한 제자가 있었다는 것은 더
없는 수치요. 그가 일찌감치 죽었으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겠소."

은이정은 본디 마음이 여리어 극단적인 말을 좀처럼 입 밖에 내
지 않는데, 송청서가 막성곡을 살해한 죄행이 워낙 통한스러워
저주의 말도 서슴치 않은 것이다.

이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지
약의 비명임에 분명했다. 그 비명에는 극도의 공포가 담겨져 있
었다.

창졸간에 들려온 비명소리로 인해 군호들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
졌다. 대낮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있는데도 그 비명소리에 등
골이 오싹해진 것은, 그만치 비명소리가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지약은 모름지기 모종의 흉험무비한 변고를 당한 게 틀림없었
다. 중인은 비명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장
무기와 정혜사태, 패금의는 이미 신법을 전개해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안위가 무척 염려되었다. 그는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숲을 뚫고 나가니, 한 줄기의 청색 그림자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바로 주지약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지약, 어떻게 된 일이오?"

주지약의 얼굴은 짙은 공포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자지러지는
소리로 외쳤다.

"귀신..... 귀신이 날 쫓아왔어요!"

그녀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앞뒤 분간할 겨를도 없이 장무기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바들바들 떨었다.

장무기는 혼비백산해 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거
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소. 귀신이 있을 리 만무이니 마음을 가라 앉히
고 무엇을 봤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주지약의 옷은 가시덩굴에 걸려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얼굴과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 장무기는 그녀의 찢겨져 나간 소매 사이
로 수궁사가 찍혀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워낙 살결이
백옥 같은데다가 수궁사의 붉은 색깔이 선명해 금방 눈에 띄었
다. 장무기는 의술에 능통해 처녀의 팔에 수궁사를 찍은 후 순결
을 잃지 않는 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
다.

수궁사(守宮砂). 바로 처녀성의 상징이었다.

앞서 정혜사태와 패금의의 말을 들었을 때 장무기는 반신반의했
었다. 그러나 지금 직접 그 수궁사를 확인하자 오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뇌리를 어지럽혔다.

'송사협의 아내가 됐다고 운운한 것은 사실 무근한 일이었군.
그녀는 무엇 대문에 나를 속였을까? 정말 나의 심기를 흐트러 놓
아 천하제일 고수의 명예를 안을 욕심 때문이었단 말인가? 아니
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시험할 생각에서 였을
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장무기야, 장무기! 이 여자는 너의 누이동생을 살해한 불구대
천의 원수다. 그가 처녀든 남의 아내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그러나 주지약이 겁에 질려 떨고 있자 차마 품 안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주지약은 그의 품안에 안기자 차츰 두려움이 사그라졌다. 현실
로 되돌아온 그녀는 장무기의 몸에서 남성의 채취가 풍겨오는 것
을 의식했다. 여인의 본능이었다. 장무기의 가슴은 바다처럼 넓
고 봄볕처럼 따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입
술을 열었다.

"장교주, 당신이군요."

"그렇소. 나요. 그런데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도 겁에 질려 있
소?"

장무기의 말에 그녀는 다시 경황해지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양소와 위일소, 그리고 정혜사태, 은이정 등도 달려왔다.
그들은 주지약이 장무기의 품에 안겨 흐느껴 오는 것을 보자 서
로 눈짓을 하며 슬그머니 물러갔다.

명교와 무당파의 군협들은 모두 장무기가 주지약과 옛정을 되살
려 부부로 결합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거기에는 조민에 대
한 적대감정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
다.

조민은 지금 그의 곁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지만, 몽고의
귀족이라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무기가 만약 그녀
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오랑캐를 몰아내는 지상과제에 차질이
생갈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약은 잠시 흐느끼고 나서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날 쫓아온 사람이 없었나요?"

장무기는 멍해지며 대답했다.

"없었소. 대관절 누가 쫓아온다는 거요? 혹시 현명이로가 다시
나타난 게 아니오?"

주지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정말 아무도 날 쫓아오지 않았죠?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요? 날 쫓아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귀.....귀신이었으니....."

장무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청천백일하에 귀신이 있을 리 있겠소? 필시 허깨비를 본게 분
명하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약, 며칠 동안 너무 피곤했던 탓일 거요. 사람의 몸과 마음
이 허해지면 허깨비를 보게 된다고들 하오."

주지약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예요. 잘못 볼 리가 없어요. 한두 번도 아니라 연달아 세
번이나 봤어요."

그녀는 두려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지 음성이 떨렸다.

장무기는 내심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그녀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도 겁을 집어 먹고 있는지 궁금하여 넌지시 물었다.

"세 번씩이나 무엇을 봤다는 거요?'

주지약은 몸을 가볍게 떨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
려 뒤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
요했던 모양이다. 뒤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장무기를 쳐다보았다. 장무기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온몸에 힘이 쑥 빠져 무너지듯 장무기
의 품안에 쓰러졌다.

"나는 나쁜 계집이에요. 모든 게 내가 한 짓이에요.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치고 은..... 은낭자를 사..... 살해한 것도 나예요.
사대협의 혈도를 찍은 것도 내가 한 짓이었어요. 그러나 송청서
에게 몸을 허락하진 않았어요. 내 마음 속엔 오직..... 오직 당
신뿐이었어요."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소. 아직도 난 지약이 무엇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주지약의 양볼을 타고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나의 스승님이 만안사에서 나
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거예요. 선사께서는 도룡도와 의천
검의 비밀을 일러주시고 나더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도와 보검
을 수중에 넣어 그 속에 담겨진 무학을 연성한 후 본문을 빛내도
록 맹세하라고 강요했어요. 나는 추상같은 엄명을 거역할 수 없
어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하고 말았어요. 아울러 선사께서는 신검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당신에게 접근하되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
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맹세를 하라고 했기에 부득이....."

주지약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소리내어 흐느껴 울었다.

장무기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왕년에 멸절사
태가 기효부를 쳐죽인 장면이 새삼 뇌리에 뚜렷이 떠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멸절사태는 대막에서 명교를 멸망시키겠다고
거의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날뛰었고 직접 의천검으로 얼마나 많
은 명교의 교도들을 죽였던가!

심지어 멸절사태는 만안사에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자신의
도움을 거절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녀가 명교에 대한 원한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지약이 그녀의 유명에 다라 장문직을 계승했으니 당시 얼마나
모진 맹세를 강요받았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주지
약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여러모로 악랄한 행위를 저질러온 것이
다. 스승님의 유명이니 만치 그녀로서는 그 유명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본디
천성이 너그러워 남의 과실을 쉽게 용서하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지약은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푼 바가
있지 않는가!

장무기의 뇌리에 아득한 옛일이 떠올랐다. 처음 한수(漢水)에서
주지약을 만났을 때 자기는 현명패천장의 음독에 의해 제대로 몸
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어린 주지약은 정성스레 자신
을 위해 궂은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 때 주지약의 초롱초롱한 눈
망울을 장무기는 잊을 수 없었다. 광명정에서 하태충 부부와 화
산파의 고수를 상대해 악전고투할 때도 만약 주지약이 옆에서 도
와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한 은혜를 늘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장무기로선 근래 주지약
이 연거푸 취해 온 악랄하고 교활한 행동이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심한 배신감마저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모질게 다져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
었다.

그러나 이제 그 미움의 감정은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모
든 것이 주지약의 본의에서 행한 짓이 아니고, 또한 자기에 대한
깊은 감정 때문에 빚어진 엉뚱한 행동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
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의 품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있는 주지약은 한낱 연
약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준 여인이고, 자신
이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이제 그녀에 대한 원한은 고사하고 장
무기는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지약, 이제 그대의 진심을 알았소. 내 어찌 그대를 나무랄 수
있겠소? 그런데 무엇을 봤기에 그렇게도 겁에 질렸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주지약은 이내 안색이 창백해지며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말할 수 없어요. 그 원귀(寃鬼)가 나에게 씌워진 것은 내가 저
지른 죄악 때문이니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해요. 나의 잘못을 전
부 털어놓고 당신에게 용서를 비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산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장무기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원귀가 씌웠다는 걸까? 혹시 개방 사람들이 복수
를 하기 위해 귀신으로 위장해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 아닐까?'

장무기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
다.

주지약은 군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우선 아미파
의 제자들부터 만나보았다. 패금의가 어디서 겉옷을 구해와 그녀
의 몸에 걸쳐 주었다. 주지약이 무엇인가 나직하게 당부하자 아
미파의 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숙였다.

이때 산 아래 모여 있는 군호들 중에서 다시 무리를 지어 떠나
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문과 공지는 정중하게 그들을 전송했다.

양소와 범요 등은 모두 장무기 곁에 모여 있었다. 장무기도 이
곳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도 이만 떠나도록 합시다."

그가 떠나자고 제의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이 공문선사
에게 다가가 무엇인가 나직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공문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잠시 굳어져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
다. 무엇인가 거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무엇인가 믿지 못하
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주지약은 간곡하게 몇 마디 더 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공문
선사에게 합장을 했다.

공문선사는 이내 안색이 엄숙하게 변하며 염불을 외웠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교주, 이 일은 아무래도 교주가 나서서 말려야 할 것 같소."

