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2

3학년2반 | 2022.03.09 07:18:38 댓글: 0 조회: 32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file.moyiza.kr/fiction/4353999

꽃밭속의 두 남녀
나무 위의 상보진과 나무 아래의 마춘화는 둘 다 놀람과 의아함에 사로잡혔
다. 잠시 후 마춘화가 말했다.
[상 도련님, 도와드릴까요.]
상보진은 바둥거렸지만 묶인 손발을 풀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창피하게 여인
에게 풀어 달라고 할 수도 없어 그저 얼굴만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떨어지면 큰일나요. 내가 올라가서 도와드릴께요.]
그녀는 몸을 솟구쳐 나무가지를 잡으려 했으나 너무 높아 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중간쯤 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한 때의 사람들이
북쪽에서 달려왔다. 벌써 새벽 빛이 희뿌옇게 동녘 하늘을 밝혀오고 있었다.
마춘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토록 이른 시간에 길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다니!)
눈깜짝 할 사이에 그 일행은 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모두 아홉 명의 말을 타
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 큰 아가씨가 이른 새벽에 나무 위로 올
라가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듯 말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마춘화는 했로통해서 소리를 쳤다.
[뭘 보는 거예요. 어서 갈 길이나 가세요!]
그들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았고 더구나 나뭇가지에 한 청년이 손발이
묶여 걸쳐있는 것을 보며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춘화는 나뭇가지를 다 오르기 전에 진기를 돋구어 몸을 날려 왼손으로 나뭇
가지를 잡고 상보진이 걸려있는 나뭇가지에 올랐다.
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하하하! 훌륭한 신법이군!]
마춘화는 재빨리 상보진을 묶은 옷조각을 풀고서 나직이 말했다.
[상처는 입지 않았어요?]
그녀의 부드러운 말에 위안이 되는 듯 상보진은 천천히 말했다.
[별 것 아니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잡고서 가볍게 뛰어내렸고 마춘화도 이어 뛰어내렸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웃으며 손가락질을 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마춘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을 한번 째려보았다.
그들 가운데는 늙은이도 있었고 젊은이도 있었는데 옷차림은 화려한 편이었고
하나같이 다부진 모습이었다. 그중 한 젊은 공자는 얼굴이 관옥(冠玉)같았고 훤
칠한 풍채와 준수한 얼굴을 지녔다. 또 용모와 행동이 우아했는데 서른 두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젊은 공자는 남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과피소모(瓜皮小帽)를 쓰고 있었
는데 그 모자의 한복판에 한 치 정도 되는 구슬을 끼워 넣고 있었다.
마춘화는 어릴 적부터 표국에서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연
히 진귀한 보물을 볼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그 옥구슬은 멀찌감치서도 광채가
나는 것이 한 채의 성을 살만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보물을
모자에 끼워놓고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한 태도에 호기심을
느끼며 그 공자를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 공자 역시 그녀가 아름답고 동작이 민첩한 것을 보고 마음이 동한 듯 옆에
있는 중년의 사내에게 나직이 몇 마디를 했다.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저 좀도적은 틀림없이 남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모양이
구려시.]
그러자 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뭘 훔쳤다고 생각하오? 어째서 많은 사람을 놔 두고 그의 누이가 달려와서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의 어조에는 경박함이 서려 있었고 얼굴에는 개기름이 흐르고 있었다.
상보진은 그러지 않아도 노기가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을 판이었다. 그런 말
을 듣자 몸을 날려 다가가 냅다 그 노인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 노인은 말을
타고 있었고 일 장 남짓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상보진이 몸을 날리며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노인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뒤로 물러서며 놀람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엉겹
결에 모욕을 당하자 즉시 몸을 날려 상보진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으나 도리어
상보진이 그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그 노인은 즉시 장법으로 바꾸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리하여 대로 변에서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상보진은 호비에게 매질을 당했지만 근골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옆에 있고 그렇지 않아도 울화통이 터져 죽겠는데 잘 되었다
싶어 팔괘장의 절예를 모조리 펼쳐 갈수록 매섭게 공격을 했다.
노인은 제대로 받저 못하고 어깨에 일장을 맞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야 했
다. 그가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나서려 할 때 마상의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노장(老張)은 물러서시오. 그 녀석은 약간 요상한 데가 있구만.]
그러면서 한 사람이 말 위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노인은 즉시 물러났다.
상보진과 마춘화는 새로 나타난 사람의 솜씨가 뛰어난 것을 보고 더욱 경각심
을 돋구었다. 새로 나타난 사람은 네모진 얼굴에 표정과 태도가 위맹해 보였고
체구도 우람했다. 그가 버티고 서자 상보진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그는 뒷짐을 짚고 떡 버텨서서 상보진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자네, 팔괘문의 제자인가? 사부의 성씨가 저( )씨인가, 상씨인가?]
그는 상대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매우 오만한 태도였다.
상보진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상관할 필요없소?]
그 사람은 미미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팔괘문 사람이라면 우리들이 상관할 수가 있다네.]
상보진은 위인됨이 본래 꼼꼼하고 총명했으나 이날은 잇따라 좌절을 거듭 겪
었기 때문에 성이 난 나머지 그 말을 꼼꼼히 생각해 보지 않고 벽뢰추지(劈雷墜
地)라는 일초를 펼쳐 경쾌한 신법으로 그의 무릎을 차려고 했다.
그 사람은 미미하게 웃더니 오른손을 가볍게 휘두르고 한걸음 내딛으며 대뜸
상보진의 일격을 해소시켰다. 상보진은 곧 유신팔괘장을 펼치며 이내 선천팔괘
(先天八卦)의 도식(圖式)에 따라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상대방을 가운데 두
고 공격해 들어갔다.
그 대한은 초식을 완전히 뻗쳐내지 않고 시종 상보진과 맞닥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펼치는 초식은 하나같이 상보진의 장법과 극성(剋星)이었으며 상보
진은 초식을 다 펼치기도 전에 부득이 기세를 변화시켜야 했다. 삽시간에 상보
진은 사십여 장을 후려쳤으나 일장도 그의 옷자락 조차 스치지 못하는 것이었
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대한이 뛰어난 무공을 지닌 것을 보고 모두 칭
찬과 탄복의 말을 했다.
상보진은 초조하여 더욱 신속하게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장법을 더욱 조여갔
다. 그러나 대한은 여전히 여유있는 태도로 미소를 띠우고 마치 권법을 혼자서
연마하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상보진은 상대가 초식을 끝까지 펼치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선천팔괘의 도식에 따라 움직이며 방위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보진은 팔괘문 중에 가장 정심한 것이 내팔괘공(內八卦功)이며 이것은 외팔
괘(外八卦)를 완전히 연마한 사람만이 익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단 연성한다면
그때는 정(靜)으로써 동(動)을 제압하여 선수를 써서 적을 제압하는 것인데 이
경지에 이르면 천하무적이 된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자기에게 양보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자기를
제압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황하고 두려워져 갑자
기 뒤로 물러서며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 후배가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라 뵈었습니다. 원래 본문의 선배님이 도달
하셨군요?]
그 사람은 미미하게 웃더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사부의 성씨는 저씨인가? 상씨인가?]
상보진은 모친으로부터 함부로 신분을 드러내면 원한을 갚는데 차질이 생긴다
는 당부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장법은 문호(門戶)가 활짝 열린 것으로 보아 상검명 상사형의 일파인
것같군. 형님! 형님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소?]
마지막 말은 마상에 있는 노인에게 물은 것이었다.
그 노인은 오십여 세 정도였는데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상보진에게 입을 열었
다.
[자네의 사부님은 어디 계신가? 우리들을 그곳으로 안내해 주게. 나는 자네의
왕사백(王師伯)이 되고 이 분은 나의 동생이야. 어서 사숙께 인사드리게.]
그리고는 껄껄 웃었다.
상보진은 부친의 사부가 위진하삭(威震河朔) 왕유양(王維揚)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또한 그가 북경 진원표국(鎭遠 局)의 총표국주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왕씨라고 하고 팔괘문의 고수임을 볼 때 자신의 사백
부와 사숙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꼼꼼한지라 거듭
물었다.
[두 분은 위진하삭 왕 노표국주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요?]
왕씨 형제는 서로 쳐다보면서 웃더니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우리 형제의 선친일세. 자네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 상사
제는 어디 있는가?]
상보진은 더 망설이지 않고 털썩 엎드려 몇 번 큰 절을 하며 말했다.
[선친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백부님과 사숙부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왕검영(王劍英)이라 했고 그의 동생은 왕검걸(王劍傑)이
라 했다. 그들은 모두 왕유양의 아들이었다.
왕유양은 과거 한 쌍의 팔괘장과 한 자루의 팔괘도로 강호에서 위세를 떨친
바가 있었다. 흑도에서는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면 만났지 늙은 왕가를 만나면
끝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
상검명은 그의 문하이기는 하지만 사제지간의 정은 별로 없어 사문을 떠난 이
후에는 좀처럼 안부를 전하지 않았다. 왕씨 형제 또한 관부(官府)에서 일을 보
고 있었고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초야에 묻혀 있는 동
문 사형들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따라서 산동과 북경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상검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왕검영은 즉시 정은 공자에게 나직이 몇 마디를 했고 젊은 공자는 곁눈질로
마춘화를 바라보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검영은 상보진에게
말했다.
[자네 집은 이곳에서 멀지 않겠지? 자네는 우리 형제들을 자네 부친의 영전에
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안내 해주게. 우리 사형제는 이십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때 헤어진 것이 영원한 작별이 되었구만. 쯧쯧!]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공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복공자(福公子)님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하게나. 우리들은 모두 공자
휘하에서 일을 보고 있다네.]
상보진은 그 공자가 기품이 있고 귀티가 나는 것을 보고 경사의 귀족이나 대
가집의 공자이기 때문에 왕씨 형제와 같은 호걸들을 거두어 들여 부리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즉시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했다. 복공자는 손을 내저
으며 말했다.
[일어나시오!]
그는 반례도 하지 않았다. 상보진은 속으로 은근히 성이 났다.
(되게 건방지구나. 니가 정말 황제라도 된 줄 아느냐?)
일행이 상가보에 이르게 되었을 때 보 안에서는 호비가 도망친 것을 알고 종
적을 찾고 있었다.
상보진이 안으로 들어가 전갈을 하자 상노태는 선부의 동문 사형들이 찾아왔
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마중을 나왔다.
왕검영은 상노태에게 다른 사람들을 인사시켰다. 이들 가운데 다섯 사람은 무
림의 일류 고수였다. 왕씨 형제를 제외하고 태극문(太]極門)의 진우(陳禹), 소
림파의 고반야(古般若), 천룡문(天龍門) 남종(南宗)의 은중상(殷仲翔)이 있었
다.
진우와 은중상은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지 오래되었고, 고반야는 나이가 젊은
편이었지만 안광이 형형하고 손이 고목처럼 말라 있으며 손가락이 무쇠같아 외
공에 조예가 깊은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복공자를 모시는 시종들이었고, 상보진에게 뺨을 얻어맞은
늙은이는 장씨 성을 가진 자였다. 사람들이 그를 모두 장총관(張總管)이라 부르
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복공자의 저택에서는 권세가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왕검영은 복공자가 어떤 신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복공
자라고만 칭했다.
왕검영과 왕검걸 형제는 상검명이 죽은 이유를 물었다. 상노태는 오기가 많은
여자라 호일도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병을 얻어 죽었다고만 했
다. 그녀는 한사코 아들과 함께 친히 원수를 죽일 작정이었지 결코 남의 손을
빌려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춘화는 상노태와 상보진이 동문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자기
의 처소로 돌아와 조금전에 보고 들은 것을 부친에게 이야기했다.
마행공은 호비가 바로 요동대협 호일도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놀라기는 했
지만 그가 상보진보다 무공이 뛰어나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서쟁은 그저 옆에서 묵묵히 들으며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하면서도 좀처럼 끼
어들지 않았다. 부녀가 한 동안 말을 나눈 후 마춘화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했
다. 서쟁이 그녀를 따라오며 불렀다.
[사매!]
마춘화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서쟁은 그녀의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고 마음 속에서
사랑의 불길이 일어, 물으려는 말을 억누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춘화는 손
을 뿌리치며 뾰로퉁해져 말했다.
[남들이 보겠어요. 창피하게?]
서쟁은 끝내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분연히 입을 열었다.
[흥! 창피하다고? 그렇게 창피한데 사매는 야밤에 상가 녀석하고 바깥으로 나
가 무슨 짓을 했지?]
마춘화는 그의 말투가 곱지 못한 것을 보고 오기가 생겨 노해 말했다.
[사형, 무슨 뜻이죠?]
[그 녀석과 무엇하러 나갔느냐고!]
그는 언제나 사매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른 아침에 그녀
가 상보진과 함께 밖에서 들어왔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질투심이 끓어올
랐다. 더구나 그녀가 부친에게 꾸지람을 들을까봐 상보진에게 호비를 풀어달라
고 부탁한 사실을 감추고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고 있는 그로서
는 더욱 분노했다.
마행공도 사실 그날 밤 창문으로 상노태 모자가 하는 소리를 듣고 상보진이
딸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사사로운 감정이 싹터 밤
중에 만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지만 서쟁이 옆에 있어 묻지를 않았던 것이다.
서쟁은 성격이 충동적인데다 그녀와는 정혼을 한 약혼자이기 때문에 호되게
추궁하고 있었다.
사실 마춘화는 양심에 꺼릴 것이 없었다. 이 사형은 평소에는 유순하여 모든
일을 양보해 왔는데, 어제 부친이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하자 이토록 무지막지하
게 나오는 것이니, 일단 결혼하고 나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전후 사정을 털어놓는다면 서쟁도 사태를 파악하고 더이상 언급을 하
지 않겠지만 그녀는 성질이 나서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대들었다.
[내가 따라서 가고 싶으면 나가는 거예요. 사형이 무슨 상관이예요?]
사람은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성을 잃는 법이다.
서쟁은 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목덜미까지 붉어져 큰소리로 말했다.
[전에는 내가 상관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관할 수 있다!]
마춘화는 치미는 울화에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사형이 이 모양이니 결혼하면 더욱 의처증이 심해질테니 큰일이군
요.]
서쟁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그녀와 상
보진이 깊은 밤에 밖으로 나가 밀회를 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
[사매! 도대체 나가서 무슨 짓을 한거지? 빨리 말해봐! 빨리!]
마춘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무식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나는 더 말하지 않겠다!)
이때 상보진은 어머니의 명을 받고서 마행공을 왕씨 형제 일행과 인사시키기
위해 마행공을 데리러오다가 복도에서 서쟁과 마춘화가 큰소리로 언쟁하는 것을
보고 발을 멈추었다.
서쟁은 울화를 참지 못하고 약혼녀의 따귀를 한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감히 그
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판인데 상보진이 다가서자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에
대뜸 욕을 했다.
[너, 이 개새끼, 패 죽이겠다!]
그리고는 달려들어 한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상보진은 주먹을 피하고 아연해
서 물었다.
[어, 왜 이러는 거요?]
서쟁이 다시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자 상보진은 피하지 못하고 가슴팍을 얻어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복도에서 싸움질을 하게 되었다.
마춘화는 분통이 터져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리
고 방으로 들어가 한바탕 울었다. 시녀가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
고 울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라 발닿
는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화원에 이르렀다. 그녀는 화원의 돌 위에 앉아 자기
의 앞날을 생각했다.
(설마하니 내 한평생을 저 무지막지한 사형에게 의탁해야 하는 것일까? 아버
님이 옆에 있는데도 저토록 사납게 나오니 이후에는 나를 어떻게 대할런지 걱정
이 태산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퉁소 소리가 고요하게 풀밭에서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그 퉁소 소리는 그녀를 위로라도 하는듯 은은
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퉁소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여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들으면 들을수록 황홀하여 자신도 모르게 바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바로 해당화 나무 아래에서 남색 장삼을 걸친 남자가 옥소(玉簫)를 불고 있었
다. 그 사람의 손가락은 옥처럼 희어 피리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남삼의 젊은이는 바로 복공자였다.
복공자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여 그녀에게 다가오라는 시늉을 하
고는 여전히 퉁소를 불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태도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며 한
가닥 끄는 힘이 있어 항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춘화는 얼굴을 붉히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 피리소리는 끊일듯 말듯 이어지
며 정이 가득 담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마춘화는 손을 뻗
쳐 옆에 있는 붉은 꽃 한송이를 꺽어 수줍은듯 향기를 맡았다.
퉁소 소리와 꽃향기, 석양의 황혼과 눈 앞에 서 있는 온유하고 고귀한 자태의
젊은이!
마춘화는 문득 서쟁을 떠올렸다. 그는 거칠고 무미건조했으며 이 귀공자와 견
주어 보면 한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고 한 사람은 진흙탕 속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눈길로 귀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가 묻고 싶
지도 않았고, 그가 자기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
만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와 한번 가까이 해봤으면 좋겠
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 귀공자는 결코 그녀를 유혹려는 뜻이 없는 듯 퉁소를 불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소녀다운 환상 때문에 봄날의 황혼녘에 그녀 스스로 이러한 열정을 내쏟
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복공자는 그녀의 미모를 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상가보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며, 휘하 무사의 사형제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들 그의 발걸음을 멈
추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화원에서 혼자 넋이 빠져 있다는 보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꽃밭에서 통소를 불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복공자의 퉁소 솜씨는 경사에서도 일절(一絶)이라 할 수 있었다. 설사
왕공이나 종친 또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의 한 곡조를 듣기는 힘든 노릇이었
다.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연모의 정을 드러냈고 눈빛은 열렬한 정을 토로하고 있
어 수많은 달콤한 말보다, 몇만 번의 맹세보다도 더 호소력이 있었다.
공자는 퉁소를 내리고 손을 뻗쳐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마춘화는 부
끄러운 듯 피했지만 두번째는 미미하게 한번 몸을 틀었을 뿐이고, 세번째는 이
미 그의 몸에서 풍겨나는 사내의 체취에 도취되고 말았다.
석양은 붉은 꽃잎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타는 듯한 그림자를 꽃밭에 드리우
고....... 꽃그림자 속에는 한 쌍의 젊은 남녀의 그림자가 서로 얽혀 한몸이 되
고 있었다. 태양은 서산에서 스러지며 꽃밭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 젊은 남녀의 열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리라!
마춘화는 사내 냄새에 흠뻑 취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더군다나
뒷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화원에 들어온다해도 아랑곳하지 않
았으리라.
그러나 복공자는 화원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계획이 서 있었다. 그는 태극문
의 진우를 보내 마행공을 벗하라고 했고, 왕씨 형제를 보내 상씨 모자와 이야기
하도록 했으며, 소림파의 고반야를 보내 서쟁을 붙잡아 두라고 했고, 천룡문의
은중상으로 하여금 화원 입구를 지키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백승신권 마행공의 딸 마춘화는 부친이 그녀에게 한평생의 배필을 정해준 이
튿날 다른 사람의 정부(情夫)가 된 것이다.
처음 떨친 신위(神威)
이날밤 상가보에서는 크게 연회를 베풀어 복공자를 접대했다. 참석한 사람들
이 모두 무림의 인사들이기 때문에 남녀구별도 없었고 따라서 상노태와 마춘화
도 뭇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마행공은 과거 왕씨 형제의 부친인 왕유양과 알고 지내는 처지였다. 그러나
왕유양이 세상을 등진 후 왕씨 형제가 관부에 투신했기 때문에 진원표국은 오래
전에 문을 닫아 동업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왕씨 형제는 마행공의 명성
을 알고 그에게 몇 푼의 경의를 표하였다.
마춘화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춘정(春情)이 가득한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부끄러워서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그녀의 머리 속은 복공자와의 꿀처럼 달콤했던 정사 장면으로 가득차 황홀함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녀는 서쟁의 눈길도 피하지 않았으며 상보진의 눈길도 피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그녀와 눈빛이 마주쳤어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두 사람을 위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열렬했던 사랑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있었다.
복공자는 종종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를 마주볼 수가 없
었다. 서로의 눈동자가 얽혀들게 된다면 다시는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가정(家丁)이 한 명 총총히 상노태 곁에 다가와서 귓속말
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 평가라는 외팔이 도적이 어떤 자의 도움을 받아 도망을 쳤습니다.]
상노태는 놀랐으나 곧 여유있는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어 뭇사람들에게 건배
하며 이 사실을 손님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별안간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짝의 대청문이 축에서 빠져 허공으로
떠올라 꽈당! 꽈당! 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입구에는 깡마르고 조그마한 소년
이 허리를 짚고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왕씨 형제는 복공자를 보호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연회석상에서도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몇 사람이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공자를 사방에
서 호위하였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이 겨우 깡마른 소년 한 사람 뿐이자 놀람과 안도의 표정
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대청문을 날려보낸 사람이 바로 이 소년이란 말인가?)
이 어린 소년은 바로 호비였다. 그는 외팔이 평사를 빼낸 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상보진에게 채찍질 당한 것은 보복한 셈이었으나, 상노태가 그를 암산
한 일은 아직 원한을 갚지 못했다고 여기고 보복하기 위하여 대청으로 되돌아
온 것이었다.
호비는 큰소리로 외쳤다.
[상노태, 다시 나를 잡을 수 있겠소?]
그의 태도와 표정은 호탕했지만 어린애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해 마치 그녀와
장난을 치려는 것 같았다.
상노태는 원수의 아들을 대하자 두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녀는 나직이 아들에게 당부했다.
[뒷길을 차단하여 저 애숭이 도적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라!]
그녀는 다시 등뒤에 있는 가정에게 말했다.
[빨리 나의 칼을 가져오너라!]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매서운 어조로 물었다.
[누가 너를 놓아주었느냐? 이 분 마(馬) 노권사님이시냐?]
그녀는 결코 이 소년이 스스로 쇠사슬을 풀고 도망쳤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
았다. 틀림없이 보 안에 첩자가 있어 그를 구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상노태는 서쟁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냐?]
호비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노태는 마춘화를 손가락질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이 아가씨겠군!]
(저 아가씨는 본래 나를 구하려고 했지만 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은혜와 온정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큰소리로 말했다.
[맞았소. 그 아가씨는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외다.]
그 한마디는 마춘화에게 들려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애다운 마음으로 단
지 고맙다는 뜻을 표하려고 생각했지, 그말로 인해 그녀가 어떤 화를 당하게 될
것인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상노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춘화를 한번 바라보았다. 이때 가정이 칼을 가
져왔다.
상노태는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손으로 호비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네 아버지 호일도는 어째서 오지 않느냐?]
왕씨 형제 등은 눈 앞의 이 소년이 호일도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모두 표
정이 변했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님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소이다. 당신이 원한을 갚겠다면 나
를 찾아오시오.]
상노태는 순간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며 호통을 쳤다.
[그 말이 사실이냐?]
호비는 냉랭히 말했다.
[우리 아버님이 만약 살아 계신다면 당신이 감히 나에게 채찍질을 할 수 있었
겠소?]
상노태는 자금팔괘도를 높이 쳐들고 갑자기 대성통곡올 하며 부르짖었다.
[호일도야, 호일도야! 너는 너무 일찍 죽었구나! 너는 이토록 일찍 죽지 말았
어야 했다!]
호비는 아연해져 생각했다.
(아니, 이 할망구가 어째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우리 아버님을 안타깝게 생
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상노태는 울부짖더니 갑자기 눈물을 거두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훔친 후 벼
락같이 자금팔괘도를 들고 질풍같이 몸을 빙글 돌리면서 휙! 하니 호비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이 한 수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복공자, 마춘화, 서쟁 등
은 모두 놀라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상노태의 이 일초는 회신벽산도(回身劈山刀)였다. 바로 팔괘도 수법 중에서
가장 고명한 초식이었다. 또한 의표를 찌르는 것이기 때문에 눈앞의 소년은 말
할 것도 없고 강호의 일류 고수라 하더라도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호비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칼날을 피했으며 곧장 손을 뻗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가 즉시 반격을 하자 군호들은 모두 놀라 의
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노태는 칼이 빗나가자 다시 두번째의 칼을 쪼개
내었다.
상노태는 늙은티가 완연했지만 손을 쓸 때의 칼부림은 매섭기 이를데 없었다.
그녀는 원수가 이미 죽었고 살아 생전에는 원한을 갚을 길이 없어지자 이 어린
애를 죽여서라도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부군을 따라 자결하지 않았던 이유는 강렬한
복수의 일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살아갈 의미도 없었고 삶에 대한 미련
도 없어졌다. 따라서 그녀가 펼치는 초식은 모두 적과 동귀어진을 노리는 살수
였다.
호비는 처음으로 강적을 만나게 되었으나 오히려 용기백배하여 전혀 물러서거
나 양보를 하려 하지 않았다. 적이 매섭게 내려찍으며 죽이려 들었지만 그는 대
금나수인 용형조(龍形爪)를 펼치며 역시 신속하게 반격하고 후려쳐 갔다.
촛불 아래 백발노파와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 싸움
이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씨 형제는 상노태가 곧바로 맹렬히 살수를 펼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못마땅
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어린애를 상대로 그와같은 무공을 쓰는데 일류고수를 만
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생각했으나 보면 볼수록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상노태의 팔괘도는 매섭고 면밀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빈틈이 없었다. 비록 노
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는 아니지만 그녀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초식에, 그녀
의 성깔까지 보태니 아무리 강한 자라 하더라도 대항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러나 십여 세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그녀를 맨손으로 상대하여 점차 우세를 차
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몇 합을 겨루게 되자 상노태는 어느덧 호비의 장풍에 뒤덮이게 되었고,
갑자기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따귀를 한대씩 얻어맞게 되었다.
왕검걸은 입을 열었다.
[상씨 집안의 형수님! 물러서시오! 내가 그 녀석을 상대하겠소.]
그는 큰 칼을 들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그 순간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덧 상노태는 한쪽으로 나뒹굴었다.
왕검걸은 눈 앞에 갑자기 푸른 빛이 번뜩이며 한 자루의 칼이 맞은 편에서 쪼
개오자 급히 칼을 들어 막았다.
그런데 그 칼은 내려찍는 듯 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옆으로 베어왔다.
비스듬히 막으려는 순간 칼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번개처럼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상노태에게 따귀를 두 대 갈기자 충분히 화풀이를 한 셈이라 느꼈다.
그는 즉시 금나수법을 써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발을 들어 그녀를 곤두박질치게
만들며, 자금팔괘도를 빼앗아 왕검걸에게 잇따라 칼을 휘둘러 그의 손발을 어지
럽게 만든 것이었다.
왕검걸은 팔괘문의 일류고수로서 팔괘도에 대한 조예는 과거 상검명에 못지
않았다. 다만 상대를 얕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적에게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삼 초가 지나자 왕검걸은 눈앞의 소년이 강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
다. 그는 더이상 상대방을 얕보지 못하고 침착하게 응수하면서 소년이 펼치는
도법이 어느 문파의 도법인지 알아보려 했다.
흔들거리는 촛불에 따라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푸른 칼빛은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군호들은 긴장하며 무기를 손에 꼭 쥐고 두 사람이 맞서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공자는 비쩍 마르고 남루한 소년이 자기 부중(府中)의 일류고수와 막상막하
의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의아해 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미있다는 생각
이 들어 뒷짐을 진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담담한 지분 향기가
코에 감미롭게 스며들어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마춘화가 어느덧 그 옆에 와 있
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은 대청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결투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그 두
사람을 유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렇게 꺼리낌없이 다정
하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역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복공자는 어느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자였고, 마춘화 역시 나이어린 처녀
였지만 첫사랑의 감흥이 채 가시지 않았으며 춘정이 한창 무르익을 나이라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왕검걸이 잇따라 칼을 휘둘렀으나 호비는 교묘한 수법으로 모두 피해버렸다.
왕검걸은 애써 그의 문파를 가늠해 보려했으나 도저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상대방이 호일도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있고, 또한 호일도가 대단한
고수임을 부친으로 부터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호씨 집안의 도법이
도대체 일반적인 수법과 어떻게 다른지 알 수는 없었다.
즉, 강맹한 것인지 부드러운 것인지, 또는 내가(內家)에 속하는지 외가(外家)
에 속하는 것인지 도무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더구나 눈앞의 소년의 초식은 태
산과 같이 무겁게 압박해오다가 갑자기 물흐르듯 유연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도
법과는 전혀 다른 바가 있었다.
다시 몇 차례를 겨루게 되자 왕검걸은 초조해졌다. 그는 복공자의 부중(府中)
에서 대단한 신분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소년과 수십 초 이상을 싸웠
고 더이상 질질 끌게 된다면 설사 그를 죽인다 하더라도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법을 더욱 바짝 조이고 걸음을 크게 떼어 놓으며 호비의 주위
를 맴돌 듯 빙글빙글 맴돌았다.
왕씨 팔괘문의 팔괘유신이라는 무공은 무림의 일절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유양은 이 무공으로 화수판관(火手判官)의 장소중(張召重)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었다.
왕검걸은 성큼성큼 뛰며 주위를 맴돌고 전후좌우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면서
헛점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뿐만 아니라 팔괘의 방위를 따라 움직이는 까닭
에 뒤에 있다가 홀연 앞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뒤에 있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도
는가 하면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등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적은 상
대를 따라 돌며 방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이 어릿어릿
해지는 것이었다.
만약에 적이 그를 따라 돌지 않는다면 즉시 호비의 등뒤를 공격하게 되는 것
이었다. 그러니 호비가 어찌 말려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팔괘유신이란 정말 오
묘하고도 무서운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왕검걸은 어릴 때부터 부친의 지도 감독 하에 매일 새벽에 세번씩 이 무공을
연습했다. 그는 매번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오백 열두 번의 원을 그렸고, 잠
들기 전에 다시 세차례 연습하곤 했다. 큰 원이면 큰 원에 따라, 가운데 원이면
가운데 원을 따라, 작은 원이면 작은 원을 따라서, 모두 하루에 삼천여번을 돌
았다. 이십 년간 연마하자 어느덧 자연스럽게 발걸음도 변했다. 따라서 그저 손
으로 뻗쳐내는 초식만 신경쓰면 되는 형편이었다.
본래 원을 따라 돌며 공격을 할 때는 장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
이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왕검걸은 살기가 일어 칼을 칼로 내리치는 초식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되자 신형이 표홀하여 삽시간에 호비는 번득이는 칼빛속에 갇
힌듯 했다.
호비는 적의 공세가 강맹해지자 재빨리 경신법을 펼쳐 이리저리 피했다. 그는
몸놀림이 날렵하고 경신법 또한 절묘하여 칼바람 속을 종횡으로 오락가락하면서
상대가 펼쳐내는 강( ), 삭(削), 참(斬), 벽(劈)의 수법을 피했다.
마행공은 그와같은 광경을 보고는 무릎을 치며 개탄을 했다.
(정말 부끄럽구나! 어젯 밤에 본 비쩍 마르고 조그만 사람이 바로 저 녀석이
었구나. 만약에 이 소년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어찌 상노태의 악독한 심
보를 알 수 있었겠는가? 상가보에 호랑이가 엎드리고 용이 숨겨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비쩍 마르고 조그만 소년이 있었구나. 내가 한평생 강호를 떠돌아다녔
다고는 하지만 늘그막에 그만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그는 갑자기 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와 같은 고수들이 무공을 겨루는 것을 평생동안 몇 번이나 볼 수 있겠는
가? 젊은 나이라 좋고 나쁜 것을 모르고 그냥 빠져나가 정담을 나누고 있구나.
부부가 되면 얼마든지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지 않겠는가?)
그의 딸이 정담을 나누러 나간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의 상대가 결코 그녀의
약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창! 하는 커다란 음량이 울려퍼지면서 사방으로 불꽃이 튀는 가운데
호비와 왕검걸의 두 자루 칼이 서로 부딪혔다.
왕검걸은 돌면 돌수록 빨라졌고 내려치면 내려칠수록 더욱 날카로워졌다.
호비는 나이가 어리고 견식이 모자라 그의 도법의 내력을 알지 했다. 결국 피
할 여유가 없어 부득이 칼을 들어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왕검걸은 속으로 기뻐
했다.
(이 녀석의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힘은 약할 것이니 몇번 더 칼질을 한
다면 무기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왕검걸은 쉬지 않고 맹렬하게 칼질을 했고 호비는 부득이 맞받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대여섯 번의 칼을 막고나자 호비는 손과 팔이 점차 시큰거리며 마비되어 왔
다. 상검명의 자금도는 크고 무거운데 호비는 근력이 약해 휘두르기가 본래 수
월치 않았다. 원래 손에 맞지 않는 무기였는데 무기가 서로 세차게 부딪히자 더
욱 힘겨워졌다.
왕검걸의 체구는 우람하여 호비의 키는 그의 목에도 조차 미치지 못했다. 자
연히 한사람은 높은 곳에서 아랫쪽으로 칼을 휘둘렀고 한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막아야 했으니 강약의 차이는 더욱 현격해졌다.
호비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상대방의 칼
을 밀어내며 싸움의 테두리에서 빠져나가며 부르짖었다.
[잠깐!]
왕검걸은 본래 살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와 아무런 원한도 없고 또 그가 어
린 나이에도 공격을 받아내는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 그의 재주를 가상하게 여기
고 말했다.
[좋다. 네가 졌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졌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저 덩치가 크기 때문에 이득을 보고 있는 셈
인데, 그게 어찌 재간이라 할 수 있겠소. 잠시 기다려 주시오.]
그는 기다란 걸상을 대청 한복판에 옮겨 놓고 몸을 날려 걸상 위로 뛰어오르
며 부르짖었다.
[우리 다시 한번 겨뤄봅시다!]
왕검걸은 한편으로 성도 났지만 어이가 없어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려는 거냐?]
호비는 설명하듯 말했다.
[우리 분명히 밝혀둡시다. 당신 만약 이 걸상을 걷어차 쓰러뜨린다면 당신이
지는 것으로 것으로 하겠소이다.]
왕검걸은 침을 탁 뱉었다.
[칙! 세상에 이렇게 겨루는 법이 어디 있느냐?]
호비는 웃었다.
[나는 아직 다 자라지 못했으니 당신보다 덩치가 작소. 공정하게 서로 겨루는
것이지요. 싫다면 오년 후 내가 다 크고 나서 다시 결판내도록 합시다.]
호비는 외팔이 평사로부터 부친 호일도의 위풍이 당당했다는 소리를 자주 들
어왔다. 따라서 부친이 남긴 책에 있는 무공만 익히면 그도 부친처럼 천하무적
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초로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상노태에게 맥문을 움켜잡혀 착실하게 한
바탕 매질을 당했지만 그것은 자기가 경계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고 위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왕검걸과 겨루면서 그는 자기가 도법은 뛰어나지만 공력은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왕검걸의 체면을 세워주고 기회를
봐서 이곳에서 도망쳐 나가려고 했다.
왕검걸은 어린 꼬마를 데리고 오랫동안 겨루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원숭이같은 새끼야! 그 걸상에 올라섰다고 이 나으리가 너를 쳐 죽이지
못할줄 아느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을 휘둘러 호비의 허리춤을 베어왔다.
호비는 칼을 비껴 들고 막았다. 호비는 이미 상대방보다 키가 커진 셈이라 기
다란 걸상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칼을 휘둘러 싸웠다.
걸상의 길이는 다섯 자 정도였는데 왕검걸이 걸상 주위를 빙글빙글 공격한다
면 이십년간 연마해온 원과는 완전히 다른 커다란 원을 돌게되어 보법이 어지러
워질 형편이었다.
숙련된 무공을 일시에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즉시 도법
에 장법을 곁들여 맹렬하게 상대방을 몰아붙여 상대방이 걸상에서 내려오도록
만들려고 했다.
호비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더이상 상대방의 공격을 맞받으려고 하지 않
고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왕검걸이 비록 전문적으로 팔괘문의 무공만을 연마했다고 하
지만 그 팔괘문의 무공은 매우 복잡다단하여 도법만 하더라고
대가(大架), 소가(小架), 내가(內架), 외가(外架) 등의 여러가지 항목에 걸쳐
변화가 무궁했다.
지금 그는 도법을 일변시켜 왼쪽으로 휘두르고 오른쪽으로 베는 등 적의 하반
신만 공격했다. 호비는 몸을 솟구쳐서 피하기만 했다.
잠시 후 호비가 몸을 솟구쳐 피하는 순간 몸을 낮게 구부리며 걸상에 스칠 듯
쉴새 없이 좌우로 칼을 휘둘렀다. 호비가 만약에 걸상 위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발을 짤릴 형편이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걸상에서 위로
내려설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호비는 지모가 뛰어난 소년이었다.
자기의 형세가 난처해진 것을 알고 갑자기 발끝으로 기다란 걸상의 왼쪽 가장
자리를 힘껏 밟으며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 기다란 걸상도 별안간 옆으로 세워
졌다.
이 한 수는 상대방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걸상의 오
른쪽 모서리가 정확하게 왕검걸의 아랫턱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충격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호비는 어느덧 걸상의 꼭대기에 서서 아래로 칼을 휘둘렀다.
왕검걸은 '이 녀석 너는 이제 끝장이다'하며 몸을 구부리고 쉴새없이 칼을 좌
우로 휘두르다가 냅다 걸상에 턱을 맞은 것은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왕검걸은 크게 노해서 칼을 몇 번 휘둘렀으나 호비가 높다란 곳에 있어 열세
에 몰리게 되자 걸상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돌보지 않고 왼발을 들어
걸상을 걷어차 뒤집히도록 만들었다. 상보벽산(上步劈山)이라는 초식을 펼쳐 호
비의 가슴팍을 짓이기려 들었다.
호비는 공중에서 칼을 옆으로 막으며 반 장 정도 몸을 솟구쳐 물러났다. 순간
왼손으로 걸상을 쳐들고 방패로 삼으며 오른손의 자금도로 한칼 한칼 착실하게
공격하는 것이었다.
왕검영은 동생이 오랫동안 싸우고도 이기지 못하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진우, 은중상, 고반야, 마행공등, 강호의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호비가 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왕검걸이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때 호비는 왼손에는 걸상을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무
기의 덕을 크게 보고 있었다. 걸상은 홍목(紅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척
단단하여 왕검걸이 몇 번 칼질을 했으나 자를 수가 없었다. 호비는 걸상 뒤에
숨어서 오히려 공격을 펼쳤다.
왕검걸은 욕을 했다.
[이 원숭이같은 새끼야! 노부가 네 녀석에게 무서움을 맛보여 주겠다!]
별안간 맹렬히 상왜문(上歪門)이라는 일초를 전개해 비스듬히 칼을 내려찍었
다. 하지만 너무 세게 찔렀기 때문에 칼날이 걸상에 박혀 뽑히지 않았다.
그가 다시 힘을 주어 뒤로 뽑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자색 광채가 번쩍하더니
상대방의 칼끝이 어느새 아랫배를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초는 마치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가듯 재빠르기 이를 데 없어 왕검걸은 깜짝 놀라 칼올 놓았다.
그는 다 이기고 있는 싸움에서 무기를 빼앗겨 화가 불끈 치밀었다. 그는 즉시
맨손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 팔괘도의 고수는 놀랍게도 한쌍의 맨손으로 체면을 세우려고 했다. 이때
그는 찍고, 치고, 찌르고, 낚아채는가 하면 쪼개고, 후려치고, 누르고, 부딪치
는 등, 두 손을 호비가 휘두르는 칼틈 사이로 디밀며 쉴새없이 공격을 했다. 그
위세는 칼에 못지 않았다.
호비는 힘이 약한 데다가 한손에는 무거운 걸상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
게 왕검걸의 날렵한 맨손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눈깜짝할 사이에 위험한 초식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어
깨쭉지를 왕검걸의 일 장에 얻어맞았다. 호비는 하마터면 쓰러질뻔 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아! 하는 소리를 터뜨렸다.
호비는 고통을 참으며 걸상 위에 꽂혀있는 칼자루를 쥐고 오른발로 걸상을 맹
렬히 걷어찼다. 걸상은 칼에서 떨어져 왕검걸에게 부딪쳐 갔다.
호비가 얼렁뚱땅 위기를 넘기려는 것을 본 왕검걸은 두 손을 질풍같이 들어
걸상을 후려쳤다. 이 걸상은 아미 몇 번이나 칼질을 당한 터라 우지끈! 소리과
함께 대뜸 두 토막이 났다. 순간 호비는 쌍칼을 쥐고 땅을 쓸면서 노도처럼 공
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왕검걸은 맨손으로 쌍칼을 상대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낚아채면서 필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찍어왔다. 호비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왼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왕검걸에게 빼앗겼다.
왕검걸은 뺏은 칼을 내팽개치고 여전히 맨손으로 상대했다. 그는 장법에 몰두
한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 일단 장법을 펼쳐내자 정말 매섭기 이를 데 없었다.
상보진은 옆에서 광경을 지켜보면서 의기소침 하면서도 한편으론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의기소침한 이유는 어릴 적부터 배워 어느덧 도법의 오묘한 이치
를 깨달았다고 자임했는데, 왕검걸의 무공을 보니 어느 세월에 그러한 공력을
지니게 될 지 아득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했게 생각된 것은 본문의
무공이 그토록 신묘하니 자기가 끊임없이 수련한다면 전도가 양양하리라는 생각
에서였다. 바로 이때 갑자기 왕검걸이 폭갈을 터뜨렸다.
[가거라!]
순간 호비는 자금도를 내던지며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왕검걸은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도 뒤엎을 듯한 기세로 공격을 해왔다.
호비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다급한 김에 꾀가 생겨 갑자기 그를 손가락질하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왕검걸은 뜻밖의 웃음소리에 손을 거둔 채 장력을 두며 욕지거리를 했다.
[이 녀석! 왜 웃는 거냐?]
[나를 도울 사람이 오고 있으니, 이제 당신들은 모두 합심협력하여 이 꼬마를
빨리 제압해야 할 것이오.]
왕검걸은 내심 생각을 했다.
(나는 강호에서 명성이 있는 인물인데 이와 같은 애숭이를 데리고 사생결단을
내려고 하다니, 과연 내가 옳은 것일까?)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나를 도우려고 오는 사람을 맞으러 가야겠소이다. 비겁하게 피하
지 말고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그는 왕검걸이 망설이는 틈을 타서 대청 문쪽으로 걸어가 냅다 뺑소니를 치려
고 했다.
상노태는 어느새 자금팔괘도를 집어들고 몸을 날려 가로막고 호통을 내질렀
다.
[이 후레자식아! 어딜 도망치려는 것이냐?]
그러나 그녀는 이 소년의 무공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가까이 달려들지는 못했다.
바로 이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조용한 밤이라 말발굽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본래 빠른 말이 질풍같이 달리
게 된다면 말발굽 소리가 이어져 들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발굽 소리는 세찬 소나기 처럼 달그락 닥닥, 달그락 닥닥, 하는 것이 두
필의 말이 달려오는 소리보다 더 긴밀하게 이어져 들려왔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태반이 강호에서 명성이 쟁쟁한 인물이라 칼이나 말에
대해서는 귀신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발굽 소리를 듣자 모두 의아한 빛을
띠게 되었다.
삽시간에 그 말은 상가보 앞에 이르렀다.
상가보의 가정들의 호통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대문이 열리는 소리, 가정들
의 비명 소리, 무기가 쨍그랑!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퍼졌다. 사람
들이 아연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가운데 대청 문 앞에 홀연 한 사람의 그림
자가 드리워졌다.
말발굽 소리가 삼 사 마장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는데 눈깜짝 할 사이
에 이 사람은 대청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신법이었
고 천하에 보기드문 속도였다.
군호들은 안색이 변하며 일제히 나타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임기응변의 귀재
그 사람은 나이가 오십여 세 정도 되어 보였고 몸에는 펑퍼짐한 무명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콧수염을 짧게 기르고, 머리카락은 반백이었으며 중키에 약간
뚱뚱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는 듯한 얼굴은 무척 자상해 보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십이삼 세 되는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시골에 땅마지기나 제법 가지고 있는 부자처럼 보였고, 어
떻게 보면 조그만 고을의 가게 주인처럼 보여, 언제라도 그의 입에서 '돈 많이
버십시오!'라는 말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약간 속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
표정과 태도는 매우 친근감을 주는 것이 상가보로 들어 올 때의 사납고도 매서
운 기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호비는 협조자가 온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해 본 소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람이 보 안으로 달려들어 온 것이었다. 그는 뭇 사람들이 이 뚱뚱한 그 사
람을 주시하는 틈을 타서 몰래 대청 문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를 잠시 잊을 수 있어도 상노태만은 그를 잊을 수 없었
다. 그녀는 뚱뚱한 사람이 들어올 때,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 시종 호비에게
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자 즉시 날카롭게 외치며 그의 등을 후려치려 했
다. 이 일 장은 바로 팔괘장의 절초 가운데 하나인 배심정(背心釘)이라는 무공
으로 적중되기만 하면 즉시 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며 죽게 되는 것이었다.
그 뚱뚱한 사람은 그녀가 이토록 악랄한 수법을 어린 소년에게 펼치는 것을
보자 어! 하더니 손을 뻗쳐 구하려 했다. 그런데 호비는 몸을 비틀며 왼손을 갈
고리처럼 해서 그녀의 손을 옆으로 떨쳐 상노태의 공격을 해소시키는 것이 아닌
가?
상노태는 휘청하더니 세 걸음을 뒤뚱거리며 옆으로 나가며 겨우 몸을 가눌 수
가 있었다.
그 뚱뚱한 사람은 호비가 비쩍 마르고 조그만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무
공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의아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호비를 몇 번이
나 바라보았다.
왕검영은 이 뚱뚱한 사람이 약간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누구인지 금방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포긴을 하고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 늦은 시각에 이곳에 왕림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십니까?]
뚱뚱한 사람은 포권을 하여 답례를 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이 형제는 성이 조씨이외다.]
왕검영은 별안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바로 홍화회(紅花會)의 조삼야(趙三爺)께서 왕림하셨구려. 소제가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군호들은 이 말을 듣고 눈 앞의 사람이 홍화회의 대두령 천수여래(千手如來)
조반산(趙半山)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같이 안색이 변했다.
육 년전 홍화회의 영웅호걸들이 옹화궁(雍和宮)에 불을 질러 자금성(紫禁城)
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무림을 크게 진동시켰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홍화회는 더이상 일을 벌이지 않았다. 떠도는 소문에 의
하면 홍화회의 군웅들은 모두 회강(回疆)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조반산이 불쑥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왕검영은 청년이었을 때 표국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미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조반산은 이미 옛날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차럼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왕검영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삼야께서는 홀로 산동으로 오신겁니까? 아니면 홍화회의 영웅호걸들이 일
제히 산을 내려오신 것입니까?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종종 홍화회의 여러 영웅
들을 들먹이곤 하셨기 때문에 여간 뵙고 싶지 않았소이다.]
조반산은 원래 성격이 인자하고 온화한 편이라 잔꾀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누구와도 잘 어울렸으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제는 사사로운 일이 있어 혼자 산동까지 오게 되었구려. 실례지만 영존께
서는......?]
왕검영은 그가 혼자 뿐이라는 소리를 하자 즉시 안심이 되었다.
(만약에 홍화회 형제들이 모조리 달려와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면 정말 귀찮
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을 했다.
[선친은 진원표국의.......]
조반산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친'이라는 말을 듣자 물었다.
[아, 원래 왕 노표국주의 현랑(賢郞)이시구려. 아니, 노표국주께서 이미 세상
을 등지셨소?]
그의 표정은 침울한 것이 정말로 애석해 하는 것 같았다.
왕검영은 입을 열고 담담히 대답을 했다.
[선친께서 세상을 등진 지 이미 오래 되었지요. 이 사람은 불초의 동생인 검
걸이외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왕검걸에게 말했다.
[조삼야께서는 태극권(太極拳), 태극검(太極劍), 그리고 암기수법에 있어 삼
절(三絶)이라 일컬어지는 천하무쌍의 고수이신데 여기서 만나뵈니 여간 반갑지
않소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조반산을 소개 하려고 했는데 왕검걸이 재빨리 그 말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이 분 진형 역시 태극문의 제자이십니다. 두 분은 알고 지내시는 사이입니
까?]
그러면서 그는 태극수(太極手) 진우를 가리켰다.
조반산은 싸늘히 코웃음쳤고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이 대뜸 한가닥 불쾌한 기
미를 띠우더니 진우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훔어보는 것이었다.
진우는 그의 안색이 변하는 순간 이미 꺼림찍하게 느꼈는데 그가 아래 위로
훑어보자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조반산이 데리고 온 여자애가 손가락으로 진우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조숙부님, 저 사람이예요. 바로 저 사람이예요!]
그 여자애의 음성은 날카로웠으며 분노의 빛이 가득했다.
진우는 거무튀튀하고 나이어린 계집애의 얼굴에 통한의 빛이 가득한 것을 보
고 의아해 하더니 고개를 돌려 왕검걸에게 말했다.
[조삼야께서는 남파(南派) 온주(溫州)의 태극문이고 형제는 직예(直隸) 광평
부(廣平府)의 태극문이지요. 우리는 같은 태극파이지만 같은 종(宗)은 아니외
다. 조삼야는 우리 선배이기 때문에 이 형제는 언제나 우러러 보고 흠모해 왔지
요.]
그러면서 가까이 와서 조반산에게 포권의 예를 하는데 표정이 무척 공손했다.
하지만 조반산은 뒷짐을 진 채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왕검영에게 말했다.
[왕형, 형제가 오늘 이렇게 느닷없이 뛰어든 것을 여러분들께 먼저 사과 드리
오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둥그렇게 돌며 사방에 읍을 해보였다.
뭇 사람들은 재빨리 답례를 하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조삼야께서는 너무 겸손 하시군요.]