장무기가 멍해졌다.

"무엇을 말리라는 건지.....?"

주전은 주지약 쪽을 다시 힐끗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주낭자가 속세를 떠나 불문에 귀의하려는 게 분명하오. 만약
그녀가 여승이 된다면 교주는..... 교주는 큰일날 게 아니겠소?"

옆에 있던 양소가 냉소를 날렸다.

"주낭자가 설령 속세를 떠날 생각을 갖고 있다 해도 소림장문을
스승으로 모실 리가 있겠나? 소림에 여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잘못 짚었네!"

"맞아! 맞아. 내가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주낭자가
소림에 입문할 리가 없지..... 그런데 왜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아미파의 장문인이니 소림 장문과는 대
등한 위치이므로 구태여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을 텐데...."

이때 주지약이 몸을 일으켰다. 공문선사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낭자 개인적인 일인 것 같으니 우리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조민을 찾았다.

"민매, 이만 떠납시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조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최근 며
칠 동안 조민은 늘 그림자처럼 그의 곁에 붙어다니며 특별한 경
우를 제외하고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한 조민이 갑자
기 보이지 않자 장무기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조낭자를 보지 못했소?"

순간 그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뿔싸, 내가 지약을 품안에 안고 있는 것을 목격한 모양이군.
그래서 내가 지약에 대한 옛정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해 말
없이 떠나버린 게 분명하다.'

그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조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열화
기의 장기사 신연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교주님, 조낭자가 하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무기는 자신의 생각이 적중된 것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민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오직 나를 위해 숱한 고
생을 해 왔는데, 내 어찌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
가?'

그는 곧 양소에게 말했다.

"양좌사, 나를 대신해 이곳의 일을 처리해 주시오. 아무래도 먼
저 떠나야 할 것 같소."

이어 공문, 공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는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등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맨 마지막으로 그는 주
지약에게 다가갔다.

"지약, 부디 몸보전하시오.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
오."

주지약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러자 고였던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장무기는 그녀 곁
에 남아 여린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조
민을 찾는 일이 더 시급했다. 그는 주지약을 뒤로 한 채 신법을
전개했다.


----- 제 7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7 장 좌절(挫折)과 세 번째 약속(約束)


장무기는 경공술을 전개해 계속 산 아래로 질주해 갔다. 산길을
따라 줄곧 군호들의 행렬이 보였다. 소림사에서 얼마전에 출발한
각 문파의 사람들이었다.

장무기는 그들과 맞닥뜨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하여 길 옆 숲길을 택해 군호들을 추월했다. 장무기는 갈수록 초
조해졌다.

약 삼십 리 가량 달렸을까, 찾고자 하는 조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느덧 주위에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행인의 모습도
이젠 찾아보기 드물었다. 장무기는 문득 생각을 굴렸다.

'민매는 심계가 뛰어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날 피할 생각이라
면 필시 큰 대로보다는 으슥한 산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
고서야 여지껏 달려 왔는데도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니야..... 혹시 소실산 근방에 숨어 있다가 내가 떠난
후에 반대편으로 간 게 아닐까?'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하여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는
허기도 잊은 채 이번에는 가까운 산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따
금씩 높은 나무에 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까마귀 떼
가 삼삼오오 귀소하는 것만 보일 뿐 사람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는 다시 소실산 뒤쪽으로 돌아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그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민매,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바윗돌만큼이
나 단단하오. 설령 하늘 끝을 뒤져서라도 기필코 그대를 찾아내
겠소.'

스스로 마음의 다짐을 확고히 하자 울적했던 기분이 다소 가셨
다. 하루종일 뛰어다닌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머지 않은
곳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을 보고 곧 신법
을 전개해 나무 위에 올랐다. 그는 가지가 교차된 곳을 골라 다
시 여러 개의 나뭇 가지를 꺾어 가로 세로 얽어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다. 일단 눕자 눈꺼풀이 감기며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달이 중천으로 옮겨
갔을 즈음 장무기는 잠결에 인기척을 느끼고 이내 잠에서 깨어났
다. 분명 수십 장 밖에서 걸음을 옮기는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
다.

장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워 시선을 한 곳에 모았다. 달빛을 빌어
한 사람이 날렵한 신법으로 남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왜소한 그림자였다. 아니, 잘룩한 허리와 가냘픈 몸의 곡선으로
미루어 여자임에 분명했다.

장무기는 뛸 듯이 반가와 하마터면 <민매>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는 즉시 뒤쫓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어 주춤했다.

상대방은 여자임에 틀림없지만 자세히 보니 조민보다 키가 크고
경공신법도 판이하게 달랐다. 분명 조민보다 날렵한 신법을 구사
하고 있었다.

'혹시 주지약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야밤에 웬 낭자가....
.'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주지약 같지도 않았다. 주지약에 비해
서는 신법이 뒤떨어졌다.

장무기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야심한데 혼자서 숲속을 뚫고 가는
것일까?'

본디,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장무기였다. 더우기
상대는 여인이 아닌가? 사사로운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더욱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쩌면 저 여인을 통해 민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
른다. 만약 민매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면 슬그머니 떠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민매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단
서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달빛에 잠겨 있는 울창한 숲은 나무 위에서 넓은 시야로 살펴본
것과 달리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아 어둑어둑했다. 그래도
장무기는 행여나 상대방에게 발각돼 공연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까 봐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생면부지의 낭자를 한밤중
에 미행하는 것은 결코 떳떳한 일이 못 되었다.

상대방은 일신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로 소림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저 낭자가 설령 민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해도 소림으로 향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림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만약 소림
을 겨냥해 엉뚱한 짓을 하려는 것이라면 수수방관만 할수 없지.'

장무기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걸음을 멈추고 주위에 유심
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흑의 낭자 외에 혹시 다른 야행인이 없
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이상한 소리도 그의 예민한
청각에 잡히지 않았다. 흑의 낭자가 단신 홀몸으로 야행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밥 한 끼 먹는 시간이 경과되도록 흑의 낭자는 시종 고개를 돌
린 적이 없었다. 장무기는 상대방의 뒷모습이 눈에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전에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얼
른 뚜렷한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무청영 낭자가 아닐까? 아니면 아미파의 제자 중에 한 사
람.....?'

다시 몇 리 가량 가자 소림사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흑의 낭
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소림사 옆쪽으로 접근해 갔다.

장무기는 그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흑
의 낭자는 신법을 늦추어 나무와 바윗돌 사이로 몸을 은폐한 채
소림사와 거리를 좁혀가는 것으로 미루어 누구에게 발각될까 봐
매우 조심하는 것 같았다.

이때 소림사 안쪽에서 목탁소리에 이어 염불 외는 소리가 우렁
차게 들려왔다. 모름지기 수백 명의 승인이 일제히 염불을 외는
것 같았다. 주위가 조용한데다가 수백 명의 승인이 동시에 염불
을 외자 가히 천승만기(千乘萬騎)와 같은 장엄함을 연출했다.

장무기는 크게 의아해 했다.

'소림 승인들이 야밤중에 염불을 외우다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
일까? 게다가 수백 명의 승려가 일제히..... 갑자기 무슨 대법사
(大法事)를 집례하게 된 걸까?'

흑의 낭자는 날렵한 신법으로 몸을 은폐한 채 다시 십여 장 가
량 접근해 가자 대전 옆에 이르렀다. 순간 흑의 낭자가 별안간
대전 아래 돌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네 명의 소림 승려
가 손에 계도와 선장을 들고 순시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흑의 낭자는 네 명의 승려가 지나간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대전 밖 창문 아래로 사뿐히 몸을 솟구쳤다. 날렵한 신법이었다.
이 신법만 보아도 그녀의 무공이 강호 일류 고수대열에 낄 수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혼자서 소림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소란을 부리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가 가장 궁
금한 것은 흑의 낭자의 정체였다.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숙인채 대전 서북쪽으로 빙 돌
아갔다. 그는 아주 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명교 교주의 신분
으로서 몰래 소림사로 잠입해 들어온 것이 발각된다면 설령 상대
방이 눈감아 준다 해도 체면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그래서 유난
히 행동에 신중을 기했다.

이때 대전 안에서 염불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무기는 조심스
레 창문 틈을 통해 안을 살펴보았다. 대전 안에는 수백 명의 승
인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
결같이 황색 승포에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 법기(法
器)를 들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목탁을 두드리는 자, 합장을
한 채 염불을 외우는 자, 바로 망혼(亡魂)을 초도(超度)하는 법
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무기는 이내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번 영웅대회에 많은 사람들이 살상돼 그들의 영혼이 극락왕
생하도록 법사를 올리고 있는 중이군.'

그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법사를
직접 주재하고 있는 공문대사 옆에 한 낭자가 서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낭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
기 때문이다. 주지약, 뜻밖에도 그녀였다.

주지약은 눈살을 찌푸린 채 몹시 어두운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맞아. 낮에 지약이 공문대사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법사를 간
청한 것이군. 아마 자신의 검에 죽은 무고한 생명들을 위해 망혼
제를 올리는 모양이군.'

장무기는 천천히 공탁(供卓)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공탁에 모셔놓은 영패에 뜻밖에도 <여협은리
지영위(女俠殷離之靈位)>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살아오다가 끝내 불행하게 생을 마친 은리(주아)를
생각할 때마다 장무기는 가슴이 아팠다. 지금 그녀의 영위를 보
자 장무기는 다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목탁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주지약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나직
이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장무기는 신공을 끌어올려 청각을 곤두세우자 그녀의 음성이 어
렴풋이나마 들려왔다.

"은낭자..... 저승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으세요.....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그 동안 나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장무기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주지약은 죄책감으로 인
해 몹시 괴로와해 왔던 것 같았다.

삶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꽃봉오리인 채 시들어간 은리, 스승의
유명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혼자 몸부림쳐 온 주지약. 모두가 불
행한 여인이었다.

장무기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날 광명정에서
명교의 교도들이 읊조렸던 노래가 메아리가 되어 다시 뇌리에 되
살아난 것이다.

----- 삶의 환희가 무엇이며 죽음의 고통이 무엇인가? 모든 게
부질 없는 것 -----

이때 주지약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우연히 시선이 동쪽 창
문에 닿자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앗! 그.....그녀가..... 또 나타났어요!"

그녀의 자지러지는 외침은 비명에 가까왔으므로 주위에 있는 소
림 승려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엄하게 울려퍼지던
목탁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 보았다. 창호지가 찢
어진 그곳에 뜻밖에도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삐끔히 드러나 있었
다. 장무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기절초풍하여 하마터면 비명
을 지를 뻔했다.

그 얼굴은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부종기가 빠진 은리의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목숨이 끊어져 자기 손으로 묻은 은리가 이곳
에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으니 장무기가 기절초풍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당장 달려가 그녀를 잡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
무나 큰 충격으로 인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돌처
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상처투성이 얼굴은 이내 사라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
약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되로 쓰러졌다.

장무기는 자신의 행각이 노출되어 소림 승려들로부터 무슨 오해
를 사게 되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 높여 외쳤다.

"주아! 주아!"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즉시 대전을 끼고 돌아 은리가 나타났던 방향으로 신법을 전개했
다. 하지만 차가운 달빛에 나뭇 가지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진
채 주위는 조용하기만 할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비록 귀신을 믿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자 절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넋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주아임에 분명해. 처음부터 뒷모습이 눈에 익다 했더니.... 주
아였군. 그렇다면 소림에서 망혼제를 올린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혼백이 나타난 거란 말인가? 정말 그녀는 죽어 원귀가 되어 이승
을 떠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소림 승려들이 이때 대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장무기를
확인하자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그 중에 나이가 많은 노승이 앞
으로 다가와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장교주께서 왕림한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마중을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오."

장무기는 더욱 송구스러워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소란을 피워 죄스
러울 뿐입니다."

그는 곧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주지약은 눈을 감은 채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땅에 쓰러져 있는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장무기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인중혈을 누르고 등을 쓸어주자
비로소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장무기를 보더니 품 안으로 파고들며 소리
쳤다.

"귀신! 귀신이에요!"

장무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글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소. 이곳에
고승들이 많으시니 필시 원혼을 위로해 줄 것이오."

주지약은 늘 몸가짐이 단정했다. 지금은 너무나 심한 충격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장무기의 품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정신을 차
리고 주위의 이목을 의식하자 얼굴이 붉어지며 황급히 장무기에
게서 떨어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이 계속 떨리는 탓으로
장무기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장무기는 공문 등과 인사를 나눈 후 조금 전에 창밖에 누가 나
타났다는 말을 거론하자, 공문 등은 보지 못했으므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창호지가 찢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지약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틀림없이 그녀였어요. 이번에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
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았소."

주지약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정말..... 당신도 보았단 말인가요?"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명히 나의 사촌 누이동생 은리 은낭자였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지약은 나직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정
신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장무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으
므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주지약은 곧 깨어났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귀신을 본 게 아니라
실지 살아 있는 은리를 본 것이오."

주지약은 입술이 새파랗게 변해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에요. 그녀는 귀.....귀신이 됐어요."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줄곧 그녀의 뒤를 다라 이곳 소림사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녀의 걸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 절대 귀신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소."

그는 주지약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호히 은리가 귀신이 아닌 사
람이라고 했지만, 그 자신도 마음 속으로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나타난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이 확인을 하듯 그에게 물었다.

"정말 그녀의 걸음은 보통 사람과 같았나요? 정말 허공을 떠돌
아다니는 귀신이 아니란 말인가요?"

장무기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처음 흑
의 낭자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녀가 소림사로 잠입해 창문 틈으로
대전 안을 엿볼 때까지 그 일거일동이 날렵하여 절세 무공을 지
닌 고수라는 사실 이외에 특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물음에 답하기 앞서 공문대사에게 물었다.

"장문인, 한 가지 알고 싶은 일이 있으니 가르침을 주셨으면 감
사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정말 그 영혼이 귀
신으로 변합니까?"

공문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교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불(我佛)은 윤회를 중요시하오.
흔히 전생의 업(業)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중생은 지은 바 업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인데, 즉 육도(六道)라고 하오.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
獄)이 바로 그것이오....."

장무기가 일단 불법에서 말하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하여 묻
자 공문선사는 장황하게 불리(佛理)를 늘어놓았다.

"천상이란 곳은 지혜가 밝고 마음이 선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
며, 아수라는 네 가지가 있는데, 아귀로 태어났던 중생이 불법을
극호한 선행을 쌓은 공덕으로 신통력을 얻어 허공을 자유자재로
다니는 귀신 아수라와 하늘에 있다가 복이 다함으로 아수라로 떨
어진 사람 아수라와 기운이 세고 두려움이 없어 싸움을 즐겨하는
아수라와 바다 속에 있다가 아침에 허공을 날아다니다 해가 지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는 축생 아수라가 바로 그것이오. 아귀는 본
디 죽은 사람이란 뜻이오. 사람이 죽어서 다른 계(界)에 환생하
지 못하고 귀계(鬼界)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함이오. 아
귀로 태어남은 탐욕을 부리고 질투를 일삼는다든가, 진실을 파괴
하거나 불법을 비방한 여러 가지 업으로 아귀보를 받게 되는 것
이오. 아귀의 업보가 끝나면 다시 여러 종류의 귀신이 되는데,
그 이전에 업이 다하고 망상을 쉬면 보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
오....."

공문선사는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라는 것을 감안하여 심오한 불
리를 조심스레 들려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무기의 질문
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
음이오. 그 마음에 따라 귀신도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
소."

장무기는 진지하게 공문의 불리를 받아들이며 다시 질문을 했
다.

"그렇다면, 법사를 행함으로써 유혼(幽魂)을 천상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공문은 조용히 합장을 했다.

"좋은 질문이오. 유혼은 초도(超度)가 필요치 않소. 이승에서
심은 업이 저승에서 보를 받게 되므로 선유선보(善有善報), 악유
악보(惡有惡報)일 뿐이오. 본문에서 법사를 행하는 것은 생인(生
人) 즉 이승에 남이 있는 자의 심안(心眼)을 구함이니 초도를 받
는 것은 바로 생인이라 할 수 있소."

장무기는 이내 깨달음을 얻고 공수의 예를 취했다.

"깊은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야심한데 불청객으
로 귀사에 어지러움을 끼쳐 죄스럽습니다."

공문선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교주는 본사의 대은인으로서 여러 차례 겁난을 구해 주었는
데 언제 왕림하여도 결코 불청객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장무기는 군승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주지약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린 이만 떠나도록 합시다."

주지약은 망설였다. 불전을 벗어나면 다시 은리의 원귀에 시달
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앞섰다.

장무기는 동요하지 않고 그녀에게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럼 내가 먼저 실례해야겠소."

말을 끝낸 그는 대전 밖으로 걸어나갔다. 주지약은 그의 뒷모습
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생각인가요? 나도.....함께 가겠어요!"

그녀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가 장무기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공문선사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아불의 자비가 있기를....."

소림사에서 멀리 벗어나자 주지약은 장무기에게 바싹 붙어서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음을 알고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다. 게다가 몸에서 유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장무기는 묘한 감정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걸어나가다가 주지약이 장탄식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공문대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전생의 업보를 받고 있나봐
요. 우리가 처음 한수에서 만났을 때 장진인의 도움을 받아 목숨
을 부지했는데,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때 알았다면
차라리 한수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하는 게 좋을 뻔했어요."

장무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명교 교
도들의 노래가 다시 되살아났다.

"삶의 환희가 무엇이며 죽음의 고통은 무엇인지 모든 게 부질없
는 것, 애환은 마음에서 생겨나도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읊조렸다. 주지약은 힘주어 그의 손
을 쥐었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장무기는 느낄 수
있었다.

주지약이 다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선 나의 장래를 생각하셔서 아미로 보냈겠지만, 차라
리 무당산에 남겨 나를 무당의 제자로 거두어 주셨다면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은사께서도 나를 잘 보살펴 주었어요. 그러나.....그러나
그 어르신네께선 나더러 명교를 멸망시키고 영원히 당신을 미워
하도록 맹세를 강요한 것은..... 도저히.....도저히....."