이렇게 되자 진우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 굽혔던 상체를 펴지도 못하고 어정쩡
하게 마주 잡은 손도 내려 놓지 못한 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너에게 죄를 졌다는 말이냐? 네가 명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설마하
니 내가 너를 두려워 할 줄 아느냐?)
이때 왕검영이 호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소형제는 우리 사문의 제수씨와 원한관계가 있는데 그 원한은 윗대에서
맺어진 것이지요. 이제 나의 사제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었고 또 조삼야
의 금쪽같은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번 일은 덮어두기로 하지요?]
그리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원래 왕검영은 상검명과 옛날부터 별로 화목한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애초부
터 그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는 조반산의 호감을 사고 싶어서 그
와 같이 말한 것이었다.
조반산은 어리둥절해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상노태가 큰 소리로 부
르짖었다.
[조반산(趙半山)든 조일산(趙一山)이든 간에 상가보에 온 이상 그 누구도 이
곳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거예요!]
조반산은 여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왕검영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왕형,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인지 소제는 잘 알 수가 없군요.]
왕검영은 담담히 말했다.
[나의 제수씨는 여인이니 조삼야께서는 그녀의 좁은 소견에 아랑곳할 필요 없
소이다. 자, 자! 꽃을 본 김에 꺽어 부처님에게 바친다고, 소제는 이미 차려놓
은 술자리를 빌어 조삼야에게 한 잔의 술로 경의를 표하고 싶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술을 따르려고 했다.
호비는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조반산이 자기를 도우러왔다는 거짓말이
들통이 날 것같아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삼야, 이 밥통들이 허풍을 떠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그들은 홍화회 사람들
이 모두 허수아비라고 혈뜯었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팔괘장 무공이 천하
무적이며, 그들 문중의 영웅은 단 한자루의 팔괘도로 홍화회의 모든 고수들을
물리쳤다고 자랑하지 않겠어요? 소인이 차마 그 말을 듣고 넘길 수 없어 반박을
했더니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어린 나에게 손을 쓰는 것이 아니겠어
요! 조삼야! 이것을 어떻게 참아요? 이 일에 대해서 그대가 평을 해주어야겠군
요?]
조반산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과거 왕유양이 홍
화회와 대적한 일이 분명히 있었고, 홍화회에서는 무력에 의지하여 이긴 것이
아니고 계책을 써서 그로 하여금 패배를 시인하도록 만든 적이 있었다. 따라서
왕검영이 자기의 부친이 어떻게 영웅호걸답게 행동했는가를 칭찬했을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지상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거라고 이해하고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 노표국주의 무공이 고강해서 우리 뭇 형제들은 그 당시 마음속으로 탄복
을 했었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우를 쏘아보더니 말했다.
[진사부(陳師傅), 잠깐 바깥으로 나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진우는 속으로 섬칫했으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불초는 조삼야와 초면인데 어떤 분부가 계시온지요? 이곳에 있는 어르신들은
모두 광명정대한 호걸들이시니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곳에서 하셔도 상관이 없
습니다.]
조반산은 냉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이야기는 우리 태극문파의 수치스러운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어디 있겠소?]
진우는 집히는 것이 있는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한 걸음 물러서며 냉랭히
말했다.
[조삼야는 온주의 태극이고 저는 광평부의 태극입니다. 우리들은 같은 파이지
만 종이 다르니 서로가 서로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조반산은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진형의 무공이 너무나 뛰어나 광평 태극문에서는 감히 징계하러 나설
사람이 없기에, 이 소형제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회강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외다. 이 형제가 북경에 도착하여 물어보니 진형이 산동으로 내려갔다길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외다. 어찌됐든 간에 하늘의 그물에서 빠져 나갈 수는 없
는 법이오.]
뭇 사람들은 그가 하늘의 그물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말을 하자 깜짝
놀랐다. 진우가 어떤 나쁜 일을 했길래 홍화회의 조 셋째 두령이 만리 먼길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우는 총명함과 강직함으로 강호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다. 물론 조반산 만큼
명성이 자자하지는 않아도 북파의 태극문에서는 쟁쟁한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복공자라는 강력한 배경을 갖고 있는지라 조반산에게 두려운 기색도 없
이 매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전에 선배라고 칭한 것은 그대의 나이를 봐서 그렇게 부른 것이외
다. 당신과 나의 남북 태극은 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이 나선다고 해서
반드시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것같소?]
말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옥녀천사(玉女穿梭)라는 일초를 펼쳐 맹렬히 조
반산의 어깨를 후려치려 했다.
조반산이 수 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달려온 목적은 바로 눈앞의 이
일초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진우가 옥녀천사라는 일초를 쓰는 것을 보자
그의 무공수준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조반산은 몸을 살짝 웅크리고 운수(雲
手)라는 일초로 그의 손목을 잡고 오른쪽으로 끌어당겼다. 진우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신이 제압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태극문의 남북 각파의 권초는 대동소이했으며 강약의
차별은 전적으로 각자의 이해력과 공력에 따라 고하(高下)가 정해지는 것이었
다.
천룡문의 고수인 은중상은 진우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조반산과 진우가 언
쟁을 벌이게 되자 검을 뽑아들고 그의 무공을 시험해 보려는 기회를 노리다가
전우가 일초에 제압을 당하는 것을 보자 즉시 검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손을 놓아라!]
조반산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대뜸 진우가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뒤로 돌아서
며 막았다. 그의 겨냥은 정확하여 두 자루의 검이 얽히게 되면서 창! 하는 소리
와 함께 은중상의 장검은 두 토막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조반산은 즉시 장검을 진우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집에 꽂았다.
군호들은 일초에 그가 태극문의 고수인 진우를 제압하고 일검으로 천룡문의
고수인 은중상의 장검을 부러뜨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검을 부러
뜨리는 공력의 순후함과 검을 돌리는 눈썰미나 가늠의 정확함은 일생에 보기 힘
든 일이라 자기도 모르게 모두들 입을 쩍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조반산은 진우에게 냉랭히 물었다.
[아니, 그래도 나가지 않겠다는 것인가?]
진우의 얼굴이 놀람과 당황스러움에 씰룩씰룩거리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
었다.
별안간 은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일곱 대의 금표가 상하좌우로 나뉘어 호비에
게 쏘아져왔다. 상노태가 뭇 사람들이 조반산과 진우를 주시하는 틈을 타서 원
수를 갚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힘을 다해 금표를 던진 것이었다.
그녀와 호비와의 거리는 일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기습공격을 한 만큼 상
대가 금표를 모조리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십여 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서 남편의 원한을 갚고자 했는데 묘인
봉이나 호일도의 무공이 탁월하여 광명정대하게 손을 써서는 절대로 승리를 취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금표에는 극독이 묻혀 있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호비는 아이쿠!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위
로 날아오는 세 대는 피할 수 있었지만, 아랫쪽으로 날아오는 네 대의 금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순간 인영이 번뜩이더니 조반산의 기다란 팔이 쭉 뻗쳐져 휘둘러 지더니 일곱
대의 금표를 모조리 받아쥐는 것이었다.
그의 별호가 '천수여래'인데 '여래'는 그의 얼굴이 온화하고 마음이 인자하다
는 것이고, '천수'는 그의 암기수법이 뛰어나 마치 천 개의 손을 가진 것과 같
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인 것이다. 오늘 그가 펼쳐낸 수법은 그가 한평생 가장
장기로 내새우는 절기이기도 했다.
뭇 사람들은 그저 눈앞에서 무엇이 번쩍이는 순간 어느덧 금표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사실 일곱 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일곱에 일곱을 곱한
마흔아홉 대의 금표라 해도 조반산은 거뜬히 받아냈을 것이다.
촛불 아래 금표는 짙은 남색을 띠우고 있었다. 조반산이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이 극독을 묻혔음이 분명했다.
그는 암기의 대가였지만 암기에 독을 묻히는 것을 가장 증오하여 종종 "암기
는 원래 정파의 무기로서 작으면서도 멀리 뻗쳐나가는 잇점이 있다. 암기수법은
권각법(拳脚法), 무기 조작법과 더불어 무학의 삼대문(三大門)의 하나였다. 그
런데 몰염치한 소인배들이 암기에 독을 묻히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암기를 경
멸하게 된 것이지."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상노태를 매섭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왕 나으리는 얼마나 뛰어난 영웅이었소. 그 분이 가르칠 때 암기에다 독을
묻히라고 했소? 더군다나 어린애를 상대하다니!]
이 몇 마디의 말은 너무도 이치에 합당해 왕씨 형제들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
했다.
상노태는 왕씨 형제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뭔데 감히 상가보에 와서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거요? 애석하게도 내
남편 상검명이 돌아가신 이래 팔괘문중에서 다시는 영웅호걸을 찾아볼 수 없었
소. 나의 아들이 나이가 어리고 이 늙은이가 여자이니, 당신이 업신여겨도 어쩔
수 없겠지.]
그러더니 갑자기 통곡하며 말했다.
[아, 검명! 당신이 죽은 후에 팔괘문중에는 한떼의 못난 자들만 남아서 외부
사람들에게 그저 아부만 할 줄 아는구료. 문호를 위해 일할만한 뼈대있는 사람
은 하나도 없어요. 아, 검명! 내일부터 나는 당신의 아들을 태극문의 제자로 들
여보내 그가 한평생 창피당하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검
명! 과거 당신은 얼마나 호걸다웠나요? 진작 일이 이럴줄 알았으면 이 팔괘도가
이곳에서 못난 꼴을 보지 않도록 당신의 관속에 넣을 걸 그랬어요!]
그녀는 울다가 웃다가 미친 듯 부르짖더니 팔괘도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침
을 뱉고 발로 짓밟는 것이었다.
그녀의 그와 같은 행동에 왕씨 형제들은 가슴 가득히 노기가 끓어 올랐으나
남들 앞에서 그녀와 말다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반산은 진우만 데리고 떠나려고 했지만 상노태가 악랄한 수단으로 호비를
상대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이 자리를 그냥 떠난다면 호비가 살신지화를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호비와 아무 관계도 없었지만 불공평한
일을 보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지라 왕씨 형제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나중에 다시 두 분의 성의에 사의를 표하기
로 하지요.]
왕검영이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상노태는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 검명! 당신은 일찌감치 죽었으니 이렇게 창피한 골을 볼 필요가 없겠지
요. 당신의 사제는 팔괘문의 고수라고 자칭하면서도 십여 세의 어린애를 이겨내
지 못하고 가문을 지켜주는 한자루의 칼마저도 빼앗기고 말았어요. 더구나 당신
사형은 어린애를 두려워해서 그저 그가 멀리 떠나기만 바라고 있어요.......]
왕검영은 그녀의 말에 자극을 받아 더 참을 수 없는 듯 호통을 내질렀다.
[닥치시오!]
그리고 조반산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조삼야, 조금전 제수씨가 한 말을 모두 들었겠지요. 오늘은 불초가 조삼야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이대로 떠나도록 내버려둔다면 팔
괘문은 강호에서 다시 존립하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형제 또한 사람을 대할 면목
이 없어지게 될 것이외다.]
조반산은 그 말이 옳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호비에게 말했다.
[얘야, 어쩌다가 너는 두 분 왕사부(王師傅)에게 죄를 지었느냐? 어서 사과의
절을 하고 나를 따라 가자꾸나?]
조반산은 견문이 넓고 노련했지만 이번만은 상황 판단이 적절치 못했다. 그는
조금전에 상노태를 끌어당기는 호비의 솜씨가 약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찌되
었든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호비는 천성적으로 호기
가 높아 가볍게 남에게 고개를 숙이려고 하지 않았다.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
었다.
[조삼야, 나보고 저 사람에게 절을 하라구요? 그거야말로 저는 감당할 수가
없군요.]
조반산은 어리둥절해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 녀석이 무얼 믿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일까?)
왕검영은 본래 호비가 사과의 절을 하기만 한다면 그대로 물러설 참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답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조반산이 수양이 모자란다
는 소리를 할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소형제, 자네의 무공이 훌륭하니 자네가 큰소리 치는 것도 탓할 수 없겠군.
자, 자, 이 왕모가 자네에게 몇 수의 무공을 가르침 받도록 하지.]
호비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청 한복판으로 달려가더니 획! 하니 한
대의 주먹을 왕검영의 콧잔등을 향해 내질렀다.
왕검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곧장 일 장을 반격하자 세찬 바람이 일면서 호비의
면상으로 뻗쳐가는 것이었다.
조반산은 그의 손에 실린 공력으로 보아 왕씨 집안의 무학이 과연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일 장에 호비가 얻어맞고 중상을 입게 될까봐 몸을 앞
쪽으로 기울여 위험이 닥치면 즉시 손을 뻗쳐 왕검영의 장력을 해소시키려 했
다. 그러나 이 나이 어린 소년의 신법은 기이하도록 빨라 상반신을 한쪽으로 기
울이게 되자 왕검영의 일 장은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왕검영은 당금 팔괘문
에서 으뜸가는 고수였다. 필손이 빗나가자 오른손을 지체하지 않고 아래로 쪼개
왔다. 호비는 두 주먹을 쳐들어 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막으며 크게 외쳤다.
[아이쿠! 꽤 빠르구나!]
그리고는 별안간 침주금나( 擒拿)라는 수법으로 손을 뻗쳐 왕검영의 왼팔에
있는 곡지혈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이 초식은 지극히 괴이하여 왕검영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상노태와 마행공은 서로 바라보며 똑같이 속
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이 애도 저와 같은 기이한 초식을 알고 있을까?)
원래 염기가 표은을 강탈하려고 마행공과 싸울 때에도 염기의 십여 초의 기이
한 초식 중에는 바로 이와 같은 침주금나라는 일초가 섞여 있었던 것이었다.
왕검영은 일단 물러섰다가 다시 돌진하며 맹호복춘(猛虎伏椿)이라는 일초를
펼치며 호비의 왼팔을 내려치려고 들었다. 호비는 몸을 반쯤 돌리더니 구퇴반척
(鉤腿反 )이라는 기이한 초식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마행공 등만 의
아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견문이 넓은 조반산마저도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
각했다. 왕검영은 그의 초식과 수법 가운데 은연 중 자신을 모독하려는 뜻이 있
음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이 녀석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팔괘
문을 얕보게 될 것이다.)
그는 호비와 대결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이 소년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
고 전적으로 옆에 있는 대가인 조반산에게 뽐내 보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렇
기 때문에 손을 쓰면서 무겁고도 유연한 점을 과시하려고 노력했으며 조금도 명
가의 신분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와 같은 의도 때문에 초식은 매서운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조반산이 보고 명문의 고수가 어찌 그토록 악랄한
수법으로 품위없이 어린애를 상대하느냐고 비난할까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장법은 반점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지만 수초안으로 상대방
을 제압하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상보진은 어릴적부터 팔괘장을 고되게 연마했다. 이때 자기의 대사백부 되는
사람의 손씀씀이가 평범한 것이 팔괘장 가운데 가장 수월한 초식인 것을 보고
대사백부가 조반산을 꺼려해서 마음속으로 얼렁뚱땅 넘기려는 것이지 진정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뜻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상보진은 속으로 대사백부의 그
러한 행동에 분노를 느꼈다.
사실 그는 왕검영의 이와 같이 평범한 장법 가운데 수십 년 동안 고되게 쌓아
온 공력이 실려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호비는 처음에 이리저리 뛰면서 기이한 초식을 연거푸 펼쳐냈지만 어느덧 상
대방의 장풍에 뒤덮이고 말았다. 왕검영은 장법을 더욱더 조이며 점차 호비를
꼼짝 못하게 했고 그가 공격해 올 때마다 즉시 팔괘장 장력의 반탄력을 받도록
만들었다.
왕검영이 세찬 기운을 쏟아내 호비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 않
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조반산의 면전에서 자기의 솜씨를 보이고 호
비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어 자진해서 땅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도록 만들겠다
는 뜻이 있었다.
그래서 왕검영은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호비를 상대하면서 얼굴에는 인자한 미
소마저 띠고 있었다.
사실 무술에 있어서 가장 미치기 어려운 경지는 바로 무거운 것을 가볍게 움
직이는 것이고, 힘을 쓰되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하며, 세찬 기
운을 쏟되 세찬 기운을 쏟는 것같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 무학의 명가들은 무공을 연마할 때 누구나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정성을 다하는 법이었다. 또한 호통을 치고 격렬하게 싸우며 땀을 뻘뻘 흘리고
가뿐 숨을 몰아쉬는 따위는 가장 하승(下乘)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쉽게 왕검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조반산은 저 소년은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겠으니 우선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두고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호비는 자기 뜻과는 달리 상대방의 장력에 끌려다니게 되었고 발
걸음이 휘청거리게 되자 갑자기 그는 한번 재주를 넘고 싸움의 테두리에서 벗어
나더니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두 발을 동시에 허공에 날리며 쓸어 차 왔다.
이것은 한 수의 매우 기이한 초식이었다.
왕검영이 몸을 솟구쳐 피하자 호비는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두 다리를 잇따라
차올려 삽시간에 일곱여덟 번을 걷어차는데 괴이하고도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
다.
권법에는 원래 연환원앙퇴(連環鴛鴦腿)라는 초식이 있었다. 그러나 왼발을 차
낸 이후 오른발을 잇따라 차 낼 수 있지만 세번째 발차기를 할 때는 반드시 한
쪽 발이 땅에 닿아야 했고 아무리 빠르다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호비는 땅바닥에 앉아서 두 발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번개같이 이쪽
발이 떨어지면 저쪽 발로 차올리고, 저쪽 발이 떨어지면 이쪽 발로 차올려 왕검
영의 손발을 어지러이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마행공과 상노태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한 수의 기이한 초식은 결코 염기가 쓰던 수법이 아니다. 보기에 저 소년
이 배운 것은 염기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 같구나!)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짐작대로 호비는 몸을 홱 뒤집더니 즉시 두 팔꿈치
를 뒤로 뻗으며 상대방의 옆구리를 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왕검영과 등을 서로 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은
데다가 초식을 뻗쳐내는 것이 재빨라 팔꿈치로 허리를 쥐어박는다는 것이 그만
모두 왕검영의 엉덩이를 치게 되었다.
허리를 찍으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 타닥! 하고 살이 많은 엉덩이를 치게 되자
구경하던 주위의 뭇 사람들은 그만 참지를 못하고 실소를 했다.
왕검영은 볼기짝을 마치 엄마에게 얻어맞은 꼴이라 크게 노해 일 장을 획 하
니 가슴팍으로 쪼개왔다. 이 순간 그의 얼굴빛은 흉칙하게 변했고 이제는 날렵
한 것이고 어떤 기품이고를 따지지 않았다. 조반산은 속으로 탄식했다.
(위진하삭 왕유양의 아들은 애비보다 훨씬 못하구나!)
그는 한편으로 싸움을 보면서도 눈길은 시종 진우에게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
았으며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호비는 상대방의 손이 세찬 폭우처럼 공격해
오자 교만 깜짝 놀라게 되었다. 상대방은 무림의 일류 고수이고 자기는 전적으
로 권보에 실려 있는 가전의 기이한 초식을 상대방이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억지로 지탱해 온 것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어린애로서는 대단한 것
이었다.
기실 호씨 집안의 권보에 실린 기이한 초식 중에서 지금까지 호비가 펼친 것
은 무공을 연마할 때 사용하는 기본기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적을 제압하려 할
때 쓰는 무공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남과 대결할 때 사용하는 초식은 권보의 맨
뒷부분 몇 장에 걸쳐 수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비의 공력이 아직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격투기는 좀처럼
터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싸우면서도 무공을 연마하는 기초를 다지
는 초식밖에 쓸 수 없었다.
만약 비천호리(飛天狐狸)나 호일도 같은 일대대협(一代大俠)이 남과 손을 쓸
때 이와 같이 부적합하고 불완전한 무공을 전개했다면 그야말로 위신을 실추시
키는 것이었다.
다시 십여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호비는 이리저리 막기에 급급하여 크게 낭
패한 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별안간 왕검영이 왼손을 바깥쪽으로 뻗쳐내는
것을 보고 그는 즉시 몸을 날려 오른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왕검영은 유
공탐조(遊空探爪)의 초식을 써서 비스듬히 쪼개왔다. 이 일 초는 세차고 매우
빨라 호비는 몸을 재빨리 움츠리며 실린 힘을 해소시키려했지만 역시 그의 장력
에 충격을 받고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뭇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왕검영은 다시 일장을 내리 쪼개려
고 했다. 조반산은 그 광경을 보자 대노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자가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인물이란 말인가? 어린애가 얻어맞아 쓰러
졌는데도 어찌 저와 같은 독수를 쓴단 말인가?)
그의 태극권의 무공은 늦게 뻗쳐서 먼저 도달하게 하고 나중에 펼쳐도 먼저
사람을 제압하는데 적격이었다. 적의 초식이 끝까지 펼쳐지면 펼쳐질수록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더욱 효과적이었다. 그리하여 왕검영의 손이 호비의 몸에 닿을
순간에 초식을 뻗쳐서 구하려고 했다.
돌연 한가닥 푸른 빛이 번쩍하더니 왕검영이 질풍같이 왼손을 거두어 들이면
서 몸을 기울이고 다리를 번씩 쳐들었다. 호비는 쓰러지게 되었을 때 옆에 반
토막난 검의 앞날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부러진 검날은 바로 은중상
의 동강 난 검이었다. 다급한 김에 호비는 그 부러진 검토막을 주워서 공격해오
는 적의 손바닥을 찔러갔던 것이다.
만약 왕검영이 재빨리 피하지 않는다면 손바닥이 호비에게 찔려 구멍이 날 판
이었다. 호비는 그 일 초가 성공을 거두자 재빨리 몸을 뒹굴어 왼손으로 땅바닥
에서 광채가 나는 뭔가를 슬쩍 집어들고 오른손은 옷자락으로 부러진 검날을 감
아쥐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 나으리, 나의 손은 짧고 당신의 손은 기니, 우리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룬
다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구려. 나는 오른손을 길게 할 수밖에 없는데 당신이
만약 두렵다면 팔괘도를 꺼내도록 하시구려.]
비천호리 이래 호씨 집안은 대대로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배출되어 왔었다.
호비는 맨손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자, 부러진 검을 집어 들어 무기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짜로 무기를 들고 나오게 될까봐 미리 선수
를 친 것이었다.
왕검영이 어떤 신분인가? 분명히 손해인줄 알면서도 그와 똑같이 칼을 들고
휘두를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호비가 부러진 칼토막을 집어들어도 별 차
이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싸늘히 코웃음 치고는 팔괘장 가운데 금나수법을 섞
어 곧장 호비의 검토막을 쥔 손목을 움켜잡으려 들었고, 왼손으로는 장력을 내
쏟아 그의 얼굴을 후려쳐 갔다.
호비는 검끝을 휘둘러 아미자(蛾眉刺)처럼 사용했다. 그는 초식을 펼치면서
왼손을 갑자기 머리 위로 올려 전모를 내리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오른손에는 검이 있고 왼손에는 방패가 있으니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두고 보겠소.]
그는 전모를 방패삼아 왕검영의 왼손을 막았다. 왕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썩어질 녀석! 그와 같이 막는다면 너의 왼쪽 손목은 반드시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는 손에 다시 삼 푼의 힘을 더 쏟아 다 헤어진 전모를 후려쳤다. 도리어 왕
검영이 아!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일 장이나 물러섰다. 그의 고함 소리는
매우 처절하고 날카로워 마치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니 그의 왼손은 새빨간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입은 상처인지 알 수 없었다.
왕검영은 극도로 노해 호비를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 녀석! 그 썩어빠진 전모에 무엇을 숨기고 있느냐?]
호비는 전모를 머리에 쓰고 왼손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한자루의
금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당신네 팔괘문의 암기이고 내가 가져온 것은 아니오. 나는 아무렇게
땅바닥에서 한 개 주운 것이오. 가져가서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당신이 굳이 나
의 밑천을 드러내라고 하니, 좋소. 그까짓 조그마한 금표 하나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리고는 손을 휘두르며 상대방의 가슴을 노리고 금표를 던졌다. 왕검영은 몸
을 기울여 그 금표를 낚아채려 들었다.
그가 먼저 몸을 기울여 피한 후 손을 뻗친 것은 호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꺼
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가 금표를 던지는 수법이 또한 이상하여 혹시나
남아채려다 가슴팍에 얻어맞을까 두렵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을 뻗쳐 낚아챘을 때는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사실 호비는
앞쪽으로 던지는 시늉을 하며 금표를 등뒤로 던져보낸 것이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바로 상노태였다. 갑자기 금빛 광채가 번쩍하더
니 금표가 어느덧 얼굴로 날아드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머리를 움츠렸다. 그러
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금표는 그녀의 틀어놓은 머리에 박혀 흔들거리는
것이 아닌가?
상보진은 그만 깜짝 놀라 간담이 서늘해지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어머니
앞으로 달려가면서 부르짖었다.