그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변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장무기는 그녀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다. 여지껏 그녀가 행해
온 일은 그 진심과는 상관없는 멸절사태의 유명일 뿐이었다. 그
로 인해 그녀는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장무
기는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더욱 깊어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계속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바람결에
짙은 꽃내음이 실려오며 어디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니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이 좋은 밤에 장무기는 미모의 낭자와 산길을 걸으며 그녀로부
터 깊은 정이 담긴 하소연을 듣고 있으니 어찌 가슴 속에 뜨거운
감정이 여울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무인도에서 한독을
제거해 주기 위해 그녀의 몸에 손길이 닿은 바도 있지 않은가.
당시까지만 해도 장무기는 그녀에게 깊은 정을 노골적으로 표현
했으며 일생의 반려자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와 상황
이 달랐다. 장무기는 마음이 착잡했다.

주지약은 걸으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날 호주에서 나하고 혼례를
올렸을 때 무엇 때문에 조낭자가 부르자마자 그녀를 따라 훌쩍
떠나가 버렸죠? 그렇게도 그녀에 대한 감정이 깊은가요?"

장무기는 그녀와 차분하게 얘기를 나눌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려 했소. 우리 이곳에
앉아 잠시 쉬는 게 어떻겠소?"

이렇게 말하며 길 한쪽에 보이는 펑퍼짐한 바윗돌을 가리켰다.

주지약은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아니에요. 나는 지금 마음이 어지러워 무슨 말이든 귀에 잘 들
어오지 않을 거예요. 잠시 걷다가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듣
기로 하겠어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잡은채 꽃향
기 그윽한 산길을 걸어나갔다. 얼마 정도 걷자 주지약은 그의 손
을 잡고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사, 오리 가량 걷자 걸음
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됐어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세요."

그녀는 향나무가 우거진 쪽에서 평평한 바윗돌을 골라 장무기
와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장무기는 조민이 사손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녀를 따라가게 된 것을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주지약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침묵을 지킬 뿐 이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쳐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지약,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소?"

주지약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거듭 말하지만 난 죄가 많은 계집이에요. 모든 게 내 운명이에
요. 난 자신을 원망할 뿐 당신을 원망하진 않아요."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사는 복잡미묘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태반인 것 같소.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우린 달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소. 그
리고 불행 뒤에는 다시 예기치 않은 행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
오. 지약,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주지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간절
한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을 장무기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지약은 그 맑은 눈망울로 그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키며 진
지하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내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진실을 말해 준다고 약속할 수 있겠죠?"

장무기는 힘주어 대답했다.

"좋소. 내 숨김없이 대답해 드리리다."

주지약은 서편으로 기울어가는 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이 세상에서 네 명의 여인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어요. 한 사람은 파사로 간 소조이고, 한 사람은
조낭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그....."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은리를 꼽고 있었으나 은낭자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다시 그 원귀
가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앞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 끝을 멈칫하더니 이어갔다.

"만약 우리 네 사람이 모두 무사히 이 땅에 남아 당신 곁에 있
다면, 당신은 그 중에 어느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겠어요?"

장무기는 마음에 혼란이 왔다.

"그건..... 그건....."

그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지약과 조민, 은리, 소조와
함께 배를 타고 출해(出海)할 당시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곰곰히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네 명의 낭자는 모두 나에게 깊은 정을 베풀고 있다. 난 어
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내가 그들 중에 어느 누구와 혼례를 올
려도 나머지 세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음 깊숙히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일까?'

그는 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생각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산하를 되찾는 대업을 이룩하기
전에 내 어찌 한 몸 편하기 위해 가정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따위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나는 명교의 교주이다. 나의 일거일동은 본교와 무림의 흥망과
모두 관련이 있다. 난 여지껏 하늘을 우러러 양심의 부끄러움 없
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여색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주
체하지 못한다면 천하영웅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고, 본교
의 명예도 크게 손상을 입힐 것이다.'

그의 생각은 다른 각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머님은 임종을 앞두시고 분명 나에게 신신당부를 한 바가 있
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속임수에 능통하니 평생을 두고 경계하
라고, 내 어찌 어머님의 유언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스스로의 질문을 회피했지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만에 불과했다. 그가 정말로 한 여
인을 점찍어 한눈을 팔지 않고 온 마음을 쏟아 사랑했다면 산하
를 되찾는 대업에 지장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명교의 명예에도
손상을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자기에게 진심
을 보여 준 네 여인 중 어느 누구도 모질게 외면할 수가 없다.
이 여인도 버릴 수 없고, 저 여인도 마음을 써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는데만 급급했다.

그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사실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모든
일을 모나지 않게 무리없이 해결하려 했다. 다른 사람의 뜻을 존
중해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건곤이위신공을 연마하게 된 것은 소조의 요구에 따른 것이며,
명교 교주가 된 것도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은천정, 은야왕 등의
의사에 다른 피동적인 것이었고, 주지약과 무인도에서 혼례를 언
약한 것도 사손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혼례를
파기한 것도 또한 조민의 강요에 좌우된 것이다. 만약 왕년에 금
화파파와 은리가 무력을 앞세워 강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빙화도
로 함께 가지고 청했다면 십중팔구 그 청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는 때로 엉뚱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만약 네 낭자와 더불어 화목하게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당시는 원나라 말엽으로써 농공병상(農工兵商) 혹은 선비나 강
호 호객, 어느 신분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삼처사첩(三
妻四妾)을 거느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조강지처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찾아보기 드물 정도였다. 단지 명교는 파사국에서
뿌리가 유래되었듯이 교도들은 근면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아 정실
이외에 첩을 거느린 경우가 드물었다.

장무기는 명교의 교주이기 이전에 원래 천성이 착하여 어느 낭
자를 먼저 아내로 맞아들이면, 그것을 자신의 더없는 큰 복이라
여기며 다시 첩을 맞이할 생각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갖는 즉시 지워 버렸다. 아울러 그런 생
각을 갖게 된 자신을 책망했다.

'사람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에게 그런 과욕이
잠재해 있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나중에 소조가 파사국으로 떠나 버리고 은리가 세상을 뜨자, 그
는 차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은리를 해친 원흉이 조민이라
단정했기 때문에 순리대로 주지약과 혼례를 올리기로 결정한 것
이다.

한데, 하늘의 풍운은 예측할 수 없듯이 인간사도 변화무쌍하여
진상이 밝혀짐에 따라 마음의 결정이 다시 변하게 됐다.

조민과 주지약, 장무기가 그녀들에게 느끼고 있던 선악의 관념
이 뒤바뀌어진 것이다. 그는 주지약과 혼례를 올리지 않은 것을
큰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혼례를 마쳤다면 그것은 돌이길 수
없는 잘못일 것이다.

조민은 자기를 따르기 위해 혈육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한 조민
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조민이 훌쩍 떠나가 버린 지금 주지약으로부터 단도직입적인 질
문을 받게 되자 장무기는 선뜻 단호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 다시 입
을 열었다.

"내가 묻는 것은 만약의 경우예요.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르겠
죠. 소조가 파사국 명교의 처녀 교주가 되었고, 나 또한 은.....
은낭자를 살해했으니 네 명의 여인 중에 조낭자밖에 남지 않았
죠. 그러나 내가 묻는 것은 네 명의 여인이 모두 아무런 변화없
이 당신의 곁에 남아 있을 경우에요. 그 때는 누구를 택하겠어
요?"

장무기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변했다.

"지약, 사실 나도 이 일로 인해 오래 전부터 고심해 왔소. 그
동안 줄곧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한 게 누구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그게 누구죠? 조낭자인가요?"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오늘 그녀가 홀연히 내 곁을 떠나 버리자 난 모든 것
을 잃은 듯한 충격을 받았소. 그녀가 없는 세상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소. 소조가 나에게서 떠나갔을 때 난 매우 가슴이 아팠
소. 누이가 세상을 떠날 때도 슬펐소. 그리고 지약의 일로도 난.
.... 깊은 충격을 받았소. 그러나 지약, 이제 내가 더 이상 무엇
을 숨기겠소. 만약 앞으로 다시 조낭자를 보지 못하게 된다면 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소. 이런 강렬한 감정은 여지껏 누
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오."

그는 애당초 은리, 주지약, 소조, 조민, 네 사람에 대한 감정이
비슷했었다. 그러나 조민이 훌쩍 떠나 버린 이제서야 그녀가 자
기 마음 속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
다. 그것은 다른 세 여자와 다른 감정이었다.

주지약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대도에서 당신이 조낭자와 주막에서 만나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당신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요. 그래서 난 불안했어요. 나는 당신과 혼례를 올림으로써 그녀
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 때 혼례를 올렸다 해도 역시 당신의 마음을 독
차지하진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어요."

장무기는 웬지 그녀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지약, 난 항상 그대를 존중해 왔소. 은리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꼈고 소조에게는 연민의 정을 가졌었소. 그러나 조낭자에 대한
감정이 가슴깊이 사무치는 그리움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주지약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슴깊이 사무치는 그리움이라....."

그녀는 장무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역시 당신에게 사무치는 그리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
시나요?"