[어머니,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까?]
호비가 구사하는 매 일초 매 일식이 희한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방비할래야 방
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도 교묘하게 금표를 내던지자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노태가 간일발의 차이에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을 보자 사람들은 모두 아연해
졌다.
조반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암기를 앞쪽으로 던지는 척
하면서 뒤로 내던지는 수법은 조반산의 특기였다. 만약 자신이 손을 썼더라면
열 명의 상노태라 하더라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었지만 소년의 의표를 찌른 기
습공격은 자기도 생각할 수 없는 묘책이라고 생각했다.
조반산은 곧이어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부르짖었다.
[왕사형, 빨리 맥문을 누르도록 하시오! 금표에는 독이 묻어있소이다!]
상보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해약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황급히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와 같이 부르짖게 되자 즉시 옷자락을 찢어 왼쪽 손목을 바짝 동여맸다. 그
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왕검걸은 형님이 걱정되어 서둘러 달려와 그
를 도와 손목을 옷자락으로 감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왕검영은 왼손으로 뿌리치
며 소리쳤다.
[비켜!]
왕검걸은 그가 맹렬히 손을 뿌리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그의
손짓에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게 되었다.
그는 아연해서 형을 바라보며 불렀다.
[형님!]
왕검영은 상처입은 손으로 휙! 하니 호비의 머리 위를 후려쳐 오며 동시에 발
걸음을 나는 듯이 미끄러뜨리면서 유신팔괘장이라는 절초를 펼쳤다.
이때 그는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고약하고도 교활한 소년의 목숨을 빼앗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호비는 무예를 익힌 후 처음으로 상보진과 싸웠고 그 뒤에 상노태와 왕검걸을
상대로 싸웠던 것이며, 지금은 왕검영과 장법으로 대결을 벌이고 있으니 어느덧
네 번째의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실전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
의 머리는 더욱더 맑아지면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있었고, 가능한한 잔재주
를 부려 부족한 공력을 메꾸려 했다. 이 유신팔괘장은 왕검걸이 이미 펼친 바
있어 지금은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호비는 상대의 동작을 따라 같이 돌게 된다면 반드시 눈이 어지러워지고 머리
가 띵해질 것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눈깜짝 할 사이에 왕검영은 어느덧 호비
의 등뒤로 돌아가게 되었다.
호비는 권보에 실려있는 사상보(四象步)가 문득 떠올랐다. 이 보법은 단순하
기는 했지만 크게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호비는 적이 자기 등뒤로 가는 것을
보자 선뜻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바로 이때 왕검영은 획! 하니 그의 등을
향해 일 장을 내려치려고 했다.
뭇 사람들은 호비가 등뒤에 헛점을 내보이자 그를 위해 마음을 조였다. 그러
나 뜻밖에도 그는 경쾌하고도 교묘하게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고 왕검영의
그 일장은 그만 허공을 치고 말았다.
유신팔괘장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중도에 멈출 수 없었으며 적중되든 적
중되지 않던 간에 발걸음은 계속 움직이며 일장 일장을 잇따라 펼쳐야만 했다.
호비는 얼굴을 대청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왕검영이 오른쪽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자 대뜸 왼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왕검
영이 손을 뻗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또 다시 왕검영의 일 장은 허공을
치게 되었다.
이치를 따져 보면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생겨나고, 음양에서 사상(四象)이
생겨나며, 사상에서 팔괘(八卦)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 사상보와 팔괘장의 원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호씨 집안의 권보에 실려있
는 사상보는 권각(拳脚)과 무기를 다루는 무공을 연습하기 전에 익히는 입문의
보법으로 결코 적을 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호비는 이미 지극히 순후하고 익숙해지도록 연마를 해온 터라 시간이
흐르자 아예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상대방을 주시한 채, 왕검영이 초식에 상관
하지 않고 그가 왼쪽으로 달려들면 오른쪽으로 한 걸음 내딛고 앞쪽으로 달려들
면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어느 방향에서 달려
든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여유있게 전후 좌우로 네걸음 옮길 뿐인데 묘한 것
은 미리 서로 연습을 한듯 정확한 시간에 피해버린다는 것이었다. 왕검영이 쓰
는 팔괘장의 보법은 팔괘 방위와 꼭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매번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하나같이 상대방의 행동과 마치 짝을 맞추는듯
하여 함께 오랫동안 연습을 하고 시범 대련을 여러 사람 앞에서 보여주는 것 같
았다.
이 유신팔괘장은 일단 손을 쓰게 된다면 연속해서 끊임없이 사상의 사(四)에
팔괘의 팔을 곱한 삼십이 초의 권법을 구사해야 되는데 왕검영은 호비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형편이라 손을 쓰면 쓸수록 초조해졌다.
조반산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탄식을 했다.
(왕검영은 부친의 재간을 헛되이 익혔을 뿐이다. 그는 곧이곧대로 그 법칙을
지킬줄만 알았지 대적할 때 임기응변을 하지도 못하고 새로운 경지를 창안해 내
지 못하니, 왕유양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는 것 같구나!)
왕검영은 제이절(第二節)의 삼십 이 초 팔괘장을 거의 다 펼쳤을 때 마침 상
보진이 해약을 가지고 와서 불렀다.
[대사백부님, 약을 복용한 후에 다시 그 녀석을 처리하시지요?]
이때 왕검영은 독기가 위로 올라와 왼팔이 점점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왕검영
은 즉시 싸움권 밖으로 물러서서 해약을 받아먹었다.
조반산은 입을 열었다.
[왕사형, 내가 보기에.......]
왕검영은 그가 싸움을 말리려고 입을 여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말이 일
단 떨어지게 되고, 자기가 그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지라 그 말을 마치기 전에 즉시 앞으로 달려나가 호비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보법은 신속하였고 손을 뻗치는 것도 무척 중후해 보였다. 원
래 그는 팔괘문 중에서 가장 무서운 내팔괘장법(內八卦掌法)을 펼친 것이었다.
먼저번에 왕검걸은 그저 내팔괘단가(內八卦短架)를 휘둘러서 상보진을 제압했
는데 왕검영의 무공은 동생보다 훨씬 정순하였기 때문에 내팔괘장법을 쓸 때 손
을 짧게 내뻗지만 매 일 장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호비는 정직하게 삼 초를 받고는 즉시 더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속
으로 부르짖었다.
(방법을 바꾸자!)
그러고 보니 상대방은 발걸음을 왼쪽으로 내딛고 있었다. 따라서 호비는 왈칵
발을 들어 그의 왼쪽 발등을 내리찍으려 했다. 왕검영은 대뜸 욕을 했다.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그는 왼발을 거두어 들이며 오른발을 내딛었는데 그만 팔괘의 방위와 틀리게
발을 내딛었다.
왕유양은 자식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 규정이 지극히 엄하고 매서워 털끝만
치도 차질이 나지 못하게 했다. 유독 이 큰아들은 천성적으로 우직했기 때문에
적을 상대할 때 반드시 발로 올바른 방위를 밟아야 비로소 초식을 뻗치곤 했다.
그리하여 그의 두발이 방위를 따라 신속히 옮기고 있을 때 호비는 다시 한번
그의 발등을 노리고 밟으려고 했다. 이와 같이 엉터리같은 수법을 쓰면서 호비
는 줄곧 짖궂게 장난을 치듯 잇따라 몇 번이나 왕검영의 발을 밟으려고 시도하
자 왕검영은 그만 심기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호비는 문득 빈틈이 있는 것
을 보고 맹렬히 일장을 들어 그의 아랫배를 후려쳐갔다.
왕검영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좋아!]
그는 두 손을 일제히 뻗쳐서 호비의 손을 밀쳐냈다. 이것은 상대방의 공격을
그대로 맞받는 수법이라 전혀 농간을 부릴 수 없었다.
호비는 몸을 움찔하며 상대방의 압력이 무겁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조금이라도 물러서게 된다면 즉시 상대방에게 내상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호비는 필사적으로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조반산은 호비가 틀림없이 패하게 된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가 졌네. 그런데도 겨루겠다는 것인가?]
그는 손을 뻗쳐서 호비의 등을 가볍게 쳤다. 한가닥 내력이 그의 손을 통해서
호비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순간 왕검영은 두 팔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화끈 달
아오르는 것을 느끼고서 황망히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조반산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왕형, 왕형의 공력은 이 소년보다 훨씬 고강하고 승부가 정해졌는데 더 겨루
려는 것이오?]
그리고 그는 가볍게 호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오륙 년만 지나면 나 역시 자네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같네.]
그 말은 당신 왕노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뜻이었다. 왕검영은 얼굴이 화
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조반산에 비해 훨씬 무공이 뒤떨어지기 때
문에 체면치레로 몇 마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만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왕검걸은 형의 왼손이 흑자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상노태에게 물었다.
[살갗에 바르는 해독약은 없나요?]
상노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반산은 품속에서 붉은색 작은 병을 꺼내더니 병마개를 뽑으며 말했다.
[이 형제가 스스로 배합한 해독산이 있는데 어느 정도 효과는 거둘 수 있을
것이외다.]
왕검걸은 그가 암기를 쓰는 대가인 만큼 몸에 지닌 해독약은 틀림없이 효과가
빠르고 좋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 형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염치 불구하고
손을 내밀었다.
조반산은 그의 손에 해독산을 부어주며 웃었다.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외다.]
이렇게 되자 왕씨 형제는 더이상 호비를 난처하게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소녀의 피맺힌 원한
조반산은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으로 대청을 오락가락 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연히 성취에 있어 높고 낮은 구분이 있소.
심지가 광명정대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다면 무공이 고
강하면 더욱 좋고 그렇지않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외다.
이 조아무개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바로 일을 행함에 있어 악독하고 비열하며
몰염치한 소인배이외다.]
그의 음성은 말을 할수록 더욱 엄숙해졌고 진우를 향해 부릅뜬 두 눈은 움직
일 줄 몰랐다.
진우는 고개를 숙인채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얼핏 고개를 들었던 진우
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반산은 대청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상노태가 호비에게 던졌던 일곱 대의 금
표를 천천히 발로 밟아 모두 다 네모진 벽돌 안으로 박히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
이었다. 그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금표와 벽돌이 차이가 나지않아 얼핏 보아
서는 금표가 벽돌에 박힌 것을 알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은 진우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던지
는 순간 모두 크게 놀랐다.
조반산이 이와 같은 무공을 보인 것은 첫째, 상노태에게 다시는 악독한 암기
를 쓰지 말라고 경고하는 뜻이었고, 둘째로는 진우를 데리고 나가 과거의 죄과
를 따지는데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막으려 하지 말라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
다.
진우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왕씨 형제들은 상처를 싸매기에 바빴고, 상노태와
상보진은 이빨을 갈고 있었으며, 마행공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은중상은 모두들 겁을 집어먹고 아무도 진우를 도우려고 나서지 않는 것을 보자
마음을 모질게 먹고 큰소리로 말했다.
[좋소! 평소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절친한 친구들이 오늘 이 진가가 큰 도적
의 협박을 받고 있는 마당에 모두 가버리고없군! 조씨 양반, 우리 나갈 필요없
이 이곳에서 싸우도록 하시지!]
조반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조반산의 등 뒤에서 파공성이 일었다.
그는 순간 암기가 날아오는 것임을 알았다. 뒤이어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절친한 친구가 왔소!]
조반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두 손가락으로 한자루의 조그마한 비도(飛刀)를
끼워 받았다. 그러나 날아드는 비도의 기세가 너무나 세차고 빨랐기 때문에 손
가락 사이에서 부르르 진동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반산은 그것이
복건(福建) 포전((葡田) 소림파의 암기수법이 아닌 소림본사(小林本寺)의 수법
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는 원래 숭산 소림사에서 왔군! 혹시 불의대사(不疑大師)의 제자인
고형이 아니시오?]
이 비도를 던진 사람은 바로 숭산 소림파의 젊은 고수인 고반야(古盤若)였으
며, 그는 불의대사의 제자였다.
왕씨 형제, 은중상, 진우 등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반산은 몸을 돌려
고반야의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의 문파와 사문의 내력을 정확하게 알아 맞
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반산은 그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홍화회가 외떨어진 회강에서 수 년 동안 은거했다고는 하나 중원에서
떠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명성은 과거보다 많이 퇴색한 것 같
구나. 내가 한 아이를 구하고 또 한 사람을 데리고 나가 훈계하려고 하는데 계
속해서 사람들이 가로막으려드니, 오늘 이곳에서 위엄을 보이지 않는다면 젊은
후배녀석들이 우리 홍화회를 얕보게 될 것이다.)
그는 낭랑히 입을 열었다.
[좋소, 절친하다는 친구 양반!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마시오!]
그는 고반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 손을 뒷쪽을 향해 몇번 쳐들었다. 곧이
어 몸을 돌리더니 두 손을 잇따라 휘두르는데 뭇 사람들은 눈이 빙글빙글 돌아
갈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도, 금표, 수전(袖箭), 배노(背弩), 철보리(鐵菩
), 비황석(飛蝗石), 철련자(鐵蓮子), 금전표(金錢 ) 등이 일제히 쩡쩡! 창창!
파공성을 내며 고반야를 향해 끊임없이 쏘아져 나가는 것이었다.
왕검영은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조형, 온정을 베풀어 주십시요!]
조반산은 웃으며 말했다.
[맞았소. 마땅히 온정을 베풀어야지.]
뭇 사람들은 고반야를 바라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고반야는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는데 주위에는 암기가 가득 박혀있
었지만 한 대도 그의 몸에 맞지 않았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한
참 후에 겨우 벽에서 몸을 떼며 벽에 박힌 암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여 대나 되는 암기들이 인체의 굴곡을 따라 촘촘히 벽에 박혀있는 것이 아닌
가?
그는 참담해진 심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반산에게 정중히 읍을 하더
니 그가 모시고 온 복공자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대청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조반산이 이와 같은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그 누가 감히 나서서 관여를 하겠는
가? 그러나 진우는 죽을 때까지도 입은 살아 억지를 썼다.
[자고로 관가(官家)와 도적은 양립할 수 없는 법, 내가 죽음으로써 복공자에
게 보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조반산은 대노해서 왕검영 등을 향해 말했다.
[태극문에 이러한 패륜아가 나온다는 것은 문호의 수치라 본래 사적으로 해결
을 지으려고 했더니, 그는 내가 분명하게 털어놓기를 강요하는구려.]
진우는 자기가 무슨 일 때문에 이 홍화회의 셋째 두령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
고 죄를 짓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위인됨이 똑똑하고 원활하여 좀차럼 남의 원한을 사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즉시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맞소이다. 천하의 일이란 어떤 것이라도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말씀을 해준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사리에 맞는지 평가해 줄 것이 아
니겠소?]
조반산은 싸늘히 코웃음치고 가무잡잡한 살결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어린
여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이 소매(小妹)를 아는가?]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한번도 본 적이 없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네는 그녀의 부친을 알고 있지. 그녀는 광평부 여희현
(呂希賢)의 딸이야!]
그 말이 떨어지자 본래 창백했던 진우의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더욱 하얗게
질렸다. 뭇 사람들은 아! 소리를 내며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아이는 기껏해야 열 두서너 살 정도였으나 온 얼굴에 풍상을 겪은 흔
적이 역력했고 깜디 짧은 인생살이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고 있었다. 그녀는 진우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본적이 없지만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그날밤 당신이 내
동생을 죽이고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나는 창 밖에서 아주 똑똑히 보았단
말이예요. 그리고 매일밤 당신을 꿈속에서도 보고 있어요.]
이 몇 마디의 말은 무쇠를 자르듯 단호했다. 진우는 확실히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 혀가 굳어져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아, 아! 소
리만 냈을 뿐 더이상 변명을 하지 못했다. 조반산은 뭇 사람들에게 두 손을 마
주 잡아보였다.
[이 진가의 말이 맞았소이다. 천하의 일이란 것은 도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나는 자초지종을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리고 그 도리를 따져보도록 하
겠소이다. 여러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광평부 태극문의 삼형제 중에서
소사제 여희현의 무공이 제일 강하지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이, 진가. 자네는 여희현을 뭐라고 칭하지?]
진우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그 분은 우리의 사숙이지요.]
그는 속으로 조반산이 과거사를 이야기한다면 변명하거나 항의할 필요없이 이
곳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반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여희현은 바로 그의 사숙이외다. 사실 여희현이라는 사람을 불
초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소. 그는 북경 왕부(王府)에서 무예를 가르치는 직
책에 있었으니 우리와 같은 시골 사람이 어찌 신분에 걸맞지 않게 사귈 수 있었
겠소이까?]
그는 매우 불만스러운 듯 비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너
그러워 어린 소녀 앞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힐책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화제를 돌렸다.
[불초는 회강에 은거한 이후 중원 무림의 은원관계는 상관하지 않았소. 그러
나 어느날 이 나이 어린 낭자가 불초를 찾아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불초
에게 올바르게 일을 처리해 달라며 울먹이는 것이었소.......]
그는 나이 어린 소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소매, 자네는 그 두 가지 물건을 꺼내서 여러 숙부님과 백부님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시게.]
그 소녀는 등 뒤에 진 봇짐을 풀더니 매우 정중하게 보자기를 펼쳤다. 모든
사람들은 똑똑히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 든 것은 한 쌍의 말라 비틀어진 사람의 손이었고, 그 옆에
는 혈서로 빽빽하게 채워진 하안 천 조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조반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게.]
소녀는 말라 비틀어진 한 쌍의 손을 쳐들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목매인 어
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님은 병이 나서 몸져 누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
느날 밤 이 진가가 나쁜 사람을 세 명 데리고 우리집에 찾아와서는 왕야의 명을
받든 것이라며 아버님에게 태극권의 무슨 구결(九訣)을 말하라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언쟁을 벌이게 되었어요. 우리 동생이 놀
라 울음보를 터뜨리자, 저 진가는 우리 동생을 잡아 도검을 쳐들고 일검에 죽여
버리겠다고 우리 아버지를 위협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몇 마디 말을
했는데 저는 자세히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 저...... 사람은 우
리 동생을 죽여 버렸어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녀는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그와 같은 악인이라면 빨리 쳐죽이지 않고 무엇하고 있소?]
그 소녀는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우리 아버님과 그들은 손을 쓰게 되었어요.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데
다가 우리 아버님은 병이 났기 때문에 이 나쁜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어
요. 나중에 손(孫)백부님이 우리집에 오셨길래 저는 그 분에게 말씀을 드렸지
요.......]
나이 어린 소녀라 무림의 은원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해 그녀의 말에는 약간은
모호한 점이 있었다.
조반산은 불쑥 입을 열었다.
[이 소녀가 말하는 손백부님이란 바로 광평부 태극문의 장문인 손강봉(孫剛
峯)을 말하는 거외다.]
그 사람의 명성이 쟁쟁하여 모두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이 어린 소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손백부님은 며칠 동안을 생각하시더니 나를 부르셨어요. 그 분은 칼로 자기
의 왼손을 잘라 그 피를 찍어 이 혈서를 썼어요. 그리고 다시 칼을 탁자 위에
세워놓고 있는 힘을 다해 오른손을 휘둘러 오른손마저 잘라버렸어요. 그리고 저
보고...... 저보고 회강에 있는 저 백부님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며 태극문중에
서 저 백부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우리 아버님의 피맺힌 원한을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뭇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러한 일은
진정 세상에서 보기드문 가장 참혹한 사건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 소녀가
나이도 어리고 울먹이며 말을 하고 있어 분명하지 못한 점이 있어 이해되지 않
는 점도 있었다.
조반산은 천천히 입을 열고 설명하듯 말했다.
[손강봉은 불초가 알고 있는 사람인데 과거 그는 이 조반산을 만만하게 보고
온주(溫州)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인 일이 있소이다.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이
조아무개의 그림자가 그 분의 머리 속에 남게 된 모양이외다.]
뭇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 싸움에서 손강봉이 진 모양이로구나.)
조반산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손강봉은 이 혈서에서 그는 광평부 태극문의 장문인이나 부끄러운 노릇이지
만 진가라는 천추의 반역도를 처치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손을 잘라 이 조아무개
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했으며, 편지에는 조나으리의 구름을 찌를듯한 높은
의기를 오래 전부터 흠모해왔으니 다급한 사람의 어려움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지요. 그는 나에게 한쌍의 자른 손을 보내 주면서 더구나 나를 추켜올
리는 것이었소이다. 그만큼 간절히 이 원한을 갚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었겠지요.
이 조아무개와 그는 반푼 어치의 교분도 없었지만 이 일만은 해결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소이다.]
진우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 혈서가 반드시 우리 손사백부님의 친필이라고 할 수 없으니 내가 좀 보아
야겠소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소녀의 곁으로 다가와 그 혈서를 받으려는 듯 손을 내밀더니
별안간 손목을 홱 뒤집었다. 순간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며 오른손에는 어느덧
한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고 그 비수는 소녀의 등을 겨누는 것이었다. 진우는
부르짖었다.
[좋소! 그렇다면 우리 동귀어진(同歸於盡)합시다!]
이러한 변고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조반산은 달려나와 소
녀를 구출하려 했으나 진우는 왼팔로 여씨 소녀의 목을 조이며 묵직한 소리로
호통을 쳤다.
[한걸음만 더 나온다면 이 계집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을 것이오!]
조반산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으며 일시에 어떻게 할지 몰라 속으로 생각했
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만약에 일곱째 아우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그는 반드시 어떠한 계책이 있었을 텐데.)
조반산은 중후하고 점잖은 사람이라 간악한 소인배를 상대하기에는 적당한 인
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곤경에 빠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모가 출중
한 일곱째 아우인 무제갈(武諸葛) 서천굉(徐天宏)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진우는 소녀의 뒷덜미를 꽉 움켜잡고 조반산이 암기를 써서 비수를 떨어뜨리
지 못하도록 비수를 목덜미에 바짝 돌이대며 두 눈을 부릅뜨고 조반산에게 말했
다.
[조삼야, 당신과 나는 과거에 원수진 일도 없었거니와 지금도 그렇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암기로 내 두 눈을 멀게 하더라도 이 진가는 결코 반격을 하지
않겠소.]
조반산은 두 개의 전표(錢票)를 거머쥐고 그의 두 눈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피하거나 막는다면 그 틈을 이용해 소녀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
은 눈치가 빨라 먼저 조반산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었다. 대청에는 서로가 대치
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진우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조반산을 노려보며 그가 어떤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가 경계를 하면서 왕씨 형제를 향해 말했다.
[왕형, 왕 둘째형, 조삼야가 오늘 이 형제를 못살게 구는 진짜 이유를 그대들
은 알고 있소?]
왕씨 형제는 그와 함께 부중(府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우의 성격이
원만하고 매끄러워 인품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씨 형제는 조반산의 무
공을 꺼려하지 않았다면 말리려고 했을 것이다.
왕검영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조삼야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 역시 남의 부탁을 받은 일이군요. 그러니 진
상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도 없고, 그 안에 어떤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
됩니다.]
진우는 냉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해는 없소이다. 왕형, 형제가 복공자 부중에 들어가기 전에 정친왕부(定親
王府)에서 일을 보았다는 것은 왕형도 알고 있지요?]
왕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왕야가 당신을 복공자에게 추천을 한 것이 아니겠소? 왕야는 당신
이 매우 똑똑하고 근면하다고 칭찬을 하더구려.]
진우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조금전 조삼야가 이 형제가 어린 소녀의 부친을 해쳤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
제로 있었던 일이외다. 그러나 이 형제는 왕가의 명을 받은 몸이었소.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부중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 아니오?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주인
이 무슨 일을 시키면 당신도 그 명을 어길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왕검영은 그제서야 그가 자기와 일문일답을 하여 조반산에게 이번 일의 내력
을 설명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명령을 받은 몸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야 진형제를 탓할 수가
없는 노릇이겠지.]
사실 조반산은 회강에서 손강봉이 보낸 혈서를 받자 즉시 여씨 집 소녀를 데
리고 광평부로 달려갔으나 손강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즉시 다시 북경으로
가서 수소문해 본 결과 진우는 이미 복공자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낙빙(駱氷)의 은상축전구(銀霜逐電軀)를 빌려 타고 온
것이라 이틀만에 북경에서 상가보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우가 여
희현 부자를 어떻게 해쳤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여씨 소녀는 나이가
어려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을 뿐더러 혹 몇 마디 더 물어보려고 하면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고 작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끊임없이 흐느낄 뿐 설명을 조리있게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진우가 지난 일의 사유를 분명히 하려는 뜻이 있는 것을 보고 잘 되었다는 생
각에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은 천하의 일이란 도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했소. 여희현은 당신
의 사숙아니오? 설사 하늘보다도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직접 손을 써
서 그를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어디 한번 말을 해보시오.]
이때 진우는 믿는 바가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또한 목숨을 건져 도망친다 하
더라도 조반산이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이후 계속 자기를 찾아다니게
된다면 대항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
반산을 납득시켜 다시는 상관하지 않도록 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넌즈시 말했다.
[조삼야, 당신은 광명정대한 영웅호걸이외다. 흔히들 군자는 사람들한테 속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당신은 이번에 손강봉에게 속은 것이외다.]
조반산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어떤 일에 속았다는 것이오?]
[우리 광평 태극문의 손(孫) 조사(祖師)께서는 제자 세 명을 두셨는데 손사백
부는 큰제자이고, 선친이 둘째이며, 여사숙이 세째이외다. 그 사형제 세 사람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조삼야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조반산은 원래 전혀 알지 못했으나 자기가 그의 문호에 관한 일도 모르면서
상관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마음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오?]
진우는 거침없이 말했다.
[여사숙은 태극 북종의 명성이 쟁쟁한 고수였소. 나는 평소 그 어르신을 매우
존경했소이다. 그런데 그는 정왕부에서 교사(敎師) 노릇을 할 때 왕야에게 태극
권의 오묘한 점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소. 정왕야는 무공을 익히는 것을 매우 좋
아했는데 그가 숨기는 것이 많자, 불쾌히 생각하며 잇따라 몇 번이나 물었소.
여사숙께서는 강요를 받다가 도저히 막을 길이 없음을 알자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말았소이다. 그런데 정왕야는 불초를 불러 태극권 중에 있는 무슨 난환결(亂環
訣)인가, 음양결(陰陽訣)인가를 설명하라는 것이었소. 그러나 선친의 무공은 평
범한데다가 더우기 일찌기 세상을 등지셨으니 불초가 어찌 알겠소이까? 그래도
정왕야는 불초에게 책임을 지고 여사숙에게 똑똑히 알아보라고 명령을 하는 것
이었소이다.]
조반산은 속으로 생각했다.
(태극문의 남종이나 북종에 각기 문파의 규율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히 본문
의 무공 기밀이나 오묘한 이치를 만주(滿州)사람에게는 전수하지 말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여희현이 비결을 전수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우는 얼굴에 매우 성실하고도 간곡한 빛을 띠우고 말했다.
[불초는 왕야의 명을 받고 세 분 왕가의 형제들을 데리고 여사숙의 저택으로
찾아갔소이다. 그때 그는 병들어 있었으며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 나의 두세
마디 말에 무서운 살수를 펼쳐내는 것이었소이다. 조삼야, 생각해 보시오? 나의
이까짓 보잘 것 없는 무공으로 어찌 광평 태극문의 제일류 고수를 해칠 수 있겠
소이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죽은 것이오?]
진우는 대답했다.
[여사숙은 원래 병이 있는데다가 불초의 말이 좀 심했었던 것 같았소. 여사숙
은 화가 나서 가래가 끓어 오르며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게 되었소이다. 불초는
재빨리 부축을 한다고 했지만 때는 늦었지요.]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조반산이 꾸짖으려 하는데 여씨 소녀가 부르
짖었다.
[아버님은 저 사람이 때려 죽인 거예요. 아버님을 저 사람이.......]
진우는 두번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목을 바짝 조여 말을 막았다. 조반
산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그에게 죽을 병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째서 그를 이길 수 없다고 말을
하지? 더군다나 그의 어린 아들은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째서 무고한
아이를 해친 것이오? 당장 그 소녀를 내려놓도록 하시오!]
진우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조삼야, 당신은 만리 밖에 있는데 어찌 우리 문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겠
소? 내 당신에게 충고하는데 역시 각자 자기 집 앞의 눈이나 치웁시다.]
그리고는 천천히 대청 문쪽으로 물러갔다. 조반산은 불을 내뿜을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우의 심보가 악랄하여 막으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여
소매의 목숨을 해치려 들것 같았다.
이 소녀는 나이가 어리지만 성격이 지극히 굳건하여 놀랍게도 홀몸으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회강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사
실 그토록 먼 길을 오면서 겪었던 일은 이와 같이 나이어린 소녀는 말할 것 없
고 비단 건장한 젊은이라 하더라도 매우 벅찬 일이었다.
조반산이 의연히 이번 일에 관여한 것은 물론 손강봉이 두손을 잘라 부탁한
연유도 있겠지만, 절반은 이 외로운 소녀의 효성을 보아서 한 것이었다. 이 소
녀와 말을 타고 동쪽으로 오는 동안 어느덧 정이 들어 소녀를 자기 딸처럼 여기
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진우는 몇 걸음만 더 물러선다면 대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조반산은
암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진우에게 내던질 수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가장 무거운 사두추(蛇頭錐)를 던져 일거에 그의 뇌문(腦門)을 가격
한다면 즉시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팔에 힘만 준다면
여소매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 않은가?)
진우는 다시 한걸음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있는 커
다란 붉은 초에 맺혀있던 불꽃이 픽! 하면서 사그라들어 촛불이 순간적으로 어
두워졌다가 밝아지게 되었다.
순간 진우의 등뒤에 홀연 한 노인이 나타났다.
희한한 무공전수
그 노인은 두 팔을 수평으로 가슴 앞에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 잘려진
매끄러운 두 손목만을 볼 수 있었다. 몸에는 청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
은 마른 편이며, 두 눈은 움푹 꺼졌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잿빛 얼굴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만들었다.
진우는 사람들이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팔목이 자기의 얼굴로 뻗쳐왔다. 하
마터면 부딪칠뻔한 그는 놀라 재빨리 한걸음 뒤로 비껴서며 부르짖었다.
[손사백부님! 당신이군요!]
그 사람은 그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포를 걷어 올리더니 한걸음 나서며 조
반산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조삼야, 당신의 은혜는 이 손강봉이 내세에서 보답하는 길밖에 없겠구려.]
조반산은 급히 답례를 했다. 그러나 조반산의 두 눈은 진우에게서 떠나지 않
았다. 진우는 급히 두 걸음 물러서며 여소매를 끌어 안은 채 대청 밖으로 도망
치려고 했다. 손강봉이 몸을 흔들하더니 어느덧 문을 가로막고 호통을 쳤다.
[돌아가거라!]
진우는 물었다.
[당신이 길을 막을 수가 있겠소?]
손강봉은 냉랭히 말했다.
[너는 이미 여씨 집안의 두 목숨을 해쳤다. 이 손가는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
없다.]
그는 조반산에게 다시 눈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조삼야, 불초는 이 진가의 말을 문밖에서 똑똑히 들었는데 정녕 터무니 없는
소리였소. 우리의 여사제는 난환결(亂環訣)과 음양결(陰陽訣) 때문에 이 간적의
손에 죽은 것이외다.]
조반산은 진우를 곁눈질로 노려보며 싸늘히 코웃음쳤다.
[원래 진나으리는 우리 태극문파의 양대 비결을 면밀히 연구하고 있었군요.
이 형제는 나으리에게 한번 가르침을 받아야겠소.]
손강봉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이 진가는 우리 태극권에 구대비결(九大秘訣)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고 난환결과 음양결이 권법과 관련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애석하게도 그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미처 전수를 받지 못했지
요. 그리하여 그는 온갖 방법으로 나와 여사제로 하여금 설명을 하도록 했지만
우리 사형제들은 그의 행실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
은 것이라오.]
손강봉은 진우를 노려보며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윽고 진가는 정왕야의 세력을 빌어 우리를 억누르려 했으나 여사제는 끝까
지 입을 다물고 있었소이다. 기어코 그는 여사제가 병이 난 틈을 타서 밤중에
뛰어들어 여사제의 외아들에게 칼을 들이대며 난환결과 음양결을 말하지 않으면
어린애를 단칼에 죽이겠다고 했지요. 이 진가야, 내 말이 진짜냐 거짓이냐?]
진우는 얼굴이 창백해져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그는 놀람과 분노로 얽혀 속
으로 생각했다.
(이 망할 놈의 손가놈이 하필이면 이때 뛰어들어 올게 뭐람.)
손강봉은 노기띤 어조로 다시 말했다.
[결국 총명하고 귀여운 어린애가 그의 예리한 칼날에 목숨을 잃고 말았소이
다. 여사제는 병을 무릅쓰고 그와 싸웠으나, 이 자가 운수(雲手)라는 무공을 쓰
는 바람에 지쳐 탈진해 죽은 것이지요. 조삼야, 이 손아무개는 비록 장문인의
몸이지만 노쇠하고 무능한 데다가 우리 북종에는 인재가 없구려. 때문에 이 늙
은이가 염치불구하고 남종(南宗)인 당신에게 공평하게 처리해 주기를 희망하게
된 것이외다.]
그러더니 진우에게 고개를 돌리고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진나으리, 내가 말한 것 중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부담없이 이야기하시구
려!]
조반산은 듣기만해도 분노가 치밀어 성큼 한 걸음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권술의 비결이나 오묘한 점을 배우고자 할 때는, 자고로 스승이나 친구들에
게 부탁을 하여 전수받을 수 밖에 없소. 난 당신처럼 금수와 같은 행동으로 무
공을 전수받으려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평생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진우는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으시오!]
그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여소매는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렇게 되
자 조반산은 걸음을 멈추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진우는 낭랑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씨 양반, 당신이 나를 찾고 싶다면 언제든지 북경 복공자의 부중으로 찾아
오시오. 아무쪼록 오늘은 저 사람에게 길을 비켜 달라고 부탁 좀 하구려.]
조반산은 어쩔 수 없어 손강봉에게 말했다.
[손사형, 잠시 그를 용서해 주기로 합시다.]
손강봉은 크게 초조한 나머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지금...... 지금...... 그를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오?]
조반산은 정중히 말했다.
[손형, 안심하시오. 이 조아무개가 이번 일에 뛰어든 이상 틀림없이 끝을 보
도록 하겠소이다.]
손강봉은 다급한 나머지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더듬거리기만 했다.
[그대는...... 그대는.......]
[길을 비켜주도록 하시오. 이 조가가 만약에 이번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내
손목을 잘라 되돌려 드리겠소.]
이 몇 마디의 말은 무쇠를 자르듯 단호한 것이라 손강봉으로서도 더 이상 말
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원한과 독기가 서린 두눈으로 진우를 노려보며 한쪽으로
비켜셨다.
진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다면 즉시 멀리 떠나도록 하자. 이 세상이 넓고
넓은데 설마하니 이 몸 하나 숨길 곳이 없을까? 내가 이름을 숨기고 은거하게
된다면 너희들은 백 년 동안 찾아도 못찾을거다, 요놈들아.)
그런 생각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득의양양하여 입을 열었다.
[조삼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시다! 손사백께서 말씀하신 것은 틀림없소.
나는 정말로 태극문의 난환결과 음양결의 요결을 배우고 싶소이다. 나중에 당신
이 경사로 올라오신다면 이 형제는 그때 당신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조반산은 흥! 했을 뿐 다시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진우는 감히 몸을 돌리
지 못하고 여소매를 안은 채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미미하게
웃으며 손강봉의 곁을 지나갔다.
호비는 왕검영과 장법을 겨룬 이후에 줄곧 조반산, 진우, 손강봉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우가 교활하게 계책에 성공을 하는 것을 보고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
다.
(조삼야께서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지금 그 분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어찌 내가 모르는척 할 수 있는가?)
그는 매우 영특하지만 짖궂은 어린애였다. 즉시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
었고 작정을 한듯 진기를 방광으로 모으고 바지를 풀어헤치고 진우가 막 대청
문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찰나 갑자기 의자를 쳐들며 말했다.
[진우! 나는 한가지 가르침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잊었소이다.]
진우는 어리둥절했으나 이 소년을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랑곳하지 않
았다. 호비는 의자를 그의 앞에 놓더니 훌쩍 뛰어올라 별안간 오줌을 그의 눈에
내갈겼다.
진우는 다급하면서도 분노가 끓어올라 왼손으로 그가 쏘아내는 오줌을 막고
오른손의 비수를 호비의. 가슴팍을 향해 찔렀다. 호비는 바지를 벗기 전에 이미
다음 단계에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비수가 찔러오는 것을
보자 두손으로 의자를 쳐들고 몸을 날리며 그의 머리를 맹렬히 내리쳤다. 진우
는 팔로 의자를 밀어젖히고 노기를 띠며 욕을 해댔다.
[이 좀도둑 같은 놈새끼!]
호비는 공중에서 덮쳐들어 여소매를 안고 땅바닥으로 뒹굴었다. 진우는 깜짝
놀라 여소매를 되빼앗으려고 들었다. 호비는 발을 갈고리처럼 해서 그를 걷어차
면서 몸을 곧장 일으켜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수법을 펼쳐 그의 비수를 빼
앗으려 들었다. 진우는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고 싸움에 연연할 수 없어 맹렬히
칼을 내리치며 대청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반산이 팔을 허리에
짚고 위풍당당하게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
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나는 오줌을 다 싸지 못했다오!]
이러한 변화는 조반산은 물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의도를 알았을 때는 이미 여소매를 구출하고 있었다. 진우는 어느덧 겹겹이 둘
러싸여 있었다.
이렇게 되자 상노태는 더욱 증오심이 복받쳐 올랐고, 왕씨 형제는 시기심이
더욱 깊어졌으며, 마행공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고, 은중상은 중얼중얼 욕지
거리를 해댔다. 그러나 미워하든 부끄러워하든 간에 그들은 속으로 하나같이 놀
람과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 녀석이 기발한 수단을 쓰지 않았다면 어찌 진우를 가로막을 수 있
었겠는가?)
조반산은 속으로 호비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진우
에게 당당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진나으리, 당신은 난환결과 음양결을 배우기 위해서 두 사람의 목숨을 해쳤
는데 기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 이 두 편의 가결(歌訣)은 태극문중에서 대
단한 비전기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오. 이 조아무개가 재주는 없지만 아
직도 기억하고 있소이다. 당신은 나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했는데 오늘 당신에
게 전수해 주어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진우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왜 저런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때 조반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난환결을 들려줄 터이니 잘 기억해 두시오.......]
이윽고 그는 낭랑한 어조로 읊었다.
[난환술법최난통
(亂環術法最難通),
상하수합묘무궁
(上下隨合妙無窮).
함적심입란환내
(陷敵深入亂環內),
사량능발천근동
(四兩能撥千斤動).
수각제진수화횡
(手脚霽進竪 橫),
장중란환락불공
(掌中亂環落不空).
욕지환중법하재
(欲知環中法何在),
발락점대즉성공
(發落點對卽成功).]
이 여덟 구절을 읊자 손강봉과 진우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을 하지 못했
다. 이 여덟 구절의 댓구가 궁,동,공,공으로 끝나는 것이 싯구 같기도 하고 노
래 같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태극문중의 난환결이었다. 진우는 어릴적 부친에
게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구결의 오묘한 점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음부터 끌까지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생사를 안중
에 두지 않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가운데 포함된 뜻을 조삼야께서 가르쳐 주시지요?]
조반산은 천천히 설명했다.
[본문의 태극이라는 무공은 손을 씀에 있어서 초식마다 고리(환:環)를 이룬다
오. 소위 난환이라는 것은 바로 권초에는 비록 정형(定型)이 있으나 변화는 사
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이외다. 수법이 연속된 고리를 이루지만 고저(高
低), 진퇴(進退), 출입(出入), 공수(攻守)의 구별이 있소.]
[권(圈)에는 대권(大圈), 소권(小圈), 평권[平圈), 입권(立圈), 사권(斜圈),
정권(正圈), 유형권(有形圈) 및 무형권(無形圈)이 있소. 적과 임하게 되었을 때
는 반드시 대(大)로서 소(小)를 극하고, 사(斜)로서 정(正)을 극하며, 무형으로
서 유형을 극하는 것이며 매 일 초를 발출할 때마다 반드시 암암리에 고리(環)
의 기운을 채워 놓아야 한다오.......]
그는 말을 하면서 갖가지 권환(圈環)의 형상을 보여주며 다시 말을 이어 갔
다.
[환형(環形)의 기운으로 적을 나의 무형권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면 왼쪽으로
몰고 싶으면 왼쪽으로 몰고, 오른쪽으로 몰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런 연후 네냥(四兩)의 미미한 힘으로 천근이나 되는 적
의 힘을 움직이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런데 반드시 나의 견고한 힘으로
적의 측면을 횡으로 쳐야 하는 것이외다. 태극권의 승부수는 뻗쳐내는 기운이
정확한가, 가격하는 부위가 정확한가에 달려있는 것이외다.]
그가 말하는 권리(拳理)는 쉽고 명확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실로 지극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대청 안의 뭇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무학의 고수들이라 그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손발을 움직이
고 있었다. 사실 이와 같이 무학 명가로부터 권법의 정수(精髓)를 듣는다는 것
은 실로 얻기 힘든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조반산이 말하는 구결에 대해서 처음에 왕씨 형제와 상노태, 마행공, 은중상
등은 반신반의하며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말을 할수록
상세하고 구체화되자 어릴적부터 가슴속에 쌓여있던 의문과 어려움이 그의 두세
마디의 말에 확연히 풀리는 것이었다.
조반산은 난환결의 해설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이 구결은 단지 몇 구절에 불과하며 이 사권(斜圈)과 무형권(無形圈)을 제대
로 펼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발점(發點)과 낙점(落點)이 정확한가에 달려있
는데, 이는 필생을 두고 공력을 쌓아야 하는 것이외다. 당신은 알겠소?]
진우는 난환결의 요결을 터득하기 위하여 목숨을 빼앗는 것도 불사했는데 이
때 완전히 이해하게 되자 십년만 고되게 연마한다면 무학의 고수가 될 수 있다
고 생각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실례하지만 조나으리, 그럼 음양결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조반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고 말했다.
[음양결 역시 여덟 구절의 노래처럼 되어 있으니 잘 기억하도록 하시오.]
진우는 과거 부친이 무공을 전수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지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 무심결에 공손히 대답했다.
[네, 이 자식은 열심히 외우고 있습니다.]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자기의 실언을 알아차린 그는 얼굴이 온통 시뻘게지고
말았다. 그러나 뭇 사람들은 조반산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말에 신
경을 쓰지 않아 실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조반산은 낭랑히 읊었다.
[태극음양소인수
(太極陰陽少人修),
탄토개합문강유
(呑吐開合問剛柔).
정우수방임군주
(正隅收放任君走),
동정변리하수수
(動靜變裏何 愁)?
생극이법수착용
(生剋二法隨着用),
섬진전재동중구
(閃進全在動中求)?
경중허실흠적시
(輕重虛實 的是),
중리현경물초유
(重裏現輕勿稍留)?]
진우는 이 구결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외웠다.
조반산은 자세를 바로잡고 권로(拳路)를 시범보이면서 말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음양으로 나누어 진다오. 권법의 음양에는 정반(正反), 연
경(軟硬), 강유(剛柔), 신굴(伸屈), 상하(上下), 좌우(左右), 전후(前後) 등등
을 포함하게 된다오. 신(伸)은 양(陽)이고 굴(屈)은 음(陰)이며, 상(上)은 양이
고 하(下)는 음이외다. 산발적인 공격은 집어삼킬 듯한 공격을 우선으로 하되
강맹함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가며 마치 뱀이 먹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고, 집
중적인 공격은 재빠른 공격을 우선으로 하되 유연함을 이용하여 받아들이는 것
으로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다오. 그것들은 하나같이 냉(冷), 급(急), 쾌
(快), 취(脆)의 성질을 지녀야 할 것이외다. 정(正)이라고 함은 바로 네 개의
정면을 말하고 우(隅)는 네 개의 모퉁이를 말하는 것이라오. 적과 싸울 때는 반
드시 나의 정(正)으로 적의 우(隅)를 향해 쳐들어가야 하오. 만약에 정으로 정
을 대하게 된다면 그것은 상충되는 것이니 바로 세찬 기운끼리 맞서는 것이외
다. 그러므로 '나이가 어리고 힘이 약하여 공력이 상대방보다 못한 사람이 정으
로서 정을 대한다면 반드시 손해를 보는 것이외다.......]
호비는 줄곧 정신을 집중하여 권법의 이치를 강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여기까
지 듣고 속으로 흠칫했다.
(설마하니 저 한마디는 나에게 들려주는 것이란 말인가? 내가 왕검영과 겨루
게 되었을 때 힘으로 맞선 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
조반산은 호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론을 했다.
[만약에 모퉁이로서 모퉁이로 달려들게 된다면 경대경(輕對輕), 전락공(全落
空)이라고 하지. 이것 역시 좋지 않다. 그러니 반드시 나의 무거움으로 적의 가
벼움을 쳐야하는 것이고, 나의 가벼움으로 적의 무거움을 피해야 하는 것이오.
다시 섬진(閃進)이라는 두 글자를 설명하면, 적이 기습해 올 때는 피하는 것과
동시에 반격을 해야하는 것인데 이는 수비 가운데 공격이 있는 것이라오. 그리
고 자기가 공격을 하게 되었을 때도 반드시 동시에 적이 펼쳐오는 공격을 피해
야 하는 것인데 이는 공격 가운데 수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오. 이를 두고 봉
섬필진(逢閃必進), 봉진필섬(逢進必閃)이라 하는 것이외다. 권결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소. <무엇을 타(打)라고 하는가? 무엇을 고(顧)라고 하는가! 공격
은 바로 수비이고, 수비는 바로 공격이니 손을 뺄쳐내는 것을 이름함이다. 무엇
을 섬(閃)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진(進)이라고 하는가! 반격은 곧 기습이요, 기
습은 곧 반격이니, 먼 데서 구할 필요가 없느니라.> 만약에 공격과 수비를 나누
어 펼친다면 그것은 상승의 무공이라 할 수 없는 법이오.]
이와 같은 말을 듣자 호비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도리를 진작 알았더라면 조금전 왕씨 형제와 무공을 겨
룰 때 결코 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반산에 대해서 흠모하는 마음과 탄복하는 마음이 가득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반산은 다시 말했다.
[무공 가운데 기세라는 것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이지만 크게 나눈다면
세 가지 기세가 있는데 바로 경(輕), 중(重), 공(空)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니까 무거움을 이용하는 것은 가벼움을 이용하는 것보다 못하고, 가벼움을
이용하는 것은 텅빈 것을 이용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오. 권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소. <쌍중(雙重)은 통하지 않지만 단중(單重)은 오히려
성공을 한다.> 쌍중이라는 것은 힘과 힘으로 다투는 것이고, 내가 가고자 할 때
상대방에서 다가오니, 이것은 큰 힘으로 작은 힘을 제압하는 것이오. 단중라 함
은 나의 작은 힘으로 상대방의 헛점을 공격하는 것인 바, 이것은 일거에 성공을
할 수 있는 법이오. 만약에 적의 큰 기세를 허공으로 쏟게 할 수 있다면 나의
내력이 비록 적다 하더라도 적을 이길 수 있으니, 이래야만이 무학의 고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외다.]
이어 그는 손을 써서 시범을 보이는데 대부분의 권법은 놀랍게도 호비가 조금
전에 왕검영과 장법으로 대결할 때 사용한 것이었다. 그는 자세히 해설을 붙여
이 초식으로는 어떻게 적의 허점을 찌르고, 이 일 초로는 어떻게 공격하는 것인
가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여기까지 듣게 되자 비로소 깨달았다.
(원래 조삼야가 이토록 정성을 들여 설명한 것은 바로 나에게 무공을 지도해
주기 위한 것이로구나!)
진우는 태극문을 배반하고 뭇 사람을 살해한 간적인데 어찌 조반산이 그에게
태극의 비법을 전수해 주겠는가? 다만 그는 호비의 권초가 기묘하기 이를 데 없
으나 적과 임할 때 그저 자기 자신의 총명함에만 의지하여 변화를 구할 뿐이고
권법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을 보고 호비가 명사(明師)의 지도를 받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림에는 규칙들이 지극히 많아서 만약에 다른 문파의 제자들이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청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 본
문의 사부나 윗어른들을 지극히 불쾌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분규와
사건이 종종 이런 것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조반산은 호비가 스승도 없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한권의 권경에 의지해서 스스로 연습하여 성취를 이룬 것을 모
르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훌륭한 인재가 소질을 갈고 닦지 않는다면 무척 애
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호비의 사부나 윗어른들이 무학의 이치에
밝지 못한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진우가 난환결과 음양결에 관해서 묻는 기회를
빌어 무학의 기본 이치를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호비의 권
법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전수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호비가 총명하기 때문에 분명히 터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
고, 왕검영이나 마행공 등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설사 도리를 깨우치고 고된 훈
련을 쌓는다 하더라도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다.
이와 같은 지도를 받은 호비는 고되게 연마한다면 이후에 일대의 무학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무공의 요결을 전수하는 일은
무림에서 희귀하고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설명이 끝나게 되자 진우에게 물었다.
[내가 한 말이 맞소?]
진우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지도를 받게 되어 모든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불초 역시 손씨나 여씨 두 사람에게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반산은 냉랭히 말했다.
[그렇지. 진작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 누구도 두 명의 인명을 해칠 필요는
없었겠지.]
진우는 섬뜩했다. 한가닥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곧장 치미는 것을 느끼
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그 권결을 전수하고 어찌하여 또 이 일을 들먹이는 것일까?)