그녀의 음성은 격정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껴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약, 나도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소. 당신의 그 고마운 마음
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난..... 그저 죄스러울
뿐이오."

주지약은 울적한 심정을 떨쳐 버리려는 듯 길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늘 나한테 잘 대해
주었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만약 조낭자가
영영 떠나 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든가, 누구에 의해 살해
되든가, 아니면 변심하여 당신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
죠?"

장무기는 그렇지 않아도 조민이 혹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
떻게 하나 하고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주지약의 말을 듣자
크게 당황해졌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찾
아내고 말겠소."

주지약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당신에 대한 마음이 변할 리가 없겠죠. 당신이 그렇게
도 그녀를 간절하게 찾고 싶다면 쉽게 찾아줄 수도 있어요."

장무기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어서 말해 주시오!"

주지약은 그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주시했다. 장무기의 얼굴
에는 조민을 찾을 수 있다는 벅찬 환희가 넘실거렸다. 주지약의
입에서 다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아마 영원히 나에게는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예
요. 그렇게도 조낭자의 행방을 알고 싶으면 나의 요구를 한 가지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나더러 무슨 요구를 들어 주라는 거요?"

"지금은 뚜렷이 요구할 게 없지만 나중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겠
어요. 아무튼 협의도에 어긋나지 않고 산하를 되찾는 대업에도
지장이 없으며, 당신과 명교의 명예에도 손상이 없는 일일 테니
쉽게 이행할 수 있을 거예요."

장무기는 멍해졌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예전에 민매도 나에게 세 가지 요구를 제시해 왔다. 역시 협의
도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운운하면서..... 지금까지 난 그녀의 요
구를 두 가지 들어주었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
약까지 그녀를 흉내내어 이런.....'

주지약이 그의 생각을 끊어 버렸다.

"승낙을 하기 싫으면 강요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만약 승낙을
한다면 대장부답게 때가 오면 그 요구를 응해야 해요."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며 물었다.

"정말 협의도에 어긋나지 않고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지장이 없
으며, 나와 본교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는 일이란 말이오?"

주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장무기는 한시바삐 조민을 만나고 싶은 심정에서 당장 약속을
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을 느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주지약이 비록 겉으로 온순해 보이지만 일을 행함
에 있어 심지가 깊고 때에 따라 수단이 악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주지약이 나중에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부담이 느
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가 망설이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보아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요. 승낙만 하면 바로 조낭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장무기는 결정을 내렸다.

"좋소. 어서 그녀의 행방을 말해 보시오."

주지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걸어가
무성한 나뭇잎을 헤치자 그곳에 한 소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드
러났다.

바로 조민이었다.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민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과 장무기의 등 뒤 수십여 장쯤 떨어
진 곳에서 지극히 나직한 인기척이 들렸다.

"아니.....?!"

분명 여인의 음성인데, 조민의 뜻하지 않은 출현으로 인해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대관절 누구일까? 장무기는 그녀의 놀란 외침
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일순 표정이 굳어졌으나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조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경직돼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낮에 조민이 갑자기 사라
진 것은 스스로 떠나간 게 아니라 주지약에 의해 납치된 것이었
다.

주지약은 그녀의 혈도를 찍어 이곳에 은폐해 놓은 후 일부러 자
기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만약 자기가 주지약의 간절한 마
음에 이끌려 그만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뜨거운 행동을 취했다
면, 조민이 모든 것을 듣고 느꼈을 테니 정말 영영 떠나 버렸을
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조민의 맥을 짚어보니 기혈이 순조롭게 유통되는 것이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음을 알았다. 장무기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달빛 아래 조민은 만면에 행복에 겨운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그러한 모습이 한없이 요염하게 느껴졌다. 자기와 주지약
의 대화를 그녀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들었을 것이다.

장무기가 조민의 혈도를 풀어 주려는데 주지약이 몸을 숙여 그
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그러자 장무기는 나직이 한 마
디 대답했다.

순간, 주지약의 입에서 성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무기, 이제 와서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자세히 보세요!
조낭자는 이미 중독되어 살아나지 못할 거예요!"

실로 뜻밖의 호통이었다. 장무기는 몹시 놀라며,

"그게..... 사실이오? 정말 독을 당했단 말이오?"

하고 조민의 맥을 다시 짚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이
그의 등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윽!"

그 즉시 장무기의 입에서 신음이 내뱉어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주지약은 다시 장검을 뽑아쥐고 그의 목을 겨냥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의 목숨도 살려둘 수 없어요! 나 역시 은
리의 원귀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우리
모두 함께 죽기로 해요!"

이렇게 외치며 다짜고짜 장무기의 목을 겨냥해 찍어갔다. 아무
도 예기치 못한 변화였다.

이때, 뒤쪽에서 여인의 뾰족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주지약, 은리는 죽지 않았다!"

주지약이 고개를 돌려보니 흑의 여인이 질풍처럼 나무 뒤에서
뛰쳐나오며 장풍을 떨쳐냈다.

주지약은 재빨리 한쪽으로 미끄러지며 몸을 돌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흑의 여인은 다름아닌 은리였다. 비록 얼굴에 상흔이 얼
룩져 있지만 부종기가 빠진 원래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주지약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 검 끝으로 장무기의 가슴을 겨냥
하며 소리쳤다.

"더 이상 접근해 오면 우선 이 사람부터 죽이겠다!"

은리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여지껏 저지른 악행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거냐?"

주지약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넌 대관절 사람이냐, 귀신이냐?"

은리는 힘주어 대꾸했다.

"물론 사람이다!"

그녀가 자신이 사람이라고 시인하기 무섭게 장무기의 입에서 격
동에 찬 일성이 터졌다.

"주아!"

그는 펄쩍 몸을 솟구쳐 은리를 껴안았다.

"주아,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은리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장무기의 팔
을 뿌리치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지약이 빙긋이 웃으
며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돌려 조민의 혈도를 풀어 주고 추혈과궁 수법으로
혈액이 원활하게 유통하게끔 해 주었다.

조민은 그녀에게 혈도가 찍혀 한참동안 움직일 수 없었지만, 모
든 것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여 처음에는 짜증스럽고 분
노가 치밀었지만 장무기가 자기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말을 실토
하는 것을 듣자 그 분노가 환희로 바뀌어졌다.

한편 은리는 눈을 곱게 흘겼다.

"어서 손을 놓으세요.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추
태예요?"

장무기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아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기쁨을 어떻게 형용해야 좋을지 모
르겠군.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인지.....?"

은리는 대답을 하기 앞서 장무기의 얼굴을 뜯어보듯 이리저리
유심히 살피고 나서 갑자기 귓바퀴를 꼬집었다.

장무기는 고통으로 인해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은리는 앙칼지게 말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못난이, 나를 땅 속에 생매장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아나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장무기의 가슴을 주먹으로 호되게 때렸다.
장무기는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하지 않고 연거푸 삼권을 맞았
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으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주아, 난 정말 주아가 죽은 줄만 알았어. 그로 인해 내가 얼마
나 가슴 아파했는지 알아? 어쨌든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
정말 기쁘군. 오직 하늘에 감사할 뿐이야."

은리는 여전히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하늘은 당신처럼 무심하지가 않아요. 내가 정말 숨이 끊어졌는
지 똑똑히 확인도 하지 않고..... 당신은 내가 추하게 생겨 진작
부터 죽여 없어지길 바랬겠죠? 그래서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
았는데도 땅 속에 묻은 거죠? 이 양심없는 못난이, 비겁장이!"

그녀는 계속 억지를 쓰고 욕을 섞어가며 장무기를 몰아부치는
게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장무기는 헤벌쭉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욕을 들어도 마땅하지 그런 엄청난 실수를 범하다니.....
당시 주아의 얼굴이 피투성인데다가 호흡이 멎었기 때문에 죽은
줄로만 알았어....."

은리는 펄쩍 뛰며 다시 그의 귀를 잡아 비틀려 했다. 장무기는
얼른 몸을 피하며 공수의 예를 취해 용서를 빌었다.

"주아,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줘."

은리는 냉랭하게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 날 땅 속에서 깨어나 보니 주위가 얼음
장처럼 차갑고 돌에 깔려 있는 것을 알았어요. 나를 생매장하는
것도 억울한데 왜 돌로 덮어 놓았죠? 흙으로 덮었다면 숨이 막혀
정말 죽을 뻔했잖아요! 내가 죽었다면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나
괴롭히지도 않을 테니 좋았을 게 아니겠어요?"

장무기는 후 하고 한숨을 불어냈다.

"다시 하늘에 감사를 드려야겠어. 당시 흙으로 덮지 않고 돌을
올려 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

그는 감격을 금치 못하며 한 쪽에 있는 주지약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은리는 냉소를 날렸다.

"당신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 흥! 저 여인을 쳐다보
지 말아요!"

"왜 쳐다보지 말라는 거지?"

"그녀는 나를 죽인 흉수인데 왜 쳐다보는 거죠?"

잠자코 있던 조민이 이때 불쑥 입을 열었다.

"죽지 않고 이렇게 정정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흉수라고 할 수
가 있죠?"

은리는 차갑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난 이미 한 번 죽었어요. 그러니 그녀는 한 차례 살인 흉수가
되었던 거예요!"

장무기가 나섰다.

"주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우리 모두에게 기쁜 일이야.
자, 여기 편히 앉아 죽음에서 되살아난 경과를 자세히 얘기해 주
지 않겠어?"

은리는 눈을 흘겼다.

"우리라뇨? 내가 묻겠는데, 당신이 말한 <우리>는 대관절 몇 사
람이 포함돼 있는 거죠?"

장무기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네 사람밖에 없으니 물론 나와 주낭자, 조낭자를 포함
해서 말한 거야."

은리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은 어쩌면 기뻐
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주낭자나 조낭자도 진심으로 기뻐할까
요?"

주지약이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은낭자, 그날 난 나쁜 마음을 먹고 낭자를 해쳤지만, 그 후 얼
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매일 밤 꿈에도 당신의 혼백이 나타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어요. 나는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
어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해봤어요. 그런데 낭자
가 이렇게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쁨을 뭘로 형용해야 좋을지 모르
겠어요. 하늘이 나의 이 죄를 용서한 걸로 생각하고 싶어요."

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요. 난 원래 당신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었는데, 정녕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면
그만 두겠어요."

주지약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꼈다.

"나..... 나는 낭자에게 너무나 큰 죄를 졌어요."

은리는 원래 고집이 대단해 한 번 마음먹은 일을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자존심이 매우 강한 주지약이 무릎을 꿇고 용서
를 빌자 마음이 누그러져 얼른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언니, 이미 지난 일이니 나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겠어
요. 어쨌든 난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주 언니가 내 얼굴
에 상처를 내는 바람에 부종기가 독혈(毒血)에 섞여 모두 흘러나
와 이렇게 멀쩡해지기도 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주지약은 그저 죄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장무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와 의부님, 그리고 주낭자는 섬에 오래 머물렀는데 주아는
무덤에서 나온 후 어째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

은리는 다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꼴이 보기 싫었어요. 당신이 주낭자와 밀어를 속
삭이는 것을 듣고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아나요? 흥! <앞으로
난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는
데.....>"

은리는 장무기의 말투를 흉내내더니 다시 주지약의 음성을 모방
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은 나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진 않겠죠?>"

은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남자의 음성을 흉내내었
다.

"<지약, 당신같이 온순하고 현숙한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을 저
지를 리가 있겠소? 설령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난 좋게 타이르며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손으로 서편의 달을 가리켰다.

"<하늘의 달님이 우리 두 사람의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알고보니, 그날 밤 장무기와 주지약이 정답게 밀어를 나누는 것
을 은리가 전부 엿들은 모양이다. 은리가 당시 두 사람이 나누었
던 말을 일일이 들추어 내자 주지약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
고, 장무기는 멋적어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장무기가 조민을 힐
끗 쳐다보니 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했다.

장무기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 조민은
손을 젖히며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장무기는 심
한 고통을 느꼈으나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은리는 품 속에 손을 넣어 길쭉한 나무 조각을 꺼냈다. 그것을
장무기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나요?"

장무기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 나무 앞면에 <애처은리지묘>라
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그 당시 자기가 은리의 무덤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 묘비의 일부분이었다.

은리가 한스럽게 말했다.

"나는 무덤 속에서 나와 이 나무 조각을 보고 어리둥절해졌어
요. 묘비 아래 장무기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
중에 당신과 주낭자의 대화를 듣고 비로소 증아우가 바로 장무기
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 교활하고 비겁한 사람! 그 동안 용케
도 나를 속여왔군요!"

이렇게 말하며 나무토막으로 다짜고짜 장무기의 머리를 내리쳤
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나무조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
방으로 튕겼다.

조민이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왜 걸핏하면 이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죠?"

은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내가 그를 때리니까 가슴이 아픈 모양이군."

조민은 얼굴이 빨개졌다.

"이 사람은 계속 양보하고 참고 있는 것이니 자중을 하세요."

은리는 코웃음을 쳤다.

"자중하라고? 흥! 자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방금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지 못했나요? 분명히 애처라고 적혀
있었어요.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가 당신을 받아들일 수도 있
고, 저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난 당신과 이 못난
이를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 호접곡에서 내 손등을 깨물은 작은 장무기
예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못난이의 이름이 증아우든 장무기든
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그 장무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아우 오빠, 당신은 줄곧 나에게 잘해 주었어요.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난 마음을 이미 그 쌀쌀맞고 흉악한 작
은 장무기에게 주었어요. 당신은 그가 아니에요. 아니고 말고요.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어요. 아무도....."

장무기는 멍해졌다.

"내가 분명 장무기이거늘, 어째서..... 어째서....."

은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우 오빠, 당신은 몰라요. 서역 대막에서 우리 둘은 공생공
사, 동고동락을 했고, 해외 작은 섬에서 당신은 인으로서 나를
대해 주었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 말만큼
은 분명히 명심해 주세요. 난 이미 그 작은 장무기에게 마음을
정했어요. 그를 찾아가야겠어요. 기어코 그를 찾아내고 말겠어
요.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예전과 같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깨
물까요?"

이렇게 혼잣말처럼 씨부렁거리더니 장무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나갔다.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어렸을 때 가슴 속에 새겨놓은 장무기의
환영(幻影)일 뿐 이미 어른으로 성장한 장무기가 아니었다.

장무기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은 착
잡했다. 슬픔, 아쉬움, 적막함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심저(心底)
에 여울져 퍼졌다. 그는 은리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보며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은리는 호접곡의 그 어린 소년을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그 소년을 찾아나선다고 했지만 찾을 수
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벌써 그 소년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바로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 사랑, 그것은 어쩌면 실지 현실에서 경
험하는 사랑보다 더욱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주지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나 때문에 그녀가 넋빠진 사람으로 변
한 것 같아요."

장무기는 달리 생각했다.

'그녀가 환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때문일 것이다. 하
지만 정신이 맑은 사람보다 그녀처럼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

한편 조민의 생각은 각도가 달랐다. 은리는 떠났지만 주지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은리는 죽지 않고 사손도 무사하며, 의천검과
도룡도에 숨겨졌던 비급도 도룡도와 함께 장무기에게 되돌아갔
다. 이제 주지약에게 큰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송
청서는 그녀로 인해 막성곡을 죽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송청
서가 저지른 죄악일 뿐, 주지약은 사전에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사주한 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무기가 이미 그녀와 혼례를 약속한 바 있다
는 사실이다. 장무기는 신의를 중시하는 위인이므로 주지약에게
큰 잘못이 없는 한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지약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이제 떠나요."

조민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주지약이 답했다.

"조금 전 내가 소림사에 있을 때 팽화상이 교주를 찾아온 것을
보았어요. 명교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내심 다급해졌다.

'내가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교내의 대사를 그릇치는 게
아닐까?'

그는 서둘렀다.

"어서 가 봅시다."

세 사람은 곧 신법을 전개해 얼마 후 명교 교도들이 야영을 하
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양소, 범요, 팽화상 등은 사람을 시켜 도처로 교주를 찾아 다녔
는데, 그가 돌아온 것을 보자 내심 의아해 하기도 했다.

장무기는 얼른 물었다.

"팽대사, 나를 찾아다닌 모양인데, 교내에 무슨 일이 생겼소?"

팽화상은 주지약과 조민의 눈치를 살피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
았다. 주지약은 얼른 조민의 손을 잡았다.

"우린 저쪽으로 가죠."

조민도 자리를 피할 필요성을 느껴 그녀와 함께 한쪽으로 물러
갔다.

팽영옥은 그녀들이 멀어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교주께 보고하오. 우리가 호주에서 참패를 당해 한산동 한형이
순직했소."

장무기는 이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그는 통한을 금치 못했다. 팽영옥이 다시 말했다.

"지금 회서(淮西)의 의군을 주원장 형제가 지휘하고 있소. 서
달, 상우춘 두 형제는 소식을 전해 듣는 즉시 대군을 이끌고 후
원하기 위해 달려갔소. 한림아도 역시 함께 갔소. 화급을 다투는
일이므로 교주의 명을 기다릴 겨를이 없었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일이오."

이들이 군정(軍情)을 상의하고 있는 사이에 은야왕이 달려 들어
왔다.

"개방에서 방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진우량 녀석의 행방이
밝혀졌다고 하오."

장무기가 물었다.

"그가 어디에 있소?"

은야왕이 대답했다.

"그 놈은 본교 서수휘 형제의 휘하로 잠입하여 상당히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하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정녕 그렇다면 성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삼촌,
수고스럽지만 사람을 시켜 진우량의 정체를 서형에게 알리도록
하세요. 진우량은 워낙 교활하여 곁에 두면 언젠가는 화근이 될
거라고."

은야왕은 대답을 하고 나서 말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찾아가 단칼에 죽여 버리는 게 어떨는지?"

장무기가 그의 제의에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교조 한 명이 서수
휘의 긴급 문서를 갖고 들어왔다. 양소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났군. 아무래도 녀석이 선수를 친 모양인데....."