그는 왕씨 형제와 은중상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같이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조반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나으리, 권결은 당신에게 전수했지만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아직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외다. 자, 우리 한번 손을 맞추어 봅시다.]
손을 맞춘다는 것은 바로 같은 동문끼리 무공을 연마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
법이었다. 진우는 속으로 의혹심과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
어 입을 열었다.
[조삼야, 불초는 기예(技藝)가 평범하니, 너그럽게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반산은 묵뚝뚝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태극의 북종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고수인 여희현마저도 귀하의 손 아래 죽었
는데 어찌 겸손의 말씀을 하시오. 자, 받아보시오.]
조반산은 수휘비파(手揮琵琶)라는 일초를 펼쳐 그를 공격했다. 진우는 깜짝
놀라 서둘러 여봉사폐(如封似閉)라는 초식으로 대응을 했다. 그러나 수 초 사이
에 권로(拳路)는 모두 조반산에게 차단을 당했다. 두 사람이 펼치는 태극권은
남북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권로는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공력의 깊이는 월등
한 차이를 보여 수 초를 겨루자 진우의 양손은 마치 조반산의 손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비로소 손강봉은 커다란 바위 같은 중압감을 쓸어내릴 수가 있었다.
조반산이 물었다.
[손형, 여희현은 이 자의 운수(雲手)에 걸려 기진맥진해서 돌아가셨다고 했
소?]
손강봉은 재빨리 말했다.
[그렇소. 나는 여희현의 시신을 보았는데 근골이 탈력(脫力)된 것이 틀림없었
소.]
진우는 싸우면 싸울수록 두려워졌다.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조삼야, 불초는 그대의 적수가 아니니, 이 정도에서 손을 멈추지요?]
[좋소. 그럼 당신은 단 일초만 다시 받아보시오.]
그러면서 조반산은 왼손으로 진우의 오른손을 잡아끌며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리더니 내공이 용솟음치며 뻗쳐오를 때 생기는 지극히 강한 나선력(螺旋力)을
그의 왼손에 실었다. 이것이 태극문의 운수였다. 이 운수는 면면히 이어지는 것
인데 연속해서 원을 그리며 공격하는 것이었다. 진우가 여희현을 죽인 것은 바
로 이와 같은 수법이었다. 진우는 여희현이 연신 애걸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차없
이 상대방을 쪼개갔던 냉혹한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던 모습을 상기하고는 불현듯 땀을 뻘뻘 흘리게 되었다.
조반산은 진우가 두려움이 극에 달한 빛을 드러내자 가엾은 생각이 들어 진우
의 몸을 빙빙 돌리던 것을 그만두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라면 마땅히 자신이 한 일을 책임져야 할 것이오. 또한 악한 일
을 하였다면 자연히 악한 결과를 맺게 될 것이오. 당신은 잘 생각해 보시오.]
그는 워낙 인정이 많고 착하기 때문에 진우가 죽을 죄를 졌다고 하지만 그가
여희현처럼 참혹한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몸을 돌리고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했다.
[한 사람이 무공을 배워서 나라를 지키고 외침(外侵)을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
도 마땅히 올바른 일을 행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이오. 악(惡)을 위
해 무공을 쓴다면 차라리 평범한 농부가 되어 씨를 뿌리고 거두며 살아가는 것
보다 못할 것이오.]
이 말은 사실 호비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혹시나 그의 총명함이 오히려 교
만방자하게 되어 사잇길로 빠질까봐 걱정이 된 것이었다. 조반산은 한평생 호비
와 같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여간 사랑스럽게 생각되지 않
았다. 또한 이번 일이 끝나면 즉시 회강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다시 만나리라고
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예의 무학을 전수한 이후에 다시 뜻깊은 말로 훈
계를 하고 그가 애써 노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충고를 해준 것이엇다.
호비가 어찌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모르겠는가? 그는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
렀다.
[진가야!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추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
상의 영명(英名)을 더럽히지 말고 자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몇 마디 말은 조반산의 말에 대답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지극히 기쁘고 위로를 받았으며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가상하다는
뜻이 깃들어 있었다. 호비 또한 고마움으로 가득 찬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정히 한 노인과 한 소년이 서로를 아끼고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었다. 진우는
자기와 두 자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조반산의 등뒤에 헛점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오른팔에 전신의 힘을 다해 진보반란추(進步搬欄追)라는 일초를 펼쳐서
조반산의 등을 격타하려고 했다. 진우의 이 주먹은 그의 필생의 공력이 담긴 것
이었다. 그리고 이 일초가 적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
문에 주먹은 질풍과 같았고 기세는 번개와 같았다.
바로 이 전광석화 같은 순간, 조반산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것은 태극권
중에서 백학량시(白鶴亮翅)라는 반초(半抄)였으며 진우의 주먹에 실린 기운은
대뜸 허공으로 뿌려지게 되었다. 조반산은 허리를 비틀며 남작미( 雀尾)라는 전
반초를 펼쳐 몸을 돌리며 천천히 밀어냈다. 지금 사용한 것은 태극권 가운데 누
르는 수법으로 여기에 세찬 기운을 가세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의 반초로서 적
의 공력을 해소시켰으며 두번째의 반초로서 공격을 한 것인데 두 대의 반초로
인해서 진우의 전신은 그의 장력 아래 짓눌리게 되었다.
태극권이라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권술이라 할 수 있었고 무학을 배우는 인
사는 모두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조반산이 반초를 가지고 수비와 공격
을 한번씩 했는데 진우를 제압하자 명가의 수단은 역시 범속하지 않다고 모두
탄복해 마지않았다.
진우는 이빨을 깨물고 필생의 공력을 다해 조반산에 대항하려 했다. 그런데
막 일초를 접하게 되었을 때 별로 강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기운을 쏟아내면 쏟아낼수록 상대방의 반탄력 역시
증대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공력을 거두어 들이자 상대방의 반격도 즉시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인력(牽引力)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불가능
한 노릇이었다.
호비는 묵묵히 조금전에 전수해준 난환결과 음양결을 떠올리며 두 사람이 겨
루는 것을 보면서 조반산이 말한 권결의 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진우가
뻗쳐내는 기운이 강하기는 하지만 조반산이 한번 밀치고 당기면 장세의 방위가
변했는데 이것이 바로 난환결에서 말하는 '함적심입란환내(陷敵深入亂環內), 사
량능발천근동(四兩能撥千斤動)'의 운용이었다. 호비는 자세히 보며 입을 열었
다.
[진노형, 당신은 이미 조삼야의 난환 안에 깊이 빠졌으니 내가 보기에 당장
저승으로 가게 될 것 같소.]
진우는 온 정신을 모아서 응수를 하느라고 호비의 몇 마디 말을 듣지 못했다.
다시 몇 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진우의 권초에 빈틈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다시
부르짖었다.
[조백부님, 그의 왼쪽 늑골이 텅 비어 있는데 어째서 공격을 하지 않습니까?]
조반산은 웃었다.
[아, 그렇군!]
그는 호비의 말에 따라 주먹을 뻗쳐 진우의 왼쪽 늑골을 공격했다. 진우는 서
둘러 피했다.
호비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오른쪽 어깨를 공격하십시요.]
조반산은 대답했다.
[좋아!]
그리고는 일장을 들어 진우의 어깨를 후려쳤다.
진우는 어깨를 내려뜨리고 바깥쪽으로 손을 뻗쳐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었
다. 조반산은 웃으며 물었다.
[다음 일초는 어떻게 되는가?]
호비는 대답했다.
[그의 허리를 걷어차십시오.]
조반산이 왼손을 끌어 당기자 진우는 힘을 주어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다. 그
러자 조반산은 아니나 다를까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호비
가 말하는 것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 것이라 조반산은 칭찬의 말을 했다.
[소형제, 자네의 말은 모두 도리에 합당하구만!]
호비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그의 등을 후려치십시오.]
이때 조반산은 진우와 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어리둥절했다.
(이 일 초는 잘못 부른 것이 아닐까? 나는 적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어
떻게 그의 등뒤를 공격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였을 뿐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도리어 이 애는 어려운 문제를 내놓고 나를 시험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즉시 몸을 기울이면서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진우 역
시 몸을 기울이며 그 초식에 대응했다. 조반산은 다시 방향을 바꾸며 좌우로 끌
어당기자 진우의 몸뚱아리가 기울어지며 그야말로 등을 상대방에게 들이 미는
꼴이 되었다.
조반산은 가볍게 일장을 들어 정확히 그의 척추를 후려쳤다.
이 일장을 조금만 더 세게 뻗쳤더라면 진우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진우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으나 얼굴빛은 참담하여 살아있는 사
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조반산은 얼굴을 돌려 슬며시 입을 열었다.
[맞는가?]
호비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말했다.
[매우 훌륭합니다!]
진우는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었지만 역시 명가의 후예라 놀라고 당황한
와중에서도 조반산이 빈틈을 드러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몸을 돌
리고 호비와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반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가 급히 일 초를 공격하며 뛰쳐나가면 도망을 칠 수 있을 것도 같구나.)
그는 바로 전신등각(轉身 脚)이라는 일초를 맹렬히 펄쳐 조반산을 격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반산이 몸을 기울여 피하자 진우는 일성을 대갈하며 수휘비파
(手揮琵琶)라는 일초로 비스듬히 조반산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 일초는 잇따라 펄쳐진 것이라 광풍폭우와 같은 기세였지만 적을 해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이 물러 설 때 문을 박차고 도망치려는데
있었다. 그는 자기는 젊고 힘이 좋고 발이 빠른 반면, 조반산은 검술이 고강하
기는 하지만 몸이 뚱뚱해, 도망친다면 그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반산은 그가 다리를 쳐들 때부터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가 수휘비파라는 일
초로 공격을 해오자 뒤로 물러나지 않고, 한걸음 나서며 역시 수휘비파라는 일
초로 맞섰다.
이 일초는 힘으로서 힘에 부딪히는 것으로 초식이 같으므로 역세(逆勢)에 놓
이게 되는 것이라 태극권에서는 기피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조금전에 말한
쌍중(雙中)이 통하지 않는다는 권법의 이치와 완전히 상반된 것이라 설사 고수
가 하수를 상대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패하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반수 이상이 나직이 어! 하는 소리를 내지르게 되었다. 진우는 냅다
손을 뻗쳐 어느덧 조반산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기세를 빌어 잡아당기며 그의
우람한 체구를 들어 내던지려고 했다.
손강봉과 여소매는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아!]
그러나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절묘하군! 정말 절묘해!]
조반산은 몸이 허공에 떠있는 상태에서 암암리에 탄식을 했다.
(북종의 태극문이 명성을 떨치다 쇠퇴한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구나! 손강봉
은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어린 소년보다도 생각이 짧아, 내가 펼치려는 초식의
오묘한 점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한편으로 그는 기쁘게 생각했다.
(저 호비라는 어린애는 내가 지도한 권법의 이치와 정수를 능숙히 변화시켜
응용할 수 있으니 정말 신통하구나!)
진우는 적을 쳐들게 되자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였다. 이와같은 성공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조반산을 내던진다면 무사히 상가보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막 내던지려는 순간 조반산이 갑자기 손을 획 뒤집
더니 그의 손목을 꽉 잡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던지려고 해도 던질 수가 없었다.
진우는 놀라 즉시 왼손을 위로 휘둘러 공격을 하려 했으나 조반산은 높은 곳
에서 아래로 오른손을 내려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이 서로 맞닥뜨리
며 두 손바닥은 마치 아교풀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진우가 왼손을 밀어내
면 조반산은 오른손을 뒤로 움츠렸고, 진우가 당기면 밀고 들어왔다. 조반산의
몸은 여전히 진우에 의해서 허공에 들려진 상태였다. 상식적으로 몸이 허공으로
들려지면 의지할 곳을 잃어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조반산은 상대방
의 공력이 자기에게 크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력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호비에게 알려주려는 의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필생의
절기를 펼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호비에게 적과 싸울 때는 형식에 얽매이지 말
고, 원칙(正)을 기본으로 하되 변화(奇)를 응용하여야 하며, 왕씨 형제처럼 무
조건 형식에 얽매이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말라고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우는 미친듯 내던지려고 했으나 시종 조반산을 땅으로 떨어뜨릴 수 었었다.
더구나 조반산의 몸은 뚱뚱해 이백근이나 나갔으며 두 팔로 공중에서 내리누르
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깨가 점점 무거워져 왔으며 마치 무거운 바
위를 들고 무공을 연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만일 무거운 바위라면 견딜 수도
있겠지만 조반산의 몸은 허공에 떠있기 때문에 두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 끊임없이 그의 얼굴이나 두 눈을 걷어차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잠시 더 지탱을 할 수가 있었으나 땀은 이미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몸을 벼락같이 날려 문쪽으로 다가서며 진력을 돋구어 적의 몸이 기둥에
부딪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조반산이 어찌 그의 술수에 말려들겠는가? 어느덧
그는 오른발을 뻗쳐 기둥에 대고 힘을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허공에서 진
우의 어깨를 자신의 체중으로 누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발로 기
둥을 뻗대고 있기 때문에 태산이 무너진듯 덮쳐 누르는 힘으로 되어 진우의 어
깨에서는 우두둑! 소리가 나게 되었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아 그는 남몰래
부르짖지 않을 수 었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진우는 급히 뒤로 물러셨다. 그는 전신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땀이 겉옷까지 배어나왔다. 그가 지당권(地堂拳)을 펼쳐 땅바닥에 뒹굴건 종횡
으로 이리저리 뛰던 간에 조반산은 여전히 몸을 공중에 띄운 채 체중으로 내려
누르는 것이었다.
호비는 조반산의 무공이 이토록 신묘한 것을 보고 놀랍고도 기이하게 여기면
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조반산은 하반신이 의지할 곳이 없는 데에도 적의
힘을 빌어서 반격을 하고 있었다. 진우는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흥건하게 땀으
로 옷이 젖었고, 바닥에는 곳곳에 땀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호비는 진우가 기운을 너무 많이 써서 지쳤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는 모양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행공과 왕검영 등대가들은 땀을 한방울 흘릴 때마다
공력이 조금씩 소진되고, 땀이 나지 않을 지경에 이른다면 기름이 다한 등불처
럼 절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신이 시큰거리고 맥이 빠져 숨
쉬기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옛일을 떠올렸다.
(내가 운수를 써서 여회현을 죽일 때 그가 느낀 고통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
라. 자승자박(自繩白縛)으로 나는 지금 앙갚음을 받는 것이로구나!)
목숨을 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극도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는 대항하
기 위해 반푼의 힘도 낼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두 무릎을 털썩 꿇고 부르짖었
다.
[조삼야!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조반산은 몸을 허공에 띄워 적의 힘을 역이용하여 지탱을 하고 있었다. 진우
가 무릎을 꿇게 되자 그는 가볍게 몸을 솟구치더니 호통을 질렀다.
[너와 같이 간악한 자를 남겨서 어디에 쓰겠느냐?]
그리고 일장을 들어 정히 진우의 정수리를 후려치려고 했을때 그의 애처로운
눈빛과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게 되었다.
조반산은 성품이 인자해서 설사 극악무도한 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못된
짓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다면 종종 연민의 정을 느껴 톡톡히 혼을
내주고 설득을 하여 그가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했다. 진우의 무공은 이미 상실
되어 폐인과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이상
못된 짓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더구나 그의 표정이 가련한지라 손을 허공
에 쳐든 채 고개를 돌리고 손강봉에게 물었다.
[손형, 이 자의 무공은 이미 제거되었으니 손형이 처리하도록 하시오. 하지만
소제의 청이 한가지 있는데 이 자의 목숨만은 살려주실 수 없겠소?]
손강봉은 조반산과 진우를 번갈아 보며 난처해서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간악한 적은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다. 나는 나의 두 손을 잘라서 조반산
을 모셔냈는데 어찌 이 녀석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허나 이 간적을 조반산이
제압했고 그가 이 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니 내 어찌 거절을 할 수 있겠는
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고개를 돌려 여소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며 매섭게 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강봉
은 여소매를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조반산에게 넘죽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
다.
[조삼야, 오늘 조삼야께서는 우리 북종을 위해서 문호를 정리해 주셨으니 이
손모는 이 커다란 은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외다.]
그는 연신 절을 했다. 조반산도 재빨리 무릎을 꿇고 답례를 했다.
[손형,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 불공평한 일을 보고 칼을 뽑아 돕는다는 것은
우리 협의도(俠義道)의 본분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손형과 나는 동문이고 관계
가 깊은데 어찌 인사를 받을 수 있겠소이까?]
손강봉이 몸을 일으키는데 입에는 날카로운 칼을 물고 있었다. 조반산은 몸을
일으키다 그 칼을 보자 놀라 한 걸음을 물러섰다.
원래 이 비수는 진우가 여소매를 겨누던 칼이었는데 호비가 잔꾀를 부려 싸울
때 그 비수를 빼앗아 땅바닥에 버린 것이었다. 두 손이 없는 손강봉은 그 비수
를 집어들기 위하여 일부러 조반산에게 절을 했던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
마자 여소매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구부리고 입에 물은 비수를 내밀었다.
여소매는 칼자루를 쥐고 의아한 얼굴로 손강봉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벌려
비수를 여소매에게 넘겨주고 입을 열었다.
[조삼야, 조삼야가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이 형제로서는 반박을 할 수 없소이
다. 하지만 여소매의 부친은 이 간악한 자에게 산 채로 맞아 죽었고 여소매의
동생마저도 희생되었소이다.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고는 여소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조삼야, 그렇지 않소이까?]
조반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강봉은 여소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듯 말했다.
[소매, 원한을 갚고자 하는 용기가 있다면 이 간악한 자를 네가 직접 죽이도
록 해라. 만약 마음이 여려 네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 자를 놓아주도록 해라!]
뭇 사람들의 시선이 여소매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떤 사람은 속으로 그녀가 굳
건한 의지를 가지고 멀리 회강까지 가서 구원을 청한 것을 보면 복수심으로 불
타올라 이 사람을 죽일 용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나약하고 갸
날픈 어린여자애이니 겁이 나서 진우를 죽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여소매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으나 이미 작정을 한듯 비수를 쳐들고 곧장
진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키는 진우의 가슴께도 미치지 못해 첨도(尖刀)를 앞
으로 내밀자 겨우 그의 아랫배를 겨냥할 수 있었다.
진우는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그런데 여소매가 칼로 찌르려고 하자 일성을
대갈하더니 몸을 돌려 피했다. 여소매는 권각법을 약간 연마한 적이 있었지만
그가 몸을 움츠리자 허공을 찌르게 되었다. 그녀는 즉시 첨도를 쳐들고 진우의
뒤를 쫓아갔다.
진우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대청문쪽으로 부리나게 달려갔다. 그런데 대청문
은 굳게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악랄한 복수
진우는 급히 손을 뻗쳐 대청문을 힘껏 밀었다. 순간! 대문에서는 이상하게 피
식! 하는 소리가 나면서 흰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두 손바닥이 대문에 철썩 붙
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떼려고 했지만 전신의 공력은
이미 상실되어 도리어 휘청하더니 대문으로 곤두박질쳤다. 순간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대문에 달라붙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뭇사람들은 어리둥절
하며 일제히 문앞으로 몰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알
고 보니 그 대청의 문은 두꺼운 철판으로 되어 있었고 바깥에서 누군가 불을 피
워 문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던 것이다. 결국 진우는 그 문에 붙은 채 구워져 죽
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놀람과 의아함에 휩싸이게 되었다.
왕검영이 부르짖었다.
[제수씨,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오?]
상노태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니 상노태 모자의
모습 뿐만 아니라 대청에서 수발을 들던 하인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왕검영은 얼굴에 한가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급히 내당(內堂)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내당으로 가는 문도 꼭 닫혀 있었다. 닫혀진 문 한복판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는데 거무튀튀한 것이 강철로 주조된 것 같았다. 그는 감히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섰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뻗쳐왔다.
뒷문 역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왕검걸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상씨집 형수님, 무엇 하시는 겁니까? 빨리 나오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벽에 부딪쳐 메아리치며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뭇 사람들은
고게를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대청에는 놀랍게도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앞뒤의 철문이 닫혀지자 바람 한점 들어올 틈도 없었다.
뭇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상가보에서 이 대청을 지을
때 이미 다른 속셈이 있어 대청을 무쇠로 만들고 창문도 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
달았다. 벽 역시 지극히 견고하고 두꺼운 바위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
행공은 긴 걸상을 쳐들고 얍! 하는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벽을 쳤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가 나며 기다란 걸상은 즉시 가운데가 부러지며 두 토막이 났고 벽에
서는 하얀 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며 안쪽에서 화강석(花崗石)이 드러났다.
왕검영은 마보(馬步)의 자세를 취하고 기운을 돋구어 두 손으로 벽을 후려쳤
다. 그의 이와 같은 일격이라면 보통 담은 구멍이 뚫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흔
들리며 흙이 무너지고 벽이 갈라지겠지만, 이 벽은 두꺼운 암석으로 만든 것이
라 왕검영이 후려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검걸은 당호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외쳐댔다.
[상씨집 형수님, 무엇 하시는 겁니까? 빨리 문을 여십시오. 빨리 문을 열어
요!]
조반산은 초조함을 누르고 냉정하게 나갈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이 대청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만든 것 같다. 필시 천장도 뚫
고 나가지 못할 것이다.)
왕검걸은 몇 번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두려움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형
을 바라볼 뿐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대청에 남아있던 사람은 조반산, 호비, 손강봉, 여소매, 왕씨 형제, 마
행공, 서쟁, 은중상 등 모두 아홉 명이었고 진우의 시체도 있었다. 여소매를 제
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쇠와 돌
로 쌓아 만든 대청 안에서는 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별안간 음산한 음성이 바닥에서 들려왔다.
[당신들이 영웅호걸이라고 자처하지만 이 상가보의 무쇠로 만든 대청에서 도
망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일 것이외다. 이 무쇠 대청은 선부(先夫) 상검명이
친히 건조한 것이며, 그는 죽어서도 당신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외다.
여러 영웅호걸들께서는 이제 승복하셨겠지?]
그리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몸을 덜덜덜 떨
며 그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상노태의 말소리는 벽 밑에 있는 개구멍에
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왕검영은 몸을 구부리고 개구멍을 향해 부르짖었다.
[제수씨, 우리 형제와 검명 사제는 한 사부님을 모신 동문으로 은혜를 입었으
면 입었지 원한은 전혀 없는 사이이외다.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곳에 가둔 것은
무슨 영문이오?]
상노태는 음산하게 몇 번 웃었다. 장작이 탁탁! 타는 소리가 개구멍으로 들리
는 것으로 보아 바깥에는 맹렬히 불길이 솟구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노태는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명이 불행하게도 간적 호일도의 침해를 받았을 때 당신이 동문의 정을 느
꼈다면 먼저 방법을 강구해서 복수를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오늘 원수의
아들을 만났는데도 당신네 두 사람은 남을 두려워하여 뒷짐만 지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토록 인정머리 없고 의리없는 사람을 세상에 남겨두어 어디에다 쓸
까?]
왕검영은 말했다.
[검명 사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오늘 처음 들었소이다. 더우기 호일도가 해친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소?]
상노태는 냉소했다.
[흥! 당신은 양심도 없이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군!]
왕검영은 이리저리 둘러댔다.
[아까 내가 손에 상처를 입고 중독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획! 하니 한 대의 화살이 개구멍에서 날아들었다. 만
약에 동생인 왕검걸이 달려들며 발로 밟지 않았더라면 땅바닥에 엎드려 개구멍
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야기하던 왕검영은 화살에 맞고 말았을 것이다.
은중상은 장검이 조반산에 의해 두 동강난 후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으
나,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목숨을 내준다고 생각을 하니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왕검영에게 물었다.
[상검명이 이렇게 무쇠로 대청을 만든 이유는 도대체 누구를 해치려고 한 것
이오?]
왕검영은 노해서 그 말에 대꾸했다.
[그 사람이 선친 문하에서 무예를 익힐 때 위인됨이 정파 사람같지 않고 남의
눈치만 살피는 소인배였소. 그런 그가 이러한 집을 지었는데 무슨 좋은 마음이
있었겠소?]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상검명은 우리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니까, 이 무쇠 대청을 지어서 아버지
를 해치려고 했는데 그 밥통은 되려 우리 아버지 손에 죽고 말았구나!)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사방을 살피며 빠져나갈 계책을 찾아보려고 했다.
사실 호비의 그러한 추측은 틀린 것이었다. 상검명과 호일도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상검명은 묘인봉과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고 타편천하무적수라고 일
컬어지는 금면불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고, 언젠가는 그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이 무쇠 대청에 가두어 제압하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찾아온 사람은 묘인봉이 아니고 호일도였다. 상검명
은 줄곧 자신의 능력을 자부했기 때문에 호일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일전
을 벌였다. 따라서 무쇠로 만든 대청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겨루다가 그만
호일도에게 머리를 잘리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원한을 상노태는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호일도는 이미 죽었
고 그의 아들 호비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은지라 원수를 죽일 방법이 없게 되자
뭇 사람들이 조반산과 진우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보고 살그머니 아들
을 데리고 빠져나가 앞뒤 철문을 내리고 가정들을 지휘해서 장작더미를 쌓고 불
을 지른 것이었다.