장무기는 급히 문서를 펼쳐보았다. 서수휘의 친필 서한이었다.
그 내용은 진우량이 한때 교주에게 죄를 지었지만, 지금 그 죄를
참회하고 본교에 투신해 성심껏 이바지하고 있으니 교주께서 그
에게 개과천선할 길을 열어 주십사 하는 간청이 담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서찰을 양소와 은야왕 등에게도 보여 주었다. 은야왕
은 심려를 했다.

"서형은 이미 그 녀석의 간교한 술책에 현혹된 모양인데.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오."

양소도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량이 교활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 서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으니 경솔하게 죽인다면 서형과의 관계가 서먹해질 우려
가 있소. 게다가 진우량은 겉으로 개과천선하는 흉내를 내고 있
을 테니, 우리가 그를 받아 주지 않으면 천하 영웅들로부터 우리
의 아량이 좁다고 손가락질 받게 될지도 모르오."

장무기는 심각하게 말했다.

"양좌사의 말도 일리가 있소. 팽대사, 대사는 서형과 남달리 친
분이 두터우니 진우량을 항상 경계하고 충고를 해주었으면 좋겠
소. 만약 진우량의 손에 병권이 넘어간다면 우린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될 것이오."

팽영옥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서수휘는 결코 팽영옥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우
량을 신임한 나머지 그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나중에 진우량
은 명교 서로의군(西路義軍)을 이끌고 자칭 한왕(漢王)이라 하며
명교 동로의군(東路義軍)과 천하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파양
대전(播陽大戰)에서 패배를 당해 죽고 만다. 그 수년 동안 진우
량으로 인해 명교의 영웅호걸들이 숱하게 죽어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이날 밤, 장무기는 양소, 팽영옥 등과 상의하며 교대 형제들을
각처에 있는 의군에게 보내 후원하도록 결정했다. 협의를 마치자
그들은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이튿날 아침 조민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언니는 어젯밤에 떠나갔어요. 미처 작별을 고할 새가 없었
기 때문에 나더러 대신 전해 달라고 했어요."

장무기는 잠시 적막함에 잠겼다.

얼마 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장삼봉과 헤어진지 오래되어 한
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래서 조민, 송청서, 유연주 등과 곧장 무
당산으로 향했다.

소실산과 무당산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며칠 후 장무기
일행은 무당산에 당도해 장삼봉을 배견하고 송원교와 유대암에게
도 인사를 올렸다. 송원교는 아들이 대전에 와 있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파랗게 상기되어 당장 검을 뽑아쥐고 뛰쳐나갔다. 장무기
등이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모두 대전에 모이게 되었
다. 장삼봉도 따라나왔다.

송원교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대역무도한 그 짐승이 어디에 있느냐?"

그는 송청서가 한쪽 침상에 누워 흰 붕대로 온몸을 칭칭감고 있
는 것을 보자 다짜고짜 장검을 떨쳐 찔러갔다. 그러나 검 끝이
송청서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손목에 힘이 쭉 빠져 그만 검을 내
리고 말았다. 일순 부자지정(父子之情)과 동문지의(同門之義),
만감이 교차되어 몸을 가볍게 떨더니 갑자기 검 끝을 돌려 자신
의 아랫배를 향해 찔러갔다.

위기일발의 순간 장무기가 황급히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었
다.

"대사부님, 절대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 태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삼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무당 문하에 이런 몹쓸 제자가 배출됐다는 것은 원교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다. 이 대역무도한 이놈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송청서의 가슴에 일장을 뻗어냈다. 송
청서는 즉시 오장육부가 파열되어 숨이 끊어졌다.

송원교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스승님, 제자가 자식놈을 제대로 관속하지 못해 칠제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 엄청난 죄를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모르
겠습니다."

장무기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번 일은 너에게 책임이 있다. 오늘부터 본파 장문제자의 자
리를 유연주에게 내주도록 해라. 너는 태극권법을 연구하는데 전
념하고 다시는 장문의 업무를 관여하지 않도록 해라."

송원교는 다시 무릎을 꿇고 그의 명을 받들었다.

유연주는 한사코 사양을 했으나 장삼봉의 확고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중인은 장삼봉이 송청서를 직접 죽이고 송원교를 장문제자의 자
리에서 물러나게 한 엄한 문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삼봉은 영웅대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물으며 장무기에
대해서는 종전보다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조민은 장삼봉에게 무릎을 꿇고 예전에 무례했던 죄를 용서 빌
었다. 장삼봉은 호탕하게 웃어 넘기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유대
암이 불구가 되고 장취산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 모두 조민의 수
하였던 아대, 아이 등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그 당시 조민은 아
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직접 그 죄를 결부시키지 않았
다. 오히려 그녀가 혈육과 등을 돌린 채 장무기를 따르고 있다는
말을 듣자 가상하게 여겼다.

"하핫..... 어려운 인연이로다."

장무기는 무당산에서 며칠간 머문 후 조민과 함께 호주로 향했
다.

도중에서 그는 명교의 의군들의 전승보를 계속 접할 수가 있었
다. 그리고 도처에서 새로운 의군들이 궐기하고 있다는 것도 들
었다. 고소(姑蘇)에서 장사성(張士城), 태주(台州)에서는 방국진
(方國珍), 그들은 비록 명교의 소속이 아니지만 오랑캐를 몰아내
겠다는 뜻은 같았다.

장무기는 내심 기뻐했다. 하루속히 산하를 되찾아 태평천하가
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아울러 자기가 그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동분
서주해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떠들썩한 것을 원치 않아 도중에서 명교 의군 수령들
을 상면하지 않았다. 단지 암암리에 그들의 동태를 관찰할 뿐이
었다. 명교의 의군은 군기가 엄해 백성에게 피해를 입하는 사례
가 없었다. 장무기가 가는 곳마다 주원장(朱元璋) 원수(元帥)와
서달 대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장무기는 흐뭇했다.

이날 호주성에 당도하자, 주원장이 소식을 전해 듣고 탕화(湯
和), 등유(鄧愈) 두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장무기를
영접케 했다. 장무기는 빈관(賓館)으로 안내되었다.

탕화가 아뢰었다.

"주원수와 서대장군, 상장군께선 긴요한 군무(軍務)를 상의하느
라 친히 교주님을 영접나오지 못했습니다. 이 점 속하들로 하여
금 미리 교주님께 용서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장무기는 웃음을 머금고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모두 한 핏줄을 나눈 형제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형식
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긴요한 군무를 젖혀놓고 날 영접나왔다
면 오히려 나무랐을 것이오."

이날 밤 빈관에서 주연을 베풀어 탕화와 등유가 장무기를 접대
했다. 술이 세 순배 돌았을 때 주원장이 대장(大將) 화운(花雲)
을 대동해 허겁지겁 나타나 땅에 엎드려 장무기에게 큰절을 올렸
다. 장무기는 얼른 그를 부축했다. 주원장은 공손하게 장무기에
게 술잔을 받아 모두 단숨에 비워 버렸다. 주원장은 조민에게도
술을 올렸다. 조민은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주연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원장은 그 동안의 전과를 보고하며
매우 양양해 했다. 장무기도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대장 요영충(요永忠)이 성큼 대청 안
으로 들어와 교주를 배견한 후 주원장에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잡았습니다."

주원장은 매우 기뻐했다.

"잘했다!"

이때 대문 밖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억울하다! 난 억울해!"

장무기는 그 외침소리에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한림아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한 형제가 아니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오?"

주원장은 힘주어 대답했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한림아는 오랑캐와 결탁해 본교를 배신하
려 했습니다."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한형제는 누구보다도 충심이 확고한데 그럴 리가 있겠소? 내가
직접 물어볼 테니 어서 데리고....."

그는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
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 손발이 굵은 밧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
다. 그의 놀라움은 컸다. 다행하게도 조민도 묶인 채 옆에 있었
다.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장무기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내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필시 주원장이 엉뚱한 마음을 품고 행한 음모일 것이다. 이제 명
교는 도처에서 원병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머지 않아 천하를
움켜쥘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순리에 따라 장
무기가 황제 보위에 오르게 될 것이니, 주원장은 장무기를 제거
해 그 보좌를 차지하려고 술에다 독한 미약을 풀어넣은 게 틀림
없었다.

장무기가 운기를 해보니 체내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 공력도 상
실되지 않았다. 그는 내심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이까짓 밧줄로 날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
지. 민매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갈 필
요는 없다. 날이 밝은 후에 모든 교도들 앞에서 주원장의 음모를
폭로해야겠다.'

장무기는 곧 마음을 차분히 하고 조용히 운공조식을 했다.

약 한 시진이 지났을까, 홀연 몇 사람이 옆방으로 들어오는 인
기척이 들렸다. 그들은 곧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다름아닌
주원장, 서달, 상우춘이었다.

주원장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이 자가 본교를 배신하고 원조(元朝)에 투항한 증거가 뚜렷하
니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 두 분 형제의 의견으로
이 일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

서달과 상우춘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주원장이 다시 말했
다.

"이 자의 심복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신중을 기하기 위해 우린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서달이 그의 말을 받았다.

"주대형, 큰 일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여선
아니 되오. 풀을 벨 때 뿌리째 뽑아야 하듯이 속히 놈을 죽여 후
환을 없애는 게 현명할 것 같소."