이 무쇠 대청의 문은 단단하고 벽도 두꺼웠기 때문에 바깥에서 불을 질렀으나
대청안에 있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진우가 철문에 붙어 타 죽는 것을
보고서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이제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날개가 있어도 날
아오르기 어려운 형편이 되고 만 것이다.
뭇 사람들은 대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그 대청은 넓
어서 철문이 새빨갛게 달구어졌는 데도 열기는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조반산이 천천히 입을 열어 제안했다.
[어찌되었던 간에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모두들 합십협력해서 지하
로 땅굴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빠져 나갈 궁리를 해 봅시다.]
은중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에는 삽이나 곡괭이도 없으니 땅굴을 파기 전에 모두 불에 구워지는 오
징어 신세가 될 것이외다.]
서쟁은 줄곧 약혼자인 마춘화가 대청 밖에서 어떤 위험을 당하고 있는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는 멧돼지같은 사람이라 그저 초조하게 생각했을뿐 빠
져나갈 방법을 강구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반산이 땅굴이라도 파자
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말했다.
[조삼야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앉아서 죽는것보다는 나을 것이
외다.]
그는 칼을 뽑아 땅바닥에 있는 커다란 벽돌을 파냈다. 그러자 한가닥 뜨거운
기운이 밑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칼로 열기가 치
솟는 곳을 치니 창! 하는 금속성이 나는 것이 아닌가? 왕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바닥도 무쇠로 만든 것이란 말이오?]
칼로 몇 조각의 푸른 벽돌을 파 보니 전체 바닥이 강철로 되어 있었고 열기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서쟁은 되는대로 욕을 했다.
[제기랄, 이 할망구는 바닥에도 불을 피워 놓았군. 이 대청은 커다란 무쇠 가
마솥이었군.]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맞았소. 이 할망구는 우리를 모조리 삶아 먹으려는 것같군요.]
뭇 사람들은 열기가 점점 올라와 뜨거워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에는 머리 위에서도 열기가 쏟아졌다. 이 대청 지붕 역시 철판이었으며 그 위
에다 나뭇단이나 석탄을 쌓아 놓고 태우는 것이 틀림없었다.
왕검영은 다시 개구멍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다.
[상씨 집안 제수씨, 우리를 놓아주시오. 제수씨를 대신해서 우리 형제가 호가
후레자식의 목숨을 빼앗으리다!]
호비는 그가 말하는 것이 불손한지라 발을 들어 그의 엉덩이를 걷어 차려고
했다. 순간 조반산이 그를 잡아당겨 그만 허공을 차고 말았다. 조반산은 나직이
달래듯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배를 탄 꼴이니 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
끼리 언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일단은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해 보자.]
조반산은 상노태가 왕씨 형제를 놓아주려고 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노태는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그 후레자식의 목숨은 이미 내 수중에 있는데 당신이 생색을 내며 나설 필요
가 어디 있소? 다시 반시간만 기다린다면 당신들은 검은 숯덩이가 되고 말걸.
호호호! 그 안에 좋은 놈이 어디 있냐? 어이, 호가라는 후레자식과 마 늙은이!
어때, 대청안이 꽤 시원하지?]
마행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노태는 다시 부엉이 울음소
리 같은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마 늙은이, 당신의 딸은 내가 잘 돌봐 줄테니 안심하도록 해요. 나는 그녀를
위해 천 명이건 만 명이건 훌륭한 사위감을 찾아줄테니.]
마행공은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그는 나이가 많아 자신의 생명에
는 연연해 하지 않았지만 외동딸이 밖에서 저 악독한 노파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왕검영은 몸을 일으키더니 동생의 귀에다 대고 몇마디 말을 했다. 왕검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검영은 다시 조반산에게 다가서며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조삼야, 우리는 똑같이 곤란한 처지인데 이 형제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
야겠소이다.]
조반산은 다정스럽게 호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엇이든 왕형의 분부를 따르도록 하겠소이다. 하지만 이 작은 형제를 해치
려고 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가 없소이다.]
조반산은 왕씨 형제가 서로 귓속말을 주고 받는 것을 보고 그들이 호비를 죽
여 상노태애게 목숨을 구걸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왕검영은 조반산의 한마디가 자신의 심사를 간파하자 얼굴에 살기를 띠우고
날카롭게 말했다.
[조삼야, 상노태의 원수는 오직 이 소년 뿐이외다. 원한에는 원수가 있고, 부
채에는 채주(債主)가 있는 법이외다! 한 어린애를 위해 우리 모두가 귀신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는 뭇 사람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은중상이 즉시 그 말을 받았다.
[이 소년을 제외하고는 이 일과 우리들은 전혀 상관이 없지요.]
왕검영은 말했다.
[마 노표국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행공은 상노태와 이미 원한이 있는 이상 자기와 자기 제자를 놓아줄 것 같
지 않았다. 그러나 눈 앞의 형세는 매우 위급한지라 일단 위험에서 벗어나고 보
자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호비가 죽고 사는 문제는 애초부터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맞장구치며 말했다.
[왕나으리의 말이 맞소이다. 이 일은 본래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지요.]
왕검영은 손강봉에게 얼굴을 돌렸다.
[손형, 당신은 더욱 이번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진가는 이미 죽
었으니 당신과 여씨 집의 소녀는 원수를 갚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손강봉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반산의 얼굴을
볼 때 공공연히 그와 맞장구치는 것이 껄끄러워 권고하듯 말했다.
[조삼야, 이 형제가 의리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약 조삼야께
서.......]
조반산은 그 말을 듣자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네들은 여섯 명이고 우리쪽은 둘 밖에 없소이다. 어디 이 조가와 호가가
먼저 죽는지 아니면, 당신네 은가나 왕가가 먼저 죽는지 두고 봅시다.]
그리고는 호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위세는 늠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항상 얼굴에 인자하고 부드러운 빛을 띠우고 있었으며 말하는 것도 온화했고 마
음쓰는 것 역시 지극히 여렸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인협(仁俠)'이라
는 두 글자는 반드시 지키려고 했고 이 말은 무쇠를 자르듯 단호하였다.
왕씨 형제는 우선 그의 무공이 뛰어난 것이 꺼림직했고 둘째로 자기네들이 목
숨에 연연하고 죽음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 소인배와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에 감히 우르르 달려들어 손을 쓰지 못했다.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 선다면 참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
람들은 발바닥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어 걸상과
의자를 끌어당겨 그 위에 올라섰다. 왕검걸은 팔괘도를 쳐들고 부르짖었다.
[조삼야, 이 형제는 오늘 죄를 지어야겠소!]
그리고 은중상, 마행공, 서쟁 등에게 손짓을 하며 호통을 쳤다.
[다 함께 나서서 싸웁시다.]
그는 손강봉이 결코 조반산과 적이 되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그래도 자기들은 다섯명이고 상대방은 한 늙은이와 소년이었기 때문에 승산
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뭇 사람들은 각자 무기를 다투어 뽑아들었다. 조반산이 몸을 움직이기만 한다
면 다섯 사람의 칼과 검이 동시에 공격해 올 형편이었다. 대청이 달아오르자 그
들의 마음 역시 다급해져 서로 힘을 합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고 싸울 생각이었
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 한사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왕씨 형
제야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조반산은 대단하신 영웅호걸인데 어찌 이 분이
나 때문에 죽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이 밀어닥치면 설사 조삼야와 내가
이 자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여전히 목숨을 건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상노태의 손에 죽음을 당해야만 조삼야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왕씨 형제는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먼저 공격해 오지는 못했다.
즉시 호비는 생각을 굳히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잠시 손을 멈추십시오.]
호비는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개구멍으로 디밀며 외쳤다.
[상노태! 내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테니 금표를 던져 나를 죽이고 빨
리 문을 열어 조삼야 등을 내보내 주십시요!]
상노태는 고개를 쳐들고 크게 웃으며 품속에서 금표를 끄집어 내며 부르짖었
다.
[검명! 검명! 오늘에야 당신을 대신해서 원한을 갚게 되었구려.]
그리고는 오른손을 쳐들어 독을 묻힌 금표를 호비에게 던졌다.
호비는 금빛 광채가 번뜩이며 자신의 미간을 향해 급히 쏘아져오는 것을 보고
두 눈을 감고 속으로 생각했다.
(상노태가 나를 죽인다면 한풀이를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조백부와 아
무 원한이 없으니 그를 놓아줄 것이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의 오른발을 와락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이 뒤로 쏟살같
이 당겨졌다. 눈을 떠보니 자신은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즉시 팔을 뻗쳐
기둥을 쓸어안고 가볍게 바닥 위로 내려섰다. 그러고 보니 조반산의 손에는 한
대의 금표가 들려 있었다. 조반산이 또 다시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왕검영은 호비가 자신을 던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데 조반산이 저지하자 그
만 대노해서 부르짖었다.
[조씨 양반, 사내 대장부는 은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외다. 이번 일은 당신
이나 나나 아무 상관이 없고 그 스스로 알아서 죽으려고 하는데 왜 또 나서서
간섭하는 것이오?]
조반산은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호비를 바라
보았다.
[소형제, 방금 자네는 머리를 구멍 밖으로 내밀었지, 안 그런가?]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조반산의 표정은 매우 침착했으며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것이 이미 빠져
나갈 계책을 강구한 것 같아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백부님, 분부를 내리십시오.]
조반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머리는 딱딱한 것이라 축소시킬 수 없지만 어깨나 몸통은 유연한 것일세.]
호비는 즉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부르짖었다.
[그렇군요. 머리를 내밀 수만 있다면 몸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즉시 솜옷을 벗어 돌돌 말아 머리에 얹었다. 그 이유는 첫째 쉽게 빠져
나가려는 것이고 둘째는 상노태의 금표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조반산은 말했다.
[자네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게. 내가 자네를 위해 길을 터주지.]
서쟁은 엉겁결에 부르짖었다.
[안됩니다. 당신은 이토록 뚱뚱한데 어떻게 기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조반산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구부리더니 손
을 쳐들어 한 대의 수전을 개구멍으로 쏜살같이 쏘아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바깥에서 한 명의 장정이 비명을 질렀다.
[발, 발! 아이쿠! 내 발이.......]
틀림없이 수전이 그의 발에 적중된 모양이었다. 조반산은 다시 상노태로부터
받은 금표를 던졌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모두 피해버린 모양
이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급히 부르짖었다.
[빨리, 빨리 개구멍을 막읍시다!]
이어 상노태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꼼짝하지 말아라! 나는 그들이 타 죽으며 울부짖는 소리를 직접 듣겠다. 옆
으로 피해 있으면 된다. 암기라는 것은 회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조반산은 잇따라 십여 대의 암기를 쏘아보냈는데 그 기세는 매우 세차 십 장
밖까지 뻗치는 것이었다.
근 이십여 대의 암기를 던지고 나서 그는 호비의 등을 밀었다. 그러자 호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가며 솜옷을 먼저 내밀었다. 상노태는 이미 경계하고 있었
는 듯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개구멍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 자금팔괘도를 내리쳤
다. 그런데 정통으로 찍기는 했으나 물컹한 것이 대뜸 속았다는 것을 알고 급히
칼을 뽑았다.
호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른손을 뻗쳐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곧이어
머리를 내밀며 기어나갔다. 상노태가 부르짖자 상보진이 달려들어 호비의 머리
를 내려치려고 했다. 호비는 어깨는 어느덧 개구멍 밖으로 나갔는데 구멍이 좁
아서 일시에 튀어나갈 수 없었다. 그가 움켜잡고 있던 상노태의 손목을 휘두르
자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모자의 칼이 서로 부딪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법은 바로 조반산이 조금전에 전수해 준 차력타력(借力他力)의 수법이었고 그
는 총명했기 때문에 즉시 사용할 수 있었다.
조반산은 두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호비의 몸이 아직도 기어나가지 못한
상태라 태극의 부드러운 공력을 써서 그의 허벅지를 밀었다. 그러자 호비의 몸
은 지체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게 되었다.
상보진의 두번째 칼이 재차 떨어졌고 그 기세는 엄청나 그대로 벽의 화강석을
내려쳤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상보진의 칼날은 다 뭉개지고 말았다.
호비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맴돌다가 상노태가 칼을 들고 자신을 베러 오는 순
간, 급히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벼락같이 내려섰다. 팔괘도는 획! 하니 그
의 머리를 스칠듯 지나갔다. 호비는 왼손을 뒤집어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수법으로 상노태의 손에 들린 자금팔괘도를 빼앗으려 했다.
상노태는 원수가 놀랍게도 죽음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을 보자 눈이 뒤집혀서
팔괘도를 어지럽게 휘두르며 미친듯 내리쪼갰다.
호비는 맨손으로 신속하게 공세를 취했으나 조금도 승산이 없었다. 뭇 장정들
이 고함을 치는 가운데 연기와 불꽃 속에서 상보진이 다시 칼을 들고 덤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비는 대청 안이 이미 불에 달구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조반산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하며 맨손으로 두 자루
의 칼에 맞서 죽어라 하고 공격을 했다.
상씨 모자 역시 이 일전이 생사존망의 기로임을 알고 호랑이 처럼 호비에게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대청 안의 조반산과 왕씨 형제 등 여러 사람은 일제히 개구멍 옆으로 와서 호
비와 상씨 모자가 싸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왕씨 형제는 호비를 미워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반산의 심정과 다를바 없이 호비가 빨리 상씨 모자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청의 열기는 더욱 견디기가 어렵게 되었다. 탁자나 의자에서는 탁탁 튀는
소리가 들렸으며 촛불은 열기로 모조리 녹아버려 주위는 칠흑같은 어둠으로 휩
싸였다. 별안간 불길이 확 일며 벽에 있던 서화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불이
붙었다. 그러나 금방 타 버리고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조금만 더 지난다면 의
자나 탁자에도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뭇 사람들은 초조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바깥에서 싸우
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왕검영은 개구멍에다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호씨 소형제, 빨리 상노태의 하반신을 공격하게. 그녀의 도법은 하삼로(下三
路)가 온전하지 못하네.]
그는 팔괘도를 연마한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칼바람 소리만 듣고도 그녀
가 어떻게 칼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호비는 일시에 이기지 못해 괴롭던 참인데 왕검영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크
게 기뻐하며 몸을 구부려 상노태의 다리를 공격해갔다. 그런데 상노태는 전혀
피하지 않고 칼을 들어 그의 등을 곧장 내려치려고 했다. 그녀는 호비를 죽이려
는 일념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호비는 허리를 비틀고 몸을 기울여 피
하자 상노태는 연신 공격을 펼쳐왔다. 그녀는 왕검영의 소리를 들었으나 굳이
하반신을 지키려 들지 않았다.
왕검영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녀는 오로지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이니 자네는 그녀의 자금팔괘도를 빼앗
지 못할 것이네. 그러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나? 네가 직접 이런 미친 할망구를 만나봐라, 무슨 뽀
족한 수가 있는가.)
개구멍 밖의 싸움은 격렬했다. 호비는 점차 우세를 차지했지만 이기려면 아직
도 백여 합은 더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상노태는 왕검영이 끊임없이 적에게 팔괘문을 깨뜨리는 요결을 하나하나 이야
기 하는 것을 보고 극도로 분노하여 중얼거렸다.
(네놈은 동문 사제의 원수도 갚아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적을 돕다
니, 네놈은 정말 짐승보다 못한 양심을 가진 간적이로다.)
그녀는 막다른 처지에 놓여 호비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왕검영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했다. 그녀는 미칠 것
같이 분노가 끓어올라 생각했다.
(이 후레자식의 무공이 고강하니 죽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저 대청안
에 갇힌 간악한 자들만이라도 태워 죽인다면 가슴 속의 울분을 어느 정도 가라
앉힐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는 장정들에게 장작과 석탄을 마구 집어넣으라고 소리쳤
다.
대청 안의 은중상은 발을 구르며 호비가 쓸데없이 싸움을 질질 끌고 있다고
원망을 하고 있었다. 왕검걸은 조반산에게 간청했다.
[조삼야, 얼른 암기를 던져 도와주도록 하십시요.]
조반산은 이미 심여 대의 암기를 움켜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개구멍 옆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고 비연은사(飛燕銀梭)같은 몇 몇 암기는 회전을 시킬 수 있었
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맞붙어 싸우며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과녁을 보
지 못하고 암기를 마구 쏘다가는 호비에게도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던져내
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는 눈치가 빨라 이 점을 알고 그들을 개구멍 앞으로 유인하려고 했으나
상노태는 조반산의 암기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개구멍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
았다.
대청 안은 타는 누린내가 점점 짙어지게 되었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오무라들
고 옷의 가장자리가 말려들기 시작했다. 여러사람들은 호흡조차 하기 어렵게 되
었고 여소매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성질이 급한 서쟁은 다
급한 나머지 머리를 죽어라하고 개구멍으로 틀어박았지만 개구멍이 작아서 어깨
가 걸려 머리가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개구멍의 주위는 지극히 두껍고 굳센 화강
석으로 되어 있어 그가 두 손으로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갑자기 왕검걸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호비에게 무기가 있다면 어찌 상노태가 그의 적수가 되겠는가? 아이쿠 참,
멍청하게 여태까지 이 생각을 못하고 있었구나!)
왕검걸은 즉시 손을 뻗쳐 자기가 땅바닥에 던져 놓은 팔괘도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칼은 바닥에서 달구어질대로 달구어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칼을
덮석 잡았다가 그만 화끈거리는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손이 데는 것을 불사하고 옷자락을 찢어 칼자루를 쥐고 왼손
으로 서쟁을 밀어젖히며 외쳤다.
[호비, 무기가 가니, 빨리 받게!]
그는 손을 휘둘러 칼을 개구멍 밖으로 내던졌다.
호비는 칼을 받으려 했고 상보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순간 두 사람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쨍그랑! 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
의 칼이 모두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조반산은 말했다
[소형제, 자네와 나는 오늘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었네. 내가 비록 몇
살 더 먹었지만 자네의 의협심과 인정이 많은 것을
보니 존경스런 마음까지 드네. 훗날 자네는 틀림없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인데, 내가 어찌 윗어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결의형제(結義兄弟)
호비는 왕검걸의 칼을 잡았으나 칼자루가 너무 뜨거워 잡자마자 놓을 수밖에
없었고, 상보진도 칼을 잡으러 개구멍 앞으로 달려오다가 조반산이 던진 금전표
에 손목을 얻어맞고 칼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호비가 칼을 놓치자 상노태는 그의 등을 노리고 팔괘도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호비는 몸을 기울이며 상보진의 옆쪽으로 피하며 혼우갈수( 牛喝水)라는 일초를
펼쳐 그의 뒷덜미를 눌렀다. 상보진의 뺨은 공교롭게도 떨어져 있는 뜨거운 칼
에 부딪히게 되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준수한 얼굴에
기다란 칼모양의 화상이 생기고 말았다.
비명 소리에 대청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상보진이 호비에게 상처를 입은 것
을 알고 기뻐했다.
상노태는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과 자식을 아끼는 정이 갈등을 일으켰으나 놀
랍게도 그녀는 아들을 돌보지 않고 칼을 들어 호비의 어깨를 내려치려고 했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호비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뒤집으며 칼로 막았
다. 그는 이미 상보진이 들고 있던 팔괘도를 빼앗아 손에 들고 있었다.
대청의 뭇 사람들은 어둠과 심한 열기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칼이 엇갈리며
창창! 소리를 내자 호비가 칼을 들고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한가닥 기대
를 걸었다.
왕검영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내려치게. 오른쪽 어깨를 내려치라구!]
마행공도 거들었다.
[먼저 불을 때고 있는 장정들을 공격하여 쫓아버리게!]
손강봉도 큰 소리로 말했다.
[그 할망구와 어울릴 것이 아니라 방법을 강구해서 대청문을 여는 것이 급하
네.]
서쟁도 지지않고 짐승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워 죽겠다. 아이쿠! 뜨거워 죽겠어, 사람잡네!]
뭇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외치고 있었다.
호비가 대청문을 여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상노태
가 죽어라 달려드니 시종 여유가 없었다. 그의 도법은 상노태보다 뛰어났지만
형세가 다급하고 나이가 어려 침착하게 대응하기 어려워 여러번 좋은 기회를 얻
었지만 상노태가 덤벼드는 기세에 눌려 기회를 놓치곤 했다.
두 사람이 칠팔 합을 교환하자 어느덧 상노태는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상보
진은 가정에게 다시 칼을 받아 호비를 협공하였다.
뭇 장정들은 처음 주모(主母)와 소주인이 무기를 가지고 맨손의 소년을 상대
하는지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모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자 다투어 칼이나 창을 꼬나쥐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무예가 낮아 호비의 칼에 맞거나 발길에 차여 삽시간에 여러 명이 상
처를 입었지만 하나같이 용감하여 물러서지 않았다.
대청 바깥은 고함소리,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 욕하는 소리, 탁탁! 나무 타는
소리가 어울려 몹시 시끄러웠다.
대청 안의 사람들은 바깥의 싸움이 어지러워지자 호비 한사람으로서는 상가보
의 모든 사람들을 대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사람
은 길게 탄식하고, 울부짖는 등 부산을 떨었다.
별안간 엄숙한 소리가 들렸다.
[호비는 듣게! 음양결로 먼저 우두머리를 상대하고, 난환결로 그 아래 사람들
을 흩어놓도록 하게!]
그 소리는 기(氣)가 충만하여 모든 잡다한 소리를 뒤덮고 한자 한자 또렷이
호비의 귓가에 들려왔다. 바로 조반산의 음성이었다.
호비는 싸우면 싸울수록 적이 많아지자 걱정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
다. 그러다가 조반산의 말을 듣게 되자 속으로 조백부님은 절세적인 영웅이시니
하시는 말씀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칼을 휘두르며 상노태
의 허리를 찍어갔다.
이 칼은 상보진이 떨어뜨린 것을 주은 것이라 칼날이 뭉그러져 있었으나 그래
도 찍히게 된다면 여전히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상노태는 그의 기세가 맹렬
한 것을 보고 칼을 비껴들고 급히 막았다.
두 자루의 칼이 부딪히며 싸늘한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호비는 세번째는 강한
힘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시키며 한번 거두고 휘두르면서 손
목을 갑자기 세번이나 돌렸다. 그는 기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들린 것이지만 상
노태의 손과 팔은 역으로 원을 그려야 했다. 두번째 원을 따라 돌리자 상노태는
갑자기 팔굽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부득이 칼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팔괘자
금도는 허공으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호비는 음양결이 성공하는 것을 보자 더
욱 용기백배하여 그녀의 어깨를 쪼개려 들었다. 칼날이 그녀의 어깨쭉지와 반자
쯤 간격이 되었을 때, 문득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백발을 늘어뜨리고 얼굴에는
피가 낭자한 채 낭패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
어 한칼로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도신(刀身)을 돌려 칼등으로 그
녀의 어깨를 쳐서 그녀가 다시 덤비지 못하도록 만들고 빨리 문을 열어 사람들
을 구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노태는 자금팔괘도를 빼앗기자 즉시 적과 동귀어진 할 생각을 했다.
그녀는 호비가 칼을 내리쪼개자 오히려 한걸음 내딛으며 호비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 오른손으로 가슴팍의 신봉혈(神封穴)을 잡고 왼손으로는 아랫배의 중주혈
(中注穴)을 움켜잡는 것이 아니가? 호비는 깜짝 놀라 칼등으로 내리쳤다. 상노
태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견골이 바스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호비
의 혈도를 잡고 오른발로 호비의 발을 걸어 두 사람은 일제히 땅바닥에 쓰러지
고 말았다.
호비는 오늘 처음 대적한 것이라 적이 목숨을 걸고 덤빈다면 얼마나 매서운가
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호비는 당황하여 그녀에게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상노태는 입을 쩍 벌리더니 다시 호비의 가슴팍 옷자락을 물고 몇 번 돌리더
니 불길이 치솟는 화염 속으로 끌어안고 굴러 들어갔다. 호비는 크게 놀라 부르
짖었다.
[빨리 놓으시오! 당신은 불에 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소?]
그는 당황해서 소금나수(小擒拿手)의 수법으로 늘어붙는 손을 떨치고 빠져나
와야 한다는 것을 잊고 그저 죽어라 하고 발버둥쳤다.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두세 번 구르다가 끝내는 불덩이 속으로 굴러가게 되었
다.
상보진은 부르짖었다.
[어머니!]
그는 몸을 날리며 칼자루을 쳐들고 호비의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쳐왔다. 호비
는 재빨리 머리를 들어 피했으나 칼자루가 그의 이마에 적중되어 하마터면 기절
할뻔 했다.