주원장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우리의 두목이 아닌가. 그를 죽인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 아닐지..... 그가 우리 세력의 주춧돌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인데....."

이번에는 상우춘이 나섰다.

"주대형, 그 녀석을 죽여 군에 변란이 생길 게 우려된다면 우리
가 암암리에 살수를 전개하겠소. 자칫 잘못하면 주대형의 명예에
손상이 갈까 봐 염려가 되기 때문이오."

주원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 형제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나도 더 이상 이의가 없
네. 어쨌든 그 녀석은 여지껏 본교에 은덕을 주었고, 두 분 형제
또한 그와 친분이 두터웠으니 이번 일을 절대 누설하지 않도록
하게....."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만부득이한 상황이라지만, 그를 죽인다는 게 실로 가슴 아프
네."

서달과 상우춘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나라를 되찾는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친구에 대한 사사로운
감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세 사람은 곧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으므로 등줄기가 오싹해지
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곧 신공을 끌어올려 밧줄을 끊고 조민은
안은 채 빈관을 빠져 나갔다. 그는 오만가지 생각이 겹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장무기는 그들 셋을 모두 죽여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들을 없애면 의군이 와해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본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서달과 상우춘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군. 그렇게도 믿
었던 사람들인데.....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은 모른다는 말이 맞군.'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민을 데리고 떠나가 버렸
다.

성 밖에 이른 그는 서찰 한 통을 써서 명교 교주 자리를 양소에
게 물려 주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당했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
았다.

장무기는 사실 주원장의 치밀한 술책에 걸려든 것이다. 서달과
상우춘이 죽이자고 한 것은 그가 아니라 한림아였다. 장무기가
호주에 나타난 일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주원
장의 음랄한 술수였다. 그는 장무기로 하여금 좌절과 실의에 빠
지게 하여 스스로 물러나게끔 만든 것이다.

장무기는 나라를 되찾는 일을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시하고 있으
며, 또한 서달, 상우춘과 친형제 이상으로 친분이 두터워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 필시 자발적으로 물러날 것이라 예측했었다. 그의
예측은 과연 적중했다.

장무기는 비록 무공이 천하무적이지만 심계와 계략에 있어서는
도저히 주원장을 따를 수가 없었다. 하여 끝내 이 일대 효웅(梟
雄)의 간계에 걸려든 것이다.

물론 장무기는 애당초 황제가 될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주원장
의 음모가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달과
상우춘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우
울해졌다.

한편, 한림아가 오랑캐와 결탁해 명교를 배반했다고 운운한 것
도 역시 주원장의 모함이었다. 알고보니, 한산동이 죽은 후 의군
들은 한림아를 새로운 통솔자로 꼽아 실지로 주원장, 서달, 상우
춘은 그의 속하라 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한림아가 적과 내통한
친필 서한을 조작하여 다시 후한 조건을 제시해서 한림아의 심복
을 매수해 서달, 상우춘에게 그 거짓 사실을 알리게 했다. 서달
과 상우춘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하에서 한림아를 죽이자고
고집한 것이다. 주원장은 한림아의 공로와 위치를 내세워 마음에
도 없는 능청을 떨다가 마치 서달, 상우춘의 확고한 뜻에 못이기
는 것처럼 한림아를 죽이는 것을 억지로 승낙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장무기와 조민을 옆방에 가두어 놓았지만 장무기의 무
공으로 충분히 스스로 밧줄을 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무기가 밧줄을 끊자마자 복수를 해올까봐 서달, 상우춘
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말을 입 밖에 내게 한 후 즉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나중에 장무기가 떠난 것을 확인한 그는 요영충
에게 명하여 한림아를 물에 빠뜨려 죽이게 했다. 이 일석이조의
계책은 실로 악랄하면서도 완벽한 것이었다.

나중에 양소가 비록 명교 교주에 올랐지만 그 때는 주원장이 이
미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한 후였다. 양소는 이미 고령인데다가
덕을 쌓은 게 많지 않아 주원장과 황제의 자리를 쟁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원장은 등극한 후 오히려 명교를 핍박하고 교내에서 공을 세
웠던 형제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상우춘은 급병을 앓아 일찍 요
절했지만, 서달은 결국 주원장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되니.....

조민은 장무기가 양소에게 띄우는 서신을 쓰고 나서 붓을 내려
놓을 생각을 않고 시무룩해 있는 것을 보자, 생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공,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으로 도룡도를 빌
려주었고, 혼례를 올리지 않았어요. 이제 세 번째 약속을 이행할
차례예요."

장무기는 안색이 굳어졌다.

'또..... 무슨 엉뚱한 일을 시키려는 건지.....'

장무기는 웬지 가슴이 철렁하며 불안했다. 조민은 가지런한 치
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내 눈썹이 너무 엷은 것 같으니 붓으로 좀 그려 주세요. 강호
협의도에 위배되는 요구는 아니겠죠?"

화미(畵眉) ----- 여인의 눈썹을 그려 주는 것으로, 정인(情人)
이나 부부 사이에 행해지는 낙취(樂趣)이다.

장무기는 굳어졌던 표정이 풀리며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매일 눈썹을 그려 주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 밖에서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요구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았겠죠?"

바로 주지약의 음성이었다. 장무기는 양소에게 띄우는 서신을
쓰느라 정신을 쏟는 바람에 그녀가 어느새 창 밖에 나타났는지조
차 몰랐다.

창문이 천천히 열리며 주지약의 달덩어리 같은 얼굴이 나타났
다. 촛불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깔려 있었다.
장무기는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지.....지약은 또 나에게 무슨 요구를 하려는 거요?"

주지약의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샛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엇을 요구할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
이 민민 동생과 혼례를 올리게 되는 날 생각이 날 거예요."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조민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다시 주지약
을 쳐다보았다. 일순, 여러 가지 생각이 어우러져 그의 심기를
흐트러 놓았다. 기쁨인지 우려인지 알 수 없는 격정으로 인해 손
이 가볍게 떨리며 쥐고 있던 붓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조민과 주지약, 그녀들이 마주보는 미소에서 장무기는 가슴 속
에 어우러졌던 여러 가지 감정이 뿌듯한 행복으로 양각(陽刻)되
어 일렁거렸다.


----- 제 7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끝


작가후기 (作家後記)




이 삼부작의 남자 주인공은 제각기 개성이 다르다. 곽정(郭靖)
은 성실하고 소박하며, 양과(楊過)는 감정이 깊고 호탕하다. 그
들에 비해 장무기의 성격은 비교적 복잡하고 또한 비교적 연약하
다. 그에게는 영웅의 기질이 부족하다. 물론 그의 성격 중에 결
점이 많지만 장점도 많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유형일지도 모른다. 양과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스스로
흐름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곽정은 작은 일에 있어 황용(黃蓉)의
충고를 참고로 삼지만 큰 일을 임할때에는 확고한 신념이 두드러
진다.

장무기의 일생은 늘 타인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리고 환경의 지
배를 받아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정 면에 있어 양과는 소용녀에게 적극적이었으며 사회규범을
무시했다. 곽정이 황용과 화쟁공주 사이에서 흔들렸던 것은 순수
한 도덕 관념에서 빚어진 갈등이지 결코 애정에 있어선 절대 주
저하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시종일관 뚜렷한 주관이 없이 피동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주지약, 조민, 은리, 소조, 네 명의 낭자 중에서 그
는 조민을 가장 깊이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주지약에
게도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사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어느
낭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아마 그 자신도 모
를 것이다. 작가도 역시 알 수 없다. 이왕 그의 성격을 우유부단
한 면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의 개성에 따라 펼쳐나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작가도 그의 굳어진 개성의 테두리를 벗
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 같은 위인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정치상의 영도자가
될 수는 없다. 물론 그 자신도 원치 않으며 설령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최고의 보좌에 오른다 해도 결국은 실패할 것이다. 중국
삼 천 년의 정치사에 있어 그러한 사례가 명확한 결론으로 나타
나 있다. 중국의 정치사에서 영도자로서 성공을 거두려면, 첫째
조건이 인(忍)이다. 자신을 억제하는 忍, 그리고 정적에 대한 잔
인(殘忍)이 그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명쾌한 결단력이다. 그리
고 세 번째는 강한 권력욕인데, 장무기는 그 중 어느 조건도 구
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민과 주지약이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낭자는 비록 아름답지만 사랑스럽
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작가로서 소조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가 장무기와
일생을 함께 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늘 마
음의 부담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애정 줄거리는 별로
만족한 것이 못 된다. 영롱한 무지개빛으로 채색하지 못했기 때
문이다. 비록 현실성에 가장 접근하기는 했지만.....

장무기는 좋은 영도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친근감
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이 삼부에서 그리고자 한
것은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라 남아(男兒)와 남아간의 정의(情義)
였다. 무당칠협의 대보다 진한 우애, 장삼봉이 장취산에게, 사손
이 무기 부자에게 쏟은 애정.

한데 장취산이 자결할 때 장삼봉의 비통한 심정, 장무기가 죽었
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던 사손의 모습을 이 책에선 나무 얇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진실한 삶은 그런게 아닐
텐데.....

당시만 해도 난 참된 삶을 몰랐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 金 庸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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