상보진은 어머님이 상처를 입게 될까봐 급히 손을 뻗쳐 두 사람을 불덩이 속
에서 끌어내고는 호비의 등을 정확히 겨누고 칼로 내리찍으려고 했다.
바로 이 위기의 순간! 호비는 정신이 별안간 맑아졌다. 그는 냅다 한발로 상
보진의 손목을 걷어차고 다시 발길로 상보진을 걷어찼다. 이 발길질은 사력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보진은 오륙장 밖으로 나가 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호비는 칼자루에 맞은 이마가 쪼개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옷자락에 불이 붙자
일성을 대갈하며 두 팔을 질풍같이 떨쳐냈다. 우두둑! 소리가 나며 호비를 잡고
있던 상노태의 두 팔이 부러졌다. 호비는 땅바닥에 몸을 굴려 옷에 붙은 불을
껐다.
상노태는 나이가 많아 연기와 불길에 그을리게 되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
다. 몇 명의 장정들이 재빨리 그녀의 옷에 붙은 불길을 잡았다. 호비는 맨손으
로 장정들과 싸우면서 자기자신에 대하여 지극히 분노를 느꼈다.
(이와 같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마당에 내가 적을 불쌍하게 생각하다니, 목숨
을 잃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호비는 사정을 두지 않고 냅다 한자루의 칼을 빼앗아 주먹으로 치며, 발로 차
고, 칼을 쪼개며, 팔굽으로 후려쳤다.
마치 호랑이가 양떼 속에 뛰어든 꼴이라 뭇 장정들은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
다.
그는 대뜸 대청문 앞으로 달려가 장정의 손에서 화차(火叉:불을 뒤적이는 쇠
스랑)를 빼앗아 문앞에 쌓아놓은 장적과 석탄을 마구 흐트렸다.
그는 철문이 이미 새빨갛게 달구어진지라 그만 깜짝 놀랐다. 빗장과 철문이
불에 녹아버렸다면 문을 열 수 없는 것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칼을 들고 전신의
공력을 돋구어 빗장을 내리쳤다. 칭! 하는 소리가 나면서 빗장이 그대로 떨어졌
다. 너무나 큰 힘을 주었기 때문에 칼은 낫처럼 휘어지고 말았다. 그는 칼을 내
버리고 화차로 문고리를 걸고서 바깥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초조해진 나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 된 일이 수포로 돌아가듯 철문이 열리지 않으면 큰일이다.)
그는 다시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삐그덕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천천히 문이 열렸다. 순간 검은 연기와 불길이 문안에서 곧장 뻗쳐 나왔다. 그
는 대청 안이 이토록 무섭게 타오르리라고는 생각치 못한 터라 급히 부르짖었
다.
[조백부님, 빨리 나오십시오!]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한사람이 앞장 서 달려나왔다. 바로 왕검영이었다. 그
뒤에는 마행공, 서쟁, 은중상, 손강봉이 차례로 달려나왔다. 마지막으로 조반산
이 여소매를 끌어안고 나왔다. 사람들의 옷자락은 모두 타서 낭패한 몰골을 하
고 있었다.
대청 안의 모든 목재는 불이 붙어 탁자나 기둥은 말할 것도 없고 대들보나 기
둥마저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
었다. 만약 호비가 차 한잔 마실 시간만 지체했더라도 틀림없이 목숨을 잃게 되
었으리라! 호비는 조반산이 무사한 것을 보고 달려나가며 부르짖었다.
[조백부님! 조백부님!]
조반산은 수염이 모조리 탔으나 여전히 침착함과 여유를 잃지 않고 미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정말 훌륭하네!]
갑자기 왕검영이 부르짖었다.
[검걸, 검걸! 어디 있느냐?]
조반산은 사방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검걸은 보이지 않았다. 조반산
은 놀라서 물었다.
[설마하니 그가 아직 나오지 않았단 말이오?]
왕검영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내 동생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오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대청 안의 기둥들은 동쪽으로 쓰러지는가 하면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등 금방이라도 왕창 무너질 것만 같았으며, 대청안은 이미 불구덩이로 변해 있
었다. 왕검영은 비록 형제의 정이 두터운 편이었지만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검걸아, 빨리 나오너라. 빨리 나와!]
조반산과 호비는 동시에 생각했다.
(그가 나올 수 있었다면 어찌 나오지 않았겠는가?)
그들 두 사람은 천성적으로 협의심이 강한지라 더이상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늙은이와 한 소년이 약속이라도 한듯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불에 달구어진 벽
돌을 밟자 호비는 뜨거워 두 발을 번갈아 들면서 마구 깡총거렸다. 조반산이 재
빨리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빨리 나가게.]
[아닙니다. 조백부님, 조백부님이나 빨리 나가십시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소리쳤다.
[이곳에 있습니다!]
그는 몸을 구부려 왕검걸을 잡고 일으켜 쏜살같이 바깥쪽으로 달려나갔다. 왕
검걸은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코를 개구멍에 틀어박고 숨을 쉬고 있다
가 호비가 대청문을 여는 순간, 바깥쪽의 검은 연기가 안으로 빨려들어와 석탄
연기에 질식된 것이었다.
호비는 목이 막혀 연신 기침을 했다. 왕검걸의 체구가 우람했기 때문에 좀처
럼 안을 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호비는 그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나갔다.
문입구에 이르자 사람들은 놀라 큰소리를 부르짖었다. 지붕 위에 걸쳐 있는 커
다란 대들보가 곧장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위치는 바로 호비의 머리위였
다. 호비는 왕검걸을 끌고 오던 중이라 피할 수가 없었다.
조반산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선통배(扇通背)는 일초를 펼쳐 오른손으로 불길
에 싸인 대들보를 받쳐들었다. 이 대들보의 무게는 사오백 근이나 되었고 더구
나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으니 그 기세가 얼마나 크겠는가? 조반산은 두 다리를
마보(馬步)처럼 공고히 꼼짝하지 않고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들
보가 들려지는 것이었다. 곧이어 선통배의 반초식을 잇따라 펼쳐내며 왼손으로
대들보를 들고 바깥쪽으로 밀었다. 순간 한마리의 화룡(火龍)이 대청 입구에서
쏜살같이 날아나와 민첩하게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오륙 장 밖에 떨어졌다.
대청 밖의 사람들은 그가 펄치는 무공을 보고 잠시동안 얼이빠졌다가 우뢰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상가보의 장정들까지도 감탄하여 '멋지다!' 하는 소리를
질렀다.
왕검영은 재빨리 동생을 부축하고 그의 옷자락에 붙은 불을 끄면서 속으로 생
각했다.
(내 자신은 친형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감히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
는데 다른 사람들이 동생을 구해주었구나!)
마행공과 서쟁은 무쇠 대청에서 빠져나오자 즉시 마춘화를 찾았다. 그러나 사
방을 둘러보아도 그녀의 종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쟁은 의구심이 일었다.
(틀림없이 상가라는 놈과 수작을 부리러 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왔으나 다시 가슴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
다.
[사부님, 제가 찾죠!]
그리고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마행공은 나이가 많아 젊은 사람처럼 기력은 없었다. 연기와 불길에 시달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파 잠시동안 쉬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장
풍이 엄습해 왔다. 이와 같이 기습적인 암습은 완전히 그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
다. 그 기세가 빠르고 세차 마행공은 미처 받을 수가 없어 부득이 맞받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아리는 일장을 얻어맞아 휘
청거렸다.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전신에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정
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또다시 엉덩이를 걷어차여 부지불식간에 그의 몸뚱아리는
대청안의 불더미 속으로 떨어졌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상노태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아! 검명, 검명! 끝내 나는 당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원수를 갚을 수
가 있게 되었구려.]
마행공은 열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을 뿐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조반산은 여소매를 돌보고 있었는데 홀연 상노태가 연기속에서 뛰쳐나오며 마
행공을 불더미 속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고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상노태는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며 허리를 구부리고 다시 대청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차게 타오르는 화염을 전혀 개의치 않는듯 했다.
조반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 나오시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이오?]
그의 한마디가 막 끝나자 다시 커다란 불길에 휩싸인 대들보가 하나 떨어졌
다. 쿵! 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퍼지며 불꽃이 사방으로 춤을 추는 가운데 어
느덧 대청문을 막아버렸다.
상노태는 품안에 자금팔괘도를 안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우고 단정히 불길속에
앉아있었다. 옷자락과 머리에 불이 붙었으나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
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복수를 하려는 심원(心願)은 풀지 못했지만 나는 이제 검명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조반산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저 노파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성질이 꼿
꼿한 것이 남자보다 더 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그는 우연히 한 소년 호걸을
알게 되어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손강봉과 왕검영 등이 각자 바쁘게 갈 길을
가는 것을 보며 호비에게 입을 열었다.
[소형제, 우리 한동안이라도 함께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호비는 선뜻 응낙했다.
[좋은 일이죠. 매우 좋은 일이구 말구요, 조백부님!]
조반산과 호비는 손을 잡고 상가보를 떠났다.
몇 리 밖에서 고개를 들려보니 상가보의 불타는 연기가 하늘 한쪽을 검게 뒤
덮고 있었다.
조반산은 말했다.
[참으로 지독한 노파였고, 끔찍한 광경이었어. 그 노파의 성깔이 정말 대단하
지?]
[예, 조백부님.]
조반산은 고개를 들리고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와 나는 오늘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었네. 비록 내가 나
이를 몇 살 더 먹었지만 자네의 의협심과 인정에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드네. 훗
날 자네는 틀림없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인데, 내 어찌 감히 윗어른이라
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동녘 하늘은 찬란한 햇살이 밤의 어둠을 뚫고 밝아오고 있었다. 조반산의 얼
굴은 희뿌연 아침 햇살아래 장엄하고도 간곡해 보였다.
호비의 조그만 얼굴은 검정과 핏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 말을 듣고는 호비
는 얼굴이 새빨개져 입을 열었다.
[조백부님.......]
조반산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백부라는 석 자는 오늘 이후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게나. 나는 자네와 결
의형제를 맺고 싶은데 어떤가?]
천수여래 조반산이 강호에서 어떠한 위명(威名)을 얻고 있으며 어떠한 신분인
가 상상해 보라? 그가 놀랍게도 십여 세의 소년과 결의형제를 맺겠다니, 이 일
은 실로 범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호비의 무공이 뛰어난 점을 보고
의형제를 맺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몸을 던져 사람을 구하려는 호비의
인협심(仁俠心)을 높이 산 것었다. 그의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모든 행동이
홍화회의 뭇형제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비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감격하여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털썩 땅바닥
에 꿇어 앉아 큰절을 올리며 불렀다.
[조...... 조.......]
조반산 역시 무릎을 꿇고 답례를 하며 말했다.
[아우님, 이제부터는 나를 셋째 형이라고 불러주게.]
그리하여 노인과 소년, 이 두 영웅호걸은 광야에서 흙을 모아 향(香)을 삼고
여덟 번의 큰절을 올렸다.
조반산은 여간 흔쾌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입에 대고 휘바람을 내불었다.
그러자 숲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급히 일면서 백마가 갈기를 세우고 요란한 말굽
소리 울리며 삽시간에 그들 앞에 섰다.
[이 말은 정말 훌륭하군요.]
조반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말은 나의 네째 제수씨의 소유이고, 그녀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이라서 어
쩔 수 없구나! 그렇지 않다면 칭찬의 말을 듣게 된 이상 나는 너에게 선물을 했
을 것이다.)
조반산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아우님, 자네는 이곳에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는가?]
호비는 대답했다.
[평사숙에게 문안 여쭙고 셋째 형님을 한동안 바래다 드리죠.]
조반산도 그와 즉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네.]
그는 말고삐를 잡고 호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산비탈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나무 뒤에 한사람이 서서 무엇을 엿보는 듯 모으 길게
빼고 궁싯거리고 있었다.
호비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저 사람은 서쟁이군요.]
그의 사부가 참담하게 불에 타 죽었는데도 그가 이곳에 몰래 숨어 무슨 수작
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보고 오죠.]
그는 슬그머니 앞으로 나가 그의 등 뒤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서쟁은 넋을 잃고 무엇을 바라보는지 등뒤에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
다.
이십여 장 쯤 떨어진 한 그루의 버드나무 아래서 일남일녀가 서로 부둥켜 안
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는 매우 다정해 보였다. 남자는 상가보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던 복공자이고 여자는 놀랍게도 마춘화였다.
그 복공자는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그녀의 뺨에 입맞춤
을 하고 있었다. 마춘화는 나른한 듯 그의 품속에 안겨 나지막한 음성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호비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남녀지간의 일을 잘 모르
고 있는지라 그 일이 보기에 재미있다고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마소저는 저 복공자를 안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저토록 친하다니, 알다
가도 모를 일이로구나!)
이때 서쟁이 갑자기 입으로 뿌드득!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극도로
분노하여 이빨을 갈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치고 있었다.
호비는 웃으면서 서쟁의 등을 툭툭치며 말했다.
[서형, 이곳에서 뭐하는 것이오?]
서쟁은 온 정신을 마춘화에게 쏟고 있었던지라 호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소리를 내질렀다.
[내 너희들과 사생결단을 내고야 말겠다!]
서쟁은 허둥지둥 허리에서 단도를 뽑아들고 복공자에게 달려들었다.
호비는 총명하고 영리했지만 이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상의 문제를 전혀 이해
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마춘화가 잘생겼기 때문에 어젯밤 상보진이 그녀에게 그
와 같은 행동을 취했고, 오늘 복공자와 서쟁 또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원래, 복공자와 마춘화는 대청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까봐 멀리
이곳 버드나무 아래까지 와서 서로 얼싸안고 밀어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즐기고 여자는 사랑을 하느라 동녘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것도 모
르고 있었다.
상가보가 발칵 뒤집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이들 두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
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쟁이 전신을 그을린 채, 머리를 산산이 흐트리고 칼을
들고 달려오자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쟁의 두 눈에서는 불이 뿜어지는 듯 했으며 그 한칼을 내려치려는 기세는
지극히 맹렬해 보였다.
복공자는 무예가 평범했다. 강철칼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급히 뒤
로 물러섰다. 서쟁의 칼은 힘이 너무 컸기 때문에 텅! 하니 커다란 버드나무를
찍게 되었고, 다급한 김에 즉시 뽑지 못했다.
마춘화는 급히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예요? 뭐하는 거죠?]
서쟁은 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뭐하느냐구? 나는 이 녀석을 죽이고 말겠다!]
그리고 힘을 주어 칼을 뽑았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칼을 팍 뽑는 바람에 칼
이 버드나무에서 뽑히면서 쿵! 하니 칼등이 그의 이마팍을 후려쳤다.
마춘화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조심하세요. 아프지 않아요?]
서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거짓으로 사람을 위하는 척 하지 말아라.]
그는 다시 곧장 앞으로 나가며 칼을 쳐들고 복공자를 내려찍으려 들었다. 마
춘화는 평소에 자기의 말이라면 한번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사형이 미친 사람
처럼 날뛰는 것을 보자, 질투의 불길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해서 서둘러 그의 앞을 가로막고
두 손으로 허리를 집고 말했다.
[사형, 저 사람을 죽이려면 나 먼저 죽여요.]
서쟁은 그녀가 한사코 복공자를 보호하려는 것을 보자 더욱더 미칠 것처럼 노
해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먼저 그를 죽이고 다시 너를 죽이겠다.]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쭉지를 밀었다. 마춘화는 휘청거리며 하마터면 쓰
러질뻔 했으나 곧이어 땅바닥에서 앙상한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들고 휘두르며
서쟁의 칼을 막고는 복공자에게 부르짖었다.
[빨리 가세요. 빨리 도망치란 말이예요!]
복공자는 그녀와 서쟁이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소
리고 말했다.
[미친 사람이군. 그대는 조심하구려!]
그리고는 멀찌감치 피했다.
서쟁은 칼을 휘둘러 몇 초만에 마춘화의 손에 들린 앙상한 나뭇가지를 자르고
가로막는 그녀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물러서지 않을래! 내가 무정한 것을 탓하지 마라!]
마춘화는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팽개치며 그의 칼에 목을 디밀며 말했다.
[사형, 나는 한평생 당신의 처가 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당신이 한 칼로 나
를 죽이세요.]
서쟁은 온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가지색으로 부풀어오르며 분노가 끓어올라
부르짖었다.
[나는...... 나는.......]
왼손으로 자기 가슴팍을 치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호비는 그가 칼을 아래 위로 마구 휘두르며 미친듯이 노해 있는 것을 보고 잘
못하다가는 마춘화의 몸을 내려찍고 말 것같아 즉시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어
서쟁의 가슴팍을 밀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사형, 누구든 마춘화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이 호비
를 죽여야 할 것이오.]
서쟁은 어리둥절해져 노해 말했다.
[너는..... 너...... 너같이 입에서 젖비린내나는 녀석까지 저 계집애와 한데
붙기라도 했단 말이냐?]
순간 철썩! 하니 마춘화가 그에게 따귀를 올려붙였다. 서쟁은 극도로 분노하
여 정신이 없었고, 더구나 호비가 가운데 끼여 그의 시선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따귀를 직통으로 얻어맞아 그만 뺨이 부어오르게 되었다.
호비는 서쟁의 그 한마디가 어떤 뜻인지 그리고 마춘화가 어째서 분노하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호비는 자기가 상노태 앞에서 매질을 당할 때 마춘화가 상보진에게 자기를 놔
주라고 사정을 했고, 후에 상보진에게 자기를 놓아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스스로 묶였던 밧줄에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녀가 그와 같이 돌
보아준 은덕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마춘화와 사형간에 싸움이 벌어지자 그는 자연히 마춘화 편에 섰던 것
이다. 서쟁은 호비가 왕씨 형제와 손을 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공으로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격분하여 목숨
마저 돌보지 않는 판인데 어찌 승부에 연연하겠는가? 그는 아래 위로 칼을 휘두
르며 호비의 머리와 목, 그리고 어깨쭉지를 노리고 연신 내려 찍으려 들었다.
호비는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칼날을 피하다가 갑자
기 주먹으로 그의 콧잔등을 내지르려 했다. 서쟁은 칼을 들어 그의 팔을 찍으려
고 들었다.
호비는 내지르던 주먹을 뒤집으며 서쟁의 팔목을 비틀며 칼을 빼앗아 마춘화
에게 두 손으로 받쳐들고 넘겨주었다. 자연히 그의 등은 서쟁에게 돌리게 되었
다. 그러나 호비는 대담하게도 전혀 등뒤를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쟁은 다시 싸워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성질을
견디지 못하는 듯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어르신께선 너무나 참혹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들려 그 자리를 떠났다.
마춘화는 깜짝 놀라 물었다.
[사형, 뭐라고 했어요?]
서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질풍같이 달려갔다.
마춘화는 그를 뒤쫓아 가면서 잇따라 물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됐다구요? 매우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고 했어요?]
복공자는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남매가 한 말을 똑똑히 듣을
수가 없었다. 다만 마춘화가 서쟁의 뒤를 쫓아가는지라 마음속으로 다급해진 나
머지 부르짖었다.
[춘매(春妹), 춘매, 돌아와요. 그를 아랑곳하지 말아요!]
마춘화는 부친이 걱정되어 복공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아랑곳 하지 않고 서쟁
의 뒤를 쫓아갔다.
복공자는 마춘화의 손에 칼이 들려진 것을 보고, 더이상 서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빨리 그녀를 쫓아갔다.
그들이 십여 걸음 쫓아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나무위에서 한 사람이
돌아나왔다. 오십여 세쯤 되는 나이에 약간 뚱뚱하고 코밑에 수염을 기르고 있
었다. 바로 홍화회의 셋째 두령인 천수여래 조반산이었다.
복공자는 조반산과 얼굴을 마주치자 깜짝 놀라 사색이 되어 한참동안 입을 열
지 못했다.
조반산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복공자, 안녕하시오?]
복공자는 두 손을 마주잡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조 셋째 두령, 안녕하십니까?]
그는 더 이상 마춘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몸을 돌려 허둥지등 십여 장 나간 후
에 고개를 돌려 조반산을 한번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더욱더 빨리 했다.
삽시간에 복공자는 북쪽으로 가게 되었고, 서쟁과 마춘화는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모두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조반산은 얼굴에 미소를 띠웠으나
호비는 아리송한 얼굴을 한 채 높다란 비탈길 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 복공자는 셋째 형님을 알고 있군요. 그는 무척 두려워하는 것 같
군요.]
조반산은 미소를 했다.
[그렇다네. 그는 한때 우리들에게 잡혀 쓴 맛을 단단히 봤지.]
원래 복공자는 당금 건륭(乾隆)황제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복강안(福
康安)이었다. 그는 건륭황제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게
된 것이며 신하들도 그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한때 그는 홍화회의 군웅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건륭황제는 소
림사를 중수(重修)했으며 감히 홍화회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 일은 몇 년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조반산을 갑자기 만나자 홍화
회의 군웅들이 회강에서 대거 동쪽으로 몰려온 줄 알고 그만 혼비백산해서 마춘
화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잠시후 왕검영 등과 만나 부리나케 북경으
로 돌아갔다.
호비는 복강안이 무예를 모르기 때문에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으며 그의 내력
을 조반산에게 묻지도 않았다.
조반산은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갔다.
약 한 마장 정도 나가자 어느 찻집 앞에 이르렀다. 조반산은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아우님, 천리 밖까지 전송한다해도 끝내는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
우님과 나는 이곳에서 헤어져야겠네.]
호비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활달하고 소탈한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좋습니다. 셋째 형님, 몇 년 후 내가 나이를 더 먹으면 회강으로 셋째 형님
을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조반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강에서 자네를 기다리도록 하지.]
그는 품속에서 한송이의 붉은 융단으로 만든 커다란 꽃을 꺼내더니 말했다.
[아우님, 천하의 강호호걸들은 이 꽃을 보면 셋째형의 신표라는 것을 알 것이
네. 만약 급한 일이 생겨서 자네가 남에게 도움을 얻고 싶으면 이 꽃을 가지고
가서 각처의 친구들에게 얼마든지 요구하도록 하게나.]
호비는 그 커다란 꽃을 받아 품속에 간직하고 매우 부끄러워 했다. 그는 어린
생각이었지만 이후 셋째 형님처럼 무예를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을런지 모르지
만 천하 곳곳에 친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교분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
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반산은 찻집에서 두 잔의 차를 시켜 한 잔을 호비에게 내밀고 말했다.
[차로 이별주를 대신하도록 하세.]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머리를 젖혀 찻물을 다 비웠다. 조반산은 찻잔을 내려
놓고 말고삐를 잡고 입을 열었다.
[아우님, 이별하는 마당에 이 형이 자네에게 몇 마디 물어야 겠네.]
호비는 고개를 들었다.
[셋째 형님, 서슴지 마시고 물어보십시오.]
조반산은 천천히 물었다.
[상가보를 제외하고 아우님은 다른 원수나 적이 있는가?]
호비는 섬칫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를 누가 해쳤는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라면 무공이 엄청날 것이다. 만약에 내가 원한을 갚지 못한 것을 셋째 형님이
안다면 당장 찾아가 싸우려 들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다른 사람이 대신
갚도록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셋째형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흉악하고도
위험한 모험을 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나이는 어렸지만 가슴에는 의리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며 말
했다.
[셋째 형님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사 원수나 적이 있다 하더라도 소제
는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조반산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칭찬의 말을 했
다.
[훌륭하네.]
그는 몸을 날려 말 위에 오르더니 서쪽으로 질풍과 같이 말을 몰아갔다. 멀리
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 위의 조그만 보따리는 이 형님이 자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일세.]
호비는 고개를 들려 바라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보따리가 하나 놓여있었다.
본래 조반산이 백마의 등에 걸어 놓았던 것이었다.
호비는 손을 뻗쳐 상당히 묵직하다는 것을 느끼며 보따리를 풀었다. 대뜸 금
빛 광채가 찬란하게 빛나며 이십 냥이 나가는 금덩어리들이 가득했다. 모두 스
무냥씩 엮어진 스무 꾸러미의 사백 냥이나 되는 황금이었다.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가난하고 셋째 형님은 부자이니 나에게 황금을 선사한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셋째 형님은 내가 사양을 할까봐 황금을 놓고 급히 달려가신 모
양인데 그렇다면 이 호비를 너무나 어린애 취급한 것이라 할 수 있소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말발굽에 의해서 일어난 흙먼지가 수 마장 밖까지 쭉
뻗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이렇게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친구를 사귄데 대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는 황금을 들고 소리 높이 산가(山歌)를 부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았다.
호비는 평 숙부를 찾아 이백 냥의 황금을 주며 창주로 돌아가서 살도록 하고
자기는 천하 유람길에 나섰다. 그는 매일같이 도법을 연습하고, 검법을 익히는
등, 기운을 키워나갔을 뿐만 아니라 조반산아 전수한 무학의 요결을 참고해서
싶경도보에 실려 있는 가전(家傳)의 무공을 연구하며 파고 들었다.
<제 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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